[70 화]
-에른 : 금왕이라면, 만금상회의 주인 아닙니까?
-옥면금룡 조검휘 : 역시 날 아는 군.
-에른 : 유명하던데요. 그쪽 세계 에서는.
칭찬에 뼈가 담겨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조검휘와 얘기 잘 되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할애비란
사람이 튀어나왔으니.
절대 좋은 사인이 아니다.
극성 부모의 치맛바람, 바짓바람… 이런 게 있지만 할아버지 도포자락 은 처음 봤다.
-옥면금룡 조검휘 : 나는 차원거 래를 하지 않소.
-에른 : 그런 것 같네요.
전에도 해 봤다.
이런 식의 대화.
교류자를 사이에 두고 죽산파 장문 인과 의사소통을 했었는데.
조근남이 조검휘에게 하고 싶은 말 을 하면, 조검휘의 입을 통해 그 말 이 이쪽으로 전달되어 오는 것이다.
할아버지의 말을 똑같이 따라하는 손자라.
생각해 보면 무척 이상한 광경이겠 으나, 에른에게는 아무래도 좋은 일 이었다.
'조검휘가 못 미더워서 본인이 나
온 거 같은데… 그냥 5만 코인 받 는 게 나았나?'
그건 아니다.
에른이 고개를 저었다.
그 5만 코인을 조검휘가 마련했을 리 있나.
금수저 중의 금수저라고 해도 용돈 을 모아 만들기에는 너무도 큰 금액 이었다.
그 말인즉, 금왕도 리포트 제공 5 회권이 5만 코인값을 한다고 보는 거 겠지.
아예 이 가치 산정을 금왕이 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는 건....
'물정 모르는 후기지수가 아니라 노 련한 장사꾼한테서 뜯어내야 한다.'
마른 입술을 핥았다.
피 냄새가 진동하는 방 안.
에른의 왼쪽 눈 또한 피처럼 붉게 빛나고 있었다.
-옥면금룡 조검휘 : 검휘도 차원 거래를 자주 하는 편이 아니고. 주
로 구매 위주라서 더더욱 이름이 알 려져 있지 않지.
-옥면금룡 조검휘 : 묻겠소. 내가 뒤에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소?
거래소 리포트를 봤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면 써먹을 수 있는 5회권이 4 회권으로 줄어드는 것이라.
-에른 : 용신구는 현재 가장 위협 적인 적이니까요. 1계에 이런 말이
있던데… 적을 알고 나를 알면 위태 로워질 일이 없다고.
-옥면금룡 조검휘 :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 어느 상황에나 적용되 는 말이지.
-에른 : 주변 조사 좀 했습니다. 용 신구와 사업적으로 아는 사이시죠?
이건 순전한 추측이었다.
조검휘와의 연결고리가 용신구였으 니, 분명 조근남과도 관계가 있으리라.
'리포트를 못 봐서 답답하네. 이거,
금왕의 노림수인가?'
그럴 리가.
타인의 입을 빌려 대화를 나눈다.
[섭리의 눈]의 파해법이 될 수 있 지만, 이 특전을 맥스급으로 보유했 다는 걸 조근남이 알 리 없다.
'금왕... 무시할 수 없지만 너무 과 대평가해서도 안 돼.'
-옥면금룡 조검휘 : 제법이구려. 평생 차원거래를 피해 왔는데, 0계 인이 날 알 줄은.
-옥면금룡 조검휘 : 알겠지만… 나 는 상인이오. 적절한 물건을 적절한 가격에 구한 뒤, 적절한 이윤을 더해 판매하는 사람이지.
-에른 : 그렇군요.
-옥면금룡 조검휘 : 상인이 파는 일 만 잘한다고 생각하면 곤란하오. 상인 은 구매에 있어서도 전문가이지.
-옥면금룡 조검휘 : 그런데 내가 봤 을 때, 그쪽의 요구는 조금 지나친 감이 있더군.
-에른 : 어떤 점에서?
-옥면금룡 조검휘 : 큰손들에게 함의금으로 받은 3만 2천 코인. 그 사이에 벌어들인 이윤을 더하면 벌 써 5만 코인을 흘쩍 넘기는 금액이 라고 검휘에게 그랬다던데.
-에른 : 그랬죠.
-옥면금룡 조검휘 : 숫자를 따져 봅시다. 천급 영약은 비싼 만큼, 원 가도 상당한 물건이오. 그새 2만 코 인 가까이 벌어들인다? 어렵지. 태 산을 소유한 용신구 원주도 그새 그 렇게 벌지는 못할 거요.
-옥면금룡 조검휘 : 게다가, 용 원
주와 가격 경쟁이 붙은 상황에 그 정도 수익은.... 손해나 안 보면 다행일 텐데. 아무리 검휘가 차원거 래에 무지하다고 해도 그렇지, 너무 하다고 생각하지 않소?
'돌겠네.'
이건 뭐 계좌를 깔 수도 없고.
에른은 조검휘에게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
가격 특전 3신기를 활용했고, [정 보의 비대칭]으로 태산보신원의 포
인트 환급 이벤트에 참여했을 뿐.
이러면 천급가가 떨어지건 말건 이 쪽은 거래할 때마다 이득을 본다.
그렇게 번 게 2만 코인이 넘었고 앞으로 벌어들일 금액을 생각하면 5 만 코인으로는 부족한 감이 있었다.
-에른 : 너무한 건 회주님 같은데 요. 5회권의 가치를 너무 깎아내리 시는데.
-옥면금룡 조검휘 : 아니, 그 가치 는 나도 인정하오. 계속 영약 거래
를 하다 보면 언젠가는 5만 코인을 넘길 걸로 보고. 하지만 현재의 5만 코인은 미래의 10만 코인보다 훨씬 값지지.
이건 맞는 말이다.
현재 계좌에 있는 금액은 5만 2천 코인 정도.
지금 에른에겐 1, 2000코인은 아무 것도 아니지만 스틸가드에 있었을 때만 해도 그게 엄청난 액수였다.
이제는 5만 코인이 딱 그 느낌.
-옥면금룡 조검휘 : 복수의 가치 가 5만 코인에 불과하냐는 말. 검휘 에게 들었을 때, 약간 띵하긴 했소. 맞는 말이지. 부모의 복수에 어떻게 값을 매길 수 있겠소.
-옥면금룡 조검휘 : 하지만 난 상 인이오. 상인은 복수도 상인답게 함 니다. 충분하다고 생각하오. 5만 코 인이면.
확실히 조검휘하곤 다르다.
쉽게 격동하지 않고, 침착하며, 말
의 허실을 파악할 줄 안다.
'이런 게 연륜인가?'
그러나.
씨익.
에른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조근남은 큰 실수를 범했다.
-에른 : 제 생각엔 그냥 손자분에 게 협상을 맡기는 게 좋았을 것 같 네요.
-옥면금룡 조검휘 : ...?
어쩔 수 없다.
제아무리 금왕이라도.
산전수전 다 겪은 상계의 왕일지라도.
-에른 : 자식은 부모를 땅에 묻고, 부모는 자식을 가슴에 묻는다고 하죠.
거스를 수 없는 것은.
인간의 마음, 부모의 마음.
-에른 : 저도 상인입니다. 주 무대
가 여러 차원이라는 것만이 다를 뿐.
-에른 : 그 말 그대로 되돌려 드 리죠. 5만 코인? 적당한 가격일지도 몰라요. 하지만 나에겐 없어도 그만 인 금액입니다.
-에른 : 그런데… 모든 걸 가지신 금왕께선,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 습니까?
아쉬운 쪽은, 자신이 아니라 금왕 이다.
이게 싫으면 조검휘에게 돈을 줘서
[섭리의 눈]을 맥스까지 찍으면 그 만이다.
아니면 다른 리포트 제공권을 가진 교류자를 찾거나.
그게 안 되니까 이렇게 매달리는 거 아니겠는가.
-에른 : 복수에 실패한 뒤, 여생을 보내면서 본인을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다면 제가 잘못 생각한 거겠죠.
-에른 : 난 상인이니까, 상인다운 복수를 해야 하니까. 그렇죠?
-옥면금룡 조검휘 : ....
금왕이 나섬으로써, 이 복수는 금 룡 개인이 아닌 그들 가문의 숙원으 로 확장되었다.
조검휘에게 5만 코인이면 능력 밖 의 금액이겠지만, 금왕이라면?
'턱도 없지!'
처음 용신구와 만났을 때, 그의 계 좌에는 64만 코인이 있었다.
조근남이 그만 못할까?
제5 무림계의 금왕이?
-에른 : 나는 당신에게 필요한 걸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입니다. 당 신은 금왕이구요.
-에른 : 판을 키운 것은, 당신입니다.
에른은 대화를 종료하고 정원을 한 바퀴 돌았다.
반란의 밤.
찬바람에 피비린내가 섞여 있다.
블랙 스네이크의 보스는 죽었고 그 의 가신들은 죽거나 꽁꽁 묶여 옴짝 달싹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자유로운 것은 오직 에른뿐.
'금왕이 어떻게 나올까…. 자식의 복수를 포기할 만큼 비정할까?'
그런 냉혈한일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나름 모험수를 던져본 것인데, 어 떤 결과가 나올지는.
다시 차원거래를 시작하자 다급한 조검휘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옥면금룡 조검휘 : 죄송합니다. 갑자기 이렇게 된 건…. 원하는 금
액을 맞춰 드리려면 조부님께 말씀 드려야 했거든요.
-옥면금룡 조검휘 : 그리고, 조부 님께서 요구 조건을 알려 달라고 하 십니다.
"이거지!"
참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했던가.
조검휘가 제시한 5만 코인으로 만 족하지 않기를 정말 잘했다.
유혹에 넘어가지 않은 스스로를 칭 찬해 주고 싶을 정도다.
'이런 게 존버인가?'
교류자들은 항상 말한다.
버티고 버티다 보면 좋은 날이 올 거라고.
딱히 엄청 오래 버티진 않았지만 오늘이 그 날인 것 같다.
금룡에 이어 금왕까지 구워삶으니 온 세상이 금빛으로 보였다.
아직 동이 트려면 멀었지만.
-에른 : 내가 원하는 건 코인도, 물건도 아닙니다.
-에른 : 그보다 오래 지속되는 것, 신용이죠.
*
"흐음.…"
조근남이 허연 수염을 쓰다듬었다.
방안은 붉은 빛으로 뒤덮여 있었다.
차원거래를 진행 중인 조검휘는, 리포트에 나온 대로 인상적인 미남 이었다.
짙은 눈썹과 뚜렷한 콧대.
호수처럼 깊은 검은 눈을 보면 누 구라도 헤어나오지 못할 것 같고.
무림인임에도 상처 하나 없는 깨끗 한 얼굴은 옥면이라는 별호와 정말 잘 어울렸다.
"할아버님, 어떻게...
조검휘의 물음에 조근남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지간하면 들어 주려고 했는데… 이 친구, 자꾸 무리한 요구를 하는군."
조근남의 목소리가 단호해졌다.
"우리 만금상회는 차원거래를 하지 않소. 제휴 상점도 없고… 리포트를 위해 새로운 사업 분야를 확장할 수 는 없는 일이오.... 이렇게 전해 주겠니?"
"예."
조검휘가 금왕의 말을 옮기는 동 안, 조근남이 혼잣말을 했다.
"천급 거래로 만족하지 못하는 건 가? 욕심이 너무 많군."
이 에른이란 교류자.
꿈도 야무지다.
조건으로 독점 거래 계약을 내밀었다.
만금상회가 보유한 현금과 현금성 자산은 어마어마하다.
금왕이 처음 사업을 일굴 때만 해 도 모두가 만금(M金)이란 이름을 비웃었으나, 지금에 와서는 경외를 가득 담아 부른다.
그런데 왜인지 금왕은 차원거래를 엄금, 철저히 제5 무림계에서만 사 업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그런 단체가 차원거래에 발을 들이 민다면?
그 사실만으로도 1계 채널에 엄청 난 영향을 끼칠 것인데.
에른이 단독 중개인이 되어 중간에 서 이윤을 챙긴다면 얼마나 거물이 될지 상상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이 조건 말고는 안 되겠 다고 합니다."
".…"무슨?"
"20만 코인."
" 뭣'?"
"거저 달라는 건 아니고 투자금이 라고 합니다. 이자까지 쳐서 돌려준
다는데요."
"그걸 어떻게 믿고? 먹고 튈 줄 누가 알아?"
"계약서를 작성하면 된다고 합니다."
거래소가 보증하는 차원계약 기능.
계약을 체결한다고 해도 날릴 가능 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20만 코인...
금왕이라면 손쉽게 마련할 수 있지 만, 금왕이라도 한 번에 날린다면 내상을 입을 만한 금액이었다.
"투자에는 항상 위험이 따르지. 저
에른이란 교류자가 깜냥이 되는지 난 알지 못한다. 눈먼 투자를 하다가 전부 잃을 수도 있는 거 아닌가."
금왕의 눈가에 주름살이 잡혔다.
리포트만 아니었어도, 복수만 아니 었어도.
이런 말도 안 되는 제의를 고민하 고 있다는 것 자체가 그에게는 굴욕 적인 일이었다.
조검휘가 고개를 돌려 금왕을 바라 봤다.
"...그것도 방법이 있다는데요?
위험을 아예 뿌리 뽑아 버릴 방법."
[기화]
붉은 차원거래서.
거기에서 흘러나온 붉은 안개와 같 은 기운이 에른의 얼굴을 감쌌다.
그리고 서서히 흡수되어 왔다.
[흡수가 시작됩니다.]
['내 머릿속의 스펀지'의 효과가 적 용됩니다.]
『상업학 총론' 흡수 진행, 1%-
6%....]
['인사 원칙' 흡수 진행, 1%- 5 %....]
['협상의 기술 97가지' 흡수 진행,
!%... 4%..]
['고객의 마음을 사로잡는 법' 흡수 진행, 1%… 3%....]
['회계의 모든 것' 흡수 진행 1%-
2%....]
이 느낌은 뭐랄까....
몇 번을 겪어도 적응이 안 된다.
누군가가 자기 머리를 열고 대뇌 피 질을 억지로 편 뒤, 그 안에 지식을 쑤셔 넣고, 다시 원래대로 돌려놓는 듯한?
추출된 지식의 주인은.
조근남이 말하길, 50년 경력의 장인 중의 장인.
'상왕까지는 아니더라도 상계의 대신 정도는 된다고 했던가.'
존경할 만한 삶이다.
차원거래서는 가치 있는 것만 [추출] 해 낸다.
지식과 정보, 기술, 전투술 등… 굶 주린 하이에나처럼 뭐든 가리지 않지 만
수수료 값도 안 나올 지식에는 눈길 도 주지 않는다.
예컨대.
동네 양아치가 우연히 차원거래서를
얻어 추출을 시도한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삥 뜯는 기술의 모든 것', '치아 사 이로 침 뱉는 법', '허세왕이 되기 위 한 A to Z'… 이런 게 거래 대상이 되진 않으니까.
평생의 경험을 모아도 책 한 권이 되지 않는 삶들이 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무려 다섯 권.
조근남의 지식이었으면 더 좋았겠지 만, 애초에 거기까지는 기대하지 않았
다.
"내가 투자금을 날릴까 걱정이 되신 다.... 그러면 날 믿을 만한 사람으로 만들면 되는 거 아닙니까?"
"그게 무슨 말이오?"
"좋은 기능 뒀다 뭐 합니까. 어디 남 는 지식 없어요?"
에른은 상계의 노하우를 전수받는 것을 조건으로 걸었고, 금왕은 은퇴를 앞둔 노상인에게서 지식을 추출하여 전송해 줬다.
'이거 너무 낯설군.'
뇌리에서 각종 정보가 부유한다.
그 편린들을 훑을 때마다 노상인의 기억이 문득문득 스쳐 지나갔다.
그의 경험과 체험, 울고 웃고 때로는 쓴웃음 짓고 피눈물을 삼킨 사건들.
건조한 사실의 나열일 뿐인 백과사 전,〈세상에 나쁜 괴수는 없다〉나, 깨 달음이 전수되어 오는 무공 흡수와는 종류가 다른 느낌이었다.
-옥면금룡 조검휘 : 왜 그러지?
-에른 : 부작용 때문에.
채 흡수가 완료되지 않아서 머리가 지끈지끈했다.
-옥면금룡 조검휘 : 그건 자네가 감 당해야 할 몫 아닌가.
-에른 : 그거야 그렇죠.
-에른 : 이거 추출한 분은, 앞으로 이쪽 일은 못 하겠죠?
-옥면금룡 조검휘 : 사업 초창기부 터 내 곁을 지킨 심복 중의 심복일세.
-에른 : 이거 고맙다고 절이라도 해 야 하나요.
-옥면금룡 조검휘 : 고마워할 건 없 네. 낙향해서 손주들 재롱이나 보겠다 는 거, 억지로 잡아두고 있었으니까.
-옥면금룡 조검휘 : 그 친구가 그러 더군. 평범한 촌로가 되어 버린 건 아 쉽지만… 다른 차원에서라도 자기 능 력이 계속 이어진다면 그거 참 반갑 고 고마운 일이라고.
에른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에른 : 너무 고용주적인 시각 이닙 니까? 속으로는 뭐 이딴 갑질이 있 나… 라고 생각할 거 같은데.
-옥면금룡 조검휘 : 내 사람은 내가 알아서 챙기오. 섭섭하지 않도록 예우 해 줬으니 신경 쓰지 마시게
-에른 : 그러죠.
노상인이 물려준 기억의 편린 때문 일까?
뭔가 씁쓸하고 헛헛한 기분이 들지 만, 에른이 상관할 베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보유 코인 : 252131]
'25 만...
보유 코인이 5배나 늘어났지만 마냥 기뻐할 것은 이니다.
저 중 20만 코인이 빚.
무사히 투자받았다.
에른은 조검휘와 아래와 같은 차원 계약을 맺었다.
〈거래 계약서〉
-교류자 에른(이하 "갑"이라 한다)과 교류자 옥면금룡 조검휘(이하 "을"이 라 한다)는 다음과 같이 거래 계약을 체결한다.
1. 갑은 을에게 48시간 내로 [리포 트 제공 5회]를 제공한다.
2. ['리포트 제공 5히' 제공]이란, 을 이 선정한 대상 5명에 대해 갑의 권 한을 사용해 거래소가 발행한 이용자
리포트를 공유해 주는 행위를 의미한다.
3. 이 대가로, 을은 갑에게 투자금 L20만 코인]을 송금해야 한다.
4. 이 투자금에 대한 연 이자율은 13%]. 상환방식은 L만기일시상환]이며 상환 기간은 [2년]이다. 날짜 계산은 갑이 거주하는 [1342호 지구]의 시간 을 기준으로 한다.
5. 4번 항목에 의거, 갑은 매달 을에 게 [500코인]을 송금해야 하며, 24개 월째에는 [20만 500코인을] 송금해야 한다.
6. 갑이 1, 2의 조항을 지키지 않을
경우, 위약금 [100만 코인]을 지불한 다. 이자와 원금의 반환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는 갑의 자산이 압류당할 수 있다. 그 범위와 방식은 을의 의사 에 따른다.
7. 이 대가로, 갑은 을의 요청이 있 을 때마다 [복수]에 필요한 [각종 물 품]을 제공해 주어야 한다.
8. [각종 물품]은 갑과 을이 합의하 여 정한다. 그 가격은 채널의 일반적 인 거래가를 따른다.
9. 본 계약은 체결일로부터 [3년간] 그 효력을 가진다. 계약에 필요한 모
든 비용은 을이 부담한다.
상당히 길다.
그렇지만 노상인의 지식이 들어온 지금은 바로 이해가 됐다.
'3%의 이자만 갚아 나가다가 2년 뒤에 20만 코인을 한번에 돌려주는 방식... 이러면 총 이자액이 많아지지 만, 목돈을 끝까지 쥐고 있을 수 있어 서 좋아.'
투자금을 어떻게 상환할지에 대해서.
예전 같았으면 방식이 어떻게 되건
차이를 몰랐겠지만, 이제는 안다.
처음부터 원금과 이자를 갚아 나가 는 것보다는 최대한 코인을 들고 있 는 편이 좋았다.
에른은 다른 교류자들과는 다르니까.
가만히 있어도 코인이 불어나는 각 종 특전들!
위험을 줄이겠다고, 이자 덜 내겠다 고 빨리빨리 갚으면 그게 더 손해였다.
'이자율도 부담되는 편이 아니고 말 이지.'
연 3%는 정말 낮다.
금왕이 20만 코인을 굴린다면 2년 동안 못해도 6, 7만 코인은 벌지 않 을까?
그 대신 매년 6천 코인 이자를 가 져가는 것이니 대강 계산이 맞아떨 어진다.
원래 받으려고 했던 5만 코인과.
-옥면금룡 조검휘 : 자네가 원하는 대로 다 해 줬네.
-에른 : 에이, 그건 아니죠. 5회권으 로 끝날 거, 물품 지원까지 해주게 생
겼는데. 그것도 3년이나!
-옥면금룡 조검휘 : 지원이 아니라 거래지. 터무니없는 거금에, 측근의 지식까지. 검휘를 보조해 준다고 해서 그나마도 양보하는 걸세.
-에른 : 흐음.
에른은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에른 : 그런데… 만금상회는 차원 거래를 하지 않는다면서요?
-에른 : 어떻게 바로 추출이 된 겁
니까?
-옥면금룡 조검휘 : 상회가 사용하 지 않는 것일 뿐이지, 개인이 거래하 는 것까지 제한하는 것은 아닐세.
-에른 : 그러면 왜 나한테 금룡의 서포트를 맡기죠? 수하들이야 많지 않습니까.
-옥면금룡 조검휘 : 자네 때문에 가 장 믿을 만한 수하를, 수하이자 친우 를 내려 보냈네.
-옥면금룡 조검휘 : 이것까지 부탁 하기는 염치가 없고… 최소한 자네가 의발은 맡아 줘야 하지 않겠는가.
'그만큼 믿을 만한 사람이 없다는 얘 기군.'
하긴, 그럴 만도 했다.
금왕은 늙었고 남은 혈육은 조검휘 뿐이다.
휘하의 이무기들을 믿느니 차라리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이계의 교류 자가 나으리라.
-옥면금룡 조검휘 : 그러면, 합의된 걸로 알고 가겠네.
-에른 : 또 뵐 수 있으면 좋겠네요.
-옥면금룡 조검휘 : 좋은 날이 있겠지.
금왕이 떠났고, 에른은 조검휘에게서 명단을 받았다.
모두 다섯 명.
조검휘는 이들의 거래소 리포트를 요구했다.
-옥면금룡 조검휘 : 각각 대화방을 만들어서 초대해 두겠습니다. 한 명씩 확인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에른 : 친구로 등록해둔 건가? 원 수일지도 모를 사람들을?
-에른 : 저쪽에서 자길 노린다는 걸 눈치채면 곤란해질 텐데?
-옥면금룡 조검휘 : 괜찮습니다. 놈
들은… 자기가 금왕의 아들과 며느리 를 죽였다는 걸… 모르거든요.
-에른 : 이제 알겠군. 왜 별호하고 이름을 다 깐 건지.
-옥면금룡 조검휘 : 예. 덕분에 친 해지기 쉬웠지요. 정보도 알아서 술술 털어놔 주고.
에른은 다섯 명의 거래소 리포트를 살폈다.
모두 제5 무림계의 인물들.
보유한 코인은… 많은 사람도 있고
개털인 사람도 있다.
거래 레벨도 각각이 다르고.
그러나 한 가지 공통점은.
[혼의 위상 : 초월적인 무공을 보유 한 자.]
'모두 초절정?'
조검휘도 초절정이니 이래야 급이
맞기는 한다.
하지만 설명을 보면, 어마어마한 괴
물들이라 아직 어린 그가 상대할 수 있을까 걱정부터 앞선다.
'뭐, 내 알 바 아니고… 금룡이 알아 서 하겠지.'
에른은 조검휘에게 거래소 리포트를 전송해 줬다.
그의 성격이라면 분명 고마움을 표 할 것이다.
감사 인사를 기다리고 있는데.
-옥면금룡 조검휘 : 교류자님....
어떤 톤일지 듣지 않아도 보였다.
착 가라앉은.
더 이상 낮게 깔릴 수 없는 목소리.
-에른 : 뭡니까?
-옥면금룡 조검휘 : 이거 장난치시 는 거죠.
_에른 : ???
-옥면금룡 조검휘 : 뭔가를 더 얻어 내려고. 조건을 추가하려고. 솔직히 말씀해 주십시오. 조작하신 거죠?
-에른 : 리포트를 내가 무슨 수로 조작합니까.
-에른 : 용신구도 그런 말을 했었 지. 그런데 결과가?
-옥면금룡 조검휘 : ....
-옥면금룡 조검휘 : ....
에른은 이상함을 느꼈다.
무겁게 찍히는 말줄임표에서 느껴지 는 것은.
좌절에 가까운, 낭패의 감정.
-에른 : 혹시, 원수가 거기 없는 건?
-옥면금룡 조검휘 : 그건 아닙니다.
-옥면금룡 조검휘 : 두 명 있네요.
-에른 : 그러면 최악은 아니군. 셋 중 둘은 있으니까.
-옥면금룡 조검휘 : 그렇죠… 최악 은 아닙니다. 하지만 빠져 있어요. 가 장 중요한 주범이....
-옥면금룡 조검휘 : 죄송하지만, 한 번만 더 묻겠습니다.
-옥면금룡 조검휘 : 정말, 아무것도
안 건드리신 거죠? 사실대로 말씀하 신다면 탓하지 않겠습니다.
-에른 : 나도 그런 거였으면 좋겠는 데, 내가 그렇게까지 비열하진 않거 든. 거래는 거래고 난 할 일을 했어.
-옥면금룡 조검휘 : 아....
한동안 말이 없었다.
조검휘는 조용히 대화를 끄고 차원 거래서도 닫아 버렸다.
"흠… 이거 좋아할 수도 없고."
덕분에 조검휘의 부모를 죽인 원수
가 누군지 알게 됐다.
금룡에게는 안 된 일이지만.
다섯 사람 중 두 사람이 공유하는 유일한 공통점.
[닉네임 : 삭초제근
거래소 리포트 : 철혈귀검 정호근. 난주혈사를 일으킨 주역. 현재는 강동 제일사파인 철혈문을 이끌며 지역의 패자로 군림하고 있다.]
[닉네임 : 질풍협녀
거래소 리포트 : 백가협녀 이난희. 백가장의 백원진과 혼인한 명문정파 의 안주인이며 여러 협행과 구휼 활 동으로 유명한 여협이다. 그렇게 알려 져 있지만… 실은 난주혈사를 일으킨 주역으로, 추악한 과거를 숨기기 위해 항상 전전긍긍한다.]
'난주혈사!'
곧이어 너무도 당연한 질문이 떠올 랐다.
'난주에서 무슨 일이 있었길래?'
[72 화]
모든 게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필라프가 말한 대로 됐어."
카마잔의 저택을 차지한 타이탄과 베스는 감개무량한 표정이었다.
정말 그가 말한 대로 됐다.
밀수 조직은 기다렸다는 듯 타이탄 을 지지했고, 상인회 또한 카마잔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던 터라 베스 의 설득에 쉽게 넘어갔다.
의외였던 것은 도박장과 유곽.
도박장은 끝까지 저항할 줄 알았는 데 꽤 순순히 이쪽으로 붙었고, 오히 려 유곽이 가장 격렬히 반대했다.
헤이브를 죽인 배후에 카마잔이 있 다는 말이 도는데도 아랑곳하지 않았 지만.
다른 조직이 전부 둘에게 붙어 버리 자 어쩔 수 없이 입장을 바꿨다.
아무튼 됐다.
"테아로스 밤거리의 주인… 처음 들 었을 때는 뭔 개소리냐 했었는데."
두 사람은 블랙 스네이크의 공동 보
스가 되었다.
아직은 임시지만.
"그러게...
베스의 눈이 우수에 젖었다.
전대 보스가 살아 있을 때만 해도 둘 중 하나가 후계자가 될 거란 소문 이 조직 내에서 파다했었다.
하지만 황망하게도, 보스가 돌연 사 망하자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며 준비 하고 있던 카마잔이 칼을 빼 들었고, 그가 차기 보스가 됐다.
후계자로 거론되던 두 사람을 카마
잔이 좋게 볼 리 없다.
그때 이후론 보스는커녕 간부 자리 도 그들에겐 간절했는데.
"얼떨떨하지 않아?"
타이탄이 집무실 책상을 어루만졌다.
맨질맨질한 원목의 감촉이 느껴졌다.
"물론."
베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꿈에서도 상상하지 못했던 바로 그 자리다.
"베스... 앞으로 여긴 네가 앉아라."
"그, 그래도 될까?"
"실무는 네가 잘 알잖아. 나야 뭐… 앉아있어 봐야 장식이나 마찬가지지."
"...고맙다."
베스도 그 부분을 지적하고 싶었지 만, 쉽게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타이탄이 인정하고 먼저 얘기해 주 니, 마음이 편해졌다.
그러나.
"필라프...
그를 떠올리자 곧 다시 불편해졌다.
베스의 눈썹이 우그러졌다.
"그 인간은 대체… 정체가 뭘까?"
난해한 퍼즐과도 같은 작자다.
문제는 퍼즐이 여럿 얽혀 있어 한두 개를 풀어낸다 해도 여전히 미궁이라 는 것.
왕실 기사단에 들어가도 에이스를 먹을 것 같은 검술 실력과, 그가 사용 한 기괴한 물건들.
아직도 도통 모르겠는 실비아를 구 한 이유, 그리고....
타이탄이 입을 뗐다.
"필라프는, 뭘 하려고 암흑가를 배후 조종하는 거지?"
수도의 암흑가는 현재 초긴장 상태 였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약고와도 같 O
보스가 바뀌면 조직의 정책도 바뀐 다.
카마잔은 정통성이 떨어지는 편이었다.
내부 수습이 우선이라 타 조직과의 분쟁은 피하고 보는 편이었는데.
타이탄과 베스는 정통파이자 강경파 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블랙 스네이크의 경쟁 조직인 레드 트라이앵글에선 두 사람을 경계하기 시작했고 다른 군소 조직들은 바짝 엎드린 채, 다음 행보를 예의 주시하 고 있었다.
"보통 독종들이 아니야. 카마잔이 몇 번이나 골로 보내려고 했는데도 끝까 지 버텨냈지. "
"그런데 뒤에서는 반역의 칼을 갈고 있었고. "
''그 거대한 조직을 번갯불에 콩 구
워 먹듯이 먹어 버렸어. 장악하는 속 도가… 철저한 준비를 했다는 거지. 그것도 남몰래."
"카마잔보다 훨씬 까다롭겠네. 이거 귀찮게 됐어. "
이런 평가.
그러나 그들은 모른다.
'준비는 무슨 준비! 필라프의 꼭두각 시일 뿐인데.'
그가 뭘 꾸미는 지도 모르는 채로, 블랙 스네이크를 홀라당 넘겨 바쳤다.
거절하면 죽었을 테니 달리 선택지
가 없었지만, 목숨을 구한 지금은 걱 정이 산만 같다.
"그거는… 알아봤어?"
타이탄이 조심스레 물었다.
베스는 어두운 얼굴로 끄덕거렸다.
"의사한테 가 봤는데 자기는 엄두가 안 난다더군."
«..2"
"머리를 갈랐다가 봉합하는 것만 해 도 생사를 장담할 수가 없고, 안전하 게 꺼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던데."
"그거 돌팔이 아냐? 벌레 하나 꺼내
는 게 뭐가 어렵다고."
"가만히 있지 않고 움직이잖아. 필라 프 말 못 들었어? 위험을 느끼면 뇌 속으로 파고들어 갈 거라고."
« O «
M 으 .
"마법사도 만나 봤어."
"누구?"
"안드레드."
" 아."
암흑가에선 유명한 마법사다.
아이스 블래스트도 그에게 구매한 것.
마탑 출신이라 실력 하나는 인정할 만한데, 여자관계가 지저분해서 탑에 서 쫓겨나고 말았다.
변태 같은 놈'이다.
얼굴만 마주해도 기분이 나빠지는.
그렇지만 유능한 마법사였다.
타이탄이 조바심을 냈다.
"안드레드가 뭐라고 하는데?"
"마법적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는군."
"그럼?"
"저주 마법이면 해주를 걸면 되고
몸에 손상이 생긴 거면 비싼 치유 마 법을 쓰면 되지만… 이런 경우는 처 음 본다더군. 자기 능력으론 제거할 수 없다… 더라."
"자기 능력으론? 그럼 더 실력 좋은 마법사를 찾으면 된다는 거잖아! 그럼 됐네."
"되긴 뭐가 돼? X 됐지!"
한숨 쉬는 베스를 보고 타이탄이 고 개를 갸웃거렸다.
"아직 실감이 안 나나 본데. 우리 이 제 부자야. 마탑 출신을 찾을 게 아니라 아예 돈 싸 들고 마탑엘 가 보는 건?"
"필라프가 그걸 보고만 있겠냐… 알 아채고 벌레를 으스러뜨리면 우리 는.... 캑."
타이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몰래 가야지… 아무도 모르게."
"소용없어. 탐지 마법으로 벌레의 위 치를 정확히 감지하면서, 정교한 마법 으로 그 손톱만 한 걸 단번에 터뜨려 야 한다는데. 그러면서도 뇌에는 손상 을 입히면 안 되지. 이게 되는 마법사 면...
"우린 감히 얼굴도 못 쳐다보겠군."
"그래."
둘은 급격히 침울해졌다.
똑똑.
"누구냐?"
노크하고 들어온 사람은 덴버였다.
"저기, 형님들...
"뭔데? 우리 대화 중이다."
신경질적인 베스의 목소리에 덴버가 움츠러들었다.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그… 뵙자고 해서요."
"누가?"
"필라프 님이요."
"헉!"
두 사람의 눈이 커졌다.
베스는 허둥거리며 말까지 더듬었다.
"오, 오… 오라고 해."
"네...
잠시 뒤.
"호오… 깨끗하게 잘 치웠네?"
에른은 한때는 카마잔의 것이었던 집무실을 둘러보았다.
시체들로 가득했을 땐, 그보다음산 할 수가 없었는데.
밝을 때 보니 나름 권위 있어 보이 고 그렇다.
"예, 뭐… 피범벅 상태로 둘 수는 없 으니까요."
에른은 두 사람이 권하기도 전에 책 상으로 가서 푹신한 의자에 몸을 묻 었다.
너무나 자연스럽다.
책상 위로 다리를 꼬아 올려놓는 것 까지도.
"뭐해? 너네도 앉아."
"아, 아뇨...
타이탄과 베스는 공손히 서 있기만 할 뿐이었다.
반란이 성공한 뒤로.
이때가 오지 않았으면 하는 동시에, 내심 기다리기도 했다.
날짜를 받아 놓은 사형수처럼.
블랙 스네이크의 보스가 된 것은 좋 았지만, 그래 봐야 필라프의 꼭두각시 신세다.
그 사실을 체감하기가 두려우면서도,
필라프의 속내를 하루빨리 알고 싶기 도 했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나은 법.
"자...
에른이 입을 열었다.
"어때? 소감이."
대답한 사람은 베스였다.
"생각보다 좋진 않은데요."
"왜지?"
"당신이 뭘 요구할지 모르니까요."
"왜, 내가 조직원 동원해서 왕궁이라
도 치라고 할까 봐?"
타이탄이 화들짝 놀랐다.
"호, 혹시 제국 첩자?"
"농담이야."
"노… 농담이라도 그런 말씀 마십시 오. 반란은 카마잔한테 한 걸로도 충 분합니다."
에른의 입술이 살짝 휘었다.
"걱정들이 그렇게 많아서 조직 운영 하겠나. 난 함리적인 사람이야."
"몇 가지 무리한 요구를 할 수도 있 겠지. 너희가 내키지 않는 일을 시킬 수도 있고."
"근데 그건, 목숨값에 비하면 아무것 도 아니잖아? 그리고 누구 덕분에 이 자리에 앉게 됐는데."
베스가 마른 침을 삼켰다.
"세상사 대부분이 정도의 문제 아니겠 습니까. 어떤 일인지가 중요한 건데."
"걱정 붙들어 매라. 난 최대한 재량 권을 줄 생각이다. 암흑가 사업에는
관심 없거든."
"그, 그럼?"
에른은 품에서 여러 번 접힌 종이를 꺼내 건넸다.
"내 요구 조건이다. 이거만 지키면 카 마잔 같은 최후를 맞진 않을 거니까."
두 사람은 거기 적힌 내용을 읽었다.
1. 고독을 삐내려는 시도는 반란으 로 간주한다. 너희들도 깨달았겠지만, 어차피 무익하잖아?
2. 내 정체를 파악하려는 시도도 반
란으로 간주한다. 자신 있으면 해 보 든가.
3. 조직의 순이익 15%를 매달 상납 한다. 이 비율은 언제든지 조정될 수 있다. 내가 원할 때마다. 그리고, 숫자 장난질도 안 통한다. 카마잔의 장부를 갖고 있거든.
4. 조직 운영에 필요한 모든 물자는 앞으로〈필라프 상회〉에서 구매한다.
5. 상인회를 비롯, 블랙 스네이크는 〈필라프 상회〉에 적극 협조한다.
6. 조직 내부의 모든 일은 공동 보 스가 상의하여 결정한다.
이건 뭐 협상문인지, 협박문인지?
이런 식의 요구 조건은 처음 본다.
'벌레 없애려고 했던 걸 아는구나!'
베스는 1번을 읽으면서는 낯빛이 사 색이 됐고 2번에서 약간 회복되었다 가 3번에선 다시 납빛으로 변했다.
'어쩐지 이상했어. 저택에 혼자 남을 이유가 없었는데. 장부를 확보하려 고...
카마잔의 장부에는 조직의 모든 자
금 흐름이 기록되어 있다.
집무실을 뒤져도 나오지 않아서 어 디 비밀 금고에 있나 했더니 필라프 가 가져갔을 줄이야.
연이어 충격을 받다 보니까 뒷부분 은 무덤덤했다.
특히 6번은 조건으로 안 달았어도 그러려고 했던 거라 혈색이 좀 괜찮 아졌다.
"그럭저럭 수용할 만한 조건이군요."
"...그럭저럭?"
"아, 아니… 관대한 제안이십니다."
"말했잖아. 합리적이라고."
'합리적은 개뿔...
그래도 최악은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자신과 타이탄을 얼굴로 내세우고 비선에서 조직을 좌지우지하면 어쩌 나 했는데.
순이익 15% 상납이 크기는 하지만, 감당할 수준은 된다.
"그런데 필라프 상회가 뭡니까? 처 음 들어 보는데...
"당연히 처음 듣겠지. 신생 상회니까."
"상인이셨어요?"
"50년 경력이다."
자신만만한 에른의 대답에 베스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50년 같은 소리 하네. 5일이나 되면 다행이지...
*
지르칼이 마련해 준 15일의 폐관 수 련 기간.
종료까지 만 하루도 채 남지 않았다.
한밤중, 에른은 몰래 아카데미 담을 넘어 특별 수련실로 숨어들어 갔다.
" 후아...
걸리면 퇴학도 가능한 건이라 최대 한 주의를 기울였는데, 교내 경비가 그렇게까지 삼엄하진 않았다.
"투명화까지 쓸 건 없었나? 아니…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지."
15 일.
짧다면 짧은 시간이지만 많은 일이 있었다.
우선 각성급으로 올라간 것.
'최대 성과지.'
금왕과 연이 닿아 노련한 상인의 평 생 노하우를 얻어냈고.
20만 코인이라는 자금줄을 마련한 것도 그에 버금가는 성과였다.
덕분에 망해가는 상회를 인수해〈필 라프 상회〉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 말고도.'
블랙 스네이크의 보스를 자기 사람 으로 갈아치운 것도 뺄 수 없다.
아마 잘할 것이다.
베스의 두뇌와 타이탄의 힘과 인망
이라면.
보스의 자질이 둘로 분산되어 있어 컨트롤하기 쉬운 것은 덤이고.
'대강 밑그림은 그려졌군.'
역시 아카데미에만 처박혀 있지 않 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밖으로 눈을 돌리면 이렇게나 가능 성이 널려 있는데.
차원거래에 열중하는 것도 좋지만, 이쪽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결국 코인도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존재하는 거니까.
"지르칼 쪼아서 폐관 한 번 더 들어 가야겠어."
시스템은 대강 구축해 둬서 내버려 둬도 잘 돌아갈 것 같긴 하다만.
아직 사업이 궤도에 오르기 전이다.
몸소 신경 써야 할 부분이 있기는 했다.
다음날.
아침 일찍부터 지르칼이 찾아왔다.
"어, 반가워요. 학교에서 보는 건 엄 청 오랜만이네."
"예...
그런데 지르칼의 표정이 이상했다.
반가움이 아닌 걱정 가득한 얼굴.
그가 물었다.
"혹시, 입학 전에 무슨 사고 치셨습 니까?"
"사고?"
"네. 어제 감찰 기사단에서 찾아왔습니다. 에른 님을 만나야겠다고요."
"감찰 기사단이 왜? 아니, 그래서 어 떻게 했지?"
"내일 폐관 끝나니까 다시 오라고 하 고 돌려보냈죠. 혹 짐작 가는 거라도?"
"전혀."
« O "
M....
지르칼이 이름 하나를 기억해 냈다.
"아, 그리고 동행인이 있었어요. 알
브레트에서 온 디르카라던가?"
그거라면 짐작 수준이 아니라 100% 확신할 수 있다.
에른의 눈이 가라앉았다.
'도리안 후작이 날 의심하는군.'
[73 화]
모든 살인은 흔적을 남긴다.
이 말.
대개는 들어맞는다.
그렇다는 건, 가끔은 틀릴 때도 있다 는 거다.
일부는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모든'을 보다 덜 과감한 수식어로 교체해야 한다.
-대부분의 살인은 흔적을 남긴다.
죻지만, 2% 부족한 느낌?
떠올랐다.
현재 상황에 딱 들어맞는 표현.
'어떤 살인은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흔적 없는 살인은 처벌이 불가능하다.'
에른은 속으로 생각했다.
'내 경우가 그렇지.'
*
좁고 어두운 방.
덩그러니 놓인 테이블.
에른은 거기 혼자 앉아 있었다.
가슴에 손을 대 보니 빨라진 박동이 느껴졌다.
'이건, 후회인가?'
아니.
바로 고개를 저었다.
단호한 반응이었다.
쿤츠의 죽음.
아카디오에서 했던 일에 후회가 있나?
시기와 방법에 있어서는 미련이 남
는다.
쿤츠에게 더 큰 절망과 좌절을 안겨 준 뒤에....
알브레트 가문을 전생의 스틸가드만 못한 처지로 추락시킨 다음, 그가 했던 말을 똑같이 되돌려줬으면 어땠을까.
''나? 에른 스틸가드. 넌 이제는 가문 빨도 못 세우는 알브레트의 개망나니. 굳이 승패를 따져야 하나?"
또 너무 편하게 보내준 감이 있었다.
시간에 쫓기지만 않았어도 평생 느 끼지 못한 고통을 경험하게 해줬을
텐데.
'내가 당한 것에 비하면… 백 분의 일도 안 되지.'
확실한 것은, 여태껏 한 모든 일을 다 후회하게 된다 해도 쿤츠에게 죽 음을 선사한 것만은 후회하지 않으리 라는 사실이었다.
그것만큼은 바위처럼 확고하다.
'그렇다면, 뭐지?'
에른은 곧 깨달았다.
몸이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
약간의 긴장과 들뜬 기분.
이건 흥분이다.
그는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난 철벽의 알리바이를 만들었다. 감 찰 기사단이 이걸 깰 수 있을까?'
감찰 기사단.
무서울 게 없는 기사들을 쥐 잡듯이 잡는 유일한 집단이다.
비리를 저지른 기사, 결투를 빙자한 살인, 레이디와의 불장난 등등....
흠결이 있다면, 잘못을 저지른 사람 이 기사라면, 경중을 가리지 않고 잡 아내어 처벌하기에.
기사들은 감찰의 감자만 들어도 치 를 떠는 동시에 두려워했다.
덜컥.
문이 열리고 멀끔한 인상의 중년 남 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아… 수련생 에른 스틸가드?"
"그런데요."
"반갑군. 감찰기사단 단장 제니츠일세."
"...단장님께서 학교까지 무슨 일로?"
"그렇게 놀란 눈으로 보지 않아도 되 네. 몇 가지 질문하러 온 것뿐이니까."
맞은편에 앉은 제니츠는 생각과는 달리, 친절하고 사람 좋아 보였다.
'진정제라도 먹고 왔나?'
제니츠가 상황을 설명하자 에른은 표정 관리를 했다.
놀란 듯 보여야 하니까.
몰랐던 것처럼, 생각지도 못했던 것 처럼.
"...아직도 쿤츠 군을 찾지 못했다 고 하더군. 정말 이상하지. 알브레트 의 모든 기사와 병사들이 아카디오 주변을 샅샅이 뒤지고 있다는데. 목격
자조차 나오질 않으니."
"그런 일이 있었군요."
"몰랐나?"
제니츠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잘 벼려진 눈빛으로 에른을 꿰뚫어 보던 그의 눈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하긴, 알 수가 없지. 스틸가드의호 위대는 하루 먼저 떠났고 일은 한밤 중에서 다음날 새벽 사이에 벌어졌으 니까. 그래도, 아카데미에 쿤츠 군이 없는 게 이상하지 앉던가?"
"처음엔 반이 갈라졌나 했는데, 쭉
안 보여서 의아하긴 했어요. 근데 뭐, 애초에 아는 사이도 이니었고. 마음이 바뀌어서 알브레트로 돌아갔겠거니 했죠."
"그렇군. 내 질문은 이게 다일세."
이렇게 끝날 거면 뭐하러 이 취조실 같은 곳에 온 건가 싶다.
고강도 심문 같은 게 있을 줄 알았 는데.
맥이 풀리는 동시에 의문이 들었다.
"뭔가, 그 아쉬운 표정은?"
에른의 얼굴에 떠오른 물음표를 본 제니츠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뇨, 음. 좀 의외여서."
"뭐가 말이지?"
"듣던 것과 너무 다르시군요. 역시 소문은 믿을 게 못 되나 봐요."
"그 소문이란 건… 테아로스의 미친 개 제니츠?"
무언의 긍정이다.
에른이 알기로, 제니츠는 피도 눈물 도 없는 인물이었다.
그도 역시 아카데미 출신이었는데, 백 명이 넘는 동기 중에서 아직 친분 을 유지하는 사람은 단 둘뿐이라고 했다.
그 외 나머지는.
'...전부 적이라고.'
그런 사내가 이렇게 물렁할 줄은.
"실종에 관련 있는 거 아니냐고 막 윽박지를 줄 알았거든요."
제니츠가 픽 웃었다.
"난 그 별명을 좋아하네. 개성 있잖 아. 근데 이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오해를 하더군."
"오해요?"
"한번 물면 놓지 않는 건 맞지만 아 무나 무는 건 아니거든."
"그거참… 다행이군요."
"별다른 혐의점이 없는데 물고 늘어 질 순 없지 않은가."
"그럼 이제 가봐도 되나요?"
"그건 곤란한데. 내 질문이 끝났다는 거지. 질문하고 싶은 다른 사람이 또 있거든."
제니츠는 마나를 담아 말했다.
"이제 들어와도 될 것 같네."
묵직한 음성이 문틈으로 빠져나갔다. 몇 초 뒤.
끼이 익.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오랜만입니다."
디르카가 고개를 숙였다.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못 본 사이에
엄청 초췌해졌다.
에른이 그를 본 감상을 말했다.
"얼굴이 많이 상했네요."
"예. 제 부주의로 도련님이 실종되셨 으니까요."
디르카는 제니츠 옆에 앉았다.
그러곤 말없이 한참 에른을 노려봤다.
"나 보러 왔으면 말씀을 하시죠."
"그러죠."
마침내 디르카가 입을 뗐다.
"왜 그러셨습니까?"
"뭐가요?"
에른은 놀란 눈으로 디르카를 쳐다
봤다.
그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듯.
그러나 속으로는.
'이 인간… 예리한데?'
오랫동안 쿤츠를 보좌해 온 탓일까?
모시던 주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 는지 본능적으로 아는 것 같았다.
하지만 감은 감일 뿐이다.
증명할 수 없다면 혼자만의 망상에 불과하다.
"겨우 하루 뒤… 에른 님께서 떠난 다음 날! 쿤츠 도련님께서 실종되셨습니다. 전날에는 기사들 간에 몸싸움까지 있었구요. 너무 공교롭지 않습니까?"
근거가 하찮다.
에른은 웃으며 대응했다.
"공교로워서 내가 의심스럽다는 거 군. 그거참."
"지금까지 수천 번… 아니 수만 번 고민해 봤습니다. 도련님께선 가출하 신 게 아닙니다."
"왜지? 그때 보니까 돌발 행동 잘할
거 같은 성격이던데."
"도련님은, 그렇게 사라지실 분이 아 닙니다."
"평생 부대껴도 모르는 게 사람 속 마음이지."
에른의 반박에 디르카가 목소리를 높였다.
"종적을 감추신 지 한 달이 다 되어 갑니다. 자의로 떠나신 거라면 몇 번 은 발견되고도 남을 시간입니다. 금전 을 노린 납치였다면? 몸값 요구라도 있었어야 하는데. 가출도 아니고 유괴 도 아니다… 그렇다는 건!"
울분에 찬 음성.
말투도 거칠어졌다.
"모든 불가능한 가능성을 지우면 마 지막 남은 것이 진실이라는 말… 난 그 말을 믿는다. 너는, 동기가 있고 실행에 옮길 능력도 있었어!"
"디르카 경."
제니츠가 눈살을 찌푸렸다.
"영웅의 후손일세. 백작가의 자제분 이고. 예의를 갖추시오."
"...죄송합니다."
에른이 물었다.
"그런데 저 사람이 날 취조할 권한 이 있나요? 감찰 기사도 아니잖아요."
"음… 도리안 후작께서 특별히 부탁 하셔서 같이 온 거라. 양해 부탁하네. 내키지 않는다면 오늘은 여기까지 하 는 걸로 하지."
"아뇨. 궁금하네요."
에른의 눈이 요사하게 빛났다.
"동기야 뭐 있다 치죠. 기분 나쁘게 쳐다봤다는 이유로 살인이 벌어지기 도 하는 세상이니까. 근데 실행에 옮 길 수 있었다라… 무슨 근거로?"
디르카가 대답했다.
"도련님이 실종된 날 밤. 스틸가드의 호위대는 테인 마을에 짐을 풀었소. 마차로 갔을 때, 아카디오에서 딱 하 루거리지. 정말 빠듯했을 텐데...
그가 의문을 제기했다.
"어떻게 마을에 도착을 했소. 한시도 쉬지 않아야 겨우 가능할 텐데. 이상 하지 않습니까? 마치 꼭 마을에 도착 해야 했던 것처럼."
"그거야, 노숙은 힘드니까."
에른의 말에 제니츠도 동의했다.
"바짝 힘들고 침대에서 푹 쉬는 게 낫지. 나라도 그렇게 했을 거요."
"그건 그렇다 치지요."
디르카는 여유를 잃지 않았다.
"흥미로운 부분은 이제 시작입니다. 마을 주민들은 증언합니다. 그날 호위 대를 봤으며 호위대는 밤부터 다음 날 아침까지 묵었다는 사실도."
"그래서 혐의가 부족하다는 거요. 있 잖소. 수십 명의 증인이."
"예. 철옹성처럼 보이죠. 하지만 그 목 격담에는 치명적인 공백이 있습니다."
"혼자 독방을 쓴 사람. 새벽 내내 방 밖으로 나온 적도 없는 사람. 누구일 까요? 에른 스틸가드입니다."
'제법이군.'
이 정도면 사건의 실체에 거의 근접 한 거 아닌가.
문제는.
"어...
제니츠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이 친구가 제정신인가? 라는 듯한 얼굴.
"새벽 동안 아카디오로 돌아가서 쿤 츠 군을 사라지게 하고, 마을로 돌아 왔다고?"
"정확함니다."
"이봐, 에른 수련생은 중급반일세. 나 나 자네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이미 실험해 봤습니다. 되더군요. 아슬아슬하게."
"물리적으로는 가능하다 쳐도, 이목 은 어떻게 속일 건가?"
"아카디오는 수도와 달리 성벽이 낮 습니다. 새벽이라면 몰래 드나들기 어
렵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네와 자네의 부하들까지 속이고?"
"예. 저와 비슷한 실력이라면 불가능 할 것은 없지요. 이게 유일한 가능성 입니다."
"그건 참… 비악과' 추측으로 가득하군."
제니츠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자네 좀 쉬어야겠어. 사건에 너무 몰두한 모양일세."
용의자라면 의심부터 하고 보는 감 찰 기사단장이라도 동의가 안 되는
주장이었다.
"그래서 부탁드리지 않았습니까. 한 번만 확인해 보면 됩니다. 에른 스틸가드가 실력을 숨기고 있는지 아닌지."
디르카는 확신에 차 있었다.
그와 제니츠는 1급이다.
동급까지는 상대의 몸에 마나를 흘 려 보는 것으로 대강의 경지를 파악 할 수 있다.
에른 스틸가드가 1급이라면?
나바로가 뒤집힐 일이다.
처음 디르카는 이 가정을 떠올렸을
때, 미친 생각으로 여기고 머릿속 한 켠에 치워뒀었다.
'말도 안 되지. 열여섯에 1급이라니 역사에 남을 천재도 아니고...
하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그것 말고 는 사건이 설명되지 않았다.
'처음 봤을 때부터 뭔가 다른 느낌을 받았잖아. 그 남다른 기세는...
'그리고 스틸가드니까! 한 집안에서 역사에 남을 천재가 연속으로 나오는 게 부자연스러운 건 아니잖아?'
에른 스틸가드는 1급이어야 한다.
그러면 해결된다.
모든 의문이.
결심한 뒤로, 제니츠를 만나러 갔고 오늘의 자리가 마련되었다.
"남의 몸에 함부로 마나를 집어넣을 순 없소."
제니츠는 곤란한 표정이었다.
유력 용의자라면 모를까, 납득 안 가 는 혐의에.
게다가 보통 가문도 아니고 스틸가드라 부담이 된다.
"괜찮습니다. 해 보죠."
에른이 손을 내밀었다.
'마나 측정법은 동급까지만 먹히지. 그리고 난, 각성급 이상이 온다고 해 도 뭐...
여태껏 영웅급인 아버지를 완벽하게 속여 온 에른이다.
실력이 탄로 날 걱정은 하지 않는다.
다만 생각해볼 것은.
"내가 쿤츠의 실종에 관여했다니… 이거 좀 모욕적인데. 누명 쓴 것 같기 도 하고."
서늘한 눈길.
에른은 디르카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만약 아무 상관 없는 걸로 밝혀진 다면 어떡할 거지?"
[74 화]
후작가 장남의 실종 배후로 지목당 한 것은 큰 일이다.
보통 사안이 아니고.
만약 진실이 밝혀진다면 알브레트 가 스틸가드에 전쟁을 선포한다 해 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뭐든 하겠소."
디르카가 결심한 듯 말하자 에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빨리 끝내죠. 누가 확인할
건가요?"
제니츠가 자원했다.
"아무래도 중립인 내가 측정하는 게 맞겠지."
[마나 측정]은 [전투 악수]의 다른 버전이라고 보면 된다.
서로의 마나를 충돌 시켜 실력을 가늠하는 게 전투 악수라면, 마나 측정은 상대방의 몸에 마나를 넣어 서 직접 마나 하트를 건드리는 방 식.
이러면 가늠 정도가 아니라 정확한
실력을 알 수 있지만, 잘 선호되지 않았다.
아니 그 이상으로, 대상자가 불쾌 해하는 경향이 있었다.
가장 은밀한 부분을 공개하는 것이 고, 측정자가 딴 맘을 품는다면 마 나 하트를 손상시키는 것도 가능하 기 때문.
정말 친인, 혈육이나 끈끈한 사제 관계가 아니고선 물어보는 자체로 엄청난 결례였다.
말 다 한 것이다.
테아로스의 미친개 제니츠가 조심 스러워 할 정도면.
"그럼... 마나를 넣도록 하겠네."
에른의 손목으로 제니츠의 마나가 흘러들어 왔다.
이질감이 느껴진다.
당연하다.
남의 마나니까.
제니츠의 마나가 에른의 마나 로드 를 타고 심장 부근으로 올라왔다.
잠시 두].
" O 으.."
- T그' .
제니츠가 놀란 듯 신음을 홀렸다.
"이, 이건!"
"제 말이 맞죠? 1급입니까?"
디르카는 얼굴 가득 떠오른 홍분을
감추지 못했다.
"자네… 일단 좀 진정하게."
제니츠가 한숨을 쉬었다.
그는 에른에게서 손을 떼고 측정한
바를 말했다.
"훌륭한 성취일세. 4급...? 더 노
력하면 금방 3급도 가겠어. 몇 성인 가, 강철의 숨결은?"
"5성에 조금 못 미치는 4성입니 다."
"...천재였군."
이때 제니츠에게 자연스레 떠오르 는 의문.
"그런데 왜 중급반에 있지?"
"테스트 결과가 그렇던데요."
"그건 말이 안 되지. 나도 아카데 미 졸업생일세. 1학년 4급이 중급반 이면 4학년은 전부 오러 유저여야
하고 그랬으면 우리 왕국이 대륙을 정복했겠지."
에른은 준비한 대답을 내놓았다.
"최근에 조금 성취를 봐서요."
"아, 그래서 폐관 수련을… 아무튼 대단하군. 아버님께서도 자랑스러워 하실 걸세."
"그러실까요?"
"아니, 아직 한참 모자라지. 최소 오러는 만들 수 있어야 기대치 충족 일 텐데. 앞으로도 열심히 하게."
두 사람이 이런 대화를 나누는 동 안, 디르카는 불신의 빛을 띠고 있었다.
"4급… 4급이라구요?"
"그렇네."
"말도 안 돼! 그럴 리가 없어!"
"날 못 믿는단 건가?"
제니츠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후작님과의 인연을 생각해서 최대 한 편의를 봐줬더니만… 이건 뭐 막 가자는 건가?"
"아니, 아닙니다. 하지만...
디르카는 한 대 얻어맞은 표정이었다.
그의 머릿속에선 이런 시나리오는 존재하지 않았다.
'에른이 아니었단 말인가? 제니츠 단장 말대로, 비약과 추측이었을 뿐...?'
디르카의 입에서 간절한 외침이 터 져 나왔다.
"죄송합니다! 제가 확인해 봐도 되 겠습니까?"
"이봐... 적당히 하게!"
결국 제니츠가 역정을 냈다.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자네 가 여기 있을 수 있는 것도 다 에른 군의 협조가 있었기 때문이야. 거기다 마나 측정까지 순순히 받아 줬고. 자네 말대로, 에른 군이 정말 그런 일을 저질렀다면 뭐하러 이렇 게까지 협조하지? 앞뒤가 하나도 안 맞잖아!"
'이거 좀 미안한데.'
에른이 해 달라는 대로 다 해 주 는 건, 결백해서가 아니라 그만큼 자신이 있어서였다.
두 사람이 감히 상상도 못 하는 지점.
'에른 스틸가드는 알브레트의 부기 사단장과 감찰 기사단장보다 높은 경지에 올라 있다.'
...는 사실.
에른은 디르카에게 팔을 내밀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확실히 해 두 는 게 좋겠죠. 측정해도 괜찮아요."
디르카는 떨리는 손으로 에른의 손 목을 붙잡았다.
"그럼."
두 번째 숨바꼭질이 시작됐다.
그리 어렵지 않았다.
잘못된 측정을 유도하는 속임수.
심장의 마나를 마나 로드 곳곳에 흩뿌리는 것으로 가능하다.
그러면 측정자는 정상적인 상태가 아닌 쪼그라든 마나 하트를 감지하 게 되고.
'착각하게 되지. 훨씬 낮은 경지라 고.'
물론 측정자도 이 수법을 간과하지
않아서, 마나 로드를 샅샅이 점검하 기에 어지간해선 측정 결과가 잘못 나오는 일은 없었다.
동급 수준에서는.
디르카의 마나가 에른의 마나 로드 를 활보하고 다녔다.
에른은 제니츠에게 했던 것처럼 측 정자의 마나를 피해 도망 다니다 가....
'이 짓도 귀찮네.'
그냥 근처 혈맥으로 보내 버렸다.
이렇게 되면.
'없어! 대체 왜 없는 거지! 어디 있는 거냐… 여분의 마나!'
디르카는 정신없이 마나 로드를 헤 매고 다녔다.
하지만 마나를 찾을 수 없었다.
단 한 줌 조차도!
그는 알지 못했다.
미친 듯이 뒤지는 그 바로 옆 혈 맥에, 1급 수준의 마나가 숨죽이고 있고.
단전으로 내려가면 심장의 마나와 는 비교도 할 수 없는, 100년 내공
이 잠들어 있음을.
어쩔 수 없다.
1계와 무공의 존재를 모르는 1342 호 지구인이라.
아무리 뛰어난 자라도 상식의 틀을 깨기란 어려운 법이다.
"정말이군요...
디르카는 마나를 거두고 고개를 숙 였다.
"...죄송함니다."
집착의 끝은 비참하기만 했다.
그는 참담한 심정으로 인정했다.
"제가 틀렸습니다."
*
"자네가 이해해 주게. 디르카 부단 장도 절박해서 그런 것이니."
"괜찮습니다. 의심을 거두게 됐다 니 다행한 일이죠. 쓸데없는 의심이 었지만."
"자네...
제니츠의 두 눈은 호의로 가득했 다.
"듣던 것과는 아주 다르군?"
"단장님께서도 그렇지 않습니까."
"음, 그건 그렇지. 아무튼 고맙네. 그냥 넘어가 준다니."
그로서는 고마울 수밖에.
디르카의 태도, 그의 요구는 선을 넘었다.
에른이 정식으로 문제 삼는다면 가 문 간의 분쟁으로 비화할 수도 있었다.
그 고래 등 사이에 낀다고 생각하 면....
벌써부터 골치가 아프다.
제니츠가 디르카의 옆구리를 쿡 찔 렀다.
뭐라도 한마디 하라는 듯.
"면목이 없습니다…. 그동안 제가 뭐에 홀렸나 봅니다."
디르카의 눈은 초점을 잃었다.
"약속한 대로, 다시는 귀찮게 하지 않겠습니다. 후작님께도 잘못 짚었 다고 말씀드리고...
"쿤츠, 꼭 찾기를 바랄게요. 잘은 몰 라도 안면은 있는 사인데. 그렇게 사 라졌다고 하니까 마음이 안 좋네요."
애써 걱정하는 얼굴을 만들어 본 다.
속내는 전혀 그렇지 않지만.
"예...
에른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번졌다.
이것으로 쿤츠에 대한 복수가 마무 리되었다.
디르카가 나서서 결백을 입증해 줬 으니 도리안 후작도 의심을 거두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무턱대고 내지른 복수는 아니 었다.
절대 잡히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었고.
자칫하다간 가문을 위기에 빠뜨릴 수도 있었기에, 완벽한 확신이 없었 다면 진행하지 않았을 테다.
그렇다면, 좋아할 일인가?
아니다.
'쿤츠는 장애물로 치면 앞을 가로 막은 통나무 정돈데 뭐.'
그래도 사람 마음이라는 게....
무사히 빠져나왔다는 실감은 어느 덧 고양감으로 변해 전신을 가득 채 웠다.
'종결돼서 나쁠 건 없으니까.'
두 사람과 헤어진 에른은 중급반으 로 향했다.
"에... 에른?!"
교실에 들어서자 드미트리가 벌떡 일어났다.
보름 만의 재회.
이런 반응이 나올 만도 했다.
"오랜만이다."
"너...
옆으로 다가가자마자 드미트리가 말을 쏟아냈다.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가 있어?"
"내가 뭘?"
"말도 없이 폐관에 들어가는 게 어 딨어? 얼마나 걱정한 줄 알아?"
"걱정은. 담임 교관한테 물어보면 바로 아는 건데."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고!"
"누가 그러라고 했나...?"
핀트가 어긋난 대화다.
중급반 수련생들은 의아함을 느꼈다.
에른에게 관심 없는 척하면서도 다 들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는데.
'미리 말을 하고 안 하고가 뭐가 중요해?'
'중위권이 어떻게 폐관에 들어간 건지, 그걸 물어보라고!'
'스틸가드라서 특혜받은 거 아니야?'
'설마... 아카데미가 어떤 곳인데.'
드미트리는 에른의 실력을 안다.
바로 앞에서 똑똑히 봤으니.
특별 수련에 들어갈 자격이 차고도 넘친다는 걸 알아서 묻지 않는 것뿐 이었다.
에른은 반 분위기를 살폈다.
드미트리 외에도 그의 실력을 아는 바란과 바란의 친구들 외에는 모두 의구심 가득한 표정이었다.
그때.
"...에른 스틸가드?"
문가에서 미성이 들려 왔다.
그 목소리에 에른을 곁눈질하던 눈
동자들이 일제히 방향을 바꾸었다.
"어, 카시엔...
드미트리의 입에서 흘러나온 세 글 자 이름.
놀라서인지 평소의 설명충 기질도 나오지 않는데.
에른은 듣기 전부터 누군지 알고 있었다.
'예상보다 빨리 만나는군.'
카시엔 트라우드.
1학년부터 4학년까지 쭉 수석 자리 를 놓치지 않았고 기어코 [카르 숨]
을 가져간 이번 기수의 에이스다.
전생의 에른에게는 존재 자체로 열 등감 촉진제였다.
스틸가드만큼 유명하진 않아도 같 은 작위인 백작가에, 에른에 비해서 도 크게 떨어지지 않는 외모.
'거기다 나랑 비슷한 고]'지. 미소년 스타일...
가장 중요한 검술에선 학년 수석이 라 에른으로선 미칠 지경이었다.
이런 말도 들었다.
"에른, 넌 외모만 보면 딱 내 취향인데… 자꾸 아쉬움이 생긴단 말이 야."
"카시엔이 있잖아. 꿩 대신 닭 같 은 느낌이 들어서. 남들이 보면 카 시엔을 못 가져서 너하고 만나는 줄 로 알 거야. "
"말이 좀 심했나? 미안해. 그래도 사실은 사실인걸. "
이러니 열등감이 안 생길 리 있나.
카시엔은 졸업 후에도 승승장구해
학년 에이스에서 왕실 기사단의 에 이스가 되었고.
에른은 3급에서 더 나아가지 못한 채로, 결국 낙향했다.
그 뒤에 있었던 일은 더 말할 필 요가 없고.
'얘가 날 왜 찾지?'
아직까지 에른은 중급반 수준으로 알려져 있다.
카시엔은 자기보다 약한 놈은 안중 에도 없는 캐릭터.
반까지 찾아온다는 게 이상했다.
에른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내가 에른이 맞긴 하지. 무슨 일 인데?"
카시엔은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내 이름은 카시엔 트라우드. 대련 을 신청하러 왔다."
에른뿐 아니라, 중급반 모두가 벙 찐 얼굴로 변했다.
반대로 에른이 그에게 대련을 신청 했어도 이보다 놀라진 않았을 것이 다.
저거 두들겨 맞고 싶어서 환장했나 보다, 객기 부리네… 정도로 치부하 고 말겠지.
그런데 상급반 1등이 굳이 중급반 중위권에 대련 신청을?
'그런 무의미한 짓을 왜 하냐고!'
다들 똑같은 의문을 떠올렸다.
[75 화]
아카데미의 서열전.
그 존재 이유는.
'이곳에서, 서열은 곧 권력이다.'
높은 서열은 특별 대우를 받는다.
서열이 높아지면 온갖 귀찮은 일을 다 피할 수 있다.
단지 이것뿐이었으면 애들 소꿉장 난에 불과하다고 하겠지만.
서열은 곧 성적.
졸업 성적순으로 국가 요직이 분배 된다.
학생들은 여기에 목숨을 걸었다.
기를 쓰고 등수 하나라도 올리기 위해 구슬땀을 흘린다.
그럴진대.
'카시엔이 머리에 화살을 맞았나? 왜 낮은 서열에 도전을 해?'
'냅둬. 1등의 삶이라는 거야. 검으 로 이를 쑤시건, 방패로 수프를 끓 여 먹건 누가 뭐라 하겠냐.'
'1학년에 대련 상대가 없으면 고학
년으로 월반할 생각을 해야 하는 거 아냐? 왜 중급반엘 와서.'
'아니지. 이번 기수는 이미 쟤가 1 등 확정인데. 위로 올라가면 나이 많은 수련생들 확실히 찍어누를 수 있겠어? 그것도 전원을?'
'...아무래도 어렵겠지.'
'가능하기만 하면 그게 더 큰 명예
겠지만, 어설프게 졸업하느니 O 1 번
기수에서 [카르 숨 ] 따 가는 게 이
득이지.'
'그건 그렇겠다… 그러면, 할 거
없으니까 심심해서 저러는 거란 말
이야?'
'거기까지는 모르겠어.'
이런 속닥임들.
카시엔이 재차 요구했다.
"대련을 하자."
에른의 대답은.
"싫어."
"왜?"
"싫으니까."
"그건 이유가 못 돼."
"갑자기 대련을 왜 하자는 건데?"
"너야말로, 이유도 없으면서?"
세필로 그린 듯한 카시엔의 눈썹이 찌푸려지며 미간으로 모였다.
"대련을 거부하는 건 불가능하다. 학칙이 그래."
"그 학칙이 왜 만들어졌겠어? 상위 권이면 랭킹 관리하지 말고 도전에 응하라고. 하위권에게 주어진 권리 인 거지."
"나에게도 있는 권리다."
"글쎄?"
"뭐, 교관님께 문의해 보면 알겠지." 카시엔이 돌아보자 지르칼이 그 뒤
에 서 있었다.
"참관해 주실 거죠?"
"어, 음...
지르칼은 곤란한 표정이 되었다.
그는 교실로 들어와서 에른에게 귓
속말을 했다.
"이거 거부할 방법이 없습니다."
"왜?"
"말씀하신 취지로 만든 교칙이 맞
지만… 그렇다고 '높은 서열은 낮은 서열의 대련 신청을 거부할 수 없 다'인 건 아니라서요. 특별한 경우 를 제외하곤 받아들여야 합니다."
"교관의 재량으로도 어떻게 안 돼?"
"무리하면 가능은 하겠지만, 가뜩 이나 폐관 수련으로 말들이 나오고 있는데… 너무 티 나지 않을까요?"
"하는 수 없군."
지르칼 방패까지 안 통한다면 어쩔 수 없다.
에른은 카시엔을 보며 고개를 끄덕
였다.
"그래, 하자. 대련. 언제 할까?"
"지금."
"뭐… 그러지. 어차피 오래 걸리지 도 않을 텐데."
에른이 승낙하자 반 전체가 술렁였다.
"미친… 카시엔 트라우드랑 대련을 한다고?"
웅성거림의 정체는 기대감보단 놀 라움과 어이없음에 더 가까웠다.
그런 분위기는 에른과 카시엔, 지 르칼이 교실을 떠난 뒤에도 한동안
지속되었다.
이런 반응이 당연한 것이, 1학년
서열 1위 대 72위라.
보통 대련이 벌어지면 학생들은 환
호하며 뒤따라가지만, 이번에는 뭔
가 달랐다.
"음… 볼 것도 없지 않나. 난 그냥
있을래."
"나도 수업 준비나 해야겠다." 그러나 드미트리는.
"이, 이러고 있을 때가… 친구가 대
련을 하는데. 나라도 응원해 줘야지!"
그 외에도.
바란이 입을 열었다.
".…"가자."
"엥? 뭐하러?"
"그때 바위산에서… 실력 봤잖아."
"봤지. 근데 아무리 그래도 에른이 카시엔을 이기겠어?"
"그러니까 더 가야지! 에른 새끼 두들겨 맞는 거, 얼마나 좋은 구경 거리냐? 자신만만한 낯짝도 오늘까 지야."
그… 그러네?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바란과 친구들도 대련장으로 향했다.
이렇게 되자.
"카시엔 실력이나 보러 가야겠다. 얼마나 천재인지 궁금하긴 해."
"언젠간 붙어봐야 할 상대야. 분석 해야지."
마음이 동한 수련생들이 자리를 털 고 일어났다.
어쨌거나 싸움 구경만큼 재밌는 게 없기도 하다.
아무리 일방적일 게 뻔히 보이더라도.
*
대련장.
에른과 카시엔은 목검을 든 채로 마주 섰다.
학년 서열 1위와의 대련이라.
에른을 지켜보는 수련생들은 하체 가 풀리지 않은 것만 해도 대단한 거라고 생각했다.
입장 바꿔 본다면, 무지 떨릴 것 같은데.
그러다 주저앉기라도 한다면 망신
도 그런 개망신이 없다.
압박감이 느껴질 수밖에 없는 현장 이었다.
카시엔의 대련 소식을 듣고 다른 반 수련생들도 구경하러 왔다.
상급반 학생, 그리고 고학년 몇몇 까지.
대련이 처음은 아니지만, 입학 초기 에 했던 건 내부 랭킹전에 가까워서.
이번이 사실상의 서열전 데뷔 무대!
에른은 태연하기만 했다.
그가 물었다.
"이제 말해줘도 되지 않나, 이러는 이유?"
카시엔이 입을 열었다.
"오늘 아침까지 특별 수련실에 있 었다고 하던데."
"그랬지."
"신입생 중에선 최초라고 하더라."
"그렇겠지."
입학 후 겨우 일주일.
변화된 생활 패턴에 적응하기에도
빠듯한 시간이다.
그런데 에른은 첫 주가 끝나자마자 폐관에 들어갔으니… 역대급 기록이었다.
물론 지르칼과 실비아를 도와준 덕 에 가능했던 거지만, 카시엔이 저간 의 사정을 알 리 없다.
"이해가 안 가. 그게 어떻게 가능 하지? 내 신청은 반려됐는데...
" 아."
에른이 목검을 내렸다.
"너 설마... 최초 타이틀을 뺏겨서
이러는 거냐?"
"헛, 헛소리!"
카시엔이 목소리를 높였다.
"너는 되고 나는 안 되는 이유가 궁금할 뿐이다!"
"궁색하다, 궁색해."
에른의 입가가 쑥 올라갔다.
"특별 수련실 배정은 서열순이 아 니라 잠재력을 보고 주는 거지. 그 걸 모르진 않을 테고?"
"난 벽을 목전에 둔 상태였고 폐관 한 덕분에 넘을 수 있었다. 특별 수 련의 취지가 그거잖아?"
"나도 안다."
"그럼 이해 못 할 게 뭔데? 그냥 그거 아닌가? 난 카시엔이니까. 수 석 입학자 카시엔 트라우드니까. 뭐 든 1등이어야 해… 특별 수련이라고 해서 예외일 수는 없어! 뭐 이런?"
"무, 무슨 그딴소리가!"
카시엔이 주위를 둘러봤다.
제 잘난 맛에 사는 그라도 이 정
도까지는 아니었다.
안타깝게도, 카시엔의 평소 캐릭터 탓에 구경꾼의 반 정도는 그 말을 믿는 것 같았다.
수군거리는 소리에.
"아… 아니야....
카시엔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 모습을 보며, 에른은 고소를 머 금었다.
'이거 실망인데.'
전생에 그는 홀로 고고한 학처럼 보였다.
항상 같은 기수는 범접할 수 없는 성취를 유지했고, 모두가 발아래에 있다는 듯이 행동했다.
빛나는 외모, 근거 있는 프라이드.
그런데 지금 보니.
'카시엔도 그냥 애군.'
살짝 흔든 걸로 격동하는 게, 기사 의 필수 자질인 평정심이 좀, 아니 많이 부족해 보였다.
카시엔이 소리쳤다.
"너만 벽을 맞닥뜨렸다고 생각하지 마라. 나도 마찬가지야!"
"그러냐. 열심히 해서 뛰어넘길 바 란다."
"보자고. 얼마나 늘었는지, 폐관할 자격이 있었는지!"
카시엔이 몸을 날렸다.
목검이 허공을 가르고, 대련이 시 작되었다.
탁! 탁!
타타타탁!
두 사람의 목검이 어지러이 교차했다.
몇 합 겨뤄 보기도 전에, 카시엔의 실력이 파악되었다.
'시시하군.... 그래도, 대단은 하다.'
최근 붙었던 상대… 제이비스, 지 르칼과 비교하면 한참 떨어지고 오 러 유저가 아닌 타이탄만 해도 저 잘난 낯짝을 단번에 뭉개 버릴 것 같다.
그래도, 나이 보정을 거치면 엄청 나기는 했다.
'20대 후반의 나하고 비슷하군.'
십 년이 지나서야 겨우 따라잡을 수 있었던 격차.
이러니 카시엔에게 열등감을 느꼈
던 거지.
그는 진짜 천재다.
1년 뒤엔 오러 유저, 4년 뒤에는 1 급을 따면서 [카르 숨] 졸업을 하 고, 나중에는 특급 기사까지 올라간 것으로 기억한다.
그 뒤론 영웅급에 도전하는 것 같 았는데… 어떻게 됐는진 모른다.
소식이 끊긴 것도 있고 몇 년 안 가 죽기도 해서.
하지만.
'눈높이가 달라지니 받는 느낌도
달라지는군.'
카시엔이 대단하다는 생각은 들지 만, 그냥 그렇구나 하는 정도로 그 쳤다.
평생 목이 빠져라 올려다보기만 했 던 벽이 발아래에 놓여 있는데.
별로 기쁘지가 않았다.
뿌듯함을 느끼기엔, 그 벽이 너무 낮은 탓이다.
고민이 된다.
이거 이기는 건 말이 안 되는데, 어떻게 져 줘야 할지.
'화끈하게 대패? 아니면 아슬아슬?'
고민하는 에른.
"수비는 탄탄하군!"
카시엔의 목검이 급소를 노리며 이 곳저곳 찔러 들어 왔다.
"그런데 언제까지 막기만 할 거냐!"
'웬 평가질?'
후우웅!
목검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살벌 했다.
평가받아야 할 건 내가 아니고 너다.
에른은 몰아치는 카시엔의 공세를 막아 내면서 생각했다.
'역시 그 장인(掌印)은 카시엔 거 였어.'
반 배정 테스트를 받았을 때, 했던 돌벽에 장인 남기기.
그때 눈에 띄는 손자국이 하나 있었다.
뛰어난 마나 출력과 거기에 못 미 치는 컨트롤 능력.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에른이 우뚝 멈췄다.
"뭐야?"
의외로 팽팽히 흐르는 대련 양상에 관중들은 손에 땀을 쥐었다.
그런데 갑자기 에른이 검을 내려 버리니.
"벌써 기권? 이건 아니지!"
"더 해라, 더!"
카시엔도 같은 반응.
"뭐 하자는 거지?"
"...아버지께서는 말씀하셨지."
"경지에 오른 기사는 부드러움으로 강함을 제어한다. 가벼움으로 무거 움을 제압하고, 느림으로 빠름을 압 도한다."
"레, 레바단 백작님?"
무리 속 누군가가 헛바람을 들이켰다.
레바단의 말이라면 귀담아들어야 한다.
그가 짚어 주지 않아도, 수련생들 은 이미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그래도 그렇지, 너무 뻔한 얘기 아니야?"
"저게 가능한 거긴 해?"
"강하고 무겁고 빠르면 그게 더 좋 은 거 아닌가?"
하지만 카시엔만은.
그의 낯빛이 변했다.
"그래서? 또 뭐라고 하셨지?"
"더 말하진 않으셨어."
"대신 몸소 보여주셨지. 이렇게."
에른이 목검을 들어 올렸다.
그의 검이 천천히 카시엔을 향해
나아갔다.
"뭐 하자는 건지."
방금 그 말은 최근 카시엔이 속에 품은 화두이기는 했다.
하지만 에른은 레바단이 아니다.
앵무새도 아니고, 아버지의 말을 옮긴 게 뭐가 어떻단 말인가.
카시엔은 코웃음을 치며 에른의 목 검을 쳐냈다.
툭.
그런데 이상하게도.
타격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목검이 다시 접근해 온다.
여전히 느린 속도로.
한 번 더, 마나를 가득 실어 후려 쳐 봤다.
툭!
카시엔의 눈이 커졌다.
'이, 이건...!'
*
이 대련을 관람한 수련생들은 반으로 돌아가서 침이 튀도록 떠들어 댔다.
"진짜 이상했어. 에른이 레바단 백 작님 얘기를 꺼내면서 휘적휘적 걸 어가는데...
"더 이상한 건 카시엔이었지."
"바로 목검 날리고 후드려 팰 줄 알았지. 근데 몇 번 쳐낸 다음엔 암 것도 안 하고 목석처럼 서 있기만 하더라."
"그런 대련은 태어나서 처음 봤지."
"둘이 짜고 친 거 아니야?"
"아니,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어. 직 접 봤으면 그런 말 못 할걸? 너도 카시엔 표정을 봤어야 하는 건 데...
"그건 뭐였을까?"
가서 본 사람이 승리자다.
교실에 남았던 수련생들은 아쉬워 했다.
"에이 씨. 누가 시간 낭비라고 했어?"
"놓쳐도 그런 좋은 구경을 놓치 냐…. 다음부턴 대련 있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보러 간다."
"근데 마지막에 에른이 뭐라고 했 더라?"
"자격이… 어쩌고 했던 거 같은데?"
"카시엔하고 무승부면 자격은 있는 게 맞네."
[76 화]
에른이 물었다.
"어때? 이래도 내가 자격이 없나?" 카시엔은 한참을 침묵 속에 서 있
었다.
"아니... 아닌 것 같다...
그는 그 말만 하고 다시 입을 다
물었다.
"싸울 의지가 안 보이는군!"
에른이 눈짓하자 지르칼이 얼른 둘
사이로 들어왔다.
"이 대련은 무승부인 것으로 한다."
"무, 무승부?"
"말도 안 돼!"
양쪽이 전투 불능에 빠진 것도 아 닌데 무승부 판정이라니.
수련생들은 반발했으나, 교관의 판 정을 뒤집을 수는 없다.
게다가 카시엔은 넋 놓고 가만히 있고 에른도 몸을 돌린 채라.
대련이 이어질 것 같지는 않았다.
지르칼은 수련생들을 해산시키고 에른에게로 왔다.
"제때 잘 끊었어."
"이거 의도하신 거죠?"
"이렇게 끝내는 게 좋겠더라고."
지르칼이 의아해 했다.
"좀 과하신 거 아닙니까?"
"내가 뭘?"
"저도 겨우 이해할까 말까 하는 기 술입니다. 말씀하신 건."
"그렇겠지. 저걸 다 체득하면 특급
으로 가는 문을 열어둔 거나 마찬가 지니까."
에른이 대련 중에 말한 것은 1급 이상의 깨달음.
시범을 보인 건 현천검법 8성의 묘리 였다.
유능제강, 이유극강의 원리.
타인의 힘을 되돌려 주는 차력타력 과 서푼의 힘으로 천근을 제압하는 사량발천근까지.
물론 맛만 보여줬지만, 카시엔으로 선 기존에 배운 모든 검술 이론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으리라.
"2급을 노리는 애한테 그 윗 단계 를 보여줬으니… 혼란에 빠지고 말 겁니다."
"그러라고 한 거야."
"예?"
"진짜 실마리를 줬다가 오러 유저 라도 되면 곤란하잖아?"
"그, 그건 좀...
에른은 현재 카시엔의 경지에서 평 생을 헤맸고, 끝내 오러를 보지 못 한 채로 죽음을 맞았다.
그래서 누구보다 잘 안다.
3급에서 올라서기 위해 무엇이 필 요한지.
같은 이유로, 어떻게 하면 방해할 수 있는지도 알았다.
카시엔에게 필요한 것은 정교한 마 나 컨트롤.
그러나 에른이 보여준 건 그 윗줄 의 제어와 응용 능력인데.
카시엔에겐 신기루와도 같았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2급으로 올라가기 위해 이걸 쫓다
가는....
'난마처럼 얽힌 심마. 풀어헤쳐 봐 야 남는 건 없다.'
지르칼이 물었다.
"그, 그냥 적당히 져 주실 수도 있 었을 거 같은데…. 실력을 숨길 생 각이라면서요."
"그 많은 수련생 중에 진가를 알아 본 거, 카시엔 밖에 없었어. 그리고."
에른이 입매를 비틀었다.
"그 녀석한텐 지고 싶지 않았거든."
유..2"
"그러게 누가 어거지로 대련하자고 하래? 폐관 못 들어갔다고 심술은."
"뭐... 본인이 자초한 거긴 하지만. 카시엔 성격상 두고두고 귀찮게 할 거 같아서요."
"설마, 그 성격에."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놈이다.
에른이 선물해 준 심마를 해결하기 전까지는 어딘가에 처박혀서 거기에 만 몰두하고 있으리라.
"그럴까요? 아, 그건 그렇고. 감찰 기사단하곤 어떻게 됐습니까?"
"그냥... 잘 해명해서 끝났어."
"그렇군요."
지르칼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는 디르카가 어떤 혐의를 제기했 는지 알고 있다.
게다가 에른이 필라프라는 사실도 알고 있지만.
후작가 장남의 실종에 관여했을 것 이라고 보는 건 너무 나갔다고 생각 했다.
'에이, 설마...
*
수업을 마치고.
에른은 바로 필라프 상회로 향했다.
저학년은 외출에 제약이 있어서 교 관의 승낙을 받아야 하지만, 지르칼 이 있어 이런 문제에서는 자유로웠다.
도착 전에 역용술을 사용, 마차에서 내린 에른은 필라프로 변해 있었다.
"흠...
상회 건물은 무척 낡았다.
만지면 부스러질 것 같은 벽도 그 렇고 그 옆의 창고도 그렇고.
오래되지 않은 게 있다면 새로 바 뀐 간판 정도.
〈필라프 상회〉
다 망해가는 상회를 인수했으니 어 쩔 수 없다.
그래도 주인이 바뀐 뒤론 외관 빼 곤 모든 게 달라졌다.
파리만 날리던 창고는 들고 나는 물자들로 먼지 한 톨 쌓일 새가 없 어졌고, 죽 늘어선 마차에선 일꾼들
이 바삐 짐을 나르고 있었다.
멋진 풍경이다.
저게 다 골드가 되어 주머니로 들 어올 테니까.
"어이구… 나오셨습니까, 상회주님!"
안으로 들어서자 중년 남자가 달려
와서 허리를 90도로 접었다.
그의 이름은 마쿠스.
원래 이곳은〈마쿠스 상히〉였다.
자금난에 허덕여 언제 문을 닫아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였는데.
에른에게 상회를 넘긴 뒤론 빚도 다 갚고, 직원들에게 밀린 월급도 지급할 수 있어서 한시름 놓은 참이었다.
그런 데다.
"별일 없었지, 부회주?"
"예... 물론이죠. 장사가 너무 잘 돼 서 눈코 뜰 새가 없을 지경입니다."
상회에 에른이 항상 상주할 수가 없어서 마쿠스에게 부회주 자리를 맡겼다.
그로서는 엎드려 절이라도 하고 싶
은 결정이었다.
정직하게 살다 보니 이런 행운이 다 찾아오나?
모든 문제가 해결됐을뿐더러 하고 싶은 일도 계속할 수 있으니.
회주에는 비할 수가 없지만, 부회 주만 해도 어딘가.
아니, 이제 필라프 상회는 확실한 자금줄을 움켜쥔 건실한 상회다.
망해가는 상회의 회주보단 끗발 날 리는 부회주가 훨씬 낫다.
'충분히 컨트롤 할 수 있는 인물이
지. 무엇보다 욕심이 적어. 실무는 잘하지만 담이 작아서 계속 잘못된 결정을 내렸어.'
이건 에른의 판단이 아니다.
반백 년의 노하우를 가진 노상인의 눈썰미.
아니, 이제는 그것도 에른에게서 나왔다고 봐야 하겠지.
물론, 마쿠스를 완전히 신뢰하진 않았다.
그래서 만든 통제 장치.
"서기는?"
"안쪽에서 업무 처리 중입니다."
"보고 와야겠군."
에른은 서기실로 가서 노크했다.
"들어오세요."
"좀 어때?"
"필라프 님!"
책상에서 서류와 씨름하는 아름다 운 여성.
에른을 본 실비아의 얼굴 가득 화 색이 돌았다.
그녀뿐 아니라.
"뀨에엥!"
방 한쪽에서 잠들어 있던 사리가 에른의 냄새를 맡고 벌떡 일어났다.
텅 빈 기숙사에 혼자 두기가 뭐해 서 실비아 옆에 붙여 뒀는데.
그나마 실비아하곤 잘 지내는 편인 데도 여전히 이런 의존성을 보인다.
"일은 할 만해?"
"힘들긴 해도 재밌어요."
"너무 과중한 업무를 맡긴 거 아닌 가 모르겠네."
"제가 원해서 하는 건데요."
마쿠스 상회를 선택한 주된 이유는 두 가지다.
가장 큰 이유는, 상회 전체를 큰 비용을 들이지 않고도 온전히 인수 할 수 있을 것 같아서였고.
또 마쿠스를 만나 보니 뒤통수 칠 사람 같지는 않아서였다.
그러나 사람 마음속은 모르는 법.
요직에 믿을 사람을 심어 둬야 안 심이 되는데, 테아로스에 연고가 없 으니....
'실비아가 있어서 다행이었지.'
에른은 보름 동안 틈틈이 그녀에게 장부 보는 법, 기초 회계 등을 가르 쳤고 실비아는 종이가 물을 빨아들이듯 배워 나갔다.
그녀가 숫자를 담당하고 있으니, 마쿠스가 딴맘을 먹는다 해도 쉽게 되지 않을 것이다.
"아무튼, 서기직 맡아줘서 고마워."
"아니에요."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사 리는 계속 에른의 품으로 파고들어 가고 있었다.
"야, 그만 달라붙어. 나갔다 온 지 하루도 안 됐다."
실비아가 푸훗 웃었다.
"그만큼 필라프 님을 좋아한다는 거죠. 사리가."
"일부러 이러는 거 같은데… 나 없 어도 잘 놀고 그러지?"
"그건 그런 거 같기도...
"먹이는?"
"하루 세 번씩 주고 있어요. 아까 도 줬고."
실비아는 책상 서랍을 열어 안에
든 묵철괴를 보여줬다.
'묵철괴로 먹이 바꾼 지도 꽤 됐군.' 슬슬 다음 단계로 넘어가 봐도 되
지 않을까?
마침 실비아가 그 얘기를 꺼냈다.
"참, 공방에서 연락 왔었어요. 완성
됐으니까 가지러 오라고 해서요."
"벌써? 빠르군."
"네. 뒷마당에 뒀어요."
"음?"
"낮에 부회주님이 직접 가지러 가
셨거든요."
"시키지도 않은 일을…. 입안의 혀 처럼 구는군."
"좋으신 분 같아요. 제가 보기에는요."
에른이 씩 웃었다.
"뭐, 그러라고 월급 주는 거긴 하 지. 그럼 수고해."
사리를 데리고 나가자 그 입안의 혀, 마쿠스가 에른을 기다리고 있었다.
손에는 서류철을 든 채로.
"회주님, 결재해 주실 게 있습니다."
"뭐지?"
"그… 신규 채용 건입니다."
"보자."
에른은 서류철을 받아들고 내용을 확인했다.
"짐꾼 15명, 상인 10명, 서기보 3명一 이것도 너무 적어. 두 배로 뽑아."
"예? 너, 너무 많은데요?"
"아니, 그것도 부족해. 거래량은 앞
으로 계속해서 늘어날 거다."
"정말입니까?"
마쿠스로선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상회명을 바꾸며 에른이 물어 온 거래처만 해도 평생 먹고살기에 부 족함이 없다.
문득 떠오르는 가능성은.
"혹시 유곽 말고도 거래처가 더 있 으신...?"
"물론. 지금은 다 소화 못 해서 안 하는 것뿐이다. 마음 같아서는 세 배, 네 배로 늘리고 싶은데 그게 당 장 되진 않으니까."
"허.…"
마쿠스가 입을 떡 벌렸다.
"필라프 상회는 몇 년 내로 테아로 스의 최대상이 될 거다. 자네는 그 런 상회의 부회주고. 신중한 것도 좋지만, 우선 그에 맞는 그릇을 키 워야 할 거야."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오면서 봤는데 건물이 너 무 낡았더군. 보수하게 목수들 부르 고, 창고도 확장해."
"이제 사업 초기인데… 너무 무리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창고야 규모 있게 쓰면 아직은 여유가 있고."
"...내가 뭐라고 했지?"
"그릇… 이요?"
"그래, 그릇. 필라프 상회가 다 쓰 러져 가는 건물을 쓰고 있다면 고객 이 우릴 어떻게 보겠어. 비용 아끼 지 말고 팍팍 써."
"아, 알겠습니다!"
米 *
상회 뒷마당.
거기에는 철제 마차가 덜렁 놓여 있었다.
덮개부터 좌석, 바퀴까지 모든 게 쇠로 만들어진 마차다.
강철은 비싸고 무거워서 나무 등 가볍고 싼 재료로 대신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대체하기 마련인데.
또 전부가 딱딱한 쇠로 되어 있다 면 승차감이 최악이 되기도 한다.
당연히 이런 마차는 존재하지 않지 만, 에른이 특별 주문해 만든 것이다.
"어디 변신으로 재현할 수 있나 볼 까. 사리야... 다 먹어."
"뀨와아앙!"
쇠 마차를 본 사리의 까만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사람으로 치면 과자로 만들어진 마 차를 본 기분이 이럴까?
또한 평소에는 절대 먹으면 안 된 다고 교육받았던 것이라 엄청 흥분 하며 달려들었다.
깡! 까앙!
사리가 마차 곳곳에 송곳니를 박았다.
'그러고 보니 결과 나올 때가 됐는데.' 아무리 사리라도 마차를 다 뜯어 먹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에른은 사리가 내는 오독거리는 소 리를 들으며 차원거래를 시작했다.
붉은빛이 동공을 뒤덮고, 에른의 프로필이 나타났다.
[사용자 ID : [S]UserOOOsss 닉네임 : 에른
종족 : 인간
접속 장소 : 0계, 1342호 지구.
거래 등급 : Level 1
혼의 위상 : 거래소가 공인한 상인.
보유 코인 : 157131]
'어...?'
몇 가지 바뀐 부분이 보였다.
금왕의 투자로 25만 코인까지 치 솟았던 코인이 10만대로 떨어졌고.
무공 경지를 나타내던 혼의 위상은 상인 계열로 바뀌어 있다.
이 말은?
"...이거 된 건가?"
얼떨떨한 기분도 잠시.
메시지가 희소식을 알렸다.
[축하드립니다, 에른 교류자님』
[입점 심사를 통과하셨습니다.]
[이제부터 '제휴 상점' 메뉴를 관리 할 수 있습니다.]
[77 화]
"이게 되네...
에른의 진짜 투자처는 이곳이다.
여기에 비하면 필라프 상회에 쓰는 골드는 코 묻은 돈에 불과하다.
입점 비용으로 10만 코인을 지불.
안타깝게도 여기에는 할인 특전이 적용되지 않았다.
구매가 아닌, 거래소에 송금하는 개 념인 듯.
아무튼간에, 자그마치 100만 골드다.
보유한 자체로 나바로에서 거부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는 금액.
제휴 상점에 천문학적인 비용을 낼 가치가 있나?
멋모르는 교류자가 질문한다면 에른 은 이렇게 답해줄 것이다.
'그야 물론!'
일반 교류자들이 보따리 노점상이라 면 제휴 상점은 번듯한 가게를 낸 것 과도 같다.
우선 판매자 게시판에서의 노출도가
다르고, [거래소] 메뉴의 [판매]에서도 추가 노출된다는 점.
교류자들도 비슷한 값이라면 거래소 가 보증하는 제휴 상점을 선택하곤 한다.
뿐만 아니라 효과가 큰 각종 이벤트 와 프로모션은 대부분 제휴 상점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라.
'용신구나 큰손들이 바보라서 10만 코인을 내고, 갱신 비용도 계속 내는 게 아니지.'
저 금액을 지불하고도 들어오겠다는 교류자들은 쌔고 쌨다.
그래서 입점 심사라는 게 존재했고, 통과율은 10%가 채 되지 못한다고 했다.
물론 에른은 3개 가격 특전으로 경 쟁력이 있는 터라, 노출이 좀 떨어진 다고 해도 알아서 손님들이 찾아왔고.
부족한 노출도도 [1 시간마다 갱신]을 걸어 두면 어느 정도 커버가 됐다.
그렇다는 건.
에른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장점을 노리고 심사를 신청한 게 아니었다.
취약점을 강점으로, 강점이 아닌 것
을 특장점으로 만들어 버리는 게 맥 스급 특전의 힘.
그는 같은 제휴 상점인 천검서고, 죽 산파, 태산보신원이 노리는 부분과는 전혀 다른 지점을 보고 있다.
'고맙다, CM묘암… 보답할 길은 없 지만.'
그의 컨설팅이 없었더라면 0계인인 에른이 1계에 제휴 상점을 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메시지가 말한 대로, 메인 창에 새로 운 카테고리가 생성되었다.
[제휴 상점]
아이콘을 터치하자 관리 메뉴가 나 타났다.
[상점명 변경]
[소개글 변경]
[거래 설정]
[이벤트/프로모션]
[재고 관리]
[매입/판매]
'상점 이름부터 바꿔 볼까. 이거 덕 분에 통과한 거 같긴 하지만… 역시 좀 그래.'
심사를 준비하며 CM묘암과 나눈 대 화.
그러던 중 아이디어가 나왔다.
"에른 님. 이런 말씀 드리기 그렇지 만... 현재로서는 제휴 상점에 들어가 기에 경쟁력이 없다고 봅니다."
"왜지?"
"각 상점들은 특화된 분야를 하나씩
가지고 있습니다. 그 예로 혈마존자는 사술 물품, 천검서고는 압도적인 장서 량, 보금당은 야명주나 묘안석 같은 온갖 희귀한 보석들을 취급하지요."
"내가 자체 컨텐츠가 부족한 건 사 실이지만, 영약 시장에서의 점유율이 있잖아? 큰손들과 겨뤄도 밀리지 않 는데. 나라고 안 될 거 있어?"
"그건 맞지만요, 제휴 상점은 한정된 자리입니다. 누구나 들어가고 싶어 하 구요. 영약에 여섯 자리를 내주는 건 너무 많습니다. 심사에선 단순 매출만 고려하는 게 아니거든요."
"요는, 새로운 분야가 경쟁력이 있다?"
"그러면서 시장성도 있어야 하겠죠."
"어렵네."
"아니면 더 좋은 물품을 팔아서 기 존 제휴 상점을 밀어낼 정도가 되거 나요."
"그게 말처럼 쉽게 될까?"
"그래서 통과율이 낮은 거긴 합니다."
"잠깐, 그럼 이건 어때?"
"어...
괜찮지?"
"괜, 괜찮은 게 아니라 죻은데요? 제 가 보기엔 이거, 가능성이 있어요."
그렇게 만들어진 제휴 상점.
-에른의 무림만물상 : 다양한 1계 물품을 판매합니다. 여기서 영약 사 고, 저기서 내공 사고, 무기 사러 갔 다가, 무공서 사러 가고… 왔다 갔다 하기 귀찮으셨죠?
무림만물상에서 한 방에 해결하세요.
특화 상점은 이미 1계에 넘쳐난다.
에른은 생산자가 아닌 철저한 중계자.
뭔 수를 써도 그들이 파는 것보다 좋은 물품을 팔수는 없으니.
'...그렇다면 다양함을 장점으로 내 세운다.'
그러면서도 물품의 질은 제휴 상점 수준으로!
발상의 전환.
이 전략은 주효했다.
심사 통과가 증명해 준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무림만물상은 너무했다.
심사자에게 어필하기 위해 오버해 봤는데, 뭔가 과한 느낌?
'잡화점 정도로 흐}자. 무슨 만물상이야.'
상점명을 고치고 버튼을 누르는데.
파직!
붉은 화면이 요동치고 에른의 눈빛 또한 흔들렸다.
귀에서는 경고음이 들렸다.
[30일 두], 변경을 신청할 수 있습니다.]
[상점명 변경이 승인되지 않았습니
다.]
소개글은 어떤가 보니 이것도 마찬 가지였다.
'이 종목으로 허가받았으면 계속 이 걸로 팔라는 얘기군.'
뭐, 상관없다.
무림만물상이란 이름이 좀 오그라들 뿐이지, 어차피 온갖 물품을 다 팔 생 각이었던 건 맞으니까.
에른은 [재고 관리]로 들어가 판매 목록에 가진 물건을 쏟아 넣었다.
팔다 남은 인급, 지급 영약과.
판매 중인 천급 영약.
보유한 금, 남는 무공서 등등.
몇 알 안 남은 죽활단은 언제 쓰게 될지 몰라 옮기지 않았다.
그런데 겨우 이걸로 만물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전혀.'
일단은 무공서부터 채워 놓도록 하자.
에른은 석현을 호출했다.
최근엔 부를 일이 좀 있었기 때문에, 빠릿빠릿했다.
-석현 : 10분 안 지났죠?
-에른 : 응, 5분.
-석현 : 다행이군요…. 어쩐 일로?
-에른 : 요즘 어때?
-석현 : 넵! 도와주신 덕분에. 내공
도 조금씩 사 모으고 있구요.
-석현 : 적어도 마누라한테 맞아 죽 을 걱정은 안 해도 될 거 같습니다, 하하핫.
_에른 : ???
—석현 : ....
분위기가 싸늘해진 걸 느꼈는지.
석현이 조심스레 물었다.
-석현 : ...제가 무슨 실수라도?
-에른 : 네 개인사 따위는 궁금하지 않아. 장사 말이다.
-석현 : 아, 예… 배분금 나올 정도 는 됩니다. 금방 700코인 모일 거 같 아요.
-에른 : 한 달이 다 돼 가는데. 아 직도 700코인이 안 됐다고?
-석현 : 어… 그게 그러니까..….
-에른 : 무공 되찾겠다고 뻘짓하고 다니는가 본데.
-석현 : 아… 아닙니다! 그런 거 아 니구요. 요즘 서고 보안이 강화돼서요.
-에른 : 그래? 그럼 어쩔 수 없네.
-에른 : 안정적인 거래처 하나 터 주려고 했는데.
-석현 : 거, 거래처? 안정적?!
천검서고의 사서실.
진생 몰래 차원거래 중이던 현진석 이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이전의 무공을 다 회복했더라면 공 중제비라도 돌았을지 모른다.
안정적 거래처.
가문에 단비와도 같은 말이었다.
호구는 한 번 쭉 빨아먹으면 그걸로 끝.
어수룩한 놈 잡아서 눈탱이 치면 그 보다 달달할 수 없긴 하다만.
호구는 속았다는 걸 깨닫고 나면, 바 로 고객에서 이탈하고 만다.
이런 방식 때문에 매번 신규 고객을 모집해야 하는 그로선 귀가 번쩍 뜨 일 수밖에.
-석현 : 어, 어딘가요? 그 거래처?
-에른 : 알아서 뭐 하게? 보안 강화
돼서 힘들다며?
-석현 : 그거야, 노력해서 뚫으면 되지요. 제가 누굽니까. 천검성에 목 숨 건 도박을 매번 하고도 아직까지 살아 있는....
-에른 : 시끄러. 그래서, 된다는 거 지?
-석현 : 물량은, 얼마나?
-에른 :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만, 우선은 매달 3000코인 정도.
석현이 군침을 삼켰다.
에른에게 80%를 떼 준다 해도 600 코인이 남는다.
이걸로 2년 내공을 살 수 있으니, 1 년만 바짝 하면 과거 내공의 절반 정 도는 되찾을 수 있다.
-석현 : 그래서 거래처가 어딥니까?
-에른 : 제휴 상점.
-석현 : 괜찮네요. 돈 떼먹힐 일도 없을 거고. 상점 이름은요?
-에른 : 에른의 무림만물상.
-석현 : 예?
석현이 눈을 비볐다.
-석현 : 뭐라구요?
-에른 : 닥쳐라. 웃으면 죽는다.
-석현 : ....
웬 만물상?
우습기는 했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건.
-석현 : ...제휴 상점을 여셨어요?
-에른 : 그래.
-석현 : 심사 엄청 빡센 걸로 아는데.
-에른 : 그렇더라고.
-석현 : 하긴, 보통 분이 아니시니 까요....
이러면 생각을 달리해야 한다.
에른에게 공급해 준다는 말은, 이윤을 많이 남길 수 없다는 것과 같은 뜻.
누구 안전이라고 장난질을 친단 말 인가.
그러면 같은 3000코인을 받더라도 넘겨줘야 할 비급의 수가 늘어난다는 건데.
-에른 : 주판알 굴리지 마라.
-석현 : 그, 그런 거 아닙니다.
-에른 : 아니긴, 다 보이는데.
—석현 : ....
-에른 : 생각해 보}. 비급이 남아서 문제지 모자라서 문제야? 거래하러 온 교류자 중에서 호구 골라내고, 공 사도 치고… 여기에 드는 시간을 생
각하면. 나한테 재깍재깍 파는 게 더 나을걸?
-석현 : 그… 렇긴 하죠. 요즘 가장 부족한 게 시간이라.... 무공 수련도 해야 해서요.
-에른 : 공급가는 평균가에서 10% 할인된 가격으로 하자.
-석현 : 그, 그건 좀.
-에른 : 대신, 호출 시간 10분을 30 분으로 늘려 주지.
석현은 마지못해 수락했다.
10분 동안 칼 휘두르고 차원거래서 확인하고, 한참 운기하다 내공 거두고 확인하고… 이런 번거로움에 지쳐 있 던 터라.
'이러면 무공서 부분은 해결됐고. 석 현 이거, 은근 도움이 되는데.'
에른이 미소를 지었다.
천검성의 독문무공까지 판매할 수는 없겠지만, 그가 있어 천검서고의 다양 함을 그대로 담아올 수 있다.
무림만물상이 지향하는 바다.
"규에엥!"
석현과 협상을 진행하는 동안, 사리 는 어느새 쇠 마차를 전부 뱃속으로 집어넣고 있었다.
에른은 잠깐 붉은빛을 끄고 사리를 위아래로 훑었다.
"대단한데…? 위장에 아공간이라도 있는 건가?"
끄덕끄덕.
포식한 사리가 만족한 듯 고개를 끄 덕였다.
"진짜로? 음, 그래야 말이 되긴 하지. 그럼, 방금 먹은 걸로 변신해 볼래?"
사리는 잠재값 상급 이상의 불가살 이다.
얼마 전까지는 최상급은 아니고 상 급은 넘는 정도로 여겨 왔는데, 첫 변 신에 성공한 이후로는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
"캬오오오!"
사리가 울부짖으며 재주를 넘었다.
퍼엉
박 터지는 소리와 함께 붉은 마차가 눈앞에 나타났다.
"이야.…"
에른은 감탄하며 마차 곳곳을 어루 만졌다.
쇠로 된 거라면 무엇이든.
섭취한 대상의 구조와 성질을 파악 해 변신으로 완벽히 재현해 낸다.
그것이 최상급 불가살이.
"마법검 변신이 완벽하지 못했던 건 아직 덜 자란 상태라서 그랬던 거군."
저택에서 첫 변신에 성공한 이후로.
사리는 식사 시간마다 먹이와 같은 형상으로 변신해 댔다.
마치 이전의 실패를 만회히려는 듯이.
물론 그것들은 묵철괴 같은 단순한 구조였기에 가능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마차처럼 복잡한 물체라면 어떨까 해서 시도해 본 건데.
몇 번을 확인해 봐도 색깔 외엔 아 까의 마차와 다른 점을 찾아볼 수 없 었다.
결국은 괴수황제 그랑뷔트가 맞았던 셈이다.
'상최급이라는 건 없었군.'
사리는, 최상급 불가살이가 맞다.
퍼엉!
변신을 푼 사리가 달려왔다.
에른은 사리를 품에 안고 쓰다듬었다.
"잘했어, 사리야."
"뀨잉!"
흡족한 듯한 울음소리.
그러나 이 정도로 만족하긴 이르다.
"최상급이라면, 더 어려운 난이도의 변신도 가능하겠지. 해 볼래?"
"뀨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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