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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투스는 좁은 방의 벽에 자신의 도끼를 기대어 놓고, 부하와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도넬란은 그 도끼가 무서웠다.

심지어 꿈에도 나올 정도였다.

사령관의 도끼에는 강렬하고 불길한 오러가 숨막힐 듯한 기세로 일렁였다.

도끼는 웨이브를 막아내던 도중 갑자기 깨어났다.

공기 중에서 마나가 요동치더니 오러가 불길처럼 일어난 것이다.

훈련병들은 마치 악마의 아가리에 목을 들이민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런 느낌은 그날부터 지금까지 계속 이어졌다.

유일한 위안은 몬스터들이 훈련병들만큼이나 도끼의 오러를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었다.

도끼가 깨어난 이후로 놈들은 요새에 대한 공격을 멈췄다.

레기온 쪽으로는 접근하지 않은 채, 서로 싸우는 쪽을 선택했다.

덕분에 전선의 병사들은 안도했다.

비록 사신의 숨결을 계속해서 느끼고 있기는 하지만···

적어도 더 이상 싸우지 않아도 됐기 때문이다.

지난 2주 동안 끊임없이 밀려드는 몬스터들을 상대로 싸우면서 몇 명의 병사들이 목숨을 잃었다.

처음 웨이브를 겪는 젊은 군단병들에게는 결코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다.

수천 마리의 몬스터들이 마치 해일처럼 몰려왔다.

전장은 폭력과 죽음의 끝없는 바다였다.

어떤 스킬을 사용하든 조준은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빗나가는 일이 불가능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전투는 병사들의 팔이 납처럼 무거워지고, 피로로 시야가 흐려질 때까지 몇 시간이나 멈추지 않고 이어졌다.

병사들은 담요 위에 시체처럼 쓰러졌다가 다음날 눈을 뜨면 다시 싸움을 계속했다.

하루하루가 지옥 그 자체였다.

저 도끼가 깨어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도넬란은 도끼가 깨어났을 때 장교들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기억했다.

무시무시한 오러를 느낀 몬스터들이 즉시 물러났지만, 장교들의 표정은 놀람과 걱정으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사령관은 도끼를 놓아둔 천막으로 달려가 그 물건을 어깨에 걸치고 나왔다.

눈빛에는 수심이 가득한 모습이었다.

마법사 훈련을 받고 있는 도넬란은 사령관을 비롯한 장교들이 왜 그런 표정을 하는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마치 수채 구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마나의 흐름을 느꼈기 때문이다.

도끼는 자신을 '깨운' 마나를 게걸스럽게 흡수했다.

도넬란이 한 번도 들어보지도 못했고 가능하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는, 무기가 잠들거나 깨어난다는 개념 자체는 차치하더라도···

높은 분들의 태도가 심상치 않았던 이유는 그게 이렇게 높은 층에서 일어나서는 안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마나 밀도가 이 정도로 높아져서 도끼가 스스로 깨어나는 일은 사령관을 비롯한 장교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태가 분명했다.

그래서 도넬란은 또다른 걱정에 사로잡혔다.

마나 밀도가 왜 이렇게 높은 걸까?

왜 계속 더 높아지고 있는 걸까?

도넬란은 마나 멀미를 느끼고 있었다.

지속적으로 짙은 마나에 노출되는 일이 인간에게는 자연스럽지 않았다.

인간은 지상의 희박한 에너지 농도에 적합한 형태로 진화한 생물이기 때문이다.

지금 도넬란이 경험하는 마나 밀도는 너무 높았고, 그래서 멀미가 느껴졌다.

다른 모든 훈련병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대로는 마나 중독이 일어날 터였다.

제때 치료하지 못하면 죽음에 이르는 증상이다.

도넬란은 그 사실을 알았다.

아니,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왜 더 깊이 내려간다는 걸까?

도넬란이 그런 걱정을 곱씹는 동안, 티투스는 추적 전문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확실한가, 리세스투스?"

티투스의 물음에 군단병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 던전 센스에 따르면 그렇습니다, 사령관님. 바로 이 방에서 수많은 개미들, 그리고 다수의 다른 몬스터들이 죽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지난 한 주 동안은 여기서 죽은 개미가 없습니다. 그때 모두 죽었거나, 아니면 어딘가 다른 곳으로 둥지를 옮겼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여왕은? 그만한 크기의 몬스터가 죽었다면 자네가 알 수 있을 텐데?"

리세스투스가 눈을 감고 자신의 특수 클래스 스킬을 사용했다.

"모르겠습니다, 사령관님. 여왕은 여기서 다른 개미들과 함께 죽었을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 사이 너무 많은 몬스터들이 죽어서 특정할 수가 없습니다."

"알겠네, 수고했네."

티투스는 부하의 어깨를 두드린 뒤 가서 쉬라고 지시했다.

몬스터가 죽은 뒤 남아 있는 에너지를 감지할 수 있는 던전 관측자들은 레기온에게 있어서 엄청나게 유용한 인력이었다.

하지만 던전 관측자의 고유한 스킬들은 정신력을 빠르게 소진시켰다.

그래서 이 방을 조사한 리세스투스는 잠시 휴식을 취할 필요가 있었다.

티투스는 작은 방 안을 둘러봤다.

바로 개미 둥지가 있었던 공간이었다.

여왕은 원래 더 깊은 층에서 태어났겠지만...

도둑맞은 아이들을 찾아 여기까지 왔거나, 아니면 첫 번째 둥지가 위험에 처하자 높은 층으로 피신했을 터였다.

어쨌든 간신히 개미의 둥지를 찾아냈는데, 놈들은 이미 모두 죽었거나 아니면 어딘가로 달아난 뒤였다.

만약 달아났다면···

티투스는 놈들이 어디로 갔을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이제 자신의 손을 떠난 문제였다.

티투스는 레기온이 다음으로 취할 행동을 고민하며 기지개를 폈다.

자신의 도끼 아니마 시티오가 깨어났기 때문에, 티투스는 더 이상 약한 몬스터들과 계속 싸울 필요가 없었다.

도끼는 끊임없이 자신의 굶주림을 드러내며 몬스터들을 위협했다.

이제 어지간한 몬스터들은 그 오러 가까이 접근하지도 못했다.

티투스가 갑자기 동작을 멈추더니 귀를 기울였다.

뭔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티투스는 한 손을 들어 방 안에 있는 군단병들의 주의를 모은 뒤 경고했다.

"조심하게!"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사령관을 쳐다보던 군단병들도 곧 이변을 알아차렸다.

마치 공기 그 자체의 밀도가 높아진 듯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아래쪽으로 이어진 통로에서 우르릉 소리가 들렸다.

낮은 포효에 지진이 난 것처럼 땅이 흔들리자, 몇몇 훈련병들이 무릎을 꿇고 쓰러졌다.

많은 병사들이 넘어지지 않기 위해 손으로 벽을 짚어야 했다.

떨리는 으르렁 소리가 잦아들자, 이번에는 거센 바람이 통로를 지나며 찢어지는 소리를 냈다.

무시무시한 돌풍까지 지나간 뒤 모든 몬스터가 싸움을 멈춘 듯 주위의 던전 안이 고요해졌다.

2주 동안의 끊임없는 소란 끝에 찾아온 갑작스러운 정적은 기괴하기 이를 데 없었다.

티투스는 어두운 표정으로 생각에 잠긴 채 자신의 도끼를 쳐다봤다.

겉으로는 침착해 보였지만, 잠시 후 방 안으로 뛰어들어온 아우릴리아는 사령관의 눈빛이 전투에 대한 갈망으로 타오르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사령관님."

아우릴리아가 속삭이듯 말했다.

"방금··· 제가 생각하는 그게 맞습니까?"

티투스가 천천히 자신의 도끼로 걸어가서 집어 들며 말했다.

"그래, 가라로쉬··· 놈이 올라오고 있네."

아우릴리아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사령관을 응시했다.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사령관님. 우리가 먼저 칩니까?"

티투스가 고개를 저었다.

"내려가는 길에 그 늙은 악어를 마주친다면 기꺼이 팔을 하나 더 잘라 주겠지만, 우리에게는 임무가 있네."

티투스가 돌아서서 대대장을 마주봤다.

"지상의 사정에 대한 자네의 우려는 알지만, 저 위의 상황이 얼마나 나빠지든지 우리가 아래쪽의 방비를 강화하지 않으면 거기서 열 배는 더 나빠질 걸세. 자네도 알다시피, 우리는 내려가야 하네."

아우릴리아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인 뒤, 병력을 정비하기 위해 방을 나갔다.

도넬란은 사방을 옥죄던 압박감을 떨쳐내고 사령관을 향해 다가갔다.

훈련병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행동이지만, 지금은 공포와 당황이 도넬란의 이성을 마비시킨 상태였다.

"사령관님! 정말로 우리는··· 더 깊은 던전으로 내려가게 됩니까?"

도넬란이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

사령관은 훈련병의 돌출 행동에 놀란 듯했지만, 나무라지 않고 대답했다.

"자네 이름이 도넬란이라고 했나? 우수한 훈련병이라고 들었네. 맞아, 우리는 아직 한참 더 내려가야 하네."

"하지만 그럼 마나 중독은··· 그리고 웨이브는 어쩝니까? 웨이브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마나 밀도가 아직도 높아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상으로 가야 합니다! 우리가 돕지 않으면 도시 전체가 파괴될 겁니다! 제 가족과 친구들이 위험합니다!

사령관님께서는 마나 밀도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으시는 것 같지만, 저희는요? 저희 모두 높은 마나 밀도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저희를 이렇게 죽게 내버려두실 수는 없습니다, 사령관님!"

도넬란은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로 횡설수설했다.

그러자 티투스가 한 손으로 도넬란의 어깨를 붙잡았다.

"진정하게, 훈련병! 진정해! 우린 자네들이 마나 중독으로 죽게 내버려두지 않을 거야, 알겠나? 자네도 나나 장교들, 그리고 정식 군단병들이 모두 괜찮다는 걸 알고 있겠지. 사령부로 내려가면 자네들도 괜찮아질 걸세. 하지만 서둘러야 하네. 자네 말처럼 훈련병들이 마나 중독으로 목숨을 잃을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으니까.

내 말 잘 듣게. 앞으로 며칠이면 우리는 페리클라수스의 계단에 도착할 걸세. 아래로 20 킬로미터까지 이어져 있는 계단이지. 그 계단을 내려가서 도시에 도착하면 자네들 모두 말처럼 건강해질 테니 걱정하지 말게."

도넬란이 멍한 얼굴로 되물었다.

"도시라고 하셨습니까?"

"직접 보면 알게 될 걸세. 우리는 지상에 남아 있는 사람들을 위해 2주의 시간을 벌어줬네. 이제부터는 지상에서 알아서 대처해야 하네. 그 커다란 악어를 막아낼 수 없다면··· 달아나야 하겠지만. 도시에 도착하면 자네 가족들의 소식을 들을 수 있을 걸세. 거기 가면 방법이 있으니까."

도넬란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티투스가 그 등을 두드렸다.

"조금만 더 참게, 훈련병. 이제 곧 안전해질 테니. 운이 좋다면 내려가는 길에 이 도끼가 에인션트 몬스터의 살점을 베어내는 모습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지."

새로운 터전

여왕은 정말 잘 견디고 있었다.

내가 마나 감지를 사용해서 중간중간 살피지 않았다면, 여왕의 코어에서 에너지가 새어 나가고 있는 줄도 몰랐을 정도였다.

여왕 개미의 코어가 발하던 눈부신 빛은 이미 반쯤 줄어든 상태였다.

닷새째 이어진 강행군으로 둥지 전체가 지쳤고, 휴식이 간절히 필요했다.

우리가 군대 개미처럼 유랑하는 개미 종족이 아니라는 사실이 안타까울 정도였다.

물론 내가 군대 개미로 태어나서 둥지 밖에 홀로 떨어졌다면 지금까지 살아 있지도 못할 터였다.

우선 군대 개미는 완전히 장님일 뿐 아니라···

그렇게 유랑하는 이유 자체가 머릿수를 엄청나게 늘린 다음 주위의 모든 걸 남김없이 먹어 치우는 무시무시한 습성 때문이었다.

계속해서 새로운 장소로 이동하지 않으면 먹이를 구할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 둥지가 앞으로 명심해야 할 교훈 한 가지를 얻을 수 있다.

바로 주위를 황무지로 만들지 않으려면, 먹는 양을 제어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뭐, 우리 둥지가 그런 걱정을 할 만큼 커지려면 아직 한참 먼 이야기지만···

개미도 꿈은 꿀 수 있잖아!

이 정도면 겸허한 야망이지!

내가 바라는 건 오직 우리 가족의 부흥 뿐이었다.

아직은 미약하지만, 의지를 가지고 열심히 굴을 파다 보면 언젠가는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우리는 마침내 새로운 땅에 도착했다.

몬스터가 우글거리고 숲이 무성한 축복받은 대지였다.

사방에서 전투가 기다리고 있을 테고...

그건 단 한 가지를 의미했다.

바이오매스!

지금 둥지는 굶주린 상태였다.

우리에게는 식량이 필요했다.

우리는 성난 악마처럼 리리아를 가로질러 야생의 대지에 도착했다.

그동안 내내 유심히 뒤를 살폈지만 무척 놀랍게도 추격해 오는 인간은 하나도 없었다.

내심 우리의 그랜드 테프트 코어를 응징하기 위한 추격대가 언제 덤벼들지 모른다는 걱정을 하고 있던 나는 경계를 넘어서자 긴장을 풀었다.

설마 인간들이 여기까지 쫓아올 리는 없었다, 그렇지 않은가?

물론 일개미들은 그런 일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곧장 몬스터의 흔적을 찾아 눈에 들어오는 모든 바위와 수풀에 대고 더듬이를 흔들 뿐이었다.

우리와 마주친 지상의 몬스터들은 곧장 달아나거나, 아니면 거꾸로 공격해 왔다.

달아나는 놈들은 움직이지 못할 때까지 산성 용액 세례를 받았다.

덤벼드는 놈들은 그대로 분해되어 둥지에 양식을 제공했다.

나 역시 굶주림을 달래기 위해 그런 몬스터들을 먹었다.

새로운 바이오매스의 원천 덕에 보너스 포인트는 얻었지만, 그게 전부였다.

지상의 몬스터들은 너무 약해서 나와 타이니의 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변이를 하려면 한시라도 빨리 던전으로 내려가야 했다!

하지만 던전과 가까운 장소를 찾기 전에는 둥지를 만들 수가 없었다.

여왕 개미의 생존을 위해서는 마나 밀도가 높은 던전의 공기가 반드시 필요했다.

우리 모두의 어머니가 언제 쓰러질지 모른다는 사실에 두려움을 느낀 개미들은 던전 입구를 찾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였다.

목까지 차오른 불안감을 억누르며 이틀 동안 절박한 수색을 계속한 끝에...

마침내 찾던 장소를 발견했다!

틀림없이 던전과 이어진, 내가 처음 보는 개 머리의 이족 보행 몬스터들이 차지하고 있는 좁은 균열이었다.

우리는 압도적인 머릿수, 약간의 중력 마법, 타이니의 무자비한 주먹을 앞세워 개 머리 몬스터들을 모두 제거한 뒤 즉시 땅굴을 파기 시작했다.

천 마리가 넘는 개미들이 얼굴을 땅에 처박고 작업에 몰두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던전까지 이어지는 통로를 완성할 수 있었다.

그러는 동안 지상에서는 개미 언덕이 빠르게 지어졌다.

여왕이 지하의 던전에 자리를 잡고 호위들에게 둘러싸인 채 차분히 체력을 회복하기 시작하자, 일개미들은 지상의 언덕 안에 알과 애벌레를 위한 보육실을 만들었다.

드디어 집이 생겼군!

타이니와 나는 바이브로부터 아주 약간의 도움을 받으며 개미 언덕의 입구 근처에 우리가 쓸 방을 만들었다.

몬스터 코어를 벽 속에 안전하게 보관한 뒤, 우리 넷은 마침내 벼르던 휴식을 취했다.

"우리는 왜 쉬는 거예요?"

"조용히 해, 바이브."

···

흐압!

잘 쉬었다!

이제 새로운 하루를 시작해 볼까!

할 일이 너무 많아서 뭐부터 시작해야 할지 결정하기도 어려웠다.

일단 제일 중요한 것부터···

나는 타이니에게 다가가서 녀석이 깨어날 때까지 다리로 쿡쿡 찔렀다.

[일어나, 덩치! 배가 터질 때까지 먹으러 갈 시간이야!]

먹는다는 소리를 듣자 타이니가 벌떡 일어났다.

그 눈빛이 사납게 이글거리고 있었다.

거의 1주일 넘게 배불리 먹지 못한 뒤라, 아마 그 어느 때보다 배가 고플 터였다.

더구나 오늘은 지상이 아니라 새로 발견한 던전 안을 돌아다닐 예정이었다.

그건 곧 운이 좋으면 전투다운 전투를 할 상대를 만날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물론 가능성은 희박했다.

나는 인간 여왕을 심문하면서 몬스터 지대 아래의 던전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다.

여왕의 말에 따르면 이 지역의 던전은 끝없는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지하 통로였다.

가장 큰 통로에서 뻗어 나온 작은 가지들이 서로 교차하는 복잡한 구조였다.

인간들의 주된 사냥터는 이런 통로들이 아니라 개활지라고 부르는 장소였다.

땅 밑에 존재하는 불가능한 크기의 공동을 의미하는 개활지에는 항상 스폰 지점들과 기이한 식물들, 희소한 광물과 강력한 몬스터가 가득했다.

리리아 왕국 지하의 던전에도 "숲 개활지"가 있었다.

여왕의 말에 따르면 애초에 도시를 그곳에 건설한 이유가 개활지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고, 거기서 나는 자원을 독점하기 위해서였다.

심지어 숲 개활지는 다른 개활지에 비해 작은 편이지만 지상과 가까이 위치한 것이 장점이라고 했다.

타이니와 나는 바이브와 크리니스를 데리고 아래쪽 통로에서 졸고 있는 여왕과 그 호위병들을 지나쳐 더 깊은 던전으로 들어갔다.

바이브는 그러는 동안에도 지칠 줄 모르고 질문을 퍼부어서 나를 괴롭혔다.

새로운 던전이라!

나도 모르게 기대감으로 가슴이 부풀어올랐다.

이 세계에 환생한 뒤로, 새로운 장소를 탐사하고, 모르던 사실들을 배우는 일은 언제나 내게 커다란 기쁨을 안겨줬다.

이번에는 또 뭘 찾게 될까!

통로를 따라 더 깊이 내려가자, 던전의 시원한 불빛이 우리를 반겼다.

마치 고향에 돌아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번 던전 탐험 그리고 앞으로 며칠 간의 목표는, 다음 진화로 인한 페널티에 대비해서 최대한 많은 바이오매스를 섭취해 놓는 거였다.

진화를 할 때마다 낮은 진화 단계의 몬스터로부터 얻을 수 있는 바이오매스의 양이 점점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한 번 더 진화를 하면 나는···

티어 4 몬스터가 되는 셈이다!

홀로 던전을 헤매던 갓 부화한 개미가 이렇게 성장하다니, 감개무량한 기분이었다.

나 뿐만 아니라 타이니 역시 바이오매스를 많이 섭취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녀석에게는 다음 진화까지 레벨을 올리기 위한 경험치도 필요했다.

여왕의 방을 통과하면서 대화를 통해 확인하자, 타이니는 아직 레벨 20이 되지 못한 상태였다.

당분간은 타이니가 모든 경험치를 흡수하게 해야 할 것 같았다.

크리니스와 바이브도 데리고 가는 이유는 둘에게 바이오매스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이브 또한 진화를 위해 경험치도 획득해야 했다.

태어날 때부터 코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바이브는 첫 번째 진화부터 코어를 형성할 필요 없이 바로 성체 개미로 자라날 수 있었다.

나는 바이브도 진화 전에 특별 코어를 만들기를 바랐다.

내가 첫 번째 진화에서 놓쳤던 특수 선택지가 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진화 당시에 나는 특별 코어나 추가 선택지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

어쨌든, 여기서 어떤 몬스터를 마주칠지 기대됐다.

던전의 새로운 부분이니 새로운 몬스터가 나왔으면 좋겠다.

솔직히 이제 지네와 싸우는 건 지긋지긋했다.

내가 태어난 그 순간부터 사방이 지네투성이였다!

더 이상 꽁무니에 가시가 달린 거대한 지네들과는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그런 놈들을 먹는 건 더 싫었고 말이다!

지네가 한 마리라도 나오면 난 그냥 도로 올라가버릴지도 몰라···

우리가 내려온 통로는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았다.

아무래도 수많은 곁가지들 중 하나인 것 같았다.

나는 벽 안에서 몬스터의 존재를 느꼈다.

아직 웨이브가 끝나지 않아서 그런 듯했다.

하지만 왜 놈들이 벽을 뚫고 나오지 않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웨이브가 시작된 직후 우리가 마주쳤던 놈들보다 성장 속도가 느린 듯했다.

던전 안에서는 몬스터가 생겨나고 십여 분이면 바로 튀어나왔는데···

마치 기름에 도넛을 튀길 때처럼 금방 만들어졌다.

마나 감지 스킬을 활성화하자, 벽 속에 잠들어 있는 몬스터들이 더 분명하게 느껴졌다.

여기 몬스터들이 더 강하거나 더 복잡한가?

그래서 던전이 생성하려면 더 긴 시간이 필요한 걸까?

아니면 웨이브가 끝나 가서 마나가 부족한 탓에 몬스터가 그때처럼 빠르게 생성되지 못하나?

나는 앞다리로 살짝 머리를 긁었다.

이쪽 통로는 일개미들이 여왕의 방을 만들면서 이미 한 차례 쓸어버린 뒤였다.

우리의 주린 배를 채우려면 더 깊이 내려가야 했다.

우리는 타이니를 선두로 통로를 따라 내려가면서, 적당한 사냥감이 없는지 계속 주위를 살폈다.

그렇게 5분쯤 지나자 뭔가가 달라진 걸 눈치챌 수 있었다.

여기···

좀 초록색인데?

여태까지 내가 경험한 던전과 달리, 벽에 진짜 넝쿨이 자라고 있었다.

저기 저건 설마 꽃인가?

언제부터 던전에 이런 알록달록한 꽃이 핀 거야?

문제의 꽃은 벽의 바위틈으로 반쯤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전혀 위험해 보이지 않는 모습이었다.

붉은 꽃잎을 보니 봄이 성큼 다가왔다는 생각이···

나는 꽃이나 보면서 감탄하려고 여기까지 내려온 게 아니야!

식량을 구하러 왔다고!

하지만 그런 내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통로를 따라 들어갈수록 초목이 더욱 무성해졌다.

점점 넓어지는 통로를 따라서 끝까지 내려가니 던전보다는 열대우림에 더 가까워 보이는 풍경이 나타났다.

언제라도 노래하는 곰이나 타잔이 튀어나올 듯한 분위기였다.

하지만 노래하는 곰은 커녕 몬스터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넝쿨이 통로를 온통 뒤덮었고, 천장에서 자란 이끼는 눈 앞까지 늘어져 있었다.

통로의 벽은 수풀에 가려져 거의 보이지도 않았다.

사방을 가득 메운 거대한 꽃들과 양치 식물들이 산들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렸다.

잠깐···

여기는 지하잖아.

바람이 불 리가 없는데!

내가 그런 생각을 했을 때에는 이미 수많은 식물과 넝쿨들이 꿈틀대며 움직이고 있었다.

놈들은 날카로운 이빨이 늘어선 주둥이를 벌리고 우리를 위협했다.

젠장.

["식물들을 조심해, 놈들은 몬스터야!"]

내가 그렇게 말하기도 전에, 타이니는 이미 신나게 울부짖으며 앞으로 나아가서···

식물 한··· 마리? 의··· 목? 을 붙잡았다.

그리고 커다란 주먹을 연속해서 날렸다.

무시무시한 주먹에 가격당한 식물 몬스터의··· 얼굴? 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주위의 넝쿨들이 채찍처럼 날아와서 나를 때리는가 하면, 날카로운 잎사귀로 베려고도 했다.

이런 놈들에게는 불 마법이 아주 잘 먹힐 텐데, 미리 배워 놓지 못해서 안타깝군!

지금은 턱으로 만족해야겠지.

*깨물어 가르기!*

내 생명력을 주입하자 빛나는 턱이 만들어졌다.

물어 깨뜨리기를 사용하면 폭이 넓고 녹슨 톱처럼 생긴 에너지 턱이 나타나서, 마치 바이스처럼 다물어지며 적을 분쇄하고 압착했다.

깨물어 뚫기를 업그레이드한 깨물어 가르기는 좀 더 관통력이 높은 형태의, 길고 뾰족한 가시가 달린 칼날 같은 에너지 턱을 만들었다.

에너지 턱은 나를 향해 덤벼드는 넝쿨을 잘라버리고 그 몸통에 커다란 구멍을 뚫었다.

지금은 얼굴에서 1미터 정도 길이까지 늘어날 뿐이지만, 스킬 레벨이 오르면 에너지 턱이 더 커질 뿐 아니라 위력도 강해질 터였다.

물어 깨뜨리기의 레벨을 올렸을 때 그랬으니, 이 스킬도 마찬가지겠지?

토막난 넝쿨과 잘린 잎사귀가 우수수 떨어졌다.

나는 새로 얻은 또 하나의 스킬인 질주를 사용해보기로 했다.

히얍!

[질주: 짧은 거리를 빠르게 이동할 수 있지만 체력 소모가 늘어난다.]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빠른, 폭발적인 속도로 통로를 달렸다.

머리 위에 타고 있던 바이브가 갑작스런 질주에 신이 나서 깔깔거렸고, 크리니스는 촉수를 뻗어서 나를 꼭 붙들었다.

세상에!

스킬 레벨이 1에 불과한데도 최고 속도가 거의 30%는 늘어났다!

그만큼 체력이 빠르게 줄어들기는 했지만, 그래도 인상적인 스킬이었다.

나는 넝쿨들을 헤치고 가장 가까이 있는 식물의 본체를 향해 다가갔다.

넝쿨들이 나를 때렸지만, 갑각으로 어렵지 않게 튕겨냈다.

머리 위로 거대한···

어째서인지 몰라도 화나 보이는 식물이 주둥이를 크게 벌린 채 나를 굽어봤다.

나를 통째로 삼킬 셈인가?

어림없지!

*물어 깨뜨리기!*

나는 턱으로 식물의 줄기를 물었다.

채소를 좀 다듬어 볼까!

채식

식물의 줄기를 턱으로 자르자, 꼭대기의 거대한 꽃이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놈은 죽기 직전까지도 우스꽝스러울 만큼 거대한 주둥이를 벌린 채 나를 삼키려고 애썼다.

[레벨 6 플로스 플라메를 처치했습니다.]

[경험치를 얻었습니다.]

음하하!

동물의 왕국을 재패하고 나서, 이제 식물계로부터 바이오매스를 뜯어낼 차례로군!

통로 안에서는 열 마리도 넘는 식물 몬스터들이 가지 각색의 방법으로 이 싸움에 참여하고 있었다.

몇몇 식물들은 넝쿨로 사냥감을 자르고 감아서 동굴처럼 커다란 입으로 가져가려 했고, 나머지는 또다른 방법으로 공격을 시도했다.

그때 저 뒤쪽에 다른 몬스터들과 전혀 다르게 생긴 식물 하나가 눈에 띄었다.

둥글 납작한 받침 위에 기다란 관 모양의 꽃이 얹혀 있는 모양인데, 길쭉한 꽃은 마치 주위의 움직임을 좇는 것처럼 받침 위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그러다 그 꽃이 갑자기 나를 향해 액체를 발사했다!

점프!

나는 여섯 개의 다리로 힘껏 뛰어올라 가까스로 액체를 피했다.

어쩐지 익숙한 공격이었다.

내가 이미 쓰러뜨린 식물을 덮친 액체는 그 몸뚱이를 빠르게 부식시켰다.

강력한 산성 용액이었다!

빌어먹을 꽃이 또다시 나를 조준했다.

이크!

질주!

["다들 꽉 잡아!"]

나는 등에 태운 꼬마들에게 외친 뒤 다리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달렸다.

"이예에에에!"

바이브가 앞다리 두 개로 내 갑각에 매달린 채 낄낄거렸다.

나머지 다리들은 허공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꽉 잡으랬더니 이 멍청이가!

다른 승객인 크리니스 역시 몇 개의 촉수를 뒤로 뻗어서 바람에 흩날리게 두고 있었다.

적어도 크리니스는 원래 나를 붙들고 있던 촉수들을 놓지 않을 정도의 상식은 있는 모양이었다···

빨리 이 녀석들이 자라서 내 등에 탈 수 없게 되어야 할 텐데···

얼마 안 남았으니 조금만 더 참자.

관 모양의 꽃은 어떻게 아는 건지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나를 정확히 조준해서 산성 용액을 몇 차례 더 발사했다.

나는 지그재그로 움직여 산성 용액을 피하며 놈에게 접근했다.

턱을 벌린 채 거리를 좁히자, 나를 향한 놈의 두려움과 경계심이 느껴지는 듯했다.

*깨물어 가르기!*

나는 내 진짜 턱 대신 에너지 턱만 사용해서, 식물의 불룩한 받침을 가차없이 깨물었다.

예상했던 대로, 에너지 턱이 식물의 부드러운 살을 가르자 마자 그 상처로 산성 용액이 쏟아져 나왔다.

몬스터는 산성 액체를 줄줄 흘리며 술에 취한 사람처럼 몸을 이리저리 휘청거렸다.

하지만 아직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건 아니었다.

놈은 지근 거리에서 나를 향해 산성 용액을 한 차례 더 발사했다.

마치 "망할 고깃덩이 같으니! 이거나 먹어라!" 하고 소리치는 듯했다.

하지만 나는 이미 거리를 벌리는 중이었다.

산성 용액은 이전처럼 액체 줄기로 발사되는 대신, 힘없이 아래로 쏟아졌다.

내가 뚫어 놓은 구멍 때문에 압력이 줄어들어 주무기를 잃어버린 셈이다.

구헤헤헤.

나는 지나치게 신이 나 있는 두 꼬마를 등에 태운 채 이런 식으로 동굴 안을 달리며, 식물 몬스터들의 잎사귀를 자르고 넝쿨을 끊고 약한 부분에 구멍을 냈다.

한편 타이니는 맨손으로 식물의 줄기를 갈갈이 찢는가 하면, 심지어 커다란 주둥이에 팔을 우겨 넣고 내장을 끄집어 내는 광란의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꼭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는 거야, 타이니?

그냥 얼굴에 주먹 몇 방 날리면 될 텐데, 굳이 입으로 내장을 꺼내다니···

앞으로 두고두고 생각이 날 것 같은 장면이잖아.

우리는 오래 걸리지 않아서 통로를 정리했다.

나는 대부분의 경험치를 타이니에게 양보했고, 바이브도 한두 마리 식물의 숨통을 끊어서 레벨을 올리도록 했다.

이제 포식할 시간이다!

환생한 이후로는 내내 고기와 물컹거리는 내장만 먹고 살았다.

이제 좀 새로운 메뉴를 시도할 때도 됐지.

예를 들어 신선한 샐러드나, 식이섬유 같은···

나는 커다란 입이 달린 달린 꽃들부터 시식했다.

흐으음···

질기고, 거칠고, 섬유질이 풍부해서···

마치 밧줄을 먹는 기분이네.

그리고 오호, 내장은 반대로 아주 물컹하고···

역겹잖아.

거의 지네를 먹는 것만큼 별로였다.

제기랄!

다리가 달린 고기 파이라거나···

입에서 치킨을 토해내는 몬스터가 있어도 좋잖아?

대체 빌어먹을 던전 안에 맛이 좋은 몬스터가 있기는 할까?

성에 갔을 때 타이니한테 보물 창고 말고 주방도 털라고 시켰어야 했는데···

하지만 타이니, 바이브, 크리니스는 맛이 괜찮은지 신나게 바이오매스를 삼키고 있었다.

나보다 몸집이 훨씬 작은 크리니스가 입은 어떻게 나보다 더 큰 건지 여전히 수수께끼였다···

뭐, 그럴 수도 있지.

[새로운 바이오매스의 원천을 섭취했습니다: 플로스 플라메, 1 바이오매스를 얻었습니다.]

[플로스 플라메의 기초 정보가 잠금 해제되었습니다.]

[플로스 플라메: 굶주린 꽃, 식물계의 기본형 몬스터인 굶주린 꽃은 열 감지로 적의 위치를 파악해, 날카로운 덩굴로 공격한 다음 입으로 끌고 와서 섭취합니다.]

[새로운 바이오매스의 원천을 섭취했습니다: 아키둠 올람, 1 바이오매스를 얻었습니다.]

[아키둠 올람의 기초 정보가 잠금 해제되었습니다.]

[아키둠 올람: 산성 항아리, 항아리 모양의 식물 몬스터로, 강력한 산성 용액을 발사하여 적들을 제거합니다. 처치한 적의 시체를 섭취하기 위해 이동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바이오매스의 원천을 섭취했습니다: 비네아 베스티아, 1 바이오매스를 획득했습니다.]

[비네아 베스티아의 기초 정보가 잠금 해제되었습니다.]

[비네아 베스티아: 덩굴 야수. 덩굴 야수는 식물과 동물의 흥미로운 교배 종으로, 몸통이 없는 대신 덩굴 전체에 주요 장기들이 골고루 분포해 있습니다. 급소가 없기 때문에 상대하기 까다로울 수 있지만, 주요 장기를 가지고 있는 덩굴을 찾아낸다면 쉽게 처치할 수 있습니다]

···

물론 타이니는 별 생각 없이 적이 움직임을 멈출 때까지 벽에 붙어 있는 덩굴을 무작정 잡아 뜯었겠지만···

"레벨이 얼마나 올랐어, 바이브?"

내가 바이오매스에 얼굴을 처박고 있는 꼬마 개미에게 물었다.

사실 나도 마찬가지로 얼굴을 처박고 먹는 중이지만···

어차피 우리는 대화를 할 때 입이 필요하지 않았다.

바이브가 바이오매스를 계속 먹으면서 내 쪽으로 더듬이를 흔들었다.

"목소리가 바이브는 이제 레벨 4라고 했어요! 이제 나도 강해진 건가요?"

"어, 아니. 전혀."

"우우!"

"하지만 곧 강해질 기회가 찾아올 거야! 레벨 5가 되면 더 강한 몬스터로 진화할 수 있거든."

"이예!"

"하지만 진화하지 말고 기다려야 돼, 알았지? 그 전에 코어를 강화해서 한층 더 강하게 진화해야 하니까!"

바이브가 잠시 내 말을 곱씹었다.

"알았어요! 그건 그렇고 페로몬 분비선은 벌써 +5까지 올렸는데, 이제 바이오매스를 어디다 쓸까요?"

나는 여전히 식사를 계속하며, 더듬이로 어깨를 으쓱하는 동작에 해당하는 신호를 보냈다.

"어디든 원하는 부위에 사용하면 돼. 최대한 빨리 모든 부위를 +5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만 기억하고 뭐든 마음에 드는 변이를 선택해."

짧은 대화를 나눈 뒤 바이브는 한동안 조용했다.

정말이지 드문 일이었다.

아마 변이 메뉴를 보면서 선택지를 고르는 모양이었다.

나는 바이브를 유심히 살피며, 변이로 인한 가려움증에 괴로워하기를 기다렸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쳇!

내가 얻은 바이오매스는 총 네 개였다.

그 중 셋은 새로운 원천을 섭취해서 얻은 보너스 포인트였고, 나머지 하나는 먹다 만 식사의 효과였다.

굳이 이 나약한 식물들로 배를 가득 채우고 싶지는 않았다.

내게는 더 강력하고 진화한 먹이감이 필요했다.

물론 싸울 필요가 없는 크리니스와 바이브는 지금 최대한 배를 채우고, 나중에 또 먹으면 되겠지만···

그럼 슬슬 좀 더 깊이 들어가 볼까.

우리는 가능한 더 넓은 길을 따라서 던전 더 깊숙이 들어갔다.

중간에 작은 곁가지 통로들이 수도 없이 많았지만 모두 지나쳤다.

인간 여왕의 말에 따르면, 깊은 던전으로 더 빨리 내려가거나 개활지를 찾기 위해서는 큰 통로를 따라가야 했다.

통로의 규모가 클수록 더 좋다고 했다.

마주치는 몬스터들과 일일이 전투를 하며 시간을 낭비하기 싫었던 나는, 타이니를 앞세워 길을 막아서는 다양한 식물들을 뚫고 나갔다.

타이니는 지치는 기색도 없이 주먹을 휘두르며 점점 더 기괴해지는 식물들을 갈갈이 찢어버렸다.

식물형 몬스터로 가득한 던전을 탐험하니 정말 색다른 기분이 들었다.

차가운 바위와 거무튀튀한 흙, 짐승과 곤충형 몬스터만 보다가 이렇게 식물이 우거진 환경을 마주하니 거의 신선할 지경이었다.

식물이 살기 위해서는 햇빛이 필요하다는 일반적인 상식과는 어긋나지만···

던전의 식물들은 다른 몬스터와 마찬가지로 바이오매스를 섭취하니 광합성이 굳이 필요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광합성도 안 하는 놈들이 이파리는 왜 이렇게 많이 달려 있는 거야?

갖가지 식물들을 헤치며 한 시간 정도 더 구불구불한 통로를 따라 이동하자, 마침내 진화를 한 번 정도 했을 법한 몬스터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입이 달린 더 커다란 꽃들, 뿌리를 마치 다리처럼 사용해서 덤벼드는 식물들, 심지어 기괴한 갈대처럼 생긴 몬스터가 우리를 향해 물 마법을 사용해서 강력한 물 대포를 쏘기도 했다.

하지만 타이니의 주먹 앞에 모두 나가 떨어졌고, 물 마법을 사용하던 몬스터는 코어를 내놓기도 했다.

나는 틈틈이 마나 감지를 활성한 채로 벽을 관찰했다.

벽 안에는 분명히 몬스터들이 자라고 있었다.

때때로 다 자란 식물 몬스터들이 벽을 뚫고 나와서 우리를 공격하기도 했다.

의아한 부분은 식물형 몬스터들이 서로를 공격하는 모습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뭔가 다른 생물들이 이 통로로 들어오면 잡아먹고 살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계속해서 사용한 덕분에 내 마나 감지 스킬의 레벨은 5까지 올랐다.

레벨이 오를 때마다 마나가 느껴지는 범위가 넓어지고 감도도 예민해졌다.

마침내 우리는 수풀이 우거진 넓은 공동을 발견했다.

커다란 식물형 몬스터들이 벽을 가득 메웠고, 좀 더 활동적인 다른 생물들이 사냥감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개중에는 아주 흉악해 보이는 놈들도 좀 있었다.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았다.

나는 빠르게 터널 지도를 확인했다.

우리는 원래 계획대로 새로운 둥지 근처의 지하에 도달한 상태였다.

두 시간 동안 던전 안을 헤맸지만, 거리로 따지면 불과 1킬로미터를 이동한 셈이었다.

어쨌든···

여기다.

[좋아! 타이니, 여기가 이번 식사 장소다. 배는 다 꺼졌지?]

타이니가 몬스터들을 쳐다보며 고개를 빠르게 끄덕였다.

누가 보면 며칠 굶은 줄 알겠네···

[타이니 먹을 준비됐다!]

[그럼 가서 먹어!]

타이니가 무시무시한 포효를 지르더니, 두 팔을 들어올린 채 앞으로 뛰었다.

그리고 착지하며 엄청난 기세로 주먹을 내리쳤다!

저렇게 식물 하나가 또 섬유질이 되는군···

이제 나도 좀 싸워볼까!

한동안 타이니가 손쉽게 길을 뚫는 모습만 구경하느라 지루해진 참이었다.

나는 턱에 중력 마나를 주입한 뒤, 공동 반대쪽에 있는 짙은 보라색의 커다란 꽃을 끌어당겼다.

휙!

···이 아닌가?

벽에서 당겨진 꽃은 분명히 괴로워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수많은 뿌리로 흙과 바위를 단단히 붙잡고 버티는 중이었다.

심지어 그걸로는 충분치 않자 넝쿨을 뻗어서 가까이 있는 바위 기둥을 휘감고 끌려오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나는 턱에 중력 에너지를 주입하는 걸 멈추고 그 식물을 놔줬다.

식물들은 땅을 단단히 붙잡고 끌려오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이지···

그럼 뭔가 다른 방법을 시도해봐야겠군.

나는 재빨리 머리 속으로 중력 화살 주문을 준비했다.

예전에 비해 훨씬 빨라진 속도로 마나 줄기들을 조종해서 복잡한 패턴을 만들 수 있었다.

시간이 날 때마다 마나 형성 스킬을 연습한 덕분에, 기본적인 주문들에는 점점 더 익숙해지고 있었다.

그동안 중력 화살 주문을 만들다가 실패해서 처음부터 다시 했던 적이 몇 번이던가?

셀 수도 없을 정도였다!

그래도 연습량은 나를 배신하지 않았다.

여전히 마나를 조작하려면 온 정신을 집중해야 하지만, 그간의 훈련 덕분에 마나를 좀 더 본능적으로 다룰 수 있게 됐다.

예전에는 주문을 사용하려면 1분 정도 걸렸지만 이제는 6초만에 완성할 수 있었다!

중력 화살!

나는 벽에 붙어있던 보라색 꽃을 향해 중력 화살을 발사한 뒤, 실험의 결과를 흥미진진하게 지켜봤다.

그동안 내 중력 마법에 어느 정도 저항할 수 있는 몬스터가 있을지 늘 궁금했다.

당연하지만 식물은 회피에 그리 유리한 구조가 아니다 보니 중력 화살은 쉽사리 명중했다.

이미 벽에서 반쯤 뽑힌 상태였던 보라색 꽃이 자신을 동굴 바닥으로 잡아당기는 강력한 힘을 감지했다.

식물 몬스터는 다시 한번 말그대로 벽을 파고 들었다.

놈은 뿌리와 넝쿨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벽에 매달렸다.

만약 식물도 땀을 흘릴 수 있다면 주위가 이미 수중 동굴이 되었을 터였다.

그래도 꽃은 계속 벽에 붙어 있었다.

잎사귀와 꽃잎이 기진맥진한 듯 늘어졌지만, 어쩐지 내 주문에 버티고 있는 걸 뿌듯해 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좋아!

그럼 좀 더 본격적으로 나가볼까.

나는 그동안 계속 강력한 마나 스킬에 대해 고민해 왔다.

과연 위력적인 폭발을 날리는 게 이 스킬의 전부일까?

스킬 설명을 보면 마나를 압축하는 용도라고 써 있는데···

압축된 마나를 일반 마나처럼 사용할 수는 없을까?

시험해 볼 시간이다!

나는 다시 한 번 빠르게 중력 화살을 만들었다.

중력 마나로 이루어진 복잡한 3차원 구조물이 내 안에서 빛나기 시작했다.

어려운 부분은 지금부터였다.

나는 천천히 중력 분비선에서 더 많은 마나를 끌어냈다.

짙은 보라색 에너지가 내 의도에 따라 구조물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단순히 구조물 안에 에너지를 채워 넣지 않았다.

대신 에너지를 압축하기 시작했다.

나는 이미 구조물을 가득 채운 마나 위에 더 많은 마나를 꾹꾹 눌러 담으며, 최대한 많은 에너지를 압축시켰다.

그리고 정신력을 총동원해서 요동치는 에너지를 간신히 다스렸다.

그러기 위해서 턱을 악물고 두 개의 뇌를 최대치로 가동해야 했다.

이 주문은 말 그대로 내 몸 속에서 형성되고 있었다.

만약 잘못해서 터지기라도 하면···

그건 생각하지 말자.

신중하게, 나는 계속해서 마나를 구조물 안으로 압축해 넣었다.

시간이 지나자 밀도 높은 에너지로 꽉 찬 구조물이 터질 듯이 팽창했다.

천천히!

서둘다가 구조물이 폭발하면 내 몸도 터질지 몰랐다.

공동 반대편, 40미터 떨어진 위치에 있는 보라색 꽃은 조금 전의 주문에서 서서히 회복하고 있었다.

내가 새로운 주문을 시험하려고 준비하는 줄은 꿈에도 모르겠지.

그래 푹 쉬어라···

일단 주문이 준비되면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두고 보자고!

내가 주문을 완성할 수 있다면 말이지만···

이 주문이 통할지도 확신할 수 없다 보니, 정신적인 부담이 두 배였다.

나는 모든 정신력을 동원해서 마나를 다루는 동시에 구조물이 폭발하지 않도록 다스렸다.

천천히···

신중하게···

압축!

됐다!

마침내 압축 마나로 채운 주문을 완성했다!

불안정한 모습으로 요동치는 구조물을 보면서 나는 몸을 떨었다.

조금만 실수했다면 구조물을 통제할 수 없었을 터였다.

뜸을 들일 여유가 없었다.

나는 재빨리 꽃을 겨냥하고 마법을 발사했다.

중력 화살이 공기를 가르며 날아갔다.

좀더 짙은 보라색이라는 점 말고는 여느 때의 중력 화살과 다를 바가 없어 보이는데···

화살이 꽃에 명중하자, 마법이 효력을 발휘했다.

식물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눈치챈 듯 다시 뿌리로 벽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힘이 놈을 잡아당겼다.

우드드드드득!

꽃은 1초만에 벽에서 뜯겨져 나왔다.

놈의 덩굴과 뿌리를 마구 흔들며 저항했지만, 붙잡고 있던 바위까지 뽑혔다!

그리고 식물과 함께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무자비한 중력에 짓눌린 꽃은 마치 거인에게 밟힌 듯 처참한 꼴이 되었다.

와, 너무 잘 먹히잖아.

이거 쓸 만한데!

바이오매스로 향하는 계단

[레벨 13 베네눔 플로스 칼리고를 처치했습니다.]

···

진짜?

그 주문이 식물 몬스터를 벽에서 뜯어내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짓눌러 죽일 만큼 강력했다고?

'강력한 마나' 장난이 아니잖아!

아무래도 마나를 압축해서 주문을 발동하면 위력이 엄청나게 상승하는 모양이다.

만약 중력 창이나···

혹은 중력장 주문을 그런 식으로 사용하면 어떻게 될까?!

생각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지만 아직 내 실력이 부족했다.

방금 중력 화살 주문의 발동에도 1분이 넘게... 거의 중력 폭탄을 준비할 때만큼 시간이 걸렸다.

그래도 꾸준히 연습하면 좀 더 빠르게 압축 마나로 주문을 사용할 수 있게 되겠지.

···

결국 또 연습인가.

내가 스스로 사용한 주문의 위력에 감탄하는 사이, 타이니는 온몸에 산성 용액이며 유독성으로 보이는 연기를 뒤집어쓴 채로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무척 즐거워 보였다.

온몸에 상처가 늘어가도 타이니는 전혀 위축되는 기색 없이 우렁차게 포효하며, 전기가 일렁이는 주먹을 마구 휘둘렀다.

싸움에 대한 끝없는 갈증!

그리고 무모한 전투 방식을 즐기는 유인원이라니···

우주 최강의 전투 민족인가?!

어쨌든 가서 좀 도와줘야겠군.

기다려, 타이니!

질주!

"이예에에에!"

···머리 위에서 이상한 소리 지르지 마!

전투에 집중하기 어렵잖아!

[질주 스킬이 레벨 2가 되었습니다.]

이예에에에!

···

왜, 뭐.

스킬 레벨이 오르는 건 신날 수밖에 없잖아!

나는 재빨리 달려가서 타이니가 벌이고 있는 치열한 싸움에 가세했다.

지금 우리가 상대하는 식물 몬스터들은 아까 마주쳤던 놈들보다 훨씬 더 위협적이었다.

보라색 꽃들은 아무래도 독성이 있을 듯한 꽃가루나 가스를 내뿜었다.

물론 직접 확인해보고 싶은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놈들이 나를 조준할 때마다 질주를 사용해서 피했다.

멀리서 우리를 공격하는 놈들을 확인한 나는 놈들에게 옳게 된 원거리 공격을 보여주기로 결심하고 꽁무니를 그쪽으로 향했다.

푸슝! 푸슝! 푸슝!

내가 연달아 발사한 산성 용액은 곧바로 식물들에게 엉겨 붙어 놈들의 섬유질을 녹였다.

맛이 어떠냐 이··· 꽃 같은 놈들아!

여섯 발을 쏘자 산성 용액이 거의 동났지만, 덕분에 독을 뿜는 꽃들의 원거리 공격을 효과적으로 봉쇄할 수 있었다.

그때 갑자기 수많은 채찍으로 동시에 얻어맞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대체 뭐지?!

겹눈으로 살피자 바닥에서 시작해 벽을 타고 올라간 넝쿨들이 갑자기 살아 움직이며 신나게 나를 공격하고 있었다.

채찍처럼 날아드는 속도가 너무 빨라서 흐릿한 잔상처럼 보일 정도였다!

제기랄 아프잖아!

극도로 단단한 내 다이아몬드 갑각이 충격의 대부분을 흡수한 덕분에, HP는 겨우 손톱만큼 줄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연신 느껴지는 통증은 나를 충분히 열 받게 만들었다.

이 멍청한 샐러드 거리들이!

돌아서서 새로운 적과 마주한 나는 놈이 아까 싸웠던 넝쿨과 좀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넝쿨 하나하나가 더 두껍고 움직임도 빨랐을 뿐 아니라, 거미줄처럼 얽힌 넝쿨들 사이에 두껍게 뭉쳐 있는 덩어리가 간간이 눈에 띄었다.

오호라.

진화한 넝쿨 야수인가?

좋아!

모처럼 제대로 바이오매스를 얻을 수 있겠군!

나는 넝쿨 채찍을 이리저리 피하면서 중력 화살을 만들어 발사했다.

여기저기 보이는 넝쿨 덩어리들이 과연 약점인지 알아보기 위해, 일부러 그 중 하나를 겨냥했다.

놀랍게도 식물 몬스터는 몇 개의 넝쿨을 움직여서 내 주문이 덩어리에 닿지 못하게 막았다!

흥미로운데···

덩어리 대신 중력 화살을 맞은 넝쿨들은 중력이 잡아당기는 힘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에 짓눌렸다.

하지만 넝쿨의 나머지 부분은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중력이 주문에 직접 닿은 넝쿨들만 잡아당기고 있었다.

흐음···

아직도 십여 가닥의 넝쿨들이 어지럽게 춤추며 나를 공격하는 중이었다.

심지어 바이브도 이리저리 움직이며 넝쿨을 피해야 했다.

당연하지만 나는 전도유망한 꼬마 개미가 내 머리 위에서 으깨지는 사태를 바라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좀 더 진지하게 싸움에 임해야 할 것 같았다.

질주!

나는 턱을 크게 벌린 채 앞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나를 노리고 날아드는 넝쿨들을 턱으로 물어서 끊어버렸다.

팟! 팟!

마치 숙련된 정원사처럼 턱으로 가위질을 하며 계속 전진했다.

팟! 팟! 팟!

나는 에너지 턱으로 날아드는 넝쿨을 연신 잘라냈다.

그리고 마침내 넝쿨이 뭉친 덩어리들 중 하나에 가까이 다가갔다.

혹시 모르니, 거리를 둔 채 에너지 턱으로 공격했다.

*물어서 깨뜨리기!*

콰직!

에너지 턱이 뭉쳐 있는 넝쿨 덩어리를 그대로 으깨버렸다.

그러자 거기 연결돼 있던 여러 개의 넝쿨들이 한꺼번에 힘을 잃고 바닥에 떨어졌다.

···흥미롭군.

아마 이 덩어리들이 여러 개의 넝쿨을 움직이는 모양이었다.

이 몬스터는 엄청난 수의 넝쿨들을 사방으로 뻗고 있으니 이런 방식이 아니라면 말단까지 빠르게 움직이기 어렵겠지.

나는 계속해서 날아드는 넝쿨을 잘라내며 덩어리를 하나씩 없앴다.

한참을 그렇게 반복하자 마침내 모든 넝쿨이 움직임을 멈췄다.

[레벨 8 비네아 트라메스를 처치했습니다.]

드디어!

나는 기진맥진한 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고급 물기 스킬을 계속해서 사용하느라 체력이 바닥난 상태였다.

이 넝쿨 몬스터는 나보다 훨씬 약하지만 죽이기가 극도로 어려운 놈이었다.

덕분에 스킬 레벨이 오르기는 했네.

타이니는 어쩌고 있지?

고개를 돌리자 타이니는 한 손에 뿌리째 뽑힌 식물을 들고 다른 손으로 주먹을 날리는 중이었다.

녀석의 주위로는 죽은 몬스터들의 시체가 무슨 농산물 직판장처럼 쌓여 있었다.

좀 더 자세히 보자 타이니가 들고 있는 식물도 이미 숨이 끊어진 상태였다.

타이니에게 놈을 처치했다는 시스템 메시지가 떴을 텐데···

왜 계속 때리는 거지···

[그거 죽은 것 같은데, 타이니.]

타이니가 나를 돌아보더니 죽은 식물을 한 차례 더 때렸다.

[짜증나.]

타이니가 투덜거렸다.

[독 때문에?]

내가 물었지만, 타이니는 그저 투덜거릴 뿐이었다.

[몸은 괜찮아?]

치료가 필요한 걸까?

[괜찮아, 내가 고쳐.]

타이니가 대답했다.

잘됐군.

아마 뭔가 자가 치유 능력을 가진 기관이 생긴 모양이었다.

잘 샀어, 타이니!

타이니가 몬스터들을 싹 정리한 터라, 우리는 자리를 잡고 바이오매스를 먹기 시작했다.

얌냠냠.

네 마리의 몬스터가 섬유질로 배를 채우는 소리가 던전의 통로 안에 울려 퍼졌다.

나는 걷기 어려울 만큼 배가 부를 때까지 멈추지 않고 식사를 계속했다.

움직일 때마다 부풀어오른 복부가 땅에 끌렸다.

타이니도 비슷한 상태라서, 배가 터질 듯한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다.

나는 식물 몬스터들로부터 10개의 바이오매스를 얻고, 새로운 원천을 섭취한 보너스로 세 개를 더 획득했다!

마침내 유의미한 식사를 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다.

물론 여기서 멈출 생각은 아니었다.

나는 귀찮아 하는 타이니를 데리고 통로 벽을 파서, 대각선으로 살짝 위를 향하는 작은 방을 하나 만들었다.

우리 넷이 들어갈 만큼 충분한 공간을 확보한 다음 입구를 막고 소화를 시킬 겸 식후 낮잠을 청했다.

···

후아!

몇 시간 뒤 나는 의욕이 충만한 상태로 깨어났다.

바이브와 크리니스는 여전히 내 등 위에 잠들어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바이브가 크리니스를 베개로 쓰고 있었다.

나는 방을 만들기 전에 우리가 쉬는 동안 마나 줄기가 얼마나 자랄지 가늠해 봤었다.

식물 몬스터를 잔뜩 먹고 배가 불러서 잠을 청했다가, 자는 동안 머리맡에서 생겨난 식물 몬스터에게 잡아 먹히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원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바이오매스가 잔뜩 쌓였지만, 아직 그걸 사용하고 싶지는 않았다.

최대한 많은 바이오매스를 모아서 지상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말하자면 진화 전의 기나긴 만찬인 셈이다.

브레이크 없는 식탐 열차!

그리고 내 펫들에게도 바이오매스를 잔뜩 먹여야 했다.

타이니도 곧 진화할 테니 나만큼 많은 바이오매스가 필요할 테고···

크리니스도 최대한 많이 먹고 빨리 자라야 했다.

바이브는 이미 순조롭게 성장하고 있었다.

이번 사냥이 끝나면 아마 바이오매스 속에서 헤엄치게 될 테니···

모든 부위를 +5로 만드는 건 식은 죽 먹기겠지!

바이오매스를 수확하고 나면, 우리는 지상으로 이어지는 길도 뚫어야 했다.

일종의 편하게 오갈 수 있는 계단 같은 거 말이다.

매번 사냥을 위해 던전에 내려올 때마다 길고 구불구불한 통로를 지나올 생각은 없었다.

둥지에서 곧바로 던전으로 올 수 있는 지름길이 필요했다.

특히 내가 진화하고 나면, 바이오매스를 구하기 위해 더 깊이 내려가야 했다.

그때가 되면 지름길을 더 아래까지 확장해야 하겠지.

["일어나 이 돼지들아!"]

나는 게으른 부하들을 향해 외쳤다.

여느 때처럼, 타이니는 내가 다리로 한참 찌른 뒤에야 겨우 눈을 떴다.

녀석은 커다란 손으로 나를 밀어내며 다시 잠들려고 했다.

···십대의 반항인가?!

["밥 먹자."]

타이니가 번쩍 눈을 뜨더니 일어나서, 어깨와 손가락을 풀며 언제든 뛰어나갈 태세를 취했다.

단순한 놈.

바이브는 굳이 여러 번 말할 필요도 없이 활기차게 깨어났다.

"잘 잤어요, 선배? 이제 또 사냥하러 가는 거예요? 질주도 하나요?!"

"그럼, 질주도 해야지!"

내가 선언했다.

스킬을 연마할 기회를 놓칠 수는 없으니까.

"이예에에에!"

바이브가 환호했고, 심지어 크리니스마저 기쁜 듯 촉수를 흔들었다.

···그게 그렇게 재미있나?

그나저나 어째 분위기가 학살에 가까운 사냥이 아니라 가족 휴가라도 온 것 같군.

아니, 둘 다라고 봐야 하나···

뭐 어때!

가자!

잠들기 전에 팠던 통로의 입구 부근에 식물 몬스터 몇 마리가 스폰되어 있었다.

우리는 놈들을 에피타이저 삼아 해치웠고, 바이브가 마지막 일격을 가해서 경험치를 얻게 했다.

그런 다음 다시 큰 공동으로 향했다.

그곳은 혼돈의 도가니로 변해 있었다.

그 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전날과는 완전히 다른 풍경이었다!

어제는 식물들이 이상할 만큼 조용히 있다가, 우리가 먼저 공격하고 나서야 본색을 드러냈는데···

지금은 마치 전쟁이 벌어진 듯한 분위기였다.

여기저기서 식물 몬스터들이 내가 전에 본 적 없는 다른 괴물들과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언뜻 봤을 때에는 마치 근육으로 뒤덮인 돼지나 멧돼지 같았다.

좀 더 자세히 보니 녀석들의 가죽이 좀 이상했다.

빛을 받을 때마다 반짝이고, 광택이 흐르는 게···

금속?

금속 돼지들이라고?

주위의 식물 몬스터들은 모두 전력을 다해 이 금속 돼지들과 싸우는 중이었다.

돼지들은 날카로운 엄니를 휘둘러 식물을 찢거나, 돌진해서 깔아 뭉갠 다음 마구 물어뜯었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오른쪽 저편에서 식물 몬스터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거대한 돼지를 발견했다.

다른 놈들에 비해 두 배가 넘는 크기였고, 금속성의 가죽 아래 기괴할 정도로 우락부락한 근육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 돼지들의 피부가 정말로 금속이라면···

전기가 아주 잘 통하겠군?

[타이니, 가서 저 커다란 놈에게 주먹을 한 방 먹여줘. 식물들과 자잘한 놈들은 내가 처리할 테니까.]

사냥 끝, 고통 시작

타이니가 고개를 끄덕이는 동시에 으르렁거리며 내 말에 동의했다.

싸울 때 녀석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의사 표시를 하는 건 드문 경우였다.

뭐, 내 지시를 알아들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타이니는 송곳니를 드러내며 앞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녀석이 서서히 최고 속도에 이르자, 주먹으로 땅을 짚을 때마다 동굴 전체가 흔들리는 듯했다.

돌진하는 타이니의 팔과 어깨에서 전기 에너지가 거세게 일었다.

타이니는 거대 멧돼지를 포위하고 있는 식물 몬스터들을 그대로 뚫고 들어갔다.

그리고 거대 멧돼지를 향해 포효하며, 강력한 주먹을 날렸다.

주먹에 실린 전기 에너지가 흘러 들어가자 돼지의 몸통이 마치 크리스마스 트리처럼 빛났다.

멧돼지는 고통스럽게 울부짖더니, 엄청난 기세로 타이니에게 몸통 박치기를 했다.

···와우.

저 싸움에는 절대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

어쨌든 돼지들의 금속 피부가 타이니의 전기 에너지에 취약할 거라는 가설은 사실로 드러났다.

방금 번쩍할 때 멧돼지의 내부 골격이 보인 것 같은데···

두 마리의 덩치가 알아서 싸우게 내버려 두고, 나는 잔챙이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환호하는 꼬마들을 등에 태운 채 전속력으로 질주했다.

성가신 놈들에게 산성 용액을 날린 뒤, 가장 위협적인 식물들부터 물어서 처리했다.

도중에 마주치는 돼지들은 주입 턱과 물어 깨뜨리기로 갈아버렸다.

금속 피부의 방어력이 높기는 했지만, 대지 폭군 곰과 견줄 정도는 아니었다.

이 돼지들은 아직 충분히 변이를 거치지 않았거나 진화를 하기 전인 것 같았다.

돼지 한 마리가 내 옆구리를 힘껏 들이받기도 했지만, 다이아몬드 갑각은 끄덕 없었다.

멍청한 돼지 같으니!

금속과 다이아몬드 중에 뭐가 더 단단하겠어?

음하하하하!

내가 잔챙이들을 청소하는 동안, 타이니는 커다란 돼지를 전기 주먹으로 두들겨 패고 있었다.

엄청난 힘이 실린 주먹이 명중할 때마다 천둥 같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쾅! 쾅! 쾅!

거대 돼지는 이제 눈에 띄게 비틀거리고 있었다.

놈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흔들어 엄니로 타이니를 찌르려고 했지만 그리 잘 되지 않았다.

타이니는 영리하게 엄니의 사정 거리 바깥으로 물러나더니, 입을 크게 벌리고 음파 공격을 터뜨렸다.

끼에에에에에에엑!

맙소사···

저 소리는 점점 더 커지는군.

나는 높은 의지로 버텼지만 주위의 식물 몬스터와 돼지들은 음파 공격에 일제히 마비되거나 쓰러졌다.

내 머리 위에 있던 바이브도 젖은 수건처럼 늘어졌고, 심지어 크리니스조차 평소보다 좀 더 말랑거리는 느낌이었다.

지근 거리에서 음파 공격에 노출된 거대 돼지가 순간적으로 동작을 멈추자, 타이니가 두 주먹을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

이윽고 공중으로 뛰어오른 타이니의 온몸에서 번개가 일어났다.

눈이 부셔서 녀석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을 정도였다.

콰과광!

타이니의 온 체중이 실린 두 주먹이 멧돼지의 머리를 내리치자, 산사태 같은 굉음이 울렸다.

무시무시한 전기 에너지가 멧돼지에게 흘러 들어가 놈의 몸 속을 구워 버렸다.

하지만 너무 큰 기대는 금물이었다.

이 던전에서는 돼지 통구이조차 맛이 없을지도 몰랐다.

거대 돼지가 쓰러지자, 더 이상 우리와 맞설 만한 몬스터는 없었다.

채 20분도 지나지 않아 우리는 다시 한 번 편하게 자리를 잡고 폭식을 시작했다.

얌냠냠!

나는 이번 식사로 여덟 개의 바이오매스를 획득했고, 새로운 원천을 섭취한 보너스로 하나를 더 얻었다.

전투 도중에 몇 가지 스킬의 레벨이 오르기도 했다.

[질주 스킬이 레벨 3이 되었습니다.]

[물어서 깨뜨리기 스킬이 레벨 6이 되었습니다.]

잠에서 깨어난 지 얼마 안 된 우리 일행은 아직 힘이 넘쳤고, 그래서 던전과 둥지를 잇는 지름길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시간 동안 굴을 파다가 다시 휴식을 취했다.

이런 식의 과정을 나흘 동안 반복하자, 마침내 지상으로 이어지는 통로를 완성할 수 있었다.

나는 터널 지도 스킬을 이용해서 기존의 통로들을 피했지만···

몇 번인가 아주 가까이 접근하기도 했다.

어쨌든 정확한 계획과 설계 덕분에 우리는 둥지로부터 불과 몇 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을 뚫고 나왔다.

이제 구불구불한 통로를 따라 몇 시간이나 걸어야 했던 여정이 이십 분 정도의 가벼운 산책으로 줄어든 셈이다.

물론 이 지름길에도 마나 줄기가 퍼지면 생성되는 몬스터들과 싸우며 내려와야 하겠지만, 그건 기존의 통로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이번 원정의 결과가 매우 만족스러웠다.

며칠 동안 열심히 사냥한 끝에 나는 전에 없이 많은 양의 바이오매스를 모았다!

뭔가 위가 영구적으로 늘어나 버린 듯한 기분도 들지만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다.

물론 당장 모든 부위를 +10까지 업그레이드할 정도로 바이오매스가 충분하지는 않았지만···

그건 너무 오래 걸릴 터였다.

진화가 나를 유혹하고 있었다!

마치 사이렌의 노래처럼 매 순간 내 영혼을 끌어당겼다!

두뇌파 개미도 환상적인 종이지만···

이제 다음 단계로 나아갈 때였다.

능력치를 더 높여야 마법 스킬들을 최대로 활용할 수 있을 테니까!

물론 내 목표는 마법을 능숙하게 구사하는 건 물론이고, 육체적으로도 강력한 팔방미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마법에 제대로 눈을 뜨기 직전에 와 있는 느낌이었다.

내 높은 영리함과 의지 능력치, 그리고 보조 뇌의 도움을 고려하면···

지금은 어렵고 비실용적인 마나 변환도 진화 후에는 손쉽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연습을 통해 몇 가지 변환을 익히면···

불이나 물 마법으로 보다 다양한 공격 수단을 갖출 수 있었다.

그러고 나서 다음 번 진화에는 육체적인 강함에 자원을 집중하면 될 일이었다.

육체적인 능력이 정신적인 능력을 따라잡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터였다.

여태까지와 같은 패턴이라면 레벨 40, 코어는 200 MP까지 성장시킨 다음 또 한 차례 진화를 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우리 일행은 그새 눈에 띄게 커져 있는 개미 언덕으로 돌아갔다.

언제나처럼 충실한 보초 개미들이 언덕 위를 지키고 있었다.

둥지는 완전히 예전과 같은 분위기로 돌아와서, 수많은 일개미들이 사방으로 이어진 흔적을 따라 주위를 탐험하거나 먹이를 운반하고 있었다.

던전에 있을 때와 달리 형제 자매들이 크게 걱정되지는 않았다.

지금까지 내가 본 지상의 몬스터들 중 개미 무리를 곤란하게 만들 만한 상대는 없었기 때문이다.

둥지 안으로 내려가자 여왕이 따스한 던전의 빛을 쬐며 평화롭게 회복하는 중이었다.

여왕의 방 벽에서 몬스터가 생성되기라도 하면 즉시 수많은 일개미들이 달려들어, 혹시 모를 위험을 제거하는 동시에 둥지를 위한 바이오매스를 확보했다.

이상하게도 둥지 안에 아이들이 그리 많이 보이지 않았다.

원래 있던 알과 유충은 이제 거의 부화해서, 개미의 수가 다시 천 마리 이상으로 늘어났다.

하지만 그 이후 새로 태어나는 개미들이 많지 않은 듯했다.

혹시 여왕이 회복하는 동안 산란을 쉬고 있는 걸까?

뭐, 본격적으로 정착하기 시작하면 금방 개미들이 늘어나겠지.

스킬을 좀 더 훈련하고 나면 내가 오랜 시간 품고 있던 개미 제국을 향한 야망을 다시 추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둥지 안의 작은 방으로 돌아온 우리는 사냥을 통해 얻은 코어들을 원래 있던 무더기에 더했다.

물론 여왕으로부터 강탈한 코어의 수에 비하면 얼마 안 되지만, 그래도 열 다섯 개면 나쁜 수확은 아니었다.

타이니가 벽에 묻어 놓았던 코어 자루를 꺼내서 내용물을 쏟아내자, 작고 둥근 보석들의 찬란한 빛이 나를 황홀하게 만들었다.

마이 프레셔스!

만약 내가 드래곤이라면 이 코어들이 내 보물이겠지.

"선배, 왜 침을 흘리고 있어요?"

바이브가 물었다.

어흠!

나는 황급히 앞다리로 입 주위를 닦고 선배 개미로서의 위엄을 되찾으려고 애썼다.

···혹시 타이니도 봤을까?

하지만 내 앞에 빈 자루를 들고 서 있는 타이니는 여전히 멍한 표정이었다.

아무 것도 못 본 척하다니··· 좋아, 타이니.

앞으로는 코어로 머리를 때리지 않을게!

빠르게 추산해 보니 우리에게는 대략 4백여 개의 코어가 있었다.

이 정도면 내 펫들과 바이브 모두 완벽한 진화가 가능한 숫자였다.

내 코어 공학 스킬도 최대치로 올릴 수 있을 테고 말이다.

하지만 그 전에 먼저···

쌓여 있는 바이오매스부터 써야지!

먹고, 땅을 파고, 휴식을 취하는 과정을 나흘 동안 반복한 결과 나는 무려 72개의 바이오매스를 모았다.

엄청나게 많은 것 같아도 모든 부위를 +10까지 올리려면 턱도 없이 부족했다.

나는 이미 +8인 턱을 우선적으로 업그레이드할 생각이었다.

신체 부위가 +10이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잘 모르겠지만···

부디 새로운 고급 변이를 선택할 수 있으면 좋겠군.

전과 같은 목록이 뜰까, 아니면 추가로 가능한 고급 변이들이 나올까?

어디 한 번 확인해 보자!

[턱을 +10으로 업그레이드하겠습니까? 19 바이오매스를 소모합니다.]

그래!

[이 단계에서는 고급 변이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메뉴에서 선택하세요.]

그렇지!

이제는 익숙해진 긴 목록이 내 머리 속에 펼쳐졌다.

나는 빠르게 목록을 내리며 가능한 선택지를 확인했다.

흠···

그래, 그래.

그렇군!

목록의 내용은 내가 예상한 대로였다.

지난 번에 이미 봤던 선택지에, 몇몇 새로운 항목들이 추가되어 있었다.

새로운 항목들 중에는 내가 저번에 선택한 주입 턱과 관련된 변이들도 있었다.

그리고 어김없이 두통이 찾아왔다··· 뭘 고르지?!?!

지난 번에 마지막까지 고민했던, 적의 체력을 흡수해서 나 자신을 회복시키는 흡혈 턱도 여전히 괜찮아 보였다.

하지만 내게는 이미 재생 분비선이 있었고···

지금 나는 회복력보다 공격력이 부족하지 않을까 하는 점이 더 고민이었다.

상대를 더 많이 물수록 공격력을 높여주는 광전사 턱도 마음에 들었지만···

하나의 적을 계속 물어야 하는 이상 대규모 전투에서는 활용도가 제한적이었다.

그럼 주입 턱의 업그레이드는 뭐가 있는지 한 번 볼까.

강력한 주입 턱, 턱에 마나를 주입하는 속도를 높여준다고?

강한 공격을 더 빨리 할 수는 있겠지만 지금 꼭 필요한 기능인지는 모르겠다.

효율 주입 턱.

마나를 덜 소모하고도 같은 위력을 낼 수 있을 뿐 아니라, 지속적인 마나 소모량도 줄여주는 변이였다.

이 선택지도 괜찮지만 그리 기대가 되지는 않았다.

뭔가 좀 더 공격적인 선택지가 있으면 좋겠는데···

나는 계속 목록을 내리며 내 필요에 맞는 선택지를 찾았다.

내가 턱에 원하는 건 그저 최대한 강력한 물기 공격이었다.

모든 마법과 스킬을 다 쓰고 나면 내가 의지할 수 있는 건 턱으로 무는 공격 뿐이니···

그런 생각을 하며, 결국 나는 가장 기본적인 선택지들로 돌아왔다.

사나운 턱.

턱의 크기와 밀도를 증가시켜 관통력과 압축력을 직접적으로 올려주는 선택지였다.

그저 더 크고 강한 턱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마나 주입과 조합하면···

내 물기 공격의 위력이 크게 늘어날 터였다.

[이 선택지로 결정하겠습니까?]

그래!

···

아아아아앍!

내 얼굴!!!!

다이아몬드의 가치

끄아아악!

간지럼증은 상당히 오래 계속됐고···

이번에는 내 턱이 변이하는 과정을 실제로 목격할 수 있었다.

턱이 더 길어지고, 더 무거워졌을 뿐 아니라 모양도 한층 무시무시하게 변했다.

늘어난 무게를 감당하기 위해 얼굴 부분의 근육 밀도도 변화하면서, 고통을 더욱 심하게 만들었다.

5분 정도 바닥을 굴러다니며 괴로워하고 나자 겨우 간지러운 느낌이 사라져, 겨우 여섯 발로 일어설 수 있었다.

나는 마음을 다잡고 다시 변이 메뉴를 열었다.

이 느낌이 정말 싫긴 하지만···

그래도 변이는 해야만 했다!

변이하거나 죽거나!

내가 섬유질이 부족해서 맛도 없는 식물들을 그렇게 처먹었던 게 아니라고!

이제 내 턱은 +10이었고 나머지 신체 부위는 모두 +5였다.

모든 신체 부위를 고루 업그레이드할 만큼 바이오매스가 넉넉하지는 않았다.

하나의 신체 부위를 +5에서 +10이로 만들려면 40 바이오매스가 필요한데···

남아 있는 바이오매스는 53개 뿐이었다.

즉 하나의 신체 부위를 +10, 다른 부위 하나를 +7까지 성장시킬 수 있다는 의미였다.

···

솔직히 조금 실망스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동안 내내 사냥을 하고, 공처럼 바닥을 굴러다닐 때까지 바이오매스를 먹었는데 고작 두 부위를 +10으로 만드는데 그치다니···

다시 던전 안으로 내려가서 닷새쯤 더 바이오매스를 모으고 싶은 유혹이 들었다.

나는 아직 배가 고프다!

한편으로는 기회가 있을 때 내가 쓰러뜨린 인간들을 먹지 않았던 일이 후회되기도 했다.

인간들과 전투로 레벨을 올리는 동안 바이오매스도 함께 섭취했다면 이런 상황에 처하지 않았을 텐데!

하지만···

솔직히 지금도 인간을 먹을 엄두는 나지 않았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면서, 현재 가지고 있는 바이오매스를 어디다 쓸까 하는 문제에 다시 집중했다.

지금 당장은 진화부터 하고 싶은 충동이 내 안에 가득했다.

바이오매스야 그 뒤에 시간을 들여서 모으면 될 일이었다.

그러려면 나와 타이니는 지름길을 아래로 확장해서 더 깊은 던전까지 내려갈 필요가 있었다.

어쩌면 이번에 진화한 뒤에는 두 번째 스트라타까지 진출할 수 있을지도!

인간 여왕은 지상의 인간들이 던전을 스트라타라는 이름의 대략적인 층으로 구분한다고 말했다.

지하 1킬로미터부터 50킬로미터 깊이의 가장 높은 층은 첫 번째 스트라타, 혹은 짐승의 스트라타라고 불렸다.

가장 규모가 작은 이 첫 번째 스트라타에는 주로 지상에도 존재하는 생물들의 변종에 해당하는 약한 몬스터들이 서식했다.

사자, 호랑이, 돼지, 지네 혹은 식물 몬스터가 그런 부류였다.

여왕의 말에 따르면 개미 몬스터는 발견되는 경우가 드물고, 있다 해도 주로 첫 번째 스트라타의 경계인 45~50 킬로미터 깊이라고 했다.

두 번째 스트라타는 훨씬 더 컸고 악몽의 층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 층에 대해서는 여왕이 그리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았는데, 정말로 아는 바가 없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뭔가를 숨기려는 의도였는지는 모르겠다.

악몽의 스트라타는 대략 지하 30킬로미터부터 200킬로미터보다 더 아래까지 걸쳐 있었다.

여왕도 정확히 얼마나 깊이까지 내려가는지 알지는 못한다고 했다.

이 스트라타에는 초자연적이거나 비현실적인 그림자 생물들이 득실거렸다.

그런 몬스터들은 기이한 정신 계열 주문을 사용했고, 가장 강력한 종들은 공간을 왜곡하는 능력을 가지고 그림자와 그림자 사이를 뛰어넘기도 했다.

내가 웨이브 때 본 바와도 맞아 떨어지는 이야기였다.

마나 밀도가 높아지자 벽에서 기이한 그림자 생물들이 스폰됐기 때문이다.

그때 나타난 크리니스도 분명 일반적인 동식물에 기반한 몬스터는 아니었다.

크리니스가 아마 두 번째 스트라타 출신의 강력한 몬스터일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몇 차례 진화를 거치면 어떻게 될지 엄청난 기대감이 들었다.

틀림없이 어마어마하게 강해지겠지!

세 번째 스트라타에 대해서 인간 여왕은 해줄 이야기가 거의 없었다.

악마의 스트라타라고 하는 이 층에 대해서는, 지상의 그 누구도 자세히 알지 못한다고 했다.

지금보다 훨씬 더 강력한 제국들이 번성했던 과거에는 거기까지 탐험을 하기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지만, 적어도 여왕은 악마의 스트라타에 가본 적이 있다는 사람을 만나보지 못했단다.

혹시 소포스와 다시 마주칠 수 있다면··· 포르모에게 그 층에 대해 물어보면 흥미로울 듯했다.

그 종족은 분명 던전의 아주 깊은 층까지 가본 적이 있을 테니까 말이다.

어쨌든 잡설은 여기까지!

지금은 생각이 아니라 행동을 해야 할 때였다.

나는 갑각을 +10까지 업그레이드하기로 했다.

그리 재미있는 선택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이미 턱을 업그레이드한 이상 다음으로 중요한 부위는 갑각인 것 같았다.

공격력 다음에는 방어력을 올리는 게 순서니까.

[갑각을 +10으로 업그레이드하겠습니까? 40 바이오매스를 소모합니다.]

그래!

[이 단계에서는 고급 변이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매뉴에서 선택하세요.]

메뉴를 대령해!

어디 보자···

자가 치유 갑각이라, 괜찮군.

신축 갑각은··· 구리고.

턱과 마찬가지로, 갑각도 부가적인 기능은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갑각에 원하는 건 피해를 흡수해서 나를 죽일 수도 막을 수도 없는 몬스터로 만들어 줄 방어력이 전부였다.

그러니까 직접적으로 방어력을 높이는 선택지를 찾아보자.

자가 치유 갑각은 시간이 흐르면 저절로 재생하는 기능이 있었다.

다이아몬드 갑각이 이미 충분히 단단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쓸만한 선택지였다.

여러 가지 원소 저항 갑각들도 있었지만 모두 제외하기로 했다.

특정한 원소에 집중하는 길은 이미 오래 전에 버렸다.

다이아몬드 갑각을 업그레이드하는 선택지는 없을까?

아하!

강화 다이아몬드 갑각.

갑각을 더 단단하게 만들고 물리적인 피해에 대한 저항력을 높여주는 선택지였다.

반사 다이아몬드 갑각.

마법 피해를 반사하는 기능을 추가하는 선택지였다.

암흑 다이아몬드 갑각.

빛을 흡수해서 은신 능력을 높여준다고··· 좋은데?

하지만 가장 마음에 드는 건 역시 강화 다이아몬드 갑각이었다.

대놓고 방어력을 높이는 선택지니까··· 이걸로 하지!

그리고 눈도 +7로 업그레이드하기로 했다.

여태까지 시력을 높여서 후회한 적은 없었다.

[갑각을 +10으로 눈을 +7로 업그레이드하겠습니까? 53 바이오매스를 소모합니다.]

다시 시작이로군.

와라!

···

오 하느님!

으아아앍!

언제나 눈을 업그레이드할 때의 고통이 가장 심했다.

눈알의 크기가 커지는 건 정말 특별하게 불쾌한 느낌이고···

거기다 전신을 뒤덮고 있는 갑각의 간지러움까지 더하니 고문이 따로 없었다.

고문이라고!

내가 다시 5분 동안 바닥을 구르는 동안, 내 펫들은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물론 크리니스는 내 모습을 볼 수 없겠지만···

바이브는 이따금 더듬이로 나를 건드려 보기도 했다.

하지 마!

어쨌든 이제 당분간 바이오매스를 사용할 일은 없을 터였다.

···

다행이지.

이제 코어를 강화할 차례였다.

코어들을 모아 놓은 쪽으로 걸어가려던 나는 방 안의 벽이 반짝거리는 걸 알아차렸다.

뭐지?

마치 방 안에 사이키 조명을 틀어 놓은 것 같은 이 광경은?

나는 천장에 뭐가 매달려 있는지 고개를 들려고 하다가 내가 더 이상 고개를 들지 않아도 위쪽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벽의 반사광이 다름 아닌 나한테서 나오고 있다는 사실도···

보다 정확히 말하면 내 갑각에서 말이다.

이게 무슨 일이야!

더 자세히 살펴보니, 원래 은은하게 반짝이던 내 다이아몬드 갑각이 변이를 거치면서 뭔가 변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내가 강화 다이아몬드 갑각을 선택하면서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효과였다.

원래부터 갑각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반짝이는 점들이 커져서, 갑각의 조금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각각의 작은 점들은 아주 조금씩 커졌을 뿐이지만···

모두 더해지니 상당한 차이를 만들었다.

지금 내 갑각에는 작은 다이아몬드 알갱이들이 잔뜩 박혀 있는 셈이었다!

물론 보기에는 예쁘지만, 이 길로 계속 가면 대체 내 갑각의 값어치가 얼마나 높아지는 거지?

아니 그보다 앞으로도 계속 다이아몬드 갑각을 강화하면···

결국 난 전신이 다이아몬드로 뒤덮인 빛나는 크리스탈 개미가 되는 건가?

···

멋진데···

그러면 정말로 전 세계의 몬스터 헌터들이 거대한 다이아몬드 덩어리나 다름없는 나를 노리고 덤빌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엄청나게 멋진 모습일 것 같았다.

뭐, 그건 나중에 걱정하기로 하고.

일단은 진화 준비부터 마치도록 하자.

내가 코어를 하나씩 조작하며 코어 공학 스킬을 연마하는 동안, 내 펫들은 참을성 있게 기다렸지만 바이브는 심심했는지 방 안을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코어 하나를 조작하고 나면 정신력이 바닥 나서 5분 동안 쉬었다가 다음 코어로 나아가야 했다.

코어 조작은 내가 여태까지 겪어본 중에서 정신적으로 가장 힘든 작업이었다.

소포스들은 대체 어떻게 코어 하나를 가지고 몇 주 동안이나 작업할 수 있는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나는 코어 하나에 십 분만 소모해도 머리가 지끈거리는데 말이다.

어쨌든 코어 조작을 연습하면서, 나는 예전처럼 능력치를 억지로 크게 바꾸기보다 좀 더 정교한 작업을 시도했다.

예를 들어 능력치 변화와 함께 다리의 위치를 옮기거나, 입을 더 크게 만들거나 하는 식으로···

이런 조작은 정신적인 에너지를 더 많이 요구했지만, 내 거대한 프로젝트를 실현하려면 이 분야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었다.

물론 코어들 중에서 특별히 흥미롭거나 강력해 보이는 것들은 연습용으로 사용하지 않고 남겨뒀다.

언젠가 유용한 펫이 될지도 모르는 몬스터의 머리 부위에 쓸모 없는 다리 한 쌍을 더 달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말이다.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나자 더 이상 조작할 수 없는 상태가 된 코어가 한 무더기 생겼다.

이제 흡수해도 상관없는 코어들이었다.

다음 단계는 더 힘들 예정이라, 나는 우선 짧은 휴식을 취했다.

조금만 더 힘내자!

진화가 멀지 않았어!

마음의 준비를 마친 나는 바닥에 놓인 작은 코어 두 개에 각각 더듬이 하나를 올렸다.

그리고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도 두 코어를 한 데 뭉쳤다.

흐으으으응아!

마치 두 개의 돌을 서로 맞대고 누르는 것처럼 코어들은 합쳐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내 의지력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짜내야만 했다.

말 들어 이 빌어먹을 놈들아!

그러자 두 개의 코어 그리고 그 안에 담겨 있는 에너지가 서서히 하나로 융합되기 시작했다.

이런 융합의 결과를 제어하는 건 아직 내게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지금으로서는 융합 그 자체만으로도 내 능력의 한계에 가까웠다.

으라차차!

할 수 있어!

나는 턱을 악물고 두 코어가 완전히 하나로 합쳐질 때까지 정신을 집중했다.

휴!

맙소사, 힘들었다···

···

좋아, 이제 하나!

···

젠장!

휴식과 융합을 반복한 끝에 마침내 시스템 메시지가 들렸다.

[호환 가능한 특별 코어를 발견했습니다. 흡수하거나 몬스터를 재구성하겠습니까?]

드디어!

기진맥진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특별 코어를 완성했다!

"바이브!"

내가 작은 개미를 불렀다.

"네-네!"

바이브가 활기차게 나를 향해 달려오며 대답했다.

내가 스킬 연습을 하는 동안 기다리는 건 이 작은 개미에게 아주 지루한 일이었다.

그래서 녀석은 사방을 정신없이 뛰어다니거나, 말그대로 벽을 따라 달리기도 했다.

가장 큰 피해자는 크리니스였는데, 바이브가 그러는 내내 이 작은 공 모양의 몬스터를 굴리거나 자기 등에 업고 다녔기 때문이다.

어쨌든 내가 부르자 바이브는 엄청나게 기뻐하며 달려왔다.

나는 지친 와중에도 사악한 즐거움을 느꼈다.

그래, 지금은 신나겠지.

이번에 진화하고 나면 넌 더 이상 내 머리 위에 탈 수 없을 정도로 커질 테고···

앞으로 네가 먹을 식량은 스스로 싸워서 구해야 할 거다.

그리고 나는 다시 자유가 되는 거다!

음하하하하!

"지금 최대 레벨에 도달했지?"

"넵!"

"코어도 최대치로 성장했고?"

"넵!"

"좋아! 이제 이 코어를 흡수하고 나면 넌 특별한 개미로 진화할 수 있을 거야!"

그러자 바이브가 기쁨으로 몸을 떨었다.

"정말요?"

"물론이지! 유일한 문제는 이걸 흡수하는 과정이 엄청나게 아프다는 것 뿐이야!"

내가 즐겁게 말했다.

···

"좋아요!"

바이브가 여전히 기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무래도 녀석을 장시간 우울하게 만들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는 듯했다.

특별 코어에 가까이 다가간 바이브가 흡수를 시작했다.

지난 번에 타이니가 특별 코어를 흡수할 때와 마찬가지로, 바이브도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괴로워했다.

코어 안의 강력한 힘이 바이브의 몸으로 흘러 들어가서, 녀석의 코어를 강화하고 진화에 사용할 수 있는 여분의 에너지를 충전하고 있었다.

나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더듬이를 내밀어 괴로워하고 있는 작은 개미의 머리를 토닥였다.

그 덕분인지, 아니면 그저 흡수가 진행됐을 뿐인지 몰라도 바이브는 한결 편해진 것처럼 보였다.

···

나도 딱히 바이브를 괴롭히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게 녀석을 위한 최선이었다!

보다 강력한 진화는 바이브가 타고난 운명을 극복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개척할 수 있도록 해줄 터였다.

···

이런 게 자식을 위하는 부모의 마음일까?

*훌쩍*

마침내 흡수가 끝나자 바이브가 지쳐서 바닥에 쓰러졌다.

"이제 진화를 하렴, 꼬마야."

내가 부드럽게 말하자, 바이브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방 구석으로 가서 잠에 빠져들었다.

나는 바이브의 진화를 흥미롭게 지켜봤다.

녀석은 어떤 길을 선택할까?

타이니 역시 기묘한 표정을 하고 바이브를 쳐다봤다.

맞아, 친구.

다음은 네 차례야!

잘 배운 펫

내가 빤히 쳐다보자, 타이니의 표정이 점점 더 불안해졌다.

[타이니.]

[···]

[타이니!]

[···왜?]

[너도 코어를 최대치로 올려야지! 어서 이리로 와.]

···

내가 코어 공학을 연습하는 동안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던 타이니가 온몸에 내키지 않는 기색을 드러내며 두 발로 일어서더니, 어쩐지 반항적인 태도로 나를 향해 걸어왔다.

나는 더듬이를 이용해서 코어 하나를 타이니의 발치로 밀었다.

타이니가 나를 쳐다봤다.

···

내가 천천히 턱을 벌려 코어를 집으려고 하자, 타이니의 두 눈에 뭔가가 스쳐갔다.

이해?

지혜?

아니면 가슴 깊이 새겨진 공포?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다만 타이니는 재빨리 몸을 굽히더니, 내가 턱으로 코어를 집기 전에 먼저 낚아챘다.

그리고 잠시 후 내게 텅 빈 손바닥을 보여줬다.

[잘했어.]

나는 더듬이로 내가 조작을 마친 코어를 하나씩 밀어서 타이니가 흡수하게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코어가 다 떨어져서, 몇 개를 더 만들어야 했다.

새롭게 조작을 마친 코어를 타이니에게 건네면서, 나는 진화를 겪고 있는 바이브 쪽을 살폈다.

뭔가 빛에 휩싸이거나 하는 광경을 기대했지만 진화가 그런 식으로 이루어지는 건 아닌 듯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아무 일도 없었고, 바이브는 여전히 의식이 없는 듯한 모습으로 바닥에 엎드려 있는 상태였다.

눈에 띄는 물리적인 변화는 전혀 없었다.

[코어 공학 스킬이 레벨 5가 되었습니다.]

좋아!

레벨이 1이라도 오르면 차이가 생기겠지.

나는 계속 코어들을 조작했지만 갈수록 더 자주 그리고 오래 쉬어야 집중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조금 더 했다가는 그대로 정신을 잃어버릴 듯한 느낌이었다.

정말 빡세군···

그렇게 몇 개의 코어를 더 조작한 다음 건네자 타이니가 더 이상 흡수할 수 없다는 신호를 보냈다.

드디어!

나는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머리가 심각하게 아팠다.

아무래도 한 숨 자고 일어나지 않으면 특별 코어를 만들기는 무리일 것 같아서, 타이니에게 잠시 동안의 유예를 줬다.

[너도 눈 좀 붙여, 타이니. 내일 마무리한 다음 진화하자.]

그러자 타이니가 기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멍청한 녀석!

내가 자기를 위해서 얼마나 애쓰고 있는 줄도 모르고···

나는 지친 몸을 끌고 바이브 쪽으로 가서 뭔가 변한 점이 있는지 살폈다.

···

여전히 그대로였다.

혹시 아직도 진화 메뉴를 보면서 고민하고 있는 건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하긴 내가 처음 진화를 할 때에도 시간이 얼마나 흐르는지 전혀 모르고 엄청난 길이의 선택지 목록을 뒤적였지···

난 이게 바이브가 수동 진화를 할 만큼 영리하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타이니는 절대 할 수 없는 일이겠지.

내 사랑스러운 펫의 멍청함에 속으로 투덜거리며, 나는 서서히 잠에 빠져들었다.

···

으랴랴럅!

일어났다!

나는 눈을 뜨자 마자 벌떡 일어나서 바이브의 상태를 확인하러 갔다.

그리고 더듬이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내가 잠든 사이 어디가 변했는지 열심히 살폈다.

뭐가 새로 생겼지?

날개?

추가 머리?

크기가 두 배로 늘었나?

아니면 세 배?

···

변한 데가 없잖아?

바이브는 여전히 바닥에 - 아마 태어난 뒤 처음으로 - 조용히 엎드려 있었다.

그저 휴식을 취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왜 아무 변화도 없는 거지?!

최소한 더 커지기라도 했어야 하잖아!

혹시 예전과 다를 바 없는 크기로 깨어난다면 엄청 짜증날 것 같은데···

나는 바이브를 일단 내버려 둔 채, 거의 줄어든 티가 나지 않는 코어 더미로 다가갔다.

이만큼 많은 코어를 얻기 위해 그야말로 한 왕국의 보물 창고를 탈탈 털어야 했다.

그리 부유하지 않은 작은 왕국이었지만, 그래도!

이 코어들은 앞으로 두고두고 쓸 예정이었다.

내 계획대로 된다면, 이 코어들이 세상을 바꾸리라···

후후후···

하지만 그건 아직 꿈일 뿐이고, 현실로 돌아와서.

코어를 융합시킬 차례였다!

아자!

나는 다음 5분 동안 스스로를 정신적으로 고문하며 코어 융합을 시도했다.

···

흐아아아앙!

잠시 후 나는 정신적으로 기진맥진한 상태가 되어, 융합을 통해 커진 코어를 턱에 물고 잠들어 있는 타이니에게 다가갔다.

[일어나 임마!]

나는 다리로 타이니를 찌르며 여러 번 그렇게 외쳤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일어나기 싫다 이거로군.

아무래도 자기가 이제 뭘 하게 될지 알아서, 그걸 최대한 미루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어쩌면 이건 타이니의 머리가 조금이나마 좋아지고 있다는 신호인지도 몰랐다.

잔꾀를 부리려고 하는 걸 보면···

하지만 안타깝게도 녀석이 원하는 대로 해줄 수는 없었다.

설마 내가 머리가 쪼개지는 고통을 참아가면서 자기를 위해 코어를 만들어 놓고 이대로 물러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나는 소중한 코어를 턱으로 조심스럽게 들어올린 뒤 벽을 타고 '잠들어 있는' 유인원의 머리 쪽으로 이동했다.

그런 다음 코어를 높이 들었다가···

[일어]

딱!

[나!]

딱!

···

딱! 딱! 딱! 딱! 딱!

나는 코어로 타이니의 머리통을 가차없이 내리쳤다!

사실 두 번째 내리쳤을 때부터 타이니는 자는 척을 포기하고 손을 들어 코어를 막으려고 했다.

그 뒤로는 순전히 내 애정 표현이었다.

타이니에게 교훈을 가르칠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지 않으면 점점 더 버릇이 나빠질 테니까···

머리를 문지르며 일어난 타이니가 내게 원망스러운 눈빛을 던졌지만 무시했다.

그리고 벽에서 내려와 특별 코어를 녀석의 앞에 내려놓았다.

더 강력한 진화를 가능하게 해 줄 코어를 보자 욕심이 생겼는지, 아니면 내가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기 때문인지 몰라도 마침내 타이니가 손을 뻗어 코어를 만지더니 이내 흡수를 시작했다.

타이니가 코어를 흡수하는 내내 나는 녀석을 매의 눈으로 바라보며 감시했다.

내가 정확히 뭘 기대했는지···

타이니가 갑자기 내 얼굴에 코어를 던지고 방에서 뛰쳐나가며 '프리더어엄!' 하고 외칠까 봐 그랬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코어의 크기가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하자 타이니의 표정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하지만 타이니는 꿋꿋하게 참아내며 코어를 전부 흡수했다.

그래야지!

갓 부화한 작은 일개미도 해낸 걸 타이니가 못하면 이상한 일이었다.

결국 코어가 완전히 사라졌고, 타이니는 새로운 특별 진화를 맞이할 준비를 마쳤다.

[잘했어, 타이니. 가서 진화해. 깨어나면 전보다 더 강해져 있을 거야.]

타이니는 피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벽에 등을 기대고 잠을 청했다.

···

나는 첫 번째 펫인 타이니에게 매우 큰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녀석은 언제나 격렬한 싸움을 하고 싶어했는데, 그러려면 매번 최고의 진화를 거칠 필요가 있었다.

아무리 크고 강해도 타이니는 던전의 첫 번째 층에 서식하는···

가장 약한 축에 속하는 몬스터였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더 깊은 곳에서 온 몬스터들과 마주친다면, 타이니가 과연 얼마나 잘 싸울 수 있을까?

나는 계속 특별 진화를 시켜서 녀석이 태생의 한계를 극복하게 해 주고 싶었다.

···

그럼 이제 내 차례인데···

마침내 진화를 한다고 생각하니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면 바이오매스를 모아서 모든 부위의 업그레이드를 마칠 때까지 진화를 미루는 편이 낫겠지만, 도저히 유혹을 참기가 어려웠다.

그냥 할 거야!

또다시 며칠 동안 몬스터의 시체에 얼굴을 파묻고 맛없는 식사를 반복하기보다, 얼른 푹 자고 일어나서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고 싶었다.

이제 몬스터 내장이라면 지긋지긋해···

이번 진화에는 어떤 선택지가 나올지 두근두근했다.

나는 두뇌파 개미로 진화하면서 비약적으로 강해졌을 뿐 아니라, 본격적인 마법의 길에 들어섰다.

그 자체로도 훌륭했지만···

내가 마법을 제대로 익히려면 또 한 번의 계기가 필요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정신력을 향상시키는 선택지를 고르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물론 그러기 전에 특별 코어부터 만들어야 하지만.

가자!

···

아우··· 머리야!

[코어 공학 스킬이 레벨 6이 되었습니다.]

좋아!

힘들었지만 결국 해냈다!

내 앞에는 반짝이는 특별 코어가 놓여 있었다.

[호환 가능한 코어를 발견했습니다···]

흡수!

이틀 동안의 정신적인 중노동이 마침내 끝났다.

몹시 지친 상태였지만, 나는 지체 없이 특별 코어를 흡수하기 시작했다.

특별 코어를 몸 속에 품고 있는 불편한 기분을 조금이라도 더 느끼기 싫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걸 흡수하는 과정 또한 만만치 않았다.

마치 내장 속에 서서히 가스가 차오르는데 배출할 방법이 전혀 없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느낌이었다.

에너지가 점점 커지면서 고통도 더 심해졌다.

으으···

어쩌면 특별 코어를 만드느라 정신력을 소진한 상태로 곧장 흡수를 시작한 건 그리 좋은 생각이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 봤자 너무 늦었다.

해내는 수밖에 없었다.

턱 꽉 다물어!

내가 어떤 개미인지 보여주는 거야!

일개미들이 불평을 하던가?

아니지!

그런데 나는 불평할 건가?

조금만!

매 순간 고통이 커져서, 나는 어떻게든 신경을 분산하기 위해 애썼다.

처음에는 방 안을 둘러보며 뭔가 흥미로운 대상을 찾으려고 했지만···

나를 제외한 모두가 잠들어 있거나 그와 비슷한 상태였다!

타이니는 대놓고 코를 고는 중이었다.

진화를 하고 있는지 아니면 일단 낮잠부터 자기로 한 건지 의심스러웠다.

바이브는 여전히 바닥에 납작하게 엎드려서 움직이지 않았고···

여전히 외관상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크리니스는 홀로 방 한복판에 놓여 있었다.

언제 저기까지 굴러갔는지 몰라도, 다시 데려오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크리니스, 이쪽이야.]

그렇게 말하는 내 사념이 고통으로 떨리고 있었다.

내가 다리 하나를 내밀자 크리니스가 촉수 몇 개를 뻗어서 붙잡았다.

그리고 재빨리 내 등 위로 올라와, 잠시 동안 꼬물대며 편한 자리를 찾았다.

[얼마나 더 있어야 성체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내가 고통으로부터 신경을 분산시키려고 애쓰며 그렇게 물었다.

[···]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하필이면 지금 남아 있는 게 우리 중에서도 가장 말이 없는 녀석이라니.

[저기 크리니스··· 잠시만 내 대화 상대를 해 주면 정말 고맙겠어.]

[···언제 성체가 될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주인님.]

크리니스가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크리니스가 아직 도움이 되지 못해서 속상해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별로 재촉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타이니가 내게 도움이 될 때까지는 그야말로 한 세월이 걸렸다.

아직도 많은 측면에서 그리 도움이 되지 않기도 하고···

[걱정하지 마, 크리니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넌 예전처럼 강력한 몬스터가 될 테니까.]

나는 크리니스의 성체 형태가 몬스터들을 갈갈이 찢어버리던 장면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사실 잊으려 한다고 잊힐 것 같지도 않았다···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주인님.]

[그래. 네가 말하는 걸 들으니까 좋은데. 앞으로 좀 더 자주 이야기해, 알겠지?]

[···]

[···뭐, 천천히 익숙해지면 되겠지. 난 이제 곧 진화를 할 거야, 크리니스. 그러니까 잠시 내가 움직이지 않거나, 네가 말을 걸 때 대답하지 않아도 걱정할 필요 없어.]

크리니스가 말을 걸 것 같지는 않지만···

[진화를 하시나요, 주인님?]

작은 공이 물었다.

[그래! 아주 기대돼. 지금 다들 진화를 하는 중이야. 타이니와 바이브는 이미 시작했고, 내가 마지막이지.]

[아···]

크리니스가 조금 움츠러든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하지 마, 크리니스. 너도 곧 자라서 진화를 하게 될 거야. 다음 번에는 네가 가장 먼저 진화할 수 있게 해 줄게. 이미 널 위해 멋진 계획을 세워 놨거든!]

[감사합니다, 주인님.]

크리니스가 조금 밝아진 기색으로 대답했다.

죽음의 촉수 몬스터가 이렇게 섬세할 줄 누가 알았을까?

하지만 그래도 나쁘지 않았다.

다른 두 녀석에 비하면 훨씬 더 공손하기도 하고···

···

겨우 코어 흡수를 끝낸 나는 마침내 진화 준비를 모두 마쳤다.

드디어!

이번 진화는 어쩐지 예감이 좋았다.

두뇌파 개미는 새로운 진화의 길을 시작하는 단계였다.

그리고 그 다음 단계는 더욱 강력할 터였다.

[그럼 크리니스, 난 진화할게!]

[네, 주인님.]

예의도 바르지!

[현재 진화 단계의 최고 레벨에 도달했습니다.]

[진화 메뉴를 사용하겠습니까?]

그래!

선택과 진화

내 머리 속에서 즉시 메뉴가 펼쳐졌고, 진화 가능한 새로운 선택지가 빛나기 시작했다.

어디 보자, 어디 보자!

[두뇌파 일개미 (포르미카). 이 진화는 힘에 +10, 영리함에 +5 보너스를 줍니다. 이 진화를 하면 일개미 협동과 관련된 오러 분비선 구매시 할인 혜택을 받습니다.]

좋아, 첫 번째 선택지로군!

보너스 능력치를 좀 주는 일반 진화였다.

그리고···

저건 뭐지?

오러 분비선 할인?

흐으음.

흥미롭군.

오러 분비선을 찾아봤더니 특정한 부류의 아군들을 대상으로 조직력이나 작업 속도를 높일 수 있는 수많은 기관들이 나왔다.

아마 이런 기관들을 할인해서 구입할 수 있다는 말 같았다.

이번에는 능력치 보너스가 상당히 크다는 점도 주목할 만했다.

총 +15 보너스라고?

게다가 영리함에 +5?

지난 번에는 특별 진화가 그 정도였는데!

나는 더욱 흥분해서 다른 선택지를 살폈다.

[고급 병정개미 (포르미카). 이 진화는 힘에 +10, 강인함에 +10 보너스를 줍니다. 체력과 관련된 기관 하나를 무료로 얻습니다. 방어적인 갑각 업그레이드가 할인됩니다.]

흠.

이 길을 택하면 두뇌파 개미를 버리고 병정개미가 되는 거로군.

그래도 처음부터 고급 병정개미를 시켜주네.

보너스가 엄청난데··· 능력치 +20이라고?

에너지 측면에서는 힘과 강인함이 가장 '저렴한' 능력치기는 하지만 그래도···

무료 체력 관련 기관?

체력과 관련된 기관은 이미 여러 개 본 적이 있고···

아마 HP와 관련된 새로운 선택지들도 있겠지?

어쩌면 HP 최대치를 늘려주는 기관이나 두 번째 심장 같은 것도 있으려나?

궁금하군.

그리고 다음은 드디어 특별 진화였다!

[특별 진화: 마법 병정개미. 힘에 +15, 강인함에 +10, 영리함에 +5 보너스를 얻습니다. 하나의 체력 관련 기관을 무료로 얻고, 방어적인 갑각 업그레이드에 할인 혜택을 받습니다.]

와우!

저 능력치 보너스 좀 보게!

근접 전투에 더 치중한 형태의 진화지만, 그러면서 마법 능력도 올릴 수 있는 길이었다.

솔직히 상당히 유혹적이었다.

만약 내가 지금 수준의 마법 능력에 만족하고 있었다면 좀 더 흔들렸을 터였다.

그만큼 능력치 보너스가 후했으니까.

[특별 진화: 개미 현자. 영리함에 +10, 의지에 +5 보너스를 얻습니다. 하나의 마법 속성 분비선과 에너지 변환 분비선을 무료로 얻습니다.]

뭐라고?!

마법 속성 분비선에 에너지 변환 분비선이라고!?

에너지 변환 분비선은 분명 일반적인 마나를 속성 마나로 변환하는 효율을 높여주는 기관일 터였다.

정말 탐나는 혜택인데!

이 진화를 선택하면 내 마법 능력이 엄청나게 상승할 터였다.

보다 다양한 주문을 사용할 수도 있을 테고···

군침이 도는군!

과연 다음 선택지가 이것과 경쟁이 될까?

[특별 진화: 분산 두뇌 개미. 영리함에 +10, 의지에 +10 보너스를 얻습니다. 공조 보조 두뇌를 무료로 얻습니다.]

···

분산 두뇌 개미?

정신 능력치에 +20 보너스를 주고 보조 두뇌도 하나 준다고?

보조 두뇌 하나만 해도 영리함 5의 가치가 있을 텐데!

정신적으로 그만큼이나 강해진다면 내가 애를 먹고 있는 마나 변환이나 코어 조작 같은 일이 엄청나게 쉬울 터였다.

그리고···

공조 피질?

이름만 봐서는 전혀 무슨 기관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어디다 쓰는 거지?

어쨌든 내가 선택할 만한 진화는 개미 현자와 분산 두뇌 개미 두 가지였다.

이 두 가지 선택지만 내 마법 능력과 정신력을 만족스러운 수준까지 높여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로 내가 현재 설정하고 있는 목표의 달성을 앞당겨줄 테고 말이다.

사실 개미 현자가 제공하는 또다른 마법 속성 분비선이 상당히 끌리기는 했다.

내 마법 주문을 보다 다양하게 만들어줄 수많은 선택지가 존재했다.

그동안 벼르고 있던 정신 마법을 선택하거나···

아니면 공간이나 시간처럼 또 하나의 어마무시한 속성을 고를 수도 있었다.

마나 변환의 효율을 높여주는 분비선까지 생기니, 속성 분비선들의 활용도는 더 높아질 테고 말이다.

중력 분비선은 이미 업그레이드로 용량을 크게 늘린 상태였다.

그래서 에너지 변환 분비선으로 회복 속도까지 빨라지면 중력 마나가 거의 무제한이 되는 셈이었다.

적어도 중력 에너지가 바닥나려면 한 세월이 걸리겠지!

그야말로 주문을 펑펑 날리고 다닐 수 있을 터였다!

반면 분산 두뇌 개미는···

엄청난 능력치 보너스와 보조 뇌를 준다!

이건 좀 다른 종류의 파워 업이었다.

정신 계열 능력치들이 그만큼 높아지고, 보조 두뇌가 하나 더 생기면 마나를 훨씬 더 쉽게 이동시키고 형성할 수 있었다.

그건 곧 전투 상황에서 주문을 더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보조 두뇌가 두 개나 있다면 싸우면서 마나를 빠르게 변환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불이나 물처럼 기초적인 변환만 할 수 있어도 사용할 수 있는 주문이 극적으로 늘어날 터였다.

그리고 무슨 피질이라는 기관은···

뭔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분명 아주 유용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어디 한 번 설명을 볼까.

[공조 피질. 다수의 보조 두뇌를 제어해서 각각 혹은 다 함께 어떤 작업을 수행할 때 효율성을 높여주는 기관입니다.]

아하!

여러 개의 보조 두뇌를 관리하는 일에 특화된 기관이로군?

이게 있으면 내가 매번 보조 뇌들에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것 같았다.

지난 번 진화에서 수동으로 보조 뇌를 만들지 않았다면 이 선택지가 생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진화의 또다른 장점은 의지의 강화였다.

정신적인 강함을 의미하는 의지는 다양한 측면에 관여했다.

예를 들어 마나를 더 쉽게 이동시키거나···

정신적인 공격에 대한 방어력을 제공하기도 했다.

아마 던전 아래로 더 깊이 내려갈수록 이 능력치의 중요도가 더 높아질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좋아, 이걸로 하자!

분산 두뇌 개미!

결정을 내린 나는 진화 메뉴의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내 코어 안에는 지난 번 진화 때보다 거의 두 배에 달하는 에너지가 쌓여 있었다.

이제 마침내 그 에너지를 소비할 때였다!

먼저 나는 두 개의 보조 뇌를 확인했다.

짐작했던 대로 이번에 무료로 얻은 보조 뇌는 내가 직접 만들었던 보조 뇌만큼 성능이 좋지 않았다.

나는 상당량의 에너지를 사용해서 두 개의 보조 뇌를 모두 성장시키기로 결정했다.

이미 보조 뇌의 한계에 부딪혔던 경우가 여러 차례 있었기 때문에···

두 개 모두 성능을 높일 필요가 있었다.

다만 공조 피질이 있으니, 앞으로는 두 개의 보조 뇌가 동시에 하나의 작업을 수행하게 할 수 있었다.

그럴 경우 보조 뇌들이 협업을 위한 조정은 공조 피질이 알아서 처리할 테고···

즉, 보조 뇌가 단독으로 크고 중요한 작업을 수행할 만큼 성능이 높을 필요는 없다는 의미였다.

두 개가 함께 그런 작업이 가능할 정도로만 성능을 높이면 족했다.

나는 영리함에 대한 +10 보너스 중 대부분을 보조 뇌의 성능을 높이기 위해 사용한 다음, 나머지로 내 자신의 두뇌를 강화했다.

거기다 코어의 넘쳐나는 에너지 일부까지 투입해서 결과적으로 영리함 능력치를 +13까지 올렸다.

의지 보너스도 유사하게 세 개의 뇌에 나눠 사용해서, 각각의 성능을 높이고 코어의 에너지로 원래 두뇌를 좀 더 강화했다.

의지 능력치는 최종적으로 +12가 올랐다.

이 정도만 해도 내 정신적인 능력치는 예전보다 엄청나게 높아졌다.

영리함은 32에서 45로, 의지는 22에서 34로 올랐으니까!

그러고 나서도 코어에는 에너지가 잔뜩 남아 있었다.

나는 마치 사탕 가게에 들어간 꼬마처럼 가능한 선택지들을 탐욕스럽게 뒤졌다.

추가할 수 있는 새로운 기관과 신체 부위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가장 먼저 눈길을 끈 건 날개였다.

날개···

솔직히 끌리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다.

엄청나게 멋지긴 하겠지만···

던전 안에서 날개가 얼마나 유용할지는 좀 의문이었다.

나는 목록을 뒤지며 현재 암컷으로 되어 있는 내 성별을 다시 돌려 놓을 방법을 찾았다.

하지만 아직은 목록에 적당한 선택지가 보이지 않았다.

···

다음 번에는 가능할지도···

지금 내게 가능한 길은 두 갈래가 있었다.

남은 에너지를 소모해서 지난 번처럼 육체적인 능력치를 올리거나, 아니면 그 에너지로 구입할 수 있는 유용한 기관을 찾아보거나.

기관의 경우에는 선택지가 너무 많았다!

다리를 한 쌍 더 늘릴까?

아니, 다리의 수는 여섯 개가 딱 적당했다.

여덟 개가 되면 개미가 아니라 거미잖아···

그렇다고 눈이 더 필요하거나 한 것도 아니었다.

아니면 턱에 독샘을 더하거나, 꽁무니에 독침을 달 수도 있었다.

내가 아는 바로 지구의 개미 중에도 독침을 가진 몇몇 종들이 있었다.

아마 그 중에 불개미가 가장 잘 알려진 경우일 것이다.

사실 개미도 벌목에 속하는 곤충이라,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당장 독침이 필요할 것 같지는 않았다.

내 꽁무니는 산성 용액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위협적이니까.

오러 분비선이 탐나기는 하지만, 아직은 내게 너무 비싼 기관이었다.

아무래도 좀 더 진화한 뒤에나 가질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혹시 방어력을 더 높일 수 있는 수단은 없는지 관심을 돌렸다.

뭔가 방어를 강화할 수 있는 흥미로운 분비선이나 기관이 있을 터였다.

앞으로 당분간 나는 마법을 주력 공격 수단으로 삼을 계획이었다.

애초에 이쪽 계통의 진화를 선택한 이유도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만큼 적어도 한동안 물리적인 공격력보다는 방어력을 더 중시할 필요가 있었다.

어디 보자···

순간적으로 폭발적인 회복 효과를 제공하는 치유 분비선은 이미 가지고 있지만, 그 밖에도 다양한 기관들이 존재했다.

예를 들어 생존 확률을 높여주는 두 번째 심장이라든지···

사실 난 외골격을 가진 무척추동물이라, 그런 보조 장기가 크게 필요할 것 같지는 않았다.

인간처럼 피부가 부드럽고 약하다면 심장이나 기타 장기들이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셈이라 하나 더 있으면 결정적인 순간에 도움이 되겠지만, 개미인 나한테는 그다지···

나로서는 차라리 외골격의 방어력을 더 높이는 편이 나았다.

두 번째 치유 분비선을 구입할 수도 있었지만 그건 패스하기로 했다.

어디 보자, 뭔가 적당한 게 분명 있을 텐데···

아하!

이거다!

[내부 갑각판: 내부에서 외골격을 보강하기 위해 설계된 추가적인 뼈 판이며, 갑각의 유연성과 두께를 증가시킵니다.]

딱이야!

더 자세히 살펴보니 이름과 달리 '판'보다는 외골격 아래에 갑각과 같은 재질로 만든 그물 같은 내피를 덧대는 형태에 가까웠다.

아마 그래서 내가 충분히 살 수 있을 만큼, 그리 많은 에너지가 들어가지 않는 듯했다.

내부 갑각판을 선택하자 남아 있는 에너지로는 육체 능력치를 올려 봐야 티도 나지 않을 정도였다.

그래서 나는 그 에너지로 내부 갑각판을 강화해서, 소중한 뇌를 보호하기 위해 머리 부분의 그물을 더 촘촘하게 만들었다.

여기까지 모든 진화 과정을 마친 내 최종 상태창은 아래와 같았다.

=====

레벨: 1(코어)

힘: 41

강인함: 29

영리함: 44

의지: 35

HP: 50/50

MP: 110/110

스킬: 채굴 레벨 7; 고급 산성 용액 발사 레벨 6; 고급 잡기 레벨 2; 물어 꺠뜨리기 레벨 6; 고급 은신 레벨 5, 깨물어 가르기 레벨 2; 터널 지도 레벨 3; 마나 변환 레벨 1; 강력한 마나 레벨 4; 외부 마나 조작 레벨 2; 마나 감지 레벨 5; 코어 공학 레벨 5; 고급 외골격 숙련 레벨 5; 펫 커뮤니케이션 레벨 2; 질주 레벨 4;

변이: 초점 겹눈 +7, 적외선 더듬이 +5, 구속 산성 용액 +5, 흡수 다리 +5, 마나 주입 턱 +10, 다이아몬드 갑각 +5, 신체 부위 재생 분비선 +5, 페로몬 언어 분비선 +5, 심화 중력 마법 분비선 +5, 공조 피질, 내부 갑각판

종족: 분산 두뇌 개미 (포르미카)

스킬 포인트: 12

바이오매스: 0

=====

결과에 만족한 나는 선택을 최종적으로 확정했다.

그러자 내 의식이 즉시 온통 암흑 뿐인 공허 속으로 가라앉았다.

첫 번째 대화

여태까지 진화할 때마다 언제나 의식을 잃었지만, 이번에는 뭔가 좀 달랐다.

단지 의식이 가라앉는 느낌이 드는 게 아니라···

정말로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내 의식이 개미의 육체를 떠나 코어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난 막 진화를 마치고 기분 좋게 깨어날 참이었는데!

대체 뭐야?

타이니를 너무 많이 때려서 벌을 받는 건가?

그럴 만해서 때린 거라고!

진짜야!

내가 너무 많은 인간을 죽였나?

한때 동족이던 인간을 죽이고 경험치를 얻어서 신이 벌이라도 내리는 건가?

그 인간들은 나쁜 놈이었다고!

···아마도.

솔직히 말하면 잘 모르지만.

아무리 발버둥치며 애를 써도 내 정신은 완전히 내 통제를 벗어나 있었다.

내 의식은 코어 속으로, 그리고 더 아래로 계속해서 내려갔다.

그때 어둠 속에서 가느다란 실 같은 뭔가가 나타나 내 코어와 연결됐다.

그리고 그 실을 통해 나는 더 깊이 끌려 들어갔다.

내 정신은 마치 토끼 구멍 안에 떨어진 앨리스처럼,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내려가고 있었다.

뭔가의 중심부를 향해···

하지만 그 뭔가가 대체 뭔지 전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육체를 벗어난 정신이 되어버린 내게는 아무런 감각도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바이브였다면 아마 지루함 때문에 죽어버렸을 정도였다.

타이니가 더 이상 싸우거나 먹지 못하게 된다고 해도 마찬가지일 테고.

그러고 보면 크리니스는 잘 적응할지도 모르겠군.

어차피 촉각 말고는 아무런 감각도 없는 채로 살아왔으니까···

나는 내 존재가 이대로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을 떨치기 위해 그런 잡생각들을 계속했다.

너무 겁난다고!

의식이 육체를 벗어나는 일이 흔한 건 아니잖아?

모든 감각이 사라져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전혀 모르는 상태로 말이야.

누가 그런 경험을 해봤겠어?

나도 고작 두 번째라고!

···

순간 내 머리··· 아니 영혼 속에 어떤 깨달음이 스쳐갔다.

실제로···

나는 이미 똑 같은 경험을 해본 적이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죽었을 때···

이런 느낌이었지?

그때도 내 의식이 육체를 떠나 알 수 없는 어딘가로 끌려갔다.

이전 육체의 고통이 모두 사라지고 주위가 온통 하얗게 변하더니, 그 다음에···

[그 다음에 넌 새로운 세계에 온 걸 환영한다는 말을 들었지.]

맞아!

그런 말을 듣고 나서 이 미친 모험이 시작됐지···

···

그때 그···

목소리?!

[그게 네가 나를 일컫는 말인가?]

어··· 그쵸?

목소리밖에 들리지 않았으니까.

그나저나 이게 무슨 일이죠?

제가 다시 육체로 돌아갈 수는 있는 건가요?

[네 코어가 일정 수준의 밀도에 도달한 덕분에 내가 이런 식으로 접촉할 수 있게 되었다. 이건 일종의··· 전통이지. 새로운 여정의 이 단계에 이른 자들에게 내가 개인적으로 말을 거는 게 말이야.]

어···

거의 항상 저한테 말을 걸고 있지 않나요?

레벨 업을 할 때라거나···

[그런 메시지는 좀 더··· 무의식적이지. 내가 의식적으로 말을 걸기 위해서는 네 정신이 좀 더··· 견고해질 필요가 있었다. 넌 이 단계에 아주 빠르게 도달했다. 몬스터의 삶에 잘 적응한 모양이군.]

내가 이 단계에 아주 빠르게 도달했다고요?

누구와 비교해서 빠르다는 거죠?

나 같은 사람들이 더 있나요?

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여기로 데려온 거죠?

[나는 주기적으로 너와 같은 존재들을 이 세계로 데려오지. 아주··· 다양한 목적으로.]

나와 같은 존재라뇨?

전생의 나에게 무슨 특별한 점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은데?

[그렇게 생각하나? 나는 몇 차례의 실패를 통해 인간처럼 지적인 존재의 정신이 던전 안의 몬스터에게 옮겨지고도··· 망가지지 않으려면 강한 정신력이··· 혹은 일정한 수준의··· 광기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래서 너처럼 고독과 좌절에 익숙한 영혼을 찾아서 데려오는 거지. 그런 영혼이 몬스터로 살면서 겪는 광기와 학살 그리고 고독을 더 잘 견딜 수 있으니까.]

···

···

하지만···

전 특별히 끔찍한 삶을 살았다거나 그러지 않았는데요?

뭐 가끔 힘든 일도 있었지만, 그건 누구나 마찬가지잖아요?

···

목소리가 잠시 할 말을 잃은 듯 침묵했다.

···

[넌 가족에게도 친구에게도 마음을 터 놓지 못했지···]

···

뭐, 그렇긴 하지만···

생각보다 그런 사람이 많을 걸요?

그게 그리 엄청난 일은 아닌 것 같은데···

···

[인생에 특별한 희망도 목표도 없지 않았나?]

···

아니, 그렇긴 한데···

뭐 좋아요!

그래도 최소한 애완 동물은 있었다고요.

[아 그래, 넌 애완동물로 개미를 길렀지. 그리고 최선을 다해 개미 둥지를 보살폈어. 그게 네게 가장 소중한 대상이었다.]

음, 그 정도였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대상이 애완용 개미 둥지인 사람을 멀쩡하다고 보기는 어렵지 않을까?]

뭐, 누구나 저처럼 책임감이 강한 건 아니니까요.

[어쨌든 그래서 나는 널 개미로 환생시켰다. 네게 가장··· 편안한 형태일 거라고 생각했지.]

그럼 정말로 내가 개미를 애완 동물로 길러서 개미로 환생한 거라고요?

젠장!

[마음에 안 드나?]

···아니 지금은 마음에 들지만, 처음에는 솔직히 어이가 없었다고요!

[그래, 처음 며칠을 버티지 못하는 자들이 많지.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말이다.]

그럼 그··· 버티지 못한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데요?

[당연히 죽지.]

···

이크···

[넌 앞으로도 계속 잘해 나가기를 바란다, 젊은이. 누가 알겠나, 언젠가 우리가 직접 만날 수 있을지.]

직접이요?

그럼··· 당신은 영적인 존재나 뭐 그런 게 아니라는 말인가요?

당신이 어디 있는데요?

[충분히 깊이 내려오면, 날 찾을 수 있을 거다.]

어··· 제가 내려가지 않을 수도 있을 텐데요.

[선택의 여지가 없을 수도 있겠지··· 행운을 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내 의식이 다시 한 번 저항할 수 없는 힘에 의해 끌려갔다.

이번에는 반대 방향으로··· 위로, 위로.

점점 속도가 빨라지다가, 내 코어에 거칠게 다시 처박혔다.

아야!

코어 안에서부터 내 의식이 다시 한 번 원래 자리를 찾아갔다.

그리고 이상한 곳으로 끌려가기 전부터 진행 중이던 진화 과정을 다시 시작했다.

음···

내 의식이 서서히 돌아오고 있었다.

언제나 그렇지만 기이한 느낌이었다.

개미가 된 이후로 나는 정말로 잠을 자는 게 아니라 가만히 휴식을 취할 뿐이라···

이런 식으로 의식을 잃었다가 되찾는 건 드문 경험이었다.

그리고 조금 전의 기이한 경험이 아직도 내 머리 속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목소리?

그 존재가 던전 아래쪽의 어딘가에 있다는 건가?

전생의 불행한 삶이야 어쨌든 상관없었다.

지나간 일을 생각하는 건 시간 낭비니까.

현재 그리고 미래에 집중해야지!

이제 내게는 새로운 가족, 펫들 그리고 보살펴 드려야 할 어머니가 있었다.

이미 오래 전에 끝난 삶을 돌아볼 여유는 없었다.

마침내 감각이 돌아와 내 눈에 빛이 느껴졌다.

깨어났다!

하!

짜잔!

내가 돌아왔다!

더 멋지고 강해진 상태로!

···

왜 앞이 안 보이지?

뭔가 얼굴이 푹신한데?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자 익숙한 부위들이 모두 느껴졌다.

여섯 개의 다리, 두 개의 더듬이··· 모두 괜찮았다.

문제는 시야가 온통 털로 가려져 있다는 점이었다!

이게 대체 뭐야!

[타이니!]

[···]

[타이니, 이거 너야?]

[···]

[당장 비켜, 타이니! 내가 못 움직이잖아!]

[···졸려.]

[지상으로 올라가서 자든가! 네 털 때문에 아예 앞이 보이지도 않아!]

[···피곤해.]

[졸리다는 거랑 같은 말이잖아! 빨리 비키지 못해!]

정신적인 연결 고리를 통해 지친 한숨 소리가 느껴졌다.

마치 내가 억지를 부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이 원숭이 녀석이 버르장머리 없게!

그리고 왜 이렇게 털이 수북해진 거야?

서서히 눈 앞에서 털이 사라지더니 시야가 조금 돌아왔다.

길고 하얀 털들이 방의 입구 쪽으로 움직이더니 짜증스러운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

[못 지나가는 거야?]

[···응.]

이런!

하긴 진화 전에도 타이니에게는 이 방이 좀 좁았으니···

예상했어야 하는 일이다.

타이니의 예전 모습을 고려하면 진화한 뒤에 더 커질 게 뻔했으니까 말이다.

미리 생각을 좀 했다면 방이나 입구를 넓혀 놓았을 텐데···

[네가 직접 파고 나갈 수밖에 없겠다, 타이니. 직진으로 굴을 파면 개미 언덕의 꼭대기 근처로 나갈 수 있을 거야.]

우리 방은 개미 언덕의 꼭대기 바로 아래에 있는지라 타이니가 그대로 뚫고 나가도 괜찮았다.

언덕 옆쪽이 조금 무너지더라도 다른 방이나 통로가 영향을 받는 일은 없을 테니까.

우리 방이야 금방 다시 만들면 되고.

타이니가 땅을 파는 소리가 들려왔다.

물론 시야를 가득 채운 하얀 털 때문에 아무 것도 보이지는 않았다.

잠시 후 타이니가 마침내 탈출에 성공했다.

녀석은 기쁜 듯 신음 소리를 내며 햇빛 아래에서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비로소 나는 타이니의 몸 크기를 확인할 수 있었다.

크다!

커다란 유인원이야!

원래도 지구의 고릴라보다 컸지만 이번 진화로 30%는 더 자란 듯했다.

이제 타이니가 똑바로 일어서면 3미터도 넘을 듯했다.

그리고 전신의 털이 흰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좀 더 자세히 보니, 북극곰처럼 완전히 하얀색이 아니라 윤기가 흐르는 은빛 털에 더 가까웠다.

그럼 실버백 고릴라가 된 건가?

[네가 무슨 종족으로 진화한 건지 기억나, 타이니?]

개미 언덕의 옆을 통해 햇빛 아래로 나온 타이니는 나를 돌아봤다.

녀석의 박쥐 얼굴은 예전보다 한층 더 검은색으로 변했고, 두 눈은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

[종족! 네가 어떤 종류의 몬스터냐고! 기억 안 나?]

타이니가 멍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혹시 영리함 능력치가 더 내려간 거야?!]

[···]

맙소사!

이런 식으로 계속 진화하면 얼마나 더 근육 바보가 되는 거지?

여기서 더 멍청해지면 먹는 법도 까먹겠다!

어쨌든 타이니의 우락부락한 덩치는 엄청난 위용을 과시했다.

저 거대한 두 주먹이 얼마나 강력할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이 종은 확실히 육체적인 강함을 가장 우선하는 모양이군.

뇌가 없어질 정도로 말이야···

어떤 면에서는 완벽한 펫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나는 타이니가 좀 더 영리해지기를 원했다.

그저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는 대신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을 내릴 수 있을 만큼.

뭐, 나중에 무슨 방법이 있겠지.

타이니가 뚫어 놓은 구멍으로 자연광이 쏟아져 들어왔고, 공간의 여유가 생긴 나는 차분하게 방 안을 살펴볼 수 있었다.

바이브는 어디 있지?

지금쯤 진화를 마치고 깨어났을 텐데?

어디로 간 거야?

"바이브?"

"네-네!"

활기찬 대답이 돌아왔다.

···

내 머리 위에서.

겹눈의 각도를 조금 움직이자 바이브가 구슬처럼 작고 까만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전과 정확히 똑같아 보이는 모습이었다.

"진화한 거 맞아, 바이브?"

"그럼요!"

흠.

"무슨 종을 선택했는지 기억나?"

"물론이죠! 바이브는 선배가 시킨 대로 특별 진화 중에 하나를 골랐어요! 갓 부화한 신동 개미요!"

바이브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러니까 아직도 성체가 아닌 거로군.

나는 좌절감에 사로잡혀 바닥에 엎드렸다.

그럼 이 녀석이 레벨 10이 될 때까지 계속 머리 위에 태우고 다니다가, 또 한 번 특별 코어를 만들어 줘야···

비로소 내게 도움이 된다는 건가!

하하하.

뭐, 엎질러진··· 뭔가를 보고 후회해도 소용없는 일이지.

크리니스는 여전히 내 등 위의 움푹 들어간 부분에 편안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기분은 좀 어때 크리니스?]

[좋습니다, 주인님.]

크리니스가 대답했다.

[진화는 잘 마치셨나요?]

[그럼! 이번에는 아주 훌륭한 보너스도 좀 얻었지!]

[그렇게 많이 변하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주인님.]

크리니스가 촉수 몇 가닥을 뻗어 내 갑각을 더듬으며 말했다.

아마 내 크기를 가늠해 보는 것 같았다.

[이번에는 주로 몸 내부가 변했어! 결코 작은 변화가 아니지!]

내가 자랑했다.

[곧 내가 얼마나 강해졌는지 보여줄게!]

[기대하겠습니다, 주인님.]

정말로 이미 차이가 느껴졌다.

내 정신은 그야말로 힘이 넘쳐서, 마치 중립 기어를 넣은 스포츠카처럼 신나게 웅웅거리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내달리고 싶어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몸 속에 자리잡고 있는 두 개의 보조 뇌도 느껴졌다.

각각 원래 있던 보조 뇌보다 성능이 높았고, 두 개를 묶어서 동시에 하나의 작업을 수행하게 만들 수도 있었다.

내 새로운 능력을 시험해 보고 싶어서 좀이 쑤시는군!

어디 한 번 해볼까!

마나!

변화아아아안!

나는 신이 나서 여태까지 한 번도 성공해본 적이 없는 마나 변환 스킬을 시도했다.

이 과정은 너무 어려워서 솔직히 인간 마법사들이 어떻게 이걸 해내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 전투 중에 말이다!

먼저 코어에서 마나를 끌어낸 뒤, 얇은 실처럼 만들어서 머리 속에 떠오르는 패턴대로 엮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이거 3차원을 넘어선 구조 같은데···

온통 복잡한 고리와 매듭으로 이루어진 정교한 패턴을, 안과 밖에서 동시에 만들어야 했다.

그 말도 안 되는 작업을 계속하자 두통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우··· 음···

음하하하하하!

좋았어!

나는 작업의 상당량을 보조 뇌들에 할당했다.

그러자 두 개의 보조뇌가 서서히 깨어나며 마나를 움직이고 형성하는 부담을 가져갔다.

공조 피질이 마치 현장 감독처럼 두 개의 보조 뇌가 하는 작업이 서로 겹치지 않도록 일감을 분배하고 있었다.

덕분에 보조 뇌들은 톱니 바퀴처럼 딱딱 맞아 떨어지게 돌아갔다.

보조 뇌들에 부하가 느껴지기는 했지만···

원래 있던 보조 뇌보다 훨씬 더 유능하다는 점도 느껴졌다.

단지 영리해졌을 뿐 아니라 의지도 높아져서, 부하를 더 잘 견디고 있었다.

덕분에 내 주 두뇌는 자유로운 상태로 부족한 점을 찾아서 메꿀 수 있었다.

나는 패턴의 전체 형태를 고려하며 여기저기 잘못된 구조를 고치거나 너무 복잡해서 보조 뇌들끼리 처리하기 어려운 부분을 보완했다.

서서히, 몇 분에 걸쳐 정신 마법의 패턴이 완성되어 가자 내 마음 속에 환희가 느껴졌다.

이번에는 정말로 성공하겠는데!

슈퍼 개미 프로젝트

거의 다 되어간다!

나는 그간 이 구조를 만들기 위해 수도 없이 시도했지만, 계속 실패만 할 뿐이었다.

이 빛나는 패턴을 너무 자주 봐서 눈꺼풀 안쪽에 새겨질 정도였다.

물론 난 눈꺼풀이 없지만···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시간이 지나면서 빛의 실이 점점 더 촘촘하게 엮여갔다.

찬란하게 빛나는 패턴이 내 안에서 완성되려 하고 있었다.

드디어···

*우지끈*

아, 젠장···!

신나서 너무 힘이 들어간 나머지, 마나 한 가닥이 제자리를 벗어나고 말았다.

당연하지만 그 결과 전체 패턴이 무너져 버렸고···

그대로 사라졌다.

···

으아아아아!

드디어 성공한다고 생각하니 신이 나서 더 열심히 했을 뿐인데!

이건 내 잘못이 아니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