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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이상한 인생이었다.

처음으로 되돌릴 수 있다면, 어디로 되돌려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는 이상한 인생.

공작 가의 하나뿐인 아들로 태어났는데 밑의 놈들에게 모든 걸 빼앗긴 것도 모자라 추방당했다.

가문에서 내쫓긴 귀족이 할 수 있는 선택지는 그렇게 많지 않다.

그중 가장 나은 선택지는 역시나 자결.

귀족으로서의 품위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었다.

허나 머저리였던 나는 이마저도 하지 못한 채 대륙을 떠돌았다.

그러다 우연히 공작가의 혈통 능력을 각성할 수 있었다.

타인의 재능을 흡수할 수 있는 기괴한 능력.

덕분에 오랜 방랑에 지친 몸을 회복시킬 수 있었지만, 부작용으로 남들과는 다른 사고를 가지게 되었다.

미쳐버렸단 소리다.

혼잣말을 중얼거리게 되고, 말투가 이상해졌으니 미친 게 분명했다.

오랫동안 시달리던 불치병은 나았지만 미치광이 상태로 가문에 돌아갈 순 없었다.

고민하던 나는 결국 방랑을 계속하기로 했다.

그렇게 다시 대륙을 하염없이 떠돌 때였다.

우연히 들려온 소문 하나가 이 결심을 뒤흔들었다.

내 가문.

바이에른 공작가가 멸문했다는 소문이었다.

다급히 공작가로 돌아간 나는 소문이 진짜인지 확인하려 했다.

하나 확인할 거리도 없었다.

여동생은 보이지 않았고 어머니는 싸늘한 시체가 되어 있었다.

그뿐만이 아닌 가문의 모든 것들이 어머니를 죽인 놈들의 손에 들어가 있었다.

그 참혹한 현실에 더욱 미쳐버린 나는 복수의 칼날을 들었다.

다행히 공작가의 혈통 능력 덕에 유의미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공작가를 이렇게 만든 놈들 몇 명의 목을 잘라낸 것이다.

하지만 날 추방하고 가문을 박살 낸 장본인들은 죽이지 못했다.

되려 놈들의 칼에 죽어가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구차하게 가네…."

중얼거림과 함께 나는 웃었다.

정신이 돌아버린 뒤로, 가끔 웃음이 제어되지 않았다.

"죽더라도 어머니와 여동생을 그런 꼴로 만든 놈들은 꼭 죽이고 싶었는데…."

입맛을 다신 나는 고개를 들었다.

비가 내리는 하늘이 보였다.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을 향해 나는 물었다.

차라리 이렇게 죽을 거였다면, 가족들이랑 같이 죽이지 그랬어요, 신님?

기도 비슷한 질문에 대답 대신 가슴팍에서 피가 쏟아졌다.

"…아."

그 순간 엄습해 온 또 한 번의 고통.

나는 점점 감겨 오는 무거운 눈꺼풀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채 결국 정신을 놓고 말았다.

이렇게, 죽은 줄로만 알았다.

"...!"

일주일 전까지만 하더라도.

* * *

아더는 제 몸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과거로 돌아왔네?'

일주일 전, 30살의 아더 바이에른은 15살의 아더 바이에른이 되어버렸다.

그 증거로 상처투성이인 30살 아더의 몸이 아닌, 성장기가 끝나지 않은 얇은 소년의 몸이 보였다.

허나 단순히 몸만 어려진 건 아니었다.

"와아… 제정신으로 돌아왔어?"

미쳐버린 뒤로 줄곧 붉게 물들어 있던 세상이 다시 색감을 되찾았다.

이 사실에 아더는 순수히 놀라 중얼거렸다.

"내 정신병이… 나아졌다고?"

그 어떤 명의도 치료하지 못한 정신병이?

그래서 아더는 자신이 과거로 돌아왔다는 걸 실감 할 수 있었다.

'미친놈이 정상인이 되는 방법은 다시 태어나는 수밖에 없으니깐.'

문제는 어떻게 과거로 돌아왔냐는 것이다.

생각과 함께 다시 고민에 빠져들 때였다.

방문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련님."

집사 세비스찬이었다.

"약 드실 시간입니다."

아더가 정신을 차리고 바보처럼 말을 더듬었다.

이때의 자신은 말더듬이였기 때문이었다.

"네… 에."

"…그래요. 오늘은 기분이 좀 어떻습니까? 도련님?"

늘어진 발음을 용케 알아들은 세비스찬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질문한다.

아더는 조금 전과 같이 말을 더듬으며 답했다.

"기분 좋아요오…."

"다행이군요. 약은 지금 드실 겁니까?"

"나중에 먹고 검사 받을게요오…."

세비스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꼭 드셔야 합니다. 도련님의…. 병을 위해 어렵게 구한 약이니."

아더가 똑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에…."

대답을 들은 세비스찬이 방을 나섰다.

그의 발걸음이 멀어진 것을 확인한 아더는 시선을 돌려 세비스찬이 가져온 약을 바라보았다.

"흠…."

과거에도 그랬지만, 겉보기에는 참으로 평범한 약이었다.

'원인 모를 병으로 말더듬이가 된 내 병을 치료하기 위한 약이지.'

하지만 미래의 경험 덕에 이 약의 진짜 정체를 지금은 알고 있었다.

병을 치료하기 위해 먹던 이 약이 사실은 제 병을 키우던 독약이었다는 걸.

그래서 아더는 약을 집어 들어 발로 으깨버렸다.

콰직-!

가루가 된 약이 방 안에 휘날렸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아더는 턱을 쓰다듬었다.

"세비스찬, 저 인간은 과거나 지금이나 똑같네. 또 똑같이 독약을 들고 오는 걸 보면…."

하긴, 그의 진짜 정체를 생각하면 또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그는 미래 바이에른 공작 가문을 멸문시키는 데 가장 앞장선 가문.

도르문트의 세작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도르문트는 바이에른의 멸문을 지시한 2황자, 칸 마드리드의 가장 충직한 심복이었지.'

이 사실을 모르던 과거의 자신은 배신자가 건네준 약을 매일 같이 받아먹어 말을 더듬는 병신이 되었다.

물론 지금은 그 약을 먹지 않아 말은 더듬지 않았지만 상황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세비스찬은 여전히 독약을 주었고, 제 상태를 매일 체크했다.

독약을 먹지 않는다는 게 언제 들통나도 이상하지 않다는 소리다.

'즉, 그 일이 일어나기 전 집사 세비스찬을 쳐내야 한다는 건데… 어떻게 쳐내야 할까?

지금 당장 가서 죽여버릴까?

고민하던 아더는 흠칫 놀랬다.

"아니지. 더 이상 과거처럼 행동하면 안 돼."

그때야 미쳐 있어서, 물불 가리지 않고 바이에른을 멸문시킨 원수들을 죽여도 상관없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제정신으로 돌아왔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없어.'

눈에 띄어 가면서 세비스찬을 죽일 필요가 없다.

아주 조용히 목을 그어버리거나, 머리를 써 그를 쳐내는 게 가장 좋았다.

'난 이제 미친놈이 아니니깐, 정상인처럼 복수를 해야지. 예전처럼 무식하게 칼만 휘두를 필요가 없어.'

그때 세비스찬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들려왔다.

"도련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도르문트 백작의 셋째 아드님입니다."

상념에 빠져있던 아더가 움찔 몸을 떨며 중얼거렸다.

"빌 도르문트가 찾아왔다고?"

* * *

도르문트 백작의 셋째 아들인 빌 도르문트.

그는 지난 삶에서 죽이지 못했던 원수 중 한 명이었다.

'가장 먼저 죽여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지.'

빌 도르문트는 다른 백작가의 아들보다 능력이 뒤떨어졌지만 교활하고 눈치가 빠른 자였다.

바이에른 가문을 멸망시킨 자들에게 복수하러 다닌다는 소문이 돈 순간 가장 먼저 자취를 감춘 것도 빌이었다.

'죽을 때쯤 나타나서 날 조롱했지. 그때 어찌나 약 오르던지.'

그의 첫째 형과 둘째 형의 뒤에서 비웃음을 날리던 빌의 얼굴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는 아더였다.

그런데 이놈이 제 발로 앞에 나타났다.

"야 벙어리."

자신이 기억하는 그 얼굴과 표정으로.

그 탓에 아더의 표정이 모호해졌다.

'기회? 아니면 함정?'

그토록 찾아 헤매던 원수가 제 발로 등장했지만 죽이기가 참 애매했다.

불과 조금 전까지, 이제는 더 이상 생각 없이 행동하지 않겠다고 다짐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지금 그를 죽여버리면 과거와 별 다를 바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안 죽일 수도 없고.'

고민에 빠진 아더가 턱을 쓰다듬을 때였다.

빌이 이죽거리며 입을 열었다.

"네 여동생은 어딨냐? 개 보려고 왔는데 어디에도 없네? 설마 네가 숨긴 거냐, 벙어리?"

그의 말에 정신을 차린 아더가 탄성을 터트렸다.

'저 벙어리란 말, 참 오랜만에 듣네?'

말을 더듬는 것이 벙어리는 아니지만, 의도적으로 자신을 깎아내리기 위해서 붙인 별칭.

하나 아더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빌 뿐만이 아니라 과거, 자신을 얕잡아 보는 사람들 모두 자신을 벙어리라 불렀기 때문이다.

'말더듬이 공자는 어감이 안 산다고 벙어리 공자라 불렀지.'

그래서 이런 놀림은 아무렇지 않게 넘길 수 있었지만, 빌이 언급한 아이린.

제 여동생은 달랐다.

'굳이 아이린을 언급하네?'

자신이 빌 도르문트를 죽이려던 이유는 제 여동생 때문이었다.

빌 도르문트는 가문이 멸문당하기 전부 항상 제 여동생인 아이린을 탐했고 결국 바이에른 가문이 멸문당하는 날.

제 여동생과 강제로 혼약을 맺었다.

그 후 5년이란 시간이 흘러 아이린은 자살을 했다.

'그게 자살인지, 아니면 녀석의 손찌검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흘러 들려오는 소문으로는 거리에 내쫓기면서 맞았다고 하니깐….'

그래서 아더는 빌을 죽이려 했다.

'미친놈인 나도 원수의 가족은 안 건드리는데 이 자식은 그 선을 넘었어.'

그런데 그 빌 도르문트가 과거로 돌아온 지금, 또다시 아이린을 언급했다.

안 그래도 죽일 이유가 차고 넘치는 녀석인데, 그 와중에 또다시 선을 넘은 것이다.

'…역시 죽여야 하나?'

고민과 함께 아더의 마음이 한쪽으로 기울어질 때였다.

한 가지 좋은 방법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오… 맞아."

"…?"

"죽이는 게 안 된다면, 죽지 않을 정도의 부상은 된다는 거잖아? 그럼 뒷수습도 쉬워질 거고."

아더의 중얼거림에 앞에 있던 빌이 흠칫 놀랬다.

"너? 어떻게 말을 안 더듬…!?"

이 말에 아더가 기습적으로 빌의 발을 세게 걷어찼다.

예상치 못한 일격에 빌이 철퍼덕 엎어졌다.

"…!?"

어안이 벙벙해진 빌이 뒤늦게 발버둥 쳤지만 소용없었다.

어느 사이엔가 자신의 위에 올라탄 아더가 그 움직임을 봉쇄했기 때문이었다.

"무, 뭐?"

놀란 빌이 경악해 소리친 순간, 아더가 고개를 숙였다.

그 순간 높낮이가 없는 목소리가 빌의 귓가로 파고들었다.

"지금부터 오른쪽 눈알을 뽑아낼 건데요 빌. 부디 잘 참아주세요."

제2화

빌이 당황해 소리쳤다.

"너, 너?"

아더가 말을 더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착각인 듯했다.

"…왜요오?"

벙어리 공자는 다시 말을 더듬었다.

이에 빌의 표정이 분노와 당황.

그 외 감정들로 일그러졌다.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괴롭히러 온 '벙어리'한테 이런 모욕을 당하다니?

그래서 화가 나 손을 들어 올렸을 때였다.

'벙어리' 공자가 웃으며 무언가를 들어 올린다.

"…?"

눈을 끔뻑이던 빌이 숨을 참는다.

벙어리 공자의 손에 들린 것이 인간의 '눈알'이었기 때문이다.

"어…?"

말을 흐린 빌이 제 오른쪽 눈을 더듬었다.

하나, 당연히 있어야 할 눈의 감촉이 느껴지지 않았다.

경악한 빌이 입을 벌린다.

'서, 설마?'

빌이 뒤늦은 비명을 지르려 했다.

하지만 아더가 먼저 움직였다.

입고 있던 옷을 벗어젖힌 아더는 소리를 지르려는 빌의 입속에 그 옷을 박아 넣었다.

"으으으읍!"

말문이 막힌 빌이 반항을 시도했지만, 소용없었다.

어떤 방법을 썼는지 몰라도 아더의 몸은 돌덩이처럼 무거웠다.

3살이나 많은 자신이 이겨내지 못할 정도로.

그 사이 아더는 주먹을 말아 쥐고 있는 힘껏, 빌의 오른쪽 뺨을 때렸다.

퍽!

경쾌한 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아더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힘이 약해서, 타점이 정확하지 않네.'

아무래도 몸 상태가 완벽하지 않은 탓인 것 같았다.

그래서 빌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억지로 뜯어내 오른쪽 손으로 말아 쥐었다.

'구심점이 있으면 부족한 악력이 어느 정도 채워지겠지.'

생각과 함께 다시 주먹을 내질렀다.

그러자 조금 전보다 명쾌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퍽!

퍽!

퍽!

빌이 발버둥 쳤지만 여전히 몸은 움직여지지 않았다.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그 속에서 공포를 느낀 빌이 눈물을 머금었다.

허나 이 눈물은 아더의 폭력성을 더욱 자극했다.

퍽! 퍽! 퍽!

주먹질이 더욱 거세진다.

그 덕에 콧등이 내려앉고 두 앞니가 빠져 바닥을 뒹굴었다.

피는 말할 것도 없었다.

"으으으으읍!"

결국 눈치 빠른 빌이 우는 것을 멈추고 애원하기 시작했다.

흉측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비는 꼴이 퍽 불쌍했지만, 아더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 봐달라고 비는 건가?'

과거의 자신을 괴롭힐 때는, 그렇게 애원해도 단 한 번도 주먹질을 멈춘 적이 없던 놈이?

'에이… 사람이면 그럴 리가 없지. 적어도 양심이란 게 있다면 말이야.

그래서 착각이라 치부하며, 다시 주먹질을 시작했다.

퍽-!

결국 그 주먹질이 멈춘 것은, 빌이 기절한 직후였다.

마지막으로 기절한 빌의 뺨을 때린 아더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몸 상태가 안 좋기는 하네. 고작 이 정도로 숨이 차다니."

이 말과 함께 땀에 전 앞머리를 쓸어 넘긴 아더가 시선을 돌렸다.

조금 전 주먹질에 의해 끔찍한 몰골이 된 빌이 보였다.

그 모습을 한동안 지켜보던 아더는 진지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확실히 정상으로 돌아오긴 했나 보네… 죽이지 않고 눈만 뽑아낸 걸 보면."

예전의 자신이었다면 곧바로 빌을 죽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자신은 얌전히 눈알만 빼내었다.

이 차이는 생각보다 컸다.

'죽였다면 뒷수습을 못 했겠지만, 죽이지 않았으니깐,뒷수습은 가능하잖아?'

지금 당장의 울분도 풀고, 실리도 챙기고.

과거의 일들을 생각하면 이건 엄청난 발전이었다.

"제정신으로 돌아오니깐, 일이 이렇게 쉬워진다고?"

혀를 내두른 아더가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바닥에 굴러다니던 빌의 눈알이 보였다.

그 눈알을 집어 든 아더가 기절한 빌의 눈꺼풀을 들어 올려 억지로 끼워 넣었다.

"…!"

기절한 와중에도 고통은 있었는지 빌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사이 눈알이 잘 들어갔는지 확인한 아더가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이 정도로 뒷수습을 하기에는 부족하겠지?"

그래서 조금 더 원만한 싸움으로 보이기 위해, 방법을 강구 할 때였다.

문득 한 가지 의문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고 보니… 내 혈통도 돌아왔으려나?"

아더가 턱을 쓰다듬으며 떠올렸다.

바이에른의 숨겨진 혈통 능력.

다른 혈통의 능력을 강탈할 수 있는 비정상적인 능력.

과거, 절반의 복수를 이루게 해주었던 그 축복받은 능력이 돌아왔는지 이제껏 확인을 안 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확인을 못 하고 있었던 거지… 능력을 활용할 수 있다는 걸 확인하기 가장 좋은 방법은 다른 혈통을 들이마시는 거니깐.'

그런데 우연인지 몰라도, 지금 쓰러진 빌이 마침 혈통의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도르문트 가문은 뛰어난 정령술사들을 배출해낸 집안으로 유명했지?'

생각과 함께 아더가 입꼬리를 올렸다.

그 후 몸을 움직여 줄줄 흘러나오는 빌의 피를 손바닥에 담는다.

그 양이 한 움큼 정도 모인 순간, 제 손에 모인 고인 핏덩이를 호로록 들이마셨다.

"…!"

식도를 타고 넘어가는 비릿한 맛에 현기증이 핑하고 돌았다.

하나 아더는 그것을 이겨내고서 가만히 눈을 감는다.

그 순간 바이에른 가의 축복받은 혈통이 깨어나, 도르문트의 피를 폭력적으로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오… 혈통 능력도 깨어 있었구나.'

중얼거림과 함께 아더가 다시 눈을 뜬다.

그러자 조금 전에는 보이지 않던 정령 하나가 창가의 화분에 몸을 숨기고 있는 게 보였다.

"안녕하세요?"

[…]

"제 이름은 아더예요. 당신 이름은요?"

물음에 정령은 대답이 없었다.

보통 정령 보인다면, 대화가 가능했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뭔가 잘못됐나?'

턱을 쓰다듬던 아더가 곧 어깨를 으쓱였다.

'뭐 상관없으려나… 중요한 건 바이에른 혈통 능력이 깨어 있다는 것. 그리고 현 시점에서 빌 도르문트의 혈통 능력인 정령술을 빼앗았다는 것.'

그리고 정령술은 치료에 탁월한 효과를 보였다.

물의 정령의 치료술은 신관의 사제보다 더 뛰어난 치유력을 보유했기 때문이었다.

아마 현재 망가진 제 몸 상태도 충분히 치료할 수 있을 것이다.

"와… 제정신으로 돌아오니깐 운도 좋아졌네. 일이 이렇게 술술 풀린다고?"

고개를 끄덕인 아더가 거울 맞은편에 섰다.

'남은 건 깔끔한 뒤처리. 하지만 이것도 문제없지.'

거울에 비친 저를 잠시 바라보던 아더는 주먹을 말아쥐었다.

그리고 오른쪽 뺨을 내리쳤다.

퍽!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피가 흘렀다.

그런 제 얼굴을 쓰다듬은 아더가 중얼거렸다.

"으음… 비등한 애들 싸움처럼 보이려면, 더 때려야겠지, 아마?"

* * *

"빌!!!"

평화롭던 바이에른 가문에 난데없는 사건이 터졌다.

"도, 도련님!"

그 중심에는 바이에른 가문의 벙어리 아더 바이에른과 도르문트 가문의 셋째 아들이 있었다.

"이게 도대체…."

사건이 일어났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달려온 카나 도르트문트 부인은 방 안의 참상을 바라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

온통 피바다였다.

누구의 피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로, 새하얀 대리석이 피로 물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대리석 위에 제 아들이 게거품을 문 채 쓰러져 있었다.

"으아아아앙!"

그 옆에서 울음을 터트리는 아더 바이에른!

이에 화가 난 카나 도르문트가 소리쳤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공자님!!"

"으아아아앙!"

"이게 무슨 일이냐고요!!!"

하지만 빌과 마찬가지로 온몸이 피투성이인 아더는 그녀가 원하는 대로 사건의 해명을 해주지 않았다.

그저 울음만 연신 터트릴 뿐이었다.

결국 화를 참지 못한 카나가 몸을 일으켜 아더에게 다가갈 때였다.

현 바이에른 공작가의 주인이 방 안에 들이닥쳤다.

"아더?"

"엄마아!"

요넬 바이에른의 등장에 카나 도르문트가 멈칫하며 물러섰다.

"우리 아들. 무슨 일이니?! 얼굴은 또 왜 이렇고?"

"그, 그게…."

요넬의 등장에 아더가 그제야 대답했다.

"혀, 형이 때렸어요오…."

물론 그 대답은 알아듣기 어려웠다.

늘어진 발음 때문이었다.

하지만 요넬은 용케 알아듣고서 질문했다.

"빌 도르문트 공자가 때렸다고 너를?"

"네에에…."

"왜 때렸니?빌 도르문트 공자가 먼저 널 때린 거니?"

"네에에. 그러다아아… 참기가 힘들어서 같이 때렸어요오."

방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고, 기절한 빌을 바라본다.

"…우리 아들을 때렸다고?"

요넬 바이에른이 중얼거림에 카나 도르문트가 움찔 놀란다.

그러나 곧 정신을 차리고 소리친다.

"공작 각하! 단순한 싸움이라 보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빌은 도르문트의 막내였고, 카나 도르문트는 그 막내를 꽤 편애하는 편이었다.

다른 형제들에 비해 뒤처져 항상 구박을 받는 탓이었다.

그런데 그런 빌이 기절을 한채 피를 흘리고 있으니 그녀가 흥분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나 평소 온화하기 짝이 없던 요넬 바이에른의 노한 목소리에 그녀의 기세는 금방 수그러들었다.

"그럼 말해 보세요. 단순한 싸움이 아니면 뭡니까?"

"그, 그건…."

"설마 제 아들과 빌 공자가 목숨을 건 결투라도 했다는 겁니까?"

"각하!"

"소리 높이지 마세요. 제 아들 놀랩니다."

카나 도르문트가 움찔 놀라며 결국 고개를 숙인다.

망해 가는 공작가라 하지만 어찌 되었건 공작가.

그 공작가의 주인 앞에서 카나 도르문트는 일개 백작가의 부인일 뿐이었다.

"세비스찬. 빌 공자를 의원에게 데려가게."

"알겠습니다."

"카나 부인은… 나중에 나랑 면담 좀 하고."

순식간에 상황을 정리한 요넬 바이에른은 모든 사람이 방 안을 빠져나간 뒤에야 표정을 풀고서 고개를 돌렸다.

"내 사랑스러운 아들아. 정말로 빌과 싸운 거니?"

물음에 아더가 눈물을 그치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에에."

"왜 싸운 것이니?"

"저를 때렸어어요오…."

요넬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사실인 거지?"

"네에에."

"...."

요넬은 잠시 말이 없었다. 아더는 살짝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로 돌아오기 전, 지금 시기에 요넬에게 자신은 한없이 유약한 아들에 불과했을 터.

하루아침에 남의 눈알을 뽑아버릴 정도로 성격이 변했다면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예상 밖이었다.

"잘했다. 우리 아들. 그래… 어디 가서 맞는 것보다 차라리 때리는 쪽이 낫지."

"…?"

"이제 보니 기개가 있구나. 3살이나 많은 형과 싸워서 이기고."

예상치 못한 요넬의 대답에 아더가 잠시 눈을 끔뻑였지만, 곧 웃음을 터트렸다.

"헤헤…."

"나중에 커서 좋은 기사가 될 것 같구나, 우리 아들은."

그런 어미의 위로에 아더가 미소지었다.

순수한 웃음에 요넬도 방긋 미소 지었다.

"방 안에서 치료받거라. 어디 아픈 데 있으면 꼭 말하고."

"엄마 어디 가요오?"

"빌 공자에게 갔다 오마. 다시는 우리 아들에게 접근하지 말라고 내 일러야지."

아더가 고개를 끄덕이자 요넬이 방 안에 들어온 의원들과 자리를 바꾸었다.

그 후 의원에게 스스로 낸 상처를 치료받으며 생각했다.

'잘 마무리가 됐네. 흠… 그런데 이 편견이 도움이 되는 날도 오는구나.'

만약 아더. 자신이 이런 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편견이 없었다면 절대로 이렇게 넘어갈 리가 없었다.

아무리 스스로의 얼굴을 때려놔 망가트렸다 하지만, 빌의 상태가 너무 좋지 않았으니.

하지만 빌의 상태를 저런 꼴로 만든 게 벙어리라 불리는 자신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안 그래도 말을 더듬는 탓에 공작가의 하나뿐인 후계자임에도, 연민의 시선을 받는다.

그런 자신에게 두들겨 맞았다는 건, 어떻게 보면 벙어리보다 못한 놈이 되어버린다는 소리.

체면을 신경 쓰는 귀족가의 특성상, 이 일은 크게 문제 잡히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아더는 욱신거리는 뺨의 고통에 신음을 냈다.

사건이 두 소년의 주먹 다툼 정도로 보이게 하도록 피를 냈는데, 그 과정에서 입 안이 찢어진 듯했다.

"도련님 많이 아프십니까?"

"…쪼금 아파요오오."

"이런. 입 안까지 찢어지셨군요. 한번 봅시다."

"아아아아."

아더의 입 안을 진찰하던 의원이 눈치를 보다 불쑥 칭찬했다.

"그런데 우리 도련님. 진짜 대단하네요. 체구도 작은데 빌 도련님이랑 싸움해서이기고."

아더가 웃었다.

"저 강해요오오."

"맞습니다. 인제 보니 도련님이 빌 공자보다 훨씬 강하시군요. 다시는 빌 공자가 도련님 방에 들어올 일은 없을 겁니다!"

옆에 있던 의원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다툼을.... 칭찬하기는 그렇지만, 그래도 남자가 기개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맞아요. 잘하셨습니다, 정말로!"

의원들의 말에 아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서 뽑아줬어요!! 눈알… 랄"

"…뭘 뽑았다고요?"

"눈알… 랄!!"

의원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더 바이에른이 무언가 열심히 말하기는 했는데, 늘어지는 발음 탓에 그 뜻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허나 깊이 고민하지 않았다.

아더 바이에른은 가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곤 했으니까.

그래서 평소처럼 적당히 맞장구만 쳐 주며 상처의 치료에 전념할 때였다.

카나 도르문트의 새된 비명이 저택 전체에 울려 퍼졌다.

"비이이일---!! 눈, 눈이 왜 눈이 빠져…!"

깜짝 놀란 의원들이 방문을 바라본다.

그러다 한 의원이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돌렸다.

"헤헤!"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는 아더가 보였다.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의원은 조금 전 아더의 말을 떠올렸다.

'설마 조금 전 눈알랄이… 눈알은 아니겠지?'

고민 끝에 그는 곧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세상 어떤 사람이 눈알을 뽑아내고 저렇게 천진난만하게 웃는다 말인가?

그런 놈이 있다면, 아마 제대로 미친놈일 것이다.

그리고 아더 바이에른은 미친놈이 아니었다.

'바보지만 세상에서 가장 착한 귀족가 도련님.'

그게 바로 바이에른 가문의 하나뿐인 후계자.

아더 바이에른이었다.

제3화

현재 가장 영향력 있는 귀족이자, 제국 남부를 책임지는 도르문트 백작.

그의 망나니 아들이 애꾸가 되었다는 소문에 제국의 수도가 들썩였다.

"도르문트 백작가의 빌 공자가 두들겨 맞았다지?"

"뭐? 그 도르문트 백작가의 공자가 두들겨 맞았다고?"

"누가 그 도르문트의 백작가의 공자를 건든단 말이오?"

이목이 쏠리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의 망나니 아들 빌 도르문트의 기행은 수많은 귀족가의 자제 중에서도 악명이 자자했으니.

그 탓에 가십거리를 좋아하는 기자들과 귀족들이 다급히 소문의 진원지를 파헤칠 때였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이 소문에 등장했다.

"바이에른 공작가의 소공자가 그랬다는데?"

"바이에른 공작가의 소공자가?"

"아니… 바이에른 공자는, 장애가 있지 않으셨던가?"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바이에른의 공자에게 두들겨 맞았다고?"

사건의 원인에 모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벙어리 공자가, 어떻게 빌 도르문트를 애꾸로 만든단 말인가?

그래서 왜곡된 추측들이 난무할 때였다.

요넬이 히죽히죽 입꼬리를 올리며 제 아들을 바라보았다.

"…우리 아들 덕에 내가 풍문으로나마 그 도르문트 백작을 이겨보는구나."

"응? 오빠가 뭘 했길래 엄마가 그 무서운 사람을 이겨요!"

"씁. 아이린. 무서운 사람이 아니라고 내가 몇 번을 말했니!"

"이잉…. 하지만 무서운 건 무서운 건데요."

그런 둘의 대화에 끼어든 아더의 여동생.

아이린 바이에른의 말에 요넬이 웃음을 터트렸다.

옆에 있던 아더도 똑같이 미소지었다.

'여전히 귀엽네, 아이린은.'

과거로 돌아와 유일하게 좋은 점이 있다면 바로 가족들과 다시 식사를 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내가 가장 바라 왔던 소중한 시간…하지만 이대로 오래 가지 못하겠지.'

과거로 돌아왔지만 바뀐 것은 없었다.

바이에른 가문은 여전히 무너져 가고 있었고, 집 안팎을 가리지 않고 배신자들이 들끓었다.

'가만히 두었다가는, 가문은 또다시 멸문할 거야.'

그리고 가문을 잃어버린 귀족의 최후는 죽음, 혹은 죽음에 가까운 치욕뿐이다.

당연하게도 아더는 그 일을 지켜만 보고 있을 생각이 없었다.

그 미래를 막는 것은 물론이고, 가능하다면 그 일의 원인이었던 인간들을 모조리 죽여버릴 생각이었다.

'후환을 없애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그 싹을 잘라놓는 거지.'

그리고 그 후환 중, 가장 위협적인 인물은 역시나 제 옆에 있는 집사.

세비스찬일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한 아더는 입을 열어 소리쳤다.

"스테이크 더 주세요오, 집사니임!"

상념에 빠져있던 세비스찬이 움찔 놀란다.

허나 곧 정신을 차리고 한 박자 늦게 아더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그런 세비스찬의 행동을 유심히 지켜보던 아더는 중얼거렸다.

'케인 도르문트… 바이에른 가문을 멸망시킨 장본인 중 한 명. 그 인간이 이번 일의 보복을 해 온다면 분명 세비스찬을 통해 걸어올 텐데….'

문제는 이 인간을 어떻게 쳐내냐는 것이다.

고민과 함께 세비스찬이 가져온, 스테이크를 잘라 먹으려 할 때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요넬이 아더의 옆으로 다가온다.

"우리 아들. 엄마가 잘라줄게."

"네에!"

"잘 먹어야 없던 병도 나을 수 있지. 우리 아들 싸움 실력을 보니 이 병만 나으면 대단한 기사가 될 수 있을 거야."

요넬의 농담에 식당에 있는 모두가 웃음을 터트렸다.

세비스찬만 빼고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아더가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소리쳤다.

"엄마아!"

"응?"

"저 소원이 있어요오!"

"소원?"

요넬의 두 눈이 크게 치켜 떠진다.

그 사이 아더가 눈빛을 반짝이며 부탁한다.

"하이넨 호수에 가고 싶어요오!"

* * *

아더가 외출을 하고 싶다는 의사를 내보인 뒤 2주가 흘렀다.

"외출이라…."

공작으로서의 업무를 쳐내며, 이 사안에 관해 고민하던 요넬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평범한 아이였다면, 외출 정도로 이렇게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15살의 소년이 집 안보다는 밖을 좋아하는 건 당연한 일이니.

허나 제 아들 아더 바이에른은, 장애가 있었다.

말을 더듬고, 또래 소년보다 지능이 떨어졌다.

그 탓에 외출 하나로도 크게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장애가 있다 하여 집 안에만 있는 게 옳을까? 라는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갑갑할 테지…. 종일 집 안에만 있으니. 거기다 처음으로 무언가를 하고 싶다고도 했고.'

아더는 순한 아이였다.

그게 장애 때문인지, 지능이 낮아서인지는 몰라도 천성적으로 착했고 누구에게나 웃음을 보였다.

그래서 보통 아이들과 달리, 무언가를 요구하지 않았다.

항상 남들의 기분을 살피는 탓에 상대방에 최대한 맞춰 주려고 배려한 것이다.

그런 아이가 장애가 생겨난 뒤로 처음으로 무언가를 요구했다.

항상 '네'라는 대답만 하던 아이가 무언가를 하고 싶다 소리친 것이다.

어미의 입장에서 이 요구를 들어주지 못한다는 건 가슴이 찢어지는 일이었다.

"그래. 외출 정도야…. 거기다 하이넨 호수라면 바로 근처니."

요넬이 결심하고서 아더의 외출을 허락했다.

준비는 곧바로 됐다.

"우리 아들. 조심히 갔다 오렴."

"엄마…는요?"

"엄마는 할 일이 많아서 같이 못 가겠구나. 대신 네 여동생, 아이린이랑 같이 갔다 오렴."

아더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에! 갔다 올게요, 엄마아!"

"그래…. 가서 오랜만에 즐겁게 놀다 오려무나. 필요한 거 있으면 세비스찬에게 말하고."

요넬이 눈짓한다.

대기하고 있던 바이에른의 기사들이 아이린과 아더의 곁으로 다가갔다.

기다렸다는 듯, 고급 리무진에 시동이 걸렸다.

휘이이잉-!

마력 엔진이 가동되는 소리에 아이린이 좋아라 하며 웃음을 터트렸다.

입가에 미소를 건 채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더는 중얼거렸다.

'드디어 정령과 계약하는구나.'

며칠 전 빌 도르문트의 혈통 능력을 흡수한 아더는 전에는 보이지 않던 정령을 볼 수 있게 되었다.

허나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몰라도 계약은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원인을 아더는 장소 때문이라 짐작했다.

'정령들과의 계약하기 위해서는 자연과 가까이에 있는 게 정석이지.'

그래서 어머니에게 부탁해 하이넨 호수로 나들이를 나온 것이었다.

제국의 수도 인근 호수 중, 가장 큰 하이넨 호수라면 아마 충분히 정령과 계약할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오늘 나들이의 목적을 떠올린 아더가 고개를 들었다.

때마침 하이넨 호수에 도착했는지, 리무진이 멈추고 문이 열렸다.

"오빠!! 어서 가자!"

신이 난 여동생의 외침에 아더가 고개를 끄덕였다.

뒤따라온 가신들과 기사들은 재빠르게 하이넨 호수 주변을 점검했다.

수도 근처 외각에 위치한 호수라고는 하지만, 어찌 되었건 도심이 아니다.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충분했다.

그 탓에 경계 태세가 완성되고서야 바이에른 가문 남매의 나들이가 시작됐다.

"오빠 꽃이야-! 이 꽃의 이름은 뭘까?"

"글세… 하지만 이쁜 꽃이네에."

"그래? 이거 오빠 머리에 달아 줄까?"

아더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린이 기다렸다는 듯 아더의 귓가에 머리를 꽂아준다.

꽃을 꽂은 아더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아이린이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오빠 이쁘다!"

기분 좋은 웃음에 아더도 방긋 웃었다.

그때 자리에서 일어난 아이린이 아더를 잡아 이끈다.

"저기 가 보자!! 하이넨 호수!"

아더는 거부하지 않았다.

애초에 이곳에 온 목적이 저 호수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아이린의 뒤를 졸졸 따라 호숫가로 다가갔다.

"와아…. 진짜 맑다 이 호수."

"응 맑아 보이네에."

"그래서 오자 한 거지 오빠? 이 호수가 이뻐서!"

"응. 맞아아."

아이린과 대화하며 아더가 은근슬쩍 물에 손을 담갔다.

눈치 빠른 아이린이 다급히 소리쳤다.

"들어가면 안 돼 오빠! 위험해!"

아직 어린 아이린이었지만 제 오빠가 장애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더가 호수에 빠질까 제지하려 했지만 아더가 먼저 움직였다.

"괜찮아. 아이리이인."

아이린이 눈을 치켜뜨며 제 머리 위에 얹어진 아더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 틈을 타 아더는 중얼거렸다.

'물의 정령님 계신가요?'

나직한 부름.

허나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래서 아더는 제 몸속에 각인된 혈통의 힘을 일깨웠다.

그 순간 묘한 떨림과 함께 도르문트 혈통을 잡아먹은 바이에른의 혈통이 깨어났다.

그 속에서 아더가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물의 정령님 계신가요? 계시면 대답 좀 해주실래요?'

아더의 물음에 호숫가에 옅은 진동이 일어난다.

그 이변에 아더가 눈빛을 빛낼 때, 작은 요정이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당신이 절 부른 건가요?]

아더가 입꼬리를 올렸다.

정령이 나타난 걸로 모자라 대답까지 한 걸 보니 역시 장소가 문제였던 모양이었다.

여기까지 생각한 아더는 물의 정령을 향해 물었다.

'네. 혹시 저랑 계약해 줄 수 있나요 운디네?'

운디네가 새초롬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계약이요? 전 아직 당신 이름도 모르는데요?]

'앗! 마음이 급한 나머지 실수했네요. 사과할게요. 운디네.'

아더가 고개를 숙이며 정중히 사과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운디네의 새초롬한 눈가가 풀어진다.

숙였던 고개를 든 아더가 다시 질문했다.

'제 이름은 아더 바이에른이에요. 이제 계약할 수 있나요?'

[…?]

운디네가 눈을 끔뻑였다.

뭐지 이 인간?

* * *

세비스찬은 물장구를 치는 바이에른 가의 남매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애매하게 됐군… 애매하게 됐어.'

그는 오래전 도르문트의 현 가주인 케인 도르문트에게 거두어진 농노였다.

그러나 바이에른 가를 살펴보라는 도르문트의 명 아래 바이에른 가의 집사로 임명받으며 인생 역전을 일궈냈다.

하지만 며칠 전 있었던 일로, 이 성공한 삶이 부서질 위기에 처해 있었다.

벙어리인 아더 바이에른이 빌 도르문트를 무참히 두들겨 패는 바람에 현 가주의 부인, 카나 도르문트가 말도 안 되는 부탁을 해 온 것이다.

'그 반병신을 아예 병신으로 만들어 버리죠.'

'예? 하지만 마님....'

'그 벙어리 덕에 제 아들이 애꾸가 됐어요! 가만히 있으면 수도에 있는 귀족들이 저희 가문을 뭐라 보겠어요? 반드시 보복해야 해요!'

화가 난 카나 부인을 말리는 건 불가능했다.

그녀는 자신의 바람을 들어주지 않을 시, 압박을 가할 것이라 협박까지 했다.

그리고 이 협박은 세비스찬에게 있어서 치명적이었다.

남부럽지 않은 삶을 영위하고 있지만, 두 가문 사이에서 하는 이 아슬아슬한 줄타기는 항상 그의 마음을 옥좨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카나 부인의 협박은 심기를 어지럽히기에 충분했다.

'어차피 케인 도르문트. 내 주인님께서는 일이 틀어질 경우, 날 바로 잘라 낼 거야.'

제아무리 아끼는 자라도, 실수했을 때면 가차 없이 버려버리는 피도 눈물도 없는 남자.

그런 남자가 정체가 발각되었음에도 자신을 두둔해 주리라는 건, 지나친 희망이었다.

여기까지 생각한 세비스찬은 물장구를 끝내고 일어나는 아더 바이에른을 바라보았다.

'그러게 병신처럼 쭉 살지, 왜 사고를 치셨습니까. 병신이면 병신답게…. 그렇게 살았으면 일이 이렇게 커지지 않았을 텐데.'

품속의 독약을 매만지며 어린 주인의 어리석음을 탓한 그는 결심을 굳혔다.

일주일 뒤.

아더 바이에른은 반병신이 아니라 진짜 병신이 될 것이다.

자신의 손에 의해.

제4화

바이에른의 저택으로 돌아가는 길.

아더는 제 무릎을 베개 삼아 잠든 아이린의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이쁜 아이네요 아더!]

어깨 위에 앉아있던 운디네가 방긋 미소 지었다.

아더 또한 미소지으며 중얼거렸다.

'응. 이쁜 아이지.'

대답과 함께 아더가 손가락을 내민다.

쪼로롱 날갯짓한 운디네가 그 손가락 위에 걸터앉는다.

그리고 이런저런 잡담을 시작했다.

처음 본 순간 갑자기 계약하자고 해서 무례한 사람인 줄 알았다느니.

그래도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았다느니.

생각 이상으로 수다스러운 물의 정령이었다.

'흠… 뭐 계약은 했으니깐 이 정도 수다쯤이야.'

예상대로 계약이 되지 않았던 건 장소의 문제였던 모양이었다.

하이넨 호수까지 나와서야 운디네하고 계약을 맺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 계약은 꽤나 많은 걸 시사했다.

'운디네 능력이라면 독에 중독된 몸을 치료할 수 있어.'

그렇게 되면 무려 과거보다 몇 년이나 앞서 몸을 치료하는 것이다.

'검만 10년을 휘둘러도 차이가 나는데, 몸을 치료한 게 십수 년이나 먼저면 어마어마한 차이지.'

생각과 함께 아더가 오늘의 이룬 성과에 미소를 지었을 때, 내달리던 리무진이 점차 그 속도를 늦추었다.

동시에 바이에른 가문의 장엄한 저택이 시선에 들어왔다.

잠든 아이린을 깨워 저택 안으로 들어선 아더는 요넬과 즐거운 저녁 식사를 가졌다.

"다음에는 다 같이 가보자꾸나. 맛있는 음식과 돗자리를 들고서 말이지."

그렇게 하루 일정을 마친 아더는 방안으로 들어와 기지개를 켰다.

과거로 돌아온 날부터 오늘까지, 가장 긴 일정을 소화한 것 같았다.

그 감상과 함께 방 안을 기웃거리는 운디네를 향해 질문했다.

"운디네. 혹시 내 몸 상태가 어때 보여?"

운디네가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 잠시 시선을 좁히며 아더를 바라보다, 놀라 소리쳤다.

[…아니 아더. 도대체 뭘 했길래 몸이 이런 거예요?]

"상당히 나쁘지?"

[네! 나쁜 편이 아니라…. 완전히 망가져 있어요!]

"그래서 치료하고 싶은데, 할 수 있을까? 운디네의 능력이면 치료할 수 있다 들었거든."

운디네가 망설이다 대답했다.

[…아직 아더와 저와의 유대감이 깊지 않아서, 완벽한 치유는 힘들어요.]

"그럼?"

[대신 꾸준히 치료는 할 수 있어요!]

아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청량감이 몸 전체를 훑고 지나간다.

'흐음…. 사제들의 신성력하고는 뭔가 다른 기운이네.'

중얼거림과 함께 아더가 입꼬리를 올린다.

느리지만 아주 조금씩 나아지는 제 몸 상태를 느낀 것이다.

그 속에서 아더는 작은 탄성을 터트렸다.

'빌 도르문트… 그 사람이 이런 도움을 다 주고, 참 별일이야.'

생각과 함께 아더가 고개를 든다.

어느 사이엔가 치료를 끝내 운디네가 속삭였다.

[아더. 저기 땅의 정령 노움이 보이는데요?]

"어디?"

[저기 화분에요. 안 보여요?]

이 말에 아더가 고개를 돌린다.

며칠 전 빌을 두들겨 팼을 때 보았던, 정령이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었다.

운디네가 쪼로롱 날아가, 그 정령의 손을 잡는다.

[노움! 왜 거기 숨어 있어? 이리로 와!]

[…!]

[…싫다고? 왜? 아더 때문이야?]

[…!]

[아더는 착한 사람이야! 괜찮아!]

노움이 고개를 젓는다.

그 완강한 거부 의사에 운디네가 당황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부끄럼이 많은 땅의 정령이라 할지라도, 이상하리만치 완강한 거부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아더는 상황 파악을 하고서 씩 미소지었다.

'인제 보니 알겠네. 왜 저 정령님과는 계약하지 못했는지.'

정령들은 대부분 매우 온화하고 평화를 지향했다.

그중에서도 땅의 정령은 이런 성격이 더욱 두드러졌다.

그러나 며칠 전 빌을 두들겨 패던 자신의 모습은, 그 평화와 온화함에서 많이 벗어나 있었다.

'그래서 곤란하네. 운디네한테 쓸데없는 소리를 할 수 있으니깐.'

몸을 치료할 때까지 운디네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던 아더는 고민하다 손짓했다.

"노움 씨. 여기로 와 볼래요?"

[…!]

"가지 않으면 제가 갈게요."

노움이 깜짝 놀라며, 아더의 앞으로 후다닥 다가온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운디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노움이 왜 이렇게 겁을 먹었죠? 이상하네….]

그 사이 노움과 시선을 마주친 아더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날의 일은 우리 둘만의 비밀이에요. 알았죠?"

[…!]

"운디네가 절 싫어하면 안 되니깐 말이에요. 지켜 줄 수 있죠?"

웃으며 제안하는 아더의 얼굴에 노움이 날개를 떨었다.

지금 미소 짓는 얼굴이 꼭, 그날 한 인간을 두들겨 패며 짓던 미소와 똑같았기 때문이었다.

'대, 대답 안 하면 나도 때릴지 몰라….'

겁에 질려 고개를 끄덕이자 만족스러운 미소를 입가에 건 아더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런데 노움 씨는 무슨 능력을 가지고 있어요?"

[….]

"땅의 정령은 부끄럼이 많아서 계약하신 분들은 많이 못 봤거든요. 괜찮다면 말해 줄 수 있어요?"

어느 사이엔가 날아온 운디네가 대신 대답했다.

[노움은 많은 걸 구별할 수 있어요!]

"어떤 걸?"

[먹어도 되는 것과 먹지 말아야 할 것! 그리고 냄새도 잘 맡아요!]

아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별로 쓸모가 없는 능력이네?"

[….]

"그것 말고 다른 능력은 없어?"

운디네가, 당황하며 중얼거린다.

[그, 글쎄요? 노움 뭔가 다른 걸 할 줄 알아요?]

운디네의 물음에 노움이 대답하지 못하고, 날개를 퍼덕일 때였다.

방문 너머로 세비스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련님. 약 드실 시간입니다."

아더가 입가에 걸린 미소를 거두며 대답했다.

"들어오세요오!"

아더의 허락에 세비스찬이 평소와 같이 약으로 위장한 독약을 들고 왔다.

"오늘 나들이는 어떠셨습니까?"

"좋았어요오!"

아더의 대답에 세비스찬이 방문을 나서려다 멈칫했다.

도련님, 약 꼭 드셔야 합니다."

당부에 아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오!"

대답을 들은 세비스찬이 천천히 방을 나섰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아더는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저 사람은 진짜 꾸준하네. 매일 독약을 들고 오고.'

생각과 함께 세비스찬이 들고 온 약을 부수기 위해 집어 들었을 때였다.

침묵하던 노움이 갑작스레 소리쳤다.

[…!]

아더의 옆에 있던 운디네도 놀라 소리쳤다.

[아더! 그거 먹으면 안 된대요!]

"왜?"

[노움이 그건 인간이 먹어서는 안 되는 거래요!]

아더가 눈을 치켜떴다.

"독약을 알아볼 수 있는 거야?"

[…제가 말했잖아요! 노움은 어떤 냄새든 맡을 수 있다구!]

운디네의 대답에 아더가 시선을 돌려 노움을 바라보았다.

낮게 가라앉은 그 시선에 노움이 놀라 몸을 떨 때였다.

입꼬리를 올린 아더가 불쑥 제안했다.

"저기요 노움 씨? 혹시 저랑 계약하실래요?"

* * *

정령들의 능력은 뛰어났다.

아더 자신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을 정도로.

'쓸모가 많아 아주 여러모로.'

물의 정령 운디네는 몸을 치료할 뿐만이 아니라, 물과 관련된 간단한 마법도 구사할 수 있었다.

전문적인 마법사만큼은 아니었지만, 지금의 아더에게는 더없이 필요한 능력이었다.

허나 운디네의 능력만이 쓸모있는 건 아니었다.

어젯밤 계약한 노움의 능력 또한, 여러모로 쓸모가 많았다.

'독을 구분해 낸다는 건…. 꽤나 탁월한 능력이지. 특히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현재 제 상태는 굉장히 불안정했다.

정령과 계약을 했다지만, 허약한 몸 상태는 변하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도르문트 백작이 작정하고 손을 쓴다면 속절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

'도르문트 백작의 성격상, 일을 급하게 서두를 것 같지는 않지만 또 모를 일이지.'

케인 도르문트 백작은 평판을 굉장히 중요시하게 여기는 남자였다.

출세를 위해 가문을 버리고 도르문트 백작가로 들어갔을 때 생긴 자격지심인지 몰라도 말이다.

그 탓에 눈에 띄는 수작질은 부리지 않을 테지만, 반대로 눈에 띄지 않는 수작질은 얼마든지 부릴 남자였다.

그중 하나가 바로 독약이었다.

지금도 꾸준히 약으로 위장해 아더 자신에게 먹이고 있었지만, 저번 일로 인해 언제 이보다 강한 독약을 음식에 탈지는 몰랐다.

'그런 와중에 독을 알아차리는 노움의 능력까지…갑자기 운이 너무 좋아진 거 아니야?'

생각과 함께 아더가 노움을 칭찬했다.

"노움 씨 계약해줘서 고마워요."

[….]

"더불어 비밀도 지켜줘서 고맙고요."

노움의 작은 두 눈동자가 쉼 없이 떨린다.

그 모습에 옆에 있던 운디네가 의아해할 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도련님 약 드실 시간입니다."

아더의 집사이자 배신자.

세비스찬이었다.

"들어오세요오!"

대답에 세비스찬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는 평소처럼 약을 책상에 내려두고, 허리를 폈다.

"오늘 기분은 어떻습니까?"

"좋아요오!"

"…다행이군요. 그럼 오늘도 약을 먹어볼까요?"

세비스찬이 방을 나서지 않고 자리를 지켰다.

평소와 다른 그 모습에 아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평소 같았으면 약만 남겨두고 나가야 하는데 왜 이러지?'

그 이유는 금방 드러났다.

"도련님. 오늘 가져온 약은 특별한 약입니다."

"…?"

"그러니 절대 남기시거나, 흘리면 안 됩니다."

이 말에 아더가 세비스찬을 빤히 바라본다.

그리고 슬그머니 손을 빼내어, 노움을 불렀다.

'약을 좀 살펴봐 주시겠어요?'

아더의 어깨 위에 앉아있던 노움의 시선이 책상 위에 놓인 약으로 향한다.

그리고 놀라 날개를 파닥거렸다.

[…!]

노움이 운디네에게 말을 전하고, 운디네가 경악하며 아더에게 말을 전했다.

[절대로 먹어서는 안 돼요, 아더! 엄청나게 나쁜 독이래요!]

경고에 아더가 씩 미소 짓는다.

동시에 알 수 있었다.

마침내 케인 도르문트의 보복이 마침내 시작되었다는 것을.

'언젠가 움직일 줄은 알았지만.... 빠르네. 그래서 더 좋기도 하고.'

판단을 끝마친 아더가 고개를 든다.

그리고 자신을 내려다보는 세비스찬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웬일로 남아계시네요? 그전까지는 확인도 안 하고 나가시더니."

"그전에는 도련님을 믿고…. 도련님?"

세비스찬의 눈이 커진다.

그사이 자리에서 일어난 아더가 노움에게 부탁한다.

"노움 씨 문 좀 닫아줄래요?"

노움이 쪼로롱 날아가 열린 방문을 닫았다.

그걸 확인한 아더가 천천히 뒤돌아선다.

충격에 휩싸인 세비스찬을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 아더가 방긋 미소 짓는다.

"왜 그런 표정이세요, 세비스찬? 머저리가 제대로 말을 하니 신기하나요?"

제5화

아더의 말에 세비스찬은 극도의 공포심을 느꼈다.

'어떻게?'

벙어리인 아더 바이에른이 말을 더듬지 않는다.

거기다 약으로 위장한 독약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

이는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대체 어디서부터?'

이 일에 관해 알고 있는 사람은 아주 극소수다.

케인 도르문트, 카나 도르문트.

당장 생각나는 사람은 이 두 사람 정도뿐이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은정보를 흘릴 리가 없다.

공작가의 아들을 말 더듬이로 만들었다는 사실이 밝혀져 봐야 좋을 게 뭐가 있겠나?

그래서 의문이었다.

이 사실을 벙어리 공자 아더 바이에른이 어떻게 알고 있을까?

그때 아더가 입을 열었다.

"흐음…. 생각해보니 신기하긴 하겠네요. 매일 같이 독약을 먹였는데, 말을 더듬기는커녕 그 내막도 알고 있으니깐."

이 말과 함께 아더가 웃는다.

어딘가 기형적인 그 미소에 세비스찬이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더가 입을 열었다.

"운디네."

부름과 함께 새하얀 대리석에 물웅덩이가 고인다.

뒷걸음질 치던 세비스찬은 그 웅덩이를 확인하지 못하고 바닥을 뒹굴었다.

"컥!"

신음과 함께 세비스찬이 고개를 들었다.

그와 동시에 어느 사이엔가 옆으로 다가온 아더 바이에른이 제 머리칼을 움켜잡았다.

놀란 세비스찬이 다급히 소리쳤다.

"도, 도련님…!!! 무슨 짓입니까 이게!"

아더가 갸웃거렸다.

"보면 몰라요?"

"…?"

"배신자를 죽이려고 하는 거죠."

경악한 세비스찬이 소리쳤다.

"도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독약이라니! 제가 무슨 이유로 그런 걸 도련님에게 먹이겠습니까!"

그의 변명에 아더가 씨익 웃어 보였다.

그리고는 세비스찬의 머리칼을 당겨 그대로 바닥에 내려찍었다.

쿵-!

묵직한 소음과 함께 세비스찬이 비명을 지른다.

그런 세비스찬 앞에 아더가 약을 내밀며 말했다.

"그럼 증명해 보세요."

"…?"

"세비스찬이 가져온 약이 독약이 아니라는 걸 먹어서 증명해 보세요."

세비스찬이 벌벌 떨며, 소리쳤다.

"아니 도련님!!"

"소리 지르지 마세요. 빌 도르문트와 똑같은 꼴이 되기 싫으면."

"…!"

경고에 세비스찬이 입을 다문다.

동시에 그의 머릿속으로 한 사람이 떠오른다.

애꾸가 된 빌 도르문트였다.

'서, 설마…. 그때부터 제정신이었다고?'

그사이 아더가 한 번 더 경고한다.

"한 번만 더 소리를 높이면혀부터 잘라내고 시작할 거예요. 저도 고문은 좋아하지 않으니깐, 조용히 있는 게 서로에게 이득일 겁니다."

세비스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아더가 방긋 웃으며 다시 약을 내민다.

"자 이제 증명해 보세요."

"...."

"독약이 아니라면서요. 그럼 아주 쉽잖아요? 저 약을 먹기만 하면, 지금의 상황은 해프닝으로 끝나는 거예요. 그러니깐 먹어 보세요, 세비스찬."

아더의 제안에 세비스찬이 입술을 질끈질끈 깨물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이게?'

벙어리 공자가 독에 중독되지 않은 것도 놀라웠지만, 모든 진실을 알고 있음에도 침묵했다는 게 더 놀라웠다.

'거기다 조금 전 마법 같은 현상은….'

허나 거기까지 생각하기에는 지금의 상황이 너무 급작스럽게 흘러갔다.

세비스찬은 생각하기를 포기하고, 아더에게 납작 엎드렸다.

"도련님…. 아니 소공자님. 제발 자비를."

아더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세비스찬은 재차 부탁했다.

"제발 부디 자비를…. 제가 이 가문에 바친 충성을 생각하며, 이번 일을…. 이번 일을 용서해주시길."

아더가 피식 웃음을 터트린다.

"용서해주면 뭘 해줄 건데요?"

"제가 아는 모든 정보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더가 턱을 쓰다듬다,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해보세요."

허락이 떨어지자, 집사 세비스찬이 재빨리 입을 연다.

자신의 과거 시절부터, 이 집안에 누가 첩자인지.

더 나아가 어떤 방식으로 연락을 취하는지.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사실을 술술 토해냈다.

그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던 아더는 탄성을 터트렸다.

"그분들도 첩자였다고요?"

"…그, 그렇습니다!"

겁에 질린 그의 대답에 아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걸… 좋아해야 하나?'

세비스찬의 입에서 나온 배신자들 중에는 자신이 미처 알지못했던 자들도 섞여 있었다.

그 탓에 고민하던 아더는 어깨를 으쓱였다.

세비스찬의 설명이 아니었다면, 알지 못했을 배신자였으니 좋은 일인 듯했다.

다시 고개를 숙인 아더가 세비스찬을 향해 말했다.

"좋아요. 세비스찬. 용서해줄게요."

"소공자!!"

"목숨은 살려 줄게요. 대신 그 약은 먹어주세요."

세비스찬이 환호를 지르려다 멈칫한다.

그 사이 아더가 싱글 생글 웃으며 설명한다.

"원래 죽일 생각이었는데…. 기회를 줄게요. 그거 먹고 살아나면 진짜 살려 줄게요."

"아, 아니...."

"왜요? 설마 저 약이 정말 내 목숨을 앗아 갈 약이었던 거예요?"

"그, 그건...."

아더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세비스찬의 가슴팍을 손가락으로 푹 찔렀다.

"그래도 자비롭게 3알 중 한 알만 먹게 해줄게요. 이 정도면 꽤 구미가 당기지 않아요? 혹시 모르잖아요?"

아더가 입꼬리를 올렸다.

"그 독약이 3알을 다 먹어야 반응이 있는 독약일지. 그러니깐 얼른 먹어주세요, 세비스찬."

* * *

"아더---!!!"

바이에른 가문에 또 한 번의 난리가 났다.

"이, 이게…."

가문의 충신.

집사 세비스찬이 병신이 되어버린 탓이었다.

그런데 이 일이 소공자의 방에서 일어났다.

그것도 소공자의 약들에 의해.

"그래…. 안 먹었지? 안 먹었지, 우리 아들?"

요넬이 손을 벌벌 떨며 제 아들을 감싸 안았다.

그리고 독약을 먹어 침을 질질 흘리는 집사 세비스찬을 두려움에 찬 눈길로 바라보았다.

"치료할 수 있습니까?"

"…송구스럽지만 각하. 이 독약은 저희도 처음 보는 독인지라 해독법을 알지 못합니다."

의사들의 설명에 요넬이 분노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도대체--!! 이런 일이 일어날 때까지 뭘 한 겁니까 뭘!"

가신이 당황해 물러선다.

"어떻게 공작가의 저택 내에서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습니까? 이게 말이나 됩니까?"

"각하…."

"부르지 마세요! 당신들에게 매우 실망했습니다!"

요넬 바이에른의 격분에 바이에른의 가신들이 어쩔 줄 몰라 했다.

"당장 찾아내세요. 이번 일의 범인을!"

축객령에 가신들이 다급히 허리를 숙이며 물러난다.

그렇게 방 안에 들어와 있던 자들이 모두 나가자 요넬이 입술을 질끈 깨문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아더는 몸을 일으켜 그녀에게 다가갔다.

"…엄마 전 괜찮아요오오."

요넬이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 눈물을 글썽이며 중얼거렸다.

"미안하구나…. 아들. 미안해. 힘없는 어미라 이런 일까지 당하게 하고."

이 말에 아더는 입맛을 쩝 다셨다.

'어머니 탓이 아니라 내 탓인데….'

하지만 굳이 이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당장 그녀에게 사실을 말해 줘 봐야, 좋을 게 없기 때문이었다.

'사실을 들은 어머니가 섣불리 움직이면, 케인 도르문트도 그에맞춰 움직일 거야.'

그래서 정상으로 돌아왔음에도 아직 말을 더듬고 있던 아더였다.

적어도 몸 상태를 치료하고 주변 정리는 다 끝낸 뒤에, 제 변화를 드러내는 것이 가장 좋았으니깐.

'제정신으로 돌아오니깐, 이런 뒷일도 다 생각하네.'

생각과 함께 아더가 시선을 돌렸다.

몇십 년간 가문의 충신인 척 연기하며 자신을 말더듬이로 만들었던 배신자가 침을 흘리며 백치가 된 것이 보였다.

자신이 하려던 짓을, 그대로 돌려받은 것이다.

허나 아더는 입맛을 쩝 다시며 중얼거렸다.

'분명 전보다는 깔끔하게 복수도 하고 원한도 갚은 것 같기는 한데… 역시 죽이는 게 좋기는 하네.'

결국 인간이 느끼는 가장 큰 고통은 죽음이다.

하지만 지금의 세비스찬은 백치가 되었지만 살아 있었다.

아더는 이에 아쉬움을 느꼈지만, 참아내기로 했다.

'더 이상 난 미친놈이 아니니깐, 이런 식의 깔끔한 복수도 할 줄 알아야지.'

그렇게 시간이 흘렀을 때였다.

도르문트 백작가의 저택.

그곳에서 바이에른에서 일어난 상황을 뒤늦게 전해 들은 케인 도르문트는 웃음을 크게 터트렸다.

"…하하."

그 후 시선을 돌리며 질문했다.

"할 말 있나?"

제 남편의 질문에 무릎을 꿇고 있던 카나 도르문트가 부들부들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