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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여, 여보…. 그게 아니라…."

케인이 손을 올리더니 그대로 제 아내의 뺨을 내리쳤다.

"소리 내면 죽는다."

7서클 고리를 달성한 기사의 힘은 일개 인간이 버텨 낼 수 있는 힘이 아니었다.

허나 카나 도르문트는 악착같이 비명을 참았다.

지금 상황에서 비명을 질렀다가는, 뺨을 맞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볼이 불어터질 때까지 뺨을 얻어맞던 카나가 무릎을 꿇었다.

"요, 용서를…."

케인이 다시 한번 손을 들어 올렸다.

그 순간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 이안입니다."

도르문트 가문의 첫째.

이안 도르문트의 목소리였다.

케인이 들어 올렸던 손을 내리며 대답했다.

"들어오너라."

허락에 이안이 방문을 열고 들어온다.

그리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은 제 어미를 잠깐 바라보더니 이내 시선을 돌려 버린다.

"제국의 3황자와 접촉을 마쳤습니다."

"뭐라더냐?"

입술을 깨문 카나가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빠져나갔다.

지나간 자리에 핏자국이 흥건했지만, 두 부자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조건은 안 붙이더냐?"

"차후에 직접 만나 뵙고 말씀하신다 하셨습니다."

"뭘 얼마나 대단한 걸 내걸려고 이리 말을 아낀다는 말이냐…."

첫째의 보고에 말을 흐린 케인이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제 아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번 소동에 관해 들었느냐?"

"예. 세비스찬이 병신이 되었다는 이야기와…. 막내가 두들겨 맞았다는 이야기 모두 들었습니다."

"연합 도시, 아케인에 가 있었는데 용케 들었구나."

"대업과 관련된 이야기인데 어찌 안 들을 수 있겠습니까."

"그럼 궁금하구나. 네 생각은 어떠냐?"

이안이 고민하다 대답했다.

"흐름이 이상합니다."

"흐름이 이상하다라?"

"이런 사고가 터질 거였으면, 징조라도 보여야 하는데 그런 게 전혀 없었습니다."

"계속 말해 보거라."

"막내가 맞은 건 그렇다 치더라도, 세비스찬이 저희 쪽 사람이라는 건 가문 내에서도 아주 극소수만 아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번 사건을 보면, 마치 세비스찬이 배신을 한 것을 미리 알고 있는 것처럼 움직였습니다."

"내부의 배신자가 있다?"

케인의 물음에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 봅니다."

"뭐…. 나쁘지 않은 의견이지만, 내 생각하고는 다르구나."

"…?"

"내부의 배신자가 있다면, 그 배신자가 누구에게 이 정보를 건네줄까?"

"…바이에른의 가주 아니겠습니까?"

"그렇겠지. 그런데 바이에른의 가주는 세비스찬이 저러한 꼴이 된 것을 보고 격분했다 하더구나."

"연기일 가능성도 있지 않겠습니까?"

"배신자인 데다, 제 아들을 독살하려는 놈이 병신이 된 꼴을 보고 웃지는 못할망정 운다? 거기다 두둑한 보상금까지 주고서?"

케인이 웃었다.

"요넬 바이에른의 그 성격을 생각하면 절대로 못 할 짓이지."

"...."

"제 가족만큼은 끔찍이 생각하는 년 아니더냐?"

자리에서 일어난 케인이 뒷짐을 졌다.

뒤에 선 이안은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을 때였다.

"…어떠냐?"

"예?"

"바이에른의 장남."

이안의 눈이 치켜떠진다.

"아더 바이에른이… 이 모든 일의 원흉이라면 어떻겠느냐?"

제6화

이안이 의문을 제기했다.

"너무 비약이 심하신 거 아닙니까?"

"역시 그래 보이느냐?"

"벙어리가 사건의 중심에 있었다고는 하지만, 벙어리는 벙어리입니다."

"막내가 두들겨 맞은 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벙어리라 하지만…. 막내는 그 벙어리에게 옛날에도 한 번 두들겨 맞았지 않습니까?"

케인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이안의 말대로 막내인 빌은 5년 전 벙어리 공자에게 한 번 두들겨 맞은 적이 있었다.

'소공자… 그 아이의 병세가 심해지기 전에.'

이러한 정황을 고려하면, 제 추측은 지나친 비약이 맞았다.

'그럼…. 제삼자가 있다는 건가?'

새로운 가정에 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로서 가장 타당한 의견일 듯싶었다.

자신의 예상을 벗어난 제삼자.

그자가 세비스찬의 정체를 알아차리고 이번 사태를 막았다는 게 가장 그럴듯한 이야기였다.

물론 이것 또한 무수한 가정 중 하나일 뿐이었다.

아직까진 모든 게 베일에 싸여있으니 짐작만 해두는 게 좋을 듯했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케인은 이안에게 명했다.

"이 시간부로 바이에른에게 허튼짓을 하지 말아라."

"…아버지?"

"왜 그러느냐?"

"고작 이런 일로 바이에른을 포기하실 겁니까?"

케인이 어깨를 으쓱였다.

"바이에른이 우리의 목표더냐?"

"…?"

"우리의 목표는 조금 더 위에 있지 않으냐?"

"죄송합니다."

"그 위를 노리려면 지금보다 더 철저히 해야지. 모든 변수를 없애고 대업이 성공할 수 있게."

그의 대답에 이안이 허리를 숙이며 물러난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케인은 시선을 돌렸다.

거대한 황제궁이 그의 시야에 담겼다.

"어차피 끝내 웃는 자는 우리가 될 텐데 서두를 필요 없지. 천천히 확실하게… 모든 변수를 없애며 가는 게 더 나을 터."

이 말과 함께 케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사람을 불러 명령했다.

아더 바이에른.

그 아이에게 일어난 변화를 관찰하라는 명령이었다.

* * *

세비스찬이 병신이 되고 난 후, 6개월이란 시간이 흘렀다.

이 시간 동안 많은 변화가 일어났고, 아더는 그 변화를 매우 만족스럽게 보았다.

'전에 알던 과거와는 너무 많이 달라졌는걸?'

가장 눈에 띄는 건 어머니.

요넬 바이에른이 이전과 달리 각오를 다지고 공작으로서의 업무를 쳐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녀는 이전 삶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공작이라는 자리를 매우 버거워했다.

애초에 권력과는 먼 삶을 살았던 그녀이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독약 사건이 일어나고 난 후 그녀는 눈에 띄게 달라졌다.

여전히 공작이라는 자리를 버거워 하기는 하지만 도망치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흔들리던 바이에른 가문을 다잡는 효과를 보여주었다.

'어머니를 무시하는 자들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지.'

허나 변화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세비스찬이 병신이 되고, 아더는 이전보다 훨씬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었다.

그 덕에 몸의 치료에 전념할 수 있었고, 그 결과는 엄청났다.

원래라면 27이란 나이에 치료한 몸을 불과 15살의 나이에 완벽히 치료한 것이다.

[아더 드디어…!]

[…!!!]

정령들의 축하에 아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이전하고 전혀 다른 상쾌한 감각이 느껴졌다.

마법사들에겐 마력.

기사들에게 마나라 불리는 신비한 기운들이었다.

망가진 몸 상태에서는 도저히 느낄 수 없었던 기운에 아더는 미소를 지었다.

'이 기운이 느껴진다는 건…. 드디어 서클을 만들 수 있다는 거네.'

칼잡이들의 경지를 나타내는 서클.

이 서클이 만들어지면, 다시 한번 검을 잡을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매우 컸다.

'가문에 자리 잡고 있는 배신자들. 그들을 슬슬 쳐낼 시간이 가까워진다는 거지.'

중얼거림과 함께 아더가 눈빛을 빛낼 때였다.

새로 부임한 집사.

안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련님. 가주님께서 부르십니다."

"어머니가요오?"

"네 저녁 식사를 함께하자고 하십니다."

고개를 끄덕인 아더가 몸을 일으킨다.

그리고 방문을 빠져나와 식당으로 향했다.

"우리 아들!"

일주일 만에 만난 요넬이 미소 짓는다.미소를 지어 보였다.

전에 보았을 때보다 마른 듯한 얼굴이었다.

"어머니 어디 아파요오?"

"응? 내가 아프다니?"

"얼굴이 핼쓱해요오!"

요넬이 크게 감동한 얼굴로 아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니야. 요즘 일이 바빠서 그렇단다."

"쉬면서 하세요오!"

"그래. 우리 아들 때문이라도 쉬면서 해야겠구나. 그런데…."

말을 흐린 그녀가 아더를 올려다보며 감탄했다.

"또 키가 컸구나. 이제 이 어미가 아예 올려다봐야겠는데?"

옆에 있던 아이린이 반응했다.

"오빠 또 키 컸어?"

"응? 키 컸나아?"

"또!? 아이린은 안 크는데!"

그녀의 외침에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 속에서 요넬이 수저를 들었다.

"요즘 들어 좋은 일들만 일어나는구나. 앞으로 계속 이런 일만 일어나면 좋으련만."

그렇게 식탁에 둘러앉아 밥을 먹은 세 가족은, 자리를 옮겨 티타임까지 가졌다.

아이린의 재롱을 보면서 웃음을 터트릴 때, 바이에른의 의원이 나타나 허리를 숙였다.

"각하. 부르셨다 하여 왔습니다."

아더의 시선이 요넬에게로 돌아갔다.

공작의 가족끼리 가지는 티타임에 의원이 등장할 이유는 한 가지밖에 없다.

'내 몸 상태를 살피기 위해서겠지.'

이 예측은 정확했다.

"아들아. 2주 전에 진료를 받았지만, 한 번만 더 받아 보자꾸나."

"네 어머니이!"

아더가 걸음을 옮겨 의원 앞에 앉았다.

그런 아더의 몸 이곳저곳을 진찰하던 의원이 이내 감탄을 터트렸다.

"맥박의 흐름이나 상태가, 이제 일반인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놀란 요넬이 황급히 물었다.

"확실한 겐가?"

"그렇습니다. 각하. 사실 이전에도 빠른 차도를 보이셨는데, 최근 몇 달간 보여 주신 이 상태는…. 가히 신이 하사한 기적이라고밖에 설명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의원이 말에 요넬이 이마를 짚으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깜짝 놀란 아더가 반사적으로 다가가니, 요넬이 와락 끌어안으며 중얼거렸다.

"고맙구나, 아들아…."

지켜보던 의원도 미소 지으며 조언했다.

"이제 슬슬, 적당한 운동을 해도 나쁘지 않을 듯합니다. 한창 성장기인 이 시기에 몸을 움직여 주지 않으면 근육이 제대로 발달하지 않으니."

"운동이라…."

의사의 충고에 요넬이 고민하다, 아더에게 물었다.

"아들. 혹시 어미랑 같이 연습할래?"

"어떤 거요오?"

요넬이 웃는다.

"사격 연습이란다. 힘들지 않고, 편하기도 한… 사격 연습."

* * *

요넬 바이에른의 설명이 이어졌다.

"우리 아들은… 잘 모르겠지만, 바이에른은 전통적으로 매번 사냥 대회를 여는데 며칠 뒤면 그날이겠구나."

"...."

"작년까지만 하더라도, 이 대회를 열지 않았지만.... 이제는 이러한 전통도 지켜나가야지. 우리 아들과 딸을 위해서라면."

요넬의 설명에 아더가 속으로 감탄을 터트렸다.

'와… 어쩌면 나보다 더 많이 변한 게 우리 어머니 아닐까?'

그녀가 변할 거라는 건 짐작하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적극적으로 가문의 일에 끼어드는 건 솔직히 말해 놀라운 일이었다.

항상 제 어깨에 놓인 책임을 무거워하던 어머니 아니던가?

그 탓에 아더의 입장에서는 이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어차피 15살의 아더 바이에른의 몸에도 적응해야 했다.

적당한 운동은 반가운 일이었다.

그렇게 요넬과의 사격 연습을 기다릴 때였다.

마침내 약속한 날이 다가왔고, 아더와 요넬은 바이에른의 가신들과 함께 뒤뜰로 향했다.

넓은 뒤뜰에는 미리 준비해놓은 것인지 표지판과 여러 총이 정렬되어 있었다.

그것들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아더는 시선을 돌렸다.

험상궂게 생긴 사내가 입가에 인자한 미소를 걸고 있었다.

"공작 각하. 자세를 낮추셔야 합니다."

케딜락 라이넌.

세비스찬이 말해 준 배신자 중 한 명이자, 바이에른의 기사였다.

"총이란 모름지기, 정돈된 자세를 갖춘 상태에서 쏘아야만 제대로 된 포물을 그립니다. 그런데 공작 마마의 자세는 지금 매우 틀어져 있지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아더는 턱을 쓰다듬었다.

'흠… 배신자가 선생님이라.'

사실을 모르고 보았다면, 참 뛰어난 기사로 생각했을 것이다.

우직한 기사를 연기하며, 요넬을 지도하는 모습은 충신이 따로 없었으니.

'그래서 까다롭네… 차라리 뭔 짓을 저지르면, 그걸 꼬투리 잡아 쳐냈을 텐데.'

사실 케딜락뿐만이 아니라, 모든 배신자들이 그랬다.

그들은 겉으로는 바이에른의 충신인 척 연기하며 이 집안의 사람들을 속이고 있었다.

'슬슬 이들을 쳐내야 하는 데 그래서 쉽지가 않아.'

배신자라는 건 알았지만 증거가 없었다.

증거가 있다 하더라도 이들을 쳐낼 힘이 현재의 자신에게는 없었다.

그 탓에 고민하던 아더는 입맛을 다시며 중얼거렸다.

'몸도 나았으니 확 암살해 버려?'

진지하게 고민하던 아더는 고개를 저었다.

눈앞의 케딜락은 5서클 기사다.

서클조차 맺지 않은 지금의 자신이 어찌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래서 아더가 섣불리 움직이지 않고 며칠간 상황을 지켜볼 때였다.

시간이 흘러 주말 아침.

가족과의 식사를 위해 식당을 찾은 아더가 예상치 못한 모습에 놀라 눈을 치켜떴다.

"…?"

식당 안에 아이린과 요넬 외 다른 사람이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얼굴이 매우 익숙했다.

아더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소드 마스터가 왜 여기 있는 거지?'

* * *

바이에른 가의 혈족들만 들어올 수 있는 식당의 한 자리를 차지한 노신사가 입을 연다.

"오호…. 못 본 사이에 많이 바뀌었구나. 네가 정말로 아더 바이에른이냐?"

이 말에 옆에 있던 요넬이 환히 웃는다.

하늘이 도운 건지, 상태가 날이 갈수록 좋아지고 있습니다."

"…그래 보이는군요. 공작 각하. 근심 하나를 덜어서 참으로 다행입니다."

대답을 한 노신사가 다시 시선을 돌려 아더를 바라본다.

그 집요한 시선을 아더는 모른 척하며 제 자리로 찾아가 앉았다.

그리고 떠올렸다.

'홀란 레버쿠젠 후작. 제국의 북부를 담당하는 총사령관이자 소드 마스터가…. 왜 찾아온 거지?'

미래.

제국에는 총 7명의 소드 마스터가 존재한다.

그중 한 명이 홀란 레버쿠젠 후작.

북부 설원 너머, 잔인한 야만인들로부터 제국을 보호하는 방패이자 검인 그는 쉰 살을 넘겼음에도 현역으로 활동하는 군인이었다

그래서 아더는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 사람이 왜 이른 아침부터 바이에른 가에 있는 걸까?

의문과 함께 아더가 수저를 들었을 때였다.

요넬이 입을 연다.

"아이린 아더. 인사드리거라. 홀란 레버쿠젠 후작은 오래전부터 우리 바이에른 공작가와 긴밀한 사이를 유지해 온 분이시란다."

아더가 눈을 치켜뜬다.

이건 미래의 정보를 아는 아더로서도 처음 듣는 사실이었다.

그사이 멋들어진 콧수염을 자랑하는 노신사.

홀란 레버쿠젠 후작이 입을 연다.

"정확히는 돌아가신 네 아버지와 인연이 더 깊지. 너희들의 입장에서는…. 그래. 대부라고도 볼 수 있겠군."

선을 그으면서도, 선을 긋지 않는미묘한 발언.

그 탓에 요넬이 애매한 미소를 입가에 띠었다.

허나 그 이상의 반응은 보이지 않고서 분위기를 환기시키고자 했다.

다행히 홀란 레버쿠젠도 분위기를 깨지 않고서 요넬과 즐겁게 대화를 나누었다.

아이린은 그 대화에 흥미가 없다는 듯, 아더에게 칭얼거리며 안겼다.

아더는 여전히 홀란을 주시하며, 그런 아이린을 다독였다.

"…어찌 되었건, 고맙습니다 홀란 경. 저희 공작가의 사냥 대회를 위해 친히 방문도 해주시고."

"공작 각하께서 선 결심에, 도움을 드리지 못할망정 발걸음 옮기는 게 무엇 어렵겠습니까?"

"아닙니다. 이런 걸음을 해주시는 게…. 어떤 의미인지 저도 이제는 알 것 같으니."

요넬의 말에 홀란이 대답하는 대신 차를 들이켰다.

그 모습에 요넬이 손뼉을 짝 쳤다.

"그럼 뒤뜰로 나가서 차나 한잔 더 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아이들을 들여보내고, 가벼운 사담이나 하시다 가시지요."

요넬의 제안에 홀란이 제 턱수염을 매만지다, 힐끔 아더를 돌아봤다.

그리고 잠시 고민하다 부탁했다.

"그 전에 잠시, 아더 이 아이와 대화를 나눠도 되겠습니까?"

"…아더랑요?"

"오랜만에 보는 친구 놈의 아들이기도 하고, 몸 상태도 직접 확인해 보고 싶어서 말입니다."

요넬이 환히 웃는다.

"저야 좋은 일이지요. 그럼 잠시 제 아들과 같이 식당에 있어 주십시오. 가벼운 다과와 차를 가져오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요넬이 아이린을 대리고 식당을 빠져나간다.

그녀의 손짓에 대기하던 요리사들도 우루루 빠져나갔다.

덕분에 홀란과 독대를 하게 된 아더가 인사를 올렸다.

"안녕하세요! 홀란 레버쿠젠 각하아!"

홀란의 시선이 가늘어진다.

"각하아? 연기가 아주 일품이구나."

"…?"

"속일 생각은 말거라. 이미 눈치채고 있으니."

홀라 레버쿠젠.

소드 마스터라 불리는 기사의 형형한 눈빛이 아더를 훑는다.

"네 몸에 있는 독이 전부 없어져 말을 더듬지 않게 되었다는 걸 말이야."

대답과 함께 침묵이 내려앉는다.

그 속에서 아더가 눈을 끔뻑였다.

"…."

그 미묘한 분위기 속에서 홀란이 다시 한번 입을 열려 할 때였다.

입꼬리를 올린 아더가 먼저 침묵을 깼다.

"어라? 어떻게 아셨어요? 제가 연기하고 있다는 걸?"

제7화

홀란의 눈꼬리가 올라갔다.

'이렇게 쉽게 수긍한다고?'

벙어리인 척 연기하고 있기에 끝까지 말을 더듬으리라 예측한 홀란이었다.

허나 예상과 달리 아더는 너무나도 쉽게 수긍해 버렸다.

그 탓에 당황했지만, 그 감정의 변화를 드러내지는 않았다.

노련한 노기사는 표정을 갈무리한 체 질문을 던졌다.

"그럼 이제 해명을 해야겠구나. 어째서 벙어리인 척 연기를 하는 것이냐?"

"음…. 여러 사정이 있는데 꼭 말씀드려야 하나요?"

"사정? 벙어리인 척하는 사정이 있다는 말이냐?"

"예. 그래서 모른 척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아더의 대답에 홀란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그 이유를 말해 보거라. 조금 전에도 말했다시피, 난 네 대부이니 들을 자격은 충분하지."

"…대부라면 말씀드려도 되겠지만, 정말 대부이신가요?"

"그게 무슨 소리냐?"

아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가 알고 있는 대부의 뜻이 맞다면, 제게 또 다른 아버지란 뜻인데 전 홀란 경을 오늘 처음 뵙거든요."

날카로운 지적에 홀란의 입이 다물어졌다.

조금 전 아더가 말을 더듬지 않았을 때까지만 해도 감정의 변화를 티 내지 않은 그였지만 이번 대답에는 감정의 동요를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서운한 것이냐?"

"아뇨. 하지만 제가 벙어리인 척 연기하는 이유에 관해서 설명하는 건 곤란해요."

홀란의 시선이 낮게 가라앉는다.

그는 손가락을 툭툭 두들기다, 이내 머릿속의 상념을 정리하고서 입을 열었다.

"그래. 너로서는 갑작스레 나타난 늙은이가 대부라 말하면서 이런저런 권리를 행사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겠구나. 그럼 이건 어떠?"

홀란이 씩 미소 짓는다.

"난 바이에른 공작 각하. 네 어미를 오랫동안 봐 온 오빠이기도 하지. 그런 의미에서 아끼는 여동생의 근심을 덜어주기 위해 지금 이 상황을 말해주러 갈 생각인데 어떻게 생각하느냐?"

아더가 머리를 긁적였다.

"그건 말씀드렸다시피 곤란한데요…."

"그게 싫으면 사정을 설명하거라."

"그것도 곤란하고요. 음…."

말을 흐린 아더가 궁리했다.

'이걸 어쩐다?'

정체가 들킨 것도 난감한데, 하필 그 상대가 소드 마스터인 홀란 레버쿠젠이라니?

'그것도 내 대부님이라는 분인데… 이걸 어떻게 입막음한다?'

사실이 새어나가지 않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입을 열지 못하게 죽이는 거지만 이번엔 상대가 소드 마스터라 그러지도 못했다.

그 탓에 아더가 머리를 긁적이며 고민할 때 옆에 있던 홀란이 놀라 중얼거렸다.

"…마나를 가지고 있어?"

"네?"

"어떻게… 네 몸속에 마나가 있는 것이냐?'

그의 말에 아더가 탄성을 터트렸다.

'와 이걸 눈치챈다고?'

몸 상태가 나아진 뒤로, 서클을 만들기 위해 마나를 모으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여태 들켜 오지 않은 이유는 고리를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뭉치지 않은 마나는 그저 신비로운 기운에 불과했다.

'그런데 이걸 눈치채다니… 역시 소드 마스터라 이건가?'

그 사이 아더를 지켜보던 홀란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설마… 너 혼자서 마나를 모은 것이냐?"

아더가 고민하다 대답했다.

"네."

"혼자서 독학한 것이냐?"

"네."

"칼은?"

"칼도 쓸 줄 압니다."

"스승도 없이 혼자서 이 모든 걸 해냈다고?"

아더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에 홀란의 시선이 가늘어졌다.

"…."

힐끔 눈길을 돌린 홀란이 아더의 손을 훔쳐보았다.

훈련된 칼잡이의 손과는 거리가 먼 말랑말랑한 맨살이 보였다.

'이걸 믿어야 하나….'

이곳에 오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벙어리 공자라 불리던 소년이 스스로 심법을 체득하고 칼까지 다룬다?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았다.

'…이렇게 된 이상 그 이유를 꼭 들어야겠군.'

하지만 그 사실을 듣기는 어려워 보였다.

눈앞의 아더 바이에른은 더 이상 사실을 말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 홀란은 적당한 미끼를 던졌다.

"그럼 그 실력을 좀 볼 수 있겠느냐?"

"실력이요?"

"그래. 네 입으로 칼을 좀 쓴다 했으니, 대련을 한 번 하자꾸나. 대련 상대는 내 손녀다. 지금은 외출해서 없지만, 꽤 재능이 괜찮은 아이지."

아더가 눈빛을 반짝였다.

"대련에서 이기면, 비밀을 지켜주신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래 맞다. 더불어 소원도 하나 들어주마."

"…소원이요?"

"네가 내 손녀를 마나 없는 순수한 대련에서 이기면 가능한 선에서 어떤 소원이건 들어주도록 하마."

홀란의 제안에 아더가 탄성을 터트렸다.

"너무 좋은데요?"

자신만만한 대답에 홀란이 충고했다.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야지. 만약 패배하면, 넌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일에 관해 설명을 해야 할 것이다. 어떻냐? 이대로 받아들이겠느냐?"

아더가 조금 전보다 더욱 환히 웃으며 답했다.

"너무 좋죠. 받아들이겠습니다. 대부님."

* * *

바에이른 공작가의 사냥 파티.

제국의 설립과 함께해 온 공작가의 유서 깊은 전통에 참여하기 위해 각지의 귀족들이 모여들었다.

망해가는 공작가라 한다지만, 어찌 되었건 제국의 단 하나뿐인 공작가.

이런 자리에 참석한다는 것만으로도 가문의 위상을 세울 수 있었다.

그 탓에 수많은 귀족으로 인해 바이에른 저택이 오랜만에 떠들썩해졌을 때였다.

"지금부터 위대한 바이에른 공작 각하! 요넬 바이에른 공각께서 첫 신호탄을 쏘아 올리겠습니다!"

선언과 함께 시작된 축제.

관례대로 축포를 쏘아 올리기 위해 요넬이 걸어 나왔다.

가볍게 심호흡을 한 그녀는 미리 잡아다 푼 멧돼지를 향해 권총을 겨누었다.

탕-!

울려 퍼진 총성과 함께 멧돼지의 몸에서 피 분수가 쏟아졌다.

너무나도 깔끔한 사격에 지켜보던 귀족들의 눈에 이채가 담겼다.

그건 홀란 레버쿠젠 후작.

북부 총사령관도 다르지 않았다.

"오호…. 언제 저런 걸 또 연습했을까."

"뭐가요, 할아버지?"

"내가 알기론 공작 각하께서 총을 잡은 지 일주일밖에 되지 않은 거로 알거든. 그런데 생각보다 꽤 재능이 있으셨던 것 같구나."

홀란의 말에 그의 손녀.

엘린 레버쿠젠이 불쑥 질문했다.

"할아버지 그런데 웬 대련이에요? 설마 파티장에서 저보고 검을 휘두르란 말은 아니죠?"

"왜? 부끄러운 게냐?"

"당연히 부끄럽죠! 안 그래도 북부 설원이 고향이라 하면, 야만인이라고 수군거리는데 그런 짓을 하면 이곳에 계신 분들이 절 뭐로 보겠어요?"

똑 부러진 손녀의 말에 홀란이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이제 13살이 되는 엘린 레버쿠젠은 눈에 넣어도 안 아플 깜찍한 손녀였다.

레버쿠젠 가문을 상징하는 붉은 머리칼에, 제 어미를 닮아 아름다운 이목구비는 이미 수도에서도 정평이 나 있었다.

그런데 레버쿠젠 가문의 혈통답게 검에 대한 이해도도 '천재'의 범주에 들어갔다.

'이대로 잘 성장하면…. 소드 마스터는 몰라도 그 밑의 경지까지는 무난히 올라설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더 바이에른.

그 아이와 제 손녀의 대련은 어찌 보면 불공평한 처사였다.

제대로 된 훈련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 아더 바이에른이 제 손녀를 이길 가능성은 전무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대련을 제안한 것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무슨 계기로 그 아이가 변했을까? 5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내 눈조차 쳐다보지 못하던 녀석이었는데….'

어렸을 때는 신동 소리를 듣던 아이.

하지만 가주의 죽음과 동시에 벙어리가 되어 버렸고 이제는 남들의 손가락질을 받는 바보가 되어 버렸다.

아더 바이에른의 아버지와 두터운 친분을 자랑하는 홀란 레버쿠젠이었기에 가만히 있지 않았다.

내로라하는 명의와 약재.

그것들을 매년 공작가에 보내주었고, 8년 전까지는 시간이 날 때마다 아더의 몸 상태를 살폈다.

그러다 아더의 몸에 깃든 독을 우연히 발견할 수 있었다.

'아주 악질적인 독이지. 처음에는 말을 더듬게 하고, 그 뒤에는 백치로 만들어 버리는 악질적인 독.'

그 탓에 쉽사리 해독제를 찾지 못했다.

허나 더 문제인 것은 그 독을 누가 아더에게 어떤 경로로 먹였냐는 것이었다.

'저런 증상은 꾸준히 먹였기에 일어나는 일이다. 즉…바이에른 가에 첩자가 있다는 소리지.'

그래서 독의 해독제를 찾는 한편, 이번 일의 내막을 조사했다.

요넬 바이에른.

현 가주에게는 이 사실을 말하지 않고서 말이다.

'요넬 그 아이는… 이 사실을 감당할 수 없을 터. 그리고 섣불리 행동하겠지. 그렇게 되면 이 일을 꾸며낸 자들은 숨어 버릴 것이고 다음에는 아더가 아니라 요넬을 노릴 수도 있어.'

그 탓에 조사는 아주 비밀스럽게 진행되었고, 대략 그 꼬리가 잡혀갈 때쯤에 아더의 변화를 눈치챈 것이다.

1년 만에 다시 본 아더 바이에른의 몸에 그 악질적인 독은 완벽히 사라져 있었다.

이 사실만으로도 놀라운데 말을 더듬지 않게 된 아더가 갑자기 밑도 끝도 없는 칼솜씨를 자랑해 왔다.

'…1년이라는 시간 만에 이게 가능한 일인가?'

그 탓에 홀란은 짙은 흥미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서 제일로 친한 친우.

그 친우의 아들이 이렇게 변화하게 된 계기를 말이다.

'원래라면 억지를 부려서라도 내막을 알아야 하지만…. 그렇게 하면 나는 진짜 그 아이에게서 대부라 불릴 자격이 없어져 버리지.'

요넬을 지키고자 마음먹고서, 이미 아더를 미끼로 쓴 상태다.

대부로 불릴 자격은 이미 없는 것이나 다름없지만, 마지막 남은 양심이 그 마지막 선마저 넘지 않게 만들었다.

그렇게 상념을 정리한 홀란은 고개를 들었다.

먼저 와 기다리던 아더 바이에른이 보였다.

"안녕하세요오!"

"…안녕하세요오?"

"네! 안녕하세요오!"

홀란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 말도 안 되는 장단에 맞춰 줘야 하나?

고민하던 그는 일단 그러자고 판단을 내렸다.

"그래 우리 벙어리 공자님. 준비는 다 되었는가?"

"예! 준비는 끝났습니다아아!"

"좋군. 그럼 대련 상대를 소개하지. 내 손녀 엘린 레버쿠젠이 오늘 네 대련 상대다."

홀란이 물러서고, 당황하던엘린이 걸어나왔다.

아더가 방긋 웃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오!"

"…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그런데…. 공자님이 정말 제 대련 상대예요

"네에에!"

대답에 엘린이 홱 시선을 돌렸다.

새초롬하게 올라간 눈꼬리에 홀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진짜예요, 할아버지? 대련이라고 하길래 뭔가 했는데, 정말 벙…아니. 공자님을 상대로 검을 들라고요?"

"진검이 아닌 목검이다."

"그게 그거잖아요."

"마음에 안 드느냐?"

"마음에 들고 자시고, 이게 말이나 돼요?"

손녀의 고집에 홀란이 손가락을 튕겼다.

"네가 이 대련에서 이기면, 수도에 이틀간 더 머물마. 그때 동안 시내를 외출하건 쇼핑을 하건 절대로 간섭하지 않으마."

홀란의 제안에 엘린의 눈이 커졌다.

어떤 애교를 부려도, 정해진 기간 내에 돌아갈 것이라던 할아버지가 고집이 꺾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이 대련이 뭐길래?'

관객도 그렇다고 심판도 없는 연무장에서 저 벙어리 공자와 대련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고민하던 엘린은 곧 어깨를 으쓱였다.

생각해 보니 뭐가 됐건 상관이 없었다.

'저런 벙어리한테 내가 질 리는 없고, 그 말은 즉 수도에서 이틀을 더 놀 수 있단 이야기잖아?'

판단을 내린 엘린이 입꼬리를 올렸다.

그 후 연무장에 놓인 목검을 집어 들었다.

보통 목검보다 끝이 날카로워, 살을 헤집기에 충분해 보였다.

그 사이 아더 또한 자연스레 목검을 집어 든 체 그녀 앞에 섰다.

그것을 확인한 홀란이 입을 열었다.

"이번 대련은 마나는 쓰지 않고 순수 검술만으로 싸운다. 패배는 내가 결정할 때까지. 질문 있나?"

"없습니다."

"없어요오오!"

대답을 들은 홀란이 뒤로 물러났다.

그 사이 엘린이 내로라하는 기사들에게서 배운 대로 상대방과의 거리를 가늠하기 위해 뒤로 물러났을 때였다.

움직이지 않던 아더가 까닥 손짓한다.

"오세요오-!"

"…?"

"먼저 공격하세요오! 제가 나이가 더 많으니까안!"

엘린이 눈을 끔뻑인다.

그리고 황당하다는 말투로 중얼거린다.

"지금 선공을 양보하겠다는 거예요?"

"네에에-!"

"하.... 나참. 어이가 없어서. 자신 있어요, 공자님?"

"네에에!"

엘린이 표정을 굳힌다.

총명하다 하지만, 결국은 13살.

자신이 무시당했단 생각이 들자마자, 가볍게 임한 대련에 의미가 생긴 것이다.

그리고 이 광경을 지켜보던 홀란은 혀를 찼다.

한 번 화가 난 손녀의 검은 북부에서 키우는 유소년들조차 당해내는 이들이 몇 없었다.

'예상보다 빨리 끝날 수도 있겠군…. 이 대련.'

생각과 함께 홀란이 아더를 바라볼 때였다.

움켜쥔 검에 힘을 준 엘린이 무릎을 굽혔다.

"그럼…. 사양 안 하고 먼저 선공을 받아 갈게요. 공자님."

이 말과 함께 엘린이 자리에서 뛰쳐나간다.

그 움직임은 빨랐으며 뻗어 오는 목검은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그 탓에 홀란의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

손녀의 일격이 예상보다 위험했기 때문이었다.

'피하지 못하면 최소한 타박상이다. 그래도 배려를 해서 검의 선로는 정직해.'

판단과 함께 홀란이 시선을 돌린다.

그 일격에 맞서 아더 바이에른은 어떤 움직임을 보여 줄까?

던져진 의문과 함께 그의 눈이 치켜떠진다.

동시에 엘린도 눈을 치켜떴다.

날카롭게 뻗어진 목검.

그 목검의 끝으로 아더가 그대로 뛰어들었기 때문이었다.

"…!"

콰직-!

기이한 소리와 함께 엘린이 뻗은 검이 아더의 어깨를 살짝 관통했다.

동시에 뿜어져 나온 피에 엘린의 모든 사고와 행동이 멈췄다.

허나 아더는 아니었다.

목검에 어깨가 관통당한 채로, 그대로 엘린의 손목을 날카롭게 쳐올렸다.

갑작스레 일어난 피 분수에 정신이 나가 있던 엘린은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고 목검을 놓아버렸다.

"어, 어?"

당황한 그녀가 물러선다.

반대로 아더는 앞으로 나아간다.

어깨가 꿰뚫렸지만, 아더의 목검은 힘을 잃지 않고 그녀의 정수리를 강하게 타격했다.

쿵!

묵직한 울림과 함께 엘린의 신체가 한 차례 부르르 떨렸다.

그리고 기절해 넘어진 순간, 부러진 목검이 휘리릭 날아가 홀란의 발밑에 꽂혔다.

"…!"

넋을 잃고 있던 홀란은 그 목검의 파편에 황급히 정신을 차린다.

"너, 너?"

말을 더듬은 홀란이 피를 철철 흘리는 아더를 향해 다가가려 했다.

허나 먼저 움직인 아더의 손이 어깨에 꽂힌 목검의 파편을 뽑아 버렸다.

촤악-!

한 번 더 흩뿌려지는 함께 홀란이 결국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 사이 아더가 피가 묻은 입가를 올리며 웃었다.

"제가 이겼네요, 대부님. 그러니깐 약속은 지켜주세요."

제8화

"제가 이겼네요. 대부님. 그러니깐 약속을 지켜주세요."

넋을 놓고 있던 홀란이 정신을 차렸다.

그러자 피를 뚝뚝 흘리는 중인 아더가 보였다.

놀란 홀란이 황급히 다가오며 물었다.

"상처를…. 아니, 아프지 않으냐?"

아더가 눈을 끔뻑인다.

그 후 꿰뚫린 제 오른쪽 어깨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어…. 아프긴 하네요. 어머니가 보시면 엄청 화를 내실 것 같기도 하고…."

말을 흐리는 아더의 모습에 홀란의 표정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비명을 질러도 모자랄 판에, 요넬에게 혼날 것을 걱정한다고?'

상식적으로 해서는 안 되는 판단이었다.

그 탓에 그의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은연중에 느끼고 있었지만, 이 아이의 정신세계는 정상인들과 비교해서 어딘가 매우 어긋나 있었다.

허나 깊이 고민할 수 없었다.

지금도 아더의 벌어진 상처에서 피가 뚝뚝 흘러나왔기 때문이었다.

상념을 접은 홀란이 손수건을 꺼내 들었다.

"이리로 와 보거라. 상처나 일단 좀 보자꾸나."

이 말과 함께 홀란이 지혈을 시작했다.

뼈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상처를 강하게 압박하는데도 아더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그 모습에 홀란의 눈길에 다시 한번 이채가 담겼을 때였다.

아더의 상처를 지혈하던 그의 어깨가 크게 떨린다.

'…빗맞았어?'

중얼거림과 함께 다시 살펴보았다.

허나 착각이 아니었다.

목검이 꿰뚫린 부위가 매우 정교했다.

어깨의 연골과 뼈는 건드리지 않은 채로 살집만 헤집혀 있었다.

그 탓에 놀란 홀란이 중얼거렸다.

'이런 확률이 얼마나 있지? 뼈는 다치지 않은 채 살만 헤집는 상처를입을 확률이?'

의도했다고밖에 볼 수 없는 상처.

하지만 이런 상처를 15살의 아이가 의도할 수 있다고?

생각과 함께 홀란이 자신도 모르게 눈꼬리를 파르르 떨 때였다.

아더가 다시 입을 연다.

"저…. 대부님? 약속은 꼭 지켜주셔야 해요."

"…무슨 약속 말이냐?"

"제 비밀이요. 대련에서도 이겼으니 꼭 비밀로 해주셔야 해요."

홀란의 떨리던 눈꼬리가 진정된다.

그 사이 엘린과의 대련에서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던 아더가 전전긍긍하는 모습으로 홀란을 바라본다.

그 모습에 어이가 없어진 홀란이 중얼거린다.

"…미치겠군."

"예?"

"아니다. 일단… 그래. 비밀은 지켜주마. 네 어미에게는 오늘 일을 포함해 절대로 이 사실을 말하지 않으마."

아더가 환히 웃었다.

"감사합니다, 대부님!"

"감사는 무슨… 그런 의미에서, 무엇을 바라느냐?"

질문에 아더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바라는 거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내가 전에 약속하지 않았느냐? 대련에서 이긴다면 내가 들어줄 수 있는 선에서 소원을 한 가지 들어준다고. 설마 잊은 것이냐?"

아더가 눈을 끔뻑이며 대답했다.

"어… 아뇨. 잊지 않았습니다."

잊지 않기는.

잊어버렸구만.

중얼거림과 함께 홀란은 왠지 모르게 아더의 대화법에 익숙해지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것을 기뻐해야 할지 아니면 못마땅하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하던 그때 아더가 운을 띄웠다.

"가능한 선이라면, 어디까지인가요?"

"제국의 북부 사령관이자, 레버쿠젠 가문의 후작. 그리고 소드 마스터라는 이름을 짊어진 홀란 레버쿠젠. 이 이름이 들어줄 수 있는 선까지다."

"오…. 엄청나네요."

"대단한 기회이기도 하지."

아더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물어봐도 되나요?"

"얼마든지."

"대부님은 정말 제 대부님이신가요?"

"…? 그게 무슨 소리냐?"

"말 그대로예요. 대부님은 정말 제 대부님이신가요?"

물음에 홀란의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듯했다.

"…."

그는 어떠한 대답도 하지 못한 체, 아더의 시선을 피했다.

허나 아더의 시선은 떨어질 줄 몰랐고, 결국 백기를 든 홀란이 대답한다.

"자격은 없다."

"그렇군요."

"하지만 네 소원을 들어주기에는 충분하지."

"그래요? 하지만…. 자격이 없는 대부님을 어떻게 믿죠? 전 지금부터 아주 중요한 일을 부탁하고 싶은데."

홀란이 다시 고개를 든다.

그리고 단호한 어조로 대답한다.

"기사의 맹세 정도면 되겠느냐?"

"…네?"

"지고하신 황제 폐하만이 내 맹세를 바꿀 수 있다. 그 맹세에 대고 약조하마. 이 정도면, 믿음이 가느냐?"

아더가 탄성을 터트렸다.

'기사의 맹세…. 진짜 오랜만에 듣네.'

기사들이 약속을 할 때면, 언급하는 말이었는데 옛날에는 이 맹세를 언급하고, 지키지 않으면 죽임까지 당했다고 전해졌다.

물론 지금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눈앞의 사내는 소드 마스터다.

모든 기사의 목표이자 이정표이기도 한 그의 맹세는 그 무게가 차원이 다를 것이다.

그 탓에 고민하던 아더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지금 상황에서 들을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이었다.

"알겠습니다, 대부님. 그럼 제 소원을 말해도 될까요?"

홀란이 팔짱을 낀다.

그 무언의 허락에 아더가 천천히 입을 열어 설명한다.

그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던 홀란이 놀라 소리친다.

"뭐? 가문의 배신자들을 처단해 달라고?"

* * *

요넬은 제 남편과 찍은 사진을 어루만지며 떠올렸다.

원치 않은 공작가의 주인으로서주인이란 이름으로 보낸 10년이란 세월이었다.

'불행한 시간이었지…. 지옥이나 다름없을 만큼.'

그녀는 권력을 좋아하지 않았다.

하물며 돈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제국의 단 하나뿐인 공작가의 주인 자리는 그녀에게 있어서 가장 쓸모없는 것이었다.

허나 포기할 수는 없었다.

세상 그 누구보다 사랑했던 남자의 유언.

그 사랑하는 남자의 핏줄을 이은 아더와 아이린을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온갖 암투와 계략이 오가는 귀족들의 사회는 만만치 않았다.

그 탓에 해가 지날수록, 공작가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고 지금은 저물어 가는 태양이라고 표현될 정도였다.

'…미래, 아더와 아이린을 위해서라도 더는 공작가를 기울게 해서는 안 된다. 언젠가 이 아이들에게 가문을 물려주려면.'

그래서 요넬은 최선을 다해 귀족이 되려 노력했다.

쉽지 않은 길이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수모를 당하기도 했지만, 웃으며 넘겼다.

그리고 오늘.

그 노력의 결실이 조금이지만 드러났다.

공작가의 오랜 전통인 사냥 대회를, 아주 성공리에 끝마친 것이다.

'첫 사격은 물론이고…. 그 뒤의 과정도 나름 매끄러웠어. 아무런 사고 없이.'

생각과 함께 요넬이 히죽 웃음을 터트렸다.

오늘의 연회로 공작가의 인식이 바뀌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건재하다는 것 정도는 보여 주었을 것이다.

'첫걸음에 배가 부를 수는 없지…. 앞으로도 이런 식으로 바꿔나가야 해.'

중얼거림과 함께 그녀가, 오랜 연회로 지친 몸을 침대에 뉘었을 때였다.

다음 날이 되고, 제 집무실로 찾아온 홀란 레버쿠젠으로부터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게 된다.

"겨, 경?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요넬이 벌벌 떨며 질문한다.

"지금 이 사람들이…. 전부 간첩 혹은 배신자란 소리입니까?"

홀란이 진중히 고개를 끄덕였다.

"전부는 모르겠지만…. 몇몇 이들은 출생지가 의심스럽더군. 충분히 조사해 볼 만한 가치는 있을 것이오."

요넬이 다시 시선을 돌린다.

그 시선 끝에는 홀란이 건네준 서류 한 장이 있었다.

서류에는 공작가의 충신이라 부를 만한 이들의 이름과 이들의 출생지 그 전에 몸담았던 가문.

그 외 잡다한 기타 상황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그 정보들을 확인하던 요넬은 나직이 중얼거렸다.

"도르문트…의 사람들이 제 가문에 이렇게나 많다니…."

"어느 가문이나, 첩자가 있긴 마련이지. 하지만 이번에는 그 수가 조금 많기는 하더군."

찹찹한 목소리로 이 말을 중얼거린 홀란이 조언했다.

"지금 당장 이들을 쳐내지 말고, 시간을 들여 한 사람씩 내보내시오. 정확한 증거와 정황들이 있으니 빠져나갈 구멍만 주지 않으면 될 것이오."

"…."

"힘든 건 알지만, 거쳐 가야 할 길이오, 요넬. 레오 바이에른…. 그가 남겨준 가문을 지키려면 말이오."

남편의 이름에 요넬이 눈이 붉어진다.

만약 홀란이 아니었다면, 대번에 눈물을 터트렸을 정도로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 탓에 요넬 스스로도 추태라는 걸 알았다.

가문에 첩자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가주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다는 걸 의미했으니.

'하지만…. 딱 하루만… 딱 하루만…더 늦게 이 사실을 알아차렸으면….'

불과 어젯밤이었다.

공작가의 가주로서 다시 나아가자고, 결심한 날이 말이다.

그런데 바로 다음 날, 이러한 소식을 들으니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할 때였다.

그런 요넬을 바라보며 홀란이 불쑥 선언했다.

"그 힘든 길을 괜찮다면 내가 함께 가고 싶소."

"…!"

"공자 각하. 아니 요넬. 지금까지 신경 쓰지 못해서 미안하오. 저 북부의 야만인들과 오랜 분쟁 탓에, 친우의 가문을 돌보지 못했군."

대답에 요넬이 입을 벌린다.

붉어진 눈시울은 감출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게…. 정말입니까, 오라버니?"

"이런 자리에서 거짓말을 해서 무엇하겠소? 지금 당장 전폭적인 지지는 못 하겠지만, 적어도 가문에 뿌리내린 쥐새끼들을 잡는 데는 도움을 주겠소."

"…하지만 그랬다가는."

요넬이 망설이며 대답한다.

"레버쿠젠 가문의 오랜 전통이 깨지는 게 아닐까 걱정됩니다. 북부를 지키는 레버쿠젠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정치에 끼어들지 않는다고 알고 있는데."

대답에 홀란의 시선이 낮게 가라앉는다.

동시에 머릿속으로 한 장면이 스쳐 지나간다.

제국의 아카데미.

그 아카데미의 정원을 거니는 친우와 그 친우의 여자친구였던 요넬 바이에른.

그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던 홀란은 중얼거렸다.

'맞다. 지금 상황에서 내가 움직이면, 가문의 오랜 전통을 깨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절친한 친우의 가문이 이런 식으로 망가지는 것 또한 두고 볼 수 없었다.

그래서 홀란은 아더의 부탁을 받아들여 이 자리에 나온 것이었다.

안 그래도 공작가에 침투한 첩자들의 꼬리를 밝혀내기 직전이었고 남은 것은 그 숫자와 정확한 명단이었다.

그런데, 아더가 그 가려운 부분을 정확히 긁어줘 버렸다.

'미처 찾지 못한 첩자 놈들의 이름…. 그걸 말해 준 거지.'

그 탓에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첩자들의 정체와 증거.

그 두 가지 모두 손아귀에 들어왔으니 말이다.

그래서 오늘 이 자리에 나온 것이고, 그 결심은 매우 굳건했다.

다만.

'…아더. 그 아이가 어떻게 이 사실을 알고 있는지, 또 그 검술의 정체가 뭔지 마음에 걸리는군.'

중얼거림과 함께 홀란의 시선이 낮게 가라앉았다.

허나 곧 정신을 차리고서 아더 바이에른이란 이름을 머리 한구석으로 밀어 넣었다.

지금은 아더 바이에른 보다, 요넬을 납득시키는 게 중요했다.

그래야 아더 바이에른의 비밀을 캐낼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머릿속을 정리한 홀란이 천천히 입을 열어 설명했다.

"전통은 중요하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의리와 맹세지. 난 아더 바이에른과 아이린 바이에른의 대부가 될 것을 레오 바이에른, 그 아이들의 아버지와 약속했소."

홀란이 방긋 미소 짓는다.

"그런데 그 아이들은 내가 대부임을 전혀 모르더군. 그래서 뒤늦게나마 대부 노릇을 좀 하려 하오. 나중에 다시 만난 내 친구에게 타박을 듣지 않기 위해."

설명에 요넬이 결국 눈물을 터트린다.

홀란은 말없이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가, 감사합니다. 홀란 오라버니…."

"감사하기는… 그래서 말인데 요넬."

"예… 말씀하세요."

"내 작은 부탁 하나 들어줄 수 있소?"

요넬이 우는 것을 멈추고 대답했다.

"뭐든 말씀하세요.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선에서 들어드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들어드릴게요."

대답에 홀란이 눈빛을 빛낸다.

"그럼 사양하지 않고 말하겠소."

홀란이 진중한 목소리로 제안한다.

"아더 바이에른. 그 아이를 내가 데려가서 키워 볼까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시오?"

제9화

요넬이 놀라 되물었다.

"…오라버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아더를 북부로 데려가고 싶다니요?"

"말 그대로, 아더 그 아이를 데려가서 한번 키워 보고 싶소."

그의 대답에 요넬이 눈을 끔뻑인다.

오래전 사별한 남편의 친구이자, 한때 같은 아카데미에서 수학했던 선배.

그는 기사 중에 기사라 불리는 이였으며, 절대로 허투루 말을 하지 않는 사내이기도 했다.

그 탓에 이해할 수 없었다.

제국에 있는 모든 기사들의 우상이라 불리는 남자가, 갑자기 왜 아더를 데려가 키우고 싶다는 걸까?

'황제 폐하께서 명을 내려도… 제 마음에 들지 않으면, 절대로 제자로 받지 않은 게 홀란 오라버니인데?'

밀려드는 생각에 요넬이 대답하지 못하자, 홀란이 입을 열어 설명한다.

"레오. 그 친구와의 우정때문만은 아니오. 나는 아더 그 아이에게서 칼잡이의 재능을 발견했고 그 재능이 범상치 않아 이런 제안을 하는 것이라오."

"…칼잡이의 재능이요? 기사로서의 자질이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홀란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소. 그것도 범상치 않은 재능이오. 관리하지 않으면…. 스스로를 다치게 할 만큼."

요넬이 다시 한번 놀라 입을 벌린다.

이제 막 건강해진 아더에게 칼잡이로서의 재능이라니?

그 탓에 믿기는 힘들었지만, 눈앞의 사내가 허언을 싫어하는 자라는 걸 고려하면 또 믿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우리 아더에게… 정말로 기사로서의 재능이 있다고?'

생각과 함께 요넬의 입가에 함박웃음이 걸린다.

제국 최고의 기사가 재능을 논했다는 건, 공작가의 아들이라 할지라도 대단한 명예임이 틀림없다.

더군다나 그 재능을 가진 아이가, 몸이 나빴던 제 아들이라면 두말할 것도 없었다.

'최근 몸 상태가 좋아진다고 느끼기는 했는데…. 그 변화가 이런 식으로 이어지는구나.'

중얼거림과 함께 요넬이 대답하기 위해 입을 열려 할 때였다.

작은 망설임이 요넬의 마음속을 스쳐 지나갔다.

"…정말 좋은 제안이지만 오라버니. 조금만 시간을 주실 수 있나요?"

"시간? 이유가 있소?"

"제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오라버니에게 아더를 맡기고 싶지만…. 저는 항상 아이들의 의사를 먼저 존중해 왔어요."

홀란이 고개를 끄덕인다.

"아더, 그 아이의 의사도 물어보겠다, 이 말이군."

"네. 이제 겨우…. 건강해진 아이입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항상 불안할 따름입니다. 그 아이의 상태가 언제 또 나빠질지."

요넬이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니 아더와 상의를 해보겠습니다. 만약 그 아이가 기사의 길을 걷고 싶다 하면…. 그때 아더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홀란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정중히 허리를 숙이며, 대답한다.

"앞으로 이틀간 수도에 더 머무를 테니, 느긋하게 대답을 주시오. 하지만 이건 명심하는 게 좋을 것이오, 요넬."

경고와 함께 홀란의 시선이 낮게 가라앉았다.

"아더의 재능은…. 상식에서 매우 어긋나 있다는 것을."

* * *

홀란의 제안을 들은 요넬은 곧바로 아더를 불렀다.

"엄마아-!"

아더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다가왔다.

그 천진난만한 모습에 요넬 또한 미소 지었다.

"우리 아들. 잘 시간 아니야?"

"엄마가 불러서 괜찮아요오!"

"이런, 나 때문에 자지도 못하고 있었구나. 그럼 얼른 이야기를 마치고 돌려보내야겠어."

아더의 머리를 쓰다듬은 요넬이 잠시 말을 골랐다.

그 모습에 아더는 본능적으로, 어떠한 일이 있었음을 깨달았다.

'뭐지? 설마 홀란… 그분이 약속을 어긴 건가?'

생각과 함께 아더의 시선이 낮게 가라앉을 때였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이야기가 요넬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아더는 꿈이 뭐니?"

"꿈이요오?"

"그래 꿈. 우리 아들은 커서 뭐가 되고 싶니?"

아더가 눈을 끔뻑인다.

갑자기 웬 꿈?

중얼거림과 함께 아더가 고민하기 시작했다.

자신에게 있어 꿈이랄 게 있을까?

'음…. 생각해 보니, 꿈이 있긴 하네. 제국의 2황자를 시작해, 우리 가문을 위협하는 놈들을 모두 죽이는 꿈.'

하지만 이 꿈을 사실대로 말할 수 없었다.

아더는 적당히 둘러댔다.

"글쎄요오… 아직 잘 모르겠어요오.."

"그래? 그럼… 기사는 어떻니?"

"기사요오?"

"명예를 신봉하는 기사. 멋지지 않니?"

아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반응에 요넬은 잠시 머뭇거리다, 설명한다.

"사실 너의 대부. 홀란 오라버니가 제안을 해 왔단다. 널 데려다가 한번 가르쳐 보고 싶다는구나."

"대부님이요오?"

"그래. 그분의 성격상 허튼 말을 하지 않은 걸 고려하면…. 이건 대단한 기회란다. 그 어떤 명문가의 자제들도 재능이 없으면 가르침을 주지 않았거든.

아더가 탄성을 내질렀다.

정확히는 탄성을 내지르는 척했다.

'그래서 어머니가 꿈이 뭐냐고 물은 거네. 홀란… 대부님에게서 가르침을 받아볼 생각이 있는지 떠보기 위해.'

생각을 끝마친 아더가 혀를 찼다.

예상외의 난관이 갑작스레 찾아와 버렸기 때문이었다.

'이건 전혀 계획에 없던 건데?'

소드 마스터 홀란 레버쿠젠.

그의 밑에서 검의 가르침을 받는 건 분명 좋은 기회일 것이다.

정상적인 상황에서라면 말이다.

'나한테는 아무런 메리트가 없지… 칼이야 전생에서 실컷 휘두른 덕에 누구한테 배울 단계는 이미 지났으니깐.'

스스로의 입으로 말하기에는 그렇지만, 순수한 칼싸움에서 누구한테 져 본다는 생각을 바이에른 혈통을 각성한 뒤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홀란의 제안은 아무런 메리트가 없었다.

차라리 레버쿠젠의 혈통.

그 피를 마시게 해준다면 고민이라도 잠깐 했을 것이다.

'그것도 마음에 안 차기는 하지만… 북부로 떠난 사이, 도르문트 백작이 수작을 부리면 어떻게 해?'

그 탓에 아더가 어떻게 해야 잘 거절할 수 있을까 고민할 때였다.

요넬이 불쑥 입을 연다.

"하지만 나는…. 우리 아들이 조금만 더 나와 함께 있었으면 좋겠구나."

아더의 눈이 치켜떠진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 요넬의 입에서 나온 덕이었다.

그 사이 요넬이 횡설수설 설명한다.

"그…. 우리 아들이 몸이 나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이런 행복한 시간을 가진 지 또 얼마나 되었는지 모르겠구나."

"…."

"그래서 나는 이 시간을 좀 더 가족… 아더 너하고 보내고 싶구나. 어미로서는 잘못된 선택이겠지만…."

말을 끝마친 요넬이 부끄러운지 고개를 돌린다.

그런 그녀를 빤히 바라보던 아더는 입꼬리를 올렸다.

"남을게요! 엄마아!"

포옹과 함께 들려온 대답에 요넬이 당황한다.

"아더? 하지만 이건 진짜 엄청난 기회란다. 어미의 조금 전 말 때문에 이런 대답을 하는 거라면…."

"아니에요오! 저도 엄마랑 조금 더 있고 싶어요오오!"

힘찬 대답에 요넬이 입을 다문다.

그리고 눈물을 글썽이며 중얼거린다.

"미안하구나, 아들아. 이렇게 나약한 어미라서…."

천만에요.

이런 어머니라서 세상에서 제일 행복해요.

이 말을 속으로 중얼거린 아더는 제 방으로 돌아가지 않고, 요넬과 함께 밤을 보냈다.

그리고 다음 날.

요넬에게서 대답을 들은 홀란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음…. 결국 그렇게 됐군."

시선을 돌린 홀란이 아더를 바라보았다.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느냐?"

"네에에!"

늘어진 대답에 홀란이 또 한 번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끝까지 연기를 하는군. 진짜로 밝힐 생각이 없는 모양이야.'

생각과 함께 홀란이 팔짱을 낀다.

그런 홀란을 아더가 멀뚱멀뚱 바라볼 때였다.

침묵하던 홀란이 입을 연다.

"약속은 지켰다, 아더."

"…?"

"조만간 모든 게 해결될 거다."

맥락 없는 대화.

그 탓에 현장에 있던 모두가,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로지 아더만이 환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아! 대부니임!"

그 모습에 다시 한번 웃음을 터트린 홀란이 무언가를 내민다.

"받거라."

아더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칼이네요오오?"

"그래 칼이다. 아주 낡은 칼이지만, 너한테는 의미가 있지."

아더의 눈이 커진다.

"이 칼은 네 아버지. 레오 바이에른이 젊을 적에 쓰던 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