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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 * *

서정우는 인천 쪽 경찰서의 회의실에서 사건에 대해 설명했다.

배에서 폭탄이 터진 건 테러리스트나 외국의 공격을 의심해야 할 정도로 큰 사건이다.

경찰만이 아니라 검찰과 군, 그리고 정보기관에서도 사람이 찾아와 그의 설명을 들었다.

서정우는 호텔 테러리스트 사건 때도 비슷한 브리핑을 했다. 그때 본 사람들이 이 회의실에 또 찾아온 경우도 많았다.

게다가 서정우만 상황을 브리핑하는 게 아니다.

이미 사건에 대한 기본 정보는 배에 있을 때 무전으로 전달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여러 기관에서 조사해 알아낸 정보들이 있다.

서정우의 설명이 끝난 후에 군 장교가 그들이 알아낸 것을 이야기했다.

"장석준은 이십 년 전에 군에서 폭파 기술을 배웠습니다. 당시 같이 근무했던 사람들에게 확인해 보니, 배에 폭탄을 설치해 침몰시킬 능력이 있다고 합니다. 폭탄은 장석준이 직접 설치했을 확률이 높습니다."

경찰 관계자가 이어서 설명했다.

"장석준은 전자공학을 전공했습니다."

질문이 나왔다.

"시한폭탄이나 그 원격 제어 시계를 장석준이 직접 만들었다는 겁니까?"

"그건 알 수 없지만, 직접 만들지 않았다 해도 개인적으로 제작을 의뢰할 인맥은 있을 겁니다. 주변 인물을 수사하겠습니다."

정보기관에서 나온 사람도 말했다.

"장석준은 출국을 자주 했습니다. 그쪽 조사는 우리가 맡겠습니다."

장석준의 시계를 분석한 결과도 나왔다. 정밀 분석은 시간이 더 필요하지만, 기본 기능은 뚜껑을 열고 신호 단자를 연결해 데이터를 뽑아보는 방식으로 추측할 수 있었다. 시계에 사용된 칩은 상용 제품이라 데이터를 뽑는 건 쉬웠다.

그 데이터를 기반으로 여러 의견이 나왔다.

"그 시계에 폭탄을 선택적으로 터트리는 기능이 있더군요. 이번에 사용한 건 비상 자폭 모드라서 다 터진 것처럼 보입니다만."

"제가 보기에는, 장석준은 원래 주말이 아니라 주중에 화물선 상태일 때 자폭시킬 생각으로 폭탄을 설치했을 겁니다."

"맞습니다. 증거를 없애려면 손님이 있을 때는 피해야 합니다."

"이번엔 칼에 찔려 죽게 생기니까 그냥 다 터트린 거겠지요. 어차피 죽을 거 다 같이 죽자는 속셈이었을 겁니다. 진짜 나쁜 놈입니다."

선원들이 도망친 이유도 나왔다. 해경 간부가 설명했다.

"선원 중 한 명이 장석준에게 배를 침몰시킬 수단이 있다는 걸 눈치채고 있었습니다. 그 선원은 첫 번째 폭탄이 터지자마자 그 수단이 자폭이라는 걸 깨닫고 도망쳤습니다. 다른 선원들도 그 선원의 말을 듣고 같이 빠져나갔다고 합니다."

"그 배의 선원은 다 장석준의 부하더군요. 전부 한통속이라 같이 탈출했습니다."

서정우는 한쪽에 앉아서 회의에서 나오는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장석준에게 킬러를 보낸 조직에 대한 정보는 나오는 게 없네.'

연결고리인 장석준은 죽었다. 그 조직의 명령을 받고 온 킬러도 죽었다. 다른 피해자는 없다.

지금 회의가 사건 처리에 중요한 과정이긴 하지만, 서정우에게 필요한 정보는 나오지 않았다.

'회의 끝나면 집에나 가야겠다.'

회의가 길어졌다. 잠시 휴식 시간을 갖기로 했다.

정보기관의 요원이 서정우에게 다가와 은근슬쩍 제안했다.

"우리 쪽으로 오시면 원래 7급부터 시작하는데, 서정우 씨라면 오자마자 그날로 한 단계 승진해서 6급이 될 겁니다."

그 소리를 들은 경찰 간부가 당장 달려왔다.

"어허. 상도의 없게 왜 이러실까? 서 형사는 우리 직원입니다."

"서정우 씨를 아직까지 순경으로 놔두고 있는 경찰에서 할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서 형사 승진은 이미 예전에 결정 났습니다. 위에서 준비만 되면 바로 승진입니다."

"순경에서 승진해도 경장 아닙니까? 우린 6급부터 시작하게 해준다니까요?"

"지금 경장 무시합니까?"

"아니, 그건 아니지만."

"경장으로 승진하고 끝이 아닙니다. 특진 계획이 또 있으니까 우리 직원에 대한 그 과도한 신경은 그만 끄시지요?"

검찰에서 나온 사람도 슬그머니 발을 담갔다.

"계속 수사기관에서 근무하는 걸 원한다면, 우리도 특채가 있는데…."

군 장교도 혼자 빠질 수 없어서 얼른 말을 섞었다.

"서정우 씨가 군대에 다시 들어오면 준위로 특채를…."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는 듣고만 있던 서정우가 그 말에는 바로 반응했다.

"재입대는 안 합니다. 절대로."

그는 저쪽 세계에서 군 복무를 마쳤다.

입대한 날 각성자 특수부대에 끌려가서 바로 여의도 방어전투에 투입되었다. 그 후에도 많은 위험한 작전을 성공시키고 병장으로 제대했다.

제대할 때도 순탄하지는 않았다. 그의 제대를 막고 장기 복무를 시키려는 음모가 있었다.

그는 그런 수작을 부리는 사람들을 찾아가 멱살을 잡고 흔들어준 후에 제대했다.

저쪽에서는 아직도 그가 군대에 복귀하기를 바라지만, 재입대할 생각은 전혀 없다.

다시 회의가 시작됐다. 그 회의가 끝난 후에는 여러 기관 사람들과 따로 만나 정보를 교환했다.

그중에는 마약계 형사 구민호도 있었다.

구민호가 서정우의 앞에 앉아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위에서 저한테 뭐라고 하더군요."

"이번 일로요?"

"제가 서 형사를 찾아간 것 때문에 서 형사가 그 배에 탄 거잖습니까? 우리가 추적하려던 인물이 죽어버려서 중요한 단서도 같이 사라졌다고 욕을 먹었습니다."

"욕먹을 일이 아닌데요. 제가 안 갔어도 장석준은 죽었을 겁니다. 제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킬러의 칼에 맞아 죽어가고 있었으니까요."

구민호의 표정이 밝아졌다.

"아까 브리핑에서 그 이야기를 듣고 마음을 놓았습니다. 돌아가서 저한테 욕한 분한테 확실히 말할 겁니다."

구민호의 불만은 그게 다가 아니다.

"그리고 사실, 상을 줘도 모자란 거 아닙니까? 서 형사가 그 배에 안 탔으면 어떤 참사가 벌어졌을지 생각해보면, 저한테 표창장을 줘도 부족할 판에 구박이나 하고 말이야."

"고생 많으시네요."

"어디 서 형사만 하겠습니까? 그런데 말이죠."

구민호가 목소리를 조금 낮췄다.

"장석준이 죽은 거야 어쩔 수 없지만, 서 형사가 아무 성과 없이 배에서 내렸을 것 같지는 않은데…."

187. 단서

마약계 형사 구민호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뭔가 해줄 말 없습니까?"

서정우도 목소리를 낮췄다.

"하나 있습니다."

이 정보는 회의 시간에는 말하지 않았다. 그때는 듣는 사람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대신에 수사기관 담당자들에게만 개별적으로 전달하는 중이다.

"놈들이 장석준을 죽인 건 경찰의 추적을 차단하기 위해서입니다. 경찰이 그 배에 대해 알아냈다는 걸 놈들 조직에서도 알더군요."

구민호가 책상을 내리쳤다.

"젠장! 역시 우리 내부에 정보를 팔아먹는 놈이 있군요."

"정보 유출에 대해 알고 있었습니까?"

"그런 의심이 들어서 서 형사에게 자문을 얻으러 간 겁니다. 서 형사가 분석한 결과는 나 혼자 알고 있으려고 했는데."

"정보를 유출한 놈이 누군지는 압니까?"

구민호가 창피해하는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르지요. 팀 내부인지, 아니면 보고 라인 중간 어딘가인지."

서정우가 진심으로 충고했다.

"그놈들을 너무 대놓고 찾으려 하지 마시죠. 조직이 노출될 위험만 보여도 같은 편에게 킬러를 보내는 놈들입니다."

"그런 거 무서워하면 이 일 못 합니다."

"꼬리를 자른다고 하지 않고 문어 다리 중 하나를 자른다고 한 걸 보면, 장석준 같은 놈이 여럿 있을 겁니다."

구민호는 살짝 긴장했다.

"장석준만 해도 마약 조직 하나쯤 따로 운영한다고 믿어도 될 만큼 거물인데…."

"그런 거물 장석준이 언제든지 잘라낼 수 있는 문어 다리 하나 취급을 받았습니다. 조직의 규모가 구 형사님이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큽니다."

"진짜 조심해야겠군요."

"혹시라도 킬러가 주변을 맴돈다 싶으면 절 부르세요. 산 채로 잡아드릴 테니까."

* * *

한국에 배치된 CIA 요원 제임스 커튼이 모니터에 뜬 사건 보고서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서정우 형사."

그는 호텔 테러리스트 사건 때는 경찰서에서 서정우를 따로 만날 수 있었다. 그때는 호텔 파티 참석자 중에 미국인이 있었기 때문에 끼어들 명분이 충분히 있었다.

이번 사건에는 미국인 피해자가 없다. 게다가 워낙 많은 기관에서 나와 회의 중이다.

인맥을 동원하면 서정우를 못 만날 건 없지만, 다른 기관 사람들의 눈에 대놓고 보이게 행동하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다.

그래서 그는 사무실에 앉아서 올라오는 보고서만 읽었다.

"서 형사가 또 사람들을 구했어. 아주 많이 구했단 말이야."

그가 손가락으로 탁자를 톡톡 두드렸다.

"그런데 어떻게 이번에도 바로 그 순간에 그 배에 있었던 걸까?"

아까부터 그 문제를 계속 고민했다. 그런데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았다.

"서정우. 도대체 뭘 어디까지 아는 거지?"

* * *

서정우는 오늘은 아직 평행차원을 넘어가지 않았다. 배를 조사할 때 무슨 돌발상황이 생길지 모르기 때문에 만약을 위해 텔레포트를 미뤘다.

아직 자정도 되지 않았다. 회의에서 얻을 정보도 대충 얻었다. 이제 넘어가야 한다.

그런데 여기는 인천이다. 평소에 그가 평행차원으로 넘어가는 위치가 아니다.

서정우가 스마트폰에 넣어둔 저쪽 세계의 지도를 열었다.

대한민국은 이미 20세기에 건물이나 도로의 위치와 모습을 전산 데이터로 만들었다. 그 도면 데이터에는 작은 도로까지 자세히 나와 있었다.

그걸 정부 데이터베이스에만 보관한 게 아니라 일반에게도 배포했다. 그 덕분에 게이트가 열리고 많은 시설이 파괴될 때도 도면은 살아남았다.

다만, 21세기에 바뀐 지형 정보는 제대로 갱신되지 않았다.

저쪽 세계의 한국에서는 거의 매일 게이트가 열린다. 도심에 게이트가 열리고 건물이 부서지는 일은 흔하다. 좀 커다란 몬스터가 나타나면 도로 자체가 바뀌기도 한다.

당연히 이 지도를 그대로 믿을 순 없지만,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 참고할 수는 있다.

'이 지역은 사람이 사는 곳이긴 한데, 조금 위험도가 높긴 하구나.'

서울은 전국에서 몬스터 대응 시스템이 가장 잘 갖춰진 곳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권총 한 자루 정도는 항상 가지고 다닌다.

인천의 상황은 서울보다 나쁘다.

게다가 지금 그는 총이 없다. 거길 맨손으로 가는 건 좀 위험하다.

'가자마자 한 자루 사야겠다. 슈퍼가 가까우면 좋겠는데.'

권총 정도는 동네 슈퍼에 가도 판다. 일반 식료품점도 중고 권총 몇 자루 정도는 가지고 있다.

서정우가 건물 1층 화장실에 들어간 후에, 모든 칸을 열어 사람이 없는지 확인했다. 점검이 끝난 후에, 그는 평행차원 텔레포트 스킬을 사용했다.

* * *

서정우는 몬스터와 싸우는 세계로 넘어가 각성자 수사대 2과장 권병철을 만났다.

서정우가 물었다.

"전화로 이야기한 장석준은 찾으셨어요?"

권병철이 도로 물었다.

"장석준은 왜 조사해달라는 겁니까?"

"그냥 좀 궁금해서요."

"찾긴 찾았는데, 십오 년 전에 게이트에 휘말려 죽었습니다. 그 이전에도 사기꾼이라는 것 외에는 특별한 건 없더군요. 군대에서는 폭파가 주특기였다는 게 특이사항이긴 합니다."

"어디 수상한 조직에 가담한 건 없고요?"

"확인되는 건 없습니다. 어딘가 가담했을지도 모르지만, 이렇게 오래전에 죽은 잔챙이에 대한 자료는 날아간 게 많습니다."

서정우가 혀를 찼다.

"쯧. 아쉽네요."

'장석준에 관한 최근 정보가 필요한데 너무 옛날에 죽었어.'

그가 권병철에게 물어볼 건 그것 하나가 아니다. 장석준을 통해 정보 하나를 더 알아냈다. 그 정보는 저쪽 세계의 회의에서도 말하지 않은 것이다.

"저번에 김수철에 대해 알아봐 달라고 한 건요?"

김수철은 저쪽 세계의 해커다. 칼치파와 사거리파가 저지른 납치 사건에서, 김수철이 해킹으로 병원 기록을 빼낸 정황이 있다.

"계속 찾고 있습니다. 그런데 김수철이 본명 맞습니까?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 너무 많은데…."

"가명일 수도 있겠군요."

"환장하겠네. 그나마 딱 하나 있는 단서조차 가명일지도 모른다는 겁니까? 그런 놈을 도대체 어떻게 찾습니까?"

서정우가 저쪽 세계에서 사서 이쪽 세계의 집에 보관하고 있던 술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해커일 수도 있고, 아니더라도 컴퓨터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일 겁니다. 꼭 좀 찾아주세요. 중요한 일입니다. 아. 이건 선물입니다. 이 술 좋아하시죠?"

서정우가 간 후에 권병철이 술병을 보며 인상을 살짝 썼다.

"술 마시는 사람 중에 이런 진짜 양주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지. 그런데 왜 나에게 자꾸 술을 선물하는 거지? 이렇게까지 안 해도 협조는 할 텐데…."

게이트 관리처 현장 담당 과장 김민상이 술을 마셨다.

"크으. 이거 진짜 좋은 술이다. 네 덕에 진짜 양주를 다 마신다."

"오늘 다 마셔서 없애자."

"그래야지."

김민상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야. 그런데 이 술 혹시…."

"어. 맞아."

김민상이 육포를 꽉꽉 씹었다.

"젠장. 또 위험한 술 마시네."

"서정우가 준 술은 마셔도 안 죽는다며."

"안 죽지. 안 죽는데…. 어? 이거 진짜 소고기 육포냐?"

"술이 들어있던 종이가방에 같이 있더라. 이젠 안주까지 챙겨줘."

"서정우가 왜 너한테 진짜 술에 진짜 소고기 안주까지 챙겨주냐?"

"나도 그게 궁금하다. 그냥 부탁해도 협조할 텐데."

김민상이 술잔을 빙글빙글 돌렸다.

"이 술 마셔도 죽진 않지만…."

그는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얼마 전에 영화사 하나가 게이트 근처에서 영화를 찍었는데, 그 현장에 공포 스킬을 가진 보스 몬스터가 튀어나왔다. 소형 하급 게이트인 줄 알고 찍었는데 상급 게이트였던 거지."

"뭐? 피해는?"

"없어."

"응? 없어?"

"영화배우가 그 보스 몬스터를 잡았거든."

"공포 스킬이라며?"

"확실해. 그것도 광역 공포 스킬. 소대 병력이 그 스킬에 당해서 다 얼어붙어 있을 때, 그 배우가 혼자서 보스 몬스터를 잡았다."

권병철은 진심으로 감탄한다.

"이야아. 우리나라에 그 정도로 대단한 배우가 있었어? 누구야?"

"이선화."

권병철은 멈칫했다. 그는 이선화를 안다. 개인적으로 아는 건 아니지만 프로필 정도는 꿰고 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이선화가 총도 잘 쏘고 전투도 잘하지만, 어쨌든 비각성자잖아."

권병철은 미사리 전투에서 이선화가 얼마나 잘 싸웠는지 안다. 담당 경찰이 작성한 보고서를 입수해 읽었기 때문이다.

김민상이 설명했다.

"이선화가 이전에 워낙 위험한 일을 많이 겪어서 비각성자인데도 정신 저항력이 굉장히 높대. 그래서 공포 스킬을 이겨내고 그 몬스터를 잡았다더라. 소형 몬스터라서 총으로 잡을 수 있었다네?"

"야. 영화촬영 중에 그랬으면 그 장면이 다 찍혔겠네? 그 영화 나오면 꼭 봐야겠다."

"곧 방송할 거라더라. 그런데 말이야."

김민상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아무래도 그 현장에 서정우도 있었던 것 같다."

"어? 아. 서정우는 이선화하고 가까운 사이인 것 같더라. 그래서 같이 있었나?"

김민상이 다시 술을 마셨다.

"무려 광역 공포 스킬을 가진 몬스터가 나타났어. 그놈과 마주칠 때까진 아무도 몰랐지. 그런 상황이면, 처음에 중대 병력이 들어갔어도 몰살당했을 거야."

"어쨌든 이선화가 잡았다며."

"잡았지. 그런 위험한 놈을, 아무리 상성이 좋다고 해도 비각성자인 이선화가 잡았지."

"세상이 이렇게 바뀌고 나서 신기한 일이 어디 한두 번 일어났냐? 기적이 도와줬나 보지."

"기적. 그래. 기적. 그거 사실 서정우한테 어울리는 말이야. 거의 불가능한 임무를 기적처럼 성공시킨 사람이니까. 그것도 여러 번."

"음?"

"더 자세한 건 기밀이라 말 못한다. 어쨌든 난 이선화가 그 몬스터를 잡을 때 어떤 식으로든 서정우의 도움이 있었다고 본다."

권병철이 찜찜한 표정으로 물었다.

"너 왜 이렇게 심각해? 그래서 서정우와 얽힌 게 좋은 거냐? 나쁜 거냐?"

"우리가 도움받은 쪽일 때는 최고로 좋지. 서정우의 일에 잘못 말려들면 불구덩이에 같이 뛰어들어야 하니까 굉장히 나쁘고. 병철아. 우리 지금 어느 쪽에 서 있는 거냐?"

권병철이 술잔에 가득 차 있던 술을 한 번에 마셨다. 화끈한 느낌이 식도를 타고 내려갔다.

"이거 진짜 비싼 술이구나."

"젠장. 불구덩이구나."

"서정우가 사람 하나 찾아달라더라. 저번 술도, 이번 술도 그래서 얻어먹는 거다."

김민상이 얼굴을 구겼다.

"그럴 것 같더라. 젠장."

"민상아. 술 같이 마셨잖아. 같이 좀 찾자. 너희 쪽 정보망도 돌려봐."

* * *

이튿날 이선화와 남수정, 강서준이 ES 엔터테인먼트에 모였다.

사장 오동철은 너무 좋아서 입을 다물 줄 몰랐다.

"으하하하. 수정이가 이런 식으로 또 뜰 줄이야!"

이선화가 한마디 했다.

"동철 오빠. 우린 거기서 다 죽을뻔하다가 겨우 살아났는데, 너무 좋아하신다."

"그래도 아무도 안 다치고 살아서 돌아왔잖아."

"그건 그렇지만."

오동철이 남수정에게 말했다.

"이 기회를 살려야지. 수정아. 빨간색파랑 말이야."

남수정이 원형을 만든 노래 빨간약의 제목은 결국 '빨간색파랑'으로 바뀌었다.

"그거 홍보 시작해야겠다."

남수정은 당황했다.

"네? 제 노래 실력이 하도 모자라서 이대로는 못 내보낸다고 하셨잖아요."

"못 내보내지. 지금 홍보하려는 건 남수정과 디맨션이 같이 만든 노래 빨간색파랑이 조만간 나온다는 거야."

"조만간…. 큰일 났네요."

"큰일 났지. 그러니까 열심히 연습해라. 홍보에 쓸 사진은 오늘 바로 찍자."

남수정은 오래 기죽는 스타일이 아니다.

"넵!"

강서준이 말했다.

"수정이가 곡 하나 더 만들었는데, 그것까지 연습하려면 진짜 바쁘겠다."

오동철이 강서준에게 물었다.

"곡이라니?"

"어제 그 파티에서 수정이가 노래를 흥얼거리더라고요. 듣기 되게 좋아서 제가 얼른 녹음해왔죠. 30초 정도 돼요."

"아니. 왜 서준 씨가 우리 수정이 노래를 녹음…."

"저도 ES 엔터하고 계약하려고요."

오동철이 활짝 웃었다.

"이제 우리 배우팀도 완성되는구나! 그런데 왜 갑자기 결정한 겁니까?"

"저 진짜로 가수가 되고 싶어서요."

오동철이 원하는 건 강서준의 배우로서의 능력과 인지도다. 중증 음치를 라이브 가수로 만들어줄 능력은 없다.

"그건… 디멘션도 안 된다고 해서…."

"제가 서 형사님에게 직접 졸라보려고요."

"그러니까 서 형사도 안 된다고…."

오동철은 말하다 말고 화들짝 놀랐다.

"헉! 그, 그걸 어떻게…."

남수정이 얼른 두 손을 높이 들었다.

"죄송해요. 제가 그만 실수로."

이선화가 대신 변명해주었다.

"수정이가 밝힌 게 아니라, 서준이가 수정이 말을 듣고 주변 상황을 분석해서 눈치챈 거예요. 서준이 쟤가 평소에는 맹하다가도 집착할 땐 눈치가 빨라진다니까."

이야기가 정리된 후에 오동철이 기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이 기자. 나야. 당연히 좋은 소식이 있어서 걸었지. 이번 선상파티 폭파 사건에서 우리 수정이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 거 알지? 어허. 연예계 기자한테 도움되는 이야기라니까. 그래. 자세한 건 만나서 이야기하자. 지금 오면 수정이 인터뷰도 할 수 있어. 하하하. 고맙기는. 내가 또 어려울 때 도와준 사람은 안 잊잖아."

오동철이 이선화와 강서준을 쳐다보았다. 이선화는 두 손을 교차시켰지만 강서준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강서준도 같이 인터뷰하게 해줄까? 이번 사건 서포터 삼인방 중 둘을 한 번에 인터뷰하는 거야. 이런 기회 잘 없어. 왜 여기 있냐니? 강서준 지금 프리잖아. 우리하고 계약할 거니까 여기 있지. 하하하. 그렇긴 하지?"

오동철이 전화를 끊었다.

"이 기자가 당장 달려온다니까 우린 무대부터 세팅하자. 인터뷰 거절한 선화는 집에나 가라."

이선화가 물었다.

"방금 통화 마지막에, 뭐가 그렇긴 하다는 거예요?"

"이 기자가 그러는데, 우리 회사가 너무 빨리 커서 좀 무섭대."

188. 약

남수정에 관한 기사가 하나 떴다.

선상파티 폭파 사건으로 이선화, 남수정, 강서준은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다.

서정우가 인터뷰를 안 해서 그 몫까지 세 명이 나눠 처리했다. 그 세 사람이 서정우의 지시로 사람들을 대피시켰다고 목격자들이 이야기했기 때문에, 기자들도 마이크를 그들 쪽으로 내밀었다.

언론의 관심이 집중되는 건 이선화나 강서준에게는 흔한 일이다.

반면에 남수정은 새파란 신인이다. 데뷔할 때 워낙 유명한 사건으로 알려지긴 했지만, 노래는 한 곡밖에 없고 가끔 방송 스케줄만 소화한다.

그러던 남수정의 인지도는 이번 사건 덕분에 크게 치솟았다.

그런 그녀가 요즘 핫한 작곡가인 디멘션과 공동작업으로 노래를 만들었다는 기사가 났다.

쌍둥이가 애용하는 커뮤니티 게시판에도 그 기사가 올라왔다.

즉시 댓글이 잔뜩 붙었다.

- 남수정이 작곡도 해요? 음악 교육은 학교 음악 시간에 받은 게 전부였다고 하지 않았나요?

- 맞습니다. 노래방도 거의 못 가봤다고 했는데.

- 이야아. 물 들어오니까 노 젓는 클라스. 선상파티 폭파 사건이 뉴스에 크게 나니까, ES 엔터가 이 기회에 디멘션하고 엮어서 띄우려나 봅니다.

- 디멘션이 뭐가 아쉬워서 남수정 같은 신인하고 엮입니까? 그건 아닌 듯.

- 공동작곡이라잖아요. 님 말대로 디멘션이 뭐가 아쉬워서 공동작곡을 합니까? 소속사에서 부탁했겠죠.

-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무리인 듯합니다. 디멘션이 도대체 왜 아마추어하고….

남수정의 신곡을 기대하는 사람도 꽤 있지만,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더 많았다.

남수정도 쌍둥이를 통해 그 커뮤니티 게시판을 알게 됐다. 그녀는 그 댓글들을 읽으며 걱정했다.

"나 때문에 아저씨까지 욕먹나 봐요."

그게 미안해서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

그녀를 불러서 밥을 사주던 이선화가 젓가락으로 얇게 저민 고기를 집으며 말했다.

"정우 씨가 욕을 먹는 건 아니지. 다른 데서 곡 받아오는 건데."

"그래도 아저씨가 결정권을 가진 사람이잖아요. 디멘션이라는 이름을 쓰는 사람이기도 하고요."

"걱정하지 마. 이건 오히려 좋은 기회야."

"네? 욕먹고 있는데요?"

"빨간색파랑을 발표하면 어떻게 될 것 같아? 일단 노래 좋잖아? 너도 뉴스의 중심에 있고 언론 푸쉬까지 이렇게 받고 있어. 당연히 뜨겠지."

"그리고 게시판은 더 시끄러워지겠죠."

"바로 그때 네가 처음에 녹음한 빨간색파랑의 원곡을 공개하는 거야."

"녹음실에서 한 거요?"

"아니. 너희 집에서 한 거."

"그거 대충 녹음한 거라 음질도 나쁘고…."

"그러니까 더 자연스럽지. 그럼 네가 만든 원래 멜로디가 어떻게 빨간색파랑으로 바뀌는지 사람들이 알게 되잖아. 그럼 다들 인정할 거야."

"뭘 인정해요?"

"너한테 감각이 있다는 거."

"에이. 그 노래는 그냥 우연히 나온 건데요? 그리고 아저씨가 원래 가사는 쓰지 말라고 했는데…."

"음…. 그럼 가사만 바꿔서 그런 분위기로 다시 녹음하자. 그러고 나서 다음 곡도 또 공동작곡이라고 발표하는 거야."

"그럼 더 욕하지 않을까요? 두 번이나 그런다고."

"전부터 디멘션은 한 사람이 아니라 집단이라는 추측이 있었어. 외국 회사라는 말도 있었고."

"저도 들었어요."

"조만간 정우 씨가 회사와 새로 계약한 가수들에게 곡을 여러 개 줄 거야. 그럼 디멘션이 집단이나 외국 회사라는 소문이 힘을 얻겠지. 그때 묻어가면, 네 원곡이 워낙 좋아서 그쪽에서 조금 도와준 거라는 여론을 만들 수 있어. 그러면 모든 불만은 사라져."

"진짜요?"

"나 이선화야. 내 말이 곧 진리니까 믿어."

남수정은 안심했다.

"언니 말 들으니까 배고파졌어요. 많이 먹어야지."

"하나 더 시켜줄까?"

"네! 이거 맛있어요!"

이선화가 사람을 불러 음식을 추가로 주문한 후에 말했다.

"그러니까 연습 열심히 해. 정우 씨가 준 약 꼬박꼬박 챙겨 먹고."

"연습 많이 한 날은 꼭 마시고 있어요. 그거 근데 효과는 좋은데, 진짜 맛이 없어요."

이선화가 한숨을 내쉬었다.

"알아. 나도 거의 매일 마시니까."

* * *

서소라가 서정우와 통화한 후에 전화를 거칠게 끊었다.

"아오. 어떻게 이렇게 동생을 박대하지? 나 주워왔나? 곡 준다고 해놓고 왜 안 주는데!"

쌍둥이 박다연이 뒤에서 음침하게 웃었다.

"흐흐. 신곡은 곧 나올 듯."

서소라가 박다연을 휙 돌아보았다.

"넌 뭔가 아는 것 같은데?"

입이 싼 박다연은 당황했다.

그녀는 꿈속 세상에서 박철우가 다듬고 있는 노래를 듣고 직접 불러도 보았다. 하지만 꿈에서 겪은 일은 비밀이다.

"어? 아니야! 디 형사님에게 들었어! 곧 준다던데?"

서소라가 불평했다.

"나한테도 그랬어. 금방 한 곡 줄 것처럼 말하더니 수정이를 먼저 주네?"

이번에는 박하연이 웃었다.

"흐흐흐. 괜한 걱정은 마시라. 진짜 곧 나온다. 곧."

박다연도 맞장구를 쳤다.

"거의 완성됐다. 이번 노래 진짜 좋다. 대만족이다."

서소라의 눈이 가늘어졌다.

"너희는 노래까지 들어본 것 같네?"

버릇처럼 박하연의 말에 맞장구를 치던 박다연이 다시 당황했다.

"어? 어떻게 알았지?"

서소라가 버럭 했다.

"이 인간이! 지난번 노래도 쌍둥이 위주더니, 쌍둥이들만 너무 편애하는 거 아냐? 친동생도 좀 챙기라고!"

윤나나도 아쉬워했다.

"나도 좀 챙기고."

* * *

기자가 서정우가 근무하는 경찰서의 서장이나 과장을 찾아가면, 어렵지 않게 커피 한 잔과 적당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그런데 강력2팀을 직접 찾아가면 대놓고 박대받는다.

처음에는 그런 방침에 반발이 꽤 있었지만, 여론이 서정우 편인 데다가 수사에 방해된다는 핑계도 어느 정도 먹혔다.

어차피 서장과 과장이 기자들에게 잘 협조하기 때문에, 이제는 기자들도 형사과 사무실은 잘 들르지 않았다.

물론 미리 연락한 일반 손님에게는 그런 제약이 없다.

영화 제작사 이사 이수현이 서정우를 찾아왔다. 서정우는 듣는 귀가 많은 사무실이 아니라 회의실에서 그녀를 만났다.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약속 지키러 왔어요."

그녀는 배에서 세 번째 폭탄이 폭발할 때 옆구리를 심하게 다쳤다. 그때 그녀는 서정우에게 살려주면 돈을 많이 주겠다고 약속했다.

서정우가 말했다.

"형사가 사람 구해주고 돈 받으면 잘립니다."

그녀가 방긋 웃었다.

"그럼 여기 그냥 그만두고 우리 아빠 회사 보안 부서로 오세요. 소속만 거기로 두고, 제 경호 책임자로 특채할게요. 연봉은 1억 딱 맞춰드리죠."

서정우가 피식 웃었다.

"괜찮습니다."

이수현이 얼른 말을 추가했다.

"실수령액으로 1억."

"괜찮다니까요."

그녀가 등을 의자에 기대고 다리를 꼬았다.

"좋아요. 역시 협상을 잘하시네요. 거기에 보너스 알파 추가."

회의실에 같이 들어온 백성민이 끼어들었다.

"이미 여러 로펌이나 대기업에서 정우를 스카우트하려고 찾아왔습니다. 조건은 그쪽에서 더 크게 부르던데요?"

"거기서 얼마 불렀는데요? 우리 아빠 돈 진짜 많아요. 저도 돈 많고요."

"얼마를 불렀는지가 뭐 중요하겠습니까? 다 쫓겨났는데."

이수현은 당황했다.

"그, 그래요?"

백성민이 자기 일처럼 자랑했다.

"다른 정부 기관 여러 곳에서도 정우를 데려가려고 경쟁하다가 서로 멱살까지 잡을 뻔했습니다. 물론 그것도 다 거절해서 싹 정리됐지만."

"그러니까 형사님 말씀은…."

"백성민입니다."

"백 형사님 말씀은, 정우 씨가 그 좋은 조건을 다 거절하고 계속 형사 일을 하고 있다는 건가요? 왜요?"

"그거야 저도 모르죠. 올림픽에 나가야 할 사람이 왜 여기 있는 건지. 어쨌든 정우를 돈으로 꼬시긴 어려울 겁니다."

이수현은 난감했다.

"이러면 곤란한데."

서정우가 그녀에게 물었다.

"상처는 어때요?"

그녀의 표정이 밝아졌다.

"정우 씨가 잘 지혈해줘서 다행히 살았어요. 의사가 응급조치가 참 잘 됐다고 감탄하던데요. 출혈이 더 심했으면 큰일 날 뻔했대요."

서정우는 부상자 응급조치를 저쪽 세계에서 굉장히 많이 해봤다. 다른 몬스터의 공격도 없고 긴급 지혈제까지 있는 상황에서, 이수현이 입은 상처를 안정시키는 건 간단했다.

이수현이 말했다.

"그런데 무슨 약을 썼냐고 의사가 묻던데요?"

서정우는 그 말에서 좋은 정보를 얻었다.

'역시 병원에서도 알아낸 건 없나 보네.'

이수현에게 쓴 약의 기본 성분은 이쪽에서 만드는 지혈제나 진통제와 비슷하다. 거기에 몬스터에서 추출한 성분이 조금 추가되었다.

'몬스터에서 추출한 지혈 성분은 이쪽 혈액검사로도 분석이 안 됐다는 소리네.'

그 성분은 몸에 사용되면 빠르게 사라진다. 설사 일부가 남아있다고 해도, 혈액검사로는 그 특별함을 알아낼 수 없다. 몬스터 추출 성분의 특별한 힘은 저쪽 세계에서 수없이 분석을 시도했지만, 모조리 실패했다.

'이쪽은 의학 장비가 더 좋아서 혹시 검출되는 건 아닐까 했는데, 역시 안 되는구나.'

이수현이 다시 물었다.

"정우 씨?"

"그 약은 지인에게 얻은 겁니다. 지혈 효과가 좋다는 것만 알지 약 이름은 모르겠네요."

아무리 현대 과학 기술로 분석할 수 없는 힘이라고 해도, 그 일을 이수현이 떠들고 다녀서 좋을 건 없다.

서정우가 말을 추가했다.

"그런데 그 약을 처방전 없이 의료인도 아닌 제가 쓴 거라서, 식약처 같은 곳에서 따지고 들면 곤란해집니다."

이수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역시 문제가 되는구나. 의사가 그러는데, 효과가 워낙 좋아서 약국에서 그냥 파는 건 아닐 거라더라고요."

"출처를 의심하던가요?"

그녀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제가 비상용으로 가지고 다니던 거라고 적당히 둘러댔어요. 우리 집에 강력한 진통제가 많거든요. 그래서 그렇게 말하니까 더 안 따졌어요. 그분이 우리 아빠한테 신세 많이 졌거든요."

서정우는 배에서 그녀의 상처를 지혈하다가 저쪽 세계의 약을 팔 방법을 생각해냈다. 철가면을 쓰고 팔면 된다.

문제는 누구에게 파느냐이다. 불특정 다수에게 팔면 정보 통제가 불가능하다.

게다가 그가 가진 약은 상처 치료제다. 레드 포션은 부상 치료에 기적에 가까운 효과를 보이지만, 병 치료에는 큰 효과가 없다.

'사고가 나기를 기다렸다가 약을 팔 수는 없지.'

사고가 날 줄 안다면 미리 막아야 한다. 다치기를 기다렸다가 약을 팔 생각은 없다.

그런데 이수현은 조금 전에 집에 강력한 진통제가 많다고 했다.

서정우가 물었다.

"집에 진통제가 왜 그렇게 많나요?"

"아빠 때문에요."

"그런데 아버님께서는 왜…."

그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일 년 전에 사고를 당하셔서 하반신이 마비되셨어요. 그것 때문에 진통제를 달고 사세요."

"치료는…."

"여러 가지를 시도했는데 다 실패했어요. 그래서 이젠 외부 활동도 안 하세요. 회사 일도 원격으로 다 처리하시고, 가끔 저나 동생이 가서 지시대로 잘 돌아가는지 확인만 해요."

그녀가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제 동생은 철이 하나도 안 든 인간이거든요. 맨날 도망쳐서 놀 궁리만 해요. 힘들어 죽겠어요."

이수현의 표정이 더 어두워졌다.

"아빠 진통제도 점점 더 강한 걸 써야 해서 걱정이에요. 정우 씨가 쓴 그 약이 좋은 거면, 주치의 선생님에게 처방해달라고 하고 싶어요. 효과가 진짜 좋던데."

"그 약은 부작용이 심해요. 한두 번은 괜찮은데 여러 번 쓰면 건강을 해칩니다. 진통 효과의 지속 시간이 짧은 건 경험해보셨을 테니 아실 거고."

"아…. 하긴. 약효가 그렇게 강하니까 당연히 부작용도 심하겠죠."

이수현이 간 후에 서정우도 자리로 돌아왔다.

백성민이 잠시 후에 서정우에게 다가와 말했다.

"야. 이수현 씨 아버지 말이야. 척추가 손상돼서 하반신이 마비됐다더라."

"그걸 그새 알아봤어?"

"궁금하잖아."

"다른 건?"

백성민이 아예 서정우의 옆자리에 앉았다.

"회사가 굉장히 커. 재벌까지는 아니지만 국내 기업 순위로 대충 100위쯤 돼. 게다가 현금이 많은 알부자야. 이름은 이병훈. 나이는 53세. 열정적으로 기업을 경영하다가, 다친 후로는 외부 활동을 전혀 안 한다더라. 약해진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서 그러는 거라더라."

"회사 일은 원격으로 처리하고 자식들이 가서 확인하면 된다며."

"지시대로 이행되는지만 보는 건데, 아들은 회사는 관심 없고 가수가 꿈이라더라. 집에 돈이 많으니까 음반도 몇 번 냈는데 실력이 안 돼서 모조리 폭망했지만."

"아들이야 알아서 잘 살겠지."

그는 다른 쪽에 관심이 갔다.

"척추는 어디쯤을 다쳤대?"

"허리에서 조금 위쪽이라는데, 몇 번 척추인지까지는 나도 모르지."

서정우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쯤이란 말이지?"

약을 팔기 딱 좋은 사람을 찾았다.

189. 기적

서정우는 몬스터가 나오는 세계로 넘어갔다. 아무 정보 없이 이수현의 아버지에게 약을 팔 수는 없다. 약만 판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레드 포션은 이미 상처가 아문 곳까지 회복시키지는 못한다.

그는 우선 각성자 수사대 권병철 과장을 만났다.

서정우가 반갑게 인사했다.

"과장님. 우리 요즘 되게 자주 보네요."

권병철은 하나도 반갑지 않았다. 그는 서정우가 왜 친하게 구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어. 그러게 말입니다. 김수철에 대한 건 아직…."

"오늘은 다른 사람에 대해 물어보려고요."

"각성자 수사대가 사람 뒷조사해주는 곳은 아닙니다만?"

"에이. 우리 사이에 왜 이러시나. 여기 선물도 가져왔는데."

서정우가 술병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어? 이건?"

"위스키입니다. 블랙 라벨. 다음에는 블루를 찾아볼게요."

권병철이 자기도 모르게 입맛을 다시다 정신을 차렸다.

"이런 걸 준다고 해서…."

"다음에 과장님이 위험한 상황에 빠지면 연락하시고요."

"누구를 찾아주면 됩니까?"

권병철은 각성자의 범죄를 수사한다. 일반 경찰도 종종 각성자와 싸우지만, 권병철은 매번 각성자와 싸운다. 당연히 위험하다.

'이 구출 카드를 내 부하를 구할 때도 쓸 수 있을까?'

서정우가 간단한 신상 정보를 내밀었다.

"이병훈. 53세. 이번엔 주민등록번호도 있습니다."

"알고 싶은 건?"

"평판."

살아있는지는 묻지 않았다. 그건 평판을 조사할 때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권병철이 부하에게 전화를 걸었다. 생존 여부는 바로 파악됐다.

"찾았습니다. 어떤 사람인지 조사해서 이메일로 보내겠습니다."

* * *

서정우는 권병철과 헤어진 후에 각성자 특수부대 중령 윤현식을 만났다.

윤현식은 엄청 반가워했다.

"정우야! 다음 작전 같이 뛰게? 다들 진짜 너만 기다리고 있다."

서정우가 술을 한 병 쓱 내밀었다. 이미 상표를 떼고 날짜도 지웠다.

"형. 이거 진짜 위스키야."

윤현식이 활짝 웃으며 술을 받았다.

"우리 사이에 이런 걸 주면 나야 좋지. 하하하."

"술값으로 장비 하나만 빌려줘."

"뭔데? 뭐가 필요하냐? 총 필요해? 조준기? 자이로 위치 표시기? 말만 해."

"야전 긴급 척추 회복 장치."

윤현식은 술병을 든 채로 멈칫했다.

"어? 뭐?"

"레드 포션을 쓰는 버전으로."

윤현식이 술병을 도로 내려놓았다.

"야. 내가 이해가 안 가서 그러는데, 서울에 사는 민간인이 그게 왜 필요해? 다친 사람이 있으면 병원에 데려가면 되잖아."

"무기도 아닌데 용도는 묻지 말고."

서정우가 요구한 건 척추가 손상된 사람을 치료할 때 쓰는 장비다. 그 장비와 레드 포션만 있으면 전쟁터 한복판에서도 손상된 곳을 회복시킬 수 있다.

그런데 그 장비가 실제로 쓰이는 경우는 거의 없다.

레드 포션이 기적의 치료제이기는 하지만, 상처가 어느 정도 아문 사람에게는 효과가 없다. 이미 엇나간 방향으로 회복된 것을 그 이전 상태로 돌려놓는 효능은 없기 때문이다.

그런 환자는 병원에 데려가야 한다. 그러면 의사가 회복된 부분을 다시 손상시키고, 그곳에 레드 포션을 사용해 도로 회복시킨다.

레드 포션은 구하기가 워낙 어려워서 병원에도 재고가 잘 없지만, 일단 약만 구하면 부상에 의한 척추 손상은 그런 방법으로 어렵지 않게 치료할 수 있다.

당연히 민간에서는 야전 긴급 척추 회복 장치가 필요 없다. 병원에 가는 게 훨씬 안전하고 치료도 확실히 된다. 전쟁터라 해도 야전 병원으로 후송해서 치료하는 게 낫다.

그런데 몬스터 점령지에 고립된 사람이 척추를 다쳤고 레드 포션도 없다면, 병원은커녕 탈출도 어렵다.

그렇다고 다친 사람을 죽게 내버려둘 수는 없다. 보통은 다른 상처 치료제를 이용해 일단 목숨은 붙여놓는다.

그런 특수한 경우에 그 사람을 구출하러 들어갈 때 가져가는 장비가 야전 긴급 척추 회복 장치다.

윤현식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야. 그건 진짜 특수한 경우에 구출팀이 가지고 들어가는 장비잖아. 전쟁터에서도 어지간하면 그 위험한 장비는 안 쓴다고. 그거 실패율도 높은데."

"난 많이 써서 익숙해."

"하긴. 넌 자주 썼지. 너 혼자 구출하러 들어가면 부상자를 업고 나올 수는 없으니까. 요즘은 너처럼 그 장비를 잘 쓰는 녀석이 없다."

"그거 좀 빌리자."

"야. 도대체 누구를 구출하러 어디로 가는 거냐?"

"남의 영업 비밀을 너무 묻지 말고."

윤현식이 술병을 보았다. 진짜 위스키는 비싸다.

"나도 확 제대해서 너하고 같이 일할까?"

"군대에서 형을 잘도 놔주겠네."

"그치? 너 그만둘 때 나도 같이 그만뒀어야 하는데."

윤현식이 한숨을 내쉬었다.

"옛날이 좋았는데 말이야. 너 있을 때만 해도 침투나 장거리 정찰 작전 성공률이 되게 높았잖아. 애들도 용감했고. 살아만 있으면 네가 구하러 올 거라고 믿고 다들…."

서정우가 그의 말을 끊었다.

"이 형이 왜 말을 돌리지?"

윤현식이 어색하게 웃었다.

"표 나냐?"

"뭐가 문제인데?"

"그건 우리도 하나밖에 없는 장비야. 술 한 병으로는 좀…."

"어차피 안 쓰잖아. 하루만 빌릴게."

윤현식이 입맛을 다시며 본론을 꺼냈다.

"정우야. 다음 양방향 게이트 조사 작전 말이야."

"저번 같은 방식으로 공략작전을 짜면 이번엔 전멸당할 거야. 거긴 화력으로 밀 곳이 아니야."

"저번 작전은 다섯 나라 특수전 담당자들이 모여서 머리를 싸매고 만든 거였다."

"근데 망했잖아."

"망할 뻔했지. 그때 네가 없었으면 반 이상 죽을 뻔했으니까."

"거긴 최정예 팀을 짜서 조용히 침투해야 해. 길잡이가 제일 중요해. 최고로 뽑아."

"네가 최고잖아. 넌 그 게이트 바로 앞까지 진입에 성공한 유일한 사람이기도 하고."

"길잡이는 다른 부대 뒤져봐. 다른 나라 부대까지."

"지난번 작전에서 네가 그 활약을 했는데, 다른 부대에서 누가 너하고 경쟁하려고 하겠냐?"

"가서 '네가 이겼다.'

라고 말하고 꼬셔. 내가 진 거로 칠게."

"그때 작전에 참가했던 사람들이 다음에도 너를 꼭 데려오라고 부탁하더라. 그리고 그 작전은 꼭 필요해. 너도 알다시피 인류의 반격을 위한 중요한 연구…."

"그 방법이 싫으면."

윤현식이 침을 꼴깍 삼켰다.

"싫으면?"

"우리끼리 따로 들어가든지."

서정우도 다시 그곳에 가서 지난번에 싸우다 만 트롤을 잡고 싶다. 그 연구가 얼마나 중요한지도 안다. 게이트 너머에 대한 정보는 그도 알고 싶다.

윤현식이 긴장했다.

"진짜 소수 병력만?"

"진입만 소수가 하는 거고, 다국적 특수부대 연합군도 그대로 필요해. 양동작전을 할 사람들이 있어야 하는데 일반 보병부대를 보내면 몰살당해."

"양동작전? 그러니까 몬스터들을 한쪽으로 쭉 유인하고…."

"우리는 다른 방향으로 침투하는 거지. 침투 경로는 저번에 좀 찾아놨어."

"솔깃한데?"

"우리 팀에 견습 성녀는 꼭 데려가야 해."

"당연하지. 그 연구의 핵심이 그 여자인데."

"그래서 야전 긴급 척추 회복 장치는?"

윤현식이 활짝 웃었다.

"당연히 빌려줘야지. 야. 원래 빌려주려고 했어. 나 믿지?"

서정우가 술병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럼 이 술은 도로 가져갈게."

윤현식이 술병을 덥석 잡았다.

"이거 왜 이러냐? 우리 사이에."

"이거 원래 그 장비 대여료였어."

"우리 와이프가 이런 술을 참 좋아한다. 나 오늘 집에 가서 큰소리 좀 치자."

"알았어."

"야. 고맙…."

"형수님한테 이 술 내가 줬다고 해."

"어?"

"나중에 전화해서 확인할 거야."

"야. 그건…."

서정우가 피식 웃었다.

"농담이야."

윤현식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휴. 진짜 확인하는 줄 알고 깜짝 놀랐다."

서정우가 가방에서 술을 한 병 더 꺼냈다.

"형수님 건 따로 있어. 애들 것도. 아. 애들은 술이 아니라 과자야."

* * *

영화 제작사 이사 이수현이 그녀의 아버지인 BH 테크 사장 겸 회장 이병훈에게 말했다.

"그래서 서정우 형사를 찾아갔는데 제 스카우트 제안을 딱 거절하지 뭐예요. 연봉을 계속 올려도 꿈쩍도 안 해요."

이병훈은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마음에 들었나 보구나."

"실제로 위기를 해결하는 거 옆에서 보면 진짜 어마어마해요. 이 세상 사람 같지가 않다니까요. 아빠도 보면 놀랄 걸요""나도 서정우 형사 기사는 많이 봤다. 그런 사람이면 원하는 곳이 많겠지."

이수현이 아쉬워했다.

"네. 많아요. 대기업에서도 찾아왔는데 다 거절했대요. 돈으로 데려오는 건 불가능해요."

이병훈은 잘 알지도 못하는 서정우보다는 딸의 건강이 더 걱정됐다.

"다친 건 좀 어떠니?"

"응급조치가 너무 잘 돼서 건강에는 아무 이상이 없을 거래요. 그래도 흉터는 남을 거라니까 비키니는 이제 다 입었죠. 뭐."

이수현은 서정우와 만난 이야기를 한참 하고 갔다.

이병훈은 전동 휠체어를 조작해 서재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화상회의 시스템을 켰다.

모니터에 이사 몇 명이 나타났다. 이병훈은 사고를 당한 후부터 회사에 출근하지 않았다. 전자 결재 시스템과 화상회의로 업무를 처리했다.

회의 도중에 이사들이 서로 싸웠다. 박광천 이사가 강하게 주장했다.

- 이 프로젝트만 성공하면 대박이라니까!

다른 이사가 반대했다.

- 개발비가 너무 많이 들어가잖아! 위험하기는 또 더럽게 위험하고!

- 이거 미국 정부가 제안한 프로젝트잖아! 이것만 성공하면 다음에는 더 큰 프로젝트를 딸 수 있다고!

이병훈은 이번 프로젝트는 이메일과 영상으로 보고받은 것만으로는 감이 오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요즘 기운이 나지 않았다. 전에는 회의 시간에 이사들보다 더 소리를 질렀는데, 지금은 아무런 의욕이 없었다.

그가 손을 들었다.

"다들 진정하고, 이 문제는 조금 더 생각해봅시다."

그날 밤에 이병훈은 휠체어를 운전해 방으로 들어갔다.

"후우. 이건 뭐 감옥이 따로 없군."

그의 휠체어는 손가락만 까닥여도 조작할 수 있는 제품이다. 만들 때부터 그의 체형에 맞춰 특별히 제작되었고, 각종 첨단 보조장치들도 붙어 있다. 집안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해 이곳에 있을 때는 어디든지 갈 수 있다.

하지만 집 밖으로 나가지는 못했다. 일 년 전에 사고를 당한 후부터 그는 병원에 갈 때 외에는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 병원도 가지 않게 된 지 꽤 오래됐다.

"이대로 난 이곳에 스스로를 가둬놓고…. 음?"

방안에 사람이 있었다. 이병훈은 살짝 긴장했다.

"누구?"

서정우가 철가면을 쓰고 모습을 드러냈다.

"이병훈 회장님."

이병훈이 인상을 썼다.

"사업을 하면서 날 미워하는 사람이 많이 생기긴 했지만, 암살자를 보낼 정도로 원한을 맺은 기억은 없는데…."

"너무 넘겨짚으시는군요."

"그 가면, 철가면 아닌가? 철가면은 위험한 인물이라고 들었으니까."

"초면에 말도 까시고."

"가면밖에 못 봤으니 우린 아직 진짜 면을 본 건 아니지."

"이러시면 나중에 후회하실 텐데."

"불청객을 상대로 반말 좀 했다고 후회할 리가 있나."

"정말 좋은 제안을 하러 왔습니다만?"

"나한테 그런 말을 하며 다가온 사람이 많았는데, 모두 사기꾼이었지."

서정우는 이병훈이 왜 이렇게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말을 함부로 하는지 안다.

'의욕을 완전히 잃었군. 희망도 잃고.'

왜 잃었는지도 안다.

서정우가 질문을 던졌다.

"다시 예전처럼 걸을 방법이 있다면, 얼마나 내시겠습니까?"

이병훈이 낮게 웃었다.

"철가면이 위험하다는 기사는 많이 봤지만, 설마 사기꾼일 줄이야. 다시 걸을 수 있다면? 십억, 아니, 백억이라도 내지."

서정우가 얼른 말했다.

"딜."

"음? 딜?"

그건 서정우가 저쪽 세계에서 협상할 때 습관적으로 쓰던 말이다.

그는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한숨 자고 일어나면 신세계가 열릴 겁니다. 잔금 이야기는 결과를 보고 이야기하죠."

"잠이라면 낮에 많이 자서 요즘은 밤잠이 없…."

서정우가 이병훈의 팔에 주사기를 꽂았다.

"어?"

"거 좀 주무시라고."

수면제의 약효가 이병훈의 몸에 빠르게 퍼졌다.

"이런다고 해서…."

이병훈의 고개가 젖혀졌다. 그는 그대로 잠들었다.

서정우가 불평했다.

"이 아저씨 진짜 쌓인 게 많았나 보네. 왜 싸우려고 들어? 도와주러 왔는데."

190. 기적 II

서정우는 이병훈을 번쩍 들고 침실에 딸린 욕실로 들어갔다. 그는 그곳에서 이병훈의 옷을 벗기고 욕실 바닥에 엎어놓은 후에 따로 챙겨온 장비를 꺼냈다.

야전 긴급 척추 회복 장치는 30센티미터쯤 되는 길이에 여러 개의 관절로 이루어진 장비다. 핵심 부품은 광물형 몬스터에서 추출한 금속으로 만들어졌다.

장비의 양옆에는 몸에 감을 수 있는 고정장치도 달려 있었다.

"내가 쓰던 상태 그대로네."

각성자 특수부대에서 제대한 후에는 이 장비를 쓸 일이 없었다.

그는 제대 후에도 생존자를 구출하는 일을 했다. 그런데 그가 구출하는 건 대부분 일반인 생존자다. 일반인이 몬스터의 공격을 받아 이 장치가 필요할 정도로 다치면, 보통은 구출하러 가기도 전에 죽는다.

그가 이병훈의 등을 확인했다. 허리와 등 사이에 수술 자국이 몇 개 보였다.

'이건 이미 다 아물어서 레드 포션의 영향을 안 받겠어. 딱 좋은 상태야.'

이병훈에게 주사한 수면제만으로는 지금부터 생기는 고통을 견디기 어렵다.

그는 강력한 국소마취제를 이병훈의 척추에 주사했다. 그 마취제에도 몬스터 추출 성분이 포함되어 있다.

그 후에 회복 장치를 이병훈의 등에 붙였다.

성공하려면 척추뼈의 크기에 맞춰 만들어진 각각의 모듈을 정확한 위치에 놓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 조준이 빗나가면 엉뚱한 부분을 회복시키게 된다.

서정우는 손으로 뼈를 만져가며 장비의 위치를 조정했다. 실수한다고 해서 이병훈이 죽는 건 아니지만, 그 실수를 복구하려면 레드 포션을 한 병 더 써야 한다.

"난 이 느낌이 참 싫더라."

서정우가 척추를 따라 장착한 여러 개의 모듈을 손으로 콱콱 눌렀다. 그가 누를 때마다 철컥 소리와 함께 작은 송곳이 여러 개 튀어나와 척추에 박혔다.

장치 사이로 피가 새어 나왔지만, 여기는 욕실이다. 흔적을 지울 방법이 많다.

서정우가 장치의 상태를 확인했다.

'빗나간 거 없이 잘 박혔네.'

레드 포션의 회복력은 유한하다.

팔이 잘려도 레드 포션을 그 자리에서 사용하면 도로 붙일 수 있다. 그런데 팔다리가 다 잘려나간 상태라면 한 병의 힘으로는 어림도 없다.

문제는 레드 포션은 연속해서 쓸 수 없다는 것이다. 스킬처럼 레드 포션도 재사용 대기시간이 있다.

그래서 손상된 척추를 치료할 때는 상처를 정확한 위치에 치료가 가능한 만큼만 내야 한다.

서정우가 레드 포션을 장비에 넣었다.

곧바로 레드 포션이 바늘처럼 가느다란 관을 타고 새로 상처 낸 곳에 정확히 주입됐다.

레드 포션은 다른 상처에 사용해도 몸 전체에 영향을 끼치지만, 치료 효과를 극대화하라면 상처에 정확히 사용하는 게 좋다.

순식간에 포션 병이 텅 비었다.

서정우가 말했다.

"오랜만이라 손이 미끄러질 뻔했다."

* * *

이수현은 밤늦게 퇴근했다. 그녀가 이병훈의 침실 문을 열었다.

이병훈은 침대에 누워 있었다.

이수현이 그 옆에 서서 이병훈을 내려다보았다. 표정이 편안해 보였다.

"오늘 밤은 잘 주무시네. 다행이다."

* * *

이튿날 아침에 이병훈이 눈을 떴다. 익숙한 천장이 보였다.

아쉬움 가득한 한숨이 나왔다.

"후우. 꿈이었나?"

철가면을 만난 건 기억하지만, 눈을 떠보니 평소 아침처럼 침대에 누워 있다.

"꿈에 철가면이 나와서 다시 걷게 해준다고 했는데…. 내가 얼마나 걷는 걸 원했으면 그런 꿈을 다 꾼 거지? 이거 창피해서 애들에게 말도 못 하겠어."

척추가 마비된 사람이 휠체어에 혼자 타는 건 쉽지 않다. 그런데 그는 현관 안쪽에 외부인을 두지 않은 지 꽤 됐다.

대신에 그가 쓰는 휠체어에는 혼자 탈 수 있게 도와주는 첨단 보조장치가 장착되어 있다.

그는 휠체어를 조작하기 위해 침대 옆의 리모컨을 향해 팔을 뻗었다. 평소보다 리모컨이 쉽게 잡혔다.

"어?"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가 고개를 몸쪽으로 돌렸다.

그는 지금 상체를 조금 일으키고 있다.

이럴 리가 없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바로 어제만 해도 허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지난 일 년간 그런 상태였다.

"어어?"

그가 몸을 일으켰다. 허리 근육이 약해져 단번에 일어나지는 못했지만, 상체를 세우는 게 어렵지 않았다.

"어어어?"

어젯밤에 철가면을 만났던 때가 다시 생각났다. 그때 철가면이 했던 말도 선명하게 기억났다.

- 한숨 자고 일어나면 신세계가 열릴 겁니다.

이제야 그게 꿈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갑자기 숨이 거칠어졌다.

"허억! 허억!"

바짝 긴장하며 다리를 들어보았다. 다리가 움직였다.

"허어억!"

이쯤 되면 현실을 안 믿을 수가 없다.

그가 조심스럽게 침대 옆으로 다리를 내밀었다. 발끝에 바닥이 닿았다.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다리의 근육이 예전보다 줄어있었지만, 그의 몸에 맞춰 만든 전자동 물리치료기를 그동안 꾸준히 사용한 덕분에 일어서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가 창문을 돌아보았다. 커튼이 닫혀 있었다. 커튼 제어 리모컨을 찾아 버튼을 눌렀다. 커튼이 좌우로 부드럽게 열렸다.

이병훈이 창가로 걸어갔다. 일 년 만에 걷는 걸음인데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가 창가에 서서 밖을 보았다. 넓은 정원에서 개 두 마리와 놀고 있는 딸이 보였다.

그는 전에는 그 모습을 휠체어에 앉아서 보았다. 그런데 이제 두 다리로 서서 보고 있다.

"이 눈높이에서 이 모습을 볼 날이 다시 올 줄이야…."

개 한 마리가 이병훈을 돌아보고 꼬리를 열심히 흔들면서 짖었다.

"컹컹!"

다른 녀석은 흥분해서 펄쩍펄쩍 뛰었다.

이수현이 개들을 불렀다.

"얘들이 왜 이래? 야. 앉아! 앉으래도? 왜…."

그때서야 이병훈을 발견했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굳었다. 눈만 동그래졌다.

"아빠?"

이병훈이 예전처럼 서 있었다. 처음에는 잘못 본 줄 알았다. 다시 봐도 이병훈이다.

이수현이 갑자기 현관을 향해 달려갔다.

이병훈이 돌아섰다.

"꿈이 아니야. 다시 일어섰어. 이건…."

그가 아는 현대 의학으로는 하룻밤 사이에 이렇게 될 수가 없다.

"기적이야."

그의 시선이 탁자 위로 향했다. 그곳에 메모지가 한 장 있었다.

[비밀 꼭 지키시고, 잔금도 잊지 마시고.]

잔금이라는 글을 보자 어젯밤에 철가면이 질문했던 다른 말도 생각났다.

- 다시 예전처럼 걸을 방법이 있다면, 얼마나 내시겠습니까?

그때 이병훈은 확실히 대답했다.

- 철가면이 위험하다는 기사는 많이 봤지만, 설마 사기꾼일 줄이야. 다시 걸을 수 있다면? 십억, 아니, 백억이라도 내지.

이병훈은 크게 당황했다.

"어? 잠깐. 백억?"

너무 크게 불렀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 * *

이수현은 집안으로 뛰어들어갔다. 방금 본 모습이 믿어지지 않았다.

'분명히 서 계셨어! 내가 미쳤나? 헛것이 보이나?'

그녀가 이병훈의 침실 문을 벌컥 열렸다.

"아빠!"

이병훈이 이수현을 돌아보았다.

"수현아!"

이수현은 다시 얼음이 되었다. 그 자리에 서서 이병훈을 보기만 했다. 그녀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이 현실이 믿어지지 않는 건 이수현도 마찬가지다. 그녀가 겨우 입을 열었다.

"아빠. 지금…."

의사들은 이병훈이 다시는 걸을 수 없다고 선언했다. 기적이 일어나기 전에는 다시 설 수 없다고 했다. 그녀는 분명히 그렇게 들었다.

이병훈이 말했다.

"기적이 일어났지."

"어, 어떻게…."

이병훈은 쪽지의 내용을 떠올렸다.

'비밀을 지키라고 했는데.'

이 상황을 다른 사람들에게 납득시키려면, 말을 맞춰줄 사람이 한 명은 있어야 한다. 자고 일어났더니 그냥 걸을 수 있게 됐다고 하면 믿을 사람이 없다.

'수현이에게는 말해도 되겠지. 생각이 깊은 아이니까.'

아들도 생각했다.

'성우는 입이 싼 녀석이라서 당장 자랑하고 다니겠지. 성우에게는 일단 숨기자. 집에도 잘 안 들어오는 녀석이니까 숨기긴 쉽겠네.'

아들에게도 숨기는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할 생각은 없다.

"수현아. 일단 말을 좀 맞춰야겠다. 그동안 비밀리에 치료받은 거로 하자. 관련 업무는 네가 혼자 처리한 거로 하고."

이수현은 당황했다. 이게 왜 비밀로 할 일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네?"

이병훈이 서정우가 남긴 메모지를 들었다.

"사실은 말이다."

* * *

이병훈은 온종일 흥분해서 지냈다.

허리와 다리의 근육이 약해져서 아직 뛰는 건 어렵지만, 집안에서 걷는 것 정도는 무리가 없었다.

낮에는 정원도 걸었다. 대낮에 밖을 걷는 게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지 깨달았다.

"이 평범하게 좋은 걸 다시는 못 누릴 줄 알았는데."

개 두 마리도 주인이 걷는 걸 보고 신나서 주변을 뛰어다녔다.

"너희들도 좋냐? 나도 좋다."

* * *

서정우는 그날 밤에 철가면을 쓴 채로 이병훈의 집에 침입했다. CCTV의 위치는 이미 알고 있지만, 공간 분석 스킬을 사용해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추가된 카메라는 없었다.

그는 창문을 통해 이병훈의 방으로 들어갔다.

이병훈은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하게 인사했다.

"오늘 다시 오실 줄 알았습니다."

서정우가 피식 웃었다.

"하루 사이에 태도가 너무 바뀌십니다? 진짜 면을 못 본 사람에게는 말을 까신다더니?"

이병훈이 어색하게 웃었다.

"하, 하하. 그거야…. 어젯밤엔 제가 너무 무례했습니다. 진짜 도와주러 오신 줄도 모르고."

"그렇게 말했는데 안 믿으셨지요."

"죄송합니다. 그런데 여기는 어떻게 이렇게 쉽게…. CCTV도 있고 개들도 있는데."

CCTV는 3차원 공간 분석 스킬을 사용해 간단히 피했다.

이 집 개들은 경비견이 아니라 리트리버인데, 두 마리 다 사람을 워낙 좋아해서 침입자를 보고도 짖지 않았다. 오히려 좋다고 꼬리를 흔들었다.

"사업 노하우를 물으시네?"

"아. 죄송합니다. 신세계교의 비전 기술이겠지요."

서정우는 살짝 당황했다.

"네?"

"혹시 교주님이십니까?"

'이 아저씨가 미쳤나?'

"그게 무슨 헛소리입니까? 신세계교라니?"

이병훈도 당황했다.

"아, 아닙니까? 하지만 쪽지에 신세계가 열릴 거라고…."

"꽤 합리적인 분이라고 들었는데 왜 사이비 종교를 믿으실까?"

이병훈에게 누군가 찾아와서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신흥 종교가 나타났다고 하면, 그는 코웃음을 칠 사람이다.

그런데 그 기적을 직접 경험했다. 그의 상식으로는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일이 그의 몸에 실제로 일어났다.

서정우는 이병훈을 욕실에서 치료한 후에 흘러나온 피를 깨끗이 씻어서 제거했다. 루미놀을 이용하면 흔적을 찾을 수 있지만, 눈으로 봐서는 표가 나지 않는다.

이병훈의 등에 야전 긴급 척추 회복 장치를 사용했을 때 생긴 상처는 레드 포션을 썼을 때 모두 사라졌다.

그래서 이병훈은 서정우가 어떤 방법으로 치료했는지 모른다. 거울에 등을 비춰봤지만, 이전에 병원에서 치료받을 때 생긴 흉터만 보였다.

아무런 흔적이 없는데 하룻밤 사이에 일어설 수 있게 되었다. 다리에 힘은 좀 없지만 걸을 수도 있다.

그는 기적이 일어났다고 생각했다.

기적과 신세계라는 단어를 결합했더니 신성한 힘을 실제로 쓸 수 있는 특별한 종교라는 결론이 나왔다. 평소에는 그따위 건 믿지 않지만, 기적을 경험한 충격이 너무 커서 판단이 흐려졌다.

거기다 그 나름대로 논리를 세웠다. 그런 강력한 치유 능력이 하급 신관에게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는 철가면이 신세계교의 교주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철가면은 그걸 헛소리라고 했다. 이병훈도 철가면이 그를 또라이 보듯이 본다는 걸 눈치챘다.

"신세계교가… 아닙니까?"

"당연히 아닙니다."

"그럼 이 기적은…."

"과학이죠. 아주아주아주 특수한 약을 사용했습니다. 굉장히 귀하고, 합성도 불가능합니다. 그걸 썼습니다."

"그렇게 귀한 약입니까?"

레드 포션이 귀하긴 하다.

"상상 이상으로 귀합니다. 자세한 건 알려고 하지 마시죠. 중요한 건, 이제 걸을 수 있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그게 제일 중요하지요."

서정우가 손가락으로 철가면을 톡톡 쳤다.

"나에 대한 소문은 들으셨을 테지요? 추적해봐야 내가 누군지 못 찾습니다. 그리고 난 추적당하는 걸 아주아주 싫어합니다."

이병훈이 얼른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게 은혜도 모르는 놈은 아닙니다."

"비밀 꼭 지켜야 합니다."

"그동안 비밀리에 치료를 받았다고 하겠습니다. 진실은 아들도 모르게 하겠습니다. 다만…."

이병훈이 망설이다가 말했다.

"이 상황을 다른 사람들에게 납득시키려면 제 딸은 진실을 알아야 합니다. 제가 휠체어에 앉은 채로 혼자 치료받으러 다녔을 리는 없으니까요."

"그럼 따님 한 명만 허용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서정우는 저쪽 세계 권병철에게 부탁해 이병훈이 어떤 사람인지 대놓고 조사했다.

권병철은 그만하면 괜찮은 사람이라고 알려주었다.

'비밀은 지킬 것 같고.'

어차피 이병훈은 철가면의 정체를 모른다.

서정우가 철가면을 쓴 채로 씩 웃었다.

"그럼 이제 잔금 이야기를 합시다."

"어… 잔금이…."

"백억 원."

191. 기적 III

이병훈이 어색하게 웃었다.

"제가 어제는 다시 걷는 건 불가능하다고 착각하고 말을 함부로 했습니다. 백억은 너무 크니까 좀 깎아주시면…."

서정우가 말했다.

"초면에 왜 이러실까?"

"어제도 봤는데 초면은 아니…."

"'가면밖에 못 봤으니 우린 아직 진짜 면을 본 건 아니지.' 어제 그렇게 말했잖습니까? 그래서 후회할 거라니까. 그러고 보니 초면조차도 아니네. 누구세요?"

"아니, 그게 아니라…."

"잔금이 아까우면 안 내놔도 됩니다. 몸을 원상태로 돌려놓으면 되니까."

이병훈은 화들짝 놀랐다.

"뭐, 뭐라고요?"

"하룻밤 사이에 걷게 만들었는데, 원래대로 돌려놓는 거라고 못할 것 같습니까?"

못한다. 허리를 접어버릴 수는 있지만, 원래 상태 그대로 돌려놓는 건 불가능하다.

서정우는 그렇게 할 생각으로 한 말이 아니다. 상대가 딴소리 못 하게 압박하려고 한 말이다.

이병훈이 침을 꼴깍 삼켰다.

그는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손톱만큼도 없다. 다만 백억 원이 너무 커서 좀 깎아보려고 한 것뿐이다.

그 돈을 만들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가 즉시 두 손을 들었다.

"드리겠습니다. 원래 드리려고 했습니다."

"비밀도 꼭 지키셔야 합니다. 비밀이 여기서 새어나가면."

서정우가 협박했다.

"본인이나 가족이 이런 사고를 당했을 때 그 어떤 대가를 내놓아도 이런 치료는 다시는 없습니다."

"헉!"

이병훈에게 지난 일 년은 지옥이었다. 그는 자신은 물론이고 자식들에게도 그런 걸 겪게 하고 싶지 않다.

사고가 안 일어나면 된다는 안일한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의 아내는 예전에 사고로 죽었다. 그도 사고를 당해 일 년을 하반신이 마비된 상태로 살았다. 그의 딸도 바로 며칠 전에 배에서 폭발에 휘말려 죽을뻔하다가 서정우에게 구출됐다.

이병훈에게 그런 사고는 언제든 다시 찾아올 수 있는 현실이다.

그가 진심을 담아 말했다.

"확실히 지키겠습니다."

"그럼 이제 잔금 이야기를 마저 하지요."

이병훈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제가 현금으로 백억을 갖고 있지는 않습니다. 자산을 현금화하려면 시간이 좀 필요한데…."

"현금이라니요? 백억을 어떻게 들고 가라고 현금으로 줍니까?"

"예? 설마 은행 이체를 받으실 겁니까?"

"설마요."

"그럼…."

"그 돈으로 제약회사 지분을 사시죠. 제 대신."

이병훈의 눈이 번뜩였다.

"혹시 이 기적의 약을 대량생산…."

"사람 말을 진짜 대충 들으시네. 그건 현대 기술로는 못 만든다니까. 당연히 대량생산도 불가능합니다. 오직 나만 만들 수 있습니다."

이병훈은 하룻밤 사이에 그를 낫게 하는 약이나 치료법을 들어본 적도 없다.

그렇다고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이렇게 몸으로 직접 경험했기 때문이다.

'페니실린이 처음 나왔을 때는 폐렴으로 죽어가던 사람이 하룻밤 사이에 상태가 좋아지는 기적이 일어나긴 했지. 21세기에 내가 그런 기적을 경험할 줄은 몰랐지만.'

그래도 이병훈은 이 대화로 꽤 많은 정보를 얻었다.

'무슨 약일까? 어쩌면 약과 기적의 중간에 있는 어떤 신비한 것이 아닐까?'

그게 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약과 제약회사 지분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사업가의 감이 이건 대박이라고 소리쳤다.

"알겠습니다. 어느 회사의 지분을 살까요?"

'특정 회사를 지목한다면, 그 회사에 기적의 약이 있을 확률이 높아.'

서정우가 이쪽 세계 제약회사의 내부 사정까지 조사하는 건 어렵다.

그는 적당한 회사를 찾는 일까지 이병훈에게 맡겼다.

"인수하기 좋고 규모도 적당히 큰 회사. 현재 시중에서 팔리는 여러 치료제를 골고루 만들거나 수입해서 팔고, 생산력도 커야 합니다."

생산력이 커야 과잉 생산된 약이 창고에 쌓이게 만들 수 있다. 그 창고에서 약을 빼돌리면 저쪽 세계로 가져갈 수 있다.

서정우가 제약회사를 손에 넣으려는 이유는, 저쪽 세계에 병 치료제를 가져가거나 저쪽에서도 쓸 수 있는 제조 방법을 알아내기 위해서다.

이병훈의 머리가 팽팽 돌았다.

'회사를 특정 짓지 않았어. 이 기적의 약은 철가면이 기존 제약회사에서 빼돌린 게 아니야. 철가면의 오리지널이야. 이건 대량생산이 불가능하다고 했으니 제약회사를 사서 다른 약을 만들려는 거겠지. 그것도 아주 효과가 좋은 약을.'

그런데 그 계획에는 문제가 있다.

"인수라고 하셨는데, 말씀하신 회사는 백억 원으로는 못 삽니다. 본격적인 제약회사들은 덩치가 굉장히 큽니다."

"일단 백억 원어치 주식을 사서 가지고 있으시죠. 그 주식이 필요할 때가 되면 이야기할 테니까."

이병훈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철가면의 지분, 백억 원어치의 주식을 잠시 맡아두겠습니다. 급한 일은 아니신 것 같으니 천천히 매집하겠습니다. 서두르면 가격이 올라서 손에 넣을 수 있는 양이 줄어듭니다."

이병훈은 계열사를 몇 개나 가진 기업가다. 지분 문제에 밝다. 그가 설명했다.

"백억으로 인수는 못 하지만, 영향력은 행사할 수 있을 겁니다."

"첫술에 배부를 순 없지요. 돈이 부족하니까 손님을 더 찾아야겠습니다."

이병훈의 눈이 번뜩였다.

"제가 고객을 알아볼까요?"

"그러다 이 비밀이 세상에 유출되면 책임지셔야 하는데?"

"어, 그, 그건…."

"대상자만 조용히 알아보시죠. 남 시키지 말고, 당사자에게도 말하지 말고, 그냥 누가 적당한지만."

"다시 활동을 시작하면 가만히 있어도 그런 소식이 들릴 겁니다. 어디서 치료받았는지 물어볼 사람이 많을 테니까요. 치료가 가능한 상태였다는 식으로 적당히 둘러댄 후에, 그중에서 선별하겠습니다."

"회장님이라 그런가? 일을 잘하시네."

"그거 말고도 필요한 게 있으면 얼마든지 말하십시오. 적극적으로 도와드리겠습니다."

"일단은 그거면 됩니다."

"아. 대상을 물색한 후에 연락을 드리려면 전화번호가…."

"알려줄 리가요."

이병훈이 서랍을 뒤져 휴대폰을 하나 꺼내 켰다. 그는 그 휴대폰의 주소록에서 번호 두 개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삭제한 후에, 서정우에게 내밀었다.

"제 명의의 휴대폰 중 하나인데 일 년쯤 안 쓴 겁니다. 연락은 이걸로 하시죠. 저와 제 딸의 전화번호만 남겨놨습니다."

그가 내민 건 배터리 분리형 스마트폰이다. 서정우는 배터리를 빼고 주머니에 넣었다.

서정우가 말했다.

"좋은 거래였습니다. 잔금으로 지분 매입은 알아서 잘 해주시리라 믿겠습니다. 그럼 전 이만."

이병훈이 급히 서정우를 불러세웠다.

"저, 잠깐만!"

"할 말이 더 남았습니까?"

이병훈이 머뭇거리다 물었다.

"저기…. 혹시 흉터 없애는 약은 없습니까? 제 딸이 배에 흉터가 크게 남아서…."

서정우는 여기 오기 전부터 이병훈이 그 부탁을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수현의 배에 어떤 상처가 났는지는 서정우도 잘 안다. 그가 직접 응급조치를 했기 때문이다.

서정우가 약을 네 병 꺼내서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이쪽 약 세 병은 하루에 한 병씩 마시고, 이쪽 약은 솜에 적셔서 상처에 바르면 됩니다. 의사가 의심 안 하게 잘 처리하셔야 합니다."

이병훈이 큰소리쳤다.

"제가 오래전부터 후원하는 의사가 제 딸 치료를 전담하고 있습니다. 그 친구는 아무 소리 안 할 겁니다."

서정우는 창문을 열고 사라졌다.

이병훈은 그가 사라진 방향을 보다가 책상 위로 시선을 돌렸다.

"역시 날 낫게 만든 기적의 약 외에 다른 약도 있구나."

머릿속에 여러 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철가면이 백억을 투자하는 회사에 나도 발을 담가야겠어. 인수할 때 백기사 역할도 할 수 있고, 좋은 약 몇 개만 내놓으면 주가가 폭등할 테니까 돈도 벌 수 있고, 저런 신비한 능력자와 친하게 지낼 수도 있으니까. 이건 진짜 꼭 사야 해."

* * *

이수현은 철가면이 왔다 갔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네? 언제요?"

"조금 전에."

그녀가 얼른 현관을 나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개 두 마리만 그녀가 놀아주려는 줄 알고 달려와서 헥헥댔다.

"너네들! 모르는 사람 보면 짖을 줄 몰라?"

"멍?"

"확 굶길까 보다."

"끼이잉."

그녀가 집안으로 돌아왔다. 이병훈이 약병 네 개를 내밀었다.

"이 약은 하루에 한 병씩 마시고, 이 약은 솜에 적셔서 바르라더라. 그러면 네 배의 흉터를 없앨 수 있…."

이수현이 얼른 병 하나를 열고 단숨에 마셨다. 그녀가 얼굴을 찡그렸다.

"으. 약에서 물파스 맛이 나요."

"아니. 왜 설명도 다 안 듣고…."

"아빠를 다시 걷게 해준 사람이 준 약이잖아요. 당연히 효과가 좋겠죠. 이젠 비키니 못 입는 줄 알았단 말이에요."

* * *

이튿날 백성민이 서정우에게 말했다.

"야. 재미있는 일이 생겼다."

"뭔데?"

"그저께 찾아온 이수현 씨네 아버지 말이야."

서정우는 조금 놀랐다.

"형 정보력은 진짜 놀라운데?"

이병훈은 어제 대문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상황을 정리하고 앞으로의 일을 준비할 시간이 필요해서였다.

'어떻게 그걸 벌써 알아냈지? 우리 관할도 아닌데?'

백성민이 감탄했다.

"어? 너도 알았냐? 야. 역시 우린 열심히 일한다니까. 우린 진짜 열혈 형사 브라더스 아니냐?"

조민석이 옆에서 말했다.

"삼총사로 해줘요. 나도 존재감 좀 가지게."

"세 명도 브라더스잖아."

서정우는 다른 이유로 당황했다.

"응? 일?"

"어? 넌 뭐 이야기한 건데?"

서정우가 둘러댔다.

"그 집에 대해 뭔가 새로운 내부 정보를 알아냈나 했지."

"내가 왜 그걸 알아보겠냐? 그저께야 궁금해서 연락 좀 돌려본 거지. 하여간 우리 관할에서 도둑놈을 하나 잡았는데, 직장이 BH 테크네? 거기 이수현 씨 아버지가 회장으로 있는 곳이잖아."

이병훈은 BH 테크와 몇 개 계열사의 회장이다. 본사인 BH 테크는 사장을 겸하고 있다.

"그러네. 우연이네."

"그런데 이 도둑놈이 회사에서도 뭘 훔쳐서 팔아먹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어. 그거 확인하려면 우리가 거기 방문을 해야지."

"우리?"

"자기네 직원 일인데 내가 영장도 없이 가면 잘도 협조해주겠다. 네가 가서 이수현 씨 빽으로…."

"빽 아니라고. 그날 이야기하는 거 봤으면서 그래?"

"그만하면 빽 맞는 것 같던데. 하여간 빽 안 써도 좋으니까 같이 가자. 유명인인 네가 가면 쉽게 협조하겠지."

* * *

서정우는 차를 몰고 BH 테크의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차에서 내린 두 사람이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가다가, 다른 차에서 내린 사람과 백성민이 툭 부딪혔다.

백성민이 사과했다.

"아. 죄송합니다."

상대편 비서가 부딪힌 사람에게 말했다.

"이사님. 괜찮으십니까?"

박광천이 옷에 더러운 거라도 묻은 것처럼 툭툭 턴 후에 백성민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이건 뭐야?"

"예?"

"말 한마디로 사과가 되냐?"

백성민도 안에서는 실실 웃고 다니지만 밖에서는 성깔을 부릴 줄 안다.

"아니, 이 아저씨 왜 이러실까? 서로 부딪혔는데도 내가 먼저 사과했으면, 괜찮습니다. 하는 게 보통인데 시비부터 거네?"

"뭐? 아저씨? 야. 김 비서."

"예. 이사님."

"이 두 놈이 우리 회사 소속이면 날 모를 리 없으니까 협력업체 중 하나겠지. 어딘지 알아내서 거기 사장 당장 튀어오라고 해. 이 두 놈 당장 데려가게 할 테니까."

"바로 전화하겠습니다."

박광천이 옷을 한 번 툭 털었다.

"이제 내가 누군지 알겠냐?"

그는 그 말만 남기고 가버렸다.

백성민은 어이가 없었다.

"와. 뭐 저런 게 다 있지?"

비서가 화를 냈다.

"이봐! 지금 우리 이사님한테 저런 거라니!"

"당신네 이사지 우리 이사냐?"

"뭐? 너 어디 소속이야! 우리 이사님 말씀 못 들었어? 거기 아예 날려버릴까?"

"정부를 날려버리게? 와. 쿠데타라도 하게?"

"네? 정부라니요?"

백성민이 경찰 신분증을 내밀며 과장되게 말했다.

"아이고. 안녕하십니까? 민중의 지팡이입니다. 어디 국가를 한 번 날려보시지. 아니면, 같이 가서 설렁탕이라도 한 뚝배기 하시든가?"

"아, 아니, 경찰이 왜 여길…."

"범인 잡으러 왔지요. 범인. 가만있자. 범인이 일당 중에 비서도 있다고 했는데…."

박광천의 비서는 겁먹은 얼굴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오, 오해가 있었나 봅니다. 저, 전 바쁜 일이 있어서 이만."

비서가 도망치듯이 사라졌다.

백성민이 서정우에게 말했다.

"저놈 분명히 비리 저지른 거 있다. 도망치는 꼴이 딱 그래."

서정우가 말했다.

"형 오늘따라 세게 나가네?"

"흐흐. 난 이제 옛날의 내가 아니지. 내가 그동안 너한테 얹은 숟가락이 몇 개냐? 그 숟가락 무게가 있으니까 압력 좀 들어온다고 해서 한직으로 밀려나진 않겠지."

"올라가서 조사나 빨리 끝내고 이 근처에서 점심이나 먹자."

192. 이병훈

박광천 이사가 회장 의자에 앉아서 책상에 다리를 걸쳤다.

"이 의자 진짜 좋단 말이야."

그가 담배를 꺼내 입에 물며 말했다.

"수현이하고 성우는?"

"수현 양은 영화사 일이 바빠서 오늘은 회사에 못 들를 것 같습니다. 원래는 성우 군이 와야 할 차례인데 또 도망쳤습니다."

박광천이 웃었다.

"크크크. 역시 이 회사는 내가 없으면 안 돌아간다니까."

비서가 창백해진 얼굴로 들어왔다.

박광천이 물었다.

"지하주차장 그놈들은 알아봤어? 어느 업체 놈들이야?"

"협력업체가 아니라…."

"그럼 영업 뛰러 온 놈들이 그렇게 건방져? 어디야? 거기 물건 사지 마."

"경찰입니다."

"어?"

"무슨 사건을 수사하러 왔다고 합니다."

박광천이 책상에서 다리를 슬그머니 내리며 말했다.

"설마 나는 아니겠지?"

"이사님 얼굴을 못 알아본 걸 보면 아닐 겁니다."

박광천이 다시 책상 위에 다리를 얹었다.

"그럼 그렇지. 그 경찰 놈들에게는 물 한 잔도 주지 마. 딱 물어볼 것만 물어보고 꺼지라고 해. 건방진 놈들."

박광천이 지금 있는 곳은 BH 테크의 회장실이다. 그에게 줄을 선 사람도 몇 명 와 있었다.

그들 중 한 명이 말했다.

"회장님은 저렇게 되셨고 자식들은 밖으로만 싸돌아다니니까, 그 자리는 곧 박 이사님이 앉으시겠습니다."

박광천이 실실 웃었다.

"그렇지? 그런데 그러려면 김 이사가 방해되는데 말이야."

"다른 이사들의 지지는 육 대 사로 박 이사님이 우세합니다. 이대로 세력 유지만 해도 그 자리는 당연히 박 이사님이…."

갑자기 회장실 문이 벌컥 열렸다.

박광천이 화를 벌컥 냈다.

"누가 노크도 없이 문을 여나!"

"나다."

"나가 누군데!"

이병훈이 걸어들어오며 말했다.

"광천아. 너 많이 컸다?"

"어? 어? 억! 회장님!"

"너 지금 내 책상에 발 올려놨냐?"

박광천이 급히 책상에서 다리를 내렸다.

"아니, 회장님. 그게 아니라."

"내 의자 편하지?"

박광천이 벌떡 일어났다.

"아, 아닙니다. 제가 의자 상태가 어떤지 점검 좀 해보려고…. 그, 그런데 회장님."

박광천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어떻게…."

"서 있냐고?"

"분명히…."

하룻밤 사이에 나았다고 대답할 수는 없다. 그래서 다른 핑계를 만들어왔다.

"그동안 비밀리에 치료받았다. 우리 수현이가 고생 많이 했어."

"경축드립니다! 저에게 말씀하셨으면 치료받으시는 동안 불편함이 없으시게 제가 최선을 다해서 모셨을 텐데…."

"너희들 일하는 거 보려고 말 안 했다. 누가 누가 잘하나 보려고 했지. 그런데 박 이사. 네가 내 방에 있네?"

"오늘은 회장님을 기리며 이곳에서 회의를…."

"내가 죽었냐? 기리긴 뭘 기려?"

"아, 아닙니다."

이병훈이 회장 자리에 앉았다. 그가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책상을 쓰다듬었다.

"여기 다시 앉으니 참 감회가…. 음? 여기 구두 자국이 한두 개가 아닌데?"

박광천이 얼른 책상을 소매로 닦으며 외쳤다.

"회장님! 오해이십니다! 제 자국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이병훈이 비서실장에게 말했다.

"회의 소집해. 지금 회사 안에 있는 부장 이상 간부들 싹 다 모이라고 해."

그가 굳이 부장급 이상을 다 부르는 이유는, 두 다리로 걷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내가 돌아왔다는 걸 확실히 알려야지.'

* * *

서정우와 백성민은 개발 부서의 부장과 조그만 회의실에서 만났다.

부장은 사건 이야기를 듣고 무척 창피해했다.

"김 과장이 도둑놈이었을 줄이야. 이거 제가 면목이 없습니다."

서정우가 말했다.

"부장님이 사과하실 일은 아닙니다. 그런데 어쩌면 회사에서도 뭔가 중요한 걸 팔아먹었을지 모릅니다."

"그건 제가 책임지고 알아보겠습니다."

갑자기 회의실 문이 벌컥 열렸다. 30대 여자 과장이 숨을 몰아쉬었다.

"부장님. 여기 계셨네요. 한참 찾았어요!"

"왜?"

"회장님이 부장급 이상은 전부 회의에 참석하라고 지시하셨어요."

"어? 회장님? 회장님은…."

"오셨어요. 그것도 두 다리로 걸어서 오셨단 말이에요!"

"헉!"

부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죄송합니다. 이 회의는 꼭 들어가야 하는 거라서. 일단은 여기 최 과장이 김 과장이 하는 일에 대해서 아니까…."

"아. 예. 회의 다녀오시죠."

* * *

회의실의 자리가 모자라 부장급 상당수는 벽 쪽에서 있었다. 사장 겸 회장 이병훈은 두 다리로 회의실 안을 걸어 다니며 일장 연설을 했다.

연설문은 어제 집에 있을 때 썼다. 그동안 고생해줘서 고맙다는 말도 하고, 앞으로는 예전처럼 앞에서 뛰겠다는 선언도 했다.

그런데 그의 연설이 끝나자마자 부장 한 명이 목을 움츠리고 들어왔다. 그는 연설 도중에는 못 들어오고 끝나기만 기다리다가 이제야 들어왔다.

개발 부서는 이병훈이 특별히 관심을 갖는 곳이다.

"이 부장? 외근 나갔다 이제 들어왔나?"

"아, 아닙니다!"

"아니야? 회사에 있었는데도 안 와? 날 보는 게 그렇게 싫었냐?"

그는 농담으로 한 말이지만, 부장에게는 농담으로 들리지 않았다. 그가 긴장한 얼굴로 상황을 설명했다.

"그게 아니라, 형사들이 찾아왔습니다. 형사들이 회사를 뒤지고 다니면 좋을 건 없어서 조용한 곳으로 데려가 이야기하다 회장님이 오셨다는 소식을 못 들었습니다."

"응? 형사가 왜? 야. 박 이사. 너 무슨 짓 저질렀냐?"

박광천은 화들짝 놀랐다.

"아, 아닙니다!"

부장이 급히 설명했다.

"직원 중에 도둑놈이…. 경찰이 밖에서 도둑놈을 체포했는데, 회사가 입은 피해는 없는지 확인하러 온 것뿐입니다."

"내가 월급을 적게 주나? 우리 직원이 범인 확실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서정우 형사가 범인을 착각하는 실수를 할 것 같지는 않…."

"어? 뭐? 서정우?"

부장은 해명이 통한다는 생각에 좀 밝아진 표정으로 설명했다.

"예. 아! 서정우 형사가 살인마만 잡는 게 아니라, 평소에는 이렇게 도둑놈도 잡고, 사기꾼도 잡는다고 합니다."

이병훈의 딸 이수현이 배에서 폭발에 휘말려 죽어갈 때 구해준 사람이 서정우다. 이병훈은 그때만 해도 하반신이 마비된 상태라 병원조차 가보지 못했다.

"이 부장."

"예. 회장님."

"붙잡아."

"예?"

"회의 금방 끝내고 갈 테니까 붙잡아두라고!"

"아, 예. 알겠습니다!"

* * *

서정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협조 감사합니다."

백성민이 명함을 내밀었다.

"언제든지 필요한 게 있으면 연락하십시오. 저 시간 많습니다. 하하하."

최 과장은 무슨 의도로 한 말인지도 모르고 명함을 받았다.

"네. 고맙습니다."

서정우가 백성민을 엘리베이터 쪽으로 끌고 갔다.

"아오. 형 때문에 내가 창피해서. 왜? 이번엔 저 과장님이 마음에 들어?"

"내 스타일이신데?"

"형 스타일이 아닌 사람도 있나? 그리고 애인이 있거나 결혼했으면 어쩌려고?"

"그럼 나한테 연락을 안 하겠지."

갑자기 백성민의 휴대폰에 전화가 걸려왔다. 그가 전화를 받았다.

"아. 최 과장님?"

백성민이 서정우를 향해 어떠냐는 듯이 웃어 보였다.

서정우는 드디어 백성민에게 봄날이 오나 싶어서 엄지를 세워주었다.

백성민이 웃으며 말했다.

"벌써 연락을 다 주시고. 하하. 예. 예? 아니, 왜요? 아. 모르시는구나. 아, 예. 알겠습니다."

백성민이 전화를 끊자마자 서정우가 물었다.

"표정이 왜 그래?"

"내가 아니라 너 찾는데?"

"하여간 이놈의 인기는."

"아니. 최 과장님 말고, 여기 회장님이 너를…."

그들이 서 있던 곳 바로 앞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며 이병훈이 내렸다. 그는 서정우를 보자마자 웃음을 터트리며 손을 내밀었다.

"아! 서정우 형사! 하하하. 이거 정말 반갑습니다. 우리 딸이 큰 신세를 졌는데 찾아뵙지도 못했습니다."

서정우는 이병훈이 누군지 아주 잘 안다. 어제도 철가면을 쓰고 만났다.

그는 처음 보는 척하며 악수했다.

"아. 네. 경찰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하하하. 여기서 이러실 게 아니라 가시죠? 제 방에서 차를 한 잔 대접하고 싶습니다."

"저희가 좀 바빠서…."

빨리 가서 점심을 먹어야 한다. 서정우가 대안을 제시했다.

"그냥 저기 휴게실에서 간단히 커피나 하시죠."

"아. 그러실까요?"

이병훈의 뒤에는 이사들이 서 있었다. 박광천 이사는 두 사람과 눈도 못 마주치고 시선을 피했다.

서정우와 이병훈이 휴게실로 걸어갈 때, 백성민이 박광천의 옆에 슬쩍 붙어 조용히 말했다.

"이사님이시라고? 또 뵙네요?"

"아. 네. 그게…."

"아까 우리 대빵 당장 여기로 튀어오라던 거 말입니다만, 대빵이 좀 많아서 누구 말하는 건지 모르겠더라고요. 서장님? 청장님? 헉! 설마 대통령님? 이야아. BH 테크의 BH가 블루 하우스의 약자일 줄이야."

"진짜 미안합니다. 아까는 형사인 줄 모르고 그만…."

"형사 아니라도 사람이 그러시면 안 되지요."

"그러게 말입니다."

* * *

이병훈이 휴게실로 들어가면서 서정우에게 자랑했다.

"우리 휴게실에는 별다방에서 쓰는 최고 사양의 전자동 커피 머신이 있…."

휴게실에는 그런 게 없었다. 자판기만 몇 대 보였다.

이병훈이 뒤를 돌아보았다.

"여기 있던 커피 머신 어디 갔냐?"

김 이사가 얼른 일렀다.

"박 이사가 자기 사무실 앞으로 옮겼습니다."

"잘하는 짓이다. 김 이사 넌 보고만 있었냐?"

박광천도 얼른 일렀다.

"다른 휴게실에 있던 건 김 이사가 가져갔습니다."

"아닙니다. 그건 여기 것보다 훨씬 저렴한…."

이병훈이 한소리 했다.

"이것들이 지금 손님 앞에서. 후우. 내가 안 나와보는 동안 회사 꼴 참 잘 돌아갔다?"

이수현과 이성우는 이병훈의 지시가 제대로 처리됐는지 확인하러 회사에 교대로 들르긴 했다. 그런데 그들은 휴게실까지 확인하진 않았다.

서정우가 이병훈을 보며 생각했다.

'내가 그저께 본 건 의욕을 잃고 좌절한 사람, 어제 본 건 사이비 종교에 넘어갈 뻔한 사람인데.'

지금 보는 이병훈은 에너지가 넘치고 사람도 유쾌했다.

'이게 원래 모습이겠지.'

* * *

이수현은 영화 제작사의 이사다. 그 회사의 직원 세 명이 휴게실에서 커피를 마시며 말했다.

"오늘 마녀 봤냐? 분위기가 좀 바뀐 것 같지 않아?"

"미친 줄 알았다. 아까 깨질 거 각오하고 보고하러 들어갔는데, 다음에 잘하래. 평소라면 서류가 날아다녔어야 하는데."

"저도요. 저한테는 웃어줬어요."

"무슨 좋은 일 있나?"

"제가 보기에는요. 그 배에서 죽다 살아나더니 사람이 좀 여유로워진 것 같아요."

휴게실에 부장이 나타나면서 한소리 했다.

"잘들 한다. 뒤에서 상사 욕이나 하고."

"아. 부장님."

"너희들 혹시 내 욕도 하냐?"

"에이. 설마요. 하하."

"난 너희들 욕 많이 하는데."

"그, 그렇습니까? 그런데 부장님. 이 이사님이 어제부터 진짜 좀 이상하지 않으세요?"

부장이 혀를 찼다.

"이렇게 소식들이 느려서 승진을 어떻게 하려고. 다른 이사도 아니고 이수현 이사의 일은 경조사까지 다 챙겨야 하는 거 몰라?"

"혹시 득남…."

"처녀한테 그 소리 하다가 걸려서 단칼에 잘리고 싶지?"

"노, 농담입니다."

"이 이사님 아버지 말이야. 그분이 우리 회사 지분을 꽤 많이 갖고 있잖아."

"아. 이병훈 회장님이요? 많이 아프시다던데…."

"BH 테크 본사에 있는 친구가 그러는데, 자기네 회장이 오늘 깜짝 등장해서 지금 난리가 났다더라. 왜 난리가 났는지 알아? 휠체어가 아니라 두 다리로 걸어왔거든. 이제 다 나았다는 거지."

"아! 그래서 이 이사님이 저렇게 기분이 좋나?"

"그렇다고 괜히 말실수하지 마라. 저 좋은 기분이 얼마나 갈지 누가 아냐."

"하긴요."

* * *

이선화가 인상을 살짝 썼다.

"어디서 이 영화에 투자한다고요?"

AKX 픽처스 사장 김성준이 말했다.

"블루토마토입니다."

"블루토마토는 AKX의 경쟁사 아녜요?"

"경쟁사라고 해도 조건만 좋으면 영화 투자를 마다할 이유는 없습니다. 이러면 상영관 잡을 때도 유리해집니다."

"수상한데. 혹시 이 이사가 수작을 부리는 거 아녜요?"

김성준이 웃었다.

"이번 영화 투자에 이수현 이사의 입김이 아주 강하게 작용한 것 같더군요."

"역시! AKX가 어디서 영화 제작 투자를 받든 제가 감 놔라 대추 놔라 할 순 없지만, 이 이사의 의도가 매우 매우 수상한데요?"

"이수현 이사가 한 성격 하는 사람인 거야 잘 알지만, 일 욕심도 많은 사람입니다. 일부러 영화를 말아먹을 수작을 부릴 리는 없습니다."

"아니. 그쪽으로 수상한 게 아니라요."

"예? 그럼?"

"아니에요."

* * *

이선화는 친구 김경희와 만나자마자 테이블 위에 노트를 펼치고 볼펜을 들었다.

김경희가 물었다.

"뭐해?"

"승률 계산."

"응?"

"당연히 내가 더 예쁘니까 미모, 섹시, 귀여움 모두 내 승리."

"야. 다른 건 몰라도 귀여움은…."

"시끄러."

"그럼 그거 다 하나로 쳐. 결국 다 외모잖아."

"알았어. 대중의 인기는 내가 더 높은데, 카메라를 싫어하는 정우 씨한테 이게 장점인지 단점인지가 애매하니까 이건 비겼다 쳐야지. 그럼 일 대 영으로 내가 이겼네? 훗."

"왜? 누가 또 서정우를 노려?"

"이 이사."

"네 욕하고 다니는 그 이수현?"

"어. 아무래도 그 마녀가 정우 씨를 노리는 것 같아."

김경희가 잠깐 생각하다가 노트에 항목을 추가했다.

"돈이 누가 더 많은지도 비교해야지."

"어?"

"이수현네 집이 돈 되게 많잖아. 거의 준재벌이지 아마?"

"야! 너 누구 편이야!"

"이년이 왜 정확히 계산을 해줘도 난리야?"

"정우 씨는 돈 같은 건 신경도 안 쓰는 사람이거든?"

"네가 가진 돈의 액수가 부족했던 거 아닐까?"

"아니다! 이 악마야!"

193. 개봉

서정우는 몬스터와 싸우는 세계에서 TV 앞 소파에 앉았다.

이선화가 최근에 출연한 영화가 드디어 완성됐다.

이쪽 세계에서 보름쯤 걸렸으면 좀 빠른 편이긴 하지만 이상한 건 아니다. 극단적으로 빠른 경우에는 사나흘 만에 영화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저쪽 세계도 옛날에는 그런 식으로 영화를 만들던 시기가 있었다. 지금은 투입 자본이 늘어나고 특수효과 같은 후처리도 많아서 그런 경우는 거의 없다.

이쪽 세계는 영화관 상영을 전제로 만들지 않는다. 거의 모든 영화는 TV 방송용이다. TV용은 시청자에게 관람료를 따로 받을 수 없다. 그래서 영화는 대부분 저예산으로 만들고 빨리 만든다. 빨리 만들수록 예산을 더 아낄 수 있다.

이쪽 세계의 영화관 건물은 대부분 부서졌다. 그나마 남아 있는 영화관은 거의 다 다른 용도로 바뀌었다. 영화를 상영하는 진짜 영화관은 몇 개 남지도 않았다.

오늘은 이선화가 출연한 영화가 첫 방송을 하는 날이다.

이쪽 세계 장현성 감독은 지난 몇 년 사이에 찍은 것 중에 최고의 대작을 만들었다고 자랑하고 다녔다.

방송국에서도 대작이라고 판단하고, 감독과 남녀 주연 배우들을 예능에 출연시키며 적극적으로 홍보했다. 조연인 이선화는 그 예능에 초대받지 못했다.

고등학생 정현수가 영화를 같이 보려고 서정우의 집에 왔다가 TV를 보고 감탄했다.

"우와아. 이건 뭐예요? 이렇게 화면이 크고 두께가 얇은 TV가 언제 나왔지?"

이 TV는 저쪽 세계에서 샀다. 동전처럼 얇은 최신형을 사서 가져오면 너무 표가 날까 봐, 두께가 좀 있는 구형을 샀다. 그런데도 이쪽 최신형 고가 TV보다 훨씬 더 좋았다.

서정우가 적당히 둘러댔다.

"연구소에서 테스트용으로 제작한 거야. 가게 가서 이거 달라고 해봤자 안 판다. 이런 게 있는 줄도 모를 거다."

"와. 역시 형은 쩌네요. 그런 인맥도 있어요?"

"어. 있어. 서로 인사하는 사이야."

저쪽 세계 가전 종합 마트에서 판매 사원과 서로 인사하고 TV를 샀다.

정현수가 갑자기 눈을 크게 뜨고 손뼉을 쳤다.

"형. 그럼 원래 있던 TV는 남네요? 나 주면 안 돼요?"

먼저 와 있던 남수정이 정현수의 팔을 때렸다.

"그거 내가 이미 가져가기로 했거든?"

"나도 받아서 너 주려고 물어본 거야. 진짜야."

"믿을 소리를 해야지."

"진짠데. 내가 같이 옮겨줄까?"

이선화가 말했다.

"다들 조용! 영화 시작한다!"

서정우가 팝콘과 사이다를 나눠줬다. 남수정과 정현수는 이제 이 집에 오면 뭔가 맛있는 게 나온다는 걸 안다.

영화는 화끈하고 재미있었다.

보통은 아는 사람이 출연하기만 해도 신기한데, 이 영화에는 남수정과 정현수도 가끔 나왔다. 두 사람은 그래서 더 재미있었다.

장현성 감독은 이선화가 미사리 전투에서 백상어 클랜과 싸울 때 찍은 필름을 그대로 사용했다. 대신에 완전히 편집해 전혀 다른 상황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남수정과 박현아가 전투 도중에 대화하는 장면도 여러 개 추가했다. 마지막에 도와주러 온 사람도 서정우가 아니라 남자 주연배우로 대체했다.

이선화는 그 부분이 불만이었다.

"저기서 원래 오빠 등장시키려고 했는데, 오빠가 거절해서 저렇게 바꾸었어."

"귀찮아."

서정우는 멋진 장면은 모두 이선화에게 몰아주었다. 그가 공중에서 하강하며 사격하는 모습이 나오면 이선화가 받을 스포트라이트가 줄어든다.

주연배우는 서정우처럼 멋지게 그 부분을 재현할 능력이 없었다. 결국 그 장면은 이선화가 완전히 중심이 되었다.

이쪽 세계에도 인터넷은 있다. 유선망이 아니라 무선망을 사용하기 때문에 좀 느리지만, 커뮤니티 게시판의 글을 읽을 때 불편하지 않을 정도는 된다.

서소라는 서정우가 저쪽에서 산 구형 노트북으로 게시판 반응을 확인했다. 저쪽에선 크고 무거운 구형 저가 노트북이지만, 이쪽 최신형보다 가볍고 성능도 더 좋았다.

게시판에 글이 줄줄이 올라왔다.

- 와아. 이선화 총 진짜 잘 쏘네.

- 나 헌터인데 나보다 더 잘 쏘는 듯.

예능 방송에서 영화에 관한 정보를 미리 접한 사람이 글을 달았다.

- 저 장면 찍을 때 악당들이 실제로 쳐들어왔다더라.

- 헐. 그럼 저게 설정이 아니라 진짜 전투? 피해는?

- 배우 쪽은 한 명도 안 죽고 심지어 이겼어. 악당이 더 많았는데도.

- 이선화가 쏘는 거 보니까 어떻게 이겼는지 알겠다.

- 같이 있는 박현아가 각성자인데, 이선화가 더 각성자 같아.

전투 후반에 갑자기 이선화가 모든 총탄을 다 갈겨 적이 머리조차 들지 못하게 하는 장면이 나왔다. 그녀는 탄창을 다 비운 후에 벌떡 일어나서 손을 하늘로 뻗었다. 그 직후에 서정우가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며 연발로 사격했다.

서정우 쪽은 화면에 나오지 않았다. 그때 카메라는 이선화를 찍고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는 남자 주연배우가 서정우의 역할을 대신하기로 했지만, 막상 해보니 그 압도적인 느낌을 조금도 재현하지 못했다.

그래서 감독은 남자 주연배우의 전투 장면을 빼버렸다. 등장하는 모습만 새로 찍고, 적을 쓸어버리는 부분은 아예 찍지 않았다.

대신에 그때 녹음한 총소리를 배경으로 이선화의 표정과 자세를 집중해서 보여주었다.

시청자들은 열광했다.

- 우와아! 이선화!

- 날 가져!

영화가 진행되면서 남수정도 단역으로 몇 번 등장했다. 그녀는 약간의 대사를 어색하지 않게 해냈다.

사람들은 궁금해했다.

- 쟤 누구야?

- 잘 쏜다.

- 귀엽다.

서정우는 댓글이 올라오는 걸 힐끗 보며 생각했다.

'수정이는 저쪽에서도 가수로 인기가 꽤 있는데, 여기서도 반응이 좋네. 확실히 연예인 체질이야.'

영화는 재미있었다. 다들 영화를 보며 촬영 때 있었던 일들을 신나게 이야기했다.

그러다 드디어 영화의 하이라이트인 게이트 공략이 시작됐다.

정현수는 미사리 전투 장면에서 잠깐 등장했다. 게이트 공략 때는 더 자주 화면에 나왔다. 대사는 없지만 전투에 여러 번 개입했기 때문에 얼굴도 확실히 찍혔다.

- 저 남자 누구지?

- 얼굴만 보면 악당 보스인데?

- 분장 조금만 하면 보스 몬스터 해도 되겠다.

서정우가 물었다.

"현수야. 너도 얼굴 나오는데 출연료 따로 받았냐?"

정현수가 팝콘을 부지런히 집어 먹으며 말했다.

"아뇨. 저런 경우는 원래 돈 안 준다던데요. 경호 추가 계약금에 저렇게 잠깐 화면에 잡히는 것도 다 포함되어 있대요. 그래도 텔레비전에 얼굴 나온 게 어디에요?"

게이트 공략 장면부터는 영화가 이선화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서정우는 그날 게이트 근처에서 이선화에게 몬스터 출현 경고를 몰아주었다. 덕분에 이선화가 몬스터를 잡는 모습이 화면에 자주 나왔다.

반면에 서정우는 몇 줄의 대사와 약간의 전투 장면 외에는 나오지 않았다.

게이트 공략 장면이 이어지면서 사람들이 몬스터를 분석했다.

- 적은 주로 대두 도마뱀인가?

- 다른 개체도 좀 있지만 다 하급이야.

- 보병 소대와 같이 들어갔으니까 저 정도는 잡을 수 있지.

그러다 드디어 소형 게이트가 화면에 잡혔다.

게시판이 난리가 났다.

- 오오! 게이트다!

- 진짜 위험한 곳까지 들어갔네!

- 역시 장현성 감독!

게이트 앞쪽에서 새로운 몬스터가 나타났다.

- 저거 대두 도마뱀 특이 개체 같은데?

- 머리가 진짜 크잖아.

- 저 정도면 초대두 도마뱀이라고 불러야….

갑자기 보스 몬스터가 입을 쩍 벌리고 소리를 질렀다.

그날 게이트 앞에서 그 광역 공포 스킬에 당한 사람은, 그날 그 순간에 거의 다 공포에 질렸다.

정신 저항력이 굉장히 높은 서정우와 성물 목걸이의 보호를 받는 이선화만이 영향을 받지 않았다.

지금 시청자들이 보고 듣는 건 그 공포 스킬 그대로가 아니다. 소리가 녹음되고 화면이 녹화된 것이다.

현대 기술로 만든 녹음기와 카메라는 공포 스킬의 특별한 힘을 그대로 담지 못한다. 당연히 시청자들에게는 스킬의 힘이 직접 닿지 않았다.

하지만 섬뜩한 느낌은 확실히 전해졌다. 스킬이 만들어낸 공포는 녹음 과정에서 사라졌지만, 그 스킬이 담겼던 소리에 공포의 잔재가 묻어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시청자들은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게시판이 잠시 멈췄다가 바로 댓글이 줄줄이 올라왔다.

- 이거 뭐야!

- 지렸다!

- 와씨! 아직도 몸이 떨리네.

- 난 심장이 아직도 두근거림.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그 공포의 잔재를 접한 사람들은 작은 충격을 받았다.

장현성 감독은 보스의 첫 등장 이후에는 몬스터가 지르는 소리의 크기를 일부러 줄였다.

녹음된 소리를 계속 들어도 처음 들었을 때만큼 충격을 받지는 않는다. 그래도 소리를 줄여주자 사람들이 더 빨리 충격에서 빠져나와 영화에 집중했다.

글이 계속 올라왔다.

- TV로 걸러 봐도 이 정도면, 현장에서 본 사람들은 다 얼어붙었겠는데?

- 공포 스킬에 당하면 헌터들도 방아쇠를 못 당긴다던데. 무서워서.

- 진짜 이거 어떻게 찍었지? 설마 배우들이 저 장면에서 다 죽은 건 아니겠지?

남수정도 그때 생각을 하며 몸을 흠칫 떨었다.

"아우. 그때 진짜 무서웠는데."

정현수가 말했다.

"난 좀 견딜만했…."

"너도 총 못 쐈잖아."

"그건…."

화면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거의 다 얼어붙어 있을 때, 몬스터 두 마리가 돌진했다.

시청자들은 바짝 긴장했다.

- 어어어?

- 진짜 배우들 다 죽나?

이선화가 혼자서 방아쇠를 당겼다. 그녀는 돌진하는 두 마리를 향해 철갑탄을 쏟아부었다.

- 이선화가 쏜다!

- 쏜다!

- 잡아!

- 우와!

돌격하던 두 마리가 철갑탄 세례를 얻어맞고 고꾸라졌다. 자동소총의 탄창도 텅 비었다.

그녀가 권총을 꺼내 보스 몬스터를 조준했다.

- 또 분홍색 소형 권총이네?

- 이선화가 저번에 출연한 영화에서도 저 총을 썼는데, 저거 보기에만 장난감 같지 성능이 장난 아니더라.

그녀가 방아쇠를 당겼다. 단발로 날아간 총알이 보스 몬스터에게 꽂혔다.

보스 몬스터가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몬스터를 정확히 조준하고 한 발씩 신중하게 사격했다.

보스 몬스터도 그녀를 향해 전진하며 더 크게 소리를 질렀다. 감독이 그 소리의 크기를 줄였는데도 불구하고 섬뜩한 느낌이 다시 시청자들에게 파고들었다.

전국의 시청자들이 바짝 긴장하며 화면에 집중했다. 댓글도 올라오지 않았다.

이선화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그녀의 권총이 계속 불을 뿜었다.

총을 쏘는 이선화와 소리를 지르는 보스 몬스터가 교대로 화면에 나타났다. 명중탄이 나올 때는 그 모습을 확대해서 보여주었다.

그러다 그녀의 마지막 총알이 보스 몬스터의 입을 뚫고 들어갔다.

마침내 보스 몬스터가 쓰러졌다.

빠르게 전환되던 화면이 멈췄다. 이제 화면에는 이선화만 나왔다.

댓글 창은 아직 조용했다.

그녀가 카메라 쪽으로 돌아서서, 아직 연기가 나오는 권총 총구를 향해 입으로 바람을 훅 불었다.

잠시 후에 댓글 창이 폭발했다.

- 우와아아아!

- 이선화!

- 나 지금 반했다!

- 누나! 날 가져요!

그 장면이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였다. 영화의 남은 시간은 그 여운을 시청자들이 즐길 수 있는 방향으로 진행됐다. 그때부터는 이선화의 비중이 제일 높았다. 그녀는 압도적인 연기력과 미모로 시청자들을 사로잡았다.

마침내 영화가 끝났다.

영화가 끝나도 댓글은 계속 달렸다.

- 이건 진짜 대작이다.

- 이선화 진짜 연기력도 쩔고, 액션도 쩔고!

- 출연 시간은 좀 짧지만, 이 영화에서 제일 인상 깊은 배우는 이선화네.

- 이선화 혹시 전투 스킬 각성자 아니야?

- 아니야. 각성자면 벌써 영화판 씹어먹었지.

- 저런 어마어마한 보스 몬스터를 이선화 혼자 잡았는데?

- 상성이 워낙 좋았어. 정신 저항력이 굉장히 높대.

- 얼마 전에 이선화가 저주에 걸렸다가 극복한 거 기사로 났다. 그때 정신 저항력이 더 높아졌겠지.

- 기사 링크 좀.

- 옜다.

- 이선화는 비각성자의 여신이다!

- 쩐다. 진짜 쩐다.

이선화가 서소라의 옆에 앉아 댓글을 보면서 자랑했다.

"다들 봤어? 내가 이런 사람이야."

남수정이 말했다.

"전 원래 언니 팬이에요!"

이선화가 서정우를 빤히 쳐다보며 눈빛으로 칭찬을 요구했다.

서정우가 말했다.

"연기 좀 하더라."

이쪽에도 포털 사이트가 있고 실시간 검색어도 있다. 영화의 제목이 검색 순위 2위를 찍었다. 1위는 이선화다.

이선화가 장현성 감독의 전화를 받았다.

"아. 네. 잘됐네요."

그녀가 전화를 끊은 후에 자랑했다.

"반응이 폭발적이래. 방송국에서 재방송 계약부터 하자고 한대. 재방송 시청률이 더 높게 나올 거래. 다른 방송국에서도 연락이 쏟아진대. 자기네도 좀 방송하자고."

이쪽 세계의 TV용 영화는 많이 방송될수록 돈이 된다.

그녀에게 전화가 다시 걸려왔다. 그녀가 아쉬운 듯이 말했다.

"어머. 그때요? 스케줄 좀 조정해보고 다시 연락 드릴게요."

서정우가 물었다.

"뭔데?"

"예능 출연."

"너 다른 스케줄 하나도 없잖아. 무슨 조정을 해?"

"어허. 없어도 있는 척해야지. 그냥 좋다고 하면 너무 없어 보이잖아."

전화가 또 걸려왔다. 이번에도 섭외 전화였다.

"어머. 그 시간에 다른 스케줄이 또 있는데…. 제가 시간 조정이 가능한지 알아보고 연락 드릴게요."

이선화가 전화를 끊자마자 활짝 웃으며 자랑했다.

"봤어? 금방 또 들어오잖아."

서정우도 기분이 좋았다. 지금 이선화가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행동하는 모습이 저쪽 톱스타 이선화와 비슷했다.

'우리 선화도 그렇게 떠야지.'

기분이 좋아진 서정우가 선언했다.

"그럼 오늘은 고기 파티다!"

194. 게임 대회

서정우는 지하 저장고에서 꺼내온 고기를 구웠다. 다들 신이 나서 고기를 먹었다. 이선화와 서소라는 술도 마셨다.

이선화는 소주를 특히 좋아했다. 기분이 좋아서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고등학생 두 명은 사이다를 주었다. 사카린 사이다보다 훨씬 더 맛있어서 둘 다 좋아하면서 먹고 마셨다.

남수정과 정현수는 진짜 고기와 음료수가 나와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나름대로 답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남수정이 말했다.

"이 아저씨 진짜 돈 많나 보다. 이 비싼 걸 막 먹고."

정현수가 맞장구를 쳤다.

"부자들 의뢰를 처리해주고 고기를 왕창 받아오는 거 아닐까?"

"저 실력이면 그럴지도."

서정우는 작은 파티를 즐기며 방금 본 영화를 생각했다.

'오늘 본 영화를 저쪽 세계로 가져가서 상영해도 통할 것 같은데.'

이건 저쪽의 그 어떤 블록버스터 영화보다도 실감 나는 액션 영화다.

'그러면 곤란해지겠지.'

이 영화에 이선화가 나온다. 다른 배우들도 저쪽에 실제로 존재한다. 그걸 설명할 방법이 없다.

'아쉽네.'

* * *

서정우가 평행차원을 넘어와 포캣츠에게 새 노래를 넘겼다.

서소라가 곡의 파트 배분을 재빨리 훑었다.

"이거 봐. 이거 봐.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쌍둥이는 60퍼센트나 되는데, 나하고 나나는 40퍼센트밖에 안 되네!"

"소라야."

"왜?"

"배가 불렀구나."

"나는 아직도 배가 고파!"

"굶고 싶냐?"

"엄마한테 전화해서 물어봐야겠다. 나 주워왔냐고."

"시끄러우니까 연습이나 해."

서정우가 돌아간 후에 연습을 시작했다. 곧바로 다른 문제가 생겼다.

분명히 오늘 새로 받은 악보인데 쌍둥이가 너무 잘 불렀다. 그들은 꿈으로 연결된 세계에서 박철우에게 이 노래를 배웠다.

서소라가 다시 불평했다.

"와. 이 차별. 분명히 따로 배운 거네. 도대체 누가 진짜 동생이야?"

박다연이 웃었다.

"흐흐흐."

"어라? 다연이가 이유를 아는 것 같은데?"

"아, 아니다!"

* * *

남수정이 서정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저씨!"

- 어. 왜?

"신곡 발표 오늘이잖아요. 오늘 뭐 없어요?"

- 응. 없어.

"진짜요?"

- 진짜 없어.

남수정이 부르는 새 노래 '빨간색파랑'은 예정보다 일찍 발표됐다.

그 노래는 그녀가 중요 멜로디를 만들었다. 하급 회복 물약 덕분에 연습을 많이 해도 목은 계속 좋은 상태를 유지했다. 그 두 가지 이유 덕분에 필요한 수준까지 빨리 도달했다.

아직 선상파티 폭파 사건이 사람들의 기억에 확실히 남아 있다. 남수정은 그때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런 그녀가 신곡을 냈다. 그것만으로도 뉴스가 되기에 충분한데, 심지어 노래까지 좋았다.

ES 엔터테인먼트 사장 오동철은 '빨간색파랑'이 발표만 되면 바로 음원 판매 사이트 상위권으로 올라갈 거라고 장담했다.

서정우도 그렇게 예상했다. 잘 될 걸 알기 때문에 굳이 응원하지 않았다.

남수정이 다시 물었다.

- 아저씨.

"왜."

- 히어로 활동할 때 조수 필요하지 않아요? 철가면과 철교복.

"응. 필요 없어. 시간 남으면 공부나 해.

* * *

서정우는 경찰서 옥상에서 도시 풍경을 보며 커피를 마셨다.

백성민도 커피를 들고 다가와 물었다.

"무슨 생각 하냐?"

"요즘 좀 평화롭다는 생각."

백성민이 앞을 가리켰다.

"저기 저 건물들이 여기서 보니까 다 평화로워 보이지? 겉만 그래. 안으로 들어가 보면 다 전쟁터다."

"형이 그런 있어 보이는 말을 할 줄이야."

"너 날 도대체 어떻게 본 거냐?"

"무당 스킬 보유자?"

"전부터 왜 자꾸 무당 같은 소리를 하냐?"

서정우는 저쪽 세계에서 백성민이 뭘 하고 사는지 궁금했다.

그렇다고 저쪽 백성민을 찾아보지는 않았다. 이미 몬스터에게 당해 죽었다면 마음이 불편할 것 같아서다.

백성민이 자판기 커피를 홀짝이며 물었다.

"야. 수정이 새 노래 들어봤냐?"

"어."

처음 흥얼거린 버전부터 완성본까지 모두 다 들어보았다. 오늘은 신곡까지 발표했다.

백성민이 실실 웃었다.

"노래 좋지? 진짜 이럴 때 구해준 보람을 더 느낀다니까."

"수정이는 나 혼자 구했는데?"

"야. 나도 나중에 숟가락 얹었잖아. 잡은 놈들 조서 꾸미는 거도 내가 다 했고."

"알아. 농담이야."

백성민이 옥상 난간에 몸을 기대고 앞을 가리켰다.

"수정이가 사는 데가 저쪽에 있는 저 오피스텔이지?"

"어."

"여기서 가깝네."

"이선화 씨가 일부러 경찰서와 가까운 곳을 골랐어."

저 오피스텔이 있는 위치는 경찰서와 서정우의 집의 딱 중간이다.

백성민이 사심을 꺼냈다.

"시간 되면 나하고 수정이하고 같이 사진 찍어서…."

"소개팅에 써먹게?"

"당연하지."

"하지 마. 상대편에서 안 좋아할 거야."

"연예인인데 왜?"

"상대편이 소개팅 자리에서 형한테 잘생긴 배우하고 같이 찍은 사진을 보여주면서 잘 안다고 자랑하면 기분 좋겠어?"

"난 괜찮은데."

서정우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연애하지 마. 혼자 살아."

* * *

서정우는 동네 피시방을 종종 이용한다. 고등학생 정현수를 처음 만난 곳도 이곳이다.

그는 저쪽 세계에서 몬스터 고기와 합성 음식만 먹고 살아서, 이쪽에 온 후부터는 뭐든 많이 먹고 잘 먹고 맛있게 먹는다. 집에 컴퓨터가 있는데도 피시방에 오는 이유 중에는, 마우스만 클릭하면 이것저것 다양하게 먹을 수 있다는 것도 있다.

정현수가 서정우를 발견하고 옆자리에 앉았다. 서정우는 오늘 먹을 음식을 고르고 있었다.

"형. 신메뉴 나온 거 맛있대요."

"뭐가 나왔는데?"

"초밥이요."

"피시방에서 초밥도 만드냐?"

"여기서 주문하면 바로 옆 건물 초밥집에서 배달 온대요."

"그럼 그거랑 라면 시켜야겠다. 초밥엔 라면이지."

"라면에는 김밥이 아니고요?"

"라면에는 뭐든 다 어울려."

"와. 그렇구나. 그럼 저두요."

당연히 사달라는 소리다.

"그래. 먹어라. 많이 먹고 쑥쑥…. 넌 더 클 필요는 없을 것 같다만."

고등학생의 식사량은 일반 성인보다 많다. 서정우도 잘 먹는다. 시키는 김에 몇 가지 더 시켰더니 그릇이 많아져서 컴퓨터 앞에서 먹는 건 무리였다.

그들은 구석에 있는 빈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본격적으로 먹었다.

정현수가 초밥을 맛있게 먹으며 말했다.

"형. 시간 되면 저 좀 도와주세요."

서정우는 라면을 후루룩거리며 물었다.

"왜? 네가 어디 가서 맞고 다닐 것 같지는 않은데? 네 여자친구 노리던 놈 셋과 싸워서 둘은 박살 내고 하나는 도망치게 만들었잖아. 그거 아무나 못 한다."

"아, 형. 효진이는 같은 반 친구라서 도와준 거지 여자친구가 아니거든요?"

서정우도 정현수가 남수정 해바라기라는 걸 안다. 그냥 좀 놀리려고 한 말이다.

"혹시 살인마라도 쫓아오냐?"

"설마요. 그리고 그런 이야기 아니거든요?"

"그럼?"

"제 꿈이 원래 프로게이머였잖아요."

"그래서 수업도 때려치우고 게임만 하지. 너 그러다 프로게이머 못 되면 인생 망한다."

"그래서 제가 프로게이머 말고 다른 길을 찾았어요."

"공부?"

"큰 대회에서 우승한 다음에 인터넷 개인 방송 게임 BJ가 되는 거예요."

"전에 아마추어도 할 수 있는 게임 대회에 나가서 우승하겠다며? 상금 받으면 그걸로 수정이 동생 병원비도 하고. 그걸로 부족해?"

"수정이 이제 돈 잘 벌잖아요. 그래서 저도 절박하지 않아서…."

"떨어졌구나?"

"AOS 게임 대회에 도전했는데 실패했어요."

"수정이는 고3에 실력부족이라 행사를 못 뛰지만, 그래도 동생 병원비에 생활비 정도는 벌어. 네가 상 안 타도 되긴 해."

첫해 치료비는 서정우가 ES 엔터테인먼트를 통해서 주었다. 남수정은 그 돈의 출처를 아직 모른다.

"거봐요. 이제 저만 문제라고요.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게임 BJ로 방향전환 하려는 거예요."

"대회에서 이미 떨어졌다며."

"총으로 싸우면서 한 팀만 살아남는 배틀로얄 게임이 있어요. 여기서 우승하면 돼요. 그런데 이거 진짜 운빨망게임이거든요?"

"근데?"

"이거 듀오 대회예요. 두 명씩 편 먹고 하는 팀전이죠."

"그래서 나도 같이 나가자?"

정현수가 눈을 반짝거렸다.

"네. 전에 보니까 형도 게임에서 총 좀 쏘더라고요."

"내가 너보단 잘 쏘지."

서정우는 원래 지옥부처라는 닉네임으로 게임을 했다. AOS와 배틀로얄 게임 둘 다 그 닉네임으로 쓸고 다녔다.

처음에는 신나서 하다가 그쪽에서 너무 유명해져 버렸다. 정현수도 그 닉네임를 안다는 걸 알고 계정을 아예 새로 팠다.

"언제부터인데?"

"오늘이 접수 마지막이에요. 접수하면 바로 온라인 예선전을 할 수 있어요. 내일까지 신청자들끼리만 자동으로 연결해서 다섯 경기를 싸우고 점수를 받는 방식이에요. 최종 100명에 들면 결승전은 모레 오후에 올림픽공원 행사장에 모여서 할 거예요."

그 배틀로얄 게임은 원래 100명이 동시에 싸워 한 명 또는 한 팀만 살아남는 방식이다. 그래서 본선 진출자도 100명이다.

서정우가 생각했다.

'게임 대회라. 요즘처럼 평화로울 때는 이러면서 지내는 것도 좋겠네.'

"어디에다 신청하면 되냐?"

정현수가 활짝 웃으며 스마트폰을 꺼냈다.

"폰으로도 신청할 수 있어요! 여기예요."

서정우도 스마트폰을 꺼내 정현수가 보여준 사이트에 접속했다.

그는 우선 간단한 대회 소개 글부터 확인했다. 그런데 그중에 눈에 익은 것이 있었다.

"음?"

"왜요?"

"대회 후원사 중에 BH 테크도 있네? 여기서 게임도 만드냐?"

"아니요. 로봇 청소기부터 드론이나 공장 조립용 로봇까지 다양하게 만든다고 들었어요. 우리가 지금 먹는 이 초밥도 어쩌면 BH 테크의 초밥 기계로 만든…."

정현수가 설명하다 말고 깜짝 놀랐다.

"앗! 왜요? 거기 혹시 나쁜 곳이에요? 막 악당이 사장 하고…."

"아니. 거기에 아는 사람이 있어서."

'이런 작은 것도 인연은 인연인가 보다.'

그들은 밥을 마저 먹고 자리에 앉았다.

예선전은 모두 온라인 경기로 진행된다. 그런데 정현수는 듀오 팀으로 연결된 후에 뜨는 닉네임을 보고 당황했다.

"형. '선화각성'이 닉네임이에요?"

"어. 왜?"

지옥부처는 집에서만 쓰고, 피시방에서는 얼마 전에 새로 만든 선화각성을 사용했다. 그건 저쪽 세계의 이선화가 각성하기를 바라고 만든 닉네임이다.

"이걸로 우승하면요. 형하고 선화 누나하고 열애설이 또 터지지 않을까요?"

"선화가 왜 네 누나냐?"

"형하고 친하니까 저한테는 누나죠."

"이런 게임 대회를 누가 본다고 닉네임 하나로 열애설이 터지냐? 그리고 선화각성의 선화는 이선화 씨가 아니야. 다른 선화야."

정현수는 믿지 않았다.

"아. 예. 그러시겠죠. 그런 핑계가 먹힐지는 모르겠지만."

"게임 하지 말까?"

"누가 물어보면 제가 적극적으로 아니라고 말할게요."

대회 신청자가 워낙 많아서 100명짜리 예선전 경기는 순식간에 준비됐다.

곧바로 게임이 시작됐다.

정현수가 배틀로얄 경기 장소인 섬에 떨어진 후에 말했다.

"형. 첫 경기부터 1등 해서 점수 벌어놔야 본선 진출에 유리…. 아오! 이 운빨망게임! 총이 안 나와!"

정현수는 15발짜리 반자동권총 한 자루만 주웠다. 서정우는 운이 더 나빠서 6연발 리볼버를 집었다. 그건 탄창 교환식이 아니라 총알을 한 발씩 넣어야 하는 권총이다.

정현수가 걱정했다.

"여기 한 팀 더 내렸단 말이에요. 초반 탈락하면 본선 진출 진짜 어려워져요. 빨리 좋은 총을 주워야…."

서정우가 키보드의 R키를 눌러 총알을 한 발씩 넣었다. 딱 두 발을 넣었을 때 적이 눈앞에 나타났다. 적은 30발짜리 자동소총을 들고 있었다.

정현수가 외쳤다.

"형. 도망…."

서정우의 사격 스킬은 모니터 속의 총을 쏠 때도 보정 효과가 적용된다.

서정우가 마우스를 쓱 움직여 적을 조준하고 발사 버튼을 눌렀다.

스피커에서 총소리가 들렸다. 적의 캐릭터는 머리에서 붉은빛을 뿌리며 쓰러졌다. 헤드샷이 떴다.

서정우가 적이 흘린 무기를 주우러 가며 말했다.

"뭐라고 했냐?"

"경찰이라서 리볼버를 잘 쏘…. 형! 그쪽으로 가면 안 돼요! 총은 좀 쏘는데 운영이 엉망이네요. 저놈 친구가 근처에 있으면…."

서정우가 마우스를 옆으로 쓱 밀며 버튼을 클릭했다.

사격 효과와 함께 새로운 헤드샷이 터졌다. 두 번째 적이 붉은색 명중 효과와 함께 뒤로 넘어갔다.

서정우가 총을 주우며 말했다.

"야. 쟤는 AK 들었다. 저건 너 먹어라."

정현수가 눈을 껌뻑였다.

"어…."

"왜?"

"형 혹시 핵 써요?"

"쓰겠냐?"

핵은 게임에서 사람 대신에 자동으로 사격을 해주는 조작 프로그램의 별명이다. 그런 걸 쓰다 발각되면 게임 계정이 삭제된다. 당연히 대회도 실력 처리된다.

"근데 어떻게 리볼버로 둘이나 잡아요? 그것도 두 번 다 헤드샷으로? 딱 한 발씩 쏴서?"

"총알을 두 발밖에 못 넣었으니까 낭비하면 안 되겠더라고."

"아니, 그게 아니라."

"아. 그거? 쟤들이 헬멧이 없더라고."

"그걸 물어본 게 아니잖아요!"

서정우 정현수 듀오는 그날 두 게임에서 1등을 했다. 세 번째 게임도 마지막 열 명에 들었다.

정현수는 흥분했다. 이대로 가면 본선 진출은 충분히 가능할 것 같다고 판단했다.

"형! 세 판 연속 1등 가자!"

"말 까냐?"

"아뇨. 1등 가시옵소서!"

* * *

쌍둥이 박하연과 박다연은 전략 게임 랭커였던 박철우의 영향을 받아 게임을 좋아한다.

이번 대회 온라인 예선전에는 쌍둥이도 참전했다. 두 명이 한 팀으로 싸우는 대회라서 같이 하기 딱 좋았다.

두 사람은 집에서 게임에 접속했다. 그들은 이미 첫 경기에서 1등을 했다. 지금은 두 번째 경기인데, 여기서도 생존자 열 명에 들었다.

경기는 빠르게 진행됐다. 순식간에 다섯 명이 쓸려나가고 다섯만 남았다.

박하연이 경고했다.

"2대 2대 1이야. 선화각성이 아직 살아 있어. 킬도 많이 했어. 고수야. 조심해."

박다연이 큰소리쳤다.

"선화각성은 내가 잡을게!"

195. 본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