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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 * *

영화사 버스가 서정우의 동네에 섰다. 이선화와 서정우, 남수정과 정현수가 차에서 내렸다.

영화감독 장현성이 따라 내린 후에 이선화에게 말했다.

"선화 씨. 오늘 잡은 희귀 몬스터 말입니다. 그거 나중에 영화사에서 샀으면 하는데."

"어머. 돈 되는 몬스터예요?"

그녀가 서정우를 돌아보았다. 서정우가 설명했다.

"대두 도마뱀은 고기도 별로 안 나오고 독성이 있는 경우도 많아서 식용으로는 안 써. 가죽도 질이 안 좋아. 희귀 몬스터니까 치료제 재료가 나올 수도 있지만 그거야 째 봐야 아는 거고."

이선화가 장현성에게 물었다.

"그런 걸 왜 사시게요?"

"박제로 만들어서 영화 소품과 홍보에 쓸 겁니다. 우리 영화에서 가장 큰 위기 장면에 등장하는 몬스터잖습니까? 그 장면이 영화의 하이라이트가 될 겁니다."

"아아."

몬스터는 원래 잡은 헌터에게 소유권이 있다.

군 작전에 헌터가 참여한 경우는 계산이 복잡해지지만, 이번에는 거꾸로 영화사의 촬영에 군이 참여한 거라서 계산도 간단하다.

"그럼 팔게요. 나중에 부대에서 받아봐야 둘 데도 없어요."

장현성이 활짝 웃었다.

"그럼 돌아가는 대로 시세에 맞춰서 돈 보내고…."

"어머. 감독님. 그렇게 안 봤는데."

장현성이 즉시 말을 바꾸었다.

"우리 영화 제작자를 협박해서라도 시세보다 훨씬 높게 쳐서 돈을 보겠습니다. 도축했는데 혹시 특수한 재료가 나오면 그것도 계산해서 추가로 보내겠습니다."

그는 도축 과정에서 이선화를 속일 생각이 손톱만큼도 없다. 서정우나 이선화처럼 총을 잘 쏘는 사람을 상대로 돈 몇 푼 빼돌렸다가 총알을 선물 받고 싶지는 않다.

그가 두툼한 봉투를 하나 꺼냈다.

"그리고 이건 선금입니다."

그녀가 냉큼 돈 봉투를 받았다.

버스에서 박현아가 고개를 내밀었다.

"그 돈으로 뭐 먹을 거야? 나도 내릴까?"

"넌 가. 얼른 가!"

차 두 대가 떠난 후에, 이선화가 봉투를 열었다.

"백만 원이나 되네. 선금이 이 정도면 그 몬스터는 도대체 얼마짜리라는 거야?"

서정우가 설명했다.

"희귀 몬스터라도 백만 원도 안 되는 꽝이 있고, 부르는 게 값인 놈도 있어. 어쨌든 영화 홍보용으로 쓰려는 건데 백만 원보다는 가치가 있겠지."

"그치?"

그녀가 돈 봉투를 흔들었다.

"어쨌든 돈 생겼으니까 내가 쏜다! 맛있는 거 먹자!"

"음? 식당에서?"

식당은 몬스터 고기와 클로렐라 합성 쌀을 식재료로 쓴다. 그런데 집에 가면 저쪽 세계에서 가져온 진짜 고기와 쌀이 있다.

정현수와 남수정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자기들끼리 오늘 받은 일당을 비교하고 있었다.

정현수가 항의하는 소리가 들렸다.

"왜 네가 내 두 배인데! 감독님이 너무하잖아!"

"난 단역으로 출연했잖아."

"나도 텔레비전에 나오고 싶었는데!"

이선화가 목소리를 조금 낮췄다.

"그런데 오빠가 물건 사오는 곳 말이야. 거기서 이 돈이 통해?"

"내가 사온 거 보면 상표가 다 한글이잖아."

"이 오빠가 지금 누굴 바보로 아나? 한글로 쓰여 있지만 여기서 파는 물건이 아니잖아. 같은 돈 쓰는 지역이 아니지?"

"우리 선화가 언제 이렇게 눈치가 빨라졌지? 많이 컸네."

"원래 눈치는 내가 더 빨랐거든? 그래서 대답은?"

"내가 환전해주면 돼. 돈 가치는 비슷하니까."

그녀가 활짝 웃으며 돈 봉투를 다시 흔들었다.

"그럼 내가 쏜다! 뭐 먹고 싶어? 말만 해."

"말하면?"

"돈 줄 테니까 가서 사와."

이선화는 그곳으로 데려다 달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사람을 데리고 텔레포트를 시도한 각성자들이 있었지만, 모두 비참한 결과를 맞았다. 이제는 그런 무모한 짓을 하는 사람은 없다.

서정우가 말했다.

"그럼 저녁때 잔치를 하자. 완전히 조리된 요리를 층층이 쌓아서 가져올 테니까 기대해라."

* * *

차연숙은 몬스터 가죽 가공 스킬을 가진 장인이다.

그녀는 20세기에는 의상 디자이너로 활동했다. 지금은 몬스터 가죽 가공 스킬을 각성해 그쪽을 본업으로 한다.

그녀가 가죽을 가공하는 공방에 매장 직원이 들어와 말했다.

"선생님. 손님이 오셨는데요."

"나 바쁜 거 안 보이니?"

"서정우 씨인데…."

"말을 하지!"

그녀가 가죽을 내려놓고 공방을 나와 매장으로 넘어갔다. 서정우는 매장에 전시된 상품들을 보고 있었다.

"자주 좀 오지. 요즘 질 좋은 희귀 몬스터 가죽이 부족…."

그녀의 눈이 번뜩 빛났다.

"너 옷 그거 뭐니?"

서정우가 입고 있는 옷은 저쪽 세계의 차연숙이 만든 것이다. 그는 집에서 이 옷으로 갈아입은 후에 이곳을 찾아왔다.

저쪽 의상 디자이너 차연숙은 이선화에게 샘플이라는 핑계를 대며 남자 옷을 몇 벌 맡겼다. 그걸 서정우에게 입힌 후에 피드백을 달라는 것이 유일한 요구였다.

그가 지금 입은 옷이 그중 한 벌이다.

"어울려요?"

"어머. 너무 잘 어울린다. 디자인도 딱 내 취향이네."

"당연히 그렇겠죠."

"응?"

드백을 달라는 것이 유일한 요구였다.

그가 지금 입은 옷이 그중 한 벌이다.

"어울려요?"

"어머. 너무 잘 어울린다. 디자인도 딱 내 취향이네."

"당연히 그렇겠죠."

"응?"

"아줌마와 디자인 감각이 똑같은 사람이 만든 거니까요."

"훗. 나 같은 천재가 또 있다니. 역시 세상은 넓다니까. 그리고 누나라고 부르라니까."

"아줌마. 양심이 있어야죠."

"그런데 나와 똑같은 감각을 가진 사람이 누구야?"

"있어요. 몬스터 가죽 가공 스킬은 없지만 옷 만드는 실력은 좋은 사람이."

"혹시 내가 아는 사람인가?"

"자세한 건 비밀이라. 옷을 여기서 팔지도 않고."

"난 국내에서 그런 사람 본 적이 없어. 역시 외국에 있나 보다."

"아주 먼 곳에 있어요."

평행차원에 있다.

"그래서 옷 재질이 이렇게 특별하구나. 이런 옷감 국내에서는 못 구하거든. 아! 나 이 옷감 좀 구해줄 수 있어? 나도 만들어보게."

"옷감의 색을 정해서 알려주면 다음에 가져올게요."

"역시 정우는 최고의 재료 공급자라니까. 가죽도 최고만 공급해주더니 이젠 옷감까지 구해주네? 돈은 얼마나 주면 돼?"

"옷감 가격은 나도 물어봐야 해요. 오늘은 가방 하나 사러 온 거라서."

"가방? 누구 주려고?"

"있어요."

"이선화?"

"그걸 어떻게 알았을까?"

차연숙이 피식 웃었다.

"이선화가 영화나 드라마에서 내가 만든 가방 가지고 나온 게 한두 번인 줄 알아? 네가 나한테서 산 가방 셋 중에 둘은 이선화가 가지고 나오더라."

서정우는 차연숙에게 희귀 몬스터 가죽을 가끔 공급한다. 그러다 가죽값 대신에 가방 두 개를 받아서 하나는 이선화에게 주고 다른 하나는 서소라에게 준 적이 있다.

그는 가죽을 자주 공급하지는 않았다. 몬스터 점령지에 사람을 구하러 들어갈 때는, 생존과 탈출이 최우선이기 때문에 전리품을 가져오기 어렵다.

그런데 가끔 전리품을 챙겨올 여유가 있을 때가 있다. 그중에서 질 좋은 가죽은 차연숙에게 팔았다.

한 번은 아주 특별한 희귀 몬스터를 잡은 후에 가죽을 챙겨왔다. 위험한 상황이라서 가죽을 다 가져오지는 못하고 조금만 챙겼다. 그래도 작은 핸드백 하나 만들 만큼은 되었다.

그는 그걸 차연숙에게 맡기고, 분해 후 재조립하면 심장 보호 갑옷으로 변하는 핸드백을 만들어달라고 했다.

"주문제작 포함해도 가방은 딱 세 개 팔았으면 무슨."

"어머. 심장 보호 갑옷으로 바뀌는 그 핸드백이 아무한테나 만들어주는 건 줄 알아? 그래도 이선화가 요즘은 영화나 드라마에 꼭 그 가방을 가지고 나와서 뿌듯하긴 하더라."

"평소에도 그 가방만 가지고 다녀요. 이런 세상이니까요."

심장 보호 갑옷 하나에 레드 포션 하나면, 머리를 당하지만 않으면 살 수 있다.

"그리고 지금 사는 가방은 선화 주는 거 아닙니다."

그는 선화가 아니라 저쪽 세계 이선화에게 선물을 하나 하겠다고 약속했다.

"아니야? 그럼 분해조립 기능은?"

서정우가 잠깐 생각해보았다.

저쪽 세계의 이선화라고 해서 위험에 처할 일이 안 생긴다는 보장은 없다. 그런데 그 위험은 교통사고 같은 것이다.

그녀가 가방을 분해해서 심장을 보호하는 갑옷 형태로 재조립한 후에, 그걸 입고 적과 싸울 일은 없어 보였다.

"없어도 돼요."

"그럼 디자인이 정말 잘 나온 신제품이 있어. 잠깐 기다려."

차연숙이 안쪽으로 들어갔다.

서정우는 매장을 다시 둘러보았다.

'옷은 저쪽이 낫지만.'

매장에 전시된 가방들은 모두 몬스터 가죽으로 만든 것이다.

'가방은 확실히 이쪽이 낫지.'

175. 가방 II

몬스터가 없는 세계에서는 질 좋은 천을 돈만 주면 쉽게 살 수 있다.

그 세계에는 옷을 디자인하는 사람도 많고 패션쇼도 자주 열리며, 기업들도 관련 분야에 투자할 돈이 충분히 있다.

원재료가 되는 석유화학 기술도 잘 발달했고 생산량도 많다.

반면에 몬스터가 있는 쪽은 전 세계가 전시 체제로 돌아간다.

저쪽보다 의복 산업에 투자되는 돈이 적다.

섬유도 나일론이나 폴리에스터는 여전히 생산되지만, 원료인 석유의 공급에 문제가 있다.

유전 지대라고 해서 게이트가 안 열리는 건 아니다. 대규모 장치 산업인 정유 시설도 위험에 노출되는 건 마찬가지다.

운송 수단도 문제다. 유조선이 해양 몬스터의 습격으로 침몰하면 어마어마한 양의 기름이 유출된다. 그건 환경 재앙이다.

그래서 석유는 육상으로 옮기거나, 군함 여러 척의 호위를 받는 유조선으로 옮겨야 한다. 당연히 값이 올라간다.

특수한 종류의 섬유 공장도 별로 없다. 그런 공장이 몬스터의 습격으로 날아가면 새로 짓기 부담스럽다. 수요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돈이 돌지 않으면 기술 발전만 느려지는 게 아니다. 의상 디자인도 자본이 받쳐줘야 더 잘 나온다.

다양한 옷이 팔리고, 신소재가 개발되고, 패션쇼도 많이 열리고, 언론 매체에도 많이 등장해야 의상 디자인도 더 발전한다. 그런 건 저쪽 세계가 훨씬 더 잘한다.

반면에 가방 같은 가죽 제품은 이쪽이 훨씬 낫다. 몬스터 가죽이 공급되기 때문이다.

몬스터 가죽 중에는 독특한 무늬나 질감을 가진 것들이 있다. 주로 그런 것이 가죽 제품에 사용된다.

좋은 몬스터 가죽을 쓰면 방어력이 꽤 괜찮은 옷을 만들 수 있다. 그래서 가죽 자켓이나 코트가 많이 생산된다. 바지를 만들 때도 있다.

그렇다고 일반 몬스터 가죽으로 총알까지 막는 건 아니다. 몬스터 가죽은 대부분 두껍고 무겁고 딱딱하다.

사람이 입으려면 얇고 부드러워지게 가공해야 하는데, 그러면 방어력이 크게 떨어진다.

그런데 희귀 몬스터 중에는 가죽을 가공한 후에도 총알이 박히지 않는 것이 있다.

그중에는 부드럽고 두께도 얇고 가벼우면서 총알을 막을 수 있을 정도로 질긴 것이 있다. 그런 가죽은 보통 고급 방어구에 사용된다.

이선화의 심장 보호형 핸드백이 바로 그런 가죽으로 만들어졌다.

차연숙이 공방에서 매장으로 나왔다. 그녀는 가방을 하나 들고 있었다.

"이번에 새로 만든 거야."

가방 표면에 독특하고 신비한 무늬가 보였다.

"가죽은 작살 카멜레온을 썼어. 가공할 때 방어력이 떨어져서 이걸로 총알은 못 막지만, 그래도 단검 정도는 막을걸?"

"방어용으로 사는 거 아니라니까요."

"그건 그냥 부수 옵션이라고 생각해. 이거 어때?"

서정우가 가방을 받았다.

작살 카멜레온은 위장 능력을 갖춘 몬스터다. 나무에 달라붙어서 그 능력을 사용하면 사람의 눈으로는 구분하기 어렵다. 그 특성을 일부라도 살리려면 가죽 가공 스킬을 가진 사람이 가공해야 한다.

서정우가 가방을 빛에 비춰보았다. 빛의 각도에 따라 무늬의 색이 변했다. 가죽의 질감도 바뀌었다.

그런데 그 질감의 변화가 지금 디자인과 굉장히 잘 어울렸다.

"이 가방 진짜 좋네요."

"그럼 그거로 해. 싸게 줄게."

"작살 카멜레온 가죽은 비싸잖아요. 이걸 그냥 싸게 줄 아줌마가 아닌데?"

"다음에 좋은 가죽 좀 갖다 줘. 왜 요즘은 가죽 팔러 안 와?"

"최근에는 전리품을 챙겨올 만큼 느긋한 임무가 별로 없어서."

그는 양쪽 세계를 오가면서 많은 사건을 해결했다.

차연숙이 말했다.

"희귀 등급 작살 카멜레온 가죽 하나 있으면 딱 좋겠다. 구할 수 있는 건 보통 등급 가죽뿐이야."

서정우가 양방향 게이트 전투를 떠올렸다. 그곳에서 그런 놈을 한 마리 잡았지만, 가죽을 벗겨올 상황이 아니라 버려두고 지나갔다.

'그게 아직 남아 있을 리는 없지.'

몬스터는 사람도 먹고 짐승도 먹고 몬스터도 먹는다.

게이트를 나온 몬스터들이 서로 싸워서 잡아먹는 일은 별로 없다. 그런데 몬스터 사체는 잘 뜯어먹는다.

학자들은 게이트 저쪽 세계에서는 몬스터가 서로 먹고 먹히는 관계라고 추측했다.

한 게이트에서 이미 나온 놈과 같은 종류가 또 나오는 경우는 많다. 그 양방향 게이트처럼 위험 등급이 높은 곳은 희귀 몬스터가 한 마리만 나오지는 않는다.

'거기 가면 희귀 작살 카멜레온이 더 있겠는데?'

"가죽은 얼마나 필요한데요?"

"구할 수 있어?"

"확실한 건 아니고, 어쩌면."

'트롤 잡으러 거기 다시 가긴 가야 하는데.'

그는 그 양방향 게이트 바로 앞에서 트롤과 싸우다 빠져나왔다. 돌아가서 그놈을 잡아야 하는데, 생명력이 너무 강한 놈이라서 혼자 잡는 건 쉽지 않다. 팀이 필요하다.

'너무 위험한 곳이라 소라나 다른 애들을 데려갈 순 없는데.'

차연숙이 말했다.

"가죽이야 많을수록 좋지만, 위험하면 가방 하나 만들 분량만 있어도 돼. 특별 주문이 들어왔거든."

"다음에 그런 놈 보면 벗겨올게요."

* * *

서정우는 형사로 활동하는 세계로 넘어왔다.

그는 그날 저녁때 액션 스쿨에서 이선화를 굴렸다.

"요즘 우리가 바빠서 훈련이 좀 뜸했지요? 자. 두 바퀴만 더 구릅시다."

"악마!"

"남들은 날 부처라고 부른다니까."

그 훈련은 오래 시킨다고 효과가 더 나는 건 아니다. 지금 그녀의 수준에서는 회복이 더 중요했다.

그는 딱 한 시간만 강하게 훈련 시킨 후에 액션 스쿨을 나왔다.

그녀는 훈련이 끝난 후에 저레벨 회복 물약을 마셨다.

"으으. 이거 너무 맛없어요."

"내일 근육통으로 고생하기 싫으면 참고 마셔요."

그 물약을 마시면 밥맛이 좋아진다. 몸을 회복시키려면 연료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선화는 조금 전까지 실컷 굴렀다. 설사 물약을 마시지 않았다 해도 허기가 질 수밖에 없다.

그녀가 하소연했다.

"배고파 죽겠어요."

"고기 먹으러 갑시다. 운동하고 나서는 역시 고기지."

"감독님하고 떨거지들이 같이 저녁 먹재요. 오늘 메뉴는 고기로 하자고 하면 되겠네."

"떨거지?"

"서준이하고 경철 오빠요."

"약속장소까지 데려다줄게요."

오늘은 서정우가 백성민의 차를 빌려 타고 왔다. 원래 그의 차는 살인 미수 사건의 증거로 제출된 상태라 아직 돌려받지 못했다.

이선화가 손가락을 흔들었다.

"데려다주다뇨? 당연히 정우 씨도 가야죠. 같이 영화 제작 이야기하려고 모이는 건데요."

그녀가 조수석에 탔다.

"지금 가면 시간 딱 맞아요. 얼른 가요."

식당에는 장현성 감독과 강서준, 권경철이 먼저 와 있었다. 이선화와 서정우가 그곳에 나타났다.

장현성이 서정우에게 말했다.

"제가 마음이 급해서, 식사 자리에서라도 의견을 좀 들으려고 이선화 씨에게 부탁했습니다. 하하하."

"그럼 오늘 고기는 감독님이 사시는 거겠네요?"

"아니요. AKX 픽처스에서 카드 받아왔습니다. 김 사장님이 제일 비싼 거로 먹으라더군요."

서정우가 자리에 앉았다. 이선화는 서정우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강서준이 이선화에게 물었다.

"지금까지 훈련받고 온 거야?"

"당연하지."

"할만해?"

"엄청 힘들지. 그래도 정우 씨가 잘 가르쳐주니까."

강서준이 서정우에게 말했다.

"서 형사님. 저도 선화하고 같이 훈련받으면 안 돼요?"

이선화가 대신 대답했다.

"응. 안돼. 꺼져."

서정우가 차 트렁크에서 꺼내온 상자를 올려놓았다.

장현성이 물었다.

"이건 혹시 영화 소품입니까?"

"설마요."

"그럼…."

"이선화 씨한테 저번에 선물 하나 한다고 했잖습니까? 그거 오늘 가져왔습니다."

얼마 전에 이선화는 서정우와 단둘이 동해안까지 차로 드라이브하는 꿈에 부풀었다가, 그게 범인을 유인하기 위한 가짜 미끼라는 걸 알고 크게 실망했다. 그때 서정우가 그녀를 달래려고 선물을 하나 주겠다고 약속했다.

이선화가 활짝 웃었다.

"어머. 차 트렁크에서 상자를 꺼내서 뭔가 했는데, 내 거였어요?"

그녀는 상자를 잡고 내용물을 추측했다.

'일단 내가 고른 목걸이는 아니네? 그럼 뭐지? 되게 가벼운데… 혹시 가방? 이 느낌은 가방이 확실해. 그런데 형사 월급에 좋은 가방은….'

그녀가 얼른 마음을 고쳐먹었다.

'가격이 뭐가 중요해? 내 자신이 명품인데!'

그녀가 활짝 웃으며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서정우가 저쪽 세계에서 가져온 가방이 들어있었다.

"어머. 진짜 가방이다."

그녀가 가방을 꺼냈다. 손에 잡히는 감촉부터 눈에 보이는 디자인까지 평범하지 않았다.

"이 가방 진짜 좋다!"

인사치레로 한 말이 아니다. 마음에 쏙 들었다.

디자인도 좋고, 장식처럼 붙어 있는 부자재도 고급스러웠다. 특히 가죽에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무늬가 신비한 느낌을 주었다.

그녀가 두 손으로 가방을 조심스럽게 돌려보며 말했다.

"이거 진짜 마음에 들…."

그녀가 멈칫했다.

가방을 돌리면 전등의 빛을 받는 각도도 변한다. 그런데 빛이 변하자 가방의 느낌도 변했다.

"이거…."

가죽의 색도 조금 달라졌지만, 더 크게 변한 건 질감이다. 손으로 만질 땐 그대로인데 눈으로 볼 때는 가죽의 재질 자체가 달라진 것 같았다.

그런데 빛을 받으면 변하는 그 느낌이 굉장히 좋았다.

그녀가 가방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정우 씨. 이거 뭐예요? 나 이런 가방 처음 봐요."

"아는 사람이 만든 수제품입니다. 판매된 적이 없으니 당연히 본 적도 없겠죠."

"와. 되게 신비한 가방이다."

"그럴 겁니다."

서정우는 저쪽 세계의 가방을 이쪽에 가져온 것이 문제를 일으킬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헌터의 스킬이나 몬스터의 특수한 능력이 어디서 나오는지는 현대 과학으로도 알아내지 못했다. 몬스터에서 추출한 성분을 섞은 약도 합성이 불가능했다.

작살 카멜레온 가죽에 깃든 특수한 시각 효과는 몬스터의 능력 때문에 생긴 것이다. 사람의 스킬과 비슷한 그 능력은 저쪽 세계의 과학 기술로 분석할 수 없다. 당연히 재현도 못 한다.

'누가 저 가방을 훔쳐가서 가죽의 유전자 검사를 하진 않겠지만.'

해도 상관없다.

'해봤자 동물 가죽이라는 것 외에는 나오는 게 없겠지.'

몬스터 고기는 먹을 수 있다. 먹을 수 있다는 건, 사람이 소화할 수 있는 단백질 구조를 가졌다는 뜻이다.

작살 카멜레온의 가죽을 분석해봤자 동물 가죽이라는 것 외에는 알아낼 수 있는 게 없다.

'세상 모든 동물의 유전자 지도를 확보했을 린 없으니까.'

그래서 걱정하지 않았다. 저쪽 세계에서 수없이 시도했지만 그 원리를 찾아내는 데 실패했는데, 이쪽 세계에서 겨우 가방 샘플 하나만 분석해서 성공할 리 없다.

이선화가 물었다.

"이거 무슨 가죽인데 이렇게 신비해요?"

"특별한 가죽을 아주 특별한 기술로 가공해서 만든 겁니다."

몬스터 가죽은 공장에서 기계로 가공해도 쓸 수는 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방어력이 떨어지는 건 기본에, 몬스터 가죽에 깃든 특수 효과도 대부분 잃는다.

이렇게 작살 카멜레온의 가죽 효과를 제대로 살리려면 몬스터 가죽 가공 스킬이 있는 장인이 작업해야 한다. 저쪽 세계의 차연숙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

이선화가 활짝 웃었다.

"진짜 마음에 쏙 들어요."

배우 강서준도 여자 가방을 많이 사 봤다. 그가 쓰려고 산 게 아니라 여자들에게 선물하려고 샀다.

그래서 그는 이런 물건을 볼 줄 안다.

강서준이 서정우에게 물었다.

"이 가방 어디서 샀어요? 저도 사고 싶은데요."

"이제까지 판 적 없는 수제품이라니까요."

이선화가 더 좋아했다.

"히힛. 세상에 단 하나뿐인 가방. 난 브랜드 가방보다 이런 가방이 훨씬 더 좋더라."

강서준은 미련을 버리지 않았다.

"저도 사고 싶어요. 제가 진짜 꼭 선물할 데가 있어서 그래요."

이선화가 말했다.

"야. 꺼져. 왜 정우 씨 귀찮게 하는데?"

"우리 엄마 사드리려고 그런다!"

"이게 어디서 약을 팔아? 내 눈을 똑바로 보고 이야기해."

"여동생…."

"당연히 친동생은 아니겠지?"

"친동생이면 큰일 나지."

"이 헤픈 놈이 또!"

"아. 돈 드린다고! 서 형사님. 얼마면 돼요? 저 돈 많아요."

이선화가 또 딴죽을 걸었다.

"너 나보다 돈 적잖아."

"경철이 형보다 많아!"

권경철이 불평했다.

"불똥이 나한테까지 튀네? 서 형사님. 쟤들이 저러는 거 보니까 진짜 좋은 가방인가 본데, 나도 그 가방 하나 사고 싶습니다. 우리 와이프 생일이 얼마 안 남아서요. 하하하."

이선화가 바로 치고 들어왔다.

"경철이 오빠 총각이잖아!"

"곧 할 거야! 곧!"

"그 소리 작년에도 들었어!"

서정우가 그런 그들을 보며 생각했다.

'저쪽에서 가방을 가져다 이쪽에 팔면 진짜 잘 팔리겠네.'

레드 포션을 팔 수만 있으면 돈은 쉽게 벌 수 있다. 그건 저쪽에서도 구하기 어렵지만, 이쪽에서는 받을 수 있는 액수의 단위가 다르다.

이쪽 세계에는 조 단위의 재산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사고를 당했을 때 여분의 목숨으로 쓸 수 있는 레드 포션은, 그 효과를 제대로 알릴 수만 있다면 부르는 게 값이 된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레드 포션의 효과는 기적에 가깝다. 현대 의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수준이다.

그런 약을 대놓고 팔면 당연히 문제가 생긴다.

저쪽 세계의 상처 치료약도 이쪽에 팔 수 없다. 그 약을 제조할 때는 특정 몬스터에서 추출한 특수한 성분이 들어가야 하는데, 그건 이쪽에서 합성할 수 없다.

반면에 가방은 다르다.

'가방은 들킬 수가 없잖아.'

대신에 이 가방은 서정우가 손으로 들고 와야 하고, 그것조차도 남들 눈을 피해서 해야 한다. 대량 공급은 어렵다.

'그래도 종종 갖다 팔면 짭짤하겠는데?'

176. 경쟁자

서정우가 계속 궁리했다.

'수제품 브랜드라도 하나 만들어서 저쪽 세계의 가방을 갖다 팔까? 돈 많은 연예인들이 저렇게 원하는 걸 보면 좀 비싸게 받아도 되겠다.'

가방 생산은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운송이 문제다. 저쪽 세계에서 가방을 대량으로 가져올 방법이 없다.

어차피 물량이 소량이라면, 소문 듣고 찾아온 사람에게만 조금씩 팔아도 된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다.

'내가 직접 팔아도 되나?'

이선화가 물었다.

"정우 씨. 무슨 고민 있어요? 뭘 그렇게 생각해요?"

가방 문제로 싸우던 다른 사람들도 서정우를 쳐다보았다.

서정우가 말했다.

"그 가방을 좀 팔아볼까 하고…."

배우 강서준이 얼른 말했다.

"저부터 살게요! 저부터!"

"그런데 그 가방을 만드는 사람은 신분이 노출될 수 없어서, 내가 대신 팔아야 하는데…."

"팔면 되죠! 제가 손님 모아올게요!"

"한두 개라면 모를까, 계속 팔려면 정식으로 등록하고 팔아야죠. 그런데 난 경찰이라서, 대놓고 팔면 걸립니다."

그냥 경찰도 아니고 유명한 형사다. 그가 돈을 받고 가방을 팔러 다니면 기사가 난다.

강서준이 말했다.

"그럼 경찰을 그만두시고 가방 회사 사장님이 되시…. 아니다. 그건 곤란하죠. 살인마 잡으셔야 하는데."

권경철이 해결책을 제시했다.

"그럼 대신 팔아줄 사람이 필요하겠군요."

서정우는 그 말을 듣자마자 서소라를 떠올렸다.

'소라 그게 쓸모가 다 있네?'

* * *

서소라가 인상을 찡그리며 귀를 후볐다.

"뭐지?"

윤나나가 물었다.

"왜?"

"누가 내 욕하는 것 같아."

* * *

이선화는 지금 돌아가는 이야기가 어쩐지 익숙했다.

'응? 이거 디멘션 상황하고 비슷한데? 정우 씨는 곡을 어디서 받아오는 거라고 했는데, 이번엔 가방을 받아오네?'

ES 엔터테인먼트 사장 오동철은 서정우가 작곡을 직접 한다고 믿었다.

그런데 어떤 외부 자료에도 서정우가 디멘션이라는 건 적혀 있지 않다. 그렇게 발표된 적도 없다. 디멘션의 모든 저작권 관련 업무는 ES 엔터테인먼트가 대행한다.

이선화는 오동철과 다르게 알고 있다.

'정우 씨는 분명히, 신분을 공개할 수 없는 작곡가에게서 곡을 받아온다고 했어.'

오동철은 그 말을 서정우가 둘러대는 거로 생각했지만, 이선화는 들은 그대로 믿었다.

'그런데 이젠 가방도 다른 사람에게서 받아온다고? 신분을 공개할 수 없는 사람?'

그것 때문에 서정우를 의심하는 건 아니다. 그녀는 오히려 다른 곳에 꽂혔다.

'정우 씨가 받아오는 곡은 동철 오빠가 맡으니까, 그럼 이건 내가 맡을까?'

그녀는 생각이 거기까지 닿자마자 얼른 손을 들어 열심히 흔들었다.

"가방 그거 제가 팔게요!"

서정우는 서소라를 바지사장으로 내세울 생각을 하고 있다가 고개를 돌렸다.

"이선화 씨가요?"

"네! 정우 씨가 팔면 입장이 곤란하지만 제가 팔면 괜찮으니까요. 제 건물에 마침 빈 가게가 하나 있으니까 거기 매장 내고 사업자 등록도 할게요."

그녀는 여기에 있는 사람들이 들으라고 일부러 말을 추가했다.

"정우 씨는 그 가방 만드는 사람 소개만 해줘요."

'공식적으로는 정우 씨가 소개만 해준 거로 하고, 실제로는 내가 정우 씨한테 물건을 받고. 그러면 ES 엔터하고 비슷한 구조가 되겠지? 이렇게 정우 씨하고 더 가까워지나?'

"그럼 이선화 씨에게 소개해주는 거로."

"아싸!"

서정우가 단서를 달았다.

"공급량은 일주일에 한두 개 정도?"

저쪽 세계 가죽 장인 차연숙은 관련 스킬이 있어 가방을 빨리 만든다. 그녀의 공방에서 직원으로 일하는 사람도 몇 명 있다.

차연숙 외에도 가죽 가공 스킬로 가방을 만들어 파는 사람은 여럿 있다. 저쪽에서 좋은 가방을 구하는 건 문제가 아니다.

그걸 이쪽 세계로 가져오는 게 문제지만, 일주일에 한두 개 정도는 쉽다. 집에서 평행차원을 넘나들 때 가져오면 된다.

이선화에게는 공급량이 중요한 게 아니다. 가방 사업에 큰 뜻을 품은 것도 아니다. 그녀는 그저 서정우와 더 가까워지고 싶었다.

"생산량이 그렇게 적어요? 그럼 돈 많이 번 연예인들만 골라서 비싸게 팔아야겠다."

강서준이 얼른 이선화에게 말했다.

"내가 너무너무 좋아하는 내 친구 선화야!"

"갑자기 왜 이럴까?"

"연예인 협찬 하나 안 해주나?"

"누구셔? 우리 아는 사이인가? 그리고 네 여친도 연예인이냐?"

"어…. 그럼 나한테는 싸게 팔 거지?"

"그러엄. 당연하지."

"얼마에?"

"오천."

강서준은 당황했다가 바로 큰 목소리로 따졌다.

"어? 야. 미쳤어?"

"이 가방이 유명 브랜드 제품이면 경매 들어가서 오천이 아니라 억대로 받았을 거야. 브랜드 없는 수제품이라 싸게 파는 거야."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브랜드 없는 수제품은 아무리 품질이 좋아도 오백 받기도 힘들잖아."

"넌 이 예쁜 가방을 보고도 오백 소리가 나오니?"

"내가 오백 꽉 채워서 줄게!"

"꺼져!"

강서준과 권경철은 결국 가방 구입을 포기했다. 둘 다 돈 잘 버는 인기 연예인이고 이 가방이 보통 물건이 아니라는 것도 알지만, 여자친구 선물용으로 오천만 원이나 쓰는 건 너무 부담스러웠다.

* * *

모임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서정우가 물었다.

"내가 가방 가격에 대해 잘 모르긴 하지만, 그걸 오천이나 받고 팔 수는 없을 것 같은데."

이선화가 설명했다.

"사실 서준이 말이 맞아요. 아무리 이 가방이 대단해도 이대로는 오천은커녕 오백 받기도 어렵죠."

"그런데 왜…."

"그래서 내가 이 가방의 가치를 높이려고요."

"어떻게요?"

그녀는 자신만만했다.

"나 이선화예요. 다 방법이 있어요."

이번에는 그녀가 물었다.

"가방 만드는 분 말이에요. 소개 못 해주죠?"

"눈치가 많이 빨라졌네요."

"그럴 줄 알았어요. 곡도 그런 식이니까. 그럼 전 정우 씨한테 가방을 직접 받으면 되겠네. 공급량은 일주일에 한두 개라고 했죠?"

"정해진 건 아니고 대충 그쯤인데, 지갑이나 작은 핸드백이라면 더 가져올 수도 있어요."

이선화가 손가락을 흔들었다.

"품목을 늘리는 건 아직 일러요. 일단은 가방부터 띄워야 하니까요. 나중에는 서준이나 경철 오빠가 제발 팔아달라고 부탁하게 만들 테니까 구경이나 해요."

서정우는 몬스터 가죽 가방 판매를 부업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이선화가 오천만 원을 불렀을 때는 깜짝 놀랐지만, 인기 배우 강서준과 권경철이 포기하는 걸 보고 욕심을 버렸다.

"알아서 해요. 맡겨둘 테니까."

이선화가 활짝 웃었다.

"나 믿는구나? 잘하고 있어요. 그렇게 계속 나만 믿어요."

서정우가 옆자리에 앉은 이선화를 만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하나는 안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지.'

그는 양쪽 세계를 오가며 다양한 사람을 만났다. 하는 일이 달라진 사람은 많아도, 성격은 다들 비슷했다.

'그런데 소라만 성격 차이가 너무 많이 난단 말이야. 저쪽에서 고생을 해서 그런가? 아니면 여기서 너무 배 째고 편하게 살아서 그런가.'

서정우는 가방 판매는 이선화에게 완전히 맡기기로 했다.

그가 다른 용건을 말했다.

"나 부탁이 하나 있는데."

"어머. 얼마든지 해요. 부탁."

그녀가 조수석에서 몸을 살짝 비틀었다. 대리석으로 깎은 것 같은 늘씬한 다리, 잘록한 허리, 아름다운 가슴과 사슴 같은 목선까지 모두 고개만 돌리면 바로 옆에서 볼 수 있었다.

그녀가 콧소리를 살짝 냈다.

"뭐든 다 들어줄 테니까."

"차연숙 디자이너를 좀 만나고 싶은데."

"네?"

"왜요? 잘 아는 사이인 줄 알았는데?"

"알죠. 쳇. 그게 다예요?"

"다인데요."

"알았어요. 내일 같이 가요."

* * *

이튿날 서정우는 차연숙을 만났다.

그녀는 호들갑을 떨었다.

"어머. 진짜 서정우 형사네? 반가워요. 차연숙이에요."

서정우도 반가웠다. 어제 저쪽에서 가죽 장인 차연숙을 보고 왔을 때와는 느낌이 달랐다.

'이 아줌마. 여기선 이렇게 사는구나.'

매장은 이쪽이 훨씬 고급스러웠다. 여기서는 쓰레기통까지도 고급 제품을 썼다.

파는 상품도 달랐다. 저쪽에서는 가방을 파는데 이쪽에서는 옷을 팔았다. 저쪽에서도 옷을 팔긴 하지만 그건 가죽이 덧대어져 방어구 겸용으로 쓰는 것들이다.

이쪽 차연숙이 입은 옷도 훨씬 더 고급 제품이다. 그런데 옷의 기본 스타일이 비슷했다.

'감각도 비슷한 걸까? 저쪽에서도 옷을 팔아보라고 할까?'

서정우가 상념을 끝내고 인사했다.

"서정우입니다."

"알아요. 내가 준 옷 입고 왔네? 잘 어울린다. 딱 이런 느낌이 들 줄 알았지."

"주다니요? 샘플로 빌려주신 건 줄 알았는데요?"

"연예인 협찬이긴 한데, 그냥 쭉 입어요."

"연예인이 아닙니다만."

"연예인보다 더 유명한 형사잖아요. 얼굴은 안 찍히지만, 범인 잡는 모습은 동영상으로 곧잘 뜨던데."

"그건 뭐 어쩌다 보니까."

차연숙이 제안했다.

"그럼 그 옷을 입고 살인마를 잡게 되면, 그때 옷만 반납해요. 내가 따로 전시하게."

"아니, 그게 뭐라고 전시를…."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인데 어때요. 호호. 아참. 내가 망토 하나 만들었는데 쓸래요?"

"망토요?"

"히어로는 역시 망토가 있어야 의상이 완성되죠."

서정우가 두 팔을 교차시켰다.

"아뇨. 절대로."

"아쉽네요. 이미 망토를 세 개나 만들어놨는데."

"하나라더니요?"

"호, 호호."

서정우가 여기 찾아온 이유를 말했다.

"전 그냥 옷을 한 벌 사려고 온 겁니다."

"어떤 용도로 입을 건가요? 범인 잡을 때? 아니면 인터뷰… 는 안 하니까 행사장에서 입게요? 그것도 아니면…."

"제 옷이 아니라 여자 옷이요."

"어머. 그렇구나. 어떤 스타일을 원하는데요?"

서정우가 한쪽에 걸린 옷을 가리켰다.

"이미 골랐습니다. 저 옷으로 주시죠."

옆에서 듣고 있던 이선화의 표정이 대놓고 밝아졌다.

'저건 내가 좀 전에 마음에 들어서 자세히 본 옷이잖아. 내가 살까 했는데, 사주려고 그러나? 가방 사업 같이하는 기념으로?'

차연숙이 망설였다.

"그 옷은 공무원 월급으로 사기는 좀…."

서정우가 통 크게 나갔다.

"얼마입니까?"

"이백만 원."

그는 살짝 당황했다.

'이 매장에 옷이 이렇게 많은데 한 벌에 이백? 이 아줌마 여기서 돈을 아주 삽으로 퍼담나 보다.'

이선화도 머리를 굴렸다.

'정우 씨 월급이 얼마지? 한 달 월급 다 부어야 하는 거 아냐? 아무리 곡 저작권료를 따로 받는다 해도 이건 좀….'

그녀가 슬쩍 끼어들었다.

"연예인 DC 없어요?"

차연숙이 대답했다.

"응. 없어. 서 형사가 입을 거 아니라잖아."

"그래도요."

'딱 봐도 내가 입을 거 같은데.'

서정우가 봉투를 꺼냈다.

"사겠습니다."

그는 카드가 아니라 현금으로 옷을 샀다. 이건 악당들을 잡고 챙긴 돈이라서 은행에 입금하지 않고 현금으로 가지고 있었다.

차연숙은 살짝 놀랐다.

"어머. 현금? 아아. 알겠다. 말단 공무원이, 그것도 그냥 공무원도 아니고 서정우 형사가 내 옷을 턱턱 사면 기사가 날지도 모르겠다."

"그냥 시끄러워지는 게 싫어서요."

차연숙이 씩 웃었다.

"서 형사에게 팔았다는 건 비밀로 할게요."

"그래 주시면 저야 고맙죠."

차연숙이 직원을 시켜서 옷을 포장하게 했다.

서정우가 말했다.

"그리고 옷감을 좀 구입하고 싶은데, 어디 가서 사면 됩니까?"

"옷감?"

저쪽 세계의 차연숙이 옷감을 사다 달라고 부탁했다.

"이런 옷에 쓰는 옷감은 어디서 사는지 몰라서요."

"개인 주문은 안 되는 게 좀 있는데…. 필요한 게 있으면 나한테 말해요. 내가 주문 넣어줄 테니까, 나중에 찾아가요."

"그래 주시면 저야 고맙죠."

직원이 옷을 포장하는 동안 서정우는 다른 옷들을 구경했다.

'확실히 옷은 이쪽이 낫단 말이야.'

이선화는 포장되는 옷을 보며 눈을 반짝였다.

'저거 내 거다. 저거 분명히 내 거다.'

차연숙이 그녀에게 작게 말했다.

"선화야. 서 형사하고 너 말이야. 열애설이 종종 터지더라?"

그녀가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쵸? 남들 눈에는 그렇게 보이나 봐요. 하긴. 이렇게 같이 옷도 사러 오고 하니까."

"그런데 말이야. 혹시 너하고는 열애설만 터지고 실제로는 다른 여자가 있는 거 아냐?"

"어머. 차 선생님. 왜 막 그런 저주를 하고 그러실까?"

"네가 걱정돼서 그러지. 저 옷을 누구 주려고 형사 월급에 이백이나 주고 사."

이선화가 웃었다.

"에이. 아니에요. 저 옷은요."

이선화는 예전에 목걸이를 골랐을 때가 생각났다. 서정우는 그녀에게 가장 마음에 드는 목걸이가 무엇인지 물어본 후에, 그걸 샀다.

오늘도 마찬가지다. 그녀에게 의견을 묻지는 않았지만, 그녀가 마음에 들어서 유심히 보던 옷을 샀다.

'남 주려고 의견을 묻는 것치고는 너무 대놓고 내 취향에 맞추잖아. 저 옷도 딱 내 사이즈고. 당연히 내 거겠지.'

그녀가 믿는 건 그게 다가 아니다.

"제가 소라한테 다 알아봤어요. 포캣츠 서소라 아시죠? 걔가 정우 씨 친동생이거든요. 정우 씨는 여친이 있었던 적이 한 번도 없대요."

"오빠가 동생한테 연애하는 거 보고하면서 하겠어? 몰래 했겠지."

"전에는 초능력이나 초자연현상 같은 것에 관심이 많았지 여자는 쳐다보지도 않았대요. 요즘은 그런 취미는 다 졸업했다지만, 어쨌든 이전에 여자친구가 없었다는 건 확실해요. 있었던 흔적 자체가 없어요."

그녀가 손으로 머리카락을 휙 넘겼다.

"그리고 이젠 새로 경쟁자가 달라붙는다고 해도 상관없어요. 어차피 제가 제일 예쁘잖아요."

차연숙도 그건 동의했다.

"하긴. 그 얼굴과 몸매에 성격까지 좋은 네가 남자를 빼앗긴다는 건 말이 안 되지."

"내가 이미 정우 씨 옆에 자리 딱 잡고 있는데, 다른 것들이 뒤늦게 찔러봤자 나한테 상대도 안 되죠."

177. 브랜드 작업

서정우는 몬스터와 싸우는 세계로 넘어갔다. 그는 집으로 가서 5단으로 쌓아온 음식 그릇을 식탁 위에 펼쳐놓았다.

이선화가 환성을 질렀다.

"와! 맛있겠다!"

"내가 층층이 쌓아온다고 했지?"

"믿었어!"

서정우는 종이 상자도 하나 내놓았다.

"선화야. 이건 선물이다."

"응? 이것도 먹는 거야?"

그녀가 상자를 열어보았다. 안에는 옷이 한 벌 들어있었다.

"어머. 옷이잖아."

그건 저쪽 세계의 차연숙에게 산 옷이다.

이선화가 거울 앞에 서서 옷을 몸에 대보았다.

"이 옷 진짜 예쁘다. 선금받은 거로 산 거야?"

그녀는 희귀 대두 도마뱀의 사체를 영화사에 넘기기로 했다. 그때 선금으로 받은 돈은 백만 원인데, 서정우가 사온 건 옷값만 이백만 원짜리다.

"아니. 그 옷은 내가 사주는 거야. 일단 입어봐. 안 맞으면 내일 가서 바꾸게."

이선화가 얼른 방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이제 방 하나를 완전히 자기 것처럼 썼다.

잠시 후에 문이 열리고 그녀가 나왔다. 그녀가 그 자리에서 한 바퀴 빙글 돌았다. 치마가 살짝 올라가자 대리석을 깎아 만든 것 같은 늘씬한 다리가 더 섹시해 보였다.

"어때?"

"예쁘네."

이선화는 만족하지 않았다.

"난 원래 예쁘잖아. 좀 더 참신하고 좋은 감상을 말해봐."

"그쯤에서 만족하는 게 좋을 텐데? 다음부터는 비닐 우비나 사다 주는 수가 있다."

"히힛. 마음에 쏙 든다고. 그런데 이 옷 되게 비싸 보인다."

"가격은 신경 쓰지 마라. 너 이번 영화 찍을 때 더 빛나라고 샀으니까. 액션 없는 장면에서는 그거 입고 찍어."

"알았어. 샤방샤뱡하게 입고 섹시하게 연기해서 주연보다 더 빛나는 조연이 될게."

서소라가 옆에서 부러워했다.

"언니 옷 예쁘다."

서정우가 종이백을 내밀었다.

"이건 네 옷이야."

서소라가 슬쩍 웃으며 종이백을 받았다.

"언니 것만 있는 줄 알았는데, 제 것도 샀어요?"

그건 산 게 아니다.

저쪽 세계의 포켓츠 서소라는 요즘 돈 좀 벌었다고 옷을 여러 벌 샀다. 그는 그중에서 종이백에서 꺼내지도 않고 보관한 걸 하나 슬쩍 가져왔다.

'둘이 똑같으니까 옷 사이즈도 맞고 취향도 맞겠지.'

* * *

이튿날 서정우가 형사로 사는 세계로 돌아왔다.

서소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집안을 돌아다녔다.

"이상하다. 그게 어디 갔지? 오빠. 혹시 내 옷 못 봤어?"

서정우는 뜨끔했다.

"옷이라니?"

"새로 산 옷 중에 한 벌이 없어져서."

"어디 흘리거나 안 가져온 거 아냐?"

"아니야. 이번에 산 옷 중에 제일 마음에 드는 건데 그걸 왜 흘려? 집에 와서도 종이백 분명히 봤거든?"

"그럼 어디 있겠지."

저쪽 세계에 있다. 저쪽 서소라가 그 옷을 입고 신나서 출근했다.

"오빠가 범인 잡는 실력으로 내 옷 좀 찾아봐."

"그러겠냐? 그냥 하나 더 사."

"그거 마지막 한 벌을 산 거라서 이제 못 구한단 말이야."

지은 죄가 있는 서정우가 소파에서 슬그머니 일어났다.

"어…. 난 약속이 있어서 나가야겠…."

서소라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오빠 지금 이거 뭐지?"

"뭐가?"

"전에 내 화장품 들고 튀었을 때 딱 이런 반응을 보였는데?"

"야. 오해…."

서소라가 쏘아붙였다.

"미친 거 아냐? 내 옷을 왜 가져갔는데! 파냐? 팔았구나? 이젠 안 그러는 줄 알았는데 또 팔았어! 아직 입어보지도 않은 옷을!"

"입었던 옷을 팔면 그게 더 문제 아닐까?"

"시끄러!"

"신곡 필요하지? 곧 하나 나올 것 같은데."

서소라는 즉시 공손해졌다.

"오빠마마. 내가 나나 옷도 훔쳐올까? 걔 옷이 더 비싼데."

* * *

이선화는 장르를 가리지 않고 최고로 인정받는 배우다. 그녀는 이전에도 톱스타였는데, 서정우를 만나고 나서는 더 유명해졌다.

스토커 체포 영상도 널리 퍼졌지만, 정말 대박이 난 건 호텔을 습격한 테러리스트 중 한 놈을 그녀가 때려잡은 영상이다.

그 짧은 영상에서 그녀는 아름다우면서도 강한 전사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건 실감이 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실제 영상이다.

지구 반대편에서도 그녀의 그 영상은 큰 인기를 얻었다.

당연히 그녀를 찾는 곳이 많았지만, 그녀는 오히려 스케줄을 줄였다. 섭외 담당자들만 애가 탔다.

그러던 그녀가 새로 개봉하는 영화 시사회에 갑자기 나타났다. 그녀가 출연한 영화가 아닌데도 그곳에 들렀다.

그 영화의 홍보 담당자가 활짝 웃었다.

"이선화 씨. 초대장을 보내긴 했는데 정말 와줄 줄은 몰랐습니다."

"어머. 그냥 갈까요?"

"하하. 농담입니다."

"저도 농담이에요. 아. 저 일단 사진 좀 찍고요."

안 그래도 기자들의 카메라 플래시가 하나씩 터지고 있었다.

그녀는 전투 모드로 세팅하고 이곳에 나타났다. 아침부터 알아주는 헤어 디자이너의 손길을 빌려 머리카락을 세팅하고, 옷은 차연숙이 새로 만든 신상을 입었다. 메이크업도 완벽했다.

그녀가 가방을 들고 포토존에 올라갔다. 서정우에게 선물 받은 바로 그 가방을, 의도가 너무 대놓고 드러나지 않도록 자연스럽게 들었다.

카메라 플래시가 연속으로 터졌다.

그녀는 자세를 몇 번 바꿔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때마다 가방의 위치도 바꿨다. 가방의 느낌이 계속 변했다.

영화가 시작됐다.

'그러고 보니 정우 씨하고는 영화 한 번 같이 본 적이 없네. 같이 자동차 극장에 가고 싶다.'

영화는 그리 재미있지 않았다. 지루한 장면이 너무 많았다. 재미있는 부분도 웃음이 딱히 터지지는 않았다.

'관객 백만 넘기기도 힘들겠다. 돈 많이 썼다던데 안됐네.'

영화가 망하는 건 아쉽지만, 그녀의 계획에 변수가 되지는 않는다. 그녀는 이 영화에 홍보비가 많이 책정됐다는 걸 알고 시사회에 찾아왔다.

'홍보비 많이 쓴다니까 기사도 잔뜩 나가겠지.'

영화사 홍보팀이 열심히 일한 덕분에 시사회 기사가 각 언론사는 물론이고 여러 커뮤니티 게시판에도 퍼졌다.

포털 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순위에도 영화의 제목이 올라갔다.

그런데 실검에는 이선화의 이름도 있었다.

쌍둥이가 이용하는 커뮤니티 게시판에 그녀가 포토존에서 찍힌 사진에 대한 글이 잔뜩 올라왔다.

- 와. 역시 이선화.

- 진심 장난 아니네.

- 사람이 이렇게 예뻐도 되나?

- 사람 아닌 듯.

- 나랑 결혼해줘요.

- 이선화 씨가 무슨 죄를 지어서!

- 이날 다른 여배우들은 아무도 이선화 옆에 서지 않았다던데요.

- 왜요?

- 같이 사진 찍히면 학살당할까 봐.

그녀가 들고 온 가방 이야기도 나왔다.

- 저 가방 진짜 마음에 드는데 비싸겠지요?

- 톱스타가 저런 자리에 들고 온 가방인데 당연히 비싸겠지요.

- 진짜 좋은데, 저거 어디서 파나요?

- 검색해봤는데 안 나오더군요.

- 어떤 브랜드인지 알면 거기 문의하면 되잖아요.

- 이미 시도해봤는데, 브랜드 파악이 안 되는데요?

좀 더 자세히 알아본 사람도 있었다.

- 제가 아는 명품 매니저들에게 연락을 돌려봤는데, 저 가방을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습니다. 검색해도 안 나오고요. 저거 아무래도 수제품 같습니다.

- 에이. 설마요.

- 아닌 것 같으면 찾아보시든가. 전 이미 찾아봤습니다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선화의 가방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 이 가방 이상합니다. 이선화의 자세에 따라서 가방의 느낌이 조금씩 변해요.

- 조명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거겠죠.

- 사람은 그대로 보이고 가방만 변하는데요?

- 진짜 질감이 변하네요. 표면의 무늬도 조금씩 색이 변하는 것 같고요.

사진보다 늦게 동영상이 하나 퍼졌다.

- 와. 미친.

- 영상으로 보니까 가방 진짜 장난 아니네요.

- 신비하고 고급져요.

- 실제로 보고 싶은데, 진짜 이거 어디 가면 살 수 있습니까?

- 살 수 있는 가격이 아닐 듯.

- 구경은 할 수 있잖아요.

* * *

이튿날 김경희가 이선화에게 물었다.

"진짜 그 가방을 서 형사가 줬다고?"

이선화가 마음껏 자랑했다.

"어때? 좋지?"

"좋기는 진짜 좋아 보인다. 그런데 이 가방 수제품이라며? 누가 만든 거야?"

"비밀."

"혹시 서 형사가 만든 거 아니야?"

이선화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에이. 설마."

"서 형사는 뭐든 다 잘한다며. 가방도 만들지 어떻게 알아?"

"그건 아니고, 정우 씨한테만 공급하기로 한 사람이 있나 봐. 신분은 밝힐 수 없대."

"그거 되게 이상하지 않아?"

"하나도 안 이상해. 이게 처음도 아니고."

"처음이 아니라니?"

이선화는 대충 얼버무렸다.

"아. 시간 다 됐다. 나 간다."

"무슨 시간?"

"ES 엔터가 오늘 새 사무실로 옮기거든."

"네가 투자한 돈으로 임대료도 내고 인테리어 공사도 한 그 새 사무실?"

"응. 오늘 사람들 많이 오니까 내가 가서."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가방을 들었다.

"가방 자랑해야지."

김경희가 이선화의 손목을 잡았다.

"잠깐."

"왜?"

"그거 나도 하나 사고 싶은데."

"어허. 기다려. 지금 내가 작업 중이니까. 판매는 그 후에 할 거야."

"무슨 작업?"

"가방 브랜드 만드는 작업."

* * *

ES 엔터테인먼트의 새 사무실 공사가 드디어 끝났다. 이삿짐은 이미 전날 다 옮겼다.

오동철이 감개무량한 얼굴로 사람들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많은 분이 도와주셔서 이렇게 크고 좋은 사무실로 옮겼습니다. 고맙습니다."

오늘은 외부 연예인도 제법 나타났다.

ES 엔터테인먼트와 계약을 저울 중인 연예인들도 얼굴을 비쳤다. 그들이 온 건 사무실이 얼마나 좋은지, 그리고 이 회사의 재정 상황이 어떤지 눈으로 보기 위해서였다.

이선화는 사무실 한복판에 있는 책상에 가방을 올려놓았다.

"정우 씨도 같이 오면 좋은데, 지금은 근무시간이라서 안 되겠다."

남수정과 포캣츠 네 명이 다가왔다.

서소라가 가방을 보고 감탄했다.

"와. 이게 사진으로 본 그 가방이구나. 진짜 장난 아니다. 언니. 이 가방 엄청 비싸죠?"

이선화가 씩 웃었다.

"당연히 최대한 비싸게 팔아야지."

"얼마나요?"

"목표는 반억."

"네? 오천만 원이요?"

"물론 지금은 그 가격으로는 아무도 안 사지. 일단 처음에는 이천이 목표야."

"와. 이 가방 도대체 어디서 파는데 가격이 그래요?"

"아직 안 팔아. 지금은 홍보 기간이야."

"진짜 비싸서 살 자신이 없지만, 그래도 하나 갖고 싶다."

남수정도 부러워했다.

"이런 거 사려면 돈 얼마나 많이 벌어야 해요? 이천이면 우리 수호…."

'일 년 병원비인데.'

배우 강서준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수정아. 넌 그냥 서 형사님한테 잘 이야기하면 지갑 하나 정도는 얻을 수 있지 않을까?"

남수정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에이. 우리 아저씨는 월급쟁이 경찰인데, 이런 비싼 걸 어떻게 사요? 이천이라잖아요. 이런 가방 하나 사려면 아저씨 일 년 연봉 다 써야 할 걸요?"

"저 가방, 서 형사님이 선화한테 선물한 건데?"

"네?"

사람들이 이선화를 돌아보았다.

이선화가 강서준을 째려보았다.

"야. 너 지금 뭐하는 거야?"

강서준은 당황했다.

"어? 왜? 말하면 안 되는 거였…."

"내가 자랑하려고 했는데!"

그녀가 가방을 슬쩍 들었다.

"정우 씨가 선물로 주더라. 어머. 난 정말 가방 같은 거 안 줘도 되는데, 굳이 받아달라고 해서 말이야. 오호호홋."

윤나나가 부러워했다.

"나도 가방 좋아하는데…."

쌍둥이도 끼어들었다.

"학생도 책가방이 필요하다!"

"백팩이라도 달라!"

남수정도 분위기에 휩쓸려 말했다.

"그럼 난 동전 지갑이라도 하나…."

서소라가 심각한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잠깐. 잠깐. 선화 언니. 우리 오빠가 이 가방을 선물했다고요?"

"어. 꼭 받아달라고 하는데 거절할 수는 없잖아?"

"오빠 일 년 연봉 실수령액이 얼마지? 거의 그쯤 될 것 같은데요?"

"에이. 너도 알다시피 정우 씨는…."

돈을 더 벌고 싶으면 당장 연예계에 진출하면 된다.

이선화는 서정우가 디멘션이라는 가명으로 곡을 공급한다는 것도 안다. 오동철은 서정우가 작곡을 직접 한다고 생각하지만, 이선화는 그가 어디서 곡을 받아온다고 생각한다. 어느 쪽이든 돈이 많이 생긴다.

게다가 이 가방은 이선화가 이천만 원이나 오천만 원에 팔고 싶다는 거지, 원가가 그런 건 아니다.

그래서 그녀는 이 가방을 아무 부담 없이 받았다. 하지만 그런 사정을 대놓고 말하면 자랑을 하기 어렵다.

'나나만 정우 씨를 노리나? 아니지. 저기 레몬플라워 애들도 수상해. 이것들을 견제하려면.'

그녀가 가방을 꼭 안았다.

"정우 씨가 나한테만 이걸 선물했어. 오직 나한테만. 콕 집어서 나한테만. 거기 잘 들려? 나한테만."

서소라가 발끈했다.

"이 인간이 진짜!"

"왜?"

"내 거는!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데, 이 인간은 아주 그냥 수돗물로 알아!"

이선화가 상황을 정리했다.

"소라야. 정우 씨 괴롭히지 말고, 네가 돈 열심히 벌어서 사. 다들 돈 벌잖아. 그리고 이거, 생산량이 워낙 적어서 돈만 있다고 다 살 수 있는 거 아니야. 참고로 이 가방을 파는 건 나야."

서소라는 당황했다.

"네? 언니가 팔아요? 선물 받았다면서요?"

"정우 씨가 팔 수는 없잖아. 내가 가방 장인을 소개받으면 내 건물에 매장 하나 내기로 했어."

* * *

서정우는 몬스터와 싸우는 세계로 넘어가 박철우를 만났다.

박철우가 말했다.

"수정이가 부르게 하겠다던 그 곡. 완성됐다. 일단 들어봐."

178. 눈치

서정우가 MP3 플레이어에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들었다.

"되게 흥겹게 잘 나왔다. 아저씨 작곡 실력 아직 안 죽었네."

박철우가 슬쩍 자랑했다.

"중심이 되는 멜로디가 좋았으니까. 나머지야 뭐 나한텐 어렵지 않은 일이지."

중심이 되는 멜로디는 저쪽 세계의 남수정이 샤워하다 만들었다. 그런데 그건 길이가 너무 짧았다. 박철우가 거기에 뼈와 살을 더 붙여서 제대로 된 노래를 완성했다.

서정우가 노래를 들으며 말했다.

"그런데 이거 노래 부른 사람이…."

"가이드 녹음을 수정이가 했어. 어차피 수정이도 이 곡으로 발표하게 할 거라며. 하는 김에 마무리 작업을 같이했지."

원래는 하나였던 사람이 평행차원이 분리되면서 둘이 되었다. 그래서 서정우가 남수정을 만났을 때, 그녀는 두 개의 차원에 별개의 사람으로 존재했다.

그래도 그는 저쪽 남수정이 만든 곡이 이쪽 세계의 남수정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수정이라면, 양쪽 동생을 다 낫게 하고 싶어 할 테니까.'

"수정이 디지털 싱글은 아저씨가 진행해줘. 그쪽 전문가잖아."

"녹음부터 판매까지 아는 사람들 통해서 확실히 진행할 테니까 안심해라."

서정우가 제안했다.

"그럼 말이야. 하는 김에 이쪽 일을 좀 더 하는 건 어때? 전쟁터는 좀 쉬고."

"안 그래도 우리 와이프하고 딸들이 그러라더라."

박철우는 저쪽 세계의 가족과 꿈으로 연결되어 있다. 세계가 평행차원으로 나뉘기 전부터 가족이었기 때문에, 저쪽 세계의 쌍둥이도 그의 딸이다.

게다가 성물 수호 단검 덕분에 이젠 거의 매일 꿈에서 만난다.

서정우는 딱 한 가지가 우려되었다.

'성물의 성스러운 힘은 소모성인데.'

그 힘을 다 써도 다시 채울 수는 있다. 그런데 그러려면 막대한 돈과 노력이 들어간다.

'단순히 꿈에 개입하는 정도라면 성력 소모량이 표도 안 나겠지만, 평행차원에 있는 사람과 연결되는 꿈이라 어떨지 모르겠네.'

어차피 인간의 기술로는 성스러운 힘을 측정할 수 없고 소모량을 계산할 방법도 없다.

'그 힘이 오래오래 유지됐으면 좋겠다. 아저씨가 좋은 꿈 계속 꾸게.'

박철우가 말했다.

"그런데 정우야. 우리 와이프하고 딸들이 널 알더라?"

서정우는 살짝 당황했다.

"으응?"

"우리 쌍둥이가 어딘가 다른 세상에 살아있는데 꿈으로 연결되는 것 같다고 했잖아. 난 그렇게 믿고 싶어. 그런데 그 세계에도 네가 있어."

"어…."

"거기선 네가 형사를 하고 있다더라. 어마어마하게 유명한 형사라던데."

박철우는 심각했다.

"그래서 문제야. 난 이게 그냥 꿈이 아니라 우리 가족이 있는 어떤 세계와 연결된 거로 생각하는데, 그러면 네가 거기 있으면 안 되잖아?"

"어…. 나도 내 꿈에서 쌍둥이를 만나나?"

"넌 내 꿈 이야기를 아무 의심 없이 믿어줬어. 매일 그 꿈을 꿀 수 있게 해주는 단검도 네가 갖다 줬고."

"그 단검은 어쩌다 보니 손에 들어왔어."

박철우가 주변을 슬쩍 둘러보고 목소리를 낮췄다.

"네가 나에게 구해달라고 하는 노래들 말이야. 구매 조건이 참 이상하지? 우리 세상에서는 공개될 일이 없다며. 난 그게 어디 재벌가의 내부 공연용인가 했는데…."

"뭘 그리 복잡하게 생각해."

"네가 갖다 주는 먹거리들도 그래. 구할 수는 있지만 참 비싼 것들이지. 우리 딸들 이야기로는 그런 건 그쪽에서는 흔해빠졌다던데."

서정우가 의자에 등을 기댔다.

'이 아저씨. 반쯤 눈치챘네.'

이런 날이 곧 올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박철우가 꿈에서 저쪽 세계의 쌍둥이를 만났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이런 결과를 예상했다.

그는 그런데도 성물 단검을 박철우에게 빌려주었다. 인간적으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그 행동 때문에 박철우가 눈치채는 것이 빨라졌다.

서정우가 박철우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평행차원에 대해 누군가에게 밝혀야 한다면, 박철우도 대상자 중 한 명이다.

박철우라는 사람 자체도 믿을만하지만, 그의 가족이 저쪽 세계에 있는 것도 중요하다. 서정우가 있어야 박철우와 그들 사이의 연결이 유지된다.

'아직 평행차원에 대해 밝힐 때는 아니라고 봤는데.'

그 정보가 실수로라도 외부로 새어나가면 침을 흘릴 놈이 너무 많다.

일단 박철우가 어디까지 아는지 확인해야 한다.

서정우가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생각하는데?"

박철우는 심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내가 우리 가족을 꿈에서 만날 수 있듯이, 너도 어떤 식으로든 그곳에 영향을 끼친다고 봐야지. 그 영향은 나보다 훨씬 더 강하겠지. 그쪽 물건을 가져올 수 있을 정도로."

"자세한 건 아직 말 못하는 거 알지?"

"내 추측이 사실이구나?"

"긴가민가하면서 여기저기 떠들고 다니면 곤란하니까 말해주는데, 그 생각 대충 맞아."

서정우가 진지하게 말했다.

"비밀 지켜."

"정확히 어떤 상황이냐?"

"나중에 때가 되면 전부 다 말할 수 있겠지."

박철우가 진짜 궁금한 건 다른 게 아니다.

"내 가족은?"

"실제로 존재해."

"역시!"

"아저씨가 생각하는 상황과 다를 수 있지만."

"알아."

"응?"

박철우가 갑자기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딸들이 살아온 삶이, 인생이, 내가 아는 것과 많이 다르더라."

서정우는 망설임을 끝냈다.

'이쯤 되면 알 만한 건 다 아는 거네.'

"상황이 좋아지면 말해주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지. 아저씨.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은, 때가 되기 전까지는 절대로 누설하면 안 돼. 그 누구에게도."

"약속한다."

"평행차원이라고 알아?"

"개념은 알지."

"21세기로 넘어올 때 게이트가 열렸잖아? 그때 하나의 세계가 두 개로 갈라졌어. 게이트가 열리고 몬스터가 쳐들어온 이쪽 세상. 몬스터가 없는 저쪽 세상."

"네 말은 진짜로 평행차원이…."

"그때부터 아저씨도 아줌마도 양쪽 세계에 존재하게 됐다는 거지. 물론 그 이전까지는 같은 사람이었지. 그런데 그때 아줌마는 쌍둥이를 임신 중이었지? 그러니까 쌍둥이도 아저씨 딸이 맞아."

박철우는 꿈속에서 저쪽 세계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딸들이 학교에 다니고 가수가 되었다는 것도 안다.

그걸 단순히 꿈이라고 생각하면, 그가 얻은 희망이 통째로 날아간다.

그런데 그 모든 이야기를 현실로 받아들이면, 딸들이 그가 기억하는 것과 다른 인생을 살았다는 소리가 된다.

그는 서정우가 하는 이야기를 조용히 들었다.

서정우는 평행차원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박철우는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 그도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는 건 짐작하고 있었다.

이야기가 어느 정도 끝난 후에, 박철우가 말했다.

"그렇구나."

그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딸을 다시 만났지만, 잃은 딸이 돌아온 게 아니다.

그가 잠시 그렇게 슬픈 눈으로 앉아 있다가 물었다.

"정우야. 그럼 너는? 어떻게 영향을 끼치는 거냐?"

"난 그쪽 세계로 갈 수 있어. 일종의 텔레포트야."

"텔레포트라…."

박철우는 그 말도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 박철우도 꿈속에서나마 저쪽 세계와 접촉하기 때문이다.

"진짜 부럽다. 나도 현실에서 그쪽으로 가고 싶은데 불가능하겠지?"

"다른 사람이 텔레포트에 끼어들면 죽어. 알잖아."

"알지."

박철우가 눈물을 닦고 웃었다.

"그러니까 내가 딸이 넷이나 있었구나."

"어."

그가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몇 번을 문지르고 나서 맑아진 눈으로 말했다.

"그래. 예상은 했어. 우리 쌍둥이가 살아온 인생이 내가 기억하는 것하고 너무 많이 달랐거든. 그래도 내 딸인 건 그대로야. 세계가 하나일 때부터 내 딸이었으니까."

서정우가 마음을 놓았다.

'다행히 잘 받아들이네.'

중요한 이야기가 아직 남았다.

"아저씨가 그 꿈을 꾸게 된 거 말이야. 내가 원인이야."

"어?"

"내가 저쪽에 가서 쌍둥이와 아줌마를 만나서야. 내가 두 세계를 오고 가는 행동이, 주변 사람들까지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게 한 것 같아."

박철우가 진심으로 말했다.

"야. 고맙다. 나까지 연결해줘서."

"그리고 그 단검 말이야. 성물이야."

"어? 뭐? 홀리 아티펙트?"

"성물의 성스러운 힘은 차원 너머까지 영향을 끼치더라고. 그래서 어쩌다 한 번씩 꾸던 꿈을 매일 꾸게 된 거야."

"정우야. 성물까지 나한테…. 너 진짜 고맙다. 이놈아."

서정우가 손가락을 하나 세웠다.

"이 이야기는 절대로 새어나가면 안 돼. 내가 평행차원으로 못 가게 되면 그 꿈도 끝나. 그러니까 술에 취해서 이 정보를 실수로 흘릴 것 같으면 그냥 술을 끊어."

"어? 술은…."

"취하지 않을 정도만 마시던가."

"오케이. 그런데 말이야."

박철우가 눈을 빛냈다.

"정우야. 그러니까 네가 거기 갔다 올 수 있다는 건, 너를 통해서 우리 쌍둥이에게 선물을 전해줄 수도 있다는 소리지?"

"어."

"그럼 권총 세 자루만 보내줘라. 우리 애들이 비무장이더라."

"이 아저씨가 미쳤나. 저쪽에서 총 가지고 다니면 당장 체포된다고."

"그럼 겉보기엔 장난감처럼 생긴 핑크색 권총이라도…."

"절대로 안 돼."

박철우가 잠시 시무룩했다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악보는? 네가 나한테 받아간 곡, 그중에서 네 명이 부르는 곡들은…."

"포캣츠라고, 쌍둥이가 걸그룹을 하거든."

"'작은 아기 고양이들'도?"

"그거 쌍둥이가 저쪽 세계에서 불러서 엄청 떴지."

박철우가 팔을 걷었다.

"정우야. 나 곡 많다. 내가 우리 딸들 팍팍 밀어줄 거야! 아니다. 그 곡 다 내가 줬다고 말해야겠다!"

서정우가 단호하게 말렸다.

"안돼."

"왜!"

"이쪽 세계에 나와 연결된 정보가 저쪽에 퍼지면, 저쪽에서 내가 활동하는 데 심각한 문제가 생겨. 내가 방어 마스크를 쓰고 사고를 좀 많이 쳤거든. 그런데 쌍둥이는 말실수를 자주 해."

"아. 그러면 조심해야지."

"포켓츠에게 곡을 준 사람이 아저씨라는 이야기는 내가 할게. 평행차원에 대해 알려줄 순 없지만, 아저씨와의 관계는 설명할 방법이 있으니까."

"어떻게?"

"쌍둥이도 아저씨하고 꿈에서 만나는 상황이 정상이 아니라는 건 알더라고."

* * *

서정우는 형사로 사는 세계로 돌아왔다.

그는 그날 저녁때 ES 엔터테인먼트로 갔다. 남수정이 부를 노래의 악보는 이미 이메일로 보냈다.

저쪽 남수정이 부른 가이드 녹음 파일은 보내지 않았다. 대신에 박철우가 악보에 설명을 자세하게 달아놓았다.

오동철은 인기 가수 출신이다. 악보만 있어도 곡을 이해하는 데 문제는 없다.

서정우도 듣는 귀는 좋다. 가이드 녹음과 차이가 나는 부분은 그가 지적할 수 있다.

그리고 그가 놓친 것은 저쪽 세계의 박철우가 녹음파일을 듣고 조언해주면 된다.

이전에도 그런 식으로 작업했다.

ES 엔터테인먼트의 녹음실에 서정우와 오동철, 이선화, 포캣츠, 그리고 남수정이 모였다.

남수정이 노래를 불렀다. 아직 제대로 연습한 건 아니지만, 원형을 그녀가 만들었기 때문에 따라부르는 건 어렵지 않았다.

테스트 녹음이 끝난 후에, 그녀는 자기가 부른 노래를 다시 듣고 감탄했다.

"와. 진짜 노래 좋다. 역시 디멘션!"

쌍둥이 박하연이 말했다.

"진짜 부럽다. 디 님이 공동작업도 다 해줄 줄이야."

박다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수정이만 특별대우야."

남수정은 궁금해졌다. 그녀도 자기가 특별대우를 받았다는 건 안다.

'그 유명한 디멘션이 진짜 왜 나한테만 특별대우를 하지?'

그녀가 아는 한, 그녀를 이렇게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어른은 몇 명 없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모두 이곳에 있다.

'디멘션의 정체가 혹시?'

일단 포캣츠는 제외했다.

'언니들이랑 쌍둥이는 디멘션 님을 직접 만났다고 했어. 그러니까 디멘션일 리는 없어.'

오동철도 제외했다.

'사장님에게 그런 작곡 능력이 있으면 회사가 망할 뻔할 일도 없어야지. 원래 가수인데 작곡 능력을 숨길 이유도 없고.'

그럼 남는 건 이선화와 서정우 뿐이다.

'선화 언니는 그걸 비밀로 할 사람이 아니야. 오히려 더 자랑하면 자랑했지.'

아닌 이유를 가진 사람들을 소거하고 났더니 서정우 하나만 남았다.

'아저씨는 기자들이 그렇게 원하는데도 인터뷰를 안 하는 사람. 뭔가 숨기는 게 많은 사람. 아저씨가 디멘션이라면, 정체를 숨겨도 이상하지 않은데….'

문득 빨간약이 생각났다. 그녀가 칼에 찔려 죽어갈 때 서정우가 빨간약을 꺼냈다. 그 약을 쓰는 모습은 보지 못했지만, 그녀는 그 약 때문에 살아났다고 생각한다.

그건 정말 신기한 경험이었다. 남에게 말해봤자 믿을 리가 없는 일이기도 했다.

'신비한 게 많은 아저씨라면….'

문득, 서정우를 쌍둥이가 예전에 어떻게 불렀는지 생각났다.

'아저씨를 디 형사님이라고 부른 적이 있는데?'

방금은 박하연이 디멘션을 디 님이라고 불렀다.

그녀가 침을 꼴깍 삼켰다.

"이거 말이 안 되는 거 저도 아는데요."

남수정이 서정우에게 물었다.

"아저씨가 혹시 디멘션이세요?"

다들 그 말을 듣고 화들짝 놀랐다.

서정우는 일단 아니라고 말하려 했다.

"아…."

찔리는 게 많은 박다연이 얼른 변명했다.

"내가 말 안 했어요!"

그만하면 실토한 거나 마찬가지다.

서정우가 한숨을 쉬었다.

"수정아. 어떻게 알았냐?"

179. 비밀 공유

남수정은 자기가 먼저 서정우가 디멘션이냐고 물어놓고도 깜짝 놀랐다.

"와아! 진짜 아저씨가 디멘션이에요?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많은 재능을 가질 수 있어요?"

"아니. 그게…."

"하긴. 아저씨니까. 어쩌면 손가락에서 레이저가 나갈지도."

"야. 그건 아니지. 난 사람이다."

쌍둥이가 서로에게 말했다.

"수정이가 확실히 우리보다는 똑똑한 것 같지?"

"원래 공부 잘했대."

"지금도 우리보다는 잘할걸?"

"그건 숨겨야 할 듯."

남수정은 서정우가 진짜 고마웠다.

'그때 죽을뻔한 날 살려주시고 곡까지 주셨네.'

서정우는 이 문제에 대해 쌍둥이에게 할 말이 있다. 그런데 그건 남들이 들으면 곤란하다.

일단은 문제 안 생길 정도로만 말했다.

"그 곡을 만든 사람은 따로 있어. 나는 그냥 받아서 전해준 거야."

서정우는 전부터 그런 말을 여러 번 했다.

이선화는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부터 그대로 믿었다.

"알아요."

오동철이나 포캣츠는 믿지 않았다. 그들은 서정우가 곡을 직접 만들면서 그렇게 둘러댄다고 생각했다.

윤나나가 웃었다.

"에이. 우리한테까지는 안 그러셔도 돼요."

남수정은 서정우의 말이라면 뭐든 믿는다.

"아. 그렇구나. 아저씨도 만능은 아니구나."

그녀는 서정우가 작곡한 게 아니라는 말을 듣자마자 불평했다.

"근데 그분이 가사까지 뜯어고쳤어요. 원래 그 가사가 제가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였는데."

"가사는 내가 고쳤는데?"

"네?"

"원래 이야기가 좀 이상해서."

원래 가사는 죽어가는 소녀의 상처에 아저씨라는 사람이 빨간약을 발라 살려내는 이야기였다.

남수정은 레드 포션이 상처에 적용되는 걸 직접 보진 못했지만, 그 기적에 가까운 효과는 몸으로 체험했다.

서정우는 레드 포션에 대한 정보가 그 노래로 알려지는 걸 경계했다.

'나중에 내가 레드 포션을 다른 사람에게 쓰게 되면, 그 노래 가사가 문제가 될 수도 있어.'

그는 그래서 가사를 뜯어고쳤다. 빨간약은 먹는 알약으로 바꾸고, 연막용으로 파란 알약 이야기도 넣었다. 몸의 상처는 극복 대상인 시련과 고난으로 바꾸었다.

남수정이 눈을 깜빡였다.

"아저씨 가사도 써요?"

"나도 네가 곡을 만들 줄은 몰랐다."

"역시 만능 맞네요."

* * *

남수정이 디멘션의 정체를 눈치챈 사건은 작은 헤프닝으로 끝났다. 같이 있던 사람 중에 서정우가 디멘션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남수정밖에 없었기 때문에 일이 커지지도 않았다.

서정우는 상황이 수습되자마자 쌍둥이를 맞은편 방으로 불렀다. 그곳은 연습실로 사용하려고 만든 곳이다. 노래를 불러도 소리가 새지 않을 정도로 방음처리가 잘 되어 있어서 그들의 대화를 남들이 엿들을 염려는 없었다.

박다연은 혼내려고 부른 줄 알고 애교 섞인 표정으로 웃었다.

"히이. 죄송해요."

"다른 사람 앞에서는 조심해. 눈치챈 사람이 수정이니까 다행이지, 기자가 엿듣기라도 했으면 어쩔 뻔했어?"

"넵! 앞으로 조심할게요!"

"말은 잘한다."

"히히."

"그런데 말이야."

서정우가 조금 진지하게 물었다.

"요즘도 그 꿈 매일 꾸지?"

무슨 이야기인지는 단번에 알아들었다. 평범한 꿈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빠하고 만나는 꿈이요? 그럼요. 엄마도 같이 만나요. 그래서 요즘 우린 밤마다 같은 시간에 맞춰서 자요."

"시간 맞춰서?"

"잠 못 드는 사람은 그 꿈에서 빠지거든요."

"그래. 참 신기한 꿈이지?"

박다연은 신났다.

"진짜 신기해요. 현실하고 정말 똑같은 느낌이고, 다 같이 아빠도 만날 수 있잖아요."

박하연도 맞장구를 쳤다.

"잠에서 깬 후에 서로 물어보면 기억도 똑같아요. 역시 우리 가족에게 초능력이 생긴 것 같아요."

고등학생인 쌍둥이는 전부터 그 꿈을 초능력 덕분에 꾼다고 생각했다. 그녀들의 상식으로는 그것 말고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서정우가 진지하게 물었다.

"방송에서 말한 적은 없지?"

박하연이 두 손을 교차시켜 X자로 만들었다.

"절대로요! 미쳤다고 생각할 테니까요. 엄마가 선을 딱 그었어요. 그거 방송에서 말하는 순간 우린 다 미친년 되는 거래요. 그러니까 절대로 떠들지 말래요. 이젠 친구들에게도 꿈 이야기는 안 해요. 디 형사님은 이미 알고 있으니까 말하는 거예요."

"내 비밀도 그렇게 지켜주면 좋았을 텐데."

"그건 다연이가…."

"야!"

박다연이 박하연의 팔을 툭 친 후에 말했다.

"엄마는요. 아빠의 영혼이 우리를 지켜주는 거래요."

박하연도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아빠 영혼이 사는 세계가 여기랑 좀 다른 것 같기는 하지만요."

서정우가 본론을 꺼냈다.

"사실 나도 꿈에서 철우 아저씨를 만났다. 만난 지 꽤 됐어. 너희처럼 나한테도 초능력이 있거든."

평행차원의 존재를 숨기려면 이런 식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그 말을 쌍둥이가 믿어주느냐이다.

'구체적으로 따지고 들어오면 대답이 좀 궁색….'

괜한 걱정이었다.

박하연이 박수를 쳤다.

"와! 그럴 줄 알았어요."

박다연은 아예 물개 박수를 쳤다.

"아빠가 디 형사님 잘 안대요. 되게 친하대요! 진짜였어!"

박하연이 오른손을 머리 위로 들었다.

"우리끼리만 아빠를 만나는 게 아니야. 디 형사님도 아빠를 만났으니까 그건 진짜 현실이야!"

박다연이 그 손을 마주쳤다.

"진짜 아빠야!"

서정우는 안심했다. 어떻게 설득하나 걱정했는데, 이 정도면 설득할 것도 없다.

"너희 어머니 말이 맞아. 이 이야기를 떠들고 다니면, 미친년들에서 미친년놈들로 업그레이드되는 거야. 그쯤 되면 병원 가라는 소리 진지하게 듣는다. 알지?"

쌍둥이가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당연하죠!"

"아싸아! 엄마한테는 말해도 되죠?"

서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해야지. 그리고 알아야 할 것이 더 있는데."

"뭔데요?"

"좋은 거예요?"

"포캣츠가 받은 그 노래들 말이야. 모두 너의 아버지가 작곡한 거야."

쌍둥이는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우리 아빠는 게임만 잘했는데요?"

"노래는 다 디멘션이 작곡한 거잖아요. 디멘션은 디 형사님이잖아요."

서정우가 손가락을 하나 세웠다.

"잘 생각해봐. 내가 내 입으로 그 곡을 작곡했다고 말한 적 있어?"

쌍둥이가 서로를 마주 보았다.

"없나?"

"있는 줄 알았는데?"

박하연이 서정우에게 물었다.

"하지만 소라 언니가 분명히 그렇다고 말했는데요? 모든 작곡은 디 형사님이 한다고."

"소라가 혼자 그렇게 짐작하고 내가 작곡했다고 말했지. 나도 초능력으로 얻었다고 하면 미친놈 소리를 들을까 봐 적당히 얼버무린 거고. 철우 아저씨한테 받아왔다고 하면 누가 믿겠어? 그런데 난 내가 작곡했다는 말은 한 적이 없어."

아무리 쌍둥이를 잘 알아도 평행차원을 공개할 수는 없다. 그게 공개되면 이쪽에서 만든 알리바이 몇 개가 깨진다. 칼치파를 몰살시킨 일 같은 건 알려져서는 안 된다.

박하연이 말했다.

"소라 언니가, 디 형사님이 제일 처음에 주신 노래는 직접 광고지 뒷면에 긁적거린 거라고…."

"긁적거렸지. 철우 아저씨가 만든 곡을 그 종이에."

박다연은 쉽게 받아들였다.

"와…. 그래서 전부터 곡을 오다가 주웠다거나 어디서 받아왔다고 한 거예요? 그거 당연히 농담인 줄 알았어요."

"나도 너희처럼 꿈속에서 철우 아저씨를 만나. 그런데 내 초능력이 더 강력해서, 난 그 세상에 갈 수 있어."

박다연이 진심으로 감탄했다.

"우와! 쩐다!"

박다연의 반응이 워낙 좋아서, 서정우는 설명하는 김에 조금 더 질렀다.

"물건도 전해줄 수 있다."

"우와아!"

박다연이 얼른 주머니를 뒤졌다. 작은 인형으로 만든 열쇠고리가 하나 나왔다.

"자요!"

"이건 왜?"

"직접 만든 건데 아빠한테 전해줘요. 꿈속 세상에서 아빠가 이거 가지고 있는지 보게요. 디 형사님 말이 사실이면 우리가 꿈에서 이 열쇠고리를 볼 수 있잖아요."

서정우는 살짝 당황했다. 열쇠고리가 문제가 아니라 이 제안을 박다연이 했다는 것에 놀랐다.

"하연이가 아니라 다연이가 이렇게 꼼꼼할 줄은 몰랐는데?"

"어라? 절 띄엄띄엄 본 듯?"

"어…. 아니다."

서정우가 단서를 달았다.

"다만, 이 모든 이야기는 우리끼리만 알아야 해. 소라한테도 말하면 안 돼. 진심으로 미쳤다고 할 거야."

쌍둥이가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물론이죠."

"이제 언니들이 새 악보 보고 좋아할 때, 우린 뒤에 앉아서 씩 웃고 있으면 될 듯."

* * *

서정우가 저쪽 세계로 넘어가 박철우에게 열쇠고리를 주었다.

"이거."

"어디서 이런 못생긴 싸구려 장난감을."

"다연이가 직접 만든 거야."

박철우가 얼른 열쇠고리를 받았다.

"이 인형만 봐도 우리 딸이 얼마나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알겠다."

"오늘 밤 꿈에 쌍둥이 만나면 그거 꼭 보여줘. 이야기는 전에 말한 대로 대충 했는데, 증거를 봐야겠대."

"그럼 당연히 보여줘야지!"

이번에는 박철우가 작은 상자를 탁자에 올려놓았다.

"나도 너한테 맡길 게 있다. 이거 우리 와이프하고 애들한테 좀 전해줘라."

"총은 안 된다고."

"총 아니다."

서정우가 상자를 열었다.

"그럼 적당히 핑계를 대면서 전해줄…."

상자에는 나이프 세 자루와 상처 치료 약품들이 들어있었다.

박철우가 설명했다.

"최소한 칼은 한 자루씩 있어야지. 혹시 다칠지 모르니까 약도 넉넉하게…."

서정우가 상자를 탁 닫았다.

"안 된다고!"

"그럼 약이라도…."

"이 약은 상처 치료 효과가 지나치게 좋은 것들이잖아. 이것도 안 돼."

"후우. 그래? 그럼 이것 하나만 좀 전해줘라."

박철우가 가느다란 은색 원통 케이스를 꺼냈다.

"레드 포션이라도…."

"치료제도 못 보내는데 레드 포션이 될까?"

"하지만…."

"애들이 다치면 내가 레드 포션으로 치료해줄게. 남들 모르게."

"약속 꼭 지켜라."

박철우가 손가락을 튕겼다.

"악보 하나 손보고 있다. 예전에 내가 쓴 곡 중에 잘 나간 건데, 우리 쌍둥이한테 딱 맞을 거야. 수정 끝나면 전해줘."

"걔들 4인조야. 두 명한테 너무 집중하면 갈등 생겨."

"알아서 파트 배분 잘했어. 우리 쌍둥이가 30씩 60, 나머지 둘은 20씩 40."

"뭐, 그 정도면. 아. 쌍둥이 노래 연습은 아저씨가 꿈속에서 시키면 되겠네?"

박철우가 활짝 웃었다.

"흐흐. 당연하지."

* * *

서정우가 집으로 돌아왔다.

이선화도 집에 와 있었다.

"선화야. 촬영 스케줄은?"

"내가 나오는 장면은 다 찍었어. 다른 배우들도 조금만 더 찍으면 돼."

이선화가 TV를 가리켰다.

"그래서 장 감독님이 방송에까지 나와서 여유 부리잖아."

장현성 감독은 TV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서 제작 중인 영화 이야기를 했다.

- 이 영화를 찍으면서 이선화 씨의 진면목을 다시 봤습니다. 조연인데도 그 누구보다 더 빛이 나더군요.

진행자가 맞장구를 쳤다.

- 원래 이선화 씨가 미모와 연기력은 인정받고 있었죠. 전투 스킬만 각성했으면 완벽했을 텐데, 그게 참 아쉬운 배우입니다.

- 이번 영화를 보시면 그 아쉬움을 한 방에 날려버리실 겁니다.

- 그래요? 이거 정말 기대되는데요? 아! 혹시 이선화 씨가 각성을….

- 그건 아니지만, 전투 감각도 좋고 총도 정말 잘 쏜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스킬은 없지만 전투에 천재적인 재능이 있더군요. 정신 저항력도 굉장히 높고요.

진행자가 안쓰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 정신 저항력은 위기를 겪어야 올라간다고 알려져 있죠. 이선화 씨가 그동안 위험한 일을 참 많이 겪었나 봅니다.

다른 출연자가 말했다.

- 예전에 여의도 방어 전투에서 이선화 씨가 며칠 동안 고립됐다가 극적으로 구출됐다더군요.

- 와. 며칠이나요? 그때 여의도는 사방이 다 몬스터 천지였는데 어떻게 버텼을까요? 대단하네요.

장현성 감독도 한마디 했다.

- 이번에 들었는데, 얼마 전에도 몬스터의 저주에 당했다가 완전히 극복했다더군요.

진행자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 그런 시련을 다 이겨냈으니까 정신 저항력이 높아지지요. 그럼 이제 전투 스킬 하나만 각성하면 정말 대단하겠는데….

또 다른 출연자가 눈치 없이 끼어들었다.

- 그렇게 열심히 사는 사람이 그 나이까지 각성을 못 했으면, 스킬 각성은 거의 불가능….

다른 출연자들이 그 여자를 째려보았다.

진행자가 웃음으로 상황을 수습했다.

- 하, 하하. 잘 되겠죠. 이선화 씨. 응원하겠습니다!

이선화가 서정우를 돌아보면서 자랑했다.

"훗. 봤어? 내가 이런 사람이야."

"이번 영화가 잘 되면 좀 뜨겠네?"

"당연하지!"

"너 뜨고 나서도 계속 우리 집에 오면 스캔들 난다."

서정우는 저쪽 세계의 이선화가 조금 부러웠다.

저쪽 이선화는 열애설이 터져도 걱정하지 않는다. 사회 분위기가 연예인의 열애설을 심각하게 생각하지도 않는 데다가, 그녀는 그런 소문 정도로 타격을 받을 위치도 아니다.

그런데 이쪽 세계의 조연 배우 이선화는 상황이 다르다.

이쪽에서 여자 연예인은 열애설이 터지면 치명상을 입는다. 이선화처럼 비각성자인 조연 배우에게는 사형선고나 다름없다.

"겨우 잡은 인기인데 잘 관리해라."

"괜찮아. 소라 핑계로 오는 거니까. 그리고 여기 올 때는 미행하는 사람 없는지 조심하고 있다고."

"만약 누군가 여기를 찾아와서 몰래 감시하면?"

이선화가 방긋 웃었다.

"그런 놈은 오빠가 냉큼 잡겠지. 난 오빠만 믿어. 파이팅!"

"나만 믿고 배 째지 말란 말이야."

180. 초대받지 않은 손님

서정우가 형사로 사는 세계로 넘어왔다.

이선화는 그녀가 몬스터 가죽 가방을 들고 찍은 사진이 인터넷에 어떻게 돌아다니는지 확인했다.

"소문은 잘 나고 있네."

그녀는 스마트폰에 들어온 메시지도 확인했다. 그 가방에 관해 묻는 연락이 많았다.

"갖고 싶어 하는 사람도 많고."

문제는 가격이다.

'생산량이 많으면 싸게 팔아도 되지만, 어차피 조금밖에 못 만드니까 사고 싶어도 못 사는 명품 브랜드로 만들고 싶어.'

돈만 남기는 게 목적이 아니다.

'나하고 정우 씨가 같이 작업한 브랜드니까 당연히 최고가 되어야지. 아직 한참 덜 떴어. 작업을 더 해야겠다.'

그녀는 소속 기획사를 찾아가 그녀 앞으로 온 초대장을 전부 다 확인하고 그중에서 한 장을 골라냈다.

"바다 위에서 열리는 선상 자선파티? 돈 많고 인정도 많은 사람이 많이 오겠네?"

그녀가 초대장을 빙글 돌렸다.

"여기 가야겠다."

* * *

남수정은 요즘은 학교에 꼬박꼬박 간다. 정규 수업시간만 끝나면 바로 빠져나오긴 하지만, 그래도 학교에 있을 때는 착실하게 공부했다. 손을 놓은 지 오래돼서 어려운 게 많았지만 그래도 학교가 좋았다.

가끔은 '수업 열심히 듣는 남수정' 같은 사진이 인터넷에 올라갔다. 그건 그녀의 반 친구들이 알아서 하는 홍보 활동이다.

남수정은 금요일 수업이 끝나자마자 ES 엔터테인먼트에 가서 노래를 연습했다. 그런 그녀에게 오동철이 초대장을 하나 내밀었다.

"너 오늘 밤에 여기 갈 수 있겠냐?"

"이게 뭔데요?"

"자선파티."

"사람들이 막 기부하고 그러는 파티요?"

"어. 그거."

남수정은 망설였다.

"웅…. 전 조금만 내도 돼요?"

"응? 조금만이라니?"

"전 돈이 없잖아요. 사장님한테 받은 거 다 수호 약값으로 쓰고, 생활비도 쓰고, 수호 신발도 새로 사 주고, 아저씨 운동화도…."

오동철이 손을 흔들었다.

"아니. 잠깐. 너보고 거기 가서 돈을 기부하라는 게 아니잖아."

"네? 가서 기부하는 자선파티라면서요."

"넌 가서 노래를 불러야지. 물론 자선파티라서 행사비가 그대로 기부되긴 하는데…."

남수정이 안심하고 활짝 웃었다.

"갈게요!"

"그래. 이미지 관리를 위해서라도 이런 건 가는 게 좋지."

"히히. 신난다. 제가 진짜 떴나 봐요. 행사도 들어오고."

"어…. 재능 기부 공연이라 돈은 안 된다만."

남수정이 부른 노래가 뜨긴 했다. 그런데 그녀가 무대에서 부를 수 있는 건 딱 한 곡뿐이다.

행사장에서 동료 가수의 노래를 불러 숫자를 채우는 방법은 쓸 수 없다.

그녀가 무대에서 포캣츠나 레몬플라워의 노래를 부르는 건 자폭이나 마찬가지다. 실력 차이가 너무 많이 나기 때문이다. 오동철의 노래는 부르기가 더 어렵다.

오동철도 그녀를 굴리지 않았다. 지금은 방송 스케줄 외에는 외부 일정도 거의 잡지 않았다. 학교를 무사히 졸업하는 걸 더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동철은 남수정이 학교에 다니는 동안 노래 실력을 키워줄 생각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자선파티 행사 주최 측에서 오동철에게 연락해 그녀의 참여를 부탁했다.

'수정이가 어려움을 이겨내고 가수가 됐기 때문에, 상징성이 있어서 초대한다고 했지.'

오동철도 그런 좋은 뜻의 행사라면 반대할 이유가 없다.

다만, 그런 이야기를 남수정에게 굳이 하지는 않았다. 그동안 고생하면서 어렵게 살았다는 건 본인은 해도 되는 이야기지만, 남이 해서 좋을 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 *

마약계 형사 구민호가 서정우를 찾아왔다. 그냥 놀러 온 건 아니다.

"우리 쪽에서 추적하는 그 마약 조직 때문에 의견을 좀 듣고 싶어서 왔습니다."

"뭔가 나왔습니까?"

"이번에 잡은 골동품을 이용한 마약 밀수 조직 말입니다. 그놈들을 털다가 중요한 단서를 하나 찾아냈습니다. 우리가 쫓는 조직의 간부급 인물이 선상 자선파티에 나타날 거라더군요. 그놈의 이름까지는 알아내지 못했습니다만."

"잠깐만요. 마약을 판 돈을 기부한다고요?"

"그럴 리가 있습니까? 그런 놈들이 기부하는 경우는 외부의 눈을 속이기 위한 때뿐입니다."

"이번에도 뭔가 속일 일이 있나 보군요. 그런데 이름도 모르는데 어떻게 찾아낸다는 겁니까?"

"제가 전에 이야기한 다선 국회의원 기억하시지요? 그 의원도 그 파티에 갑니다. 배가 바다 위에 떠 있을 때 접선하려는 게 아닐까 합니다."

서정우도 납득했다.

"하긴. 이홍국이 이유 없이 자선파티에 갈 놈은 아니죠."

구민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어?"

"왜 그러십니까?"

"다선 의원이 이홍국이라는 건 어떻게 알았습니까?"

서정우가 둘러댔다.

"저번에 힌트를 주셨잖습니까?"

"아니, 다선 의원이라는 말밖에 안 했습니다만? 국회에 다선 의원이 한두 명도 아닌데 그게 왜 힌트가 됩니까?"

"어쩌다 보니 알게 됐습니다."

"우리가 이홍국을 찾아내는 데 얼마나 오래 걸렸는데 그걸 어쩌다…."

서정우가 말을 돌렸다.

"그러면 이홍국과 만나는 놈이 누군지만 알아내면 되겠군요."

"우리 직원 얼굴은 놈들이 대충 파악하고 있을 겁니다. 국회의원까지 빽으로 쓰는 놈들이니 그 정도 정보력은 있겠지요."

"외부인을 들여보내면요?"

"그 선상파티는 초대받은 사람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사람을 함부로 심었다가 놈들이 눈치채면 곤란합니다."

"그럼 얼굴이 팔릴 대로 팔린 저에게 가달라고 하는 건 아닐 테고."

"배가 돌아오면 참석자의 정보를 최대한 모을 테니까, 분석을 좀 도와주시지요."

"네. 그 정도는 뭐. 먼저 우리 팀장님 허락부터 받아오시면 해드리죠."

* * *

구민호가 가고 나서 서정우 잠시 고민했다.

"이홍국을 이용하면 좋은 정보가 계속 흘러나오는데…."

그게 이홍국을 날려버리지 않는 이유다.

"이번에도 느낌이 좋단 말이야."

오늘은 금요일이다. 자선파티도 오늘 밤이다.

"이선화 씨는 오늘 밤에 스케줄이 있다고 했으니까 시간도 남고."

이선화는 평소에도 훈련을 받다 지치면 저녁 스케줄 핑계를 대면서 빼먹곤 했다. 이번에도 그런 경우라고 생각했다.

"나도 정보가 좀 필요하고."

마약계 구민호가 그에게 모든 정보를 알려줬을 리 없다. 나중에 주는 정보도 자기들이 분석에 실패한 것만 넘길 게 뻔하다.

서정우가 결론을 내렸다.

"어차피 내일은 쉬는 날이고 밤에 할 일도 없으니까, 나도 거기 가야겠다."

그런데 서정우는 유명한 형사다. 그의 얼굴을 아는 사람도 많다.

파티장에 그가 나타나면, 이홍국과 그 조직의 간부가 접선할 리 없다. 그래서 구민호도 서정우에게 직접 침투해달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얼굴이 알려지니까 이렇게 불편하네."

그가 사진을 찍지 않고 외부 인물과의 접촉도 반기지 않는 건, 이곳에서의 18년 동안의 삶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 기간에 알던 사람과 다시 만나게 되면 곤란해진다.

그걸 사실대로 말할 수 없어서 댄 핑계가 얼굴이 많이 알려지면 범인을 잡을 때 방해가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게 그냥 핑계는 아니다. 이번처럼 실제로도 방해되곤 한다.

서정우가 결론을 내렸다.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되어야겠다."

* * *

꽤 큰 배가 선상파티를 위해 정박해 있었다. 이선화가 승선한 후에 말했다.

"이 배 한강은 못 올라가나?"

그녀의 근처에 있던 남자가 대답했다.

"아쉽게도 허가가 안 납니다."

이선화가 고개를 돌리며 우아하게 물었다.

"누구신지?"

"오늘 자선파티 주최자인 장석준입니다."

"어머나. 좋은 일 하시는 분이시네요."

"알아주셔서 고맙습니다. 하하하."

이선화는 웃지 않았다. 장석준이 얼른 말했다.

"아. 농담입니다. 이선화 씨를 직접 보니까 좋아서 그만."

이선화는 직원의 안내를 받아 안쪽으로 들어갔다. 내부의 넓은 공간이 파티를 위해 꾸며져 있었다. 한쪽에는 작은 무대도 있었다.

"파티 한 번 하려고 이렇게까지 꾸미나? 돈 많이 들었겠는데."

장석준이 다시 다가왔다.

"평소에는 전세 화물선으로 쓰다가 주말에만 선상파티에 사용하려고 이곳과 갑판을 개조했습니다. 화물선으로 쓸 때는 이 공간은 닫아둘 겁니다."

"아아. 그렇구나. 그런데 파티 주최자시면 되게 바쁘실 텐데 자주 보이시네요?"

"하하. 제가 뭐 하는 게 있겠습니까? 밑에 직원들이 다 하지."

이선화는 슬슬 장석준을 떼어낼 궁리를 했다.

'좀 귀찮네.'

갑자기 이선화의 왼팔을 남수정이 두 팔로 껴안았다.

"선화 언니!"

이선화는 살짝 놀랐다.

"어머! 수정이 네가 여긴 어쩐 일이야?"

"저 오늘 여기서 노래 불러요."

이선화가 남수정을 안아주었다.

"아유. 벌써 행사도 하고, 많이 컸네. 우리 수정이."

"히히."

장석준은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 틈이 없었다. 그는 잠시 머쓱하니 서 있다가 다른 사람을 찾아갔다.

남수정이 장석준의 뒤통수를 향해 눈짓하며 물었다.

"그런데 저 남자는 누구예요?"

"이 행사 주최자래."

"언니랑 잘 알아요?"

"몰라."

"지금 말고 조금 전에도 언니랑 이야기하던데요? 언니 표정이 나빠 보여서 얼른 달려왔어요."

"잘했어."

이선화가 설명했다.

"나한테 저렇게 괜히 찔러보는 사람 되게 많아. 하도 많이 경험했더니 이젠 척 보면 알 정도야. 너도 학교 졸업하면 많이 경험하게 될걸?"

"방송국 가면 지금도 좀 있는데."

"고등학생한테? 누구야? 정우 씨한테 말해서 전부 다 은팔찌를 채워버리겠어!"

"에이. 제가 알아서 다 뻥 차버렸죠. 그리고 동갑이나 한 살 어린 녀석도 있었는데 걔들은 은팔찌 못 채우지 않아요?"

이선화가 진심으로 걱정했다.

"고딩은 스캔들 터지면 한 방에 훅 간다. 알지?"

"당연히 알죠. 전 노래로 우리 수호 병원비하고 대학 등록금까지 다 벌어놔야 해요. 그 전에 망하면 절대로 안 돼요."

"응? 네 동생 초등학생이잖아."

"나중에 대학 갈 거잖아요. 미리 벌어놔야죠."

이선화가 웃었다.

"그래. 얼른 떠서 동생 대학 보내."

* * *

서정우는 선상파티가 열리기로 한 배에 접근했다.

배가 바다 위로 나간 후에는 침투가 어렵다. 부두에 정박해 있을 때 잠입해야 한다.

그는 공간 분석 스킬로 CCTV 카메라를 찾아내고 사람들의 시선도 피하며 배의 바로 근처에 있는 컨테이너 뒤까지 이동했다.

저쪽 세계의 몬스터 중에는 질기고 탄력 좋은 줄을 사용하는 놈들이 있다. 거미 계열 몬스터를 잡으면 그런 게 잘 나온다. 다른 몬스터 중에도 거미줄과 비슷한 섬유를 함정이나 무기로 쓰는 것들이 있다.

서정우가 침투에 사용하려는 줄도 그런 것을 가공해 만든 것이다. 어두운 밤에는 그 줄이 잘 보이지 않는다.

줄의 끝에 붙어 있는 물체는 금속에 닿는 순간 강력하게 달라붙는 성질을 갖고 있다. 그건 기갑차량을 공격하는 몬스터에게서 뽑아낸 것이다.

서정우가 줄을 던져 배에 붙였다. 그는 남들의 시선이 다른 쪽을 향한 순간 줄 위를 달렸다.

줄 끝에 붙어 있던 물체의 부착력은 유지되는 시간이 짧았다. 사용하고 난 줄은 바닷물 속으로 사라졌다.

* * *

자선파티에 온 사람들은 이선화와 이야기하고 싶어 했다. 대화의 주제는 그녀의 연예계 활동부터 테러리스트를 잡을 때의 일까지 다양했다. 서정우에 대한 질문도 종종 나왔다.

모든 사람이 이선화를 반긴 건 아니다. 그녀를 좋지 않은 표정으로 보는 여자가 있었다.

'쟤도 왔네?'

이수현은 영화 제작사의 이사다. 그녀의 집안에서 그 제작사의 지분을 꽤 많이 가지고 있다.

그런데 올해 초에 그녀가 주도해서 제작한 영화가 흥행에서 참패했다. 손익분기점이 삼백만 명인 영화인데 관객은 백만 명도 들지 않았다. 그야말로 쫄딱 망했다.

그때 이선화가 출연한 영화도 상영됐다. 그 영화는 팔백만 명을 찍었다.

이수현이 제작했다가 망한 그 영화는 원래 이선화를 주인공으로 섭외하려다 실패하고 다른 배우를 썼다.

이수현은 영화가 망한 이유를 이선화 탓으로 돌렸다. 이선화가 출연했으면 망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고, 하필 이선화가 경쟁작에 나와서 더 망했다고 생각했다.

그때부터 이수현은 이선화의 욕을 하고 다녔다. 이 바닥에 떠도는 이선화 관련 루머 몇 개는 그녀의 입에서 나왔다.

이선화는 이수현이 들고 있는 분홍색 가방을 표적으로 삼았다.

'가격은 이천만 원쯤? 저거 아마 어지간한 인맥이 아니면 즉시 구매는 불가능하고 예약해도 몇 달은 걸려야 받을 수 있지?'

그건 백화점에서 '이거 주세요'라고 하면서 살 수 있는 가방이 아니다. 일반 고객이 사려면 예약을 걸어놓고 몇 달은 기다려야 한다.

'내 목표가 저기 있네? 우리는 생산량이 일 년에 오십에서 백 개밖에 안 되니까, 저거보다 훨씬 더 가치 있고 귀한 브랜드로 만들어야 자랑거리가 되지.'

가방만 목표가 아니다. 적대적 관계인 이수현도 목표다.

이선화가 이수현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어머. 이 이사님. 오랜만이에요."

이수현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러네요. 이선화 씨가 이런 좋은 행사에 올 줄은 몰랐는데?"

상대의 말에 가시가 숨어 있었다. 일단 먼저 공격이 들어왔다.

이선화도 똑같은 방식으로 반격했다.

"이 이사님은 이런 행사에 자주 안 오셔서 몰랐나 보다. 난 자주 다니는데."

이선화가 일부러 이수현의 옆에 섰다. 두 사람의 모습이 단번에 비교되었다.

181. 접선

자연스럽게 이선화와 이수현이 든 가방이 사람들의 눈에 동시에 들어왔다.

브랜드 가치를 빼고 보면 이선화가 든 몬스터 가죽 가방이 훨씬 더 좋아 보였다. 이천만 원짜리 이수현의 가방이 갑자기 볼품없어졌다.

사람은 더 크게 차이가 났다. 이수현도 어지간한 연예인에게 안 꿇릴 정도로 꾸미고 오긴 했지만, 톱스타 이선화가 옆에 선 순간 그녀의 빛에 가려져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이 자선파티에는 연예계 관계자들도 여럿 와 있다. 그들 중 일부는 두 사람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걸 안다.

사람과 가방 모두 이선화의 일방적인 승리였다. 싸움은 시작하자마자 승패가 결정됐다.

이수현은 지금 남들의 눈에 어떻게 보이는지 모르는 상태로 이선화에게 시비를 걸었다.

"요즘 서정우하고 단둘이 만난다는 소문이 있던데? 그러다 또 스캔들 터지겠어? 소속사에서 관리 안 하나 봐요?"

"내가 그런 관리 받을 레벨은 아니죠. 이 이사님도 소문 좀 돌던데."

"난 연예인이 아닌데 무슨 소문?"

"이 이사님이 뒤에서 내 욕하고 다닌다는 소문."

이수현의 눈빛이 당장 날카로워졌다.

"증거 있어요?"

"증인은 많죠. 직접 들었다는 사람이 어디 한둘이어야지."

"그거 떠들고 다녀봤자 난 아무것도 인정 안…."

"어머. 그거 따지려고 같이 서 있는 거 아닌데 왜 그렇게 놀라세요?"

"뭐? 그럼 왜…."

이수현의 눈에 다른 사람들이 들어왔다. 그때서야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다.

'조용히 이야기해서 우리 대화는 거의 안 들렸을 텐데….'

그녀가 귀를 기울였다. 조금 큰 목소리로 떠드는 소리 몇 개가 귀에 들어왔다.

"이 이사 컨디션이 나쁜가 본데? 얼굴이 어째…."

"일본까지 가서 시술받고 왔다던데 약발이 다했나?"

"이선화 저 가방 어디서 팔지?"

"와. 이 이사 가방이 장바구니로 보인다."

그녀는 이선화가 왜 굳이 그녀의 옆에 섰는지 깨달았다. 그녀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뒤로 물러났다.

"너 지금 일부러…."

"어머. 목소리 커지면 다 들릴 텐데."

"내가 가만히 있을 줄 알아?"

"그동안은 뭐 가만히 있었나?"

이수현이 이선화를 노려보다가 씩씩거리며 파티장을 빠져나갔다.

상황이 정리되고 나서 김경희가 다가왔다.

"이년아. 성질 좀 죽여."

"왔어?"

이선화가 가진 초대장은 한 명을 더 데려올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 서정우를 데려오면 가방 자랑을 대놓고 하기 어렵다. 이렇게 사나운 모습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열애설을 크게 신경 쓰지 않지만, 서정우가 신경 쓴다는 건 안다. 둘이서 같이 이 파티에 참석하면 다시 기사가 날 게 뻔하다.

그래서 그녀는 친구 김경희를 불렀다.

김경희가 말했다.

"네 빽으로 부자들 사이에서 부귀영화 좀 누려보려고 일찍 퇴근하고 달려왔지. 차가 막혀서 배 출발하기 전에 겨우 탔는데, 파티장에 들어오자마자 본 게 네가 또 누구 하나 잡는 모습이네?"

"저게 내 욕 많이 하고 다닌단 말이야."

"네 욕하는 게 어디 저 여자 하나겠냐? 십만 안티는?"

"그건 괜찮아. 내 팬은 천만이잖아."

이선화는 천만 관객 영화를 두 번이나 찍은 배우다.

한쪽에 마련된 무대 위에 마술사가 올라가 간단한 마술을 보여주고 내려왔다.

시간이 좀 지나자 이번에는 가수가 무대에 올라가 노래를 한 곡 부르고 내려왔다.

공연은 그렇게 아무나 무대 위에 올라가서 간단히 재능을 보여주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형식만 그렇고 실제로는 모두 섭외된 사람들이다.

아무도 그걸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늘 공연하는 사람의 행사비는 모두 기부되기 때문에, 그 마술사와 가수도 파티 참석자의 자격을 갖고 있다.

남수정이 세 번째로 무대에 올랐다. 그녀가 폴더 인사를 한 후에 활짝 웃었다.

"와. 저 진짜 알바도 이렇게 좋은 곳에서는 못 해봤는데, 여긴 엄청 맛있는 요리가 다 공짜래요. 많이 먹어야지."

준비한 맨트가 아니라 진심으로 한 말이다. 사람들이 유쾌하게 웃었다.

남수정이 노래를 시작했다.

김경희가 콧노래로 따라 부르며 말했다.

"쟤 노래는 참 부르기 쉬워서 좋아. 몇 번 연습하니까 비슷하게 되더라."

"원래 수정이가 노래를 전문적으로 배운 적이 없잖아. 그런 수정이가 부를 수 있도록 딱 맞춘 노래라서 그래. 대신에 노래의 맛은 수정이가 부를 때가 제일 좋아. 맞춤노래니까."

"노래방에서 부를 노래가 한 곡밖에 없는 게 아쉽다."

"조만간 한 곡 더 나올 거야. 그 노래도 진짜 좋아."

김경희가 이선화를 돌아보았다.

"들어봤어?"

"당연하지. 나 ES 엔터 투자자야."

"이번 노래도 디멘션이야?"

"이번엔 수정이하고 디멘션의 공동 작곡이야."

"그래서 디멘션이 누구야? 넌 이제 알지?"

이선화가 서정우를 떠올렸다.

'정우 씨가 디멘션이긴 한데, 직접 작곡하는 건 아니고 어디서 받아온다고 했단 말이야.'

"몰라."

"뭔가 아는 눈치인데?"

"진짜 작곡가는 몰라."

남수정의 노래가 끝났다. 사람들이 박수를 크게 쳤다.

김경희가 무대를 보며 말했다.

"수정이 쟤 말이야. 오늘 무대를 되게 즐기나 보다. 아니면 이 파티가 재미있던지. 얼굴에서 웃음꽃이 사라지지 않아."

"쟤는 더 좋은 거 보고 더 맛있는 거 먹고 더 행복해져야 해. 아직 학생인데 너무 고생만 하고 살았어. 그동안 어깨가 되게 무거웠을 거야."

남수정은 무대에서 부를 수 있는 노래가 한 곡뿐이다. 다른 노래를 부르면 실력이 들통나기 때문에 안 하는 게 낫다.

그녀의 무대는 인사한 시간을 합쳐도 5분밖에 되지 않았다. 그래도 기분이 정말 좋았다.

그녀가 무대에서 내려온 후에 말했다.

"또 하고 싶다."

여기는 아는 사람이 한 명밖에 없다. 그녀를 데려다준 ES 엔터테인먼트 직원은 초대장이 없어서 배에 타지 못했다.

남수정이 이선화에게 가려고 했다. 그런데 이선화에게 새로운 사람들이 접근해서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역시 톱스타. 언니 인기 쩌네."

사람들이 이선화에게 가방에 관해 물었다. 이선화는 신비로운 느낌의 가방을 들고 그 사람들을 상대했다.

남수정이 그 가방을 보며 혼잣말을 했다.

"나도 아저씨한테 동전 지갑 하나만 선물 받으면 좋겠다."

그녀는 혼자서 음식이 있는 테이블로 이동했다. 기다란 테이블 여러 개에 뷔페식으로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대부분은 서서 먹기 편한 것들이다. 자리에 앉아서 천천히 먹어야 하는 건 별로 없었다.

그녀는 그 요리들을 본격적으로 즐겼다.

달콤한 디저트도 많았지만, 그녀는 주로 고기가 재료로 사용된 것에 집중했다.

그녀가 콧노래를 부르며 먹었다.

"고기, 고기, 맛도 좋고 배가 안 고파지는 고기. 있을 때 많이 먹어둬야…."

그녀의 뒤에서 강서준이 말했다.

"수정아. 고기 먹고 싶으면 말을 해. 사줄 테니까. 그런데 가사는 좀 고쳐야겠다."

남수정이 휙 돌아섰다.

"앗! 서준 오빠?"

"어? 야. 흘린다."

접시에 담긴 음식이 그녀의 옷에 살짝 닿았다. 남수정은 당황했다.

"앗! 이거 회사에 깨끗하게 반납해야 하는데."

"괜찮아. 그 정도는 회사에서 거래하는데 맡기면 감쪽같이 지워줘."

"진짜요?"

"당연하지. ES 엔터도 단골로 거래하는 데가 있을 거야."

"그런데 서준 오빠가 여긴 어쩐 일이세요?"

"오 사장님이 이 배에 너만 혼자 두는 걸 걱정하더라. 그래서 넌 내가 대신 데려다준다고 하고 왔지."

"아. 요즘 노시죠."

"쉬는 거야."

"그런데 이 배가 아무나 막 들어오고 그래도 되는 곳이에요?"

"야. 나 강서준이야. 난 얼굴이 초대장이라고."

"와. 그렇게 맨날 놀아도 잘 나가는구나."

"나 원래 잘나갔…. 어쨌든 오늘 네 에스코트는 내가 한다고 했으니까 넌 이제부터 나만 믿어라. 이 파티는 물론이고 집에까지 안전하게 모실 테니까."

남수정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고맙습니다."

강서준이 씩 웃었다.

"고마우면 곡 하나만. 나 진짜 너한테 곡 하나 받으려고 이 에스코트 한다고 한 거라고."

"빨간약은 진짜 우연히 생각난 거란 말이에요. 이젠 가사도 바뀌고 제목까지 바뀌게 생겼지만. 전 작곡할 줄 몰라요."

"방금 부른 그건? 좋던데."

"네?"

"이번엔 제목이 뭐야? '맛도 좋고 배도 부른 고기'야?"

"아…. 그냥 되는대로 흥얼거린 건데."

강서준이 그녀를 구석으로 데려갔다. 그쪽에 사람이 없었다. 그는 그곳에서 스마트폰의 녹음 기능을 켜고 말했다.

"다시 흥얼거려봐. 혹시 알아? 오 사장님이나 디멘션이 이번에도 좋다고 할지."

"에이. 진짜 흥얼거린 건데."

"밑져야 본전이잖아?"

남수정이 조금 전에 대충 불렀던 노래를 다시 했다. 이번에는 노래가 좀 더 길었지만, 그래도 30초 만에 끝났다.

"이게 다인데요?"

강서준이 녹음파일을 확인했다.

"오케이. 내일 회사에서 같이 물어보자. 토요일이니까 학교 안 가지?"

"알바를…."

"알바 다 그만둔 거 아냐?"

"평일에는 학교도 가고 연습도 해야 해서 안 해요. 대신에 주말 알바만…."

"너 연예인인데?"

"그래서 인형탈 알바 하려고요."

"얼마냐? 내가 널 내일 알바로 쓸 테니까 그건 빠져."

"이렇게 갑자기 째면 다음 주에도 그 알바 못 해요."

"다음 주 알바비도 줄게."

"아싸! 고맙습니다! 알바는 대타 보낼게요!"

"대타도 있냐?"

"현수라고 친구 있어요. 걔 공부도 안 하는데 놀면 뭐해요? 돈이라도 벌어야지. 아. 저 얼룩 좀 닦고 올게요."

남수정은 파티장을 나왔다. 옷에 묻은 얼룩이 아무래도 신경 쓰여서 화장실에서 물로 닦아볼 생각이었다.

"화장실이 어디에 있을까…."

* * *

서정우는 조용히 움직였다. 얼굴은 백성민의 서랍에 있던 소품으로 간단히 변장했다. 친한 사람이 보면 서정우라는 걸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변장은 간단했다.

그는 그 상태로 사람들을 피해 움직였다. 가끔 스쳐 지나가는 사람은 있지만, 지금 이 배에는 자선파티 때문에 방문한 외부인이 워낙 많아서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대신에 CCTV는 철저히 피했다. 그가 이곳에 있었다는 기록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다.

그러다 드디어 일차 목표를 발견했다.

'이홍국.'

그의 진짜 목표는 이홍국이 접선하는 사람을 찾는 것이다.

'사람이 많은 파티장에서 접선하진 않겠지.'

거기서 만날 수는 있지만, 진짜 중요한 이야기는 숨어서 할 게 뻔했다.

'따로 만나는 놈. 그놈을 찾으면….'

구민호 형사의 팀에서 쫓고 있는 마약 조직에 접근하게 된다.

문득 웃음이 피식 나왔다.

'나 이러다 진짜 형사가 되는 거 아냐?'

그는 저쪽 세계에서 헌터로 살았다.

이곳에 처음 넘어왔을 때는 정보의 습득 수단으로 형사라는 직업이 필요했다. 그런데 지금은 마약 조직을 잡는 것 자체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이 배에 잠입했다.

'이쪽 세계의 삶과 직업도 나한테 무척 중요해졌네.'

백성민처럼 여기서 처음 만난 사람들도 많다. 그 관계는 저쪽보다 가볍지 않았다.

배는 이미 바다 위에 있었다. 주변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그저 배의 화려한 조명만이 검은 바다를 비추었다.

배의 뒤쪽 작은 갑판에는 그 조명조차 별로 없었다. 그곳은 선상 자선파티가 벌어지는 곳의 반대쪽이다.

그곳에 이홍국이 나타났다.

이홍국이 툴툴댔다.

"꼭 이렇게 불편하게 만나야 하나?"

장석준이 어둠 속에서 쓱 걸어 나오며 담배를 입에 물었다.

"의원님이 요즘 기분이 안 좋으신가 봅니다. 전에는 이런 접촉이 안전해서 더 좋다고 하시더니."

장석준은 이 자선파티의 주최자다.

이홍국이 화를 냈다.

"너 이 새끼. 지금 나 비꼬냐? 요즘 내가 욕을 좀 먹으니까 우습게 보여?"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4선 의원님을 제가 비꼬다니요. 5선도 하셔야 하는데."

"이 새끼가 진짜!"

"가능하시겠습니까? 저도 계속 투자해야 하는지 확인해야 해서 말이지요."

이홍국이 구겨진 얼굴로 주변을 한 번 둘러보았다. 그런 정도로는 숨어 있는 서정우를 발견할 수 없다.

"똑바로 들어. 나를 통해서 네놈 돈을 먹은 놈이 한둘이 아니야. 내가 나가리 되면 그놈들은 멀쩡할 거 같아? 난 절대로 혼자 안 죽는다. 그러니까 그놈들은 날 못 버려."

"당장은 힘을 쓰실 수 있다는 건 알겠습니다. 임기 중에는 제 지원도 꾸준히 계속될 겁니다. 다음 선거에도 꼭 당선되시면 좋겠습니다만."

"내가 요즘 욕 좀 먹기는 했는데, 그건 안 중요해. 이 나라에는 깃발만 꽂으면 당선되는 지역구들이 있지. 내 지역구도 그런 곳이야. 다음 선거 때가 되면 요즘 욕 좀 먹은 건 다들 잊어버릴 거다."

"의원님의 그 노른자 지역구를 노리는 경쟁자들이 이번 기회를 그냥 넘기겠습니까?"

이홍국이 구겨진 얼굴을 폈다.

"장 사장. 그러니까 십억만 뿌리자. 지역구를 유지하려면 당에 그 정도 기름칠은 해야지."

장석준이 웃었다.

"이십억을 준비하겠습니다."

이홍국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오늘 무례에 대한 사과의 뜻인가?"

"의원님도 더 높은 자리로 가셔야 하고, 저도 사람 몇 명 꽂고 싶어서 말이지요."

"어떤 자리를 원하는데?"

"항구에서 수출입 관리하는 쪽에 일자리 몇 개만 알아봐 주시면 됩니다."

"높은 자리인가?"

"제가 아마추어도 아니고 설마 그런 걸 부탁하겠습니까? 실무자 쪽 자리입니다."

이홍국이 큰소리쳤다.

"그래? 그 정도야 쉽지. 한두 번 해보는 것도 아닌데. 알았어."

이십억 원을 준다는 말에 기분이 풀린 이홍국이 물었다.

"이 배는 뭐야? 빌린 거야?"

"평소에는 전세 화물선으로 쓰다가, 주말에만 이렇게 선상파티를 하려고 중고로 하나 장만했습니다."

"장 사장은 역시 돈이 많아."

"제가 돈을 더 많이 벌면 의원님께 떨어지는 떡고물도 더 많아지겠지요."

"흐흐흐. 장 사장은 말이야. 말하는 꼬락서니가 참 품위가 없어."

"우리 사이에 뭘 품위를 찾고 그러십니까? 질펀하게 노시는 거 잘 아는데요. 흐흐흐."

* * *

서정우가 어두운 그늘 안쪽에 서서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저놈이네."

182. 조수

국회의원 이홍국과 파티 주최자 장석준이 배의 뒤쪽 작은 갑판에서 접선했다.

그들이 서 있는 곳 근처에서 스크루가 돌아가며 물보라를 일으켰다. 그 소리에 바닷바람 소리까지 더해졌다.

서정우의 위치에서는 두 사람의 대화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누가 엿듣지 못하게 일부러 시끄러운 저곳에서 대화하는 거겠지.'

서정우가 방어 마스크를 꺼내 얼굴에 썼다. 그건 이쪽 세상에 철가면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마스크다.

저쪽 세계에는 다양한 방어 마스크가 판매된다.

지금 서정우가 쓴 건 광물형 몬스터를 잡고 구한 금속과 곤충형 몬스터의 갑각 조각, 짐승형 몬스터의 가죽을 조합해 만든 것이다. 여러 가지 재료를 사용해 두께를 줄이고 변형도 가능하게 만들었는데도 재료가 워낙 좋아 방어력이 꽤 높았다.

게다가 변형 기능 덕분에 휴대가 간편했다.

'나올 때 따로 나왔으니까, 이야기가 끝나면 이홍국이 먼저 들어가겠지. 그래야 혼자 나갔다 들어온 것처럼 보이니까. 그럼 그때 저 담배 피우는 놈을 잡아서 조사….'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서정우가 인상을 살짝 썼다.

'하이힐 소리? 체중은 가벼운 편. 여기는 파티 손님이 올 곳이 아닌데? 그럼 일당인가?'

서정우가 뒤로 쓱 돌아섰다. 적의 일당이라면 조용히 제압해야 한다.

모퉁이 너머에서 남수정이 나타났다.

서정우는 당황했다.

'쟤가 왜 여기 있어?'

그는 남수정이 이 배에 탔다는 것을 몰랐다.

'자선파티에 기부금 낼 돈은 없을 텐데?'

당황하긴 했지만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마스크를 썼으니까 어차피 내가 누군지는 모르겠지.'

남수정이 철가면을 쓴 서정우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아저씨? 여기서 뭐 하세요?"

"어?"

"그 마스크는 또 왜 쓰고 있어요? 요즘 형사는 잠복할 때 마스크도 써요?"

서정우는 진짜로 당황했다.

'쟤가 날 어떻게 알아봤지?'

남수정이 한 박자 늦게 깜짝 놀라며 마스크를 가리켰다.

"앗! 그거 혹시 철가면…."

서정우가 급히 손가락으로 입술을 가렸다.

"쉿."

남수정이 얼른 그 동작을 따라 했다.

"쉿."

서정우가 조용히 남수정에게 다가가 물었다.

"나인 건 어떻게 알았냐?"

그녀가 그의 신발을 가리켰다.

"아저씨 운동화요."

서정우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이건 매장에서 돈 주고 산 흔한 운동화인데?"

"매듭 묶는 모양, 때 탄 모습, 그리고 거기 그 얼룩. 다 아저씨 운동화인데요?"

서정우는 정체를 들킨 이유를 깨달았다.

'겉옷은 다른 걸 가져와서 뒤집어 입었는데, 운동화가 그대로라서 알아봤구나.'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있었다.

"내 신발을 어떻게 이렇게 쉽게 알아봤어?"

이건 아무 가게나 가면 흔히 살 수 있는 운동화다.

"아저씨 운동화가 낡아 보여서 하나 선물하고 싶었거든요. 운동화 사이즈하고 볼 넓이 같은 거 알아야 하니까 유심히 봤죠. 아. 선물할 때까지 비밀로 하려고 했는데."

그는 이 운동화를 이쪽 세계에서 샀지만 저쪽 세계에서도 신고 돌아다닌다.

평범한 이 운동화는 헌터 서정우의 엄청난 운동능력을 버티지 못하고 금방 손상됐다. 신발이 낡은 형태도 보통 사람이 신을 때와 달랐다.

'잘 보면 조금 다르긴 한데.'

이런 상황에서 누구 신발인지 한눈에 알아볼 만큼 크게 차이가 나는 건 아니다.

남수정이 설명을 추가했다.

"키도 아저씨 키고 느낌도 아저씨라서 자세히 본 거예요. 그러다 신발이 눈에 딱 들어왔죠."

서정우가 남수정을 빤히 쳐다보았다.

남수정은 원래 공부를 잘했다. 아르바이트하느라 학교를 제대로 못 나가면서 시험성적이 내리꽂혔지만, 그 전에는 학업 우등생이었다.

이번에 새로 만든 노래도 원형은 남수정이 샤워하다 만든 것이다. 그 노래는 연습 중이라 아직 발표하지 않았지만, 공동 작곡가인 박철우는 원형이 좋아서 노래가 잘 나왔다고 말했다.

그런데 남수정이 이제는 범상치 않은 관찰력까지 보여줬다.

이쪽만 그런 게 아니다. 저쪽 세계의 남수정도 두 가지 스킬을 각성했고, 그 나이의 다른 애들보다 훨씬 더 잘 싸웠다.

서정우는 남수정을 보며 생각했다.

'혹시 재능충?'

남수정이 소곤거렸다.

"그런데요. 아저씨가 진짜 철가면이에요?"

서정우는 잠깐 떠오른 잡념을 치우고 진지하게 말했다.

"그거 알려지면 큰일 난다. 비밀 꼭 지켜라."

그는 철가면을 썼을 때는 제약 없이 총을 쏘고 다녔다. 그게 공개되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남수정은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는 다른 이유 때문에 좋아했다.

"우와! 일본에서까지 유명한 히어로 철가면이 우리 아저씨일 줄이야!"

"아니, 일본 일은 어쩌다 보니."

"인터넷에서 아저씨하고 철가면하고 싸우면 누가 이기는지 가지고 사람들이 싸우던데. 같은 사람일 줄이야."

"수정아. 목소리가 크다."

남수정이 얼른 목소리를 낮추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넵. 쉿. 그럼 지금도 히어로 활동 중이세요?"

"아니. 나쁜 놈 조사하는 중이야. 나 형사잖아."

"낮에는 형사로, 밤에는 철가면으로. 역시 우리 아저씨!"

남수정이 엄지까지 세우고 좋아했다.

서정우가 철가면 소리를 그만 들으려고 방어 마스크를 벗었다.

남수정이 웃었다.

"풋! 그 어설픈 변장은 뭐예요? 금방 알아보겠네."

"스쳐 지나간 정도로는 다들 내가 누군지 알아보지 못하더라. 그런데 넌 여기 어떻게 왔냐?"

남수정이 자랑했다.

"재능 기부요. 오늘 이 자선파티에서 노래 불렀어요. 아! 혹시 보셨어요?"

"아니. 난 잠입 중이라 파티장엔 못 들어갔지."

"하긴. 오늘은 제가 이해할게요."

"네가 이해해줘야 하는 거였냐?"

"히힛!"

서정우가 손을 바깥쪽으로 흔들었다.

"넌 이제 가라. 난 일 좀 하게."

남수정이 두 손을 허리에 짚었다.

"이거 왜 이러실까?"

"응?"

"조수 필요하시잖아요."

"필요 없어."

"원래 히어로들은 조수가 있어야 해요."

"그런 게 어디 있냐?"

"영화에서 보면 웬만하면 다 있던데요. 옛날 옛적 홈즈도 왓슨이 있었고요. 요즘도 당연히 다들 있어요. 강철맨도 인공지능 조수가 있잖아요."

"영화에서 보면 슈퍼 파워를 가지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힘센 외계인 히어로는 조수가 없잖아."

"아. 그 팬티를 바지 위에 입고 돌아다니는 히어로요? 그러니까 조수가 없죠."

"그게 설마 팬티는 아니겠지."

"딱 봐도 팬티인데요?"

서정우가 다시 손을 흔들었다.

"까불지 말고 가라. 고딩은 이런 위험한 일 하는 거 아니…."

저쪽 세계에서는 고등학생 남수정과 정현수를 경호원으로 썼다.

"음. 어쨌든 가라."

남수정이 졸랐다.

"제가 사건 해결하는 거 도와드릴게요. 네?"

서정우가 갑자기 고개를 뒤로 휙 돌렸다.

뒤쪽 갑판에 있던 이홍국이 대화를 끝내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가 기다리던 순간이다.

'같이 있던 놈이 혼자가 됐으니 지금 치자. 저놈을 잡아서 바다 위에 거꾸로 매달면 뭔가 털어놓겠지.'

그러는 모습을 남수정에게 보여줄 수는 없다.

"그럼 다음에 조수 해라. 오늘은 준비가 안 됐으니까 가서 파티를 즐겨."

만족한 대답을 들은 남수정이 어디서 본 건 있어서 경례를 했다.

"넵!"

그녀가 씩씩하게 돌아섰다. 그대로 배의 앞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갑자기 배의 뒤쪽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남수정은 그 소리에 놀라 발이 삐끗했다. 평소에 하이힐을 거의 신어보지 못해서 작은 실수로도 중심을 잃었다.

"꺄악!"

발이 완전히 꺾이기 전에, 그녀의 등을 서정우가 부드럽게 받았다. 남수정은 뒤로 반쯤 누운 상태로 위를 올려다보았다. 서정우의 얼굴이 보였다.

"아저씨?"

서정우의 표정은 굉장히 심각했다.

"이상한데?"

"괜찮아요. 저 하나도 안 다쳤…."

"너 말고."

"네?"

큰 소리가 날 때 살기가 잠깐 잡혔다가 사라졌다. 약한 수준의 살기이지만, 감지됐다는 게 문제다.

뒤쪽 갑판에서 장석준이 급히 휴대용 무전기를 켰다.

"지금 이거 무슨 소리야? 뭐? 이 새끼야! 그게 무슨 개소리야! 내가 갈 때까지 기다려!"

서정우가 남수정을 바로 세워주며 말했다.

"나는 상황을 파악하고 문제를 해결하러 갈 테니까, 넌 파티장으로 가. 음…."

그가 잠시 생각하다 지시했다.

"조수가 되고 싶다고 했지? 그럼 넌 가서 사람들을 앞쪽 갑판으로 내보내."

"갑판이요?"

"뭔가 잘못됐어. 밖에 있는 게 나을 거란 느낌이 든다."

"넵!"

서정우가 철가면을 바깥쪽으로 던졌다. 철가면이 원반처럼 날아가다가 바닷물 속으로 사라졌다.

남수정은 당황했다.

"앗! 아깝게 그걸 왜 버려요?"

"저런 가면 많아."

"아저씨 변장은 너무 대충이라서 남들이 알아볼 거예요."

"어차피 변장으로 넘어갈 단계는 지났어. 느낌이 안 좋다. 가라. 남수정."

"아저씨."

"왜?"

"조심하실 거죠?"

"조심은 놈들이 해야지."

남수정은 뒤를 두어 번 돌아본 후에 파티장 쪽으로 이동했다.

처음에는 하이힐을 신고 뛰려고 했지만 익숙하지 않아서 어려웠다. 그래서 아예 신발을 벗고 뛰었다.

서정우는 남수정을 보내고 나서 장석준이 사라진 쪽으로 움직였다.

그러면서 상황을 판단했다.

'저쪽 세계라면 기관실에 몬스터가 침입했다고 생각할 텐데.'

타고 있는 배에 갑자기 문제가 생기는 상황은 처음 겪은 게 아니다.

저쪽 세계에는 전차나 장갑차에 달라붙어 전기 회로를 태우거나 엔진을 망가뜨리는 놈들이 있다. 비행 능력까지 가진 놈이 날아와 달라붙으면 그 전차는 그걸로 끝장이다.

군함이나 상선도 그런 놈들의 공격을 받을 때가 있다.

그는 예전에 바다 위에서 임무를 수행하다가 해양 몬스터의 습격을 받은 때를 떠올렸다. 그때는 기관실에 침입한 소형 몬스터 때문에 엔진이 갑자기 멎었다. 지금 이 느낌이 딱 그때 그 느낌이다.

'살기와 함께 엔진이 갑자기 정지했어. 단순 기계 고장은 아니야. 이쪽 세계에는 몬스터가 없으니까, 사람 짓이겠지.'

* * *

이선화에게 윤지민이 다가와 웃으며 인사했다.

"어머. 안녕하세요. 이선화 씨."

그녀는 저쪽 세계에서는 견습 성녀이고 이쪽 세계에서는 생화학 전문가다.

"네. 안녕하세요."

"정우 씨는 같이 안 왔나 봐요?"

이선화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정우 씨하고 아는 사이세요?"

"그럼요. 잘 알죠. 정우 씨하고 같이 일도 하고 그래요."

"그럼 형사?"

"아니요. 전 과학자예요."

"국과수?"

"지금은 민간 연구소에 있어요. 정부 의뢰로 일하기도 하고요. 우리나라 정부는 아니지만."

이선화는 연구소라는 말을 듣고 나서야 그녀가 누구인지 생각났다.

'호텔 테러 사건 때 정우 씨한테 잠깐 아는 체한 그 여자네?'

"그럼 교수님은 아닌가 보네요? 어디 소장님도 아니고? 이 파티는 그냥 과학자가 오기엔 좀…."

"제가 좀 유명해서 초대장이 오더라고요. 호호."

이선화는 슬슬 짜증이 났다.

'연예인도 아니면서 묘하게 예쁘네? 이거 정우 씨한테 날파리가 너무 다양하게 붙는데?'

윤지민이 말했다.

"방금 큰 소리가 들려서 무슨 일인지 정우 씨에게 물어보려고 했는데, 같이 안 왔다니까 아쉽네요. 어머! 남수정이 왜 맨발이죠?"

이선화가 고개를 돌렸다. 파티장으로 뛰어들어오는 남수정이 보였다. 그녀의 왼손에는 하이힐이 들려 있었다.

"쟤는 왜 또 저렇게…."

남수정이 맨발로 뛰어 무대 위에 올라갔다. 그녀가 마이크를 잡고 외쳤다.

"여러분!"

사람들이 남수정을 돌아보았다. 다들 그녀가 노래를 한 곡 더 하려는 줄 알았다.

남수정이 말했다.

"모두 갑판으로 나가셔야 해요. 제가 나가보니까 바깥바람이 추워요. 옷에 지퍼 있으면 잘 올리시고요. 없으면 식탁보라도 둘러쓰세요."

사람들은 무슨 소리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이 날씨에 밖에 나가라니?"

"수정 양. 이유가 뭐지요?"

남수정도 그게 궁금했다. 서정우는 정확한 이유를 말해주진 않았다.

"저도 모르는데요."

"하하. 모르면서 왜…."

"우리 아저씨가 다 대피시키랬어요. 앞쪽 갑판으로요. 소리가 뒤에서 났거든요."

지금 이곳에는 남수정이 말하는 아저씨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이 두 명 있다. 이선화와 강서준이다.

이선화가 당장 무대 위로 뛰어 올라갔다.

"수정아. 정우 씨가 지금 이 배에 있어?"

"네. 악당을 조사하는 중이라고 했는데, 배 뒤에서 쿵 소리가 났어요. 그걸 듣더니 얼른 파티장에 있는 분들을 앞쪽 갑판으로 보내랬어요."

이선화가 사람들을 향해 외쳤다.

"뭐해요? 전부 나가요! 구명조끼도 입고!"

사람들은 그녀가 왜 그러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강서준도 무대 위로 뛰어 올라가 소리를 질렀다.

"서정우 형사가 이 배가 곧 침몰한다고 선언…."

남수정이 급한 마음에 강서준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며 외쳤다.

"아니요! 침몰한다고는 안 했어요! 그냥 대피하라고 했어요! 아저씨가 악당을 쫓아갔으니까 어떻게든 해결될 거예요!"

강서준이 엉덩방아를 찧은 채로 눈을 껌뻑였다.

"수정아. 너 무술 배웠냐?"

사람들의 분위기가 싹 변했다.

"서정우라니!"

"구명조끼 어디 있어?"

"누가 해경에 전화해!"

"휴대폰이 안 터져!"

"도대체 바다 위로 얼마나 멀리 나온 거야!"

이선화가 사람들을 향해 소리를 빽 질렀다.

"정우 씨가, 서정우 형사가 해결한다잖아요! 어떤 사건이든 단 한 번도 실패한 적 없는 거 다들 알잖아요. 그러니까 진정해요! 흥분하면 안 다쳐도 되는 사람이 다쳐요! 아, 진짜. 거기! 사람 밀지 말고 침착하게 나가라고!"

183. 폭발

서정우는 장석준의 뒤를 밟았다.

장석준은 중간에 두 번 뒤를 돌아보았다. 서정우는 한 발 먼저 몸을 숨겼다.

장석준이 배의 아래층 기관실 문을 벌컥 열었다.

"어떻게 된 거야!"

남자가 당황한 얼굴로 보고했다.

"저 기계가 터졌습니다. 그래서 엔진도 멈췄는데, 고칠 방법이…."

"이 새끼야! 저건 중요한 장비니까 꼭 국산 쓰라고 했잖아!"

"분명히 국산 썼습니다."

"부품 바꿔친 새끼 있으면 죽여버린다!"

장석준이 기계를 향해 걸어갔다.

"씨발. 이 배가 얼마짜리인데."

오래된 배를 중고로 샀지만 그래도 비쌌다. 파티를 위한 공간 개조에도 돈을 많이 썼다.

'어?'

기계가 부서진 형태가 이상했다.

'밖에서 안으로 구겨져?'

처음에는 경찰을 의심했다.

'경찰이 이걸 부숴? 그런 막장 경찰이 있을 리가 없지. 그럼….'

실수가 아니라면 이 장치를 부술 곳은 하나밖에 없다.

'다른 파벌이 작업 들어온 거 아닐까?'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골동품으로 약을 납품하던 놈들이 날아갔으니까, 이제 이 배가 중요 공급선이 될 거야. 그만큼 내 발언권이 강해지겠지. 그걸 막으려고 누군가….'

갑자기 옆구리가 화끈해졌다.

"컥!"

장석준이 짧은 비명을 지르며 앞으로 튀어나갔다. 거의 동시에 몸을 뒤로 휙 돌렸다.

"이 새끼!"

방금 그의 부하인 척하며 보고하던 남자가 단검을 흔들며 입술을 핥았다.

"얕았나?"

장석준이 왼손으로 옆구리를 막았다. 입에서도 피가 흘러나왔다.

"쿨럭!"

"아니네. 제대로 들어갔네."

장석준이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 새끼. 너 누구야?"

"당연히 이 배의 선원은 아니지. 언뜻 보니까 비슷했지? 내가 변장을 좀 잘해."

"누가 시켰냐? 날 제끼면 내가 만든 세력을 먹을 수 있을 것 같아? 씨발. 내가 없으면 후원조직도 못 먹어!"

"이런. 뭔가 착각하고 있나 본데, 널 제끼는 건 네 세력을 먹으려고 하는 게 아니야. 네 후원조직이야 돈 좀 더 뿌리면 다시 손에 넣을 수 있겠지. 윗분들이 그런 거 잘하잖아."

"씨발. 그럼 왜…."

킬러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네가 노출됐으니까."

"뭐?"

"경찰이 이 배에 대해 알아냈다. 배의 주인이 너니까, 이제 경찰이 네 주변을 얼마나 파고 다니겠냐? 그러다 네가 실수라도 하면, 그건 민폐지."

"씨발. 그래서 꼬리를 자르는 거냐? 내가 겨우 꼬리란 거냐! 쿨럭!"

"꼬리는 아니고, 문어 다리 중 하나겠지. 다리 하나 잘려나가도 문어는 안 죽지만, 그 다리를 살리려고 버티면 다른 다리들하고 몸통까지 다 죽는다고. 그러니까 장 사장이 이해하고, 잘 가."

장석준의 입에서 피가 계속 흘러나왔다. 옆구리의 상처도 너무 깊었다. 그는 어차피 곧 죽는다는 걸 깨달았다.

장석준은 조금 전에 이홍국과 했던 대화가 생각났다.

"씨발. 혼자 안 죽는다더니, 내가 그 말을 할 줄은 몰랐다."

"뭐?"

"다 같이 죽자. 이 씹새야."

장석준이 손목시계를 몇 번 비틀었다.

시침이 가리키는 인덱스 열두 개 중에 다섯 개가 붉은빛을 뿌리며 깜빡였다. 다섯 개 모두 초소형 LED였다.

첫 번째 불빛이 빠르게 점멸하다가 완전히 켜진 상태로 고정됐다.

갑자기 기관실 벽에서 폭탄이 폭발했다. 폭풍과 함께 금속 파편의 소나기가 기관실을 덮쳤다.

"으악!"

강철 파편 몇 개가 킬러의 등 뒤에서 몸을 관통했다. 그중 하나는 심장을 뚫었다. 킬러는 즉사했다.

다른 파편 네 개가 장석준의 몸을 파고들었다.

"컥!"

그 직후에 서정우가 기관실로 들어왔다.

그는 장석준과 조금 떨어진 위치에서 미행하느라 도착이 조금 늦었다. 도착한 후에는 둘의 대화에서 정보를 얻으려고 조금 기다렸다.

그러다 살기를 느끼고 몸을 피했다가 지금 들어왔다.

서정우가 장석준을 내려다보며 인상을 썼다.

"폭탄 전문가였나?"

장석준은 주저앉은 상태로 부서진 기계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그가 서정우를 올려다보았다.

"크크. 이건 또 뭐지?"

서정우가 얼굴에 붙인 변장을 떼어냈다.

"경찰이다."

변장을 반쯤 떼어냈을 때 장석준이 그를 알아보았다.

"서정우?"

"날 아네?"

"씨발. 남수정을 초대가수로 부른 건 전에 칼 맞을 때 뭔가 눈치챘는지 떠보려던 거였는데, 진짜로 서정우를 불러들일 줄이야. 초대손님 중에는 없었는데 어떻게 들어왔지?"

"너 부상이 심하다."

장석준의 눈빛이 조금 밝아졌다.

"살려줘. 경찰이면 내가 누구든 날 살려줘야 하잖아."

"여기는 바다 한복판이다. 네 부상은…."

레드 포션을 쓰면 목숨은 붙여놓을 수 있다. 하지만 레드 포션은 저쪽 세계에서도 목숨 대신에 사용되는 귀중품이다. 장석준은 그 약을 받을 자격이 없다.

게다가 포션으로 살려도 문제다. 장석준이 남수정처럼 빨간약의 비밀을 지켜줄 리 없다.

"넌 이미 늦었다. 배를 찔리고 파편에 관통까지 당했어. 살아있는 게 신기할 정도야."

"씨발. 폼 나게 살고 있었는데 이렇게 끝날 줄이야."

"고통은 좀 줄여주마."

서정우가 장석준의 몸에 저쪽 세계에서 만든 자백제를 꽂았다.

그 자백제에는 정신을 몽롱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는데, 그 부수 효과로 고통이 줄어든다.

장석준이 숨을 크게 내쉬었다.

"후우. 약빨 죽이네. 이런 걸 팔았어야 했는데."

"약 대신에 마약을 팔았지?"

아무리 자백제라고 해도 마음에 방어벽을 단단히 치고 있는 사람에게는 잘 안 통한다.

그런데 장석준은 이미 조직에게 배신당하고 죽어가는 중이다. 방어벽이 남아있을 리가 없다.

장석준이 안주머니에서 담배와 라이터를 꺼냈다. 그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물었다.

서정우가 불을 붙여주었다.

장석준이 연기를 들이마셨다가 내뿜은 후에 말했다.

"후우. 이런 꼴만 안 당했으면 약을 더 크게, 더 많이 팔 수 있었는데."

"어떻게?"

자백제의 약효가 장석준의 입을 가볍게 만들었다.

"이 배가 무슨 배인지 알아? 중국 쪽 공급책이 물 위에 약을 띄워놓으면, 그걸 건져오는 배야. 전세 화물선이라는 건 당연히 위장이지. 배를 놀리면 의심받으니까 연안에서 개인 의뢰 화물만 운송하는 척하려고 했다. 그러다 주말에는 선상파티를 하면서 약을 쓱 건져오는 거지."

"그 약이 담긴 용기는 레이더에 안 걸리나?"

"아래쪽은 물에 잠기고 위만 살짝 나오게 하면 돼. 대신에 나만 추적할 수 있는 약한 신호가 주기적으로 나와. 그렇게 바다에서 약을 건져서 가지고 돌아오면."

장석준이 다시 연기를 내뿜었다.

"선상파티를 위해 나간 배니까 외국 화물을 들여왔다고 생각할 리 없잖아. 항구 공무원 자리에 내 부하를 몇 놈 심어놓으면 걸릴 수가 없지."

"걸렸으니까 내가 여기 있지."

"크큭. 제대로 걸렸을 때의 대비도 다 해놨는데."

"어떻게?"

"바다 위에서 배를 없애야지. 모든 증거가 여기 있으니까, 바다에 가라앉으면 증거도 사라져."

서정우가 다시 물었다.

"어떻게?"

자백제를 맞은 장석준이 피 묻은 손으로 벽을 가리켰다.

"저기가 왜 터진 것 같아? 폭탄이 터져서잖아. 저걸 설치한 건 나야. 그런데 내가 폭탄을 하나만 설치했을까?"

갑자기 폭발음과 함께 배가 크게 흔들렸다.

서정우가 인상을 썼다.

"폭탄이 더 있구나."

"처음에는 기관실인데, 이번에는 좀 더 앞쪽이 터졌네? 아직은 배가 침몰 안 하지? 괜찮아. 폭탄은 몇 개 더 터질 테니까."

장석준이 왼손을 흔들었다.

"모든 시한폭탄이 이미 작동했거든."

서정우가 장석준의 손목시계를 빼앗았다. 붉은색 LED 불빛 두 개가 완전히 켜져 있었다. 나머지 세 개는 천천히 깜빡였다.

"이건…."

"하나는 여기. 기관실. 그럼 엔진이 멈추지. 두 번째는 좀 더 앞쪽. 나머지 폭탄들까지 다 터지면 배는 산산조각이 나서 침몰할 거야. 그럼 모든 증거는 바닷속으로 꼬르륵…."

"멈추는 방법은?"

자백제의 성능은 완벽하지 않아서 질문한 것과 다른 말이 튀어나올 때도 있다.

"씨발. 하필 서정우하고 엮이다니. 칼치파가 일을 망쳤을 때부터 느낌이 안 좋았는데…."

"뭐?"

서정우는 여기서 칼치파 이야기가 나올 줄은 몰랐다.

"칼치파 새끼들. 그걸 또 하청을 줘서 일을 다 망쳐."

칼치파가 사거리파를 시켜 사람들을 납치한 사건의 피해자는 모두 구출됐다. 그런데 의뢰한 놈이 누군지는 끝내 알아내지 못했다. 서정우가 아는 건 김수철이라는 해커가 연관되었다는 것뿐이다.

'그 사건을 청부한 곳이 이 마약 조직이구나.'

장석준의 입에서 담배가 툭 떨어졌다.

서정우는 그가 어떤 상태인지 안다.

'이놈. 곧 죽는다.'

이젠 레드 포션을 써도 못 살린다.

하나하나 다 물어볼 시간은 없다. 먼저 질문할 것을 정해야 한다.

"폭탄은 어디 있지?"

* * *

배의 앞쪽 대형 갑판은 파티에 어울리게 꾸며져 있었다. 화려한 장식품도 많았고 조명도 밝았다.

정작 거기 있는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이미 두 번이나 폭발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으아아!"

"우린 다 죽었어!"

이선화가 소리를 질렀다.

"선장은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구명보트 내려야지!"

남수정이 외쳤다.

"언니! 선원들이 안 보여요!"

"서준이 넌 뭐해! 선원부터 찾아!"

"보내면 안 돼요! 아저씨가 앞쪽 갑판에 있으라고 했단 말이에요!"

* * *

장석준은 폭탄에 대해서만 털어놓고 죽었다.

이미 폭탄 두 개가 터졌다. 엔진은 망가졌고, 후미도 부서졌다.

서정우는 세 번째 폭탄을 찾기 위해 이동했다.

늦었다. 시계의 불빛이 깜빡이는 속도가 너무 빨랐다.

서정우가 객실로 뛰어들었다. 그 직후에 세 번째 폭탄이 폭발했다.

화염이 복도를 훑고 지나갔다.

* * *

갑자기 배의 중간에서 폭발이 일어나며 불길이 위로 솟아올랐다. 앞쪽 갑판에 있던 사람 대부분이 그 충격으로 넘어졌다.

이선화는 넘어지지 않았다. 최근에 서정우에게 집중적으로 훈련받은 덕분에, 그녀는 이런 심한 흔들림 속에서도 균형을 잃지 않았다.

"정우 씨는 진짜 어디 있는 거야?"

남수정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아저씨 좀 전에 봤는데요. 악당을 조사한다고 몰래 잠입했어요. 변장까지 하고."

철가면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건 비밀로 하기로 약속했다.

"그래서 지금 어디 있어?"

"배 뒤쪽에서 악당을 조사한다고 했는데…."

이선화가 배의 뒤쪽을 보았다. 그쪽에서는 이미 세 번이나 폭발이 일어났다.

이선화가 불안해했다.

"아니겠지? 괜찮겠지?"

"아저씨잖아요. 총알도 아저씨를 피해가는데요."

"저건 총알이 아니라 폭탄 같은데…."

"그럼 제가 찾으러 갈게요!"

이선화가 남수정의 팔을 붙잡았다.

"가긴 어딜 가! 이럴 때 찾으러 가면 꼭 위험해져. 여기서 구명보트를 내리는 방법이나 찾아!"

* * *

서정우가 복도로 나왔다. 복도는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만만치 않네."

폭탄이 터진다고 해서 꼭 불이 붙는 건 아니다. 아주 특수한 상황에서는 일부러 폭탄을 터트려 화재를 진압할 수도 있다.

서정우가 전진했다. 배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한두 개만 더 터지면 침몰하겠…."

한쪽에서 작은 신음이 들렸다.

'수정이에게 손님들을 갑판으로 데리고 나가라고 했는데?'

서정우는 소리가 들린 곳으로 뛰어갔다. 가까웠다.

영화 제작사 이사 이수현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조금 전 세 번째 폭발이 그녀에게 상처를 입혔다.

"이런."

그는 급히 이수현의 부상을 확인했다.

'옆구리 상처. 내부 장기까지 다친 것 같진 않지만, 출혈이 너무 심해. 지혈하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어.'

이수현도 자기가 중상을 입었다는 걸 안다.

"사, 살려주세요."

서정우는 폭탄을 찾으러 가야 한다. 그런데 이수현의 상처는 당장 지혈하지 않으면 과다출혈로 생명이 위험해진다.

'어쩐다.'

그녀가 피 묻은 손으로 서정우의 옷을 잡았다.

"돈은 얼마든지 줄 테니까 제발 살려주세요. 우리 아빠 회장님이에요."

이 상황을 한 방에 해결할 방법은 있다. 레드 포션을 쓰면 된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이수현은 남수정이 아니다. 이 상처를 흉터조차 없이 회복시키면 레드 포션의 비밀도 알려진다.

그렇다고 눈앞에서 죽어가는 사람을 버려둘 수도 없다.

서정우가 짧게 경고했다.

"아플 겁니다."

박철우는 쌍둥이에게 전해달라며 단검 세 개와 상처 치료제를 맡겼다.

서정우는 처음에는 거절했다가 나중에 치료제만 몇 개 챙겨왔다. 쌍둥이가 중상을 입으면 레드 포션을 쓰지만, 작은 상처는 그 약으로 치료하기로 했다.

그 약 중 하나를 이수현의 상처에 부었다.

이수현은 그게 무슨 약인지 몰랐다. 갑자기 살을 찢는 것 같은 고통이 밀려왔다.

"꺄아악!"

서정우는 바로 옆에 있는 시트를 찢어 그녀의 허리에 둘둘 감았다.

"피는 금방 멎을 겁니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면 나중에 누가 구하러…."

그녀가 급히 외쳤다.

"날 버리고 가지 마세요!"

그녀의 얼굴에 간절함이 보였다. 그렇다고 서정우가 여기 남아있으면 이 배에 탄 사람은 다 죽는다.

"따라올 수 있으면 따라오든지요. 막지는 않을 테니까."

서정우는 그대로 전진했다. 그러면서 시계를 확인했다. 불빛이 깜빡이는 속도는 아직 여유가 있었다.

'다음 폭탄이 터질 때까지 남은 시간은 약 1분.'

네 번째 폭탄의 위치는 이미 들었다. 거기까지 가는 데 30초를 소모했다. 이제 폭탄이 터질 때까지 30초가 남았다.

서정우가 단검으로 벽을 찍었다. 그 단검은 킬러가 갖고 있던 것이다.

내장재가 잘려나갔다. 그 안쪽에 숨겨져 있던 폭탄이 모습을 드러냈다.

겨우 뒤따라온 이수현이 손으로 피가 배어 나오는 옆구리를 누르며 헐떡였다.

"처, 천천히 좀 가요."

서정우가 방금 사용한 상처 치료제는 저쪽 세계의 전쟁터에서 쓰는 것이다. 그런데 그건 치료보다는 지혈 효과에 더 중점을 둔 약이다.

치명상이 아닌 경우, 일단 그 약으로 지혈하고 다시 방아쇠를 당겨야 한다. 몬스터에게 근거리에서 공격당했다면, 빨리 총알 한 발이라도 더 쏴야 살아날 확률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약에는 지혈제와 함께 강력한 진통제가 같이 들어 있다. 극심한 고통을 잠시라도 잊어야 총을 더 쏠 수 있다.

서정우가 말했다.

"진짜 따라왔네요."

"참을 만해서요."

"진통제 성분 때문에 그런 건데, 그렇게 무리하면 나중에 더 아픕니다."

"일단 살아남는 게 중요…."

이수현이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그, 그거 뭐예요? 포, 폭탄이잖아요!"

184. 폭발 II

서정우가 물었다.

"폭탄 처음 봅니까?"

이수현은 절망했다.

"우린 이제 다 죽…."

서정우가 폭탄을 단검으로 잘라버렸다. 한 번에 그치지 않고 네 번을 그었다. 전자식 기폭장치만 남기고 화약이 잘려나갔다. 그런 후에 시한장치를 칼로 그어 두 토막으로 만들었다.

기폭장치는 별다른 반응 없이 부서졌다.

"이건 일단 됐고."

서정우가 다음 폭탄을 찾아서 걸어갔다. 아직 시간은 있었다.

이수현은 놀란 눈으로 그 모습을 보다가 얼른 서정우를 따라갔다.

그가 말했다.

"그렇게 무리하면 나중에 후회할 텐데."

"움직일 만해요."

"나라면 아무 객실이나 들어가서 가만히 누워있을 겁니다."

"시, 싫어요. 혼자 있는 건 너무 무서워요."

서정우는 다음 폭탄을 찾아 배의 앞쪽으로 이동했다.

이수현이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데요. 시한폭탄을 그냥 칼로 잘라도 돼요? 빨간선 파란선 고르는 건 안 해요?"

"화약만 떼어내면 나머지는 터져도 상관없습니다."

"아. 그렇…."

"그러다 실수하면 다 죽는 거고."

"네?"

다음 폭탄은 더 앞쪽에 있었다.

서정우는 성큼성큼 걸었다. 이수현은 필사적으로 따라다녔다.

"좀 천천히…."

"그냥 쉬라니까."

그는 다섯 번째 폭탄도 찾아냈다. 시간은 아직 여유가 있었다.

이수현이 급히 말했다.

"혹시 모르니까 잘 보고…."

서정우가 단검을 휙휙 휘둘러 폭탄을 여러 조각으로 잘라버렸다. 기폭장치는 터지지 않았다.

이수현은 벽 뒤에 숨어서 머리만 내밀고 그 모습을 보면서 물었다.

"더 찾으러 안 가요? 다, 다 끝난 거예요?"

서정우가 시계를 확인했다. 이제 깜빡이는 불빛이 없었다. 다섯 개의 표시등이 모두 켜져 있었다.

"그런 것 같군요."

이수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와. 진짜 대단하네요."

그녀가 숨어 있던 벽 뒤에서 나와 언제 겁먹었냐는 듯이 당당하게 말했다.

"아. 전 이수현이에요. 살려주면 돈 준다는 것도 진짜예요. 우리 아빠 돈 진짜 많아요. 나도 돈 많고요. 그쪽 이름이 뭐예요?"

서정우는 멈칫했다. 상대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런데도 구해준 값을 내겠다고 한다.

문득 다른 생각이 하나 들었다.

'내가 저쪽 세계의 약을 팔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네. 형사 신분으로는 못 팔지만, 정체가 뭔지 상관하지 않고 살 사람도 있네. 지금 이 여자처럼.'

서정우는 다른 신분이 하나 더 있다.

지금도 철가면으로 활동할 때는 평행차원을 거쳐 이동하고 3차원 공간 분석 스킬까지 쓰면서 현장을 빠져나온다.

어차피 저쪽 세계의 약을 파는 것과 총을 쏘는 것 모두 걸리면 큰일 난다.

'철가면을 쓰고 저쪽 세계의 약을 팔아볼까?'

판매 횟수가 많으면 위험도 증가한다. 최소한으로 줄여야 한다. 게다가 그가 팔려는 건 병 치료제가 아니고 상처 치료제다. 그 약이 필요하고 다른 조건까지 맞는 사람을 찾는 것도 쉽지 않다.

'그래도 이런 고객을 만나면 비싸게 팔 수 있겠는데?'

이수현이 물었다.

"무슨 생각을…."

서정우의 얼굴에는 아직 변장이 절반쯤 남아있다. 그가 그것을 마저 떼어냈다.

"앞으로 할 일을 좀 생각했습니다."

이수현이 그때서야 그를 알아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앗! 서, 서정우 형사?"

"성의는 고맙지만 공무원이라서 그 돈을 받으면 안 됩니다. 이 시계도 내 것이 아니라…."

서정우가 멈칫했다.

손에 들고 있는 시계의 붉은색 LED는 시각을 표시하는 자리에 두 칸 간격으로 하나씩 켜져 있었다. 모두 다섯 개가 붉은빛을 뿌리고 있었다.

'왜 다섯 개지? 열두 시 자리가 비어 있는데?'

여섯 번째는 불이 켜지지 않았다.

저쪽 세계의 TV는 잘 안 나올 때 손바닥으로 때리면 말을 듣곤 한다. 그가 시계를 탁탁 쳤다.

갑자기 여섯 번째 LED가 붉은빛을 점멸했다.

"젠장!"

'첫 번째 폭탄이 터질 때 상태가 나빠졌구나.'

이수현이 놀라서 물었다.

"왜, 왜 그래요?"

"폭탄이 하나 더 있습니다."

이수현은 깜짝 놀라서 좌우를 돌아보았다.

"네? 어, 어디에요?"

여섯 번째 폭탄의 위치는 듣지 못했다. 장석준은 거기까지 말하지 못하고 죽었다.

서정우가 궁리했다.

'어디지? 어디일까?'

폭탄은 일정한 간격으로 설치되어 있었다. 터지는 순서도 일정했다. 위치는 아래에서 위쪽으로 점점 올라갔다.

서정우가 마지막 하나의 폭탄에도 같은 기준을 적용해 위치를 계산했다.

'앞쪽 갑판!'

지금 그곳에는 사람들이 모여 있다.

서정우가 달렸다.

"젠장!"

* * *

서정우는 파티장으로 들어갔다. 조금 전에 해체한 다섯 번째 폭탄은 바로 아래층에 설치되어 있었다. 그게 터졌으면 이 파티장은 박살 날 뻔했다.

사람들은 모두 밖으로 나가 있었다.

서정우가 파티장을 뛰어나가 앞쪽 갑판에 도착했다. 갑판을 비추는 조명은 아직 살아있었다.

'어디지?'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는 폭탄을 찾을 수가 없다.

이선화가 서정우를 발견하고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정우 씨! 여기에요!"

서정우는 그녀가 이 배에 있는 줄 몰랐다.

'설상가상이군.'

폭탄을 찾아야 할 이유는 이미 많은데, 거기에 하나가 더 늘었다.

서정우가 시계를 확인했다. 깜빡임이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장석준이 이걸 작동시켰을 때, 배에 설치된 모든 시한폭탄의 시한장치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장석준은 일단 작동한 폭탄을 멈추는 방법을 말하지 않았다. 방법이 아예 없을 수도 있다.

시계에서 깜빡이는 불빛은 예정된 폭발 시각까지 남은 시간을 알려줄 뿐이다. 시계를 부숴도 폭발을 막을 순 없다.

다섯 번째 폭탄까지는 장석준이 위치를 자백했다. 여섯 번째 폭탄은 듣지 못했다.

'의심스러운 곳을 하나씩 뜯어보면 늦어. 한 번에 찾아내야 해.'

감지 스킬은 몬스터의 살기를 찾는 능력이다. 액티브 모드로 전환해도 한 방향만 조사할 수 있다.

사격 스킬도 지금은 의미가 없다. 평행차원을 넘어가는 텔레포트 스킬을 쓰면 서정우 혼자만 빠져나가게 된다.

그럴 생각은 없지만, 설사 혼자 빠져나간다 해도 저쪽 세계의 바다 한복판에 떨어진다.

희망이 있는 스킬은 하나뿐이다.

'3차원 공간 분석 스킬.'

스킬의 효과는 각성자가 직접 실험해서 찾아야 한다. 공간 분석 스킬은 최근에 각성한 것이다.

'내가 아직 확인하지 못한 부수 효과가 있다면!'

지금 기댈 건 그것밖에 없다.

서정우가 스킬을 썼다. 평소처럼 가볍게 쓴 게 아니다.

이선화가 보였다. 남수정도 활짝 웃고 있었다. 강서준은 또 사람들 앞에서 잘난 체를 했다.

그들 외에도 사람이 많았다.

서정우가 그 모든 사람을 살리고 싶은 마음을 간절하게 담아 3차원 공간 분석 스킬을 사용했다.

그를 보는 사람들의 좌표가 쭉 잡혔다. 이건 이미 아는 효과다.

'더 위험한 것. 더 악의에 가득 차서 만든 것. 살기를 가득 담고 만든 것.'

이 스킬을 한 부분에 집중하면 벽 너머 사람의 형체를 알아볼 수 있다.

그 정도로는 부족했다. 갑판 전체를 분석해야 하고, 사람이 아니라 폭탄을 찾아야 한다.

정신을 극도로 집중했다. 정보를 조금이라도 더 얻기 위해 눈으로도 사물을 살폈다.

스킬이 한계 이상으로 강하게 사용됐다. 몸에 부담이 걸리며 코에서 코피가 주르륵 흘렀다.

갑판 한복판 장식물 내부에서 뭔가가 잡혔다. 흐릿한 윤곽만 보였지만 그 정도면 충분했다.

서정우가 갑판 한복판으로 달려갔다.

이선화가 외쳤다.

"정우 씨. 코피가…."

서정우가 공중으로 뛰어올랐다가 아래로 떨어지며 단검으로 장식물을 콱 베었다. 단단한 나무로 만든 표면이 쩍 갈라졌다.

서정우가 나무를 뜯어냈다.

그 안에서 철판이 나왔다. 자물쇠도 보였다.

'이럴 줄 알았지. 그놈이 폭탄의 상태를 주기적으로 점검하려면, 열어볼 방법이 있어야 하니까.'

서정우가 단검으로 자물쇠를 찍었다. 자물쇠가 단번에 박살 났다.

그가 작은 철문을 벌컥 열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구경하던 사람들이 안에서 나타난 물체를 보고 후다닥 물러났다.

"포, 폭탄이다!"

누가 봐도 시한폭탄처럼 생긴 것이 그 안에 들어 있었다.

서정우가 폭탄을 제거하기 위해 단검을 들었다.

문제가 생겼다.

이번 폭탄은 지금까지와 달랐다. 구조가 굉장히 복잡했다. 폭탄의 크기도 더 컸다.

여러 개의 전선이 폭발물 여기저기에 박혀 있어서 화약만 제거하는 건 어려웠다.

이러면 칼로 잘랐을 때 안 터진다는 보장이 없다.

서정우가 시계가 점멸되는 속도로 남은 시간을 예측했다.

'15초?'

이 폭탄을 15초 안에 해체하는 건 불가능하다.

서정우가 폭탄을 고정한 고리 네 개를 칼로 베었다. 금속 고리가 불꽃을 튀면서 잘려나갔다.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으아! 조심!"

"그러다 터져요!"

서정우가 폭탄을 뜯어냈다. 작은 가방 크기였다.

그는 배의 앞쪽으로 달려가며 외쳤다.

"비켜! 공간 만들어! 반경 최소 2미터!"

앞쪽에 있던 사람들이 좌우로 쩍 갈라졌다.

서정우는 테이블보 하나를 잡아 폭탄을 감쌌다.

그는 테이블보의 끝을 쥐고 제자리에서 빠르게 회전했다. 아예 체중을 싣고 고속으로 돌았다.

폭탄이 테이블보에 쌓인 채로 서정우를 중심으로 커다란 원을 그리며 회전했다. 회전이 너무 빨라서 바닷바람이 갈라지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서정우가 갑자기 손을 놓았다. 테이블보 한쪽이 풀려나갔다.

고속으로 원을 그리며 회전하던 폭탄이 앞으로 튀어나갔다. 마치 대포알을 발사한 것 같았다.

폭탄은 이백 미터 이상 날아가다가, 바다에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폭발했다.

어두운 밤하늘에 거대한 섬광이 번뜩였다가 사라졌다.

곧바로 충격파가 바닷물을 타고 날아와 배를 때렸다. 사람들은 몸에 전해지는 충격 때문에 얼마나 강력한 폭탄이 터졌는지 확실히 깨달았다.

방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하지 못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저 커다란 폭탄이 이 배에서 터졌으면…."

"우린 다 죽었겠지."

폭발에 휘말려 높이 솟아올랐던 바닷물이 비처럼 쏟아졌다.

서정우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어떻게 해결했네."

남수정이 달려왔다.

"아저씨! 코피 나요!"

"괜찮아. 안 죽어."

이선화도 달려와서 그녀의 옷을 잡았다.

"코 막게 내가 옷을 찢어서 천을…."

"그건 좀 오버인데?"

"그, 그렇죠? 앗! 몸에 피는 왜 이리 많아요? 어디 다쳤어요?"

"이건 내 피가 아니라…."

서정우가 갑자기 갑판 반대쪽 파티장 출구를 가리켰다.

"거기! 그 상처에 바닷물이 들어가면 덧나니까 나오지 마요!"

이수현이 밖으로 나오려다가 순순히 뒤로 물러났다.

"알았어요."

이선화가 이수현의 피로 물든 옆구리를 본 후에 다시 서정우를 돌아보았다.

"정우 씨. 혹시 그 피…."

"저 아가씨가 좀 다쳐서."

"정우 씨가 쟤를 어떻게 알아요?"

"이선화 씨가 아는 사람입니까? 그럼 좀 잘해줄걸."

이선화가 얼른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잘해주지 마요. 저거 꼬리가 세 개쯤 붙은 여우니까, 잘해주면 간 빼먹으려고 들 거예요."

"어. 그건 좀 무섭군요."

저쪽 세계의 세 꼬리 여우는 굉장히 강력한 몬스터다.

바닷물로 만든 비는 순식간에 그쳤다.

이수현이 그때서야 서정우에게 다가왔다.

"역시 서정우 형사님. 대단하네요. 감동했어요."

이선화가 그녀를 견제했다.

"어머. 이 이사님. 가서 치료나 받으시죠?"

"보다시피 서 형사님이 치료해주셔서 난 괜찮은데요?"

"그러다 덧나요."

"덧나라고 비는 거 같네요?"

"어머. 눈치챘어요?"

"이선화 씨!"

"왜요!"

서정우가 끼어들었다.

"진통제의 효과가 떨어지면 그렇게 함부로 움직인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이수현이 겁을 덜컥 먹었다.

"대, 대가라니요?"

"진짜 많이 아프죠."

"아. 그래요? 난 또. 괜찮아요. 난 인내심이 강…. 아? 아? 악!"

그녀가 비명을 질렀다. 서정우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말했다.

"약효가 끝났네."

"이, 이렇게 아프단 말은 없었…. 아악!"

"아까 그 자리에 가만히 누워있었으면 좀 나았을 텐데, 그렇게 열심히 돌아다니니까 더 아픈 거지요. 그래서 말렸는데."

"아아아악!"

이수현을 아는 사람들이 다가와 그녀를 부축했다. 서둘러 들것을 만드는 사람도 있었다.

그녀가 서정우에게 외쳤다.

"진통제 더 줘요! 제발!"

"그거 하나만 비상약으로 가지고 다니던 거라서."

"다음부터는 두 개 가지고 다…. 꺄아아악!"

이수현의 지인들이 외쳤다.

"어디 구급상자 찾아봐요!"

"의무실에 가면 진통제가 있을 겁니다!"

"의무실은 어디 있지?"

"이 배 선원들은 다 어디 간 거야!"

서정우가 그녀의 비명을 피해 한쪽으로 이동했다.

이선화가 따라오며 물었다.

"정우 씨. 진통제가 진짜 하나밖에 없어요?"

정확히 말하면 이수현에게 사용한 건 진통제가 아니다. 급속 지혈제에 강력한 진통 효과가 추가로 있는 것이다.

"진통 효과가 있는 다른 약이 하나 더 있긴 한데, 그건 지금 쓰면 큰일 나요."

지금 이수현에게 자백제를 꽂으면 뒷감당이 안 된다.

이선화가 아쉬워했다.

"그렇구나."

"왜요? 사이 나쁜 것 같더니 도와주고 싶나 보네."

"아니요. 설마요. 내가 쟤 싫어하는 거 알고 약이 있으면서도 일부러 안 주는 줄 알고 좋아한 거죠. 그냥 약이 없어서 못 주는 거구나."

옆에서 듣고 있던 남수정은 깜짝 놀랐다.

"언니한테 이런 사악한 면이 있는 줄 몰랐어요."

"네가 쟤를 몰라서 그래. 쟤가 더해."

한쪽에서 이수현이 이선화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웃어? 너 지금 웃었어? 내가 누구 때문에 파티장을 떠났다가 다쳤…. 꺄아아아악! 아파!"

이선화가 말했다.

"봤지? 쟤는 저렇게 아픈데도 내 욕을 못 해서 안달이라니까."

서정우는 시계를 다시 확인했다. 이제 새로 점멸하는 건 없었다.

'살았네. 다들.'

185. 귀환

모든 사람이 살아남은 건 아니다.

이 배의 주인인 장석준이 킬러에게 죽었고, 킬러는 장석준에게 죽었다.

이선화가 서정우에게 물었다.

"그 시계는 장석준 씨가 차고 있던 건데, 왜 정우 씨가 가지고 있어요?"

서정우는 그녀가 죽은 사람과 잘 아는 사이일까 봐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는 사람입니까?"

"아니요. 오늘 처음 봤어요."

"그런데 이 시계는 어떻게?"

"아까 두 번이나 집적댈 때 시계가 눈에 뜨였거든요. 처음 보는 디자인이라서 기억에 남아요."

"이건…."

장석준이 죽었다는 말을 하면 찜찜할까 봐 다른 쪽으로 설명했다.

"중요한 증거물인데, 분석을 맡겨야 해서."

* * *

바다에서 폭탄이 터졌다. 그것도 수류탄처럼 작은 것이 아니라 거대한 물보라를 일으킬 정도로 큰 폭발이 일어났다. 그것보다 작은 폭탄도 세 개나 터졌다.

당장 해경과 해군에 비상이 걸렸다.

휴대폰은 여전히 터지지 않았지만, 손님 중에 조타실의 무전기를 다룰 줄 아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이 무전으로 신고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배를…. 아니, 선장은 어디 있는지 보이지도 않…. 이봐요! 지금 이 배를 몰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니까! 이대로 북한이나 중국으로 흘러가면 당신이 책임질 거야? 어?"

해군과 해경의 배가 전속력으로 달려왔다. 군함보다 먼저 헬기가 한 대 날아왔다. 헬기의 탐조등이 배 위를 비추었다.

사람들은 실내로 들어가지 않았다. 모두 갑판에 있었다. 부상자는 이수현 한 명뿐인데 그녀도 내부로 들어가는 걸 거부했다.

사람들은 사라진 선원들이 어디 있는지 모른다. 그들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라서, 서로 보고 도와줄 수 있는 갑판에 있기를 원했다.

헬기에서 밧줄을 타고 특수부대원이 몇 명 내려왔다. 모두 자동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군복을 입은 그들이 경계를 선 후에야 사람들은 마음을 조금 놓았다.

특수부대 팀장이 물었다.

"손님 중에 위치가 파악되지 않는 분 있습니까?"

손님 중 한 명이 손을 들었다.

"장 사장이 안 보입니다!"

"장 사장이 누구입니까?"

"장석준 사장. 이 배의 주인이고 오늘 자선파티의 주최자입니다."

"그럼 저희가 수색하겠습니다."

서정우가 나섰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장석준은 죽었습니다."

"그 말 지금 책임…. 어? 서정우?"

팀장이 침을 꼴깍 삼켰다. 이 갑판에는 인기 연예인도 많지만, 서정우는 다른 의미로 특수부대에서 유명한 사람이다.

"서정우 형사가 왜 여기에…."

"오늘 파티에 아는 사람이 좀 많이 와서, 따라왔습니다."

팀장이 정신을 차리고 질문했다.

"방금 장석준이라는 분이 죽었다고 하셨습니까?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입니까?"

"장석준은 킬러에게 당했습니다."

그들의 대화를 들은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장 사장이 킬러에게?"

"킬러에 폭탄에! 도대체 이 배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장석준이 보이지 않는다고 했던 사람이 급히 물었다.

"그, 그럼 그 킬러는 어디 있습니까! 저 안에서 다음 표적을 노리고 있습니까?"

특수부대원들이 즉시 총을 선실 쪽으로 겨누었다.

서정우가 말했다.

"킬러는 장석준이 폭탄을 터트려서 죽였습니다."

장석준이 안 보인다고 말한 손님은 마음을 놓았다.

"아. 폭탄을 터…. 예? 그럼 그 폭발들이 혹시? 하지만 폭탄은 한 개가 터진 게 아닌데요?"

"일단 터트리기 시작하면 킬러만 죽는 게 아니라 이 배가 침몰할 때까지 터집니다. 그중 몇 개는 터지는 걸 보셨을 거고, 몇 개는 제가 제거했습니다."

"마, 말도 안 됩니다. 장 사장이 왜…. 누명 씌우는 거 아닙니까?"

"살려줬더니 의심은."

"뭐, 뭐요?"

"그런데 성함이 어떻게 됩니까? 왜 장석준의 편을 드는지 궁금해서요."

"어, 저기. 그게."

따지고 들었던 손님이 뒤로 슬그머니 물러났다.

'수상한데? 이 사건을 맡을 담당자에게 저 사람도 조사해보라고 해야겠다.'

서정우가 사람들이 볼 수 있게 시계를 들었다.

"장석준이 차고 있던 시계입니다. 이 배에 설치된 자폭장치의 원격 제어장치이기도 하고요."

다른 손님이 그 시계를 알아보았다.

"확실히 그 시계는 장 사장이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수제품이라고 자랑하던 거군요. 그런데 그게 폭탄…."

"시한폭탄을 작동시키는 장치입니다. 국과수에서 조사하면 구조는 금방 파악할 수 있습니다."

"장 사장은 도대체 왜 이 배에 시한폭탄을 설치한 겁니까?"

"증거를 없애기 위한 자폭용입니다. 자세한 건 나중에 뉴스를 보시지요."

특수부대 팀장이 물었다.

"서 형사님. 그럼 선원들이 어디 있는지도 혹시 아십니까?"

서정우가 뒤쪽을 가리켰다.

"탈출용 구명보트가 하나 사라졌더군요. 배를 버리고 튀었겠지요. 장석준과 한패니까 경찰이 오기 전에 도망치려고 했을 겁니다."

팀장이 즉시 그 정보를 무전으로 보고했다.

갑자기 손님 중 한 명이 파티 진행을 도왔던 직원들을 가리키며 외쳤다.

"선원은 더 있잖아! 저기 저 사람들!"

통일된 유니폼을 입고 있는 사람들이 급히 손을 흔들었다.

"우린 아닙니다. 우린 선상파티를 위해 고용된 파티 전문 업체 사람들입니다!"

"전 주말에만 여기 파티에서 일하기로 한 알바예요!"

남수정은 그 말을 듣자마자 주먹으로 손바닥을 쳤다.

"이런 좋은 알바가 있는 줄 알았으면 나도 할걸!"

* * *

도망치던 선장과 선원들은 바다 위에서 체포됐다.

해경이 도착했다. 배는 해경함의 호위를 받으며 인천항으로 향했다.

상황이 안정되고 나자 사람들이 서정우에게 다가와 인사했다.

"정말 고맙습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그중에는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도 있었지만, 서정우가 거절했다.

개중에는 불평하는 사람도 있었다.

"아니. 무슨 연예인이 사진도 안 찍어줍니까?"

"연예인 아니고 경찰입니다."

"아. 그, 그렇지요. 하도 유명하셔서 제가 착각을…."

그런 사람들을 막기 위해 이선화와 남수정, 그리고 강서준이 서정우를 호위하듯 둘러쌌다. 그들은 아예 갑판 구석으로 이동했다.

이선화가 작은 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정우 씨. 여긴 진짜 어떻게 온 거예요?"

"누굴 좀 쫓는 중입니다. 그런데 이선화 씨는 오늘 중요한 스케줄 때문에 훈련 못 한다더니?"

"주, 중요하잖아요. 가방 홍보에 딱 좋은 행사란 말이에요."

남수정이 자랑했다.

"전 오늘 여기서 노래를 불렀어요."

"아까 말했잖아."

"관객들이 엄청 좋아했어요. 무대에서 노래하는 거 되게 재미있어요."

강서준이 끼어들었다.

"저도 오늘…."

"서준 씨는 요즘 노니까 시간이 남아서 왔겠죠."

"아니. 그게 아니라… 수정이 에스코트하러 왔는데요. 아까 사람들이 혼란에 빠졌을 때 저도 나서서 상황을 수습했고요. 제가 이런 경험이 처음이 아니라서. 흐흐."

"언제 또?"

"호텔 테러리스트 사건이요. 같이 싸웠잖아요."

"아. 맞다. 거기 있었죠."

"그리고 수정이가 아까 새 노래를 만들었는데, 그냥 부르고 잊어버리려던 걸 제가 녹음했죠. 이야아. 나 오늘 엄청 대단한 일 많이 했네."

서정우가 관심을 보였다.

"새 노래요?"

"들려드릴까요?"

강서준이 휴대폰에 녹음한 파일을 재생했다. 노래는 30초 만에 끝났다.

남수정이 눈을 반짝거리며 서정우에게 물었다.

"아저씨. 어때요?"

서정우가 그녀를 보며 생각했다.

'얘 진짜 재능충인가? 저쪽에서는 작곡을 안 했는데?'

"어떠냐니까요?"

"되게 좋네."

서정우는 듣는 귀가 좋다. 노래에서 문제가 되는 부분도 잘 찾아낸다. 그걸 어떻게 고쳐야 하는지 모를 뿐이다.

"조금 부족한 부분이 있지만, 그거야 여기에 살 더 붙여서 곡을 완성할 때 수정하면 되겠지."

그 작업은 저쪽 세계의 헌터 작곡가 박철우가 잘한다.

남수정이 활짝 웃었다.

"히히. 아저씨가 오케이 했으니까 저도 이제 노래가 세 개가 되는 거네요?"

갑자기 강서준이 끼어들었다.

"어? 잠깐. 수정아. 서 형사님이 오케이 하면 다 되는 거야?"

"네?"

"디멘션이 오케이 해야지, 왜 서 형사님이…."

강서준의 눈동자가 갑자기 크게 흔들렸다.

"어? 어? 설마, 에이, 어? 서 형사님하고 디멘션의 처음 등장 시기가 비슷하네? 거기다 처음 발표한 노래는 포캣츠가 받았는데 서 형사님은 소라 오빠고, 너하고도 친한데 너도 노래를 받고…."

갑자기 강서준이 서정우의 소매를 잡았다.

"디멘션 님?"

서정우가 한숨을 쉬었다.

"후우. 오해가 좀 있는데…."

"헉! 지, 진짜로?"

"쉿."

강서준이 즉시 손가락으로 입술을 가렸다.

"아! 당연히 비밀이시겠죠. 쉿."

"일단, 제가 곡을 만드는 게 아닙니다. 어디서 받아옵니다."

"전 그런 건 모르고요. 어쨌든 결정권은 서 형사님이 가지고 있으니까 수정이가 저렇게 말한 거잖아요."

"그렇기는 한데…."

"디멘선 님. 저 곡 하나만. 네?"

"서준 씨는 중증 음치라서 안 됩니다. 기계로 튜닝해도 된다면 모를까."

"전 라이브가 꿈인데요?"

"세계평화가 더 쉬울 겁니다."

"그러지 말고 진짜 하나만요. 네?"

이선화가 강서준에게 경고했다.

"야. 정우 씨가 디멘션이라는 거 소문내기만 해. 그럼 죽을 줄 알아."

"야. 너 나 못 믿어? 내가 그럴 사람이야?"

"믿겠냐? 너 자랑하는 거 너무 좋아하잖아!"

강서준이 주먹을 꼭 쥐고 고개를 끄덕였다.

"날 믿어. 최선을 다해서 입 다물게. 서 형사님. 그러니까 곡 하나만. 네?"

영화 제작사 이사 이수현이 그들 쪽으로 걸어왔다. 그녀가 서정우에게 고개를 숙였다.

"고맙…. 아야!"

서정우가 말했다.

"또 움직이네요? 그러면 고생한다니까."

"해경 분들이 가져온 진통제를 새로 맞으니까 움직일 수는 있어요. 아까 그 진통제처럼 강력한 것 같진 않지만."

이선화가 끼어들었다.

"이 이사님. 인사 다 했으면 가시죠? 그러다 상처 덧나면 고생하는데."

"이선화 씨한테 인사 하러 온 거 아닌데?"

"그러다 흉터 생기면 비키니도 못 입겠네."

"아. 그건 좀 곤란한데…."

서정우가 말했다.

"가서 누워있어요. 괜히 움직이면 치료 기간 길어집니다."

"네에. 나중에 뵈어요. 약속 지키러 갈게요."

이수현이 군소리 없이 돌아갔다.

이선화가 손으로 팔을 문지르며 강서준에게 물었다.

"서준아. 너 그동안 이 이사가 콧소리 내는 거 본 적 있어?"

강서준도 팔을 문질렀다.

"와. 나 잘못 들은 거 아녔냐? 나 지금 소름 돋았다.

"나도."

이선화가 화살을 서정우에게 돌렸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데 이제 저런 것까지!"

"아까 그냥 놔두면 과다출혈로 죽을 거 같아서."

"되게 멀쩡해 보이는데! 그리고 약속은 뭔데 지키러 온다고 그래요?"

"살려준 대가로 돈 준다던데요."

"어머. 돈 받아도 돼요?"

"설마요. 구해주고 돈 받으면 잘립니다."

* * *

배가 항구에 도착했다.

소식을 들은 기자들이 부두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 자선파티에는 기업체 대표들은 물론이고 연예인도 여러 명 참석했다. 그 사람들이 다 죽을뻔한 위기에서 극적으로 살아서 돌아왔다. 그것만 해도 뉴스가 된다.

게다가 한국은 폭탄 테러는커녕 총기 사건도 거의 일어나지 않는 곳이다.

기자들은 흥분했다.

"기삿거리가 넘쳐나겠구나."

"국장이 오늘은 아예 돌아오지 말라더라."

"지금 여기 와 있는 중계차만 몇 대냐."

사람들이 배에서 내렸다.

기자들이 몰려갔다. 처음에는 경찰이 그들의 앞을 막았지만, 연예인들이 밀고 나와서 기자들과 이야기하는 바람에 통제에 실패했다.

연예인들은 앞다투어 배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중계차 세 대가 그들을 찍었다.

"그래서 배 중간에서 불꽃이 펑하고 솟는데, 와. 정말 다 죽는 줄 알았습니다."

"중간에 좀 잠잠하다가, 갑자기 서정우 형사가 나타나는 겁니다."

"갑판에 숨겨져 있던 폭탄을 서정우 형사가 찾아서 던져버리지 않았으면 우린 다. 어휴."

기자가 급히 외쳤다.

"잠깐만요! 저 배에 서정우 형사가 있었다고요?"

기자들은 그 사실을 이제야 알았다.

연예인들이 설명했다.

"예. 폭탄을 몇 개나 해체했는데, 마지막 폭탄은 그럴 시간이 없어서 바다에 던져버렸습니다."

"엄청 크게 터졌습니다. 그 폭탄."

"그게 배에서 터졌으면 우린 다 죽었을 겁니다."

기자들이 흥분한 얼굴로 물었다.

"서정우 형사는 그래서 지금 어디 있습니까?"

연예인들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까는 같이 있었는데…."

"어? 진짜 어디 가셨지?"

기자들이 움직였다.

"찾읍시다!"

"이번엔 못 빠져나가!"

이선화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어머. 정우 씨를 찾으세요?"

움직이던 기자들이 일제히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녀가 도도하게 웃으며 말했다.

"한발 늦으셨네요."

"예?"

그녀가 오른손을 머리 위로 들어 수평으로 움직였다.

"정우 씨는 이미 헬기 타고 갔어요. 이 사건을 해결한 사람이라서 어떻게 된 일인지 제일 잘 아니까, 브리핑하러 바로 경찰서로 휭 하고 날아갔죠."

"아니, 또!"

이선화가 남수정을 끌어당기며 말했다.

"대신에 궁금한 건 우리한테 물어봐요. 정우 씨가 저하고 수정이에게 어떻게 된 일인지 아주 잘 설명해 줬으니까."

"진짜입니까?"

"물론이죠. 우리 수정이가 정우 씨의 지시를 받고 사람들에게 파티장 밖으로 나가라고 했거든요. 제가 같이 사람들을 데리고 나갔고요. 파티장 밑에도 폭탄이 있었다던데, 큰일 날 뻔했죠."

강서준이 얼른 두 사람 옆에 섰다.

"둘이 아니라 우리 셋이서 했죠. 저도 오늘 참 열심히 뛰었습니다. 하하하!"

기자들이 세 사람에게 달려들어 질문을 쏟아냈다.

이선화는 몬스터 가죽 가방을 손에 든 채로 기자들을 상대했다.

그 모습이 여러 언론사의 카메라에 담겼다.

186. 귀환 II

선상 자선파티를 위해 바다로 나갔던 배에서 폭탄이 터졌다. 한 번도 아니고 네 번이나 폭발했다. 당연히 해군과 해경에 비상이 걸리고 헬기가 날아다녔다.

거의 모든 언론이 그 뉴스를 속보로 다루었다. 방송국 세 곳은 배가 도착한 부두로 중계차를 보내 현장 상황을 실시간으로 보도했다.

카메라가 제일 많이 향한 건 톱스타 이선화 쪽이다.

그녀는 일부러 몬스터 가죽 가방을 들고 인터뷰를 했다. 자연스럽게 가방도 카메라에 계속 노출됐다.

쌍둥이가 이용하는 인터넷 커뮤니티 게시판에도 이선화의 사진과 인터뷰 영상이 올라왔다.

댓글이 줄줄이 달렸다.

- 역시 이선화. 저 상황에서도 빛이 날 정도로 예쁘네.

- 저 빛은 조명인데요?

- 내 환상을 깨지 마!

- 이선화가 들고 있는 저 가방 말인데요. 전에도 관심을 가지고 봐서 잘 아는데, 확실히 빛에 따라서 느낌이 변하네요.

- 저도 봤습니다. 그것도 굉장히 고급지게 변합니다.

- 되게 신기하네요.

- 저거 진짜 어디서 살 수 있을까요? 아무리 검색해도 찾을 수가 없어요.

이선화만 카메라에 많이 찍힌 건 아니다. 남수정의 사진과 인터뷰 영상도 많이 올라왔다.

- 남수정이 제일 먼저 위험하다고 경고했네요.

- 남수정은 서정우가 시켜서 한 거죠.

- 어쨌든 사람들에게 직접 경고한 건 남수정이잖아요.

그녀가 그 배에 타고 있던 이유를 궁금해하는 사람도 있었다.

남수정의 별명 중 하나가 알바녀다. 과거 그녀의 수많은 아르바이트 경력이 그런 별명을 만들었다. 팬들은 그녀가 돈이 별로 없다는 걸 안다.

- 그런데 남수정은 저 자선파티에 왜 간 거죠? 가난하다더니?

- 재능 기부요. 돈은 없지만 재능은 부자잖아요.

- 와. 인성도 부자네.

- 돈 빼고 다 가진 듯.

- 이선화는 나를 못 가졌습니다.

- 님. 헛소리 자제요.

배우 강서준에 관한 기사도 좀 올라왔다.

- 강서준은 요즘 논다더니 저런 파티에도 가네요.

- 우리 서준 오빠 안 놀거든요? 잠깐 쉬는 거거든요? 곧 영화 찍거든요? 저기도 좋은 일 하러 간 거거든요?

그 많은 사진 중에 서정우가 찍힌 것은 한 장도 없었다.

- 그런데 서정우는 왜 저기 간 겁니까?

- 인터뷰를 절대로 안 하니까 알 수가 있나.

- 잘 아는 연예인들이 있어서 갔다잖아요. 이선화와 남수정, 강서준이요. 그 인맥으로 갔겠죠.

- 저번 호텔 테러 사건 때처럼 이선화 경호원으로 따라갔을지도.

- 난 범인 잡으러 갔다는 데 한 표.

- 호오. 그거 그럴듯한데요?

나중에는 서정우가 왜 그 배에 탔는지를 고르는 투표 게시물까지 올라왔다.

* * *

국회의원 이홍국은 배 위에서부터 긴장과 불안, 분노에 휩싸였다.

'장 사장 그 새끼가 나까지 죽이려고 해? 잘 죽었다. 참 잘 죽었어. 살아서 내 이름을 말했으면 어쩔 뻔했어?'

그는 서정우가 다른 배로 옮겨가 헬기를 타고 먼저 떠나는 것을 봤다.

평소의 이홍국이라면 그가 탈 헬기도 가져오라고 소리를 질렀겠지만, 이번에는 그러지 못했다.

그러려면 먼저 해경의 배에 타야 하는데, 그러다 장석준과 접선한 것을 들킬까 봐 입 다물고 있었다.

그는 배에서 내린 후에도 빨리 빠져나갈 궁리만 했다. 그 좋아하는 방송국 카메라도 피하면서 사람들의 뒤쪽에서만 움직였다.

지금 이곳에는 이홍국 외에도 유명인사가 많고, 특히 연예인들이 적극적으로 인터뷰에 나섰기 때문에 숨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현장을 빠져나갈 때 문제가 생겼다. 경찰은 호구가 아니다. 승선 인원 중에 누군가 사라지는 모습을 놓칠 리가 없다.

젊은 경찰이 이홍국의 앞을 막아섰다.

"선생님. 아직 가시면 안 됩니다."

이홍국은 다짜고짜 화부터 냈다.

"뭐? 선생? 내가 누군지 몰라? 나 이홍국이야. 국회의원 이홍국. 어디서 선생이래? 의원님이라고 불러!"

경찰은 당황했다.

그는 이홍국을 모르지만, 국회의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을 무시하진 못했다.

그렇다고 그냥 보내줄 수도 없다.

배에 타고 있던 모든 사람은 일단 조사 대상이다. 신원을 조회하고 사건 발생 시간에 어디 있었는지도 확인해야 한다.

"의원님. 절차대로 조사를 받고 나서 가셔야 합니다. 순서를 앞으로 당겨드릴 테니 협조 부탁드립니다."

이홍국은 폭탄이 터지기 조금 전에 장석준과 접선했던 사람이다. 조사를 받다가 그 일을 들키면 뒷감당이 어렵다.

'아랫것들 시켜서 뭐라고 대답할지 시나리오부터 짜야지. 그러려면 시간이 필요해.'

"국회의원은 국민의 대표야! 국민의 대표한테 감히 뭐? 조사? 너 소속이 어디야! 너네 서장부터 과장 계장 팀장 싹 다 날려줘? 어?"

다른 쪽에 있던 중년 경찰이 얼른 달려왔다.

"아이고. 이게 누구십니까? 이홍국 의원님 아니십니까?"

이홍국이 그쪽을 힐끗 본 후에 헛기침을 했다.

"어흠. 이제야 말이 통하는 사람이 왔군. 내가 답답해서 진짜. 얼굴 확인했으니까 나 가도 되지?"

"물론이지요."

처음 막아선 경찰이 말했다.

"하지만…."

"야. 보내드려. 신분 확실하시잖아. 여쭤볼 게 있으면 우리가 나중에 찾아가야지."

이홍국이 얼른 맞장구를 쳤다.

"그래. 내가 협조 안 한다는 것도 아니잖아. 나중에 예의를 갖춰서 오라고. 나중에."

중년 경찰이 두 손으로 옆을 가리켰다.

"이쪽으로 가시지요. 의원님."

"가는 건 내가 알아서 갈 테니까 수고해. 그리고."

그는 처음에 그를 막아섰던 경찰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너. 조심해라."

이홍국이 간 후에 젊은 경찰이 말했다.

"그냥 보내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이홍국을 보내준 경찰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후우우. 법은 멀고 권력은 가까운데 어쩌겠냐."

"아니. 우린 규정대로 하는 건데…."

"국회의원 상대로 규정대로 하다가 좌천된 사람이 없을 것 같아? 난 예전에 봤다. 이홍국 저 인간, 더 버티면 우릴 진짜 무인도 파출소로 보내버리겠더라."

"만약 저 사람이 범인의 일당이면요?"

"에이. 설마 국회의원인데 그러겠냐? 그리고 무슨 문제라도 있으면 담당 팀에서 나중에 찾아가서 알아서 잘 조사하겠지."

이홍국이 그곳을 빠져나가자마자 승용차가 다가와 그의 앞에 섰다. 그의 비서가 운전하는 차였다.

그는 뒷자리에 앉은 후에 넥타이를 풀었다.

"후우. 젠장. 뭐 이따위 일이 다 있어?"

장석준은 돈을 주겠다는 약속을 했지만, 현금을 넘기진 않았다. 그래서 몸수색을 당한다 해도 나올 건 없다.

그래도 그는 조사를 받다가 장석준과 만난 것이 발각될까 봐 걱정했다. 현장을 빠져나와 차에 탔는데도 아직도 심장이 쿵쾅거렸다.

"요즘 내 주변에 왜 이렇게 안 좋은 일이 자꾸 생기지?"

그는 운전석에서 차를 모는 비서를 발로 툭툭 찼다.

"야. 부적 잘 쓰는 데 좀 알아봐. 경비처리 가능한 곳으로."

"예? 부적을 경비로…."

"장사 한두 번 하냐? 찾아보면 식당 영수증으로 처리해주는 데 있을 거 아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