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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 to 198

제188화

"극독 마가 놈들이 수작을 부렸다는 이야기를 듣고 우리 암흑 마군 쪽에서도 다들 분노했거든요. 그런데 우리 암흑 마군의 입장상 나설 수가 없어서 화만 삭이고 있었는데, 이런 기회를 주시다니."

암흑 마군의 주 임무는 사왕성을 견제하는 거다.

사왕성이 빈틈을 노릴 수 있기에 다른 쪽, 그러니까 골드 크로스와 극독 마가의 분쟁에는 어지간하면 나서지 않는 게 방침이었다.

하지만 크리스의 작전대로라면 괜찮았다.

방심한 적을 기습해 순식간에 일을 마무리 지을 테니, 전력을 오래 비워두지 않아도 되니까.

새닌도 한마디 하였다.

"이번에야말로 대공자께 제 실력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이지만, 억하심정으로 꼬인 마음은 아닌 모양.

도리어 크리스를 향한 긍정적인 경쟁심을 불태우는 모습이었다.

'실력도 한층 강해졌군. 심마를 벗어던져서 그런가.'

크리스와 결투할 당시 새닌은 열등감이라는 심마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래서 제대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6성 하(下)라는 경지에 맞지 않게 5성에 불과한 크리스에게 철저히 농락당했다.

지금은 크리스를 완전히 인정하며 심마를 극복한 덕인지 더욱 탄탄하게 강해진 힘이 느껴졌다.

'새닌과 다시 싸우면, 이전처럼 쉽게 승리하는 건 어려울지도.'

크리스는 입을 열었다.

"둘 모두 반갑다. 그러면 간략히 작전을 설명해 주겠다."

간단했다.

아무런 대비 없이 방심하고 있는 적을 기습으로 무너뜨리는 것.

"중요한 건 속도다. 극독 마가 본가에서 지원군을 보내기 전에 네 곳의 영지를 모조리 함락시킨다."

가능했다.

일단, 네 곳의 영지는 극독 마가 본가보다는 암흑 마가의 접경에서 가까운 지역이다.

무엇보다 극독 마가 입장에서도 암흑 마가와의 접경은 최전선보다는 후방에 가까워 강력한 전력이 배치되어 있지 않다.

'극독 마가의 주적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사왕성과 골드 크로스이지.'

참고로, 극독 마가도 암흑 마가처럼 사왕성과 골드 크로스를 북쪽과 남쪽으로 접하고 있었다.

차이점은 사왕성과는 지리적 여건상 충돌이 잦지 않고, 대신 골드 크로스 쪽과 싸우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골드 크로스의 호전적인 국사 강국들이 극독 마가와의 접경에 많이 붙어 있으니까.'

골드 크로스의 정신적인 지주가 법국이라면, 실제 힘을 지닌 이들은 군사력을 가진 강국들이었다.

이들은 법국의 말도 잘 따르지 않고 무시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주로 극독 마가 쪽에 붙어 있어서 종종 충돌을 일으켰다.

어쨌든, 그래서 암흑 마가와의 접경 쪽은 다른 방면에 비해 허술한 형편이었다.

'영주들의 경지도 두 곳은 5성급에 불과하다고 했지.'

물론, 5성은 결단코 낮은 경지가 아니었다.

당당히 고위 마인으로 분류되니까.

하지만 지금 이곳에 모여 있는 흑기군을 상대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문제는 나머지 절반인 두 곳인데. 모두 6성의 마스터 클래스가 영주들이야.'

그렇다고 하더라도 크게 걱정할 수준은 아니었다.

이쪽에도 6성 마스터 클래스가 두 명이나 있었으니까.

과연, 삼대장 레온이 가벼운 어투로 말했다.

"당장 출발하죠. 얼른 끝내고 술이나 한잔합시다. 아, 대공자님께서는 주량이 약해서 술 못 하셨나?"

걱정 따위는 보이지 않는 어투.

그런데 갑자기 뜻밖의 음성이 끼어들었다.

"자, 잠깐! 정말 이대로 우리 극독 마가를 공격한다고?"

마리사였다!

크리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너 아직 안 가고 있었냐?"

"다, 당연히 안 가고 있었지! 그나저나 너무 본가를 무시하는 것 아니야? 우리 쪽이 왜 암흑 마가 쪽 접경에 큰 전력을 배치해놓지 않았을까?"

마리사가 심각한 어조로 경고했다.

"각각의 성마다 독진(毒陣)이 설치되어 있어."

독으로 만든 진법을 뜻한다.

"물론, 너나 저기 오대장분들이라면 독진에 걸려도 벗어날 수 있겠지만, 일반 마인들은 아니야. 방심했다가는 삽시간에 몰살당할 거야."

이게 극독 마가가 무서운 이유였다.

아무리 전력이 열세여도 아차 하는 순간에 상대를 몰살시켜 버릴 수 있으니까.

특히 독은 상대의 경지가 낮을수록 치명적인 법이라 일반 마인의 비율이 높은 암흑 마가와는 상성이 좋지 않았다.

노르디언이 극독 마가와의 충돌을 꺼렸던 이유.

삼대장 레온이 고개를 갸웃했다.

"독진에 대해서는 대공자님께서 대책이 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오대장 측에서도 독진에 대해 걱정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크리스는 한마디로 그들의 염려를 불식시켰다.

-독진은 내가 알아서 하겠다.

다들 크리스티앙이 무슨 대책을 갖고 있는 건지 궁금하다는 시선을 보냈고, 크리스는 어깨만 으쓱했다.

"뭐, 별것 없다. 독진도 결국 진법의 한 종류일 뿐이니까."

"??"

"음… 설명하려니 복잡하군. 가서 보면 알 거다."

아리송한 이야기.

다들 고개를 갸웃했고, 크리스는 그저 씨익 웃으며 말에 올랐다.

"그러면 출정!!"

싸움의 시작이었다.

* * *

첫 시작은 발먼트 영지였다.

5성 중(中)의 마인이 영주로 있는 영지.

늦은 밤, 비명이 울려 퍼졌다.

"크아악!!"

"무, 무슨?! 암흑 마가 놈들이다!! 기습이다!! 모두 일어나라!! 커헉!"

경비를 서던 극독 마가의 마인들이 외쳤지만, 늦었다.

뒤늦게 다른 마인들이 싸움에 나섰지만, 소용없었다.

극독 마가의 장기는 당연히 독이다.

독은 상황만 맞게 사용하면 전세를 단번에 뒤집을 정도로 강력한 위력을 지니고 있다.

특히 상대를 함정에 빠뜨린 후 살포하는 독의 위력은 잔혹할 정도.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이렇게 기습을 당하는 상황에서는 취약한 면이 있었다.

더구나 암흑 마가 쪽은 독에 대한 대비까지 철저했다.

크리스 덕분이었다.

"도대체 이 약은 뭐지?"

"대공자님께서 주신 독의 저항력을 올리는 약인데, 효과가 무슨?"

흑기대의 마인들은 얼떨떨한 얼굴로 자신의 몸들을 바라보았다.

극독 마가와 싸우기 전에는 독에 저항력을 올리는 약을 먹고 싸움에 임한다.

하지만 당연히 효과는 제한적이다. 독이 퍼지는 걸 살짝 지연시켜 주는 정도에 불과했다.

그런데 크리스가 준 약은 그런 수준이 아니었다.

어지간한 하급 독은 모조리 막아주는 것 같았다.

'내가 특별히 제조한 약이니까. 으으, 이거 남몰래 만드느라 비자금 많이 깨졌지.'

아무리 크리스라도 이런 효과의 저항약을 만드는 게 쉽지는 않았다.

특히 돈이 문제였다.

약초는 효과가 좋을수록 비싼 법.

고가의 약초를 들입다 부어야만 했다.

솔직히 300명이나 되는 마인들에게 모두 보급하기에는 턱없이 비싼 약이었지만, 오늘만큼은 어쩔 수가 없었다.

어쨌든, 덕분에 전투는 일방적이었다.

성의 병력은 금세 제압되었다.

문제는 독진이었다.

"내성(內城)의 상태가?"

발먼트 영지의 성은 다른 성이 흔히 그렇듯 밖의 외성과 영주가 머무는 내성으로 나누어져 있다.

내성 주위로 시커먼 독의 안개가 펼쳐져 있었다.

"독진이 펼쳐진 거야. 저 안개 안으로 들어가면 진법에 휘말리게 돼."

마리사가 긴장된 얼굴로 말했다.

"가볍게 생각하면 절대 안 돼. 이곳 발먼트 영지의 독진은 본가의 이전 세대 원로이자 진법의 전문가인 그로벤 님이 펼치신 거야."

극독 마가는 단순히 독만 다루는 가문이 아니었다.

독을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여러 보조 수단도 함께 발달해 있었다.

마공, 흑마법, 암기술, 기관술 등등을 독술을 보조하기 방법으로 발전시켰는데, 진법도 그중 하나였다.

'환영 마가나 연합 쪽 주술 명가나 천공 마탑만큼은 아니지만, 꽤나 진법에 조예가 깊지.'

특히 마리사가 말한 그로벤이란 인물은 크리스도 들어본 적이 있는 이름이었다.

최근 100년 동안, 극독 마가가 배출한 가장 뛰어난 진법 장인.

'극독 마가의 어지간한 요충지의 독진은 모두 그로벤이 만들었다고 하니까.'

마리사가 무겁게 말을 이었다.

"암흑 마가에는 알려지지 않은 극비 사항이지만, 이곳 발먼트 영지의 독진은 특히 그로벤 님이 신경을 쓰셨다고 해. 이런 기습 사태가 일어날 경우를 대비해서."

삼대장 레온이 말했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부사령관님? 영주 놈은 저 독진 안에서 지원군이 올 때까지 버틸 예정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크리스가 뜻밖의 말을 하였다.

"뭘 고민하나? 파훼하면 되지."

어디 장난감이라도 부수겠다는 듯 가벼운 어조였다.

"…쉽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레온이 곤란한 음성으로 말했다.

"마리사 공녀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진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예상보다 훨씬 더 강력합니다. 설마, 저 정도 수준의 방어 진법이 설치되어 있을 거라고는."

"...."

"저와 새닌이 힘을 합쳐도 저 진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놀라운 이야기였다.

원래 6성 마스터 클래스 정도 되면 어지간한 진은 힘으로 파훼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이 자리에는 6성이 두 명이나 있는데, 어렵다니.

저 독진이 단순한 진을 넘어 '절진(絶陳)'의 영역에 들어간다는 뜻이었다.

마리사도 거들었다.

"섣불리 들어가면 큰 봉변을 당할 거야. 최악의 경우, 크리스 너라도 목숨을 잃을 수도 있어."

모두 심각한 얼굴로 크리스를 보았다.

그런데 크리스가 뜻밖의 대답을 하였다.

"다들, 내가 했던 이야기를 잊은 모양이군. 내가 출정 전에 뭐라고 했지? 진법은 내게 맡기면 된다고 하지 않았나?"

크리스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괜찮다. 방법이 있으니."

크리스는 저벅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크리스가 진법에 정면으로 도전할 생각이란 걸 깨달은 레온이 놀라 말했다.

"그러면 저랑 새닌이 동행하겠습니다!"

"아니, 필요 없어. 나 혼자 간다."

"대, 대공자님?"

모두 당황한 얼굴을 했다.

특히, 저 진법이 얼마나 대단한 위력을 가졌는지 가장 잘 알고 있는 마리사는 다급한 음성으로 외쳤다.

"크리스티앙! 무모한 짓 하지 마!!"

"무모?"

"그래, 아무리 너라도 그로벤 님이 혼신을 다해 만든 진을 혼자서 파훼하는 게 가능할 리가!! 차라리, 갈 거면 다 함께 가!!"

"걸리적거린다."

"!!"

"어차피 진의 수준이 별로 높아 보이지도 않고 말이야."

"…뭐?"

마리사는 멍한 얼굴로 반문했다.

이놈이 지금 무슨 미친 소리를 하는 건가?

'크리스티앙, 얘 설마 진법을 볼 줄 모르는 것 아니야?'

어쩌면 그럴지도 몰랐다!

진법에 조금이라도 조예가 있다면, 감히 저런 발언을 할 리가 없으니까.

아무리 천재라도 모든 걸 잘하지는 못할 테니.

"어쨌든 더 끌 시간 없으니, 들어간다. 너희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자, 잠깐…!!"

하지만 미처 말리기도 전에 크리스티앙의 몸이 진법 안으로 스르르 사라졌다.

"자살행위를!"

마리사가 뒤늦게 따라 들어가려고 할 때 말리는 손길이 있었다.

새닌이었다.

"그냥 가만히 있으십시오."

"뭐라고요? 당신네 대공자 아닌가요? 대공자가 죽도록 가만히 보고만 있겠다고요?"

제189화

마리사가 뾰족하게 외치자 새닌과 레온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대공자이니 가만히 있는 겁니다."

"…무슨?"

"우린 대공자가 얼마나 미친놈… 아니, 미친 분인지 잘 알고 있으니까요."

황당한 이야기.

레온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솔직히, 저희도 걱정이 되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무슨 정신으로 저런 진에 혼자 도전하겠다는 건지 돌았나 싶기도 하고요."

"…그런데 왜?"

"대공자가 미친 도전을 하는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어서요."

"...."

"그러니, 기다리고 있으십시오. 이번에도 분명 또 미친 짓을 저지르고 오실 테니."

마리사는 입을 쩍 벌리고 그런 둘을 바라보았다.

'다 이상해.'

심지어 뒤에서 따라오고 있는 멜린이란 측근은 처음부터 걱정이라고는 1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크리스티앙을 향한 절대적인 신뢰가 깃든 눈동자.

'…저 진은 단순히 재능 있는 천재라고 파훼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진법에 대한 완벽한 조예를 갖추고 있어야 가능해.'

마리사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만약 시간이 경과했는데도 소식이 없다면, 다른 이들이 말려도 도우러 들어가야겠다고 다짐했다.

* * *

물론, 마리사의 걱정은 전혀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진에 들어간 크리스는 주변을 살펴보았다.

감각을 혼동하게 하는 온갖 장치와 술식 때문에 시야가 온전치 않았다.

동서남북의 방위는 물론, 위아래, 심지어 본인 몸의 좌우까지 확신이 들지 않는 혼몽.

과연 '절진'의 수준에 걸맞은 감각 교란이었지만, 크리스는 냉소했다.

'고작 이딴 수준 낮은 진법쯤이야.'

놀라운 생각.

마리사가 목소리를 높였던 것처럼 이 진은 절대 무시할 수준이 아니었다.

지금 느껴지는 감각의 혼동은 시작일 뿐,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끝없는 미로 속에서 헤매다가 독에 중독되어 죽어가게 하는 진이었지만.

'이거, 천공 마탑의 갈로스 학파의 진법을 그대로 베낀 거잖아. 오리지널리티도 없는 놈이 무슨 진법의 대가라고? 극독 마가의 진법 수준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지만.'

그렇다.

극독 마가는 진법을 능숙하게 다루지만, 어디까지나 독을 효율적으로 투여하려는 방편일 뿐, 진법 자체의 조예가 깊은 것은 아니었다.

'진법의 최고 전문가는 환영 마가랑 연합의 주술 명가이지. 거기에 천공 마탑까지.'

그들 세 곳에 비하면, 극독 마가의 수준은 한참 떨어졌다.

'그리고 난 그 세 곳의 진법조차 무시하던 인물이었고.'

크리스가 진법가였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진법을 제대로 펼치려면 일단, 마기나 성휘가 높은 경지에 이르러야 하니까.

크리스는 정확히 말해, '진법 분석가'였다.

직접 진을 펼치진 못하더라도, 최고 수준의 진법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진법 지식은 이래저래 필요할 때가 많았으니까.'

한때, '빛의 발굴자'라 불리며 트레져 헌터로 이름을 떨칠 때도.

용사의 일행이 되어, '길잡이' 역할을 할 때도.

진법 지식은 필수였다.

특히 그는 멸망의 시대 때 온갖 대단한 진법을 직접 경험해 보았고, 그런 그의 진법 조예는 진법 최고의 전문가라 불리는 환영 마가, 주술 명가, 천공 마탑에 비해 결단코 못하지 않았다.

'물론, 환영 마가나 주술 명가, 천공 마탑의 최고 대가가 펼친 진법 정도 되면 나도 파훼하기 만만치 않겠지만, 이 정도는 귀엽지.'

물론, 그렇다고 극독 마가의 진을 마냥 무시해서는 안 된다.

비록 진법 자체의 조예는 다소 떨어지더라도, 극독 마가의 진짜 무기는 '독'이니까.

애초에 극독 마가의 진법은 다른 곳과 운용 목적이 달랐다.

빈틈을 만들어 상대를 독에 당하게 하는 것.

한 발짝이라도 잘못 내딛는 순간, 중독되어 끔찍한 죽음을 맞게 되지만.

'진법을 완벽히 분석하면, 독에 당할 일도 없지.'

크리스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일단, 기본적인 방위 먼저 잡는 게 우선이다.

감각의 혼동은 여전했지만, 괜찮았다.

흐트러진 감각을 새로운 기준으로 인식했고, 그걸 기반으로 역산해 방위를 잡았다.

'갈로스 학파의 진법은 활로가 없는 미궁을 끝없이 헤매게 하는 게 핵심.'

진법이면 마땅히 있어야 할 생문(生門)이 없는 게 특징이었다.

온갖 종류의 사문(死門)만 연속해서 나타날 뿐.

'해결책은 하나야. 핵을 찾아 부수는 것.'

물론 핵을 찾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진법의 생명이라고 할 수 있었으니.

이 핵을 얼마나 철저하게 숨기냐에 따라 진법의 수준이 결정될 정도.

'심지어 거짓 핵도 있어서, 잘못된 핵을 고를 경우, 역공을 당해 죽음을 맞을 수도 있어.'

이 진도 '절진'의 수준에 맞게 핵이 꼭꼭 숨어 있었으나.

'찾는 방법이 있어. 사문(死門)의 배열 순서와 진법의 변동 자취와 사방위를 조합하면, 대략적인 위치를 추정할 수 있어. 그 후 진을 이루는 술식을 해석해서 틈을 찾아 좌표를 확정하면 돼. 분명 미세한 틈이 있을 테니.'

이건, 크리스니까 가능한 특별한 방법은 아니었다.

진법의 전문가들이 진법을 해석할 때 쓰는 전통적인 방법.

다만, 차이가 있다면, 다른 전문가들은 이 과정을 여럿이 힘을 합쳐 긴 시간 동안 공들여 간신히 해낸다는 점이다.

하지만 크리스의 경우에는.

'저긴가?'

그딴 건 필요 없었다.

'빙고. 찾았다.'

크리스는 혀를 찼다.

'진법의 보안이 뭐가 이렇게 허술해? 고작 이런 수준의 진법이 뭐가 대단하다고. 환영 마가, 주술 명가, 천공 마탑이랑은 비교도 안 되잖아.'

이건 다소 극독 마가에 억울한 평가였다.

크리스의 평대로 최고의 진법들에 비하면 손색이 있지만, 이건 '독진'이었다.

앞서 말했듯, 진법을 분석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독진은 그럴 여유를 주지 않는다.

조금만 시간을 끌어도 독에 중독되어 가기 때문에 허점이 있어도 파고들 수 없는 게 독진의 무서운 점이었는데, 크리스가 지나치게 빨리 허점을 찾아내 독이 먹힐 틈이 없었던 거다.

아니, 허점 자체도 크리스니까 쉽게 발견할 수 있었던 거고.

'그나저나, 이 진법을 무너뜨리면, 곧바로 극독 마가 본가에서 알아차릴 텐데.'

크리스는 팔짱을 꼈다.

곧 좋은 방법이 떠올랐다.

'장난 좀 칠까?'

* * *

한편, 독진에 휩싸인 내성 안.

영주, 발먼트 자작은 낮게 가라앉은 얼굴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설마 이런 기습을 하다니. 암흑 마가 놈들.'

완전히 허가 찔렸다.

'하지만 괜찮아. 이 성에는 그로벤 님이 남긴 독진이 있으니. 며칠만 버티면 본가에서 지원군이 올 거야.'

도리어 비웃음이 나왔다.

'군사를 이끌고 온 게 크리스티앙 대공자라고 했나? 어리석은 놈. 감히 우리 극독 마가를 상대로 이딴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다니.'

심지어 놈은 더욱더 황당한 자살행위까지 했다.

"크리스티앙 대공자가 독진에 혼자 들어갔다고?"

"네, 남작님. 이제 3시간 정도 되었습니다."

"멍청한 놈. 무식하면 용감하다더니. 만용도 정도가 있지. 천재라 이름 높다더니 주제 파악도 못 하는 병신 놈이었어."

영주, 발먼트 자작은 입꼬리를 비틀었다.

"3시간이나 지났으면 시체로 변해 있겠군. 가서 수습해 오도록. 놈의 목을 잘라 성벽의 창대에 꽂아 놓으면 암흑 마가 놈들이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하군."

"네, 알겠습니다."

수하가 고개를 숙이고 방을 나가려는 순간이었다.

푸욱. 파앗!

갑작스레 피가 튀었다.

"?!"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킨 영주의 눈에 한 인물의 모습이 나타났다.

재수 없게 잘생긴 얼굴.

크리스티앙이었다.

"어, 어떻게 네놈이?!"

"어떻게긴. 독진을 뚫고 왔지."

"무슨 말도 안 되는?! 독진은 여전히 건재한데!!"

진법을 통과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생문을 여는 것.

아니면, 핵을 무너뜨리는 것.

하지만 이곳 발먼트 영지의 독진은 생문이 없어서 오로지 핵을 무너뜨려 진을 붕괴시켜야만 벗어날 수 있었다.

'독진은 여전히 멀쩡해. 그런데 어떻게 통과를?'

크리스는 태연히 말했다.

"아아, 핵이 무너지면 극독 마가의 본가에 바로 신호가 갈 테니, 조금 번거로운 방법을 썼지. 진법에 손을 대 사문(死門) 중 하나를 생문(生門)으로 바꿨어."

발먼트 자작은 황당하단 얼굴을 했다.

이놈이 지금 무슨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한 건가?

"이미 작동하는 진에 손을 댔다고? 더구나 사문을 생문으로? 진법의 근간을 바꾸지 않는 한 불가능한데, 헛소리를?!"

"그래서 번거로웠다고 했잖아. 천재인 나도 무려 3시간 가까이 걸렸는걸. 나름대로 어려웠어."

* * *

크리스는 정말 피곤하다는 듯 어깨를 주물렀다.

"그런데 한가하게 이야기나 할 때야?"

크리스가 서늘하게 말했다.

"나 너 죽이러 온 건데?"

"!!"

발먼트 자작은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사실, 그와 크리스의 마인으로서의 경지 자체는 엇비슷했다. 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기세에서 압도당한 거다.

'보, 보고를…!!'

발먼트 자작은 퍼뜩 하나의 생각이 떠올랐다.

이대로 그가 죽으면, 본가에서는 영지가 함락된 사실을 모르게 된다.

독진은 여전히 건재하니까.

대응이 늦어질 거다.

다급히 구석에 숨겨놓았던 긴급 통신구에 손을 뻗으려는 순간이었다.

"나름대로 충성심이 있네. 보고를 우선시하다니."

"!!"

발먼트 자작의 등줄기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크리스티앙의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려온 거다.

눈 깜짝할 사이에 거리를 좁힌 것.

"이익…!!"

화아아악!!

발먼트 자작의 손에서 독이 피어올랐다.

강기에 비견되는 독술의 경지, '진강 독'이었다.

발먼트 자작의 독은 부식 독.

거기에 '녹인다'는 의지가 실려 스치기만 해도 치명상을 입게 되지만.

"독의 수준이 나쁘진 않은데, 날 너무 얕본 것 같네. 살고 싶었으면, 날 보는 순간 곧바로 전력을 다했어야지."

낮은 음성과 함께.

크리스의 강기가 번뜩였다.

완벽한 그릇을 갖춘.

또한, 완벽한 파괴의 의지를 담은 절대의 강기.

"!!"

순간, 발먼트 자작은 시야가 암전되는 듯했다.

자신에게 날아드는 흑강기에 압도당하여, 순간적으로 시각이 마비 현상을 일으킨 거다.

눈뿐이 아니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 다른 감각도 얼어붙었다.

거인의 시선에 사로잡힌 듯한 아찔한 감각.

'무, 무슨 놈의… 강기가 이런 위력을?'

파앗!

흑강기는 진강 독을 말 그대로 짓밟아 버렸다.

이후에도 어떤 흔들림도 없이, 파괴의 궤적을 이어갔다.

서걱.

발먼트 자작의 몸에 기다란 선이 그어졌다.

"…마, 말도 안 되는…."

그게 마지막이었다.

발먼트 자작은 털썩 뒤로 쓰러졌다.

이후, 크리스는 발먼트 자작이 손을 뻗던 긴급 통신구를 손에 쥐었다.

'역시 긴급 통신구답게 보안이 강하군.'

단순히 술식적인 보안 외에도, 지문처럼 소유주의 마기를 인식시켜야만 작동하게 되어 있다.

'하지만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

크리스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발먼트 자작에게 다가갔다.

발먼트 자작은 완전히 숨이 끊긴 상태로 코어에 있던 마기가 허공에 산산이 흩어지고 있었다.

원래라면, 금방 허무로 돌아가야 할 마기이지만, 크리스는 암흑 마기의 지배 성질을 이용해 그 마기를 자신의 손에 모아 긴급 통신구에 반응시켰다.

보안 술식이 풀렸고, 크리스는 하나의 문구를 극독 마가 본가 쪽에 보냈다.

-적 격퇴함.

제190화

다음은 로드락 영지였다.

이쪽은 더 쉬웠다.

크리스가 통신구로 부린 수작이 효과가 있었는지, 여전히 어떤 방비도 하지 않고 있었다.

'독진의 수준도 형편없었으니까.'

접경지대인 발먼트 영지의 독진이 특별했을 뿐, 극독 마가의 모든 영지가 강력한 독진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었다.

"갈림길이군요. 어느 쪽으로 가겠습니까?"

삼대장 레온이 물었다.

"남은 영지는 세시아, 칼리아입니다."

크리스는 잠시 고민했다.

'두 곳 모두 중요한 곳이지.'

칼리아, 세시아 지방은 각각 다른 의미로 중요했다.

세시아 지방은 극독 마가가 사용하는 핵심 독초의 산지이자 독초 보관소가 있는 곳이었다.

칼리아 지방은 극독 마가의 영토를 가로지르는 슈트란 강의 댐을 끼고 있다.

'이 두 지방을 손에 넣으면, 극독 마가의 목젖에 칼을 드리우는 거나 마찬가지인 셈이야.'

세시아 지방의 독초 산지 및 보관소를 불태워 버리면?

칼리아 지방의 슈트란 강의 댐을 무너뜨리면?

극독 마가는 어마어마한 타격을 입게 된다.

그러니 이 두 지방을 손에 넣으면, 극독 마가는 인질이 잡힌 것처럼 어떤 경거망동도 못 하게 되고, 이번 분쟁은 그의 승리로 끝나게 될 거다.

'두 지방 모두 만만하지 않다는 게 고민인데.'

중요한 지방답게 최전선이 아닌 후방임에도 강력한 마인이 자리하고 있어 두 곳 모두 6성의 마스터 클래스의 마인이 영주로 있었다.

'두 지방을 모두 장악해야 극독 마가의 전의를 확실히 꺾을 수 있을 거야.'

문제는 역시 시간이었다.

'슬슬 극독 마가 쪽에서도 사태를 눈치챘을 테니, 두 곳을 모두 공략하기에는 시간이 빠듯할 수도 있어.'

크리스는 결론을 내렸다.

"레온 삼대장, 흑기군의 절반을 이끌고 칼리아 지방으로 향하도록."

"부사령관님께서는?"

"난 새닌 남작과 나머지 흑기군을 이끌고 세시아 지방을 공략하겠다."

양동작전이었다.

'칼리아 지방의 영주는 6성 하(下). 6성 중(中)인 레온이면 충분하겠지.'

반면, 크리스가 향할 세시아 지방의 영주는 6성 중의 강자였다.

레온이 염려되는지 말했다.

"세시아 지방을 제가 가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부사령관님과 새닌만으로는 상대하기 힘들 수도 있습니다."

상중하의 격차는 위로 올라갈수록 커져 6성 하와 6성 중은 커다란 차이가 있다.

특히 크리스는 6성도 아닌, 5성에 불과하지 않은가?

객관적으로 따지면 필패의 전력이었지만.

"괜찮아. 이길 수 있어."

"하지만 부사령관님?"

레온도 이번만큼은 염려를 떨치지 못했다.

"다시 생각해 주십시오. 세시아 백작은 악랄한 의념 독으로 우리 암흑 마가 쪽에도 유명한 강자입니다."

"그래도, 악마보다는 못하겠지."

"!!"

크리스는 씨익 웃었다.

"벌써 잊은 건가? 내가 어떤 존재인지."

신비 마가의 괴물 파테라를 격퇴한 일을 말한다.

당시 크리스가 아니었다면, 슈펜 후작과 오대장들은 어떤 희생을 치러야 했을지 몰랐다.

"하지만 그래도…."

레온은 여전히 염려를 떨치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그만큼 6성 중의 마인은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었으니까.

'솔직히 지금 내 힘으로는 6성 중의 마인을 상대하기 어려운 게 맞기는 하지.'

하지만 괜찮았다.

생각해둔 바가 있으니까.

"새닌, 너는 어떤가? 두려운가?"

새닌은 눈썹을 꿈틀했다.

열등감은 떨쳤지만, 그렇다고 크리스를 향한 경쟁심까지 버린 건 아니었다.

"대공자님과 함께라면 어떻게든 되겠지요. 단, 더 큰 공을 세우는 건 저입니다."

"멜린, 너는?"

"후후, 제게 물어볼 필요가 있나요? 전 그저 대공자님의 검이 되어 적을 벨 뿐입니다."

다들 그런 반응이자, 결국 레온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알겠습니다. 부사령관님께서 생각한 바가 있으시겠지요. 대신, 반드시 승리하셔야 합니다."

얼렁뚱땅 결정하자, 멍하니 뒤에서 이야기를 듣던 마리사가 다급히 외쳤다.

"자, 잠깐! 미쳤어? 정말 이대로 간다고?"

"무슨 문제라도?"

"죽을 거야! 세시아 백작이 얼마나 끔찍한 인물인데!"

"방법이 있어."

"6성 마스터 클래스와 싸우는데, 방법은 무슨 얼어 죽을 놈의 방법!"

타당한 이야기였다.

작전을 짜도 어느 정도 비슷한 수준에서나 먹히는 거니까.

힘의 차이가 이 정도로 현격하면, 어떤 대단한 방법을 준비해도 무의미했다.

그런데 크리스는 황당한 대답을 하였다.

"나도 충분히 강해."

"…뭐?"

"나도 세시아 백작 못지않게 강하다고. 그러니 걱정은 필요 없어."

5성 주제에, 6성 중을 상대할 수 있다니.

누가 들어도 말도 안 되는 헛소리에 마리사는 말문이 막힌 얼굴을 했고, 크리스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너 왜 계속 따라다니면서 잔소리야? 누가 보면 아직도 우리가 약혼 관계인지 알겠다."

마리사의 얼굴이 화르르 붉어졌다.

"이, 이미 끝난 약혼 관계 따위를 누가 신경 쓴다고! 저, 전혀 신경 안 쓰거든?"

"그래, 알고 있어. 나도 그래."

"...."

"그러니 괜히 신경 쓸 필요 없다고. 넌 그냥 극독 마가 본가로 돌아가."

마리사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이 나쁜 놈. 말을 해도 꼭 이렇게 싸가지 없게 하지. 난 왜 저딴 놈을 좋아했던 건지. 물론, 지나간 과거 일이고, 지금은 전혀 전혀 절대로 좋아하지 않고 있지만.'

마리사는 고개를 강하게 저었다.

"됐어. 나도 따라갈 거야."

"흐음?"

"우린 친구잖아! 네가 무모한 바보짓을 하는데, 여차해서 위험해지면 나라도 도와주어야지!"

"…별로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은데?"

"시끄러워!"

물론, 그녀도 자신의 힘으로는 큰 도움이 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

'그래도 최악의 경우, 내 신분을 이용해 크리스티앙의 목숨이라도 살려달라고 어떻게든 협상해볼 수 있을 거야.'

크리스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흑기군을 향해 외쳤다.

"출발!!"

"우리도 출발한다!"

그렇게 레온은 칼리아 지방으로.

크리스와 새닌은 세시아 지방으로 향했다.

그런데 세시아 지방에 도착한 직후였다.

크리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이 펼쳐져 있었다.

"쥐새끼들이 이곳까지 기어오다니. 발먼트, 로드락이 함락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정말이었구려."

"뭐, 상관있겠습니까? 지금에라도 잡아 죽이면 그만인 것을."

성벽 위에 강렬한 기세를 내뿜는 두 명의 독인이 서 있었다.

한 명은 세시아 백작.

이곳 영지의 영주였다.

6성 중의 강자.

문제는 다른 한 명이었다.

칼리아 백작.

삼대장 레온이 향한 곳의 영주.

6성 마스터 클래스 두 명이 한자리에 모여 있었던 거다.

* * *

'어째서 칼리아 백작까지 이곳 세시아 영지에?'

크리스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간단했다.

'각개격파 당하지 않게 서로 힘을 합치기로 한 거야.'

지금 이 싸움은 시간의 싸움이었다.

크리스는 극독 마가의 지원군이 오기 전에 영지들을 함락해야 하는 반면, 적들은 버티기만 하면 된다.

'상대적으로 중요도가 떨어지는 칼리아 성을 버리고 함께 세시아 성을 지키기로 한 거야.'

최악의 상황이었다.

지금 크리스 일행의 전력으로는 6성 중인 세시아 백작 한 명만으로도 벅찼는데, 다른 6성의 마인인 칼리아 백작까지 함께 있다니.

"대공자님, 일단 몸을 피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지금 전력으로는 승산이 없습니다."

새닌이 딱딱하게 말했지만, 성벽 위의 둘은 비웃음을 지었다.

"겁을 먹은 건가?"

"설마 몸성히 도망갈 수 있을 거라는 헛된 꿈을 꾸는 건 아니겠지."

파앗!

세시아 백작과 칼리아 백작이 성벽 위에서 아래로 뛰어내렸다.

둘에게서 뻗어 나온 음습한 독기가 주변을 뒤덮었다.

"너희는 단 한 명도 이곳을 벗어나지 못할 거다. 모두 끔찍한 고통 속에서 죽음을 맞게 해주마."

"특히 크리스티앙 대공자, 당신은 팔다리를 독물에 녹여서 몸통만 살려 인질로 삼아주지."

두 명의 마스터 클래스의 독인이 낮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크리스 일행을 바라보았다.

"자, 잠깐!! 멈춰요!"

마리사가 다급히 앞으로 나섰다.

"흐음, 마리사 공녀? 당신도 있었군."

마리사는 이를 악물었다.

"제가 이번 사태의 죄를 인정할 테니, 크리스티앙은 놔주세요."

"흐음?"

마리사는 결연한 얼굴로 말했다.

"암흑 마가와의 관계가 더 악화되는 건 숙부, 고라스 후작의 입장에도 안 좋지 않나요? 그러니 제 목으로 만족해 주세요."

* * *

어차피.

이번 작전이 실패로 끝나면, 마리사도 누명을 벗지 못한다.

루이나가 마련한 증거는 거짓 조작된 증거일 뿐, 진짜 제대로 된 증거는 성을 함락한 후 얻을 생각이었으니까.

그러니 이대로라면 마리사는 죽음을 피할 수 없으니 크리스티앙이라도 살리려는 거다.

'우리는 친구니까. 어차피 죽을 목숨, 마인답게 친구를 위해 바치는 것도 나쁘지 않아.'

그런 마음으로 마리사는 빼액 외쳤다.

"뭐 하고 있어? 내가 어떻게든 막아볼 테니, 크리스티앙 너는 도망가! 당신들은 뭐해요?! 당신네 가문 바보 대공자 데리고 도망가지 않고!"

새닌과 멜린은 마리사의 외침에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공자님, 어서 몸을 피하십시오. 이 멜린, 목숨을 바쳐 적을 막아 보겠습니다. 후후, 지금껏 더 열정적으로 대공자님과 결투하지 못했던 건 아쉽군요."

"…저도 남아서 막겠습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당신이 저보다 암흑 마가에 필요한 존재인 건 맞으니까요. 이렇게 되었으니 말하는 건데, 당신 진짜 재수 없습니다."

멜린, 새닌만이 아니었다.

흑기군들 또한 엄숙한 기세를 내뿜었다.

어떻게든 크리스라도 살리려는 각오.

결연하기 그지없는 장면에, 당사자인 크리스는,

"…다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 내가 도망가긴 왜 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위기일발의 상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크리스의 태도에 다들 목소리를 높였다.

"허세 부리지 말고 도망가!"

"맞습니다, 대공자님! 아무리 대공자님이라도 무리입니다."

"마지막까지 재수 없는 모습 보이지 말고, 얼른 꺼지기나 하십시오."

"...."

그런 반응에 크리스는 헛웃음을 흘렸다.

"왜 무조건 진다고 생각하는 거지?"

"그야 당연히…."

"아니, 질문을 바꾸지. 천재인 내가 설마 이런 상황을 조금도 예측하지 못했을 거로 생각하나?"

그래.

양동작전을 생각할 때, 혹시나 이런 최악의 상황을 맞닥뜨릴 수도 있다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크리스는 양동작전을 결정했다.

왜?

간단했다. 이런 상황이 되어도, 이길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말하지 않았나? 난 강하다고. 세시아인지 뭔지 하는 놈도 충분히 이길 수 있을 정도로."

"!!"

모두 눈을 크게 떴다.

아무리 크리스티앙이라도 말도 안 된다는 반응.

한편, 극독 마가의 둘은 크리스티앙의 말을 듣고 커다랗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암흑 마가의 새로운 대공자가 대단하다고 하더니, 확실히 그렇구려. 허풍 하나만큼은 우리 마도 제국 제일일 게 분명하오."

제191화

세시아 백작이었다.

그가 눈동자를 잔인하게 빛내며 말했다.

"어차피 이 근방은 내 독의 영향권에 들어왔으니, 도망가기에는 늦었소. 말했던 대로, 당신의 팔다리를 독에 녹여버린 후 몸통만 살려서 인질로 삼아주겠소."

스스슥.

크리스 일행의 발밑에 마치 그림자와 같은 어둠이 스며들었다.

세시아 백작의 독 기운이었다.

정확히는 '의념 독'.

세시아 백작이 손짓하는 순간, 발밑의 독은 뱀이 되어 크리스 일행을 덮치리라.

이미 늦었음을 깨달은 일행 모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을 때였다.

"멜린, 네게 시킬 일이 있어. 내가 세시아 백작을 쳐서 틈을 만들 테니, 흑기군을 이끌어 뒤로 물러나줘."

"그럴 수는…?"

"도망가라는 게 아니야. 네가 해줄 일이 있어."

크리스는 메시지 마법을 통해 속으로 모종의 명령을 내렸고, 멜린의 얼굴이 오묘해졌다.

"그 명령은…? 정말 승리하실 생각이군요."

"그거야 당연한 것 아니야? 난 처음부터 진다는 생각 따위 한 적 없는데?"

멜린이 헛웃음을 흘렸다.

도저히 불가능한 상황이건만, 크리스티앙의 자신만만한 모습을 보니 또 이해할 수 없는 신뢰가 들었던 거다.

"알겠습니다. 대신, 전 아직 대공자님과 충분히 겨루어보지 못했으니, 반드시 무사하셔야 합니다."

다음엔 새닌이었다.

"새닌, 넌 칼리아 백작을 맡아. 같은 6성 하(下)이니, 할 수 있지?"

크리스티앙은 삐딱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너한텐 벅찰 수도 있으니, 이기지 못해도 상관없어. 시간만 끌어. 버티고 있으면, 내가 세시아 백작을 쓰러뜨리고 칼리아 백작까지 처리할 테니."

황당하다 못해 어이가 없어지는, 제정신이 아닌 듯한 허풍 같은 이야기.

하지만 크리스티앙의 눈동자를 본 새닌은 침음을 흘렸다.

진중하게 가라앉은 눈빛.

진심이었다.

"…대공자님의 손까지 빌릴 일은 없습니다. 칼리아 백작은 제가 책임지고 처리하겠습니다."

마지막은 마리사.

"…넌 도움 될 것 없는데."

"뭐, 뭐?!"

"농담이야. 멜린을 따라가서 도와줘. 독을 이용한 함정이 있을 수도 있으니, 네가 도움이 될 거야."

마리사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여전히 염려를 떨치지 못하는 눈빛.

크리스는 피식하였다.

"그리고 아까 날 위해 나서준 거 고마웠다."

"그, 그건 친구로서!!"

"알아, 알아. 오해 절대 안 해."

"...."

이야기는 여기까지.

크리스는 앞으로 나섰다.

새닌이 옆에 따라갔다.

칼리아 백작과 세시아 백작도 앞으로 나서며 자연스레 2 대 2의 구도가 만들어졌다.

"암흑 마가의 대공자가 이렇게 멍청하다니. 주제도 파악 못 하는 얼간이일 줄은 몰랐소."

세시아 백작이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특별히 고깝게 무시하는 투는 아니었다.

무시도 어느 정도 급이 비슷해야 하는 법이니까.

아예 격이 다른 아래의 존재를 보는 눈빛이었다.

"차라리 수하들을 제물로 바친 후 도망갔으면 티끌만큼이라도 희망이 있었을 텐데."

"시끄럽네. 그나저나 너, 입 냄새나는 건 알아?"

"…뭐라고?"

"말을 할 때마다 썩은 악취가 여기까지 진동하는데, 이건 독 냄새도 아니고 뭐야? 똥 냄새? 혹시 너 똥 좋아하니?"

크리스는 이죽거렸다.

"하긴, 고라스 후작을 졸졸 따라다니며 똥 주워 먹는 똥개이니, 입에서 똥 냄새 나는 것도 당연하겠지."

"네놈…!! 죽여주마!!"

화아아악!!

세시아 백작의 몸에서 독이 피어올랐다.

그와 동시에 칼리아 백작도 함께 독을 펼쳤다.

전투의 시작이었다.

* * *

새닌과 칼리아 백작은 서로 같은 6성 하(下)답게 호각의 전투를 펼쳤다.

칼리아 백작의 장기는 '집적 독'.

광범위한 학살 효과보다는 독의 위력을 한 점에 집중하여 강력한 살상 효과를 보이는 식이었다.

반면, 새닌은 환검술사.

환술과 검술을 시의적절하게 사용하며 독에 대응했다.

단기간에 승부가 나지 않을 모양새.

한편, 크리스티앙과 세시아 백작 쪽은 양상이 조금 달랐다.

세시아 백작의 장기는 '광범위 독'이었다.

광범위 독은 다수의 약자를 학살하는 데 특화되어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소수의 강자를 상대로 약한 면모를 보이는 건 아니었다.

일점(一點)에 독의 위력이 집중되지는 않지만, 마치 맹수를 덫에 몰이하듯 옴짝달싹 못 하는 독의 덫에 빠뜨려 무너뜨린다.

하지만 이런 덫은 크리스티앙과 상성이 좋지 못하다는 게 문제였다.

"이놈…!!"

사방위에서 독의 안개가 휘몰아친다.

하지만 그건 속임수일 뿐, 진짜는 그림자에서 튀어나오는 독이었다.

다른 이였다면, 꼼짝 못 하고 허를 찔렸을 한 수였지만, 크리스티앙은 유유자적 독의 마수를 피했다.

'내가 수 싸움에서 밀릴 리가 없으니까.'

그건 상대가 6성 마스터 클래스라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나도 피하는 게 고작이지만.'

천재적인 두뇌로 요리조리 위기를 벗어나고는 있지만, 크리스가 유리하다는 건 절대 아니었다.

앞서 모두가 누누이 말했듯, 지금 크리스와 6성 중인 세시아 백작 사이에는 어마어마한 격차가 있으니까.

간신히 위기를 모면하고는 있지만, 이대로라면 결국 한계에 봉착하게 될 거다.

'하지만 괜찮아. 이 싸움은 내가 이겨.'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자신감.

'일단, 세시아 백작을 내 의도대로 흔들어야 해.'

크리스는 계속 입을 털었다.

"6성 중이라더니 별것 없군. 혹시 6성인 건 거짓말이고, 영주 자리는 고라스 후작의 똥을 주워 먹으며 얻은 것 아니야?"

"이놈!!"

"똥 냄새 나니 입 다물라니까?"

번뜩!

찰나, 빈틈을 노린 흑강기가 날아들었다.

정확히 세시아 백작의 입을 향해.

더러우니 닥치고 입 다물라는 듯.

물론, 흑강기는 세시아 백작의 방어에 막혔다.

어떤 타격도 주지 못했지만, 세시아 백작은 잔뜩 분노한 얼굴이었다.

"이놈…."

크리스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연달아 흑강기를 날렸다.

똑같이 세시아 백작의 입을 향해.

마치 놀리기라도 하듯.

세시아 백작의 얼굴이 터질 듯 달아올랐다.

그런데 어느 순간이었다.

돌연 세시아 백작이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멍청한 놈. 이 몸을 상대로 감히 빈틈을 보이다니."

연달아 흑강기를 날리느라 희미한 빈틈이 노출된 거다.

"쥐새끼처럼 도망 다니는 것도 마지막이다. 죽여주마."

파아아아앗!!!

세시아 백작으로부터 어둠이 뻗어 나와 크리스티앙 주변을 어둠으로 물들였다.

독기를 머금은 마기의 그물이었다.

그물은 점점 더 촘촘해지더니, 크리스티앙을 완전히 에워쌌다.

"대공자!!"

옆의 새닌이 놀라 외쳤다.

새닌은 저게 어떤 수법인지 잘 알고 있었다.

'세시아 백작의 의념 독인 '함거(檻車)의 벽'!'

이름처럼, 독으로 결계를 만들어 상대와 시전자를 외부와 격리하는 의념 독이었다.

갇힌 순간 절대 벗어나지 못하고, 사방에서 휘몰아치는 독에 철저히 농락당하다가 핏물이 되어 죽음을 맞게 되는 끔찍한 수법이었다.

'구해야…!'

하지만 새닌도 칼리아 백작을 상대하느라 손을 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세시아 백작에게서 뻗어 나온 그물은 완전히 감옥 같은 벽이 되어 세시아 백작과 크리스티앙을 외부로부터 유리해 버렸다.

'안 돼!!'

끝이었다.

하지만 새닌이 모르는 게 있었다.

크리스티앙이 독의 벽에 갇히기 전에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

승리의 미소였다.

* * *

한편, 세시아 영지가 내려다보이는 야산.

뜻밖의 한 인물이 크리스티앙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은빛 머리칼의 아름다운 외모, 셰라드였다.

"흐응, 이거 어떻게 하나?"

원래 그는 기회를 봐서 크리스티앙을 죽이려고 했다.

그런데 크리스티앙이 암흑 마군과 동행하며 기회를 잡지 못했다.

"이런, 곤란한걸. 크리스티앙은 내가 죽여야 하는데."

셰라드는 크리스티앙이 의념 독에 갇히는 모습을 보며 눈썹을 찌푸렸다.

'내가 얼마나 크리스티앙을 죽이는 날을 고대해 왔는데.'

셰라드는 크리스티앙이 자신의 얼굴에 흉터를 새길 때의 장면을 떠올렸다.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쩌릿 떨렸다.

이런 미친 듯한 살의를 품게 된 건, 크리스티앙이 처음이었다.

당장에라도 크리스티앙을 갈가리 찢어발겨 손에 그의 피를 잔뜩 묻히고 싶었다.

하지만 동시에 모순적인 생각도 들었다.

아직은 죽이고 싶지 않다는.

크리스티앙은 앞으로 얼마나 더 강해질까?

지금도 이렇게 살 떨리게 매혹적인데, 시간이 지난 후 크리스티앙이 어떤 모습이 되어 있을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미친 듯 요동쳤다.

'어쨌든 다른 놈에게 죽게 놔둘 수는 없지.'

셰라드의 눈빛이 스산하게 가라앉았다.

고작 저렇게 허무하게 죽는 꼴을 보려고 이토록 크리스티앙과의 만남을 고대해왔던 게 아니다.

셰라드가 움직이려는 찰나였다.

"흐음…?"

셰라드의 눈동자에 이채가 떠올랐다.

독에 휩싸인 내부에서 무언가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던 거다.

셰라드는 악마에게 받은 축복, '식귀(食鬼)' 권능의 능력을 이용해 의념 독 내부의 상황을 살폈고, 곧 커다란 웃음을 터트렸다.

크리스티앙이 또 미친 짓을 벌이고 있었다.

"역시 나의 크리스티앙.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구나."

셰라드는 혀를 내밀어 크리스티앙이 새긴 흉터를 핥았다.

"믿을 테니, 절대로 죽지 마."

크리스를 보는 셰라드의 눈동자에 짙은 갈망이 서린 광기가 일렁였다.

"널 죽이는 건 반드시 내 몫이니."

* * *

함거의 벽.

독의 벽을 이용해 적을 외부와 완전히 분리해 가둔 후 농락하는 끔찍한 의념 독이었다.

'갇히는 순간, 살아날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할 수 있지.'

방법은 하나.

더욱 강력한 힘으로 의념을 무너뜨리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무리 크리스의 절대의 강기라도 6성 중의 마인이 펼친 의념을 능가할 수는 없었다.

과연, 세시아 백작은 이미 승패가 마무리되기라도 한 듯, 잔혹한 음성으로 선언했다.

"그래도 암흑 마가의 체면을 봐서 죽이지는 않으마. 대신, 차라리 죽는 게 나은 처지로 만들어 주마. 손발을 모조리 녹인 후, 잘난 얼굴도 독으로 짓뭉개주마. 숨구멍과 입의 구멍, 귀도 모두 독으로 짓이겨 간신히 목숨만 유지할 수 있는 처지가 되게 해주마."

끔찍한 선언.

하지만 빈말이 아니었다.

함거의 벽에 갇힌 이상, 이제 크리스티앙은 거미줄에 걸린 벌레의 신세가 된 것과 마찬가지였으니까.

"지금이라도 내게 무릎 꿇고 구걸하면, 조금은 고통을 줄여주도록 하마."

"닥쳐."

"…뭐?"

"내가 아까부터 계속 말했지? 너 입에서 똥 냄새 나니 닥치라고."

세시아 백작은 순간 멍한 얼굴을 했다.

이런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까지 크리스티앙이 망둥이 같은 발언을 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거다.

"네놈… 지금 네가 어떤 처지인지 모르는 거냐?"

"아아, 알지. 이 함거의 벽이란 의념이 대단하다는 거잖아. 확실히 마인으로서의 내 힘으로는 이겨내기 어려울지도."

남의 일을 이야기하듯 한가로운 음성.

세시아 백작은 버럭 화를 내며 손짓했다.

"직접 당해보면 깨닫겠지! 몸이 녹아내리는 고통 속에서 네놈의 건방짐을 후회해라!"

화악!

벽에서 시커먼 독이 크리스의 양발을 노리고 튀어나왔다.

사방에 갇힌 상황이라 회피는 불가능한 상황.

세시아 백작이 곧 울려 퍼질 끔찍한 비명을 생각하며 진득한 미소를 짓는 순간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이변이 일어났다.

파앗!!

크리스티앙의 몸에서 한 줄기 빛이 뿜어져 나왔고, 독이 산산이 흩어져 사라졌다.

제192화

"무, 무슨…?!"

세시아 백작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익숙한 빛이었다.

극독 마가의 마인이라면 못 알아볼 수 없는 빛.

하지만 절대 이 자리에 나타나서는 안 되는 빛이었다.

"아아. 내가 말했잖아. 마인으로서의 힘으로는 당하기 어려울 것 같다고."

크리스의 손에서 다시 빛이 일렁였다.

"그런데 내가 마인의 힘만 익힌 게 아니라서 말이야."

숭고하디숭고한 치유의 빛.

극독 마가의 천적인 의선 명가의 힘.

의선 기공이었다.

* * *

크리스가 자신만만했던 이유.

'애초에 이럴 생각이었지.'

세시아 백작의 의념 독인 '함거의 벽'은 한번 갇히면, 벗어나는 게 불가능한 치명적인 공격이었다.

하지만 약점도 여럿 존재했다.

일단, 속박 결계의 형태를 빌린 의념이라 외부와 완전히 유리된다.

즉, 외부에서 안의 상황을 살필 수 없었다.

마음 놓고 성휘의 힘을 사용해도 되는 거다.

'거기에 결계의 형태라 시전자도 한번 펼친 의념을 쉽게 거둘 수가 없고.'

세시아 백작은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어, 어떻게 의선 기공을?"

긴장한 음성.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극독 마가의 마인들에게 의선 기공은 악몽과도 같은 것이니까.

괜히 의선 명가가 극독 마가의 '천적'이란 평을 듣는 게 아니다.

"아아, 내가 천재라서 말이야. 한번 익혀봤어."

"무슨 말도 안 되는!!"

세시아 백작이 강하게 힘을 일으켰다.

"그게 진짜 의선 기공이라고 해도 내 전력을 다한 의념 독을 당하지는 못할 터! 핏줄로 만들어 주마!!"

화아아악!

사방위 벽에서 크리스티앙을 향한 독이 몰아쳤다.

마치 거센 폭풍에 휘말리는 것처럼 크리스티앙의 전신이 독기에 휘말렸다.

하지만 다시 빛이 번뜩했고.

파사사삭.

독기는 말라비틀어진 모래처럼 힘을 잃고 사라졌다.

세시아 백작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 어떻게? 아무리 의선 기공이라도, 의념 독을 이렇게 쉽게 막다니?"

의선 기공이라고 독에 무적인 건 아니었다.

의념 독을 막으려면, 같은 등급인 의념이 실린 의선 기공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인데?

"간단해. 내 의선 기공에 담긴 '활인(活人)의 의지'가 네 의념보다 강하기 때문이야. 결국, 의념도 의지가 극한으로 발현된 것이니, 더욱 강한 의지를 만나면 무너지는 게 당연하지."

"헛소리하지 마라! 네가 그런 '활인의 의지'를 가지고 있을 리가!!"

의선 기공은 시전자가 어떤 활인의 의지를 품고 있느냐에 따라 위력이 달라진다.

하지만 활인의 의지는 오로지 환자를 치료하며 위했던 경험을 통해서만 강하게 할 수 있는데?

의선 명가의 제자들이 환자를 치료하는 순례 여행을 떠나는 것도 이 활인의 의지를 강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치료 경험이야 질리도록 많으니까. 오죽하면, 과거 '진창의 성자'라고까지 불렸을까.'

의선 명가 본산을 가도, 이전 삶 크리스만큼 많은 환자를 살린 성자는 드물 거다.

그때, 크리스는 정말 많은 환자를 살렸으니까.

그러니 크리스는 어지간한 의념 정도는 가볍게 압도할 정도로 강력한 활인의 의지를 품고 있었다.

"마, 말도 안 되는!! 죽어라!!"

세시아 백작이 마구잡이로 독을 퍼부었지만, 다 소용없었다.

최소 '개변(改變)'을 눈앞에 둔 6성 상(上)급의 의념이 아닌 한, 크리스의 의선 기공을 뚫을 수 없었다.

자신의 독이 전혀 먹히지 않음을 깨달은 세시아 백작의 안색이 하얘졌다.

그는 방법을 바꾸기로 했다.

'어차피 의선 기공만으로는 날 해칠 수 없어. 일단, 이 의념 독을 해체한 후 놈의 실체를 모두의 앞에서 까발린다.'

세시아 백작은 의념 독을 거둘 준비를 했다.

결계 형식의 의념 독이라 원한다고 곧바로 거둘 수 있는 게 아니라,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도망가려고?"

"닥쳐라. 암흑 마가의 대공자가 가증스러운 연합 놈들의 힘을 사용하다니. 소문이 퍼지면 네놈이 어떤 꼴이 될지 궁금하군."

"아아, 곤란하겠지. 하지만 괜찮아. 네놈을 여기서 죽이면 소문이 퍼질 리는 없으니."

세시아 백작은 코웃음을 쳤다.

"의선 기공은 방어와 치료의 힘. 그것만으로 날 죽일 수는…."

"내가 왜 의선 기공만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

스르릉.

크리스가 아공간 주머니에서 새로운 하나의 검을 꺼냈고, 세시아 백작은 다시 눈을 부릅떴다.

찬란한 검신.

에른힐트.

이전, 올리비아가 골드 크로스에서 헤어지기 전, 선물로 주었던 성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 어떻게 네놈이 성검을?!"

"의선 기공도 다루는데, 성검이 문제야?"

크리스가 검을 겨누었다.

파아아아앗!!!

환한 광채가 성검에 깃들었다.

모든 종류의 성휘 마나 중에서 가장 상위의 힘.

용사에게만 허락된다는 '광휘의 마나'가 성검을 찬란하게 빛냈다.

"이, 이…!!"

위기를 직감한 세시아 백작이 전력으로 힘을 발휘했지만, 소용없었다.

마인으로서 크리스는 5성 하(下)다.

발휘하는 힘을 보면, 쉽게 믿기지 않지만, 경지는 아직도 5성 하다.

반면, 성휘로서의 경지는 달랐다.

무려 5성 상(上).

일전 절대의 강기를 얻을 때, 성휘로서의 경지가 덩달아 뛰어오른 덕이다.

아니, 사실은 5성 상도 뛰어넘었다.

'의념.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아.'

크리스는 눈을 가늘게 떴다.

마인으로서는 무리였다.

의념은 자신만의 상념을 완성해 의지로 법칙의 한계에 도전하는 힘.

아직 크리스는 마인으로서 상념을 완성하지 못했다.

하지만 성휘로서는 달랐다.

'멸망의 시대 때 보았던 수많은 의념기들.'

촤르륵, 수많은 연합 기사들이 쓰던 의념기가 머릿속을 스쳐 갔다.

그중 가장 뇌리에 박히는 건 단연코 하나.

용사 에반이 사용하던 의념기, '사암(死暗)의 검'.

어둠의 존재에게 절대적인 죽음을 선사하는 검이었다.

마치 에반이 된 것처럼, 상념이 떠올랐지만, 크리스는 고개를 저었다.

'이것만으로는 부족해.'

크리스의 상념이 한층 더 앞으로 나아갔다.

더욱더 거칠게.

용사가 아닌, 마치 마인의 것처럼 상념이 위협적으로 일렁였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단순한 파괴의 힘은 빛의 힘이라 할 수 없는 터.

단죄의 의지가 상념에 실렸다.

마치, 심판자의 의지처럼.

모든 어둠을 멸하고자 하는 빛의 의지가 검에 실렸다.

크리스의 첫 의념기, '멸광(滅光)의 검'이었다.

성휘로서 6성 진(進)의 경지로 올라선 거다.

파앗.

허공을 가르는 한 줄기의 빛.

파멸의 의지를 담고 있어서일까?

어둑한 빛이었다.

마치 그림자에 싸인 것처럼.

하지만 동시에 찬란한 기운이 담겨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숭고함이었다.

어둠보다 어두운.

하지만 화려한 광채보다 더욱 찬란한 엄숙한 빛이 마치 심판자의 검처럼 장엄하게 허공을 갈랐고,

"이익…!! 크아아아아악!!"

파아아아앗!!

어둠의 빛이 세시아 백작의 몸을 가로질렀고, 빛이 관통한 절단면에서 광채가 터져 나왔다.

빛은 마치 화형대에 올라간 죄인을 처형하듯 세시아 백작의 몸을 불살라 버렸고, 세시아 백작은 끔찍한 비명과 함께 죽음을 맞았다.

승리였다.

'생각보다도 더 대단한 위력이야.'

크리스는 살짝 놀란 얼굴을 했다.

상성상 범위 독이 특기인 세시아 백작은 이런 일점에 힘을 집중하는 의념기에 약하긴 하지만, 그래도 6성 중의 마인을 일격에 쓰러뜨린 거다.

'위력이 강한 만큼 기력 소모가 심해 쉽게 사용하긴 어렵겠지만, 비장의 한 수가 되겠어.'

성휘의 힘을 썼다고 흔적이 남을 걱정은 없었다.

함거의 벽이 무너지더니, 남아 있던 세시아 백작의 시체를 그대로 녹여버린 덕이다.

"대공자님!! 괜찮으십니까?!"

새닌이 크리스티앙에게 다가왔다.

"세시아 백작은?"

"처리했다."

"!!"

새닌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어떻게?"

"아아, 내가 천재라서."

"...."

"어쨌든, 새닌, 네가 상대하던 칼리아 백작은?"

"쓰러뜨렸습니다."

저편에 칼리아 백작이 목이 잘려 쓰러져 있는 게 보였다.

새닌도 뜻밖에 승리한 거다.

"제법이군."

"…대공자님께 그런 이야기를 들으니, 기분이 썩 좋지 않군요. 반드시 대공자님을 뛰어넘는 공을 세우려고 했는데."

"네가 날 이기는 건 평생 가도 무리라고 했잖아."

"…절대 포기하지 않습니다."

크리스는 기분 좋게 쿡쿡 웃었다.

"그러면 우리, 또 하나 내기하지 않겠나?"

"무엇입니까?"

"누가 먼저 성의 꼭대기에 오르느냐로."

그래.

아직 싸움은 끝난 게 아니었다.

성을 정복해야 한다.

마침, 거센 함성이 울려 퍼졌다.

"와아아아아!! 암흑 마가 만세!!"

"크리스티앙 대공자님 만세!!"

크리스의 명을 받고 우회한 멜린이 성벽을 돌파해 문을 연 거다. 중간중간 독을 이용한 방어 병기들이 있었지만, 마리사가 무력화시켰다.

크리스는 말에 오르며 높게 외쳤다.

"그대로 성을 함락한다! 성에 암흑기를 꽂도록!!"

그렇게 크리스는 6성 중의 세시아 백작을 쓰러뜨리고, 그대로 성까지 함락했다.

정말 처음에 선언했던 대로 4개의 영지를 손에 넣은 거다.

충격적이기 그지없는 일.

이제 날이 밝고, 제대로 된 소식이 전해지면 극독 마가는 발칵 뒤집히리라.

비단 극독 마가뿐이 아니었다.

암흑 마가도 크리스의 비밀 작전을 모르고 있었던 건 마찬가지이니.

아니, 두 가문을 넘어 마도 제국 전역이 발칵 뒤집히고도 남을 사건이었다.

그런데 세시아 성의 공략이 마무리되고 있을 때, 한 인물이 성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셰라드가 아니었다.

잿빛 머리칼의 매혹적인 인상의 여인.

사왕성의 장로, 인형사 메르헨이었다!

셰라드 말고도 메르헨 또한 크리스티앙을 지켜보고 있었던 거다.

정확히 말해 지금 나타난 이는 메르헨 본체는 아니었다.

메르헨의 쌍둥이 동생을 이용해 만든 첫 번째 인형이었다.

피를 나눈 쌍둥이를 재료로 만든 인형인 것만큼, 다른 인형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본체처럼 완벽히 동조화하는 게 가능했고, 인형임에도 무려 7성에 달하는 힘을 발휘하는 게 가능했다.

어지간하면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없는 첫 번째 넘버링을 동원한 목적은 하나.

셰라드와 같았다.

그녀 또한 크리스티앙을 노리고 있었다.

"후후, 역시 기대한 것 이상이네요. 어찌나 이렇게 매혹적이고 아름다운 것인지."

설마설마했는데 정말 6성 중의 마인까지 쓰러뜨리다니.

메르헨은 설렌다는 얼굴로 입술을 핥았다.

"더는 참지 못하겠어요. 지금 당장 납치해 인형으로 만들어야겠어요. 마침 기회도 좋으니."

성을 점령하며 혼란스러운 지금이 딱 기회였다.

틈을 봐서 남들 몰래 납치할 수 있으리라.

"아아, 저 아름다운 공자를 나만의 인형으로 만들면, 얼마나 황홀할지. 인형이 될 때 고통스러워할 얼굴까지 모두 기대되어요."

그녀가 그렇게 환희에 찬 음성을 뱉고 있을 때였다.

차가운 음성이 들려왔다.

"이런, 역겨운 시체 성애자 따위가 주제넘은 바람을 품고 있군. 아니, 너 같은 경우에는 시체를 인형으로 박제하는 걸 좋아하는 거니, 박제 성애자인 건가?"

"!!"

메르헨의 얼굴이 굳었다.

옆을 돌아보니, 은발의 여인처럼 아름다운 남자가 차갑게 눈빛을 가라앉히고 있었다.

"당신은? 암흑 마가의 1공자 광인 셰라드?"

"그래."

"당신이 왜?"

셰라드가 앞으로 흘러내린 머리를 뒤로 넘겼다.

차갑게 짓는 미소와 함께 크리스가 새긴 흉터가 섬뜩하게 일그러졌다.

"아아, 크리스티앙의 목숨은 내 것이라서 말이야. 너 같은 인형 변태한테 넘겨줄 수는 없어서."

제193화

메르헨의 눈빛도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셰라드, 당신도 인형으로 만들면 좋겠군요. 별반 제 취향은 아니긴 하지만 얼굴은 예쁘니 놀이용 인형으로 만들어서 심심할 때마다 고문하면 즐길 만하겠어요."

"나야말로 마찬가지야. 너한테 관심 따위는 없지만, 적당히 가지고는 놀아줄게. 인형이라도 이 정도의 동조화율이면 고통은 똑같이 느낄 테니."

공교롭게도 둘은 취향이 비슷했다. 둘 모두 남의 고통을 즐기는 끔찍한 성향.

디테일하게 들어가면, 박제 성애자와 사이코 패스 살인마로 다소 다르지만.

둘이 기세를 끌어 올렸다.

그런데 놀라운 건 셰라드 쪽이었다.

메르헨은 본체가 7성 상의 최고위 마인이고, 입고 있는 인형도 혈육을 재료로 만든 첫 번째 인형이라 7성에 달하는 힘을 품고 있었지만, 셰라드도 전혀 밀리지 않는 기세였다.

셰라드 또한 7성에 오른 거다!

악마 계약의 효과.

아니, 정확히는 악마에게 내려받은 '식귀(食鬼)' 권능의 효과였다.

심상치 않음을 느낀 메르헨이 얼굴을 굳혔고, 셰라드는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어디, 한번 볼까?"

셰라드의 관자놀이에 섬뜩한 악마의 낙인이 떠올랐다.

"인형을 '먹어도' 내 허기를 달랠 수 있을지."

* * *

그렇게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메르헨의 인형과 셰라드는 결전을 벌였다.

결과는 셰라드의 승리.

메르헨의 인형은 간신히 소멸을 피해 도주했지만, 셰라드도 무사하진 못하고 치명적인 상처를 입게 되었다.

적들끼리 황당하게 자멸한 셈.

크리스티앙은 아무것도 모르고 고개만 갸웃했다.

'이대로 끝인가? 뭔가 더 있을 것 같았는데?'

이번 작전은 여러모로 위험천만했다.

특히 가문의 그늘에서 벗어나 적진에 들어와 있는 것이니, 누군가 그를 노린다면 딱 좋은 기회였다.

'나름대로 대책도 준비해 놓았는데.'

크리스는 허리춤에 찬 검을 어루만졌다.

'안드릴'이었다.

'골드 크로스에서 봉인 일부를 해제해 권능의 일부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으니.'

물론, 일회성으로 굉장히 제한적인 사용만 가능할 뿐이었다.

사용하는 순간, 크리스 본인도 치명적인 위험을 각오해야만 했고.

그래서 지금껏 단 한 번도 안드릴의 권능을 쓴 적이 없지만, 만약 예상치 못한 벅찬 위기가 오면 사용하려고 준비 중이었는데, 조용했다.

'뭐, 잘된 거지.'

크리스는 고개를 저었다.

쓸데없는 생각을 할 여유는 없었다.

'전투는 끝났지만, 사태가 마무리된 건 아니니까.'

도리어 진짜 싸움은 지금부터 시작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제 승전 협정을 통해 고라스 후작에게 죗값을 치르게 해야 했다.

아니, 고작 대가를 받아내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크리스는 이번 일을 통해 극독 마가를 자신의 발아래에 굴복시킬 발판을 마련할 계획이었다.

* * *

크리스가 해낸 일은 금세 소식이 퍼졌다.

양 가문이 발칵 뒤집혔다.

일단, 암흑 마가.

"크리스티앙 대공자님이 극독 마가의 영지를 점령했다고?"

"그래. 본가에서 어물쩍하는 사이 증거를 확보하고 뒤로 암흑 마군을 움직여 전격적으로 놈들을 쳤다는군."

"그러면 서쪽 영지에서 독에 걸려 쓰러졌다는 소문은?"

"당연히 극독 마가를 방심시키기 위한 수작이었던 거지. 난 처음부터 대공자님을 믿었어. 역시, 우리 대공자님은 미친 분이야!!"

"그때 대공자님을 의심했던 거 어떤 놈이야?"

"크리스티앙 대공자님 만세!!!"

열렬한 환호의 함성이 터졌다.

암흑 마가의 마인이라면 누구 하나 가릴 것 없이 크리스티앙의 이름을 높여 불렀다.

"이럴 게 아니야! 우리도 크리스티앙 대공자님을 도우러 가세!!"

"저희 영지도 전력을 보태겠습니다!!"

"저도 가겠습니다!!"

그렇게 점령지로 크리스티앙을 지원하기 위한 마인들이 쇄도하였다.

한편, 극독 마가는 믿을 수 없다는 분위기였다.

"무슨 말도 안 되는?! 4개의 영지가 함락되었다고? 발먼트, 로드락뿐 아니라, 세시아, 칼리아까지?"

"그럴 리가 없습니다! 무언가 잘못된 소식일 겁니다!"

첫 번째 반응은 부정이었다.

당연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네 곳의 영지가 함락되어 버렸으니.

하지만 소식이 사실로 판명되자, 경악에 휩싸였다.

특히 구체적인 일의 정황이 전해지자, 모두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아무리 기습이었다지만?"

강력한 방어용 독진.

6성 마스터 클래스의 영주들까지 있었는데, 그게 모조리 뚫린 거다.

그것도 단 한 명의 인물 때문에.

"그로벤 님의 독진을 뚫은 것도, 세시아 백작을 쓰러뜨린 것도, 모두 크리스티앙 대공자 한 명이 한 일이라고?"

적에게 감탄하는 격이지만, 크리스가 해낸 일이 충격적이다 못해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라 극독 마가의 마인들은 화내는 것도 잠시 잊을 정도였다.

특히 수준이 높은 독인일수록 크리스가 해낸 일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것인지 알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당장 우리도 병력을 보내야 하오!"

"우리 극독 마가의 영지를 침범한 이들에게 대가를 치르게 해야 하오!"

"독살대(毒殺隊)를 출격시킵시다!"

그런 분노한 반응이 나왔지만, 쉽지 않았다.

"세시아 영지와 칼리아 영지가 어떤 곳인지 잊은 거요? 만약 병력을 일으켰다가 크리스티앙 대공자가 미친 척 사고를 치면?"

세시아 영지에는 극독 마가의 핵심 독초가 자라는 산지 및 보관소, 정제소가 있고, 칼리아 영지에는 상수원의 댐이 있다.

크리스티앙은 여차하면 그 두 곳을 망가트릴 것이다.

주저할 이유도 없었다. 망가뜨린 후 암흑 마가 영지로 돌아가면 그만이니.

목에 칼이 드리운 거나 마찬가지인 상황.

더구나 극독 마가 내부의 반대 여론도 만만하지 않았다.

일단, 가주인 후암 공작이 이견을 표명했다.

"군사를 일으키기 전, 암흑 마가의 영지에 독을 살포한 게 누구인지 진상 먼저 밝히는 게 옳다."

애초에 크리스티앙이 군사를 일으킨 이유가 암흑 마가에 퍼진 독 때문이었다.

특히 크리스는 영지를 점령 후 곧바로 고라스 후작 일파가 독을 유포했다는 증거를 밝혀서, 극독 마가의 마인들은 서로 지리멸렬한 상태였다.

처음 군사를 일으켰을 때 꾸민 거짓 증거가 아니었다.

세시아 백작과 칼리아 백작은 이번 사태를 일으킨 이들이라 성에 증거가 남아 있었고, 그걸 모조리 확보했다.

"정말 부가주이신 고라스 후작 각하께서 그런 일을 하셨다고?"

"아니, 후작 각하가 아니라, 세시아 백작과 칼리아 백작이 주도로 벌인 일이라고 해."

"하지만 그게 그것 아닌가? 그들 두 분은 부가주님의 명만 듣는데."

극독 마가의 상당수는 고라스 후작 일파였다.

하지만 아무리 고라스 후작을 따른다고 해도 이번 일을 옳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독을 살포해 민간인을 학살하는 건, 누가 봐도 명백한 잘못이었으니까.

"…부가주님께서 설마 이런 일까지 저지르시다니."

"아무리 부가주님이라도 이건 선을 지나치게 넘은 것 아닌가."

만약, 정말 고라스 후작이 한 짓임이 밝혀지면, 커다란 정치적 타격이 불가피한 상황.

그때, 극독 마가 본가의 깊은 집무실에서 한 마인이 무릎 꿇고 있었다.

"휘하 마인들이 동요하고 있습니다, 부가주님."

그 말에 어둠 속에서 한 인물이 시선을 돌렸다.

고라스 후작이었다.

차가운 시선에서 주위를 압박하는 섬찟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휘하 마인들이 동요하고 있다고?"

"네, 그렇습니다. 불경하게도 부가주님께 의심을 품는 이들도 나오고 있어서…."

"버러지 같은 놈들이 감히?"

"!!"

측근은 흠칫하였다.

고라스 후작은 웃는 낯이었다.

하지만 눈빛이 섬뜩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어차피 부가주님은 이런 평판 따위를 신경 쓰는 분이 아니니.'

고라스 후작이 극독 마가의 최정점에 군림하게 된 건, 인망 때문이 아니었다.

강력한 힘.

거기에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끔찍한 성정 덕분이었다.

고라스 후작은 자신을 반대하는 이들에게 선택을 강요했다.

죽음이냐, 복종이냐.

복종을 거절하면, 희생되는 이는 본인만이 아니었다. 은밀하며 교활한 수작으로 소중한 가족부터 목숨을 잃게 해 절대 거절할 수 없게 만들었다.

즉, 고라스 후작이 극독 마가의 마인들을 굴복시킨 방법은 철저한 공포였다.

"역시 벌레같이 하등한 놈들은 어쩔 수가 없군. 고작 이런 일로 흔들리다니."

"…그렇습니다."

"어쨌든, 대책을 마련하긴 해야겠어. 다른 걸 떠나 이대로라면 내 계획은 실패로 돌아갈 테니."

원래 고라스 후작은 이번 일로 가주인 후암 공작을 몰락시킬 계획이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나타난 천둥벌거숭이 한 명 때문에 일이 완전히 틀어져 버린 상황.

문제는 이번 일의 경우 고라스 후작도 처리하기 쉽지 않다는 점이었다.

상대는 암흑 마가니까.

거기에 고라스 후작의 목에 시퍼런 칼까지 들이밀고 있었다.

하지만 괜찮았다.

방법이 있었다.

"암흑 마가 쪽 움직임은 어떻지?"

"영지를 점령한 채 잠자코 있습니다. 아마 우리가 먼저 고개를 숙이길 기다리고 있는 듯합니다."

양 가문 모두 이대로 전면전을 벌일 수는 없다.

협상으로 마무리해야 하는데, 칼자루를 쥔 건 암흑 마가 쪽이니 이대로라면 극독 마가는 굴욕적인 협상을 해야 할 것이다.

"암흑 마가 쪽에 연락하도록. 일을 마무리 짓게 협상하자고."

"…분명 감당하기 어려운 조건을 요구할 겁니다."

측근이 염려스럽다는 듯 말했는데, 고라스 후작이 뜻밖의 말을 하였다.

"아니, 반대다. 고개를 숙이게 되는 건, 암흑 마가 쪽이다."

"…어떻게?"

"청류의 마왕께 중재를 요청하도록."

"!!"

측근은 흠칫하였다.

"하지만? 청류의 마왕께서 중재하면, 오히려 상황이 더욱 어려워질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마왕은 마황의 대리자다.

따라서 마왕이 내린 결정은 그게 무엇이든 반드시 따라야 한다.

특히 청류의 마왕이 마도 제국에 투신하기 전 과거 신분은 무려 영광된 요정왕(妖精王).

따라서 지금도 공명정대한 성품을 지니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이번 일은 고라스 후작 측이 명백히 잘못한 상황이니, 청류의 마왕은 고라스 후작 측에 불리한 판결을 내릴 게 분명하지만.

"괜찮다. 내게 생각이 있으니."

"…알겠습니다."

측근은 더 이야기 못 하고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홀로 남은 고라스 후작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영광된 요정왕이라. 우습군. 지금은 추악하게 타락한 괴물일 뿐이면서."

이번 일의 진정한 뒷배는 사실 고라스 후작이 아니었다.

바로 청류의 마왕이었다.

'이번 일뿐이 아니지.'

고라스 후작은 청류의 마왕이 어떠한 '목적'을 품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 목적을 위해 어떤 끔찍한 일들을 획책하고 있는지도.

이번 일이 이렇게 마무리되는 건, 결단코 그녀가 바라는 바가 아닐 터.

청류의 마왕은 고라스 후작의 손을 들어줄 거다.

* * *

청류의 마왕이 이번 협상을 중재하기로 한 소식은 곧 양 가문으로 전달되었다.

다들 뜻밖이란 반응이었다.

"청류의 마왕께서 왜?"

"그분이 각 가문의 일에 직접 개입하는 건 거의 없던 일인데?"

각 번국의 마왕마다 통치 방침이 다른데, 보통 일반적으로 방임의 원칙을 따른다.

마황의 뜻이 그러하기 때문인데, 청류의 마왕은 그중에서도 유독 관심이 없는 편이었다.

근 10년간, 단 한 번도 명문가의 일에 나선 적이 없었을 정도.

마왕의 갑작스러운 개입에 다들 의문과 경계심을 품었고.

단 한 명.

크리스티앙만이 태연한 기색이었다.

제194화

"청류의 마왕이 나선 이유야 간단하죠. 극독 마가의 편을 들 생각일 겁니다."

크리스가 말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는 거냐?]

노르디언이 어린 소년의 형태로 물었다.

사안의 중대성 때문에 크리스가 있는 점령지로 사념체를 보낸 것이다.

"아니라면, 청류의 마왕의 성격상 고작 이런 사소한 일에 나설 리가 없으니까요."

사소한 일.

수천 명이 죽을 뻔한 사건을 그렇게 표현하는 건 어폐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사실이었다.

청류의 마왕은 이보다 더한 사건 때도 침묵하는 경우가 허다했으니까.

아무리 마황의 방침이 자유방임이라고는 해도, 그녀의 무관심은 도가 지나친 면이 있을 정도였다.

'애초에 청류의 마왕의 관심사는 마황의 명을 따르는 것도, 마도 제국을 올바르게 통치하는 것도 아니니까.'

크리스는 청류의 마왕의 진짜 '목적'을 떠올리고는 고개를 저었다.

이전 삶, 청류의 마왕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 온갖 끔찍한 일을 벌인다.

덕분에 남방 마도국은 쑥대밭이 되고, 사왕성의 침략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게 된다.

[청류의 마왕이 극독 마가의 편을 들 이유가 있단 말이냐?]

"무슨 이유에서인지야 저도 정확히는 모르죠. 다만 추측해보면, 극독 마가에서 청류의 마왕이 혹할 만한 제안을 제시하지 않았겠습니까? 원래도 청류의 마왕은 자신의 몸 상태 때문에 종종 극독 마가에 신세를 지고는 하니까요."

청류의 마왕은 요정왕에서 타락할 때의 후유증으로 지금도 여러 고통을 겪고 있어 극독 마가의 도움을 받고 있었다.

[…만약 네 말이 사실이면, 좋지 않다. 청류의 마왕이 편파적인 판결을 내려도 우린 따를 수밖에 없어.]

노르디언이 무겁게 말했다.

[최악의 경우, 역으로 네게 죄를 물을 수도 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였다.

크리스가 제시한 증거를 인정하지 않고, 도리어 크리스에게 사태의 책임을 묻게 할 수도 있었다.

[이번 협상은 내가 직접 나서도록 하겠다.]

"할아버님?"

[아무리 마왕이라도 날 상대로 터무니없는 억지를 부리진 못할 거다.]

하지만 크리스티앙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이번 협상은 제가 주도하겠습니다."

[내게 걸린 제약 때문에 걱정하는 거냐? 괜찮다. 힘을 쓰는 것도 아니고, 협상에 한 번 나서는 정도는 그럭저럭 버틸 수 있어.]

"그런 게 아닙니다."

크리스가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제가 직접 나서야 극독 마가의 고라스 후작을 시궁창에 처박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노르디언은 흠칫했다.

[너?]

"이건 어떻게 생각하면 좋은 기회이니까요. 고라스 후작을 제대로 단죄할 수 있는."

원래라면.

협상만으로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는 건 쉽지 않았다.

고라스 후작은 극독 마가의 최고 권력자이니까.

만약, 협정 결과가 자신의 목을 죄는 것이라면, 순순히 따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중재자가 청류의 마왕이 되었으니 이야기가 다르지. 아무리 고라스 후작이라도 판결에 복종하지 않을 도리가 없어.'

고라스 후작은 알까?

자신이 어떤 어리석은 선택을 한 건지.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청류의 마왕은 철저히 고라스 후작의 편일 테니.

그걸 극복하고, 청류의 마왕이 고라스 후작을 단죄하는 판결을 내리도록 만들어야 했다.

[…정말 할 수 있겠냐? 청류의 마왕은 만만한 존재가 아니다. 소문처럼 공명정대하지도 않아. 도리어 어떤 마인보다도 끔찍한 본질을 숨기고 있다.]

역시 노르디언.

청류의 마왕을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심지어 넌 이번 일에 약점도 있지 않으냐?]

뜻밖의 이야기.

하지만 사실이었다.

[왜 처음에 증거 조작 따위를 한 거냐? 아무리 빠른 해결을 위해서였다지만, 경솔했다.]

크리스는 극독 마가를 치기 전, 정확한 증거를 확보하는 걸 포기하고 루이나를 통해 가짜 증거를 조작해 싸움의 명분으로 삼았다.

물론, 추후 성을 함락하고 제대로 된 증거를 확보하긴 했다.

하지만 당시 만든 가짜 증거를 극독 마가에서 트집 잡으면 곤란해질 수도 있었다.

특히 청류의 마왕이 가짜 증거를 핑계로 크리스가 확보한 제대로 된 증거까지 인정하려 들지 않을 수도 있었다.

'청류의 마왕은 어떻게든 극독 마가의 편을 들 생각일 테니, 내가 마련한 가짜 증거는 좋은 핑곗거리가 되겠지.'

노르디언이 인상을 찌푸렸다.

[극독 마가 놈들은 만만치 않아. 특히 잔재주가 많다. 네가 증거를 조작했다는 사실을 반드시 증명해낼 거다.]

"그렇겠지요. 예상하고 한 일입니다."

[예상했다고? 그게 무슨?]

노르디언은 흠칫하였다.

크리스티앙이 씨익 웃고 있었던 거다.

"천재인 제가 일이 이렇게 돌아갈 걸 예상하지 못했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너, 혹시?]

"네, 맞습니다. 그 가짜 증거들, 제가 판 함정입니다."

사실.

크리스티앙이 루이나를 통해 증거를 조작한 건 단순히 싸움의 명분으로 삼기 위해서만이 아니었다.

진짜 목적은 덫이었다.

'고라스 후작이 날 모함하려 할 게 뻔했으니, 덫을 파놓았지.'

고라스 후작은 까마득히 모르고 있으리라.

크리스를 모함하기 위해 가짜 증거들을 파헤치는 순간, 도리어 덫이 자신의 목을 죄게 될 것이란 것을.

'청류의 마왕이 중재자로 나서는 것까지는 예상하지 못했지만, 도리어 잘됐어. 청류의 마왕을 이용하면 내 덫은 더욱 완벽해질 거야.'

크리스는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저놈이 또 무슨 미친 생각을 하는 거지?'란 표정으로 얼떨떨하게 있는 노르디언에게 말했다.

"하나만 부탁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무엇이냐?]

"이번 협정 장소를 극독 마가의 본가로 정해 주십시오."

[!!]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원래 전후 협정의 경우, 협정 장소 선정부터 치열한 기 싸움을 벌인다.

일단, 가장 선호하는 장소는 당연히 각자 자신의 본거지인 본가였다.

그래서 현재 극독 마가와 암흑 마가는 서로 자신들의 가문에서 협상을 하자고 주장하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아무리 극독 마가의 음침한 놈들이라도 사절로 온 절 해코지하지는 못할 테니 말입니다."

[그런 문제가 아니다. 이건 양 가문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다.]

보통은 불리한 입장의 가문이 고개를 숙이고 상대방의 가문에 사절을 보내게 된다.

팽팽할 경우, 중간 지대에서 협정을 맺고.

만약 크리스티앙이 극독 마가 본가로 사절로 가면, 먼저 고개를 숙이는 것과 비슷한 의미가 되니 절대 용납할 수 없었는데.

"꼭 그렇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전 고개를 숙이러 가는 게 아니라, 극독 마가 놈들을 짓밟으러 가는 것이니까요."

[!!]

"극독 마가 놈들의 본거지에 가서 놈들에게 치욕을 주면 그게 훨씬 더 통쾌하지 않겠습니까?"

노르디언은 말문을 잃었다.

도대체 무슨 자신감인지, 황당하게까지 느껴지는 선언.

하지만 크리스티앙은 단 한 번도 자신의 말을 지키지 못한 적이 없었다. 이번도 마찬가지이리라.

[알겠다. 네 말대로 하마. 단, 확실히 놈들을 짓밟을 수 있는 거지?]

노르디언의 핏빛 눈동자가 섬뜩하게 타올랐다.

[널 믿고 모두 맡길 테니, 반드시 놈들에게 제대로 된 대가를 치르게 하여라.]

사실 겉으로 표현을 하지 않았을 뿐, 이번 사태에 가장 분노한 이는 가주인 노르디언이었다.

'감히 음침한 독쟁이 놈들 따위가 우리 암흑 마가에 이딴 수작을 부려?'

노르디언이 건재할 때는 상상도 못 할 일.

당장에라도 극독 마가를 피로 물들이고 싶었지만, 암흑 마가의 미래를 생각해 억지로 신중한 태도를 견지했을 뿐이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크리스는 짙게 미소를 지었다.

악동처럼 보이는.

"선물을 들고 갈 테니, 할아버님께서는 좋은 소식을 기다리고 있어 주십시오."

그렇게 드디어.

'작전'의 마지막 막이 올라갔다.

* * *

극독 마가의 본가로 협정 장소가 결정된 후, 사절단이 출발했다.

책임자는 당연히 크리스티앙.

[오호호. 도련님과 오래간만에 나들이군요. 왓따, 이렇게 설렐 수가. 저기 수풀의 독충들도 우리의 나들이를 축복하는 듯한데, 저 수풀에 숨어서 찐하게 사랑이나 나눠볼까요?]

"…뭔 헛소리야."

[아아, 부끄러워하시는 모습. 너무나 사랑스럽군요. 떨어져 있는 동안 어찌나 도련님의 품이 그립던지. 당장에라도 도련님을 납치해 결혼식을 올리고 싶은 기분입니다.]

"…그건 참아줘."

오랜만에 신이 났는지, 마리는 유령 꼬리를 흔들며 크리스티앙 주위를 날아다녔다.

[그래도 저 열심히 도련님의 명령에 따라 그 머저리의 시중을 성심성의껏 들었습니다. 그 머저리도 제게 무척이나 감동한 눈치입니다.]

"…감동하긴 했지. 안 좋은 의미로."

크리스는 휴버트의 상태를 떠올리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도대체 무슨 정신 공격을 당한 건지, 휴버트 대공자는 반쯤 폐인이 되어 있었다.

- 으아아. 뭐든 시키는 대로 할 테니, 제발… 제발 저 유령에게서 날 벗어나게 해줘.

'뭐, 잘됐지. 중요하게 쓸 데가 있으니까.'

크리스는 끝없이 재잘재잘 떠드는 마리의 헛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암흑 마가의 대표로 가는 것이기에 당연히 호위대가 따라오고 있었다.

다만, 호위대의 면면이 뜻밖이었다.

'설마 흑사자 기사단을 동행시켜 주다니.'

크리스티앙은 살짝 놀란 얼굴을 했다.

본가 최강의 기사단이었다.

단장은 6성 상의 고위 마인인 베르켈 백작.

암흑 마가의 일반 마인들 중 선두를 다투는 강자였다.

'거기에 랑함 후작을 따르지 않고 아직까지 중립을 지키고 있지.'

정확히는 노르디언에게만 충성을 바치고 있었다.

'암흑 마가를 완벽히 장악하려면 반드시 마음을 얻어야 하는 인물이야. 이번 기회에 가까워지면 좋을 텐데.'

문제는 쉬워 보이지 않는다는 거다.

딱히 크리스에게 적대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무뚝뚝했다.

그것도 지나치게!

뭔가 가까워지려고 해도 대화가 이런 식이었다.

"먼 길을 동행해주어 고맙구려."

"가주님의 명에 따랐을 뿐입니다."

"흑사자 기사단의 위용을 보니, 대공자로서 자랑스럽구려. 경의 노고가 컸겠소."

"가주님의 명에 따랐을 뿐입니다."

"…혹시 기사단에 지원이 필요한 것은 없소? 부족하지만, 대공자로서 도움을 드리고 싶구려."

"없습니다. 저흰 그저 가주님의 명에 따를 뿐입니다."

"...."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다!

'…재미없는 양반일세.'

예상했던 대로 사적으로 친해지는 건 쉽지 않을 것 같아 물러나려고 할 때였다.

"…굳이 절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대공자께서는 가주님이 인정하신 분이니까요. 저희도 따를 뿐입니다."

단장 베르켈 백작이 무감정한 어조로 말했다.

오로지 가주에게만 충성을 바치는 이다운 말이었지만.

"난 가주님을 향한 충성이 아닌, 날 향한 충성을 받고 싶어서 말이오."

"!!"

"뭐, 지금 당장은 섣부른 것 같긴 하지만, 상관없소."

크리스티앙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씨익 웃었다.

"베르켈 백작, 당신은 반드시 내게 충성을 바치게 될 테니 말이오."

제195화

크리스의 선언에 베르켈 백작은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여전히 가면을 쓴 듯 무뚝뚝한 태도를 견지할 뿐이었다.

크리스도 더는 말을 걸지 않았다.

'천천히 공략해야지. 그래도 베르켈 백작이 랑함 후작의 편이 아닌 건 확실하니까.'

앞으로 나서서 가는데, 뜻밖의 인물이 크리스티앙에게 다가왔다.

"크리스티앙."

"아버지."

굳건한 인상의 중년의 미남자, 카자르 백작이었다!

적지 한복판으로 향하는 아들이 염려되어 카자르 백작도 호위로 따라온 것이다.

'괜찮은데.'

크리스는 괜히 겸연쩍은 마음이 들어 말했다.

"왜 굳이 따라오신 겁니까? 아버지까지 호위로 따라오실 필요는 없었는데 말입니다. 아무리 극독 마가의 음침한 놈들이라도 사절로 온 절 건드리지는 못할 겁니다."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다."

카자르 백작이 왜인지 인상을 찌푸렸다.

"또 네놈이 무슨 황당, 위험한 사고를 치지 않을지 걱정되어서 따라온 거다."

"...."

"이번에도 또 무언가 사고를 칠 생각인 것 아니냐?"

크리스는 말문이 막힌 얼굴을 했다.

'어떻게 알았지?'란 아들의 표정에 카자르 백작은 한숨을 팍팍 내쉬었다.

"얼마 전 극독 마가에 홀로 쳐들어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내가 얼마나 가슴 철렁했는지 아느냐? 도대체 넌 이 아비를 얼마나 놀라게 할 작정인 거냐?"

크리스는 머리를 긁적였다.

'확실히 아버지 입장에서는 걱정스럽긴 했겠군.'

살짝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더구나 크리스는 앞으로도 이런 위험천만한 일을 반복하게 될 테니까.

'주변을 생각하지 못했네. 이전 삶 때는 날 이렇게 걱정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니까.'

경험이 부족해, 이런 상황에서 뭐라고 아버지를 달래야 할지 잘 모르겠어서 크리스는 자신답지 않게 머뭇거렸다.

카자르 백작은 그런 아들의 모습에 한숨을 내쉬더니 크리스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물론, 어쩔 수 없다는 건 알고 있다. 이런 네가 자랑스럽기도 하고. 하나만 약속해다오. 절대 무리하지 않겠다고."

"알겠습니다. 꼭 약속하겠습니다."

"말은 재깍 잘하는구나. 약속을 지킬 생각도 없으면서."

크리스는 겸연쩍은 얼굴을 했다.

앞으로 맞닥뜨릴 적들의 면면을 생각하면, 무리하지 않는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카자르 백작은 다시 팍 한숨을 내쉬더니 똑바로 크리스티앙을 바라보았다.

"대신, 지지 말아라. 상대가 누구든 말이다. 다치거나 죽으면 영혼을 소환해서라도 네놈을 가만히 두지 않겠다."

응원이 아니다.

지독한 걱정이었다.

카자르 백작은 앞으로 아들이 어떤 강대한 적과 싸워야 할지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는 거다.

크리스티앙이 무사할 방법은 그 적들을 모조리 짓밟는 것밖에 없었다.

'어색하네. 이런 걱정.'

카자르 백작을 아버지라 인정하기로 했지만, 그의 짙은 부정은 아무리 마주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간질간질한 가슴을 숨기려 크리스는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도리어 불쌍한 건 제 적들이니까요. 상대가 누구든, 반드시 짓밟고 승리하겠습니다."

"…그래. 믿겠다."

카자르 백작은 더는 염려하는 티를 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크리스는 그런 카자르 백작을 보면서 잠시 묘한 얼굴을 했다.

'이제 슬슬 아버지의 경지를 7성으로 올려야 하는데.'

카자르 백작의 경지는 6성 상(上)이었다.

그것도 그릇이 꽉 찬.

슈펜 후작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벽을 넘지 못해 정체하고 있었지만, 계기만 주어지면 언제든지 뛰어넘을 가능성이 있었다.

'아버지만이 아니야. 아까 흑사자 기사단의 단장 베르켈 경도 그렇고, 잠재력이 있는 이들이 꽤 있어.'

암흑 마가에 7성 이상의 최고위 마인이 부족한 건, 암흑 마기의 난해함 때문이었다.

암흑 마기는 위로 올라갈수록 성취를 얻는 게 극단적으로 어려워진다.

특히 6성에서 7성이 될 때.

그리고 7성에서 8성이 될 때 어마어마한 벽을 마주해야 하는데, 어지간한 오성(悟性)으로는 이 벽을 뛰어넘지 못한다.

하지만 크리스가 스승으로서의 능력을 사용해 그들의 깨달음을 강제로 끌어주면?

'이번 극독 마가와의 일이 마무리되면, 본격적으로 해봐야지. 더 늦기 전에 암흑 마가의 전력을 끌어올려야 해.'

이번 일을 해결하는 대가로 '대선생'직을 요청한 것도 바로 이 계획 때문이었다.

아무도 짐작하지 못하고 있지만.

크리스의 손에 의해 조만간 암흑 마가에는 믿기지 않은 기적이 일어날 것이다.

더는 누구도 암흑 마가를 얕보지 못하게 될 것이다.

"형님, 저도 따라왔습니다."

"...."

크리스는 대답 대신 지그시 테른을 바라보았고, 테른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존경하는 킹 엠페러 마제스티 형님. 저도 왔습니다."

"오냐."

크리스는 고개를 까닥거렸다.

"근데 왜 왔냐?"

"혀, 형님께 도움이 되기 위해!!"

"…네가? 내게?"

테른의 얼굴이 붉어졌다.

사실, 지금 테른의 수준으로는 크리스에게 1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 아닙니다! 저도 도움 될 겁니다!"

"그래?"

"네. 그간 열심히 수련을 해왔으니!! 형님께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크리스는 쿡쿡 웃음을 지었다.

'얘도 참 많이 변했네.'

테른과 만난 지 벌써 2년이나 되었다.

크리스는 열일곱 살이 되었고, 테른도 열다섯 살이 넘었다.

변한 건 나이뿐만이 아니다.

크리스를 향한 눈빛.

아닌 척하지만, 크리스를 향한 존경이 가득한 눈동자였다.

'하긴, 나같이 대단한 형이 있으면 존경심을 주체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긴 하겠지. 이해돼.'

크리스는 한결 귀여워진 동생에게 특별한 호의를 베풀기로 하였다.

"더 강해지게 도와줄까?"

"…어떻게요?"

"빨리 강해지는 데는 대련이 최고지. 한판 붙자."

"…그, 그건."

테른의 얼굴이 하얘졌다.

"왜? 지금 네 경지가 3성이 아니던가? 나는 네 경지 때 5성의 고위 마인과 결투하고는 했는데? 무엇보다 나 같은 천재와 결투할 기회가 쉽게 오는 게 아니라고."

"그, 그야 그렇긴 하지만."

테른은 뒷걸음질 치더니 다급히 말했다.

"이, 일단 먼저 알로스 님이랑 결투하며 실력을 키운 후 형님께 도전하겠습니다!"

옆에서 기죽은 채 조용히 있다가 난데없이 테른에게 지목당한 알로스가 사나운 얼굴을 했다.

'아니, 이제는 하다 하다 이런 어린놈의 새끼마저 날 무시하다니?'

참고로, 알로스는 크리스보다도 나이가 많았다.

그렇지 않아도 최근 독약의 탈을 쓴 영약을 먹고 죽을 고생을 해서 크리스를 향한 반감이 잔뜩 심해져 있던 알로스가 흉흉하게 말했다.

"그래, 테른. 우리 한번 대련이나 해볼까? 미리 말하는데, 최근 이 형이 영약을 먹고 강해져서 말이야. 맞아서 아프다고 울면 안 된다?"

"당신이 왜 제 형입니까?"

"그야 먼 핏줄이지만, 우린 같은 가문의 피를 이었으니?"

"아니, 크리스티앙 형님께 배우기로 형 동생에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무조건 강한 놈이 형님이라고. 그러니 당신은 제 동생이 되는 것 아닙니까? 당신이야말로 제게 맞고 울지 마십시오. 질질 짜는 모습은 질색이니까요."

"…야!!"

그 형에 그 동생 아니랄까 봐 얄밉다!

알로스는 그간 크리스티앙에게 당한 설욕을 테른에게 대신 갚아주기 위해 기를 쓰며 달려들었고.

파앗! 퍼억!

테른의 저주 흑마법 및 검술의 연계에 꽥 하고 쓰러져 버렸다.

"어, 어째서? 아무리 괴물의 동생이라도! 이건 말도 안 돼!"

다시 덤볐지만, 결과는 비슷했다.

멜린이 크리스의 옆으로 다가오더니 말했다.

"테른 도련님이 어마어마하게 성장했군요. 알로스 도련님도 그간 많이 성장했는데 전혀 상대되지 않네요. 혹시, 대공자님이 지도하신 덕분인가요?"

"뭐, 반쯤은."

반은 크리스의 덕이고 반은 테른의 재능 덕이었다.

그간 크리스티앙은 틈틈이 편지를 보내 테른의 성장 방향을 잡아주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이런 빠른 성장을 할 수 있었던 건 아니다.

'테른은 저주 분야의 적성자니까.'

적성자(適性者)는 천재와 비슷하면서도 살짝 다르다.

전체적인 재능 자체는 도리어 범재와 비슷하다.

오성이 뛰어난 것도 아니며, 번뜩이는 감각을 지닌 것도 아니다.

대신, 해당 분야에 국한해 특별한 '축복'을 받는다.

지능이 뛰어난 것도, 센스가 좋은 게 아님에도, '축복'의 영향으로 누구보다도 쉽고 빠르게 해당 분야를 숙달한다.

그것도 완벽하고 뛰어나게.

마치 아이가 성장하며 자연스레 기고 걷는 법을 익히게 되는 것과 비슷했다.

그래서 적성자는 제대로 성장하기만 하면, 해당 분야에 한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대가(大家)가 될 수 있다.

'물론, 적성자 모두가 그렇게 성장하는 건 아니지. 제대로 꽃피우지 못하고 묻히는 적성자도 많으니까.'

적성자가 성장하려면 이끌어주는 스승의 역할이 굉장히 중요했다.

적성자의 배움과 성장은 일반인과 다르니까.

범재는 말할 것도 없고, 천재라 불리는 이와도 다르다.

앞서 말했듯, 그들에게 해당 분야를 익히는 건, 공부나 수련이라기보다는 자연스러운 '성장'에 가까웠다.

이 차이를 대다수가 이해하지 못하고, 섣부른 재촉과 강압으로 적성자의 성장을 도리어 방해하고 심하면 재능을 짓밟게 된다.

'재능을 순조롭게 개화하지 못하면, 적성자는 어느 순간 축복을 잃게 되니.'

그런 면에서 크리스는 최고의 스승이었다.

그는 이전 삶 여러 차례 적성자를 만난 적이 있었고, 그들의 특성을 완벽히 이해하고 있었다.

'테른 놈도 제대로 키워야지. 생각보다 성장이 빨라 조만간 호구로 부려먹을 수 있을 것 같으니.'

"이겼습니다, 형님!!"

테른은 알로스를 때려눕히고 형한테 인정받고 싶어 하는 동생처럼 의기양양하게 크리스를 보았고, 크리스는 테른을 호구로 삼을 생각에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저랑도 한판 하시죠."

"지금?"

"뭐, 쉬는 중 아닙니까?"

멜린이 맹수처럼 웃으며 검을 꺼내 들었다.

크리스는 피식하고는 마주 검을 겨누었다.

"이번엔 조금 오래 버텨주라고."

파앗!

검과 검이 마주쳤다.

그렇게 막간의 시간이 흐른 후, 크리스티앙 일행은 목적지에 도착했다.

진록성(鎭綠城).

극독 마가 본가였다.

* * *

극독 마가 본가인 진록성은 특이하게 영지민들이 머무는 성에 붙어 있는 게 아닌, 깊은 수림 지역에 동떨어져 자리하고 있었다.

독극물에 일반 백성들이 피해를 입게 하지 않기 위해서였는데, 성이란 이름과 다르게 성벽은 존재하지 않았고, 대신 짙은 녹색 빛을 머금은 나무들이 성벽처럼 가문을 감싸고 있었다.

'어차피 가문 안에 온갖 독진 및 함정이 준비되어 있으니 성벽은 필요 없지.'

저 커다란 영역 전체가 독진 및 함정의 집합체라고 봐도 좋았다.

한 발짝이라도 잘못 내디디면 곧바로 목숨을 잃게 되는.

그때, 극독 마가의 대문이 열리며 한 인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극독 마가에 온 것을 환영하네, 크리스티앙 대공자."

크리스티앙의 눈이 커졌다.

마치 학자처럼 부드러운 인상의 미남자.

8성의 마군주이자, 극독 마가의 가주인 후암 공작이었다.

가주가 직접 마중을 나온 거다!

"공작 전하를 뵙습니다."

"그래, 먼 길 오느라 고생했네."

친근한 어조.

당연했다.

현재 크리스티앙은 후암 공작과 한배를 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으니까.

"자네가 해낸 일은 들었네. 설마 그렇게나 전격적으로 본가를 공격할 줄이야."

"피를 흘린 건 죄송합니다."

"아니네. 그들은 독인으로서 해서는 안 될 짓을 저질렀으니, 응당 벌을 받는 게 마땅하지. 자네가 아니었다면, 내가 단죄하려고 했을 걸세."

후암 공작은 자조적으로 말을 이었다.

"비록 힘은 부족하지만 말이야."

크리스는 입을 다물었고, 후암 공작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괜한 이야기를 했군. 그나저나 정말 괜찮은 건가? 마왕께서 이 협상을 중재한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는 알고 있지?"

크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고라스 후작과 청류의 마왕이 밀월 관계임은 짐작하고 있습니다."

"그래. 마왕께서는 분명 부가주, 고라스 후작의 손을 들어줄 거네. 그뿐 아니라, 고라스 후작은 이미 자네와 마리사를 모함할 준비를 다 끝내놓았어."

하지만 크리스티앙은 전혀 염려의 기색을 내비치지 않고, 도리어 이렇게 말하였다.

"괜찮습니다. 아니, 오히려 좋습니다."

제196화

좋다니.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대답.

하지만 진심이었다.

고라스 후작의 이런 수작들은 되레 크리스티앙을 도와주는 일이었으니까.

"…도대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건가?"

"뭐, 대단히 거창한 건 아닙니다. 어차피, 모두의 앞에서 고라스 후작의 죄를 증명하기만 하면 되는 거니까요. 간단하죠."

도대체 뭐가 간단하다는 건지 모르겠어서 후암 공작은 헛웃음을 흘렸다.

"단, 하나만 미리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무엇인가?"

"전 이번 협정에서 고라스 후작을 무릎 꿇릴 겁니다. 단, 그 과정에서 공작 전하를 불편하게 할 일을 할 것이니, 미리 양해를 구하겠습니다."

후암 공작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인가? 자세히 설명해줄 수 있겠나?"

크리스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낮게 입을 열었다.

설명을 듣는 후암 공작의 눈이 곧 찢어질 듯 커졌다.

이후, 협정이 막을 올렸다.

장소는 극독 마가에 따로 마련된 커다란 홀이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미리 자리하고 있던 수많은 마인의 시선이 크리스티앙에게 꽂혔다.

대다수가 고라스 후작 일파인지, 적대적인 기세가 크리스티앙을 짓눌렀다.

호위로 함께 들어온 카자르 백작과 흑사자 기사단의 베르켈 백작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지만, 크리스는 그저 어깨만 으쓱해 보였다.

'숫자로 내 기를 눌러보려는 건가? 귀여운 수작이군. 뭐, 잘됐지.'

크리스티앙은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이제 곧 내가 할 일을 생각하면, 관객은 최대한 많을수록 좋으니까.'

고라스 후작은 모르고 있으리라.

크리스가 극독 마가를 협정 장소로 정한 건 극독 마가의 마인들을 곧 있을 일의 관객으로 삼기 위해서라는 것을.

'자기 안방에서 수하들 앞에서 당하는 치욕이야말로 최고로 수치스러운 것 아니겠어?'

크리스티앙은 여유로운 동작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곧 한 인물과 마주하게 되었다.

뱀 같은 인상의 싸늘한 남자.

고라스 후작이었다.

'대단한 기운이군.'

크리스티앙은 저릿하게 느껴지는 기운에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확실히 후암 공작보다 몇 수는 위의 존재로 보였다.

은근히 크리스티앙을 압박하려는 듯 기세가 흘러나왔다.

본능적으로 몸이 떨리려 했지만, 크리스티앙은 신체 반응을 조절해 반응하지 않았다.

'무서운 척해봐야, 여기서 아무런 짓도 못 한다는 걸 알고 있거든?'

버티는 것에 그치지 않고, 비웃음을 지어 보였다.

"과연, 극독 마가의 부가주의 위세가 대단하긴 하군요. 얼마나 위세가 높은지, 극독 마가의 부가주께서는 곧 오실 마왕 전하마저 아랑곳하지 않으시나 봅니다."

"!!"

고라스 후작은 흠칫하였다.

아직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청류의 마왕이 주관하는 자리에서 힘을 끌어 올린 건 청류의 마왕을 무시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는 행위였다.

본막이 시작하기도 전에 한 방 먹은 셈.

"...."

고라스 후작은 대꾸하지 않고 휙 시선을 돌렸다.

크리스티앙도 어깨를 으쓱한 후, 입을 다물었다.

이제 곧 나타날 인물에게 정신을 집중한 거다.

째깍, 째깍,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시계의 시침이 정확히 정시를 가리키는 순간이었다.

장내에 이변이 일어났다.

소리가 없어졌다.

소리뿐이 아니었다.

미세한 바람의 움직임, 수풀의 흔들림, 사람들의 동작까지 멈추었다.

'이건?'

한발 늦게 사람들의 등줄기에 소름이 오소소 올라왔다.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았건만, 압도적인 존재감이 장내를 뒤덮었다.

이어서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파아아앗.

장내의 전경이 변하였다.

실내 협상장의 모습이 잿빛 전경으로 뒤바뀌었다.

"화, 환영?"

"뭐지?"

마인들이 당황해 외쳤다.

이 현상의 정체를 알고 있는 일부 인물들만 당황하지 않고 침음을 삼켰다.

'이건 고작 환영 따위가 아니야.'

크리스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생각했다.

'9성의 권능. 창세(創世) 강림.'

자신만의 작은 세상을 만드는 9성 초월지경의 권능이었다.

황량한 수풀 위로 말라비틀어진 세계수가 치솟았고, 그 위로 한 인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전신이 얇은 쇠사슬에 촘촘히 꿰뚫린 섬뜩한 외양의 아름다운 요정 여인.

장내의 모두가 그녀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마왕 전하를 뵙습니다!!"

청류의 마왕의 등장이었다.

* * *

청류의 마왕은 잠시 말없이 무릎 꿇은 이들을 내려다보았다.

크리스는 고개를 숙인 채 주먹을 움켜쥐었다.

'저게 청류의 마왕.'

그녀와는 첫 대면이었다.

청류의 마왕은 이전 삶에서 멸망의 시대가 오기 전에 사망하니까.

'이런 수준의 창세 강림이라니.'

크리스는 9성을 처음 만나는 게 아니었다.

늘 같이 다니던 용사 에반이나 대마법사 라냐도 9성이었으니까.

그 외에 연합의 칠존 여러 명과도 안면이 있었다.

그래서 대략적으로 9성끼리 비교를 할 수가 있었다.

'9성 중에서도 상위에 가까운 존재야.'

9성이라도 다 같은 9성이 아니었다. 9성 사이에도 힘의 격차가 컸다.

단적인 예로 과거 사혈의 마왕은 연합의 9성 초인들인 칠존 중 네 명을 홀로 상대해 승리한 적도 있을 정도였다.

'예상보다 훨씬 강한 힘이야. 고작 서열 7위인데 저 정도의 수준이라니.'

무겁게 생각하는 이유가 있었다.

크리스는 남방 마도국에 일어날 파란을 모조리 해결할 계획이고, 결국 배후인 청류의 마왕과 맞서게 될 거다.

그의 일차적 목표인 암흑 연맹의 결성은 청류의 마왕의 목을 벰으로 완성될 테니까.

'물론 계획이 있긴 하지만,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일이 훨씬 어렵겠어.'

그때 청류의 마왕의 음성이 들렸다.

[다들 고개를 들도록. 협정을 시작하겠다. 양 가문의 대표는 앞으로 나오도록.]

크리스티앙과 고라스 후작이 앞으로 나섰다.

청류의 마왕은 세계수에 나른하게 기대어 앉으며 곰방대를 입에 물었다.

[각자 주장하는 바를 이야기해 보도록. 양측의 이야기를 모두 들어보고 결정을 내리겠다.]

먼저 크리스티앙이 자신이 밝혀낸 전말을 이야기했다.

고라스 후작 일파에서 암흑 마가의 서쪽 영지에 독을 살포했으며, 이에 관한 증거를 확보했다고.

"모두 거짓입니다."

고라스 후작이 싸늘하게 반박했다.

"이 일은 암흑 마가의 크리스티앙 대공자와 본가의 마리사 공녀의 자작극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근거가 있는가?]

"물론입니다. 일단, 마리사 공녀가 이번 일을 획책했다는 증거들입니다."

고라스 후작은 여러 서류와 증인들을 동원했다.

원래부터 그는 이번 일의 책임을 마리사에게 덮어씌우려고 했던바, 증거들은 흠잡을 데가 없었다.

[크리스티앙 대공자가 자작극을 벌였다는 주장의 근거는 무엇이지?]

"크리스티앙 대공자는 소신을 따르는 가신들에게 죄를 덮어씌우기 위해 증거를 조작했습니다. 이에 대해서도 증인을 확보했습니다. 앞으로 나오게 하도록."

곧 사색이 된 인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한 얼굴이었다.

"읍읍!!"

단정한 인상의 미인, 루이나였다!

'…쟤는 왜 저기서 저러고 있는 거야?'

크리스는 얼떨떨한 얼굴을 했다.

설마 루이나가 잡혔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조심 좀 하지.'

루이나가 들으면 속이 터지다 못해 환장할 말이었다.

하지만 크리스는 정말로 루이나가 잡힐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실제 증거를 조작한 밑 선이 잡힐 거로 생각했는데.'

그래서 크리스는 일부러 사기 범죄 이력이 있는 나쁜 놈들을 통해 증거를 조작하도록 부탁했다. 극독 마가에 잡혀 고초를 당해도 상관없게.

그런데 어쩌다가 루이나가 잡힌 건지.

'뭐, 내 잘못은 아니지.'

루이나가 자신을 원망스럽게 바라보는 걸 보며 크리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이건 조심하지 않은 쪽의 잘못이라고. 난 정말 루이나를 고생시킬 생각이 없었으니.'

어쨌든 뭐, 크게 걱정할 건 없어 보였다.

특유의 수완을 발휘한 덕에 고초를 당하지는 않았는지, 몰골이 멀쩡했다.

'잡히자마자 다 불었나 보군.'

역시나 루이나.

의리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과연, 재갈을 풀자마자 루이나는 이렇게 외쳤다.

"모두 저 크리스티앙 악마 놈이 시킨 일입니다!! 전 그저 시킨 대로 한 죄밖에 없습니다!"

"...."

"크리스티앙 죽일 놈!! 극독 마가 만세!! 고라스 후작 각하 만세!! 청류의 마왕 전하 만세!!!"

거기에 루이나는 누가 추궁하지도 않았는데, 크리스티앙의 명에 따라 어떻게 증거를 조작한 건지 끝없는 자백을 이어갔다.

"충성충성충성!!"

그 방정스러운 모습에 고라스 후작은 인상을 찌푸리며, 다시 재갈을 물리게 했다.

"이렇게 증거가 명백한바, 마리사 공녀와 크리스티앙 대공자는 서로 손을 잡고 소신을 모함하려 한 게 분명합니다."

고라스 후작이 차가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특히 민간인을 학살하려고 했던 건 용서받을 수 없는 대죄. 공명정대한 마왕 전하께 청하거니와 마리사 공녀와 크리스티앙 대공자 모두 극형에 처할 것을 요청합니다."

장내의 시선이 크리스티앙에게 향했다.

이대로라면 꼼짝없이 죄를 덮어쓰게 될 상황.

그런데 크리스가 뜻밖의 발언을 하였다.

"이의 있습니다. 저 여인을 어떻게 믿는단 말입니까?"

눈치를 보니 루이나는 자신이 루돌프 & 디어, 양 상단의 상단주란 것까지는 들키지 않은 것 같다.

원래 마도 제국에서는 '천의 가면' 유물을 이용해 남자의 몸으로 활동했으니까.

크리스가 삐딱하게 말했다.

"극독 마가 측의 사주를 받아 거짓 증언을 하는 것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생긴 것만 봐도 딱 사기꾼 같지 않습니까?"

"읍읍, 아닙니다! 모두 크리스티앙 저 나쁜 놈이 시킨 게 맞습니다!! 극독 마가 만세! 고라스 후작 만세!! 청류의 마왕 전하 만세!!"

"저 경박한 태도를 보십시오. 발언을 신뢰할 수 없습니다."

루이나는 속이 터질 것 같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때, 고라스 후작이 말했다.

"확인 결과, 저 여인의 증언은 모두 사실이다. 그런 근거 없는 부정은 오히려 본인에게 불리하게 작용한다는 사실을 모르는가?"

카자르 백작을 비롯한 암흑 마가의 인물들도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크리스티앙이 증거를 조작했음은 명명백백한 사실이다. 저렇게 부정해봤자 전혀 소용이 없을 텐데?

하지만 크리스티앙은 계속해서 이해할 수 없는 주장을 이어갔다.

"저 증인의 증언을 신뢰할 수 없으니 위대한 마왕 전하께 청합니다. 극독 마가의 '진실의 자백단(自白團)'의 사용을 허가해 주십시오."

순간, 장내에 소란이 일었다.

진실의 자백단은 무려 7성의 '이적 독약'이었다.

이름처럼, 진실을 말하도록 강제하는 독약이었는데, 고통을 주어 강제로 입을 열게 하는 고문 독약과는 완전히 종류가 달랐다.

'이적'을 통해 복용한 자가 진실을 말했는지 판별해, 만약 거짓을 말했을 경우 그대로 핏물로 녹여버린다.

여기서 핵심은 발언의 진위를 판별하는 것.

법칙에 간섭해 진실을 완벽히 구별해내기 때문에, 자백단을 먹은 이는 어떤 거짓도 말하지 못하게 된다.

"진실의 자백단은 본가의 보물. 함부로 쓸 수 있는 게 아니다."

고라스 후작이 불쾌하다는 듯 말하자, 크리스는 피식 비웃음을 지었다.

"극독 마가 측은 이번 일이 가볍게 느껴지나 보구려. 무려 수천 명의 죄 없는 백성이 살해당할 뻔했는데 말이오."

고라스 후작은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크리스티앙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고라스 후작 입장에서는 나쁠 것 없는 제안이었다.

루이나에게 진실의 자백단을 쓰면, 크리스티앙이 증거를 조작했다는 사실이 더욱더 명확해질 테니까.

제197화

"전하, 잠시 통로를 개방해 주시겠습니까? 본가의 비고에서 진실의 자백단을 가져오도록 하겠습니다."

[좋다.]

곧 극독 마가의 고위 마인이 자백단을 모아놓은 함을 가져왔다.

그런데 크리스가 또 이상한 딴지를 걸었다.

"잠깐. 그 약들이 진실의 자백단인지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하.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트집을."

"부디 청컨대, 마왕 전하께서 이 약들이 진실의 자백단이 맞는지 판별해 주십시오."

이 상황이 재밌다고 여긴 걸까?

청류의 마왕은 웃음을 흘렸다.

[좋다.]

휙, 손짓과 함께 자백단이 담긴 함이 청류의 마왕의 앞에 나타났다.

간단해 보이지만, 공간을 다루는 권능을 발휘한 거다.

[흐음. 이 함에 담긴 약들 모두 진실 판별의 이적이 담겨 있는 게 맞도다.]

"외람되지만, 가장 위대한 존재, 마황 폐하의 이름 앞에 맹세해 주십시오."

[!!]

모두가 숨을 들이켰다.

청류의 마왕의 시선도 낮게 가라앉았다.

[날 신뢰하지 못한다는 거냐?]

장내에 얼어붙은 듯한 기세가 내려앉았다.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할 압박감이 짓눌렀지만, 크리스는 꿋꿋이 말을 이었다.

"그런 게 전혀 아닙니다. 도리어 반대입니다."

[반대라고?]

"네, 그렇습니다. 마왕 전하께서 손수 판별하였음에도 혹시나 판별 결과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무뢰배들이 나올까 봐, 미리 확실히 쐐기를 박는 게 옳을 듯하여 청하였습니다."

크리스는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이번 일은 무려 마황 폐하의 신민들을 학살하려 한 극악무도한 사건. 진실을 밝히기 위해 판결 과정에 어떤 빈틈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외람된 청을 드린 건데, 불쾌하셨다면 사죄드립니다."

청류의 마왕은 헛웃음을 흘렸다.

[말은 잘하는구나.]

"...."

[그렇게까지 말하니, 좋다. 마황 폐하의 이름을 걸고 이 자백단이 진짜임을 맹세하지. 단, 명심해라. 네가 정말로 이번 일을 주동했다면, 절대 가벼운 벌로 끝나지 않을 테니. 암흑 마가도 널 지켜주지 못할 거다.]

서슬 퍼런 경고.

다들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크리스티앙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왜 저런 제안을?'

지금 크리스티앙이 하는 행동들은 전혀 자신에게 유리한 것들이 아니었다.

루이나는 꿀꺽 진실의 자백단을 삼키더니, 다시 불처럼 한 맺힌 증언을 토했다.

"정말 크리스티앙 저 나쁜 놈이 시킨 게 맞습니다! 정말 진실입니다! 고라스 후작 각하 만세!! 청류의 마왕 전하 만세!! 충성충성충성!!"

그렇게 말했음에도 어떤 이상 반응도 없었다.

실제 진실이란 뜻.

[저 증인의 발언은 위증이 아니구나. 더 변명할 할 말이 있느냐?]

청류의 마왕의 싸늘한 물음에 크리스티앙은 어깨를 으쓱했다.

"사실, 증거를 조작한 게 맞긴 합니다."

[죄를 인정한다는 뜻이냐?]

"물론, 그건 아닙니다. 제가 증거를 조작했던 건, 고라스 후작의 죄를 단죄하기 위해서였을 뿐이니까요."

절대 받아들여지지 않을 주장이었다.

청류의 마왕이 판결을 내리려는 순간이었다.

"아, 저도 증인 한 명을 대동해도 되겠습니까?"

[증인?]

"네.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일이 고라스 후작 측의 음모라는 걸 증언해줄 증인이 있어서 말입니다."

장내의 모두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곧이어 복면을 쓴 한 인물이 앞에 등장했다.

극독 마가의 일부 마인들이 증인의 정체를 눈치채고 눈을 크게 떴고.

크리스가 복면을 벗기자, 잔뜩 겁에 질린 청년의 얼굴이 나타났다.

"극독 마가의 휴버트 대공자입니다."

"!!"

"휴버트 대공자는 고라스 후작의 명에 따라 마리사 공녀와의 친분을 이용해 독을 유출했으며, 마리사 공녀에게 누명을 씌우기 위해 증거를 조작했습니다. 내가 한 말이 맞나, 휴버트 대공자?"

휴버트 공자는 입술을 질끈 깨물더니 떨리는 동작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렇습니다. 모두 제가 한 일입니다."

장내에 놀람이 퍼졌다.

휴버트는 마리사와 배가 다르긴 했지만 같은 아버지를 둔 남매로, 서로 우애가 좋기로 유명했다.

그런데 뒤에서 이런 짓을 벌이다니?

'모두 가면이었지.'

휴버트는 못난이 대공자였다.

부족한 재능으로 인정받지 못해 다른 혈육에게 늘 타박받는 게 일상인.

반면, 동생인 마리사는 서출이었음에도 독성학(毒性學)에 탁월한 재능을 인정받아 나름의 입지를 쌓고 있어 그녀에게 열등감을 품고 있었다.

'자신을 핍박하던 다른 혈육들에게는 찍소리도 못 하고, 만만한 동생한테나 앙심을 품은 못난 놈이지.'

크리스는 혀를 찼다.

단순히 억하심정만 품은 게 아니다.

휴버트는 아버지를 배신하고 자신만 살아남기 위해 고라스 후작의 손을 잡았다.

'마리사는 고작 이런 놈 때문에 상처 입다니.'

크리스는 힐끗 마리사가 앉아 있는 쪽을 보았다.

마리사는 딱딱하게 얼굴을 굳히고 있었다.

미리 크리스에게 귀띔을 들은 뒤라 놀란 기색은 없었다.

다만, 믿던 오라비에게 배신당한 심정이 어떨지는 말할 것도 없었다.

"휴버트 대공자의 증언대로 이 모든 건, 고라스 후작이 마리사 공녀와 절 음해하기 위한 짠 계략입니다."

"인정할 수 없습니다."

고라스 후작이 차갑게 고개를 저었다.

"휴버트 대공자의 상태를 보십시오. 흑마법적 수법으로 심령이 제압당한 게 분명합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마리의 정신 공격에 시달린 탓에 반쯤 제정신이 아니었고, 실제로 자백을 강제하는 저주 흑마법도 걸어 놓았으니까.

하지만 애초에 휴버트가 이런 모습을 보이게 한 건, 크리스가 의도한 연출이었다.

"못 믿겠으면 '진실의 자백단'을 사용해 보지요."

"!!"

"진실의 자백단을 쓰면, 휴버트 대공자가 진실을 말하는지 아닌지 알 수 있을 것 아닙니까?"

고라스 후작은 주춤하였다.

자백단을 먹으면, 휴버트의 증언이 진실임이 밝혀진다.

'반대해야.'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는 뒤늦게 크리스티앙이 아까 자백단을 쓰자고 한 이유를 깨달았다.

이 일을 위한 밑밥이었던 거다!

만약 다짜고짜 휴버트에게 진실의 자백단을 먹이자고 했으면, 고라스 후작은 어떤 핑계를 대서든 반대했을 거다.

하지만 이미 앞서 한차례 진실을 판별하기 위해 진실의 자백단을 사용했으니,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심지어 자백단의 진위를 청류의 마왕이 인정하기까지 했으니, 누구도 자백단의 효과를 부정할 수도 없었다.

외통수에 빠진 거다.

"거짓임이 명확한데, 불필요하게 진실의 자백단을 사용할 이유는 없소."

고라스 후작이 어떻게든 위기를 모면하려고 말했으나, 한 인물이 끼어들었다.

"부가주의 말은 납득할 수가 없구려."

"!!"

"극독 마가의 가주인 내가 판단하기에 지금이야말로 가장 진실의 자백단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생각되는데."

그간 가만히 있던 후암 공작이었다!

후암 공작이 무겁게 가라앉은 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휴버트 대공자의 앞으로.

"아, 아버지."

찰나, 아들에게 배신당한 실망감, 괴로움이 후암 공작의 눈가를 스쳐 지나갔고.

"먹어라."

진실의 자백단을 내밀었다.

휴버트 대공자는 덜덜 떨리는 몸으로 꿀꺽 약을 삼키고는 입을 열었다.

"…제, 제가 한 말은 모두 진실입니다. 부가주인 고라스 후작의 명에 따라 마리사의 약을 유출했고, 모함할 증거를 조작했습니다."

진실이었다.

장내에 경악이 퍼졌다.

죄가 확정되는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이, 이건."

고라스 후작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크리스는 피식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또 무슨 거짓을 말하려는 건지 궁금하군요. 단, 입을 신중히 여는 게 좋을 겁니다. 휴버트 대공자가 복용한 자백단을 보증한 분은 바로 마왕 전하이시니까요. 무려 마황 폐하의 이름을 걸고서."

그렇다.

무려 마왕이 마황의 이름을 걸고 한 보증이니, 누구도 진실의 자백단의 효과를 부정할 수 없었다.

심지어 청류의 마왕 본인이라고 하더라도.

고라스 후작은 어떤 말도 못 하고 입을 다물었고, 크리스는 청류의 마왕을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마왕 전하께 청합니다. 고라스 후작은 자신의 사사로운 욕심으로 마황 폐하의 백성들을 해하려고 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 거짓으로 마왕 전하와 마황 폐하를 능욕하려고 하였습니다."

[!!]

"이는 모두 용서받을 수 없는 대죄. 고라스 후작에게 마땅한 극형을 내려주시길 청하옵니다."

장내의 모두가 침을 꿀꺽 삼켰다.

특히 고라스 후작의 측근들은 하얀 안색을 하였다.

'마왕께서 판결을 내리시면, 아무리 고라스 후작 각하라도 따르지 않을 도리가 없어.'

문제는 고라스 후작이 저지른 죄가 보통 무거운 게 아니란 거다.

특히 크리스티앙은 교묘하게 재판 내내 고라스 후작이 마황에게 죄를 범했음을 강조했다.

아무리 청류의 마왕이 고라스 후작의 편을 들어주려고 해도, 마황의 이름이 거론된 이상 가볍게 넘어갈 수가 없었다.

잠시 장내에 정적이 흘렀고.

[대단하구나.]

"!!"

청류의 마왕이 싱긋 미소를 지었다.

[크리스티앙 대공자, 그대 덕분에 제대로 된 진실을 밝힐 수 있었어. 마황 폐하께서도 그대의 공을 들으면 기뻐하실 거다.]

뜻밖의 칭찬.

아니, 칭찬이 아니다. 무언가 수작을 부리려는 거다.

과연, 청류의 마왕은 이렇게 말했다.

[다만, 곤란하구나. 고라스 후작은 극독 마가의 부가주로서 그간 마황 폐하를 위해 많은 노고를 다해온 충신이니. 크리스티앙 대공자, 그대는 고라스 후작에게 어떤 벌을 내리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가? 그대라면 분명 현명한 결정을 내리리라고 믿네.]

크리스티앙에게 처벌을 결정하라는 이야기!

다만, 청류의 마왕은 단서를 붙였다.

고라스 후작이 극독 마가의 부가주로서 쌓은 공을 고려하라고.

즉,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라는 뜻이었다.

암흑 마가 입장에서는 분통이 터지는 이야기였으나, 크리스는 뜻밖에 씨익 미소를 지었다.

'오히려 좋지. 청류의 마왕이 대충 이런 비슷한 수작을 부릴 거라고는 짐작하고 있었으니까.'

어차피 고라스 후작에게 정말 극형을 내리게 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괜찮았다.

대신, 커다란 타격을 줄 벌을 내리면 되니까.

크리스는 입을 열었다.

"마왕 전하의 말씀대로 고라스 후작은 그간 마황 폐하를 위해 많은 노고를 다했으니, 극형을 내리기는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됩니다. 대신, 다른 벌을 내리길 요청합니다."

[무엇이지?]

"일단, 첫째로 고라스 후작을 6개월간의 참회형에 처해줄 것을 청합니다."

장내가 다시 술렁였다.

구금형의 일종이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명칭처럼 죄를 참회하라는 의미로 일체의 외부와의 교류가 차단된다.

"저지른 죄를 생각할 때, 이 정도는 아주 가벼운 징벌이라 할 수 있겠지요."

고라스 후작은 이를 악물었다.

사실, 다른 이들이라면 이 참회형이 큰 문제가 될 건 없었다. 기간도 6개월로 길지 않으니까.

하지만 고라스 후작은 달랐다.

'내가 고립되어 있는 사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고라스 후작은 철저한 공포로 극독 마가의 마인들 위에 군림하고 있었다.

그런데 6개월이면 균열이 일어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거절할 수는 없었다.

원래라면 극형을 받아 마땅한 죄였으니까.

[그걸로 끝인가?]

"아니, 당연히 아닙니다. 당연히 더 남았습니다."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제198화

[…무엇이지?]

크리스는 고라스 후작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둘째로 고라스 후작이 직접 저와 마리사, 그리고 암흑 마가를 향해 고개 숙여 사죄하도록 해 주십시오."

"!!"

"이 자리에서요."

극독 마가의 최고 권력자인 그에게 고개를 숙이라니. 그것도 모두가 보는 앞에서.

고라스 후작의 얼굴에 핏기가 사라졌다.

그의 음성이 무저갱처럼 가라앉았다.

"네놈이… 죽고 싶은 거냐? 감히 헛소리를."

"헛소리라고?"

크리스의 얼굴이 싸늘해졌다.

"네놈이야말로 암흑 마가의 분노가 우스워 보이는 거냐? 감히 본가에 그딴 죄를 저질러놓고 목소리를 높여?"

"...."

"잊지 말아라. 난 암흑 마가를 대표하여 이 자리에 나와 있는 거야. 네놈이 죄를 뉘우치는 마음으로 충분한 성의를 보이지 않을 경우, 협상은 결렬이며, 네놈과 극독 마가는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크리스는 이번에는 청류의 마왕을 향해 말했다.

"분명히 말하지만, 고라스 후작이 제대로 된 사죄를 하지 않을 경우, 우리 암흑 마가는 이 협상을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또한, 고라스 후작이 마황 폐하께 저지른 죄를 중앙에 정식으로 알려 공론화하도록 하겠습니다."

장내가 고요해졌다.

고라스 후작의 손이 분노로 파르르 흔들렸다.

당장에라도 크리스를 한 줌의 핏물로 만들려는 듯한 흉흉한 시선.

하지만 크리스는 마주 오연한 시선을 보낼 뿐이었다.

그때, 크리스의 어깨에 힘을 실어주는 손길이 있었다.

"우리 극독 마가의 가훈을 잊지 마시오, 부가주. 독을 다루지만, 하늘에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는."

"!!"

"특히 크리스티앙 대공자는 부가주에게 자비를 베풀고 있으니, 마땅히 사죄하고 감사하는 모습을 보이는 게 옳소."

후암 공작이었다!

고라스 후작은 이를 바득 갈았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명분은 크리스티앙에게 있었으니까.

결국, 고라스 후작은 이를 바득 갈며 입을 열었다.

"…마리사 공녀와 그대, 암흑 마가에 사죄하오."

장내에 커다란 경악이 퍼졌다.

모두에게 공포로 군림하던 고라스 후작의 사죄라니. 충격이 모두를 휩쓸었다.

그런 극독 마가 마인들의 시선에 고라스 후작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모습이 보였다.

수많은 이들 앞에서 수치를 보였다는 모멸감에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하지만 크리스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걸 사과라고 하는 건가? 한 가문의 부가주나 되어서 사과하는 법도 제대로 모르나 보군. 아니면, 전혀 뉘우치지 않고 있거나."

"!!"

"만약 정말 진심으로 뉘우치는 게 맞다면, 그에 맞는 제대로 된 사과를 해. 아니면, 우리 암흑 마가도 당신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을 테니."

모두가 숨을 들이켰다.

고라스 후작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당장에라도 터질 듯한 긴장감이 흘렀지만, 크리스티앙은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백기를 든 건 고라스 후작이었다.

크리스티앙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이번 일에 대해 진심으로 사죄하오."

그 굴욕적인 모습에 아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충격이 퍼졌다.

심지어 크리스티앙은 고라스 후작의 체면을 끝까지 짓밟았다.

오만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말한 거다.

"이번 일로 느끼는 게 많을 거라 생각하오. 특별히 자비를 베푸는 거니, 앞으로는 반성하는 마음으로 남은 인생이라도 똑바로 살도록 하시오."

"!!"

이 미친 도발에 고라스 후작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분노에 머리가 하얘져 전신을 덜덜 떠는데, 크리스티앙이 또 말하였다.

"잠깐. 또 있소."

"…뭐?"

"본가에 피해를 주었으니 배상해야 할 것 아니오? 배상금을 청구할 테니, 갚으시오. 단, 극독 마가의 공금이 아닌, 전액 당신의 사재로 내는 게 조건이오."

고라스 후작의 안색이 다른 의미로 하얘졌다.

천문학적인 배상금을 요구할 게 뻔했다.

막대한 부를 뒤로 축적한 고라스 후작이라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고라스 후작은 금전적으로 파산하게 될 거다.

'뼈아프겠지. 돈은 고라스 후작의 권력을 지탱해준 수단 중 하나일 테니.'

고작 돈이 뭐? 라고 말할 일이 아니다.

돈은 중요했다. 마도 제국에서도.

권력을 유지하는 건, 단순히 힘만으로는 불가능했으니까.

무슨 일이든 돈이 필요했다. 심지어 수하들의 충성을 유지하게 하는 데도 돈이 필요했다.

물론, 고라스 후작 정도의 존재면 돈이야 시간의 문제일 뿐 얼마든지 다시 모을 수 있긴 하지만, 단단하게 유지되던 권력의 기반에 균열이 생기는 건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것 역시 거절할 상황이 아니었다.

고라스 후작은 반드시 크리스티앙을 죽이겠다는 듯 섬뜩한 눈빛을 보냈고, 크리스는 그저 어깨만 으쓱했다.

'참회형이 끝나면 바로 날 죽이려고 하겠군. 뭐, 상관없지.'

고라스 후작이 형벌을 끝낼 때쯤에는 모든 게 변해 있을 거다.

'이번 일로 발판을 모조리 무너뜨려 놓았으니.'

고라스 후작은 공포로 극독 마가를 휘어잡았다.

공포에 짓눌린 극독 마가의 마인들은 감히 고라스 후작에게 저항할 생각을 못 했다.

그래서 크리스는 일부러 극독 마가의 모두가 보는 앞에서 고라스 후작에게 굴욕을 주었다.

오늘 일을 목격한 극독 마가의 마인들은 생각할 거다.

공포로 군림하던 고라스 후작도 사실 빈틈이 있는 인간일 뿐이라고.

더구나 참회형 때문에 6개월간 고립될 테니, 반기를 드는 이가 나와도 손을 쓸 방법이 없었다.

거기에 금전적인 파산까지.

고라스 후작의 권력은 커다란 타격을 입게 되리라.

크리스티앙은 이번 처벌로 고라스 후작의 아성에 커다란 지진을 일으킨 거나 다름없었다.

'정말 대단하군.'

한편, 극독 마가의 가주 후암 공작은 그런 크리스티앙을 보며 감탄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원래라면 이번 일은 모두 고라스 후작의 의도대로 풀렸을 거다.

암흑 마가는 커다란 타격을 입고, 마리사와 후암 공작은 죄를 덮어쓰고 몰락했을 거다.

하지만 크리스티앙 덕분에 모든 게 뒤집혔다.

처음 진상을 밝힌 것부터, 전격적인 기습으로 판을 뒤집은 것, 거기에 마왕을 상대로도 당당히 원하는 결과를 끌어낸 것까지.

어느 것 하나 대단하지 않은 게 없었다.

'암흑 마가가 부럽군.'

후암 공작은 씁쓸하게 생각했다.

아들이 자신을 배신한 뒤여서일까?

크리스티앙이 더욱 탐나 보였다.

'아니, 아직 완전히 늦지는 않은 건가?'

후암 공작은 은근한 눈빛을 보냈다.

마리사가 보였다.

믿었던 오빠에게 배신당했음에도 생각보다 충격이 커 보이지는 않았는데, 이유가 있었다.

크리스티앙이 마리사에게 진실을 알려줄 때, 마음을 다잡을 수 있게 해주었다고 한다.

'…둘이 다시 약혼 관계를 맺을 수 있으면… 아니, 이건 너무 성급한 생각이군.'

후암 공작은 겸연쩍은 얼굴을 했다.

원체 크리스티앙이 탐이 나 주책맞은 생각을 해버렸다.

'그래도, 나중에라도 기회를 봐서 가능하다면….'

거기까지 생각한 후암 공작은 고개를 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라스 후작에게 내릴 벌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번엔 후암 공작이 나설 차례였다.

'정확히는 이것도 크리스티앙 대공자가 떠올린 생각이지만. 정말 대단해.'

다시금 감탄하고는 입을 열었다.

"소신, 극독 마가의 가주로서 마왕 전하께 아뢸 말씀이 있습니다."

[무엇인가?]

"본 극독 마가는 마왕 전하의 충성된 종으로서 책무를 다하지 못하고 대죄를 저질렀습니다. 이에 커다란 사죄를 올립니다."

[되었다. 이미 판결은 끝났으니.]

청류의 마왕이 손을 내저었으나, 후암 공작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크나큰 아량에 감사드리오나, 소신, 이번 사태에 커다란 책임을 느끼는바, 극독 마가를 쇄신토록 하겠습니다. 이에 대한 첫걸음으로 이 자리를 빌려 마왕 전하께 극독 마가가 이전에 저지른 죄를 고하도록 하겠습니다."

[…극독 마가의 죄?]

"네. 비단 이번 일뿐 아니라, 지난 세월 동안 극독 마가가 저지른 죄들을 마왕 전하께 고하고 본가의 그릇된 점을 바로잡도록 하겠습니다."

극독 마가의 마인들.

정확히는 고라스 후작 일파의 마인들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후암 공작이 지금 무슨 '사고'를 치려는 건지 눈치챈 거다.

"자, 잠깐, 가주님. 지금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건…!"

"시끄럽다! 이는 모두 마왕 전하를 향한 충심이니, 다들 입을 다물어라!"

'마왕 전하를 위한 충심'이란 말에 모두 우뚝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청류의 마왕 본인도 뭐라고 후암 공작을 만류할 수가 없었다.

가주가 자신을 향한 충성의 마음으로 가문의 죄를 고하겠다는데 무슨 핑계로 막겠는가?

물론, 이건 모두 크리스티앙이 후암 공작에게 귀띔해준 수작.

이윽고 후암 공작의 입에서 폭탄 같은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본가의 로레 남작은 독의 개발을 위해 민간인들을 향해 인체 실험을 하였습니다. 이는 마왕 전하를 향한 대죄. 마왕 전하를 향한 충심의 마음으로 반드시 올바른 처벌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본가의 뤽 경은 민간의 여인들을 겁탈하고, 증인을 몰살시켰습니다. 이는 마왕 전하를 향한 대죄이니…."

"또한, 주르당 자작은…."

고라스 후작 일파는 자신의 권세를 믿고 안하무인격의 행동을 보여왔고, 용납할 수 없는 죄를 저지른 이들도 많았다.

하지만 고라스 후작의 위세 덕분에 어떤 처벌도 받지 않았는데, 이번 기회에 청류의 마왕을 이용해 모조리 일망타진하려는 거다.

"마, 말도 안 되는…!!"

"모두 거짓말입니다!!"

그때, 삐딱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간도 크네. 감히 마왕 전하의 앞에서 죄를 부정하려고 하다니."

"!!"

크리스티앙이었다.

그가 한없이 얄미운 표정으로 이죽거렸다.

"이미 증거가 다 있다고 하는데, 마왕 전하께 거짓을 아뢰다니. 설마 마왕 전하를 능멸하려는 건가."

마왕을 능멸.

부정하던 이들의 안색이 하얘졌다.

죽음으로도 씻지 못할 죄였다.

장내가 조용해졌고, 후암 공작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이상, 중죄를 저지른 13명을 마왕 전하의 이름으로 단죄토록 하겠습니다."

[…그래.]

저지른 죄의 무거움상 가벼운 벌로 끝날 가능성은 없었다.

13명 모두 고라스 후작의 중요한 측근이었으니, 마치 팔이 잘리게 된 것이나 다름없으리라.

심지어 언급된 이 중에는 고라스 후작의 큰아들도 있었다.

못난이 휴버트 대공자를 발아래로 보며 유력한 차기 가주로 꼽히는 유망주였는데, 이번 일로 커다란 타격을 입게 된 거다.

후암 공작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지금까지 고라스 후작에게 여러 벌을 내렸지만, 이게 가장 치명적인 상처를 줄 내용이었다.

"다시는 이토록 끔찍한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극독 마가가 완벽히 새롭게 거듭나도록 하겠습니다. 마왕 전하를 향한 충심으로 어떤 작은 썩음이라도 모른 척하지 않고 바로잡을 테니 지켜봐 주십시오."

고라스 후작의 일파가 숨을 들이켰다.

가문의 작은 썩음도 외면치 않겠다.

가문에 크고 작은 죄를 지은 이들을 벌주겠다는 뜻으로, 당연히 고라스 후작 일파를 겨냥한 이야기였다.

여기서 중요한 건, 마왕을 향한 충성을 명분으로 삼은 거다.

따르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심지어, 청류의 마왕 본인도 뭐라고 만류할 방법이 없었다.

다른 때라면 모르지만, 고라스 후작이 민간인 학살이라는 커다란 죄를 저지른 직후 아닌가?

그런 일이 재발하지 않게 자신을 위해 가문을 올바르게 바로잡겠다는데 무슨 핑계로 만류하겠는가?

상황의 허를 찔러 자연스레 마왕을 등에 업는 절묘한 한 수였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한 건지. 정말 크리스티앙 대공자는 대단해.'

후암 공작은 속으로 다시 크리스티앙에게 감탄했다.

이 모든 계책을 일러준 건 크리스티앙이었다.

덕분에 후암 공작은 고라스 후작 일파를 칠 전가의 보도를 쥐게 되었다.

심지어 이를 막아줄 고라스 후작은 참회형 때문에 가문을 떠나 있을 계획이다.

극독 마가의 권력 지형이 송두리째 바뀌리라.

모두 크리스티앙 덕분이었다.

'크리스티앙 대공자가 내 아들이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