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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 to 187

제178화

필립이 먼저 올라왔다.

"왜 혼자 왔어? 함께 덤비라니까?"

"닥치십시오!! 당신 따위, 나 혼자서도 충분히 짓밟을 수 있으니!"

필립은 놀라운 물건을 꺼냈다.

섬뜩한 낙인이 새겨진 지팡이.

마유물 '멸망의 오브'였다.

'흑마법의 파괴력을 증폭해주는 마유물이었지. 파괴 마가의 흑마법과 궁합이 맞는.'

유물을 알아본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상성이 맞는 유물을 사용하는 흑마법사는 상상을 초월하는 힘을 발현할 수 있다.

더구나 필립은 천재.

유물의 능력을 완벽하게 끌어낼 게 분명했다.

"후회해도 늦었습니다. 끔찍한 고통 속에서 내게 저지른 잘못을 속죄하게 해 주겠습니다."

파아아앗!!

오브에 새겨진 낙인이 시뻘건 빛을 뿜었다.

그리고 나타나는 화염.

어제 결투 때 펼쳤던 진강 주문이었다.

하지만 달랐다.

하얗게 타오르는 백염(白炎).

오로지 파괴의 성질만 가득한 멸망의 화염이었다.

결투를 보는 흑마법사들이 놀란 눈을 했다.

'유물의 힘으로 5성 진강 주문인 파멸의 화염을 6성 의념 주문인 백아의 화염으로 진화시켰어!'

물론, 진정한 6성의 의념 주문은 아니었다.

억지로 힘을 강화한 것일 뿐이니까.

그래도 위력은 6성 의념 주문에 필적할 거다.

'저 화염을 막는 건 불가능해!'

'피해도 소용없어! 저 화염은 목표를 놓치지 않아.'

살 방법은 하나였다.

화염에 휩싸이기 전, 패배를 인정해 상대의 자비를 구하는 것.

그런데 크리스티앙이 뜻밖의 반응을 보였다.

척 손을 올린 거다.

'설마 흑강기로 막아볼 생각인 건가?'

'무모한.'

사람들은 크리스티앙이 당연히 흑강기를 쓸 거라 생각했다.

암흑 마가는 결국 마투의 가문이니, 크리스티앙이 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도 흑강기였으니까.

하지만 크리스티앙이 꺼낸 건 강기가 아니었다.

손앞에 형상화되는 기다란 물의 창.

파괴 흑마법이었다.

'무슨?!'

'파괴 마가의 흑마법사에게 파괴 흑마법을 사용하려 하다니?!'

더구나 크리스가 펼친 건 고작 3성의 파괴 흑마법.

최고의 전문 흑마법사가 펼친 의념급 흑마법 앞에 아마추어가 초라한 식칼을 들고 맞서는 격이었지만.

"네가 파괴 마가의 천재라고 불린다고 했나? 고작 이따위로?"

"!!"

흔히들 착각하지만.

성취의 속도 따위는 천재의 기준이 아니었다.

'물론, 저놈은 고작 스물에 5성이니 성취의 속도로만 봐도 그렇게까지 빠른 것도 아니지만.'

크리스는 이전 삶 때 자신만큼은 아니어도 진짜 천재들을 본 적이 있었다.

그 '진짜'들과 눈앞의 놈은 비교할 수도 없었다.

"내가 진정한 천재가 어떤 존재인지 알려주지."

파아앗!

추가로 마법이 펼쳐졌다.

전격 파괴 마법.

바람의 칼날 마법.

마지막으로 그림자 마법이 물의 창날과 하나로 합쳐졌다.

무려 마법의 사중 중첩이었다.

네 가지 마법의 모든 술식을 해체해 서로가 충돌하지 않고 하나로 합치할 수 있게 해야만 가능한, 크리스만이 해낼 수 있는 기사.

손짓과 함께 창이 날아가기 시작했다.

목표는 백염의 핵.

"무슨… 닥쳐라!!"

노호성과 함께 백염의 위력이 증폭하였다.

그 순간, 크리스가 쏘아 보낸 얼음의 창이 믿을 수 없는 광경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우우우우우웅!!!

함께 깃든 바람이 순간적으로 창날의 속도를 가속시켰다.

찰나, 창날은 이미 백염에 파고들고 있었다.

당연히 산산이 파괴되었어야 했지만, 놀랍게도 창날은 무너지지 않았다.

창날에 깃든 그림자 마법 때문이었다.

'그림자는 물리적 공격을 무시하지.'

마법이란 술식이 현상으로 발현된 거다.

특히 저 백염은 화염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실제 화염이라기보다는 '파괴'의 의지가 불로 형상화된 것이다.

따라서 만약 술식이 얼음을 '그림자'로 인식하면, 파괴 현상은 일어나지 않는다.

크리스가 부여한 전격 마법은 그러한 술식의 혼란을 부추겼다.

전격 역시 불에 타지 않는다.

화염에 닿는 순간, 사방으로 전격이 튀며 술식의 혼동을 가중시켰다.

'물론 이게 정말 제대로 된 의념 주문이었다면, 이런 식으로 회피하는 게 불가능했겠지만.'

지금 필립이 발현한 마법을 의념 주문이라고 할 수 없는 건, 주문의 완성도 때문이었다.

유물로 주문의 파괴력만 강제로 올렸기 때문에 허점이 생기는 건 당연했다.

'차라리 자신의 실력에 맞는 진강 주문을 썼으면, 이렇게 쉽게 파고들지는 못했겠지.'

물론 불안정하다고 해봐야 미세한 틈 같은 것이었고, 다른 이들이었다면 파고드는 게 불가능했겠지만, 크리스에게야 뭐.

얼음의 창이 백염의 핵을 정확히 관통해 버렸고, 필립이 펼친 의념급 주문은 허무하게 소멸하여 버렸다.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필립이 충격에 파리한 안색이 되어 뒷걸음쳤다.

"말이 안 되긴. 못 믿겠으면 더 해봐. 나도 이대로 끝내긴 싱거우니."

필립이 연거푸 파괴 흑마법을 펼쳤다.

모두 마유물로 파괴력을 잔뜩 끌어 올린 의념급 주문들이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필립이 펼친 강대한 파괴 흑마법들은 크리스가 펼친 가벼운 흑마법에 번번이 무산되었다.

다들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흑마법의 대가가 미숙련자를 상대로 농락하고 있는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그것도 상대의 장기인 파괴 흑마법으로.

"커억!!"

결국, 필립은 무리한 힘을 사용한 대가로 왈칵 피를 토하며 무릎을 꿇었다.

그런 그에게 내리까는 듯한 음성이 들렸다.

"천재란 말이야. 너 같은 헛똑똑이를 말하는 게 아니라, 한계를 아무렇지도 않게 넘을 수 있는 이를 말하는 거야."

"!!"

"이렇게 말이야."

화르르르륵!!!

크리스티앙의 손에서 화염이 피어올랐다.

필립이 펼쳤던 진강 파괴 흑마법 '파멸의 화염'이었다.

몇 번 본 것만으로 흉내 낸 거다.

물론, 완벽하게 같지는 않았다.

아직 크리스티앙은 파괴 흑마법으로는 5성의 경지에 이르지 못했으니까.

제대로 된 '파괴의 진의'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신 자신만의 의지를 실어 개량해 펼쳤다.

하지만 그럼에도 부족하지 않았다.

도리어 '진의'를 제외한 다른 모든 부분은 필립이 펼친 것보다 더욱 훌륭했다.

완벽하리만큼.

"아…."

필립의 눈동자가 좌절로 물들었다.

그제야 필립은 깨달았다.

크리스티앙이 자신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진짜' 천재라는 것을.

크리스티앙이 거대한 벽처럼 느껴졌다.

절대로 넘을 수 없는 절망을 마주한 것처럼 필립의 눈동자의 빛이 완전히 죽어버렸고, 크리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마무리를 지을 필요도 없겠군. 치우도록. 아, 오줌은 싸지 말아라."

장내에 쥐 죽은 듯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방금 필립이 보인 힘은 결단코 약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냥 패배도 아닌, 완벽한 농락을 당해버렸다.

더욱 놀라운 건, 크리스티앙이 자신의 제대로 된 실력을 조금도 드러내지 않았다는 거다.

누누이 말하지만, 암흑 마가는 마투의 가문이다.

파괴 흑마법은 다른 흑마법들처럼 그저 보조로 사용할 뿐이다.

그런데 자기 장기도 아닌 파괴 흑마법으로 종가(宗家)의 천재를 농락해버린 거다.

크리스티앙은 딱딱하게 굳어 있는 삼각 연합의 대표들을 향해 말했다.

"너희는 뭐하나? 올라오지 않고. 설마 겁이라도 먹었나?"

"!!"

"생각해서 말해주는 건데, 너희는 한 번에 덤비는 게 좋을 거야. 물론, 그래도 내 상대가 되지는 못하겠지만."

장내에 또 다른 긴장이 흘렀다.

참고로, 마도 제국에서 가장 많은 전투를 치르는 번국은 의외로 사왕성 쪽이 아니었다.

삼각 연합이 있는 서방 마도국이었다.

연합의 세력 중 가장 호전적인 신성 제국이 옆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거울 빙궁과 광신 교단, 원탁까지 모조리 서쪽에 있었다.

삼각 연합의 세 가문이 친분이 두터운 건, 크루세이드 연합의 적들과 끝없이 함께 싸워온 덕.

그런 만큼 이들 세 가문이 힘을 합쳐 펼치는 합격술은 강력하기 그지없었다.

"방심하면 안 돼."

"성매(星?) 기사단장을 잡았던 때처럼 간다."

그들은 서로 손발을 맞춘 적이 자주 있었다.

특히 최근에는 신성 제국의 6성의 강자, 성매 기사단의 단장을 잡은 적도 있을 정도.

이들의 합격이 6성 마스터 클래스조차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하다는 뜻이다.

'그렇지 않아도 복수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는데, 스스로 목을 내밀어 주다니. 죽여주마.'

어제 크리스에게 끔찍한 치욕을 당했던 마수 마가의 공자가 이를 바득 갈았다.

"전위는 귀(鬼)가, 수(獸)인 내가 옆을 친다. 환(幻)이 놈을 무력화시키도록."

간단한 원리의 합격술이었다.

귀검이 상대를 막는다.

마수가 상대의 옆을 친다.

그사이 환영이 상대를 완전히 무력화시키는 거다.

간단하지만, 세 가문의 상성상 치명적이기 그지없는 합격.

"시작한다. 크르르르!!"

마수가 변신을 시작했다.

길게 늘어나는 송곳니와 발톱.

전신이 털로 덮이며 체격도 거의 1.5배로 커졌다.

라이칸스로프의 본체를 드러낸 거다.

극한으로 단련된 신체가 놈이 뒤에서 마수만 부리는 '조련사' 스타일이라기보다는 전면에서 함께 싸우는 마투 스타일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파앗!

마석이 깨지더니 안에 봉인되었던 마수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4마급 마수인 샤벨 울프였다.

마투를 위주로 하는 이답게 아주 높은 수준의 마수는 아니었다.

하지만 눈가에 서린 섬뜩한 마기가 샤벨 울프가 평범한 마수가 아니란 걸 알려주고 있었다.

"마수 마가의 비기로 개량한 마수인 건가? 일반적인 4마급 마수가 아니야!"

"숫자도 많아!"

무려 여덟 마리.

귀검 마가의 공자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암흑 마가와는 한번 검을 나누어보고 싶긴 했지."

끼아아아악.

발검과 함께 섬뜩한 비명이 울렸다.

'귀검(鬼劍)'이었다.

포로로 잡은 연합 기사의 몸으로 담금질한 끔찍한 검.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은 이의 비통함과 원한이 검에 새겨져 어마어마한 예리함을 지닌다.

물론, 귀검 마가의 무서움은 고작 들고 있는 검의 날카로움 따위가 아니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중이 가문 주제에 같은 마투 가문이라고 불리는 게 우스워서 말이야."

암흑 마가는 마검사의 가문이다.

따라서 흑마법 가문은 마법 분야에서, 마투 전문 가문은 마투 분야에서 암흑 마가를 깔보았다.

특히 그런 경향이 가장 심한 게 귀검 마가였다.

오로지 검 한 자루에 모든 걸 바친 검귀들이 보기에 암흑 마가는 비겁한 사도나 마찬가지였으니까.

환영 마가의 공녀도 해골 지팡이에 마기를 끌어 올리며 술식을 펼칠 준비를 하였다.

그런데 크리스티앙의 반응이 이상했다.

그저 우두커니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기만 하고 있었다.

"…뭐?"

"아까, 파괴 마가의 머저리처럼 볼품없으면 곤란해서 말이야."

크리스가 하품을 찍 했다.

전혀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는 모습.

"부디 최선을 다해달라고. 너희가 훌륭히 발악해 줄수록 내가 빛나게 될 테니까."

제179화

하지만 환영 마가의 공녀는 날 선 반응을 보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소리 하지 마세요!! 고작 '구별'이 안 되는 그런 수준이 아니에요!!"

"!!"

"이, 이건 진짜 '실재(實在)'하는 듯한…? 하지만 어떻게 4성의 경지로?"

그녀는 5성의 환영술사다.

환영으로 현실에 영향을 끼치는 경지이지만, 이런 수준의 환영은 절대 구현하지 못한다.

"아아, 내가 천재라서 말이야. 현실과 경계를 무너뜨리면서 환영을 실재하는 것처럼 만드는 것은 당연히 할 수 있는 것 아니겠어?"

"!!"

"어쨌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이대로 가만히 당하고 있을 거야?"

환영 마가의 공녀가 이를 바득 깨물었다.

'아무리 환영 구현의 수준이 높다고는 해도, 고작 4성이야. 5성의 진강 환영에 당해낼 수 있을 리가…!'

파아앗!

빛이 터져 나왔다.

5성 진강 환영인 '환희의 침몰'.

상대를 음습한 환희에 빠지게 한 후, 그대로 정신을 망가뜨려 버리는 끔찍한 환영이었다.

타락한 환희의 빛이 크리스가 불러온 어둠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크리스는 고개를 저었다.

'약해.'

그래, 약했다.

같은 흑강기라도 누가 펼치냐에 따라 위력이 달라지듯, 진강 환영도 마찬가지다.

그저 그런 의지를 담은 수준.

아까 필립보다도 훨씬 못했다.

비록 크리스는 환영으로 5성에 이르지 못했지만, 진강 환영 따위, 얼마든지 찢어발길 수 있었다.

"도대체 환영 마가에서 뭘 배운 거야? 잘 보라고. 이게 바로 제대로 된 환영이니."

어둠이 변하였다.

부르르.

마치 지진이 일어나는 듯한 진동과 함께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

어둠의 저편에서 섬뜩한 시선이 환영 마가의 공녀를 내려다보기 시작한 거다.

"!!"

환영 마가 공녀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원초적인 공포에 그녀의 몸이 덜덜 떨렸다.

당연했다.

지금 크리스가 구현한 환영은 바로 얼마 전 목격한 4계의 악마 '미스트롯'의 눈동자였으니까.

크리스조차 공포에 떨어야 했던 아득한 존재.

물론, 아무리 크리스라도 그런 위대한 격의 환영을 구현하는 건 불가능했다.

'단, 그때 내가 느꼈던 공포를 구현하는 건 얼마든지 가능하지.'

거기에 크리스는 얼마 전 터득했던 미세한 틈조차 놓치지 않는 저주 마가의 '진의'를 환영에 섞었다.

환영 마가 공녀의 정신의 틈 사이로 무참히 공포가 내리꽂혔다.

두려움에 질려 어떻게든 벗어나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차라리 서로 환영으로 겨루는 상황이 아니었으면 그나마 나았을 거다.

어떻게든 정신 방벽을 세워 공포를 최소화할 수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앞서 말했듯, 환영 결투를 펼치는 동안에는 서로의 정신이 무방비하게 노출된다.

찰나, 억겁과 같은 공포가 그녀의 정신을 잠식했고.

"아아아아아아아아악!! 그, 그만…!! 크어어어어어어어억!!!!"

환영 마가의 공녀는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무너져 내렸다.

완전히 이성을 잃은 모습.

'악마의 공포에 노출된 거나 마찬가지니, 당분간 제정신을 차리긴 어렵겠지.'

결투를 관전하던 이들은 무슨 일이 펼쳐진 건지 눈치채고 침을 꿀꺽 삼켰다.

'환영 마가의 공녀를 환영 결투로 제압했어?'

'무슨? 미친?'

물론, 크리스의 미친 짓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너희는 뭐해? 정신 제대로 안 챙겨?"

"!!"

크리스의 질책에 귀검과 마수는 퍼뜩 눈을 부라렸다.

그들을 둘러싼 어둠의 환영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크리스가 나름대로 그들을 배려(?)해준 거다.

"이놈…!!"

귀검이 검을 그었다.

파앗!

마치 벼락같은 쾌검.

그뿐이 아니다.

샤벨 울프가 옆에서 팔다리를 물어뜯으려 달려들었다.

마련술에 조종당하는 마수답게 두려움 따위 느끼지 못하는 거친 공격.

거기에 개량되어 일반 4마급 마수를 훌쩍 뛰어넘는 속도와 강인함이었다.

"조심…!!"

암흑 마가 쪽 마인들이 식겁하여 외쳤다.

당장에라도 크리스티앙이 피를 뿌릴 것만 같은 위태로운 광경이 펼쳐졌지만, 또다시 이변이 일어났다.

귀검이 아무리 검을 뿌려도.

샤벨 울프가 아무리 날아들어도.

크리스의 몸에는 닿지 못했다.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아니, 아슬아슬이 아니었다.

정확한 계산에 의한 회피였다.

"마수들의 움직임이 너무 뻔한 것 아니야? 멍멍이 너, 마련술을 그렇게 단순하게 펼치는 건 멍청해서 그런 거냐?"

아무리 크리스라도 변칙이 심한 귀검 마가의 검술을 예측하는 건 쉽지 않았다.

하지만 마수의 경우는 달랐다.

원래도 마수는 움직임이 단순한 데다, 마련술의 조종까지 받고 있었으니까.

마수를 지배하고 있는 마기의 흐름과 마수가 취하는 사전 움직임들을 종합하면 훤히 다음 동작이 보였다.

물론, 귀검 마가의 검을 상대하면서, 무려 여덟에 달하는 마수의 움직임을 일일이 예측하는 건 뇌가 여러 개가 아닌 한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긴 했지만, 뭐.

거기에 크리스가 펼치는 미친 묘기는 그게 끝이 아니었다.

"너, 이 검술은?"

귀검 마가 공자가 눈을 부릅떴다.

검의 움직임이 익숙했다.

"너 어떻게 우리 귀검 마가의 탈혼 검법을?!"

그렇다.

지금 크리스가 펼치고 있는 건, 암흑 마가의 검술이 아닌, 귀검 마가의 검법이었다!

"너희가 어제 보여줬잖아?"

"뭐?"

"어제 결투장에서 귀검 마가의 마인 한 명이 신이 나서 펼치고 있던데?"

어제 연회는 수많은 마인이 모인 만큼 탈도 많았고 서로 싸움도 많이 일어났다.

그중 눈에 띄게 활약한 게 귀검 마가의 마인 한 명이었다. 무려 다섯 번의 결투를 해서 5연승을 거두었다.

그 마인이 그때 사용한 검법이 바로 지금 크리스가 펼치는 탈혼 검법이었다.

"재밌어 보여서 심심풀이 삼아 따라 해본 거야. 별로 어렵지는 않네?"

"무슨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탈혼 검법은 귀검 마가의 직계 혈통의 검법은 아니었다.

소속 마인들이 익히는 검법.

하지만 그렇다고 절대 깊이가 얕은 검법은 아니었다.

귀검 마가에는 탈혼 검법만 일평생 파는 마인도 있을 정도다.

그런데 하루 만에 따라 익혔다니?

"거짓말하지 말아라! 그런 일이 가능할 리가?!"

"거짓말 아닌데. 이런 허접한 검법 따위를 익히는 데 하루면 충분한 것 아니야? 아, 너는 혹시 오래 걸렸니?"

차앙!

크리스의 검이 날카로운 선을 그었다.

탈혼 검법의 묘리를 그대로 담은.

혼을 빼놓는다는 별명처럼 절묘한 움직임이었다.

귀검 마가의 공자는 간담이 서늘해져 허겁지겁 검을 피했다.

'이익. 질 수 없다!'

화르르륵!

그의 검에서 흑강기가 피어올랐다.

귀검 마가 특유의 서늘한 남색의 강기였다.

'우리 귀검 마가의 진정한 검공을 보여주마!'

펼쳐지는 화려한 검세.

직계만이 익히는 화귀(花鬼) 검법이었다.

현란한 움직임으로 상대의 목숨을 앗아가는 치명적인 검법이었다.

특히 크리스가 펼치는 탈혼 검법에는 상성상 절대적 우위를 지니고 있었으나.

"그런 춤 놀림으로 뭘 하게?"

파앗!

어깨가 길게 베이며 피가 튀어 올랐다.

"너,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크리스의 검이 휘몰아쳤다.

"검은 어떤 검법인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누가 펼치는지가 중요한 거야."

크리스는 한 인물을 떠올렸다.

에반.

같은 5성 하의 경지였지만, 눈앞의 놈과 비교도 할 수 없는 검술을 지니고 있던 이.

얼마 전, 골드 크로스에서 봤을 때 에반이 펼치던 검은 이렇지 않았다.

'상대가 에반이었다면, 나도 이렇게 몰아붙이지 못했겠지.'

눈앞의 놈은 달랐다.

수준의 차이가 너무 심했다.

파앗!

"크아악!"

크리스의 검이 번뜩할 때마다 피가 튀었다.

그 광경을 목격하는 마인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말도 안 돼. 귀검 마가의 마인을 저런 식으로 농락하다니?'

'그것도 마법은 일절 사용하지 않고 검술만으로.'

크리스는 상대가 모자란다고 폄훼했지만, 아니었다.

귀검 마가의 공자는 일반적인 5성 하의 기준으로 봤을 때 충분히 강력한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더욱 경악스러운 점은 지금 크리스는 일대일 결투를 펼치고 있는 게 아니란 점이다.

여덟 마리 샤벨 울프와 마수 마가 공자가 쏟아붓는 원격 마기 공격을 모조리 회피하면서 귀검 마가의 공자를 무릎 꿇리고 있는 거다.

그야말로 미친 짓.

'…저게 5성 하라고?'

순간, 모두의 머리에 떠오르는 의문.

크리스티앙이 정말 5성 하가 맞는지.

하지만 아무리 봐도 그 이상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자 사람들은 다른 생각 하나를 떠올리고는 침을 꿀꺽 삼켰다.

'…5성 하인데도 이렇게 강하면, 앞으로 경지가 더욱 올라가면?'

같은 경지여도 실력은 마인마다 천차만별이다.

이런 경향은 위의 경지로 올라갈수록 극단적으로 벌어진다.

만약 지금도 미친 강함을 보이는 크리스티앙이 6성… 아니, 7성, 8성이 된다면?

'…괴물이라 불리던 노르디언 공작을 초월하는 끔찍한 괴물이 될지도.'

그렇게 모두가 침을 꿀꺽하고 있을 때였다.

결투가 절정으로 치달았다.

귀검 마가의 공자는 결국 탈혼 검법에 쓰러졌다.

남은 건 마수 마가의 공자.

"이제 멍멍이밖에 안 남았네? 다시 왈왈해볼래? 어제 살짝 귀여웠는데."

"이놈…!!! 죽여주마!!"

어제 당했던 끔찍한 치욕을 다시금 놀림당하자 마수 마가의 공자는 금세 이성을 잃었다.

시뻘게진 눈으로 폭주하여 폭풍 같은 공격을 난사했다.

수인족의 결전 모드인 '광폭화'였다.

그런데 크리스가 또 이상한 반응을 보였다.

제대로 반격하지 않고 힐끗힐끗 피하기만 하는 거였다.

'…또 무슨 미친 짓을 하려고?'

관람하던 이들도 이제 슬슬 크리스의 패턴을 파악하고는 질린 얼굴을 했다.

저건 분명 무언가 노리고 있는 거였다!

정확했다.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다.

-크르르륵!

샤벨 울프가 돌연 마수 마가 공자의 허벅지를 물어뜯었다.

"?!"

한 마리가 아니었다.

여덟 마리 전부 미치기라도 한 것처럼 주인에게 이빨을 들이밀기 시작했다!

"무슨?!"

"마수들의 제어권을 빼앗았어!!"

그렇다.

크리스가 한 것은 마련술을 펼쳐 놈의 샤벨 울프를 자신의 것으로 빼앗은 것이다!

또 말도 안 되는 일.

사람들은 더는 놀랄 기분도 들지 않았다.

'내 암흑 마기의 지배력이 마수 마가의 황색 마기보다 더욱 우위에 있으니 이런 일도 가능하지. 광폭화 상태에서는 통제력이 떨어지고, 놈의 마련술이 전문 조련사에 비해 상대적으로 미숙한 점도 있고.'

이후, 마수 마가의 공자가 자신이 부리던 마수들에게 물어뜯겨 무릎 꿇는 황당한 장면을 끝으로 결투는 막을 내렸다.

"...."

"...."

장내에 죽을 듯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단순히 승리만 했어도 놀라웠을 텐데, 세 명 모두를 모조리 상대의 장기로 제압하다니.

모두 기가 질린 얼굴로 크리스티앙을 바라보았다.

그때, 짝짝, 박수 소리가 울렸다.

마황의 대리인인 상트 공작이었다.

"훌륭한 모습이었다. 오래간만에 대단한 인재를 본 것 같아서 마음이 흡족하구나. 잘하면, 우리 마도 제국에 새로운 왕이 탄생할 수도 있겠군. 훗날의 이야기지만 말이야."

대리인의 극찬에 모두가 경악했다.

크리스티앙이 마왕이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였다.

아무리 크리스티앙이 오늘 보여준 모습이 대단해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야기다.

마왕.

9성 초월지경에 오르는 건, 어떤 천고의 천재라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니까.

하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중앙의 마황의 대리인이 한 말이니 모두 가볍게 넘길 수가 없었다.

그런데 크리스는 더욱 황당한 이야기를 했다.

"글쎄요. 제가 마왕이 되는 건, 그렇게까지 먼 훗날의 일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흐음?"

"전 성격이 급해서 말입니다. 이왕 될 거면 빠르게 되어야지요."

"뭐? 하하!! 이놈, 자신감도 정말 대단하구나! 마음에 들어!"

상트 공작은 시원하게 웃은 후 좌중을 둘러보았다.

"그러면 또 크리스티앙 공자가 암흑의 유지를 잇는 걸 반대하는 이가 있는가?"

당연히 아무도 없었다.

"그러면 마무리를 짓지. 크리스티앙 드 배런, 그대에게 암흑의 유지를 이을 것을 명하나니, 모두에게 포부를 말해보도록."

마지막 단계였다.

취임 연설.

그리고 크리스가 계획한 사고의 클라이맥스 순간.

그렇다.

크리스가 지금껏 사람들에게 여러 대단한 모습을 보여준 건 바로 이 연설에서 하려는 말 때문이었다.

제180화

"연합 놈들처럼 구구절절한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마인은 무릇 행동으로 보여주는 법이니까요. 딱 하나만 말씀드리겠습니다."

크리스의 목소리가 홀 전체에 울려 퍼졌다.

가벼운 듯하지만, 감히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위압감이 실린 음성.

"내가 대공자로서 하고자 하는 바는 하나입니다. 암흑 마가를 원래처럼 위대하게 만드는 것."

"!!"

"초대 가주이신 '암멸의 마왕' 때처럼 말입니다."

크리스가 꺼낸 이름에 장내의 모두가 숨을 죽였다.

잊을 수 없는 이름이었다.

마도 제국은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그 기나긴 역사 동안 마도 명문가는 지고 새로 떠오르기를 반복했다.

그런 면에서 암흑 마가는 비교적 신생이었다.

300년 전에 처음 개가했으니까.

초대 가주, 암멸의 마왕 때가 암흑 마가의 최전성기였다.

파괴 마가와 극독 마가를 발아래로 복속시켰으며, 멀리 서방 마도국의 삼각 연합조차 암흑 마가에 고개를 조아렸다.

사왕성? 감히 도발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바짝 등을 엎드리고만 있었다.

당시 암흑 마가의 성세가 얼마나 대단했냐면, 암흑 마가에 무릎 꿇은 휘하 명문가들을 통틀어 '암흑 연맹'이란 이름으로 부를 정도였다.

암흑 마가가 신비 마가와 더불어 천외천 중 하나로 꼽히던 시기.

그런데 놀랍게도 당시 암흑 마가의 전체적인 전력은 별로 강대하지 않았다.

그렇게나 강력한 세력을 일구었는데, 전력이 강하지 않다니?

이유가 있었다.

당시 암흑 마가가 그런 전성기를 누렸던 건 단 한 명, 초대 가주인 '암멸의 마왕'의 힘 덕분이었다.

단 한 명이 수많은 명문가를 무릎 꿇린 거다.

결국, 암멸의 마왕이 서열 3위 마도 재상으로 발탁되어 암흑 마가를 떠날 때까지 주변 가문들은 암흑 마가의 눈치를 살피며 어두운 시기를 보내야만 했다.

'설마, 오늘 이런 결투를 선보인 것은?'

'암멸의 마왕을 흉내 내서?'

사람들은 침을 꿀꺽 삼키며 무참히 쓰러져 있는 삼각 연합의 공자, 공녀를 바라보았다.

암멸의 마왕은 성흑을 9할 이상 흡수했다.

따라서 크리스처럼 속성을 가리지 않고 모든 종류의 흑마법과 마공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게 특기였다.

- 암흑은 모든 마도를 지배하는 힘이니, 암흑 마가야말로 마도 제일의 가문이다.

암멸의 마왕이 했던 말.

당시 암흑 마가는 '고작' 마검사의 가문 따위가 아니었다.

모든 종류의 어둠을 지배하는 절대의 가문이었다.

실제로 암멸의 마왕은 파괴면 파괴, 저주면 저주, 환영이면 환영 등 모든 종류의 마도의 힘으로 각각의 종가(宗家)를 발아래로 압도했으니까.

마치 오늘 크리스가 보여주었던 것처럼 말이다.

즉, 크리스는 오늘 결투를 통해 자신이 암멸의 마왕 같은 존재가 되겠다고 선포한 거다.

"과거, 암흑 연맹의 깃발이 휘날릴 때처럼."

크리스는 씨익 웃으며 모두를 내려다보며 선언했다.

"마도 제국의 모두는 다시 우리 암흑 마가의 위대함을 알게 될 겁니다."

그렇게.

훗날 '2차 암흑 연맹'의 시발점이 되는.

사서에 기록되는 선포가 선언되었다.

* * *

그날 크리스의 선포는 커다란 파장을 낳았다.

암멸의 마왕이 마도 재상이 되어 암흑 마가를 떠난 건 고작 200년 전의 일이다.

유서 깊은 명문가 모두 암멸의 마왕이 주던 공포를 잊지 않고 있었다.

'심지어 암멸의 마왕은 지금도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으니.'

중앙에서 가장 빈번하게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는 게 마도 재상인 암멸의 마왕이었다.

9성 초월지경에 이르면, 수명의 한계를 벗게 된다.

특히 암멸의 마왕은 9성 중에서도 극한의 경지에 이른 이니, 아직도 멀쩡히 살아 있는 거다.

물론, 지금은 마황의 명으로 암흑 마가와 연을 완전히 끊었다는 의미로 '암멸의 마왕'이란 호칭을 사용하지 않고 '마도 재상'이라고만 불리고 있어 암흑 마가와 별다른 관계는 없지만 말이다.

'실제로 마도 재상이 암흑 마가에 사적인 도움을 준 적은 한 번도 없다고 하지.'

가문의 시조라고 해서 뭔가를 바랄 관계는 아니었다.

도리어 최악의 경우, 적이 될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지만 말이다.

어쨌든 당시의 기억은 각 가문에 트라우마와도 같은 것이기에 크리스의 선언은 적지 않은 진동을 일으켰다.

특히 크리스가 결투에서 보여준 모습이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각 가문의 장기로 상대를 농락한 건, 크리스가 훗날 암멸의 마왕처럼 성장할 수 있다는 증거였으니까.

더구나 성의 경지로 설명할 수 없는 강함까지.

여러 가문에서 크리스티앙을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다만, 이게 반드시 좋은 일이라고는 할 수 없었는데.

"경솔했다."

노르디언이 인상을 찌푸렸다.

"다른 가문들에 쓸데없는 경계심만 심어줄 뿐이야. 그런 이야기를 하기에는 우리 암흑 마가의 힘은 부족하다."

가주의 입에서 나온 부족하다, 라는 이야기.

씁쓸하지만, 엄연한 사실이었다.

암흑 연맹의 재건은커녕, 당장 다가올 미래조차 불안한 상황이었으니까.

하지만.

"부족하니, 더더욱 가만히 있으면 안 되죠."

"!!"

"어차피 적들은 우리 암흑 마가를 언제고 집어삼킬 생각만 하고 있는데 말입니다."

그렇다.

사왕성뿐만이 아니다.

파괴 마가도, 이웃한 극독 마가도.

심지어 남방 마도국의 지배자인 청류의 마왕까지.

모두 암흑 마가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극독 마가는 그나마 가주인 후암 공작이 우리 쪽에 친화적이라 낫지만.'

문제는 극독 마가의 진짜 실세는 가주인 후암 공작이 아니란 거다.

부가주 고라스 후작.

이자가 극독 마가의 진정한 실세였다.

'이제 벌어질 '독암(毒暗) 분쟁'도, 끔찍한 참사인 '진녹(鎭綠)의 변'도 고라스 후작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지.'

크리스는 똑바로 노르디언을 보며 말했다.

"마도 제국에 거센 피바람이 몰아치고 있음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

"웅크리고 있어봤자, 피바람에 휩쓸려 무너질 뿐입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먼저 남들을 짓밟는 수밖에 없습니다."

노르디언은 입을 우뚝 다물었다.

크리스티앙의 말이 옳았다.

가만히 있어봤자, 미래는 없었다.

그는 속으로 한탄했다.

'안타깝구나. 내게 시간이 얼마 없는 것이.'

만약 노르디언에게 시간이 충분하다면.

그래서 크리스티앙이 성장할 때까지 우산이 되어줄 수 있다면 뭐가 두려울까?

하지만 노르디언에게 남은 시간은 1년도 되지 않는다.

자신이 사라진 후, 과연 저 아이가 홀로 그 거친 피바람을 버텨낼 수 있을지 염려가 되었다.

그때, 크리스티앙의 흑적안이 똑바로 노르디언을 바라보았다.

단단한 신뢰를 담고.

마치,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할아버지, 절 믿어 주십시오."

"!!"

노르디언의 눈동자가 희미하게 흔들렸다.

그러다가 나직한 웃음을 흘렸다.

크리스티앙의 굳건한 음성을 들으니, 이상하게도 웃음이 나왔다.

'그러고 보니 이놈은 자신의 말을 지키지 못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지.'

그래.

돌이켜보면 크리스는 항상 자신이 내뱉었던 말을 이루어 내었다.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이든 말이다.

이번 일의 경우, 너무 스케일이 커, 좀처럼 믿음이 생기진 않지만 말이다.

"정말, 암흑 연맹을 세울 생각이냐?"

"네, 반드시. 그것 외에 우리 암흑 마가가 살아남을 방법은 없으니까요."

크리스는 단순한 과시 목적으로 엄포를 놓은 게 아니었다.

암흑 연맹 재건은 반드시 필요했다.

'최소 파괴와 극독 정도는 암흑 마가의 깃발 아래 두어야 해. 그래야만 앞으로 일어날 파국에 맞설 수 있어.'

노르디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물론, 네가 지금껏 믿기지 않은 일들을 해냈던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암흑 연맹이라니. 넌 시조이신 암멸의 마왕이 아니다."

암멸의 마왕이 암흑 연맹을 이룰 수 있었던 건, 본인의 절대적인 힘 때문이었다.

"물론 전 시조님이 아니죠. 그래도 상관없습니다. 전 시조님이 가지지 못한 무기를 가지고 있으니까요."

"…무슨?"

크리스는 씨익 웃으며 답했다.

"천재성입니다."

노르디언은 황당한 얼굴을 했다.

하지만 크리스는 진심이었다.

"전 암멸의 마왕과 다르게 제 방식대로 암흑 연맹을 만들 계획입니다. 믿고 지켜봐 주십시오. 앞으로 1년 뒤, 우리 암흑기(暗黑旗)는 파괴와 극독 위에서 펄럭이고 있을 테니까요."

노르디언은 클클 웃음을 흘렸다.

1년 만에 파괴와 극독 위에 서겠다니.

말도 안 되는, 황당하기 그지없는 포부였다.

하지만 크리스티앙의 터무니없는 자신감을 보고 있으니, 정말 그렇게 해내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난 1년 뒤에는 없을 거다."

"...."

"너도 짐작하고 있겠지만, 내게 남은 시간은 많지 않다. 사실 진즉 죽었어야 했으니까."

크리스는 잠시 침묵했다.

'실제로는 1년보다도 훨씬 더 짧지.'

앞으로 암흑 마가에 일어날 사건들 때문이다.

정확히는 랑함 후작 때문.

랑함 후작은 끔찍한 수단으로 노르디언을 능가할 힘을 얻고, 노르디언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죽인다.

'그렇게 되도록 놔두지 않을 거지만.'

사실 크리스는 노르디언과 관련하여 생각해둔 게 있었다.

노르디언은 전혀 상상하지 못하고 있을 계획.

'일단, 지금 이야기할 단계는 아니지. 아무리 나라도 실제로 성공할지는 미지수인 계획이니까.'

아니, 실패할 가능성이 훨씬 높았다.

크리스도 노르디언이 사망할 거라는 가정하에 계획을 짜고 있었다.

하지만 모든 게 완벽하게 풀린다면.

그래서 일차적으로 그가 원하는 힘, '도화경(圖?境)'을 손에 얻는다면.

'어쩌면 기적을 일으킬 수 있을지도.'

물론, 크리스도 자신할 수 없는 희박한 확률의 일이니, 담담히 이렇게만 말했다.

"괜찮습니다. 아까 말씀드렸듯, 절 믿어 주십시오."

"...."

노르디언은 다시 큭큭 웃음을 흘렸다.

막막한 상황은 여전했지만, 이상하게 속이 시원해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래, 구체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방법은 있느냐?"

"일단, 극독 마가를 무릎 꿇릴 계획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극독 마가 쪽의 움직임이 수상쩍다는 개인 첩보가 있어서요."

앞으로 남방 마도국에서는 온갖 커다란 파란들이 일어날 예정이다.

남방 마도국 전체를 뒤흔들 파국들.

원래라면 암흑 마가는 그 파란들에 휘말려 끔찍한 상처를 입게 되지만, 크리스티앙은 도리어 그 사건들을 이용해 각 가문을 무릎 꿇릴 것이다.

'…엄청나게 빡세긴 하겠지만.'

크리스는 앞으로 자신이 해야 할 생고생을 떠올리고는 잠시 침묵했다.

그의 계획을 역으로 생각해보면, 앞으로 남방 마도국에 일어날 파란들을 모조리 그의 힘으로 해결해야만 한다는 뜻이었다.

얼마나 어마어마한 생고생일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해야만 했다.

'…빌어먹을. 내가 어쩌다가 이런 고생을 하게 된 거야. 나중에 일이 다 끝나면 정말 끝장나는 부귀영화를 누려주마. 세상에서 제일 게으른 마왕이 되어주겠어! 마왕명도 아예 '나태의 마왕'으로 짓겠어.'

크리스는 고개를 저어 쓸데없는 생각을 내쫓고 다시 본론을 떠올렸다.

'첫 시작은 곧 벌어질 독암 분쟁이야.'

독암 분쟁을 암흑 마가의 완벽한 승리로 장식한 후 그걸 빌미로 본격적으로 극독 마가를 굴복시킬 단초를 마련할 계획이었다.

'슬슬, 소식이 전해질 때가 되었는데.'

마침, 노크 소리가 들렸다.

부집사 세바트찬이었다.

"가주님, 긴히 보고드릴 이야기가 있습니다."

"무슨 일이지?"

노르디언은 눈썹을 찌푸렸다.

세바트찬은 본관을 담당하기에 별채의 노르디언에게 오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가 방문하는 것은 오로지 가문에 큰일이 일어났을 경우.

과연.

"갑작스레 서쪽 영지에 정체불명의 역병이 창궐하기 시작했습니다."

"!!"

"극독 마가의 수작이 의심되니, 가주님의 고견을 여쭙습니다."

그렇게.

남방 마도국의 파란의 막을 연 '독암 분쟁'이 시작되었다.

제181화

당장 회의가 소집되었다.

"가주님을 뵙습니다."

노르디언이 나타나자 랑함 후작이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표했다.

랑함 후작은 가주석에 앉아 있었다.

노르디언은 회의에 참석해도, 어떤 의견 표명도 없이 뒷좌석에서 참관만 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미리 앉아 있었던 건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오늘 회의는 내가 진행하겠소."

"!!"

랑함 후작은 흠칫하였다.

"왜? 무슨 문제라도 있소?"

"…아닙니다, 가주님."

랑함 후작은 우측의 두 번째 자리로 옮겼는데, 노르디언이 더욱 뜻밖의 발언을 하였다.

"그 자리는 대공자의 자리요, 후작."

"!!"

"대공자는 내 뒤를 이을 암흑 마가의 이인자. 후작도 마땅한 예를 지켜주길 바라오."

모두가 숨을 들이켰다.

원칙적으로는 맞는 이야기였다.

랑함 후작은 '부가주'가 아닌, 가주 '대리'였으니까.

대리직은 공식 직위가 아니다.

그저 암묵적으로 가주직을 대신 수행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가문의 공식 서열상 차기 후계자인 크리스티앙이 랑함의 윗자리에 올라간 건 맞지만.

'그래도 이렇게 직접적으로 모두의 앞에서.'

가신들은 노르디언의 의중을 짐작했다.

첫째는 크리스티앙이 자신의 뒤를 이을 후계란 사실을 다시금 모두 앞에서 천명하려는 목적.

둘째는,

'랑함 후작을 향한 경고야.'

노르디언은 랑함 후작에게 가주직을 물려주지 않을 거다.

따라서 랑함 후작이 가주가 되려면, 크리스티앙을 반드시 죽여야만 했다.

그러니 노르디언은 미리 경고하는 거다.

이 아이는 내가 인정한 후계이니, 허튼 생각 따위 하지 말라고.

'과연, 랑함 후작은 무슨 반응을?'

회의장에 긴장된 침묵이 흘렀다.

모멸감을 느낀 걸까?

랑함 후작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우측에 앉으시오, 대공자."

"!!"

평소와 같은 차분한 어조.

하지만 모두 직감했다.

랑함 후작이 분노했음을.

그저 티를 내지 않고 있을 뿐이었다.

'휘유, 분위기 살벌하네. 저 자리에 앉았다가는 후환이 무시무시할 것 같은데.'

물론, 움츠러들 크리스가 아니었다.

"아닙니다. 이 자리는 후작 각하께서 앉아 주십시오. 그간의 노고만으로도 각하께서는 충분히 제 존경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으신 분이니 말입니다."

"...."

가신들은 다시 숨을 들이켰다.

얼핏 들으면 공손한 이야기다.

하지만 곱씹으면 전혀 아니었다.

'그간의 노고'란 표현은 랑함 후작을 은근히 퇴물로 치부하는 말이니까.

특히 대공자인 크리스가 저런 말을 하는 건 도발이나 다름없었다.

랑함 후작은 가타부타 반응이 없었다.

살얼음이 낀 듯한 긴장감이 흘렀지만, 크리스는 태연한 얼굴이었다.

'뭐, 겁먹을 필요는 없으니까.'

아직 노르디언이 살아 있는 한, 랑함 후작은 자신에게 적극적으로 손을 쓰지 못할 거다.

'도리어 빈틈을 드러내게 해야 해.'

크리스는 눈빛을 가라앉혔다.

랑함 후작의 역모는 정해진 미래다.

반드시 일으킨다.

'중간에 수작을 부려야 해. 랑함 후작의 완벽한 준비에 구멍이 생기도록.'

그는 랑함 후작의 철두철미한 성격상 쉽게 틈을 보일 리가 없어서 일부러 도발한 거다.

자신을 향한 앙심에 틈을 드러내도록.

하지만 랑함 후작은 역시 만만치 않았다.

대응하지 않고 무표정하게 우측 자리에 앉아버렸다.

크리스도 어깨를 으쓱한 후, 가주의 좌측 자리에 앉았다.

희의가 시작되었다.

"상황을 보고하도록. 서쪽 영지면 페이벤 백작의 담당인가?"

"네, 가주님. 제가 보고토록 하겠습니다."

페이벤 백작은 서쪽 접경을 담당하는 영주이자 6성 마스터 클래스의 마인이었다.

"영지에 갑작스레 500명이 넘는 환자가 발생했습니다. 아직은 사망자가 많지 않지만, 위중한 상태의 환자가 많아 조만간 급속도로 사망자가 나올 것으로 보입니다."

"자연적으로 발생한 전염병일 가능성은?"

"낮습니다. 기존에 알려진 어떤 전염병과도 양상이 다릅니다."

"극독 마가의 짓이라 짐작하는 이유는 무엇이지?"

"그 음침한 놈들 말고는 이런 짓을 할 만한 놈들이 없으니까요."

단순해 보이지만, 나름대로 이유가 있는 이야기였다.

이런 대규모 전염병을 일으킬 수 있는 건 오로지 저주 마가와 극독 마가뿐이다.

단, 저주의 경우 흑마법의 흔적이 느껴지니, 남는 건 극독 마가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서쪽 영지를 관통하는 텐느 강의 물을 연금술사를 통해 감식한 결과, 정체불명의 이물질이 일부 검출되었습니다."

텐느 강은 서쪽 영지의 상수원이었다.

극독 마가의 영토 쪽에서 발원하는 강이라 이전에도 극독 마가에서 몇 차례 문제를 일으킨 적이 있었다.

"그 이물질이 정말 전염병을 일으킨 원인이 맞는가?"

"…그럴 거로 추정합니다."

"추정하는 이유는?"

"…이물질을 죄인에게 복용시켜 보았을 때, 증상이 유발되지는 않았습니다."

노르디언은 인상을 찌푸렸다.

애매했다.

하지만 복용 후 증상을 일으키지 않는다고 극독 마가를 배제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복합적인 원리로 작용하는 독도 많으니까.

'여러 정황상 극독 마가의 짓이라고 보는 게 맞긴 하겠지.'

가신들의 목소리가 점차 올라갔다.

"더 볼 것 없습니다! 극독 마가 놈들의 짓이 분명하니, 당장 쳐야 합니다!!"

"정확한 진상은 놈들의 피를 뿌린 후 알아봐도 늦지 않습니다!!"

마인들다운 반응이었다.

노르디언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노르디언은 피를 원하지 않는다.

평화를 바라서가 아니라, 암흑 마가의 미래를 걱정해서였다.

독을 다루는 극독 마가와 싸움이 일어나면, 대규모 희생이 불가피하다.

가급적 피할 수 있는 싸움은 피하고 싶었다.

"후작은 어떻게 생각하오?"

"당연히 극독 마가를 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단호한 대답.

"너무 섣부른 결정 아니오?"

"머뭇거릴수록 사태는 수습하기 어려워질 겁니다. 지금도 서쪽 영지에는 환자가 늘어가고 있으니까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어차피 암흑 마가의 능력상 독의 해법을 밝혀내기는 어려웠다.

시간을 끌수록 희생자만 늘어날 뿐이니, 서둘러 원흉을 치는 게 해답이었다.

하지만 무언가 석연찮음을 떨치지 못한 노르디언은 이번엔 크리스티앙에게 물었다.

"대공자의 생각은 어떤가?"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극독 마가를 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가."

크리스티앙마저 싸움을 주장하자 노르디언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크리스가 뜻밖의 말을 이어갔다.

"단, 싸울 상대를 확실히 구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극독 마가의 누가 저지른 짓인지 알아내야 죄를 물을 수 있을 테니까요."

순간, 장내가 조용해졌다.

하나 간과하고 있던 사실이 떠오른 거다.

'극독 마가는 현재 두 파벌로 나뉘어 있어.'

가주인 후암 공작 일파.

부가주인 고라스 후작 일파.

둘 중 누구의 짓이란 말인가?

"그 문제는 내가 알고 있다."

랑함 후작이었다.

"마침 극독 마가에서 이번 전염병의 증상과 비슷한 독을 개발 중이라는 첩보를 들은 적이 있다."

"!!"

"개발자는 극독 마가의 어린 공녀이자, 천재적인 독 제조 능력으로 소만독이라 불리는 마리사. 그녀가 범인일 거다."

뜻밖의 이름이 나왔다.

여기저기서 흥분한 음성이 울렸다.

"마리사라면 가주인 후암 공작의 친딸 아닙니까? 그러면 후암 공작이 이번 일을?"

"후암 공작은 앞에서는 우리에게 호의적인 척하더니, 뒤에서 이런 끔찍한 짓을!!"

"당장 후암 공작 측을 쳐야 합니다! 반대파인 고라스 후작도 우리를 막지 않을 겁니다!"

다들 분노하여 외치는 사이, 크리스티앙 홀로 차분히 생각했다.

'거짓말이야.'

이건 마리사의 짓이 아니었다.

크리스는 '진짜 범인'이 누구인지, 어째서 이런 일을 일으킨 건지 내막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

하지만 랑함 후작은 왜 거짓말을 한 걸까?

'진짜 범인과 손을 잡았군. 그래서 아까부터 싸움을 주장하고 있는 거야.'

이 사태의 진짜 범인은 고라스 후작이었다.

가주의 반대파.

그의 목적은 이번 사태를 가주인 후암 공작 측의 잘못으로 덮어씌워 실각시키는 것.

'랑함 후작은 고라스 후작의 음모에 발을 맞춰주는 대가로 무언가 받기로 한 게 있겠지.'

아마 일전 손에 넣지 못한 '황혼의 에뮬릿'을 받기로 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이전 삶, 랑함 후작이 노르디언을 능가하는 힘을 얻게 되는 결정적인 도구이니까.

'아니면, 독정(毒井)의 부산물을 받기로 한 것일 수도 있고.'

랑함 후작이 받기로 한 게 무엇이든, 막아야 했다.

"확실히 하기 위해 은밀히 고라스 후작 쪽에 연락해 놓았습니다. 정말 가주인 후암 공작이 이번 일을 벌인 게 맞는지. 고라스 후작의 능력이면, 금방 진상을 밝혀낼 겁니다."

랑함 후작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크리스의 비아냥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격이군요. 고라스 후작을 어떻게 신뢰한다는 말입니까?"

랑함 후작이 미간을 좁혔다.

"그러면 넌 방법이 있다는 말이냐? 의선 명가가 아닌 한, 극독 마가의 독을 분석하는 건 누구라도 불가능하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런데.

"제가 할 수 있습니다."

"…뭐?"

"독에 관해서는 이전에 공부해본 적이 있어서요. 제가 정확한 진상을 밝혀 보겠습니다."

순간, 회의장에 황당하다는 기색이 번졌다.

가신들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크리스티앙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크리스티앙 대공자가 천재라도 이건 좀.'

크리스티앙이 대단하다는 건 이제 누구나 다 안다.

하지만 암흑 마가가 왜 시도도 하지 않고 진상을 밝히길 포기했겠는가?

극독 마가는 독의 대륙 최고 장인이다.

그만큼 사용하는 독들도 지독하게 난해했다.

극독 마가의 천적이라 불리는 의선 명가가 아닌 한, 이 사태의 진상을 밝히는 건 불가능했다.

"허튼소리를. 대공자가 되었다고 오만함에 눈이 멀었는가? 방자한 헛소리는 삼가도록."

"헛소리가 아닙니다. 제 대공자직을 걸고 맹세하건대,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대공자직까지 걸겠다는 크리스티앙의 장담에 가신들이 술렁였다.

노르디언도 놀란 반응이었지만, 크리스티앙의 은근한 눈빛을 받고 입을 다물었다.

랑함 후작이 싸늘히 말했다.

"대공자직을 걸겠다고? 지키지 못할 이야기는 하는 게 아니다."

"진심입니다."

"정말 이번 사태의 진상을 밝히지 못할 경우, 대공자직을 내려놓겠다고?"

"네, 물론입니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크리스티앙은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제가 대공자직을 걸었으니, 각하께서도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거는 게 맞겠지요. 제가 해낼 시, 가주 대리의 권한 일부를 제게 내어 주십시오."

"!!"

"그러니까… '인사권' 정도면 좋겠군요. 동시에 가문의 '대선생' 자리도 제가 가져가겠습니다."

장내가 다른 의미로 술렁였다.

가주에게는 여러 권한이 있었다.

'재정권', '군사권', '외교권', '행정권' 등등.

그중 인사권은 가주의 가장 핵심 권한이었다.

가문 소속 마인들의 모든 걸 결정할 수 있는, 진정한 지배자의 권한이니까.

'대공자가 되었으니, 슬슬 가문의 실권도 손에 넣어야지.'

크리스는 랑함 후작의 권한을 하나하나 잘라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갈 계획이었다.

크리스의 의중을 짐작한 가신들은 모두 긴장한 얼굴을 했다.

단, 크리스의 '대선생' 자리 요구에는 다들 뜻밖이란 얼굴이었다.

가주는 가문 모두의 스승이기도 하다는 의미에서 가주가 겸직하는 직위였다.

하지만 별달리 의미 없이 사문화된 직위였다.

'왜 저런 직위를 요구한 거지?'

'설마, 정말 선생 역할을 하겠다는 건 아닐 거고.'

아무리 천재라도, 크리스는 아직 5성이다.

대선생 역할을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냥, 명예를 노리는 건가?'

'아니면 이상한 속셈 같은 게 있을지도. 원체 기상천외한 일을 많이 꾸미시니.'

다들 크리스가 무언가 꿍꿍이가 있어서 이런 기이한 요청을 했다고 여겼다.

하지만 크리스에게 꿍꿍이 따위는 없었다.

정말 암흑 마가의 마인들에게 가르침을 베풀고자 이런 직위를 요청한 거다.

'암흑 마가의 전력도 끌어올려야 하니까. 내 가르침이면 충분히 가능해.'

제182화

이전 삶, 크리스는 용사 일행의 폭발적인 성장을 이끌었다.

그런 그가 본격적으로 가르침을 내리면, 정체 중인 암흑 마가 마인들의 전력도 대폭 강화할 수 있을 거다.

지금은 다른 명문가의 비웃음을 사는 처지이지만, 머지않은 시기에 모두를 놀라게 하리라.

"...."

가신들의 시선이 노르디언을 향했다.

이제 결정은 노르디언의 몫이었다.

노르디언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놈은 도대체.'

솔직히 말해, 크리스티앙이 잘해낼 수 있지 염려가 들었다.

지금까지처럼 기지와 힘만으로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독에 관해서는 누구도 대적할 수 없는 극독 마가에 독술과 의술로 맞서야 한다.

하지만.

크리스티앙의 씨익 웃고 있는 눈동자를 마주하자 어쩔 수 없이 헛웃음이 나왔다.

실패 따위는 전혀 생각지도 않는 눈빛이었다.

"좋다. 후작과 대공자의 이야기대로 하겠다."

노르디언이 말했다.

"대공자에게 일주일간의 시간을 줄 테니, 그 안에 진상을 밝혀내도록."

* * *

암흑 마가 서쪽 접경 너머.

울창한 수림 지역 깊은 곳에 커다란 장원이 있었다.

사람의 발길이 닿기 힘든 외진 곳이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운 웅장한 규모의 장원.

극독 마가의 본가인 진록성(鎭綠城)이었다.

장원은 화려한 정원과 소속 마인들이 거주하는 건물들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중심부에 커다란 저택이 우뚝 자리하고 있었다.

웅장한 장원 중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화려하고 커다란 건물.

호심원(湖心園).

극독 마가의 가주가 머무는 곳이었다.

그런데, 지금 호심원을 차지하고 있는 주인은 놀랍게도 극독 마가의 가주인 후암 공작이 아니었다.

부가주인 고라스 후작.

가주인 후암 공작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극독 마가의 실권을 차지한 폭군이었다.

"부가주님, 암흑 마가의 일은 말씀대로 진행 중입니다."

측근의 말에 고라스 후작이 시선을 돌렸다.

마치 뱀 같은 시선에 측근은 침을 꿀꺽 삼켰다.

단순히 8성 중의 절대의 마인을 앞둬서 느끼는 긴장이 아니었다.

고라스 후작의 눈빛에는 인간이면 마땅히 지녀야 할 인간성이 부재했다.

자신의 탐욕을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이든 아랑곳하지 않는 끔찍한 성정.

'그러니, 이번 일도 일으키신 거겠지.'

측근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암흑 마가에서 일어났던 사건의 배후는 고라스 후작이 맞았다.

크리스가 했던 생각처럼, 가주인 후암 공작을 완벽히 몰락시키기 위해서.

'아무리 그래도 민간인을 학살하려 하다니.'

아무리 마인들이 피를 흘리는 게 일상이라도 절대 용납되지 않은 선이 있었다.

바로 힘없는 민간인을 학살하는 거다.

아니, 그뿐이 아니다.

이대로 일이 진행된다면, 계략에 휘말린 암흑 마가와 극독 마가는 커다란 피를 흘리게 된다.

얼마나 많은 이가 죽게 될지 모르건만, 고라스 후작은 자신의 욕심을 위해 태연히 끔찍한 일을 저지른 거다.

측근은 주저하다가 입을 열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만약, 암흑 마가 측에서 일의 진상을 밝혀내기라도 하면 곤란한 상황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민간인을 학살하려 했으니, 이 일이 밝혀지면 아무리 고라스 후작이 극독 마가의 최고 권력자라도 가볍게 넘어갈 수 없었다.

"그럴 가능성은 없다."

고라스 후작은 딱 잘라 대답했다.

메말라 갈라진 음성이었다.

"랑함 후작에게 방금 연락이 왔다. 암흑 마가 측에서는 크리스티앙 대공자가 이번 일을 맡기로 했다더군."

"크리스티앙 대공자가 말입니까? 그런 애송이한테?"

측근은 놀라 말했다.

물론, 크리스티앙의 재능은 극독 마가에도 유명했다.

마공이든, 흑마법이든 가리지 않고 어마어마한 재능을 보이는 천재.

차후 대단한 괴물로 성장할 게 분명했지만, 이번 일은 단순히 천재라고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암흑 마가 놈들이 미쳤군. 어떻게든 의선 명가의 인물을 수배해 의뢰해도 모자랄 판에.'

이번 일의 진상을 밝힐 능력이 있는 이들은 단 하나, 의선 명가의 제자들밖에 없었다.

그것도 일반 제자들은 무리이고, 의선 명가의 '학술적 지식'을 완벽히 이해하고 있는 '의학자(醫學者)' 정도는 되어야 가능할 것이다.

"암흑 마가에서 일의 진상을 밝힐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다. 너는 예정대로 마리사 공녀와 후암 공작에게 죄를 덮어씌울 준비를 하도록."

"네, 명에 따르겠습니다."

측근은 고개를 숙이고 사라졌고, 홀로 남은 그에게 통신구의 신호가 울렸다.

청류의 마왕에게서 온 연락이었다.

-일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지?

놀라운 이야기.

이 일의 배후에 청류의 마왕이 있다는 뜻이다.

고라스 후작이 서슴없이 이런 끔찍한 일을 저지른 건 청류의 마왕의 동의가 있었기 때문.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고라스 후작은 담담히 답했다.

"전하께서는 원하시는 바를 얻게 될 겁니다."

만족한 듯, 통신구의 신호가 꺼졌다.

고라스 후작은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커다란 장원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번 일만 마무리되면, 이 장원은 완벽히 그의 것이 되리라.

"머지않았군."

* * *

한편, 크리스티앙은 곧바로 사건을 해결할 준비를 하였다.

시간이 급했다.

'제한 시간인 일주일이 문제가 아니야. 지금도 환자가 늘어나고 있어.'

다행히 '아직까지는' 사망자가 많지 않았다.

하지만 크리스는 이전 삶을 통해 이 사건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알고 있다.

'무려 천 명이 넘는 희생자가 나왔지. 그래서 양 가문이 전면전 직전까지 가게 되고.'

문제는 이 일을 해결하는 것이 쉬운 게 아니란 거다.

'독의 정체를 규명하는 것부터가 난제야.'

극독 마가에는 정말 무수히 많은 독이 있다.

극독 마가 마인들의 취미가 독 개발이니까.

오죽하면 극독 마가 마인들의 숫자만큼 독의 숫자가 있다고 하겠는가?

따라서 어떤 특이한 증상을 보이는 독이 있으면, 그와 비슷한 효과를 나타내는 독도 수도 없이 많았다.

이 많은 독을 일일이 구별하는 건 누구라도 불가능한 일이지만.

'괜찮아. 내 지식을 이용하면 가능해. 내 의학적 지식은 의선 명가의 '의학자(醫學者)'들을 능가하니.'

크리스는 이전 삶, 의선 기공을 익히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신의라 불릴 정도의 명성을 쌓았다. 모두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의술 지식 덕분이었다.

의학의 총본산인 의선 명가에서도 의술 지식으로 그를 능가할 이는 누구도 없을 거다.

'문제는 고라스 후작의 꼬리를 잡는 일인데.'

고라스 후작이 독을 유포했다는 증거를 잡아야 한다.

문제는 고라스 후작의 치밀한 성격상 허투루 증거를 남기지는 않았을 거라는 점이다.

일주일밖에 안 되는 시간 동안 독의 정체를 밝히고 흔적까지 잡아내는 건 아무리 크리스라고 해도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괜찮아. 이것도 생각해둔 바가 있으니.'

크리스는 자신만만하게 생각했다.

'꼭 정공법으로 일을 해결할 필요는 없잖아? 치사함은 내 전공이니.'

아마 고라스 후작은 상상도 못 하고 있을 거다.

크리스가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지. 그래서 자신이 어떤 뒤통수를 맞게 될지.

'바로 시작하자.'

그런데 의외의 인물이 그를 찾아왔다.

멜린이 말했다.

"대공자님, 손님이 왔습니다."

"누구?"

"극독 마가의 휴버트 대공자입니다."

곧 한 인물이 들어왔다.

"크리스티앙 대공자를 뵙습니다. 책봉식 이후 또 뵙게 되는군요."

정말 극독 마가의 못난이 대공자 휴버트였다!

'아직 안 떠나고 있었나?'

책봉식에 참석했던 사절들은 이미 자신들의 가문으로 돌아간 지 오래였다.

어쨌든, 뜻밖의 일.

"무슨 일입니까? 지금 암흑 마가의 상황이 극독 마가의 대공자께서 머물기에 좋지 않다는 것은 아실 텐데요."

크리스는 팔짱을 꼈다.

"제가 대공자를 제압해 구금할 수도 있습니다."

"하하, 무서운 말씀이군요. 설마 대공자께서 제게 그러지는 않을 거로 믿습니다. 애초에 전 인질로서 별 가치도 없으니까요."

휴버트가 씨익 웃음을 지었다.

"아시다시피 전 허수아비 대공자 신세라."

크리스는 눈썹을 살짝 꿈틀했다.

휴버트의 태도가 무언가 거슬렸던 것이다.

'상황과 다르게 여유가 넘치는군.'

휴버트는 가주인 후암 공작의 아들이었다.

그런데 가주 일파가 곤경에 처했음에도, 전혀 무거운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이해하기 어려운 일.

크리스는 휴버트의 안색을 깊게 살피며 입을 열었다.

"왜 온 겁니까?"

"이번 사태에 대해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휴버트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암흑 마가의 영지에서 일어난 사태는 제 동생 마리사의 독 때문이 맞습니다."

"...."

"마리사가 이번에 개발 중인 역작, '악의 혈루' 독이 만독관의 관리 소홀로 텐느 강에 방류되었습니다."

참고로, 만독관의 관주는 마리사였다.

이번 일의 모든 잘못이 마리사라는 이야기.

이게 정말이면, 진상을 밝혀내도 고라스 후작에게 죄를 물을 수 없었다.

"제게 그 이야기를 해주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마리사와 남매인 대공자 입장에서는 숨기는 게 좋은 이야기일 텐데 말입니다."

이 사태가 마리사의 잘못으로 판명되면 그게 고의든 단순 실수이든 절대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일단, 당사자인 마리사는 무조건 극형이다.

오라비인 휴버트 대공자, 가주인 후암 공작도 커다란 타격을 입을 거다.

'실제로 이전 삶 때도 마리사는 이번 사태의 책임을 덮어써서 죽음을 맞으니까.'

돌이켜보면, 이전 삶에서 마리사는 굉장히 기구한 삶을 살았다.

일전 '악마의 에뮬릿' 사건 때 누명을 써 양 눈, 혀가 뽑히며, 손발이 잘리는 극형을 받는다.

그럼에도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불구의 몸으로 만독관의 관주까지 되었지만, 이번 고라스 후작의 음모에 다시 희생된다.

모든 잘못을 억울하게 덮어쓰고 끔찍한 죽음을 맞았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건 동생인 마리사를 위해서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지금 마리사는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관리 소홀로 독이 일부 유출된 건 맞지만, 사태 초기에 늦지 않게 중화 조처를 했고, 절대 자신의 독 때문에 이런 사태가 발생한 건 아니라고 부정하고 있습니다."

휴버트는 무겁게 말했다.

"더 늦기 전에 대공자께서 마리사의 잘못을 밝혀 주셨으면 합니다. 최소 마리사의 목숨이라도 건질 수 있게요."

크리스는 잠시 침묵했다.

그는 이 사건의 대략적인 흐름을 알고 있다.

하지만 정확히 구체적으로 어떤 식으로 마리사가 죄를 뒤집어쓰게 되는지까지는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방금 휴버트의 말을 들으니, 번뜩 아귀가 맞추어졌다.

'그러고 보니 이놈. 이번에 처음 보는 게 아니야.'

크리스는 눈을 가늘게 뜬 채 휴버트를 살폈다.

분명 이전에 본 적 없는 얼굴인데, 이상한 기시감이 들었다.

크리스는 문득 하나의 음성이 떠올랐다.

- 이번 일만 처리하면, 마리사 그 재수 없는 년의 얼굴을 볼 일은 없을 테니.

일전 극독 마가와 암흑 마가의 탐사대가 유물 쟁탈전을 벌였던 '악마의 에뮬릿' 사건.

그때, 극독 마가 측에서 마리사에게 누명을 덮어씌우려고 한 공자가 있었다.

가면을 쓰고 있어서 얼굴을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딱 눈앞의 휴버트와 체형이 비슷했다.

크리스는 똑바로 물었다.

"정말 마리사를 걱정해서 그러는 게 맞습니까?"

일순, 휴버트의 얼굴이 굳었다.

금세 다시 온화한 빛으로 돌아왔지만, 크리스는 그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물론, 체형이 닮았다는 것만으로 그때 그놈과 이놈이 동일 인물이라고 확정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의심이 드는 결정적인 이유.

바로 휴버트의 눈빛이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전 마리사를 무척이나 아낍니다."

"저도 마리사와 당신의 사이가 좋음은 알고 있습니다만."

마리사는 종종 크리스에게 쓰잘데기 없는 편지를 보냈는데, 오라버니인 휴버트 이야기도 적혀 있었다.

마도 명문가에서는 드물게 사이좋은 오누이 관계로 보였다.

"그런데 왜 당신의 눈빛에 마리사를 향한 걱정이 전혀 보이지 않는 걸까요?"

"!!"

"도리어, 무언가 시커먼 빛만 가득한 것 같습니다만? 제가 음흉한 속을 알아채는 건 또 전문이라서."

얼핏 들으면, 마리사를 걱정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

마리사가 이번 사태의 원흉임을 크리스에게 주지시키는 이야기였다.

휴버트의 얼굴이 시커메졌다.

"무슨 실례되는 말씀이오?! 당신을 믿어서 어렵게 말을 꺼낸 것이건만, 이런 무례를! 더 이야기할 것도 없으니, 난 이만 가보겠소!"

"잠깐."

파앗!

크리스티앙의 검이 휴버트의 목을 겨누었다.

'어느새?'

휴버트는 침을 꿀꺽 삼켰고, 크리스티앙은 빙글 웃음을 지었다.

"들어올 때는 마음대로라도, 나갈 때는 아니지."

제183화

"…난 극독 마가의 대공자요. 이런 짓을 하고도…."

"뭔 상관이야? 어차피 우리 양 가문은 서로 한판 하기 일보 직전인데. 도리어 네 목을 잘라 우리 가문의 암흑기에 꽂아 놓으면 사기 진작에 좋지 않을까?"

싸늘하게 가라앉은 크리스의 눈동자를 본 휴버트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그러다가 크리스가 피식 웃었다.

"물론, 진짜 죽일 생각까지는 아니니, 너무 겁먹지는 말라고. 칼 하나 겨누었다고 그렇게나 무서워하면 정말 못난이 같잖아."

"…뭐, 뭐라고?"

"그냥 가두어 놓기만 할 테니 얌전히 따라줘. 네놈은 꽤 쓸모 있는 패로 이용할 수 있어 보이니 말이야."

"이… 이…! 비겁한…!"

"나, 나쁜 놈인 것 몰랐어? 그러게, 뭘 믿고 대책 없이 날 찾아온 거야?"

크리스는 빈정거리고는 옆에 있던 멜린에게 말했다.

"모시도록. 허튼 생각 않고 쭈욱 편히 쉴 수 있게, 구속구도 단단히 채워놓고."

크리스는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마리, 구속구를 채워놓아 거동이 불편하실 테니, 네가 따로 잘 모셔."

심증만 있을 뿐이니 다짜고짜 고문하는 건 무리였다.

하지만 꼭 육체의 직접적인 고문만 방법인 건 아니었다.

'티가 나지 않으면서 효과적인 게 정신 고문이지.'

마리가 그 분야의 전문가였다.

"네가 잘 모시다 보면 혹시 알아? 네 시중에 감동한 휴버트 대공자가 무언가 중요한 이야기라도 털어놓을지."

정신 고문으로 휴버트에게 속내를 털어놓게 하라는 이야기였다.

[말씀 알아들었습니다. 이 마리, 도련님의 부탁이니 왓따 최선을 다해 마음과 성을 담아 성심성의껏 이놈을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무, 무슨…! 놓아라!"

휴버트가 외치자, 마리가 청순하게 웃으며 말했다.

[오호호… 귀여워라. 죽고 싶니? 아니면, 시끄러운 혀 먼저 뽑아줄까?]

"!!"

오소소 마리에게 느껴지는 서늘한 기운에 휴버트의 안색이 하얘졌다.

[그러면 이리 오시길. 도련님의 명에 따라, '성심성의껏' 모실 테니, 앞으로 소녀랑 잔뜩 애틋한 시간을 보내도록 하지요.]

그렇게 휴버트는 끌려갔다.

앞으로 감금 내내 마리의 정신 공격을 잔뜩 받게 될 거다.

'정신력이 강해 보이지는 않으니, 뭔가 털어놓겠지.'

예상치 않은 횡재였다.

그리고 뜻밖의 소득이 더 있었다.

"이건?"

"놈에게서 압수한 소지품들입니다."

독 시약들과 해독약들이 즐비했다.

하지만 크리스는 다른 물품에 주목했는데, 통신구였다.

'가문 직통 통신구인가?'

크리스는 이리저리 통신구를 만졌다.

높은 수준의 보안이 걸려 있었지만 크리스가 작정하고 파헤치니 해체할 수 있었다.

크리스는 상대 쪽에 연락하였다.

-휴버트? 무슨 일이냐? 상황이 급한데, 어서 가문으로 돌아오지 않고 뭘 하고 있냐?

이전 한 번 들은 적 있는 익숙한 음성.

극독 마가의 가주인 후암 공작이었다!

"전 휴버트 대공자가 아닙니다. 크리스티앙입니다. 공작 전하께 인사 올립니다."

-아니, 크리스티앙 대공자? 어떻게 이 통신구를?

당황한 음색이 전해졌다.

일단, 크리스는 휴버트를 구금했다는 사실을 숨겼다.

"휴버트 대공자는 제 방에서 따로 휴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공작 전하께 본가와 극독 마가 사이에서 일어난 불미스러운 일에 관해 따로 드릴 말씀이 있어서 통신구를 빌렸습니다."

크리스티앙이 이번 사태를 언급하자, 무거운 기색이 통신구 너머에서 전해졌다.

-분명히 말하지만, 이번 사태는 우리 측이 아니라, 고라스 후작의 음모이네. 난 결단코 암흑 마가와의 충돌을 바라지 않아.

"네, 저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상황에서 이득 볼 건 고라스 후작밖에 없으니까요."

-…그렇게 생각해주니 고맙군. 하지만 상황이 쉽지 않아. 이대로라면, 우린 그대의 가문과 충돌을 피할 수가 없네.

확실히 어려운 상황이었다.

고라스 후작은 이 일을 마리사의 책임으로 만들어 두었다.

가만히 두면 무려 일천이 넘는 사람이 죽게 될 테니, 암흑 마가는 후암 공작 측에 죄를 물을 거고, 서로 간에 엄청난 피를 흘리게 될 거다.

오로지 고라스 후작만 웃게 되는 상황.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해결할 테니까요. 방법이 있습니다."

-방법이 있다고?

"네."

놀란 음색이 전해졌다.

"단, 미리 드릴 말씀이 있어서 연락을 드렸습니다."

-무엇인가?

크리스는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이전에 전하께 제가 했던 이야기, 기억나십니까?"

-이전에 했던 이야기라면….

후암 공작이 돌연 우뚝 침묵했다.

크리스가 무슨 말을 했는지 떠올린 거다.

"필요시 극독 마가에 피를 흘려도 용서해 달라고 했었지요."

-…그랬었지.

"다시 묻겠습니다. 제가 극독 마가에 피를 흘려도 용납하시겠습니까?"

한 번쯤 짚어주는 게 좋았다.

오해하면 안 되는 게, 크리스는 이번 일을 평화롭게 해결하려고 하는 게 아니었다.

커다란 피가 흐르게 될 거다.

-…용납하겠다.

무거운 대답이 돌아왔다.

-종기를 도려내는 데는 아픔이 필요한 법. 극독 마가의 가주로서 부탁하니, 본가의 썩은 면을 도려내는 데 도움을 주도록.

크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더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무엇이지?

"제가 만약 이 사태를 완벽히 해결해 낸다면."

크리스는 이번 일의 진정한 목적을 이야기했다.

"제가 극독 마가의 정수인 '독정(毒井)'을 손에 넣는 데 협조해 주십시오."

독정.

극독 마가의 힘의 근원이었다.

단순히 독술을 넘어 크리스를 한 단계 위의 존재로 탈바꿈하게 해줄 힘.

통신구 너머로 한참 침묵이 흘렀다.

크리스의 요구에 당황한 거다.

-…독정을 가공한 부산물을 말하는 거겠지?

"아니, '원천'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독정이 무엇인지는 알고 하는 이야기인가?

"물론, 당연히 압니다."

그러니까.

'독정'은 암흑 마가의 '성흑'과 비슷한 거였다.

극독 마가의 마인들을 진정한 독인으로 만들어 주는 힘의 원천.

극독 마가에서도 최고의 실력을 가진 마인들만 얻을 수 있었다.

"암흑 마가의 성흑과 다르게, 극독 마가의 독정은 자격만 있으면 꼭 혈족이 아니어도 접근할 수 있으니, 명분은 어떻게든 만들 수 있겠지요."

-그걸 말이라고 하나…?!

후암 공작은 버럭 언성을 높였다.

-우리 극독 마가의 독술을 극한으로 익힌 자가 아니면 독정에 발을 담그는 순간, 한 줌의 핏물로 변한다는 걸 모르는 건가?!

이게 성흑과 다르게 독정을 혈족이 아닌 가문 내 다른 이에게도 개방하는 이유였다.

독정을 흡수하는 과정은 지극히 위험했다.

성취도 높아야 하며, 독에 관해 완벽한 자신만의 관념을 완성해 내야만 독정에 녹아내리지 않고 체내에 흡수하는 게 가능했다.

이럴 만한 자격을 가진 이는 몇 년에 한 명도 잘 나오지 않으니 가문 내 혈족이 아닌 이에게도 개방하는 거다.

-절대 안 된다. 우리 극독 마가의 다른 이들이 반대하는 것을 떠나서 그대가 독정에 도전하는 건 자살행위야.

그런데, 크리스가 황당한 이야기를 하였다.

"그러면 제가 자격을 갖추면 되는 겁니까?"

-…뭐?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어처구니없다는 반응이었다.

-오래 걸리지 않는다고? 일평생 독술을 익혀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거늘.

당연한 반응이었다.

수십 년 독술을 익힌 극독 마가의 마인도 쉽게 도전할 수 없는 게 독정이니까.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충분히 준비를 끝마친 다음에 도전할 테니까요. 나중에 제가 자격을 갖추면 독정을 얻는 일에 협조 부탁합니다."

-하.

통신구 너머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불가능한 일이라는 반응.

하지만 크리스는 물러서지 않았다.

'독정은 앞으로를 위해 꼭 필요해.'

그의 목표는 고작 조금 강한 마왕 따위가 아니었다.

그가 바라는 수준은 홀로 마도 제국을 오시할 힘.

그러니까, 암흑 마가의 시조인 암멸의 마왕처럼.

아니, 그 암멸의 마왕조차 뛰어넘는 힘이었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천재라도 단순한 수련만으로는 성장에 한계가 있었다.

앞으로는 얻을 수 있는 것은 모조리 얻어야만 했다.

'특히 독정은 단순히 독술을 쓰는 데만 도움이 되는 게 아니야.'

성흑이 그의 근본을 완전히 바꾸어 주었던 것처럼, 독정 또한, 그를 또 다른 존재로 탈바꿈하게 해 줄 거다.

무엇보다, 그의 일차적인 목표인 도화경(圖?境)을 이루는 데 필수 불가결했다.

-…그렇게까지 말하니, 알겠네. 자네가 독정을 얻는 데 협조하도록 하지.

씁쓸한 음성이 이어졌다.

-하지만 이번 일을 해결할 수 있을 때의 이야기야. 이대로라면, 독정이고 뭐고 다 끝장일 테니.

고라스 후작의 음모를 파훼하지 못하면, 마리사도 후암 공작도 모두 끝이었다.

마리사는 책임을 물어 죽임당할 거고, 후암 공작은 실각하게 될 거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무릎 꿇게 되는 건 고라스 후작 쪽이 될 테니."

크리스는 단단한 음성으로 말했다.

"암흑 마가의 대공자로서 말하건대, 고라스 후작은 감히 본가를 이용해 농간을 부리려 했으니, 그에 맞는 대가를 치르게 될 겁니다."

* * *

사태를 해결할 본격적인 준비를 하였다.

바로 서쪽 영지로 출발하지는 않았다.

들를 곳이 있었다.

루이나의 도박장이었다.

"고."

"올인!"

"어허? 지금 장난하나? 속임수 쓰는 것 아니지?"

늘 그렇듯, 크리스는 루이나를 불러내기 위해 신이 나서 도박장을 털어먹었다.

'요즘 스트레스 많이 받았다고. 도대체 난 언제까지 이렇게 생고생을 해야 하는 거야?'

크리스는 속으로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어쩔 수 없다는 마음에 개고생하고는 있지만, 불쑥불쑥 억울한 마음이 치솟아 올랐다.

'원래 내가 바랐던 건 그냥 금수저 한량 라이프였다고!'

그런 억하심정이 들어서인지, 조금 과하게 털어먹었고, 사업장에 악마가 나타났다는 급보를 들은 루이나가 하얀 안색으로 나타났다.

"오랜만이네?"

"그…그러게 말입니다. 아하하…."

"에반은 잘 지내고 있고?"

"…네, 네. 종종 공자님 이야기 한답니다. 에반 경도 참. 당신 같은 악ㅁ…아니, 분이 뭐가 좋…아, 아니, 호호, 못 들은 이야기로 해주십시오."

단정한 외모의 미인, 루이나가 응가 씹은 얼굴로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으아아! 난 저놈이랑 언제 인연을 끊을 수 있는 거야!'

마치 호환마마라도 마주한 듯한 반응.

단순히 또 도박장을 털어서가 아니다.

이유가 있었다.

'또 내게 이딴 터무니없는 일을 시키다니!!'

루이나는 크리스가 자신에게 시킨 일을 떠올리고는 속으로 머리를 쥐어뜯었다.

'에반 경은 진짜 눈이 삐었지! 뭐, 이 악마가 본심은 사실 착하다고? 이 악마 놈 때문에 내가 스트레스 받아 빠진 머리가 얼마인데! 탈모가 올 지경이라고!'

한편, 크리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별로 반갑지 않은 얼굴이네? 기껏 큰돈을 벌 기회를 물어와 주었는데."

"그, 그걸 말이라고!! 이런 일을 해야 한다고는 말하지 않았잖습니까?"

"왜? 골드 크로스 때처럼 고생하는 일은 아니잖아."

루이나는 가슴이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건 아니지만, 훨씬 위험하지 않습니까! 이건 극독 마가를 완전히 적으로 돌리게 되는 행위잖아요!!"

처음에는 몰랐다.

그냥 극독 마가를 털어먹자길래 무슨 잔수작을 부리자는 것인지 알았는데.

'이건 너무 심하잖아! 이런 일인 줄 알았으면, 절대 안 했지!'

제184화

하지만 이미 일이 한참 진행되고 난 뒤라, 무를 수도 없었다.

'극독 마가의 마인들은 원한을 절대 잊지 않는다고 하던데. 으아아. 이 크리스티앙 나쁜 놈. 나한테 도대체 무슨 원한이 있어서!!'

고통스럽게 머리를 쥐어뜯는데, 크리스가 얄미운 음성으로 말했다.

"극독 마가를 적으로 돌리는 게 아니라, 고라스 후작 일파를 적으로 돌리게 되는 거겠지."

"그게 그 말 아닙니까? 극독 마가의 대세는 고라스 후작 일파인데요!"

"그거야 지금까지의 이야기고."

크리스는 팔짱을 꼈다.

"이번 일 이후로는 달라지겠지."

루이나는 흠칫하였다.

크리스가 무언가 또 무시무시한 일을 계획하고 있음을 눈치챈 거다.

"하지만 공자님이 대단하다고는 해도 고라스 후작을 무너뜨리는 건…."

고라스 후작은 무려 8성 중(中)의 마군주급 강자에 극독 마가의 세력 중 7할 이상을 장악하고 있기도 했다.

아무리 크리스라도 그런 이와 대적하는 게 가능해 보이지 않았다.

더구나 크리스는 극독 마가의 인물도 아니고 외인일 뿐이지 않은가?

하지만.

"내가 대공자 취임식 때 한 이야기를 들었을 텐데? 난 다른 가문들을 암흑 마가의 깃발 아래 서게 할 생각이야. 그런데 고작 고라스 후작 정도가 문제이겠나?"

루이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황당하기 그지없는 이야기.

하지만 크리스의 음색은 어떤 허세도 없이 담담했다.

당연히 해낼 수 있는 일을 이야기하듯.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짐작이 되지 않았다.

더 무서운 건, 저 황당한 이야기가 허세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물론, 이번 일 한 번으로 고라스 후작을 무너뜨리겠다는 건 아니야. 하지만 극독 마가의 판세를 뒤엎을 계기가 되기에는 충분하겠지."

"...."

"이번 일이 끝나면, 극독 마가는 네 상단 따위는 신경도 쓰지 못하는 처지가 될 거다. 그러니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어."

루이나는 헛기침하였다.

"그, 그렇다면야. 공자님을 믿어보지요."

"감사의 인사는 안 하는 건가?"

"가, 감사요?"

"그래. 큰돈을 벌 기회를 물어다 주었는데, 감사의 마음이 너무 부족한 것 아닌가? 아무리 마음 넓고 착한 나라지만, 조금 서운하군."

루이나는 입을 뻐끔거렸다.

이게 말이야, 방구야 하는 표정이었다.

"대공자 책봉 선물도 안 보내고 말이야."

"…보냈는데요? 암흑 마가에 루돌프 상단 이름으로. 엄청 비싼 선물 보냈는데?"

"나한테는 따로 안 보내지 않았는가? 당연히 개인적으로도 뒷자금을 보냈어야지."

아마추어같이 왜 그래? 하는 표정.

대놓고 삥 뜯으려는 태도에 루이나는 입을 쩍 벌렸고, 크리스는 선심 썼다는 듯 말했다.

"무척이나 서운하지만, 그간의 정을 생각해서 특별히 서쪽 영지에 약품과 구호 물품을 보내주는 정도로 넘어가 주지."

"무, 무슨…!!"

"뭐, 우리 암흑 마가도 돈이 없는 건 아니지만, 랑함 후작이 중간에 수작을 부릴 게 뻔해 조달에 차질이 있을 것 같아서 말이야."

크리스는 빙글 말했다.

"더구나 이러면 암흑 마가에 공적으로 은혜를 입힐 수 있게 되는 거니, 너에게도 나쁘지 않은 일이라고 보는데. 특히 네 진짜 '목적'을 위해서라면."

루이나는 입을 우뚝 다물었다.

크리스가 나름대로 자신을 배려(?)해 이런 삥을 뜯는 거라는 걸 눈치챈 거다.

지금까지 그녀와 크리스의 관계는 철저히 '개인 대 개인'의 관계였다.

하지만 크리스의 요청에 따라 그녀의 상단이 암흑 마가에 도움을 주면, 그녀와 크리스의 관계는 '상단 대 암흑 마가의 대공자' 간의 공적인 관계로 격상한다.

크리스가 암흑 마가의 대공자 입장에서 그녀의 뒤를 봐줄 수 있게 된다는 뜻.

특히 루이나의 진짜 '목적'을 생각하면, 최대한 힘 있는 이들의 비호가 필요하니 이 일은 도리어 그녀가 먼저 청했어야 할 일이지만.

'으아아!! 왜 이렇게 삥 뜯기는 것 같지! 이 나쁜 놈! 악마 같은 놈!'

배알이 꼴렸다.

그녀가 돈벌레여서인지, 크리스가 얄미워서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크리스는 더더욱 얄밉게 서류를 내밀었다.

"자, 도장 찍어."

"…뭡니까?"

"구호도 상단 대 가문 간의 정식 거래이니, 계약서는 써야지. 너도 이렇게 정식으로 서류를 남겨놓아야 좋을 것 아니야? 싫으면 말고."

루이나는 응가 씹는 얼굴로 도장을 찍었다.

"좋아. 이건 필요한 물품 목록. 급하니 지금 바로 빠르게 보내달라고. 늦으면 손해배상 청구할 테니."

"으아아! 무슨 놈의 손해배상! 안 늦을 테니 얼른 나가기나 하십시오! 더 얼굴 보기 싫으니!"

크리스와 대화를 나눌 때마다 복장이 터져 수명이 몇 달씩 줄어드는 것 같았다.

크리스가 사라진 후, 마음을 진정시킨 루이나는 크리스가 놓고 간 품목 서류를 살폈는데.

"미친?"

서류 뒤쪽 잘 안 보이는 구석에 작은 글씨로 말도 안 되는 고가의 품목들이 적혀 있었다.

"이 나쁜 죽일 악마 놈아!!"

* * *

이제 서쪽 영지로 출발하려는데, 대공자의 신분이니 수행원이 따라붙었다.

"제가 모시기로 하였습니다. 란돌입니다."

낯선 얼굴.

'랑함 후작 쪽 마인이군.'

크리스는 본가 저택에 서식하는 유령들을 휘어잡고 있는 마리를 이용해 남들이 모르는 은밀한 정보를 꽤 알고 있다.

그 정보에 따르면 지금 나타난 란돌은 남몰래 랑함 후작을 따르고 있는 인물이었다.

'날 훼방하려는 수작이군.'

정석대로라면 쫓아내는 게 옳겠지만.

크리스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잘됐어. 이놈을 이용해 먹어야지.'

크리스는 놈을 역으로 이용해 도리어 랑함 후작과 고라스 후작의 뒤통수를 칠 계획을 짰다.

"알겠네. 잘 부탁하네. 먼저 출발 준비를 하고 있게."

크리스는 적당히 인사 후 놈을 물리고 난 다음 다른 이들을 바라보았다.

늘 자석처럼 따라다니는 멜린, 알로스, 쥬피엔이었다.

"어서 가지요. 대공자님과 함께 극독 마가 놈들의 목을 벨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리는군요."

"…저, 저는…안 가면 안 될까요?! 수련도 해야 하고, 멍청해서 이번 일에 도움 되지 않을…!!"

"얼른 가자. 심심해."

각각 이야기했는데, 크리스가 뜻밖에 고개를 저었다.

"멜린, 너는 따라오지 마."

"네?"

"어차피 이번 일의 진상을 밝히는 데 넌 별 도움 안 돼."

"하지만 유혈 사태가 생길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멜린은 전투광답게 극독 마가랑 싸우고 싶어 몸이 달아올라 있는 듯했다.

"네가 따로 해 줄 일이 있어."

"어떤?"

"중요한 일이야."

크리스는 다른 이가 듣지 못하게 목소리를 낮추었다.

속삭임을 들은 멜린의 눈이 커졌다.

"설마, 주군?"

"그래, 네가 짐작하는 일을 생각하고 있는 게 맞아."

크리스는 고작 일의 진상을 밝히는 것으로 이번 사태를 마무리할 생각이 없었다.

더욱 커다란 사고를 칠 계획이었다.

그 계획을 위해 미리 멜린을 통해 준비하려는 거다.

"아아. 역시 내가 섬기기로 한 주군. 이건 기대한 것 이상이군요. 설레는 마음으로 주군의 명을 수행하겠습니다."

멜린은 흥분된다는 듯이 혀를 핥았다.

"쥬피엔, 너도 오지 마."

"왜? 나 똑똑해. 진상 밝히는 데 도움 될 거야."

"…열혈 바보인 네가?"

"머리는 좋아."

쥬피엔은 당당히 말했다.

멍해 보이면서도, 은근 날카로운 구석이 있는 그녀인지라, 틀린 말은 아닐 수도 있었다.

"너도 따로 할 일이 있어."

"뭔데?"

"이걸 받아."

크리스가 건넨 돌을 받은 쥬피엔은 고개를 갸웃했다.

"환석(幻石)?"

환영이 깃들어 있는 마도구를 뜻한다.

"네 환검술에 도움을 줄 수련용 환영들이야. 최대한 반복 숙달해서 강해져."

"!!"

"지금 네 힘으로는 내게 어떤 도움도 될 수 없으니."

매정한 이야기지만, 사실이었다.

물론, 쥬피엔의 자질은 나쁘지 않다.

최고의 근성까지 가지고 있으니, 먼 미래에는 충분히 7성 이상의 최고위 마인까지 성장할 수 있겠지만, 문제는 당장이었다.

최소 5성은 되어야 그의 힘이 될 수 있었다.

'한 가지 다행인 건, 쥬피엔이 이미 충분히 그릇을 다져 놓았다는 거야.'

강해지는 데 필요한 건 기초 기반이 되는 '그릇'과 '깨달음'이다.

크리스는 깨달음에 그릇이 따라가지 못했던 상황이었지만, 쥬피엔은 정반대였다.

그녀는 암흑 마가를 통틀어 최고의 수련 벌레.

먹고 잘 때를 제외하고는, 아니, 심지어 먹고 잘 때조차 나름의 방식으로 수련을 할 정도로 지독한 근성을 지니고 있어 누구보다 탄탄한 기초를 갖추고 있었다.

문제는 깨달음이었다.

'다행히 환영술은 간접적으로 깨달음을 체험하게 하는 게 비교적 쉬우니까.'

크리스가 건네준 환석에는 쥬피엔에게 필요한, 위로 올라가기 위한 깨달음이 빼곡하게 담겨 있었다.

'물론, 이런다고 무조건 빠른 성취가 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간접 체험을 시켜주어도 깨달음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건 쥬피엔이 해내야만 했다.

하지만 크리스는 쥬피엔이 해낼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쥬피엔만 한 근성을 지닌 이는 이전 삶에서도 쉽게 보지 못했으니까.

"…왜 이런 걸 내게?"

크리스가 준 선물이 어마어마한 기연이라는 걸 알고 있는 듯 쥬피엔은 잠시 말문이 막힌 얼굴이었다.

"너 더 알차게 부려 먹으려고 그러는 건데?"

크리스는 얄밉게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잊지 마. 난 이제 대공자니, 넌 이제 날 위해 일해야 하는 호구 신세라고."

쥬피엔뿐이 아니다.

암흑 마가의 모두가 크리스의 호구가 된 셈이다.

쥬피엔은 흥, 코웃음을 쳤다.

"강해져서 반드시 짓밟아 주겠어."

"그래, 그래. 목표는 높을수록 좋으니까. 얼른 가봐."

마지막은 알로스였다.

"저, 저도 안 가도 되겠지요? 저는 가문에 남아서 뭘 하면 될까요?!"

"남기는 뭘 남아. 넌 나 따라가야지."

"허, 허억. 전 멍청하고 능력도 없는데요? 도, 독에 당할 게 무서운 게 아니라…!! 괜히 대공자님의 발목을 잡게 될까 봐!!"

알로스는 독이 잔뜩 퍼져 있는 서쪽 영지에 갔다가 중독이라도 될까 두려운 듯 허우적거렸다.

"걱정하지 마. 어차피 너 튼튼하잖아? 독에 당한다고 쉽게 죽기야 하겠어?"

"그,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제가 정말 독에 당하게 되기라도 할 것처럼."

"어. 맞아. 너 독에 당해야 해."

독에 당한다, 도 아니라, 독에 '당해야 한다'.

크리스가 알로스를 이용해 무언가 꾸미고 있음을 뜻하는 뭔가 의미심장한 뉘앙스.

"제가 뭔가 잘못 들은 것 같습니다만?"

"아, 뭐. 진짜 널 독에 중독시키겠다는 건 아니고. 아니, 결과적으로 비슷한 건가?"

"네? 네? 대, 대공자님?! 농담이시죠? 하하. 대공자님도 참. 그런 농담을 하시다니, 센스가 넘치십니다."

"농담도 거짓말도 아니니, 잘 들어."

"네? 네?"

크리스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서쪽 영지에 가면 네가 해주어야 할 일이 있어."

"무슨?"

알로스는 두려운 듯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크리스의 '작전' 설명을 듣고 나서는.

"그, 그런 짓을 하면 제가 죽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제185화

"죽지는 않을 거야. 조금 고생이야 하겠지만, 어쨌든 믿고 맡긴다."

"으아아아!!"

알로스는 비명을 질렀으나, 헛된 외침이었다.

그렇게 울상인 알로스를 끌고 크리스티앙은 말에 올랐다.

그런데 막 성 밖을 벗어나려는데, 뜻밖의 인물이 발길을 붙들었다.

차분하게 부드러운 인상의 미녀.

유리안이었다.

"…유리안 공녀."

"위험한 곳으로 가는데, 인사라도 하려고 들렀어."

유리안은 싱긋 웃었다.

주변이 화사하게 밝아지는 듯한 예쁜 미소였지만, 크리스는 편하게 그 웃음을 바라보지 못했다.

'이전보다 강해졌어?'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힘은 그대로다.

하지만 악마의 잔향이 확 짙어졌다.

멸망의 시대를 경험한 크리스만이 알아차릴 수 있는 흔적.

'악마의 축복을 추가로 받은 거야. 어째서?'

크리스는 눈빛을 가라앉혔다.

단순히 더 강한 악마의 축복을 받았다는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이유'였다.

악마 계약자들은 모두 간절한 소망이 있어서 악마와 계약한다.

유리안은 무얼 바라고 있는 걸까?

'가주 자리를 바라고 악마와 계약한 건 절대 아니야.'

유리안은 크리스가 대공자가 될 때까지 어떤 훼방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바라는 것은 가주직이 아닌, 다른 무언가였다.

'짚이는 게 없군.'

크리스는 새삼 유리안에 대해 전혀 알고 있는 바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에게 너무 무관심했다는 것도.

'하지만 하나 확실한 건 있어.'

유리안은 무언가 섬뜩한 바람을 품고 있는 게 분명했다.

지금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쩌릿한 긴장감이 그 사실을 증명했다.

온화하게 웃고 있지만, 마치 칼이 드리운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고 보니, 대공자 책봉도 제대로 축하 못 해줬네. 누나가 되어서 챙겼어야 했는데, 미안해."

"그런 연기 하실 필요 없습니다. 절 위하는 마음 따위 전혀 없으시지 않습니까?"

"!!"

순간, 유리안의 얼굴이 굳었다.

하지만 다시 스르르 부드러운 표정으로 돌아갔다.

"그건 아니야. 난 나름대로 널 특별하다고 생각하고 있는걸?"

"저를 말입니까?"

"응, 이상하지? 사실, 우리 별로 친하지도 않은데 말이야. 나도 잘 이해가 안 되는데, 아마, 네가 다른 이들과는 다르다는 생각이 들어서일까? 나도 내 마음을 잘 모르겠네."

종잡을 수 없는 그녀의 이야기에 크리스티앙은 입을 다물었다.

유리안은 후후 웃었다.

"이번에 서쪽 영지에 직접 가려고 하는 것,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서지?"

"…무슨 말입니까?"

"일전 골드 크로스에서 있었던 진열 흑사병 사건 때, 네가 백성들을 치료했다는 이야기를 들었거든. 어둠의 성자라는 별명까지 얻었다며?"

크리스는 의외란 얼굴을 했다.

마도 제국 쪽으로는 크게 퍼지지 않은 이야기다.

다른 굵직한 일들에 비해 사소한 일이라 다들 큰 관심을 안 가지기도 했고.

"뭐, 저주 마가의 수작을 막으려고 했던 일일 뿐, 딱히 백성들을 생각해서 그런 건 아닙니다."

"단순히 훼방이 목적이라면 그렇게까지 열심히 환자를 치료할 필요는 없잖아. 들어보니 환자 전원을 살렸다고 하던데."

"…그냥 능력이 되니, 겸사겸사 손을 썼을 뿐입니다."

"후후, 그게 네가 보통의 이들과 다른 점이야. 세상에는 그런 선의는커녕, 악의만 가득 가진 사람이 많으니까."

유리안이 묘한 음색으로 말을 이었다.

"자신의 욕심을 위해 남들을 지옥에 떨어뜨리는 끔찍한 짓도 아랑곳하지 않을 정도로 말이야."

크리스는 흠칫하였다.

'방금?'

흘리듯 한 말이지만, 아니었다.

크리스는 방금 이야기가 유리안의 '진면목'을 밝히는 데 중요한 단서임을 직감했다.

"무언가 비슷한 일을 겪기라도 한 것 같은 말투군요."

떠보았지만, 웃음으로 넘길 뿐이었다.

"글쎄, 후후. 어쨌든 내가 주책같이 너무 오래 붙들었네. 잘 다녀와."

유리안은 그렇게 홀연히 사라졌다.

이후, 크리스와 헤어진 유리안은 성의 첨탑으로 올랐다.

바람을 맞으며 하늘을 보았다.

"비슷한 일을 겪었냐, 라."

유리안의 얼굴이 씁쓸해졌다.

"겪었을 뿐일까."

그녀의 머릿속에 끔찍한 전경이 떠올랐다.

과거 그녀가 겪어야 했던 지옥.

이 일이 아니었다면, 그녀가 악마에게 영혼을 팔 일도 없었으리라.

그때, 높은 고음의 음성이 그녀를 불렀다.

"크리스티앙을 본 소감은 어땠어?"

고개를 돌리니, 놀라운 인물이 나타나 있었다.

찬란한 은발.

여인처럼 아름다운 외양.

동시에 얼굴의 사선을 가로지르는 섬뜩한 흉터.

일전, 크리스티앙을 죽이려고 했던 1공자 셰라드였다!

당시 셰라드는 크리스의 기지로 게헨나에 떨어졌는데, 죽지 않고 돌아온 거다.

단순히 살아 돌아온 게 아니었다.

눈가에 '악기'가 일렁이고 있었다.

셰라드가 악마 계약자가 되었다는 증거.

"이제 몸은 괜찮은가요, 오라버니?"

"아아, 덕분에. 그런데 오라버니란 말은 조금 그렇지 않니?"

셰라드가 히죽 웃었다.

"넌 내 진짜 동생도 아니잖아."

"!!"

놀라운, 의미심장한 이야기.

유리안은 그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딴 것, 우리에게 상관없지 않나요?"

"큭큭, 그렇지. 넌 암흑 마가의 피를 바라고, 난 옆에서 그 피를 같이 마시고 싶을 뿐이니."

셰라드가 혀를 옆으로 내밀어 사선으로 그어진 흉터를 핥았다.

"그래서, 크리스티앙은 어떻게 할 거니?"

유리안은 잠시 침묵했다.

그녀는 암흑 마가를 피로 물들일 계획이다.

하지만 이상하게 그녀는 다른 이들이라면 몰라도 크리스티앙은 죽이고 싶지 않았다.

특히 자신의 손으로는.

'하지만 내 목적을 위해서는 크리스티앙을 살려둘 수는 없어.'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다.

유리안은 굳은 음성으로 말했다.

"크리스티앙을 당신이 죽여줘요. 이번 극독 마가와의 사건 때 틈을 봐서."

"큭큭, 좋아. 그렇지 않아도 크리스티앙의 목숨은 내 거라 누구에게도 양보할 생각 없었으니까."

셰라드는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여인처럼 아름다운 외모, 일그러진 흉터와 어울려 섬뜩한 미소가 그려졌다.

"이번엔 어떤 대단한 모습을 보여줄지 기대되는걸."

셰라드가 손을 들어 얼굴에 새겨진 흉터를 어루만졌다.

보석 같은 눈동자에 광기가 깃들었다.

"크리스티앙을 떠올릴 때마다 이 흉터가 저릿해왔지. 지금도 마찬가지야. 아아, 너무나 설레 가슴이 떨릴 정도야."

셰라드는 휙 사라졌고, 유리안의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어쩔 수 없어.'

과거, 끔찍한 지옥 속에서.

그녀는 맹세했다.

악마가 되기로.

그러니, 다 괜찮았다.

그렇게 크리스티앙의 뒤에서 새로운 위협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 * *

'유리안은 위험해.'

서쪽 영지로 가는 길에서 크리스티앙은 생각했다.

그녀의 목적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지만, 확실했다.

유리안은 커다란 위험을 품고 있었다.

'대비해야겠어.'

어쩌면, 유리안이 이번 극독 마가 사태 때 무언가 손을 쓰려고 할 수도 있었다.

만약 정말 그렇다면, 그렇지 않아도 쉽지 않은 일이 더욱더 어려워지는 셈.

하지만 괜찮았다.

'어차피 유리안 공녀도 내가 무슨 패를 숨기고 있는지 모를 테니까.'

그래.

극독 마가의 고라스 후작이 어떤 흉계를 꾸며놓았든.

랑함 후작이 어떤 훼방을 하려고 하든.

유리안이 어떤 위험한 비수를 던지든.

상관없었다.

다 짓밟으면 그만이니.

"알로스?"

"네, 네?"

"내가 시킨 일 잘 기억하고 있지?"

알로스의 얼굴이 하얘졌다.

"믿고 있는다."

그렇게 모두를 농락할 크리스티앙의 '작전'이 첫 막을 열었다.

* * *

다음 날.

드디어 서쪽 영지에 도착했다.

서쪽 영지에 도착하니, 잔뜩 가라앉은 분위기가 느껴졌다.

정체불명의 역병에 대한 공포가 사람들을 뒤덮고 있었다.

"저분들은?"

"본가에서 오신 분들이야. 혹시 저분이 크리스티앙 대공자?"

아름답게 잘생긴 소년의 얼굴이 사람들 앞에 나타났다.

"저분이 본가 역사상 최고의 천재일지도 모른다는 분이야."

"저분이면 이 역병을 해결해줄 수도 있어."

"크리스티앙 대공자 만세!!"

"만세!!"

희망에 찬 외침이 터져 나왔다.

그런데 크리스티앙의 반응이 이상했다.

평소라면 한껏 재수 없는 오만한 표정을 지어 보였을 텐데,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일 뿐이었다.

이유가 있었다.

'으아아!! 이 나쁜 악마 놈!! 나보고 어떻게 이런 일을 하라고!!'

크리스티앙이 아니었기 때문에.

크리스는 또 성좌의 휘장으로 알로스를 자신으로 위장시켜 대역을 맡긴 거다.

알로스는 눈을 질끈 감고는 크리스티앙과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 저, 저보고 대역이요? 독이나 병에 대해서는 하나도 모르는데요?

- 괜찮아. 도리어 좋아.

- 조, 좋다니?

- 어차피 적들의 눈을 속이려는 게 목적이니까. 넌 그냥 어리바리 헤매는 모습이나 실컷 보여줘. 아니, 확실히 상대를 속이려면 아예 너도 독에 중독되는 게 나을 수도 있지.

그 이야기를 들은 알로스는 침을 꿀꺽 삼켰다.

크리스의 목적이 단순한 진상 파악이 아닌 걸 눈치챈 거다.

알로스를 미끼로 상대의 눈을 가리고 무언가 무시무시한 일을 획책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 아, 아무리 그래도 독에 중독되라니요? 저, 절대 싫습니다!

- 그래, 아무리 나라도 너한테 독을 먹일 수는 없지. 난 착하니까. 대신, 자, 이거.

- …이, 이건 뭡니까?

- 영약이야. 그것도 개량한 영약. 기존 영약보다 마기 증진 효율이 훨씬 높아진. 바보인 너도 쉽게 흡수할 수 있을걸?

- …왜, 왜 제게 이런 귀한 것을?

알로스는 미심쩍은 눈으로 크리스를 보았다.

역시나.

- 대신 조금 부작용이 있어.

- …부작용이면 어떤?

- 서쪽 영지에 도는 역병과 비슷한 증상이 생길 거야. 아, 심하지는 않을 테니, 너무 걱정은 안 해도 돼.

- …정말입니까?

- 아마도? 죽지는 않을 거야.

- 크아악! 그 불길한 대답은 무엇입니까?! 결국, 절 독에 중독시킨 것과 다름없는 상태로 만들겠다는 것 아닙니까?!

- 원래 좋은 영약은 몸에 독한 법이야. 싫으면, 그냥 안 준다?

알로스를 희생(?)시켜 완전히 상대들을 방심시키겠다는 의도.

알로스는 울상을 지었지만, 거절할 수도 없었다.

크리스가 건넨 영약은 원래라면 방계의 찌그레기인 알로스 따위는 감히 바랄 수도 없는 귀한 것이었으니까.

'으아아. 이 나쁜 악마 놈! 크흑, 로이 경, 그립습니다. 전 언제 이 악마 놈한테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오늘따라 골드 크로스에서 만났던 소백작 로이가 유독 그리워지는 알로스였다.

한편, 랑함 후작이 보낸 첩자인 란돌은 피식 비웃음을 지었다.

'역시나 별것 없군. 하긴, 당연하지. 아무리 천재라도 독과 질병에 대해 해박하게 알고 있을 리가. 다들 천재라고 치켜세워 주니 주제도 파악 못 하고 우쭐대는 마음에 나선 거겠지. 꼴좋군.'

크리스로 위장한 알로스가 한창 어리바리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랑함 후작 각하께서는 어떻게든 훼방 놓으라고 했지만, 그럴 필요도 없겠어.'

란돌은 랑함 후작에게 서신을 적었다.

크리스티앙 대공자가 진상을 밝힐 염려 따위는 절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내용의 서신이었다.

하지만 첩자 란돌이 모르는 게 있었다.

'진짜' 크리스티앙이 지금 무얼 하고 있는지.

제186화

크리스는 일단 거리 곳곳을 돌아다니며 상황을 살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정보를 취합한 후, 환자들이 모여 있는 치료소를 찾아갔다.

"의사입니다. 도움을 드리러 왔습니다."

마도구로 변장한 덕에 치료소의 치료사들은 별다른 의심 없이 크리스를 맞았다.

"아, 감사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환자들이 급속도로 늘고 있어서 손이 모자란 참이었습니다."

"상태가 많이 심각합니까?"

"네, 벌써 천 명이 넘는 환자가 생겼습니다. 아직 사망자는 거의 생기지 않았지만, 악화하는 속도를 봤을 때 곧 수많은 사망자가 생길 겁니다."

치료사가 무겁게 말했다.

"정확히 증상이 어떻습니까?"

"의식 저하입니다. 환자들 모두 극심한 두통과 구토 증상을 호소하다가 점차적으로 의식을 소실하고 있습니다."

"발열이나 다른 증상은 없습니까?"

"환자 중 발열을 보이는 이는 없습니다. 호흡기나 다른 기타 증상도 없고요."

크리스는 속으로 생각했다.

'자연적인 전염병과는 양상이 다르군.'

전염성을 지닌 감염병 중에서도 의식을 악화하는 병은 적지 않게 있다.

하지만 그런 병들은 대다수 발열을 동반한다.

'뇌염이나, 수막염 종류도 아니야.'

마리사가 개발 중이었다는 '악의 혈루'와 똑 닮은 증상이었다.

그녀가 개발 중인 독약이 딱 이런 증상을 일으킨다고 알려져 있다.

정말 마리사가 유출한 약이 문제를 일으킨 걸까?

정확한 건 환자를 더욱 살펴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면 환자들을 살펴봐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아, 저기 리사라는 분께 안내를 받으십시오."

"리사?"

"네, 얼마 전 합류한 외지의 치료사로 저분의 치료 덕분에 많은 환자가 아직까지 죽지 않고 버티고 있습니다."

들으니, 대단한 수준의 치료사 같았다.

고개를 갸웃하며 가본 크리스는 눈을 크게 떴다.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 환자를 보고 있었다.

'…마리사잖아.'

나름대로 극독 마가의 녹색 머리칼을 감추는 등 위장하고 있었지만, 크리스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극독 마가의 마리사였다!

'얘가 왜 여기에? 설마 이번 사태를 해결해 보려고?'

그런 것 같았다.

마리사는 멀뚱하게 서 있는 크리스를 휙 보더니 뾰족하게 외쳤다.

"새로 온 치료사? 뭐 하고 있어요?! 여기 환자 혈압 떨어지는 것 안 보여요? 여기 와서 도와주세요!"

"…그 치료 방법, 잘못된 것 같은데?"

"뭐라고요?!"

"뇌부종에 의한 혈압 저하인데, 그런 식으로 치료하면 안 되지."

"…무슨?"

크리스는 의선 명가의 지식대로 숨이 넘어가는 환자를 조처했고, 곧 환자의 상태가 안정되었다.

"…아니? 어떻게?"

마리사는 눈을 크게 떴다.

참고로, 독과 의술은 일맥상통하는 법.

극독 마가는 치료술의 명문이기도 해서, 의선 명가를 제외하면 대륙에서 가장 뛰어난 치료술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방금 크리스가 보여준 모습은 극독 마가의 재녀인 그녀의 실력을 훌쩍 뛰어넘는 것이었다.

"아아, 내가 천재라서 말이야."

익숙한.

잊을 수 없는 재수 없는 음성을 들은 마리사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크리스는 씨익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 * *

마리사는 크리스를 단박에 알아보았다.

외양은 변해 있었지만, 크리스 특유의 재수 없는 분위기는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것이니까.

"네, 네가 어떻게?"

"암흑 마가의 대공자가 재난 지역에 오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아, 아니, 넌 여기 오자마자 독에 중독되어 쓰러졌다고 들었는데?"

참고로, 알로스는 서쪽 영지에 오자마자 크리스가 준 영약을 먹고 중독(?) 상태가 되었다.

큰소리쳐 놓고 오자마자 도리어 독에 당한 상황이라 곧바로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아아, 적을 속이기 위한 거짓말이지. 그런데 너, 왜 그런 얼굴이야?"

크리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그렇게 반가워?"

마리사는 뭐라고 설명하기 복잡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멍한 눈으로 크리스를 보다가 팩 고개를 돌렸다.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절대 아니거든!! 그, 그냥 나는 네가 내가 만든 독 때문에 중독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사실.

마리사는 최근 정신적으로 궁지에 몰려 있었다.

자신이 개발 중인 극독이 어떤 이유에서인지 암흑 마가의 상수원에 뿌려졌고, 그 뒤 이런 끔찍한 사태가 일어났다.

이대로라면 모든 책임을 덮어쓰게 될 예정.

그래서 어떻게든 해결해 보려고 위험을 무릅쓰고 암흑 마가의 영역에 숨어들었는데, 크리스티앙이 자신의 독에 중독되었다는 소문까지 들었다.

그 소식을 듣는데 왜 그렇게 눈앞이 컴컴해지던 건지.

무너져 내리기 일보 직전이었는데, 크리스가 이렇게 나타났다.

크리스티앙의 재수 없는 표정과 음성을 들으니 이상하게 왈칵 안도감이 들어 눈시울이 붉어져 버렸다.

"내, 내가 이러는 건, 그러니까 네가 독에 쓰러지면, 내 책임이 더 커지니까! 그래서 그러는 것뿐이야."

"굳이 그렇게까지 자세히 안 이야기해 줘도 되는데."

"…그래."

민망함에 마리사의 얼굴이 급속도로 무표정해졌다.

'이 나쁜 놈.'

그러고 보니 굉장히 오랜만에 보는 건데, 크리스에게서는 전혀 반가운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마리사는 꽤 그를 보고 싶어 했는데 말이다. 물론, 절대 다른 의미가 아닌, 무조건 무조건 친구의 의미로서.

'생각해보니 이 나쁜 놈. 내가 편지 보내도 답장도 거의 하지 않았어.'

그때, 크리스가 이런 말을 했다.

"어쨌든 만나서 다행이네."

"…왜?"

"왜긴. 너 도와주려고 했으니까 그렇지. 우린 서로 돕기로 한 동맹 관계인데, 네가 이런 일로 억울하게 누명 써서 죽으면 안 되잖아."

크리스는 나중에 극독 마가에서 독정을 얻을 때 마리사를 호구로 삼아 이용할 계획이었으니, 이런 일로 죽게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왜일까?

크리스티앙의 말을 듣자 꿍했던 마리사의 마음이 이상하게 풀렸다.

'크, 크흠. 소심하게 구는 건 마인답지 않은 것이니, 내가 마음 넓게 넘어가 주는 거야.'

어쨌든 한가하게 회포나 풀 상황은 아니었다.

"마리사, 넌 어떻게 생각하지? 네가 개발한 독 때문이라고 생각해?"

이 사태가 마리사가 유출한 독이 원인이 맞는지를 먼저 파악해야만 했다.

"…난 아니라고 생각해."

"이유는?"

"증상은 똑같아. 하지만 내 독은 이렇게나 광범위한 살상력을 낼 효과는 없어."

독이 유출된 상수원에서 이곳 서쪽 영지까지는 꽤 거리가 있었다.

아무리 많은 양이 유출되었다고 해도 중간에 희석되어 실제 개개의 사람들이 복용한 양은 극미량일 것이다.

"학살용으로 개발한 것도 아니어서, 어느 농도 이상 복용하지 않으면 효과가 나타나지도 않으니, 내 독은 아니야."

크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비슷하지만, 다른 독일 가능성이 크다는 거였다.

아마 마리사에게 누명을 씌우려고 일부러 비슷한 증상이 나타나게 하는 독을 개발해 살포한 것이리라.

"짐작되는 독은 있나? 이 정도 살상 효과면 '의념 독'일 가능성이 커 보이는데."

말 그대로, 6성 마스터 클래스의 독인(毒人)이 의념을 담아 만드는 독이었다.

의지로 법칙의 한계에 도전하는 의념을 담은 독답게, 말도 안 되게 강력한 효과를 보인다.

"아마 의념 독은 아닐 거야. 내가 아는 의념 독 중에 이런 증상을 보이는 독은 없어."

의념은 지금껏 살면서 쌓아온 의지를 구체화한 것.

각 개인마다 기껏해야 2~3개 정도씩만 가질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극독 마가라도 의념 독의 개수 종류는 제한되어 있었다.

'이상하군. 의념 독이 아니면, 이런 대단한 효과의 독을 개발하는 게 쉽지는 않을 텐데.'

새로운 독을 배합하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다.

하지만 쓸 만한, 효과적인 독을 개발하는 건 지극히 난해했다.

특히 이렇게 극미량만으로도 강력한 살상 효과를 보이는 독은 극독 마가라도 뚝딱 만들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환자들을 치료하려 해봤자 소용없어. 이 독이 내가 개발한 '악의 혈루'와 같은 증상을 일으키는 거라면, 절대 환자들을 살릴 수 없어."

마리사도 간신히 생명을 연장하는 데 그쳤을 뿐이다.

그녀는 무력하게 말했다.

"이제 수많은 사망자가 생길 거야."

그런데 크리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내가 없었을 때의 이야기지."

"…뭐?"

"내가 왔으니, 여기 환자들은 누구도 죽지 않게 될 거다."

마리사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크리스는 진심이었다.

'해독제가 없어도 환자들을 살릴 방법이 있어.'

그리고 환자들을 살려야 하는 더욱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환자들을 회복시켜야 독의 정체를 밝힐 수 있다."

"…무슨?"

"모든 답은 환자들에게 있는 법이니까."

크리스가 방금 한 말은 의선 명가의 가훈 중 하나였다.

'지금은 환자 중 대다수가 의식이 저하되어 있어서 제대로 된 조사를 하기 어렵지만.'

치료해 의식을 회복시키면 본격적인 조사를 할 수 있을 거다.

이른바, 의선 명가의 조사법인 '역학조사'였다.

물론, 환자를 조사하는 것만으로 독의 정체까지 알 수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환자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정보가 있었다.

바로 독이 투약된 경로였다.

그 경로를 역으로 추적하면, 이번 사태의 원흉을 밝힐 수 있으리라.

* * *

이틀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암흑 마가 쪽의 여론은 악화만 되어갔다.

진상을 밝히러 간 크리스티앙이 되레 독에 당해 쓰러진 상황이니까.

"잘난 척 떠나더니, 원."

"역시 별것 없었어."

본가의 마인들, 특히, 랑함 후작을 따르는 이들이 비웃음을 지었다.

랑함 후작은 그런 분위기를 보다가 통신구를 통해 누군가에게 연락하였다.

-오랜만이구려, 랑함 후작.

낮은 음습한 음성이 통신구 너머로 들려왔다.

"저도 오랜만입니다, 고라스 후작."

놀라운 장면.

둘이 내통하고 있다는 크리스의 추측이 사실이었다는 뜻.

-일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소이까?

고라스 후작이 물었다.

"진상을 밝히러 떠난 본가의 크리스티앙 대공자 쪽은 전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랑함 후작은 차분히 말했다.

"일은 고라스 후작이 원하는 대로 진행될 겁니다."

통신구 너머로 탁한 웃음이 들려왔다.

-좋구려. 후작이 내게 협조해준 대가는 반드시 잊지 않겠습니다. 후작은 원하는 힘을 얻게 될 겁니다.

"...."

-드디어 노르디언의 시대가 끝나고, 암흑 마가에 새로운 주인이 나타나겠군요.

의미심장한 이야기.

그렇게 통신이 끝났고, 랑함 후작의 눈빛이 낮게 가라앉았다.

그의 시선이 본가의 동편.

노르디언이 머무는 별채로 향했다.

랑함 후작의 눈동자가 한없이 싸늘해졌다.

그는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제가 하는 일은 모두 아버지 때문입니다."

* * *

그렇게 랑함 후작이 음습한 대화를 하는 동안, 크리스는 환자를 돌보고 있었다.

"…너,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의술을?"

옆에서 마리사가 경악한 음성으로 말했다.

"말했잖아. 대충 취미 삼아 공부해본 적 있다고."

제187화

"그걸 말이라고!! 아니, 아무리 천재라도 어떻게?"

그렇게 경악할 만큼, 크리스가 지난 이틀간 보여준 모습은 대단했다.

일단, 꺼져가는 생명을 다루는 처치.

어떤 명의에 못지않았다.

아니, 고작 명의 수준일까?

'극독 마가의 원로도 저런 치료는 하지 못해. 저건 신의(神醫)나 다름없는 수준이잖아.'

더구나 더욱 믿기지 않는 일이 있었다.

'어떻게 악의 혈루의 치료법을? 해독제도 없으면서?'

크리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뭐, 해독제가 없어도 증상이 일어난 원리만 이해하면 그에 맞춰 치료하면 되는 거잖아?"

"...."

"네 독, 뇌에 물이 차게 만드는 거니, 그에 맞춰 압력을 교정해 주었지."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크리스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말했지만,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일단, 약을 즉석에서 개발했다.

콩팥에 작용해 체액 농도를 조절하는 약이었다.

'의선 명가의 지식에 따르면, 뇌에 찬 물은 체액 농도를 조절해 뺄 수 있으니까.'

애초에 의선 명가가 독을 치료하는 방식이 이런 식이었다.

무수히 많은 독의 해독제를 일일이 개발할 수는 없으니, 대신, 독이 일으키는 증상을 치료하는 거다.

루이나가 고가의 약초들을 재빨리 보내주어서 그것을 배합해 쉽게 대량의 약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거기에 의선 명가의 지식에 따른 세밀한 수액 투여 조절까지.

덕분에 환자들의 상태가 급속도로 안정을 찾아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크리스가 해낸 대단한 일.

"알았어. 이 독의 정체를."

"어떤?"

"마리사, 네가 개발한 독이 맞아."

"!!"

마리사의 눈이 흔들렸다.

"마, 말도 안 되는…!"

"연금술로 확인한 결과, 모든 환자의 혈액에서 네가 개발한 '악의 혈루'의 결정이 확인되었어."

"하지만 극미량이 검출되었을 뿐이야. 그 농도로는 절대 이런 증상이 일어나지 않아!"

마리사가 부정했다.

"네 독만 있다면 그렇겠지."

"…그게 무슨?"

"결합 독이야."

"…뭐? 설마?"

마리사의 눈이 커졌다.

당연히 아는 용어였다.

단독으로는 어떤 효과도 없지만, 다른 독과 같이 복용 시 효과를 극단적으로 증대시키는.

"그래, 누군가 이곳 영지에 결합 독을 유포했어. 그러니 네 독과 합쳐져 이런 사태를 일으킨 거야."

"도대체 누가?"

"그거야 이제 가서 확인해보면 알겠지."

크리스는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어떤 식으로 독을 유포한 건지는 파악했으니까."

크리스는 단순히 환자만 치료하고 있었던 게 아니다.

환자 한 명, 한 명의 정보를 모아 취합했고, 모든 환자에게서 공통점을 찾아냈다.

"마호 차야."

"마호 차?"

극독 마가의 영지에서 재배되는 차로, 이곳 서쪽 영지 백성들도 흔하게 마시는 차였다.

확인 결과, 특정 상단에서 유통한 마호 차를 마신 이들에게서만 증상이 발병했다.

고라스 후작 일파의 영지에서 재배되는 차였다.

곧바로 상단에 쳐들어갔다.

"다, 당신은? 허억? 크리스티앙 대공자?"

"죽고 싶나?"

"네? 네?"

"감히 본가의 백성들에게 독이 든 차를 살포해?"

"그, 그게 무슨 말입니까?"

상단주는 소스라치게 놀라 납작 엎드렸다.

"네놈이 유통한 마호 차에 독이 섞여 있었다. 네놈의 차는 극독 마가 세시아 지방에서 재배된 차. 세시아 지방의 영주에게 사주를 받은 거냐?"

세시아 지방의 영주는 대표적인 고라스 후작 일파였다.

"허, 허억?! 전 전혀 모르는 일입니다!! 억울합니다! 믿어 주십시오!!"

상단주는 덜덜 떨며 빌었다.

"모른다고?"

"네, 정말입니다!! 전 절대 모르는 일입니다!!"

"그러면 맹세해 보도록."

"네?"

"진실을 말하겠다고 맹세한 후 다시 자신이 무죄하다고 말해보라고."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걸까?

상단주가 침을 꿀꺽 삼켰다.

"그, 그건…."

"왜? 네놈이 정말 무죄하다면, 그깟 맹세쯤 거리낄 것 없을 텐데?"

스르릉.

크리스티앙의 검이 상단주의 목을 파고들었다.

상단주는 소스라치게 놀라 비명을 질렀다.

"지, 진실을 말하겠다고 맹세하겠습니다!! 저, 저는 모르는…!"

거기까지 말한 다음이었다.

상단주의 말문이 탁 하고 막혔다.

"모, 모르는… 모르지 않는…."

덜덜 떨리는 음성.

크리스는 피식 웃었다.

그의 손에는 어느새 흑마법진이 떠올라 있었다.

이전 여러 번 사용한 적 있는 '속박의 인(印)'이었다. 조건에 따라 상대의 행동을 강제하는 저주 흑마법.

"진실을 말하겠다고 맹세하지 않았나? 어서 말해보도록."

"나, 나는…."

상단주의 혀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속박의 인에 따라 맹세한 대로 진실을 밝히려는 순간.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

"꺼, 꺼억?!"

상단주의 안색이 하얘졌고.

"크아아아아아아악!!!"

찢어질 듯한 비명과 함께 상단주의 몸이 산 채로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독이었다.

"우리 가문의 금제 독이야. 진실을 말하는 순간, 목숨을 뺏게 만든."

마리사가 딱딱하게 굳은 음성으로 말했다.

"이제 어떻게 하지?"

놈이 죽었으니, 실제로 세시아 지방의 영주가 차에 독을 섞은 것인지 증언해줄 사람이 사라졌다.

꼬리가 잘린 셈.

그런데 크리스가 뜻밖의 말을 하였다.

"괜찮아. 오히려 잘됐어."

"…잘되다니?"

"이쯤 되면 범인이 누구인지는 명확하잖아?"

"…그렇긴 하지."

고라스 후작 일파의 영지에서 생산된 마호 차가 원인이었고, 상단주는 금제 독에 당하기까지 했다.

명확한 증거만 없을 뿐, 고라스 후작 쪽이 일으킨 일이 분명했다.

"범인을 알게 되었는데, 정확한 증거를 얻겠다고 시간 낭비할 필요는 없잖아?"

의미심장한 이야기.

크리스는 악당 같은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까지 밝혔으면, 나머지 증거야 적당히 만들어 가져다 붙이면 되지."

그래.

크리스는 처음부터 모든 증거를 확보할 생각이 없었다.

'시간도 없는데, 왜 그런 일을 해?'

괜히 상대가 대비할 시간만 갖게 할 거다.

'이제 다음 작전으로 넘어갈 차례야.'

애초에 그의 진짜 목적은 진상을 밝히는 게 아니었다.

이 일을 빌미로 커다란 사고를 치는 것.

"들어와."

짝, 손뼉을 치자 한 인물이 들어왔다.

응가 씹은 표정의 단정한 외모의 미인.

루이나였다.

"준비는 다 됐지?"

"…네."

루이나의 얼굴이 더더욱 일그러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크리스가 시킨 건 무려 '증거 조작'이었으니까!

상단의 힘을 이용해 고라스 후작 일파의 영지 쪽에서 이번 독을 살포했다는 증거를 거짓으로 만들어낸 거다.

참고로, 루이나가 증거를 조작한 영지에는 마침 세시아 영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으아아!! 이 나쁜 놈아!! 내가 범죄자냐?! 물론, 불법 사업체를 운영하기도 하지만, 난 선량한 상인이라고!'

"이거 정말 괜찮은 거 맞습니까?!"

루이나가 불안 가득한 얼굴로 물었고, 크리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마도?"

"이익! 그 불안한 대답은 무엇입니까?"

"세상사가 어떻게 돌아갈지 모르는데, 어떻게 확답하겠나? 난 그런 신뢰 없는 인물 아니네."

"그렇게 말씀하니 더 신뢰가 없거든요!"

"뭐, 너무 걱정하지 말도록. 어차피 그쪽 영지들을 털면, 진짜 증거가 나오게 될 테니. 결과적으로 너도 거짓을 말한 게 아니게 되는 거지."

"…털다니요?"

무언가 이상한 단어에 루이나는 흠칫했다. 마리사도 같이 흠칫했다.

"아아, 내 목적이 무엇인지 아직 말하지 않았던가?"

마침, 그때 문이 끼익 열리며 한 인물이 등장했다.

크리스에게 모종의 명을 받고 사라졌던 멜린이었다.

"명을 수행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래, 어떻게 되었지?"

"명하신 대로 암흑 마군의 최정예 흑기군(黑旗軍)이 극독 마가의 영역에 은밀히 접근해 대기하게 하였습니다."

루이나와 마리사와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크리스가 무얼 노리고 있는지 드디어 눈치챈 거다.

"세시아, 발먼트, 로드락, 칼리아."

크리스의 입에서 하나하나 이름이 나왔다.

극독 마가 영지들의 이름이었다.

모두 고라스 후작을 따르는 영주들.

"암흑 마가의 대공자이자, 암흑 마군의 부사령관으로서 선언하거니와."

서늘한 음성.

"암흑 마가를 농간한 대가로 이 네 곳의 영지를 토벌하겠다."

* * *

그렇다.

크리스의 진짜 목적은 이들 영지를 힘으로 토벌하는 것이었다.

'진상을 밝히는 것만으로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을 테니까.'

만약, 이번 일이 고라스 후작의 짓이란 걸 증명해 낸다고 치자.

그러면 그에게 제대로 된 대가를 치르게 할 수 있을까?

쉽지 않았다.

당연하지만, 마도 제국이라도 민간인을 독으로 학살하는 건 어마어마한 중죄였다.

그러니 고라스 후작이 죄를 인정하려고 할 리가 없었다.

당연히 증거를 부정하려고 할 거고, 랑함 후작도 고라스 후작과 한통속이니 죗값을 물리는 일이 잘 될 리 없었다.

'결국, 죗값을 묻는 방법은 힘을 동원하는 것밖에 없지만, 고라스 후작의 경우에는 그것도 쉽지 않아.'

후암 공작이 범인으로 지목되는 것과는 상황이 달랐다.

후암 공작은 가주면서도 극독 마가 내에서 소수 일파다.

그러니, 비교적 부담이 적게 싸움을 벌일 수 있었다.

하지만 고라스 후작을 친다는 건, 사실상 극독 마가와 전면전을 하겠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방법은 하나였다.

'전면전으로 번지기 전에 기습해서 압도적인 승리를 해야 해.'

그래서였다.

크리스가 이런 일을 꾸민 것은.

'설마 사왕성을 경계 중인 암흑 마군을 움직일 거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할 테니까.'

거기에 추가적인 도움도 있었다.

'후암 공작이 고라스 후작의 움직임을 지연시켜 주기로 했지.'

일전, 통신구로 대화할 때 은밀히 부탁했다.

'이곳 네 영지를 토벌하면, 고라스 후작의 힘을 크게 약화시킬 수 있을 거야.'

크리스는 무작위로 네 곳의 영지를 지목한 게 아니었다.

잘려나갈 시 고라스 후작에게 큰 상처가 될 영지들을 골랐다.

'서두르자.'

크리스티앙은 멜린과 함께 흑기군이 대기 중인 장소로 빠르게 말을 몰았다.

머지않아 한 무리의 병력이 눈에 들어왔다.

칠흑의 갑주를 입은 마인들.

암흑 마군의 최정예 기병 부대 흑기군이었다.

숫자는 많지 않았다.

대략 300명?

하지만 다른 일반 암흑 마군의 병사들과 비교할 수 없는 정광이 흐르고 있었다.

부대원들 모두 '최소' 2성에서 3성 정도의 실력으로 보였다.

'이 정도면 어지간한 기사단에 데려다 놓아도 손색이 없는 정예들이지.'

그런 이가 무려 300명.

어마어마한 전력이었다.

특히 이들은 일반 기마병이 아닌, '마수'를 타기 때문에 이동 속도와 체력 또한 월등했다.

가장 압권인 점은 전면에 선 두 명이었다.

"아아, 부사령관님을 뵙습니다. 오랜만입니다. 그때 술자리 이후로 처음이군요. 주량은 조금 느셨나요?"

히죽 웃는 경박한 인상의 사내.

오대장 중, 셋째인 레온이었다.

무려 6성 중(中)의 강력한 실력자.

그뿐이 아니었다.

"…대공자님을 뵙습니다."

무언가 못마땅한 표정과 어투.

일전 크리스에게 무릎 꿇은 오대장 중 막내인 새닌 남작이었다!

오대장 중 두 명이 온 것이다.

"멜린 경께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아아, 역시 우리 공자님. 아니, 이제 대공자님이시죠. 작전을 듣고 어찌나 전율이 일던지요."

삼대장 레온이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