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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 짓궂어. 아주.

"네?"

잘 못 들었습니다?

"농담이에요."

아니, 이 사람이.

"재밌는 사람 같아요. 광익 씨."

"네, 저도 압니다."

"풉."

뭐지, 이 찬란하게 빛나는 녹색 불은.

잘록한 허리와 큰 가슴, 운동을 쉬지 않는지 건강미가 느껴진다.

적당히 섹시하고 귀여우며 청순미도 섞여 있다.

이게 한 사람에게 느낄 수 있는 매력일까.

요염함도 은근히 보인다. 내 직감이 그리 말했다.

내 육감과 직감은 정체를 숨긴 테러범을 잡는 날카로운 맛이 있지.

입술이 형광등을 반사하며 반짝였다.

립스틱? 립글로스? 틴트?

뭘 발랐을까. 향기랑 맛이 궁금했다.

아니, 맛은 아니고 향기만 궁금했다.

예쁘다. 진짜 농담이 아니라 심하게 예쁘다.

이전에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얼굴을 마주하고, 얘기를 나누고, 풉 하고, 웃는 걸 보니 확실히 알겠다.

이 여자는 내 이상형에 가깝다.

"요리 잘해요?"

"음, 한식, 중식, 일식, 양식 자격증은 땄는데 자주는 못 해요. 요새 일이 너무 많아서."

말하며 적당히 미간을 찌푸렸는데.

나도 모르게 귀엽다고 중얼거렸다.

"네?"

"아닙니다."

"나중에 시간 나면 휴게실에서 같이 놀아요. 얘기도 하고 뭐, 서로 취미가 맞으면 좋겠다."

쿵쿵쿵.

심장이 나댄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다.

"사랑해요."

"네?"

"농담이에요."

그냥 던져 봤다.

"진짜 재밌어."

근데 이걸 좋아해.

재밌다고 말하며, 미남 대리가 내 어깨를 톡톡 쳤다.

손이 참 하얗네.

녹색불이 켜지다 못해 폭죽처럼 터져 올랐다.

녹색 폭죽이 사방에서 터진다.

펑, 펑, 펑.

귀에 달콤한 음악이 절로 들렸다.

허니, 스윗 뭐 이런 가사 섞인 노래들이다.

내가 물었다.

"우리 애는 셋만 낳을까?"

"아니, 힘닿는 데까지, 자기가 원할 때까지 낳자."

우리 아기가 말했다.

미남이, 우리 아기.

"또 봐요."

우리 아기가 탕비실 문을 열고 나갔다.

"너 뭐 하냐?"

날 향한 물음이다.

내가 도망가면 팀장은 굳이 쫓지 않는다. 어차피 돌아갈 곳은 정해져 있으니까.

그러니 팀장은 아니었다.

김요한과 우미호였다.

"세상은 밝고 아름답지."

내가 말했다.

"정상이 아니야."

우미호는 말하고 날 지나치고 요한은 내 앞에서 손가락을 흔들었다.

"몇 개?"

한 개, 두 개, 세 개를 동시에 섞어서 흔들었다.

"둘둘 셋 하나."

타이밍 맞춰서 정확히 셌다.

"정상이네. 미남 대리님이랑 무슨 얘기 했어?"

탕비실은 방음이 뛰어나다.

"허리케인을 속삭였지."

비틀.

그 말에 우미호가 반응했다.

"내 앞에서 그 허리케인 꺼내지 마."

"왜?"

"듣기 싫어. 그거 때문에 내 기분이 불쾌하면 일에 집중하기 힘들어지고 효율이 떨어져."

제 감정까지 효율성으로 치부하는 여자, 그 이름 우미호다.

귀태 형도 대단한걸.

드디어 저 철벽이 반응하게 하다니.

"으흠. 그래서 물어봤나."

요한이 옆에서 중얼거리기에 물었다.

"뭘 물어?"

"아니, 며칠 전부터 미남 대리님이 계속 묻더라고."

설마.

"내 취미나 그런 거?"

"응."

쿵쿵.

심장이 또 나댄다.

아버지, 어머니, 며느리를 찾은 것 같은데요.

애는 셋이면 되나요?

손주 하나에 손녀 둘.

전 딸이 좋습니다.

"야, 정신 차려. 최미남 대리님 보통 아니다."

요한이 말했다.

"뭐가 보통이 아닌데."

뒷말은 우미호가 이었다.

"냉정하고 세밀한 성격, 미모를 앞세워 능력을 보지 못하게 하는 능구렁이, 필요하다면 남자 몇 명쯤 홀리게 하는 능력자."

"홀려? 야, 말이 심하네."

"...머저리."

우미호는 차갑게 말하며 커피를 들고 나갔다. 얌전히 비켰다.

그 눈에 담긴 차가움이 매섭다.

"질투인가."

이래서 인기 있는 남자는 서럽다.

"점점 미쳐 가는구나."

요한이 말하고, 그 뒤에 귀태가 나타났다.

"사랑은 허리케인. 우리 미호 못 봤냐?"

방금 나갔는데?

"응?"

요한이 귀태 형 옆으로 비켜서서 고개를 저었다.

나가면서 귀태를 보자마자 기척이라도 죽이고 간 거냐?

아니, 근데 우미호가 기척 죽이기를 쓸 수 있었나.

그거 꽤 어려운 기예 아니었나.

"못 봤는데."

"쳇, 오늘 못 봤는데."

"여긴 왜 왔는데?"

내가 물었다.

"미호 보러."

이 단순명쾌한 사람 봐라.

"간다."

귀태 형은 그대로 떠났다.

회사에서 일은 안 하고 우미호만 찾아다니는 거냐?

월급 루팡 같으니라고.

"요새 정신없지 않냐?"

요한이 물었다.

"말해 뭐 해. 분석팀도 난리야?"

"보름째 야근이다."

요한 형 눈 밑이 검다. 잠을 푹 자지 못하나 보다.

"엄청 불길하단 말이지."

요한이 말하며 어깨를 툭 치고 나갔다.

나만 남았다.

난 미남 대리 얼굴을 떠올리며 다시 자리로 돌아갔고, 내가 잊었던 행동의 결과를 맞이했다.

우득.

자리에 오자마자 누가 옆에서 팔을 잡아 꺾었다.

반사적으로 힘을 주려는데, 기가 막힌 각도로 손목을 밀어 넣고 팔을 꺾는다.

프로 그 이상, 그러니까 고수다.

몸을 팽이처럼 돌리자, 발목을 걷어찬다. 그냥 걷어차는 것도 아니고 아킬레스건을 찬다.

수법이 아주 엿 같다.

피하지 못했다. 균형을 잃자, 상대가 내 목덜미를 뒤에서 잡고 말했다.

"이 새끼야, 컵을 던져?"

"아, 팀장님이구나."

그제야 내가 왜 6층 탕비실까지 튀었나 생각났다.

"놓친 거라니까요."

"나도 방금 주먹과 발을 놓쳤다."

이게 무슨 개소리야.

"뭐, 시발, 뭐."

우겨도 이건 아니지.

"야."

그런 우리 둘을 향해 2팀장이 입을 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다.

"니들은 여기가 대련장이냐? 좀 나가서 싸워. 새끼들아. 정신 사나우니까."

"새끼. 날카롭네."

시발 팀장에게 뭐라고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다.

팀장 동기니까, 뭐.

"어, 팀장님, 광익이."

팬더 대리가 말을 하다 만다.

"저 뭐요?"

팀장이 그제야 날 풀어줬다.

자리에 앉은 팬더 대리가 손가락으로 모니터를 가리켰다.

[유광익 2급 사원 진급

1급 사원

포상금 수여]

"음?"

이건 뭐야.

어떤 전조도 없이 갑자기 진급을 시켜 줘?

"지랄 났네. 사람 보는 눈이 없어. 이놈의 회사는."

팀장이 말하고 자리로 돌아갔다.

사수는 어깨를 두드려 줬다.

"축하해."

"이러다가 대리도 내일모레 달겠다?"

팬더 대리는 농담을 던졌고.

다른 팀 사람들은 눈으로만 인사했다.

요즘 바빠서 그런지 다들 기운이 없다.

난 급히 몸을 움직였다.

기남이가 보고 싶었다.

우리 3급 사원 기남이가.

* * *

"뒤처지지 마라."

"순혈의 피를 타고났다면 그에 걸맞은 행동을 해라."

어릴 때부터 기남이 수없이 들었던 말이다.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한 삶, 그게 기남의 삶이었다.

문제라면.

자신의 동기가 실적과 능력 모든 면에서 자신을 찍어 눌렀다는 거다.

혼혈, 최단기간 2급 사원으로 진급한 불멸자.

처음에는 머저리인 줄 알았다.

얼굴도 기억 안 나는 놈이 친한 척을 하기에 무시했더니 방귀를 뀌고.

그 뒤에는 갑자기 손날치기로 동기를 재우더니 자신을 놀린다.

머저리가 아니라 미친놈으로 규정했다.

걸리면 반쯤 죽여 놓을 생각도 있었다.

기회는 있었다.

신입 사원 능력평가 때, 대련 상대로 머저리 미친놈이 자신을 택했으니까.

그런데 졌다.

반항도 제대로 못 했다.

룸메이트가 된 뒤에는 더했다.

이 미친 머저리는 손을 아끼지 않았다.

때리고 눕히고 목을 조른다.

미친 새끼가 싸움을 잘했다.

그것도 아주 잘.

기남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까드득.

절로 어금니가 갈렸다.

'그 새끼.'

이제는 공공연한 비밀이다. 머니&세이브 사건 때의 호랑이 가면이 유광익이라는 건.

덕분에 놈은 특수종 세계에서 유명해졌고.

자신이 그 호랑이 가면한테 반쯤 죽은 건 아무도 걸고넘어지지 않았다.

'반드시 복수한다.'

그 미친 새끼를 때려눕히려고 갖은 노력을 다했다.

어릴 때부터도 재능은 있었다.

감각도 그렇고 몸을 움직이는 것도.

자신은 고귀한 혈통을 이은 몸이다.

그런데도 쉽게 꺾을 수 없었다. 인정하기 싫지만, 주먹질만 보면 유광익은 자신보다 한참 윗줄이었다.

빌어먹을 새끼.

'괜찮아. 아직은.'

기남은 마음을 다잡았다.

동대문 구원자? 우습다.

2급 사원 진급? 자신도 기회만 있으면 금방이다.

기남은 그런 기회를 노렸다.

광익보다 자신이 돋보이는 그런 자리를.

"야, 기남아, 너희 기남아."

그런 생각을 하며 복귀하는데, 미친 스컹크 새끼가 다가와서 자신을 불렀다.

집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위경련이 일어나는 기분이어서, 적어도 회사에서만은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스컹크와 자신은 같은 층을 쓰고 같은 일을 하니, 마주치지 않는 건 불가능했다.

그럼 남은 건 무시뿐이다.

외면하고 지나쳤다.

"어허, 3급 사원 정기남. 사내 계급 제도를 무시할 셈인가. 카스트 제도를 무시할 셈이냐고."

미친놈이, 여기서 카스트 제도가 왜 나와.

무시다. 그렇게 지나치려 했다.

"3급 사원 정기남, 나 1급이다. 진급했다."

우뚝.

방심했다. 예상하지 못한 말에 발이 멈췄다.

"1급?"

되물었다.

3급에서 1급까지 걸리는 시간은 최소 2년.

자신이라면 반년은 앞당길 수 있었다. 최근 진급 얘기도 심심찮게 오갔고.

그런데 1급?

1년도 안 된 놈이?

물론 능력은 된다. 기남도 내심 그건 인정한다. 하지만 인정하는 것과 별개로.

"우히히히."

앞에서 저렇게 웃는 걸 보면 배알이 꼴리는 법이다. 기남은 자신에게 솔직했다.

광익을 잘게 썰어서 땅에 묻어 버리고 싶었다.

입과 코를 틀어막고 관에 가둬서 태평양 한복판에 던지고 싶었다.

"오늘 저녁에 축하 파티하자. 집에서."

말하며 찡긋.

한쪽 눈을 감는 순간, 기남은 초인적인 인내를 보여야 했다.

품에 넣어 둔 쓰로잉 나이프를 던질 뻔했다.

"곧 형수님도 생길 것 같고."

"미친 새끼."

더 들을 가치가 없었다. 기남은 몸을 돌렸다.

잊자. 저 새끼 일은 잊는 게 맞다.

"마침 같이 있군. 미리 들은 거라도 있나?"

뒤를 돌아봤다.

흰머리의 파견 본부장이 보였다.

그 옆에 형, 정호남도.

"너희 파견 좀 나가자."

본부장이 말했다.

그 말에 기남이 고개를 들었다.

"저 말입니까?"

"쟤도."

본부장이 손가락을 들었다.

그 손가락 끝의 주인은 광익이었다.

"네. 1급 사원 유광익."

"진급 축하하고."

본부장이 대수롭지 않게 말을 이었다.

"셋 전부 준비해."

* * *

"어디로 갑니까?"

떠나기 전, 본부장에게 물었다.

"화림 지하."

대답은 호남이 했다.

무슨 파견을 지하로 가.

무기고 청소라도 하러 가나?

나와 기남이 눈으로 의문을 표했다.

"정보 권한은 아직입니까?"

호남이 물었고, 본부장은 고개를 저었다.

"긴급 처리 중이니까 기다려."

"설명 불가다. 일단 대기."

호남의 말에 난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미리 말하지만, 이건 전부 팀장 탓이다.

하도 그 작자랑 대거리하다 보니 붙은 버릇이다.

"에이, 슨배님, 힌트라도 좀 주시죠. 무기고 청소를 하는지, 바퀴벌레를 잡는지 정도는 알아야...."

"권한 밖이다."

매몰찬 말투다.

정기남의 싸가지는 혈통 탓인가.

그 형도 만만치 않았다.

놈이 말하고 내 옆을 훅하고 지나쳤다.

"기남이 넌 아냐?"

"몰라."

정기남은 제 형의 등만 빤히 바라봤다.

"정기남, 한가한가? 작전의 목적을 몰라도 할 일은 많을 텐데?"

툭툭 걸으며 정호남 과장이 말했다.

"네, 지금 갑니다."

기남이 반사적으로 답했다.

얘 형한테 아주 잡혀 사는구나.

집에서는 형한테, 밖에서는 나한테.

갑자기 기남이가 불쌍하게 느껴졌다.

기남이 어깨에 손을 올리며 두드리려 했는데, 놈이 피했다.

그래서 심심한 위로만 건넸다.

"너도 고생이 많다. 형 성격이 장난 아니네. 짓궂어. 아주."

"...그게 네 입에서 나올 말이냐?"

기남은 그렇게 말하고 떠났다.

왜? 내가 뭘?

"3급 사원 정기남 군. 같이 가자."

난 그 뒤를 따라갔다.

권한이고 뭐고, 임무가 떨어졌으면 브리핑은 들어야 할 거 아닌가.

110. 건물을 세웠다.

불멸교도 색출 때부터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그 일 이후로 사장의 압력이 강해졌다.

반대로 임원진의 의견은 약해졌고.

강태환 전무는 생각했다.

이 모든 일은 어디서 시작됐는가.

사장이 꾸민 음모?

그럴 리가.

모든 일은 작은 시발점에서 시작됐다.

유광익.

김동철 이사가 신입 회유에 실패했을 때는 그러려니 했다.

능력이 뛰어나다고 오래 살아남는 건 아니니까.

그런데 그 신입이 일을 제대로 터트렸다.

'마윤, 마윤, 마윤.'

그 새끼가 불멸교도였을 줄은 누가 알았겠나.

덕분에 남은 사람만 곤란하게 됐다.

강태환 전무가 손안에서 구슬을 굴렸다.

따가락, 따가락.

구슬 맞물리는 소리가 전무실에 울렸다.

뚝.

소리가 멎음과 동시에 강태환 전무가 입을 열었다.

"김 이사님."

"네."

김동철이 답했다. 책상 옆에 서서 두 손을 허리 옆에 붙인 모양새가 벌 받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그것도 벌써 30분째였다.

강태환은 사람을 불러 놓고 생각을 정리한 뒤 입을 여는 고약한 버릇을 가졌다.

"그 친구, 데려옵시다."

이름을 말하지 않아도 안다.

지금 사내에서 제일 유명한 인물이니까.

"착수하겠습니다."

"좋아요. 나가 봐요."

전무실을 나온 김동철은 생각했다.

'유광익, 유광익.'

이제는 고작 신입 하나라고 볼 수 없었다.

객관적이고 냉정하게 평가해도 그 신입이 한 공적은 만만치 않았다.

거기에 NS, 규격 외 등급을 받은 초특급 불멸자다.

탐나지 않을 리 없었다.

인재를 품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까.

김동철은 일단 유광익이란 친구가 뭘 원하는지 알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러려면 같이 시간을 보내야 한다. 되도록 다른 사람 눈을 피해서.

특히 사장의 눈을 피해야 했다.

머릿속으로 시나리오를 그렸고, 곧 스마트폰의 통화 버튼을 눌렀다.

* * *

시발 팀장만 아니었으면 내 회사 생활이 더 수월했을까?

모른다. 그래도 배운 건 많으니까 아쉬운 건 없다고 생각하곤 한다.

특히나 이런 순간이 찾아오면, 난 시발 팀장에게 일말의 감사함을 느끼기도 했다.

난 네가 싫다.

정호남 과장 새끼의 눈빛에서 난 여실한 감정을 느꼈다.

애초에 숨길 생각도 없어 보였다.

그렇다고 해서 딱히 이 자리가 불편하진 않았다.

이런 눈빛 정도로 날 가시방석에 앉히려 했다면, 그건 오산이었다.

내 입사 첫날을 떠올려 보라.

"시발."

욕을 뱉는 팀장.

이마에 핏대를 세우고 인사과에 항의하는 팬더.

얼음덩이 그 자체인 사수까지.

솔직히 나니까 버텼지.

다른 동기가 우리 팀 왔으면 탈탈 털려서 나갔을 거다.

텃세가 장난 아니었다.

그러니 이 정도 눈빛은 초롱초롱한 강아지의 눈과 다를 바 없었다.

기남의 호적 메이트가 날 바라본다. 난 그 눈빛을 음미하며 회의실에 비치된 초코바를 까먹었다.

우적.

트믹스. 카라멜과 비스킷, 초콜릿의 조합은 언제나 진리다.

맛나다. 과자 부스러기가 내 앞섬에 조금 떨어졌다.

그걸 본 기남이 미간을 찌푸렸고.

"나가."

호남은 브리핑을 시작하기도 전에 날 내보내려 했다.

"눼?"

대답하다가 입에 든 부산물이 조금 튀었다. 툭 하고 반쯤 녹은 초콜릿 조각이 호남 과장 발치에 떨어졌다.

고의는 아니었다.

"나가라고."

호남이가 말하며 품에서 칼을 뽑았다. 아니, 이 새끼는 진짜 칼을 쓸 것 같은데.

팀장이 반 농담 반 진담이라면, 이 새끼는 지금 2,000% 진심을 담았다.

저 새끼는 진심으로 칼질을 하려 했다.

그것도 같은 회사 동료이자 후임에게 말이다.

진심 칼날은 진심 펀치보다 위험하기에 밖으로 튀어 나갔다.

상사가 지랄한다고 번번이 때려눕힐 순 없는 노릇이니까.

나가면서 입에 있는 걸 꿀꺽 삼키는데.

"브리핑 간다며? 유광익이 넌 첫날부터 농땡이질이냐?"

지나가던 시발 팀장이 말했다.

이 양반은 또 어딜 가나.

"아뇨, 정호남 과장님이 칼을 뽑고 찌를 것 같아서 잠깐 대피한 건데요."

"칼? 왜?"

"그건 칼 뽑은 사람이 알지 않을까요?"

"나와."

꽝.

우리 팀장에게 본받을 점이 몇 개 있는데 그중 하나가 이거다.

아무리 욕해도 제 팀원을 까면 가차 없다는 거.

문을 박차고 들어간 중봉이 자신을 보는 호남과 기남을 마주했다.

"우리 기남이, 오랜만이고."

"3급 사원 정기남, 안녕하십니까."

"정호남이, 넌 주둥이를 꿰맸냐?"

"과장 정호남, 업무 중입니다. 무슨 일입니까?"

까칠한 정호남이 팀장을 노려본다. 팀장은 상황 파악을 끝낸 뒤, 짧게 숨을 들이켜고 단숨에 말을 뱉었다.

"야, 칼로는 안 돼. 묶어. 주둥이에는 재갈 물리고. 그래야 말 들을까 말까 한다. 저 새끼 재생력 존나 빨라. 자르는 건 비추천."

팀장은 그렇게 말하곤, 내 옷깃을 잡아서 날 다시 회의실에 넣고 나갔다.

쿵.

내 뒤에서 문이 닫혔다.

다시 열고 나가고 싶다.

난 날 지켜보는 네 개의 눈깔을 마주했다.

호남, 기남, 쌍남 형제다.

멀뚱히 선 채로 둘을 보며 미소를 보였다.

웃는 얼굴에 침 뱉으면 개새끼.

"하하. 저 묶이는 거 별로 안 좋아합니다. 그런 취향 아니에요."

그리고 팀장 개새끼.

하여간 사람이 기대를 하면 지랄하는 게 아주 버릇이야. 종족 특성이지.

이 일은 반드시 복수할 것이다.

머쓱해서 뒤통수를 긁고 웃으니, 정호남이 입을 열었다.

그 표정이 몹시 신기했다.

볼이 안 움직이고 입술만 움직여 말하는 데 이 정도면 기인 아니냐.

"시키지 않은 일은 하지 마라. 이 작전 이후 정보 열람 권한이 열리므로 각자 정보를 파악해라. 이상."

그 말을 끝으로 정호남 과장이 회의실을 나갔다.

...이게 끝?

이걸 브리핑이라고 한 거냐?

"야, 룸메이트, 동기, 기남아."

"미친 스컹크 새끼."

뭐 이 새끼야? 스컹크?

내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다시금 피를 토하는 지각생이 되고 싶은 거냐?

요새 나 피해서 조기 출근하던데.

난 뭐 일찍 일어날 줄 모르나.

"너희 형."

"어설프게 입 놀리면 그 주둥이 찢는다."

그 와중에 형제애는 넘치네.

내가 보기에는 짝사랑 같다만.

사실 사랑도 아니지.

"가문을 모욕하지 마라."

기남이 말을 덧붙였다.

모욕할 생각은 없다. 그저 처음 기남의 형, 그러니까 정호남 대리의 이름을 들었을 때부터 궁금했던 걸 물었다.

"너희 형...."

기남이 눈을 부라렸다.

"어릴 때 별명 호남평야 맞지?"

내 물음에 기남은 답하지 않았다.

대신 아까 호남이가 본 것과 비슷한 눈으로 날 3초간 바라보고 밖으로 나설 뿐.

회의실 안이 쓸쓸했다.

나만 남았다.

근데 별명 호남평야 아니었을까?

이름 듣자마자 떠올랐는데 아니라고? 진짜?

궁금했지만, 더 물으면 기남이가 거품 물고 덤빌 것 같았고, 호남평야 과장에게 물으면 날 꽁꽁 묶은 다음에 고문할 것 같았다.

나이를 먹으면 호기심도 길들일 줄 알아야 하는 법.

난 궁금증을 참고 가슴 안에 잠시 눌러 놨다.

"근데 진짜 이러고 가라고?"

이제까지 임무를 꽤 맡았다.

그 다양한 임무 중에 이 정도로 불성실한 브리핑은 처음이었다.

이동하는 와중에 정보를 전달받은 적도 있지만, 이건 뭐 새로운 게임이 나왔는데 설명서도 없이, 시작하는 버튼도 모른 채로 하는 기분이다.

하물며 지하로 간다며?

그게 뭔데?

설명 한번 더럽게 안 해 주네.

뭐, 괜찮다.

나에게는 호남이 대신 팬더라는 든든한 지식인이 있다.

권한도 열린다고 했으니.

자리로 돌아와 팬더 대리 옆으로 의자를 굴려 붙였다.

"대리님, 대리님, 나의 대리님."

"왜?"

"지하로 파견 임무가 떨어졌는데 지하에 뭐 있어요?"

"...지하?"

"네."

"무기고 청소?"

"무기고 청소에 정호남 과장이 나설 것 같진 않은데요."

"1팀 에이스 정 과장님?"

"네."

"너랑 둘이?"

"아뇨. 기남이도 가요."

팬더 대리는 날 빤히 보다가 입을 열었다.

"너 권한 열렸냐?"

그제야 인트라넷에 들어가 확인하니 1급 기밀 정보 허가가 떨어졌다.

그걸 보더니 팬더 대리가 입을 털었다.

"화이트홀도 다 같은 화이트홀이 아니거든."

"네, 압니다."

입사 초반에 나한테 외우라고 한 것 중에는 그런 내용도 있었다.

따로 이론 교육도 받았고.

"이전에 간 화이트홀은 사실 협회가 반, 국가가 반 소유한 곳이란 곳도 알지?"

사이오닉 협회가 관리하지만, 국군이 주둔하기도 하는 곳이니, 그렇다고 들었다.

"네, 뭐. 대강."

"그럼 높은 등급의 화이트홀이 있다면 사람이 막 드나들 게 놔둘까? 병력을 주둔시키는 것만으로 해결이 될까?"

안 되겠지. 몰래 홀 너머를 탐험하는 미친 프리랜서들도 있다니까.

허공에 둥둥 떠 있는 구멍을 완벽하게 통제하려면 그만한 인프라가....

그렇게 말하다가, 깨달았다.

"지하에요?"

"응. 지하에."

아더 사이드는 현대의 보고寶庫다.

화이트홀은 그 보고에 들어가는 입구였으니, 그걸 지키는 건 매우 중요하다.

특히나 등급이 높은 홀은 철저하게 관리해야 한다.

병력 주둔? 그건 완벽할 순 없지.

화이트홀은 아더 사이드로 넘어가는 통로다.

이면 세계의 자원을 채취하려면 화이트홀이 필요하다.

돈과 권력을 가진 올드포스와 엑스큐라시는 쪼잔하게 병력 따위를 주둔시키지 않았다.

그들은 건물을 세웠다.

그것도 제 사람들로 가득한 건물을.

그러니까 올드포스 한국지부, 불멸특수대 중 하나인 화림정보통신은 화이트홀 위에 세워졌다.

이게 바로 올드포스의 스케일이다.

아무리 미친놈이 발에 차일 듯이 많은 특수종 세상이라 해도, 어지간히 미치지 않고서야 불멸특수대 지부를 들이받진 않는다.

고로 이 화이트홀은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에 있는 법이다.

올드포스와 엑스큐라시가 보유한 고등급 화이트홀이 전부 그럴 것이다.

난 기밀 정보 권한을 이용해 사내 정보를 검색했다.

건물 내부 평면도와 각 층의 정보가 보인다.

지하 8층, 화이트홀이 열린 곳이었다.

"2년 차쯤 되면 따로 교육받는데, 이번에는 좀 빠르네."

팬더 대리가 말을 덧붙였다.

당연하게도 화림 내에서도 마이닝 팀이 존재한다.

아더 사이드의 이곳저곳을 탐험하고 안전 구역을 넓히는 개척탐사팀.

그리고 안전 구역에서 이것저것 자원을 채취하는 자원채취팀, 일명 마이닝팀이 있다.

최초 발견한 아더 사이드 자원은 나풀거리는 철이었다.

그때 당시에는 섬유철 따위로 불렀단다.

뭐, 최초로 발견했으니 원소 기호도 붙일 수 없고 당황스럽긴 했겠지.

인류는 그 섬유철을 연구하고 분석해서 케블라 섬유에 섞었다.

그걸 토대로 만든 게, 현재 보급되는 방검방탄복의 시초다.

그래서 보통 이면의 세계, 아더 사이드 채취팀이 하는 일을 마이닝(Mining)이라고 한다.

채굴, 채광이란 단어가 고유 명사가 된 셈이다.

여기서 내가 할 일은.

요새 한창 바빠서 인력난에 빠진 마이닝팀 경호가 되겠지.

호남, 기남 쌍남 형제와 함께 말이다.

"조심해라. 거기서 길 잃어버리면 미아로 안 끝난다."

팬더 대리가 경고했고, 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뭐, 별일이야 있을까.

난 팬더 대리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물었다.

"정호남 과장님 있죠."

"별명이 호남평야냐고?"

"어?"

"기남이한테 그거 물어봤다며? 아까 본부장님한테 메신저 왔다. 정신 병력이 있는지도 물어보시더라."

팬더 대리가 담담하게 말했다.

"없습니다."

"나도 그렇게 믿어. 하지만 병원은 꼭 가 봐라. 이게 또 다른 사람 눈으로 보면 좀 더 잘 보이고 그런 거잖아."

"대리님도 절 그렇게 보는 겁니까?"

그럼 팀장은? 저 양반이 제일 정상이 아니지.

성격이 아주 개차반이잖아.

"농담이야. 하여간 그게 궁금했어?"

"네, 뭐, 조금?"

사실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다.

"정호남 과장님하고 기남이하고 형제라는데 사이가 안 좋아 보여서요."

"...의외네, 기남이 걱정?"

"걱정까진 아니고."

그래도 한집에서 매일 얼굴 보며 사는 사이인데, 같이 일도 해야 하고.

"그 집안이 좀 그렇다고 하더라."

가정 교육이 문제란 소리인가.

아무리 나라도 이건 못 물어보겠다.

기남이한테 '너 가정 교육을 어떻게 받았냐?'라고 묻는 순간, 이건 뭐 진지하게 싸우자는 소리 같잖아.

거, 자식 되게 신경 쓰이네.

형제끼리 알아서 할 일이긴 하다. 내가 알 바는 아니었다.

일할 때 불편하지만 않으면 그만이었다.

111. 음, 뭐랄까 재능의 차이?

화림에는 왜 특별한 훈련 환경이 갖춰져 있을까.

단순한 이유다.

그럴 필요가 있으니까.

고중력 훈련, 강풍 속에서 몸의 균형을 잡는 훈련 등 잡다한 게 많았다.

몸을 혹사하기 위한 거로 생각하기 쉽지만, 아니다.

다 쓸 데가 있었다.

화이트홀 너머, 흔히 아더 사이드나 이면 세계라 불리는 곳은 어떤 홀로 들어가냐에 따라 환경이 달라졌다.

그 환경이란 건 크게 네 개로 나눌 수 있었다.

하나, 감각 교란.

이건 경험해 봤다. 축능석을 구하러 갔을 때. 오감을 비롯한 육감이 이물질이 낀 것 같은 느낌이다. 물론 나는 금세 회복했다.

둘, 이상 기후.

폭풍우가 몰아치는 초원.

뜨거운 열기에 몸이 녹아내릴 것 같은 사막.

침을 뱉으면 2초 만에 얼어 버리는 설원.

다섯 걸음만 걸어도 온몸이 축축해지는 밀림.

더 말해서 뭐 하랴.

이런 기상 변화들이 섞여 있는 데가 있다고 했다.

그러니까, 한파가 몰아치는 사막 같은 곳 말이다.

셋, 중력 변화.

지구의 2배, 또는 3배까지 몸을 짓누르는 압력을 느낄 수 있는 경험이 흔하진 않을 것이다.

이건 돈 받고 관광지로 개발하면 대박 나는 거 아닐까.

넷, 이상 현상.

이건 딱히 꼬집어 말할 게 아니다. 불현듯 일어나는 일이고 예상할 수 있는 종류가 아니니까.

뭐, 붉은 벼락이 치는 땅이라든지, 이해할 수 없는 고중력지대라든지, 칼날 폭풍이 분다든지, 하는 그런 거.

하여간 나도 이론 교육을 통해 아는 건 이게 전부였다.

아더 사이드 경험은 축능석 사건 때 한 번뿐이고.

이게 두 번째 경험이었다.

4번 타자, 아다만티움 정글도, 슬래거 나이프와 헥사곤 쉴드 코트, 알에게 선물 받은 장갑.

그 외 K-2 소총 한 자루, 40발들이 탄창 4개, 글록 17 권총 한 자루와 비상 탄창 하나, 보위 나이프 한 자루, 쓰로잉 나이프 세 자루와 마약 두 종류 등등을 챙겼다.

전투복 위에 불명 특전 조끼를 입으면 이 모든 장비가 조끼에 들어간다. 주머니에 넣은 다음 쑤시고 걸면 끝이다.

어깨에 수통도 하나 있다.

홀 너머의 세계에서는 생존이 제일 중요했다.

그렇다고 화력을 소홀히 할 순 없다.

인베이더가 사는 집에 초인종도 안 누르고 찾아간 셈이니까.

인베이더라 불리는 놈들이 밀입국자를 상대하는 수법은 단순하다.

찢어 죽이고, 씹어 죽이고, 패 죽인다.

죽기 싫으면 우리도 쏴 죽이고 잘라 죽여야 하는 판이다.

그래서 이게 기본 무장이었다.

화이트홀의 위치는 지하 8층.

쌍남 형제와 난 승강기를 타고 내려갔고.

"무장 상태."

"이상 없습니다. 과장님."

호남이 물었고, 기남이 답했다.

둘이 형제라면서 더럽게 딱딱한 분위기다.

윙.

승강기 문이 열리는 사이, 난 기남이의 팔뚝을 팔꿈치로 툭 쳤다.

"왜?"

"집에서도 과장님이라고 부르냐?"

기남이는 대답 없이 승강기 밖으로 나갔다.

그 뒤를 내가 따라나섰다.

이런 말 하긴 뭐한데.

우리 기남이, 되게 주눅 들어 있는 것 같다. 내가 할 일 없어서 호남이 형 별명을 물어본 게 아니다.

나 그렇게 이상한 사람 아니다.

그저 기남이 새끼를 보다 보니 마음에 틱틱 걸려서 그렇지.

전에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렇고.

평소의 기남이가 매운맛이라면, 호남이 앞에서의 기남이는 순한맛이었다.

그냥 순한맛도 아니다. 이 정도면 맹한맛이다.

"형 여자친구라도 뺏었냐? 왜 이리 저자세야."

슬쩍 다가가 귀에 대고 말하려는데, 기남이 고개를 꺾어 피하고는 날 향해 손등을 휘둘렀다.

툭 쳐서 막고 대답을 기다렸다.

"상관하지 마라. 귀에다 바람 불지 말고. 몹시, 매우 불쾌하니까."

그렇게 말하니까 더 상관하고 싶잖아. 기남아.

형이 오지랖 나라의 18대 국왕이란다.

"아잉, 알려줘."

애교를 보이자, 기남이 총에 손을 가져갔다.

"장난질 그만하고 따라와."

호남이 말리지 않았어도, 우리 기남이가 덤비진 않았을 거다.

그동안 그토록 처맞고 변한 게 없다면 이 자식 대가리에는 뇌 대신 우동 사리만 가득한 거겠지.

타박타박 걸어가니, 철저한 두꺼운 금속 문이 보였다.

"소속."

금속 문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문과 천장, 벽 곳곳에 까만 점이 박혀 있는데, 유심히 보니 전부 카메라였다.

"파견 본부 소속 외부 보안 1팀 과장 정호남."

"동팀 3급 사원 정기남."

"동 본부 소속 외부 보안 3팀 1급 사원 유광익."

신분을 밝히고 얼굴을 확인하자, 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가니 또 뚱뚱한 금속 문이 반겼다.

"컨셉이 양파야? 까도 까도 계속 나오는?"

혼잣말을 중얼거리자.

"생각 없는 놈."

기남이 날 힐난했다.

난 그런 기남의 발을 뒤에서 툭 찼다. 기남이 피하며 고개를 홱 돌렸다.

나랑 눈을 마주한 기남이 속삭였다.

"제발, 조용히 좀 가자."

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아니, 어깨가 굳어 보여서 긴장이나 풀라고 건 장난이다.

"여기가 어디라고 생각하는 거냐?"

소란에 호남이 뒤를 돌아보고 눈을 부라렸다.

눈에서 레이저가 나올 것 같아서, 고개를 꺾어서 피했다.

"뭐 하는 짓이냐?"

"눈으로 레이저를 쏘시길래."

우리 정호남 과장님은 굳이 열을 내지 않았다.

내 능력을 의심하면서 뭐라 할 수도 없을 테고.

아무리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순혈주의에 물들었어도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내가 회사 내에서 세운 공적은 만만한 게 아니다.

최단 시간 1급 사원 진급.

이게 내 타이틀이고.

이 외에도 '동대문의 구원자', '프로메테우스가 제 편으로 끌어들이고 싶은 불멸특수대원 인기 1위', '화림 내 최고 미녀로 손꼽히는 여자와 썸타는 남자' 등의 타이틀도 있다.

두 번째 보안 문은 쉽게 열렸다.

이쪽은 내부보안팀 관리였다. 그쪽 직원이 서서 신분을 재차 확인하고 열어 줬다.

"박다람 팀장님은 잘 계시죠?"

지나가는 길에 물으니.

"자주 보다가 얼굴 못 봐서 서운하다고 하시던데요."

내부보안팀 직원이 수수하게 웃으며 답했다.

내가 말이야, 응? 이쪽 팀장하고도 사이가 아주 깊다고.

같이 사우나는 못 했었어도 같이 쇠질은 한 사이다, 이 말이지.

그 시답잖은 대화가 마지막이었다.

"홀을 통과할 때는 호흡 멈추십시오. 감각 교란이 심하면 구토를 하는 경우도 있지만, 당연한 거니까 당황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담당 직원, 나이는 스물 중반쯤의 귀여운 여자가 말했다.

말하며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은은한 미소를 보였다.

은근히 부끄러워하는 걸 보니, 새삼 내가 회사 내에서 인기가 급상승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합리적인 의심이 들었다.

난 볼매인가 보다. 1년이 다 돼 가는 시점에서야 인기가 터지는 걸 보니.

"후우우."

뒤에서 기남이 숨을 내쉬었다. 이 새끼는 왜 이렇게 바짝 붙어 있나.

기남이 놈은 내가 아니라 우리 앞에 있는 '문'에 시선을 뺏겼다.

우우우우웅.

홀은 잔잔한 빛을 뿜었다.

긴 타원형이었고 은은한 빛과 함께 표면이 찰랑거렸다.

굳이 한 줄로 표현하자면.

하얀색 물을 가진 호수가 땅과 수직으로 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선두, 유광익이 후위."

정호남이 날 가리켰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먼저 홀 안에 들어가고, 기남이 따라 들어갔다.

나도 숨을 멈춘 채 안으로 발을 들이밀었다.

이전에 들어간 화이트홀은 급으로 따지자면 최하급이었다.

축능석을 제하면 딱히 고가의 자원을 찾지 못했다고 들었다.

나오는 광물, 채취할 수 있는 자원이 많고 아까 말했던 '환경'이 만만할수록 홀의 급수는 올라간다.

그리고 화림 내에 있는 화이트홀의 급수는 중급.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수준이다.

나오는 자원은 종류도 꽤 되고 질도 좋지만, 환경이 나쁘다는 평이다.

물론 오기 전에 팬더에게 듣고 열람 권한이 늘어서 공부한 내용이다.

웅.

귀가 떨리고 몸이 붕 떠오르는 착각이 들면 게이트 너머다.

한 번 해 봤다고, 이게 또 익숙한 맛이 있다.

홀은 곧 게이트.

구멍은 문이고, 문이란 넘어서면 새로운 공간을 보여 주는 용도.

탁.

땅에 발을 내디뎠다.

"호흡기 착용."

호남이 말했다.

아무리 재수 없긴 해도, 그 또한 불멸특수대원. 프로는 프로다.

그렇게 말함과 동시에, 방탄의 페이스 가드를 내려 작동시켰다.

윙.

곧 얼굴 앞이 진공 상태가 되고 조끼 뒤쪽에 찬 손바닥만 한 압축 산소통을 꺼내 헬멧 옆에 붙였다.

과학의 진보는 이런 것도 가능케 하는 법이다.

대형 산소통 대신, 이거 하나면 48시간은 숨 쉬는 데 문제없다.

시계가 열리지 않았다. 30cm 앞도 보이지 않는 짙은 먼지 폭풍 속이었다.

후아아앙.

방심하면 몸이 붕 떨어질 것 같은 강풍이었다.

"자세 낮춰."

난 호남이 말하기 전에 낮췄고.

기남이는 그 말과 동시에 무릎과 허리를 굽혔다.

눈앞이 안 보이고, 바람 때문에 청각에 의지해 주변을 읽기도 어려웠다.

산소통에 의지하고 있으니, 당연히 후각도 아웃.

답답하네.

이전에도 겪었던 감각 교란도 섞였다.

물론 난 1분도 되지 않아 감각의 크랭크를 조절했다.

이 정도야 뭐.

오감을 조정하니, 몸을 짓누르는 압력이 달라진 걸 느낄 수 있었다.

중력이 지구보다 더 높았다.

체감으로는 대략 1.2배.

약간의 차이지만, 평소보다 몸이 무겁게 느껴졌다.

거기에 장비의 무게가 더해지니, 몸이 땅으로 끌려 내려가는 기분이 든다.

그러니까, 나 말고 기남이가 그럴 것이다.

후아아앙.

계속될 것 같았던 바람은 금세 멎었다.

휘잉.

사람을 통째로 뽑아서 날릴 것 같은 강풍이 사라진 자리에, 희끄무레한 그림자가 보였다.

보호색으로 전신을 두른 사람이었다. 헬멧도 전투복도 전부 황갈색이다.

내가 디딘 곳의 땅은 무르고 짙은 황갈빛이었다. 모래도 아니고 진흙도 아닌, 그 중간쯤 되는 진흙 사막이라는 지형이었다.

지구에는 없는 재질의 땅이란 소리다.

"훌륭한 대응이다. 정호남 과장."

"정호남 과장 외 2명 현장 도착했습니다."

정호남은 상대를 이미 알고 있었다.

나도 목소리를 들으니, 누군지 알겠고.

이 양반이 왜 여기 있나.

"반갑다. 제군들. 난 김동철이다."

총괄 본부장이자, 사내 이사, 김동철이다.

나한테 소고기를 선물해 준 사람이기도 했다.

나와 기남이 각각 3급과 1급 사원을 복창했다. 기남이 안색이 보기 드물게 나빠 보였다.

아직 감각 조절이 끝나지 않은 탓이리라.

"전원 쉘터로 이동한다."

김동철이 말하고 몸을 돌렸다.

그제야 주변 전경이 보였다.

넓다.

광활하다는 말은 이런 곳에 어울리겠지.

시계가 트이지 않아 지평선 따위는 보이지 않지만, 오감과 더불어 육감으로 알 수 있다.

이곳은 참으로 드넓은 땅이다.

날 기준으로 오른쪽에는 우리를 스쳐 간 폭풍이 지나쳤고.

왼쪽에는 꽈릉- 하고 붉은 벼락이 치는 중이다.

화림 내에 있는 화이트홀 너머 세계의 공식 명칭은 '진흙 사막'. 번개와 폭풍우가 치는 독특한 질감의 땅을 가진 사막이었다.

"가지."

김동철이 말하고 걸었다.

그가 향하는 곳은 지하였다. 위로는 폭풍우가 몰아친다.

그러면 안전지대를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

위가 위험하면, 밑으로 가면 된다.

불멸특수대는 이곳에 지하 시설을 만들었다.

땅을 비스듬히 파고, 그 위로 철제 구조물을 올렸다.

위로 비스듬히 휘어진 스키대 같은 구조물이다.

바람의 피해를 막기 위한 거로 보였다.

그 밑이 입구였다.

단단한 시멘트 계단이 우리를 반겼다.

"대단하지 않나?"

걸으며 김동철 이사가 말했다.

날 보며 한 말이다.

"네. 대단하군요."

솔직히 감탄했다.

아더 사이드에 올 때는 몸에 지닌 물건이 아니면 들여올 수 없다.

정확히는 힘으로 들어 올릴 수 있는 것만 가져올 수 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건축물이 가능할까.

답은 조립이다.

하나씩 나르면 된다.

부품 하나하나를 피라미드 쌓는 인부의 마음으로 가져와 쌓고 조립해서 만든 거다.

"여기가 베이스다. 이곳에는 연구원 스무 명과 개척팀 스무 명이 머무르지."

빠바바바빠밤.

러브하우스에서 집을 소개하는 것처럼, 이사는 하나하나 친절하게 설명해 줬다.

"여긴 간이 연구실, 간단한 실험만 하는 곳이고 그곳은 식당이다. 거긴 휴게실, 거긴 화장실이다. 급한가? 급하면 다녀오고."

"아닙니다."

하수 처리, 오물 처리 등 기본적인 의식주를 위한 모든 것을 갖춘 곳이다.

"진짜 대단하네요."

이걸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했을까.

이 모든 것이, 이 땅에 있는 자원을 채취하기 위한 거다.

"당장 쉬면 좋겠지만, 손이 부족하다. 2시간 휴식하고 곧바로 경계 근무에 돌입한다."

"네, 알겠습니다."

대표로 정호남이 답했다.

그 말에, 기남이는 더욱 속이 뒤집힌 표정으로 변했다.

친구야, 속이 많이 안 좋니?

"감각 조절 끝내고 와라. 정기남."

호남이가 말했다.

"알겠습니다."

기남이가 딱딱한 어조로 답했다.

형제가 아니라, 사이 안 좋은 상사와 부하 직원 같다.

딱한 기남이 같으니라고.

기남이와 난 같은 방에 배정됐다.

적당히 깨끗하고 흰 이불이 있는 침대 두 개. 넓지도 좁지도 않았다.

아무리 자원을 가져와 조립해도 지구만큼 편안한 환경은 무리겠지.

그래도, 습도로 괴롭진 않았다.

건조하면 건조했지, 눅눅하지는 않았으니까.

"넌, 왜?"

방에 들어오자마자 기남이가 물었다.

"뭐?"

감각 조절?

눈으로 묻고 눈으로 답을 들었다.

"음, 뭐랄까. 재능의 차이?"

툭 하고 내뱉은 말에.

기남이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