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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형은 얘가 왜 좋은 거야?

"최근 어스 블랙홀 발생 빈도가 늘었습니다."

"맞습니다. 작년 기준 14.8 퍼센트나 늘었죠."

"이번 이상 현상이 휴즈 게이트 사건만큼 위험하다고 보십니까?"

"어떤 것도 확답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이 일이 위험하다는 건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사고에 대비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으니까요."

계산대 앞에 세워둔 스마트폰에서 뉴스가 한창이었다.

박철수는 흥미도 없고 재미도 없었다.

"제노 라이트 1밀리 하나."

바뀐 아르바이트생이 담배를 찾지 못하고 헤맸다.

"저기. 야, 거기 말고 그 옆에, 어 그 노란 거. 아오, 답답한 새끼."

"아, 이거요."

아르바이트생이 담배를 꺼내 바코드에 찍었다.

손이 참 느린 놈이었다.

그걸 보고 있자니, 두피가 간지러웠다. 철수는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을 집어넣어 벅벅 긁었다.

하얀 가루가 떨어졌다.

본래 작업 중에는 안 씻는다. 그게 박철수의 징크스였다.

덕분에 가루가 좀 날렸다.

그걸 본 아르바이트생이 미간을 찌푸렸다가 금세 폈다.

"6,000원입니다."

"야."

"네?"

"시바, 너 방금 인상 썼지?"

"안 썼는데요."

"내가 다 봤는데?"

"잘못 보셨겠죠."

키가 자기보다 한 뼘이나 큰 놈이다. 얼굴도 꽤 반반한 편.

철수는 괜히 짜증이 솟았다.

그가 손을 들어 아르바이트생 머리를 때렸다.

딱 소리 대신 틱 소리가 났다.

소리가 찰지지 못했다. 철수는 방금 일어난 일을 곱씹었다.

'피해?'

아니, 그것보다 어려운 짓을 했다.

손을 피한 게 아니라, 맞는 순간 손이 흘러가는 방향으로 머리를 젖혔다.

굳이 말하자면 머리통으로 손바닥을 흘린 거다. 칼날 흘리기와 같았다.

고로, 어려운 기술이다. 이렇게 움직이려면 어지간한 운동신경과 훈련이 필요하다.

동네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이 할 짓이 아니란 거다.

'우연이겠지.'

마음먹고 때린 건 아니지만, 그런 훈련을 받은 놈이 여기서 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겠나?

"새끼야, 차라리 예능을 켜 놔. 어린 놈의 새끼가 뉴스는 무슨 뉴스야. 칙칙해 뒈지겠네."

딸랑- 하고 문을 밀고 나가는데 뒤에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뉴스를 보건 말건, 지가 수신료를 내줬나. 전기세를 내줬나. 배터리 충전을 해 줬나."

문을 연 채로 멈춘 철수가 입을 열었다.

"야, 형이 동생 같아서 하는 말인데. 입 함부로 놀리다가 인생 조진다. 내가 그런 놈 본 게 한둘이 아니야."

"저기, 그럼 형이라고 생각하고 하는 말인데. 좀 씻고 다녀요. 냄새나요."

"이 새끼, 아까 인상 쓴 거 맞잖아."

그냥 말해도 짜증이 치솟는데, 이 쌍놈의 새끼가 귀를 후비며 눈길조차 안 돌리고 말한다. 그걸 보는 순간 박철수는 화가 치솟았고, 더는 참을 이유도 찾지 못했다.

동네 편의점 아르바이트생 손모가지 하나 부러뜨리는 거야 일도 아니었다.

일이 터지면 알아서 처리할 뒷배도 든든했고.

"너 이 새끼, 이리 와 봐."

성큼성큼 걸어 아르바이트생에게 손을 뻗었다.

놈은 잽싸게 몸을 숙이더니 계산대이자 출입구인 테이블 도어 밑으로 굴러 나와서는 진열대 뒤로 튀었다.

"이 씹새끼가."

"아, 씹새끼는 저 말고 따로 있는데."

제대로 미친놈이었다. 잡아서 아작을 내줘야 했다.

본래, 버릇은 어릴 때 고쳐야 하는 법이다.

자신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어릴 때 문방구에서 펜 한 자루 훔치던 버릇이 지금까지 이어졌다.

물론 지금은 손수 뭘 훔치지는 않는다. 대신 사람들의 안목을 훔친다. 그게 더 벌이가 좋기도 했고.

만족감도 있으니까.

박철수는 '카피어'였다.

한국에서는 '복돌이'라고도 부르는데, 보통 명품이나 명화를 복사해서 팔아먹는 이들을 총칭하는 직업이었다.

개중에는 자신들이 하는 일을 예술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박철수가 그런 종류의 인간이었다.

그리고 지금.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이 예민한 예술가의 성질을 건드렸다.

박철수가 진열대를 잡고 옆으로 엎었다.

우당탕 소리와 함께, 과자나 물티슈 같은 것들이 바닥으로 우르르 쏟아졌다.

"아, 니가 다시 진열할 거냐고."

"니가? 니가? 이 새끼 너 또라이지?"

"여기서도 그 얘기를 들어야 한다니."

"오냐, 오늘이 네 제삿날이다."

아르바이트생은 잘 피했다. 잡힐 듯 말 듯 움직이면서 정말 잘 피했다.

막 손에 닿을 듯하면 쏙- 하고 피했다. 진열대를 뛰어넘으며 사탕 따위를 던지기도 했다.

딱 하고 이마에 사탕 케이스가 적중한 순간, 박철수는 분노를 표출했다.

"으아아아!"

아르바이트생은 덤덤한 태도로 말했다.

"그렇게 소리 지르면 성대 나가요."

딸랑.

외침과 함께 다시금 달려들려고 할 때, 손님이 들어왔다.

"오늘 장사 접었어! 나가!"

소리를 하도 질러서 목이 반쯤 쉰 박철수가 외쳤다.

딸깍.

들어온 사람은 묵묵히 문을 잠갔다.

소리도 안 지르고, 무슨 일이냐고 묻지도 않는다. 묵묵히 자물쇠 잠그는 소리만 들렸다.

박철수가 고개를 돌렸다.

"얌전히 시간만 끌면 되는 일을 이렇게 처리하는 건 비효율적이야."

여자였고, 예뻤다. 지나가다가 봤다면 당장 연락처를 묻고 싶을 정도로 예쁜 얼굴이다.

다만 표정은 딱딱했고, 누군가를 나무라고 있었다.

'누굴?'

또라이가 어깨를 으쓱했다.

"나가려는 사람을 어떻게 잡으라고, 기운이 좋아 보인다고 같이 제사라도 지내자고 할까?"

"포스기 고장으로 잠시만 기다리라고 하면 되잖아. 기다리는 동안 담배 한 대 태우고 오시라고 라이터를 빌려줬다면 도로 들어와서 계산까지 하고 갔겠지. 그럼 시간도 충분히 끌었을 거고."

"그건 모르지. 저놈이 도둑놈이라서 그냥 갈 줄 누가 알아."

"자기 작업실 코앞에서 좀도둑질을 한다고? 비합리적이야. 유광익."

"넌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는 말도 모르냐? 저건 바늘 도둑으로 시작한 소도둑이야."

또라이 아르바이트생의 손가락이 자신을 가리켰다.

이 새끼들이 지금 뭐라고 하는 거지?

"너희 뭐 하냐?"

박철수는 흥분을 가라앉히며 허리춤에 꽂아 둔 폴딩 나이프를 꺼냈다.

틱- 나이프를 펴고 손에 쥐었다.

그런데 또라이와 예쁜 여자는 눈도 안 돌렸다.

"소도둑이건 바늘 도둑이건 합리적 방법을 택했으면 될 일이었다는 거야."

"아니, 그 합리적인 방법이 안 통하면 골치 아프잖아. 저거 튀면 누가 잡는데? 영장 나오기 전까지는 건들지도 말라며."

"일 처리 방식이 마음에 안 들어."

박철수는 둘의 대화 사이에 영장이란 단어를 들었다.

'영장? 무슨 영장?'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그런데 은근슬쩍 둘이 입구를 막았다.

창문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었다. 출입로는 하나뿐이었다.

"손도 대지 말라고 해서 최선을 다한 것뿐이다. 결과가 좋잖아."

"지저분한 일 처리야."

"효율이 떨어지는 건 아닌데?"

"아니, 본사에서 이 점포에 배상해야 하니까 효율이 떨어지지."

"말을 말자. 말을."

미친 것들.

철수는 슬금슬금 움직이다가 또라이의 왼쪽으로 뛰었다.

달렸고 거리가 좁아졌다. 또라이가 코앞이었다. 서슴없이 칼날을 그었다.

우둑.

'우둑?'

위로 꺾인 제 손목이 보였고.

"어디 가, 형?"

통증에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눈앞이 까맣게 변했다.

박철수는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특수종 구치소였다.

일어났는데 머리에 충격이 없다.

어지럼증도 없었다. 기가 막히게 정신만 잃게 만든 거다.

"누구였지? 나 때려눕힌 놈?"

눈을 뜬 박철수가 처음 뱉은 말이었다.

그는 상대의 예술적인 타격 기술에 반쯤은 감탄하며 물었다.

그는 예술가였다. 그게 작품이든, 기술이든, 보는 순간 반하는 그런 종류의 인간.

"숨기라는 말은 없지?"

"오히려 자기가 처리한 일이라고 똑똑히 알려 주고 가던데?"

"불멸특수대원 유광익."

박철수는 그 이름을 머릿속에 단단히 새겼다.

* * *

사장님은 날 뺑뺑이 돌리기로 작정한 듯했다.

처음 나간 임무는 귀태 형과 함께였다.

"뭐냐? 난 미호와 사선을 넘어야 하는데 왜 네가 나와?"

"임무 배정을 내가 하는 건 아니잖아?"

귀태 형은 몹시 실망한 표정으로 날 봤다.

딱히 해 줄 말이 없었다. 일이나 합시다. 방귀태 씨.

요새 들어 블랙홀 발생 빈도가 높아졌단다.

그래서 외부로 파견 나온 인원까지 일대를 단속하기 바빴다.

PWAT도 바쁘고, 엑스큐라시도 지들이 담당한 지역을 커버치느라 바쁘고.

뭐, 그런 일이 있어서 나와 귀태 형이 페어로 일을 나섰다.

신입이라지만, 이제 1년이 다 되어 간다. 제 몫을 할 때가 됐다는 게 회사의 판단일까.

나야 그렇지만, 우리 귀태 형 싸울 줄은 아나?

우리는 답십리 도로 위 생긴 블랙홀과 마주했고.

일대는 이미 봉쇄 중이었다.

때아닌 도로 봉쇄로 근처 도로가 교통 체증으로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사이오닉 협회에서 만든 판독기는 비접촉 전자 체온계를 다섯 배쯤으로 확대한 것처럼 생겼는데, 그 위로 정보가 줄줄이 뜨기 시작했다.

근데 저 판독기 좀 작게 못 만드나.

낑낑거리며 들고 있는 순경이 불쌍해 보였다.

"판독 끝났습니다!"

타입은 더블 라인, 콜드였다.

핫이 빠른 거라면 '콜드'는 느리다는 거고, '더블 라인'은 둘이나 셋씩 줄줄이 나온다는 거다.

나오는 인베이더는 넘버 투 인베이더, 도플갱어.

도플갱어는 상대의 모습을 훔치는 인베이더다.

처음 만나는 놈이었다.

"상대해 본 적 있어?"

"아니."

귀태 형도 처음이다.

이곳에 있는 특수종은 형과 나 둘뿐이다. 상대하는 게 어렵지는 않다. 당황하지만 않으면.

난 머릿속으로 외웠던 인베이더의 정보를 되새겼다.

인베이더 '도플갱어'는 상대의 모습을 그대로 복사한다. 자신과 똑 닮은 무표정한 괴물이다.

모습을 흉내 내지만, 그 능력을 전부 가져오는 건 아니다. 한계가 있다는 거다.

냉병기는 복사하지만, 총화기는 복사 불가다. 복사체 또한 신체 일부이기에 그걸 발사할 수 없다.

대응법도 단순하다.

거울을 보고 '난 왜 이렇게 태어났나'라고 한탄할 외모라면 쉽다. 제 얼굴을 보고 총탄을 갈기면 된다.

주의할 점이라면 하나뿐.

도플갱어 무리가 아군과 섞이지 않도록 하면 된다. 섞이면 아군이 아군을 죽이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다.

"전원 일렬로 모이십시오. 이제부터 제 앞으로 나가는 인원은 인베이더로 추정, 곧바로 격살합니다."

내가 말했다.

공포 분위기가 조성된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도플갱어와 싸울 때는 대열이 중요하다.

내 외침에, 귀태 형이 뒤로 세 걸음 물러났다.

"형은 빼고. 우린 앞에서 싸워야지."

"알지."

귀태 형이 다시 세 걸음 앞에 섰다.

"그렇다고 내 앞에 서지는 말고."

"내가 뒤에 있는 게 낫겠지?"

귀태 형이 뒤로 물러났다.

이 양반, 그동안 임무 수행 어떻게 한 거야.

홀이 열리고 인베이더가 튀어나온다.

"저거 내 얼굴이라고? 거짓말!"

귀태 형이 외쳤다.

혼혈이지만, 우리 형 얼굴은 좀 그래. 아쉽긴 하지.

견착할 것도 없이 오른손과 왼손, 소총 두 자루를 들고 갈겼다.

탕! 탕! 탕!

귀태 형 얼굴에 구멍이 난다.

도플갱어는 모습을 훔치는 대신 약점도 같아진다. 인간의 모습을 훔치면 인간과 같이 머리통이 약점이다.

쓰러진 놈들의 머리통에서 걸쭉한 보라색 액체가 바닥에 흩뿌려졌다.

"전원 사격."

일반 병력을 지휘하는 사람이 외쳤다.

곧 도심 한복판으로 화끈한 화력이 쏟아졌다.

요새 경찰은 소총 장비가 필수다.

그들이 갈기면 갈기는 대로 도플갱어가 쓰러졌다.

몇몇, 다른 놈보다 발이 빠르거나 움직임이 다른 놈은 내가 쐈다.

도플갱어의 전술은 간단하다. 썩은 사과 속에 멀쩡한 자두를 숨기는 전법이다.

한 마리만 아군 사이로 들어오면 지는 셈이니까.

"긴장 풀지 마!"

지휘관이 외쳤다.

잘하네.

두두두두두.

한창 총질 중인데, 머리 위로 헬기가 날았다.

홀로 인해 생긴 교통 체증 때문이었다.

"가지가지 하네."

귀태 형이 툴툴댔다.

뭐, 요새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다.

돈 많은 작자들은 서울 시내에서 헬기 착륙장을 만들어 타고 다닌다. 택시 헬기도 곧 도입한다는데, 그걸 누가 타고 다니려나.

나도 모르겠다.

그렇게 세 시간가량 총기 난사를 하니, 홀 클로징이다. 인베이더가 더 나오지 않았다.

한숨 돌릴 틈도 없었다.

"다음 작전이다."

방탄 헬멧 통신기로 팬더 대리가 말했다.

"대리님, 저 이제 막 끝났는데요?"

"다음 건 쉬워. 잠복이야."

"혼자 가요?"

"아니, 3급 사원 우미호랑."

통신은 귀태 형도 같이 들었다.

화르륵.

열기가 느껴져 옆을 보니, 귀태 형이 눈에서 불을 뿜었다.

"나도 같이 가."

"아니, 방귀태 사원은 복귀. 보고서 작성해야지."

팬더 대리의 말에 귀태 형의 눈에는 불꽃 대신 물기가 생겼다.

"안 돼. 우리 미호랑 사선 넘지 마."

이 형은 머릿속에 뇌 대신 우동 사리가, 아니지. 연애 세포가 가득한 거겠지.

좋게 보자, 좋게.

난 환복한 뒤 곧장 작전 장소로 향했고.

"편의점 직원으로 잠복해."

"내가?"

"내 얼굴은 너무 눈에 띄니까."

우미호의 말이 맞았다.

"그리고 난 증거 찾아서 영장 발부까지 해야 하니까. 이게 효율적이야."

틀린 말은 아닌데,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네.

어쨌든 그렇게 편의점 잠복을 시작한 거였고.

현재.

달려드는 복돌이 새끼가 칼을 들고 있길래 손목을 꺾고 몸을 반 바퀴 돌려 목 뒤를 후렸다.

꿀잠 목덜미 후리기다.

한두 번 해 본 게 아니어서 힘 조절은 일도 아니었다.

"죽이진 않았네. 장족의 발전이다."

우미호가 말했다. 내 귀에는 비아냥거리는 거로 들렸다.

"체포가 임무라며?"

"잘했어."

나 진짜 기분 이상해. 얘가 칭찬하는 거 같긴 한데, 기분이 나빠.

귀태 형. 형은 얘가 왜 좋은 거야?

난 이해할 수 없었다.

105. 그게 핵심이다.

편의점 잠복 작전은 단순했다.

"이름 박철수, 일명 칼잡이. 그동안 증거가 없어 잘 빠져나갔는데 이 근처에서 작업한다는 정보가 있어. 이 편의점에 자주 나타난다고 하니까 넌 기다리고 만나면 시간 끌어. 난 그사이 작업실을 찾아서 증거를 확보, 영장을 발부한다."

"...정리 잘하시네요."

일반인 검사가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렇게 난 잠복을 하고, 우미호는 탐정으로 빙의해서 일대 작업실 조건을 선정했고, 곧 찾았다.

그리고 놈이 자리를 비운 사이 작업하던 물건, 그러니까 증거가 될 만한 것을 찾아서 영장을 발부했단다.

의심만으로 사람을 감방에 처넣을 수는 없다.

그래서 필요한 과정이었다.

이런 복돌이 새끼들이 수틀리면 증거 소멸하는 게 또 기가 막혀서, 자리를 비운 사이에 노려야 했고.

난 뭐, 적당히 시비 걸고 성질 돋워서 못 가게 했다.

그게 전부다.

영장 발부하기 전까지는 손도 대지 말라고 해서 손도 안 댔고.

"이번 일의 주요 포인트는 하나다. 패지 마."

팬더 대리가 이렇게 말했었다.

내가 무슨 파괴왕이야?

어느 웹툰 작가처럼 어디 나타나기만 하면 다 부숴 버리는 그런 존재냐고.

그래서 원만히 처리했다. 편의점을 조금 부순 건 어쩔 수 없다.

이게 최선이었다니까?

"점포 피해는 불멸특수대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우미호가 정리를 마쳤다.

그렇게 범죄자 검거 완료.

"복귀?"

"연남동에 홀 출현했어. 그쪽 지원."

"또?"

아니, 진짜 뺑뺑이 제대로 돌리네.

"뛰는 게 빠르겠다."

난 장비도 없이 다음 홀 출현 지점으로 가야 했다.

이번에는 넘버 쓰리 슬라임과 바운스가 같이 나왔다.

귀찮은 조합이다.

슬라임은 불에 태워 죽여야 하고, 바운스는 냉각탄이나 그물 따위로 잡는데.

일반종이 상대하기에는 둘 다 껄끄럽다.

고위 넘버 인베이더가 나오는 홀도 간간이 생긴다곤 하는데, 난 그런 곳은 구경도 못 했다.

"불멸특수대 우미호와 유광익, 합류합니다."

우리는 그대로 합류, 그물을 던져 바운스를 잡고 슬라임을 태웠다.

노동이긴 한데 놓치면 누군가는 죽을 수도 있는 일이기에 긴장을 놓을 수는 없었다.

"클리어, 홀 클로징입니다."

엑스큐라시에서 나온 변신족도 있었다.

"수고."

난 그렇게 말하며 이제 진짜 복귀하려고 했는데.

미호가 어깨를 잡았다.

"왜?"

"사장님 특별지시야. 도주한 변신족 잡아 오래."

"나만?"

"응."

우미호가 필요한 정보만 똑 부러지게 전하고 훌쩍 떠났다.

정이 없다. 도와주겠다고 물어보지도 않냐?

귀태 형, 진짜 쟤가 왜 좋아? 어디가?

얼굴만 보고 좋아하는 거라면, 화림 내에 저 정도 수준은 꽤 많다.

난 당최 귀태 형 취향을 모르겠단 말이지.

자고로 여자란 참하고 몸매 좋고 가슴 크고 성격 좋고 낮에는 현모 밤에는 요부, 응? 하여간 그런 여자다.

우미호는 아니지.

"싸가지 장례 치른 애가 뭐가 좋은 거냐고."

난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발걸음을 옮겼다.

어쩌겠나. 시키면 해야 하는 게 회사원인 것을.

"동대문의 구원자시죠?"

엑스큐라시 변신족이 물었다.

"낯부끄럽지만, 네, 맞습니다."

명성은 즐기라고 있는 법이다.

"영광입니다."

어느새 내가 이렇게 유명해졌다.

자식, 똘똘하게 생겼다.

악수 한번 해 주고 헤어졌다.

그대로 폭주하는 변신족을 잡기 위해 갔더니, 이미 두 명의 변신족이 쫓는 중이었다.

난 베이스로 쓰는 대형 버스에 올랐다.

"불멸특수대?"

"네. 지원 왔습니다"

"...맨몸으로?"

홀 정리하면서 화기랑 그물만 쓰고 방검방탄복도 안 입고 왔다.

"바빠서요."

"골치 아파, 미친놈인 줄 알았는데 잘 숨네. 냄새로 쫓기도 곤란하고."

"이 근처까지 쫓긴 했어. 위성으로 위치 파악 중이니까 반나절이면 잡을 수 있어."

도심 한복판에서 변신족의 냄새, 그것도 특정한 냄새를 찾아서 맡는 건 어렵지.

아무리 개 코라도 기준은 있어야 특정할 수 있는 법이다.

그런데 반나절?

"반나절 동안 기다릴 필요 없습니다."

난 대충 말하고 감각을 열었다.

정기남에게서 배운 감각 확장의 변형이다.

한 사람에게 집중하는 게 아니라, 이 일대 전체에 감각의 거미줄을 퍼트린다.

호수를 연상하며 그 호수 안에 걸린 특이한 모든 걸 잡아채고 걸러낸다.

내 주변에 있는 변신족 둘은 제외.

이 일대라면 반경이 어느 정도일까.

호수가 일그러진다. 이미지가 깨지기 직전, 난 작고 옅은 호흡을 들었다.

일반종이라면 절대 할 수 없을 깊고 깊은 호흡.

찾았다.

"생포는 두 분이 직접 하시죠."

난 전투가 아니라 탐색 지원이다.

최근 맡은 모든 임무가 이랬다.

전투 외, 일반 임무 지원.

블랙홀 지원도 내가 전면에 나서서 싸우는 게 아니라 서포트였고.

편의점 잠복도 마찬가지다.

내가 그동안 보여 준 것만 해도 전투의 귀재란 소리를 듣기엔 충분했다.

그러므로 이제 보여 줄 건, 다양성이다.

전투 외 임무에서도 잘한다는 걸 보여 주라는 거지.

뭐, 단순하게 어떤 임무든 해결하면 그만인 문제다. 깊게 생각할 일은 아니었다.

"찾았다고?"

"벌써?"

"제 왼쪽 손목을 걸죠."

그렇게 말하고, 버스 밖으로 나가서 내달렸다.

본능이 탁월한 도망자였다.

놈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좌전방, 빨간 건물."

건물주 취향이 의심되는 빨간색 건물 바로 옆이었다.

휙 하고, 검은 그림자가 골목 안으로 달리는 게 보였다.

나만 본 건 아니었다.

동체 시력은 변신족도 뛰어나다.

꽝! 꽝!

둘은 곧바로 땅을 박찼다.

보도블록이 박살 나며 변신족 둘의 몸이 골목 안으로 짓쳐들었다.

사람들이 참 깔끔하지가 못하네.

부드럽게 밟고 땅을 박차도 속도를 낼 수 있는데 뭐가 그리 급하다고, 멀쩡한 바닥을 부수나.

응? 사람이 말이야. 일이라고 다 때려 부수고 그러면 안 돼.

난 편의점 점포를 반쯤 부순 과거를 깨끗하게 잊었다.

사실, 내가 부순 건 아니지, 흥분한 복돌이가 부쉈지.

나도 둘의 뒤를 쫓았다.

둘은 이미 침을 흘리고 동공이 흔들린 변신족을 제압한 뒤였다.

한 명이 어깨에서 피를 질질 흘리는 걸 보니, 기습에 당한 것 같았다.

어쨌든, 클리어지?

"고생했습니다."

변신족 하나가 그제야 존댓말을 제대로 썼다.

"네, 불멸특수대원 유광익이었습니다."

난 그렇게 답한 뒤 회사로 복귀했고.

그곳에 날 반기는 팀장을 만났다.

"오, 꽝 왔네, 10분 뒤에 출발이다."

"...어딜?"

"어딜은 반말이고."

"요?"

"죽여 버리고 싶네."

전신 방검방탄복에 가벼운 무장.

권총, 나이프 따위를 두른 게 보였다.

팬더 대리도 비슷하고, 사수도 비슷하다.

캐쉬 히포 대신 토가레프.

방검방탄복 안쪽에 불룩하게 튀어나온 건 소음기.

섬광탄과 연막탄도 몇 개 챙긴 것 같다.

소음탄과 드론 따위도 챙겼네.

"어디 가요?"

셋만 따로 작전을 나가나?

난 사무실 지키고?

"5분 준다. 장비 챙기고 지하로 내려와."

"나요?"

"그럼 시바, 너 말고 뭐, 컴퓨터한테 처 말하겠냐?"

아따, 성질은.

팀장은 나이프 손잡이를 쥐고 나갔다.

진심 뺑뺑이네.

뛰었다. 방검방탄복 챙기고 장비 대강 챙기고.

권총 두 자루, 소음기, 섬광탄 손에 잡히는 대로 대강 달라고 했다.

"너 무기 안 가리는구나?"

탄약고 담당 대리가 말했다.

"팀장이 5분 이내에 오래요."

"거, 중봉 팀장님도 너무 하시네. 야, 이것도 챙겨 가, 이번에 새로 연구팀에서 내려온 건데 너한테만 먼저...."

"감사합니다."

낚아채듯 받아서 뛰었다.

"아이고, 고생이다."

뒤에서 들리는 말에 호의가 느껴졌다.

입사하고 따로 친분이 있던 사람이었나? 그건 아니었던 것 같은데.

내가 인간관계를 워낙 잘해 놨지.

이미지도 좋고.

기남이나 미호에 비하면 난 천사다. 말도 잘 듣고, 사교적이며, 능력도 좋다.

하하하하, 내가 그런 사람인데.

"꽝, 빨리 안 튀어와?"

팀장이 총을 꺼내 장전하며 말했다. 그 움직임에 날 쏘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꽝.

난 바닥을 발로 찼다.

부서지든 말든 힘을 좀 썼다.

대신 추진력을 얻어 검은 밴 앞에 단숨에 당도했다.

"...너 운동 너무 열심히 한 거 아니야?"

팬더 대리가 어안이 벙벙한 채로 말했다.

"훌륭해."

사수는 칭찬했고.

"사내 기물 파손, 네 월급에서 깐다."

이런 시....

상급자한테 욕은 하지 말자. 난 그런 사람이 아니다.

대신 속으로 읊조릴 뿐.

시발, 팀장 너님이 하도 쪼아서 이런 일이 생기는 거잖아.

시발 다음에 팀장 일부러 띄워서 생각한 건 아니다. 잠깐 딴생각하다가 그랬지.

"그래서 진짜 어디 갑니까?"

내 물음에 운전석에 앉은 팬더 대리가 나섰다.

"박병준 박사가 그동안 미주알고주알 떠들어 줘서 사설 연구 시설 위치를 몇 군데 캤지. 그중 하나."

"다 때려 부수러?"

"폭력적인 새끼, 뭘 때려 부숴."

그게 늦었다고 막 귀환한 부하 직원에게 총을 겨누는 사람이 할 말입니까?

팀장을 바라봤다.

"뭘 봐. 눈깔 빼 줄까?"

"팀장님 안 봅니다. 팀장님 뒤에 있는 창문 봤어요."

"지랄로 팡파레를 터트리시네."

내가 할 말을.

"안 부숴. 들어가서 물건 하나만 빼 올 거야."

사수가 차근차근 설명을 시작했다.

사설 연구 시설인데, 대외적으로는 공식 인증 기관이란다.

그래서 자료만 빼 오는 거란다.

대놓고 쳐들어갈 명분은 없기에 불멸특수대가 관여됐다는 증거를 남기면 안 된다는 옵션이 붙었다.

박병준 박사가 말한 정보의 진위를 판단하는 작전이란 말도 들었고.

차는 수원을 지나서 산을 옆에 두고 멈췄다.

우리 목적지는 아직 2km가 남았고.

차를 세운 팬더 대리가 말하며 홀로그램을 띄웠다.

허공에 입체감 넘치는 건물과 부지 청사진이 반투명하게 생겨났다.

적당히 넓은 부지에 사옥과 연구 시설을 동반한 곳이다.

바이오 무슨 기술을 개발하는 곳이라는데, 겉으로만 그렇고 뒤에서는 몰래 금지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단다.

박병준 박사의 말이 진짜라면 말이다.

"얘들, 단단히도 막아 놨네요."

시설을 둘러보며 동훈 대리가 말하고, 팀장이 무표정하게 홀로그램을 관찰하는 동안 난 사수에게 물었다.

"금지된 연구가 뭐래요?"

"인베이더와 인간의 혼혈."

거, 음, 끔찍한 연구를 진행 중이시네.

위성을 통한 홀로그램 형성만으로 팬더 대리는 건물에 구성된 보안 시스템을 파악했다.

"동작 감지기, 온도 변화 감지기, 외부 보안 카메라까지. 오십 대가 넘는데요?"

팬더 대리는 그렇게 말하며 홀로그램을 집게손가락으로 잡고 좌우로 나눴다.

홀로그램이 흩어지자, 건물 구조가 더욱 상세히 보였다.

바로 옆의 사옥을 별개로 치면, 지하 시설이 없는 3층 구조의 건물이다.

팬더 대리가 브리핑을 시작했다.

"사옥에서 연구하지는 않을 겁니다. 이 일과 무관한 사람도 꽤 있을 테니까요."

"으음."

팀장이 팔짱을 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몰래 땅굴을 파지 않았다면 이쯤, 아마도 여기겠죠. 뭘 숨기기 딱 좋네요. 저라면 여기를 폐기물 창고로 만들고 업체를 선정해서 처리하게 하겠습니다. 보통 연구소의 폐품이라고 하면 끔찍한 것들이 많으니, 연구원이나 다른 사람이 들어가지도 않을 거고요."

팬더 대리의 손가락이 1층 안쪽을 가리켰다.

분리된 구조로 봐서 그렇지, 연구소 정문을 기준으로 반대편이다.

"이미 전화로 확인했는데, 폐기물 창고가 있다고도 하고요."

"뭐라고 전화했어요?"

그냥 전화한다고 해서 알려 주진 않을 거 아니야?

나중에 나도 이런 임무를 할 수도 있으니, 선배의 노하우는 배우는 게 좋다.

"그게 궁금하냐?"

팀장이 팔짱을 낀 채로 물었다.

"네."

밝고 자신 있게 답했다. 풋풋한 신입 사원이 궁금하다는데.

"죽여 버릴까."

팀장이 팔짱을 낀 채로 발을 들었다.

"팀장님, 여기 작전 지역에서 고작 2km 떨어졌습니다. 소란은 곤란합니다. 임무를 생각하셔야죠."

숨도 안 쉬고 말했다.

"말 잘하네."

사수가 감탄했다.

"팀장님, 진정하시고요. 견학 간다고 전화했지. 생물학 전공하는 대학원생인데 폐기물 처리는 어떻게 하냐고."

"그럼 답해 줘요?"

"안 해 주지."

그럼 대답을 어떻게 들었는데?

팬더 대리가 픽 웃더니 말을 이었다.

"그렇게 말하면 환경 보호 단체에서 거짓말로 전화한 줄 알거든. 그럼 폐기물 처리하는 창고가 따로 있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하지. 그럼 난 증명해 달라고 하고. 보통 연구 시설, 특히나 구린 게 있는 곳은 외부인을 받고 싶어 하지 않으니까."

"사진이나 뭐 기타 증명할 만한 것을 주겠네요."

"정답."

생긴 건 곰탱이 같이 생긴 불멸자인데, 스마트하다. 우리 팬더 대리.

난 홀로그램을 바라보다가 중얼거렸다.

"전기세 더럽게 많이 나오겠네."

공업용 전기를 가져다 쓰려나.

"꽝."

그 말에 팀장이 날 불렀다.

"네?"

내가 뭘 또 잘못 말했냐?

"그게 핵심이다."

"...네?"

팀장의 말에 팬더 대리와 사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만 눈을 깜빡였다.

"그게 핵심이라고."

그니까 뭐.

"새끼야, 전기. 니 입으로 말했잖아."

팀장이 손을 들었다. 난 쫄지 않았다. 대신 홀로그램으로 눈을 돌렸다.

건물 구조도가 보였다.

우리가 해야 할 건 잠입 액션 판타지고.

필요한 건 경보 시스템의 제거.

그럼 할 일은 하나뿐이었다.

106. 배울 건 배운다.

이번 작전명은 '눈 가리고 맴매'였다.

"작전명은 누가 짓는 겁니까?"

진지하게 물었다.

"불만 있냐?"

팀장이 지었군.

네이밍 센스가 최악이었다.

"아니요. 작명소를 차리셔도 되겠습니다. 대박 날 것 같아요."

이렇게 말하며 엄지까지 치켜세우면 완벽하다.

"놔, 저 새끼 묻고 가게."

일어나는 팀장을 팬더 대리가 뒤에서 안았다.

잘한다. 우리 대리님.

"왜요. 칭찬해도 지, 지지지지 베이비, 베이비."

지랄이라고 할 뻔했네. 급히 어디서 들어 본 멜로디로 덮었다.

"총 가져와."

팀장님 허리에 있습니다. 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미친 꽝 새끼."

팀장은 흥분을 가라앉혔다. 진짜로 화낸 건 아니었다.

어쨌든 일할 시간이니, 일을 해야 할 거 아닌가.

우리 작전은 단순했다. 하지만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다.

발전소를 타격하고 외부에서 보안 요원의 시선을 끌면 그사이 뒤를 털기로 했다.

머니 & 세이브 때와 같네.

내심 그리 생각하고 있는데.

"양아치 금고를 털 때 너무 너저분해서, 차마 보고서를 눈 뜨고 볼 수가 없었지. 꽝 새끼야, 꽝 새끼야, 일 그렇게 하는 거 아니다."

팀장이 말했다.

"덕분에 불멸교도도 잡고, 퇴사도 안 당하고 감방도 안 가고 그랬지만. 네, 너저분했죠."

"이 새끼는 진짜 한마디를 안 지네."

죄송합니다. 부모님에게 지는 법을 배우지 못한 입을 물려받은 터라.

"제가요?"

대신 모른 척은 잘하지.

능청은 사회생활의 필수 요소다.

"일이나 하자."

팀장이 항복 선언을 했다.

여기로 올 때 날 갈궈서 그런 건 아니다. 우리에게는 이게 일상이다.

하여간 필요한 건 발전소 타격팀과 시선을 끌 미끼, 뒤를 털 도둑놈이었다.

"동훈이가 전기."

"오랜만에 실전이네요."

팬더 대리가 직접 나선단다.

"괜찮겠어요?"

난 팬더 대리가 싸우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사내에서는 '제일 못 싸우는 불멸자'라는 별명도 붙은 작자다.

어떤 싸움도, 전투도 피하다 보니 붙은 별명이다.

"넌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오타쿠, 회귀자 드립을 좋아하는 망상병 환자, 다크써클을 달고 다니는 밤에 뭘 하고 다니는지 모를 남자.

"...성격 좋은 대리님?"

난 사회생활을 할 줄 아는 남자다.

"이 몸은 일도 잘하지."

그래, 사무실에서는 잘했지. 밖에서는 모르겠고.

이거 진짜 괜찮은 거 맞지?

팀장에게 눈으로 물었다.

"뭐, 팍, 네 일이나 잘해."

나한테만 까칠해, 저 양반은.

기남이한테 하는 거 반만 해 봐라. 내가 업고 다니지.

"하여간 우리 기남이가 와야 했는데, 아니면 예쁜 미호라도. 어디서 덜 떨어, 아니 생기다 만 게 와서는."

난 초고속 진급으로 2급 사원, 그 둘은 아직 3급 사원이다. 내 능력이 위라는 걸 증명한 셈이다.

그러니 덜떨어졌다는 말을 틀렸다.

팀장이 그래도 개념은 있다. 거짓을 토대로 말하진 않으니.

기남이 새끼가 나보다 조금, 아주 조오오금 잘생기긴 했지.

미호는 혼혈치고 순혈만큼 예쁘장하게 생기긴 했다만, 여자랑 미모를 비교해서 뭐 하겠나.

물론 팀장은 당장 여장을 시켜도 어지간한 여성의 미모를 압도할 것이다.

그래도, 얼굴이 미모 깡패면 뭐 하나. 성격이 개차반인걸.

사람은 내면이 중요한 법이다.

"사람은 내면이 중요하죠."

나도 모르게 속마음을 내비쳤다.

"풉."

팀장이 날 비웃었다.

욕을 하고 싶어졌다.

"내면이 중요한 못난이랑 정아는 미끼, 세부 작전은 알아서."

성격이 조금 모났어도 배울 건 배워야 한다.

팀장에게 배울 건 많았다.

첫째, 약점을 간파하는 통찰력.

우리의 타깃인 연구 시설은 대외적으로 평범한 연구소다.

그런 연구소이기에, 내부에 비상 전력 발전소 따위를 만들 수는 없다.

어떤 연구소는 몰래 지하 굴을 파서 비상 발전소를 짓기도 한다지만.

작정하고 스캔하면 다 나오는 세상이다.

현재 우리 목표인 곳은 가면을 쓴 불법 연구소.

그들은 내부에 불법 시설을 지어 또 다른 위험을 안느니, 외부에 발전소를 두는 거로 결정한 듯했다.

그게 바로 비상 전력 발전소다.

내부에는 전기 잡아먹는 감지기나 경보 시스템이 한가득했고, 그 모든 건 전기를 먹어야 일을 할 수 있었다.

고로, 전력을 차단하고 비상 전력 발전소를 조지면 끝이라는 거지.

팀장은 여기 오기 전에 이미 이 작전을 세웠다.

보고 판단하는 통찰력이 남다르다는 말이다.

둘째, 과감함과 세밀함이다.

팀장은 주저하지 않았고, 고민하지도 않았다.

방법을 떠올리고 그대로 진행하면 그만이라는 거다.

다만, 그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특수한 상황을 말하고 그려 냈다.

팬더 대리는 팀장이 말하는 불시에 일어날 모든 일에 대비책을 내놨고.

쿵짝이 잘 맞는 둘이다.

셋째, 팀장은 팀원을 믿었다.

팬더 대리도 할 수 있으니까 시키겠지.

그게 아니라면 보낼 리가 없을 것이다.

작정하고 실패할 생각을 하고 일하는 위인은 아니니까.

거기에 미끼 팀에 사수만 보내서는 답이 없으니 날 동행 시키는 건, 평소 내 임기응변 능력을 믿는다는 거 아니겠나.

"정아야, 수틀리면 쟤 집어던지고 넌 빠져나와라. 저건 바퀴벌레를 닮아서 잘 살아남을 테니까."

사수는 '잘 드는 칼'이란 별명을 가졌지만, 기초적으로 강화 약물을 먹은 인간이다.

불멸자와는 다르다.

고로, 팀장이 한 말이 맞다. 위험하면 내가 남고 사수가 빠져야 한다. 다만, 듣기에는 껄끄러웠다.

팀장의 마지막 말은 적당히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내용만 캐치했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언젠가 시간이 흐르면 나도 내 팀을 가질 것이다. 그럴 때를 대비해 배울 건 배울 뿐.

"지금부터 30분, 대충 개요 잡고 타이밍 조진다."

"질문 하나 해도 됩니까."

내가 손을 들었다.

우등생은 질문을 아끼지 않는다.

"하지 마. 입 닥쳐. 끝날 때까지 벙어리라고 생각해."

전생에 나와 팀장은 무슨 사이였을까.

멍청한 고양이와 영리한 쥐?

내가 영리한 쥐였겠지.

"발전소를 건드리는 건 범법 아닙니까?"

"연구소 자료 빼 오는 건 합법일까?"

사수가 드물게, 질문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난 우등생이어서 방금 질문으로도 충분히 이해했다.

"안 걸리면 장땡이군요."

"시발, 쓸데없는 그 주둥이 좀 닥치라고."

저렇게 입이 더럽지만, 팀장 얼굴만 보고 반하는 여자도 있겠지?

하지만 금세 돌아설 것이다.

사람은 내면이 중요하니까.

"야, 내면 못난이. 밴 끌고 가."

"네."

작전 개요는 짰다.

사수와 말을 맞춰 보기도 했고.

"잘할 수 있죠?"

내가 물었다.

"진심으로 묻는 거야?"

기대하지 말자.

팀장은 시선을 끌라고 했지, 보안 요원을 두들겨 패라고는 안 했다.

우리가 불멸특수대라는 걸 걸리면 안 된다고 했다.

가면이라도 쓰는 게 어떻냐고 했더니.

"고양이 가면 쓰고 날뛴다고 해서 안 걸릴 줄 아냐? 양아치 금고 턴 것도 불멸특수대에서 했다는 거 다 알아, 새끼야."

고양이 아니고 호랑이 가면인데.

뭐, 나도 가면 하나로 감춰졌으리란 생각 안 하긴 했다.

뉴스에서야 불감가학병에 걸린 정신병자라고 했지만, 알 놈은 다 알겠지.

더군다나 그 일로 불멸교에도 타격이 가고 프로메테우스에도 타격이 갔으니.

나중에 들어 보니, 한국에 들어온 머니&세이브의 입지가 상당히 좁아졌다고 했다.

프로메테우스는 여기에 전력을 투입하느니, 지켜보기로 한 것 같다.

그게 아니었다면 또 한바탕 난리가 났겠지.

그들은 싸우는 대신 잘나디 잘난 불멸특수대원 하나에게 마수를 뻗었지만, 잘나디 잘난 불멸특수대원은 그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데 쪼개고 지랄이냐?"

사실 팀장은 날 좋아하는 게 아닐까.

툭하면 내 얼굴만 보고 있네.

"언젠가 저도 팀을 이끌겠구나, 하는 생각이요."

"꿈이 커. 우리 내면 못난이의 꿈이 아주 대하 서사시야."

요즘 팀장은 어디 드립 학원에 다니는 것 같다. 말이 늘었어, 이 양반.

"꿈은 클수록 좋은 거니까요."

"응, 개꿈. 작전 시작은 지금부터 1시간 뒤다. 알아서 시작해. 타이밍은 내가 맞춘다."

도둑놈 역할의 팀장님이 말하며 장갑을 손목 쪽으로 당겼다. 손에 딱 맞게 조절되는 응축 가죽이다.

팀장은 주먹을 몇 번 쥐었다 펴며 장비를 점검했다.

싸우지 않고 시선을 끌어야 했기에 나랑 사수는 연인을 연기하기로 했다.

적당히 길 못 찾는 남자와 화난 여자, 싸우는 연인을 보면 당황하는 법이니.

그걸 통해 시선을 끄는 사이, 팬더 대리는 잘 숨어서....

"대리님, 기척 죽이기는 할 줄 아시죠?"

"넌 진짜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진심으로 말해 줘야 하나.

"기척 죽이기도 잘하는 대리님."

"정답."

팬더 대리가 찡긋- 한쪽 눈을 감았다.

눈을 돌렸다. 엄한 걸 봤다.

"가죠."

사수에게 말했다.

우리는 장비와 방검방탄복을 벗었고.

난 맨투맨 티, 사수는 딱 붙는 니트티를 입었다.

그 뒤에 내가 밴 운전석에, 사수가 조수석에 앉았다.

"운전은 할 줄 알지?"

"절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툭하면 사고 치는 신입 사원, 싸움 잘하는 후배, 팀장님에게 지지 않는 입을 가진 사원."

뭐 하나 틀린 말이 없구나.

통찰력은 사수에게도 있었다.

"정답."

팬더 대리처럼 윙크하고 액셀을 밟았다. 사수는 어느새 창밖을 바라봤다.

붕.

밴이 출발했다.

연기는 배경부터 시작하는 거다. 난 밴을 천천히 몰았다.

길을 잃은 차는 빨리 달리지 않는 법이니까.

작전에 대해 생각하다가 자연스럽게 내가 한 일을 떠올렸다.

말은 험해도, 기초적으로 팀장은 바른말을 한다.

너저분했다는 건, 깔끔하지 못했다는 거다.

그랬나?

되새겼다.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왕자를 구했을 때는? 그 또한 마찬가지인가?

모른다. 세상일에 정답은 없다. 다만, 이게 고민할 일이 아니란 건 알겠다.

지나간 일을 후회하지 말라고 배웠다. 그건 아버지, 어머니의 의견이 같다.

"후회할 시간에 오늘 점심거리나 고민하는 게 낫지 않겠니?"

어머니는 이리 말씀하셨고.

"어제보다 중요한 건 내일이고, 내일보다 중요한 건 오늘이다."

가끔 명언을 날리시는 걸 즐기시는 아버지는 이리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쓸데없는 고민이라는 게 내 결론이다.

"사수."

그리 말하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부웅.

차가 느릿느릿 연구소 정문으로 향했다. 허리춤에 권총을 찬 보안 요원 셋이 보였다.

창문을 내리며,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여기라니까, 봐, 내가 맞잖아. 이런 컨셉 카페 있다고."

"여기가?"

만약 사수가 연기자의 길을 간다고 하면 바짓가랑이를 잡고 말려야겠다.

"아, 글쎄, 여기...."

"정지, 멈추십시오."

보안 요원 하나가 다가오며 말했다.

차를 멈추자, 그가 운전석 쪽으로 다가왔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대부분의 연구 시설은 사유지다. 회사가 소유했든 개인이 소유했든, 방문자를 탐탁지 않게 생각한다.

"카페 아니에요?"

순진무구한 눈빛 발사.

"아닙니다."

그렇게 말하며 슬쩍 허리춤을 들이민다. 무장상태를 보여 줘 압박을 주려는 거다. 못 본 척하며, 입을 열었다.

"여기 아니에요? 맞는데?"

상대가 뭐라 반응하기도 전에 문을 벌컥 열고 내렸다.

"아니, 내비가 여기를 가리키는데? 아니라고? 맞잖아. 컨셉이 이런 거죠? 보안 시설 컨셉 카페, 맞죠? 이건 웰컴 이벤트 같은 건가? 자기야, 내려."

그렇게 말하며 잽싸게 조수석 문을 열었다.

"아닌 것 같은데?"

사수, 요즘은 국어책도 그렇게 안 읽어요.

"맞다니까."

팔을 잡아끌며 어깨를 감쌌다.

사수가 옆구리를 쿡 찔렀지만, 무시한다.

"우리 애기, 오빠 못 믿어?"

"어이, 뭐 하는 거야? 차 빼."

뒤쪽에 서 있던 보안 요원이 다가왔다.

"이 양반들 연기 쥑이네. 나중에 제가 별그램 리뷰 올릴게요. 실감 나네, 진짜. 우리 애기, 예쁜 애기."

말하면서 사수 이마에 쪽.

"하지 마라."

연기가 안 되면 진심을 담으면 된다. 사수는 마음을 담아 말했다.

"화내지 마, 자기야. 무서워."

나도 진심을 담았다.

"죽창이라도 맞고 싶나."

곁에 다가왔던 보안 요원이 말하고, 먼저 나섰던 작자가 미간을 찌푸렸다.

"거, 칭찬한다니까. 여긴 뭐가 맛있어요?"

사람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당황하는 법이다.

아주 잠깐 요원 둘이 '이거 뭐 하는 새끼지?'라는 표정을 짓는 순간, 난 사수를 품에 당긴 채 걸었다.

우린 연인이다. 연인.

연기에 진심을 담아야 할 거 아닌가.

그렇게 말하며 앞으로 몇 걸음 나선 순간, 뒤에서 어깨를 잡았다. 내 어깨 말고 사수 어깨를.

일부러 그쪽으로 걷긴 했다. 딱 손이 닿기 좋은 위치에 사수 어깨를 댄 거지.

"미쳤어? 아니라니까?"

"야, 너 지금 어디에 손댔냐? 손 안 치워?"

화냈다.

화내는 연인이 안 된다면 화난 남자 친구가 되어 보자.

어쨌든 시간만 끌면 되는 거다.

107. I`m your father

잠깐의 연극은 금세 끝냈다.

"아, 여기가 아니네. 가자."

"아니라고 했잖아!"

보안 요원 친구의 어깨를 눈빛으로 두드려 주고, 사수의 어깨를 감싸고 돌아왔다.

밴을 타고 돌아와서 비포장도로에 차를 두고 곧바로 성큼성큼 걸었다.

"나쁘지 않았죠?"

연애도, 연기도, 한번 하면 잘할 수 있다니까.

"역겹지는 않았지."

사수가 답했다.

역겹진 않았다. 이걸 뭐라고 해석해야 하나.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연구소를 중심으로 크게 돌아 뒤편으로 가니, 팀장이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뻐끔.

"멍청이 꽝 꼬마."

내 호칭은 하루가 다르게 특별해지고 있다.

"네이, 입에 꽃을 물고 계신 팀장님."

꽃을 문 팀장이다.

"이 새끼 이거, 나 놀리는 거지?"

사수에게 물었지만, 사수는 묵묵부답.

둘 중 누구의 편도 들지 않는, 보기 드문 솔로몬의 지혜를 가진 요원이다.

"앞에 애들 보니까 어떻디?"

팀장이 앞에 놓인 벽을 어떻게 뚫을지는 고민하지 않고 나에게 물었다.

난 벽에 손을 올리며 두께를 가늠했다.

아주 옅지만, 규칙적인 진동이 손끝을 따라 울렸다.

불멸자의 감각이 아니고서는, 아니, 쿼터 이하로 표현되는 둔한 감각의 불멸자는 느끼지도 못할 만큼 작은 진동이다.

아직 기계는 작동 중이란 소리이며, 팬더 대리가 아직 일을 못 끝냈다는 말과 같았다.

난 손끝에 느껴지는 감각과 별개로 팀장의 질문에 답했다.

"1분이면 되겠던데요."

질문의 요지를 파악하는 건 쉽다.

처음 본 세 명, 그들의 취향을 파악하라는 건 아닐 테니.

전투 상황 발생 시 어떨 것 같냐는 질문이었다.

"쌈닭 자식."

칭찬이다.

그만큼 내가 독보적인 전투 능력을 갖춘 요원이란 소리로 해석했다.

"연구소 안은 어떨까?"

일반 연구 시설 안에 숨겨 둔 연구 자료다.

폐기물 창고가 타깃이고.

그 안?

"대단한 경호 인력이나, 보안 요원은 없겠죠. 아마도?"

"그럼 우린 왜 여기서 벽에 개구멍을 뚫으려고 지랄을 할까?"

표현이 참신하긴 해.

뭐든 다, 욕으로 끝내는 대화법이다.

하라니까 했지, 딱히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부분의 질문이다.

정신없이 이 임무 저 임무를 클리어하고 온 뒤라 더욱 그랬다.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반쯤 끌려오다시피 오기도 했고.

"머리에 든 게 없어도 생각은 좀 하고 살자."

"지금 막 생각 중이었는데요."

"그래서 답은?"

인내심은 어디에 놔두고 다니는 걸까, 사무실에 놓고 왔나.

"임무 중에 한가하게 머리 굴릴 시간이 있다고 생각하냐? 여유가 넘치는구나."

있네. 지금. 이 순간, 한가하게 머리 굴릴 시간.

팀장이 눈을 부라렸다. 머리가 굳지는 않았다. 다만,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았을 뿐.

작전이 없을 때, 다양한 상황을 시뮬레이션하고 대응하는 법을 훈련했다.

그중 하나였다.

"불법 연구소는 자료 파기를 우선으로 하니까, 정면으로 치고 들어가면 데이터 보존이 어렵습니다."

"더 빨리, 시작하기 전부터 생각해, 대가리 안에 들어 있는 게 우동 사리가 아니라면 계속 사용하면서 사는 거다. 꽝 우동."

내 호칭은 정말 나날이 특별해지고 있다.

"네, 알겠습니다."

순순히 답하니, 팀장이 미간을 찌푸렸다.

"왜요?"

"시발, 뭔가 허전하네."

항상 대거리하다가 멈춘 내 입, 칭찬해.

이게 바로 파블로프의 고전적 조건 형성이다.

매일 개기던 사람이 개기지 않으면 찝찝하거든.

팀장 신경 쓰라고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다. 배울 건 배우자고 마음먹은 참이었다.

시발 팀장의 성격은 진짜, 어디 지옥에서 올라온 파수꾼의 음경 같지만 일은 잘한다니까.

지금도 딱 필요한 순간에 말했다.

시키는 대로 반사적으로 움직이다가, 자연스럽게 앞뒤 상황을 유추하게 만드는 타이밍.

이 일은 왜 시작했는가.

본래라면 난 알 수 없다. 다른 팀에 일하는 동기한테 들어 보면 시키는 일을 하는 데도 빡세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 팀은 좀 다르다.

팀장이 아니라면 팬더 대리라도 나서서 임무에 관해 설명해 주는 편이다.

이번에도 마찬가지.

난 이미 이번 임무 정보의 출처를 안다. 박병준 박사다.

고로, 우리는 이 임무의 진실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

그러므로 데이터 보존이 최우선이다.

전투 상황이 발생하는 건 피해야 옳다.

팀장은 이 모든 걸 파악한 뒤, 이 작전을 짰을 거다.

웅.

손가락 끝에 걸리던 진동이 사라졌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잠입 액션 판타지다.

걸리면 안 된다.

그런데 벽이 좀 두껍다. 귀를 대도 안쪽에서 나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소음 방지는 기본이다. 마구잡이로 벽돌을 쌓아 만든 벽이 아니라는 거다.

"폭탄이라도 터지면 최악이겠네요?"

벽에 귀를 댄 채, 물었다.

"그걸 말이라고 하냐?"

"그럼 이건 어쩌고요?"

톡톡 벽을 두드렸다.

두께도 상당하고 소재도 아다만티움까지는 아니지만, 강도가 남다르다.

신화 속 이름까지 붙인 묵철로 연구소를 지으면 그 연구소 자체가 보물일 거다.

그러니 적당한 신소재로 만들었겠지.

"임무의 목적을 파악했으면 해답도 대가리를 굴려서 생각해야지."

팀장이 나이프를 뽑으며 말했다.

안 그래도 머리를 굴리는 중이다.

지금 필요한 건 은밀함, 거기에 과격함이다.

이 두툼한 벽을 뚫고 들어가야 하니까.

답은 뻔하다.

인류는 조용하지만 완벽한 절삭력을 자랑하는 무기를 개발했으니, 그걸 쓰면 된다.

팀장이 뽑은 나이프 손잡이는 긴 막대 형태였다.

정확히 말하면 긴 직사각형의 형태로 끝이 둥글며, 가운데에는 세로로 길게 쪼개진 긴 램프가 있었고, 그 세로 램프에서 파란빛을 뿜는 기계 막대였다.

"그거죠?"

"그게 뭔데?"

팀장은 모른 척했지만, 난 저 무기를 알고 있다.

한 번 구동하는 데 얼마라고 했더라?

신소재, 신기술, 신무기는 전부 돈 잡아먹는 하마다.

저 막대에 비하면 사수의 캐쉬 히포는 동네 구멍가게일 뿐이다.

저게 바로 가성비 최악의 무기이자, 현존하는 최강의 근접 무기다.

"길게 쓰면 경위서를 쓰라고? 시발, 하여간 회계부 개자식들."

팀장이 중얼거리면 버튼을 눌렀다.

웅.

막대 끝에 파란빛이 솟는다.

광선검이었다.

아버지는 어릴 때부터 옛날 영화광이었다. 쉴 새 없이 명언을 날리시는 병은 그 영화의 영향이 많다고 본다.

그중에서도 하나는 나도 봐야 한다며 권했었다.

난 그 영화의 명대사가 떠올라 부지불식간에 읊었다.

"I`m your father."

"...누가 니 아빠야? 할 거면 포스가 함께하기를, 이게 맞지."

팀장도 그 영화 아는구나.

팀장은 회계부의 압박을 떠올렸는지, 숨 한 번 쉴 짧은 시간 만에 파란빛을 뿜는 광선검으로 벽을 잘랐다.

정확히 사람 하나가 지나갈 정도의 크기다.

파지직.

잘린 자리로 검게 그을음이 생겼고 불똥이 튀긴 했지만, 전부 한순간이었다.

"정아야."

사수가 앞으로 나서서 벽에 흡착식 고무를 붙여 당겼다.

내가 당긴 벽을 들고 옆에 세워두자, 출입구가 생겼다.

광선검으로 만든 출입구다.

안으로 쏙 들어가니, 절단부에서 뜨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바로 앞에 후드를 눌러쓴 여자가 날 빤히 바라봤다.

"...도둑?"

구경해서 뭐 하나, 단숨에 다가가서 목 뒤를 가격, 굿 나잇 수도치기를 날렸다.

쓰러지는 여자를 한쪽에 잘 눕히고 앞뒤를 둘러봤다.

어둡다.

해가 지진 않았는데, 건물 안쪽은 빛이 없었다.

전력이 끊겨서 모든 전등이 나간 거다.

"비상 전력은 왜 안 들어와!"

"내 연구 망치면 니들이 책임질 거야?"

"야, 보안 팀장은 어디 갔는데?"

사방에서 떠드는 소리가 절로 귀에 들어온다. 소란이 일었다. 화를 내는 사람들이 많았다.

난 그들을 이해했다.

팬더 대리가 이 작전의 세부 내용을 설명하며 말했었다.

"일주일 밤샘 작업하다가 누가 컴퓨터 전원을 껐어, 화가 나? 안 나?"

미치지.

과제 하다가 블루 스크린만 떠도 돌아 버리지.

그걸 말이라고 하나.

덕분에, 지금 연구원 모두가 패닉 상태였다.

"가시죠."

팀장에게 말하고 앞장섰다.

연구소 내부는 머릿속에 다 때려 박았다.

길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팀장과 사수가 뒤를 따라왔다.

"야, 이거 꿈이지? 꿈이잖아?"

"정신 차려, 자료 날린 거야. 하, 시발 잠은 다 잤네."

열린 문 사이로 흰 가운을 입은 두 명의 남자가 보였다.

둘 다 기운이 없어 보였다.

"보조 배터리로 어떻게 안 되냐?"

"...넌 우리가 쓰는 기계가 무슨 스마트폰으로 보이냐?"

한 명은 동아줄이라도 잡으려 하고, 다른 하나는 현실을 직시했다.

"쯧쯧."

안타까움에 혀를 찼다.

"구경났냐?"

팀장이 귀 옆에 대고 속삭였다.

전신 솜털이 삐죽하고 곤두섰다.

이 양반은 이 순간에 왜 기척을 죽여.

우리는 아무렇지 않게 걸었고, 아무도 우리를 잡지 않았다.

일이 이렇게 쉬워도 되나 싶을 정도였다.

폐기물 창고 앞으로 가자, 반쯤 정신을 놓은 보안 요원이 보였다.

그래도 여긴 지키긴 하는데.

밖에서 본 세 놈도 그렇고 얘도 그렇고, 프로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거기에 이 자식은 신입 같다.

어벙해 보인다는 말이다.

"여기는 통제구역입니다."

"알아, 우리가 그것도 모르는 것 같냐?"

내가 나섰다. 무시하며 전진.

"아, 그, 들어가시면 안 되는데요."

"너 미쳤어? 팀장은 어디 갔어? 당장 이 사태를 어떻게 할 거야? 보조 배터리로 기계 구동이라도 시킬까? 우리가 이런 일 생기지 말라고 돈 갖다 부어서 너희 고용하는 거잖아."

그렇게 말하며 놈을 옆으로 밀었다.

요원 놈이 땀을 뻘뻘 흘렸다.

애가 왜 이렇게 불쌍하냐.

"아니, 그게, 제가, 아니 팀장님이요."

"나와. 안에 급히 구제해야 할 자료가 있다."

요원이 비켰다. 사수와 팀장이 뒤를 따라 들어왔다.

"넌 사기꾼이 됐으면 대성했을 거다."

뒤에서 팀장이 말했다.

이게 칭찬인가?

유심히 고민하다가 칭찬이라고 판단했다.

그만큼 임기응변 능력이 뛰어나다는 거잖아.

"네, 감사합니다."

"뭘 감사해?"

"칭찬이요."

"...말을 말자."

우린 걸었고, 곧 한 가지 문제에 봉착했다.

전기가 끊기면 자료는 어떻게 빼 와?

고개를 돌려서 물으려는데.

"머리 써라. 묻기 전에 생각해."

아무 말도 안 했는데 팀장이 말했다.

눈치가 귀신이다.

난 머리를 굴렸다. 보조 배터리? 그거로 전력 공급하고 자료만 빼 오면 될까? 근데 그런 기계가 있나?

앞쪽으로 열두 대의 컴퓨터가 보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폐기물 창고 관리 용도로 보이지만.

매서운 내 눈은 피하지 못했다.

어떤 미친놈이 수냉식 커스터마이징 컴퓨터로 고작 창고 관리나 하겠나.

저건 겉보기에는 일반 컴퓨터지만, 안에는 돈을 때려 부은 고사양 컴퓨터다.

슬그머니 다가가자, 얼굴이 흙빛이 된 남자가 라이트로 우리 쪽을 비췄다.

"누구야?"

"보안팀에서 나왔습니다."

내가 답했다.

아까는 연구원, 지금은 보안팀이다.

적절한 신분 변화다.

"염병할, 너희 이거 어떻게 할 거야? 이 자료 유출 날아가면 내 모가지 하나로 안 끝나는 거 알지?"

흙빛이 된 남자 뒤로 몇 명이 더 보였다.

다들 짧은 머리칼이 인상적이었고 이런 순간임에도 칼같이 제자리를 지켰다.

특수종은 아니다.

안쪽 보안은 바깥보다 더 허술해 보였다.

팀장은 앞으로 척척 걷더니, 연구원 앞에서 멈췄다.

"뭐? 아니, 너 처음 보는 얼굴인데?"

"나도 너 처음 봐, 새끼야."

말과 함께 팀장이 연구원을 머리를 때렸다.

손으로 팍, 맞은 놈의 목이 옆으로 꺾일 정도였다. 연구원은 동공이 풀리더니 풀썩 쓰러졌다.

연구 자료를 훔쳐 가는 방법은 많다.

복사, 공유, 또는 눈으로 보고 사진도 찍을 수 있다.

다만, 모든 건 전력이 공급되어야 시도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가 선택할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움찔한 몇 명이 뭐라 소리치면서 달려들었고, 사수와 난 전부 때려눕혔다.

일도 아니었다.

그 뒤, 말없이 본체를 뜯어서 데이터 저장 장치를 챙기려 했는데.

"분리하면 자료 소멸이다. 하드 건드리지 마."

"요새는 하드 아니고 SSD인데요."

"시바, 그거나, 그거나."

아우, 옛날 사람.

"본체 통째로 들고 간다."

우리 손은 여섯, 눈앞에 있는 컴퓨터는 총 열두 대다.

"뭐 해? 안 들어?"

사수가 두 개, 내가 여섯 개를 대충 콘센트 코드를 뽑은 다음 묶어서 들었다.

그 뒤 주변에 남은 게 없나 꼼꼼히 확인하고 돌아서서 나왔다.

나올 때도 어려움은 없었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팀장이 입을 열었다.

"꽝 새끼야, 모든 임무를 다 주먹으로 해결할 필요는 없다."

"마지막에 주먹 쓰지 않았나요?"

"손날만 썼어."

"...아, 네."

"그 앞쪽의 침묵이 몹시 거북한데?"

그러라고 답을 늦게 한 거다.

"아, 그래요?"

"나 왜 기분이 나쁘냐?"

역시 눈치는 귀신이라니까.

"글쎄요."

모른 척했다.

그사이, 주차해 두었던 밴을 동훈 대리가 끌고 왔다.

복귀할 시간이었다.

새삼 이 자료가 진짜인지 궁금하긴 했다.

인베이더와 인간의 혼혈이라니, 이 정도면 혼혈이 아니라 합성이라고 봐야 하지 않나?

근데 그게 가능하긴 한 건가?

자료를 확인하려면 시간이 필요할 거다. 연구소 애들이 멍청이가 아니라면 갖은 암호를 다 걸어 놨겠지.

그걸 푸는 데만 해도 시간이 꽤 필요할 거다.

결론만 말하면, 오늘 우리 팀이 한 일의 결과를 당장은 알 수 없다는 거다.

108. 고백을 들었다.

임무가 끝났는데도 쉬는 시간 따윈 없었다.

"야, 뛰지 마."

뛰는 놈 머리통에 캔 음료를 던졌더니, 머리통에 맞고 피가 튀었다.

죽을 정도는 아니었다.

절도를 일삼는 가속 능력자였다.

"내가 바로 제일고 류 선수다. 새꺄."

그 뒤에는 테러범으로 추정되는 범인 색출도 있었다.

본래라면 며칠간 심문도 필요하고, 증거도 찾아야 했는데.

난 더 간단한 방법을 선호했다.

사수와 둘이 나선 길에서 용의자로 추정되는 다섯을 두고 물었다.

"범인이야?"

그리 물으며, 기남이한테 훔쳐 온 기예를 발동.

감각을 집중했다.

흐르는 땀, 손짓, 눈깔이 굴러가는 방향, 입꼬리가 흔들리는 정도, 모든 걸 눈에 담는다.

화림에서 받은 훈련 중에는 표정을 보고 상대의 상태를 확인하는 것도 있었다.

물론 모든 게 정답일 수는 없다.

그러므로 여기에 내 직감을 투자하고.

"아닌데요."

식은땀을 흘리며 부인하는 친구.

"아닙니다."

단호히 고개를 젓는 친구.

"당신들 누구야, 나한테 왜 이래."

겁먹은 친구.

"내가 누군 줄 알아? 우리 아빠가 누군 줄 아냐고!"

아빠 자랑하는 친구.

"당신들 누구야?"

경계심을 보이는 친구.

증거가 없을 때는 제압하면 안 된다. 그랬다가 영상이라도 찍히면 9시 뉴스에 출현하고 무튜브에 출현하고, 각종 SNS에 나와 스타가 될 수 있다.

뭐, 회사에서 알아서 막겠지만, 큰 징계를 피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지.

그럼 증거가 필요한데, 그걸 하나하나 찾자니 시간 낭비가 아닌가 싶다.

증거 대신 특정한 범인의 증언이면 충분하지 않나.

"잠시만요."

난 다섯을 다시 관찰하고.

한 놈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너다. 너로 정했다."

"뭘?"

놈이 황당해하며 되물었지만, 난 놈의 어깨에 쥔 손에 힘을 주고 말했다.

"얘기 좀 하자고."

"당신들 뭐야."

뒤에서 경계심을 보이는 친구의 목소리가 우릴 잡았다.

난 품에서 요원을 증명하는 표식, 그러니까 'FBI입니다.' 하면서 꺼내는 배지를 보여 줬다.

"불특대."

"아, 불특대."

경계심을 보이던 친구가 수긍했다.

난 그를 두고 잡은 친구에게 어깨동무를 한 채로 물었다.

"너지?"

프로메테우스의 끄나풀.

단호히 고개를 젓는 친구다.

사수는 묵묵히 용의자를 가운데에 두고 반대편에 서서 팔짱을 낀 채, 내가 하는 걸 지켜보고 있었다.

"뭘 말하는 겁니까. 불특대라고 이렇게 사람을 막...."

똑.

사람을 과격하게 두들겨 패면 문제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수준에서 제압이라면 허용 범위 안이다.

쉽게 말하면, 안 걸리면 된다는 거다.

아, 이거 좀 위험한데.

나 어느새 팀장을 닮아가나.

그건 최악인데.

난 용의자 놈의 턱뼈를 손으로 잡아서 뺐다.

신체 전반에 탁월한 지식을 갖춘 불멸자가 아니면 할 수 없는 묘기다.

이게 다 내 몸으로 이것도 해 보고 저것도 해 보면서 익힌 기예다.

"우어억."

턱뼈가 빠진 놈이 침을 줄줄 흘렸다.

"더러워, 자식아."

그렇게 말하며 왼 주먹으로 턱을 툭 하고 때려, 다시 교합을 맞춰 줬다.

놈이 말하기 전에 내가 먼저 말했다.

"네가 진짜 억울하면 나중에 신고해. 근데 아니야. 너 맞거든. 우리가 끄나풀 하나 죽이자고 이 난리를 치는 걸까? 불특대가 그렇게 할 일이 없어 보여? 아니잖아. 내가 원하는 건 네 위라고. 그러니까 순순히 털고 얌전히 국밥 처먹으면서 감방 가자."

난 학창 시절부터 말로 상대를 제압하는 게 익숙했다.

처음 변신족으로 각성했을 때, 힘 조절을 못 해서 여럿이 천국의 문을 두드리게 했다.

당연히 문제가 생겼고, 어머니가 학교에 왔다.

그 이후로 무조건 주먹을 쓰는 게 정답이 아니란 걸 알았다.

매번 어머니를 학교에 부를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올 때마다 어머니와 링에서 대화하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진짜다.

그렇다고 깝치는 애들 그냥 놔둘 순 없어서 입으로 해결하기도 했다.

"어쩔래?"

물었다.

용의자는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더니 입을 열었다.

"저는 진짜, 아는 것도 별로 없습니다."

그 말에 난 사수를 바라봤고.

"수고했어."

사수가 한마디를 뱉은 뒤, 용의자 놈의 종아리에 로우킥을 날렸다.

콰직!

"악!"

놈이 비명을 내지르며 쓰러졌다.

그 위에서 사수는 묵묵히 제 할 일을 했다.

"현 시간부로 테러 단체 소속 테러범으로 간주, 시민권 박탈한다."

이 말이 얼마나 무서운 말이냐면.

모든 시민은 나라의 보호를 받는다. 그 권리를 박탈한다는 거란 말이고.

곧 '너는 이제 나라의 보호를 못 받습니다.'라는 말이다.

"에?"

맞은 놈이 눈물 콧물을 쏟아 내다가 날 봤다.

날 본다고 뭐 달라지냐.

"사수, 나 다른 데 지원 갈게요."

"바쁘네."

"이게 다 남명진 그 새, 사장님 덕분이죠."

말을 아꼈다.

그리고 또 뛰었다.

요새 일이 많다. 블랙홀의 출현 빈도도 높아지고 그 틈을 노려 활동하는 놈들도 많고.

하물며 소매치기나 잡범 비율도 늘었다고 하더라.

투다다다!

서울 시내에서 가장 빠른 이동 수단은 무엇인가.

헬기를 타고 다니면 좋겠지만, 내가 갑부도 아니고 어떻게 매번 헬기를 타겠나.

헬기 택시는 그래서 말이 안 된다니까.

그거 가성비가 너무 쓰레기잖아.

그래서 택한 게 이거다.

스쿠터.

적당히 빠르고, 골목길도 잘 달린다.

여기에 방탄 헬멧 쓰고 그 위에 증강 현실 내비게이션을 작동하면 금세 목적지에 당도할 수 있었다.

"팀장님한테 항의 좀 해 주십쇼. 이러다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하겠어요."

그렇게 말하고 오른 손목을 당겼다.

부앙.

스쿠터 엔진이 내 부름에 답했다.

이래서 바이크는 인생의 동반자라고 하는 거다.

엔진의 떨림이 나와 함께했다.

"스쿠터랑 교감하니?"

뒤에서 사수의 물음이 들렸다.

"어떻게 아셨지."

"...진짜 교감한다고?"

"농담입니다."

한때 실적이 없어서 난감했지만, 요새는 실적이 넘쳐흐른다.

사수는 용의자의 머리끄덩이를 잡고 끌고 갔다.

사수는 테러 단체를 증오하고 싫어하기에 테러범을 미워한다.

미안하다. 용의자야.

그래도 잘못은 네가 했다.

저놈 겉으로는 순진한 척하지만, 언택트 경보 재밍 기계로 문제를 일으켰다.

죽은 사람은 없었지만, 다친 사람은 수십이었다.

나온 인베이더가 바운스라 다행이었다.

살상력이 있는 인베이더였다면 대단위 피해가 발생했을 거다.

이 말인즉슨, 지금 사수에게 끌려가는 저 친구가 빌어먹을 새끼라는 소리다.

뒈져도 할 말이 없는 놈이고.

스쿠터를 타자, 통신기에서 팬더 대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웨이브 발생했다."

이번에는 인베이더 섬멸 작전 지원이었다.

* * *

웨에에엥!

언택트 가드의 경보음이 귀를 때린다.

"일레븐 앤 낫씽, 웨이브, 언택트 가드 경보 발동 중."

넘버링 11의 인베이더가 몰려나온다는 의미의 작전 용어였다.

"많네요."

외부 보안 1팀 대리가 임무 책임자고 난 지원 병력이다.

그 옆에 서서 말하니.

"사이오닉 협회에서 염력 부대가 합류한다니까 우리는 보조만 맞추면 될 것 같네요. 광익 씨."

분석팀 강희모 대리님이 강아지라면, 이쪽 대리님은 고양이를 닮았다. 큰 눈과 야무진 입매가 인상적이었다.

웨이브 형태는 인베이더가 몰려나온다. 넘버링 일레븐은 고블린.

고블린은 실제 판타지 월드의 몬스터와 비슷한 인베이더로.

교활하고 몸놀림이 빠르다.

그로 인해 생긴 일 중에 꽤 큰 사고도 있었다.

고블린 참사, 일반인은 잘 모르지만, 특수종 세계에서는 꽤 유명한 얘기다.

과거, 어스 블랙홀이 터진 뒤에 게이트 입구를 원형으로 포위한 채로 대기하는 중이었다.

특수종 지원이 오기 직전, ES(급격하고 위험한 상황, 작전 용어)가 터졌고.

고블린이 튀어나오기 시작.

포위한 병력은 화력을 쏟아부었다.

상황은 금세 정리되는 거로 보였으나, 그렇지 않았다.

교활함이라는 게 무엇인지, 여실히 보여 준 사건이었다.

사체와 사체 사이.

제 동료의 피와 사체를 덮은 놈들이 죽은 척을 했고.

특수종이 도착하기 직전, 일반 무장 병력은 총기 여섯 정과 나이프, 도검, 창 등의 무기를 빼앗겼다.

고블린은 약하다.

일대일이라면 훈련받은 병사 하나가 소총 사격만으로 제압할 수 있다.

발도 그리 빠르지 않고, 초인적인 움직임도 없다.

다만, 놈들의 손에 무기가 쥐어지면 얘기가 달라진다.

놈들은 놀라운 수준의 손재주를 가졌다.

총기의 사용법을 알아내는 것도 금방이었고, 칼을 다루는 것도 능숙했다.

순식간에 익힌 놈들은 일반 병력을 학살 수준으로 몰아붙였고.

그 뒤에 도착한 불멸특수대가 제압했다고 들었다.

"광익 씨?"

"네? 부르셨어요?"

"같이 일하게 돼서 좋네요."

고양이상 대리가 웃으며 말했다.

호감형이네.

"저도요."

짧게 대화하는 사이.

끼이익!

고블린의 울음이 터졌다.

"얼리어, 21분 빠릅니다!"

그동안 인류는 어스 블랙홀을 연구하고 파악했지만, 여전히 모든 걸 알 수는 없었다. 아무리 탐지기가 발달해도 모든 경우를 알아낼 수는 없는 법이다.

이번 경우도 마찬가지다.

얼리어, 예상보다 일찍 홀이 열렸다.

"염력 부대는 아직이죠?"

"쓰읍, 고생 좀 해야겠는데요."

고양이상 대리가 소총을 들고 앞으로 나갔다.

이곳은 상봉역 근처에 있는 4층 건물 앞.

1층에 있는 기사 식당 입구에 열린 홀이다.

이곳에 지원 온 요원은 넷.

고양이상 대리와 난 우측을, 나머지 둘은 좌측에 자리를 잡았다.

웨이브 홀에서 나오는 고블린.

포화로 시체가 쌓이면 곤란하다.

하나하나 살았는지 죽었는지 확인해야 하거나, 이곳에 폭탄을 터트려 깡그리 죽여 버려야 하지만, 그럴 수가 있나.

도심 한복판에서 폭탄을 터트리는 건 미친 짓이다.

그렇게 할 거면 특수종이 왜 필요하겠나.

"먼저 갑니다."

4번 타자와 슬러그 나이프, 허리춤에 찬 아다만티움 칼날 정글도, 왕자가 선물해 준 장갑과 박병준 박사를 구할 때 선물 받은 코트.

전신 무장 상태였다.

"어? 광익 씨? 그렇게 막 가면 안 돼."

뒤에서 고양이 대리님이 말렸지만, 집중포화보다 이게 낫다는 판단이다.

왼발을 앞으로 내밀고, 정글도를 뽑는다.

후앙.

무게감이 실린 일격이 홀 바로 앞에 튀어나온 고블린 세 마리를 그대로 잘랐다.

시원한 일격이다. 첫 일격을 제외한 내 움직임은 작고 섬세했다.

칼에 잘린 고블린 팔뚝이 허공으로 날았고, 동료의 시신 뒤에 숨어 있다가 버티던 놈은 대가리를 정글도 끝으로 찍어서 가르고 부쉈다.

호흡을 고르고 움직임은 더 섬세하게.

힘이 아니라 기술이다.

이전 임무를 끝내고 돌아서는 길에서 팀장은 말했다.

"불멸자는 힘이 아니라 기술로 싸운다. 힘자랑하다간 골로 간다."

그 말에 뜨끔했다.

뭐야, 내 안에 있는 변신의 피를 알아봤나?

이런 생각도 들었다.

모른다. 팀장은 속을 모를 인물 중 2위다.

1위는 남명진 사장이고.

하여간, 그 말에 난 느끼는 게 있었다.

우습게도 팀장의 한마디는 내 안의 무언가를 깨우는 계기가 됐다.

힘이 아니라 기술.

난 그렇게 했다.

고블린의 손톱은 코트로 막고, 머리는 나이프로 긋는다. 필요한 건 급소다.

힘으로 다 부수는 게 아니다.

모가지를 긋고 따는 데 필요한 건 변신족의 괴력이 아니라, 적당히 훈련한 불멸족의 근력이면 충분했다.

난 그렇게 했다.

생각보다는 즐거웠다. 피하고 벤다.

왕자가 선물한 장갑은 코트보다 상급의 마법이 걸려 있었다.

그걸 발동하지 않아도 재질 자체가 훌륭했고.

미처 피하지 못한 고블린의 손톱을 손바닥으로 막기 충분했다.

막고 손바닥으로 밀어 빈틈이 생기는 고블린의 머리를 팔꿈치로 때렸다.

웅!

충격에 맞춰 육각 결계가 코트 위를 덮는다. 좋은 방어구는 잘 쓰면 무기도 된다.

팔꿈치에 맞은 고블린의 목이 옆으로 꺾였고, 가죽이 쭉 늘어나서 머리가 덜렁거렸다.

가진 장비를 활용하고 섬세한 전투를 이어 간다.

폭풍처럼 몰아치지 않아도 죽이는 데는 문제가 없다.

4번 타자는 필요한 순간에 방패 및 둔기로 썼다.

난 홀 앞에서 고블린을 학살했으며.

협회의 염력 부대가 도착했을 때, 내가 죽인 고블린은 서른 마리가 넘었다.

"혼자서 다 죽인 겁니까? 이걸?"

황당함을 감추지 못한 염력 부대장의 말이 들렸다.

"저 복귀합니다."

그렇게만 말하고 몸을 돌렸다.

쉬고 싶었다.

그대로 부대로 복귀, 샤워하고 다시 자리에 가서 앉으니.

회사가 조용하다.

요새 외부 보안팀이 바쁘기도 하고, 퇴근 시간이 다 되기도 했다.

난 묵묵히 뒤를 돌아봤다.

팬더 대리는 보고서 쓰는 데 여념이 없었다.

일이 많아지면 서류 정리할 일도 많은 법이다.

"고생했다."

팬더 대리가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그 뒤로, 책상에 발을 올리고 얼굴에 서류철을 덮은 팀장이 보였다.

그걸 보는데 순간 호기심이 들었다.

팀장은 지금 방심하고 있을까?

궁금했다.

손에 들고 있던 플라스틱 컵을 그대로 팀장 머리 위에 던졌다.

붕-

탁.

맞지 않았다. 팀장은 눈을 감은 채로 컵을 잡아챘다.

귀신 같은 반응이었다.

"앗, 손에서 컵이 미끄러졌네."

난 연기했고.

"죽여 버린다. 이 새끼."

팀장은 잠에서 깨어났으며.

"차 한 잔만 마시고 오겠습니다."

난 잽싸게 튀었다.

비상구로 달려 6층으로 런.

곧바로 탕비실로 쏙 들어갔다.

"...광익 씨?"

에? 누가 날 부르기에 슬쩍 눈으로만 확인했다.

그러면서도 바깥을 향해 경계심을 풀지 않았다.

팀장이 쫓아오면 어디로 튈까, 동선도 땄다.

"네, 2급 사원 유광익."

평소와 똑같은 인사에.

"풉."

수줍은 웃음이 더해졌다.

그제야 상대를 제대로 봤다.

긴 머리칼에 작고 흰 얼굴의 여자다.

예뻤다.

미호도 예쁘지만, 이쪽은 딱 봐도 혼혈보다 순혈에 가까울 정도로 아름다운 분이었다.

꽤 유명한 사람이기도 했다.

분석팀 내에서 최고 미녀로 손꼽히는 최미남 1급 사원이었다.

"여기에는 왜 왔어요?"

"동기 김요한이가 또 무슨 사고라도 치지 않았나, 걱정이 끊이질 않더라고요."

아무 말이나 했는데.

"나랑 사귈래요?"

이 작자도 아무 말이나 막 던졌다.

어, 잠깐, 이건 반칙이지.

갑자기 고백이라니.

109. 짓궂어. 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