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34. 족쇄 (1)
룸 제국에서 마법을 금지한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마법을 쓰는 자는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고문을 동반한 가혹한 심문 끝에 죽임당했다.
룸 제국하에서 마녀와 마법사는 구분되지 않았다.
마법과 요술도 구분되지 않았다.
공명정대하면서도 엄격한 호라 신을 믿는 그들에게 세상의 섭리-인간에게 주어진 있는 그대로의 힘 이상을 사용하는 자는 빛에 따르는 그림자가 속한 존재니까.
그것이 마법이라고 부르든 요술이라고 부르든 크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그때만 해도 마법사는 마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숨어 살았고 은둔했으며, 손가락질당했고 공포의 대상으로 여겨졌다.
티그리트의 제국하에 마법사는 마녀와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 했던 은둔자의 속성은 신비로운 속성으로 바뀌었고, 의지의 힘으로 사물을 그 자체를 변경하는 기이한 힘에 학문이라는 허울 좋은 옷이 씌워졌다.
이제 마법사는 제국의 보호 아래 제국을 지키는 기둥 중 하나로 격상했고 수많은 소년 소녀들의 선망을 산다.
피리스 홀리바레스가 마법사의 꿈을 꾼 건 단지 자신의 몸에 깃든 마법의 재능을 느낀 것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수많은 긍정적인 이야기와 삽화가 그녀의 마음에 토양처럼 깔렸고, 그것들에서 자라난 동경심이 그녀를 마법사의 길로 이끌었다.
물론 그녀에게 가장 큰 기회를 제공한 건 현재의 황제다.
"루페르트 님."
그를 위해서 강력한 마법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늦은 나이에 막냇동생뻘 아이들 틈바구니에서 덩치 큰 빨간 머리 여자라는 놀림을 받으며 초급 과정을 배우며 부단하게 자신을 갈고닦았다.
재능과 우연 덕에 그녀는 자신의 어린 동기보다 빠른 성장세를 기록했고, 운 좋게 오각의 마법사이자 그녀의 우상이라 할 수 있는 저 위대한 눈먼 자 헬브라이트 베틀렌의 제자가 되는 영광을 거머쥐었다.
그러나 거기가 한계였다.
삼각.
그녀는 삼각의 진리에서 정체했다.
책을 보고 마법의 권능을 이끌어 봐도, 죽은 마법사의 미라에 손을 올려 영감을 받으려고 해 봤자 그녀의 이해로는 그 너머의 진리가 도저히 보이지 않았다.
헬브라이트 베틀렌은 화를 내는 사람은 아니다.
다른 거장들처럼 술을 먹고 행패를 부리거나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은 더더욱 아니다.
단지 그는 실망을 얼굴에 뚜렷하게 드러낼 뿐이다.
스승의 얼굴에 드리운 실망은 피리스를 나날이 위축되게 했다.
"나, 재능이 없는 걸까. 분명 재능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대로 파문을 당해도 피리스의 지위는 예전과는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높다.
그녀는 여전히 삼각의 마법사로 대학 외부에서 당당한 마법사로 활동할 수 있고 대학에 머물며 연구와 학업을 수행할 수 있다.
수입은 나쁘지 않고 숙소도 대학 안에서 얻을 수 있다.
눈칫밥을 먹으며 하녀 일을 하거나 보기 싫은 정원사 막스 같은 인간의 음습한 시선을 받으며 일할 정도로 바닥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소리다.
하지만 그 정도로 멈추기엔 그녀의 뜻은 낮지 않다.
피리스의 눈동자는 저 먼 곳, 황제의 궁전을 보고 있었다.
'나를 이끌어 준 그분을 위해서라도 더 먼 곳으로 나아가야 해.'
그러나 이미 한계에 느꼈다는 건 자신도 알고 있다.
그때 스승이 그녀에게 언질을 줬다.
어두운 마법.
금지된 마법.
그러한 사마외도의 힘을 빌려서라도 벽을 깨라고 주문했다.
명시적으로 말한 건 아니지만 그녀는 그렇게 이해했다.
금단의 서적에 접근하는 건 사각의 마법사 정도는 돼야 가능한 일이지만, 어째서인지 그녀가 만질 수 있는 서고에 기이한 책이 한 권 꽂혀 있었다.
[ 네이의 책 ]
네이.
들은 적이 있다.
저 남쪽 끝, 불사자들이 살아간다는 사막에 나타난 악마.
그 악마가 사막 사람들에게 준 건 재앙이 아니라 선물이었다고 한다.
바로 영생이다.
불로불사의 축복을 받은 남쪽 사람들은 영원을 손에 넣었다며 자축했지만, 그 영원이 그들에게 준 건 영원히 계속되는 몰락이었다.
전설에 따르면 그들은 신의 속성을 모방하기 위해 섬뜩할 정도로 거대한 건축물을 무작정 짓던 와중 그들의 도시를 버리고 떠났다고 한다.
그 악마에 관한 서적이 서가에 꽂혀 있다.
피리스는 책을 한번 펼쳐 보았다.
순간 그녀의 몸이 휘청거렸다.
"허억!"
봐서는 안 될 걸 봤다는 감각이 그녀의 몸을 저리게 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는 짜릿함을 느꼈다.
그 소름 끼치는 진실이 결코 열리지 않던 진실의 문을 강하게 밀어젖히는 감각 또한 함께 느꼈기 때문이다.
성실한 학생으로서 피리스는 금지된 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다.
단순하게 말해서 그러한 책은 읽는 자를 파괴한다.
죽음에 몰아넣기도 하고 죽음보다 더한 운명을 선사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대가는 거역하기 어려울 정도로 달콤하다.
진리가 저 너머에 있다.
그녀는 더 강하고 더 높은 경지로 끌어 줄.
그녀를 가장 높은 황제라는 봉우리 옆에 데려다줄.
육신이 뒤틀릴 것 같은 구역질을 느끼며 피리스는 검은 책을 폈다.
* * *
두 선제후, 혹은 황제와 신하의 대결은 싱겁게 끝나는 것처럼 보였다.
마르틴 보엠의 영도 아래 동맹을 결집하고 황제에 대한 도전을 공공연하게 드러내던 레벤호스트는 갑작스러운 침묵에 빠져들었고, 대외적인 활동도 그만뒀다.
그는 사냥을 하거나 아름답고 당찬 아내와 함께 명승지를 돌거나 자식에게 글과 문장을 가르치는 일을 하며 소일거리를 했다.
창고에 쌓인 무기도 시장에 내놓았고 직할 연대 하나를 최근에 해체했다.
그 모습을 보고 호사가들은 이야기했다.
"트라이아 선제후가 드디어 정신을 차렸군."
"철혈대제는 명분이라도 있었지, 현재의 황제에게 무슨 명분이 있을까."
"그의 멍청한 반역에 동조할 신교도 군주는 거의 없지. 장인인 앙쥬 국왕이 약간의 동맹군을 보내 주겠지만, 그게 전부겠지."
레벤호스트의 갑작스러운 변화는 당연히 황제의 궁정에도 흘러 들어갔다.
"그런가?"
루페르트는 별 감흥 없는 표정으로 보고를 들었다.
기쁜 소식이지만 기뻐하긴 이르다.
루페르트는 레벤호스트가 직접 궁전에 찾아와 현재까지의 무례를 사죄하고 문서로 된 협정을 체결해야 비로소 끝이 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럴 기미는 조금도 없다.
레벤호스트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그를 용서하는 건 황제의 권위를 실추하는 건 물론이고, 황제가 그에게 겁을 집어먹었다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루페르트는 계속해서 지켜보기로 했다.
어차피 레벤호스트는 그가 거쳐 가야 할 수많은 시련 중 하나에 불과하니까.
진정한 시련은 그날 오후에 찾아왔다.
"고어문트 선제후께서 예방하셨습니다."
골트문트가 찾아왔다.
상궤를 벗어난 일이다.
자신에겐 관대하지만, 남에겐 엄격하고 규율을 지킬 걸 요구하는 저 까다로운 선제후가 약속도 잡지 않고 황제를 찾아온 것은.
꼭두각시 시절 골트문트와 거의 붙어 지내다시피 했지만, 그 수많은 만남 중에서 골트문트가 약속을 하지 않고 방문을 한 적은 단 한 차례도 없었다.
꼼꼼한 약속은 루페르트가 골트문트를 그나마 우군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예의범절이었다.
그 골트문트가 사색이 된 얼굴로 찾아왔다.
처음 보는 선제후의 얼굴을 본 루페르트는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한스 징펠만의 위기 감지가 아니다.
루페르트의 비참했던 인생 그 자체가 알려 주는 경고다.
'설마...?!'
"제 딸을, 울피아나를, 한번 찾아가 위로의 말씀을 전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골트문트는 거의 애걸하고 있었다.
"제 딸이 죽어 가고 있습니다!"
그 선제후의 간청에 루페르트가 해야 할 일은 자명했다.
'...빌어먹을.'
어쩔 수가 없다.
언젠가 본 농민반란의 구호가 황제의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 * *
날씨는 쓸데없이 좋았다.
계절은 무더운 늦여름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노르드마르크엔 무서운 역병이 돌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루페르트는 제국 의사를 파견해 진상을 조사하게 했다
과거 제국 북방은 괴멸한 신의 회초리라는 이름의 죽음에 이르는 병일 수도 있으니.
운이 없으면 그 역병은 슈발츠마인까지 퍼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뭐 어떠랴.
그전에 이쪽이 죽을지도 모르는데.
루페르트에게 있어서 울피아나의 그림자는 그가 상상한 이상으로 컸다.
심약하고 유약한 남자가 드세고 난폭하며 폭력적인 여자 아래서 오랫동안 정서적인 학대를 당했다.
그 여자에겐 어떤 도전도 불가능했다.
그 여자의 부친, 장인이 이쪽의 생명 줄을 틀어쥐고 있었으니.
골트문트의 지원이 없다면 루페르트는 꼭두각시조차 아니었다.
그걸 알기에 고개를 숙이고 굴종했다.
울피아나도 그런 사정을 알기에 더욱 괴롭히고 인내심을, 아니 영혼을 극단까지 시험했다.
루페르트가 미치지 않았던 것은 낙천적인 천성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여자를 달래러 간다.
전생과 현생, 양쪽에 여전히 음울한 그림자를 드리운 여자를 위로하러 가야 한다.
사정은 전과 본질적으로 같다.
장인은 아니지만, 그녀의 부친의 도움을 필요로 하기에 그녀의 비위를 맞춰야 한다.
'젠장.'
어쩔 수 없다.
골트문트는 가장 중요한 동맹이다.
아카이아 대주교가 구교의 정신세계를 이끄는 대표자라고 하지만 세속 군주에 비하면 실제로 그가 모집할 수 있는 병력은 그다지 많지 않다.
게다가 성직 선제후는 보통 제국에서 가장 중립적이어야 할 인물, 정치·종교적으로 지원한다면 모를까 직접 군대를 일으켜서 누군가의 도시를 점령하고 약탈하는 건 호라의 말씀을 받드는 성직 선제후가 할 짓이 아니다.
결국 세속 선제후 가운데서 동맹을 찾아야 하는데 골트문트 말고는 없다.
그는 강력하고 부유한 군주이며 휘하에 뛰어난 장군도 보유하고 있다.
그가 없었다면 루페르트의 죽음은 꽤 빨리 앞당겨졌을 것이다.
그 울피아나가 저 방에 있다.
그녀는 침대에 반쯤 누운 채 창밖을 보고 있었다.
머리카락은 헝클어지고 빛을 받아 드러난 얼굴은 앙상하게 말라 있었다.
손을 보았다.
해골과 다를 바 없을 정도로 야위어 있다.
골트문트가 침통한 얼굴로 딸의 이름을 불렀다.
"울피아나. 보거라. 어떤 분이 오셨는지."
울피아나가 고개를 돌렸다.
루페르트는 침을 꿀꺽 삼켰다.
곧 눈과 눈이 마주쳤다.
"...!!"
감정이 요동친다.
증오, 애증, 회한, 동정.
뭐라고 특정할 수 없는 다채로운 방향의 감정들이.
그 수많은 감정은 하나의 목소리에 의해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폐하."
골트문트가 옆에서 주춤거리고 있다.
뭐라도 해 보라는 신호다.
루페르트는 침대로 다가갔다.
"울피아나 님."
황제가 손을 내밀었다.
울피아나가 미소 지으며 루페르트를 보았다.
그녀가 루페르트의 손을 공손하게 마주 잡았다.
그녀의 살결을 느끼는 건 아마 이번이 처음일 것이다.
그녀의 앙상한 손의 촉감은 얼음처럼 차가우면서도 비단처럼 부드러웠다.
접촉은 루페르트가 알지 못하던 그녀의 일면을 깨우려고 했다.
그녀가 루페르트의 인장에 키스했다.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는 불경함을 용서해 주시길."
그 목소리는 또 얼마나 달콤한지.
루페르트는 애써 그 마음을 부정하며 그녀에게 평생을 단련한 꾸며 낸 미소를 머금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울피아나 님. 쾌차하세요. 당신은 제국의 모범입니다. 부모를 잃은 수많은 아이들의 당신의 가호를 바랍니다."
"폐하...!!"
울피아나가 울먹이며 갑자기 루페르트의 품으로 와락 달려들었다.
그녀가 루페르트의 품에 안겼다.
손의 감촉과 마찬가지로 그녀를 안는 건 처음이었다.
부자연스럽게 안긴 그녀의 허리는 한 손에 들어올 정도로 얇고 빈약했다.
순간 드는 생각 하나.
'겨우 이런 작은 존재 하나에게 나는 그토록 휘둘리고 살았던 건가.'
그 회의가 무너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울피아나가 고개를 들어 루페르트를 보았다.
그 순간 루페르트는 보았다.
그 푸른 눈동자 안에 만화경처럼 가득 찬 자신의 모습을.
광기와 집착, 끝없는 충동이 만인이 찬사를 아끼지 않는 아름다운 눈앞에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은 뇌운처럼 드리워져 있었다.
"...!!"
루페르트는 다시 한번 표정을 관리해야 했다.
'아, 안 되겠어. 이 여자는 정말이지.... 안 되겠어...'
루페르트는 정정했다.
이 작고 연약한 여인은 여전히 자신의 가장 큰 상처라는걸.
"폐하...!!"
끔찍한 해후는 10분 동안 이어졌다.
루페르트에게 그 시간은 영원처럼 느껴졌다.
* * *
하루가 이렇게 길었던 적이 있었던가.
확실히 울피아나를 상대하는 건 혼백을 빼놓는 일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충격이 알 수 없는 부분에서 찾아왔다.
갑자기 영혼을 지탱하는 끈 하나가 끊어진 느낌이 덜컥 들었다.
'뭐지? 대체 뭐냐? 이 상실감은....'
마치 끝없이 가라앉는 추락감이 이유도 없이 엄습했다.
황궁에 돌아올 무렵에 루페르트는 몸을 가누기 어려울 정도의 공허감 속에서 비틀거리며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그렇게 천신만고 미궁에 돌아온 루페르트 앞에 시종이 급히 뛰어와 인사를 올렸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모양이다.
"뭐냐?"
황제가 물었다.
"폐하. 대학에서 전갈이 왔습니다."
"무슨 일이냐?"
피로를 숨기지 않은 피폐한 얼굴로 루페르트가 시종에게 물었다.
"대단찮은 소식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폐하가 아는 마법사 하나가 사고로 죽었다고 하더군요."
"지겔슈타트가?!"
"아니오. 그분은 아닙니다. 성함이 아, 피리스 홀리바레스. 카스무어인인 거 같군요."
"피리스...?"
루페르트의 흐릿한 눈앞에 붉은 머리카락과 고양이 같은 큰 눈으로 자신을 향해 미소 짓던 여성의 모습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피리스가...?"
황제의 몸이 휘청거렸다.
충격과 슬픔보다 황제의 영혼을 더 짓누르는 건 회의 섞인 물음이었다.
'그 짓을 또 해야 한다고...?'
눈앞이 어두워진다.
끝도 없이, 끝도 없이.
134화 34. 족쇄 (2)
"금서에 손을 댄 모양입니다."
죽은 마법사의 장례식은 조촐했다.
처음으로 피리스의 가족을 보았다.
전쟁으로 무릎을 다친 전직 병사 출신의 절름발이와 계모, 머리 색이 같은 창백한 피부에 주근깨가 가득한 아이들.
루페르트는 줄줄이 선 지저분하고 초라한 빨간 머리 아이들을 보고 사람보다는 짐승의 모임 같다고 생각했다.
신분의 차가 너무나도 나기에 루페르트는 그들을 멀리서만 보기만 했다.
병사들이 그들을 몰아낸 후 루페르트는 비로소 죽은 마법사에게 다가갈 수 있었다.
"...."
피리스는 차가운 관 안에 양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누워 있었다.
교차한 양손 아래엔 그녀가 생전에 탐독하던 마법 서적이 놓여 있었다.
공교롭게도 그 책의 저자는 그녀의 스승이었다.
루페르트가 선물한 바로 그 책이다.
짙은 한숨을 내쉬며 루페르트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피리스.'
처음엔 그녀를 원망했었다.
하지만 죽음의 강을 건넌 그녀의 모습을 보자 원망은 눈 녹듯이 사라졌다.
그저 안타까움과 애도만이 루페르트의 빈자리를 채웠다.
'회귀를 해야 하나.'
"드문 일이 아니지요. 벽을 느낀 탐구자가 어두운 길에 손을 뻗치는 건."
안치실엔 피리스의 스승 헬브라이트 베틀렌도 함께 있었다.
굳이 그가 참석할 필요는 없지만, 황제가 오기에 직접 마중 나와 자초지종을 설명하려고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안타깝게도 어두운 지식을 이겨 낼 정도의 정신력이 없었고, 결국 그것이 그녀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이지요."
루페르트는 한동안 피리스를 보다 헬브라이트 베틀렌을 응시했다.
"재능은 있던가요?"
"있었습니다. 상당한 재능이 있었지요."
눈먼 자라는 이명과 달리 헬브라이트 베틀렌은 두 눈을 크게 뜨며 대답했다.
"그 벽만 넘었더라도...!!"
그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모든 것이 제 불찰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마법사는 속으로 생각했다.
'고만고만한 재능밖에 없는 아이였다.'
그는 황제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
그가 본 피리스의 재능은 자신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래서 위험으로 가득 찬 샛길로 인도했다.
죽음으로 향하는 선택지를 고른 건 피리스 본인이지만 그 선택지를 그녀 앞에 놓은 건 헬브라이트 베틀렌 본인이다.
'어쩔 수가 없지. 그녀가 죽어서 그나마 황제와 접점을 만들게 됐으니, 재능 없는 아이를 제자로 둔 보람은 있는 것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마법사는 슬픔을 억누르는 표정을 지은 채 입을 열었다.
"학생들이 어둠의 유혹에 빠지지 않기 위한 노력을 수백 년 전부터 해 왔습니다. 어둠의 힘이 몸을 침식하기 전에 빠르게 정화할 수 있는 마법의 묘약을 제때 구비했다면 그녀가 죽을 일도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 약은 너무나도 값비싼 재료를 요구합니다. 돈. 그놈의 돈 때문에 안타까운 제자가 죽어 버린 겁니다."
"그 부분은 돌아가서 상의하겠소."
"폐하께서 긍정적으로 검토해 주신다면 그것만으로 무한한 영광입니다!"
루페르트는 대학을 나섰다.
대학의 어두운 종탑에서는 죽은 자의 명복을 비는 종이 울리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회귀를 해야 하는가.
이런 고민을 한다는 것 자체가 루페르트에게 수치심을 안겨다 주었다.
자신에 대한 혐오마저 불러일으킬 정도로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피리스는 루페르트의 시작을 장식한 인물이다.
그녀 또한 루페르트에게 상처를 주었지만, 그녀를 변하게 함으로 루페르트는 여신의 권능의 힘의 의미를 알게 됐다.
그러니까 피리스는 루페르트에게 있어 첫 단추이자 시발점이었다.
그러니까 변화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런 그녀가 저런 식으로 죽게 내버려 둔다는 건 그녀를 잃는다는 슬픔 이상으로 루페르트의 마음을 강하게 짓눌렀다.
'어떻게 해야 하냐고.'
상담을 하고 싶다.
여신은 거부할 것이다.
그녀는 특정 개인을 살리기 위해 회귀의 권능을 사용하는 데 늘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렇다면 달리 누가 있는가.
한 사람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엉뚱하고 무례하며 적대적이지만 솔직하고 무언가 본질을 꿰뚫어 보는 듯한 눈을 가진 소녀의 얼굴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마를로네.'
그녀에게 묻는다면 뭔가 대답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전과 달리 그녀는 루페르트를 떠나지 않았다.
* * *
"이 도기로 말할 것 같으면 동방 제국 너머 산과 사막 안개의 정글 뒤에 자리 잡은 위대한 나라에서 온 물건이오. 보시오. 이 아름다운 광택을."
테타우의 시장을 지배하는 건 굵직한 상회와 큰 점포를 가진 상인이지만 사람들의 주목을 끄는 건 먼 곳에서 온 이국적인 상품을 가지고 온 뜨내기 상인들이다.
마를로네는 시장 구경 하는 걸 좋아했다.
붉은 명찰을 단 시절엔 몰래 명찰을 떼고 시장에 놀러 가 상품과 상인들을 구경한 적도 있었다.
할아버지를 따라 워낙 많은 거리와 도시를 거쳐 온지라 그녀는 어린 나이지만 나름의 안목이 생겼다.
다른 곳에서 본 사기꾼은 또 다른 곳에서 같은 사기를 친다는 것이다.
지금 동방에서 온 자기를 파는 장사치도 분명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슈토른? 라이베르트? 잉겔하임? 아.'
마를로네가 피식 웃었다.
'폰데니어에서 봤었지. 저지대 연방에 있는.'
5성급 요새 도시였다.
계량과 수치화를 좋아하는 저지대인들은 그들의 도시를 둘러싼 방벽을 별의 숫자를 붙여 급을 구분했는데 1성급이 가장 낮은 단계의 요새이고 5성급이 가장 강력한 요새다.
100년 전만 해도 저지대 연방의 5성급 요새는 하나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무려 12개나 되고 그에 준하는 4성급 도시만 30개에 달한다.
지역의 거의 모든 도시를 완벽하게 요새화한 것이다.
이 밑바탕엔 저지대 연방의 막강한 자금력이 뒷받침된 게 틀림없다.
직접 봐서 안다.
제국의 시장보다 저지대의 시장이 보다 활기차고 사람들이 쉽게 지갑을 여는걸.
제국 사람들은 좋은 옷을 입고 점잖을 떠는 걸 즐기지만 실제로 돈이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겉만 화려하지, 실속은 많아 보이지 않았다.
"좋은 술은 좋은 잔에 따라야 합니다. 좋은 잔은 나쁜 술조차 괜찮은 술로 만들어 주는 마력이 있지요."
그 말을 들으며 마를로네는 저지대에서 보았던 일화를 떠올렸다.
저 상인의 도기는 동방 제국에서 만든 모조품이고 뜨거운 물이 닿으면 염료가 녹아 이상하게 변해 버렸다.
그래서 그 물건을 비싼 돈을 주고 산 사람들이 시장에서 상인의 멱살을 잡고 흔들어 댔었다.
곧 멱살이 붙잡힐 상인을 지나치며 마를로네는 지갑을 열어 안에 든 동전들을 살폈다.
'과자나 사 들고 갈까.'
할아버지를 생각하며 제빵 거리로 향하려고 할 때였다.
그녀는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사내를 발견했다.
초로의 사내, 혹은 노인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모습은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꿈틀거리고 끊임없이 변화하며 구체적인 하나의 상을 제시하지 않았다.
마치 마술과 같은 그 모습에 그녀는 눈을 깜빡이며 그 사내를 다시 보았다.
"어라?"
노인의 모습은 간데없고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청년이 은은하게 웃는 얼굴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페하...?"
호위 하나 없이 저잣거리에 나온 황제를 보고 그녀는 적잖이 놀랐지만 이내 루페르트가 손가락을 입에 대고 쉿 하는 소리를 내며 뒷골목을 가리켰다.
'무슨 일이지?'
터무니없는 사건에 그녀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면서도 순순히 루페르트를 따라갔다.
어두운 골목.
쥐들이 뛰어다니는 그림자 안에서 루페르트와 마를로네는 대면했다.
마를로네는 골목 밖의 밝은 거리와 뒷골목의 어둠의 선명한 대비에 꽤 강한 인상을 받으며 눈을 껌뻑거렸다.
"폐하. 여긴 어쩐 일로?"
"상담하고 싶은 게 있어서."
"상담요? 저한테요? 저처럼 무식하고 못 배운 사람한테...."
"그런 말은 지겔슈타트한테나 하고."
"아, 네."
마를로네의 삐딱하면서도 도전적인 태도는 처음엔 제법 맵게 느껴졌지만, 지금은 오히려 그런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무슨 말을 해도 고개 숙이고 거스르려 들지 않는 사람들을 상대하다 보면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그리운 법이니.
그런데 막상 그 고개를 숙이는 사람들이 마음마저 숙이는 건 아니다.
일부는 고개만 숙일 뿐, 고개를 쳐들고 이야기하는 사람보다 더 강한 자아로 무장하고 황제의 흠을 잡으려 든다. 그러니까 그들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건 황제의 흠을 잡기 위해 벌겋게 충혈된 눈을 감추려 드는 것이다.
반면 마를로네는 솔직하고, 선제로부터 이어진 가문의 원한을 갖고 있지만, 그래도 고귀한 사람들보다 훨씬 명예로웠다.
"만약에 말이야."
루페르트가 건물과 건물 위에 펼쳐진 덧없이 푸른 하늘을 슬픈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아주 큰 일을 하나 했어. 두 번 다시는 하기 싫은 그런 일들 있지?"
"렌타이어마르크, 붉은 산맥, 슈발츠마인의 숲, 리히트 보덴 같은 일요?"
"네 번이나 했구만."
마를로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런 일을 했다고 치자고. 그런데 소중한 사람이 죽었어."
"네."
"그 사람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치자고. 그런데 네가 말한 그런 끔찍한 일을 반복해야 한다는 조건하에서 말이야."
"어려운 이야기네요. 저만해도 특히 리히트 보덴은 두 번 다시 가고 싶지 않거든요."
"왜 그렇지?"
루페르트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리히트 보덴의 여정이 그나마 다른 여정보다는 쉬운 편이었다.
"모르겠어요. 일단 춥고, 배가 싫고, 그 버려진 마을 분위기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아요. 전 바다가 싫거든요."
"바다가?"
"부르봉의 바다는 잔잔하고 밝은 에메랄드빛이라 좋아하지만, 제국의 바다는 거칠고 어두워서 싫어요. 물고기는 거기가 더 많이 잡힌다고 하지만 제가 어부는 아니잖아요?"
마를로네의 말에 루페르트는 웃음을 터뜨렸다.
"웃긴 이야기인가요?"
"아니, 그냥. 뭐랄까.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의 생각을 듣는 것 자체가 재밌다고 해야 할까."
"안 바쁘세요?"
마를로네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다른 사람이 있다면 눈치를 봤겠지만 여기서는 단둘뿐이니.
"그보다 답은?"
루페르트가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그녀에게 물었다.
마를로네는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겼다.
곧 그녀가 눈을 반짝이며 입을 열었다.
"그 소중한 사람이 할아버지라면 리히트 보덴도 다시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나라면?"
"솔직하게 말해도 되나요?"
"응."
"리히트 보덴까지는 못 가겠지만 슈발츠마인 숲 정도라면 다시 갈 수 있을 거 같네요."
"슈발츠마인은 앞서 말한 네 가지 사례 중 어느 정도지?"
"그나마 제일 쉬웠던 일이죠."
"그, 그렇군. 고맙네."
"별말씀을요."
루페르트는 한숨을 내쉬며 돌아섰다.
가슴이 후련해졌다.
누군가와 짧은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 마음의 망설임이 사라진다는 건 얼마나 좋은 일인가.
과거엔 경험하지 못했다.
꼭두각시 황제 시절엔 말벗조차 하나 없었으니.
심지어 내연관계의 여인들조차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
그들은 루페르트를 이해조차 하지 않으려 들었다.
"고마워."
루페르트가 진심을 담아 말했다.
"이게 그리 고마운 일인가요?"
마를로네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처음엔 머리가 꽃밭인 거 빼면 멀쩡했던 거 같은데, 점점 이상해지는 느낌이야.'
속마음을 꽁꽁 감춘 채 말이다.
"너의 할아버지."
"네."
"언젠가 장군으로 만들어 줄 거야. 그게 네가 원하는 바지?"
"더할 나위 없죠."
마를로네가 공손하게 스커트를 살짝 올리며 예를 표했다.
그런 그녀를 보며 루페르트가 불쑥 물었다.
"결혼은 안 할 거냐?"
열아홉 정도 됐을 거다.
시골로 치면 혼기가 꽉 찬 나이고 귀족이라고 해도 슬슬 배우자를 찾아 헤매야 할 나이다.
결혼이라는 말을 듣자 마를로네가 갑자기 정색했다.
"결혼요?"
곧 그녀가 무표정한 얼굴로 속사포처럼 이야기를 쏟아 내기 시작했다.
"글쎄요. 제가 좀 예쁘긴 한데 재산이 별로 없거든요. 평민이 귀족한테 시집을 가려면 막대한 지참금이 필요한데 그게 없단 말이죠? 왜 제가 지참금을 이야기를 하냐면요, 제가 어릴 때 고생을 너무 많이 해서요. 서러움도 많이 겪었죠? 그래서 제가 아이를 낳는다면 귀천상혼이라고 손가락질받아도 제 아이는 저처럼...."
전혀 다른 사람처럼 말이 많아지는 마를로네를 보며 루페르트는 기분 좋게 소라고둥을 들어 올렸다.
'그래. 해 버리자.'
한 사람의 생명이 수고로움보다 값질 수 있을까.
보지 못했던 마를로네의 사람다운 일면을 보며 루페르트는 궁금해했다.
피리스라는 그의 첫 번째 변화에게 다시 생명이 주어지고 만개한다면 그녀는 루페르트에게 무슨 말을 해 줄지.
바다의 냄새가 루페르트의 의식을 덮쳐 왔다.
이제는 아무도 없는 어두운 복도가 황제 앞에 펼쳐졌다.
"루페르트 가우저."
불만이 섞인 여신의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울려 퍼지는 듯했지만 루페르트가 주위를 둘러보았을 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그 목소리도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135화 34. 족쇄 (3)
시간의 책갈피에 저장한 시간대는 마르틴 보엠이 죽은 직후였다.
하나의 굵직한 과제를 처리할 때마다 루페르트는 시간을 저장하곤 했다.
꽤 먼 시간을 거슬러 올라왔다.
실제 회귀를 통해 거슬러 올라간 시간은 한 달 남짓이지만, 그 한 달 안엔 수년 분의 밀도로 가득 차 있었으니.
복수심에 가득 찬 레벤호스트가 공격적으로 동맹과 우호 세력을 늘리려고 할 때였고, 이에 맞서 루페르트도 치열한 정치 공작으로 맞서던 때였다.
"노동이군."
창밖에 내다보이는 회랑에서 인부들이 구슬땀을 흘리며 작업을 하는 걸 보며 루페르트는 자신이 하는 일이 저들이 반복하는 육체노동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다고 생각했다.
"...."
구역질이 밀려온다.
다시 같은 짓거리를 반복해야 한다는 생각에, 무엇보다 그 여자 울피아나를 만난다는 생각에.
만나야 한다.
만나야만 한다.
저 모호한 골트문트에게 은혜를 입힐 유일한, 천재일우의 기회다.
루페르트의 마음이 부서지는 것과 별개로 골트문트를 이쪽으로 끌어들인다는 건 루페르트가 원하는 제국의 존속에 필수 불가결한 일이다.
안 그래도 신교과 구교로 분리된 이 나라에서 막강한 구교 선제후를 끌어들인다는 건 힘의 균형이 루페르트 쪽으로 완벽하게 기운다는 뜻이니까.
그로 인해 신교 선제후들이 받을 불만도 고려해야겠지만, 힘이라는 건 일단 쥐고 있는 쪽이 좋다는 건 두말할 여지가 없다.
'어쩔 수 없다. 내가 각오한 일이다. 마를로네와 한스 징펠만이 돌아오기 전에 빠르게 처리해야겠어.'
물론 이번 회귀의 목적은 잊지 않았다.
루페르트는 시종을 불러 목적지를 이야기했다.
"대학에 가겠다."
루페르트가 덧붙였다.
"오각의 마법사, 헬브라이트 베틀렌에게 전갈을 보내라. 그와 상의할 이야기가 있다고."
* * *
여느 오각의 마법사처럼 눈먼 자 헬브라이트 베틀렌도 천둥 같은 영웅담과 이교의 신화 같은 은밀한 이야기를 가진 기이한 인물이었다.
동료 마법사처럼 그의 나이 또한 불명으로 어떤 이는 백 살을 넘게 살았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어떤 기록을 담당하는 마법사가 발견한 바에 의하면 헬브라이트 베틀렌이라는 이름은 300년 전, 먼지와 곰팡이로 얼룩진 학생 명부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그는 부르봉과의 전쟁에서 두각을 드러냈는데, 전하는 바에 의하면 단지 손가락 하나를 흔드는 것만으로 부르봉이 자랑하는 괴물 기병대-장다름이 철혈대제의 본대를 급습하려는 걸 좌절시켰다고 한다.
병사들은 헬브라이트 베틀렌이 햇볕이 쨍쨍한 늦가을의 뜨겁고 건조한 땅 위에 안개를 만들어 냈고, 안개 속에 이름을 말해서는 안 되는 괴물을 불러내어 부르봉의 기병대를 도륙하여 달아나게 만들었다고 전한다.
물론 그가 마법을 펼치는 동안 적의 마법사는 모든 마력을 빼앗긴 채 손가락만 빨았다고.
그 마법사를 개인적으로 찾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루페르트가 생각하는 오각의 마법사는 만일의 사태, 그러니까 제국이 외세의 침공을 받고 누란의 위기에 처했을 때나 비로소 도움을 구할 수 있는 제국 수호의 마지막 보루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일반적인 제국 마법사의 인상이다.
오각의 마법사는 인지를 넘어선 지혜를 다루고 그걸 추구하는 사람들인 만큼 마치 수도승처럼 세속과 멀리 떨어져 있고 신비로움 속에 머물러야 한다고 생각했다.
회귀 전만 해도 그러한 이미지는 잘 유지됐다.
그들은 신비 속에 있었고 신비를 간직한 채 죽거나 사라졌다.
하지만 이번 생에서 그들은 조금은 달랐다.
짖는 자 프리츠 에센바하와 함께 할 때 처음으로 자각했다.
이 오각의 마법사들이 이상할 정도로 연을 만들려고 하고 황제인 자신의 눈치를 본다는 걸.
물론 겉으로는 신비를 의무로 하는 자다운 기이한 분위기를 풍겼지만, 그들이 잠깐잠깐 드러내는 속내는 적어도 루페르트가 아주 잘 아는 지겔슈타트보다 훨씬 세속적이었다.
헬브라이트 베틀렌도 비슷했다.
그는 제자의 시신 앞에서 돈 이야기를 꺼냈다.
사고를 막기 위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가 원하는 게 제국의 재원이라는 걸 못 알아들을 정도로 루페르트는 멍청하지 않다.
헬브라이트 베틀렌을 만나기 전에 루페르트는 먼저 대학에 있는 자신의 영혼 동맹, 지겔슈타트를 찾았다.
여전히 렌타이어마르크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그는 초췌한 얼굴로 병상에서 루페르트를 맞이했다.
원래 마른 편이었던 그의 얼굴은 마치 병자처럼 피골이 상접해 있었다.
그 처참한 모습에 루페르트는 자기도 모르게 지겔슈타트에게 다가가 그의 두 손을 잡아주었다.
"지겔슈타트.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루페르트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 괴물이 끔찍한 존재라는 건 인지했다. 내가 본 그 어떤 괴물보다도 강렬하고 어두운 힘으로 넘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인가. 이 정도로 한 사람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 놓을 정도인가?'
마법사가 다른 인간보다 영적인 감수성이 예민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은 있다.
그 감수성이 그들의 힘인 마법의 재능이라고 하지만 역으로 그것이 피의 거인 같은 세계의 섭리를 벗어난 존재를 볼 땐 연약한 약점처럼 보였다.
자책감이 뒤를 이었다.
'제대로 신경 쓰지 못했군.'
영혼 동맹이 여럿 있지만, 그 영혼 동맹 사이에서도 마음의 우열이라는 게 있다.
지겔슈타트는 최근에 포섭한 자다.
사실 그다지 원했던 인연은 아니다.
과정도 순탄하다고 말하기 어려웠고.
늘 마를로네와 틱틱 다투고, 억지로 신비감을 꾸며 내는 그를 보고 반감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그 또한 이제는 영혼 동맹이다.
죽을 때까지 루페르트에게 충성을 바칠 그의 진정한 신하다.
그런 지겔슈타트가 이런 지경이 되도록 알지 못했다는 점이 루페르트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만이 아니다.
저 빙해 너머엔 또 다른 영혼 동맹 아서 픽튼이 지금도 불철주야 혹한과 맞서며 루페르트의 "용돈"을 마련하기 위해 뼈와 힘줄을 혹사하고 있을 것이다.
'그에게도 선물과 더불어 위로의 편지를 보내야겠어. 아니, 이곳으로 부르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여. 후임자를 맡기고 그를 내 곁에 두는 거지.'
그런 생각을 하며 루페르트는 지겔슈타트를 위로했다.
"당신은 나의 기둥이고 나의 방패요. 그대가 아니면 누가 나를 지켜 주겠나?"
"폐하."
"쾌차하시오. 그 괴물은 아무것도 아니오. 그 괴물이 끔찍한 존재라는 건 동의하지만 나는 당신의 정신이 그 괴물보다 강할 거라고 확신하고 있소."
"...폐하의 말씀. 마음에 새기겠습니다."
"의사와 요리사를 보내 드리리다."
"요리사는 괜찮습니다."
"아니, 요리사가 더 중요한 거 같은데?"
"제가 음식을 가립니다."
지겔슈타트가 퀭한 눈에 고집을 드러냈다.
'적당히 가려야지.'
아무래도 좋다.
고목 껍질 같던 지겔슈타트의 몸에 활기가 돌아왔다.
황제의 격려란 그런 것이다.
마법의 힘도, 성스러운 가호도 없지만, 황제라는 지위 그 자체가 마술적인 힘을 발휘해 한 사람을 죽음으로 몰거나 혹은 살릴 수도 있다.
지겔슈타트는 살아날 것이다.
하지만 그전에 묻고 싶은 게 있다.
"헬브라이트 베틀렌 님 말입니까?"
"그래,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듣고 싶군. 솔직하게 말해 주게."
이에 지겔슈타트는 병약한 와중에도 마법의 기운을 드러내 사방을 살피고는 조심스레 루페르트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분은 자신의 탑을 증축하고 싶어 합니다."
"탑을 증축?"
"오각의 마법사는 저마다 성채처럼 우뚝 선 대학의 각 모서리에 자리 잡은 커다란 탑을 가지고 있지요. 워낙 튼튼하게 지어진 물건이라 무너질 일은 없지만 최근 오각의 마법사들은 그들의 탑이 지나치게 전에 오래 지어졌고 비좁고 새로운 유행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불만을 토로하며 탑을 개선하려 합니다. 하지만, 그 건축 비용이라는 게 그리 만만하지 않지요. 단지 벽돌로 건물을 쌓는 것만이 아닌, 갖가지 마법적인 가호와 수호석을 필요로 하니까요."
"얼마나 들지?"
"상당한 비용을 필요로 합니다. 테타우 대성당을 증축하는 것에 비견될 정도로."
"다섯 명이 그런 비용을 요구한다면 제국은 휘청하겠군."
"모든 오각의 마법사가 제국에 손을 벌리진 않을 겁니다. 오각의 마법사 중엔 이른바 돈이 되는 마법을 익히신 분도 있으니까요."
"돈이 되는 마법?"
"마법의 비약이나 혹은 하찮은 금속을 가치 있는 금속으로 만든다거나."
"연금술 말인가."
"금 그 자체는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만 그보다 못한 금속으로 성질을 바꿀 수는 있다고 합니다. 가령 저지대에서는 튼튼한 방벽을 필요로 하지요. 마법의 가호로 단단하게 만든 모래를 섞으면 그 요새는 어떤 포격에도 좀처럼 무너지지 않는 방어력을 가진다고 합니다. 그들이 말하는 소위 5성급 요새는 그러한 마법적인 가호가 깃든 방벽을 가지고 있지요. 아마 그건 우리 탑의 마법사들의 작품이 아닐는지...."
"그렇군."
처음 알았다.
오각의 마법사라는 존재가 나름대로 돈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거기다 일부 오각의 마법사가 세상의 인식과 달리 사업 비슷한 걸 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새로운 지식을 가지고 루페르트는 피리스의 스승 헬브라이트 베틀렌과 재회했다.
"오, 황제 폐하."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청수한 중후함과 이지적인 눈동자를 가진 중년 사내가 땅을 짚고 선 긴 지팡이를 가볍게 흔들었다.
오각의 마법사는 황제 앞에서도 고개나 허리를 숙이지 않고, 황제를 대리하는 장군이 원수봉을 흔들어 예를 표하는 것처럼 지팡이만을 흔들어 예를 표하는 것이 허락되어 있다.
눈먼 자 헬브라이트 베틀렌도 그러한 고대로부터 이어진 법도에 따라 예를 표했다.
루페르트는 가볍게 손을 들어 마법사의 예에 답한 후 서둘러 본론으로 넘어갔다.
"피리스는 잘 있는가."
"아, 피리스 홀리바레스 말이군요. 저의 새로운 제자는 아름다우면서도 불꽃 같은 영혼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눈은 늦은 나이에 대학에 입학했지만 빠르게 삼각의 마법사로 진급할 정도로 반짝이는 재능으로 넘치고 거기다 뜨거운 열의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 정도 향상심은 최근 30년 동안 결코 보지 못한 것입니다."
'지겔슈타트 덕분인가. 사람이 달라 보이는군.'
이제 오각의 마법사는 신비스럽다기보다는 경박해 보였다.
그들의 모습은 여느 정치판에서 흔히 보는 귀족이나 군주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심드렁한 마음을 꾸며 낸 표정으로 가리며 이야기를 듣던 루페르트는 기회를 봐서 본론으로 넘어갔다.
"마법을 익히다 사람이 죽을 수도 있는 건가?"
이에 아주 잠깐 헬브라이트 베틀렌은 놀란 표정을 드러냈다.
루페르트는 그 짧은 변화에서 좋지 않은 예감을 느꼈다.
'설마?'
피리스의 죽음이 의도된 것인가.
아니면 이 시점에서 예상되고 있기라도 한 건가.
갖가지 추측이 찰나 속에서 고개를 들고 일어났다.
"마법의 힘이라는 건 대단히 위험합니다. 특히 재능 없는 자가 재능 있는 자의 영역을 시기에 무리하게 지식의 외연을 확장하려 할 때 그 마법사는 대단한 위험에 노출되지요."
"지식의 외연을 무리하게 확장한다라는 게 무슨 뜻이지?"
황제의 물음에 마법사가 답했다.
"어둠의 지식을 탐하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루페르트는 여기 어딘가 있을, 살아서 그 불타는 듯한 붉은 머리카락을 휘날리고 있을 아름다운 여인을 생각했다.
'피리스....'
136화 34. 족쇄 (4)
얼어붙은 빙해를 보다 보면 마음도 덩달아 삭막해진다.
리히트 보덴의 총독 아서 픽튼은 앙쥬 왕국 남부 출신이었다.
섬나라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드넓은 평야가 펼쳐진 초록색의 낙원이 그의 고향이었다.
날씨는 전체적으로 온화했다.
그놈의 빌어먹을 비만 덜 온다면 말이다.
그래도 비가 오지 않는 날엔 그는 볼 수 있었다.
선명한 초록색, 하늘색, 그리고 흰색의 대비를.
더러는 푸른색도 있었던 것 같은데 그것은 주변의 사물을 투영하기에 구름이 머리 위에 있을 때만 진면목을 드러내곤 했다.
아서 픽튼은 그러한 변화무쌍한 강줄기 옆에서 노곤한 몸을 이끌고 휴식하는 걸 낙으로 삼았다.
가난하고 비루했던 시절.
그래도 그때는 마음에 여유가 있었던 것 같다.
"스크라엘링 경보! 스크라엘링 경보!"
땡- 땡- 땡- 땡-
경박한 종소리가 괴물의 습격을 알린다.
아서 픽튼은 한 시대 전의 대형 화승총을 한 손으로 들고 가 얼음과 벽돌로 만든 바위 위에 서서 몰려오는 괴물들을 노려보았다.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네."
"그러게 말이야."
예전에는 없던 사람이 그의 옆을 지키고 있다.
확실히 돈이라는 물건은 사람을 유혹하는 특유의 향내가 있나 보다.
이 궁벽한 곳에 저토록 노련하고 잔인한 전사들이 앞다투어 오는 걸 보면.
비록 무식하고 사려가 없고 행동조차 충동에 가득 차 있어 짐승과 다를 바가 없어 보이지만 이런 궁벽한 환경에서 그들의 단순성은 도움이 됐다.
탕! 탕! 탕!
"죽여! 죽여! 죽여!"
스크라엘링들이 성벽 아래서 파도처럼 부딪쳐 오지만 숙달된 개척민의 총과 창 앞에 무수한 시체만을 남기고 달아났다.
스크라엘링이 썰물처럼 물러간 후 새로 온 개척민들이 주위를 돌며 살아남은 괴물을 찾는다.
거구의 개척민 하나가 숨이 붙은 스크라엘링을 한 손으로 들어 올렸다.
"어이. 이걸 보라고."
그가 발견한 건 괴물이 아니었다.
"이건...?"
사람이다.
끔찍한 털가죽을 뒤집어쓰고 있지만, 그 아래 자리 잡은 건 이제 십 대 후반에서 이십 대 초반 정도의 여성의 얼굴이다.
비록 그 피부색과 얼굴의 형태는 제국인 혹은 그 주변 사람과 이질적인 느낌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여성이 인간이라는 걸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극동인인가?"
먼 바다까지 항해를 와 본 적이 있는 개척민이 소녀를 보며 물었다.
"극동인 같아. 이렇게 검은 머리와 검은 눈동자는 극동인만이 가진 속성이지. 그들은 호라를 알지 못하는 지역에 태어난 원죄를 타고났거든."
그 소녀를 총독 앞에 대령하였다.
피골이 상접한 깡마른 여성은 마치 짐승처럼 이를 드러내며 맹렬하게 발악했다.
리히트 보덴에 새롭게 부임한 젊은 주교가 주위를 둘러보며 온화한 얼굴로 말했다.
"이 괴물을 물에 빠뜨려 봅시다."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가운데 존경받는 젊은 신부가 웃는 얼굴로 말했다.
"스크라엘링은 물에 빠지면 해표(海豹)처럼 깊게 가라앉는 성질이 있다고 하더군요. 그건 전투 중에 저와 여러분이 목격한 바입니다. 저 인간 모습을 한 게 인간이라면 떠오를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가라앉을 겁니다."
리히트 보덴에서 젊은 주교의 말은 총독의 권위엔 미치지 못하겠지만 그 인기는 지금 시점엔 총독보다 높았다.
책임을 지지 않는 위치에서 대체로 듣기 좋은 소리를 해 준다는 것이 이 궁벽한 곳에 오직 돈만을 보고 온 사람들에겐 얼어붙어 가는 마음에 주는 유일한 온기니까.
주교가 의견을 내자 사람들을 앞다투어 여성에게 달려들었다.
당장 저 반쯤 얼어붙은 바다에 빠뜨릴 기세다.
"잠깐."
굵직한 음성이 차가운 회의장의 공기를 갈랐다.
총독의 목소리다.
여성을 포박한 개척민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거구의 아서 픽튼은 너무 말라 뼈로 이루어진 생물처럼 보이는 여성을 팔짱을 낀 채 가만히 내려보다 주위에 일렀다.
"이 여자를 가둬 두어라."
딱히 다정다감한 성격은 아니었다.
완고하고 고집불통의 개척자였다.
심지어 수많은 개척민을 죽게 했다.
그럼에도 그가 괴물 틈바구니에서 발견한 인간을 살려 둔 건 일종의 의무감 때문이었다.
대체 스크라엘링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 신비를 탐구하기 좋아한다던 마법대학에서도 포기한 주제다.
리히트 보덴이 너무 멀고 춥기 때문이다.
이제 아서 픽튼은 대단한 재산가다.
사는 곳은 거지 같지만 당장 대륙에 가면 하찮은 귀족의 땅덩어리 몇 개 정도는 가볍게 살 돈을 모았다.
굳이 땅을 사지 않더라도 도시에 거주하며 돈놀이만 하더라도 돈 없는 귀족들이 먼저 친하게 지내러 올 정도로.
지금 사는 것도 크게 불편하지 않다.
그는 여기서 뼈를 묻기로 결심한 사람이다.
그런데 이대로 죽는다는 것이 뭔가 아쉬웠다.
황제의 가신에 일개 농부에서 한 지역의 우두머리가 되었지만, 늘그막에 자식도 가지지 못하고 그대로 죽을 운명이다.
아내 비슷한 여자는 있다.
남편을 잃고 거리를 떠돌며 비참한 삶을 살다 이곳에서 아서 픽튼을 만난 여성이 있다.
식은 올리지 않았지만 사실상 부부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러나 그녀가 아이를 잉태한다고 해도 뭐가 달라질 것인가.
아서 픽튼은 조바심을 느꼈다.
이미 충분한 업적을 이루었지만 그러한 사람들이 으레 빠져드는 더 높은 곳을 올려다보는 질병이 그를 덮친 것이다.
검은 눈으로 빤히 이쪽을 보는 스크라엘링 여성은 점점 지쳐가던 아서 픽튼에게 새로운 번득임을 주었다.
'그래. 바로. 이거야. 이번 기회에 스크라엘링의 실체를 밝히는 거야. 놈들의 실체를 밝히면 놈들을 소탕할 방법도 나오겠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은 적은 없지만 아서 픽튼은 저 여성이야말로 정체기에 빠진 자신의 인생에 새로운 전기가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저 스크라엘링 암컷을 지켜보겠다. 죽이지 마라. 놈은 우리의 적이니. 적을 알면 놈들을 더 효율적으로 죽일 수 있을 것이다."
여론은 좋지 않았다.
개척민들은 젊은 주교의 말대로 저 불길한 소녀를 당장 죽이는 게 좋겠다고 술렁거렸다.
그런데 이번 선택은 하늘이 내려준 기회가 맞는 모양이다.
본국에서 도착한 배엔 무려 황제의 서신이 실려 있었다.
"폐하는 총독께서 본국으로 귀환해 안락한 여생을 누리시길 바란다고 합니다. 총독에 걸맞은 직과 작위를 준비했다고 합니다."
"그래 봐야 남작이겠지."
아서 픽튼이 말했다.
"제국의 남작이라. 영광스러운 자리인 건 맞아. 후대는 더 높은 곳을 오를 수도 있는 게 맞고."
아서 픽튼이 편지를 고이 속주머니에 넣으며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그걸로는 내가 이런 곳에서 평생을 바친 수고를 보상해 주지 못해."
아서 픽튼의 눈은 자신에게 기회를 가져다줄 기묘한 소녀를 향했다.
"이 괴물의 정체를 밝히고 내 리히트 보덴이라는 영지를 불멸로 만들겠다."
그것이 총독의 속내다.
그 여성은 기묘한 열망에 사로잡힌 총독을 보며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를 중얼거렸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그 여성이 말하는 소리를 들었는데 그들 사이에서 공통적으로 들리는 의견이 있었다.
"아 글쎄. 그 녀석이 르흐르네이. 르흐르네이라는 말을 반복하지 뭔가요? 그것도 아주 질겁을 하는 표정으로 말이죠."
"나는 르리크리웨라고 들었는데. 더러운 걸 말한다는 의견에 동의해."
"리푸니에 아니었어? 난 그렇게 들었는데?"
그 정확한 발음이 무엇이든 간에 스크라엘링이 극도로 혐오하는 존재가 있었다.
그것의 발음은 어째서인지 리프니에와 유사했다.
* * *
악마학은 호라 교단과 마법대학에서 동시에 연구하는 학문이다.
역사가 기록되지 않은 시설을 포함해 셀 수 없는 문명을 멸했다는 악마의 구전은 비단 룸 제국 만이 아닌 세계 전역에서 기록되고 있는 바다.
카스무어인이 발견한 "신대륙"의 끔찍한 풍경은 전설 속에 등장하는 악마의 존재는 환기시키기에 충분했다.
이른바 배웠다는 학자들은 신대륙의 파멸이 과도한 화산 활동과 끔찍한 역병, 화산 활동으로 인한 기후의 변화가 원인이라고 지목하고 있지만 한 대륙이 전부 생명이 살아갈 수 없는 땅으로 변한 건 악마, 혹은 신적이라고밖에 부를 수 없는 광경이었다.
그래도 나중에 자그마한 벌레와 짐승들이 불타 버린 대지에서 발견되긴 했다.
아무튼, 그 카스무어인의 발견이 소외받던 악마학이라는 학문을 꽤 주목받게 한 건 사실이다.
삼각의 마법사 예나 카스트룸 교수는 마법의 재능은 그리 특출나지 않지만 누구도 주목하지 않던 한물간 학문을 취급받던 악마학에서 흥미를 느끼고 평생을 바치겠다고 다짐한 인물이다.
40대 중반의 안경을 끼고 예쁘다기보다는 똘똘하게 생긴 관상의 그녀는 최근 자신을 찾아온 한 어린 마법사에게 강한 의구심을 느끼고 있었다.
"네이?"
그 어린 마법사의 이름은 피리스였다.
이제 갓 스물이 된 젊은 마법사.
재능은 평균 이상이다.
나이 스물 즈음에 삼각의 진리를 깨우친 걸 보면.
하지만 많은 "재능 있는" 학생들이 삼각에 머물러 더 이상 올라가지 못하고 일반 마법사로 평생을 보낸다.
예나가 교수를 달았던 건 그녀가 악마학이라는 소외당하던 학문에 성과를 올렸기 때문이다.
그 예나조차 삼각의 마법사는 열여섯 살에 달았다.
피리스의 재능이 적어도 대학 내에서는 아주 특출나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어둠의 지식을 기웃거리는 것이.
"네이. 그런 악마도 있었지. 하지만 그 악마의 이름은 여러 개란다."
"그런가요?"
"어떤 악마는 여러 개의 이름을 가지고 있지. 그 이름 중엔 한때 숭배받던 신의 이름이었던 것도 있어. 하지만 내가 아는 한 네이라는 이름을 쓰는 악마는 악마의 이름밖에 갖지 못했지."
예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경고를 할 필요가 있다고.
그녀가 젊은 마법사를 노려보며 힘주어 말했다.
"세 개, 혹은 그보다 많은 이름을 가진 악마가 있단다. 그것에겐 접근하면 안 돼. 여느 악마처럼 인간이 알아서는 안 되는 존재지만, 그 여러 이름을 쓰는 악마는 무수한 사람과 왕국을 파멸한 원흉이란다."
"그렇군요."
피리스는 고개를 숙이며 공손하게 대답했다.
"그냥 조금 알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 불멸의 속성이라는 것에 대해서 말이죠."
"내가 알고 있는 건 없단다. 네이에 관한 것은 나조차도 감히 열람할 수 없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지식으로 가득 차 있으니까."
"그렇군요. 악마학 최고 권위자인 교수님조차 모른다면 이 세상에 그 존재에 대해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겠죠."
피리스가 물러났다.
예나는 떠나가는 그녀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몇 명이나 보았다.
재능의 벽을 느끼고 어둠의 지식을 파헤치고, 그렇게 알게 된 어둠의 지식에 두려움을 느끼고 자신에게 상담을 신청한 제자들을.
일부는 뻔뻔하게 또 일부는 집요하게 악마의 유혹을 이겨 낼 방법을 찾았지만 예나는 오히려 그들에게 묻고 싶은 심정이다.
그런 방법을 알고 있다면 내가 왜 여기 있겠냐고.
다른 오각의 마법사처럼 멋지고 위풍당당한 탑 하나를 차지하고 있었을 텐데 말이다.
그 수많은 죽음을 본 예나의 눈에 피리스는 여느 학생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곧 죽겠네. 안타깝게도.'
물가에서 노는 아이를 돌본다는 건, 얼마나 위험한 족쇄인가.
한 익명의 하녀의 말을 떠올리며 예나는 무심한 얼굴로 다른 책을 펼쳤다.
137화 34. 족쇄 (5)
황궁의 집무실엔 여러 황제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하나 같이 제국의 위기를 극복하고 제국을 대륙의 패권국으로 끌어올리거나 지킨 불굴의 군주들이다.
거기엔 철혈대제의 초상화도 포함되어 있다.
많은 사람이 철혈대제의 초상화를 보고 지혜와 용기를 겸비한 현명하고 강한 노인의 모습이라는 평가를 내린다.
초상화 속의 철혈대제, 클라우데 2세는 확실히 노인의 모습이다.
하얗게 센 수염과 주름진 얼굴을 보면.
루페르트도 처음 선제의 초상화를 봤을 때 다른 사람과 비슷한 감상을 느꼈다.
위엄 있고 자신이 닮고 싶은 모든 것을 가진 진정한 황제라고 약간의 질투와 무한한 존경을 담아 멍하니 보곤 했다.
모든 것은 변하는 법이다.
이제는 그 초상화가 다르게 보인다.
볼 때마다 초상화 속의 노인의 얼굴이 조금씩, 미묘하게, 마치 꿈에서 본 것처럼 변해 있는 것이다.
지혜롭고 현명하고 강한 노인이라는 특징을 제외하면 초상화 속의 인물은 어떤 때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보이기도 했다.
예민한 사람이라면 정신병에 걸릴 정도의 변화지만, 루페르트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있는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쩌면 저 초상화조차 리프니에의 권능이라는 바다 위에서 넘실거리는 한 조각 배일지도 모를 일이니까.
한때 이 초상화는 루페르트의 고민이었다.
그 초상화 속의 인물이 자신에게 도전을 선언한 이후에는 애써 외면하고 싶어, 아예 그걸 치우는 것도 고려했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제대로, 그 노인을 직시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
지금 화폭에 담긴 인물은 현명하고 지혜롭고 강한 노인의 또 다른 변형이다.
모두가 생각하는 철혈대제의 개성이랄까.
그 철혈대제의 초상을 보며 루페르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입니다. 폐하."
"알고 있다."
울피아나의 집에 방문하는 날이다.
그 여자를 상대하는 건 정말이지 끔찍한 일이다.
과거엔 증오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작 실제로 마주 잡은 울피아나는 또한 연약하고 가녀린 한 명의 여자였다.
그럼에도 그녀는 여전히 루페르트의 족쇄다.
"폐, 폐하! 폐하!"
광기를 머금은 눈에 눈물이 고이는 걸 볼 때 루페르트는 자신의 죄악감이 차오르는 걸 느껴야 했다.
그녀가 벨벳처럼 부드러운 손으로 자신의 손을 잡을 땐 가장 끔찍한 뱀에 자신의 몸을 휘감기는 감각을 느껴야 했다.
왜 그런 것일까.
언젠가 우회적으로 이 고민을 그의 총신들에게 풀어놓은 적이 있다.
"어떤 여자가 있어. 내가 보는 것만으로 두려움을 느끼는 여자가 말이야. 뭐랄까, 아무리 상대해도 익숙해지지 않고 오히려 공포심만 늘어나는데, 과연 그대들은 이를 어떻게 생각하나?"
그의 총신 중 어느 누구도 루페르트가 말하는 여자가 울피아나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녀는 대단히 아름답고 총명하며 우아하면서도 덕행으로 가득 찬 인생을 살았고, 무엇보다 저 고어문트 선제후의 하나뿐인 딸이니까.
"놀랍군요. 듣자 하니 렌타이어마르크의 괴물을 보고도 단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는 폐하가 무서워하는 여자가 존재할 수 있다니요."
"여자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남자가 행동하면 따라오는 무언가죠. 닻줄이 닻에 끌려오지, 닻줄 자체가 닻을 움직이는 건 아니잖습니까?"
오토 브라에와 베르너는 루페르트의 질문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다.
당대의 인사처럼 그들도 여자를 남자보다 열등한 존재로 여겼고, 그나마 몇몇 힘 있고 권세 있는 인물 정도만을 예외로 치켜세우는 정도였다.
그런 그들의 정신세계 속에서 황제가 여자 하나에게 휘둘린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단 한 명 요하네스만이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 세상에 진정으로 여성을 극복한 남자는 그리 많지 않다고 합니다. 그 전설 속의 수많은 군왕 중 아내에게 타박을 안 받은 사람은 드뭅니다. 그거 아십니까? 저 티그리트 황제조차 장모에게 갖은 구박을 받았다는 사실을?"
"그래? 그건 그렇고 특이하게도 장모에게 당하고 사셨군."
루페르트가 관심을 드러내자 요하네스는 은은한 미소를 머금으며 찻잔에 차를 따라 모두에게 대접한 후 이야기를 시작했다.
"티그리트 폐하는 룸인과 결혼했습니다. 룸의 귀족 가문이지요. 군사를 모집할 비용과 훈련할 돈, 장비까지 모두 처가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아내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죽은 이후에도 처가와의 관계는 계속됐죠. 그때 그 장모가 참 지독하리만치 그 노예제를 달달 볶았다고 하더군요. 검투 경기장에서 세 개의 머리가 달린 괴물을 보고도 물러서지 않던 그분이 장모만 나타나면 그 큰 몸을 움직여 피할 정도라고요."
"그건 흥미롭군. 어디서 나온 내용이지?"
"일종의 야사지요. 입에서 입으로 전하는."
그 말을 들은 베르너가 한마디했다.
"누군가의 창작이겠지."
"그럴 수도 있지요. 하지만 남자니 여자니 선을 그어도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아니겠습니까? 거기에 성별이 뭐가 중요합니까? 연애할 때나 관계가 있지 사람 관계라는 건 결국 본격적으로 얽히고 얽힌 다음에야 우열과 호오가 갈라지는 게 아닐까요? 그때부터 시작되는 것이지요."
요하네스의 천연덕스러운 대꾸에 오토 브라에는 웃기만 했지만, 베르너는 여전히 하찮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대체로 아녀자라는 건 감정에 치우쳐 정상적인 판단을 할 수 없는 생물이지. 그런 여자에 휘둘린다는 것 자체가 그 사람의 자질이 부족한 게 아닐까?"
그는 요하네스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칼만 들지 않았을 뿐이지 명백한 적의가 그의 충직한 눈길에 담겨 있었다.
이에 요하네스는 은은한 미소를 지우지 않으며 능글맞게 물었다.
"선제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일까요?"
"선제라니?"
"왜, 선제께서도 대황후와 거의 한 몸처럼 움직이지 않으셨습니까?"
"그건 예외지."
"왜요?"
"대황후는 다른 여성과 다른 존재니까."
"그런 예외가 있다면 또 다른 예외가 있지 않을까요?"
"아주 드문 예외야. 천 번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그런가요?"
루페르트는 총신들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기류를 보며 먼저 웃음을 터뜨리며 분위기를 달랬다.
"웃자고 한 소리인데 다들 너무 예민한 거 같군."
아마 그때였을 것이다.
그의 총신들의 마음이 하나가 아닐 수도 있다는.
황제를 위해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기계부품이 아니라, 먹이를 두고 치열하게 서로 대가리를 들이미는 아기 새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결국 모든 이는 권력을 추구하는 법이다.
루페르트가 생각하기에 총신들은 저마다의 장소에서 개성과 능력을 발휘해 자신을 보필하는 게 좋겠지만 총신들 각자의 생각은 다르리라.
저마다 누군가의 위에 서서 황제 아래서 권력을 휘어잡은 유일한 총신이 되길 원할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자신의 권력은 물론이고 자신이 구상하는 계획을 한껏 발휘할 수 있을 테니까.
'결국 이들도 언젠가는 서로가 서로를 물어뜯을지도.'
아무튼 그때의 대담이 약간의 도움은 됐다.
특히 요하네스의 말이 가슴에 와닿았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라는 게 얽히고 얽힌 다음에야 비로소 시작된다고 했던가.'
울피아나와는 처음부터 이상하게 얽혔다.
그녀가 사람이 조금 이상한 것도 맞다.
루페르트가 다른 사람보다 심약하고 주눅이 든 위치에 있었던 것도 맞다.
하지만 그녀는 루페르트와 달리 모두에게 인정받았고 사랑받았다.
그녀를 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라는 평판을 만든 건 그녀의 얼굴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수많은 사람을 자신의 포로로 삼고 진정 어린 선의로 추종자로 끌어들였다.
방구석에서 플루트나 불고 공이나 차던 하찮은 황제와는 전혀 다른 빛 속의 삶을 살았고, 그 빛들이 모인 세계에서도 가장 밝은 빛이었다.
단지 루페르트에게 불행이 있다면 그 사람이 자기를 안 좋아한다는 것.
그 싫다는 표현이 지나칠 정도로 사무친다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잘못 얽힌 덩굴은 쉽게 풀 수 있는 게 아니다.
"페하! 정말로 고마워요! 저 같은 하찮은 여자를 이렇게 격려하기 위해 몸소 찾아와 주시고."
그 여자가 지금 루페르트의 품에 안겨 있다.
제멋대로.
루페르트의 손은 어디로 향해야 할지 모른 채 허공에서 표류하다 시종과 하녀의 눈을 보고서야 어색하게 울피아나의 등을 쓸어내렸다.
"기운을 내세요. 울피아나 님. 지금 제국은 누란의 위기입니다. 저처럼 불안한 황제가 후사를 낼 욕심을 부리다간 제국이 풍비박산 날 수도 있습니다. 이 모든 불찰은 이 루페르트가 비록 슈발츠마인 가계라고 하나, 하찮은 방계 출신이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지요. 울피아나 님에겐 어떠한 악감정도 없습니다. 다만, 저에겐 제국이 더 소중할 뿐이지요."
마음에도 없는 구구절절한 변명을 하며.
하지만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인 변명이 적어도 울피아나의 심금을 울린 건 확실했다.
"역시, 폐하! 제국과 결혼하셨군요! 역시 폐하세요! 이 울피아나! 폐하를 보니 저의 어리석음과 식견 좁음에 정말이지 통탄을 금할 수 없네요! 폐하! 저, 다시 일어서겠어요! 일어서서 폐하의 곁에서 폐하를...."
끝도 없이 루페르트를 붙잡고 이야기를 늘어놓는 걸 보면 말이다.
정작 황후 시절엔 1초도 있기 싫어했다는 걸 생각하면 장족의 발전이다.
하지만 이제 1초도 있기 싫은 건 루페르트다.
'이야기가 끝날 거 같지 않아. 어째, 전보다 더 빨리 놔주지 않는 거지?'
뿌리치고 싶지만 옆에서 골트문트가 지켜보고 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매몰차게 뿌리치면 골트문트와 적이 될 판이고, 그렇다고 계속 있자니 마음의 한계가 시험받는 느낌이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상황.
루페르트는 과거의 자신에서 해법을 발견했다.
"커억!"
꼭두각시 시절 루페르트의 전매특허 하나.
꾀병이다.
울피나아의 타박을 듣던 중에 창안했다.
잔소리와 타박의 수위가 한계에 달했을 때 루페르트는 느닷없이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휘청거려 그녀의 입을 닫게 만들었다.
처음 몇 번은 상당한 효과가 있었다.
"폐, 폐하?!"
"아, 미안해요. 요즘 무리를 하느라."
"제가 문제가 아니네요. 폐하. 어서 들어가 쉬세요. 폐하가 쓰러지시면 우리 제국은 등불을 잃게 되는 거니까요."
루페르트는 애써 표정을 관리하며 간신히 울피아나 옆에서 떨어지는 데 성공했다.
골트문트가 다가와 걱정하는 척을 하지만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아무튼, 오늘도 끔찍한 하루였다.
'아니, 이 여자는 왜 패턴이 바뀌는 거지? 전엔 그냥 놔줬잖아. 분명 전과 똑같은 흐름이었는데 왜 말이 많아진 거야?'
두 번 할 짓은 아니지만 두 번을 했다.
세 번은 없길 바란다.
그렇게 생각하며 루페르트가 황궁에 돌아왔을 때 그를 기다리는 건 저지대에서 벌어지는 전쟁과 관련한 무수히 많은 문서였다.
그 문서들을 보면 울피아나의 변화도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같은 문서라도 전과 미묘하게 문구가 다르거나 과정이 다르다.
결론 자체가 바뀐 건 아니지만 사람 마음이란 게 작은 부분에서 미묘한 변화를 일으킨다는 소리다.
그 변화에 루페르트는 가벼운 놀라움과 피로를 느끼며 늦은 시간까지 문서를 검토하고 서명했다.
기분 좋게 잠이 든 다음 날. 대학에서 사람이 찾아왔다.
피리스가 죽었다.
138화 34. 족쇄 (6)
두 번째 장례식.
여전히 피리스는 관 안에 다소곳이 누운 채 생전의 아름다운 자태를 마지막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에도 파리가 꼬인다.
곧 파리들이 알을 낳을 것이고 저 모습 또한 흉측하게 썩어 문드러질 것이다.
루페르트는 그 썩기 전의 피리스를 무심한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
분노가 느껴졌다.
다름 아닌 피리스 본인에 대해.
'내가 널 위해 이렇게까지 했는데, 왜 그렇게 어리석은 짓을 반복하는 거냐?'
또 울피아나를 만나야 한다.
이번엔 무슨 소리를 할지 모른다.
루페르트의 공포 그 자체인 그 여자는 끝없는 수렁 같았다.
아무리 한낱 여자라고 생각해 봐도 실제로 루페르트 앞에 나타난 그녀는 저항하기 어려운 펄처럼 루페르트의 마음을 심연으로 이끌고 갔다.
'또 그 짓을 해야 한다고?'
해야만 한다.
그런 의무감이 당연하다는 듯이 루페르트의 마음을 장악했다.
피리스는 회귀로 인한 변화의 상징 같은 존재.
그녀가 죽는다는 건, 루페르트의 제국 또한 멸망하리라는 징조로 보였으니.
피리스 개인에 대한 호감도 한몫했지만, 이제는 그 호감의 상당 부분이 사라졌다.
너무나 어리석다.
마음은 알겠지만, 그 마음 때문에 자신에게 피해가 온다는 것 자체가 싫었다.
그 싫은 마음은 이내 피리스의 스승, 헬브라이트 베틀렌에게 전가됐다.
"아, 폐하. 어둠의 힘을 막기 위한 환상의 약제 엘릭서를 복용했음에도 그녀가 본 어둠이 너무나 짙고 그녀의 마음이 너무나 연약하여 어찌할 방도가 없었습니다."
오각의 마법사는 아무렇지도 않게 변명을 해 댔다.
화를 낼 순 없는 노릇이다.
'이 인간한테 말해 봐야 뭘 하겠나.'
중요한 건 배경이다.
루페르트는 장례식에 모인 몇 안 되는 마법사를 눈으로 살폈다.
어린아이들이다.
겨우 열 살을 넘은 것 같은 꼬마들도 있었다.
피리스와 같은 교실에 있었던 아이라는 모양이다.
말하자면 동기라는 소리.
루페르트는 그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황제의 부름 앞에서 아이들은 그 또래 아이들답게 신나 하면서도 자기들끼리 진정시키며 애써 황제 앞에서 예의를 지키려는 시늉을 했다.
'진짜 꼬마들이군. 이런 아이들과 공부를 했다는 건가.'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집단을 이루는 단위 중 주로 보이는 게 연령이다.
이질적인 연령은 주된 연령집단에게 배척당한다.
아마 마음고생이 꽤 심하지 않았을까.
"이 언니. 엄청 열심히 했어요. 잠을 자는 걸 본 적이 없어요."
"우리하고 딱히 어울리려고 하진 않았어요. 그래도 잘해 준 거 같아요. 요리도 잘하고."
"남자아이들이 치마 안을 보겠다고 어찌나 추근거리던지. 그래도 늘 언니답게 타이르셨죠."
"좋은 누나였어요. 그런데 너무 열심히 하더라고요. 학교에서 경고하는 빨리 죽는 마법사처럼 행동했어요."
아이들의 증언으로 루페르트는 신입생 시절의 피리스를 재구성했다.
말 그대로 앞만 보고 달리는 맹목적인 학생이었다.
그 맹목적인 전진의 목적이 뭔지 모를 정도로 루페르트는 박정하지 않다.
'피리스.'
아마 자신과의 약속을 위해 노력에 노력을 거듭했고, 그 노력이 벽에 부딪히자 결국 스스로 죽음의 길로 들어섰으리라.
'마법사를 그만두게 하는 방법은 없을까?'
그것도 안 될 것 같다.
이미 그녀는 루페르트가 개울에 흘려보낸 종이배다.
그 종이배는 바다로 가기를 희망한다.
중간에 건져 봐야 그 종이배는 어떠한 희망도 가지지 못할 것이다.
이미 피리스의 마음이 극한에 몰렸다는 건 누구보다 루페르트 본인이 잘 알고 있었다.
자신도 비슷한 경험을 했으니까.
아무것도 없던 시절, 보다 나아지기 위해 얼마나 노력에 노력을 거듭했던가.
그녀가 옮겼던 감기의 고통은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난다.
'그녀의 뜻을 꺾게 하는 방법은 없다. 오히려 그 뜻을 꺾는다면 그녀조차 꺾이겠지.'
다른 방법이 필요하다.
루페르트는 자신이 아는 또 다른 마법사, 지겔슈타트를 찾아갔다.
여전히 병상에 누운 그는 수척한 얼굴로 자신의 황제를 맞이했다.
"폐, 폐하!"
"누워 계시게. 오늘은 편하게 몇 가지 묻고 싶어서 왔으니."
의외의 인연이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어떤 사람보다 큰 도움이 된다.
루페르트는 차분하게 피리스와 그녀에게 일어났던 일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아울러 그녀의 멈출 수 없는 의지에 관해서도.
"아, 그런 사정이 있었군요. 뭐, 흔한 이야기입니다. 우리 대학에서는."
지겔슈타트가 신비로운 눈을 번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들 죽는가?"
"많이들 죽지요. 우리처럼 재능의 한계가 명시적으로 드러나는 직군도 달리 없으니까요. 그래서 많은 사람이 어둠의 힘에 손을 뻗치는 것이지요."
"그 어둠의 힘이란, 역시 악마를 말하는 건가?"
"그렇습니다."
"악마가 유혹해서 사람을 죽이는 건 아니겠지?"
"아니오. 개개인에게 관심을 둘 정도로 악마는 한가롭지도 않고 가까운 존재도 아닙니다. 어둠의 지식을 얻고 죽음에 이르는 마법사들은 고작 악마의 작은 발자취 하나만을 보고 죽는 것에 불과하지요."
그 말을 들으며 루페르트는 수척한 지겔슈타트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보다 좋은 사례가 어디 있을까.
고대의 악마를 단지 눈으로 보고 느낀 것만으로 저 고고한, 마를로네와 티격태격하던 마법사가 이 지경이 이르렀는데.
일반 병사 중엔 미쳐 버려서 전역한 사람도 부지기수라고 한다.
"그녀가 죽지 않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이 필요할까? 마법사를 그만두지 않는 선에서 달리 고찰할 방법이 없을까?"
"글쎄요."
지겔슈타트가 잠시 고민했다.
"그저 알고 싶을 뿐이네. 이것이 대학의 방침에 위배된다고 해도 우리끼리만 알면 되지 않나."
루페르트가 간청했다.
이에 지겔슈타트는 한숨을 내쉬고 그가 알고 있는 비밀의 방법에 관해 이야기했다.
"...마녀가 있습니다."
"마녀?"
"어둠의 지식을 오랫동안 다룬 인간들이지요. 우리 대학에도 악마학자가 있지만, 진정으로 악마를 접하고 그에 관련된 지식을 추구하는 사람은 마녀뿐입니다. 제가 알기로 여러 마법사들이 외연의 확장을 위해 은밀하게 마녀와 접촉해 그들이 알고 있는 샛길을 배우려 하지요. 제가 알기로는 피리스의 스승 헬브라이트 베틀렌도 젊은 시절 마녀와 접촉한 것으로 압니다."
"그런가?"
"어디까지나 낭설입니다. 그 사람의 나이는 저조차 알지 못하니까요. 하지만 우리 대학에 괜히 나도는 낭설이란 존재하지 않지요."
마녀.
루페르트는 일전에 만난, 베르크 란을 경기에 휩싸이게 한 신비로운 마녀를 기억했다.
'그래, 그 마녀가 있었지.'
그러고 보니 그 마녀가 한 말이 있다.
제자가 필요하다고.
그 사실을 모르는 지겔슈타트는 수척한 얼굴로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접촉하는 것만으로 다른 마녀로 몰려 죽임을 당하기 일쑤지만, 그 마녀는 어둠의 지식에 삼켜지지 않고 그 심연을 들여다보고 나오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마녀를 찾는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겠지요."
'알고 있다.'
"마녀를 찾는다고 해도 마녀의 재주를 배우는 게 쉬운 일도 아니고요. 마녀들은 변덕이 대단히 심하거든요."
'그 마녀는 제자를 찾는다.'
모든 환경이 완비됐다.
회귀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고맙네. 지겔슈타트."
루페르트가 마법사의 두 손을 꼭 잡았다.
"폐하."
"그대를 치유하는 방법도 마녀가 알고 있는가?"
"글쎄요. 아, 괜찮은 비약이 있다고는 들었습니다."
"헬브라이트 베틀렌이 만든?"
"아니오. 그건 마녀가 만든 비약의 열악한 모조품일 겁니다. 게다가 전 약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지겔슈타트가 루페르트를 보며 은은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 신비롭고 병약한 눈빛에 서린 굳은 의지를 느끼며 루페르트는 빙그레 미소 지었다.
"좋아. 내 다녀오지."
"폐하?"
루페르트는 소라고둥을 들었다.
부우우우우우--
다시 한번 회귀가 시작됐다.
변화의 시작을 지키기 위한.
어두운 복도가 다시금 루페르트 앞에 펼쳐졌다.
이제는 아무도 없을 영원한 어둠에 잠겨 있는 복도.
루페르트는 철혈대제가 앉아 있던 자리를 보았다.
"어?"
루페르트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사람이 있다.
"루페르트 가우저."
그 사람의 정체는 다름 아닌 그의 여신이었다.
"우리 솔직하게 이야기할까요?"
* * *
저지대 연방.
제국의 서북쪽을 장악한 간척민들의 뿌리는 제국인과 크게 다르지 않다.
대륙 중앙을 차지한 전사 부족의 후예들이다.
그러나 펄과 늪, 빽빽한 삼림이 둘을 오랜 시간 갈라놓았고 그 단절이 언어의 분절과 문화의 차이를 만들어 냈다.
여전히 저지대 연방은 제국 의회에 참석할 자격이 있는 제국의 일원이지만 저지대 연방 내부에서는 이미 그들은 제국이 아니라는 조심스러운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그 저지대 연방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
공격자는 제국의 동맹국 카스무어 왕국이다.
동료들 사이에서 하드리아멘디쿠스라 불리는 왕국의 장군 산체스 에르난 데 하드리멘디가 삼만 명에 달하는 야전군을 이끌고 남부 저지대 연방에 상륙해 공격을 시작했다.
경험 많은 군대와 노련한 장군이 이끄는 강력한 군대 앞에서 저지대 연방이 택한 건 그들이 자랑하는 강력한 성형(星型) 요새로 보호받는 수성전이었다.
그러나 하드리멘디는 공성전에 일가견이 있는 인물이었다.
오히려 야전보다 공성 경험이 많고 숱한 요새를 함락시키기도 했다.
그의 군대는 카스무어 왕국이 장악한 남부 저지대와 북부 저지대를 잇는 주요 축선을 장악하는 요새도시 그레나스를 포위했다.
그레나스는 저지대 연방에서 5성급 요새라 분류된 난공불락의 요새로 높은 사기를 지닌 3천 명의 주둔군에 의해 수비 되고 있는데, 하드리멘디의 항복 요구에 당연하다는 듯이 항전을 천명했다.
도시 주위에 공성 방벽이 세워졌고 이국적인 언어를 쓰는 병사들이 참호를 파 요새로 접근했다. 땅굴이 마치 음습한 뱀처럼 요새의 내부로 파고들려 하지만 수비군은 불에 태운 유황으로 그들을 쫓아냈다.
하드리멘디는 조바심을 내지 않았다.
북쪽 바다는 카스무어 왕국의 막강한 함대가 장악하고 있고 설령 바닷길이 막힌다고 해도 남쪽 자부아 공작령을 통한 육상 교통로도 건재하다.
카스무어 왕국은 돈이 많다.
신대륙에서 그들이 얻은 건 역병만이 아니었다.
일설에 의하면 사람이 사라진 도시에서 그들은 도시 전체를 뒤덮은 금박과 황금 구조물을 발견했고 역병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탐욕스러운 사람들을 보내 그 금박을 모조리 긁어내 왕국의 보물창고에 넣었다고 한다.
그렇게 손에 넣은 금은 제국이 지닌 황금 전체보다도 많을 정도라고.
그 막대한 재원에 의해 움직이는 강력한 군대가 연방 전체를 멸하려 한다.
새로 저지대 연방 의장에 오른 야스퍼는 황제에게 전쟁을 중재하길 원하는 탄원서를 작성했다.
제국의 새로운 황제 루페르트 1세는 저지대 연방의 탄원을 일축했다.
카스무어 왕국이 제국의 동맹국이기 때문이다.
저지대 연방은 비록 외국 취급을 받고 있지만, 여전히 제국 의회의 한자리를 차지하는 제국의 일원이다.
외국이 제국을 치는데 제국은 좌시하고만 있다.
저지대 연방이 사실상 외국이며 외국 취급을 받고 그들 스스로도 제국과 분리된 정체성을 강조하고 있지만, 사람이 억울해지면 뭐든 구실을 붙이는 법이다.
저지대 연방은 전쟁을 중재하지 않은 루페르트와 제국에게 강한 배신감을 느꼈다.
그런데 제국은 하나가 아닌 여럿의 연합이다.
제국의 일부가 저지대 연방에 은밀하게 연락을 취했다.
"레벤호스트 선제후에게서 온 전갈입니다."
저지대 연방의 지도자 야스퍼는 최근 새신부를 맞이했다.
귀족이긴 하나 봉지도 없고 재산도 없는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이전에 저지대 연방을 이끌던 그의 형 빌렘 1세가 유언으로 결혼을 권장했고, 서둘러 전부터 마음에 있던 여인과 결혼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새로운 의장이자 새신랑인 야스퍼는 사십을 넘긴 나이에 키가 크지만 늘 허리를 숙여 실제보다 작아 보였고 유약하고 어눌한 관상의 소유자라 타인의 오판을 사기 십상이었다.
하지만 연방의 새로운 지도자는 눈으로 보이는 만큼 만만한 사람이 아니다.
그 또한 형과 함께 저 끔찍한 철혈대제의 치세를 눈으로 보고 겪었던 사람이다.
그는 제국이 어떻게 하나였던 저지대 연방을 남북으로 찢어 놓았고, 그 나머지 반쪽을 카스무어라는 사냥개에게 던져 주는지 톡톡히 보았다.
이제 그 사냥개가 나머지 북쪽마저 먹어 치우려 한다.
"레벤호스트라."
야스퍼는 코웃음을 치며 선제후에게서 온 서신을 눈으로 읽어 나갔다.
어눌한 얼굴에 서서히 미소가 번져 나가기 시작했다.
"이 선제후."
야스퍼가 말했다.
"미쳐 버린 건가?"
"선제후가 뭐라고 했습니까?"
그의 좁은 집무실엔 스무 명에 넘는 사람들이 방을 가득 채울 정도로 몰려 있었다.
그 중심에서 야스퍼가 말했다.
"그 선제후는 제국을 넘어 대륙 전체를 불태우려 하는군."
139화 34. 족쇄 (7)
"그 여자가 중요한 여자인가요?"
리프니에가 얼음처럼 차가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 육체의 나이는 수십 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살아 있을 때의 대황후의 꾸짖음을 연상케 할 정도의 박력이 있었다.
리프니에가, 루페르트의 여신이 화를 내고 있는 것이다.
"하찮은 신분에 하찮은 재능을 타고났고, 뭐 이제 당신은 결혼도 못 하겠지만 지참금도 못 가지고 올 그런 여자를 살리려고 회귀라는 권능을 이용하는 건가요?"
"그, 그게."
"말해 봐요. 루페르트 가우저."
"피리스는 그러니까 제가, 처음으로 여신님의 권능을 이용해서 운명을 바꾼 사람입니다. 여신님도 알고 계시잖아요?"
"한 번이나 바꿔 줬는데 스스로 제 발로 다시 구렁텅이로 떨어지는 어리석은 자를 두 번이나 살려 줄 필요가 있나요? 저기, 루페르트 가우저. 위인이라 불리는 훌륭한 사람은 살면서 단 한 번도 실수나 패배를 경험하지 않는답니다. 잘 알고 있죠?"
"알고 있습니다."
"당신의 선제만 해도 적어도 투기장에서는 패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죠. 그렇기에 제가 주목한 것이지만."
여신이 한숨을 내쉬었다.
"평범한 사람은 많은 걸 할 수 없어요."
"...."
"그러니 욕심을 줄여야 해요. 당신은 평범해요. 그 육체는 평범하지 않겠지만 당신이라는 영혼은 지극히 평범하고 범용하답니다. 그러니 욕심부리지 마요."
루페르트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리프니에는 그런 루페르트를 빤히 쳐다보다 한마디 했다.
"이미 했으니 이번은 봐 드리겠어요. 루페르트 가우저. 이번이 마지막이에요."
"감사합니다."
거기까지 루페르트가 여신에 대해 가진 건 반감이었다.
'나도 힘들었다. 게다가 수십 번을 했는데. 피리스가 어떤 사람인지 여신님도 알지 않나. 그걸 왜 이렇게 나에게 타박을 주냐고. 안 그래도 힘들어서 견딜 수가 없는데, 또 그 울피아나를....'
리프니에가 돌아섰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어둠 너머에서 희미한 여신의 간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힘들어요."
루페르트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는 크게 뜬 눈으로 여신이 사라진 어둠을 우두커니 선 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 * *
아무리 리프니에를 미워하고 원망해 봐도 루페르트가 여신의 유일한 사도인 것만은 영원히 변치 않을 사실인 모양이다.
회귀 직후부터 루페르트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이번이 마지막이다. 이번에 반드시 해결을 해야만 해.'
처리해야 할 수많은 일이 있다.
하지만 지금 그가 집중해야 할 건 하나다.
피리스.
그 붉은 머리칼을 지닌 여성을 살리는 것이 루페르트의 목적이다.
'피리스. 조금만 기다려라. 이번만큼은 죽게 하지 않겠다.'
가장 먼저 루페르트가 한 일은 피리스를 찾아간 것이다.
안개 가면의 권능은 루페르트에게 무한한 자유를 주었다.
선제, 아니 티그리트가 누린 것처럼.
대학의 입구에서 가만히 기다리고 있자니 아는 얼굴이 보인다.
피리스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방문한 어린 학생이었다.
이제 겨우 열둘 정도밖에 안 될 앳된 여자아이를 붙잡고 루페르트는 담담하게 자신의 용건을 말했다.
"아이야. 나는 이런 사람이란다."
루페르트가 자신의 인장을 보여 줬다.
황제의 인장.
하지만 아직 무구함이 남은 아이는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도 루페르트도 최소 귀족이라는 걸 알아볼 정도의 눈치는 있었다.
"무슨 일이신가요?"
"피리스를 알고 있지? 피리스 홀리바레스를 내게 데리고 오렴. 이걸 주마."
다음으로 금화 한 닢을 내밀었다.
마법사가 돈을 좋아한다는 건 그들의 정점인 헬브라이트 베틀렌이 추악할 정도로 투명하게 보여 줬다.
어리다고 해서 그 본질이 변하는 건 아니다.
사실 처음부터 정해진 일인지도 모른다.
대학에 들어가고 싶던 피리스의 가장 큰 장벽은 다름 아닌 돈이었으니.
재능은 대체로 돈에 묻힌다.
대성한 마법사는 집에 돈이 많고, 재능도 뛰어나다는 두 가지 기본 조건을 충족했다.
"바로 찾아볼게요!"
돈의 힘으로 루페르트는 피리스와의 만남을 성사할 수 있었다.
장소는 어째서인지 기억에 있는 곳이었다.
수많은 사람이 오가는 번화가 사이, 건물 틈 사이로 푸른 하늘이 올려다보이는 골목이다.
마를로네와도 여기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는데, 돌이켜보니 여기가 테타우의 중심에 몸을 숨기기도 좋은 곳이었으니.
골목에서 루페르트는 오랜만에 자신의 하녀였던 피리스와 재회했다.
"루페르트 님, 아니, 폐하!"
피리스가 감격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얼굴은 루페르트가 처음 봤을 때처럼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마력이 있었지만, 루페르트는 그녀의 눈가에 진 어두운 그늘을 놓치지 않았다.
'지금 시점으로도 엄청난 무리를 하고 있군.'
방식이 잘못됐다.
그녀를 살리기 위해 회귀를 했는데 그저 노선만 트는 방향으로 그녀를 살리려 했다.
직접 만나서 그녀의 상태를 확인하고 그녀가 살 방법을 찾았어야 했는데, 정치도 하고 궁정 암투도 하고 내부 관리도 적당히 하느라 그녀에겐 절반의 관심만을 쏟았다.
그래서 실패한 것이다.
이 여자, 피리스는 오직 자신만을 바라보고 저토록 노력하고 있는데.
"피리스. 많이 힘들지?"
"아니요. 조금도 힘들지 않아요. 폐하."
"무리하지 말라는 말을 해 봐야 너한테는 안 통한다는 걸 깜빡하고 있었네."
"...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요즘 벽에 부딪혔다며?"
루페르트가 그녀 옆을 천천히 돌며 옆모습을 보았다.
확실히 전보다 살이 빠졌다.
앞에서 볼 땐 몰랐는데 옆에서 보니 로브라는 헐렁한 옷을 걸치고 있음에도 곳곳에서 피폐한 흔적이 드러나고 있다.
일단 불이 붙으면 하나만을 추구하는 그녀의 성질상, 그 불을 꺼뜨리라는 건 그녀보고 죽으라는 것과 같다.
루페르트는 망설이지 않고 진정한 속내를 그녀에게 이야기했다.
"마녀요?"
피리스가 깜짝 놀랐다.
"내가 아는 마녀가 있다. 그 마녀에게 너에게 길을 제시해 줄 거야. 적어도 네가 이상한 책을 스스로 펼치고 얻을 위험보다는 작은 것이겠지."
"하지만 폐하."
피리스가 난색을 드러냈다.
"저는 스승님을 누구보다 존경해요."
"스승에 대한 가장 큰 보답은 그 스승을 뛰어넘는 거지. 지지부진한 착한 제자보다도 싹퉁머리 없지만, 스승의 명성을 높이는 제자가 그 스승에겐 더 좋은 제자가 아니겠냐?"
"그,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루페르트가 피리스의 두 손을 잡았다.
"피리스. 나는 네가 죽는 걸 원치 않는다."
"폐하...."
차갑게 식었던 얼굴에 홍조가 피어올랐다.
"어떤 길로 가든 목적지에만 도착하면 되는 거야. 그게 설령 샛길이라고 하더라도."
루페르트가 그녀의 손을 놓으며 천천히 멀어졌다.
"나는 네가 죽는 걸 원치 않는다."
피리스는 고개를 숙인 채 손에 남겨진 루페르트의 온기를 느끼며 잠시 생각했다.
곧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저, 마녀에게 가 볼게요."
루페르트가 빙그레 웃었다.
변화.
그녀를 상징하는 속성을 다시 한번 그의 첫 번째 여인에게서 발견할 수 있었으니까.
* * *
아무도 알려 하지 않았지만 이단 심문관 조서에 기재된 마녀의 이름은 헤베타였다.
비밀스러운 고대의 의술로 이웃의 목숨을 구해 주었지만 그 이웃에게 고발당해 이단 심문관에 잡힌 그녀는 끔찍한 고문을 받았고 자신이 마녀이며 악마를 숭배한다는 걸 자백했다.
불길 속에 태워지는 것이 그녀에게 허락된 유일한 운명이었다.
그걸 바꾼 것이 성직 선제후 아카이아 대주교다.
그가 그녀의 탁월함을 알아보고 그녀를 은밀한 곳에 빼내어 비밀스러운 의술을 활용하고자 했다.
오늘도 그는 마녀를 찾아 평소 좋지 않던 무릎 쪽의 치료를 부탁했다.
"이것으로 당분간 고통에서 자유로우실 겁니다."
대주교는 무릎을 움직여 보았다.
노환으로 인해 걸을 때마다 무릎이 아파서 견딜 수 없었다.
특히 미사라도 집전하는 날엔 온몸에 치렁치렁 무거운 옷과 장식을 걸쳐야 했는데, 안 그래도 아픈 무릎에 더욱 큰 부담을 주었다.
그 고통은 은퇴를 고려할 정도로 심각한 문제였다.
하지만 마녀를 안 이후부터 대주교는 예순을 넘어선 노구를 끌고 여전히 제국의 정치를 좌지우지하는 걸 넘어 더욱 커다란 꿈. 자신의 옛 동료를 넘어설 야망을 실현하려 하고 있었다.
이 마녀는 대주교에게 있어 없어서는 안 될 존재다.
그런데 마녀의 반응이 평소와는 다르다.
"안할트 님."
이것은 대주교가 마녀에게 자신을 지칭할 때 쓰라고 넘긴 가명이다.
아무렇게나 댄 이름은 아니고 평생의 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 크로지우스가 예전에 쓰던 가명이었다.
아무리 마녀가 편리하고 유용하다고 해도 마녀가 자신의 진짜 이름을 부르는 건 호라 교단을 이끄는 총책임자로서 껄끄러운 일이니까.
그런데 그 이름을 마녀가 말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녀는 대주교가 오면 치료해 주는 기계 같은 존재였지, 대등하게 대화를 주고받는 인간은 결코 아니었으니.
대주교가 의외라는 얼굴로 추악한 마녀를 노려보았다.
"말해 보아라."
"네. 다름이 아니오라, 대주교님의 몸에 좋지 않은 변화가 있는 것 같습니다."
"늙은이에게 좋은 변화가 있을 리 없지 않은가?"
"그게 아니오라...."
그때 누군가 문을 노크했다.
"무슨 일인가?"
대주교가 귀찮아하는 기색을 드러내며 사납게 물었다.
바깥에서 수행원의 목소리가 대답했다.
"마법사 하나가 찾아왔습니다."
"마법사?"
대주교가 마녀를 보자 마녀가 징글맞은 미소를 머금으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벽에 부딪힌 마법사가 저 같은 사람을 찾는 건 흔한 일이지요."
"그래?"
그런데 번지수를 잘못 찾아왔고 시기도 좋지 않다.
'죽여야겠군.'
이 장소는 대주교의 가장 은밀한 비밀이니.
그런데 그 마법사의 정체는 대주교의 상상을 뛰어넘는 인물이었다.
'이 여자는?'
틀림없다.
저 황제, 루페르트가 귀여워하는 여인이다.
아름다운 용모로 보아 필경 내연의 여인이리라 생각했다.
순결 선언을 했다고 했지만 그건 대놓고 후사를 남기지 않겠다는 소리지, 어떻게 젊은 남자가 혈기를 다스릴 수 있단 말인가.
분명 뒤로는 첩실 몇 명이나 둘 것이라는 게 대주교의 예측이었다.
그 첩실 후보가 마녀의 오두막에 찾아왔다.
그것이 대주교의 판단이었다.
"폐하가 위치를 알려 준 건가?"
대주교는 평범한 귀족처럼 분장했고 정체도 숨겼기에 피리스는 이 사람의 정체를 알 길이 없다.
단지 수행원이 여럿 있고 좋은 마차가 있는 걸 보고 고귀한 귀족 정도로 생각했다.
"어, 어떻게 아셨어요?"
"이름이 뭐였더라. 피, 피, 리피? 프리... 피?"
"...네?"
"프리?"
"아니오. 피리스예요."
"아, 그렇구만. 리와 피가 들어가는군."
대주교가 사람 좋은 할아버지처럼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좋은 이름이야. 좋은 이름."
그는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마차에 올랐다.
"하지만 행동엔 주의하게. 그러니까, 남들 눈에 잘 띄지 말라는 소리지."
대주교의 마차가 떠났다.
피리스는 한동안 그가 사라진 방향을 가만히 보다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뭐 하시는 분이지?"
악의는 없어 보였다.
그보다 중요한 건 이 앞이다.
저 너머에 마녀가 있다.
고심 어린 얼굴로 그녀가 천천히 오두막의 문고리를 향해 손을 뻗으려 할 때였다.
문 너머에서 냉담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또 그 비린낸가?"
"...네?"
"정말이지 요즘은 내 주변이 바다가 된 느낌이라니까."
마녀가 문을 열고 자신의 마녀다운 위풍당당한 모습을 피리스 앞에 드러냈다.
베르크 란 정도는 아니지만, 털이 곤두설 정도로 소스라치게 놀라는 그녀를 보며 마녀가 빙그레 웃었다.
"썩어 가는 바다의 악취가."
마녀가 피리스를 보며 갑자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너."
"네."
"머리에 이상한 게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
"네?"
"아까 그 노인처럼 말이야."
"무슨 말씀이신지."
"아, 우울한 이야기는 됐고, 들어와. 마법사지? 응? 내게 고대의 지식을 배우러 온 거지?"
마녀는 그 무시무시한 외모에도 불구하고 마치 인심 좋은 할머니처럼 피리스를 맞이했다.
뜻밖의 환대와 마녀의 친절함에 피리스는 어리둥절하며 자신에게 기회를 준 마녀를 결의에 부릅뜬 눈으로 응시했다.
'반드시 벽을 뚫고도 살아나겠어.'
루페르트와의 약속이다.
결코 물러서지 않겠다는 결의가 어린 마법사의 고양이처럼 커다란 눈에 단호하게 깃들었다.
140화 34. 족쇄 (8)
황제가 돼지가죽으로 만든 공을 차고 논다는 건 지금도 테타우의 호사가 입에 자주 오르내리고 있다.
사냥 같은 즐거운 놀이를 마다하고 공이나 차고 논다는 게.
귀족의 사냥은 그 자체로 하나의 작은 축제와 같다.
힘 있고 권세 높은 군주일수록 사냥이라는 행위는 더욱 화려해지고 규모도 커진다.
기본적으로 필요한 필수 인원만 꼽아 봐도 사냥개 관리자, 총기나 석궁 관리인, 경호원, 다수의 몰이꾼, 사냥감을 실어 나를 수레와 마부, 사냥터 지기, 기타 귀족을 시중을 들 시종들이 필요하다.
이런 행사엔 동료 귀족이나 군주가 끼어 친목을 도모하기도 했다. 당일 잡은 사냥감을 비롯한 갖은 정찬으로 하루를 마무리하기 때문이다. 거기에 권세 높은 군주라면 으레 흥을 돋을 악단을 불러 흥겨운 곡을 연주시키기도 했으니, 감히 작은 축제라 아니 말할 수 있을까.
거기에 비하면 공놀이 같은 건 공만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하찮은 놀이다.
그런 걸 황제가 황궁의 뒤뜰에서 혼자 하고 있으니.
"혼자 하시는 건 아닌 거 같던데요."
궁정에 자주 들락날락하는 귀부인이 호사가들이 모인 자리에서 최근 황제의 놀이에 대한 최신 소식을 전했다.
"슈발츠마인을 비롯해서 공을 잘 차는 사람을 불러서 함께 공놀이를 즐기신다고 하네요."
그 말을 들은 호사가는 모두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혼자서 공을 차시나, 둘이서 공을 차시나 그게 뭐가 다르다는 거요?"
공놀이는 공놀이일 뿐이다.
고귀한 자의 놀이가 아니다.
그것이 제국에서 돈 있고 힘 있는 사람들의 사고에 박힌 공놀이의 이미지다.
툭툭.
루페르트도 알고 있다.
자신의 취미가 욕을 먹는걸.
어쩌면 첩실을 들이고 추잡하게 노는 것보다 더 욕먹을 짓일지도 모른다.
후자가 도덕적으로 욕을 먹을 행위일지언정 돈이 없고 힘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기에.
아무나 할 수 있는 걸 하는 게 제국에서는 더 누가 되는 행위다.
'뭔가 뒤틀려 있어. 이 나라는.'
언제부터 이런 풍조가 들기 시작한 걸까.
대륙의 패권을 장악한 이후부터 이상한 생각들이 사람들의 의식을 좀먹기 시작한 걸까.
루페르트는 룸 제국의 멸망을 생각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타락과 퇴폐로 룸 제국은 멸망했지만, 그들에게도 아름다웠던 시대가 있었다.
귀족과 평민이 일치단결하여 한때 그들보다 숫자가 많고 육체적으로 압도하는 체력을 가진 이민족을 상대로 연전연승을 거두던 제국의 여명기가.
"자, 간다. 진심으로 막아 봐라. 실제 경기처럼 손을 써서 내 옷을 잡고 늘어져도 된다. 마르코스."
눈앞에 있는 남자는 크고 장대하면서도 표범처럼 날랜 몸을 지닌 사람이다.
그는 평민이다.
부두조합에서 일을 하고 있고 거기에서 가장 공을 잘 찬다는 사람이다.
왕년의 루페르트처럼 다른 조합과의 친선전에 용병으로 나가 돈을 벌기도 하는 모양.
이 사람은 잘 알고 있다.
회귀 전에 몇 번 공을 차 봐서 안다.
"나에게 일부러 져 준다면 보수의 절반을 삭감할 것이다."
마르코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강인한 육체를 놀려 루페르트를 막으려 했다.
루페르트는 이를 악물기도 하고 그의 옷을 잡고 늘어지며 잡히기도 하고 정강이와 몸을 부딪치며 격렬한 몸싸움을 하기도 하면서 결국 그를 제치고 작게 만든 골대 안에 공을 차 넣었다.
"...!!"
마르코스의 표정 없던 무뚝뚝한 얼굴에 미세한 경악이 떠올랐다.
그가 조심스럽게 황제를 보며 물었다.
"다시 해 봐도 되겠습니까...?"
"좋다. 이번에는 전력을 다해라. 나는 하켄하임에서 공을 가장 잘 차는 사람이니."
"하켄하임? 싹쓸바람 가우저라는 사람이 있었던 곳 아닙니까?"
"그 싹쓸바람 가우저가 나다."
"오!!"
귀족들은 공 차는 사람을 무시하지만 공 차는 사람에겐 나름의 자부심이 있다.
몸이라는 신과 부모가 내려준 도구를 누구보다 잘 다루고 활용한다는 점에서.
싸움과는 다르다.
싸움은 그저 때려눕히거나 찔러 죽이면 그만이지만 축구는 시간이 다할 때까지 서로의 육체와 기량을 맞부딪히며 자신의 가치를 증명할 수 있다.
그 분야에서 마르코스는 최상의 실력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존재지만 오늘 그는 임자를 만났다.
"아니."
두 번째 골이 들어갔다.
어떻게 한지도 모르겠다.
그가 물었다.
"대체, 어, 어떻게?"
"아, 이거."
루페르트가 공을 자유분방하게 놀리다가 뒤꿈치를 이용해 공을 살포시 넘기는 묘기를 보여 주었다.
"허억! 이런 기술이?!"
"뭐, 눈속임이지. 모르니까 당한 거야. 알면 아무도 안 당해 주겠지."
"저, 저는 사람이 딱딱해서 아부 같은 건 잘하지 못합니다만, 폐하 같은 축구 솜씨는 본 적이 없습니다. 아니, 폐하의 몸이라고 해야 하나. 엄청 유연합니다. 뭐라고 해야 되나. 물속의 오징어? 오징어가 흐늘거리는 느낌? 무식한 저로서는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밖에 없지만, 정말이지 대단했습니다."
마르코스의 칭찬이 입에 발린 칭찬이 아니라는 건 누구보다 루페르트 본인이 잘 알고 있다.
그럴 인간도 아니고 같은 공을 차는 사람으로서 상대를 인정한 것이다.
"이만 해산하지. 다음엔 사람을 모아 경기를 해 보자고."
"부, 불러만 주신다면!"
순간 루페르트의 눈앞에 카드 한 장이 떠올랐다.
'뭐, 뭐냐? 영혼 동맹?!'
그때 루페르트의 마음속에 청량한 여인의 목소리가 나긋하게 울려 퍼졌다.
[ 하지 마세요. ]
여신님이다.
루페르트는 침을 꿀꺽 삼켰다.
[ 개나 소나 카드의 군단으로 받아들이면 제가 입장이 뭐가 될까요? 네? ]
목에 건 소라고둥이 갑자기 위아래로 움직이며 루페르트의 가슴을 가볍게 두들겼다.
여신의 타박에 루페르트는 돌아서며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고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사람만을 동맹으로 받아들여야겠죠."
[ 전에 그 여자도 그래요. 자격도 없는 사람인데. 그 마법사도 그렇고. 아, 그 콧수염은 뭐, 나름 괜찮긴 하지만 뭐, 모를 일이죠. 그 능글맞은 얼굴 뒤에 어떤 추악한 모습을 숨기고 있을지. ]
"한스 징펠만은 괜찮은 사람입니다."
[ 당신의 첫 번째 영혼 동맹이니까요. 아무튼, 동맹을 소중히 여기세요. 당신의 가장 큰 재산일지도 모르니까요. ]
"그 말 명심하겠습니다."
여신의 기척이 사라졌다.
루페르트는 하늘을 보았다.
정오가 다가오고 있었다.
가장 중요한 행사가 남아 있다.
바로 울피아나를 만나는 일이다.
* * *
"커억!"
회귀의 무게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루페르트지만 가끔 회귀는 자신이 생각해도 웃기는 상황을 만들어내곤 한다.
지금이 그렇다.
"크으으으윽!"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여자에게 같은 장소, 같은 시간에 같은 기행을 벌이고 있다.
"폐, 폐하?!"
"어엌!"
혼신의 연기를 하며 루페르트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니, 이번에는 사람들을 안 부르냐고. 무안하게.'
그것뿐인가.
저 가증스러운 울피아나는 걱정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얼굴로 생글생글 웃으며 똑 부러지게 묻는다.
"폐하? 지금 뭐 하세요?"
저 눈.
틀림없다.
루페르트를 추궁하는 눈이다.
첫 번째 첩을 들켰을 때 그런 눈으로 봤었다.
'이, 이런.'
루페르트의 눈이 그의 의지와 관계없이 흔들렸다.
"커어어억!"
다행스럽게도 그를 구원한 건 선제후였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아, 죄송합니다. 어제 잠을 못 자서."
"아버님. 왜 그러세요? 폐하께서는 가벼운 장난을...."
"울피아나. 농담을 할 때가 아니란다. 오늘은 이쯤 하자구나."
"폐하."
울피아나가 루페르트의 손을 두 손으로 꼭 잡았다.
루페르트는 남쪽에 산다는 발톱벌레라는 징그러운 다지류 벌레를 생각했다.
그 벌레는 모습은 끔찍하지만, 감촉만은 벨벳처럼 부드럽다고 한다.
지금이 딱 그렇다.
과할 정도로 부드러우면서도 차가운 게 자신의 손등을 타고 올라오는 것이.
"다음에 뵙겠습니다."
"폐하. 저 기다릴게요."
루페르트는 온몸이 떨리는 걸 가까스로 참으며 자리를 벗어났다.
"후우...."
달리는 마차 안에서 루페르트는 황제의 체통도 잊고 축 늘어진 채 질린 얼굴로 자신의 손을 몇 번이고 손수건으로 닦아 냈다.
닦아 내는 것도 모자라 냄새를 맡고 장미수까지 뿌려서 손을 씻어 댔다.
"젠장."
노곤한 황제의 눈이 흘러가는 차창의 풍경을 담았다.
여전히 평화롭고 번영하는 제국의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전혀 다른 풍경을 본 적이 있다.
대지가 불타고 도처에 헐벗고 굶주린 여인들의 흐느낌이 들려오고 시체 냄새가 밀려오던 종말의 풍경이.
적어도 지금까지는 잘해 오고 있다.
'내전만 막으면 제국이 멸망할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다.
피리스다.
그녀는 과연 어떤 운명을 맞이할까.
더 이상의 회귀는 안 된다.
여신이 말했다.
다른 핑계를 대고 그녀를 살리려는 시도 따윈 생각지도 않는다.
이제 피리스의 운명은 온전히 그녀에게 달려 있다.
"...."
그녀가 살아남는 것이 루페르트의 바람이다.
하지만 그녀가 죽는다고 해서 루페르트는 회귀를 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답이 나올 것이다.
피리스는 울피아나를 만나고 돌아오는 날에 꼭 자신의 부고를 알렸으니.
미궁에 돌아가면 결과가 나올 것이다.
무거운 마음을 안고 루페르트는 자신의 처소로 돌아갔다.
"폐하."
시종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
"폐하가 아는 마법사 한 명이...."
"죽은 건가?"
짙은 그늘이 루페르트의 얼굴에 드리워졌다.
"아, 아니요. 서찰 하나를 전해 달라고...."
"그래?!"
루페르트가 마치 빼앗듯이 시종에게서 서찰을 낚아챘다.
그 서찰엔 울피나아의 역한 인공적인 향수의 향기와는 또 다른 기분 좋은 들꽃의 향기가 났다.
가슴이 뛰는 걸 느끼며 루페르트는 그 서찰을 펼쳤다.
[ 고마워요. 폐하. 저 더 앞으로 갈 수 있을 거 같아요.
피리스 홀리바레스로부터. ]
"...."
사람의 목을 매이게 하는 데엔 구구절절한 미사여구도 장문의 설명도 필요 없었다.
짧은 문장만으로 루페르트는 오랫동안 퇴색하고 있던 감정과 감각이 되살아나는 걸 느꼈다.
어느 순간부터 흑백으로 보였던 황궁의 모습에 총천연색이 돌아오는 듯한 부활 또한 감지했다.
살아나고 있었다.
죽어 가던 황제가.
"살아났군."
루페르트의 눈동자에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시종이 의아한 얼굴로 보지만 그가 루페르트를 이해하는 일은 영원히 없을 것이다.
그날 루페르트는 오랜만에 자신의 방에서 홀로 술잔을 기울였다.
"후우...."
회귀라는 권능에 대해 생각했다.
그 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회귀에도 그늘이 있었다.
인연의 족쇄라는.
사랑하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 시간을 몇 번이나 돌려야 했던가.
이제는 쉽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여신이 어려움을 말했다.
각오해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영원히 잃을 각오를.
루페르트는 방에 걸린 초상화를 보았다.
철혈대제의 것으로 알려진 그림이다.
그 그림은 시시각각 변해 보였다.
이제는 다르다.
그 안에 담긴 노인은 자신을 닮아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그 노인을 자신이 닮았는지도 모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