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놀랍군."
레벤호스트가 흐뭇한 눈으로 검을 든 하루가 다르게 키가 커 가는 소녀를 응시했다.
"황제의 사냥꾼을 한 번에 처리하다니."
평민의 복장을 한 마를로네는 고개를 숙인 채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답했다.
"과찬의 말씀입니다."
공을 세운 것 치고는 그녀의 얼굴은 지나칠 정도로 파리했고 표정 또한 좋지 않았다.
레벤호스트는 그녀의 마음이 좋지 않다는 걸 느꼈지만 그는 하급자의 기분을 헤아리는 사람이 아니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건 무슨 곤란을 겪고 있건, 이쪽은 군주이고 저쪽은 그 아래의 사람이다.
권신이든 한 번 쓰고 버릴 장기 말이든 그들의 행동은 제국을 움직이는 자신의 행동에 비하면 그리 중요한 게 아니다.
큰 사람이 큰일을 한다.
큰 사람의 뜻이 곧 대의다.
레벤호스트는 마를로네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녀를 돌려보냈다.
"포상으로 금화를 내리겠네."
레벤호스트와 달리 그의 조언자 마르틴 보엠은 그의 주군보다는 타인의 마음을 읽는 데 능했다.
하지만 초록은 동색이다.
"그대 조부의 치료에 보탬이 됐으면 좋겠군."
한마디 격려를 보태고 선제후의 조언자는 선제후를 따라 사라졌다.
"...."
남겨진 마를로네는 차갑게 식은 눈빛으로 높은 천정을 원망스러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이게 다 그 슈발츠마인 인간 때문이야.'
한스 징펠만을 살해한 건 단지 실력만이 아니다.
그는 백발백중의 명수이며 우스꽝스러운 외견과 달리 사려 깊고 심계가 깊은 사람이다.
그녀가 한스 징펠만을 죽일 수 있었던 건 정보가 있어서다.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전혀 알고 싶지 않았던 사실을 알게 됐다.
'나, 한스 아저씨 조금은 사람으로서 좋아했다고. 그 집단에서 그나마 인간다운 사람이었는데....'
한스 징펠만에겐 기와 루라는 쌍둥이 도제가 있다.
한스 징펠만은 그들의 부모를 죽였다.
부모를 죽이고 그 자식을 거둔 것이다.
그 부모가 죄인인 건 맞다.
무슨 죄인지는 모르겠지만 불과 철의 형제단이라는 사조직의 규율을 위반했던 것 같다.
그런데 그게 죽어야 할 짓이었을까.
기와 루는 그의 부친이 겨우 형제단의 오래된 지식 하나를 판 것뿐이라고 주장했다.
마를로네는 기술에 대해 무지하다.
고작 뭔가 만드는 잡기 하나가 사람을 죽일 사유가 된다는 걸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것보다 그녀의 마음을 흔든 건 자신이 죽인 자의 자식을 거둬 도제로 삼았다는 것이다.
이 세계에서 도제라는 건 노예의 또 다른 표현이다.
마스터가 인정해 줄 때까지 도제는 그의 충실한 수족이 되어야 한다.
부모를 죽인 살인자에게 봉사하라니.
"그 사람이 몹쓸 짓은 안 하던?"
죄책감을 덜기 위해 마를로네는 자신을 찾아온 쌍둥이 남매에게 한스 징펠만의 죄책을 물었다.
없었다.
전혀 없었다.
하지만 쌍둥이 남매에겐 그런 건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그들은 죽은 부모를 사랑하고 있었다.
"언니가 돕지 않으면 선제후가 죽을 거예요. 스승님은 이미 선제후를 죽일 만반의 준비를 갖췄으니까요."
"마를로네 님이 움직여 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계속해서 그분의 도제로 살며 그분이 마를로네 님의 고용주를 죽이는 걸 도울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도 큰마음을 먹고 부탁을 드리는 겁니다. 마를로네 님 정도 되는 친분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우리 스승님은 결코 빈틈을 드러내지 않으려 하니까요. 아니, 어쩌면."
기가 창백한 얼굴에 미세한 의문을 띄웠다.
"이미 드러내고 있는지도 모르겠네요."
"무슨 뜻이지?"
"글쎄요. 우리 스승님도 지쳤나 보죠."
기의 얼굴에 끔찍한 공포가 미세하게 흐르고 지나갔다.
멀리서 보았지만, 그들도 보았다.
렌타이어마르크에 나타난 거인을.
그 거인이 반쯤 꾸며 낸 이야기로 변하고 있는 이유는 별 게 아니다.
모두가 잊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차라리 없었던 일로 삼아 버리는 게 정신 건강에 좋아서다.
그걸 자꾸 생각해 버리면 자기도 모르게 미쳐 버릴지도 모르니까.
"멀리서 본 우리조차 그날의 악몽이 잊히지 않는데, 스승님은 오죽했겠어요? 안 그래도 마음이 약한 사람인데."
"그럼에도 우리 부모님을 한마디 말도 없이 도살하긴 했지만요."
덕분에 한스 징펠만을 죽일 수 있었다.
그녀의 조부는 이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마를로네가 벌어다 준 돈으로 기이한 무당과 주술사를 불러 그의 팔을 고치려고 하고 있었다.
그의 손엔 술병이 들려 있었다.
자신을 키워 주면서 좀처럼 술을 하지 않던 그는 이제 항상 얼굴이 벌겋게 익어 있다.
"...."
모든 것이 무너지는 걸 느끼며 마를로네는 두 눈을 감았다.
차라리, 이 모든 것이 꿈이었으면.
"뭘 그리 고민하는 표정을 짓고 있나?"
느닷없는 목소리에 마를로네는 자기도 모르게 검을 뽑으며 소리가 난 방향을 노려보았다.
마를로네의 초록빛 눈동자에 의아한 감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이 사람은?'
틀림없다.
안개처럼 소리 없이 나타나 루페르트와 높은 빈도로 단둘이서 이야기를 하던 흐릿한 관상의 노인이었다.
123화 31. 지긋지긋한 것 (3)
"그, 그쪽은? 황제의...."
"안녕하신가? 부르봉 억양의 아가씨."
그 사내가 위압적인 체구를 구부려 정중하게 인사했다.
"티그리트라고 하네."
'티, 티그리트?!'
제국인의 정체성이 모호하지만 마를로네도 제국의 건국자의 이름 정도는 알고 있다.
'노예제 티그리트? 그 이름은 함부로 쓸 수 없는 이름 아니었어?'
권위적인 동방 제국처럼 모든 왕의 이름을 피휘(避諱)라는 이름으로 사용이 금지되는 건 아니지만 제국에서도 함부로 쓸 수 없는 이름들은 몇 개 있었다.
이를테면 제국 성인의 존함이라든지, 신의 명칭이라든지.
티그리트라는 이름은 가장 대표적인 이름으로 써서는 아니 될 '이름'이다.
"티그리트 님이 왜 저를 찾아오신 건가요?"
당황하긴 했지만, 그녀는 오랫동안 권력자의 변덕을 맞춰 온 살인자답게 조심스럽게 자신을 보호하며 의도를 물었다.
"그건."
순간 마를로네는 보았다.
티그리트라는 이름을 댄 사내의 한쪽 눈에 불길한 초록색 불길이 일렁거리는걸.
'뭐, 뭐야?! 마법? 하지만 마법의 냄새는 나지 않는데?'
그녀가 도펠죌트너의 숨겨진 권능을 발동했다.
그건 피안을 보고자 하는 어두운 결심을 하고 세상을 다시 본다는 마음으로 사물을 다시 확인할 때다.
그녀는 죽음을 본다.
'?'
마를로네의 몸이 그녀의 의지와 무관하게 휘청거렸다.
'뭐, 뭐야. 이 사람.'
한 인간의 몸에 이토록 많은 죽음이 달라붙을 수 있는 걸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죽음을 검은 얼룩으로 보는 그녀의 시야 속에서 티그리트는 칠흑이다.
단 한 군데, 눈동자에 아른거리는 초록색 불길을 제외하면.
마를로네의 몸이 의지와 관계없이 격하게 떨렸다.
'뭐, 뭐야. 이 사람. 아니, 사람이긴 해? 대체 무슨 짓을 하면, 아니 어떻게 살아야 저렇게까지 많은 사람을....'
"내 선물을 하나 주지."
그가 목걸이 하나를 내밀었다.
목걸이를 장식하는 건 금도 은도 진주조차 아닌 깨진 조개 조각 같은 석회류의 파편이었다.
파편 한 면에 눌어붙은 따개비의 흔적이 원래 모습을 짐작게 했다.
'소라?'
부르봉의 바닷가에서 꽤 어린 시간을 보냈기에 그걸 알아보는 건 마를로네에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이걸 몸에 지니고 있게."
"이걸요?"
"그래."
"이런 예쁘지도 않고 기분 나쁘기만 한 걸 왜 몸에 지녀야 하나요?"
"가지고 있어 보게. 어쩌면 이 세상의 비밀을 조금은 알게 될지도 모를 테니."
티그리트라고 이름을 밝힌 사내가 돌아섰다.
마를로네는 시야를 현실로 향하며 그의 뒷모습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안개 같기도 하고 허무로 이루어진 것 같기도 한 그 미지의 사내는 어느 순간 유령처럼 그녀의 눈에서 자취를 감췄다.
* * *
여름에 접어드는 계절이었다.
제국의 여름은 건조하지만, 햇살은 뜨겁다.
루페르트는 인부들이 한창 뚝딱거리며 짓고 있는 여신의 새로운 신전의 완성도를 눈으로 확인했다.
꽤 걸릴 것이다.
3년에서 4년 정도?
그 정도로 충분히 공사 기간을 줄 것이다.
저 앞의 테타우 대성당만 해도 완공까지 120년이 걸렸다.
그것도 최고의 석공과 석수를 동원했는데도 그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대성당에 비하면 조촐한 신전이라고 하지만 루페르트는 여신을 위한 전당을 날림으로 짓고 싶진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하나.'
마를로네가 떠나고 그 마를로네가 한스 징펠만을 죽였다.
둘 다 나팔을 부는 것만으로 돌릴 수 있다.
하지만 나팔을 부는 것만으로 부족하다는 걸 루페르트는 잘 알고 있다.
레벤호스트의 폭주를 막아야 한다.
그 첫 단계가 마르틴 보엠이라는 자를 죽이는 것이다.
'마를로네를 내 곁에 둔다면 레벤호스트의 호위가 가벼워질까?'
그건 아닐 것이다.
도펠죌트너를 이용한 건 안젤리나만이 아니었다.
여간한 권력자는 암암리에 갈 곳 없는 초인 병사들을 해결사로 부려 먹고 있었다.
한스 징펠만을 죽인 건 마를로네지만, 그녀가 없었더라도 다른 자가 그 역할을 맡았을 것이다.
'암살조차 쉬운 일이 아니군.'
루페르트는 크리오네를 떠올렸다.
그 터무니없는 암살자에게 너무 쉽게 당해서 암살이라는 것을 우습게 생각한 모양이다.
사람의 판단은 경험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니까.
암살이라는 치졸한 수를 결정한 것도 암살자를 보낸 것도 그 크리오네가 남겨 준 마음의 상처에서 비롯된 것이다.
'결국 시간을 돌려야 하는 건가.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해 볼 때 지금 상황에서 의미 있는 변화를 이끌기 위해서는 마르틴 보엠을 죽이는 것 말고는 별 뾰족한 수는 보이지 않는다.'
루페르트는 잘 알고 있다.
암살이라는 극단적인 수가 없는 이상 레벤호스트는 마르틴 보엠 목사의 안배에 따라 내전을 향한 길을 차근차근 다질 것이고 루페르트 또한 총력을 기울여 그에 맞설 준비를 하게 될 테니까.
그 준비라는 건 결국 군비 증강과 동맹의 확보라는 해묵고 지긋지긋한 정치 공작으로 이어진다.
'각오한 바다. 그 진흙탕에 뛰어드는 건. 하지만 내 마음이, 내 마음이라는 게 버티지 못하는 모양이다.'
인내심이 눈에 띄게 약해졌다.
성급해졌고 때때로 화를 내는 일도 잦아졌다.
회귀 전 루페르트의 지위와 권력은 비할 바가 아니다.
제국은 물론이고 대륙의 운명마저 틀어쥔 진정한 황제와 꼭두각시는 같은 선상에 놓일 게 아니니.
하지만 그 성격은 너무나도 다르다.
과거엔 꼭두각시일지언정 성격은 유순하고 유쾌했으며 여유가 있었다.
적어도 테타우가 포위되기 전까진 여유가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매사에 신경질을 느끼고 매사 초조함과 지루함을 느낀다.
그 한스 징펠만조차 말을 끊고 사지로 보냈다.
남들이 말하는 걸 듣고 싶지 않다.
명령만 하고 싶고 결과만 보고 싶다.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시 돌려서 원하는 결과를 보고 싶다.
거기까지 생각이 이른 루페르트는 심각한 얼굴로 자신의 목에 걸고 있는 소라고둥을 보았다.
"...회귀."
금단의 단어를 입 밖에 냈다.
장점만 있다고 생각했다.
무한의 힘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 그 앞에 나타난 회귀라는 권능은 이 세상 모든 것이 그러하듯 명과 암을 뚜렷하게 간직하고 있는 힘이었다.
리프니에는 그가 지치는 걸 걱정했다.
하지만 그건 그녀가 인간이 아닌 무한한 존재라서 그렇게 생각할 것이리라.
루페르트의 생각은 다르다.
회귀는 인간을 변하게 한다.
인간이 인간이 아닌 것으로.
어쩌면 거기서 비롯되는 사람의 변화가 여신의 눈엔 지친 것으로 보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메헨부르그의 야수."
자기도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루페르트는 소라고둥을 조금은 맥없는 모습으로 입에 물었다.
부우우우우우---
또 한 번의 회귀가 시작됐다.
아무런 감흥도 흥분도 없이, 그저 의무감으로.
* * *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다."
시점은 베르크 란이 이탈하기 전의 일이다.
그러니까 순결 서약을 끝내고 레벤호스트가 점점 위협적인 행보를 이어 나가던 시점.
어쩔 수가 없었다.
순결 서약은 그 자체로 루페르트의 거대한 행마 그 자체였으니.
다른 하나의 회귀 원점은 보다 앞에 있지만, 너무 앞이다.
제위가 결정된 후, 두 개의 왕관을 쓰기 전날이다.
그때부터 돌아가 뭔가 다시 시작한다는 건 어지간한 문제가 발견되지 않는 이상 하지 않을 것이다.
같은 상황, 같은 대화, 같은 절망과 감정을 반복한다는 게 이제는 견디기 어려운 무언가로 변했다.
똑같은 일을 한다고 해서 더 잘할 것 같지 않다.
당장 프리드리히 마티아스를 또 어떻게 상대한단 말인가.
그 가죽 벗기는 자를 또 어떻게 마주하고 또 어떻게 구슬리고 또 어떻게 그 피의 거인 앞에 다시 서야 한단 말인가.
단지 상상하는 것만으로 등을 젖게 만드는 악의 우상을 기억의 한구석으로 치워 버리며 루페르트는 중신들에게 담판을 요구했다.
"베르크 란은 장군직을 원했다. 하지만 쉽진 않겠지. 선제의 명을 고스란히 어기는 것이니. 해서 그대들의 의견을 묻고자 한다."
마를로네를 옆에 두려면 베르크 란을 잡아 둬야 한다.
그가 원하는 건 장군직이다.
실제로 그는 철혈대제 시절에 명예직에 가까운 장군직을 맡았었다.
도펠죌트너들의 장군이라고 할까.
철혈대제를 위해 벌인 수많은 살육과 모험에 대한 대가다.
지금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그의 아들이 부관을 맡았다고 한다.
뭇 여성을 설레게 하는 미남이었고, 자신의 부친의 고향이기도 한 부르봉 출신의 하급 귀족 여성과 결혼을 했다고 한다.
아이는 두 명을 낳았는데, 그중 하나가 마를로네다.
다른 하나는 사내아이였는데 불행하게도 철혈대제가 도펠죌트너 박해령을 내린 이후 궁핍한 삶에 노출되어 오래 살지 못하고 죽었다고 한다.
베르크 란의 아내의 최후는 더 끔찍한데 그녀는 구빈원에 들어갔고, 죽음만을 기다리는 구빈원의 사람처럼 굶주림과 아우성 속에서 신음하며 가족을 기다리다 결국 홀로 지켜보는 이 없이 손을 뻗은 자세로, 눈을 부릅뜬 채 죽었다고 한다.
'왜 그토록 마를로네가 우리를 증오하는지 알 것 같군. 증오와 별개로 그들은 우리가 잡아 둘 필요가 있는 사람들이다.'
이제 중신들의 의견을 기다린다.
쉽지 않다는 건 각오한 바다.
아니나 다를까 부정적인 의견이 주를 이루었다.
완고한 베르너는 당연히 반대했고, 외교와 균형을 중시하는 오토 브라에도 신중한 반대론을 펼쳤다.
그나마 믿었던 요하네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 사람에 대한 편애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그는 날 위해 싸우다 그런 모습이 되었고 이제 살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런데도 작은 명예의 한 줌조차 그에게 주지 못한단 말인가?"
루페르트의 시선을 마주 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제국이라는 나라의 한계다.
"...그의 신분은 너무나도 낮습니다."
군주 - 귀족과 성직자 - 재산이 많은 자 - 평범한 자 - 하찮은 자.
지나치게 단순화한 감이 있지만, 제국의 실제적인 계급은 이런 식으로 나뉜다.
각 범주는 저마다 용인되는 한계가 있는데 그 한계는 하찮은 계급으로 갈수록 가혹해지고 엄중해진다.
가령 재산이 많은 자의 대표를 들라면 루페르트가 위버하임 장원에 있을 때 그를 죽이려 들었던 하녀와 부친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평민이지만 돈으로 명예로운 직을 샀고 그 직함으로 제국의 밤 행사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조차도 용인되기 어려운 일이지만 그들이 귀족이라는 계급과 가깝기에 벌어진 현상이다.
하지만 평범한 자가 그런 영광을 얻는 건 어려운 일이고, 사회의 관심 밖에 놓인 하찮은 자들은 꿈조차 꿀 수 없는 일이다.
그 이유는 귀족은 숫자가 적고 재산이 많은 자도 귀족에 비해 숫자가 적기 때문이다.
그러나 평범한 자는 어디에나 있고, 그 숫자가 너무나도 많다.
대다수를 차지하는 평범한 자보다 못한 하찮은 자가 그 평범한 자를 뛰어넘는 건 평범한 자들로서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무언가다.
"당장 선제께서 그들에게 걸인이라는 지위를 하사했습니다. 걸인이 장군이 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베르너가 침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들은 인정하겠지만, 테타우의 시민 대다수는 이를 인정하지 않을 겁니다. 시골의 농부들도 인정하지 않을 겁니다. 빨간 명찰을 달고 협박, 구걸이나 하는 무리 중에 장군이라니요? 아무리 명예직이라고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아니 되는 일입니다."
중신들의 의견은 확고했다.
다만 요하네스가 그답게 대담한 의견을 제시했다.
"선제의 칙령을 폐기한다면 이야기가 다를지도 모르지요."
124화 31. 지긋지긋한 것 (4)
선제의 칙령을 폐기한다는 건 선제에게 도전하는 행위와 같다.
철혈대제가 제위에서 물러난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제국 곳곳에서는 여전히 그를 기리는 사람이 많다.
철혈대제로 인해 고통받은 사람도 적지 않겠지만, 그의 강력한 치세 중에 이득을 가장 많이 본 사람들은 평범한 사람들이었으니까.
루페르트가 속한 슈발츠마인 쪽에 철혈대제의 지지자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게다가 도펠죌트너라는 집단은 이미 저물어 가고 스러지는 존재.
그들이 실제로 힘이 있고 이득을 줄 수 있다면 그들을 돕는 것도 분명 한 가지 선택지일 수도 있겠지만 늙어 가고 잊히는 그들의 권리를 보장한다고 해서 군주나 귀족 중에 반기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정책은 지지를 필요로 한다.
황제의 권위로 밀어붙이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권위의 남용은 역으로 황제의 권력을 약화하고 무너뜨리는 단초가 된다.
"선제의 칙령을 폐기한다라...."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니다.
하지만 그 위험성도 잘 알고 있다.
그 실익을 판단하려는 것도 중신들을 불러 모은 이유 중 하나다.
결과는 예상 그대로였다.
아무런 실익이 없음.
미래를 알지 못하는 그들은 베르크 란이 루페르트에게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 이해조차 하지 못했다.
"그가 폐하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 건 맞습니다. 하지만 그 덕에 그는 빨간 명찰을 뗐고, 명예로운 제국 시민 중 한 명으로 구걸할 필요가 없는 평생의 안락함을 얻었습니다. 그 정도면 그에게 충분한 은전을 베푼 것이 아닐까요?"
오토 브라에의 말은 제국 기득권이 생각하는 전형을 제시했다.
할 만큼 해 줬다는 소리다.
오히려 그 이상 특혜를 베푸는 건 반발을 살 여지가 있다고 베르너가 덧붙였다.
'역시, 안 되는 건가.'
칙령을 폐기하는 건 너무나도 위험하다.
혹 떼려다 더 많은 혹을 붙이는 행위다.
안젤리나가 마련해 준 신하들은 대단히 유능한 사람들이었지만 그들로서도 루페르트는 완벽하게 마음에 드는 방안을 찾을 수 없었다.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루페르트가 하려는 일은 단지 정치적인 문제가 아니라 개인적인 문제, 나아가서는 리프니에라는 루페르트의 가장 중요한 것과도 연결된 문제니까.
루페르트가 골머리를 앓고 있을 때 대주교가 찾아온 건 루페르트의 심기를 대단하게 불쾌하게 했지만, 의외로 그는 괜찮은 방안을 가지고 있었다.
"베르크 란? 아, 선제가 쓰던 그 도펠죌트너 말이군요. 그가 뭐, 장군직을 바란답니까? 그가 뭘 요구하는지는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목마른 자에게 반드시 물을 줄 필요는 없는 법입니다."
"물을 줄 필요는 없다고요?"
"수분이 많은 과일을 제공하는 것도 방법일 수도 있습니다. 최고의 방법은 물에 젖은 솜으로 입술을 간신히 축이게 하는 것이지요."
"그건 무슨 이야기입니까?"
아카이아 대주교가 노회한 눈을 번득이며 말을 이었다.
"신이 인간을 시험하는 것처럼, 그에게 움직일 힘만을 주는 겁니다. 스스로 물을 찾아 나설 수 있도록."
"호오."
루페르트는 좋지 않은 예감을 받았다.
아마 아카이아 대주교 본인이 걸어왔을 음험하고 비열한 모략에 관한 이야기리라.
하지만 그는 평생을 성공해 왔다.
마지막에 시대를 잘못 타고나 소리 없이 죽었을 뿐이다.
전성기의 그는 경쟁자를 모조리 몰아내고 철권 통치를 휘두르며 저 크로지우스마저 불태워 죽였던 책략이자 행동가다.
세속 선제후는 그들의 혈통을 내세우지만, 성직 선제후가 내세울 건 오직 자신의 능력, 특히 처신과 책략뿐이다.
그렇기에 아카이아 대주교의 말은 루페르트의 혐오에도 불구하고 새겨들을 이유가 있다.
"그가 물을 찾다 죽게 내버려 두는 게 최고의 선택지겠지요."
"그건 뭔가 대주교님과 맞지 않는 듯한 느낌이 드는군요."
"잔혹하다고 볼 수 있겠지요. 하지만 저는 생각합니다. 진리를 발견하고 죽은 사람보다 진리를 찾으려다 죽는 사람이 더 신성에 더 가까이 근접한 게 아닐까 하는."
"그런가요?"
"우리가 갈구하던 것이 막상 얻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경우가 많지요. 성직자의 신분인 제가 진리에 대해 폄하하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지만 사람의 문제입니다. 줄 수 없는 걸 갈구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영원히 갈구하는 과정을 걷게 하는 게 낫지 않나, 그런 생각에서 말해 본 것이지요."
"영원히 갈구하는 상태를 유지한다...."
잔혹한 이야기다.
사람이 사람의 운명을 갖고 논다는 이야기 아닌가.
그러나 대주교의 말은 잔혹한 만큼 루페르트의 마음을 강하게 파고들었다.
안젤리나의 얼굴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지금보다 작고 앳된 마를로네의 투정도 귓가에 속삭였다.
'그래, 그런 거였나.'
안젤리나는 그 박한 대접에도 불구하고 베르크 란과 마를로네를 끝까지 잡아 두었다.
처음엔 그녀의 대황후라는 신분이 그걸 가능케 했다고 생각했지만 지나고 보니 베르크 란 조손을 잡아 둔 건 그들의 희망을 담보 잡았기 때문이다.
즉, 희망을 가지게 한 상태에서 보상을 주지 않고 끝없는 사역에 내몰았다.
"인간은 하나를 얻으면 둘, 더러는 셋을 바라는 법입니다. 폐하. 그 점을 유념하시길."
아카이아 대주교는 이어서 본론을 이야기했다.
루페르트에겐 아무래도 좋은 시시껄렁한 이야기로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진정한 신의 이름의 세 번째 음절을 찾을 단서를 발견했다는 소리다.
프, 리에 이른 세 번째 음절의 후보는 '에'였다.
"프. 리. 에."
대주교가 천진난만한 미소를 머금었다.
"점점 윤곽이 갖춰지는군요."
루페르트는 그 이름이 전부터 느꼈지만, 자신이 아주 잘 아는 여신과 오싹할 정도로 닮아 가는 걸 느꼈다.
하지만 그건 중요치 않은 문제다.
지금 중요한 건 베르크 란의 마음을 돌리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그에게 물에 젖은 솜으로 입술을 축이게 할 수 있을까요?"
이런 사람을 가지고 노는 책략은 그의 중신에게 구할 의견이 아니다.
그들은 지나칠 정도로 정치적이고 현학적인 지도와 군주로 이루어진 표만을 본다.
보다 인간을 잘 아는 건 대주교다.
"프. 리. 에. 네. 그렇지요. 제가 듣기로 베르크 란은 결투로 중상을 입고 불구의 몸이 되었다 합니다."
"고칠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방법이 아주 없는 건 아닙니다."
"그런가요?"
"제가 잘 아는 마녀가 있지요."
대주교가 음험하게 미소 지으며 눈치를 살폈다.
루페르트는 입속이 바짝 마르는 경멸을 느꼈다.
'이 인간. 그렇게 많은 사람을 이단으로 불태워 죽이고도 살려 둔 이단이 있단 말인가.'
마녀는 무조건 죽여야 하는 대상이다.
용서는 없었다.
그 종교에 관대하다는 저지대 연방에서도 마녀와 관련된 사안은 제국의 이단 심문관까지 초빙해서 종교재판을 열어 고문하고 불태워 죽일 정도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마녀는 '악마'를 숭배하기 때문이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이름을 말해서도 안 되고, 아직 이름이 지어지지 않은 곧 태어날 악마를 숭배하는 자들.
그들의 기원은 룸 제국에서부터 이어진 종말론자들부터 비롯되며 엄청난 박해를 당하고도 끝까지 살아남아 루페르트가 보았던 멸망에 일조하는 데 공헌하기도 했다.
테타우를 습격한 융커스 베샤문트는 악마에게 영혼을 판 자다.
그 악마는 마녀들이 섬기는 악마를 뜻한다.
"그 마녀는 비록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있지만, 그 마녀의 치료술은 비할 바가 없지요. 죽은 사람을 살려내진 못하지만 죽어 가는 사람을 살릴 수도 있습니다. 앉은뱅이를 일어서게 하는 건 물론이고 백내장에 걸린 맹인에게 빛을 되찾아 주는 것도 보았습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백내장은 고칠 수 없는 불치병이다.
앉은뱅이까지 가지 않더라도.
당장 저 제국 성인 판텔레온조차도 백내장을 못 이겨 내지 않았던가.
명색이 제국 성인이라는 작자가 말이다.
"그 마녀를 구금한 곳을 알고 있습니다."
'이 늙은이. 보나 마나 그 마녀가 쓸모가 있으니 자기 지배하에 두고, 필요할 때마다 부려 먹었던 모양이군.'
대단히 대주교다운 일이지만 대주교의 의견은 대단히 매력적인 의견이다.
'그래, 베르크 란의 몸을 회복시켜 주는 것으로 그에게 희망을 줄 수 있다. 그에게 더 많은 일을 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내 업적과 권력이 선제에 비할 바가 아니지만, 레벤호스트를 이겨 내고 내전을 막아 낸다면 그때는 세상의 평가가 달라질지도 모르겠지.'
"좋습니다. 역시 제국의 대들보다운 훌륭한 의견이십니다."
루페르트는 절반의 진심으로 대주교를 칭찬했다.
'이런 인간도 필요한 법이다.'
황제는 제국 전체를 대표하는 자다.
제국엔 빛만이 있는 게 아니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있는 법.
음험한 것, 비열한 것, 곰팡이와 균류를 연상케 하는 것.
그런 것들도 제국의 일부다.
루페르트는 그렇게 자신을 합리화하며 대주교에게 마녀에 대한 정보를 물었다.
마녀는 슈발츠마인에 있었다.
테타우를 나서면 조금이면 거리가 닿을 정도로 가까운.
그 마녀가 사는 마을은 공교롭게도 루페르트의 장원이었던 위버하임과 놀랄 정도로 가까이 있었다.
* * *
"정말인가요? 할아버지를 고칠 수 있는 사람이 계신다는 게?"
마를로네의 표정이 밝고 기쁨에 넘칠수록 루페르트의 마음엔 그늘이 졌다.
"그렇다. 우연찮게 괜찮은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 어떤 사람인가요?"
기쁨을 드러내면서도 마를로네는 약간의 경계를 드러냈다.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너무나 많은 거짓을 보았고 너무나 많이 휘둘리는 인생을 살았다.
특히 권력자의 약속에 많은 상처를 받은 그녀가 루페르트의 말을 의심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안젤리나 님.'
루페르트는 자신의 정치적 스승이자 부모와 다를 바 없는 그녀를 생각했다.
'결국 저도 당신과 비슷한 길을 걸으려나 봅니다.'
루페르트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마를로네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마녀란다."
"마, 마녀요?!"
역시나 소스라치게 놀란다.
도펠죌트너가 모든 곳에서 천대받는 천덕꾸러기라면 마녀는 아예 제국에 발조차 못 붙이는 존재다.
굳이 비교하자면 렌타이어마르크의 강령술사보다도 훨씬 아래로 아예 발각당하는 즉시 고문당하고 불태워지는 범죄자들이다.
하지만 그렇게 마를로네는 믿을 수 있다.
박해받는 사람들에겐 나름의 동료 의식이 있으니까.
"누구에게도 말하면 아니 된다. 베르크 란을 고칠 수 있는 건 그 사람뿐이니까."
"아, 알겠어요!"
마차 한 대가 고즈넉한 교외를 느릿하게 갔다.
마차에 탄 건 3명뿐이다.
베르크 란과 마를로네 그리고 루페르트.
모처럼 두 조손과의 조촐한 여행길에서 루페르트는 문득 과거의, 지금보다 훨씬 더 밝았고 의지가 있었던 자신을 생각했다.
가령 리히트 보덴으로 향할 때라든가.
그때는 모두 좀 더 어렸다.
루페르트의 턱에 수염이 나지 않았으니.
지금은 매일 면도해야 한다.
수염이 많이 나고 빨리 자라는 체질이다.
베르크 란은 전보다 좀 더 늙어 보였다.
어쩌면 불구라는 마음의 병이 그에게 더 빠른 노화를 줬을지도 모를 일이다.
마를로네는 아름답게 자라났지만 만연한 마음의 수심이 그녀를 나이보다 성숙하게 보이게 만들었다.
침묵 속에서 마차가 한 오두막 앞에 도착했다.
오두막 안엔 넓은 차양을 쓴 추악한 노파가 가마솥에서 부글거리는 녹색의 액체를 끓이고 있었다.
"읔!"
베르크 란이 그답지 않게 경악을 보였다.
"마, 마녀!"
125화 32. 마녀의 비약 (1)
대부분의 하층민처럼 베르크 란도 미신을 믿었다.
현재 제국의 농촌에선 빨간 명찰을 단 구걸하는 자들이 미신적 공포의 대상이 되었지만, 베르크 란이 어렸을 때 부르봉의 농촌에서는 마녀에 대한 공포가 밤의 난롯가를 지배했다.
나이가 지긋하다기보다는 노화가 빠르게 찾아온 할머니들이 손자와 손녀를 안고 마녀에 대한 악담을 아이들에게 주입했고, 그 아이들은 커서도 마녀라는 존재에 대한 공포심을 키워 나갔다.
종교 재판이 횡행하는 시대에 그런 교육은 바람직했다.
주입 받은 공포심 덕분에 마녀에 적개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그 결과 마녀가 재판을 받을 때 연루될 일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 어릴 때의 공포심이 초로의 나이까지 연장되리라고는 베르크 란도 생각하지 못했다.
'마녀!'
"할아버지. 갑자기 왜 그래?"
베르크 란만큼이나 놀란 건 마를로네였다.
조부가 그렇게 놀란 건 처음 보았다.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베르크 란을 루페르트에게 무례에 대한 용서를 눈빛과 표정으로 구했다.
루페르트는 빙그레 웃어 보인 후 마녀를 돌아보았다.
"클라인하르트라는 분의 소개를 받고 왔다."
루페르트가 서찰 하나를 마녀에게 내밀었다.
마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는 글을 모른답니다. 하지만 이 문장은 눈에 익군요. 게다가 여기를 알고 찾아오셨다는 건 그분의 허락을 받았다는 것이겠지요."
"글도 모르는데 약을 만든단 말인가?"
"우리의 지식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지요. 입에서 입으로 전달된 지식이 진정한 지식입니다. 문자라는 건 진정한 의미를 곡해하고 오해의 여지를 만드니까요."
"이자를 고칠 약을 만들 수 있나?"
루페르트는 베르크 란을 돌아보았다.
베르크 란은 여전히 마녀가 못마땅한 눈치다.
어쩌면 저 마녀가 어릴 적 난롯가 옆에서 생각하던 마녀와 지나치게 일치해서 베르크 란의 반감을 더 키웠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강한 사람이다.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 또한.
자신에게 필요한 게 뭔지도 알고 있다.
그는 천천히 절뚝거리는 걸음으로 자신의 불편한 팔과 다리를 마녀에게 보였다.
마녀가 베르크 란의 팔을 덥석 잡았다.
베르크 란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지만 오래가진 않았다.
그의 손녀가, 하나밖에 없는 손녀가 그의 멀쩡한 손을 잡아 주었기 때문이다.
'마리.'
베르크 란의 눈동자에 일말의 죄책감이 지나고 갔다.
마를로네는 그 사실을 조금도 알지 못한 채 그저 걱정하는 눈빛으로 조부를 올려다보았다.
"귀인께서 함께하고 계시잖아."
"오냐."
베르크 란이 허리를 폈다.
잠시 주춤거리던 황제의 챔피언은 죽음에 맞서던 과거처럼 마녀 앞에서도 의연하게 행동했다.
"마차에 깔리기라도 한 건가?"
마녀가 베르크 란을 보며 킬킬 웃으며 물었다.
추악하게 나고 싯누렇게 변색한 뻐드렁니를 보며 베르크 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결투의 상처요."
"도펠죌트너라고 했던가."
마녀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으며 베르크 란과 마를로네를 돌아보았다.
"명찰을 달고 있다고 들었는데. 피처럼 빨간."
"우리는 사면 받았소."
"그렇구만."
뒤이어 진찰이 시작됐다.
마녀는 베르크 란에게 팔을 구부려 보라고 요청하기도 했고, 손가락을 구부린 채 이런저런 각도로 움직여 볼 것도 요구했다.
베르크 란은 묵묵히 시키는 대로 했다.
"힘줄이 끊어졌고. 뼈도 이상하게 붙었고. 아주 심하게 당했구만. 살아난 게 용할 정도야."
"고칠 방법이 있는 거요?"
"딱히 어려운 건 아니야. 고통에 견딜 수 있는 악다구니만 있으면 돼."
마녀가 도구함을 뒤적거리더니 섬뜩한 사슬톱을 꺼내 왔다.
"팔을 가르고 끊어진 힘줄을 이어 붙일 거야. 겸사겸사 휘어진 뼈도 다시 부수고 이어 붙여야 하고."
마녀가 베르크 란을 음습한 녹색 눈동자로 노려보았다.
"어때? 참을 수 있겠나?"
"바로 시작하시오."
베르크 란이 즉답했다.
섬뜩한 도구에도 그는 일말의 공포도 내비치지 않았다.
마녀가 미소 지었다.
"처음엔 겁쟁이라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대담한 자군. 하긴, 겁많은 자가 죽은 신의 피를 마신다는 게 어떻게 보면 말이 안 되는 소리지만."
잠자코 있던 루페르트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방금 뭐라고 했나. 죽은 신의 피라고?"
"아, 귀하신 분이여. 성함도 모르고 신분도 모르지만, 그분이 직접 보낼 정도면 충분히 귀하신 분이겠지요."
마녀가 호들갑을 떨며 루페르트에게 고개를 넙죽 숙였다.
"묻는 말에나 대답해라. 마녀."
루페르트는 베르크 란 정도는 아니지만, 그도 마녀를 썩 좋아하지 않았다.
베르크 란처럼 난로 옆에서 이야기를 들은 적은 없지만, 목동 시절 동료들에게 마녀에 관한 좋지 않은 이야기를 들었고 황제 시절에도 마지막 마녀 재판을 직접 보기도 했다.
그 마녀들의 죄상은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을 정도로 끔찍했다.
살아 있는 아기를 부글거리는 가마솥에 집어넣는 인간들이니.
그러니 감정이 좋을 리가 없다.
"괜찮겠습니까?"
마녀가 히죽 웃었다.
"뭐가?"
"교회는 지식을 죄로 취급하지요. 안다는 것만으로 벌을 받을 수 있다는 소리지요."
마녀가 베르크 란과 마를로네를 돌아보았다.
루페르트뿐만 아니라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그녀가 말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벌을 받을 수 있다는 표현이다.
루페르트는 코웃음을 쳤다.
'누가 나를 벌하겠는가. 나를 벌할 수 있는 건 여신님뿐이다.'
"...이야기는 나중에 듣지. 먼저 이 사람을 치료해라."
"네. 귀하신 분이여."
마녀의 비웃는 듯한 흥얼거림을 들으며 루페르트는 오두막을 나섰다.
문이 닫히기 직전 마를로네의 손이 틈새를 잡았다.
그녀도 오두막을 나가고 싶은 눈치다.
황제와 한 소녀가 나란히 서서 익숙한 풍경을 바라보았다.
잘 정리된 농경지 너머 솟은 작은 숲과 언덕이 보인다.
저 숲은 위버하임 남작 영지에 딸린 사냥터이며 그 위에 솟은 초록색 언덕은 루페르트가 남작 시절에 종종 올라가 풀 속에 누워 휴식을 취하던 곳이다.
회귀 직후 맹렬하게 자신을 단련하며 자질을 키워 나가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아무 의미도 없는 수치 하나에 목숨을 걸었지. 결국 여신님 말대로 나는 사람을 쓰는 사람일 뿐인데. 그나저나 이렇게 가까운 곳에 저런 마녀가 살고 있었다니.'
기이한 일이지만 역으로 보면 이쪽이 합리적이리라.
신통한 의술을 가진 마녀를 숨겨 둔 대주교 입장에선 이왕이면 황궁 가까운 곳에 숨기는 쪽이 마녀의 의술을 보다 요긴하게 쓸 수 있다는 이야기니까.
외부인을 그다지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를 보니 아마 꽤 많은 손님을 받았던 모양.
마녀의 오두막 주위로는 아마 전부 대주교의 땅이리라.
개울을 끼고 양지바른 곳에 위치해 농사짓기 좋은 땅임에도 방대한 토지를 놀려 두고 있는 걸 보면 말이다.
"크아아아아악!"
오두막 안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마를로네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치료가 시작된 모양이군."
"알고 있어요."
"그런데 왜 놀라지?"
"그, 그게. 할아버지가 저렇게 어린아이처럼 고함지르는 건 처음 보거든요."
"그래?"
"아마. 마녀가 무서워서 그런 것일지도요."
마를로네가 루페르트를 올려다보았다.
"그런데 진짜 신통력 있는 거 맞을까요?"
"글쎄다. 하지만 대주교가 추천한 사람이다. 약간의 신통력 정도는 가지고 있겠지."
"그렇군요."
마를로네가 뒤로 팔짱을 낀 채 굴러다니는 돌멩이를 발끝으로 살살 굴렸다.
마름모꼴의 돌멩이가 끝으로 서나 싶더니 이내 다시 바닥에 납작하게 누웠다.
"...고마워요."
마를로네가 돌멩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작은 목소리지만 마를로네는 확실하게 감사를 표했다.
"할아버지도 저도 알고 있었어요. 이대로 할아버지의 상처가 영영 낫지 않으리라는걸. 그걸 알고 있었지만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았죠. 그런 거 있잖아요? 사형수들이 모인 감방에서 사형수들이 매일 수다를 떠는데 그들 중에 사형 집행에 관해 이야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왜 그럴까?"
"외면하고 싶은 심리가 아닐까요? 앞에 중대하고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으면."
"...확실히 그런 게 없잖아 있지."
루페르트는 한숨이 나오는 걸 억지로 참으며 대신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내 이야기를 듣는 기분이군.'
루돌프.
아니 이제는 티그리트라고 정체를 밝힌 과거의 황제.
그는 이제 루페르트의 적이다.
그가 말했다.
1년 뒤에 황제직을 돌려받겠다고.
어떻게, 무슨 수로 돌려받을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보통 사람이 아니다.
그 강철처럼 단단하고 사자처럼 강인한 육체에 찍힌 낙인은 전설 속에 등장하는 티그리트의 묘사와 일치했다.
진짜 티그리트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그가 사라진 후 루페르트는 그의 생각을 하지 않으려 했다.
회피하고 외면했다.
다른 문제, 이를테면 레벤호스트의 처리에 관한 문제에 노골적으로 집중했다.
방법이 없었다.
아니, 어떻게 해야 하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어떤 황제가 천 년 전의, 그것도 제국을 건국한 황제와 다툼을 벌이겠는가?
이건 여신에게도 상담할 수 없는 문제다.
티그리트의 이야기를 논한다는 건, 곧 루페르트가 여신을 배신한 이야기와 맞닿아 있으니까.
'어떻게, 어떻게 하란 말이야. 왜 자꾸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지? 대체 내가,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난 그저 제국이 망하지 않는 걸 바랐을 뿐인데.'
애써 외면했던 문제를 떠올리는 순간 루페르트의 온몸은 격정에 휩싸였다.
그토록 감정을 잘 다스리고 숨기는데 능했던 루페르트조차 온몸을 덜덜 떨고 자기도 모르게 눈가에 충혈될 정도의 눈물이 고일 정도로.
'어떻게 하란 말이냐....'
그 정도로 중대한 문제였다.
"폐, 폐하...?"
이렇게 되자 정작 놀란 건 마를로네였다.
'나, 무슨 해서는 안 될 이야기라도 한 거야?!'
"아아아아아악!!!"
오두막 안에서 베르크 란의 처참한 비명이 재차 들려왔다.
이번엔 아까보다 더 소름이 돋을 정도의 비명이다.
마녀의 비열한 웃음이 뒤를 이었다.
"키키키키키! 노병 주제에 엄살이 심하구만! 자 그럼 접합을 시작해 볼까?!"
루페르트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그는 자신이 감정에 휩쓸렸다는 걸 알아차렸고, 약간의 수치심과 함께 오랫동안 참아 왔던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저기."
마를로네가 손수건을 꺼냈다.
"닦아 드려도 될까요?"
그녀는 루페르트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뭐가 이 사람을 이토록 고통스럽게 한 걸까? 그때 그 거신? 아니, 그건 아닐 거야. 저 사람은 태연했어.'
루페르트는 마를로네를 가만히 보다 손을 내밀었다.
직접 닦겠다는 소리다.
마를로네가 손수건을 루페르트에게 건넸다.
루페르트는 손수건을 보았다.
전에 쓰던 걸레 같은 헝겊 조각과 달리 고급스러운 소재에 아름다운 자수가 박힌 상품이다.
손수건에서는 좋은 향기가 났다.
그런데.
"음?"
손수건으로 눈가를 닦던 루페르트가 흠칫 굳었다.
"폐, 폐하?!"
"이, 이거 어디서 받은 거지?"
"이 손수건요? 아, 울피아나 님이...."
루페르트의 눈에 더 많은 눈물이 맺혔다.
"폐하?!"
"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야."
루페르트는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나오는 눈물을 애써 참아 내며 속으로 생각했다.
'이 세상이 날 죽이려 드는군. 이 세상 전체가.'
마를로네가 호의로 내민 손수건에도 루페르트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소, 손수건이 마음에 안 드시나요?"
"아니야. 매우 마음에 들어. 정말 좋은 향기군."
"그런데 더 슬퍼 보이시는 거 같은데."
"기분 탓이겠지. 어쩌면 말이야."
루페르트는 멀리 보이는 그리운 언덕을 응시했다.
"아무 생각 없이 살던 과거를 그리워하는지도."
"과거."
"그래. 과거."
이제는 저기로 돌아갈 수 없다.
기다리는 건 지긋지긋한 것들과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은 것들.
즉, 감당하기 어려운 미래다.
"저기."
마를로네가 바닥을 보며 입을 열었다.
루페르트가 그녀를 응시하자 그녀가 말을 이었다.
"전에 목동 일을 하셨다고 말씀하셨죠?"
"그랬었지."
"거세한다던데요?"
"뭐?"
"아는 목동한테 물었더니 그게 목동의 주된 일 중 하나라고."
"갑자기 그건 왜 이야기하는 거지?"
"그냥 떠올라서요."
엉뚱하기 짝이 없는 마를로네의 태도에 루페르트는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거세 정말 좋아하는 모양이군. 오싹하게도.'
그뿐만은 아닌 모양이다.
마를로네가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진짜 목동 일 하신 거 맞으세요?"
"내가 왜 거짓말을 하겠나."
웃음기가 가시기 전에 오두막의 문이 열렸다.
거기엔 창백하지만 결연한 눈빛을 번득이는 베르크 란이 한 손을 부여잡은 채 당당하게 서 있었다.
베르크 란이 자신의 오른손을 움직여 보았다.
피로 물든 다리도 움직여 보였다.
그가 손가락을 움직일 때마다 붕대에서 피가 배어들었지만, 오므렸다 펴는 그의 손가락엔 과거의 무자비한 힘참이 느껴졌다.
전사가 고개를 숙였다.
"이제 다시 싸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26화 32. 마녀의 비약 (2)
"모처럼 보는 강인한 남자였습니다. 제 나이가 오십 살만 어렸어도 남편으로 삼고 싶을 정도요."
마녀의 이름은 베르타였다.
그 이름은 오직 단둘이 있을 때에만 부를 수 있었다.
대주교가 말했다.
그 이름을 절대 타인에게 알려 줘서는 안 된다고.
딱히 타인에게 알려 줄 생각은 없다.
루페르트가 흥미를 느낀 건 이 마녀가 알고 있다는 지식 나부랭이였다.
다른 건 몰라도 약간의 능력이 있는 건 사실이니.
무엇보다 이 마녀는 그토록 많은 사람과 연루됐으면서도 알려진 건 아무것도 없는 도펠죌트너에 대해 알고 있는 눈치였다.
황제가 된 후 루페르트가 도펠죌트너에 대해 알아낸 건 하나뿐이다.
호라신의 축복으로 철혈대제가 고대의 비전을 알아냈고, 그 정수를 가장 용감한 병사에게 나눠 줬다.
'선제의 진정한 무서움은 어쩌면 비밀 유지에 있는지도 모르지.'
모호한 건 도펠죌트너의 기원뿐만 아니었다.
군대, 재정, 정책, 외교, 인사.
모든 기록이 모호했다.
마치 후임 황제 자체를 고려하지 않은 듯한 느낌.
심지어 예전부터 일하던 제국 정부 관리들도 마치 양초공이나 밧줄공처럼 하나의 국소적인 영역만을 맡아 그것만 도맡아 처리한지라 그들이 큰 틀에서 무슨 일을 했고 어떤 목적으로 그러한 일을 했는지 잘 알지 못했다.
그게 문제로 비화하지 않은 건 그 모호한 체계가 기이할 정도로 잘 맞물려 돌아갔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그 효율성은 오래된 기계가 그러하듯 점차 삐걱거리고 있었고, 곳곳에서 이상 신호를 내고 있었다.
그 사실은 행정 전문가인 베르너와 재정 전문가인 요하네스가 지적한 바다.
도펠죌트너 또한 그러한 안개 같은 모호함 속에 있었다.
명목상으로는 호라 교단 소속의 청빈 수도회와 제국 정부 산하 전쟁부가 그 일을 맡고 있었는데, 실제 도펠죌트너를 만들고 관리한 건 '전쟁 지원 조합'이라는 기관이며 그 기관에 관한 뚜렷한 정보는 남은 게 아무것도 없었다.
철혈대제의 정치적 유산 중에서 가장 모호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 기관은 아무 실체가 없었다.
그러던 차에 마녀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루페르트의 구미를 당길 수밖에 없었다.
"그래, 마녀. 아까 하려던 이야기의 계속을 듣고 싶군, 그래?"
루페르트는 자리에 앉지 않았다.
오두막은 충분히 넓고 나쁘지 않은 좌석이 있었지만, 황제가 앉기엔 지나치게 낮고 저열하며 부정한 곳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군주답게 오만함과 당당함 사이에서 루페르트는 우뚝 서서 마녀를 내려보며 대답을 요구했다.
부글부글.
가마솥에서 큰 기포가 터지며 소리와 함께 쿰쿰한 향기를 사방에 흩뿌렸다.
마녀가 킥킥거리며 웃었다.
"호기심이 많으신 분이군요."
"너의 평가를 듣고 싶진 않다."
마녀가 커다란 주걱으로 가마솥을 휘젓기 시작했다.
주걱이 경쾌하게 솥 바닥을 긁으며 불쾌한 색이 나는 액체를 리듬감 있게 뒤섞었다.
루페르트는 인내심이 서서히 깎이는 걸 느끼며 마녀를 응시했는데, 다행스럽게도 루페르트의 인내심이 바닥나기 전에 마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악마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될 악."
루페르트가 즉답했다.
"저는 다르게 말하겠습니다."
마녀의 입가에 비릿한 냉소가 떠올랐다.
"죽은 신."
"신도 죽나?"
루페르트가 빈정거리듯이 물었다.
"내가 알기로 신성엔 죽음이란 속성은 포함되지 않는 걸로 아는데."
"죽은 신들이 존재하는 건 사실 아닙니까?"
마녀가 가마솥 안에 국자를 넣어 맛을 보며 힐끔 루페르트 쪽을 훔쳐보았다.
"제국에서 숭배가 금지된 신들을 생각해 보세요."
"...."
루페르트는 자신을 이곳에 오게 만든 한스 징펠만을 떠올렸다.
그가 숭배가 금지된 신을 섬긴다는 건 예전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다.
그는 호라가 아닌, 사냥의 신 다르타니아를 섬긴다.
제국 성립 전, 기원을 알 수 없는 까마득한 과거부터 숲에서 살던 수렵민들이 섬기던 신이다.
"그 신들은 살아 있는 신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글쎄. 그건 내가 알지 못하지만 적어도 그 숭배가 금지된 신들이 악마가 된 건 아닌 거 같은데."
"그건 아직 아마도 그 신들의 숭배자가 남아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
"그 작은 숭배자마저 없는 신들은 완전히 죽습니다. 신이라는 건 결국 신자가 있어야 성립되는 존재니까요. 신자가 없는데 신을 악마라고 하든 잡귀라고 하든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그게 도펠죌트너와 무슨 관계가 있다는 거지?"
장광설, 말을 빙빙 돌려 말하는 건 이제 루페르트가 가장 싫어하는 화법이 되었다.
루페르트는 즉각적인 결괏값을 원한다.
특히 별 볼 일 없는 인간을 상대로는 더더욱.
"짧게 말할 수 있는 사안 아닌가? 그게 안 된다면 그대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거겠지."
"하지만 숭배와 별개로 살아 있는 존재가 있지요."
마녀가 루페르트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얼굴엔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공포가 깃들어 있었다.
"내 스승의 스승의 스승. 그러니까 셀 수 없는 시간 전의 제 스승이 살던 시기엔 살아 있는 신들이 이곳에 많았다고 하더군요. 그러던 어느 날 남쪽에서 혹은 서쪽에서 혹은 북쪽에서 그것이 나타나 우리 세계의 신들을 모두 먹어 치웠다고 하더군요."
"호라도 포함되는가?"
"호라는 만들어진 신입니다. 처음부터 신성을 갖지 못한 허상이지요. 그렇기에 가장 고귀하고 가장 많은 존중을 받겠지요."
루페르트는 냉소를 머금었다.
이 마녀가 마음에 든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이번 발언만큼은 꽤 마음을 움직였다.
마녀가 이어서 말했다.
"그 신들을 먹어 치운 괴물이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지금도 살아 있을 수 있죠. 한 가지 확실한 건 도펠죌트너라 불리는 존재들의 몸속엔 수많은 스승이 보았던 전쟁의 신 미르미도스와 비슷한 냄새가 나는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겁니다."
"전쟁의 신 미르미도스?"
다르타니아와 함께 만신전 구석에서 은밀하게 숭배되는 옛 토착 신이다.
다르타니아처럼 호라 신앙이 들어온 이후 숭배가 금지됐다.
이단 취급을 받는 건 아니지만 숭배가 금지된 신을 숭배하는 것은 대가가 따른다.
"수많은 스승들이 노래하길 전쟁의 신은 그를 숭배하는 자에게 전장을 지배하는 힘을 수여한다고 하더군요."
"어떤 식으로?"
루페르트가 마침내 자리에 앉았다.
단단하게 낀 팔짱은 여전히 마녀에 대한 그의 방어적인 태도를 단단하게 엿보였지만, 황제가 자리에 앉은 건 사실이다.
루페르트가 조촐한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며 마녀를 노려보았다.
"어떤 식으로 힘을 수여했다는 거지?"
"글쎄요. 거기까지는 기억의 전승자에 불과한 저로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제가 추측하기로는...."
마녀가 고개를 숙였다.
쓰고 있는 챙 넓은 뾰족모자가 드리운 그늘이 그녀의 추악한 얼굴을 반절 정도 덮였다.
루페르트는 그 어둠 속에서 갖가지 사악한 지혜가 똬리 치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역시 마녀는 마녀구만. 머리로 생각해서 떠올리는 기억은 아니야.'
루페르트는 마를로네처럼 죽음을 보는 능력은 없지만, 저 마녀에겐 스승이라는 것들의 혼령이 깃든 게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실제로 그런 느낌이 들었으니.
과거의 루페르트였다면 소스라치게 놀랐겠지만, 이미 그는 너무나 많은 것들을 보았다.
봐서는 안 될 것을 보았고 그걸 견뎌 내기까지 했다.
마녀가 드러내는 사악한 힘은 그에 비하면 애교 수준밖에 되지 않았다.
곧 마녀가 재의 냄새가 나는 쿰쿰한 숨결을 내뱉으며 고개를 들었다.
"죽은 신의 피를 마시게 한 건 아닐까요?"
"죽은 신의 피?"
"어디까지나 제 추측에 불과합니다. 수많은 스승의 말에 의하면, 신의 피를 마신 자는 그 신의 힘을 일부나마 손에 쥔다고 하니까요."
마녀가 아는 건 거기까지였다.
물론 그것은 지식이라기보다는 추측에 가까우리라.
그래도 어느 정도 도펠죌트너의 힘에 대한 실마리는 얻었다.
'전쟁의 신이라.'
루페르트는 베르크 란을 생각했다.
홀로 전장을 가르던 그는 확실히 전쟁의 신의 가호를 받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 베르크 란이 이제 불구의 몸에서 벗어났다.
그가 나이가 적지 않은 건 사실이지만 부활한 그는 어쩌면 루페르트를 위해 또 한 번의 날카로운 휘두름으로 그에게 보답할지 모른다.
당장 있을 마르틴 보엠의 암살을 쉽게 처리할 수 있는 건 물론이거니와.
"부탁이 있습니다. 존귀한 분이시여."
마녀가 떠나가는 루페르트를 불러세웠다.
"내게 용무가 있나. 마녀."
처음보다는 누그러진 목소리로 루페르트가 말했다.
"보다시피 저는 혼자입니다. 수많은 스승을 뒀지만 정작 저에겐 제자가 없지요."
"제자를 두려는 건가. 뻔뻔하기도 하군. 마녀 주제에."
"하지만 귀인께서도 저를 필요로 하시잖습니까?"
"...."
"비록 손가락질당하고 있지만 나름의 작은 재주는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제국인들이 좋아하는 마법에 대해서도 잘 알지요. 기원은 다르지만, 같은 기적을 일으킨다는 점에서 대학의 마법과 저의 마법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용건이 뭐냐. 나는 길게 말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사람을 하나 보내 주세요."
"사람?"
루페르트가 코웃음을 쳤다.
마녀가 히죽 웃었다.
"이래 봬도 저한테 가르침을 구하고 싶은 사람은 얼마든지 있답니다."
"그래?"
"이를테면 마법대학의 학생이라든지요."
"대학의 학생이 왜 마녀에게 가르침을 구하려 드는 거지?"
"그들의 스승이 잘 알려 주지 않으니까요."
"그래?"
"귀인께서는 대학이 광주리에 담아 둔 벌레들의 소굴 같은 곳이라는 걸 모르는 모양이군요. 거기엔 스승이 없습니다. 잡아먹히는 자와 잡아먹는 자만 있을 뿐이지."
"대학에 못 들어간 자의 악담 정도로 생각하겠네."
마녀의 두 눈에서 음침한 빛이 흘러나왔다.
"마녀가 되라는 소리는 아닙니다. 약간의 가르침을 주고 싶을 뿐입니다. 하지만 그 가르침은 진리 앞에서 방황하는 어린 양에게 빛이 될 수도 있겠지요. 왜, 야밤에 맹수들의 두 눈에서 나오는 안광도 길잡이 역할을 할 때가 있지 않겠습니까?"
루페르트는 마녀의 제안을 일축했다.
애당초 마법대학에 아는 사람도 없거니와.
피리스 한 명이 있지만, 그녀와는 지금 거리가 제법 떨어져 있다.
'피리스. 잘 지내겠지.'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 위안을 주는 사람이 있을까.
지금 피리스가 루페르트에겐 그런 사람이다.
저기 멀리 보이는 위버하임 장원에 속한 숲과 동산의 풍경처럼.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작은 위안에 불과하다.
그들이 루페르트가 거쳐 온 추억인 건 맞겠지만, 그 접점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루페르트의 진정한 시련은 황제가 된 이후부터 시작됐다.
루페르트는 말없이 자신 옆에 서 있는 금발의 소녀를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마를로네는 루페르트의 시선을 눈치채고 살짝 놀라 돌아보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는 언제나처럼 알 수 없는 눈동자를 돌려 석양이 지는 노을 쪽을 응시했다.
"기분이 좋네요. 이 바람."
"그래."
베르크 란을 치료하러 온 여정은 루페르트조차 생각지도 못한 결과로 이어졌다.
마녀의 비약은 베르크 란을 고쳤다.
또 다른 마녀의 비약은 루페르트의 마음에 변화를 일으켰다.
땅거미 지는 풍경을 보면서 루페르트는 단지 생각하는 것만으로 몸이 싸늘하게 식어 버릴 것 같은 이름을 떠올렸다.
'티그리트.'
마를로네 덕분이다.
꼴사납게 눈물을 흘렸지만 그녀 덕분에 애써 외면하던, 곧 도래할 운명과도 같은 사내를 마주 볼 수 있게 됐다.
물론 그것은 또 다른 각오를 해야 할 것이다.
벌을 받을 각오를 말이다.
오늘 루페르트는 자신의 죄를 리프니에에게 고백할 생각이다.
127화 32. 마녀의 비약 (3)
리프니에.
그녀는 무엇인가.
자신의 입으로는 균형의 여신이라고 밝혔다.
그녀가 균형과는 거리가 먼 존재라는 걸 알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은 걸리지 않았다.
루돌프, 그러니까 티그리트는 그녀를 괴물이라고 불렀다.
상상도 못 할 정도의 경멸과 증오를 드러내며.
안젤리나에게 한 짓을 보면 그의 기분이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리프니에는 인간의 관점에서는 상상도 못 할 짓을 저지른다.
도덕이라는 게 그녀에겐 없는 것 같았다.
시체라고 하나 자신을 숭배하는 자의 아내를 먹고 그 모습으로 변할 생각을 어떤 인간이 할 수 있겠는가.
그뿐만 아니다.
하지만 루페르트가 느낀 리프니에는 괴물하고는 조금 달랐다.
루페르트가 보기에 리프니에는 어린 여자아이 같다.
뭐든 자기 마음대로 하려 하고 원하는 게 있으면 기어코 손을 뻗치고 장난도 치는.
그녀가 엄청난 일을 저지르고 다닌 건 맞다.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하지만, 루페르트가 보았던 것들은 그녀가 균형보다는 파멸과 파괴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루페르트는 리프니에에게서 좋은 점을 발견했다.
그녀는 뭐랄까, 그래도 여신답게 따뜻하게 감싸 주는 마음이 있다.
자애라고 할까, 어쩌면 일시의 변덕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신의 변덕이라면 필멸자에겐 영원과도 같을지도.
"...."
리프니에가 무슨 반응을 보일지 루페르트는 알 수 없다.
어쩌면 본 적이 없는 분노와 모습을 드러낼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를 차마 표현하기 어려운 형태로 찢어 놓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무저갱에서 영원한 고통을 줄지도.
공포는 리프니에의 방에 다가가면서 점점 구체화됐다.
상상하기 어려운 고문과 고통, 처참한 최후가 마치 환상처럼 루페르트 앞에 떠올랐다 사라졌다.
"...헉!"
그중 하나의 결말은 루페르트의 입에서 소리가 나오게 할 정도로 끔찍한 것이었다.
"...."
불길한 상상이 루페르트의 발목을 잡았다.
루페르트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굳게 닫힌 눈을 파르르 떨리는 눈으로 보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의 눈앞엔 수천, 수만 개의 끔찍한 미래가 떠오르고 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고통이 열린 동공으로 몰려 들어오는 듯한 기분이다.
루페르트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 치켜뜬 눈엔 공포가 사라져 있었다.
'여신님에게 말해야 한다. 그러기로 했다.'
무슨 미래가 기다리고 있건 리프니에에게 사실을 말해야 한다.
차일피일 미룬다고 해서 그가 저지른 짓이 변하는 건 아니고 티그리트가 기다려 줄 일도 없을 테니까.
슈발츠마인 가문 회의 측에서는 특별한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적어도 루페르트가 아는 가문의 원로 중엔 선제에게 연락을 받았거나, 이상한 행동을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나 혼자서 처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마를로네가 용기를 줬다.
중요한 일은 외면하고 애써 일상을 영위한다는 그들의 경험은 루페르트의 그 어떤 논설이나 교훈보다 직접적인 깨달음을 주었다.
지나치게 세상일을 단순하게 보는 건 지양해야겠지만, 일은 미룬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는다.
이제 여신의 코앞에 있다.
루페르트는 천천히 문을 열어젖혔다.
때는 저녁이었다.
늘 어둠에 잠긴 방 안엔 어쩐 일인지 석양의 노을이 창문을 통해 실내를 밝히고 있었다.
가구 하나 없는 텅 빈 방 안의 공허한 풍경이 루페르트의 눈앞에 펼쳐졌다.
그 중심엔 검은 머리의 소녀가 멍한 눈으로 지는 해를 보고 있었다.
"루페르트 가우저?"
소녀가 고개를 돌렸다.
루페르트는 다시 한번, 그녀가 대단히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단지 외모만이 아니다.
석양이 그녀에게 색채를 주었고 동시에 그늘을 주었으며 그 그늘이 그녀에게 감정을 주었다.
"어머, 하필 제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에 오다니. 그래, 무슨 일인가요?"
여신이 환하게 웃으며 몸을 돌렸다.
루페르트는 고개를 숙인 채 그녀가 다가오는 걸 기다렸다.
여신이 맨발로 걸어왔다.
그녀가 발길을 향하는 곳엔 어째서인지 물결이 느껴졌고, 죽어 가는 산호의 오색찬란한 빛들이 반짝였다.
"여, 여신님."
루페르트가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네."
"죄를 하나 고백하려 합니다."
"죄요?"
리프니에가 놀라움을 드러냈다.
"무슨 죄요? 설마 제 신전을 제가 원하는 규격대로 못 만들어 주겠다는 건가요? 뭐, 어쩔 수 없죠. 당신은 앞으로 많은 일을 앞두고 있으니."
"그게, 여신님."
루페르트가 고개를 들었다.
"거짓말을 했습니다."
"거짓말요?"
"그렇습니다."
"무슨 거짓말요?"
리프리네의 얼굴에 싸늘한 한기가 흐르고 지나갔다.
루페르트는 영혼마저 얼어붙을 추위를 느끼며 두 눈을 질끈 감고 가까스로 말했다.
"일전에 아라키스트라는 검을 빌려 달라고 했습니다."
"아, 그런 부탁을 했었던 거 같네요."
리프니에의 입가에 냉소가 떠올랐다.
"제 부탁이 아닙니다! 루돌프 님의 부탁입니다. 그분이 저에게 여신님에게 그 사실을 숨겨 달라...."
루페르트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바다의 향기가 나는 손가락이 그의 입술을 막아 버렸으니.
놀란 얼굴로 루페르트를 앞을 보았다.
거기엔 안젤리나, 아니 리프니에의 미소 지은 얼굴이 자리 잡고 있었다.
'어, 어째서?!'
루페르트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그의 여신님이 이토록 자애로운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
"루페르트 가우저."
미소 지은 얼굴로 리프니에가 입술에 댔던 손가락을 천천히 떼어 내고는 허리 뒤로 깍지를 낀 채 가볍게 돌아섰다.
"저."
그녀가 서쪽을 보았다.
석양이 거의 사라지고 있었다.
"이런 기분 처음이에요."
"네?!"
"당신처럼 솔직한 사람을 만난 적이 없었거든요."
"그, 그런가요?"
"모두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만 했죠. 왕이니, 재상이니, 황제니, 신의 아들이니 인간 앞에서는 그토록 근엄하고 잰 체하는 인간들이 정작 제 앞에서는 강아지만도 못한 모습으로 벌벌 떨며 진실을 숨겼죠."
리프니에가 이번에는 피어오른 장미처럼 화사한 함박웃음을 지으며 루페르트를 향해 돌아섰다.
"당신은 다르네요. 당신에게 갖가지 불길한 환상을 심어 줬는데도 기어코 여기까지 와서 사과를 하다니."
"여신님. 서, 설마 알고 계셨습니까?"
"음, 아는 방법이 있었죠. 제 수하 하나가 당했거든요. 그것도 아라키스트에 의해."
"수, 수하도 있습니까?"
"명색이 신인데 졸개 하나둘 정도는 있지 않겠어요? 아무튼, 루페르트 가우저."
리프니에가 그에게 다가갔다.
"당신은 그자와 다른 거 같네요."
"그자라면."
"당신이 검을 빌려주었던 그 꼴사나운 사내요."
리프니에가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눈에 진한 슬픔이 떠올랐다.
"그 사람을 알게 된 건 오래전의 일이었죠."
천 년도 전의 일이었다.
파도가 부서지는 해안.
한 사내가 피투성이가 된 채 모래사장을 걸었고 힘이 다해 쓰러졌다.
사내는 목이 마른 듯 고개를 처박은 턱 아래에 밀려드는 파도를 향해 혀를 날름거렸지만, 그의 혀에 닿는 건 짜디짠 바닷물뿐이었다.
타는 듯한 갈증 속에서 그보다 더 내장을 뜨겁게 하는 불에 데이고 칼에 찔린 상처의 고통 속에서 사내는 뒤로 몸을 뒤집어 내장이 흘러내릴 것 같은 배의 상처와 상체가 하늘을 향하게 했다.
하늘을 향해 사내는 손을 뻗었지만, 그의 손에 닿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호라교의 신자였다.
정확히는 교단에서 이단으로 분류하는 발렌티우스 학파의 신자였다.
딱히 신심은 없었던 것 같다.
죽음 직전에 그는 이를 갈면서 다른 신을 찾았으니.
"누구라도 좋다. 악마라도 상관하지 않겠다. 누가 나의 말을 들어다오. 누가 나의 억울함을 듣고 저 룸이라는 악의 제국을 멸망시켜다오. 그걸 위해서라면 뭐든 하겠다. 뭐든지...."
그 말을 듣고 리프니에는 그 사내에게 말을 걸었다.
"무엇이든 하겠다고 했죠?"
그 사내의 이름이 무엇인지 여신은 기억하지 못한다.
그녀는 너무 많은 이름들을 알았으니까.
하지만 그 이후에 자신이 지어 준 티그리트라는 이름은 확실히 기억하고 있다.
'티그리트.'
그는 필멸자의 위대함과 한계를 동시에 드러내는 인물이었다.
그토록 꺾이지 않는 신념과 불굴의 의지를 가진 사람도 없었다.
하지만 시간은 모든 걸 변하게 한다.
리프니에 자신마저도.
"당분간 혼자 있고 싶네요."
리프니에가 한숨을 내쉬며 돌아섰다.
"...여신님."
"그 사람이 배신할 줄은 알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빨랐네요. 어쩌면 그 사람이 배신할 걸 알기에 저도 일을 서둘렀고, 그 사람 또한 배신을 빠르게 했는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리프니에가 손을 저었다.
방안에 익숙한 어둠이 커튼처럼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루페르트 가우저. 저에겐 당신이 있으니."
"여신님."
엉거주춤하게 선 루페르트를 보며 리프니에가 살짝 웃으며 말했다.
"조금 못 미덥긴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요?"
문이 열렸다.
루페르트는 예를 표하고 열린 문을 향해 걸어갔다.
"루페르트 가우저."
리프니에가 그를 불렀다.
"네. 여신님."
"당신은 티그리트처럼 절 배신하지 않겠죠?"
"저는 그 사람과 다릅니다."
"제가 당신의 소중한 사람을 죽여도?"
어둠 너머로 섬뜩한 미소가 떠올랐다.
종잡을 수 없는 리프니에의 감정선에 루페르트는 강한 혼란을 느끼면서도 담담하게 대답했다.
"...저는 소중한 사람이 없습니다."
문이 닫혔다.
문이 닫히는 순간 리프니에의 중얼거림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지켜보겠어요."
* * *
마법 대학만큼 재능의 크기에 민감한 곳도 없다.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마법의 재능은 명확하게 눈에 보이며 측정 가능하니까.
생판 얼굴도 모르는 놈이 갑자기 학교에서 기대받는 유망주가 되기도 하고 오래전부터 명성을 누리던 학생이 갑자기 집단으로 추월당해 이도 저도 아닌 평범한 학생이 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최고 중의 최고만이 점과 선에서 벗어나 '도형'이 될 수 있다.
그 도형 중에서 정점에 오른 자만이 오각이라는 이름을 얻을 수 있고.
제국을 대표하는 오각의 마법사 중 하나인 눈먼 자 헬브라이트 베틀렌은 여느 오각의 마법사처럼 수많은 전설과 뒷이야기를 가진 사람이다.
여느 오각의 마법사처럼 그의 나이는 알려지지 않았다.
혹자는 백 살이 넘었다고 말하고, 혹자는 이 백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의 나이가 팔십을 넘은 건 사실이다.
그의 저서 마법제요는 출간된 지 50년이 흘렀으니.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그의 나이는 초로의 사내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흰머리와 흰 수염이 어색하게 보일 정도로 맑고 주름 없는 피부도 또 다른 어색함으로 다가왔다.
그 강력한 마법사는 최근 제자를 한 명 받았다.
"피리스."
나이는 들었지만, 재능의 크기만은 인정된 친구다.
하지만 그보다 마법사의 구미를 끈 건 그녀의 출신 성분이다.
그녀는 무려 황제와 연줄이 있다고 한다.
실제로 어느 정도의 재능이 있는 건 사실이다.
노력하면 삼각의 마법사 정도는 될 수 있을지도.
하지만 그 정도로는 부족하다.
극적인 효과를 노리려면 오각은 아니더라도 사각의 마법사 정도는 되야 한다.
대학의 마법사 중 황제와 연분을 쌓은 저 사각의 마법사 지겔슈타트처럼 말이다.
'대학과 정치가 무관하다고 하지만, 세상에 완벽하게 독립된 건 아무것도 없지.'
대학의 운영엔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다.
그 자금을 대는 게 바로 제국 정부다.
황제와 친해져서 나쁠 건 없다.
단지, 둘이 너무 친해지는 것이 남들이 보기에 특히 권력자들이 보기에 좋지 않은 결과로 이뤄질 거 같아 다들 몸을 사리는 것뿐이다.
저 짖는 자 프리츠 에센바하가 오각의 마법사의 체통도 잊고 황제의 경비견 역할을 한 걸 보면 명확하다.
황제와는 친분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피리스의 재능은 명확하다.
남들보다 뛰어나지만 압도할 수 없다.
이 정도로는 황제의 감동을 이끌어 내기 어렵다.
진한 실망을 안고 헬브라이트 베틀렌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의 재능은 한계가 엿보이는구나."
"그, 그런가요?!"
피리스가 고양이처럼 큰 눈에 강한 실망과 공포감을 띠며 물었다.
"너 스스로 생각해라. 너의 벽을 깰 방법을."
재능이 없는 자가 재능 밖의 힘을 얻을 방법은 하나뿐이다.
금지된 지식을 얻는 것이다.
그중엔 악마가 집필했다는 상상할 수 없는 어둠의 마도서도 있었다.
눈먼 자 헬브라이트 베틀렌은 그 책을 제자의 눈에 잘 띄고 제자의 손이 닿을 수 있는 서가에 꽂아 넣었다.
128화 32. 마녀의 비약 (4)
레벤호스트의 스승이자 책사이며 나아가서는 레벤호스트의 숙주라고까지 불리는 마르틴 보엠 목사의 일과는 교회에서 사자처럼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기도문을 읽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날도 명성 높은 신교 목회자의 기도문 낭독을 듣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찾아 그를 지켜보았다.
"세상에 어쩜 저렇게 웅장하고 듬직하실 수 있을까."
"산악 종파에서 교육을 받은 분답네요."
"폐하도 목사님의 설교를 듣는다면 생각을 바꾸실지도 모를 텐데 안타깝네요."
대부분의 종단이 그렇듯 신교도 하나로 뭉뚱그려 불리지만 그 안에도 수많은 종파가 있다.
마르틴 보엠은 산악파라고 불리는 붉은 산맥 일대의 신교 집단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여느 신교와 달리 산악파는 구교라 불리는 호라 교단을 아예 해석을 달리 하는 신자가 아닌, 적으로 규정한다.
그렇기에 그토록 맹렬하게 황제에 대한 적의를 불태울 수 있는 것이다.
황제가 곧 케케묵은 구교의 수호자니까.
"...믿음 속에서 나는 진실을 찾노니. 장님이 되어도 진리의 빛을 볼 것이고, 귀머거리가 되어도 복음을 들을 것이다."
기도문 낭독이 끝난 후에 마르틴 보엠 목사가 하는 일은 푸짐한 식사를 하는 것이다.
그는 하루에 한 끼, 아침만을 먹었다.
점심과 저녁은 힘써서 농사를 짓지 않는 그에게 과분한 것이라 여겨졌다.
그런 것치고 아침을 너무 호화롭게 잘 먹는 편이긴 했지만, 습관으로 굳어졌고 목사 개인적으로도 꽤 합리적인 식사 방식이었다.
배부름은 그가 자랑하는 지성을 둔하게 하는데 제국의 오전은 다들 느슨하고 태만하다.
특히 레벤호스트는 잠꾸러기로 늦잠을 즐기는 편이다.
배부른 상태로 오전을 보내는 게 낫다는 이야기다.
아울러 점심 즈음부터 찾아드는 허기는 그의 야성과 도전 의식을 날카롭게 가다듬었고, 저녁 즈음에는 고통으로 다가오며 그의 신앙심과 의지를 시험하는 좋은 채찍 역할을 했다.
배가 고픈데 저녁을 먹을 것인가? 말 것인가?
목사가 평생을 고뇌하던 주제다.
그를 끝없는 시험에 들게 한 건 신에 대한 믿음이라기보다는 개인적인 굴욕이었다.
마르틴 보엠은 철혈대제 시절 아카이아 대주교가 주최했던 종교 회의에서 받았던 굴욕을 지금까지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종교의 자유를 주장하는 그를 향해 저 철혈대제, 클라우데 2세가 마치 벌레를 보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중신들에게 말했었다.
"여긴 군주들의 회합장이다. 어디 감히 내가 모르는 자가 내 허락도 없이 모습을 드러내는가? 레벤호스트. 그대가 꾸민 일인가?"
당시 절정에 이르렀던 철혈대제와 달리 레벤호스트는 이제 약관을 넘어선, 루페르트와 동년배의 나약한 젊은이였다.
문장가로는 이름이 높았지만, 군주로서의 그의 명성은 이제 막 시작되려는 찰나.
철혈대제의 일갈에 그는 아무 말도 못 한 채 자신의 스승을 마치 용서를 구하는 개의 표정으로 보았다.
여기서 나가 달라는.
그때의 그 어색한 분위기와 그가 가르친 레벤호스트의 용렬한 모습, 고개를 숙인 채 쫓겨난 개처럼 회의장을 빠져나가며 보던 회의실의 낡은 바닥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이제 시간은 흘렀다.
"...클라우데 2세도 지옥에 떨어졌고, 내 주군도 과거의 주군이 아니다. 아카이아 대주교는 정신이 이상해지기까지 했지."
복수의 순간이 왔다.
마르틴 보엠의 목적은 내전이 아니다.
신교 광신도 소리를 듣고 있지만 아무리 그라고 해도 그런 미친 짓까지 벌일 용의는 없다.
단지 그는 분위기를 조성해 의견을 관철하고 싶었을 뿐이다.
마르틴 보엠의 목적은 하나다.
종교를 통한 힘의 균형.
신교 선제후는 셋이다.
구교 선제후 또한 셋이다.
프리드리히 마티아스는 회색분자지만 그는 사실상 죽은 사람이고, 그의 선제후령은 구교 측으로 넘어갔다고 봐야 한다.
구교 선제후 중엔 황제도 포함되어 있다.
황제는 가장 부유한 슈발츠마인 선제후이며, 황제가 되면서 슈발츠마인만큼이나 부유한 카렐리아의 왕관도 함께 손에 넣었다.
그 두 부유한 영지는 과거 철혈대제가 제국 선제후들의 반기를 제압할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
그럼에도 마르틴 보엠은 균형이 팽팽하다고 생각했다.
아카이아 대주교의 성직 선제후령은 영토와 인구가 적고 부유한 도시도 드물다.
세속 선제후령에 비하면 반 정도의 전력이다.
물론 대주교의 진정한 힘은 땅이 아닌 교단의 힘에서 나온다고 하지만 가진 토지와 인구의 힘만 비교하면 그렇다는 이야기다.
무엇보다 마르틴 보엠이 믿는 건 골트문트다.
그는 구교 선제후임에도 여전히 태도를 정하지 않고 있다.
그가 구교 신자이며 백성들에게도 구교를 강요하고 있지만, 골트문트는 철혈대제를 가장 싫어하는 선제후 중 하나다.
점점 철혈대제를 닮아 가는 루페르트를 보고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굳이 그의 머릿속을 들여다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변수가 생겼다.
루페르트가 최근 왕조의 야심을 포기했다는 것이다.
그 선언이 깨진다면야 루페르트는 모든 걸 잃겠지만 선언이 유지되는 한 루페르트는 중립적인 군주는 물론 적대적인 군주의 태도마저 누그러뜨릴 것이다.
우걱우걱.
마르틴 보엠은 마치 부르봉인처럼 길게 식사를 했다.
그의 아침 식사 시간은 무려 두 시간에 달했다.
먹는 양도 양이지만 염소처럼 되새김질하며 생각에 잠겨 있는지라 그의 식사 시간은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카렐리아를 흔들어야 해. 거기를 흔들어야 황제를 약화할 수 있다."
이미 준비는 끝났다.
카렐리아의 지배자는 루페르트지만, 카렐리아를 움직이는 건 신교를 믿는 토착인들이다.
카렐리아인은 사실 제국과는 이질적인 집단이다.
쓰는 언어가 다르고 민족의 기원도 다르다.
전쟁이 아닌, 동군 연합이라는 평화적인 형태로 제국의 구성원이 되었지만 불만이 팽배했다.
그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과거의 황제들은 카렐리아의 수도 슈코브에 황궁을 짓고 황제가 기거하며 제국의 수도 역할을 하게 했다.
제국인과 기원이 다르다고 하나 명실상부한 제국 수도의 시민으로 카렐리아인들은 큰 자부심을 느끼고 기꺼이 제국을 위해 막대한 부를 제공했다.
그러나 제국의 수도가 슈발츠마인으로 옮겨 간 이후에 해묵은 문제가 터졌다.
제국의 수도였던 슈코브는 일개 지방의 수도로 전락했고 상업은 쇠퇴하고 과거의 영화를 점점 잃어 갔다.
그 반작용으로 신교가 유행했다.
반란과 심지어 독립을 부르짖는 소리마저 심심찮게 흘러나왔다.
철혈대제가 카렐리아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황제가 좋다고 판단할 때 종교의 자유에 관해 협상하겠노라는 내용의 금인칙서를 내렸다.
철혈대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죽었고, 다시 카렐리아의 불만은 원점으로 돌아갔다.
마르틴 보엠은 그들의 불만을 부채질했으며, 카렐리아의 비난의 화살이 슈발츠마인에게 향하게 했다.
"카렐리아만 떼어 놓을 수 있다면, 제국의 황제는 아무것도 못 할 것이다. 사실상 슈발츠마인 하나의 전력만으로 트라이아, 노르드마르크, 디터팔츠 세 선제후령을 상대해야 한다는 소리니까."
하녀가 차를 내왔다.
마르틴 보엠 목사는 차를 빠르게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선제후 궁전에 갈 시간이다.
오늘도 할 일이 많다.
레벤호스트에게 종교적 신념을 불어넣는 것부터 시작해 그의 자식을 세뇌해야 하고 자유분방한 선제후의 아내와 신경전도 펼쳐야 하고, 제국의 운명에 관해 논해야 한다.
'오늘은 어떤 구절을 낭독해 드릴까.'
호라 경전의 여러 경전 중 괜찮아 보이는 문구를 생각하며 그는 마차로 향했다.
그의 마차엔 검은 코트를 입은 날렵한 사내가 이미 좌석에 타고 있었다.
마르틴 보엠은 그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도펠죌트너. 설마하니 우리가 그 안젤리나 대황후와 비슷한 방법을 쓸 줄이야.'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시국이 워낙 불안하다.
마르틴 보엠 목사는 자신이 만에 하나 암살당할 일은 꿈에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역으로 생각해 보면 황제가 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선택지는 이쪽을 죽이는 것이다.
'내가 없으면 레벤호스트는 충동만 있는 어린애에 불과하지. 하지만 고맙군. 나를 위해서 호위까지 마련해 주고. 선제후도 알고 있는 거겠지. 내가 없으면 선제후는 어리석은 판단을 내리리라는걸.'
선제후 주변엔 사람이 별로 없다.
라인하르트 백작이라는 자가 책사를 희망하며 선제후 주변의 가신으로 머물러 있지만, 그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사람이다.
그 인간은 멍청하게도 카렐리아를 흔드는 걸 모자라 카렐리아에 반란을 획책하려 한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지. 그건 내전과 이어진다. 내전은 최후의 선택지야. 루페르트는 위험하지만 그렇기에 식견이 있는 인간이다.'
마차가 움직이자 도펠죌트너가 말했다.
"제 동료들이 수상한 사람들이 목사님의 저택 주변을 염탐하고 갔다고 합니다."
"염탐? 나를?"
"네."
"그대가 있지 않나?"
"그건 그렇...."
탕!
느닷없는 총성이 먼 곳에서 울려 퍼졌다.
푹!
뭔가 박히는 소리와 함께 피가 목사의 얼굴에 튀었다.
"알, 알베르트?!"
마르틴 보엠 목사가 다급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
무의미한 일이다.
도펠죌트너는 즉사했다.
탕!
또 한 번의 총성이 울려 퍼졌다.
쉬익-
탄환이 목사의 귀를 스치고 지나가 마차 좌석에 박혔다.
말이 놀라 요동치고 마부의 고함이 들려왔다.
"마, 마차를 세워! 총격! 총격을 받고 있다!"
마차가 정지하자, 마르틴 보엠은 부리나케 총알이 날아오는 방향 뒤편으로 다급히 하차했다.
"아아아악!!"
다리를 접질렸다.
끔찍한 고통에 마르틴 보엠은 바닥에 나뒹군 채 소리를 질렀다.
"누, 누가!"
주변을 보았다.
사람 몇 명이 보이지만 전부 무지렁뱅이 촌놈들.
"누가 날 좀 도와라! 사례, 사례하겠다!"
느닷없는 구조 요청에 사람들은 어리둥절할 뿐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촌각이 영원 같은 다급함 속에서 목사는 보았다.
꽃바구니를 든 작고 삐쩍 마른 소녀가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걸.
"무슨 일인가요?"
"거기 너! 날 일으켜 세워라."
"이렇게요?"
소녀가 손을 내밀었다.
마르틴 보엠은 아무 생각 없이 손을 잡아 힘껏 당기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목사는 자신의 운명을 알게 된다.
소녀의 손이 그의 손을 놔주지 않는다.
마치 거대한 게의 집게에 물린 기분.
"너, 너는?!"
탕!
먼 곳에서 총성이 울려 퍼졌다.
목사가 쓰러졌다.
* * *
"멋진 사격이었어요. 엽사님."
마를로네가 함께 목사를 암살한 주역인 한스 징펠만을 보며 화사하게 웃었다.
그의 도제들은 굳은 얼굴로 뒤에 선 채 언제나처럼 아무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늘 느끼지만, 이상한 아이들이야. 특히 기라는 애 키는 이미 나보다 더 크네.'
한스 징펠만이 우유 잔을 들이켰다.
하얀 우유 거품을 수염에 묻힌 채 한스 징펠만은 조금은 슬픈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모험은 원치 않았습니다만."
"전쟁을 막으신 거잖아요."
"그렇다면 정말로 좋겠습니다만."
그 순간 마를로네는 자기도 알지 못하는 과거의 사실을 기억해 냈다.
흐릿한 환영 같은 것이었다.
그 환영은 하나의 살인을 보여 줬다.
마를로네가 한스 징펠만의 목을 단칼에 참수해 버리는.
'뭐, 뭐지? 이건?!'
너무나도 섬뜩한 상상이라 마를로네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마를로네 님?"
한스 징펠만이 묻자 마를로네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적당히 얼버무렸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잠시 생각할 게 있어서요."
그녀는 양해를 구하고 여관 밖으로 나가 하늘을 보았다.
때는 밤이었다.
만월을 가만히 바라보던 그녀는 목에 이물감을 느끼고 옷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목걸이가 하나 걸려 있었다.
"뭐지 이건? 언제부터 있었던 거지?"
기억에 없는 목걸이다.
하지만 그것은 실재하고 있다.
그 의미를 아직 마를로네는 알지 못한다.
129화 33. 머리를 잃은 뱀 (1)
마르틴 보엠 목사가 살해당했다.
범인이 누군지는 알 수 없다.
레벤호스트는 즉각 제국 회의의 소집을 요구했다.
마르틴 보엠의 암살에 강대한 배후가 있음을 암시하며 그는 상대가 누구든 간에 암살을 교사한 자를 용서하지 않으리라고 큰 소리로 떠들었다.
루페르트는 사방에 첩자를 풀고 선제후와 주요 군주들의 동향을 파악했다.
분기탱천한 레벤호스트와 달리 다른 선제후와 군주들에겐 이렇다 할 움직임이 보이지 않았다.
마르틴 보엠이란 그런 인간이다.
레벤호스트에겐 분명 스승 이상의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이지만 그의 영향력은 오직 트라이아 선제후령에만 미쳤고, 선제후령의 경계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레벤호스트라는 화려한 범선을 필요로 했다.
레벤호스트 본인이 당한 것도 아니고, 그의 핏줄이 당한 것도 아니다.
일개 목사의 죽음은 의문점이 있다고 하나 다른 군주들의 구미를 당기지 못했다.
오히려 고소해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 건방진 목사 놈. 레벤호스트를 등에 업고 마치 자기가 선제후인 것처럼 행동하더니."
노르드마르크 선제후 게오르크 아르님은 마르틴 보엠의 죽음을 듣자마자 통쾌하게 웃었다고 한다.
같은 신교 선제후인 막스 게오르크는 심지어 마르틴 보엠이라는 사람을 알지도 못했다.
몇 번이고 중신들이 설명한 뒤에야 선제후는 뒤늦게 늘 레벤호스트 뒤에 그림자처럼 서 있던 깐깐한 노인을 떠올렸다.
"아, 그 산악파 신교 목사 말이지? 암살할 가치가 있는 인물이긴 한 건가?"
레벤호스트가 피우려던 불은 장작에 불조차 붙기 어려워 보였다.
선제후들은 차례차례 제국회의의 개최에 거부, 혹은 무응답으로 일관했다.
마르틴 보엠의 죽음은 어떠한 영향력도 미치지 못했다.
루페르트의 대담한 계획이 성공을 거둔 것이다.
'아마 다른 군주들이 레벤호스트의 분노에 동조하지 않은 건 내 순결 서약 덕분이겠지.'
레벤호스트는 머리를 잃었다.
머리를 잃은 몸뚱이가 어디로 향할지는 두고 볼 일이다.
느릿한 것 같으면서도 급박하게 흘러가는 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루페르트에게 한 장의 편지가 도착했다.
만슈타인이 보낸 것이다.
"만슈타인? 그 사람이?"
범인을 아득히 초월한 통찰력의 소유자인 그는 이 혼란스러운 시국에 어떤 조언을 원하고 있을까.
루페르트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알고 편지를 개봉했다.
"...음?"
아무 내용이 없다.
정확히 말하면 용건이 하나 있긴 했다.
-평생의 반려자를 발견했으나 제 신분의 모자람과 별 볼 일 없는 재산으로 결혼에 이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가 가진 건 폐하를 향한 충성과 그 추억뿐입니다. 폐하께서 친서 하나를 써 주신다면 저는 평생의 반려자와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결혼을 해야 하는데 장인 될 사람이 만슈타인을 고깝게 보고 있으니 편지 한 장 써 달라는 이야기다.
"서기를 불러라."
직접 쓸 필요는 없다.
대충 결혼을 권장하는 내용을 작성하게 하고 도장만 찍으면 되니까.
사실 황제가 친서를 쓴다는 일이 그리 흔한 일이 아니다.
제국 역사를 통틀어 봐도 아주 가까운 사람에게 보내는 친선의 편지가 아닌 이상 황제의 친서가 가는 일은 없다.
딱 한 번 있긴 했다.
이백 년 전, 동방 제국이 수십만의 병력을 이끌고 렌타이어마르크 일대를 침공했을 때 말이다.
"내용은 어떻게 작성할까요? 폐하?"
"만슈타인의 신원을 보증하고 내가 믿는 사람이라는 내용을 섞어서 적당히 추천사를 써 보게."
"알겠습니다."
전혀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보다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생겼다.
"만슈타인의 반려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지?"
"만슈타인보다 열다섯 살 연상의 미망인입니다."
"만슈타인. 그 사람은 연상 취향이군.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도 나이 차이는 너무 많지 않나?"
"아내가 될 사람이 재산이 상당히 많다고 하더군요. 카렐리아에서도 손꼽힐 정도의 부자라고 합니다."
"그래?"
대충 내막이 뭔지 알 것 같다.
돈을 보고 결혼한 것이다.
만슈타인이라면 만슈타인다운 짓이겠지만 루페르트는 개의치 않았다.
'돈이 많아서 결혼을 했든 진짜 사랑해서 결혼을 했든 한 남녀가 하나로 합쳤다. 축하할 일이지.'
루페르트는 만슈타인의 행운을 기원하며 소정의 금원을 보내라 지시했다.
'그건 그렇고 그 친구가 있는 곳이 기가 막히는군.'
만슈타인은 현재 카렐리아 수도 슈코브 수비대의 기병 대장을 맡고 있다.
휘하 병력은 5백 명 남짓이지만 인근에서는 하나밖에 없는 기병대다.
그 자리도 사실 루페르트가 추천서를 써 준 자리다.
그러니까 신부도 직위도 모두 루페르트에게서 나왔다는 소리다.
만슈타인은 귀족이긴 하나 제국이라기보다는 카렐리아계이고, 그 집안도 그다지 내세울 만한 집안은 아니다.
루페르트라는 끈을 얻어 도약했기 망정이지 카렐리아 출신 촌 동네 귀족을 누가 중용하겠는가.
루페르트가 아는 선제후 중에 그럴 위인은 단 한 명도 없다.
'나라는 별을 만나 그라는 별도 덩달아 반짝였다는 여신님의 말씀은 그야말로 적절하군.'
만슈타인의 혼사를 처리한 루페르트에겐 이제 거칠 게 없었다.
상황은 이제 간단해졌다.
레벤호스트 한 명만을 보면 된다.
"이것이 일전에 폐하께서 약조하셨던 건들을 정리한 문서입니다."
황제가 되기 전 루돌프의 조언을 듣고 무리한 약속을 여러 개 했었다.
루페르트는 그 수많은 공허한 약속들 중에 이행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걸 구분했다.
이 약속 중 적어도 세 군주의 약속은 지킬 필요가 없다.
프리드리히 마티아스, 아카이아 대주고, 그리고 레벤호스트다.
채무를 갚아야 할 사람은 여럿이나 그중 주요한 인물은 게오르크 아르님과 골트문트다.
루페르트는 게오르크 아르님을 위해 후계자를 정하지 못하고 죽은 뷔르템베르그 공작 가문에 개입해 그들의 중요한 재산을 반강제적으로 선제후의 손에 넘겼고 골트문트를 위해서는 프리드리히 마티아스의 도시 하나의 지배권을 선물로 주었다.
루페르트가 한 터무니 없는 약속 중 일부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만, 그 두 가지 사안은 두 선제후가 관심을 보이던 중요한 문제였다.
두 선제후는 사절을 보내 황제의 후의에 감사한다고 답했다.
그것만으로 그들의 마음을 잡았다고 할 수 없겠지만 적어도 그들에게 중립을 지킬 명분 두어 가지는 준 격이다.
퉁.
편안한 마음으로 축구를 즐기며 루페르트는 레벤호스트의 다음 행동을 기다렸다.
* * *
"마르틴 보엠 목사가 당신의 어릴 적 스승인 건 맞지만 저는 솔직히 그를 썩 대단치 않게 여겼어요. 너무 시끄럽고 말이 많았죠. 지나칠 정도로 우리 아이의 마음을 휘어잡으려 했고요."
레벤호스트의 아내 캐서린은 바다 건너 섬나라인 앙쥬 왕국의 공주다.
앙쥬 왕국은 한때 강력한 함대와 전사로 이름을 떨쳤으나 제국과 전쟁에 휘말려 함대를 잃고 해외에 건설한 교두보를 모조리 잃으면서 이류 국가로 전락했지만, 섬나라의 특성상 독립성을 잃지 않았고 평화 속에서 서서히 힘을 키우고 있었다.
캐서린은 아름답고 당찬 여성으로 가히 여걸이라고 해도 무방한 기개에 말을 아주 잘 타고 활 또한 남자 못지않게 다룬다고 소문이 자자했다.
실제로 그녀는 선제후령에서 대단히 인기가 높았다.
사람들은 말한다.
수려한 용모를 가지고 있지만 젠체하고 오만한 레벤호스트에게 현재의 아내가 없었다면 그의 인기는 지금만큼 좋지 않았을 것이라고.
그녀의 오랜 불만은 마르틴 보엠이었다.
지나칠 정도로 남편의 행동과 신앙을 간섭하려 했다.
이미 마르틴 보엠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레벤호스트는 그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지만, 캐서린 입장에서 마르틴 보엠은 눈엣가시 그 자체였다.
그것이 이번에 제거됐다.
"그 인간이 당신에게 황제에게 거역하라고 부채질을 자꾸 한 거 같은데. 대체 그렇게 해서 얻는 목적이 뭐죠? 저는 선제후에게 시집왔지, 황제에게 시집온 게 아니에요. 황제라면 아마 시집오지도 않았겠지요. 아버지도 당신을 대단히 좋아한답니다. 그런데 거기서 더 뭘 하시려는 건가요? 현재의 황제는 거기다가 평생 아이도 가지지 않겠다고 맹세했잖아요? 굳이 그런 사람 상대로 문제를 일으킬 필요가 있을까요?"
방해꾼이 사라지자 캐서린은 마음껏 자신이 평소에 가지고 있던 불만을 털어놓았다.
레벤호스트는 오만한 사람이지만 적어도 아내에게만큼은 겸손한 사람이었다.
"당신의 생각도 일리가 있어. 굳이 그와 대립을 할 필요는 없겠지. 하지만 말이야. 캐서린. 나조차 그에게 대항하지 않는다면 누가 황제가 딴마음을 먹었을 때 그를 막을 수 있겠어?"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되는 일 아닌가요?"
"그때 가서 생각하면 너무 늦어. 루페르트 가우저. 그 촌놈은 철혈대제와 오싹하리만치 닮았어. 지금은 총각 맹세를 했지만 언제 또 생각이 바뀔지 모르지. 그 인간은 이제 갓 스물을 넘은 인간이라고. 십 년이면 사람이 바뀐다고 하는데 두 번이나 더 바뀌고도 남을 정도로 젊지."
"그럼 어떻게 하실 건가요?"
캐서린이 진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정말이지, 그 목사가 죽었어도 내 부군의 생각은 터럭만큼도 바뀌지 않는구나.'
"목사가 죽은 건 큰 손실이지만 덕분에 꽤 괜찮은 사람을 만날 수 있었어."
"괜찮은 사람이요?"
레벤호스트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안드리아의 루돌프라고 하더군."
"뭐 하는 사람인가요?"
"슈발츠마인 출신의 귀족이라고 하더군. 선제의 친족이라는 모양이야."
"선제의 친족이라면 당신의 적 아닌가요?"
"그는 루페르트 가우저를 별로 좋아하지 않더군."
레벤호스트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 사람이 그러더라고. 어쩌면 루페르트 가우저는 선제의 친족이기는커녕 제국인조차 아닐 수도 있다고."
"어떻게 그런 사람이 황제가 될 수 있는 거죠?"
"뭐, 그건 중요한 게 아니야. 이제 와서 그의 과거를 쥐고 흔들어 봐야 남는 건 진흙탕 싸움이지."
레벤호스트가 갑자기 밝은 표정을 지었다.
"아, 당신도 한번 만나 보겠나? 안드리아의 루돌프라는 사람을."
"제가요?"
"한 번 보면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거야. 그 정도로 강렬한 인상을 가진 남자지."
"하아. 당신이 원한다면."
캐서린은 작은 실망을 느꼈다.
'마르틴 보엠 다음엔 출신조차 불분명한 인간이라니.'
한번 봐 두긴 해야 한다.
그 인간을 남편 옆에서 몰아내려면 적어도 어떤 인간인지는 알아야 할 테니.
시종들이 분주히 오가는 가운데 선제후 부부는 선남선녀다운 서로가 서로를 빛내는 화려한 자태를 뽐내며 차를 들었다.
"어머."
캐서린의 눈이 반짝였다.
"이 차. 상당히 맛있네요. 어디 것이죠?"
"신 칼란이라는 곳에서 가지고 왔다더군. 동방 제국 너머에 자리 잡은 수많은 신들을 믿는 민족, 그들의 영역 너머에 있다는 진정한 동쪽 끝의 제국에서 가지고 왔다고 들었어."
"그런 귀한 것을."
"루돌프가 가지고 왔지."
그 루돌프가 선제후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멀리서 확연히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확연한 거구로 회색인지 흑색인지 알 수 없는 로브를 걸치고 있었다.
캐서린은 그를 본 순간 모호함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기묘했다.
마치 안개 같기도 하고 신기루 같기도 했다.
둘 다 모호함이라는 속성을 가진 것이다.
그 정도로 집중하지 않으면 그라는 인간을 제대로 볼 수 없었고, 생각조차 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그 거구의 사내가 선제후 부부 앞에 섰다.
"안드리아의 루돌프여. 그래. 모습을 보이게."
레벤호스트가 흡족한 미소를 머금으며 그 사내에게 말했다.
"...원하신다면."
그 목소리는 노인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캐서린 또한 그 루돌프라는 자가 노인이라고 생각했다.
두건 아래 하얀 수염으로 얼룩진 하관이 보였으니.
루돌프가 두건을 벗었다.
마술이 일어났다.
수염처럼 보이던 것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대신 강인하게 갈라진 턱을 가진 헝클어진 금발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나이는 많아 봐야 서른.
그 정도로 젊었다.
무엇보다 캐서린을 놀라게 한 건 두 눈이다.
헝클어진 금발이 드리운 음영 속에서 두 개의 푸른 눈이 마치 심야의 야수의 두 눈처럼 스스로 빛을 내며 소리 없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를 본 순간 캐서린은 자기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이 인간. 사람 같지 않아. 한 마리의 야수 같아...!'
그 사내 루돌프가 말했다.
"루페르트 가우저는 가짜 황제입니다. 그는 제국의 적이며 없어져야 할 존재입니다."
그의 또 다른 이름은 티그리트다.
그 이름은 극소수의, 세상의 이면을 아는 자에게만 알려져 있다.
130화 33. 머리를 잃은 뱀 (2)
"...."
베르크 란은 오른손을 움직여 보았다.
제대로 움직인다.
힘도 들어간다.
오랫동안 전장에서 쓰던 대검 한 자루를 쥐었다.
부우웅--
가장 건장한 전사조차 두 손으로 잡고 휘둘러야 할 대검이 오직 한 손의 힘으로 바람을 가르고 신들린 듯 춤을 췄다.
"후우."
가벼운 검무를 끝내고 베르크 란은 두 눈을 감았다.
두 눈을 감으면 그는 전장으로 돌아간다.
한 번도 멈춘 적이 없었다.
아우성, 창칼이 부딪치는 소리, 포성, 일제사격, 화약과 북소리, 시체와 피, 휘날리는 군기와 벌판을 까맣게 뒤덮는 기병대가 지축을 흔드는 소리, 숲처럼 움직이는 장창들.
무엇보다 기억에 남는 건 죽어 간 전우들이다.
너무나 많은 동료들이 죽었다.
그들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들은 도펠죌트너였다.
고향에서 쫓겨나듯 도망쳐 나와 제국군에 입대한 베르크 란이 도펠죌트너의 길을 선택한 건 순전히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두 배의 봉급을 준다네. 그것도 단 한 번도 밀리지 않고! 우선적으로!"
전장에서 봉급이 밀리는 일은 대단히 잦았다.
연대장과 장교의 주 임무는 전쟁 지휘가 아니라 지루한 공성 중 봉급이 밀렸을 때 성난 병사를 설득하는 것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당시의 제국은 돈이 없었다.
병사들이 그럼에도 자리를 지키는 건 약탈에 대한 희망도 희망이겠지만 달리 할 일이 없어서다.
베르크 란도 그런 인간 중 하나였다.
고향에 돌아가 봐야 냄새나는 농촌에서 돼지나 치고 끝나지 않는 밭일이나 하다 비참하게, 그의 부친처럼 늙기도 전에 노쇠해서 다 타 버린 양초처럼 소멸할 것이다.
그런 인생을 살지 않기 위해 전장에 온 그에게 돈은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였다.
돈이 있어야 인간답게 살 수 있고 그가 원하는 땅과 집을 살 수 있으며 편안한 노후 또한 보장되니까.
그렇게 해서 그는 도펠죌트너에 지원했다.
두건을 쓴 미지의 사내가 그를 보더니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은 것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그 사내가 말했다.
"자네는 큰 사람이 되고 싶나? 작은 사람이 되고 싶나?"
"이왕이면 큰 사람이 되고 싶소. 평생 작게 살았으니."
어눌한 제국어로 베르크 란은 호기롭게 말했다.
"두 개의 잔이 있어. 둘 다 마시면 그대를 도펠죌트너라는 선택받은 황제 폐하의 병사로 만들어 줄 걸세. 하지만 한계가 다르지."
"한계? 그게 뭐요?"
"클 수 있는 그릇이 달라진다는 이야기야."
"호오. 계속해 보시오."
"하나는 죽을 위험이 대단히 높지만 그대를 누구보다 강한 병사, 심지어 황제의 챔피언마저도 노릴 수 있는 강자로 만들어 주겠지만 그대의 목숨을 뺏을 수도 있어. 나머지 하나는 뭐, 그대를 봉급을 두 배 받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겠지. 하지만 그것도 죽을 확률이 없다고는 할 수 없어."
베르크 란이 퉁명스레 물었다.
"내 듣자 하니 그 약을 마신 사람 중 절반이 죽어 나갔다던데."
"절반보다 더 되지. 그러니 봉급을 두 배나 받는 것이겠지?"
"첫 번째 잔은 죽을 가능성이 얼마나 되오?"
"백 명 중 하나. 아니 어쩌면 천 명 중 하나일지도 모르겠지."
"그걸 주시오."
"호오?"
"내가 볼 땐 전장에서 죽으나 이걸 마시고 죽으나 크게 다를 거 같지 않으니."
그렇게 해서 도펠죌트너가 되었다.
당시에 무슨 일이 있었던지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단지 기억나는 건 단 하나의 울림.
한 명이 아닌 무수한 사람들이 외치는 하나의 이름이었다.
미르미도스.
그 이름은 이제는 숭배가 금지된 전쟁의 신의 이름이다.
왜 그 이름이 아직까지 선명하게 기억나는지 베르크 란은 잘 알지 못하고, 알려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 이름이 자신에게 힘을 준 건 사실이다.
무수한 강자를 꺾었고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었다.
정체불명의 사내에게 비참하게 당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그는 승리를 거뒀다.
'은 가면.'
하지만 지금 그가 떠올리는 건 은 가면 따위가 아니다.
눈을 감으면 언제나 생각난다.
그의 옆에서 함께 싸우던 전우들이.
도펠죌트너라 불리는, 하나의 비밀을 공유한 공범들이.
그들은 명예를 잃고 지붕조차 없는 걸인이 되었다.
그들의 명예를 살려 줘야 한다.
그들에게 지붕을 돌려줘야 한다.
그것이 황제의 챔피언이었던, 그리고 봉급을 두 배 받는 자들의 우두머리였던 베르크 란이 해야 할 일이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그는 뭐든지 할 각오가 되어 있다.
심지어 저 사랑하는 손녀마저 포기할 수 있을 정도로.
"할아버지."
마를로네가 여정에서 돌아왔다.
베르크 란은 자신의 손녀를 새삼스레 가만히 관찰했다.
확실히 전보다 키가 컸다.
얼굴도 훨씬 여성의 티가 났다.
그러나 그 얼굴은 불쾌한 추억을 떠올렸다.
가세가 기울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난 야속한 며느리의 얼굴이 눈앞에 떠오른 것이다.
'그 빌어먹을 년.'
아들이 사라진 것도 그 여자 때문이다.
그 여자의 마음을 돌리겠다고 집을 떠난 뒤 영원히 사라졌다.
그걸로 베르크 란의 모든 건 무너졌다.
지위도 가족도 명예도 모든 것도.
남은 건 아직 젖도 떼지 못한 쌍둥이들이다.
사내아이는 죽었다.
기이한 일이다.
보다 신경을 쓴 건 사내아이 쪽이었는데.
계집아이가 기어코 아득바득 동냥한 젖을 물고 빨며 악착같이 살아남으려 했다.
"그래. 마리. 수고했다."
"할아버지."
손녀가 빤히 쳐다본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걸까.
부상을 입진 않았다.
모친을 닮아 운은 기막히게 타고났기에 크게 걱정한 일은 없었다.
건강한 몸은 자신을 닮아 잔병치레 하나 없었고.
"무슨 일이냐?"
"안드리아의 루돌프라는 사람 기억나?"
"음. 보자. 아, 그런 사람도 있었지. 황제의 조언자였던."
"그 사람이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난 적 있었어?"
"아니. 그런 적은 없다. 애당초 그는 황제의 사람이지 우리와는 아무 접점도 없는 자이니."
"그 사람, 분명 어디서 만난 적이 있단 말이야."
마를로네가 자신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꺼내 베르크 란에게 보였다.
따개비 흔적이 있는 오래된 소라고둥의 껍데기 같은 것이 목걸이에 달려 있었다.
"받은 적도 산 적도 없는 목걸이가 갑자기 내 목에 걸려 있질 않나. 이상한 일투성이야."
"너는 술을 안 마시니 술 먹고 훔친 건 아닐 테고. 음. 보자, 그래. 아마 도펠죌트너 특유의 광증이 도진 거겠지."
"난 광증 같은 거 안 걸리는데."
"사람마다 다르지. 때에 따라 다르고. 게다가 너는 그 거신이라는 걸 직접 봤다면서? 수많은 사람이 보았지만 아무도 믿지 않는 그런 괴물을 말이야."
"그것도 그렇네. 나는 며칠 악몽을 꾸는 걸로 끝났지만, 그 재수 없는 마법사는 아직도 앓아누워 있을 정도니. 그 한스 아저씨도 마음고생 심한 거 같았고."
한스 징펠만의 이야기를 입에 올리자 마를로네의 얼굴에 짙은 어둠이 드리워졌다.
흐릿한 장면이 꿈에서 본 것처럼 떠올랐다.
그의 도제가 자신을 꼬드겼고 그 말에 따라 한스 징펠만의 목을 단칼에 베어 버리는 장면이.
왜 그런지는 자신도 알 수 없지만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설득력이 있었다.
'역시 그 괴물을 본 영향이 뒤늦게 미친 걸까. 정말이지, 미쳐 버린다는 게 뭔지 알 것 같은 기분이야.'
"쉬어라. 마리. 고생 많았다. 다음에는 내가 가지."
베르크 란이 이제 완벽하게 치료된 오른손을 들어 보였다.
마를로네는 조부의 억센 손을 가만히 보다가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하지만 다음이 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적어도 마르틴 보엠이 죽었을 때 세상은 조용했다.
소수만이 애도했고, 나머지는 그의 죽음 자체에 무관심했다.
세상이 그의 죽음을 그냥 넘기려는 것 같았다.
자세한 의미는 모르겠지만, 전쟁이라는 불길은 조용한 장작에서는 타오르지 않는다는 게 마를로네의 생각이다.
적어도 당분간 제국은 조용하지 않을까?
그건 비단 마를로네가 흐릿한 기억 너머로 매몰차게 자신과 조부를 버리던 황제의 모습을 떠올리고 하는 생각만은 아닐 것이다.
"...속이 메슥거려."
죽음 그 자체로 이루어진 사람도 있었다.
* * *
마르틴 보엠의 죽음은 별다른 파장을 일으키지 못했다.
군주들은 무관심했고 레벤호스트는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도 않았으니까.
그런 작은 인간의 죽음보다 수십 배는 더 중요한 일이 제국 국경 서쪽에서 일어났다.
저지대 연방이 내전을 일으킨 것이다.
저지대 연방은 하나의 나라라기보다는 수십 개에 달하는 도시들의 느슨한 연합이다.
그 형태는 마치 작은 제국을 연상하게 하는데 실제로 저지대 연방엔 황제직에 해당하는 연방 회의 의장이라는 직책이 있다.
저지대의 연방 의장은 제국 의전에 따르면 왕과 같은 취급을 받으며 타국의 왕과 같은 자리에 앉을 수 있다.
그 연방 의장 바뤼흐가 최근 죽었다.
마르틴 보엠과 달리 일흔의 바뤼흐는 침대 위에서 가족들이 보는 가운데 평화롭게 죽음을 맞이했다.
비록 평안한 죽음 너머엔 해묵은 전쟁과 갈등의 불씨가 터지기 직전까지 팽창해 있었다.
바뤼흐는 지난 시대에 철혈대제 클라우데 2세가 올려놓은 사람이다.
제국의 봉신인 저지대 연방이 신교를 이유로 반항적인 모습을 보이자 철혈대제는 도펠죌트너를 앞세워 저지대 연방이 자랑하는 강력한 요새를 잇달아 점령하고, 저지대 전체를 삼킬 듯이 약진했다.
결국 혼비백산한 저지대 연방은 반항적인 의장을 자신의 손으로 죽였고 대신 순종적인 바뤼흐를 내세웠다.
그의 치세 동안에 저지대 연방은 평온했고 상업 또한 번영했지만, 상처 입은 저지대 연방인의 자존심은 봉합되지 않았다.
저지대 연방 남부 도시 일부를 제국의 동맹국 카스무어 왕국이 지배하는 상태가 저지대 연방인의 해묵은 분노의 원인인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저지대 연방을 자극한 건 돈이다.
제국의 상인이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거대한 위협자로 부상했다.
아이젠쉴트, 야스푸거 같은 거대한 정치 상회는 예전부터 존재했지만 그들은 주로 제국 국내 거래에 집중했지, 저지대 연방의 '밥그릇'을 건드리진 않았다.
하지만 최근 융성한 하스 상회를 필두로 제국 신흥 상인 세력은 해상 무역에 손을 뻗어 저지대인의 밥줄이라 할 수 있는 청어와 목재, 철광석 무역의 지분을 야금야금 뺏어갔다.
저지대 연방인들의 바다라 칭하던 빙해엔 이제 제국의 선박이 더 많이 돌아다녔다.
도시엔 실업자가 넘쳐나고 실업자가 강도나 혹은 전쟁 용병이 되어 도시 간의 분쟁을 부추겼다.
야스퍼 얀 반 하일데브론.
향후 야스퍼라는 이름으로만 불리게 될 새로운 의장은 전임자와 달리 강경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가 의장에 오르자마자 카스무어 왕국에 그들이 점거한 도시의 반환을 요구할 것이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전쟁의 불씨는 제국이 아닌, 제국의 서쪽을 태우려 하고 있었다.
카스무어 왕국은 군대를 북쪽으로 보내는 한편, 제국 남부 붉은 산맥의 고갯길을 통해 군자금을 남부 저지대로 실어 날랐다.
이런 상황에서 레벤호스트 가신 하나의 죽음은 쉽게 잊혔다.
누구나 마르틴 보엠이라는 자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다.
하지만 레벤호스트는 자신의 스승이자 그의 또 다른 분신이라 할 수 있는 스승의 죽음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는 저지대 연방을 은밀하게 지원했다.
전에 비축한 총과 전쟁 물자가 식량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저지대 연방의 국경 안으로 들어갔다.
루페르트는 조용히 그 모습을 관망할 뿐이다.
"저지대 연방의 내전이라. 그런 일도 있었지."
하지만 그들의 전쟁은 그들의 국경 내에서만 이루어지리라.
미래를 아는 루페르트는 과감하게 중신들에게 말했다.
"당분간은 내정에 집중할 것이다."
아직 레벤호스트와의 경쟁은 끝나지 않았다.
그가 저지대 연방에 역량을 소모할 때 루페르트는 이미 우월한 자리를 더 공고하게 다질 것이다.
'감히 도전조차 꿈꾸지 못할 정도의 차이를 보여 주지. 레벤호스트.'
뱀은 머리를 잃었다.
머리를 잃은 뱀이 구렁텅이로 꿈틀거리며 빠지는 광경이 황제의 눈앞에 어른거렸다.
131화 33. 머리를 잃은 뱀 (3)
황제에겐 두 개의 군대가 있다.
하나는 제국군이고 다른 하나는 황제군이다.
바깥에서 볼 때는 제국군이나 황제군이나 커다란 차이가 없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둘을 구분하지 않고 제국군이나 황제군 중 입에 붙는 명칭을 사용한다.
그러나 그 두 군대는 성질이 엄연히 다르다.
먼저 제국군은 황제가 제국 의회에서 제국 군주들의 합의를 얻어 제국의 안위와 이익을 위해 모집한다.
그 지휘관은 황제가 정하지만 제국 의회에 다른 의견이 있을 경우 황제는 반드시 제국 의회와 상의해야 하는데 그 군대를 운용할 제원이 제국 의회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제국 의회는 한 달에 한 번 백오십만 탈러를 상한으로 하는 운영 경비를 지급한다.
기이하게도 그 경비는 룸제국식 월급이라 불렸는데, 이는 기병과 포병을 합한 비율이 보병을 넘지 않는 3만 명 내외의 군대를 한 달간 운영할 수 있는 금액이다.
하지만 제국군은 제국 의회의 입김을 받을 수밖에 없고 제국 내부의 적을 치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황제는 사적인 목적을 위해서 황제군이라는 또 다른 제국군을 모집해야 했다. 제국군과 달리 황제군은 오로지 황제의 사비로 운영되며 그러므로 황제의 뜻에 따라 다방면에서 활약할 수 있다.
프리드리히 마티아스를 처단한 군대도 루페르트가 사비로 모집한 황제군이다.
물론 제국군을 황제군처럼 다룬 황제도 없지는 않았다.
철혈대제가 그러했다.
하지만 그처럼 제국군을 황제군처럼 운영하려면 제국 전체의 국정을 휘어잡아야만 가능할 것이다.
루페르트에겐 먼 이야기라고 할까.
루페르트는 황제군을 새로이 편성하려 했다.
한 번에 대규모 병력을 일으키는 건 구실도 없고 터무니없는 비용을 소모하기에 루페르트는 황제군의 중핵이 될 핵심 연대와 고위 장교만을 우선적으로 선발해 황제군의 토대를 닦으려 했다.
안타깝지만 내전에 참가한 분더발트 연대는 더 이상 이제 쓸 수가 없다.
제국의 명실상부한 1선급 연대건만 내전에 참여한 고참병과 장교 상당수가 군대를 그만뒀다.
특히 선제후 궁전 점령에 직접 참여한 병력의 이탈이 심했는데, 그들 대다수가 정신병을 호소했고 그중 일부는 극도의 불안증세로 도저히 정상적인 생활을 이어 나갈 수 없는 상황까지 이르러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
그들의 우두머리인 분더발트도 은퇴했다.
그는 와병을 핑계로 한 장의 서찰을 남긴 채 루페르트의 곁을 떠났는데 루페르트가 그를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는 사실은 황제의 첫 장군이었던 분더발트가 빠르게 황제 곁을 떠나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그 분더발트의 서찰의 내용은 짤막했다.
- 황제 폐하 만세! 역시에 이름을 남길 지휘관이 제 뒤를 이을 겁니다.
"분더발트. 그 사람은 고향으로 내려간 건가?"
루페르트가 서찰을 내려놓으며 중신들에게 물었다.
"그렇습니다."
베르너가 대답했다.
"조금은 안타깝군."
장군으로서의 능력은 몰라도 군사 조직가로서 능력은 탁월했다.
지금 같은 전쟁을 준비하는 시기엔 저렴한 가격에 합리적인 비용으로 군대를 모집할 수 있는 조직가 쪽이 도움이 된다.
루페르트는 회귀 전 레벤호스트의 장군 중 한 명을 떠올렸다.
에른스트 폰 룬돌프.
룬돌프 백작을 칭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사생아인 인물로, 야심이 많고 욕심이 많은 것 이외엔 전쟁 지휘관으로서는 이류에 가까운 인물이고 평판도 극도로 나빴다.
가는 곳마다 약탈을 일삼았고 지나가는 거의 모든 도시와 촌락을 황폐화하며 지나갔으니.
하지만 그는 저렴한 비용으로 매우 빠르게 군대를 조직하는 능력이 있었다.
죽여도 죽여도 끝없이 숫자를 보충하며 전쟁지도 한 곳에 장기말로 남은 그를 보며 골트문트는 룬돌프를 시궁쥐 같은 놈이라고 부르며 경멸하면서도 두려워했다.
'룬돌프라면 저렴한 병력에 군대를 모아 줄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는 써서는 안 되는 인물이다.'
룬돌프의 유일한 장점은 어떤 패배를 당했건 간에 지도에서 사라지지 않고 전쟁 지도 한 구석에 장기말로 남는다는 것이다.
그것 이외에 그에겐 아무런 장점이 없고 단점만이 있다.
그 단점은 상술한 바와 같다.
그는 악마에게 영혼을 판 자 융커스 베샤문트가 나타나기 전에 가장 재앙적인 인물이었다.
그의 병사들은 가축을 보이는 대로 죽이고 여자를 겁탈하고 반항하는 자는 죽이고 집을 불태웠다.
그들은 쟁기 대신 칼로 땅을 갈았다.
남은 건 버려진 여자와 아이, 불탄 폐허가 전부였다.
그마저도 역병이 남은 모든 걸 삼켜 버렸다.
"적당한 사람을 뽑아 군대를 조련하고 조직하도록 하게. 관직이나 명성에 연연하지 않는 인물이 좋겠군."
'지금 중요한 건 돈이겠지.'
전쟁에 대비한다는 건 곧 군자금을 마련하는 것이다.
군대는 돈 없이 움직이지 않는다.
평민을 채찍과 철권으로 휘몰아 전장에 서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압도적인 숫자로 전장을 가득 채우게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짚으로 쌓은 벽이다.
무질서하고 무지해 전장에서 의미 있는 기동이라는 게 불가능하고, 총성 한 번에 왕겨처럼 흩어지기 일쑤다.
쓸데없이 많은 병사가 얼마나 많은 식량을 무의미하게 소모하는지, 군대의 규모가 클수록 꼬리표처럼 달라붙는 역병이 얼마나 지독한지, 군대를 운영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것이다.
전쟁은 오직 잘 훈련된 용병만이 수행할 수 있다.
그들을 움직이는 건 종교나 출신보다는 계약이다.
계약은 돈을 필요로 한다.
소수의 예외가 있다지만 그 소수를 일반화하는 건 정신병자가 할 발상이다.
전쟁은 돈을 잡아먹는 괴물이다.
그 골트문트마저도 전쟁에서 이기지 못해 파산하고 말았다.
고어문트에 터 잡은 저 막강한 아이젠쉴트 상회조차 골트문트의 채무 불이행으로 휘청거렸고, 결국 도산의 길을 걸었다.
그에 비하면 루페르트는 대단히 유리한 고지를 가지고 있다.
'나는 돈을 복사할 수 있지.'
여신의 금고는 회귀에 영향받지 않고 재물을 보관할 수 있다.
본격적인 실험은 해 본 적은 없지만 루페르트는 자신의 무기 중 하나를 잊은 적이 없었다.
만약 황제의 군자금 1년 치를 여신의 금고에 보관하고 회귀한다고 해 보자.
그 군자금을 그대로 획득한 채 루페르트는 자신의 곳간에 아직 쓰지 않은 군자금이 남아 있는 걸 볼 수 있다.
그걸 다시 여신의 금고에 넣는다.
3년 치의 군자금이 생긴다.
계속해서 회귀를 반복한다면 루페르트는 골트문트 따위는 황금으로 묻어 버릴 수 있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부를 가지게 된다.
여신에게 그 일부를 떼어 줄 수 있는 건 물론이고 말이다.
늘 하던 생각이지만 아직 말할 기회가 없었다.
이제는 그 권능을 시험해 볼 때다.
"무슨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나요?"
여신의 방.
리프니에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루페르트를 노려보았다.
"제가 당신의 부를 보관해 줄 수 있는 건 맞지만 여신의 권능이 뭐라고 생각하나요?"
"아니, 여신님. 저는 그저."
"그건 너무 치사하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루페르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뭐지? 난 분명 여신님이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일어난 상황은 정반대다.
뒤로는 무슨 짓을 했든 앞으로는 온화한 미소만 보여 주던 여신이 정색하고 있었다.
곧 그녀가 슬픈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런 식으로 저의 권능을 사용해서 당신의 군자금을 불리는 것도 어떻게 보면 방법일 수도 있어요. 하지만 말이죠. 루페르트 가우저. 저는 그런 게 싫네요. 어디까지나 당신이 어려울 때, 당신이 필요할 때 간절하게 동원할 수 있는 그런 자금이라면 모를까, 그렇게 멋없이 회귀를 반복하며 저를 고생시키며 돈을 복사한다는 발상이.... 좀 안일한 거 같아요."
"죄송합니다. 여신님!"
"죄송하면 제 신전부터 빨리 완성해 주세요."
루페르트는 황급히 사죄를 하며 여신의 방을 빠져나갔다.
'그랬었지. 회귀는 그 자체로 여신님의 심력을 소모하는 것이었지.'
내심 준비했던 나름의 필승 전략이 무위로 돌아가는 느낌이다.
솔직히 루페르트도 너무 날로 먹는 게 아닐까 의구심을 가지던 전략이긴 했다.
'어쩔 수 없지. 그런 방법을 쓰지 않아도 재정의 우위는 내게 있으니.'
루페르트의 가장 큰 수입은 슈발츠마인과 카렐리아 등 직할지에서 들어오는 수입이다.
그것만으로 루페르트는 다른 선제후, 외국의 군주들을 가볍게 압도한다.
그다음으로 제국의 군주들이 바치는 세금이 뒤를 차지한다.
무역으로 얻는 관세도 세금에 비할 바 아니지만, 대단히 큰 금원이다.
게다가 루페르트에겐 리히트 보덴이라는 또 다른 보물창고가 있다.
세금에 비하면 크지 않은 돈이지만 온전히 루페르트의 개인적 수입이라는 점에서, 제국 회계 관리의 눈치를 보지 않고도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돈이다.
"트라이아 선제후 레벤호스트의 수입은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황제 폐하에 비하면 5분의 1도 되지 않습니다."
요하네스가 루페르트에게 잠재적인 적 레벤호스트와 루페르트 간의 격차에 관해 장문의 보고서를 작성해 보고했다.
"그 정도 차이가 난다고?"
"그렇습니다. 선제께서 트라이아 선제후의 수입이 높은 지역을 빼앗고 트라이아 선제후의 수입 기반이던 부르봉 왕국 간의 무역로를 고사시켰기 때문이지요. 트라이아 선제후령에서 가장 중요한 재산은 황금이 나오는 티롤 광산이라는 곳인데 선제 시절에 그 광산엔 해로운 공기가 발생해 더 이상 채굴을 할 수 없게 되었고 트라이아 선제후령의 경제력은 급격히 저하됐습니다."
루페르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트라이아 선제후령이라는 이름만 알고 있었던 레벤호스트 땅의 실체를 조목조목 눈으로 확인했다.
'이것이 트라이아인가.'
레벤호스트의 화려한 이미지에 가려 제대로 보지 못했다.
제국을 둘러싼 강대국 하나와 맞설 수 있다는 선제후령의 실체는 생각 이상으로 빈약했다.
'용병업과 약간의 무역, 농사로 수입을 올리고 있긴 하지만 제대로 된 특산물은 이제는 폐광이 된 금 이외에는 내세울 것도 없고 공장도 변변치 않다. 설상가상으로 돈을 벌어다 주는 도시의 수는 적고 제대로 된 상회도 없다. 그나마 부르봉에서 피난 온 신교도들이 체면을 세울 정도의 세금을 바치고 있어. 하지만 선제후를 떠받드는 하위 가문이 상당한 경제력을 쥐고 있어 선제후령 전체를 떠받드는 모양새군.'
슈발츠마인이 한 마리의 사자가 호령하고 나머지 하등한 것들이 뒤를 따르는 모양새라면 트라이아는 무리를 이끄는 늑대다.
물론 레벤호스트도 믿는 구석이 있다.
그는 영지 내에서 대단히 인기가 많은 군주이고 그의 휘하엔 용맹한 백성들이 있다.
부르봉 왕국과 저지대 연맹을 이웃에 둔 트라이아는 예전부터 용병업으로 많은 수익을 올렸다. 게다가 트라이아엔 부르봉 왕국에서 피난 온 신교도가 많다.
아직 영지에 완전히 정착한 건 아니지만 그들 일부는 수완 좋은 상인이고, 부르봉 내전에서 경험을 쌓은 병사와 하급 지휘관이 충분하다.
자금만 받쳐 준다면 레벤호스트도 큰 도박을 노릴 수 있다는 소리다.
하지만 레벤호스트의 가장 큰 재산은 역시 동맹일 것이다.
사적인 이익이나 욕심이 아닌, 신교라는 영혼과 믿음으로 엮은 동맹이 말이다.
당장 그는 앙쥬 왕국의 사위다.
여차하면 앙쥬 왕국 국왕이 바다를 건너 군대를 파견할 수 있다는 소리다.
레벤호스트의 머리라 할 수 있는 마르틴 보엠은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죽기 전까지 제국과 외국을 오가며 한 명이라도 많은 동맹을 확보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레벤호스트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마르틴 보엠만큼 거기에 목숨을 걸진 않을 것이다.
그는 몸이지 머리가 아니니까.
"레벤호스트의 동맹을 무너뜨려라. 특히 그의 사절이 다녀간 외국을 중심으로."
루페르트는 지도를 노려보며 그만의 그림을 그렸다.
꼭두각시 시절엔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쳐다보기만 했던 제국과 그 너머의 나라들.
그들이 어떻게 움직이는가.
무엇을 원하는가.
그리고 어떻게 그들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을지.
루페르트의 시선은 크게 두 나라로 가 있었다.
부르봉 왕국과 스베아 왕국이다.
마르틴 보엠은 두 나라에 다녀왔다.
"오토."
루페르트가 중신의 이름을 불렀다.
"네. 페하."
"레벤호스트의 사슬을 끊으려 한다. 할 수 있겠나?"
오토 브라에는 어렵지 않게 황제의 뜻을 알아차리고 미소 지었다.
"제 눈에 그 사슬은 꽤 녹이 슬어 보이는군요."
132화 33. 머리를 잃은 뱀 (4)
제국의 서쪽 국경에 자리 잡은 강국 부르봉 왕국엔 최근 새로운 왕이 즉위했다.
그 왕, 앙리 5세는 열다섯 정도 됐는데 주변에서 평가한 왕의 인물됨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흥분하기 쉬운 성격, 사려의 부족함, 무기력함, 잦은 싫증, 소화 불량 등 그다지 왕에 어울리는 재목은 아니라는 평가다.
심지어 그는 벌써 동성애적 성향을 드러내 주변의 성직자와 친지를 긴장케 했다.
호라교는 구교든 신교든 불문하고 동성애를 악마의 꾐에 넘어간 악덕으로 치부하고 엄벌에 처한다. 개인적으로 후사를 얻을 수 없는 건 물론이고 반역자에겐 좋은 구실이다.
불안한 소년 왕을 대신해 부르봉 왕국의 기틀을 다지고 있는 것은 뱅상 페리에라고 알려진 고위 성직자다.
그도 소년왕처럼 성격에 결함이 많았다.
작은 원한을 담아 두었다가 반드시 복수하는 아량 좁음, 사적인 영역에 대한 병적인 결벽, 호오가 뚜렷한 성격, 타인의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는 소심함, 알아듣기 어렵고 모호한 목소리.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부족함을 채우고도 남는 인내심과 탁월한 식견을 바탕으로 자칫 나락으로 갈 뻔한 부르봉 왕국의 기틀을 단단하게 다지고 있다는 평가다.
마르틴 보엠이라는 신교 목사를 직접 상대한 것도 뱅상 페리에다.
주교 출신인 그가 신교 목사 나부랭이를 상대했다는 것 자체가 상궤를 벗어난 일이지만 소문에 의하면 신교 목사와 구교 주교의 대담은 꽤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마무리됐다고 한다.
루페르트가 중용하는 세 명의 중신 중 하나, 오토 브라에가 그를 찾아간 건 그 대담의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저는 단지 왕국과 이웃한 선제후령이 총애한다는 사람이라기에 손님으로 맞이한 것뿐입니다. 그가 신교를 믿건 아니면 다른 요사스러운 종교를 믿건 그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문제지요. 저는 부르봉 왕의 신하로 그를 맞이했고 그 또한 트라이아 선제후의 신하로 찾아온 것이니까요."
오토 브라에는 뱅상 페리에의 심중을 파악하려 애를 썼지만, 주교는 자신의 마음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았다.
그다지 영양가가 없는 무던한 이야기가 흘러간 후 오토 브라에는 이 노회한 주교에게서 얻을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아차렸다.
오토 브라에가 이번에 얻은 소득은 뱅상 페리에가 자신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불유쾌한 발견이 전부였다.
하지만 오토 브라에는 뱅상 페리에가 입을 다물 가능성에 대비해 또 다른 한 수를 준비했다.
그것은 바로 오토 브라에가 동행한 그의 수행원들이다.
자신이 직접 선발하고 훈련한 수행원들은 저잣거리 밑바닥에서부터 궁정의 그늘까지 폭넓은 영역에 걸쳐 왕국에 감도는 여러 상황과 정보를 신속하게 수집했다.
그 결과는 루페르트에겐 우호적이었다.
"당장 부르봉 왕국은 전쟁에 뛰어들 여력이 없습니다. 애당초 구교를 믿는 부르봉 왕국이 레벤호스트를 지원한다는 건 꽤나 용기가 필요한 일이고 무엇보다 왕국은 지난 신교도 반란으로 인한 상처를 수습하는 것만으로 벅찬 상태입니다. 앙리 5세가 실권을 쥐고 있다면 모를까, 지금 왕국을 쥐고 흔드는 건 뱅상 페리에입니다. 그 음습한 자가 그렇게 막무가내인 정책을 밀어붙일 것 같진 않습니다."
루페르트는 오토 브라에의 보고서를 읽고 만족을 드러냈다.
"부르봉 왕국은 레벤호스트를 돕지 않겠군."
"그 녹슨 사슬은 제대로 묶이지도 못한 상태였습니다."
그것만으로 절반의 걱정은 덜었다.
제국과 국경을 접한 부르봉 왕국이 전쟁에 뛰어든다는 건 전쟁의 판도를 바꾸고도 남을 정도의 사건이니까.
병력의 수준과 질도 질이지만, 부르봉 왕국 정도 되는 나라가 믿음을 져버리고 전쟁을 벌인다는 건 아마 제국을 둘러싼 잠재적인 적대국에게 어떤 신호를 보내 주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스베아 왕국은 어떤가?"
"스베아 왕국은 그들의 친척인 서쪽의 북부인과 싸우느라 여력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
빙해 약탈자라고 불리는 북부인은 제국 북방을 위협하는 강대한 적이다.
병사 하나하나의 수준이 높고 강한 해군력을 가지고 제국의 해안을 들쑤시는 그들의 파괴 행위는 저 강한 척하는 노르드마르크 선제후 게오르크 아르님의 혼백을 쏙 빼놓을 정도였는데, 그들을 스베아 왕국이 토벌한다?
그것은 루페르트가 보기에 호재로 보였다.
'그 강력하고 야만적인 부족을 스베아 왕이 처리해 준다면 그나마 우리 쪽엔 사정이 낫겠지. 오로지 약탈만을 목적으로 하는 야만인 대신 말이 통하는 야만인과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니까.'
지난 회귀 시절에 스베아 왕국은 그다지 두각을 내지 않았다.
그들보다 문제가 된 건 지금 스베아 왕국과 전쟁을 벌인다는 통합되지 않은 북부인 부족이다.
사실 루페르트의 눈에 스베아 왕국이라는 건 문명인의 탈을 쓴 북부인에 지나지 않지만, 야만인끼리 서로 싸워 준다면 이쪽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전개다.
개입할 수 있는 외국은 하나가 더 있다.
슈발츠마인의 서쪽, 트라이아의 서북에 걸쳐 자리 잡은 저지대 연방이다.
하지만 그들은 내전에 휩싸였고 카스무어 왕국이 철혈대제에게 불하받은 도시를 지원하기 위해 전쟁에 참여했다.
그들이 제국의 내전에 개입할 여력은 거의 없을 것이다.
제국의 오랜 동맹국인 카스무어 왕국은 탁월한 해상 강국이고 제국 다음으로 강한 보병대를 지닌 나라도 명성이 자자하니까.
기타 잡다한 공국, 백국, 자유도시는 황제가 생각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미약한 세력이다.
"선제후는 쓸 수 있는 수단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티롤 금광을 되찾는 등의 기적이 있다면 모를까, 현재의 자금력과 외교력만으로 상황을 바꾼다는 게 여의치가 않겠지요. 마르틴 보엠이 있다면 어떻게든 신교 세력을 전쟁으로 끌고 왔겠지만, 선제후 혼자서는 무리입니다."
오토 브라에의 총평은 가혹했다.
"내전을 벌인다면 선제후는 모든 걸 잃을 겁니다. 그것도 아주 빠른 시간에 말이죠. 그는 돈이 그다지 많지 않기 때문이죠. 단순한 이치입니다."
* * *
티롤 광산.
일개 군소 부족에 불과하던 트라이아를 공작에서 선제후로 만든 영지의 보석과도 같은 귀중한 금광이다.
룸 제국 이전, 상고시대부터 돌로 만든 곡괭이로 금을 캐왔다는 이 유서 깊은 금광은 철혈대제 시절에 죽음을 부르는 공기가 갱도에 가득 차 쓸 수 없게 되어 버렸다.
해로운 공기가 갱도 안에 퍼져 사람을 죽이는 건 그리 드문 일이 아니지만, 티롤 금광을 덮친 재앙은 규모가 달랐다.
해로운 공기가 거의 갱도 전체를 가득 채웠고, 지금 이 순간에도 갱도의 가장 깊은 곳에서 새어 나와 갱도는 물론 주변 농작물마저 시들게 했다.
그리하여 광산을 폐쇄했고, 어쩔 수 없이 트라이아는 광산을 기반으로 만든 제조와 무역 기반에 의지해야 했다.
옆에 부르봉 왕국을 두고 있다고 하지만 트라이아는 숲이 많고 구릉이 많은 지역이다.
제국을 가로지르는 상인들은 숲으로 이루어진 트라이아보다는 북쪽의 평평하고 완만한 평야가 펼쳐진 저지대 연방의 자유도시를 거치는 루트를 택했다.
레벤호스트는 선제후에 오른 뒤 나른 도로를 개선하고 관세를 낮추고 교역에 따르는 편의를 제공했지만, 저지대 연방 또한 비슷한 장려책을 내놓아 별 재미를 보지 못했다.
트라이아는 고어문트를 흉내 내지만 고어문트처럼 될 수 없다는 조롱 섞인 이야기가 고어문트의 주점에 퍼져도 레벤호스트가 할 수 있는 건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그는 감히 제국의 황제이자 제국 최강의 슈발츠마인 가문에 맞서려 한다.
절대적인 열세라는 상황을 호전하기 위해 나름 외교적인 방법으로 해법을 찾아가려 했지만 쉽지가 않다.
사람들은 레벤호스트가 믿는 신교 군주 연합이 레벤호스트가 부당하게 황제의 공격을 받지 않는 이상 레벤호스트의 싸움을 지원하지 않으리라 보았다.
명분이 너무나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것도 사실상 제위를 반납한 것과 다를 바 없는 욕심 없는 황제에게 도전한다는 건 트라이아 주민조차도 억지로 보였다.
"결국은 돈이지요."
안드리아의 루돌프라는 자는 신비로운 자였다.
마르틴 보엠이 죽자마자 혜성처럼 나타난 그는 순식간에 레벤호스트의 마음을 휘어잡았다.
그 루돌프는 레벤호스트의 눈이 번쩍 뜨일 만한 방법을 제시했다.
"잃어버린 광산을 트라이아의 품으로 돌려주려 합니다."
"그, 그런가? 그런 게 가능한가?"
"네. 하지만 그 악령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사람 몇 명이 필요할 거 같군요."
"사람이라고?"
"사형수나 아니면 연고가 없는 부랑배, 왕을 배신한 자들, 나라 없는 민족. 뭐, 쓸 만한 것들은 얼마든지 있겠지요. 뭐 하면 연안 갤리선에서 노 젓는 인간들을 차출해도 될 겁니다."
"무엇을 하려 하나?"
"광산 아래에 괴물이 있습니다. 숨결 자체가 독으로 이루어진 상상할 수 없는 고대의 괴물이지요."
루돌프의 말은 어린아이조차 믿기 어려울 정도로 유치했지만 레벤호스트는 그의 말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이자는 눈으로 보이는 이상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마법. 아니 마법과는 다른 보다 근원적인,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요술 같은 힘이라고 할까.'
레벤호스트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르틴 보엠 대신 옆자리를 꿰찬 중신들이 서로를 마주 보다가 답변했다.
"신교의 대의를 위해 인간이길 포기한 자 몇 명을 버리는 건 그다지 아깝지 않은 장사로 보입니다."
"그렇게 하게."
레벤호스트는 흔쾌히 승낙했고, 루돌프가 보는 앞에서 중신을 불러 제물로 바칠 사람을 모을 걸 지시했다.
중신이 어떤 인간을 선발할지 묻자 레벤호스트는 잠시 생각하다 이내 눈을 반짝이며 답했다.
"부르봉에서 망명 온 신교도가 좋겠군."
"부르봉 출신 신교도 말입니까?"
중신이 아닌, 루돌프가 물었다.
"그들은 돈이 많지. 하지만 그 돈은 부정하게 벌어들인 것이야. 게다가 종교가 다르다고 하나 자신의 군주를 배신한 자다. 한 번 군주를 배신한 자가 두 번을 배신하지 못하겠나? 안 그래도 그들이 내 영지 안에서 비음 섞인 부르봉어로 제국의 언어를 오염시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레벤호스트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으며 루돌프를 보며 넌지시 말했다.
"그들을 박해한다면 부르봉 왕의 마음도 얻을 수 있겠지? 안 그런가?"
이에 루돌프는 미소로 화답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마르틴 보엠이라는 머리가 없으니, 자기가 어디로 향하는지 자신조차 모르는군.'
루돌프는 아무 말도 해 주지 않았다.
루돌프의 방관 속에서 레벤호스트는 부르봉 출신 신교도에게 죄를 덮어씌워 그중 일부를 투옥하고 고문해 자백을 받아 냈다.
재산을 모두 토해 낸 그들은 알 수 없는 곳으로 끌려갔다.
혹자는 그들이 부르봉 왕에 보내졌다고 하고 혹자는 그들이 갤리선에 끌려가 노를 젓고 있다고도 말한다.
진실을 아는 자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부르봉어를 쓰는 교양 있어 보이는 사람들이 돼지처럼 줄줄이 묶인 채 티롤 광산의 밑바닥으로 끌려갔다고.
그날 밤 광산 주변의 사람들은 쉬쉬하면서도 괴담을 전했다.
단 한 번도 듣지 못한 야수의 울음이 광산 전체를 들썩이며 밤새 울려 퍼졌다고.
"폐하. 또 한 번의 승리를 축하드립니다."
사막을 닮은 고혹적인 여인이 승리를 축하했다.
"승리라고 부르기도 과분한 것이지. 싸움조차 아니었다."
여성이 루돌프 아래에 널브러진 집채만 한 괴물을 놀라움이 깃든 눈으로 보았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겸손한 게 아닐까요? 샐러맨더. 신화의 괴물을 죽이셨는데."
이에 루돌프는 감흥 없는 얼굴로 자신이 칼을 박아 넣어 죽여 버린 괴물을 응시했다.
용암의 파편을 온몸에 박아 넣은 거대한 도마뱀.
신화에서 샐러맨더라 불리는 괴물을.
"아가티아, 녀석은 저항조차 하지 않았어."
"진짜요?"
"날 아비라고 생각했거든."
"어떻게 그런 것이 가능했나요?"
사막을 닮은 피부색과 사막 위에 떠오른 달처럼 맑은 눈동자를 지닌 여성이 강한 흥미를 드러냈다.
뇌쇄적인 미녀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루돌프가 답했다.
"알에서 깨운 것도, 인간의 피를 묻힌 수정을 먹여 키운 것도 나였으니."
담담하게 말하는 루돌프의 얼굴엔 일말의 감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 무감각과 무심함은 사막을 닮은 여성의 충성심의 근원이니까.
"제국은 끝나겠지요?"
그 물음에 루돌프는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그렇겠지."
루돌프는 죽은 괴물을 힐끗 보고는 자리를 떠났다.
"머리를 잃은 뱀은 트라이아만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