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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   *   *

 조굉은 연우혁이 뒤에 하인들을 시켜 들고 온 궤짝들을 보고 의아해했다.

 "재산이 없을 텐데 어디서 났느냐?"

 "한경 관리들의 소소한 성의입니다."

 "탐학질을 얼마나 했으면 저렇게 내놓을까."

 부지휘사는 못마땅하다는 듯이 말하면서도 돌려보내진 않았다.

 "금으로 바꿔줄 테니 이번 일의 포상으로 가져가도록 해라. 그냥 돌려주면 다른 관리들에게 눈치가 보이겠지."

 "!"

 뜻밖의 말에 연우혁은 당황했다.

 "괜찮습니다."

 "됐다. 그만한 공을 세웠는데 저게 뭐 대단하다고. 안 그래도 한 번 부르려고 했는데, 깨달음을 잘 갈무리한 모양이구나. 이번에 뇌옥에 갇힌 후기지수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지? 원한이 있더냐?"

 '무슨 뜻이지?'

 연우혁은 질문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당황했다. 영안으로 보니 부지휘사가 딱히 악의나 함정을 파놓은 것 같지는 않았다.

 "딱히 없습니다."

 "처형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라고 생각하느냐?"

 "굳이 저 많은 자들의 피를 봐야 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알겠다! 그럼 그렇게 하마. 구파일방에게는 네가 전하도록 해라."

 "...?!!"

136화

 부지휘사의 말에 연우혁은 깜짝 놀랐지만, 곧바로 침착을 되찾고 방금 들은 이야기의 진의를 파악하기 위해 노력했다.

 '무슨 뜻이지?'

 연우혁이 부지휘사가 한 말을 그대로 믿을 만큼 순진하진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한경에 붙잡힌 구파일방 후기지수들의 생사를 일개 판관에게 결정하게 할 리는 없지 않은가.

 '...처음부터 처형할 생각까지는 없었던 거였군.'

 그렇다면 한경에 떠돌던 강경한 소문들은 무림인들을 압박하기 위해 금의위 측에서 퍼뜨린 게 분명했다.

 황자 입장에서는 무림인들의 원한을 사지 않고도 겁에 질려 복종하게 만들었으니 실로 교묘한 계략이었다.

 '정말 무서운 사람이다!'

 하지만 아직도 이해가 안 되는 게 있었다.

 "태자 전하께서 베푸신 은덕의 공을 감히 제가 가져가도 되겠습니까?"

 태자가 마음을 바꿔서 무림인들에게 은혜를 베풀고 싶다면 그냥 태자의 이름으로 베풀면 되는데, 굳이 연우혁에게 그 공을 나눠주려고 하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평범한 관리였다면 냉큼 받아먹었겠지만 연우혁은 한경과 무림에서 구르며 아무 대가 없는 호의 같은 건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조굉은 피식 웃었다. 눈앞의 판관이 재빨리 내막을 파악한 뒤 행동을 삼가고 있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부하들에게 보여주고 싶을 만큼 실로 뛰어난 처세였다.

 "먼저 무림인들이 그렇게 멍청하진 않다. 목줄을 조였다가 풀어줄 때도 나름의 이유가 있어야 하는 법."

 부지휘사는 손바닥 위에 앉은 작은 새가 날아오르려고 할 때마다 재빨리 손바닥을 아래로 내려 힘을 받지 못하게 만들었다. 몇 번을 반복하자 새는 손바닥을 움직이지 않아도 위로 날아오르지 않고 의심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그냥 풀어줬다가는 은혜도 잊고 전하의 진의를 의심할 수 있다. 무림에도 명성이 있는 관료가 목숨을 걸고 충언을 올렸다는 이야기가 훨씬 더 그럴듯하지."

 '과연.'

 이렇게 조여 오다가 갑자기 풀어주면 무림인들은 처음에야 감격하겠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의심을 하게 될 것이다.

 처음부터 무림인들을 길들이기 위해 황자가 얕은 수작을 쓴 것이 아닌가 하고 말이다.

 그에 비해 청백리로 이름 높은 한경의 판관이 후기지수들을 위해 직언을 올렸다는 이야기는 훨씬 그럴듯하게 들렸다.

 납득이 가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내게 호의적이어서 오히려 무섭군.'

 황자의 속마음을 모르는데 호의를 베푸니 연우혁 입장에서는 오히려 긴장되는 게 있었다.

 출세를 위해서 상대방이 줄을 던지면 무조건 잡아야 하는 입장이었지만, 적어도 상대방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고 가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전하께서 공을 네게 나눠주시는 건 네가 세운 공적 때문이다."

 조굉은 연우혁의 속마음을 눈치 챘는지, 혹은 눈치채지 못했는지 구분이 가지 않는 무심한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이번 개방에 숨은 혈교 첩자를 찾아낸 일은 원래라면 훨씬 더 크게 치하를 했어야 하는 일. 한경이 소란스럽지만 않았다면 그렇게 했을 거다. 아까 원한을 물어본 것도 그래서였지."

 "원한... 말입니까?"

 "몇몇은 처형할 수도 있었다는 뜻이다. 네가 원했다면."

 "!"

 연우혁은 별 생각 없이 내뱉었던 대답을 떠올리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저번에 집요하게 싸웠던 몇몇 후기지수들을 무심코 언급이라도 했다면 무익한 원한이 쌓였을 뻔했다.

 "황송할 따름입니다. 하지만 그런 원한이 있었다면 당연히 말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래? 원한이 남았을 줄 알았는데."

 부지휘사는 지금이라도 죽이고 싶은 자가 있다면 말하라는 듯이 날카로운 눈빛을 던졌다. 그 날 밤 싸웠던 흔적을 보면 한둘 정도는 원수가 되었어도 이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무림에서 원한 있는 자를 죽일 기회는 흔치 않았다. 죽일 수 있을 때 죽이지 않으면 언제 귀찮아질지 몰랐다.

 하지만 연우혁은 금의위의 힘을 빌려 피를 볼 생각이 없었다. 나중에 이 사실이 알려지기라도 하면 역으로 본인의 목을 조를 수도 있지 않겠는가.

 "아닙니다."

 "하긴 무공이 벽을 넘었으니 원한도 같이 두고 왔을 수 있겠구나. 고수는 초연한 법이지. 그 나이에 그렇게 고강한 무공을 가진 사람은 고금을 통틀어도 드물었다. 비무가 흐지부지됐음에도 무영암룡(無影暗龍)이란 별호를 받았으니, 뿌듯해해도 좋다."

 "감사합... 제 별호가 무영암룡입니까?"

 "저택 안에서 심득을 갈무리하느라 못 들었나? 그렇다. 썩 괜찮은 별호지."

 부지휘사는 혈교가 알아차리지도 못하는 사이에 그들을 발본색원한 판관의 솜씨에 참으로 잘 어울리는 별호라고 생각했다.

 어떤 마두든 간에 저런 별호를 들으면 한경 근처에서 암계를 꾸미기 두려울 터였다.

 '별로 같은데.'

 연우혁은 결국 암룡이란 별호를 받은 게 떨떠름했지만 하늘 같은 금의위 부지휘사 앞에서 내색할 순 없었다.

 "아주 기쁩니다."

 "그래. 그럼 구파일방한테 가서 전하도록 해라."

 "예. 처형을 막았고, 곧 다들 풀려날..."

 "그건 아니다."

 "예?"

 "말하는 걸 잊었군. 처형하진 않겠지만, 그렇다고 전부 다 풀어주면 놈들이 다시 기고만장해지겠지. 교훈을 주기 위해 몇몇 놈은 뇌옥에 한동안 가둬 둘 생각이다."

 연우혁은 묻지 않아도 그 몇몇 놈들이 본인의 옷을 찢고 몸에 상처를 남긴 놈들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한경의 뇌옥이 공자들을 가둘 만한 곳은 아닌데?'

 애초에 한경 정도 되는 대도시니까 뇌옥이 있지, 작은 촌락의 관아 같은 곳은 뇌옥 같은 것도 없었다. 누군가를 가둬놓기만 하는 것도 생각보다 은자가 드는 것이다.

 그런 한경이라 하더라도 뇌옥은 그리 크지 않았고 시설도 별로였다. 아무리 거칠고 튼튼한 무림인들이라 하더라도 거기 계속 있는 건 상당한 고생이었다.

 '상관없나. 구파일방의 후기지수 정도면 옥살이를 도와줄 자들 정도야 고용할 수 있을 테니.'

 이 정도면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한 연우혁은 고개를 숙였다. 뇌옥에 갇힌 후기지수들까지 꺼내줄 의리는 없었다.

*   *   *

 무림맹 쪽으로 일이 긍정적으로 풀릴 것 같다고 서신을 보낸 뒤, 연우혁은 관리들에게 찾아갔다. 서신을 몇 통 보내며 생색을 내야 하는 무림인들과 달리 한경의 관리들한테는 편하게 보고할 수 있었다.

 "이런 빌어먹을!"

 "?!"

 그러나 관리들의 반응이 생각보다 격렬했다. 연우혁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이 물었다.

 "이 정도면 최선의 결과 아닙니까?"

 스스로 자랑할 생각은 없었지만 이 정도면 꽤 괜찮은 결과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말에 지부 대인이 만족스러워하며 대답했다.

 "최선의 결과지. 연 판관. 잘 했네! 어느 누가 금의위를 이렇게 설득할 수 있었겠는가! 나도 무림인들에게 체면이 설 테니 정말 기쁜 일이야."

 "그런데 왜 저렇게...?"

 "하하, 연 판관은 겁이 없어서 잘 모르는군그래! 몇몇 후기지수들이 뇌옥에 갇혀 있으면 한경에 무림인들이 그만큼 들락날락하지 않겠나!"

 "!"

 생각해보니 한경의 뇌옥에 후기지수들이 몇몇 갇혀 있으면 그들을 돌봐주기 위해서라도 무림인들이 근처에 어슬렁거릴 수밖에 없었다.

 한경의 관리들 입장에서는 청정한 거리에 무림인들이, 그것도 나름 세력이 있는 무림인들이 늘어난 셈이니 거슬릴 수밖에 없으리라.

 애초에 연우혁처럼 상대가 무공을 익혔어도 아랑곳하지 않고 덤벼드는 관리가 드문 것이다.

 "과연. 금의위들이 일부 남긴 하겠지만 그들은 뇌옥을 지키는 정도일 테니."

 "잘 말했네. 연 판관! 금의위 놈들이 자기 일만 신경 쓰느라 한경의 관무는 아랑곳하지 않는군. 하여튼!"

 "나쁜 점만 있지는 않네. 무림인들이 갇혀 있는 만큼, 더 성의를 보이기 위해 은자를 많이 지불하겠지."

 "이 와중에 은자 이야기냐!"

 "그럼 이 와중에 은자를 이야기하지 언제 은자를 이야기한단 말인가?"

 한경의 관리들은 한동안 뇌옥에 있을 후기지수들에 대해 떠들며 어떻게 해야 할지를 진지하게 논의했다.

 그걸 보며 너털웃음을 터뜨리는 지부 대인의 모습에, 연우혁은 의아함을 느껴 물었다.

 "대인께서는 무슨 계책이라도 있으십니까?"

 "그런 게 있으면 내가 왜 숨기겠나? 하하. 설마 내가 웃어서 그렇게 생각한 건가?"

 "예..."

 "연 판관, 내가 웃은 건 내 일이 아니기 때문에 웃은 걸세! 저들이 저렇게 열심히 고민하는 게 어찌 기특하지 않겠는가!"

 '괜히 물어봤다.'

 지부한테 물어본 걸 후회하며, 연우혁은 앞으로 한경이 어떻게 변할지 깊게 고민했다.

*   *   *

 관리들은 진지하게 논의하다가 싫증이 났는지 연우혁을 데리고 주루로 이동했다. 술잔이 몇 번 돌고 나자 모두 다 무림인들에 대한 짜증을 잊은 것처럼 보였다.

 "한 가지는 확실하네. 놈들이 건방지게 기어오르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걸세."

 "동감하오! 안 그러면 머무는 내내 상전 노릇을 할 것 아닙니까!"

 "관졸들에게 미리 말해둬서 뇌물을 깎지 못하게 해야 한다. 몇몇 멍청한 관졸 놈이 뇌물을 적게 받고 들여보내주면 한경의 청렴한 관리들 모두가 손해를 보게 되지!"

 연우혁은 오늘 나눴던 이야기들을 몇 개 되새겨보며 저택으로 향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저택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누구지?'

 "들어와라!"

 "!"

 그렇게 많이 듣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연우혁은 상대가 누군지 바로 알아차렸다. 정파에서 가장 명성 드높은 고수의 목소리를 잊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태극검존 님!"

 "앉게!"

 태극검존은 별다른 인사나 차를 내오게 하는 대신 경쾌한 태도로 본론을 꺼냈다. 낯익은 병장기 두 개를 꺼내서 던지자 연우혁은 그 무기의 모습을 곧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혈교의 신병이기인 혈옥갑(血玉鉀)과 혈옥비(血玉匕)였다.

 그러나 그 모습은 저번에 봤을 때와 꽤 많이 달라져있었다. 무엇보다 그 특유의 짙은 혈색이 완전히 사라져서 보이지 않았다.

 "광명갑(光明鉀)과 귀령비(鬼靈匕)다."

 "원래 이름입니까?"

 "그래! 혈교 놈들이 참 잡다하게 섞인 놈들이라 여기저기서 보물은 많이 주워 모았던 모양이군. 광명갑은 원래 명교의 보물이었다. 귀령비는 배교의 보물이고. 그 두 개를 혈교 놈들이 멋대로 바꾼 게 혈옥갑과 혈옥비다."

 "검존께서 술법을 파훼하신 겁니까?"

 "아니. 보아하니 자기가 해놓고도 모르고 있었군. 하긴 절정의 경지가 황홀했겠지!"

 태극검존의 말에 연우혁은 그 날 밤 기억이 다시 떠오르는 걸 느꼈다.

 워낙 정신이 없었는데 생각해보니 그 때 보물을 제압하고 나서 혈옥갑이 자기 멋대로 떨어졌던 것이다.

 "네 영기가 두 보물을 정화시킨 거다. 경지를 넘으면서 말이다. 그러니 잘 사용해봐라. 명교는 이제 흔적도 남지 않았고, 배교 놈들은... 배교 놈들은 들키면 귀찮아지겠지만 이제 절정의 고수니 그 정도는 감수할 만하겠지. 혈교의 보물을 입수했다는 소문을 듣고 왔는데, 덕분에 재밌는 구경을 했다."

 "...감사합니다!"

 연우혁은 태극검존에게 감사인사를 했다. 안 그래도 혈교의 보물을 멋대로 쓰는 것에 조금 조심스러운 감이 있었는데, 태극검존이 확인하고 검증을 해줬으니 안심이 될 수밖에 없었다.

 "혹시 이 무림말학에게 해주실 조언이라도 있으십니까?"

 "먼저 스스로를 말학이라고 하는 것부터 관둬라."

 "..."

 "절정의 경지에 올랐고, 스스로의 뜻도 깨달았는데 내가 무슨 조언을 할까?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정진해라. 오직 그뿐이다."

 일어서서 나가려던 태극검존은 뚝하고 발걸음을 멈췄다.

 "굳이 조언을 하자면, 경지에 오른 김에 술법을 몇 개 더 익혀놔라. 혈교 놈들을 상대할 때 유리할 거다."

 "명심하겠습니다."

 말을 끝낸 태극검존의 허리가 구부정해지더니 늙은 촌부로 변해서 대문을 빠져나갔다.

 그 뒷모습을 존경스럽게 쳐다보던 연우혁은 문득 생각이 나서 외쳤다.

 "태극검존 님! 이번에 뇌옥에 갇힌 후기지수들은 안 궁금하십니까?"

 -별로 안 궁금하다.

 "..."

137화

 상대가 너무 즉답하자 연우혁은 당황했다. 당연히 후기지수들 때문에 온 줄 알았던 것이다.

 "하지만 같은 문파의..."

 이제는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태극검존이 정말로 사라졌다는 걸 깨달은 연우혁은 더 이상 부르는 걸 포기하고 저택으로 돌아왔다.

 '명교와 배교의 보물이라고?'

 광명갑은 예전과 달리 기운을 불어넣어도 핏빛을 띠지 않고 투명함을 유지했다. 그러면서 단단함은 달라지지 않았으니, 상대를 방심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는 예전보다 훨씬 나아진 셈이었다.

 게다가 명교는 이미 흩어져서 흔적도 찾기 힘든 세력이었으니 뒷일을 걱정하지 않아도 됐다.

 쾅!

 연우혁은 다시 한 번 권법을 펼쳤다. 저택 연무장 구석에 있던 바위가 실금이 가며 쪼개졌다.

 본인이 절정의 경지에 오른 것도 있었지만, 그렇게 내공을 담지 않았는데도 이만한 위력이 나오는 건 대단한 보물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가볍게 위력을 확인한 연우혁은 영안을 열고 깊게 파고들었다.

 광명갑(光明鉀). 명교의 보물, 운철을 성화(聖火)로 제련해냈기에 파사(破邪)의 기운이 있어 삿된 술법을 밀어낸다...

 '...명교보다 혈교 쪽에서 피눈물을 흘릴 것 같군.'

 안 그래도 이미 몇 번 상대방의 대계를 망친 만큼 충분히 원수지간이었는데 이 혈옥갑까지 연우혁의 손에 들어가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는 걸 알게 되면 어떻게 반응할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연우혁은 광명갑을 착용한 뒤 귀령비를 꺼내들었다. 사실 광명갑과 달리 귀령비는 대놓고 휘두르기 꺼림칙한 무기였다. 극음지기가 뭉쳐서 휘두를 때마다 귀곡성(鬼哭聲)이 난다는 점을 제외하더라도 일단 배교의 보물이지 않은가.

 배교가 혈교처럼 광적인 이들도 아니고 어디까지나 신비문파에 가까운 이들이었지만 보물이 연우혁 손에 있다는 게 알려져도 그럴지는 알 수 없었다.

 '이건 보는 눈 없을 때 꺼내야겠다.'

 보물을 점검한 연우혁은 마지막으로 태극검존이 남긴 말을 떠올렸다.

 술법을 몇 개 더 익히란 말은 확실히 솔깃하게 들렸다. 조정에서 내려온 학사나 혹은 몇몇 도사들이 쓰는 술법만 봐도 알 수 있었지만, 그 쓰임새가 한정적인 무공과 달리 술법은 여러모로 편리한 기술이었다.

 더군다나 연우혁처럼 선천적으로 상단전이 열려서 영안과 영기를 짊어지고 있는 사람 같은 경우라면 더더욱 접근하기 쉬웠다. 그나마 몇 안 되는 장점이었다.

 물론 연우혁이 무당이나 소림, 혹은 배교의 제자도 아니었지만 이제 연우혁에게는 권력과 은자가 있었다. 대단한 비술이 아니라 쓸만한 술법 몇 개는 충분히 구할 수 있을 터였다.

*   *   *

 공 총관은 젊은 판관이 부르자 의관을 몇 번이고 점검한 다음 준비한 선물을 챙겼다.

 지부 어른을 만나러 갈 때보다 몇 배는 더 조심스러워하는 모습에 전장의 점원이 의아해했다.

 "주인 어르신. 연 판관은 그 지위가 낮았을 때부터 어르신과 친분이 있었고, 또 어르신께서 섭섭하게 하신 적도 없었잖습니까. 왜 그리 조심하시는 겁니까?"

 "허허, 너는 평생 상인으로 크게 성공하기는 그른 놈이구나!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하다니."

 총관은 단순한 점원의 말에 혀를 차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혹시 누가 듣기라도 했나 싶어 조심스러웠던 것이다.

 "기억해둬라. 누군가 출세했을 때 그 사람의 빈궁했던 과거를 떠올리며 건방을 떠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기껏 친절을 베풀었으면 그에 맞춰서 호의를 살 생각을 해야지, 어디 과거 일에 얽매여 건방을 떨겠느냐?"

 공 총관은 연우혁이 포쾌였을 때부터 안면이 있었고 이런저런 거래를 해왔었지만, 그렇다고 그 과거를 들먹일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상대가 판관의 자리에 앉았다면 예전의 행동들이 책잡힐 게 두려워 더욱 조심해야지 친한 척 굴면 트집을 잡힐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단순한 점원과 달리 공 총관은 한경의 다른 부호나 세족으로부터 듣는 이야기가 많았다.

 벌써 세운 공적이 많아 연 판관을 눈여겨보는 자들이 제법 된다는 것 아닌가.

 아직 짐작이지만 공 총관은 연우혁이 더 출세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터무니없이 들릴 수도 있겠지만 지금 연우혁이 출세한 걸 보면 전혀 말이 안 되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오늘 이렇게 부른 게 어떻게 보면 기회다.'

 그렇기에 공 총관은 선물까지 신경 써서 챙겼다. 청렴한 판관의 신경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 고심해서 고른 찻잎과 다기(茶器)였다. 이 정도라면 뇌물로 보이지 않는 적절한 선물이 되리라.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역시 주인 어르신이십니다."

 "앞으로는 말을 한 마디 하더라도 깊게 생각하고 하거라."

 "그렇다면 주인 어르신을 부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야 어렵지 않지. 지금 붙잡힌 무림인들 때문 아니겠느냐."

 공 총관은 한경의 관리들이 구파일방의 압박을 받고 중재에 나설 것이라고 정확하게 예측했다. 한경에서 유혈 낭자한 처형이 벌어져봤자 관리들에게 좋을 게 없기 때문이었다.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자들도 부름을 받았을 거다. 태자 전하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성의를 준비하라는 거겠지."

 총관의 말에 점원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또 얼마나 많은 은자가 나갈지 걱정하는 얼굴이었다.

 "허허, 너무 신경 쓰지 마라! 오히려 이런 은자로 빚을 지워둘 수 있다면 남는 장사다. 또, 태자 전하와 인연을 맺을 수 있는 기회가 그리 흔하겠느냐!"

 물론 공 총관도 얼마가 나갈지 알 수 없어 속이 쓰리고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점장에서 일하는 이들한테 약한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었다.

 가서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협상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 때까지는 호방하게 행동하는 것이 상인인 법.

 "과연 그렇습니다!"

 총관의 말에 넘어간 점원들은 밝아진 얼굴로 배웅했다. 공 총관은 긴장되는 마음으로 관청을 향했다.

 평소 연우혁이 머무르는 관청의 형관은 길게 줄이 늘어섰지만, 최근에 있었던 무림인들의 소란 때문인지 줄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무림인들이...

 '...장로 아닌가!?'

 공 총관은 기겁해서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쳤다. 형관 건물 앞에 서있는 건 구파일방의 무림인들이었고 그 무림인들을 이끄는 건 무려 장로였던 것이다.

 어지간한 중소문파여도 장로 정도 되면 그 배분이 무림에서 상당했는데 구파일방의 장로라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게다가 지금 장로들은 공 총관도 예전에 얼굴을 본 적 있을 만큼 명성이 자자한 이들이었다.

 '소매검객에 정망거사까지...! 구파일방이 몸이 달긴 달았구나!'

 소매검객 조오렴은 화산파의 장로였지만 사실 그 검기(劍技)보다는 화산파를 대표하는 세객(說客)으로서의 명성이 더 드높았다.

 화산파는 검종으로 이름이 높은 문파인데 혀로 명성을 쌓은 장로라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싶을 수 있었지만, 원래 구파일방 정도 되면 조정의 고관이나 황족을 상대하는 장로도 필요한 법이었다.

 아무리 황족이나 고관이 도사나 승려를 존중한다 하더라도 도관이나 사찰에 찾아갔는데 그들 특유의 무뚝뚝한 태도로 대접을 한다면 결코 참지 못할 것이다.

 조 장로는 고관대작들을 설득해 화산파의 명성을 떨치는 데에 크게 공헌한 사람이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가장 알맞은 사람이 왔다고 할 수 있었다.

 옆에 있는 무당의 장로, 청방진인도 마찬가지로 조정 관리들에게 명성 높은 도사였다. 각종 비유와 우화, 설법으로 탐관오리가 스스로 관직을 그만두게 한 일화 덕분에 정망거사(停望居士)란 별호를 얻은 만큼 영향력도 짐작 가능했다.

 "고맙소. 연 판관. 정말로 고맙소!"

 "아닙니다. 전부 다 풀어주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서 아쉬울 뿐입니다."

 "사사로운 정에 휘둘려 혈교의 첩자를 놓치게 만들 뻔한 놈들인데 아무런 벌도 받지 않고 풀려날 수는 없소. 뇌옥에서 깊게 반성한다니 오히려 좋은 기회일 거요."

 조 장로는 아쉽다는 기색을 조금도 드러내지 않고 공손하게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그 뒤에 있는 화산파의 무인들도 마찬가지로 일사불란하게 행동했다.

 아쉽지 않다면 당연히 거짓말이었다. 화산파의 후기지수가 잘못을 저질러 벌을 받는다 하더라도 당연히 문파 내에서 받아야지 외부 뇌옥에 갇혀 있는 게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그러나 지금처럼 보는 눈이 많은 자리에서 아쉬워하거나 불경한 태도를 취할 만큼 조 장로는 멍청하지 않았다. 그렇게 멍청했다면 조정의 관리나 황족들을 상대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아직도 금의위와 그 세작들이 시퍼렇게 눈을 뜨고 있을 테니 최대한 행동거지를 조심해야 했다.

 -경거망동하는 자는 내가 직접 참하겠다. 표정도 함부로 짓지 말거라!

 조 장로의 추상 같은 전음이 날아오자 화산파의 제자들은 고개를 숙였다.

 '목숨을 보장받은 것만으로도 충분한 성과다.'

 조 장로는 그렇게 생각했다. 얼마 전까지도 처형 소문이 돌았던 만큼 문파 내에서도 흉흉한 이야기가 자주 나왔던 것이다.

 그런 만큼 장로 본인도 고민이 많았는데 이렇게 매듭이 지어질 줄이야.

 '한경의 관리들이 가만히 있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이렇게 빠르게 설득할 줄이야. 놀라운 재주다.'

 조 장로는 금의위와 태자를 설득한 연우혁의 재주에 새삼 감탄하며 말했다.

 "화산은 이 은혜를 잊지 않을 것이오. 다시 한 번 감사드리오!"

 화산파뿐만 아니라 무당의 장로도 비슷한 감사 인사를 올리고 떠났다. 뒤에서 지켜보던 공 총관은 그제야 상황을 파악하고 경악했다.

 '...벌써 금의위 놈들을 설득했다고!?'

 한경의 부호들이 재산을 내놓아야 한다는 말이 나온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설득이 끝났다니.

 공 총관은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들었는데도 믿기지 않았다.

 그 많던 무림인들이 전부 물러나고 나서야 연우혁은 공 총관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판관이 반갑게 손짓하자 공 총관은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판관 어른, 불러주셔서 영광입니다!"

 "급한 부름에 이렇게 와줘서 내가 고맙습니다. 자. 앉으시지요."

 예전과 다를 것 없는 연우혁의 태도에 총관은 새삼 감탄했다.

 누구나 출세할 수는 있었지만 출세하고 나서도 태도가 달라지지 않는 사람은 찾기 힘들었다. 조금의 뽐냄이나 거만함도 눈앞의 젊은 판관에게서는 보이지 않았다.

 "여기, 선물을 갖고 왔습니다."

 "무슨...?"

 "좋은 다기를 구해서 말입니다. 하하."

 선물을 감싼 비단을 벗긴 연우혁은 다기와 찻잎을 보고 멈칫했다. 공 총관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실망한 표정이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아니다. 팔면 되겠군.'

 연우혁은 짐짓 엄숙한 얼굴로 말했다.

 "이런 사치스러운 다기를 쓸 수는 없습니다. 하인을 보내서 바꿔오라고 하겠습니다."

 시전에 가서 싸구려 다기로 바꾼 뒤 차액을 챙길 속셈이었다. 그러나 공 총관이 먼저 무릎을 치며 외쳤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판관 어른의 생각을 읽지 못하고 이런 실수를... 그런 수고를 하실 필요 없습니다. 제가 직접 가난한 자들에게 은자를 전해주겠습니다."

 청렴한 판관이 차액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뿌릴 거라고 착각한 공 총관의 말에, 연우혁의 얼굴이 흐려졌다.

 "...그럼 그렇게 하시지요. 오늘 이렇게 부른 건 서책을 몇 권 구하고 싶어서입니다. 술법에 관련된 책들을 찾고 있는데..."

 공 총관은 그제야 연우혁이 왜 불렀는지 진의를 깨달았다.

 딱히 뇌물을 원하는 것도, 별다른 꿍꿍이가 있어서도 아니었다. 그저 무공을 수련하기 위해 새로운 비급이 필요한 것이었다.

 그걸 깨닫자 총관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상대는 대쪽처럼 꼿꼿한 사람이었는데 자기 혼자 멋대로 착각해서 뇌물을 얼마나 준비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다니.

 "어렵습니까?"

 "어렵지 않습니다! 맡겨만 주시지요. 한경뿐만 아니라 다른 곳의 전장에도 연락해 구할 수 있게 하겠습니다."

 그 순간 누군가 다급하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처음에는 포쾌인가 싶었는데 놀랍게도 스님이었다. 공 총관은 놀라서 외쳤다.

 "무슨..."

 "빈, 빈승이 또 실수를 저지른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스님도 공 총관 못지않게 놀란 것 같았다. 다시 문을 닫고 나가더니 밖에서 들어가도 되냐고 기침하며 물었다.

 "들어와도 된다. 여기 총관은 그런 사소한 실수로 역정을 내는 사람이 아니니."

 "저 사람은 누굽니까?"

 "소림 무승인데 사죄의 뜻으로 일을 돕고 있습니다."

 "???"

 공 총관이 대체 무슨 소리냐고 묻기도 전에, 들어온 소림의 무승 정원이 말했다.

 "뇌옥에서 문제가 일어났습니다."

 "또?"

 "검이 사라졌는데..."

 "그 정도면 됐네. 청성파 제자를 데리고 오게."

 "..."

 "..."

138화

 소림철권은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차마 꺼내지 못하고 입 안에서만 우물거렸다. 스스로가 저지른 과오를 씻기 위해 일하는 사람이 판관의 일을 방해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참. 안에 있던 사람들에게 이것도 하나 물어보고."

 "???"

 연우혁이 속삭이며 지시하자 소림 무승의 표정은 더욱 더 혼란스러워졌다. 무승은 복잡한 기분으로 다시 뇌옥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나 공 총관은 소림의 제자만큼 수양이 깊지 못했다. 표정을 관리하지 못하고 황당한 얼굴로 계속 연우혁을 쳐다보자, 연우혁이 알겠다는 듯이 미소지었다.

 "왜 소림의 무승이 일을 돕고 있는지 궁금하신 겁니까."

 "아, 아니. 그것도 궁금하긴 한데..."

 공 총관은 당황했다. 사실 지금 쳐다본 건 뇌옥에서 검이 사라졌는데 왜 청성파 제자를 데리고 오라고 한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아서였다.

 대체 그게 어떻게 연결된단 말인가?

 "제가 궁금한 건 뇌옥에서 검이..."

 "저 무승은 정원 선사입니다. 소림철권이란 별호를 갖고 있지요."

 "소림철권 말입니까?!"

 공 총관은 뇌옥 이야기도 잊어버리고 다시 놀랐다.

 소림철권은 공 총관 본인도 이름을 들어본 적 있는 소림의 후기지수였던 것이다. 어떠한 타협도 없이 수많은 마두를 쓰러뜨리며 쌓은 그 명성은 다른 후기지수들이 쉽게 따라올 수 없었다.

 "그, 그런 고수가 대체 왜 하인처럼...?"

 "오해하지 마십시오. 제가 강제로 시킨 게 아니니."

 '그런 생각은 하지도 않았습니다.'

 소림의 제자를 멋대로 하인으로 부리는 건 어지간한 대마두도 목숨 걸지 않고서는 하기 힘든 일이었다. 연우혁 같은 지혜로운 사람이 그런 짓을 할 이유가 없었다.

 "괜찮다면 빈승이 설명 드려도 되겠습니까?"

 그 사이 뇌옥에서 청성파의 제자를 데리고 온 정원이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연우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총관이 이상한 오해를 하고서 소림철권의 명예를 떨어뜨릴까봐 설명해주려고 한 것이었다.

 "이번 용봉지회에서 빈승은 혈교의 첩자를 앞에 두고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진충... 아니, 무영암룡께서..."

 "그냥 연 판관이라고 하게."

 "예. 연 판관께서 조언을 주셨는데도 오히려 일을 방해해서 첩자를 놓칠 뻔했으니, 정말로 면목이 없습니다."

 "그렇게 신경을 쓸 필요는 없는데 말이지."

 연우혁은 너그럽게 말했다. 절반은 한경의 고관으로서 너그러움을 보여주려는 생색이었지만 나머지 절반은 사실 진심이었다.

 뇌옥 안에 갇혀 있는, 직접 덤비거나 참가한 놈들에 비교하면 소림철권은 솔직히 크게 원한이 없었던 것이다.

 "원래는 참회동에 들어가려고 했으나, 장로님께서 조언을 주셨기에 여기서 이렇게 일을 도와드리게 된 겁니다."

 "이제 어떻게 된 일인지 아시겠습니까? 놀라실 것 없는 일입니다. 제가 정말로 소림의 제자를 부릴 리 없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궂은일을 맡겨주십시오. 그리고..."

 정원은 아까 연우혁이 시킨 질문에 대한 대답을 조용히 전달한 뒤 인사하고 바깥으로 나갔다. 연우혁은 잘 설명됐다 싶어서 공 총관을 바라보았다.

 "저, 판관 어른. 제가 사실 놀랐던 건 아까 뇌옥에서 검이 사라진 것만 듣고서도 청성파의 제자를 부른 겁니다만."

 "...아, 그랬습니까? 별로 대단한 일도 아니어서 크게 신경쓰지 않을 줄 알았는데."

 연우혁은 머쓱해했다.

 공 총관은 '그게 어떻게 대단한 일이 아닙니까!'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눈앞의 사람이 한경의 고관이란 걸 떠올리고 꾹 참았다.

*   *   *

 청성파의 제자 도운표는 걱정을 속으로 삼키며 형관 건물 앞에 섰다.

 원래 구파일방의 제자 중에 관청을 두려워하는 겁쟁이는 없었지만, 지금 한경의 뇌옥에 갇힌 후기지수들에게는 이야기가 달랐다.

 커다란 사고를 저지른 뒤 간신히 목숨을 부지해서 살아나온 상황인 것이다.

 장로들부터 그들을 매섭게 질책했으니, 평소 도문이나 불문 안에서 수련하느라 경험이 부족한 이들도 무슨 상황인지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판관이 불렀으니 어찌 긴장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판, 판관 어른을 뵙습니다."

 "그래. 청성의 제자인가?"

 "예. 맞습니다."

 명문의 제자답게 문파의 이름을 말하자 긴장이 줄어들고 몸의 자세에 힘이 들어갔다. 긴장한 와중에도 문파의 이름을 짊어진 이상 위축될 수 없다는 자세였다.

 "술법을 쓸 줄 아나?"

 "...조금은 쓸 줄 압니다."

 청성은 무당과 함께 구파일방 중에서 도가의 술법으로 유명한 문파였다. 도가나 불가로 시작한 문파가 무공에 온전히 집중하기 위해 술법의 맥이 약해지는 건 꽤 흔한 일이었기에 두 문파의 명성은 더 높을 수밖에 없었다.

 차이가 있다면 무당은 우도(右道)였고 청성은 좌도(左道)에 가깝다는 정도.

 사천 지방은 예로부터 강력한 흑도 문파들이 여럿 있었고 이들과 싸우며 제자를 모은 문파들은 그에 걸맞게 날카롭고 살기 짙은 무공을 가지게 되었다.

 청성파가 좀 더 요사스럽고 불안정한 좌도방의 술법을 추구하게 된 것도 이와 연관이 깊으리라.

 "나 또한 술법에 관심이 있는데, 혹시 술법을 봐줄 수 있겠나?"

 "청성의 비술을 가르쳐드릴 순 없습니다만... 술법에 대해 물으시는 건 얼마든지 대답해드리겠습니다."

 "고맙군."

 판관의 질문에 도운표는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히 별 일 아닌 걸로 부른 모양이었다.

 무공에 전념하는 무림인들이 술법에 관심을 보이는 게 특이하긴 했지만 가끔씩 이런 사람들이 나왔다. 술법으로 무공의 깨달음을 얻어 보려고 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없다면 구파일방 내에서 술법의 진전이 어떻게 이어져 내려왔겠는가. 도운표는 별로 놀라지 않...

 "그럼 이제 일각(一刻)을 줄 테니, 밖으로 나가서 숨긴 검을 갖고 오게. 그러면 모른 척 해주지."

 "!!!!"

 도운표는 기절할 뻔했다. 순간 자신의 무릎이 후들거린다는 걸 깨닫고 청성의 도사는 재빨리 내공을 운기했다.

 "무,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정말 모르겠나?"

 젊은 판관은 무표정한 얼굴로 도운표를 쳐다보았다. 어떠한 기세도 일으키지 않았는데 이렇게 강한 압박이 될 수 있다는 걸 도운표는 처음 알았다.

 "괜히 쓸데없이 시간을 끌고 싶지 않고, 또 자네를 데려다가 문초하고 싶지도 않으니 이번만 설명해주겠네. 자네는 이번 점창의 제자, 남익이 새로 갖고 들어온 검에서 불길함을 느꼈겠지."

 마음만 먹으면 후기지수들을 두들겨 패고 심문한 다음 자백시켜도 됐지만 연우혁은 최대한 좋게 설득하려고 했다.

 금의위를 업고 진짜 막나갔다가는 정말 대마두가 되는 것이다.

 게다가 이번 일은 악의나 탐욕보다는 선의에 가까운 의도로 벌어진 일이었다.

 '후기지수들이 한 곳에 모여 있고, 점창과 청성의 제자가 있는데다가, 검이 사라졌으니.'

 일의 시작은 점창파의 제자 남익이 뇌옥 밖의 속가제자한테 검 한 자루를 새로 받은 것에 있었다. 한경까지 와서 옥살이를 보살펴 줄 정도의 속가제자들은 어느 정도 재력이 있는 만큼 뇌옥 안에 검 한 자루 넣어주는 건 별로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이 명검이 요사스러운 살기를 띠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원래 피를 많이 마신 검이 살기를 띠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었지만, 청성의 제자인데다가 본인도 술법에 어느 정도 조예가 있는 도운표는 저 검이 그보다 더 요사스럽고 위험하다는 걸 느꼈다.

 저 정도 살기라면 요괴나 마귀가 깃들어 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만약 친한 사이였다면 잘 설득해서 검을 밖으로 내보내거나 했겠지만 도운표는 남익과 친분도 그리 깊지 않은데다가 청성과 점창의 사이도 별로 좋은 편이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네 검이 위험해서 여기 뇌옥에 있는 사람을 여럿 다치게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건 상대방의 체면을 상하게 하려는 수작으로 보일 수 있었다.

 고민하던 도운표는 결국 몰래 계략을 짜 남익의 검을 훔쳐서 밖으로 숨겨버렸다. 본인이 생각해도 참으로 영리한 계획이라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눈앞의 판관은 대체 어떻게...?!

 "검을 밖으로 치우고 싶었지만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해 검을 훔치는 게 쉽지는 않겠지. 그래서 자네는 하인 하나를 매수했네."

 뇌옥 독방에 갇힌 후기지수들은 벽곡단과 이슬만 먹지 않았다. 다른 죄수들이 그렇듯 뇌옥을 지키는 관졸이나 하인들에게 돈을 내고 외부에서 음식을 사가지고 들어왔다.

 도운표는 하인이 갖고 들어온 음식을 챙긴 뒤 친구한테 음식을 대접하고 싶다는 핑계로 독방을 나섰다. 은자를 받은 하인은 죄인이 다른 독방에 접근하는 것까지 신경 쓰지 않았다.

 후기지수들은 주기적으로 위로 불려가 지부 어른과 대화했기에, 남익이 없는 사이 독방에 들어가 검을 훔치는 건 때만 맞추면 손바닥 뒤집듯 쉬운 일이었다.

 뇌옥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설마 안에서 음식을 들고 걸어 다니는 게 하인이지 도운표라고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

 새하얗게 질린 도운표가 시치미를 뗄 생각도 하지 못하고 물었다.

 "어, 어떻게?! 어떻게 아신 겁니까?"

 "검을 훔쳤다면 그 이유가 그리 많지 않네. 뇌옥에 갇힌 게 도둑이나 마두들이 아니라 후기지수들이라면 더더욱. 원한이 있어서 보복을 한다면 저렇게 득은 적고 실만 많은 식으로 할 이유가 없지 않나. 검을 훔치는 게 아니라 치워야 하는 강한 이유가 있으리라 짐작했네. 그럼 점창의 제자와 사이가 친하지 못한 사람이겠지."

 "..."

 "그 중 자네가 가장 나서기 좋겠다 싶었네. 독방도 가까운데다가 청성의 제자로 술법도 쓸 줄 아니, 검에 무슨 이유가 있을 경우 짐작하기 좋지 않겠나."

 "그, 그런 추측만으로..."

 "추측만으로 그러진 않아. 혹시 몰라 아까 정원 선사에게 하나 물어보라고 시켰지. 검이 사라진 날 복도를 지나간 하인이 든 음식에서 무슨 냄새가 났었냐고. 맵고 얼얼한 향기가 강하게 맴돌았다고 하더군. 다들 잘 모르는 음식이라고 하기에 사천의 음식이라는 걸 알 수 있었네. 아미파의 제자도 당문의 제자도 뇌옥에 없으니 자네밖에 없겠지?"

 "!"

 도운표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 차라리 두들겨 맞거나 고문을 당하는 게 덜 무서울 것 같았다.

 "잘... 잘못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그러니까 용서해준다고 하지 않았나. 숨긴 곳에 검을 갖고 오게. 들보 위에 숨겼나?"

 "아, 아닙니다."

 "..."

 연우혁은 살짝 불길함을 느꼈다. 보통은 들보 위였지만 가끔 드문 확률로 다른 곳에서 발견될 때가 있었던 것이다.

 "설마 뒷간에...?"

 "..."

 "알아서 잘 꺼내오게. 여하튼 그 검은 더 안 쓰겠군."

 몇 번이고 사죄를 한 다음 물러나는 청성의 제자를 보며 연우혁은 고개를 저었다.

 처음에 한경의 관리들이 후기지수들에 대해 질색했을 때만 해도 연우혁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었다.

 한경에 무림인들이 늘어난다 하더라도 연우혁에게는 크게 상관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절정의 벽을 넘고 올라온 지금 자신감이 꽤 충만한 상태였다. 어느 마두가 날뛰어도 쓰러뜨릴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뇌옥 안에 갇힌 후기지수들이 귀찮게 문제를 일으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었다.

 '안에 가둬놔도 지랄이라니. 보통 귀찮은 놈들이 아니다.'

 연우혁은 한경 관리들이 괜히 닳고 닳은 사람들이 아니라는 걸 느꼈다. 선견지명이 있는 것이다.

 '그나저나 공 총관에게는 미안하게 됐군.'

 공 총관이 궁금해했지만 연우혁은 설명해줄 수가 없었다. 청성파의 명예와도 관련이 있는 만큼 외부인을 참관시킬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결국 공 총관은 살짝 침울해하며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판관 어른!"

 "왜 그러나?"

 "운령 도사가 받은 음식에 독이...!"

 "..."

*   *   *

 보름 후, 연우혁은 지부 대인이 머무르는 후당으로 부름을 받고 찾아갔다.

 한 지부는 연우혁을 보자마자 함박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연 판관. 어서 오게!"

 "이리 불러주셔서 기쁠 뿐입니다. 무슨 일로..."

 "무슨 일이겠나. 후기지수들과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아무래도 자네가 있으면 든든할 것 같아서 말일세."

 금의위도 연우혁도 무공의 고수였지만, 당연히 지부 입장에서는 연우혁이 훨씬 더 든든할 수밖에 없었다. 전자와 달리 후자는 지부를 급습해서 압송할 일이 없는 것이다.

 연우혁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젊은 놈들이 영 성가셔서 말일세."

 "!"

 언제나 무골호인처럼 웃던 지부가 얼굴을 찡그리며 불평하자 연우혁은 놀랐다.

 "그 자들이 무슨 짓을 저질렀습니까?"

 "아. 그런 건 아니야! 다만 워낙 촌부처럼 세상 물정을 모르니 이거 참..."

 지부는 툴툴대며 설명했다. 사실 지부가 서글서글해보여도 은근히 대접이나 대우받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여기 갇힌 후기지수들은 대부분 다 경험이 부족하고 세상 물정 모르는 자들이라 정해진 예의만 보여줬지 굽신거리는 진짜 예의를 보여주지 못했다.

 마음 같아서는 쫓아내거나 푸대접을 하고 싶었지만, 또 구파일방과의 관계가 있었기에 지부는 연우혁에게만 투덜대고 있었다.

 '과연.'

 "만날 때마다 검을 달라, 수련할 공간을 달라, 이 한 모가 무슨 하인인 줄 알겠네그래!"

 "확실히 무림인들이 그런 면이 있지요."

 떠드는 사이 후기지수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딱 정해진 대로 인사만 하는 그 모습에 지부가 입술을 씰룩였다.

 "안녕하십니까. 지부 어른...!!"

 뒤늦게 연우혁이 옆에 있는 걸 깨달은 후기지수가 깜짝 놀라 자세를 깊게 낮췄다.

 "이, 이렇게 불러주셔서... 정, 정말이지 영광입니다!"

 '아니, 드디어!'

 예의범절을 깨달은 후기지수의 모습에 지부 어른은 매우 기뻐했다.

139화

 "진작 자네를 부를 거 그랬군!"

 지부 어른은 연우혁을 보며 호쾌하게 웃었다. 그렇게 말귀를 못 알아듣던 후기지수들이 마치 고양이 앞의 쥐처럼 쩔쩔매는 모습이 자못 통쾌했던 것이다.

 역시 무림인들은 무림인들이 다뤄야 했다. 특히 세상 물정 모르고 꼿꼿하게 구는 젊은 놈일수록 더더욱 그랬다.

 "원래 저러지 않았습니까?"

 "무슨 소리를. 저것보다 훨씬 꼿꼿했네."

 연우혁은 지부의 말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뇌옥에 갇힌 후기지수들이 일으키는 대소사 하나하나를 해결해주면서 나름 이들과 낯이 익은 연우혁이었다. 그가 보기에는 여기 젊은 무림인들은 원래 저런 태도였던 것이다.

 "무, 무슨 일로 이 보잘것없는 도사를..."

 점창파의 제자, 남익은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평소 안 부르던 것도 아니고 침착하게 생각해보면 으레 하던 관습이란 걸 떠올릴 수 있을 텐데도 저렇게 말하는 걸 보니 정말로 긴장한 모양이었다.

 지부 대인은 그런 오해를 풀어주고 후기지수를 다독이는 대신 거만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당황하는 걸 즐겼다.

 "무슨 일이긴 무슨 일이겠나. 대(大) 점창파의 도사가 불운한 일로 뇌옥에 갇혀 있으니, 말직이나마 한경을 돌보는 입장으로서 신경을 안 쓸 수가 없네."

 "과, 과연. 판관 어른은 어째서...?"

 "연 판관도 뇌옥에 갇힌 자네들을 돌보는 사람 아닌가! 판관이 옆에서 듣는다면 자네들의 부탁도 한층 더 공명정대하게 처리될 걸세."

 남익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등에서 괜히 식은땀이 흘러나오는 걸 느꼈다. 한경의 지부야 후기지수들 사이에서 무골호인 취급을 받는다지만 판관은 전혀 달랐던 것이다.

 본인의 무공이 고강하고 그 수법이 매서운 건 둘째 문제였다. 한경의 소문만 듣고 막연하게 명판관을 상상해왔던 후기지수들은 뇌옥에 갇혀서 직접 대면하고 나서야 명판관이 얼마나 두려운 존재인지 뼈저리게 느끼게 됐다.

 무공을 쓰지 않아도, 악독한 수법을 쓰지 않아도 눈빛만으로 사람을 위압하고 꼼짝 못하게 만들 수 있을 줄이야.

 후기지수들이 직접 경험하지 않았다면 그들도 믿지 못했을 터였다.

 -도사의 음식에 독이 들어가 있었습니다!

 -보아하니 낭인의 짓이로군. 아마 팔 년 전 무당과 원한을 맺은 마두일 것이다.

 -자시(子時)마다 여우가 우는 소리가 들립니다!

 -이틀 전에 옥졸에게 부탁해 보물을 갖고 들어온 후기지수들은 나오도록. 후기지수들 중에 동경(銅鏡, 구리거울)을 갖고 들어온 자는 나오도록. 그 물건에는 사악한 요귀가 들었다.

 널찍한 장원에 모여 있어도 하루가 멀다 하고 문제가 일어났는데, 좁은 뇌옥에 여럿을 가둬놨으니 문제가 안 생길 리 없었다.

 평소 자신만의 전각에서 느긋하게 도를 닦고 무공을 수련하던 후기지수들은 다른 친우들이 이렇게 불쾌하고 무례한 이들일 수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된 것이다.

 검 휘두르는 소리 하나부터, 몰래 갖고 들어온 술법용 보물까지 다 신경에 거슬리는 만큼 내버려뒀다면 크게 싸움이 났을지도 몰랐다.

 그런 문제를 단칼에 해결한 게 저 젊은 판관이었다.

 무슨 소란만 일어나면 옥졸들은 후다닥 올라가서 연우혁을 불러왔고, 연우혁은 내려오더니 무뚝뚝한 목소리로 한 마디 던지고 다시 사라졌다.

 놀랍게도 그러면 모든 문제가 해결됐다.

 -무당과 원한을 맺은 마두라는 건 어떻게 안 거지?

 -팔, 팔 년 전인 건 대체 어떻게?

 -한경에 혹시 용문각 같은 탐문 조직이 있나?

 싸우던 후기지수들도 저런 묘기를 한 번 보고 나면 얼이 빠져서 대체 어떻게 한 건지 떠들곤 했다.

 "그래서 부탁이 뭔가?"

 연우혁은 귀찮음을 참고 물었다. 속으로는 귀찮았지만 그래도 후기지수들이 부탁을 하면 어지간해서는 들어줄 생각이었다.

 조굉 같은 사람이야 이번 기회에 본때를 보여주겠다지만 연우혁은 금의위 부지휘사가 아니었다. 구파일방과 필요 이상으로 얼굴을 붉힐 생각이 없었다.

 "없습니다!"

 "...?"

 남익의 즉답에 연우혁은 황당해했다.

 뇌옥에 갇혀 있는 후기지수가 어떤 부탁도 없을 리 없지 않은가.

 "없을 리 없잖나. 말해보게."

 "정... 말로 없습니다!"

 '거짓말을 하고 있군.'

 영안으로 봐도, 영안으로 안 봐도 상대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연우혁은 대신 좀 구슬려달라는 듯이 지부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지부 대인은 통쾌해 죽겠다는 듯이 싱글벙글 웃고만 있었다.

 '잊고 있었군. 도움이 안 되는 사람이라는 걸.'

 "가끔 뇌옥 안에 내려가면 꽤 덥던데. 수련을 위해 따로 전각이 필요한가? 지부 어른께서도 몇 번 이야기하시긴 하셨는데."

 "아닙니다! 양강의 무공을 익히고 있어서 열기가 오히려 좋습니다."

 "자네 딱히... 그래. 알겠네."

 상대방의 내공이 딱히 양강지기가 많아 보이지 않았지만 연우혁은 괜히 물고 늘어지지 않기로 했다. 상대의 무공에 대해 너무 자세히 알면 그건 그거대로 이상한 것이다.

 "날이 선 진검은 내주기 어렵더라도 가검은 될지 모르는데 필요한가?"

 "죄를 지은 죄인이 무슨 가검입니까? 괜찮습니다!"

 "...그, 그래. 알겠네."

 그 후로도 남익은 연우혁의 어떤 질문에도 '괜찮습니다' '죄송합니다'로 일관했다.

 터덜터덜 돌아가는 점창파의 제자를 보자 지부 어른은 좋아 죽을 지경이었다.

 "으핫핫핫핫핫핫핫핫!"

 "지부 어른. 후기지수들을 너무 핍박하면..."

 "핍박이라니! 연 판관. 그게 무슨 소린가? 나도, 자네도 어떤 핍박도 하지 않았네. 저 무부들이 알아서 겸손하게 행동하겠다는데 왜 그러나?"

 확실히 한경의 지부는 자신의 안위에 대해서는 예민하고 철저한 감각이 있었다.

 자신이 직접 나서서 후기지수들에게 꾸중을 하거나 타박을 할 경우 뒷말이 나올 수 있었지만, 아직 젊고 세상 물정 모르는 후기지수들을 압박해 스스로 물러나게 만들면 그런 말이 나올 구석이 없는 것이다.

 '이런 부분에서는 쓸데없이 영리하시군!'

 "지부 어른. 그러면 저는 이만..."

 "아. 연 판관. 기다리게."

 "?"

 "다음 후기지수도 곧 올라올 테니, 자네가 본때를 보여주게!"

 "...예. 알겠습니다."

*   *   *

 "낭인 놈 하나가 약방을 털었답니다."

 "적 포두."

 "지금 가겠습니다."

 "여기 정원 선사하고 같이 가게."

 "..."

 적조는 애원하듯이 눈빛을 보냈다.

 금의위 교위야 아랫사람처럼 놀리는 맛이라도 있지, 고리타분하고 꽉 막힌 소림의 스님과 같이 움직이고 싶진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연우혁 입장에서도 어쩔 수 없었다. 포두 중에 무공 뛰어난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적조를 피해 도망치는 낭인을 확실히 잡으려면 고수 두 명이 가는 게 맞았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포두 어른. 빈승이 실수하면 따끔히 야단쳐주십시오."

 "그... 에이. 무슨 말씀이십니까. 스님. 갑시다!"

 보통 몰려오는 사건의 절반은 포쾌를 보내서 발로 뛰는 것만으로도 해결됐다. 남은 절반에서도 포두를 보내면 해결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걸 제외해도 남는 일들은 이제 연우혁이 직접 머리를 써야했다.

 "그러니까 자꾸 밤에 잠이 들면 조부께서 나타나 자기 보물을 무덤에 묻어놔 달라고 한다?"

 "예! 정말 골치 아파서 죽겠습니다. 안 그래도 묘를 이장한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또 새로 파도 되는 게 맞는지... 판관 어르신. 이래도 벌을 받지 않겠지요? 조부께서 정말로 필요하신 거니까 나오신 거니, 무덤을 파고 관에 보물을..."

 "자네 새로 첩 들였나?"

 "예? 예. 그건 어떻게..."

 "그 첩이 노서(老鼠, 도굴꾼)와 손을 잡고서 밤마다 자네 조부인 척 속삭이는 걸세. 아마 술에 몽혼약도 좀 들어가 있겠지. 풍수와 불운을 걱정하기 전에 여색부터 끊게."

 "...!"

 그렇게 하나씩 처리해나가던 도중, 연우혁은 어디서 본 것 같은 낯익은 얼굴이 서있는 걸 목격했다.

 청월루, 그러니까 하오문 소속의 하인이었다.

 "기루에 도둑이라도 들었나?"

 "아닙니다. 판관 어르신! 조용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일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일각만 기다리게. 곧 끝낼 테니까."

 "...?"

 하인은 늘어선 줄을 보고 무슨 소린가 싶어서 의아해했다. 혹시 자신 때문에 형관의 문을 닫는 것 아닌가 싶어 괜히 조마조마한 마음이 들었다.

 분노한 한경의 사람들이 달려들어서 몰매를 놓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일각 후, 연우혁은 남은 사람들의 문제를 전부 해결하고서 하인을 불렀다.

 "무슨 일인가?"

 "정, 정말 대단하십니다! 그... 곡물상의 둘째 아들이 돈을 훔쳐간 건 어떻게 아신 겁니까?"

 "내막을 들으면 별로 대단한 이야기도 아니지. 그래. 무슨 일로 왔나?"

 '대단한 이야기가 아니어도 좀 알려주시지...'

 하인은 속으로 불평했지만 감히 판관 어른 앞에서 그런 식으로 말할 배짱은 없었다.

 "모금묘사 어르신을 기억하십니까?"

 "아. 그 도둑놈."

 "...그, 그렇지요."

 나름 신투라고 자처하는, 하오문에서도 명성 높은 모금묘사 조의망을 도둑놈이라고 부르는 연우혁의 모습에 하인은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확실히 젊은 판관은 저렇게 말할 자격이 있었다.

 거만하게 한경에 찾아 온 모금묘사를 마치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듯 손쉽게 잡아버리지 않았던가.

 "이번에 어르신께서 장보도를 하나 얻으셨는데, 이 장보도가 심상치 않더군요."

 "그렇군."

 연우혁은 크게 기대하지 않고 심드렁한 기분으로 들었다.

 수많은 사건을 해결한 만큼 무림에서 장보도란 게 얼마나 사람 속이기 좋은 물건인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거의 십중팔구는 다 가짜거나 이미 털린 곳들이라 거기서 사람이 죽어나가거나 다쳐나가는 일밖에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게 마교의 천마총인 모양입니다!"

 "...?!"

 젊은 판관이 크게 놀라워하자 하인은 그제야 뿌듯해했다.

 자신이 나름 가치 있는 정보를 갖고 왔다는 확신이 든 것이다.

 하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마교가 멸문했어도 그 악명은 아직도 남아서 강호를 떠돌고 있지 않던가. 그런 마교의 천마총이라니.

 눈앞의 판관은 한경의 고관이지만 동시에 무영암룡이란 별호를 가진 무림의 고수인 만큼 놀라워 할 수밖에 없었다.

 "혹시 인근에 다른 문파들이 있어서 모금묘사가 섣불리 행동하기 어려운 건가? 믿을 만한 무인 중 지혜를 빌려줄 사람은 나밖에 없어서 이렇게 연락한 것이고?"

 "어, 어떻게 아셨습니까?!?!"

 하인은 기절할 듯이 놀랐다. 이유를 말하지 않았는데도 이렇게 속마음을 읽어버리다니.

 "생각할 줄 알면 별로 어렵지 않지. 모금묘사 같은 도둑이 아무리 은혜를 입었어도 아쉬운 게 없는 상황에서 무엇하러 내게 보물을 나눠주겠나. 그리고 천마총 정도 되는 고묘의 장보도라면 어느 정도 주변에 소문이 퍼져 있을 테니, 다른 문파의 눈치를 보는 것도 당연하지."

 실은 짐작가는 사건이 있어서였지만, 연우혁의 말에 하인은 감명 받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저도 생각하는 습관을 들여 보겠습니다! 여하튼, 모금묘사 어르신께서는 저를 시켜 전갈을 보냈습니다. 도와주신다면 안에 있는 보물들 중 원하는 걸 먼저 가져가셔도 좋으시다고..."

 모금묘사는 아마 안에 비급이 있어봤자 자기가 익힐 게 아니니 연우혁이 가져가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이 신투는 이미 자신의 독문무공이 있는 만큼 금붙이에만 관심이 있었던 것이다.

 '마교의 천마총이... 아니지.'

 연우혁은 이 사건에 대해 짐작가는 게 있었다.

 일단 이 고묘는 마교의 천마총이 아니라, 옛 명교 교주의 무덤이자 제단에 가까웠다. 마교가 멸망하면서 소문이 와전된 것이다.

 명교를 비롯한 여러 무림 세력들을 묶어서 천하를 호령했던 마교야 가진 금붙이가 태산에 버금갔지만, 원래 옛 명교는 재산이 그리 많은 곳이 아니었다. 고묘 안에 든 것도 명교 쪽 경전이나 술법 같은 게 대부분이었고.

 물론 모금묘사와 달리 연우혁은 무공이나 술법에 관심이 많았다.

 그리고 차라리 마교의 마공보다는 옛 명교의 술법이 더 나았다. 전자와 달리 후자가 훨씬 정순하고 부작용이 덜한 것이다.

 '문제는 여기가 만만치 않다는 건데.'

 무림의 소문이 대개 그렇듯이, 아무리 도둑이 조심하고 조심해도 소문은 새어나가게 되어 있었다.

 인근의 고묘 중에 천마총이 있다는 소문이 돌자 인근 문파들은 물론이고 저 먼 곳에 있는 다른 문파들까지 다 달려들어서 몇 번의 혈사가 거듭 벌어지는...

 모금묘사는 연우혁의 지혜를 빌려서 조용히 처리하고 싶어했지만, 연우혁은 그런 부분에서는 확신이 없었다. 소문이 퍼져나가는 속도를 보면 벌써 샜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갖고 싶다.'

 고민하던 연우혁은 결론을 내렸다.

 "좋다. 도와주도록 하지."

 "정말이십니까!"

 "그래. 대신 네가 심부름을 좀 해야겠다."

 "무엇이든 맡겨주십시오."

 일이 잘 해결되면 자신한테도 콩고물이 떨어질 걸 잘 알았기에 하인은 헤벌쭉 웃었다.

 "지금 한경에는 무당파의 청방진인께서 머물고 계신다. 이 서신을 전하도록 해라."

 "...?"

 "그리고 화산파의 소매검객께서도 머물고 계시지. 이 서신을 전하도록 해라."

 "..."

 하인은 대체 이 젊은 판관이 어떤 심계를 꾸미고 있는 건지 상상도 가지 않아 몸을 떨었다.

140화

 하오문의 하인이 겁에 질린 것과 별개로 연우혁은 꽤나 온건하고 안정적인 계획을 생각하고 있었다.

 호가호위(狐假虎威)!

 '역시 이런 일은 몰래 숨기기보다는 든든한 우군을 데리고 접근하는 게 맞다.'

 원래 이 고묘를 노리던 자들이 그렇게 조심했는데도 어딘가 소문이 새어나가 일이 크게 틀어진 걸 봤을 때, 이걸 남몰래 혼자 삼키겠다는 생각은 객기에 가까웠다.

 그렇기에 연우혁은 진실을 밝히고 든든한 우군을 모을 생각이었다.

 물론 그 상대가 무당파나 화산파의 장로라는 게 일반적이지는 않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부탁을 안 들어줄 수 없겠지.'

 당장 연우혁이 후기지수들의 목숨을 살려주고 구파일방의 체면을 세워줬는데 '지금 구파의 장로를 이런 일에 부른단 말인가?'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랬다가는 다음 날 한경의 고관이 일개 무림인에게 모욕을 당했다는, 한경의 관리라면 누구나 비분강개할 소문이 퍼질 것이다.

 '그리고 차라리 장로들도 이런 일을 돕는 걸 기꺼워 할 거다.'

 모금묘사가 끼어 있다지만, 어디까지나 판관인 연우혁이 주도하는 일이었고 명분 또한 그럴듯했다.

 혈사가 벌어질 것 같은 고묘의 화근을 먼저 확인하고 제거하겠다는 것 아닌가.

 이런 멀쩡한 일로 빚을 갚는다면 장로들도 차라리 다행이라고 여길 터였다. 강호에는 관리가 부탁할 만한 훨씬 추잡하고 불명예스러운 일들이 많았다.

 '나는 술법의 비급을 얻고. 무당과 화산은 고묘를 확인해 쓸데없는 혈사를 막았다는 명성을 얻는다. 서로에게 이득이지.'

 모금묘사는 원하는 금붙이를 챙기지 못하겠지만 그건 가난한 고묘를 찾은 자기 탓이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왜 그러고 있지?"

 "아, 아닙니다. 갔다 오겠습니다!"

 물론 연우혁의 속마음을 모르는 하인은 죽을 각오를 하고 대문을 나서야 했다. 밖으로 나가는 하인의 어깨가 유난히 좁아보였다.

 마침 일을 마치고 돌아온 오 포쾌는 지나가는 하인의 얼굴을 보고 의아해했다.

 "판관 어르신. 저 자는 왜 저리 죽상입니까?"

 보통 형관을 나서는 사람들은 기쁨과 감격으로 눈물을 흘렸지 저런 표정을 짓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무림인들에게 심부름을 시켜서 그렇다."

 "과연. 저 정도 되는 담력이 아니면 무림인들을 상대하기 쉽지 않지요. 잠깐. 저 하인은 청월루에서 일하고 있는 녀석 아닙니까?"

 "맞다. 어떻게 알았나?"

 "하하. 저는 번루에서 일하는 자들 중 술 주는 얼굴은 모두 다 외워두고 있습니다."

 오 포쾌는 자랑스러워하며 말했다. 한경의 포쾌들 중에 공짜 술 얻어먹고 싶어 하는 자들은 많았지만 그걸 위해 진지하게 정진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번루에서 일하는 자들 중 술 주는 사람들의 얼굴을 모조리 기억해놓은 오 포쾌는 한경의 포쾌들 중 가히 으뜸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 그렇군."

 "청월루에서 일하는 녀석이 무림인들을 대하기 꺼려하다니 별난 놈이군요."

 "아무래도 구파의 장로에게 심부름을 해야 하니까 그렇겠지."

 "..."

 오 포쾌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연우혁은 포쾌가 애원하듯이 쳐다보자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자네에겐 시킬 생각 없네. 그리고 위험한 서신도 아니야. 근처에 무림인들이 문제를 일으킬 만한 일이 있어서 미리 도움을 요청하는 거지."

 "군관들을 부르면 안 됩니까?"

 "군관들이 이런 일을 잘 처리하겠나."

 판관의 말에 오 포쾌는 속으로 탄식했다. 직목선벌(直木先伐)이란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닌 것이다.

 곧은 나무가 먼저 베어지듯이 유능한 인재 또한 일을 혼자 과중하게 맡은 탓에 먼저 쓰러지기 마련.

 '하여간 한경의 관리 놈들은 문관이든 아니든 모조리 도둑놈들밖에 없다!'

 군관들에게 시켜봤자 무림인들과 서로 칼부림이나 벌일 테니 직접 나서는 판관의 마음도 이해는 갔지만, 휘하의 포쾌로서는 저런 명판관이 사소한 일도 신경 쓰는 게 답답할 따름이었다.

 "참. 아직 한경에 금의위나 동창의 무인들이 남아 있는데, 그들의 힘을 빌릴 순 없겠습니까?"

 "큰일 날 소리 하지 말게. 어디 이런 하찮은 일로 그들을 부른단 말인가."

 연우혁은 엄한 태도로 부하를 질책했다. 여기 안이면 모를까 밖에서도 말하고 다녔다가 문제가 생기면 연우혁도 도와줄 수가 없는 것이다.

 고작해야 무림인들 사이에 벌어질 혈사를 막겠다고 금의위나 동창을 부른다니. 건방진 놈으로 크게 찍힐 수 있었다.

 "저, 저도 동창이나 금의위 무서운 건 압니다요. 그런데 그, 허 중관께서도 그렇고 무슨 도움이 필요하면 과감하게 직언을 올리라고 하셨는데... 금의위 위사도 그랬고..."

 "당연히 인사치레지. 그걸 믿으면 어떡하나."

 '그런가?'

 오 포쾌는 연우혁의 말에 긴가민가했지만 결국 수긍했다.

 포쾌 자신의 눈치보다는 판관의 머리가 훨씬 더 정확할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진심 같았는데... 하긴. 동창의 환관들은 웃는 얼굴을 해도 속으로는 칼날을 품고 있다고들 했지. 금의위도 마찬가지일 거야.'

 "구파일방의 후기지수들이라면 든든할 겁니다! 누가 판관 어르신을 감히 건드리겠습니까?"

 "그렇겠지. 그리고 후기지수들이 아니라 장로들한테 직접 와달라고 부탁했네. 아무래도 그게 더 확실할 것 같아서."

 "..."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연우혁의 모습에 오 포쾌는 진심 어린 공경심을 보냈다.

 천하의 어느 관리가 구파일방의 장로를 이렇게 오라가라 할 수 있겠는가!

*   *   *

 모금묘사(摸金墓師) 조의망은 흐뭇한 얼굴로 서신을 집어넣었다. 주변에 앉아 있던 다른 낭인들과 무인들이 조의망을 떨떠름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이봐. 모금묘사. 이제 슬슬 결정을 내려야 하지 않겠나?"

 "맞네. 맞아. 언제까지 기다리기만 해야 한단 말인가?"

 조의망은 기본적으로 손발이 맞는 부하들과 일을 벌이는 걸 선호했지만, 세상의 일이란 게 대개 그렇듯 언제나 원하는 대로 할 수만은 없는 법이었다.

 특히 이번 일처럼 안에 어떤 흉계가 있을지 모르고 밖에서 어떤 방해가 들어올지 모르는 일은 더더욱 뛰어난 무력을 가진 고수들이 필요했다.

 고묘 근처의 문파들만 봐도 그랬다.

 일단 하씨세가는 그나마 나았다. 정파로 대표되는 문파인 만큼 체면을 신경 써서 행동할 테니까.

 물론 완전히 믿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아무리 정파여도 이 고묘가 어떤 고묘인지 듣는 순간 남의 체면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있었다.

 그 다음은 적원방인데, 이 적원방은 정파에 적을 뒀지만 정사지간이나 마찬가지인 거친 이들이었다. 이들에게 소문이 흘러 들어가면 며칠도 지나지 않아 칼부림이 일어날 수 있었다.

 가장 걱정되는 건 흑도칠문에 소속된 천화회(天火會)였다. 이들은 체면이고 명성이고 신경 쓰는 이들이 아닌 만큼 그냥 소문만 돌아도 달려와서 모금묘사와 낭인들을 붙잡아 갈 수 있었다.

 그렇기에 조의망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여러 무인들을 고용했다. 근처 문파가 조의망의 소문을 듣고 흥미를 가져도 쉽게 건드리지 못하도록.

 하지만 역시 떠돌아다니는 낭인들은 참을성이 부족했다. 이들은 모금묘사가 말한 일확천금에는 솔깃해서 찾아왔지만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듣지 못하자 점점 더 인내심이 사라지고 있었다. 모금묘사의 명성이 없었다면 예전에 출수했을 것이다.

 "뭐라도 좀 말해주게. 그래야 믿고 기다리지 않겠나."

 "설마 우리를 믿지 못하는 건가?"

 '당연히 믿지 못하지.'

 조의망은 낭인들이 하는 말에 속으로 어이가 없었지만 웃는 낯을 유지했다.

 "하하. 다들 왜 그러나. 내가 그래서 먼저 은을 내지 않았나? 이 모금묘사를 믿지 못한다면 떠나면 되는 것을, 왜 자꾸 재촉하는가?"

 "...믿지, 믿는데. 자꾸 기다리기만 하니 답답해서 그렇지."

 모금묘사의 말에 쌍부맹호 우곽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 역시 먼저 은자를 받은 게 꽤 큰 모양이었다.

 이대로 윽박지르거나 협박을 한다고 모금묘사가 순순히 털어놓을 무인은 아니었으니 낭인들은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모금묘사. 너무 오래 시간을 끌면 오히려 위험하다는 걸 명심하시오."

 "맞소. 우리가 일을 망치려는 게 아니라, 그저 일을 도와주려는 거요! 모금묘사의 명성치고는 일을 너무 굼벵이처럼 하고 있지 않소!"

 비검객 사동마부터 웬 별호를 들어본 적 없는 잡스러운 낭인들까지 말을 얹자 조의망은 짜증이 울컥 올라왔다.

 그러자 낭인들 중 쌍비홍검 담온과 쌍비청검 담기 형제가 은밀히 눈빛을 보냈다.

 '참으시오.'

 '끄응.'

 하오문에서 모금묘사를 위해 보내준 저 둘은 낭인인 척 무리에 끼어 있었다. 그걸 보자 조의망은 조금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그래. 곧 연 판관이 온다.'

 연우혁이 수락했다는 하오문의 서신을 받은 조의망은 뛸듯이 기뻐했다.

 분명 연우혁이 오면 이 복잡하고 난처한 상황을 단칼에 해결할 수 있으리라.

 물론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는 본인도 상상이 가지 않았지만 조의망은 연우혁의 재주를 믿었다. 직접 잡혀본 만큼 더더욱 그 믿음이 강했다.

 "계속 시간을 끌면, 우리가 직접 저 도둑을 붙잡고 물어봐도 되겠지."

 낭인 중 한 명이 음산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스스로를 장강냉검 고팔이라고 한 자였는데, 아무도 저런 별호를 들어본 사람이 없어서 내심 비웃음을 사고 있는 자였다.

 장강 출신 무인도 들어본 적 없는 별호라면 결국 스스로 지은 별호일 테니 그 실력을 믿을 수가 없는 것이다.

 '같잖은 놈이 허세는...'

 옆에 있는 낭인들도 고팔을 비웃는 표정이었다. 고팔은 그걸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있었다. 그 대응이 낭인들을 더욱 가소롭게 만들었다.

 "오십니다!"

 "드디어!"

 하오문 무인이 달려와서 외치자 모금묘사는 벌떡 일어나 동굴 밖으로 달려 나갔다. 그 신법이 뛰어나 낭인들은 자신도 모르게 감탄하는 표정을 지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연 판관!"

 "지나치게 깍듯하군. 아무리 도움이 필요해도 그렇지 어색하게 왜 그러나?"

 "저를 얼마든지 붙잡으실 수 있다는 걸 알았는데, 아무리 도둑이어도 자존심을 부리겠습니까."

 조의망은 진심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저번에 한경에서 붙잡혔던 일이 조의망 본인에게는 커다란 충격을 줬던 것이다.

 단순히 재주의 차이를 떠나 청백리라는 인품이 조의망을 더욱 부끄럽게 만들었다.

 "이야기는 혹시 들으셨습니까? 지금 다른 문파들이 이상하게 신경이 곤두선 상태라 고묘에 접근하기가 힘든데..."

 "그래. 그래서 무인들을 조금 데리고 왔네."

 "오. 어떤 무인들입니까? 혹시 포쾌들입니까?"

 "아니. 한경의 포쾌들을 이런 일에 멋대로 쓸 수는 없지. 그리고 험한 일이 될 수도 있으니."

 "그러면 병사들입니까?"

 "하하. 무인들이라고 하지 않았나."

 "이런! 제가 귀가 어두워진 모양입니다."

 조의망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웃었음에도 불구하고 딱히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진짜 누구지?'

 "아. 혹시 친분이 있는 고수를..."

 "잘 맞혔네."

 "역시!"

 "여기입니다."

 연우혁은 뒤따라오는 무림인들에게 손짓했다.

 무당파와 화산파의 장로들이 도복을 입은 제자들을 여럿 데리고 오는 모습에 모금묘사의 낯빛이 시체처럼 창백해졌다.

*   *   *

 "..."

 현실을 파악한 조의망은 물론이고 낭인들까지 어색함과 두려움이 섞인 눈빛으로 공터에 모여 힐끔힐끔 구파일방의 무인들을 쳐다보았다.

 이들 중 하늘을 우러러 떳떳하지 않은 짓 한 번을 안 한 사람이 없는 만큼 당연한 반응이었다.

 "판, 판관 어른. 저는 대체 이해가 안 갑니다... 어떻게? 그리고 어째서?"

 "부탁을 했지. 그리고 이유는 간단하네. 이 근처 문파들이 생각보다 고묘에 관심이 많기 때문이지. 아까 이들의 신경이 곤두서서 접근하기 힘들다고 하지 않았나? 그건 다른 이유가 아니라 고묘 자체에 관심을 두고 있어서야."

 "말도 안 됩니다!"

 조의망은 도저히 인정할 수가 없어서 외쳤다.

 나름 이 주변을 돌아다니며 오래 탐문했지만 저들은 고묘에 대해 알고 있을 수가 없었다. 조의망 본인도 정말 우연한 기회로 고서를 구했던 것이다.

 "저들은 알 방법이 없습니다. 저기 낭인 놈들도 고묘에 대해서는 하나도 모르는데 어찌?"

 "정확히는 모르겠지. 하지만 천화회 때문에 의심은 하고 있을 거야."

 "천화회 놈들이 어떻게?"

 "천화회는 옛 마교 출신 호법이 도망쳐 나와 세운 문파니까. 이들은 고묘의 소문을 알고 있는데 자네 같은 도둑이 주변을 어슬렁대니 의심가지 않겠나? 다른 문파들은 천화회의 움직임을 보고 마찬가지로 신경이 곤두선 걸 테고."

 모금묘사는 '옛 마교 출신 호법'을 듣는 순간 머리가 새하얘져서 그 뒤로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저 사실이 진짜고 천화회 무인들이 방금 대화를 알아차린다면 평생 천화회에 쫓겨서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만이 머리를 맴돌았다.

141화

 "그, 그게 사실입니까? 아니. 그게 사실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실이라면 대체 왜 저한테 말해주신 겁니까!?"

 조의망은 가슴을 두드리며 외쳤다. 그 모습에 연우혁이 오히려 당황했다.

 "자네가 발견한 천마총인데 설명하지도 않고 진행할 수는 없지 않겠나."

 "차라리 마음대로 하시는 게 나았겠습니다...! 천화회 놈들이 이걸 알면 저를 찢어 죽이려고 할 겁니다!"

 "아. 그것 때문인가.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연우혁은 담담하게 설명했다. 가슴이 여전히 콩닥거리는 모금묘사는 대체 이 젊은 판관이 뭘 믿고 이렇게 담대한지 믿기지 않았다.

 "천화회에게도 자기들의 출신은 생각보다 중요한 비밀일세. 회 안에서도 몇몇만 알고 있겠지."

 마교가 멸문했다지만 그 흉명은 여전히 강호에 남아 있었다. 나름 흑도칠문에 들어가는 천화회가 마교의 이름이나 후예를 자처하지 않는 것도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리 쟁쟁한 흑도칠문이라 하더라도 마교의 후예로 엮여 정파무림의 공적이 된다면 어떻게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겠는가.

 다른 흑도칠문의 힘도 믿을 수 없었다. 정파와 달리 사파는 이럴 때 다른 문파들을 믿을 수 없는 것이다. 있지도 않은 마교의 절세비급을 찾아 역으로 습격해오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그러니 혹시나 소문이 돌더라도 자네 같은 아무 상관 없는 외인을 의심하겠나? 자기들부터 의심하겠지."

 "과, 과연..."

 "게다가 자네가 입만 잘 다물고 있으면 천화회가 어떻게 알겠는가. 애초에 문제가 되지도 않을 일이지."

 "확실히 그렇습니다."

 모금묘사는 조금 기분이 가라앉았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하긴 이런 비밀은 천화회 안에서도 극소수만 알 일인 만큼 나중에 문제가 생기더라도 모금묘사까지 의심하진 않을 것 같았다.

 게다가 또 입만 다물고 있으면 천화회 입장에서는 어떻게 모금묘사가 비밀을 알고 있다는 걸 눈치 채겠는가.

 '...아니, 그런데 이 사람은 대체 어떻게 안단 말인가?'

 생각해보니 이건 그 하오문에서도 모르는 이야기였다. 모금묘사 정도 되는 장로급 무인도 모르는 이야기라면 정말 기밀 중의 기밀이라고 봐야 했다.

 모금묘사는 새삼 연우혁의 재주가 두렵고 섬뜩해졌다. 좌견천리(坐見千里)의 지혜가 있으면 한밤중에 다른 문파의 장원 전각에 들어가서 양상군자 노릇을 하며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는 것이다.

 아마 운 없는 천화회 무인 몇몇이 보여준 무공만 보고 그들의 출신을 알아챘으리라.

 '정말 말도 안 되는군...'

 "그럼 설명이 다 된 걸로 알겠네."

 "잠, 잠깐. 판관 어른."

 "왜 그러지?"

 "...구파일방의 장로들이 온 것도 조금 설명해주십시오..."

 생각해보니 천화회의 이야기가 너무 충격적이어서 넘어갔었는데, 구파일방의 장로들이 후기지수들까지 데리고 온 건 그에 못지않게 충격적인 일이 맞았다.

 모금묘사는 대체 연우혁이 저들을 어떻게 데리고 왔는지, 그리고 저들이 하오문의 무인이나 낭인들을 보고 기분이 틀어져서 검을 뽑는 게 아닌지 매우 관심이 많았다.

 설마 젊은 판관이 저들을 일부러 초청하진 않았을 테고, 억지로 따라온 거라면...

 "말했잖나. 내가 부탁했다니까."

 "...?!!"

 *   *   *

 정파무림에 난제가 생기면 천기수사를 부르듯이, 사파무림에도 그런 꾀를 가진 책사들이 없진 않았다.

 그 중 가장 악명 높은 이로는 흑염방 소속의 책사, 흑교서(黑狡鼠) 우거가 있었다.

 이 우거라는 책사는 흑염방 소속으로 되어 있었지만 실상은 강호를 내키는 대로 떠돌아다니며 간계를 꾸며주고 대가를 받는 마두였다. 흑염방의 장로들과 방주가 우거의 재주에 빚진 적이 있었기에 거칠고 잔인한 무인들도 쉽게 우거를 건드리지 못했다.

 그런 우거는 지금 천화회의 장원 깊숙한 안채에 앉아 상전 대접을 받고 있는 중이었다.

 "정말 계속 기다려야 한단 말이오?"

 "그렇다니까. 헤헤. 우리 삼화공자께서 이 흑교서의 말이 별로 믿음직스럽지 않으신가보군?"

 "삼화검이오."

 삼화검 위우는 흑교서의 말에 가볍게 대답했다. 그러나 본인과 달리 뒤에 있던 회의 다른 무인들은 노기를 드러냈다.

 지금 그들 앞에 앉아있는 이 귀공자는 단순히 천화회의 젊은 후기지수가 아니었다. 무려 회주의 친아들이었던 것이다.

 흑교서 같은 자가 모르고 별호를 틀릴 리는 없을 테니 저건 의도적인 도발이었다.

 하지만 우거는 킬킬 비웃음을 흘리며 무인들을 쳐다보았다. 천화회 무인들이 아무리 화가 나도 손을 쓰진 못할 거라는 확신이 담긴 비웃음이었다.

 "미안하군. 미안해. 이 흑교서는 자꾸 똑같은 질문을 받으면 기억이 나빠지는 버릇이 있단 말이야! 또 질문을 받으면 남은 계획도 잊어버릴지도 모르겠군."

 '괴팍한 놈 같으니.'

 위우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지만 일단은 참았다. 지금 천화회 입장에서는 흑교서 같이 재주 좋은 책사가 필요했던 것이다.

 모금묘사 입장에서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겠지만 사실 천화회는 고묘의 존재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정확한 위치는 몰라도 옛 명교 교주의 무덤이 이 근처 어딘가에 있다는 이야기는 나름 호법 사이로 전달이 된 것이다.

 다만 찾아야 하는 곳이 워낙 넓은데다가 섣부르게 뒤졌다가는 괜히 이상한 소문이 돌 수 있어서 조심한 것이었는데, 웬 도둑놈이 낭인들을 데리고 이 주변을 어슬렁거리니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었다.

 결국 천화회는 때 좋게 근처를 지나가는 흑교서를 불러 빈객으로 대접하며 일을 맡겼다. 물론 그들이 아는 모든 걸 말해주진 않았다.

 -인근 도둑이나 낭인들이 무언가 꾸미고 있는 것 같은데, 뭘 노리는지 알고서 먼저 손에 넣으려고 하오.

 -고작 그런 일로 나를...? 좋아, 좋아! 대가만 받는다면 못해줄 것도 없지!

 그런데 이 흑교서는 어떤 꾀나 책략도 내놓지 않고 느긋하게 기다리기만 하고 있었다. 애가 탄 천화회 무인들이 낭인들을 붙잡아오거나 함정을 놔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물어도 태평하게 대답했다.

 -헤헤. 자네들은 왜 대붕이 삼 년 동안 울지도 날지도 않는지 아는가? 적당한 때를 기다리며 힘을 비축하기 때문이야! 이 흑교서 또한 때를 기다리고 있으니 더 이상 재촉하지 말게.

 -낭인들은 굶주린 개와 같은 놈들이라 내버려두면 결국 침을 질질 흘리며 달려들겠지. 기다리라고!

 -다른 문파들이 신경을 쓰고 있다고? 너희들이 자꾸 움직이니 신경을 쓰는 것 아니겠나! 가만히 기다리게. 좀! 공자가 이런 자들을 처벌해야 기강이 잡힐 텐데 말이야.

 우거는 그럴듯한 핑계를 늘어놓으며 버텼다.

 내버려두면 낭인들이 알아서 알고 있는 걸 토해낼 거다, 빈틈이 드러날 거다, 섣불리 움직이면 인근 다른 문파들도 의심할 거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헤헤. 네놈들이 뭘 숨기는지 이 흑교서께서 봐야겠다!'

 천화회가 말 같지도 않은 이유로 일을 맡겼을 때부터 우거는 천화회가 뭔가 숨기고 있다는 걸 직감했다.

 인근을 어슬렁거리는 낭인 무리가 일 년에 수십도 넘을 텐데 고작 그것 때문에 수상하게 여기고 쫓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아무리 모금묘사가 나름 명성 있는 도둑이라 하더라도 천화회가 이렇게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었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낭인들 사이에서 소문이 새어나오든, 아니면 모금묘사가 무언가를 찾아내든 진전이 일어날 터. 우거는 그걸 보고 천화회가 숨긴 게 뭔지 파악할 생각이었다.

 아무리 안달이 나고 초조하더라도 천화회는 우거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게 되어 있었다.

 여기 무인들은 설마 흑교서가 근처 다른 문파에 은밀히 소문을 퍼뜨렸다고는 상상도 하지 못할 것이다.

 "큰, 큰, 큰일났습니다!"

 "무슨 소란이냐?"

 우거는 옆으로 비스듬하게 누운 채 물었다. 나름 산전수전 겪은 책사인 만큼 무인의 이런 보고에 놀라거나 허둥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이럴 때일수록 침착하고 느긋하게 굴어야 했다.

 그리고 지금 다급히 달려 온 무인이 왜 놀랐는지는 대충 짐작이 갔다.

 '다른 문파 놈들이 선수를 쳤나보군. 하씨세가보다는 적원방일 가능성이 높으렷다.'

 우거야 인내심이 있다지만 다른 문파는 무언가 있다는 소문만 듣고도 나설 수 있었다. 원래 강호 무인들은 대개 성급하고 탐욕스럽지 않은가.

 특히 적원방은 정파를 표방하고 정사지간처럼 행동하는 만큼 더더욱...

 "무당과 화산파의 장로들이 인근에 도착했습니다! 적원방과 하씨세가에게 초대장을 보냈답니다. 저희 회에도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그 소식에 우거는 자신도 모르게 딸꾹질을 하며 들고 있던 술병을 놓쳐버렸다.

*   *   *

 우거는 역용술을 펼친 채 천화회 무인들과 같이 구파일방 쪽으로 움직였다. 등 뒤에서 의심 섞인 시선이 칼날처럼 찌르는 게 느껴졌다.

 '이런 빌어먹을.'

 자리에서는 호탕하게 웃으면서 '헤헤, 이럴 줄 알았다! 다 계획대로군!'하며 넘겼지만, 우거는 아직도 등에 식은땀이 흐르는 게 느껴졌다. 천화회 무인들도 뭔가 의심스러웠는지 혹시라도 우거가 도망치지 못하게 감시하는 기색이었다.

 대체 왜 구파일방의 장로들이 여기에 온단 말인가?

 설마 도둑질이나 하는 하오문 잡배 놈이 불렀을 리는 없을 테고, 낭인 놈들이 불렀을 리는 더더욱 없을 테고...

 '하씨세가 놈들이 불렀나? 아니. 하씨세가 놈들이 구파일방 장로 둘을 멋대로 부를 정도였으면 하씨세가가 오대세가 중 하나였을 거다. 대체 뭐냐?'

 "이보시오. 흑교서. 대체 구파일방이 오는 건 왜 기다린 거요?"

 "아니! 그걸 아직도 모른단 말이냐? 이렇게 무식해서야!"

 우거는 탄식하며 말을 돌리려고 했지만, 구파일방의 장로들이 왔다는 사실이 생각보다 충격적이었는지 천화회 무인들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무식해서 모르겠소. 고견을 들려주시오."

 "삼화검! 아랫것들이 이 흑교서를 겁박하는 걸 두고만 보고 있을 건가? 응? 기분이 상해서 대계고 뭐고 다 집어치울지도 모르겠는데."

 "...그러시오."

 "뭐?" 

 "그러라고 했소. 천하의 흑교서가 집어치우고 싶다는데 말릴 방법이 어딨겠소. 다만 설명은 듣고 집어치워야겠지."

 '제기랄!'

 작정한 듯한 천화회 무인들의 태도에 우거는 이들을 너무 자극했다는 걸 깨달았다.

 평소라면 자존심을 긁는 방법이 통했을 텐데, 구파일방의 장로들을 보자 계획이 완전히 무너졌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보자! 어쩔 수 없군. 이 흑교서를 이렇게 의심하다니. 설명을 해줘야겠어. 대신 천화회의 일은 여기까지만 맡겠네."

 하지만 우거도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죄를 인정하거나 사죄하는 대신 더욱 밀고 나갔다.

 괜히 약한 태도를 보였다가는 오히려 위험했다.

 "내가 구파일방의 장로들이 여기 올 거라고 생각한 이유는... 허어."

 말을 하던 우거는 짐짓 시선을 돌리더니 입을 다물었다. 다행히 구파일방의 장로들을 만나러 가는 다른 문파의 무인들이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천화회의 무인들도 듣는 귀가 많은 자리에서 흑교서의 계획을 퍼뜨리고 싶지는 않았는지 더 이상 뭐라고 하지 않았다. 설령 나중에 캐묻더라도 이 자리는 모면한 게 분명했다.

 '멍청한 놈들 같으니.'

 우거는 자기 꾀에 넘어간 천화회 무인들을 속으로 킬킬거리며 비웃었다.

 의심이 가면 그 자리에서 칼을 쑤셔 박아서라도 해결해야지 이렇게 미루면 어떡한단 말인가. 조금만 시간을 줘도 흑교서는 변명거리를 만들어 도망칠 수 있었다.

 "천화회에서 오셨습니까?"

 "그렇소. 삼화검 위우요."

 "예. 들어오시지요."

 무당파의 도사 한 명이 위우의 별호를 확인한 뒤 들어오라고 길을 내주었다.

 그러는 사이 뒤편에서 다른 도사 한 명이 달려오더니 속삭이며 뭐라고 말을 전했다. 무당파의 도사는 심각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빈도가 천화회에서 오신 분들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뭡니까?"

 "여기 혹시 흑교서 우거란 자가 있습니까? 그 자가 천화회 무인들을 속이고 이간질해서 자기 이득을 얻으려고 하고 있다고..."

 "..."

 "...?!!"

 우거는 하늘에 맹세코 이렇게 놀라운 일은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거라고 확신했다.

142화

 철컥거리는 소리와 함께 화산파에서 나온 무인들이 검집을 두드리는 게 보였다.

 같은 도가 출신의 문파라 하더라도 화산파의 도사들은 도인(道人)이라기보다는 무인에 가까운 자들이었다. 잘 정제된 살기가 날아들자 우거는 퇴로가 완전히 막혔다는 걸 깨달았다.

 '이런, 섣불리 도망치다가는 죽겠구나!'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흑교서 같은 자는 모릅니다."

 위우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과연 회주의 후계자로 교육받은 사람답게 이런 상황에도 잘 대응하고 있었다.

 천화회도 흑교서에게 불만이 없는 건 아니지만, 구파일방이 내놓으라고 냅다 바친다면 흑도칠문으로서 체면이 바닥에 떨어지는 것이다.

 "흑교서 우거가 없단 말입니까? 숨기실 필요 없습니다. 그 자는 일찍 일을 처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문파에 헛소문을 퍼뜨려 천화회를 곤궁에 빠뜨린 자입니다."

 "..."

 "..."

 하늘에 맹세코 이렇게 놀라운 일은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거라고 확신한 우거였지만, 그 확신은 순식간에 깨졌다.

 자신이 몰래 꾸민 계략마저 단숨에 들키자 우거의 낯짝이 마치 납덩어리처럼 변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위우는 끝까지 부정했다.

 이 회합이 끝나면 바로 흑교서를 고문해서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내겠지만 체면상 넘길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자 무당파의 도사는 놀랍게도 순순히 물러났다. 의외의 반응에 천화회 무인들도, 우거도 의아해했다.

 "판관 어른. 말하신 대로 천화회 무인들이 없다고 합니다만..."

 "알겠다."

 안쪽 천막에서 젊은 무인이 걸어 나왔다. 특이하게도 무림인들이 입고 다니는 평복이 아닌 관복을 입은 무인이었다.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흔들림 없는 기세가 느껴지자 좌중에 모여 있던 무인들은 상대가 그들보다 한 수 위의 고수라는 걸 깨달았다.

 '저 나이에 저 정도 경지라니?!'

 관복을 입은 무인은 멈춰서더니 천화회 사람들을 휙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흑교서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 자가 흑교서다. 점혈만 해놓게."

 "예."

 "...?!!!!"

*   *   *

 "연우혁이오. 부족한 능력이지만 한경의 판관을 맡고 있소."

 "!"

 자리에 모인 여러 문파 무인들은 판관의 이름을 듣자 깜짝 놀랐다.

 이번 용봉지회는 그 기대와 달리 예상 밖의 일들로 흐지부지 끝나버렸지만, 언제나 그런 상황에서도 명성을 날리는 후기지수는 나오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연우혁의 명성은 특별했다. 몇몇 활약을 한 다른 후기지수들의 명성이 빛을 바랠 정도로.

 원래는 진충비도란 별호로 불렸던 한경의 판관이 혈교의 첩자들을 모조리 잡아내고 구파일방의 후기지수들을 꺾다니.

 그 이전까지는 천기수사 같은, 무림의 기인이사들과 관련이 있는 젊은 괴인 정도로 연우혁을 생각했던 사람들도 이야기를 듣자 판단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이 정도면 후기지수들 중 손꼽히는, 시간만 더 주어지면 언젠가는 무림의 최고수 자리에 도전할 만한 기재였다.

 "무, 무영암룡!"

 "...거창한 별호라 부끄럽소. 판관이라 불러주시오."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희 적원방 사람들은 무영암룡 대협과 예전부터 인연이 있었던 만큼, 이 명성이 부끄럽지 않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적원방의 무인들은 예전에 철두산군(鐵頭山君) 마자추가 연우혁과 인연이 있었다는 걸 떠올리고서는 호탕하게 외쳤다.

 원래 무림에서 이런 인연은 생각보다 중요한 것이었다. 당장 다른 하씨세가나 천화회 무인들도 아차 싶은 표정을 짓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연우혁은 별다른 표정 변화가 없이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아차.'

 판관이 공명정대하다는 소문을 얻는 건 어떻게 보면 초절정의 벽을 깨는 것보다 더 어려울 수 있었다. 뒤늦게 연우혁이 그런 판관이라는 걸 떠올린 적원방 무인들은 입을 다물었다.

 "여기 두 장로분께서는 무당과 화산에서 나오셨소."

 "으음."

 "크흠."

 화산파의 소매검객과 무당파의 정망거사는 별다른 설명을 할 필요도 없었다. 이미 두 장로의 얼굴을 알아 본 각 문파의 사람들은 낯빛이 어두워졌다.

 구파일방의 두 장로가 왔다는 소문이 정말이었던 것이다.

 '대체 무슨 수로 여기까지 장로들을 데리고 왔단 말인가?'

 '믿기질 않는군.'

 혈사라도 벌어지면 모를까 별다른 일도 없는데 장로들을 데리고 왔으니 각 문파 입장에서는 놀라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가장 놀라운 건 흑교서 우거였다.

 '이건... 이건 말이...'

 나름 책사로서 자부심이 있는 우거였다. 제갈세가의 천기수사가 그 명성이 높다지만, 우거는 정파 놈들의 허풍이 세서 그렇지 자신의 재주도 천기수사에 비해 못할 게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오늘 어떤 식의 책략인지 짐작도 가지 않는, 천외천의 책사를 만난 것이다.

 그것도 자신보다 새파랗게 젊은 놈을!

 '어미 뱃속에서부터 책략을 갈고 닦아도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구파일방의 장로들을 데리고 온 것부터 시작해서 자신을 잡아낸 것까지 하나같이 다 믿기질 않았다.

 "다들 공사다망할 테니 빠르게 말하겠소. 최근에 이 주변 어딘가에 고묘가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소. 나는 이게 혈사로 번지지 않을까 걱정되오. 그래서 중재를 위해 이 두 장로분들을 모셨소. 두 분께서는 고묘를 찾는 일을 지켜보시고 부정이 없는지 확언해주실 거요. 그리한다면 다른 분들도 별다른 불만이 없지 않겠소."

 길게 빙빙 돌려서 말했지만 연우혁의 말은 결국 '명분과 힘이 있으니 이 주변의 고묘는 우리가 맡아서 관리하겠다 불만이 있으면 나서봐라'에 가까웠다.

 애초에 무당파든 화산파든 무슨 자격이 있어서 이 주변의 혈사를 막겠다는 명목으로 고묘를 감독하겠는가. 결국 이럴 때 휘두를 수 있는 건 명분과 힘이었다.

 "안에서 나오는 물건들은..."

 "사악한 물건이 아니라면 무당파는 관심이 없소이다."

 "화산도 마찬가지요." 

 슬쩍 물어본 하씨세가 무인들의 얼굴이 밝아졌다.

 과연 구파일방답게 무덤에서 나오는 자잘한 보물이나 비급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는 모양이었다.

 여기가 명교의 고묘인 걸 모르는 하씨세가나 적원방의 무인들은 벌써 절반쯤 넘어온 상태였다.

 어차피 정파무림에 적을 둔 이상 이런 사소한 일로 무당, 화산과 충돌을 할 수 없는데 실리까지 적당히 챙길 수 있다면 무리를 할 이유가 없었다.

 "아예 두 문파에서 같이 지켜보시면 어떻겠소?"

 연우혁의 말이 쐐기를 박았는지 두 문파는 자리에서 결정을 내렸다.

 "안 그래도 이 주변에 혈향이 감도는 것 같아서 두려웠는데 실로 다행입니다!"

 "무당과 화산이 아니라면 어느 누가 정파의 기치를 들어 올리겠습니까!"

 두 장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시선을 교환했다.

 사실 적원방이나 하씨세가는 그들도 쉽게 설득되리라 예상하고 있었던 만큼 별로 놀랍지 않았다.

 하지만 천화회는 이야기가 달랐다. 명백히 사파 문파인데다가 흑도칠문 소속인 이상 두 장로의 이름값으로 쉽게 압박할 수 없었다.

 '과연 이 젊은 판관은 어떻게 설득할 것인가?'

 소매검객이나 정망거사 모두 문파 내에서 수완이 뛰어난 인물들인 만큼 젊은 판관이 어떻게 설득할지를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지켜보았다.

 "저희는 동의할 수 없겠군요."

 "!"

 예상은 했지만 거절이 나오자 다른 문파 무인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천화회와 구파일방이 충돌한다면 싸움이 금방 끝나진 않을 터였다. 분명 다른 흑도칠문까지 불러 모으는 커다란 싸움이 될 것이다.

 "우리 천화회 또한 인근에서 공명정대하기로는 이름이 높고, 일을 처리하면서 한 번도 모짐이 없었습니다. 무당파와 화산파의 드높은 명성은 존중합니다만, 이런 상황에서 양보하는 것 또한 천화회의 이름을 더럽히는 일 아니겠습니까."

 "공명정대 같은 소리 하고 있군!"

 적원방 무인은 기가 차다는 듯이 내뱉었다.

 정사지간인 만큼 천화회와도 친분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정파 쪽에 선 만큼 확실하게 선을 그은 것이다.

 "네놈들이 저번 달에 강탈해 간 점방(店房)이 몇 개더냐?"

 "가게 주인들이 보호해달라고 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최근 오동표국과의 싸움은 뭐였습니까?"

 "국주가 무례하게 행동해서 설욕한 겁니다."

 하씨세가 무인들까지 끼어들어서 성토했지만 천화회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결국 적원방의 무인이 먼저 성질을 냈다.

 "됐다, 됐어! 어르신. 저 자들은 절대 양보하지 않을 겁니다. 힘으로 승부를 보도록 하지요!"

 "천화회는 싸움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적원방은 두려워할 것 같나? 이번 기회에 천화회의 꼴보기 싫은 장원들을 싹 치워버려야겠군! 안 그래도 여기에 얼쩡거리는 게 보기 싫었는데!"

 "잠깐."

 연우혁은 대화를 막더니 위우를 불렀다.

 "단둘이 이야기 좀 할 수 있겠소?"

 "...할 수야 있겠지만, 절 설득할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천화회는 결코..."

 연우혁은 위우를 데리고 가서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다. 일각도 지나지 않아 돌아온 위우는 반쯤 혼이 나간, 창백해진 얼굴로 비틀거렸다.

 천화회 무인들은 무슨 습격이라도 당했나 싶어 깜짝 놀랐다.

 "괜찮으십니까?!"

 "괜, 괜찮다."

 그러는 사이 연우혁이 태연히 입을 열었다.

 "천화회 쪽에서도 양해해준다고 하셨소. 이 자리에 모인 동도들께서 판관의 체면을 세워줘서 고맙소!"

 "..."

 "..."

 연우혁이 자리를 빠져나간 뒤에도, 자리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풀리지 않는 의문에 서로를 쳐다볼 뿐이었다.

*   *   *

 "끄응. 빌어먹을."

 낭인, 쌍부맹호 우곽은 욕설과 함께 곡괭이를 휘둘렀다. 허리춤까지 올라온 중수(重水)가 조금만 움직여도 쉽게 지치게 만들었다.

 구파일방의 장로들이 인근 문파들을 불러 잘 설득해서 중재했다 하더라도 낭인들의 일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지금부터 시작이라고 봐야 했다.

 "빌어먹을 도둑놈. 무슨 놈의 무덤이 이렇게 들어가기 힘들단 말이냐?"

 "그러게 말이다. 인부들을 시키면 안 되나?"

 "인부들은 무공을 익히지 않아서 버티질 못한다는군. 또, 밖에 괜히 말이 새어나가서 좋을 게 없다잖나."

 "살인멸구면 우리도 위험한 것 아닌가."

 "설마, 무당이 그런 짓을 할까. 천화회면 모를까."

 "염병... 무당의 장로가 와서 다행이라고 느낀 건 또 처음이로군."

 문제가 해결되자 이제 모금묘사는 낭인들을 데리고 고묘로 들어갈 길을 파기 시작했다.

 그러나 모금묘사 놈이 찾아낸 고묘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접근이 까다로웠다. 흙을 파내면 안에서 중수가 흘러나오고 기관진식이 튀어나오는데, 어지간한 광부도 버틸 수 없을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작업을 진행할 수 있는 건 그래도 무공을 익힌 무림인밖에 없었다. 마침 호가호위할 장로들도 있겠다 모금묘사는 눈치 보지 않고 낭인들을 부려먹기 시작했다. 마치 이제까지 귀찮게 기어오른 원한을 풀려는 것 같았다.

 "자네들, 너무 쉬는 것 아닌가? 그렇게 은자를 받아놓고서!"

 "..."

 "..."

 낭인들이 노려보았지만 모금묘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번 고묘를 털면 만날 일도 없는데다가, 낭인들의 분노란 건 금덩어리가 손에 쥐어지면 감사함으로 바뀌기 마련인 것이다.

 "빨리 더 파게. 오늘 두 장은 더 파야 하네!"

 "잠깐."

 낭인들 옆에서 점혈당한 채 끌려다니던 흑교서가 입을 열었다.

 "...저기 기관진식이다."

 "빨리 좀 말해라, 이 쥐새끼야!"

 평소라면 흑교서를 함부로 대하지 못할 낭인들이었지만, 지금은 덥고 힘든 만큼 거침없이 성질을 터뜨렸다. 점혈된 만큼 거리낄 것도 없는 것이다.

 고묘까지 파고 들어가는 길이 워낙 험하고 함정이 많은 만큼 연우혁은 흑교서의 재주를 낭인들에게 빌려줬다. 일일이 연우혁이 다 보고 해체해줄 수는 없었으니까.

 '죽여버리겠다.'

 우거는 언젠가 이 낭인놈들을 잊지 않고 보복하겠다고 다짐하며 기관진식의 위치를 짚어줬다. 일을 소홀히 했다가는 자기도 같이 죽을 테니 그럴 수도 없었다.

 '대체 어떻게 한 걸까?'

 중수가 차올라서 힘든 와중에도 우거는 대체 판관 놈이 어떻게 재주를 보인 건지만 곰곰이 생각했다.

 같은 책사인 만큼 답을 알기 전에는 잠도 제대로 못 잘 것 같았다.

 '대체 어떻게...'

 쉭!

 "이 미친 쥐새끼야! 제대로 찾지 못하겠냐!"

 "기, 기관진식은 원래 이렇게 찾는 거다!"

*   *   *

 "다시 한 번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위에서 아래 쪽 작업을 감시하며, 연우혁은 두 장로에게 깍듯하게 감사를 표했다.

 그 모습에 장로들은 내심 만족스러워했다. 한경의 판관인데다가 금의위와도 친분이 있는 만큼 거만해도 이상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공손할 줄이야.

 실제로 이야기를 나눠볼수록 이 젊은 판관은 호감이 가는 인물이었다. 거드름을 피우지도 않고 자신의 재주를 적시적소에 휘둘렀다.

 과연 혈교의 첩자들을 모조리 잡아낸 게 우연이 아니었다.

 "음. 궁금한 게 있네만."

 분위기가 괜찮자 소매검객은 슬쩍 입을 열었다.

 "그게 무엇입니까?"

 "천화회 무인들은 어떻게 설득한 건가? 그 자들은 고집이 세서 설득하지 못할 줄 알았는데."

 정망거사도 모르는 척 귀를 기울였다. 본인도 꽤나 궁금했던 것이다.

 "죄송합니다만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

 "..."

 두 장로의 얼굴이 실망으로 크게 흐려졌다.

143화

 하지만 연우혁은 모르는 척 입을 다물었다.

 연우혁도 구파일방의 장로들에게 호감을 더 사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천화회의 비밀을 멋대로 퍼뜨릴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화산파의 장로는 아쉬움이 담긴 목소리로 말끝을 흐렸다.

 다른 상황이라면 물고 늘어지기라도 했겠지만, 한경에서 크게 빚을 진 지금 억지를 부릴 수는 없었다.

 정망거사는 화제도 바꿀 겸 아까부터 궁금해왔던 걸 물어보았다.

 "고묘 안으로는 언제쯤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가?"

 지금 낭인들이 구슬땀을 흘리고 있는 곳은 엄밀히 따지자면 고묘의 안쪽이 아니었다. 무덤 안쪽으로의 접근을 막기 위해 준비해놓은 봉분 구간에 가까웠다.

 보물이든 비급이든 더 파고들어가 석실의 문을 열어야 나올 테니, 낭인들의 작업은 앞으로 한동안 더 계속되어야 했다.

 "아마 보름 안에는 들어갈 수 있을 겁니다."

 "낭인들이 걱정이군!"

 소매검객은 한탄하듯이 외쳤다.

 당연히 이 화산파의 장로들은 낭인들이 무리할까봐 걱정하는 게 아니었다. 한 곳에 모아놓은 낭인들이 불만을 터뜨리거나 소요를 일으킬까봐 걱정하는 것이었다.

 지금이야 장로들이 후기지수들까지 데리고 철저히 감시하고 있으니 엄두를 내지 못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다른 꿍꿍이를 품는 놈들이 나올 터였다.

 몰래 도망가려는 놈은 차라리 나았다. 그런 놈은 봐줄 수 있었다. 고묘 안으로 먼저 들어가려고 하거나 별개의 꿍꿍이를 꾸민다면 괜히 일이 복잡해졌다.

 "너무 걱정하실 필요는 없을 겁니다. 고묘의 기관진식이 실로 복잡해 몰래 들어가는 건 불가능에 가까울 테니까요."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연우혁과 달리 고묘 안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는 장로들은 약간 반신반의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먼저 들어가는 건 그냥 스스로 죽겠다는 거다.'

 그에 비해 연우혁은 고묘가 열렸을 때 안에서 어떻게 죽어나가는지 몇 번이고 본 만큼 뭐가 나올지 파악하고 있었다.

 장로들도 있고 연우혁 본인의 무공도 크게 증진했으니 충분히 뚫고 나갈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방심한 채로 뚫을 수준은 절대 아니었다.

 "그보다 저는 다른 소란이 걱정입니다."

 "다른 소란이라면 어떤 걸 말하는 건가?"

 연우혁은 별 생각 없이 대충 떠오르는 예시를 말했다.

 "낭인들끼리 서로 죽인다거나..."

 "낭, 낭인 하나가 죽었습니다!"

 "!!"

 밖에서 들려오는 화산파 제자의 다급한 외침에, 두 장로는 경악의 눈빛으로 연우혁을 쳐다보았다.

 이건 또 어떻게 예측했단 말인가?!

*   *   *

 비검객 사동마가 가슴팍이 쩍 갈라진 채로 죽어있는 모습에 낭인들은 술렁였다.

 하루 동안 고되게 일하고 나서 술이나 한 잔 하자고 사동마의 천막에 들어갔다가, 졸지에 고통으로 얼굴이 끔찍하게 일그러진 시신만 발견한 낭인은 더듬으며 외쳤다.

 "나, 나는 안 했다!"

 "안 했겠지. 저 놈은 그럴 실력이 안 되니까. 비검객을 이길 순 없었을 거야."

 "뭐? 감히 날 무시하는 거냐? 가까이만 붙으면 비검객 따위는...!"

 "흑교서. 당신이 나서줘야겠소.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오? 사동마가 왜 죽은 거요?"

 "무, 무덤을 파서 그런 거 아닌가? 무덤에 있던 원혼이..."

 흑교서는 쥐새끼를 연상시키는 특유의 수염을 매만지다가 쯧쯧 혀를 찼다.

 "이 멍청한 놈들아! 원혼 때문이면 여기 있는 놈들이 다 죽어야지 왜 이 놈만 죽겠냐?"

 "그, 그건 원혼도 직접 나서야 하니까 한 번에 한 놈씩..."

 "이런 병신 같은 놈들. 이걸 봐라."

 거친 작업 내내 끌려 다닌 탓에 흑교서는 평소 보여주던 능글맞은 태도 대신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흑교서가 가리킨 곳은 사동마의 손바닥이었다. 손바닥에는 날카로운 절창(切創, 베인 상처)이 여럿이었다. 그뿐 아니라 팔뚝에도 흔적이 있었다.

 "봤냐? 봤으면 다음에는 이걸 봐라."

 그 다음 흑교서는 사동마의 갈라진 가슴팍 옆을 들추더니 그리 크지 않은 자상(刺傷)을 찾아냈다. 옆에서 보던 낭인 하나가 당황해서 물었다.

 "이건 어떻게 찾아낸 거요?"

 "헤. 보는 눈이 있으면 다 찾아낼 수 있는 법이지. 옷에 구멍이 안 보이나?"

 "여기 이렇게 옷이 찢어졌는데 이런 작은 구멍이?"

 "그래서 이 몸은 흑교서고 네놈은 낭인 나부랭이 아니겠나? 자. 일은 이렇게 된 거다! 비검객 이 녀석은 천막에 들어온 사람을 보고 방심해서 접근을 허락했다. 그 때 단칼에 기습을 당해 가슴팍을 베였지. 하지만 비검객은 바로 죽지 않았어! 상대의 검을 손과 팔로 막아내며 어떻게든 뒤로 피하려고 했지. 바닥 보이나?"

 흑교서의 말에 낭인들은 고개를 돌렸다. 과연 흙으로 된 바닥 위에는 어지러운 발자국들이 여럿 보였다.

 "이 때 비검객은 보법을 펼치다가 넘어진 거야. 봐! 흙먼지가 옷에 묻어있네. 일어나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콱. 가슴팍에 숨통을 끊은 일격이 들어온 거지."

 바닥에 떨어진 젓가락을 하나 줍더니 흑교서는 굴러다니는 동과(冬瓜)에 푹 찔러 넣었다. 감탄하며 듣던 낭인들은 자신도 모르게 물었다.

 "그, 그럼 누가 죽인 겁니까?"

 "누가 죽였느냐! 헤헤. 흑교서는 당연히 알지. 가까이 다가가도 비검객 놈이 반응하지 않고, 얼마든지 천막에 접근할 수 있으려면 여기 낭인 놈들 중 하나일 거야."

 들으면서 짐작하고는 있었지만 실제로 듣자 낭인들의 얼굴이 단단하게 굳었다.

 낭인들이 비록 은자 하나에 은원 없는 자의 목도 서슴없이 벤다지만, 그들 사이에서도 규율이 있는 것이다.

 아직 일이 끝나지도 않았는데도 멋대로 기습을 가해 동료 낭인의 목을 벤 자는 결코 넘어갈 수 없었다.

 내버려둔다면 어느 낭인이 안심하고 잠들 수 있겠는가?

 "그래서 누구란 거요!"

 "헤, 흑교서는 지혜를 싸게 팔지 않아!"

 "뭐?"

 "이 흑교서가 문파에게 지혜를 빌려줄 때면 한 자 한 자가 천금의 가치를 갖고 있지. 무식한 낭인 놈들아. 그것도 모르고 알려달라고 소리친단 말이야?"

 "이 자식이..."

 점혈된 주제에 건방지게 입을 놀리자 분노한 낭인이 나서려고 들었다. 그러자 흑교서가 짐짓 놀란 척 외쳤다.

 "이 흑교서를 치려고 하다니! 설마 네 녀석이 비검객을?"

 "아... 아니야!"

 낭인들은 다시 웅성거리며 술렁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바뀐 분위기를 보며 우거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런 순간이 책사로서는 가장 즐겁고 짜릿한 순간이었다.

 자기 무공만 믿고 날뛰던 자들이 고개를 숙이고 들어오는 순간!

 우거는 이들이 곧 어떤 결정을 내릴지 훤히 보였다. 아무리 자존심이 상하고 불만스럽더라도 낭인들은 결국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는데 언제 칼을 휘두를지 모르는 살수를 뒤에 두고 넘어갈 만큼 낭인들은 멍청하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낭인들은 자기들끼리 떠든 끝에 우거에게 다가왔다. 말을 거는 그 태도는 한결 공손해져있었다.

 "흑교서 님. 이번 일을 누가 벌렸는지 알려주십시오."

 "태도가 제법 괜찮아졌군그래. 누가 지혜가 있는지 이제야 깨달은 모양이야. 그럼 앞으로 남은 일을 진행할 때에도 이 흑교서의 조언을 들을 텐가?"

 "예."

 "하늘에 맹세코? 응?"

 흑교서는 다른 건 몰라도 고묘까지 파고 들어가는데 낭인 놈들에게까지 무시받을 생각은 없었다. 이놈들 정도는 쥐락펴락할 생각이었다.

 "알, 알겠습니다."

 "좋아, 좋아! 그럼 말해주도록 하지."

 사파에서 명성 자자한 책사는 만족스럽다는 듯이 의자에 앉아 몸을 뒤로 젖혔다. 그리고는 비검객 사동마의 한쪽 손을 가리켰다.

 "저길 봐라."

 "상처는 아까 봤잖소?"

 "지금 흑교서에게 건방을 떠는 거냐?"

 "아... 아닙니다. 봤, 봤잖습니까."

 "상처가 아니라 그 옆을 보란 거다."

 낭인들은 시선을 돌렸다. 비검객의 손 옆에는 땅에 떨어져서 으깨진 동과(冬瓜)가 있었다. 비검객이 안에서 먹고 있었는지 몇 개가 굴러다니는 게 보였다.

 "동과 아닙니까?"

 "정확히는 으깨진 동과다."

 "땅에 떨어져서 으깨진 거 아닙니까...?"

 "이렇게 단단한 게 그냥 떨어졌다고 이 정도로 으깨지진 않지. 이건 비검객이 마지막에 직접 잡고 일부러 으깬 거다."

 "...그걸 왜 으깹니까?"

 "먹고 싶었나?"

 낭인들의 수준 낮은 질문에 흑교서는 순간 아찔했지만, 참고서 설명을 이어나갔다.

 "누가 자신을 죽였는지 은밀하게 흔적을 남긴 거야! 대놓고 이름을 적었다면 아무리 상대가 정신이 없어도 지웠을 것 아닌가."

 "과, 과연. 그럼 이 짓을 저지른 자는 동과란 겁니까!"

 낭인들은 자신들 중 동과란 이름을 갖고 있는 자를 찾았다. 물론 그런 자는 나오지 않았다.

 흑교서는 무시하고서 아까 젓가락으로 찌른 동과를 들었다.

 "동과(冬瓜)의 과(瓜)는 파자하면 팔팔(八八)이다. 겨울(冬)이 오면 추위(冷)가 오고. 이게 들어간 놈이 누구겠냐?"

 "...고, 고팔!"

 "고팔? 그 놈이 누구지?"

 "저 놈! 장강냉검이라고 자처한 놈 있잖아!"

 낭인들이 외치자 흑교서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비검객이 남긴 파자가 없었다 하더라도 흑교서는 고팔이란 놈을 의심했을 것이다. 낭인들 중 다른 사람과 유난히 어울리지 않아서 수상한데다가, 검수(劍手) 중 유일하게 비검객이 죽은 날에 행적을 파악할 수 없었던 것이다.

 낭인들이 놀라서 웅성대는 동안 흑교서는 낭인 중 검을 쓰는 자들부터 골라내 어느 자가 죽일 수 있었는지 확인했다. 과연 흑도에서 명성이 자자한 책사다운 치밀함이었다.

 그 치밀함에 파자를 알아보는 예리함까지.

 강호에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책사는 몇 되지 않았다. 그걸 느꼈는지 낭인들은 감탄의 눈빛으로 흑교서를 쳐다보았다.

 "고팔, 이 놈! 비검객을 죽이다니."

 "헛소리. 난 저딴 놈을 죽일 이유가 없다."

 "이유야 많겠지! 네놈이 꾸며낸 별호를 들어본 적 없다고 모욕을 줬으니까. 비검객이 네놈을 비웃었다지만 이런 짓을 하다니!"

 비검객과 친했던 쌍부맹호 우곽이 벌게진 눈으로 고팔을 노려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고팔은 차갑게 대꾸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덤벼보지 그러냐?"

 "다들 저 놈을 죽여버려!"

 고함과 함께 낭인들이 고팔을 둘러쌌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연우혁이 장로들과 함께 자리에 도착했다.

 "무슨 일이냐?"

 "비, 비검객이..."

 상황 설명을 들은 연우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묵묵히 들었다. 흑교서가 끼어들었다.

 "이 흑교서가 다 해결했다. 무영암룡. 한 발 늦었군."

 "해결했다고?"

 "그래. 저 고팔이란 놈이 한 짓이야."

 "아니."

 "??"

 "저 놈입니다."

 연우혁은 쌍부맹호 우곽을 가리키며 손짓했다. 말이 떨어지자마자 화산파의 장로는 가볍게 검을 뻗어 점혈했다. 쾌속한 검기에 우곽은 반응하지도 못하고 풀썩 쓰러졌다.

 "뭐... 무슨. 고팔이란 놈이라니까! 무영암룡. 지금 이 흑교서가 먼저 해결했다고 트집을 잡는 거냐?"

 "어디서 혓바닥을 놀리는 거냐?"

 소매검객이 으르렁대자 흑교서는 움찔했다. 연우혁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이 대답했다.

 "틀렸으니 틀렸다고 한 거지. 비검객은 암기술을 익힌 무인이라 같은 낭인이라 하더라도 가까이 접근하는 걸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려면 꽤 친한 무인이었어야 하지. 고팔은 무리다. 게다가 동과를 직접 으깼으면 손바닥과 소매에 더 튀었어야 했는데 그런 흔적이 없군. 이후에 다른 자가 으깬 거겠지. 마지막으로 우곽은 도끼를 들고 다니지만 검법을 익혔다. 손을 자세히 보면 알 수 있는 사실이지."

 "죽...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자신의 내막이 낱낱이 드러나자 우곽은 넙죽 엎드리며 외쳤다.

 "사, 사동마 놈이 자꾸 은자를 빌려준 걸로 핍박해서...!"

 "말... 말도 안 돼!"

 흑교서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우곽을 노려보았다.

 저런 무식한 촌놈처럼 생긴 녀석이 우거 본인을 속였단 말인가?

 "동과를 사용한 파자는 그럼 왜 해놓은 거냐? 내가 알아차리지 못했으면 어떻게 하려고?!"

 "못, 못 알아채도 고팔 저 놈이 수상하다고 몰릴 거라고 생각했지. 저 파자는 고서에서 봤는데, 흑교서 네놈은 똑똑하니까 알아볼 거라고 생각했고..."

 "..."

 흑교서의 얼굴이 굴욕으로 벌겋게 달아올랐다. 낭인 놈들을 무시한 탓에 저런 보잘것없는 속임수에 당한 것이다.

 파자를 알아차렸다는 마음에 다른 건 다 넘기다니!

 연우혁은 흑교서가 하도 부들부들 떨자 가볍게 위로했다.

 "너무 개의치 마라. 사람이 속을 때도 있는 법이지."

 "하지만 대인께서는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으시잖습니까?"

 눈치 없는 낭인의 질문에 흑교서의 얼굴이 더욱 더 썩어 들어갔다.

144화

 "어허. 그만하게."

 보다 못한 청방진인이 나서서 말렸다.

 무당파의 장로가 보기에도 이번 건 충분히 실수할 수 있는 문제였다. 낭인 주제에 제법 영리하게 꾀를 낸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하는 법일세. 흑교서 이 자는 그저 운이 나빴을 뿐이야."

 "뭘 그리 말해주나. 보는 눈이 없으니 실수를 한 거지."

 그에 비해 조오렴은 노골적으로 빈정댔다. 정망거사와 달리 화산파의 장로는 흑도의 책사를 조롱할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사지를 꽁꽁 결박당해도 입만 멀쩡하면 혓바닥을 놀릴 흑교서였지만, 이번 일이 어찌나 충격이었는지 고개만 푹 숙이고 대꾸하지 못했다.

 평생 흑도에서 명성을 쌓아오면서 이렇게 망신살이 뻗치는 건 처음이었다. 만약 오늘 일이 새어나간다면 흑교서의 별호는 강호의 웃음거리가 될지도 몰랐다.

 "저, 어르신. 저희가 처리해도 되겠습니까?"

 "마음대로 하게."

 낭인들이 흉흉한 눈빛으로 우곽을 쳐다보며 말하자, 장로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허락했다.

 원래 낭인들 사이에는 낭인들만의 법률이 있는 법. 굳이 이런 일에까지 발을 들이밀 만큼 두 장로는 고지식하지 않았다.

 애원하며 끌려 나간 우곽은 어느 순간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확 조용해졌다.

 "훌륭하네. 연 판관. 설마 흑교서 저 자가 저렇게 웃음거리가 될 줄은 몰랐는데."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아니, 진심일세! 내 저 쥐새끼를 얼마나 눈엣가시로 여겼는지 아는가?"

 소매검객은 평소 보여주던 허랑한 태도와 달리 날카로운 목소리로 내뱉었다.

 정파의 무인들 중에는 흑교서와 원한이 있는 자들이 여럿 있었다.

 직접적으로 손을 섞거나 무공을 겨뤄서가 아니었다. 기껏 준비한 계획이 저 책사 놈 때문에 틀어진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놀랍게도 화산파의 장로인 소매검객도 거기서 벗어나지 못했다.

 "예전에 화산파의 무경각이 털린 것도 분명 저 놈이 관련되어 있을 거야."

 "이보게. 그건..."

 정망거사가 당황해서 친우를 말리려고 했다. 흥분해서 화산파의 비사를 털어놓을 순 없지 않은가.

 그러나 소매검객의 목소리는 날카로워도 눈빛은 침착했다. 정망거사는 친우가 흥분해서 이성을 잃은 게 아니라는 걸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제가 들어도 되는 이야기입니까?"

 "자네 정도면 들을 자격이 있으니 괜찮네. 어디 가서 말하지만 말게."

 무경각은 화산파의 서고, 즉 문파의 비급을 총망라해서 모아놓은 곳이었다.

 당연히 그 중요성은 다른 어느 시설과 비교해도 모자라지 않았고 무림의 어떤 신투도 이런 곳은 건드리지 못했다. 당장 그 백면신투가 남궁세가의 담장을 넘으려다 무슨 꼴을 당했던가.

 '...들어도 되는 거 맞나?'

 연우혁은 괜한 이야기를 듣는 것 아닌가 싶어서 가슴이 덜컥했다. 화산파의 장로야 연우혁을 신뢰하니 말하는 거였지만, 아무래도 화산파 입장으로서도 부끄러운 일을 외인이 알아서 좋을 게 없는 것이다.

 "그 때 사라진 몇 놈 중에 한 놈은 분명 흑염방의 구역으로 도망갔단 말이지..."

 그날의 사건은 자시(子時)에 시작되었다.

 한 화산파의 제자는 무공의 진전이 없자 답답한 마음에 찬 밤공기라도 마시기 위해 앞뜰로 나섰다가 무경각 쪽에서 기묘한 불빛을 목격했다.

 -도, 도둑이다!

 그 외침에 절정의 경지에 오른 화산파의 고수들이 사방에서 튀어나와 무경각에 침입한 도둑을 붙잡았다. 도둑은 문제가 생긴 걸 알자 바로 입 안에 넣어놓은 독단을 깨물고 자결했다.

 어떻게 들어왔는지는 몰라도 일단 도둑이 도망치기도 전에 격살했으니, 일이 수습된 줄 알았는데...

 놀랍게도 무경각 안에 있던 비급들 십수권이 사라진 것이다.

 대경실색한 화산파는 수색령을 내려 근처를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대(大) 화산파의 힘은 놀라워 근처 흑시(黑市)나 귀시(鬼市)에서 국법을 비웃으며 장사하던 도둑놈들도 기겁해서 동료들을 팔아치울 정도였다.

 다행히 대다수를 확보하긴 했지만 그 와중에 손에 넣은 비급을 갖고 지역을 빠져나간 이들이 있었다.

 화산파는 흑도칠문이든 뭐든 충돌하면 단칼에 베어버릴 각오로 추격대를 보냈지만, 그 중 한 놈은 흑염방의 구역으로 도망가더니 행적이 묘연해졌다.

 흑염방 놈들의 목에 칼을 겨누고 샅샅이 뒤졌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으니 화산파 고수들 입장에서는 분통이 터질 노릇이었다.

 소매검객은 그 때 일이 흑교서와 관련이 있는 게 아닌가 의심하고 있었다. 주도하진 않았더라도 분명 한몫 거들었을 것이다.

 "...혹시 무경각 각주께서 그 일이 있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가셨습니까?"

 "함평이 말인가? 그래... 마두를 토벌하다가 암습에 당했지."

 "그 분께서 비급을 빼돌리신 것 같습니다만..."

 "..."

 "..."

 두 장로가 입을 다물자 갑자기 분위기가 차가워졌다. 생전 각주와 친분이 있었던 소매검객이 무슨 말을 할 지 몰랐기에 정망거사가 먼저 나서서 중재했다.

 "그, 그게 무슨 소리인가?"

 "음. 생각해보십시오. 도둑놈이 들어왔는데, 뭘 할 틈도 없이 붙잡혀서 죽었습니다. 그런데도 비급이 밖에 돌아다닌다면 무슨 뜻이겠습니까?"

 "같이 들어온 다른 도둑놈이 먼저 비급을 들고 빠져나갈 수도 있지 않나!"

 "도둑들이 천하의 화산파에 들어와서 그런 짓을 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화산파의 경계를 뚫고 들어와 무경각 안을 뒤지고 다시 경계를 뚫고 빠져나가는 건 천하의 어떤 신투도 하기 힘듭니다."

 무림을 돌아다니는 기담책에는 황궁도 들어갔다 나오는 신투가 나왔지만, 사실 신투에게 그럴 능력이 있으면 그냥 어느 문파든 들어가 장로 대우를 받으며 편하게 살 수 있었다.

 신투가 신공을 익힌다 한들, 그 신투를 상대하는 거대문파들의 무인들도 신투의 신공보다 더 대단한 신공을 더 오랫동안 연마한 것이다.

 "저는 보이지 않는 신투가 있었다기보다는, 누군가 내통한 사람이 있다는 것에 걸겠습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내통할 수 있는 사람은 각주밖에 없습니다. 그 밑의 제자는 별개로 내통하기 쉽지 않으니 말입니다. 혹시 일이 벌어지기 전에 각주가 특이한 행동을 하지 않았습니까? 갑자기 사치를 부린다거나..."

 소매검객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순간 생전의 무경각 각주가 머무르는 방 안에서 값비싼 장신구를 발견했던 기억이 떠오른 것이다.

 그 때는 우연히 구했다고 웃어넘기길래 그런가보다 했는데 왜 갑자기 이 기억이 떠오른단 말인가?

 친우가 당황해서 말을 잇지 못하자 정망거사가 대신 물었다.

 "그, 그 각주가 비급을 빼돌렸다면 왜 도둑이 들어왔단 말인가?"

 "화산파라면 아마 주기적으로 문파 내부를 돌이켜보고 점검하는 일이 있지 않겠습니까. 자기 예상보다 빨리 확인이 들어오자 책임을 피하려고 했을 겁니다. 무림의 도둑들은 부나방 같아서 조금만 정보를 흘려줘도 목숨을 걸고 들어왔을 테니 어렵지 않았겠지요."

 "하지만 비급은 대부분 회수되었네!"

 "그것도 아마 미리 준비했을 겁니다. 비급이 하나도 회수되지 못하면 필히 이런 이야기가 나왔을 테니까요. '그러고 보니 무경각의 경계는 왜 뚫린 거지?'같은. 각주로서는 자기한테 관심이 쏠리지 않게 하고 싶었겠지요. 처음부터 돌려보낼 비급은 찾기 쉽게 던져놨을 겁니다."

 "...그럼 흑염방으로 도망친 놈은?"

 충격에서 간신히 회복한 소매검객이 어두운 눈빛으로 물었다.

 믿음직한 동생이라고 생각했던 각주가 실은 문파의 배신자일수도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쓰라렸지만, 그렇다고 진실에서 눈을 돌릴 만큼 화산파의 장로는 머저리가 아니었다.

 무영암룡 또한 이런 이야기를 해주는 게 편하지만은 않을 테니 호의에 감사하며 최대한 들어놔야 했다.

 "이 모든 게 미리 준비해놓은 암계라고 생각하면 판단하기 쉬워집니다. 아마 일부러 흑염방 구역으로 데리고 가서 죽였겠지요. 죽은 자만큼 찾기 힘든 것도 없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 일을 저지른 건, 당시 흑염방과 사이가 특히 안 좋았던 문파일 겁니다."

 "...사독문!"

 같은 흑도칠문 중 하나였지만, 사독문과 흑염방의 사이는 꾸준히 견원지간이었다.

 흑도칠문 중 사이가 좋은 놈들이 어디 있겠냐만은 둘의 사이는 그 중에서도 유독 심각했던 것이다. 특히 화산파의 비급이 사라졌을 때는 곧 혈사가 벌어진다고 소문이 돌 만큼 관계가 험악했던 때였다.

 "그, 그러고 보니 함평이는 독에 당했네."

 "아마 사독문 쪽에서 손을 썼을 겁니다. 살려뒀다가는 언제 비밀이 새어나올지 모르는 만큼..."

 "이 후레자식들을 그냥!"

 소매검객의 눈빛에서 짙은 살기가 폭사하듯 쏘아져 나오자, 옆에 있던 장로가 말렸다.

 "진정하게! 지금 나설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지 않나!"

 "알고 있네. 하지만 맹세코, 이 일이 사실이라면 사독문 놈들은 절대로 편하게 죽지 못할 거야!"

 흑도의 꼬임에 넘어간 화산파의 도사도 잘못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꼭두각시처럼 갖고 논 다음 목숨을 끊은 원한을 잊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 당시 화산의 장문인께서는 현명한 선택을 하셨네. 사독문 놈들은 기껏 계략을 꾸며놓고서도 좌절했을 걸세."

 "그 때는 왜 말리나 불만을 토했었는데... 확인하고 나서 사죄해야겠군."

 사독문은 화산파의 비급도 비급이지만 흑염방과 어떻게든 충돌시키고 싶었던 게 분명했다.

 만약 화산파의 장문인이 확실한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자제하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면 정말 손바닥 위에서 놀아날 뻔한 것이다.

 친우가 어느 정도 진정하자 정망거사는 찬탄의 눈빛을 연우혁에게 보냈다.

 "연 판관. 정말 감탄했네. 실은, 천기수사께서도 이 일은 해결하지 못하셨지. 그런데 이렇게 앉은 자리에서 단칼에..."

 "...혹시 이 일을 제가 해결했다는 건 천기수사께 비밀로 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연우혁은 천기수사의 이름을 듣자 자기가 선금을 받지 않고 문제를 풀어줬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무당파의 장로는 의아해하며 말했다.

 "숨길 수야 있겠지만 오래 가지 못할 걸세. 그 분을 속이기는 힘든 일이거든.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나?"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해본 말이었습니다. 아."

 젊은 판관이 무언가 떠올렸다는 듯한 표정을 짓자 정망거사는 의아해했다.

 "혹시 더 말해줄 게 있나?"

 "아. 그런 게 아니라... 너무 하던 이야기에서 멀리 왔군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그러니까, 흑교서 저 자는 화산파의 비급이 사라진 것과 별 상관이 없다는 거였습니다. 그냥 하찮은 마두일 뿐이지요."

 "그, 그렇군!"

 정망거사는 그 일이 상관없다 하더라도 흑교서가 저렇게 하찮은 마두 취급 받을 자는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눈앞의 판관은 흑교서를 얕봐도 될 만한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   *   *

 "판관 어른. 낭인 놈이 판관 어른을 뵙고 싶어합니다만..."

 "들어오라고 해라."

 연우혁은 흔쾌히 허락했다. 장강냉검 고팔이 안으로 들어왔다.

 "고맙소. 판관 나으리."

 "무슨 할 말이 있어서 이리 왔나?"

 "우선 오늘 있었던 일에 감사를 표하고 싶군. 설마 그런 누명을 쓸 줄은 몰랐는데."

 고팔의 말투가 어느새 변했지만 젊은 판관은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판관으로서 해야 할 일이지."

 "과연 명판관이군. 하지만 명판관이라 하더라도 알지 못하는 게 있지."

 "설마 네가 냉수사 고송이라는 이야기를 하려고 이러는 건가?"

 "..."

 냉수사(冷手蛇) 고송은 허를 찔려서 얼어붙었다. 눈을 몇 번 깜빡이던 고송은 산전수전 겪은 마두답게 정신을 차리고 외쳤다.

 "...알고 있었다니 이야기가 빠르겠군. 난 거래를 하러 왔다."

 "무슨 거래?"

 "난 저 고묘 안에 있을 비급에 관심이 있다. 내가 네 목숨을 살려줄 테니, 비급 한 권을 주겠다고 맹세해라."

 '왜 사람들은 내가 맹세를 지킬 거라고 생각하는 건지 모르겠군.'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 심지어 마두들까지 맹세는 가급적 어기고 싶지 않아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칼날 위의 삶이지만, 아니, 오히려 그렇기에 더더욱 맹세를 꺼림칙하게 여기는 것이다.

 하지만 연우혁은 하늘에 대고 맹세한 다음 즉시 말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이었다.

 "내 목숨은 내가 챙길 테니 거절하지."

 "오해가 있는 것 같군! 지금 네 목숨은 네 목숨이 아니다."

 마두답게 고송은 넌지시 협박했다. 천막 안에 들어온 이상, 판관의 목은 고송의 손아귀 안에 있다는 암시였다.

 "내 생각에는 그쪽이야말로 오해가 있는 것 같군."

 연우혁이 기세를 일으키자 고송의 눈이 크게 떠졌다.

 예전에 만난 보잘것없는 포쾌가 판관이 된 것도 놀라운 일이었는데, 그 경지가 절정이라니!

 "미친 놈 같으니!"

 "칭찬 고맙군!"

 "하지만 날 정말 이길 수 있다고 보느냐? 게다가 이 거리에서? 네 암기술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천막 뒤에서 두 장로가 은신을 풀고 모습을 드러냈다. 냉수사 고송은 노련한 마두답게 무릎을 꿇고 외쳤다.

 "목숨만 살려다오!"

145화

 두 장로는 고송의 반응에 별로 놀라워하지 않았다.

 정파의 고수가 이십 년 넘게 협행을 하며 명성을 쌓으면 정인군자가 되지만, 사파의 마두가 이십 년 넘게 강호를 제멋대로 주유하면 간도 쓸개도 닳아 없어지기 마련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절정 고수로서의 자존심을 부리는 자였다면 애초에 이렇게 오랫동안 살아남지도 못했으리라.

 그보다 두 장로가 놀란 건 연우혁이 냉수사의 역용술을 완전히 꿰뚫어보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마두가 펼친 교묘한 역용술을 어린아이 손목 비틀듯 꿰뚫어 볼 줄이야.

 덕분에 냉수사는 자기 무공만 믿고 발을 내딛었다가 사지에 몰린 꼴이 됐다. 이 정도면 처음부터 저 젊은 판관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났다고 봐야 했다.

 "내가 그쪽과 원한이 없는데 죽이기야 하겠는가."

 "!"

 연우혁의 말에 고송은 반색하기보다는 멈칫했다.

 물론 대뜸 죽으라고 외치는 것보다는 나았지만, 지금 들은 말도 영 좋게 들리지는 않았다.

 강호초출이라면 반색했겠지만 고송 같은 노회한 마두는 대가 없는 호의가 얼마나 무서운지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뭐냐? 무슨 생각이냐?'

 차라리 가둔다거나, 무슨 위험한 일에 강제로 떠민다거나, 그도 아니면 고독이라도 먹이려는 게 속은 편할 것 같았다.

 방금 일어난 협박을 마치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다니.

 물론 고송은 무슨 꿍꿍이냐고 따져 묻지 않았다. 그랬다가는 실낱같은 기회도 날아가기 마련이었다.

 "고맙다, 고마워! 역시 소문이 자자한 명관답게 자비롭구나! 내, 어느 곳을 가더라도 한경의 판관이 천하제일이라고 칭송하마!"

 "마음만으로도 고맙군."

 연우혁이 두 장로한테 '저 자를 죽이십시오'라고 하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물론 고송한테 받은 게 있기도 했지만, 일단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연우혁은 보물과 무공서를 받았다고 그 은혜에 평생 감읍하는 사람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렇게 된 김에 청수경에 대해 물어보고 싶군.'

 -청수경(靑手經), 놈은 청수경을 갖고 있다! 청수경 말이다!

 서장의 법왕이 익힌 독문무공으로서 이백 년 전 무림을 뒤흔들었던 무공, 청수경.

 예전 냉수사와 깊게 원한을 진 마두 청수귀마는 죽기 전 냉수사가 청수경을 갖고 있다는 유언을 연우혁에게 남겼었다.

 그 때는 청수경이 무슨 무공인지도 모르는데다가 무림을 제멋대로 돌아다니는 마두를 찾을 방법이 없었기에 넘겼었는데, 이렇게 냉수사를 만나게 되자 호기심이 생긴 것이다.

 그렇기에 낭인들 사이 냉수사가 숨어있어도 내색하지 않고 기회를 노리고 있었는데, 이렇게 냉수사가 멋대로 고개를 들이밀어 주니 고마울 따름이었다.

 '기회를 엿봐서 청수경에 대해 캐내보자.'

 물론 저런 닳고 닳은 마두가 협박한다고 진실을 토해내진 않겠지만 연우혁에게는 상대를 설득할 방법이 여럿 있었다. 당장 범망공부터 시작해서 고묘 안까지 파악하고 있지 않은가.

 무력마저 이쪽이 우위인 만큼 충분히 냉수사를 압박해서 설득할 수 있으리라.

 "그럼... 물러가도 되겠는가?"

 "물러가도 된다. 참. 설마 떠날 생각은 아니겠지?"

 "...그럴 리 있겠느냐."

 "그래. 고묘에 빨리 들어가야 하는데 그쪽 같은 낭인이 빠진다면 얼마나 타격이 크겠나. 자리를 멋대로 떠나지 말게."

 냉수사는 뭐라도 씹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자리만 빠져나가면 밤에 몰래 도망가려고 했었는데, 역시 저 판관 놈한테는 통하지 않은 것이다.

 하긴 무공이 보잘것없을 때도 세 치 혀만으로 마두의 칼을 막아낸 놈이니 이런 뻔한 계략을 못 알아차릴 리 없었다.

 "점혈을 좀 해도 되겠지?"

 "...하게."

 두 장로가 와서 냉수사를 점혈하자 내공이 마치 막힌 듯 경맥을 타고 흐르지 못했다. 냉수사는 속으로 이를 갈며 고개를 숙였다. 지금은 분하더라도 목숨을 부지한 것에 감사하고 물러날 때였다.

 "냉수사 고송이라니! 저 마두 놈을 여기서 보게 될 줄은 몰랐네."

 "심지어 낭인으로 위장하고 있었을 줄은. 죽이는 게 낫지 않았겠나?"

 소매검객은 냉수사와 크게 원한은 없었지만, 저렇게 노회한 마두는 점혈을 한다 하더라도 안심할 수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고묘에 원하는 게 있어서 낭인으로 위장하고 들어오기까지 했으니 석문이 열리면 무슨 짓을 할 지 알 수 없었다.

 '청수경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겠군.'

 연우혁은 두 구파일방 장로한테 예전에 들은 절세신공을 캐내려고 한다는 이야기를 할 수가 없어 대충 둘러댔다.

 "관리로서 혹형을 내리는 것보다 군자의 덕으로 교화시키는 게 옳은 일 아니겠습니까?"

 "...?"

 정망거사는 연우혁의 넓은 그릇에 감탄했지만 소매검객은 뜨악해하는 반응이었다.

 "저런 마두가 교화되길 기대하는 건 백년하청(百年河淸)보다 더 오래 기다려야 할 것 같네만...?"

 -석문이다! 석문!

 "!"

 밖에서 들려오는 함성에 떨떠름해하던 장로도 고개를 홱 돌렸다.

 그렇게 기다린 덕분에 드디어 고묘의 입구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어서 가보세!"

*   *   *

 '예상보다 더 빠르군.'

 확실히 낭인들이 구슬땀을 흘려가며 작업을 한 덕분에 예상했던 것보다 빠르게 고묘의 입구가 모습을 드러낸 것 같았다.

 모금묘사 조의망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드디어! 보이십니까? 저 무덤이..."

 듣는 귀가 많아서 천마라는 이름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연우혁은 상대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충분히 짐작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낭인들 사이에 지친 얼굴로 서있던 흑교서가 입을 열었다.

 "...별다른 문제는 없으니 빨리 석문을 열어보도록 허락해주시오."

 붙잡힌 상황에서도 오만하게 굴던 흑염방의 책사치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공손한 태도였다. 옆에 있던 낭인들도 흑교서의 그런 태도에 놀란 얼굴이었다.

 "정말 별다른 문제가 없나?"

 "...네놈들의 목숨을 이 흑교서가 몇 번이고 구해줬는데도 아직도 그런 소리를 하는 거냐? 진작 저 구덩이에 빠져 죽게 내버려뒀어야 했는데 아쉽구나!"

 "이 작자가!"

 흑교서의 말버릇에 화를 내면서도 낭인들은 그제야 살짝 안심했다. 순간 흑교서가 아닌 줄 알았던 것이다.

 "별다른 문제가 없긴 합니다."

 모금묘사도 흑교서의 말에 동의했다.

 고서에 기록된 내용에는 딱히 입구에 별다른 문제가 없었던 것이다. 그걸 제외하고 신투로서의 눈으로 봐도 입구에는 별다른 기관진식이 보이지 않았다.

 "정말 석문이군!"

 뒤늦게 소식을 듣고 도착한 적원방과 하씨세가의 무인들은 기대감 가득한 눈빛을 던졌다.

 물론 정말 절세비급이 나오면 무당이나 화산의 이름으로 관리할 테니 손에 넣지는 못하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들 손에 떨어지는 게 아무것도 없지는 않을 것 아닌가.

 "저희가 앞장서겠습니다."

 "맡겨만 주십시오!"

 허드렛일은 낭인들에게 맡겨도 이런 일은 누구보다도 의욕적인 무림인들이 앞장서려고 했다.

 "아니. 함정이 있을 거다. 저 아래로 한 장 정도 더 깊게 파고 내려가라."

 "..."

 "..."

 순간 자리에 모인 무림인들이 조용해졌다. 몇몇 낭인들은 흑교서를, 다른 무림인들은 모금묘사를 빤히 쳐다보았다.

 졸지에 함정 있는 문을 열자고 주장한 머저리가 된 둘은 다급하게 외쳤다.

 "정말 함정이 있단 말이오?"

 "분, 분명 확인했습니다. 함정은 없지 않습니까?"

 둘이 예상했던 것보다 간절하게 외치는 모습에 연우혁은 살짝 당황했다. 이렇게까지 격하게 반응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하지만 있는 함정을 없다고 할 수는 없었다.

 '있는 걸 어쩌라고...'

 원래 여기서 석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 처음에는 평범한 통로가 나오지만 일각(一刻) 정도가 지나면 통로가 좁혀지며 죽음의 길로 변하게 되어 있었다.

 뒤늦게 도착하면 이제 석문 밖으로 뱉어낸, 부러지고 박살난 시체들만 보고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맞혀야 했다.

 "함정이 까다로워서 알아차리지 못했을 거다. 석문을 열어봐라."

 "판, 판관 어른. 함정이 있다고 하셨잖습니까?"

 "여는 것 정도는 괜찮다. 열어봐라."

 연우혁의 지시에 낭인들이 머뭇거리며 석문을 열었다. 돌 부딪치고 굴러가는 소리와 함께 입구가 열리고 안쪽의 어두운 통로가 드러났다.

 "...?"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자 자리에 모인 무림인들은 살짝 당황했다. 기관진식이라고 하면 흔히들 암기가 날아오고 바닥이 꺼지고 천장이 무너져야 하는데, 아무런 변화가 없었던 것이다.

 "한 명 들여보내볼까요?"

 "기다려라."

 젊은 판관은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이 가만히 서있었다. 그 모습이 묘한 신뢰감을 줘서 무림인들은 별다른 불평도 없이 따라서 같이 지켜보았다.

 저 판관이 저렇게 말한다면 정말 뭔가 있을지도 모른다!

 쿠르릉!

 마침내 일각이 지나자 안의 통로가 사정없이 좁혀지기 시작했다. 밖에 있던 무림인들의 낯빛이 시퍼렇게 질렸다.

 기관진식을 몇 번 경험해 본 적 있는 무림인들도 저 정도로 살기등등한 함정은 본 적 드문 것이다.

 "이, 이거..."

 "보통 무덤이 아닌 것 같소."

 무림인들의 얼굴에 긴장과 함께 기대가 올라왔다.

 물론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위험한 고묘이긴 했지만, 그렇다는 건 그만큼 안에 있는 보물도 많을 거라는 뜻 아니겠는가.

 '대체 어떻게?!'

 천화회 무인들과 함께 있던 위우는 귀신에 홀린 듯한 얼굴로 연우혁을 쳐다보았다.

 여기서 유일하게 회주를 통해 고묘에 대한 정보를 조금이나마 들었기에, 위우는 고묘가 들어가기 쉬운 곳이 아니라는 걸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저렇게 입구에서부터 무슨 함정이 나올지 알아맞히는 건 이야기가 달랐다. 저건 위우 본인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마교의 호법 출신도, 혹은 고서를 통해 준비한 도둑도 모르는 걸 혼자서 알고 있다니?

 '혹시 저 자도 마교 출신의 핏줄인가?'

 미친 생각 같았지만 그런 의심이 안 들 수가 없었다.

 천화회가 마교 쪽 호법이 세운 문파인 것도 알고 있고, 무림의 수많은 후기지수들 중 눈에 띌 만큼 빠른 속도로 성장한데다가, 저런 고묘에 대해 박식하기까지 하다니.

 하지만 그렇다면 한 가지 의문이 남았다.

 마교는 온갖 잡다한 문파들이 결탁해서 모인 세력이었다. 때문에 마교칠종이니 뭐니 말해도 그 안의 문파들은 서로 무엇을 하고 어떤 비밀을 갖고 있는지 잘 알지 못했다.

 젊은 판관이 그 중 어느 문파의 후예라 하더라도 이렇게 자세히 알지는 못할 것 같은데...

 '...설, 설마 천마의...?!'

 "빨리 더 파내라!"

 "예, 예!"

 낭인들은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서 더 파내려가기 시작했다. 연우혁의 말대로 한 장 정도 더 파고 내려가자 아까보다 훨씬 더 투박하고 볼품없는 석문이 드러났다.

 무림인들은 이제 흑교서나 모금묘사한테 묻는 대신 그냥 바로 연우혁에게 질문을 던졌다.

 "판관 어른. 이 문을 열어도 되겠습니까?"

 "열어도 된다."

 둘은 입이 열 개여도 할 말이 없었다. 조심스럽게 석문이 열리자 연우혁은 가장 먼저 발걸음을 내딛었다.

 '확실히 넓군.'

 입구에서 어두컴컴한 통로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고묘의 규모는 거대했다. 연우혁은 영안으로 주변을 감지했다. 혹시 모를 습격을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야명주를 꺼내라."

 "여기 있습니다. 판관 어른."

 '으음.'

 연우혁은 뒤를 일사불란하게 따라오는 무림인들을 보며 살짝 곤란함을 느꼈다.

 느긋하게 안의 비급을 수색하려면 보는 눈은 좀 적어야 했는데, 생각보다 무림인들이 너무 많이 뒤에 따라붙은 것이다.

 원래 이런 고묘를 탐색할 때는 몇 명씩 나눠서 들어간 뒤 앞에 들어간 조가 나와서 보고하면 뒤의 조가 들어가기 마련.

 위험천만한 곳일수록 더더욱 그러기 마련인데, 지금 모인 무림인들은 연우혁의 재주를 너무 믿은 탓에 과감하게 뒤에 붙어서 들어왔다.

 '어떻게 갈라놓는다?'

 무슨 핑계를 대서 사람들을 밖으로 보낼까 고민하던 연우혁의 눈에 흑교서가 들어왔다. 어떻게든 명예를 회복하고 싶었는지 생쥐 같은 눈빛으로 고묘 안을 샅샅이 훑어보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흑교서가 실수 한 번 더 한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이 의심하진 않겠군!'

 연우혁은 흑교서가 듣는다면 사파 최고의 책사 자리를 반납할 흉계를 즉석에서 준비했다.

146화

 '함정이 언제쯤 나왔었지?'

 이 고묘는 여러 기관진식과 함정들이 득시글거리는 만큼 원래는 연우혁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아무리 손금 보듯이 외우고 있다고 한들 일이란 건 실제로 일어날 경우 어떻게 흘러갈지 알 수 없는 법이었으니까.

 당연히 기관진식이나 함정이 있는 곳은 피해가는 게 맞았지만...

 '저기다.'

 ...지금은 목적이 조금 달라진 만큼, 연우혁은 자연스럽게 발걸음을 내딛었다. 뒤에서 따라오고 있는 무림인들은 설마 연우혁이 흉계를 꾸미고 있다고는 상상치도 못했다.

 쿵!

 벽과 바닥, 그리고 천장 안쪽에서 굉음과 함께 무언가 굴러가는 소리가 나자 무림인들이 당황했다. 연우혁은 흑교서를 보며 단호하게 외쳤다.

 "이런! 뭘 건드린 거냐!"

 "!?"

 나름 자신의 식견으로 고묘 안의 위험을 확인하고 있던 흑교서는 갑작스러운 연우혁의 외침에 당황했다.

 "내가 아니오! 나는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았소."

 "답답한 놈 같으니!"

 연우혁이 진심으로 답답하다는 듯이 외치자 흑교서는 순간 자신이 무언가 건드렸는데 놓치고 있나 당황했다.

 원래 이런 장난 같은 수작에 넘어갈 만큼 만만한 흑교서가 아니었지만, 연우혁이 이번 일에서 보여준 신위가 흑교서의 눈을 가려버린 것이다.

 '내가 뭘 건드렸단 말인가?!'

 "방향이 건(乾)에서 태(兌)로 바뀌었지 않느냐!"

 "그게 대체 무슨 소리..."

 "다들 물러나라! 곧 함정이 작동될 거다!"

 판관의 외침에 무림인들의 낯빛이 변했다. 몇몇 성질 급한 낭인들은 흑교서를 보며 외쳤다.

 "이 자칭 책사 놈은 하나 같이 일은 해결하지 못하고 망치기만 하는구나!"

 "만약 이 아래에서 죽으면 원귀가 되어서라도 네놈을 찢어발기리라!"

 낭인들뿐만 아니라 무림인들도 심상찮은 반응을 보이는 건 마찬가지였다. 적원방이나 하씨세가에서 나온 무인들은 물론이고 구파일방의 도사들까지 의심스러워하는 반응을 보였다.

 "저 자가 혹시 일부러 함정을 작동시킨 것 아닙니까?"

 "지금 바로 제압해야..."

 낭인들은 그나마 실수라고 생각했지만 강호 경험이 많은 무인들은 조금 다른 걸 의심하고 있었다. 흑교서 같은 교활한 마두는 이런 고묘에서 의도적으로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는 것이다.

 온갖 기관진식과 함정이 많은 곳만큼 책사가 활약할 수 있는 곳이 또 있겠는가.

 반쯤 붙잡힌 상태인 흑교서가 무림인들을 죽이고 빠져나갈 틈을 만들기 위해 일부러 함정을 건드렸어도 전혀 놀랍지 않았다.

 "뛰어라! 내가 잠시 발동을 늦추고 있겠다."

 "판관 어른!"

 "어서!"

 연우혁의 외침은 감히 대꾸하기 힘든 위엄을 갖추고 있었다. 무림인들은 안타깝게 외치면서도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달려나갔다.

 "내가 빠져나올 때가지 다들 기다리고 있어ㄹ..."

 쿠르르릉!

 마침 때맞춰 위에서 석벽이 내려왔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통로가 단단히 막혀버렸다.

 '됐군.'

 무림인들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연우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분노한 무림인들 사이에 낀 흑교서가 조금 고생을 하긴 하겠지만, 교활한 마두인 만큼 알아서 잘 해결할 것이다.

 여하튼 시간을 번 만큼 연우혁은 몸을 돌렸다.

 기다리고 있으라고 했지만 원래 무림인들의 인내심은 믿을 게 못 됐다. 인내심이 바닥나서 자기들끼리 들어오기 전에 최대한 챙길 걸 챙겨놔야 했다.

*   *   *

 -크아!

 기괴한 사기(邪氣)가 담긴 괴성이 앞에서 흘러나왔다. 연우혁은 놀라워하는 대신 비도의 끝을 붙잡고 앞을 응시했다.

 '역시 강시인가.'

 이 고묘가 악명 높은 건 단순히 기관진식으로 끝나는 게 아닌, 이런 강시 같은 적들도 잠들어 있기 때문이었다.

 얼핏 보면 느리고 뻣뻣하게 다가오는 것 같았지만 강시의 강함은 결코 얕볼 수 없었다. 정말 약해빠진 놈이었다면 무림에서 강시를 만드는 문파의 취급도 그리 악명 높지 않았을 터였다.

 물론 사람의 시체를 멋대로 다룬다는 것도 거부감이 컸지만 그걸 떠나서 강시의 강함은 인근 다른 문파들을 언제나 위협했던 것이다.

 '그 중 철강시군.'

 영안으로 상대를 확인한 연우혁은 기다렸다.

 철강시는 말 그대로 피부가 외공을 익힌 것마냥 단단하고 그 힘이 억센 강시였다. 어지간한 연단으로는 이런 강시를 만들기 힘들었다.

 정면에서 정직하게 싸운다면 고작 이류 고수 정도였지만 강시의 강함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푹!

 연우혁이 날린 비도가 철강시의 미간을 관통했다. 절정의 경지에 오른 고수, 그것도 암기술이 일절이라고 불리는 고수의 비도인 만큼 아무리 철강시의 살갗이 철갑마냥 단단하다 하더라도 버티지 못했다.

 철강시가 허물어지듯 쓰러졌지만 연우혁은 다가가지 않았다. 대신 영력을 끌어내 술법을 발동했다. 박힌 비도가 쑥 뽑혀 나오더니 연우혁의 손으로 돌아왔다.

 능숙한 허공섭물이었다.

 다른 무공 고수라면 불가능했겠지만 술법도 쓸 수 있는 연우혁이기에 가능한 묘기였다. 연우혁은 어서 나오라는 듯이 벽을 쳐다보며 기다렸다.

 -크아아악!

 아니나 다를까, 벽 아래의 작은 구멍이 열리더니 거기서 철강시가 기어 나와 손을 휘둘렀다. 독이 깃든 단단한 손톱이 땅을 찢고 벽을 할퀴었다.

 이런 식으로 목숨을 아끼지 않는 악랄함이 강시의 진짜 강함이었다. 밝은 대낮에 일대일로는 충분히 강시를 제압하고도 남는 고수가, 어둡고 좁은 고묘 안에서는 예상치 못한 공격에 조금씩 상처를 입어나가는 것이다.

 강시는 계속해서 튀어나오는데 살아있는 고수는 다치고 지칠 수밖에 없으니, 이게 진짜 강시의 강함이었다.

 물론 연우혁은 굳이 상대해주지 않았다. 기억으로 확인해서 강시가 나오는 곳에서는 한 번 멈춰서고 영안으로 두 번 확인했다. 강시가 앞에서 도발하듯이 괴성을 토해내도 절대 접근하지 않고 멀리서 암기로 제압했다.

 '벽을 깨서 다행이군.'

 만약 연우혁이 아직 일류의 벽 앞에서 머뭇거리고 있었다면 아무리 자신감이 있더라도 혼자서 고묘 깊숙이 들어가진 않았을 터였다. 지금 현재 연우혁의 무공이라면 무슨 일이 벌어져도 몸을 뺄 자신은 있었다.

 -크아! 크아! 크아아아아악!

 '숫자가 늘어났다?'

 그렇게 돌파하던 연우혁은 위화감을 느꼈다.

 처음에는 착각인 줄 알았는데 철강시의 숫자가 예상보다 자꾸 늘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원래와 달리 철강시가 계속 늘어날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내가 너무 위협적으로 행동했나?'

 가끔 무림인들이 고묘 안에서 크게 소란을 일으킬 경우 다른 곳에 있던 강시들이 우르르 몰려가는 경우가 있긴 했다. 하지만 연우혁은 본인이 그런 경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조용히, 소란을 일으키지 않고 쓰러뜨리지 않았던가.

 물론 너무 손쉽게, 빠르게 쓰러뜨리긴 했지만 그것 때문에 이렇게 몰려올 줄이야.

 '어쩔 수 없군.'

 연우혁은 비도를 꺼내들고 빠르게 던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된 이상 돌파하는 수밖에 없었다. 괜히 시간을 끌었다가는 오히려 위험졌다.

 공간을 찢으며 비도가 날았다. 그럴 때마다 철강시는 제대로 된 저항도 하지 못하고 쓰러졌다. 어둠 속에 숨든 벽 속에 숨든 영안은 철강시를 놓치지 않았다.

 단순한 내공과 초식의 조화가 아닌 연우혁이란 무인의 일부가 담긴 만큼 혼백이 없는 철강시들은 결코 막을 수 없었다.

 탓!

 어느 정도 철강시들이 사라지고 길이 만들어지자 연우혁은 재빨리 내달렸다. 그러는 사이에도 철강시들이 하나둘씩 몰려왔다. 철강시들은 그들을 무시하고 도망치는 무림 고수를 향해 살벌한 울음소리를 내뱉었다.

 -크아아아아...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