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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단하십니다, 유 협회장님."

"덕분에 숨통이 트일 것 같습니다."

세론에서 스켈레톤을 빌려주기로 했다는 소식을 듣고 강당에 모인 한국 신발 협회 협회원들.

협회원 자격은 신발 회사의 경영진에 한하기에 협회에 소속된 협회원은 고작 330명.

그런데 이번엔 세론이 스켈레톤 대여를 직접 언급했다는 소식을 듣고 무려 250명이 몰려들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의 발단을 제공한 유용오는 협회원들과 협회 위원들의 칭찬 세례에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뭘요. 당연한 말을 했을 뿐입니다."

"그나저나 세론을 어떻게 설득하신 겁니까? 저번 환영식 이야기 듣고 그냥 무산되는 줄 알았는데."

사실 환영식 이후 김덕배로부터 스켈레톤을 빌려주겠다는 연락이 오기 전까지 단 한 번도 개별 연락을 취한 적이 없기에 정확한 내막을 알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자신을 대단하다 추켜세우는 협회원들 앞에서 정말 모른다 말할 수는 없는 법.

"별것 있습니까. 그냥 최대한 노력했을 뿐이죠."

유용오의 말에 협회원이 감동받은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를 위해 직접 발로 뛰어 주시다니."

"협회장님 앞에서 할 말은 아니지만 협회 역할에 대해 굉장히 회의적으로 생각했었는데, 이번에 다시 봤습니다."

그 말에 유용오가 혀를 차며 말했다.

"그러니 앞으로 회비 밀리지 말고 꼬박꼬박 내세요. 아무려면 협회가 협회원들에게 안 좋은 일 추진하겠습니까?"

"하하.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그때.

강당의 문이 열리며 한지혁과 김덕배가 안으로 들어온다.

그 모습을 보고 유용오가 환하게 웃으며 다가가 말했다.

"한지혁 대표님, 정말 큰 결단 감사······."

그런데 그런 유용오를 지나치며 그대로 강단을 향해 걸어간 한지혁과 김덕배.

유용오는 뻘쭘해진 손을 휘저으며 주변에 의아한 표정으로 서 있는 협회원들을 향해 어색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거, 못 보고 그냥 지나치셨······."

그런데 성큼성큼 강단 위에 오른 한지혁이 마이크를 잡으며 말했다.

"아아. 마이크 테스트. 반갑습니다. 한지혁입니다."

다짜고짜 절차를 무시하고 마이크부터 잡은 한지혁.

그 모습에 당황한 협회원들이었지만, 일단 박수를 친다.

짝짝짝.

"감사합니다. 아무튼 다른 게 아니라, 모두들 스켈레톤 관련해서 오셨겠죠? 예. 뭐, 압니다. 잘 알죠. 얼마나 탐나는 노동자입니까. 안 먹고 안 자고, 심지어 무급인데."

한지혁이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사람이라면 탐이 나는 게 당연하죠. 이해합니다. 그래서 생각해 봤는데, 까짓것 빌려드리기로 결정했습니다. 뭐··· 여러분이 상상하시는 거랑 약간 다르기는 할 텐데, 아무튼."

뒤에 알 수 없는 첨언이 붙었지만 흥분한 협회원들의 귀엔 오직 빌려주기로 했다는 그 말만이 강조되어 들릴 뿐이었다.

"감사합니다!"

"한지혁! 한지혁!"

그런데 그때 한지혁이 단상을 두 번 두드린다.

쿵쿵.

그러자 조용히 침묵하는 협회원들.

"그런데 말입니다. 제가 성격이 좀 많이 꼬여서요. 차라리 나한테 힘드니 도와 달라 부탁하면 도와줄 수도 있었는데, 대뜸 사전에 약속도 안 된 걸 공표하며 압박해 오니 기분이 아주 나쁘더라고요?"

한지혁이 유용오를 쳐다보자 협회원들의 시선도 유용오로 향한다.

그러자 당황한 유용오가 말했다.

"그, 그건······."

"워, 워. 변명 들으려는 것 아니니까 말하지 마세요, 어찌 되었든 스켈레톤을 빌려드리려 온 건 사실이니까.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한지혁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사람이 일단 마음이 가야 신나게 일도 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는 제가 싫어하는 사람이랑은 같이 일하기 싫거든요. 그래서 정식으로 제안합니다. 현 협회장의 탄핵, 만약 이게 타결되면 협회에 가입하고 스켈레톤도 빌려드리겠습니다."

26화

"그,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립니까!"

내 폭탄선언에 당연하게도 유용오가 뻘게진 얼굴로 일어나 외쳤다.

"탄핵이라니요! 신발 협회 역사상 협회장이 탄핵된 적은 단 한 번도······."

나는 유용오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회칙에 적혀 있던데요. 협회원의 절반이 탄핵에 찬성하면 탄핵 표결에 들어가고, 3분의 2가 찬성하면 탄핵 가결. 그간 없었다고 해서 이번에도 없어야 할 이유는 없잖아요?"

나는 느긋한 표정으로 말했다.

"혹시나 여러분이 오해할까 봐 다시 한번 말하는데, 협회장님이 저희한테 한 것?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냥 좋은 마음으로 가입하겠다 한 것뿐인데, 대뜸 환영식을 열더니 스켈레톤 빌려 달라 한 게 전부입니다. 아까도 말했죠? 부탁하면 고려해 볼 생각 있었다고. 그런데 말도 없이 사람 불러 놓고 그게 뭐 하는 겁니까? 친구끼리도 이렇게 막무가내로 하진 않습니다. 안 그래요?"

나는 침묵하는 협회원들을 보며 말했다.

"아무튼 저는 그것 때문에 기분이 몹시 나빴고, 협회장이 탄핵되기 전엔 절대 협회에 가입할 생각 없습니다. 하지만 만약 탄핵이 됐다? 그럼 적극적으로 여러분과의 상생을 위해 노력하겠다 약속드리죠."

그러자 유용오가 악을 쓰며 외쳤다.

"타, 탄핵을 제안할 수 있는 건 협회원에 한해서입니다! 한 대표는 아직 협회 소속이 아니······!"

그러자 내 옆에 있던 김덕배가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유용오 협회장에 대한 탄핵안을 제출하겠습니다."

무려 25년 차 협회원인 김덕배.

당연하게도 회칙상 문제될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러면 됐죠? 그럼 길게 갈게 뭐 있습니까. 마침 다들 모였는데 여기서 결정하죠? 자, 유용오 협회장에 대한 탄핵안 제출에 찬성하시는 분 손 들어 주세요."

그러자 침묵하던 협회원들이 눈치를 보더니 슬금슬금 손을 들어 올린다.

그 모습을 보고 유용오가 충혈된 눈으로 외쳤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한지혁 대표에게 스켈레톤을 빌려 달라 요청한 건 나예요! 나!"

그러자 손을 들어 올린 협회원이 말했다.

"그 한지혁 대표가 협회장님이 있으면 가입 안 한다잖습니까."

협회원 하나가 물꼬를 트자 너도나도 말을 하기 시작한다.

"난 또 협회장이 설득한 줄 알았더만 그냥 어거지만 피운 거였잖아."

"웬일로 협회가 일하나 싶더니······."

김덕배는 말했다.

협회의 조직력은 수십 년 전 산업이 붕괴되며 없어진 지 오래라고.

그런 만큼 당연하게도 협회원 개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건 자신들의 이득.

협회장에게 승산은 없었다.

그렇게 순식간에 대다수의 협회원들이 손을 들어 올린다.

나는 그 협회원들의 수를 세어 본 뒤 말했다.

"도합 170명 찬성. 전체 협회원의 절반이 넘었으니 탄핵안은 정식으로 통과되었습니다. 그럼 계속해서 이번엔 정말로 유용오 협회장을 탄핵할지에 대해서도 표결해 보죠. 보자, 총 협회원이 330명이고 그중 3분의 2니까··· 220명이 찬성하면 유용오 협회장은 정식으로 탄핵됩니다."

나는 귀찮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냥 들고 있던 분들은 계속 들고 계세요, 카운트하기 귀찮으니까. 50명만 더 들어 올리면 가입하고, 아니면 저는 그냥 저 문 통해서 나갈 겁니다."

그러자 망설이던 사람들까지 하나 둘 손을 들어 올린다.

유용오가 어떻게든 상황을 바꿔 보기 위해 악을 질렀지만 손을 들어 가는 사람은 점점 늘어만 갔고, 그렇게 드디어 도달한 탄핵의 매직 넘버 220.

"끝."

나는 유용오를 바라보며 말했다.

"유용오 협회장은 이걸로 탄핵되어 일반 협회원으로 강등되었습니다."

"이, 이건 아니야! 이렇게 번갯불 콩 구워 먹듯 탄핵을 하는 경우가 어디 있어! 제대로 총회를 열고 진행을 해야 할 것 아니야!"

사실 정말 회칙대로 하려면 유용오의 말처럼 올라온 안건에 따라 긴급 총회를 열고 정식으로 표결을 붙여야 하지만, 상관없다.

이번의 급작스러운 탄핵은 한자리에 모인 사람들을 내 편으로 끌어들이고 대세가 내 쪽에 있다는 걸 모두에게 각인시키기 위함이니까.

설사 회칙에 따라 탄핵이 무효화되어도 이미 3분의 2가 탄핵에 찬성한 상황에서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아. 시끄럽네. 불만 있으면 따로 유용오 씨가 총회 열어서 이번 탄핵은 회칙상 무효다 이렇게 공표해요. 그럼 될 것 아니야. 그럼 난 그 자리에서 다시 표결 붙이지 뭐. 결과는 뻔한 것 아닌가?"

"으윽!"

자. 이걸로 일단 적의 선봉은 꺾었다.

이제는 나머지 전부를 내 편으로 만들 차례.

나는 가입서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아무튼 탄핵이 가결된 걸로 생각하고, 이야기 계속하죠. 저는 이 가입서에 인장을 찍어서 왔습니다. 비록 전 협회장이지만 유용오 전 협회장님의 직인도 찍혀 있고요. 저 한지혁, 저를 위해 협회장을 탄핵해 주신 여러분의 성원에 감동받아 정식으로 협회에 가입하겠습니다."

그러자 환호하는 협회원들.

"와!"

그 모습을 본 유용오가 악을 지르며 외쳤다.

"이 탄핵은 무효라고! 제대로 된 절차도 안 밟······!"

그런데 그때 말을 하던 유용오가 갑자기 핸드폰을 들고 확인하더니 시뻘게진 얼굴로 조용히 자리에 착석하는 게 아닌가.

'오호?'

얼렁뚱땅 강제로 탄핵당한 이런 굴욕스러운 상황에서 핸드폰 잠깐 확인하고는 그냥 자리에 앉아 침묵하기를 선택하다니.

'뭔가 지령을 받았구나.'

스켈레톤을 빌려준다니 일단 상황을 보자며 앉아 있으라 한 것 아닐까?

그게 아니라면 저렇게 얌전히 침묵할 리가 없지.

나는 새빨개진 얼굴로 땅바닥만 노려보고 있는 유용오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일단 자기들에게 유리한지 어쩐지 상황 파악 먼저 하겠다? 그러데 미안해서 어떡하지, 기대처럼 움직여 줄 생각이 없는데.'

나는 가입서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아무튼 가입도 했겠다, 이제 제가 약속을 지켜야 할 차례겠죠? 스켈레톤 빌려드리겠습니다."

"오오!"

"드디어!"

나는 기대감에 부푼 협회원들을 보며 말했다.

"물론 그냥 빌려드릴 수는 없습니다. 저도 사업하는 사람인데, 아무리 같은 협회라지만 공짜로 해 드릴 수는 없잖아요?"

협회와 한국 신발 산업을 완전히 장악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손해를 볼 수는 없잖아?

세론의 넘쳐 나는 노동력과 한때 잘나갔지만 가격경쟁력에 밀려 폭락한 기술과 인맥을 가지고 있는 영세 업체들.

이걸 잘 버무리는 거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조건은 간단합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걸 빌려주는 거죠."

*

"서로 필요한 걸 빌려?"

이들은 가격경쟁력에서 밀리는 현실을 타파하기 위해 인맥과 기술력으로 여태 버텨 온 사람들이다.

이들에게 부족한 건 저렴한 노동력.

"스켈레톤? 빌려드릴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착각하고 계시는 게, 스켈레톤은 일반 노동자들과는 많이 다릅니다. 300개가 넘는 회사에 스켈레톤을 전부 개별 배치 해서 그 많은 신발 종류를 전부 그때그때 조율한다? 그게 과연 가능할까요?"

사실 못 할 건 없다.

그러라고 있는 게 프로그래머니까.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되지.

이들을 나에게 완전히 종속시키고 절대 을이 되어 내 눈치를 볼 수밖에 없도록 만들려면 이들이 자유자재로 스켈레톤을 다루게 두어서는 안 된다.

나는 협회원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스켈레톤을 노동자라기보단 반자율 기계 정도로 인식하시는 편이 더 편할 겁니다. 그리고 이런 기계는 한 장소에 모여 있을 때 더욱 빛을 발하는 법이죠, 정비든 아니면 뭐든 간에. 즉, 현실적으로 여러분들 공장 전부에 스켈레톤을 제공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말입니다."

내 말에 수군거리기 시작한 협회원들.

빌려준다더니 갑자기 딴소리를 하니 당황했겠지.

"그래서 역으로 제안합니다. 스켈레톤을 직접 빌려드린다는 건 말이 안 되니 그냥 스켈레톤의 노동력을 여러분에게 제공해 드리겠습니다."

한 협회원이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노동력을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가 잘 안 되는데요."

"간단하게 말해서, 여러분이 오더를 따 오면 저희가 만들어서 여러분에게 납품해 드리겠다는 겁니다."

"예? 아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나는 반발하려는 협회원을 보며 말했다.

"대신 저희는 마진으로 일반 신발 기준 딱 1,500원만 받겠습니다. 여러분이 저희에게 주문하여 만든 신발에 마진으로 만 원을 붙이든 십만 원을 붙이든 일절 상관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이들은 인맥과 기술이 있다.

그리고 나에겐 노동력이 있지.

이들이 그간 쌓아 온 인맥을 이용해 영업을 해 오면 나는 그들의 기술력과 내 노동력을 이용해 신발을 만들어 주는 거다.

"여러분 공장에서 직접 신발을 만들 때 인건비로 얼마나 소모되십니까? 만들기 쉬운 것도 최소 3,500원에서 4천 원은 들 겁니다. 그렇죠? 거기에 공장 마진을 더하면 뭐, 5천도 우습고. 하지만 저희에게 주문하면 천 원에 만들어 준다는 겁니다. 이 가격이면 중국에 직접 주문한 것보다도 훨씬 싸죠."

물론 이것만 놓고 보면 궤변에 불과하다.

1,500원이면 내가 메이커에게 받는 마진과 똑같으니까.

즉, 협회원으로서 얻을 메리트가 아무것도 없다는 말.

아니나 다를까 협회원들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그게 그냥 세론에 주문해서 만드는 거랑 뭐가 달라?"

"그러니까."

"이게 빌려주는 거라고? 기껏 협회장 탄핵까지 찬성했는데?"

너무나도 당연한 협회원들의 반응.

하지만 상관없다.

여기에 딱 한 가지 조건만 더 추가되면 이 제안은 이들에게 그야말로 천금과도 같은 기회가 될 테니까.

나는 그런 협회원들을 보고 씨익 웃으며 말했다.

"대신 이것 하나는 저희 세론에서 확실하게 보장하겠습니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저희 세론은 국내 내수용 신발은 일절 만들지 않고 수출용만 만들고 있죠."

돈이 되는 주문이라면 모조리 받아먹는 세론이 유일하게 진출하지 않은 분야.

바로 한국의 내수 시장이었다.

일반인들은 신발 하면 메이커만 떠올리지만, 비메이커 시장이 차지하는 규모도 절대 무시할 수준은 아니었다.

장화나 안전화 그리고 각종 패션 신발이나 인터넷 쇼핑몰 등, 이런 비메이커 시장이 차지하는 비중은 거의 절반 수준으로, 한국 신발 내수 시장이 1조에 가깝다는 걸 생각해 보면 결코 작은 규모가 아니었다.

문제는 이런 내수 시장조차도 중국산과 동남아산 일색이라는 거다.

비율상으로 따지면 거의 9 대 1.

당연히 여기서 9가 중국과 동남아산이고 1이 여기 있는 300개의 회사들이다.

그런데 여기서 내가 오직 이들에게만 스켈레톤의 저렴한 노동력을 제공한다면?

그리고 빼앗긴 9를 되찾아온다면?

산술적으로 이들은 사업 규모를 지금보다 10배로 키울 수 있게 된다는 말.

"앞으로 저희 세론은 내수용 신발에 한해선 오직 신발 협회 협회원들의 주문만 받겠습니다. 당연히 저희가 직접 진출할 생각도 없고요."

그러자 실망하던 협회원들의 귀가 쫑긋 세워진다.

"내수용을··· 협회원들에게만 만들어 주겠다고?"

그렇지?

느낌 오지?

"저희는 오직 주문대로 만들어 줄 뿐, 그걸로 만들어 낸 부가가치는 전부 여러분 몫이 되는 겁니다. 내수 시장, 언제까지 중국산에 빼앗긴 채로 앉아만 있을 수는 없지 않나요? 세론이 도와드리겠습니다."

"···나쁘지 않은데?"

"그렇지 않아도 조만간 유영 그룹에서 안전화 입찰이 있는데, 한번 넣어 볼까?"

"유영 그룹?"

"원래는 우리가 납품했었는데, 10년 전부터 중국산이 계속 입찰을 따고 있거든. 그런데 저 가격이라면 내가 더 싸게 납품할 수 있단 말이지? 그쪽 입찰 담당자가 내 친구라서 가격만 맞춰 주면 따낼 수 있을 텐데."

그래.

그거야.

그렇게 움직이라고.

만드는 건 나한테 맡기고 영업에 집중해.

그렇게 완전히 모든 생산을 세론에 의지하는 거다.

더 이상 세론이 없으면 신발 사업을 하지 못할 정도로.

그때 한 협회원이 말했다.

"그나저나, 이런 식이면 직원을 둘··· 아니, 애초에 공장을 운영할 필요가 없잖아."

"그렇네?"

좋아.

원하던 말이 나왔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한 가지 좋은 지적이 나왔네요. 직원과 공장, 제 말대로라면 여러분은 더 이상 돈 들어가는 공장과 직원을 데리고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무슨 수를 써도 세론보다 싸게 만들 방법이 없을 테니까."

나는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상생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습니까? 게다가 아무리 세론이라 해도 기존의 일에 더해 수천 종사자가 담당하던 일까지 단번에 모두 커버하기에는 불가능합니다."

게다가 그렇게 전부 실직되면 나 때문에 일자리 잃었다고 난리 칠 거잖아.

그러니 이들이 생산직 노동자를 유지해야만 하는 이유를 만들어 준다.

"그래서 제가 생각해 온 게 있습니다. 바로 생산직과 스켈레톤 연동제.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한 번에 빌릴 수 있는 스켈레톤의 수를 보유하고 있는 공장의 생산직 직원 수와 연동하도록 하는 겁니다. 3배까지 빌려준다 가정할 경우 생산직 직원이 5명이면 한 번에 최대 15개까지만 스켈레톤을 배정 받을 수 있는 거죠."

그러자 한 협회원이 말했다.

"스켈레톤 빌리려면 억지로 생산직을 유지해야 한다고요?"

"예."

"인건비 때문에 스켈레톤을 빌리려는 건데 스켈레톤을 빌리려면 공장과 직원을 유지하라니··· 이건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부담이 될 수밖에 없죠. 하지만 그 고난의 세월을 버텨 온 여러분에게도 부담인데, 신규 사업자는 어떨까요?"

"신규 사업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돈이 되면 사람은 몰리는 법입니다. 내수 시장을 빼앗아 오고 본격적으로 여러분이 돈을 벌기 시작하면 이 바닥에 눈독 들이는 사람은 무조건 나타납니다. 그런데 여기서 세론이 오직 협회원에게만 신발을 만들어 주고 협회원이 되기 위한 조건으로 제대로 된 공장과 생산직 시스템을 요구한다면? 이것 자체가 일종의 진입 장벽이 되는 겁니다."

나는 느긋한 표정으로 협회원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세론에서 한국 내수용 신발을 납품 받고 싶으면 공장을 구하고 생산직 노동자까지 고용 유지 한 다음 협회에 가입해야 한다는 말인데···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일까요?"

내 말을 이해한 협회원들이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말했다.

"그러네. 그거 말 되네."

"우리야 돈은 안 돼도 그간 수주해 온 일감이랑 인맥이 있어 공장 굴리는 건 문제가 아니지만, 신규 사업자가 스켈레톤 빌리자고 공장 임대하고 생산직을 고용하는 게 어디 쉬운 일이야? 그게 그렇게 간단했으면 그 많은 신발 회사들이 망했을 리가 없잖아."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습니다. 그동안 여러분 고생하셨잖습니까? 그러니 벽 딱 치고 남아 있는 우리 협회원들끼리만 국내 내수 신발 시장을 나눠 먹자는 소립니다. 공장과 직원으로 협회 가입이란 벽을 둘러 신규 사업자는 전부 쳐 내고 딱! 우리끼리만."

협회가 너무 거대해져도 통제하기 버거워질 수 있다.

그러니 딱 현재 300여 개의 회사만 유지한 채 이들에게 한국 내수 시장이란 애초부터 고려조차 하지 않았던 사탕을 물려 주고 이들의 절대 갑이 되는 거다.

세론 입장에서도 좋은 게, 포기했던 한국 내수 시장용을 만들 수 있으니 돈도 벌고 동시에 이들이 스켈레톤을 운용하면 이들의 기술도 자연스레 세론에 흡수되니, 그야말로 완벽하다.

나는 손으로 사람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러분, 이제 우리는 가족이 되는 겁니다. 서로가 서로를 지켜 주는 가족. 저는 가족의 정의가 이익을 공유하는 사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식이 부모의 도움을 받고 용돈을 받는 게 너무나도 당연한 것처럼. 그런데 갑자기 근처 양아치가 자식에게 준 용돈의 절반을 빼앗아 가려 하면 가만히 두고 보실 겁니까?"

내 말을 완전히 이해한 협회원들이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절대 안 되죠!"

"때려 죽여야지!"

나는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습니다. 절대 가만둬서는 안 되죠.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우리가 가족이랑 다를 게 뭐가 있습니까? 서로가 서로의 이득을 지켜 주는 사이. 가족들끼리 가끔 싸우기도 하지만, 가족이 아닌 다른 존재가 싸움을 걸어오면 함께 똘똘 뭉쳐 물리치는 가족. 안 그렇습니까?"

"맞습니다!

흐름은 완벽하게 넘어왔다.

나는 주먹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여러분, 함께합시다! 중국에게 빼앗긴 시장을 되찾아오는 겁니다! 그 누구도 우리의 상생을 깰 수 없다는 걸 확실하게 보여 주는 겁니다!"

27화

"그래. 되찾아오는 거야!"

"우리끼리 똘똘 뭉치면 나머지 경쟁 상대라 해 봐야 중국산, 동남아산 떼 오는 무역상들인데, 우리 상대가 되겠어?"

스켈레톤의 압도적인 가성비에 더해 한국으로 들여올 때의 물류비를 생각하면 그간 가격을 무기로 한국 내수를 점령해 온 중국산 신발은 세론산 신발의 상대가 아니다.

"이건 무조건 된다."

"그동안 당했던 걸 생각하면 진짜······."

기대감에 부풀어 이런저런 대화를 하고 있는 협회원들.

하지만 유일하게 똥 씹은 표정으로 앉아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유용오와 스켈레톤 대여 소식을 듣고 참석한 3대 신발 회사의 임원들.

그때 유용오가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우선 한 대표님 말씀 잘 들었습니다. 빼앗긴 내수 시장을 우리 손으로 찾아올 소중한 기회를 주신 점, 협회장으로서 감사드립니다."

아직도 탄핵은 인정 못 하겠다?

뭐, 나야 상관없지만.

"그나저나 내수 시장만 줄곧 강조하시던데, 그럼 수출 쪽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나는 그 모습을 보고 피식 웃으며 생각했다.

'역시 저 3개 회사가 뒷배였나.'

3개 회사 대리인들의 표정이 안 좋은 건 너무나도 당연했다.

내가 내건 조건은 어디까지나 국내 한정으로 여기 있는 영세 업체들에게나 필요한 거지, 해외에 공장을 두고 OEM 수출 사업을 하는 3개 회사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협회장이 저렇게 나서는 건 말이 안 된다.

왜냐하면 협회장 역시도 다른 협회원들과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작은 영세 공장을 운영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즉, 탄핵 쇼가 기분 나쁠 수는 있어도 협회장 역시 두 손 들고 환영할 만한 제안이라는 거다.

그런데 본인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수출을 언급한다?

'당황했다는 거지.'

갑작스러운 협회장 탄핵으로 정신없는 와중에 자기들이 생각한 시나리오와 정반대로 흘러가니 급한 마음에 저런 빈틈을 드러낸 협회장과 3대 제조사.

"어차피 한국 신발 수출길 막힌 건 오래되지 않았나요?"

"전부 그런 건 아닙니다. 협회 회사들 중엔 수출 중심으로 사업을 하는 회사도 분명 존재······."

나는 유용오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아. 그, 공장 해외에 있는 회사들? 그것까지는 제 알 바 아닌데?"

"예?!"

나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아까 말한 스켈레톤 연동제는 국내 공장 그리고 국내 고용 직원에 한해서만 적용되는 겁니다. 해외 공장과 해외 노동자는 노 카운트란 말이죠."

아무려면 나 엿 먹이려고 든 너희한테 좋은 일을 할 리가 없잖아?

"그리고 수출 제품은 제가 직접 수주해도 되는데 굳이 다른 공장 손을 빌릴 필요가 있나요? 세론이야말로 100퍼센트 수출만 하는 회사잖아요. 그런데 해외 공장 사정까지 봐줘 가며 노동력을 빌려준다? 그건 상생이 아니라 내 살 깎아 먹기인데 내가 왜? 막말로 메이커들처럼 나한테 물량 줄 것 아니잖아요?"

유용오가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

"고, 공장이 해외에 있는 건 맞지만 본사는 한국······."

"아아."

나는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어떻게 모든 사람 입맛을 다 맞춥니까. 여러분!"

내 말에 협회원들이 모두 나를 바라본다.

"제 조건 만족하십니까?"

그러자 협회원들이 환호하며 외쳤다.

"물론입니다!"

"대만족입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대부분 만족하셨다네. 그럼 된 것 아닌가? 아니면 뭐, 다른 꿍꿍이라도 있으셔서 그러나?"

유용오가 이를 갈며 말했다.

"한지혁 대표······."

나는 유용오를 무시하고 협회원들을 향해 외쳤다.

"자! 오늘 용건은 일단 이걸로 끝! 빨리빨리 움직이세요! 이제부터 한국은 여러분에게 기회의 땅입니다!"

*

유영 그룹 김 과장이 안전화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거 작년에 입찰했던 거랑 똑같은 것 아니야?"

그러자 신발 공장을 운영하는 김 과장의 동창 윤 사장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맞아. 너도 인정했잖아? 품질은 좋다고."

"그래. 그랬지."

김 과장이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하아.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윗분들은 품질에 별로 관심 없어. 애초에 작업화를 입찰해서 사는 이유가 정말 근로자들 안전 때문에 그런 거라 생각해?"

처음 들어 보는 솔직한 말에 윤 사장이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야?"

"순진하긴. 그게 아니라 정부에서 하도 안전 가지고 태클 거니까 우리는 이렇게 근로자들 안전에 신경 씁니다, 하고 보여 주기 위해서 사는 거라고. 그러니까 KCS 안전 인증 받은 안전화면 뭐가 됐든 상관없다는 말이야. 그럼 남은 게 뭐겠어? 가격이야, 가격."

"가격······."

"너랑 나랑 하루 이틀 친구냐? 나도 어지간하면 너네 회사 것으로 하고 싶지. 근데 가격 차이가 한두 푼이 아니잖아. 작년에 중국산 입찰 가격이 한 켤레에 5만 원이었어. 근데 너, 입찰가 얼마였지?"

윤 사장이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7만이 넘었지······."

"맞아. 한 번에 5천 켤레씩 입찰하는데, 그럼 가격 차이만 거의 1억이 넘어. 이 가격 차이면 내부감사에 무조건 걸린다고."

그러자 잠시 침묵하던 윤 사장이 말했다.

"걱정 마, 이번에는 달······."

하지만 그런 윤 사장의 말을 끊으며 김 과장이 말했다.

"그만하자. 매번 품질이 어떻고 안전화는 작업이 오래 걸려 인건비 빼면 6만 원대도 불가능하니 어쩌니. 내가 매번 들었던 말이야. 나도 그때마다 너한테 이런 소리 하는 게 미안하고 답답하다고. 내가 꼭 이렇게 독한 소리까지 하게 만들어야겠어?"

김 과장이 씁쓸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나도 이러고 싶지 않은데, 현실이 그래. 자본주의에서 가격경쟁력이 떨어지면 결국 도태되는 거야. 그건 너뿐만이 아니라 우리 회사도 마찬가지고. 우리 회사 계속해서 해외 법인 늘리고 있는 것 알지? 그게 다 인건비 때문이라고."

그러자 윤 사장이 다급히 말했다.

"아니, 잠깐 내 말 마저 들으······."

"그만하자고! 나도 너한테 이런 말 하는 게 미안하다니까?"

"야, 이 새끼야!"

윤 사장이 큰소리로 말했다.

"사람 말 끝까지 들으라고! 지 멋대로 말 끊고 있어."

"어, 어?"

"작년 5만이라고? 내가 그 가격 맞춰 주면 되는 거지?"

"···뭐?"

김 과장이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맞춰 준다고?"

"그래, 맞춰 줄게. 아니면 그보다 천 원 더 낮출까?"

그 가격에는 안 된다며 앓는 소리만 하던 윤 사장의 갑작스러운 딜.

늘 거절만 하던 김 과장은 그런 윤 사장의 말에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야! 그럼 무조건 너네 걸로 하지!"

"그래?"

"당연하지! 같은 값이면 당연히 한국산 아니냐? 아, 이 새끼. 할 수 있었으면 진작에 그렇게 하지!"

윤 사장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앞으로도 계속 이 정도 가격대 유지할 생각이니까 각오해. 너네 유영 그룹 안전화는 이제 전부 내 거다."

"근데 뭐냐? 갑자기 왜 이렇게 태도가 변한 거야? 아니, 그보다 진짜 그 가격에 된다고? 그게 말이 돼?"

윤 사장이 히죽히죽 웃으며 말했다.

"그런 게 있어. 든든한 우리 편이 생겼거든. 야, 그나저나 다른 입찰 건 뭐 없냐? 내가 너 용돈 좀 줄 수 있는데."

"비슷한 가격대로?"

"비슷한 가격대로."

김 과장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래? 기다려 봐. 하청업체랑 여기저기 한번 알아볼게."

*

궁지에 몰렸던 한국 신발 공장들은 마치 그간의 울분을 풀어내기라도 하듯 쌓아 온 인맥을 총동원하여 빼앗겼던 내수 시장을 계속해서 되찾아온다.

"여기 앞쪽에 철판을 먼저 덧대는 겁니다."

그런 그들의 반격의 기반은 바로 세론의 스켈레톤들.

그리고 그런 그들의 노력 덕분에 세론의 주문량은 더 폭주했다.

당연하게도 주문이 늘어난 만큼 나는 더욱 빠르게 스켈레톤을 늘릴 수 있었고.

게다가.

"자, 잠시만요! 이건 일반 신발이랑 달라서 그렇게 하면 안 된다니까요!"

한 사장의 말에 프로그래머가 땀을 뻘뻘 흘리며 말했다.

"이런 특수 신발은 처음이라서요."

"특수 신발이 수요는 적어도 마진은 좋··· 아니,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일단 여기는 삼중구조로······."

그간 경쟁을 위해 쌓아 올린 그들의 기술이 고스란히 스켈레톤을 통해 세론에 주입된다.

나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이거지."

심정지되어 가는 한국 신발 시장을 살려 줌과 동시에 나는 기술도 얻고 돈도 벌고.

심지어 직원까지 고용 유지를 하니 이보다 더 완벽한 상생이 어디 있나.

"대표님, 스켈레톤이 포화 상태입니다."

김덕배의 말에 나는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벌써요?"

500 추가한 지 4일밖에 안 됐는데?

"내수 물량이 갑자기 늘어나서······. 게다가 하도 품종이 많아 프로그래머들 일손도 점점 부족합니다."

"그럼 늘리지 뭐. 스켈레톤은 제가 알아서 할 테니 프로그래머나 더 많이 고용해요."

어차피 세론은 계속 성장한다.

그럼 망설일 게 뭐 있나.

부족해? 그럼 채우면 그만.

나는 흡족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제 유용오랑 그놈들 어떻게 나올까요?"

앞세웠던 협회는 완전히 내 손아귀에 떨어져 버리다 못해 거의 종속 수준이 되었고, 아무런 결실도 얻지 못한 상황.

김덕배도 즐거운 듯 입술을 꿈틀거리며 말했다.

"그놈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애초에 협회를 앞세웠던 것도 마땅히 대처할 방법이 없어서 그런 건데요."

"그렇죠?"

그럼 이제 마무리를 할 시간이다.

"그런데 김 사장님, 솔직히 그놈들 한국 회사라 부르는 게 맞을까요? 우리 협회원들은 전부 국내 직원 고용 유지 하고 나도 스켈레톤으로 상부상조하고 있는데, 그놈들은 한국에 있던 기반 다 버리고 외국으로 간 거잖아요."

물론 그것 자체로 뭐라 할 생각은 없다.

저렴한 인건비를 통해 저렴한 물건을 생산해서 마진을 극대화하고 싶어 하는 건 기업이라면 당연한 일이니까.

하지만 그로 인해 나를 귀찮게 한 건 봐줄 수 없단 말이지.

차라리 아예 처음부터 사정이 이러저러하니 좀 도와주십시오 하며 부탁했으면 이야기는 달라졌을지 모른다.

나는 좋은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정말 많이 노력하고 있으니까.

스켈레톤은 안 빌려줘도 3개 회사가 하청받은 신발을 세론이 또다시 하청받아 만드는 하청의 하청 구조로 만드는 것도 그들과 상생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지.

메이커에게 직접 수주를 받든 아니면 하청의 하청을 받든 나야 똑같이 마진 1,500원만 받을 수 있다면 아무래도 상관없으니까.

그렇게 됐다면 아마 3개 회사는 지금보다 훨씬 상황도 좋아지고, 어쩌면 세론의 협력사로서 해외 메이커 영업을 책임지는 선봉이 됐을지도 모를 일.

"우리처럼 상생하며 대통합을 이룬 신발 협회엔 어울리지 않는 회사인 것 같은데. 한국 신발 협회잖아요. 다른 나라가 아니고 한국."

하지만 놈들은 세론과 아무런 타협도 안 될 거라 스스로 단정 짓고 협회를 앞세워 나를 압박하려 했다.

당연히 나를 가지고 꿍꿍이를 부린 시점에서 하청의 하청 같은 가정은 전부 의미가 없어지지.

아.

물론 3개 회사 전부인지 아니면 그중 하나인지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래도 운 좋은 줄 알아.

세론이었다면 절대 이 정도로 안 넘어갔을 테니까.

그러니 그냥 그렇게 사업하다가 천천히 세론에게 모든 걸 빼앗기며 무너지라고.

어차피 너희가 수주한 거, 세론이 성장하면 자연스럽게 우리 것이 될 거니까.

김덕배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해했습니다. 조만간 총회를 열어서 정식으로 안건 올리겠습니다."

"굿잡."

이제 3개 회사만 뽑아내면 한국 신발 산업과 협회는 완전히 내 것이 된다.

그 누구도 나에게 손가락질할 수 없고 내 눈치 보기 바쁜, 그야말로 완벽한 종속.

나는 느긋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 할 일 많잖아요. 그러니 깔끔하게 빨리 치우고 할 일이나 하자고요."

28화

김덕배가 정식으로 요청하여 열린 신발 협회 총회.

당연하게도 첫 안건은 협회장에 대한 정식 탄핵이었다.

김덕배가 협회원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유용오 협회장에 대한 탄핵, 찬성하십니까?"

그러자 모든 협회원이 거리낌 없이 손을 들어 올린다.

김덕배는 사실상 내 대리인이나 다름없기에 김덕배의 말은 곧 내 뜻이기도 했으니, 내 의지를 거스를 협회원이 있을 리 없지.

"젠장······."

정식으로 총회를 열어 탄핵된 유용오.

이미 모든 대세가 이쪽으로 넘어온 상황이기에 예정된 결과나 다름없었다.

"그럼 정식으로 유용오 협회장의 탄핵이 가결되었습니다. 오늘부로 유용오 전 협회장은 일반 협회원으로 강등됩니다."

일단 회칙에 따라 협회원으로 강등 된 유용오.

물론 모든 정리가 끝나면 협회 내부 문건을 탈탈 털어 비리를 찾아낸 다음 엮어서 쫓아낼 생각이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어거지를 부리면 탈퇴시킬 수는 있지만 명분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다르니까.

그때 김덕배가 계속해서 다음 안건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다음 안건은 협회원 자격에 대한 안건입니다. 우리는 한국 신발 협회입니다. 그리고 한지혁 대표님이 가입하시며 진정한 상생의 행보를 시작했죠. 그런데 본사만 한국에 있고 공장을 해외에 둔 기업도 과연 한국 기업이 맞는지 의문이 들더군요."

김덕배의 말을 이해한 협회원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만경 실업이랑 나머지 두 회사 말하는 거지?"

"그 세 회사밖에 더 있어?"

김덕배가 그런 협회원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서 정식으로 안건을 올립니다. 협회원의 자격을 오직 한국에 생산 공장이 있는 회사만으로 한정하는 겁니다."

사실상 3개 회사를 내치자는 김덕배의 말.

그러자 협회장을 탄핵할 때는 거침없었던 협회원들이 주저하기 시작한다.

"나 만경에서 하청 받는 물량이 은근히 큰데······."

"나도."

나름 한국 신발업계의 큰 형님 노릇을 하며 협회를 좌지우지해 온 3개 회사.

게다가 비록 지금은 해외에 공장이 있지만 그들도 시작은 한국에서 했기에 그간 그들이 쌓아 온 인맥과 거래는 협회원들 입장에서 결코 무시할 만한 수준이 아니겠지.

상대가 세론만 아니라면 말이다.

아무 말 없이 자리에 앉아 있던 나는 조용히 한마디를 던졌다.

"선택은 자유지만 결과는 본인 몫입니다. 모두 성인이시니 제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는 이해하시겠죠?"

다시금 김덕배의 안건이 내 의지임을 상기시킨다.

이제는 선택해야지.

그러라고 일부러 시간 주고 내수 시장 맛을 보여 준 것 아니야.

세론 덕분에 가격경쟁력에 밀려 빼앗겼던 파이를 빠른 속도로 먹어 치우고 있는 협회원들.

3개 회사가 내려 주는 콩고물로 만족할 것이냐, 아니면 세론과 손을 잡고 공격적으로 회사를 확장해 나갈 것인가.

물론 답은 이미 정해져 있지만.

그때 유용오가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한 가지 질문해도 되겠습니까."

"하세요."

"만약 해외에 공장을 둔 회사가 공장을 한국으로 이전하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오호.

탄핵된 와중에도 끝까지 바람잡이로서의 역할을 다하려 하는 유용오.

뒤로 받는 게 좀 많은가 봐?

아무튼.

"그럼 협회원 자격으로 충분하죠. 다만 그렇게 되면 다른 협회원분들이 많이 불편하시겠네요."

나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세론은 어디까지나 국내 내수 시장 물건만 만들어 주는데, 그 파이를 함께 뜯어먹을 강력한 경쟁자가 생기는 꼴이니."

그러자 협회원들이 굳은 표정으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3대 회사도 한국 내수 시장에 진출한다고?"

"···그건 아니지, 자금력 차원이 다른데."

벽 치고 우리끼리 나누어 먹자고 하는 상황인데 이 벽 안에 체급이 다른 맹수 세 마리가 들어오는 걸 반길 사람은 없지.

그러자 유용오가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그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예시를 든 겁니다! 예시를!"

분위기가 불리하게 돌아가니 협회원 자격이라도 어떻게든 유지할 생각으로 유용오를 통해 질문을 던진 것 같은데, 오히려 역효과다.

김덕배를 바라보자 김덕배가 고개를 끄덕이고 협회원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이번 안건에 대한 투표, 시작하겠습니다. 찬성하시는 분은 거수해 주십시오."

사람은 이기적인 동물이고 자기 이득에 조금이라도 해가 되는 걸 참지 못하는 법이니까.

3개 회사에 받아먹은 게 있어서 망설이던 협회원들이 3개 회사가 한국에 진출할지도 모른다는 말에 주저 없이 너도나도 손을 들어 올린다.

그렇게 순식간에 과반을 넘긴 찬성.

"그럼 이번 안건도 정식으로 통과되었습니다. 회원 자격이 없는 협회원은 자동으로 탈퇴 처리 됩니다."

이제 3개 회사를 내쳤고 협회는 완전히 내 수중에 떨어졌다.

그럼 마지막으로 확인 사살까지 해 볼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김 사장님."

"예?"

"대충 마무리된 것 같은데 마지막 안건 하나 더 처리하죠."

"마지막 안건이요?"

"협회장 자리가 공석인데 채워야 할 것 아닙니까."

나는 유용오에게 걸어가며 말했다.

"저는 김덕배 사장님을 협회장님으로 추천··· 아. 그러고 보니 회칙에 가입한 지 3년 이상 된 사람만 안건을 올릴 수 있다고 했지?"

나는 태연한 표정으로 협회원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누가 나 대신 안건 올려 주실 분?"

그러자 협회원들이 경쟁적으로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저 진부 신발 오진기! 김덕배 협회원의 협회장 선출을 안건으로 제안합니다!"

"저, 저도!"

나는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그럼 빠르게 표결도 하고 마무리하죠? 길게 끌 것 없잖아요?"

그렇게 내 말 한마디에 사전에 언질받지 못한 김덕배가 어어 하는 사이 순식간에 안건이 올라가고 표결까지 시작된다.

그렇게 표결을 하는 사이 유용오에게 다가가 말했다.

"유용오 씨."

"···예."

"누가 시킨 겁니까?"

그러자 유용오가 당황해하며 말했다.

"그, 그게 무슨 말이십니까? 시키다니요."

"시치미 떼시겠다?"

나는 옆에 있는 3개 회사 임원들을 힐끔 보며 말했다.

"저쪽 저 양반들 아닌가?"

임원들과 눈을 마주친 유용오가 말했다.

"아,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봐줄지도 모르잖아요?"

그러자 유용오가 당황한 표정으로 임원들을 곁눈질한다.

하여튼 연기는 참 못해요.

그때 임원 중 하나가 나에게 다가와 말했다.

"만경 실업의 김 상무입니다."

"아, 예."

"한 대표님, 서로 오해가 좀 있었던 것 같은데요. 잠깐 나가서 이야기라도······."

나는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이야기는 무슨 이야기요, 어차피 저번에 할 얘기는 다 했는데. 세론이 양보할 수 있는 건 딱 내수 시장까집니다. 그런데 그쪽은 아니잖아요? 아. 그래도 이런 건 가능하겠네."

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리 세론이 유일하게 약한 게 신소재 분야 아닙니까. 그래서 톱급 메이커랑은 아직 거래를 못 하고 있고. 그런데 그쪽 3개 회사는 톱급 메이커 물량 수주하고 있죠? 그럼 우리랑 서로 하청의 하청 하거나 협업하는 식으로 상부상조도 가능했겠네."

3개 회사가 신소재나 신소재 기술을 공급해 주는 대신 톱급 메이커 물량을 하청의 하청으로 받는 방식.

이렇게 되면 말 그대로 상부상조가 되겠지.

그러자 3개 회사 임원의 동공이 흔들린다.

가능성이 있어 보이니까.

"근데 뭐, 사실 신소재라고 해 봐야 결국 원단인데, 여차하면 톱 메이커 측에 연락해서 아예 새로운 걸 공동 개발 해도 되는 거라 꼭 도움이 필요한가 싶기도 하지만··· 그래도 도움을 받으면 빨리 진행될 것 아니에요? 그런 의미에서 가장 먼저 솔직히 말하는 회사는 제가 진지하게 고려해 볼지도 모릅니다?"

먼저 말하는 놈은 봐줄지도 모른다.

그러자 침묵하던 태흥 물산 임원이 말했다.

"저, 한 대표님? 잠깐 저희 둘만 긴밀하게 이야기를······."

그러자 만경 실업의 김 상무가 대경실색하며 말했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분명··· 큭!"

내 앞이라 얼버무리긴 했지만 대충 느낌이 온다.

만경이 주도하고 나머지 2개 회사가 동조하며 벌어진 일.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나중에 따로 이메일 보내 주세요. 뭘 또 얼마나 대단한 비밀 이야기라고."

신소재와 하청 이야기를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놈들을 흔들어 내막을 알아내기 위해 한 말일 뿐.

어차피 지금 세론은 내수 물량과 중견 메이커 물량만으로도 매번 포화 상태라고.

즉, 톱급 메이커 물량에 대한 간절함이 아직은 없단 말이지.

대충 내막도 알았겠다, 조용히 돌아가서 손이나 빨고 있으라고.

톱급 메이커는 세론이 커지면 자연히 우리 게 될 거니까.

그때 한 협회원이 외쳤다.

"이걸로 김덕배 협회장님이 최종 선출 되었습니다! 새로운 협회장님에게 박수!"

짝짝짝짝!

마침 김덕배가 협회장으로 선출되며 놈들이 좌지우지하던 협회도 완전히 내 것이 되었다.

3개 회사도 축출하고, 협회도 장악하여 내수 시장도 먹고.

완벽하네?

나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아무튼 돌아가서 잘들 생각해 보고 연락들 줘요. 허튼 생각들은 하지 마시고. 나 A급 각성자인 것 알죠? 나 의외로 갑자기 확 돌아 버리는 성격이니까 주의 좀 해 주세요."

*

김덕배를 협회장으로 올리며 한국 신발 협회를 완전히 장악해 버린 나.

고용도 유지했고 모든 신발 공장이 내 편이니, 이제 그 신발업계에 한해선 그 누구도 나에게 반발하지 못할 거다.

김덕배가 골치 아프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언질이라도 좀 주시지."

"어차피 김 사장님 말고 제가 믿고 맡길 사람도 없잖아요?"

"그렇지 않아도 회사 일 때문에 바쁜데 협회장 일을 어떻게 합니까."

"그냥 부협회장 하나 잘 골라서 일 전부 떠넘겨요. 누가 뭐라 하겠어요."

그 말에 김덕배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어차피 협회를 차지한 김에 언론 플레이를 좀 할까 하는데요."

"언론 플레이?"

"집에서 쫓아낸 똥개가 짖으면 시끄럽지 않습니까. 그러니 미리미리 언론에 이번 협회 소식을 알리는 겁니다. 각성자와 사양산업의 상생 그리고 부활. 기사로 쓰기 참 좋은 주제니까요."

하청과 협업이란 의미 없는 떡밥을 던지자 3개 회사는 각자 자신들이 얼마나 억울한지를 토로하며 계속 연락을 하고 있었다.

계획이 어그러진 와중에도 가능성이 보이니 어떻게든 해 보려 발악을 하는 3개 회사들.

그렇게 떡밥에 낚여 우왕좌왕하는 사이 언론 플레이를 통해 이번 일을 일종의 미담화를 해 차후 있을지 모를 논란에 미리 종지부를 찍어 두면 협회는 더욱더 공고해지겠지.

"좋네요. 그렇게 하세요."

이런 걸 보면 김덕배도 의외로 머리가 참 빨리 굴러간단 말이지.

"알겠습니다."

"자. 그럼 집안 단속은 이 정도면 됐고······."

3개 회사가 발악을 하든 말든 이미 아무 의미 없다.

그럼 깔끔하게 머릿속에서 지우고 사업 확장 할 궁리나 해야지.

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 열심히 한번 벌어 봅시다."

*

사업은 그야말로 이렇게 잘돼도 되나 싶을 정도로 순항한다.

스켈레톤을 늘리면 금방 포화가 되고, 또 늘리면 또 포화가 되고.

그렇게 지금 세론이 보유한 모든 공장에서 일하고 있는 스켈레톤을 모두 더하면 5천에 이르렀다.

덕분에 내 수입도 몇 배나 폭증해 운반형과 사령마 사업을 더하면 한 달 순수익이 2백억에 육박하는 상황.

하지만 언데드 군단 재건이란 부가 목표가 생긴 이상 이 정도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어디 돈 될 만한 것 없나."

매크로야 김한울 덕에 전투 데이터가 차곡차곡 쌓이고 있으니, 최대한 빨리 돈을 모으는 데 집중해야지.

"흠."

신발이나 옷 같은 경공업 말고 사람들 반감 안 사고 할 만한 사업 없나?

"농사? 아니야. 다들 영세 농가인데 그거 푼돈씩 받아서 언제 사업을 키워."

외국처럼 기업형 농장이 많다면 모르겠는데, 한국은 다들 개인으로 농사를 짓다 보니 스켈레톤을 동시에 대량 투입 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건설업이 돈은 될 텐데······."

솔직히 스켈레톤으로 돈을 버는 가장 쉬운 방법은 건설업이다.

물론 난잡한 건설 현장 특성상 알고리즘 제작에 제법 심혈을 기울여야 하긴 하지만, 그래도 변수의 끝판왕인 전장의 환경보다는 압도적으로 편하니까.

아무튼 그렇게 일단 자리만 잡히면 인건비도 높고 순이익도 높으니 가장 탐나는 시장인 게 사실이지만······.

나는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외국인 노동자 비율이 높다지만, 그래도 여전히 한국 노동자가 많잖아."

그 많은 건설 노동자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지.

당연히 건설 회사들도 지랄발광을 할 거고.

이건 나중에.

정말 나중에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내 언데드 군단을 못 막겠다는 판단이 섰을 때나 해야 할 플랜 B의 업종이다.

"좋은 것 없나? 이번처럼 한국에서 사양된 신발 같은 거."

검색이나 한번 해 볼까?

나는 컴퓨터로 한국 사양산업을 검색해 보았다.

"보자··· 섬유, 신발."

대충 여기까지는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사업과 일맥상통한다.

옷이나 신발 같은 섬유 봉제 산업.

사람의 손이 많이 가기에 인건비의 비중이 절대적으로 높은 제품들.

그중엔 축구공 같은 다른 것들도 있지만··· 별로 내키지 않는다.

솔직히 축구공 팔아 봐야 얼마나 벌겠어.

그렇게 한국의 사양산업 목록을 쭉 보던 나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한 산업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뜨며 말했다.

"어? 이게 사양산업이라고?"

그것은 바로 전자 제품.

나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 나라 전자 제품 강국 아니었어?"

*

우리나라 1등 대기업부터가 전자 쪽이 강세일 만큼 우리나라가 전자 제품 강국인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사양산업으로서의 전자 제품은 조금 그 궤를 달리했다.

"그러네. 생각해 보니 다 중국산이잖아."

TV, 냉장고 등 대형 가전이나 컴퓨터 같은 비싼 전자 제품은 분명 우리나라가 강세다.

세계적으로도 알아주고.

하지만 인터넷에서 말한 사양산업으로서의 전자 제품은 그런 고부가가치 전자 제품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것들을 의미하는 거였다.

저가형 청소기나, 하물며 건전지로 작동되는 장난감 하나까지, 전기로 작동되는 모든 것이 전자 제품이니까.

그리고 이런 전자 제품은 중국산이 아닌 게 없는 수준.

하다 하다 1등 대기업에서 출시한 핸드폰에 동봉되어 있는 충전기조차도 중국산이나 동남아산이니 더 말해서 뭐 하나.

물론 대기업 충전기는 중국 현지 자사 공장에서 만든 거겠지만, 아무튼.

"이야······."

이거 노다지네?

장난감, 면도기, 믹서기 등등 잠깐만 생각해 봤는데도 상품들의 종류가 무궁무진하다.

그리고 이런 생활형 전자 제품을 살 때 사람들이 보는 것은 역시나 가격.

수백만 원짜리 TV를 살 때야 성능도 중요한 고려 사항 중 하나지만, 이런 몇만 원짜리 생활형 가전제품은 오직 가격에서 모든 게 결정된다.

어차피 싸구려 전자 제품에 대단한 품질을 기대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그리고 이 가격의 핵심은 바로 인건비.

신발보다는 덜하지만 이것 역시도 저부가가치 상품이고, 조립과 제작에는 사람의 노동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니까.

중국산 전자 제품이 사방 천지에 널려 있는 것이 바로 그 증거다.

"괜찮은데?"

브랜드 가치를 인정받은 소수의 기업을 제외하면 전멸해 버린 한국 소형 가전 시장.

이거야말로 내가 찾던 완벽한 사양산업이다.

나는 눈을 빛내며 말했다.

"전자 제품, 이걸로 가자."

29화

전자 제품 진출을 결심하고 본격적으로 무엇을 만들지 고민하기 시작한 나.

그런데 생각보다 이게 쉽지 않다.

"···이거 그냥 맨땅에 헤딩해서 될 일이 아니구나."

원단만 있으면 뚝딱 재단해서 만들면 되는 신발과 다르게 제품에 맞는 플라스틱 성형도 필요하고, 기판 설계 등 의외로 자잘한 걸림돌이 많다.

그래서 김덕배의 공장을 인수했던 것처럼 인수할 만한 소형 가전 회사가 있나 살펴봤는데······.

"진짜 어떻게 이렇게 다 죽었냐."

그나마 메이드 인 코리아.

그리고 주문 제작을 통한 맞춤 제작을 앞세워 어떻게든 사업을 이어 나가고 있던 신발 공장들과 다르게 한국의 소형 가전제품은 만드는 자체 브랜드와 인지도를 가진 중견 기업 이상급을 제외하면 싹 다 씨가 마른 상황.

그마저도 공장 대부분이 한국이 아닌 중국에 있으니 사실상 한국에 소형 가전 회사는 없는 거나 다름없었다.

"어떡하지?"

물론 크게 어려운 기술이 필요한 건 아니니 관련 직종 사람 몇 명 고용해서 연구하게 하면 그까짓 것 하나 못 만들겠냐마는 과연 그 정도로 어설프게 만든 물건이 아무리 저렴하다고 해도 시장에서 먹힐까?

그 잘나가는 대기업들도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여 만들어 낸 신제품에서 고질병이 발견되기 일쑤인데, 바탕 기술이 전무한 세론은 말할 것도 없지.

그래서 가장 간단한 인수를 고민했던 건데 마땅히 인수할 만한 회사가 없으니 당혹스러울 수밖에.

나는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중국이 처음에 어떻게 시작했더라?"

저가형 제품의 대명사이자 내 사업의 롤 모델 겸 경쟁자인 중국을 생각해 보자.

"저 품질의 싸구려 제품. 그리고··· 아!"

짝퉁.

중국은 짝퉁 제품을 찍어 내며 그걸 기반으로 기술을 쌓아 지금 오늘날의 위치에 이르렀다.

"그래. 꼭 오리지널만이 답은 아니지."

내가 무슨 세상에 둘도 없는 최고의 전자 제품을 만들려는 건 아니지 않나.

그저 성능은 다른 것과 비슷하지만 가격이 압도적으로 저렴한 걸 목표로 하는 것뿐.

그럼 우리가 어설프게 자체 개발 할 바에야 이미 검증된 다른 제품을 만들면 되는 것 아닌가.

그렇다고 해서 중국처럼 아무 제품이나 무단으로 다 가져다 베끼는 건 내 양심은 둘째 치고 한국에서조차 좋은 소리를 못 들을 게 뻔하고.

나는 사무실을 나가 한참 바쁘게 일하고 있는 김덕배를 부르며 말했다.

"김 회장님!"

그러자 김덕배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회장님이라니요."

"협회장님이시니까 회장님 맞잖아요."

"대표님··· 제발 그냥 원래대로 불러 주시면 안 됩니까?"

"하하."

장난은 이 정도만 하고.

"김 사장님, 이 근처에 천원숍이랑 대형 마트 있죠?"

"예. 뭐 필요한 것 있으십니까?"

"직원들 보내서 거기 있는 전자 제품 전부 싹 다 하나씩 사 오라고 하세요. 아! 인터넷에서 파는 전자 제품도 5만 원 이하로 괜찮아 보이는 거 골라서 주문하라 하시구요."

*

중국 심천시에 있는 인추 전자의 사장 왕진리.

인추 전자가 주력으로 생산하는 제품은 헤드셋으로, 한 해 수출액만 수백만 달러에 이르는 건실한 중소기업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한국 회사의 부장이라며 찾아온 한 남자.

"반갑습니다. 안 부장입니다."

"중국 말 잘하시네요?"

"예. 중국 유학 출신이라. 하하."

"아, 예. 그나저나 깜짝 놀랐습니다."

왕진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우리한테 라이선스를 팔아 달라니. 이런 요청은 처음이라서요."

유명 전자 제품의 라이선스를 거래하는 건 들어 봤어도 이런 중소기업의 헤드셋을, 그것도 최신형이 아닌 단종을 고려하고 있는 전 모델의 라이선스를 매입하려 하다니.

"그, 뭐라고 했죠? 회사 이름이?"

안 부장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SR 전자라고 합니다. 본사에서 이번에 새로 창립한 전자 회사지요."

"본사가 따로 있습니까?"

"세론이라고 하는데, 뭐 들어도 모르실 겁니다. 이쪽과는 전혀 관련 없는 업종의 회사라서."

어디서 들어 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회사 이름.

"아무튼 SR 전자는 한국에 공장을 세운, 완전히 새로 시작하는 회사다 보니 라인업이 워낙 부실합니다. 그래서 빠른 시장 안착을 위해 본사의 투자를 받아 라이선스를 사서 라인업을 강화하는 작업을 진행 중입니다."

라이선스를 사들이려는 합리적인 이유.

하지만 왕진리는 그 이유가 아닌 오직 한 단어에 어이없음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한국? 잠깐만. 그럼 설마 헤드셋을 한국에서 만들겠다는 겁니까?"

"맞습니다."

왕진리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걸 한국에서 생산해 가지고 단가가 맞겠습니까?"

"그거야 저는 모르죠, 사장님 생각이신데."

"나 참 이거 황당해서."

반도체처럼 거의 완벽한 자율 생산 라인을 구축하는 고부가가치 제품이 아닌 이상 전자 제품은 무조건 인건비에 의해 가격이 좌지우지되는 시장이었다.

그런데 가격과 상관없이 믿고 사는 유명 브랜드도 아닌 신생 업체가 한국에 공장을 세운다니.

"아무튼 저희 SR에서 요구하는 것은 제품 생산에 대한 권리와 완전한 기술 양도 그리고 해외 수출 권한 입니다."

"수출도 한다고요?"

물론 한국산 헤드셋이 팔리면 얼마나 팔리겠나 싶고, 또 단종을 앞둔 구형 모델이긴 하지만 그래도 자사에서 만들던 상품이 경쟁 상대로 나온다는 걸 반길 사람은 없었다.

왕진리가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굳이 경쟁 상대를 늘리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경쟁이 치열한데, 심지어 우리와 똑같은 제품을 만들······."

"70만 달러 일시불."

그 말에 왕진리가 흠칫하며 말했다.

"70만 달러?"

왕진리의 회사가 한 해 수백만 달러의 수출을 기록하고는 있지만 제조업 특성상 한 해 순수익은 고작해야 40만 달러가 안 되는 상황.

그런데 단종을 앞둔 모델 라이선스로 무려 2년어치에 가까운 순수익을 한 번에 준다고?

왕진리의 동공이 거세게 흔들렸다.

"거기에 현재 공장에서 구형 모델 제작에 사용하는 기계들도 전량 매입해서 한국으로 보낼 예정입니다. 그것도 일반 중고가의 1.5배를 드리죠."

심지어 단종으로 인해 처분해야 할 중고 기계까지 1.5배 가격으로 사 준다니.

"으음······."

"솔직히 이런 기회가 또 올까 싶은데. 어떠십니까?"

그러자 왕진리가 한참을 고민하더니 말했다.

"그래도 나름 디테일에 신경 써 가며 열심히 개발한 제품인데, 70만 달러는 조금······."

안 된다에서 갑자기 돈이 부족하다는 식으로 나오는 왕진리.

"100만 달러. 더 이상은 안 됩니다."

"쓰는 김에 조금만 더 쓰시죠?"

"너무 욕심 부리시면 그냥 다른 회사를 찾아갈 겁니다."

안 부장의 말에 왕진리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흠흠. 그 기종이 그래도 올해에만 2백만 달러어치나 수출 나갔는데, 아무리 단종 예정이라지만 겨우 100만 달러는 조금······."

그러자 안 부장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서로 의견이 맞지 않으니 어쩔 수 없군요. 다음에 좋은 기회가 또 생기면 찾아뵙겠습니다. 저는 그럼 이만······."

그러자 왕진리가 다급히 일어나며 말했다.

"아이고. 뭐 그리 성미가 급하십니까! 자자."

왕진리가 담배를 하나 꺼내 건네며 말했다.

"담배 하나 피우면서 천천히 이야기하시죠."

그러자 안 부장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는 담배를 안 피워서."

"그렇습니까? 아무튼 100만 달러라고 했죠?"

"예."

"한국에서만 생산하는 거고? 로고랑 모델명은?"

"당연히 한국에서만 생산하고, 로고는 당연히 자사 로고를 달고 모델명도 저희 자체 모델명을 쓸 겁니다. 원하시면 계약서에 명시해 드리죠."

왕진리는 생각했다.

'이거 완전 꽁돈인데. 신형보다 아주 약간 부족한 구형이긴 하지만 디자인도 완전 다르고, 어차피 우리가 무슨 충성 고객 데리고 장사하는 것도 아니잖아?'

솔직히 말이 좋아 구형과 신형이지, 둘은 비슷한 기능을 할 뿐 사실상 별개의 제품이나 다름없었다.

거기에다 충성 고객이 있어 무조건 인추 전자의 제품만 고집하는 사람이 있다면 구형이 신형의 판매를 잠식하겠지만, 애초에 인추 전자 같은 회사의 제품을 메이커 보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나.

그저 비슷한 가격대의 보급형 헤드셋을 쭉 나열하고 그중에서 가격과 디자인이 괜찮아 보이는 걸 고를 뿐.

즉, 구형을 SR에 넘겨도 인추 전자 입장에선 많고 많은 보급형 헤드셋 경쟁 라인업에 자사의 구형 헤드셋이 하나 추가될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라는 거였다.

심지어 한국에서만 만든다는 조건이 붙으니 가격경쟁력은 오히려 자사의 신형이 더 우월할 게 분명하니 더욱 좋다.

'그래. 어차피 단종할 거, 마지막 단물 쭉 빨고 그걸로 설비에 투자하는 쪽이 훨씬 이득이야.'

결국 결정을 내린 왕진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습니다. 계약하겠습니다."

그 말에 안 부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아. 그리고 헤드셋 만들 때 따로 다른 공장에서 납품 받는 것도 있으십니까?"

"아. 그 뭐냐. 다른 건 다 여기서 만드는데, 스피커는 근처 공장에서 납품 받고 있습니다."

그러자 안 부장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그 공장도 소개해 주실 수 있으실까요?"

*

중견 기업의 중국 법인 담당자였지만 명예퇴직당한 안 부장.

김덕배의 소개로 안 부장을 영입한 나는 안 부장을 새로 만든 SR 전자의 부장으로 앉힌 다음 인터넷과 마트 등에서 내가 마음에 든 제품을 고르면 그 제품 제조사로 찾아가 라이선스를 사 오는 일을 맡겼다.

그것도 신형의 출시로 구형이 되어 단종을 앞두고 있지만 실사용에 아무런 지장이 없으며 동시에 시장에서 검증이 된 제품들 위주로.

한마디로 시행착오와 개발 연구 등 새로운 제품 하나를 만들 때 필요한 시간을 돈으로 사들인 셈이었다.

"이거야말로 서로 윈윈이지."

나는 공장 인수 비용보다 저렴한 가격에 생산 품목을 확보해 좋고, 라이선스를 판 회사는 미리 돈 벌어서 좋고.

어차피 라이선스를 사들인 제품을 초저가에 대량으로 생산해서 무차별로 뿌리면 저가형 시장 전체가 흔들릴 수밖에 없다.

그런 상황에서 그래도 미리 라이선스 대가로 제법 목돈을 미리 땡긴 거니까 얼마나 좋은가.

물론 아무도 나에게 라이선스를 팔지 않아 시장 진출 자체를 막는 게 그들에겐 베스트겠지만, 그건 불가능하지.

돈 앞에는 장사가 없는 법이니 몇몇이 거절했다 하더라도 그 수많은 후보군 중 누군가는 결국 라이선스를 팔았을 거니까.

그리고 이게 내가 세론의 이름을 처음부터 전면에 내건 이유였다.

아직 세론의 이름이 한국과 신발 업계 한정으로만 알려져 있어 모를 거라 생각은 하지만, 설사 안다고 한들 결국 그 수많은 회사들 중 어느 하나는 반드시 넘어왔을 거라는 자신감.

아무튼.

나는 중국에서 배로 실어 온 중고 기계를 보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

"역시 돈이 최고야."

돈을 지르니 그야말로 백지 상태였던 SR 전자에 구형이긴 해도 성능과 판매량이 검증된 제품 라인업이 줄줄이 생겨난다.

거기에 제품에 들어가는 부속들 라이선스까지 사들이며 직접 생산하니 SR 전자는 명실상부한 종합 전자 회사나 다름없게 된 셈.

사실 일반적 상식으로 제품의 부속까지 직접 생산하는 건 가성비 측면에서 매우 매우 비효율적인 일이다.

헤드셋에 들어가는 스피커만 필요로 하는 인추 전자에서 자사에서 쓸 소량의 스피커만 만드는 것과 온갖 회사에 납품할 스피커를 대량으로 만드는 회사 둘 중 어느 쪽 스피커가 저렴할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으니까.

그래서 대부분의 회사들은 각자 잘하는 분야를 잡아 대량 생산을 통해 가격을 다운시키는 식으로 철저한 분업화가 이루어져 있는 게 대부분.

하지만 SR은 다르다.

애초에 초저가 대량 생산을 목표로 하고 있기에 물량도 충분하고, 거기에 스켈레톤의 장점인 인건비 제로와 극한의 하이브리드를 고려하면 오히려 스피커 전문 제작 회사보다 더 저렴하게 스피커를 뽑아낼 수 있으니까.

당연하게도 그렇게 기초 부품 하나하나에서부터 가성비를 뽑아내고 하청 공장에 줘야 할 마진까지 아끼며 만들어 낼 최종 완성 제품의 가성비는 그야말로 끝판왕급.

오직 스켈레톤을 보유한 나만이 할 수 있는 사업 방식이었다.

그때 대기하던 백상호 팀장이 다가와 말했다.

"대표님, 중국 기술자들이 곧 도착한다 합니다."

기계 작동 방법과 생산 노하우를 알려 주러 오는 중국 기술자들.

"백 팀장이 잘 보고 외워 둬요. 특히 이 기계들."

나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거 정비 핑계 대면서 어떻게 작동하는지 잘 봐 둬야 합니다."

나중에 스켈레톤으로 비슷하게 만들어야 하니까.

백상호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백 팀장만 믿습니다."

그렇게 백상호에게 일을 맡기고 공장을 나선 나.

나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중국 카피 제품으로 해외 공략. 완벽하잖아?"

기술과 노하우가 축적되기 전까진 자금력을 무기로 라이선스를 사 와 제품을 만든다.

중국이 불법 카피 제품으로 기술을 축적했던 것처럼 말이다.

"어? 근데 잠깐만. 어차피 이것들은 메이드 인 코리아가 아예 없잖아."

내가 국내시장을 꺼려 하는 건 한국에 있는 공장들이 나로 인해 힘들어져 대량의 실직자가 발생하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소형 가전은 인지도 있는 소수의 브랜드를 제외하면 한국 중소기업은 인수할 회사가 없어 황당해했을 만큼 전멸했다고 봐도 무방한 수준.

즉, 내가 라이선스를 사들인 보급형 제품의 경쟁 회사들 중 한국 출신은 없다는 소리다.

물론 중국 전자 제품을 수입하는 업자들이 볼멘소리를 할지도 모르지만, 수입업자들이야 돈 안 된다 싶으면 다른 제품을 수입하면 그만이니 그것까지 내가 신경 써 줄 필요는 없잖아?

잠시 고민하던 나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한국 시장부터 먹자."

30화

천원숍의 임원은 최근 급등하는 물가 때문에 골머리가 아팠다.

천원숍의 정체성은 천 원 단위의 초저가 물건을 파는 건데, 물가가 상승하며 그 정체성이 점점 어그러진 거다.

천 원에 팔던 물건이 물가 상승으로 천백 원에 팔아야 마진이 남는데, 천백 원에 팔자니 그럼 천원숍이 가지는 정체성이 흔들리고, 그렇다고 이걸 2천 원에 팔자니 한 번에 가격을 너무 많이 올리는 꼴이고.

그렇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차에 갑자기 세론의 한지혁으로부터 납품 관련 미팅 요청을 받은 임원.

원래라면 임원급이 나설 만한 일은 아니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A급 각성자인 한지혁이기에 직접 미팅을 주관한 임원이었다.

"우리 숍은 신발이랑 옷 취급 안 하는데."

임원은 세론에서 천원숍에 납품할 만한 제품이 뭐가 있나 생각했다.

"수건? 아니면 뭐, 천?"

세론의 압도적인 가성비는 이미 섬유업계에서 정평이 난 상황.

그렇기에 임원은 한지혁과의 미팅이 제법 기대가 됐다.

똑똑.

그때 누군가 회의실 문을 노크하며 말했다.

"한지혁 대표님 오셨습니다."

그렇게 문이 열리고 회의실 안으로 들어온 한지혁.

임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서 오세요, 한 대표님!"

가성비의 절대 강자로 떠오른 세론의 대표이자 A급 각성자로 추정되는 한지혁.

한지혁이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한지혁입니다."

"이쪽으로 앉으시죠."

임원의 말에 자리에 앉은 한지혁.

임원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간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스켈레톤을 이용한 혁신적인 사업 기법. 존경스럽습니다, 한 대표님."

한지혁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에이. 안 띄워 주셔도 돼요. 그냥 운 좋게 각성한 각성자일 뿐인데요."

"그래도 본인 능력을 100퍼센트 완벽하게 발휘하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겁니다. 하하."

그렇게 덕담을 주고받은 임원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나저나 저희에게 납품을 하고 싶으시다고요."

"예."

"혹시 수건이나 천 이런 종류입니까?"

그러자 한지혁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수건이랑 천? 그것도 전부 중국산인가요?"

"거의 다 그런 편이죠."

"한국은요?"

"한국도 있긴 합니다."

"있다고요? 중국산이랑 경쟁이 되나요?"

"수건이랑 천은 아무래도 규격 상품이라 자동화가 잘되어 있어서, 중국보다야 조금 비싸긴 해도 물류비 생각하면 그럭저럭 나쁘지 않습니다."

그러자 한지혁이 김샜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자동화 기계가 있어요? 그럼 패스."

"······?"

수건과 천이 아니라고?

"그럼 혹시 인형입니까?"

"인형은 어떤데요."

"인형은 전부 중국산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건 정말 인건비가 많이 들어서."

"오! 좋네요."

한지혁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인형, 리스트에 올려 둘게요. 조만간 생산하면 연락 드리죠."

이제야 리스트에 올려 둔다는 한지혁.

그렇다는 건 인형 역시도 이번 미팅의 주제가 아니라는 말이었다.

"그럼 혹시······."

그렇게 이런저런 섬유 관련 제품에 대해 물어보는 임원.

그때마다 한지혁은 자동화가 있으면 패스를 외쳤고 중국산으로 도배가 된 제품은 좋아요를 외친다.

그렇게 자기도 모르게 시작한 스무고개가 끝이 날 기미가 안 보이자 임원이 피식 웃고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이제 떠오를 만한 건 전부 말한 것 같은데요. 더 맞히고 싶어도 떠오르는 게 없군요."

"하하. 이거, 저도 모르게 흥이 나서 계속 받고 있었네요. 물건부터 보여 드리고 말을 했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바로 보여 드리죠."

그렇게 한지혁이 손을 뻗자 테이블 위에 아공간이 생겨난다.

그리고 아공간에서 나오는 10개의 전자 제품들.

"···음?"

한지혁이 헤어 드라이기를 집어 들며 말했다.

"이게 한국 인터넷에서 2만 5천 원에 파는 거거든요? 근데 그거야 뭐 수입업자가 자기 마진 끼고 어쩌고저쩌고한 최종 소비자가격이 그 정도지, 아마 공장에서 떼 오는 가격은 대충 만 원 초중반? 근데 저는 이거 엄청 싸게 드리겠습니다."

"얼마나 싸게 주신다는 겁니까?"

"한··· 7천 원?"

"풉!"

임원이 마시던 커피를 바닥에 뿜고는 말했다.

"이, 이걸 7천 원에요?"

물론 임원이 일하는 천원숍에도 헤어 드라이기는 있었다.

그것도 무려 5천 원짜리.

하지만 그건 정말 누가 봐도 저렴한 티가 나는 미니 헤어 드라이기로 여행 갈 때 작은 가방에 챙겨 가는 용도인 반면, 이건 정말 일반 가정집에서 쓰는 제대로 된 헤어 드라이기인데 이걸 7천 원에 판다니.

임원이 멍한 표정으로 헤어 드라이기를 바라보다 말했다.

"그런데 방금 인터넷에서 2만 5천 원에 판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죠. 근데 그건 중국산. 그리고 이건?"

한지혁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국산."

임원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게 아니라 법적으로 문제없는 거냐는 말입니다."

불법 데드 카피를 한 거냐 돌려 묻는 임원.

그러자 한지혁이 검지를 까딱거리며 말했다.

"그럴 리가요. 정식으로 라이선스 사서 만든 건데요."

"라이선스를 사 왔다고요?"

"예. 저는 합법적인 물건만 만든다고요. 여기 있는 나머지 제품들도 다 마찬가지고."

한지혁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이것들 전부 천원숍에 납품하고 싶은데. 그것도 방금 헤어 드라이기랑 비슷한 가성비 수준으로. 생각 있으십니까?"

*

임원의 호출을 받고 단숨에 회의실로 달려온 상품 기획 관리 팀.

팀장이 헤어 드라이기를 작동해 풍량을 확인하더니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게 8천 원이라고요?"

"별로인가요?"

"···제가 정말 수많은 상품들을 보고 확인해 오며 느낀 게 하나 있습니다. 싼 건 싼 이유가 있다는 거죠."

한국에서 가장 가성비 높은 제품만을 다루는 천원숍.

당연하게도 천원숍 진열대에 올릴 제품을 확인하고 검수하는 상품 기획 관리 팀은 그야말로 가성비 좋은 제품을 수도 없이 만지고 또 만져 본 사람들이다.

그런 상품 기획 관리 팀의 팀장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말한다.

"하지만 이건··· 정말 말이 안 됩니다. 이렇게 저렴하면서도 쓸 만하다니."

당연하지.

설마 내가 아무거나 골라 왔겠어?

솔직히 8천 원짜리 드라이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겉만 번지르르할 뿐 막상 사서 써 보면 형편없는 성능에 그러면 그렇지가 절로 나오는 수준.

내가 테스트해 본 것들 중엔 디자인은 제법 공들였는데 풍량이 너무 약해서 무슨 산들바람이 나오는 줄 착각한 드라이기도 있었을 정도니까.

하지만 이건 그런 싸구려급과 비슷한 가격인데 반해 성능은 2만 원대급이니 저런 반응이 나올 만도 하다.

애초에 그걸 노리고 딱 저 정도급의 제품들 라이선스를 사 온 거고.

팀장이 드라이기를 내려놓고는 이번엔 미니 청소기를 들어 올렸다.

대충 책상 위 청소 정도로는 쓸 만한, 말 그대로 미니 청소기.

"이건 얼마입니까?"

"삼천삼백 원이요."

"사, 삼천삼백 원?"

임원도 어이가 없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우리도 이거랑 비슷한 것 있지 않습니까, 팀장님?"

"있습니다, 5천 원짜리."

"그건 납품가가 얼마입니까?"

"창고 도착 기준 4천8백 원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가격이 올라 6천 원으로 인상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팀장이 미니 청소기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이걸로 제품을 바꾸면 5천 원은 유지하면서 오히려 마진은 더 높은 꼴입니다."

그러곤 이어서 다른 제품들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이것도, 이것도. 전부 다 말도 안 되는 수준입니다."

나는 느긋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 먼저 돌아갈 테니 천천히 확인해 보실래요?"

그러자 침묵하던 임원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러실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더 확인하는 건 의미가 없어 보이니. 계약하시죠."

그래.

이 가격과 성능을 보고 그냥 넘기면 직무 유기지.

그나저나 계약이라.

또 한바탕 해야 하나?

"혹시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계약에 대해 상당히 민감한데."

그러자 임원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오신다고 할 때 신발 쪽 계약 관련 일은 이미 알아봤으니까."

이야.

일 잘하네!

"저희에게 납품하는 가격 이하로 시중에 유통하시지만 않으면 문제될 건 없을 겁니다."

에이.

상도덕이 있지, 그렇게까지는 안 한다.

그때 임원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저희 회사는 아운 그룹과 일본 백엔숍이 합작으로 만든 회사입니다."

"그래요?"

"그런데 최근 일본 백엔숍도 요즘 물가 상승 때문에 골치 아파하고 있단 말이죠. 그래서 그런데, 그쪽에도 납품이 가능하겠습니까?"

노 재팬이니 뭐니 하지만, 한국에서 일본으로 수출하는 건 외화벌이니까 문제될 것 없잖아?

"콜입니다."

"그럼 일본 본사 쪽에 샘플로 보낼 상품이 좀 필요한데······."

"그거야 쉽죠."

손가락을 튕기자 아공간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고, 그 안에서 포장되어 있는 제품들이 후두두둑 튀어나온다.

"···정말 편해 보이는군요. 이거라면 물류 혁신도 가능할 것 같은데."

당연히 가능하기는 하지만, 그러려면 내가 왔다 갔다 해야 하는데 그건 너무 귀찮잖아.

겨우 운반비 좀 먹겠다고 내 몸을 움직이는 건 가성비가 너무 떨어진다고.

"그나저나, 얼마나 만들어 두신 겁니까?"

"음··· 대충 3만 개씩?"

그러자 임원이 입을 쩍 벌리며 말했다.

"사, 삼만 개씩? 아직 계약도 안 됐는데?"

"그게, 원자재를 사려니까 한 번에 많이 주문해야 싸게 주더라고요. 그래서 아예 왕창 주문했지."

성공에 대한 확신이 있기에 가능한 방법.

나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자··· 그럼 샘플은 이걸로 됐고. 계약서 가져오세요. 시간 끌 것 없잖아요? 빨리빨리 합시다."

*

천원숍을 한국 시장 공략의 첫 타깃으로 잡은 이유는 간단했다.

천원숍은 전국에 매장을 보유한 보급형 전자 제품 유통의 최강자니까.

그렇게 전 국민들로 하여금 SR 전자의 제품을 써 보도록 유도하고 그들의 머릿속에 각인시키는 거다.

SR 전자의 말도 안 되는 가성비를.

제품이 아무리 싸고 좋아도 사람들이 사서 써 보지 않으면 아무 소용도 없으니까.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천원숍의 전국 유통망은 SR 전자의 제품을 전국에 뿌리는 데 가장 효율적이며 확실한 방법이었다.

"이제 수출도 해야 하는데······."

일단 천원숍을 뚫었으니 한국 시장 공략은 시간문제다.

그럼 이제 다음 스텝은 수출 판로 개척.

"어떻게 해야 할까."

한국 최고의 가성비를 자랑하는 천원숍 임원조차도 홀릴 만큼 가격경쟁력과 성능은 확실하지만, 문제는 역시 인지도다.

당장 인터넷에서 헤어 드라이기 하나만 검색해 봐도 천 종이 넘는 헤어 드라이기가 검색되는 게 현실이니까.

즉, 사람들로 하여금 SR 전자의 제품을 사고 싶어 하게 만들 세일즈 포인트가 필요하다는 거다.

"신발은 메이커들이 알아서 해 줘 가지고 편했는데."

자체 마크를 달고 움직이려니 뭔가 막막하다.

일단 당장 떠오르는 건 한국의 천원숍처럼 각국의 유력 유통업체를 끼고 납품하는 것.

하지만 한국에서야 세론이 나름 인지도가 있어 천원숍을 쉽게 뚫었지만 해외에서는 이야기가 좀 다르단 말이지.

물론 일단 만나서 SR 전자의 가성비를 느끼게 해 주면 계약 따내는 건 일도 아니라 자신하지만, 그 많은 나라의 유통업체들을 언제 일일이 만나 가며 설득을 하나.

하자면 못 할 건 없지만 너무나도 비효율적이다.

"좋은 방법 없을까."

그때 누군가 노크를 하며 말했다.

"대표님, 사령마 인수자께서 오셨습니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사치품이지만 사실 원가는 몇천만 원밖에 안 되는 데다 유지에도 그리 큰 힘이 소요되지 않는 사령마.

"어? 잠깐만, 사령마를 경품으로 걸어 볼까?"

한 달에 한 번 SR 전자 제품의 일련번호를 추첨해서 당첨된 제품을 소유한 사람에게 사령마를 경품으로 제공하는 거다.

한국인이든 외국인이든 상관없이.

그럼 소문이 퍼지며 우리 SR 제품을 재미 삼아서라도 사 보고 싶어 하는 외국인 소비자가 생겨나지 않을까?

그리고 그렇게 수요가 만들어지며 풍겨 나는 돈 냄새는 자연스럽게 공급자들을 움직이도록 만드는 법.

"그래. 내가 찾아다닐 필요가 뭐 있어. 지들이 날 찾아오게 만들면 되지."

동시에 SR 전자의 제품을 사야 하는 확실한 이유이자 세일즈 포인트가 될 테니 더욱더 안성맞춤이다.

나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좋아. 이걸로 간다."

31화

평소처럼 필요한 물건을 사기 위해 천원숍에 도착한 한 남자.

"천원숍이 싸서 좋기는 한데, 나도 모르게 바구니 넣다 보면 몇만 원이 훌쩍 사라진단 말이지."

가성비에 홀려 늘 과잉 구매를 반복하던 남자는 이번에야말로 필요한것만 딱 사고 나오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쪽지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오늘은 무조건 여기 적혀 있는 것 만 사는 거야, 무조건."

그렇게 천원숍으로 들어가 바구니를 들고 쪽지에 적힌 제품을 찾아 나선 남자.

"와이프 머리 끈이랑··· 접시걸이대, 암막 커튼."

그때 남자의 눈에 장난감 코너에 진열되어 있는 2천 원짜리 장난감이 보였다.

"아들놈 장난감이나 하나 사 줄까? 2천 원이면 막 쓰고 놀다 버려도······."

그렇게 말하던 남자가 이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야, 아니야. 그렇게 막 사다가 또 오버할라. 오늘은 진짜 정해진 것만 산다."

그렇게 굳은 다짐을 하고 쇼핑을 이어 가던 남자.

그때 남자의 눈에 천원숍 직원들이 한쪽 구석을 완전히 들어내고 무언가 채우는 모습이 보였다.

"뭐지? 이벤트인가?"

그렇게 새로운 진열대에 차곡차곡 쌓여 가는 물건들.

그것들은 바로 저렴한 소형 가전제품들이었다.

그쪽 코너로 다가간 남자가 직원에게 물었다.

"이게 뭔가요?"

"SR 전자 런칭 기념 이벤트예요."

그저 널리고 널린 중소기업 중 하나겠거니 하고 별생각 없이 진열하고 있는 제품을 살펴본 남자.

"오! 싸네?"

원래 천원숍이 저렴한 가성비 때문에 방문하는 곳이라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매우 저렴한 가격이었다.

남자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하나 살까?"

그렇게 잠시 고민하던 남자는 이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야. 오늘은 참는다."

그렇게 몸을 돌리고 나가려던 그때 천원숍 점장이 흥분한 표정으로 현수막을 가지고 오며 직원들에게 말했다.

"이것 봤어?"

"뭔데요?"

"오픈 이벤트 내용인데, 행사 개시 직전엔 개봉 불가래서 나도 지금 봤거든? 근데 이거 완전 대박이야!"

"뭔데 그렇게······."

그렇게 점장이 펼친 현수막을 확인한 직원들이 헉 소리를 내며 말했다.

"이거 진짜예요? 이걸 준다고?"

"미친······."

가성비의 천원숍 직원들이 경악하는 모습에 흥미가 동한 남자는 결국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다가가 그들의 어깨너머로 현수막을 확인해 보았다.

그리고.

"헉!"

현수막에 적힌 내용을 확인한 남자는 경악했다.

"사, 사령마?"

현수막의 내용은 간단했다.

SR 전자의 제품을 구매하는 모든 고객을 대상으로 매달 한 번 추첨을 통해 맞는 제품 번호를 구매한 사람에게 사령마를, 그것도 옵션까지 포함해서 지급한다는 것.

사령마가 언급되자 그제야 남자는 SR 전자의 SR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

"세론이구나!"

남자는 흥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령마를 준다고?"

주 고객층은 각성자지만, 부자들 역시 애완 겸 감상용으로 많이 구입하는 비싸디비싼 사치품.

일단 소유하기만 해도 부러움을 살 텐데, 심지어 옵션까지 포함해서 준다니.

남자는 고개를 돌려 진열대에 올려진 제품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니까 저게 로또인 거네?"

저렴하면서 실용적인 물건.

심지어 일확천금의 기회까지?

남자는 결국 쪽지를 구겨서 품안에 집어넣고 진열대의 제품을 집어 들며 말했다.

"하나씩만 사자, 하나씩만. 어차피 집에 있는 헤어 드라이기 오래됐잖아? 이 기회에 바꾸지, 뭐."

*

사령마 추첨을 통한 마케팅.

당연하게도 사람들의 이목을 사는 데는 충분했다.

실용적인 물건이 추첨지나 다름없으니 굳이 안 사도 되는데 일단 사고 보는 거지.

어차피 크게 비싼 물건도 아니니까.

그리고 사람들의 반응은 일맥상통했다.

-이벤트 보고 그냥 사 본 건데, 가격 대비 성능이 미쳤습니다.

-집에서 쓰던 만오천 원짜리 드라이기보다 더 좋음.

줄줄이 이어지는 호평들.

정확히 내가 의도한 대로였다.

이벤트로 눈길을 끌고 그다음 제품의 가성비로 사람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돌게 한다.

그때 내 핸드폰으로 걸려 오는 천원숍 임원의 전화.

"예. 한지혁입니다."

-대표님! 전부 매진입니다! 추가 납품 해 주셔야 할 것 같은데요.

그래.

이렇게까지 했는데 안 사고 배겨?

"얼마나 더 필요하십니까?"

-일단 만들 수 있는 만큼 최대한 많이 필요합니다! 가능하겠습니까?

"물론이죠."

내가 그럴 줄 알고 미리 기계를 준비해 뒀지.

스켈레톤으로 해결할 수 있는 기계는 그냥 스켈레톤으로 하고, 플라스틱 사출기같이 스켈레톤으로 대체가 안 되는 건 아예 기계를 대량으로 주문해서 들여놓은 상황.

당연히 스켈레톤만 추가 투입 해 조립 매크로만 덮어씌우면 라인은 그걸로 끝이다.

그나저나 한국에서만 붐이 되면 안되는데.

애초에 사령마를 경품으로 내걸며 이벤트를 연 건 한국이 아닌 다른 나라의 바이어들을 내가 찾아가는 게 아니라 찾아오도록 만들기 위함니까.

"혹시 그런 것 없었습니까? 중국인이나 다른 나라 사람이 와서 대량으로 싹쓸이해 간다든지."

그러자 임원이 잠시 침묵하더니 말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가성비의 끝판왕 제품이고 경품까지 달렸으니 관심이 안 생기려야 안 생길 수가 없지.

나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냥 그럴 것 같아서요."

-아무튼 빠른 납품 좀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임원과 전화를 마친 나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자. 이제 기다려 볼까?"

*

누구나 당첨만 되면 사령마를 받을 수 있는 SR 전자의 전자 제품들.

경품이 경품인 만큼 한국과 일본뿐만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에서 인터넷을 타고 소문이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드디어 내가 기다리던 해외 각국의 유통업자들로부터 하나둘 연락이 온다.

"이거··· 좋군요."

그리고 내가 그 유통업자들 중 가장 처음 만난 사람은 바로 중국의 유통업자 김학맹.

조선족으로, 중국 인터넷 상거래 사이트에서 다양한 물건을 파는 인터넷 업자이자 동시에 도매상이었다.

김학맹이 드라이기의 풍량을 확인하고는 말했다.

"경품이 걸린 것도 모자라 이 정도 가성비라니. 수많은 중국 물건을 다뤄 봤지만 이 정도 제품은 처음입니다."

중국의 저가 제품을 수없이 팔아 본 김학맹조차 감탄하는 SR 전자의 제품들.

그때 드라이기를 내려놓고 헤드셋을 집어 든 김학맹이 흠칫하며 말했다.

"그런데 이거, 디자인이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인추 전자?"

그러자 김학맹이 그제야 깨달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 맞습니다, 인추 전자! 예전에 제법 많이 팔아 봐서 기억에 남는데, 이거 디자인이 상당히 유사한데요."

"유사한 정도가 아니라 똑같을걸요."

"예?"

"그 제품은 인추 전자에서 생산하던 제품 라이선스 사서 똑같이 만든 거라."

그 말에 김학맹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중소기업 제품의 라이선스를 샀다고요?"

"예."

"어째서······?"

어째서긴.

시간 아까우니 돈 발라 버린 거지.

"대충 7.1채널에 기능도 적당히 달려 있고, 나쁘지 않아 보여서요. 그런데 문제만 없다면 그게 뭐 중요한가요?"

"그건 그렇죠. 이건 얼마에 파실 생각이십니까?"

"만 이천 원."

"하하··· 그 인추 전자 헤드셋을 고작 만 이천 원에 파신다고요?"

인추 전자 헤드셋을 취급해 본 김학맹이라면 더 확실하게 알겠지.

이 헤드셋의 미친 가성비를.

"경품 이벤트도 유지되고?"

"물론이죠. 전 세계에 판매된 모든 제품들이 추첨 대상입니다."

김학맹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이거··· 돈 되겠군요."

당연하지.

그저 평범한 보급형 헤드셋이 스켈레톤과 만나 가성비 끝판왕 헤드셋이 된 건데.

이벤트로 인한 화제성과 가성비를 모두 갖춘, 그야말로 실패하려야 실패할 수가 없는 제품.

"라이선스 계약 내용에 수출이 금지되어 있거나 이런 건 없겠지요? 인터넷으로 팔 때는 합법성도 잘 고려해야 해서."

"애초에 수출하려고 산 건데, 그런 계약이었으면 애초에 하지도 않았죠."

라이선스 계약에 명시된 건 오직 한국에서만 만든다뿐이니까.

"혹시 단독으로 저에게만 공급해 주실 수는 없으십니까?"

"그건 좀 곤란한데요."

"대신 가격을 조금 더 올려 드리겠습니다."

김학맹의 가격 딜.

아주 상식적인 접근 방식이었다.

이미 가성비가 미친 급이니 조금 더 비싸게 사더라도 자기가 독점 유통 하는 쪽이 유리하다 판단한 거다.

만약 SR이 일반 공장이라면 충분히 혹했을지도 모르지.

공장 입장에서는 납품가를 단돈 100원이라도 더 받는 쪽이 유리하니까.

하지만 나는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가격은 동결. 독점도 없습니다."

"이유를 알 수 있겠습니까?"

"저는 박리다매 스타일이라서요."

돈 몇 푼 더 받으려고 난리 칠 시간에 하나라도 더 판다.

그래야 대량생산을 통해 원가를 더욱 절감하여 그야말로 미친 가성비를 더욱 확고히 할 수 있으니까.

기술이 뛰어난 기업들이 적극적인 기술 개발을 통해 후발 주자와의 기술 격차를 지속적으로 유지하여 경쟁력을 확보하는 걸 초격차 전략이라고 한다.

하지만 나는 정확히 반대란 말이지.

어떻게 해서든 한 푼이라도 더 싸게 만들어 세상 그 어떤 회사도 따라올 수 없는 미친 가성비를 완성하는, 이른바 초저가 전략.

그런 점에서 볼 때 독점은 그야말로 쥐약이다.

김학맹에게 독점을 쥐여 줬다가 높은 마진 차익을 보려고 가격을 올리면 그만큼 가성비는 떨어지며 동시에 판매량도 줄어들 테니까.

그러니 어떻게 해서든 많은 유통업자를 확보해 서로 경쟁하도록 만드는 게 나한테는 이득이란 말씀.

"그거 아쉽군요."

"대신 초반에 선점하면 그만큼 이득도 클 것 아니에요. 인터넷이 주력이라면서. 그럼 초반에 왕창 팔아 별점이랑 판매량 높이면 계속 상단에 노출될 것 아닙니까."

그러자 김학맹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잘 아시는군요."

공부 좀 했지.

김학맹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습니다. 수입하겠습니다."

"오케이!"

나는 김학맹과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많이 파세요, 그래야 나도 힘나서 열심히 만들지."

"물론입니다."

그렇게 성사된 김학맹과의 거래.

그렇게 SR 전자의 제품은 중국을 시작으로 세계 각지를 향해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

그야말로 미친 듯이 폭주하는 주문.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스켈레톤 물량 공세로 생산량 역시 폭증하니 두 사이클이 맞물려 SR 전자는 그야말로 폭주하듯 성장해 나갔다.

그리고 그렇게 본격적으로 SR 전자의 제품이 팔려 나가자 당연하게도 가장 먼저 민감한 반응을 보인 건 SR 전자에 라이선스를 판매한 회사들이었다.

라이선스를 담당하는 안 부장이 귀찮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수시로 연락을 해서 계약을 변경하자거나 파기하자고 합니다."

자기들이 만들던 단종된 제품이 갑자기 미친 듯이 잘나가는데, 그걸 기분 좋게 바라볼 사람은 없으니까.

하지만 그래 봤자 소용없다.

이미 라이선스 계약을 하면서 그 정도는 모두 예상하고 최소 4년은 SR 전자가 마음껏 생산할 수 있도록 만들어 두었으니까.

그리고 4년이면 뽕을 뽑을 만큼 뽑고 다른 새로운 제품을 만들어 판매하기엔 충분한 시간.

"아! 인추 전자에서는 세론이 아니라 SR 전자를 내세운 건 사기라며 아예 소송도 불사하겠다 했습니다."

"하라고 해요."

애초부터 세론의 자회사라고 전부 말해 줬는데 그게 무슨 상관?

게다가 소송에 들어간다고 해서, 그게 하루 이틀 만에 판결 나는 것도 아니란 말이지.

상고하고 판결 진행 하고 뭐 하다 보면 4년쯤은 후딱 지나갈 거다.

당연하게도 인추 전자 역시 그 정도는 알고 있을 테지만, 그럼에도 소송을 언급한 이유는 뻔하다.

"대신 라이선스 계약을 현 상황에 맞게 재조정하면 소송을 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계약 기간도 늘려 줄 수 있다 하고요."

그 이유는 당연히 돈.

자기들이 개발한 제품이 미친 듯이 팔려 나가며 중국에도 진출해 가성비와 사령마 경품을 무기로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데, 자기들이 얻은 거라곤 고작 100만 달러가 전부.

당연히 배가 미친 듯이 아플 수밖에.

그러니 계약을 변경해 조금이라도 이득을 더 취하고 싶은 거다.

하지만 그거야말로 도둑놈 심보 아닌가?

막말로 우리 아니었으면 조용히 단종되어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을 제품들을 SR 전자가 살려 낸 건데.

"그런 건 대충 알아서 처리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대표님."

그렇게 순식간에 라이선스 판매 회사의 이야기를 머릿속에서 지운 나는 안 부장에게 말했다.

"그보다 슬슬 라인업을 더 늘려도 될 것 같은데요."

"어떤 제품을 원하십니까?"

지금 SR 전자가 확보한 라인업은 대부분 비교적 아주 간단한 제품들이었다.

모터만 있으면 되는 드라이기나 미니 청소기 같은, 말 그대로 처음 이 시장에 진출한 SR이 소화하기 쉬운 전자 제품들.

하지만 이제 본격적으로 회사가 확확 굴러가고 있으니 슬슬 라인업을 늘려야지.

"마우스?"

내 말에 안 부장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마우스는 쉽지 않을 겁니다. 저가 제품부터 고가 제품까지 유명 브랜드들이 꽉 잡고 있고, 또 컴퓨터 사용자들은 그런 쪽에 워낙 민감해서 말입니다."

"그래요?"

"대신 이런 건 어떻습니까? 체중계나 거치용 전자시계처럼 메이커 영향력이 없는 제품들 말입니다."

"오! 좋네요."

그거야말로 SR 전자가 지향하는 포인트지.

"기왕이면 사람 손 많이 가서 인건비 비중이 높은 전자 제품이면 더 좋습니다. 라이선스 무차별로 매입하세요, 평가가 괜찮아 검증도 되었고 성능도 적당한 걸 종류별로 하나씩."

"알겠습니다. 대신 예전보다는 확보하는 게 쉽지 않을겁니다. 이미 세론의 이름이 중국 바닥에 알려지기 시작해서······."

"괜찮아요, 괜찮아."

어차피 우리에게 선택받는 제품은 많고 많은 보급형 제품 중 단 하나뿐이다.

즉, 그 회사가 거절해도 대안은 널리고 널렸다는 말.

그렇기에 그들의 선택지는 이제 두 개다.

단종이 얼마 안 남은 제품을 라이선스 비용이라도 건져서 조금 덜 배 아파 할 것이냐, 아니면 거절해서 그조차도 못 받고 다른 회사의 제품이 SR 전자에서 미친 듯이 생산되어 팔려 나가는 것을 보며 후회할 것이냐.

나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돈 앞에는 장사 없는 법이에요. 어차피 거절해 봤자 본인만 손해인데. 결국은 넘어오게 되어 있으니 계속 사들이세요."

한때 기술력과 장인 정신으로 무장한 일본의 전자 회사들이 세계를 호령했지만, 결국 한국의 가성비에 전부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그런 한국 역시 중국의 저가 공세에 맥을 못 추고 있는 상황.

그것이 이제는 세론의 차례가 된 것뿐이다.

"우리는 무조건 가성비랑 물량입니다. 무조건 싸게, 무조건 많이."

"알겠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슬슬 사령마 추첨 한번 해야겠네."

유통업체를 통해 해외에도 제법 많은 SR 전자 물건이 풀린 상황.

이때 사령마 경품을 실지급하여 화제성을 더 끌어올림과 동시에 판매도 가속화하는 거다.

그렇게 추첨 방법에 대해 고민하던 나는 눈을 빛내며 말했다.

"추첨 라이브 방송 한번 할까요? SR 전자 제품 풀린 나라들 언어 자막도 달아서."

기왕 홍보하는 거, 확실하게 눈도장 찍고 화제성을 키우려면 역시 생방송이 제격이지.

안 부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번역가들 준비하겠습니다."

"오케이. 제대로 한번 해 보자고요."

32화

"레디. 큐!"

큐 사인이 떨어지자 진행자가 마이크를 들고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SR 전자 경품 추첨식 방송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카메라 밖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나는 안 부장에게 말했다.

"자막 문제없이 나가고 있죠?"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하고 있습니다. 걱정 마시지요."

아무려면 이제는 제법 큰 회사 오너가 됐는데, 이런 추첨식까지 내가 직접 나설 필요는 없지 않나.

그래서 이번 추첨식 방송을 위해 아예 전문 스튜디오를 고용해 버렸지.

"시청자는 얼마나 됩니까?"

"세계 각국에서 몰려든 시청자가 10만 명을 넘었고, 지금도 계속 올라가고 있습니다."

"서버 터지거나 그런 일은 없겠죠?"

"전문 스튜디오 아닙니까. 이미 시청자 분산을 위해 라이브 방을 여러 개 만들어 두었답니다."

"오케이."

SR 전자가 해외 루트를 뚫은 지 얼마 안 돼 수출한 물량의 상당수가 배 위에 실려 각 국가로 실려 나가고 있는 걸 생각하면 이 정도 시청자 수만 해도 어마어마한 수준.

그때 진행자가 말했다.

"자, 여기서 제가 제 소개를 하고 어쩌고 하는 걸 원하는 분은 없으시겠죠? 바로 경품 소개부터 가겠습니다. 보여 주시죠!"

진행자의 말에 미리 최고가 옵션으로 도배한 사령마 한 기가 위풍당당한 보폭으로 진행자에게 다가간다.

"보이십니까? 이 늠름한 자태가? 오늘 이 경품식을 통해 여러분 중 누군가가 가지게 될 사령마입니다!"

그러자 인터넷 채팅창에 온갖 언어들이 미친 듯이 쏟아진다.

그중에는 한국어도 있긴 하지만, 채팅 올라가는 속도가 너무 빨라서 제대로 읽기도 힘든 수준.

진행자가 사령마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거 정말, 와! 소리 나오는군요. 장담하건대 여러분이 영상으로 보시는 것보다 실물로 보는 게 몇 배는 멋있고 아름답다는 것만 말씀드리죠."

그렇게 살짝 분위기를 잡은 진행자가 옆으로 걸음을 옮겨 이번에 새로 구입한 추첨기로 다가갔다.

"이제 슬슬 추첨을 해 볼까요? 아. 혹시나 해서 다시 한번 제품 번호 확인하는 방법을 알려 드립니다. 제품을 개봉하면 제품명이 적혀 있는 스티커가 있을 겁니다. 그 스티커를 보면 하단에 Made in Korea가 적혀 있는데, 그 바로 밑에 있는 번호가 제품 번호입니다."

경품이 걸려 있는 만큼 저 제품 번호는 오직 제품에 붙어 있는 스티커에만 적혀 있었다.

만약 도매상이 경품을 탐내 제품 번호를 확인하고 싶어도 봉인 실을 뜯어야만 한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봉인 실이 뜯기는 순간 당연하게도 새 상품으로서의 판매가 불가하니 오직 소비자만을 위한 경품 행사.

"거기에 한 가지 더 희소식! 여러분은 이번 추첨에서 떨어졌다고 너무 실망하실 필요 없습니다. 왜냐구요? 일단 한번 산 SR 전자의 제품은 무려 1년간 총 12번 추첨의 기회를 제공해 드릴 예정이니까요!"

한 달에 한 번씩 갱신을 하면 정말 우리 제품을 복권처럼 사서 추첨식을 확인하고 버린 다음 다시 제품을 사는 사람이 나올 게 분명했다.

물론 그렇게 제품 회전률이 높아지면 당장의 매출적 이득은 높을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 사행성 조장 논란과 물건 낭비로 인한 비난을 들을 게 뻔하지 않나.

한마디로 브랜드 이미지에 손상을 주는 행위라는 말.

그래서 아예 1년 단위로 갱신 주기를 설정했다.

올해 1월에 제품을 사면 12월까지 추첨 번호에 포함해 주는 거지.

그렇게 되면 당첨 확률을 높이기 위해 새로 사고 기존 걸 버리는 게 아니라 새로운 SR 전자의 제품을 계속해서 사들여 집에 쌓아 놓게 되는 거다.

당연히 그렇게 되면 쌓아만 둘 수는 없으니 SR 전자 제품을 반강제로라도 사용하게 될 거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레 사람들은 SR 전자 제품에 대한 좋은 사용 경험까지 체험하는 방식.

그때 진행자가 추첨기 버튼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아무튼 설명은 이 정도로 하고 이제 추첨을 해 볼까요? 자! 우선 제일 먼저 SR 전자의 어떤 제품에서 당첨자가 나올지 확인하겠습니다! 과연 사령마의 주인은 누가 될 것인지! 누릅니다!"

그렇게 진행자가 추첨기 버튼을 누르는 순간 추첨기 안에서 사방팔방으로 튀어 다니던 공 중 하나가 입구에 딱 걸려 나온다.

그 공을 집어 든 진행자가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이거 놀랍군요! 제가 알기로 SR 전자 라인업 중 이 제품 판매량이 가장 적다 알고 있는데, 그건 다시 말해 이 제품을 보유하신 분들은 당첨 확률이 상당히 높다는 뜻 아닙니까?"

판매량이 가장 적다고?

설마······.

진행자가 공에 적힌 글자 부분을 카메라에 보여 주며 말했다.

"이번 추첨 제품은 바로 미니 청소기입니다!"

책상 위에 있는 먼지 정도를 빨아들일 때 쓰는 제품인 미니 청소기.

당연히 다른 제품 대비 수요가 많지 않아 판매량이 상당히 미비했다.

그런데 하필 걸려도 저게 걸리다니.

"저건 4만 개 정도밖에 안 팔렸는데?"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내뱉은 말을 캐치 한 진행자가 외쳤다.

"지금 한지혁 대표님 말씀 들으셨습니까? 미니 청소기 판매량이 고작 4만 개랍니다! 4만 개! 로또 당첨 확률이 800만 분의 1 정도라는데 이건 무려 4만 분의 1 확률인 겁니다!"

진행자의 애드리브에 당황해하며 자막을 실시간으로 타이핑하는 안 부장과 번역가들.

하지만 그런 그들의 고생 덕인지 채팅창 반응은 그야말로 폭발적이었다.

-미친, 4만 개!?

-나 전부 다 사고 미니 청소기만 안 샀는데!

-여러 개 산 사람도 있을 테니까 확률 엄청 높을 것 아니야!

진행자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거이거 점점 재미있어지는데요. 그러니 여러분, 최소 1년간은 빠트리지 말고 SR 전자 제품들 종류별로 꼭, 꼭 집에 하나씩은 비치해 두세요. 그 제품 중 어느 게 효자일지 누가 압니까? 안 그래요?"

당첨 때문에라도 SR 전자의 라인업을 하나씩은 다 비치해야 한다라.

좋네.

모든 제품이 균일하게 잘 팔릴 테니까.

진행자 제법 마음에 드는데?

고정시켜야겠다.

그때 진행자가 다음 추첨기로 다가가며 말했다.

"자, 이제 4만의 제품 중 행운의 당첨자는 누가 될 것인지? 추첨을······."

천천히 추첨기의 버튼을 누르려던 진행자가 갑자기 몸을 돌리며 말했다.

"하기 전에! 광고 하나 보고 가시겠습니다!"

진행자의 말에 감독이 손을 휘젓자 인터넷 방송에 미리 준비해 둔 광고가 흘러나온다.

그 광고의 대상은 바로 이번에 새로 매입한 라이선스를 이용해 만든 체중계와 탁상시계.

사실상 다음 추첨에는 이것들도 포함이니 미리 사라는 강매 수준의 광고.

그렇게 중간 광고까지 끝나자 다시 진행자로 화면이 돌아간다.

"잘 보셨죠? 체중계와 탁상시계입니다. 아무튼, 자."

진행자가 추첨 버튼을 누르며 외쳤다.

"계속해서 번호 추첨합니다!"

*

최종 당첨자는 한국에 있는 한 평범한 가장.

심부름 겸해서 들른 천원숍에서 충동적으로 구매한 미니 청소기가 당첨이 된 것이었다.

경품 수여식에 초청받아 가면을 쓰고 등장한 가장은 울먹거리며 말했었다.

쪽지에 적힌 상품만 사려고 갔다가 이벤트의 유혹을 이겨 내지 못하고 이것저것 사 버리는 바람에 와이프에게 등짝까지 맞았는데, 그게 이렇게 큰 행운으로 돌아올 줄은 몰랐다며.

아무튼 그렇게 성공적으로 경품 수여까지 끝내자 그 여파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했다.

그야말로 모든 제품의 동반 성장.

가장 판매가 부진했던 미니 청소기에서 당첨자가 나와 버리니 미니 청소기의 판매량이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간 거다.

거기에 새로 출시한 체중계와 전자시계까지 미친 듯이 팔려 나가며 SR 전자의 모든 제품 판매량이 모두 상향 평준화 되어 간다.

나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일단 출시하면 무조건 팔린다는 소리잖아."

성공의 절대적 공식을 만들어 낸 셈.

물건만 쓸 만하다면 그야말로 실패할 수가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심지어 남들이 보기엔 수억에서 십억에 달하는 사령마가 경품이니 로또급이라 생각을 하지만, 실제 원가는 수천만 원과 내 마력이 전부.

티브이 광고도 제대로 못 할 만한 금액으로 이만한 마케팅 효과라니, 얼마나 완벽한가.

"하. 돈이 쏟아진다."

판매량이 미친 듯이 늘어나며 하루 매출액이 거의 10억을 넘어섰고, 심지어 그것도 실시간으로 계속해서 늘고 있으니 SR 전자가 성장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여기에 매달 스켈레톤 보유 신기록을 미친 듯이 경신하며, 폭발적으로 성장 중인 신발 사업까지 더하면 세론의 한 달 추정 매출액은 2천억에 육박하는 수준.

제조사로서는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만큼 어마어마한 성장 속도였다.

"원래는 이게 내 최소 목표였지."

수조 원의 목돈 혹은 매달 수백억씩 주머니에 꽂히는 걸 은퇴 목표로 잡았었으니 그 최소한의 목표는 달성된 상황.

"원래라면 슬슬 은퇴 준비를 시작했을 텐데."

이미 자리도 잡혔겠다, 스켈레톤 숫자만 늘리면 되니 슬슬 경영도 믿을 만한 사람에게 넘기면서 매달 주머니에 꽂히는 돈으로 여행도 다니고 별장도 사들여 플렉스 하며 은퇴 라이프를 즐겼겠지.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썩을 놈의 언데드 군단."

하지만 그 목표는 내 언데드 군단이 출몰하며 박살이 난 지 오래.

당연히 내가 목표로 하는 돈은 이 정도로는 턱도 없다.

언데드 군단을 재건해야 한다는 걸 고려하면 최소 목표 매출액은 수십조 이상.

거기에 돈을 많이 벌면 벌수록 재건에 필요한 시간도 줄어드니, 나는 그야말로 무한 성장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더 벌자."

언데드 군단 재건이 완료되면 그때는 정말 쉴 수 있겠지.

거기에 살짝 희망을 섞자면, 그때는 진짜 돈이 썩어 날 만큼 많을 테니 플렉스 정도가 아니라 돈지랄을 하고 다녀도 될 것 아닌가.

그땐 진짜 미친 듯이 놀아야지.

사람이 저렇게 돈을 써도 되나 싶을 정도로 노는 거야.

그렇게 은퇴의 단꿈에 입맛을 다시던 그때.

"대표님."

김덕배가 노크를 하고 들어오며 말했다.

"유림 전자에서 대표님과 이야기를 좀 하고 싶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유림 전자요?"

"제가 검색을 해 보니 자체 브랜드로 소형 에어컨이나 가습기 등을 만들며 제법 잘나가는, 연 매출 5천억 원 규모의 전자 제품 중견 기업이었습니다."

한국의 전자 제품 시장이 전멸하다시피 한 상황에서 살아남은 몇 안 되는 회사 중 하나라는 말.

"오호."

전자 제품 회사로부터의 연락이라.

"OEM 의뢰인가?"

섬유산업만큼은 아니어도 전자 제품 역시 OEM은 흔한 제조 방식이었으니까.

"아니면 뭐, 단종 제품 팔아서 라이선스 챙기기?"

아직은 모르겠다.

하지만 만난다고 돈 드는 것도 아닌데, 거절할 필요는 없잖아?

한번 만나나 보지, 뭐.

"약속 잡아 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럼 바로 약속 잡겠습니다."

*

"반갑습니다, 한 대표님."

연 매출 5천억 규모의 유림 전자 대표이사 진인기.

"저도 반갑습니다, 대표님."

진인기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소문으로만 듣던 분을 이렇게 만나게 되니 정말 반갑군요."

"에이. 별것 있습니까, 그냥저냥 사업하는 놈인데."

"이미 사업 규모가 저희 유림 전자보다 더 큰데 그냥저냥이라니요. 하하."

사실 매출 규모로만 보면 세론이 이미 유림 전자를 한참 추월했으니 틀린 말은 아니지.

"사령마 경품은 정말 흥미로웠습니다. 검증된 보급형 제품을 저렴한 가격에 만들어 경품을 이용해 판매량을 끌어올리다니. 솔직히 부러웠습니다. 저도 그런 능력이 있었으면 회사를 더욱 키울 수 있을 텐데 하고요. 하지만 뭐··· 없는 걸 부러워해 봤자 아무 의미 없죠. 그래서 찾아왔습니다."

이제부터가 본론.

진인기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저희 유림 전자는 3개의 공장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한국, 두 개는 중국에 있지요. 한국에선 주로 창문형 에어컨 같은 비교적 고가의 제품을 생산하고, 중국 공장에선 저가 제품을 생산하는 식으로 운영 중입니다."

한국에서 생산 공장을 완전히 철수한 3대 신발 회사와 다르게 적당히 절충하여 운영하는 방식.

"왜 전부 중국으로 이전하지 않으신 건가요? 고가의 제품도 중국에서 생산하면 훨씬 가격이 싸질 텐데."

"물론 그렇겠지요, 솔직히 말해서 저희가 만든 창문형 에어컨의 가격은 수입된 중국산의 두 배에 가까우니까. 하지만 자체 브랜드를 가지고 있는 입장에서 때론 비용을 감수할 필요도 있는 법입니다."

그러자 진인기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100퍼센트 국내 제작, 이 문장이 주는 안정감은 무시할 수 없으니까요."

오오.

그렇구나.

저 한 문장에서 뭔가 제품도 튼튼할 것 같고, 동시에 A/S도 잘될 것 같은 느낌이 확 온다.

보급형 제품을 만드는 SR과는 전혀 다른 판매 전략.

"그래서 어지간하면 한국 공장은 계속 운영할 생각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중국 공장이지요. 어디서 만들든 저렴하게만 만들면 되는 저가형 전자 제품. 그런데 최근 중국의 경제가 급속도로 성장하며 인건비도 동반 상승 하고 있습니다. 즉, 저렴한 인건비에서 오는 메리트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거죠."

좋은 이야기네.

중국이 세계의 공장 지위를 잃으면 잃을수록 세론이 그걸 받아먹을 확률도 높아지는 꼴이니까.

유림 전자가 나를 찾아온 것처럼.

"물론 중국 내수 시장의 규모도 동반 성장 하며 기회의 장이 열리기는 했지만··· 솔직히 말해서 외국 기업의 제품이 중국에서 살아남기에는 쉽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1등 대기업도 밀려나는 판국이니까요. 외국 기업이라는 이유로 제법 높은 임금을 지불해야 하는데, 그 상태에서 정부 지원금과 은행의 지원을 받으며 성장하는 중국 기업과의 가격경쟁력은 차이가 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아예 중국 공장을 철수하고 동남아로 가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진인기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때 떠오른 게 세론이었습니다. 저렴한 인건비, 거기에 국내 생산이라 한국의 인프라를 온전히 이용할수 있다는 장점은 물론, 국내 자체 제작 타이틀까지. 솔직히 동남아와는 비교하는 게 무색할 정도죠. 그래서 제안하고 싶습니다. 중국에 있는 두 공장에서 나오는 매출액이 대략 2천억 수준인데, 이 공장을 한국으로 이전하려 합니다. 그 공장을 세론과 저희 유림이 합작으로 만드는 건 어떻겠습니까?"

합작?

OEM이 아니라 합작 공장을 만들자고?

"합작은 예상 못 했는데······."

"세론이 스켈레톤을 빌려주지 않는다는 건 잘 알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합작회사라면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유림의 이름을 걸기는 하겠지만 세론의 지분도 있는 거니까."

이러면 또 이야기가 달라지지 않나.

저 제안을 받아들이는 순간 무려 매출 2천억의 공장이 바로 생겨나는 꼴이니까.

게다가 유림은 중국의 저가 공세에도 살아남으며 자체 브랜드를 가진 나름 기술이 있는 회사니 노하우와 기술력 습득에도 도움이 될 거고.

나는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합작 공장이라······."

사실 SR 전자라는 자체 브랜드를 달고 성공적으로 제품들을 연이어 론칭하고는 있지만, 그 한계는 명확하다.

전자 제품의 종류는 그야말로 수천, 수만 가지에 달하니까.

심지어 극한의 가성비를 뽑아내기 위해 하청 줘야할 부속까지 직접 만드니 그 가짓수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수준.

아무리 라이선스를 사 오고 스켈레톤으로 하이브리드 운영이 가능하다지만, 결국 그 제품들을 개발, 관리하고 조율하는 건 나를 비롯한 사람들의 몫이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SR 전자 혼자서 그 많은 제품과 그 제품에 필요한 부속까지 전부 감당하는 게 과연 가능할까?

수만 명의 직원을 거느린 대기업조차도 하지 못하는 일인데?

그럴 리가 없지.

하지만 유림과 합작 공장이 생겨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현재 유림이 만들고 있는 저가형 제품의 개발, 관리를 유림이 전담하게 될 테니까.

즉, 세론 신발과 메이커의 관계처럼 된다는 말이다.

SR 전자가 할 수 있는 건 SR 전자가 만들고 그 외에 나머지들은 합작 공장을 통해 빈틈을 메꾸는 방식.

심지어 중국 공장을 대체하는 것이기에 일자리에 대한 문제도 없어 더욱 완벽하다.

물론 내수에 집중하는 다른 회사들이 볼멘소리를 할 수도 있지만 그런 회사라 해봐야 몇 군데 되지도 않고 다들 이런 저가 제품 공장은 유림처럼 중국에 두고 있으니 깔끔하게 무시하면 끝.

하지만 걸리는 점이 한 가지 있다.

'합작 공장이면 벌어들인 돈을 내 마음대로 못 쓴다는 말인데.'

나는 막대한 돈을 벌어서 언데드 군단을 재건해야 하는데 이건 회사 입장에서 전혀 생산적이지 않은 일.

동업자인 유림이 돈도 안 되는 언데드 군단 재건 따위에 회삿돈이 쓰이는 꼴을 가만두고 볼 리가 없지 않나.

당연히 나와 유림은 충돌할 수밖에 없고 이 합작 공장은 무조건 분쟁의 씨앗이 될 거다.

"OEM은 관심 없으시죠?"

우리가 만들어 주고 유림은 상표만 붙이고.

하지만 역시나 진인기가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없습니다. 자체 제작은 저희 회사가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원동력입니다."

근데 말이 자체 제작이지, 결국 스켈레톤이 만드는 건 똑같은 거잖아.

나는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인 법이죠. 그냥 이렇게 하는 건 어떻습니까? 스켈레톤을 자동 생산화 기계로 생각하는 겁니다."

"예?"

"유림이 공장을 만들면 세론이 입주해서 스켈레톤이라는 자동 생산화 기계를 배치하고 운영, 관리해 주는 대가로 돈을 받는 거죠."

OEM과 다른 것은 그저 스켈레톤이 일하는 장소가 다르다는 것뿐.

하지만 그 대신 유림은 자체 생산 제작이란 타이틀을 유지할 수 있고 세론은 다른 회사의 공장에 스켈레톤을 배치하여 공간을 절약할 수 있으니, 윈윈 아닌가.

"한마디로 1공장 2회사 체계인 거죠. 합작 공장이 아닌 협업 공장.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33화

내 말에 잠시 침묵하던 진인기가 말했다.

"굳이 그렇게 복잡하게 처리할 필요가 있습니까?"

"있죠. 저는 지분 관계가 복잡한 걸 싫어해서요."

"혹시 지분 비율 때문에 그러십니까?"

합작 공장의 세론 지분을 높이기 위해서 자신을 떠보는 게 아니냐는 진인기의 말.

"오해 마세요. 저 거짓말은 안 합니다. 세론만 해도 대출 받는 것 빼면 전부 자기자본으로만 움직이고 있잖아요. 그런 것의 연장선상이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러자 진인기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지분 관계는 회사가 커지면 커질수록 복잡해지는 게 당연합니다. 세론도 언젠가는 상장을 해야 할 것 아닙니까."

"세론은 상장 안 할 건데요?"

"예?"

미쳤어?

대표가 돈 빼돌린다고 주주들이 지랄발광 할 게 뻔한데?

"허어······."

"아무튼 유림이 OEM 생각 없듯 저도 합작 공장은 싫습니다. 그러니 그냥 이렇게 하시죠? 막말로 고객들이 공장에 쳐들어와서 세론과 유림의 계약서까지 확인해 가며 물건을 사는 건 아니잖아요."

같은 물고기도 한국에서 잡으면 한국산, 중국에서 잡으면 중국산인 법.

그러니 중간에 과정이 어떠하든 유림 자체 생산인 것처럼 보이기만 하면 될 것 아니야.

그러자 잠시 침묵하던 진인기가 말했다.

"무슨 말인지는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그걸 위해선 확실한 보증이 필요합니다."

"보증이요?"

"이건 말 그대로 세론이 유림과 계약을 맺고 일정 기간 고용되는 형태 아닙니까. 만약 중간에 세론이 계약 연장을 거부하면? 우리 유림 전자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손해를 감수해야 합니다."

아아.

그래서 더 합작 공장을 밀어붙인 거구나.

하긴.

기껏 돈을 투자해 한국에다가 공장을 만들었는데 세론이 빠지면 유림의 공장은 그대로 허공에 붕 뜨는 꼴이니까.

"계약서에 명시해 드리죠. 유림이 세론에 해가 되는 일을 하지 않는 이상 세론은 계약을 자동으로 연장한다."

"···으음."

보증이라 부르기엔 부족하다 이거지?

하지만 이 이상의 양보가 불가한 만큼 더 설명을 해 봐야 시간 낭비에 불과하다.

"이것 하나만 더 말씀드리고 마무리하겠습니다. 세론 신발은 여태까지 단 한 번도 고객사와의 계약을 먼저 취소한 전례가 없습니다. 당연히 고객사도 어떻게든 세론 신발과 거래를 늘리면 늘렸지 줄인 적이 없고요. 이걸로 이야기 끝."

만약 이것도 거절하면 어쩔 수 없지.

내 말에 진인기가 나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이게 세론이 해 줄 수 있는 마지막 양보라 이거군요."

머리 좋은 사람이랑은 대화가 빨라서 좋단 말이지.

"정확합니다."

그러자 한참을 고민하던 진인기가 말했다.

"좋습니다. 그 정도라면 진지하게 이야기해 볼 만할 것 같군요."

오케이.

아주 좋아.

'거래 성사되면 짭짤하겠지?'

매출과 판매량이 보증된 회사와의 협업 공장.

말 그대로 공장이 완공되는 즉시 수익이 생겨난다는 말이다.

'협력사 팍팍 늘릴까?'

유림 전자가 가장 처음 접촉해 왔을 뿐, 스켈레톤의 노동력을 탐내는 회사는 얼마든지 있다.

그런 회사들의 해외 공장을 한국에 유치하면 순식간에 세론의 덩치를 키울 수 있다는 말.

'그래. 쉬운 길 두고 굳이 어려운 길로 돌아갈 필요 없잖아.'

목표는 정해졌다.

그럼, 첫 단추를 잘 끼워야 그다음 단추도 순조롭게 끼우는 법이지.

미리 바닥부터 확실하게 다지고 가는 거다.

"이걸 가지고 일자리 빼앗긴다며 사람들이 난리 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설마요, 애초에 한국엔 없던 공장인데."

"그래도 누군가 바람만 살살 불면 일반인들은 그냥 넘어갈 것 아니에요. 당장 한국에 있는 유림 전자 직원들만 해도 불안해하지 않겠습니까? 이러다 자기들 공장 일거리까지 전부 세론과 계약한 신규 공장에 넘어가는 게 아닌가 하면서."

외국인 노동자가 한국인이 꺼려 하는 일자리를 메꿔 주고 있는데 그것조차도 일자리 빼앗긴다며 난리를 치는 게 사람들이다.

일자리는 생계와 직결된 민감한 문제니까.

"···생각해 보니 그럴 수도 있겠군요."

"그럴 수도가 아니라 무조건 그럴 겁니다."

신발 협회 때처럼 사람들이 난리 치기 전에 미리 못을 박아야 한다.

세론은 상생을 추구하며, 절대 기존 사람들 일자리를 빼앗는 게 아니라 해외로 유출된 공장들이 되돌아오게 만드는 것뿐이라는 걸 강조할 필요가 있다는 말.

미국도 법인세까지 깎아 주며 해외로 나간 공장들을 되돌아오게 하려고 안간힘을 쓰지 않나.

그걸 세론이 해냈다고 강조하는 거다.

"대표님, 그럼 이렇게 합시다. 일단 유림 전자 한국 공장 노동조합이랑 만나서······."

*

나와 진인기가 악수를 하고, 그 모습을 초대한 기자들이 사진기로 찍는다.

그런 나와 진인기 머리 위에 걸려 있는 현수막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세론, 유림 전자 협약식.

그렇게 적당히 사진이 찍히자 이번엔 유림 전자 한국 공장 노동조합장이 나에게 다가온다.

조합장이 나와 악수를 하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계약서는 확인하셨죠?"

내 말에 조합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한국 공장의 배정 물량과 모델을 보장한다는 계약 내용 확인했습니다. 한 대표님이 적극적으로 나서 주신 덕분입니다."

진인기와의 이야기를 마무리한 나는 진인기의 소개로 조합장과 만나 세론과 유림의 협업 계약을 이야기해 주었다.

역시나 예상처럼 당황해하며 한국 공장의 물량 유출이나 실직 사태를 걱정한 조합장.

나는 한국 공장에 그 어떤 변화도 없을 것이며, 오히려 신규 공장이 커지면 스켈레톤을 보조하는 인력이 더 필요할 수도 있다고 안심시켰다.

거기에 더해 진인기를 설득해 아예 한국 공장의 배정 물량과 모델까지 보장하는 내용을 계약서에 포함시킨 나.

덕분에 노조와 회사 그리고 협력사가 모두 환하게 웃는 지금과 같은 그림을 그리는 데 성공했다.

"저는 늘 상생을 추구하니까요."

나는 기자들을 보며 말했다.

"모두가 오해하시지만, 스켈레톤도 만능은 아니기에 사람의 보조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즉, 자동화 설비와 노동자의 중간 역할이라고 할 수 있지요. 아무튼 이렇게 해외 공장이 한국으로 들어오면 한국 경제도 더욱 활성화되고, 거기에 스켈레톤 관리와 사무직 일자리도 늘어나는 일거양득의 효과를 누릴 수 있습니다. 동시에 철저한 계약으로 한국 노동자의 기존 일자리도 보장하고요."

이 정도면 충분하지?

스켈레톤이 이렇게 무해하다고.

투자 효과도 있고 일자리 효과도 있고.

아무튼 이 정도면 그림도 제법 예쁘게 나온 것 같고··· 슬슬 영업을 해 볼까?

"그렇기에 저는 이것이 대한민국 경제 발전에 큰 한 걸음이 될 거라 자신합니다. 해외! 로 유출된 자본을 한국으로 돌아오게 만드는 겁니다!"

해외를 극단적으로 강조하며 설명을 이어 가는 나.

나는 큰소리로 외쳤다.

"앞으로도 세론은 해외! 공장들이 한국으로 돌아와 경제 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러니 해외 공장 가진 회사들아?

빨리 연락 좀 해 줘라.

같이 돈 좀 벌자고.

*

유림 전자 중국 공장의 한국 복귀로 생기는 투자 효과와 일자리 창출, 거기에 생산비 절감으로 인한 경쟁력 확보 등등, 부정적인 내용은 싹 빼고 오직 긍정적인 점만 집중 조명 하여 기사화한 기자들.

당연하게도 이 기자들은 모두 유림 전자 쪽에서 진작부터 약을 쳐 온 기자들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유림 전자와의 협약식을 성공리에 마치고 기사화까지 되자 눈치를 보던 회사들로부터 하나둘 연락이 온다.

그 회사들의 공통점은 모두 유림 전자처럼 중국에 생산 공장을 두었지만 늘어나는 중국의 인건비 부담에 동남아 이전을 준비하던 회사들이라는 것.

당연하게도 이 회사들 모두 유림 전자처럼 아무 탈 없이 먹을 수 있는 회사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거나 다 먹을 수는 없지.

나는 김덕배가 건네준 리스트를 보며 말했다.

"연 매출 46억. 이건 패스."

46억은 너무 적잖아.

저런 중소기업까지 전부 다 받아 주면 사방 천지에 스켈레톤을 다 깔아 두고 쉴 새 없이 오가며 관리해야 한다는 소린데, 아무리 프로그래머가 있더라도 그건 너무 비효율적이다.

그러니 어느 정도 검증된 기업만 골라서 받는 게 효율로 보나 비용으로 보나 훨씬 안정적이고 편한 선택.

"그다음, 보자. 커피 머신?"

커피 머신만을 주력으로 만드는 회사인데 규모도 제법 크고 한국에서도 나름 인지도가 있는 회사.

나쁘지 않네.

커피 같은 기호 식품은 사람들이 기계 하나를 골라도 브랜드를 제법 따진단 말이지.

SR이 커피 머신 라이선스를 사서 세계적인 브랜드로 성장시킬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솔직히 말해서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SR 전자의 빈틈을 메우는 데 딱 안성맞춤인 회사.

"이건 오케이."

그렇게 후보군을 대충 정리한 나는 김덕배에게 리스트를 건네주며 말했다.

"여기 체크한 회사들하고 미팅 잡고 이야기해 보세요. 아. 그리고 노조랑 협의 안 된 회사는 무조건 패스입니다. 기억하시죠? 영진 테크."

유림 전자와의 협약식 이후 연락 온 회사 중 하나로, 자동화 기계를 만드는 회사였다.

매출액은 유림 전자와 비슷한 규모인 데다 공장도 한국과 중국으로 나뉘어 있다는 점까지 똑같아 마음에 들었었지.

그래서 그쪽 대표와 좋게 좋게 이야기를 마무리하며 계약 성사 직전까지 갔지만, 거기서 노조 문제가 터져 버렸다.

유림 전자 노조는 그래도 비교적 협조적이어서 계약서에 명시하는 정도로 넘어갔지만, 영진 테크 노조는 말이 씨알도 먹히지 않았던 거다.

스켈레톤 공장이 세워지면 야금야금 중국 공장뿐만 아니라 한국 공장의 일감까지 빼앗아 갈 거라며 결사반대를 외치던 노조.

나는 그 모습을 보고 모든 계획을 백지화해 버렸다.

"잘못하면 우리까지 엮여서 귀찮아질 게 뻔하잖아요? 그러니 그런 상황이 벌어질 건덕지 자체를 남기면 안 됩니다."

김덕배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무슨 말인지 이해했습니다."

"좋아요."

"그런데 대표님, 또 다른 회사로부터 제안이 왔는데······."

"오늘은 일단 이걸로 마무리하고, 내일 보고 때 한 번에 몰아서 주세요."

"그게 아니라, 이게 한국 회사가 아니라서 말입니다. 이런 회사들은 어떻게 처리할까요?"

"한국 회사가 아니라고요?"

"미국 회사입니다. 주력은 모니터 제조고요."

이야.

이제는 하다 하다 해외 기업까지?

"매출은 어떻습니까?"

"매출 같은 나머지 조건은 전부 부합합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콜. 해외 기업도 조건 부합하면 만나 보죠."

내 목표는 해외에 있는 공장들을 한국으로 들여와 일자리 문제 없이 돈을 버는 것.

그러니 그 대상을 꼭 한국에 국한할 필요는 없단 말이지.

오히려 해외 기업을 한국으로 들여오면 더욱더 깔끔한 거래가 가능하다.

영진 테크처럼 한국 노조와의 갈등 자체가 없을 것이며, 무엇보다 타이틀로 걸기에도 좋지 않나.

SR 전자 해외 기업 투자 유치.

캬.

얼마나 듣기 좋아.

해외투자라는 단어만 들어도 뭔가 경제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은 기분이잖아?

"알겠습니다."

나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자. 계속 가자고요."

*

유림 전자를 시작으로, 제안이 온 해외 공장들 중 계약까지 성사되어 협약식을 연 회사만 모두 10여 개.

하나하나가 모두 한국에서나 아니면 해외에서나 나름 인지도와 규모가 있는 회사이기에, 계약한 공장의 매출 규모만 해도 한 해에 8천억이 넘는 수준이었다.

물론 세론은 시설물 관리 업체로 들어가는 거기 때문에 그 8천억 매출 중 세론의 몫이 그리 크지 않지만, 그 매출 비중 대부분이 순수익이란 말이지.

말이 좋아 시설 관리지, 사실상 협력사들에게 월급 받고 스켈레톤을 빌려주는 꼴이나 다름없으니까.

덕분에 이 10개 회사만으로도 1년에 수백억에 가까운 인건비를 가장한 관리비를 벌 수 있을 거라 예상되는 상황.

이것만 해도 상당한 이익인데, 거기에 더해 한국 기업의 유턴과 해외투자 유치로 인해 한국 내 분위기까지 좋다.

나는 신문에 적혀 있는 SR 전자와 전자 회사의 협약식에 대한 내용을 읽어 보았다.

"단기간에 10개의 중견 회사와 협약식을 맺으며 한국 유치를 확정 지었고, 그로 인한 직간접적인 경제적 효과는 최소 수조 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되며······."

나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이거 우리가 부탁한 것 아니죠?"

"아닙니다."

우리 입김 없이 기자가 알아서 적은 기사라는 말.

"하긴. 이런 해외투자 유치 소식이 어디 자주 있는 일도 아니고."

공장 부지 매입과 설비투자, 거기에 관리인에 대한 일자리 효과에 법인세로 생기는 세수 증가를 생각하면 수조 원의 경제적 효과는 과장한 감이 없지 않아 있으나, 분명 큰 성과인 것은 사실.

거기에 한국에 대한 외국 기업의 직접투자나 해외 공장의 한국 복귀는 한국이 경제 성숙기에 들어서며 고임금 시대를 맞이한 이후로 거의 가뭄에 콩 나듯 있는 수준이었으니 기자가 이런 기사를 작성할 만도 하다.

"그런데 대표님, 슬슬 전자 제품 업계에서 불만 어린 목소리가 조금 나오는 것 같습니다."

"불만이요?"

"그러니까, 한국에만 공장을 둔 회사는 역차별을 받는 게 아니냐는 말이······."

한국의 전자 제품 산업이 완전히 박살 난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국산 제품을 직접 생산하는 업체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캠핑용 전자 제품을 만드는 회사나, 유림 전자처럼 창문형 에어컨을 만드는 등 각자의 특기를 잘 살려 여전히 살아남은, 이른바 브랜드를 지닌 회사들.

그런 회사들 중엔 정말로 한국에만 공장을 가지고 있는 회사들도 있기는 있지.

그래서 더욱 어이가 없다.

"아니, 이 정도 배려 해 줬으면 됐지, 얼마나 더 해 달라는 겁니까?"

그 회사들의 공통점은 브랜드 가치를 높여 중국산 대비 매우 높은 가격으로도 충분히 경쟁력 있는 업체들이라는 거다.

유림 전자만 해도 중국산보다 두 배나 비싼 창문형 에어컨을 국산이라는 이유로 잘만 팔아 치우고 있지 않나.

즉, 내가 지금 유치하고 있는 공장들과는 영업 포지션 자체가 완전히 다르다는 뜻.

"어이가 없네. 그냥 무시하세요."

사양산업을 골라 진출하고 아무 탈없는 해외 공장들을 국내로 들여오며 유치하는 등 정말 욕 안 먹으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별걸 다 가지고 난리야.

"아예 그냥 한국 공장과의 협업은 국내 노동자의 일자리 문제를 야기할 수 있어 절대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공표해요."

이번 기회에 우리는 한국인의 일자리 피해를 절대 좌시하지 않는다 못 박아야지.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협력사들이 공장 부지를 알아보고 있는데, 어디가 좋을지 저희 의견을 수렴하겠다고 합니다."

"우리 의견을?"

하긴.

최대한 세론과 가까워야 더욱 수월하게 공장을 돌릴 수 있을 테니까.

"대충 이 근방에 알아서··· 어? 잠깐만."

기사가 실릴 만큼 10개 협력사의 투자 규모는 상당한 수준이다.

투자 지역 선정 공고만 내도 신규 투자 유치에 혈안이 된 지자체들이 입에 거품을 물고 달려들 정도로.

내가 해외투자 유치란 타이틀을 적극 사용 하는 것처럼 지자체와 지자체의 장들도 이번 투자를 자신들의 치적으로 삼을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지금 이걸 사실상 내가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소리잖아.

나는 눈을 빛내며 말했다.

"이것 봐라."

그럼 이걸 빌미로 지자체들과 협상을 벌여 양보를 얻어 낼 수 있지 않을까?

아니면 더 나아가 한 지역에 협력사를 모조리 몰빵 해서 그 지역 경제를 세론에 의지하도록 만드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다.

"포항이나 울산처럼 되지 말란 법 없지."

포항 하면 한국 제1의 제철소가 떠오르고 울산 하면 중공업이 떠오르는 것처럼, 지역의 대표 기업이 되면 얻게 되는 영향력은 어마어마하다.

당장 저 두 도시의 정치인은 저 기업에서 찍는 인물로 나온다는 소문이 돌 정도니까.

세론이라고 해서 못 할 게 뭐 있나.

앞으로 협력사는 무궁무진하게 늘어날 텐데.

"그래. 기왕 할 거면 확실하게 해야지."

내가 아무리 사람들 눈치를 보며 착한 기업인 척 세론을 키워도, 결국 덩치가 커지면 적은 생기기 마련.

그때 세론에 절대적으로 의지하는 지역이 있다는 건 그 자체만으로도 세론이 가질 수 있는 크나큰 무기다.

여차하면 방 뺄까, 협박 한 번에 지역 주민들이 전부 들고 일어날 거니까.

"좋아. 몰빵 간다."

세론이 빠지면 지역 경제에 마비가 올 정도로 의지하게 만드는 거다.

결정은 났으니 이제는 어디에 몰빵을 할 건지 결정할 차례.

"어디가 좋을까······."

나는 머릿속으로 한국에 있는 적당한 규모의 도시들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규모가 있는 도시. 동시에 지역 대표 기업이 없는 도시."

내세울 만한 대표 기업이 없는 도시에 협력사들을 이끌고 개선장군처럼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며 들어가는 거다.

"거기에 이왕이면 항구와 가까워야 좋은데."

수출은 물론 해외 기업을 유치하는 데 있어서 항구의 역할은 절대적이니까.

그렇게 한참을 고민하던 내 머릿속에 떠오른 한 도시.

"오!"

그야말로 내가 생각하는 모든 조건이 딱 들어맞는 최고의 도시다.

입주해 있던 대형 회사들이 줄줄이 나자빠지자 대량으로 실직자가 발생하여 고용 위기 지역으로 선정되었고, 그로 인해 상권까지 무너져 가는 무주공산의 도시이자, 동시에 바로 옆에 항구까지 끼고 있는 도시.

나는 환하게 웃으며 김덕배에게 말했다.

"김 사장님, 차 준비해 주세요. 군산으로 갑시다."

그 도시는 바로 군산이었다.

34화

# 34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