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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토벌 (1)

이틀 전의 사건에 관한 얘기는 귀빈관에 머물고 있던 모든 귀족들의 귀에 들어갔다.

자연스레 소란이 일었다.

드라센의 심처에 마법사가 나타났다!

불과 벼락이 쏟아지던 광경을 본 목격자가 너무 많아 숨길 수도 없었는데.

바로 이어진 영주의 정식 발표가 그들을 더욱 놀라게 만들었다.

콘넬 자작가의 대리인, 토이네 란델이 마법사였다!

"그게 무슨? 말이 돼?"

"하지만 증거도 다 있다더군."

"트리안과 에쉬남에서 증인도...."

"허, 그럼 모이네 콘넬 자작이 마법사와 손을 잡았다는...."

"예끼, 거기까지 나가진 말자고. 듣자 하니 마법사가 변장을 했다는 말도 있고...."

상황이 이러하니 사냥제가 하루 정도 미뤄졌다 해도 문제가 될 리 만무했다.

심지어 누군가는, 오히려 바로 다음날 사냥제를 시작한다는 소식에 더 놀라워하기도 했다.

"아니, 그런 일이 있었는데 고작 하루 미루고 바로 시작한다고?"

"뭐, 우리야 나쁠 것 있나."

"그래도 마법사가 관련된 일인데."

"에녹 각하께 보고가 들어갔다는군. 우리야 일단 지시를 기다리면 될 일이야."

그러나 이곳에 모인 귀족들은 6성 기사이자 왕국의 북부를 지키는 방벽이라 불리는 변경백, 에녹 트리안의 지배력을 30년 동안 겪어 온 이들이었으니.

드라센이 보고 후에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들의 주군을 믿고, 드라센이 주최하는 축제의 시작을 웃으며 맞이할 뿐이었다.

"드라센은 올해 겨울을 좀 편히 지나겠군."

"뭐,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거지."

"그렇긴 하지만."

북부 산맥의 몬스터들을 사냥하는 이벤트, 사냥제.

물론 그것이 겨울의 몬스터 웨이브가 시작되기 전에 자잘한 몬스터를 미리 토벌하여 그 영향을 줄이기 위함이라는 것은 귀족들 모두가 알고 있었다.

다만 이번 사냥제에는 무노 드라센의 성년식으로 인해 오랜만에 많은 귀족이 모였고, 그 덕에 십수 명의 기사들이 더해졌으니 토벌의 위험성이 상대적으로 낮았다.

그렇게 된다면.

"좀 괜찮은 놈을 잡아야 할 텐데. 막토 가죽이나 여러 벌 얻으면 쏠쏠할 텐데."

"그래도 3등급 이상은 피해야지."

"당연한 말을. 비싼 놈이 걸리기를 기도하자고."

"그런데 드라센에서는 잡은 몬스터의 등급으로 평가해서 상금을 준다는데?"

"예끼, 이 사람. 폭식의 기사가 있는데, 그 상금이 누구 몫이겠나?"

"아니, 아니지. 자네가 오히려 모르는군. 상금은 오직 손님들을 대상으로 준다는 거야. 드라센은 순위에 들어도 제외하고."

"아. 그럼 3등급 정도는 노려 볼까? 함정을 파고, 우리가 힘을 합치면 3등급도...."

"그래. 서두르자고. 이 시기에 북부 산맥 초입이라면 3등급도 많지는 않을 거야."

매해 겨울 일어나는 몬스터 웨이브에서는 심할 경우 5등급 트롤 같은 괴물이 나올 때도 있었지만, 그런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애초에 몬스터 웨이브의 본질은 겨울의 북부 산맥에서 먹이를 구하지 못하는 약한 몬스터들이 남쪽으로 내려와 인간들을 공격하는 현상이었으니까.

그래도 매해 희생자는 생겨 왔으니, 드라센 전체 전력의 두 배 이상의 기사들이 투입되는 사냥제는 그런 피해를 사전에 크게 줄일 수 있는 기회나 다름없었다.

자연히.

"자, 신나게 때려잡아 보자!"

올 초부터 독행을 허락받았던 무노는 아주 신나 있었다.

가문에 도움이 된다는 게 뿌듯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다른 이유가 더 컸다.

"몬스터 놈들한테 스트레스를 죄다 풀어 주마!"

사냥 자체에 강렬한 충동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중세의 귀족들이 사냥에 목매던 게 이유가 있는 거였어.'

현대 문명에 비하면 아무런 오락거리도 없는 따분한 세상에 와서야 깨달았다.

이런 환경에서는 그나마 즐길 만한 게 사냥밖에 없다는 것을.

게다가 그게 가문에 도움이 되기까지 한다니, 들뜨지 않는 것이 이상할 노릇.

물론.

"공자님, 천천히...!"

"저희가 느립니다!"

홀로 나서는 것은 아니었기에 마냥 신나 있을 순 없었다.

그의 뒤에, 사냥감의 사체에서 필요한 부분을 추려내고 운반할 병사 열두 명이 뒤를 따르고 있었던 것.

독행이라 함은 다른 기사의 동행 없이 나서는 것을 말함이지, 결코 홀로 외로이 사냥에 나서는 것이 아니었다.

초인들이 다수 존재하는 이 세상에서, 이능이 없는 병사들은 사실상 최소한의 치안 유지 능력을 갖추고 잡일을 도맡아 하는 인부와 같은 것이었으니.

수레를 끌며 그를 따르는 열두 명의 병사 중 절반은 전투보다는 도축에 쓰일 만한 칼을 차고 있었다.

물론 드라센에서는 병사들에게 기본 강체술을 보급하고 훈련을 시키고 있지만, 실제로 그중에서 각성을 하는 이는 극히 드물었으니 보조용 인력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지금은 평상시의 절반도 안 되는 숫자.

사냥제에 참가한 다른 귀족 쪽에도 병사들이 붙어야 함에 따라, 기사 한 명 당 붙는 병사의 수도 확 줄어 버린 것이다.

자연히.

우당탕탕.

"고, 공자님!"

산길에서 수레를 끄는 것부터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하...."

버리고 갈 수도 없고.

신나게 산길을 달리던 무노는 다시금 병사들에게 돌아가 비탈길 아래로 굴러떨어질 뻔한 수레를 끌어 올렸다.

쿵.

"가, 감사합니다."

병사들 조장, 롬의 피곤한 얼굴을 보는 순간에서야 무노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였다.

씁.

"아냐, 내가 너무 서둘렀네. 천천히 가지."

고작 이틀 전에 벌어진 마법사와의 결투, 그 전에 치른 카리나와의 대련.

그 두 번의 전투를 겪으면서 본의 아니게 투쟁심이 끓어올라 가고 있었다는 걸 이제야 자각한 것이다.

쩝.

'마법사를 잡은 지 이제 이틀. 놈들이 다시 손을 쓰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고.... 이럴 때라도 스트레스를 풀어야 하는데.'

아쉽기는 했지만, 괜히 서둘렀다가 병사들을 고생시켜서 좋을 것은 없다.

이들도 자신이 지켜야 할 가문에 속한 식구들이니까.

"급할 건 없지. 그래. 내가 맡은 경로를 천천히 훑으면서 후환이 될 만한 몬스터들을 제거한다. 그거면 돼."

병사들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말이었다.

'성격이 조금 급해진 것 같아....'

악마포식자의 특성 때문일까, 아니면 애머스를 쥐어짜 삼킨 마기때문일까.

이 문제를 스스로 자각하는 걸 보면 일시적인 현상 같기는 했지만, 의식을 나눌 수 있다는 특기만 믿고 안일하게 굴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애머스를 잡고 얻은 것은 부작용만이 아니었으니.

우드득.

가볍게 쥔 손에 들어가는 힘은 분명 그전과 확연히 달랐다.

적어도 2할 이상의 힘이 증가한 것이다.

'근력뿐만 아니라 모든 역량이 전체적으로. 흐....'

자연스레 미소가 나왔다.

힘, 순발력, 감각의 모든 면에서 2할 이상 성장했으니, 실제로 전투력은 그 전에 비해 거의 두 배 수준은 되지 않을까 짐작하고 있었다.

다른 강체술사들이 각고의 노력을 거듭해 단련해야 겨우 이룰 만한 성장을 고작 마법사 하나 잡은 것으로 달성한 것이다.

물론 1성의 기사가 2서클 마법사의 마기를 통째로 잡아먹은 것이 '고작'이라 할 수 있겠냐마는, 악마포식자의 특성을 가진 그에게는 그리 어렵지도 않은 일이었다.

'빨리 그놈들이 더 왔으면 좋겠어.'

자연히 이런 생각이 들 정도로.

그런데.

"고, 공자님."

"음?"

"저, 저희가 잘못했으니, 노여움을 푸십시오. 최대한 빨리 따라붙겠습니다. 늦어지게 만들어서 죄, 죄송합니다."

"죄, 죄송합니다."

갑자기 병사들이 이상한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어?

'얘들 왜 이래?'

온몸을 덜덜 떠는 롬의 모습과 그 뒤쪽 병사들의 새파랗게 질린 표정에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는데.

"나, 화 안 났는데?"

"다, 다 저희 잘못입니다. 그러니 제발."

특히 가장 가까이 있는 롬은 정말 조금이라도 뭐라 하면 지릴 것 같았다.

'왜...?'

당혹스러웠지만, 신체 능력이 상승한 만큼 좋아진 무노의 시력은 이내 롬의 파란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주목하게 만들었다.

스산하게 웃고 있는 얼굴과 입가에 삐져나온 유난히 빛나 보이는 송곳니.

흠칫해서 스스로의 몸을 내려다보니, 팔뚝과 주먹에는 검붉은 핏줄이 튀어나와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푸스스.

자신도 모르게 힘이 들어간 발치 부근에서 누렇게 변색되어 가는 풀들까지.

'이런....'

왜 이렇게 된 건지는 직감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미처 소화하지 못한 애머스의 마기가 몸 밖으로 슬슬 삐져나오고 있는 것.

부작용은 결코 살짝 급해진 성격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지만, 당장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이 모습이 병사들에게 어떻게 보일지 생각해 보니, 어떻게든 수습을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순간, 적당한 핑곗거리가 보였다.

"너희한테 화낸 것이 아니라...."

"제발...."

"...저것들 때문이다."

"...예?"

파바박.

텅.

롬이 다시 고개를 치켜드는 순간, 무노는 그대로 쏘아지듯 비탈 위쪽의 수풀을 향해 뛰어올랐다.

그리고.

"키엑!?"

"반갑다, 몬스터. 그러니...."

언덕 위에서 자신들을 습격할 기회만 노리고 있던 고블린 떼를 코앞에서 마주했다.

"...죽어라."

쩌어억.

무리의 가장 앞에 선 고블린 세 마리가 대검의 일격에 그대로 반 토막이 났고.

"캬악!"

"끼에에!"

나머지 고블린들이 놀라서 흩어지자, 무노가 그들 사이를 그대로 파고들었다.

'남은 마기부터 다 털어 낸다!'

우드드득.

사실 고블린은 죽여 봤자 얻을 것이라고는 놈들이 쓰는 독침의 마비독 일부밖에 없다.

게다가 잘 훈련된 병사라면 제대로 된 장비만 있어도 대여섯 마리는 상대 가능한, 괴물 아닌 괴물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고블린 떼를 상대로, 무노는 잠깐이나마 '가속'까지 써 가면서 대검을 휘둘렀다.

굶주림을 참아 온 끝에 위험을 무릅쓰고 인간을 사냥하려던 불쌍한 고블린 떼는 그날 끔찍한 재앙을 마주했고.

콰아아아아앙!

순식간에 전멸했다.

"...그, 독침도 멀쩡한 게 없습니다. 전부 박살이...."

"으음. 내가 너무 흥을 냈나 보네. 미안하군."

"아, 아뇨. 미안하실 것까지야...."

고블린 50여 마리의 사체를 확인한 병사들은 어색한 웃음으로 주춤 물러났다.

'어째 더 무서워하는 것 같네.'

생각처럼 수습이 되지 않은 듯해서 쓴웃음이 나왔지만 이 정도만 해도 상관없었다.

자신의 악마 같은 모습을 보았을 때 병사들이 느낀 공포가 미지의 존재에 대한 두려움이었다면, 지금은 압도적인 강자에 대한 것으로 바뀌었을 터.

괜히 이상한 소문이 퍼지는 것보다야, '난폭한 도련님이 몬스터를 학살한다.' 수준의 소문이 나는 것이 나았다.

'마기도 다 털어 냈고.'

언젠가 드라센 대검술을 사용할 때 쓰려고 억지로 붙잡아 두었었던 마기였는데, 이젠 그게 바보짓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악마의 부산물로 여겨지는 몬스터들에게서는 정작 별다른 마기를 얻을 수 없다는 것도.

'마기는 내가 소화할 수 있는 수준만 삼킨다. 그걸 깨달은 것만으로도 충분해.'

다시금 기준을 세운 후에, 무노는 조금 더 깊은 산속으로 이어지는 길 너머를 바라보았다.

"고블린에게선 건진 게 없으니, 오늘은 조금만 더 깊이 들어가 볼까?"

"...예에?"

병사들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이 보였지만.

그들의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건 어렵지 않았다.

"내가 뭘 사냥하건 간에, 전리품 절반은 너희들 준다."

"예?!"

"그러니 힘 좀 내자!"

"예, 예! 알겠습니다!"

"공자님! 만세!"

"우와아아!"

압도적인 힘을 가진 자에 대한 공포는, 그 강자가 아군이라는 사실을 인식시켜 주는 것만으로 사기로 바뀐다.

인간 세상과 그 밖의 세상을 구분하는 대륙 북쪽의 장벽, 북부 산맥의 초입에서 무노와 일행은 좀 더 힘차게 산을 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날.

"으라아압!"

쩌어어억.

"꾸에에엑!"

무노의 거대한 대검은 거대 뿔 멧돼지, 막토를 그대로 반 토막 냈고.

"자, 또 간다!!"

꽈아아앙!

"끼에에에엑!"

불과 얼마 전 고전했던 적들와 비슷한 규모의 놀 떼를 십여 분도 되지 않아 박살 냈다.

자신의 키만 한 대검을 미친 듯이 휘두르며 걸리는 모든 것을 썰어 버린 무노는, 그날 사냥에 참여한 기사들 중 가장 많은 수의 몬스터를 잡고도 순위는 여섯 번째에 그쳤는데.

가장 큰 이유는 너무 과격하게 박살이 난 사체 때문이었다.

덕분에.

드라센의 대공자는 자신보다 수준이 높은 몬스터도 거침없이 사냥한다.

항상 탈진하기 직전까지 몬스터를 학살하며, 영지의 안전을 지키려 한다.

그는 이미 나이를 뛰어넘은 훌륭한 기사다.

드라센의 천재 기사.

무노의 첫 번째 별명이, 사람들 사이에서 슬금슬금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23화. 토벌 (2)

"조용. 대기."

그 말 한마디에 병사들은 대답도 없이 자연스레 멈춰 섰다.

무노 역시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그대로 수풀 속으로 뛰어들었다.

얼핏 막무가내 같은 행동으로 보였지만,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마기가 느껴진다.'

사냥제가 시작된 지 벌써 사흘째.

그동안 경지에 비해 엄청난 성과를 만들어 낸 무노였는데, 그 과정에서 새롭게 얻은 것이 있었다.

'이렇게나 짙은 마기가 느껴지는데도 모습이 보이지 않고 냄새도 안 난다. 이 정도면 잡아먹을 만할 것 같은데.'

바로 '먹이'를 판단하는 감각.

몬스터는 신화시대에 일어났던 신마대전의 흔적.

좀 더 정확히는 악마들이 남긴 잔재라는 전설이 있다.

실제로 몬스터는 등급에 따라 진한 마기를 품고 있기도 하는데.

지난 이틀간 2등급에 해당하는 몬스터를 다섯 마리나 잡았음에도 실질적으로 그의 기량이 증가하는 느낌은 없었다.

그저 떨어진 기력을 도로 채우는 정도였을 뿐.

- 그것만 해도 어디냐? 우리 드라센 대검술의 고질적인 약점이 바로 전투 지속력인데, 적어도 마법사나 몬스터와 싸울 때는 그 걱정을 안 해도 된다는 뜻이니.

아버지의 말도 인정하지 않는 바는 아니었지만, 몬스터를 잡는 대로 성장하길 기대했던 그로서는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지금 느껴지는 마기의 양이라면, 얘기가 다를지도 몰랐다.

'최소 3등급. 거기다 이 정도로 흔적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은신을 주로 하는 몬스터.'

자연스레 떠오르는 이름이 있었다.

자이언트 보아.

- 숲에서 다른 생물의 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면 일단 조심하십시오. 놈이 다 잡아먹은 걸지도 모르니까요.

- 은신의 달인인 그 거대 뱀이 하늘이나 땅에서 갑자기 덮쳐들면, 웬만한 기사도 순식간에 전신의 뼈가 으스러져서 죽습니다.

군터 경의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살짝 소름이 돋았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미소만 나올 뿐이었다.

냄새도 기척도 느껴지지 않지만, 악마포식자는 나무 위에 걸쳐져 있는 20m는 될 듯한 거대 뱀의 형태를 완벽하게 포착하고 있었으니까.

'아주 좋아.'

기사의 별(星)이나 마법사의 서클처럼 몬스터들에게도 등급이 붙지만, 그것은 동급의 이능력자가 셋 이상 달려들어야 안전하게 잡을 수 있다는 의미로 매겨지는 것이다.

즉, 특출난 자가 아닌 이상 동급의 몬스터를 혼자서 잡을 수 없다는 뜻.

그렇기에 5등급의 스노우 트롤을 홀로 잡은 4성 기사, 라이언 드라센이 폭식의 기사라는 이름을 세상에 떨쳤던 것이다.

이틀간 2등급의 몬스터를 다섯 마리나 잡아 버린 무노의 성과가 주변을 놀라게 만든 것도 같은 맥락이었는데.

드라센의 천재 기사라는 별명은 그 일로 인해 퍼져 나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무노가 3등급의 몬스터까지 잡을 수 있다고 믿는 이는 거의 없었다.

그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고.

하지만 이놈은 경우가 달랐다.

'자이언트 보아는 단지 그 기가 막힌 은신 능력 때문에 3등급으로 평가되는 몬스터야. 충분히 가능해.'

촤르륵.

숲속으로 들어서자마자, 무노의 팔다리에서 검은 쇠사슬들이 사방으로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주변 환경과 확연하게 색이 다른 만큼 적의 눈에 띌 수도 있으니, 쇠사슬은 일단 바닥을 타고 움직였고.

이내 은밀하게 땅을 살짝 파고들었다가 다시 솟구쳐 자이언트 보아가 매달려 있는 나무를 타고 올랐다.

"흐음. 어. 디. 있. 을. 까...."

무노는 어색한 연기까지 해 가며 그 나무 아래로 걸어가 놈의 이목을 끌었다.

악마포식자의 감각은 적의 몸에 어린 마기를 완벽하게 포착하고 있었고.

이내 거대한 뱀의 머리가 그의 머리 위쪽으로 소리도 없이 다가오던 그때.

무노의 몸을 통째로 삼킬 수 있을 정도로 쩌억 벌린 뱀의 입 속으로, 네 가닥 쇠사슬이 파고들었다.

콰드드득.

"취이익!? 끅!?"

쾅. 쾅!

먹이를 삼키려다가 졸지에 몸 안으로 단단한 이물질을 들이게 된 자이언트 보아는 거칠게 발버둥 쳤다.

"합!"

그 발버둥과 고약한 노린내에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무노는 강제로 벌려진 자이언트 보아의 입을 똑바로 마주했다.

...아, 개징그러.

그러니까.

'그대로 잘라 주마.'

쿵.

수백 킬로, 아니 어쩌면 톤 단위에 가까울 괴물의 발버둥조차 일순간 버텨 내는 강렬한 진각과 함께.

우드득.

뒤쪽으로 크게 젖혀진 무노의 몸이 일순간 붉게 달아오르며 근육을 부풀렸다.

본래대로라면 그의 몸에 축적된 열량을 순식간에 소모해 버렸을 만한 괴력이, 지금은 마력을 바탕으로 발휘되었고.

그대로.

'바람 가르기.'

번쩍.

쩌어어어어억.

눈에 보이지도 않는 검격이, 자이언트 보아의 머리를 세로로 갈랐다.

파아아아아앙.

검이 휘둘러진 뒤 반 박자 늦게 충격파가 퍼지며 그 상처를 다시 터트려 버렸지만.

"끼에에에에엑!"

'젠장, 얕았다.'

터무니없이 거대한 놈의 머리 때문에 무노의 검격은 뇌까지 닿지 않은 것 같았다.

"흡!"

황급히 놈의 몸속을 파고든 쇠사슬들을 더욱 거칠게 움직여 보지만.

"캬아아아아!"

"큭!"

콰아앙.

고통에 못 이겨 발작하는 자이언트 보아의 움직임을 버티기에는 그의 몸무게가 너무나 가벼웠다.

"캬악!"

콰아아앙!

'젠장!'

주변 나무줄기에 연달아 처박히며 내장이 꼬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고통에 발작하는 뱀 몬스터의 움직임을 예측하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무노는 놈의 내부를 휘젓고 있는 쇠사슬 중 두 가닥을 그대로 빼내고.

쿵. 쿵.

주위의 나뭇등걸이나 땅을 디뎌 가며 어렵사리 균형을 잡았다.

"흡!"

그리고 간신히 타이밍을 맞춰, 다시 놈의 머리를 향해 뛰어올랐다.

그러나 그 순간.

"뒈져...!"

"캬아아악!"

무노는 거대한 뱀이 토해 낸 진득한 액체를 그대로 뒤집어 쓰고 말았다.

'빌어먹을.'

하지만 이미 전신의 근육과 마력을 쥐어짜 휘두른 비기, 바람 가르기는 그의 시야가 불쾌하고 끈덕진 액체로 가려진 와중에도 본래의 의도에 따라 번개처럼 놈의 몸을 베어 냈다.

쩌어어어어억.

이미 세로로 갈라져 있는 상처를 그 거대한 대검이 한 번 더 깊게 갈랐고.

파아아아앙.

음속을 넘어서는 검격이 만들어 낸 충격파가 조금 늦게 그 상처를 파고들었다.

"크. 크르...."

그에 20m에 가까운 거체가 하늘을 바라보듯 꼿꼿이 서서 부들부들 떨리다가.

쿵.

"큭."

정체 모를 액체를 뒤집어쓴 무노가 본능적으로 낙법을 사용해 바닥을 굴렀다가 다시 일어나는 순간.

쿠우우우웅.

거대한 괴물의 사체가 그대로 넘어가며 커다란 진동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런 거대한 괴물을 쓰러트린 이의 상태도 그리 좋지는 않았다.

"아이씨, 젠장."

온몸이 끈적하다.

눈을 뜰 수도 없을 정도로.

'독은 없다고 들었는데. 이건 뭐....'

마치 찐득한 거미줄을 뒤집어쓴 것처럼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방법은 있었다.

촤르르륵.

뱀의 내장을 휘저었던 쇠사슬들을 한 번에 회수하자, 불쾌한 찌꺼기를 털어 내며 그대로 줄어들어 팔다리의 보호대로 바뀌었다.

촤르르륵.

그러자마자 다시 한번 발출된 쇠사슬은 조심스레 움직이며 무노의 온몸을 뒤덮은 액체를 빠르게 털어 내기 시작했다.

의지에 따라 섬세하게 움직이는 쇠사슬이 발출과 회수를 거듭한 끝에 순식간에 무노의 움직임에 자유를 찾아 주었는데.

그 순간 무노는 결심했다.

"으, 냄새...."

오늘은 사냥 끝이다.

단순히 이 끈적하고 더러운 체액이 대검에 눌어붙어 무기를 둔하게 만들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기껏 3등급의 마수를 처리했는데, 성과가 미미했던 것이다.

물론 자이언트 보아의 비늘과 이빨. 가죽은 비싼 재료가 되겠지만, 그가 바란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이렇게 고생했는데.'

분명 마기가 진득하게 느껴지는 괴물이었는데, 내장까지 파고든 쇠사슬에서 흡수된 마기의 양은 기대치를 한참 밑돌았다.

물론 바람 가르기를 연달아 쓰고도 그리 피로하지 않을 정도로 마력이 충전되었고, 기량마저 미미하게나마 상승하는 기분이 들었지만.

그가 기대한 것은 겨우 이 정도 수준이 아니었으니.

쓰읍.

'다르다. 왜지?'

분명 자이언트 보아에게서 느껴진 마기의 총량은 2서클의 마법사였던 애머스보다 훨씬 많았다.

그런데 이 차이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이런 놈 열 마리를 잡아야 애머스 한 놈을 잡아먹은 수준과 비슷해질 것 같았다.

'아니, 그보다 못할 것 같기도....'

단숨에 성장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허무하게 깨졌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짝.

"이것만 해도 충분히 대단한 능력이다. 그래, 배부른 소리 하지 말자. 언제 쉽게 풀린 적 있다고...."

혼잣말로 스스로를 다독이며 한숨을 내쉬어 보지만, 그래도 결론은 마찬가지.

무노는 들이켠 숨을 뱉어 내며 버럭 고함을 질렀다.

"들어와!! 커다란 놈 잡았으니까. 오늘은 이걸로 끝낸다!"

- 예!!

수풀 바깥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들이 유독 힘차게 느껴지는 것은 결코 착각이 아닐 것이다.

"히에에...."

"이, 이걸...?"

"공자님 혼자?"

자이언트 보아의 사체를 본 병사들은 처음에는 기겁을 하다가 결국 놀란 눈으로 무노를 돌아보았다.

"챙겨야 할 부위는 알지, 롬?"

"예, 옙!"

병사라 불리긴 해도, 사실 그들은 만능 일꾼이나 마찬가지였으니.

드라센의 병사 경력만 7년인 롬은 능숙한 몬스터 도축업자이기도 했다.

'신호도 보내야겠는데.... 아, 젖어 있네. 젠장.'

무노는 끈적한 액체에 절여진 폭죽들을 보며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사냥을 하고 있는 이곳의 양옆 구역에는, 악마교의 혹시 모를 수작에 대비하기 위해 군터 경과 카리나가 배치되어 있을 터였다.

그것도 원래 지정된 구역보다 한참 이쪽에 가까운 곳에 말이다.

'군터 경은 그렇다 쳐도, 카리나는 사실상 사냥제 성과를 포기한 건데. 나중에 다 보답해야겠지.'

그 귀하다는, 속도에 특화된 3성 기사.

그녀라면 동급 이상의 마법사와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고 판단한 무노가 원조를 청했을 때.

- 상황은 알겠어요. 하지만 그래도....

- 저! 할게요!!

- 언니!?

로안나 공녀의 놀란 표정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만큼 적극적으로 나서 준 카리나가 고맙긴 했지만.

부르르.

'솔직히 아직도 좀 무서운데....'

끌리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만에 하나라도 더 깊게 얽혔다가는 평생 잡혀 살 것 같은 예감도 들었다.

예쁜 만큼 손이 좀 매운 그녀였으니까.

'아니, 기사들 팔다리를 싹 다 날린 걸 그냥 손이 맵다고 표현하는 나도 이미 그른 건가? 그래도 적한테 한 거였으니까....'

이 말랑하면서도 서늘해지는 마음이 무엇인지, 모태 솔로는 명확히 정의 내리기가 힘들었다.

"하...."

그녀에 대해 생각하면 자꾸 한숨만 나오니, 지금은 그냥 당면한 문제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롬. 이 폭죽, 이 상태로도 터질까?"

괜히 열심히 일하고 있는 만능 일꾼을 부르는데.

"아, 또 신호를 보내십니까? 다른 분들은 안 그러신다는데, 공자님은 굳이 왜 때마다...."

물론 악마교의 습격을 대비해 동료들과 긴밀히 연락을 주고받기 위함이었지만.

롬에게 그렇게 대답할 수는 없었다.

"그런 게 있어. 그러니까 이거나 보고 말해 줘. 될까?"

"...좀 말려야 할 것 같긴 합니다만."

"역시 그렇겠지?"

쓰읍.

혹시나 해서 물어본 건데, 역시나였다.

한숨을 푹 쉬고 돌아서려던 그때.

무노는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지는 느낌에 자신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이건...!?'

24화. 사냥감이 미끼를 물었다

대체 언제부터였을까.

자신이 있는 곳을 중심으로 사방에 은밀하게 깔린 마기가 이제야 느껴졌다.

'...왔구나.'

그런데 느껴지는 마기의 수준이 생각보다 너무 높았다.

애머스를 잡았을 때, 대외적으로는 아버지와 그레먼 경이 마법사를 처치한 것으로 공표했었다.

그러니 놈들이 다시 자신을 노린다면 애머스와 비슷한 수준의 적이 찾아올 줄 알았는데.

'그놈하곤 비교가 안 된다. 3서클... 아니, 어쩌면 4서클? 에이, 설마....'

확실한 것은 악마포식자의 능력으로도 잘 가늠이 되지 않는다는 거였다.

"공자님?"

"아, 아냐. 이 끈적이는 것 때문에 기분이 나빠서. 작업 계속해. 자네들도 이 타액 조심하고."

무노는 그렇게 롬의 어깨를 두드리며, 품 안에서 다른 폭죽을 꺼내 슬쩍 건넸다.

롬은 의아한 눈으로 무노를 쳐다보다가도, 그가 스치듯 입술에 올린 손가락을 보며 살짝 인상을 굳혔다.

"난 저~쪽 퇴로에 놓친 몬스터가 있는지 좀 살펴보겠네."

무노는 다소 과장된 몸짓으로 숲의 바깥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리고.

"아, 예. 당연히 그러셔야죠."

그 연기에 적당히 호응해 주는 듯한 롬이 자신의 의도를 알아들었기를 바랐다.

'그놈들이라면, 목격자가 생기는 걸 원치 않을 거야.'

애머스의 행동으로 봤을 때, 놈들의 목적은 자신을 납치하는 것이다.

그러니 자신이 먼저 무리에서 떨어진다면 굳이 병사들을 건드리지는 않을 터.

실제로 자신이 일행에게서 멀어질수록 주변의 마기 역시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마침 잘되었다는 것처럼 서서히 사냥감을 향해 조여드는 마기의 영역.

그 세밀한 컨트롤 자체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무노의 긴장감이 더욱 고조되었다.

'군터 경과 카리나에게 알려야 하는데....'

이렇게 가늠하기 힘든 적이 올 줄 알았으면, 아버지도....

'아니, 아니지.'

애초에 폭식의 기사가 자신의 뒤를 따라붙었으면 놈들이 접근을 안 했을 수도 있다.

그리고 마법사가 아무리 강해 봤자, 마도사가 아니라면 자신에게는 안 될 것이다.

...그리 믿어야 했다.

"퇴각 신호를 보내야겠는데...."

숲 밖으로 나오는 순간, 무노는 괜히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다른 폭죽을 꺼내 심지 부분을 벅벅 닦아 냈다.

롬에게 준 폭죽이 터지지 않을 수도 있으니, 이거라도....

푸스스스.

하지만 그 시도는 허무하게 실패로 끝났다.

심지를 당기자마자 화약에 옮겨붙었어야 할 불꽃이 그대로 꺼져 버렸고.

어느새 그의 주변을 싸늘한 냉기가 감싸기 시작했다.

'이런....'

인상을 구기며 마기의 근원지를 찾으려던 순간.

화르륵.

그가 쏘아 내려 했던 붉은빛이, 병사들이 있는 숲속 안쪽에서 하늘로 솟아오르는 것이 보였다.

'잘했다, 롬!'

그리고.

쩌저저저저정.

뒤이어 그곳에서 거대한 얼음 기둥이 솟구치는 것 또한.

- 아아악!

병사들의 비명 소리가 들려오는 순간.

"젠장!!!"

무노는 자신도 모르게 병사들이 있는 숲을 향해 쏜살같이 내달리기 시작했다.

'목격자가 없길 바라겠지.... 그래, 그러자면 다 죽여 버리는 게 가장 확실할 테고. 이런 멍청이!'

자책과 함께 가속도를 붙이자마자.

[얼어붙어라.]

소름 끼치는 목소리가 들려왔고, 동시에 형언할 수 없는 냉기가 사방을 휘감아 왔다.

쩌저저저적.

그러자 그의 몸은 내달리던 자세 그대로 얼어붙어 순식간에 커다란 얼음덩어리가 되었는데.

[고작 너 따위 놈 때문에 내가 직접....]

뒤이어 귀찮음이 노골적으로 묻어나는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순간.

콰아아아앙!

[...아니!?]

얼음 덩어리가 산산이 깨어지며 그 속에서 무노의 몸이 튀어나왔다.

"이 개자식이!!"

분노가 들끓는 와중에도 냉기 덕분에 그나마 머리를 식힌 무노는, 이번엔 얼음 기둥이 솟구쳤던 곳이 아닌 그 마력의 근원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병사들이 있는 곳에서 조금 더 북쪽으로.

- 마법사! 죽여!! 먹어 치워!!

치밀어 오른 분노에 따라 머릿속에서는 악마포식자의 목소리가 울리기 시작하는데.

'그래. 네 뜻대로 해 봐라.'

그 외침을 수용하기로 결심하는 순간.

여태 의식을 애써 분리하며 악마포식자를 통제하던 무노는 그 폭력적인 자아를 그대로 풀어 놓기 시작했고.

우드드득.

눈동자가 흰자위까지 검게 물듦과 동시에 한층 더 부풀어 오른 그의 몸이, 직전보다 훨씬 빠르게 목표를 향해 쇄도하기 시작했다.

"이런 미친...!?"

악마교 북부 지단 소속 4서클 마법사, 알튼 런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냉정과 평상심이 마법사의 덕목이라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1성 기사가 자신의 마법을 파훼하며 돌진해 오는 데에는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손짓 하나면 얼음 동상이 되어야 할 하수가 자신의 마법을 파훼하다니.

금속 조종 관련 능력을 가진 1성의 강체술사.

전해 받은 그 정보에 의하면 말이 안 되는 일이었으니.

그의 냉정한 머리는 자연스럽게 그럴듯한 이유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 사로잡는답시고 내가 무의식적으로 마력을 더 약하게 한 거야.'

그래, 그래야 말이 된다.

놈이 데리고 있던 쓰레기들을 처리할 때보다 마력을 적게 넣었던 탓일 거다.

그래서 그는, 다음번 마법에는 좀 더 많은 마력을 투자하기로 했다.

설령 사냥감이 죽어도 상관없다는 마음으로.

쿵.

'버텨라, 애송이.'

자신의 마법을 견뎌야 할 적에게 건투를 빌며 내리찍은 지팡이를 통해, 서슬 퍼런 냉기가 퍼져 나갔다.

마법사인 자신은 그 어설픈 정령사들과는 다르게 어떤 환경에서도 제힘을 낼 수 있지만, 그래도 이 추운 환경을 이용하지 않는 것도 바보짓이라.

쩌저저적.

다시금 퍼져 나간 얼음의 파도가 300여 미터 앞에서 돌진해 오는 애송이를 그대로 뒤덮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을 뿐.

콰직.

"캬아아악!! 죽인다!!"

콰드드득.

놈은 산만 한 얼음의 파도를 그대로 뚫고 돌진해 왔다.

머리에 성에가 끼고 얼굴이 파랗게 질린 상태로나마, 분명히 자신의 마법을 돌파한 것이다.

흰자위도 보이지 않는 검은 눈동자와 가죽 갑옷을 뚫고 솟아오른 거대한 근육.

마치 전설 속 북방의 야만전사와 같은 놈의 모습에 저절로 압박감이 느껴지는데.

'압박감? 내가?'

자신의 감정을 알아차린 순간 떠오른 알튼의 당혹감은 이내 분노로 바뀌었다.

"감히...!"

아무리 애송이라 하나, 강체술사라면 300m 정도 거리는 금방 좁혀 올 테니.

이것저것 따질 여유는 없었다.

'저놈이 특별히 냉기에 강한 거다.'

쿵.

그렇게 짧은 생각으로 판단을 내린 그는, 이번엔 적에게 불꽃의 파도를 쏘아 냈다.

콰르르르르.

방사형으로 퍼져 나가는 불꽃의 파도.

4서클의 마법사인 그가 주문 없이 사용할 수 있는 것 중 최고 수준인, 3서클의 마법이 적의 전면으로 쏟아졌다.

무려 4서클 마법사인 그의 최대치 마력을 싣고.

그것을 자각하는 순간, 아차 싶었다.

'이런....'

아무리 즉발성이라 한계가 있다 한들, 이 정도라면 3서클 마법사가 전심전력으로 준비한 마법보다 강한 것이었다.

마법사에 비하면 하찮은 이능력자인 강체술사, 그중에서도 하등한 수준의 기사 따위가 버텨 낼 수는 없을 터.

'사로잡아야 하는데!'

그런데 그때.

푸화학.

그 불꽃의 파도를 뚫고, 검은 쇠사슬 네 가닥이 튀어나와 근거리까지 닥쳐 왔다.

"헙!?"

반사적으로 발현된 투명한 보호막으로 막아 내긴 했지만.

콰드드드득.

쇠사슬을 한 번 튕겨 내는 순간, 왜인지 보호막이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어떻게...!?'

이유를 생각할 시간조차 없었다.

"뒈져라!"

그 쇠사슬이 튕겨 나간 뒤쪽에서, 전신이 붉게 달아오른 애송이가 뜨겁게 달궈진 대검을 벼락처럼 휘둘러 왔으니까.

눈앞이 하얗게 변했다.

직감할 수 있었다.

'죽는....'

자신의 장기인 마법을 제대로 써 보지도 못하고, 방심하다가 이렇게 허무하게 죽는다?

원통하고 또 원통하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그때.

콰아아아앙!

굉음과 함께 눈앞에서 검은 갑옷이 솟구쳐 올랐다.

"저를 두고 가시면 어떻게 합니까, 알튼 님."

새까만 갑옷을 입고 검은 투구까지 눌러쓴 남자.

"로만!"

"항상 그랬듯, 전위는 저에게...."

쾅!

"...맡기십시오."

콰콰쾅.

로만은 그대로 튀어 나가 적을 들이박았다.

형편없이 튕겨 나가는 적을 보고서야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는데.

'아니, 적? 놀라다니? 내가 저 애송이한테?'

이윽고 스스로 떠올린 생각에 분노한 알튼은 그대로 다시 마력을 끌어 올리며 고함을 질렀다.

"놈을 붙잡아! 내가 끝장낸다!"

"명을...."

쾅!

"...따르겠습니다."

로만이 다시 한번 적을 향해 달려드는 것을 보면서, 알튼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강의 주문을 떠올렸다.

'잘근잘근 빻아서 가루로 만들어 주마.'

까드득.

고고한 자존심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지금 이 순간만큼은 교단의 명령도 염두에 두지 않았다.

우우우우웅.

"마법사도 아닌 애송이 따위가!!"

고작 1성의 강체술사로 알려진 애송이가 대검과 기묘한 쇠사슬을 휘두르며 3성의 마기사(魔騎士)와 대등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지만, 그런 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금속 조종 능력 같은 게 있는 놈이라 하니, 무식한 쇠붙이를 휘두르는 싸움에는 확실히 유리할 테니까.

그저 찢어 죽여 마땅할 애송이가 끝까지 발악하는 모습이 불쾌할 뿐.

콰콰콰콰콰콰콰.

끌어 올린 마력과 속으로 외우는 주문이 호응하며 주변에 불꽃과 냉기의 폭풍을 만들어 가는 순간.

이글거리는 마력의 폭풍 사이로, 누군가 전장에 뛰어드는 것이 보였다.

꽈아아아앙!

"마기사!?"

콰아아아앙!

"마법사의 노예가 여길 어디라고!!"

커다란 할버드를 휘두르는, 중갑을 입은 기사였다.

"가십쇼...!"

쾅.

"...공자!"

쾅쾅쾅쾅쾅쾅.

"이놈은 제가 맡겠습니다!"

무식하기 짝이 없는 거대한 할버드를 미친 듯이 휘두르며 로만을 압박하는 중갑 기사의 등장에.

"크르르르."

쇠사슬 애송이는 맹수 같은 울음소리를 내며 다시 알튼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그 짧은 순간, 알튼이 느낀 감정은 황당함이었다.

어찌 그러지 않을 수 있을까.

대략 3성으로 추정되는 중갑 기사가, 고작(?) 쇠붙이를 조종하는 특이한 능력을 가진 1성의 애송이한테 자신을 상대하라 시킨 것이다.

직전과는 달리 만전의 준비가 되어 있는 자신을 말이다.

'아까 방심했던 모습으로 나를 판단했나 본데.'

이제는 로만이 없어도 두 놈 모두 한순간에 불태워 죽일 자신이 있었다.

"푸하하하하!"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어처구니없는 저 하루살이들에게 주제를 가르쳐 줘야 겠다.

먼저, 어느새 눈앞에 다가와 네 가닥 쇠사슬을 쏘아 내는 저 건방진 애송이부터.

"흩날려라, 냉염(冷炎)의 바람."

간단한 시동어와 함께, 주변을 휘감은 불꽃 폭풍의 일부가 애송이를 향해 뻗어 나갔다.

일부라 해도 4서클의 마법이었으니, 놈이 버텨 냈던 3서클의 즉발성 마법 따위와는 차원이 다른 마도(魔道)의 이치가 담긴 공격이었다.

순리대로라면 섞일 리 없는 불꽃과 냉기와 바람이 공존하는 파멸의 마법.

외신(外神)의 선택을 받은 자들만이 배울 수 있는, 세상의 섭리를 무시하고 비웃고 비트는 위대한 진리가 닿은 진짜 마법의 조각.

그것이 놈을 단숨에 흩어지는 잿빛 얼음 조각으로 만들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 믿음대로.

콰콰콰콰콰.

"큭!"

돌진해 오던 놈은, 그 기세에 휩쓸려 뒤쪽으로 날아갔다.

하지만.

"크와악! 죽인다! 마법사!"

놈은 이내 멀쩡한 모습으로, 아니 더 덩치가 부풀어 오른 듯한 모습으로 다시 한번 달려오기 시작했다.

"무슨!?"

네 가닥 쇠사슬이 놈의 전면으로 뻗어 나오는 순간, 고양된 알튼의 감각은 자신의 마법이 확연히 반감되며 흩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 순간 깨달았다.

'저 쇠사슬, 아티팩트다. 그것도 대(對)마법사용.'

어쩐지!

저 애송이가 여태 마법을 버텨 온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하지만.

"흥. 정령사가 만든 아티팩트 따위...!"

분명 한계가 있을 것이다.

그런 걸 가지고 있다고 해서 아무나 고위마법사를 상대할 수 있다면, 지금의 마도 제국이 존재할 리 없다.

거기다 저 아티팩트는 이미 몇 번이나 3서클과 4서클 마법의 일부를 삼켰다.

"아티팩트와 함께 폭사해라!!"

화르르르륵.

완성된 냉염의 불꽃이 절반이나 투자된 마법의 폭풍이, 다시 놈을 향해 전방위로 쏘아졌다.

설령 저 쇠사슬이 아이언 왕국 국왕이 가지고 있다는 대마법 갑옷 수준의 아티팩트라 한들, 사용자가 1성의 강체술사라면 이 힘의 여파조차 절대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 그래야 했다.

그런데.

콰콰콰콰콰콰콰콰.

한순간 붉고 푸른 폭풍에 휩쓸려 사라진 적의 모습에 미소 짓는 것도 잠시.

콰아아아아아앙.

- 죽인다!!!

투다다다다.

다시금 저 멀리서 쇠사슬을 펄럭이며(?) 달려오는 괴물의 모습이 보이는 순간, 알튼은 피부에 소름이 돋고 말았다.

"캬아아악!"

연신 고함을 지르는 놈의 몸은 전에 비해 한층 더 부풀어 올라 있었고.

그 피부에는 얼어붙고 불타오른 흔적이 가득해 보였다.

심지어 놈은 그 상처 위로 검은 혈관이 튀어나온 상태로 피까지 토해 내고 있었는데.

쇠사슬만큼은 너무나도 멀쩡했다.

아무리 마법사를 상대하기 위한 아티팩트라도, 이 정도로 마법을 먹어 치웠는데 아무런 변화도 보이지 않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아티팩트가 아니라....

'저놈이.... 마법을 먹는다!?'

믿을 수 없었다.

어처구니없는 일.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말이 안 되는 추론이라도, 가능성이 그것밖에 없다면 그것이 사실.

"미친!!!!"

자신의 상식을 뒤엎는 광경에 알튼은 마법사로서 다시 한번 분노했다.

'감히, 섭리 위에 군림하는 마법을 먹는다고?'

그 사실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불쾌했다.

다행히 놈의 꼴을 보아하니 이미 한계에 달한 듯했고.

"뒈져라!!!"

남은 냉염의 폭풍만으로 놈을 끝장낼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어쩌면 마법사의 천적으로 자라날지도 모르는 작은 새싹을 이 순간 뿌리 뽑을 수 있다.

'반드시 죽인다.'

그 생각에 알튼은 여력을 전부 쏟아부어 냉염의 폭풍에 더했다.

단순히 투지만으로 내린 판단은 아니었다.

짐승처럼 돌진해 오는 놈의 상태는 딱 봐도 이미 중상을 입은 듯했으니.

절대로 이 공격까지 먹어 버리지는 못할 것이라는 계산이 선 것이다.

그런데 그 순간.

푸슉.

아주 작은 소리와 함께 갑자기 목이 따끔해졌다.

'뭐...?'

말을 하려 했는데,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무심결에 목을 잡은 손에서 뜨거운 액체가 흘러 내리는데.

푸슈슈슈슉슉.

연달아 몸 전체에서 화끈한 느낌이 엄습하면서 마력이 산산이 흩어져갔다.

"끄...?"

반사적으로 돌아본 곳.

빛나는 세검을 든 비쩍 마른 여자가 살벌한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알튼은 그제야 자신의 온몸에 수많은 구멍이 뚫렸다는 것을 인지할 수 있었다.

'이 내가, 이렇게 황당하게....'

한순간에 흐려지는 시야 속에서.

"안 돼! 내 거야!!"

더 황당한 말을 들은 것 같았지만.

그의 의식은, 거기에서 끊기고 말았다.

25화. 그건 좀...

"안 돼! 내 거야!!"

촤르르륵.

일방적으로 두드려 맞은 분노를 담아 쇠사슬을 쏘아 내 보지만.

콰드득.

그 끝에 걸리는 것은, 이미 생명과 함께 마력도 빠져나가 빈 껍질이 된 마법사의 허약한 육체뿐이었다.

"크르르..."

그 허망한 결과를 확인한 무노, 아니 악마포식자는 사냥감을 가로챈 카리나를 향해 포효를 터트리려다가.

- 그만.

본체의 통제에 강제로 입을 다물었다.

"크르르."

잠시 짐승 소리를 내던 무노의 눈동자가 다시 흰자위를 드러내더니.

이내 부풀어 올라 있던 근육이 우드득 소리와 함께 제자리를 찾았다.

"으윽."

전신의 통증에 쓴웃음을 지은 무노가 카리나를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카리나 경."

- 갈가리 찢어! 

'조용히 해.'

그리고 마법사의 시체조차 박살 내길 원하는 머릿속 외침을 억지로 억누른 채, 악마포식자에게 '침습'을 허락했을 때의 상황을 다시금 복기했다.

'힘과 속도는 훨씬 강해지지만, 기술도 잊어버리고.... 안 좋은 점이 더 많아. 씁.'

어떻게 달리 활용할 방법이 없을까.

고민해 보던 찰나, 카리나의 목소리가 그 상념을 깨트렸다.

"...투쟁심이 과하면 독이 됩니다, 공자. 조금 전에는 위험했어요. 아무리 아티팩트가 있어도요."

그의 능력에 대해 모르는 그녀였지만, 핵심을 정확히 짚었다.

"압니다."

무노는 고개를 끄덕이며 경장 가죽 갑옷이 전부 터져 나가 드러난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근육이 부풀어 오르고 검은 핏줄까지 드러났던 몸.

마법을 억지로 삼키면서 무리한 탓에 전신이 삐걱대는 것 같았다.

'역시....'

악마포식자가 아무리 대단한 특성이라 해도 3단계 이상 차이 나는 마법사의 마법을 온전히 다 삼킬 수는 없다는 걸 체감한 것이다.

또한 이미 마법으로 '소모'된 마력을 삼켜 봤자, 당장 자신의 마력이 보강될 뿐 근본적인 기량 상승을 기대할 수는 없다는 것도 깨달았다.

'마법사가 살아 있는 동안 다루는 근원 마력을 흡수해야 하는 것 같은데.... 몬스터와 차이는 뭐지...?'

아쉬움이 많았지만, 일단은 자신의 능력에 대한 정보를 하나 더 알았다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할 듯싶었다.

생각을 정리한 무노는 잠시 정신을 집중했다.

'이건 이렇게....'

푸슈슉.

그리고 '가속'을 쓰느라 소모된 열량은 어쩔 수 없지만, 소모된 마력만큼은 이번에 흡수한 마력으로 도로 채우고 여분을 모두 흘려 보내기 시작했다.

애머스의 마력을 삼켰을 때와는 또 다르게, 지금도 꿈틀거리는 이 불용 마력은 당장이라도 처리하지 않으면 몸에 좋지 않을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으니까.

이 격전으로 약간이나마 성장한 걸까. 그 기운이 이미 흡수된 마력과도 충돌하는 느낌이 이제야 확실히 느껴졌다.

물론.

"으음...."

딱 불필요한 만큼만 조절해서 내보내는 것이 쉽지는 않았지만, 한번 물꼬가 트이자 요령을 잡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래도 전투 중에는 어렵겠는데.'

자신의 능력에 대해 아직도 알아 가야 할 것이 무궁무진하다는 사실이 새삼 즐겁게 느껴지는데.

그렇게 집중하느라, 코앞까지 다가온 푸른 눈동자를 그제야 눈치챘다.

흠칫.

"뭐, 뭡니까?"

당황해서 주춤 물러서는데, 카리나 역시 뒤늦게 살짝 얼굴을 붉히더니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공자, 아무리 봐도 공자가 사용하는 아티팩트라는 게...."

걱정스러운 마음에 그녀가 뭐라 말을 더하려 할 때.

콰쾅!

"흐아압!"

쩌어어억.

쿵.

요란한 기합과 함께, 무언가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이 흘깃 돌아본 곳에는.

"거참. 두 사람 다 절 도와줄 생각은 전혀 없었던 겁니까? 전우가 고생하는데 전장에서 연애하는 건 좀 아니지 않습니까?"

매우 지친 듯한 군터가, 두 쪽이 난 마기사의 시체를 뒤로한 채 능글맞은 표정을 지으며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게 아니라...!"

"...군터 경이 당연히 이길 줄...."

그에 무노와 카리나는 마치 짠 듯이 동시에 같은 말을 내뱉다가 서로 눈을 맞추며 말끝을 흐렸다.

둘의 얼굴에 어색한 웃음이 지어질 때.

"...아주 말도 딱딱 맞네요, 두 분. 잘~ 사시겠습니다그려. 좀 더 즐기십쇼. 저는 일할 테니까."

군터가 빙글빙글 웃으며 마기사와 마법사의 시체를 한데 모으기 시작했고.

붉어진 얼굴로 괜히 허공만 바라보던 남녀는, 그 말을 듣고서야 화들짝 놀라 전장 정리를 돕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들의 사냥제는 끝이 났다.

* * *

우물우물.

"4서클의 마법사로...."

꿀꺽.

"...추측된다?"

"예, 3성급으로 보이는 마졸(魔卒)도 있었습니다."

"마졸...?"

와드득. 와드득.

꿀꺽꿀꺽.

"영주님, 천천히 드십쇼."

"...아! 마기사?"

"기사라고 볼 수도 없죠. 그냥 노예들 아닙니까? 마졸이란 말로 충분합니다."

"흠. 뭐, 그렇긴 하지."

팔머의 시중을 받으면서 고기를 씹고 있는 영주가 군터의 보고에 맞장구를 쳤다.

다만 그 모습이 범상치가 않았다.

"공자. 저, 저게...."

"예. 저게 제 아버지, 드라센의 주인 맞습니다."

"저거라니? 다 들린다, 아들. 카리나 경."

"죄, 죄송합니다! 영주님, 정말...."

"괜찮네."

씩 웃으며 당황한 카리나를 달래는 대인배 아버지의 외모는 불과 며칠 전과 완전히 달랐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건지, 그사이 거의 3배로 퉁퉁 부은 초고도비만 중년이 되어 있었던 것.

"여기 이 부분이 특히 비계가 많습니다."

"아. 이 짓도 진짜 고생인데, 좀 맛있는 부위 주면 안 되나?"

"원래 고기는 기름 맛에 먹는 겁니다."

"흐미...."

대화를 하는 와중에도 기름기 가득한 고기를 건네는 팔머와 그것을 받아 우악스레 씹어 삼키는 영주의 모습에 카리나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지만.

그 광경이 익숙한 군터는 아무렇지 않게 보고를 이었다.

"아무튼 꽤나 숙련된 3성의 마졸이었으니, 그 마법사는 4서클이 분명합니다."

군터의 말에 라이언의 미간에 주름이 깊어졌다.

"4서클이라...."

마졸, 아니 마기사(魔騎士).

4서클 이상 고위 마법사의 주선을 통해 악마와 계약해 자신의 한계를 깨트린 강체술사들을 말함이라.

당사자들은 외신의 축복이 뭐니 하며 정당화를 하지만, 실제론 한 번 한계를 넘어서는 대가로 영원히 그 경지에 고정될 뿐만 아니라 거래를 주선한 마법사와의 계약에 평생 묶이게 되니.

군터 경의 말대로 악마나 마법사의 노예로 불러도 이상하지 않는 이들이었다.

그리고 본디 마법사는 딱 자신의 수준에서 한 단계 아래 마졸과의 계약을 주선하는 것이 최선이니.

"거기다 무노 공자에게 즉발성으로 쏟아부은 마법은 거의 다 3서클 수준이었습니다. 확실하다고 봐도...."

와구와구.

"그래, 이해했네. 4서클의 마법사가 틀림없겠지."

쩝쩝.

라이언은 군터의 보고에 냉철한 결론을 내렸지만 그러면서도 두 손으로 뼈를 붙들고 고기를 뜯어 먹는 모습은 야만인, 아니 야만 돼지나 다름없었다.

카리나 입장에서는 여전히 놀랍기만 한 모습이었으니.

그녀는 그제야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 탄성을 뱉어 낼 수밖에 없었다.

"그 폭식의 기사가, 이런 뜻이었군요."

"예. 이게 우리 드라센의 비밀 병기, 아니 결전 병기입니다. 모양새는 좀 많이 빠지지만...."

"다 들린다니까, 아들?"

무노는 휘리릭 날아온 뼈다귀를 가볍게 쳐 내고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단 한 순간에 모든 에너지를 뿜어냄으로써 격상의 몬스터조차 참살할 수 있는 폭식의 기사. 이런 영주님이 계시기에 드라센의 영지민들이 마음 놓고 겨울을 보낼 수 있는 겁니다."

"저거 저거, 말문 좀 트였다고 성격까지 능글맞아져서는. 어릴 때는 아버지 힘든 것 같다고 맨날 걱정해 줬었는데. 젠장할...."

우걱우걱.

"자식 키워 봤자 헛수고라는 게 아주 틀린 말은 아니라는 거겠죠. 흘흘."

"그러게. 자기 색싯감 생겼다고 이 아비를 아주 놀림감으로...."

쩝쩝.

"에에이! 그건 아니고요!!!"

괜히 장난 좀 쳤다가 된서리를 맞은 무노가 몸서리를 치며 슬쩍 옆을 보는데.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숙인 카리나의 모습이 왠지 더 예뻐 보여서 심장이 두근두근했다.

'아, 안 돼. 겉모습에 속지 말자. 정신 차려, 한문호!'

속으로 전생의 이름까지 소환해 가며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억지로 시선을 돌리는데.

의미심장한 웃음을 짓는 아버지와 눈이 딱 마주쳤다.

"...그, 그냥 아버지가 이렇게 고생하고 있다는 걸, 카리나 경에게 알려 주고 싶었던 것뿐입니다. 이 모습을 진지하게 설명하는 게 더 어색하잖아요!"

"고생은 무슨. 너무 잘 먹고 있어서 힘든 건데."

우걱우걱.

피식 웃으며 다시 고기를 씹기 시작하는 라이언.

그런 두 부자의 모습을 보며 잠깐 한숨을 내쉰 군터가 다시 말을 이었다.

"아무튼 마졸까지 거느린 고위 마법사가 대놓고 드라센까지 왔다는 걸 더는 숨길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와구와구.

"사흘 정도 걸렸던가? 드라센에 잠입한 마법사가 쓰러지기까지."

"그렇습니다."

쩝쩝.

"그렇다면 적어도 놈들의 뿌리가 우리 왕국 내에 있다는 것은 확실하군."

"백작 각하께 보고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 음. 오늘은 그만, 팔머."

"예. 알겠습니다."

꺼어억.

우렁찬 트림으로 오늘 치 에너지 저장이 끝났음을 알린 라이언이 연이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야지. 생각보다 상황이 심각하다고. 사흘 내에 고위마법사를 지체 없이 투입할 수 있는 조직이 왕국 내부에서 암약하고 있다는 거니. 최악의 경우, 우리 트리안 내부에 있을 수도 있고 말이야."

며칠 전에 비해 두 배는 커진 얼굴에 상대적으로 작은 손을 갖다 대며 턱을 괴는 모양새는 사뭇 우스꽝스러웠지만, 지금 그 모습을 보며 웃을 수 있는 이는 없었다.

다만.

"그런데 영주님, 제국의 수작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무심코 건넨 팔머의 한마디가 모두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아이언 왕국의 숙적이자 현재 대륙의 패자, 마도 제국이 직접 관여했다고 본다면 또 차원이 달라지는 문제니까.

하지만 라이언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닐 걸세."

악마교는 제국에서도 큰 문제를 일으킨 적이 있는 사교 집단.

제국에서 도망친 놈들이 아이언 왕국에 숨어들었다는 것이 10년 전 토벌 당시에 내려진 결론이었으니까.

하지만 애머스의 정체와 그 일에 대해 들은 바 없는 팔머로서는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예? 어찌 그리 확신을 하십니까?"

"각하께 따로 보고 드린 일이 있으니, 그런 최악의 경우까지는 생각하지 않아도 되네."

"그게, 제가 알면 안 되는.... 일이겠군요. 알겠습니다, 영주님."

"...미안하네, 팔머."

"아닙니다. 과분한 비밀은 이 노구의 심장에 좋지 않은 법이지요. 그래도 최악의 상황은 아니라니 그나마 다행입니다."

팔머의 너스레에 쓴웃음을 지은 라이언은 한숨을 내쉬며 상황을 정리했다.

"그럼 각하께 이 상황을 보고 드리고, 지시를 기다리겠네."

"예."

"귀족들에게는 상황을 알리고, 그래도 사냥제를 계속하고 싶다는 사람들은 말리지 말게. 우리에겐 필요한 일이니. 상금은 약속대로 끝난 후에...."

"예,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마법사에게 희생된 병사들의 가족들에게는 최대한 보상을...."

그렇게 이야기는 마무리되었고.

무노가 카리나와 함께 아버지의 집무실을 나오는 길.

"공자, 잠시만...."

카리나가 망설이다 건넨 말에, 무노의 가슴이 다시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렇게 상황이 어렵게 돌아가면 곤란해질 수 있습니다."

"...예?"

"저희 아가씨 일 말입니다."

"아...."

이어진 속삭임에 이번엔 다른 의미로 가슴이 두근거릴 수밖에 없었다.

"설마 큰 지장이야 있겠습니까?"

그렇게 대답은 했지만,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을 무노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그 불길한 예감은 바로 현실이 되어 나타났다.

"무노, 트리안 백작가에서 소환령이다."

"예!? 저를요?"

"아무래도 시기가 시기인 만큼, 나나 군터 경이 움직이기는 그렇지 않느냐. 더구나 이제 마법사와 연달아 부딪친 것이 너였다는 사실이 다시 주목을 받고 있는 상황이니까."

"그런...."

"걱정 말거라. 각하께서도 네 출신을 아신다."

"아...."

속삭이는 듯한 아버지의 마지막 말에 무노는 당황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로안나 공녀의 호위 행렬에 동참해서 트리안으로 가거라."

이어진 그 지시는 사뭇 곤란하기만 했다.

26화. 다음에 다시 만나면...

"왜 하필...."

원수들을 토벌하는 일에 적극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바라던 바였다.

하지만 상황이 좋지 않았다.

"그게 너한테도 좋다. 악마교 놈들이 미치지 않은 이상, 지금 시점에서 공녀 일행을 건드리진 않을 테니까."

아버지의 말도 틀리지는 않았지만.

'공녀가 가출할 예정입니다만....'

무노는 목구멍까지 솟구친 그 말을 삼키며 아버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시기가 시기인지라 몸이 조금 부풀어 올라(?) 있는 몰골이었는데, 덕분에 웃는 모습이 더욱 푸근해 보였다.

"갑자기 왜 그렇게 보냐?"

"아, 아닙니다."

자상하고 능력 있는 아버지.

전생의 한문호가 그리도 꿈꾸던 가족을 만들어 준 은인.

하지만 무노의 아버지, 라이언 드라센은 뼛속까지 기사였다.

'북부의 방벽' 에녹 트리안 백작을 따르는 충실한 기사.

만약 공녀의 가출 계획을 안다면, 도와줄 가능성은....

'거의 없지.'

로안나 공녀가 정말 '그분'에게 가서 왕위 계승 문제에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는 걸 안다면 더욱.

그러니 그 일은 그냥 자신만 알고 있기로 했다.

다만 곤란한 건 어쩔 수 없었다.

로안나 일행이 드라센을 나선 뒤 사라진다면, 가장 곤란해지는 것은 그녀를 호위하는 트리안의 병력일 터.

하지만 이제 그 병력에 자신도 끼게 된 것이다.

심지어 그중 유일한 외부 인사일 테니, 아마 공녀가 사라질 경우 제일 먼저 의심받게 될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X 됐다.'

상황이 곤란하니 일단은 얌전히 트리안에 돌아가고 나중에 가출하라고 설득하면, 공녀가 응해 줄까?

- 다시 돌아갔을 때는 혼처가 결정될 때까지 나오지 못할 수도....

...그럴 리가 없지.

"왜? 할 말이라도 있느냐?"

"아닙니다. 그리 알고 준비하겠습니다."

"있는 것 같은데?"

"괜찮습니다."

"...뭐. 알아서 잘할 거라 믿는다만, 영지 밖에서는 네가 드라센의 얼굴이다. 품행에 각별히 신경 쓰도록 하거라."

"당연하죠."

"처음으로 드라센 밖으로 나가보는 것 아니더냐. 세상을 둘러보고 싶어 하는 건 안다만, 괜히 흥분해서 일을 그르치진 말기를 바란다."

"아니, 절 뭘로 보고...."

"뭘로 보긴, 자유를 찾아 고향을 뛰쳐나가려는 철없는 아들내미로 보지."

뜨끔했다.

"...."

"마음 같아서는 여기서 확 카리나 경과 결혼시키고 보내고 싶다만...."

"엑!?"

"뭐, 카리나 경의 생각도 있을 테니. 가는 동안 잘해 보거라."

...깜짝이야.

"뭘 그렇게 놀라느냐? 너도 상대방도 마음은 있는 것 같은데. 나도 얼른 며느리를 보고 싶구나."

"하. 하하.... 그게...."

식은땀이 삐질 흘러나왔다.

그 며느릿감이 조만간 공녀와 함께 사라질 예정이라는 말을 꺼낼 수는 없었으니까.

그에 아버지가 피식 웃으며 그의 어깨를 툭 쳤다.

"농담이다. 약속했듯이 재촉하지는 않을 생각이니, 그저 몸 성히 돌아오기만 하거라. 각별히 조심하고."

"...예. 알겠습니다."

조심해야 할 대상은 악마교일까, 트리안 백작가일까.

무노의 가슴속에는 걱정만 쌓여 갈 뿐이었다.

* * *

드라센 영지에서 연이어 벌어진 마법사의 테러 행위.

그것은 10년 전 사건 이후 느슨해졌던 트리안의 경각심을 일깨우기에 충분했다.

라이언 드라센은 사냥제를 중단시키지 않으려 했지만, 대다수의 귀족은 4서클 마법사의 습격 사건 이후 북부 산맥을 향하지 않았다.

결국 드라센은 사냥제의 종료를 선언하고, 외부인 중에서 최고의 실적을 올린 이에게 큰 상금을 선사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무노의 성년식과 함께 열렸던 드라센의 야심 찬 행사는 졸속으로 마무리되었고.

모여들었던 귀족들은 하나둘씩 드라센을 떠나기 시작했다.

"...토벌된 마물은 다 해서 대략 600개체 정도에 불과합니다. 이래서야 오히려 손해입니다."

막 성문을 나서는 에쉬남의 행렬에 예를 표하던 라이언이 팔머의 보고에 미미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이거 예상보다 올겨울이 힘들어지겠군."

"너무 날로 먹으려 했나 봅니다."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나았겠지?"

"그야 그렇겠지요. 그래도 작년보다는 기대치가 높았는데, 아쉽습니다."

"그래. 무노 녀석도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었고 말이야.... 뭐, 상황이 이렇게 됐으니 어쩔 수 없지."

"말씀하시니 딱 저기 오는군요."

팔머의 손짓을 따라 시선을 돌리자, 화려한 사두마차를 이끄는 일단의 무리가 회색 장미 문양이 새겨진 깃발을 휘날리며 다가오는 게 보였다.

번쩍이는 갑옷을 입은 병사 30여 명에, 시종을 비롯한 일꾼 10여 명까지.

에녹 트리안 백작이 로안나 공녀를 아낀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 주는 행렬이었다.

거대한 덩치의 록암이 사두마차의 마부석에 마부와 함께 타고 있었고.

그 사두마차의 오른편에는 백마를 탄 카리나. 그리고....

왼편에는, 흑마를 탄 무노가 어딘지 불편한 표정으로 행렬을 따르고 있었다.

아들의 뚱한 표정이 마음에 걸린 라이언은 마부석에 앉은 거인을 괜히 걸고넘어졌지만.

"저 친구는 기사면서 왜 마부석에...."

"저 덩치를 감당할 말이 없었겠지요. 지금 영주님이 이곳까지 걸어오신 것과 같은 이유일 겁니다."

"아. 그렇지."

불쑥 튀어나온 팔머의 한마디가 그를 대번에 납득시켰다.

그리고 그 순간, 곧바로 사두마차의 창문이 열리며 공녀가 얼굴을 드러냈다.

"고모부... 아!?"

라이언의 모습을 본 로안나는 눈동자가 잠시 흔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바로 웃으며 말을 건넸다.

"...풍채가 갑자기 좋아지셨군요, 고모부. 소문으로만 듣던 폭식 상태. 눈으로 직접 보니 영광입니다."

"하하. 웃으셔도 됩니다, 공녀. 그런데 다른 이목들도 있는데 호칭은 좀...."

"뭐 어때요? 다 제 사람들인걸요. 그리고 이제 무노하고도 누나 동생 하기로 했어요."

...저 녀석이?

라이언이 노려보자 무노가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절대 자기 뜻이 아니라는 뜻.

'뭐, 어쨌든 공식적으로 사촌이긴 하니.'

라이언은 피식 웃음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 그래도 우리 아들 잘 부탁한다, 로안나."

"오히려 제가 잘 부탁해야죠. 그렇지, 무노?"

"하아...."

이 녀석이?

라이언은 한숨을 푹 내쉬는 아들을 향해 눈을 부라려 봤지만, 지금 이 상태로는 그다지 위엄있는 모습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고모님께는 따로 인사드리고 나오는 길이에요. 다음에 또 봬요. 고모부."

"...그래. 그러자꾸나."

유난히 밝아 보이는 로안나의 눈치를 슬쩍 본 그는 다시금 당부하듯 아들에게 말을 건넸다.

"트리안까지 공녀님을 잘 모시거라, 무노. 그리고 에녹 각하를 뵙게 되면 상황을 '잘' 설명드리고."

똑똑한 녀석이라면 무슨 의미인지 충분히 알아들을 법한 얘기였는데, 여전히 아들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예. 알겠습니다."

연신 눈짓을 하자 그제야 맥아리 없는 어조로 대답할 뿐.

진짜 왜 이러는 걸까 싶었지만.

"하하. 공자께서 처음 드라센을 떠나는 게 심란하신가 봅니다."

옆에서 거든 팔머의 한마디가 아들의 속을 짐작하게 만들었다.

'아.'

세상을 둘러보고 싶다니 뭐니 철없는 소리를 한다지만, 어차피 아직은 어린 아들.

각성 이후 부쩍 어른스러워졌던 아들이 다시금 옛 모습을 보이는 것 같아 괜히 미소가 나왔다.

"드라센은 항상 여기 있다, 아들아. 몸조심하고, 건강히 돌아오거라."

"예."

이 말에 녀석의 안색이 조금 펴지는 것을 보니 괜히 가슴이 따뜻해졌고.

그날 라이언은, 드라센의 남쪽 성문을 나선 사두마차의 행렬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까지 로안나 일행.... 아니, 아들의 뒷모습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 * *

타닥타닥.

한밤중의 숙영지. 타오르는 모닥불 앞에서 아침의 일을 이야기한 로안나는 웃으며 말을 보탰다.

"확실히 고모부가 널 아끼나 봐, 무노."

...이젠 아예 대놓고 반말.

멋대로 친분을 확정(?) 지어 버린 그녀를 보며 무노는 쓴웃음을 지었다.

"...팔불출이시죠, 아버지가."

연고를 모르는 수준을 넘어 존재 자체가 수상하기까지 한 꼬마. 그런 자신을 데려와서 성심을 다해 키워 준 부모다.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마음은 한가득인데, 아직은 그 방법을 모르겠으니 답답할 뿐이다.

'소설 같은 거 보면, 판타지 세상에 환생해서 전생의 지식을 통해 영지를 팍팍 발전시키고 그러던데.'

그게 얼마나 터무니없는 얘기인지, 직접 겪어 보니 더욱 마음에 와닿았다.

대체 현대의 어떤 일반인이 종이 만드는 법이나 화약 만드는 법 따위를 외우고 다닐까.

'설령 안다 해도 그걸 실제로 만드는 건 또 다른 얘기일 텐데.... 제엔장.'

속으로 투덜거려 보지만, 그런다고 이제 와서 좋은 아이디어가 갑자기 떠오르는 일은 없었다.

그래도 전생의 지식 중에 이 세계에서 도움이 될 만한 게 분명 있을 텐데.

지난 10년간 고질병처럼 자신을 괴롭히던 악마를 잡아먹은 후부터, 무노는 줄곧 그 문제를 고민해 왔다.

무엇보다.

'사회 구조가 다르고 문화가 다를 뿐, 이곳 사람들이 멍청한 건 아니라고.'

당연히 교육받은 사람 기준으로 하는 말이지만.

아무튼, 그가 상상할 수 있는 최소한의 문명적 도구들은 대부분 이 세상에도 이미 있었다.

서양의 중세와 분위기가 비슷한 곳이지만 다양한 이능력이 존재하는 만큼, 생각지 못한 신기한 물건들도 종종 보게 되고 말이다.

눈앞의 공녀가 손짓하는 순간 '촤르륵' 접혀서 작은 가방만 하게 축소되는, 저 텐트 같은 아티팩트처럼 말이다.

"역시 이과를 갔어야 했나...."

"뭐?"

"아, 아닙니다."

공녀의 물음에 그는 딴청을 부리며 한숨을 내쉬었는데.

"누나라고 부르라니까. 말도 편하게 하고!"

내가 미쳤냐.

가능한 한 절대 엮이기 싫다.

...라는 진심을 꺼낼 수는 없었다.

"제가 감히 어떻게...."

그저 어색하게 웃으며 말끝을 흐리자, 공녀가 피식 웃음을 지었다.

"하여간 고지식하기는. 음. 뭐 아무튼, 고모부께서 그렇게 아끼는 너한테 피해를 주게 되었으니.... 미안해."

억지로 딴생각까지 하면서 피하려 했던 현실이 갑자기 눈앞에 닥쳐왔다.

"지금 가시려는 겁니까?"

"트리안에서 멀수록 좋으니까."

"하아...."

"애늙은이처럼 자꾸 한숨만 쉴 거야?"

네가 내 입장이 돼 봐라. 한숨이 안 나오게 생겼나.

대답 대신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자, 공녀가 슬쩍 손을 내밀었다.

그 손에 들린 것은....

"너무 걱정하지 마. 이 편지를 할아버님께 전달하면, 분명 이해해 주실 거야."

공녀가 내민 편지를 보니 또 한숨이 나왔다.

야영지의 바깥에서 경계를 서고 있는 병사들을 제외하면 대다수의 일행이 잠든 지금.

혼자.... 아니 셋이서 깨어 있는 로안나와 카리나, 록암은 이미 완전무장을 갖추고 있었다.

"성년 선물로 자유 기사 서임까지 받았는데, 처음으로 드리는 보고가 당신의 사랑스러운 손녀의 가출을 막지 못했다는 소식이 되겠군요. 하, 인생...."

그 한탄에 공녀 일행의 얼굴에도 쓴웃음이 번졌다.

그런데.

"나는 차라리 이렇게 돼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동생."

뭐 인마?

공녀의 한마디가 절로 고개가 획 돌아가게 만들었다.

"적어도 네가 내 편지를 가지고 있다면, 여기 있는 가솔들은 처벌을 피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러니까.... 제가 독박을 쓰면 다른 이들은 괜찮을 거라는 말씀이신거죠, 지금?"

무노의 태도가 점점 삐딱해지는데.

공녀는 웃기만 했다.

"푸하하. 그럴 리가."

"그럼?"

"드라센에서 이름난 기사인 네가 우리를 막지 못했다면, 어찌 일반 병사나 시종들에게 책임을 묻겠냐는 거야."

...애초에 너희 셋이 함께 움직이는데, 여기 누가 막을 수 있겠냐.

"그리고 병사나 시종이 아닌, '신분 높은' 증인도 생기는 거잖아."

"그게 뭐...."

"그래야 할아버님이 걱정을 덜 하실 거야."

공녀의 주장은 아예 설득력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무노에겐 이미 스스로 뱉은 말이 있었으니.

"어쩔 수 없죠. 약속한 바가 있으니, 지키겠습니다. 제가 이 일행에 속해서 돕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만."

"고마워, 동생. 다음번에 만나면 꼭 누나라고 해야 한다?"

공녀의 강짜 아닌 강짜에 무노는 그저 어색한 웃음을 보일 뿐이었다.

그러자 살짝 삐진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는 공녀.

"그럼 경들...."

이어진 말 한마디에, 세 사람은 슬쩍 고개를 숙여 무노에게 예를 표하고는 그대로 돌아섰다.

카리나는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보이긴 했지만.

"자, 잠깐!"

지금 무노가 그들을 붙잡으려는 것은 결코 그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예?"

"설마 그냥 가시려는 겁니까?"

"무슨 말이야?"

공녀가 어리둥절해할 때.

무노는 이를 악물며, 정말 하기 싫은 말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제가 너무 멀쩡하면, 다른 이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아...."

"적당히 만져 주십쇼. 후유증 안 남을 정도로만."

눈을 질끈 감은 그가 변태나 할 법한 이상한 부탁을 내뱉자.

공녀가 '아!' 하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피식 웃음을 지었다.

"더 미안하게 됐네, 무노. 그러니까 다음번에는 정말 그냥 누나라고 불러 줘."

...됐수다.

불퉁한 표정으로 그 대답이 전해졌을까.

빙긋 웃은 공녀의 눈짓에 따라.

"그럼, 사양치 않고."

쿵.

'아우, 쌍...!'

거인, 록암이 한 발 앞으로 나서며 대뜸 주먹을 뻗었다.

쾅!

27화. 사라진 공녀

"공녀님께서 사라지셨다!"

"젠장, 기사님들은!?"

"안 보이셔!"

"여기, 여기 드라센 공자님이 계신다!"

새벽녘, 시끌벅적한 소란 속에서 무노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망할....'

아직도 얼굴 반쪽이 욱신거리는 채로 나무에 묶여 있는 자신의 모습이 하도 초라해서, 절로 고개를 떨궈졌다.

그리고 그런 그를 한 병사가 흔들어 깨웠다.

"공자님! 무노 공자님!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끄응...."

"불침번들도 전부 기절해 있고...."

웅성웅성.

혼란과 당황, 다급함이 느껴지는 병사들의 목소리에 무노는 최대한 처량한 연기를 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고, 공녀님께서...."

"예? 공녀님께서?"

그리고 부릅뜬 병사의 눈동자를 마주하며, 결정적인 단어를 내뱉었다.

"...가출, 하셨다."

"예?!"

까드득.

간밤의 일을 돌이켜 보면 절로 이가 갈렸다.

그럴 만도 했다.

사람 머리만 한 주먹을 대가리를 깨 버릴 것처럼 휘두르던 록암과, 뒤이어 갑자기 나타나 '좀 더 확실히 하자'며 뒤통수를 내려치던 카리나의 모습이 다시 떠올랐으니까.

물론 때려 달라고 한 건 자신이었지만, 그 와중에 뒤통수가 훨씬 아팠다는 게 더욱 열이 받았다.

'거긴 상처도 안 보일 텐데, 왜...?'

그 생각을 하자, 뭔가 삐진 듯하던 카리나의 표정이 이상하게 또렷이 떠올랐다.

'내가 또 뭘 잘못했나? 쌍.'

말을 해 줘야 알지.

무노는 예쁜 만큼 성격 이상한 여자를 떠올리며 한숨을 푹 내쉬었고.

"날 이렇게 만든 건, 록암 경과 카리나 경이다!"

그 분노를 고스란히 담아 소리를 질렀다.

보나 마나 시퍼렇게 멍들었을 자신의 얼굴을 한껏 들어 올리며.

"아, 아니 무슨 그런...."

전혀 상상도 못 한 발언이었는지, 눈앞의 병사는 얼빠진 얼굴로 더듬거리기만 했다.

"일단, 이것 좀 풀어 주게."

솔직히 밧줄 따위 끊어 내는 것은 일도 아니었지만, 최대한 지친 기색을 보여야 했다.

그래야 기껏 얻어맞은 얼굴도 확실히 어필을....

"그런데 다치신 곳도 안 보이는데.... 왜 이렇게 힘없이 제압당하신 겁니까?"

...응?

그때, 밧줄을 풀던 병사가 영문 모를 소리를 뱉었다.

"무슨, 소리지? 이렇게 얼굴이 욱씬.... 아...."

그제야 머릿속에 짧은 기억이 스쳤다.

일라이 놈에게 칼을 맞았을 때, 얼마 지나지 않아 상처가 아물고 긁힌 자국만 남았던 기억.

물론 욱신거리는 통증은 며칠 더 갔었지만, 이 육체가 비정상적인 회복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그때 체감했었다.

그런데 칼도 아니고 주먹에 얻어맞은 정도라면?

"...아무래도 사정을 봐준 모양이지. 흐, 나 말고 크게 다친 사람은 없을 거 같은데."

"그건, 그렇습니다."

까드득.

대답을 듣다 보니 무의식적으로 이가 갈렸다.

난 대체 왜 맞은 걸까.

'괜한 바보짓을.'

욱신거리는 얼굴의 통증이 굉장히 억울하게 느껴졌다.

'이건 뭐, 환상통이냐.'

나으려면 아예 통증까지 없어지던가. 쌍.

무노는 다시는 이런 실수를 하지 말아야겠다는 결심을 하며 묶인 밧줄을 그대로 뜯어 냈다.

우드득.

"저희가 안 도와드려도 됐을 뻔했...네요."

흠칫.

그래, 여기까지만.

"...무슨 소리? 자네가 다 풀지 않았나. 아, 근데 이게 뭐지?"

"예?"

"품. 속. 에. 웬. 편. 지. 가...?"

약속된 연기가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 어색하게 나왔다.

"아!?"

아, 씁.

'방금 나 좀 X따 같았....'

하지만 이왕 내친걸음이었다.

"이건 공녀님 글씨 같은데...."

"저희 공녀님 글씨체도 알아보십니까?"

"으음? 아, 아. 전에 살짝 봤네. 예쁘게 쓰시길래."

"그렇...군요."

병사의 미심쩍은 눈빛을 보자 스스로 뺨이라도 후려갈기고 싶어졌다.

'아오, 이 X신아. 하....'

...뭐, 사람이 당황하면 연달아 실수할 수도 있는 법이다.

원래 성격상 적의가 없는 사람을 속이는 게 어색하기도 하고. 흠, 흠.

이제부터 잘하면 되지.

"흠. 흠. 아무튼, 편지를 읽어 보겠네."

무노는 무슨 내용인지 뻔히 아는 편지를 병사들 앞에서 대충 읽고서는.

선언하듯 말했다.

"...역시, 공녀님이 스스로 의지로 떠나신 것이 틀림없네."

"아...."

밧줄을 풀어 준 이를 비롯해 어느새 주변에 모여든 병사와 시종들이 그 말에 동시에 탄식을 흘렸다.

무노는 그런 그들을 슥 둘러보며 편지를 들어 올려 흔들었다.

"이 편지는 내가 직접 책임지고 에녹 각하께 전해 드리겠네. 적어도 자네들에게 책임이 돌아가는 일은 없게 만들 것이야."

그 말에 불안해하던 이들의 표정이 조금은 안정을 찾았다.

그러나 그 후로 트리안으로 향하는 여정의 분위기가 무거워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남쪽으로 갈수록 조금이나마 기온이 따듯해지며 색다른 풍경이 나타났지만, 일행의 눈에는 들어오지도 않았으니.

'악마교 놈들이라도 와 줬으면 좋겠네. 쌍.'

하다못해 무노가 그런 생각을 떠올릴 만큼 조용했던 그 행렬은, 그렇게 닷새 동안 이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저기!"

"트리안입니다!"

공녀 없는 공녀 일행은 아주 무거운 표정으로 트리안 영지의 주도, 트리안의 성문을 두드리게 되었다.

* * *

"뭐라고!? 공녀님이!?"

공녀의 가출 소식은, 트리안 내성의 기사들을 바쁘게 움직이게 만들었다.

그 결과.

"각하께서 찾으십니다!!"

도착한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아, 무노는 트리안 기사단의 수위 기사급으로 보이는 중년 기사를 따라 내성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저벅저벅.

'화려하긴 하네. 그래도 백작령의 중심부라는 건가.'

거의 죄인이 된 심정으로 기사의 뒤를 따라 걷는데.

복도에 걸린 화려한 장식이나 그림, 도자기 등은 예술에 대해 잘 모르는 무노가 보기에도 상당히 귀한 작품들 같았다.

'북부 최대 도시라더니.'

거의 3만의 인구가 성내에 상주한다는 북부 최대의 도시 트리안은, 영지 내의 다른 도시를 전부 합친 것보다 규모가 컸다.

아이언 왕국 중심부와 북부를 연결하는 교두보이자, 남북을 오가는 상인들이 필수로 거쳐 가는 대도시.

'그래 봤자 작은 도시라고 생각했는데....'

물론 인구 천만의 대도시인 서울에서 살다 온 한문호의 눈에는 그나마 조금 큰 성일 뿐이었지만.

성 내부의 인테리어까지 보고 나니, 과연 중앙 도시답긴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세상에서도 이런 그림들은 비싸겠지.'

전생의 사회에서 도무지 의미를 알 수 없는 추상화들이 수십, 수백억에 팔리던 것은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마찬가지로 의미를 알 수 없는 선과 색채로 범벅된 그림들을 보다 보니 불쑥 질문이 나왔다.

"이런 그림들은 얼마 정도 합니까?"

그 말에 그를 안내하던 파란 머리의 잘생긴 중년 기사, 클람이 정중히 대답했다.

"값으로 따질 수 없는 보물입니다."

"역시 예술이란...."

부자들의 생각은 도무지 알 수가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저도 모르게 혼잣말을 뱉었는데.

"로안나 아가씨께서 어렸을 때부터 그려 오신 그림들이니까요."

"...쿨럭."

당황한 무노가 헛기침을 하는 것을 보며 클람이 피식 웃음을 지었다.

"우습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만, 각하 앞에서는 말조심해 주십시오. 각하께는 어떤 예술 작품하고도 바꾸려 하지 않는 보물들이니까요."

적어도 에녹 트리안 백작이 손녀 바보라는 소문은 거짓이 아닌 듯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은, 그 손녀가 무단으로 가출했다는 보고를 하기 위해 백작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새삼 상황이 다시 자각되며 한숨이 나왔다.

'X 됐네. X바....'

차라리 악마교 놈들이랑 싸우는 게 마음 편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 때쯤.

너른 복도의 맞은편에서 누군가가 대여섯 명의 기사를 거느린 채 걸어오고 있었다.

턱까지 이어진 구레나룻이 멋지게 다듬어진 그 금발의 중년인을 보는 순간, 클람이 제자리에 멈춰 섰다.

척.

"케인 공자님을 뵙습니다."

아.

그제야 그가 누군지 알게 된 무노 역시 클람의 뒤에서 적당히 손님으로서 예를 표하는데.

그 중년인, 케인 트리안이 먼저 그를 보며 말을 건넸다.

"검은 머리에, 이렇게 어린 기사라.... 자네가 그 무노 드라센인가?"

무노의 인상이 자연스럽게 슬쩍 찌푸려졌다.

갓 성년이 된 나이긴 하지만, 키가 거의 180cm에 이르는 자신이 그렇게까지 어려 보일 리는 없다.

굳이 전생을 기억하는 자신의 경우가 아니더라도, 보통 갓 성년이 된 남자가 어린애 취급을 싫어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건 그냥 무례다.

하지만, 저쪽이 갑이다.

...썩을.

"예. 처음 뵙겠습니다, 케인 트리안 대공자님."

그 말에 이번에는 케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너무 정정한 아버지 때문에 마흔이 넘도록 작위를 승계하지 못한 그에게 대공자라는 호칭은 역린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케인 님이라 부르게. 난 자네 아버지와도 연이 있으니. 이렇게 만나게 되어 반갑군."

어머니가 자신의 동생이라는 사실은 일부러 언급하지 않았다.

'친척으로 생각하지도 말라는 뜻이겠지.'

그 딸과 어쩜 이리 다를까 싶었다.

- 3성의 강체술사니, 이능력이나 행정 능력에 있어 모자람은 없다는 평가를 받는 자다다. 하지만 속이 좁아 신경을 거스르는 일을 참지 못하고 사람을 품지 못하니, 그것이 각하의 유일한 걱정거리지. 자기보다 잘난 사람도 싫어하고.

- 아버지처럼요?

- 커흠. 뭐, 콕 집어 나라기보다야....

아버지의 말 때문인지 첫인상이 그다지 좋지는 않았지만, 굳이 적으로 돌릴 이유는 없는 자다.

"저 역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무노가 정중히 다시 인사하는데.

"그래도 라이언보다는 예의가 바르군그래."

흐릿하게 웃은 케인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슬쩍 다시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런데 케인은 거기서 한 발 더 나갔다.

"아버지를 뵈러 가는 길인가?"

"예, 그렇습니다."

"클람, 듣기로는 이 자가 내 딸이 남긴 편지를 가지고 있다지? 아버지를 뵙기 전에 내가 먼저 확인하고 싶은데."

클람은 그 말을 듣고 낭패한 얼굴로 무노에게 눈빛을 보냈다.

어떻게 말릴 수가 없다는 뜻일 것이다.

하지만 무노는 쓴웃음을 짓고 고개를 저으며 그를 대신해 케인에게 대답했다.

"죄송합니다만, 이건 공녀님께서 에녹 각하께 먼저 전하라고 남기신 편지입니다. 저로서는 그 당부를 어길 수 없습니다."

그 말에 다시 케인의 얼굴이 구겨졌다.

"...어린 친구가 융통성이 없군. 이런 면은 또 제 아비를 닮았어. 양자면서 말이야. 어이가 없군."

이 새끼가....

"...죄송합니다."

치솟는 짜증을 감추려 다시 고개를 숙이는데.

케인의 한숨 소리와 함께 생각지 못한 말이 들려왔다.

"뭐. 천방지축 내 딸이 또 아버지의 심기를 건드릴까 봐 걱정돼서 한 말일세. 굳이 원칙을 어길 생각은 없으니. 내 부탁은 잊게."

...잊힐 것 같지는 않다만.

"알겠습니다."

"자네도 내 딸과 동행하면서 낭패를 봤을 텐데. 특별히 이상한 점은 없던가?"

"예?"

이건 또 무슨 소리?

"가출하기 전에 말이야. 말이나 행동이 좀 독특한 아이였을 텐데? 보통은 감당 못 하거든."

고개를 들자 케인의 푸른 눈동자가 의미심장하게 빛나는 게 보였지만, 그 말뜻을 짐작한 무노는 모른 척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글쎄요. 꽤나 영명하신 공녀님이신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가출하시기 전까지는요."

"...흐음. 그런가? 편지 내용에도 별말은 없었겠군?"

"혼사에 대한 반감만 표현하셨습니다."

"...그렇군. 어디로 간다는 말도 없고?"

"...예."

쯧.

유심히 그의 표정을 지켜보다 이내 살짝 실망한 표정으로 혀를 차는 케인.

"대신 사과라도 하려 했더니, 좋게만 말하니 그럴 필요도 없겠군. 다만 아버지께서는 그런 내 딸을 너무 아끼시니, 언행에 각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할 거야."

"조언 감사합니다."

괜스레 끼어든 방해꾼은, 그 말 한마디를 남기고 그대로 사라져 갔다.

뜬금없는 등장과 뜬금없는 퇴장.

'왜 온 거지...?'

가출한 딸이 남긴 편지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부모로서 당연한 것이겠지만, 로안나에게 들었던 '아버지 케인 트리안'의 모습과는 사뭇 거리감이 있었다.

'그냥 로안나의 행선지가 궁금했던 건가?'

무노는 멀어지는 케인의 뒷모습을 보며 눈을 가늘게 뜨다가.

"곤란하셨을 텐데, 잘 대처하시는군요."

이어진 클람의 말에 그제야 표정을 바로 했다.

"아, 아닙니다. 가시죠."

"혹시, 각하께서 과하게 다그치시더라도 이해하시길 바랍니다. 그만큼 아가씨를 아끼시는 것이니까요. 일단 얌전히 계시면 곧 다시 조용해지실 겁니다."

왜인지 아까보다 좀 더 푸근한 표정으로 팁(?)을 전해 주는 클람.

그에 슬쩍 미소로 답한 무노는 생각에 잠긴 채로 조용히 그의 뒤를 따랐다.

'케인 트리안. 아랫사람을 대하는데 직접 움직이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들었는데.'

아무래도 뜬금없는 케인의 등장이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하지만 그 상념이 어떤 결론에 다다르기도 전에.

"각하, 무노 드라센 공자를 모셔 왔습니다."

- 들라 하라.

끼이이이이.

단순히 집무실로 보기에는 너무 커다란 방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28화. 에녹 트리안

끼이이익.

문이 열리자마자 저벅저벅 걸어가 누군가에게 예를 표하는 기사 클람.

쿵.

"명을 수행했습니다, 각하."

"수고했다."

무릎을 꿇은 클람을 훑은 엄중한 시선이 무노를 향했다.

새하얀 머리를 단정히 빗어 넘긴 건장한 체격의 근육질 노인.

머리에서 인중과 턱 밑까지 이어진 새하얀 구레나룻은 좀 전에 보았던 케인이 누구를 흉내 낸 것인지 대번에 눈치채게 만들었다.

푸른 눈동자 역시 케인과 닮아 있었지만, 왜인지 경계심이 들게 하던 그와는 인상이 완전히 달랐다.

눈을 마주치는 순간 깊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바다를 마주한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노인의 눈은 크고 깊었다.

'무슨 사람 눈빛이....'

노인이 슬쩍 미소를 짓는 순간에야 그 눈빛의 압박에서 벗어난 무노는, 뒤늦게 제자리에서 한쪽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무노 드라센이 강철 위에 핀 장미, 왕국 북부의 지배자를 뵙습니다."

그 모습을 본 노인은 묘한 미소를 유지한 채 자신의 기사에게 눈을 돌렸다.

"...클람. 자네는 이만 나가 보게."

"예."

기사는 주군을 두고 서슴없이 자리를 비웠다.

외부인인 무노가 무장을 갖춘 상태로 노인을 독대하려는데도 문제 삼지 않는 모습.

그리고 그 자리의 어떤 누구도,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세븐스타의 경지를 눈앞에 두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 북부의 방벽, 6성 기사 에녹 트리안이 바로 이 노인의 정체였으니까.

끼이이.

쿵.

"무노 드라센이라.... 라이언 그 녀석이 널 양자 삼겠다는 황당한 소리를 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닫힌 문을 뒤로한 채 무노를 바라보는 그 눈빛에는 짙은 호기심이 어려 있었다.

"...정말 잘 컸구나."

왜인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백작의 말에 무노는 어색한 웃음으로 응수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아는 듯한 눈빛이지만, 정작 그에겐 백작에 관한 기억이 없었으니까.

"날 기억하지 못하는 게냐?"

"각하께서 저에 대해 아신다는 말만 아버지께 전해 들었습니다."

"저런.... 하긴, 확실히 그때의 너는 참 불안정하고 위험해 보였지. 라이언 그 녀석이 대체 왜 자식으로 삼겠다고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만큼."

음? 위험...?

"아버지께는 언제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그래, 그래야지. 뭐, 지금 너를 보니 라이언 녀석이 선택을 잘한 것 같구나. 하여간 묘한 녀석이란 말이지. 둔한 것 같으면서도, 가끔은 사람을 참 잘 본단 말이야...."

"잘 키우신 겁니다."

사람을 잘 본 게 아니라, 잘 키운 것이다.

예의를 지키면서도 할 말은 다 하는 무노를 보며, 에녹 트리안이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래. 딱 저 같은 놈을 키워 냈구나. 가끔 버릇없어지는 것도 꼭 닮았어."

"...죄송합니다."

"죄송할 필요는 없다. 말만 앞서는 놈이었다면 괘씸해서라도 뭐라 했을 텐데...."

백작은 다시 한번 웃으며 그의 모습을 슥 훑더니.

"신체가 균형 잡힌 걸 보면, 한쪽으로 치우친 진화를 택한 것 같지는 않고. 그러면서도 제법 단단한 걸 보니, 소문처럼 머리만 좋아진 것도 아니로구나. 라이언의 폭식 느낌도 나지만 그 녀석과는 확실히 다르고...."

헐.

"...녀석의 폭식을 씨앗으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낸 모양이구나. 그 폭식을 진화시킨 3차 특성이라? 흐. 그래. 뭐, 그 정도는 되어야지. 막 각성한 놈이 3성 기사와 대련 비슷한 거라도 하려면 말이야."

대번에 정답에 가까운 해석을 내어놓았다.

'하....'

6성 기사쯤 되면 그냥 보기만 해도 이런 걸 다 알 수 있나?

당황스러우면서도 백작이 뱉은 단어 중 하나가 마음에 걸렸다.

"3차 특성이요...?"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온 무노의 물음에 백작이 고개를 갸웃했다.

"음? 모르느냐? 라이언 녀석도 알 텐데?"

"처음 듣는 말입니다."

"흠. 아마도 네가 자만하게 될까 봐 말해 주지 않은 모양이구나. 뭐, 그 녀석답다. 쓸데없는 걱정까지 하는 걸 보니. 그런 특별함이 반드시 좋은 것도 아닌데 말이다."

"예?"

"됐다. 나머지는 네 아비한테 듣거라."

걱정과는 달리 호의적인 분위기에 무노가 내심 안심하던 찰나.

"...내 손녀가 가출하도록 방조한 놈한테, 더는 조언해 주고 싶지 않으니."

호의적으로 흘러가던 대화가 갑자기 퉁명스럽게 끝났다.

뒤이어 훅 들어온 본론.

여태껏 미소만 짓던 백작이 자신을 째려보기 시작하자, 무노는 그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변명할 수밖에 없었다.

"...불가항력이었습니다."

"어떻게든 말리려 한 흔적도 안 보이는데? 몸뚱어리가 아주 멀쩡해."

마치 몸이 박살 나더라도 막았어야지. 라는 뜻 같았다.

뭐라 할 말이 있을까.

"...죄송합니다."

일단 무조건 수그려서 된바람을 피하려 했으나, 백작이라는 폭풍은 곱게 지나갈 생각이 없는 듯했다.

"안 막은 거냐, 못 막은 거냐?"

추궁하는 듯한 말투.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푸른 눈이 그 손녀와 매우 닮아 보여서, 무노는 더 변명하는 대신 로안나의 편지를 품 안에서 꺼내 건넸다.

"읽어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버르장머리 없는 녀석. 어른이 묻는데.... 쯧."

흥 하고 콧김을 내뿜으면서도 벌떡 일어나 편지를 받아 드는 백작.

쿵.

무노는 백작이 일어서는 그 간단한 동작 하나에, 거대한 산맥이 일어나 덮쳐드는 듯한 압박감을 느꼈다.

'음?'

단순히 2m에 가까운 키와 노인 같지 않은 건장함에서 느껴지는 압박감이 아니었다.

'저 커다란 몸 안에, 압축된 무언가가 빈틈없이 꽉 차 있다.'

의자에서 일어나는 동작 하나만으로도 묵직한 진동이 방 안을 울렸고.

그 움직임에 따라 밀려난 공기가 남다른 무게감을 고스란히 전해 주었다.

'이게 6성의 기사....'

위계가 높은 초인의 힘을 간접적으로나마 느낀 무노는, 자연스레 백작의 전신을 뚫어져라 바라보게 되었다.

그게 너무 노골적이었을까.

편지를 읽던 백작이 그 시선을 느꼈는지 잠시 눈을 들었다.

무노는 바로 고개를 숙였지만, 그 짧은 순간 본 백작의 표정은 왜인지 다시 좋아지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그 느낌은 착각이 아니었다.

"...네 녀석, 생각보다 더 괜찮게 컸구나."

"예?"

"로안나의 능력을 안다면, 보통은 그 아이를 피하려고 하는데 말이다."

아.

"...공녀님께서 워낙 편히 대해 주셔서...."

"그래도 로안나가 어디로 가는지 알았다면 말려야 했다, 이놈아. 그 아이의 능력을 초면에 눈치챘다는 놈이, 그걸 왜 모르느냐."

한탄하는 듯한 백작의 말에 무노 역시 속으로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내가 방조했다는 걸 확신하는구나.'

애초에 이럴까 봐 좀 다쳐 가며 알리바이를 만들려 했던 건데.

비정상적인 회복력을 지닌 몸뚱이가 잠깐이나마 원망스러웠지만, 이제 와서 발뺌할 수는 없었다.

자포자기하듯 속사정을 털어놓는데.

"제가 어찌 공녀님을 말릴 수 있었겠습니까. 더구나 가시고자 하는 곳이 왕실...."

그 말에 급격히 좁혀지는 백작의 눈매를 보면서 무노가 말끝을 흐렸다.

"네 녀석, 로안나가 청혼을 받은 게 왕자라는 걸 알고 있었구나?"

...이런.

낚였다.

"그, 그분이 누군지는 모릅니다. 절대 안 여쭤봤고, 공녀님도 말씀해 주시지 않았습니다!"

"지금 그게 중요하냐, 욘석아!"

으르렁거리던 백작의 바위 같은 얼굴이 어느새 코앞으로 다가오더니, 이내 피할 틈도 없이 거대한 손이 무노의 왼쪽 볼을 잡아챘다.

"3백 년 내내 중립을 지켜 온 우리 가문이 왕위 계승에 끼어들게 생겼단 말이다! 더구나 시절도 하 수상한 요즘 시기에!!"

고막에 대고 소리를 지르니, 귀청이 떨어질 것 같았다.

그뿐만 아니라 아예 손가락으로 볼을 잡고 몸을 들어 올리는 괴력은 더 문제였다.

나름 바둥거리면서 반항해 봤지만 무슨 공업용 로봇 집게라도 되는 양, 꿈쩍도 안 하는 손가락에 그 팔을 잡고 볼살 살점이 떨어져 나가지 않게 버티는 게 고작이었다.

"으그그극. 아, 아니. 가, 가카. 이그, 쪼 아니지 아...."

"아니긴 뭐가 아냐! 네 애비인 라이언도 내가 자식처럼 대한다. 네 엄마가 내 딸이고. 그러니까 손자놈 조금 굴린다고 대수냐!"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양자인 그가 졸지에 백작의 진짜 손자로 인정받은 꼴이 되었지만,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나보고 어쩌라고! 내가 어떻게 했어야 하는 건데!?'

그냥, 눈물이 핑 돌 정도로.... 억울하기만 했다.

그래, 억울해서 그런 것이다. 아파서가 아니라.

'제엔장.'

공녀한테 이 대가를 톡톡히 받아 내고 말겠다.

눈앞의 괴물 대신 그 괴물의 손녀에게 어떤 보상을 받을까 생각하며 현실 도피를 하고 있던 찰나.

그의 볼을 잡은 손에 힘이 풀렸다.

쿵.

"사내자식이 그거 가지고 울기는. "

자신의 몸을 놔준 백작이 혀를 차는 것을 본 무노는 이를 갈며 소리를 질렀다.

"아으윽. 안 울었슴다! 억울해서 쪼끔 고인.... 씁! 쪼끔! 억울해서요! 아, 그리고 진짜 제가 뭘 어째야 했습니까!? 공녀가 가겠다는데! 카리나 경도 못 이기는데...!"

성질을 드러내며 소리를 지르다가, 점점 가늘어지는 백작의 눈을 본 순간 다시금 급격히 목소리가 줄어들었다.

"말 다 했느냐."

"...조금 남았습니다."

"그래. 마저 해 보거라."

손짓하는 그 모습이 마치 사형수에게 마지막 자비를 베푸는 집행인 같아 보인다면 착각일까.

'제엔장.'

무노는 엄청난 압박감을 느끼면서도 기어이 입을 열었다.

좀 더 처맞더라도 할 말은 하고 싶었으니까.

"정말 공녀를 아끼신다면, 그냥 두고 보십쇼. 자유를 제약하고 하기 싫은 일을 강요하는 건, 손녀를 위하는 길이 아닙니다."

개인차는 있겠지만, 사람들은 모두 사회에서 스트레스를 받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 스트레스를 해소하거나 위안해 줘야 할 가족들마저 자신을 괴롭힌다면, 아무리 정신력이 강한 사람도 조금씩 피폐해질 뿐이다.

그런 뜻에서 한 말이었는데.

반응은 그리 좋지 않았다.

"뭐라? 네가 로안나에 대해 뭘 안다고...!?

"잘은 모릅니다. 하지만 제가 본 공녀는 온실 속에서 말라죽을 들꽃으로 보였습니다."

그 말에 다시 뭐라 하려던 백작의 입이 다물어졌다.

백작가의 보옥을 감히 들꽃으로 빗댄 거였지만, 그 비유에는 묘하게 설득력이 있었다.

어이없다는 눈으로 무노를 바라보던 백작이 이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 네 녀석, 애비 닮았다는 말은 취소다."

"...?"

"훨씬 더해. 라이언 녀석이 저보다 더한 놈을 키웠어. 녀석은 내가 이렇게 화를 내면 결국 고집을 꺾었었는데. 쓰읍."

그리고 언제 화를 냈냐는 듯이 헛웃음을 짓고는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노인네가 성격이 급해서 미안하다."

갑자기?

'이 노인네가 조울증이 있나?'

엉뚱한 생각에 자연스레 째려보게 되는데.

다행히 백작은 그 불경한 시선을 쓴웃음으로 받았다.

"평생을 앞만 보며 살아왔는데, 다 늙어서 뒤를 돌아보니 정작 가장 중요한 자식 농사를 망쳤더구나. 그나마 싹수가 보이는 손녀는 따뜻하게 품으려 했더니 내 품 안을 벗어나려 하고. 아니, 어쩌면 내가 이랬기에 자식들이 엇나간 걸지도 모르지."

"백퍼...."

"뭐?"

"아니, 아닙니다. 전 아무 말 안 했는데요?"

다시금 자신을 노려보는 시선에 무노는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

그러자 그를 보며 풀썩 웃은 백작이 한숨과 함께 다시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래. 어쩌면 네 말이 맞는지도 모르지. 하지만 나는 집안뿐만 아니라 나랏일까지 봐야 하는 신분이다. 지금 안 그래도 왕실 정세가 혼란한데, 그 아이까지 개입되면.... 아니, 아니 이제 와서 이런 말을 해 봤자 소용없겠지. 그저...."

최선을 다해 수습하는 수밖에.

질끈 눈을 감으며 중얼거리는 백작.

"그럼, 공녀의 뜻을 받아들이시려는 겁니까?"

"이제 와 어쩌겠느냐. 질풍 그 아이까지 붙었으니, 이미 수도에 도착했을지도 모르는데. 하. 이러라고 호위를 붙인 게 아닌데. 카리나 그 아이도 괘씸해. 흐."

"하...."

"그리고 로안나 역시 영특한 아이니 알아서 처신을 잘할 것이다. 그리 믿는 수밖에."

생각보다 쿨한 태도에 무노는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수고했다, 너도. 일단 쉬거라. 적당히 선물을 챙겨 줄 테니 삐지진 말고."

"누가 삐지...!"

"내 손이 과한 건 나도 알고 있으니 하는 말이다, 이 녀석아. 미안했다. 나이 든 할애비가 실수했다 여기고 사과를 받아 주거라."

그 말에 무노는 헛웃음을 흘렸다.

백작씩이나 되는 사람이 자존심을 내려놓고 사과하는 모습이 결코 나빠 보이지는 않았지만.

'이 양반이 진짜 손녀 바보가 맞긴 하구나.'

그 전에, 더 중요한 문제가 남아 있었으니까.

"저기, 각하."

"가서 쉬라니...."

"제일 중요한 본론을 잊으셨습니다. 악마교. 아버지께 들으셨을 텐데요?"

"아...!"

무노에 눈에서 이글거리기 시작한 불길이, 백작의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들었다.

29화. 용의자 특정

"그래. 그놈들이 있었지. 그 빌어먹을 사교 놈들의 잔당이...."

백작은 바로 답했지만, 무노의 안색은 살짝 찌푸려질 뿐이었다.

손녀의 가출에 비해 그 문제를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듯한 느낌이 어조에서 묻어 나온 것이다.

"잔당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배후가...."

"그래. 그 말도 들었다. 하지만 근거가 너무 부족해. 네 기억 속 얘기라고 하지 않았더냐? 그것도 이제야 생각난."

아버지께서 생각보다 많은 이야기를 전한 모양이다.

하지만 그것이 백작을 설득하지는 못한 것 같았다.

"네 기억을 아예 믿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10년 전 그 사교 놈들을 토벌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사람이야. 그 치열했던 전쟁을 직접 겪은 나로서는 그 말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구나."

"예?"

이 노인네가 무슨 말을 하나 싶어서 인상을 찌푸리던 무노는, 백작의 얼굴에 떠오른 회한을 보고는 다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힘겨운 전쟁이었다. 내 충실했던 기사들 절반이 죽어 나갈 만큼. 만약 네 말대로 크레이멀 녀석의 배후가 있었다면, 우리 영지는 그들에 의해 무너졌을 거고 나도 죽었을 것이다. 그리고 왕국 전체가 혼란에 빠져들었겠지."

"...."

"하지만 토벌은 결국 성공적으로 끝났고 그 뒤로 10년이 지났는데, 이제 와서 배후가 있었다니? 기껏해야 잔당일 것이다. 그래야 말이 돼."

백작의 말은 본인의 희망 사항을 담고 있었지만, 또한 사리에 맞기도 했다.

그러나 무노가 트라우마 속에서 건져 낸 기억은 그때를 다시 한번 겪은 것처럼 생생했다.

"그래도 저는 똑똑히 기억합니다. 크레이멀은 분명히 누군가에게 책임을 추궁당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확실합니다."

아버지를 통해 이야기를 전달받았다면 이런 말까지는 듣지 못했을 것 같아서 덧붙인 거였는데.

역시나 그 말을 듣고서야 백작의 눈빛이 무거워지는 것이 보였다.

"...그 말, 책임질 수 있겠느냐?"

"예."

망설임 없이 나온 대답에 백작이 표정이 미미하게 일그러졌다.

"마법사는 마법사가 아닌 자를 사람 취급조차 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어 본 적 있느냐?"

"자신보다 위계가 낮은 마법사 역시 무시한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그래. 놈들은 허공에 불과 벼락을 만들어 내고, 사막을 얼어붙게 만든다. 세상의 섭리를 무시하는 힘을 사용하니 위계가 높은 마법사일수록 오만해질 수밖에."

백작은 그가 이미 아는 사실들을 새삼스레 확인해 가며, 마치 추궁하듯 말을 이었다.

"그러다 보니, 고위마법사는 자신보다 못한 자의 말을 절대 듣지 않는다."

"알고 있...."

"악마교주 크레이멀은 6서클의 마법사였다. 그것도 6서클 중에서도 상위의."

"...습니다. 그 사실도."

"그러니 네 기억대로라면, 놈의 배후는 최소 세븐스타라는 게 된다. 그런데도 그 말에 책임질 수 있다? "

"아버지께도 확신하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허어...."

백작은 한숨을 내쉬더니, 이내 의자에 파묻었던 등을 다시 꼿꼿이 세웠다.

"네 과거의 원한이 기억을 왜곡시킨 것일 수도 있다. 놈들의 잔당을 쫓을 명분을, 무의식중에 꾸며낸 걸지도 모르지. 그 경우도 생각해 봤느냐?"

"...그놈들의 뿌리를 뽑고 보니 배후는 없었고, 제 착각이었다? 그러면 결국 이 땅에, 이 왕국에는 좋은 일이겠지요."

이제는 아예 불꽃이 되어 자신을 쏘아보는 시선을, 무노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받았다.

'뿌리를 뽑아 버린다. 가능하면 내 손으로.'

이제는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친부모의 죽음과, 어린 시절에 받았던 끔찍한 실험과 고문들.

그것들을 떠올리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분노와 의지가 백작에게 고스란히 전달되기를 바랐다.

"네 말을 믿고 일을 벌이고자 한다면, 10년 전 나와 네 아버지가 이룬 공적이 모두 잘못되었다는 것부터 알려야 한다. 그걸 알고서 하는 말이냐?"

순간 움찔했지만, 이 또한 이미 아버지께 듣고 충분히 고민해 본 문제였다.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애초에 사교 놈들은 제게 무슨 정보가 있는지도 모를 테니, 알려 봤자 괜히 놈들의 경각심만 일깨우게 될 수도 있으니까요. 세간에는 잔당을 처리하려 한다고만 공표하시면 됩니다."

"흐.... 애비보다는 확실히 머리를 굴릴 줄 아는구나."

백작은 헛웃음을 지었지만, 분명 그의 주장을 받아들인 듯한 기색이었다.

"제 말을 믿어 주시는 겁니까?"

"어차피 네 말이 사실이라면 이 나라 자체가 흔들릴 일이다. 정말 그 악마교주보다 더한 놈이 있다면, 대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건지 짐작도 가지 않으니.... 일단 그것을 가정하고 조사해 보마."

"감사합니다."

아무리 잔당 토벌이라고 공표한다 한들, 10년 전 일을 마무리 짓지 못했다고 인정하는 것과 다름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한 말이었는데, 백작은 고개를 저었다.

"네가 감사할 일이 뭐가 있느냐. 어차피 내가 마무리하지 못한 일일 뿐이다. 다소 면이 서지 않게 되는 것 정도는 감수해야지. 설마 네가 놈들의 첫 타겟이 될까 봐 걱정이라도 했던 거냐? 아니면 그저 복수를 할 수 있게 되어서 고마운 거냐?"

"솔직히, 후자입니다."

"참 뻔뻔하기도 하구나, 허허. 뭐, 좋다. 아무튼 한동안은 트리안에 있도록 하거라."

"예?"

"엉뚱한 제보에 낚여서 토이젠 영지를 조사하다가 괜히 시간만 낭비했다. 콘넬 자작령에 대한 조사가 이제야 시작되었으니, 우선은 그 결과를 보고 얘기하자꾸나. 그리고 놈들이 널 노린다면, 드라센보다는 이곳이 더 안전할 것이다."

엑?

"안전하게 있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만...."

"네가 잘못된다면 네 아비를 내가 무슨 면목으로 보겠느냐...마는. 네 녀석, 싸우고 싶은 거구나?"

백작이 피식 웃으며 눈을 빛내자 무노는 확고한 의지를 담아 답했다.

"예! 물론입니다. 미끼가 싱싱하게 펄떡여 줘야 고기가 낚이지 않겠습니까."

"푸하하하. 그래, 정말 싱싱하긴 하구나. 그럼 그 미끼를, 물고기가 가장 많을 것 같은 곳에 보내야지."

"예?"

"콘넬 자작가로 가거라. 이미 믿을 만한 조사단을 보내 놨다만, 모에노 콘넬 그 친구가 정말 놈들과 연관이 있다면 단서를 찾기는 쉽지 않을 거야."

"그럼...."

"하지만 놈들이 정말 널 포기 못 한다면, 제대로 입질이 오겠지."

백작은 살벌한 미소를 지으며 결정을 내렸다.

* * *

10년 전 이 땅에서 참상을 일으켰던 사교의 잔당이 다시 나타났다.

드라센 영지에서 시작된 그 소문은 이미 트리안 전역에 슬금슬금 퍼지고 있었는데, 백작이 그것을 직접 인정한 직후부터는 그야말로 들불처럼 번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 사람을 제물로 바쳤다는 사교?"

"에구머니나. 무슨 그런...."

"그럼 백작님이 다 토벌하지 못하셨다는 거야?"

"쉿! 그런 말 하면 못써."

트리안 휘하 7개의 영지에는 순식간에 불안감이 퍼졌지만.

"그래도 백작님께서 알아서 하시겠지?"

"그럼. 북부의 영웅이신데."

"10년 전에도 토벌 성공하셨잖아."

"백작님을 믿자고."

30년째 영지의 치안을 지키고 통치해 온 북부의 방벽, 에녹 트리안의 역사가 그 불안감을 억눌렀다.

그리고 그때, 무노는 트리안을 떠나 남동쪽을 향해 말을 달리고 있었다.

히이이이잉!

"오늘은 이쯤에서 야영해야겠군요."

"그러시죠."

콘넬 영지까지 함께할 동행은 오직 한 명.

트리안에서 무노를 백작에게 안내했던 기사 클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생각했던 것보다 더 직급이 높은 기사였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말씀 편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의 친구분이시면서 존대를 하시면 제가 불편합니다."

"그럴 수야 없지요. 백작님의 명령으로 손님을 모시고 가는 건데. 그리고 확실히 말하는데, 라이언 드라센과 저는 친구 사이가 아닙니다."

"예? 아니, 분명...."

"제가 선배죠. 나이도 7살이나 많은. 뭐, 검술 실력이야 녀석이 쪼오~금 낫지만."

"아...."

갑자기 훅 들어온 이상한 소리에 무노가 멍한 표정을 지어 보이자.

푸흡.

"농담입니다. 크크큭."

혼자서 큭큭 웃기 시작하는 클람.

'...이런 사람이었나.'

대체 어디서 웃어야 할지 모를 농담에 무노로선 어색한 미소밖에 나오지 않았다.

뒤늦게 안 사실이지만, 클람 역시 10년 전 사건으로 남작의 지위를 제수받은 귀족이라고 한다.

다만 공훈의 차이로 영지는 받지 못한 단승 귀족이라고.

- 네 아비가 특별히 뛰어난 공을 세운 거지. 본래 몰락 귀족 출신이기도 했고.

- 클람 역시 평민 출신으로 작위를 받은 훌륭한 기사다. 낚시 작전의 동행으로는 충분하지.

굳이 백작의 말이 아니더라도, 이 세계에서 평민으로 태어나 실력만으로 귀족의 작위를 얻은 클람을 무시할 생각은 없었다.

더구나 클람은 볼수록 특이한 사람이기도 했다.

"굳이 절 차출하시는 걸 보면, 백작 각하께서도 공자를 좋게 보고 계신 것 같습니다. 케인 대공자를 대할 때부터 짐작은 했지만, 확실히 공자는 대단합니다."

아버지에게는 반말을 하면서 자신에게는 공대한다.

단지 지금 자신이 백작의 손님이라는 이유로.

사람 참....

"...복잡하게 사시는군요."

이놈의 주둥아리.

말을 뱉어 놓고 보니 아차 싶었지만, 클람은 오히려 싱긋 웃었다.

"사람은 다 복잡하게 사는 겁니다. 공자가 예를 갖추는 듯하면서 할 말 다 하는 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불편한 것처럼요. 아, 물론 저는 좋아합니다. 아주요. 크크크큭."

또 웃는다.

근데 왜 웃는지 모르겠다.

'난 그냥 배알이 꼴릴 때 못 참는 거뿐인데.'

무노가 본능적으로 주춤 물러나려다가 눈이 마주치고 어색하게 웃는데.

클람이 이번에는 웃음기를 싹 지운 채 생각지도 못한 얘기를 꺼냈다.

"우리가 둘이서 콘넬로 향하는 것을 아는 사람은 몇 없습니다."

"예?"

"낚시라고 했잖습니까. 각하께서."

"아. 그랬죠. 콘넬 자작령에서...."

"애초에 드라센에서 처음 마법의 흔적이 나왔을 때, 토이젠 영지를 제보한 이들이 있었습니다. 익명으로요. 그럴듯한 증거를 동봉했었지요. 물론 거짓이었지만."

"아...."

"덕분에 진짜 일이 터졌을 때, 각하께서는 북서부의 토이젠 영지에 있었지요. 콘넬 자작령의 정반대 쪽에 말입니다."

"예, 들은 바 있습니다."

"트리안 내부에 놈들의 선이 닿은 자가 있다는 거죠. 그리고 지금 콘넬 자작령에 가 있는 조사단 책임자가 꽤나 무서운 분인데, 매우 열 받아 있을 거거든요. 이미 콘넬 자작령이 뒤집어졌을 수도 있습니다."

"예?"

"즉, 놈들이 만약 공자님을 노린다면, 콘넬에 가는 길에 습격을 받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설마.

"그럴 것을 대비해, 각하께서는 의심 가는 사람 몇몇에게 우리의 경로를 각기 다르게 알려주셨지요. 일부는 목적지마저 다르게요. 그리고 우리와 비슷하게 변장을 한 이들이 그 경로를 따라가고 있을 겁니다."

"호오, 그럼...."

"예. 습격이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용의자는 특정될 겁니다. 오늘은 길을 떠난 첫날이니, 시간이 더 지나 봐야 알겠습니다만...."

말끝을 흐리며 웃는 클람을 보며 무노 역시 마주 웃었다.

"아. 역시 그렇군요. 하하하."

"역시?"

"...혹시 그 용의자 중에 백작님과 매우 가까운 분이 있나요?"

"음?"

"벌써 입질이 오네요. 그것도 꽤나 많이...."

"그게, 뭐...."

"티 내지 마시고 같이 웃으시죠. 관도 오른쪽 숲입니다. 아. 하하하!"

"아...? 하, 하하!"

"마법사'들'입니다. 적어도 셋."

웃음 사이로 나지막이 깔리는 무노의 말.

"아. 하. 하. 하. 농담도 잘하는군요. 공자."

억지로 웃는 클람의 목소리는 컸지만, 그 표정만큼은 잔뜩 굳어 있었다.

30화. 습격

"설마 이런 주제로 장난치시는 건 아니겠지요? 나도 전혀 못 느끼겠...."

마치 복화술을 하듯, 웃는 표정으로 낮게 까는 목소리.

"제가 마기에 많이 민감합니다. 들으셨을 텐데요?"

그에 무노가 즉각 대답하자, 클람은 '아' 하는 표정으로 한발 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의 균형을 흐트러트리는 악마의 힘, 마기(魔氣)를 품은 존재는 평범한 사람에게도 이질감과 혐오감이나 공포심을 안겨 주기 마련이다.

그것은 한계를 뚫고 진화를 한 강체술사들에게는 더욱 또렷이 느껴질 수밖에 없는데, 드라센에 마법사가 잠입했을 때 영지의 기사들은 이상하게도 그런 기운을 조금도 감지하지 못했다.

'나만 느낄 수 있었지.'

- 네 특성을 전부 공개하는 것은 위험하지만, 마기에 민감하다는 것 정도는 알릴 필요가 있다. 놈들이 마기를 감추는 수법을 쓰니, 네가 그것을 알아챌 수 있다는 사실을 밝혀야 네 말에 설득력이 생길 거다.

아버지는 그렇게 말했고 무노 역시 동의했었다.

다만 백작은 그저 그 이야기를 참고만 하는 듯했다.

- 마기에 민감한 특성이라? 3차 특성 중에서도 특이한 쪽이구나. 흐음. 혹시 네 녀석, 정령사나 사제 쪽 적성이 있었던 것 아니냐? 허허.

- 뭐, 안 그래도 그 사건 이후 영지의 사제들과 지금 콘넬에 가 있는 우리 영지의 정령사, 라스미아가 트리안 내부를 대대적으로 점검했었다.

- 마법사가 수작을 부려 봤자 마법일 뿐이니, 정령사나 사제의 눈을 피할 수는 없어. 굳이 네가 더 살필 필요는 없다. 트리안의 체면 문제도 있고....

아직은 정령사나 사제를 실제로 만난 적은 없지만 관련된 이야기는 무수히 보고 들었으니, 그 말에는 무노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다만 지금은 약간 회의감이 들었다.

'4서클 그놈을 처리한 이후로 마기가 더 잘 느껴진단 말이지. 정령사나 사제도 이런 감각으로 마법사들을 판단하는 걸까?'

지금 그의 감각은, 관도의 오른쪽 숲 안쪽에 존재하는 마법사들의 존재를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악마포식자가.

- 크르르르.

'조금만 기다리라고. 안 그래도 잡아야 하니.'

또 하나의 자신을 진정시키고 흘낏 시선을 돌리자, 눈에 보이는 것은 역시 숲과 나무밖에 없었다.

다른 동물의 기척은 전혀 느껴지지 않지만, 오직 마기를 품은 불쾌한 것들의 존재감만은 확연하게 느껴졌다.

"숲 안쪽 2~30m 부근, 3서클로 추정되는 마법사 셋이 비슷한 간격으로 떨어져 있습니다. 삼각형 모양으로.... 마기를 그 가운데에 응집한 채 대기하고 있습니다."

"그렇게까지 자세히 알 수 있다고요?"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자신에게 어깨동무를 하고 있던 클람의 반응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자신의 능력이 결코 조금 민감한 수준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합니다."

"허.... 우리 동선을 세 군데로 꼬아서 알려 놨는데, 어떻게 벌써...."

멀리서 보면 무언가 즐거운 얘기라도 나누는 것 같은 모습.

하지만 두 사람이 낮은 목소리로 몰래 나누는 대화의 내용은, 그 표정이나 행동과는 전혀 달랐다.

동선을 세 군데로 알렸다는 것은, 악마교에 관여하고 있다고 의심되는 사람이 셋이었다는 얘기고.

백작의 의도가 그대로 들어맞았다면, 지금 사교도들은 여기가 아닌 다른 경로에도 이와 비슷한 전력을 깔아 놨다는 말이 된다.

클람의 말한 대로였다.

'어떻게 벌써...?'

자신이 트리안에서 출발한 게 고작 한나절 전이다.

클람과 함께 콘넬 영지를 향하기로 결정한 것은 바로 어제였으니, 보통 귀족가의 일 처리 방식에 비추어 보면 그야말로 미친 실행력이었다.

그런데 적은 이미 그사이에 모든 준비를 마친 것이다.

정보를 알리고, 대응할 전력을 마련하고 파견하는 데까지.

즉 놈들은 3서클의 마법사를 세 군데에 세 명씩, 총 아홉이나 즉시 파견할 수 있을 정도의 전력을 갖추고 있다는 의미다.

역시나 잔당으로 볼 세력은 아니라는 확신이 다시금 들었다.

'최소 트리안 백작가 수준이라는 건데....'

그나마 일전의 그놈처럼 4서클의 마법사가 없다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하지만 이 또한 만만치 않은 전력이었다.

"마법사들이 간격을 유지한 채 그 가운데에 마기를 응집하고 있다.... 마법진(魔法陳)이군요. 모르고 있었으면 저도 무조건 당했겠어요. 빌어먹을."

3성의 기사는 셋이 모인다 해도 3성의 기사 셋일 뿐이지만.

3서클의 마법사 셋이 모이면, 경우에 따라 4서클의 마법사 혹은 그 이상의 힘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니까.

"약속한 대로, 제가 미끼가 되겠습니다."

"...정말 괜찮겠습니까."

"여태 만나 온 습격자들은 절 사로잡으려... 했습니다."

그리 말하다 보니 살짝 걸리는 것이 있긴 했다.

4서클 그놈만큼은 마지막에는 정말 자신을 죽이려 했으니까.

뭐, 그거야 궁지에 몰리다 보니 흥분해서 그랬던 걸로 보는 것이 맞을 터였다.

...아마도.

"충분히 가능할 겁니다. 아니더라도, 절 죽게 내버려 두시진 않을 거 아닙니까?"

"하. 거참, 정말 배짱 좋으시군요."

무노는 그 칭찬에 답하는 대신 바닥을 내려다보며 슬쩍 인상을 찌푸렸다.

"움직이시죠. 벌써 마기가 이 공터에 은밀히 퍼지고 있습니다."

잘 닦인 관도의 주변 숲으로 이어지는 공터에, 그의 감각으로만 읽히는 기분 나쁜 기운이 깔리고 있었다.

"여전히 전혀 모르겠군요. 흐음, 그래도 믿겠습니다...."

조용히 눈썹을 꿈틀거린 클람이 이내 애써 밝은 얼굴로 목소리를 높였다.

"공자는 천막을 칠 준비나 하고 있으십쇼. 제가 저쪽에서 장작을 구해 오겠습니다."

무노가 마법사들이 있다고 말한 오른쪽이 아닌, 관도 왼쪽의 숲을 향해 여유롭게 걸음을 옮기는 클람.

그에 바닥에 깔리며 짙어지던 마기가 갑자기 흔들리더니 점점 흐려지기 시작했다.

'그래. 곤란하겠지....'

클람은 무려 4성의 기사.

마법으로 먼저 처리하지 못한다면, 죽는 것은 저 마법사들이 될 테니까.

하지만 무노 역시 클람이 숲을 우회하여 적들의 뒤를 칠 때까지 기다리고만 있을 생각은 없었다.

"저는 이쪽에서 장작을 줍겠습니다! 같이하는 게 빠르겠죠!"

반대편 숲을 향하던 클람은 그 순간 멈칫하는가 싶다가도, 이내 다시 발걸음을 옮겨 사라지는 석양빛처럼 숲속으로 녹아들었다.

'좋아.'

단순히 안전을 위한다면, 무노는 클람이 마법사들의 뒤를 친 다음에 움직이는 것이 나을 터였다.

하지만.

'내 먹이야. 가능한 한 내가 먹는다.'

머릿속에서 아우성치는 악마포식자의 목소리가 아니더라도, 그는 놈들을 직접 처리할 생각이었다.

단지 복수심 때문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소망이 있었으니까.

'사람답게 살고 싶다.'

다행히 전생보다는 훨씬 좋은 환경에서 자랐지만, 그것만으로 그 단순한 소망이 충족되는 것은 아니었다.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말은, 그저 그냥 그렇게 살아가기만을 원한다는 의미가 아니었으니까.

'내 인생, 내 뜻대로 살 거다. 휘둘리지 않고.'

그것이 무노가 생각하는 사람다운 인생이었다.

하지만 이 불편하고 야만적인 세상에서 그렇게 살려면 힘이 필요했다.

이 세상에서는 힘이 최고의 가치니까.

계급제의 사회지만 능력, 특히 무력에 따라 귀족도 왕도 될 수 있는 세상.

그러자면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긴 했지만, 그 또한 자신이 있었다.

평생을 노력하며 살아온 한문호의 인생과 평생을 투쟁하며 살아온 무노 드라센의 인생이 모두 그의 안에 있었으니까.

심지어 그런 그에게, 이제 지름길까지 생겼다.

아버지도, 백작도 감탄한 재능.

지금 저 숲에서 기다리는 원수들이 심어 놓은 악마를 잡아먹고 얻은 재능이.

무노는 숲을 향해 걸어가면서, 떠나기 직전 백작에게 들은 말을 떠올렸다.

- 정확히 네 특성이 뭔지 묻지는 않겠다만, 직관적이지 않고 복잡해질수록 다음 단계 진화를 하는 것이 힘겨워질 거다.

- 그것이 다중 특성, 혹은 특별한 특성의 가장 큰 단점이다.

- 별거 아니라고? 적어도 내가 알기로 백 년 내 세븐스타의 경지에 오른 이들 중 3차 특성을 가진 이는 하나도 없었는데?

'저는 다를 겁니다, 영감님.'

이미 애머스를 잡아먹고 몬스터들을 사냥하며 육체 능력만 50% 이상 상승했다.

'마기를 가진 놈, 특히 마법사를 잡아먹을수록 나는 강해진다.'

4서클 그놈을 잡아먹지 못한 것을 괜히 아쉬워한 것이 아니다.

물론 애초에 실력이 받쳐 주지도 않았고, 어찌 보면 카리나의 도움을 받아 살아난 것이니 아쉬워할 자격도 없을지 모르지만.

"...이번엔 달라야지."

그리고 다를 것이다.

달라야 한다.

'어쩌면 이번이 가장 쉬운 기회야.'

애머스는 아버지가 처리한 것으로 공표되었고, 4서클 그놈은 카리나와 다른 기사들이 뒤를 쳐서 잡은 것으로 외부에 알려졌다.

하지만 이번에도 이놈들의 습격이 실패로 끝난다면, 사교 놈들도 이제는 주변인이 아닌 자신을 주목할지 모른다.

'아니, 반드시 그러겠지. 그러니 그 전에....'

무노는 자신도 모르게 스산한 미소를 짓고는, 입맛을 다시며 숲속을 향해 빠르게 걸어 들어갔다.

지이이잉.

팔다리의 검은 보호대가 진동하기 시작하는 것을 억지로 달래 가면서.

* * *

[4성 기사는?]

[감지 범위를 벗어났다.]

[목표가 다가온다.]

[4성 기사를 먼저 처리해야 한다. 마법진이 흐트러지면 우리가 역으로 당할 수 있어.]

[그렇다고 다가오는 놈을 그냥 놔줘?]

세 명의 마법사를 연결하는 메시지 마법이 서로의 귓가를 연달아 시끄럽게 울렸다.

[...일단 먼저 잡는다.]

[하지만!]

[마법 변환, 일대에 결계를 만들고 목표부터 제압한다. 4성 기사는 결계 안에서 상대한다.]

[그래도 피를 보는 이가 나올 텐데.]

[명령이 우선이다.]

[알겠다.]

[젠장. 인정한다.]

조직의 최정예 중 하나였던 4서클 마법사, 알튼 런이 사망한 직후 북부 지단에는 비상이 걸렸다.

고작 2서클이었던 마법사 애머스는 그렇다 쳐도, 마기사까지 동원한 고위마법사가 느닷없이 시골 영지에서 죽은 것은 어떻게 숨길 수도 없었다.

10년 전에 놓친, '바쳐지고도' 살아남은 수수께끼의 실험체를 잡으려다가 그동안 은인자중했던 조직의 꼬리가 잡힌 것이다.

그럼에도 조직은, 그 실험체를 회수하고 트리안에 드리웠던 꼬리를 잘라 내는 방향을 택했다.

즉, 실험체 회수가 아직은 최우선 목표라는 것이다.

아이언 왕국 북부에 뿌려 놓은 조직의 선을 다 잘라 내더라도 말이다.

'왜 그렇게까지 하는지는 모르겠단 말이지.'

세 마법사 중 리더, 로한은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바깥의 신(外神). 무지한 자들이 악마라는 멸칭으로 부르는 지고한 존재.

그분들께 바쳐지는 제물은, 때로는 멀쩡히 살아나기도 한다.

너무 하급품이라서 외신에게 외면당하는 경우라면 제물은 살처분되겠지만.

간혹 격이 높은 외신은 아예 제물을 안 받기도 하는 것이다.

'아니면.... 상부에서는 저 실험체를 외신께서 분명히 받아들였을 거라 확신하는 건가? 왜?'

머리를 굴려 보지만 답이 나올 리가 없었다.

그러니 일단은 명령대로.

[타겟이 다섯 걸음 안쪽으로 접근하는 즉시 결계를 발동한다. 속성은 냉기. 사로잡는다.]

[준비 끝.]

[지시를 기다린다.]

'일단 놈을 산 채로 얼리고, 그 후에 결계를 향해 돌진해 올 4성 기사를 잡는다. 너희 둘 정도는 희생해도 조직에서는 성공으로 볼 거다.'

로한은 절대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그 속마음을 꿀꺽 삼킨 채, 실험체가 다가오는 광경을 은신 마법 안에서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가 예견한 마지막 한 걸음을 내딛기 직전.

[발동...!]

갑자기 '씨익' 웃은 실험체가, 그들이 있는 방향을 향해 번개처럼 뛰어들었다.

31화. 두 번째 진화

'흥.'

발걸음을 내딛으려 하던 찰나, 마기의 흐름이 바뀌는 것이 느껴졌고.

그래서 그 순간, 무노는 세 줄기 마기가 서로 엇갈리는 틈을 향해 그대로 뛰어들었다.

촤르륵.

뻗어 나간 네 가닥 쇠사슬들이 묘한 패턴으로 얽혀들려던 마기의 흐름에 끼어들어 그 일부를 흡수했다.

꿀꺽꿀꺽.

- 키야아아아!!

마치 감로수를 마시는 듯한 느낌과 함께 머릿속 악마포식자가 환호성을 질렀지만, 이번에는 저번과 달리 녀석에게 몸을 내맡기진 않았다.

'완벽히 통제될 때까지, 넌 봉인.'

모든 마법을 무식하게 몸으로 부딪쳐 가며 삼킬 생각은 없다.

그래선 안 된다는 사실을 배웠으면, 다르게 행동해야 하지 않겠는가.

지금처럼.

"어떻...!?"

눈앞에 다가온 마법사의 얼굴을 평범했다.

장기 여행자가 흔히 입을 법한 회색 로브에, 얼굴의 반을 덮은 덥수룩한 수염.

마기를 느끼지 못했다면 그저 길거리의 부랑자 정도로 치부됐을 법한 그놈의 눈동자가 두 배로 커지는 것을 보면서 무노는 대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쩌어어억.

스각.

"악!"

'얕아.'

칫.

그 3서클의 마법사는 애머스와의 수준 차이를 보여 주듯, 잘린 팔 하나만을 남겨 놓고 미끄러지듯 뒤로 물러났다.

"어떻게...!?"

"이제 막 각성한 놈이라더니...!?"

요란스러운 적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무노는 미끄러지는 부랑자 마법사(?)의 전면으로 다시 빠르게 쇄도했다.

"어딜...!"

적어도 팔 잘라 놓은 놈은 이 자리에서 잡아야 하지 않겠나.

하지만 그가 공포에 질린 적의 얼굴을 확인하면서 재차 대검을 휘두르려던 순간.

쩌저저저적.

갑작스레 놈의 전면에 거대한 얼음벽이 나타났다.

'젠장! 벌써?'

꽈아아아앙!

전력으로 휘두른 대검이 애꿎은 얼음벽을 부술 때.

"잡아!"

목표였던 마법사는 제 동료들을 향해 악을 썼다.

물론 정작 그 몸은 갑자기 나타난 빙판 위를 미끄러지며 더욱 빠른 속도로 멀어지고 있었지만.

이내 놈의 고함에 반응하듯, 사방에서 서슬 퍼런 냉기의 폭풍이 그가 있는 자리를 덮쳤다.

쩌저저정.

'이따위...!'

콰드드득.

하지만 마력을 그대로 흡수하며 얼음 폭풍의 여파를 최대한 흩어 낸 무노는 다시금 원래의 목표를 향해 돌진했다.

"어떻게!?"

"미친...!?"

당황하는 적들의 목소리가 퍼지고 난 직후.

'음!?'

이번에는 칼날 같은 얼음 덩어리들이 사방에서 쏟아지기 시작했다.

'전조도 없이?'

살짝 당혹스러웠지만, 대응은 빨랐다.

파바바박.

콰과과광!

휘둘러진 대검과 쇠사슬이 날아드는 얼음 칼날들을 한꺼번에 쳐 내는 순간.

"흡!"

돌진하던 무노의 몸이 관성을 무시하듯 갑자기 허공을 향해 직선으로 치솟아 올랐다.

"위!"

"죽여!"

"아니, 사로잡아!"

파바바바박.

적들의 말이 서로 꼬인 그 순간, 냉기의 폭풍과 얼음 칼날들이 어중간하게 섞이면서 위력이 반감되었고.

그 마법 중 일부는 네 가닥 쇠사슬을 다리 삼아 숲속에서 입체 기동을 하고 있는 인간 거미, 무노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그 광경을 지켜본 마법사들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마력으로 이루어진 사방의 마법 결계가, 그 과정을 더욱 명확하게 느끼게 만든 것이다.

- 마법은 섭리에 위에 군림하는 진리.

- 그렇기에 마법사야말로 가장 위대한 인간이다.

그 절대 명제를 부정하는 듯한, 마법을 먹는 기사의 행태.

당연히 발작 같은 반응이 튀어나왔다.

"이놈, 마법을 먹는다!"

"죽여!!"

"무조건 죽여!"

살기와 흥분, 당황. 모든 감정이 뒤섞인 목소리들이 쏟아질 때.

쇠사슬 다리를 단 인간 거미는 나무 위에서 뛰어올라, 이 냉기의 감옥 같은 지역의 축을 이루는 다른 마법사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빌어...!"

쩌저저저적.

다시금 예의 그 얼음벽이 눈앞을 가로막았지만, 무노는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우드드득.

근육을 쥐어짜 가며 에너지를 폭발시킨 몸이 공중에서 활처럼 휘어지더니.

번쩍.

번개처럼 휘둘러진 대검이 얼음벽을 무시하듯 관통하는 순간, 적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아악!"

쩌어어억.

콰아아아앙!

뒤늦게 얼음벽이 깨져 나가며 충격파가 사방을 휩쓰는데.

'잡았다!'

강퍅한 인상의 깡마른 마법사의 몸이 오른쪽 쇄골부터 복부까지 쩍 하고 갈라지는 것을 보며, 무노는 만족스러운 듯 씩 웃었다.

처음부터 얼음벽이 솟아오를 걸 짐작하고 모든 힘을 실어 내지른 바람 가르기가 예상 그대로의 효과를 보여 주었다.

일격으로 적 하나를 완벽히 무력화시킨 것이다.

그리고 그 모습은.

- 아주 '먹음직'스럽다.

우드드득.

새까맣게 변해 가는 눈동자와 부풀어 오르는 근육, 피부 위로 튀어나오는 검은 핏줄들.

하지만 무노는 스스로의 변화를 인지하지 못했다.

오히려.

'저놈이 죽기 전에!'

촤르륵.

서둘러 쇠사슬을 움직여, 숨이 끊어지려 하는 허약한 마법사의 몸을 휘어 감았다.

콰드드드득.

"끄아아악!"

"알론!!"

"자폭해! X신아!!"

우드드득.

그 말을 따르듯 그대로 부풀어 오르던 깡마른 마법사의 몸은, 조여드는 쇠사슬을 따라 다시금 바람 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푸스스스.

그러자 이내 무노의 머리 위로.

"죽어!"

"괴물 자식!"

확고한 살의를 담은 거대한 냉기의 칼날이 떨어졌고.

쩌저저적.

나무를 타고 오른 얼음의 사슬이 그의 양 발목을 묶었다.

콰륵.

콰드득.

하지만 포박한 마법사를 통해 검회색의 기운을 빨아들이며 웃고 있는, 반쯤 눈이 뒤집힌 무노는 그 어떤 것에도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온몸에서 우드득 소리를 내며 부르르 떨기만 할 뿐.

하지만 그때, 그런 그를 대신하여 그 공격에 대응하는 이가 있었다.

"이게...!"

콰아아앙!

"...무슨 짓!"

푸스스스스.

숲의 뒤쪽에서 튀어나온 푸른 머리의 기사가 무노의 머리 위로 떨어지던 칼날을 분쇄했다.

마법사들의 허점을 노리려던 시도를 포기하고 무노를 살린 것이다.

"무노 공자!!"

클람의 고함 소리가 숲속에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진 뒤에야.

움찔.

흰자위까지 검게 뒤집혔던 무노의 눈동자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반드시 죽여야 돼!"

"저런 불경스러운 것이...!"

대신 눈이 뒤집힌 듯한 두 명의 마법사가 전신을 쥐어짜듯 마기를 뽑아 올렸다.

폭발적으로 마기를 뽑아내느라 '우드드득' 소리와 함께 골격이 비틀리는데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그 마기는 곧바로 어마어마한 냉기로 화하더니, 둘의 사방을 뒤덮는 얼음의 칼날과 창, 화살이 되어 쏟아졌다.

"빌어먹을!"

콰콰콰쾅!

클람이 미친 듯이 회전시킨 창이 그 마법을 사방으로 튕겨 냈지만.

그것 역시 역부족이었다.

'이런 황당한....'

서서히 몸이 얼어붙어 가며 움직임이 느려지는 것을 느낀 클람이 이를 악물었다.

무노까지 지키려고 무리하다가 냉기의 침습을 통제하지 못한 것이다.

'저놈들도 자폭한 거야. 시간만 지나면 되는데....'

지금이라도 피한다면 자신의 몸은 지켜 낼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얼굴 때문이라도 그럴 수는 없었다.

'라이언 네 녀석, 이 빚은 나중에 저승에서 만나면 꼭 갚아라. 젠장!'

각오를 다진 그의 창이 오히려 직전보다 더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콰콰콰콰콰.

자신보다는 각하가 기대하는 인재를, 천재라 불리던 후배의 사랑하는 아들을 지키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리고 그 대가로.

카드득.

휘두르는 창대를 잡은 그의 손아귀가 갈려서 터져 나가고.

푸푹.

푹.

사지에 얼음의 칼날들이 하나둘씩 꽂혀 들기 시작했다.

'크윽.'

그 통증이 결국 다시 창을 느리게 만들었고.

얼음의 칼날에 의해 난자되던 그의 몸이 완전히 무너지기 직전.

"죄송...."

촤르르르륵.

아주 작은 목소리와 함께, 사방으로 굵직한 쇠사슬들이 튀어나왔다.

"...합니다."

콰드드드득.

직전보다 두 배는 길어진 듯한 검은 쇠사슬이 폭발적으로 움직이며, 쏟아져 오는 얼음의 마법들을 쳐 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또한 4성 기사가 전력을 다해 휘돌리던 창을 완전히 대신할 수는 없었다.

결국.

"난 여기 있다!!"

이내 그 쇠사슬의 주인은 사방으로 쇠사슬을 휘둘러 마법을 분쇄하면서 두 마법사를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미친 듯이 폭주하는 마법사들의 목표가 자신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내릴 수 있는 결단.

그리고 그 예상을 증명하듯.

콰콰콰콰콰콰.

쏟아지는 얼음의 칼날들은 클람을 두고 돌진하는 그에게만 쏟아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네 가닥 쇠사슬로 사방에서 쏟아지는 공세를 완전히 막아 내는 것은 무리였다.

돌진하는 무노의 갑옷이 몰아치는 마법에 부스러지듯 깨져 나갈 때.

까드득 이를 간 무노의 손발에 달린 보호대들이 한순간에 확대되며 팔다리를 뒤덮기 시작했다.

콰아아앙!

그러자 무노가 쇠사슬로 미처 막아 내지 못하던 얼음의 세례가 그의 팔다리에, 정확히는 그 팔다리를 둘러싼 검은 '갑옷'에 부딪혀 깨져 나갔다.

팔꿈치에서 손목까지 감싸고 있던 검은 보호대는 손끝에서 어깨 부근까지를 뒤덮었고,

발목에서 무릎까지 덮여 있던 다리의 보호대 역시 발끝에서 허벅지까지 완전히 감싼 갑옷으로 변해 있었다.

마치, 사지에만 빈틈없이 검은 갑옷을 장착한 듯한 모습.

그리고 그 갑옷들은, 쏟아지는 냉기의 공세에도 표면에 잠깐 얼음이 맺히고 말 뿐이었다.

물론.

푸부북.

그 '검은 갑옷'이 감싸지 않은 몸통, 특히 팔로도 쳐 내지 못한 등 쪽에 몇 발의 얼음 화살이 박히기는 했지만.

"크...."

그대로 마법사들 앞에까지 도달한 무노의 검은 눈동자는 시퍼렇게 살아 있었다.

자연히.

"말...도, 안...."

"이...럴, 수는...."

"뒈져!"

쩌어어어억.

마력을 남김없이 뽑아내느라 팔다리가 비틀려 옴짝달싹 못 하던 두 마법사는, 그대로 휘둘러진 무노의 대검에 반쪽이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