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포터가 다 해먹음
1화 환생 퀘스트 (1)
나는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엄청난 숫자의 몬스터 군단이 이쪽으로 몰려오고 있었으나, 나에게는 조금의 위기감도 주지 못했다.
몬스터들이 더욱 가까이 접근하자 내 오른편을 지키던 흑기사가 반응했다.
묵빛 대검을 쓰윽 뽑아 들고 거대한 검기를 날린다.
- 써-걱!
참격이 지나간 곳의 몬스터들이 흔적도 없이 바스러졌다.
기사의 머리 위에는 조그마한 상태창이 떠올라 있었다.
[고요한]
[클래스:흑기사]
[졸업생] [Rank:S]
뒤이어 내 왼편의 마법사도 두런두런 마법을 영창하기 시작했다.
곧 몬스터 군단의 머리 위에 무수한 마법진이 떠오르며 연쇄적인 폭발을 일으켰다.
- 퍼퍼퍼펑!
[홍현아]
[클래스:루비 마탑주]
[졸업생] [Rank:S]
두 S등급의 활약 덕분에 길이 열리고.
나는 가던 길을 계속 나아갔다.
아직도 포기하지 않은 놈들이 사방에서 덮쳐 오지만, 가까이 접근하기도 전에 저절로 튕겨 나가고 소멸한다.
내 뒤를 따라 걷는 사제.
그녀가 유지하는 강력한 보호막 덕분이다.
[이 서]
[클래스:성녀]
[졸업생] [Rank:S]
이 외에 다른 파티원의 면면을 살펴봐도 S등급으로 도배를 했다.
몬스터 군단이 아무 힘도 못 쓰고 길을 내주는 것도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귀찮은 날파리들을 걷어 내자 폐허가 된 신전이 모습을 드러냈다.
반쯤 부서진 대문을 뻥 걷어차고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신전 한가운데에 제단이 하나, 그리고 그 제단에 요사한 붉은빛을 뿌리는 보석이 놓여 있었다.
대충 집어 들어 어깨너머로 내밀자, 그림자 속에서 불쑥 솟아난 여성이 그것을 더없이 공손한 자세로 받아 들었다.
그녀의 입가에는 뾰족한 송곳니가 돋아나 있었다.
[카르밀라]
[클래스:진혈족 뱀파이어]
[졸업생] [Rank:A]
- 번쩍!
카르밀라가 받아 든 보석이 폭발하는 듯한 광채를 발산했다.
곧 점점 크기가 줄어들며 붉은 기체로 화하더니, 그녀에게 남김없이 빨려들어 갔다.
보석의 힘을 모두 흡수한 카르밀라가 눈을 떴다.
[카르밀라]
[클래스:뱀파이어 여왕]
[졸업생] [Rank:S]
나는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로 1,000번째.'
아카데미 MMORPG <용살학원>.
플레이어는 아카데미에서 수많은 사건·사고를 거치며 성장한다.
졸업 후에는 최전선에서 드래곤을 비롯한 각종 보스 몬스터들을 토벌하게 된다.
이 게임에서 내 직업은 '서포터'였다.
왜 많고 많은 직업 중에 하필 서포터인가?
그건 내가 이 게임에서 제일 좋아하는 컨텐츠와 연관이 있었다.
바로 '영웅 키우기.'
아카데미에 막 입학하는 1학년 햇병아리 NPC를 최강의 졸업생, S급 영웅까지 성장시킨다.
그리고 서포터야말로 이 작업에 가장 잘 어울리는 클래스였다.
'처음에는 고생 좀 했지.'
플레이어 자신이 S급이 되는 것도 쉽지 않은데, NPC를 S급으로 끌어올리려 했으니.
하지만 나는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쏟아부었고, 끝내 한 명, 두 명 S급을 달성해 냈다.
휘하의 영웅이 늘어날수록 점점 노하우가 생기고 작업에 가속도가 붙었다.
언제부터인가 다른 플레이어들이 나를 'S급 찍어 내는 공장'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나 자신의 무력도 강해졌다.
내 직업은 여전히 서포터였지만, 키우는 영웅들의 직업에 관심을 갖고 파고들다 보니 의도치 않게 그 분야에도 통달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해서.
방금 S급을 달성한 [카르밀라]가 1,000번째다.
휘하의 S급 영웅만 무려 1,000명.
이들을 육성하며 얻어 배운 스킬이 수천 개.
통합 랭킹 1위.
최강의 서포터.
그게 바로 나였다.
그러나 이런 나에게도 걱정거리가 있었는데....
'컨텐츠가 부족해.'
아카데미를 수백 번씩 들락날락하며 천 명이나 되는 영웅을 육성했다.
그중에는 기사, 무인, 마법사, 주술사, 사제를 시작으로 탐험가, 연금술사, 대장장이, 상인에 심지어는 농부, 마부, 낚시꾼까지.
온갖 직업이 다 포함되어 있었다.
그걸 싹 다 S랭크로 키워 놓고 보니 이제는 남은 게 없다.
정확히는 이미 키운 영웅들과 중복되는, 고만고만한 친구들만 남았다.
'중복이라도 키울까? 이미 중복도 많은데. 그래도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낫나?'
진지하게 그런 고민을 하던 도중, 시야 한구석에서 쪽지 모양 아이콘이 깜빡거렸다.
중요한 알림 메시지가 도착했다는 뜻.
[당신은 누구도 이루지 못한 위대한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S급 졸업생 1,000명!]
[특수 퀘스트를 진행할 수 있습니다.]
▷세계의 멸망을 저지하십시오.
▷난이도:EX급
!!주의!!환생 퀘스트입니다!!
[수락/거절]
'이건....'
S급 퀘스트는 몇 번쯤 클리어해 본 경험이 있었다.
랭킹 1위에 오른 나에게도 쉽지 않은 것들이었다.
그렇다면 그 위 단계인 EX급은 더욱 어려울 게 분명했다.
게다가 '환생 퀘스트'란다.
일시적으로 플레이어의 능력치와 장비, 스킬을 초기화하는 퀘스트.
당연히 온전한 상태로 임하는 일반 퀘스트보다 난이도가 한 단계 높다.
EX급에 환생이 더해지면 도대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난이도일까?
하지만 나에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S가 최고 등급이 아니었단 말이지.'
중요한 것은 방금 막 알게 된, S랭크 위에 EX랭크가 존재한다는 사실.
EX랭크 퀘스트가 존재한다면,
EX랭크 아이템과 스킬도 존재할 것이다.
'EX랭크 영웅도.'
수집욕이 불타오른다.
더 강한 영웅들을 육성할 실마리를 잡았다.
이걸 난이도가 어려워 보여서 포기한다?
나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나는 주저없이 [수락]을 선택했고,
[퀘스트가 시작됩니다.]
정말로 게임 속 세상에 들어와 버렸다.
* * *
전후좌우 빽빽하게 나무가 늘어선 숲 한복판.
<용살학원>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문제는 내가 곧바로 강렬한 위화감을 느꼈다는 점이다.
가령 어디선가 솔솔 불어오는 바람, 그 바람에 흩날리는 내 머리카락, 바람에 실려 오는 옅은 풀 내음까지.
지금 이 상황은 게임도 아니고, 꿈도 아니었다.
내 짐작이 맞다면....
'이거, 그건가?'
소설에서나 보던 '게임 속 플레이어가 되었다.'
이제는 내가 그 소설의 주인공이 됐나 본데,
난이도 EX급의 영향이 아닐까 싶다.
'좀 당황스럽긴 하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내가 선택한 퀘스트인데.
그리고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도 나는 분명 퀘스트를 수락했을 것이다.
EX급 영웅을 육성할 기회란 나에게 그런 의미였다.
빠르게 받아들이고 나아간다.
'상태창.'
[김 호]
▷스킬
(없음)
▷특성
(없음)
▷장비
평상복(F)
▷인벤토리
5실버
깔끔해진 상태창.
다양한 S급 스킬과 특성들도, 온몸을 도배하던 전설급 장비들도, 천 명에 달하던 S랭크 영웅들도 이제는 없다.
사실상 캐릭터를 처음 생성한 상태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러면서 서포터 클래스라면 앞으로 개처럼 구르는 일만 남았겠지만,
'아직 실망하긴 이르지.'
[환생 퀘스트 특전이 부여됩니다.]
'환생'이라곤 해도 아예 맨몸으로 EX급을 깨라고 던져 버리지는 않는다.
초기화를 하는 대신 최소한의 완충재로써 플레이어에게 몇 가지 무기를 쥐여 주는데, 바로 환생 특전이라는 녀석이다.
이 특전은 기존에 보유한 스킬과 특성, 장비, 달성한 업적 등을 합산해서 결정된다.
그리고 이 게임에서 안 해 본 짓이 없는 썩은물, 나에게는 꽤 짭짤한 특전이 주어진다.
['복사-스킬'을 습득합니다.]
['복사-특성'을 습득합니다.]
['증폭(F)'을 습득합니다.]
['군주(F)'를 습득합니다.]
[복사], [증폭], 그리고 [군주].
강력하고 효용성이 높아서 즐겨 쓰던 스킬들이었다.
지금 같은 극초반부에는 거의 사기 수준이고.
랭크가 F까지 하락한 건 아쉽지만, 그건 차차 다시 올리면 그만이지.
[김 호]
▷스킬
복사-스킬[0/1]
증폭(F)
▷특성
복사-특성[0/1]
군주(F)
▷장비
평상복(F)
▷인벤토리
5실버
내가 상태창을 다 확인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떠오르는 메시지.
[튜토리얼I]
▷조건:10분 동안 생존하십시오.
▷보상:용살학원 신입생 키트
[남은 시간 9:56]
숨 돌릴 틈도 없이 튜토리얼 퀘스트를 던져 준다.
10분 동안 잘 도망 다니는 게 목표.
다만 본래 튜토리얼이란 초보자 구역에서, 고블린 따위의 최하급 몬스터들 틈바구니에서 10분을 생존하는 것인데, 지금 내 위치는 어디인지 모를 숲 한복판이다.
'시작부터 뭐가 나오려고.'
- 쿠웅! 쿵!
그런 생각을 하기 무섭게 육중한 발소리가 가까워져 왔다.
우지끈거리며 나무 부러지는 소리는 덤이었다.
곧 수풀을 헤집고 나타난 거구의 몬스터, 오우거.
한 손에는 사람 몸뚱이만 한 곤봉을 들고 있다.
"꾸우우우...."
'튜토리얼부터 오우거라.'
나는 조금 긴장하면서도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오우거의 등급은 C에서 D 사이.
반면 내 등급은 사실상 초기화된 상태라 F급 언저리다.
랭크 차이, 육체 능력 차이가 극심한 만큼 지금으로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못 쓰러뜨린다.
'도주도 힘들어 보이고.'
같은 맥락으로 당장 뒤돌아 뛰더라도 금세 따라잡힐 터.
처치도 도주도 불가능하다면 튜토리얼부터 그냥 죽으라는 소리인가?
'그렇지는 않지.'
"꾸우우우...."
오우거가 대뜸 곤봉을 휘둘러 왔다.
재빨리 옆으로 몸을 날리자 곤봉이 섬뜩한 파공음을 흘리며 땅에 꽂혔다.
- 쿵!
이어서 곤봉이 가로로 휘저어졌으나, 이미 나는 납작 엎드린 상태였다.
섬뜩한 느낌이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간다.
'예측이 되기는 하는군.'
몬스터들에 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나였다.
오우거도 마찬가지.
육체 능력 차이는 엄청나더라도, 움직임이 단조로워 예측만 잘하면 피할 수 있다.
놈에게서 단 한시도 눈을 떼지 말아야 하며, 어느 정도는 운에 맡겨야 하지만 말이다.
'그리고 하나 더.'
이 상황을 타개하는 데에 도움이 될 스킬을 갖고 있다.
[복사-특성]
혼자서는 제대로 된 공격 기술 하나 배우기가 힘든 서포터에게 한 줄기 빛이다.
단어 그대로 대상이 가진 능력을 복사하는 스킬.
[복사-스킬]은 스킬을 복사하고,
[복사-특성]은 특성을 복사한다.
단, 몇 가지 제약이 걸려 있다.
대상의 스킬이나 특성이 발현되는 것을 직접 확인해야 하며, 이름과 랭크를 정확히 맞혀야 한다.
물론 이건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다.
경험상 오우거가 보유한 특성은,
'C랭크 괴력.'
['복사-특성'을 사용합니다.]
[대상의 특성 '괴력(C)'을 슬롯에 등록합니다.]
▷복사-특성[1/1]
1. 괴력(C)
온몸에 힘이 넘쳤다.
오우거는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 마구잡이로 곤봉을 휘둘러 왔다.
- 부웅!
종이 한 장 차이로 스쳐 지나가는 곤봉.
괴력을 얻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저놈을 상대할 수 있게 된 건 아니다.
따라서 예측하고 회피하는 전법은 그대로.
대신 하나 해 볼 만한 거라면,
'장애물 만들기.'
나는 놈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이리저리 회피하며 계속 물러났다.
그러다가 적당한 굵기의 고목이 눈에 띄면 그것을 있는 힘껏 밀었다.
괴력에 의해 고목 밑동이 우지끈 부러지고 놈을 향해 쓰러진다.
"꾸우우...."
오우거는 귀찮다는 양 단번에 그것을 치워버리거나, 그대로 밀고 들어왔다.
그래도 내 의도대로 쫓아오는 데에 조금은 지장이 생겼다.
얼마간 놈과의 술래잡기가 이어졌다.
그러다가 남은 시간을 확인해 보니,
[튜토리얼I]
▷조건:10분 동안 생존하십시오.
[남은 시간 04:31]
벌써 반 이상 지난 상태.
이대로만 계속하면 조만간 튜토리얼이 끝날 것이다.
그런데 그때,
"꾸어엉?"
오우거가 움찔 멈추더니, 오한이라도 느끼는 듯 몸을 덜덜 떨었다.
그러고는 황급히 등을 돌려 자리를 벗어나 버렸다.
'뭐야, 쟤 어디가.'
오우거가 뭐에 겁먹을 몬스터는 아닌데.
그런 의문을 품는 동시에,
"크오오오오—!"
머리 위에서 귀청을 찢을 듯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시선을 들어 올리기 무섭게 거대한 비행체가 훅 하고 지나간다.
"크오오오오—!"
다시 굉음이 울렸다.
이번에는 비행체의 정체를 또렷하게 볼 수 있었다.
<용살학원> 최강의 생명체이자 S등급 보스 몬스터,
바로 드래곤이었다.
그것도 두 마리.
서포터가 다 해먹음
2화 환생 퀘스트 (2)
온몸이 핏빛 비늘로 뒤덮인 놈은 레드, 진청색 몸뚱이와 이마에 뿔이 셋 돋아난 놈은 블루 드래곤으로, 각각 화염과 뇌전 속성이다.
별다른 저항 수단도 없는 지금 드래곤은 그야말로 날아다니는 자연재해.
하지만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자기들끼리 치고받느라 나에게는 별반 관심이 없는 듯하다.
"크오오오—!"
두 드래곤이 격돌할 때마다 일대에 충격파가 몰아쳤다.
나는 재빨리 근처의 굵직한 거목 하나를 끌어안고 버텼다.
충격파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꼴이 몹시 불편했지만, 나는 그런 와중에도 눈을 빛냈다.
'이건 기회다.'
그것도 다시는 오지 않을 절호의 기회.
최종 보스급 몬스터 둘이 눈앞에서 투덕거릴 일이 얼마나 있겠는가?
지금 [복사]를 써서 강력한 특성을 가져가면 앞으로 두고두고 편할 것이다.
"————!"
상황은 레드 드래곤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는 중이다.
격돌할 때마다 일방적으로 상처를 입고 있으니 말이다.
방금도 블루가 스쳐 지나가며 놈의 날개에 기다란 발톱 자국을 남겼다.
상처에서 푸른 전류가 파직거린다.
레드가 고통스러운 듯 포효했다.
"크오오오—!"
'화나지? 그러니까 마법 한 번만 써 봐.'
내 생각이 전달되기라도 한 것처럼 레드의 근처 허공에서 붉은 마법진이 생성되고, 화염구 수십 개가 블루에게 우수수 쏟아졌다.
블루는 피하거나 막을 생각도 하지 않고 몸으로 다 맞았다.
그럼에도 온몸에 그슬린 자국 하나 없이 멀쩡하다.
'좋았어.'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복사]의 사용 조건을 만족했기 때문이다.
블루가 마법을 몸으로 때울 때 발동된 특성, [원소 저항].
불, 얼음, 번개, 바람 등 모든 원소 계열 피해를 대폭 줄여 주는 특성이며, 드래곤이니 랭크는 당연히 S급이다.
['복사-특성'을 사용합니다.]
[대상의 특성 '원소 저항(S)'을 슬롯에 등록합니다.]
▷복사-특성[1/1]
1. 원소 저항(S)
[복사]는 랭크가 없는 대신 슬롯이라는 제한이 존재한다.
지금은 슬롯이 하나밖에 없기에 오우거에게서 훔친 특성, [괴력]을 포기해야 한다.
그래도 C급보다는 S급이지.
가볍게 버리고 [원소 저항]으로 갈아탄다.
'이제 가자.'
볼 장은 다 봤다.
아직 [복사-스킬]의 슬롯은 비었지만 훔쳐도 의미가 없다.
저 드래곤들이 쓰는 스킬들이 대부분 고등급 마법이라 그에 상응하는 마나 동력로, 즉 고등급 [코어]가 없다면 어차피 못 쓴다.
해서 미련 없이 자리를 벗어나려 했는데.
"크오오오—!"
연이어 당하기만 하던 레드가 이대로는 안 되겠다 생각했는지 돌연 크게 날개를 휘저어 물러났다.
아가리를 쩌억 벌리고 무서운 속도로 주변의 공기와 마나를 빨아들이자 배가 풍선처럼 불룩하게 부풀었다.
'승부수를 띄우려나 보군.'
블루 드래곤 역시 그에 반응하여 이마에 난 뿔에 마나를 그러모으기 시작했다.
거대한 전기의 구체가 파직거리며 크기를 키워 간다.
그리고 아래에서 직관 모드에 들어가 있던 나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놈들은 서로가 가진 최강의 일격을 준비하는 중이다.
드래곤이 가진 최강의 일격이란?
바로 브레스다.
그리고 서로 다른 속성의 두 브레스가 만나면?
상충하며 폭발을 일으킬 것이다.
그렇다면 아래에 있는 나는?
'이거 말려들겠는데?'
현명한 사람이라면 여기까지 생각이 닿았을 때 이미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어야 한다.
이곳에서 조금이라도 더 멀어져야 살 가능성도 커지니까.
하지만 나는 제명에 못 죽을 성격이었다.
또 그놈의 실험 정신이 발동한 것이다.
'[원소 저항]이 S급이니까.... 정면으로만 안 맞으면 버티겠네.'
저놈들이 브레스를 나한테 쏘지는 않을 것 아냐?
고목에 느긋하게 몸을 기댄 채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곧이어 두 드래곤이 한계까지 에너지를 축적했다.
그리고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서로에게 브레스를 뿜어냈다.
- 콰아아아아!
- 파지지지직!
붉은 화염 광선과 푸른 번개 기둥이 부딪히며 거대한 폭발을 만들었다.
백색 섬광이 순식간에 일대를 집어삼키고, 시야가 하얗게 물들었다.
'뜨끈뜨끈하네.'
브레스의 범위 안에서도 고작 뜨끈하고 끝이다.
드래곤과 동일한 수준의 원소 저항력 덕분에.
이로써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내가 원소 피해로 인해 타 죽거나, 얼어 죽거나, 감전사할 일은 없으리라는 것.
물론 화살에 머리가 뚫리거나 날카로운 검에 목이 잘리는 등 다양한 위험 요소가 남아 있지만, 이만큼 줄인 것만 해도 어디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백색 섬광도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 슈우우우우....
눈앞의 풍경은 두 드래곤이 브레스를 쏘기 전과 판이하게 달랐다.
숲 한복판이 황량하기 짝이 없는 불모지로 화한 것이다.
수백 년은 나이를 먹었을 법한 굵은 거목들도 이제 작은 불씨가 타오르는 숯덩이로 둔갑한 상태였다.
그리고 이 짓을 벌인 드래곤들은 벌써 어디로 날아가 버린 것인지 보이지 않았다.
[남은 시간 0:00]
시기적절하게 튜토리얼의 남은 시간도 모두 소진되었다.
[튜토리얼I 완료]
▷주어진 시간 동안 생존했습니다.
▷보상:용살학원 신입생 키트
[용살학원 교복(D)]
▷활동이 편리하며 D등급 방어 마법이 걸려 있습니다.
[학생증]
▷용살학원의 학생임을 증명합니다.
▷용살학원의 각종 시설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열차 승차권]
▷용살학원행 열차에 탑승할 수 있습니다.
문득 나 자신을 돌아보니 평상복이 거의 넝마 조각이 되어 있었다.
하기야 일대가 모조리 타서 불모지가 됐는데, 최하급 아이템인 평상복이 멀쩡하면 그것도 말이 안 되는 일이겠지.
교복으로 갈아입자 곧바로 다음 퀘스트가 나타났다.
[튜토리얼II]
▷목표:화살표를 따라 승강장으로 이동하십시오.
▷↗24.81km
눈앞에 조그마한 화살표가 떠올랐다.
나침반처럼 한 방향만 가리키고 있으며, 아래에는 남은 거리가 적혀 있다.
퀘스트가 안내하는 대로 걷기 시작했다.
조금 걷다 보니 불타고 그슬려서 황량했던 풍경이 다시 조금씩 녹색으로 물들었다.
브레스의 범위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저 앞에 어렴풋이 사람의 실루엣이 보인다.
저쪽에서도 나를 알아챘는지 곧장 나를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사내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시오?"
"안녕하세요."
'얘는 처음 보네.'
<용살학원>의 모든 캐릭터를 줄줄이 꿰고 있는 나로서도 생소한 얼굴이었다.
신규 캐릭터.
어쩌면 EX급 퀘스트의 영향이 아닐까.
사내의 나이는 내 또래로 보였고, 무복을 입고 검을 찬 모습이 무협지의 무사를 연상시켰다.
어디 깊은 오지에서 살다 나왔는지 행색이 다소 초라했으나, 얼굴에서 광채가 날 정도의 미남이라 전체적인 외견은 전혀 초라해 보이지 않았다.
사내는 내 교복을 보곤 반색을 했다.
"오, 용살학원 교복이로군. 혹시 이번 연도 신입생이시오?"
"네, 그쪽도?"
"이런 기막힌 우연이! 본인도 마찬가지라오."
사내가 품에서 넥타이핀을 꺼냈다.
핀의 색깔은 학년마다 다른데, 그가 꺼낸 건 지금 내가 교복에 꽂아 둔 것과 완전히 같은 흰색이었다.
같은 학년이라는 뜻.
그는 한층 더 기분 좋은 표정으로 자기소개를 이어 갔다.
"본인은 고현우라 하오. 같은 학년이지만 나이는 형장(兄丈)보다 다소 어릴 거요. 그러니 말씀 편히 하시오."
"나는 김호다."
"김 형이로군. 우리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동행하지 않겠소?"
"나야 좋지."
가는 길에 또 몬스터라도 마주친다면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할 텐데, 마침 이 고현우라는 녀석은 검을 차고 있으니 적당히 업혀 가면 그만이다.
앞장서는 고현우를 조금 더 주의 깊게 관찰했다.
걸음걸이부터 시작해서 사소한 움직임 하나하나가 매우 절제되어 있다.
오랜 세월 뼈를 깎는 수련을 거쳤다는 증거다.
'키워 볼 만해.'
얼핏 보기에도 제법 강해 보인다.
이 정도 자질이라면 무난하게 A급, 내 도움을 받는다면 간단하게 S급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 이상도.
하지만 나는 판단을 보류하기로 했다.
아직 입학도 안 했는데 벌써 누굴 키우네 마네 정하기는 이르지.
그런데 고현우의 행색에는 그 외에도 묘한 구석이 있었다.
허리춤에는 아무 데서나 구할 수 있는 싸구려 철검, 등에는 천으로 돌돌 만 길쭉한 물체를 지고 있다.
길이로 보나 굵기로 보나 이것 역시 장검일 가능성이 크다.
"등에 그건 장검이야?"
"바로 보았소. 우리 사문의 신물(神物)이라오."
"그런데 왜 그렇게 칭칭 감아 놨어?"
천으로만 돌돌 말아 두었으면 그러려니 하겠는데, 그 위에다 쇠사슬까지 잔뜩 써서 아주 봉인을 하다시피 했다.
마치 자기는 이걸 쓸 생각이 없다고 시위하는 듯하다.
고현우가 씁쓸한 미소를 흘리며 허리춤의 철검을 쓰다듬었다.
"부끄럽게도 아직 봉인을 풀 자격이 없소. 그때까지는 이 철검이 본인의 동반자라오."
"그러냐."
"하지만 걱정할 것 없소. 아직까지는 이것만으로도 적수를 찾지 못했으니. 물론 용살학원이라는 곳에 가면 어떨지 모르지만 말이오, 하하."
호언장담하는 걸 보니 실력에는 제법 자신이 있는 모양이었다.
고현우는 내가 지나온 곳을 가리키며 되물었다.
"헌데 김 형, 저쪽에서 오는 길이오?"
"어. 그게 왜?"
"방금 전에 그곳에서 고룡 두 마리가 날아다니는 모습을 봐서 말이오."
"방금 전까지는 있었지. 지금은 가 버렸고."
"이런, 한발 늦었나 보군. 지나가던 참에 눈요기라도 할까 싶었건만."
고현우의 얼굴에 짙은 아쉬움이 드러났다.
그러다 무슨 생각이 스쳤는지 고개를 갸웃한다.
"김 형은 무언가 본 게 있소?"
"필요한 만큼은 봤지."
"오오, 어땠소?"
나는 두 드래곤의 전투를 가능한 사실적으로, 그리고 2% 정도 조미료를 첨가해서 묘사해 주었다.
고현우는 영웅들의 무용담을 듣는 어린아이처럼 눈을 빛내며 들었다.
"—그러더니 마지막에는 서로 브레스를 갈기더라니까."
"브레스? 그게 무엇이오?"
"쉽게 말하면 오의나 필살기 같은 거지."
"필살기! 과연, 아까 본 거대한 폭발이 그 브레스라는 것이었나 보군."
고개를 주억이는 고현우였다.
그러다 또 의문점이 떠올랐는지 묻는다.
"그렇다면 김 형은 그 브레스라는 것을 제법 가까운 거리에서 본 것 아니오?"
"가깝다면 가까운 데서 봤지. 그게 왜?"
"그토록 거대한 폭발을 일으키는 공격이었는데, 너무 멀쩡해 보여서 말이오."
확실히 의문을 떠올릴 만한 부분이었다.
가까이서 드래곤 두 마리가 치고받는 광경은 물론 브레스까지 목격했다면 조금이라도 영향을 받았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나에게서 털끝 하나 다친 구석을 못 찾겠는가?
이럴 때는 내가 가진 패를 숨기는 게 이득이다.
"나한테도 한 수가 있지. 네 등에 있는 그 장검처럼."
"그렇군. 세상에 강자들이 모래알처럼 많다더니, 벌써 이렇게 김 형을 만나는구려. 기회가 닿는다면 한 수 가르침을 청하고 싶소."
"기회야 앞으로도 많겠지. 일단 가자. 열차 놓치겠다."
"이런, 내 정신 좀 보게. 깜박 잊고 있었소. 얼른 갑시다."
고현우가 힘찬 걸음으로 앞장섰다.
서포터가 다 해먹음
3화 아카데미행 열차 (1)
<용살학원>에는 갖가지 세계관이 뒤섞여 있다.
검과 마법이 등장하는 중세 판타지 도시에 있다가도 한 발짝만 벗어나면 무림, 슬쩍 시선을 돌려보면 현대식 건물이 눈에 띄기도 한다.
그러니 눈앞의 승강장이 고풍스러운 전각들로 이루어져 있는 것도 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다행히 제시간에 맞췄네."
"전부 김 형 덕분이오."
고현우가 칭찬을 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는데, 얘는 길 찾기에는 썩 재능이 없었다.
반면 나는 퀘스트 화살표가 지시하는 대로만 가면 됐으니 헤맬 일이 아예 없었고.
'그래도 도움은 됐지.'
고현우가 가는 길에 마주친 사소한 몬스터들을 처리했으니 나로서는 손해가 아니었다.
승강장에는 이미 열차가 도착해서 대기하고 있었고,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오가는 게 눈에 띄었다.
우리는 역무원에게 다가갔다.
사십에서 오십 사이로 보이는 중년 남성이었는데, 나이에 비해 굉장히 머리숱이 풍성했다.
게다가 머릿결은 또 어찌나 좋은지 산뜻하게 찰랑거리기까지.
'...저거 혹시 가발 아니야?'
나는 그런 의구심을 마음속에 떠올리며 승차권을 건넸다.
역무원이 승차권을 확인하고 나와 고현우를 쓱 훑어보더니 묻는다.
"1학년?"
"네."
"1학년은 1번부터 10번 차량에 타면 돼요."
"감사합니다."
줄줄이 이어진 차량들을 훑으며 걷다 보니 이내 <10>이라는 번호가 붙은 차량이 눈에 들어왔다.
열차에 발을 올리자마자 알림 메시지가 떠올랐다.
[튜토리얼II 완료]
[튜토리얼III]
▷목표:입학식에 참석하십시오.
[TIP:열차에서 다양한 친구들을 사귀어 보세요.]
용살학원행 열차는 객실형이다.
오른쪽 절반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복도, 왼쪽 절반은 작은 방 형태의 객실들로 이루어져 있다.
고현우와 나는 복도를 걸으며 객실 문마다 조그맣게 난 창문들을 기웃거렸다.
빈 객실이 있나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빈 객실은커녕 빈자리를 찾기도 힘들었다.
열차가 거쳐 온 다른 승강장에서도 학생들이 잔뜩 탔을 테니 당연한 일이었다.
10번 차량부터 쭉 걷고, 기웃거리고, 걷기를 반복하며 8번 차량쯤 왔을까,
마침내 고현우가 적당한 객실을 발견했다.
"김 형, 이곳에 자리가 있는 것 같소."
슬쩍 안쪽을 들여다보니 한 사람밖에 없다.
미닫이문을 드르륵 열었다.
객실 내부의 크기는 두어 평 정도.
한가운데에 그리 크지 않은 탁자가 하나, 그리고 그 탁자를 끼고 붙박이 의자들이 마주 보고 있었다.
한 객실당 네 명이 앉아서 가는 구조다.
창가 쪽 좌석에는 옅은 회색빛 머리칼을 한 여학생이 엎드려 있었는데, 인기척이 느껴지자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
회색 머리 여학생과 눈이 마주치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미인이라는 것이었다.
미남미녀가 나름 흔한 <용살학원>에서도 독보적이라 할 정도로.
남정네들의 본능이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다음으로 졸려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곤함이 뚝뚝 묻어 나오는 나른한 얼굴과 다시 잠들지 말지 고민하는 듯 반쯤 뜬 눈.
지금 막 깨어나기도 했지만, 어쩐지 평소에도 이럴 것 같다.
마지막으로, 수집가의 오랜 경험이 나에게 속삭이고 있었다.
'이건 원석이다.'
당장은 막연한 느낌뿐이지만, 이런 캐릭터는 백에 구십구는 어렵지 않게 S급에 도달했었다.
내 느낌이 들어맞는지는 앞으로 확인해 보면 되겠지.
어쨌든 계속 눈싸움만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내가 먼저 물었다.
"혹시 자리 비었어?"
"응."
교복 위에 걸친 후드티가 살짝 오버 사이즈인지 헐렁한 소매에 손가락만 살짝 보였다.
그 손이 자기 옆자리를 툭툭 친다. 여기 앉으라는 뜻이겠지?
나는 사양하지 않고 냉큼 앉았다.
고현우는 맞은편 창가 쪽에 자리를 잡았다.
"본인은 고현우라 하오."
"나는 김호야."
"서예인."
간단한 자기소개가 오간 후,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용살학원>의 스토리와 퀘스트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네임드부터 사소한 엑스트라까지 전부 외워 두었다.
하지만 고현우, 그리고 서예인.
둘 다 처음 본다.
또 승강장에서 간략하게 둘러본 바로는 다른 학생들과 역무원들 등도 모두 낯선 얼굴들뿐이었다.
무대는 같지만, 등장인물이 다르다.
그로 인해 앞으로 발생할 사건이나 퀘스트 등에도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무엇이 바뀌고, 무엇이 그대로일지 계속해서 주시할 필요가 있으리라.
- 덜컹,
그때, 몸이 가볍게 흔들리며 옅은 부유감이 들었다.
창밖의 풍경이 점점 뒤로 처지는 걸 보니 열차가 출발했나 보다.
그런데 한참 전부터 계속 시선이 느껴진다.
서예인이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는 조금 덜 졸린 눈으로.
"...."
"...?"
무슨 할 말 있냐는 눈빛을 보내자 자기 무릎 위에 가방을 올려놓는다.
귀여움이라곤 티끌만큼도 없는, 극한의 실용성만을 추구하는 택티컬한 금속 가방.
그 가방에서 부스럭거리며 자그마한 종이봉투를 꺼낸다.
그리고 종이봉투에서 꺼낸 초코칩 쿠키를 나에게 내밀었다.
"먹을래?"
* * *
서예인에게는 남들과는 다른 눈이 있었다.
보이는 모든 것들을 수치화하여 정보로 보여 주는 눈이.
가령 무복을 입은 남학생에게서는 평소와 비슷한 것이 보였다.
[상태]
고현우
▷스킬
천류풍운검법(D)
...
▷특성
검술(C)
코어(E)
...
...
...등등.
원한다면 언제든 자세히 뜯어볼 수 있겠으나 별로 관심이 가지 않았다.
그러나 문을 열고 들어온 다른 남학생의 정보는 물음표투성이였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말 그대로 물음표투성이.
[상??]
?????
#?▷????
?복??
??군?
▷???
▷???
아무것도 읽을 수가 없었다.
이런 상태창을 보는 것은 서예인이 '눈'을 가지게 된 이래로 이번이 네 번째였다.
그녀의 앞을 스쳐 지나간 무수한 상태창 중에서 네 번째.
관심이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또한 앞선 세 명은 모두 자신에게 깊은 의미를 갖는 사람들이었는데.
그렇다면 자신을 김호라고 소개한 눈앞의 사내도 그렇게 될까?
여러 이유로 자꾸만 시선이 갔다.
계속 바라본다고 상태창을 가득 채운 물음표들이 바뀔 리가 없는데도, 그저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고 있으니 김호가 자신을 마주 보며 의문이 담긴 눈빛을 돌려보냈다.
서예인은 그 눈을 피하지 않고 계속 바라보다가, 문득 예전에 들었던 조언 하나를 떠올렸다.
관심 가는 사람이 있으면 우선 호의를 베풀라고 했었지.
서예인이 가방에서 쿠키를 꺼냈다.
"쿠키 먹을래?"
* * *
"어. 고맙다."
나는 얼떨결에 쿠키를 받아 들었다.
손바닥 반절쯤 되는 크기에, 동그라미에서 한참 벗어나서 울퉁불퉁하며, 군데군데 초코칩이 고르지 못하게 박혀 있다.
미관상으로는 썩 식욕이 돋지 않지만, 그래도 초코칩 쿠키 맛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겠지.
그런 생각으로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
서예인이 또 물끄러미 바라보는 게 맛은 어떤가 묻는 듯하다.
나는 잠시 뜸을 들이며 적절한 단어를 골랐다.
"...쿠키가 담백하네."
단맛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담백함 덩어리.
초코칩에 약간의 기대를 걸었으나 순도 65% 카카오인 듯, 단맛보다 쓴맛이 더 강했다.
물론 내가 예상하던 쿠키의 맛과 달랐을 뿐이지, 맛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해서 쿠키 하나를 어렵지 않게 해치웠다.
"...."
그리고 서예인은 먹는 내내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얼굴에 아무 표정도 안 나타나서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못 읽겠다.
그래도 계속 눈만 마주치고 있기는 부담스러워서 화젯거리를 찾았다.
"괜찮네. 직접 구운 거야?"
"응, 더 먹어."
고현우가 헛기침을 하며 물었으나,
"크흠, 실례가 안 된다면 본인도 하나."
"이제 없어."
서예인은 매정하리만치 단호하게 끊었다.
동시에 종이봉투에서 나온 마지막 쿠키를 내 입에 쏙 물려 주었으니 이게 마지막이기는 했다.
어쩐지 쟤한테는 주기 싫어서 그랬다는 느낌도 적잖이 들지만....
고현우는 뭐라 말하려다가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도로 입을 다물었다.
그때,
- 드르르륵,
갑자기 객실 문이 열리며 깍두기 머리 남학생이 난입했다.
그리고 고현우 옆 빈자리에 턱 걸터앉았다.
"아이고 여러분, 잠시 실례 좀 하겠습니다. 미안한데 여기 잠깐만 앉았다 갈게요."
"본인은 개의치 않소. 편히 머물다 가시오."
"나도. 어차피 빈자리야."
"...."
서예인은 대답 대신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깍두기 머리가 씩 웃었다.
"이런 환영받는 느낌, 아주 좋아. 나는 병철이야. 신병철."
'얘는 평범하네.'
신병철을 보자마자 대략적인 견적이 나왔다.
무난하게 가면 C급, 정말 노력하면 B급 정도일까.
고현우와 서예인에게서 보이는 잠재력이 너무 찬란해서 이 정도는 눈에 차지도 않는다.
'그래도 안면은 익혀 둘 만해.'
객실에 들어올 때부터 대강 정체를 짐작했으니까.
힌트를 던지자면, 저렇게 요란하게 다니는 사람이 발소리는 거의 내지 않는다는 점.
가벼운 통성명이 오가고.
신병철은 유독 고현우에게 관심을 보였다.
"무복을 입은 걸 보니 문파 쪽에서 나왔나 봐? 사문이 어디야?"
"천풍문이라는 곳이오."
"천풍문? 천풍문, 천풍문.... 처음 듣는데."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일인전승 문파라오. 처음 들을 수도 있지."
"그래? 일단 메모해 둘게. 보자...."
신병철은 품에서 조그마한 메모장을 꺼내더니 무언가를 쓱쓱 적어 넣었다.
다음으로 서예인과 나에게 관심을 보인다.
"너희도 뭐 소속된 문파나 마탑 같은 거 있냐?"
"아니."
"...."
서예인은 관심이 없어진 듯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다시 메모장에 뭔가 휘갈기는 신병철.
"정보는 중요하지. 정보는 돈이 되거든."
"돈이 된다고 말하는 걸 보니 사고팔기도 하나 보네."
"당연한 말씀을. 그리고 정보만 파는 것도 아니야."
내가 관심을 보이자 잠재적인 고객이 될 수 있다 여겼는지, 잽싸게 명함을 꺼내 나에게 건넨다.
싸구려 주점에서 뿌리는 것과 비슷한 조잡한 디자인에, 가운데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용살학원 심부름 서비스!]
"언제 어디서든 이 신병철을 찾으시라! 적당한 대가만 지불하면 뭐든 구해다 드리지."
나는 명함을 흥미롭게 앞뒤로 뜯어보며 물었다.
"뭐든 구해다 준다라.... 다소 교칙을 어기는 것도 상관없을 거고?"
"아, 물론입죠. 말씀만 하십쇼."
"지금도 그것 때문에 쫓기는 중이고?"
"!"
신나서 주절대던 신병철이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그가 이 객실에 들어온 건 단지 친목을 다지기 위해서는 아니었던 것이다.
"...티 많이 났냐?"
"아까부터 시선이 자꾸 문 쪽으로 가더라."
"헤헤, 이거 참. 숨긴다고 숨겼는데."
말 나온 김에 또 한 번—이라며 객실 밖을 기웃거리는 신병철이었다.
그러다가 뭘 봤는지 후다닥 돌아와서는 자리에 앉은 다음, 원래부터 이 객실의 일원이었던 것처럼 시치미를 뚝 뗀다.
그러나,
- 드르륵!
다시 객실 문이 열렸다.
서포터가 다 해먹음
4화 아카데미행 열차 (2)
다시 객실 문이 열리며 여학생 하나가 걸어 들어왔다.
서예인에 비할 만한 미인이지만, 차갑고 엄격해 보이는 인상 탓에 어지간해서는 말 한마디 붙이기도 힘들 것 같다.
연한 갈색 머리를 단정하게 묶고, 팔에는 '학생 선도'라 적힌 완장을 찼다.
문밖에는 덩치, 귀티가 줄줄 흐르는 귀공자, 그리고 사람 좋게 방긋방긋 웃는 여학생이 자리를 잡았는데, 모두 팔에 찬 완장이 같았다.
'초반부터 선도부랑 엮였군.'
학생선도부.
용살학원 내외의 치안을 관리하는 학생 단체다.
전통적으로 1학년 선도부는 사전에 조기 입학을 하고, 기본적인 지침을 숙지한 후 곧바로 열차에 투입된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각지에서 혈기왕성한 젊은이들이 몰려드는 이 용살학원행 열차야말로 선도부가 경험을 쌓기에 아주 훌륭한 무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병철은 그 선도부의 경험치가 되기 직전으로 보이는데, 무슨 이유인지는 금방 알게 될 것이다.
여학생이 신병철을 노려보며 손을 내밀었다.
"돌려주세요. 그건 당신이 가져서는 안 되는 물건입니다."
그러나 신병철은 물건을 포기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장난기 가득한 표정을 유지한 채, 눈으로는 연신 여학생의 어깨너머를 흘깃거린다.
어떻게 하면 도주로를 확보할 수 있을까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 중이겠지.
여학생이 물었다.
"뭐가 우습죠?"
"아니, 좀 집착이 심하다 싶어서. 얼굴은 예쁘장해 갖고 피곤하게 굴면 남자애들한테 인기 없을 거—거걱!"
- 파지직!
짧은 전류가 신병철을 때렸다.
간편 전격 마법인 [잽(Zap)]이다.
'뇌 속성 마법사는 흔치 않은데.'
가능하면 엮이지 않고 지켜보기만 할 생각이었지만 이러면 얘기가 달라진다.
마침 [복사-스킬] 슬롯이 비었으니까, 슬쩍 끼어들어서 하나 챙길까?
신병철이 전격에 격중당한 짧은 찰나 계산을 끝마쳤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서예인에게 사과부터 했다.
'미안하다.'
신병철은 약한 마비 상태에 빠졌는지 몸을 부르르 떨었고, 옆으로 넘어가려다가 가까스로 객실 탁자를 짚고 버텼다.
온몸의 무게가 가득 실려 있었기에 탁자를 짚는 반동이 내 팔꿈치를 때렸다.
- 턱!
'지금.'
야금야금 떼어 먹던 수제 쿠키가 내 손에서 떨어져 바닥을 굴렀다.
거기에 열차가 가볍게 한 번 덜컹거리자 나에게서 더욱 멀어졌다.
이제는 너무 늦어 버렸다.
땅에 떨어지고 3초가 지난 음식은 더 이상 먹을 수 없는 것이다.
'명분은 만들었고.'
이제 끼어들 타이밍만 잡으면 된다.
신병철은 비틀거리며 마비된 몸을 풀고 일어났다.
바지 뒷주머니로 손이 슬슬 움직인다.
"아~ 이거 난감하게 됐네. 정면 승부에는 자신 없는데...."
"순순히 내놓을 생각이 없나 보네요. 제압하겠습니다."
여학생이 한 손에 묵빛 장갑을 꼈다.
황금색 자수가 수놓여 있고 군데군데 깨알같이 토파즈가 박혀 있는 게 제법 고급진 아티팩트로 보인다.
손가락을 튕기자 장갑이 강렬한 빛과 함께 전류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파직거리는 전류가 자그마한 벌새의 형상을 갖추더니, 신병철을 노리고 쏘아져 나갔다.
[허밍버드(Hummingbird)]
- 파지지직!!
그러나 허밍버드는 신병철에게 아무 피해도 주지 못했다.
날아가던 도중 내가 뻗은 손에 가로막혔기 때문이다.
내 손바닥에서 자그마한 전류의 폭발이 일어나며 스파크가 튀었다.
직접 맞아 보니 확실하다.
'D급처럼 보이지만 E급.'
나는 간질간질한 손을 털어 냈다.
뜻밖의 방해꾼에 여학생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잠시 내 얼굴을 응시하며 기억을 더듬는 듯하더니 고개를 살짝 기울인다.
"한패가 있었나요. 요주의 인물 리스트에서는 못 봤는데."
"한패는 아니고. 갑자기 없던 볼일이 생겨서."
"무슨 볼일이시죠."
"내 쿠키."
"...네?"
나는 지금도 바닥을 왔다 갔다 돌아다니는 반쪽짜리 수제 쿠키를 가리켰다.
"너네 때문에 떨어졌거든. 저거 돈 주고도 못 사 먹는 건데."
"고작 쿠키 때문에 선도부의 행사에 끼어드는 건가요?"
"고작 쿠키는 맞는데, 잘 먹던 사람 입장에서는 열 받지."
여학생은 별 어이없는 놈 다 보겠다는 표정이 되었다.
동시에 내 말에도 어느 정도는 일리가 있다 생각했는지 곧바로 행동하지 않고 뜸을 들였다.
그러자 뒤편에서 지켜보던 선도부 셋 중 귀공자가 객실로 들어섰다.
금방이라도 허리춤의 황금빛 검을 뽑아 들 기세다.
"되도 않는 트집을 잡는군. 자리에 앉아라. 그렇지 않으면 쿠키가 아니라 뜨거운 맛을 보게 해 주마."
"신중히 생각하고 행동하길 바라오."
고현우가 천천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검을 뽑을 생각이라면 본인도 보고만 있지는 않을 거요."
"...."
귀공자의 시선이 고현우에게 꽂혔다.
무복을 입은 것을 확인하고 시선이 손에 쥔 검집으로 옮겨 갔다.
그것의 정체가 싸구려 철검이라는 걸 알아채자 얼굴에 비웃음이 번진다.
"보고만 있지 않으면? 어쩔 테냐?"
"...."
귀공자는 사나운 웃음을 머금고, 고현우는 침착한 표정으로 서로를 노려보았다.
신병철이 훔친 물건에서 시작된 문제가 쿠키를 거쳐 두 무인의 싸움으로 번지려는 찰나,
"잠깐만요."
여학생이 손을 들어 중재에 나섰다.
그리고 이게 과연 통할까 하는, 반쯤은 미심쩍은 표정으로 나를 보며 묻는다.
"학생 식당에서 쓰는 디저트 쿠폰을 보내 드리죠. 이걸로 됐나요?"
"뭐, 그럽시다."
"그럼 더 방해하지 말고 물러나세요."
나는 잠시 고민하는 척하다가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고현우도 내가 눈짓을 보내자 약간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러났다.
호기롭게 나선 것에 비해 너무나도 순순히 물러났기에, 선도부 몇몇이 나를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이미 원하는 건 얻었다.'
['복사-스킬'을 사용합니다.]
[대상의 스킬 '허밍버드(E)'를 슬롯에 등록합니다.]
▷복사-스킬[1/1]
1. 허밍버드(E)
스킬은 [허밍버드], 특성은 [원소 저항]을 저장했다.
다른 스킬이나 특성을 얻으려면 슬롯을 늘리거나, 기존의 슬롯을 덮어씌워야 한다.
"!"
기회를 엿보던 신병철이 이때다 싶었는지 앞으로 튀어 나갔다.
연체동물처럼 몸을 구불거리며 빈틈으로 빠져나가려 했으나, 여학생의 손끝에서 다시 번개로 만든 벌새가 날았다.
- 파지지직!
"어으억!"
보는 사람이 눈살을 찌푸릴 정도로 볼썽사납게 고꾸라지는 신병철.
거기에 앞으로 튀어 나가는 관성까지 더해져서 반쯤 열린 객실 문에 쾅! 머리를 찧고 말았다.
'저건 좀 아프겠네.'
깍두기 머리에 큼지막한 혹이 하나 생기지 않았을까?
신병철은 머리를 세게 부딪힌 충격으로, 그리고 허밍버드에 온몸이 마비되어 바닥에서 꿈틀거리기만 했다.
여학생이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더니 신병철의 품을 뒤적거렸다.
그 안에서 나온 것은 한 뭉치나 되는, 풍성하고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이었다.
"역무원분의 가발을 훔쳤더군요. 장난이 지나쳤습니다."
"아이고...."
"저런...."
나와 고현우는 바닥을 기는 신병철을 안쓰럽게 내려다보았다.
지금 보니까 선도부가 쫓아올 만했네.
병철이가 나쁜 놈이었어.
어떻게 대머리의 가발을 훔치는 반-인륜적인 짓을 저지를 수 있냐는 말이다.
선도부 4인조는 전격 마법에 살짝 그슬린 가발을 회수해 지퍼 백에 집어넣었다.
떠나기 전에 여학생이 아직도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신병철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미리 경고해 두죠. 신병철 학생은 우리 선도부에서 예의주시하는 인물입니다. 가급적이면 엮이지 말도록 하세요. 학교에서 문제를 일으키면 가만 안 둘 겁니다."
"그건 내가 정할 일이고. 살펴들 가십쇼."
"흥."
여학생은 못마땅한 눈빛으로 나를 째릿 노려보고는 등을 돌렸다.
귀공자가 떠나기 전 고현우에게 한마디 내뱉었다.
"너, 기억해 두마."
"마찬가지요."
그리고 문을 닫고 나갔다.
"...."
"아오, 아오, 아이고, 삭신이야...."
선도부 4인조가 떠나고 잠시 후, 신병철이 앓는 소리를 하며 몸을 일으켰다.
움직일 때마다 파직거리는 정전기가 튀기고 그에 맞춰 몸을 펄떡거린다.
대머리의 가발을 훔친 대가로는 싼 게 아닐까?
옆에서 지켜보던 고현우가 쓴웃음을 지었다.
"용살학원에는 학생선도부라는 강력한 무력 단체가 존재한다더니, 저들이 그자들인가 보오."
"끄어응윽, 맞아. 엘리트 중에서도 엘리트만 엄선해서 뽑으니 약할 수가 없지. 나한테 허밍버드 날린 애 봤지? 걔 누군지 알아?
"본인의 식견이 좁은 터라 잘 모르오. 가르쳐 주시겠소?"
"힌트. 송씨야."
곧바로 고현우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송씨라면.... 혹시 토파즈 마탑의 종주인 송씨 가문을 말하는 것이오?"
"바로 맞히네. 그 송씨 가문 맞아. 그리고 걔는 무려 우레군주 송경욱의 손녀딸, 송천혜란 말씀이야."
"허어, 범상치 않은 소저 같기는 했소만, 우레군주의 손녀라니. 오늘 안계를 크게 넓히는구려."
고현우가 나지막이 감탄성을 흘렸다.
우레군주는 번개를 다루는 수많은 영웅들의 정점.
오직 가장 강한 한 명에게만 붙는 타이틀이다.
<용살학원>의 세계관을 통틀어서도 손꼽히는 강자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뒤에서 대기하던 셋도 다들 한 가락 하는 친구들이야. 덩치 큰 친구는 조벽이고, 싱글싱글 웃던 여자애는 한소미인데, 각각 권왕과 검후의 제자 되는 몸이시지."
"그 귀공자처럼 생긴 자의 정체는 무엇이오?"
"금조한. 황금련주의 하나뿐인 아들인데, 너도 봤다시피 재수 없는 놈이야. 턱걸이로 선도부에 들어갈 실력은 되는 것 같지만 앞의 셋에 비해서는 아무래도 손색이 있지."
"대단하군. 선도부에는 다 그런 자들만 모여 있는 거요?"
그 질문에 신병철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는 비교적 애매한 태도로 답했다.
"어어.... 그렇기는 한데 그게, 올해가 조금 특이한 편이래. 선도부뿐만이 아니라 전반적인 신입생들 수준이 엄청나게 뛰었다고 들었거든? 우리 길드 선배들도 올해 기수보고 말이 많더라."
신병철은 드디어 마비가 완전히 풀렸는지 아침 체조하듯 팔을 붕붕 돌려 가며 몸을 풀었다.
"아무튼 만나서 반가웠다 얘들아. 나중에 보면 아는 척하기다. 그럼 수고!"
그리고 바람처럼 객실 밖으로 사라져 버렸다.
"허허, 참으로 정신 사나운 친구로다. 안 그렇소, 김 형?"
"그러게."
나는 조용히 우리를 지켜보던 서예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미안하다. 쿠키 맛있었는데."
"또 해 줄게."
"진짜?"
"응."
졸지에 쿠키 약속을 받아 버린 나였다.
서예인은 슬슬 다시 피곤이 몰려오는지 그 말을 끝으로 스르르 탁자에 엎드렸다.
그리고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
"...."
한바탕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탓일까, 조용한 오후의 객실 분위기가 달갑다.
고현우도 나도 별다른 말 없이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고현우가 말문을 열었다.
"그런데 김 형, 하나 물어봐도 괜찮소?"
"뭔데?"
"정말 과자 때문에 끼어든 거요?"
"...."
"간식 시간이 방해받으면 화가 나는 건 본인도 동의하나.... 어쩐지 숨겨진 곡절이 있어 보여서 말이오."
'생각보다 눈치가 빠른데.'
바른 생활 청년같이 생겨서는 제법 머리가 잘 돌아간다.
고현우에게서 본 의외의 일면이었다.
나는 약간은 신선한 기분을 느끼며 설명을 시작했다.
가장 큰 이유는 [복사-스킬]의 조건 달성 때문이었지만, 그것을 빼놓더라도 이유가 있었다.
"워낙 보기 드문 뇌 속성 마법사니까, 가볍게 실력이나 보자 싶었지."
"으음.... 허나 김형이 한 거라곤 송 소저의 한 수를 받아 낸 게 전부 아니오?"
내가 한 거라곤 중간에 쓱 끼어들어서 허밍버드를 받고 빠진 게 전부인데, 그것만으로는 실력을 보기에 부족하지 않냐는 말이다.
내가 되물었다.
"허밍버드라는 마법에 대해 얼마나 알아?"
"방금 본 게 처음이오."
"그럼 처음 보기에는 어땠는데?"
"으음...."
고현우가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자신이 본 장면들을 떠올리는 모양이다.
"눈으로 좇기 힘들 정도로 매우 빠르고, 적에게 피해를 입히기보다 마비나 경직 등 적의 제어에 중점을 둔 기술 같소."
"반은 맞았어."
"나머지 반은 무엇이오?"
"잘 봐."
나는 손바닥 위에 허밍버드를 만들어 보였다.
파리만 한 크기라 송천혜의 벌새와 심히 비교된다.
아직 마나 동력로, [코어]를 만들지 않았기에 하급 마법이라도 제대로 구현해 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도 움직임만 보여 주는 건 이 크기로도 충분하겠지.
손 위에서 벌새가 날아올랐다.
내 조작을 따라 허공에서 8자 모양을 그리거나, 지그재그로 불규칙하게 움직인다.
"벌새의 비행을 따라 만들었다 해서 허밍버드거든."
"과연, 그런 움직임이라면 상대하기가 적잖이 까다롭겠소."
"술자의 숙련도에 따라 성능이 천차만별이지."
고현우가 여전히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헌데 그것과 송 소저의 실력에 어떤 연관성이 있는 거요?"
"거꾸로 생각해 봐. 술자의 숙련도에 따라 벌새의 움직임이 달라진다면."
"...아! 벌새의 움직임으로 실력을 가늠해 볼 수도 있겠구려."
"그렇지."
송천혜가 정말 숙련된 마법사였다면 내 난입을 감지한 순간 허밍버드에 어떤 움직임의 변화라도 있었어야 한다.
예를 들면 내 손을 우회해서 날아갔거나, 잠시 뒤로 빠진 뒤 다시 날아갔거나.
하지만 송천혜의 벌새는 곧장 내 손바닥에 꽂혔다.
마법의 컨트롤, 또는 실전 경험이 미숙하다는 증거였다.
"송 소저의 한 수에 그토록 많은 정보가 담겨 있었다니."
'그게 다가 아니지.'
손수 몸으로 파악한 바로는, E급이기는 했지만 사실상 D급이라 봐도 무방할 만큼 위력이 강했다.
마법을 보조하는 강력한 특성을 배웠거나, 또는 타고난 마력량이 어마어마하거나.
어느 쪽이든 잠재력이 높다는 뜻이다.
'우레군주의 손녀라. 확실히 이름값은 해.'
언젠가 영입할 영웅 리스트에 송천혜의 이름을 추가했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한편, 고현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기분 좋게 웃어 보였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배우는 게 많구려. 기연이 아닐 수 없소."
"기연이라고 할 것까지야. 이 정도쯤은 그냥 가르쳐 줄 수 있지."
"배포가 크군. 첫 친우가 될 사람을 잘 골랐으니 내 안목도 이만하면 나쁘지 않은 것 같소. 하하."
뭐든 좋게 해석해 버리는 고현우였다.
고현우는 돌연 표정을 진지하게 바꿨다.
"혹 본인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말하시오. 내 최선을 다해 도울 테니."
"그래? 그럼 말 나온 김에,"
쇠뿔도 단김에 빼라 했다.
나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나랑 어디 좀 다녀오자."
히든 피스 하나만 주워 먹으러.
서포터가 다 해먹음
5화 히든 피스 뽑기 (1)
"멋진 한 수였다."
송천혜는 어깨너머로 슬쩍 시선을 돌렸다.
말문을 연 사람은 그녀와 같은 학생선도부의 일원, 금조한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별 시답잖은 일로도 끊임없이 말을 붙여 대는 그였다.
그것이 호의에서 비롯된 행동임을 모르지는 않으나, 호의를 되돌려줄 생각은 없다.
그러나 원활한 집단생활을 위해서는 아예 무시로 일관할 수도 없는 노릇.
결국 송천혜는 속으로 작게 한숨을 쉬며 되물었다.
"무슨 말씀이시죠."
"쿠키 운운하면서 끼어든 방해꾼 놈 말이다. 나였으면 괘씸해서라도 뜨거운 맛을 보여 줬을 텐데, 네 허밍버드를 맞고도 멀쩡하더군."
한소미도 고개를 끄덕거리며 한마디 거들었다.
"맞아, 마지막에 봐준 거지?"
"...."
조벽도 별다른 말은 안 했지만 마찬가지로 긍정하는 분위기였다.
반면 송천혜는 한순간 우뚝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금조한이 물었다.
"왜 그러지?"
"...아무것도 아니에요."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지만, 송천혜의 머릿속은 두 배는 더 복잡해졌다.
그 남자가 끼어든 건 예상 밖이었다.
워낙 갑작스러웠던 탓에 잠시 집중력이 흐트러졌고, 부끄럽게도 허밍버드의 제어가 한 박자 늦고 말았다.
폭발하는 뇌전을 봤을 때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었다.
내가 엉뚱한 사람에게 피해를 입힌 건 아닌가? 하고.
하지만 어떻게 된 일일까, 그 남자는 허밍버드를 정면으로 받아 내고도 멀쩡했다.
아니, 멀쩡하다 못해 아예 아무 영향도 안 받은 것 같았다.
마탑의 실력자들도 격중당하면 아주 짧게나마 움직임에 지장이 생기는데, 가볍게 손을 털고 끝이라니.
'어떻게 된 거지?'
뭐라 표현하기 어려웠던 찜찜함이 조금 더 구체적으로 변했다.
송천혜는 곰곰이 방금 있었던 일들을 되짚어 보았다.
생각할수록 앞뒤가 안 맞는 것 같다.
혹시 내가 무슨 초보적인 실수라도 한 게 아닐까?
마력을 충분히 싣지 않았다거나, 술식이 허술했다거나.
하지만 그녀의 상념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한쪽 귀의 소형 무전기를 통해 음성이 들려왔기 때문에.
[4-C 객실에서 학생 간 분쟁 발생. 지원 바랍니다.]
"곧 가겠습니다."
송천혜는 다른 선도부원들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들 역시 같은 연락을 받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가죠."
"그러지."
이내 싱글싱글 웃는 한소미에게는 큼지막한 지퍼 백을 넘긴다.
신병철에게서 압수한 가발이 들어 있는 그 지퍼 백이다.
"역무원님에게 이거 전해 주고 와. 아마 13번 차량쯤에 계실 거야. 오면서 슬롯머신에 문제없나 확인하고."
"오케이! 갔다 올게!"
해맑게 손을 흔들고 떠나는 한소미였다.
송천혜는 열차 복도를 따라 걸으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할 일이 산더미다.
그 묘하게 거슬리는 남자는 일단 잊어버리자.
* * *
본래 용살학원행 열차는 부유층을 위한 관광 열차로 설계되었다.
어른들의 복잡한 사정 탓에 이 프로젝트는 도중에 무산되었지만, 열차 자체의 튼튼함을 높게 평가한 용살학원에서 열차를 매입했다.
지금은 용도에 맞게 개조한 후 이렇게 멀쩡히 운행 중이다.
다만 아직 열차 곳곳에 '관광 열차'의 잔재가 남아 있고, 그것은 <용살학원>에서 일종의 히든 피스 역할을 한다.
내 목표는 바로 그 히든 피스다.
1번부터 10번 차량까지가 1학년 구역, 그 뒤는 2학년과 3학년 구역이다.
우리가 8번, 9번 차량을 지나 10번 차량 끄트머리에 가까워지자 따라오던 고현우는 내 목적지가 11번 너머인 줄 알았나 보다.
"김 형, 2학년 구역에 볼일이 있는 거요?"
"2학년 구역에는 2학년 선도부가 돌아다니겠지. 지금 우리 실력으로는 턱도 없고."
"하면?"
"직접 봐. 다 왔다."
10번 차량의 끝자락에는 커다란 빈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리고 잘 보이지 않는 구석에 낡고 작은 슬롯머신이 하나.
관광 열차의 잔재, 손님들을 위해 마련된 작은 오락실 겸 카지노의 잔재였다.
개조하는 과정에서 싹 밀어 버리기는 했는데, 어째서인지 저 슬롯머신만큼은 제거할 수 없었단다.
동전을 넣고 레버를 당기면 화면 세 개가 돌아가는 전형적인 구식 슬롯머신.
불도 전혀 안 들어오고, 심지어 누군가 동전 투입구 위에 '고장'이라고 써 붙여 놨다.
섣불리 동전을 넣었다간 낼름 먹어 버리고 돌려주지도 않을 것 같다.
고현우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제대로 온 거요? 고장이라 써 있소만...."
"제대로 왔어."
우선 '고장' 딱지부터 뜯어냈다.
사실 멀쩡히 잘 돌아가거든.
[인벤토리]
▷5은화
다음으로 인벤토리에서 은화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고현우가 말릴 새도 없이 슬롯머신에 집어넣었다.
"...."
"...."
그러나 기기는 여전히 깜깜하기만 했다.
한참이나 둘이서 아무 말 없이 스크린만 바라보다가,
참다못한 고현우가 입을 열어 뭐라 말하려던 순간,
"아무래도 고장—"
- 띠롱띠롱!
갑자기 오락기 같은 소리가 울리며 슬롯머신의 모든 전구에서 불빛이 요란하게 번쩍거렸다.
"오...."
감탄사를 흘리는 고현우와 달리, 나에게는 익숙하다 못해 지겨운 광경이었다.
히든 이벤트, <고장 난 것 같은 슬롯머신>.
무수한 플레이어들 중에서도 아는 사람만 아는, 그리고 하는 사람만 하는 이벤트다.
열차에 처음 탑승하는 건 튜토리얼도 다 끝나지 않은 극초반부.
초보들 눈에 10번 차량 끄트머리에 처박혀 있는 낡은 슬롯머신 따위가 눈에 들어올 리가 없다.
그리고 설령 이곳에 슬롯머신이 있다는 걸 눈치채더라도, 떡하니 '고장'이라고 붙어 있는데 귀중한 은화를 넣어 볼 엄두가 나겠는가.
나처럼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파악한 게 아니고서야.
레버를 잡아당기자 화면 세 개가 어지럽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 휘리리릭—
다양한 그림들이 지나간다.
얼음, 거미, 사과, 다이아몬드, 화염, 코끼리, 마나....
[얼음] [마나] [물]
덜컹, 소리가 나며 슬롯머신 상품 출구에서 아이템이 나왔다.
500mL 생수. 당연히 꽝이다.
'기대도 안 했다.'
태연하게 다음 동전을 넣고 레버를 당긴다.
또다시 휙휙 바뀌는 화면 셋.
흥미롭게 지켜보던 고현우가 물었다.
"그래서 김 형, 본인이 동행한 이유는 무엇이오?"
"지금 이거, 엄밀히 따지면 교칙 위반이거든."
"이해하기 어렵군. 도박에 쓰이던 기계라고는 하나 교칙 위반까지 갈 일이오?"
"쓰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야. 여기에서 나오는 아이템이 문제지."
슬롯머신의 최고 보상인 [암흑빙정], [귀여운 극독], [연옥용암].
모두 학생이 소지해서는 안 되는 '금지 아이템'에 속한다.
얻는 순간부터 학생선도부의 이목을 피해 다녀야 한다는 뜻이다.
"과연, 하면 본인은 망을 봐주면 되겠소?"
"어. 만에 하나 걸렸을 때 시간까지 끌어 주면 더 좋고."
"으음.... 아까 봤던 자들을 상대하게 될지도 모르겠구려."
"그럴 가능성이 크지. 어려울 것 같냐?"
지나가는 듯 가볍게 물었지만 나는 내심 고현우의 반응을 살피고 있었다.
사실 일방적으로 그에게 리스크가 큰 일이다.
이득 보는 건 딱히 없는 반면, 교칙 위반에 학생선도부와 마찰을 빚을 가능성까지.
그러나 고현우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번 해 보리다. 승리를 점치기는 어려울지 몰라도 잠시 시간을 끄는 건 가능할 거요."
"의외네. 그래도 조금은 고민할 줄 알았는데."
"하하.... 한번 발을 들였으면 끝까지 함께하는 게 강호인의 도리라 했소. 이 또한 송 소저와 신 형의 다툼에 끼어든 것처럼 무언가 뒷사정이 있어서겠지. 나중에 전부 설명해 주기요."
"그래, 고맙다."
호기롭게 말하지만 약간은 긴장이 되는지 철검을 슬며시 쓰다듬는 고현우였다.
나는 다음 동전을 집어넣으며 말했다.
"근데 별일 없을 거야. 선도부도 여긴 그렇게 자주 안 오거든. 시기상 지금은 1번 차량 쪽으로 가는 중일 테니 걱정 안 해도,"
"안뇽안뇽! 거기서 뭐 해?"
"?"
"?"
우리는 동시에 고개를 홱 돌렸다.
2학년 구역인 11번 차량 쪽에서 여학생 한 명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2학년은 아니고, 이미 한번 봤던 얼굴이다.
방긋거리며 웃는 귀염상 얼굴과 팔에 찬 선도부 완장.
한소미였다.
"걱정을.... 해야겠구만."
"...검후의 제자라 했소?"
"그렇다더라."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서포터가 다 해먹음
6화 히든 피스 뽑기 (2)
열차에서 선도부는 일반적인 파티 단위인 4인 1조를 짜서 다니지만, 아주 특수한 경우 개별 행동을 하기도 한다.
하필 지금이 그 아주 특수한 경우인가 본데, 나로서는 운이 없는 셈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포기할 생각은 없고.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고현우에게 말했다.
"나 1실버만 빌려주라."
"은화 한 개로 되겠소?"
"한 개면 충분해."
더 있어 봤자 무의미하다.
나는 고현우가 튕긴 1실버를 허공에서 잡아챘다.
"믿는다."
"맡겨 두시오."
내가 동전을 투입하고 레버를 당기는 걸 보고, 한소미가 어린아이를 타이르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얘들아, 그건 쓰면 안 돼. 학생들이 만지지 못하게 하랬어."
하지만 한소미가 한 걸음 다가오자 고현우도 한 걸음 나서며 앞길을 가로막았다.
"...?"
"부득이하게 실례를 범하게 된 점, 미리 사과드리겠소. 허나 더 이상은 지나갈 수 없소이다."
"계속 쓰겠다는 말이야?"
"그렇게 되었소."
한소미는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고현우가 상황 파악을 못 했다고 생각했는지 차근차근 설명한다.
"교칙을 위반하면 벌점을 받을 수도 있어. 그리고 교칙 위반 학생을 도와주는 것도 벌점 대상이라구."
"상관없소."
"학기 초부터 벌점을 받는 건데 왜 상관없어?"
"본인이 선택한 일이오. 그러니 마땅히 결과 또한 본인이 감내해야겠지."
"허."
한소미가 작게 헛바람을 터트렸다.
그제야 말이 안 통하는 상대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같은 편인 내 입장에서는 든든하지만 쟤 입장에서는 심히 답답하겠지.
한소미가 다시 뭐라 말하려던 찰나, 고현우가 정중하게 예의를 갖춰 보였다.
"한 소저는 검후께 검술을 사사(師事)했다 들었소. 한 수 견식 할 기회를 주시겠소?"
태도는 정중했지만 조금 삐딱하게 돌려 말하면 이런 뜻이다.
'아~ 꼬우면 검후한테 배운 검술로 뚫고 지나가 보든가~'
한소미 역시 그 속뜻을 알아들었는지 입술을 몇 번 삐죽거리곤 물었다.
"...너, 이름이 뭐야?"
"고현우라 하오."
"난 싸우는 거 별로 안 좋아해. 그치만 승부를 걸어오는 사람이 있을 땐 무시해서도, 피해서도 안 된다고 우리 스승님이 그랬어."
"좋은 가르침이오. 본인의 사부님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지."
고개를 끄덕이는 고현우였다.
한소미는 그대로 검을 뽑아 들려다가 멈칫했다.
"맞다. 지금은 검 쓰면 안 된댔는데."
용살학원 교복은 D급 방어 마법이 여러겹 둘러져 갑옷 이상의 안전장치 역할을 한다.
그런데 지금 고현우는 아직 하산한 지 얼마 안 돼서 무복 차림이니, 이 상태에서 칼부림을 했다간 크게 다칠 수도 있다.
"부득이하게 학생을 제압해야 할 때에는...."
주섬주섬 다른 것을 꺼내 든다.
강철로 이루어진 짧은 봉이었는데, 붙어 있는 버튼을 꾹 누르자,
- 철컥!
봉이 세 배로 길어졌다.
진압용 삼단봉이었다.
"이걸 쓰랬어!"
검보다 다소 살상력이 떨어진다 뿐이지, 상대를 제압하기에는 차고 넘친다.
더군다나 쓰는 사람이 검후의 제자라면 아무리 무쇠 막대기라도 나름의 검술이 묻어 나오는 법이다.
고현우가 싱긋 웃었다.
"손속에 사정을 두는구려. 그렇다면 본인만 전력을 다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소?"
허리에서 철검을 풀어내더니 검집째로 들어 올려 보였다.
"본인은 이걸 쓰지. 한 수 부탁드리겠소."
"좋아, 그럼!"
한소미가 앙증맞게 발을 굴렀다.
제자리에서 가볍게 통 튀어 오르나 싶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고현우의 바로 앞까지 쇄도했다.
삼단봉이 곧장 목젖을 찔러 들어왔다.
고현우가 슬쩍 몸을 비틀어 피했으나, 그마저도 예상했는지 찌르던 그대로 궤적을 바꿔 후려친다.
이번에도 고현우는 가볍게 한 발짝 물러나 삼단봉의 범위에서 벗어났다.
한소미는 즉시 자세를 고쳐잡곤 첫 공격과 같은 찌르기로 간격을 좁혀 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삼단봉의 끄트머리가 알아차리기 힘들 만큼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가까워질수록 흔들리는 폭이 커지더니, 마치 분신술을 쓴 것처럼 셋으로 나뉘며 각기 다른 세 방향에서 고현우를 후려친다.
엄청난 속도 탓에 셋으로 나뉜 것처럼 보인 것이다.
"...."
고현우는 그것을 유심히 살피다가, 손에 든 검집을 공격 범위 안에 쑥 밀어 넣은 뒤 한 차례 가볍게 흔들었다.
- 따다당!
들리는 소리로 판단하기에 방어에는 성공한 것 같지만, 그럼에도 손해를 봤는지 반걸음 물러난다.
한소미는 그 우세를 놓치지 않고 계속해서 고현우를 몰아쳤다.
고현우는 조금씩 물러나면서도 빈틈없이 공격을 막아 냈다.
- 덜컹,
관전하던 도중 슬롯머신이 또 500mL 생수를 뱉었다.
생수를 옆에 세워 두고 또 한 번 슬롯머신을 작동시킨다. 3실버째.
당장 나오는 아이템들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어차피 꽝일 테고, 꽝이 아니라도 시원찮은 것들뿐이니까.
화면에서 아예 시선을 돌려 두 사람의 전투에만 집중한다.
'기교는 안 밀려.'
철검을 검집째로 휘두르느라 운신에 약간의 제약이 걸리는 점을 감안하면 거의 동수를 이루는 셈이다.
검후의 제자와 거의 동수.
1학년에서는 최상급이라는 의미다.
첫 만남 때 예상했던 대로 훌륭한 재질이었다.
- 땅! 따당!
고현우는 비슷한 방식으로 삼단봉의 궤적에 검집을 찔러 넣어 공격을 차단했다.
공격이 실패로 돌아갔음에도, 한소미는 한층 더 깊이 파고들며 손잡이로 고현우의 관자놀이를 찍으려 했다.
그러나 고현우는 검집을 쥐지 않은 손으로 한소미의 손목을 가볍게 쳐올리고, 팔꿈치를 휘둘러 역공했다.
"!!"
얼굴이 맞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주먹, 손, 삼단봉, 검집, 무릎, 팔꿈치가 어지러이 얽힌다.
이번에 물러난 것은 한소미였다.
초근접 거리에서 일어나는 박투는 고현우가 한 수 위인 것 같다.
[레몬] [사과] [오렌지]
-덜컹,
슬롯머신이 네 번째 상품을 뱉었다.
이것도 꽝이지만 그나마 500mL 생수는 피했다.
[비타민 드링크(E)]
▷각종 비타민이 풍부하게 함유된 음료수.
▷피부 미용에 매우 효과가 좋습니다.
'두 번 남았군.'
슬롯머신은 카지노의 대표적인 게임 중 하나.
그런 인식 탓에 이 히든 이벤트를 접하는 플레이어들은 모든 게 운빨이라 생각하곤 한다.
확실하지 않은 도박에 은화를 낭비하느니 나중을 위해 아껴 두는 게 이득이라고.
하지만 그들이 모르는 사실 하나.
이 슬롯머신에는 최고 보상을 확정적으로 얻을 수 있는, 일명 '천장'이 존재한다.
6회, 30회, 100회째.
30회 이상은 상인 계열 스킬을 보유하지 않은 한 거의 불가능하고, 내 목표는 6회째의 천장이었다.
이 6회 천장도 교묘한 것이, 게임을 처음 시작할 때 플레이어에게 주어지는 전 재산이 5실버다.
그냥 들이받으면 올인을 해도 천장을 못 치는 것이다.
단 1실버만 더 넣으면 된다는 점을 모르고.
그래서 미리 고현우에게 1실버를 빌린 것이다.
다섯 번째로 슬롯머신의 레버를 당겼다.
치열하게 삼단봉과 검집을 맞대는 두 사람을 잠시 구경하자니,
[마나] [마나] [7]
- 덜컹,
[마나 2%(D)]
▷응축된 마나가 함유되어 있습니다.
▷복용 시 최대 마나량이 소폭 증가합니다.
'2매치는 잘 안 나오는데.'
마나량을 소폭 늘려 주는 음료.
대박까지는 아니지만, 뜻밖의 수확이었다.
나름 운이 좋은 편이라 하겠다.
이제 대망의 천장이다.
앞선 다섯 번과 달리 아주 조금은 긴장하며 동전을 넣고 레버를 당겼다.
빠르게 회전하는 화면, 휙휙 바뀌는 그림들.
'[귀여운 극독]만 안 걸리면 돼.'
최고 보상은 세 종류인데, [귀여운 극독]만큼은 당장 내가 못 써먹는다.
포기하고 선도부에 넘겨야 한다는 뜻이다.
사실상 1/3 확률로 투자금 6실버를 날리는 셈이니 가급적이면 피해 갔으면 한다.
하지만 나머지 2/3 확률로 원하는 보상이 나오고, 거기에서 얻는 이득을 생각하면 충분히 걸어 볼 만했다.
- 휘리리릭—
휙휙 넘어가던 세 화면의 속도가 점차 줄어들더니, 한 화면씩 결과물을 띄워 냈다.
[얼음] [얼음] [얼음]
'됐어.'
- 덜컹,
그렇게 드랍 된 아이템은 별사탕쯤 되는 크기의 결정들이 담긴 유리병.
원래는 얼음이었을 결정들이 거의 검은색에 가까운 군청색으로 물들어 다소 불길한 느낌을 준다.
[암흑빙정(C)]
▷까맣도록 차가운 맛.
▷복용에 각별히 주의하십시오.
▷주의:당신은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건 가져가면 안 돼."
그렇게 말하는 한소미의 분위기는 여태까지와 사뭇 달랐다.
여태까지는 그래도 사람 좋게 방긋방긋 웃으며 우리를 대하고, 고현우와도 나름 친선 대련을 하는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생사 대적을 만난 것처럼 진지하다.
왜 저런 반응인가 하면, 이 [암흑빙정]이 '금지 아이템'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이걸 보유한 지금부터 나는 실시간으로 교칙을 어기고 있는 셈이다.
"넘겨줘."
"싫은데."
한소미가 다가오며 한 손을 내밀어 보였으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순순히 넘겨줄 생각이었다면 아예 시작조차 안 했을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 동조한다는 듯 고현우가 다시 앞을 가로막았다.
"...."
한소미는 역시 말로는 안 되겠다고 여겼는지 삼단봉을 중단으로 들어 올렸다.
고현우와 대련하며 몇 번이고 취했던 자세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주변의 공기가 싸늘하게 얼어붙은 것 같았다.
본격적으로 기세를 끌어올리기 시작한 것이다.
한소미가 발을 구르자, 신형이 흐릿하게 변하며 시야에서 사라졌다.
"!"
고현우가 황급히 검집을 들어 올리고,
한 줄기 섬광이 번쩍인다 싶은 순간.
- 쩌엉!!
"크으윽...!"
차원이 다른 일격에 고현우의 신형이 옆으로 주르륵 밀려났다.
어떻게 공격을 막아 내긴 했지만, 그 대가로 검집에 살짝 금이 갔다.
고현우는 자세를 다잡고 기세를 끌어올렸고,
- 쩌엉!!
다시 한번 한소미의 일격을 가까스로 방어했다.
'[코어]가 살짝 아쉽네.'
한소미의 삼단봉에서는 여전히 마나가 줄기줄기 피어오르는 반면, 고현우의 검집에서 흘러나오는 마나는 금방이라도 꺼질 듯 미약하다.
고현우가 가진 [코어]의 등급이 한소미의 것보다 낮고, 그로 인해 가용하는 마나의 양도 적기에 벌어지는 현상이다.
"더 못 버티겠냐?"
"솔직히 어려울 것 같소."
고현우 역시 자신의 약점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는 듯하다.
이대로는 승산이 매우 낮다는 사실도.
하지만 아직은 포기하게 두지 않는다.
아직 더 볼 게 남았으니까.
"1분만 더 해 봐."
이럴 때 동료의 부족함을 메꾸는 것이 바로 서포터의 역할이다.
['증폭'을 사용합니다.]
[대상의 특성 '코어'의 등급이 상승합니다. (E->C)]
[지속시간 00:00:58]
[재사용 대기시간 00:59:58]
곧바로 자신의 코어에서부터 끓어오르는 힘을 감지한 고현우가 놀란 눈으로 나를 돌아보았고,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1분만 더 날뛰어 봐라.
서포터가 다 해먹음
7화 히든 피스 뽑기 (3)
환생 퀘스트 특전으로 가져온 세 스킬 중 하나, [증폭].
지속 시간 동안 지정한 스킬의 랭크를 상승시키는 효과를 가졌다.
가령 지금 내가 보유한 F급 [증폭]은 1분 동안 스킬 랭크를 두 단계 끌어올린다.
E급이라면 C급으로, C급이라면 A급으로.
겨우 1분 증폭에 쿨타임이 1시간이나 되지만, 그 제약을 감수할 만큼 막강한 효과다.
- 쩌엉!!
고현우는 무기를 맞댈 때마다 속절없이 밀리던 바로 전과 달리 철탑처럼 그 자리를 지켰다.
움켜쥔 검집에 넘실거리는 푸른 기운.
[코어]의 랭크가 E에서 C로 올라갔기에 가능해진 일이었다.
막는 데에 그치지 않고 적극적인 공세에 나선다.
한소미는 급격히 치솟은 고현우의 기세에 순간 당황한 듯 보였으나, 이내 평정심을 되찾고 들어오는 공격들을 하나하나 피하고 되받아쳤다.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공방이 훨씬 더 빠르고 격렬해졌다.
'훌륭하군.'
갑자기 늘어난 마나를 다루기 버거워할 법도 한데, 고현우는 원래부터 제 것인 양 능숙하게 분배하고 있었다.
마치 물 만난 물고기처럼.
'가능하면 검술까지 보고 싶은데.'
[지속시간 00:00:16]
그건 욕심이겠지.
뭘 보고 싶어도 고작 1분으로는 한계가 있다.
그리고 지속 시간이 다 끝나기도 전에 승부가 날 것 같다.
- 쩌저적,
"이런!"
고현우가 싸우다 말고 시선을 내렸다.
검집에 거미줄처럼 금이 쩍쩍 간 상태.
한소미의 검격을 막으며 생겼던 균열이 계속해서 커지다가 결국 이렇게 된 것이다.
이내 철검은 퍼석하는 단말마와 함께 검집째로 두 동강이 나 버렸다.
재질이 조금만 더 좋았으면 버텼을지도 모르지.
싸구려 철검의 한계였다.
'이만하면 볼 건 다 봤다.'
꽤 유익한 시간이었어.
나는 [암흑빙정]의 마개를 따고 내용물을 단숨에 입에 털어 넣었다.
"헉!!"
한소미가 그런 나를 보고 기함했다.
한달음에 거리를 좁혀서 내 손을 붙잡았지만, 검푸른 결정들은 이미 내 배 속으로 사라진 후였다.
한소미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너, 너 그거.... 먹으면...."
이걸 먹으면 어떻게 되냐고?
처음에는 얼음 한 컵을 들이켠 것처럼 시원하다.
그러다 점점 시원함이 싸늘한 한기로 변한다.
온몸이 내장부터 얼어붙는 감각.
['빙결' 상태이상이 적용됩니다.]
<용살학원>을 처음 시작하는 초보자에게 이 암흑빙정은 극독 중의 극독이다.
손톱만 한 빙정 한 개만 입에 넣어도 삽시간에 얼음 조각상이 되고 만다.
물론 나는 예외다.
S랭크 [원소 저항]을 갖고 있으니까.
['빙결' 상태이상이 해제됩니다.]
['빙결' 상태이상이 적용됩니다.]
['빙결' 상태이상이 해제됩니다.]
....
암흑빙정이 계속해서 한기를 내뿜지만 어림도 없다는 듯 곧바로 해소해 버린다.
플레이어에게 악영향을 끼치는 한기가 사라지는 반면, 빙정에 담긴 막대한 기운은 그대로다.
그 기운이 체내에 차곡차곡 쌓인다.
'독약과 영약은 종이 한 장 차이지.'
독약의 부작용만 다스릴 수 있다면 그게 곧 영약 아니겠는가.
만약 [암흑빙정] 대신 [연옥용암]이 나왔다면, 그건 그것대로 화염을 다스려 내 것으로 만들었겠지.
처음부터 [원소 저항]을 믿고 이 히든 피스를 구하러 온 것이다.
"...."
"...."
한소미의 낯빛은 여전히 하얗게 질린 채였다.
이 빙정의 정체를 대강 짐작하고 있었을 테니까.
적어도 학생이 절대 가져서도, 먹어서도 안 되는 위험한 아이템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겠지.
따라서 내가 얼어붙거나 픽 쓰러질 거라 예상했을 것이고.
그런데 내가 멀뚱멀뚱 서 있기만 하자 서서히 안색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조심스럽게 내 얼굴을 살피며 묻는다.
"...괜찮아?"
"커어억...!"
한소미가 괜찮냐고 묻는 순간, 나는 두 손으로 목을 움켜쥐고 고통스럽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리고 몸을 점점 굽혀 가며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김 형!"
"어, 어, 얼른 가서 애들 불러올게!"
한소미가 자리를 박차고 나서려는 순간,
나는 언제 그랬냐는 듯 편안한 얼굴, 멀쩡한 자세로 돌아왔다.
"—는 연기였습니다."
"아!!"
"하하하. 김 형, 장난이 지나치시구려."
속았다는 걸 깨닫고 삿대질을 하는 한소미와 웃음을 터뜨리는 고현우.
나는 한소미에게 빈 병을 흔들어 보였다.
"뭘 생각했는지는 몰라도 이건 아닌가 본데? 잘못 본 거 아냐?"
"...그런가?"
['빙결' 상태이상이 해제됩니다.]
['빙결' 상태이상이 적용됩니다.]
...
...
지금도 몸속에서는 전쟁이 일어나고 있지만, 굳이 그 사실을 알려 줄 필요는 없다.
한소미는 나에게서 빈 병을 받아 들어 유심히 살폈다.
그래 봤자 내용물이 부스러기 하나 안 남기고 전부 내 배 속으로 들어갔으니 헛수고였다.
"아닌데, 분명 그거였는데."
"잘못 봤다니까."
뚜렷한 증거도 없겠다, 나는 끝까지 오리발을 내밀었다.
한소미는 여전히 영 미심쩍은 표정이었지만 심증만으로 추궁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결국 입술을 삐죽거리며 우리를 보내는 것 외에는 선택지가 없었다.
"너네 둘 다 객실로 돌아가. 이제 이거 절대로 쓰면 안 돼. 아예 근처에도 오지 마!"
"그래. 괜히 귀찮게 해서 미안하다. 가면서 이거라도 마셔."
슬롯머신에서 나온 [비타민 드링크(E)]를 선심 쓰듯 건넸다.
설명에도 나와 있지만 피부 미용에 좋다더라.
한소미는 내 손에서 비타민 드링크를 홱 낚아챘다.
"몰라, 너네 천혜한테 다 이를 거야."
"가자."
"한 소저, 좋은 승부였소. 그럼 다음에 봅시다."
떠나면서도 정중하게 예를 표하는 고현우였다.
가다가 뒤통수가 따가운 느낌에 슬쩍 뒤를 돌아보니, 한소미가 여전히 우리를 째려보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위협하려는 듯 눈에 잔뜩 힘을 주었지만,
'귀엽기만 하네.'
* * *
"한 소저가 납득한 것 같소?"
"설마. 대놓고 눈 가리고 아웅 했는데 납득하면 바보지."
"그렇다면 조만간 다시 시비를 걸어오겠구려."
"백 프로. 한소미가 넘어가 주더라도 선도부는 가만 안 있을 거야."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소?"
선도부와 마찰을 빚고, 학기 초부터 벌점을 받는 리스크를 감수할 가치가 있었냐는 뜻이다.
"마찰이라 해 봐야 누구 다친 사람도 없고, 이걸로 저쪽이랑 완전 척진다고 보기도 어려우니까. 얻은 것에 비하면 사소한 문제지."
"으음.... 그 또한 일리가 있군. 한 소저도 크게 화난 기색은 아니었으니. 그래서, 그 유리병의 정체는 뭐였소?"
"설명하자면 긴데, 쉽게 표현하면 영약 같은 거야. 먹으면 마나가 쌓이지."
손바닥을 펴 보였다.
그 위로 한 줌의 마나가 맴돌다 사라진다.
고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영약의 대가가 사소한 마찰뿐이라면 이문이 많이 남는 장사요. 김형을 도와준 보람이 있구려."
"원래는 선도부랑 마찰은커녕 마주치지도 않았어야 정상인데, 이번에는 운이 없었어. 그래도 네가 시간을 끌어 줘서 잘 넘어갔다."
"하하.... 본인으로서는 김 형도 돕고, 검후의 검술도 한 자락이나마 견식했으니 일석이조였소. 게다가 김형이 손을 써 준 덕분에 한 소저와 마지막까지 비등한 대결을 할 수 있었소."
[증폭]으로 등급을 강화해 준 덕분에 금세 패배했을 상대와 1분 가까이 공방을 교환했다.
그 전투를 복기하는 것만으로도 얻는 게 적지 않을 것이다.
고현우는 넘치던 힘의 여운이 남은 듯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다가, 나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김형의 그 기술을 다시 견식해도 괜찮겠소?"
"다음에. 제약이 있는 스킬이라 그렇게 자주는 못 써."
1시간 쿨타임이 도는 중이기도 하고, 쿨이 아니더라도 내 밑천을 함부로 내보일 생각은 없다.
본격적으로 서포팅하는 건 조금 더 신뢰를 쌓은 뒤의 일이다.
고현우는 아쉽지만, 이해한다는 반응이었다.
"어쩔 수 없구려. 그토록 강력한 기술이니 분명 어떤 제약이 있으리라 예상은 했소."
"오늘만 날이 아니니까. 앞으로도 종종 쓸 일이 생길 거다. 그리고,"
슬롯머신에서 운 좋게 드랍된 [마나 2%(D)]를 건넸다.
"이거 나왔더라. 네 몫이야."
"...!"
아이템 설명을 살피자 고현우의 눈이 놀람으로 커졌다.
[마나 2%(D)]
▷응축된 마나가 함유되어 있습니다.
▷복용 시 최대 마나가 소폭 증가합니다.
"본인이 이런 귀한 걸 받아도 될지 모르겠소."
"도움도 많이 받았고, 아까 1실버도 빌렸고, 그 정도는 줘야 셈이 맞지."
"그래도.... 1실버에 비하면 과하다 생각하오."
고현우가 힘을 보태 주지 않았다면 한소미와 마주친 시점에서 슬롯머신 계획은 붕 떠 버리는 셈이었으니,
[암흑빙정]을 먹게 해 준 대가로는 전혀 아깝지 않다.
그러나 고현우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지 아직도 주저하는 모습이었다.
장난스레 녀석의 어깨를 툭 쳤다.
"그냥 받아. 정 뭐하면 밥이나 한 끼 사든가."
"그러는 게 본인 마음에도 편할 것 같소. 마침 지나오는 길에 스낵 코너라는 것을 본 듯한데, 거기에서 과자라도 사 가면 어떻겠소?"
"나야 좋지."
우리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스낵 코너로 향했다.
* * *
우리가 돌아왔을 때도 서예인은 여전히 탁자에 엎어진 채 꿈나라를 헤매고 있었다.
스낵 코너에서 뽑아 온 과자들을 하나둘 뜯자 그제야 부스스 잠에서 깨어난다.
눈은 반쯤 떴지만 아직 비몽사몽간이다.
"일어났네."
"서 소저도 조금 들겠소?"
"...응."
하얗고 가느다란 손이 아주 잠깐 과자들 사이를 헤매다가 막대기 모양 과자를 집어 들었다.
서예인은 그것을 입으로 가져가더니 끄트머리부터 오독거리며 갉아 먹기 시작했다.
조금 더 이것저것 집어 먹는 모습을 지켜보며 확인한 것은, 얘는 달기만 한 것보다는 담백한 계열을 더 선호한다는 것이다.
직접 만든 수제 쿠키에 단맛이 부족했던 건 실수로 설탕을 덜 넣었던 게 아니라, 순전히 본인의 취향이었던 것이다.
"오오, 이 당과는 무엇으로 만들었는고? 참으로 오묘한 맛이로구나."
반면 고현우는 담백하든, 달든, 맵든, 짜든, 과자라면 가리지 않고 일단 입에 쑤셔 넣고 봤다.
그러면서도 마치 장인의 요리를 맛보는 것처럼 하나하나 음미하고 감탄사를 연발한다.
"그렇게 맛있냐?"
"사문이 원체 깊은 산중에 있던 터라 이런 것을 접할 기회가 별로 없었소. 가끔 사부님의 친우분들께서 선물로 가져오시는 게 전부였지."
"그래, 깊은 산중에 있는 문파는 어쩔 수 없지."
과자 봉투를 슬쩍 밀어 주었다.
한창 닭다리 과자를 음미하던 고현우가 문득 창밖을 보더니 물었다.
"도착하려면 앞으로 얼마나 더 남은 것 같소?"
"거의 다 왔을걸?"
내가 그렇게 답한 이유는 창밖이 온통 파란색 일색이었기 때문이다.
바다가 연상될 정도로 거대한 호수.
열차는 언제부터인가 그 호수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중이었다.
창밖만 내다봐서는 마치 열차가 물 위를 달리는 듯한 착각이 들게 하지만, 실제로는 수면에 얕게 깔린 선로를 달리는 것이다.
나는 정면에 어렴풋이 윤곽만 보이는 섬을 가리켰다.
"저기까지만 가면 되니까 금방이지."
"과연, 길어야 일각(15분)이면 도착하겠구려."
거대한 호수와 그 정중앙에 위치한 섬.
'던전 섬'이라 불리는, 무수한 미궁들로 이루어진 기이한 섬이 바로 이 열차의 종착역이다.
과거 던전 섬은 온갖 흉악범들이 득실거리는 무법 지대였다.
'워낙 숨기 좋은 곳이니까.'
도망치는 입장에서는 적당히 위험한 던전 하나를 골라서 들어가면 그만이다.
반면 쫓는 입장에서는 어떤 던전에 숨었는지부터 파악해야 하고, 요행히 찾는다고 해도 던전 내부에서의 추적이 기다리고 있으니 일이 훨씬 복잡해지는 것이다.
따라서 오랫동안 무법 지대로 방치된 곳이었으나.
어느 날, 초대 용사이자 드래곤 슬레이어가 이 던전 섬에 발을 들였다.
그는 흉악범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쓸어 버렸고,
던전들을 완벽하게 정복했으며,
도시를 세우고 아카데미를 설립했다.
그것이 바로 용살학원.
드래곤 슬레이어 아카데미인 것이다.
흐릿하게만 보였던 던전 섬의 모습이 점점 또렷해졌다.
육지가 가까워질수록 열차의 속도도 줄어들더니, 파랗기만 하던 창밖이 잘 포장된 길로 바뀌었을 즈음에는 완전히 정지했다.
고현우는 그때까지도 과자 봉투들 사이에서 혼자 축제를 벌이고 있었는데,
갈 때가 되자 아직 과자가 제법 남았음에도 미련 없이 봉투들을 한데 모아 우그러뜨렸다.
하나가 된 덩어리를 가볍게 쓰레기통에 던져 넣고 말한다.
"도착했군. 일어납시다."
그새 꾸벅꾸벅 졸던 서예인도 제자리에서 쭉 기지개를 켰다.
어지간히도 탁자나 벽에 문대면서 잤는지 옷차림이 영 엉망이다.
나는 보다 못해 옷자락을 슬쩍 잡아당겨 바로잡아 주었다.
열차에서 내리자 사방이 학생들로 바글거리고 있었다.
빨간 머리 여학생이 든 지팡이에서 작은 불씨가 타오르고,
소심해 보이는 여학생의 어깨에는 손바닥만 한 고양이가 올라탔다.
연신 스쳐 가는 학생들에게 냥냥펀치를 날려 댄다.
모두 개성이 지나치게 뚜렷해서 오히려 평범한 사람을 찾는 게 더 힘들 지경이다.
그리고 개성이 뚜렷한 수많은 학생들을 한곳에 모아 두니 혼란스러움이 배로 늘어난 느낌이다.
"1학년! 1학년은 이쪽으로!"
"이쪽으로는 오지 않습니다! 선배들 따라가지 않습니다!"
"야, 쟤 잡아!"
선도부 완장을 단 선배들이 지시봉을 흔들며 목청이 터져라 소리쳤다.
2, 3학년과 신입생들은 목적지가 다르기 때문에, 선배들을 따라가려는 신입생들을 멈춰 세우고 한 방향으로 가도록 안내한다.
나야 한두 번 와 본 곳이 아니라 던전 섬은 눈 감고도 돌아다닐 수 있다.
선도부의 안내를 따라 계속 걷다 보면 커다란 대강당이 나오는데, 그곳에서 입학식이 열릴 것이다.
우리 셋도 앞 학생의 뒤통수만 보고 따라가는 길이었으나.
도중에 우리를 가로막는 사람이 있었다.
"...."
송천혜는 팔짱을 끼고 네 죄를 네가 알렸다! 하는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한 손에 낀 장갑에서는 무력시위를 하듯 옅은 전류가 파직거린다.
백이면 구십구, 아까 슬롯머신에서 벌어진 일 때문에 나를 찾은 거겠지.
저쪽에 뚜렷한 증거가 있는 건 아니지만,
내 입장에서는 여기서 매듭을 짓고 가는 게 깔끔할 듯하다.
"잠시 따라오시죠."
"본인도 동행해야 하는 거요?"
고현우가 묻자 송천혜는 그에게 시선을 옮겼다.
"소미와 대련을 했다고 들었어요."
"검후의 제자라는 말을 들으니 호승심이 동하더군."
"다음부터는 때와 장소를 구분해 주셨으면 좋겠네요. 또 같은 일이 발생한다면 이렇게 넘어가지 않을 겁니다."
"명심하지."
이번에는 나를 도운 일을 문제 삼지 않으려나 보다.
잘됐네.
나는 고현우와 서예인에게 가볍게 손을 저었다.
"걱정 말고 먼저들 가 있어."
"알겠소. 한 자리 맡아 두리다. 서 소저."
"...."
서예인은 졸린 눈으로 나와 송천혜를 번갈아서 바라보았다.
하지만 고현우가 재촉하자 미미하게 고개를 까딱이더니 함께 대강당으로 향했다.
두 사람이 멀어지는 걸 보며 송천혜도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쪽으로."
"그럽시다."
서포터가 다 해먹음
8화 입학식 (1)
나를 어딘가로 데려가는 동안 송천혜와 나 사이에는 한마디도 오가지 않았다.
앞장서던 송천혜가 이따금 고개를 돌려 잘 따라오나 확인하는 게 다였다.
"...."
시선을 마주칠 때마다 못마땅한 기색이 묻어나오는 걸 보면 썩 좋은 첫인상을 남기지는 못한 듯하다.
하기야 쟤 입장에서 보면 나는 쿠키 때문에 선도부에 시비를 거는 이상한 사람이다.
게다가 한소미와의 가벼운 마찰로 인해 불량 학생 꼬리표가 붙기 직전이고.
요주의 인물이라는 신병철보다 아주 조금 나은 정도의 인식 아닐까.
그렇게 걷던 우리는 <학생선도부> 팻말이 붙은 부실에 도착했다.
선도부실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한구석에 서류가 탑을 이루고 있는 것만 제외하면.
부실 한쪽 벽에는 옆방으로 이어지는 문이 나 있었는데, 송천혜가 먼저 다가가 그 문을 열고 나에게 들어가라며 눈짓했다.
선도부실이 깔끔하고 정갈한 느낌이었다면, 이 방은 휑하고 삭막했다.
가구라 해 봐야 한가운데 놓인 탁자와 마주 보는 접이식 의자 둘.
어두운 방을 어슴푸레하게 밝히는 백열전구 단 하나.
이건 누가 봐도 취조실이다.
플레이어들 사이에서는 <진실의 방>이라 불리는 곳이었다.
들어가면 그 누구든 착해져서 나오게 되어 있지....
"앉으세요."
"넹."
송천혜의 말에 나는 접이식 의자 하나를 끌어다 앉았다.
느긋하게 등을 기대고 앉은 모습이 지나치게 편안해 보였는지 송천혜의 미간이 한 차례 꿈틀거렸다.
화를 참는 것처럼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뜬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진실의 방을 나선 송천혜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남학생 하나와 함께 돌아왔다.
넥타이에 꼽힌 핀의 색이 황금색인 걸로 보아 3학년 선배다.
든든한 덩치에 후덕한 인상이 마치 온순한 곰을 떠올리게 했는데, 눈매가 가느다란 실눈이라 더욱 그렇게 보였는지도 모른다.
입가는 입꼬리만 미약하게 올라가 있어 웃는지 무표정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실눈 선배가 탁자 위에 가져온 물건 몇 개를 내려놓으며 물었다.
"안녕. 이름이.... 김호라고?"
"예, 선배님."
"그래, 김호야. 나는 오세훈이야. 선도부장이지."
"...."
입학식이 열리는 이때 선도부실에 있는 걸 보고 어렴풋이 짐작은 했지만, 오세훈은 선도부장이었다.
그가 손에 든 보온병에서 커피를 따르며 물었다.
"뭐 좀 마실래? 꿀물도 있고, 녹차도 있고, 커피는.... 금방 저녁이니까 지금 마시면 잠이 안 오겠지?"
"찬물이면 충분합니다."
"앉아 계세요. 제가 가져올게요."
오세훈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기 전에 송천혜가 먼저 방을 나섰다가, 곧바로 돌아왔다.
떠오는 속도가 그야말로 순식간이라 문 바로 앞에 정수기가 있는 줄 착각할 정도였다.
송천혜는 여전히 못마땅함을 가감 없이 드러내며 내 앞에 종이컵을 턱 내려놓고, 오세훈의 뒤편에 자리를 잡고 꼿꼿하게 섰다.
오세훈이 커피를 한 모금 들이키고 다시 말문을 열었다.
"그래, 김호야. 입학식에 늦으면 안 되니까 오래 붙잡아 두지는 않을 거야. 질문 몇 개만 답해 주면 바로 보내 줄게."
"예."
"10번 차량의 슬롯머신을 썼다고 들었어. 소미는 교칙 위반이라고 경고를 줬다던데, 계속한 이유가 있니?"
곧바로 열차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묻는다.
내 대응은 상대가 선도부장이라고 해서 달라질 게 없었다.
오리발 내밀기 작전을 고수한다.
"왜 교칙 위반인지 납득도 안 가는데, 무턱대고 하지 말라니까 괜히 반발심이 들더라구요."
천연덕스럽게 답하자 송천혜의 미간이 또다시 꿈틀댔다.
선도부장만 아니었다면 당장이라도 나에게 전격 마법을 갈겼을 것 같다.
반면 오세훈은 그럴 수도 있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위아래로 움직였다.
"소미가 제대로 설명하지 않은 잘못도 있기는 해. 그래도 선도부원이 지시하면 일단은 따라 줬으면 좋겠다. 항상 설명할 여유가 있는 건 아니잖아."
"알겠습니다."
"또 묻고 싶은 건,"
송천혜가 지퍼락에 보관해 둔 작은 유리병을 건넸다.
[암흑빙정]이 들어 있던 그 유리병이다.
그것을 들어 살피는 오세훈의 가느다란 실눈이 순간 날카롭게 빛난 듯했다.
"여기 들어 있던 결정들을 삼켰다고 하던데. 몸에 별다른 이상은 없니?"
"전혀 없어요. 평소와 똑같습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간단한 테스트만 하나 해 볼게. 여기에 손 좀 넣어 볼래?"
혈압 측정기처럼 생긴 장치를 내 앞에 내려놓는다.
주먹만 한 구멍에 손을 집어넣으면 결과가 표시되는 장치.
'디버프 감지기구만.'
<용살학원>에서 상대방의 스킬, 특성, 장비 등 정보를 열람하는 방법은 매우 제한적이다.
심지어 상대가 어떤 상태이상을 달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그 디버프를 직접 건 게 아니라면 말이다.
이 디버프 감지기는 손을 넣은 사람의 상태이상만을 확인하는 장치였다.
나는 아무 거리낌 없이 구멍에 손을 집어넣었다.
-위잉—
장치가 윙윙거리며 돌아가기 시작했다.
도착하기 거의 직전까지만 해도 암흑빙정이 완전히 흡수되지 않아 빙결이 계속 걸렸다 풀렸다 했지만, 지금은 그것도 다 끝났다.
따라서 측정기가 디버프를 잡아낼 리 만무했다.
장치가 초록 신호를 보내는 것을 확인하자 오세훈이 고개를 주억였다.
"별다른 이상이 없는 것 같네. 김호야, 하나 말해 둘게. 원칙적으로는 우리가 설명을 했든 안 했든, 지시를 어기는 것만으로 징계 대상이 될 수 있어."
"...."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원칙적인' 경우고, 이번 일은 아무도 안 다쳤고, 처음이기도 하니까 벌점을 안 주고 넘어갈 거야. 그렇지만 여기에서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으면 좋겠다."
"예, 선배님."
대답을 듣자 오세훈의 입매가 조금 더 완만한 곡선을 그렸다.
"이제 가도 좋아. 대강당까지 가는 길은 아니? 모르면 천혜랑 같이 가도 되는데."
"괜찮습니다. 길은 잘 알아요."
"그래, 들어가고, 학기 잘 보내렴."
* * *
오세훈은 김호가 떠나간 후에도 느긋하게 커피를 음미하고 있었다.
언제 어디서든 커피와 함께라면 여유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그였다.
부드럽게 한 모금 더 들이킨 후 어깨너머로 물음을 던진다.
"천혜는 마음에 안 드나 보네."
"...저 남자는 거짓말을 하고 있어요. 최소한 무언가 숨기고 있는 건 확실합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니?"
"김호 학생의 객실은 8번 차량에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슬롯머신을 목표로 한 게 아니고서야 굳이 10번 끝까지 갈 이유가 없어요. 유리병의 내용물을 소미가 보는 앞에서 털어 넣은 것도 본인 말로는 반발심에 그랬다지만, 제가 보기에는 억지 같구요."
"제대로 봤구나. 내 생각도 비슷해."
오세훈은 말로는 동의해도, 이미 이번 일이 관심 밖인 듯했다.
송천혜는 조금 더 고집을 부려 보기로 했다.
"부정한 스킬을 얻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돋보기]를 써서 보유 스킬을 확인해 보면 꼬리가 잡힐지도 몰라요."
"응, 그럴 수도 있지."
[돋보기]는 대상의 정보 일부분을 열람하게 해 주는 아이템이다.
종류와 등급에 따라 열람할 수 있는 정보가 다르지만, 어쨌든 적당한 것을 쓰면 어떤 스킬을 보유 중인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세훈의 반응은 여전히 영 미적지근했다.
송천혜가 한마디 덧붙이려던 순간, 그가 되물었다.
"그런데, 아무것도 안 나오면 어떡하지?"
"네?"
"돋보기까지 썼는데 문제 될 만한 스킬이 안 나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건...."
송천혜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심증은 거의 100%에 가깝다고 말하고 있지만, 만에 하나 강행했다가 아무것도 안 나온다면?
그 역풍은 학생선도부뿐만 아니라 그녀가 속한 토파즈 마탑까지 미칠 것이다.
반면 돋보기로 '부정한 스킬'을 확인한다고는 해도, 그게 엄청나게 사악한 부류일 가능성은 작다. 기껏해야 벌점이나 간단한 징계 정도의 처벌이 내려지겠지.
얻는 것에 비해 리스크가 지나치게 크다.
오세훈은 진작에 거기까지 계산하고 김호를 보내 준 것일 터.
송천혜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경솔했어요."
오세훈으로서는 이런 후배의 태도가 기꺼웠다.
엘리트로서 한창 자존감이 충만할 시기.
이런 시기에 자신의 잘못을 빠르게 인정하고 굽히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오세훈이 부드럽게 타일렀다.
"천혜야, 마음이 앞서는 건 이해해. 그래도 이런 일은 무조건 밀어붙인다고 될 게 아니니까 천천히, 길게 보자."
"...네."
김호가 정말로 부정한 무언가를 얻어서 사용한다면, 굳이 돋보기를 쓰지 않더라도 나중에 반드시 꼬리가 잡히게 되어 있다.
"더 말썽을 부리는 게 아니면 김호는 놔둬. 당분간은 동아리들의 동향을 주시하자."
"알겠습니다."
"자, 너도 서둘러야지. 얼른 안 가면 입학식에 늦겠다."
* * *
'진실의 방'에서 보낸 시간이라 해 봐야 아주 잠깐이었는데,
밖으로 나왔을 때는 어느새 해가 반쯤 저물어 가고 있었다.
나는 석양으로 붉게 물든 땅을 밟아 가며 대강당에 도착했다.
수백 명의 신입생들이 입학식을 기다리며 앉아 있었다.
저들끼리 떠드는 소음이 합쳐져 벌떼가 웅웅거리는 것 같다.
가볍게 둘러보는 도중 잿빛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온갖 세계관이 혼재한 게임 속 세상이지만 회색 계통 머리카락은 의외로 흔치 않다.
서예인이 내 시선을 어떻게 알아챘는지 때마침 내 쪽으로 슥 고개를 돌렸다.
고현우의 시선도 그것을 따라 이동하더니, 곧 나를 발견하고 손을 흔든다.
"김 형, 이곳이오."
고현우와 서예인은 용의주도하게도 가운데 한 자리를 띄어 놓고 앉았다.
어지간히 낯짝이 두꺼운 게 아니라면, 그 사이에 엉덩이를 붙이기는 어려웠으리라.
내가 빈자리에 앉는 순간 시야 한켠에 알림 메시지가 출력되었다.
[튜토리얼III 완료]
▷제시간에 입학식에 참석했습니다.
▷보상:E등급 무기 선택권, 5실버
[무기 선택권(E)]
▷원하는 E등급 무기를 습득할 수 있습니다.
E급 무기라 해 봐야 고현우의 철검보다 하등 뛰어날 게 없는 양산형 장비다.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지.
슬롯머신 돌린다고 탕진한 5실버도 고스란히 돌려받았다.
"...!"
"...!"
그때, 시끌시끌하던 대강당이 앞쪽에서부터 점점 조용해지기 시작했다.
왜인가 하니, 대강당 앞의 단상으로 일단의 무리가 걸어 들어왔기 때문이다.
등장한 시기로 보나 연령대로 보나, 그들이 용살학원의 교직원들인 것은 분명했다.
학생들의 이목이 집중되자 선생님들은 제각각 다른 반응을 보였는데,
아예 눈앞에 아무것도 없다는 듯 무시하고 앞만 보는 선생님도 있고, 옅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어 주는 선생님도 있었다.
그중 턱수염을 대충 깎은, 서른 후반 정도로 보이는 남성이 단상 위에 올라섰다.
서포터가 다 해먹음
9화 입학식 (2)
중년 남성을 보니 우리 동네 바보 형이 떠올랐다.
후줄근한 추리닝 차림에 다 떨어져 가는 슬리퍼를 질질 끌고 다니던 바보 형.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 듯 앞자리의 여학생 두 명이 서로 귓속말을 했다.
하지만 속닥거리는 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주변 사람들에게 다 들릴 지경이었다.
- 저분이 교장 선생님 맞지? 별로 대단해 보이지는 않는데....
- 아냐. 저래 봬도 젊었을 때는 드래곤 토벌대 리더였대. 성체 화룡을 두 마리나 잡았다더라.
- 와, 진짜?
전통적으로 용살학원의 교장은 일선에서 물러난 전대 용사가 맡게 되어 있다.
그리고 <용사> 칭호 역시 <우레군주>와 마찬가지로, S등급을 단 수많은 강자들 중에서도 단 한 명에게만 붙는다.
겉모습은 저렇게 후줄근하지만, 내면에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막대한 힘이 소용돌이치고 있는 것이다.
예전에 키웠던 용사가 S급 스킬을 20개가량 갖고 있었으니까,
저 양반도 대충 엇비슷하지 않을까?
- 근데 아직도 독신이래.
- 어! 나도 들었어. 성녀님한테 네 번이나 차였다며?
- 아니, 바로 얼마 전에 또 까여서 다섯 번이야.
- 어머머~
내 마음속 교장 선생님의 인식이 급격히 측은해졌다.
권태로운 눈빛으로 가볍게 좌중을 둘러본 그가 입을 열었다.
"반갑습니다, 신입생 여러분. 용살학원에 입학하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강당은 삽시간에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만큼 고요한 상태가 되었다.
온화한 인사말로 시작한 교장 선생님의 표정이 진지하게 변했다.
"오래전, 용살학원(龍殺學園)은 이름 그대로 드래곤들과의 전쟁을 대비하기 위해, 드래곤 슬레이어들을 육성하기 위해 설립되었습니다."
"초대 용사님께서 여러 좋은 단어들 가운데에서 살(殺)을 고집하신 이유라면, 여러분이 슬레이어(Slayer)가 무엇인가 한 번씩 깊이 생각해 보길 바라서일 것입니다."
"슬레이어란 무엇입니까? 오우거를 베지 않으면 오우거 슬레이어가 될 수 없고, 드래곤을 베지 않으면 드래곤 슬레이어가 될 수 없습니다."
"이렇듯 생명을 빼앗는 것이 우리 슬레이어들의 숙명이자 본질입니다. 이 사실에서 눈을 돌리지 마십시오."
"동시에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슬레이어가 되려는가. 나는 무엇을 위해 생명을 빼앗으려는가."
"여러분이 졸업 전까지 자신만의 해답을 찾았으면 합니다."
교장 선생님이 굳이 시작부터 이런 불편한 진실들을 언급하는 이유는,
외적인 단련 이상으로 내면을 담금질하는 것도 굉장히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면의 담금질은 마음속에 뚜렷한 목표를 세우는 데에서 시작된다.
졸업 후 상대하게 될 A등급, S등급 몬스터들은 그야말로 살아 있는 자연재해와 같은 존재들.
막연히 잘 먹고 잘살고 싶다, 부자가 되고 싶다 같은 어중간한 마음가짐으로는 그런 괴물들을 마주했을 때, 바람 앞의 등불처럼 덧없이 스러지고 말리라.
나 외에도 교장 선생님의 말씀에 고개를 끄덕이거나 깊은 생각에 잠긴 학생들이 제법 되었다.
거기서 끊었으면 아주 훌륭한 개회사였을 테지만,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더 하겠습니다—"
유감스럽게도 교장 선생님은 1절에서 끊을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훈화가 길고 또 길게 이어졌다.
학생들이 괴로움에 몸을 뒤틀었으나, 교장 선생님은 본 체도 하지 않고 자장가처럼 느린 템포로 자기 할 말만 계속했다.
"진짜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더—"
* * *
누군가 제지하지 않았다면 아마 이대로 몇 시간은 더 가지 않았을까.
단상 곁에서 대기하던 정장 차림의 여성이 손목시계를 가리키는 듯한 제스처를 보냈다.
그제야 교장 선생님도 마무리를 짓기로 한 모양이다.
"—여러분이 용살학원에서 진정한 영웅으로 거듭나기를 기원합니다. 이상입니다."
"어흐흑."
"엄마.... 나 머리가 아파...."
신입생 일동은 하나같이 얼굴을 감싸 쥐거나 두통을 호소하는 등 절망에 깊이 잠식된 상태였다.
그 와중에 고현우는 교장 선생님의 말씀에 깊이 감화된 듯 미소와 함께 연신 고개를 끄덕인다.
"음. 참으로 뜻깊은 시간이었소."
"넌 안 지루하디?"
"지루하다니, 김 형, 그 무슨 무례한 언사란 말이오? 하나같이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조언이었거늘. 사부님께서도 매일같이 이런 조언을 해 주시고는 했소."
"저런 걸 매일같이 들었다고?"
단련이 될 대로 된 놈이로구나?
나는 대화를 포기했다.
"...."
한편 서예인은 팔짱을 끼고 고개를 아주 살짝 숙인 채였다.
눈앞에 가볍게 손을 흔들어 봤지만 아무 반응도 안 한다.
반쯤 뜬 눈으로 졸고 있는 것이다.
굳이 깨워야 하나 싶어서 그냥 놔두기로 했다.
교장 선생님이 단상에서 물러나고 뒤이어 정장을 입은 여성이 올라섰다.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빈틈이 없어 보이는 사람이었다.
아마 송천혜가 그대로 10년쯤 나이를 먹으면 저렇게 되지 않을까?
앞자리 여학생들이 '교감 선생님이다'라고 속삭이는 말이 귀에 들어온다.
이 사실을 모르고 교장, 교감 선생님이 나란히 서 있는 걸 봤다면 아마 누가 교장인지 헷갈렸겠지.
교감 선생님이 차가운 시선으로 좌중을 훑자 저들끼리 떠들던 학생들이 움찔하여 입을 꾹 다물었다.
서서히 커지려던 소음이 잦아든 건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당부의 말씀 드립니다. 금년도 금지 아이템 목록이 갱신되었습니다. 해당 물품들은 학생이 휴대하거나 인벤토리에 보관하는 것만으로 압수 대상이며, 경중에 따라 벌점 이상의 처벌이 가해집니다. 불이익을 받는 일이 없도록 충분히 숙지하고, 지켜 주시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신입생 여러분은 별도의 공지 전까지 던전동 지상층에서만 실기 평가를 치르게 됩니다. 지하층에 무단으로 출입하여 문제가 발생할 시, 본인뿐만 아니라 본인이 소속한 문파, 마탑, 길드 등에도 피해가 미칠 수 있습니다. 순간의 호기심으로 모두를 불행하게 만들어선 안 되겠죠."
그렇게 말하며 경고하는 듯한 눈빛을 보내는 교감 선생님이었다.
신입생들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오한이라도 든 것처럼 몸을 떨었다.
"저녁 식사를 하실 수 있도록 입학식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모두 늦지 않게 기숙사로 돌아가도록 하세요."
교감 선생님은 그 말까지만 끝내고 곧바로 단상에서 내려왔다.
교장 선생님의 기나긴 연설에 비하면 찰나와 같은, 요점만 꾹꾹 눌러 담은 실전 압축 안내였다.
너무 순식간이라 아직도 입학식이 안 끝난 줄 알고 제자리에 앉아 있는 학생들이 부지기수였다.
그러나 교직원 일동이 모두 떠나가자 그제야 하나둘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고현우가 제자리에서 가볍게 몸을 풀었다.
"저녁 식사 시간이로군. 마침 출출해지던 차였소."
"빨리 가자. 조금만 더 늦으면 줄 서야 돼."
발걸음을 재촉하려던 우리는 문득 잊은 걸 떠올리고 동시에 몸을 돌렸다.
아직도 의자에 구부정하게 앉아서, 반쯤 뜬 눈으로 졸고 있는 서예인.
존재감이 희미해서 하마터면 두고 갈 뻔했다.
"서예인."
"...."
깨우기는 해야 하는데, 불러도 대답이 없다.
더 가까이 다가가서 손끝으로 어깨를 가볍게 톡 건드렸다.
"...."
그제야 서예인은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몸을 세웠다.
막 자다 깨서 상황 파악이 잘 안 되는지 느릿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그러다가 나를 발견하고, 잠을 깨운 원흉인 내 손을 뚫어지라 응시한다.
"입학식 끝났다. 밥 먹으러 가자."
"응...."
* * *
저녁 식사로는 해물 파스타가 나왔다.
수백 명분의 식사를 동시에 조리하다 보면 불가피하게 그만큼 맛이 떨어지게 되는데, 이건 유명한 맛집 파스타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었다.
주방 측의 실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용살학원에서 식사의 맛 같은 세세한 것에조차 신경을 기울인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인류를 보호할, 장래의 영웅들을 육성하는 기관이니 그만큼 대우를 해 주는 거겠지.
아무나 여기 입학하는 게 아니기도 하고.
"헤이! 친구들, 식사는 맛있게들 하고 계신가?"
"어, 왔냐."
신병철은 열차에서 처음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아무 거리낌 없이 다가와서는 옆자리에 턱 걸터앉았다.
그사이에 무슨 짓을 하고 다녔는지 뺨에 사선으로 붉은 손톱자국이 세 줄이다.
고현우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신 형, 그 상처는 어찌 된 거요?"
"아, 이거? 그냥 뭐, 사소한 해프닝이 있었지."
소심해 보이는 여학생이 지나가다가 신병철에게 불안한 눈빛을 보냈다.
어깨에 앉은 고양이가 하악질을 하며 발톱을 세운다.
나는 아무것도 못 본 척하기로 했다.
'새우가 맛있군.'
신병철이 자기 몫의 파스타를 흡입하며 말했다.
"잘 먹고 푹 쉬어 두라고. 내일은 빅—데이가 기다리고 있다, 이 말씀이야."
"빅 데이라? 그게 무슨 뜻이오?"
"아니, 몰라? 내일이 수업 첫날이잖아."
"그렇기는 하오만, 수업 첫날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요?"
신병철이 설명을 해 주려고 입을 열었다가, 도중에 생각이 바뀐 듯 짓궂게 미소 지었다.
"흐흐, 안 알려 주지. 내일의 즐거움으로 남겨 두는 걸로."
"김 형, 김 형은 혹시 아는 게 있소?"
"별거 아냐. 그냥 내일까지 기다려."
"크음.... 그래도 영 궁금한데.... 서 소저?"
"몰라."
서예인은 아예 고현우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졸지에 소외된 고현우가 나지막이 탄식을 흘렸다.
"허허, 강호의 도리가 땅에 떨어졌도다...."
저녁 식사가 끝나고도 우리는 그 자리에서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물론 고현우를 배려하여 내일이 뭐 하는 날인지는 끝내 언급하지 않았고....
한참을 그러다 보니 선도부원들이 시간이 늦었음을 알렸다.
"슬슬 정리들 하자!"
"각자 기숙사로 이동합니다!"
"길 모르면 헤매지 말고 와서 물어봐!"
사방이 어둑어둑해진 지금 우리의 마지막 종착역은 바로 기숙사였다.
학생증을 꺼내자 뒷면에 언제부터인가 3-406이라는 숫자가 새겨져 있다.
3동 406호라는 뜻.
3동을 찾아 마법으로 은은하게 빛나는 기기에 학생증을 가져다 대자 대문이 열렸다.
그런데 고현우 녀석이 계속 나를 따라오고 있다.
같이 대문을 열고, 같이 계단을 오르고, 같은 복도를 지나....
406호 앞에 멈췄는데도 계속 따라오길래 물었다.
"야, 너 몇 호냐?"
"407호요. 김 형은?"
"406호."
"오."
그랬다.
무슨 운명의 장난이 작용했는지, 우리는 졸지에 이웃사촌이 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마침 옆방이구려. 참으로 기꺼운 우연이오."
"나는 별로 안 기꺼운데?"
"하하, 그럼 김 형, 편히 쉬시오."
예의를 담아 인사하는 녀석에게 대충 손을 저어 주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방은 기숙사답지 않게 세련되고 넓은 데다, 필요한 설비가 빈틈없이 갖춰져 있었다.
호텔 객실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막연히 게임 속에서 스쳐 지나갔던 일상적인 요소들이 이제는 현실이 되었다.
묘한 감회를 느끼며 침대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침대 역시 상당한 고급품이라 몸을 눕히는 순간 곧바로 잠들어 버릴 것같이 편안했다.
하지만 오늘 밤에는 잠들지 않을 것이다.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코어]를 만든다.'
[김 호]
▷스킬
증폭(F)
복사-스킬[1/1]
1. 허밍버드(E)
▷특성
군주(F)
복사-특성[1/1]
1. 원소 저항(S)
▷장비
교복(D)
▷인벤토리
E등급 무기 선택권(E)
5실버
송천혜에게서 [허밍버드]를 복사하기는 했지만 당장은 못 쓴다.
마법이나 내공이 들어가는 스킬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것을 제공해 주는 동력로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일차적인 동력로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코어].
일반적으로는 진득하게 몇 주씩 투자해야 만들 수 있지만, 나는 지름길을 수백 번씩 걸어 본 썩은물이다.
'하룻밤이면 충분하지.'
열차에서 흡수한 [암흑빙정]을 통해 이미 체내에 마나는 넘치도록 쌓아 놓았다.
이제 그것을 압축해서 온전한 [코어]로 빚어내기만 하면 된다.
나는 잡념을 없애고 정신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내면에 쌓인 거대한 기운을 통제하기 위해서.
서포터가 다 해먹음
10화 첫 수업
이 시각 잠들지 않는 사람은 또 있었다.
고현우 역시 단정한 자세로 앉아서 정신을 집중했다.
푹신한 침대 대신 딱딱한 바닥에 앉아서.
눈을 감은 그의 뇌리에 열차에서 겪은 일들이 스쳐 갔다.
빨리 감기를 하듯 휙휙 지나가던 장면들이 한소미를 마주하는 부분에서 슬로우 모션처럼 느려졌다.
뼈 한둘은 부러뜨리겠다는 기세로 매섭게 날아오는 삼단봉이 있었고, 그 하나하나를 심혈을 기울여 막아 내는 자신이 있었다.
삼단봉과 검집이 어우러지는 궤적들이 아름다웠다.
한소미는 그가 하산한 후 처음으로 만난 강적이었다.
전 세계를 통틀어서도 손꼽히는 강자인 검후의 제자.
서로 실력을 얼마간 감추고 대결한 것은 사실이나, 전력을 다해 부딪혔다 한들 승리를 점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아니, 아마 패배했을 가능성이 크다.
서로 기세를 끌어올려 맞붙자 자신의 부족함이 여실히 드러났다.
김호가 적절히 나서서 그 부족함을 메꿔 주지 않았다면, 철검이 부서지기 전에 자신이 먼저 쓰러졌으리라.
'고수.'
그것이 김호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고현우가 계속해서 떠올리는 단어였다.
강자만이 보이는 여유,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이 그에게 있었다.
그렇다면....
잠시 상념에서 벗어난 그의 시선이 방 한켠에 세워 둔 기다란 물체를 향했다.
두꺼운 천으로 둘둘 말고 쇠사슬로 칭칭 감아 놓은 사문의 신물.
고현우는 분명한 목표를 갖고 사문의 신물을 계승했다.
김호라면 그 목표를 달성하는 데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쓴웃음을 머금으며 고개를 저었다.
'안 되지.'
아직은 손을 벌릴 생각이 없다.
그는 그가 처음으로 사귄 친구니까.
힘닿는 데까지는 직접 해 볼 것이다.
고현우는 다시 눈을 감고 한소미와의 전투를 복기하기 시작했다.
그의 주변으로 옅은 기의 파동과 함께 미풍이 불었다.
* * *
['코어' 특성을 습득합니다.]
['코어'의 랭크가 상승합니다. (F->E)]
역시 영약이 좋기는 좋다.
[코어(F)]를 얻고도 아직 마나가 잔뜩 남았길래, 내친김에 E랭크로 승급까지 했다.
그러고도 여분의 마나가 꽤 된다.
어디서 영약 두어 개만 더 주워 먹으면 D랭크도 금방일 듯하다.
- 파지직,
전류로 이루어진 벌새 한 마리가 만들어졌다.
열차에서는 겨우 파리만 한 크기에 움직임도 비실비실했지만, 지금은 온전한 벌새의 형상에 움직임도 날렵하다.
허밍버드가 방을 한 바퀴 선회한 후 다시 내 손에 흡수되었다.
문득 창밖을 보니 벌써 아침이었다.
시계를 보니 알람이 울리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잠깐 눈을 붙이기도 애매하니 그냥 깬 채로 시간을 죽이는 게 낫겠다.
그러고 보니 튜토리얼을 깨면서 무기 선택권을 얻었지.
이왕 생각난 김에 써 버리기로 했다.
[무기 선택권(E)]
▷원하는 E등급 무기를 획득할 수 있습니다.
-정련된 장검(E)
-뾰족한 장창(E)
-탄력 있는 장궁(E)
-....
고민 같은 건 안 한다.
어떤 무기를 얻을지도 이미 다 정해 두었으니까.
단숨에 목록을 쭉 내렸다.
[대지의 스태프(E)를 획득합니다.]
[대지의 스태프(E)]
▷미약한 대지의 기운이 깃들었습니다.
▷대지 속성 마법과 보호 계열 마법의 효과가 소폭 상승합니다.
나무를 깎아 만든, 끝부분에 손톱만 한 에메랄드가 박힌 길쭉한 지팡이.
왜 하필이면 대지의 스태프냐고?
다 미래를 위한 초석이다.
- ♪♬♩
알람이 울리기 무섭게 꺼 버리고 대충 정리했다.
방을 나서는데 거의 동시에 옆방 문이 열리며 고현우가 걸어 나왔다.
무복을 입은 어제와는 다르게 깔끔한 교복 차림이다.
물론 등에 사문의 신물을 메고, 허리춤에 철검을 찬 건 어제와 똑같다.
어제 깨 먹었는데 그새 새로 하나 구했나 보네.
"좋은 아침이오."
"어. 밥 먹으러 가자."
* * *
간단한 아침 식사를 마친 후 배정된 반으로 향했다.
<1학년 3반>이라는 팻말을 보고 교실에 들어섰다.
나름대로 일찍 등교한 편이라 생각했는데, 교실은 벌써 우리보다 먼저 온 학생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아마 학기 첫날의 설렘이 크게 작용했겠지.
낯익은 얼굴들이 제법 눈에 띈다.
자기 패거리 몇몇과 무슨 작당 모의를 하는지 음흉하게 실실거리는 신병철.
자꾸 시답잖은 장난을 걸어대는 한소미와, 귀찮아하면서도 마지못해 받아 주는 송천혜.
조벽과 금조한은 다른 반에 배정된 것 같다.
고현우가 교실을 둘러보더니 물었다.
"서 소저가 보이지 않는군. 우리와 같은 반 아니었소?"
"그랬지."
"혹 늦잠이라도 자는 건 아닌가 걱정되는구려."
"냅둬. 기다리면 어련히 오겠지."
어제 저녁 식사를 하며 우리 모두 3반이라는 사실은 확인했다.
그런 가운데 서예인만 교실에 없으니 고현우는 얘가 첫날부터 지각이라도 할까 싶은가 보다.
내 입장에서는 무의미한 걱정이었다.
정말 서예인이 꿈나라를 헤매는 중이라 한들, 어차피 우리가 손쓸 방법은 없으니까.
여자 기숙사까지 쳐들어갈 것도 아니고.
오히려 내가 이상하다고 여기는 것은 서예인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부재였다.
'담임은 어디 갔대?'
학기 첫날, 첫 수업이라 하면 누구보다도 일찍 교실에서 수업을 준비하는 게 담임 선생님들이다.
최소한 현실에서의 기억과 <용살학원>에서의 기억에 빗대면 그렇다.
학기 첫날의 설렘은 학생들뿐만 아니라 선생님들도 공유하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태 그림자도 안 비춘다?
우리 반 담임은 이런 방면에서 굉장히 무신경한 사람인 것 같다.
그건 학생들에게 썩 좋은 소식은 아니다.
수업 시간이 가까워지자 나머지 학생들도 우르르 등교해 교실의 빈자리를 채웠다.
서예인은 거의 종이 치기 직전에서야 나타났다.
"죠흔하치임...."
하품이 뒤섞인 아침 인사를 건네며 흐느적흐느적 손을 젓고, 아주 자연스럽게 내 옆자리에 앉는다.
— ♩♪♬♩♩—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멜로디가 수업 시간임을 알렸다.
그러나 교탁은 아직도 휑하기만 했다.
"...."
"...?"
영문을 몰라 두리번거리는 학생들의 수가 점점 늘어났다.
"야, 선생님은?"
"나도 몰라."
"근데 우리 담임이 누구야?"
"내가 어떻게 알아."
- 저벅, 저벅,
그때, 복도 저편에서부터 무거운 구둣발 소리가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학생이면 수업 종소리를 듣고도 저렇게 느릿느릿하게 다닐 수가 없다.
따라서 저 발소리는 담임 선생님이란 작자의 것일 확률이 매우 높다.
비슷한 생각을 한 듯, 온 반의 이목이 복도에 집중되었다.
예상대로 구둣발 소리는 교실 문 앞에서 멈추었다.
드르륵 문이 열리고 담임 선생님의 정체를 확인한 순간,
"!!"
"허억-"
반 전체가 말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 남자의 외견은 온전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한쪽 귀가 짧은 짝귀에 그마저도 화상으로 눌러붙었고, 얼굴 한복판을 검상으로 추정되는 흉터들이 죽죽 가로지르고 있다.
거기에 맹금류를 연상시키는 날카로운 눈매까지 합쳐지니, 어지간한 흉악범 저리 가라 할 살벌한 아우라가 뿜어져 나왔다.
"...."
"...."
대다수는 고양이 앞의 쥐처럼 잔뜩 위축되어 덜덜 떨고, 송천혜를 비롯한 일부는 굳은 표정으로 경계심 가득한 시선을 보낸다.
나와 고현우를 포함한 몇몇만이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는데, 특별히 담이 커서 그런 게 아니라 단순히 저 남자의 정체를 몰라서 그렇다.
좀 험상궂게 생기기는 했는데, 누군지 알아야 놀라든 말든 할 거 아니야.
남자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반응들을 보아하니 나도 은근히 유명한가 보군. 반갑다. 내가 올해 한 해 너희들의 담임을 맡게 되었다."
남자가 칠판에 자기 이름 석 자를 적었다.
본인의 외모처럼 매서워 보이는, 마치 칼로 베는 것 같은 필체였다.
이 수 독.
"모르는 놈들을 위해 딱 한 번만 알려 주마. 내가 토벌한 최고 등급 몬스터는 A급 베헤모스라는 놈이다. 물론 그뿐이라면 너희들이 내 앞에서만 이렇게 쫄고 있을 리가 없지. 이 학교 선생이라면 죄다 A급은 기본 소양 아닌가. 거기 너,"
"네에?? 네!"
이수독이 제일 앞줄의 여학생을 지목했다.
안 그래도 파래진 얼굴로 덜덜 떨던 여학생의 안색이 더욱 새하얗게 질렸다.
"사람들이 나를 뭐라고 부르는지 말해 봐라."
"스스, 스스스, 슬레이어 사냥꾼.... 입니다."
"그거 말고. 네 글자다."
"아.... 그, 그게...."
"화 안 낼 테니까 말해라. 빨리 말 안 하면 화낸다."
여학생의 시선이 갈 곳을 잃고 헤맸다.
그 네 글자가 뭔지는 몰라도 본인 앞에서 입에 담기에는 껄끄러운 단어인가 보다.
그러나 이수독이 눈에 힘을 주고 바라보자, 여학생이 시선을 내리깔고 겨우겨우 목소리를 쥐어짜서 한 글자씩 내뱉었다.
그마저도 갈수록 목소리가 기어들어 가서 마지막에는 잘 들리지도 않았다.
"이이, 이...인간...배배, 배배배배백...ㅈ...ㅓ...."
"정답이다."
이수독은 만족스럽다는 듯 자기 이름 석 자 아래에 여학생이 말한 네 글자를 적어 넣었다.
인간 백정.
'그렇게 된 거구만.'
<용살학원>의 세계에는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초인들이 모래알처럼 많다.
그 모래알처럼 많은 초인 중에는 자신의 힘을 그릇된 욕망을 위해 휘두르는 악인, 빌런들도 존재하게 마련.
이수독은 이런 악인들의 추적과 체포를 맡았으리라 추측된다.
덧붙여 인간 백정이라는 단어에는, 체포한 수보다 처형한 수가 훨씬 더 많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저렇게 얼굴만 봐도 알 정도면 추살한 악인의 수가 아마 백은 훌쩍 넘어가지 않을까?
그런 사람이 눈앞에 있으면 쫄 만도 하지.
"나도 하고 싶어서 이 자리에 선 것은 아니다. 교장이란 작자가 한 의뢰만 아니었어도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았을걸. 어찌 됐건 이건 일이고, 나는 프로다. 그리고 여태 모든 의뢰를 완벽하게 수행했다는 점은 내 몇 안 되는 자랑거리지. 너희들이 그걸 망쳐 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진심으로."
이수독이 씹어뱉듯이 말하자 교실의 공기가 한층 더 싸늘해졌다.
'성적이 안 나오는 놈은 낙제점을 받기 전에 내 손으로 죽여 버릴 것이다,'같이 들린 건 나 혼자만의 착각은 아니리라.
"시간이 없으니 자기소개는 이쯤 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지. 성적에 대해 설명해 주겠다."
이수독이 손가락을 딱 튕기자 칠판에 써진 글자들이 증발하듯 사라졌다.
깨끗해진 칠판에 다시 적는다.
+ 필기 30%
"필기가 차지하는 비중은 3할이다. 중간고사, 기말고사, 보고서, 과제 따위를 모두 포함해서 3할. 마음 같아선 2할로 줄이고 싶었다만 그건 내 소관이 아니더군."
나 때에는 2할이었는데, 정말이지 유감스럽다며 혀를 차는 이수독이었다.
그의 말대로 필기의 비중은 매년 바뀐다.
20%였다가, 30%였다가, 심할 때는 15%까지 내려가기도 한다.
확실한 건 내가 <용살학원>을 수백 번씩 다니는 내내 필기가 30%를 넘겨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는 점이다.
용살학원 측에서는 책상 위에서의 성적보다 다른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다음으로 이수독은 필기 30% 아래에 한 줄을 추가했다.
+ 태도점수 10%
"문제 안 일으키고 멀쩡히 숨만 쉬어도 10%나 준다. 누군가에게는 거저먹는 점수겠지. 단,"
느긋하게 말한 뒤, 이걸 언급하는 걸 잊었다는 듯 덧붙인다.
"이 태도 점수는 교칙을 어겨서 벌점을 받을 때마다 조금씩 깎인다. 그리고 0% 아래로 내려가면 다른 성적까지 깎아 먹을 수도 있다. 과연 그 정도로 교칙을 우습게 여기는 놈이 있을까 싶지만...."
의도된 것인지는 몰라도, 이수독의 시선이 일순 신병철 패거리에게 꽂힌 것 같았다.
그들은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싹수가 노란 놈들은 눈여겨보도록 하겠다. 혹시 아나? 졸업 후에 다시 만나게 될지."
학생들이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인간 백정'을 졸업 후에 다시 만나게 된다는 게 어떤 의미인가 상상했을 테니까.
아마 마음속으로는 죽어도 교칙을 어기지 않겠노라 필사적으로 다짐하고 있겠지만, 그게 생각처럼 쉽지 않다.
10%를 주고 시작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다음은 가장 중요한 실기다."
+ 공략전 30%
+ 대인전 30%
"실기는 다양한 던전을 클리어하는 공략전, 다른 학생과 승부를 겨루는 대인전으로 나뉜다. 그리고 이건 상대 평가다. 점수를 얻고 싶다면 무조건 네 옆에 있는 놈들보다 더 열심히, 더 잘해야 한다는 말이지."
플레이어가 흔히 쓰는 용어로 바꿔 말하면 공략전은 PVE, 대인전은 PVP다.
대인전을 예로 들면 다른 학생과 승부를 겨루며 점수를 뺏고 빼앗기며, 이 점수로 순위를 매기게 된다.
대인전에서 얻을 수 있는 최대 성적이 30%니까,
상위 10%는 30% 만점에 27%,
상위 50%는 30% 만점에 15%를 받는 것이다.
공략전도 마찬가지.
이수독이 칠판에 적은 내용을 둘러 크게 동그라미를 쳤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맨 아래에 '100%'라고 적었다.
+ 필기 30%
+ 태도점수 10%
+ 공략전 30%
+ 대인전 30%
——————————————
= 총점 100%
"1학년 1학기 평가 기준은 이렇다. 질문할 시간을 주지. 궁금한 게 있는 놈은 지금 당장 손을 들도록."
"...."
아무도 손을 올리지 않았다.
그것이 모두가 이수독의 설명을 완벽히 이해해서인지, 정말로 손을 들었다간 단숨에 손모가지를 잘라 버릴 것 같아서인지는 모를 일이다.
"없나? 좋다. 오늘은 학생들 사이에 가벼운 변별력을 부여하기 위해 배치 고사를 실시할 것이다. 모두 아레나로 이동하도록."
서포터가 다 해먹음
11화 배치 고사 (1)
이수독이 설명하는 내내 뿜어댔던 살벌한 아우라 때문일까, 아레나로 이동하는 반 전체가 바짝 위축된 분위기였다.
반면 고현우의 얼굴은 조금 상기되어 있었다.
"신 형이 어제 말했던 '빅 데이'라는 게 이런 뜻이었구려. 매우 기대되오."
"그래, 너는 척 봐도 대인전 좋아할 것 같더라."
"강자와의 비무는 항상 즐겁지. 헌데 그 배치 고사란 것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거요?"
나는 손가락 셋을 펴 보였다.
"무작위 세 명이랑 붙어서 승수만큼 점수를 가져가는 거야. 1승당 300점."
"3승을 모두 따내면 900점이나 가져가는 거요?"
"그렇지."
"지거나 비기면? 점수를 잃기도 하오?"
"잃지는 않고, 그냥 아무것도 없어. 1승 1무 1패는 300점 0점 0점."
"과연, 이해했소."
모두가 0점부터 대인전을 시작한다면 하위권 학생들만 신나게 두들겨 맞을 것이다.
그것을 조금이나마 방지하려는 목적으로 첫날에 배치 고사를 실시하고, 실력에 따라 300점씩 떨어뜨려 놓는다.
이수독을 앞세운 1학년 3반 행렬은 곧 다른 1학년들과 합류하여 함께 아레나로 향했다.
반은 달라도 배치 고사는 1학년 전체가 동시에 실시하는 까닭이다.
조금 걷다보니 거대한 돔형 건물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아레나의 구조는 현대의 경기장과 마찬가지로, 경기가 벌어지는 중앙의 무대를 관중석이 둘러싸는 형태다.
차이점을 꼽자면 저 무대.
온갖 마법적, 과학적 기술을 집대성한 결정체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지형을 구현해 낸다.
운석이 떨어지고 용암이 흘러내리는 화산 지대, 낙뢰가 비 오듯 내리치는 협곡, 심지어는 깊은 호수마저도.
아직은 특별한 것 없이 회색 타일만 쭉 깔려 있다.
그 위에는 스코어보드가 둥둥 떠다니는데, 배치 고사가 시작되기 전인 지금은 점수 대신 다른 게 적혀 있다.
MAP:[원형 투기장]
RULE:[데스매치][5분 제한]
대인전을 이루는 두 요소, 환경과 규칙이다.
영웅으로서 의뢰를 수행하다 보면, 상대를 제압하는 것만이 목표가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된다.
대표적인 예시가 호위 임무.
암살자의 제압보다 요인의 보호를 최우선으로 삼는 임무다.
무식하게 무력만 열심히 키웠다면, 압도적인 힘으로 적들을 쓸어버렸는데 정작 호위 대상은 죽어 버리는 불상사도 왕왕 발생하게 마련이다.
이렇듯 학생들을 다양한 환경과 상황에 대비시키려는 목적으로, 대인전의 규칙은 수시로 바뀐다.
이번 배치 고사의 규칙인 [데스매치]는 대인전의 단골 메뉴 중 하나다.
한 사람이 체력을 모두 소진하거나, 전투불능이 되거나, 패배를 선언할 때까지 끝나지 않는 간단한 규칙.
거기에 [5분 제한]이 더해져서, 5분 동안 승패가 갈리지 않으면 판정승 또는 무승부로 끝난다.
환경은 원형 투기장.
두 사람이 치고받기 적당한 크기의 원형 공간이다.
중앙의 커다란 무대가 독립된 투기장 여럿으로 나누어져 있고, 투기장마다 학생들이 두 명씩 들어가서 대인전을 치르게 될 것이다.
이수독이 3반 학생들을 관중석에 앉힌 후 위와 같은 내용을 설명했다.
옆 반 선생님도 조금 떨어진 곳에서 같은 설명을 하는 듯했다.
"그럼 시작하지. 호명하는 학생은 경기장으로. 최정필. 박경아."
남학생 하나, 여학생 하나가 몸을 일으켰다.
경기장 앞의 마법진에 발을 올리자 순간 모습이 사라지더니, 여러 개의 투기장 중 하나에서 다시 나타났다.
그 위 스코어보드의 내용이 바뀌었다.
[최정필 100% vs 박경아 100%]
[남은 시간 5:00]
준비되었음을 확인한 이수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3]
[2]
[1]
[Start!]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두 사람은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마나를 끌어올렸다.
넘실거리는 마나를 갑옷처럼 몸에 두른 후,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중앙에서 격돌한다.
- 콰아앙!!
폭발음이 울리며 스코어 보드의 숫자가 변했다.
[최정필 89% vs 박경아 92%]
[남은 시간 4:43]
이수독은 거기까지만 확인하고 고개를 돌렸다.
아직 빈 투기장은 많고, 부를 이름도 잔뜩이었다.
"다음. 고현우. 황혁."
"오! 본인의 차례로군."
고현우가 반색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벌써부터 몸이 근질거리는지 허리춤의 철검을 슬슬 쓰다듬는다.
"다녀오리다."
"그래, 잘해라."
내 순서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방금 도착한 퀘스트를 불러냈다.
[서브 퀘스트:배치 고사]
▷목표:배치 고사에서 중위권 이상의 성적을 거두십시오.
▷대인전 배치 고사에서 1승 이상 (0/1)
▷공략전 배치 고사에서 상위 50% 이상 (현재 랭킹:N/A)
▷보상:[복사-스킬] 슬롯+1
대인전에서 최소 1승, 공략전에서는 중위권 이상의 성적만 거두면 된다.
대충해도 식은 죽 먹기라 사실상 나에게는 스쳐 지나가는 퀘스트나 다를 바가 없었다.
지금 정말로 중요한 건 따로 있다.
'탐색전.'
배치 고사라고 자기만 잘하면 끝이 아니다.
이 대인전 배치 고사는 1학년 전체가 보는 앞에서 치러지고 있다.
즉, 다른 학생의 경기를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지켜볼 수 있다는 뜻이다.
거기에서 수집하는 다양한 정보들.
다른 학생의 무기, 스킬, 성향, 습관, 약점 등을 미리 파악해 놓는다면, 학기 내내 벌어질 대인전에서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으리라.
자기 순서만 기다리면서 안절부절못하는 놈들은 하수고, 눈치 빠른 놈들은 이미 경기장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다.
단 한 번의 전투라도 더 눈에 담아 둬야 하니까.
나에게도 이건 아주 좋은 기회였다.
추후 EX급으로 육성할 만한 재목이 있나 점 찍어 두는 게 첫 번째 목표.
그리고 [복사]할 괜찮은 스킬이나 특성을 가진 학생들을 기억해 두는 게 두 번째 목표다.
장기적으로 둘 모두 중요하다.
'쟤는 센스가 좋아. 스펙이 한참 딸리는데 안 밀려. 키워 볼 만하겠다.'
'저건 보기에만 요란해 보이지 장비빨이야.'
'저건 희귀 스킬인데. 일단 체크.'
경기 하나하나를 뜯어보던 중 내 이름이 불렸다.
"김호. 홍연화."
주위를 슬쩍 둘러보니 나 말고는 아무도 일어나지 않았다.
홍연화는 다른 반인가 보다.
관중석 어딘가에서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겠지.
조그마한 순간이동 마법진 위에 올라서자 순식간에 시야가 급변했다.
원형 투기장 내부로 이동한 것이다.
금세 맞은편 마법진에서도 누군가 소환되었다.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여학생.
그리 길지 않은 완드에는 굵은 루비가 박혀 있다.
'루비 마탑이군.'
화염 계열 마법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마탑.
파괴력과 공간 장악력이 일품이라, 루비 마탑주는 S급 영웅 중에서도 내가 은근히 자주 데리고 다니는 주류픽이었다.
그런 마탑 소속 마법사가 상대로 나오니 기분이 묘했다.
마치 부하의 제자를 괴롭히는 듯한 죄책감.
'가엾은지고.... 근데 어쩌겠냐, 배치 고사인데. 나도 이겨야지.'
딱 5분만 내 연기에 놀아나 줘야겠다.
홍연화는 루비 마탑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유망주다.
그녀의 목표는 차기 마탑주.
그것을 현실로 만들려면 우선 이 용살학원을 제패해야 한다.
검후의 제자, 토파즈 마탑의 재녀, 명문세가의 후기지수 같은 쟁쟁한 천재들을 모두 제치고 정상에 우뚝 선다면, 졸업 후 마탑으로 돌아갔을 때 탄탄대로가 열리는 셈이다.
이 배치 고사는 그녀가 내디딜 위대한 첫걸음이었다.
그러나....
첫 상대로 나온 남자는 그녀에게 실망감만 안겨 주었다.
김호? 듣도 보도 못한 이름이다.
아무리 배치 고사라도 그렇지, 조금이라도 네임밸류를 가진 상대를 꺾어야 그만큼 명성이 올라갈 텐데.
어쩐지 김이 샌다.
무기랍시고 들고나온 것도 형편없다.
척 보기에도 저건 [대지의 지팡이(E)].
견습 마법사조차 거르는 허접한 아이템이다.
대지 계열 마법이나 보호 마법의 효과를 개미 눈곱만큼 증폭시켜주는, 그녀 입장에서는 그냥 나무 막대기나 마찬가지인 스태프.
'목토 마법사는 아니야.'
에메랄드 마탑과는 썩 사이가 좋지는 않지만, 그쪽 마법사들과 안면은 익혀 두었다.
저 남자가 에메랄드 마탑 소속이 아닌 건 확실하다.
에메랄드 마탑과 관련이 없다는 건 대지 계열 마법을 익혔을 가능성이 급격히 줄어든다는 말이고,
소거법에 따라 대지 마법보다는 보호, 또는 유틸리티 계열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또한 긴 스태프를 사용하는 것으로 보아 기동성을 포기하고 위력에 치중하는, 이른바 포대형 술사일 가능성이 크다.
서포터. 포대형 술사.
그렇다면,
'속전속결로 승부를 본다.'
[김 호 100% vs 홍연화 100%]
[남은 시간 5:00]
양측이 자리를 잡자 스코어보드가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다.
[3]
[2]
[1]
[Start!]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홍연화는 완드를 앞으로 쭉 뻗었다.
[컴버스천(Combustion)]
-펑!
상대방의 상반신이 작은 화염 폭발에 휩싸였다.
E급 발화 마법, 컴버스천이다.
파괴력은 다소 떨어지지만 시전 시간이 극도로 짧다는 게 강점.
저 허접해 보이는 서포터가 보호 마법을 시전한다 해도 능히 뚫을 수는 있겠지만, 경기가 지지부진하게 끌리는 건 그녀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깔끔하고 압도적인 승리를 원했기에 아예 상대가 마법을 시전할 틈도 주지 않은 것이다.
- 와, 저거 시전하는 거 봤냐?
- 뭐가 반짝하긴 했는데 그게 술식이었나 봐.
- 역시 루비 마탑이구만.
관중석의 감탄사가 여기까지 들려온다.
홍연화에게는 너무나도 당연한 찬사였다.
그러나....
[김 호 100% vs 홍연화 100%]
[남은 시간 4:41]
스코어보드를 확인한 그녀는 두 눈을 의심했다.
고작 이걸로 끝나지는 않을 거라 생각은 했지만... 100%라고?
단 1%의 영향조차 없었다는 말이 아닌가?
다시 시선을 돌려보니 김호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느긋하게 팔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뭐지?
혹시 대지의 지팡이는 연막이고, 방어형 아티팩트라도 두르고 있는 건가?
'그럼 이건 어때?'
홍연화가 마나를 끌어올려 캐스팅을 시작했다.
지팡이 위에 마나의 구체를 만들고, 그 안에 화염 술식을 채워 넣는다.
"...."
계속 그 자리에 멀뚱멀뚱 서 있던 김호가 처음으로 움직임을 보였다.
느릿하게 스태프를 사선으로 기울이며 반대쪽 손을 앞으로 향한다.
마치 손으로 상대방의 마법을 흩뜨리려는 듯한 동작.
그것을 보고 홍연화는 눈살을 찌푸렸다.
마법사라면 모를 수가 없는 동작이었기 때문이다.
'디스펠(Dispel).'
주문 해제 마법.
하지만 그녀의 상식에 디스펠은 낌새조차 채지 못하도록 은밀하게 사용하는 마법이었다.
저렇게 대놓고 시전하는 행위에는 이런 속뜻이 담겨 있다.
나는 초보라서 디스펠을 제대로 쓸 줄 모른다.
혹은.
너 따위한테는 대놓고 써도 통한다.
'좀 열받네.'
아무래도 후자는 다소 비약이다 싶지만 그럼에도 기분이 확 나빠진 홍연화였다.
부글부글 끓는 속마음과는 반대로, 머리를 차갑게 가라앉히고 마법의 완성에 집중한다.
자신에게 디스펠을 쓰려고 한다면, 그 전에 빠르게 술식을 완성해서 날려 버리면 그만이다.
"...."
김호는 여전히 한 손을 자신을 향해 뻗은 채였다.
그러나 마법이 전혀 방해받지 않는 걸 보면 아직도 적절한 타이밍을 잡지 못한 듯하다.
여전히 무덤덤한 표정이지만 속은 바짝 타들어 가고 있으리라.
홍연화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미 늦었어!'
사람 몸뚱이만 한 화염 구체가 완성되었다.
홍연화는 그것을 그대로 상대를 향해 집어 던졌다.
감히 날 상대로 수작을 부리다니, 후회하게 만들어 주겠다!
[플레임 오브(Flame Orb)]
- 퍼엉!!
이글이글 불타는 화염구가 김호를 집어삼켰다.
화염구는 재차 폭발을 일으켜 일대를 화염으로 뒤덮어 버렸다.
홍연화는 그녀의 뺨에 닿는 열기를 느끼며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끝났어.'
실전에서 플레임 오브에 격중 되었다면 모조리 불타서 잿가루만 남았겠지만, 교복에 자체적으로 D급 보호 마법도 걸려 있고, 아레나에 학생들을 보호하는 각종 안전장치도 존재하니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최소 전투 불능이 됐음은 분명했다.
이 압도적인 일격에 의지가 뚝 꺾여서 나머지 배치 고사도 망치지는 않으려나 모르겠다.
그러나....
[김 호 100% vs 홍연화 100%]
[남은 시간 3:58]
"...어?"
스코어보드를 확인한 홍연화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황급히 시선을 정면으로 향하자 서서히 사그라드는 불길 사이로 김호의 모습이 드러난다.
멀쩡하다.
아까와 전혀 다를 것 없이, 그냥 제자리에 서 있다.
마치 이 정도 화염은 아무렇지도 않다고 말하는 것처럼.
'정말 디스펠을 한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멀쩡한 건 설명이 안 된다.
마법이 적중하기 직전, 그 찰나의 순간에 디스펠을 써서 마법을 와해시켰다는 말인가?
그런데 이미 완성된 마법을 디스펠하는 게 가능했던가?
무엇보다 홍연화를 놀라게 한 것은, 저 남자가 디스펠을 언제 쓰는지 잡아내지도 못했다는 점이다.
그녀의 등줄기에 오한이 스쳐 지나갔다.
'그, 그렇네. 내가 방심했나 보네.'
홍연화는 겉모습만 보고 상대를 얕잡아 봤던 자신을 질책했다.
저 남자 또한 수많은 경쟁을 뚫고 이 용살학원에 입학한 영웅 후보.
녹록한 상대일 리가 없지 않은가.
크게 심호흡을 하고 지팡이를 꽉 움켜쥔다.
다음 마법도 방해받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존재한다.
그렇다면 아예 디스펠의 영향을 거의 안 받는, 마법진 계열 술식으로 승부를 본다.
- 부우웅—
홍연화가 마나를 끌어올렸다.
루비에서 방출된 마나는 김호의 발밑에 붉은 마법진을 그려 냈다.
그의 시선이 흘끔 아래로 내려가며 마법진을 확인했다.
"...."
마법진이 나타난 위치에 곧 마법이 떨어진다.
누구나 알 수 있는 단순한 인과관계다.
그러므로 자기 발밑에 마법진이 나타났다면 당연히 거기에서 최대한 멀어져야 한다.
홍연화는 김호가 황급히 몸을 피하리라 예상했고, 그를 옭아맬 다음 수까지 준비해 두었다.
그러나….
'...안 움직여?'
김호는 그 자리를 계속 지킬 생각인 듯했다.
몸을 피하기는커녕 자기 스태프를 바닥에 쿡 찍는다.
얼마 안 되는 기동성조차 완전히 버린다는 뜻.
서포터일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감안하면, 강력한 방어 마법으로 맞상대하겠다는 의도로 보인다.
"하. 하하."
홍연화는 어이가 없어서 헛바람을 터뜨렸다.
내가 루비 마탑 출신인 걸 모를 리가 없을 텐데.
파괴력으로는 다른 어떤 마법에도 밀리지 않는 화염 계열임을 알면서도,
감히 방어 마법으로 정면 승부를 걸어온단 말이지?
그렇다면 좋다.
- 번쩍!
완드에 박힌 루비가 광채를 뿜었다.
붉은 마법진의 지름이 두 배가량 넓어지고, 빈자리에 술식이 추가되었으며, 한층 더 선명한 붉은빛을 머금었다.
반면 김호는 석상처럼 미동도 하지 않고, 바닥에 스태프를 꽂아 넣은 모습 그대로 자신을 기다릴 뿐이다.
홍연화가 보기에는 '그래서 마법은 언제 쓸 거야?' 하고 물어보는 것 같았다.
'그렇게 재촉 안 해도 지금 쓸 거야!'
그럼 어디 한번 막아 봐라!
[파이어 필라(Fire Pillar)]
- 콰아아아아!
거대한 마법진에서 불기둥이 솟구쳤다.
서포터가 다 해먹음
12화 배치 고사 (2)
파이어 필라(Fire Pillar).
지정한 범위에 불기둥을 피워 올리는 마법이다.
일반적으로는 적에게 타격을 입히기보다 적의 움직임을 제한하거나, 연이어 시전할 화염 마법을 보조하는 용도로 쓰인다.
단, 상대가 멍청하게 마법진 위에 멀뚱멀뚱 서 있는 경우는 예외다.
바로 지금처럼.
- 콰아아아아!
강화한 파이어 필라의 위력은 홍연화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화염이 솟구치는 기세가 얼마나 강력했는지, 마법을 시전한 그녀 본인조차 몰아치는 열풍을 감당하지 못하고 몇 걸음 뒤로 물러날 정도였다.
열풍은 또한 자욱한 흙먼지를 피워 올리며 투기장 내부의 시야를 차단했다.
따라서 한동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잠시 후, 파이어 필라의 지속 시간이 끝나 서서히 사그라들고 자욱하던 흙먼지도 조금씩 걷혀 갔다.
홍연화는 시야가 확보되자마자 제일 먼저 스코어보드부터 확인했다.
[김 호 100% vs 홍연화 99%]
[남은 시간 1:01]
"아니...!"
이래도 아무렇지도 않다고?
정말로 강화한 파이어 필라마저 빈틈없이 방어했다고?
누구나 이런 상황에서는 전의를 상실할 것이다.
그러나 홍연화는 '누구'가 아니었다.
'나는.... 나는 차기 루비 마탑주야.'
그렇게 속으로 되뇌며 이를 악물었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다.
학기 중반쯤에나 강자들을 상대로 꺼내 들기 위해 숨겨 두었던 비장의 카드들.
그것들을 꺼내 쓴다.
그렇게 해서라도 이기고 말 것이다.
홍연화가 마나를 끌어모아 다시 주문을 시전하려 할 때였다.
아직 완전히 걷히지 않은 흙먼지 속에서 반짝 작은 무언가가 빛났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뇌전으로 이루어진 벌새였다.
- 치지지직—
'허밍버드!?'
황급히 대응 주문을 외워서 허밍버드를 후려치려 했으나, 벌새는 휙휙 불규칙하게 움직이다가 그녀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사라진 벌새를 찾기 위해 필사적으로 두리번거리던 홍연화의 어깨에서 짜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 파지직!
"윽!"
['마비' 상태이상이 적용됩니다.]
뻣뻣해져서 쓰러지려는 몸을 이를 악물며 겨우 일으켜 세웠다.
그러나 그녀도 직감하고 있었다.
마비에 걸린 시점에서 승산이 지극히 낮아졌다는 사실을.
김호가 흙먼지 속에서 천천히 걸어 나와 자기 앞에 서더니, 길쭉한 스태프를 어깨 위에 턱 올렸다.
"여기까지 하지."
"...!"
마주 보는 그의 시선은 한없이 무감정하기만 했다.
그리고 무감정한 시선만큼이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서 다 보여 주는 것보다, 포기할 건 포기하고 패를 아끼는 게 더 나을걸. 나머지 경기를 생각한다면."
"...!"
그제야 홍연화는 깨달았다.
경기 내내,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읽히고 있었다는 사실을.
자신은 완전히 이 남자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난 것이다.
그리고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여기에서 남은 마법을 다 쏟아부어도 통하리란 보장이 없다.
반면 자신의 숨겨 둔 패를 공개하는 것은 다음 경기, 나아가서는 학기 내내 대인전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다.
지금은 일단 물러나는 게 나은 선택이리라.
게다가 홍연화에게 별다른 선택권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당장 상대의 무기가 어깨 위에 걸려 있지 않은가.
저 제안을 거절하는 순간 어떤 마법이 날아올지는 몰라도, 지근거리에서 맞는 만큼 치명적일 것이다.
홍연화의 머릿속에 꼴사납게 나동그라지는 자신의 모습이 그려졌다.
저 남자는 그런 일이 발생하기 전에 백기를 들도록, 나름대로 체면을 세워 주려 하는 것이다.
'알아, 아는데...!'
이것들을 모두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직전까지 투지를 불태우던 홍연화에게 패배를 인정한다는 건 몹시 어려운 일이었다.
한참이나 주먹을 꽉 쥐고 부르르 떨던 그녀가 마침내 고개를 떨구었다.
"져, 졌습니다...."
[김 호 Win vs 홍연화 Lose]
시작 전까지만 해도 루비 마탑의 승리를 의심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상대가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무명이었기에 더욱.
따라서 홍연화가 반쯤 혼이 빠진 채로 터덜터덜 무대를 나서자 관중들은 저마다 바쁘게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 와, 루비 마탑이 졌어? 쟤 뭔데? 무슨 마법 썼는지 봤어?
- 아니. 내가 봤을 땐 저거 마법 아니야. 술식이 아예 안 보였거든.
- 무슨 소리야. 마법으로 뭘 했으니까 피가 안 깎였지.
- 아, 그러니까 마법 아니래도?
- 근데 어떻게 100%에서 아예 안 떨어질 수가 있냐.
- 저게 돼?
대부분은 내가 어떻게 쏟아지는 화염 마법을 완벽하게 방어했는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나를 맞상대한 홍연화 본인에게도 꽤 오랫동안 의문으로 남을 것이다.
진실을 알게 되면 모르긴 몰라도 엄청 허탈해하지 않을까?
'그걸 다 속아 줄 줄은 몰랐지.'
방어 아티팩트를 쓴 척.
디스펠을 하는 척.
방어 마법을 쓰는 척.
그럴싸하게 연기만 했을 뿐이지만 홍연화는 그대로 도발에 걸려들어서 정면승부에 응했다.
화력하면 루비 마탑이니 정면 승부는 무조건 이긴다는 계산이 깔려 있었겠지.
다만,
'원소 저항은 계산 밖이었고.'
S급 [원소 저항]을 가진 상대에게 원소 마법으로 아주 작은 생채기라도 내려면 최소 B랭크 마법은 써야 한다.
혹은 적의 저항력을 낮추는 디버프를 곁들이거나.
이도 저도 아니라면 백날 마법을 퍼부어 봤자 내 체력은 100%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홍연화가 조금 더 마음에 여유를 갖고 신중하게 관찰했다면, [원소 저항]의 존재를 파악하고 대책을 마련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부족한 실전 경험과 겨우 5분에 불과한 제한 시간이 그녀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초조함은 결국 패배로 이어지고 말았다.
투기장 이곳저곳에 저절로 마법진이 생성되더니 불타고 부서진 부분들을 말끔히 수복했다.
동시에 빛무리가 모여들며 나를 무대 밖으로 이동시켰다.
바로 관중석으로 돌아가려는데, 이수독의 목소리가 내 발걸음을 붙잡았다.
"김호. 송천혜."
곧바로 다음 배치 고사가 잡힌 것이다.
관중석이 또 한 차례 술렁거렸다.
- 송천혜?
- 진짜 송천혜야?
- 올해 입학했다고 듣기는 했는데, 3반인가 보네.
- 쟤 선도부도 들어갔대.
- 역시, 이름값은 하는구나.
이름만으로 학생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유명인사.
하지만 정작 본인은 쏟아지는 관심을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태도다.
송천혜가 나를 향해 똑바로 걸어오더니 시선을 맞췄다.
"운이 좋네요. 마침 확인해 보고 싶은 게 있었습니다."
확인해 보고 싶다고 말하는 걸 보니 나와 홍연화의 경기를 관전한 듯하다.
뇌 속성 마법사라면 내가 마지막에 날린 허밍버드에 관심이 안 생길 수가 없지.
최선을 다하겠다며 투지를 불태우는 송천혜였으나, 사실 운이 좋다는 말은 틀렸다.
"미안하게 됐다. 그건 다음으로 미뤄야겠는데."
"그게 무슨...?"
이 승부는 처음부터 성사될 수가 없었으니까.
나는 이수독을 바라보며 한 손을 들어 올렸다.
"저 기권할게요."
"...네?"
어안이 벙벙해진 송천혜.
이수독 역시 이런 상황은 처음 겪어보는지 가볍게 인상을 찌푸리곤 물었다.
"왜지."
"컨디션이 너무 안 좋아요. 대인전을 더 진행하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세 번째 경기도 기권 처리해 주세요."
"당장 컨디션이 안 좋더라도 한 번 승리를 더 따 두는 게 따로 300점을 올리는 것보다 훨씬 쉬울 거다. 그래도 기권하겠나?"
"예. 그거야 어쩔 수 없죠."
"...좋다. 패배로 처리해 주지."
이수독은 지나치게 승패에 달관한 내 태도가 미심쩍은 기색이었으나,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않고 내 선택을 존중해 주었다.
그로 인해 훨씬 낮은 랭킹부터 시작하고, 원하는 순위를 달성하려면 더 많은 대인전을 치러야 하겠지만, 어차피 손해는 내가 보는 거니까.
발걸음을 돌리는데,
"잠깐만요."
송천혜가 나를 불러 세웠다.
"왜?"
"정말 그런 이유로 포기하는 건가요? 컨디션이 안 좋아서?"
"응. 그러면 안 돼?"
송천혜는 아주 잠깐 눈을 감고 치밀어오는 화를 삼키는 듯했다.
그리고 훈계하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승부에는 항상 만전을 기하라. 최적의 상태가 아니라도 최선을 다해 임하라. 불리한 상황에서도 끝내 승리를 쟁취해 내는 자만이 최고의 자리에 오르는 법이라고 했습니다."
"방금 막 지어낸 말 같지는 않고, 어느 고인(高人)께서 하신 말씀이야?"
"저희 조부님이요."
그러고 보니까 얘네 할아버지가 우레군주랬지.
자기 분야에서 정점을 찍은 영웅인 만큼, 우레군주가 했다는 말은 영웅 지망생이라면 새겨들을 만한 조언이었다.
...그 조언을 행동으로 옮기는 건 별개의 문제고.
이미 세워 둔 계획을 수정할 생각은 없다.
해서 나는 말싸움 최고의 회피기술인 '네 말이 다 맞단다'를 시전했다.
"그래, 아무래도 나는 안 될 놈인가 봐. 네가 이긴 걸로 치자."
"...실망스럽네요. 당신에게 조금이나마 기대를 한 제가 바보 같아요."
송천혜의 눈빛은 이제 실망을 넘어 미약한 경멸까지 드러내고 있었다.
호감도가 표시되었다면 아마 한없이 0에 가깝지 않을까?
다 시간 낭비였다며 떠나는 송천혜를 이번에는 내가 불러 세웠다.
"아, 맞다."
"...왜요."
"디저트 쿠폰. 보내 준다며."
"이 상황에 디저트 생각이 나요?"
"솔직히 말하면 단 게 땡기기는 해."
"하, 진짜 어이가 없어서."
"까먹기 있냐? 디저트 쿠폰."
"...."
송천혜는 나를 완전히 무시해 버리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사실 붙어 보고 싶기는 했는데, 상황이 별로 안 좋다.
'벌써 너무 눈에 띄었거든.'
첫 경기에서 홍연화에게 항복을 받아 내는 바람에 나에게는 '루비 마탑을 꺾은 정체불명의 실력자'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그것만으로도 앞으로 적잖이 귀찮아질 텐데, 거기에 우레군주의 손녀딸까지 이긴다?
학기 초부터 일약 슈퍼스타 탄생이다.
명성은 양날의 검이다.
그리고 대개 부정적인 쪽이 더 예리하고 날카롭다.
이름이 알려질수록 주시하며 분석하는 시선도 늘어나게 마련이니까.
S급 [원소 저항]은 용살학원의 학생들은 물론 교사들마저도 쉽게 못 뚫는 어마어마한 특성이다.
다만 지금 나는 원소 저항'만' S랭크고, 다른 건 아직 별 볼 일 없다.
그 정보가 새어 나가면 앞으로 대인전이 아주 귀찮아질 것이다.
그런 이유로 지금 송천혜와 붙는 건 하책 중의 하책.
앞서 홍연화와의 경기를 지켜본 사람 몇몇은 벌써 의구심을 품기 시작했을 테고, 같은 방법을 두세 번 쓰다 보면 의구심이 확신으로 굳어질 터.
정보전이 한창 진행 중이다.
다른 수단을 손에 넣기 전까지는 최대한 내가 가진 패를 감춰야 한다.
- 엥? 쟤네 왜 하려다 말아?
- 기권이라는데?
- 기권? 배치 고사에서 기권을 하는 놈이 있어?
- 상대가 송천혜라니까 쫄았나 보지.
-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해 보지도 않고 그냥 튀냐. 김빠지네.
- 겁쟁이야, 슈퍼 겁쟁이.
당연히 관중들이 그 속뜻을 헤아릴 리가 없었다.
'쟤 누구야?'라는 호기심이 담겼던 시선이 순식간에 '그럼 그렇지' 하는 비웃음과 조롱이 섞인 시선으로 바뀌었다.
별 볼 일 없지만 운 좋게 루비 마탑을 이긴 놈.
그러다가 막상 토파즈 마탑과 붙게 되자 곧바로 꼬리를 말고 도망친 겁쟁이.
'아주 좋아. 아주 적절해.'
그야말로 정확히 내가 의도한 평가였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야유 소리를 귓등으로 흘리며 관중석으로 돌아왔다.
배치 고사 중반쯤이라 그런지 오히려 관중석에서 대기하는 학생이 드물었다.
어차피 다음 경기가 금세 잡힐 테니 아예 무대 근처에서 기다리는 것이다.
신병철은 관중석에 자리를 잡은 몇 안 되는 학생 중 하나였다.
무대에 시선을 고정한 채 메모장에 열심히 무언가를 휘갈기고 있다.
정보를 사고파는 녀석이라 그런지 이럴 때는 열심이다.
자리에 앉는 나에게 신병철이 물었다.
"다 끝났나 보네? 몇 승 했냐?
"1승 2패. 너는?"
"동지."
신병철과 나 사이에 무언의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우리는 손을 굳게 맞잡았다.
송천혜의 다음 상대로는 창을 든 남학생이 나왔다.
시작 전에 호기롭게 뭐라고 선언을 하는 것 같은데, 송천혜는 그저 싸늘한 눈빛만 되돌려 줄 뿐이다.
신병철이 두 사람의 대치를 지켜보며 물었다.
"난 너랑 쟤랑 붙는 거 좀 기대했거든. 왜 기권했냐?"
"그냥, 못 이길 것 같더라."
"그래, 송천혜면 어쩔 수 없지."
신병철은 전격 마법의 피해자로서 내 결정에 깊이 공감하는 듯했다.
어차피 질 싸움, 온몸이 마비된 채 바닥에서 추하게 꿈틀거리는 것보다는 일찌감치 기권해 버리는 게 미관상 아름답지 않겠느냐, 이 말이다.
내 원래 의도와는 굉장히 동떨어진 해석이지만 이렇게 생각해 주면 나로서는 차라리 고맙다.
[3]
[2]
[1]
[Start!]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달려들던 창잡이 남학생이 갑자기 속도를 잃고 비틀거렸다.
부주의하게도 곧바로 허밍버드에 격중당한 것이다.
창잡이는 바닥에 꿇리려는 무릎을 붙들고 안간힘을 써 가며 겨우 자세를 회복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자신을 향해 사람 몸뚱이만 한 벼락을 내리꽂는 송천혜의 모습이었다.
- 쿠르르릉!! 쾅!!
귀청이 찢어질 듯한 천둥소리가 아레나를 뒤흔들었다.
"...쟤 화났나 본데?"
"그런가 봐."
씩씩거리던 송천혜의 시선이 관중석을 뒤지다가 나를 찾아냈다.
째릿 날카로운 눈빛을 보내더니 순간이동 마법진을 타고 투기장 밖으로 나가 버린다.
그리고 창잡이 남학생은 들것에 실려 나가는 신세가 되었다.
신병철이 혀를 끌끌 찼다.
"아유, 쟤는 아직 3경기도 안 했던데, 해보지도 못하고 부전패네. 불쌍하게 됐구만. 불쌍하게 됐어."
"쟤만 불쌍한 게 아니지. 송천혜도 3경기는 안 했잖아."
"어, 그렇네? 다음은 누구래?"
송천혜의 배치 고사. 그 마지막 희생양은 누구인가?
신병철의 의문에 대답이라도 하듯, 이수독이 이름 둘을 입에 담았다.
"송천혜."
그리고,
"서예인."
서포터가 다 해먹음
13화 배치 고사 (3)
송천혜는 말없이 맞은편의 서예인을 바라보다가, 품에서 장갑 한 짝을 꺼내 오른손에 꼈다.
황금빛 자수가 수놓여 있고 토파즈가 깨알처럼 박힌 검은색 장갑.
토파즈 마탑의 고유 아티팩트일 것이다.
창잡이 남학생을 상대할 때는 아주 맨손이었으니, 마지막 배치 고사에는 더 진지하게 임하겠다는 생각 같다.
반면 서예인은 교복 셔츠 위에 멜빵 같은 것을 메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그것은 권총을 꽂아 두는 홀스터(Holster)였다.
그리고 권총이 양쪽에 한 자루씩 두 자루.
신병철이 그걸 보고 나에게 묻는다.
"쟤 이제 보니까 총사였네? 넌 알았냐?"
"아니. 나도 지금 알았지."
총사. 또는 거너.
마력을 담은 탄환으로 적을 제압하는 원거리 계열 클래스다.
겉모습이 다가 아니라고, 서예인이 총사일 줄은 나도 예상치 못했다.
따지고 보면 만난 지 하루밖에 안 됐고, 그마저도 절반은 늘어져라 자는 모습밖에 못 봤으니까.
거기에서 기민하게 움직이며 표적을 꿰뚫는 총사의 이미지를 연상하기는 쉽지 않다.
신병철이 흥미롭다는 듯 양측을 번갈아 관찰했다.
"이거 일이 재미있게 됐네. 총사면 마법사랑 완전 상성이잖아? 6 대 4? 7 대 3? 이거 의외로 송천혜가 질 수도 있겠다야."
"그건 모르지. 더 두고 봐야 해."
"에이, 아무리 토파즈 마탑이라도 그렇지, 총사 쪽이 기본만 해 줘도 지기 힘들다니까?"
"그럼 내기할까?"
내기라는 단어에 신병철이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아하, 내기. 저야 언제든 환영이죠. 뭐 걸어?"
"5실버."
"오케이. 5실버면 쬐끔 많은데, 그래야 쫄리는 맛도 있는 거지."
"그럼 너는 서예인, 나는 송천혜에 거는 거다."
"콜."
전 재산 5실버를 탈탈 털어 넣었다.
곧 두 배로 복사될 예정이다.
[송천혜 100% vs 서예인 100%]
[남은 시간 5:00]
스코어보드가 두 사람의 체력과 남은 시간을 띄워 올리고.
곧이어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다.
[3]
[2]
[1]
[Start!]
경기가 시작된 순간 이미 서예인의 양손에는 각각 권총이 한 자루씩 들려 있었다.
권총들이 번갈아서 푸른 빛을 뿜어냈다.
- 투투투투투!
송천혜는 빗발치는 마력탄들을 피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단지 장갑을 끼지 않은 손을 앞으로 뻗었을 뿐이다.
마치 여기까지만 오고 멈추라는 것처럼.
- 치지직! 치지지직!
그렇게 뻗은 손바닥 조금 앞에서 쉴 새 없이 스파크가 튀겼다.
마력탄들이 송천혜가 전개한 장벽에 막힌 것이다.
신병철이 그 광경을 보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어? 저게 왜 막혀? 저게 막히면 안 되는데?"
'이래서 더 두고 봐야 하는 거지.'
서예인이 탄마다 담는 마력도 보통 이상은 되지만, 그 이상으로 송천혜가 보유한 마력량이 지나치게 막대하다.
마법 하나하나에 얼마나 많은 마나를 쏟아붓는지 E랭크 허밍버드가 D급처럼 보인다.
지금 쓰는 간단한 장벽 마법마저 두께가 두 배에 가깝다.
원래는 장벽을 가볍게 파고들었을 마력탄들이 도중에 힘을 잃고 흩어져 버리는 건 그런 이유에서다.
송천혜는 그렇게 한 손으로 장벽을 유지하면서, 반대쪽 손으로는 뇌전으로 이루어진 벌새 두 마리를 띄워 올렸다.
[허밍버드]
벌새 두 마리가 허공을 가로질렀다.
서예인은 배리어를 향해 연사하던 총구를 허밍버드 쪽으로 돌렸다.
- 투투투투!
벌새 한 마리를 요격하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다른 하나는 아직 멀쩡하다.
서예인의 신형이 스르르 옆으로 미끄러지며 허밍버드를 피해 냈다.
그러나 송천혜가 숙련된 지휘자처럼 손을 휘젓자 벌새는 공중을 선회하여 다시 목표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 투투투투투!
또다시 권총들이 불을 뿜는다.
벌새는 한쪽 날개가 떨어져 나갔음에도 날아오는 힘을 잃지 않고, 한 줄기 뇌전을 그리며 서예인에게 닿았다.
- 파지직!
"...!"
서예인이 아주 살짝 인상을 썼다.
꽤 좋은 장비의 보호를 받는지 단번에 행동 불능이 되지는 않았지만, 움직임이 눈에 띄게 느려졌다.
- 펑!
후속타로 굵은 벼락을 준비하던 송천혜는 순간 멈칫했다.
자욱한 연기가 시야를 가린 탓이다.
허밍버드를 피하지 못하리라는 판단하에 빠르게 연막탄을 던진 게 분명했다.
신병철이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주 훌륭한 판단! 이러면 시간 좀 벌었죠."
"얼마나 빨리 연막을 걷어 내느냐가 관건이겠지."
괜히 보이지도 않는 연막에다 벼락을 꽂아봤자 불발로 끝날 게 뻔하니까.
하지만 송천혜는 연막을 치우기 전에 다른 것을 시도하려나 보다.
장갑 위에서 술식의 구조가 순식간에 뒤틀리며 다른 것으로 바뀌었고, 벼락이 야구공만 한 전기 구체 여러 개로 나뉘었다.
송천혜는 그것들을 한꺼번에 연막 안으로 던져 넣었다.
- 파직, 파지직, 파지직!
[송천혜 100% vs 서예인 88%]
[남은 시간 4:02]
체력이 줄어든 걸로 보아 한두 개는 명중한 것 같지만, 아직 상대를 제압하려면 멀었다.
송천혜가 바람 마법을 시전하여 연막을 걷어 냈다.
텅 빈 투기장.
서예인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다.
그리고 다음 순간,
- 퉁—!
묵직한 충격음과 함께 송천혜의 신형이 옆으로 휘청거렸다.
우측 어딘가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강력한 일격이 날아온 것이다.
간신히 균형을 유지한 후 공격이 날아온 방향을 유심히 살펴보니, 아지랑이 같은 투명한 무언가가 꿈틀거린다.
그것은 마치 투명한 덤불이나 나뭇잎 더미가 살랑거리는 듯한 모양새였다.
신병철이 감탄사를 흘렸다.
"이야.... 투명 길리? 쟤 돈 진짜 많나 보네."
투명 길리. 광학미채 길리슈트.
아무리 못해도 C등급, 장인의 손길이 닿는다면 A등급까지 받는 귀한 아이템이다.
그러니 값은 말할 필요도 없이 비싸디비싸고.
학생, 그것도 1학년이 투명 길리를 구비했다는 점도 놀랍지만, 나는 그것보다 다른 부분에 주목하고 있었다.
"라이플로 바꿔 들었네."
"권총으로는 답이 없잖아."
총사가 술사에게 피해를 입히려면 마법 장벽의 일점을 겨냥해서 뚫어야 하는데, 저렇게 술사의 마력량이 엄청나게 풍부한 경우 그것이 상당히 어려워진다.
때문에 이런 경우 권총 두 자루로 여러 발을 연사하기보다는 한 방이 강력한 라이플로 바꿔 드는 게 올바른 판단이다.
서예인이 쓰는 라이플의 마력탄은 관통력보다는 파괴력에 치중한 물건으로 보인다.
대포알과도 같은 일격으로 장벽을 전개한 마법사를 껍질째 찌그러뜨리는 용도다.
- 퉁—!
다시 한번 송천혜의 몸이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이번에 저격이 날아온 방향은 정면이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송천혜가 급하게 다음 마법을 시전했다.
마법 장벽 위로 전류가 추가로 한 겹 덧씌워진다.
- 퉁!
세 번째 탄환이 장벽에 날아와 꽂혔다.
장벽을 강화한 덕분에 이전처럼 쭉 밀려날 정도는 아니지만, 충격은 여전히 내부까지 전해진다.
어지러움을 느낀 송천혜가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송천혜 85% vs 서예인 88%]
[남은 시간 2:13]
"야, 솔직히 이건 나도 긴가민가했는데, 이러면 진짜 서예인이 이길 수도 있겠다."
"계속 봐."
야금야금 유효타를 허용하다 보면 마법사 쪽이 진다.
그러나 내가 계속 지켜보라고 하는 이유는 여전히 내기에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명색이 토파즈 마탑인데, 거기에서 배우는 온갖 마법 중에 과연 이 상황을 타파할 방법이 없을까?
당장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만 수십 가지인데.
"...."
송천혜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푹 쉬더니, 품에서 장갑 한 짝을 더 꺼내 비어 있던 손에 착용했다.
두 손을 깍지를 끼듯 붙잡은 다음 실뜨기를 하는 것처럼 양쪽으로 쭉 벌리자,
[라이트닝 스레드(Lighting Thread)]
두 손 사이에 가느다란 전기의 실이 수십 가닥 생성되었다.
송천혜는 그것을 사방으로 넓게 퍼뜨리기 시작했다.
"그렇지. 똑똑하네."
"저게 뭔데?"
"쉽게 설명하면 거미줄이야. 저렇게 쭉 쳐 놓고 걸려들길 기다리는 거지."
내가 설명한 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원형 투기장 전체가 라이트닝 스레드로 가득 찼다.
- 치지직!
그리고 반응이 왔다.
투기장 한 구석, 투명하게 꿈틀거리는 형체 위로 옅은 스파크가 일어난 것이다.
위치를 특정 당한 순간 서예인의 라이플이 불을 뿜었으나,
- 퉁—!
네 번씩이나 똑같은 공격에 당해 줄 송천혜가 아니었다.
저격하는 위치가 뚜렷하게 보인다면 더욱.
모든 마력 장벽을 한 면에 집중시키며 마력탄을 조금의 피해도 없이 막아 낸다.
- 펑!
서예인은 이제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는지 투명 길리를 벗어 던지고 재차 연막탄을 터뜨렸다.
그러나 송천혜 입장에서 이제 이 연막탄은 걷어 낼 필요도 없었다.
어차피 계속해서 튀기는 스파크가 상대방의 대략적인 위치를 알려 주고 있었으니까.
또다시 허밍버드가 투기장을 가로질렀다.
이번에는 한 마리였으나 비교적 덩치가 컸다.
그리고 움직임 역시 훨씬 불규칙적이었다.
지그재그와 소용돌이를 섞은 듯한 움직임에 서예인은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
- 파지직!
'아주 조금은 발전했네.'
내 평가 기준으로 100점 만점에 30점은 줄 만하다.
방금까지는 10점도 안 됐고.
벌새를 참새마냥 직선 궤도로 곧장 날려 보내는 걸 보고 얼마나 훈수가 마려웠던가.
역시 사람은 실전에서 구를수록 많이 배우는 법이다.
"...."
안타깝게도 서예인에게는 더 이상 패가 남지 않은 듯했다.
허밍버드에 제대로 당하는 바람에 기동성도 0에 가까워졌다.
그렇기에 마지막으로 되든 안 되든 최대한 화력을 쏟아부어 본다.
라이플이 순식간에 분해되고 권총 두 자루로 재조립되었다.
- 투투투투!
그러나 초반에도 안 통했던 공격인 만큼 이번에도 장벽에 가볍게 막히는 건 당연한 결과였다.
송천혜가 견고한 방어를 유지하며 한 번씩 반격을 날릴 때마다 서예인의 체력이 계속해서 깎여 나갔다.
"끝났네."
"아."
[남은 시간 0:00]
[송천혜 85% vs 서예인 68%]
제한 시간인 5분이 모두 소진되자, 송천혜는 언제 그랬냐는 듯 순식간에 모든 마력을 거두어들였다.
마나를 제 몸처럼 자연스럽게 다루는 모습을 보고 확신했다.
'1학년 중에는 거의 적수가 없겠어.'
상대를 잘못 만나서 그렇지 서예인의 실력도 상당하다.
토파즈 마탑을 상대로 경기가 끝날 때까지 제압되지 않고 버텼다는 것만으로도 칭찬받을 만했다.
[송천혜 Win vs 서예인 Lose]
물론 평가는 평가고, 내기는 내기다.
신병철에게 손을 쓱 내밀었다.
"5실버."
"아니이~ 이게 지네~ 아~"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5실버를 꺼내 올려놓는다.
말은 5실버면 적당히 쫄리는 맛이 있다고 했지만, 실제로 잃게 되자 굉장히 아쉬운 모양이다.
"야야, 내기 한 번만 더 하자. 딱 한 번만 더."
"뭘 자꾸 내기를 하재. 진 다음에 이러시는 거 아름답지 못하거든요?"
"아잇, 그러지 말고 들어 봐라. 배치 고사야 1학년 합동으로 하니까 대놓고 다 공개하지, 원래 대인전은 거진 비공개란 말이야. 이렇게 팝콘 뜯으면서 내기 주고받을 기회가 언제 또 올 줄 알고?"
당연히 나도 아는 사실이었다.
가을에 대회라도 열리면 모를까, 학생 간의 대인전을 관전할 일은 좀처럼 없다.
해서 나는 못 이기는 척 내기를 승낙했다.
"그러면 딱 한 번만 더 하지 뭐."
"아주 잘 생각했어! 그러면 이번에는...."
신병철의 눈이 이 투기장, 저 투기장을 돌아다니며 내기 대상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매서운 검기로 상대방을 몰아붙이다 결국에는 제압해 버리는 한소미.
투기장 하나를 불바다로 만들어 버린 홍연화.
두 사람 모두 내기 대상으로 부족함이 없지만, 아쉽게도 세 번째 배치 고사를 거의 끝내 가는 참이다.
"오!"
그러다가 신병철이 누군가를 발견하고 눈을 빛냈다.
"고현우는 어때?"
서포터가 다 해먹음
14화 배치 고사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