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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포터가 다 해먹음

14화 배치 고사 (4)

[고현우 100% vs 백준석 87%]

[남은 시간 3:08]

고현우는 한창 두 번째 배치 고사를 치르는 중이었다.

상대는 교복 위에 견고한 갑옷을 갖춰 입고 양손검을 휘두르는, 전형적인 기사의 모습이다.

묵직하고 두꺼운 검날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살벌한 파공음이 울린다.

다만 이런 살벌해 보이는 공격도 안 맞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분명 연이어 공격을 퍼붓는 쪽은 백준석이고, 피하는 데에만 집중하는 쪽은 고현우다.

그러나 전혀 백준석의 우세로는 보이지 않는다.

백준석은 지친 기색이 역력하며 땀을 뻘뻘 흘리고, 고현우는 너무나 평온한 표정으로 유유자적한 움직임을 이어 가고 있었으니까.

"헉, 허억, 커헉."

백준석이 공격을 멈추고 거리를 벌렸다.

계속 맞지도 않는 공격을 반복하다가 제풀에 지쳐 버린 것이다.

그렇게 가쁜 숨을 몰아쉬는 상대방에게 고현우가 검을 겨누고 물었다.

"더 하시겠소?"

"...이익!"

백준석이 발끈해서 달려들었다.

안 그래도 체력이 얼마 안 남았는데, 체력을 모두 소진한 후의 뒷일은 아예 생각지도 않고 마구잡이로 롱소드를 휘두른다.

순간, 시종일관 피하기만 하던 고현우가 앞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그러고는 붓으로 그리는 것처럼 부드럽게 철검을 긋자,

- 드드드득!

소름 끼치는 마찰음과 함께 백준석의 갑옷에 사선으로 긴 상처가 새겨졌다.

[고현우 100% vs 백준석 87%]

[고현우 100% vs 백준석 68%]

뭉텅 깎여 나가는 체력.

백준석은 엄청난 고통에 가슴팍을 움켜쥐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런 그에게 또다시 검이 겨누어졌다.

"더 하시겠소?"

"...내가 졌다."

[고현우 Win vs 백준석 Lose]

'확실히 제법이란 말이야.'

최적의 시기에 내디딘 일보(一步)와 깔끔한 일검.

다른 건 몰라도 검술 하나는 거의 완성에 가깝다.

신병철은 깊이 있는 분석은 못 했어도 고현우가 제법 강하다는 사실에는 동의하는 모양이다.

"이야.... 백준석이 쉬운 상대는 아닌데 그냥 썰어 버리네. 한소미랑도 반반 가져갔다면서?"

"그건 또 어디서 들었냐."

"흐흐흐, 이래 봬도 정보를 사고파는 몸이라, 이 말씀이야. 이 정도는 해 줘야지. 아무튼 쟤 이제 2승인 거 맞지? 우리 3경기에서 안목을 겨뤄 보자고."

고현우가 마지막 배치 고사를 치르기 위해 순간이동 마법진에 올라탔다.

곧 맞은편에서도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보통 남학생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키, 강철 같은 근육으로 이루어진 우람한 덩치.

[고현우 100% vs 조벽 100%]

"...3경기는 고전하겠네."

"한소미랑 조벽 중에는 누가 더 강해?"

내 질문에 신병철이 드물게 진지한 얼굴로 턱을 쓸었다.

"글쎄, 세간의 평가만 놓고 비교하면 검후보다는 권왕이 조금 더 위지. 근데 그건 어디까지나 권왕과 검후의 비교고, 제자들 실력은 또 다르지 않겠냐?"

"한 마디로 모른다?"

"...."

잠시 말문이 막혔던 신병철이 빠르게 화제를 전환했다.

"...아무튼! 이번엔 내기 조건을 다르게 해 보자. 누가 이기는지 말고, 몇 분 만에 승부가 나는지. 어때?"

"뭐 그럽시다. 너부터 정해."

승부가 났을 때, 5분의 제한 시간 중 몇 분이나 경과했을까?

짧은 고민 끝에 신병철이 먼저 시간을 정했다.

"나는 4분. 아니다, 5분 풀로 쓰는 걸로. 아무래도 실력이 비슷하면 금방은 안 끝날 거 아냐?"

"그럼 나는 2분 컷으로."

"...엉?"

황당하다는 기색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신병철이었다.

한쪽의 실력이 압도적으로 뛰어나지 않은 이상 2분 만에 승부가 나는 경우는 거의 드물기 때문이다.

"아니, 이번엔 왜 또 2분 컷이래. 쟤가 그렇게 빨리 진다고?"

"누가 빨리 진대. 난 그런 말 한 적 없다."

"그럼 뭔데?"

"다 보면 알아."

"야, 너는 그, 사람 궁금하게 만드는 데 뭐 있다? 아무리 그래도 2분대는 무리수인데."

"무리수면 5실버 돌려주는 거지. 보자고. 어떻게 되나."

'김 형이 지켜보는 중이로군.'

고현우의 시야에 김호의 모습이 잡혔다.

관중석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며 신병철과 진지하게 무언가 대화를 나눈다.

내용은 몰라도 자신과 아주 관련이 없지는 않겠지.

가능하면 친우 앞에서 이기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다.

승패가 우정에 영향을 미치겠냐마는, 이기는 편이 더 체면이 서지 않겠는가.

그러나 마음처럼 쉽지는 않을 것이다.

상대가 상대인 만큼.

[고현우 100% vs 조벽 100%]

고현우는 스코어보드를 한번, 조벽을 한번 눈에 담았다.

'권왕의 제자라.'

열차에서 한소미의 실력을 가볍게 파악해 본바, 조벽의 실력이 한소미와 엇비슷하기만 해도 승리를 점치기 어려워진다.

열차에서는 김호의 그 신비한 능력 덕에 조금 더 버텼지만, 이번에는 오롯이 자신의 힘으로 맞붙어야 하니까.

문득 그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미약하게 떨고 있는 손을.

떨림의 원인은 두려움인가? 흥분인가? 기대감인가? 어쩌면 셋 모두인가?

그로서도 확실치 않았다.

주먹을 한 번 강하게 움켜쥐고 펴자 떨림이 멎었다.

그제야 고현우는 다시 정면을 응시했다.

서로를 응시한 채, 조벽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한소미와 동수를 이루었다고 들었다."

"당치도 않소. 부족한 실력으로 한 소저의 눈만 어지럽혔을 따름이오."

"정말 부족한지는 지금부터 확인해 보면 될 일. 검을 뽑는 게 어떤가."

고현우는 조벽이 말하는 '검'이 허리춤의 철검을 뜻하는 게 아님을 알아차렸다.

시선이 어깨 어림, 즉 등에 묶어 놓은 사물의 신물을 향하고 있었기에.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어야 했다.

"본인도 그러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소만, 지금은 때가 아니라오."

"그런가. 아쉽군."

"동감이오. 그럼 이제 시작해 봅시다."

[3]

[2]

[1]

[Start!]

경기과 시작되기가 무섭게 조벽이 땅을 박찼다.

곰 같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매우 재빨랐다.

한 걸음씩 성큼성큼 내디딜 때마다 거리가 훅훅 좁혀진다.

고현우가 탐색전과 견제를 겸해 가벼운 검기 두 개를 날려 보냈으나, 조벽은 아예 막을 생각도 안 했다.

검기는 조벽의 몸에 닿자 조금의 영향도 못 주고 덧없이 사그라들었다.

'시작부터 강수를 두는군.'

고현우는 참 그다운 전투 방식이라 생각했다.

탐색전 같은 겉치레를 배제하고 처음부터 올곧게 정면으로 부딪쳐 온다.

그로서는 조금 더 느긋하게 비무를 즐기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이런 식의 전투도 싫지는 않았다.

"흠!"

상대가 간격에 들어왔음을 인지한 고현우가 선공에 나섰다.

한 손으로 휘두르던 철검을 양손으로 잡고 폭풍 같은 연속 베기로 조벽의 상반신을 노린다.

- 스스스스—

조벽의 신형이 좌우로 흔들리며 미미한 잔상을 남겼다.

덩치에 걸맞지 않은 재빠른 속도로 날아오는 검격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회피한다.

동시에 굳게 움켜쥔 주먹에 강대한 기운이 담겼다.

조벽은 그것을 바짝 끌어당긴 후, 그대로 앞으로 쭉 뻗어 냈다.

고현우의 시선에는 주먹이 다가오면서 삽시간에 크기를 불리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거대한 바윗덩이 같구나...!'

감탄만 하고 있을 겨를이 없었다.

기세를 끌어올려 철검에 담고, 섬전과도 같은 속도로 삼검(三劍)을 내지른다.

- 파파팟!

검격이 한 번 닿을 때마다 바위 같은 기운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그러나 검격과 세 번이나 충돌했음에도 조벽의 일 권은 모두 해소되지 않고, 일부가 남아 고현우를 강타했다.

- 쿵!

'으음....'

커다란 바위에 얻어맞은 듯한 충격이 몸에 가해진다.

미간을 살짝 찌푸린 찰나 조벽이 시야에서 사라져 있었다.

고현우는 즉시 앞으로 몸을 날렸고,

- 콰쾅!

방금까지 그가 서 있던 자리에 막대한 경력이 떨어져 내렸다.

투기장 바닥이 산산조각 나며 사방으로 흩날린다.

조벽의 공격이 빗나간 틈을 타 거리를 벌린 고현우였지만, 거리만 벌리면 안전하리라는 생각은 큰 오산이었다.

멀리서 주먹을 내지르는 조벽.

조금 전과 똑같은 일 권이다.

그런데 그 먼 거리에서, 바윗덩이 같은 기세가 고현우를 향해 짓쳐 왔다.

'쉽지 않군.'

- 파파파파팟!

이번에는 연이어 다섯 번의 검격을 날려 조벽의 기세를 상쇄하려 했으나, 여전히 일부가 남아 그를 후려쳤다.

- 쿵!

전투가 시작되고 몇 수 교환하지도 않았지만 내내 손해만 봤다는 점은 뼈아프다.

이대로라면 앞으로도 같은 양상일 것이다.

고현우는 이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본공으로는 여기까지가 한계로군. 조금은 더 통하리라 생각했건만....'

슬슬 감춰 둔 실력을 내보여야 할 순간이 왔다는 것을.

"...."

다시 거리를 좁혀 가던 조벽은 문득 고현우의 기세가 급변했음을 눈치챘다.

철검이 보는 사람이 지루함을 느낄 정도로 느릿느릿 움직이고, 동시에 어디선가 불어오는 옅은 미풍이 머리카락을 간질인다.

무더운 여름날에 간혹 불어오며 지상의 열기를 식히는 서늘한 바람.

외부와 완벽하게 단절된 원형 투기장에 바람 같은 게 불어올 리가 없다.

따라서 이 미풍의 근원은 눈앞의 고현우일 것이다.

'심상치 않다.'

조벽의 본능이 경종을 울렸다.

이번만큼은 신중해야 한다고.

해서 그답지 않게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세 번째 권격을 날려 보냈다.

그러나 거대한 바윗덩이 같던 자신의 기운은 미풍에 닿자 순식간에 녹아서 사라져 버렸다.

이어서 내지르는 일 권 역시 금세 증발해 버린다.

그제야 조벽은 확신했다.

'저 미풍은 일종의 검기(劍氣)다.'

앞선 두 권격을 통해 어설픈 공격은 기력 낭비라는 사실을 파악했다.

그렇다면 단 한 수에 모든 힘을 집중해 승부를 본다.

조벽의 몸에서 유형화된 투기가 피어올랐다.

그는 그것을 빈틈없이 몸에 두른 뒤, 부드럽게 불어오는 바람 속으로 뛰어들었다.

'이것은....'

투기를 최대한 끌어올린 것은 올바른 선택이었다.

스쳐 지나가는 부드러운 바람이, 몰아치는 검기처럼 그를 사방에서 압박한다.

어지간한 무인은 순식간에 온몸이 난자당해 싸늘한 시체로 화할 것이다.

몸에 두른 투기가 빠르게 줄어들었으나 이 정도는 예상한 바였다.

목표까지 닿기에는 충분한 양이다.

"...."

다가오는 조벽을 마주하며, 고현우 역시 그가 승부수를 띄웠음을 직감했다.

부드럽게 움직이던 철검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리자, 조벽을 향해 불어 가던 모든 미풍이 검날에 집중되었다.

조벽이 주먹을 내지르는 순간,

고현우의 철검도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 번쩍!

"...."

"...."

눈 깜짝할 사이에 두 사람의 위치가 뒤바뀌어 있었다.

잠시간의 침묵 후, 조벽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 초식의 이름은?"

"청류(淸流)."

조벽이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교복 어깨 부분이 살짝 잘려 나가 있었다.

고현우의 일검이 찰나에 불과한 짧은 순간이나마 교복의 D급 방어 마법을 상회했다는 뜻이다.

다만 그 이상의 상처가 없는 걸 보면 조벽이 몸에 두른 호신기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한 듯하다.

"기억하지, 허나 아쉽군."

- 퍼서석,

고현우가 아래로 늘어뜨린 철검이 끄트머리부터 서서히 부서져 내렸다.

초식과 초식이 맞부딪히는 반발력에 내구도가 다한 것이다.

손잡이만 남아 버린 철검을 놓자 남은 부분마저도 소멸해 버렸다.

철검이 파괴된 이상 그에게 남은 선택지는 둘이었다.

등의 장검을 뽑아 들고 마저 승부를 보거나, 패배를 인정하거나.

고현우는 후자를 선택했다.

"내가 졌소."

"다음 승부를 기대하겠다. 그때는 온전한 실력을 보고 싶군."

"...."

고현우는 등을 돌려 떠나가는 조벽의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고현우가 항상 차고 다니는 철검에 주목했다.

사문의 신물 대신 다른 검을 써야 한다는 것은 나름의 사정이 있을 테니 이해할 만하다.

하지만 그게 반드시 '철검'이어야 할 필요가 있는가?

그 질문에 대해 내 나름대로 생각해 본 결과 나온 대답은,

'소모품으로 써야 하니까.'

고현우는 열차에서 철검이 깨졌을 때도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었다.

그런 상황을 한두 번 겪어 본 사람의 태도가 아니었다.

아마 고현우가 익힌 무공의 특성 때문이겠지.

어지간한 장비로는 그 기운을 온전히 담을 수 없기에, 내구도가 빠르게 깎이고 결국에는 깨져 버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배치 고사에서도 충분히 같은 일이 발생할 수 있었다.

특히 조벽 같은 강자를 상대로는 아주 높은 확률로.

따라서 내가 베팅한 '2분 컷'은 승부가 나는 시간이 아니라, 철검이 버티지 못하고 깨져 버리는 시간이었다.

[고현우 Lose vs 조벽 Win]

경기에 소요된 시간, 2분 28초.

5분보다는 2분에 훨씬 가까운 시간이니 내기는 나의 승리였다.

"하아니, 진짜 말도 안 되네 이거. 저렇게 끝난다고? 야, 이건 아니지. 이걸 어떻게 예측해?"

"혀가 길다. 5실버."

수금을 하기 위해 손을 내밀자 신병철이 비굴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야야, 내가 지금은 돈이 없고, 금방 빌려다 줄게. 진짜 금방."

"네가 하자며. 돈도 없으면서 내기는 왜 걸었어?"

"아니, 이번에는 이길 줄 알았지.... 내기 하면 이 신병철인데, 오늘 일진이 영 사납네."

저렇게 말하는 걸 보니 딴에는 제법 자신이 있었나 보다.

하필 안목을 겨루는 상대가 나였다는 게 불행한 점이었다.

5실버를 빚으로 달아 둬도 괜찮지만,

"꼭 돈으로만 받을 필요는 없지."

"진짜? 그럼 뭘로?"

신병철이 반색을 하며 물었다.

나는 턱짓으로 녀석이 쥐고 있는 메모장을 가리켰다.

정보.

서포터가 다 해먹음

15화 배치 고사 (5)

마지막 한 명까지 배치 고사를 마치고 원형 투기장 밖으로 이동하자,

무대는 처음과 마찬가지로 텅 비었다.

"일단락됐군. 모두 집합."

이수독이 1학년 3반을 주위로 불러 모았다.

"대진운이 안 좋아서 예상보다 승률이 낮게 나온 경우도 있을 것이다. 배치 고사는 어디까지나 최소한의 변별력을 위해 실시하는 것이니 지나치게 큰 의미를 부여하지 말도록."

몇몇 학생들의 표정이 안 좋기는 했다.

중위권 정도의 실력은 되는데도 마탑이나 명문가 등을 상대로 만나 연패를 해서 그렇다.

'이 점수는 내 실력이 아닌데' 하는 생각과 함께 배치 고사의 시스템에 불만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생각보다 공평하거든.'

본 실력과 다른 점수대에서 시작하는 게 당장은 불공평해 보일 수도 있지만, <용살학원>에는 이를 보완하는 장치나 이벤트들이 제법 많다.

학기 중 꾸준히 대인전을 거듭하다 보면 결국 자기 실력에 걸맞은 위치를 찾아가게 되어 있다.

그사이에 실력을 보강하면 당연히 더 높이 올라갈 수도 있겠고.

"나도 1학년 배치 고사는 다 지고 0점에서 시작했다. 참 많이도 비웃더군. 아득바득 실력을 키워서 한 놈씩 주둥이에 칼을 꽂다 보니까 2학년쯤에는 다들 조용해졌다. 3학년이 됐을 때는 대인전에서 나보다 뛰어난 놈이 한 손에 꼽혔지. 지금? 나 말고는 다 죽었다."

이수독의 과거사가 이어질수록 학생들의 얼굴이 점점 더 창백하게 질렸다.

특히 마지막의 '나 말고는 다 죽었다.'는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내가 다 죽였다.'처럼 들렸다.

이수독이 이를 드러내며 살벌하게 웃었다.

"그러니까 너희보다 센 놈한테 졌으면 배치 고사의 형평성을 따질 시간에 강해져서 설욕할 생각을 해라. 그것이 용살학원의 학생다운 마음가짐이다. 점심 식사 후에 공략전 배치 고사를 마저 진행한다. 늦지 말고 던전동으로 집합하도록. 그럼 해산."

학생 식당으로 향하는 발걸음들이 빨랐다.

모두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적잖이 지쳤고 그만큼 허기가 졌을 것이다.

게다가 점심 식사 후에는 공략전 배치 고사가 남았으니, 든든하게 먹고 에너지를 비축해 두어야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다.

"어이, 병철이! 밥 먹으러 안 가나?"

신병철 패거리 중 한 명이 그를 불렀다.

신병철은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며 답했다.

"너네끼리 먹어라. 난 이분이랑 사업 얘기를 좀 해야 해서."

"사업? 그래, 알았다."

패거리는 좋을 대로 하라는 반응을 보이며 떠났다.

신병철이 말하는 '사업'이란, 이번 대인전에서 조사한 정보를 넘기는 걸 말한다.

내기에서 빚진 5실버만큼.

신병철이 반쯤은 장난스럽게 한탄했다.

"에휴, 내가 어쩌다 베팅을 잘못해 가지고. 가자, 오늘 점심은 샌드위치라더라."

"좋지, 샌드위치."

고현우와 서예인을 데리고 가려고 돌아봤다.

아직 패배의 여운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탓인지 둘 다 상태가 영 별로였다.

특히 고현우의 상태가 더 심각했는데, 안색이 파리한 것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조벽과의 대결에서 많지도 않은 내력을 잔뜩 쏟아부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게다가 마지막에 쓴 [청류]라는 기술은 척 보기에도 내력 잡아먹는 괴물 아닌가.

철검이 깨지지 않았더라도 본인이 먼저 한계에 부딪혔을 것이다.

"야."

"...음. 김 형, 무슨 일이오?"

"안 가? 밥 먹으러."

"잠시 다른 생각을 했소. 어서 갑시다."

그제야 삐걱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하는 녀석을 도로 멈춰 세웠다.

"아니다. 너 기숙사 가서 좀 쉬다 와라. 상태가 말이 아니네."

"아직 견딜 만하오."

"견딜 만하면 안 되지. 이다음이 공략전인데. 가서 조금이라도 회복하고 와. 샌드위치 싸다 줄 테니까."

"...그래 주겠소? 김 형에게 신세를 지는구려."

"됐으니까 가라. 이따 늦지 말고."

"고맙소."

고현우는 짧은 감사를 표하고 자리를 떠났다.

점심시간 내내 운기조식을 한다면 바닥난 [코어]를 공략전을 치를 정도까지는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신병철과 서예인에게 말했다.

"점심은 우리끼리 먹으러 갑시다."

* * *

신병철의 말대로 점심 메뉴는 샌드위치였다.

햄치즈계란 샌드위치와 게맛살샐러드 샌드위치.

봄 날씨도 화창한데 굳이 식당에 앉아서 샌드위치를 먹을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서 우리는 잔디밭에 자리를 깔았다.

우리 외에도 삼삼오오 잔디밭에 모여든 학생들이 제법 되었다.

비단 학기 첫날이라서가 아니라, 오늘 날씨에는 사람 기분을 들뜨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런데도 서예인은 여전히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 샌드위치를 우물거리는 중이었다.

무당벌레가 잔디 위를 기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반면 신병철은 배 속에 거지라도 들었는지 샌드위치를 연이어 게걸스럽게 입에 쑤셔 넣었다.

입 안을 햄치즈계란과 게맛살샐러드가 뒤섞인 무언가로 가득 채운 채 입을 열었고,

"구애훠 모과 굼굼호쉰—"

"입에 든 거 다 삼키고 말하면 안 돼?"

내 핀잔에 오렌지 주스를 벌컥벌컥 들이켠 다음,

빈 병을 바닥에 탁 내려놓고 했던 말을 다시 한다.

"쏘리. 그래서 뭐가 궁금하신가? 네가 1승 2패랬으니까, 300점대 애들 정보를 좀 주면 되나?"

"아니. 난 마음만 먹으면 금방이야."

올리고자 하면 언제든 올릴 수 있는 게 점수다.

게다가 이 점수대는 수준이 너무 낮아서 상대방을 분석하는 의미가 없다.

"이열.... 자신 있나 봐? 그럼?"

"최상위권."

"최상위권이라.... 나도 그쪽 위주로 보기는 했는데, 이게 참."

신병철이 살짝 난처한 기색으로 메모장을 한 장씩 넘겼다.

"이게, 실력 있는 애들이 많아도 너무 많아서 어디부터 얘기해야 할지 모르겠다야. 열차에서도 말했잖아. 올해 1학년은 역대급 황금 세대라고."

"4대 세력 위주로, 유망주들만."

"아, 그러면 범위가 좀 좁혀지지요. 어디 보자...."

4대 세력.

용살학원에는 학생회나 선도부 같은 공식적인 단체 외에도, 학생들의 공통된 관심사나 목표를 위해 설립된 수많은 동아리가 존재한다.

이 동아리들은 크게 보면 대부분 네 세력 중 하나에는 속하는 편인데,

<무림연맹>,

<마탑회>,

<길드연합>,

그리고 <기사단>이 그것이다.

실력자들이 즐비한 황금 세대라도, 4대 세력을 기준으로 잡으면 각 세력마다 가장 특출난 한두 명씩은 추려 낼 수 있을 것이다.

신병철은 메모장을 빠르게 뒤적거리며 내용을 정리했다.

"우선 보자.... 우리가 파악하기로 <무림연맹>에서 제일 강한 카드는 모용준. 이름에서 짐작했겠지만 검성 모용현성의 손주야. 딱 명문세가 후기지수답게 탄탄하게 수련을 쌓았고. 대인전은 2승 1패를 하기는 했는데, 1패 상대가 그 한소미였어. 팽팽하게 가다가 판정패로 끝났지. 딱 3% 차이로."

"3%면 거의 없는 셈이네."

"그렇지. 규칙이 달랐으면 이건 몰랐을걸."

[5분 제한] 규칙이 아니라 장기전이었다면 다른 결과가 나왔을지도 모를 일.

사실상 실력이 같다고 봐도 무방하다.

"우리가 듣기로는 흑도 쪽에도 한 명 더 있다던데, 얘는 이번 대인전에서 드러나질 않았어. 실력을 감추고 싸웠거나, 그냥 헛소문이거나, 둘 중 하나겠지. 이건 우리도 더 조사해 볼 거고, 지금은 그냥 모용준이 제일 뛰어나다고 보면 돼."

"오케이, <마탑회>는?"

신병철이 메모장을 몇 장 뒤로 넘겼다.

"<마탑회>는 원래 송천혜, 홍연화 투탑이었던 게 송천혜가 선도부에 들어가면서 원탑이 됐지. 평가는 둘이 엇비슷했...는데, 홍연화가 너한테 져서 살짝 떨어졌더라. 야, 진짜 어떻게 이겼냐?"

"그냥, 운이 좋았지. 다음은?"

사실 나한테 S급 [원소 저항]이 있다고 나불거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내가 의도적으로 화제를 돌리자, 신병철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거두지 않은 채 설명을 이었다.

다음은 <길드연합>.

짐작대로라면 신병철의 동아리가 속한 세력이기도 하다.

"그, 어깨에 고양이 올리고 다니는 애 봤냐?"

"오다가다 몇 번."

"그거, 사실 고양이 아니고 호랑이다."

"그럴 것 같더라."

"...안 놀라네. 재미없게."

신병철은 내 반응이 너무 건조해서 실망한 듯했다.

용살학원에서 단순한 애완 고양이를 어깨에 올리고 다니리라 생각하기는 어렵다.

평소에는 축소 스킬 등으로 크기를 줄여 놓고 다니는 것이리라.

내가 물었다.

"비스트 테이머야, 드루이드야?"

"드루이드. 목토 마법도 쓸 줄 알거든."

"에메랄드 마탑이랑도 접점이 있겠네."

"그렇다더라. 마법은 곁가지 같은 거지만."

"길드 쪽은 그게 끝이야?"

"이게 끝...은 아니고."

신병철은 대답하기 전에 힐끔 서예인의 눈치를 봤다.

서예인은 아이스 녹차를 홀짝이면서, 근처 나무를 오르내리는 다람쥐를 구경하는 중이었다.

내가 괜찮다는 의미로 고개를 까딱이자, 주위에 들릴세라 목소리를 낮추고 말한다.

"...5실버 값은 해야 되니까 너네한테만 말해 줄게. 우리 쪽에 활 진짜 잘 쓰는 애가 하나 더 있어. 대인전에서는 실력을 감춘다고 단검만 썼는데, 그러고도 2승 1패."

"같은 식구라고 과대평가하는 건 아니고?"

"아냐, 아냐. 다른 유망주들하고 비교해도 안 꿀려."

저렇게 호언장담할 정도면 어느 정도는 사실이겠지.

"일단 그렇게 알아 두지. <기사단> 유망주는 누구야?"

"이성현. 얘도 모용준이랑 거의 비슷해. 소드마스터 부친 밑에서 왕도적으로 착실하게 수련을 쌓은 케이스. 뭐, 독보적으로 강하다 싶은 건 얘네 정도? 원하면 그 아래로도 더 풀어 주고."

"아니, 이만하면 됐다. 확실히 쟁쟁하네."

"그렇다니까? 우리 기수 최상위권 경쟁은 진짜 피가 튀길걸."

<용살학원>을 수백 번씩 들락거린 나로서도, 한 기수에 이만한 실력자들이 한꺼번에 몰리는 일은 이번에 처음 겪는다.

이 시점에서는 EX급 퀘스트의 영향이라는 추측에 무게가 많이 실리는데, 추후 얼마나 강력한 적들이 등장하려고 이러는지 모르겠다.

신병철이 메모장을 덮으며 물었다.

"야, 그런데 하나만 물어보자. 이게 왜 궁금하냐?"

"시장 조사 같은 거지."

"시장 조사? 뭐 팔아먹게?"

"비슷해."

앞으로 4대 세력에서 누구를 중점적으로 밀어줄지, 그들이 어떤 히든 피스를 필요로 할지 파악했다면.

'거래가 가능하지.'

그들이 원하는 히든 피스를 선점한 후 거래한다.

동급의 유물이든, 그들이 가진 이권이든.

배치 고사가 끝나고 어떻게 판을 짤지 대강 그림이 그려진다.

"아잇, 그러지 말고 조금만 더 얘기해 줘 봐라. 사람 궁금하게 만드네."

"야, 너 메시지 왔다."

"어?"

나를 졸라대던 신병철이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주머니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손을 넣고 잠시 뒤적거리더니 제 학생증을 꺼내고, 뒷면에 떠오른 글자들을 띄엄띄엄 소리 내서 읽는다.

"너...어디야...당장...부실로...튀어오지...않으면...머리카락을.... 이런 쒯, 맞다. 까먹고 있었네."

"화가 많이 나셨나 본데, 누구?"

"우리 동아리 부장님. 아주... 아주 무서운 사람이야."

떠올리기만 해도 오한이 드는지 부르르 몸을 떤다.

문제는 지금 그 무서운 사람의 심기를 거스른 것 같다는 건데, 그건 본인이 알아서 할 일이겠지.

신병철은 곧바로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났다.

"가야겠다. 빨리 안 가면 내 신변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그래, 이따 보자."

그리고 전력 질주로 달려 나갔다.

한편 서예인은 신병철이 떠났을 때도 혼자 조용히 샌드위치를 우물거리고 있었다.

그래도 야금야금 거의 다 먹기는 했네.

"...."

회색빛 눈동자가 나를 응시한다.

속내를 알 수 없는 것은 여전하지만 지금은 유독 가라앉은 느낌이다.

고현우, 서예인, 신병철.

EX급 영웅을 키우겠다는 내 궁극적인 목표와는 별개로, 이 녀석들은 특별했다.

환생 퀘스트를 받고 게임 속 세계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만든 인연이니까.

저렇게 가라앉은 채로 놔두기엔 어쩐지 마음이 편치 않다.

해서 분위기를 환기하고자 한다면, 단순하지만 효과가 좋은 방법이 하나 있다.

"어제 열차에서 쿠키 떨어뜨린 거 있잖아."

"...?"

학생선도부와 신병철의 마찰에 휘말려, 서예인이 준 쿠키가 바닥에 떨어지는 사건이 있었다.

그게 왜? 하고 묻는 듯한 눈빛이 돌아왔다.

"송천혜가 미안하다고 디저트 쿠폰을 보내 주더라."

송천혜는 맺고 끊는 게 확실한 성격이었다.

대인전을 기권한 탓에 내 인식이 거의 신병철과 동급으로 곤두박질쳤지만, 약속은 약속이니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나 보다.

점심시간이 시작되는 즉시 디저트 쿠폰이 날아왔다.

가격과 상관없이 학생 식당에서 제공하는 어떤 디저트든 교환할 수 있는 쿠폰.

그걸 써서 고른 게 바로,

"짜잔."

인벤토리에서 깔끔하게 포장된 종이 박스를 꺼냈다.

박스를 열자 과일이 송송 박힌 생크림 케이크 한 조각이 나왔다.

주문할 때는 잘 몰랐는데 눈앞에서 보니까 범상치 않다.

케이크가 아니라 예술 작품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었다.

돈을 주고 산다면 한 조각에 최고급 레스토랑의 한 끼 식사 정도는 하는 비싼 가격.

거기에 한정 수량이라는 프리미엄까지 붙어서, 한 발짝만 늦었으면 디저트 쿠폰으로도 못 살 뻔했다.

서예인의 눈에도 범상치 않아 보였는지 시선이 케이크에 쏠렸다.

일회용 포크를 쓱 건네자 얼떨결에 받아 든다.

"따지고 보면 네가 준 쿠키였으니까 너한테도 지분이 있지. 같이 먹자."

"...고마워."

짧은 감사 인사를 건네고, 조심스럽게 포크로 한 귀퉁이를 떼서 입에 넣은 서예인의 눈이 아주 살짝 커졌다.

나 역시 맞은편 귀퉁이를 맛보고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비쌀 만도 하구만.'

케이크를 이루는 스펀지와 생크림, 과일의 조화가 거의 완벽에 가까웠다.

특히 생크림의 경우 크림보다는 구름을 먹는다는 느낌이었다.

단맛도 지나치지 않고 적당했는데, 담백한 걸 선호하는 서예인에게는 그게 제대로 먹혀든 것 같다.

한동안 우리는 말없이 번갈아서 포크질만 해 댔다.

케이크가 거의 부스러기만 남았을 즈음.

"있잖아."

서예인이 말문을 열었다.

서포터가 다 해먹음

16화 픽스 존 (1)

"있잖아."

"어."

"왜 진 것 같아?"

"송천혜한테?"

"응."

고민을 털어놓기 시작했다는 건 긍정적인 신호다.

조금이라도 마음을 열었다는 뜻이니까.

그렇기에 더욱 신중하게 대처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잠깐 말을 골랐다.

"아무래도 지형 영향이 컸지. 투기장 공간도 좁았고, 엄폐물도 없었고. 총사한테는 불리하잖아."

원형 투기장과 데스매치는 사실상 정면 승부를 강요하는 환경과 규칙이다.

만약 다른 조건에서 경기가 진행됐다면 결과도 달라졌을 것이다.

공간만 두세 배 더 넓었어도 [라이트닝 스레드]로 커버하기가 급격히 어려웠을 터.

거기에 엄폐물까지 있었다면 5분 내내 은신이 발각되지 않았을 확률도 높으니 판정승으로 끌고 갔어도 됐을 테고.

하지만 서예인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걸 묻는 게 아니야."

외적인 요인을 탓하기보다는 근본적인 해결책을 원하는 것이다.

총사로서 송천혜의 마법 장벽을, 나아가 더 강력한 고위 마법사의 마법 장벽을 뚫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이 진짜 질문이다.

정답이야 이미 준비되어 있었지만 일단 나는 한 걸음 물러서기로 했다.

"관전하면서 생각은 해 봤는데, 나한테 듣는다고 도움이 될까 모르겠다. 나는 서포터거든. 너보다 점수도 낮고."

"그래도 듣고 싶어."

도움이 되든 안 되든 내 생각을 들어 보고 싶다.

여기까지 왔다면, 서포터가 아니라 고인물 총사로서 조언을 던져도 별 탈은 없을 것이다.

나는 두 손바닥을 펴 보였다.

"자, 봐 봐."

한 손에 한 줌씩 마나가 피어오르고, 압축되며 탄환 모양을 형성했다.

일부러 두 마력탄의 조형에 차이를 주었다.

하나는 형상만 겨우 유지하고 있는 반면, 다른 하나는 실제 총탄에 푸른 칠을 했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정교했다.

"마법 장벽에 단 한 발만 쓴다면 뭘 가져갈 것 같아?"

"...."

답이 정해져 있는 문제였다.

서예인의 손가락이 정교한 쪽을 가리켰다.

동시에 살짝 놀란 눈치였는데, 이렇게 완벽한 마력탄 조형은 처음 봤나 보다.

'좀 어설프게 만들 걸 그랬나?'

생각해 보니 내 기준에서는 이게 기본이지만 1학년 기준에서는 아닐 것 같다.

이럴 때는 티 안 내고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게 중요하다.

우선 어설픈 마력탄을 들어 끄트머리로 손바닥을 쿡쿡 찔러 보였다.

금세 총알 모양이 무너지며 스르르 흩어져 버린다.

"적당히 모양만 갖춘 마력탄으로 장벽을 뚫으려 들면 마력과 마력의 싸움이 되지. 그럼 마력량이 우월한 마법사가 유리할 수밖에 없고."

다음으로 정교한 쪽을 들어서 똑같이 끄트머리로 손바닥을 쿡쿡 찔러 보인다.

끄트머리가 파괴되어 약간의 푸른 기운이 새지만 형태가 무너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검사가 마법사의 장벽을 가르고, 총사가 뚫을 수 있는 이유는 일점에 집중된, 응축된 마력을 써서야. 그러니까 마력 수련에 시간을 더 투자하고, 마력탄 하나하나의 조형에 신경을 쓰면 답이 보이지 않을까 싶다."

"...."

서예인은 내가 설명을 끝마칠 때까지 말없이 경청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면서 묻는데,

"마력 수련은 어떻게 해?"

"...뭐?"

나는 두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확인차 되묻는다.

"마력 수련을 할 줄 모르면, 여태까지 마력탄은 어떻게 만들었어?"

"그냥 하니까 됐어."

"[마력탄] 스킬은?"

"안 배웠어."

"?"

"?"

아직도 내 반응을 이해할 수 없다는 기색이다.

'이건 예상 밖인데.'

방금 내가 만든 마력탄은 그럴듯하기는 했지만 사실상 보여 주기용이었다.

그냥 만든 마력탄과 [마력탄] 스킬이 더해진 탄환은 살상력이 하늘과 땅 차이다.

총사의 기본적인 토대를 이루는 스킬.

그런데 얘는 여태까지 그걸 안 익혔단다.

마력 수련도 할 줄 모른다니까 관련된 스킬이나 특성들도 밑바닥에 가까우리라 짐작된다.

결국 이 모든 것을 감으로 때웠다는 뜻인데, 그렇다면.

'천재적이다.'

오히려 서예인에 대한 평가를 한 단계 올려야 할 것이다.

기본조차 제대로 잡혀 있지 않은 상태에서 송천혜를 고전하게 만들었다는 뜻이니까.

그 재능의 끝이 어디인지, 내 손으로 직접 확인해 볼 필요성을 느낀다.

"괜찮으면 언제 시간 내서 한번 봐줄까?"

"응."

서예인은 곧바로 내 제안을 수락했다.

지금 간단하게 몇 개 시험해 볼까 싶었지만,

— ♩♪♩♬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멜로디가 점심시간의 끝을 알렸다.

공략전이 시작될 시간이었다.

* * *

던전섬 한 구역을 차지하는 너무 높지도, 낮지도 않은 동산.

그 동산은 사람이 오르내리는 곳이 아니다.

안으로 들어가는 곳이지.

그리고 눈앞의 거대한 터널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면, 무수한 던전들이 얽히고설켜 끝없는 지하까지 이어지는 마경이 나온다.

이곳이 바로 용살학원의 학생들이 공략전을 치르는 장소, 던전동이다.

"김 형."

터널 근처에서 고현우와 만났다.

다시 만난 고현우의 표정은 한결 밝아져 있었다.

샌드위치를 건네며 물었다.

"좀 괜찮아졌냐."

"덕분에. 거듭 감사하오."

"일일이 고마워하지 않아도 돼. 친구끼리."

눈 깜짝할 새에 샌드위치를 해치운 고현우가 앞장섰다.

"그럼 배치 고사를 마저 치르러 가 봅시다."

* * *

던전동 지상층의 던전들은 모두 학생들의 교육 또는 시험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인공 던전들이다.

이수독 옆에 입을 벌리고 있는 순간이동 포탈 여러 개가 좋은 예시다.

"다 모였나. 공략전에 대해 설명하겠다."

이수독이 자신 옆에 작은 창을 띄워 올렸다.

MAP:[안개숲]

RULE:[하이 스코어], [10분 제한], [픽스 존]

"한 명씩 포탈을 타고 들어가서 시험을 친다. 하이 스코어 규칙에 대해서는 아마 많이들 숙지하고 있을 것이다."

하이 스코어.

제한 시간 10분 동안 처치한 몬스터의 숫자를 모두 합해 점수로 환산한다.

등급이 높은 몬스터는 마리당 배점도 높은 편.

가령 고블린보다는 오크, 트롤이 점수를 더 많이 준다.

시간 내에 최대한 많이, 양질의 몬스터를 처치하는 게 목표다.

"질문할 시간을 주겠다."

"저.... 선생님."

학생 하나가 조심스레 떨리는 손을 들어 올렸다.

상대가 인간 백정이라 질문을 하기가 두렵지만,

막 떠오른 의문점을 해소하지 않고 배치 고사에 임하는 건 더 두렵다.

"저.... 픽스 존은 어떤 규칙이에요?"

그렇게 물은 뒤 동의를 구하듯 다른 학생들의 눈치를 살피는데, 다들 비슷한 표정을 한 것으로 보아 같은 의문을 품은 것 같다.

이수독은 당연한 걸 묻는다는 투로 대답했다.

"픽스 존(Fixed Zone)은 고정 능력치 구역이다. 말 그대로 모든 것의 성능이 최하급으로 '고정'되지. 너희들 대부분이 갖고 있을 [코어]도 F급으로 제한이 걸리니 주의하도록. 평소에 부족함 없이 마법을 펑펑 썼던 놈들은 마나를 잘못 관리했다간 후회할 것이다."

"...!"

"...!"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여태까지 제 몸처럼 다뤄 오던 장비, 스킬, 특성 등의 성능이 대폭 하락한다.

그대로 유지되는 것은 오랜 세월 자신의 몸에 밴 기술뿐.

고현우가 목소리를 낮추고 나에게 물었다.

"하면 저 픽스 존이라는 곳에서는 어떤 명검이든 이 철검과 하등 다를 바가 없어진다는 말이오?"

"그런 셈이지. 고등급 아이템이나 스킬을 아예 못 쓰는 건 아닌데, 그 위력이 안 나와. 그 시간에 칼 한 번 더 휘두르는 게 나을 수도 있어."

"으음. 흥미롭군."

그렇게 말하면서 새로 가져온 철검을 슬슬 쓰다듬는다.

하지만 우리 반에서 이 상황이 흥미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고현우를 포함해 겨우 몇몇에 불과했다.

대부분은 혼란과 걱정이 점철된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힐끗 보니 송천혜 역시 이런 시험 내용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지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 갑자기 무슨 픽스 존이야?

- 저거 2학년은 돼야 나온다고 들었는데.

- 야, 저거 많이 어렵냐?

- 나도 모르지, 근데 선배들이 엄청 싫어하긴 하더라.

- 진짜? 망했네....

"그만."

이수독의 한마디에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다물었다.

언짢은 표정으로 내뱉듯이 말하는 이수독이었다.

"던전의 내용물이 조사한 정보와 다른 일은 아주 비일비재하다. 그때마다 지금처럼 갈피를 못 잡고 허우적거릴 건가? 너희는 지금 급변한 상황에 어떻게 대처할지 생각하고 있어야 한다."

질책은 효과 만점이었다.

모두 얼굴을 굳히고 각오를 다지기 시작한 것이다.

안에서 뭐가 기다리든 가진 건 다 써 보겠다는 마음가짐으로.

"그럼 준비해라. 호명하는 학생부터 한 명씩 입장한다. 최정필."

최정필이 긴장한 기색으로 앞으로 나섰다.

심호흡을 몇 번 하고 순간이동 포탈에 발을 들이자 곧 던전이 주둥이를 닫았다.

거기까지 확인하고 이수독이 다음 이름을 불렀다.

"한소미."

"넹!"

한소미는 기분 좋은 미소를 방긋거리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던전에 입장했다.

그 모습에서 긴장한 기색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었기에 이수독의 눈빛이 잠시 이채를 띠었다.

곧 시선을 거두고 다음으로 넘어간다.

"박경아."

이름이 불릴 때마다 대기하는 학생이 하나씩 줄어들고, 순간이동 포탈이 하나씩 닫혔다.

그렇게 던전들이 절반쯤 들어찼을 때,

"크허억!"

외마디 비명과 함께 학생 하나가 포탈에서 튕겨 나왔다.

규칙은 10분 동안 최대한 많은 몬스터를 잡는 것인데, 이 친구는 들어간 지 10분은커녕 3분 정도밖에 안 됐다.

중도 리타이어.

던전의 안전장치가 모종의 이유로 더 이상 시험을 진행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그대로 참가자를 쫓아내 버린 것이다.

"으악!"

포탈이 학생 한 명을 더 뱉어 냈다.

얘는 그래도 2분 더 버텨서 5분.

물론 리타이어라는 점은 같다.

'평소대로 했나 보네.'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안 봐도 뻔하다.

평소대로 스킬을 펑펑 갈기며 몬스터들을 쓸어 버리려 했을 것이다.

스킬의 파괴력이 F급으로 떨어졌다는 점을 간과하고.

무더기로 쓸려 나가야 했을 몬스터들이 버젓이 살아서 달려드니, 어버버하다가 흠씬 두들겨 맞았을 테지.

그렇게 계속 처맞다가 결국 쫓겨난 것이고.

"억!"

"꺄악!"

탈락자가 속출했다.

그 말은 추하게 바닥을 기는 학생이 늘어났다는 말이기도 하다.

자기 차례를 기다리던 학생들은 그 광경을 보며 더욱 긴장했다.

나는 절대 저렇게는 되지 말아야겠다고.

"으으으...."

"그만, 그만 때려 이 개자식들아...!"

탈락자들은 던전에서 쫓겨난 뒤에도 바닥을 구르며 신음했다.

어디까지나 인공 던전인 데다 안전장치도 겹겹이 걸려 있기에 육체적인 피해는 없지만, 우글거리는 몬스터들에게 집단 린치를 당하는 경험은 멘탈을 터뜨리기에 충분했으리라.

그러던 와중 드디어 공략전을 개시하고 10분이 지났다.

우리 반에서 처음으로 10분을 채운 사람이 나왔다.

바로 처음 들어갔던 최정필이었다.

비틀거리며 걸어 나오는 꼴이 정신적으로 몹시 피로해 보였으나 어쨌든 두 발로 땅을 딛고 섰다.

[최정필, 530점, 20%]

공략전 포탈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는 큼지막한 대자보 크기의 홀로그램창이 떠 있는데, 이것이 바로 리더 보드 되시겠다.

학년 전체 기준으로 [이름, 점수, 랭킹]이 실시간으로 표시된다.

곧이어 최정필 다음으로 들어간 한소미도, 그다음으로 들어간 박경아도 자기 시험을 끝마치고 걸어 나왔다.

[한소미, 928점, 1위] New!

...

[박경아, 543점, 40%]

[최정필, 530점, 45%]

다른 반에서도 성공하는 학생들이 줄줄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럴 때마다 리더 보드에 이름과 점수가 추가되고, 순위가 계속해서 갱신되었다.

상위 20%였던 최정필의 순위가 뚝뚝 떨어진다.

- 와씨, 한소미 점수 봐.

- 거의 두 배네, 두 배.

- 저게 실력 차이인가?

- 쟤가 알고 보면 진짜 무서운 애라니까.

- 생긴 건 되게 귀여운데.

탈락자들에게 집중되었던 관중의 이목이 순식간에 리더 보드로 옮겨 갔다.

순위에 대해 떠들면서 점점 더 의욕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픽스 존] 때문에 긴장한 것은 여전하지만, 남들이 다 보는 리더 보드에 높은 순위를 기록해야겠다는 욕심이 동기 부여가 된 듯하다.

"서예인."

서예인의 차례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권총 두 자루를 점검하는 서예인에게 짧은 조언을 던졌다.

"라이플로 드는 게 더 나을 거야. 마나 관리가 힘들어진다 싶으면 가까이 붙는 놈들한테 헤드샷만 날리는 식으로 운용해."

"응."

서예인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내 조언을 받아들였다.

권총들이 순식간에 분해되고 라이플로 재조립되었다.

무표정한 눈으로 나를 흘끔 보는데, 어쩐지 '나 잘했지?' 하고 묻는 것 같다.

고개를 끄덕여 주자 마주 고개를 까딱이곤 던전에 입장한다.

"...."

뒤통수가 따가운 느낌에 뒤를 돌아보니, 송천혜가 못마땅한 눈빛을 보내고 있다.

쟤 입장에서는 내 주제에 무슨 조언이냐 싶겠지.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홱 고개를 돌린다.

"김호."

기다리다 보니 내 이름도 불렸다.

포탈에 한쪽 발을 집어넣자 몸이 어디론가 쑥 빨려 들어갔다.

다음 순간 나는 안개가 잔뜩 낀 숲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아직 동이 트기 전, 새벽녘의 어둠과 축축함을 간직한 숲.

[곧 몬스터가 소환됩니다.]

[남은 시간 10:00]

나는 알림 메시지를 보면서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여기도 오랜만이군.'

<용살학원>에서 나는 수많은 별명을 갖고 있었다.

S급 찍어 내는 공장, 랭킹 1위, 최강의 서포터.

그리고 하나 더.

픽스 존의 신(神).

서포터가 다 해먹음

17화 픽스 존 (2)

<용살학원>을 시작한 이래 나는 언제나 랭킹 1위였다.

필연적으로 내 자리를 탐하는 자들의 무수한 도전을 마주해야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도전은 나에게 닿지도 못하고, 내가 키워 놓은 영웅들 선에서 허무하게 정리되기 일쑤였다.

샌드백도 손맛이 있어야 치는 법이다.

해서 가끔씩은 재미 삼아 영웅을 쓰지 않고 도전자들과 일대일로 붙었다.

간혹 새로운 아이템이나 스킬을 얻은 날에는 그것들을 시험해 볼 상대로 다른 랭커들이 아주 적격이었다.

그치들도 녹록하기만 한 상대는 아니라, 일대일로 붙으면 가끔씩은 나를 위기로 몰아넣기도 했다.

나보다 랭킹이 낮다 뿐이지, 크게 보면 피라미드의 최상위층에 위치한 실력자들이었으니까.

그러나 그런 실력자들도 픽스 존에서는 모두 공평하게 내 발밑을 기는 신세였다.

실력 차이가 나도 너무 났다.

대인전에서 승부를 겨루든, 공략전에서 경쟁을 하든, 무엇이든 내 뜻대로 되었다.

그리고 그 명제는 지금도 변함없이 그대로다.

[곧 몬스터가 소환됩니다.]

[남은 시간 10:00]

상태창을 불러내 보았다.

[김 호]

▷스킬

증폭(F)

복사-스킬[1/1]

1. 허밍버드(F)

▷특성

코어(F)

군주(F)

복사-특성[1/1]

1. 원소 저항(F)

▷장비

교복(F)

대지의 스태프(F)

픽스 존의 규칙대로 모든 스킬, 특성, 장비의 랭크가 F랭크로 고정된 상태다.

나야 원래 가진 것들이 거진 E급이었기에 크게 변한 건 없다.

덧붙여 [허밍버드] 같은 스킬은 어차피 파괴력보다 적을 제어하는 게 주목적이라, F급이 되었더라도 비슷한 성능이 나올 테고.

물론 이번에는 허밍버드마저 봉인하고, 기본적인 육체 능력만 써서 도전할 생각이다.

'몸 좀 풀어야지.'

입학하고 처음으로 겪는 픽스 존이고, 지금 내가 얼마나 할 수 있나 확인도 할 겸.

그리고 육체 능력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나에게 괜히 '픽스 존의 신'이라는 별명이 붙은 게 아니다.

주위를 쓱 훑어보았다.

[안개 숲]의 지형은 도전자가 포탈을 타고 입장하는 순간 무작위로 형성된다.

다만 아무리 무작위라도, 결국 이 던전은 사람이 만든 것이다.

크게 보면 몇 가지 정형화된 패턴이 존재한다.

그 패턴만 파악한다면 언제, 어디서, 어떤 몬스터가, 몇 마리나 소환될지 예측하고 행동할 수 있다.

내 주위를 이루는 덤불, 나무, 잡초, 바위 등의 배치, 그리고 안개가 흐르는 방향 등으로 유추해 보면,

'C 패턴이군.'

바위 근처 빈 공간 앞에 자리를 잡았다.

대지의 스태프를 양손으로 움켜쥔 후, 머리 위로 번쩍 들어 올린다.

시스템이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다.

[3]

[2]

[1]

[Start!]

[몬스터가 소환됩니다.]

[남은 시간 9:59]

[현재 점수:0점]

내 앞 허공에서 까맣고 지저분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연기 속에서 대여섯 살배기 어린아이의 키를 한, 초록색 피부의 몬스터가 튀어나왔다.

"케륵, 케르륵."

고블린은 소환되자마자 누런 눈깔을 번뜩이며 죽일 대상을 찾으려 했다.

그러나 놈의 시야에 가장 처음 들어온 것은, 자신의 정수리를 노리고 떨어져 내리는 두꺼운 나무 막대기였다.

- 콰직!

첫 고블린의 머리통을 으깨 버리고 곧바로 놈이 들고 있던 단검을 빼앗았다.

동시에 스태프를 왼쪽으로 강하게 휘두르자 머리 하나가 더 터졌다.

그 고블린의 단검까지 챙기고 무작정 덤불 쪽으로 달렸다.

그곳에서 피어오르는 까만 연기 세 개가 고블린의 형상으로 변하기도 전에 스태프를 휘둘렀다.

- 콰직, 콰직, 콰직!

고블린 세 마리가 소환되자마자 점수로 환산되고,

똑같은 자리에 족히 열 개는 되어 보이는 까만 연기 덩어리들이 우르르 떠올랐다.

또다시 스태프를 휘두를 준비를 하면서,

'7시 방향에 오크 두 마리. 앞으로 3, 2, 1초.'

'1초'를 세는 순간 어깨너머로 단검 두 자루를 집어 던진다.

- 푹푹!

"끅."

"컥."

눈앞의 고블린들을 쓸어 버리는 도중 등 뒤에서 들리는 피육음 둘, 짧은 단말마 둘.

대지의 스태프를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이제는 널린 게 무기다.

고블린들이 떨군 단검들을 한 아름 품에 안은 채, 방금 죽인 오크들의 사체로 달려간다.

그러면서 단검들을 사방으로 흩뿌리듯이 던진다.

사방에서 몰려들던 고블린들이 미간에 단검 한 개씩을 꽂고 널브러진다.

죽은 오크 두 마리의 시체는 각각 숏소드와 도끼를 들고 있었다.

그것들을 한 손에 하나씩 쥐고 다음 소환 장소로 질주했다.

나무 둘 사이에서 피어오르는 커다란 연기와 작은 연기 여럿.

'좌측 고블린 여섯, 우측 고블린 넷에 오크 둘, 최후방에 트롤. 3, 2, 1.'

이번에도 '1'을 세는 순간 연기 속으로 뛰어들어 몸을 풍차처럼 회전시켰다.

- 서거거걱!

잡몹들을 한순간에 몰살시키고 갓 소환된 트롤에게 돌진했다.

놈이 저항할 틈도 없이 심장에 숏소드를 박아 넣고, 비틀고, 손잡이를 걷어차 더욱 깊숙이 박히게 하고, 마지막으로 이마에 도끼를 내려찍는다.

-콰직!

다음 장소, 또 다음 장소로.

몬스터들은 소환되는 즉시 목이 날아가기 바빴다.

제삼자가 본다면 심각하게 부정행위를 의심할 만한 플레이였다.

마치 누군가가 일부러 내가 가는 곳에만 몬스터를 소환해 주는 것처럼 보일 테니까.

하지만 이것은 부정행위가 아니라, 오랜 경험과 치밀한 분석이 더해진 결과물이다.

'좋아. 여기까지.'

슬슬 때가 됐다 싶어 다음 소환 장소로 향하던 발걸음을 멈추었다.

스코어보드로 시선을 옮겨 보니,

[남은 시간 7:02]

[현재 점수:683점]

결과가 살짝 실망스러웠다.

'3분 해서 683점이라....'

나도 많이 죽었네.

한창 신기록을 세우고 다니던 시절에는 안개 숲 3분이면 800점은 찍었는데.

아무튼 당초의 목적은 달성했다.

[서브 퀘스트:배치 고사]

▷목표:배치 고사에서 중위권 이상의 성적을 거두십시오.

▷대인전 배치 고사에서 1승 이상 (1/1)

▷공략전 배치 고사에서 상위 50% 이상 (현재 랭킹:N/A)

▷보상:[복사-스킬] 슬롯+1

배치 고사 퀘스트의 목표는 대인전 1승 이상, 공략전 상위 50% 이상.

보통 상위 50% 커트라인이 400점에서 500점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편이니까, 683점이라면 확실하게 중상위권에 안착할 수 있을 것이다.

아직 남은 시간이 7분이나 되지만 더 점수를 올릴 필요성은 못 느낀다.

물론 설렁설렁해도 공략전 1위는 떼놓은 당상이겠지.

그런데 그렇게 이목을 끌어 버리면, 관중들한테 겁쟁이 소리까지 들으면서 송천혜한테 기권한 게 다 무용지물이 된다.

- 어? 김호가 랭킹 1위네?

- 쟤 알고 보니까 엄청 센 거 아니야?

- 그럼 기권은 왜 한 건데?

- 그냥 봐준 거 아닐까?

대강 이런 식으로 구설수에 오르겠지.

대인전과 마찬가지로, 유명세를 감당할 실력을 키우기 전까지는 실력을 감출 필요가 있다.

그러니 배치 고사는 여기서 마감한다.

"그만할래."

모든 것이 회색으로 변하며 일시에 정지하고, 눈앞에 메시지가 출력되었다.

물론 남은 시간은 계속해서 줄어든다.

[남은 시간 6:49]

[정말 공략전을 종료하겠습니까?]

[수락/거절]

"어."

[리플레이를 저장하겠습니까?]

[수락/거절]

"아니."

곧바로 출구가 입을 벌렸고,

나는 유유히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나약한 놈들.'

이수독이 인상을 찌푸렸다.

평소에도 험상궂던 얼굴이 더 흉악해져서 지나다니는 학생들이 저도 모르게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의 시선 끝에는 '나약한 놈들', 즉 탈락자들이 있었다.

시험이 시작한 지 한참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바닥에 드러눕거나 주저앉은 채다.

'아직도 못 일어나는가.'

이수독의 성격상 먼저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교사의 재량으로 리타이어한 학생에게 재도전할 기회를 부여할 수 있다.

저들 중 한 명이라도 부탁했다면, 어떻게 만회할 방법이 없는지 묻기라도 했다면 기회를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저 패배자들에게서 그런 낌새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완전히 의욕이 꺾여 버린 듯하다.

'고작 이따위 일로.'

이수독 역시 한때 용살학원의 재학생이었다.

그가 걸었던 길은 이것보다 훨씬 더 가혹하고 험난한 가시밭길이었다.

그런 환경에서도 밑바닥부터 악착같이 기어 올라온 그였다.

그러니 벌써부터 포기하는 저들이 못마땅할 수밖에.

"...."

이수독이 눈길이 슬쩍 옆을 향했다.

닫혀 있던 포탈 하나가 벌어지며 학생 하나가 빠져나왔다.

기억하기로는 입장한 지 3, 4분쯤 됐다.

그 말은 10분을 채우지 못했다는 뜻이니,

'또 리타이어군.'

이름은 잘 몰라도 기억에는 남아 있는 얼굴이었다.

대인전 배치 고사에서 '컨디션이 안 좋다'며 기권했던 녀석.

아니나 다를까 공략전마저 리타이어했나.

'저따위 썩어 빠진 근성으로 무슨 드래곤을 잡겠다고.'

드래곤은커녕 졸업하고도 B급 보스나 잡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자기 부하가 저런 한심한 짓거리를 했다면 단숨에 피떡으로 만들었을 테지만, 이곳은 용살학원이었고 저 녀석은 그의 담당 반 학생이었다.

담임으로서 저런 버러지 같은 놈도 가르치고 이끌어야 한다니,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 온다.

아무리 전대 용사의 의뢰라도 섣불리 수락하는 게 아니었다며, 거듭 후회하는 이수독이었다.

'가만....'

이수독이 고개를 돌렸다.

문득 알 수 없는 위화감이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다.

위화감의 정체를 곰곰이 되짚어 보다가, 탈락자들의 면면을 보고서야 깨달았다.

'저 녀석, 걸어 나왔다.'

인공 던전의 안전장치들은 공략전을 치르는 학생의 안전이 위기에 처한 순간, 강제적인 순간이동 마법으로 학생을 '방출'한다.

탈락자들이 던전에서 튕겨 나와 바닥을 구르는 건 그런 이유에서다.

후유증이 남아 한동안 제정신을 못 차리는 건 덤.

그런데 저 녀석은 멀쩡히, 아무렇지도 않게 걸어 나와서 리더 보드를 확인하고 있다.

다른 건 몰라도 최소한 '방출'되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이수독의 눈길이 녀석의 시선을 따라 리더 보드를 훑었다.

[김 호, 683점, 38%]

'중상위권?'

저 점수는 절대로 3분 만에 낼 수 있는 게 아니다.

조금 과장해서 폴리모프한 드래곤이 오더라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10분을 다 채우고 나왔다는 말인가?

분명 들어간 지 3분밖에 안 됐는데, 내가 잘못 봤던가?

항상 차가운 평정심을 유지하는 이수독이었으나, 지금만큼은 약간의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김호라고 했지.'

이수독은 저 녀석의 이름을 기억에 남겨 두었다.

나중에 반드시 리플레이를 확인해 보겠다 다짐하며.

서포터가 다 해먹음

18화 픽스 존 (3)

[김 호, 683점, 38%]

내 성적은 리더보드 중간쯤에 자리 잡고 있었다.

올해 기수의 전반적인 수준이 높아서인지 예상보다 다소 밀려난 편이다.

그래도 이 정도면 아무 문제 없이 중위권 이상으로 공략전을 끝마칠 수 있을 것이다.

배치 고사가 제법 진행된 이 시점에서 신입생들의 대화 주제는 둘로 나뉘었다.

리더 보드와 시험 내용.

그리고 시험 내용 대부분은 앓는 소리였다.

- 아씨, 나 완전 죽 쒔다.

- 나도. 들어가니까 무슨 내 몸이 내 몸 같지 않더라. 말을 안 들어.

- 그러니깐. 칼을 휘두르는데 칼이 느려.

- 살다 살다 고블린 잡는 게 빡센 날도 오네.

- 선배들이 싫어할 만해.

평소에 주렁주렁 달고 다니던 스킬과 특성이 많을수록, 픽스 존의 F랭크 고정이 더 크게 체감될 것이다.

익숙해지려면 앞으로 고생깨나 하겠지.

싫어하는 것도 이해는 되지만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픽스 존]은 그리 흔한 규칙은 아니지만 잊을 만할 때마다 한 번씩은 튀어나온다.

몇몇 악명 높은 보스 몬스터들이 자기 던전에 배치하기도 해서, 잘나가던 파티가 픽스 존에서 몰살하는 참사가 벌어지기도 한다.

그런 참사의 주인공이 되고 싶지 않다면 최대한 빨리 익숙해지는 수밖에.

[이성현, 951점, 1위]

[한소미, 928점, 2위]

[모용준, 903점, 3위]

최상위권은 이런 악조건에도 최상위권다웠다.

한소미 위아래에 자리 잡은 이름들이 바로 신병철한테 전해 들었던 유망주들인가 보다.

이성현이 소드마스터네 아들, 모용준이 검성의 손자랬지.

그런데 얘들 실력이 한소미와 비슷한 수준이라면,

'고현우도 해 볼 만하겠는데.'

열차에서 한소미와 붙었을 때에도 검술로는 안 밀렸으니까.

검술 한정으로 고현우=한소미=유망주들 삼단 논법이 성립된다.

규칙도 픽스 존이라 스펙 요소가 거의 배제되었으니, 순위권에 오를 가능성이 매우 크다.

과연 몇 점을 받을지 은근히 기대가 된다.

주위를 둘러봐도 눈에 안 띄고, 리더보드에 이름도 없는 걸 보면 아직 시험을 치르는 중인 듯하다.

리더 보드와 순간이동 포탈을 번갈아 바라보며 기다리는데, 고현우 대신 서예인이 먼저 걸어 나왔다.

천천히 고개를 움직이며 두리번거리더니 이내 나를 발견하고 다가온다.

내가 물었다.

"어때, 할 만했냐."

"...어려웠어."

[서예인, 781점, 21%]

어려웠다면서 성적은 썩 나쁘지 않았다.

픽스 존은 총사나 마법사 등 마력 기반 클래스들에게 매우 불리한 규칙이다.

극히 제한된 마력으로만 점수를 내야 하니까.

고득점이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차라리 나처럼 맨몸으로 다 때려 부수는 게 더 쉽다.

그런 점을 감안하면 총사로서, 첫 시도에서 상위 21%는 아주 괜찮은 점수다.

손에 여전히 라이플이 들려 있는 걸 보면 내가 말해 준 방식대로 운영한 것 같다.

- 와-!

리더보드를 주시하던 학생들 사이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무슨 일인가 하니.

1위가 갱신되어 있었다.

[고현우, 1,023점, 1위] New!

[이성현, 951점, 2위]

[한소미, 928점, 3위]

"오."

높은 확률로 순위권에 오르겠다 싶었는데, 기어이 공략전 수석을 달성하고 만 것이다.

그것도 차석과 꽤 큰 차이로.

관중들이 마치 자기 일인 것처럼 열광했다.

직접 겪어 보았기에 저게 얼마나 대단한 점수인지 아는 것이다.

- 1,000점이 가능한 점수였구나.... 나는 쥐며느리만도 못한 놈이었어....

- 쟤 어디 소속이야? 검술 동아리?

- 아니. 우리 동아리에는 없는 앤데.

- 내가 알아봤는데 무소속이래.

- 무소속이 유망주들 다 깨고 1위 먹었네.

- 쟤 아까 대인전에서 조벽이랑 붙지 않았나?

- 그랬을걸.

- 어쩐지, 아까도 잘 싸우더라.

- 이따 리플레이 챙겨 봐야겠네.

당당한 걸음으로 군중을 가로지르는 고현우에게 시선이 집중되었다.

고현우가 나에게 감사를 표했다.

"전부 김 형 덕분이오."

"내 덕분은. 그냥 네가 잘한 거지."

"아니. 점심시간 동안 기력을 회복해 두지 않았더라면 이와 같은 고득점은 내지 못했을 거요."

그게 그렇게 되나?

과하게 해석한 감은 있었지만 아주 틀린 말도 아니었다.

군중들이 고현우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고 있었기에, 자연스레 옆에 있는 나에게도 관심이 쏠렸다.

- 옆에 쟤는 누구야?

- 송천혜한테 기권한 걔네.

- 아~ 그 겁쟁이?

- 벌써부터 고현우한테 빌붙는 거야?

- 하여간 꼭 저런 놈이 있어요. 저럴 노력으로 실력이나 키울 것이지.

첫인상이 영 안 좋아서인지 고현우랑 대화만 나누는데도 이미지가 실시간으로 악화되는 중이다.

그런 수군거림이 귀 밝은 고현우에게 안 들릴 리가 없었다.

삽시간에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진다.

군중들에게 일갈하려는 고현우를 말렸다.

"됐어, 놔둬."

"허나 김 형."

"괜찮다니까."

"...알겠소. 김형의 뜻이 그러하다면."

내가 단호하게 끊자 입을 다물고 분을 삭인다.

여전히 표정을 굳힌 채.

수군거림이 계속 들려왔으나, 그것도 오래가지는 않았다.

오늘이 학기 첫날인데 날 씹어 댈 거리라 해 봐야 얼마나 되겠는가.

때마침 시험을 마친 송천혜에게 관심이 분산되기도 했고.

"...."

심력을 잔뜩 소모하고 비틀거리며 걸어 나오는 여느 학생들과는 달리, 송천혜는 조금도 흐트러짐 없는 모습이었다.

절도 있는 걸음걸이로 지나가던 송천혜가 잠시 속도를 늦추더니, 슬쩍 곁눈질로 나를 흘겼다.

그리고 가던 길을 마저 간다.

문득 쟤는 몇 점을 받았을까 궁금해졌다.

리더 보드를 맨 위에서부터 쭉 읽어 내려갔으나,

'없네.'

40%쯤 내려왔는데도 송천혜의 이름은 찾을 수 없었다.

굳이 아래까지 샅샅이 뒤지고 싶지는 않다.

'상위권에 없으면 다 본 거지.'

썩 좋은 성적을 내지는 못했나 보다.

마법사들도 픽스 존에서 고전하는 편이니까 아주 이해 못 할 일은 아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신경을 끄려고 했는데, 자꾸 시선이 느껴진다.

"...."

송천혜가 내 쪽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평소의 못마땅한 기색이 아니라, 왠지 내 눈치를 살피는 것 같다.

시선이 마주치면 다시 홱 고개를 돌려 버린다.

'쟤는 또 왜 저런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