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식은 즐거워 - 3 >
이제 좀 조용하네.
귀신소리를 듣고 도망친 사람들이 이야기를 해줬는지 들어오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방심은 금물이다.
나는 차원문으로 입구를 막은 후 던전 탐사에 들어갔다.
이런 실험 던전 같은 곳은 대개 구조가 정형화되어 있다.
무슨 국가 공인 던전 규격이라도 정해놨나 싶을 정도.
문제는 구조를 모르면 헷갈리면서 길을 잃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특정 지점에는 방향을 헷갈리게 하는 함정까지 있어서 더더욱 그렇다.
"어디 보자···"
현우 일행이 들어오는 바람에 플래쉬는 쓰기 어려워졌다.
이런 던전, 미궁류는 내 쉘터와 같은 차원으로 확인이 되었기에 아쉬웠다.
안에서는 총이나 그물총 같은 것도 쓸 수 있다는 말이다.
"여차하면 아무거나 써야지 뭐."
생존과 독식을 위해서는 뭐든지 할 생각이다.
나는 장비를 점검하고 노트북으로 영상을 확인한 다음 발광석을 들었다.
던전이 그리 크지 않기 때문에 초입에는 우리가 없을 확률이 높았다.
"냄새를 찾아야 돼···"
몬스터 우리는 특유의 냄새가 난다.
소와 돼지를 싣고 가는 트럭의 그것과 상당히 비슷하다.
동굴이라 더 지독하게 느껴지는데 가까이에서 맡으면 냄새에 기절할 수도 있다.
몬스터들이 싸갈긴 똥오줌이 어디로 가겠는가.
"필터 마스크를 끼고···"
서바이벌 라이프에선 지독한 냄새도 디버프의 일종이라 마스크를 끼면 완화된다.
물론 일반 마스크는 별 효과가 없다.
나는 중무장을 한 뒤 딩고를 불러내 우리를 찾아 나섰다.
"짖으면 안 돼, 알았지? 조용히."
영특한 녀석이라 동굴의 환경을 바로 알아채곤 내 앞으로 나섰다.
그렇게 좁은 길을 걷는데 나와 딩고가 동시에 발자국 소리를 들었다.
내 인지능력이 딩고와 비슷할 정도로 성장한 것이다.
물론 후각에서는 따라가지 못하겠지만.
차원문에 숨고 기다리려니 앞서 봤던 현우 일행이 앞을 지나갔다.
그들은 한 차례 전투를 치렀는지 긴장한 상태였다.
"여기도 갈림길이네. 무슨 구조가 이렇게 복잡한지···
"던전이 그렇게 크진 않은 것 같은데 우리가 못 찾는 겁니다. 방향감각이 상실돼서."
"제가 이정표를 남기고 있거든요? 조금만 더 고생해요."
"오, 잘하셨습니다 소윤씨."
저 여자 이름이 소윤인가.
싱긋 웃으며 허리를 쭉 펴는데 키가 거의 180cm였다.
그녀는 동굴 벽을 훑다가 하필 차원문을 건드리고 말았다.
"어?"
느낌이 이상한가보군.
나는 즉시 차원문을 닫았다.
차원문은 동굴 벽과 달리 매끈하기 때문에 감각이 다르다.
설마 내가 훔쳐보고 있다는 걸 눈치 채지는 못하겠지.
약간 시간이 흐른 뒤 다시 차원문을 열자 현우 일행은 떠난 상태였다.
나는 딩고와 함께 갈 길을 재촉했다.
그러다가 녀석이 한 갈림길에서 귀를 쫑긋하게 세우며 자세를 낮추고 헙, 소리를 냈다.
저기군.
나는 롱보우의 시위에 아다만틴 화살을 걸었다.
어렴풋이 몬스터의 우리가 보였다.
희한한 건 몬스터가 몇 마리 남아 있다는 점이었다.
보통은 서로 잡아먹어서 얼마 지나지도 않아 한 놈만 남지 않나?
"뭐 포인트만 챙기면 되니까."
나는 발광석을 우리 앞으로 던졌다.
은은한 빛이 경계하며 다가온 몬스터의 면상을 비췄다.
"트롤이다···"
여기서 트롤을 만날 줄이야.
녀석은 오크와 비슷한 덩치에 팔이 길쭉하고 빳빳한 가시를 가진 몬스터다.
다른 게임에선 그저 그런 잡몹으로 나오지만 서바이벌 라이프에선 매우 위험한 몬스터였다.
"저 가시가 장난이 아니지···"
위험하면 몸을 부풀려 가시를 사방으로 발사하는데 독은 없지만 매우 아프다.
전용스킬인 발작적인힘과 초재생은 육탄전을 어렵게 만든다.
원래의 나라면 상대할 수는 있지만 도망가서 다른 방법을 찾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지."
녀석은 우리에 있고 나는 일방적으로 공격할 수 있으니까.
시위를 놓자 아다만틴 화살이 트롤의 튼튼한 피부를 사정없이 꿰뚫었다.
쿠으으으―
좁은 동굴에 트롤의 울음소리가 둔중하게 퍼졌다.
현우 일행이 오기 전에 처리하고 도망가야 한다.
나는 연달아 화살을 쏘았다.
안 그래도 상태가 좋지 않은 트롤은 머리에 연달아 화살을 맞고 죽고 말았다.
그 와중에 몸뚱이에 박힌 화살이 밀려나오는 건 섬뜩하다.
초재생이 순식간에 회복시킨 것이다.
"그게 나왔어야 했는데···"
「포인트를 50 획득했습니다」
「스킬 : 야성을 획득했습니다」
조금 아쉽네.
야성은 늑대인간의 투쟁본능과 비슷한 것으로 위기시 스탯을 높여준다.
살의는 가지지 않아도 되고 간단히 발동된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효과는 그저 그랬다.
"초재생이 나왔어야 했어."
발작적인힘도 좀 그런 것이 내 전투스타일과는 궁합이 맞지 않았다.
애초에 최대한 안 맞아야 하는데 맞고 힘을 발휘하면 무슨 소용이야.
보험이라 생각하면 나쁠 건 없지만···
"뭐 이것도 나쁘진 않아."
생명체추적이 없어진 건 아쉽지만 결과가 이렇게 됐으니 어쩔 수 없지.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나는 재빨리 다른 몬스터들을 쏴서 총 95포인트를 획득했다.
그러고 나니 발걸음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저기서 무슨 소리가 났어!"
"빨리 가보자고!"
"잠시만요···"
바쁜 것 같으니 나는 우리 옆쪽의 길로 조용히 퇴장해야지.
나는 딩고를 불러내 오래된 책 냄새를 맡게 했다.
연금술사의 던전인 만큼 오래된 책과 기구가 많다.
물론 거기까지 가려면 숱한 함정과 몬스터를 극복해야만 한다.
다행히도 내가 축적한 경험과 착실하게 쌓은 전투력은 얕은 편이 아니었다.
"딩고, 멈춰."
내가 낮은 소리로 지시하자 딩고는 바로 멈추곤 자세를 낮추었다.
그리고 같이 장애물을 극복.
우리는 이런 식으로 빠르게 던전을 관통했다.
내가 구조를 대강 꿰뚫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몇 차례의 전투를 거친 후 드디어 최심부에 도착했다.
흔히 거주구라고 부르는 연금술사의 방.
거기에 책상 몇 개와 상자, 가구 등이 자리하고 있었다.
"주인은 없나···"
이세계에서 사람 비슷한 생명체는 한 번도 보지 못했다.
하지만 존재 자체는 확실했다.
이런 책과 집기를 누가 만들었겠는가.
뭐가 있는지 궁금했지만 루팅이 먼저다.
아까 차원문을 닫아버렸기에 지금쯤은 사람들이 안에 들어왔을 것이다.
진상을 파악하고 나면 잔뜩 화를 내겠지.
하지만 상관없다.
내 정체를 아는 사람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니.
나중엔 입구를 막고 난리를 치겠지만 돌파하는 방법이 또 있지.
이런 걸 한두 번 해보는 게 아니거든.
"일단 챙기기부터 하자."
나는 차원문을 열고 이것저것 마구 욱여넣었다.
그렇게 넣다 보니 스크롤북이 눈에 띄었다.
대부분은 내가 알 수 없는 언어로 써져 있었지만 두 개는 달랐다.
「아이템칸확장권 : 아이템칸이 1칸 확장된다. 1,000포인트 소모」
「스킬칸확장권 : 스킬칸이 1칸 확장된다. 1,000포인트 소모」
"이거지."
나는 스크롤을 불끈 쥐었다가 조심조심 찢었다.
메시지가 떠오르며 천 포인트가 사라졌다.
「아이템칸이 6개로 확장되었습니다」
「스킬칸이 11개로 확장되었습니다」
트롤 죽이기 전에 나왔으면 딱인데.
하지만 던전의 구조상 우리가 먼저니 어쩔 수 없다.
나는 거주구의 종이 하나, 펜 하나까지 몽땅 차원문에 처넣은 다음 닫았다.
이제 입구로 나갈 차례다.
물론 거기엔 몇 명이 나를 회치기 위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즉 뚫어야 한다는 거다.
일단은 상황을 봐야겠군.
나는 딩고를 차원문에 들여보내고 입구를 향해 뛰었다.
.
.
.
넓지 않은 던전에 여러 무리가 엉켰다.
서로 화살을 쏴댄 주제에 모든 것을 잊고 하하호호 지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덕분에 던전 안은 긴장감이 가득했다.
서로 마주치기라도 하면 화들짝 놀라 고개를 숙이고 지나가기가 일쑤였다.
그 와중에 싸움이 벌어져 누군가 상처를 입은 모양이었다.
피해자는 바닥에 쓰러진 채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내가 씨발 너 죽이고 살인자 되고 만다 개새끼야!"
"죽여! 죽여보라고!"
"아까 화살 쏜 거 똑똑히 기억하거든? 넌 멀쩡할 줄 알았어?"
금방이라도 살인이 벌어질 것 같자 두 명이 중재에 나섰다.
"어허이! 그만합시다!"
"좀 참아요!"
피해자가 불쌍해서, 가해자가 무서워서 사람들이 이러는 게 아니었다.
던전의 특성상 언제 몬스터들이 튀어나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물론 대부분의 몬스터는 성호가 처리한 상태였지만 이들은 모른다.
던전 곳곳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살인자가 출현하지는 않았다는 점이었다.
빠져나갈 틈만 찾고 있는 성호에겐 아쉬운 일이겠지만.
그리고 현우 일행은 드디어 최심부에 도달했다.
물론 성호가 휩쓸고 지나갔기에 텅 비어 있었다.
"···그 사람이 다 갖고 갔나 봅니다."
"배낭 하나에 넣기는 어려웠을 텐데···"
"와 진짜 하나도 안 남기고 싹 쓸어갔네요. 먼지도 좀 갖고 가지."
소윤은 투덜투덜하며 서랍을 닫았다.
거주구를 둘러보던 현우가 뭔가 발견했다.
문에 달려 있는 경첩이었다.
"여기는 철사병이 없나 봅니다···?"
"진짜네요···
둘이 경첩을 확인하곤 놀랐다.
서울에선 멀쩡한 금속을 찾으려야 찾을 수가 없다.
정부 쉘터가 다량의 금속을 봉인했다는 소문은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소문이었다.
셋은 아쉬움을 달래며 거주구를 빠져나가려 했다.
그 때 발소리가 들리며 몇 명이 거주구를 막아섰다.
"다 털고 지금 나가시는 거죠?"
"그냥 보내드리기는 좀 아쉬운데."
어느새 셋이 협력을 하기로 한 모양이다.
밖에서는 그렇게 화살을 쏴댄 주제에.
소윤은 긴장한 현우의 앞으로 나섰다.
"미안한데 우린 아무것도 못 먹었어요. 이미 상황이 끝난 상태였다고요."
"하하, 그걸 누가 믿겠습니까."
"우리보다 먼저 들어간 사람이 있어요. 배낭 털어서 확인해주면 되잖아요."
그녀의 심중을 눈치 챈 대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무것도 못 먹은 사람들끼리 싸우는 것도 좀 그렇잖습니까? 좋게 넘어갑시다."
"···숨긴 거 아닙니까?"
"이 동굴 어디에 숨길 곳이 있습니까. 사람들이 샅샅이 뒤질 텐데."
하긴···
셋도 그럭저럭 납득한 모양이었다.
소윤과 대호가 앞을 막고 현우가 뒤에서 배낭을 털었다.
별거 없는 내용물을 확인시키고 안까지 보여주자 다들 실망한 얼굴이었다.
차마 몸까지 수색하자는 말은 못 꺼내고 벽을 걷어차며 투덜거렸다.
"아 진짜 환장하겠네."
"그럼 여기를 털고 간 놈이 있다는 거죠?"
"대체 누굽니까 그게?"
"누군지는 모르겠는데 지금쯤은 입구를 향해 뛰고 있지 않을까요?"
소윤이 넌지시 일러주자 셋의 표정이 확 바뀌더니 인사도 않고 뛰기 시작했다.
"밖에 나가는 거 어렵게 됐습니다."
"우리야 확인시켜주면 되는데 그 사람은 진짜 못 나가겠는데요."
대호가 말하자 동생 소윤이 역정을 냈다.
"우리가 지금 그 사람 걱정을 할 때가 아니라고!"
"아니 그래도···"
그 때 또 사람들이 몰려왔다.
현우 일행은 싸움을 피하기 위해 또 배낭을 확인시켜줘야 했다.
소윤은 주먹을 불끈 쥐었지만 오빠가 말리자 간신히 참았다.
동시에 먼저 던전에 진입해 다 쓸어간 그 남자에 대해 이를 갈게 되었다.
보나마나 우리 안의 몬스터도 그 사람이 다 쏴 죽였을 것이다.
생각해보니 이거 보통 사람이 아닌데?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빨리 행동할 수가 있나.
혹시 고인물 아니야?
한편 다 쓸어간 놈이 아직 던전에 있다는 소문이 퍼졌다.
두 번째로 도착했다는 일행이 배낭을 털어서 확인시켜줬다는 이야기도 돌았다.
일이 이렇게 되자 사람들은 꼭지가 돌아 우르르 달려갔다.
"막아! 입구 막아!"
"입구 막으면 제깟 놈이 뭘 어쩌겠어?"
들어온 입구는 하나, 그러니 나가는 출구도 하나.
그러니 막기만 하면 놈은 배낭을 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거의 동시에 사람들끼리 인사를 주고받고 표식을 하는 것도 눈에 띄었다.
혼자 돌아다니는 놈을 색출하기 위함이다.
현우는 이 모든 것을 보며 씁쓸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밖에선 그렇게 화살을 쏴대며 난리를 치더니 안에서는 이렇게 착착 손발이 맞다니.
'진작 그렇게 했으면 보상을 나눠가질 수도 있었는데···'
탐욕이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이제 사람들은 입구에 모여 누군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 씨발새끼 어디서 뭐하는 거야?"
"수색대는 뭐랍니까?"
"지금 뒤지고 있는데 아무도 없다는데요?"
"사실 놀고 있으면서 입만 나불대는 거 아니야?"
"그럼 당신이 가보시든지."
"말 함부로 하지 맙시다, 예? 수색이 뭐 쉬운 건지 아나."
사람들 사이에서 불만의 싹이 피어올랐다.
한편 성호는 쉘터에 들어가 루팅한 것을 하나하나 살펴보고 있었다.
느긋하게.
.
.
.
"슬슬 짜증날 때도 됐지."
차원문을 열어두니 사람들이 싸우는 소리가 아주 잘 들렸다.
싸워라, 싸워라.
던전이 사라지기까진 시간이 꽤 걸리니까 느긋하게 있을 생각이었다.
급한 건 내가 아니다.
그나저나···
"하필 이게 아이템으로 변하냐."
트롤을 잡았는데 낡은 목토시가 아이템으로 변했다.
「낡은 목토시 : 건강+2, 냉기저항 상승」
"냉기저항은 뭐 겨울에 쓸 만하겠지."
아이템칸이 6개로 확장되었기에 하나를 더 장착할 수 있다.
나는 예전에 따둔 겨울딸기를 먹고 목토시를 꼈다.
그러자 서늘하던 공기가 평이하게 바뀌는 게 느껴졌다.
"효과 죽이는구만."
이 정도면 추운 겨울이 와도 웬만큼은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아포칼립스에선 여름도 힘겹지만 진짜 무서운 건 겨울이다.
다들 몬스터를 피해 아지트를 옮기느라 식량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본격적인 겨울이 찾아오면 진짜 혹독한 생존경쟁을 하게 될 것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은 나와는 상관없는 얘기다.
다들 추위에 떨고 있을 때 나는 따뜻한 숲에서 지낼 테니까.
나는 오래된 책을 뒤적거렸다.
"대체 뭐라고 적혀 있는 거야?"
뭔가 식물에 대해 설명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하나도 알아볼 수가 없었다.
빠르게 페이지를 넘기니 묘한 지도가 눈에 띄었다.
이거 북쪽에 있는 산 아닌가?
만년설로 뒤덮여 있고 밑에 호수가 자리한 걸 보면 딱 맞는데?
"여기 근처 지돈가?"
확인해 볼 필요는 있었다.
혹시 몰라서 풍뎅이들에게 줘봤지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누군가의 영혼이 들어간 건 아닌가?
그럼 평범한 풍뎅이라는 건데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나도 정체를 숨기고, 니들도 정체를 숨기고."
옆에서 일하고 있던 풍뎅이들이 화들짝 놀라더니 내 눈치를 봤다.
뭐 사정이 있겠지.
나는 차원문을 열어 밖을 살폈다.
몇 명이 발광석을 들고 입구를 완전히 막았다.
덕분에 빠져나갈 틈이 보이지 않았다.
"독한 놈들."
사실 제일 독한 놈은 나다.
저놈들을 엿 먹이고 빠져나갈 궁리를 하고 있으니까.
"기다려서 던전이 사라지면 차원문은 어떻게 되나···"
양재대로 한복판에 덜렁 남는다는 게 내 추측이지만 확신은 금물이다.
베스트는 저들을 따돌리고 도망가는 거다.
"밖에 사람들도 좀 있을 텐데···"
나는 고민한 끝에 좋은 방법을 찾아냈다.
살인자의 심장소리를 크게 틀고 싶었지만 귀신소리를 들어서 면역이 되었을 것이다.
"이번에는 이걸 써야겠네."
얼마나 버티자 보자고.
< 독식은 즐거워 - 3 > 끝
< 독식은 즐거워 - 4 >
입구를 뚫는 건 어렵지 않다.
풍뎅이와 딩고로 하여금 발리스타를 쏘게 하면 된다.
근처에 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간담이 서늘해질 것이다.
"마비독으로 하나씩 눕혀도 되고."
그동안 마비독을 쓰지 않고 모아뒀기에 이젠 제법 양이 된다.
하지만 내가 고른 방법은 고추폭탄이었다.
입구 근처는 좁고 환기도 잘 안 된다.
고추폭탄이 위력을 발휘하는데 아주 좋은 조건이다.
물론 도망가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지만 그건 내가 원하는 바다.
"한 번 나가면 못 들어오니까···"
밖에서 기다리는 놈들은 내가 나가기 전까지 손가락만 빨 수밖에 없으니 더더욱 좋다.
또 몬스터 때문에 근처에 있지는 못할 것이다.
다시 말해 입구에서 담배를 피고 있는 저 놈들만 처리하면 된다는 말.
고추를 따서 폭탄을 제조하고 있는데 눈앞에 몇 명이 지나가는 게 보였다.
입구를 막은 놈들은 고압적으로 지시를 내렸다.
"배낭 다 털어보세요."
"아니 우린 그놈이 아니라니까요."
"그걸 여기서 증명하란 말입니다."
"우리가 왜 증명해야 되지?"
"자자, 조금만 양보합시다."
이런 식의 험악한 대화가 오갔다.
그래도 싸우진 않는 걸 보면 빨리 나가고 싶은가보다.
아니면 나에 대한 증오가 대단하거나.
"손님들 곧 나갑니다."
물론 그들의 테이블에 나갈 것은 루팅한 아이템이 아니라 고추폭탄이다.
나는 흥겹게 수액 코팅을 끝마쳤다.
이제 봄이 되면 이 방법도 쓰기 어려워지니 다른 수를 생각해야 한다.
"그거야 풍뎅이들이 알아서 해줄 테고···"
옆에서 듣고 있던 녀석들이 흠칫 하고 떠는 게 느껴졌다.
흠흠. 너무 압박을 줬나.
하여튼 게임을 시작해보자.
룰은 아주 간단하다.
고추폭탄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맡고 밖으로 도망치면 된다.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고 버티면 생지옥이 뭔지 체험하게 될 것이다.
설마 후각을 차단할 수 있는 능력자는 없겠지.
"준비하시고···"
나는 고추폭탄을 새총에 걸고 조준했다.
모든 손님에게 맛을 선보이기 위해선 위치선정이 중요하다.
역시 천장에 쏘는 편이 좋겠지.
황소고추의 분말이 확 쏟아지며 눈과 코에 들어가면 아주 황홀한 기분일 것이다.
나는 그걸 상상하며 손가락을 놓았다.
"쏘세요!"
뭔가 퍽, 하고 깨지는 소리가 났고 한 발을 더 쐈다.
분말이 사람들의 머리에 쏟아지자 즉각 반응이 나타났다.
"어?"
다들 코를 벌름거렸다.
담배연기 사이로 스멀스멀 스며드는 냄새가 아주 죽겠지?
콧잔등이 일그러지더니 기침이 아니라 신음이 튀어나왔다.
"흑!"
"허억!"
간접적으로 접해도 죽고 싶은 황소고추 분말을 뒤집어썼으니 고통은 오죽할까.
사람들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통을 호소했다.
"흐아악! 커헉!"
"포호, 호흡! 호! 부뤠에에에엑···"
식사가 마음에 드는 것 같으니 다행입니다, 고갱님.
사람들이 픽픽 쓰러졌고 나는 방독면을 착용한 채 던전으로 나갔다.
밟지 않도록 조심하며 지나가는데 누군가 내 발목을 덥석 잡았다.
"너, 너···"
혼미한 상태에서도 나를 포착하다니 대단한 놈이군.
나는 포상의 의미로 녀석의 손을 꾸욱 밟아주었다.
"흐아아어오컥!"
그는 희한한 비명소리를 질러댔다.
그러게 가만 누워 있으라니까.
이제 입구는 뻥 뚫렸다.
나는 적당히 간격을 재고 차원문을 열었다.
지금 상태는 던전의 입구인 차원문 밖에 내 차원문이 열린 상태다.
잠깐 노출되는 그 짧은 시간에 나를 발견하는 건 불가능하다.
방독면도 쓰고 있으니 얼굴도 못 보겠지.
좋아.
나는 두 차원문을 단숨에 통과했다.
이제 기다려도 되지만 다른 곳에 숨어 관찰하고 싶었다.
폭죽으로 시선을 끄는 게 좋겠군.
"몇 초면 돼···"
그 시간이면 나는 차원문에서 튀어나와 가까운 건물로 도망갈 수 있다.
나는 폭죽 두 개의 심지에 불을 붙이고 멀리 집어던졌다.
퍼퍼펑!
칠흑 같은 밤에 섬광과 불꽃이 우후죽순 튀어나오자 사람들이 짧게 탄성을 질렀다.
나는 그 틈을 타 차원문 밖으로 튀어나와 뛰었다.
내 존재를 눈치 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
.
개새끼 나오기만 해봐라.
이게 대다수 사람들이 품은 생각이었다.
누구든지 던전을 독식한 놈이 안에 있는 건 확실했다.
그렇다면 출구를 통해 나올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일부는 이런 생각을 가졌다.
아무도 모르게 던전에 진입해 다 쓸어간 놈이다.
그렇다면 아무도 모르게 나올 수도 있지 않을까?
사람들의 이목을 감쪽같이 속이는 것도 가능할 테고 말이다.
그래서 몇 명은 던전의 입구만 노려보고 있었다.
나오면 반드시 작살을 내겠다고 다짐하며.
하지만 그런 그들도 폭죽이 터지는 광경은 참지 못하고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워낙 화려했어야지.
타타타탁! 피유웅! 퍼펑!
대형 폭죽인지 격렬하게 섬광과 불꽃이 주변으로 피어올랐고 입구를 감시하던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그 몇 초 사이에 싹쓸이범이 사라졌음은 물론이다.
속았음을 깨달은 사람들이 주변을 살폈으나 성호는 저 멀리 도망가고 없었다.
현우와 헤어져 걷고 있던 소윤과 대호의 진로가 그와 우연히 겹쳐졌다.
소윤이 기척을 발견하고 신경을 곤두세웠다.
"오빠 잠깐만, 뒤에 누가 있어."
"···어디쯤이야?"
"저 가게 안에."
눈썰미가 좋은 그녀는 성호가 숨은 곳을 바로 알아챘다.
그녀는 한 마리 야수가 웅크리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어두움에도 옷차림이 비교적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그는 큰 키에 방독면을 쓰고 있었다.
배낭 위아래로 삐죽 튀어나온 활은 생존자의 베이스셋은 이런 것이다라는 걸 몸소 보여주고 있었다.
그녀는 방독면 남자를 바라보다 뭔가가 속에서 울컥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던전에서 고생하고 의심받았음에도 건진 건 아무것도 없다는 게 짜증이 났다.
'저 남자가 다 처먹었다 이거지?'
불현듯 화가 나는 건 인간이라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녀는 성격이 급한 만큼 행동도 재빨랐다.
대호가 말릴 새도 없이 그녀는 이미 성호에게 돌진했다.
빠르다.
성호는 그녀를 주의 깊게 보고는 있었으나 달려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성격이 급한 여자군.
롱나이프를 꺼낼까 했으나 그녀가 맨손이라는 걸 깨달았다.
'현우와 일행이니 거칠게는 못 하겠군.'
그렇게 생각한 성호는 몸을 웅크리며 바디샷을 쳐오는 그녀의 손을 막아냈다.
"헉."
소윤은 자신의 주먹을 이렇게 쉽게 막아내는 남자가 있는 것에 놀랍다.
어지간한 육체계 능력자들도 엄두를 못 내던 건데!
게다가 힘도 어지간히 세어서 그녀가 힘껏 주먹을 내질렀음에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 남자 강하다···
볼멘소리가 절로 나왔다.
"왜, 왜 그랬어요."
"뭘 말입니까?"
"혼자 다 먹고 도망가는 바람에 우리만 누명 뒤집어썼잖아요."
"2등은 원래 그렇습니다."
서바이벌 라이프 대부분의 이벤트가 그런 식이다.
"당신 대체 누구예요? 고인물이에요?"
"그랬으면 당신이 살아 있을까요?"
그녀는 입술을 잘근 깨물고는 빠르게 그의 가슴팍을 걷어찼다.
그 반동으로 주먹을 손아귀에서 빼내려는 생각이었다.
보통이라면 남자는 가슴을 걷어차이고 물러서는 게 정상이었다.
하지만 성호는 발목을 잡고 역으로 그녀의 배를 걷어찼다.
"흑!"
그녀는 붕 나가떨어져 배를 부여잡고 일어섰다.
잠시 관망하던 대호의 표정이 일그러진 것도 그 때였다.
"당신···"
"여기까지 합시다."
남자가 롱나이프를 뽑아들었다.
더 덤비면 칼을 쓸 수밖에 없다는 뜻.
동시에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자기가 공격하진 않겠다는 의사를 명백히 했다.
대호는 그를 공격하는 대신 배를 감싸고 일어서는 동생을 부축하는 편을 택했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곤 곧장 사라졌고 소윤은 배를 쓰다듬었다.
"저 남자 강하네···"
"배는 좀 괜찮아?"
"응. 그냥 밀린 거야."
"다행이다···"
그나저나 대체 뭐하는 사람이기에 가속 능력자인 그녀의 공격을 막은 걸까.
소윤은 비록 대단한 힘을 가진 건 아니지만 움직임을 가속해서 상대의 의표를 찌르는 데 능숙했다.
그런데 남자는 그녀의 공격을 대수롭지 않게 막아냈다.
이전에 순간가속 능력자를 만나본 적이 있나?
"오빠 진짜 신기하지 않아? 아무도 모르게 던전에 들어가서 몬스터를 다 죽이고 독식한다는 게 가능해? 그런 주제에 내 공격까지 막고?"
"눈앞에서 봤잖아. 가능하겠지."
"아니 내 말은, 그 남자 특성이 뭔지 모르겠다는 거야. 추가효과가 붙어도 특성의 그, 본질은 사라지지 않는 법이잖아."
"그렇긴 하지···"
대호도 그의 특성을 추측하기가 어려웠다.
사람들을 농락하며 던전에서 빠져나온 걸 보면 은신 계열 같기도 한데 동생을 손쉽게 막아낸 걸 보면 또 육체 계열 같고.
하여튼 카멜레온 같은 남자였다.
동생을 보니 그 남자에게 흥미를 가진 듯했다.
하지만 아포칼립스에서 정체를 모를 남자에게 흥미를 가지는 건 위험하다.
둘 다 그걸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동생은 여전히 아쉬운 듯 그가 사라진 방향을 계속 쳐다봤다.
처음 만난 남자에게 호감을 가진 건 아닐 테고, 강함에 대한 궁금증이겠지.
대호는 동생의 어깨를 두드렸다.
"언젠가 다시 만날 일이 있을 거야."
"오빠는. 그냥 궁금한 것뿐이야."
"알았어. 일단 아지트로 가자."
.
.
.
나는 옥상에 올라가서 혼자 중얼거리는 현우를 발견했다.
경매장에 코멘트를 입력하는 것 같았다.
"예. 그렇습니다. 누군가 던전에 선진입해서 싹 털어갔습니다. 몇 명이 호되게 당해 지금 죽인다고 찾아다니고 있고요. 아뇨. 물리적인 공격은 아닙니다. 무슨 CS캡슐 같은 걸 마셨다던데 정신을 못 차릴 정도랍니다. 예."
대화를 들어보니 정부 쉘터의 누군가에게 보고를 하는 것 같았다.
경매장을 켰지만 암호문으로 코멘트가 입력되어 대화 전체를 파악할 순 없었다.
"대통령 아니면 비서실장이겠지."
둘 외에 현우에게 명령을 내릴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현우는 불쑥 내 아이디를 언급했다.
"김밥조아는···글쎄요, 가능성은 있지만 그는 현재 경남에···예? 토공과 오리궁뎅이가 서울로 왔다고요? 아, 그럼 그도···"
이 아저씨들 정보 입수가 엄청 빠르네.
아니면 석현과 다정이 나 여기 있소 광고를 하며 돌아다니는 걸까?
현우는 몇 번 대답만 하더니 이상한 얘기를 꺼냈다.
"아, 검인씨의 쉘터 때문에 간 거로군요. 좀비 레이드에서 안전한 쉘터라···기대되는데요. 예. 인천 건에 대해서는 제가 가서 말씀드리려 했습니다만···간단히 요약하자면 보트피플입니다. 제가 본 숫자만 수백이 넘습니다."
좀비 레이드에서 안전한 쉘터?
인천의 보트피플 수백 명?
뭔가 중요한 얘기일 것 같아 차원문에 귀를 바짝 기울였다.
현우는 내가 엿듣는 것도 모르고 조사한 정보를 줄줄이 말했다.
"다수에게서 확인한 결과 중국 동부 해안의 원전이 방사능 사고를 일으킨 건 사실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 서부 해안가에 영향이 미쳤는지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예."
눈이 번쩍 뜨이는 정보였다.
중국의 동부 해안가에 수백 기의 원자력 발전소가 있다는 것 정도는 나도 안다.
그게 방사능 사고를 일으켰다니···
수백 명의 보트피플은 중국인들을 의미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걔네들이 인천에 왔다고?
"놀라운 건 그들과 말이 통한다는 점입니다. 부산에 상륙한 일본인들도 그렇고, 한국어를 따로 배운 것 같지는 않던데 말이 통하더랍니다. 예."
점점 더 놀랍군.
하여튼 외국인들이 한국 땅에 들어오고 있다는 건 분명했다.
자국 땅이 위험해서 그런가?
아포칼립스라서 그들을 쫓아낼 수도 없고 해서 정부 쉘터도 답답한 모양이었다.
"걔네들이 우리와 섞이기를 바라는 건 무리겠지."
국민감정도 상당히 험악한 편이라 뭐 얌전히 지낼 것 같진 않았다.
몬스터 사이에서 살아남기도 바쁜데 외국인들과도 싸워야 되는군.
현우의 말을 들어보니 정부 쉘터는 인천 앞바다를 잃는 게 부담스러운 모양이었다.
하긴,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바다니까.
그가 떠난 뒤 나는 경매장을 통해 다정을 불러냈다.
그녀는 몇 분 뒤에 응답했다.
―왜? 맛있는 거 구했어?
―아니. 뭐 물어볼 거 있어서. 대통령한테서 받은 임무가 뭐야?
―자세한 건 모르고 어디에 가 있으라고만 하던데.
―인천?
―그거 어떻게 알았어?
―방금 현우···김대위가 정부 쉘터와 대화하는 걸 엿들었거든. 전에 김해대대에 있던 사람이야.
―그래서?
나는 엿들은 것을 다정에게 설명했다.
그녀는 갑자기 화를 냈다.
―이 할아방탱이 그거 때문에 나를 보낸 거였어? 좀비 레이드가 안 일어나나 실험하려고?
―아직 폭발하진 마. 진상을 알아내야 하잖아?
―진상이고 뭐고 배검인 이새끼 조져야겠어. 실험하고 싶으면 지가 할 것이지 왜 나를 끌어들이고 난리야?
―아니 좀 참아···
검인이 좀비 레이드를 피할 방도를 생각해낸 건 놀라운 일이었다.
뭔지는 몰라도 다정이 가는 곳에 실험할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다.
워낙 강하니까 혹시 좀비 레이드가 일어나더라도 문제는 없을 거고.
다정의 입장에선 검인에게 놀아난다는 느낌을 받았겠지.
나는 겨우 그녀를 진정시켰다.
―나중에 패더라도 일단 정보를 얻어야지. 날 봐서라도 좀 참아.
―너 누드 보면 화가 좀 가라앉을 것 같은데?
뭐 이런 변태녀가 다 있나 그래.
―석현이한테 보여 달라고 해.
―너 내가 강제 다이어트 하는 거 모르지?
―갑자기 무슨 다이어트?
―맨날 누런 빤스 보니까 밥맛 떨어져서 그런다 왜.
토공은 내가 없으니 또 팬티만 입고 다니는 모양이다.
좋다는데 뭐 어쩌겠어.
나는 그녀를 다독였다.
―하여튼 일단은 해달라는 대로 해줘. 나중에 인천에서 이야기하자.
―인천은 갑자기 왜?
―거기 가보면 알 거야.
―이 능구렁탱이 할아방탱이랑 점점 닮아가네.
그런가?
나는 대화를 끝낸 후 인천으로 떠날 준비를 했다.
여기서 사냥하는 것도 좋겠지만 사태의 진상을 파악하고 싶었다.
"인천에만 수백 명의 중국인이라···"
얌전하게 지낼 확률은 거의 없으니 충돌은 필연적이었다.
같은 국적끼리 뭉쳐서 싸워대겠지.
말이 통하니 더 심하게 싸울 수도 있었다.
나 같은 경우엔 중국인들에 대해 딱히 편견을 가지고 있진 않다.
좆같은 놈은 어딜 가나 존재한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
"세상엔 좆같은 놈 천지야···"
분식집을 하다 보면 여러 손님을 접하게 되는데 진상이 상당히 많았다.
내가 자기보다 신분이 낮다고 생각해 막 대하는 미친 아저씨.
김밥은 자기가 쌀 테니 재료값만 받으라는 정신 나간 아줌마.
애기가 먹는 거는 돈 안 받아도 되지 않냐고 목청 높이는 애 엄마.
먹고 튀는 급식은 애교고 오뎅통에 기침을 하는 남자도 있었다.
실수라고? 난 그렇게 생각 안 한다.
"좋은 사람도 많았지."
하지만 좆같은 기억이 가슴에 깊이 남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서 믿을 수 있는 몇몇 사람만 챙기면 된다는 게 내 생각이다.
뭐 개똥철학이지만.
워우우우―
늑대인간의 울음소리가 들리자 부산스럽게 돌아다니던 사람들이 딱 멈췄다.
나는 차원문을 닫았다.
오늘은 잠이나 자자.
< 독식은 즐거워 - 4 > 끝
< 우리 집에 왜 왔니 - 1 >
11월 말부터 본격적인 겨울이 닥쳤다.
나는 새벽에 밖으로 나왔다가 찬바람이 부는 걸 느끼곤 동굴 안으로 되돌아갔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숲의 겨울보단 현실의 겨울이 훨씬 견디기 힘들었다.
"살던 곳이라서 그런가···"
그나마 냉기저항이 달린 목토시가 있어서 다행이다.
다른 사람은 지금쯤 뼛속까지 시린 추위를 맛보고 있을 것이다.
1월이 되면 진짜 추워지겠네.
그에 반해 숲의 쉘터엔 봄이 찾아왔다.
황량했던 풍경이 녹색으로 물들었고 동굴 앞의 공터에도 잡초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름 모를 새가 지저귀고 다람쥐가 돌아다니는 등 숲에 생명의 활기가 넘쳤다.
그리고 은색늑대 딩순이는 아직까지 쉘터 밖의 둥지를 점령하고 있었다.
"쟤는 우리 집에 왜 온 거야?"
딩순이의 목적이 딩고라는 건 나도 안다.
아마 번식을 위해서겠지.
하지만 적극적인 액션이 보이지 않았다.
짝으로 맺어지기 전에 구애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딩고가 아직 어려서 그런가?
컹! 컹!
창고정리를 하던 내 옆에 있는 딩고가 딩순이를 향해 짖었다.
님을 향한 애타는 마음이 보여서 더 짜증이 났다.
나는 철조망을 열고 딩고를 밖으로 보내주었다.
딩고는 순식간에 둥지로 달려가 딩순이를 덮쳤다.
발라당 자빠져 꽁무니 냄새를 맡고 핥아주고 난리도 아니다.
분위기만 보자면 이미 거사를 치른 커플의 그것이었다.
"···"
거 참 눈꼴사납네.
이쯤 되자 둘 사이에서 새끼라도 태어나지 않을까 하는 묘한 기대감이 싹텄다.
몇 마리 낳을 테니까 나한테 한 마리만 주면···
"아니지. 딩고가 아직 새끼인데."
발견할 당시를 되새겨보면 태어난 지 1,2개월 정도밖에 안 되었을 때였다.
즉 암컷과 물고 빨고 있는 저 수컷은 고작해야 생후 5,6개월 정도라는 말이다.
"보통 1년은 되어야 번식이 가능하지 않나?"
은색늑대는 다를지도 모르겠다.
뭐 어쨌거나 둘이 떨어질 수 없는 사이라는 건 분명해 보였다.
그런데 나와 딩순이의 사이는 그 정도까진 아니었다.
아침에 나와 기지개를 펴다 보면 시선이 맞는데 녀석은 항상 외면하곤 했다.
분명 서로의 존재를 느끼고는 있는데 달갑지는 않은, 아주 묘한 사이인 것이다.
"뭐 문제될 건 없지만···"
나는 쉘터 안에서 주로 생활하니까 불편한 점이 없었다.
하지만 딩순이는 그게 불편했는지 어느 날 사고를 쳐버렸다.
혹멧돼지 성체를 잡아온 것이다.
나는 새벽에 청소 하러 나갔다가 혹멧돼지 목을 물고 있는 딩순이를 보고 기겁했다.
은빛 털 곳곳에서 피가 비쳤다.
"야, 야, 괜찮냐?"
나는 황급히 동굴로 달려가 포션과 연고를 가지고 나왔다.
딩고는 옆으로 누워 곤히 자고 있었다.
철조망을 열고 딩순이에게 가니 녀석의 콧잔등이 살짝 주름을 그렸다.
아직까진 나를 경계한단 의미.
"너 치료해주려고 이러는 거라고."
내가 두 팔을 들어 올리자 딩순이는 머리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일단 해보라는 의미일까.
조심조심 다가가니 혹멧돼지의 성체가 눈에 들어왔다.
크군···
딩순이도 어지간한 덩치인데 혹멧돼지는 녀석보다 몇 배는 더 컸다.
간헐적으로 꿈틀대는 걸 봐서 아직 숨통이 끊어지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리고 딩순이는 피를 흘리면서도 혹멧돼지의 멱살을 끝까지 놓지 않았다.
나는 딩순이의 털을 들췄다.
녀석은 살짝 으르렁대다가 입맛을 다셨다.
아직까진 헷갈리는 모양이로군.
상처는 꽤 크긴 했지만 깊진 않았다.
연고를 잘 바르고 포션까지 먹이자 딩순이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고통이 희미하게 사라지는 희한한 느낌이겠지.
"좀 낫냐?"
그렇게 말하며 딩순이의 머리를 쓰다듬자 녀석은 갑자기 나를 혀로 핥았다.
우왓 피 냄새!
하지만 기분은 별로 나쁘지 않았다.
왠지 딩순이에게 인정받은 것 같아서.
혹멧돼지의 숨통이 완전히 끊어지자 딩순이는 멱살을 놓고 다른 곳에 가서 지켜봤다.
"나보고 어쩌라고?"
설마 혹멧돼지를 가지라는 건가?
죽은 짐승은 빨리 먹거나 피를 빼야 한다.
나는 딩순이가 먹기 위해서 혹멧돼지를 잡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녀석은 명백히 나를 보고 있었다.
"이거 선물이야?"
녀석은 머리를 돌려서 혹멧돼지에게 관심을 끊었다는 의사를 분명히 했다.
거 참 신기한 녀석이군.
인간한테 잘 보여서 뭘 얻겠다고.
"아니지···"
이거 혹시 딩고가 나를 따르고 있으니 잘 보여야 한다는 그런 건가?
그때 고개를 돌린 딩순이가 나를 슬쩍 쳐다봤다.
꽤 영악한 녀석이군···
"뭐 좋아."
날 시어머니처럼 생각하려면 그렇게 해라.
하지만 딩고는 너 같은 여자한테 줄 수 없다!
이게 아닌데.
나는 혹멧돼지의 뒷다리를 잡고 질질 끌어 쉘터에 넣었다.
예전의 나라면 엄두도 못 냈을 무게지만 스탯이 워낙 높아서 부담스럽지는 않았다.
손으로 털을 비비고 동굴에 들어가 딩고를 톡톡 두드리니 녀석이 벌떡 깨어났다.
혹멧돼지의 냄새를 맡은 거다.
녀석은 밖으로 뛰쳐나가 딩순이에게 달려갔다.
"아예 살림을 차려라 차려."
몇 개월 후면 그렇게 할지도 모르겠다.
딩순이는 그때까지 먹이를 가져다주며 기다리는 것이다.
이 무슨 역키잡이란 말인가.
나는 장비를 챙겨 혹멧돼지를 손질했다.
이렇게 무거운 녀석은 처음이라 거꾸로 매다는 게 힘이 많이 들었다.
"젠장. 너무 큰 걸 잡아왔다고 할 수도 없고."
크면 그만큼 고기도 많이 나올 테니 기뻐해야 한다.
피를 빼고 손질을 하고 있으려니 딩고와 딩순이가 침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설마 나를 보고 그러는 건 아니겠지.
하하하.
나는 2시간에 걸쳐 작업을 끝낸 뒤 내장에 피를 듬뿍 묻혀 녀석들에게 가져다주었다.
은색늑대 두 마리가 주둥이에 피를 묻혀가며 허겁지겁 먹어치웠다.
뒷다리 하나를 통째로 가져다주니 딩고가 먼저 주둥이를 들이밀었다.
딩순이는 연장자의 여유를 선보이며 어린 애인이 배부르게 먹을 때까지 기다렸다.
"이 녀석들···"
꽁냥꽁냥이 장난이 아니구만.
나는 왠지 모를 서러움을 느끼며 훈제에 들어갔다.
다리 하나는 다정의 몫으로 남겨둘 생각이었다.
요즘 경매장에서 말하는 거 보면 스트레스가 장난이 아닌 모양.
스트레스의 원인은 장원택과 배검인이지만 쉘터로 들여보낸 건 나니까 책임을 져야지.
"족발로 스트레스가 풀릴 진 모르겠지만."
안 되면 앞바다 나가서 참치 비슷한 거라도 잡아야 한다.
매일 참치 참치 노래를 부르니까.
나는 훈연기 앞에서 하품을 하다가 꾸벅꾸벅 졸고 말았다.
봄날이 따스했다.
.
.
.
토끼공듀와 오리궁뎅이는 혼자서 돌아다녀도 눈에 확 띄는 존재였다.
그런 그들이 붙어 다니니 자연스레 사람들의 시선이 모였다.
시선은 소문이 되었고 소문은 사람들을 끌어당겼다.
그리하여 둘이 가는 길은 언제나 몬스터와 인간들로 북적북적했다.
방금도 둘은 좀비 레이드를 막은 참이었다.
"아 짜증나! 왜 맨날 이 지랄이야?"
다정이 하이힐을 저 멀리 벗어던지며 짜증을 냈다.
반면 옆의 석현은 만면에 웃음이 넘쳤다.
드디어 분홍색 토끼 귀를 구했기 때문.
훌륭한 성능의 아이템으로 변하기까지 해서 애지중지했다.
부하 구울이 잽싸게 다정의 하이힐을 주워 와서 신겨주었다.
그녀는 옆의 석현을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하아아···넌 좋겠다."
"뭐가?"
"걱정거리가 없어 보여서."
"걱정은 마음에 있는 거야. 마음을 비우면 걱정도 없어져."
"그럼 넌 아무 걱정도 안하는 거야? 이렇게 지내다간 한도 끝도 없어. 앞으로 더 강한 몬스터들이 나올 텐데."
"나한테는 미래를 걱정하는 니가 이상하게 보여. 아직 닥치지도 않은 일을 왜 걱정해?"
"아니 그래야 대비도 하고 하지."
"장담하는데 그 대비의 90% 정도는 쓸모가 없을 걸? 계획은 세운 후부터 어긋나기 시작하거든."
"···"
뭐 이런 놈이 다 있지.
게임에선 똘기밖에 발산하지 않은 주제에 직접 만나보니 살짝 도인 같은 분위기도 존재했다.
토끼 귀만 아니었어도 제법 진지하게 들을 수도 있겠지만···
다정은 참지 못하고 분홍색 토끼 귀를 잡고 말았다.
"이게 토끼 주제에 건방지게 여왕님에게 훈계를 해?"
"아아아, 때 묻는다고."
티격태격하던 둘은 어느덧 월미도 선착장에 접어들었다.
저 멀리 영종도가 보였지만 아쉽게도 다리는 다 끊어진 상태였다.
거리는 1km정도.
보트로 노를 저으면 충분히 갈 수 있는 곳이다.
장원택의 말에 의하면 저 안에 중국인들이 꽤 많이 산다고 한다.
무슨 연유로 보트피플이 되어 여기까지 넘어온 걸까.
인천을 관통하다 보니 사람들이 중국인들과 싸우러 온 거냐면서 흥분하던데 왜 그러는 걸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골치가 아팠다.
역시 이런 건 성호에게 맡겨두는 게 제일이다.
그녀는 다리가 다 끊어졌다고 메모해두곤 석현의 엉덩이를 팡 쳤다.
"집에 가서 밥이나 먹자."
"응. 나 여기 빵 보관해뒀어."
"제발 팬티에서 뭐 꺼내지 좀 말고!"
"아야야."
석현은 다정에게 귀를 잡혀 어디론가 끌려갔다.
수십 마리의 구울들이 둘을 호위하듯 따랐다.
일행이 도착한 곳은 정부 쉘터에서 지정한 아지트였다.
이 아지트엔 좀비 레이드를 아예 무산시키는 특별한 장치가 되어 있다고 한다.
다정은 그게 뭔지 궁금해 건물 주위를 돌아봤으나 찾을 수가 없었다.
"검인이 그 녀석 쉘터에 처박혀 있으면서 이런 거나 연구했다 이거지···"
"나 걔 마음에 안 들어."
"나도 그래."
"그런데 붙어 있는 이유는 뭐야?"
"성호가 하라고 했으니까!"
다정이 주먹을 불끈 쥐며 포효했다.
"싫다고! 어떻게 작업이나 걸어볼까 속이 빤히 보이는 배검인이나! 예의바른 척하면서 나한테 밥값이나 하라고 주절대는 영감탱이나 다 짜증난다고! 두들겨 패고 싶어! 콱콱 밟아서 빌게 만들고 싶어!"
"그럼 그렇게 해."
"···뒷감당은 어떻게 하고?"
"언제는 그걸 걱정했었어? 걱정되면 내가 다 죽여줄게. 결국 정부 쉘터의 총기가 필요한 거잖아, 맞지?"
"그게 맞긴 한데···"
"다 죽이면 문제는 해결될 거야."
이를 드러내며 웃는 석현을 보고 다정은 복잡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얘는 또라이라서 진짜 저지를지도 모른다.
그녀는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짜증나는 점이 없진 않지만 성호의 얼굴을 봐서라도 참아준다."
"필요하면 언제든 말해. 나는 자살하면 되니까 상관없어."
"그, 그래."
둘이 높은 담장을 두고 시끄럽게 떠드는 사이 주변에 몬스터들이 몰려들었다.
좀비와 고블린, 오크 등이 다정의 부하 구울과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일단 주변부터 치우고 들어가자."
석현이 몬스터들에게 돌진했다.
얼마 후 주변은 깔끔하게 정리되었다.
둘은 3미터나 되는 담장을 넘어 주택 안에 들어갔다.
다정이 거실을 먼저 점령하고 드러누웠다.
"아아 배고파···"
"성호한테 달라고 하면 되지. 계약했다며?"
"그래야겠어."
그녀는 벌떡 일어나 암호문으로 성호를 호출했다.
마침 그도 보고 있었는지 얼마 후 다정이 히죽히죽 웃었다.
"내가 성호 땜에 산다 진짜."
"뭔데?"
"족발 풀세트야!"
이윽고 거실바닥에 족발 풀세트가 진짜 나타났다.
밑반찬과 소스, 비빔국수와 콜라까지 완벽한 세트였다.
양도 엄청나서 공룡이라도 잡은 건 아닌지 착각할 지경.
석현은 뜨악한 눈으로 세트를 바라봤다.
"분식집이 아니라 족발집 한 거 아냐?"
"진짜 감격이야. 이거 되게 만들기 힘들었을 건데."
다정이 포장을 풀며 싱글벙글 웃었다.
잔뜩 쌓였던 스트레스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약한 주제에 멧돼지 잡느라 힘들었겠네."
석현이 그녀의 앞에서 손가락을 천천히 흔들었다.
"아직 모르네. 성호 걔 나보다 강해."
그의 말에 다정이 흠칫했다.
"토공 너보다 강하다고?"
"서울까지 올라오는 동안 같이 싸웠거든. 단순 공격이나 방어는 나보다 약할지 몰라도 종합적인 면에선 우위야. 난 성호하고 1:1로 붙으면 자신 없어. 계속 죽을 거야."
"···진짠가 보네."
"먼저 만났으면서도 몰랐어?"
"아니 같이 싸울 일이 없으니까···"
말꼬리를 흐리는 다정.
자기한테 보여주지 않은 것을 토공에겐 다 보여줬다고 생각하니 질투심이 일었다.
임무고 뭐고 좆까라 하고 성호나 따라다닐 걸 그랬나?
그녀는 툴툴거리며 젓가락을 들었다.
그때 손님이 왔다.
구울들이 시끄럽게 굴었고 다정이 나갔다마 표정을 일그러트리곤 돌아왔다.
배검인과 장원택이 온 것이다.
둘은 족발 풀세트를 보곤 눈이 휘둥그레졌다.
"대체 족발을 어떻게···?"
놀라는 장원택과 달리 검인은 젓가락을 가져왔다며 차려놓은 밥상에 달려들 기세였다.
참다못한 다정이 쌍심지를 켜곤 그에게 드롭킥을 날렸다.
"오늘 너 죽고 나 살자!"
"꽥!"
.
.
.
"귀가 왜 이리 간지럽지?"
나는 인천의 남부 주택가에 숨어들었다.
여기는 서울과 분위기가 달랐다.
몬스터는 상당히 많았지만 사람들은 왠지 위축된 것처럼 보였다.
잠시 밖을 쳐다보고 있으려니 배낭을 메고 몬스터에게서 도망가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움직임을 보면 레벨은 낮은데···"
기껏해야 10레벨도 안 될 것 같았다.
몬스터가 너무 많아서 상대하기가 버거운지도 모른다.
나는 5층짜리 복도식 아파트의 2층에 자리를 잡았다.
벽에 여기저기에 금이 가 있어 위험해 보였지만 하룻밤만 지내면 충분하다.
짐을 풀다 보니 위층에서 후다닥 달리는 소리가 들렸다.
위에 누가 있나보군.
입구를 가구로 막는데 누군가 창문으로 나를 지켜보는 게 느껴졌다.
"거 참···"
나는 내로남불형 인간이라 누가 나를 엿보는 건 좋아하지 않는다.
아지트를 옮길 생각으로 짐을 싸고 나가니 중년의 남자가 계단으로 사라졌다.
위험해 보이진 않지만 귀찮은 일이 벌어지기 전에 사라지는 게 좋겠지.
거리로 나서는데 느닷없이 화살이 날아들었다.
"흡!"
나는 화살을 간신히 피하고 날아온 쪽을 노려봤다.
원룸 건물 테라스에서 남자 세 명이 당황해선 자기들끼리 떠들어댔다.
들으나마나 피했다느니 또 쏘라니 따위의 시시껄렁한 말이겠지.
"새끼들 짜증나게 구네."
몬스터를 불러서 죽이고 싶었지만 아지트 확보가 먼저였다.
나는 놈들의 위치를 확인한 다음 건물의 창문과 입구가 보이는 건물로 이동했다.
저녁이 되면 그런 짓을 하지 말아야 했다는 걸 깨닫게 해줄 참이었다.
무장을 챙기는데 누군가가 계단으로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왠지 발소리가 조심스럽군.
나는 그가 올라오길 기다려 재빨리 위에서 덮치곤 롱나이프를 들이댔다.
"사, 살려주세요!"
여자···?
< 우리 집에 왜 왔니 - 1 > 끝
< 우리 집에 왜 왔니 - 2 >
족발의 양은 많았고 덕분에 검인과 장원택까지 식사에 낄 수 있었다.
일단은 석현만 제외하면 그들은 한솥밥을 먹던 사이인 것이다.
검인은 연신 족발의 야들야들함에 감탄하며 먹성을 숨기지 않았다.
젓가락을 쥔 다정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저렇게 눈치가 없어서야···
장원택은 젓가락을 놓고 일어서서 창가에 몸을 기대었다.
"누가 보내줬는지 참으로 친절한 사람이군요. 얼마 줬습니까?"
"100포요."
"100포인트라···멧돼지를 사냥할 수 있는 터전과 많은 물자를 가진 사람이겠군요."
"더 묻진 마세요. 별로 안 좋아하니까."
"다정씨가 그렇습니까, 아니면 그 사람이?"
"둘 다요."
다정이 웃자 장원택은 입을 다물었다.
대신 그는 놀라운 방법으로 의사를 전달했다.
―듣기만 하십시오. 김밥조아가 지금 여기 와 있습니까?
"···"
다정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할아방탱이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리고 있었다!
특성이 뭔지 궁금했는데 텔레파시였던 것이다.
그건 그렇고 성호가 여기 왔다는 건 어떻게 알았을까?
그녀가 눈알을 굴리는 사이 상황을 파악한 장원택의 텔레파시가 이어졌다.
―맞나보군요. 내겐 여러 경로로 들어오는 정보가 많지요. 그렇다고 오해하진 마십시오. 나는 입이 무거운 사람입니다.
다정은 대답하는 대신 전장을 누비는 기병처럼 여러 반찬을 뒤적거리는 검인의 젓가락을 딱 막았다.
"대체 뭐하는 거야? 하나만 딱 정해서 집으라고. 뒤적거리지 말고."
"아니 맛있는 게 많아서···"
검인은 차가운 말에 눈치를 보며 김치를 집어갔다.
하여튼 마음에 안 드는 놈은 뭘 해도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다.
그녀의 머릿속에 다시 텔레파시가 들어왔다.
―불쌍한 검인씨가 한 소리 들었군요, 허허. 내가 뭘 원하는지는 다정씨도 잘 알고 있을 겁니다. 그를 만나는 거죠. 내일 밤 늑대인간이 울 때 월미도 선착장에서 보잔다고 전해주십시오. 참고로 말하자면 그도 나를 보고 싶을 겁니다.
다정은 그의 뒷모습을 빤히 쳐다봤다.
그녀의 시선을 눈치 챈 검인은 갑자기 불안해졌다.
왜 대통령에게 관심을 가지는 걸까?
망상이 폭주한 나머지 족발이 넘어가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석현은 식사를 끝마치고 일어서서 밖으로 나갔다.
대통령이 뒤돌아서며 말했다.
"석현씨는 오랜만에 만났는데 인사도 없군요."
"젊다고 해서 먼저 인사하란 법은 없으니까요."
"이런 실례. 이 나이가 되어서 높은 직위에 있다 보면 가끔 실수를 하곤 합니다. 내가 먼저 인사드리지요."
한 때 대통령도 했던 사람이 일개 국민에게 고개를 숙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석현은 별 감흥이 없는 얼굴이었다.
"그래서 여기 온 이유는 뭐죠?"
"겸사겸사죠. 테스트도 하고 현장 확인도 하고. 아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저 바다 너머의 섬엔 중국인이 꽤 많습니다."
"중국인이 여긴 왜···?"
"그 이유는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일단은, 외부인이니까."
석현은 입을 다물었고 장원택이 능글맞게 권했다.
"어떻습니까. 지금이라도 쉘터에 들어오면 모든 걸 가르쳐드리겠습니다."
그 말이 나오자 다정이 쌍심지를 켰다.
"뭐야, 나한테는 왜 말 안 해줬어요?"
"원래 잡은 물고기에게는 소홀하게 되는 게 사람 심리 아니겠습니까."
"내가 물고기로 보여요?"
"가물치로 보이는군요. 자칫 잘못하면 어항을 박살낼 수도 있는 가물치."
"그런데 날 이따위로 대해요?"
"저런. 먹이를 먹으러 들어오지 않았습니까? 아직 배가 고픈 것 같으니 어항을 부술 일은 없다고 생각했지요."
그녀는 이 할아버지에겐 말로 당해낼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하긴 대한민국 정치권력의 정점에 오른 사람인데···
겉으로는 인자한 노인처럼 보이지만 속엔 구렁이가 백 마리쯤 들어 있을 것이다.
성호도 그렇고 세상에는 내심을 보이지 않는 놈이 참 많다.
그녀가 입술을 삐죽이는데 밖에서 이범석이 들어왔다.
장원택은 무슨 말을 들었는지 만면에 웃음을 지었다.
"테스트는 성공적입니다. 총 8명의 인원이 모였는데도 좀비 레이드는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훌륭합니다, 검인씨."
배검인은 배에 힘을 넣고 어깨를 잔뜩 세웠다.
그러나 그가 원하던 다정의 눈길은 받을 수 없었다.
뭐가 그리 불만인지 볼을 부풀리곤 딴청을 피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 모습까지 예뻐 보이는 건 착각일까.
"이제 첫 걸음을 뗐다고 할 수 있겠죠."
"맞는 말입니다. 새로운 정부를 위해 다 같이 노력하십시다. 다정씨도 도와줄 거지요?"
장원택이 물었으나 그녀는 고개를 휙 돌린 채 아무 말도 않았다.
둘이 나간 뒤 검인이 말했다.
"다정이 너한텐 따로 일이 있을 거야. 이 아지트에 가라는 건 표면적인 임무였다는 거지."
"아는 척 그만해."
"아는 척이 아니라 진짜인데···뭐, 그런 임무를 아무에게나 알려줄 수는 없는 거니까. 물론 넌 아무나가 아니지만 누가 엿들을 수도 있잖아, 안 그래?"
검인이 석현을 흘깃 쳐다보니 아직까지 족발을 먹고 있었다.
"그거 되게 질겨서 맛이 없던데···"
그렇게 처먹어놓고 뭐?
화를 눌러 참고 있던 다정이 차갑게 말했다.
"시끄럽고 꺼져."
검인은 흠칫하곤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육체강화 특성을 다른 것으로 바꾸었기에 여기서 옥신각신 해봐야 그만 손해다.
그는 재빨리 달아났고 다정이 하이힐을 집어던지곤 씩씩거렸다.
"하여튼 찐따나 할아방탱이나 마음에 드는 놈이 없어."
"장원택은 왜?"
그녀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특성이 텔레파시였어. 성호 좀 만나게 해달라고 그러던데."
"거절했어야지."
"자기를 만나길 원할 거라고 해서."
"···그래? 성호가 무슨 소리를 듣기 전에 내가 다 죽이는 편이 좋겠어."
석현이 일어나려 하는 바람에 다정은 그를 말려야 했다.
확 엎어버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여기서 그럴 순 없었다.
"잠깐만 기다려 봐. 일단 이야기는 들어보고 죽여도 늦지 않아."
"넌 생각이 너무 많아. 가끔은 모든 걸 잊어버리고 행동해야 할 때가 있는 거야."
"그게 지금은 아니야. 아 진짜, 날 정상인으로 만들지 말라고. 엎어버리고 싶은 건 나도 똑같으니까."
그녀의 얼굴이 슬슬 달아오르자 석현이 부추겼다.
"내면의 화를 받아들여. 악마를 깨워···"
"개소리 닥치고 앉아."
석현은 말 잘 듣는 어린애처럼 앉았다.
구울이 하이힐을 가져왔고 다정은 그의 주위를 또각거리며 걸었다.
"이번 일만 끝나면 성호가 내 다리 붙잡고 사정해도 쉘터에서 떠날 거야. 헛소리 들어주기도 지쳤어. 이젠 끝이라고."
"잘 생각했어."
"그리고 니들하고 붙어서 안 떨어질 거니까 그리 알아. 성호가 도망가려고 하면 잡는 거야, 알겠지?"
이 대목에서 석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도망가는 성호는 못 잡아."
"한 번 잡은 적 있거든?"
"잡혀준 거지. 차원문 안에 들어가면 땡인데 어떻게 잡을 거야?"
진짜 그런가?
말문이 막힌 다정은 괜히 석현의 어깨를 체중으로 꾹 눌렀다.
"···하여튼 같이 다니는 거야, 알겠지? 정체가 드러나면 안 되니 어쩌니 좆까라 그래. 덤비는 놈들 다 죽여 버릴 테니까."
"멋진 생각이야."
석현이 엄지를 척 세웠다.
.
.
.
살려달란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목에 들이댄 롱나이프를 치우지 않았다.
"왜 여기 왔습니까?"
"호, 혹시 도와주실 수 있을까 해서요···"
"뭘요?"
"저기 밖에서 돌아다니는 세 남자가 저를 죽이려고 해요···"
"진짭니까?"
"네, 네!"
그녀는 격렬히 고개를 끄덕였으나 나는 긴장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아포칼립스에서 미끼를 내세워 사냥감을 낚는 것은 흔한 일이다.
미끼는 주로 여자가 맡는데, 경계심을 누그러뜨리는 데에 적당하기 때문이다.
외모로 구워삶아 배낭을 털고 방치하면 딱 아닌가.
전통적인 아포칼립스에선 죽이겠지만 지금은 살인자 시스템이 있으니까.
여기선 역으로 미끼를 던져야겠군.
나는 롱나이프를 치우고 난봉꾼처럼 그녀의 턱을 손으로 받쳤다.
"당신을 보호해주면 뭘 줄 겁니까?"
"뭐, 뭘 원하세요···?"
겁에 질린 눈과 목소리.
이 여자가 연기를 하고 있다면 정말 대단한 수준이었다.
나는 눈으로 그녀의 불룩한 가슴을 가리켰다.
왠지 가짜 가슴 같은데?
"살짝 구경 좀 해봅시다."
"···"
그녀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지만 가슴에 손을 가져갔다.
무척이나 가까운 거리.
그리고 나는 방심하고 있다.
본색을 드러내기에 좋은 기회 아닌가?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가 품에서 벼락같이 미스릴 나이프를 꺼내들어 나를 찔렀다.
그러나 내가 허공에 띄운 차원벽에 막히고 말았다.
충격에 미스릴 나이프가 떨어졌고 그녀는 크게 놀란 듯 입을 벌렸다.
"어···?"
"어는 무슨."
나는 발로 그녀의 손을 차버리고 배에 주먹을 꽂았다.
"어흑!"
"밖의 세 놈도 일행이지? 잠시 자고 있어."
마비독침을 그녀의 허벅지에 찌르자 그녀는 소리도 내지 못하고 굳었다.
이런 곳에 마비독을 쓰면 안 되는데.
요즘 독개구리가 시름시름 앓고 있어서 독을 얼마 모으지 못했다.
"개구리 잡으러 가야 하는데···"
나는 그녀를 엎드리게 한 뒤 창문을 반쯤 열고 비명소리를 냈다.
"으헉!"
이제 세 놈은 여자가 나를 제압한 것으로 착각하고 위로 올라올 것이다.
급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나는 재빨리 갈고리를 옥상에 던져서 고정시켰다.
그리고 곧장 옥상으로 올라갔다.
문은 하나고···됐어.
"얘 뭐야? 어떻게 된 거야?"
"그 새끼 옥상으로 올라갔어!"
"빨리 올라가!"
여기서도 나는 그 새끼로 불리는군.
나는 녀석들이 바쁘게 뛰는 것을 듣고 호루라기를 꺼내 길게 불었다.
삐이이익―
주변을 지나다니던 좀비와 구울들이 건물로 몰렸다.
여자는 죽은 목숨이고 남자들도 죽는다.
왜냐하면···
"야이 개새끼야!"
"너 죽이고 내가···"
막 옥상으로 뛰쳐나오려 하던 세 명은 내가 전개한 차원벽에 부딪치고 말았다.
"씨발 이거 뭐야!"
"공중에 뭐가 있어!"
그들이 차원벽을 미는 순간에도 몬스터들은 건물로 올라오고 있었다.
남자들의 안색이 안 좋아졌다.
거긴 창문도 없지?
블링크가 없으면 다 죽은 목숨이다.
내가 쪼그리고 앉아 있으려니 남자 셋이 거세게 차원벽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거기 있으면 너도 죽어 임마!"
"혀, 협상하자! 협상!"
"이거 빨리 열라고!"
미안하지만 나는 걱정 안 해도 돼.
이윽고 구울들이 올라왔는지 남자 셋의 버둥거림이 격렬해졌다.
차원벽에 얼굴을 문대고 거의 울다시피 비는 놈도 있었다.
"제, 제발! 다시는 이런 짓 안할게!"
"이거 열어주시면 뭐든 하겠습니다 형님!"
새끼에서 형님으로 지위가 올라갔다.
하지만 나는 차원벽을 해제하지 않았다.
행동에 대한 책임을 져야지.
"잘 가라."
내가 손짓을 하자 남자들이 뒤를 돌아보곤 거의 까무러쳤다.
"흐아아악!"
"오, 오지 마!"
그런다고 구울들이 안 오겠냐.
차원벽 안에서 처참한 사투가 벌어졌다.
남자 셋은 좁은 공간에서 최대한 반항했지만 구울들을 이겨내기엔 역부족이었다.
"끄아아아!"
구울이 휘두른 손톱에 한 남자의 손이 날아갔다.
피가 쫙 뿌려져 차원벽에 묻었다.
두 남자는 육체강화가 특성인지 구울의 머리가 홱 돌아갈 정도로 두들겨 팼으나 그것뿐이었다.
올라오는 좀비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흐읍!"
남자는 구울의 양 팔목을 잡고 버텼으나 다른 좀비에게 어깨를 깨물리고 말았다.
"아아악!"
단말마의 비명소리가 몰아쳤다.
나는 그제야 차원벽을 거두고 옆 건물 옥상으로 이동했다.
구울 한 마리가 나를 향해 뛰어올랐으나 롱나이프를 휘두르니 머리만 남겨두고 바닥에 철퍽 떨어졌다.
좀비들이 구울의 몸을 향해 달려들었다.
여기도 못 있겠구만.
나는 몬스터들이 사라지길 기다려 죽은 자들의 배낭을 챙겨서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
.
.
네 명이 나 때문에 죽었다.
어쩌면 내겐 얌전히 배낭을 내놓고 그들에게 비는 선택지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들도 살인자가 되고 싶진 않을 테니까 죽이진 않았겠지.
하지만 나는 그 선택지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멍청이들···"
아포칼립스에서 약탈자로 행세하는 건 매우, 매우 위험하다.
가만히 배낭을 내놓을 놈은 없기에 필연적으로 전투가 동반된다.
나 같은 고인물이 아닌 바에야 거듭된 전투는 죽음으로의 지름길이다.
몇 번이야 운 좋게 이겨 전리품을 차지한다 해도 계속 이기리란 법은 없다.
언젠가는 다치고 패배한다.
그리고 결과는 죽음이다.
좋은 선택은 숨고 도망가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잘못된 선택지를 골라 죽음을 맞았다.
대한민국 인구가 계속 줄어가는군.
"하아암."
지나간 일이니 밥이나 먹자.
차원문을 여니 딩고가 빠져나왔다.
녀석은 내 소매를 물고 잡아당겼다.
갑자기 왜 이러는지 모르겠네.
동굴에 들어가 보니 딩순이가 철조망 근처에서 헉헉대고 있었다.
녀석의 주위엔 고블린의 시체로 가득했다.
다 죽인 거구나.
"···들어올래?"
커다란 은색늑대를 쉘터 안으로 들이는 건 나로서도 큰 부담이었다.
하지만 왠지 괜찮을 것 같았다.
녀석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배를 드러냈다.
복종의 표시.
철조망을 열자 딩고가 달려가 딩순이를 데리고 왔다.
녀석들은 내 앞에 엎드리더니 뒹굴어 배를 드러냈다.
"얌전히 지내야 한다."
그나저나 쉘터가 좁아서 큰일이었다.
딩고는 몰라도 딩순이가 뛰어 놀 정도는 되지 않는다.
뭐 하루에 한 번 철조망을 열어 외출시키면 되겠지.
내친김에 나는 딩순이가 차원문을 통과할 수 있는지 테스트했다.
"여기, 여기로 나와."
녀석은 나를 따라 원룸으로 나왔다.
크군···
좁은 곳에서 봐서 그런지 엄청 커보였다.
나는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고 안으로 들여보냈다.
앞으로 의심받을 일이 있으면 딩순이를 데리고 와서 테이머로 위장해야겠다.
딩고는 아직 덩치가 작으니까.
혼자서 밥을 먹으며 경매장을 살피니 마침 다정이 나를 부르는 품목이 눈에 띄었다.
장원택이 나를 보고 싶단다.
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고?
"···아니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장원택이라면 알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그의 주위엔 사람도 정보도 많으니까.
아마 강동구에 나타난 던전을 깬 놈이 나라는 것도 알 것이다.
"···만나볼까."
나 역시 그를 만나서 할 얘기가 좀 있다.
하지만 모습을 드러내고 싶진 않았다.
시간과 장소를 내가 정해도 되냐고 물으니 벌써 정해져 있단다.
"늑대인간이 울 때 월미도 선착장이라···"
이건 내가 거부하지 않을 거라고 믿고 있단 말이다.
동시에 내 실력을 보고 싶다는 뜻이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그의 장난에 어울려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는 급할지 몰라도 나는 아니었다.
―거절한다고 전해 줘.
―잘 생각했어. 그 할아방탱이 텔레파시 능력자야. 혹시 나중엔 생각도 읽을지도 몰라.
텔레파시 능력자라고?
이거 더 흥미가 이는데.
어떻게 접촉하면 상대에게 의사를 전달할 수 있는지 궁금했다.
권씨처럼 악수라도 해야 되나?
그녀가 계속 코멘트를 입력했다.
―그리고 나 이번 일만 끝나면 쉘터고 나발이고 나갈 거야, 알았지?
젠장, 벌써 싫증이 났나.
뭐 쉘터의 위치와 구조에 대해선 대충 알아냈으니 상관없다.
호랑이 한 마리와 여우 두 마리가 한 집에 있는데 다툼이 없을 리 없다.
언젠가는 균열이 생길 것이고, 나는 기회를 엿보다가 잽싸게 챙기면 된다.
쉘터가 굳건하게 버티면?
"그때는 또 다른 수가 있지."
방법은 많다.
나는 그녀가 입력하는 코멘트를 보다가 입안의 밥을 뿜고 말았다.
―이번에 나가면 너 나하고 찐한 시간 좀 보내야겠어. 못 도망가게 도장이라도 찍어둬야지.
무슨 도장을?
< 우리 집에 왜 왔니 - 2 > 끝
< 우리 집에 왜 왔니 - 3 >
다행히 다정의 말은 내게 박고 싶다는 게 아니었다.
그냥 붙어 다니고 싶단다.
정부 쉘터엔 귀찮고 짜증나는 놈들 천지라 더 이상 있고 싶지 않다고.
―하나같이 음흉하게 웃으면서 날 어떻게 해보려는 놈들 투성이야. 두들겨 팰 수도 없고 여긴 지옥이라고. 그러니까 날 좀 꺼내줘. 다 죽여 버리기 전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나보다.
―당장 나오라고 말하고 싶지만 조금만 기다려줘. 대통령 할아버지 얼굴이나 좀 보게.
―안 만난다며?
―그렇게 믿게 만들어야지.
―아항. 대충 알았어. 사실 나보다는 토공이 문제야. 내가 안 막았음 경고도 없이 공격했을 걸? 상성이 안 맞아, 우리하고 정부 사람들은.
석현이 그랬단 말이지···
철사병이 가라앉은 후에는 여러모로 시끄러워질 것 같았다.
나는 마지막으로 다정에게 참치를 잡아주겠다고 약속한 후 경매장을 나왔다.
"후···"
대통령이 나를 만나고자 하는 이유는 대강 짐작이 갔다.
그는 사람을 모으고자 한다.
어떻게든 인재를 모아서 세력을 키우고 문명을 일구는 게 목적일 것이다.
그래서 잘 됐다 치고, 그 후엔?
대통령도 해본 사람인데 자잘한 권력 따위에 연연하지는 않겠지···
하지만 확신을 할 순 없었다.
"텔레파시 능력을 발전시켜 능력자들을 배후에서 조종하거나···"
영화를 많이 봤나.
그가 얌전히 은퇴해 소소하게 살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정치인을 믿을 수가 있어야지···"
사람은 기본적으로 믿을 존재가 못 된다.
아포칼립스 상황에선 더더욱.
그래도 일단은 보기는 해야겠지.
좀비 레이드가 일어나지 않도록 한다는 그 저택도 신경이 쓰였다.
나는 다정이 말해준 위치를 지도에 기입한 후 쉘터에 들어갔다.
요즘 신경 쓰이는 일이 생겼다.
돌원숭이 몇 마리가 쉘터 주위를 돌아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녀석들은 나를 보자마자 끼긱! 하고 나뭇가지 위에서 방방 뛰었다.
덩치도 예사 덩치가 아니고 돌을 던져서 상대하기 짜증나는 몬스터였다.
"지나가는 길이겠지?"
제발 그렇길 빈다.
그러나 녀석들의 숫자가 차근차근 늘고 있었다.
종국에는 30,40마리나 되는 대집단으로 변모해 돌멩이를 던져댔다.
젠장할 놈들.
물론 내가 가만히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보이는 족족 활을 쏘아 죽였지만 녀석들은 기민하게 대응했다.
내가 시위를 당기면 바로 나무 아래로 떨어지는 것이다.
동작이 어찌나 빠른지 맞추기가 쉽지 않았다.
발리스타로 한 놈을 죽이는 성과도 올렸지만 그 후엔 성과가 없었다.
끼기긱! 끼긱!
녀석들은 명백하게 학습하고 있었다.
뒤늦게 자리를 잡은 동료에게 활과 발리스타가 위험하다고 가르쳐주는 듯했다.
빌어먹을 놈들.
"저걸 어떻게 다 죽이나···"
끼긱!
지금 이 순간에도 녀석들은 쉘터를 향해 돌멩이를 던져댔다.
창고가 튼튼한 만큼 별 피해는 없지만 공터로 나가지를 못해 스트레스가 쌓였다.
딩순이조차 다굴을 맞아 몸 여기저기에 멍이 든 상태였다.
동물이 아니라 몬스터라서 투척력이 상당했다.
잘못 맞았다간 뼈가 부러진다.
쪽수에 장사 없구만.
"저 자식들 대체 우리 집에 왜 온 거야."
봄이 되어서 서식지를 옮길 타이밍인가?
하여튼 다 죽여 버려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싸우면 이길 수 있는데 피해 다니니 원."
내가 나무를 잘 타는 것도 아니라서 녀석들은 요리조리 피하면 그만이다.
쉘터가 훤히 드러나 있으니 돌멩이 던지기도 아주 재미날 테고.
이거 외통수에 걸렸다.
총으로 쏴죽일 수는 있지만 원숭이 따위에게 쓰긴 좀 그렇지.
"155발···아껴야 돼."
그렇다면 저 염병할 놈들을 족칠 방법은 뭐가 있을까.
"대장부터 족치자."
돌원숭이는 덩치가 크고 강한 수컷이 대장을 맡는다.
후방에 빠져 있으면 다른 원숭이들의 존경을 받지 못하므로 전방에 나서서 적극적으로 공격한다.
녀석을 죽여야 한다.
나는 겨우내 애지중지 관리한 K2소총을 가지고 나왔다.
5.56mm탄은 겨우 15발.
신중히 조준해서 한 방에 대장을 죽여야 한다.
죽이면 돌원숭이 무리는 혼란에 빠질 것이다.
그 틈에 너네 둥지를 박살내주마.
원숭이라서 루팅할 건 없고 불을 질러버리면 되겠지.
"원숭이라서 먹을 수도 없고···"
비인간형인 그리폰은 아주 잘 먹었지만 인간형 몬스터는 먹기가 좀 꺼려진다.
나는 장비를 챙겨 나와 창고 뒤에 숨었다.
타타탁!
돌원숭이들이 던진 돌멩이가 창고에 맞아 튕겨져 나갔다.
"이거 영점도 안 맞췄는데···"
탄이 워낙 없으니 이대로 쏘는 수밖에.
나는 돌멩이 투척이 뜸한 틈을 타 재빨리 총구를 내밀고 대장을 향해 쏘았다.
탕!
나무에 앉아 있던 새들이 우수수 날아오르며 덩치 큰 원숭이가 바닥에 툭 떨어졌다.
녀석은 이마에 관통상을 입고 절명했다.
끼기기긱!
돌원숭이 무리는 대장을 잃고 혼란에 빠져들었다.
자기들끼리 발악하며 때로는 옆에 있는 놈을 공격하기도 했다.
나는 지체 없이 롱보우로 화살을 쏘았다.
두어 놈이 그렇게 쓰러지고 나니 돌원숭이들이 도망가기 시작했다.
워우우우―
딩순이와 딩고가 공터에 나와 멋진 하울링을 선보였다.
원래 군대가 패퇴할 때 가장 큰 피해가 난다고 하던가?
녀석들과 함께라면 돌원숭이 태반을 박살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가자."
철조망을 열어주자 두 녀석이 쏜살같이 뛰쳐나가 돌원숭이들을 추적했다.
그래봐야 나무 위에 있는 녀석들을 잡는 건 무리지만 내가 도와주면 된다.
멈춰서 활을 쏘자 돌을 던지며 늑대를 농락하던 원숭이 한 마리가 툭 떨어졌다.
잔뜩 화가 난 딩순이가 달려들어 원숭이의 머리를 물고 맹렬히 흔들었다.
우드득―
목이 부러지는 끔찍한 소리가 났다.
우리 셋은 그런 식으로 돌원숭이 무리를 추적해 열 마리 이상을 사냥했다.
둥지까지 추적해서 20마리를 잡았고 마침내 새끼들을 목전에 두었다.
딩고와 딩순이는 새끼들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한 다음 나를 쳐다봤다.
원숭이 새끼라서 나름 귀엽지만···그래도 몬스터일 뿐이다.
언젠가 나를 공격할 적.
"전부 죽여."
크르릉!
둘이 새끼들을 죽일 동안 나는 둥지를 루팅했다.
별거 없으리란 추측이 완전 빗나갔다.
"이런 건 어디서 구했지?"
낡은 가죽배낭이 둥지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새끼들이 물고 뜯고 해서 볼품은 없었지만 내용물은 그대로였다.
"가져온 지 얼마 안 됐다는 건데."
난폭한 새끼들의 악다구니에 가죽배낭이 오래 버틸 리가 없다.
매듭을 풀어보니 나이프와 솥, 망토 등 주인이 여행자임을 드러내는 물건이 나왔다.
그리고 지도.
알아볼 수 없는 언어로 써진 지도책이 나왔다.
"이 근처인가보네."
만년설이 쌓인 북쪽 산과 호수가 있는 걸 보면 확실했다.
지도는 그 외에도 여러 지형과 식생, 동물의 분포까지 자세히 설명하고 있었다.
던전에서 구한 책과 대조해보니 얼추 맞아떨어졌다.
"···이런 건 대체 누가 만든 거야."
역시 여기에도 문명이 있는 게 확실하다.
배낭을 살펴보는 사이 새끼들은 모두 죽었다.
다른 돌원숭이들이 오기 전에 빨리 둥지를 불태워야지.
나는 둥지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질렀다.
녀석들이 둥지를 포기하고 도망가도록.
대장이 있었다면 복수심에 불타 재차 공격해왔겠지만 그럴 여력도 없을 것이다.
쉘터로 돌아와 드론을 띄우니 과연 돌원숭이들이 서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휴···끝났군."
잘못 대처했으면 꽤 위험했을 돌원숭이 위협이 끝났다.
이제 딩순이는 나를 완전히 신뢰해 딩고처럼 따라다녔다.
덩치 큰 은색늑대가 몸을 비비적거리니 나름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앞으로 잘 지내보자."
그리고 풍뎅이들에게 지도책을 보여주었지만 모른 척했다.
"너네들 진짜 모르는 거 맞아? 아는 눈친데?"
대장 풍뎅이가 지도를 유심히 들여다보더니 한 곳을 짚곤 곡괭이로 내리치는 시늉을 했다.
아, 이거 표시가 있었는데 지워졌구나.
녀석에겐 보이는 모양이다.
"점화석? 흑탄? 광석지대가 있다는 거지?"
끄덕끄덕.
녀석은 앞다리를 벌려 아주 과장된 제스쳐를 취했다.
엄청 좋은 게 있다고?
그리 멀진 않으니 찾아가보는 게 좋겠지.
그 전에 휘발유도 좀 확보해야 하는데.
미니 포크레인이 워낙 많이 드셔서 비축량이 간당간당했다.
나는 딩순이와 딩고를 부른 다음 저장해 둔 멧돼지 고기를 먹였다.
잘 먹고 새끼 좀 빨리 낳으면 좋겠네.
.
.
.
다음날 저녁, 나는 월미도에 잠입해 선착장 부근에 자리를 잡았다.
정부 인원들이 머물고 있다는 저택에 바로 가도 되겠지만 왠지 대통령을 보고 싶었다.
파밍 던전에서 본 적은 있지만, 그 때는 나를 김밥조아로 인식하진 못했을 것이다.
다정은 그의 특성이 텔레파시라고 했는데 정확히 어떤 능력인지는 파악이 어려웠다.
단순하게 입을 열지 않고 상대방에게 말을 건네는 능력은 아닐 거고.
"마음도 읽을 가능성이 있어···"
장원택은 대한민국의 대통령이었다.
지지자, 반대자들과 만나 지지를 얻어내고 설득하는 과정은 전투나 다름없다.
그는 수십 년을 여의도 정치판에서 구르고 마침내 정점에 올랐다.
사람의 심리를 읽어내는 데에는 탁월하다는 평인데 텔레파시 능력과 결합되었으니 진짜 무서울 것 같았다.
"레벨이 낮기만을 바랄 수밖에 없나."
다정에게서 들은 바에 의하면 사냥하는 걸 못 봤다고 하니 레벨은 낮을 것이다.
아니, 이렇게 생각할 필요가 없는데.
장원택은 대단히 훌륭한 사람이다.
대통령으로서 할 일을 했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가.
그는 수많은 생명을 살린 거나 다름없다.
정부 쉘터에서 사람을 모으고 이것저것 실험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다 같이 몬스터에게 대항하는 건 당연하지 않은가?
"표면적으로는 분명 그런데···"
다정은 내가 정체를 밝혔으면 살아있지 못했을 거라 한 적이 있었다.
정부 외에 다른 세력이 있었다나 뭐라나.
불쌍맨 지만이도 비슷한 소리를 한 적이 있다.
하여튼 명쾌히 설명할 수 없는 찝찝한 느낌이 존재했다.
나는 차원문을 열어놓고 바다를 바라보며 그를 기다렸다.
마침내 늑대인간이 하울링을 터트렸을 때, 약속이나 한 듯 노신사가 나타났다.
어두운 밤인데도 희끗한 머리와 셔츠, 정장바지가 보였다.
그는 등을 돌리고 누군가에게 말했다.
"들어가 보게. 그가 온 것 같으니."
설마 나를 눈치 챈 건가?
저녁부터 여기 와서 숨어 있었는데?
발걸음이 들린 후 그가 말했다.
"이렇게 만나는 건 처음이지요? 아니면 만난 적이 있습니까?"
파밍 던전을 얘기하는 것이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기다렸다.
장원택은 여전히 등을 돌린 상태에서 계속 말을 이었다.
"절대 당신을 보지 않겠습니다. 이거 하나만은 약속드릴 수 있지요."
···이렇게까지 하는데 나가는 것도 좋겠지.
여차하면 도망갈 방법은 많으니까.
나는 배낭을 점검하고 밖으로 나갔다.
소리가 들릴 텐데도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옆에 서자 대통령이 감탄했다.
"덩치가 꽤 크군요. 아이디는 참 귀여운데 이렇게 큰 청년이라니, 재미있는 일입니다."
"내가 온 걸 어떻게 알았습니까?"
"올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당신이라면 그랬을 테니까."
"다정이를 통해 거절했는데도요?"
"다정이? 무척이나 친한 모양이군요. 혹시 관계가?"
"일단은 친구입니다."
"하하···젊은 남녀 사이에 친구라는 걸 나는 믿지 않습니다만 그런 걸로 해두지요. 아무튼 나는 당신이 올 걸로 생각했고, 실제로 왔습니다. 뭐가 더 부족합니까."
그는 앉아 양반다리를 하더니 내게도 앉으라고 권했다.
묘하게 도망갈 수 없도록 수 쓰는 것처럼 느끼는 건 내가 의심이 많아서 그렇겠지?
내가 앉았지만 그는 여전히 나를 쳐다보지 않고 말했다.
이런 건 또 철저하게 지켜주시는군.
"마지막에···날짜 알려준 거 정말 고마웠습니다. 덕분에 안사람하고 아이들하고 시간을 가질 수 있었어요. 그때도 그랬지만 지금 생각하니 참 고맙습니다."
높은 직위에 올라선 사람이 할 말은 아니었다.
내가 만난 얼마 안 되는 높은 분들이라고 하면 전부 고개가 빳빳했기 때문.
"별거 아닙니다. 최소한의 일만 한 거니까."
"최대한이면, 역시 가진 정보를 푸는 것이겠죠?"
"그렇죠."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특성과 관련이 있다 봐도 되겠습니까?"
"비슷합니다."
"대충 그렇게 추측하긴 했습니다. 검인씨가 좋아서 합류한 게 아니듯이. 그나저나 다정씨를 쉘터에 들여보낸 이유는 역시 총 때문이겠지요?"
완전히 읽고 있구나.
하지만 여기선 부정하는 게 맞겠지.
"글쎄요."
정확히 말한다면 실탄, 그리고 그걸 만들 수 있는 제작법이 필요했다.
풍뎅이들이 있으니 금속외피는 얼추 만들 수 있는데 뇌관이 문제였다.
녀석들도 탄을 뜯어보곤 이건 안 되겠다고 머리를 설레설레 저었다.
구조 자체는 만들 수 있는데 공이가 뇌관을 찌르면 정확히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그렇게 3발을 분해해서 날려먹은 뒤, 녀석들은 다시는 탄을 건드리지 않았다.
장원택은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총이라···매우 위험한 물건이지요. 사실 철사병만 아니었더라면 우리가 멸망당할 일은 없었을 겁니다. 현대무기의 위력은 정말 대단하니까요."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위험천만한 무기가 배검인의 손에 들어가는 게 조금 아쉽습니다."
"하하하. 역시 총이 맞군요. 그리고 우리 검인씨는 참 인망이 없고."
배검인에 대해서는 그도 익히 아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바로 곁에서 몇 개월을 생활했는데 모를 리가 있나.
그는 뜻밖의 제안을 했다.
"나는 검인씨가 힘을 가져도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성격이 조금 그렇지만 그만한 결함은 다들 갖고 있지요. 모든 정보를 넘겼는데 힘을 가질 이유로는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안 그렇습니까?"
"인정합니다."
"어떻습니까. 정체를 밝히고 검인씨를 보듬는 것이. 비록 여러 이벤트에서 충돌이 있었지만 당신의 능력이라면 충분히 그를···"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만 정체를 밝히면 나를 회치러 달려올 놈들이 최소 백 명은 될 겁니다."
"···그 이야기는 나도 들었습니다. 경매장은 당신의 욕으로 가득하더군요. 정보는 충분히 전해준 것 같은데 왜 그러는지···"
"그들이 원하는 건 몬스터에 대한 정보가 아니라 이벤트에 관한 거죠. 너만 꿀 빠느냐는 일종의 질시입니다."
"흐음···과연···"
"그리고 나는 대통령···님을 완전히 믿지는 않습니다. 정확히 얘기하면 그 밑에 드러나지 않은 세력이겠지만요."
그 얘기를 꺼내자 장원택이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기회가 닿았으니 얘기해드리지요. 6월 말···여의도에서 총격전이 일어난 사건 기억합니까?"
아···그거.
탈영병에 의한 총격전이라고 보도가 되었다가 관련뉴스가 싹 사라진 적이 있었다.
뭐 언제나 그렇듯이 정부에서 은폐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거 때문에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전군의 지휘관들에게 지시해서 점검에 들어갔지요. 지금이야 말하는 거지만 이상이 없었습니다. 군이 난리를 핀 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럼 누군가가 총기를 들여와서 총격전을 벌였다는 겁니까?"
"궁금하지요? 나는 정부 쉘터의 한 명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주승철.
대현그룹의 재벌 3세이자 서바이벌 라이프의 제작사에 투자했다는 남자.
"머릿속에 누군가가 떠오르지요? 다정씨가 참 많은 정보를 준 모양이입니다, 허허."
"그거 하라고 들여보낸 거니까요."
"그렇군요. 하여튼 그도 쉘터를 갖고 있습니다. 정부 쉘터보다 규모가 더 방대할지도 모르지요. 그는 미리 알고 있었고, 또 대현건설의 주인이었으니까요. 쉘터의 위치를 대강 가르쳐주면 도움이 되겠습니까?"
"아뇨. 알아서 하겠습니다."
필요한 정보는 다 얻었기에 나는 거절하고 일어섰다.
그가 타이르는 어조로 말했다.
"혼자서도 잘 살아온 건 인정하지만 앞으로의 세상에선 세력이 필요할 겁니다. 우리 쉘터에 들어오면 시간을 크게 단축할 수 있어요."
"세력이란 걸 믿을 수가 없어서요. 몇 명과 친하게 지내는 정도면 충분합니다."
"사람을 잘 믿지 않는 성격이군요. 하지만 내가 말한 대로 될 겁니다. 저기 영종도에 누가 들어와 있는지 압니까?"
"중국인 수백 명이겠죠?"
"그렇습니다. 들어와 있는 숫자만 그 정도고 지금도 보트피플이 계속 늘어나고 있어요. 방사능에 피해를 입지 않은 땅을 찾는 겁니다, 그들은."
그렇다면 한국은 안전하고 중국 땅은 방사능에 오염되었다는 얘기가 된다.
장원택은 힘주어 말했다.
"살인자 시스템 때문에 그들에게 손대는 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말은 통하지만 문화와 풍습이 크게 다르죠. 충돌이 많이 일어날 겁니다. 그래도 중국인보다야 한국인이 맞지 않겠습니까? 성향으로 보나 뭘로 보나."
"글쎄요. 어제 내가 몇 명을 죽였는지 아십니까?"
그는 흠칫 놀랐다.
"···사람을 죽인 게 아니라 죽게 만들었다는 거겠죠?"
"맞습니다. 하여튼 네 명을 죽였습니다. 나를 방심하게 하고 공격하려 했죠. 그들과 중국인이 뭐가 다릅니까."
"그건···"
그는 쉽게 답하지 못했다.
나는 목소리를 높였다.
"아포칼립스에서 국적을 찾는 건 바보짓입니다. 친구, 아니면 적이죠. 나는 그렇게 살아왔고 또 앞으로도 그렇게 살 생각입니다."
"흐음."
대통령은 잠시 고민하는 듯 침묵했다.
그때 어두운 밤바다를 헤치며 보트 몇 척이 선착장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보트가 옵니다."
그는 눈을 찡그리더니 말했다.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보트 다섯 척. 모두 무장하고 있습니다."
"좋은 목적은 아닌 것 같군요."
나는 천천히 뒷걸음질을 쳐 차원문 안에 들어갔다.
장원택은 그제야 뒤를 돌아봤다.
"특성 정말 엄청나군요.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다니. 그나저나 정보를 잔뜩 줬는데 안 도와줄 겁니까?"
나는 대답 대신 발리스타에 폭죽을 매달아 발사했다.
피유웅! 퍼펑!
폭죽이 터지며 보트 다섯 척이 어렴풋이 드러났다.
장원택이 멍하니 있다가 머리를 흔들었다.
"이거 준비가 장난이 아니군. 하여튼 고맙습니다. 나머지는 알아서 하지요."
미안하지만 가만히 있을 생각은 없다.
허락도 없이 무기를 들고 우리 집에 왔으면 대가를 치러야지.
< 우리 집에 왜 왔니 - 3 > 끝
< 우리 집에 왜 왔니 - 4 >
아포칼립스에선 무장하고 야음을 틈타 파밍을 시도하는 것도 하나의 선택이다.
눈으로 봐선 보트를 타고 오는 중국인들이 적인지 아닌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적이라 단정한 이유는 심장소리에 있다.
두근두근두근.
한두 놈이 아닌지 불규칙적으로 소리가 들려왔다.
살인자들이 단체로 상륙이라.
이거 장난이 아닌데?
장원택도 그걸 들었는지 누군가에게 지시했다.
"일단 자리를 옮기지. 그리고 오늘 일은 누구에게도 비밀입니다."
입이 가벼운 편은 아니니 안심하십쇼.
그가 사라지고 난 뒤 나는 준비를 했다.
대통령 앞에선 국적은 중요하지 않다 떠들었지만 결국 나도 한국인이다.
보트를 타고 오는 중국인들이 서해에서 고기를 쓸어가는 중국 어선처럼 느껴져 거부감이 들었다.
"똑같은 짓을 하겠지."
평범한 중국인이라면 타협의 여지가 있었겠지만 살인자가 한둘이 아니다.
살인자 노릇을 잠깐 해봐서 아는데 살인 충동을 버티기는 힘들다.
"결국 전부 죽일 수밖에."
나는 무기를 준비해 슬롯에 넣었다.
살인자가 여럿인 다중 데스매치는 경험한 적이 별로 없다.
기껏해야 한두 번인데 두 명이 전부였다.
살인자가 워낙 희귀해서 말이지.
"최소 셋 이상은 되는 것 같은데···"
이제 놈들이 가까워져 심장소리가 쿵쿵쿵 들려왔다.
유원지 거리가 발자국 소리로 시끄러워졌고 사람들이 건물 뒤에 숨었다.
하나는 비서실장이고 저 놈은 배검인이군.
그는 준비가 안 됐다며 투덜거렸다.
"여기서 대기하다가 상황이 안 좋아지면 대응하셔야 합니다."
"알았다고요."
비서실장이 블링크로 사라진 순간, 투덜거림이 욕설로 변했다.
"씨발 육체강화 없는데 짜증나네. 다정이 특성 좀 어떻게 안 되나···아···"
좀비 지배 특성이 하나 더 생기면 확실히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다정이 특성을 복사하게끔 놔두리라곤 생각되지 않았다.
보트가 선착장에 도착할 때쯤이 되자 그는 머리를 쥐어뜯더니 블링크로 사라졌다.
비서실장의 말에 의하면 여기는 그가 맡아야 할 영역인데 튄 것이다.
"다정이 왜 싫어하는지 알겠군."
책임지기 싫으면 나처럼 혼자 살든가 해야지 도망가는 건 뭔 행동인지 모르겠다.
블링크가 있으니 화살이라도 쏴서 지원하면 되잖아.
다정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마음에 드는 구석이 하나도 없다고 했는데 동감이었다.
그때 갑자기 석현, 아니 토공이 나타났다.
토끼 머리띠는 대체 어디서 구한 거야?
빤스만 입은 남자가 그러고 있으니 눈에 독극물이 들어온 느낌이었다.
"아 진짜."
밖에 나가려 하는데 그가 허리에 손을 얹고 보트의 살인자들을 향해 외쳤다.
"타이완 넘버 원!"
열댓 명의 시선이 일제히 그를 향했다.
도발 효과 끝내주네.
.
.
.
월미도 선착장에 모인 사람들은 다수의 전투를 겪었다.
다들 좀비 레이드와 데스매치도 겪어서 어지간한 일에는 놀라지 않는다.
하지만 둘이 동시에 벌어지는 난장판은 처음이었다.
또한 살인자가 한둘이 아니란 것도 문제를 키웠다.
열 명이 넘는 살인자가 상륙하니 사람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당연히 데스매치가 벌어졌고 좀비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이 아비규환 속에서도 제 역할을 하는 사람이 존재했다.
오리궁뎅이 최다정과 토끼공듀 황석현.
둘은 좀비의 벽을 무시하고 살인자들과 뒤섞여 날뛰기 시작했다.
어느새 하이힐을 벗어던진 다정은 휘하 구울들과 함께 살인자를 몰아붙이고 있었다.
살인자의 힘이 장난이 아닌지라 구울이 머리채 잡혀 날아갔다.
다른 구울들이 목숨을 걸고 앞을 막았다.
"크흐흐···"
살인자는 정신이 이상한지 미소를 짓고는 육탄돌격을 감행했다.
수십 명을 죽였기에 그의 전투력은 구울을 상회했다.
하지만 다정에게 이른 순간 분위기가 확 반전되었다.
투쟁본능을 활성화 한 그녀의 눈이 붉게 타올랐다.
'강하다.'
배검인은 다정의 활약에 시선을 빼앗겼다.
롱나이프를 뽑아든 다정은 살인자를 일방적으로 도륙했다.
부하 구울이 없어도 1:1로 충분히 죽였을 것 같았다.
특히 늑대인간의 스킬을 얻은 게 컸다.
투쟁본능과 광란을 활성화시킨 그녀의 움직임은 도도한 여왕과도 같았다.
토공처럼 하늘을 붕붕 날아다니지는 않지만 한방 한방이 묵직했다.
급기야 검인은 그녀의 발이 살인자의 사타구니를 쳐올리는 장면에서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크아아악!"
뭉개졌겠구나.
한편 토공은 다수의 살인자와 붙어 육탄전을 벌였다.
그는 최근에 부쩍 강해졌다.
특히 창원에서 고인물 살인자와 붙어본 경험이 컸다.
어지간한 살인자도 스탯에서 밀렸고 스킬과 전투센스는 압도적이었다.
그 결과는 살인자 셋의 몰살이다.
토공은 그들이 쓰러지기 전 어깨를 밟고 다른 살인자를 덮쳤다.
온몸을 피로 떡칠한 그를 보면 누가 살인자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한편 살인자들을 데리고 온 탕자오룽과 탕쉔롱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산둥반도 북부에서 적수를 찾기 힘들었던 살인자들이 허수아비처럼 당하고 있었다.
육지에서 파밍을 하기 위한 교두보를 만들려던 계획이 완전히 무너졌다.
살인자들이 저렇게 당해서야 어찌 사람을 쫓아낼 수 있겠는가.
그들이 보트에 탑승하기 위해 급히 달려가는데 누군가 앞을 가로막았다.
"누군가의 집에 방문하려면 흙 묻은 신발을 벗었어야지."
오빠 탕자오룽이 안면을 일그러트렸다.
"무턱대고 공격하는 게 너희 한국인들의 예의인가?"
"살인자는 죽이는 게 당연한데 그쪽 예의는 좀 다른가?"
"남의 물건은 함부로 손대는 게 아니야, 덩치."
"미안한데, 나는 세뇌 특성이 싫어."
차라리 죽였으면 죽였지 사람을 세뇌해 꼭두각시로 써먹는 건 딱 질색이었다.
그의 아이템이 심상치 않은 걸 본 여동생 탕쉔롱이 나섰다.
"우리를 환영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으니 이만 물러가죠. 서로 피를 보는 건 원치 안잖아요?"
"미안한데 피를 보는 건 너희뿐이야."
자오룽은 분위기를 읽고 부하 살인자를 앞으로 나서게 했다.
순간 허공에서 볼트가 튀어나와 살인자의 복부를 꿰었다.
저지력이 엄청난지 볼트는 그대로 살인자와 함께 바다에 뛰어들었다.
자오룽은 입을 딱 벌리고 살인자가 빠진 바다를 바라봤다.
"말도 안 돼···"
그때 성호의 눈이 붉게 빛났다.
설마 낭인의 능력을 얻은 건가?
쉔롱이 그걸 읽고 소매를 떨쳤다.
한 줄기 바람이 일어나 성호를 덮쳤다.
그러나 바람줄기는 무언가에 턱 막혀 하늘로 치솟았다.
쉔롱은 입술을 깨물며 손을 교차시켰다.
그녀의 의식에 따라 바람이 일어나 성호의 몸을 하늘로 띄웠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그는 공중에서 몸을 회전시키고 곧장 쉔롱에게 낙하했다.
"어, 어떻게?"
회심의 일격이 막히자 그녀는 크게 당황했다.
대체 허공에서 몸을 회전시킨다는 게 말이 되는가 말이다.
발을 디딜 곳도 없는데!
그녀를 구원한 건 오빠인 자오룽이었다.
그는 몸으로 동생을 들이받았다.
"아악!"
둘이 바닥을 구르는 동안 남은 살인자가 성호에게 쇄도했다.
파파팟.
몇 차례 공방이 오간 끝에 팔 하나와 머리통이 허공으로 치솟았다.
그제야 남매는 느낄 수 있었다.
이 남자는 괴물이라는 걸.
부하 살인자는 몇 번의 데스매치를 거쳐 상당히 강해진 상태였다.
그런 그를 단숨에 죽인다는 건 말도 안 되는 강자라는 뜻이었다.
둘은 시선을 마주친 후 즉시 도망가기 시작했다.
성호가 뒤를 쫓았으나 바다에서 일어난 물벼락 때문에 몸을 피해야 했다.
차원벽으로 막았지만 물이 쏟아지는 건 제대로 막기가 힘들었다.
"젠장."
그는 물에 홀딱 젖어선 멈추고 말았다.
발리스타를 쏴버릴까 했으나 둘은 어느새 모퉁이를 돌아 사라진 상태였다.
"바람을 조종한다니, 거 참."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주변을 돌아봤다.
석현이 섹스라고 외치며 살인자들을 두들겨 패고 있었고 다정도 구울을 동원해 좀비들을 사냥했다.
장원택은 자신에게 맡겨달라는 투로 말했지만 별로 할 게 남아있지 않았다.
이제 좀비 레이드만 막으면 끝난다.
"슬슬 퇴장해야겠군."
배검인까지 왔을 확률이 높은데 함부로 다니면 위험하지.
그가 투명한 차원문 속으로 사라졌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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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장원택은 3층 건물에서 눈을 감고 전투를 지켜보고 있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그의 특성은 텔레파시가 아니었다.
지휘자.
주변 전장의 요소를 파악하고 지시를 내려 보내는 능력이었다.
그는 월미도의 전장 전체를 손바닥 보듯 할 수 있었다.
만약 젊은 남자가 그의 특성을 알아챘다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맵핵이라고.
장원택은 거기에 더해 부하로 받아들인 요소에 한해서 버프까지 줄 수 있었다.
이 전장에선 부하가 한 명밖에 없어서 아쉬웠다.
"병력을 동원할 필요도 없었구만···"
토공과 다정은 그러려니 했는데 김밥조아조차 이렇게 강할 줄은 몰랐다.
살인자 하나가 그의 손에 죽음을 맞이했고 둘은 싸우다가 도망쳤다.
월미도에 상륙하려 한 중국인들도 보통내기가 아닐 텐데 신기하기 그지없었다.
아무래도 그가 숨는 공간은 보통의 아공간이 아닌 모양이었다.
안에 여러 가지 준비를 해놓은 게 틀림없었다.
그러니 양재대로 던전에서 사람들을 농락하고 도망갔지.
"참으로 아쉬워."
그 능력을 자신의 밑에서 쓴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때가 되면 세력을 물려줄 것이고 자연스럽게 조직을 이끄는 몸이 될 것인데.
그가 몸을 돌렸고 비서실장 범석이 블링크로 이동해 왔다.
"대통령님, 다정씨와 토공이 좀비 레이드를 막아내고 있습니다."
"김밥조아는? 안 보이겠지?"
"예.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 검인씨도 그런가?"
"아마도···"
워낙 꼭꼭 숨어서 안 보인단다.
여기 올 때 전투특성으로 바꿨어야지.
측근도 없으니 특성을 복사할 대상도 없을 것이다.
장원택은 다정에게 텔레파시로 말을 걸어보곤 쓴웃음을 지었다.
"이번 일만 끝나면 세상이 무너져도 나간다고 하는군."
"예? 그러면 저희 방어가···"
"남은 사람들이 열심히 일해야지 별 수 있겠나. 아마 김밥조아와 같이 다닐 텐데 잘 됐어. 워낙 화려하니 금방 위치를 알 수 있겠지."
"그녀도 변장하지 않을까요?"
"특성이 특성인지라 감추기가 어렵지. 금방 드러날 걸세. 그것보다 자네가 준비할 게 있네."
장원택이 종이에 메모를 해선 범석에게 건넸다.
내용을 확인한 범석은 고개를 갸웃했다.
총알과 화약의 제조법이었다.
"···이게 왜 필요한 걸까요?"
"나로선 알 수가 없지. 확실한 건 김밥조아는 총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야."
"총을···매우 위험한 인물이군요."
"아니지. 그는 적이 아니야. 그 누구보다 든든한 조력자가 될지도 모르네. 우리의 목적은 궁극적으로 같지 않은가?"
생존이다.
아포칼립스에선 그 어떤 사람도 생존이 최종 목적이 된다.
단지 방향이 다를 뿐.
"그렇게 알고 선물을 준비하겠습니다."
"너무 쉽게 넘겨주면 안 되지. 영어로 된 걸로 준비하게."
해석을 못하면 그걸 빌미로 또 접촉할 상황을 만들 모양이다.
"그리고 영종도 중국인들이 왜 여기까지 왔는지 확인해봤나?"
"내륙은 화학물질과 방사능에 완전히 오염되어서 지옥이랍니다. 영종도 중국인들은 산둥반도 출신인데, 내륙 도시는 끝장났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고 합니다. 지방에는 먹을 것이 없고요."
"분명 언질을 줬는데."
"완전히 믿지 못한 거겠죠. 혹은 중국이 너무 커서 제대로 대처를 못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장원택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몬스터도 모자라 중국인들과도 싸우게 생겼군."
영종도 뿐만이 아니라 서해안 도시를 다 내줘야 할 판이었다.
그들이 얌전히 살면 좋겠지만 기대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오늘과 같은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겠지···
그나마 한국이 나은 것은 철사병이 사라진 뒤 문명을 일으킬 기반이 있다는 점이었다.
대통령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정리가 된 모양이군. 구울 여왕이 떠나기 전에 환송회는 해야겠지. 가보세."
"예."
.
.
.
"음 그러니까···석현이 니가 들어가기로 했다고?"
끄덕끄덕.
좀비 레이드까지 마친 뒤, 나는 석현과 다정을 만나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다.
하나가 나오는 건 알고 있었는데 하나가 들어간다니.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
내가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수틀리면 다 죽여 버리게."
"···진짜?"
"응. 그 쉘터 밖에서 깨는 건 불가능하거든. 그러니까 안에서 깨버릴 거야."
"잠깐만, 그 쉘터 아직 적은 아니야."
"그러니까 적이 되면."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석현은 다정 대신에 들어가 있다가 적으로 판단이 되면 박살낼 계획인 모양이다.
문제는 정부 쉘터가 아직 우리의 적은 아니라는 점이다.
다정도 탈 없이 지내다 나왔고, 나도 경계하고는 있지만 적이라고 여기진 않는다.
"보험이라고 생각해. 우리 성호 기쁘겠네. 든든한 암보험 들어줄 사람이 있어서."
다정이 의자를 가져와 우리 사이에 턱 앉곤 양손을 어깨에 얹었다.
"그 할아방탱이도 허락한 거야."
"장원택이 허락했다고? 예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꺼림칙할 텐데."
그는 나와 석현이 함께 있었다는 걸 안다.
"그러니까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어, 그 할아방탱이."
"그걸 내가 들어가서 확인해줄게. 배가 검은 사람도."
석현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사실 그는 정부 쉘터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
마찰이 생겨서 죽으면 부활해서 도망가면 되니까.
그는 나를 위해서 이렇게까지 하는 것이다.
"고마워."
"창원에서 서울까지 올라오면서 재밌었어. 다음에도 그렇게 놀자."
"그래."
그는 곧장 일어서서 떠났다.
이번에는 다정이 내 옆에 앉아 다리를 내 허벅지 위에 척 올렸다.
"이제 도장 찍을 시간이야."
"어? 농담이라고 하지 않았어?"
"농담은 무슨. 내가 농담할 사람으로 보여? 얌전히 나한테 박히라고."
"자, 잠깐만."
내가 벌떡 일어서자 그녀는 깔깔깔 웃으며 가슴께에서 종이뭉치를 꺼냈다.
"이거 너한테 주면 되게 좋아할 거라던데."
종이뭉치를 폈지만 전부 영어였다.
"···이거 그 할아버지가 나 엿 먹이는 거 맞지?"
그녀가 내 어깨에 기대어 종이를 보고선 혀를 내둘렀다.
"전부 영어네. 해석하기 빡세겠다."
"못하는 건 아닌데."
"오올, 강성호씨 영어도 할 줄 아세요?"
"그냥 더듬더듬 해석하는 정도야."
미튜브 영상에 나오는 영어를 해석하는 것처럼 하면 되겠지.
안 되는 건 풍뎅이들과 실험을 하며 찾아내면 될 거고.
다정이 다리를 꼬며 말했다.
"내가 정부 쉘터에서 들은 거 꽤 많아. 나한테 잘해야 할 거야."
"참치 잡으러 준비하고 있는데···"
"참참. 이걸 깜빡했네. 쉘터 준비한 세력이 한둘이 아니란 거. 주승철이 알려줬나 봐."
"그래?"
그녀는 내 얼굴을 들여다봤다.
"너 방금 다 털어먹겠다는 표정이었어."
"이런, 들키고 말았네."
기회가 나면 챙기겠다는 거지 내가 먼저 공격하겠다는 건 아니다.
다정은 참치가 무척이나 먹고 싶었는지 입술에 침을 바르고 연신 말했다.
"그리구 우리 해안이 봉쇄됐나봐."
"봉쇄? 말이 안 되잖아. 중국인들은?"
"사람은 괜찮은데 환경적으로 분리가 됐다고 쑥덕거리던데. 서버처럼."
"···게임 서버 말하는 거야?"
이건 무슨 소린지 모르겠네.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며 누군가가 외쳤다.
"배검인 나와!"
당당하게 들어오는 사람은 다름 아닌 석현이었다.
우리는 멍하니 그를 쳐다봤다.
진짜 심각한 길치구나.
< 우리 집에 왜 왔니 - 4 > 끝
< 겨우살이 - 1 >
아···
그냥 정부 쉘터에 있으라고 할 걸 그랬나.
다정과 함께 지내니 이전에 몰랐던 단점이 속속들이 드러났다.
먹을 걸 밝히고 살짝 정신이 나간 것은 단점 축에도 끼지 못했다.
그녀의 진정한 단점은 코를 골고 잠꼬대를 하며 몸부림까지 친다는 것이었다.
3종 세트의 무시무시한 압박에 나는 잠을 설쳐야 했다.
원래 우리는 남녀칠세부동석의 엄격한 율법에 따라 방을 따로 썼다.
그런데 날 얌전히 자게 둘 그녀가 아니었다.
베개를 갖고 옆에 누운 건 괜찮다 치자.
다리를 내 몸에 척 올리더니 몸부림을 치며 코를 골기 시작했다.
거기에 잠꼬대까지.
"흐아앙 여보 갱장해에~"
"아 진짜."
나는 진저리를 치며 잠자리를 다른 방으로 옮겼다.
신기한 건 내가 없으면 그녀는 몽유병 환자처럼 일어나 따라온다는 것이다.
덕분에 나는 밤새도록 잠을 설쳐야 했다.
새벽에 깨워 물어보니 아무것도 모른단다.
"나, 나 밤새도록 한숨도 못 잤다고. 너 때문에."
"그럼 여기서 자."
자기 이부자리를 팡팡 두들기는 다정.
대체 석현과 지낼 때는 어떻게 한 건가 물어보니 전혀 느끼지 못했단다.
"···니들 둘 다 코 골고 몸부림 친 건 아니지?"
"그럴 수도 있고?"
"하여튼 정상이 아니야···"
"너한테서 그런 말 듣고 싶진 않은데."
"잠은 얌전하게 잔다고."
이래서 혼자가 편하다.
나는 양해를 구하고 동굴 안에 들어가 세상 평화로운 잠을 잤다.
깨어나 보니 다정이 긴 머리카락을 만지면서 투덜투덜하고 있었다.
"영양공급이 잘 안되나 봐. 머리 완전 푸석푸석해."
"그런 말은 뱃살 좀 뺀 다음에 하시죠?"
"뭐래 이거 만지면 기분 좋은데. 만져볼래?"
"됐습니다."
살쪘다고 구박하긴 했지만 사실 다정의 체격이 커서 그렇게 보이는 것뿐이었다.
구울 한 마리가 들어와 바닥에 생수 두 병을 놓고 돌아갔다.
그녀는 고양이 세수를 하기 시작했다.
"요즘에는, 물 찾기도, 힘들어···으 차거."
겨울이라 손이 시린가 보다.
"냉기저항 아이템 없어?"
"없는데. 하나 줄래?"
하나밖에 없고 쓰던 거라서 주기는 좀 그렇다.
나는 잠깐 기다리라고 한 다음 화로로 물을 끓여서 갖고 나왔다.
그리고 찬물과 섞으니 다정이 기묘한 콧소리를 내며 내게 비비적댔다.
"흐으응. 역시 나한텐 성호밖에 없어엉."
"이상한 소리 내지 말고 세수나 해. 근데 너 몸에서 냄새난다?"
"아포칼립스에서 땀내 나는 건 당연한 거야. 너한테서도 날걸? 킁킁."
그녀는 내 가슴에 코를 처박고는 냄새를 맡곤 충격을 받은 얼굴이 되었다.
"희한하게 상쾌하고 은은한 향이 나네···"
"숲에서 살아서 그런가봐. 빨리 씻어."
"넵."
다정이 씻는 동안 나도 대충 씻고 식사 준비를 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 12월 1일이었지.
못을 하나 가지고 나오니 꽤 오래 버텼다.
5분, 10분, 15분이 되었음에도 못의 형상을 그대로 유지했다.
명백하게 철사병이 가라앉는다는 증거.
못은 무려 30분 동안 버티고는 내가 힘을 주자 뚝 부러졌다.
이젠 예전처럼 모래로 돌아가지는 않는가보다.
다정이 빗으로 머리카락을 빗다가 한 소리를 했다.
"2월쯤 되면 철을 쓸 수도 있겠네."
"대형 쉘터쯤은 되어야 쓰겠지. 용광로가 있어야 하니까."
"너도 못 쓰지?"
"글쎄."
나한테는 풍뎅이가 있다.
녀석들은 별다른 시설 없이도 금속을 추출하고 가공할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을 가졌다.
그건 내가 보기에 기적에 가깝다.
현대사회에서도 원광에서 금속을 만들어내려면 엄청난 노력과 비용이 들어간다.
하지만 풍뎅이들은 그걸 모두 생략하고 주둥이로 오물오물해서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것도 매우 정확한 치수로.
노트북 나오는 영상도 이해하는 걸로 봐선 시간만 주면 총을 만드는 것도 불가능은 아닐 것이다.
내가 흐뭇한 미소를 짓자 다정이 눈썹을 모았다.
"너 지금 되게 음흉하게 웃는 거 알아?"
"그런 일이 좀 있어."
"나한테도 비밀로 숨긴다 이거지?"
"아니 비밀까지는 아닌데···이 친구들이 조금 수줍어서 말이야."
"친구들? 너구리가 무슨 친구야."
"잠깐만. 물어보고 올게."
"뭘 또 물어본다는 거야···"
다정의 표정은 혼란 그 자체였다.
말을 알아듣는 풍뎅이를 직접 보면 머리를 쥐어뜯을지도 모른다.
나는 안에 들어가 수확한 야채를 다듬고 있던 풍뎅이들에게 물었다.
"나 말고 다른 사람에게 보여줘도 괜찮아?"
대장 풍뎅이는 심사숙고한 뒤 머리를 저었다.
아직은 불안하다는 거군.
나는 다정에게 돌아가 그대로 전했고 그녀는 거짓말을 하는 것 같다며 미심쩍어 했다.
"좋을 대로 생각해."
"그럼 진짜 말을 알아듣는 너구리가 있단 말이지? 언젠간 보고 말거야."
"밥이나 먹자."
아침은 돼지국밥이다.
다정은 뜨끈한 돼지국밥 먹은 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안 난다며 호들갑을 떨어댔다.
"누린내가 좀 날 거야. 아무래도 집돼지는 아니고 손질도 좀 그래서."
"아포칼립스에서 돼지국밥을 먹는데 그게 뭔 상관이야."
"새우젓도 좀 넣고."
"잠깐, 난 국물 먼저 맛보는 파야."
그런 파도 있었습니까.
하여튼 그녀는 플라스틱 숟가락으로 국물을 맛보더니 크으, 하고 엄지를 치켜세웠다.
우리는 허겁지겁 식사를 끝마쳤다.
다정은 구울들을 데리고 파밍을 나섰고 나는 대통령이 준 영어 문서를 점검했다.
"···잠깐."
가만 생각하니 좀 이상하다.
중국어와 일본어는 한국어로 들리고 보이는데 왜 이건 안 되지?
"사람이 말하는 언어만 되는 건가···"
이 내용을 미국인이 말하면 한국어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이후에 다정이 돌아와서 읽어보기도 했지만 콩글리시로 들렸다.
"아무래도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사람이 읽어야 되나본데?"
다정은 이 무슨 깐깐한 마법이냐며 투덜거렸다.
잠깐, 이거 진짜 마법인가?
"그럴 수도 있어."
내가 중얼중얼하자 다정이 뭔 혼잣말을 하냐며 라면을 집어던졌다.
"빨리 이거나 집어넣으셔."
"라면 이런 건 이제 못 먹어. 유통기한 지났거든."
"상품 유통기한하고 섭취 유통기한은 좀 다르잖아."
"그렇긴 한데 기름내가 나기 시작할 거야."
봉지를 뜯어 냄새를 맡게 하자 다정이 오만상을 찌푸리곤 뒤로 물러났다.
"쩐내 장난 아니네."
보관 장소가 별로 안 좋았나 보다.
"라면이 장기적인 식량이 못 되는 이유가 이거야. 유통기한이 짧거든. 국수가 차라리 나아."
"뭐야. 그럼 갈수록 식량사정이 안 좋아진다는 소리잖아."
"아포칼립스니까 당연하지. 그래서 장기적으로 생존대책을 세워야 하는 거야."
당장은 도시에서 파밍이 가능하지만 그 가능성은 날이 갈수록 줄어든다.
생존자뿐 아니라 몬스터도 식량을 찾고 있기 때문.
어지간한 마트와 편의점, 물류센터는 탈탈 털린 지 오래다.
이제 도시에서 식량을 찾으려면 몇 시간 정도는 빨빨거리며 돌아다녀야 한다.
도시 외곽으로 나가면 그나마 나은 게 미곡센터가 있기 때문이다.
쉘터에 비축한 쌀이 워낙 많아서 당장 찾으러 갈 필요는 없지만.
그 말을 들은 다정이 어처구니없어 했다.
"맨날 나보고 돼지라더니 니가 돼지네. 이 물자돼지야."
"휘발유가 부족한데 뭐 들은 거 없어?"
"타임쉘터 있잖아."
"1년이 되기 전에는 안 열리잖아. 그리고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을 텐데 표적이 되고 싶진 않아."
"하긴 그렇지. 아, 나 그 소리 들었는데. 정유사에서 석유 비축한 거."
"자세히 얘기해 봐."
"돼지국밥으로는 쪼오끔 부족한데?"
"···점심 때 화조 한 마리 잡자."
"나 찜닭 좋아해. 하여튼 뭐냐면···"
그녀가 한 얘기는 이랬다.
정부가 종말을 대비해 준비한 것은 타임쉘터가 끝이 아니었다.
대한민국의 정유사에 연락해 첨가제를 넣은 경유와 휘발유, 등유를 특수제작한 용기에 비축했다는 내용이었다.
정말이지 눈이 번쩍 뜨이는 얘기가 아닐 수 없었다.
"근데 그걸 사람들한테 알리면 탈탈 털리잖아? 겨울에 다들 등유 쓰고 싶어서 난리일 텐데. 그래서 아무도 모르는 시골에 비축해놨다고 하던데."
따로 쓸 곳이 있었나 보다.
"위치는 모르지?"
"할아방탱이는 알 걸?"
그거야 그렇겠지···
젠장.
그 쉘터와는 연관되고 싶지 않았지만 방법이 없다.
쉘터를 증축하기 위해선 미니 포크레인을 써야 하는데 휘발유 비축분이 간당간당했다.
왜 경유를 비축하지 않았는가 하면, 기름을 일원화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부러 휘발유를 쓰는 포크레인을 골랐고.
나는 정부 쉘터가 홍보용으로 쓰는 경매품을 찾다가 뜻밖의 사실을 발견했다.
돝섬 사람들이 암호문으로 자기들끼리 대화를 나누고 있었던 것이다.
벌써 15레벨을 만들었다고?
급식 3인방을 제외한 헬스장 멤버들의 대화가 모두 보였다.
"이야···많이 노력했네."
갑자기 다정이 내 귀를 잡아당겼다.
"너 혼잣말 하는 거 좀 고쳐. 내가 옆에 있잖아."
"아아, 알았어. 하여튼 신기해서. 돝섬 사람들 15레벨이네."
"우리가 20레벨 오버니까 그쯤 돼야지."
"그래도···잠깐."
갑자기 수연이 생각났다.
그녀는 의사이므로 분명히 영어를 잘 할 것이다.
공학적인 단어는 유현이가 해석할 수 있을 거고.
이 문서를 불러주면 되지 않을까?
나는 암호문을 가져와 코멘트를 입력했다.
코멘트란이 난리가 났다.
.
.
.
"누나누나, 성호 형이 코멘트 달았어요!"
평화로운 돝섬의 어느 날.
유현이는 잠깐 쉬고 있다가 코멘트를 발견하고 밖에 나갔다.
돝섬의 넓은 텃밭에선 수연과 지만이 시금치를 캐고 있었다.
"응? 성호씨가?"
"네네. 다들 잘 있냐고 묻는데요."
"···아, 진짜네. 잠깐 쉬자."
다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겨울의 텃밭농사란 참 어렵지만 돝섬만큼은 예외였다.
감자와 고구마, 시금치 등이 기후를 무시하고 자라고 있었다.
지만이의 생물친화 특성 덕분이다.
본격적인 겨울이 되니 많이 쌀쌀해졌지만 돝섬 사람들은 최소 먹을 것은 걱정하지 않았다.
"너네들까지 달려들면 복잡하니까 내가 얘기할게. 흠흠. 크흠."
수연은 둘에게 양해를 구한 뒤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시골집 아낙처럼 머리를 감싼 손수건을 푸는 건 왜일까.
오랜만에 성호를 만난다고 생각하니 약간이지만 들뜬 그녀였다.
서울에 간 뒤에는 도무지 생사조차 알 수 없었던 사람이다.
주된 원인은 그들의 레벨이 낮아 경매장을 이용하지 못했기 때문이지만.
―성호씨 오랜만이에요.
―다들 잘 지내죠? 갑자기 연락드린 건 다른 게 아니고···
그는 정체불명의 영어를 읊으며 해석이 가능하냐고 물어왔다.
알고 보니 총알과 화약의 제조법이란다.
대체 이런 건 어디서 구했을까?
또 알아서 무얼 하려고 그러지?
언제나 그렇듯 성호의 행동은 비밀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수연은 그런 그를 이해했다.
반대로 그가 수연의 마음을 얼마나 이해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니까 단순한 구조가 아니라 공이가 실탄을 쳤을 때 일어나는 반응을 단계별로 해석해야 한다는 거죠?
―맞습니다.
―그리고 화약의 제조법도 자세히 해석해야 되고···이건 유현이가 알려나 모르겠어요.
그때 유현이가 끼어들었다.
―흑색화약이라도 만들려면 질산칼륨하고 숯이 있어야 되는데요.
―유현이니? 반갑다. 나 성호야.
―네 형, 저도 반가운데 일단은 급한 것부터 해요. 그래서 질산칼륨을 만들려면 비료가···
―잠깐만, 잠깐만. 지금 너무 복잡하니까 차근차근 얘기하자.
―넵.
―성호씨 준비됐어요.
수연은 성호가 읊는 영어발음에 정신이 혼미해졌다가 겨우 종이에 받아 적었다.
옆에서 지만이가 웃으며 발음이 구수해서 알아듣기 쉽다고 중얼거렸다.
참 성호에 대해선 언제나 좋은 쪽으로 해석하는 청년이다.
"아, 이거 영어로 써야지."
유현이가 사전을 들고 와 문장을 영문으로 옮겼다.
작업은 거의 1시간이나 계속되었다.
형준과 급식 3인방, 미경까지 와선 뭐하나 물었다가 깜짝 놀라 구경했다.
"성호 걔 씨드볼트에 도착하긴 했다냐?"
형준이 묻자 수연은 입가에 손가락을 가져다대었다.
"쉿, 발음이 워낙 엉망이라 보는 것도 어렵다고요."
―발음이 엉망이라 미안합니다.
"아 성호씨 그게 아니고."
"우와 다 들었나봐."
옆에서 미경이 히죽 웃었다.
마침내 옮겨 적기 작업이 끝났다.
성호는 빨리 사가라고 하며 씨드볼트에서 구한 씨앗을 10포인트에 올렸다.
대한민국에서 식용하는 거의 모든 채소가 돝섬에 들어왔다.
형준이 팔짱을 끼곤 고개를 끄덕거렸다.
"진짜 씨드볼트에 간 모양이네. 걔가 약속 하나는 철저하다니까."
수연과 유현이는 즉각 해석에 들어갔다.
양은 많지 않았지만 군사용어가 많아 해석이 어려웠다.
둘은 사전을 뒤져가며 간신히 해석본을 완성할 수 있었다.
끝내고 다시 보내는 것도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성호가 수고했다며 그들에게 각종 무기와 식량을 보냈다.
미경이 눈치를 보며 그에게 코멘을 달았다.
―오빠 잘 지내시죠? 저 안 잊어버렸죠?
―당연하지. 미경이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웬만하면 보내줄 테니까.
―먹을 건 여기도 많은데 헤헤.
다행히 떠날 때의 불협화음은 이미 사라진 모양이다.
미경은 새로 얻은 추가효과가 대박이라며 자랑하듯 말했다.
―다음에 우리가 만날 기회가 있을 거야.
―진짜죠?
―당연하지. 그러니까 잘 지내고 있어. 밥 잘 먹고, 사냥 열심히 하고.
―오빠도요.
대화가 끝났고 성호는 종이를 움켜쥐었다.
이제 실탄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당장 만드는 건 어렵고 부단한 노력과 시간을 쏟아 부어야겠지만.
"가능성이 있다는 게 어디야."
그 정도면 충분하다.
그는 차원문을 열고 동굴 안에 들어가 풍뎅이들에게 설명했다.
녀석들이 이해가 안 된다며 머리를 움켜쥐었다.
.
.
.
"흐음···휘발유가 필요하다라···"
장원택은 김밥조아의 요청을 듣고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등유도 아니고 휘발유가 필요한 건 무엇 때문일까?
옆에서 이범석이 조언했다.
"휘발유를 쓰는 설비가 있는 모양입니다."
"그 아공간 안에 말인가?"
"볼트를 회수한 결과 한국에서 자생하는 나무가 아닌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아마···"
"몬스터들의 고향과 같은 공간이겠지."
"예."
"거기에 총도 있고 휘발유를 쓰는 설비도 있다···정말 다람쥐처럼 모아놨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장원택은 연필로 책상을 톡톡 두드리다가 멈췄다.
"영어 문서를 해석해 달라고 할 줄 알았는데···그건 할 사람이 있다 이건가? 다정씨의 영어 실력은 어떻게 되지?"
"인사를 겨우 할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조력자가 있다고 봐야겠군. 공학도일지도 모르겠어."
"행적을 찾아볼까요?"
"···아니. 그럴 필요까진 없네. 쓸데없이 경계심을 일으켜선 안 돼. 명심하게. 그는 우리의 적이 아닐세."
"하지만 적이 될 가능성이 있는 남자이기도 하죠."
"그러니 여기선 호의를 보여야겠지···다른 쉘터에서 그를 채가기 전에 말이야. 강화도 주유소 위치를 보내주게."
강화도 주유소란 각종 유류를 비축한 창고를 말한다.
정부가 정유사를 협박해 만든 만큼 엄청난 양이 비축되어 있었다.
거길 오픈한다니 이범석의 속이 쓰려왔다.
"그에겐 대박이겠군요."
"오해하지 말게. 주는 만큼 확실히 받아낼 생각이니까."
한편 성호는 정확한 위치를 전해 듣곤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 깐깐한 대통령이 별로 고민하지도 않고 알려주니 희한한 노릇이었다.
"나중에 뭔가 요구할 것 같은데···"
잔뜩 먹었으니 토해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왠지 이런 식으로 엮이는 게 조금 꺼림칙하기도 하고 말이다.
"뭐, 내 할일만 하면 돼."
어찌되었든 지금은 강화도에 가서 유류를 확보하는 게 우선이었다.
그는 다정과 함께 길을 떠났다.
< 겨우살이 - 1 > 끝
< 겨우살이 - 2 >
당연한 얘기지만 강화도로 가는 다리는 끊겨 있었다.
정부도 철사병으로 다리가 끊기리라곤 예상하지 못한 모양이다.
건너편 강화도는 안개로 자욱했고 우리가 선 초지대교 위엔 심한 바람이 불었다.
추운 날씨에 다정이 오들오들 떨었다.
미니스커트에 하이힐을 신고 있으니 추울 만도 하지.
"그 되도 않는 패션을 버릴 때야."
냉기저항을 올려주는 겨울딸기를 먹었음에도 옷차림이 저래서야 의미가 없다.
그녀는 볼이 빨갛게 되어 겨우 수긍했다.
"알았어. 근데 나 옷 없으니까 조금만 기다려 줘···구울들이 파밍해 올 테니까."
"아니 그럴 필요 없어."
석현과 함께 서울로 올라오면서 아웃도어 아울렛을 파밍한 게 다행이었다.
여성용 아웃도어도 제법 확보했거든.
물론 지퍼 등의 금속은 죄다 바스러진 상태였지만 단추를 달면 된다.
나는 동굴에서 바느질을 해 밖으로 가지고 나왔다.
바지와 운동화, 패딩 등을 받아든 다정이 감격해선 나를 끌어안았다.
"진짜 성호 너밖에 없어."
나는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감기 걸릴라. 빨리 갈아입어."
"감기 걸려도 나 안 버리고 갈 거지?"
"버리기는 무슨. 빨리 입기나 해."
다정은 히죽 웃더니 구울로 몸을 가리지도 않고 훌러덩 옷을 벗었다.
그, 흠···오···
나는 다정이 가슴 달린 남자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쉘터에 들어가 고무보트를 꺼내와 바람을 넣었다.
강화도까지는 그다지 멀지 않아서 금방 건널 수 있다.
옷을 다 입은 다정이 머리까지 묶고 구울들에게 명령했다.
"니들은 보트 따라와, 출바알."
고무보트가 바다에 뜨자 30마리나 되는 구울이 뒤를 따라왔다.
마침내 도착한 강화도는 안개와 덩굴로 둘러싸여 있었다.
다정이 내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전에 내가 할아방탱이 말 듣고 밤섬에 갔었거든? 거기하고 똑같아."
"밤섬도 이랬어?"
"여기보다 훨씬 심했지. 보고 있는 도중에도 덩굴이 막 자라는 것 같았다고."
"아직 침식이 일어날 시기는 아닌데."
설정 상 침식은 좀비와 구울들이 활동을 정지했을 때 시작된다.
놈들의 뇌에 자리 잡은 포자가 영양분을 모두 섭취하고 성장을 끝냈을 때다.
나는 잠깐 동굴로 들어가 침식이 일어나는 시점을 확인한 후 나왔다.
"침식은 아직 멀었어. 영상 보니까 트롤이 나타날 때쯤이야."
"아울베어가 그 뒤에 나오지?"
"아마? 녀석들은 생태계가 좀 안정이 되어야 활동하니까."
"그럼 저건 씨가 날아가 성장했다는 소린데 완전히 미쳤네."
"오래 지속되진 못할 텐데···"
생명은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좀비도, 여타 몬스터도, 저 덩굴도 그 법칙에선 벗어나진 못한다.
저만한 크기라면 상당한 양의 에너지를 흡수해야 덩치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강화도의 좀비 해봐야 얼마 안 될 텐데.
나는 영종도에 왔다는 수백 명의 중국인을 떠올렸다.
"잘못하면 중국인 흡수해서 더 흉포해질지도 모르겠어."
"그럼 저건 메이드 인 차이나야?"
"한국 좀비도 먹었을 테니 다국적이지."
우리는 뻘소리를 나누며 84번 지방도를 따라 이동했다.
도로의 좌우 밭에선 각양각색의 식물형 몬스터가 자리 잡고 있었다.
식물형 몬스터도 종류가 많은데 자리를 잡고 움직이지 않는 류가 대부분이다.
에너지 소모를 아끼기 위해서일까?
다정이 커다란 식물 몬스터를 가리켰다.
"예전에 저거 안에 들어갔다 나오기 하면서 놀았잖아."
생명체가 잎을 건드리면 순식간에 갇히는 구조다.
그리고 천천히 녹게 되는데, 게임 상으로도 상당히 끔찍한 죽음이었다.
차라리 단숨에 죽는 게 낫지.
"그래. 근데 지금은 그러지 말자."
"내 구울로 시험해볼까? 몇 초 만에 잎이 닫히는지?"
"1.5초 정도야."
"오올. 역시 몬스터 공략대장."
검인이 쉘터를 주로 연구했듯 나는 몬스터에 집중했다.
"저렇게 잘못 자리 잡은 놈들은 못 먹어서 잎에 힘이 없거든. 2초까지 늘어나. 생생한 놈들은 1초 이내로 닫히고."
"힘이 있고 없고는 뭘로 구분해?"
"이파리 뒤에 잎맥 보이지? 저게 시퍼래야 생생한 거야."
"오홍."
나는 식물 몬스터의 본체에 달린 가시 달린 열매에 주목했다.
저것도 꽤 맛있는데.
"고블린들이 저 열매 좋아하거든. 이파리에 뭐 던져 넣고 그 틈을 타서 따는 거야."
"우리도 그렇게 하자."
다정은 입맛을 다시며 나를 쳐다봤다.
설마 날 던지겠다는 말은 아니겠지?
다행히 그녀는 가장 약한 구울을 골랐다.
예전 좀비는 소년시대라고 부르며 애지중지하더니 구울들은 그렇지 않는 모양이다.
내가 이유를 물어보자 그녀는 간단히 답했다.
"못생겼잖아. 이 험악한 외형을 보라고. 내가 예뻐해 주게 생겼어?"
"···좀 그렇긴 해."
확실히 전의 소년시대 좀비들은 미형이 많았지.
일부러 골랐는진 모르겠지만.
그런데 구울을 던질 필요가 없어졌다.
안개를 헤치고 일단의 고블린 무리가 나타난 것이다.
다정은 이게 웬 떡이냐 하며 고블린들을 잡아와 이파리에 던졌다.
키에엑!
키익!
이파리는 고블린과 접촉하자마자 덥석 붙잡곤 놓아주지 않았다.
그 틈을 타 구울들이 열매를 따 왔다.
이거 되게 맛있네.
우리는 고블린들을 식물 몬스터에 던져 넣으며 열매를 땄다.
그리고 진강산으로 올라가는 도로에서 군부대를 발견했다.
예전이라면 지나쳤겠지만 지금은 찾아야 할 게 있다.
바로 화약이다.
.
.
.
군부대엔 보통 탄약고가 있다.
5.56mm부터 시작해서 수류탄, 크레모아 등 아주 위험한 물건들로 가득하다.
문제는 철사병으로 인해 외피가 전부 부스러졌다는 것이다.
약간의 마찰이 일어나 스파크가 튀면 탄약고는 단숨에 날아가 버린다.
다행히 이 부대의 탄약고는 멀쩡했다.
다정은 시골집 뒷간 같다며 투덜거렸다.
"하여튼 화약이 필요하다 이거지?"
"내가 가지고 나오고 싶은데 잘못하면 근처가 날아가 버릴지도 몰라."
나는 부산에서 있었던 일들을 말해주었다.
버섯구름이 피어올랐다는 말에 다정이 내 어깨에 손을 짚었다.
"혹시 죽으면 내가 구울로 써줄게."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니까? 화약 위력이 장난이 아니야."
죽었는데 구울로 쓸 수 있나는 작은 호기심은 접어두도록 하자.
차원문 안에서 플라스틱 삽으로 퍼도 되지만 버텨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래서 다정이 구울을 보내기로 했다.
녀석이 화약을 퍼 오면 다른 구울이 소분했고 우리가 비닐에 담았다.
다정은 피곤하다며 막사에 들어갔고 나는 풍뎅이들에게 화약 소분한 것을 보여주었다.
"이거면 되겠어?"
흐음···
대장 풍뎅이가 잠시 고민하더니 휘하 풍뎅이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화약 파우더에서 철 알갱이를 분리하는 작업이었다.
녀석들은 조심조심 철을 물어 옮겼고 마침내 순수한 화약만 남았다.
대장 풍뎅이가 화약 약간을 사발에 넣고 점화석에 불을 당겼다.
파팟.
화약이 맹렬히 타오르자 풍뎅이들이 놀라 뒤로 물러섰다.
대장은 화력에 만족했는지 앞발톱을 들어보였다.
이제 뇌관만 어떻게 하면 실탄을 만들 수 있다.
"뇌관은 얼마나 걸릴 것 같아?"
너무 급한 질문이었나.
얼핏 녀석들에게서 곤혹스러운 표정을 본 것 같기도 하다.
나는 풍뎅이들의 갑각을 두드려주었다.
"괜찮아. 무리하지 말고 천천히 해. 니들이 다치지 않는 게 제일 중요하니까."
내 말에 감격이라도 했는지 풍뎅이들의 눈이 유난히 초롱초롱했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들 덩치가 꽤 커졌다.
처음 발견했을 땐 작은 자두만 했는데 이제 거의 귤 정도로 커졌다.
그만큼 힘도 세져서 예전에는 엄두도 못 내던 작업도 해냈다.
역시 황제꿀 덕분이겠지.
녀석들이 먹어야 되니까 꼭 필요할 때만 이용하기로 했다.
우리는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취사장 박스에서 식료품을 찾아냈다.
쌀과 건빵, 전투식량 몇 박스가 전부였다.
다정이 침을 흘리는 구울들을 살펴보며 걱정스럽게 말했다.
"얘네들 배고픈가봐. 뭘 좀 먹여야겠는데."
"쌀 먹지?"
"먹긴 먹는데 묘하게 힘을 못 써. 아까 고블린을 이파리에 던지는 게 아니었는데."
몬스터는 대개 사람이 많은 곳에 많다.
즉 인구수가 얼마 안 되는 강화도는 몬스터의 수도 그만큼 적었다.
덕분에 우리는 논밭과 민가 몇 채가 전부인 풍경을 구경하며 걸어야 했다.
겉으로만 보면 멀쩡한 시골이지만 사람이라곤 우리뿐이다.
다정이 내 팔에 팔짱을 꼈다.
"넌 혼자 다녀도 안 외롭지?"
"글쎄, 외롭다는 게 뭐지 잘 모르겠어. 할 일이 워낙 많아서 말이야."
세상이 망한지 몇 달 되었음에도 나는 외로움을 느끼지 못했다.
원래 성격도 그렇고 교감을 할 수 있는 녀석들이 존재한다는 것도 이유가 될 것이다.
풍뎅이들, 딩고, 딩순이···
같은 배를 탄 녀석들이다.
어찌된 영문인지 풍뎅이들과는 최소한의 소통이 가능해서 전혀 외롭지 않았다.
하지만 다정은 그렇지 않은지 내 팔을 꼭 붙들며 속삭였다.
"도시에 있을 땐 몰랐는데 여기 오니까 나 막 감성 터지는 것 같어. 우리밖에 없잖아."
"강화도 인구가 워낙 적으니까···"
"우와 너 진짜 삭막하다···"
내가 삭막한 인간인거 이제 알았니?
그녀는 갑자기 다리가 아프다며 업어달라고 졸라댔다.
"몸 튼튼하면서 뭘 업어 달래? 구울도 있잖아."
"많이 도와줬잖아, 빨리 업어줘."
생떼에 가깝지만 뭐 이 정도야.
나는 다정을 업고 한적한 논길을 걸었다.
뒤에서 그녀가 꼼지락거리는 게 느껴졌다.
그···흠···확실히 크네.
"새삼 느끼는 건데 너 등 되게 넓다. 막 든든하고 포근해서 졸릴 것 같어."
"침 흘리면 던져버릴 거야."
"말하는 거 좀 봐. 완전 나쁜 남자네."
"싸이코패스에 가깝지. 나만 살면 되거든."
"···나랑 토공은?"
"물론 너희도 포함해서. 니들 배신하고 도망가는 짓은 안 해."
"그럼 다행이고."
그녀는 내 등에 볼을 기대어 졸린 듯 말하기 시작했다.
"쉘터 있을 때 할아방탱이가 진지하게 그러더라. 여기 정착하지 않겠느냐고."
"거절했으니까 여기 있는 거네."
"응···근데 좀 흔들렸어. 할아방탱이 진심을 조금 들은 것 같아서."
"무슨 진심이었는데?"
"자기 목표가 그거래. 결혼식에서 사람들 주례 서주는 거."
순간 나는 웃을 뻔 했지만 잘 생각하니 그게 아니었다.
결혼식에서 주례를 선다는 건 사회가 어느 정도 안정되었음을 의미한다.
몬스터의 압박을 이겨내고, 문명을 재건해 마침내 결혼식이라는 소모적인 절차를 만들어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대통령 장원택은 그 나이에 꿈을 꾸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영원히 오지 않을 그 날을 그리며.
하지만 나는 그를 비웃을 수 없었다.
다정은 영차, 하고 내 목을 끌어당겼다.
"자꾸 밑으로 내려가잖아. 확실하게 엉덩이 받치라고."
"거 참 말 많네."
엉덩이가 너무 커서 받치기도 힘들었다.
나는 그녀를 튕겨서 다시 업었다.
나중에 철사병이 가라앉으면 이런 시골길을 오토바이로 달려볼까?
참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정에게 그 얘기를 하니 목을 꽉 졸랐다.
"다람쥐도 아니고 뭘 그렇게 많이 모아놓은 거야?"
"나 혼자 살려니까 준비를 많이 할 수박에 없더라고."
"나중에 나 꼭 태워줘야 돼, 오토바이."
"일단 휘발유부터 구하고 봐야지."
그녀는 내 등에서 내려와 손가락을 튕겼다.
구울들이 우리를 들더니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진작 좀 이렇게 하지.
우리는 순식간에 강화읍 근처에 도착했다.
그런데 이거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
.
.
"사람 많네···"
"저거 다 중국인이지?"
"아마도."
"남의 땅에 와서 도둑질이나 하고 진짜 안 되겠어, 이거."
"살려면 발버둥이라도 쳐봐야지."
우리는 은행에 숨어 밖을 훔쳐봤다.
도로 건너편의 주유소에 사람들이 다가서다가 도망가는 게 보였다.
주유소라고는 하지만 멸망 이전의 주유소가 아니라 유류를 저장해놓은 창고다.
공교롭게도 덩굴이 창고 주위를 둘러쌌고 식물형 몬스터가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당연히 일반 몬스터도 많고 해서 근처는 아비규환이었다.
"모두 도망쳐!"
"으아아아!"
먼저 무리가 도망가는 틈을 타 접근했던 중국인 몇 명도 몬스터에게 쫓겨나왔다.
제법 넓은 도로가 몬스터와 사람으로 가득했다.
우리만 있는 줄 알았는데 왠지 머쓱하군.
하여튼 중국인들의 목표는 주유소에 비축된 유류인 것 같았다.
기름내가 여기까지 진동하는데 모를 리가 없지.
나는 그리폰의눈 스킬로 주유소 안을 확인했다.
"파란 통이 경유고, 노란 게 휘발유, 녹색이 등유야."
"그럼 노란 통만 챙기면 되겠네?"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아니, 전부 다 필요해."
뭐든 비축해두면 언젠가는 쓸 일이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다정이 뜨악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욕심 쩌네···"
"이제 알았어? 하여튼 쌀을 빼서라도 기름은 다 챙길 거야. 내려가면서 쉘터 확장하고 미곡센터 들르면 되니까."
가까운 곳에 미곡센터가 있다.
저 중국인들이 그랬는지 털린 지 오래였지만 안쪽에 있는 창고는 멀쩡했다.
여는 도중에 몬스터의 습격을 받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나저나 저 악다구니 사이에서 어떻게 기름을 챙긴담.
중국인과 몬스터, 식물형 몬스터, 그리고 살아 움직이는 덩굴까지 아주 개판이었다.
다정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우리까지 끼어들면 완전 엉망이겠네. 구울들 동원해도 힘들겠어."
뭘 또 그렇게 말씀하시나.
"방법이 없는 건 아니야."
"어떻게 하려고?"
"얘네들을 이용해야지."
나는 쉘터에서 딩고와 딩순이를 불렀다.
다정은 먼저 나온 딩순이를 보고 깜짝 놀랐다.
"아니 딩고가 언제 이렇게 컸어?"
"얘는 딩고가 아니고 딩순이, 암컷이야."
"진짜···?"
둘 다 그녀에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심통이 난 다정이 꼬리를 잡아당기자 딩순이가 나직하게 으르렁거렸다.
"얘 성깔 좀 봐. 완전 주인 닮았네."
"미안한데 걔 야생늑대야. 딩고 잡아먹으려고 내 곁에 있는 것뿐이지."
"딩고를 잡아먹어?"
"그···역키잡 알지?"
"아항. 무슨 뜻인지 알겠네."
근데 왜 음흉한 눈으로 나를 보는 걸까.
내가 계획을 설명하자 그녀는 미심쩍어했다.
"이거 안 먹힐 것 같은데···차라리 내가 프리 티벳을 외치는 게 낫지 않을까? 그 틈에 챙기는 거지."
갑자기 토공이 타이완 넘버 원을 외친 게 생각났다.
또라이끼리는 확실히 통하는 게 있는 모양.
나는 그녀를 진정시켰다.
"한국인들한텐 의외로 잘 통했어. 쟤네들도 마찬가지일 거야."
"뭐 나라도 놀라긴 하겠는데···"
다정이 딩고와 딩순이를 쳐다봤고 나는 둘을 쓰다듬었다.
이번에는 니들이 주역이니 잘 부탁한다.
< 겨우살이 - 2 > 끝
< 겨우살이 - 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