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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

전투가 시작된 지 약 한 시간 후.

"후우— 개운하네. 타격감은 물론이고 적당히 반항하면서 긴장감을 끌어올리는 데도 좋으니, 그야말로 최고의 샌드백이로군."

오랜만의 격한 운동을 마치고 시원하게 기지개를 켠 헤스페론이 상쾌하게 이마의 땀을 닦았다.

그의 앞에는 사이먼 황태자였던 것이 너덜너덜해진 인형처럼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워낙 튼튼했던지라 좀 과하게 손을 쓰긴 했지만, 그의 회복력을 생각하면 며칠만 정양하면 회복할 수 있을 터.

다만, 한 가지 예상하지 못한 소식이 있었는데.

"개체가 반복된 훈련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스킬「격투술」을 획득합니다."

이 짧은 순간에 도대체 무슨 조건을 만족했는지는 몰라도 근접 전투에 관한 스킬까지 생성되었다는 것이었다.

격투에 관한 모든 행위에 추가 보정을 주는, 무투가에게는 필수라고 봐도 될 쓸 만한 능력이었다.

'아니, 그보다 난 마법사인데.'

물론 없는 것보다야 낫겠지만, 그래도 조금 떨떠름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처음 생각했던 진로는 소환수로 안전을 도모하며 뒤쪽에서 우아하게 마법을 사용하는 그림이었는데, 뭔가 최전방에서 치고받고 싸우는 배틀 메이지가 되어가는 것 같다고나 할까?

"···끝났군요. 설마 그 사이먼이 이렇게 먼지 나도록 맞는 걸 바로 옆에서 지켜보게 되다니. 썩 나쁘진 않은데··· 뭔가 미묘한 기분이네요."

그때, 조용히 옆으로 다가온 라일리가 복잡한 표정으로 기절한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미워도 가족은 가족이라는 건지, 만신창이가 된 그의 모습에 뭔가 답답한 듯한 기색으로.

"···아! 그렇구나."

하지만 그에 헤스페론이 뭐라 입을 열기도 전.

씁쓸하게 사이먼을 내려다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던 그녀는 문득 뭔가를 깨달은 것처럼 탄성을 토해내더니···.

퍽!

그대로 시원하게 그를 걷어찼다.

"···라일리?"

"아닌가? 아직 잘 모르겠군요."

그녀는 옆에서 뭐라 하건 말건, 잠시 고개를 갸웃하고는 재차 발을 휘둘렀다.

퍼억!

"아! 뭔가 알 것 같기도 하고···."

퍽! 퍼억!

그렇게 몇 번의 발길질이 더 이어진 후에야 그녀는 속이 후련하다는 듯이 뒤로 물러섰다.

"후우— 역시 옆에서 지켜보기만 하니까 답답한 거였어요. 언젠가 이렇게 시원하게 때려보고 싶었다고 생각은 했었는데. 이걸 이런 식으로 이루게 되네요."

"······."

그제야 상쾌한 얼굴로 배시시 미소를 머금는 라일리.

헤스페론은 그녀의 뺨에 튄 핏방울을 바라보다 그저 어색한 얼굴로 고개만 끄덕일 따름이었다.

"···음, 뭐. 네가 만족한다면 그걸로 된 거겠지."

어차피 워낙 튼튼한 양반이니 저 가녀린 소녀가 발로 몇 번 걷어찼다고 더 나빠질 것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걸로 한 사람의 기분이 나아졌다면 좋은 일이지 않겠는가?

"그보다 예상 밖의 일로 상당히 지체했는데, 이제 슬슬 움직이자. 사이먼도 기절했겠다, 지금이 딱 좋은 타이밍이니까."

"괜찮으신가요? 조금 전까지 싸우느라 지쳤을 텐데. 잠시 쉬었다 가는 것이···."

"아니, 괜찮아. 이 정도는 별것도 아니니까. 기회가 왔을 때 지금 바로 여길 빠져나가는 게 좋지 않겠어?"

그리 말한 그는 라일리에게 잡으라는 듯이 한 손을 내밀었다.

당연히 이곳에서 조금이라도 빨리 나가고 싶었던 그녀도 그 말에 수긍하며, 진지한 표정으로 그의 손을 꼭 부여잡았다.

마치 이것이 유일한 동아줄이라도 된다는 듯이.

"간다."

"네."

이제 정말 마지막이었다.

우우웅—!

그는 남은 마력을 모조리 끌어모아 그녀와 자신을 감싸고, 그대로 한계까지 기운을 운용하다가···.

[가긴 어딜 가신다는 건지요···?]

"크흡—? 쿨럭—!"

후두둑—

그 순간 들려온 서늘한 목소리와 함께.

마력이 역류하며 입에서 한 무더기의 선혈을 토해냈다.

"헤론!"

바로 옆에서 쓰러지는 그를 황급히 끌어안는 라일리.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그녀는 긴장 어린 시선으로 사방을 둘러보다 곧바로 입술을 깨물었다.

어느새 자욱한 안개가 깔린 주변은 몸서리쳐질 만큼 차가운 기운이 한가득 감돌고 있었다.

[소란이 일어 와 봤습니다만···. 탈출이라니, 이건 또 의외의 전개로군요···.]

그리고 그 안개 속에서, 검은 상복을 입은 창백한 얼굴의 귀부인이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냈다.

현 불사성의 관리 총책임자.

밴시 퀸 올리비아가.

#182

마왕성 탈출 작전 (4)

올리비아의 등장과 함께 고위 언데드 특유의 '공포의 아우라'가 순식간에 주변을 잠식해 나갔다.

그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전신이 떨리며 호흡이 가빠지고, 그 존재감을 정면으로 마주하자 평정심이 흐트러지며 사고가 뚝뚝 끊기기 시작했다.

라일리는 어떻게든 정신을 가다듬기 위해 이를 악물고 품 안의 헤스페론을 꼭 끌어안았다.

'밴시 퀸 올리비아. 2대 불사왕의 휘하에서 악명을 떨쳐 역사서에도 기록된 괴물···!'

또한 개인적으로는 이세아와 함께 있던 그녀를 납치해 불사왕 앞에 대령한 장본인이기도 했다.

그때는 보호 마법과 온갖 마도구의 힘으로 공포를 이겨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는데, 이렇게 맨몸으로 간부급 언데드를 마주하게 되니 경지가 그리 높지 않은 그녀로선 버티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흐음··· 이계의 존재에 대해서는 익히 들었사옵니다만···. 정말 여기서 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하진 않았는데 말이지요···.]

올리비아는 마력의 역류로 피를 게워내는 헤스페론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다고 간과할 수도 없는 일이니···.]

사실 그녀는 방금 이 자리에 온 게 아니었다.

그저 은신에 압도적인 이점을 가진 유령체였기에 격이 떨어지는 그들이 미처 눈치채지 못했을 뿐.

정확히는 헤스페론이 한창 황태자를 두들기고 있을 때 이미 이곳에 도착해,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며 사태를 파악하고 있었다.

'그저 싸움만으로 끝났다면 조용히 자리를 피할 생각이었는데 말이죠···.'

그들의 취급에 관해선 미리 언질을 들었기에 황태자가 일방적으로 당할 때는 굳이 개입하지 않았다.

다만 그를 제압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죽이려 들거나, 반대로 황태자가 반격을 가해 나머지 둘이 상처 입게 되는 상황이 오면 대처하기 위해 끝까지 지켜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들이 탈출에 관한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말뿐만이 아니라 금방이라도 수를 쓸 듯 뭔가를 하는 모습에, 그녀는 조금 급하게 끼어들며 일단 헤스페론의 마력 운용부터 방해하고 나섰다.

'그 과정에서 그의 몸이 조금 상하긴 했습니다만···. 그 정도 부상이야 시간만 있으면 얼마든지 회복할 수 있겠지요···.'

불사왕께서 직접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상대를 다치게 한 만큼, 이번 건으로 경을 치게 될지도 몰랐으나.

그래도 만약의 사태가 발생해 정말 이들을 놓쳐버리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일이었다.

[당분간 그 사내는 제가 따로 관리하겠사옵니다···. 황녀 아가씨는 이곳에서 얌전히 기다리시지요···.]

"큭—!"

그렇게 단호하게 통보하며 다가오는 밴시 퀸의 모습에 라일리는 피가 날 정도로 강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막막함 속에서 찾은 희망이 바로 코앞까지 다가온 상황이었는데, 그걸 이렇게 허무하게 놓아버려야 한다니···.

무엇보다 당장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그녀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뭐가 철혈 황녀고, 뭐가 차기 황제야?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해서 남에게 의지만 하다가, 정작 위기 속에선 도움도 되지 못하는데!'

밖에선 그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그녀는 만인의 위에 서서 방향을 제시하는 자였고, 주변에는 항상 명령을 수행할 자들이 대기하고 있었으니까.

형제자매들에게 기를 펴지 못하던 어린 시절조차 황녀로서의 권위는 남아있었으며, 이세아가 마음의 버팀목이 되어준 후로는 그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세력을 키웠다.

본격적으로 황위 경쟁에 끼어들고부터는 그녀를 지지하는 파벌이 자신을 지키는 무기이자 갑옷이 되었고.

그러나 지금은···.

라일리는 슬쩍 시선을 내려 품 안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마력 역류의 타격이 상당히 컸던 모양인지, 그는 눈을 질끈 감은 채 고통스러운 듯한 숨만 거칠게 몰아쉬고 있었다.

'···그래, 언제까지 타인의 뒤에 숨어 있을 수는 없지. 적어도 내가 지향하는 황제는 그런 존재가 아니야.'

이제 자신을 지켜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롯이 그녀의 힘만으로 헤쳐 나가야 하는 상황.

기적이 일어날 가능성은 한없이 낮고, 애초에 뭘 어떻게 해야 할 지도 알지 못한다.

하지만, 명색이 '철혈 황녀'라 불리는 사람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포기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스윽—

라일리가 마력을 끌어올려 육체를 강화하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품 안에는 절대로 놓지 않겠다는 듯 헤스페론을 단단히 끌어안은 채로.

[하아— 의미 없는 저항이라는 것은 잘 아실 터이온데···. 순순히 통제에 따라주시지요···.]

흔들림 없는 그녀의 눈을 본 올리비아가 한 손으로 가볍게 뺨을 감싸며 고개를 내저었다.

마력 역류로 상태가 그리 좋지 않은 이에게 그녀의 존재는 그 자체로 해악이었다.

그를 데려가기 위해선 최대한 섬세하게 기운을 다뤄야 했는데, 저렇게 반항하게 되면 아무래도 조금 번거로워질 수밖에 없었다.

'말 그대로 조금 귀찮을 뿐이지만 말이죠···.'

뭐, 어차피 시간은 넘치도록 많지 않은가.

올리비아는 옅게 미소 지으며 천천히 허공을 날아 그들에게 다가갔다.

"흐읍, 하아—."

'정말 뭔가 방법이 없나?'

깊은 심호흡과 함께 조금씩 뒤로 물러서며 이리저리 움직이던 라일리의 시선이, 서서히 이쪽으로 다가오는 밴시 퀸에게로 다시 고정되었다.

사실 처음부터 뭔가 특별한 대책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어쩌면 상대가 한 말대로 그저 의미 없는 반항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녀는 피가 흐르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엄습해 오는 공포를 오직 정신력만으로 이겨내며 다가오는 적을 정면으로 노려보았다.

'안 될 걸 알지만. 설령 의미 없는 행동일지라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포기하고 싶지는 않아!'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앞으로 남은 시간들을 도저히 버틸 자신이 없었으니까.

그리고 그녀가 재차 결의를 다지던 그 순간.

턱—

갑작스러운 손길이 라일리의 팔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에 저도 모르게 움찔했던 그녀는 이내 그 손의 주인을 깨닫고 반색하며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헤론? 괜찮···!"

꾸욱—

말없이 팔을 더욱 강하게 움켜쥐는 손.

헤스페론은 입가에 피가 흥건하면서도 형형하게 빛나는 두 눈으로 그녀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헤론?"

뭔가 심상치 않은 기색에 라일리가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또한 그들의 낌새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챈 것은 올리비아도 마찬가지였으니.

[이번엔 또 무슨 짓을 하려고···.]

그녀는 느긋하던 태도를 버리고 곧바로 그들에게 손을 뻗었다.

일단 헤스페론의 안위는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먼저 그들부터 확실히 제압하고 볼 셈이었는데···.

[아···? 잠깐, 이게 무슨···!]

상황은 그녀의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갔다.

그녀가 발한 힘은 무언가에 가로막힌 것처럼··· 아니, 공간이 단절되기라도 한 것처럼 그들에게 어떠한 영향도 줄 수 없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이곳은 왕께서 친히 마련하신 공간일진대···!]

경악한 채 직접 몸을 날려 접근을 시도하는 올리비아.

하지만 유령체인 그녀조차 더 이상 저들이 있는 곳으로 접근할 수 없었다.

심지어 그녀는 불사성의 관리 총괄을 맡으며 어느 정도 공간의 제어 권한을 갖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 잠깐··· 설마 진짜로···?]

보기 드물게 진심으로 당황한 그녀가 전력으로 흑마력을 끌어올리며 대응하려던 찰나.

스으으—

방금 전까지 그 자리에 있던 두 남녀가 한순간에 씻은 듯이 사라졌다.

단순히 모습만 감춘 것이 아니었다.

정말로 이 거주 구역은 물론 불사성 내부 어디에서도 더 이상 그들의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게··· 이게 무슨···?]

뜻밖의 사태에 망연자실한 올리비아는 한참 동안 주변을 살피고서야 끝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그들이 이 불사성에서 도망쳐 버렸다고.

[아니··· 지금부터라도 수색을 시작해서 다시 잡아 오기만 한다면··· 아?]

그러나 유령들을 풀어 그들의 추적을 시작하기 직전.

갑작스레 머릿속을 울리는 어떤 신호에, 그녀는 모든 작업을 멈추고 공손한 자세로 허공에 고개를 조아렸다.

[부르셨나이까, 왕이시여···. 언제든 하명하소서···.]

때마침 불사왕이 방문해 그녀를 호출했던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마침 왕의 방문 예정일이 가까워졌던지라, 다른 일들을 모두 마무리해 두고 그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하필이면 이런 일이 발생한 순간에 오실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지만.

[저··· 왕이시여··· 외람되오나, 한 가지 드릴 말씀이···.]

일을 어느 정도 수습한 후에 오셨다면 더 좋았을 텐데.

하지만 이런 중대 사항을 보고하지 않고 넘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는 호된 꾸지람을 각오하고 여기서 있었던 일들을 자세히 고하며, 조심스럽게 곧바로 추적을 시작하겠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네? 네··· 알겠사옵니다···. 명을 따르겠나이다···.]

하지만 불사왕은 이미 모든 것을 예상했다는 듯, 그녀의 긴장이 무색하게도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을 보일 뿐이었으니.

결국 왕의 의중을 재단하는 것을 포기한 그녀는 준비했던 유령들을 해산시키며, 거주 구역을 다시 한번 둘러보는 것을 끝으로 그 자리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그렇게 한순간 적막에 휩싸인 불사성 제2 거주 구역의 정원.

두 남녀에 이어 올리비아마저 사라진 그곳에는.

걸레짝이 되어 널브러진 사이먼 황태자만이 외롭게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

한바탕 소란이 있던 때로부터 서너 시간이 지난 후.

"으윽— 젠장, 머리가···."

흙바닥 한편에 구겨져 있던 인영이 연신 몸을 꿈틀거리다, 서서히 상체를 일으키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인기척 하나 없는 정원엔 오직 너덜너덜해진 그 혼자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으드득— 이 망할 연놈들이 감히 황태자인 이 몸을···!"

기절하기 전의 상황을 떠올린 사이먼이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이를 갈았다.

정말 마법사인지도 의문인 건방진 사내 한 놈과 그 뒤에서 자신을 업신여기듯 깔보던 라일리.

그들이 쓰러진 자신을 비웃으며 떠나가는 장면이 자동으로 머릿속에 그려졌다.

"큭, 설마 내가 함정에 빠진 건가? 놈들이 나를 능멸하기 위해 미리 작정하고 일대에 결계를 펼쳐 두었다면···."

도저히 자신의 패배를 받아들일 수 없던 그는 곧 그럴싸한 가설 하나를 떠올릴 수 있었다.

그런데 자세히 따져 보니 이게 굉장히 가능성이 높은 일이지 않은가!

적어도 그가 생각하기엔 자기가 마법사에게 격투술로 졌다는 것보다는 훨씬 현실적이었다.

"그래, 그게 아니고서야 놈의 움직임을 설명할 수 없지. 이 비겁한 놈이 감히 이 몸을 속여···?"

급조한 변명거리에 저 혼자 확신하고 분통을 터트리던 그는 다시 주변을 둘러보다 비틀거리며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곳은 휴식을 취하기에 적합하지 않으니, 일단 숙소로 돌아가서 제대로 몸을 회복시킬 생각이었다.

'틀림없어. 놈들은 내가 접근할 걸 알고 미리 함정을 파 두었던 거야. 마법사들의 영역에 함부로 들어가다니, 내가 너무 성급했군.'

그는 발걸음을 옮기며 어느 정도 이성이 돌아온 머리로 패인을 분석하고 이후 대책을 강구했다.

그 또한 제국의 후계자 중 한 명인 황태자.

아무리 최근 극심한 스트레스 때문에 평정을 잃은 상태라고는 하나, 이미 한 번 당한 상태에서 아무런 대책 없이 다시 들이받을 정도로 멍청해지지는 않았다.

'그래, 이번은 내 패배를 인정하마. 하지만 다음번은 다를 거다.'

당연하지만 그는 이대로 당하고만 있을 생각이 없었다.

이번엔 그들을 너무 무시하고 방심했다가 낭패를 보았지만, 진심으로 상대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같은 수법에 또 넘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일단 당분간은 정양하면서 작전을 구상해야겠군. 놈들이 마법사라곤 하지만, 수준이 그리 높진 않으니 함정을 파는 데도 한계가 있을 터. 방심하지 않고 제대로 싸운다면 내가 질 리가 없다.'

지금 유일하게 걱정되는 것이라면 복수를 하기도 전에 리리스가 돌아오는 것이었으나, 아마 이런 기회는 이후로도 꾸준히 있을 것이다.

어차피 이곳에선 남는 게 시간이었으니 굳이 서두를 필요도 없었고.

사이먼은 욱신거리는 몸을 이끌고 숙소로 들어가 씻은 후 침대에 몸을 뉘었다.

아마 지금쯤 놈들은 한창 승리를 자축하며 그를 비웃고 있을 테지만···.

'지금 실컷 즐겨둬라. 내가 완전히 나으면 너희들에게 제대로 된 지옥을 선사해 줄 테니.'

그렇게 그는 복수를 꿈꾸며 서서히 잠에 빠져들었다.

자신에게 굴욕을 안겨 주었던 두 남녀를 무릎 꿇리는 날을 기대하면서.

안타깝게도 그는 아직 이 거주 공간에 자기 혼자만 남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아마 그가 확실하게 사태를 파악하는 건 상당한 시일이 지난 후가 되겠지.

그때쯤이면 구상한 작전이고 뭐고 전부 의미 없어졌다는 것을 깨닫게 될 테지만···.

원래 복수는 허망한 법이라고 하니, 그것도 나름대로 의미 있는 일이지 않을까?

"으음— 프흐흐··· 이 천한 놈들··· 내가 노예로··· 음냐."

어쩌면 달콤한 꿈을 꾸는 지금이야말로 그에게 가장 행복한 순간일지도.

***

갑작스럽게 이뤄진 전송 직후.

"흐읍—!"

라일리는 눈을 부릅뜨며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장거리 공간 이동의 여파로 순간적으로 머리가 띵해졌지만, 지금 그런 사소한 것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바깥? 설마, 그 상황에서 정말 성공했다고···?"

푸른 하늘을 도도하게 흐르는 하얀 구름과 따사롭게 내리쬐는 강렬한 햇볕.

주변은 정원 수준이 아니라 다종다양한 식물들이 식생을 이뤘고, 그곳을 터전으로 삼은 벌레들도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었다.

근 두 달간, 인공적인 정원에서는 볼 수 없었던 자연 그 자체의 풍경.

그에 그녀는 한동안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쿨럭—! 커헉—!"

품 안에서 거친 기침 소리가 들려오기 전까지.

"아! 헤론! 괜찮아요?"

위기 상황 속에서 무리했던 탓인지, 그는 아까보다 더 많은 피를 토하고는 힘겹게 눈을 떴다.

"···라일리? 탈출은··· 어떻게 됐어···?"

"성공이에요! 헤론, 당신은 정말···! 아, 이제 말하지 말고 눈 좀 붙이도록 하세요. 나머진 제가 어떻게든 해 볼 테니!"

그녀는 갈라진 목소리로 입을 여는 그를 황급히 제지하고, 강화 마법을 사용해 그 건장한 몸을 들어 자신의 등에 둘러업었다.

그가 이 지경이 되면서까지 결국 그들을 탈출시키는 데 성공했는데, 자신이 여기서 망설이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후우— 혹시 모르니, 최대한 조심스럽게 이동할게요. 남쪽으로."

아제리온 제국의 황태자와 5황녀가 불사왕에게 납치당한 지 약 2달.

기어코 라일리 5황녀가 불사왕의 손아귀에서 탈출해 자유를 손에 넣는 순간이었다.

'좋아, 이 정도면 제법 만족스러운 마무리로군.'

한 연출가의 흡족한 미소와 함께.

#183

마왕성 탈출 작전 (5)

황녀와 헤스페론의 탈출 과정에서 올리비아가 개입한 건 원래 예정에 없던 내용이었다.

일부러 자리를 비우게 한 시아나의 관할 구역에서 일어난 작은 소란을, 설마 그녀가 곧바로 눈치채고 찾아올 줄은 몰랐으니까.

과연 불사성의 관리 총책임자에 어울리는 꼼꼼한 일 처리라 할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불사성 내에서 가장 바쁠 텐데, 이런 사소한 부분까지 알아서 챙기고 말이야. 유능해도 과하게 유능한 인재로군.'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린 지금에서야 편하게 말하는 거지만, 사실 처음 그녀가 등장했을 때는 그도 상당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을 대비해 작전 개시일을 '한스'가 방문하는 날로 했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판을 처음부터 다시 짜야 할 뻔하지 않았는가?

'다행히 그 상황을 이용한 덕에 처음 예상보다 좋은 흐름으로 이어갈 수 있긴 했는데.'

아무래도 극적인 효과가 가미되며 비장함이 부각되고, 갑작스레 맞닥뜨린 위기에 라일리와의 유대감이 더 깊어진 게 컸다.

'이후에 황녀 앞에서 사용한 능력을 다시 재현하는 건 어렵겠지만···. 뭐, 그때는 위기 상황에서 초인적인 힘을 발휘한 거였다고 둘러대면 되려나.'

당연하게도, 도중에 올리비아의 방해를 차단하고 그 둘을 멀리 이동시킨 것은 불사왕 한스가 몰래 개입한 것이었다.

이 '영겁의 미궁'의 주인인 그는 의지만으로도 내부 공간을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었기에, 그 정도는 그리 어렵지도 않았다.

'헤스페론도 이제 빠르게 강해질 테니까. 나중엔 자력으로 비슷한 능력을 보일 수 있겠지.'

앞으로는 5황녀의 전폭적인 후원까지 받으며 안락한 환경에서 쑥쑥 성장해 나갈 수 있을 터.

덤으로 딸려 오는 카르마도 만만치 않을 테니, 여러모로 만족스러운 전개라 할 수 있었다.

[오셨습니까? 불사왕이시여!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한스는 불사성 내의 언데드 제작 공방에서 아크리치 드웰과 마주하고 있었는데.

오랜 시간 기다려왔던 '살마'의 사전 공정이 드디어 끝났기 때문이었다.

'그래봤자 지구 시간으로는 이제 일주일 정도 지났을 뿐이지만.'

거기다 원래라면 온갖 희귀한 재료를 때려 박고도 약 일 년간의 숙성이 필요한 과정이었으나, 심연과 죽음의 기운을 적극적으로 이용한 덕분인지 고작 두 달 남짓한 시간만으로도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었다.

[크흐흣— 수고했다, 드웰. 상당히 번거로웠을 텐데 잘해 주었구나.]

[과찬이십니다! 이 드웰 맥케인, 왕께서 만족하실 수 있도록 다른 개체들의 공정도 확실하게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가벼운 치하에 감격하며 바닥에 엎드리는 그를 뒤로하고, 한스는 심연이 가득 담긴 인큐베이터 안에 고요히 떠 있는 인영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가 처음으로 손에 넣은 초월급 각성자의 사체인 살마.

아직 미완성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에게선 벌써부터 심상치 않은 존재감이 느껴지고 있었다.

'지구의 각성자인 데다가 무공을 익힌 현경의 고수를 심연까지 사용해 언데드로 만들다니. 어떤 결과가 나올지 기대되는데.'

그 바탕이 되는 존재가 특별한 만큼 그걸 이용하는 언데드화에도 상당한 공을 들였다.

그간 세상에 존재했던 일반적인 개체가 아니라, 아예 완전히 새로운 공정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불사의 심장」의 보조를 받은 「금단의 지식」을 통해 기틀을 잡고, 「사악한 지혜」와 「마도의 길」로 다시 한번 조율을 거쳤다.

이후 「심연의 눈」으로 심연이 지날 통로를 다듬고 「마력 지배」로 술식을 최적화하는 등, 그가 가진 모든 스킬을 총동원한 결과가 바로 저것.

지금껏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불사왕 한스의 오리지널 언데드, 가칭 '어비스 레버넌트(Abyss Revenant)'였다.

[그럼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하도록 하지. 남은 개체들도 이렇게만 하도록.]

[네! 맡겨만 주십시오!]

그렇게 한스는 마지막 공정만을 남겨둔 살마를 회수하고, 이곳에서의 일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점검한 뒤에 조용히 지구로 넘어갔다.

다시 '불사왕'이 아닌 '하회탈'이 되기 위해서.

***

불사성을 탈출한 직후.

라일리는 헤스페론을 등에 업고 연신 주변을 경계하며 남쪽으로 이동했다.

아직 이곳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었으나, 치안이 확보된 곳은 아닌 듯 돌아다니는 몬스터들이 너무 많아 한시도 긴장을 놓을 수 없었던 것이다.

"후우— 후우—."

"···라일리? 나 이제 괜찮다니까? 알아서 걸을 수 있···."

"아, 시끄러워요. 시간이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 괜찮아져? 괜히 무리하지 말고 얌전히 업혀있기나 하라고! 후아—."

그렇게 이동한 지 몇 시간.

마법까지 사용했음에도 벌써 녹초가 되어버린 그녀는 겨우겨우 발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지금까지 버틴 것만도 대단하다 봐야겠지.'

아무리 강화 마법을 사용했다 한들 그것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었으니.

이런 보조 마법은 기존의 신체 능력이 높을수록 효율도 증가하는 법이었는데, 평소 육체노동과는 담을 쌓고 살았던 그녀는 그것과 그리 궁합이 좋지 못했다.

당연히 효과를 끌어올리기 위해선 무리하게 마력을 운용할 수밖에 없었고, 안 그래도 경지가 그리 높지 않은 그녀는 그 최악의 효율로 줄줄 새어 나가는 마력 때문에 더욱 빠르게 지쳐갔다.

거기다 설상가상으로 그들의 이동을 방해하는 요소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는데···.

"···라일리, 또 온다."

"윽! 대체 이걸로 몇 번째인지. 설마 여기 아직 북부 산맥 내부인 건 아니겠죠?"

헥헥거리면서도 부지런히 발을 놀리던 라일리는 등 뒤에서 속삭이는 헤스페론의 말에 나직한 불평을 토하며 서둘러 수풀 속으로 몸을 숨겼고.

이어서 그곳을 중심으로 발동한 작은 결계가 공간을 격리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크륵— 크훅—!"

"크헤헥!"

한 무리의 몬스터들이 그들을 스쳐 지나가듯 한쪽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다행히 이동 중에도 발동하고 있던 기척 차단 마도구 덕분인지, 이쪽의 존재를 눈치채고 쫓아온 놈들은 아닌 모양이었다.

"···갔나요?"

"음, 그냥 지나가던 놈들 같네."

"후우— 고작 두어 시간 만에 마주한 무리가 벌써 스물에 가까운데, 아무리 봐도 여기가 북부 산맥 내부인 것 같지는 않고. 설마 도시 바깥이 어디나 다 이러지는 않겠죠?"

"어? 나야 지금이 처음 밖으로 나온 건데 모르지···?"

"알아요, 그냥 해본 말이었어요. ···그렇다면 역시 후보지는 한 곳밖에 없네. 아니, 사실 당연하다고 봐야 하려나."

불사왕이 자리 잡은 곳의 남쪽에 있으면서, 북부 산맥과 인접한 곳.

그러면서 최근 방어선이 무너져 결국 몬스터들에게 점령당한 영토.

"로한 공국. 제국 북쪽의 작은 나라였는데··· 지금은 어떤 상황인지 모르겠네요. 제가 아는 건 잡혀 오기 전의 정보가 전부라."

이왕 자리를 깔고 앉은 김에 잠시 쉬기도 할 겸, 그녀는 이곳 사정에 대해 잘 알지 못할 헤스페론을 위해 자신이 알고 있던 것들을 설명해 주었다.

사실 이런 환경 속에서 하급 마법사들··· 그것도 곱게 자란 황녀와 골골거리는 환자 둘이 살아남는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지만.

"자, 받아. 여기 마실 것도."

"고마워요, 헤론. 이건 또 처음 보는 메뉴네요?"

자칭 '고유스킬'인 「아바타 클라우드」의 물자 공급은 그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에 충분했다.

음식과 음료, 옷가지와 침낭 등을 비롯한 야영 도구는 물론이고···.

"크허엉—!"

"컹컹!"

두두두—

"아, 또 지나가네. 여기가 놈들이 자주 다니는 길목인가."

"그런데 확실히 대단한 능력이네요. 이만한 마도구는 돈이 있다고 쉽게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닐 텐데."

"그래도 공짜는 아니니까. 무한정 쓸 수 있는 능력은 아니지."

"그렇겠죠? 하긴 무리한 것 때문에 한동안 공간 이동도 하지 못한다고 했으니."

신변을 보호하기 위한 기척 차단과 주변 감지, 격리 결계 등의 온갖 마도구들까지.

필요한 물건은 무엇이든 쉽게 공급할 수 있는 만큼, 큰 문제만 없다면 몸을 숨기며 움직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럼 이제 슬슬 이동해 볼까?"

"그래요, 쉴 만큼 쉬기도 했고. 자! 어서 이리 업히세요, 헤론!"

"이제 걷는 것 정도는 할 수 있다니까. 나중에 힘들면 말할 테니까 일단 출발하자."

"어휴— 사람이 걱정해 줘도."

"자자, 어서 가자고."

그래, '큰 문제'만 없다면.

하지만 이곳은 이미 패망한 로한 공국의 영역.

광기에 잠식된 몬스터들에게 수도를 제외한 모든 땅을 빼앗겨, 지금도 주신교단과 제국군의 도움으로 겨우 버티고 있을 뿐인 마경이었다.

그런데 숫자만 많은 하급 몬스터들에게 국가 하나가 그렇게까지 거덜 날 리가 없지 않은가?

응당 이곳에도 혼자서 부대를 상대할 수 있을 정도의 괴물들이 셀 수 없이 많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당연한 일이었지만.

후우웅— 후웅—!

최상위 몬스터들의 감각은 상식을 초월할 정도로 광범위했고.

"···아, 젠장."

"헤론? 갑자기 왜 그러시···."

그 움직임은 범인의 인지를 벗어날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쐐애애액—!

결계를 해제하고 한창 이동을 시작하던 도중.

거칠게 몰아치는 바람 소리가 헤스페론의 귓가에 닿았을 땐, 이미 '그 존재'가 그들의 지척까지 다가온 뒤였다.

'위험!'

치닫는 위기감에 사고가 가속하며 주위의 시간이 서서히 느려졌다.

한순간에 증폭된 그의 초인적인 정신력이 찰나 만에 사태를 분석했고.

이내 모든 상황을 파악한 그는 지극히 이성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체내를 휘돈 마력이 신체 능력을 강화함과 동시에 그 몸을 한층 더 단단하게 만들었으며···.

"읍?!"

이어서 옆에 있던 라일리를 끌어안고 뒤쪽을 향해 전력으로 몸을 내던졌다.

한 손으로는 그들의 모습을 감출 결계 마도구를 발동시키면서.

그 직후.

콰아아앙—!

그들이 있던 자리에서 강렬한 충격파가 터져 나오며 자욱한 흙먼지가 폭발적으로 피어올랐다.

그리고···.

"끼에에에엑—!"

후우웅—!

사방을 뒤흔드는 광포한 포효와 함께 거센 날갯짓이 한순간에 주변 흙먼지를 사방으로 흩어버렸다.

그로 인해 드러난 거대한 체구의 사자 몸통에 독수리 머리와 날개.

광기가 가득한 두 눈엔 새빨간 안광이 타오르고 있었고, 그 시선은 연신 주변을 살피며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부리에서는 침이 뚝뚝 흘러내리는 상태로.

"···그리폰."

바닥에 나동그라진 채 그 압도적인 위용을 바라보던 라일리가 억누르듯이 낮게 중얼거렸다.

'분명 제대로 확인하고 결계를 해제했었는데!'

탐지 마도구로 주변의 위험 요소를 살펴보고, 기척 차단 마도구까지 확실히 챙긴 후에야 결계를 나섰거늘.

빠르게 반응해서 대응한 헤스페론이 아니었으면 첫 강습에 그냥 모든 게 끝날 뻔하지 않았는가?

'아니, 사실 지금 상황도 그리 좋다고 볼 수는 없지.'

한순간에 발동한 결계로 일시적으로 그들을 놓친 것 같지만, 그리폰은 오우거와도 맞상대할 수 있는 최상위 포식자였다.

비행 몬스터라는 점을 생각하면 더 까다롭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

'본격적으로 우릴 찾기 시작하면 이 결계도 그리 오래 버티진 못할 거야. 그 전에 어떻게든 방책을 마련해야 해.'

즉, 지금도 언제 파국으로 치달을지 모르는 위기인 건 마찬가지란 뜻이었다.

"후우, 그래도 역시 헤론은 대단하네요. 이번에도 신세를 졌어요. 그런데 지금 상황이··· 어? 헤론? 잠깐, 당신 괜찮아요?"

긴장되는 마음에 최대한 조용히 말하던 라일리가 멈칫하곤, 자기를 끌어안은 채 미동도 없는 그의 등을 향해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철퍽—

"아?"

그 손에 닿는 미끌미끌하고 불쾌한 무언가.

불길한 예감에 황급히 몸을 일으켜 조심스럽게 그의 몸을 살피던 그녀는 이내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갑작스러운 강습 공격을 온전히 피하진 못한 듯, 길게 찢어진 그의 등에선 연신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또 그 충격의 여파 때문인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기도 했고.

"···포션, 포션이 있었는데."

라일리는 헤스페론이 비상용으로 준비해두었던 포션을 뜯어 서둘러 그의 등에 뿌렸다.

하지만 이 정도는 응급조치에 불과할 뿐, 제대로 된 치료를 위해서는 더욱 전문적인 조치가 필요했다.

"이제 어떻···?"

하지만 상황은 점점 악화 일로를 걸을 뿐이었으니.

갑작스레 느껴진 불길한 기척에 슬그머니 고개를 돌린 그녀는···.

"끼엑?"

"······!"

한 쌍의 붉은 눈과 정면으로 시선을 마주하고, 그대로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온 그리폰이 고개를 바짝 숙여 결계 내부의 그녀를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던 것.

그렇게 숨이 막힐 듯한 긴장감 속에서 짧은 정적이 흐르고.

"끼에에에엑—!"

"아, 젠장."

광기에 찬 포효 소리와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튀어나온 그녀의 한탄이 한데 뒤섞였다.

'기껏 불사왕의 손에서 벗어났는데!'

그런 억울함을 뒤로 하고 라일리는 바닥에 쓰러진 헤스페론을 감싸 안으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제 와선 아무런 의미도 없는, 그저 본능적으로 나온 행동.

하지만 그랬기에 그녀는 미처 볼 수 없었다.

그가 힘겹게 뜬 한쪽 눈으로 그리폰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다는 것을.

그 직후.

파아앗—

"끼에엑?!"

새벽을 가르는 여명처럼 환한 빛무리가 터져 나온 것과 동시에.

그 안에서 갑작스레 튀어나온 거대한 빛의 검이 세상을 가를 듯이 휘둘러졌다.

"흐읍—!"

스카카칵—!

푸확—

그 중앙에 정확히 그리폰을 둔 채로.

처음부터 전력을 다한 듯, 어마어마한 신성력이 밀집된 채 한계까지 날카롭게 벼려진 빛의 검.

아무리 광기로 강화된 최상위 몬스터라 할지라도 일개 마물에 불과한 존재가 그만한 기습을 버텨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키헥, 끼— 끄헥!"

쿠웅!

비틀거리던 커다란 동체가 쓰러지며 무거운 소리가 주변에 울려 퍼졌다.

압도적인 등장과는 대비되는 그리핀의 허무한 퇴장이었으나, 사실 그 상대를 생각한다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리라.

"아··· 아? ···서, 설마. 성자님이신가요?"

"오랜만입니다, 황녀님. 혹시나 했는데 설마 정말 여기서 마주하게 될 줄이야. 과연 주신의 인도하심이로군요."

전신에 빛의 아우라를 두른 채, 엉망이 된 라일리 황녀를 내려다보며 부드럽게 웃는 사내.

그가 바로 주신교단의 성자이자 세상을 구원할 용사.

하인리히 세인트 랜드가드였으니까.

#184

이세계의 지구인들 (1)

'···어떻게 여기에?'

전혀 예상치 못했던 만남에 라일리 황녀는 멍하니 하인리히를 올려다보았다.

오늘 하루만 해도 많은 일이 있었다.

사이먼 황태자와의 마찰부터 시작해서 밴시 퀸 올리비아의 개입과 방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성공했던 극적인 탈출과 이후 바깥에서 직면한 목숨의 위기까지.

그런데 그 절체절명의 상황에 갑자기 나타나 구해준 것이 무려 용사이지 않은가?

그녀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아!"

하지만 그녀의 혼란도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는데···.

그런 것을 따지기보다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이 뇌리를 스쳤기 때문이었다.

"아,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성자님! 그런데, 일단 이 사람부터 먼저 좀···! 부탁드립니다!"

상상도 못 한 조우에 순간적으로 당황하긴 했으나, 지금 상황에서 성자를 만났다는 것은 정말 둘도 없는 행운이었다.

당장 생명의 은인인 것은 둘째 치고, 아무리 치유보단 전투 쪽에 치중된 용사라지만 그 또한 정상급의 성직자란 건 틀림없는 사실이었으니.

헤스페론의 상세가 위중한 지금에서는 그야말로 최적의 인선이라 할 수 있었다.

"당연히 그래야지요. 제게 맡겨주십시오."

물론 그녀의 말이 없었더라도, 정의로운 성자는 처음부터 눈앞의 부상자를 외면할 생각이 없었다.

"흐음— 제법 위중한 상태긴 하지만, 생명에는 큰 지장이 없을 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상당히 튼튼하신 분이로군요."

"그런가요···? 다행이네요, 정말···."

성법을 사용해 치료를 시작한 하인리히가 나직한 감탄을 토하자, 곁에서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그것을 지켜보던 라일리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침내 모든 위기가 지나갔음을 실감한 그녀가 그제야 긴장이 풀린 듯 몸을 축 늘어뜨렸다.

정말이지, 여러 가지로 피곤하기 그지없는 하루였다.

"다시 한번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성자님. 아, 그러고 보니 저희가 여기 있는 걸 어떻게 아시고···."

그리고 그렇게 여유가 생기자, 문득 아직 모든 의문이 풀리지 않았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친 그녀가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그저 우연이라고 치부하기엔 지금의 만남이 너무 극적이지 않나?

하지만 그에 하인리히가 뭐라고 답을 하기도 전에···.

우우웅—

또 한 번의 변화가 일어났다.

진동음과 함께 근처의 허공에서 한순간에 밀집하는 어마어마한 마력.

하급 마법사인 라일리로선 감히 가늠할 수도 없는 엄청난 에너지가 한순간에 특정 구조를 이루더니, 곧 공간이 일그러지며 그곳에서 일단의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살벌하면서도 압도적인 개성으로 단번에 주위 시선을 사로잡는 거대한 체구의 야만 전사.

음울함이 물씬 느껴지는 분위기로 기다란 창을 어깨에 걸친 창기사.

···그리고 그 낯선 사람들 사이에 끼어있는 한 자그마한 소녀까지.

"성자님! 공간 이동 마법은 그리 간단한 게 아니라구요. 그렇게 갑자기 먼저 가버리시면···!"

그동안 줄곧 보고 싶었던, 반가운 얼굴이 그곳에 있었다.

"···세아?"

"어?"

집중하기 위해 감고 있던 눈을 뜨자마자 하인리히에게 툴툴거리던 이세아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멈칫하곤,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하며 짧은 침묵이 흘렀다.

한바탕 난리를 겪으며 꼬질꼬질해진 상태긴 했으나, 그녀가 상대의 모습을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라일리?"

오직 불사왕에게 납치당한 황녀를 구하겠다는 일념만으로, 가진 모든 카르마 포인트를 쏟아붓고 용사 파티에까지 자진해서 참여하지 않았나!

몇 년이 걸리더라도 반드시 구출하고 말겠노라고 매일 같이 다짐하고 있던 참이었는데···.

그 대상이 지금 이 자리에 있네?

···왜 여기 있지?

평소처럼 성자의 인도에 따라 로한 공국의 수도에 방문했다가 그곳 사람들을 돕던 중, 갑자기 사라진 하인리히를 따라왔을 뿐인 그녀로선 이 갑작스러운 만남에 벙찔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성자님이 평소와 좀 다르긴 했는데.'

곧 그녀에게 기쁜 일이 생길 거라느니, 앞으로 좋은 인연을 마주하게 될 것 같다는 둥 뭔가 의미심장한 말들을 꺼내긴 했다.

그것들이 복선이었던 걸까.

하지만 그녀가 멍하니 굳어있던 시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세아 언니—!"

와락—

후다닥 달려와 품에 안기는··· 아니, 그녀를 품 안에 끌어안는 라일리의 모습에 지금 상황이 전부 현실이라는 것을 확실히 체감할 수 있었으니.

그 '언니'라는 호칭은 좀 비현실적이긴 했지만 말이다.

그보다 지금은···.

"냄새나, 라일리. 떨어져."

"엑! 너무해! 두 달 만에 만나서 한다는 말이 그거야?"

뭐, 사정이야 어찌 되든 좋은 일이겠지.

피식 웃은 이세아가 결국 그녀를 마주 끌어안으며 토닥여 주었다.

복잡한 건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일단은 당장의 기쁨을 온전히 즐기기로 했다.

조금 뜬금없긴 했으나, 어쨌든 지금이야말로 그녀가 바라던 목표가 이뤄진 순간이지 않은가.

'···아, 맞다. 내 포인트.'

물론 정말 조금··· 아주 살짝, 카르마가 아까운 건 어쩔 수 없는 문제였다.

***

감격의 재회 시간을 가진 것도 잠시.

이세아는 곧 그들 모두를 데리고 공간이동을 통해 다시 로한 공국의 수도, 로한으로 이동했다.

하인리히가 급하게 이동하는 바람에 큰일이 터진 줄 알고 부랴부랴 뒤따라오긴 했는데, 이미 상황이 모두 끝났으니 더는 여기서 시간을 보낼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으하하! 뜻밖에 횡재했군! 이놈들은 워낙 조심성이 많아서 강자는 피하고 약자만 노린단 말이지. 그것 때문에 소재도 귀하고 말이야!"

그 와중에 야만 전사 할리가 순식간에 그리핀을 해체해 부산물을 챙기기도 했으나, 어차피 그 정도는 늘 있는 일이었던지라 딱히 대수롭지도 않았다.

물론 그 자리에서 심장을 뽑아 마석을 씹어 삼키고, 발라낸 마물의 고기까지 야무지게 구워 먹는 모습은 아직도 적응되지 않긴 했지만.

'오러를 사용한 것도, 마법을 사용한 것도 아닌데 마나를 움직여 열을 발생시키다니. 그 녹색 눈, 언제 한 번 조사해 보고 싶은데···. 좀 더 친해지면 넌지시 말해 볼까? ···역시 과거사와 연관이 있을 테니 아무래도 실례겠지?'

사실 눈을 제외하더라도 할리라는 존재는 천생 마법사인 이세아에게 흥미로움 그 자체였다.

'용인'은 황녀의 도움으로 수많은 마법 지식을 접하고, 나중엔 마탑들과의 학술 교류까지 종종 참여했던 그녀에게도 생소한 생명체였으니.

심지어 거기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모종의 시술까지 더해진 상태라면 더 말해 무엇하랴.

아마 그가 지금처럼 강하지 않았더라면 연구에 미친 마법사들이 그를 결코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무사히 로한에 도착한 이후.

제국 주둔군을 통해 황실에 라일리 황녀의 무사 귀환을 알리고, 그녀와 함께 숙소로 돌아온 이세아는 할리보다 더한 관심을 끄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지구에서 온 이세계인이라고?"

좀 더 집중적인 치료를 하겠다며 하인리히가 데려간 부상자가 바로 그 당사자.

처음 마주했을 때는 라일리에게 정신이 팔려 딱히 신경 쓰지 못했는데, 그가 자신과 동향 사람이었다고 하니 당연한 일이었다.

"응, 이름은 헤론···이 아니라 헤스페론. 이상한 이름이지? 새로운 시작을 기념해서 스스로 지은 거래. 푸흡!"

"흐음—?"

"본명은 하스···운? 이라고 했던 거 같은데, 잘 모르겠네. 뭔가 어려운 발음이었어."

이세아는 연신 조잘거리는 라일리를 가늘게 뜬 눈으로 지그시 바라보았다.

8년을 함께해 왔지만 그녀가 누군가에 대해 이렇게 즐겁게 이야기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애초에 이세아 자신을 제외한 모두에게 은근히 벽을 세우는 이 아이가 다른 사람을 이리 편하게 대하다니.

뭔가 자식의 성장을 보는 듯 대견하면서도 시원섭섭한 기분이랄까.

"뭐··· 그래서 세아 언니 생각도 나고, 마침 거기선 할 것도 없었으니까···."

그 와중에도 그녀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불사왕의 성에 갇히고 그를 만나게 된 후로 있었던 일들을.

당연히 그 대부분의 시간을 마법 수련으로 보냈던 만큼, 자연스럽게 이야기는 그것을 위주로 흘러갈 수밖에 없었다.

처음엔 뭔가의 인연을 느껴 마법을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마치 과거의 이세아를 떠올리게 하는 그 재능에 깜짝 놀라버렸다던가.

"···그 성장 속도가 너무 빠르다 보니 결국 내가 더는 가르칠 게 없어진 거 있지? 자존심 때문에 중간에 멈추지도 못하고, 결국 나중엔 아는 것들을 필사적으로 쥐어짜 내야 했다니까?"

헤스페론의 능력에 대해 열변을 토하는 라일리.

그리고 이세아는 그녀가 왜 그 이야기를 이렇게 열심히 했는지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말인데? 세아 언니가 그 사람을 좀 봐주면 안 될까~? 제국··· 아니, 대륙 최고의 천재 마법사 이세아 프리스틴 님에게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닐 테니까! 응?"

"흐흠?"

이세아는 아부와 함께 배시시 미소 짓는 금발의 미녀를 바라보며 슬쩍 고개를 기울였다.

어쩐지 말이 길어진다 싶더니 처음부터 이걸 부탁하려 했던 모양이었다.

'···그래, 나도 벌써 이 세계로 온 지 8년이 넘었지. 내가 언제까지나 이 아이의 옆에 있어 줄 수는 없으니, 대신 곁을 지켜줄 다른 사람이 필요하긴 했는데···.'

말을 들어보니 자신 못지않은, 어쩌면 그 이상의 재능을 지닌 사람이라는 것 같았다.

거기에 그녀의 가르침까지 더해진다면 어쩌면 정말 몇 년 안에 라일리를 충분히 지켜줄 수 있을 만큼 성장 할지도.

하지만 여기서 문제는, 결국 그 또한 지구인인 건 마찬가지라는 사실이었다.

'나중엔 그도 라일리의 곁을 떠날 날이 오겠지. 조금 시간을 벌 수는 있겠지만.'

물론 그때쯤이면 지금과는 상황이 많이 달라져 있을 것이다.

사실 라일리가 혼자 돌아온 시점에서 이미 황위 경쟁은 거의 끝났다 봐도 좋을 정도였으니.

흔들리던 파벌은 단단히 결집해서 오히려 주변 세력들을 빠르게 흡수할 테고, 간신히 그들을 붙잡아두는 데에 그쳤던 이세아의 활약도 그 현상에 힘을 더할 터였다.

아마 몇 년까지 갈 필요도 없이 일 년 내로 황태자는 오갈 곳 없는 신세가 되지 않을까?

'그런데 하필이면 나 이후로 정을 붙인 존재가 또 이계인이란 거지. 이곳 출신의 사람들에게 두는 거리감은 여전한데 말이야.'

그동안 파벌을 꾸리고 아랫사람들을 거느리면서 많이 나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아직 그 의식의 기저에 깔린 거부감은 여전한 듯싶었다.

그래도 아직은 시간이 제법 남아있기도 하니, 그 문제는 앞으로 차차 방법을 찾아 봐야겠지.

"뭐, 좋아. 그가 큰 공을 세운 것도 사실이니까. 그렇다 해도 지금 하는 일 때문에 그리 많은 시간을 할애하진 못하겠지만."

그러나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과는 별개로, 이세아는 라일리의 부탁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라일리를 구해준 은인에게 가르침을 주는 것쯤이야 큰 보답도 아니었다.

당연히 따로 이것저것 챙겨줄 생각이기도 했고.

또 약간의 사심을 더하자면···.

라일리가 자기 다음으로 의지하게 된 그 이방인을 좀 더 가까이서 살펴보고 싶은 마음도 단단히 한몫했다.

아무래도 동성보다는 이성과의 관계에서 문제가 생길 확률이 더 높지 않은가!

그 남자가 라일리처럼 예쁜 아이에게 흑심을 품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아직 라일리는 어리니까. 그가 괜히 허튼 생각 하지 않게 스승으로서 소소하게 경고도 좀 해주고 말이지.'

150센티를 조금 넘는 작은 소녀가 170을 훌쩍 넘는 장신의 미녀를 바라보며 근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았어! 역시 세아 언니야!"

"그러고 보니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기에 아까부터 자꾸 언니라 부르는 거야? 전에 그렇게 말했을 때는 싫다더니."

"헤헤헤, 그냥 좀? 생각해 보니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닌 데 내가 너무 유난을 부렸던 것 같더라고."

배시시 미소 지은 라일리는 다시 이세아를 끌어안으며 그녀에게 어리광을 부렸다.

속으로는 일이 잘 풀렸다는 만족감에 쾌재를 부르면서.

'됐다! 이걸로 어느 정도는 은혜를 갚을 수 있겠어. 아직 많이 부족하긴 하지만, 그건 앞으로 차차 갚아 나가면 되겠지! 또 언니도 헤론도 동향 사람과 함께라면 앞으로 향수병을 이겨내는 데도 도움이 될 거야.'

헤스페론에 대한 이야기를 이세아에게 했던 것 또한 이미 사전에 그와 합의가 된 사안이었다.

불사성에 함께 있으며 그들은 많은 대화를 나누었고, 그 중엔 라일리가 자신이 아는 지구인을 소개해주겠다는 내용도 있었던 것.

물론 처음부터 이세아와 접촉할 생각이었던 헤스페론은 흔쾌히 그것을 받아들이며 자신에 대한 정보 공개를 허용했다.

어차피 그의 신상이라 해 봐야 날조된 것들밖에 없기도 했고.

그렇게 다사다난했던 하루가 훈훈한 상봉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다음 날이 밝았을 때.

"이거 참,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제 이름은 헤스페론입니다. 진짜로 죽는 줄 알았는데, 덕분에 살았습니다."

"별말씀을. 그 또한 전부 주신의 뜻이겠지요. 저는 하인리히라고 합니다."

"크하하핫! 거 형씨 겉은 비리비리해 보이는데 상당히 튼실하구만! 아, 난 할리라고 부르면 된다고!"

마침내 부상으로 정신을 잃었던 헤스페론이 깨어나, 일행은 그와 정식으로 통성명을 나눌 수 있었다.

마치 세 명과 같은 '한 사람'이 포함된 상태로.

#185

이세계의 지구인들 (2)

로한으로 도착한 다음 날.

헤스페론이 정신을 차리자, 4인의 용사 파티는 그의 병실에서 황녀까지 포함해 따로 대화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애초에 그들의 최종 목표는 불사왕 한스를 쓰러뜨리는 것이지 않았는가?

그런 마당에 포로까지 되었다가 그 본거지를 탈출해 빠져나온 이들이 있었으니, 정보 수집 차원에서라도 필히 거쳐야 할 과정이었다.

물론 그렇게 모인 6명 중 과반수인 3명이 실은 동일 인물이라는 건 다른 이들이 알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그렇게 해서 그곳에서 간신히 빠져나올 수 있었죠. 이후로는 별거 없어요. 몬스터들이 득실거리는 땅을 가로질러 남쪽으로 이동하다, 결국 그리핀에게 당할 위기에서 성자님께서 구해주신 게 전부니까."

아무리 헤스페론이 정신을 차렸다 한들 아직 환자인 만큼, 전후 사정을 설명하는 것엔 라일리가 먼저 자진하고 나섰다.

여전히 침대에 기대앉은 그는 뭔가 추가할 부분이 있을 때만 첨언하기로 했으나, 그녀의 조곤조곤하면서도 조리 있는 말은 따로 뭐라 덧붙일 필요도 없을 정도였다.

"흐음, 불사성이라. 북부 산맥 내에 불사왕의 거점이 있다는 것은 관측으로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만, 워낙 위험 지역에 있는지라 그것을 직접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는데···."

마침내 그녀의 이야기가 모두 끝나고.

무거운 표정으로 이야기를 듣고 있던 하인리히가 그 광경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듯 지그시 눈 감으며 말을 이었다.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이 정보는 이후 불사왕을 상대하는 데 큰 도움이 될 테지요."

그리고 그런 진지한 분위기는 미리 들어 대충 알고 있던 이세아와 창을 끌어안고 벽에 기대고 서 있던 지오스도 마찬가지였으니.

오직 길어지는 이야기에 고개를 푹 숙이고 꾸벅꾸벅 조는 할리만이 천하태평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점이 있습니다만."

하지만 그때,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지오스가 눈을 빛내며 입을 열었다.

그는 별다른 말도 없이 조용하던 평소와는 다르게, 불사왕과 관련한 주제가 화두에 오르자 매우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 불사왕의 성에서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었는지 아직 명확히 말씀해 주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무려 그 밴시 퀸 올리비아의 방해 속에서도 가능했던 방법 말입니다."

"그건, 헤스페론 씨의 특별한 능력 덕분에 가능했다고 아까 말씀드렸···."

"아니오, 황녀님. 이건 그렇게 어물쩍 넘어갈 문제가 아닙니다. 불사왕이 심혈을 기울였을 것이 틀림없는 보안을 무력화할 수단. 이건 추후를 생각해서라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입니다."

평소와는 달리 청산유수로 말을 잇는 지오스 칼킨.

그가 이렇게 말을 많이 하는 것을 처음 보는 하인리히와 이세아, 심지어 졸고 있던 할리까지 깨어나 동그래진 눈으로 그 모습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그것이 특별한 능력이라면 어떤 식으로 특별했기에 가능했던 건지. 혹시 능력의 발동에 필요한 특정 조건이 그 열쇠가 아닌지. 혹은 그걸 다른 기술에 응용할 여지는 없는지."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는 라일리에게서 시선을 돌려 침상에 기대앉은 헤스페론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평소의 암울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그의 두 눈은 무언가의 열기로 강하게 이글거리고 있었다.

"잊지 마십시오. 상대는 그 불사왕 한스입니다. 지금 저희가 있는 이 로한 공국을 무너뜨리고, 수많은 대륙인을 학살한 그 한스 말입니다. 지금 저희는 사용할 수단을 가릴 때가 아닙니다."

"···으음."

그에 차마 반박하지 못한 라일리가 침음을 흘렸다.

좀 과격하긴 했으나 확실히 옳은 말이었다.

일반적인 경우였다면 충분히 주변의 동조와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주장이겠지.

한 가지 안타까운 점이라면, 이 자리에서 오로지 그 혼자만이 아무것도 모르는 외부인이라는 사실이었다.

'아니지? 이건 오히려 괜찮은 기회 같은데.'

대의를 위해 개인의 비전(秘傳)마저 털어놓으라고 한다··· 이건 반대로 그 자신에게도 적용할 수 있는 문제이지 않나!

호시탐탐 그의 기술을 탐내던 입장에서 이번 건은 좋은 계기라 할 수 있었다.

"음, 뭐. 딱히 숨길 일도 아니겠죠."

이리저리 계산기를 두들기며 순식간에 판단을 마친 후.

그의 시선을 받던 헤스페론이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사실 이 능력에 대해서는 저도 잘 모릅니다. 아직 이걸 얻은 지 두 달도 채 되지 않았거든요."

"그게 무슨··· 그럼 그 능력을 얻자마자 곧바로 북부 산맥으로 향했다가 불사왕에게 잡혔던 거란 말씀이시오?"

"아, 그곳에 간 건 제 의지와는 상관없는 일이었습니다. 하필 떨어진 위치가 거기였던 거죠. 저는 다른 세상에서 온 이세계인이니까요!"

"···이세계인?"

그 갑작스러운 커밍아웃에 지오스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동시에 이세아도 살짝 움찔했으나, 그녀는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그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능력도 그 과정에서 얻게 된 거라··· 딱히 뭐라 드릴 말씀이 없네요."

그는 그렇게 말을 마치며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사실 원래부터 헤스페론은 이쪽 노선으로 갈 생각이었기에 별로 큰 비밀이라 할 것도 아니었다.

굳이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닐 생각은 없지만, 그렇다고 기를 쓰고 숨기려 들지도 않는 정도?

'사실 미끼 같은 느낌도 좀 있고 말이지.'

그러면서 이참에 지오스의 반응도 살짝 떠볼 생각이었는데, 그는 이세계인이라는 말을 들은 순간부터 뭔가를 생각하듯 고개를 갸웃거리고만 있었다.

"지오스 님? 일단 그 문제는 넘어가도록 하죠. 어차피 복잡한 건 지금 듣는다고 별 의미도 없을 테니까요."

"아! ···알겠습니다. 성자님. 그런 종류의 능력이라면 더 자세히 알기 위해서는 좀 더 시간이 필요하겠지요."

"그에 관련해서는 대마법사이신 이세아 님에게 맡기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저희보다는 아는 게 더 많지 않으시겠습니까?"

"과연 그렇군요. 제가 너무 마음만 앞섰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하인리히의 개입과 함께 한창 불타올랐던 지오스가 다시 잠잠해졌고, 그 대화를 끝으로 제법 길게 이어졌던 대화도 슬슬 마무리되기 시작했다.

"생각 이상으로 이야기가 길어졌군요. 전 잠시 주둔지에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별다른 일정이 없으니 편하게 쉬셔도 됩니다."

"으하하하! 난 근방을 좀 돌면서 사냥이나 하고 와야겠구만! 그렇지 않아도 좀이 쑤셨는데 잘 됐어!"

자리가 파하며 하나둘 각자 볼일을 보러 밖으로 나가는 일행들.

하지만 모두가 그렇게 자리를 피한 것은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라일리가 슬쩍슬쩍 눈치를 보다 조심스럽게 병실을 나선 직후에···.

"헤스페론 씨? 잠깐 시간 괜찮으세요? 둘이서 대화를 좀 나누고 싶은 게 있는데."

끝까지 남아있던 이세아가 가늘게 뜬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조용히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

미국에 소재한 세계 귀환자 협회 본부.

딸깍— 딸깍!

"후우, 드디어 끝났군. 으차차!"

새롭게 추가된 정보의 업로드를 마친 사내가 뻐근한 몸으로 기지개를 켜다 축 늘어졌다.

"어우— 이 일은 해도 해도 끝이 없으니."

그는 귀환자 협회 '이세계 현황 파악팀'의 일원으로, 곳곳에서 수집되는 정보들을 취합해 각 차원의 현황을 갱신하는 것이 주 업무였다.

얼핏 보면 들이는 노력에 비해 얻는 것이 별로 없다고 생각될 수도 있으나, 이건 의외로 대중들의 많은 호응을 받는 사업이었다.

아직 각성하지 않은 이들에게는 미리 이세계에 대한 사전 정보를 제공해 그들의 생존 확률을 높여주고, 이미 돌아온 귀환자들에게는 출신 세계의 정보를 간접적으로나마 접하게 해 주는 뉴스 같은 역할을 했던 것.

사실 일반인들은 각성하게 되더라도 전송되기 전까지는 자신이 어느 차원으로 갈지 알 수 없었기에, 그 수백 개가 넘는 차원의 정보에서 유용한 내용을 얻을 확률은 그리 높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이세계에 떨어지는 것보다는 약간이라도 아는 편이 훨씬 낫지 않겠는가?

'만약 관심 있게 살펴봤던 세계에 당첨되기라도 한다면 적응 기간을 확 줄여서 생존 확률도 급격히 올라갈 테고.'

실제로 그 효과는 최근 들어 조금씩 상승하기 시작한 귀환율이 톡톡히 증명하고 있었다.

'물론 일하는 입장에서는 시차 때문에 변화가 너무 잦아 갱신이 좀 번거롭긴 하지만 말이야.'

거기다 본부에서는 세계 각국의 지부에서 올라오는 정보들을 취합하고 교차 검증까지 해야 하다 보니, 기껏 확인까지 마치고 정리를 끝낸 정보가 곧바로 폐기되는 경우도 비일비재할 정도였다.

또 한 가지 귀찮은 경우를 꼽자면, 관측된 지 오래되지 않은 차원의 경우 정보의 진위를 가리기 위한 품이 많이 든다는 점일까?

여기서 정리된 정보는 전 세계로 퍼져나가는 만큼 허위 정보가 섞이지 않도록 철저히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사전 정보도 부족하고 아는 사람도 적은 차원은 정보를 검증하는 데 그만큼 어려움이 있을 수밖에 없으니.

'그래도 이 차원은 그게 좀 덜한 편이었지.'

그는 자신이 막 업로드한 정보들을 다시 살펴보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New) 아우테리카 차원.

이곳도 아직 돌아온 사람이 적은 건 마찬가지였으나, 그 얼마 되지 않은 사람들이 하는 말이 대체로 일치한 편이라 검증이 빨리 진행된 케이스였다.

돌아온 시기들도 비슷해서 각자가 알고 있는 세계정세에 큰 차이가 나지 않기도 했고.

'···마왕의 강림으로 세계가 한창 혼란에 빠진 상황이라고 하니까.'

대륙 전역에서 몬스터들이 미쳐 날뛰며 여러 국가가 휘청인 것은 물론, 결국 멸망에 이른 소국과 혼란을 틈탄 흡혈귀 마인들에게 점거된 나라까지 있을 정도라고 하니 더 말할 필요가 있나.

그에 협회에서 추정한 위험성 등급도 '상당히 높음, 주의 요망'이었다.

미리 카르마를 확보해 둔 어중간한 각성자들이라면 잇달아 귀환을 선택할 만한 환경이라 할 수 있겠지.

'지구에 있는 사람들에겐 별 상관도 없는 문제겠지만 말이야. 그나저나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군. 슬슬 퇴근 준비를 해야겠어.'

어쨌든 그가 할 일은 여기서 끝이었으니, 나머지는 정보를 받아들일 사람들의 몫이었다.

그렇게 세계 귀환자 협회 본부에서부터 시작된 정보는 인터넷을 타고 전 세계로 빠르게 퍼져 나갔고—.

발달한 기술과 유능한 인재들에 의해 순식간에 각자의 언어로 번역되어 대중에 공개되었다.

소정의 금액을 받는 유료 서비스이긴 하나, 원한다면 누구나 열람할 수 있게 된 각 차원의 최신 정보들.

"오? 이제 슬슬 정보들이 풀리기 시작한 건가? 역시 아우테리카에도 알게 모르게 지구인들이 제법 있었던 모양이야."

그리고 그것을 살펴보는 이들 중에는 태평양 건너편의 한국에서 평소와 다름없는 일상을 보내던 한성현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주택 내부의 헬스장에서 운동과 샤워를 마치고 수건을 어깨에 걸친 채 인터넷을 하다가 발견한 자료에 눈을 빛냈다.

딱히 고급 정보라고 할 만한 것들은 별로 없었으나, 그래도 저번과는 다르게 제법 알찬 내용들이 들어차 있는 것이 그간 귀환한 이들의 수가 적진 않았던 모양이었다.

다만 한 가지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이 있다면···.

-이온 대륙을 침공한 마왕, '불사왕 한스'에 의해 세계적으로 큰 혼란에 빠진 상황. 모든 몬스터들이 광기에 젖어 있으므로···.

기어코 지구에도 불사왕의 이름이 '한스'라고 알려져 버렸다는 것이었다.

이미 어느 정도 포기한 상태이긴 했지만, 그래도 그간 열심히 어필했던 만큼 혹시나 하는 기대도 있었거늘.

아무래도 아우테리카에 거주하던 지구인들에게까지 닿기엔 그 정도의 노력으로는 부족했던 모양이다.

"쯧, 이제 와선 어쩔 수 없지."

사실 여기선 하회탈이라고 불리고 있는 만큼 불사왕의 이름에 딱히 집착할 필요가 없긴 했다.

어차피 그건 실체도 없이 서류상으로만 남는 이름일 뿐이니.

'흠, 그런데 생각 이상으로 내용이 나쁘지 않네. 확실히 이걸 잘만 숙지하면 적응하는 데 큰 도움이 되겠어. ···내가 갔을 때도 이런 게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는 아우테리카에 대한 정보들을 쭉 훑어보며 가만히 턱을 쓰다듬었다.

-아우테리카 종교계를 지배하는 최대 규모의 세력, 주신교단의 성자 '하인리히 세인트 랜드가드'가 동료들과 함께 불사왕에 맞서며 당장의 전쟁은 피할 수 있게 됨. 하지만 언제 어떤 사건이 터질지 모르는 위태로운 상황인 것은 변함없으므로···.

-이온 대륙 서부의 탈리아 왕국에서 흡혈귀 마인들이 나라를 점령. 당장은 흡혈귀 군주의 강한 통제력으로 인해 문제가 발생하진 않고 있으나, 이 또한 불안한···.

물론 대부분의 정보가 그가 아는 내용들이긴 했다.

사실 안다고 하기도 뭐한 게, 중요하게 다뤄지는 사건들에 그가 개입한 것들이 한두 건이 아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이건?'

하지만 모든 정보가 쓸모없었던 것은 아니었는데—.

정말 의외로, 그가 미처 파악하지 못했던 정보도 그 안에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온 대륙 남부의 칼코스 부족 연맹에서 쿠데타 발발. 워낙 은밀하게 진행되어 자세한 정보는 불명. 하지만 기본적으로 외부인에게 배타적인 지역이기에, 만약 이곳에서 시작하게 되었다면···.

'쿠데타?'

남부 부족 연맹이 시끄러운 상황이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고, 조만간 방문할 생각이 있기도 했다.

그저 최근 이런저런 일들이 많아 계속 뒤로 미루다 보니 지금까지 왔을 뿐.

'그런데 쿠데타란 말이지? 그것도 아우테리카의 여러 정보 조직들이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은밀하게?'

물론 부족 연맹은 정보의 사각지대라고 불릴 정도로 폐쇄적인 곳이었지만, 그렇다고 그 정도로 큰 사건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다.

일을 벌인 쪽에서 정말 작정하고 계획을 시작했다는 뜻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철저하게 정보를 차단하던 놈들도 설마 지구인이 차원을 넘어 도망칠 줄은 몰랐겠지. 이런 일을 알 정도면 제법 고위층의 측근이었을 텐데.'

어쨌든 덕분에 쓸 만한 정보를 얻게 되었으니 이쪽으로선 감사할 따름이었다.

"흐음··· 남부, 쿠데타라. 이걸 어떻게 이용할 수 없을까? 좀 더 자세한 사정을 파악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큰 사건에는 큰 카르마가 따르는 법.

거기다 남부라 하면 할리가 얻을만한 것들이 분명히 더 있을 터였다.

'누가 뭐래도 마음의 고향이니까 말이지!'

물론 그것도 할리가 일방적으로 정한 것이긴 하지만.

그래도 반박하는 사람들의 허리를 전부 분질러 버린다면, 모두가 그의 진심을 알아주지 않겠는가?

그렇게, 정보가 부족해 차일피일 미루기만 하던 남부에서 먹음직스럽게 숙성된 향기가 풍겨 나오기 시작했다.

#186

이세계의 지구인들 (3)

"일단 다시 한번 제 소개를 할게요. 전 이세아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단둘이 남은 병실 내부.

그녀는 평소와 같은 냉담한 얼굴로 재차 그에게 인사말을 건넸다.

"아, 저는 헤스페론이···."

"잠깐만요. 지금은 그 가명 말고 본명으로 부탁드려도 될까요?"

"본명··· 말입니까?"

"사실 이세계에서 그걸 따지는 것도 우습긴 하지만. 그래도 처음으로 동향 사람과 인사를 나누는 자리니 좀 더 '제대로' 통성명하고 싶어서요. 뭐, 일종의 요식 행위라고 생각해도 좋아요."

그녀가 아예 대놓고 그리 말하자 헤스페론도 곧 그 의도를 깨닫고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역시 당신이 라일리가 소개해 준다던 그 지구인이었군요. 사실 이름을 들었을 때부터 긴가민가하긴 했는데."

"흐음, 그쪽도 한국인이셨나 봐요?"

"아! 전 하승훈입니다. 서울에서 살다가 이곳에 온 지는 두 달 조금 안 됐지요. 아하하!"

참고로 이 이름은 그냥 지어낸 가명이 아니었다.

서울 암흑가의 큰손이 된 헤테로시스를 통해 구한, 정부의 전산 정보에까지 존재하는 정말 제대로 된 신분 중 하나였으니까.

힘과 권력만 있다면 이런 사소한 디테일까지 챙기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은 법이었다.

"전 이곳에 온 지 벌써 8년이 넘어가네요. 그동안 참 많은 일이 있었는데···. 아, 일단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사실 라일리가 납치되고부터가 가장 힘들었을 때였거든요."

"별말씀을, 저도 많은 도움을 받았으니까요. 라일리가 아니었으면 아무것도 모른 채 평생 그 안에만 갇혀 있을 뻔했지 뭡니까!"

그렇게 재차 인사를 나눈 그들은 점점 말문이 트이며 활발하게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처음엔 조금 거리를 두는 듯했던 이세아도 나중엔 그런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으니.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녀는 어린 나이에 다른 세상에 떨어져 무려 8년을 버텨온 사람이었다.

아무리 라일리 황녀와 함께하며 외로움을 덜었다고는 하지만 갑자기 떠나왔던 고향에 대한 그리움만은 어쩔 수 없는 노릇.

그런 상황에서 동향인 지구, 그것도 한국에서 온 사람을 마주했으니 반가운 마음이 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물며 큰 도움까지 받으며 기본적인 호감도 있는 상태였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

"그래서 헤론 씨는 이제 스무 살이시라고요?"

그리고 이런저런 주제로 이어지던 대화는 자연스레 나이에 관한 것까지 흘러가게 되었다.

사실 헤스페론에 대한 호구조사도 목적 중 하나였던 만큼 그건 처음부터 그녀가 의도한 바였으나, 문제는 다음에 이어진 그의 질문이었다.

"그렇죠. 그러고 보니 이세아 씨는 나이가 어떻게 되십니까? 뭐, 좀 많이 동안이시긴 한데, 라일리가 언니라고 부를 정도면 최소한 스물 이상은 되겠··· 어라? 하지만 8년 전에 왔다고 했으니···."

그가 갸웃거리며 눈만 깜빡이자 이세아는 잠시 멈칫했다.

순간적으로 그녀도 자기를 몇 살이라고 해야 하는지 갑자기 헷갈렸던 것.

일단 이곳으로 넘어온 것은 18살 때였으니, 그로부터 8년이 지난 지금은 틀림없이 26살이라고 봐야 했다.

명백히 그보다 나이가 많다고 할 수 있겠지.

하지만 다시 지구로 돌아가면 그녀는 곧 19살을 앞둔 18살이 된다.

또 만약 이후에 그를 지구에서 만나게 된다면 과연 그때도 자신이 연상이라고 할 수 있나?

"스···."

"스?"

"스물여섯이에요."

하지만 잠시 인상을 찌푸리고 고민하던 그녀는 곧 그것이 별 의미 없었다는 것을 깨닫고 당당하게 말을 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자신의 나이를 '18세(9년 차)'라고 소개할 수도 없는 일이지 않은가!

또 원래 나이란 '살아온 세월'을 세는 단위였으니,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해도 충분한 일이었다.

앞으로 그를 가르치는 스승이 될 텐데 괜히 이런 일로 복잡해지고 싶지 않기도 했고.

"아하핫! 이거 재밌네요? 어쩐지 좀 과하게 동안이다 싶었는데, 9년 차 고등학생이라서 그러셨구나!"

하지만 그 대답으로 그녀가 전송된 나이를 유추한 헤스페론은 눈치도 없이 신나게 웃어 재낄 뿐이었다.

···그간 대화하며 많이 편해졌는지 굉장히 격의 없는 웃음이었다.

"크흠, 헤론 씨?"

결국 이세아는 가볍게 헛기침하며 그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래도 나이를 존중해줄 생각은 있는 듯 박장대소하면서도 존댓말을 고수하긴 했지만, 아무래도 그것에 불편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아— 이거 죄송합니다. 그냥 신기해서 말이죠. 사실 라일리가 귀엽고 사랑스러운 언니라고 했을 땐 그러려니 했었는데, 확실히 그 말 대로군요!"

"헤론···?"

그런데 그녀의 생각 이상으로 그가 가진 내적 친밀감이 더 컸던 모양이었다.

두 번이나 부르며 눈치를 주었는데도 유쾌한 농담이라도 한다는 듯 실실거리는 것을 보니.

"근데 솔직히 외모로 봤을 땐 고등학생이라기보단 중학생 같···."

"···좀 닥치세요!"

이세아는 머릿속에 기록한 헤스페론의 조사 내용에 굵게 한 줄을 추가했다.

이 인간, 눈치는 더럽게도 없다고.

***

언제나처럼 음침한 불사성의 한편.

"도망쳤다고? 신입이··· 여기서? 그것도 황녀까지 데리고?"

아우테리카의 또 다른 지구인 앤드류 위버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오늘도 평소처럼 업무에 치인 생활을 보내다가 조금 늦게 그 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는데, 그렇게 접하게 된 내용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어떻게?"

무슨 수단을 썼는지는 알 것 같았다.

아무래도 고유스킬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그것을 고작 전송된 지 두 달도 채 되지 않은 신입이 했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생각보다 대단한 녀석이었나."

여러모로 일이 꼬이는 바람에 그자가 처음 잡혀 왔을 때 말고는 따로 대면할 기회도 없었지만, 설마 그 정도로 유능한 이였을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심지어 호기심에 사용한 그의 「궤적 관측」에도 명확히 잡히지 않는 걸 보니, 그 사이에 또 뭔가 수라도 쓴 모양.

'거기다 왠지 모르게 불사의 군대도 추적하려는 낌새를 보이지 않고.'

어차피 황태자가 있으니 상관없다는 것일까?

어쩌면 불사왕은 이번 일도 단순히 유희의 일부로 여기고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허— 그놈 참 운 한번 끝내주는군. 처음엔 불쌍하다고 생각할 정도였는데 말이야."

탈출에 성공한 이상 이제 황녀는 단순한 포로가 아니었다.

무려 제국의 가장 유력한 황제 후보라는 황금 인맥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심지어 단순히 그녀를 탈출시키는 공을 세운 건 둘째 치고, 함께 이겨낸 고난은 남녀 사이에 모종의 감정이 싹트게 만드는 단골 소재이지 않은가?

여러모로 부러울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쯧, 누구는 머리가 돌아버린 놈들이랑 언데드들과 부대끼고 있는데 말이지.'

하지만 앤드류는 그저 가볍게 혀를 차며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전이었다면 치솟는 시기심에 몸부림쳤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고된 업무로 하루하루 시들어갈 때, 편한 곳에서 연애질이나 하던 것들이 결국 눈이 맞아 도망갔다는 것과 다를 바 없었으니까.

하지만 더 이상, 그는 그들을 부러워할 필요가 없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그 날이 마침내 오고야 말았으니까!

『카르마 상점』

『귀환 (1,000,000) (사용 가능) 』

『고유스킬 강화 (700,000)』

『스테이터스 강화 –상세 보기』

『보유 카르마 - 1,000,028』

"흐··· 흐흐흐흣—!"

그가 역천의 서약의 일원으로서 개입한 일들은 그 수가 결코 적지 않았다.

그중 가장 대표적이면서도 규모가 큰 사건이 바로 심연의 문을 열어 '광기'를 대륙에 퍼트리는 데에 일조했던 것.

당시에는 생각보다 포인트가 적게 들어와 그저 고유스킬의 네 번째 강화를 하는 정도에 그쳤으나, 이후 시간이 지나며 그로 인한 피해가 점점 누적되자 그에게 들어오는 카르마도 증가하기 시작했다.

거기다 그가 몇 년간 관여했던 일들에서도 소소하게나마 꾸준히 정산이 이뤄지고, 최근에는 가혹한 노동으로 올리비아에게 착취당하기까지 했으니···.

'9년··· 길었다.'

드디어 그 결과가 나타난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한참 그 자리에서 낄낄거리던 그는 한결 편한 마음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제 언제든 도망갈 수 있는 퇴로가 마련되었다고 생각하니, 평소엔 숨이 막힐 듯했던 불사성의 정경도 마치 유령의 집을 구경하는 것처럼 감상할 수 있었다.

이후 그는 느긋하게 성내를 돌아다니며 자신만의 이별 의식을 거행했다.

미친놈들이 득실거리는 제1 거주 구역은 물론이고 높게 솟은 첨탑까지.

갈 수 있는 모든 곳을 기웃거리며 곳곳에 자신의 흔적을 남겼다.

-앤드류 위버 왔다 감.

"후우, 대충 다 된 것 같은데."

그는 벽의 한구석에 삐뚤삐뚤한 영어로 적힌 글귀를 바라보며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지긋지긋할 정도로 끔찍한 장소였지만, 그래도 이제 영원히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앤드류···? 업무 시간이 지났는데, 아직도 여기서 무얼 하고 있사옵니까···? 할당량을 채울 때까지 자유 시간은 없다는 걸 잘 아실 터이온데···.]

그때, 감회에 젖어있던 그의 눈앞에 올리비아가 유령처럼 스르륵 나타났다.

"헉!"

꿀꺽.

그 갑작스러운 등장에 움찔한 앤드류가 본능적으로 눈을 내리깔았다.

그는 이제 아무것도 두려울 것이 없는 몸이었으나, 사신이나 다름없던 그녀를 직접 마주하게 되자 저도 모르게 위축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 어차피 이게 마지막이잖아? 내가 무슨 짓을 하든 이제 어떻게 할 수도 없을 텐데!'

무엇보다 곧 떠날 마당에, 마지막까지 이렇게 빌빌대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동안 그녀에게 맺힌 게 오죽 많았던가!

이참에 쌓인 걸 모조리 쏟아부어 버리고 홀가분하게 이 세계를 뜨는 게 최고의 마무리일 터였다.

그리 다짐한 그는 당당하게 허리를 펴며 고개를 치켜들고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가···.

고요히 그를 쳐다보는 흐릿한 눈동자를 마주하고 곧바로 다시 눈을 내리깔았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 괴물은 내가 뭘 하려는 낌새를 보이기만 해도 그 자리에서 날 찢어버릴 수 있잖아? 그 앞에서 경거망동하는 게 과연 현명한 일일까?'

처음에는 면전에 대고 쌍욕과 함께 실컷 조롱을 퍼붓다가 튈 생각이었는데, 그렇게 했다간 정말 도주하기도 전에 사지가 뜯겨나가 버릴 것 같았다.

그간 열심히 쓸모를 증명한 만큼 죽이진 않을 테니 나중에 도망갈 수야 있겠지만···.

'···난 몸 성히 돌아가고 싶단 말이야.'

그러나 역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이대로 물러나기엔 너무 억울했다.

앞으로 영원히 오지 않을 마지막 기회인데, 이걸 그냥 흘려버리면 평생 마음속에 멍울이 진 채 살아가야 할 터.

'그래, 간단하게 몇 마디만 하고 바로 튀자. 곧바로 손을 쓰기엔 애매한 수준으로. 그 정도는 괜찮겠지.'

그는 심호흡과 함께 입술에 침을 발랐다.

그리고 바로 도망갈 수 있도록 단단히 대비하고, 다시 고개를 들어 올리비아를 바라보았다.

[앤드류···? 제 말이 들리지 않으시옵니까···? 역시 그 쓸모없는 귀를 뜯어버리고 뇌에다가 직접 사념을 쏘아드려야겠사옵니까···?]

그녀가 안타깝다는 듯이 그를 바라보며 나직이 속삭였다.

그 말에 저도 모르게 다시 쭈그러들 뻔했지만, 앤드류는 이를 악물고 버티며 당당하게 외쳤다.

"그···!"

[···그?]

"그동안 함께해서 더러웠고, 우리 두 번 다시 보지 말자? 시아나 누님과 일할 때가 훨씬 좋았는데, 당신은 일하는 거 빼곤 전부 누님의 발끝에도 못 미친다고? 아, 그리고 말꼬리 늘이면서 공대하는 거 들을 때마다 엿 같아!"

너무 긴장한 나머지 잠시 음 이탈이 나긴 했으나, 그는 결국 하고 싶었던 말들을 쏟아내는 데에 성공했다.

지레 겁먹어 나름대로 선을 지킨다고 수위가 많이 내려가긴 했지만, 그 예상치 못한 반항은 올리비아를 당황시키기엔 충분했다.

게다가 그리 사이가 좋지 않은 시아나를 끌어들이기까지 했으니···.

쩌저저적—!

삽시간에 온도가 영하로 떨어져 내리며 사방의 기운이 들끓기 시작했다.

[당신, 혹시 흑마력 때문에 미쳐 버리신···.]

더불어 심상치 않은 표정의 올리비아가 서늘하게 뭐라 한마디 하려던 순간.

"하하하하! 그럼 난 간다! 어디 찾을 수 있으면 찾아보라고!"

어느새 분위기를 타 기세등등해진 앤드류가 시원하게 웃어 재끼며 마지막 인사를 던졌다.

그리고 그 직후.

그의 모습은 불사성에서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아···?]

분노를 발산할 상대를 잃고 혼자 남은 올리비아는 한동안 멍하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후 정신을 차리고 곧바로 유령들을 풀어 앤드류의 수색을 시작했으나···.

당연히 이미 차원을 넘어 지구로 이동한 그의 종적은 그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

미국 로스앤젤레스.

"하! 하하하핫! 아아— 속이 시원하구만! 좀 아쉽긴 한데, 뭐 이 정도도 나쁘진 않지! 으하핫!"

자신이 처음 전송되었던 주택 지하실에서 모습을 드러낸 앤드류는 지구로 돌아왔다는 사실에 감격할 겨를도 없이 신나게 웃느라 여념이 없었다.

항상 위압감을 풍기며 그를 깔아보던 올리비아가 부들대는 모습이 눈에 선해 도저히 웃음을 참을 수 없었으니까.

거기다 한참 동안 자신을 찾아 헤매다 결국 포기할 걸 생각하니 그 또한 통쾌하긴 마찬가지.

그가 이세계인이라는 사실은 그녀도 알고 있으니 결국엔 현실을 받아들일 터이나, 혹시 모를 가능성에 수색을 쉽게 멈출 수도 없을 것이다.

"하하··· 하··· 하?"

하지만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던 그의 웃음도 그리 오래 가지는 못했는데.

아주 조금,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음··· 이거 왜 이러지? 금제란 게 원래 이런 건가?"

바로 불사왕에 의해 심어졌던 금제가 여전히 활성화된 채 머릿속에 남아있었던 것.

아니, 왠지 모르게 지금이 아우테리카에 있을 때보다 더 연결이 강해진 느낌이 들었다.

'에이, 설마.'

그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서서히 흘러내리기 시작한 식은땀을 조용히 훔쳤다.

아무래도 원래 금제란 게 원래 이런 식인 모양이었다.

조금 찝찝하긴 하지만, 그래도 명령을 내릴 주체가 없으니 별로 상관없는 문제···.

[호오— 지구로 넘어온 건가, 앤드류 위버?]

그 순간.

앞으로 영원히 들을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목소리가 그의 뇌리를 뒤흔들었다.

"아?"

심장이 철렁이며 내려앉고, 그는 어색하게 웃는 표정 그대로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그의 얼굴에 서서히 차오르기 시작한 공포.

"어, 어? 잠깐··· 잠깐잠깐잠깐···! 이건 아니지! 이건, 어, 이건 말이 다르잖···!"

[앤드류 위버.]

"아—."

'주인'의 절대적인 의지가 담긴 한 마디에 그의 말문이 턱 막혔다.

부정할 여지 없는 금제의 발현이었다.

[크크큭— 마침 일손이 필요했는데 잘 됐구나. 지구에 온 것을 환영한다.]

그렇게 앤드류 위버는 마침내 지옥에서 도망치는 데엔 성공했지만.

도착한 곳에 그가 바라던 평온은 없었다.

#187

제국의 황궁 (1)

'하, 하하하. 이야— 이거 참 이상하네? 역시 내가 고생을 좀 하긴 했나 봐. 환청으로도 모자라 실어증까지 와 버렸나? 아무래도 병원에 가 봐야겠어. 모아둔 돈이 얼마나 되더라? 아니, 어차피 이제 내 능력이면 돈 정도는 얼마든지 벌 수 있으니 상관없나?'

고유스킬의 강화로 쓸데없이 강해진 사고력이 폭주하면서 한순간에 수많은 생각이 앤드류의 머릿속을 스쳤다.

그는 직면한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애써 '부정'하며 생각의 방향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노력했으나···.

[흐음, 이 위치는 미국인가? 그중에서도 서부 지역··· 캘리포니아로군.]

계속해서 그의 머릿속을 뒤흔드는 그 목소리는 도저히 상황을 외면할 수 없게 만들었다.

'아니, 어째서? 왜 불사왕이 여기에 있는 거야! 이게 무슨 개 같은 경우지? 장난하자는 것도 아니고. 저 아우테리카의 괴물이 어떻게 지구로 넘어와!'

다음 단계는 '분노'였다.

사실 한바탕 화를 쏟아내긴 했지만, 불사왕의 정체가 무엇이기에 지구에 있을 수 있는 건지는 지금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어차피 그걸 안다고 처지가 달라지지도 않을 테니까.

'제발···. 그동안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데! 이제야 평온한 삶을 되찾았다고 생각한 직후에 이건 아니잖습니까? 하다못해 조금만이라도 시간을···!'

다음 단계는 '타협'.

이미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하는 최후의 발버둥이었다.

[자— 앤드류 위버, 그럼 첫 번째 임무다. 곧바로 주변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넘어오도록. 도착하게 되면 이쪽에서 따로 사람을 보내도록 하지.]

"아."

금제로 인해 막혔던 말문이 풀리며 앤드류의 입에서 나직한 탄성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이미 '우울'에 빠진 그에게 그런 사소한 건 아무래도 좋을 뿐이었다.

'···그래, 뭐. 그래도 올리비아 그 귀신 밑에서 일하는 것보단 낫겠지. 한국이란 곳도 그렇게 못 사는 나라는 아니었던 걸로 기억하니까. 피자와 콜라가 있고 TV까지 볼 수 있다면··· 그 정도면 더 바랄 것도 없겠네.'

마지막으로 비로소 모든 것을 '수용'하기에 이른 그는 공허한 얼굴로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명을 따르겠습니다. 불사왕님."

따지고 보면 항상 바쁜 불사왕의 직속이 되는 것이니, 깐깐한 상사가 있던 전처럼 업무가 그리 빡빡하지도 않을 터였다.

환경 또한 언데드들이 득실거리며 뿜어내는 흑마력과 죽음의 기운에 비하면 도시의 매연 따윈 향수나 다름없을 테고.

'생각해 보니 그리 나쁘지 않을지도? 업무 환경만 개선된다면··· 차라리 이렇게 강자 밑에 붙어있는 게 더 나을 거야. 그럼 뭔가 콩고물이라도 떨어지지 않을까?'

급격한 사고의 격류를 겪으며 부정적인 감정들이 어느 정도 떨어져 나가자, 그의 내면 깊은 곳에 숨겨져 있던 행복 회로가 맹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미국의 앤드류 위버가 죽음의 5단계를 거치며 한층 성숙해지고 있을 때.

[크흐흣— 언젠가 이렇게 될 거라곤 생각했는데, 예상보다 더 빨랐군. 뜻하지 않게 미국 좌표도 얻게 되었고. 나중에 이동할 시간을 덜 수 있겠어.]

일본에 있던 한스는 사방을 뒤덮은 결계를 유지한 채, 바쁘게 죽음을 수확하는 살마의 활약을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쿠우웅—!

"끄아악!"

"젠장! 뭐야, 이 시커먼 건? 뭐가 이리 빠른··· 크헉!"

이후 제법 수준 있는 각성자들도 많이 포함된 야쿠자 조직이 몰살당하기까지 고작 30여 분.

생각 이상으로 살마의 무공과 '심연'의 시너지가 뛰어난 듯 대단히 만족스러운 성과였다.

이 정도면 생전과 그다지 차이 나지 않아 보일 정도였으니.

'역시 살마는 무공이 주력이라 그런지 고유스킬을 잃은 타격이 크지 않군. 다른 자잘한 스킬들은 여전히 남아있기도 하고.'

아쉽게도 각성하며 주어지는 고유스킬은 소유자가 사망함과 동시에 소멸해 언데드는 사용할 수 없었다.

대다수의 각성자들이 그것에 크게 의지한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안타깝기 그지없는 사실.

어쨌든 마공을 사용하는 어비스 레버넌트, 살마의 시연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이 데이터를 바탕으로 공정의 개량까지 거치면 앞으로 점점 더 효율적인 개체를 만들 수도 있을 테지.

한스는 뒷정리를 시작한 언데드들을 바라보다 느긋하게 난장판이 된 주변을 훑었다.

상황이 마무리 단계로 접어들자 다시 앤드류에 대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 능력이 있으면 앞으로 좀 더 효율적으로 움직일 수 있겠지? 관리는 헤테로시스에 맡기면 될 테니 따로 신경 쓸 필요도 없을 테고.'

물론 그는 누구도 알아선 안 되는 비밀을 알아버렸으니, 다시 꼼꼼하게 금제를 중첩하는 건 필수였다.

가장 큰 비밀인 자신의 정체에 대해서야 감도 못 잡겠지만, '하회탈'이 지구와 이세계를 오갈 수 있다는 것만 해도 상당히 큰 정보였으니까.

'그러고 보니 한국에서 정보 수집을 시키려면 한국어 교육도 병행해야 하지 않나?'

방금 있었던 텔레파시야 금제를 통해 의지를 전달하는 거니 별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언어가 통하지 않으면 그의 정보 수집 효율이 상당히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무언가를 보거나 듣더라도 그 뜻을 모르면 무용지물이 아닌가.

거기다 그를 한국에서만 쓸 것도 아니니 일본어나 중국어 등 다른 나라의 언어들도 교육해야 할 텐데···.

'···아무래도 언어와 관련된 마도구가 있는지 따로 알아봐야겠군. 아우테리카에 없다고 다른 세상에도 없진 않을 테니. 물론 지금까지 못 들어본 걸로 봐선 상당히 귀한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작정하고 찾다 보면 어딘가에선 나오지 않을까?

수고스럽겠지만 그전까진 앤드류가 좀 더 노력해서 언어를 습득해 주는 수밖에 없었다.

물론 한스에게 그가 겪어야 할 노고에 대한 죄책감 따윈 없었다.

남들은 비싼 돈을 들여가며 받는 교육을 공짜로 해줘서 다국어 능력자로 만들어주겠다는데, 오히려 감사를 들어도 모자랄 판 아니겠는가!

본인도 모르는 사이, 앤드류의 평온한 미래에 K-교육의 그림자가 드리우는 순간이었다.

***

"이세계인이라···."

자신의 숙소에서 창을 손질하던 지오스 칼킨이 한순간 멈칫하고는 나직이 혼잣말을 뱉었다.

헤스페론이란 낯선 사내에게서 들었던 한 마디가 뇌리에 박혀 도무지 잊혀 지지 않았던 것이다.

'장난···은 아닌 것 같았는데. 설마 진짜인가?'

여러 부분을 따져 봤을 때, 그의 말이 그냥 내뱉은 헛소리일 확률은 상당히 낮았다.

사실 주변의 분위기 또한 다들 이미 뭔가를 알고 있는 느낌이기도 했고.

그렇다는 말은 곧···.

"당연히 장난인 줄 알았는데, 그럼 그게 진짜였다고?"

이번에 한 말은 헤스페론에 대해서가 아니었다.

그보다 더 전, 훨씬 오래전에—.

자신이 이세계인이라며 그와 같은 소리를 했던 이가 있었다.

지오스의 친구이자 멘토이며, 그에게 이 창과 비기까지 전수해 주었던 스승이기도 한 존재.

그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혹시 모르니 언제 한 번 찾아가 보는 게 좋겠군. 만약 사실이라면 그 헤스페론이라는 자의 능력에 대해서도 좀 더 실마리를 얻을 수 있겠지. 성자님이 오시면 말이라도 꺼내 볼까.'

그렇게 생각을 일단락 지은 그는 멈췄던 창의 손질을 완전히 마무리하고 천천히 창가로 다가가 밖을 내다보았다.

이곳에서 도시 전경을 한눈에 담을 수는 없었지만, 당장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도 로한의 사정을 알기엔 충분했다.

무장한 채 이곳저곳을 분주히 돌아다니는 병사들과 더러운 길거리 곳곳에 쓰레기처럼 널브러진 피난민들.

그들 중 누구의 얼굴에서도 희망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혼란, 절망, 비탄, 원망, 포기···.

한때는 번영했던 일국의 수도에는 그런 암울한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으며, 그들 모두는 하루하루를 힘겹게 버텨나가고 있었다.

'···불사왕 한스.'

이 모든 상황이 전부 그 존재 때문에 초래된 일이었다.

이들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도 고통에 신음하며 죽어가는 이들이 부지기수겠지.

'역시 수단을 가릴 때가 아냐. 놈이 다시 뭔가 큰일을 벌이기 전에 가능한 한 빨리 처리하는 게 최선이다.'

그렇게 지오스가 재차 마음을 다잡던 순간, 문득 골목길 한 귀퉁이에서 꼬질꼬질한 아이를 부둥켜안고 있는 부부의 모습이 그의 시선에 들어왔다.

그리 형편이 좋다 할 수 없는 초췌한 안색의 일가족이었으나, 한데 모여 서로를 의지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그는 한동안 눈을 뗄 수 없었다.

"후우—."

잠시 그들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그는 깊은 한숨과 함께 힘겹게 고개를 돌렸다.

모두가 힘든 이때, 어려운 상황에 처한 이들 하나하나에 연민을 품었다간 끝이 없었다.

무엇보다 이제 일개 창잡이에 불과한 그로서는 그 모두를 책임질 능력도 없었고.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오로지 복수뿐.'

그저 그들의 분노와 한이 담긴 창날을 대신 휘두르는 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으니.

그 창끝이 불사왕의 심장을 꿰뚫을 수 있기만을 소망할 뿐이었다.

***

처음부터 용사 파티가 로한 공국에서 할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애초에 그들을 이쪽으로 보낸 것도 황녀와 헤스페론을 픽업하기 위한 포석일 뿐이었으니, 목적이 달성된 이상 더는 이곳에서 시간을 보낼 필요가 없었다.

물론 하나같이 최고급 인력들인 만큼 잠시 체류하는 것만으로도 전황에 상당한 도움이 되긴 했으나, 그렇다고 이런 변방에 언제까지고 잡혀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들은 앞으로도 가야 할 곳이 많은 몸이었으며, 이곳은 소수의 강자보단 다수의 군대가 더 도움이 되는 전장이었으니까.

그렇게 두 명이 추가된 일행은 로한에 머문 지 며칠 되지도 않아 다음 목적지로 이동했다.

아직 파괴된 신전의 게이트가 채 복구되지 않았던지라, 이세아의 공간 이동 마법을 통해 도착한 곳은 바로—.

"아···!"

라일리 황녀가 나직한 탄성을 토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 그녀의 눈앞에 펼쳐진 정경은, 그 압도적인 규모의 건축물은 그녀에겐 너무나도 익숙한 것이었으니.

"···드디어."

바로 근 두 달 만에 간신히 돌아오게 된 그녀의 집.

아제리온 제국의 수도 제론에 위치한 황궁이었다.

"확실히 황녀님이 돌아왔다고 하니 대우가 다르네요. 보통 어지간히 급한 일이 아니면 외성 안쪽의 좌표는 열어주지도 않는데. 설마 내성도 아니고 이렇게 황궁 내부까지 바로 들어오도록 허가해 줄 줄이야."

추가된 인원까지 데리고 장거리 공간 이동을 하는 게 부담되었던지, 조금 지쳐 보이는 이세아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내부라곤 해도 좌표가 개방된 시설 자체가 외곽에 있는 데다, 바로 옆에는 황실 수호대의 본부까지 있을 정도로 엄중한 관리를 받는 보안 구역이었지만···.

그래도 중요한 이유가 없으면 황족이더라도 외성에서부터 절차를 거쳐 들어와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지금의 대우는 확실히 특별 취급이라고 할 수 있었다.

"뭐, 사실 성자님도 함께 계시니 당연한 일이겠지만요."

지금은 '대(對) 불사왕 대응 특수 기동 타격대'를 이끄느라 일선에서 뛰어다니고 있으나, 원래 주신교단의 성자는 제국의 황제와도 겸상할 수 있는 거물이었다.

이번에도 하인리히가 번거로운 환영식 같은 건 원치 않는다는 의사를 미리 전해뒀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아마 이곳에 도착한 순간부터 진짜 국빈급 대우를 여실히 체험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럼 궁으로 모시겠습니다. 저희를 따라오시지요."

그런데 그들이 마중 나온 호위 인원의 안내를 따라 보안 구역을 나서자.

마치 그때만을 기다렸다는 듯, 바깥에서 서성이던 일단의 무리가 먹이를 발견한 들짐승처럼 일제히 몰려들었다.

"라일리 황녀님! 다시 돌아오신 것을 경하드립니다. 그동안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습니까?"

"오오! 성자님, 저희 황녀님을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과연, 이것이야말로 주신의 은총이라 할 수 있겠지요."

"흠흠, 프리스틴 자작님? 저 말라프 자작입니다. 제가 긴히 드릴 말씀이···."

"모두 물러서 주십시오! 먼 길을 오신 분들입니다. 자자, 비키세요!"

하나같이 비싸 보이는 것들을 온몸에 두르고 비굴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귀족들.

그들이 원하는 바가 너무 노골적이어서 모르는 척하기도 힘들 정도였다.

'기존의 황녀 휘하가 아닌 다른 파벌 귀족들도 상당히 많이 끼어있군. 어라? 심지어 저 양반은 황태자파였던 거 같은데.'

원래부터 5황녀 파벌이었던 귀족들은 희희낙락하며 그녀에게 알랑방귀를 뀌고 있었고, 다른 파벌이었던 이들은 줄을 바꿔 잡기 위해 열심히 자신을 어필했다.

과연 정치가 일상인 이들답게 대세를 읽고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빠르게 판단한 듯했다.

"감사합니다, 여러분. 모두가 걱정해 주신 덕분에 제가 이렇게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던 거겠지요. 솔라인 백작님은 못 뵌 사이 많이 야위셨군요? 아무리 바쁘시더라도 건강은 챙기셔야죠."

"황녀님께서 무사하실까 걱정되어 잠 못 이루는 날이 많아서 말이지요. 그래도 이제는 푹 잘 수 있을 것 같아 다행입니다. 허허헛!"

"피아논 백작님? 2년 만에 뵙는 것 같은데,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흠흠, 물론입니다. 마침 수도에 왔다가 이번에 황녀님께서 무사히 귀환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인사라도 드리고자···."

라일리는 그간 보였던 모습과는 다른 도도한 얼굴로 그들을 능숙하게 다루며 조련해 나갔다.

황궁에 발을 들이자마자 시작된 정치판이었지만, 본의 아니게 두 달간 손을 놓고 애간장만 끓여야 했던 그녀는 오히려 이런 기회가 반갑기만 할 뿐이었다.

'그렇게 지긋지긋했던 황궁 암투가 이젠 오히려 그립게 느껴질 정도라니.'

내심 실소를 흘린 라일리는 귀족들을 어르고 달래면서 일행들과 함께 황궁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곳은 그녀가 평생을 싸워왔던 전장.

일시 휴전 상태였던 자신만의 전쟁을 다시 본격적으로 시작할 때였다.

#188

제국의 황궁 (2)

황궁의 영역 한편에 자리한 5황녀궁.

오랜만에 귀가했다면 부모님에게, 남의 집에 방문했다면 집주인에게 인사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하지만 그 상대가 제국의 황제쯤 된다면 그것조차 단순한 안부 인사로는 끝나지 않는 법이었으니.

그런 의미에서 복잡한 절차와 까다로운 예절이 강요되는 오찬은 그것에 익숙하지 않은 이에겐 번거롭고 답답한 자리일 수밖에 없었다.

"킁, 난 그런 자리는 딱 질색인데. 식사 정도는 편하게 하고 싶다고. 나도 꼭 가야 하나?"

그리고 용사 파티 안에선 상남자 야만 전사 할리가 딱 그런 경우였다.

"으음···."

"확실히 좀···."

그에 제법 긴 시간을 그와 함께한 이세아는 물론, 잠깐 동행한 게 전부인 라일리마저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핀 고기를 뜯어 먹던 그의 야성적인 모습이 아직도 머릿속에 선명하게 남아있었으니까.

그는 평소 성격부터 언행, 그리고 그 패션까지 너무나 파격적이라 격식 있는 자리에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았다.

"···사실 성자님만 대표로 가셔도 상관없을 거예요. 이런 말 하긴 뭐하지만, 성자님을 제외한 저희 셋은 좀 곁다리 같은 느낌이 있거든요."

잠시 라일리와 눈짓을 주고받던 이세아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대체 불가인 성자님과 저희는 사정이 다르니까요. 그래도 완전히 무시하기도 뭐하니 성자님의 체면을 봐서 대우해 주는 느낌인 거죠."

또 그나마 귀족이기라도 한 나머지 둘과는 달리 완전히 야인인 할리는 소위 말하는 '급'이 부족했다.

아마 결사대의 일원이라는 배경이 없었다면 아예 황궁 안으로 들어오지도 못했을 터.

"아— 그럼 저도 빠지겠습니다."

그런 그녀의 말에 조용히 있던 지오스가 기다렸다는 듯이 끼어들었다.

그 또한 레스크 왕국의 귀족이긴 했으나, 평민 출신이었던 탓에 은근히 배척당한 면이 있어 이런 자리는 영 익숙하지 않았던 것이다.

정치에는 워낙 무관심했던지라 자국의 왕조차 그리 자주 마주한 적 없기도 했고.

물론 그냥 어쩌다 딸려 왔을 뿐인 헤스페론은 애당초 해당 사항이 없었다.

"그럼 우린 좀 편하게 먹어도 되는 건가? 솔직히 황궁의 요리사 실력이 어떨지 궁금하기도 했는데 잘 됐군! 으하하핫!"

"네, 제 궁의 전속 주방장에게 일러두도록 할게요. 원하는 대로 식사하실 수 있도록."

결국 황제와의 오찬 자리에 참석하는 건 하인리히와 라일리, 이세아 셋만으로 결정되었다.

그리고 그들이 준비를 위해 자리를 비운 사이, 할리와 헤스페론은 자연스럽게 지오스에게 다가가며 넉살 좋게 대화를 나누었다.

"자— 우리도 가 볼까? 과연 황실에서 먹는 고기는 어떤 맛일까?"

"오! 고급 요리를 먹는 건 이 세계에 와서 처음인데 진짜 기대되는데요? 물론 제 능력으로 이것저것 꺼내먹긴 했습니다만."

"그러고 보니 그쪽 형씨는 다른 세상에서 왔다고 했었지?"

"그렇습니다. 그런데 말씀 편하게 하셔도 됩니다, 형님! 그냥 헤론이라 불러주십쇼. 아, 전 형님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크하하핫—! 거 시원시원한 친구로구만?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자고, 헤론!"

"크~ 이렇게 멋진 형님을 모시게 되다니, 아주 든든합니다!"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신나게 떠들어대는 두 사람.

실상을 따지고 보면 혼자 형님·아우 하는 촌극이나 다름없었으나, 겉으로 보기에는 별 위화감 없이 지극히 평범한 모습이었다.

"아, 지오스 님도 편하게 헤론이라고 불러주십시오. 이야~ 이거 밖으로 나오자마자 좋은 분들을 만나게 돼서 다행이네요. 하하핫!"

"···알겠습니다, 헤론 씨."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들이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전적으로 바로 옆에 자리하고 있는 지오스 칼킨 때문이었다.

'일단 그와 헤스페론을 좀 더 친해지게 만들어야겠지.'

로한 공국에서 이곳으로 이동하기 전에 그가 하인리히에게 조심스레 꺼낸 말이 있었다.

자신의 지인 중에 스스로를 이세계인이라고 밝혔던 이가 있으니, 어쩌면 그에게 뭔가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을 들어보니 최소한 20년은 이 세계에 있었다는 것 같은데. 그게 사실이라 가정한다면··· 역시 귀환을 포기한 정착자인가.'

정착자.

카르마 포인트를 모아 귀환하는 것을 포기하고, 완전히 이세계에 눌러앉은 이들을 뜻하는 말로···.

지구에 별다른 미련이 없으면서 이곳에 더 애착을 가지게 된 이들이 간혹 선택하는 길이었다.

당연하지만 그들에 대해서는 그도 간접적으로만 접했을 뿐이었다.

어찌 보면 이번이 직접 당사자를 대면해 정보를 얻을 좋은 기회라 할 수 있겠지.

'갓 이세계로 넘어온 지구인으로서 말이야. 그런 의미에서 친한 지인인 지오스가 직접 헤스페론을 소개해 주는 게 베스트인데.'

물론 하인리히라면 그와 대면하는 게 그리 어렵지 않겠지만, 이세계의 성자로서 할 수 있는 말과 같은 지구 출신의 각성자로서 물어볼 수 있는 질문의 범주는 차원이 다르지 않겠는가?

"자자, 이러고 있지 말고 다 같이 고기나 뜯으러 가자고!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겠어, 아주!"

"하하핫! 형님, 아까 간식으로 고기 꺼내 드신 지 두 시간도 안 됐습니다. 아, 지오스 님도 얼른 오시죠!"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친목을 다지는 데엔 함께하는 식사가 최고인 법.

거칠고 사나운 야만의 사나이 할리와 눈치 없고 순박한 청년 헤스페론이 위풍당당하게 식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사이에 떨떠름한 표정으로 따라오는 지오스를 끼운 채로.

***

제국의 현 황제, 가리오 카르테 아제리온.

이제 예순에 가까운 나이인 그는 빛바랜 금발과 강렬한 연녹색 눈동자를 가진, 학자라기보다는 무장 같은 느낌이 강한 사내였다.

"먼 길 오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세상을 지키기 위해 노고가 많으신 줄은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만, 염치없게 이제야 인사를 드리게 되는군요. 거기다 이번에는 이렇게 라일리 황녀까지 구해주시고 말입니다."

"아닙니다. 황제께서 바쁘신 거야 세상 모두가 알고 있지 않습니까? 이 환란 속에서 거대한 제국이 흔들리지 않게 지탱하는 것 또한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지요."

당연한 일이지만, 아우테리카 최대의 세력이라 할 수 있는 아제리온 제국의 황제와 주신교단의 성자가 함께하는 오찬이 그저 식사만 하는 자리일 리 없었다.

그나마 지금은 하인리히가 교단의 대표가 아닌 결사대의 리더로서 자리했기에 좀 덜한 편이지, 그게 아니었으면 숨 막히는 긴장감 때문에 식사 같은 건 생각하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으으— 나도 그냥 빠질 걸 그랬나? 라일리에게 뭐라도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싶어서 참가하긴 했는데···. 이런 분위기에서 어떻게 밥을 먹으라는 거야!'

물론 현재 상태도 식사를 하기에 그리 좋은 환경은 아니었다.

속으로 한탄을 토한 이세아가 슬쩍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식기만 깨작거렸다.

지금은 도저히 뭔가를 먹을 기분이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다들 평범하게 식사하고 있는데 혼자만 멀뚱히 앉아있을 수도 없지 않은가.

"이세아 프리스틴 자작."

그 순간, 그녀의 몸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딱히 뭔가를 잘못한 것도 없건만, 한창 긴장하던 와중에 들려온 갑작스러운 황제의 부름에 잠깐 당황해 버렸던 것.

하지만 그 시간은 아주 찰나에 불과했다.

"네, 황제 폐하. 하명하십시오."

지구에서야 평범한 소녀였다지만, 지금의 그녀는 극의를 넘어서 초월의 벽을 두드리는 대마법사였다.

그동안의 긴장은 '여고생 이세아'로서의 자아 때문에 나타났던 것일 뿐, 막상 상황이 닥쳐오자 차분하게 마음이 가라앉으며 한 발짝 뒤에서 상황을 관조할 수 있었다.

"워낙 상황이 급하게 흘러가다 보니 이제야 말을 꺼내게 되는군. 자작이 나서준 덕에 우리 제국도 면이 서게 되었어.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되고 나면 조만간 자작에게도 좋은 소식이 있을 거야. 그러니 앞으로도 잘 부탁하네."

성자의 동료로서 용사 파티에 합류해 활약 중인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라일리를 구하기 위해 선택의 여지 없이 나선 일이었으나, 굳이 치하하며 상을 주겠다는데 거절할 필요도 없었다.

"황송하옵니다, 황제 폐하.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지요."

그녀의 겸양 어린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인 황제의 시선이 이번엔 라일리에게로 돌아갔다.

시종일관 근엄하던 그의 표정이 그녀를 바라보자 잠시 흔들렸지만, 순식간에 신색을 회복한 그는 이내 아무렇지 않다는 듯 그녀에게 차분히 말을 걸었다.

"이제라도 돌아와서 다행이구나, 라일리 황녀. 그동안 고생 많았다."

"···감사합니다, 황제 폐하."

"그런데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다만···."

오랜만에 만난 부녀가 주고받는 말이라기엔 딱딱함이 느껴지는 대화.

단순히 공적인 자리이기 때문은 아닌 듯, 그들은 익숙하다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황제가 꺼낸 질문은 당연히 누구나 의아해했을 만한 것이었다.

바로 어떻게 그녀 '혼자만' 탈출할 수 있었는가에 대한 의문이었으니.

'확실히 쉽게 넘어갈 수 없는 문제이긴 하지. 아무래도 납득하기 힘든 경우이긴 하니까.'

하인리히는 내심 수긍하며 천천히 나이프를 움직여 스테이크를 썰었다.

만약 이번에 황녀를 구해온 게 성자가 아니었다면 그녀가 지금처럼 수월하게 제자리를 찾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사실 지금도 성자의 위명 때문에 대놓고 나서지 못할 뿐이지, 그녀의 정적들이 온갖 유언비어를 퍼트리는 중이기도 했고.

그녀가 황녀로 변신한 가짜라는 주장부터, 그 몸에 숨긴 치명적인 저주를 수뇌부들 한가운데에서 터트릴 속셈이라는 우려, 이미 라일리가 세뇌를 당해 불사왕의 앞잡이가 되었다는 확신까지.

하나같이 한스가 그녀를 일부러 풀어주었을 거라는 가정에 기반한 추측이었다.

"제가 탈출할 수 있었던 건 온전히 함께 갇혀 있던 다른 이의 능력 덕분이었습니다. 그가 아니었다면 탈출은 꿈도 꾸지 못했겠지요. 저는 그저 운 좋게 그의 옆에 있었을 뿐입니다."

이어서 그녀는 차분한 목소리로 전후 사정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갇힌 이후로 그녀와 왕래가 끊긴 황태자, 그 와중에 등장한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내, 이어지는 마법 교육과 갑자기 나타난 희망.

물론 막바지에 황태자와 있었던 마찰은 일부러 빼고 설명했다.

굳이 그런 부분까지 말해서 분란의 여지를 남길 필요는 없었으니까.

"흐음—."

이어서 불사성에서 빠져나온 직후 있었던 위기와 홀연히 등장한 성자가 그들을 구해준 걸 끝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되자, 황제는 무거운 침음과 함께 지그시 눈을 감고 말았다.

혹시나 했건만, 그녀의 말을 들어보니 황태자가 같은 방법으로 빠져나올 수 있는 가능성은 없다시피 했다.

그걸 어떻게 역으로 이용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고.

라일리 황녀의 탈출에는 여러 가지 요소가 복합적으로 얽힌 데다 온갖 우연과 행운이 점철되어 있었다.

일반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어찌 보면 작위적이라고까지 느껴지는 미약한 가능성.

하지만 그것이 실제로 일어난 이상 그저 부정할 수만도 없는 일이었다.

우연이 필연이 되고, 너무나도 작아 도저히 있을 수 없을 것 같은 확률이 현실이 되어 나타나는 것.

···우리는 보통 그것을 '운명'이라고 부른다.

스윽—

천천히 감았던 눈을 뜬 황제가 다시 하인리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2차 대륙 정상 회의가 머지않았군요."

"그렇습니다. 이제 이 주도 채 남지 않았죠."

1차 회의 때와는 다르게 그는 용사 파티의 일로 한창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으나, 교단에서 소식 정도는 꾸준히 받고 있었다.

그 일로 다시 성녀가 갈려 나가고 있다는 후문도.

"저희 아제리온 제국의 사절단 대표로는 라일리 5황녀를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황제가 담담한 어투로 말을 이었다.

사이먼 황태자와 라일리 황녀가 납치된 상황에서, 2황자와 6황자가 한창 서로 기 싸움을 하며 노리고 있던 자리였지만···.

이제 그녀가 돌아온 이상 아무 의미 없는 일일 뿐이었다.

'드디어···!'

라일리와 이세아가 동시에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저 일개 사절단 대표에 불과할 뿐이었으나, 주신교단의 성자가 함께한 자리에서 황제가 직접 꺼낸 말이었다.

단순히 그 문장의 뜻 이상의 의미가 내포된 것은 당연한 일.

일시 휴전이었던 라일리만의 전쟁이— 재개하자마자 경쟁자들의 진영을 초토화하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189

제국의 황궁 (3)

용사 파티와 헤스페론이 라일리 5황녀를 황궁에 데려다준 후.

하인리히의 요청으로 번거로운 절차 등은 생략했다지만, 그렇다고 그게 제국 측의 예우가 부족했다는 뜻은 아니었다.

파티의 리더가 성자라는 점을 떠나서 제국의 황족을 구해준 은인들을 대접하는 것은 황실의 위신과 직결된 문제였다.

하물며 그 황녀가 최유력 황위 계승 후보인 데다 현 황제의 암묵적 지지까지 받게 된 상황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지 않겠는가?

자연스럽게 그들에게 주어진 대우도 호화로워질 수밖에 없었다.

그 거대한 귀빈 숙소에는 아무 물건 하나만 팔아도 서민들의 년 단위 생활비는 나올 것 같은 비싼 물건이 즐비해 있었고.

식당 주방에는 언제 어떤 요리를 요청해도 응할 수 있는 황실 요리사들이 24시간 대기하고 있었다.

또 곳곳에는 베테랑 시녀들이 배치되어 그 어떤 불편 사항도 용납할 수 없다는 듯 꼼꼼하게 사방을 체크하고 다녔다.

그것도 있는 듯 없는 듯 발소리와 기척을 한계까지 줄인 유령 같은 걸음걸이로.

'대단하군. 황실 시녀들은 은신술도 따로 배우는 건가? 제법 경지도 높아 보이는데, 유사시 호위 인원으로도 사용할 수 있겠어.'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은 이 호화로운 숙소에서 오래 숙박하며 쉴 형편이 되지 못했다.

당연하지만, 용사 파티에게는 그렇게 한가롭게 시간을 보낼 여유가 없었으니까.

"으하하핫! 역시 제국이라서인지 통이 아주 크구만!"

"오오— 금화가 번쩍번쩍하네요."

물론 황실 측에서도 단순히 대우만으로 퉁 치려 한 건 아니었다.

좀 더 직접적이면서 물질적인 대가도 추가로 제시했던 것.

최고급 명품 장비들을 모든 인원에게 맞춤으로 수선해서 선물했고, 활동비 명목으로 막대한 자금을 지원했다.

그들도 주신교단의 후원을 받는 만큼 돈이 부족한 적은 없었으나, 원래 재화란 건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이지 않나!

"이것도 상당히 마음에 드는군. 어떠냐, 헤론?"

"크~ 한층 더 위엄 있어 보이십니다, 형님! 당장이라도 물어뜯을 듯한 야성이 느껴지는 것이 아주 오싹하네요!"

거기다 센스 있게도 할리에게는 일반적인 장비가 아닌, 장식용으로 벽에나 걸어뒀을 법한 최상급 마수 '샤벨 라이온'의 가죽을 가공해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마수 머리 투구 망토'를 만들어 주었는데···.

과연 황실 소속 장인의 손길이 닿았는지 그 또한 평범한 장비가 아니었다.

'설마 이 짧은 시간 만에 이걸 마도구로 만들어서 선물해줄 줄이야.'

단순히 튼튼한 물건이 아닌 특별한 이능을 담고 있는 마도구.

물리, 마법 방어력 강화는 물론이고 주변의 상대에게 '위압'을 가하는 효과까지 있는 훌륭한 장비였다.

'정상급 가죽 장인과 인챈트 마법사의 협력으로 만든 물건인가 보군.'

할리가 슬쩍 기운을 일으켜 투구의 내부를 살피고는 혀를 내둘렀다.

가죽으로 마감된 안쪽에 빼곡하게 박힌 마석들과 치밀하게 구성된 마력 회로가 느껴졌다.

'로한 공국에서 라일리를 구했다는 소식을 전했을 때부터 제작에 들어갔더라도 여유 시간이 고작 사나흘밖에 되지 않았을 텐데. 어쩌면 그보다 더 짧을 수도 있고. ···이게 제국 황실의 저력인가.'

확실히 급하게 만들긴 했는지 회로 자체가 단조로워 복잡한 기능은 넣지 못한 것 같았지만, 어차피 할리의 전투 방식에는 복잡하고 섬세한 기능보다는 단순하더라도 안정성을 우선한 지금이 훨씬 더 적합했다.

아무리 봐도 여러모로 마음에 드는 물건이었다.

'···음, 역시.'

잠시 투구에 신경이 팔렸던 할리의 시선이 앞에서 멀뚱히 서 있는 맹한 표정의 헤스페론에게로 향했다.

'좋아, 이쪽 길도 병행하도록 하자.'

소환 마법사에서부터 시작한 헤스페론의 진로가 정통 마법사, 전투 마법사를 거쳐 부여 마법사까지 뻗어나가는 순간이었다.

지금도 세계수의 가지를 태워가며 한창 드워프의 비기를 배우고 있는 하워드도 이능을 담은 물건을 만들 수 있게 될 테지만, 거기에다 인챈트까지 더해지게 된다면 효과는 훨씬 더 배가되지 않겠는가?

'그건 아무리 한스라도 할 수 없는 거니까 말이야.'

물론 마도구 자체는 한스도 만들 수 있긴 했다.

문제는 그게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물건이 아닌, 흑마력으로 가동되는 음습하고 사악한 저주 아이템이라는 것이었지만.

'···그건 태생상 어쩔 수 없지.'

그러나 굳이 한 사람이 모두 다 잘하려고 할 필요는 없었다.

원래 사람마다 가진 재능은 각기 다른 법.

이 세상은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이니, 각자가 잘 할 수 있는 분야에 집중해 그들이 서로 협력하면 되는 문제였다!

'해리스가 가져다준 세계수의 가지를 이용해 하워드가 물건을 만들고, 한스의 자문을 받아 헤스페론이 인챈트를 새기고.'

거기다 기타 물자 공급은 휴버트가, 몬스터 부산물은 할리가 구해오면 된다.

'제작 과정 내내 하인리히의 신성한 불길을 더하면 유사 성검이라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반대로 한스의 심연을 이용하면 최악의 마검이 탄생할지도.'

또 하인즈 2세의 피로 담금질한다면 혈마력을 이용한 무구도 만들 수 있겠지.

여럿이서 힘을 합한다면 이렇게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펼쳐지게 되는 것이다!

'역시 함께하는 삶, 협력은 아름다운 거야.'

그렇게 용사 파티가 황궁을 떠나기 직전.

할리가 씨익 흉악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리는 것과 동시에.

헤스페론의 얼굴에 헤픈 웃음이, 하인리히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머금어졌다.

그리고 그 순간, 우연히도···.

아주 먼 곳에 있는 몇몇의 입가에도 비슷한 웃음이 머무르고 있었다.

***

역천의 서약이란 조직은 '인간의 신'의 사도인 혁명가가 주도해 만든 것이긴 했지만, 그게 소속원들이 전부 그와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가 모종의 방법을 통해서 은밀하게 수뇌부들을 끌어들이고, 타인의 욕망을 자극해 음지에서 세력을 규합하긴 했어도 결국 그 본질은 각자의 이익에 따라 모인 연합체에 가까웠던 것이다.

덕분에 점조직으로서의 보안은 물론, 각자가 자신의 영역에서 자율권을 가지고 좀 더 효율적으로 일을 처리할 수 있었으나···.

당연히 거기에도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화르륵—

어두운 공간 속에서 타오르는 보랏빛 불길.

그리고 그와 동시에···.

[당장 튀어나와라! 혁명가 이놈! 이 찢어 죽일 놈이!]

사방을 울리듯 분노에 찬 외침이 터져 나왔다.

[시끄럽구나···.]

[키힛! 그러게 말이야~ 저렇게 애타게 부르다니, 돈이라도 떼 먹혔나 본데? 키키킥!]

[쯧, ···그러고 보니 그가 보이지 않는군. 리리스야 불사왕에게 당했다고 짐작하긴 했다만.]

그 소란에 막 모습을 드러내던 검은 형체들이 하나둘 불평을 토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이 뭐라 하건 말건 아랑곳하지 않은 덩치 큰 그림자는 노발대발하며 연신 주변을 살필 뿐이었다.

그래봤자 보이는 거라곤 화로에서 일렁거리는 보랏빛 불꽃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는 그림자들밖에 없었지만.

그리고 그 덩치··· 역천의 서약 이온 대륙 남부 방면 책임자이자, 칼코스 부족 연맹의 대전사 발테온은 결국 제 분에 못 이겨 씩씩거리다 다른 이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크으— 거기 네놈들, 그 자식에 대해 뭔가 아는 게 있다면 당장 털어놓아라! 감히 내 뒤통수를 치고 도망가다니, 반드시 그놈을 찢어 죽이고 말 것이다!]

그 말에 다른 세 그림자가 슬쩍 서로를 바라보았다.

정황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혁명가가 저 멍청한 야만인에게 뭔가 수작을 부리고 잠적한 듯싶었다.

당연히 그들 또한 별달리 아는 바가 없는 건 마찬가지였으나,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는 둘과는 달리 나머지 한 명은 기다렸다는 듯 경박한 웃음을 터트렸다.

[푸힛! 그 딱딱한 인간이 그랬단 말이지? 이거 이거, 내가 먼저 괴롭혀주고 싶었는데 선수를 빼앗겨 버렸네!]

[뭐라?!]

[카칵칵— 이것 봐, 이렇게 반응이 좋은데 어떻게 참아? 어라? 화났나?]

[···일단 네놈의 혓바닥부터 먼저 뽑아 주마!]

[힛, 에나멜 대륙까지 올 수 있으면 어디 그래 보시던가? 지금 그쪽 사정에 그럴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언쟁을 벌이기 시작한 두 사람에 의해 다시 한바탕 시끄러워지기 시작한 회의장.

그러나 평소와는 달리 마찰을 중재하고 분위기를 주도하던 이가 사라진 탓인지, 그 소란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고 점차 격화되었다.

그것이 도무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자, 결국 그를 지켜보기만 하던 한 그림자가 마지못해 점잖은 목소리로 그들을 타이르고 나섰다.

[후우— 우리끼리 그래봐야 소용없다는 걸 알고 있지 않나? 그만하고 각자 용건만 꺼내고 빨리 끝내도록 하지. 그나저나 남은 건 이게 전부인가. 하나둘 줄어드는가 싶더니 결국 이 지경까지 와 버렸군.]

말을 마친 이가 가볍게 혀를 차며 고개를 내저었다.

하나는 감정적이고 거친 언행의 야만인, 다른 하나는 남의 속을 긁지 못해 안달인 미친 광대, 마지막으로 시끄럽다는 첫마디 이후로 한마디도 없이 그저 구경만 하는 목석까지.

이제 정상인은 자기 혼자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이 확 실감 나는 라인업이었다.

'이제 역천의 서약도 끝이군. 아쉽게 됐어. 가만, 그래서 혁명가가 잠적한 건가?'

그래도 이곳에서 한창 활발히 활동할 때는 서로 상부상조하며 나름대로 쏠솔한 이득도 거뒀었거늘.

여러모로 유감스러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그래서 뒤통수라니,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그들은 한결 진정한 발테온에게 전말을 전해 듣고서 그가 왜 그런 모습을 보였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남부에 방문한 혁명가가 일을 도와주겠다고 접근했다가 그가 방심한 사이에 애지중지하던 '광기의 씨앗'을 탈취해 사라져 버렸다는 것.

물론 그것을 심연에서 꺼내는 데엔 조직 차원의 지원이 결정적이었던 만큼 그게 온전히 발테온만의 것이라곤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계획을 완성하고 성공한 것은 엄연히 그의 총괄하에서였고, 따라서 당장의 우선권 또한 그에게 있는 걸로 합의가 끝난 상황이었는데···.

[그런데 놈이 그걸 무시하고 광기를 가져가는 바람에 계획이 전부 흐트러진 상황이란 말이다! 원래라면 2차 대륙 회의가 열리기 전에 모든 작업이 끝났을진대!]

지금은 도저히 기한을 맞출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흐음— 이미 합의된 계획을 무시하면서까지 일을 벌였다는 거군. 그렇다는 건 역시···.]

[푸히힛, 이제 그런 건 의미 없다고 판단한 거겠지! 하긴, 최근에 어그러진 작전이 어디 한두 개여야 말이지?]

[···이미 뭔가를 눈치채고 독자 노선으로 돌아선 건가···.]

그들 사이의 공기가 미묘하게 경직되었다.

이미 이탈자까지 나온 마당이었으니 이 모임도 이제 끝이라는 것을 모두가 직감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그 존재가 조직을 만든 자이자 실질적인 리더나 다름없었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

다만, 일단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킥, 그래서? 이대로 그간의 준비고 뭐고 다 버리고 다시 숨어들 생각인 건 아니겠지~?]

[어림없는 소리! 이미 시작한 일, 이제 와서 물러설 순 없다!]

[몇 차례의 실패가 있었다곤 하나···, 전 대륙이 혼란스러운 지금이 최고의 기회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

객관적으로 바로 이때가 일을 벌이기에 가장 좋은 시기라는 건 변하지 않았다.

[그럼 별수 없군,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거라곤 한 가지밖에 남지 않았으니. 이렇게라도 해야겠지.]

하위 조직들은 물론 간부들마저 하나둘 사라져 이제 세력은 절반 이하로 쪼그라들었다.

거기다 돌아가는 꼴을 보아하니 이대로 가만히 있다간 나머지도 언제 무너질지 알 수 없는 상황.

[키키킥~ 좋아, 좋아! 때마침 대륙 연합군이다 뭐다 하며 에나멜의 전력에 공백이 생긴 상황인데, 이참에 놈들의 정신을 번쩍 들게 해 주지!]

[남부야 말할 것도 없다! 조금 차질이 생기긴 했지만, 정보 통제는 완벽하니 시간만 있으면 해결될 문제다.]

[동부는··· 좀 걸리는 부분이 있긴 하나, 큰 문제는 되지 않을 것이다···. 그동안 준비해 왔던 것들이 있으니···.]

사실 딱히 작전이랄 것도 없었다.

철저하고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 최고의 효율을 추구하고, 덤으로 연계 효과까지 계산했던 전과는 다르게.

그저 그들이 꾸준히 준비했던 것들을 한꺼번에 풀어놓을 뿐이었으니까.

'변수를 예상하고 시행한 작전들이 하나같이 처참하게 박살 난 것이 문제지. 괜히 이쪽이 입는 손실을 최소화하겠다고 효율 따지다가 오히려 판이 통째로 엎어져 버리지 않았나. 차라리 진즉에 이렇게 했어야 했다.'

앞선 세 사람의 대답이 끝나고, 마지막으로 점잖은 목소리가 그 뒤를 이었다.

[중부 지역··· 제국은 다시 돌아온 5황녀만 처리하면 구심점을 잃고 알아서 혼란에 빠질 것이다. 다만 이쪽은 미리 안배된 게 없다는 게 문제인데···.]

애초에 황태자와 황녀가 불사왕에게 납치당한 건 물론이고, 그러고도 황녀 혼자 탈출해 귀환에 성공한 일은 정말 상상치도 못한 전개였다.

당연히 따로 준비된 수단이 있을 턱이 없었다.

[그래도 2차 대륙 정상 회의가 끝난 직후를 목표로 최대한 서둘러 보도록 하지. ···아쉽군, 리리스가 남아있었다면 더 편했을 것을.]

압도적인 존재감을 과시하는 불사왕이 대부분의 혐의를 대신 뒤집어쓴 탓인지, 그간 벌인 사건·사고에 비해 이름이 크게 알려지지 않은 역천의 서약.

그들의 마지막 발악이 카운트다운에 들어갔다.

#190

정착자 (1)

"황녀님 덕분에 좋은 곳에서 푹 쉬다 가는군요. 그동안 신세 많이 졌습니다."

"신세라니요. 제 생명의 은인이신데. 오히려 더 신경 써 드리지 못한 것 같아서 죄송할 따름이지요."

황궁의 정문 앞.

떠나가는 용사 파티를 배웅하기 위해 이곳까지 나온 라일리가 하인리히와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이번에도 성자의 요청으로 거창한 송별회는 없었으나, 직접적으로 그에게 은혜를 입었던 황녀가 황실의 대표로서 그들을 전송하고 나선 것이다.

그녀는 하인리히를 시작으로 다른 이들과도 하나하나 대화를 나누며 무운을 빌어주었다.

그리고 전날 이미 실컷 회포를 나누었던 이세아의 손을 잡고 또다시 한동안 아쉬워하던 라일리는···.

"하아— 헤론, 역시 당신이 제일 걱정이네요."

마지막으로 헤스페론의 앞에 서서 깊은 한숨부터 내쉬었다.

"아하핫! 그게 무슨 말이십니까, 황녀님? 저처럼 믿음직스러운 사람이 또 어디 있다고! 어젠 스승님도 제 재능에 깜짝 놀라 감탄을 금치 못하셨다니까요? 큰 문제 없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쇼!"

옆에서 그 정돈 아니었다는 이세아의 작은 투덜거림이 들려왔지만, 그는 그것을 가볍게 넘기며 헤픈 웃음과 함께 당당히 가슴을 두들겼다.

뒤쪽에서 황녀를 수행하는 인원들이 지켜보고 있었기에 평소와 달리 제법 예의를 갖추긴 했으나, 그 말투는 여전히 친구를 대하듯 가볍기 그지없었다.

그에 몇몇 수행원들이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지만···.

"···그래요, 뭐. 당신도 보통 사람은 아니니 알아서 잘하겠죠. 어차피 그리 오래 있는 것도 아니고."

라일리는 그의 말투엔 신경도 쓰지 않고 그저 천천히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다만—."

그러나, 그녀의 말은 거기서 끝난 게 아니었으니.

"그런 과한 자신감은 좀 고칠 필요가 있어 보이는군요.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당신은 이제 고작 하급 마법사일 뿐이랍니다? 저분들과는 차원이 다른 약자란 소리죠. 그런데 그런 이들마저 최선을 다해야 하는 전장에 따라가면서 그 근거 없는 자신감은···."

걱정을 덜어 주려고 부린 허세가 오히려 어마어마한 잔소리가 되어 돌아온 상황.

헤스페론은 언제 자신만만했냐는 듯 곧바로 쭈그러들어 그녀의 말을 경청할 수밖에 없었다.

"굳이 나서서 뭘 하려고 할 필요 없어요. 당신은 그저 덤으로 딸린 짐 덩어리일 뿐이니까. 있어봤자 별 쓸모도 없고 나서더라도 방해만 되니, 그저 있는 듯 없는 듯 몸을 사리면서 배울 거만 배우고··· 헤론? 제 말 듣고 있나요?"

"아, 예! 물론입죠. 옙."

멍하니 그녀의 말을 듣던 그가 미묘한 표정으로 황급히 대답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건 조금 말이 심하지 않나···.'

하지만 괜히 반박했다간 잔소리 시간만 길어질 테니 굳이 뭐라 항변하지는 않았다.

쉬지 않고 말을 늘어놓는 그녀의 눈동자에 어린 걱정을 보니, 왜 그런 말을 하는지도 알 것 같았으니까.

···이후.

라일리는 다른 이들과 나눈 대화 시간을 전부 합한 것보다 몇 배는 길게 잔소리를 퍼붓고 나서야 후련하다는 듯 뒤로 물러났다.

혼이 빠진 것처럼 멍한 표정의 헤스페론만 남겨두고서.

"···그럼, 저희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조만간 다시 뵙도록 하지요."

"네, 성자님. 부디 무탈하시기를."

그렇게 예상 이상으로 길어졌던 작별 인사가 마침내 끝이 나고.

준비된 마차를 탄 일행은 게이트를 이용하기 위해 수도 외곽에 위치한 제론 대신전으로 향했다.

어쩔 수 없는 경우라면 모를까, 잘 깔린 교단의 인프라를 사용할 수 있는 상황에서조차 굳이 이세아를 고생시킬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인원이 한 명 늘면서 공간 이동하는 데 신경 쓸 게 좀 더 많아지기도 했을 테고.'

라일리 황녀가 걱정했던 대로 헤스페론은 당분간 용사 파티와 함께 움직이기로 했다.

정확한 기간을 따지자면··· 약 열흘 정도가 되겠지.

'딱 2차 정상 회의가 열리기 직전까지만 이쪽에 함께 있기로 했으니.'

첫 번째 이유는 대마법사인 이세아에게서 효율적으로 가르침을 받아 마도의 길을 제대로 다지기 위함이었다.

물론 지금도 그의 기본기 자체는 흠잡을 구석이 없었다.

「마법학개론」이라는 스킬이 있기도 했으며, 아무리 계통이 달라도 그 불사왕의 영향력이 있는데 고작 기초 수준에서 허덕일 리가 없지 않나.

거기다 라일리가 황태녀의 자리에 오르는 것도 이제 시간문제였으니, 그녀가 원한다면 과거 이세아가 받았던 수준 이상의 교육을 황궁 내에서 제공할 수도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 모든 걸 감안하더라도 이세아에게 직접 배우는 것보단 못할 거야. 이쪽이 훨씬 더 효율적으로 성장할 수 있겠지.'

그도 그럴 것이, 어찌 보면 지금의 헤스페론과 그녀는 동류라고도 볼 수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소위 '천재'라 불리는 부류 말이다.

'물론 그냥 타고난 천재인 이세아랑은 좀 결이 다르긴 한데···. 그래도 결과만 비슷하면 그게 그거 아니겠어?'

중첩 적용된 온갖 성장 보정, 막대한 카르마를 쏟아부어 만들어낸 우월한 스테이터스, 「마도의 길」과 「사악한 지혜」 등의 스킬을 가진 한스의 간접적인 조력.

이것이야말로 만들어진 천재 마법사, 헤스페론의 진면목이었다.

'그런 이 몸에게 일반적인 커리큘럼은 시간 낭비일 뿐이지.'

선배인 이세아가 앞서 마법을 배우면서 느꼈던, '굳이 없어도 되는' 부분을 날리고 핵심만을 압축해 전수해준다면 학습에 필요한 시간을 극적으로 절약할 수 있었다.

거기다 대마법사의 경지에 오른 그녀의 노하우까지 더해질 테니···.

'좋군. 물론 모든 지식을 고작 열흘 만에 전부 습득할 수는 없겠지만, 어차피 황궁으로 돌아가더라도 그녀는 꾸준히 만나게 될 테니까. 벌써 조급해할 필요는 없겠지.'

덜컹—!

마침내 수도를 가로질러 이동한 마차가 제론 대신전에 당도했다.

황궁의 화려한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곧바로 게이트 룸으로 안내되는 일행들.

또한 헤스페론이 용사 파티를 따라나선 두 번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는데—.

"그럼 대사제님, 레스크 왕국 글라탄 영지로 부탁드립니다."

"알겠습니다, 성자님. 자, 일행분들도 이쪽으로 오시지요. 게이트를 가동하겠습니다."

매우 우연찮게도, 성자 하인리히가 이끄는 일행의 다음 목표 장소가 바로 레스크 왕국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곳은.

용사 파티의 일원인 창기사 지오스 칼킨의 고향이자···.

그가 말한 자칭 '이세계인'이 은거하고 있는 땅이었다.

***

제국의 수도 제론에서 있었던 전투 끝에, 성자 '하인리히 세인트 랜드가드'와 불사왕 '한니발 스트라우스' 사이에 성립된 내기.

그 기본 골자는 무작위로 선정된 장소를 습격하는 불사왕의 병력과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그것을 막아내야 하는 용사의 싸움이었다.

그야말로 창과 방패의 싸움이라 할 수 있을 터.

룰 자체는 불사왕쪽이 압도적으로 유리했으나, 이 내기를 통해 일반 백성들의 피해를 극적으로 줄일 수 있다는 점에서 용사 측에도 그리 나쁜 조건은 아니었다.

아직도 광기에 젖은 몬스터들에게 몸살을 앓고 있는 이들은 별로 동의하지 않겠지만.

'물론 그 습격을 사전에 알아챌 수 있는 이의 존재가 선결되어야 가능한 일이기도 하지.'

그게 아니라면 그저 일방적으로 당하고 말 뿐이었으니까.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습격'은 단순히 대규모 공습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

"···찾았어요."

레스크 왕국 글라탄 자작령의 중심 도시, 글라탄 시.

많은 사람이 오가는 대로와 조금 떨어진 골목에서 지그시 눈을 감고 있던 이세아가 짧은 한마디와 함께 안광을 번뜩였다.

"어디죠?"

"링크할게요."

그녀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일행의 정신이 연결되며 특정 좌표들이 머릿속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세 곳입니까?"

"일단 제가 찾은 곳은 그래요. 하나는 저쪽 광장에 있는 시계탑인 것 같은데, 나머지 둘은 직접 가 봐야 알겠네요."

이번 습격의 유형은 도시 내로 밀반입한 마도구로 대규모 의식을 시행해 벌이는 무차별 테러였다.

지금까지도 몇 번 있었던 방식으로, 그 종류 또한 습격자들의 성향에 따라 가지각색이었다.

물리적으로 주변을 날려버리는 폭발형부터 인간에게 치명적인 기운을 퍼뜨리는 오염형, 아예 일대의 생명체들을 공물로 바쳐 버리는 제물형까지.

그 외에도 온갖 기상천외한 형태가 있는 게 이번 유형이었다.

"다만, 아직 의식이 시작된 게 아니라 그 종류는 정확히 밝혀내지 못했어요. 지금은 그저 마력의 흐름이 수상한 장소만을 골라낸 게 전부라."

"좋군요. 앞으로도 그냥 계속 몰랐으면 좋겠네요."

"크흥! 그럼 곧바로 움직이도록 할까? 아예 의식이 시작되기 전에 박살 내 버리자고! 세 곳이라고 하니 우리 셋이 흩어지면 되겠군! 아가씨는 여기서 만약을 대비하고 말이야!"

"······."

할리의 말에 조용히 옆에 서 있던 지오스가 창을 단단히 틀어쥐었다.

불사왕의 부하··· '적'들과의 전투를 앞두자, 그는 여느 때와 같이 두 눈을 살기로 일렁거리며 금방이라도 튀어 나갈 듯 연신 몸을 들썩거렸다.

"잠깐만 기다려 주시죠. 일단 확실하게 확인부터 하죠."

하지만 하인리히는 그런 그들을 제지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당장 일이 벌어진 상황이라면 모를까, 남의 영지에 오면서 아무 연락도 없이 함부로 난장을 피울 수는 없는 노릇.

그는 시선을 옆으로 돌려 연신 손수건으로 식은땀을 닦고 있는 사내를 돌아보았다.

미리 보낸 연락을 통해 영지 측에서 보내온 기사, 이 도시의 치안 책임자였다.

"···확실히, 저희 영지의 시설이 있는 장소는 아닙니다. 전부 그냥 평범한 장소여야 했을 텐데···."

이세아를 통해 좌표를 공유받은 기사가 품에서 지도를 꺼내 살피더니 한숨과 함께 질끈 눈을 감았다.

용사 파티가 방문하며 사전에 이상을 파악하게 되었다고는 하나, 지금 상황 자체도 딱히 그에게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설령 이번 일이 잘 마무리되더라도 도시의 방비가 뚫렸다는 사실은 명백했으니, 그도 이후의 책임을 피할 순 없었던 것이다.

'후우— 그래도 지금이라도 발견해서 다행인가. 만약 진짜 대참사가 벌어졌더라면?'

그 피해 정도에 따라 다르겠지만, 아마 그에 대한 처벌도 단순히 징계 수준으로 끝나진 않았겠지.

확실히 이번은 그나마 운이 좋았다고 봐야 했다.

"아! 저희 치안 병력을 지원하겠습니다. 확실하게 처리하려면 병력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을 테지요."

"아뇨, 많은 병력이 움직이게 되면 놈들이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눈치챌 겁니다. 그렇게 되면 최후의 발악으로 무슨 짓을 벌일지 알 수 없지요."

"그, 그럼···?"

하인리히는 불안한 듯 자신을 바라보는 기사를 향해 부드럽게 미소 지어주며 진중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흐음, 그래도 혹시 모르니 대비는 해 두는 게 좋겠지요. 일단 목표 지점 주변에는 소수 정예만 포진시키고, 나머지 병력은 사태 발생 시 근방 주민들의 대피 유도를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아! 그 정도는 문제없습니다. 그, 그런데 사태 발생이라 하시면···?"

기사는 왠지 모를 불안감에 말끝을 흐리며 눈앞의 성자를 조심스레 바라보았다.

그의 입가에 걸린 미소는 아까와도 별다를 바 없이 자애로웠으나, 어쩐지 전과는 달리 오싹함이 느껴지고 있었다.

"당연히—."

그렇게 입을 연 하인리히가 말을 채 끝맺기도 전.

"카하하핫! 쳐들어간 우리가 놈들을 몽땅 박살 내는 거지!"

그 뒷말을 이은 것은, 살벌한 웃음을 터트리며 등에 걸어둔 전투 도끼의 손잡이를 움켜쥔 할리였다.

"···흐으."

거기다 긴 창을 들고 으스스한 웃음을 흘리는 지오스 칼킨까지.

꿀꺽—

그에 기사는 저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키며 슬쩍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과연 결사대의 일원들답게 이상한··· 아니, 비범하다고 생각하면서.

"뭐죠? 왜 그런 눈으로 절 보시는지?"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저도 모르게 옆으로 돌아간 그의 시선에 이세아가 인상을 찌푸리자, 기사는 냉큼 다시 고개를 돌리며 식은땀을 훔쳤다.

저들과 함께하는 이 꼬마 아가씨도 평범해 보이지 않기는 마찬가지였으니까.

***

이미 놈들이 숨어있던 위치를 파악한 이상, 그들을 정리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스카칵—!

하인리히의 광검은 언제나 시원하게 적을 베었고.

"크하핫! 덤벼라 이놈들!"

할리는 평소처럼 호쾌하게 적들을 찢어발겼으며.

"뒤져라!"

흑마법사를 마주해 눈이 돌아간 지오스는 분노를 터트리며 그들의 몸에 구멍을 뚫어 주었다.

혹시 모를 이상 상황을 파악하는 것은 후방 지원을 맡은 이세아의 몫.

놈들도 이대로 허무하게 당할 수는 없다는 듯 마법진 폭주부터 자폭 공격까지 쓸 수 있는 수단은 전부 다 사용했지만···.

이미 수 개월간 반복된 전투를 거치며 그 수법에 익숙해진 일행들에게는 의미 없는 발악일 뿐이었다.

"뭔가 이번엔 지금까지에 비해 쉬운 편이었네요. 급하게 준비하기 시작했는지 조금 미흡한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마침내 큰 피해 없이 사건이 마무리되고 파티가 다시 한자리에 모이자, 이세아가 뭔가 미심쩍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으하핫! 뭐, 큰 피해 없이 막아냈으니 좋은 거지! 이번엔 놈들이 미처 준비를 마치기도 전에 우리가 들이닥친 거 아니겠나?"

"흐음, 그럴 수도 있겠네요. 하긴, 이럴 때도 있는 거겠죠."

"하핫,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전 옆에서 구경만 했는데도 굉장히 떨리던데, 역시 여러분은 대단하시군요!"

그렇게 다른 일행들이 한창 시끄럽게 떠들던 와중.

"성자님."

전투가 끝남과 동시에 다시 음울한 표정으로 돌아온 채, 무언가를 골똘히 고민하던 지오스가 조용히 하인리히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가 이어서 한 말은.

하인리히가 내심 바라 마지않았던 한 마디였다.

#191

정착자 (2)

레스크 왕국은 이온 대륙 서부에 위치한 4개의 왕국 연합 중 가장 남쪽에 있는 나라였다.

특이 사항이라면 서부 최대의 식량 생산지라 불릴 만큼 넓은 곡창 지대를 가지고 있다는 점일까.

작물을 재배하기에 최적인 따뜻한 기후를 가진 덕에, 오랜 세월 농경지를 넓히는 사업에 주력해 일궈낸 성과였다.

'또 피카올 대신전의 존재도 특별하다 할 만하지.'

300년 전의 2대 불사왕이 쓰러진 자리에 세워진 대신전.

성검을 손에 넣기 위해 하인리히가 방문하기도 했던 그곳은 역사적으로는 물론 종교적으로도 큰 의미가 있는 곳이었다.

아무래도 대륙 서부의 유일한 대신전이니만큼, 일대의 교구를 총괄하는 역할을 맡고 있기도 했으니까.

그리고, 용사 파티의 일원인 창기사 지오스 칼킨은—.

이 나라에서 무려 백작위를 가지고 있는 귀족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가주님. 그간 소식은 계속 듣고 있었습니다만, 이렇게 무탈하신 모습을 뵈니 한결 마음이 놓이는군요."

"···그래. 올리버 자네도 그간 고생 많았네."

"허허허, 이 노인네야 그저 집을 관리하는 게 전부인데 고생이랄 게 있겠습니까. 가주님께서 하시는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요."

글라탄 자작령에 있던 하인리히 일행이 다음으로 도착한 이곳은, 왕국에서도 상당히 변방에 위치한 작은 남작령의 한 마을이었다.

신전의 게이트도 이용할 수 없어서 이세아의 공간 이동으로 올 수밖에 없었던 영지.

이곳이 바로 지오스의 고향이었다.

"이런, 손님분들께 인사가 늦었군요. 저는 이 저택을 관리하는 올리버라고 합니다. 여러분들께서 편히 쉬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불편한 점이 있으시다면 언제든 편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집사 복장의 노년 신사가 일행을 향해 공손히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아무리 레스크 왕국이 그리 크지 않은 나라라고는 하나, 백작위 정도 되면 엄연히 고위 귀족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당연히 이렇게 집사가 딸린 별장을 고향 마을에 세운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지오스 님은 백작이라고 하셨죠. 그럼 혹시 영지도 있으신가요?"

숙소를 안내해 준 올리버가 식사 준비를 위해 자리를 비우자, 이세아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그녀도 실력만으로 작위를 얻었다는 점은 그와 같았으나, 당시엔 특별히 공을 세운 것이 없어 영지를 받진 못한 상태였다.

그때는 라일리 황녀도 한창 황태자와 힘겨루기하던 와중이라 따로 챙겨주는 게 어렵기도 했었고.

'어차피 난 몇 년 내로 지구로 돌아갈 예정이니 이제 와서 영지를 받아도 곤란할 뿐이지만.'

그래도 자신과 비슷한 처지였던 그의 경우는 어땠는지 관심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무래도 귀족이 가진 힘의 근간은 영지라 볼 수 있지 않겠는가?

"···얼마 전에 모든 자산을 정리하고 영주 직에서 물러났습니다. 지금의 제게, 타인을 책임질 여유는 없으니까요."

"앗."

"하지만 이 저택만큼은 도저히 정리할 엄두가 나지 않더군요. ···이곳은 제 고향이면서 아내와 만났던 곳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희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영지보다는 이곳에 머물렀지요."

한 영지의 주인인 영주는 그 권한만큼 의무도 많은 자리였다.

수천, 수만이 넘는 사람들이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하는 것은 물론 그 생존까지 책임져야 하는 위치.

거기다 그가 받은 영지는 말만 백작령일 뿐, 대부분이 황무지인 열악한 환경이었다.

평화로운 시기에도 여러모로 신경 쓸 것들이 많아 골치 아플 정도였는데, 이 난세에서 영지민들을 지키기 위해선 보통 노력으로는 어림도 없는 노릇이었으니···.

자신의 전부나 다름없던 가족을 잃고 자포자기한 그에게 그런 여유가 남아있을 턱이 없었다.

"으흠흠."

이세아는 가볍게 헛기침하며 조심스레 그의 눈치를 살폈다.

괜히 아픈 상처를 건드린 것 같아 실수했다고 여기고 있었는데, 그녀의 걱정과는 달리 그는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무덤덤할 뿐이었다.

이미 닳고 닳아 더는 표출할 기력도 없다는 듯이.

"물론 이제 와서 그건 아무래도 좋은 일일 뿐입니다. 저희가 굳이 여기까지 온 이유가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 무덤덤한 모습이 그가 모든 감정을 버렸다는 뜻은 아니었다.

이미 마모될 대로 마모된 마음속엔 허전함만이 가득했지만.

그 와중에도 그를 채찍질하는 강렬한 감정이 남아있었는데—.

공허함 속에서도 선명하게 타오르는 그것, '분노'야말로 그를 움직이는 원동력이었다.

"아암! 그렇고말고! 우리가 이 먼 데까지 놀러 온 건 아니지!"

"이세계인이라···. 저랑 같은 지구인이면 좋겠네요. 어느 나라 사람이려나?"

"흠, 그럼 식사만 하고 바로 출발해 볼까요? 이왕 이곳까지 왔으니 뭐라도 얻을 수 있었으면 좋겠군요."

그러자 옆에 있던 다른 일행들이 냉큼 저마다 한마디씩 하고 나섰다.

그래, 그들이 이 먼 곳까지 온 이유는.

헤스페론이 가진 '이세계인만의 특별한 능력'에 취약점을 보인 불사왕의 허를 찌르기 위해.

그에 대해 잘 알만한 이를 찾아 어떻게든 정보를 얻기 위해서였으니까.

***

지오스는 그 고강한 경지 덕에 상당히 젊어 보이는 외견을 하고 있었지만, 엄연히 40대에 접어든 파티 내 최연장자였다.

'뭐,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긴 하지.'

사실 온갖 보정과 스킬의 도움을 받아 빠르게 성장하는 각성자들이 특이한 경우일 뿐.

경지를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뼈를 깎는 수련이 필수인 이 세계 사람들에겐 별로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사람들이 이세아를 보고 천재 마법사라며 경외하는 거겠지.'

고작 20대라는 어린 나이에 대마법사라는 경지에 오른 데다, 심지어 지금도 계속해서 성장하는 중이지 않은가!

하인리히야 신의 선택을 받은 용사였으니 예외였고, 할리는 용인이라는 생소한 종족에 노안이라는 점까지 겹쳐 그다지 위화감이 없었던 반면···.

이세아는 순수한 인간이면서도 외모조차 10대 중반의 어린 소녀에 불과했으니 더 충격이 클 수밖에 없었다.

"벌써 그를 처음 만난 지도 20년이 훌쩍 넘었군요. 그때는 정말··· 제가 이렇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었는데 말이죠."

언덕 위에 지어진 저택을 나서 마을로 향한 오솔길을 따라 걸은 지 십여 분.

길을 안내하던 지오스가 주변을 둘러보다 감회에 젖은 듯 낮게 읊조렸다.

평민에다 고아였던 어린 소년이 지금의 위치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을까.

아마 그가 겪었을 사건들도 '할리의 대모험' 못지않게 파란만장했을 것이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돈 아니려나.'

내심 자신의 이야기에 자부심이 있던 할리가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하다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조만간 좀 더 극적인 시나리오를 넣을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하며.

"킁! 그런데 형씨, 그 양반이 아직 그 자리에 있겠소? 혹여나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라도 했다면···."

"···아뇨. 마지막으로 봤던 게 두 달 전이니, 아직 그 자리에 있을 겁니다. 제 가족들의 장례식···에도, 함께 했었지요. 그 후로 힘들어하는 절 여러모로 신경 써 주기도 했고···."

"크흠!"

또다시 지뢰를 밟은 듯한 상황.

아무래도 사방이 온통 지뢰밭인 지금은 그냥 얌전히 입을 다물고 있는 게 나아 보였다.

"그리고 지금의 터전을 버리고 어디 갈 수도 없을 겁니다."

"흐음?"

그 마지막 말과 함께 혼자 추억에 잠긴 지오스를 따라 길을 걸은 지 얼마간.

언덕 아래의 제법 규모가 있는 마을에 도착한 그들은 주변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거리를 가로질렀다.

"엇! 저기, 설마···."

"지오스 백작님이잖아? 한동안 안 보인다 싶더니, 다시 돌아오신 건가?"

"같이 있는 사람들은 누구지?"

확실히 그가 유명 인사이긴 한 듯, 곧바로 알아본 마을 사람들이 삼삼오오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하긴, 같은 마을 출신이었던 사람이 난데없이 귀족이 되어 돌아와, 인근에 저택까지 짓고 눌러앉았는데 모르는 게 이상하겠지.'

거기다 그 직위조차 이 땅의 주인인 남작보다 높은 상대이지 않나.

그것 덕분에 알게 모르게 혜택도 많이 받았을 텐데, 주민들이 그를 아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곳입니다."

그리고 모두의 관심을 받으며 이동한 그들이 도착한 곳은.

지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듯한, 이 마을 안에서도 가장 크고 깔끔한 건물이었다.

다만, 그 용도가 조금 예상 밖이었는데···.

"어? 지오스 아저씨다!"

"으이? 지짜네? 지짜 아씨다!"

"아빠~! 지오스 아저씨 왔어요!"

"그런데 같이 온 사람들은 누구··· 히익?"

"흐아앙! 괴물이다! 언니! 언니이!"

낮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넓은 안뜰에서 정신없을 정도로 연이어 터져 나오는 어린아이들의 목소리.

한 가정에서 태어난 자식들이라기엔 지나치게 많은 숫자였다.

"여긴?"

"···보육원?"

그때, 살짝 당황한 일행들의 귓가로 낯선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지오스라고? 괴물은 또 뭐야! 어떤 놈이 감히 우리 애들을··· 응?"

안뜰에서 시끄럽게 울려 퍼지는 아이들의 아우성에 황급히 건물에서 튀어나오던 한 사내가 일행을 발견하고 순간 멈칫했다.

짧게 친 머리에 하얗게 센 수염을 단정하게 정리한 흑인 사내.

그의 시선이 갑자기 등장한 외지인들을 훑다가 그 선두에 선 지오스에게서 멈춰 섰다.

"오랜만입니다. 체하이."

"···지오스."

그렇게 마침내 용사 파티는 자칭 이세계인과 마주하게 되었다.

보육원을 운영하는 독지가라는 조금 뜻밖의 직업을 가진 그와.

***

"쳇, 이 상남자 할리 님을 보고 괴물이라니. 애들이 아직 어려서 그런지 뭘 모르는구만? 자고로 사나이란 나처럼 근육이 빵빵해야 하는 법인데."

커다란 보자기를 뒤집어쓰고 건물 내의 응접실로 들어온 할리가 그것을 벗어던지며 불만스럽게 툴툴거렸다.

그를 본 아이들이 하나같이 난리를 쳤기에 도저히 어쩔 수 없었던 것.

그나마 쫓겨나지 않고 이렇게나마 들어올 수 있었던 것도 함께 왔던 지오스가 아니었더라면 불가능했으리라.

"저기, 할리 씨? 당신은 근육만 문제가 아닐 텐데요···?"

"으잉? 그게 무슨 소리야 아가씨?"

이세아는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눈만 껌벅이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2.3미터가 넘어가는 거대한 근육질 덩치와 그 위에 빼곡하게 새겨진 문신, 야만인 그 자체인 옷차림과 흉악한 거대 도끼.

거기다 은연중에 풍겨 나오는 포식자의 기세와 마초의 극한을 달리는 인상까지 더하면, 과연 아이들이 울고불고하는 것도 이해가 갈 수밖에 없었다.

"···아니에요."

하지만 그녀는 그 사실을 구구절절 설명해 주는 대신 그저 슬쩍 고개만 젓고서 시선을 돌렸다.

사실 그도 모르는 척하고 싶을 뿐, 어차피 굳이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 잘 알고 있을 테니까.

"끄응."

그에 인상을 찌푸린 할리가 팔짱을 끼며 벽에 몸을 기댔다.

그로써 한층 더 살벌한 비주얼이 완성되었으나, 다행히 이 방 안에는 어린아이가 없어서 큰 소란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우선 이렇게 갑작스레 찾아온 점부터 사과드리겠습니다, 체하이."

"아니, 네가 찾아와 준 거야 오히려 고맙지. 내가 그동안 얼마나 걱정했는데? ···물론 저 양반 때문에 애들이 놀란 건 사과를 받아야겠다만."

지오스가 먼저 말문을 열자 그와 마주 앉은 흑인 사내, 체하이가 할리를 흘겨보며 혀를 찼다.

정말 마음만 같아선 당장이라도 쫓아내고 싶은데, 오랜만에 찾아온 지오스의 동료를 그렇게 박대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참고 있을 뿐이었다.

···물론 그들의 정체를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기도 했고.

"그래. 그래서 무슨 일이냐, 지오스? 너 혼자 온 것도 아니고 이렇게 다른 사람들까지 데리고서."

"아! 일단 용건을 말하기 전에, 저희 일행들부터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우선 이쪽은···."

"안녕하십니까? 저는 주신의 뜻을 따르는 첫 번째 검, 하인리히 세인트 랜드가드입니다. 이렇게 갑자기 찾아와 불편을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아, 아니. 그건 이제 괜찮습니다. 크흠— 전 체하이라고 합니다. 그저 작게 보육원이나 하며 애들 보는 낙으로 사는 촌부일 뿐이지요."

시골에 살고 있다지만 완전히 세상과 담을 쌓은 것은 아닌 듯, 그는 하인리히의 인사를 받고 조금 부담스러워하는 기색이었다.

그리고 이어진 다른 동료들과의 통성명.

이세아에게는 미소를 지어주던 표정이 할리에 이르러선 저도 모르게 찌푸려졌지만, 그도 이전 화제로 더 이상 뭐라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안녕하세요, 체하이 씨! 전 헤스페론이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물론 그게 본명은 아니지만요."

"음?"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어진 헤스페론과의 인사를 끝으로 그의 시선은 다시 지오스에게로 옮겨졌다.

통성명도 마쳤으니 이제 그가 본론을 꺼낼 거라는 생각에.

"체하이. 이분들이 누군지··· 그리고 제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굳이 더 말하지 않아도 당신이라면 알고 계시겠지요?"

"···그래."

"당신에게 묻고 싶은 게 한 가지 있습니다. 매우 중요한 문제이니 솔직하게 대답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 말과 동시에 응접실 내부에 무거운 공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말을 꺼낸 지오스는 물론, 그 동료들도 진지한 표정으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허허, 이거 참. 참고로 난 흑마법사도 아니고 불사왕과도 관련이 없다고? 아, 얼마 전에 애들이랑 감자 서리를 한 적이 있긴 하다만. 설마 그것 때문이냐?"

그 분위기에 체하이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농담을 건넸지만, 지오스는 약간의 표정 변화도 없이 그저 가만히 그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에 괜히 멋쩍어진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거칠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알겠으니까 빨리 그 질문이나 해 봐라. 대체 뭔 소리를 하려기에 이렇게 답답하게···."

"체하이, 당신은 혹시 지구라는 차원에서 오셨습니까?"

지금까지 뜸을 들였던 것과는 달리 단도직입적으로 꺼낸 질문.

그리고 그와 동시에.

체하이의 몸이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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