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보주(寶珠)
온선은 온유의 손을 살며시 잡은 채 불안해했다.
하지만 온유는 오히려 차분했다.
많은 일들은 결코 갑작스럽게 일어나지 않는다. 대부분 미리 조짐을 보이기 마련이다.
서로를 존중하던 부부는 최근 들어 유난히 다툼이 많아졌다. 그건 사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아버지가 눈치 볼 사람이 더 이상 없었기 때문이었다.
눈치 볼 사람이 사라지자 사랑하지도 않는 아내에게 거짓으로 꾸며 대할 필요도 사라진 것이다.
얼마 후 아버지는 딴살림을 차리고 살던 친척 누이를 온부로 데려온다. 게다가 아들 하나, 딸 하나도 데려오는데 심지어 아들인 온휘(溫輝)는 언니보다 한 살 위였다.
외할머니가 나서서 어머니를 대신하여 상황을 정리하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아버지는 애당초 과거에 급제한 다음 외할아버지의 강요로 어머니와 정혼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자신은 이미 사촌 누이동생과 혼인을 한 사이였는데도 외할아버지가 혼사에 응하지 않으면 자신의 앞길을 끊겠다고 협박해서 사촌 누이동생을 물러나게 했다면서…….
그래서 울며 겨자 먹기로 어머니와 혼인했다는 것이었다.
외할아버지는 젊었을 때 산을 점거하고 산채를 세웠던 녹림호걸 출신이었다. 그래서 온여귀의 이런 주장을 믿지 않는 사람도 있었지만, 믿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이십 년 전만 해도 정국공(定國公)이었던 임 노장군은 산적 출신의 다혈질이니 사랑하는 딸을 위해 정말 그런 짓을 저지를 수 있었겠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외할머니는 아버지가 입에서 나오는 대로 함부로 지껄인다고 꾸짖었지만, 아버지는 오히려 증인을 내세웠다. 하나는 당시 그를 모시고 과것길에 함께 나섰던 서동이고, 다른 하나는 고향에서 상경한 친척 형님이었다.
그렇게 해서 아버지의 말이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외할머니는 가슴에 울화가 쌓여 갑자기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함께 죽으려고 칼을 뽑아 아버지를 찔렀지만, 아버지는 상처만 입었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헤어질 명분이 생겼으나 인의 있는 사람으로 추앙받기 위해 어머니를 쫓아내지는 않았다. 또한 역으로 황제에게 상소를 올려 과거 처가 있으면서 중혼을 한 죄를 벌해 달라 청하였다. 그러자 황제는 억지로 그랬다는 점을 감안하여 아버지를 따로 추궁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버지의 이종사촌 누이인 상(常) 씨가 당당한 명분을 가지고 그녀의 계모가 됐다.
어머니는 그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실성해 버리고 말았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평생 책임지겠다고 공언했고 이로 인해 인의 있는 군자라고 큰 칭송을 받았다.
언니는 어머니의 가여운 처지를 가슴 아파하면서도 아버지의 어려움도 헤아리려고 했다.
오직 그녀만이 계모 상 씨를 몇 번 만난 후 진상을 꿰뚫어 봤다.
아버지는 상경하여 과거를 보기 전에 상 씨와 혼인한 적이 아예 없었다!
아버지는 새빨간 거짓말로 외할아버지를 비방했다. 본처의 자리를 어머니에게서 뺏어 사랑하는 여자에게 주고, 하나뿐인 아들에게 적장자의 신분을 주기 위해서 꾸민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벙어리였던 데다 늘 감시를 받았기 때문에 이런 진실을 밝힐 방법이 없었다.
온유는 여기까지 떠올리자 아버지에 대한 뼈에 사무치는 미움을 다시 느꼈다.
쾅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에 온유의 생각이 현재로 돌아왔다.
임 씨는 크게 흔들리는 휘장을 멍하니 바라보며 창백한 입술을 꼭 깨물었다.
온선은 어머니의 손을 잡고 부드럽게 위로했다.
“어머니, 너무 화내지 마세요. 아버지도 홧김에 그러셨을 거예요.”
온유는 언니의 말을 끊었다.
“어머니, 아버지가 변하신 것 같지 않아요?”
언니의 위로는 당장 어머니 마음을 조금 편하게 할 수는 있지만, 한편으로는 부스럼이 커져 큰 병이 되게 하는 일이었다.
그녀는 어머니 임 씨를 대비시킬 생각이었다. 청천벽력 같은 일을 당한 다음 뒤늦게 허둥대지 않도록 말이다.
이번에는 외할아버지가 마련해 준 저택에서 아버지가 사랑하는 ‘처자식’과 편하게 살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유아야, 왜 그런 소리를 하는 거니?”
온유는 원래 말을 못 했었기 때문에, 임 씨는 온유의 말을 이상하다고 생각하기보다는 귀 기울여 들으려고 했다.
온유는 소매 속 손을 꼭 쥐고 최대한 차분해지려고 노력했다.
많은 일들을 바꾸려면 반드시 이성적이어야 한다. 이성적인 주장이라면 사람들에게 통할 수 있지만, 어린 소녀의 응석으로 받아들여진다면 실패할 것이다.
“제 기억에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얼굴을 붉힌 적이 거의 없었죠. 그런데 최근 한 해 동안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여러 번 화를 냈어요.”
임 씨가 멍하니 있다가 무의식적으로 남편을 두둔했다.
“너희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내 기분이 좋지 않다 보니 자꾸 너희 아버지와 다툴 일이 생긴 거야.”
온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머니가 부친상을 당하셨으면 아버지가 더 배려해야 맞죠. 오히려 어머니와 자꾸 싸운다고요?”
막내딸의 말을 들은 임 씨는 한참 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이후 두 자매가 각자의 거처로 돌아가는 길, 온선은 시녀들이 없는 틈을 타 작은 목소리로 온유에게 말했다.
“유아야, 앞으로 어머니께 그런 소리는 하지 마. 괜히 두 분 사이만 나빠지겠어.”
온유는 온선이 잠시 침묵하는 틈을 타 조용히 물었다.
“언니는 내가 하는 말 믿어?”
온선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당연히 믿지.”
“그럼 나랑 같이 낙영거(落英居)에 가자. 언니한테 꼭 할 말이 있어.”
* * *
낙영거는 온유의 처소인 별채의 이름이었다. 초봄을 맞아 낙영거의 홍매화 한 그루가 담 모퉁이에 소리 없이 활짝 피어 은은한 향기를 바람에 실어 보냈다.
익숙하면서도 또 낯선 정원을 천천히 훑어본 온유는 마음이 씁쓸했다.
언니의 이름 ‘선(嬋)’은 어머니가 고른 글자였다. 그리고 언니가 머무는 거처의 이름도 어머니가 지은 것으로, 교월거(皎月居)라고 했다.
언니 이름인 ‘선(嬋)’자와 ‘교월거’는 모두 사랑하는 사람과 오래오래 아름다운 달빛을 함께 보고 싶다는 뜻을 담고 있었다.
아버지와 그렇게 살고 싶다는 어머니의 바람이 담긴 이름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것이 이십 년에 달하는 일장춘몽에 불과한 건 몰랐다.
꿈에서 깨는 순간 바로 나락으로 빠져들 터였다.
“유아야, 나한테 할 말이 뭐야?”
동생의 방에 들어온 온선은 편한 자리에 앉았고 시녀가 올린 차를 받아 먼저 동생에게 주었다. 그리고 다른 찻잔을 손에 들었다.
여러 해 동안 동생의 선천적 결함 때문에 온선은 동생에게 더욱더 지극정성이었다. 그런 이유로 온유는 온선을 깊이 신뢰하고 있었다.
“보주(寶珠)야, 넌 나가서 문을 지키거라.”
차를 올린 여종은 벌써 물러난 차였다. 방 안에는 얼굴이 둥근 시녀 하나만 남았었는데 이마저도 온유의 말을 듣고 묵묵히 밖으로 나갔다.
온부 사람들은 누구나 둘째 아가씨가 보주 한 사람을 제외하면 다른 여종과 시녀들이 곁에서 시중드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들 둘째 아가씨가 태어날 때부터 벙어리라 성격도 괴팍해서 그런 거라고 여겼다. 다만 한 가지 다들 궁금해했던 건, 그다지 영리하지도 않은 보주가 어떻게 둘째 아가씨의 총애를 받았느냐는 것이었다.
온선은 동생이 보주까지 내보내자 더욱 궁금해졌다.
“언니…….”
온유는 찻잔을 꼭 쥐고 잠시 생각을 정리하느라 말을 멈췄다.
그때, 손 하나가 그런 그녀의 손을 가볍게 토닥였다.
“유아야, 할 말 있으면 편하게 해. 언니에게 어려울 게 뭐야?”
온유는 찻잔을 내려놓고 언니를 바라보면서 맑은 눈물을 흘렸다.
온선은 깜짝 놀랐다.
“유아야, 왜 그래?”
“언니, 아버지는 바깥에 딴살림을 차리고 있어.”
찻잔이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온선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유아야, 너 혹시 어디 아프니? 열이 심해서 횡설수설하는 거 아냐?”
온유는 자신의 이마를 짚으려는 언니의 손을 피했다. 그러면서도 줄이 끊어진 구슬이 쏟아지는 것처럼 눈물을 계속 흘렸다.
“열이 나서 헛소리하는 거라면 나도 좋겠어. 아버지는 딴살림을 차렸을 뿐만 아니라 자식도 낳았다고. 아들 이름은 상휘(常辉)이고, 딸은 상청(常晴)이야. 성씨는 자기 어머니 성을 따른 거고…….”
회귀하기 전 많은 시련을 겪으면서 그녀는 자신의 눈물이 진작에 마른 줄 알았다. 하지만 회귀한 다음에는 눈물이 다시 많아졌다.
동생이 쏟아 낸 말이 온선의 머릿속에서 웅웅 울리는 것 같았다. 특히 유아가 아버지가 밖에서 낳은 자식 이름까지 말하자 아버지가 그런 짓을 했을 거라고 믿지 않던 온선도 조금은 믿을 수밖에 없었다.
“유아야, 넌…… 그걸 어떻게 안 거야?”
온선은 동생의 말을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길에서 우연히 봤어. 나도 처음에는 잘못 본 줄 알고 확인하기 위해서 며칠 동안 그 여자 뒤를 몰래 쫓았어. 그런데 보면 볼수록 나 자신을 속일 수가 없었지.”
온유는 눈물을 멈추고 입가에 냉소를 띠었다.
“언니, 알아? 그 집 아들 상휘는 언니보다도 한 살 많아.”
온선은 깜짝 놀라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자신보다 나이가 많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만 해도 피가 끓었다.
“유아야, 혹시라도 네가…….”
온유는 언니의 말을 끊었다.
“오해한 것 아니냐는 소리는 하지 마. 난 비록 말은 하지 못했지만 보고 듣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고. 머리도 정상이고.”
온선은 두 손을 탁자에 기댄 채 평정을 쉽게 회복하지 못했다. 한참 후에야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 집은…… 어디 있어?”
“여의방(如意坊) 마화(麻花) 골목이야.”
온유는 추호도 망설이지 않고 어디인지 말했다.
이름과 주소까지 알게 되자, 온선은 동생의 말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길은 아버지가 등청하고 퇴청할 때 늘 지나는 길이잖아…….”
온유가 언니의 손을 잡았다.
“언니, 직접 가서 보자. 괜히 상대가 눈치채고 대비하지 못하게 조심하면서 말이야. 그렇게 직접 확인하고 나서 우리 같이 어머니를 도와주자.”
온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동생의 말을 완전히 믿는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온선은 마음이 심란해서 더는 낙영거에 머물지 못하고 교월거로 돌아갔다.
주전자의 찻물은 차갑게 식었고, 바닥에는 떨어져 산산조각 난 찻잔 조각이 널브러져 있었다.
온유는 침상에 기대어 잠시 앉아 있다가 소리쳤다.
“보주야!”
얼굴이 둥그런 여종이 빠른 걸음으로 들어와 바닥의 찻잔 조각을 보더니 아무 말 없이 즉시 치웠다. 검은 눈동자에는 기쁨이 가득했다.
“아가씨, 무슨 시킬 일이 있으세요?”
온유는 빙긋 웃었다.
“보주야, 너 즐거워 보이는구나.”
보주가 씨익 웃었다.
“아가씨 목소리가 너무 예쁘세요.”
“그래?”
온유는 손을 뻗어 보주의 토실토실한 뺨을 살짝 꼬집었다.
“내 생각에도 그래.”
이 세상에서 그녀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유일한 사람이 보주였다.
보주는 원래 외가인 장군부에서 아궁이 불을 담당하던 종이었다. 어릴 때부터 온유를 가까이서 모시는 시녀는 계속 바뀌었지만, 온유가 직접 고른 보주만은 그녀 곁에 계속 남았다.
온부의 하인들은 둘째 아가씨가 굳이 외가에서 아궁이 불을 담당하던 여종을 데려와 자기 곁에서 시중들게 한 이유를 궁금해했다. 그리고 그 여종에게 ‘보주(寶珠)’라는 이름을 내린 이유도 궁금해했다.
하지만 온유에게 있어 자신이 직접 고른 이 시녀는 명실상부한 보주, 즉 보물이었다.
사실 아무도 몰랐지만 말하지 못하는 온유에게는 한 가지 비밀이 있었다. 바로 혈연관계가 없는 경우, 상대방의 생각이 들리는 경우가 가끔 있다는 것이었다.
말을 못 하는 주인을 섬기다 보면, 설사 딱히 악의가 없더라도 답답한 마음에 속으로 투덜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나이가 어렸던 온유는 당시 시녀의 생각을 읽고 나면 자연스럽게 그 시녀와 친하게 지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른 시녀로 계속 갈아치운 것이다. 보주를 만날 때까지는 늘 그랬다.
보주를 처음 봤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녀가 읽은 보주의 생각은 ‘아가씨는 참 예뻐’라는 것뿐이었다.
이런 보주를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