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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가족

3화. 가족

온유는 손을 뻗어 노부인의 소매를 꼭 쥐었다.

“유아야, 왜 그러니?”

외손녀를 바라보는 노부인 눈가에 감출 수 없는 기쁨이 드러났다.

사실 그녀에게 있어서 온유는 말을 할 수 있든 없든 사랑하는 손녀였다. 하지만 온유에게 있어서는 말을 할 수 있게 된 것이 완전히 다른 인생을 열어 줄 것이라 기뻤던 것이다.

외손녀 온유는 천향지색(天香之色)일 뿐 아니라 영리하고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다만 벙어리인 것 때문에 불합리한 대우를 받아 왔다.

“외할머니, 아무래도 제가 사고를 친 것 같아요.”

“무슨 사고 말이냐?”

노부인은 온선의 말을 떠올리고 별것 아니라는 듯 웃었다.

“담장을 넘어간 일 말이냐? 그게 무슨 대수라고. 이 할미도 어릴 때 자주 넘었는걸.”

이곳 장군부는 사실 국공부(國公府)이기도 했다. 태조(太祖)를 모시고 천하를 공략한 임(林) 노장군은 신분상으론 친왕보다 낮지만, 실권이나 태조의 총애 정도를 따지면 몇 명을 제외한 대부분의 친왕보다 높다고 할 수 있었다.

후에 태조가 승하하고 성정이 연약한 평락제(平樂帝)가 황위를 계승하자 제나라가 변경을 침공해 왔다. 연전연패를 당하자 겁에 질린 평락제는 배상금을 지불하고 이 년 만에 열 개 성을 제나라에 할양했다.

다혈질인 임 노장군은 황제의 나약한 모습을 차마 두고 볼 수 없어 면전에 대고 욕을 했고, 그 결과 작위를 강등당했다. 그래도 욕을 멈추지 않아 결국 국공부는 지금의 장군부로 격하되었다.

그나마 아직 선황의 그림자가 짙었기에 황제도 차마 임 노장군을 국공부에서 쫓아내지 못하고 현판만 장군부로 바꿔 달았다.

그리고 훗날 평락제의 친동생인 안왕(安王)이 도성을 공략하여 차지하자, 평락제는 혼란 속에 종적을 감췄다. 그리고 안왕이 제위에 올라 태안(泰安)이라는 새로운 연호를 내거니, 그가 바로 태안제(泰安帝)였다.

태안제는 임 노장군을 다시 국공에 봉하려고 했다. 임 노장군은 평락제의 나약함이 못마땅하긴 했지만, 또한 불명예스러운 방식으로 즉위한 태안제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때문에 그는 국공 작위를 끝까지 거부했다.

“전…… 정왕부 세자 눈앞으로 떨어졌고, 소군주 등 여러 사람이 그걸 봤어요.”

그 말을 들은 노부인은 눈썹을 찡긋하더니 온유를 품에 안고 위로했다.

“그래도 상관없다. 유아야, 소문이란 건 원래 스쳐 지나가는 바람이란다. 너를 아껴 주는 사람만 괜찮다면 유언비어는 금세 지나간다는 걸 기억하렴.”

“네, 기억할게요.”

온유는 외할머니에게 안긴 채 속으로 탄식했다.

삼 년 전에도 나를 아껴 주던 사람들은 확실히 그 소동에도 개의치 않았어. 하지만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사람들 중 어떤 사람은 죽고, 어떤 사람은 미쳐 버렸지. 나를 아끼지 않는 사람만 남아 나를 불구덩이로 밀어 넣으려고 했고.

이때 한 의녀가 약상자를 들고 들어왔다.

노부인은 온유를 가리키며 말했다.

“둘째 아가씨 발목을 살펴보거라.”

온유는 한쪽 발목이 파랗게 부어올랐지만, 다행히 뼈는 다치지 않았다.

의녀는 얼음찜질하기 위해 수건으로 얼음을 감쌌다.

온선은 애틋한 마음이 들면서도 참지 못하고 동생을 꾸짖었다.

“발을 삔 것도 삔 거지만, 손은 왜 물어뜯어 상처를 낸 거야? 흉터가 남으면 어쩌려고 그랬어?”

온유는 조심스럽게 연고를 발라 주는 언니를 보며 살며시 웃었다.

“말을 할 수 있다는 걸 알고 꿈인지 생시인지 몰라서 그랬어.”

순간 온선은 연고를 바르던 손을 멈추고 눈시울을 붉혔다.

우리 유아가 고생 끝에 낙이 왔구나.

의녀가 물러가자 쪽진 머리를 높게 틀어 올린 미부인이 허겁지겁 휘장을 젖히고 들어왔다.

“어머니, 선아가 유아를 데리고 여기로 왔죠?”

바람처럼 빠르게 달려온 미모의 부인은 두 자매의 어머니 임(林) 씨였다. 임 씨는 긴장한 얼굴로 온유를 살폈다.

“유아야, 괜찮니?”

그녀가 도성의 여러 귀부인들과 함께 정왕비와 담소를 나누고 있을 때, 왕부의 한 시녀가 다가와 귓속말로 막내딸에게 있었던 일을 전해 주었다.

다만 시녀가 간단하게 사실관계만 전달하였기에 그녀는 걱정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실례를 무릅쓰고 자리를 떠나 장군부로 온 것이다.

온유는 어머니를 보자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임 씨는 입가에 웃음을 머금은 맏딸과 만면에 희색이 가득한 어머니를 보며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예요?”

“어머니.”

온유는 낭랑한 목소리로 난생처음 어머니를 불렀다.

임 씨는 순간 멍하니 온유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유아야?”

그녀는 온유가 다시 입을 열기를 기다리지 못하고 손을 들어 자신의 볼을 세게 꼬집었다.

딸의 갑작스러운 행동을 말리지 못한 노부인이 나무라듯 말했다.

“누가 둘이 모녀지간 아니랄까 봐!”

임 씨는 너무 흥분해 입술을 파르르 떨고 있었다. 꼬집은 볼은 분명히 아팠지만, 아직도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이었다.

“유아야, 다시 한번 어머니라고 불러 볼래?”

“어머니.”

온유는 목이 메었다.

임 씨는 온유를 끌어안은 채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노부인은 눈물을 훔치며 웃었다.

“어서 우리 사위에게도 이 기쁜 소식을 전해야지.”

이 말을 들은 온유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맞아. 이때만 해도 아버지는 외할머니 눈에 좋은 사위였지. 어머니 눈에는 좋은 부군이었고.

온유는 임 씨의 품에서 빠져나오면서 말했다.

“어머니, 일단 집으로 돌아가요.”

“유아야, 다리도 성치 않은데 여기서 좀 쉬다가 다 나으면 돌아가지 그러니?”

노부인이 온유를 만류했다.

“멀지도 않은데요, 뭐. 마차를 타면 몇 걸음 걸을 필요도 없고요. 발목이 나으면 또 뵈러 올게요.”

임 씨도 말했다.

“어머니도 쉬셔야 하니 아이들을 집으로 데리고 갈게요.”

임 노장군이 세상을 떠난 뒤, 임 씨는 출가한 딸로서 일년상밖에 치를 수 없었다. 하지만 노부인은 미망인으로서 아직 삼년상을 치르는 중이었다.

그 생각이 나자 노부인도 더는 딸과 손녀들을 붙잡을 수 없었다. 그리고 실제로 온부는 장군부에서 매우 가까웠다.

* * *

세 모녀는 마차를 타고 일각도 지나지 않아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온유는 마차 휘장을 걷어 올리고 ‘온부(溫府)’라는 글자가 적힌 현판을 보며 조용히 냉소를 흘렸다. 이 저택은 자신의 부모가 정혼을 한 후 외할아버지가 고르고 골라서 사 준 집이었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무남독녀인 어머니가 친정집에 드나들기 쉽도록 가까이 살았으면 했던 것이다.

물론 현실적인 문제도 있었다. 당시 아버지는 이제 막 과거에 급제해 한림원 미관말직인 서길사에 오른 처지였다. 아버지는 처가살이가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라고 여겼으나, 또 한편으로는 자기 힘으로 저택을 마련할 길도 없었다.

“유아야, 뭘 그리 보니?”

기분이 좋은 임 씨가 웃으며 밖을 내다보는 막내딸을 보고 물었다.

온유는 휘장을 내리고 미소 지은 채로 말했다.

“그냥 다 꿈 같아서요. 왠지 집도 낯설게 느껴지네요. 그리고 아버지께 따로 연락하지 말고 돌아오셨을 때 깜짝 놀라게 해 드리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어린 시절부터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임 씨는 시집온 지 이십 년이 다 되어 가지만 여전히 소녀다운 장난기가 있었기에 딸의 제안이 좋다고 생각했다.

해 질 무렵이 다 되어서야 시녀가 주인의 도착을 알렸다. 곧이어 온부의 주인이자 온유의 아버지인 온여귀(溫如歸)가 성큼성큼 걸어 방으로 들어왔다.

“노야.”

집에 돌아온 온여귀의 안색이 붉으락푸르락한 것을 보고 웃음을 머금고 있던 임 씨 또한 자기도 모르게 표정이 굳었다.

온여귀는 심각한 얼굴로 임 씨 뒤에 있는 온유를 노려봤다. 이팔청춘 꽃다운 나이의 소녀는 파릇파릇한 버드나무처럼 가녀리고 아름다웠다. 그러나 온여귀의 눈에는 지긋지긋하기만 했다.

벙어리로 태어난 이 딸은 그에게 치부에 불과했다. 게다가 이제는 철이 들기는커녕 경박한 여자들이 하는 짓을 따라 하고 있었다.

“유아야, 네 잘못을 아느냐?”

그제야 정신을 차린 임 씨는 온여귀의 노여움은 신경 쓰지 않고 말했다.

“노야, 그거 아세요? 우리 유아가 말을 한답니다!”

임 씨는 남편이 아무리 화가 났다고 해도, 이 기쁜 소식을 들으면 화가 눈 녹듯이 풀릴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온여귀는 그 말을 듣고도 눈살을 찌푸리고 오히려 더 차갑게 말했다.

“말문이 트였다면 내 말에 대답해야 할 것 아니냐? 설마 네 잘못을 모르는 것이냐?”

온씨 가문 이소저가 말문이 텄다는 놀라운 소식은 이미 파다하게 퍼져서 온여귀의 귀에도 들어갔다. 문제는 그 소문과 동시에 이소저가 담장을 기어올라 세자를 훔쳐봤다는 소문도 같이 퍼졌다는 점이었다.

온여귀는 그 소문을 듣고 죽을 정도로 화가 나서 온유를 혼내려고 허둥지둥 돌아온 것이었다.

임 씨는 온여귀의 거친 질책에 놀랐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노야, 제 말 못 들으셨어요? 우리 유아가 말을 한다고요.”

“난 귀머거리가 아니오.”

온여귀가 이렇게 냉랭하게 대하는 건 임 씨에게 드문 일이었다.

“그럼 이제 평범한 사람이나 다름없으니 더욱 법도를 제대로 알고 따르게 해야 할 것 아니오? 딸이 잘못을 저질렀는데 어미가 훈계조차 안 한다면 저 아이가 장차 얼마나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천방지축으로 날뛰겠소? 그 결과로 남에게도 폐를 끼치고 자기 인생도 망칠 것 아니오?”

조용히 듣고만 있던 온선이 참지 못하고 아버지를 말렸다.

“아버지, 고정하세요…….”

“아비와 어미가 이야기 중인데, 어딜 끼어드는 게냐?”

온선은 입을 오므리며 난감한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온유는 마음속에서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애써 냉정함을 유지했다.

“제가 잘못했어요. 정왕부 세자가 도와달라고 소리를 쳐도 담장을 넘어 도와주면 안 되는 거였어요.”

“세자가 도와달라고 하는 소리를 들었다?”

온여귀는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소문은 다르던데?”

“소문은 뭐라고 하는데요?”

온유는 차분하게 물었다.

온여귀는 세 모녀를 보며 차갑게 비웃었다.

“다들 네가 불측한 마음을 품고 세자를 훔쳐봤다고 하더구나!”

이건 그야말로 한 여자의 일생을 망치고도 남을 만한 오명이었다.

임 씨는 화가 나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노야, 남들이 무슨 소리를 하든 믿지 마십시오. 우리 유아는 좋은 뜻으로 정왕세자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도우려 했던 겁니다.”

온여귀는 더는 화도 안 나서 웃어 버렸다.

“어리석은 소리! 만에 하나 그게 사실이라고 해도 세상 사람들이 믿을 것 같소?”

그건 사실이었다. 세상 사람들은 악의에 찬 소문이나 남녀 사이의 추문을 퍼뜨리는 걸 좋아했다.

임 씨는 화가 난 남편이 낯설었다.

“세상 사람들이 믿지 않으니 우리도 그래야 한다는 거예요? 세상 사람 모두가 유아를 의심한다고 해도 우리는 믿어 주고 아껴 줘야죠. 노야는 어째서 유아에게 화를 내시나요?”

“당신!”

온여귀는 임 씨에게 손가락질하다가 화를 참지 못하고 소매를 휙 뿌리쳤다.

“오냐오냐 키우면 아이 장래를 망치는 것이오!”

지금껏 온여귀에게 정성을 다한 임 씨는 오늘 이런 질책을 받자 참지 못하고 말대답을 했다.

“당신이야말로 너무 책만 보다 보니까 생각이 고루하고 완고한 고집불통이 됐군요…….”

말다툼을 하면 할수록 두 사람의 목소리가 높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