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난감해진 밀회 현장
남궁묵이 덤덤하게 말했다.
“먼저 날 언니라고 부르지 말거라. 그리고 지금은 듣고 있자니 닭살이 돋아 못 참겠어서 나온 것이다. 난 너의 황장손 전하께 전혀 관심이 없다. 저분의 후궁이 될 생각은 더더욱 없고.
네 어머니께서 첩실 부인이시니 너는 이를 전혀 개의치 않는지 모르겠다만, 난 어머님, 외조모님, 외증조모님, 외증조모님의 어머님까지 모두 정실부인이셨던 적녀의 혈통이다. 그러니 후궁의 자리는 전혀 고려해 볼 수 없는 위치고, 평민의 본처가 될지언정 결코 부자의 첩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너와 황장손 전하를 미행한 적이 없다. 외려 너와 황장손 전하의 밀회가 내 휴식을 방해했다. 어쩜 그리 아둔하단 것이냐? 여긴 들어오고 나가는 길이 하나밖에 없단다. 마지막으로, 혼약도 하지 않았는데 야밤에 사내와 이런 곳에서 밀회나 하다니. 체면 좀 차려. 알겠니?”
남궁묵이 쏟아낸 말에 남궁주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휘청거렸다. 곧 남궁주가 눈물을 머금고 말했다.
“언니,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가 있어요? 저……, 저랑 전하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란 말이어요.”
남궁묵은 한층 더 따스한 미소를 지으며 유유히 말했다.
“그래, 가련하고 박복한 팔자니 기꺼이 후궁이라도 되어야겠지. 잘해 봐. 아버지께선 왜 널 정실부인의 여식으로 태어나지 못하게 하신 걸까. 내가 아버지께 잘 말씀드려 보마. 황장손 전하께 좀 더 최선을 다해 노력하시라고 말이야. 그래도 귀족 아가씨가 후궁이 되는 것은 막아야 하지 않을까?”
소천야가 눈살을 찌푸렸다.
“남궁 아가씨.”
이 이야기가 남궁회의 귀까지 들어가게 되면 상황은 그야말로 골치 아파졌다. 초국공의 여식 정도라면 황손의 비(妃)나 태자의 후궁으로 입궁하는 건 그래도 그런대로 괜찮은 일이었다. 하지만 고작 황손의 후궁으로 들어가는 건 아무래도 조금 너무한 처사였다. 남궁묵이 정말 소란이라도 피운다면, 남궁회는 체면 때문에라도 절대로 남궁주를 월군왕에게 보내지 않을 것이었다.
“하하, 가련하고 박복한 팔자니 기꺼이 후궁이라도 되려 한다. 맞는 말이긴 한데……. 초국공의 따님이 박복하다면 평범한 백성들의 여식은 어떻게 살겠습니까?”
그때, 어디선가 인장풍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인장풍은 순식간에 근처 길목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달빛 아래서 쥘부채를 흔들고 빙그레 웃으며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내 인장풍이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남궁 공자님, 그렇지 않습니까?”
이윽고 인장풍의 뒤로 남궁서, 남궁휘, 위군맥도 차례로 나타났다. 남궁서는 꼴사납다는 표정으로 남궁주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자 남궁묵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속으로 생각했다.
‘옆에서 구경이나 하며 재미나 봐야겠구나.’
갑자기 나타난 이 인물들을 보고, 줄곧 온화하고 점잖던 황장손의 얼굴이 완전히 일그러졌다.
남궁주도 한밤중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잠도 자지 않고 화원에 올 것이라곤 생각지도 못한 것 같았다. 그러다 순식간에 이 모든 것이 남궁묵의 소행이란 결론을 내곤, 남궁묵에게 삿대질을 하며 분노에 찬 목소리를 높였다.
“언니지! 언니가 우리를 모함하는 것이지!”
낯빛이 어두워진 남궁서가 사나운 목소리로 말했다.
“입 다물지 못해!”
남궁 형제도 원래 남궁주와 황장손이 친분이 있음을 알고는 있었지만 이를 그렇게 신경을 쓰진 않았다. 그런데 남궁주가 이리 어리석게도 황장손과 남궁가 저택에서 밀회를 할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그렇다고 지금 남궁주의 명예나 평판이 그리 훌륭한 것도 아니었다. 만약 이 일이 풍문으로 퍼지면 사람들은 황장손에겐 젊은 시절에 풍류를 즐긴 것이라 말하는 게 고작이겠지만, 여인에겐 더욱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낼 것이 빤했다. 이 모든 오명은 결국 남궁주가 몽땅 뒤집어쓰게 되어 있는 것이었다.
남궁주는 황당한 얼굴을 하다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큰오라버니! 언니가, 언니가 우리를 모함하는 것이어요!”
더는 참을 수 없었던 남궁서가 결국 벼락같은 호통을 쳤다. 그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온 화원에 울려 퍼졌다.
“묵아가 너를 모함한다 했느냐? 묵아가 널 모함해서 얻는 게 무엇이라고!”
남궁주의 명예가 손상된다고 해서 남궁묵의 명예가 드높아지는 건 아니었다. 또한 남궁서는 남궁묵이 아무리 남궁주를 미워한다 해도 절대로 이런 방법을 쓰지는 않으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무엇보다 남궁묵이 이들에게 밀회를 즐기라고 시키지는 않았을 것 아닌가.
사실 남궁서는 남궁묵의 인품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만약 정말 필요했다면, 남궁묵은 정말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남궁주를 모함할 것이었다. 허나 지금 보니 남궁묵이 애써 나서서 모함하지 않아도 남궁주는 스스로 제 무덤을 팔 위인으로 보였다.
그때, 인장풍이 앞으로 나오더니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남궁주 아가씨께서 오해하신 것 같습니다. 위군맥 공자님께서 달구경이 하고 싶어 우리를 데리고 나온 것인데, 이것이 어찌 남궁묵 아가씨의 모함이 되겠습니까? 설마 남궁묵 아가씨께서 남궁주 아가씨와 월군왕 전하를 이리로 부르신 겁니까? 그렇다면 남궁묵 아가씨, 이건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남궁묵이 인장풍을 흘겨보자, 그가 잽싸게 위군맥 뒤로 숨곤 활짝 웃었다.
“아아, 깜빡했습니다. 아가씨는 저녁을 드신 후 바로 나가셨던 것 같습니다. 남궁 아가씨는 월군왕 전하와 절대 마주칠 수가 없겠습니다.”
그러자 위군맥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장풍이, 입 다물게.”
그리곤 남궁묵에게 말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남궁묵은 미소를 머금은 채 급변한 상황에 얼이 빠져 있는 남궁주를 한번 쳐다보곤 천천히 위군맥 곁으로 걸어갔다.
이내 위군맥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예에 어긋나는 것은 보지 마십시오. 그런 지저분한 장면을 보신다면 다래끼가 날 수도 있습니다.”
위군맥의 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모든 사람의 이목이 소천야와 남궁주에게 집중됐다.
소천야는 그래도 괜찮았다. 밤이라 어두워 크게 문제 될 것이 없었지만 남궁주에게는 날벼락이 떨어진 것과 같았다. 옷도 얇게 입은 데다 두 사람이 접촉을 할 때 흥분한 나머지 옷매무새가 흐트러졌고, 앵두 같은 입술도 조금 부어 있는 상태였다. 거기다 이들의 뒤에 선 하인들이 든 등불에 남궁주의 하얀 목덜미에 어슴푸레 남은 붉은 자국이 비쳐 어른거리고 있었다.
결국 남궁서의 안색은 더 어두워졌고, 남궁휘의 낯빛도 마찬가지로 굳어졌다. 이내 남궁휘가 먼저 남궁묵을 뒤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묵아, 먼저 처소로 돌아가 쉬거라. 여기 일은 신경 쓰지 마라.”
조금 전 사랑하는 이와 천국을 오가던 남궁주는 졸지에 날벼락을 맞았다. 남궁묵은 갑자기 기분이 한결 나아지는 것을 느꼈다.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위군맥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아가씨를 바래다 드리겠습니다.”
남궁휘는 차분한 낯빛의 위군맥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껏 위군맥의 신세에 약간의 불만을 품고 있었지만, 지금 보니 그가 꽤 마음에 들었다.
신세가 좀 처량한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설령 위군맥이 정강군왕부를 물려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연왕과 장평 공주가 있다면 그리 손해 보는 것도 아니었다.
하물며 초국공부는 필시 장남 남궁서가 물려받게 될 것이었다. 남궁서가 남궁묵을 모르는 척할 리는 결코 없었다. 그러니 위군맥의 인품만 좋다면, 앞으로 누이 남궁묵은 평온한 나날을 보내게 될 것이 분명했다.
* * *
위군맥과 남궁묵이 떠나자 인장풍도 이곳에 남아 괜히 미움을 살 필요가 없었다. 이제 뒷일은 모두 남궁가의 몫이었다.
셋이서 오솔길을 천천히 걷던 중, 남궁묵이 먼저 고개를 들고 물었다.
“누구 생각이었습니까?”
한두 사람과 마주친 것이라면 그런대로 말이 되었지만, 야밤에 이렇게 많은 사람과 마주치다니. 이것이 결코 우연일 리가 없었다.
이내 인장풍이 웃으며 말했다.
“말하지 않았습니까, 위 공자가 가자고 한 것이었습니다.”
남궁묵은 미소를 머금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인장풍도 슬쩍 웃고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그게…… 위 공자가 황장손 전하랑 한잔하려고 찾아갔는데, 방에 안 계시는 겁니다. 그러자 누가 전하께선 산책하러 나가셨을 거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음,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나저나 남궁가 둘째 아가씨께서 어지간히 애가 탄 모양입니다?”
남궁묵이 말했다.
“애가 탄 건 황장손 전하시겠지요. 안 그렇습니까?”
인장풍이 물었다.
“그럼 아가씨는 어떻습니까?”
남궁묵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저 말입니까? 뭐, 황장손 따위.”
황장손이 황태자도 아니고, 설사 황태자라해도 지금까지 황위에 오르지 못한 태자는 부지기수였다. 그런데도 남궁가는 그에게 너무 안달하고 있으니, 황제가 공신들과 명문세족을 곱게 보지 않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인장풍은 곧 한숨을 쉬며 이상하다는 눈으로 남궁묵을 바라봤다. 황장손에게 황장손 따위란 말을 할 수 있다니. 남궁묵의 대담함은 한계가 없어 보였다.
“따위?”
그때 위군맥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장풍, 돌아가자.”
인장풍은 잠깐 어리둥절하다가 곧 눈치를 채곤 남궁묵에게 눈을 찡긋한 뒤 어둠 속으로 쏜살같이 사라졌다.
그러나 위군맥은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어, 남궁묵은 매우 의아했다.
“할 말이라도 있습니까?”
이윽고 위군맥이 남궁묵을 내려다보았다. 남궁묵은 그제야 자신의 키가 위군맥의 어깨에도 닿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물론 아직 더 자랄 수야 있겠지만, 원래 175cm였던 지난 세계의 키만큼 자랄 수 있을까?
이내 위군맥이 말했다.
“소천야를 건드리지 마십시오.”
“그런 적 없습니다.”
남궁묵은 다시 생각해도 자신은 아무런 잘못도 한 것이 없었다. 밀회를 즐기며 장소를 제대로 안 따진 것도 그들이었고, 뒤에서 자신의 험담을 한 것도 그들이었다. 이렇게 참고만 있으면 그냥 자신이 물로만 보이지 않겠는가.
“왜, 살수를 보내 저를 암살이라도 한답니까?”
조금 흥분된 어조가 이어졌다. 남궁묵은 아직 이 세계의 살수와 겨루어 본 적이 없었다.
달빛 아래 비친 위군맥의 눈은 매우 싸늘했고, 어쩔 수 없단 빛도 있었다.
“당신을 죽이진 않을 겁니다. 하지만 소천야는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를 건드려 봤자 당신에게 좋을 건 하나도 없습니다.”
위군맥은 잠시 망설이더니 그녀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그렇다고 걱정도 하지 마십시오.”
남궁묵이 약간 이상하단 눈으로 올려다봤을 때는 위군맥은 이미 시선을 피한 후였다.
“어서 돌아가 쉬십시오.”
위군맥은 다시 정원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얼마 못 가 입구에 서서 잠시 망설이다 질문을 던졌다.
“소천야는 황장손인데다 폐하께서 가장 총애하는 황손입니다. 당신은…… 정말 신경이 쓰이지 않는 겁니까?”
그러자 남궁묵이 그의 앞에서 손가락을 쭉 폈다.
“첫째, 그에겐 이미 부인이 있습니다. 전 후궁이 되는 것엔 취미가 없습니다. 둘째, 황장손이 금화도 아닌데 모든 사람이 그를 좋아하는 건 아닙니다. 요즘엔 돈도 하찮게 보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알겠습니다, 들어가 얼른 쉬십시오.”
마침내 위군맥이 고개를 끄덕이곤 자리를 떠났다.
남궁묵은 말없이 입구에 서서 떠나는 위군맥의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이 시대에 이상한 사람이 이렇게 많으리라고는 생각 못 했어. 이상한 사람과 어울리는 일이 이렇게 힘들다는 것도 몰랐고. 말이 안 통하는 것 같은데, 어쩌면 좋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