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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화 어찌 저리 아둔할꼬?



21화 어찌 저리 아둔할꼬?

인장풍은 위군맥의 하좌에 앉아 느긋하게 물었다.

“월군왕 전하께선 무슨 시간이 있으셔서 이곳에 온 것입니까?”

소천야가 웃으면서 말했다.

“서봉촌은 초국공의 고향이지. 초국공처럼 대하를 개국하는 데 힘쓴 동량지재를 배출한 곳이니, 이곳은 분명 영험한 땅이 틀림없다. 그래서 여기저기 돌아다녀 보고 있었는데, 이곳에 군맥과 장풍이 있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네.”

인장풍이 씨익 웃으며 고개를 숙이고 차를 마시던 위군맥을 흘끗 쳐다봤다.

“왜 그러십니까? 폐하께서 군맥이와 남궁가 큰아가씨의 혼사를 정해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우리가 이곳에 있는 것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대하왕조는 이전 왕조처럼 외척 통치로 인해 예법이 파괴되어 방종한 행위가 자행되는 것을 마냥 두고 보진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결코 예전보다 예법과 도덕이 엄격해졌다고 볼 수도 없었다.

새 왕조가 세워지면서 방치됐던 많은 것들이 시행돼야 했다. 모두 자녀의 명예를 매우 중시하면서도, 이미 혼약을 맺은 남녀 간의 만남은 허용되곤 했다. 물론 몰래 밀회를 하는 것까지 용납되는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래서 지금은 모두가 혼례 날 처음 배필을 만나며 어색해하는 풍토가 없었다.

‘위군맥이 이곳에 있는 건 자신의 정혼자인 남궁묵 때문인데, 그러면 황장손께서 이곳에 계신 건 무엇 때문입니까?’

이것이 인장풍의 말속에 숨겨진 속뜻이었다.

웃는 듯 아닌 듯, 인장풍의 요염한 눈이 정 씨 옆에 앉아 자못 부끄러운 기색을 보이는 아리따운 남궁주에게 가 닿았다. 인장풍은 소천야가 상당히 못마땅했다. 그는 소천야가 황제가 처음 정한 위군맥의 혼처가 남궁주였음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걸 결코 믿지 않았다.

물론 소천야를 중간에서 끼어 든 제삼자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황제도 아직 소천야와 남궁주의 혼사에 대해 가타부타 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이후에 남궁가에서 했던 행동을 그가 몰랐다는 걸 의미하지는 않았다. 그러니 지금 위군맥 앞에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친근하게 행동하는 것이 인장풍의 눈에는 매우 고까워 보이지 않겠는가.

인장풍의 말을 들은 남궁주는 간절한 눈길로 황장손을 바라봤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소천야는 그녀에게 실망을 안겨주었다.

소천야는 인장풍이 한 말의 속뜻을 전혀 이해 못 했다는 듯 여전히 부드럽고 점잖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군맥이가 좋은 배필을 찾은 것 같구나. 축하한다.”

위군맥이 냉담한 표정으로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감사합니다.”

* * *

“천야…….”

은은한 달빛과 꽃그늘, 남녀가 밀회하기 좋은 때였다.

달빛 아래 흰 비단옷을 입고 살짝 바른 연지로 붉은 입술을 옅게 물들인 남궁주의 모습은 입고 있는 옷의 무게도 버거울 만큼 약해 보였다.

남궁주는 달빛 아래 서 있는 온화하고 점잖은 사내를 응어리진 눈빛으로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천야, 당신은……, 당신은 주아를 미워하시는 건가요?”

소천야는 따스한 눈길로 남궁주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그럴 리가 있겠소?”

“그런데…….”

남궁주는 입술을 살짝 깨문 뒤 뒷말을 머뭇거렸다.

하지만 소천야는 그녀가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는지 알 것 같아, 한 걸음 다가서서 남궁주의 희고 매끈한 손을 잡고 말했다.

“바보 같기는, 진정 모르겠소? 내가 여기 온 것은 초국공에게 내 생각을 분명히 전하기 위함이오. 분명 초국공도 내 뜻을 알았을 것이오. 주아, 걱정하지 마시오. 내 반드시 당신을 배필로 맞을 것이니.”

남궁주는 기뻤지만, 여전히 의문이 남아 있었다.

“그럼 어째서……, 저는 이렇게 꽁꽁 숨겨져 있고 싶지 않아요. 전하 곁에서 떳떳하게 함께하고 싶단 말입니다.”

소천야가 짧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태황상께서 분부를 내리신 지 얼마 안 됐고, 남궁가의 일을 아는 금릉성 사람들도 적지 않소. 태황상께서 군맥이를 어여삐 여기는 건 아니지만 난 황실, 연왕 숙부님, 제왕 숙부님 그리고 장평 고모님의 체면까지도 고려해야 하오. 그러니 주아, 우리 일은 천천히 신중하게 의논합시다. 적어도……, 남궁가 큰아가씨와 군맥이의 혼사가 성사된 후에 말이오.”

소천야의 말에 설득된 남궁주가 그의 품에 안기며 말했다.

“전하께서 더 이상 저를 사랑하지 않는 줄 알았어요.”

“그럴 리 없잖소? 내가 어떻게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단 말이오.”

소천야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

“단지 조금만 늦추자는 거요. 태황상과 부왕께서 당신에게 불만을 느끼지 않도록 말이오. 그리고 신분으로 봤을 때 조금 억울하겠지만, 고려해 주시오.”

소천야는 올해 22살로 5년 전, 악국공(鄂国公)의 여식 원 씨를 정비로 맞았다. 그러니 남궁주가 소천야의 곁에 설 자리는 오로지 첩실밖에 없었다.

순간 남궁주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지만, 그녀를 안고 있던 소천야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곧 남궁주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전하와 함께할 수 있다면 주아는 억울하지 않아요.”

“주아, 나 소천야는 절대 당신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오.”

“전하를 믿어요.”

* * *

그때, 남궁묵은 화원 뒤편에서 불편하게 몸을 뒤척이며 하늘을 보고 속으로는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귓가에는 애절한 사랑의 밀어가 흐르고, 눈앞엔 야릇한 분위기가 비쳤다. 이에 남궁묵은 처음으로 자신의 처지가 처량하다고 생각했다.

남궁묵은 무슨 관음증 같은 것이 있어 야밤에 잠도 자지 않고 이곳에 와서 타인의 밀회를 엿보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늘 자신을 찾아와 설득하려는 남궁 형제를 상대하기 싫어서, 저녁을 먹자마자 뛰쳐나와 화원으로 숨어들어 자신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이 이곳에서 밀회를 즐길 줄 누가 알았겠는가. 게다가 둘이 함께 왔다니. 나가야 하는 걸까, 아니면 이대로 있어야 하는 걸까?

남궁묵은 하릴없이 손으로 입을 가리고 소리 없는 하품을 몇 번 했다. 그런데 얼마 뒤, 화원 뒤편에서 점점 뜨거워지던 소리가 돌연 뚝, 끊기고 다시 소천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아, 저기……, 남궁 아가씨는 어떤 사람이오?”

“어떻다니요. 설마 언니를 마음에 둔 건 아니시지요?”

남궁주의 아름답고 부드러운 목소리엔 질투심이 섞여 있었다.

소천야가 웃으며 말했다.

“그게 무슨 바보 같은 소리요. 그 아가씨는 군맥이의 약혼자잖소. 그저 초국공부의 큰아가씨이고, 장차 정강군왕부의 세자빈이 될 사람이니, 미리 알아두려는 것뿐이오.”

남궁주는 흥, 하고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어릴 적부터 궁벽한 시골에서 자라 언니에게 법도를 가르쳐 준 사람이 없었어요. 요 이틀만 해도 아버지를 여러 번 자극해 노발대발하시게 했지요. 그래서 아버지께선 이제 금릉에 돌아가면 언니에게 법도를 가르쳐 줄 사람을 구해야겠다고 계속 말씀하셨어요.”

소천야가 물었다.

“그렇다면 도움이 필요하지 않겠소? 내 돌아가서 원 씨에게 여인인 선생 몇 명을 보내라고 할까요?”

남궁주는 곧바로 억울한 눈으로 반문했다.

“마음에 든 게 아니라 말씀하시면서 왜 그렇게 관심을 보이시는 건가요?”

“당신의 언니잖소. 당신 얼굴 봐서 그러는 것이오. 주아, 화내지 마시오.”

“저는 언니라고 생각하지만, 아마 언니는 절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 거여요.”

“어찌 그런 말을 하오?”

그제야 남궁주는 크게 훌쩍이며 요 이틀 동안 남궁묵이 자신과 어머니 정 씨에게 준 설움을 부풀려 이야기했다. 물론 어머니와 자신이 알게 모르게 남궁묵을 건드렸던 것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듣고 있던 소천야는 서서히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다 낮에 대청에서 남궁묵이 몇 마디 말로 위씨 형제를 간단히 제압해, 일순간 사색이 되었던 형제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것이 바로 짧은 순간 보았던 남궁묵의 능력이었다.

“물론 남궁 아가씨의 어머님이 본처이시긴 하나, 정씨 부인도 초국공의 정실부인인데 그런 언행은 너무 무례한 것 같소. 주아, 너무 상심하지 마시오. 초국공의 말씀이 틀린 게 아니었소. 남궁가의 큰아가씨는 확실히 교육이 필요한 것 같군.”

소천야의 품에 안긴 남궁주의 아리따운 얼굴에 만족의 미소가 살짝 번졌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완곡하면서도 억울함이 느껴지는 어투로 말했다.

“언니는 그 어릴 때 집을 떠난 일에 대해 우리가 미안해해야 한다는 걸 매우 잘 알고 있어요. 언니가 마음이 상한 것도 당연한 일이지요.”

남궁묵은 더는 견딜 수 없었다. 남궁주가 소천야를 어떻게 유혹하든 그건 저와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었지만, 자신을 이용하는 건 참을 수가 없었다.

물론 남궁묵은 만나기도 전에 자신에게 큰 폐를 끼친 소천야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금릉성에 돌아간 후 자신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그와 자주 마주치는 것이 결코 달가울 리는 없었다. 그러니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이를 반드시 해명해야 했고, 그것이 통하지 않아도 가만히 당하고 있진 않을 생각이었다.

“흠!”

남궁묵이 작게 헛기침하자, 며칠 전 습격당했던 일 때문에 예민해져 있던 소천야가 바짝 긴장해서 날카롭게 소리쳤다.

“누구냐!”

남궁묵이 홀연히 일어나 등 뒤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며 걸어 나왔다.

“접니다.”

남궁주가 다소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왜 여기에 있는 거예요? 전하를 미행하신 건가요?”

남궁묵이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내가 먼저 이곳에 와 있었다.”

남궁가 저택의 화원은 크지 않았다. 그녀 뒤로는 걸어갈 수 있는 길이 없었고, 화원 밖으로 나가려면 두 사람의 앞을 지나가야 했다. 대체 남궁주가 가진 아둔함의 끝은 어디란 말인가. 남궁묵은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한순간에 난처한 상황이 된 소천야는 조금 전 자신이 남궁주와 이곳에서 무엇을 했는지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상황이 이리됐으니, 남궁 아가씨는 그만 나오시게.”

“자고 있다가 방금 일어나 들은 겁니다.”

그리곤 남궁묵은 아무 말 없이 두 사람을 흘끗 쳐다봤다. 자신이 무엇을 들었는지는 그냥 조용히 저 달빛 속에 묻어두고 싶었다.

소천야는 머리가 아파왔다. 그 순간, 남궁묵에 대한 인상은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세상에 자신의 밀회를 목도한 사람을 반길 사람은 없었다. 더군다나 남궁묵은 분명 자신과 남궁주의 대화를 들었을 것이 틀림없었다.

반면, 그와 달리 남궁주는 생각이 깊지 않았다. 그저 철없이 남궁묵이 자신의 소천야를 빼앗으려 한다고만 생각했다. 남궁묵이 아둔하지 않다면 황장손과 위군맥 중 누구를 택할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언니, 저도 알아요. 예전에 있었던 일에 대해 우리가 언니에게 미안해해야 한다는 걸요. 하지만……, 하지만 저랑 전하는 정말 사랑하는 사이여요. 언니에게 전하를 양보할 순 없어요.”

남궁묵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소천야는 좀 의아하다는 듯 남색 옷을 입고 꽃밭 가장자리에 서 있는 남궁묵을 바라봤다. 설마 지금 남궁주가 생각하는 건…….

남궁주는 급기야 눈시울을 붉힌 채 애걸복걸하기 시작했다.

“언니, 제발 저 좀 도와주세요. 주아는 황장손 전하 없이는 안 되어요.”

“…….”

“주아…….”

소천야가 나지막이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나랑 남궁 가문 큰아가씨는 오늘 처음 봤소. 당신이 오해하는 것이오.”

“하지만…….”

남궁주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언니는 줄곧 위 세자와 혼인하고 싶어 하지 않았잖아요. 그리고 오늘 이렇게 전하를 미행했으니……. 저도 전하가 준수하고 범상치 않은 풍모를 가졌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언니에겐 이미 위 세자가 있지 않나요?”

왜 멋대로 생각하고 말하는 것인지 기가 찰 노릇이었다. 남궁묵은 곧 깊게 한숨을 내뱉고선 미소를 띠며 말했다.

“나도 말 좀 해도 될까?”

남궁주가 눈을 깜빡이며 가여운 목소리로 말했다.

“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