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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66화

<66화 - 들어올 땐 마음대로였지만 나갈 땐 아니란다(2)>

죽겠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이러다가 죽는 거 아닐까.

나는 망망대해의 중심에서 다리에 족쇄가 채워진 채 독방에 갇혀 있다.

바다 구경은 물론이거니와 화장실을 가기조차 여의치 않았다.

음식은 하루에 한 번.

그것도 삶을 유지시키기 위해 주는 밥이라기보다는 먹다가 죽길 바라고 주는 밥 같았다.

'죽으면 어쩔 수 없지.'

그런 메시지가 허여멀건 색의 밍밍한 스튜와 이빨이 아플 정도의 딱딱한 빵에서 노골적으로 느껴졌다.

미치겠네.

태어나 처음으로 탄 배의 추억이 이따위 취급으로 점철될 줄이야.

"저기요! 이봐!"

나는 다시 문을 쿵쿵하고 두드렸다.

어찌나 단단한지 소드 마스터인 내가 두드려도 미동조차 하지 않는 철문이었다.

"이봐! 난 억울하다니까! 나는 죄를 저지른 게 없대도!"

그런 식으로 몇 차례 고함을 질러 보았지만 바깥에선 어떤 대꾸도 돌아오지 않았다.

하아.

며칠 전 복도에서 병사들이 '사상 최강의 흉악범'이니 '사기 전과도 있는데 그건 가벼운 잡범 수준이라 언급도 안 된....' 등의 이야기를 했었지.

혹시나 했는데 내 이야기가 맞았던 모양이다.

아니면 이렇게 대꾸 한 번도 안 해 주고 없는 셈 칠 리가 없으니까.

하아.

나는 방구석에 놓여 있는 두 자루의 검을 바라보았다.

한 자루 헬 파이어.

또 다른 한 자루는 룸펜 하운드가 쓰던 마검.

영감님이 이야기했던 것 때문인지 나 역시도 그 검을 어느 순간부터 잿더미의 검이라 부르고 있었다.

두 검 모두 다 어찌나 자의식이 강하던지.

나와 떨어지는 순간 배를 폭발시킬 정도로 진동하고 불꽃을 피워 대니, 결국 봉인당한 채 이렇게 던져 놓은 거지.

이 검들을 이용한다면 탈출은 할 수 있겠지만....

나는 약간의 울렁거리는 멀미 탓에 벽에 등을 대고 누웠다.

이 배멀미야말로 내가 이곳을 탈출하길 포기한 주된 원인이다.

망망대해에서 배를 다 박살 내고 탈출해 봤자 바다잖아.

어딜 어떻게 갈 수 있겠어.

하아.

그래도 다행인 게 하나 있다.

간수들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오늘내일 중에는 뇌옥요새 트팔로에 도착할 것 같거든.

빌어먹을 탈리오 영감.

내가 진짜 여기서 나가면 꼭 찾아가 죽여 버릴 테다.

그 고집스러운 영감이 왜 아카식 레코드에 대한 정보도 묻지를 않고 순순히 트팔로에 보내 주나 했더니....

제이슨 씨나 글레이시아 씨, 많이 놀란 모양이던데.

앨리스는 뭐하고 있으려나. 호위대상이 잡혀가는 마당에....

체칠리 녀석, 좋은 기회를 잡았으니 마법 수련은 잘하고 있으려나.

그렇게 나는 탈리오 영감에 대한 복수와 다른 사람들의 생각들을 곱씹으며 겨우겨우 배가 육지에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죽일 수 있었다.

* * *

신입 간수 솔트는 어젯밤부터 내내 인생을 잘못 산 것이 아닐까 수백 번을 되돌아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자기가 죄를 지은 게 아니라면 저런 흉악범이 자신의 담당으로 배정될 리 없었으니까.

"서, 선배. 진짜로 제가 들어가야 하는 게 맞나요?"

"또, 또 이상한 소리 하네. 그럼 내가 들어가랴?"

"하지만...."

"원래 흉악범이 들어오면 막내가 맞이하는 게 관례라니까. 너는 운 좋은 줄 알어! 이런 어마어마한 흉악범이 들어오는 게 자주 있는 일인 줄 알아?!"

"그냥 흉악범이 아니잖아요! 무려 200명을 죽인 연쇄살인마라면서요! 더군다나 시체를 난도질까지 했다는...."

솔트의 말에 그의 선배 간수도 끔찍하다는 듯이 양미간을 찌푸렸다.

확실히 이번 흉악범은 자신이 10년 동안 근무하면서 처음 보는 수준의 악인이었다.

더군다나 손만 대는 것으로 미쳐 버리는 마검까지 갖고 있다지 않나.

손을 대는 것만으로 화상을 입거나 침을 흘리고 오줌을 지려 버리니 결국 무기를 압수조차 하지 못한 채 수송하게 되었다.

"호, 혹시 호송 도중에 미쳐 날뛰면 어쩌죠?"

"그래서 기사 두 분이 함께하잖아. 무려 소드 익스퍼트 최상급의 기사분들이니 제깟 놈이 아무리 강해도 뭘 할 수 있겠어. 민간인들만 습격했던 저열한 놈이야. 약하게 보이면 잡아먹힌다. 강하게 나가라고."

선배의 당부에 솔트는 심호흡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 소드 익스퍼트 급의 기사님들이 날 지켜 준다고.'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안심이 되는 것도 같았다.

마침 그 두 명의 기사가 뚜벅거리는 소리와 함께 솔트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풀 플레이트 메일을 갖춰 입고 절도 있는 동작으로 발을 맞춰 걸어오는 두 명의 기사.

190cm는 훌쩍 넘을 듯한 키에 저 무거운 철퇴와 검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힘과, 헬름 너머로 번뜩이는 카리스마 넘치는 눈빛까지.

그 모습을 바라보며 솔트는 두려움이 점차 사라지는 걸 느꼈다.

기사들도 그런 기색을 알았기에 웃으며 솔트를 안심시켰다.

"솔트! 너도 이제 흉악범을 만나 보겠구나!"

"크크, 흉악범이라고 해서 대단할 것 같지? 이미 구속구에 묶인 순간 끝이야. 제 몸 안의 마나를 쓰지 못 하는 놈들이니 소드 마스터나 6써클의 대마법사가 와도 할 수 있는 게 없다니까?"

"그, 그렇습니까?"

"그럼. 게다가 이번에 잡혀 온 흉악범은 민간인들만 노린 지독한 놈이라지? 내 경험상 그런 놈들이야말로 정말 보잘것없는 녀석들이야."

"그래. 마검을 두 개나 들고 다닌다고 했지? 보나마나 능력은 없는데 마검에 휘둘리는 놈이겠지. 그런 놈들, 마검만 봉인되어 있으면 오히려 자네 같은 병사보다 약하다니까?"

솔트는 기사들의 말에 묘한 자신감이 차오르는 걸 느꼈다.

"정말입니까?"

"정말이래도. 너 녀석의 외모 봤어? 진짜 형편없어. 보아하니 공부나 하던 녀석마냥 비리비리하다니까. 아마 그만큼 연쇄살인을 할 수 있었던 것도 마검의 힘이겠지."

"얼굴도 뭔가 음침해서 모략이나 잘 짜게 생긴 녀석이었잖아."

"그, 그렇죠."

기사 중 한 명이 걱정하지 말라는 듯 솔트의 등을 툭 두드리더니 장난끼 섞인 미소를 지었다.

"정 의심 간다면 우리가 솔트 녀석 첫 흉악범 다루는 걸 도와줄 수도 있지."

"도와주신다고요? 뭘 어떻게요?"

"크흐, 나중에 잘 보라고."

솔트는 자신의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두 기사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뭘 하려는 건진 몰라도 든든하기 그지없는 뒷모습이었다.

그들의 넉살 덕분에 조금 용기가 생긴 솔트는 이내 흉악범이 단독으로 수감된 격실의 문을 열었다.

"나, 나와!"

물론 용기백배한 것이 아니라 조금만 생긴 탓에 발음을 조금 씹어 버린 건 어쩔 수 없었지만.

자신의 부름에 절그럭거리는 소리를 내며 일어섰다.

"라워드... 고르뎀! 당신은 이제 뇌옥요새 트팔로로 이감된다! 모든 재판은 이곳에서 이루어지며 최종 재판이 끝날 때까지 모든 생활은 우리 간수들의 지시를 따른다! 행여 명령에 불응할 경우 네 목숨은 보장할 수 없다!"

솔트가 규정에 따라 이감 규정을 고지하는 동안 기사들은 눈빛을 교환하며 슬금슬금 흉악범의 뒤로 움직였다.

그들이 근무하는 동안 수많은 흉악범들이 트팔로에 수감되었다.

그들은 사상 최악의 감옥이라는 이곳에서도 제멋대로 굴며 사고를 치곤 했다.

감옥을 제대로 운영하기 위해선 이렇게 처음 들어온 때부터 흉악범의 기를 죽여야 했다.

"어쭈, 간수가 이야기하는데 그냥 멀뚱멀뚱 서 있단 말이야? 아주 배가 불렀지, 꿇어, 이 새...X...어?"

평소처럼 흉악범의 뒤에서 정강이를 걷어차려던 기사의 발이 허공을 갈랐다.

누구도 그곳에서 흉악범의 다리가 움직인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마치 기사가 처음부터 허공을 노리고 발길질을 한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무, 무슨?"

흉악범은 별다른 말없이 기사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 눈빛이 마치 기사의 멍청함을 비웃는 것만 같았다.

"너 이 새X 숨겨 둔 한 수가 있단 말이지? 오냐, 이곳에서 자존심을 세운다는 게 얼마나 무의미한지 보여 주마!"

그에 분노한 기사가 빨갛게 얼굴이 달아올라 허리춤에 매여 있던 곤봉을 꺼내 휘둘렀다.

휙, 하는 소리와 함께 어마어마한 속도로 곤봉이 죄수의 어깨를 내리쳤다.

아니, 치려고 했다.

이번에도 죄수는 그저 몸을 슬쩍 트는 것만으로 곤봉을 피해 냈다.

"아니?!"

그 움직임이 어찌나 교묘했는지, 기사가 제힘을 제대로 이기지 못하고 앞으로 기우뚱 균형을 잃었다.

"이놈이!"

다른 기사가 나선 건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저 정도의 실력이라면 무방비해진 기사를 단숨에 죽일 수 있었다.

급히 곤봉으로 흉악범의 허리를 노렸고, 녀석은 슬쩍 몸을 움직여 허리춤에 매인 마검으로 곤봉을 막았다.

동시에 작은 배 안에서 화염이 솟구쳤다.

"으억?!"

"곤봉을 놔!"

기사의 손에서 떨어진 곤봉은 채 바닥에 닿기도 전 어마어마한 불길에 휩싸여 잿더미로 사라졌다.

불꽃이 곤봉을 삼키는 게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저 불길이 배를 집어삼켰을지 모른다.

그때야 두 기사와 병사는 깨달았다.

눈앞의 흉악범은 자신들이 한 번도 만나 본 적 없는 무시무시한 존재란 것을.

"용무가 더 남았나요?"

그는 방금 일어난 일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솔트를 바라보며 물었고, 솔트는 그 자리에서 겁에 질려 졸도해 버렸다.

* * *

쿵, 소리와 함께 병사가 뒤로 넘어갔다.

지병이라도 있으신가?

나는 갑옷으로 무장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헬멧 너머에서 파리하게 질린 안색이 느껴졌다.

끙, 너무 겁을 줘 버렸나.

뒤에서 갑자기 선이 번뜩여서 흐름대로 몸을 움직였더니 이렇게 되어 버렸다.

"하라는 대로 할 테니 가급적이면 내 몸에 손을 안 댔으면 좋겠어요."

"우, 우리가 네놈의 명령을 듣는 존재인 줄 아느냐!"

"그게 아니라면 두 분을 다 쓰러뜨리는 수밖에 없겠네요. 그럼 새 사람이 올까요?"

내 말에 두 기사가 움찔거리며 나에게서 거리를 벌리더니 주저하면서 말했다.

"따라와라."

나는 기사 한 명을 따라 방을 나서 걷기 시작했다.

다른 한 명은 쪽팔리니 뭐니 그런 이야기를 하며 병사를 수습하느라 격실에 남았다.

트팔로에 도착하자마자 작은 촌극을 겪으며 나는 묘한 느낌을 받았다.

몸이 무척이나 가볍고 예민했다.

내가 선을 통해 상대방의 움직임을 예측하곤 했지만 이 정도로, 그러니까 시야 바깥에서 날아오는 공격을 피할 정도는 아니었다.

더군다나 내가 방을 나설 때 기사가 중얼거리던 소리.

귀가 밝아졌나?

평소라면 듣지 못할 소리가 들렸다.

소리뿐만이 아니다.

느껴졌다.

이 트팔로라는 요새, 섬이 얼마나 흉악스러운지.

섬 곳곳에 대포가 설치되어 있었고, 요새 중간중간 난 구멍을 통해 궁사들이 안전하게 활을 쏘게끔 배치되어 있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지금 배가 정박한 부두를 빼곤 깎아내린 듯한 암벽과 해수면의 암초들이 배의 접근을 불허했다.

섬 전체를 둘러싼 방어막에 수많은 마법 장치들.

섬 전체를 오가는 병력들과 죄수들까지.

그 모든 정보가 저릿거리는 피부를 통해 들어와 머릿속에서 그림을 그린 것처럼 정리되었다.

그중에서 가장 강한 기운은 바로 저기.

지금 우리에게 다가오는 남자에게서 느껴지고 있었다.

파란 코트의 정복이 무척이나 잘 어울릴 정도로 매력적인 청년이었다.

은발을 뒤로 가지런히 넘겼으며, 독수리처럼 날카로운 눈매가 내 전신을 훑었다.

허리춤엔 작은 소총과 함께 채찍이 매달려 있었고, 무릎까지 올라온 굽 있는 가죽 부츠가 또각거리는 소리를 냈다.

"이자가 라워드 고르뎀인가."

"간수장님? 간수장님이 어쩐 일로 여기까지..."

이자가 트팔로의 총 책임자인 간수장 마르쿠제구나.

들리는 소문엔 소드 마스터 초급이라고 들었는데 그 소문은 잘못된 것 같다.

소드 마스터 중급 정도는 되어 보이는걸.

"아무래도 죄질이 나쁜 흉악범이니만큼 직접 왔네."

"알겠습니다!"

나를 인도하던 기사는 마치 잘됐다는 듯 냉큼 날 인계하곤 후다닥 뛰어 배로 돌아갔다.

그는 기사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아무 말 없이 날 바라보았다.

아하하, 제발. 제발.

"라워드 고르뎀."

"네."

"...탈리오 님에게 이야기는 전해 들었다."

예스! 그렇지!

이제야 영감님이랑 연결된 사람이 나오는구나!

"맞습니다!"

나는 환희에 차서 외쳤다.

그럴 수밖에 없지.

배 안에서 무려 2주 동안이나 흉악범이란 오명을 쓰고 쓰레기 취급을 받으며 왔는데!

이제 드디어 이 역겨운 흉악범 소리를 집어던지고!

"그렇게 감옥을 관광하고 싶어 하는 미치광이가 있다더군. 그것도 흉악범이 되어 흉악범 수용소를 들어가고 싶어 한단 말이지."

미치광이가 될 수 있다!

미치광이....

와아....

제기랄.

탈리오 영감 천벌 받아 죽는 법 삽니다.

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67화

<67화 - 들어올 땐 마음대로였지만 나갈 땐 아니란다(3)>

간수장의 사무실은 오로지 실무적인 기능만을 위한 곳 같았다.

집무용 넓은 책상과 의자.

그리고 옷걸이.

그 외엔 잠깐 몸을 뉘일 수 있는 침대는커녕 소파조차 보이지 않았다.

간수장은 나를 이곳으로 데려와 개인 면담을 시작했다.

"그래. 감옥 구경을 하겠다고?"

"바바라 드 팔세우스를 찾아왔습니다."

"맞군, 구경."

마르쿠제는 무표정한 얼굴로 자리에 앉아 날 바라보았다.

내 말을 듣긴 한 거지?

"저기 그, 제가 바바라를...."

"탈리오 님은."

어랍쇼, 이번에는 아예 말을 끊어?

"이 요새를 감싸는 마법을 만들어 낸 공신이시지. 보호마법뿐만이 아니라 이 공간의 마법 중 탈리오 님의 손길이 닿지 않은 게 없지."

나는 배에서 내렸을 무렵 느꼈던 거대한 보호마법을 떠올렸다.

안 그래도 익숙한 느낌이 들어 탈리오 영감의 솜씨인가 생각했었는데 맞았구나.

"이 감옥이 어느 정도의 크기인지 아는가?"

"네?"

"면적 21만 평. 지상 12층, 지하 4층. 이 정도 공간을 빠짐없이 감쌀 만한 보호 마법은 탈리오 님 외엔 불가능하고, 탈리오 님조차 이 마법을 1년 이상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아, 네...."

"그렇기에 탈리오 님은 1년 중 한 달 이상을 이곳에서 마법 구현을 위해 수고해 주신다."

그건 정말 고생스럽겠네.

그런데 그 이야기를 갑자기 왜 하는 거지?

마르쿠제는 계속 표정 변화 없이 무덤덤하게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 과정에서 날 빤히 노려보는 눈빛이 무척 매서웠다.

"매년 긴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노력임에도 불구하고 탈리오 님이 그렇게 수고해 주시는 까닭은 죄지은 놈들을 이 세상에서 격리시키는 것이 옳다는 정의로운 신념 때문이시지."

그 영감님이 그런 이유로 움직이신다고?

설마.

라그나에서 돈을 좀 두둑하게 준 거 아닐까.

"그런데 바로 그 탈리오 님이 네 이야기를 하더군. 네가 감옥에서 누군가를 탈출시키려 한다고."

처음으로 마르쿠제의 무표정에 금이 갔다.

"도대체 어떤 간악한 종자가 탈리오 님의 숭고한 정의를 균열 내고 한가롭게 감옥 구경을 오겠다 했는지 보고 싶었다."

아.

마치 깨달음을 얻었을 때처럼 머릿속에서 수많은 사건들의 정보가 교차되기 시작했다.

범인이 너였구나!

탈리오 영감이 아니라, 네가 날 흉악범으로 만들어 데려온 거였어!

아냐아냐, 섣불리 단정하지 말자.

혹시 모르잖아.

나는 확인차 이를 악물고 물었다.

"그래서 멀쩡한 사람을 흉악범으로 만들어 데려왔습니까?"

"네가 원하는 게 그거 아니었나? 바바라를 만나겠다고."

"그게 도대체 흉악범이랑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두 가지의 이유 때문이지. 첫째. 그녀는 흉악범들이 갇혀 있는 지하 4층에 있다. 네가 거기에 갈 방법은 흉악범이 되는 것밖에 없지. 다른 한 가지 이유는 네놈이 하고자 하는 행위가 탈옥이라는 흉악범죄이기 때문이다. 선후를 잠깐 뒤바꾼 것뿐이지."

"아니... 내가 바바라를 데려가려는 이유는 제국과 싸우기 위해...."

"어느 쪽이든."

그의 손바닥이 탁, 하고 책상 위를 두드렸다.

"감옥 설립 이후 단 한 번도 이루어지지 않은 탈옥이 성립한다는 건 바뀌지 않지. 당연히 흉악범으로 취급하는 게 맞지 않나?"

안 되겠다.

이 녀석,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곱게 미친놈이 틀림없다.

자세히 보니 무표정해 보이는 눈동자에서 살짝 광기가 느껴지는 것도 같고.

이럴 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 게 최고다.

어차피 이 녀석이 이렇게 이야기하는 건 결국 투정에 불과한 거니까.

탈리오 영감이 녀석에게 바바라를 꺼내게 해 달라고 부탁했고, 영감을 존경? 광신? 어쨌거나 추종하는 녀석은 그 부탁을 들어주기로 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냥 들어주기엔 자존심도 상하니까 이렇게 일장 연설을 늘어놓는 거겠지.

아니나 다를까.

내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마르쿠제는 더 이야기하지 않고 한참을 날 노려보다 고개를 돌렸다.

"부하들이 널 지하 4층으로 안내할 것이다. 거기에 바바라가 있다."

"어디에 있죠?"

"4층은 죄수들을 수감하는 별도의 격실이 없다. 죄수들은 그곳에서 알아서 살아남는다. 그렇게 설계되었으니."

알아서 살아남는다니.

도대체 이 감옥의 구조는 어떻게 된 것이람.

"그곳에서 바바라를 찾아라. 기한은 이틀. 이틀이 지나면 탈리오 님이 마법진 점검을 위해 트팔로를 방문할 예정이다. 그때 탈리오 님이 너희를 바깥으로 보내 주실 것이다."

"만약에 제가 이틀 만에 바바라를 찾지 못하면 어떡하죠?"

내 질문에 마르쿠제는 코웃음 치며 대답했다.

"둘 중 하나겠지. 정말로 흉악범이 되어 트팔로 지하 4층을 배회하거나, 다시는 친구를 만나지 못한 채 바깥세상으로 쫓겨나거나."

녀석의 이야기를 들어 보니 정말로 이틀 이상의 시간을 보내는 건 무리인 듯했다.

"입구 옆에 네놈의 죄수복이 있다. 마검이라고 했나? 무기는 그 옆에 대충 세워 두도록. 모든 일이 끝나는 이틀 뒤, 이것들을 되돌려 주지."

"혹시라도 검을 잡거나 하시면 안 됩니다."

"저런 흉악한 무기에 눈이 멀 정도로 어리석지 않다. 네놈과 달리 말이지."

뭐, 그렇다면 다행이긴 한데.

나는 어쩐지 찝찝한 마음을 뒤로한 채 죄수복으로 갈아입었다.

* * *

철컹.

병사 세 명이 달려들어 납작한 수레바퀴를 돌리자 묵직한 소리와 함께 두터운 철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여기가 앞으로 네놈이 지낼 지하 4층이다."

기사가 계단 위에서 날 밀치듯 떠밀었다.

족쇄의 무게 때문에 겨우겨우 균형을 잡은 후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곳은 마치 개미굴같이 생긴 공간이었다.

계단을 통해 내려온 이곳은 중앙의 광장이었다.

얼핏 보더라도 마을 하나 정도는 될 법한 넓이엔 죄수복을 입은 사람들이 무질서하게 늘어져 있었다.

"식량 배급은 하루에 두 번. 이곳에서 이루어진다. 제멋대로 돌아다니다 굶어 죽는 건 네 사정이니 알아서 처신하도록."

돌아다닌단 말은 아마 저기 보이는 저 통로들을 이야기하는 거겠지.

광장 곳곳에는 크고 작은 입구가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 길을 따라서 들락날락했다.

마르쿠제가 바바라를 이틀 안에 찾으란 것도 이 뜻이겠군.

이 안에서 정말로 살아남으란 건가.

"그럼 이만."

내가 주변을 둘러보는 동안 날 인도한 기사가 문 바깥으로 급히 달려갔다.

어쩐지 조금 겁먹은 듯한 기색이었다.

설마 나한테 겁을 먹은 건가 싶었는데 이내 그것이 착각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사방의 범죄자들이 새로운 장난감을 받은 듯한 표정으로 다가오고 있었으니까.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철문이 닫혔고 곧바로 철커덩하는 소리가 났다.

"낄낄."

"신입이네."

"캬, 곱게 생겼다."

그와 동시에 사방의 범죄자들이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지하에서 얼마나 썩었던 건지, 그들의 입과 몸에서 퀴퀴한 냄새가 훅, 하고 몰려왔다.

"신입은 뭔 죄를 지었나?"

"낄낄, 여기까지 올 정도면 한 스무 명 정도 죽인 모양이지?"

"아냐, 또 모르지. 이렇게 곱상하게 생긴 녀석이라면 다른 쪽의 범죄를 저질렀을지도 모르지."

범죄자 중 한 명이 저질스러운 손동작을 하며 헤벌쭉 웃으며 내 몸을 아래위로 불쾌하게 훑어 댔다.

일단 한 번만 참는다.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말이죠."

"올~ 신입! 묻고 싶은 게 다 있구만."

"그래! 질문, 좋다, 질문! 크하하."

나는 범죄자들의 비웃음 소리를 넘기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바바라 드 팔세우스. 팔세우스 가문의 여식이 여기 4층에 있다고 들었는데."

"크흐흐흐흐, 봐, 봐. 이 녀석, 들어오자마자 여자부터 찾는다고! 대박 아냐? 인마, 너도 내 과구나!"

"팔팔해! 젊어!"

범죄자들이 박장대소하며 소음을 만들었다.

어느덧 내 주변으로 스무 명 남짓한 인파가 몰려 있었고, 그들 중에선 노골적으로 불손한 눈빛을 하는 놈들도 있었다.

"이봐, 신입. 그런 여자들 말고 나랑 좀 즐기지 그래?"

그중 가장 혀를 저질스럽게 놀리던 놈이 내 어깨에 팔을 얹으려 했다.

"어?"

나는 녀석의 팔을 잡아끌어 그대로 바닥에 집어 던졌다.

쿵!

거대한 소리와 함께 녀석이 바닥에 메다 꽂혔다.

잠시 움찔거리며 경련하던 녀석이 이내 축 늘어졌다.

죽었는지 기절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알 바야.

이곳에 있을 정도면 어차피 사회에서 흉악한 범죄를 저질러 들어왔을 테고 무엇보다 나한테 그런 불쾌한 짓거리를 해 댔겠다.

죽어도 싸다.

"무, 무슨?"

"움직임이 보이지 않았어...!"

단 한 번의 움직임이었으나 잔챙이 같은 놈들이 이리저리 떨어져 나간다.

대신 광장 구석에서 삼삼오오 몰려 있던 덩치들이 새롭게 내 곁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곱게 보였더니 한가락 하는 놈이었군."

"주먹을 쓰는 모양이지? 힘을 별로 준 것 같지 않은데 순식간에 넘겨 버리는군."

여기 있는 잔챙이들과 달리 저 녀석들은 좀 다른 것 같군.

"사람을 찾습니다. 바바라 드 팔세우스. 팔세우스 가문의 여식으로 제국을 테러해 잡혀 들어왔다더군요."

"바바라, 바바라. 아. 들어 본 적 있지. 그 아가씨 말이군."

그들 중 가장 체구가 큰 녀석이 입을 열었다.

상체 전체가 문신으로 가득 찬 빡빡이로, 2m는 훌쩍 넘을 듯한 체구에 온몸은 마치 광폭화 주술이라도 걸린 듯 터질 것 같은 근육이 빵빵하게 부풀어 있었다.

"알려 줄 수 있나요?"

내 질문에 녀석이 송곳니를 드러내며 씩 하고 미소를 지었다.

"알려 주는 거야... 어렵지 않지!"

녀석이 시야에서 일순 사라지더니 휙, 하고 내게 달려와 양팔로 내 몸을 꽉 끌어안았다.

"크흐흐, 네놈이 상실한 겁대가리를 먼저 찾아 준 후에 친절히 안아다 데려다주지!"

"케인의 베어 허그다! 저기에 당하면 뼈도 못 추린다고!"

"저 새X 죽여 버려!"

"크흐흐, 겁 없이 설치던 놈들이 저거에 수도 없이 골로 갔지."

빡빡이가 날 끌어안은 순간 사방에서 죄수들의 고함 소리가 터져 나왔다.

지하 공동이라서 그런지 벽과 벽을 타고 울려 퍼지는 메아리가 이내 광장을 가득 채워 시끄러운 소음을 만들었다.

그 사이사이 들리는 이야기를 종합해 보자면 아무래도 이 녀석이 지하 4층의 문지기쯤 되나 보군.

그렇다는 건 이 녀석만 제압하면 더 시끄러운 일은 없다는 소리겠지?

"저기요, 덩치 씨."

"으, 으으응?"

빡빡이 녀석이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팔에 힘을 주고 있는 모양인데 내가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아서 당황한 모양이었다.

"마지막으로 물어보겠습니다. 바바라를 알고 있다는 거, 진짜입니까?"

"끄응, 끄으으으으...."

"아닌 모양이네. 시간 낭비했군."

주변의 소음이 서서히 가라앉는다.

금방이라도 내가 이 녀석의 힘에 바스라질 것이라 여겼던 사람도.

나를 죽이라고 성화였던 사람도.

그리고 낄낄거리며 나를 바라보던 수많은 녀석들이 닥치기 시작했다.

"어, 어떻게?!"

답은 하나다.

너희들은 마나를 못 쓰고, 나는 마나를 쓸 수 있으니까.

이곳에 내려왔을 때부터 혹시나 하는 생각에 <신체활용비서>에서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마나를 흘려보내고 있었거든.

그러니 단순히 힘을 버티는 것뿐만이 아니라 이런 것도 할 수 있게 되는 거지.

나는 마나를 흘려보낸 팔을 가볍게 떨쳤다.

"어?"

그러자 방금까지 힘을 주고 있었던 게 거짓말인 것처럼 케인의 양팔이 좌우로 활짝 펼쳐졌다.

케인이란 놈의 눈이 당황으로 물든 채 휘둥그레졌고, 나는 녀석의 명치께를 향해 가볍게 주먹을 휘둘렀다.

퉁, 하고 마치 가죽 북을 치는 듯한 소리와 함께 녀석이 그대로 몇 미터를 훅, 하고 날아갔다.

녀석은 우당탕거리는 소리와 함께 몇 미터를 날아갔고, 이내 광장은 완전히 적막해졌다.

자.

이 정도로 실력 행사를 했으니 이제 진짜배기가 나올 때 아닌가?

그러니까 다시 물어보자.

"바바라 드 팔세우스. 나는 그녀를 찾아왔어. 그녀를 아는 사람이 없다면 지금이라도 찾아서 데려와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들도 저기 날아간 덩치 꼴을 경험할 테니까 말이야."

주변의 분위기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일촉즉발의 상황.

"내가 알고 있어."

그 긴장감을 깨뜨린 건 이곳에서 누구보다도 작고 앳된 목소리였다.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시선을 돌리니 그곳엔 아직 10살 정도밖에 되지 않은 소년이 서 있었다.

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68화

<68화 - 들어올 땐 마음대로였지만 나갈 땐 아니란다(4)>

검은 머리에 검은 눈.

소년은 전형적인 동방 엔틸 제국 귀족의 특징을 갖고 있었다.

그런 귀족 혈통의 아이가 왜 이 감옥에 갇혀 있는 걸까.

더군다나 아까 죄수들.

소년이 나타나자마자 침을 퉤 뱉거나 겁에 질려서 사방으로 흩어졌지.

그렇다는 건 이 소년이나 소년의 뒤에 있는 사람이 지하 4층에서 제법 위세를 부리는 모양이다.

그런 소년이 어떻게 바바라를 안다는 걸까.

그러나 소년은 처음 만났을 때를 제외하곤 단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은 채 빠른 걸음으로 개미굴을 앞장섰다.

통로는 정말로 복잡했다.

사람 하나가 겨우 지나갈 법한 좁은 길이 사방에서 교차된다.

어떤 길은 오르막이고 어떤 길은 내리막이라 과연 내가 지하 4층을 걷고 있는지, 아니면 3층이나 5층 어딘가를 걷고 있는지 헷갈렸다.

더구나 감옥의 빛이 부족했다.

광장에는 조명이 달려 있었지만 굴에는 조명이 부족했다.

통로 너머로 들어오는 희미한 빛을 의지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 안에서 소년은 익숙하다는 듯 폴짝폴짝 걸음을 옮겼으니 이곳의 삶이 그리 짧지 않은 듯했다.

어쩌면 여기서 태어났을지도 모르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쯤 통로 바깥에서 빛이 새어 들어왔다.

"다 온 건가?"

소년은 대답 대신 속도를 올려 먼저 쪼르르 구멍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 뒤를 따라 도착한 곳은 조금 큰 크기의 방이었다.

어설프게나마 진흙더미를 뭉쳐 만든 침대나 가구들이 이곳저곳에 있어 아까 그 공동보다는 조금 더 사람 사는 느낌이 나는 곳이었다.

무엇보다 그곳에는 그녀가 있었다.

"누가 날 찾았다고 했...는...."

그녀의 모습은 하나도 변한 것이 없었다.

155 정도의 아담한 키에 약간 푸석푸석해졌지만 여전히 고급스럽게 웨이브진 금발.

6년이 지난 탓일까, 아니면 그 기간 동안 고생을 한 탓일까.

기억 속 앳되었던 소녀는 어느덧 한 명의 멋진 여성으로 변모해 있었다.

학창시절보다 날카로워진 눈매가 잔뜩 경계심을 품고 날 노려보다가 점차 휘둥그레진다.

이내 그녀의 노란색 눈망울이 점차 그렁그렁해지며 눈물이 차오르는 게 선명히 보였다.

"설마... 라워드? 라워드 네가 맞아?"

내가 그녀를 알아본 것처럼 그녀 역시 날 한눈에 알아본 것 같았다.

"바바라."

그리고 내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을 때, 그녀는 한달음에 달려와 내게로 몸을 던져 안겼다.

"라워드!"

"오래 기다리게 했네. 이게 뭐야. 감옥에 있으니까 찾으러 오는 것도 힘들었잖아."

바바라가 목을 꽉 끌어안았고 나 역시 그녀를 마주 안아 주었다.

아까 감옥의 죄수들과 달리 향긋한 내음이 나는 것만 같았다.

우리는 한동안 그렇게 있다가 손만 잡은 채 천천히 서로 떨어졌다. 

오랜만에 만난 만큼 해야 할 이야기도 많이 쌓여 있으니 말이야.

"언제 나온 거야?"

"도서관이랑 학교에서 나온 건 1년 전이야. 5년 만에 나온다고 했잖아. 너야말로 어떻게 된 거야. 테러를 했다고?"

바바라는 내 말에 생긋 웃으며 답했다.

"말했잖아. 5년 뒤 나왔을 땐 네가 당당할 수 있는 세계를 만들어 두겠다고."

하하.

바바라도 참 대책 없구나.

혹시 그럴지도 모른단 생각을 하긴 했지만 정말로 나 때문에 테러를 한 거였을 줄이야.

어쩐지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왜 웃냐."

"웃기잖아. 넌 안 그래? 그 얌전한 아가씨가 나 때문에 제국 귀족 가문에다가 폭탄 테러까지 했다니까 말이야."

"뭐, 꼭 그런 이유 때문만 있는 건 아냐. 데온 녀석에겐 나도 원한이 있었거든."

"무슨 일 있었어?"

"그냥, 좀."

그녀는 별로 대답하고 싶지 않다는 듯 어색하게 웃으며 시선을 피하며 말을 돌렸다.

"그러는 너는. 여기에 왜 들어온 거야? 다른 곳도 아니고 지하 4층에... 설마, 너 복수에 성공한 거야?"

그래, 이런 이야기가 중요한 게 아니지.

지금 중요한 건 바바라를 이틀이 지나기 전에 찾았다는 거다.

"바바라, 나가자."

"응?"

"나는 널 여기서 꺼내려고 왔어. 지금 난 크라피 가문, 그리고 제국과 큰 싸움을 준비하는 중이거든. 네 힘이 필요해."

"그게 무슨...."

바바라가 날 빤히 바라본다.

"이야기하면 정말 길어. 천천히 이야기해 줄게. 이틀 뒤, 탈리오 영감이라고 뇌옥요새의 마법진을 보수하러 대마법사 한 명이 올 거야. 그 사람이 우리를 탈출시켜 줘."

"우리가... 나간다고?"

그런데 이상하네.

바바라가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거지?

보통 감옥에 갇혀 있는 죄수라면 감옥을 탈출할 수 있단 얘기에 설레는 게 먼저 아닌가?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바바라?"

"라워드, 미안해."

바바라는 여태 붙잡던 내 손을 놓고 시선을 외면했다.

"난 못 나가."

"왜?! 왜 못 나가는데?"

"주변을 조금 둘러볼래?"

주변이라니.

나는 바바라의 말을 듣고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바바라밖에 보이지 않았던 세상이 확 하고 넓어졌다.

이 방에는 이런저런 사람들이 늘어선 채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모여 있는 사람은 약 10명 정도.

백발이 성성해 곧 죽을 것 같은 노인부터 아까 본 10세의 어린아이까지, 정말로 각양각색의 사람들이었다.

"라워드. 내가 왜 제국을 테러했는데 라그나의 뇌옥에 수감되었는지 생각해 본 적 없지."

"당연히 없지."

난 그냥 큰 죄를 지은 만큼 세계에서 가장 흉악하다는 감옥에 들어온 거라 생각했어.

그게 아니었단 말야?

바바라는 내 시선을 외면하며 주변의 사람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라그나의 지하 4층은 두 가지 용도로 쓰여. 하나는 정말로 흉악범들을 가두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제국의 공격으로부터 사람을 보호하는 용도야."

"보호라고?"

"그래. 여기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제국으로부터 목숨을 위협받는 사람들이야. 라그나는 그렇게 제국으로부터 쫓기는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여길 만들었어."

그렇다면 바바라 네가 여길 들어온 이유도....

내 시선을 느낀 바바라가 그제야 날 바라보았다.

"네 예상이 맞아. 난 체포된 게 아니라 내 발로 여길 들어왔어. 그리고 지금은 이곳의 사람들을 이끄는 대표가 되었고."

"대표라고? 이 사람들의 대표?"

"응. 지하 4층에 수감된 사람들이 아무리 흉악범들이라지만 스스로 감옥에 걸어 들어온 귀족을 건드릴 겁 없는 녀석은 없거든."

"그게 네가 나가는 거랑 무슨 상관이야! 여기 사람들 모두 네가 여기에 들어와서 만난 사람들일 뿐이잖아."

내 외침에 바바라가 슬픈 표정을 지으며 날 타일렀다.

나지막하게 이야기를 이어 가는 그녀의 목소리는 작게 떨리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지 마. 내가 정말 힘들 때 이곳에서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준 이들이야. 내가 빠져나간다면 이들은 또 이곳에서 힘든 삶을 살겠지. 그렇게 둘 수는 없어."

등줄기만 간지럽히던 그 불길한 기운이 온몸을 잠식한다.

어지럽다.

가만히 서 있는데도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여기까지 찾으러 와 줘서 고마워. 네가 죄를 지어 들어온 게 아니라는 것도 다행이고, 이틀 뒤에 나갈 수 있다는 것도 다행이야. 그러니 라워드. 날 두고 나가. 나가서 네 삶을 살아."

* * *

나는 방구석에 걸터앉아 사람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바바라는 도대체 왜 저렇게 중구난방 모여 있는 오합지졸들에게 마음을 쏟기 시작한 걸까?

저 노인의 경우는 어깨까지 내려오는 백발이 성성한데 허리는 완전히 굽었고, 온 얼굴이 주름으로 자글자글해 언제 죽을지 모를 정도로 늙어 보였다.

저기 저 뚱뚱한 사내는 연신 땀을 흘리며 주변의 눈치를 살폈고, 그리고 비슷하게 덩치가 있는 여성은 아까 본 소년을 끼고 돌았다.

아까 그 소년은 그냥 천진난만하게 바닥을 뒹굴며 놀고 있었고, 바바라는 그런 소년을 아련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공통점은 무언가 특별한 것을 하기보단 그냥 무작정 시간만을 보낸단 거였다.

마치 아무것도 할 것이 없는 사람들처럼.

이게 단순히 바바라 결정에 반발하는 내 감정 때문에 고깝게 보이는 것일까.

아닌 것 같아.

저들의 눈에선 어떤 희망도, 어떤 미래도, 어떤 의욕도 보이지 않았으니까.

평온해 보이는 이곳과는 다르게 당장 개미굴을 통해 이곳을 나가면 있는 거라곤 지하 4층을 가득 채운 흉악범들이 우글거린다.

제국을 피해, 흉악범을 피해 이곳에서 그저 하루하루 죽어 가는 것과 뭐가 다르지?

"배식 시간이군."

그때 다른 방 한쪽에 정좌를 한 채 명상에 빠져 있던 사내가 몸을 일으켰다.

턱까지 덮을 정도로 지저분한 흑발의 사내는 175 정도로 그리 큰 키는 아니었으나 전체 근육이 다부져 탄탄한 인상이었다.

특히 다른 사람의 두세 배 이상은 될 법하게 거대한 주먹과 낡은 죄수복 너머로 보이는 단단한 정강이 근육까지.

마치 잘 제련된 무기를 보는 것만 같은 사람이었다.

내가 왜 저 사람이 입을 열기 전까지 이 공간에 존재하는 것조차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지?

마나를 통한 감각은 여전히 생생하게 돌아가고 있는데 말이지.

"자네."

응, 나?

사내를 너무 빤히 쳐다보았나.

그가 갑자기 나를 지목했다.

"음식을 받으러 가야 하는데 같이 가지."

"진! 잠깐, 라워드는 갑자기 왜 데리고 가는 거야? 어떤 일이 있을 줄 알고?"

바바라가 급히 나서 진이라 불리는 사내를 말렸다.

도대체 배식 시간이 뭐기에... 아.

설마, 배식 시간이라는 거, 정량으로 배식하는 게 아니라 음식을 맞춰서 가져와야 하는 건가?

그런 거라면 저 진이란 녀석이 일어나는 게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아.

"제법 잘 싸울 것 같군."

"무슨 소리야! 라워드 군은 나와 같이 델피 아카데미 소속의 문관이라고! 잘못 데려갔다간 큰일 날걸?"

"아니."

바바라의 말을 끊은 것은 진이 아니라 날 데려다준 소년이었다.

"한?"

"저 아저씨, 공동에서 케인이 끌어안았는데 이렇게 툭, 하더니 풀어 버리곤 탕 쳤는데 케인이 우당탕하고 날아가 버렸어."

아이가 우스꽝스러운 몸짓으로 날아가는 케인의 흉내를 냈다.

"뭐? 라워드 군이?"

"케인의 베어 허그를 단순히 팔을 툭 치는 것만으로 풀어냈다고?"

웅성거리는 목소리와 함께 시야가 나에게로 집중된다.

놀라지 않는 사람은 단둘.

진이라는 사내와 저기 구석에 앉아 동그랗게 몸을 말고 있는 노인밖에 없었다.

"저 사내의 몸 주변에서 고요한 기가 흐른다. 마치 전설상의 자연체처럼. 저자와 배식을 간다면 평소보다도 더 많은 음식을 가져올 수 있을 거다."

"마나를 쓰니 당연한 게지."

소리는 크지 않지만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노인네는 어느덧 눈을 가늘게 뜬 채 날 바라보고 있었다.

"마나를? 설마요. 지금 라워드 군의 다리엔 족쇄가 제대로 채워져 있는데."

"그러게 말이다. 참으로 신기해... 이상하다. 내가 저런 식으로 마나를 다루는 걸 언제 봤더라. 아아아주 오래전에 본 것 같은데. 아아아주우우 오래저언...."

도대체 어떻게?

탈리오 영감조차 내 체질을 한눈에 알아차리는 건 불가능했는데.

아무리 내가 마나를 두르고 있다지만 그걸 한 번에 파악할 수 있다고?

게다가 이런 방식으로 마나를 쓴 사람을 본 적 있다고?

짧은 대화임에도 불구하고 여기 사람들에 대한 내 인식이 완전히 바뀌었다.

제국을 피해 도망쳐 온 사람들이라고 했지.

이 사람들, 내 생각들보다 거물일지도 모르겠다.

"배식 시간에 늦는다. 일단 가지. 다녀와서 얘기를 하면 되니."

그래. 다른 건 천천히 알아봐도 된다.

어차피 탈리오 영감이 오는 건 이틀 뒤.

그때까지 시간이 좀 남으니까.

나는 진의 재촉에 부랴부랴 걸음을 재촉했다.

아니, 하려고 했다.

방 안에서 남아 노인네를 독촉하는 바바라의 목소리를 듣기 전까지는.

"파르메시오 영감님, 진짜예요? 진짜 라워드가 마나를 이용하고 있어요?"

파르메시오라면....

기록의 관에서 알바트론 대신 던전을 만들었던 그 흑마법사?!

무려 120년 전 8써클에 다다랐던 흑마법사가 저 노인네라고?

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69화

<69화 - 들어올 땐 마음대로였지만 나갈 땐 아니란다(5)>

내가 개미굴 사이사이를 어떻게 이동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파르메시오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며 진의 뒤를 따라간 것이 전부였으니까.

어느덧 처음 들어왔던 광장에 도착했을 땐 아까보다 배가 넘는 사람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 사람들은...."

"개미굴 구석구석에 있던 자들이다."

"저들이 진짜군요."

그도 그럴 것이 진을 처음 보았을 때 대단히 단련된 전사라고 감탄했었는데 그 정도 수준의 녀석들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거든.

"처음 네가 들어왔을 때 봤던 녀석들은 신입을 데려오는 길잡이들이다."

"길잡이라. 그럴듯한 이름이네요."

"그들은 여기 들어온 흉악범들이 어떤 죄를 짓고 들어왔는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대화를 통해 알아내지."

진의 설명에 피식하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 감옥에선 대화는 내가 아는 뜻이 아닌 모양이군.

"죄질에 따라 사람들은 그룹을 나눠 이동하게 된다. 저기 보이는 저쪽은 연쇄살인, 저쪽은 폭행, 저쪽은 성폭력, 저쪽은 신성모독을 비롯한 정치범."

나는 진의 설명에 따라 사람들을 살펴보았다.

과연 그가 말한 특징이 범죄자들의 얼굴에서도 엿보이는 것 같았다.

진과 같이 전사와 비슷하다던 놈들은 폭행. 얍삽하지만 멀쩡하게 보이는 놈들은 성폭력. 무언가 차분하고 날카로운 인상은 정치범들.

그중에서도 가장 특이한 놈들은 연쇄살인범들이었는데, 그들은 별다른 특징 없이 묘한 기세만을 내뿜고 있었다.

그럼에도 다른 그룹들에겐 충분히 위협적인 모양이었지만.

그런 그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집중되었다.

'저 녀석, 케인을 한 번에 쓰러뜨렸다지?'

'주먹질 한 번으로 광장 바깥으로 날렸다더군. 전사인가?'

'설마 마나 구속구 가지고도 제대로 구속을 못 해내는 건가? 그 정도라면 소드 마스터 상급은 되어야 할 텐데.'

'저렇게 젊은 소드 마스터 상급이라고? 그런 사람은 들어 본 적 없어. 그보단 바디 체인지가 끝난 8써클 마법사가 아닐까?'

"사람들이 너에 대해 수근거리는군. 화려하게 해 줬던 모양인데."

그러게.

감각이 예민해지니까 소리에 대해서도 예민해져 이런저런 얘기가 다 들리네.

저들은 뒷담이라고 한 건데 본의 아니게 앞담을 듣는 꼴이 되었어.

진은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더니 그들 사이를 가로질러 입구 근처 벽으로 다가가 슬그머니 몸을 기대었다.

일단 따라오긴 따라왔는데, 이제부터 뭘 하면 될까.

"배식은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죠?"

"간수장이 간수들과 함께 음식을 갖고 내려온다. 그들이 나가면 재량만큼 음식을 가지고 가면 된다."

"재량만큼이라. 질서는 따로 없고요?"

"대충 암묵적으로 가져가는 양이 있긴 했지. 하지만 그것도 의미가 없겠군."

"왜?"

내 질문에 진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 나 때문이라는 건가.

나는 손가락으로 날 가리켰고 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배식의 절대적 우선권은 우리에게 있다. 그러니 무게를 잡고 있도록."

"무게?"

"곧 저들이 접근해 올 테니까."

아니나 다를까.

진의 이야기처럼 각 그룹에서 한 명씩 사람이 내 쪽으로 걸어왔다.

폭력배들 쪽에선 등부터 팔까지 거대한 흑룡이 그려진 다부진 난쟁이가.

성폭행범 쪽에선 묘하게 색정적인 방식으로 옷을 찢어 놓은 여성이.

정치범 쪽에선 가는 눈이 마치 뱀처럼 찢어지고 광대가 툭 튀어나온 이상한 청년이.

그리고 연쇄살인범 쪽에선 눈이 사방으로 튀어나온 사팔뜨기의 호리호리한 중년 남성이.

모두 각양각색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중 먼저 입을 연 것은 다부진 체격의 난쟁이였다.

드워프의 피가 섞인 것일까.

갈색의 털은 머리와 수염뿐만 아니라 손등과 팔, 가슴께까지 더벅하게 나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근육질의 원숭이를 보는 것 같은 자였다.

"길잡이 아그들이 힘 쪼까 쓰는 놈팽이 하나 왔다 카더만 글로 갔나. 아숩네. 우리랑 함께했으면 좋았을 낀데."

그런 난쟁이의 이야기를 막은 것은 죄수복을 거의 입은 듯 안 입은 듯 걸친 여성이었다.

노란색과 초록색, 파란색 등이 복잡하게 섞인 복잡한 헤어스타일의 여성이었는데, 감옥 안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새빨간 손톱이 인상적인 사람이었다.

"호호, X랄. 이 오라버니가 거기 갔으면, 네가 가장 먼저 피떡이 되어 누워 있지 않았을까?"

"입 대는 거 적당히 혀라. 디지는 수가 있다."

"어머, 죽여 주려고? 아쉽지만 작아서 안 될 것 같은데?"

두 사람이 으르렁거리는 것을 보아하니 서로 사이는 좋지 않은 듯했다.

그런 둘을 말리며 들어온 것이 뱀 같은 인상의 청년이었다.

그는 마치 굶고 사는 것처럼 몸 전체가 빼빼 말라 기분 나쁜 인상을 풍기는 자였다.

"진정하시구려. 우리가 이렇게 싸우려고 나온 것은 아니지 않소? 감옥이라는 공간에서 서로 고난을 함께하는 사이인데 우리끼리 다투는 것이 어디에 의미 있겠소?"

"하, 또 고결한 척한다. 그래 놓고 또 뒤통수치려고 그러지?"

"어허, 아직 오해가 안 풀리셨소? 그 아가씨는 우리의 원대한 대의에 깊은 마음으로 공감하고 들어온 것이라오. 우리는 따로 모략을 획책한 바 없소."

"그래, 이 뱀 같은 새X야. 생긴 대로 혓바닥을 놀리는구나."

이대로 둔다면 정말 칼부림이라도 날 것 같다.

그런 소모적 다툼을 끊어 낸 것은 진이었다.

"오늘 배급은 우리가 먼저 가져가겠다. 억울하면 우리 신입이랑 한판 뜨시든가."

그의 선언에 세 사람의 표정이 조금씩 일그러졌다.

"고작 신입 하나 믿고 설치다간 골로 간다?"

"그래~ 진 오빠. 무섭게 왜 그래. 그냥 우리 공평하게 페어플레이 하자는 거 아냐. 먹을 만큼 가져가고, 먹을 만큼 나눈다. 우리 늘 하던 거 알잖아."

그러나 그들의 이야기에 진은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그런 소리를 하는 자들이 평소엔 그딴 식으로 음식을 배분했나. 다시 말하지. 억울하면 우리 신입이랑 한판 뜨면 된다."

그때 사람들 사이에서 날카로운 살기가 느껴졌다.

나는 순식간에 시야를 채우는 선과 흐름을 따라 천천히 자세를 낮춰 몸을 단단히 받친 채 팔꿈치를 내밀었다.

퍽!

"꺼억...."

살기의 정체는 폭력범 무리에 있던 한 사내였다.

그는 어디서 구했는지 날카롭게 깎은 뼈 칼을 들고 나에게 휘두르려던 모양이었다.

내 팔꿈치는 녀석의 명치를 정확하게 가격했고, 녀석이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스러진다.

실력을 알아 둘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나는 쓰러지는 녀석의 목을 휘감아 폭력단에서 나온 난쟁이 쪽으로 강하게 던졌다.

쿵!

광장의 구석에서 거대한 충격음과 함께 흙먼지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피했군.

난쟁이는 그 짧은 순간 놀라울 정도의 동체 시력과 반사신경으로 폴짝 몸을 날려 자신에게 날아오는 신형을 피해 냈다.

대단하네.

마나도 없는데 이 정도의 공격은 쉽게 피한다는 거구나.

만약 마나가 봉인되지 않았더라면 소드 익스퍼트 최상급 수준은 되지 않았을까?

내가 그에게 놀란 만큼 사람들 역시 내 실력에 놀란 모양이었다.

'바, 방금 봤어? 저기서 벽까지 한 손으로 사람을 던져 버렸어.'

'40m는 될 거리인데... 무식한 힘이군.'

'소문이 과장이 아니었군. 오히려 부족했어.'

"부하를 이용하는 건 여전하네?"

진의 비아냥에 난쟁이는 제 소관이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나? 착각하지 마라. 아그들이 흥분해서 나선 기지 내가 뭐 하라고 한 거 아이다. 와. 기분 상했나? 크, 그러면 안 되지. 우리 진 님이 이제 정정당당히 배급하셔야 하는데 삔또 나가면 큰일 나지."

그 능청스러움에 뭐라 이야기를 한마디 하려던 찰나 철컥하는 소리와 함께 지금까지 단단하게 닫혀 있던 철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끼이이이익.

거대한 마찰음이 광장 내부를 울리자 광장은 방금까지의 소음이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

그 기괴한 적막 속에서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와 함께 간수장 마르쿠제와 간수들이 식사로 보이는 짐을 옮기기 시작했다.

거대한 가죽 주머니에는 배에서 먹었던 딱딱한 빵이 가득했고, 한쪽에는 식수가 담겨 있는 듯한 오크통이 쌓이기 시작했다.

이제야 알겠군.

사람들이 왜 배급에 목숨을 거는지.

식사랍시고 오는 게 빵이랑 물밖에 없다.

더구나 얼핏 보니 양도 그렇게 넉넉한 것 같진 않았다.

어느 한쪽이 욕심을 조금이라도 부린다면 누군가는 하루 종일을 굶을 수밖에 없겠지.

"오늘도 시끄럽구나 구더기들아."

마르쿠제의 경멸 어린 목소리가 사방을 울렸다.

"누차 말하지만 나는 벌레들의 목숨 따위엔 관심이 없다. 너희들끼리 죽고 죽여서 생살을 파먹든, 파먹히든 신경 쓰지 않겠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마르쿠제의 얼굴에 짜증이 어렸다.

그는 아까 날려 보낸 사내가 있는 곳, 그리고 아직까지 옅게 흩날리는 흙먼지를 보고 있었다.

마침 그의 구두 위로 흙먼지가 내려앉았다.

그 먼지를 따라 시선을 옮기던 그가 천천히 허리를 굽혀 신발 콧등의 먼지를 장갑으로 닦아 냈다.

"그런데 말이다."

살기!

광장의 모든 사람들의 표정이 순식간에 공포로 물들어 간다.

난 급히 진과 함께 벽 쪽으로 몸을 밀착시켰다.

"하지만 이 시간만큼은 얌전히 뒈져 있으란 말이다아아아!"

그가 번개 같은 속도로 꺼내 휘두른 채찍이 사방팔방으로 뻗어 나갔다.

촤아아아아악!

그건 마법으로 만든 폭풍을 보는 것만 같았다.

채찍은 사람과 감옥을 구분 없이 찢어 놓았다.

"으아아아아악!"

"파, 팔! 내 팔!"

"눈이, 눈이!"

한차례 폭풍이 지나갔을 때, 사방엔 폭풍을 피하지 못한 사람들이 신음하며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마나가 실리지 않은 탓에 끔찍한 풍경이 펼쳐지진 않았으나 마치 거대한 뱀이 지나간 듯한 흉터가 감옥과 사람에게 가득했다.

벌겋게 파여 달아오른 살가죽은 보는 것만으로도 끔찍한 모습이었다.

슬쩍 살펴봤는데 아까 그 대표들 중에서 상처를 입은 자는 한 명도 없는 듯했다.

마르쿠제는 채찍질로 묻은 몸의 먼지들을 털어 내며 이를 악문 채 말했다.

"하루 고작 두 번만 얌전히 죽은 듯 지내면 된다. 그 정도는 몬스터들도 교육하면 알아들을 수 있지 않는가, 머저리들아. 다음번에도 소란스러울 경우엔 더 이상 자비를 바라지 마라."

마르쿠제의 시선이 사람들을 향했고 사람들은 필사적으로 그의 시선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눈을 피했다.

그렇게 다시 뚜벅거리는 소리와 함께 마르쿠제 일행이 밖으로 나갔고, 이내 철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4층의 문이 닫혔다.

"...엄청 폭력적이네요, 그렇, 어라."

"감상이나 늘어놓을 시간 없다. 짐 챙겨."

진은 문이 닫힌 그 즉시 성큼거리는 걸음으로 음식을 향해 다가갔다.

비슷한 시기에 음식에 욕심을 내던 자들이 진과 눈이 마주치자 날 힐끗 보곤 뒤로 천천히 물러났다.

방금까지 공포에 질렸었던 것이 거짓말 같을 정도로 탐욕스럽고 멀쩡한 모습이었다.

"여기."

진이 나에게 빵이 담긴 가죽 포대를 내밀었다.

그 역시 오크통 하나를 짊어 든 채였다.

"어이, 빵 X나 많이 챙긴 거 아이가?"

"나는 딱 정량만 챙겼다. 억울하면 직접 와서 확인해 보든가."

"크흠, ."

녀석들은 무언가 분해하는 모습이었으나 직접 다가올 배짱은 없어 보였다.

그렇게 우리의 짐을 다 챙기고 자리를 떠나려던 때.

아까 나섰던 자들 중 유일하게 입을 열지 않았던 사내가 내게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이봐."

신기한 점은 그가 입을 여는 순간 마르쿠제가 등장했을 때처럼 사람들이 입을 닫고 슬금슬금 자리를 피하기 시작했단 점이다.

단지 마르쿠제와 다른 점이 있었다면 사람들의 얼굴에 떠오른 감정 정도?

저 표정은 두려움보다는 혐오감에 가까운 표정들이었는데.

"조심하게. 저자는 독을 다루니까."

진이 근처로 다가와 슬그머니 귀엣말로 주의해 주었다.

그러나 그 목소리를 상대도 들은 모양이었다.

"낄낄낄. 진. 그런 주의를 해 줘 봤자 독은 말보다 빠르다네."

"날 왜 찾아왔지?"

이런 자들과는 여러 이야기를 나누기보다 본론만 간단히 듣는 것이 나았다.

"자네, 듣기로 바깥에서 엄청나게 민간인을 죽여 댔다지. 그런 것을 보면 우리 과인데 말이야. 우리 방으로 오게. 자네에게 부방장 자리를 보장하지."

스카웃 제의라.

말은 안 했지만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제의를 하려고 했던 모양이다.

아까 나섰던 세 사람이 비슷하게 표정을 굳히며 이곳을 집중하는 걸 보니까.

"미안하지만 거절이다. 나는 이쪽 방에 용무가 있어 들어온 거거든."

"낄낄, 그래. 길잡이들이 그러더군. 바바라를 찾아왔다지. 그 귀족 아가씨, 그렇지. 낄낄. 알았어. 바바라 드 팔세우스를 찾아왔다라."

"너...."

어쩐지 께름칙한 예감이 들어 녀석과 드잡이질하려는데 진이 날 말리며 팔을 잡아챘다.

"더 소란을 일으킬 필요는 없어. 가자."

후. 그래.

나보다 여기서 조금이라도 더 오래 지낸 진이 판단한 게 맞겠지.

나는 그렇게 낄낄거리는 웃음소리를 뒤로한 채 다시 바바라가 있는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70화

<70화 - 들어올 땐 마음대로였지만 나갈 땐 아니란다(6)>

나는 식량을 가지고 오자마자 대충 바닥에 내려놓곤 노인네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파르메시오.

기록의 관에서 보았던 알바트론 영상에 나왔던 흑마법사.

그라면 제국의 음모와 헬피온 공작령에 생겨난 마왕성에 대해서 무언가 중요한 비밀을 알고 있을지 몰랐다.

무엇보다 130년을 넘게 살아온 마법사인 데다가... 아카식 레코드가 아닌 현실에 존재하는 사람.

이 사람이라면 아무 제한 없이 아카식 레코드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 혼자만 간직하고 비밀스럽게 이야기해야 했던 바로 그 아카식 레코드의 이야기를 말이다.

확실히 영상에서 봤던 이미지를 떠올려 보면 묘하게 색정적이고 처진 눈매에 눈물점을 가진 사내였지.

영감님의 얼굴에도 점이... 안 보이네.

주름이랑 검버섯 때문에 점 같은 건 구분이 안 돼.

눈매도 워낙 주름이 자글자글하고 눈을 감고 있는 듯해서 구분이 잘 안 되고.

직접 물어보는 수밖에 없나.

"영감님. 영감님이 파르메시오 맞나요?"

"나~? 나 파르메시오 맞지!"

"영감님 혹시... 마법사였어요?"

"내가? 그을쎄. 잘 모르겠는데. 내가 마법사였던가~?"

이래서야 원.

노인네의 정신 상태는 정상이 아니었다.

치매가 있는 듯 과거의 내용을 물을 때마다 고개를 내젓곤 마치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듯 몸을 더 웅크려 댔기 때문이다.

나는 쯧, 하는 소리와 함께 혀를 찼다.

"라워드."

"아, 바바라."

"파르메시오 할아버지를 알아?"

"글쎄. 안다고 해야 할지 모른다고 해야 할지. 혹시 내가 아는 사람이 맞는지 확인하고 싶어서 물어봤는데 기억을 못 하시는 모양이야."

"그 할아버지는 원래 그랬어."

바바라의 시선이 파르메시오의 굽어진 등을 향했다.

"아마 이 지하 4층에 있는 사람들 중 가장 오래전에 들어온 사람이었을 거야. 오래된 사람들조차 감옥에 잡혀 들어왔을 때 파르메시오를 봤다고 그랬거든. 그리고 파르메시오는 그때부터 저런 모습이었고."

"그래?"

"마법을 아냐고 물었지?"

바바라도 내가 노인네에게 했던 질문을 들었던 모양이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바바라가 기억을 떠올리는 듯한 표정이 되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한 번 그런 얘기를 한 적 있어. 자기가 대단한 마법사였다고."

"정말?"

"응. 하지만 뭐... 워낙 저러시니까. 가끔 뭔가 기억난다는 듯 이야기를 하긴 하는데, 그때마다 금방 겁에 질려서 몸을 와들와들 떨곤 이불 속에 파묻히시거든."

"그렇구나. 가끔은 뭔가 기억이 나긴 한단 말이지."

대단한 마법사라.

바바라는 그 말을 전혀 믿지 않은 기색이었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그 말을 듣고 확신했다.

이 자는 기록의 관에서 보았던 그 파르메시오가 맞는 듯하다.

그러니 날 보고 바깥세상의 마나를 자유롭게 쓴다고 단숨에 알아차린 거지.

그런데 도대체 왜 하필 이런 곳에 있는 걸까.

이곳의 용도가 제국으로부터 도망친 자들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곳이랬던가.

그렇다는 건 파르메시오 역시 제국으로부터 도망친 걸까?

왜? 어째서?

여러 가지 고민이 뒤를 이었지만 이내 길을 잃어버렸다.

제길.

다른 곳에서 조금 더 여유를 갖고 만났더라면 이자와 더 느긋하게 이야기해 볼 수 있었을 텐데.

내일 나갈 때 바바라와 함께 이자도 데려갈 수 없을까.

"그건 그렇고 많은 일이 있었나 봐."

"아, 응. 좀."

"진이 그러더라고. 라워드 군이 정말로 강하다고. 단순히 마나를 쓰는 것만이 아니라 몸을 움직이는 법에 대해서 기초가 다져진 것 같대. 전사가 된 거야?"

"전사...라고 해야 하나?"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차근차근히 점검해 보았다.

검을 휘두를 수 있고, 마법을 쓸 수 있다.

"마검사에 더 가까울 거야."

"마검사! 멋지네. 5년 동안 도서관에 있으면 그런 것도 할 수 있는 거야?"

"그냥. 많은 일이 있었지."

"밥 먹으면서 들려줄래?"

바바라가 생긋 웃으면서 내게 빵과 컵에 담긴 물을 건넸다.

"아마 저녁까지 다 이야기해도 못 할 거야."

"그러면 그때까지 쭉 들려줘. 심심한데 잘됐지."

그렇게 방 한구석에 바바라와 나란히 앉아 살아온 이야기를 천천히 나누기 시작했다.

이야기는 거의 일방적으로 내가 바바라에게 하는 것이었다.

5년 동안 도서관에 박혀 힘을 키우기 위한 방법을 찾았던 얘기.

그러던 중 <신체활용비서>라는 책을 발견하고, 몸을 움직이는 법을 수련한 얘기.

도서관에 박혀 사는 걸 마치고 나왔는데 1년 동안 직업이 구해지지 않았고, 결국 헬피온 공작령에 대필작가로 사무관 고용이 된 이야기.

티타니아 영애를 짝사랑하기 시작했지만 골수까지 검밖에 들어차지 않았던 멍청이 이야기.

내 이야기에 깨달음을 얻은 아펠 집사장.

꼬장꼬장한 스콰렛 공작과 지젤 선배를 둘러싸고 일어났던 문관과 무관들의 대립 이야기.

그 과정에서 룸펜 하운드를 만나고 제국과 다투며 알게 된 마왕성의 진실.

그리고 탈리오 마탑에서 만난 두 노인들의 이야기, 제이슨 씨와 종이비행기를 접어 날리던 얘기까지.

"...그렇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어."

"신기하다. 너는 고작 반년 동안 그 정도의 일들을 겪어 왔구나. 그래서인가. 사람이 옛날보단 좀 더 단단해진 느낌이야."

"좀 더 듬직해졌단 얘긴가?"

"그렇기도 하고, 믿음직스럽기도 하고? 뭐라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네."

나는 다시 바바라의 손을 붙잡았다.

손안에서 바바라의 온기가 그대로 느껴져 온다.

"내 얘기들을 믿어?"

"솔직히 안 믿기긴 하지만 네가 정말로 마나를 쓰고 있는 데다 엄청난 힘을 보여 줬는걸. 그게 아니면 세계를 놀래킬 만한 사기꾼이 되어 흉악범죄로 여기에 들어온 건데... 그것보단 강해졌다는 걸 믿는 게 좋지 않겠어?"

바바라는 그렇게 말하며 작게 웃었다.

감옥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바바라가 날 바라보는 표정은 한결같았다.

바로 저 웃음.

조용히 입매만 끌어당겨 웃는데 눈은 슬픈 기색이 완연했다.

마치 이 기억을 추억 삼아 오랫동안 기억하기로 마음먹은 사람처럼.

여기서 죽음을 각오한 사람처럼.

"바바라. 나랑 같이 나가자."

"또 그 얘길...."

"내 얘기 다 들었잖아. 탈리오 영감이나 헬피온 공작, 그리고 스콰렛 공작이나 지젤 선배까지. 우리는 차근차근히 제국과 싸울 준비를 하고 있어. 개인이 아니야. 거기에 너와 팔세우스 가문이 오면 제국의 턱 아래까지 비수를 드리울 수 있게 돼."

"나는...."

"물론 그것 때문만은 아냐. 나는 바바라 널 데리러 왔어."

바바라의 말이 뚝, 하고 멈췄다.

"아카데미에서 모두 날 무시했을 때 너만은 날 끝까지 챙기고 걱정하고 대신 싸워 줬지. 거기다 날 위해 크라피 녀석의 영지에 테러까지 해 줬잖아. 나는 네가 이런 곳에서 죽어 가는 걸 못 견디겠어. 그러니까 네가 함께 나왔으면 해. 계속 못 가겠다고 버티면 강제로라도 데리고 나가겠어."

"그러지 마. 그러면 난 널 싫어하게 될 거야."

바바라는 다시 슬픈 표정으로 고개를 젓더니 멍하니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혹시...."

"혹시?"

"정말로 네가 제국으로부터 날 보호할 힘이 있고, 이곳을 자유롭게 나갈 수 있다면 저들도 함께 데려가 줘."

"이 사람들도 함께?"

"응. 어쩌면 저들이 나보다 더 도움이 될 거야. 파르메시오 할아버지는 옛날에 대단한 마법사였다고 하고, 저기 멜빌은 원래 뛰어난 힐러였대. 진은 엔틸 제국에서 최고로 뛰어난 장수였다고 하고."

"하지만...."

"부탁할게. 만약 저들이 함께 나간다고 하면 나도 모든 부담을 접고 나갈 수 있을 것 같아. 네 능력도 믿을 수 있고. 할 수 있겠어?"

할 수 있냐라.

해야지. 그게 너를 이곳에서 꺼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면.

마침 타이밍 맞게 진이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에게 다가왔다.

"저녁 배급 시간이다."

우리의 얘기가 그만큼 길었던 모양이었다.

"이번에도 함께 가지."

"알았어. 바바라, 다녀올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바바라에게 인사하고 진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빛이 사라지고 오로지 사람의 기척을 따라 걸어야 하는 개미굴의 통로 안.

그 속에서 묵묵히 걷던 진이 입을 열었다.

"나간다고?"

"...네. 전 바바라를 데리고 바깥으로 나가기 위해 들어온 거니까요."

"혹시 한 도련님도 함께 데려갈 수 있나?"

"한? 그 꼬마 말인가요?"

"제국과 싸운다고 했지. 아마 큰 도움이 될 게다."

나는 아까 날 앞장서던 그 꼬마의 모습을 다시금 떠올려 봤다.

아무리 되새겨 봐도 마나가 느껴진다거나 몸놀림이 특별하진 않았다.

그런 식으로 도움이 될 만한 여지라곤 하나도 보이지 않았던 평범한 10살짜리 어린아이였는데.

"엔틸 제국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지?"

"동방의 제국이라는 것 정도? 우리와 다른 독특한 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것 정도? 아. 혹시 그거 말하는 건가. 엔틸 제국의 귀족은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을 가지고 있다고 하죠. 바로 진 당신이나 그 꼬마처럼. 혹시 한이 엔틸 제국의 귀족이라서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건가요?"

"귀족이 아니다. 황족이지."

"그래, 귀족이 아니라... 황족? 그 꼬마가? 아니, 당신도?"

바바라, 넌 도대체 어떤 사람들을 이끌고 있던 거니.

파르메시오도 그렇지만, 이젠 장군에, 황족이라.

"아니. 한 도련님만 황족이고 나는 일반 귀족이다. 도련님은 엔틸 제국의 제3황자이시지."

"3황자라. 그런데 그가 황자인 것과 제가 무슨 상관이죠? 이런 곳까지 도망쳐 온 것을 보면 이미 제국에서는 끈이 떨어진 것 같은데."

냉정해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이었다.

3황자나 되는 사람이 이 감옥에 갇힌 거라면, 도움은커녕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다.

"현 엔틸 제국의 지배자는 민준, 한 도련님의 배다른 형제다. 어려서부터 폭력적이고 남들 앞에 군림하는 것이 익숙했던 그는 가신들의 반대로 황태자 지위를 받지 못했지. 그러자 그는 제국의 힘을 빌려 전대의 황제와 1황자를 죽이고 황위를 차지했다."

"형제끼리 난이 일어난 거군요."

추잡한 이야기였다.

"그는 다른 황자와 황녀들의 목숨도 노렸다. 우리는 급히 엔틸 왕국을 빠져나왔고 이곳까지 도망쳤다."

"그렇다는 건 아무리 황자라지만 도망자란 소리 아닌가요? 제국을 상대로 싸우는데 거기에 또 다른 동방의 제국까지 적을 덧붙이는 꼴인데."

진은 고개를 저었다.

"아까 말했듯 엔틸 제국의 현 황제 민준은 성격이 급하고 독선적이라 제 세력이 없다. 오로지 현경에 달한 자신의 능력만을 믿을 뿐. 그런 상황에서 한 도련님이 자신의 세력을 갖춰 나타난다면 많은 제국민들이 자네를 지지할 거다."

"현경?"

"이쪽 세계의 말로는 소드 마스터 최상급의 문턱이라든가?"

최상급이라.

엄청난 실력자군.

그 정도 실력이라면 압도적인 무력으로 왕좌를 차지할 수 있으리라.

엔틸 제국의 힘이라... 고민이 되는군.

확실히 우릴 돕는 아군이 많은 건 좋지만, 다르게 말하자면 최상급 한 명이 나라를 좌지우지할 정도의 곳이다.

영토가 넓고 사람이 많은 것과 별개로 무력은 별달리 도움이 안 될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엔틸 제국이 도움을 주려면 일단 민준을 정리해야 할 텐데, 한을 옹위하는 과정에선 또 많은 수고가 들겠지.

평소 같으면 이런 부탁은 심사숙고하며 거절했을 가능성이 높지만....

"알았어요."

"데려가 준다는 건가?"

"한뿐만이 아니라 당신도, 다른 사람들도. 모두 데려갈 거예요."

그게 바바라의 부탁이었으니까.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런가. 나도...."

"어차피 저 꼬맹이 한 명을 데리고 나가 봤자 엔틸 제국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없으면 아무 의미 없지 않나요? 당신이 해야 할 일은 스스로 하세요. 전 여기서 모두를 꺼내 주기만 할 거니까."

"그런가. 알겠다. 일단 데리고 나가 주기만 한다면 꼭 보답하지."

보답이라.

그런 거라면 마침 궁금한 게 하나 있었는데.

"제가 처음 방에 도착했을 때 진 씨도 거기 있었죠?"

"그때 말인가. 있었다."

"왜 그런데 느낄 수 없었지? 전 감각을 최대로 개방해 놓고 있었어요. 하지만 당신은 갑자기 인식 범위 바깥에서 공간이동이라도 해 온 것처럼 갑자기 나타났거든요."

진은 내 말에 바로 답변을 해 왔다.

충분히 있을 만한 일이라 생각한 것 같았다.

"기를 다룰 줄 모르는군."

"기?"

"이쪽 세계 사람들은 마나라고 부르는 것. 나는 내 심상 속으로 명상을 통해 침잠해 있었으니 인식되지 않는 게 당연하다."

"그게 무슨...."

"이야기는 나중. 다 왔다."

진의 말처럼 우리는 어느덧 개미굴을 빠져나와 배식이 이루어지는 광장에 도착했다.

이번 역시도 사람들이 이리저리 나와 있긴 하였으나, 오전에 보았던 녀석들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 그들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파악을 위해 나왔던 것이 아닐까.

진은 오전처럼 문 근처에 가서 자리를 잡고 기댔고, 사람들은 의도적으로 우릴 피하는 것처럼 슬금슬금 거리를 벌렸다.

철컹!

광장 그 누구도 쉬이 입을 열지 않는 침묵의 시간이 잠깐 지나고, 이내 철문이 열렸다.

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71화

<71화 - 들어올 땐 마음대로였지만 나갈 땐 아니란다(7)>

철컹!

광장 그 누구도 쉬이 입을 열지 않는 침묵의 시간이 잠깐 지나고, 이내 철문이 열렸다.

이번에도 역시 먼저 앞으로 걸어 나온 건 마르쿠제였다.

그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오늘 저녁은 구데기들이 주제를 잘 파악한 모양이군."

곧이어 간수들이 음식을 갖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점심과 같은 빵 주머니와 물통들이었다.

나는 빤히 마르쿠제를 바라보았다.

과연 녀석에게 바바라 말고 다른 사람들도 나갈 수 있게 해 달라고 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녀석의 성격이라면 분명 길길이 날뛰겠지.

그렇다는 건 이틀 뒤 탈리오 영감이 오는 걸 기다렸다가 함께 나가는 건 무리란 얘기리라.

계획을 짜긴 짜야 할 텐데.

"라워드, 이봐. 어이. 고개 숙여, 라워드!"

그때 진의 조그마한 목소리가 나를 일깨웠다.

응?

무슨 일 있나 하고 정신을 차렸을 때, 모든 죄수들과 간수들의 시선이 내게로 박혀 있었다.

"너."

그 시선들 중엔 간수장 마르쿠제의 경멸 어린 시선 역시 존재했다.

"내게 불만이라도 있는 거냐? 빳빳이 고개를 들고 날 바라보고 있던데."

"아뇨, 없습니다."

이래서 진이 날 부른 거구나.

나는 급히 고개를 내저었으나 마르쿠제는 이미 심보가 뒤틀린 모양이었다.

어쩌면 나라는 사람에 대한 불만이 많았던 탓에 벼르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지.

"신입. 네가 바깥에서 잘나가던 흉악범이란 사실은 알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그럴 거라 착각하고 있나?"

"아뇨, 그렇지 않습...."

"잘 알고 있어라. 너희들이 트팔로에 들어온 순간, 네놈들의 존재는 그저 한 마리의 벌레다. 네놈들이 죽고 사는 것은 오로지 내 소관이 된다. 네놈의 눈빛, 말투, 숨소리 하나하나 모두 내 명령을 들어야 한다는 게다."

그게 무슨.

이 미치광이 녀석, 감옥을 마치 제 왕국처럼 착각하고 있는 거 아냐?

그런 내 불만이 자연스럽게 표정으로 드러난 것일까.

녀석이 한쪽 입꼬리를 비틀더니 이내 채찍을 들었다.

"잘 봐라, 구데기. 이게 네놈들이 벌레가 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그의 채찍이 사방으로 진동하기 시작했다.

"봐라! 이게 네놈들은 범접할 수 없는 상승 무예라는 것이다, 천라지망!"

정말 순간적인 일이었다.

분명 하나에 불과한 채찍이 수만 개의 가닥으로 분화되었고, 그것이 하늘과 땅, 모든 곳에 그물처럼 교차했다.

채찍과 채찍이 만들어 낸 거대한 흐름 속에서 나는 마치 우주 속에서 홀로 서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파바바바바바바바바박!

"크, 크윽, 흐억?"

마치 소나기가 쏟아지는 듯 연속적인 타격이 온몸을 두드렸다.

마치 거인이 거대한 손으로 날 짓누르는 것 같은 압력이었다.

공격이 시작되는 순간, 마나를 최대로 전개한 상태로 몸을 웅크렸다.

그럼에도 악다문 입에서 신음이 절로 흘러나온다.

연이은 충격에 다리가 꺾이고, 팔이 뒤틀릴 것 같다.

으윽, 큭, 제기랄.

저 미치광이가 진짜.

검만 있었다면 당장이라도 저 녀석에게 달려들 텐데.

안 돼. 탈출을 위해선 지금 참아야 한다.

그렇게 이를 악물며 영원할 것만 같은 폭력의 시간을 버텼다.

채찍질이 모두 끝났을 때, 나는 바닥에 거의 엎드린 상태였다.

미친....

그때 영혼이 몸에 강제로 분리되었을 때만큼 아프다.

온몸에 화상을 입은 것 같다.

몸이 꿈틀거리며 제대로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런 내 머리 위에서 마르쿠제가 피식 웃으며 이야기했다.

"명심해라. 네가 바깥에서 아무리 잘난 놈이더라도 이곳은 오로지 나와 내 힘이 법이란 것을. 버러지면 버러지답게 제 주제를 알고 얌전히 처박혀 눈에 띄지 말길."

제기랄.

그러니까 그냥 날 보니 짜증 나 화풀이했다는 거잖아.

이 녀석이 당장 나에게만 이런 식으로 굴었을까?

이게 이 녀석의 성격이라면... 언제고 바바라한테도 이런 식으로 굴지 않았을까?

제기랄.

두고 보자. 진짜, 내가 지금 탈출 작전만 다 끝나면 너는, 너만큼은 꼭....

촤악, 하고 채찍이 바닥을 때리는 소리가 들렸다.

"자 버러지들. 잘 봤겠지. 오늘 하루도 너희들의 삶이 연장되었음에 감사하며 밤을 보내라. 내일 아침 일어날 수 있는 게 모두 나의 덕임을 찬양하며 일어나는 거다. 그러니 모두 해산해라!"

그렇게 제멋대로의 이야기만 남긴 채 마르쿠제는 특유의 또각거리는 소리와 함께 철문 바깥으로 나갔다.

"괜찮나?"

그때 흙먼지를 뚫고 진이 내게로 다가왔다.

다행이다.

지금 몸 상태론 혼자서 방까지 찾아갈 자신이 없었는데.

진은 나를 마치 짐덩이마냥 어깨에 짊어지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조금 불편해도 참아라. 다른 놈들이 네 상황을 알기 전에 움직이겠다."

"아하하하, 몸이 아픈 거지 전투를 못 하는 건 아녜요. 어깨가 커서 그런가? 안락하네요. 어깨 위에서 조금 쉬면 어설픈 놈들 정도는 쳐 낼 수 있을 것 같은데."

"능청을 부리기엔 여유가 없군. 네가 맞기 시작한 순간 눈치를 보던 길잡이들이 빠르게 제 방으로 향했다. 아마 주먹 좀 쓰는 놈들이 내려오겠지. 바쁘게 움직이는 게 나아."

거기까지 이야기한 진이 묘한 발놀림으로 뛰기 시작했다.

좌로, 우로, 다시 좌에서 우로.

앞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양옆으로 번갈아 가며 나아가듯 무게중심을 흔들며 걷는데, 앞으로 달리는 것보다 훨씬 속도가 빨랐다.

더군다나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마치 솜으로 된 신발을 신고 달리는 것 같았다.

신기하네.

이게 보법이라는 건가?

"바쁘나? 꽁지에 불붙은 거 맹키로 뛰어가노. 그라지 말고 나랑 좀 보자."

그러나 진의 생각은 반만 맞았다.

그가 전력을 다해 달린 덕분에 뒤에서 쫓아오는 자들은 없었다.

다만 앞에서 미리 기다리고 있는 자들까지 피할 수는 없었으니.

좁은 통로 너머엔 저번에 봤던 난쟁이가 자신의 부하로 보이는 놈들 다섯과 함께 서 있었다.

진은 자리에서 멈추고 나를 벽 근처에 내려놓았다.

"네르마. 그냥 우릴 보내 주면 안 되겠나."

"에이. 그라믄 안 돼. 내 동생이 마이 다쳤잖아. 그런데 나가 그냥 가만있으면 되긋나?"

"아무 관계가 없다고 하지 않았나?"

네르마는 입을 쩝쩝 다시며 주변의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내가 그랬던가?"

"글쎄요. 잘 모르겠네요."

"동생들이 잘 모른다 카는 거 보면 아닌갑네."

네르마는 싸구려 연기를 하며 비열하게 웃었다.

"기어코 피를 보겠단 말이군."

"배도 마이 고프고, 몸도 뻐쩍지근하고. 가만히 뒀다간 물 한잔 못 먹고 뒈지게 생겼다 아이가. 좋은 기회인데 이참에 치워야지."

그렇게 신경전이 한참 이루어지는 그때.

"할 수 없군."

그렇게 말한 진의 시선이 슬쩍 나에게 닿았다.

"이봐."

"어?"

"아까 기를 다루는 법에 대해서 물었지."

그랬었지.

"보여 주지."

진이 제자리에서 목을 가볍게 돌리더니 어깨너비로 발을 펼친 채 기묘한 자세를 잡기 시작했다.

"조심해라."

재미있는 건 그 자세를 본 네르마 일행이 진중한 표정으로 긴장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건?"

"우리 엔틸에서는 이걸 기예, 또는 무공이라고 부른다."

거기까지 설명한 진이 단숨에 자리를 박찼다.

어둠 속에서 날카로운 예기가 번뜩였다.

네르마 일행은 너도나도 어떻게 구했는지 알 수 없는 무기를 꺼내 들었다.

누군가는 뼈를 깎아서 만든 칼을, 어떤 이들은 뼈를 머리카락으로 돌돌 엮어 놓은 곤봉을.

그 속에서 진은 오로지 맨손으로 그들을 상대했다.

훅, 하는 소리와 함께 진의 팔이 기괴한 각도로 회전하며 상대의 턱을 가격했다.

덜컥하고 턱이 내려앉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단 한 방.

그것만으로 상대는 실 끊어진 인형처럼 바닥에 허물어졌다.

진의 움직임은 그 자체로 하나의 흐름이었다.

한 손이 상대를 공격하면 다른 한 손은 꼭 자신의 급소를 방어했고, 공격이 끝난 손은 그대로 회수되어 방어를, 방어가 끝난 팔은 그대로 출수되어 공격을 담당했다.

공수일체.

아름다운 검술의 선에서 보이던 그 움직임이 그대로 엿보였다.

더구나 그의 움직임 곳곳에서는 수많은 심상이 번뜩였다.

마치 알버트 경의 검에서 설원과 늑대를 본 것처럼 말이다.

어떤 손짓에선 매의 날갯짓이 보였고, 어떤 발길질에선 말의 모습이, 또 어떤 손동작에선 호랑이의 이빨이 연상되었다.

무엇보다 신기한 건 남들보다 거의 두 배의 속력으로 모든 공격을 막는 것처럼 보이는 저 움직임 속에서 단 한 줌의 마나도 느껴지지 않는단 것이다.

오로지 몸을 움직이는 초식과 순수한 육체의 힘.

그것만으로 진은 네르마 일행을 압도하고 있었다.

"마! 비키라!"

그 모습이 답답했는지 네르마가 주먹을 말아쥐며 달려들었다.

"흡!"

진이 그 모습을 보고 주먹을 말아쥐며 자세를 취했다.

달려오는 걸 카운터 내려는 심상 같았다.

선과 선이 교차되려던 바로 그 순간.

네르마가 고함을 지르며 가속했다.

"으랴아아아아!"

곧, 진이 뻗은 주먹을 아슬아슬하게 피한 네르마는 마치 중력을 거스르는 것처럼 가로로 뉘어지며 벽을 달렸다.

육체를 단련하면 저, 저런 무식한 짓도 할 수 있단 말야?

곧 네르마는 벽을 박차고 훙, 하는 위협적인 소리와 함께 진의 뒤통수를 노렸다.

진은 그 발차기를 뒤로 쭉 몸을 뉘어 허리 힘만으로 피하고 그대로 네르마의 턱을 차올렸다.

뻑!

큰 충격음이 났으나 네르마는 이미 그 공격을 읽었다는 듯 이미 양손을 교차해 진의 발길질을 막은 상태였다.

오히려 네르마는 그 반동을 이용해 몸을 튕겨 내 쪽으로 달려들었다.

"네 녀석만 죽이면!"

안타깝지만 나는 이미 네놈의 공격을 알고 있었다.

선명한 선이 네 주먹에서 내 동맥을 향해 뻗어 나오는 게 보였거든.

"파이어!"

작은 불길이 네르마의 얼굴을 뒤덮었다.

네르마는 당황해 손을 휘저으며 불을 끄려 했고, 바로 그 순간을 진은 놓치지 않았다.

퍽!

"크흑?!"

몸을 뒤쪽으로 한 바퀴 회전하며 그 속력을 이용해 손등으로 네르마의 관자놀이를 가격했다.

제대로 타격이 들어간 모양인지 네르마가 균형을 잃고 사정없이 비틀거렸다.

"형님!"

"그만! 됐다!"

그래도 리더는 리더인 모양이다.

네르마는 자신의 등을 벽에 단단히 붙이곤 주먹을 올려 턱을 보호한 채 나와 진을 노려보았다.

날카롭게 가다듬은 살기가 저릿저릿하게 찔러 들어온다.

그냥 죽진 않겠다는 필사의 각오가 느껴졌다.

"헤, 헤헤. 한 수 있구마. 마법? 솔까 놀랐다. 이런 것도 쓸 수 있나. 족쇄가 쓸모없는 거 보이 진짜로 8써클인가 보네."

저런 오해는 풀기보다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이 더 나을 듯했다.

나는 씩 웃으며 이야기했다.

"원한다면 더 확인시켜 주지."

"아이다, 됐다. 이라다가 다 죽겠네. 골이 띵, 하다."

"물러갈 건가?"

"오냐, 얌전히 갈게. 혹시 뒤에서 습격하고 그러진 않을 거제?"

"얌전히만 간다면."

진이 천천히 네르마와 그 부하들을 경계하며 내 곁으로 다가왔다.

그가 비켜서자마자 부하들이 우르르 네르마에게 몰려들었다.

"형님, 형님!"

지독하네.

동생들이 다가온 걸 확인한 네르마가 그들의 품에 푹 늘어졌다.

그들이 다가올 때까지 정신력으로 기절하지 않고 버텼던 모양이었다.

그들이 통로 바깥으로 천천히 사라졌다.

진은 녀석들이 완전히 사라진 걸 확인한 후에야 나를 다시 짊어졌다.

이거야 원, 어깨에 짐 취급받으며 올라온 게 두 번째인데 아직 적응이 안 되네.

진은 다시금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고, 우리는 곧 바바라가 있는 방에 도착할 수 있었다.

"라워드!"

방으로 도착하자마자 바바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진이 날 업고 와서 놀란 것 같았다.

걱정시킨 모양이네.

목소리가 잔뜩 수심에 젖어 있었다.

진이 날 한쪽 벽에 내려놓자마자 바바라와 함께 덩치 큰 아주머니가 나에게로 다가와 내 몸 이곳저곳의 상처를 살폈다.

"멜빌, 어떤가요."

"뼈는 상한 곳이 없고, 인대는... 잠깐만요. 여기, 이렇게 움직이면 아픈가요?"

"아아아, 아야!"

"아픈 거 보면 신경이 멀쩡한 모양이네. 근육통이에요. 인대 쪽은 괜찮은 것 같고. 찰과상이나 열상, 화상 같은 건 젊으니까 금방 회복될 겁니다. 마나도 있다면서요."

"하지만 온몸이 피투성이잖아요!"

"바바라, 흥분하지 마세요. 바바라가 흥분한다고 환자의 용태가 더 좋아지는 건 아니잖아요? 방법이 있으니까 좀 진정해요."

"방법이요?"

"청년, 잠깐 상의 좀 벗을 수 있나요? 등을 봐야 해요."

어, 여기서 옷을 벗으라구요?

이런 순간에 좀 뜬금없어서 웃기긴 한데 나는 슬그머니 바바라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 역시 어색한 표정으로 얼굴을 붉혔다.

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72화

<72화 - 들어올 땐 마음대로였지만 나갈 땐 아니란다(8)>

"어휴, 이래서 정분난 젊은 남녀들이란. 얼른 옷 벗어요!"

아니, 정분이라니.

어쩐지 부끄러운 기분이 들어 쩔쩔매며 천천히 상의를 벗었다.

옷을 다 벗었을 무렵, 멜빌은 날 돌려 앉히곤 등에 손바닥을 댔다.

따뜻한 기운이 느껴진다.

"청년, 마나를 쓸 수 있다고 했죠?"

"아, 네."

"혹시 마나를 일으켜서 제 손으로 보낼 수 있나요?"

마나를 일으켜 손으로... 가능할 것 같았다.

나는 이 방에 흐르는 마나를 이끌어 내 몸을 통과시킨 후, 그대로 멜빌의 손으로 이끌었다.

"와."

뒤에서 멜빌이 낮게 감탄성을 내뱉었다.

"뭐가 잘못됐나요?"

"아뇨. 마나가 정말 순수하네요. 이렇게 깔끔한 마나와 마나운용은 처음이라... 이럴 때가 아니지. 집중할게요. 이제 제게 마나를 맡긴다는 느낌으로 몸을 편안히 이완시키세요."

맡긴다는 느낌이라면, 이 흐름 전체를 멜빌 씨에게 그냥 다 넘기면 되나?

오, 움직인다.

멜빌 씨에게 맡긴 마나가 천천히 움직이며 내 몸 전체를 회전하기 시작했다.

왜 멜빌 씨가 내 마나를 보고 순수하다 했는지 알 것 같다.

멜빌 씨의 손을 한차례 거친 마나는 새하얗고 포근한 느낌의 마나로 변화했거든.

따뜻한 감각이긴 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변질되었단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마나의 능력만큼은 확실했다.

따뜻한 기운이 몸을 돌 때마다 피부와 근육 등에서 느껴지던 고통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그것도 눈에 선명하게 보일 정도의 속도로 말이다.

바바라가 우수한 힐러라고 하더니 정말이었군.

"낫는다, 낫는다!"

곁에서 구경하던 한이 즐겁게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그건 그렇고 이 천진난만한 아이가 거대한 동방을 다스리는 엔틸 제국의 3황자라고?

민준이 엔틸 제국에서 황제로 등극한 게 아마 7년 전인가 그랬을 테니, 이 아이는 2~3살 정도의 나이에 제국을 떠난 건가.

아마 감옥에 들어온 것도 그쯤이 아닐까 생각된다.

바깥세상을 보지 못한 채 이곳에서만 살아가는 황태자라니.

"됐다. 이제 마나를 끊어도 돼요."

"아, 네."

멜빌은 마나를 끊자마자 내 등에서 손바닥을 뗐다.

그리고 다른 손바닥이 내 등바닥을 내려쳤다.

찰싹!

"아야!"

"야, 이 미친X아! 어쩌자고 거기서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있었어!"

찰싹!

"아, 아니, 잠깐만, 그게 아니라. 내가 어떻게 알아, 거기서 고개 들고 있다고 그 미친X이...."

멜빌에게 치료받고 있을 때 진한테 전후 사정을 들었나 보다.

찰싹, 찰싹!

"바바라, 스톱! 아파! 따갑다고!"

찰싹!

"미안해, 으아, 미안해! 아프다니까?!"

"아프라고 때리는 거야! 진짜, 왜 그런 거야! 너 때문에 내가 얼마나,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으으.

눈물까지 글썽거리는 바바라의 모습을 보니 되게 미안하긴 한데....

나는 바바라의 손목을 잡고 피식 웃었다.

"미안해. 잠깐 생각에 빠져 있었어. 모두 함께 나갈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하고."

"모두 함께?"

그 말에 방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이 날 보기 시작했다.

뭐야, 나한테는 그게 조건인 양 얘기해 놓고 아직 다른 사람들한텐 이야기 안 한 거야?

"그게 무슨 소린가?"

사람들의 시선이 나와 바바라에게 모였다.

나는 바바라가 뭐라 이야기하기 전 그들을 향해 먼저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저는 바바라를 데리러 나가기 위해 이곳에 왔어요. 마나를 쓸 수 있고, 바바라를 데리고 나갈 수 있죠."

"아...."

모두의 시선이 바바라에게 박혔다.

안타까움과 안쓰러움, 그리고 안심까지.

대체로 호의적인 시선들이었다.

"하지만 바바라가 안 나가겠다더군요. 여러분들을 떼어 놓고 나갈 수 없다고. 그래서 생각을 좀 해 봤습니다. 여러분들을 다 데리고 나가는 걸로요."

"그게 가능할까?"

하얀 머리를 곱게 뒤로 빗어 넘긴 중년 아저씨가 나에게 질문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하게 해야죠."

나는 천천히 여기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열 명 남짓.

그들의 시선이 이제 완전히 나에게로 모여 있었다.

"어떻게? 이곳은 다른 곳이 아니라 뇌옥요새 트팔로야. 우리가 나가고 싶다고 마음대로 나갈 수 있는 어설픈 감옥이 아니라고."

그건 맞다.

당장 지하 4층에서 지상까지 나간다 하더라도 배를 타고 한참을 가야 했다.

더군다나 간수장 마르쿠제와 기사들.

마르쿠제를 내가 맡는다 하더라도 다른 간수들이 이들을 공격한다면 모두 막아 줄 자신이 없었다.

하다못해 소드 마스터 한 명이라도 더 있었다면 좋으련만.

그런 생각을 할 때.

갑자기 불쑥, 그림자에서 사람 한 명이 나타났다.

"탈출, 도와?"

"...앨리스 씨?!"

가, 갑자기 나타나니까 놀랐잖아요.

도대체 어떻게 이곳에 나타난 겁니까!

전혀 생각지도 못한 움직임에 심장이 벌렁거린다.

룸펜 하운드도 등 뒤에서 칼에 찔렸을 때 이런 기분이었을까.

"누구?"

사람들 역시 갑자기 나타난 앨리스 씨를 경계하며 두어 걸음 거리를 벌렸다.

유일하게 내 곁에 남아 있는 건 바바라밖에 없었다.

바바라는 뭔가 경계 어린 시선으로 앨리스의 위아래를 훑어보았다.

"라워드, 이 여자는?"

"아아, 앨리스 씨야. 그때 얘기했지? 내 호위로 따라왔다던 헬피온 공작령의 하녀."

"하녀... 그런 사람이 왜 여기에 있죠? 아니, 왜 이제 나타난 거죠?"

"위험... 잠입... 여기 귀찮은 것 잔뜩."

"언제부터 있던 겁니까?"

"라워드... 체포."

허, 참.

마탑에서 체포될 때부터 은신해 날 계속 따라다녔단 말이야?

그렇다면 그 끔찍했던 배 안에서도 내 모습을 계속 지켜보고 있었단 거구나.

참 여러모로 대단한 사람이었다.

"방금 그 몸놀림... 나이트캣 암살단의 기예인 듯하군. 숨소리는 물론이거니와 심장박동까지 숨겨 놓는 상승의 기예."

진의 감탄 어린 목소리에 앨리스 씨는 어쩐지 살짝 으쓱해진 듯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하녀장 비기."

그렇구나.

저 묘한 몸놀림도 기예였구나.

확실히 세상은 아는 만큼 보이는 모양이었다.

이렇게 오늘도 무술에 대한 지식 하나를 얻어 갑니다.

"이런 암살자가 우릴 돕는다면... 확실히 모두 탈출할 가능성이 높아지겠군."

나는 진의 중얼거림에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소드 마스터가 한 명 정도만 더 있었으면 하던 차였으니.

이 정도라면 승부수를 던져 볼 수 있을 듯했다.

"이틀 뒤, 감옥의 마법을 보수하고 점검하기 위해 탈리오 마탑주가 트팔로를 방문할 겁니다. 그는 절 도와주는 사람입니다."

"그를 통해서 탈출하나?"

"아뇨. 아마 그렇게 되진 않을 겁니다. 마르쿠제가 그 계획을 알거든요. 원래 탈출하기로 한 건 바바라와 저, 두 사람뿐이었어요. 탈리오 마탑주와 나가는 건 바바라 혼자입니다."

"뭐? 잠깐, 라워드!"

나는 무언가 말하려는 바바라의 어깨를 짚고 고개를 저었다.

"아직 이야기 안 끝났어. 그렇게 바바라를 보낸 순간, 저는 거기서 다시 한번 소란을 피울 겁니다. 탈리오 영감님은 제게 빚이 있어 절 공격하거나 하진 못할 겁니다."

"시선을 끌겠다는 건가?"

"네. 그 사이에 여러분들은 앨리스와 함께 탈출하시면 됩니다."

"단순히 그것만으로 우리가...."

확실히 사람들의 지적처럼 그것만으로는 계획이 너무 단순하지.

하지만 내게 다른 생각이 있단 말씀.

진의 어깨 위에서 편하게 달랑달랑 오며 이런저런 계획을 짠 게 있거든.

나는 사람들을 모아 계획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 * *

"일단 감옥 전체를 뒤흔들 겁니다."

"세력 판도를 건드리겠다는 건가?"

바깥에서 전략관으로 지냈다던 페른 아저씨의 분석에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배운 사람은 이런 의도를 곧바로 파악해 내는구나.

"네. 이틀 뒤엔 큰 혼란이 있어야 합니다. 내부에서도 외부에서도. 이런 10명 남짓한 사람들에겐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을 만큼."

"우리는 그럼 선두에서 앞장서진 않겠구나."

바바라 역시 델피 아카데미 소속이란 짬이 어디 가는 건 아니었다.

나와 페른 아저씨의 이야기에 핵심을 바로 잡아냈으니까.

"그래. 간수들과 기사랑 맞서 위를 뚫는 건 다른 죄수들이 할 거야. 물론 나와 앨리스는 여기에서 앞장서야겠지. 녀석들이 의심을 하면 안 되니까."

"정리된 통로를 천천히 올라가는 거군. 앞에서 싸울 죄수들을 화살받이로 내세우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화살받이라고 생각 못 하게 해야죠. 그러기 위해서 제가 앞에 서는 거구요. 경쟁을 시키는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준비해 놓은 미끼도 충분했다.

그리고 그들이 배신하지 못할 보험도 들어 두었다.

"탈출을 위해 시간제한을 걸 예정입니다. 제가 배에 도착하는 순간 바로 배는 떠날 거다. 그렇게 엄포를 놓으면 녀석들이 미친 듯 달려들겠죠."

"자기들끼리 배를 타고 나가면... 그건 안 되겠군. 다른 배들이나 라그나 왕국에 있는 자들에게 금방 잡힐 테니까."

"네. 제 능력을 이용해 배를 움직이는 거니 저를 무시하거나 배제할 수 없죠. 그러니 여러분을 건드리지는 않을 겁니다. 혹시 모르니까 작은 조치를 취할 거지만요."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보험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겠지.

"조치?"

나는 바바라를 불러 곁에 앉혔다.

"발목 내밀어 봐. 족쇄 좀 보여 줘."

"이거?"

바바라의 족쇄는 그녀의 발목에 걸린 지 오래된 세월을 증명하는 듯 이곳저곳에 긁힌 흔적으로 엉망진창이었다.

이런 걸 달고 생활하고 있었다니.

슬픈 감회가 밀려들지만 지금은 이런 감상에 빠질 때가 아니지.

나는 세상에 가득한 마나를 느끼며 족쇄 근처의 흐름을 보기 위해 집중했다.

광장에서 녀석들이 그랬지.

족쇄가 있다 하더라도 8써클이나 소드 마스터 상급의 능력은 봉인할 수 없다고.

그 말뜻은 이 족쇄가 수용할 수 있는 마나량에는 한계가 있단 소리겠지.

그렇다면 이건 어떨까.

나는 의도적으로 이 공간에 가득한 마나를 이 자그마한 족쇄에 밀어 넣었다.

"앗, 뜨거!"

"미안, 조금만 참아."

족쇄는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고, 이내 툭, 소리를 내면서 끊어지며 바바라의 발목이 그대로 드러났다.

오랫동안 족쇄를 차고 있었던 탓에 쇠에 눌린 자국, 그리고 방금의 작업 때문에 살짝 달아오른 붉은 화상까지.

"아...!"

그렇지만 지금 얻게 된 자유의 해방감보다 저깟 고통이 문제일까.

바바라의 눈이 약간 빨갛게 물들었다.

사람들 역시 족쇄가 풀린 것을 보고 오오, 하는 소리와 함께 입을 동그랗게 모았다.

"일이 있기 전 모든 사람들의 족쇄를 다 풀어놓을 겁니다. 이 개미굴까지 오는 길은 외웠어요. 배급 시간은 저만 바깥으로 나갈 거구요. 그 동안 여러분들은 마나를 모으고 컨디션을 회복하세요."

"나, 나! 나도 얼른 이것 좀 풀어 주게!"

"서둘지 마세요. 어차피 모두 해 드릴 거니까. 일단 멜빌 아주머니부터. 제가 사람들을 풀면 힐링으로 화상부터 치료해 주세요."

"응, 응! 그럴게!"

나는 그렇게 단 한 사람을 제외한 모든 사람의 족쇄를 하나씩 풀어 주었다.

사람들은 뭐라 형용할 수 없는 표정으로 제 몸을 점검하며 감상에 빠져 있었다.

그중 감상에 빠지지 않는 사람은 애초에 마나를 갖고 있지 않았던 한과 페른 아저씨밖에 없었다.

한은 제 발을 구속하던 작은 쇳덩이가 없어져 몸이 가벼워진 게 마음에 드는 듯 폴짝폴짝 뛰어다니긴 했지만.

"상대를 휘두르려면 역시 리더를 찾아가는 게 낫겠지?"

나는 페른 아저씨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좀 요란하게 찾아갈 셈입니다."

"의도적으로 다른 그룹에게도 노출되겠다는 거군."

"네. 네르마 쪽 그룹이랑은 이미 한 번 만났으니까 다른 그룹이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다른 그룹이라면 에른하르트와 샤론, 거기에 네클리우스 세 그룹이 남았군."

에른하르트는 연쇄살인범.

샤론은 성범죄자.

그리고 네클리우스가 정치범 쪽의 대표인가.

"그중 누굴 만나는 게 가장 파급력이 좋을까요?"

"에른하르트."

바바라와 페른 아저씨가 동시에 한 사람을 지목했다.

"왜죠?"

"여기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모두 다 에른하르트를 주목하니까. 거기에 한 번 방문하면 감옥 바닥에 소문이 죽 날 거야."

그렇다면 한 번에 많은 일을 처리할 수 있겠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를 만나고 오면 샤론이 자넬 찾아올 거야. 조심성이 많고 이곳 정세 파악에 열중이니까."

페른 아저씨는 이곳 리더들의 성격을 하나둘 알려 주기 시작했다.

네르마는 폭력적이고 성격이 급한 듯 보이지만 제 식구를 감싸고 잘 챙긴다고 한다.

아마 탈옥이 시작되고 소란이 일면 제 식구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적극적으로 나설 거라고.

에른하르트는 남들보다 튀길 좋아하는 사람이라 판만 깔아 두면 제멋대로 날뛸 거라고.

조금 주의해야 할 것은 그들의 부하인데 워낙 파악하기 힘들 정도로 종잡을 수 없는 만큼 조심해야 할 거랬다.

이 부분은 진이 알아서 해 주겠지.

족쇄를 풀어 주면 제 몫을 충분히 할 테니까.

그리고 샤론은....

"그 여자는 위험해."

어느덧 감정을 수습한 바바라가 곁으로 다가왔다.

"주변 사람을 잔뜩 이용하지만, 어느 순간 그 사람들이 사라져 있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사라졌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그녀가 성범죄자들을 어떻게 규합했는지 아는 사람도 없어. 어느 순간 감옥에 있었고, 어느 순간 그들을 지배했으니까."

"그렇다고 네클리우스를 데리고 올 수 없네. 샤론도 샤론이지만 네클리우스는 더 위험해."

다른 범죄자들은 몰라도, 그 이름만큼은 들어 본 적 있다.

왜냐면 역사 교과서에 나오는 이름이거든.

네클리우스 바이리토.

모략을 통해 20년 전 작은 공국의 공왕을 털어먹은 사기꾼.

녀석은 현자로 위장해 공국, 공왕의 막내딸을 달콤한 말로 꾀어냈다.

그러고는 결국 제 딸이 아버지까지 찌르게 만들었다.

거기다 형제와 남매 사이를 이간질해 서로 죽고 죽이게 만드는 과정에서 공국의 재산을 빼돌렸고 말이야.

우연한 기회에 그곳을 지나던 성기사단이 아니었다면 그의 계획은 성공적이었으리라.

성기사단은 암운에 뒤덮인 공국의 상황을 흑마법사의 모략이라 판단했고, 그 결과 뱀의 혓바닥을 가진 모략꾼 네클리우스를 적발해 냈다.

실제로 녀석은 미약하나마 정신계열 흑마법을 사용하는 놈이었고, 결국 이단 재판 끝에 이곳 트팔로에 수감되었다.

"가급적이면 정치범 수용소의 녀석들은 배제하려고 합니다. 녀석들의 혓바닥은 위험해요. 우리의 계획을 눈치채고 죄수들을 경합한다면 오히려 독이 될 겁니다."

"동의하네."

이걸로 모든 작전은 다 세워졌다.

"그럼 언제 에른하르트를 만나러 갈 건가?"

"내일 아침이요."

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73화

<73화 - 굿모닝, 굿애프터눈, 굿이브닝(1)>

다음 날 아침.

나는 광장으로 가자마자 진이 알려 준 곳으로 걸어갔다.

"넌...."

그곳은 바로 연쇄살인범들이 모여 있는 그룹의 개미굴 입구.

그곳에서 망을 보던 길잡이가 날 보고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뭐냐."

"리더를 보고 싶어요. 광장에서 저번에 봤던 사팔뜨기 분. 전하시죠. 신입이 좀 보잔다고."

일부러 좀 건방지게 말해 보았지만 길잡이는 의뭉스럽다는 표정만 지은 채 내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듣던 대로 기분 나쁜 시선이군.

곧, 길잡이 녀석은 개미굴 안쪽에 있는 사내에게 뭔가 이야기를 전했고, 이내 안쪽에서 다시 다른 사람이 내게로 다가왔다.

"손에 무기는 없겠지?"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양 손바닥을 보였다.

그러나 녀석은 그것만으로는 안심이 되지 않는지 손바닥으로 더듬더듬 내 몸을 만지며 무기가 있나 없나를 살폈다.

"제가 싸우는 걸 봤으면 이게 별로 의미 없는 행동인 걸 아실 텐데."

"의미는 우리가 결정한다."

그러시든가.

녀석은 발목과 신발까지 꼼꼼히 점검한 뒤에야 몸을 돌려 안내를 시작했다.

과묵한 녀석이군.

나는 녀석을 따라 묵묵히 길을 걸었다.

단지 진을 따라갈 때와는 달리 적지를 향해 가는 것이다 보니, 마나를 최대한 전개하고 긴장감을 끌어 올렸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공격해 올지 모르니 긴장을 해 둬서 나쁠 것은 없지.

더군다나 이번에는 든든한 보험도 하나 있고.

"데려왔습니다."

"요이, 어서 오게."

길잡이의 안내를 따라 도착한 곳은 마치 마도공학자들이 연구한다는 공장 같은 풍경이었다.

어마어마한 넓이의 방엔 사람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었다.

저곳은 버섯을 재배하는 곳 같고, 저기는 곰팡이?

심지어 저건... 시체군.

박쥐의 시체나 모기의 시체, 저건 파리인가?

그리고 저건 사람의 시체.

감옥 안에서 독성이 생길 법한 거의 모든 것들이 다 갖춰져 있었다.

저 사팔뜨기 녀석, 독을 다루나?

이런 식으로 독 공장을 만들어 놓은 거였군.

무엇보다 그 모든 것들을 수용할 만큼 방이 넓었다.

얼핏 보기에도 바바라 그룹 방 크기의 다섯 배?

심지어 이 방이 끝이 아니다.

저쪽에 빛이 들어오는, 통로가 연결된 방이 두엇 정도 더 있어 보였다.

어마어마한 크기군.

그래서 다른 그룹의 놈들이 이 녀석을 두려워했나 보다.

바바라 녀석의 그룹은 진짜 힘이 없는 거구나.

에른하르트는 방의 가운데 서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흐흐, 대단하네. 그 짧은 시간에 몸이 다 낫다니. 역시 범상찮아. 젊음이 좋은 건가?"

"제가 마르쿠제 간수장한테 맞은 게 전 감옥에 소문이 났나 보네요."

하긴, 사람들이 많았으니, 소문 안 나면 이상했을 것이다.

"배식 시간이었잖나. 소문이 안 나는 것이 이상하지. 참 대단해. 바깥에 아무리 유명하다는 음유시인이나 영웅이 여길 들어왔다 해도 이 정도의 반응은 못 끌어냈을 거야."

"제가 어디에서나 이목을 좀 끌죠."

"크하하하, 그거지, 바로 그거야. 자넨 아무리 봐도 나랑 같은 족속이거든."

바바라에게 이 녀석의 성격을 들었는데 정말 그렇군. 

남들 눈에 띄기 좋아하고, 그런 이유로 연쇄살인까지 저지른 흉악마라고 했던가.

"크흐흐, 반갑다. 나는 에른하르트라고 한다."

녀석이 내게 손을 내밀었지만 나는 응대 없이 그저 손을 바라보기만 했다.

연보랗게 물든 손.

녀석의 손에는 어떤 독성 물질이 묻어 있을지 몰랐으니까.

"크흐, 아는군. 알았어, 알았어. 시험하려고 해서 미안하네."

녀석은 오히려 생긋 웃으며 양손을 양쪽 겨드랑이 쪽에 집어넣으며 유사 팔짱을 꼈다.

"그래. 날 찾은 건 우리 팀에 들어오기 위해서인가?"

"흠. 그건 아닙니다."

"그래? 그건 아쉬운데. 그렇다면 여길 왜 온 거지?"

그는 흥미롭다는 듯이 눈을 데굴데굴 굴려 댔다.

"제안을 하기 위해서죠."

내 말에 그가 즉각 반응했다.

"제안? 이 감옥을 들썩이게 할 만한 건가?"

어휴, 상상력은 많이 부족해 보이시네.

겨우 무대를 감옥에 한정하다니.

"고작 전 감옥에 소문이 나는 걸 대단하게 여긴다면 실망인데. 제가 여기 온 이유는 라그나 왕국 전체, 아니, 세계 전체에 이름을 알릴 수 있는 기회를 소개하기 위해서거든요."

빙고.

내 말이 끝나자마자 에른하르트의 두 눈이 번뜩이더니 곧 입이 옆으로 쭉 째졌다.

"세계라고?"

"세계."

그가 놀랐는지 나에게 다시 한번 확신을 받았다.

"세계라. 너처럼 대단한 놈이 얘기하는 거니 거짓은 아닐 테지만 과연 어떤 방법이 있을까."

에른하르트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져 갔다.

"그...."

"아니아니, 잠깐. 네가 이야기하지 마. 내가 찾아볼 테니. 옳커니. 마르쿠제 간수장을 죽이는 건가?"

"아뇨."

그가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게 눈에 보였다.

눈은 더욱 빠르게 움직이고, 쭉 째진 입에선 침까지 흐르기 시작했다.

윽, 드러워.

"그렇다면 혹시 내가 늘 주장하는 것처럼 독으로 모든 녀석들을 독살시키는 건가?! 크으, 라그나 뇌옥의 모든 죄수와 간수가 사망! 이런 거라면 아무렴, 전 세계에 유명해질 수 있지."

진짜 지독한 새X 같으니.

평소에도 그런 이야기를 계속하고 다닌단 말이지.

나는 최대한 끔찍한 심정을 티 내지 않으려고 녀석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녀석의 사팔뜨기 눈은 제 생각을 정리하느라 디룩디룩 구르는 것에 여념이 없었다.

"아냐아냐, 단순히 독으로는 여기 있는 자들을 모두 죽일 수 없지. 마르쿠제 간수장은 마나가 강하니 내성이 있을 테니. 그리고 너도 말이지."

이제 헛소리를 끊어 낼 때다.

안 그러면 이야기가 진행되지 않을 듯싶었다.

"집단 탈옥을 할 겁니다."

내 말에 사팔뜨기의 움직임이 뚝, 하고 멈췄다.

처음엔 뭔가 아쉬운 표정인가 싶었는데 1, 2초가 지나니 갑자기 히죽 웃는 표정이 된다.

또 몇 초가 지나니 화난 표정이 되었다가, 다시 슬픈 표정이, 그리고 다시 웃는 표정이 되었다.

섬뜩한 건 녀석의 얼굴에서 드러난 표정이 단순히 연극배우의 과장된 연기 같은 게 아니라 진심이었단 점이다.

화난 표정일 땐 찌를 듯한 살기가 느껴졌고, 슬픈 표정일 땐 금방이라도 울음을 쏟을 것 같은 비애감이 느껴졌으니까.

녀석은 잊었던 존재를 떠올린 듯 눈을 끔뻑이다 날 바라보았다.

"크흐흐, 미안해. 네 말을 들으니까 참 내가 바보 같단 생각이 들어서. 탈옥. 그 좋은 걸 내가 왜 생각을 못 했지? 그래서 화도 나고 슬프기도 하다가, 이런 생각이 들더라구."

녀석은 양 겨드랑이에서 손을 빼내곤 히죽 웃었다.

"사실 탈옥, 내가 10년 전쯤에 생각해 봤던 거 아닐까? 암암, 맞아. 생각해 봤었어."

"그런데 왜 그만뒀죠?"

하긴 생각 안 했을 리 없다.

"내가 그걸 왜 포기했는지도 생각해 냈지. 바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망망대해를 탈출할 생각이 안 나더라구."

"바다는 자신이 없었나요?"

"케헤헤, 그럼 넌 1주일 넘게 갤리온으로 항해해야 하는 그 거리를 헤엄이라도 치시려구?"

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거기서부터의 이야기는 탈옥한 이후의 즐거움으로 남겨 두죠. 계획도 있고 성공률도 높으니까요."

"크흐, 거래를 할 줄 아는군. 맛있는 파이를 남겨 둘 줄 알아. 좋아 좋아. 그럼 내가 할 일은 뭐지?"

나는 사팔뜨기에게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내일 대마법사가 마법진을 보수하러 들어올 겁니다. 전 그때 소란을 피울 거예요. 당신은 사람들과 함께 올라와서 간수들을 처리하면 됩니다."

그는 정말 신나 하고 있었다.

탈옥이 아니라, 탈옥이 만들어 낼 그 소란을 말이다.

"와우, 간수들, 그래. 간수들을 죽이면 된다는 거지? 어떻게? 질식시킬까? 아니면 흐물흐물하게 녹여 버릴까?"

"아무렇게나."

나는 끔찍한 질문을 최대한 덤덤한 표정으로 넘겼다.

"흐흐, 그래그래."

에른하르트는 뭐가 즐거운지 이제 콧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이놈.

바바라를 두고 언제라도 죽일 수 있는 것처럼 이야기한 놈이었다.

혹시 모를 일은 대비해 두도록 할까.

그리고 난 그럴 힘이 있고.

"어이."

"응?"

나는 손을 내밀어 에른하르트의 오른손을 맞잡았다.

"으잉?"

"아까 인사를 하지 않았으니 이제 해야지. 라워드 고르뎀이다. 네가 평생 기억하게 될 이름이지."

그러곤 동시에 녀석의 손을 꽉 우겨 쥐었다.

"으어억?"

녀석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은색으로 물들었다.

식은땀을 뻘뻘 흘리는 녀석이 날 보며 덜덜 떨리는 이를 겨우겨우 악다물고 웃었다.

"와우, 와, 우와, 으어?"

"독? 상관없다. 네놈이 날 중독시킬 수 있으면 중독시켜 보도록. 나 역시 마르쿠제만큼이나 네 독에 자신이 있으니."

나는 남은 왼손으로 녀석의 양 뺨을 잡아 쥐고 가까이 끌어왔다.

"그러니 잘 기억해 둬. 너에게 뒤를 맡기는 건 네가 믿음직스러워서가 아니라 네가 제법 쓸모 있기 때문이란 걸. 혹여 바바라와 일행들에게 뭔가 문제가 생겼다? 그럼 가만두지 않겠어."

녀석은 무서워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녀석을 잠재울 방법은 따로 있었다.

"내가 널 죽이면 우리가 탈옥해도 네 이름이 알려지는 모든 길을 막아 버리겠어. 내가 그 정도 힘이 없을 것 같아?"

"으흐, 흐흐흐, 그, 그래, 알았어, 알았다고. 원, 성격도."

나는 녀석을 밀어냈다.

녀석이 비틀거리며 양 뺨을 양 손바닥으로 문질거렸다.

벌겋게 달아오른 뺨을 진정시킬 요량인가 보다.

"알았네, 젊은 친구. 라워드라고 했지? 크흐, 알았어. 탈옥이란 대 이벤트에 빠질 순 없지. 내일, 기대할게. 내가 가진 모든 재료들을 준비해 두지."

나는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그곳엔 아까 나를 안내해 온 길잡이가 있었다.

"돌아가겠어."

* * *

에른하르트.

정말 위험한 놈이긴 하지만 그 녀석뿐만 아니다.

그 방에 있는 모든 놈들의 정신이 조금씩은 나간 것 같았다.

에른하르트를 위협할 때, 탈옥을 언급했을 때.

녀석들이 동요할 만한 수많은 순간이 있었지만 마치 홀린 것처럼 우리 쪽에 아무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뭐랄까.

극도로 단련된 암살자 같다고 해야 하나?

그게 어쩌면 에른하르트의 농간일 수도 있고, 아니면 저 방의 성격이 그런 것일지도 모르지.

어쩌면 저 방의 리더가 에른하르트가 아닐지도 모르겠어.

에른하르트의 카리스마로는 저 사람들을 다 컨트롤 할 수 없어 보이거든.

그건 그렇고 작전은 성공인가?

나는 슬그머니 등 뒤로 뒷짐을 진 채 손가락으로 손등을 툭툭 하고 두드렸다.

그러자 이내 통로 깊은 어딘가에서 마나가 살짝 일렁거렸다.

성공이군.

이곳엔 나 혼자 온 게 아니다.

은신을 한 앨리스가 함께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팔자에도 없는 연기까지 하면서 에른하르트를 비롯한 사람들의 시선을 끈 거지.

물론 녀석이 바바라를 두고 했던 묘한 제스처나 대화 같은 걸 생각하면 소름이 끼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나서서 무력으로 위협하는 건 내 성격에 안 맞는단 말이야.

그래도 일이 잘 풀려서 두 번 이런 짓을 안 해도 되는 건 다행이군.

"뭐지?"

내 걸음 속도가 조금 느려지자 길잡이가 뒤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녀석에게 마주 웃어 주었다.

"그냥, 에른하르트라고 했던가? 그 사람 정말 정신이 나간 것 같네요."

내 넉살에 길잡이는 아무 대꾸 없이 고개를 돌린 채 다시 걸음을 옮겼다.

정말 연금술사의 호문클루스 같은 놈들이란 말이야.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갑자기 길잡이 앞에 사람 한 명이 나타나 길을 막았다.

"헬로?"

"...."

갑작스러운 난입에 길잡이가 급히 손목의 소매에서 날카로운 뼈 칼을 꺼내 잡았다.

그러나 인형은 마치 연체동물 같은 움직임으로 길잡이의 뒤로 돌아가더니 그를 껴안았다.

아니, 껴안은 게 아니라 질식시키기 위해 목을 조른 거였다.

어느덧 강하게 말아 쥔 상의의 옷깃과 팔, 그리고 손 등이 묘하게 교차되더니 길잡이의 숨통은 단단히 옥죄어 차단되었다.

"크헉, 켁, 켁!"

"오빠, 잠깐 잠들어용. 나는 저쪽 오빠랑 이렇고 저런 시간이 필요하니까?"

손발을 버둥거리던 길잡이가 그대로 바닥에 허물어졌다.

어렵지 않게 그를 제압한 것은 광장에서 봤던 그 여성이었다.

"안녀어어어엉! 반가워 오빠! 하하, 그때 난쟁이 녀석이 워낙 방해를 해서 단란하게 이야기 한 번 못 나눠 봤네? 샤론이라고 해용!"

여자는 성큼성큼 다가와 쾌활하게 웃었다.

아주 자연스럽게 내 곁으로 다가와 팔짱을 끼려는 듯해 슬그머니 한 걸음 물러났더니 어머, 하고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물러났다.

"대단하네? 간격을 안 주는 거야? 에이. 저렇게 금방금방 보내 버리는 건 저렇게 매력 없는 목석들한테나 하는 거야. 나는 오빠가 마음에 들었는걸?"

"용무가 뭐죠? 다른 그룹의 개미굴까지 침범해 올 정도의 용무."

"흐응~ 다른 그룹에 와 있는 건 오빠도 마찬가지 아냐? 더군다나 그런 끔! 찍! 한! 용무라니. 어우, 야. 오빠, 무섭다."

그녀는 제 몸을 끌어안고는 소름끼친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나 호들갑도 잠시.

그녀가 씩 웃었다.

"탈옥할 거라며?"

"들었군요."

"응, 워낙 목소리가 커서 말이지. 우리 멋진 오빠가 뭐하나 쫓아다니다 보니 우. 연. 히. 들릴 정도로 큰 목소리더라구. 그래서 들어 버렸네? 어쩌나. 나는 죽기 싫은데 우리 간수장 아저씨한테 가서 이야기해야 할까?"

"원하는 게 뭐죠?"

그녀는 생긋 웃으며 폴짝거리는 걸음으로 한 번에 내 곁에 다가와 팔짱을 꼈다.

마치 이번에는 피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한 몸짓이었다.

"나도 끼워 줘. 나도 여길 나가고 싶거든. 어때? 나 이래 봬도 쓸모 많은 사람이라고."

"뭘 믿고요?"

"뭐, 아무거나 다 믿어도 좋아. 신뢰로 다져져도 좋고, 뭣하면 약속의 증표 같은 거 서로 새겨도 좋고. 그편이 좀 낭만적이긴 하다 야. 뭐 어때. 날 안 끼워 줘도 되긴 하는데, 그럼 난 바로 간수장 아저씨한테 오랜만에 아양 한 번 떨러 가고."

그녀가 팔에 노골적으로 밀착하며 교태를 부렸다.

나는 그녀의 팔을 떨쳐 내고 한 걸음 물러나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역시 오빠! 주먹만큼이나 화끈하네. 고마워, 고마워. 오랜만에 바깥 공기 좀 마시겠네. 선택을 후회하지 않게 해 주지!"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페른 아저씨와 바바라의 예상이 정확히 적중했다.

계획대로 나와 주니 내가 더 고맙지.

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74화

<74화 - 굿모닝, 굿애프터눈, 굿이브닝(2)>

샤론은 내 방까지 나를 따라왔다.

굳이 멤버들과 인사를 하겠다는 이유였다.

"안뇽~ 여러분 반가워~ 매일매일 얼굴은 봤지만 이렇게 여러분 방에 초대받는 건 처음이야! 우리 참 오래 봤는데도 이렇게 초대 한 번 안 해 주고, 여러분 참 야박해, 야박해."

개미굴을 통해 방에 복귀하자마자 샤론이 생긋 웃으며 넉살을 부렸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런 넉살에 넘어갈 리 없었다.

냉정한 눈빛이 샤론에게 꽂혔고, 샤론은 몸을 부르르 떨며 황홀한 표정으로 내 곁에 기대 팔짱을 꼈다.

"와, 이렇게 격렬한 환영이라니, 트팔로 온 이후 최고로 황홀한걸?"

"이곳엔 어쩐 일이지?"

바바라가 세모꼴이 된 눈으로 나와 샤론의 사이로 끼어들어 우릴 갈라놓으며 샤론을 노려보았다.

"어머나, 몰랐네. 이 오빠 언니 거야?"

"내가 물었어. 이곳에는 어쩐 일이냐고."

"아하하하, 걱정 마. 이런 곳에서까지 고리타분하게 일부일처제 지킬 필요 있어? 몸에 좋은 건 나눠 가져도 돼. 언니도 저 오빠 갖고, 나도 갖고. 이 오빠는 건강해서 그래도 될 것 같은데?"

훙, 하는 소리와 함께 바바라의 품속에 있던 낡은 흰색 뼈 곤봉이 샤론의 관자놀이 근처까지 휘둘러졌다.

곤봉이 그녀의 머리를 위협하며 멈출 때까지 샤론은 눈도 깜빡이지 않은 채 생글거렸다.

"왜 왔냐고 물었어. 똑같은 질문을 세 번 반복하게 하지 마. 다음엔 멈추지 않을 거니까."

"와하하, 언니 쌔끈하다. 하긴, 이런 사람들이어야 그런 계획을 세우지."

"계획이라니."

"어머, 이제 와서 모른 척하지 마. 이 오빠가 진중한 맛이 있긴 한데 알고 보면 입은 좀 가볍더라구. 아니 오빠, 그게 싫다는 건 아냐. 그래서 덕분에 계획을 다 들었거든. 내일 나간다며? 나도 나가고 싶어."

"우리가 널 뭘 믿고 동참시키지?"

바바라가 잔뜩 경계심 어린 목소리로 샤론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학창시절에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이었다.

"오빠랑 똑같은 소릴 하네. 믿고 싶지 않으면 안 믿어도 돼. 내가 뭘 할 수 있는지도 믿지 말고. 이를테면 간수장 베갯머리에서 송사 좀 할 수 있다는 소리 같은 거 말이야."

참 간 큰 여자야.

주변에서 이렇게 살기를 내뿜어 대는데도 당당하게 이런 소릴 지껄일 수 있다니.

"...뭘 할 수 있지?"

"불안하지? 에른하르트도 그렇고 네클리우스도 그렇고. 우리가 녀석들을 견제해 줄게."

샤론의 제안은 우리가 고민하던 고민의 핵심줄기를 관통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제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배배 꼬며 웃었다.

"우리끼리 경쟁하며 실리를 취하려는 거잖아? 거기에 속는 셈 치고 동참해 주겠다는 거야."

"우리 속셈을 알고 있다면 그러기 쉽지 않았을 텐데."

"부하는 상관없어. 나만 내보내 주면 돼. 바깥세상에서 아직 못다 한 일들이 많거든."

처음으로 샤론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 표정이야말로 샤론의 저 과장된 말투와 표정, 행동 속에 감춰진 진실일 것 같았다.

뭐, 잠깐 나타났다 사라졌기에 확실한 건 아무것도 알 수 없지만.

"내일 내가 행동을 시작하면 너희도 움직여. 너희들의 행동을 보고 너를 데리고 나갈지 말지를 결정하겠어."

"후후, 기대해도 좋아. 엄~청 화려하게 일을 저질러 줄 테니까 말이야"

* * *

에른하르트도 샤론도 각각 캐릭터가 명확한 탓에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기가 빨리는 듯했다.

더군다나 샤론이 떠난 직후 은근히 눈초리를 보내는 바바라도 심상치 않았고 말이야.

아아, 지친다.

저녁 배식 이후에 시간이 좀 많이 흐른 만큼 잘 시간이 되긴 했지만 아직 할 일이 하나 남았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잠드는 모습을 지켜보다 천천히 개미굴 바깥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곳에선 마치 내가 나오길 기다렸다는 듯 몸을 웅크린 채 무언가를 오물오물하는 노인네가 한 명 있었으니까.

"파르메시오 영감님, 안 주무셨나요?"

"엉? 안 자냐고? 안 자~ 늙으면 밤잠이 없어져."

"아쉽네요. 이런 밤이라면 달도 참 밝았을 텐데."

"달? 좋지. 달 보러 가는 거. 하지만 안 돼. 달 보면 제국의 놈들이 쫓아와. 그건 무서워."

그래, 제국.

바바라가 그랬지.

이 방은 제국의 시선이 무서워서 피해 도망 온 사람들의 방이라고.

그 이야기가 계속 맴돌더라고.

왜냐면 파르메시오 이 사람.

마나가 봉인되지 않았거든.

"파르메시오 영감님. 제가 왜 영감님의 족쇄를 풀지 않았는지 아십니까? 아마 아시겠죠. 족쇄를 풀 필요가 없었거든요."

"으엉? 뭐라고?"

"왜 그런 식으로 바보 흉내를 내고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영감님. 저는 당신을 압니다. 우연한 기회에 당신의 이름을 들은 적 있었으니까요. 혹시 영감님, 당신은 헬피온 공작령 근처에 있는 마왕성과 그 지하의 던전을 아십니까? 그리고 알바트론이라는 마법사를 아시나요?"

오물거리던 영감님의 입놀림이 멈추었다.

"괴성 알바트론. 그 사람이 그러더군요. 자신과 비등한 실력의 흑마법사가 바로 영감님이라구요. 왜 이런 곳에서 그런 모습으로 계신지는 모르겠습니다. 과거에 8써클이었으니 처음부터 그 족쇄는 아무 쓸모가 없었을 텐데 말이에요."

영감님은 콩벌레처럼 몸을 동그랗게 만 채 가만히 내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저흰 내일 나갈 겁니다. 영감님은 어쩌실 겁니까?"

"...자네가 제국이랑 싸운다고?"

처음으로 그의 음성이 진중해졌다.

"네."

"포기하게."

슬쩍 치켜뜬 눈.

백내장이라도 온 것인지 백태가 끼어 흐릿해진 눈 아래 희미한 공포감과 자조감이 담겨 있었다.

"자네는 제국을 몰라."

"아뇨, 압니다. 특임대를 통해 지저분한 일을 얼마나 잘하는지. 그들이 얼마나 흉포한 힘을 다루는지도."

"그래서 그러네. 자네는 고작 그것만 알아."

영감님의 고개가 다시 제 몸 안으로 수그러들었다.

"자네의 힘... 분명 대단하네. 하지만 무리야. 제국은, 그리고 황제는 무서운 사람일세."

"그럼에도 저는 싸울 겁니다."

나는 그의 걱정을 끊어 내듯 선언했다.

"아무리 강하고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저는 그럼에도 싸우겠다는 결심으로, 작은 가능성 하나라도 모두 끌어안기 위해 왔으니까요."

영감님은 답하지 않았다.

텄군.

저런 식으로 힘이 떨어진 걸 보니 아무리 설득해도 더 듣지 않을 것 같다.

나는 조금 더 영감님을 지켜보다 몸을 돌려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갔다.

이제 나도 쉬어야지.

그렇게 쉬려던 찰나.

영감님이 아주 작은 목소리로 뭔가를 중얼거렸다.

"아카식 레코드...."

지금 뭐라고 하셨죠?

방금 전까지 몰려온 졸음이 단숨에 사라졌다.

처음 감옥에 와서 파르메시오 영감님을 만났을 때 기대감을 가졌었다.

혹시 이 사람이라면 아카식 레코드와 관련된 이야기를 제한 없이 할 수 있을지 모른단 기대감.

아카식 레코드에 기록을 남긴 알바트론.

그리고 그와 견줬던 파르메시오.

그러니 이 사람 역시도 아카식 레코드의 존재를 알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그의 입에서 나온 아카식 레코드의 언급이 기꺼웠던 것이다.

그러나 영감님의 이야기는 내가 원하는 방향의 얘기가 아니었다.

"아카식 레코드를 조심해야 해."

"네? 아카식 레코드를 조심하라구요?"

"제국... 제국은 거대한 흐름을 주시하고 있어. 과거, 현재, 미래를 잇는 힘. 그것을 제 것으로 만들려 하고 있다구. 네가 아무리 강한 힘을 가지고 있어도 제국을 이길 수 없는 건 그 때문이야."

이건 무슨 소리야.

제국이 아카식 레코드를 주시하고 있다니.

그건 이때까지 내가 생각하던 상식을 단숨에 깨 버리는 이야기였다.

제국이 악당 아니었어?

그래서 알바트론이 말년에 제국과 그렇게 피 터지게 싸웠던 거 아니냐고.

아카식 레코드는 외신을 무찌르기 위해, 그리고 이 세계의 멸망을 막기 위해 생겨난 거라며.

누가 봐도 제국이 악당이잖아.

마기까지 다루는 특임대에, 수많은 사람들을 갈아 넣어 제물로 바치기까지 했으니까.

그런데 이제 와서 아카식 레코드를 조심하라고?

왜?

"영감님, 그게 무슨 소리예요. 좀 얘기해 봐요. 아카식 레코드, 그래, 그걸 좀 얘기해 보라구요."

"아카식 레코드를 조심해야 해... 제국, 제국이 온다! 그들은 어디에도 있고 언제나 있어!"

"영감님! 얼른요! 이야기해 보라고! 아카식 레코드가 잘못된 거라고? 그럴 리 없잖아! 난 알아, 영감님, 그 던전에서 1만 명의 제물을 바쳐서 뭘 했냐고! 그 기록이 아카식 레코드에 있었어! 아카식 레코드가 나에게 보여 줬다고!"

나는 급히 영감님에게 달려들어 양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그러나 영감님은 더욱더 제 몸 안으로 파고들 뿐이었다.

젠장, 무슨 노인네가 이렇게 힘이 좋아.

"영감니... 으억?!"

내가 움직이는 것보다 더 거대한 마나가 한차례 휘몰아치며 나를 밀어냈다.

마치 부드러운 손바닥과 같은 감촉으로 봄바람이 불어온 것만 같았는데 어느새 나는 영감님으로부터 대여섯 걸음을 밀려나 있었다.

정말 경악스러울 정도의 마나 컨트롤이구나.

아까부터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마나를 끌어 올리고 있었는데 단 한순간도 저항조차 하지 못했다니.

"...자네들끼리 나가게. 나는 여기에 있을 거야."

아무래도 이곳에 갇혀 있으려는 영감님의 의지는 강해 보였다.

제기랄.

좀 더 아카식 레코드나 제국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지만 저 상태에선 아무것도 이야기를 듣지 못할 것 같다.

후우.

깊은숨을 몰아 내쉬며 마음을 정리한다.

그래.

이런 상황이 한두 번이야?

아카식 레코드에 대해서 닿을 듯 말 듯한 건 처음이 아니잖아.

단지 한 걸음 걸어 나갔다는 것에 만족하자.

아카식 레코드를 조심하라는 거.

그 말뜻은 이렇게 마구잡이로 접속하다가 혹시 제국의 존재에게 내가 발각될 수도 있단 뜻이겠지.

하긴.

알바트론 같이 반제국 인사만 아카식 레코드에 접속하란 법은 없을 테니까.

그래.

그렇게 끊임없이 마음을 다잡았지만 아쉬운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결국 나는 몸을 돌리면서도 영감님에게 한 마디 쏘아붙일 수밖에 없었다.

"영감님. 영감님 말대로라면 제국은 이 트팔로에 있는 영감님조차 분명 발견한 지 오래일 겁니다. 그들이 영감님을 놔두는 까닭은 언제라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겠지요."

파르메시오는 내 말에도 웅크린 채 미동도 않았다.

"8써클 대마법사의 마법? 망망대해에 떨어져 있는 외딴 요새? 절 보세요. 그게 얼마나 무의미한지."

제국이 그럴 마음이 있다면 벌써 손을 썼겠지.

이 뇌옥은 절대 안전하지 않아.

그저 제국이 이곳까지 오기 귀찮아 할 뿐.

"그러니 영감님. 간수장 말처럼 언제라도 죽일 수 있는 버러지가 되지 말고 저희랑 나갑시다. 영감님의 힘이 있으면 분명 제국의 턱 밑까지 비수를 드리울 수 있을 테니까요."

나는 천천히 방으로 돌아갔다.

방에는 사람들이 모두 수면에 빠져 있었다.

그들의 근처에서 미묘한 마나의 잔향이 느껴졌다.

얼마나 강력한 마법이 시전 됐던 것인지 저쪽 벽 한구석에 앨리스 씨조차 새근새근 소리와 함께 숙면을 취하고 있을까.

아마 내가 자신을 따라 나오는 걸 안 파르메시오 영감이 몰래 마법을 시전한 모양이었다.

마나의 흐름엔 예민하다고 생각했는데 마법이 전개되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솔직히 지금 봐도 잘 모르겠다.

이게 과거 8써클 마스터였던 자의 힘인가.

탈리오 영감의 마법도 대단했지만 그래도 거대한 마법이 움직인다는 걸 알 수는 있었거든.

그런데 그냥 자연 그대로의 마나 상태에 의념만 담아 마법을 구현하는 경지라니.

9써클.

자연스럽게 그 경지가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하나 더.

그런 9써클 마법사조차 두려워하는 제국은 도대체 무엇일까.

그러고 보니 하나 궁금하긴 하군.

헬피온 공작은 지존이라 불릴 정도로 전 세계에서 가장 강한 검사잖아.

그런데도 그 사람을 보유한 라그나는 왕국이고 헬피온은 공작령이자 변경백이고 제국은 제국이지.

도대체 제국은 어떤 힘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그 괴물 같은 헬피온 공작과 마주해 권력을 유지할 수 있는 걸까.

내가 알지 못하는 게 너무 많다.

내일.

가급적이면 영감님을 데리고 나가고 싶은데.

일단 피곤하니 내일 생각해야지.

좀 자자.

이따 저녁에 일어나서 생각해야지.

아직 대낮이긴 했으나 나는 누워서 잠을 청했다.

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75화

<75화 - 굿모닝, 굿애프터눈, 굿이브닝(3)>

아직 초저녁. 탈옥 작전 시작을 기다리던 중이었다.

이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유용하게 잘 썼다 소문이 날까.

그런 고민을 하던 나는 진을 찾아가 무술에 대해 알려 달라고 부탁했다.

그때 네르마를 상대했던 몸짓이나, 기척을 감추는 방법 등이 궁금했거든.

더군다나 내일.

나는 마르쿠제를 상대로 시간을 벌어야 했다.

그런데 자신이 없다.

그때 마르쿠제가 마지막에 썼던 편술.

그때 상승 무술, 천라지망이라고 했던가?

다시 한번 그 기술을 받아 낸다고 생각해도 딱히 파훼법이 보이지 않았다.

마르쿠제만이 아니다.

처음 모에르와 붙었을 때에도 모에르가 이상한 검술을 휘둘렀었지.

그 검술을 버틴 건 요행에 가까웠다.

만약 탈리오 마탑에 찾아온 모에르가 제정신을 유지했더라면 간수장과 비슷하게 검을 쓰지 않았을까.

그럼 아마 더 힘든 싸움이 되었을 것이다.

이제는 단순히 검을 휘두르는 것을 뛰어넘어 보다 체계적인 검술이 필요한 시기가 아닐까?

그런 내게 진의 설명은 아리송하기 그지없는 이야기였다.

"제 몸을 이해하고 움직이는 게 아니라 상대의 몸을 내게 맞춘다고요?"

"이런 방식이다. 천천히 움직일 테니 내 주먹을 막거나 피하고 공격해 봐라. 한 번씩 움직임을 교차하는 거지."

나는 진의 설명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이 천천히 내 턱을 향해 팔을 휘둘렀다.

나는 몸을 뒤로 슬쩍 젖혀 몸을 피하고 진의 빈 공간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진은 그 상황에서 몸을 빙그르 회전하더니 내 다리를 노리고 수면차기를 걸어왔다.

느린 속도였으나 내 자세가 불안정한 걸 노린 절묘한 한 수였다.

나는 한쪽 다리로 폴짝 뛰어 몸을 피한 뒤 공격을 하려고 했지만 자세가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

그 순간 진의 어깨가 퉁, 하고 내 몸의 중심선, 명치께를 슬쩍 두드렸다.

"어, 어, 어...."

결국 나는 몸의 균형을 잃고 뒤로 쿵, 소리를 내며 넘어졌다.

"이게 무슨."

마치 밴시나 세이렌 같은 애들한테 홀린 기분이었다.

이거구나.

상대방의 반응을 한쪽으로 유도한 다음 상대방의 움직임을 예측해 반 박자, 또는 한 박자 빨리 몸을 움직이는 것이다.

마지막 진이 보여 준 어깨치기.

그건 내가 마치 그곳에 올 것을 예측이라도 한 것처럼 정확한 타이밍에 들어왔지.

더군다나 그 움직임은 단순한 공격이 아니었다.

만약 내가 거기에 없었어도 언제든지 다른 방식으로 몸짓을 진행해 공격이든 방어든 해냈을 거였다.

무엇보다 신기한 점은 움직임이나 박자가 아니었다.

선이 보이지 않았다.

진이 내게로 다가와서 손을 내밀었다.

"방금 우리가 한 것처럼 형식을 교환하는 걸 비무라고 한다."

"아, 어. 비무는 알아요. 대충 대련하는 거죠? 해 보기도 해 봤고. 기예 수련에서 말하는 비무랑은 좀 다르긴 하지만. 그것보다 방금 그, 진 씨의 어깨치기,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 왜 선이 안 보이죠?"

"선?"

나는 진의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저는 대충 상대가 어딜 어떻게 공격할지 알거든요. 그걸 전 선이 보인다고 해요. 어디서부터 공격이 나오고 어디로 다가오겠다. 하는 걸 아는 거죠."

"이런 식을 말하는 건가."

순간 진의 주먹이 허공을 수놓기 시작했다.

분명 사람의 손은 두 개가 분명한데 순식간에 수십 개의 주먹이 허공을 수놓았다.

금방이라도 전신을 구타할 것 같은 움직임 속에서, 선은 뚜렷하게 내 인중을 노리고 있었다.

나는 다시 한번 슥, 몸을 뒤로 젖혀 녀석의 주먹을 피했다.

진의 주먹은 정확히 내 인중 앞에 멈추었다.

"그렇군. 너는 육감이 좋군."

"본능적으로 공격이 들어올 것을 안다는 건가요?"

"단순한 본능은 아닐 것이다. 이를테면 흐름을 읽는 눈이 좋은 거지. 몸을 움직일 줄 알고 전체적인 흐름에 몸을 맡길 줄 아는 것 외에도 좋은 스승이 있었던 것 같다."

좋은 스승이라.

하긴.

내가 선을 보기 시작한 게 헬피온 공작의 검을 보고 나서부터였지.

그 아름다운 움직임을 따라하다 보니 어지간한 흐름을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본능적인 움직임. 상대가 더 높은 수준의 기예로 움직인다면 선은 보이지 않을 것이다. 이를테면 이렇게."

진은 다시 한번 주먹을 뻗었다.

아까는 수십 개의 환영이 허공을 수놓았다면 이번에는 정직할 정도로 곧은 정권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선은 보이지 않았다.

그 주먹이 정확히 내 가슴께에 도착해 툭, 하고 몸을 건드릴 때까지.

"이건...."

"처음 왔을 때 내 기척을 놓쳤다고 했나? 바로 그거다. 내 몸 전체를 자연 본연의 상태로 유지하는 것이지. 기예에선 이런 상태를 자연체라고 한다."

자연체라.

설명을 들으니 대충 감은 잡히는데.

결국 흐름 속에서 내 몸을 맡기는 게 아니라 나 역시 흐름 자체가 되라는 거구나.

이건 확실히 새로운 방식이긴 하네.

나는 이때까지 흐름을 이용해서 이동하거나, 또는 흐름을 조금 틀어서 마법을 구현하는 것만 생각했으니까.

대충 이렇게 하면 되나?

"그러나 이런 방식은 기예를 익힌 사람이 적어도 완숙한 화경의 경지, 그러니까 소드 마스터 중급은 되어야 사용할 수 있는 것으로...."

툭.

최대한 자연스럽게 뻗은 내 주먹이 진의 가슴을 건드렸다.

"아, 됐다."

"...."

진이 처음으로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제 가슴 쪽에 있는 내 주먹과 내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되네? 진. 그거 힘든 기예라고 하지 않았어?"

그의 심정을 대변하듯 옆에서 우리의 모습을 구경하던 바바라가 물었다.

별다른 대답 없이 가만히 서 있던 진이 슬쩍 한 걸음 뒤로 물러나서 내 주먹과 거리를 벌렸다.

"기예에 대해서 설명하지."

"방금 제가 성공한 거 맞죠?"

"소드 마스터 초급이라고 했지. 그렇다면 자연체를 구사하는 것도 분명 쉬운 일이었을 터. 그러나 기예는 다를 것이다. 무공은 엔틸 제국의 유구한 역사 속에서 수많은 선현의 노력과 종사들의 연구로 이루어진 것으로...."

뭐야, 방금 내 성공은 없는 셈 치고 그냥 설명을 진행하는 거야?

"애초에 무술이란 것은 약한 자가 강한 자를 상대하기 위해 고안한 몸짓이네. 그러니 본능과 힘에 의지한 움직임은, 기예에 질 수밖에...."

더군다나 지금 설명하는 내용.

어쩐지 자존심 상한 것 같은 느낌인데.

그러나 진은 다시 딱딱한 예의 표정을 한 채 제 설명만 이어 갈 뿐이었다.

"심상."

"응?"

"심상이 중요하다."

어라, 어디서 어떤 이야기를 하다가 거기로 넘어갔지?

워낙 잔소리로 주절주절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 같아 잠시 관심을 끊고 잡생각을 했더니 맥락을 놓쳤다.

내가 멀뚱히 바라보자 진은 한숨을 잠깐 쉬고 다시 입을 열었다.

"마법은 구현을 위해 머릿속으로 마법의 모습을 상상한다지. 기예의 개념도 일견 비슷하다. 자연을 가져와 내 몸에 담지."

거기까지 설명한 진은 조용히 몸을 움직였다.

양손을 마치 새의 날개처럼 활짝 펼치고 한쪽 다리를 들어 올린 채 몸을 곧추세웠다.

"새인가요?"

"기예 중 학의 자세라고 불리는 기예지. 그리고...."

진은 다시 몸을 거의 바닥에 닿을 정도로 낮추며 왼팔을 쭉 뻗었다.

손바닥을 바닥으로 향한 뒤 손가락을 이용해 오돌토돌한 이빨처럼 만들었는데 그 자세가 꼭 샤벨 타이거 같은 느낌이 들었다.

"호랑이?"

"그래."

그의 손이 기묘한 각도로 허공을 갈랐는데 그 모습이 마치 호랑이가 먹이를 낚아채는 장면 같았다.

"자연체와 이론은 동일하다. 마법은 자연의 힘을 모방해서 몸 바깥에 만들어 내는 거라면, 기예는 움직임을 몸 안에 자연스럽게 담아내는 거다."

"움직임이라."

"라워드. 네 움직임의 근원은 뭐지?"

근원이라.

내 움직임의 근원이라고 해 봤자 헬피온 공작의 선인데.

이걸 자연이라고 할 수 있나?

오히려 자연재해에 더 가깝지 않나.

뭐, 굳이 내 움직임에서 자연을 찾자면 자연 비슷한 게 하나 있긴 한데....

"바람?"

"바람이라. 어려운 자연을 골랐군."

그건 그렇지.

사실 바람의 길이나 이런 기술을 쓰고 있긴 한데, 정작 바람이 무엇인지 어떤 형태로 움직이는지는 아직 아리송하거든.

"그러나 불가능하지는 않다."

"네?"

진은 대답 대신 양손을 가볍게 말아 쥐고 몸 앞에 내밀었다.

달걀 하나 정도를 쥐고 있는 듯 살짝 벌어진 몸이나 어깨너비로 벌린 채 단단히 대지를 받치는 다리.

이건, 검술인가? 중단세 같은데.

"모든 기예와 무술은 평범한 무술과 상승의 무술로 나뉜다. 상승무술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 개념을 다루지. 지금 내가 보여 줄 것은 오래된 가문의 검술이다."

그는 자세를 잡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엔틸 상승고무술上昇古武術 창궁무애검법蒼穹無涯劍法 창궁비연검蒼穹飛燕劍이다."

처음 기술의 이름을 들었을 땐 오만하다고 생각했다.

푸른 하늘은 끝이 없다니.

도대체 어떤 검술이 그런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

그러나 검도 없이 펼쳐진 그 검은 정말로 푸른 하늘이라는 이름이 걸맞는 검술이었다.

마르쿠제의 천라지망을 봤을 때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피할 곳이 느껴지지 않는 느낌.

내가 뭘 하든 저 하늘 바깥으로 도망칠 수는 없겠다는 절망감.

내가 인지할 수 없는 저 높은 하늘에서 날아오는 날렵한 제비 한 마리.

그 제비가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내 목을 노리고 날아왔다.

"대충 이런 식이지."

나는 진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검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마치 내가 꿰뚫린 듯한 착각이 들었는데.

이게 엔틸 제국에서 황실의 일에 관여할 정도로 우수한 대장군의 힘인가.

대단하네.

"이처럼 자연을 모방하려는 기예 역시 존재하긴 하네. 적어도 나는 바람을 모방하는 기예를 모르지만, 이 세상 누군가는 알지도 모르지. 어쩌면 자네가 그런 무술을 만들어 낼지도 모르고."

나는 어쩐지 진의 이야기에서 묘한 예감이 들었다.

바람을 모방한 저 기예가 아카식 레코드에 분명 존재할 것이란 예감이, 그리고 그 무술은 언젠가 내게로 다가올 거라는 강한 직감이 들었다.

그때 나를 스콰렛 영지로 보냈던 헬피온 공작의 심정이 이랬겠군.

"알겠습니다."

"일단은 몸을 움직이는 기초 기예 몇 가지를 급하게나마 알려 주겠네. 내일 싸울 때 모르는 것보단 나을 거야."

* * *

"룰룰루."

빛조차 들어오지 않는 어두컴컴한 개미굴에서 작은 콧노래가 울려 퍼졌다.

평소의 트팔로였다면 이런 식의 즐거운 음악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결벽증을 가진 미치광이 간수장 마르쿠제의 폭력이나 에른하르트를 비롯한 미치광이들의 광기가 이곳을 가득 채우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오늘만큼은.

그리고 지금 잠깐 만큼은 이런 여유를 즐기는 것도 좋지 않을까.

샤론은 그렇게 생각하며 생긋 미소를 지었다.

지금 이렇게 가슴이 설레는 까닭은 명확했다.

이 통로의 끝에 그 남자가 있었으니까.

"헬로우, 안녕, 오빠?"

"너, 너는?"

갑작스러운 샤론의 등장에 사람들이 헐레벌떡 일어나며 경계태세를 취했다.

뼈 칼을 꺼내 드는 자들부터 주먹을 들어 올리는 자들까지.

샤론은 애송이들의 의미 없는 몸짓 너머 짜증 섞인 표정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난쟁이를 바라보았다.

"뭐고?"

"난쟁이 오빠. 진 오빠한테 한 대 맞아서 제정신이 아니라며?"

"이게 돌았나. 갑자기 뜬금없이 시비고."

샤론은 난쟁이의 목소리를 들으며 작은 희열을 느꼈다.

필사적으로 숨기려 했지만 그의 목소리에서는 당황과 공포가 느껴졌으니까.

그도 알고 있는 것이다.

자기가 내상을 입은 채 부하들의 보호를 받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이 트팔로에 들어온 이후 가장 위험한 순간이라는 것을.

"좋은 꼴 아닌 모습 다 구경했으면 가라. 승질 나니까."

"아하하. 오빠도 참. 이상한 소릴 하네. 좋은 꼴 아닌 모습이라니. 지금보다 더 처참한 모습을 보고 싶어 왔는데."

"뭐라고?"

샤론의 눈꼬리가 반달 모양으로 잔뜩 휘어졌다.

"내가 평소 같으면 그냥 내버려 뒀을 텐데, 오늘 아니면 기회가 없을 것 같더라구."

"뭐, 뭐꼬?"

그녀는 네르마가 던진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손가락을 들어 그녀의 바로 곁에서 경계하던 사내의 눈을 찔렀다.

"아아아아악! 눈, 내 눈!"

"저 미친X, 잡아라, 뭐하노!"

"꺄하하하하하하!"

주먹이 오가고, 옷이 찢어지고, 팔다리가 부러지고.

"뭐, 뭐고! 니가 왜 날?"

"죽어, 죽어어어!"

"사, 살려 줘! 으아아아!"

고함이 교차하는 그 자리에서 사람과 사람 역시 교차되어 누가 적인지 아군인지를 구분하기 힘들었다.

샤론은 그 사이에서 피범벅이 된 손과 발을 마음껏 휘둘렀다.

이윽고.

10분 정도가 지났을 때 그곳에서 살아 숨 쉬는 사람은 샤론 한 명밖에 없었다.

가장 마지막까지 아득바득 부하를 희생시키며 버티던 네르마도 결국 유명을 달리했다.

그의 등 위에 양반다리를 한 샤론이 눈을 감고 크게 호흡을 들이쉬었다.

"후~ 끝내주네. 몇 시간 뒤면 더 재미있어지겠지."

파티는 그렇게 라워드의 방과는 떨어진 곳에서 몇 시간 일찍, 시나브로 시작되고 있었다.

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76화

<76화 - 굿모닝, 굿애프터눈, 굿이브닝(4)>

"라워드, 바바라. 간수장님의 호출이다. 두 사람은 우릴 따라오도록."

아직 밤공기의 쌀쌀함이 채 가지도 않은 새벽.

간수 다섯 명이 우리 방까지 들어와 나와 바바라를 호출했다.

나와 바바라는 채비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실 채비라고 할 것도 없었다.

모든 물건을 압수당한 채 이루어진 감옥의 삶은 어떤 물건도 남기지 않았으니까.

"갈게."

바바라가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인사하며 눈짓했다.

간수들은 그런 바바라를 딱히 재촉하거나 말리지 않았다.

아마 바바라가 지금 나가는 것이 감옥을 완전히 떠난다는 걸 이미 알고 있는 눈초리였다.

하지만 그들은 몰랐으리라.

지금 바바라가, 그리고 내가 건네는 인사는 작별 인사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나누는 인사는 곧 있을 성대한 파티에 대해 결의를 다지고 각오를 다잡는 눈짓이라는 것을.

"그래."

진이 대표로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고, 우리는 그렇게 방을 나섰다.

간수 중 횃불을 들고 있는 사내가 가장 앞장서 길을 밝히며 걸었다.

통로를 나와 광장에 도착하자 그곳에서 뒤척이며 자고 있던 길잡이들이 게슴츠레 눈을 뜨고 우릴 바라보았다.

몇몇은 아예 관심을 꺼 버리고 돌아누웠지만 개중 몇몇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어디론가로 사라졌다.

아마 각 리더들에게 보고를 하기 위해 움직이는 거겠지.

그럼 곧 샤론과 에른하르트, 네클리우스와 네르마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리라.

"지금부터 다른 층을 통과해 간수장이 있는 곳까지 간다. 다른 곳으로 새지 않게 주의해 따라오도록."

우리는 얌전히 그들을 따라 지상 1층으로 움직였다.

바바라는 4층을 빠져나왔다는 사실이 뭔가 감상에 빠지게 되는지 감정적인 눈빛으로 날 바라보았다.

나는 그런 바바라의 손을 잡아 주며 걸었고, 곧 우리는 1층 간수장 접견실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간수들은 우리를 그곳까지 데려다준 후 곧바로 사라졌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되는 거겠지.

그렇게 집무실 안으로 들어가자 우릴 맞이한 건 나와 바바라의 소지품이 들어 있는 나무상자와 엄청나게 일그러진 마르쿠제의 표정이었다.

"왔나, 버러지들."

"이제 떠나는 마당인데 웃으며 배웅해 줘도 되지 않을까요?"

"감옥을 떠나는 게 아니라 이승을 떠나고 싶은 모양이군. 농담을 할 정신머리도 있고 말이다."

"아뇨. 지옥을 떠나서 이승으로 가니까 이렇게 농담을 할 수 있는 거지요."

으드득하고 이빨 가는 소리가 마르쿠제의 입에서 나왔다.

하지만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집무실에는 마르쿠제 말고도 우릴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 있었거든.

"쯧, 이곳에 와서 좀 갇혀 있으며 정신을 차렸겠거니 싶었는데 저놈의 혓바닥은 아직도 여전히 기름칠 되어 있구나."

눈에 낡은 두건을 쓴 채 툴툴거리는 영감님.

탈리오 마탑주가 벌써 도착해 있었던 것이다.

하긴, 저 간수장 성격에 탈리오 영감님이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우릴 먼저 불렀을 리 없지.

죄수들을 버러지라고 하며 함께 있는 걸 끔찍하게도 싫어하는데.

"옷을 갈아입고 나오도록."

마르쿠제는 영감님의 눈치를 보는 건지 슬그머니 턱짓으로 한쪽 방을 가리켰다.

나와 바바라는 번갈아 가며 그 방으로 들어가 죄수복을 벗고 평상복으로 갈아입었다.

후. 죄수복에서 퀴퀴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았는데 이제 좀 살 것 같군.

그리고 또 하나.

나는 밖에 아무렇게나 기대져 있던 내 두 자루의 검을 허리에 찼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온기가 일렁거리며 헬 파이어가 날 반겼다.

잿더미의 검에서도 뭔가 불쾌하고 습습한 기운이 올라오는 것 같은데 애써 무시했다.

이봐, 네가 날 반기기에는 우리 사이가 좀 껄쩍지근하지?

"준비 다 됐나?"

"영감님한텐 제가 할 말이 참 많이 있습니다."

"에잉, 귀찮게 됐군."

탈리오 영감이 귀찮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이 영감님이 내 말을 잘못 알아들으신 모양인데.

"할 말이 많다니까요. 얼른 가죠."

"뭬야? 이 녀석아. 내가 가자면 가고 오라면 오는 그런 사람인 줄 알아?! 이놈이 오냐오냐했더니 아주 기어오르려고 하는구나!"

말은 그렇게 까칠하게 하면서도 들어줄 거면서.

아니나 다를까, 영감님은 혀를 쯧쯧 차며 마르쿠제를 바라보았다.

"소회를 나눌 시간도 없겠군. 먼저 가겠네."

"아닙니다. 탈리오 님을 귀찮게 한 건 저 버러지들일 텐데 굳이 사과하실 필요 없습니다. 이자들을 내보낸 후에 작업을 진행하실 겁니까?"

"그래. 일단 이들은 내가 평소처럼 데리고 가마. 작업은 그 후일 게야."

"알겠습니다."

마르쿠제가 배웅이라도 하겠다는 듯 일어나 우릴 따라나섰으나 영감님이 고개를 내저었다.

"뭣 하러 따라 나오는 게야. 자네 일이나 하게. 한두 번도 아니고."

"하지만...."

"바쁜 사람 잡아 놓으면 마음이 편찮아. 그냥 있게. 자, 가자."

마르쿠제는 뭔가 미련이 남는 것처럼 우리를 빤히 쳐다보았고, 나는 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생긋 웃어 주었다.

오, 표정이 되게 스펙터클하게 일그러지시는구만.

가는 마당에도 뻔뻔한 게 마음에 안 드시나 봐.

조금만 기다리라고.

그렇게 아쉬워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곧 보게 될 거니 말이야.

아쉬워하는 건 너뿐만이 아니니까.

그렇게 나는 마르쿠제를 뒤로한 채 집무실을 나섰다.

집무실을 나선 우리는 아무리 큰 소리로 이야기하더라도 마르쿠제가 듣지 못할 정도까지 충분히 이동했다.

혹시나 싶어 탈리오 영감에게 소리를 차단하는 마법까지 걸어 달라 했으니 괜찮은 게 맞겠지.

"자, 이제 얘기해 봐라. 도대체 날 이만큼 귀찮게 하며 데려온 이유가 무엇이냐."

"탈옥시킬 사람이 더 있어요."

"뭬야?"

영감님의 양 눈썹이 사정없이 솟구쳤다.

"지금 장난하는 게야? 한 명을 탈출시킨다고 했더니 이제는 더 탈옥시킬 사람이 있다고? 이놈아, 탈옥이 장난인 줄 알아?!"

역시.

영감님이 이렇게 흥분해 고래고래 소리 지를 줄 알았지.

"내가 네놈에게 약속한 건 네 여자 한 명만 데리고 나가게 해 준다는 거였다!"

"네. 그래 주시면 됩니다."

"뭐라?"

"영감님은 바바라, 한 명만 데리고 잠시 바다 위에서 대기해 주시면 됩니다. 나머지 사람은 제가 탈옥시킬 테니까요."

"어허허허허. 허허허허."

내 말을 들은 탈리오 영감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네놈은 내가 왜 여기에 왔는지 듣지 못했더냐? 내가 여기 온 이유는 감옥을 보수하고 죄수들이 탈옥하거나 죄수들을 탈옥시키는 걸 방비하기 위함이야!"

"9써클."

내 말에 탈리오 영감이 입을 다물며 날 바라보았다.

"이놈. 이제는 말이면 다 되는 말인 줄...."

"훔볼트 영감님 얘기를 듣다가 이상한 점이 있더군요. 마탑주님의 연구 대상에는 인간의 장기와 뇌 등이 있었다고요. 그런데 탈리오 마탑에서 살아 있는 인간을 실험도구로 구하긴 힘들었을 것 같더라구요. 그럼 도대체 영감님은 실험을 어디서 어떻게 하셨을까."

거기까지 말을 꺼냈을 때 영감님은 입을 다문 채 완전히 침묵했다.

"아까 그랬죠. 평소처럼 데리고 나간다고. 그건 죄수들의 이야기가 아닙니까?"

내가 이곳에서 하루빨리 바바라를,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탈출시키려는 까닭에는 이 탓도 있다.

제국을 피해 숨어 있는다?

하지만 이곳도 안전한 곳이 아냐.

마르쿠제 같은 미친놈 외에도 영감님처럼 미친 사람들이 또 있으니까 말이야.

"...여기에 들어오는 놈들 중 감옥 안에서도 타인을 죽이고 날뛰는 놈들이 있지. 그렇게 죽어 마땅한 놈들을 제공받은 것뿐이야."

"영감님을 책망하려는 건 아닙니다. 단지 저는 방 안의 얼간이 녀석과 다르게 영감님이 그렇게 정의롭고 사명감에 찬 사람이 아닌 걸 알고 있다는 거죠."

"그래서, 내가 정의롭지 않으니 탈옥을 위해 난장판을 만드는 걸 용인하라?"

"아뇨. 아까 말씀드렸잖아요. 9써클."

"그게 무슨 말이냐."

"여기 죄수 중 9써클 마법사가 있거든요."

탈리오 영감과 바바라의 입이 떡, 하고 벌어졌다.

"너 지금 그 말 책임질 수 있느냐?"

"라워드, 9써클이라니. 설마 파르메시오 할아버지가 그...?"

영감님과 바바라는 날 잡아 놓고 좀 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모양이지만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순 없었다.

마르쿠제의 의심도 의심이지만 무엇보다 지하 4층의 상황도 걱정되었거든.

딱히 신호를 정해 놓았다기보단 위층에서 소란이 일어나기 시작하면... 정도로 느슨하게 잡아 놓은 거였으니.

"일단 모든 일이 끝나면 알려 드릴게요."

"그게 무슨, 네놈은 뭘 한 번에 알려 주는 법이 없느냐! 저번에도 편지를 다 쓰고 알려 주니 뭐니 미루기만 하더니!"

"이번에는 진짜예요. 그러니까 바바라나 잘 보살펴 주고 계세요."

나는 자신을 보모인 줄 아냐고 길길이 날뛰는 탈리오 영감님을 외면하고 바바라를 바라보았다.

"라워드...."

바바라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괜찮아."

"하지만...."

"이틀뿐이지만 봤잖아. 나 강해진 거."

"다치고 온 걸 봤지."

"아하하, 강해졌으니까 죽지 않고 다쳐서만 온 게 아닐까?"

찰싹, 하는 소리와 함께 바바라가 내 등을 때렸다.

하긴, 내가 생각해도 방금 그 농담은 영 별로였어.

"늦으면 안 돼."

"걱정 마."

그렇게 우리가 해후를 나누고 있자 그 사이를 탈리오 영감이 버럭 하고 끼어들었다.

"언제까지 시간을 끌 셈이야! 얼른 보내야 얼른 다시 만날 수 있는 게 아냐! 저 녀석, 목숨줄은 질겨서 이런 곳에서 죽을 놈은 아니니 걱정할 필요 없다!"

빨리 움직이자 재촉해 놓고선 어영부영 작별하고 있는 모습이 마음에 안 드시는 모양이었다.

그런 탈리오 영감의 짜증에 바바라는 뭐라 말을 더 잇지 못한 채 나와 영감님을 바라보았다.

아하하하.

저 표정, 아카데미 시절 자주 봤지.

교수가 강의한 내용이 마음에 안 드는데 그래도 상대가 교수니까 뭐라고 짜증을 낼 수는 없고.

그럴 때 속으로 한참 욕을 하고 있는 그런 표정이다.

저 표정을 보니까 어쩐지 과거 아카데미 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편안히 아카데미 수업을 들었던 게 벌써 10년이 되어 가는구나.

"바바라. 조금만 기다려. 금방 올게."

나는 영감님에게 가볍게 목례한 뒤 천천히 걸어왔던 길을 되짚어 돌아갔다.

뚜벅뚜벅.

잿더미의 검이 흉포한 마기를 드러내며 넘실거렸다.

마치 곧 다가올 전투를 대비해 검이 기대감에 가득 차 웃는 것만 같았다.

평소 같으면 끔찍할 녀석이지만, 오늘은 어쩐지 든든한 기분이 든다.

물론 헬 파이어 녀석도 아까부터 불길을 넘실거리며 흥분해 있기는 매한가지지만.

탁, 탁.

내 발걸음에 점차 속력이 붙었다.

영감님과 마르쿠제가 이미 이야기를 해 둔 덕분인지 간수는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아 움직이기에 무척 수월했다.

타다다다다.

나는 검들을 뽑아 들고 온몸에 마나를 회전시키며 앞으로 나아간다.

어쩐지 즐거운 마음이 들었다.

이때까지 내가 해 왔던 싸움은 해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휘말렸던 싸움들이었다.

내 공간을 위협했고 내 사람을 위협했기 때문에 해 왔던 싸움들.

그러나 지금은 내가 누군가를 구출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나서는 첫 싸움이다.

나는 눈앞에 보이는 마르쿠제 집무실의 문을 단숨에 걷어찼다.

쿠우우웅!

감옥 전체가 울릴 정도로 요란한 충격음과 함께 문이, 그리고 집무실의 입구가 박살 났다.

그 안에서 눈을 치켜뜬 채 앉아 있는 마르쿠제를 향해서.

검을 휘둘렀다.

콰과과광!

"덤벼라, 마르쿠제, 이 버러지 새X야!"

아, 속 시원해.

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77화

<77화 - 굿모닝, 굿애프터눈, 굿이브닝(5)>

잿더미의 검에서 나온 마기와 헬 파이어에서 나온 업화가 단숨에 방 전체를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

그 중심에 있던 마르쿠제가 급히 채찍을 꺼내 휘둘러 방어를 하는 듯했다.

하지만 바람의 길까지 사용해 휘두른 검을 모두 막는 건 무리지.

결국 마르쿠제는 우당탕쿵탕 하고 요란한 소리를 내며 집무실 구석에 처박혔다.

쿵, 하고 집무실의 천장이 무너져 바닥으로 툭, 하고 떨어졌다.

흙먼지가 비산했고, 저 먼 곳에서 사람들의 고함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나는 좀 더 집중력을 끌어 올리며 자세를 다잡았다.

이 공격으로 녀석을 해치울 수 있었으면 좋았겠으나 그러진 못한 것 같거든.

"...버러지."

당장이라도 내 몸을 꿰뚫을 기세로 수많은 선들이 흙먼지 속에서부터 날아오고 있었으니까.

끔찍할 정도의 환영이군.

채찍질에 당했던 트라우마가 올라오는 것 같단 말이지.

"탈리오 님은 어디 가고 네가 이렇게 날뛰는 거지?"

"바바라를 데려다주기 위해 잠시 나가셨죠. 저는 가지 않겠다고 남았고."

"남아?"

"여기 있다 보니까 다른 사람들이랑 정이 좀 들어서. 혼자만 나갈 수 없겠더라구요. 다른 사람들을 좀 데리고 나가야겠어요."

"...다른, 사람?"

흙먼지 안에서 마르쿠제가 중얼거렸다.

먼지를 잔뜩 들이마셨던 건지 딱딱하게 굳어 갈라진 목소리였다.

"네. 다른 사람들. 혹시 허락해 주신다면 그냥 얌전히 돌아갈 생각도 있어요. 방금 공격은 음... 그때 맞았던 채찍질과 버러지란 소리에 대한 반항 정도로 가볍게 넘어가 주시고요."

"아하하하, 하하하하. 하하."

내 농담이 제법 재미있는 모양이다.

저 딱딱한 녀석이 이렇게 미친 듯이 웃는 걸 보니까 말이야.

정말로 진심으로 웃어 줬다면 행복한 하루가 되었을 텐데.

나를 노리는 선들이 점차 진해지고 굵어진다.

이내 단 하나의 선이 뚜렷이 남았을 때.

선이 노리는 목을 향해 채찍이 날아왔다.

캉!

가죽 채찍과 검이 부딪친 거라곤 생각되지 않은 날카로운 충격음이 울려 퍼졌다.

마치 쇠와 쇠가 부딪친 것 같은 소리였다.

굵은 선이 순식간에 갈래갈래 찢어지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내 본능적인 감각이 그려 내는 선과 녀석의 무기가 거의 동시라고 해도 될 정도로 온몸을 두드린다.

하지만 일부러 힘을 숨기던 때와 지금은 다르다고!

전신의 마나를 몸과 몸 바깥에 고르게 두른 채 녀석의 채찍을 최대한 피하며 검을 휘둘렀다.

헬 파이어의 검신에서 불꽃이 폭발한다.

콰아아아앙!

집무실의 천장을 그대로 박살 내고도 꺼지지 않은 불꽃이 감옥 위쪽으로 끊임없이 솟구쳤다.

"으, 으아아악?!"

"이, 이건 뭐야? 불?"

"뜨거워! 뜨거워어어어어! 사람 살려!"

위쪽에서 죄수들의 것으로 보이는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람이 떨어지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지만, 거기에 신경 쓸 시간은 없었다.

마르쿠제의 귀기 어린 공격이 시작되고 있었으니까.

"죽어라! 버러지, 천산만수千山萬水!"

그가 뿌린 채찍이 묵직하게, 그러면서도 빠르게 사방을 훑으며 날아왔다.

위로는 굽이굽이 치는 산과 같고, 아래로는 여러 갈래의 강물과 같은 움직임이었다.

마치 거대한 산봉우리 위에서 자연경치를 관람하는 것과 같은 거대한 심상이 날 짓누른다.

이 자연경관 앞에서 내 존재는 한낱 먼지에 불과하다는 듯이.

그러나 이런 공격을 내가 곧이곧대로 맞아 줄 필요는 없잖아?

나는 바람의 길을 이용해 단숨에 집무실 바깥으로 몸을 날렸다.

"간수장님, 이게 무슨, 으악!?"

"피, 피해!"

소란을 듣고 달려온 간수들이 내 몸에 부딪쳐 사방으로 날아간다.

크으, 아파라.

그래도 몇 번 기술을 사용하며 몸을 좀 부딪쳐서 그런가.

예전보다 참을 만해.

"이 사단을 내놓고 도망치겠다는 거냐! 탈옥, 그래, 탈옥수들을 데리러 가는구나, 버러지 새X야!"

등 뒤에서 마르쿠제의 고함이 울려 퍼졌다.

거대한 마나가 몰려오는 것을 보아하니 완전히 열 받은 상태로 쫓아오는 모양이었다.

"어딜 도망가느냐! 이리 와! 맞서 싸워! 이 감옥에서 살고 죽는 건 모두 내 소관이란 말이다아아! 죽여 버릴 테다! 뼛가루 하나하나까지 씹어 먹을 테다아아아!"

우왓, 위험해라.

마르쿠제가 마구잡이로 휘두른 채찍에서 마치 윈드커터와 같은 검기가 마구잡이로 사방팔방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 기운은 적군과 아군은 물론이거니와 건물과 사람을 가리지 않았고, 감옥 사방팔방이 피해를 입고 폭발했다.

"으아아악! 모두 피해! 간수장님이 날뛰신다!"

오죽하면 간수들이 이런 고함까지 지르며 몸을 피할까.

그런데 착각한 게 있구나.

도망친다니.

잠시 네 기술을 피해 몸을 피한 거지, 난 도망칠 생각이 없어.

나는 잠시 심호흡을 한 뒤 몸을 점검했다.

좋아, 아까 뛰어나온 직후 불안정하던 마나들이 모두 안정되었구나.

그럼 다시 가야지.

"으랴아!"

나는 고함을 지르며 검을 휘둘렀고, 하얗게 눈이 뒤집어진 마르쿠제가 채찍을 휘두르며 응수해 왔다.

콰아앙!

거대한 타격음과 함께 다시금 건물이 부서졌다.

* * *

"시작된 모양이군."

페른이 불안한 표정으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아까부터 섬 전체를 울리는 듯한 진동 소리가 계속 울려 퍼졌고, 지하 감옥은 불길할 정도로 흔들거리고 있었다.

흙먼지가 천장에서 계속 떨어져 내리는 것이 금방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화려하게 날뛰는 모양이네."

"소드 마스터 중급 정도의 전사가 진심으로 부딪치고 있으니까요."

"우리 나가는 거야? 감옥 나갈 수 있어?"

진은 자기의 바지춤을 잡고 빤히 시선을 올려다보는 한을 바라보았다.

걸음마를 떼고 입이 트인 후, 주변을 인식할 때부터 감옥에서만 살아온 황태자.

그를 볼 때마다 마음속에 부채감이 가득했다.

제 실력이 부족해 이런 형편없는 곳에서 제국의 시선을 피해 살아야만 하다니.

생명을 하루하루 유지하는 것도 중요했지만, 희망조차 없는 삶을 유지하는 건 차라리 죽기보다 더한 고통이었다.

그러나 이제 기회가 생겼다.

"네, 도련님."

"하늘도 볼 수 있어?"

"네. 볼 수 있을 겁니다."

진은 그렇게 대답하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와아아-.

개미굴 바깥에서 묘한 소란이 일었다.

다른 사람들도 지금의 사태를 깨닫고 움직인 모양이었다.

"우리는 사태가 진정되면 최대한 늦게 움직일 겁니다. 모두 다 탈출하기 위해선 여기서 떨어지면 안 됩니다."

"그래, 그럼세."

"멜빌은 파르메시오 어르신을 부탁합니다."

진의 말에 멜빌이 고개를 끄덕이며 파르메시오를 업었다.

노인은 마치 이런 소란이 자신과 아무 관계가 없다는 듯 모포 속에서 몸을 동그랗게 만 채 잠에 빠져 있었다.

진이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있는 순간, 개미굴 바깥에서 한 사내가 뼈 칼을 든 채 소리 지르며 난입해 왔다.

"크흐흐, 진! 예전 배식 시간의 원한을 갚으러 왔, 크헉?"

그러나 그 사내는 몰랐다.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은 이미 족쇄가 풀려 있단 사실을.

감옥에 갇히기 전 화경의 경지에 달한 진이 제 몸의 감각을 극도로 끌어 올린 채 아까부터 다가오던 자신을 파악하고 있었음을.

사내가 개미굴을 통과해 방에 머리를 내미는 순간.

진은 사내의 머리를 낚아채 그대로 벽 안에 꽂아 넣었다.

쿠우우웅!

거대한 소리와 함께 벽 안 깊숙한 곳에 목까지 박혀 버린 사내를 뒤로한 채 진은 팔짱을 꼈다.

개미굴 저쪽에서 넘어오고 있는 기척은 이자 말고도 서넛 정도가 더 있었다.

그들을 다 처리한 뒤 천천히 이동할 생각이었다.

무엇보다 자신의 기감이 경고하고 있었다.

지금 광장은 지옥이라고 말이다.

* * *

"끄륵...."

피거품을 물며 쓰러지는 죄수를 보며 에른하르트는 황홀감에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만 같았다.

이 얼마 만에 느껴보는 단말마란 말인가.

생명을 얻어 이 세상에 태어난 족속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단 한 번만 단말마를 내지를 수 있었다.

그것은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 혈통이 좋은 사람과 천박한 사람을 가리지 않고 공평했다.

얼마나 아름다운가.

더군다나 이게 끝이 아니었다.

에른하르트의 아드레날린을 극한으로 끌어 올리는 두 가지 요소가 있었다.

하나는 아직 생명들이 잔뜩 남아 있기 때문이고 또 다른 하나는 지금 천장 위.

콰과과광!

끊임없이 울리는 저 진동음.

그 라워드라는 청년이 아주 화려하게 계획을 진행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무려 탈옥이었다.

그렇게 크레이지한 계획을 짜고 실행에 옮기는 또라이라니.

"흐흐흐."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침이 나올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즐거움을 단순히 라워드의 몫으로만 놔둘 수는 없었다.

그건 가장 맛있는 음식을 라워드에게 그저 헌납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으니 말이다.

에른하르트는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그러자 무표정한 얼굴의 부하 한 명이 흐느적거리는 움직임으로 철문을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건 인간이라고 부르기 애매했다.

왼발 다음에 오른발이 교차된다는 아주 기초적인 걸음걸이조차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손과 발이 제멋대로의 각도와 방향으로 움직이며 그저 나아가는 것 자체만 겨우겨우 수행하는 행위였다.

곧 철문에 도착한 부하가 철문을 끌어안았고 변화가 시작되었다.

남성의 흐리멍덩했던 검은자위가 눈꺼풀 위쪽으로 도륵, 하고 굴러 흰자위만 남았다.

곧 부하의 몸이 초록색으로 얼룩덜룩하게 물들며 거대하게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오-오-으옥?"

남성은 제 몸이 왜 그렇게 변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몇 차례 갸웃거렸다.

그러나 곧 제 몸과 목, 어깨와 배가 부풀어 올라 그러한 동작도 전혀 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콰앙!

거대한 충격음과 함께 남성의 몸이 터져 나갔다.

그 충격은 두꺼운 철문은 못 날릴지언정 철문 주변의 흙더미들을 정리하기엔 충분했다.

그렇게 균열을 살피던 에른하르트는 이내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잘됐군. 세 놈이면 나갈 수 있겠어."

그렇게 이야기하는 에른하르트의 등 뒤에는 거의 서른은 될 법한 인원이 도열해 있었다.

감옥에 숨겨 들어온 마약과 독으로 완전히 좀비화시켜 놓은 제 체스 말이었다.

더군다나 이 폭발에는 부과 효과마저 있었으니.

"크헉? 으허억...."

주변에서 에른하르트의 행동을 지켜보던 자들이 갑자기 온몸을 긁거나 목을 움켜쥔 채 쓰러졌다.

좀비 인간의 주원료가 독이니만큼 몸에서 숙성돼 터진 독성 연기가 사방으로 퍼져 나간 것이다.

쿵!

곧 몇 차례 더 자신의 부하들을 희생시켜 철문을 완전히 쓰러뜨린 에른하르트가 흥분된 기색으로 지하 3층을 올려다보았다.

공동 너머에서는 또 다른 소란이 벌어진 모양이었다.

동시에 그는 개미굴 안쪽 역시 힐끗거렸다.

'이 정도면 그때 날뛰었던 것의 보답은 충분했겠지.'

감히 제가 있는 곳까지 들어와 뺨을 부여잡고 그럴듯한 협박을 남겼겠다.

동료?

탈출해야 하는 사람들?

에른하르트에게 그런 것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마르쿠제의 방해 없이 지상 1층까지 나갈 수만 있다면 마약과 독으로 간수들을 중독시켜 배를 움직이면 되니까 말이다.

생각 같아선 마르쿠제와 라워드, 두 사람이 같이 결투 끝에 죽었으면 좋겠지만 그런 행운은 쉽게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이 그 행운을 직접 쟁취해야 하지 않겠나.

아무리 소드 마스터라도 지치고 힘든 상태에서 독에 중독된다면 버텨 낼 수가 없으리라.

'과연 소드 마스터도 이 독을 맡았을 때 버텨 낼 수 있을까? 내 비전의 조합독을 말이야!'

에른하르트는 기대감에 가득 차 켈켈 하는 웃음소리와 함께 걸음을 옮겼다.

* * *

"예상대로군."

눈과 입, 그리고 코를 감싸는 천 조각 안에서 페른의 눈이 번뜩였다.

"정말로... 되는군요."

같은 방에서 함께 있던 사내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주변을 살폈다.

사람들은 지금도 실시간으로 쓰러지고 호흡곤란을 호소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멀쩡히 숨을 쉬고 있었으니 말이다.

"바바라 양의 솜씨가 제법이군요."

"역시 팔세우스 가문. 이런 감옥에서도 이 정도 수준의 방독면을 만들어 낼 수 있다니."

사람들의 감탄에 페른이 방독면 안쪽에서 웃었다.

왜 라워드 군이 앨리스 양을 대동하고 성격과 어울리지 않게 에른하르트를 도발까지 했겠는가.

그것은 라워드 군이 시간을 끄는 동안 전설적인 나이트캣 암살단원이 녀석들의 방 안에서 독을 만들 수 있는 재료들을 파악하기 위함이었다.

재료가 나왔으니 그 재료들을 통해 만들 수 있는 독을 산출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심지어 앨리스는 그 독의 해독제도 여분으로 몇 개 챙겨 오기까지 했다.

거기에 힐러로 오랫동안 경험을 쌓은 멜빌의 지식이 빛났다.

그녀는 아주 적은 마나로도 해당 독들을 해결할 수 있는 맞춤형 큐어 포이즌의 마나 설계를 마무리했다.

그것을 바탕으로 바바라가 솜씨를 발휘했다.

남는 죄수복을 찢어, 거기에 조명을 담당하는 마나석 하나를 잘게 쪼개 갈아 넣은 뒤 회로도를 설치한 것이다.

전체의 과정에서 신기한 건 라워드의 지식이었다.

바바라와 같은 델피 아카데미 출신의 사무관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앨리스의 이야기를 무리 없이 이해하며 독 성분을 알아내는가 하면, 멜빌의 회로도에서 의견을 덧붙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지금 이 두건.

제작은 바바라였지만 이런 식으로 아이템을 운용할 수 있다며 설계한 것은 라워드였다.

아주 간단한 공정이었지만 그 결과는 지금과 같았으니.

정말로 알면 알수록 신기한 사내가 아닐 수 없었다.

아래쪽의 탈출은 이렇듯 계획대로 척척 진행되고 있었다.

"이제 위에서 라워드 군만 잘해 주면 되는군."

진은 그렇게 말하며 주변을 경계하면서 사람들을 천천히 3층으로 이끌었다.

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78화

<78화 - 굿모닝, 굿애프터눈, 굿이브닝(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