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1화
프롤로그
나는 펜을 들었다.
"자, 그럼 불러 주세요. 오전에는 뭘 하셨죠?"
"횡베기."
이 사람은 진심으로 하는 소린가.
그렇게 생각하고 눈을 마주쳤다.
자신의 운동에 확신을 가진 또렷한 눈동자가 날 마주했다.
그래. 이 사람은 원래 그런 사람이지.
"그럼 오후에는 뭘 하셨죠?"
"찌르기."
"...."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운동만 한 것을 편지에 쓸 순 없어요."
"그런가?"
"수취인이 어디 용병대 대장도 아니고, 공작가 영애잖아요. 애초에 연서를 주고받는데 운동 얘기로 가득 채우는 사람이 어딨어!"
내 건방진 태도에도 헬피온은 고개만 끄덕이며 별달리 반응하지 않았다.
"저녁...에도 설마 검술 훈련?"
"아닐세."
다행이군!
"그럼 저녁에는요?"
"유산소."
이런 미치광이 고용인 같으니.
"아니, 그런 거 말고 좀 뭐 설렐 만한 멘트 없어요? 당신 생각에 숨이 막혔다거나, 그런 달달한 거 있잖아요."
"아, 있었네."
오, 역시. 사람이 사랑을 하면 그런 변화라도 있어야 할 거 아닌가.
나는 다시 펜을 들었다.
"오늘 오전 횡베기를 하는데 작은 깨달음이 있었네. 굳이 최단 시간 베기를 하기 위해서 꼭 직선만을 고집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것인데, 사실 직선보다 빠른 곡선의 횡베기라는 개념은...."
진짜 못해 먹겠네.
나는 그대로 공작에게 펜을 집어 던졌다.
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1화 - 아카데미 졸업식에선 행방불명, 졸업 이후엔 백수(1)>
어느 학교나 그렇듯 학생들이 도서관을 사용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 번째는 공부를 위한 것이고
두 번째는 숙면을 위한 것이다.
그러한 진리는 전 세계의 모든 지식을 담고 있다 자부하는 델피 아카데미 역시도 통용되는 것이었다.
심지어 그 장소가 아카데미의 정령이 인정한 사람만 들어갈 수 있다는 전설 속의 비처.
델피 아카데미 도서관의 최상층.
역사, 마법, 문화, 기술, 과학 등 모든 정보가 모여 있는 정수, 아카식 레코드라더라도 말이지.
뜬소문일 거라고만 생각했던 곳은 실제로 존재했고, 학교에서 설 자리가 없던 나에게 유일한 안식처가 되었다.
아직도 그날의 기억이 선명하다.
날 집단으로 린치하기 위해 달려오던 세 명의 마법학부 학생들.
살기 위해 무작정 달려온 도서관 최상층.
그리고 귓가에 들려오던 목소리.
'이곳으로 와.'
목소리를 따라 도착한 그곳은 나만을 위한 최고의 안식처가 되었다.
"라워드!"
그때 날 부르는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아카식 레코드의 출구로 나섰다.
출구라고 하지만 정식으로 문이 있는 건 아니고 환상 마법으로 은폐된 탓에 상대에겐 느닷없이 등장한 것처럼 보이겠지만.
"바바라?"
"역시 여기 있었구나. 곧 졸업식이 시작된다고!"
"참여 안 한다고 했잖아."
"다른 날이면 모르겠지만 그래도 졸업식인데 참여를... 이익, 얼른 내려와 봐! 마지막 날까지 얼굴도 안 보여 줄 거야?"
귀찮은데.
나는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곳엔 155 정도, 아담한 키에 웨이브진 금발 위로 학사모를 쓴 바바라가 성난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오, 학사모네."
"여기, 네 것도 있어."
나는 바바라가 내민 학사모를 집어 들었다.
학사모라....
"정말로 졸업이네."
이게 뭐라고 5년 동안 그 개고생을 한 거람.
잊고 있었던, 아니, 다 잊었다고 되새기며 억눌렀던 기억들이 한순간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이내 마음까지 깊게 스며 들어왔다.
그런 내 마음을 짐작한다는 듯 바바라가 피식 웃었다.
"그래. 이제 너도, 나도 졸업이야."
"고마워. 이제 가 봐. 졸업식에 늦겠다."
"정말로 참여 안 할 거야?"
"응. 내가 거기 가 봤자 좋은 꼴 못 볼 거 알고 있잖아."
"아무리 데온이 제국 후작가의 후계라지만 아카데미의 졸업식까지 제멋대로 할 수는 없을 거야."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다는 거 잘 알잖아. 너도, 나도."
"하지만...."
"바바라. 난 진짜로 괜찮아. 여기까지 찾아와 줘서 고마워. 그래도 덕분에 이렇게 학사모라도 써 봤네. 졸업식 기분은 다 낸 것 같아."
나는 손에 든 학사모를 조심스럽게 머리에 써 봤다.
마치 나보고 고생했다는 듯 머리를 따뜻하게 감싸 주는 학사모의 감촉이 어쩐지 눈물겨웠다.
5년 전, 나는 문화예술과 마도공학으로 세계에서 제일간다는 델피 아카데미에 차석으로 입학했다.
내 입으로 이야기하긴 부끄럽지만, 당시 나는 이슈메이커였다.
그도 그럴 것이 수석인 바바라는 어렸을 때부터 유명한 마도공방 가문의 장녀로 우수한 조기교육을 받았다.
그런데 그런 바바라와 아주 근소한 차이로 차석을 차지한 녀석이 고작 소규모 상단가의 장남이었으니.
학생들은 이런 나를 신기해하며 친해지려 했고, 교수들은 날 성심성의껏 지도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나는 소설의 이야기로 밤을 새웠고, 직접 쓴 글이 교내 대회에서 상을 받기도 하며 행복한 아카데미 생활을 이어 나갔다.
입학 후 2년 동안 유지한 차석의 성적.
수석이었던 바바라가 워낙 뛰어난 능력을 가진 천재였던 탓에 그 정도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었지.
후원자도 생겼다.
학생들을 꾸준히 후원해 주시던 귀족이 내 글을 읽고 학비의 절반을 지원해 주신 것.
그래.
그렇게 아카데미를 입학한 2년간 내 인생은 남부러울 것이 없었다.
그러던 내 인생이 꼬이기 시작한 건 크라피 후작가의 장자, 데온 크라피를 만나면서부터였다.
'네놈이군. 푼돈이나 만지는 천민 출신 주제에 글은 그럴듯하게 쓴다고 들었지. 아카데미 바깥에서도 소문이 자자하던데.'
녀석은 3학년 개학식이 마친 직후, 다짜고짜 날 찾아왔다.
'아버지가 네놈에게 크라피 후작 가문의 서기관 자리를 제안하라고 하셨다. 삼생의 영광으로 알도록.'
녀석은 진심으로 나에게 은혜를 베푼다는 듯 자부심 가득한 표정이었다.
그때 내가 뭐라고 했는지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난다.
'X까고 있네.'
'...뭐?'
'후작가가 대단한 건 알겠는데, 네놈이 후작가의 위명으로도 가려지지 못할 정도로 졸렬하고 싸가지 없는 망나니인 건 바로 알겠다. 꺼져.'
'너, 너, 너....'
데온 크라피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나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나는 녀석을 단숨에 때려눕혔고.
그때부터였다. 내 모든 학교생활, 아니 인생 자체가 꼬여 버린 것은.
제국 후작의 힘은 일개 왕국의 상인 아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거대했고.
생각보다 집요했으며.
생각보다 훨씬 더 강력했다.
데온은 자신의 아버지에게 내가 후작가를 경멸하고 모욕했다 주장하였다.
크라피 후작이 그의 아들을 얼마나 믿는진 모르겠으나, 이 상황 자체가 그들에게 하나의 명분이었으리라.
후작이 내 잘못에 대한 사죄를 명목으로 아버지의 상단에 전방위적인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으니까.
상단과 거래하던 가게들이 모두 일방적으로 거래를 취소하는가 하면, 상행 도중 훈련된 도적 떼에게 상품을 빼앗기기 일쑤였다.
우리가 믿었던 가문의 가신들은 가장 결정적일 때 뒤통수를 때렸고.
가문의 보물들은 하나둘 사라졌다.
결국 아버지는 연속되는 사업 실패로 몸져누우셨고, 1년을 채 버티지 못하셨지.
원래도 병약하셨던 어머니도 금세 그 뒤를 따랐고, 상단은 급격히 쪼개졌다.
지금은 동생이 겨우겨우 소규모 상단을 운영하는 것이 고작.
더군다나 나에게 장학금을 후원해 주던 귀족들도 알 수 없는 이유로 내 후원을 중단하고, 몇몇 교수가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내 학점을 부당하게 채점하는가 하면, 같은 학교 선후배 동기들이 점차 나를 멀리하고 따돌리기 시작했다.
아니, 그저 배척하고 따돌리기만 했으면 다행이지.
직접적으로 괴롭히는 놈들까지 생겼으니까.
'델피 아카데미는 예로부터 마도공학의 요람으로 유명했지. 그런데 고작 글씨가 예쁘고 글 좀 쓴다고 제비 같은 놈이 장학금을 받으며 학교 다니는 게 말이나 돼?'
데온이 단 1년 사이에 아카데미의 사람들을 휘어잡곤 여론을 형성한 것이었다.
[마법을 할 줄 모르는 학생들이 마법부 학생들의 등록금을 빼먹으며 호의호식한다.]
본래의 델피 아카데미는 문화예술과 마도공학 두 분야를 공평하게 추구하는 장소.
하지만 데온 크라피의 교묘한 정치술에 모두가 놀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마법부 학생들은 나를 마치 기생충 취급하기 시작하였고.
같은 문화예술부 학생들은 이러한 여론의 원인이 된 나를 원망하고 배척하였다.
학교 어디에서나 괴롭힘을 받았고, 쉴 곳 하나, 마음 둘 곳 하나 없는 시간을 보냈다.
그나마 마법부 수석이었던 바바라만큼은 주변의 분위기에 굴하지 않고 꾸준히 나와 교류를 이어 나갔다.
하지만 아무리 뛰어난 가문과 마법 실력을 가진 그녀라지만 모든 괴롭힘을 막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이런 상황의 나를 구원해 준 것은 델피 아카데미의 도서관 최상층, 아카식 레코드였다.
델피 아카데미의 정령이 인정해 준 사람만 들어올 수 있다는 전설의 공간.
단순 학생이었던 내가 왜 선택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수업이 끝나고 남들은 들어올 수 없는 비밀 공간이 생긴 셈이었으니.
나는 틈틈이 사람을 피해 이 공간에 숨어 책을 읽고 지식을 쌓으며 하루하루를 버텼다.
그렇게 3년.
아카데미에서 대접받으며 느꼈던 알량한 자존심도 무너지고.
집안까지 무너뜨린 불효자가 되어 가족들에게 연락 한 번 못 한 채 전전긍긍하며 숨어 살던 삶인데.
이런 삶도 끝나긴 하는구나.
"라워드."
따뜻한 온기가 손을 감쌌다.
"정말로 고생했어."
그런 내 심정을 짐작한다는 듯, 바바라가 따뜻한 눈동자로 날 바라보았다.
"고마워."
나는 괜히 민망해져서 바바라의 손에서 내 손을 슬그머니 빼내곤 둘러댔다.
"나는 그렇다 치고, 바바라 너는 졸업식 안 가 봐도 돼?"
"음... 됐어. 나도 오늘은 졸업식 땡땡이야."
"수석 졸업자가 없는 졸업식도 있어?"
"뭐 어때. 마음대로 되라지. 어차피 데온이 아카데미를 장악한 후부턴 선생님들도, 학생들도 다 이상했으니까."
"아무리 그렇다지만...."
"그것보다 라워드. 졸업하면 뭐할 거야?"
바바라는 더이상 내 걱정을 듣기 싫다는 내 말을 끊고 질문해 왔다.
졸업 후라.
"옛날에는 막연했었어."
"왜?"
"미래를 생각할 만큼 여유가 없었으니까."
집으로 돌아가기엔 면목이 없고, 솔직히 말하면 데온 크라피의 힘이 무섭기도 했다.
크라피 후작가는 내가 이 아카데미 바깥으로 나오는 순간.
아카데미가 날 보호해 주지 못하는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거든.
그런데 1년 전부터인가.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어."
"뭐가 달라?"
"졸업해도 아카데미에 있을 것 같아."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려 아카식 레코드로 향하는 문을 바라보았다.
선택받은 사람이 아니라면 입구조차 볼 수 없다는 신비의 공간.
"아직 읽고 싶은 책들이 좀 더 남아서."
"여기, 도서관에 숨어 지낼 거라고? 진심이야? 아무리 이 공간을 네가 속속들이 알고 있다고 하지만 무조건 들킬 거라고."
너는 아카식 레코드의 존재를 모르니 그렇게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
나는 진심이다.
처음엔 사람들을 피해 들어온 곳이었지만....
이젠 이 공간의 책과 지식을 진심으로 좋아하게 되었거든.
한 번도 들어본 적 없고 접해 본 적 없는 정보들의 집합.
1,000년도 더 전에 멸망한 드래곤의 마법.
520년에 마지막으로 나타났던 요정국가의 풍습.
이제는 어디에서도 기록을 찾을 수 없는 제국의 건국과 관련된 비사들까지.
그리고....
혹시 세상 모든 정보가 모여 있는 아카식 레코드 안이라면.
나 같이 마나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도 마법을 쓸 수 있는 정보가 있지 않을까?
만일 그렇다면 데온 크라피에게 복수할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
내가 아카식 레코드에 매달려 있는 건 바로 그 때문이다.
실제로 아카식 레코드 속에는 정령술부터 검술, 체술부터 동서양의 다양한 전술과 비술까지도 전시되어 있으니.
닥치는 대로 익히다 보면 나 같이 마나를 못 느끼는 사람도 무언가 얻을 게 있겠지.
"먹을 거나 마실 건?"
"틈틈이 비축해 놨어."
사실 이건 거짓말이다.
아카식 레코드 안에는 원리는 알 수 없지만 무한히 빵이 나오는 접시와 무한히 샘솟는 분수가 갖춰져 있었다.
마치 이런 상황이 펼쳐질 걸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다른 준비는?"
"대충. 필요한 건 다 했어."
준비라고 해 봤자 몇 명의 사람들에게 인사를 남기는 게 고작인걸.
너나. 동생이나.
정말로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날 믿어 줬던 친구 몇 명 정도?
"얼마나 있을 것 같아?"
나는 앞으로 남은 책들을 손가락으로 얼추 셈해 보았다.
"앞으로 5년 정도이지 않을까?"
"5년."
바바라는 뭔가 마음을 짐작하기 어려운 눈빛으로 날 빤히 바라보았다.
"5년이란 말이지. 알았어."
"뭘 알았어?"
"5년 뒤, 네가 세상에 나왔을 때 데온 녀석이 널 방해하거나 괴롭히지 못하도록 세상을 바꿔 둘게."
하하하, 그런 고민을 하고 있었던 거야?
"그래, 기대할게."
"뭐야. 하나도 기대하는 것 같지 않은데?"
"아냐. 진짜로 기대할게. 그때쯤이면 나도 한 사람 몫을 제대로 할 수 있겠지. 좀 강해질 수 있을지도 모르고."
그때 아래층 도서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이 몰려오는 모양이었다.
"가 볼게. 여기에 내가 박혀 있다는 건 아무도 몰라야 하니까."
"...아."
바바라가 아쉽다는 듯 다시 내게 손을 내밀었다.
가볍게 하이파이브를 하자 바바라가 도서관 밖으로 나섰다.
그 모습을 보고 난 다시 아카식 레코드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 * *
제국력 127년 제 97회 델피 아카데미 졸업식.
128명 참석, 127명 졸업, 1명 실종.
실종자 라워드 고르뎀.
3일간 실종자 수색을 위해 대마법사 두 명과 아카데미의 교원들이 동원되었으나 찾지 못하였음.
3학년 무렵부터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침울한 표정으로 교정을 배회했다는 것이 주변 학생들의 증언.
최종 행방불명으로 수색 종료.
* * *
그로부터 5년이 지난 어느 날.
모두가 잠든 새벽 2시 무렵.
나는 아카식 레코드에서 내게 허락된 모든 지식을 읽고 드디어 세상으로 나왔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났고
나는 훌륭한 백수가 될 수 있었다.
젠장.
내가 아카데미 중퇴자에 고등교육기관 졸업자라니....
그렇다.
이런 스펙으론 데온의 방해 공작 같은 장애물이 없더라도 갈 수 있는 영지가 없었다.
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2화
<2화 - 아카데미 졸업식에선 행방불명, 졸업 이후엔 백수(2)>
"편지 가져가요."
여관의 꼬마 직원이 편지를 가져다줬다. 도착한 것은 다섯 통.
과연 이번에는 합격했을까?
[남작가에 보여 준 귀하의 애정에 감사드립니다.
주변 영지를 개발하기 위해 연금술을 접목한 공업기술, 그리고 경제만을 중심으로 한 특구를 중심으로 펼쳐진 '3년 계획'에 대해선 감탄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귀하의 신분이 제대로 보증되지 못하는 점.
아카데미를 졸업한 후 6년간의 경력이 존재하지 않는단 점이 귀하의 신분을 불확실하게 합니다.
신의 이름으로 당신의 앞길을 축복합니다.]
"때려치우라고! 신의 축복이고 나발이고 고용을 해 줘야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거 아냐!"
으아아아아아!
이게 몇 번째야!
벌써 100번째다 100번째!
아카식 레코드에 들어가 수많은 과거의 비술들, 마법과 검술의 비급들.
그리고 연금술도 마법도 아닌 '과학'이라는 학문을 바탕으로 한 기술들까지.
수많은 내용을 머릿속에 넣어 오면 뭐해!
취직이 안 되는데!
전 세계의 남작, 후작, 백작 가문들은 거의 다 훑었다.
그런데 다 안 된다니.
그럴 거면 내 계획이나 안건 같은 거 잘 읽었다고 하질 말든가!
심지어 계획을 훔쳐 간 개자식들도 있었지.
제기랄. 다른 건? 다른 편지들은!
나는 급히 다른 편지를 하나둘 뜯어 보았다.
[죄송합니다.]
[아쉽지만....]
[안타깝게도....]
이번에도 모든 귀족 가문에서 취업 거절 통보를 보냈구나.
나는 편지들을 갈기갈기 찢어 방 곳곳으로 흩어 버렸다.
하하하하, 흩날려라, 편지 조각이여.
내 인생도 저 편지 조각처럼 갈기갈기 찢겨 버린 것 같구나.
아아... 이제 모아 둔 돈도 거의 다 떨어져 가는데.
이대로 가다간 사무관 취직은커녕 여관방에서도 쫓겨나 굶어 죽게 생겼다.
하, 하하.
어쩌지.
이런 상황에 복수는커녕 가문의 빚을 갚을 수나 있나?
이런 상황에서 데온 크라피 녀석이 내 상황을 알고 수작을 부리면 막을 수 있을까?
아니, 그럴 수 없겠지.
바바라에게 연락이라도 해 봐야 하나?
훌륭한 백수에 알거지까지 된 채로 연락해야 할까.
하지만 6년 동안이나 연락 한 통 없던 동창이 뜬금없이 연락한다고 받아 줄 리 없을 텐데.
후.
이제 남은 편지는 딱 한 통.
그런데 뭐가 좀 이상하다.
"내가 이런 곳에도 이력서와 구직 희망 편지를 보냈던가?"
[헬피온 공작가]
편지의 실링에 새겨진 문양은 멋들어진 독수리.
그리고 날개와 날개 사이를 가로지르는 한 자루의 검.
이 문양의 가문을 모르는 건 아니다.
그것보다는 '도대체 이곳이 왜?'라는 감상에 가깝지.
헬피온 공작령은 대륙의 최북단, 마족과의 경계에 있는 변경으로 1년 365일 전쟁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가장 강인한 전사들이 모이고, 그런 전사들 사이에 수십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곳.
그럼에도 무를 숭상하는 자들이 이곳에 모이는 이유가 있다.
그랜드 소드마스터 헬피온.
통칭 지존.
자신을 따르는 기사들과 소수정예로 마왕성을 쳐들어가 마왕의 목을 베어 버린, 20년간 지속되었던 인마 전쟁을 끝낸 자.
그는 마족과의 전쟁을 수습하기 위해 자청해 변경에 남아 인류 최전방을 수호하고 있는데.
그런 그에게 무와 관련된 조언 한 자락이라도 얻기 위한 자들이 그곳을 찾는다지.
그렇다.
무武.
내가 속한 문文과는 전혀 연결될 수 없는 곳.
그래서 이곳은 그냥 요식행위로 넣었을 뿐, 별다른 글을 써 놓지 않았는데.
아, 설마 내가 대충 쓴 이력서에도 성심성의껏 거절 전언을 보내 준 건가?
그건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복잡한 마음인걸.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편지를 뜯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귀하가 보내 주신 이력 인상 깊게 잘 받아 보았습니다.
헬피온 공작가는 그대의 취업을 환영합니다.
가능한 가장 빠른 시일 내에 공작가를 방문해 주시기 바랍니다.]
취업 합격 통보였다.
"허."
나도 모르게 입가에 공기가 새어 나왔다.
이건 정말로... 말이 안 되잖아?
나도 내 약점을 안다.
델피 아카데미를 중퇴하고 나온 신용불량자, 행불자를 믿고 받아 줄 만한 가문은 극히 드물다.
그래서 자작가, 남작가, 백작가 같은, 비교적 급이 떨어지는 가문에만 이력서를 보냈던 거였는데.
그런데 공작가라고?
그것도 전 세계에 위명이 자자한 헬피온 공작가?
뭐지, 이거 꿈인가.
사실 이 전서는 교묘하게 꾸민 위조고, 이곳을 찾아가면 장기밀매라도 당하는 거 아닐까.
그게 아니라면 사실 헬피온 공작가에서 마족을 끝장내기 위한 신기술을 개발했는데 그 주재료가 인간이라 사회의 잉여들을 수집하고 있는 거 아닐까.
으아, 진짜, 진짜 합격한 거 맞아?
똑똑.
"아저씨, 아저씨."
그때 문 바깥에서 편지를 건네줬던 꼬마 직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 어."
"어머니가 식사 가져다드리래요. 오늘은 아샤크 고기가 들어간 스프랑 밀빵이에요!"
내가 문을 열어 주자 아이가 작은 나무판에 저녁 식사를 담아 종종걸음으로 방 안에 들어왔다.
아, 그래. 벌써 식사 시간이 됐구나.
편지를 받고 주접을 떨고 있느라 시간 가는 것도 모르고 있었구나.
"고맙다."
아이는 내 대답을 들은 둥 마는 둥 하더니 힐끗 침대 맡에 찢긴 편지를 보곤 물었다.
"아저씨, 오늘도 다 탈락인가요?"
"뭐라고...?"
"우리 여관에 매주 오는 코주부 아저씨 아시죠? 그 아저씨가 1년 동안 취직 안 됐으면 가망성 없다고, 취직하는 데 손모가지 하나 건다고 하던데요?"
그래? 그 아저씨가 그런 이야기를 했다고?
하하. 내가 참 이 여관에서 오래 빌빌거렸지.
그렇다고는 해도 이렇게 꼬마 아이나 술주정뱅이한테까지 무시당할 정도가 되다니.
나는 아이의 양어깨를 잡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리고 그 말에 대답하면서.
"그 아저씨한테 가서 말하렴."
점점 세상의 색채가 선명해졌다.
마치 뿌옇게 가려져 있던 안개가 산들바람 한 번에 사라진 것마냥.
"남은 손모가지 내놓고 앞으로 술은 발로 쳐 드시라고 말이야."
나는 헬피온 공작가의 사무관으로 합격했다.
* * *
헬피온 공작가의 여정은 참으로 길었다.
아무래도 인류와 마족이 싸우는 최전선이자 인류 거주구의 최변방이라는 악명이 자자한 곳이니까.
여행이 힘든 것은 아니었다.
지존에게 가르침을 얻기 위한 무사 수행 중인 기사들이 여정을 안락하게 만들어 주었거든.
'기사들이 많이 지나가는 탓에 도적은커녕 몬스터도 보기 힘드오. 도적들은 제 목숨을 보전해야 하니 토벌을 피해 도망쳤고, 몬스터는 거의 멸종위기지.'
'그럼 교역이 활발하겠네요?'
'꼭 그렇지만은 않소. 정작 이 구역을 들어서기 전에 당하기 십상이거든. 그렇게 밀려난 도적과 몬스터들이 다 외곽으로 나간 탓이지. 그리고 세상엔 때때로 우리 같은 놈들이 퇴치하기 힘든 괴수도 있는 법이오. 샌드웜이나 와이번 같은 놈들 말이지.'
'그런 놈들이 나온다고요?'
'고작 그런 놈들만 나올까. 여기는 마족의 영지로 가는 길이오. 세상 어느 곳보다도 더 험지니 각오 단단히 해야 하오. 다행히 어느 정도 출몰하는 서식지가 정해져 있으니 우리만 믿으시오.'
기사들과 대화하면 대화할수록 의문은 커져만 갔다.
이렇게 우수한 사람들이 모이는 헬피온 공작가라면 다양한 인재들이 많을 테고, 분명 우수한 사무관도 있을 텐데.
도대체 나같이 경력도 능력도 검증되지 않은 사람을 왜 뽑았을까?
결국 나는 최종적으로 지존과 면담을 할 때까지 내가 뽑힌 이유를 맞추지 못했다.
아니. 못 하는 게 당연했지.
어떻게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유라고 상상할 수 있었겠냐고.
* * *
"자네가 이번에 새로 뽑힌 사무관인가."
"네, 넵. 라워드 고르뎀이라고 합니다."
"반갑네. 헬피온 공작가의 가주 로델라오스 드 헬피온이라고 하네.
어깨가 딱딱하게 굳어 있군. 긴장 풀게. 나는 공작위로 살아온 날보다 길거리 용병으로 살아왔던 날이 더 많아.
예의범절도 격식도 다 귀찮으니 편안하게 대해 주게. 이건 예의상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이야."
아무리 그렇게 말하셔도, 내가 긴장하는 건 공작이라는 지위보다는 당신이라는 존재 자체 때문이라서요.
난 지금 헬피온 공작의 앞에 서 있었다.
투박하지만 결코 촌스럽지 않은 서재에서 그는 자연스런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헬피온 공작은 그야말로 '지존'이라는 단어로 모든 설명이 끝나는 존재였다.
2m에 달하는 거대한 키.
팔뚝 하나가 내 머리통만 한 거대한 신체.
아니, 팔뚝 정도가 아니라 저 주먹 하나도 내 머리통 크기인 것 같은데.
근육질의 신체는 마치 신이 조각한 것처럼 완벽한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깔끔하게 자른 푸른색 더벅머리 아래 짙은 바다색 눈동자는 마치 창공을 호령하는 그리폰을 마주하는 것 같았다.
일국의 황제와 마주하는 것 같은 거대한 위압감은 그의 앞에서 숨을 쉬는 것조차 힘들게 만들었다.
대단하다.
이게 지존이구나.
왜 기사들이 이 사람을 한 번이라도 만나 보고 싶어 열광하는지.
그 긴 시간을 투자해 헬피온 공작가에 투신하여 마족과의 전쟁을 무상으로 돕는지.
검을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나지만 단숨에 이해할 수 있었다.
"오는 데 여정은 불편하지 않았나?"
"도와주시는 기사분들이 계셔서 편하게 왔습니다!"
"그렇군. 혹여 여정이 피곤하지 않았다면 자네가 맡아서 하게 될 업무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네, 괜찮습니다!"
"크흠, 흠...."
"공작님?"
"음, 아닐세. 이야기를 하기가 좀 민망한 내용이라."
민망?
어쩐지 헬피온 공작과 정말 어울리지 않는 단어를 들은 기분인데.
헬피온 공작은 뭔가 쑥스러워하는 얼굴이 되었다.
붉게 달아올라서 우물쭈물하는 그 모습은 굳이 설명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기괴했다.
"자네가 급히 우리 가문에 고용된 까닭은... 크흠, 편지를 쓰기 위해서일세."
"편지 말씀이죠. 알겠습니다. 제가 델피 아카데미 졸업생인 만큼 문장을 구사하는 것에는 자신이 있습니다. 영지협상부터 협의문, 선전포고문에서 결투를 위한 모략까지. 말씀만 하시죠!"
"아니, 아닐세. 그런 거라면 그냥 쳐들어가면 되지 왜 복잡한 과정을 거치겠나."
아니 이 사람이 그렇게 무서운 소리를 태연하게.
"그...."
헬피온 공작은 그렇게 몇 차례나 말을 더듬다 눈을 질끈 감고는 마치 생사대적의 원수를 앞둔 장수처럼 중얼거렸다.
"내, 내가 그, 사모하는 사람이 생겼네. 사모... 큽, 그, 내가 연정을 품은 게 처음인데 해 온 건 막싸움밖에 없어 이 마음을 표현하는 걸 잘 모르네."
서, 설마.
"그, 그래서 자네는 내 마음을 그 아가씨에게 전달해 주는 역할을 하는 걸세."
"...그 말뜻은 저보고 연애편지를 대필하란 말씀이십니까."
"그래, 바로 그걸세! 역시 아카데미 출신이라서 내 속뜻을 바로 알아듣는군! 허허허, 눈치가 빠른 게, 아주 맘에 들어. 일이 잘 풀리겠군!"
아니 시발 이게 무슨 소리인가요.
속 깊은 곳에 들어앉은? 그렇게 들어앉은 속이 무슨 삼류 로맨스 소설 한복판인가요.
"연애편지.... 그러니까 지금 헬피온 공작가문이, 저를, 고용하신 게, 연애편지를 대신 써 줄, 고스트 라이터가 필요해서...."
"크흠, 큼."
헬피온 공작은 저도 무안하긴 한지 뒤통수를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사실 우리 영지에는 문관이 없다네. 워낙 분위기가 무관일변도이니. 그래서 걱정하던 차에 자네의 지원서가 온 게야. 신께서 내 사랑을 응원하신 게 아니겠나."
하... 결국 내가 내 팔자 꼬고 무덤을 판 거지.
어쩌지.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무사히, 그러면서도 내 명예에 타격을 입지 않고 타개할 수 있을까?
내가 먼저 공작 가문에 지원을 했으니 이제 와서 안 한다고 하면 공작님의 명예에 먹칠을 하는 것이 될 텐데.
설마 저 주먹으로 나를 단매에 때려죽이거나 하진 않겠지?
하지만 이건 말이 안 된다.
앞으로 힘도 쌓고, 세력도 쌓고 돈도 벌어, 가문을 부흥시키고 궁극적으로 복수를 위해선 할 일이 태산인데 연애편지나 쓰면서 시간을 보낼 수는 없지 않은가.
"공작 각하 사실 제가...."
"근무 금액은 섭섭잖게 책정해 주지. 월급은 월 10골드. 일반 공작가의 사무관들이 받는 금액의 세 배 정도일세."
공작님, 지금 저를 돈으로 매수하려고 하시는 겁니까?
"그리고 편지 한 통을 쓰고 답장을 받을 때마다 10골드의 성과금을 지급하겠네. 사택 내에서 머물 곳과 식사도 제공해 주지."
라고 거절하기에는 너무 큰돈과 좋은 조건이었다.
데온 크라피에 의해 망한 우리 가문의 빚이 1만 골드다.
여기서 개같이 일한다면 2~3년 만에 빚을 청산할 수 있지 않을까?
빚을 완전히 갚고 나면 채무 때문에 힘들어하는 동생에게 연락할 명분이라도 생기리라.
좋아. 까짓거 하루에 한 통씩 일기처럼 써 줄 수도 있지!
"하나 조건이 있네."
"이 정도로 큰돈을 주신다면 당연히 조건이 있겠죠."
"아무래도 내가 그, 연애편지 때문에 사람까지 고용했다는 말을 퍼뜨리긴 좀 그렇잖은가? 그러니 비밀로 해 주게."
비밀유지라. 그 정도쯤이야.
그렇게 나는 이 세계 최강자의 첫사랑을 이뤄 주기 위한 사랑의 전령이 되었다.
하. 내 팔자야.
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3화
<3화 - 편지 대필작가를 샀는데 부록으로 사무관이 딸려 왔다(1)>
똑똑.
"사무관님. 출근 시간이에요."
낯선 목소리에 벌떡 몸을 일으켰다.
고급 천과 푹신한 침대.
지난 몇 주 동안 경험해 본 적 없는 풍경이었다.
맞아. 나 취업했지.
그것도 헬피온 공작가에.
똑똑.
다시 들려온 노크 소리에 급히 문밖을 향해 대답했다.
"아, 네. 일어났습니다."
"식사는 어떻게 하시겠어요. 가져다드릴까요, 아니면 식당에서 직접 드시겠어요?"
"제가 아직 식당 위치랑 그런 걸 잘 몰라서, 가져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네, 그럼 문 앞에 식사를 놓고 갈게요."
또각거리는 발걸음 소리가 서서히 문에서 멀어졌다.
몸을 일으켜 문을 열어 보았다.
막 구워 낸 듯한 빵과 따뜻한 김이 올라오는 수프가 바닥에 놓여 있었다.
테이블에 앉아 요리를 한 스푼 떠먹어 보았다.
부드러운 감칠맛이 입안을 맴돈다.
맛있네. 그리고 따뜻한 음식이 들어가니 몸도 좀 데워지는 것 같고.
정말로 내가 공작가에 취업을 하긴 했구나.
이제 좀 실감이 나네.
그렇다는 건....
오늘부터 연애편지를 써야 하는구나.
큰돈 버는 좋은 일이긴 한데, 뭐랄까. 공작가에 취업했다! 라는 문장으로 가득 찼던 자존감이 단숨에 쪼그라드는 느낌이랄까.
에휴. 돈 버는 마당에 뭘 가리겠어.
그래. 심기일전해서 써 보자.
내 문장력을 지존과, 그리고 지존이 짝사랑에 빠진 영애에게 보여 주는 거야.
그런 식으로 세상을 쉽고 편하게 생각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지금 내가 그때의 나를 만난다면?
이렇게 이야기하겠지.
야, 도망쳐.
* * *
나는 아침 일찍부터 지존의 집무실에 마주 앉아 펜을 들었다.
"좋아. 그럼 편지를 써 주게."
"아뇨, 그렇게 단숨에 연애편지가 나오진 않거든요. 저는 공작님도 모르고 공작님의 연애 상대도 모르잖아요."
"어흠, 어흠. 연애 상대라니. 거 낯부끄럽군."
2미터가 넘는 체격의 거구의 근육질 전사가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보이지 말란 말이야.
"그러니 우선 두 분의 사랑이 어떻게 싹틔우게 되었는지부터 차분히 이야기 부탁드립니다."
내 이야기에 공작은 천천히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 * *
그것은 어느 날과 다름없는 아침이었다고 한다.
"나는 평소처럼 아침 식후에 맞춰 가볍게 드레이크 한 마리라도 잡아 올 요량이었지."
"그게 어딜 봐서 평범한 '평소처럼'입니까?"
"하지만 매일같이 드레이크를 잡은 탓인지 이미 영지 근처에는 드레이크가 씨가 말랐더군."
진짜로 평소처럼이었구나.
그래서 드레이크가 씨가 말랐구나.
"하지만 사나이가 결심했는데 어찌 한번 정한 일정을 쉽게 바꿀 수 있겠나? 근처에 없으면 몸도 풀 겸 옆 영지까지 다녀오면 되지 않겠나."
그래.
이 사람은 나의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편해.
"그렇게 뜀박질을 하길 한참이었네. 델피 왕국의 경계쯤까지 뛰었을 걸세."
델피 왕국의 경계라면 여기서 말을 타고 달려도 이틀 거리였던 것 같은데.
아침 식후 운동...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거기서 내가 찾던 드레이크를 발견하게 된 걸세. 그런데 드레이크 놈이 마차를 습격하고 있던 게 아니겠는가. 그래서 단숨에 드레이크를 베어 버리고 사람을 구출했지."
그리고 그렇게 구해 준 아가씨가 델피 왕국에서도 가장 뛰어난 재상으로 이름 높은 스콰렛 공작가문의 장녀였다고.
"그 아가씨는 죽음을 앞에 둔 사람 같지 않게 의연한 자세로 하인들을 지휘하더군. 그 모습이 어찌나 아름다운지.... 나는 마치 그녀가 전사들의 영혼을 인도하는 발키리 같다고 생각했네."
오, 이 묘사는 정말로 공작님이 말할 것 같은 표현이라서 좋군.
잘 기억해 두었다가 편지에 써먹어야지.
"그래서 나는 그대로 그녀에게 다가가 그, 크흠, 한눈에 반했다고 이야기했네."
"네?"
잠깐만요.
이거 이야기가 너무 급전개 아닌가.
우리 천천히 이야기의 이미지를 떠올려 보자.
마차가 있고 드레이크가 있다.
그 사이에서 귀족 여성이 죽음을 각오하고 하인을 지휘하는 중이다.
그런데 갑자기 반쯤은 오거라고 해도 믿을 법한 거구의 인간이 조깅을 한답시고 땀을 뻘뻘 흘리며 뛰쳐나왔다.
그리곤 공포스럽던 드레이크를 공작의 글자 그대로 '단숨에' 베어 버렸다.
그 자리에 없어 정확한 풍경을 묘사하긴 힘들지만 아마 굉장히 그로테스크한 광경이었으리라.
그리고 운동의 열기와 땀, 그리고 괴수의 피 냄새로 범벅된 그 순간.
어마어마한 위압감을 뿜는 전사가 귀족 영애에게 터벅터벅 다가가서 건넨 첫 마디가.
한눈에 반했....
"뺨 안 맞았습니까?"
"자네 아까부터 나를 굉장히 편하게 대하는구만."
"편하게 대하셔도 된다면서요."
물론 편안하게 대하라고 해서 진짜 편안하게 대하는 게 바보 같은 짓이란 걸 안다.
하지만 정말 마음속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울화통을 못 참겠는걸.
당신이 하는 소리가 공작은커녕 동네 주정뱅이 아저씨들 같잖아!
"그래서 답변은?"
"크흠, 아직 서로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이이니, 편지부터 교류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했네."
순간 표정 관리가 잘되지 않았다.
그거 엄청나게 돌려돌려 거절한 거 아닐까.
차마 거절하면 자신의 목숨을 단숨에 빼앗아 버리거나 강도로 돌변해 버릴 것 같은 괴인 앞이다 보니.
굉장히 예의를 차린 거절 같은 느낌인데.
하하하하. 지금이라도 때려칠까.
아냐. 돈. 돈만 생각하자. 그래. 나는 프로.
아카식 레코드의 계승자다.
전 우주의 지식을 끌어다가 쓰는 한이 있더라도 이 사랑을 성공으로 이끌어야지.
"그... 일단 알겠습니다. 일단 어떻게 만나셨는지는 알겠어요. 편지 앞부분은 그렇게 두 분이 만난 아름다운 기억으로 시작하면 될 것 같네요."
"그런가? 이거 힘들군. 단순히 기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쑥스러우니."
"하지만 지금부터가 진짜예요. 과거의 이야기를 하는 건 여기까지고, 이제부터 앞으로 어떤 이야기를 전달할 건지 공작님의 의사가 필요하니까요."
헬피온 공작은 내 말이 어떤 의미인지 잘 짐작 가지 않는다는 듯 눈썹을 찌푸렸다.
"쉽게 말해서 그냥 달달한 연애 생활을 즐길 건지, 아니면 그 영애랑 결혼해서 행복하게 사는 미래에 대한 계획을 나눌 건지 정하란 거예요."
"결혼, 음음, 결혼이라니, 으으음. 아무리 그래도 그건 너무 빠른 거 아닌가. 크흠, 그게 내 마음대로 쉽게 되겠나?"
"공작님. 이 편지를 주고받는 건 아무리 빨라도 한 달에 한두 번밖에 주고받을 수 없을 겁니다."
"그건 너무 느린 게 아닌가!"
"이게 평균 속도거든요."
"끄응."
공작은 답답하다는 듯 앓는 소리를 내며 의자에 몸을 뉘였다.
누가 이런 모습을 인류 최전선의 영웅이자 지존이라 생각하겠냐고.
"그러니까 지금 제대로 진심을 전해야 하죠. 좋아요. 아직 초반이니까 서로 간에 알아 가는 과정을 거칩시다."
남녀 사이에도 절차란 게 필요한 법이니까.
"보통은 영애에게 궁금한 것을 묻기 전에 공작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서로의 정보를 공유하는 게 좋아요."
나는 펜을 들었다.
"그러니까 불러 주세요. 오전에는 뭘 하셨죠?"
"오전 말인가? 그때라면 난 횡베기를 했네."
횡, 뭐요?
이 사람은 진심으로 하는 소린가.
그렇게 생각하고 빤히 얼굴을 노려보았다.
"이상한가?"
"아뇨... 그러니까 오전엔 운동을 하셨단 말이죠? 운동.... 네 좋습니다. 얼추 아름답게 묘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럼 오후에는 뭘 하셨죠?"
"찌르기."
"...."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공작님. 운동만 한 것을 편지에 쓸 순 없어요."
"그런가?"
"공작가에 보내는 첫 편지라구요. 공작님에 대해서 소개도 하고, 이야기하고 서로 알아 갈 만한 첫 화두를 운동 얘기만 할 수는 없잖아요. 애초에 연애편지를 주고받는데 운동 얘기로 가득 채우는 사람이 어딨냐고!"
마지막은 조금 반말이 되었지만 헬피온은 고개만 끄덕이며 별달리 반응하지 않았다.
그래. 이런 사람에게 화내 봤자 나만 손해지.
적당히 점심은 '훈련'을 했다고 쓰자. 그럼 조금은 차이 나는 것처럼 위장이 되지 않을까.
"그럼 이제 저녁인데... 설마 저녁에도 검술 훈련?"
"아닐세."
다행이군!
"그럼 저녁에는요?"
"유산소."
이런 미치광이 고용인 같으니.
"아니, 그런 거 말고 좀 뭐 설렐 만한 거 없어요? 당신 생각에 숨이 막혔다거나, 그런 달달한 거 있잖아요."
"아, 있었네."
"그런 걸 먼저 이야기하셨어야죠! 내가 당신을 만나고 이렇게 사랑에 빠졌다! 이렇게 변했다! 그런 어필이 직빵이라니까요!"
나는 다시 펜을 들었다.
"그럼 오늘 하루 영애를 만나고 와서 본인에게 어떤 변화가 있었지요?"
"오늘 오전 횡베기를 하다 드레이크를 벨 때 감각이 떠오르며 작은 깨달음이 있었네. 굳이 최단 시간 베기를 하기 위해서 꼭 직선만을 고집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것인데, 사실 직선보다 빠른 곡선의 횡베기라는 개념은...."
진짜 못해 먹겠네.
나는 그대로 공작에게 펜을 집어 던졌다.
* * *
<어진 품성과 공명정대한 업적으로 델피 왕국 역사에 길이 남을, 스콰렛 재상의 자랑이자 델피 왕국의 빛이 되실 티타니아 영애님에게.
안녕하십니까. 헬피온 가문의 가주, 로델라오스 드 헬피온이라고 합니다.
(중략)
그날 발할라의 발키리와 같은 용맹스럽고 단호한 영애의 모습은 아직도 선명합니다.
당신의 호령에 불꽃처럼 생명을 구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번뜩였고, 저는 곧장 바람에 들불이 번지듯 제 몸을 밀어붙였습니다.
티타니아 영애. 그날 목격했던 섬화에 눈이 멀어....(중략)>
* * *
"내가 지금 소설을 쓰는 것도 아니고."
나는 한숨을 쉬며 펜을 멈췄다.
없는 말을 꾸며 낼 수는 없다 보니 오전 중에 나눈 이야기로 편지를 쓰고 있긴 한데....
여기까진 어찌저찌 꾸려 왔대도 다음이 문제다.
"횡베기랑 유산소는 또 어떻게 이어 붙어야 하지?"
그나마 좀 쉬운 게 횡베기 이야기일 듯한데.
공작이 뭐라고 했더라?
'굳이 최단시간 베기를 하기 위해서 꼭 직선만을 고집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것인데, 사실 직선보다 빠른 곡선의 횡베기라는 개념은....'
직선보다 빠른 곡선이라.
아카식 레코드에서 이 비슷한 이야기를 읽은 적 있었는데.
이 일화를 적당히 가공하면 편지에 넣을 수 있겠는걸.
<평생을 검만 잡아 온 사람이라, 글재주 없음이 야속합니다. 부디 영애께 즐거움이 되길 바라며, 동방의 엔틸 제국 이야기를 들려드리는 것이 제 최선임을 헤아려 주세요.
엔틸 제국에서는 '매'라 불리는 용맹한 새가 있다고 합니다. 제 몸집의 두 배가 될 법한 거대한 날개로 창공을 유영한다는.
이 새에게는 독특한 점이 있습니다. 바닥을 기어 다니는 쥐나 뱀을 잡아먹기 위해 바닥으로 활공할 때, 직선이 아닌 곡선을 그린다는 것이지요.
그런데도 매는 그 어떤 새보다 빠르게 날아오르고, 빠르게 자신의 먹잇감을 낚아챕니다.
사람들은 빨리 가기 위해서라면 돌지 않고, 올곧게만 나아가야 한다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답은 아니었던 것이지요. 저는 오늘도 검을 휘두르다 그러한 깨달음을....>
직선보다 빠른 곡선이라.
그러고 보니 저런 식의 개념을 다룬 체술을 아카식 레코드에서 읽은 적 있었는데.
그땐 웃으면서 넘겼었지.
헬피온 공작이 저 정도까지 이야기하는 걸 보면 진짜 효과가 있는 모양이다.
하긴, 우주의 진리까지 담겨 있다던 아카식 레코드잖아.
설마 허접하고 쓰레기 같은 지식이 있었겠어.
단지 내가 그 지식들을 어디에서 어떻게 사용하는지 잘 모르는 것뿐이겠지.
그때 체술 관련 책을 보고 2년 가까이 수련하긴 했었는데.
그때의 감각이 남아 있을까?
나는 오른손에 들고 있던 펜을 마치 검을 쥔 것처럼 고쳐 잡았다.
마침 책상에는 파리 한 마리가 앉아 앞발을 비벼 대고 있었다.
얇은 날개, 끊임없이 부비적거리는 앞발.
파리의 눈이 나와 마주쳤다고 느낀 순간.
파리가 날아올랐다.
동시에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는 내 펜, 아니 검이 쇄도한다.
그리고.
반으로 갈라진 파리가 툭, 하고.
책상으로 떨어졌다.
이런 느낌인가? 어렵지는 않네.
나는 펜을 다시 고쳐 잡곤 방금 전의 감각을 잊기 전에 펜을 부지런히 놀렸다.
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4화
<4화 - 편지 대필작가를 샀는데 부록으로 사무관이 딸려 왔다(2)>
편지가 완성된 것은 한 시간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어휴. 횡베기는 얼추 끝났는데 유산소 때문에 힘들었네.
산소의 소중함 같은 개소리를 써 놨는데.
뭐 어때. 쪽팔린 건 내가 아니라 헬피온 공작이니까.
나중에 편지 내용을 일일이 확인하고 날 책망하기야 하겠어.
그건 그렇고 공작 나리.
내일도 유산소니 근력 운동이니, 종베기니 찌르기니 그따위 헛소리를 하는 건 아니겠지?
똑똑.
그때 문 바깥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누구지. 또 식사를 가져온 하녀인가?
"혹시 잠깐 시간 괜찮습니까?"
"네, 누구세요?"
"저는 이 영지의 집사 아펠이라고 합니다."
집사님이 갑자기 어쩐 일로?
나는 얼른 문을 열어 주었다.
"들어오시죠."
"아니, 괜찮습니다. 몇 가지 확인만 하면 되는 거라...."
집사는 꼿꼿이 몸을 세운 채로 날 바라보았다.
머리카락 한 올 튀어나온 곳 없이 올백으로 단정히 넘긴 하얀 머리카락.
1mm의 오차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가지런히 정리된 콧수염.
그리고 주름과 흰머리가 무색할 정도로 다져진 몸.
연미복 바깥으로도 선명히 근육 도해를 볼 수 있을 정도로 도드라진 신체라니.
정말 그 헬피온 공작의 집사답다.
"델피 왕국의 아카데미 소속이시라고요?"
"네."
"초기 2년 동안은 차석을 유지했었고."
"네...."
나는 묘한 위압감에 위축된 채로 대답했다.
설마 졸업식에 행방불명되었던 게 들켰나?
"혹시 수강 과목이 어떻게 되십니까?"
"예술 전공으로 문학과 역사를 공부했고 부전공으로 행정학과 정치학을...."
덥썩!
헉?
이 영감탱이 왜 내 손을 갑자기 잡아?
으아악, 손 부서진다! 무슨 영감쟁이가 이렇게 손힘이 강해!
"사, 사, 사...."
아니 잠깐, 사, 뭐? 사 뭐?!
지금 이거 내가 생각하는 그런 전개 아니지?
공작처럼 한눈에 돌아 버려 가지고 드레이크 잡아 죽이고 그런 거 아니지?!
"사무관님을 환영합니다!"
"저는 집사님의 마음을 받을 수, 아니, 네?"
"제 마음 말씀이십니까?"
제기랄. 민망해 죽겠네.
* * *
집사님을 따라서 도착한 집무실에는 과장 조금 보태 천장까지 가득 찬 서류뭉치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미쳤네.
이 정도 분량이 한 영지에서 처리해야 하는 업무라고?
아무리 공작가라지만 이건 너무하잖아.
"집사님. 헬피온 공작가는 가신들이 놀고먹어도 용서해 주시나요?"
"허허허, 그렇지 않습니다. 일을 안 하는 게 아니라 일을 할 사람들이 없다는 게 더 정확한 거죠."
"하지만 공작가잖아요!"
"영지의 구성원은 기사가 60%, 대장장이를 비롯한 장인들이 30%, 그리고 가족을 비롯한 일반인들이 10%입니다."
"상인은 없어요? 사무 담당은!"
"영지에 약초와 포션, 무기 따위를 공급하는 전쟁 상인은 따로 없어서 영지 바깥을 오가는 용병들에게 늘 부탁하곤 하지요. 그리고 사무장은...."
집사님의 시선이 아련해졌다.
"사무장이 있었습니다만 이번에 몸이 안 좋아 낙향했습니다."
"몸이 안 좋다뇨, 혹여 몬스터와의 싸움에서 부상을 입었다거나?"
"아뇨, 간경화가 왔습니다. 젊은 나이였는데."
젊은 나이에 지병을 얻었다고?
그만큼 일을 많이 시킨다는 건가.
하긴 여기 쌓여 있는 업무의 양을 보아하니 정말 지독하다는 생각이 들긴 한다.
"남아 있는 사람이라곤 저나 하녀장, 그리고 요리장 정도인데 다들 검만 휘두를 줄 알지 이렇게 서류처리 같은 건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족속들이라... 사무관님이 빠르게 고용되셔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그런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곳에 겁도 없이 뛰어든 나는 얼마나 불행인지 모르시겠죠.
나는 쌓여 있는 서류 몇 개를 슬쩍 살펴보았다.
[제국력 130년 8월, 헬피온 공작령 팔락시아 강 수해 재정 보고.]
[제국력 124년 마족 부산물 판매 보고.]
[제국력 132년 공작령 소재 용병단 세수 보고.]
제국력 124년... 벌써 몇 년이나 흐른 서류가 아직도 처리 안 되고 이런 곳에 쌓여 있단 말야?
더군다나 수해 재정 보고?
이건 민생 안정을 위해서라도 빨리빨리 처리해야 하는 안건이잖아.
"행정 문제들부터 치안 문제까지, 처리해야 할 서류들이 이렇게 쌓여 있다니."
도저히 공작령에서 일어나는 상황이라고 납득하기 힘든 수준이다.
"처리 기관이 없는 상태에서 도대체 영지가 어떻게 굴러갈 수 있었던 겁니까? 단순 처리되는 업무도 있겠지만 사람들끼리 갈등도 꽤 많이 쌓일 것 같은데요."
당장 서류 몇 개만 들여다보더라도 세금 문제, 영지 문제, 사소한 다툼까지 갈등이 끊이질 않는다.
그런데 그걸 처리할 법령이나 제도, 그리고 기관조차 없어?
어처구니가 없어 아펠 집사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집사는 생긋 웃으며 대답해 주었다.
"그런 제도와 법령을 만드는 것이 사무관의 역할 아니겠습니까?"
"...."
아니 분명 그게 틀린 말은 아니지만.
실제로 나도 다른 영지의 사무관, 또는 전략관, 또는 참모나 부관이 되기 위해 수많은 이력서를 보낼 무렵엔.
이런 일들을 꿈꾸곤 했다.
하지만 이건 선 넘었지.
내가 생각한 건 적당히 만들어져 있는 법률과 행정처리 절차를 보고.
'이건 잘못되었네요.'
'이건 100년 전 제국에서 만들어진 방식인가요? 낡았군요.'
같은 이야기를 하며 내 실력을 뽐내고.
'오오, 이것이 300년 전에 소실되었던 그 전략도해?'
'아아- 이것이 세금 정산의 공식이라는 것이다.'
라는 풍경이 펼쳐질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이럴 거면 차라리 내 일이 편지 쓰는 거라고 말하지나 말지.
희망을 가졌다가 단숨에 나락으로 빠지는 이 기분, 당신이 아냐고.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집사장을 보고 있자니.
내 시선을 오해했는지, 집사장이 허허 웃으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스스로 말하기 민망합니다만, 공작님은 늘 비범한 사람만을 가신으로 받곤 하지요. 이를테면 뛰어난 기사이거나 암살자이거나 용병이거나. 제 식견이 짧아 사무관님이 숨긴 능력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 이 노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 능력이라면 어마어마한 힘을 가지고 계시겠지요."
검사? 용병? 암살자?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럼 지금 집의 가신들이 다 힘을 숨긴 괴수들이라는 거야?
나, 나는 아냐! 집사님 지금 심각한 오해를 하고 있어요!
제가 분명 아카식 레코드라는 독특한 공간을 가긴 갔는데요.
거기에서 수많은 책을 읽긴 읽었는데, 그걸 어떻게 써먹어야 할지 모르는 그냥 일개 문사거든요.
"그렇다 보니 저희가 사무적으로 바라는 건 크지 않습니다. 밀린 서류들 정도만 정리해 주시면 되지 않을까요."
아펠 집사는 그렇게 이야기하고 웃으며 집무실을 나섰다.
남은 것은.
날 기다리는 서류 더미들뿐.
* * *
전임 사무관이 간경화로 낙향했다고 하는데 그 말을 믿지 못하겠다.
분명 위염이나 위경련 같은 스트레스가 더 큰 원인이었을 거다.
내가 장담할 수 있다.
왜냐하면, 지금 내가 서류 처리 업무를 받은 지 두 시간 만에 위경련으로 죽어 버릴 것 같거든.
일단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무턱대로 법령이나 세무처리 기준을 만들 수 없으니.
서류를 쭉 정리하기로 했고.
기존 서류를 통해 정리한 내용은 아래와 같다.
[헬피온 공작령
고정 수입 없음.
단기 수입 불일정함. 대부분은 몬스터 사냥에서 나오는 부산물을 판매하며 나오는 수입.
치안을 비롯한 영지의 주요 형법 존재하지 않음. 공작의 기분을 나쁘게 하지 않는 선 안에서 '적당히' 질서를 유지.]
이게 무슨 영지냐!
서방의 야만족도 이렇게는 안 살겠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건 땅도 경작지도 없는 유목민 아냐!
그런데 헬피온 공작은 땅이 없냐, 아니면 능력이 없냐.
세상에서 가장 강력하고, 세상에서 가장 넓은 땅을 지닌 사람이 이따구로 주먹구구라니!
후... 퇴사 말린다.
지금 와서 일 못 하겠다고 때려치워도 괜찮지 않을까?
그냥 때려치우는 게 아니라, 이 정도면 헬피온 공작 뺨 한 대 정도는 때려도 무죄로 인정받지 않을까?
그래도 일단 대충 쌓여 있는 서류를 쭉 읽다 보니 조금씩 드러나는 정보들이 있다.
나는 빈 종이를 꺼내 해당 내용을 천천히 기록했다.
첫 번째.
헬피온 공작령의 명령 체계는 오로지 공작의 결재만으로 이루어진다는 점.
보통 공작령이라고 하면 공작을 필두로 다양한 하급 귀족들이 함께 어우러져 있곤 한다.
기사단장이 백작이나 후작 같은 직위를 가지기도 하고.
또는 작은 영토를 받은 봉신들이 자잘자잘 헬피온 공작령의 세력을 나눠 통치하는 거지.
그러나 헬피온 공작의 휘하엔 후작, 백작, 자작, 남작까지.
단 하나의 귀족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 까닭은 영지 대부분이 마족의 영토이기 때문.
마족의 서식지를 영지랍시고 다스리라 귀족을 임명해 봤자 문제만 일으키겠지.
두 번째.
그렇다 보니 마을의 대소사는 대부분 헬피온 공작, 또는 이전에 근무하던 사무관이나 사무관 대리였던 집사장이 처리했었고.
그때그때 이야기에 따라 주먹구구로 처리하는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 세금마저도.
서류 작업 초반, 나는 세금을 정리한 기록을 보고 눈을 의심했다.
이중장부를 만든 줄 알고.
어떤 날은 트롤의 피 1L가 15골드였는데, 또 어떤 날은 10골드, 또 어떤 날은 20골드로 기록된 거 아닌가.
트롤의 피뿐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물품의 시세가 그만큼 변동의 폭이 심했다.
그나마 전임 사무관이 왜 가격이 그렇게 책정되었나 세밀하게 기록을 해 줘서 망정이지.
아니면 엄한 사람 사기꾼이라고 고발할 뻔했네.
그렇게 일을 하다 보니 도달한 결론이 세 번째인데.
"일은 어떤가. 할 만한가?"
"아, 공작님."
언제 들어와 계셨던 거지?
나는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고, 공작은 팔을 뻗어 내 균형을 잡아 주었다.
"아하하, 감사합니다."
"아냐아냐. 집사장이 자네에게 서류 처리를 시킨 모양이더군. 그래서 일은 할 만한가 살펴보러 왔네. 그런데 원래 잘 허둥거리고 넘어지고 그런가?"
나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제가 골방에서 좀 오래 박혀 있어서요. 자주 균형을 잃거나 발을 헛디디거나 그렇습니다."
정확히는 아카식 레코드에 박혀 있을 때쯤부터 생긴 증상이다.
뭐, 그 좁은 곳에 5년 동안 박혀서 책만 읽어 댔으니.
사실 몸을 수련해야겠다 생각한 것도 그 안에서 워낙 덜렁거리면서 몸을 다쳐댔으니 그랬던 거지 뭐.
그게 아니었으면 아카식 레코드 책 중 마법서나 비술서 중심으로만 책을 읽었을 거다.
몸이 퇴화되는 건 어쩔 수 없다 싶기도 하고.
"음."
공작님의 의뭉스러운 시선이 내 몸 곳곳을 한 차례 훑었다.
왜 그러지.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사람의 입장에서는 이렇게 몸 못 쓰는 사람이 신기한가?
곧 공작은 나에게서 시선을 떼고 책상 위의 서류를 집어 들었다.
"이게 오늘 업무를 정리한 서류군."
공작의 눈이 서류를 훑는다.
그리고.
호, 하는 소리와 함께 호기심이 눈동자 아래부터 천천히 차오르는 것이 보였다.
그의 시선이 나를 다시 바라보았다.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에도 결이 있다면.
아까까진 부드러운 음악 같은 결의 시선이었고, 지금은 날 꿰뚫는 듯한, 칼을 들고 서 있는 검사의 결이 되어 있었다.
"헬피온 공작령의 세력도 추정도해라. 이거 흥미롭군."
저것이 바로 서류를 정리하면서 느낀 세 번째 사항이었다.
모든 것이 주먹구구로 이루어지는 헬피온 공작령이지만, 그럼에도 이 영지가 '공작령'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굴러갈 수 있는 것은.
이 공작령의 이권을 서로 나누고 협력하는.
세 개의 거대한 세력이 굳건히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이었다.
"제법 흥미로운 추측이야. 자네 말에 따르면 내 영지에서 주인 몰래 왕 놀음을 하며 지내는 세력이 있단 거 아닌가. 이 말에 책임질 수 있는가?"
책임이라는 말은 좀 무겁네.
그래서 나는 그대로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럼 자네의 분석이 틀렸단 것인가?"
공작의 눈초리가 한층 더 날카로워졌다.
이건, 시험이구나.
내가 제대로 일을 할 수 있는지 없는지.
그러니까 더더욱 정확하게 얘기해야지.
"정확하게는 둘로 나누잔 얘깁니다. 저는 왜 세력이 있다고 생각했는지 추론 과정을 알려 드릴 수 있습니다. 아마 높은 확률로 맞을 거라고 자신합니다. 그렇지만 거기까지일 뿐, 그것을 제가 책임질 수는 없지요.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해당 내용에 대해 책임질 사람은 제가 아니라 오히려...."
나는 말을 끝까지 잇기보단 그저 공작을 빤히 쳐다보았다.
높은 직위의 귀족을 이렇게 쳐다보는 건 분명 결례일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공작에게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니, 이게 정답이었던 모양이다.
공작의 입매가.
씩, 하고 올라갔다.
"저택에 있는 사람 모두를 회의실로 불러 주게. 자네의 능력을 좀 봐야겠네."
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5화
<5화 - 1+1+1 = 4입니다!(1)>
공작은 아펠 집사와 하녀, 그리고 요리사를 회의실로 불러 모았다.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불러오라고 해서 샅샅이 뒤졌는데 고작 이들뿐이다.
정말로 공작이라고 하기엔 소탈한 사람이야.
사람들은 여섯 사람 정도가 둘러앉을 법한 작은 테이블에 모두 착석했다.
사람들의 시선은 속내를 읽기 힘들었다.
덤덤한 것 같기도 하고, 또 어떤 면에선 냉정한 것 같기도 하고.
"자, 그럼 사무관. 아까 작성한 서류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게."
헬피온 공작의 말에, 나는 크흠 하고 목을 가다듬은 뒤 입을 열었다.
"결론부터 두괄식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헬피온 공작령에는 크게 세 곳의 세력이 시장의 흐름, 질서, 그리고 법규 등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여기까지만 말하고 나는 사람들의 반응을 살폈다.
모여 있는 사람들의 표정은 덤덤했다.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이라는 걸까.
아니면 공작이 옆에 있어서 마음을 진중하게 먹고 반응하지 않는 걸까.
일단 계속 브리핑을 해 보자.
"처음 서류를 보았을 땐 당황했습니다. 세금도 엉망진창으로 매겨져 있고, 세금의 기준이 되는 실거래가들도 하루, 이틀 만에 큰 폭의 변화를 보이곤 했으니까요."
정상적인 상황이라 보기 어려운 일들.
"그래서 제가 주목한 것은 다른 쪽이었습니다. 물품의 가격을 본 것이 아니라 거래의 주체가 누구냐 하는 것이었지요."
델피 아카데미의 교수에게 행정 처리를 배울 때,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은 말이 있다.
수치에 답이 있다.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단지.
서류에는 모든 숫자가 적혀 있지 않다. 서류를 작성하는 사람은 거짓말을 할 수 있으니까.
그렇기에 서류를 살피는 건 서류를 쓴 사람들이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지, 그리고 서류에 적혀 있는 사람들이 어떤 의도로 행동했는지.
그 행간을 읽어 내야 한다고.
"제가 첫 번째로 발견한 곳은 그리즐리 용병대였습니다. 이들이 담당하는 것은 몬스터 부산물의 판매였죠."
그리즐리 용병대는 헬피온 공작령에서 가장 규모가 큰 용병대였다.
소속된 용병은 전원 A급으로 250명 규모.
다른 용병대가 50명에서 100명 전후라는 것을 감안하면 압도적으로 많은 수치다.
"15년 전 제국 전쟁에서 전쟁상인 출신의 판이 만든 용병대죠."
아펠 집사가 서류만으로 파악하기 어려운 부분을 보충해 주었다.
"판은 영악한 동시에 음험하고, 그러면서도 뛰어난 무력을 갖춘 자입니다. 상인 출신이지만 소드마스터 초급의 실력을 가질 정도로 문무에 충실한 자죠."
"판은 공작령 바깥과 꾸준히 교류하면서 용병들을 이용해 물건을 거래하며 몬스터 부산물의 시세를 유지하더군요."
"시세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나는 공작의 물음에 오후에 보았던 서류 중 하나를 머릿속에서 끄집어냈다.
"엉망이랄까, 좀 이상합니다."
"어떤 부분이?"
"사실 몬스터들의 부산물이 가격을 제대로 받으려면 그만큼의 가치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기에 어떤 몬스터는 똥도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가고일의 몸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는 마력을 머금고 있지만 결국은 돌덩이에 불과하죠. 희귀할 수는 있지만 필요하진 않으니 높은 가격이 부과되진 않으니까요."
특이한 점은 여기서 발견되었다.
"그리즐리 용병단이 유통하는 물건과 가격엔 일관성이 없습니다. 정말로 쓸모없는 물건이 큰 가격을 형성하기도 하고, 반대로 전투와 생존에 필수적인 재료가 아주 저가로 거래되기도 하더군요."
"일관성이 없다면 그들이 시장을 움직인다고 하긴 무리가 아닌가?"
"그래서 조금 더 시야를 거시적으로 바라봤더니 한 가지 의념이 보이더군요."
시장의 장악에 목적이 있는 게 아니라면?
그렇다면 그들의 행보가 말이 된다.
"이들은 개개 물건의 시세를 만들려고 하는 게 아니라, 헬피온 공작령에서 '시장' 그 자체를 끊임없이 유지하려는 게 아닌가 하는."
화폐는 절대적인 가격이 존재하지 않는다.
유통하는 사람들이 화폐의 가치를 얼마로 보느냐 하는 협의에 따라 정해지는 거지.
그리즐리 용병대가 움직이는 건 바로 그 지점을 겨냥한 것이었다.
"그렇군. 그럼 다음 세력은?"
공작은 그저 고개를 덤덤히 끄덕이는 것으로 첫 번째 발표를 매듭지었다.
"다음은... 어, 이들은 특별히 집단의 이름은 없어서 임의로 '주점'이라고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코드네임 주점은 공작령의 치안과 질서를 담당하는 자들입니다. 영내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주점에 모여 사건을 처리하죠."
"코드네임 주점이라, 흥미롭군."
이번 안건은 꽤 재미있는 반응이 나왔다.
공작을 포함한 네 사람 전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주점의 작동 방식은?"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마 일종의 법원 같은 형식이 아닐까 싶습니다. 불평불만이 생긴 영지민들은 저녁에 주점으로 모이고, 주점을 나올 때쯤엔 서로 합의를 마무리하니까요."
내 말에 더 이상 질문이 들어오진 않았다.
그들의 표정을 보니 이미 알고 있는 사항인 듯 보였다.
"그렇군. 그럼 마지막 세 번째는?"
"세 번째는 마을부녀회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하하."
처음으로 하녀의 입에서 맑은 웃음소리가 나왔다.
"부녀회라니, 재미있는 명칭이네요."
"부녀회는 공작령의 전사들과 함께 정착한 사람들의 모임을 일컫습니다. 용병들의 배우자, 자식, 그 외의 모든 가족들이 포함되어 있죠."
하지만 절대 평범한 곳이 아니었다.
"사실 이렇게만 설명을 들으면 별 볼 일 없는 민간인처럼 보이지만, 이들의 면면 또한 강력합니다."
이들의 힘은 다른 곳에서 발휘하고 있었다.
"이 사람들은 공작령을 움직이는 혈액의 역할을 전담합니다. 마을의 청소를 담당하기도 하고, 출생과 육아 같은 대소사부터, 몬스터가 쳐들어왔을 때 자경단 같은 역할까지."
"하지만 그건 모든 영지의 민간인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일 아닌가?"
처음으로 침묵을 유지하던 요리장이 입을 열었다.
날카로운 질문인걸.
"물론 거기까지만이었다면 제가 세력이라고 하지 않았겠지요. 제가 이 그룹을 세력이라고 이름 붙인 건 이들이 소문을 담당하기 때문입니다."
"소문?"
공작의 되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들은 혈액이다.
즉, 공작령 곳곳을 휘몰아치며 영양소를 운반하지.
"소문이라고 하면 너무 가벼워 보이니 이렇게 바꿔 말하는 게 낫겠군요. 그들이 담당하는 것은 정보입니다. 누가 다쳤다더라, 아님 상위 던전이 발견되었다거나 하는 이야기들이죠. 이런 사소한 이야기부터 유물이나 아티펙트 등 고급 정보들조차 하루 만에 퍼지더라구요."
하지만 그건 고민하기를 그만둔 것에 불과하다.
아카식 레코드의 기록들은 치열하게 고민해야지만 답이 나온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그래서 가설을 세워 봤습니다. 베갯머리에서 이루어지는 수많은 이야기들. 가장 편한 곳에서 주고받는 이야기들. 이렇게 마을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이야기가 모이는 중심, 허브가 있다면?"
"재미있군. 그럼 그 마을부녀회의 회장은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공작의 질문에 나는 서류를 한 장 꺼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엘시아 부인밖에 없겠더군요."
엘시아 부인.
7년 전 헬피온 공작령에 남편, 딸과 함께 들어왔으나 남편은 1년 만에 사망.
그 이후 딸과 함께 마을의 식료품점을 운영하고 있다.
공작령의 전사들은 대부분 사냥으로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만큼 농경이 제대로 이루어질 리 만무하다.
그러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엘시아 부인의 식료품점에 들르게 되지.
"엘시아 부인은 소문을 조율하고, 소문에 따라 공작령의 민간인들이 해야 할 업무를 배분하죠. 일종의 자치 민병대장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허허. 서류들만 들여다보는 것만으로 거기까지 알게 되는가."
"사무관의 능력은... 정말 놀랍군요. 그냥 서류를 다룰 줄 아는 것이 아니라 적혀 있지 않은 정보까지 유추할 수 있다니."
"대단하군."
세 번째 세력까지 브리핑을 마치자 가신들의 경탄이 이어졌다.
잘한 건가?
"모두 정답이네. 대단하군. 전임 사무관은 이런 세력 구도를 알게 될 때까지 두 달 정도의 시간이 걸렸는데."
"하하, 운이 좋았습니다."
처리되지 않은 서류가 잔뜩 쌓였으니까 이게 가능했지.
만일 매일매일 서류를 처리하는 입장이었으면 나도 한두 달 정도 시간이 걸렸을걸?
"겸양은 괜찮네. 자신의 능력에 대해서 제대로 이야기할 줄 아는 것도 미덕이야. 특히 이곳 헬피온은 더욱 그렇지."
"헬피온 영지의 복이군요. 전임 사무장보다도 훨씬 유능한 이런 인재가 스스로 영지를 찾아오다니."
"그럼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나는 공작과 사람들의 말을 끊었다.
주변 사람들의 의아한 시선이 몰려들었다.
사실 긴가민가한 부분이라서 이야기하지 않을까 했지만, 자신의 능력에 대해 스스럼없이 밝혀야 하는 게 미덕이라고 했지?
그럼 질러 보자.
"저는 큰 세력이 세 곳 있다고 했지, 저 세 세력이 전부라고 이야기 드린 적은 없습니다."
"자잘한 세력은 존재하지 않겠나?"
"자잘한...은 아닌 것 같습니다. 사실, 앞선 세 세력보다 지금 말씀드릴 세력이 훨씬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하거든요."
주변의 공기가 딱딱하게 굳어 간다.
"이 세력은 자본을 바탕으로 공작령을 뒤흔듭니다. 때로는 그리즐리 용병대보다 더 많은 자금을 통해 헬피온 공작령의 자본을 움직입니다. 어떤 날은 수많은 부산물을 무료에 가깝게 풀기도 하고, 어떤 날은 엄청난 가격으로 부산물을 제한 없이 사들이기도 하죠."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사람들을 한 명, 한 명씩 바라보다가.
이내 한 사람에게서 시선을 멈추었다.
아펠 집사장.
"마지막 한 세력은 헬피온 공작님과 공작님의 명령을 받은 아펠입니다."
처음엔 이렇게 생각했다.
검밖에 모르는 무식한 전투 괴물 헬피온 공작은 싸우는 것만 잘하는 거 아닐까.
행정 처리라곤 하나도 모르기 때문에 마을을 그저 방치하듯 내버려 두는 거지.
그렇다 보니 공작령은 공작의 휘하에 있으면서도 일종의 자치령처럼 그리즐리 용병대, 주점, 그리고 엘시아 부인이 세력을 만든 거다.
그런데 이상한 서류가 있더라고.
가끔 저 세 세력만으로는 불가능한 아주 거대한 일들이 벌어진다.
그리고 세 세력조차 이 조류에는 거스르지 못한 채 딸려 간다.
헬피온 공작령에서 그럴만한 힘이 있는 세력은 단 하나.
공작과 가신밖에 없겠지.
공작은 자신의 영지에 무심한 게 아니었다.
그저 영지가 스스로 살아갈 수 있도록 최소한의 흐름을 만들며 조율하는 조율자 역할을 자처할 뿐이었다.
"...진심으로 놀랍군."
공작은 동그란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아까도 놀랍지만 이건 정말로 더 놀랐어. 마왕성에서 마왕의 비기를 보았을 때랑 비슷한 충격이야. 서류를 읽으면 그 정도까지 볼 수 있게 되나?"
"열심히 공부했죠."
"공부라, 그렇지. 칼을 휘두르면서 도를 깨우치는 것이나, 공부를 통해 극에 달하는 것이나 다 똑같은 것이지. 칼만 휘두르다 보니 다른 영역에서 고수가 된다는 건 어떤 의미인지 잘 몰랐는데, 오늘 개안하는군."
"과찬이십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너무 과례를 차리면 그것도 무례가 될 수 있어. 겨우 오후 단 몇 시간. 공작령의 핵심 인사들만 알고 있는 사실을 단숨에 파악하는군. 대단한 기예야."
나는 공작을 바라보며 웃었다.
이곳에선 능력을 드러내면 미덕이라 이야기한 것은 공작 본인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능력을 드러낸 만큼의 보상이 있지 않을까.
"하녀장과 요리장은 업무로 복귀하게. 그리고 집사장과 사무관만 남게."
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6화
<6화 - 1+1+1 = 4입니다!(2)>
"마지막 세력을 이야기하며 아펠을 보았었지. 그 이유가 있는가?"
"특별히 이유라고 할 것까지는 없습니다. 그냥 외부 출입이 잦은 사람이 집사장밖에 없더라구요."
"...라는군, 집사장."
"허허, 제가 좀 더 주의를 기울여야겠군요. 처신을 신중히 하겠습니다."
"아냐아냐. 여기서 자기를 혼내게 되면 모두가 웃긴 꼴이 되지. 그냥 사무관이 잘한 거야."
공작은 웃으며 내가 내민 서류를 들어 올렸다.
"겨우 오후의 두 시간 동안 이 정도의 분석이라. 사무관. 내가 오늘 자네의 발표를 들으며 생각한 게 무엇인지 아는가?"
나는 묵묵히 고개를 내저으며, 찻잔으로 목을 축였다.
"기대해도 좋겠단 생각이 들었어. 자네 분석의 처음으로 돌아가 보세. 왜 우리 영지는 이렇게 엉망일까?"
풉.
마시던 차를 뿜을 뻔했다.
지금 공작 본인이 자기 입으로 영지가 개판이라 한 거 맞지?
아무리 그래도 본인의 입으로 저런 말을 하긴 좀 그렇지 않나?
공작은 그런 내 모습을 즐겁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자네의 식견이라면 보통 여기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했을 것 같은데."
공작은 잔뜩 기대감이 담긴 눈빛으로 날 쳐다보았다.
그리고 나는.
망했다, 아, 진짜 큰일 났네.
그런 거 생각 안 해 봤는데.
나도 모르게 이 영지의 공작부터 휘하 사람들은 모두 다 머리가 살짝 헤까닥 돌아가지고.
모두 검밖에 모르고 몬스터랑 치고받는 것만 생각하는 무식한 것들이라고 여겨 버렸어.
그러니까 영지 꼴이 이런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공작님을 닮은 영지라 그런 거 아니었나요?'
'집사장, 저 요망한 혀를 가진 사무관을 해고하고 끌고 나가 저잣거리의 짐승들에게 던져 주게.'
그렇게 이야기하면 안 되겠지?
아하하하.
지금부터는 임기응변이다.
나는 필사적으로 뇌세포들을 움직였다.
아니, 움직이려고 했다. 공작이 먼저 입을 열기 전까진.
"찾아오게."
"네?"
"자네의 식견은 놀라운 부분이 있으나, 그렇다고 완전한 것은 아닐세. 하나만 꼽자면 역시 주점에 대한 발표겠지. 왜 주점에서 모든 갈등이 해결되는가. 그건 그 장소를 직접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네. 그러니 가서 보고 오게."
"뭘 보고 오면 될까요?"
도대체 공작이 나에게 시키려는 게 무엇일까.
나는 그 지점을 확실히 하기 위해 공작에게 되물었고.
공작은 생긋 웃었다.
"자세한 것은 함께 갈 아펠 집사가 알려 줄 것이네."
* * *
정말로 폭풍과 같은 시간이었다.
서류 정리를 하다가 브리핑까지.
어후. 뭐가 뭔지.
"저를 비롯한 다른 가신들도 종류는 다르지만 모두 시험을 쳤습니다. 시험을 통과해야지만 비로소 진정한 가신이 되는 거지요. 물론 사무관님의 경우는 좀 더 기대를 받고 계신 듯하지만요."
내가 보기에 그 기대, 집사장님이 더 많이 하고 계신 것 같은데요.
"시험이 많고 과도한가요?"
"다른 누구보다도 빠르시니까요. 저나 하녀장은 능력을 검증받는 데까지 한 달, 요리장은 세 달이 걸렸거든요. 그런데 일주일이라니. 이건 헬피온 공작가의 최단기록입니다!"
끙. 그 정도 시기가 있었다면 나도 더 여유가 생기지 않았을까.
그럼 공작의 성격이 어떤지, 스타일이 어떤지 좀 더 확실히 알아본 후 시험에 들어갔을 텐데.
어휴.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 너무 오랫동안 골몰하는 것도 좋지 않지.
"주점은 어떤 곳이죠?"
내가 해야 할 일에 좀 더 집중하자.
"주점은 일종의 결투장입니다. 문제가 생겼을 때, 문제의 당사자들이 만나 결투를 하는 곳이지요."
아펠은 설명했고 나는 되물었다.
"농담이죠?"
"아닙니다. 정말로 공작령의 백성들은 결투를 통해 깔끔하게 문제를 해결하고 있습니다. 그들만의 문화죠."
"아무리 그래도 결투라니. 여기 잔존 마물들이 웨이브를 이루며 쳐들어오는 변경 최전선이잖아요. 그런데 쉽게 싸우고 죽고 죽이고 그래도 됩니까?"
내 말에 아펠 집사가 후후 소리를 내며 웃었다.
"목숨이 걸린 진짜배기 싸움은 아닙니다."
"그럼요?"
"그걸 보러 가는 거지요. 마침 오늘 전사 두 명이 결투를 신청했습니다. 유적지의 유물 배분 문제였지요. 우리가 도착할 때쯤은 한참 결투 중일 겁니다."
* * *
"탐슨, 죽여 버려!"
"펠릭스, 네가 충분히 이겨! 정신 차려!"
"탐슨, 나는 네게 걸었다!"
"펠릭스! 네놈이 뺏긴 보검을 찾아와야지!"
주점은 일반적인 술집인 모습과 달리 좀 더 복합적인 공간처럼 생겼다.
카운터 바에는 큰 게시판에 다양한 게시물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고, 음주뿐 아니라 바빠 보이는 직원들과 이런저런 사람들이 시끄러웠다.
조금 안쪽에는 소파부터 벤치까지, 사람들이 앉아 쉴 수 있는 의자들이 여러 종류가 갖춰져 있었다.
그러나 이 공간의 백미는 중앙이었다.
사람 두 명이 이야기를 할 법한 좁은 라운드 테이블을 중심으로 수십 명은 될 법한 사람들이 몰려, 한참 열기로 달아올라 있었다.
내기의 판돈을 쥔 채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고, 때로는 전사들의 등을 두드리기도 했다.
이내 한 사람의 머리가 테이블 위로 쓰러졌다.
"펠릭스가 이겼다!"
"탐슨 녀석, 함부로 남의 무기에 침 바르더니 잘 됐지!"
승자인 펠릭스는 자신의 머리통만 한 맥주잔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 술잔 안에 들어 있던 맥주가 마치 폭포처럼 펠릭스의 몸 위로 쏟아졌다.
승리를 자축하는 세레모니인 모양이다.
"주량 결투를 하는 건가요?"
"서로의 정신력을 가르는 겁니다. 무력보다 안전하고, 두 사람의 숙취만으로 끝나는 안전한 대결이죠."
아펠 집사의 목소리엔 어째서인지 약간의 자부심마저 느껴지는 듯했다.
사실 꽤 괜찮은 방법 같긴 하다.
세상에서 제일 잘 싸우는 사람들이 모인 공간에서 안전하게 승부를 가린다니.
하지만 뭐랄까.
"좀 야만적인 것 같기도 하고."
그 헬피온 공작의 영지니까 당연한 것 같기도 하지만....
그런데 내 목소리가 너무 컸나 보다.
"뭐라?! 신성한 결투를 야만?"
방금 전까지 신나던 분위기가 마치 실이라도 끊어진 듯 뚝, 하고 완전히 사라졌다.
대신 남은 건 날 죽일 듯이 노려보는 눈동자와 거친 숨소리들.
내가 너무 조심성이 없었네.
"이봐, 애송이! 처음 보는 얼굴인데."
"당신 아펠 할배 아냐. 할배, 옆에 쥐새끼는 당신이 데려온 거요?"
쥐새....
정정하자.
야만적이 아니라 그냥 야만인이네 이거.
"쯧쯧, 말을 삼가지. 이래 봬도 이번에 공작령으로 부임한 라워드 사무관일세. 앞으로 공작령의 대소사를 처리할 걸세."
집사님, 이래 봬도는 뭔가요.
내가 도대체 어떻게 보이는데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당신들이 근육질의 돼지 괴물인 건 생각 안 하는 거야?
그런데 주변의 분위기가 이상하다.
방금까지의 소란이 거짓말인 것처럼 사라졌으니까.
사람들은 마치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멀뚱멀뚱 눈을 뜬 채 날 바라보았고.
이내 소음이 폭발했다.
"말이 되는 소릴 하쇼! 이봐, 쥐새끼! 이 헬피온이 어떤 곳인지 알아?"
"다른 곳도 아니고 헬피온 공작가의 가신이 되었다고?! 이 새끼야, 너 어디서 좀 쳤냐?"
"검사? 아니면 전사나 마법사냐!"
"너 같은 새끼들이 괜히 괴수의 이론이 어쩌고저쩌고 나불거리다 수십 명이 다치고 죽는 거야!"
사방이 적이군.
방금 전까지 대결로 인해 달궈졌던 열기가 고스란히 나를 향한 적개심으로 바뀌었다.
원색적인 욕설들과 차마 옮기기 힘든 모욕들이 날아다닌다.
슬쩍 아펠 집사를 보자, 집사는 마치 이 상황이 재미있다는 듯 눈을 반짝거리고 있었다.
마치 내가 어떻게 나오는지 지켜보려는 듯이.
이게 집사장이 말한 공작의 시험인가?
그때였다.
내 머리 위로 차가운 맥주가 쏟아진 것은.
"헬피온 공작령에서 샌님이 있을 자리는 없어. 꺼져."
사방에서 웃음소리가 쏟아졌다.
아 싫다. 델피 아카데미에서도 비슷했는데.
'마나를 느끼지도 못하면서 이론만 알고 차석을 차지한 장학금 버러지.'
'전쟁터에서 써먹지 못할 반푼이.'
비난과 욕설을 피해 아카식 레코드에서 몇 년을 웅크리고 살았었는데.
여기에서도 똑같은 취급을 받아야 한다고?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나는 고작 이런 취급이나 받으려고 5년간 골방에 처박혀 있던 게 아냐.
세계의 진리를 배우고. 그를 바탕으로 힘을 얻고. 세력을 얻고.
그렇게 복수를 하기 위해서 나온 거지.
내 적은 데온 크라피와 후작 가문.
세계에서 가장 강대한 국가의 귀족이자 내 인생을 모두 망칠 수 있을 정도로 힘 있고 악랄한 녀석이다.
그러니 이 정도의 비아냥쯤은 깨부숴 주지.
나는 방금까지 자신의 머리에 맥주를 쏟아붓던 덩치를 밀어내고, 술에 취해 테이블 위에 침 흘리고 뻗어 있는 덩치를 바닥으로 차 버리곤, 테이블 위에 놓인 탐슨의 맥주잔을 들었다.
만취했던 모양인지 거의 마시지 못하고 가득 차 있는 맥주잔.
나는 그 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꿀꺽, 꿀꺽.
목으로 넘어가는 시원한 소리와 함께 주변의 소음이 점차 사그라들었다.
금세 맥주잔의 맥주를 다 들이켠 뒤 쾅, 소리를 내며 잔을 테이블에 내려놨을 때.
수십 쌍의 눈이 번뜩이며 빛나고 있었다.
"불만 있으면 말로만 나불거리지 말고 나와서 한 판 뜨시든가."
"푸하하하하핫!"
"와, 이 새끼 보게?"
"큭큭, 헤일로! 이건 자네가 졌어! 그래! 전사가 말로 나불거리면 안 되지."
"에이 씨펄, 닥쳐!"
주점이 떠나가라는 듯 웃음소리가 폭발했다.
마침 털이 수북한 덩치 하나가 자신의 술잔을 들고 테이블로 걸어 나왔다.
목과 상체까지 벌겋게 달아오른 게 이미 불콰하게 취한 녀석이었다.
"애송이 주제에 깡다구만큼은 끝내주는군. 네 주량이 깡다구만큼은 되어야 할 텐데 말이지. 어때, 나랑 한판 먼저 뜨는 건?"
만면에 비웃음이 가득한 거 보니 날 굉장히 얕잡아 보고 있는 모양이다.
그러니까 이미 취한 상태에서도 자기가 이길 수 있을 거라 자신하며 이렇게 나오는 거겠지.
그런데 너희들이 모르는 게 있어.
세상에서 술을 제일 잘 마시는 족속들이 누구일 것 같아?
몸을 잘 쓰고 체력이 뛰어난 전사들일까?
아니면 머리 좋은 마법사 녀석들?
아니, 다 틀렸다.
돈은 제대로 벌지도 못 하는데 이상은 높고 자존심으로 가득 찬 예술계와 문학계 사람들이다.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그저 술만 마시며 세상을 원망하는 게 고작이거든.
델피 아카데미는 그런 예술계, 그리고 문학계 사람 중 최고만 모인 곳이지.
가장 돈이 안 된다는 문학과 역사 전공은 전공 공부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술과 함께한다는 한량 집합소였고, 나는 데온 크라피와의 일이 있기 전까지 그곳에서 술귀신이라고 불리던 몸이었다 이 말이야.
난 생긋 웃으며 맥주잔을 들어 올렸다.
"지고 울지 마세요."
* * *
"뭐야. 왜 이렇게 다들 죽어 있어?"
"왔냐?"
케인은 며칠 전 헬피온 공작령에 합류한 신참 전사였다.
용병대에서 S급 전사로 대우받던 그가 인류의 변방까지 찾아오게 된 건 오로지 돈 때문.
보다 많은 괴수를 사냥하고, 보다 많은 부산물을 얻어 화려하게 은퇴하는 것이 그의 꿈이었다.
헬피온 공작령은 그를 위한 맞춤형 유토피아 같은 곳이었다.
경계 바깥으로 나가면 몬스터가 넘쳐 났고.
몬스터를 사냥한 이후 주점에는 자신과 비슷한 녀석들뿐이라 늘 유쾌했다.
무술을 토론하는 것도 좋았고, 몬스터에 대한 정보를 나누는 것도 좋았다.
오늘 역시 중형 몬스터 한 마리를 잡아 밥값은 했겠다, 맛있는 술로 하루를 마무리하려고 온 것인데.
주점의 분위기가 다른 날보다 훨씬 달아올라 있는 것 아닌가.
"엄청난 놈이 왔어."
"누구?"
"이번에 공작가에 들어온 사무관이라나 봐. 호리호리한 몸을 가졌는데 무려 12명이나 술 결투로 제껴 버리더란 말이지."
"더군다나 그 술 귀신 펨코, 탈레스 같은 놈들도 포함해서!"
"살다 살다 저렇게 술 잘 마시는 사람은 처음 봤어."
"난 사무관님한테 반했다고! 미쳤어! 그건 사람이 아니라 근육과 피부를 가진 오크통이야!"
"게다가 마지막에 두 발로 멀쩡히 걸어 나갔지?"
"사무관 그는 신이야!"
라워드의 기예가 굉장히 인상 깊었던 탓일까.
주점 사방에서 사람들의 이야기가 발작적으로 쏟아져 나왔다.
가만히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케인이 알만하다는 표정을 짓고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들, 현자님한테 덤볐구만?"
"무슨 소리야, 사무관이랑 술 결투를 했다니까?"
"그러니까, 현자님 말야. 내가 첫날 너희한테 얘기했잖아. 이번 헬피온 공작령에 오는 동안 우리 일행이 현자님을 만났다고."
"설마... 그 천문지리나 몬스터 정보에 능통하고, 날씨를 기가 막히게 맞췄다던?"
"그러고 보니, 그 현자님이 네 검술이랑 다른 사람들의 무술을 점검해 줬다며? 흐름이 이상하니 뭐니 하면서?"
"그 만능 현자가 설마?"
"그래. 술까지 잘 마시는지는 오늘 처음 알았지만."
케인은 무구를 한쪽에 세워 두곤 술잔을 들었다.
왜 이렇게 사람들이 호들갑이었는지.
'현자님이 오셨었다면 이해할 수 있지.'
S급 용병으로 세상을 유랑하며 짧지 않은 용병 생활을 했던 자신조차도 여행 내내 이 주점의 사람들처럼 호들갑을 떨었을 정도로 독특하고 신비한 사람이었으니까.
그건 그렇고 술까지 잘 마신다니.
'헬피온 공작가에서 갈등이 생겨 꽉 막힌 사건들은 술 결투로 판가름 낸다 했던가? 헬피온 공작령의 새로운 실세가 생겨나겠군.'
케인은 조만간 사무관을 한 번 더 찾아가 눈도장이라도 찍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7화
<7화 - 1+1+1 = 4입니다!(3)>
똑똑.
"사무관님. 아침 식사 시간입니다."
벌써 아침이 되었나?
눈을 뜨자마자 머리가 띵하고 울렸다.
오랜만에 술을 마셔서 그런가. 옛날 같으면 이 정도 마신 걸로는 숙취 따위가 올 리 없는데.
끄응. 귀찮다.
이불 덮고 좀 더 데굴거리고 싶다.
격렬하게 게으름 피우고 싶다.
"음식을 가져다줄래요? 가급적이면 빵보다는 수프 같은 걸로...."
"아뇨, 오늘은 나오셔야 합니다. 공작 각하께서 아침 식사를 함께하자고 하십니다."
으으. 하필 이렇게 숙취로 고생하는 날에 상사를 모시고 식사라니.
"그거 빠지면 안 되겠지요?"
문 바깥에서는 당연하다는 듯 아무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알겠어요. 씻고 나갈게요."
"나오시면 식당까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하녀가 문 바깥에서 나를 기다리려는 모양이다.
이래서는 게으름을 피울 수도 없겠는걸.
나는 가볍게 세수만 마치곤 옷을 주섬주섬 입은 뒤 문을 열었다.
그곳엔 첫날 헬피온 공작가에 왔을 때 날 반겨 주었던 하녀가 다소곳한 자세로 서 있었다.
갈색의 땋은 머리끝엔 붉은 리본이 예쁘장하게 달려 있었고, 검은 베이스의 메이드복은 먼지 한 톨 없이 깔끔하고 단정했다.
아침부터 부지런하다니까.
하녀는 마치 고양이처럼 크고 가느다란 눈매 속 저 노란 눈동자로 날 바라보았다.
"가죠."
하녀의 안내로 도착한 식당엔 붉은색의 수프와 빵이 차려 있었다.
"일어났나?"
"아, 네 공작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급히 일어난다고 일어났는데...."
"아펠에게 어제 활약은 들었네. 주점에서 무려 열두 명의 전사들을 결투로 쓰러뜨렸다지."
어제 일을 다 들었으면 좀 더 자게 해 주시는 게 좋지 않았을까요.
나는 짜증으로 일그러질 뻔한 표정을 겨우겨우 다잡으며 웃었다.
"왜 전임 사무장이 젊은 나이였는데 간경화로 은퇴했는지 알 것 같더라구요."
"요리장에게 말해서 숙취에 좋은 음식을 준비했네. 같이 앉아서 들지."
"아뇨아뇨! 제가 어떻게 공작님과 한 식탁에서 식사를 합니까."
"예의를 너무 차릴 필요 없네. 나는 귀족이랍시고 잘난 척하는 시간보다 칼을 휘두르며 마족들 멱따는 시간이 길었어. 귀찮은 절차나 예절 같은 건 거추장스럽더군."
이 정도까지 제안을 받으면 거절하는 것도 결례겠지.
나는 슬그머니 자리에 앉아 스푼을 들었다.
수프를 한 입 넣자마자 화끈하게 매운맛이 느껴졌다.
화끈함도 잠시.
목을 넘어간 수프가 내장을 따뜻하게 풀어 주며 울렁거리는 속을 다스려 주는 느낌이 들었다.
"괜찮나?"
"끝내주네요. 이거 엔틸 제국의 더블 핫 수프죠?"
"오호. 보통 사람들은 잘 모를 전통 음식인데 잘 아는군. 고향이 엔틸 제국이었나?"
"아뇨, 제 고향은 라트비아입니다."
그저 아카식 레코드에서 읽었을 뿐이죠.
이런 거 보면 아카식 레코드는 참으로 잡스러운 지식창고란 말이야.
"그런가. 요리장이 엔틸 제국 출신일세. 제국의 음식은 정갈하고 뒷맛이 깔끔해 좋아하지."
"저도 먹어 본 건 처음인데 정말 좋네요."
헬피온 공작은 씩 웃더니 자신의 빵을 스프에 찍어 먹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두 사람의 음식 접시가 빌 무렵쯤, 공작은 다시 입을 열었다.
"새로운 세력이 생기겠군."
"네?"
공작이 미소 지으며 날 응시했다.
"맥주 대결이라고 하면 치기 어린 용병들의 장난 같겠지. 하지만 그 맥주 대결은, 그래, 신성하다는 단어가 어울리겠군. 우리 공작령에서 꽤 신성하게 여기네. 자네가 직접 '주점'을 세력으로 지목할 정도로 말이지."
공작의 설명은 어제 아펠 집사장에게 들은 것과 비슷했다.
인류의 변방에서 마족과의 싸움이 계속된다.
그렇다보니 헬피온 공작령에는 실력에 자신 있는 사람만 모였고, 자신의 힘만을 숭상하는 전사들의 자존심은 다들 하늘을 찔렀다.
사소한 다툼이라도 일어날라치면 살인사건으로 확대되는 경우가 부지기수.
하루걸러 신체 불구자와 시체를 치우는 일상이 반복되던 어느 하루.
누군가 이런 제안을 한다.
'그럴 바에야 맥주로 승부를 내자!'
"어떻게 생각하나?"
지금까지 이야기를 이어 오던 헬피온 공작이 날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솔직히 대답해도 되나?
"그게 음...."
"유치하지?"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을 정확하게 알아맞히셨네.
아무리 사람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라지만 맥주 대결이라니.
삼류 소설에서 나올법한 이야기 아닌가.
"하지만 실제로 이 대결이 시작된 이후 단 한 명의 사망자도 발생하지 않았네. 그렇기에 공작령의 백성들은 이 대결을 신성시하기로 했네."
"대결 자체에 권위를 부여했군요. 이 대결에서 결정된 사안에는 무조건 따르기로."
공작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유치한 대결이 이 영지에선 일종의 시민재판이야. 그리고 자네는 그 시민재판의 키카드가 되어버린 셈이지. 역사상 12명의 전사를 한순간에 이겨 버린 사람은 없거든."
뭐... 어제 내가 무리하긴 했지.
경기 후반 술에 잔뜩 취해 한 번에 덤비라며 3:1로 대결했었으니까.
나는 세 잔.
세 명이 한 잔씩.
물론 이겼지만.
크, 그때를 생각하니 다시 속이 쓰리다. 더블 핫 수프나 한 수저 더 먹어야지.
"적어도 자네는 이 영지 내에선 전사 12명보다도 더 강력한 힘을 가진 사람이 된 거야. 누구도 무시하지 않겠지."
"그게 무리가 생긴단 말이십니까?"
"적어도 어제 함께했거나 소문을 들은 이들은 쉽사리 자네 의견에 반발을 못 할 걸세. 그것이 정책이든, 명령이든 말이지. 조금 과장을 보태자면 '주점'을 얻었다 말할 정도는 되겠지."
나는 밥을 먹느라 구부정해진 몸을 똑바로 폈다.
공작의 인지한 눈동자가 날 또렷이 응시하고 있었다.
"이런 변방의 영지지만 그래도 어엿한 공작령일세. 사무관으로서 자네의 능력을 보여 주게."
"공작령을 정비하고 발전시키란 말씀이신가요?"
공작은 빙긋 웃었다.
"그것도 사무관이 할 수 있는 하나의 업무겠지. 잘 생각해 보게. 자네의 능력을 검증하는 자리인 게야. 시간은, 그래. 한 달을 주겠네."
한 달.
머리가 복잡하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미래가 겁나서?
아니.
지금 당장 헬피온 공작령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너무 많이 떠올라서.
아카식 레코드에서 얻은 수많은 지식들이 생명을 얻어 자기를 써 달라고 머릿속에서 아우성치는 것만 같다.
하지만 이 지식을 써먹기 위해선 전제가 필요하다.
"권한이 필요합니다."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을까.
공작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이 저택엔 사용인이 직군별로 한 명씩밖에 없네. 하녀는 곧 하녀장이고 요리사는 곧 요리장이고 집사는 곧 집사장이지. 자네도 오늘부터 사무관 겸 사무장일세. 그 정도면 되겠나?"
괜찮냐구요?
그 정도면 차고 넘치죠.
* * *
"현자님 오셨는가!"
"이봐, 당신이 그렇게 술을 잘 마신다며? 한판 붙자고!"
"닥쳐, 멍청아! 네가 저번에 맥주 대결에서 졌던 트레비스도 그 열두 명 중에 포함되었다고!"
"뭐, 멍청이? 너 나랑 맥주 대결 한판 뜨고 집문서 뺏기고 싶냐!"
"현자님. 당신이 그렇게 몬스터에 대해 해박하다면서?"
나는 소란스러워지는 사람들을 손짓으로 진정시켰다.
"오늘은 술 마시러 온 게 아니라 마을을 좀 이리저리 둘러보러 온 거예요. 아, 맞다. 혹시 여러분들은 마을 생활하면서 불편한 거 있으세요?"
"불편한 거?"
"포션! 가격들이 너무 비싸."
"그러고 보니 몬스터들 잡았을 때 부산물 판매도 어렵지?"
"상단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잖아."
"시세도 잘 모르겠고... 여기 오기 전에는 길드나 용병대의 회계 나부랭이들이 해 주곤 했는데. 아마 죽었을 거야."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의견을 들려주었다.
대부분은 서류 정리를 통해 나도 파악하고 있는 문제였지만, 보다 생생한 정보들도 제법 있었다.
나는 의견들을 빼놓을세라 메모했다.
"고맙습니다. 술은 다음에 마시러 올게요."
나는 사람들에게 인사하고 마을 곳곳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헬피온 공작령은 건전하고 소박한 도시였다.
전사들이 대부분 전투로 삶을 산다.
그렇다고 한다면 쌓인 스트레스를 발산할 만한 공간도 많아야 할 텐데 그런 게 없다.
그보단 좀 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느낌?
그게 전사들의 성향 탓은 아니리라.
주점에서 들었던 것처럼 상업 자체가 발달할 여지가 없었던 모양이지.
어차피 헬피온 공작이 마왕을 해치웠겠다.
인근 영지와 가도를 닦고 치안을 정비한 후, 본격적인 유통망을 뚫으면 어떨까?
가도에 출몰하는 괴수들을 정리하기 위한 원정을 꾸려 볼까?
몇 가지 당장 꾸려 볼 만한 계획이 떠오른다.
이건 나중에 집사장이랑 이야기해 봐야지.
그건 그렇고 상인, 그리고 상단이라.
이건 그리즐리 용병대와 정면으로 맞서 싸우는 일이 되겠네.
250명 정도 되는 규모의 용병대랬지.
아무리 공작의 비호가 있다지만 어설프게 싸웠다간 작살날 것이 분명하고, 제대로 하려면 꽤 수를 써 봐야 할 것 같은데.
오랜만에 로네에게 연락을 해 봐야겠다.
로네는 내 여동생이자, 부모님의 작고 이후 소규모로 축소된 고르뎀 상단을 겨우겨우 이끄는 상단주다.
주요 거래 품목은 부모님 때부터 진행하던 포션.
크라피 후작가의 입김 탓에 상급 포션과 중급 포션은 거래할 수 없게 되었지만....
그래도 오래 거래를 했던 정 덕분에 유통기한이 간당간당한 하급 포션들을 공수해 팔 수 있었다.
덕분에 연금술이나 약재술사들과의 거래 루트는 꽤 갖고 있으니.
그들에게 몬스터 부산물을 공급한다면 어떨까?
그것도 중대형 고급 몬스터들의 부산물들을.
눈이 뒤집히지 않을까?
사소한 문제가 하나 있긴 하다.
로네가 날 싫어한다는 것.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유가 내 탓이라고 생각하거든.
어쩔 수 없지. 그 말이 틀린 건 아니니까.
크라피 후작가가 우릴 괴롭힌 원인이 나 때문이긴 하지.
그래서 온갖 쌍욕을 들어먹고 연락이 끊긴 것도 벌써 6년 전.
아카식 레코드에 들어가기 전, 공부를 위해 잠수 탄다는 편지를 한 통 보내긴 했지.
일방적인 이야기라서 더 화났을 것 같은데.
걔는 어떻게 살고 있을지.
"아."
서쪽 하늘 끝에 붉은 노을이 하루의 막을 내리고 있었다.
그 풍경이 어쩐지 과거의 그리움을 더더욱 끌어당기는 그물처럼 느껴진다.
감상적이 되는 시간이구나.
돌아가자.
영주성으로 돌아가 편지라도 한 통 보내 봐야지.
로네 말고도 편지를 보낼 사람이 한 명 더 있기도 하고.
바쁜 저녁이 될 것 같다.
* * *
"오늘도 수고하셨습니다."
"자네도 수고했어."
그녀의 머리색은 햇살 밝을 때의 호수의 색이었고 몸짓은 그보다도 더 상쾌한 바람 같았다.
사람들은 그녀가 근처에 지나갈 때마다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상단주님!"
그런 그녀, 로네의 발걸음을 붙잡은 것은 한 젊은 사내였다.
"상단주님에게 편지가 왔습니다."
"나에게?"
로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워낙 작은 상단이다 보니 거점도 없이 보부상으로 전 세계를 떠돌아다녔다.
그런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알고 누가 편지를 보낸단 말인가.
마치 자기가 어디로 다니는지 잘 알기라도 하듯이.
로네는 청년이 건네준 편지를 받아 그 자리에서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으아아아아, 이 개새끼가!"
괴성이 터졌다.
"네, 네?"
방금 전까지 로네에게 반갑게 인사하던 사람은 너 나 할 것 없이 놀란 표정으로 로네를 바라보았다.
'개새끼라고 했지?'
'로네 아가씨가 개새끼라니, 싫은 소리 한 번도 못 하시던 분이?'
'도대체 누가 저런 욕을 편지 한 장으로 끌어낼 수 있는 거지?'
'설마 부모님의 원수라도 만난 건가?'
'에이, 자네는 무슨 신소리를 하는 겐가. 아무리 남의 집안이라지만 부모님을 그렇게 쉽게 언급하는 거 아닐세.'
'아니 말이 그렇다는 거지.'
농부는 모를 것이다.
자신이 얼떨결에 정답을 맞췄다는 사실을.
로네는 한동안 편지를 어떻게 하면 더 작살낼 수 있을지 행동으로 보여 주며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간다."
"네?"
"헬피온 공작가에 있단 말이지. 후후후. 세상 끝에서 이딴 편지나 보내면 안전할 거라고 생각한 모양인데, 착각이야. 죽일 테다. 갈기, 갈기, 찢어서, 불태워, 죽일 테야아아아!"
다시 한번 괴성이 터졌고.
사람들은 마치 로네의 분노가 자기에게 향하기라도 한 듯이 헐레벌떡 도망쳤다.
남은 건 로네와 그녀를 감싸는 바람, 그리고 찢겨진 편지 조각들뿐.
갈기갈기 찢겨 나간 편지의 한 조각에는....
<꼬우면 헬피온 공작가까지 와 보시든가.>
라는.
그 누가 봐도 찐남매끼리만 구사할 법한 저렴한 문장이 적혀 있었다.
약 오를 정도로 예쁜 필체로 말이다.
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연애편지 쓰다 강해짐 8화
<8화 - 건강한 정신은 건강한 신체를 만든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