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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흑마법사가 유적지 너머에 자릴 잡았을 줄은 몰랐지.

그게 공방도 아니고 드워프의 지하 왕국 중 하나인 제4 도시라니.

그런 넓은 곳을 혼자 들쑤시고 다닐 엄두가 나질 않았다.

그래서 탐사대를 대동한 채였다.

'어차피 들어가는 방법이야 흑마력으로 파악을 마쳤으니까.'

이제 진입하면 그만인 일이다.

모두가 준비를 마쳤고, 결연한 얼굴들이었다.

공들여 준비한 만큼 탐사대의 수준은 높았다.

용병 등급으로 최소 B급.

사제단은 신성 왕국에서 파견 나온 은빛 성가대였다.

그들이 보급한 축복 장비로 당분간 저주가 탐사대를 약화할 일은 없을 것이다.

"저기… 로크 님?"

"음?"

조심스럽게 내 이름을 부르는 사제를 응시했다.

은빛 성가대의 대장직을 맡은 여자.

귀찮은 상대였다.

그야, 페르시와 절친한 친구가 바로 눈앞의 여자였기 때문이다.

"아니죠? 제가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던 분이랑 많이 닮으셔서요."

"누굴 말하는 거지?"

"불패의 용사, 로크람이요."

괜히 여기서 이러는 걸 아덴 파티가 알아봐야 좋을 거 하나 없다.

그럴 거면 파티에 어서 합류하라면서 쫓아올 게 눈에 선하다.

이러다가 용사의 문양이라도 보여 달라고 하면 어쩐담.

그건 안 되지.

보는 눈은 연락책 하나로 족하다고.

"어? 로크 님. 슬슬 진입하려 하는데 거기서 뭐 해요?"

나이스 톰.

역시 애 하나는 잘 교육했다니까.

"아무것도 아니다."

여자를 지나쳐 톰 쪽으로 합류했다.

곤란한 상황이었단 걸 알고 있었는지 그는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나는 그런 녀석을 향해 조용히 주먹을 들어 보였다.

툭.

이젠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주먹이 맞닿았다.

053.

본래 목적지였던 드워프의 지하 공방.

하지만 그곳은 폐광산 어딘가에 숨겨져 있던 게 아니었다.

"…이 너머가 소문만 무성했던 드워프의 지하 왕국 중 하나라 이거죠?"

"그 도시 내에 우리의 본래 목적지였던 지하 공방이 있는 거야."

톰은 검병을 매만지며 한숨을 삼켰다.

"단순히 하나의 공간만 파훼하면 될 거로 여겼는데. 도시 하나를 들쑤셔야 한단 게 참… 어렵네요."

"그래도 해야 하지 않나?"

"그렇죠. 해야죠. 이번 기회가 아니면 언제 다른 기회가 올지 모르니까."

누군가를 생각하는 건지 톰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그와 반대로 행동만큼은 굳건하니, 그는 모두의 앞에 섰다.

그러곤 내가 말한 것들을 그대로 읊었다.

"아까부터 지켜봤는데, 저 애는 탐사대장이라고 하기엔 너무 어리숙한 거 같아요."

"사람을 너무 쉽게 재단하는 거 아닌가."

둔감함은 이게 문제다.

이런 안전한 상황에 누가 다가와도 눈치채기 힘드니 원.

"칭찬으로 받을게요. 제가 눈치는 좀 좋거든요. 로크람 씨."

"대체 로크람이 누구지?"

"진짜 아니에요?"

"아니라고 해도 태도를 고치지 않는 게 눈치가 더럽게 없는 거 같은데."

"으음, 그럴 리가 없는데…."

혼란스러워하는 여자에게서 눈을 뗐다.

저 여자는 나를 처음 본다.

페르시가 나에 대해 얼마나 자세히 말해 준 걸까.

초면임에도 알아보는 거면 답 나왔다.

'뭐가 됐건 아니라고 잡아떼야지.'

마음을 추슬렀는지 여자가 대뜸 손을 내밀었다.

물끄러미 보고 있으니 한쪽 눈썹을 씰룩인다.

"리카. 보다시피 은빛 성가대 대장이에요. 저쪽 탐사대장이랑 통성명했지, 그쪽과는 아직이었네요?"

"로크다."

"직급은요?"

"부대장. 임시 용병이지."

"흐음, 그런 설정인가…."

아직도 의심을 거두질 않았네.

귀찮은 혹이 달린 기분이야.

"뭐, 좋아요. 로크 씨. 이번 탐사 잘해 봐요. 저는 실적을 올리고, 당신은 목표하는 바를 얻고. 서로 좋은 일 아니겠어요?"

"축복만 제대로 유지해라. 나머지는 탐사대 측에서 할 테니."

"든든하기도 하셔라."

그녀는 허리춤에 달아 두었던 종을 흔들었다.

청명한 소리가 퍼진다.

그녀 앞으로 성가대가 모여들었다.

"슬슬 진입하실 거죠?"

"그래야지."

톰 또한 얘기를 마치고 옆에 붙었다.

도합 52명에 달하는 탐사대.

가장 필요하고 중요한 자들로만 구성한 상태다.

그들을 뒤로한 채 나는 굳게 닫힌 문에 손을 올렸다.

'윈도르보다 먼저 처리하고 빠진다.'

일전에 이곳을 조사했을 때, 흑마력 외에 마력을 감지했었다.

그게 윈도르 휘하 기사단과 사제들의 것임을 파악하는 건 쉬운 일이었다.

그야, 흑마력을 와해하는 오러와 마력이 도시에 주둔하는 기사들과 비슷한 성질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윈도르가 흑마법사를 추적하는 중인 건 기정사실이었다.

그래서 서두른 탐사 준비다.

나는 문에 얹은 손을 통해 흑마력을 발했다.

베일에 싸인 자로 인해 그들 눈엔 손만 올린 것처럼 보이겠지.

'패턴은 단순하네. 괜히 복잡하게 꼬아 놓은 느낌이야. 정확한 단서는 물리적으로 훼손시켜 감춰 놓았단 말이지.'

이곳에 먼저 온 선객이 발길을 돌린 이유였다.

나야 손쉽게 파훼한다.

역순으로 풀어내면 그만이었기 때문이다.

철컹! 철컹!

"문의 봉인이 풀린다."

"답도 없어 보이는 걸 어떻게 푼 거지?"

감탄과 의문 섞인 그들의 시선을 받아 내면서 자리로 돌아갔다.

옆에 선 톰은 서서히 열리는 문 너머를 응시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제가 잘할 수 있을까요?"

"내가 말한 대로 한다면."

"그래도 변수는 늘 존재하는 거잖아요. 지금만 해도 공방이 아닌 도시 탐색이 주목적이 되었고요."

"그래도 바뀌는 건 없어. 아티팩트와 금은보화를 확보하고 돌아간다. 그것에만 집중해."

"후우, 넵. 그럼 진입한다!"

톰의 외침에 대기하고 있던 패스파인더들이 앞으로 쏘아졌다.

15분 뒤에 그들은 쓸 만한 정보를 물어 올 것이다.

이곳의 지형, 유의해야 할 점, 혹시 모를 위협까지.

그동안 탐사대는 주변을 정리하면서 나아가면 됐다.

"와…."

"이곳이 드워프들이 남긴 지하 도시."

문 너머로 발을 들이는 순간 펼쳐진 진풍경.

나는 감탄사를 삼킨 채 주변을 둘러봤다.

천장에 박힌 발광석이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인다.

그것만으로도 주변은 밝았다.

태양 빛 대용으로 쓰이는 건지 주변엔 숲이 조성되어 있었다.

"도시 구조가 신기하네요."

"좁은 공간에서 획기적으로 인원을 수용하기 위해 만든 거겠지."

톰의 말을 받아 주며 숲 사이로 솟아난 건물들을 바라봤다.

크고 작은 고층 빌딩들.

현대의 건축 양식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

'드워프들 건축 기술이 대단하긴 하네.'

지상의 인간들은 돌이나 나무를 깎아서 성과 건물을 저층으로 쌓는 게 고작이건만.

이들은 기술력이 몇 세기는 앞서간 게 보였다.

'이러다가 흑마법사와 싸울 때 시가전 양상으로 변할지도 모르겠어.'

빌딩의 고층과 저층을 아우르며 싸운다.

이런 전투는 상상도 안 해 봤었다.

미리미리 어떻게 대응할지 떠올리면서 마력 감응에 집중했다.

조금이라도 흑마력이 잡히면 추적해야지.

'흠, 느껴지는 게 없네.'

"로크 씨. 축복이 다 된 것 같은데요?"

"음?"

열심히 탐색하는 와중에 리카가 말을 걸었다.

그녀는 내 목에 걸린 목걸이를 가리키고 있었다.

확실히 밝은 빛이 옅어지긴 했다.

"미리미리 축복을 충전해 둬야죠. 암울과 암전의 저주에 걸리면 치료법도 없다고요."

리카의 말이 맞았다.

마왕의 저주는 치료할 수 없으니 예방이 중요하다.

그렇기에 더욱 철저하게 축복 장비를 수시로 확인해 줘야 했다.

'이거 완전 다이버들의 산소통이나 다름없네.'

지하 탐색이란 그런 거였다.

저주를 무릅쓰고 가족의 부흥, 자신의 목표를 위해 어둠 속으로 내려가는 길.

과연 마왕의 저주는 내게 통할까.

'굳이 실험할 필요는 없겠지.'

궁금증을 접어 두고서 목걸이를 벗으려 했다.

그러자 리카는 기겁하며 손을 저었다.

"그대로 계세요. 축복 장비의 품질이 낮아서 저주가 몸에 깃들 수 있으니까요."

"그럼 어떻게 충전할 셈이지?"

"이렇게요."

대뜸 손을 뻗는다.

피할 새도 없이 리카의 손바닥이 목걸이를 덮었다.

이내 따스한 기운이 흐른다.

장비에 차오르는 신성력을 느끼는 한편, 리카는 고갤 갸웃했다.

"이상하네요. 육안으로는 신성력이 얼마나 소모됐는지 보이거든요? 그런데 느낄 수는 없어요. 로크 씨의 능력인가요?"

베일에 싸인 자를 말하는 건가.

나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반응이 재미없었는지 리카가 입술을 삐죽였다.

"과묵하시네요. 페르시도 로크람 씨가 말수 없다고 그렇게 투덜거렸는데."

"그 얘길 왜 나한테 하나."

"조용한 것보다 좋지 않나요?"

"저주 한복판이다. 어떤 위협이 있을지 모르는 상황이야. 안일하군."

"에이, 다 대비해 놨죠."

그녀의 말대로 반투명한 장막이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의식하고 있지 않아서 파악이 늦었다.

은밀한 수호진이다.

적이 침투하려 들면 곧장 막아 내리라.

"어때요? 제가 경박스럽게 군다고 아무런 대비도 안 해 놨을까 봐요?"

"…충전이나 해 줘라."

"흐흐, 로크람 씨도 무안해지면 화제 전환부터 하려 한다던데. 비슷하시네요?"

나도 모르던 내 캐릭터를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이 유능한 친구는 아무래도 내가 로크람이라고 확신하는 듯했다.

돌아가기 전에 저 입을 입막음할 방법도 고안해 둬야지.

그래야 후에 페르시를 만나도 나를 만난 이야기를 늘어놓지 않을 테니까.

'에휴, 내 팔자야.'

충전 끝났다면서 해맑게 웃는다.

그런 리카의 얼굴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모든 감각을 초월한 강대한 마력에 솜털이 곤두섰기 때문이다.

'뭐지?'

흑마력은 아니다.

그렇다고 오러도, 신성력도 아니었다.

처음 느껴 보는 정순한 마력.

그것이 빌딩 숲 너머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왜 그러세요?"

"아무것도 아니야."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느끼지 못한 마력의 태동이다.

대체 무엇이 저 힘을 건드린 걸까.

'디그리스. 확인하고 와라.'

땅 밑에서 소환된 디그리스가 명령을 받고 움직였다.

자, 그동안 아티팩트나 수급해 볼까.

"패스파인더들이 복귀했습니다! 공방 위치를 알고 왔어요!"

톰의 희소식에 다시금 전진이 재개됐다.

***

끼긱. 끼기긱.

거대한 빌딩 안에서 소름 끼치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정적을 깨뜨리는 소음.

빌딩 내부는 관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 관들이 누군가를 맞이하듯 부서졌다.

이내 모습을 드러낸 건 이곳을 축조한 드워프가 아니었다.

끼그극. 끼극.

금속끼리 맞물린다.

팔과 다리가 움직일 때마다 금속성이 귓전을 때렸다.

앙상하지만 단단해 보이는 철제 프레임은 부드럽게 기동한다.

작은 상자 크기의 몸체에선 붉은빛이 연신 번뜩였다.

마지막으로 몸체의 위.

매부리코에 뾰족한 귀가 특징인 드워프의 금속 머리가 돌아갔다.

수십 개의 아이언 골렘이다.

그들은 거리에 선 한 존재만을 보고 있었다.

"드워프들은 죄다 뒤지고 너희만 남은 거냐?"

쿵. 쿵.

사내, 윈도르는 빠르게 다가오는 드워프 골렘들을 보며 손을 뻗었다.

"하나하나 마력도 강력하네. 그런데 이상하단 말이지."

우에서 좌로.

어느새 뻗은 손으로 주먹을 쥐어 보인다.

"왜 흑마력이 안 느껴지냐?"

콰드드득!

골렘들의 머리가 동시다발적으로 으깨졌다.

여기저기서 응축된 바람이 거세게 터져 나온다.

그래도 골렘은 움직였다.

몸체에 달린 붉은빛이 타오르듯 빛을 발했다.

"역시 동력원이 건재하면 악착같이 달려드는구나."

검지만을 빼든 채 허공을 찌르는 윈도르.

한 번의 찌르기로 몸체에 구멍이 뚫린다.

그것으로 동력원을 잃은 골렘들이 쓰러졌다.

순식간에 정리를 마친 윈도르는 팔짱 낀 채 고갤 갸웃했다.

"마력 수준만 보면 5서클에서 6서클 마법사급이야. 그런데 왜 이렇게 약한 거지?"

우회로를 찾아서 드디어 진입하게 된 지하 도시다.

그런데 적으로 마주한 건 언데드화된 드워프가 아니었다.

"마치 마력이 내부의 무언가를 억제하려는 것 같은데…."

윈도르는 찌그러진 머리를 자세히 살펴봤다.

머리가 품고 있던 마력석이 눈에 띈다.

그것은 보랏빛으로 점등되다가 서서히 빛을 잃었다.

그 모습은 마치 완전한 죽음을 나타내는 것 같았다.

"윈도르 님! 괜찮으십니까?"

"어어, 너희는?"

"이쪽도 피해는 전무합니다. 걱정한 것관 달리 아이언 골렘들은 약하더군요."

"무사해서 다행이야. 후우, 가장 노릇 하기 힘드네. 계속 나아가자고. 추적 경로는?"

약지에 낀 반지를 매만지던 윈도르.

뒤이은 기사단장의 보고에 그의 손이 멈췄다.

"그게… 사라졌습니다."

"흑마력이 사라졌다고?"

윈도르의 벙찐 표정에 기사단장이 고갤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그렇게 사과할 것까지야. 이러면 별수 없네. 따로 다니자. 발견하면 신호탄 쏘아 올리는 거 잊지 말고."

"윈도르 님. 그러지 말고… 아."

그의 다급한 만류에도 윈도르는 멈추지 않았다.

어느새 사라진 그의 빈자리를 보던 그는 외마디 소리만 냈다.

바람을 막을 자는 이 자리에 없었다.

054.

패스파인더가 찾아온 공방에 관한 정보.

그것은 도시 지도였다.

얇은 철판에 새겨진 정보들이 고대 문자로 빼곡하게 적혀 있다.

나도 해석할 수 있지만, 다른 이들에게 맡기기로 했다.

"주요 시설들에 관한 정보가 적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보이는군. 총 네 곳의 위치를 나타내는 것 같은데… 지도는 어디서 구했지?"

"공원처럼 조성된 곳 입구에서 발견했습니다."

톰의 물음에 패스파인더 한 명이 방향을 가리켰다.

여기서 북서쪽 방향.

그들은 정찰하면서 느낀 바를 가감 없이 말했다.

"함정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말 그대로 살기 좋게 만들어진 도시였어요."

"가장 가까운 곳에 성만 한 건물이 있긴 했습니다. 그곳을 우회해야 공방에 최단 거리로 갈 수 있을 것 같더군요."

"으음…."

톰이 결정을 내리고자 고민하고 있을 때, 나는 가만히 지도를 들여다봤다.

'중앙 통제실, 영혼 공방, 위대한 영안실, 기억의 요람.'

도시를 유지하기 위한 건물로 보이진 않았다.

이름만 들어 보면 죽음과 꿈을 나타내는 게 많이 보였다.

'일단 공방에 들르는 게 우선이겠지.'

톰의 어깨를 툭 쳤다.

"잠깐 대화 좀 하지."

"아, 네."

탐사대와 거릴 벌리고서 톰을 독대했다.

어리숙한 탐사 대장은 지금도 고민에 잠긴 상태다.

최단 거리로 갈지, 느리더라도 확실하게 길을 개척해 나갈지.

"방법이 하나 있다."

"둘도 아니고 단 하나요?"

"그래. 들을 의향이 있다면 말할게. 없다면 네 의사를 존중할 거고."

"듣고 싶어요."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대답이 튀어나왔다.

이 정도로 나를 의지할 줄은 몰랐는데.

그래도 사람 목숨이 걸린 일이니 판단은 좋네.

"지금부터 내가 앞장서겠다."

"네? 패스파인더 분들보다 먼저 간단 소리예요?"

"그렇다면?"

"안 돼요! 너무 위험합니다. 이 규모에 아무도 없다는 게 말이 돼요? 분명 함정이나 언데드들이 도사리고 있을 겁니다."

"그런 거에 내가 당할 거라고 보나?"

"그건… 아니에요."

"그럼 믿어라. 최단 거리로 움직이자. 길은 내가 열어 둘 테니 너희는 30분 뒤에 움직이면 돼."

"혼자서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괜찮다니까 그러네.

어차피 혼자 움직이긴 해야 해.

너희가 있으면 제대로 실력 발휘도 못 하거든.

묵묵히 손을 흔들자 톰이 체념한 듯 웃었다.

"감사합니다. 형은 없지만, 로크 님은 꼭 형처럼 느껴지네요. 의지하지 않으려 해도 의지하게 돼요."

"이 또한 효율적이라 여겼기에 제안한 것뿐이지. 선택은 전이나 지금이나 네 의지로 한 거다."

"그래서 더 좋네요. 저를 배려한 거니까요."

그게 그렇게 되나.

나는 뺨을 긁다가 톰의 등을 가볍게 쳤다.

"그러고 보니 우린 서로에 관해 대화도 안 나눴었군."

"하하, 그러네요. 일로 만난 사이랍시고 일 적인 얘기만 했던 거 같아요."

멋쩍은 미소를 흘린 톰이 자신의 인생을 짧게 밝혔다.

"그냥, 마족 때문에 부모님을 여의었어요. 동생의 다리도 그 때문에 한쪽이 이상하고요. 그래도 제가 가장이니까… 악착같이 살게 되더라고요. 그러다 여기까지 온 거고요."

로크 님은요?

톰의 물음에 침음을 삼켰다.

리코의 다리가 안 좋은 건 마족 때문이었구나.

얘도 참 불우한 가정사를 안고 있었네.

그래서 그런 계약 조항을 추가한 건가.

그나저나 이걸 그대로 밝혀 말아.

용사라고 하면 되레 사이가 불편해질 거 같은데.

"로크 씨! 탐사 대장님! 이쪽으로 와 보세요!"

고민을 이어 가던 중, 리카가 우리를 불렀다.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하다.

다급함이 묻어나는 외침에 합류하니 불청객이 찾아온 상태였다.

끼기긱. 끼긱.

"아이언 골렘이에요! 언데드가 아니어서 수호진이 제 역할을 못 하고 있어요!"

이미 탐사대는 그들을 저지하고 있었다.

몇 번 대원들의 공격을 마주한 골렘들이 반격에 나선다.

놈들에게서 느껴지는 익숙함에 나는 미간을 좁혔다.

'조금 전에 느꼈던 마력이 똑같이 느껴져.'

그렇다면 이들이 방금 소란의 원흉인가.

나는 인벤토리에 손을 넣는 한편, 모두를 뒤로 물렸다.

"로크 님!"

"여기서 힘 빼지 마라."

너희는 공방에서 굴러야지.

'쉽게 돌아갈 길이 있는데 굳이 어려운 길을 택할 필요는 없지.'

쿵!

단죄의 백결검이 돌바닥을 때렸다.

거미줄처럼 금이 가는 광경에 모두의 입이 벌어진다.

무게도 짐작하기 힘든 무기를 허공에서 꺼낼 줄은 상상도 못 한 모양이었다.

"그, 그걸 휘두르려고요? 아니, 휘두르는 게 가능하기나 한 무기인가요?"

"가능하니까 물러나."

리카의 물음을 뒤로한 채 마력 반전을 사용했다.

앱소버 한 마리를 바치자 전환되는 신성력.

황금빛이 대검에 일렁이니 리카가 고갤 갸웃했다.

"그건 무슨…."

하여간 궁금한 것도 많다.

베일에 싸인 자 때문에 기운은 못 읽어도 시각적 효과에서 기시감을 느낀 거겠지.

"흡!"

그간 본 이터를 꾸준히 사용한 결과, 폭풍검을 무리 없이 2번은 사용할 수 있게 됐다.

무리한다면 3번.

그러니 이 상황을 파헤치기 위한 단서 수집에 한 번쯤이야, 남는 장사였다.

쩌어억!

거센 광풍을 동반한 금빛 궤적이 놈들을 훑는다.

폭풍검은 효과가 크게 변한 상태였다.

이전에는 산탄총을 쏘는 이미지였다면 지금은 초고열 레이저를 휘두른다고 해야 하나.

전보다는 사정거리나 파괴력이 월등해진 상태다.

신성력이 있어야 폭풍검으로 휘두를 수 있단 단점이 있지만, 그 정도는 충분히 감수할 만했다.

"아, 아이언 골렘들이 일격에!"

"세상에, 뒤편에 있는 건물들도 베어 넘겼어…."

"이것이 S급 용병의 힘이란 말인가."

드워프를 닮은 그것들이 일격에 두 동강 나자 주변이 시끄러워졌다.

두 눈까지 비비는 게 내가 보인 무력에 어안이 벙벙한 듯했다.

리카만을 제외하고.

"신성력? 방금 신성력을 무기처럼 휘두른 건가요? 대체 그 힘은… 아니, 그 검! 그거 성유물이잖아요!"

뒤늦게 백결검을 알아본다.

순식간에 옆에 붙은 리카는 나와 대검을 번갈아 쳐다봤다.

"흐아아. 백교의 성유물 중 하나인 단죄의 백결검을 두 눈으로 보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대체 어떻게 얻은 거예요? 그보다 그 신성력의 총량. 누가 봐도 대주교급이었어요."

쫑알쫑알 시끄럽네.

나는 작동을 멈춘 아이언 골렘에 다가갔다.

검게 그을린 단면 내부를 살펴보니 동력원과 마력석이 뒤엉킨 게 보였다.

얻어야 할 건 당연히 마력석이었다.

"아, 알겠다!"

혼자 떠들던 리카가 돌연 소리쳤다.

단서를 얻고 돌아오는 나를 쳐다본다.

그 강렬한 눈빛엔 어떠한 확신이 담겨 있었다.

"로크 씨. 백교의 이단 심문관이었군요! 이 안에 숨어든 악을 잡아내고자 들어오신 게 분명해요. 제 말 맞죠? 그렇죠?"

은퇴한 S급 용병 다음은 백교의 이단 심문관이냐.

이거 오해가 하나 더 쌓였구만.

아니, 톰 너는 왜 그런 눈으로 봐.

"사실이에요?"

어째 나를 보는 톰의 시선이 더욱 존경에 차 보이는 건 기분 탓이겠지.

'그래도 이런 오해는 괜찮지 않나.'

리카를 입막음하기 딱 알맞은 신분이었다.

브라트라는 인맥도 있으니 거짓말에 알리바이를 부여할 방법도 충분하고.

'오히려 좋아.'

판단을 마친 내 손가락이 얼굴로 향한다.

코끝에 검지를 얹은 채 한 마디 내뱉었다.

"쉿."

둘을 조용히 시키는 건 그것으로 충분했다.

연신 고갤 끄덕이는 게 시끄러워도 말은 참 잘 듣는 친구들이었다.

***

'역시 와 있었나.'

한 번의 교전 이후.

영혼 공방 건물 앞에 도착했을 때 디그리스가 복귀했다.

놈이 물어온 정보는 내게 확신을 심어 줬다.

윈도르의 등장. 그는 내가 상대했던 것과 비슷한 아이언 골렘들을 처리하곤 자취를 감췄다.

'바람의 정령술사답네.'

그의 힘은 정령과의 계약에서 나온다.

하지만 정령을 소환하는 모습을 그 누구도 본 적 없었다.

유명한 일화가 설정집에 수록되어 있어서 흥미롭게 읽은 기억이 났다.

'전력을 다해라. 내가 우습나?'

최상급 마족을 상대하게 된 그는 놈의 물음에 이렇게 말했었다.

'우습긴. 그냥 그런 거야. 가장으로서 전력을 다하려면 명분이 있어야 하거든? 그런데 너한테는 그게 없네?'

딱 이렇게 말하고서 5분 뒤.

최상급 마족의 머리는 목에서 분리되었다고 적혀 있었다.

나는 그에 관한 대략적인 정보를 떠올리며 눈을 감았다.

'로맨티시스트라더니 그건 아닌 거 같단 말이지.'

페놀리노와의 말싸움에서 나눈 대화들을 떠올려 보면 답 나온다.

그는 희대의 바람쟁이일 게 분명했다.

순애보와는 거리가 먼 영웅, 그게 윈도르였다.

"해석이 잘 안 되나 봐요?"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상념에서 벗어났다.

뒷짐 진 리카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내가 쥔 물건을 보고 있었다.

"그거 아이언 골렘들한테서 얻은 거죠?"

"정비는 끝났나?"

"끝났으니까 왔죠. 잠깐 휴식 시간이에요. 진입은 그 이후. 그러니까 얘기나 할래요?"

"성유물이니 이단 심문관이니 하는 질문은 답해 줄 수 없다고 했을 텐데."

"그거 물어보려는 거 아니거든요? 그냥, 뭔가 이상하지 않아요?"

"무슨 뜻이지?"

넉살 좋게 옆에 앉는다.

리카는 가라앉은 눈으로 숲과 어우러진 고요한 도시를 응시했다.

"지도 기억하시죠?"

기억한다.

북쪽을 제외한 세 방위와 중앙에 자리한 주요 건물.

그곳으로 가는 길을 피해 지어진 건물들은 위에서 내려다보고 그린 듯 완벽한 대칭을 이루고 있었다.

"저는 처음에 예술 작품인 줄 알았다니까요?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니더라고요."

"평범한 지도 아닌가."

"지도죠. 지돈데… 신성진처럼 생겼어요."

신성진?

잠깐만. 내가 놓치는 거라도 있나?

묘한 위화감이 올라온다.

지닌 모든 지식이 수면 위로 부상하고 가라앉는다.

무엇을 놓쳤는가.

정신력은 주변의 흐름을 느리게 인식할 정도로 사고를 가속했다.

나는 그것마저도 의식하지 못한 채 생각의 격류에 의식을 맡겼다.

리카는 성가대의 대장이다.

그 자리에 오르고자 수많은 시험과 수련, 공부에 매진했겠지.

그중엔 분명 마법진과 유사한 효과를 발하는 신성진에 관한 공부도 존재할 터.

즉, 그녀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멸망할 때까지 신성술을 배척하던 드워프가 신성술에 손을 댔다고?'

모순적인 결론이 따로 없다.

드워프는 존재하지도 않는데 그 누가 도시를 거대한 신성진의 형태로 축조한단 말인가.

나는 문득 든 생각에 쥐고 있던 마력석에 눈길을 줬다.

'주입된 마법은 영혼 속박, 기억 주입, 마력 회로 동조. 세 가지를 보조하는 그 외 자잘한 마법들.'

아기 주먹만 한 마력석으로 수십 가지에 달하는 마법을 때려 박는 종족은 드워프밖에 없다.

나는 정신력으로 이해한 것들과 리카가 던진 화두를 곱씹었다.

이윽고 어떠한 결론에 도달했다.

"지도를 봐야겠어."

"역시! 이단 심문관인 당신이라면 단서를 잡아낼 줄 알았다니까요!"

기다렸다는 듯 리카가 졸졸 따라온다.

나는 그런 그녀를 제지했다.

"여기 있어라."

"네? 하지만 돕고 싶은걸요."

날 혼자 있게 만들어 주는 게 돕는 거란다.

이걸 곧이곧대로 말한다고 해서 믿어 줄 리가 없지.

"그럼 역할을 나누지."

대안을 제시했다.

나는 리카를 응시하는 한편, 한 줄기 의식을 흘렸다.

'디그리스. 영혼 공방으로 들어가서 안전한 루트를 탐색해라. 안전한 지점엔 십자가 모양의 표식을 남겨.'

이들을 데려온 건 아티팩트를 한 번에 수거할 인력이 필요해서였다.

지금 가진 언데드만으론 부족할 것 같단 판단이 들어서 데려온 거란 말이다.

그러니 흑마법사 처단엔 불필요했다.

역할을 나누는 게 옳았다.

"공방에서 아티팩트나 값나가는 것들을 챙겨서 중앙 통제실로 와라. 안전한 지점엔 십자가 표식이 있을 거야. 그쪽으로만 간다면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겠지."

"저 안에 들어가 본 적 있다는 듯이 말씀하시네요?"

"내가 뭐 하는 자인지 알면서 그런 말을 하는군."

"역시 로크 씨는…."

이단 심문관이란 확신을 심어 주고서 발길을 돌렸다.

"내게 필요한 아티팩트를 최우선으로 챙겨라. 톰에게 말해 두었으니 말하면 바로 이해할 거야."

"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혼란스러워하는 그녀에게 사기를 올려 줄 만한 말을 던져 줬다.

"네가 본 게 맞아. 이 도시는 말 그대로 거대한 고대 신성진이야. 효과는 영혼 재정착. 이 거대한 도시 전체가 그런 효과를 받는 지역인 거지."

"위험한 상황인 건가요?"

아이언 골렘에 있던 마력석의 마법을 모르니까 저런 반응인 거겠지.

나는 마력을 잃고 영혼이 사라진 마력석을 그녀에게 던졌다.

"그 안에 드워프의 영혼이 들어 있었다. 아이언 골렘이 우리에게 달려든 이유. 이제 알겠나?"

드워프들은 멸망을 직감하고 미래를 기약했다.

저주받은 육신을 버리고 골렘에 영혼을 담은 것이다.

그들은 침입자를 인식하고 움직였다.

신성술의 효과를 등에 업은 채 맹목적인 목적을 가지고 달려든 것이다.

"저희들의 육체를 빼앗으려고…."

소름 끼친다는 얼굴이다.

나 또한 숨겨진 진실을 깨닫고서 줄곧 그녀와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땅딸보 새끼들. 종족을 바꾸면서까지 새 삶을 얻고 싶었던 건가.'

지도를 보고 더욱 확신했다.

나는 도시 중앙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중앙 통제실에서 기다리지."

흑마법사는 높은 확률로 그곳에 있을 거다.

신성진을 총괄하는 중심인 거길 차지해야 이곳에 잠든 드워프 골렘들이 어쩌질 못할 테니까.

055.

끼기긱. 끄긱.

중앙 통제실로 가는 길은 순탄치 않았다.

도시의 침입자를 제압하고 그 육체를 차지하고자 달려드는 드워프 골렘들.

놈들의 목적을 알게 됐으니 잡혀선 안 됐다.

'어차피 보는 사람도 없어.'

거리낄 건 없다.

지도에 잡히는 건 적대감을 발하는 붉은 점들뿐.

모든 언데드를 소환했다.

키에엑! 크으으!

금속성과 괴음이 어우러진다.

아이언 골렘 16체와 언데드 27마리.

디그리스는 탐사대의 길 안내로 빠지고 앱소버는 전력으로 투입할 수 없기에 뺐다.

알테온은 소환해 봤자 내게 달려들겠지.

'이 정도로도 충분해.'

강대한 마력을 흩뿌리는 골렘들이지만 그뿐.

놈들은 마력석에 품고 있는 영혼을 유지하는 데 마력을 돌리고 있었기에.

나는 손을 뻗었다.

"불살라라."

비전 마법, 흑적신이 모든 언데드들에게 깃들었다.

좀비와 누더기 골렘, 중급과 상급이 섞인 혼합종들이 포효한다.

효과가 끝나면 쇠약해진단 단점이 있지만, 그 정도는 상관없었다.

"전부 부숴 버려."

진안으로 샛노랗게 번뜩이는 눈이 재빠르게 기동하는 골렘들을 담아낸다.

제각기 다른 움직임을 보이는 언데드들의 사냥이 시작됐다.

콰직! 콰드득!

죽었기에 지치지 않는다.

흑마력이 건재한 이상 망자를 막을 건 오로지 신성력이나 거대한 힘뿐.

골렘들에겐 두 가지 전부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은 검붉은 기운을 머금은 좀비들의 무구와 다른 언데드의 육탄전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뿐이었다.

"언데드가 아니라서 아쉽네."

나는 인벤토리로 반파된 그것들을 쓸어 담았다.

제 할 일을 마친 언데드들 또한 회수했다.

어느덧 주변은 고요에 잠긴 상태였다.

도심지의 빌딩 내부를 채우고 있던 관들은 텅 빈 속을 내비친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많이도 잡았구만."

길었던 전투가 끝났다.

방금 게 마지막이었나 보다.

나는 한숨을 내쉰 채 수확한 것들을 셈했다.

'빈 깡통이 된 골렘과 마력석 104개인가.'

굳이 돈으로 바꿀 필요는 없어 보였다.

이런 걸 아티팩트와 바꿔 줄 자가 한 명 떠올랐기 때문이다.

'페놀리노. 진리의 탑으로 오라고 했었지.'

이번 일이 끝나면 정비할 겸 찾아가 봐야겠다.

근처에 알케미스터 학파도 존재하니 벨라는 잘 성장하고 있는지 확인도 겸해야지.

'저게 중앙 통제실.'

드디어 도착한 목적지를 눈에 담았다.

팔각기둥 형태의 거대한 석제 건물.

면마다 자리한 철제 대문은 굳게 닫혀 있다.

그 앞을 지키는 듯한 거대한 동상은 당장이라도 살아 움직일 듯 생동감이 넘쳤다.

"저 안에 신성진의 핵이 담겨 있단 거지."

마법진이나 주술진, 신성진도 촉매를 중앙에 둔다.

도시 스케일의 거대한 신성진 중심인 저 건물 내에도 그러한 촉매가 있을 터.

나는 그것을 제거할 생각이었다.

성공하면 이곳의 골렘들도 목적성을 잃고 제 기능을 상실할 테니까.

까득.

뼛조각을 삼키고서 건물 앞에 섰다.

거대한 동상이 침입자를 제거한단 명목하에 움직이거나 그러진 않았다.

말 그대로 고요하다.

이미 누군가가 내부 시스템을 장악한 것처럼 말이다.

"흐음."

굳건한 문에 손을 올렸다.

애초에 이건 힘으로 열라고 만든 문이 아니었다.

정교한 기계 장치. 지레의 원리를 백분 활용한 톱니바퀴의 조화.

크고 작은 그것들은 맞물리고 맞물려 적은 힘을 큰 힘으로 탈바꿈시키니.

"이건가."

흑마력으로 내부를 훑어본 나는 답을 찾았다.

철문 옆면에 교묘하게 숨겨진 버튼이 정답이었다.

누군가 본다면 아름답게 음각된 작품으로 보고 지나치기 쉬워 보인다.

하지만 내 안목을 피할 수는 없었다.

쿠그긍!

버튼처럼 누르고 돌리자 반응이 왔다.

서서히 열리기 시작한 철문 너머.

칠흑의 텅 빈 공간이 나를 맞이했다.

'더럽게 어둡네.'

그렇다고 해서 발광석을 꺼내거나 하진 않았다.

둔감함이란 페널티가 적용된 오감보다 좋은 게 존재했으니까.

'당장에 적은 없네.'

지도로 한 번, 흑마력으로 두 번.

이젠 수족처럼 자유롭게 움직이는 힘을 넓게 퍼뜨린다.

그것을 이정표 삼아 나는 어둠 속을 나아갔다.

긴장과 두려움으로 심장은 펄떡펄떡 뛴다.

하지만 정신력 덕분에 머리만큼은 잔잔한 호수처럼 맑고 고요했다.

그 기이함에 기댄 채로 나아가길 몇 분.

'또 다른 문.'

나는 더욱 중앙으로 나아가기 위한 작은 문에 손을 올렸다.

여는 건 정해진 수순이다.

그러나 지도에 잡힌 하나가 내 발목을 잡았다.

'중립?'

단 하나의 푸른 점.

그것이 이 건물의 중앙에 잡혔다.

누군가 있단 거다.

그 누군가가 흑마법사일지, 아니면 예측 불가능한 무언가일지는 문을 여는 순간 밝혀지겠지.

'대비해 둬야 하나.'

이 문을 열었을 때 최악의 경우를 마주할 수밖에 없다면, 타개할 방법이야 존재했다.

인벤토리를 열자마자 보이는 하얀 나무 십자가.

역천의 순명을 사용하는 순간 나는 네크로맨서 로크람이 아닌 전성기 시절의 야만 전사 로크람이 되겠지.

나이트메어 난이도의 아덴 사가1을 완벽한 클리어로 이끈 그 힘이라면 영웅급에 속하는 최상급 마족도 이길 수 있으리라.

'죽으면 다 소용없는 법이지.'

최후이자 비장의 수로 남겨 둬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아낄 수는 없는 법이다.

나는 십자가를 쥔 채 문을 열었다.

여차하면 부수고서 그 힘을 취할 생각이었다.

생각이었는데.

"뭐야."

예상했던 경우는 없었다.

중앙에 자리한 백색 원기둥.

내부가 수통과 식량을 감쌌던 나뭇잎으로 어지럽다.

그 안에 오랜 시간 갇힌 듯 잿빛 로브를 입은 여자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사, 사람!"

퉁방울만 해진 눈을 한 채 소리친다.

구원자를 마주한 듯 금세 울먹였다.

"흐흑. 이대로 다 끝나는 줄 알고… 감사합니다. 빛의 신이시여. 여길 나가면 개종이라도 할게요…."

눈물을 훔치며 중얼거리는 여자에게 다가갔다.

이렇게 보니 알겠다.

내외부를 아우르며 모든 마력을 차단하는 듯한 원기둥이지만, 빈틈은 존재했기에.

파악을 마친 내 입에서 결론이 흘러나왔다.

"너, 흑마법사구나."

"아, 아닌데요?"

처음은 부정.

계속해서 노려보니 어깨를 늘어뜨린다.

"사실은 맞아요…."

의기소침해진 모습이 보호 본능을 자극한다.

그래도 방심하면 안 됐다.

저런 외견 이면에 수많은 생명을 탐한 악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니까.

'당장 죽여도 시원치 않은 상황이다만….'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아치형 천장과 이어진 백색 빛.

원기둥 형태로 수많은 룬어를 품고 있다.

한눈에 봐도 봉인진 같았다.

그러니 여기가 신성진의 촉매가 있는 공간인 게 확실했다.

"내가 이곳에 온 목적이 뭐일 거 같지?"

"어… 촉매를 부수러 오신 거 아닌가요?"

"그래. 겸사겸사 너를 죽이고 금서를 확보하면 되겠어."

"자, 잠깐만요! 설마 그 개자식에게 악감정을 품고 여기까지 오신 건가요?"

"개자식?"

"단탈리온이요!"

금서란 말에 격하게도 반응하네.

스승과 제자 관계 아니었어?

대체 무슨 사이길래 녀석을 저렇게 욕하는 걸까.

"하아, 단탈리온이 제게 흑마법을 가르쳐 주긴 했어요. 그걸로 제가 그놈 제자가 된 거라면 당치도 않아요! 저는 거의 방치되다시피 했거든요."

여자는 언제 울었냐는 듯 얼굴을 붉히곤 소리쳤다.

대부분 단탈리온에 관한 욕이었다.

평범한 가정집에서 잘 살던 자신을 재능 있다며 납치하고, 강제로 지식을 주입한다.

그 과정에서 따라오는 고문에 가까운 체벌.

그의 목적을 깨달은 여자는 놈이 학을 떼는 장소로 도망쳤다.

"그게 여기란 소리냐?"

"네, 제 몸을 차지하려던 미친놈이 이곳을 제일 싫어했거든요. 영혼 전이에 관한 깨달음을 이 도시에서 얻었으면서. 웃기지도 않죠?"

"그래. 웃음도 안 나오는군."

사실일까 아닐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여자는 한 줌의 흑마력만 남았을 정도로 탈진한 상태였으니까.

이 봉인만 풀면 단숨에 목숨을 취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주도권을 이쪽에서 가지고 있으니 대화는 쉽다.

나는 궁금했던 것들을 물어봤다.

"이 도시에 고대 신성진이 구축된 이유를 알고 있나?"

"그야 물론이죠."

여자는 이곳의 역사에 대해 술술 불었다.

듣다 보니 잘 아는 이유가 존재했다.

'단탈리온의 선조가 이곳에서 드워프와 마법을 교류했다니.'

금속 마법을 잘 다루는 이유가 드디어 밝혀진 셈이었다.

"마왕의 저주 극복을 위한 대책도 그 자식 선조가 제안한 거예요. 육신을 버리고 때를 기다리잔 거였죠."

"하지만 흑마법사는 신성진에 대해 몰랐을 텐데?"

"후원자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어요. 백교에서 온 후원자랬죠."

백교라니.

여기서 들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 말은 흑마법사와 백교가 결탁하여 이 모든 일을 꾸몄단 소리 아니던가.

"후원자에 대해 알고 있나?"

"저도 몰라요. 이름도, 출신도, 직위도 모든 것이 불명이었거든요. 다만 그 새끼 선조는 그를 '광익'이라 불렀대요."

광익….

들어 본 적 없다.

아덴 사가1이 아닌 2에서 이어질 스토리인 건가.

'당장은 신경 쓸 필요 없겠지.'

백교가 흑마법사의 일에 개입한 건 나중에 알아봐도 좋을 문제였다.

지금은 이 상황을 타개하는 데 집중할 때다.

"단탈리온이 싫어하던 곳을 너는 잘도 찾아왔군. 그 결과가 그 꼴이고."

갇혀 있는 여자를 턱짓했다.

그로 인해 제 처지를 다시금 자각했는지 입꼬릴 내린다.

"저는 드워프의 손재주와 기술력을 동경했어요. 인간들은 이런 건물을 지을 수 없잖아요? 복잡한 기계 장치에 세밀한 야금술. 거기에 적용되는 마법은 어찌나 아름다운지."

"그 아름다움에 이끌려 갇힌 게 부나방을 보는 거 같단 말이지."

"제가 자진해서 이렇게 갇힌 줄 알아요? 뒤에 보세요!"

여자가 자신의 뒤편을 가리켰다.

빛기둥에만 신경 썼지 뒤는 처음 본다.

미라처럼 바짝 마른 시체 몇 구가 보였다.

"도굴꾼들이에요. 제가 여길 조사하는 동안 뒤쫓아 와선… 신성진을 가동하곤 방어 체계에 영혼까지 빨려 뒤졌어요. 멍청한 새끼들."

"이 모든 일이 전부 저 녀석들 때문이다?"

"저만이 조사 목적으로 온 거니까요. 지금은 이렇게 신성진이 확장되는 걸 막고 있는 입장이고요."

그런 거였어?

그래서 도시 입구가 물리적으로 훼손됐던 거구나.

저 말이 사실이면 안 죽이길 잘했네.

어쩐지 촉매에서 느껴지는 마력 파장이 쟤 손바닥을 벗어나지 못하더라니.

"유리아예요."

"갑자기 자기소개냐?"

"절 구해 줄지도 모를 은인에게 그럼 안 밝히고 가만히 있어요?"

"흠."

유리아. 저 여자의 말이 어디까지 진실이고 어디까지 거짓인지는 아직 모른다.

다만, 모든 전황이 그녀의 발언에 무게를 실어 줬다.

쿠그긍!

"또 시작이네!"

저 봐라.

한두 번이 아닌지 격한 울음을 토하는 촉매.

그것을 움켜쥐고서 흑마력을 흘린다.

비전 마법까지 가미한 거 같았다.

유리아의 근처에서 솟구친 철 가루가 촉매에서 퍼져나온 신성력을 찢어발기며 올라갔다.

'천장은 뻥 뚫려 있는 건가.'

광산에서 벌어진 사건의 전말이었다.

지하에 터진 진동으로 인한 인부들의 죽음.

철이 나오는 광산이 아님에도 그곳에서 발견된 철 가루까지.

'저걸 막으면서 생긴 여파로 인한 피해였어.'

사건의 진실을 알게 되자 마음이 섰다.

"흑마법은 좀 알고 있나?"

"허억, 헉. 당연하죠. 개새끼가 미래에 자기 몸이라고 때리면서 가르쳤으니까요."

다채롭게 바뀌는 단탈리온에 대한 호칭.

나는 어깨를 으쓱인 채 진정된 부유물들을 가리켰다.

"그 철 가루. 비전 마법을 사용한 거겠지. 금서는 어디 있나?"

"제 유일한 협상 카드인데 그냥 줄 것 같나요?"

"너를 죽여서 알아내는 수단도 존재한다만."

상대는 흑마법사.

나는 거리낌 없이 흑마력을 드러냈다.

만약 여기서 유리아가 살아나가더라도 흑마법사의 발언은 그 누구도 믿어 주지 않을 터.

그에 반해 내 평판은 상급 용사로서 하늘을 찌르니 주도권은 여전히 이쪽에 있었다.

"흐, 흑마력! 당신도 같은 흑마법사였군요!"

"선택해라. 여기서 죽을지. 금서를 넘기고 협상을 지속할지."

"후자밖에 선택지가 없잖아요!"

울상 짓는 유리아가 내린 선택은 예상대로였다.

흑마력으로 제품을 뒤지더니 책 하나를 던진 것이다.

"돼, 됐죠? 이제 좀 도와주세요. 이대로 가다간 신성진이 던그리드까지 퍼질 거예요. 대재앙이 닥친다고요!"

발치에 닿은 금서를 손에 넣은 나는 고갤 갸웃했다.

"흑마법사면서 그렇게까지 여기에 목숨을 거는 이유가 뭐지? 그 누구도 너의 노고를 알아주지 않을 텐데."

"사람 구하는데 누가 알아줬으면 하고 구하는 자도 있나요? 위험하니까, 위험해 보이니까. 그걸 막을 힘이 나한테 있으니까 나서는 거죠. 그리고, 아직도 제가 흑마법사가 되고 싶어서 된 줄 아세요?"

아니다.

그녀는 단탈리온의 마수에 억울하게 끌려온 입장에 불과했다.

누군가의 대체품으로 길러지던 삶.

여자는 처음으로 동경할 만한 거리를 찾았고, 거기에 몰두했다.

그것이 거대한 재앙을 몰고 오는 것임을 알았을 때, 유리아는 제 몸을 던져 신성진의 확장을 막은 것이다.

흑마법사지만, 누구보다 용사다운 행동을 한 여자.

지금까지 보인 모든 행동과 말씨가 내게 확신을 주었다.

"좋아."

샛노랗게 번뜩이는 눈으로 봉인진을 눈에 담았다.

신성력의 흐름이 육안에 잡힌다.

내부에서 외부로 간섭은 가능하나, 외부에선 불가능하다 이거지.

이러면 파훼는 쉽겠어.

바닥째로 무너뜨리면 되니까.

"너를 도와주마."

그러니까 흑마법 좀 알려 줘라.

056.

디그리스를 소환해 명령을 내렸다.

'신성진 밑에 있는 지반 중 약한 곳만 무너뜨려라.'

순식간에 진동이 인다.

지반이 약해지자 봉인진이 흔들린 것이다.

"꺄악! 뭐, 뭐예요? 방금 진동, 신성진 때문이 아닌데…?"

사태에 중심에 있던 유리아가 가장 민감하게 반응했다.

나는 거기에 대꾸해 주지도 않은 채 금서를 읽어 내렸다.

'음, 이런 구조인 건가. 흑마력의 변화무쌍한 성질을 역발상해서 속성력으로 치환하다니.'

마법에 관한 이론을 모르는데도 원리를 통달한다.

정신력 스탯은 내 뇌에 금서의 핵심을 때려 박았다.

"무너질 거 같아요! 살려! 살려 줘요! 도와달라고! 아 진짜!"

'이해했다.'

그녀의 비명을 무시하길 몇 분.

금서를 덮었다.

비전 마법, 아이언 하이드는 다 익혔다.

이제 눈앞에 울부짖는 유리아를 도와야지.

"촉매를 놓치면 어떻게 되지?"

"뭘 어떻게 돼요! 제가 억누르고 있어서 푸는 순간 몇 분 안에 신성진의 위력이 증폭될 거예요."

그리고 그 여파는 이 위에 자리한 던그리드에 닿을 거다.

그렇다면 유리아만 따로 빼내는 건 보류.

봉인진을 없애고 촉매에 접촉, 내가 신성진의 핵심을 와해할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버틸 수 있나?"

"촉매 아니면 바닥!"

이젠 존대할 정신도 없는지 다급히 외친다.

나는 그녀가 쥐고 있는 걸 가리켰다.

"이제 2시간도 못 버텨! 저항이 너무 강해졌어!"

따로 자아를 가진 건가.

저런 경우는 처음 본다.

저걸 신성진에 심은 광익이란 자는 뭐 하는 놈이길래 저런 걸 만든 걸까.

'빨리 끝내야겠네.'

디그리스와 동기화된 감각으로 봉인진 지하의 상태를 가늠했다.

단단한 돌무더기와 흙을 잔뜩 파헤친 상태다.

부수기 딱 알맞아 보였다.

"웅크려라. 이제 봉인진을 부술 거야."

"봉인진만 부수는 건데 저는 왜 웅크려요?"

"다칠 수도 있으니까."

"다치다니 무슨…!"

쿠궁! 격한 진동에 유리아는 재빠르게 몸을 말았다.

공벌레보다 빠른 대응에 박수라도 쳐 주고 싶다만, 시간이 없었다.

디그리스가 지반을 무너뜨리는 아슬아슬한 상황이다.

그 틈을 비집고 봉인진이 약해졌을 때를 노려야 했다.

'지금.'

봉인진에 닿은 흑마력이 최적기를 알렸다.

읽는 순간 완숙의 경지에 닿은 그것을 영창한다.

나는 손을 뻗어서 방금 얻은 비전 마법을 사용하려 했다.

"격동하…."

끼그긍.

디그리스를 통해 전해진 기음.

정신이 흔들리지는 않았지만,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었다.

우려됐기 때문이다.

방금 무언가 변화가 일었고, 여기서 비전 마법을 사용하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

그렇기에 잠깐 머뭇거리고 말았다.

봉인진.

아니, 이 건물 전체는 그 순간에 변화했다.

마지막까지 숨겨 둔 기계 장치의 안배로 침입자를 쫓아내려 들었다.

쿠쾅! 키이잉!

바닥째로 들리거나 푹 꺼진다.

거대한 체스판이 입체적으로 형태를 바꾸면 이러할까.

내가 서 있던 바닥은 푹 꺼졌다.

그로 인해 애처롭게 손을 뻗는 유리아와 눈이 맞는 게 고작이었다.

"저기…!"

굉음에 그녀의 외침이 묻힌다.

여기서 역천의 순명을 써야 할지 말지 고민했다.

사용한다면 해결은 쉽다.

하지만 그 이후가 문제였다.

'이 뒤에 확실한 안전이 보장되지 못하면 내가 죽어.'

별수 없네.

보험 하나 걸어 두고 순응할 수밖에.

"격동하라."

끊겼던 비전 마법을 영창한다.

그러자 바닥재에 숨어 있던 철 가루가 흑마력을 따라서 모양을 바꿨다.

촤르륵!

기다란 밧줄 형태가 된 그것을 위로 올린다.

천장에 걸어 추락을 막아 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예상했다는 듯 건물은 두 번째 변화를 만들어 냈다.

쿵!

방금까지 내가 서 있던 천장이 닫힌 것이다.

"이런."

그로 인해 밧줄이 끊겼다.

외마디 비명만을 남긴 채 나는 떨어졌다.

이 상황에서 대응할 수 있는 건 추락의 충격을 최소화하는 것뿐.

'교묘하게 마법까지 가미되어 있어.'

직선으로 떨어지는 것 같지만 묘하게 다르다.

은근하게 가해지는 반중력과 강풍.

자칫 수직 낙하로 착각하기 쉬운 추락은 나를 다른 위치로 옮기고 있었다.

마치 침입자를 대신 처리해 달란 것처럼.

'다 왔나.'

밝은 빛이 눈을 찌른다.

추락이 끝나기 무섭게 영체화를 사용했다.

영체가 되어 그 자리에 고정된다.

그것으로 가속도는 순식간에 0에 수렴하게 되었다.

비기를 잠깐 사용했다가 해제하는 것으로 나는 새로운 지역에 발을 들였다.

'여긴 어디야.'

지도에 잡히는 건 없다.

연락책도 없이 오롯이 혼자인 상황.

시험 삼아 손을 당겼다.

손바닥에 감겨 있던 철 가루 밧줄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흠."

일단 흑마력이 이어진 방향만 보면 중심에서 동쪽으로 온 거 같은데.

기계 장치로 이루어진 함정은 다른 건물로 침입자를 옮기는 방식인 건가.

마력 함정이었으면 대응했을 거다.

마력도 뭣도 없는 함정이 상황을 여기까지 끌고 와 버렸다.

그래도 가는 길은 비전 마법으로 파악했으니 되짚어가면 그만이었다.

'최대 2시간 버틸 수 있다고 했지. 서둘러야겠는데.'

때아닌 시간제한 퀘스트라도 받은 기분이다.

일단 이곳을 나가고자 움직였다.

"여기가 위대한 영안실."

지도로 본 게 맞았다면 확실했다.

거대한 유리관이 좌우에 벽을 대신하고 있다.

좀 더 살풍경을 기대했는데 아쉬웠다.

언데드화 할 거리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영안실이라면서 시체도 없는 건가.'

마왕의 저주를 우려해서 다 태워 없앤 건가.

아니면 위대한이란 수식어가 붙은 거로 보아, 영웅들을 안치한 무덤처럼 축복의 중심에 드워프 영웅이 있을지도 모르고.

몇 가지 가능성을 늘어놓은 채 거대한 복도를 나아갔다.

'아이언 골렘도 안 나오네.'

그냥 침입자의 발목이나 붙잡을 용도였나.

하지만 좌우의 불투명한 유리관이 꺼려진다.

검은 실루엣이 거대했다.

분명 무언가를 보관한 거 같은데, 체구가 드워프는 아니고 거인이라 불리기 딱 좋아 보였다.

"…아악!"

비명?

모퉁이 너머에서 들렸는데.

'설마.'

익숙한 목소리다.

혹시나 해서 가 보니 정신없이 주위를 둘러보는 여자가 보인다.

리카였다.

"어어!"

눈이 맞더니 경악한다.

나 또한 속으로 침음을 삼켰다.

중앙 통제실만 침입자를 내쫓은 게 아닌 건가.

"로크 씨도 설마 저기서…?"

그녀가 이곳에 오게 된 원흉을 가리켰다.

그 구멍을 본 나는 고갤 끄덕였다.

"으으으.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인지. 원인은 파악된 건가요?"

파악이야 진작에 끝났지.

내가 저지른 일이거든.

하지만 말을 줄였다.

잘잘못을 따질 시간에 이곳을 나갈 방법을 궁리하는 게 옳으니까.

"너는 어쩌다가 여기 온 거지?"

"공방 조사하다가요. 다들 뿔뿔이 흩어진 거 같아요. 서 있는 부분만 딱 잘려서 모두 떨어졌거든요."

그렇다면 이곳 어딘가에 탐사 대원이 더 있을 수도 있단 소리였다.

그중에 톰이 섞여 있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겠지.

"톰은 아티팩트를 챙겼나?"

"네. 로크 씨 줘야 한다면서 챙기더라고요."

보상을 못 받을 일은 없겠구만.

그래도 일단 안전은 확인해야겠는데.

톰이 죽어 버리면 말짱 도루묵이잖아.

기이잉. 쿵! 쿵!

이건 뭐, 여유를 가질 시간도 없다.

그동안 조용했던 유리관이 좌우로 벌어진 것이다.

"로, 로크 씨, 여기 건물 이름이 뭐죠?"

"위대한 영안실."

"하… 이름값 하네, 진짜."

그녀의 말대로다.

위대하긴 하다.

거기에 거대함도 추가하면 좋아 보였다.

"저 아이언 골렘에도 드워프의 영혼이 들어 있겠죠?"

"그러겠지."

앞뒤를 가득 메운 거대한 강철 거인들.

놈들의 붉은 안광은 우리 둘만을 담고 있었다.

3층 빌딩에 눈이 달린 거 같다.

각진 형태의 골렘 수십 채는 이윽고 발을 뗐다.

쿵! 쿵!

"제가 보조할게요!"

네 뭐를 믿고 보조를 맡기니, 맡기기는.

나는 단죄의 백결검을 꺼내든 채 나직이 말했다.

"몸이나 숙여."

머리 잘리기 싫으면.

뒷말에 숨을 삼킨 리카가 재빨리 엎드렸다.

마력 반전과 폭풍검의 발현은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다.

좁은 공간이 황금빛으로 가득 찬다.

그것을 뚫고서 길게 이어지는 붉은 열선.

스컥!

단단한 걸 베어 낸 듯한 절삭음에 기음이 멎었다.

고약한 탄내가 코를 찌른다.

이윽고 수 톤에 달하는 질량의 추락음이 귀를 때렸다.

콰아앙!

눈감고 들으면 폭탄이라도 터진 듯하다.

그런데 아스라이 들리는 이 소리는 뭐지.

…쿵. 쿵.

다 베어 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방금 일격으로 일어난 분진 때문에 앞이 안 보인다.

뼛조각을 입에 머금은 채로 마력에 집중했다.

'강해.'

느껴지는 힘이 상상 이상이다.

지금껏 감지했던 평범한 마력이 아니다.

더 광포하고 뾰족하다.

먼 거리에서도 피부를 찌르는 듯했다.

나보다 마력 감응력이 부족한 리카도 체감하는지 팔뚝을 연신 쓸었다.

"뭐, 뭐죠?"

"뭐긴."

위대한 녀석이 오는 소리지.

방향을 가리키자 리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방금 상대한 것의 반절 크기.

하나 수십 채를 응축한 것과 같은 압박감이다.

황금으로 번뜩이는 그것은 푸른 안광을 발한 채 입을 열었다.

-나! 드워프 영웅 그루반 골댄비어를 깨운 게 너희들인가!

안식을 취하며 때를 기다리던 드워프 영웅이 우릴 보며 소리쳤다.

***

마을이 검게 불타고 있다.

익숙한 광경이다.

꿈으로 수십, 수백 번 본 광경.

더는 보고 싶지 않아 몸을 혹사해 꿈도 안 꾸던 나날이었는데 뭐지.

'도망쳐라, 톰! 최대한 멀리 도망가!'

어느새 흑색 화마의 중심이었다.

내 품에 아버지가 리코를 안겨 주신다.

그는 돌이킬 수 없는 화상을 입은 상태였다.

리코 또한 왼 다리에 검은 화상이 가득했다.

어머니는….

'앞만 봐라, 톰! 무조건 이곳을 빠져나가!'

볼 수 없었다.

마른 눈물을 흘리는 아버지가 호소해서, 톰은 애써 정신을 차린 채로 내달렸다.

어쩌면 유일하게 남게 될 혈육을 끌어안은 채로 마족이 내린 불꽃을 돌파했다.

늘 여기서 꿈은 끝을 맺었다.

마지막으로 들리는 고통에 찬 아버지의 비명을 끝으로 말이다.

"허억! 헉!"

이번에도 똑같았다.

다만, 깨어난 장소가 침대는 아니었다.

딱딱한 돌바닥에 혼자다.

탐사 대원들은 보이지 않았다.

"검은 불꽃…."

오랜만에 꿈으로 본, 절대로 잊을 수 없는 복수의 대상을 떠올려 본다.

중급 마족인 녀석은 오로지 재미를 위해 흑염을 흩뿌렸다.

마을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자신과 리코만이 유일한 생존자였다.

'역시 안 돼.'

지금 떠올려 봐도 전의가 꺾인다.

제 주제를 일찍이 깨닫게 된 용병은 다시금 마음을 다잡았다.

동생을 지킨다.

다시 예전처럼 걷게 만든다.

두 가지 일념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래서 놀라 나자빠질 뻔했다.

턱을 괸 채 자신을 보고 있는 사내 때문이었다.

"누, 누구…?"

의문은 빠르게 해소됐다.

특유의 하늘거리는 연초록색 머리가 눈에 들어왔기에.

톰은 빠르게 예를 갖췄다.

"더, 던그리드의 영주이자 바람의 영웅을 뵙습니다."

"인사치레는 됐어. 한눈에 알아봐 주니 좋네. 그나저나, 고개 좀 들어 볼래?"

"네?"

얼떨결에 윈도르를 마주하게 된 톰은 저도 모르게 멍청한 소릴 냈다.

그에 상관하지 않고 그가 숨을 흘렸다.

"흠, 좋은 눈이네. 나도 그런 눈을 한때 가져 봐서 알거든. 그런데 뭐하러 이런 위험한 곳에 왔냐? 보아하니 도굴꾼 같은데."

윈도르가 손을 내밀었다.

그의 태도엔 일말의 적개심도 묻어나지 않았다.

톰은 그 이유를 알았다.

영웅의 자리에 오른 강함이 주는 여유와 오만함.

그것만으로도 설명됐다.

"이것도 인연이니 잠시 동행할래? 너나 나나 같은 함정에 빠진 거 같은데."

거절할 이유가 없다.

하루빨리 이곳을 나가서 탐사대와 합류해야 하기 때문이다.

"로드란 용병 길드 서쪽 지부장, 톰이라고 합니다."

"아, 도굴꾼이 아니고 용병이었어? 그것도 지부장? 어린 나이에 열심이네. 여기 온 이유는 그럼 탐사 목적이겠네?"

그의 손을 맞잡고서 자신을 밝혔다.

톰의 용병패를 본 윈도르는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바람이 일며 몸에 묻은 흙먼지가 떨어져 나갔다.

"영웅이니 뭐니 허례허식은 치우고. 그냥 한 가정의 가장으로 봐줘. 난 그게 편하거든."

"아, 네….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그의 사고방식에 떨떠름한 표정을 짓던 톰은 그의 약지로 자연스레 눈이 갔다.

시선을 눈치챘는지 윈도르가 씩 웃었다.

"왜, 부럽냐?"

'세, 세 개….'

톰은 끼워진 반지 개수를 셈하고 조용히 경악을 삼켰다.

057.

황금 골렘이 기동한다.

프레임마다 내장된 실린더에서 증기가 흘러나왔다.

푸른 증기는 농후한 마력을 내포하고 있었다.

단순한 걸음걸이임에도 엄청난 압박감이다.

나는 드워프 영웅을 담아낸 골렘의 수준을 가늠했다.

'미쳤네. 마력 핵이 관절마다 박혀 있잖아.'

움직이는데 마력을 줄줄 흘림에도 손실 없이 움직인다.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다.

영혼이 발하는 의지의 결과였다.

-제 발로 깨끗한 몸을 바치고자 찾아오다니. 인간들아, 너희들의 우매함에 후회하다가 죽어라!

철컹! 오른팔을 앞세운다.

그의 황금은 완벽에 가까운 마력 조정으로 녹아서 변했다.

어느새 그의 팔엔 거대한 발리스타가 자리해 있었다.

"보, 보조할게요."

리카는 팽팽하게 당겨진 시위를 보고도 옆에 붙었다.

분명 어렴풋이 마력의 총량을 가늠했을 거다.

거기에 깃든 살기와 기세에 압도당한 그녀였다.

"호, 홀리 심볼. 브라이트 배리어."

그런데도 신성술을 펼친다.

공포를 이겨내는 마음가짐은 단순했다.

이타심. 오로지 남을 위하겠단 마음이었다.

"로크 씨! 아이언 골렘을 쓰러뜨렸던 그 기술, 한 번 더 사용할 수 있으시죠? 제가 최대한 버텨 볼게요. 그러니 그 성유물을 다시 휘둘러…!"

쩌어엉!

순식간이었다.

대기 중에서 새하얀 증기가 뒤늦게 비명 지른다.

너무도 빠른 쇠뇌는 리카의 노력을 무로 돌렸다.

방금까지 단단하게 직조된 신성력이 부서져 내린다.

아슬아슬하게 그것을 막아선 새하얀 검신이 찌르르 울렸다.

'시발.'

욕지기를 삼켰다.

조금만 늦었어도 리카는 꼬치에 꿰인 고기가 되어 뒤편으로 날아갔겠지.

진안을 처음부터 끝까지 유지하길 잘했다.

그 반동으로 안구가 뻐근하지만, 아직 버틸 만했다.

"성유물은 무사한가요?"

"이 정도로 부러질 일은 없으니 집중해."

"앗, 네."

끌어들일 수 있는 요소를 떠올린다.

폭풍검은 이제 한 번이 한계다.

사용하면 몸에 엄청난 부하를 가져오겠지.

리카라는 눈이 있어서 제 실력을 발휘하긴 힘들다.

그래도 모든 수를 사용할 수 있긴 했다.

그녀가 베일에 싸인 자를 간파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가라앉으라.'

언타임을 영창했다.

영혼을 약화하는 비전 마법이다.

그루반의 영혼도 쇠약해지는 걸 피할 수는 없을 터.

파츳!

미세한 검은색 침이 놈의 금색 장갑을 파고들었다.

사전 준비는 그것으로 끝.

이제 대응할 때다.

"검을 왜 집어넣으세요?"

"앞을 봐."

들고 다니지도 못하는 검이다.

일격필살을 노리는 건 지금이 아니었다.

-헛된 발악을 하는구나!

적당한 거리에서 그루반이 가속했다.

육중한 골렘임에도 엄청난 속도다.

어느새 근접하여 몸을 띄운다.

오른팔은 발리스타, 왼팔은 철퇴.

'격동하라.'

아이언 하이드를 발동함과 동시에 리카를 옆으로 밀었다.

그녀의 새된 비명은 발리스타의 격발음에 묻혔다.

쿠콰아앙!

10m도 안 되는 거리에서 쏜 쇠뇌다.

식지 않은 고열의 작살이 땅을 녹이고 크레이터를 남겼다.

후속타로 날린 철퇴는 대지를 두부 으깨듯 뭉개 버렸다.

고열과 흙먼지가 자욱하다.

영체화로 모든 공격을 회피한 나는 침착하게 상황을 주시했다.

'남은 흑마력은 6할. 놈은 건재하다. 시간을 끌면 내가 이기겠지만….'

정신력이 명확하게 리카를 인식했다.

신성력이 흔들리는 게 당황한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로… 크 씨? 아니죠? 아니잖아요? 그렇잖아요!"

호들갑은.

안 죽었으니까 조용히 해.

-시끄럽구나. 여자 몸을 차지할 생각은 없으니 죽어라!

나를 처리했다고 여겼는지 리카를 노린다.

그녀는 대항할 수단이 없다.

압도적인 물리력에 피떡이 되는 결과만 기다릴 뿐이었다.

'어떻게 하지.'

고민하게 되자 생긴 사고의 가속.

1초가 엿가락처럼 늘어났다.

리카를 살렸을 때 소모해야 하는 자원을 가늠한다.

포기했을 때도 생각해 봤다.

구했을 때 사용해야 할 아티팩트와 흑마력의 총량이 상당할 것 같다.

당장 놈을 이길 확률이 내려간단 말이다.

그래도 이후에 얻을 건 많다.

'은빛 성가대란 인맥. 신성 왕국의 호의. 페르시의 정신적 안정.'

포기했을 때 얻을 수 있는 건 단 하나.

'확실한 승리.'

저울이 기울었다.

확신이 선 이상 머뭇거림은 없었다.

"격동하라."

솨아아!

내 목소리를 들었음에도 놈은 멈추지 않았다.

영웅답게 변수가 발생해도 한 번 노린 대상을 바꾸지 않는다.

어찌 보면 냉철하고, 달리 보면 멍청하다.

-음?

그루반이 뒤늦게 의문을 토했다.

휘두르던 왼팔이 멈췄기 때문이다.

그의 시선은 어느새 전신을 옥죄는 철 가루에 머물러 있었다.

-잔재주로구나!

"과연 그럴까."

나는 손을 내저었다.

심상의 구체화는 행동으로 더욱 확고해지니.

땅 곳곳에서 실처럼 흘러나온 철 가루가 그루반의 관절을 파고들었다.

첫 발현으로 심어 둔 게 드디어 행동을 개시한 거였다.

-흡!

그러나 금세 와해된다.

관절마다 내장된 마력 핵에서 터져 나온 파동 때문이었다.

그래도 목적은 이뤘다.

녀석에게 확신이란 극독을 심어 준 것이다.

'나란 존재를 확실하게 죽여야 하는 것으로 여기게 된 거지.'

어떤 방해에도 당장은 나만을 주시하게 될 거다.

모든 행동이 나를 죽이려는 쪽으로 귀결될 터였다.

-그 공격에서 살아남다니, 보통 녀석이 아니로구나.

그루반이 목표를 바꿨다.

형태를 변모한 놈의 사지는 전보다 흉악해져 있었다.

-확실하게 죽여 주마.

"고작 그걸로?"

눈으로 한 번, 어깨를 터는 것으로 연거푸 도발한다.

푸른 안광이 붉게 물드는 건 당연했다.

설정집에 적힌 대로구만.

자존심과 자존감 빼면 시체인 종족다워.

-노오오옴!

삐이이-!

눈앞이 명멸한다.

소음을 넘어선 고주파 음에 귀가 찡했다.

따듯한 액체가 턱선을 타고 흐르는 게 고막이 터진 것 같았다.

'물리력으로 안 되니 소리로 공격하는 건가.'

물론 영체화로 피할 수 있다.

하지만 저 소리의 폭풍이 언제 끝날 줄 알고 소모전을 벌이겠는가.

침묵의 발걸음으로 거릴 벌렸다.

기다렸다는 듯 거릴 좁힌 그루반이 소리쳤다.

-산산이 조각나라!

제 몸보다 거대한 망치를 휘두른다.

거대한 황금 벽이 짓쳐 드는 것만 같았다.

지금 신체로 움직여 대응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래서 정신력에 기댔다.

'단죄의 백결검으로 꺼내.'

인벤토리는 생각으로도 여닫을 수 있었기에.

내 명령을 받든 시스템이 새하얀 검신을 반쯤 토했다.

열린 순간 그 위치에 고정되는 인벤토리.

반쯤 나온 더럽게 단단한 검신.

두 가지가 맞물린 결과는 놈도 뚫을 수 없었다.

콰아아앙!

'충격파가 엄청나네.'

몸이 터져 나가는 꼴은 면했지만, 후폭풍이 문제였다.

여기에서 버티냐 마느냐.

고민하던 중, 주저앉아 멍한 얼굴로 이쪽을 보는 리카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를 보자마자 묘수가 떠오른다.

'좋아.'

머릿속에 그려진 승리의 길을 따라, 나는 강풍에 몸을 맡겨 뒤로 날아갔다.

***

-크흐! 크하핫! 꼴 좋구나! 그렇게 기세등등하더니 지금 어떻지? 흔적도 없이 사라졌어!

그루반은 폭소를 터뜨렸다.

들썩이는 골렘이 감정을 보여주듯 연신 자욱한 증기를 흩뿌린다.

혈흔 하나 안 남은 로크의 빈자리에 리카는 절망했다.

"아아…."

탄식이 흘러나온다.

곧 자신에게 들이닥칠 악몽에 리카는 행동을 취했다.

-너도 사이좋게 보내 주마. 음?

그녀는 고갤 떨구지 않았다.

주저앉지도, 손을 내리지도 않았다.

똑바로 선 채 피가 배어 나올 정도로 입술을 깨문다.

부릅뜬 눈엔 습기 하나 서리지 않았다.

핏발 선 눈을 부릅뜬 채 합장할 뿐.

"포용의 여신께서는 위기마저도 받아들이라 하셨습니다. 정신 똑바로 차리면 살길이 보인다는 뜻이겠죠."

-개소리를 장황하게도 늘어놓는구나. 자, 지금도 살길이 보이나, 여자야?

그루반의 사지와 등판에서 포구와 날붙이가 돋아났다.

흉흉한 열기에도 리카는 물러서지 않았다.

"명예마저 버리고 인간의 몸을 탐하려는 영락한 종족의 영웅아! 나는 너를 막지 못하겠지. 하지만 누군가는 너를 막을 거다. 인간의 저력을 무시하지 마!"

-시끄럽군. 다음 유언은 저승에서나 지껄여라.

다가올 죽음에 그녀는 최고의 신성술을 발현하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루반은 그런 리카를 죽이고자 움직였다.

아니, 움직이려던 참이었다.

콰르륵!

돌연히 꺼지는 놈의 발밑.

균형 잃은 자세만큼 공격 또한 이리저리 튀었다.

"아악!"

마지막이랍시고 소리 지르던 리카는 차츰 입을 닫았다.

시간이 지나도 고통은 없다.

소음이 잦아들자 고갤 내미는 의문.

'뭐지?'

슬며시 눈을 떴다.

그녀는 드러난 광경에 벙찐 표정을 지었다.

사방을 막은 신성 보호막 너머, 언데드와 마물이 그루반을 공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대체 어디서 나타난 거냐!

놈이 당혹성을 터뜨렸다.

리카 또한 당황스럽긴 매한가지였다.

'뭐지?'

로크 씨의 소행이라고 여기기엔 어렵다.

그는 눈에 띄게 특이한 신성력을 다루는 이단 심문관이었으니까.

그렇다면 이 변수는 뭐지?

궁리해 봐야 뾰족한 답은 안 나왔다.

그래서 지금 할 수 있는 걸 했다.

'여길 나간 다음 외부에 이곳의 상황을 퍼뜨려야 해.'

로크의 희생을 헛되이 할 수 없다.

언데드가 저러는 동안 이곳을 탈출하는 게 옳았다.

그렇게 무사히 몸을 빼낸 리카는 거대한 복도를 내달렸다.

"허억! 헉!"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도 멈추지 않았다.

은빛 성가대의 대장직에 올라 이처럼 볼썽사납게 뛰어 보는 게 얼마 만인지.

뒤늦게 눈가가 따갑다.

"흐흑. 미안해요. 로크 씨, 제가 반드시, 꼭 당신의 복수를 해 드릴게요."

"아니. 그럴 필요 없어."

"흐약!"

옆에 있던 유리관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

리카는 우스꽝스러운 비명을 내지르며 주저앉았다.

들릴 리 없는 익숙한 목소리가 주는 놀람 뒤에 안도감이 밀려든다.

그녀는 천천히 걸어 나오는 인영에 숨을 삼켰다.

***

죽음을 연기하고서 본 이터로 몸을 회복했다.

언데드를 소환하여 리카도 무사히 빼냈고.

이제 마무리 지을 차례라 모습을 드러냈건만.

나를 본 그녀는 귀신이라도 본 듯 넘어졌다.

그러고 이 상황이다.

"왜 울지?"

"로크 씨가 죽은 줄 알아서…. 저를 대신해 희생한 줄 알고… 그랬는데 살아 계셔서 안, 안심했어요…."

연신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는 리카.

거, 얼마나 봤다고 나를 위해 울어 주는지.

무안한 마음에 어깨를 두드려 줬다.

"날 도울 생각 하지 말고 가던 길 가라. 네가 보여 준 각오로 충분했으니까."

"녀석은 괴물이에요! 혼자 대적하려 들면 이번엔 진짜 죽을 거라고요!"

"그럴 일 없어."

"그걸 어떻게 확신하시죠?"

리카는 임시라지만 동료의 희생을 두고 지나치지 못하는 여자였다.

페르시와 절친한 관계라더니.

비슷한 구석이 제법 엿보인다.

나는 피식 웃어 보인 채 그녀를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그다음 그녀의 물음에 반문했다.

"너의 어중간함을 메우다가 내가 죽길 바라나?"

"아뇨…."

즉답이네.

알면서도 고집부리는 거였나.

"그럼 안전한 곳에서 기다려. 여기서 죽을 생각 없으니까."

"하지만!"

"가."

"으읏."

설득이 길어져선 안 된다.

내 단호한 한 마디에 리카는 입술을 한껏 깨물었다.

무언가 불만이 많아 보이는 표정이다.

그래도 성큼 걸음을 옮기는 게 설득이 통한 모양이었다.

"이제 좀 편하네."

혼자가 된 나는 몸을 풀었다.

신체를 뒤흔든 충격파로 몸이 쑤신다.

그래도 나는 나아간다.

누군가 본다면 타인을 대신해 절망으로 발을 들이는 것처럼 보이겠지.

그만큼 드워프 영웅은 강력했다.

놈의 강대한 영혼, 아이언 골렘의 수준, 능력 등.

위기는 많았다.

그런 고비들을 모두 넘긴 끝에 나는 도달한 거다.

'확실한 승기.'

모든 기세가 내 쪽으로 넘어왔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이상한 자. 덕분에 깨달았다. 그것이 무용(武勇). 진정한 기사의 각오로구나.'

어떠한 상황에서도 굽히지 않는 무예와 용맹, 무용.

내 행동을 제 입맛대로 생각한 데스나이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내가 그토록 바라던 걸 너를 통해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니 인정한다. 네가 바로 나의 진정한 주군이구나.'

[네임드, 알테온 경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를 사역하시겠습니까?]

고민할 필요도 없는 알림 창이었다.

'이제부터 이상한 자라 말하면 소멸시켜 버릴 줄 알아라.'

'명을 따르겠습니다, 주군.'

급 공손해진 데스나이트가 검을 들었다.

내 스킬로 중급 용사 수준에서 더욱 강화된 그는 강대한 흑마력을 흘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이젠 그려지지도 않았다.

-이런 바퀴벌레보다 질긴 놈을 봤나!

언데드들의 포위를 뚫고 온 그루반을 응시했다.

역시, 직접 보니 더욱 안 그려진다.

내가 패배하는 그림이 말이지.

"알테온. 베어라."

스컥!

검게 타오르는 그의 검이 황금을 양단했다.

058.

그루반 골댄비어.

제4 도시의 통치자인 그는 왕명을 따랐다.

저주로 빛바랜 종족의 명운이 달린 일이다.

그는 기꺼이 본래의 작고 옹골찬 육체를 포기했다.

차갑고 단단하기만 한 골렘에 영혼을 옮겨 때를 기다린 것이다.

'우리는 죽는 게 아니다! 새 시대를 위한 준비에 들어가는 것일 뿐! 동포들이여, 숨죽여라. 더욱 단단한 존재로 거듭나기 위한 미래를 꿈꿔라!'

인간의 몸을 차지한다.

질긴 적응력으로 마왕의 저주에 대응해 낸 그들로 종족의 미래를 새롭게 이어 나가는 것이다.

드워프 영웅은 마음 놓고 긴 잠에 빠져들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죽지 않는다. 대업을 이루기까지 절대로! 나는 죽지 않아!

마력 핵들이 비산한다.

붉게 물들어 녹아내린 황금은 그것들을 기준으로 빠르게 재구축됐다.

-나, 황금의 영웅은 무적이다.

반 토막 난 일은 마치 없던 일인 것처럼 아이언 골렘은 건재하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내 눈엔 무적이 아닌데?"

놈의 발치를 가리켰다.

반 토막 나 굴러다니는 마력 핵이 빛을 잃었다.

"이제 24개 남았네. 안 그런가?"

-그 입 다물라!

그루반의 머리가 거대한 포신의 형상을 취했다.

당장이라도 포격을 이어 나갈 기세다.

하지만 알테온의 참격은 이제 시작이었다.

스카카칵!

포신을, 머리를, 몸체까지 지나쳐 마력 핵 세 개를 깨부순다.

노획하면 하나하나가 큰 도움이 되겠지만, 별수 없다.

놈을 죽이려면 마력 핵을 모두 파괴해야 했기 때문이다.

'어우, 아까워.'

내가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알테온은 흑염으로 타오르는 검을 감싼 채 중얼거렸다.

"힘이 넘치는군. 이게 주군께서 안겨 주신 깨달음의 힘인가."

그런 거 아니야, 인마.

다 스킬 덕분이지 깨달음은 무슨.

-그륵. 이런, 마력… 이.

그루반의 마력을 불사르는 흑염.

알테온의 쟁염이 가진 힘이었다.

'불사르는 결의.'

검을 맞댄 대상의 마력, 오러를 불살라 먹는 능력이다.

그루반의 마력은 그 능력에 저항하지 못했다.

언타임으로 영혼은 약해졌지, 마력 핵을 벌써 넷이나 잃은 골렘은 전보다 출력이 낮아졌다.

이젠 재구축에도 시간이 걸린다.

이를 가만 놔둘 내가 아니었다.

"뭐 해. 안 썰고."

"명을 받들겠습니다."

반쯤 회복된 몸체를 베고, 또 벤다.

발악이라도 하려는 순간엔 아이언 하이드가 진가를 발했다.

-구, 구축이!

꽈직! 놈의 몸에 심어 두었던 철 가루가 마력 핵을 깨뜨렸다.

바닥에서 솟구친 자철 폭풍이 놈의 시야마저 교란한다.

졸지에 맹인이 되어 버린 놈에 반해 나는 정신력으로 마력을 선명하게 느끼고 있었다.

이를 알테온에게 의지로 전달하면 끝.

-이럴 수는 없다. 이럴… 수는….

장기전을 염두에 둔 전투가 빠르게 끝났다.

알테온이 합류한 덕분이었다.

모든 마력핵이 부서진 골렘은 그 형태를 잃고 녹아내렸다.

골렘에 묶여 있던 그루반의 영혼은 잡을 새도 없이 순식간에 흩어졌다.

"주군."

"돌아가라."

"알겠습니다."

일단 알테온을 인벤토리로 돌려보냈다.

그가 언데드란 사실은 인비저블 언다잉으로 감춰 놓았다만, 남들이 볼 땐 제삼자가 뜬금없이 튀어나온 꼴이니까.

'일단 숨겨 뒀다가 적당히 신분만 꾸며서 소개해야지.'

고비를 넘겼으니 뼈아픈 정산 시간이다.

놈을 저지하는 데 쓰인 언데드를 가늠해 봤다.

'24마리 남았네. 다시 채울 생각에 막막하구만.'

그래도 알테온이란 네임드 언데드를 확보했다.

중급 용사 수준의 무력에 내 보조를 받으면 그 이상의 힘을 발하는 데스나이트.

벌써부터 든든해졌다.

그래, 이런 날을 위해 네크로맨서를 택한 거라고.

'여기서 본 드래곤이랑 리치, 해골마까지 추가하면 금상첨화인데.'

하나같이 얻기는 더럽게 힘든 언데드지만, 언젠간 얻을 수 있을 거다.

나는 혹시 모를 전리품을 위해 바닥에 눌어붙은 골렘을 뒤졌다.

당연히 내겐 하등 필요 없는 황금 덩어리만 눈에 띌 뿐이다.

그러니 그 속을 볼 필요가 있었다.

'마력이 거의 다 흩어졌어. 핵을 다 부숴서 그런가.'

그래도 느껴지는 건 있다.

마력과는 다른 신성력의 기운.

나는 아이언 하이드를 응용해 철 가루로 덩어리를 뜯어냈다.

그것으로 드러난 원흉에 미간이 절로 모였다.

"뭐야, 이게."

강대한 마력 핵마저도 영혼이 소멸하자마자 마력을 잃었건만.

저 홀로 존재감을 과시하는 그것은 분명….

"깃털?"

새하얀 깃털이었다.

보고 있자니 유리아의 말이 떠오른다.

이곳에 거대한 신성진을 구축하는 데 도움을 준 백교의 후원자.

'이름도, 출신도, 직위도 모든 것이 불명이었거든요. 다만 그 새끼 선조는 그를 '광익'이라 불렀대요.'

아무래도 이곳 일이 마무리되면 브라트와 접촉해 봐야 할 것 같았다.

광익과 관련된 증거물이 떡하니 나온 상황에서 그냥 넘어가는 건 내 성미완 안 맞으니까.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로 언제 접촉해야 하는가.

고민을 이어 가며 걷던 중, 두 손 모은 채 발만 동동 구르는 리카가 보였다.

"아!"

그녀는 나를 보더니 한달음에 달려와 이곳저곳을 살폈다.

본다고 뭐가 보이겠냐마는.

큰 상처 없이 온 모습에 안도한다.

"그 괴물 같은 아이언 골렘을 처리하고 오신 거예요?"

손을 뻗어 내 귀밑을 훔친다.

말라붙은 피가 리카의 손길에 바스러졌다.

그런데 이 거리감은 뭐지.

갑자기 가까워진 기분인데.

"왜 그렇게 봐요?"

"너무 가까운 거 아닌가?"

"축복 장비도 이렇게 충전했는데요?"

기도를 통해 신성술을 발현한다.

본 이터로 거의 치료된 고막과 잔상처가 말끔히 나았다.

덤으로 축복도 충전하니 리카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떨어졌다.

"이제 어떻게 하실 거예요?"

"다시 움직여야지. 일단 이 일부터 마무리 지어야겠어."

"그럼 저는 대원들을 찾으러 가 볼게요."

의외의 대답이다.

로크람이라 의심하면서 동행할 줄 알았는데 말이지.

"대원들이 걱정돼서요. 지금의 저는 로크 씨를 도우려 해도 방해만 되는 것 같고요."

잘 아네.

그래서 일을 분담하자 이건가.

"바로 가시려는 거죠?"

"빠를수록 좋으니까."

그 말만을 남긴 채 리카를 지나쳤다.

그녀는 아직 할 말이 남았는지 내 뒤통수에 대고 말했다.

"…조심하세요. 그리고 죄송했어요."

"음?"

갑작스러운 사과다.

눈길을 주자 우물쭈물 말을 이었다.

"아니라고 했는데도 제가 계속 의심했잖아요. 이제 안 그러려고요. 로크 씨는 로크 씨예요. 그렇죠?"

내가 내놓을 대답이야 정해져 있었다.

"그래."

대답이 마음에 든 것일까.

용기 내서 한 사과인지 달아오른 얼굴을 가린다.

"이제 움직일까요?"

"출구는 찾았나?"

"네. 코앞이더라고요."

그렇다면 됐다.

드워프 영웅이라서 힘을 못 쓴 거지, 리카도 어디 가서 맞고 다닐 약자는 아니었기에.

그녀와 헤어지고서 이곳으로 나를 떨어뜨린 구멍으로 향했다.

***

"어?"

의문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톰은 한순간에 일변한 공간을 둘러봤다.

온통 검은색 일색이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윈도르와 대화하고 있었는데 어찌 된 걸까.

"아직도 기억의 요람 안인 건가?"

그의 말에 따르면 이곳은 기억의 요람이란 건물 내부라고 했다.

드워프들의 모든 기억을 보관하며, 동시에 관리하는 곳이라고.

그가 파악한 정보들은 확실히 톰에게도 도움 됐다.

건드릴 수 있는 것과 없는 걸 판별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분명 위험해 보이는 건 하나도 건드리지 않았는데, 뭐지?"

그런데 왜일까.

함께 걷다가 이곳이다.

조금은 어리둥절하지만, 톰은 금세 침착함을 되찾았다.

용병은 늘 변수에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상황 또한 다를 바 없었다.

'빛 한 점 안 들어오는 동굴이랑 똑같아.'

사위가 분간 안 되니 청각에 기대야 한다.

일부러 보폭을 크게 벌리며 발소리를 키웠다.

하지만 그런 시도가 무색하게 어둠은 금세 사라졌다.

그 자리를 대신한 건 톰에게 너무도 익숙한 장소였다.

화르륵!

검은 화염으로 타오르는 마을.

어찌 잊을 수 있으랴.

기절했을 때도 봤던 광경인데.

다만, 그때와는 다른 점이 명확했다.

"마, 말도 안 돼."

꿈이라는 자각이 있던 이전과는 달리 생생하기 그지없는 감각.

피부로 전해지는 열기가 뜨겁다 못해 따갑다.

"아아악!"

"뜨거워! 크으윽! 아악!"

사람들의 비명이 귓전을 때렸다.

마치 어리고 나약했던 그 날로 다시 돌아간 것 같아, 톰은 발작하듯 검을 뽑아 들었다.

"안 돼. 안 돼…!"

기계처럼 말을 반복하다가 땅을 박찼다.

부정한들 모든 것들이 불안감을 확신으로 굳혀 낸다.

악몽이 재현됐다.

그렇기에 모든 것이 생생한 지금, 다시 한번 그때를 마주하게 된다.

하지만 조금은 달랐다.

"...."

아버지는 검은 숯덩이가 되어 있었으니까.

그뿐만이 아니었다.

동생도, 어머니도 똑같았다.

마치 방금 타들어 죽은 듯 뜨거운 열기를 간직하고 있는 가족들의 시신.

그곳에서 톰은 마주하고 말았다.

원래라면 멀리서 그 모습만 망막에 새겼을 마족이 눈앞에 있었다.

"신기하네. 스트레스 풀 겸 확실하게 몰살했다고 생각했는데. 멀쩡한 녀석이 있었을 줄이야."

놈에게 있어서 마을은 스트레스 해소 거리에 불과했다.

톰에게는 인생의 모든 것이 깃든 곳이었는데 말이다.

까득!

분노로 이가 갈린다.

너무 세게 이를 악문 나머지 턱 근육이 불룩 튀어나와 파르르 떨렸다.

핏발 선 눈은 오로지 놈만을 눈에 담았다.

흑발에 창백한 피부.

피를 머금은 듯한 적안은 약간의 호기심과 지루함으로 가득했다.

"약하네. 그러면서 운은 좋아. 날 만난 것으로 그 운이 다했지만."

놈이 손을 뻗는다.

톰은 지금껏 쌓아 온 모든 것을 단번에 터뜨렸다.

등줄기에서 시작된 폭발적인 힘이 오러에 힘입어 허벅지, 종아리를 타고 발끝에서 터진다.

순간의 가속은 상체에도 담겼다.

"죽어어!"

벤다는 일념으로 뻗은 검.

그러나 닿지 않는다.

마족의 손날이 먼저 톰의 심장을 꿰뚫었다.

푸욱!

"커헉!"

"아둔하구나. 약하면 그 주제를 알고 도망쳤어야지. 아, 혹시 이것들이 네 혈육이라 화난 건가?"

마족이 아버지의 머리를 밟았다.

재로 화해 불티가 튄다.

죽기 직전, 톰은 놈의 행동에 입을 벌렸다.

진탕된 폐부를 아무리 쥐어짜 봐야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절규한다.

소리 없는 분노에 마족은 질렸다는 듯 손을 뽑았다.

"반응이 다 똑같네. 재미없어."

멀어지는 청각이 담아낸 한마디에 눈을 감을 수 없었다.

그래서 눈을 뜬 채로 죽음을 맞이했다.

"어?"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불타는 마을이 보였다.

***

"마법으로 갑자기 끌고 와선 인간 하나 붙잡고 악몽이나 보여 주는 꼴이라니. 지금껏 만난 골렘 중에 제일 변태적이야."

재미있냐?

텅 빈 돔형 공간에 윈도르의 물음이 메아리쳤다.

그런 공간의 중심.

기절한 톰에게 손을 올린 골렘이 말했다.

-재미라…. 착각하지 마라. 그저 효율을 위해 이자의 영혼을 택한 것일 뿐. 너는 그다음이다.

자신을 드워프 대마법사 메크툼이라 소개한 골렘이다.

놈은 윈도르를 가둔 봉인진을 가리켰다.

-인간들 사이에서 제법 강해 보인다만, 드워프의 마법은 하늘에 닿은 지 오래. 영웅이었던 그루반도 뚫지 못한 봉인진이다. 그곳에서 잠자코 기다려라. 이 아이의 몸을 차지한 다음은 너이니.

"그래?"

윈도르가 봉인진에 손바닥을 올렸다.

막대한 마력이 손바닥 안에서 휘몰아쳤다.

항거할 수 없는 거대한 마력의 폭풍.

일 점으로 집중된 그 힘은 봉인진에 미세한 틈을 벌렸으니.

"난 기다리기 싫은데."

콰창!

유리가 폭발하듯 순식간에 봉인진이 무너져 내렸다.

벌레 쫓듯 손을 휘휘 저은 그는 약지의 반지를 엄지로 쓸어 만졌다.

"일찍 돌아가기로 아내랑 약속했거든."

-…넌 뭐지?

지금의 상황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골렘의 푸른 안광이 점등한다.

윈도르는 놈의 물음에 답하듯 반지를 보여줬다.

"부럽냐? 고자 새끼야."

메크툼의 안광이 붉게 일변했다.

059.

대마법사 메크툼.

그는 이 도시의 드워프들에게 두 번째 기회를 제공해 준 주역 중 하나였다.

암울과 암전의 저주는 차가운 강철로 옮긴 드워프의 영혼을 더럽히지 못했다.

저주의 위험성에서 벗어난 드워프들은 순수하게 기뻤다.

후일을 도모하게 된 것에 제4 도시의 주민들은 광익과 그에게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차가운 강철과 뜨거운 열기를 옆에 두고서, 집착에 가깝게 마도의 길을 걸었던 그는 역사의 한 페이지에 자신의 이름을 당당히 새겼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종족 입장에선 또 다른 악의 태동이나 다름없었다.

"말문이 턱 막혔나 보네. 학살자 새끼."

-너희라고 다를 거 같나?

"음?"

-살아야 했다. 죽음 앞에 모든 생명은 평등할 뿐이야. 그러니 최선책을 선택했을 뿐이다.

"고자 된 이유를 길게도 말한다."

-이미 지상을 점유하고 있던 너희 인간들은 지상으로 발을 붙이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평등이 아닌 굴복을 종용했지.

"야."

윈도르가 그의 말을 끊었다.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후비는 그의 행동엔 귀찮음이 묻어 나왔다.

"내가 뭐 인류 대표냐? 하소연할 상대를 잘못 찾았어. 너는 그냥 내 영지를 어지럽힌 놈이고, 나는 그걸 바로잡을 사람이야. 이해했지?"

-그러는 넌 내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구나.

"존나게 억울했고, 이럴 수밖에 없었다는 거잖아. 그래서 이해해 달라고?"

-아니, 너희들의 선조를 탓하란 소리다.

"큭, 자신만만하네."

-지금 상황을 보고도 모르겠나?

녀석이 두 팔을 펼쳤다.

밋밋했던 내벽이 푸르게 물든다.

바닥에서부터 차오르며 구축되는 거대한 마법진.

그것들은 오로지 윈도르만을 요격하고자 노골적인 빛을 발했다.

-너의 동료가 내 수중 아래 있다. 이 공간에 깃든 마법은 어떠한가. 7서클의 속성 마법이 집약된 마법진이야. 인질을 구하면서 이 공간과 나에게 대적할 수 있다고 보나?

메크툼이 지팡이를 뻗었다.

첨단에 매달린 마력 핵이 흉흉한 마력을 발산한다.

주변에 흩어져 있던 마력이 그의 지팡이 앞에 정교하게 구축됐다.

그 형태는 분명 8서클.

대마법사란 말이 헛소리는 아니었나 보다.

윈도르는 손가락 관절을 풀며 사납게 웃었다.

"믿을지 안 믿을지는 자유지만, 그 녀석은 내 동료가 아니야."

-헛소리. 마력을 거둬들여라. 안 그러면 새 육신이고 뭐고 이자의 목숨을 거둬 갈 테니.

메크툼의 지팡이가 톰 쪽으로 향했다.

여전히 악몽을 헤매는 듯 식은땀을 흘리며 인상을 찌푸리는 그.

윈도르는 상관없다는 듯 손을 뻗었다.

"마력이 안 되면 이건 가능하냐?"

그의 몸에서 오러가 흘러나왔다.

그 터무니없는 광경에 메크툼은 경악했다.

-마력과 오러를 대체 어떻…!

말문이 강제로 막힌다.

어느새 근접한 윈도르가 손을 뻗어 머리를 틀어쥐었기 때문이다.

채찍처럼 움직인 오러는 지팡이의 각도를 교묘하게 틀었다.

그로 인해 발현한 마법은 애꿎은 바닥만 때릴 뿐이었다.

콰아앙!

뒤늦은 격발음이 귓전을 때린다.

메크툼의 수족이나 다름없는 공간이 포격을 시작한 것이다.

하나 그 무엇도 윈도르의 몸에 닿지 못했다.

한 줄기 바람 같다.

아슬아슬하게 맞을 것도 바람처럼 유연하게 휘어간다.

여전히 그의 손아귀에 붙잡힌 메크툼은 사고를 제대로 이어 가지 못했다.

이전 육체와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로 훌륭한 골렘이 새로운 몸인 상황이다.

관절마다 내장된 7서클 출력의 마력 핵.

머리에 자리한 8서클 마력 핵은 생전 자신의 몸에서 끄집어낸 서클로 빚어낸 것인 만큼 강력하다.

'어째서냐.'

그런데 이 상황이다.

대응할 수 없었다.

현상과 흐름을 마도학적으로 분석하고 파훼한다.

그런 마법사의 전투는 그에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쾅! 콰아앙!

여전히 바닥과 벽면을 때릴 뿐, 인질을 노려봐도 헛수고였다.

어딘가에서 불어온 강풍이 마법의 궤적을, 인질의 위치를 바꿔 버렸기 때문이다.

-필멸자에게 허락된 건 단 하나의 힘일 뿐일진대…!

마력과 오러.

종족을 막론하고 두 가지 힘은 섞일 수 없다.

그런데도 윈도르는 둘 다 다뤘다.

이게 의미하는 바는 머리가 바닥에 처박혔을 때 깨달을 수 있었다.

-너는 정령술사인 게로구나.

"알면 뭐가 달라져?"

이제야 그의 마력이 발하는 속성력이 이해됐다.

바람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힘.

거기에 저 오러는 어떠한가.

단단한 합금강으로 이루어진 머리가 으깨질 것 같다.

이미 금이 간 듯 쇳소리가 웅웅 울렸다.

-블링크!

점멸하듯 그 자리에서 몸을 빼낸 메크툼은 마력을 정돈했다.

호흡할 필요도, 고통을 신경 쓸 필요도 없다.

여러모로 인간을 웃도는 강철 껍데기임에도 도무지 보이질 않았다.

'이길 방법이 안 보여.'

지금 내 영혼을 좀먹는 이 감정은 절망일까, 마왕의 저주일까.

무조건 전자겠지.

그래도 포기할 수 없다.

반드시 놈을 제압해야 한다.

이 도시에 잠든 모든 동포의 목숨이 자신의 손에 쥐어진 셈이니.

그러니 힘으로 안 되면 협박할 수밖에.

-나와 신성진은 연결되어 있다.

콰훙!

주먹이 코앞에서 멈춰 섰다.

흉흉한 칼바람에 마력선이 흔들린다.

침착하게 바로잡고서 말을 이었다.

-내 기능이 정지하는 순간 신성진은 폭주하게 되겠지. 동포들의 영혼이 수십 킬로미터 내에 있는 지성체의 몸에 무분별하게 자리 잡게 될 거다.

놈이 드디어 주먹을 거둔다.

해냈다는 생각과 함께 승기를 굳히고자 살벌한 말을 늘어놨다.

당장 그에게서 보이는 약점은 하나.

약지에 낀 반지로 보아 반려가 있는 게 분명했다.

-이 위에 인간들이 세운 도시가 있단 건 깨어났을 때부터 파악한바, 상황을 받아들여라. 내 영혼이 소멸하는 순간 주변엔 전례 없는 혼란과 우리 종족의 부활이 만천하에 알려질 것이니.

기세를 몰아 메크툼은 반지를 가리켰다.

-보아하니 반려가 있는 것 같은데… 괜찮겠나?

종족의 명운이 달렸기에 갖은 수를 동원한다.

누군가 보고 비열하다고, 드워프의 명예를 더럽혔다고 욕해도 상관없다.

죽음 앞에서 모든 것이 부질없다는 걸 알았으니까.

"…하."

하지만 대마법사는 몰랐다.

바람의 영웅, 윈도르 단 아르칸이란 사내에 대해서 말이다.

"너는 명분이 있네."

-그게 무슨 소리지?

"오랜만에 전력을 다해도 될 것 같아서 하는 말이야."

윈도르가 약지에 손가락을 올렸다.

엄지와 검지로 약지에 낀 세 개 반지 중 두 개를 감쌌다.

"가장이 왜 가장인 줄 아냐?"

-...?

그것은 제약.

자신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한시도 떨어지기 싫어하던 정령 왕이 걱정된 마음에 만들어 낸 억제제였다.

"가장 강해야 할 상황에 기꺼이 가족을 위해 나설 줄 아니까 가장인 거야."

그게 지금이고.

뒷말과 함께 힘을 준다.

그것으로 정령과의 연결을 끊어 주던 억제제는 떨어져 나갔다.

폭풍은 예고도 없이 지하를 뒤덮었다.

콰아아!

-무슨…!

대마법사는 대응하려 했다.

하지만 몸이 좀처럼 따라 주지 않는다.

그 이유는 자의가 아닌 타의로 보게 되었다.

"그래, 윈도르. 날 소환하니까 얼마나 편해. 침소에서 기다리는 것도 고역이라구."

"카트린. 필요한 건 속성력일 뿐이야. 네가 나설 필요는 없어."

"당신은 날 너무 걱정해서 탈이라니까. 그래서 사랑하는 거지만."

-아.

어느새 머리는 몸체에서 뜯긴 상태였다.

대마법사에 닿은 정신력을 지닌 자신이다.

범인을 아득히 초월한 사고의 가속이 가능함에도 인지조차 못 했다.

그의 손을 따라서 세상이 이리저리 흔들린다.

천천히 허물어지는 자신의 몸체에 메크툼은 절망했다.

그러한 감정은 어느새 윈도르를 뒤에서 껴안고 있는 여인을 보자 극에 달했다.

모든 것이 나풀거리는 듯한 인상의 미인.

대마법사는 그녀의 정체를 단숨에 꿰뚫어 봤다.

-바, 바람의 정령 왕…!

경악성은 이어지지 않았다.

윈도르가 손아귀에 힘을 줬기 때문이다.

콰득!

주먹만 한 크기로 압축된 머리는 품고 있던 모든 걸 잃은 채 바닥으로 떨어졌다.

텅! 터텅!

순식간에 내려앉은 침묵에 금속성이 울려 퍼진다.

윈도르는 그 소리에 입꼬릴 말아 올렸다.

"하하, 조금만 참을 걸 그랬나?"

일단 홧김에 저지르고 봤다만, 이제 어쩐담.

격한 진동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놈의 말이 허언이 아니라는 듯 신성진이 폭주하기 시작한 듯하다.

그래서 윈도르는 손을 내밀었다.

"힘을 조금만 더 빌려줄 수 있을까?"

사랑해 마지않는 남편의 부탁이다.

카트린은 기꺼운 마음으로 고갤 끄덕였다.

"물론이죠, 여보."

모든 힘의 근원은 중심에 모일 터.

윈도르는 카트린과 손을 잡는 한편, 톰의 상태를 확인해 봤다.

"흠, 깨어나질 않네."

"지독한 정신 제압 마법이에요."

"역시 원인은 신성진이겠지?"

"높은 확률로 그럴 거예요. 이런 거대한 힘이 저희 침소 바로 밑에 있었을 줄이야. 꿈에도 몰랐어요."

"나도 그래. 어쩐지 광물이 잘 나오는 도시 같더라니, 이런 비밀이 있었을 줄이야. 아, 애 좀 봐주고 있을래?"

속성력의 전이가 끝났다.

그녀에게서 손을 뗀 윈도르가 톰을 부탁했다.

"마음에 들었나 봐요? 드물게 타인한테 호의도 베풀고."

"본의 아니게 과거를 봐 버렸거든. 나랑 비슷한 친구야. 저 나이에 가장이라니, 쉽지 않은 처지지."

"그런가요…. 당신 말을 들어 보니 측은하긴 하네요. 알았어요. 다녀오세요."

톰을 편안하게 눕힌 카트린이 손을 흔들었다.

그녀 주위로 산뜻한 미풍이 흐른다.

각성한 자의 공격이 아니라면 뚫기도 힘든 보호막이었다.

"고마워. 그럼."

윈도르가 목적지를 바꿨다.

모든 진법의 약점은 중심에 있을 터.

그러니 미리 봐 온 지도를 따라서 중앙 통제실로 가는 게 옳았다.

***

아슬아슬하게 도착할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쿠쿠쿵!

"뭐야."

구불구불한 통로를 되짚어 오르던 중, 갑작스러운 진동이 나를 덮쳤다.

떨어질 뻔했네.

뭐가 됐건 나한텐 안 좋은 일이 발생한 거 같은데.

"돌겠네."

아무렇게나 자란 머리를 헝클어뜨린 채 의지를 흘렸다.

아이언 하이드를 발현하자 더욱 많이 나를 감싸는 철 가루.

검은 원판에 오른 나는 위로 솟구쳤다.

'얼마 안 남았어.'

떨어지기 전에 이어 둔 희미한 선이 구멍의 끝을 알려 온다.

이변이 발생하고 몇 분.

고작이라 느껴질 수 있는 시간이지만, 내가 느끼기엔 달랐다.

'유리아는 분명 한계였어. 이 정도 변화도 못 버틸 게 뻔해.'

쾅!

이내 앞을 가로막는 벽을 부쉈다.

다시 도착하게 된 중앙 통제실은 내가 벌였던 짓의 여파로 엉망이었다.

봉인진은 사라졌어도 유리아는 그대로 있었다.

대단한 희생정신이다.

자칫 신성진의 폭주에 휘말릴 수 있음에도 요지부동이었다.

"으으윽…."

그냥 기절한 거였네.

역시 한계일 줄 알았어.

"이제 다 끝났으니 상관없나."

그녀에게 다가가 버릇처럼 쥐고 있는 촉매를 살폈다.

도시 규모의 신성진에 비하면 티끌만 한 크기다.

그 정체를 확인하니 내 미간에 골이 파였다.

'이것도 깃털인가.'

보나 마나 원흉은 광익일 거다.

백교는 인간의 몸을 빼앗으려는 드워프를 대체 왜 도운 걸까.

이 모든 게 백교에 속한 광익 개인의 짓인지, 교단의 판단인진 아직 모른다.

이제 이 사태가 끝나면 알아봐야지.

'알테온. 이 여자를 따로 빼낼 수 있겠나?'

'주군, 같은 흑마법사에게 동족애라도 느끼신 겁니까? 주군의 따스한 정에 저, 알테온. 감복했습니다.'

'헛소리 그만하고 빨리 움직여.'

인벤토리에서 튀어나온 알테온이 기절한 유리아를 들쳐 멨다.

인비저블 언다잉의 효과로 스켈레톤 몰골에서 차가운 미남자로 변한 그다.

다른 사람들 눈에 띈다고 의심받진 않을 것 같았다.

'그래도 최대한 은밀하게 움직여. 목격자는 없을수록 좋으니까.'

'저를 본 자는 단칼에 베어 버리겠습니다.'

'그랬다간 너도 소멸할 거란 걸 알아둬.'

고갤 숙여 보인 알테온이 움직였다.

뒷모습이 조금 꿍해 보이는 건 기분 탓이겠지.

'내 할 일이나 하자.'

파지직!

마력 반전을 사용한 뒤, 촉매를 신성력으로 감쌌다.

미세하게 잡히는 빈틈을 공략하니 신성진 파훼는 쉬웠다.

폭주한들 어쩌겠는가.

촉매를 잃은 이상 동력 끊긴 자동차나 다름없다.

쿠그긍! 쿠긍!

처음 보였던 기세는 서서히 그 힘을 잃었다.

나는 은은한 신성력을 발하는 깃털을 인벤토리 안에 넣고서 몸을 돌렸다.

그리고 마주했다.

하늘거리는 연초록색 머리가 특이한 미남.

윈도르가 내 앞에 있었다.

"어! 너! 걔 맞지? 영웅 회의에 나온 용사! 이야, 그 특이한 황금빛 신성력은 여전하네."

그는 한 번에 나를 알아봤다.

그러다 상황 파악을 마쳤는지 고갤 갸웃했다.

"근데 왜 여기 있냐?"

그의 눈에 의심이 서린 것을 본 순간.

나는 튀어나오려던 욕지기를 겨우 삼켰다.

이런 시발.

060.

델라트나 윈도르나.

영웅들을 대면하는 타이밍은 항상 이런 건가.

이 정도면 누군가 조작한다고 여겨도 될 정도다.

한탄이 계속해서 튀어나온다만, 별수 없다.

이미 벌어진 일.

오해를 푸는 게 급선무였다.

"설명해 드릴 수 있습니다."

윈도르가 잦아드는 진동에 맞춰 발을 굴렀다.

신성진의 폭주가 끝났음을 느낀 건지 그가 턱짓했다.

"말해 봐."

여기서 내가 숨겨야 할 건 무엇인가.

유리아의 존재와 강대한 신성력을 품은 깃털.

둘 다 그의 귀로 들어가는 순간 제국의 조사를 피할 수 없으리라.

그러니 진실을 밝히련다.

어차피 숨겨야 하는 걸 빼고 말해도 그를 이해시킬 수 있는 상황이니까.

"제가 브라트 님과 연계하여 검은 안개에 관한 사건을 해결한 건 알고 계시겠죠."

"음음, 듣긴 했지. 그런데 그렇게 오래 걸릴 일이었나? 몇 달 전에 해결했다고 들었는데."

댁한텐 며칠 만에 끝났을 사건이겠죠.

이래서 영웅들이란.

공감력이 하나같이 결여된 거 같단 말이지.

"그 뒤에 여정을 계속하다가 던그리드에 닿았습니다. 이곳에서 우연히 안면을 튼 용병 동생을 만나게 되었죠."

"그래서 걔를 돕다가 여기까지 온 거다? 그러다 상황이 거지같이 돌아가서 막고자 움직일 수밖에 없던 거고?"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상하단 말이지."

윈도르가 거릴 좁혔다.

반응할 새도 없었다.

그는 어느새 바로 앞에서 팔짱 낀 채였다.

"용병과 함께라면 목적은 보나 마나 도굴일 테고, 네 입장에선 이곳의 일 따위엔 개입할 이유는 없을 텐데?"

"용사로서 넘어갈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용사가 도굴을 거드나? 불법인 걸 잘 알고 있을 녀석이 왜 그랬을까?"

집요하네.

그래도 여유 있게 풀어낼 수 있겠어.

"돕고 있는 용병의 여동생이 아픕니다. 거래로 도움을 약속한 사이지만, 그 아이가 걷는 걸 보고 싶더군요."

"음…, 혹시 그 용병 이름이 톰?"

"예?"

네가 걔를 어떻게 알아.

설마 여기서 만났나?

"햐, 세상 좁다더니 그 말이 맞았네. 맞지? 톰을 돕는 로크라는 용병! 너 맞잖아."

"그렇긴 한데…."

"폭주도 무사히 막은 것 같고, 그럼 따라와. 톰이 있는 곳을 알고 있으니까."

역시 이곳에서 톰을 마주한 듯했다.

보아하니 내가 중앙 통제실의 방어 장치를 건드렸을 때 만난 거 같은데, 다행이었다.

시체로 마주했으면 잠자리가 뒤숭숭했을 거 같았으니까.

그런데 어째서일까.

"여보. 이 아이, 자신의 트라우마에 꽉 묶여 있어요."

모든 상황이 끝났음에도 톰은 아직도 홀로 싸우고 있었다.

윈도르의 아내로 보이는 여인은 걱정된다는 듯 톰을 응시했다.

"제 마력으로도 간섭할 수 없었어요. 이러다가 이 아이, 정신이 무너질 거예요."

"그것만은 막아야지."

어째서인지 윈도르는 톰의 가정사를 잘 아는 듯했다.

톰이 죽으면 리코는 홀로 남는다.

이 세상에 기댈 곳 하나 없이 왼발을 절어 가며 평생을 살아야 한단 뜻이다.

윈도르는 침음을 삼키며 나섰다.

여자의 말을 따라서 톰의 문제에 개입하려 했지만,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안 돼. 톰의 자아가 너무 견고해."

"원인이 뭐죠?"

그들에게 다가갔다.

흘린 식은땀으로 탈수가 오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창백해진 피부 하며, 몸은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다.

당장 숨이 멎어도 이상하지 않을 광경이었다.

"드워프 대마법사 나부랭이가 정신을 약화하는 마법을 걸었어. 약화된 틈을 타 톰의 육체를 차지할 생각이었겠지. 그런데 이거 봐. 시전자가 죽어도 유지되는 마법이라니. 이 정도면 저주 아니야?"

"종족의 생존을 위해 정신 마법을 더욱 질기고 강력한 쪽으로 개량시킨 거겠죠."

"카트린, 정말 방법이 없는 거야?"

윈도르의 간절한 낮을 본 카트린이 나직이 한숨을 내뱉었다.

"길을 열 수 있어도 진입할 수 없으니 힘들어요. 저희보다 의지가 강한 자가 있어야 하는데… 그 정도면 진리의 탑 탑주가 와야겠죠."

톰을 돕지 못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정신력이 부족해서.

단지 그뿐이었다.

'나한텐 해당 사항 없는 문제지.'

결심이 섰다.

그들 앞에서 재능을 드러내는 게 조금 꺼려지지만, 톰은 내가 이 세상에 빙의해서 처음 사귄 인연이나 다름없었다.

솔직히 직접 대활 나누고 함께 여러 일을 겪었다 보니 아덴 파티보다 정감 간다.

그들은 모니터 너머로, 이 사내의 치열한 삶은 직접 보아 왔기 때문이겠지.

"제가 해 보겠습니다."

내 발언에 놀랐는지 카트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오기로 될 만한 문제가 아니에요. 정신 방벽을 이 아이의 영혼이 피해 입지 않는 선에서 빠르게 돌파해야 하거든요."

그녀는 나를 막아섰다.

하긴, 영웅도 해내지 못한 일이다.

그걸 용병의 동료인 내가 할 수 있을 리 없다고 여긴 거겠지.

다행히 윈도르는 카트린과 다른 생각이었다.

"카트린. 한번 믿어 보자고."

"여보. 함부로 접근할 문제가 아니에요. 적어도 약화된 지점을 찾아서 우리가 진입하는 게…."

"그때까지 얘가 버틸 수는 있고?"

카트린은 침묵했다.

솔직히 1시간을 버티는 게 기적인 상태였기 때문이다.

"쟤가 걔야. 전에 내가 말했지? 영웅 회의에 델라트처럼 생겨선 더럽게 과묵하던 애가 왔다고."

델라트처럼 생겼단 건 왠지 욕 같은데.

따질 수는 없으니 조용히 있자.

"아! 암신교의 대주교를 처단했다는 그…."

"로크람이라고 합니다."

"남편에게 얘기 많이 들었어요. 브라트 씨의 인정까지 받으셨다고."

"솔직히 받긴 싫었는데 그렇게 됐네요. 아무튼, 결정을 내려 주세요. 길을 열어 준다면 제가 시도해 보겠습니다."

"알겠어요. 남편도 믿어 보라고 하니, 바로 시작해 봐요."

카트린이 톰의 관자놀이에 손을 올렸다.

좋아하면 닮는 걸까.

둘 다 하늘거리는 머리는 똑같다.

심지어 마력까지 비슷하니 이쯤 되면 이상하다.

'설마.'

정령 술사인 윈도르.

그런 그와 비슷한 마력에 비슷한 외견까지.

아무래도 내가 추측하는 게 맞는 듯했다.

'국경 없는 세상에서 왔다만, 여긴 차원 경계가 없는 세상이네.'

정령과 결혼한 영웅이라니.

놀랍다만 거기에 매몰될 때가 아니었다.

"톰의 손을 잡으세요, 로크람 씨."

카트린의 신호에 톰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순식간에 영혼이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다고 해서 내 중심을 잃은 건 아니다.

내 정신력은 거대한 태풍을 마주한 암초처럼 굳건했다.

'흠.'

담담히 상황을 주시한다.

일단 이곳이 톰의 정신세계란 건 알겠다.

온통 어둡다.

묘한 격류가 느껴지는데, 이게 바로 정신 방벽이리라.

'이걸 빠르게 돌파해야 한다 이거지.'

조금만 늦어도 톰의 영혼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가 생긴다.

이는 회복 불가능한 상태가 되어 실제 신체에도 그 영향이 나타날 터.

위험해 보이지만, 나는 솔직히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이걸 왜 돌파 못 해?'

천재가 자신의 장기를 모방하지 못하는 범인을 이해하지 못하듯, 나는 숨 쉬듯 당연히 할 수 있는 걸 못 하는 영웅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야, 걸어가는 것으로 돌파해 냈기 때문이다.

"흠."

도착한 곳은 불타는 마을이었다.

온갖 처절한 비명이 난무한다.

톰이 어떤 트라우마를 가졌는지 알 법한 대목이었다.

'검은 화염. 흑염을 다루는 마족 소행인가.'

신성력이 아니면 절대 꺼지지도 않는다.

그만큼 질기고 집요한 흑염은 지금 마을과 생명을 불태우고 있었다.

'내 영혼에는 영향 없어.'

오로지 톰의 정신만을 약화하고자 만들어진 공간이란 뜻이었다.

그러니 내가 개입할 수 있는 것에도 한계가 있었다.

'물리적 개입은 불가능한 거 같고. 정신적 개입이 전부인가.'

열기가 느껴지지 않는 게 그 증거였다.

둘째로 타오르는 모든 이가 내게 도움을 구하지 않고 있다.

그들은 하염없이 한쪽을 보고 있다.

그쪽으로 가 보니 이곳에 온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잘 피하는구나. 마치 미래를 안다는 듯이 움직여. 흥미롭긴 하다만, 기대에 못 미쳐서 재미가 없구나."

마을을 불태운 마족이 지루하다는 듯 하품한다.

보아하니 고작 해 봐야 중급 마족.

지금도 내겐 쉬운 상대다.

하지만 톰에겐 아니었다.

쟁염도 얻지 못한 전사에겐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재미. 넌 고작 스트레스 해소 용도겠지."

"음?"

"난 아니야! 여기가 내 전부였다고! 그런데 네가 뭔데! 뭔데 그깟 재미 좀 보겠다고 다 가져가는데!"

얼마나 죽었을까.

그리고 얼마나 더 반복했을까.

마모될 대로 마모됐음에도 전사는 굽히지 않는다.

오히려 몇 번을 터뜨려도 부족한 울분을 내지른다.

"절대 악. 걸어 다니는 공포. 생을 갈취하는 사신. 모든 것을 하찮게 굽어보는 자."

마족이 피막으로 이루어진 날개를 펼쳤다.

"마족이다."

놈이 흑염을 터뜨렸다.

거기에 저항하기엔 톰은 한계였다.

예상대로 그는 단말마조차 내지르지 못한 채 재로 화했다.

그리고 시간은 역행한다.

톰의 영혼이 죽어 가는 이유였다.

'이 짓을 몇 번이나 반복한 거지?'

다시 눈을 뜬 톰을 보며 생각했다.

그는 잠시 누워 있었다.

생각을 정리하는 듯 무어라 중얼거리고 있었다.

눈 한 번 깜빡이지 않는 모습에 광기가 엿보인다.

오로지 놈을 베겠단 일념은 죽음이란 공포를 몰아냈다.

자신이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음에도 인지하지 못했다.

저러는 이유를 나는 안다.

알 수밖에 없었다.

'복수를 위한 일념.'

어이가 없었다.

쟁염이 각성하는 경우는 설정집이나 인물 소개로 봤다만, 이런 환경에서 각성을 목전에 뒀다는 건 듣도 보도 못했다.

'애초에 개입할 필요도 없었어.'

상황을 모르기에 걱정돼서 와 봤건만.

톰은 지금도 성장하고 있었다.

본인이 인지하지 못했을 뿐, 그는 이전 회차가 준 피드백을 정리하고서 일어섰다.

체력 소모를 최소화한 듯 축 늘어진 걸음걸이로 느릿하게 나아갔다.

'등만 조금 떠밀어 주면 되겠는데.'

대마법사 드워프는 알고 있을까.

자신이 육체를 차지하려던 행위가 그의 성장을 촉진한걸.

"이 마을의 마지막 생존자인가? 다 태워 버릴 생각이었는데, 운도 좋구나."

이젠 질렸다는 듯 마족의 환영 인사에 대꾸조차 안 한다.

대신 톰은 놈에게 달려들었다.

비록 트라우마가 구체화한 존재에 불과하지만, 진심으로 검을 휘둘렀다.

슬슬 나설 타이밍이네.

"계속해라."

"...!"

내 목소리를 들은 톰의 오러가 흔들렸다.

하지만 금세 안정되어 마족을 압박했다.

익숙하다는 듯, 눈 감고도 피할 수 있다는 듯 움직인다.

그만큼 몸에 익은 공방이었다.

"계속해."

톰은 내 말을 따랐다.

마족의 모든 공격을 피하고 반격했다.

힘이 약할 뿐, 그의 검엔 의지가 있었다.

줄기차게 오러가 감응한다.

꽃봉오리가 기어코 개화하려 했다.

그의 각성에 필요한 퍼즐 하나.

나는 이제 그것을 던져 볼 생각이었다.

'분명 쟁염 각성에 필요한 건 계기와 확신이랬지.'

한계에 자신을 부딪칠 수 있는 계기.

그것을 넘어설 수 있다는 확신.

톰은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이 부족했다.

그것은 그의 성격상 혼자일 때 절대로 채울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가장 의지하고 싶고, 힘이 된다던 내가 개입한 지금.

"멈추지 마. 의심도 하지 마라. 네게 남은 것들만 생각해. 책임져야만 하는 것만 책임져."

나는 확신을 심어 줬다.

마지막 퍼즐을 맞춰 줬다.

그의 오러가 첨예하게 벼려져 신체 첨단까지 뻗어나갔다.

곁가지에서 잔가지가 뻗치듯, 톰의 육신을 가득 채웠다가 사라진 오러는 다시금 검에 서렸다.

"확신이 들었나."

"…네."

"그럼 모든 걸 쏟아부어."

톰도, 그의 오러도 확신한다.

그렇기에 자신만의 불꽃을 찬란하게 피워 올렸다.

'자신에게 자아를 확립시켜 준 마을, 가장으로서 책임을 다하기 위한 용병 경험, 마족이란 복수 대상을 베기 위한 마음. 모든 것이 맞물렸다.'

그것으로 형태가 구축되었다.

"그 검은… 뭐지?"

마족이 처음으로 적개심을 드러낸다.

평범한 오러가 아닌, 작열하듯 백염을 토하는 오러의 불길 앞에 뒷걸음질 쳤다.

"마족을 베는 검…."

자신만의 쟁염을 입에 담은 톰이 사라졌다.

서어억!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그는 자신의 트라우마를 베어 냈다.

그를 가두던 정신세계는 반으로 갈라진 마족을 따라서 무너져 내렸다.

나는 그 흐름에 그대로 탑승했다.

머지않아 정신이 내 육체에 안착한 기분이 들었다.

"오, 무사히 끝났나 본데?"

"다행이에요. 톰, 정신이 들어요?"

부부의 목소리가 현실임을 알린다.

나는 여전히 톰의 손을 잡은 채였다.

전이라면 축 늘어졌을 손이 제법 억세다.

눈길을 주자 톰이 반개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헤… 악몽을 꿨는데, 지독한 꿈이었는데… 로크 님이 나오지 뭐예요. 덕분에 일찍 깰 수 있었어요. 감사합니다…."

손 하나 까딱하지도 못할 거면서 겨우 고갯짓하기는.

나는 톰의 눈두덩이에 손을 올렸다.

좀 더 쉬게 하고자 한마디 툭 던졌다.

"이번엔 꿈꾸지 말고 자라."

"네…."

"앞으로 형이라 하고."

"네…, 로크 형."

호흡이 고르다.

기절하듯 잠이 든 톰은 악몽 따윈 꾸지 않을 거다.

그러니 톰이 깨어나기 전에 탐사 대원들을 모아 나갈 준비를 해야겠다.

그런데 아까부터 왜 그렇게 보세요?

"형이라 하라니… 멋있는데?"

"이게 사나이들의 우정이란 건가요?"

똑같이 입을 모은 두 부부의 감탄 아닌 감탄이다.

나는 멋쩍게 관자놀이를 긁으며 일어섰다.

안 하던 짓을 해서 그런가.

일단 이 자리를 뜨고 싶었다.

061.

드워프 도시 사건.

평범한 유적지라 여겼던 곳이 실은 드워프들이 인간들의 몸을 빼앗고자 기회를 노리는 지하 도시였고, 그곳의 신성진은 도굴꾼들에 의해 가동됐다.

조금만 늦었어도 도시 위에 있던 던그리드가 휘말릴 뻔했다.

우물가에서 물을 긷는 아낙이, 모래사장을 놀이터 삼아 뛰노는 아이들이, 일터에서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하던 가장의 몸이 드워프의 차지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신성진의 폭주는 멈췄다.

"바로 네 덕분에 말이지."

쿵.

제법 두꺼운 보고서가 책상을 때렸다.

윈도르는 다릴 꼰 채 맞은편에 앉은 나를 응시했다.

"정말 아는 게 그것뿐이야? 이미 도착했을 때 일은 벌어졌고, 도굴꾼들은 말 그대로 평범한 도굴꾼이었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상황이 참 운 좋게 맞물린 셈이잖아."

내가 할 말이다.

아티팩트 확보를 위해 들어간 순간에 그런 일이 벌어진 거였으니까.

뭐, 유리아가 신성진의 활성화를 억제하고 있긴 했다.

그 얘길 했다면 윈도르의 의문도 어느 정도 해소되겠지.

하지만 말할 생각 없다.

유리아의 존재는 이번 사건에서 절대로 드러나선 안 된다.

'꼬리가 길어지는 건 최대한 막아야 해.'

꼬리가 길어지면 결국 밟히는 법.

애초에 비밀이라 치부할 수도 없을 정도로 은폐하는 게 옳았다.

"저도 그래서 의문이 한둘이 아니긴 합니다만… 조사 결과는 어떻게 나왔죠?"

"방금 말했다시피 뭐, 진짜로 이것뿐이라서. 네 시점으로 그곳에서 겪은 일들을 들어 보고 싶었지."

"그럼 이대로 사건은 종결 나겠군요."

신성진을 깨운 주동자들인 도굴꾼은 죽었다.

누굴 탓할 수도 없게 된 지금.

큰 위기를 넘긴 던그리드는 현재 큰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정말로 30%면 충분하겠냐? 못해도 35%까진 양보할 수 있는데."

윈도르의 물음에 고갤 저었다.

그가 말하는 퍼센티지란 지하 도시의 소유권을 말하는 거였으니까.

"그곳을 발견한 건 톰입니다. 사건을 막았어도, 저를 그곳으로 데려온 톰에게 보상 일부를 주는 게 옳겠죠."

"으음, 그럴 필요 없을 텐데…."

"무슨 의미죠?"

"아니다. 오늘 연회 있는 거 알지? 그때 보자고."

윈도르가 손을 흔들자 출입구가 저절로 열렸다.

명백한 축객령에 고갤 숙였다.

역시 기분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영웅다웠다.

"그럼 밤에 뵙겠습니다."

"톰한테 가는 거지?"

"안부라도 전해 드립니까?"

"됐어, 남사스럽기도 하고. 가 봐."

손을 흔드는 그의 약지가 눈에 들어왔다.

반지 세 개.

역시 그는 바람의 영웅이 맞았다.

'유리아는 어떻게 됐나.'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고 있습니다. 멍청한 계집. 주군의 관심이 얼마나 영광된 것인 줄도 모르고. 깨울까요?'

윈도르의 집무실을 나서며 알테온에게 의지를 보냈다.

녀석은 여전히 극단적인 선택지만 제시했다.

저번에도 안 깨어난다고 채찍을 사 오려 했다.

차가운 소금물을 뿌린 뒤에 몇 대 때리면 직방이라나 뭐라나.

'내가 평화적인 방법만 생각하라고 몇 번이나 말했지?'

'죄송합니다. 어둠의 군주 밑에서 배운 것이 이런 거뿐인지라….'

'일단 계속 감시하고 있어.'

'알겠습니다, 주군.'

유리아는 은신처에 잘 숨겨 두었으니 흑아의 일족과 접촉하기 전에 만나면 되겠지.

나는 톰이 머무는 방으로 향했다.

사건이 끝난 지 일주일이 흘렀으나, 톰은 깨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리카 말에 따르면 오늘 안에 일어날 거라곤 했다.

정신도 안정되었고, 신체도 모든 회복을 마쳤으니까.

'머릿속에 있는 여러 문제를 정리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어.'

정리한 것들을 차분히 떠올렸다.

'일단 지하 도시의 소유권.'

던그리드도 제국에 속한 도시다.

당연히 제국법을 따르는지라 유적지나 풍부한 자원 매장지에 관한 소유권은 최초 발견자에게 돌아가는 식이었다.

만약 그러한 지역에 영지가 속해 있으면 조금 복잡해지는데, 이를 깔끔하게 정리한 게 윈도르였다.

'어우 머리 아파! 뭔 고려해야 할 게 이렇게 많아? 그냥 딱딱 잘라서 나눠 갖자고!'

그의 곁에 붙은 보좌관들의 충정 어린 조언은 그 한마디로 묵살됐다.

그 뒤에 결과는 보는 그대로.

내가 지하 도시의 모든 자원 중 30%를 가지게 된 것이다.

'이걸로 돈에 허덕일 일은 진짜 없네.'

아마 개인 자산만 따져도 이 대륙에서 손에 꼽지 않을까.

그만큼 지하 도시가 가진 잠재성은 엄청났다.

크고 작은 마력 핵으로 구동하는 아이언 골렘.

고도의 건축 양식과 광물 제련법이 담긴 도서관 등.

각종 희귀 광석도 있었으니 중형급 영지를 세워도 차고 넘칠 돈이 내 수중에 들어온 셈이었다.

'당장은 돈을 크게 굴릴 일은 없으니까. 일단 묵혀 놔야겠지.'

그래도 좋은 게 좋은 거라고.

풍부한 자본은 훗날 큰 무기가 되어 줄 것이었다.

'아티팩트도 어느 정도 확보했고.'

톰은 제 역할을 훌륭하게 해냈다.

영혼 공방에서 노획한 아티팩트의 숫자는 무려 다섯 개.

이로써 내 부족함을 메워 줄 아티팩트 걱정은 덜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광익.'

이 또한 생각해 둔 게 있다.

교황청에 머물고 있을 브라트에게 사정 설명을 위한 편지를 보냈으니 적당히 장단 맞춰 줄 것이다.

끼이익.

"아! 윈도르 님을 만나 뵙고 오신 거죠?"

거대한 복도를 지나 도착한 방.

문을 여니 리카가 나를 맞이했다.

창문으로 들어온 햇볕에 반사된 은색 머리카락이 반짝인다.

그녀의 크고 동그란 두 눈은 나만 담고 있었다.

지하 도시를 빠져나온 이후.

나를 보는 시선이 줄곧 저랬다.

선망과 동경을 넘어선 무언가가 담겼다고 해야 하나.

뭐가 됐건 부담스럽다.

대충 손을 내젓고서 의자를 끌고 앉았다.

"상태는?"

"똑같아요. 상당히 안정돼서 이제 간병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너는 괜찮나?"

내 물음에 그녀는 엷게 웃었다.

무언의 긍정이다만, 눈꼬리가 흔들리는 게 감정을 다 추스르진 못한 듯했다.

"각오하던 일인걸요. 누군가가 필요로 하는 일에 큰일도, 작은 일도 생기니까요. 이번엔 아주 큰 일이 생긴 거고요."

"시신은 어찌했지?"

"화장은 마쳤고, 고향으로 호송 준비까지 마쳤어요. 오늘 연회만 끝나면 내일 가려고요."

탐사대는 뿔뿔이 흩어진 시점에서 큰 피해가 예견된 일이었다.

홀로 떨어졌다가 아이언 골렘을 만난 대원들.

그들은 정신이 제압당해 드워프에게 육체를 내주게 되었고, 어제까지 웃고 떠들던 동료의 몸을 점거한 드워프를 죽여야 했다.

'듣기만 해도 씁쓸하네.'

직접 보고 대처한 리카의 마음은 어떨까.

묻진 않아도 상심이 커 보였다.

그래도 제안을 무를 생각은 없다.

"리카."

"네?"

나직이 부르자 화들짝 놀란다.

그녀는 내 앞에 찻잔을 두고 앉았다.

"따로 부탁하실 일이라도 있나요?"

"할 말이 있는데, 자릴 옮겨도 되겠나?"

"단둘이요?"

응, 여기서 할 말은 아니거든.

혹시나 톰이 깨어나서 듣기라도 해 봐.

비밀은 듣는 이가 적을수록 좋은 법이다.

"어… 가능은 한데, 너무 갑작스러워서 좀 당황스럽네요. 별말 안 하는 거죠?"

별말이라.

해석하기 나름이긴 한데, 별말 하는 거긴 하지.

나는 고갤 젓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헛숨을 삼킨 리카는 새하얀 제 얼굴을 손부채질하며 입을 열었다.

"자, 잠깐만요. 톰의 간병 말고도 제가 해야 할 일이… 어디 보자…."

리카는 품 안에서 수첩을 꺼냈다.

일정표라도 적어 놓은 건지 연신 뒷장을 넘겨 본다.

이내 수첩을 소리 나게 닫더니 나를 응시한다.

그 얼굴엔 뭔지 모를 결의가 서려 있었다.

"제가 필요한 일인가요?"

"그래."

"무조건요?"

"네가 아니면 안 된다."

"히끅!"

달달 떠는 손으로 찻잔을 들더니 목을 축인다.

이내 리카는 결심한 듯했다.

몇 번이고 숨을 고르고선 입을 열었다.

"알겠어요. 그럼 연회장 뒷문 테라스에서 기다릴게요."

내 제안을 무겁게 받아들인 듯, 그녀는 느릿하게 고갤 끄덕였다.

역시 얼추 짐작하고 있는 건가.

나를 백교의 이단 심문관이라 생각하는 그녀다.

독대하자는 말에서 지하 도시와 관련된 일로 긴히 할 말이 있다고 여긴 거겠지.

내가 건넬 제안이 백교와 신성 왕국이 엮일 수도 있는 중대 사안이 될 수도 있다고 여긴 모양이다.

저렇게 잔뜩 긴장한 걸 보니 내 짐작이 맞으리라.

얼마나 굳은 마음을 먹었길래 얼굴이 빨개지고 호흡이 거칠어졌을까.

'안 되면 내가 직접 브라트를 독대해야지.'

굳이 강요할 생각은 없다.

다만 그녀에게 광익과 관련된 깃털을 맡기려는 건 어디까지나 효율 때문이었기에.

'은빛 성가대라면 백교의 교황청으로 물품을 무사히 전달해 줄 수 있을 거야. 그동안 나는 다음 목적지인 진리의 탑으로 가면 되겠지.'

이 시대에 사제만큼이나 믿을 수 있는 직업군이 있을까.

그것도 페르시와 절친한 사이인 리카다.

그녀와 지금까지 친분을 이어 온 리카는 믿을 만한 성직자였다.

"으으…."

"어? 톰 님? 정신이 드세요?"

묘한 침묵이 감도는 방 분위기를 깬 건 톰이었다.

무엇이 불편한지 잠자리를 뒤척인다.

그런 그를 걱정스럽게 보던 리카는 내 제지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왜…."

영문을 모르기에 답을 알려 줬다.

"잠자리가 너무 편해서 저러는 거다."

"아…."

애가 노숙에 최적화된 수면 습관을 가지고 있더라고.

길드 건물에서도 바닥에서 자길래 어찌나 어이없던지.

얼마 안 있어 톰이 깨어났다.

우리들이 무사함에 안도하고, 탐사 대원들의 사망 소식에 진심으로 슬퍼하는 그.

마지막으로 도착한 사고의 흐름에 톰이 벌떡 일어났다.

"여동생은! 리코는 괜찮나요?"

"너처럼 윈도르 님의 성에서 쉬고 있으니 네 몸이나 신경 써라. 연회에서 만날 수 있을 테니까."

"하아, 다행이다…. 다행이에요…. 그런데 오빠로서 동생을 볼 명목이 없네요."

기뻐하던 톰이 돌연 어깨를 늘어뜨렸다.

이제 슬퍼할 일 따윈 없는데 왜 이럴까.

지하 도시 탐사로 큰 부를 얻은 그다.

그뿐인가? 기연 아닌 기연을 만나서 쟁염까지 각성했으니 S급 용병 자리는 떼 놓은 당상이다.

이제 진정한 의미로 로드란 길드 서쪽 지부장이 될 차례만 남았단 말이다.

"아티팩트… 구하지 못했거든요."

"으음."

나는 말끝을 흐렸다.

톰과 유적지 탐사를 위해 제안서를 작성했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의 톰은 내게 한 가지 조정안을 제시했다.

'여동생이 걸을 수 있도록 보조해 주는 아티팩트가 있다면 제가 소유하고 싶습니다.'

그 한마디에는 한 치의 물러섬도 찾아볼 수 없었다.

제아무리 큰 도움을 주는 나라도 확고하게 눈을 빛냈다.

그때의 단호함에 나는 흔쾌히 조정안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톰은 리코를 위한 아티팩트를 구하지 못했다.

그 때문에 톰은 동생에게 미안함을 안고 있었다.

"침울해 있지 마라. 여동생이 그거 하나 못 구해 왔다고 구박이라도 할 거 같나?"

"맞아요. 그냥 오빠라는 존재가 무사히 돌아와 준 것만으로도 크게 기뻐할걸요?"

"그럴까요?"

나와 리카의 끄덕임에 톰은 묵은 숨을 뱉었다.

"…알겠어요. 그럼 연회 때 동생을 볼 수 있는 거죠?"

"일단 깨어나자마자 힘들겠지만, 채비부터 갖춰라. 연회에 그 꼴로 갈 수는 없지 않나?"

"네? 으음, 그건 그렇네요. 그런데 옷이 없어서 어쩌죠?"

"이곳에 거주하는 하녀들이 다 준비해 뒀나 봐요. 옷장에 보시면 멋들어진 턱시도가 있을 거예요."

리카의 시선이 내 쪽으로 향했다.

그쪽은 연회 때 입을 옷을 준비했냐는 무언의 눈빛.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사제는 연회 때도 사제복을 입나?"

"신성 왕국은 백교완 달리 신성법이 여유롭답니다? 그래서 저를 꾸밀 여벌 옷을 항시 가지고 다니죠."

자신이 소유한 고급 브랜드의 드레스를 자랑한다.

어차피 알아들을 수도 없는 단어들의 향연이었기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연회장에서 보자."

"어어, 옷 안 보여주고 가실 거예요? 저는 이미 다 말해 줬는데.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게 있어야죠. 거기 있잖아요. 허공에 감춰 둔 아공간."

인벤토리를 말하는 건가.

있기야 있다.

일전에 마도 왕국에서 왕을 알현했을 때 테런 공작이 보내 준 턱시도였다.

"자, 됐나?"

그래서 나는 거리낌 없이 꺼내 보여줬다.

내 몸에 맞게 만들어진 검은색 옷은 여전히 은은한 멋을 품고 있었다.

"히끅!"

리카는 그것을 보고 또다시 딸꾹질했다.

나와 턱시도를 번갈아 보며 손부채질도 재개한다.

아무래도 턱시도를 보고 연회장에서 나와 나눌 중대한 얘기를 상상한 듯했다.

062.

고즈넉한 마을에서 나고 자란 톰에게 도시는 별세계였다.

거기서 한술 더 떠서 드워프의 지하 도시?

놀라긴 했다. 다만 여유를 느낄 수 없던 곳인지라 던그리드에 처음 발을 들였을 때보다 감동이 덜했다.

하지만 지금, 영주 성을 돌아다닐 때의 감상은 지금껏 느꼈던 모든 것을 찍어 눌렀다.

마냥 놀랍다.

붉은 융단이 길게 깔린 복도는 신발을 신었음에도 그 푹신함과 부드러움이 전달된다.

아치형으로 높게 지어진 천장은 보기만 해도 가슴이 뻥 뚫린다.

좌우를 장식한 장식품은 또 어떠한가.

배움이 얕아 어떤 조각상인지 모르겠지만, 벽을 수놓은 규칙적인 배열의 타일과 절묘한 아름다움을 자아내고 있었다.

"와…."

"입 닦아라. 너는 지금 던그리드를 구한 주역으로 가는 길이니."

"아, 죄송합니다. 로크… 형."

"크흠."

아직 입에 붙지 않은 호칭을 담아 본다.

듣는 입장에서도 어색한지 로크가 헛기침했다.

멋쩍게 볼을 긁은 톰이 도착한 연회장 정문에서 마른침을 삼켰다.

"정말로 제가 여기 있을 자격이 있을까요?"

"나란 존재를 탐사대에 영입한 용병 길드장이 누구지?"

로크의 말에 뭐라 할 말이 없어졌다.

톰은 던그리드의 사병들이 열어 주는 정문을 어색하게 지나갔다.

그렇게 도착한 연회장에서 톰은 또다시 충격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와아…."

희미하게 들리기 시작하는 3중주의 아름다운 선율.

언제나 시끌벅적한 선술집관 달리 잔잔하게 웃고 떠들며 술잔을 기울이는 신사 숙녀들.

둔탁한 나무잔이 아닌 유리잔에서는 건배를 나눌 때마다 청명한 소리가 울려 퍼진다.

모든 것이 신기했다.

그렇기에 어색하다.

여기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감이 안 잡혔다.

"어깨 펴고 엷게 웃어라. 누군가 다가온다면 너 자신을 소개해. 그거면 될 거야."

마음이라도 읽었는지 로크가 조언했다.

한 마디 한 마디가 또렷하게 뇌리에 새겨진다.

톰은 고갤 끄덕였다.

그의 말을 따라서 손해를 본 적은 지금껏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네!"

"목소리도 줄이고. 여긴 네가 아는 선술집이 아니야."

"앗. 죄송해요."

늘 목청껏 대활 나눠야 했던 곳관 다르다.

구름 위를 노니는 듯한 분위기에 톰은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당장 해야 할 일은 하나.

'리코는 어디 있는 거지?'

연회장에서 볼 수 있을 거라고 했다.

그런데 눈에 띄는 건 처음 보는 고상한 사람들과 먹음직스러운 음식뿐이었다.

"아! 혹시 성함이 톰… 맞나요?"

"그, 그런데요?"

리코 탐색을 막는 건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신사가 말을 건다.

그의 첫 마디로 호기심 어린 얼굴들이 하나둘 톰의 곁에 모여들었다.

"영주님을 통해 소문은 들었습니다! 던그리드를 지하 도시의 드워프들로부터 지켜 주신 로드란의 서쪽 지부장! 언제 오시나 기다렸는데, 드디어 오셨군요!"

대뜸 손을 잡는 것에 반응하지 못했다.

그들은 순수하게 기뻐했다.

자신을 향해 고마움을 표했다.

'뭐지, 이 기분.'

나쁘지 않은 기분이다.

오히려 뿌듯함이 몽글몽글 솟구친다.

어느새 톰은 그들의 감사 인사를 겸손한 태도로 상대하고 있었다.

"아! 저는 던그리드의 튈튼 광산에서 나오는 구리를 제국으로 납품하고 있는 상단주, 델토메른이라고 합니다."

"도시의 수원지를 총괄하는 총괄장, 베올슨이올시다."

"저도…."

감사 인사 뒤에 시작된 건 톰이라는 유능한 길드장과 다리를 놓기 위한 자기 어필이었다.

그들의 달라진 기세를 톰은 이해했다.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이다.

용병계라고 해서 영업을 안 뛰는 건 아니었기에.

"하하, 네. 감사합니다."

형식적인 인사치레를 거치며 그들과 안면을 익혔다.

주소가 적힌 쪽지도 받았으니 편지로 연락도 가능해졌다.

아무것도 없던 지부장에서 순식간에 도시의 여러 주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것이다.

톰은 점차 자신의 손에 쌓여만 가는 쪽지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들의 감사 인사는 기쁘고 고맙다.

어찌 됐건 자신이 꾸린 탐사대 덕에 던그리드가 위기에서 벗어난 거 아니던가.

하지만 그 이면에 감춰진 진짜 주역은 자신이 아니었다.

그 사실을 자각하자 로크가 눈에 들어왔다.

우람한 근육에 맞춰진 턱시도를 멋들어지게 갖춰 입은 그.

선이 굵은 이목구비 하며, 아무렇게나 기른 머리카락은 보는 이로 하여금 사자의 갈기를 연상케 한다.

가만히 서서 와인을 기울이는 그 모습에선 자신과는 다른 기품이 느껴졌다.

'내가 해낸 일이 아닌데….'

모두 로크의 공이었다.

그는 이 사건을 막은 주역임에도 겉으로 티조차 내지 않았다.

로크 형은 욕심도 없는 건가?

요직에 오를 기회잖아.

지켜야 할 게 있는 나완 달리 홀로 자유롭게 어디라도 정착할 힘이 있는 사내일 텐데.

그런데 왜 모든 것을 나에게 양보해 주는 거지?

"얘기는 잘 끝내고 왔나?"

"어?"

어느새 그의 앞이었다.

멍하니 로크를 향해 걸어간 결과였다.

반개한 두 눈에 여유가 가득하다.

역시 닮고 싶은 사내였다.

"네, 잘 끝냈어요. 유능한 분들이 저한테 관심 가져 주셔서 몸 둘 바를 모르겠더라고요."

"귀한 인맥이야. 앞으로 네가 맡게 된 지부를 크게 성장시켜 주겠지."

"그런데 리카 씨는 어디로 가셨나요? 오후부터 안 보이시던데."

"조금 이따가 올 거다."

"그런가요…."

모처럼 둘만 있게 됐다.

이런 시간은 글레이븐에서 의뢰인과 용병의 관계 이후 처음이었다.

그래서일까.

톰은 평소 로크에게 하고 싶었던 질문들을 스스럼없이 했다.

"어떻게 하면 형처럼 될 수 있을까요?"

처음은 복수였다.

그다음은 여동생을 부양해야 한단 책임감이었고.

이후엔 현실이 주는 압박감과 비참함에 몸부림쳤다.

끝내 도달한 감정은 만족.

복수심은 희석되었고, 지부장 자리는 톰을 안주하게 했다.

그러다 로크를 다시 만난 거다.

그 만남이 모든 것을 바꿔 놨다.

"무슨 의미지?"

"말 그대로예요. 모든 일에 침착하시고, 늘 완벽한 대안을 세워 주시고, 무엇보다 강하시잖아요."

지하 도시에서 있었던 일들을 떠올렸다.

오러에도 생채기조차 나지 않던 아이언 골렘을 일격에 썰어 버리지 않나, 자신들은 눈치도 못 챘을 영혼 공방의 함정들을 피해 표식까지 남겨 줬다.

그런 수고를 들여 준 그의 조력자가 누구인지 궁금하다만, 굳이 캐묻지 않았다.

로크는 숨기는 게 많아 보이는 방랑자. 아니, 이단 심문관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는 믿음직한 형이다.

무엇보다 트라우마 속에서 헤맬 때 마음을 다잡을 수 있도록 큰 도움을 주었지 않았는가.

"알려 주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그냥 순수하게 궁금해서 물어본 거니까."

"그러니까 그렇게 묻는 이유가 뭐냐고."

"어…."

그의 물음에 멍한 표정을 지었다.

왜 로크 형처럼 되고 싶을까.

여동생을 위해? 길드를 더 훌륭하게 이끌고 싶어서?

그도 아니면….

"네 트라우마나 다름없는 마족. 진짜 녀석을 처단하고 싶은가?"

악몽에서 베어 낸 것이 아닌 진짜 마족.

지금 수준으로 놈을 베는 게 가능한가.

단언할 수 있다.

불가능하다.

중급 마족을 베어 낼 수 있었던 건 어디까지나 악몽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만약 로크가 지도해 준다면, 드디어 깨닫게 된 쟁염, 마족을 베는 검을 더욱 강하게 끌어낼 수 있다면.

"저는…!"

덜컹!

확신에 찬 목소리는 커다란 문소리에 묻히고 말았다.

모두의 고개가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향한다.

연회장 출입구의 맞은편, 2층과 연결된 계단 문이 열린 것이다.

"던그리드의 영주이자 위대한 론드란 제국의 다섯 영웅! 윈도르 단 아르칸 님께서 입장하십니다!"

문의 좌우에 선 기사들의 외침에 모두가 예를 갖췄다.

하지만 단 한 명.

톰만큼은 한쪽 무릎을 꿇을 수가 없었다.

"아…."

멍청한 소리를 내는 게 겨우다.

그만큼 충격이었다.

눈앞의 광경을 믿을 수 없었다.

얼마나 슬펐던가.

해 줘도 해 줘도 모자람만 느끼고, 가장 중요한 걸 줄 수가 없어서 마음만 아팠다.

또래들이 뛰놀 때 그러지 못한다는 것에 미안함만 켜졌단 말이다.

그래도 자신은 괜찮다면서, 밤에 홀로 눈물을 훔치던 여동생.

그런 리코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오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걸 머금은 채 걸어오고 있었다.

홀로, 누구의 도움 없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거였다.

"…흑."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오로지 동생만이 보였다.

흑염에 당한 왼 다리에 아티팩트로 보이는 무언가를 착용한 채, 자신을 향해 미숙한 발걸음을 옮기는 그녀.

안아 주고 싶다.

지금은 그 생각뿐이었다.

"흐흑!"

"우와. 옷 진짜 멋있어. 동화에 나오는 왕자님 같아!"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해맑게 웃으며 안긴 리코의 드레스 어깻죽지를 적시고 말았다.

그래도 떨칠 수 없다.

지금 이 현실이 믿기지 않아서.

여기서 동생을 놓는 순간 꿈에서 깨어날까 봐.

눈앞에 홀로 선 리코를 두 눈 가득 담았다.

"오빠, 울어?"

"기뻐… 서."

"기쁘면 웃어야지! 나 따라 해 봐. 이이!"

최근에 뺀 앞니 하나가 앙증맞은 구멍을 드러낸다.

그래도 리코는 해맑게 웃었다.

톰 또한 따라서 웃는다.

울면서 웃는, 우스꽝스러운 표정이었다.

"다시 한번 묻지."

그런 톰의 곁에 선 로크는 엷은 미소를 머금은 채 톰과 시선을 맞췄다.

"나처럼 되고 싶은 이유가 뭐냐."

톰은 드디어 온전히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의 쟁염은 마족을 베어 복수를 이룩하고자 얻은 게 아니었다.

"제 여동생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울음 섞였으나 확고한 목소리.

로크는 고갤 끄덕였다.

"그럼 나는 할 말 없다."

그는 리코와 톰의 머리를 동시에 어루만졌다.

"이미 너는 잘하고 있었으니까."

그 한마디에 톰은 끝내 오열했다.

리코는 그런 오빠를 달래고자 등을 토닥여 주었다.

***

감동적인 남매 상봉을 뒤로한 채.

나는 바 테이블에 기대 와인 잔을 기울이는 윈도르에게 다가갔다.

"어때? 내 깜짝 선물이."

"지하 도시에서 얻은 것입니까?"

"기술력이 상당하더라고. 전쟁이나 광산업에서 재해를 입은 자들을 위한 신체 보조 마도구가 상당해."

"리코의 왼 다리가 안 좋은 걸 알고 주셨군요."

"미래를 위한 뇌물인 셈이지."

"뇌물 말입니까?"

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

워낙 튀는 성격의 소유자긴 하지만, 이유가 뭘까.

다행히 곧바로 들어 볼 수 있었다.

"톰, 녀석을 키워 볼 셈이다."

"예?"

너무 궁금해서 그와 접촉했건만.

돌아온 대답은 뜻밖이었다.

영웅이 후계를 두는 건 심심찮은 일이다.

진리의 탑 탑주인 페놀리노나 제국, 론드란의 수호자인 에이모르 또한 선대 영웅의 자리를 계승한 경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윈도르는 다르다.

그는 신예 영웅으로서 제국의 다섯 기둥이 되었다.

그런 그가 후계를 둔다?

"파란이 엄청날 겁니다."

"당장 공개할 생각은 없어. 일단은 지켜볼 거야. 쓸 만하다 싶으면 그때 공개해야지. 지금은 하고 싶은 대로 두고."

와인을 들이켠 윈도르가 씩 웃었다.

"마음에 들었거든. 나랑 성장 배경도 비슷해 보이고."

그 딴에는 엄청난 내적 시험을 통과한 톰일 거다.

하지만 내 입장에선 어이없다.

톰도 막상 얘길 들으면 어이없어할 게 뻔했다.

'그래도 좋은 게 좋은 거지.'

굳이 말릴 생각은 없다.

나와 이어진 인연이 강해질 기회를 거머쥐었다는데, 떠밀어 줘도 모자랄 판이었다.

'무엇보다 톰은 쟁염을 막 깨달은 상태야. 이끌어 줄 사람이 필요했는데 마침 잘됐어.'

나는 윈도르와 건배를 나누고서 고갤 숙여 보였다.

"그럼 다음에 만날 톰의 모습을 기대하겠습니다."

"기대해도 좋을 거야. 그런데 여전히 말할 생각 없나? 나도 뚫지 못한 정신세계에 들어간 방법."

"죄송합니다."

"쯧, 재미없는 녀석일세. 뭐, 상관없어. 캐물을 이유도 없고, 그냥 이해한 상태야. 이런 놈이니까 브라트가 데려간 거겠지."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그럼."

이제 슬슬 뒷문 테라스로 가야 하기에.

나는 인사를 한 뒤 몸을 돌렸다.

그런 내 뒤통수에 대고 윈도르가 물었다.

"아, 이번 분기 영웅 회의에 나올 거냐?"

그 살얼음판 같은 곳을 또 가라고?

죽어도 싫다.

그래서 정중히 사양했다.

"윈도르 님의 권유에 몸 둘 바를 모르겠으나, 이후에 할 일이 많아서 힘들 것 같습니다."

"알았어. 가 봐."

흥이 식었다는 듯 손을 내젓는다.

혹여 마음이 바뀔세라 빠르게 자릴 벗어났다.

이내 리카가 있는 곳에 도착한 나는 슬며시 문을 열어젖혔다.

"조금 더 일찍 오실 줄 알았는데, 늦으셨네요?"

"봐야 할 사람들이 있었거든."

자연스럽게 그녀 옆에 섰다.

그제야 보게 된 리카는 새하얀 롱 드레스 차림이었다.

오프숄더에 과감하게 등을 드러낸 상태다.

깨끗하면서도 순수했다.

그런 단정한 이미지의 이면엔 뇌쇄적인 느낌마저 품고 있었으니.

새하얀 장미를 보는 듯했다.

"어때요? 나름 꾸며 봤는데."

"예쁘군."

"흐흥, 칭찬도 다 할 줄 아시네요? 로크 씨는 늘 과묵하실 줄 알았는데."

"솔직한 감상이니까."

"확실히 입에 발린 말보다 듣기 좋아요. 그래서, 저에게 할 말이란 게 뭔가요?"

생각보다 단도직입적이다.

발그름하게 달아오른 얼굴로 보아 취기를 빌린 듯했다.

앞으로 듣게 될 걸 각오하기라도 한 듯 살짝 깨문 아랫입술 하며, 그녀는 역시 준비된 여자였다.

"이걸 알아보겠나?"

나는 인벤토리를 열어 새하얀 깃털을 꺼내 보였다.

그루반 골댄비어를 처리하고 얻은 거였다.

"이, 이건 설마…."

그녀의 눈이 황홀하게 물들었다.

단번에 알아본다.

역시 종교인들에겐 널리 알려진 물건이란 말인가.

"저, 저저, 저에게 고백하는 건가요?"

…아닌데. 그런 거 절대 아닌데.

얘가 뭐라는 거야.

"로크 씨. 생각보다 섬세한 남자셨군요? 저희 신성 왕국에서 이성이 새하얀 깃털을 선물하는 게 사랑을 돌려 말하는 거란 건 어떻게 아시고…."

입을 가리며 우아하게 손을 뻗는다.

일단 자신만의 착각에 빠진 그녀의 생각을 바로잡을 필요가 있어 보였다.

"실은 저도 로크 씨가 저를 대신해서 위험을 무릅쓰고 나서던 것에…."

무어라 떠들며 깃털을 가져가려 든다.

어림도 없지.

나는 깃털을 회수했다.

"어?"

"그런 거 아니다."

"예?"

"그런 거, 아니라고."

단호하게 정정해 주니 멍청한 소릴 낸다.

더 확고하게 착각을 바로잡아 주고자 말을 이었다.

"우릴 막아선 아이언 골렘을 파괴하고 얻은 거야. 잘 봐 봐라. 미약한 신성력이 느껴지지 않나?"

고장 난 로봇처럼 머릴 주억거린다.

신성력을 느꼈다고 판단한 뒤, 그녀를 따로 부른 이유를 밝혔다.

"내가 백교의 이단 심문관이란 건 알고 있겠지. 이걸 교황청으로 가져가서 조사를 요청해 줬으면 좋겠군. 미리 연락을 넣었으니 접촉하는 건 쉬울 거야."

"교황청… 조사…."

"그래, 알아낸 사실들은 카인 아카데미 쪽으로 편지를 부쳐 달라고 하면 이해할 거다."

"내…."

"받아 주는 건가? 그럼 의뢰 대금으로 이 정도를 줄 수 있는데…."

"내가 왜!"

빠악! 굽이 뾰족한 구두가 내 정강이를 파고들었다.

음, 이거 뼈에 금 간 거 같은데.

아니 진짜로 금 간 거 같아.

아…, 더럽게 아프네.

'주군? 여자가 깨어났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주군이 올 때까지 다시 기절시킵니까?'

'눈치 챙겨라. 지금 상황 안 보여?'

'....'

내 현 상황을 볼 수 없는 알테온은 침묵했다.

지금은 깨어난 유리아를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내가! 오늘을! 어떻게 알고 왔는데! 처음부터 확실하게 말해 주든가! 아오, 열 받아!"

저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치다가 곤두박질치고서 내게 화풀이하는 이 여자를 진정시키는 게 우선이었다.

063.

리카에게 있어서 탐사대에 뛰어든 건 여러 만감이 교차하는 일이었다.

은빛 성가대 대장직을 맡고서 처음 맡게 된 거대한 직무다.

일개 용병 길드의 부족한 신성술을 보조하여 유적지 탐사를 성공적으로 이끈다.

그것만으로도 은빛 성가대는 신성 왕국에서도 그 입지를 탄탄히 굳힐 수 있겠지.

순수한 봉사 정신이 아닌 작은 야망을 품고 온 거다.

그만큼 그녀는 자신의 절친한 친구에게 약간의 라이벌 의식이 있었다.

'페르시. 너는 신분도, 능력도 타고나면서 운까지 좋구나.'

신성 왕국의 3공주로 태어난 그녀.

신성력은 혈통을 따라간다고 했던가.

그녀의 재능은 리카가 굳게 믿고 있던 노력론을 박살 낸 최초의 사례였다.

재능이 없어도 꾸준한 노력 끝에 뭐든 될 줄 알았건만.

아니었다.

'카인 아카데미에 입학한 거로 모자라 최고의 동료들만 모인 아덴 파티에 들어갔지.'

뒤처질 수 없었다.

그녀는 그러한 경쟁의식을 품게 만든 페르시를 증오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가깝게 지내며 그녀와 만날 수 있을 때면 놓치지 않고 만났다.

'페르시! 북부 격전지에서 이제 온 거야?'

'아, 리카. 미안해요. 제가 좀 늦었죠?'

'아냐, 나도 방금 왔는걸. 그런데 소개해 준다던 동료들은…?'

카인 아카데미 졸업 이후 오랜만에 만나게 된 페르시는 여전히 아름다운 친구였다.

'그게….'

'아, 다들 바쁘다는데 어쩔 수 없지. 그럼 오랜만에 같이 카페나 갈까?'

여느 때처럼 페르시와 자연스럽게 팔짱 끼고 카페에 앉아 떠든다.

새로운 만남을 기대했지만 바쁘다는데 어쩌겠는가.

리카는 그렇게 이해심이 부족한 사람이 아니었다.

안 그래도 끊임없이 생사가 오가는 격전지에서 힘써 주는 분들인데, 이해하는 게 도의적으로 옳았다.

'그래서? 그다음엔 어떻게 됐는데?'

'로크람 님이 천장을 부수고 나타났어요. 쏟아지는 온갖 흑마법과 화살을 받아 내 저희를 지켜 주셨죠. 극적이었어요.'

'와아…, 진짜 용사 같았을 거 같아.'

'로크람 님은 제가 인정한 진정한 용사랍니다.'

단둘이 떠드는 것도 즐거웠다.

페르시는 주로 아카데미에서 파티원들과 겪었던 일들을 풀어 줬다.

그중 로크람이란 자와 관련된 얘기를 할 땐 무척이나 즐거워 보였다.

약간의 동경이 엿보인다고 해야 하나.

늘 웃는 상인 페르시의 엷게 뜬 눈 사이로 비치는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죄송해요. 저만 신나서 너무 떠들었죠?'

'아니야. 나는 성가대에 근무해서 달리해 줄 말이 없었거든. 그보다 로크람이란 사람에 대해 자세히 말해 줄 수 있어?'

'네, 네?'

드물게 당황한다.

그래도 싫은 기색은 없어 보이는 게, 리카는 순수하게 궁금해졌다.

대체 이 새하얀 도화지 같은 여자에게 지극한 감정을 품게 만든 자는 누구일까.

자세한 외형 묘사부터 시작된 찬사.

그는 과묵하다. 그러면서 다정하단다.

이타심으로 점철된 희생정신은 모두를 구하고 자기 자신마저 훌륭하게 지켜 냈다고.

'그는 불패의 용사예요.'

'그래 보이네. 듣기만 해도 든든해.'

'그쵸? 리카, 저는 지금껏 이성을 멋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음? 나도 그런데.'

리카는 그녀의 말에 공감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홀쭉한 사제들과 전체적으로 마른 체구의 성기사들뿐인 교단이다.

그녀는 호리호리한 그들에게 이성 이상의 감상을 느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페르시는 다른 듯했다.

자신은 단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것을 카인 아카데미에서 얻은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로크람 님은 멋있어요. 진심으로 닮고 싶다고, 뒤를 받쳐 주고 싶다고 여긴 남자예요.'

그녀의 설명이 워낙 자세했던지라 연상은 잘됐다.

선이 굵은 이목구비, 듣는 이로 하여금 마음이 편안해지는 중저음.

사자의 갈기처럼 보이는 머리카락은 바람에 나부낄 정도로 부드럽다.

그 밑을 받치고 있는 육체는 또 어떠한가.

발그레 달아오른 페르시의 얼굴을 보는 것 또한 리카에겐 재미있는 볼거리였다.

'흐흠, 어쨌든 제가 할 말은 그거예요. 리카, 당신이 얼른 은빛 성가대의 대장직에 올라 세상을 경험해 봤으면 좋겠어요.'

'여신님을 위해서 그런 말을 하는 거 같진 않고, 나도 연심을 품어 봐라. 이거야?'

'연심이라뇨!'

'하하! 농담이야. 왜 그렇게 반응해?'

처음으로 당황하는 모습 또한 재밌었다.

그렇게 묻어 뒀던 재미있는 추억이다.

그, 로크를 만나기 전까진 말이다.

로크는 페르시가 말했던 로크람과 흡사한 외견의 소유자였다.

성격도, 말투도 비슷하다.

듣기만 한 입장이지만, 워낙에 자세했던 소개다.

그래서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 의심은 지하 도시를 탐험하면서 줄곧 이어졌다.

'이단 심문관!'

그러다 아이언 골렘을 성유물로 베어 내는 그의 모습에 의심이 옅어졌다.

그는 아덴 파티의 일원인 로크람이 아닌 듯했다.

페르시가 말한 쟁염도, 오러도 두르지 않은 게 그 증거였다.

그는 신성력을 휘둘렀다.

어떤 성기사도 흉내 내지 못할 강대한 검격으로 아이언 골렘을, 그 너머의 건물들마저 깔끔하게 양단했다.

신화 속에 영웅을 보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이내 의심을 완전히 걷어 낼 만한 사건은 위대한 영안실에서 벌어졌다.

그가 다른 행동을 했기에 걷어 낸 게 아니다.

리카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페르시가 말한 진정으로 멋있는 존재.

그런 눈앞의 존재가 페르시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사람이 아니라고 말이다.

그래서 의심을 거둔 거다.

그를, 눈앞의 사내를 로크라 철석같이 믿고 싶었던 거였다.

만약 로크가 정체를 숨긴 로크람인 게 맞았다면, 지금 이 마음에 싹튼 감정을 평생 꽃피울 수 없을 테니까.

이번만큼은 조용히 페르시를 응원해야 할 것 같았으니까.

'흐으… 진짜.'

지하 도시 사건 이후.

연회장에서 만난 그의 모습은 멍하니 보게 될 정도로 멋있었다.

봐도 봐도 질리지 않을 정도였다.

그가 다가와 옆에 선다.

장장 4시간을 고심한 끝에 고른 드레스를 담담히 칭찬해 준다.

빈말이 아닌 진심이 묻어 나오는 목소리에 괜스레 웃음이 나왔다.

이 뒤에 어떻게 되는 걸까.

이렇게 단둘이, 오로지 나여야만 들을 수 있는 이야기를 속삭여 주는 건가?

심장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뛴다.

통제하기 힘든 열기에 손부채질하기도 잠시.

로크가 무언갈 꺼냈다.

보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그것.

신성 왕국에선 고백의 방식으로 널리 쓰이는 순백의 깃털이었다.

보는 순간 깊은 곳에서 치고 올라온 환희란 감정이 몸을 가득 채운다.

속에서부터 터져 나오려던 비명을 겨우 억눌렀다.

갑작스러운 상황의 연속이지만 리카는 순수하게 기뻤다.

한 줄기 남은 이성을 겨우 붙들어 체면을 지킨 것도 그 때문이었다.

자, 이다음엔 뭘 보여 줄까.

페르시의 말이 다 사실이었다.

세상을 경험하는 것으로 이렇게 좋은 이성을 만나게 되다니.

돌아가면 보답으로 뭘 사 줘야 하지?

그 전에 로크 씨를 어떻게 소개해 줘야 하려나.

머릿속에 차오르는 온갖 망상과 장밋빛 미래다.

그것은 이어진 로크의 말에 그 무엇에 견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곤두박질쳤다.

'내가 미쳤지, 진짜!'

자신의 기대를 처참하게 부숴 버린 그에게 순간 욱해 버렸다.

다른 의미로 격정에 찬 감정은 그대로 몸을 통해 표출됐다.

그래도 로크는 담담했다.

자신의 오해를 바로잡아 주는 그 목소리는 여전히 상냥했고, 리카는 천천히 차분해져 가는 자신에게 이상함을 느꼈다.

'왜?'

배신감을 느꼈음에도 여전히 그에게 호감을 품고 있어서?

이유야 여럿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가장 먼저 떠올린 이유가 가장 합당했다.

여전히 그가 싫지 않았다.

그야, 이번 해프닝도 다 자신의 오해로 비롯된 부끄러운 일이지 않은가?

그는 잘못이 없다.

굳이 꼬집을 점을 꼽자면 하나 있긴 했다.

"다음부터는 자세히, 상대방이 오해하지 않도록 확실하게 자신의 목적을 밝혀 줬으면 좋겠어요."

"미안하다. 혹여 톰의 귀에 들어갈 수 있을 거 같다고 생각해서 돌려 말한 거야."

"그런 거라면 할 말 없네요."

심지어 이번 오해도 그의 세심한 배려에서 나온 일이었다.

자신의 일에 톰이 신경 쓰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선택한 발언이었단 말이다.

'으으, 부끄러워.'

그의 정강이는 치료한 지 오래였다.

그러면서 본인 감정은 치료할 수 없다는 것에 신성술이 야속하게 느껴지는 건 처음이었다.

그래도 얼추 마음을 추스른 리카는 로크를 똑바로 바라봤다.

"연락은 카인 아카데미로 보내라고 하셨죠?"

"내 부탁을 들어준다는 의미인가?"

"제, 제가 아니면 안 될 일이라면서요. 그러니 별수 없죠."

겉으로 툴툴댔다만, 싫지 않았다.

이번 만남을 끝으로 그와의 인연이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 정말로 좋았다.

"사건이 좀 있었지만, 당신을 돕는 것으로 백교의 고위직과 인연을 맺을 수 있다면야. 남는 장사니까요."

그래서 리카는 여전히 그를 로크람이 아닌 로크로 믿고 싶었다.

***

로크람입니다.

이 편지를 받는 시점에 던그리드에 벌어졌던 사건에 관한 걸 받으셨겠죠.

그곳 지하 도시에서 백교와 관련된 걸 얻게 되었습니다.

브라트 님이라면 알 수도 있겠다 판단, 믿을 수 있는 자에게 맡겨 보냅니다.

그자는 저를 백교의 이단 심문관이자 용병 로크라는 사내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부디 그 점을 유념하면서 독대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 뒤에 알아낸 걸 카인 아카데미 쪽으로 보내라 이거지.'

브라트는 몇 번이고 읽어 내린 짧은 편지를 갈무리했다.

솔직히 서운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그는 다음 로크람과의 만남을 기대하고 있었다.

자신이 어둠의 군주를 파헤치면서 알아낸 것들을 기쁜 낯으로 알려 주고, 놀라워하는 그의 반응을 즐기고 싶었단 말이다.

그런데 놀라운 걸 확보한 그가 직접 찾아오지 못할망정 대리인에게 일을 맡기다니.

'영리해. 그게 싫으면서 더 마음에 든단 말이지.'

로크람은 대체 어디까지 내다본 걸까.

브라트는 사나운 미소를 머금었다.

만약 그가 찾아왔다면 책임을 물게 했을 거다.

감히 백교에 있지도 않은 이단 심문관을 들먹인 죄.

그것을 벌하고자 진짜로 이단 심문회를 조직하여 그를 요직에 앉힐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는 없다.

대신 자신을 경악한 얼굴로 보는 여자만이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가 보낸 대리인.

신성 왕국의 은빛 성가대장.

브라트 입장에선 한낱 이란 축에 드는 여자다.

본래라면 눈길조차 주지 않고 자기 일에 몰두했겠지.

그러나 그럴 수 없다.

그는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에게 깊은 동질감을 선사해 준 로크람이 보낸 존재였으니까.

"이름이 리카라고요?"

"네, 네!"

"흐음, 듣자 하니 이 깃털이 백교에 속한 광익이란 존재와 깊은 연관이 있는 거라고 하는데, 제가 들은 게 맞죠?"

"그렇습니다!"

군기가 바짝 들어간 목소리에 브라트는 빙긋 웃었다.

마침 좋은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대리인으로 이 아이를 보낼 정도면 신뢰한다는 건데, 내가 이 애한테 잡기술을 조금 가르쳐서 생색내면 로크람도 마지못해 내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까.'

놀랍도록 편협하지만 확실한 계획.

브라트는 방금 떠올린 것임에도 좋은 생각이란 판단이 서, 자리를 박찼다.

"저도 모르는 그 광익이란 존재가 대체 뭔지 그럼 알아보자고요. 아마 이 교황청에 숨겨진 '월광 도서관'에서 정보를 얻을 수도 있을 겁니다."

"허업!"

월광 도서관이 어떤 곳인가.

빛의 신이 신성법을 세우고 가르침을 내릴 때부터의 기록을 보관한 지식의 보고다.

성직자 입장에선 한 번이라도 가고 싶은 꿈의 공간.

그곳을 가벼운 공원 가듯 가자고 제안하는 브라트의 모습에, 리카는 속으로 비명 질렀다.

'백교의 고위직이 성자일 줄은 몰랐다고!'

그는 대체 뭐 하는 사내일까.

그녀의 로크에 관한 생각은 헤어진 시간만큼 줄어들긴커녕 방금으로 더 커졌다.

"아, 로크 님의 최근 동향이 궁금했는데 마침 잘됐군요. 그는 지금 어디로 갔습니까?"

브라트의 물음으로 충격에서 헤어 나온 리카는 그의 다음 목적지를 떠올렸다.

"저한테는 볼일이 있다면서 진리의 탑으로 간다고 했어요."

***

구름을 뚫고 솟구친 첨탑.

끝 모를 정도로 높다란 그것은 과학이 아닌 마법 공학 발전의 산물이었다.

그런 탑 앞에서 페놀리노가 우아한 미소를 머금었다.

"검은 안개 사건이 마무리되면 오라고 했는데, 한 곳을 더 거쳐서 왔더구나? 나는 뒷전이었다 이거니?"

웃는 게 웃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화를 풀어 주는 게 급선무다.

하지만 이실직고할 수는 없었다.

'흑마법사랑 흑아의 수장을 만나서 앞으로 어찌할지 떠든 뒤에 두 번째 마왕의 아티팩트를 흡수하는 방법을 알아내고 오느라 늦었다고 어떻게 말해.'

그러니 다른 화풀이 수단을 생각해 보자.

아티팩트도 개량하고 내가 가진 주술과 비전 마법도 발전시키려면 별수 없었다.

064.

진리의 탑에 도착하기 몇 달 전.

나는 던그리드에서 떠날 준비를 했다.

"안 가면 안 되는 거야?"

이젠 나를 곰돌이 인형 껴안듯 안고 자는 게 익숙해진 리코.

누구의 부축 없이 꼿꼿이 선 아이는 내가 떠난다는 소식에 울먹였다.

"리코, 로크 형은 이제 가 봐야 해."

"나중에 가도 되잖아! 다섯 밤. 아니, 열 밤만 더 있다가 가도 되잖아!"

"으음, 그건 좀 힘들 거 같은데."

"몰라! 싫어! 싫다고!"

질풍노도의 어린이인 리코에게 이성적인 설득은 통하지 않았다.

아이를 진정시킬 수 있는 건 톰이 유일했다.

"자자, 오빠가 로크 형이 더 머물도록 꼭 설득해 볼 테니까 리코는 가서 자자. 알았지?"

"정말?"

"물론이지. 자, 약속."

"못 지키면 내가 좋아하는 거 100개 사 주기."

엄청난 요구에 톰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예전이라면 거절했겠으나, 톰은 이제 부자인 몸.

"하하, 물론이지."

약속을 흔쾌히 수락한 톰은 리코와 함께 2층으로 올라갔다.

이내 리코를 재우고 온 톰이 내 맞은편에 앉았다.

"바로 가시려고요?"

"할 일이 남았으니까."

"으음…."

난처한 미소를 흘리며 주머니를 뒤진다.

그런다고 뭐 나오겠냐마는.

톰은 내게 더 줄 게 없는지 궁리했다.

하지만 나온 답은 똑같다.

"죄송해요. 마음 같아선 이 건물도 주고 싶을 지경이에요."

"내가 받을 거 같나?"

"형이라면 당연히 안 받겠지만요. 저희, 또 만날 수 있겠죠?"

"인연이 된다면 만나는 거고, 아니라면 여기까지겠지."

"그런 거라면… 꼭 다시 만날 거예요."

어떻게?

물음을 삼켰다.

톰의 각오한 표정으로 보아 뭔가 계획이 있어 보인다.

그게 뭔지는 나중에 알아도 될 것 같았다.

지금 들어 봤자 감흥이 덜할 것 같았으니까.

"그럼 간다. 배웅은 필요 없어."

"어… 고마웠어요. 로크 형을 만나고 지금까지 쭉."

"다시 만날 거라면서 이게 마지막인 것처럼 말하는구나."

"아, 이건! 그게… 그냥 하고 싶은 말이니까 하는 거죠. 네…."

멋쩍게 웃는 톰을 따라서 엷게 웃어 보인 뒤.

나는 손을 흔들고서 건물을 나섰다.

언제 재회할진 모르겠다만, 톰과는 당분간 안녕이었다.

'연락책은 근처에 있나.'

지도엔 안 잡혀도 함께한 시간이 있다.

나는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지하 도시까지 오지 못한 연락책이 다시 붙었음을.

'이유가 뭘까.'

늘 붙어 다니던 연락책이다.

지금까지의 증거들로 보아 그 연락책은 세이라라고 확신하는 중이었다.

'높은 은닉술, 알테온의 등장 때 마음을 다잡지 못해 지도에 잡히는 모습, 내 편의를 봐주기 위한 은근한 행동들.'

떠올려 보니 참 많다.

연락책의 은근한 배려는 눈에 띄듯 안 띄듯 은밀했다.

최근에 가장 기억에 남는 걸 꼽아 보자면 당장 떠오르는 게 있다.

'내가 자주 가는 식당 예약을 계속해줬었지.'

처음엔 톰이 했나 싶었다.

물어보니 아니라는 반응에 직감했다.

모든 전황이 그녀를 가리킨다.

이따금 같이 먹고 싶었는지 네 명으로 식당을 예약하더라.

'일단 그대로 둘까.'

도움을 구한다면 언제든 구할 수 있는 구실이 마련된 셈이다.

위기의 순간, 그녀의 이름을 부른다면 날파람이란 이명답게 단숨에 나타나겠지.

일단 당장 할 일을 정리하자.

'유리아.'

나는 던그리드의 외곽 지역에 도착했다.

외진 곳인 만큼 버려진 폐가나 빈민들이 가득하다.

그곳에서 더욱 깊이 파고들면 폐수가 흐르는 지하수로 입구가 나타났다.

'어우 냄새.'

대각선으로 내려가는 길을 따라 들어간다.

가는 중에 느껴진 이질적인 마력에 방향을 바꿨다.

이리저리 섞인 갈림길에서 내 이정표가 되어 준 마력의 끝.

"아, 오셨군요."

흑아의 일족을 이끄는 수장, 그레드린이 나를 맞이했다.

그의 옆엔 알테온과 유리아가 서 있었다.

"은인님!"

"계집, 주군께 예를 갖춰라. 죽고 싶나?"

내가 유리아한테 이름을 안 알려 줬던가?

음, 알려 준 적이 없구나.

"알테온, 조용히 해라."

"죄송합니다. 계집, 닥쳐라. 주군의 자비는 단 한 번뿐이니."

"아니, 너만 입 다물라고."

"...."

억울해 보이는 표정의 알테온을 뒤로한 채.

나는 부복한 그레드린에게 다가갔다.

"이게 몇 달 만의 만남인지 모르겠습니다. 로우 님."

"정확히는 다섯 달 만이로군."

"이번에도 동화의 거울로 모든 감시를 미연에 방지했으니 안심하시길."

"다 알고 왔으니 일어서라. 너와 할 말이 있으니까."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한 차례 몸을 떤 그는 은신처로 나를 안내했다.

이미 이곳에 도착한 지 꽤 된 그다.

마련해 둔 장소는 깨끗했다.

알테온이 도중에 유리아를 이곳에 옮겨서 돌볼 정도로 넓기도 하다.

"용케 이런 곳을 구했군."

"저에겐 로우 님의 그림자를 쫓는 것보다 쉬운 일입니다."

"그런 말은 집어치우고."

"죄송합니다."

눈에 띄는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그런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은 그레드린이 고개만 살짝 들었다.

"나를 따르는 기사가 구한 여자는 봤겠지."

"예, 단탈리온의 후계자더군요. 어디 있나 했더니 이 도시 지하에 숨죽여 있었을 줄이야. 그녀를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영입할 계획이다. 그걸 위해 널 부른 거고."

"괜찮겠습니까? 저도 소문으로 들은바, 그 여자는 마왕을 모시는 것에 심한 반감을 가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거기까지 알고 있었나.

그레드린의 정보력은 무시할 수 없었다.

그만큼 설명할 거리가 줄어든다.

남은 건 설득 아닌 통보뿐.

"유리아를 흑아의 일족에서 데려가라."

"네?"

그레드린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미간을 모으자 황급히 표정 관리한다.

하지만 이미 다 봤다.

"불만인가?"

"아, 아닙니다. 로우 님의 뜻에 제가 어찌 불만을 품겠습니까."

"방금 표정 보니까 그래 보였는데."

"전혀 아닙니다. 날벌레, 벌레가 날아들어서 그만…."

식은땀을 줄줄 흘리는 모습에 여기까지 하도록 했다.

미리미리 기강을 잡아 둬야 한다.

이놈의 마왕군 소속 녀석들은 그래야 말을 잘 들으니까.

"유리아의 포섭 문제는 이미 해결했으니 걱정하지 말도록."

"그렇습니까?"

"마왕에게 반감을 가졌다고? 걱정하지 마라. 적어도 나에겐 충심을 품고 있으니까."

"흑마법사의 마음을 돌리는 건 일국의 왕을 주무르는 것보다 어렵습니다. 그런데도 포섭해 내다니. 역시 로우 님…!"

그레드린의 눈빛이 존경심으로 한층 더 깊어졌다.

그러건 말건 나는 말을 이었다.

"그녀에게 안전한 장소와 연구실을 제공해라. 흑마법 연구에 지원을 아끼지 말도록."

내게 우호적인 흑마법사다.

안 그래도 아카데미에서 벌인 일로 로크람이란 존재는 흑마법사들 사이에 기피 대상 1순위로 군림한 상태다.

그런 와중에 흑마법을 배울 기회를 서적이 아닌 인적 자원으로 구했으니 어찌 기쁘지 않으랴.

"명을 받들겠습니다."

그레드린은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고갤 숙였다.

이것으로 유리아의 안전은 당분간 확보됐고.

뒤이어 유리아를 독대했다.

그녀는 나를 만나자마자 울먹였다.

"깨어나자마자 놀랐어요. 웬 기사 같지도 않은 기사는 말도 안 통하지, 은인님은 보이지도 않지."

"진정됐나?"

"네. 늦었지만 구해 줘서 감사합니다."

"네게 받을 게 있어서 도운 거뿐이야."

"음음, 흑마법을 배우고 싶다 하셨죠?"

지하 도시에서의 대화를 기억해 낸 건지 요점을 집어낸다.

나는 최근에 던그리드 암시장에서 구매한 계약서를 꺼냈다.

이 계약서는 서로의 마력을 묶는다.

만약 한쪽이 파기하려 들면 체내 마력이 폭발하는 힘을 품고 있었다.

"그럼 계약하지. 서로 비밀을 지키는 거다."

나는 유리아의 위치를 절대로 발설하지 않는다는 계약을, 그녀는 나에 관한 모든 걸 침묵해야 한다.

"어겼을 때의 결과가 살벌하네요."

"감당해라. 강제든 아니든 간에 이 길을 걷는 순간부터 감수해야 해."

"으음, 어쩔 수 없죠."

유리아는 별수 없다는 듯 계약서에 사인했다.

이로써 그녀는 나의 백지 같은 흑마법 수준을 함구할 수밖에 없게 됐다.

나는 애초에 말할 생각도 없는 유리아의 위치에 대해 침묵하게 됐고.

"그럼 바로 알려 드릴까요? 아니면 나중에?"

"지금 배워 볼 수 있나?"

"어… 일단 로우 님의 수준부터 알아야겠죠? 제가 딱히 알려 드릴 것도 없을 거 같지만요."

내가 지하 도시 사건을 막은 걸 알고 있는 그녀다.

그렇기에 내 흑마법이 경지에 올랐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럼 일단 그 생각부터 깨부숴 줘야겠지.

"시, 실화에요?"

"보는 그대로다."

"말도 안 돼. 이런 비대칭적인 수준은 처음 봐요. 남들은 하나도 배울 수 없는 비전 마법은 줄줄이 꿰고 있으면서 어떻게 기초 흑마법은 하나도 몰라요?"

"지금 비꼬는 거냐?"

"어흠, 그건 아니고요. 일단 당장 가르치기엔 무리가 있을 거 같네요."

"이유는?"

유리아가 제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녀의 얼굴엔 황당한 기색이 역력했다.

"완전 기초부터 가르쳐야 하잖아요. 이 정도면 준비가 필요할 수밖에 없어요. 제가 머릿속에 든 정보랑 가지고 있는 서적을 합쳐서 새로 편찬해 볼게요. 그걸 가지고 한번 독학해 보시겠어요?"

유리아는 내 수준에 절망하지 않았다.

각종 비전 마법을 익힌 것에 가능성을 본 듯했다.

그러니 공부를 돕겠단 말이 아닌 독학하란 대안을 내놓는 거겠지.

물론 나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편찬까지 얼마나 걸리지?"

"감이 잘 안 잡히네요. 완성되는 대로 보내드릴 테니 기다려 주실 수 있나요?"

유리아의 말에 나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그럼 완성되는 대로 그레드린을 통해서 보내면 되겠군. 나가자. 이제 이곳에 볼일은 없어."

"어디로 가시려고요?"

나는 문을 열고서 우릴 기다리고 있던 그레드린을 가리켰다.

"너는 쟤를 따라가고, 나는 홀로 행동하게 되겠지."

"어, 음… 내키지 않지만 그러죠. 뭐."

유리아의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그레드린이 한쪽 눈썹을 추켜세웠다.

"뭐라?"

"그레드린, 유리아와 기 싸움 하지 말고 마지막으로 대화나 나누지."

"알겠습니다."

이제 그가 알아 온 정보를 들을 때다.

어차피 유리아와는 계약을 나눈 상황.

그녀가 듣건 말건 상관없어졌으니 거리낄 게 없다.

나는 그레드린의 보고를 잠자코 들었다.

"아덴 파티는 현재 자색 지대 전선에서 마왕군 측과 간간이 교전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 외 특이점은?"

"개개인이 따로 성장을 위한 준비를 틈틈이 하더군요. 일단 파티장인 아덴은 전투를 통해 성장을 꾀했습니다. 페르시는 현재 신성 왕국과 지속적인 접촉을 이어 가고 있었죠."

"축복의 날을 정하려는 건가?"

"그런 것 같습니다. 날짜는 알아내는 대로 즉시 말씀 올리겠습니다."

그 외에 레아와 스텔라는 각각 새로운 마법과 포션 제작을 위해 방에 틀어박혔다고.

"송구스럽게도 불패의 용사에 관한 행방은 여전히 오리무중입니다. 카인 아카데미에서 그의 행적을 철저하게 감춘 터라… 죄송합니다."

제법 자세한 그레드린의 보고에 나는 고갤 끄덕였다.

"유적지는?"

"그게… 그것도 죄송합니다. 하지만 조금만 기다려 주신다면 좋은 소식을 가져오도록 하겠습니다."

하긴, 유적지란 게 턱턱 발견되면 그것도 이상하지.

탓할 생각은 없다.

거의 1년여를 유랑하면서 무려 두 곳을 들른 것만 해도 엄청난 수확이었다.

"그럼 이걸 봐라."

이게 나의 본론이다.

그레드린을 부른 이유.

인벤토리를 열어서 암신교의 대주교, 발릭한테서 얻은 마왕의 아티팩트를 보여줬다.

"이, 이건…!"

그레드린은 놈의 손에 새겨진 문신을 단번에 알아봤다.

마왕의 아티팩트, 탄마의 서.

흑마법을 가공할 속도로 쏘아 낼 수 있도록 자동 보조 하는 이것은, 어째서인지 흡수할 수 없었다.

"흡수하려 할 때마다 내가 가진 것에 반발하더군. 그 이유를 알고 있나?"

그레드린은 덜덜 떠는 손을 뻗으면서도 차마 아티팩트엔 손을 대지 못했다.

마치 거룩한 무언가를 앞에 둔 듯한 반응이다.

그래서 기대감이 팍 식어 버렸다.

"모르는군."

"크흑!"

정보력으로 승부하는 흑아의 수장은 삼 연속으로 도움이 못 된 게 치명적이었나 보다.

뭐, 이걸 보인 이유는 그것만 있는 게 아니었다.

"마왕의 아티팩트가 반응을 보였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순식간에 표정을 굳힌 그가 흥미를 보인다.

나는 테아트와 연관된 일을 적당히 꾸며서 설명했다.

"…그의 성장을 아주 은밀하게 억제하는 흑마력이더군. 거기에 아티팩트가 반응했어. 그러니 그 자에게 감시를 붙여라. 어쩌면 파편의 뒤를 밟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북부 마을 출신의 하급 용사. 계승의 용사 테아트…."

정보를 숙지한 그레드린이 고갤 끄덕였다.

"특이 사항이 생기는 대로 보고하겠습니다."

"그래."

그렇게 할 말을 마치고 아티팩트를 거두던 중, 잠자코 있던 유리아가 입을 열었다.

"저기…."

우리 대화에 끼고자 조용히 손을 든다.

말해 보란 의미에서 턱짓하자 그녀는 탄마의 서를 가리켰다.

"제가 흡수하는 방법을 아는데, 알려 드려요?"

…운이 좋군.

065.

유리아를 포섭하고 그레드린에게 다양한 정보도 전해 들었다.

아덴 파티와 관련된 사건으로 내가 당장 신경 써야 할 건 하나였다.

'축복의 날.'

신성 왕국에서 여신의 말을 전파하는 대행자를 뽑는 가장 큰 행사다.

열리는 날은 불명, 누가 뽑힐지도 불명이다.

다만, 왕국이 국교로 선포한 포용의 여신 앙헬의 선택을 받은 자는 성흔을 받을 정도로 큰 사건임이 분명했다.

'아무런 노력도, 대가도 없이 성흔의 힘을 얻을 수 있으니까.'

그날이 되면 수많은 성직자들이 선택을 받기 위해 왕국으로 모일 거다.

동시에 새로운 대행자의 탄생을 막고자 마왕군과 암신교도 모여들겠지.

'작은 전쟁이라도 벌어질 것 같은데.'

설정상 늘 바람 잘 날 없었다는 축복의 날이다.

이번에도 어김없으리라 예상하며 방문 쪽으로 고갤 돌렸다.

누군가 문을 두드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용사님! 탑주님께서 불러오라 하셔서요."

"지금 가도록 하지."

"넵!"

현재 나는 진리의 탑에 들어온 상태였다.

의외로 페놀리노의 화를 가라앉히는 건 쉽더라.

'흐음, 이게 그 인간의 육체를 차지하고자 때를 기다리던 드워프의 영혼이 깃든 마력 핵이다 이거지?'

'그렇습니다.'

그녀는 흥미를 가지게 된 것을 해석하고자 혈안이 되는 성격의 소유자다.

그러니 궁금해할 만한 걸 던져 주면 쉽게 화가 풀릴 일이었다.

'일던 탑에 들어오긴 했다만, 당장 해야 할 건 아티팩트 흡수인가.'

유리아가 알려 준 마왕의 아티팩트 흡수 방법.

그걸 위해선 사전에 준비해야 할 게 몇 가지 존재했다.

어떻게 그리 자세히 알고 있는지 물어봤는데 단탈리온 때문이라고.

'그 새끼 욕심이 그득해요. 제 몸 차지한 다음 마왕의 아티팩트도 얻을 거라면서 제 머릿속에 지식을 때려 박은 거 있죠?'

그게 유리아가 방법을 알게 된 자초지종이었다.

그러니 진리의 탑에서 해결해야 할 게 많아졌다.

'일단 페놀리노의 나를 향한 흥미를 해소하고, 이를 빌미로 이득을 취한다.'

그 이득은 곧 내 성장으로 이어질 터.

나는 도착한 탑의 꼭대기, 그녀의 방문을 두드렸다.

"접니다."

"들어오렴."

문이 알아서 열렸다.

페놀리노는 내가 준 마력 핵 연구에 열중이었다.

돋보기안경을 착용한 채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다.

곁으로 보기엔 그냥 보는 거 같지만, 내 정신력은 선명하게 잡아냈다.

'복잡하네.'

그녀를 기준으로 피어오른 마력 선 수천 가닥이 마력 핵을 분석하고 있었다.

안에 깃든 회로를 음절 단위로 뜯어 보는 중이겠지.

그러면서도 나를 보는 시선이란.

'역시 대륙 최강의 대마법사인가.'

역할을 분담해도 전혀 집중력이 흐트러지지 않은 모습이다.

정신력 스탯이 대체 얼마나 될까.

볼 수 없는 노릇이니 SS급 정도라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널 부른 이유를 알고 있니?"

"저의 정신력이 궁금하기 때문 아닙니까?"

영웅 회의에서의 첫 만남을 떠올리며 답했다.

페놀리노는 무표정을 일관한 채 손을 내저었다.

고요의 흐름.

완벽한 은폐성을 자랑하는 마력 선이 내 앞으로 푹신한 소파와 다과를 대령했다.

"앉으렴."

"배려 감사합니다."

"윈도르. 그 작자는 어떻게 됐니?"

"멀쩡합니다. 영웅에게 위협될 존재는 그곳에 없었으니까요."

"저런, 아쉽구나. 적어도 팔 하나는 잃기를 기대했는데."

차를 홀짝이면서 살벌한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늘어놓는다.

그녀는 찻잔을 내려놓고 나를 응시했다.

"보이니?"

"그렇습니다."

"흠, 역시 신기해. 내 고요의 흐름을 간파한 건 그 늙은이뿐이었는데."

에이모르를 말하는 건가.

론드란의 수호자이자 불멸의 영웅.

다섯 영웅 중 가장 강하다고 평가받는 그의 안목은 영웅 회의에서 알아봤다.

브라트가 숨겨 둔 걸 나와 페놀리노 다음으로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나는 질질 끄는 걸 누구보다 싫어한단다. 배움에 있어서 핵심과 요지 외에 잡설을 흡수하는 것만큼 비효율적인 일도 없거든."

"동의합니다."

"후훗. 우린 통하는 구석이 제법 많구나."

아뇨, 그냥 본론만 말하는 게 좋다고요.

속말을 삼킨 채 경청했다.

그녀는 내게 익숙한 것들을 꺼냈다.

"눈빛을 보니 알고 있는 모양이야."

"사용했던 적 있으니까요."

세 개의 잔과 구슬.

일전에 벨라가 지닌 재능을 판별하고자 사용했던 도구였다.

"용사 후보생들이 사용하는 것의 개량형이란다. 이것으로 너의 강대한 정신력이 어떻게 쌓였는지 알아보고 싶은데, 가능하겠니?"

"제가 페놀리노 님의 제안을 수락한다면 저는 뭘 받을 수 있습니까."

"주는 만큼 받고 싶다 이거니?"

"제 입장에선 시간과 밑천을 까발릴 손해를 감수하면서 온 거니까요."

안 오면 머지않아 지긋지긋하게 괴롭혀 댔겠지.

으으, 그것만큼은 사양이야.

"당돌하구나. 그만한 재능을 지녔으니 싫지만은 않아. 좋아, 뭘 가지고 싶니?"

"아티팩트와 마법의 구조 강화, 주술의 효율 증대 및 몇 가지 재료를 원합니다."

내 똑 부러진 말에 페놀리노가 작게 입을 벌렸다.

줄곧 전사로 여겼던 내 입에서 그런 요구가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나 보다.

그래서 나는 한마디 더 덧붙였다.

"모두 훗날 만나게 될 동료들을 위한 것입니다."

"아, 그랬니? 소문은 들었단다. 지극히 이타적인 용사가 있다지? 그게 너고. 어쩐지, 요구가 이상하다고 느꼈단다."

"과찬입니다."

"칭찬 아니란다. 때론 자신을 챙길 줄 알아야지. 그런 선택은 언젠간 자신을 파멸로 몰아넣을 거야."

"마치 겪어 보신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순수한 호기심에 물었다.

설정집에서도 영웅에 관한 설정은 밝혀진 게 그리 많지 않다.

핵심만 적혀 있을 뿐, 그들의 과거에 관한 건 적혀 있지 않았다.

"숙녀의 민낯을 드러내라는 거니? 실례란다, 로크람 경."

숙녀라니.

나는 침묵했다.

20대 초반의 청초한 인상이라도 페놀리노의 나이는 올해로 58세였기 때문이다.

"일단 네 요구를 모두 들어주기엔 수지타산이 안 맞을 것 같구나. 그러니 이렇게 하는 게 어떻겠니?"

그녀는 타협점을 제시했다.

내가 요구한 것 하나당 자신의 궁금증 하나를 풀어 주기로.

나로 인해 생긴 호기심만 풀어 주면 될 듯하니 고민할 필요도 없는 제안이었다.

"그러죠. 그럼 이번 검증으로 아티팩트를 강화해 주실 수 있습니까?"

"던그리드에 있다는 지하 도시에서 얻은 거겠구나."

"그렇습니다."

"좋아, 그럼 검사를 시작해 볼까?"

페놀리노의 말에 익숙하다는 듯 잔과 구슬을 사용했다.

마력수를 묻힌 손에 신성력이 흘러나온다.

오기 전에 사용한 마력 반전이다.

황금빛의 힘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던 그녀는 구슬을 쥔 손에 변화가 일자 입을 모았다.

"반응이 나타났구나."

"개량형이라 하셨죠. 뭐가 바뀐 겁니까?"

"검사자가 지닌 마력, 오러, 신성력. 모든 힘이 어떻게 발달했는지 색으로 판별하는 거야. 이것으로 너의 강대한 정신력이 언제 형성됐는지 연대를 측정할 수 있지. 덤으로 그 수준 또한 알 수 있을 거란다."

무슨 탄소 연대 측정법도 아니고.

내 몸이 화석이라도 된 듯한 기분을 느낀 채 구슬을 살폈다.

여러 색을 내보이다가 이내 잠잠해진다.

어떠한 색도 품지 않은 투명함.

그러한 반응에 페놀리노의 미간이 모였다.

"음? 이럴 리가 없는데."

"뭐가 잘못된 겁니까?"

"분명 마력 조정은 완벽해. 그런데 이건 설마…."

페놀리노는 이내 결론에 도달했단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로크람 경. 아니, 당신은 대체 누구시죠?"

어느새 그녀의 말투엔 짙은 존경심이 묻어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