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수선전 1화
[당신의 최대 잔여 수명이 182일 남았습니다.]
갑자기 들려오는 알림에 강혁은 깜짝 놀랐다.
'잔여 수명?'
앞으로 남은 수명을 말한다.
말도 안 되는.....
어떻게 죽을 날을 미리 알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정확히는 죽을 날이 아니라 최대 수명을 의미한다.
무조건 182일 안에 죽는다는 것!
당장 내일 죽을 수도 있고, 100일 후에 죽을 수도 있지만, 182일을 넘겨 살 수는 없다는 얘기다.
'각성자 A급 이상이 되면 자신의 최대 수명을 알 수 있다더니 정말이었어.'
하급 헌터였던 자신이 비로소 A급 헌터가 됐다는 건 감개무량한 일이지만.
잔여 수명이 6개월이라니 이게 뭔가?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텐데.'
강혁은 넋빠진 표정으로 한동안 말없이 투명한 정보창을 바라봤다.
* * *
"대체 그게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죠? 갑자기 길드를 탈퇴하신다고요?"
"예."
검은 색 뿔테 안경에 날카로운 눈빛을 가진 20대 후반의 여성 김은아.
대한민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대형 길드인 여명의 인사 최고 책임자다.
그녀는 놀란 눈으로 앞의 남자를 바라봤다.
신장 187cm의 훤칠한 신장에 배우를 방불케할 만큼 잘생긴 얼굴.
흠이 있다면 언제나 한결같은 차가운 인상이지만 워낙 잘생긴 외모다 보니 그조차도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차강혁.'
올해 28살.
10년 전 고등학교 때 각성 후 일반 대학이 아닌 국가수호원 휘하 전투 헌터 과정 수료.
각성 당시 최하급으로 판정됐지만 꾸준한 노력으로 10년이 지난 지금은 전도유망한 여명 길드의 최상위 헌터 중 하나가 되었다.
괴력(怪力)과 강체화(强體化)를 활용한 근접전의 전투 능력은 이미 A급을 넘어서 AA급에 준할 정도다.
'전투 능력이 E급에서 A급으로 승급한 극히 희박한 케이스.'
한 달 한 번만 참여해도 되는 게이트 공략을 매주마다 참여한 것도 모자라 매일 극한의 수련까지 병행하는 독종.
수련에 미친 괴물!
그렇게 처절하게 인생을 갈아넣었으니 E급에서 A급 전투 헌터로 인정받을 수 있었으리라.
그런데 왜 갑자기 탈퇴를?
'틀림없어. 청룡이나 북두에서 스카웃 제의가 들어온 거야.'
김은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강혁은 여명 길드에서 절대 놓쳐서는 안 될 최상급 인재인 만큼 그녀는 곧바로 협상에 들어갔다.
"원하시는 연봉을 말씀해보세요. 그쪽에서 어떤 대우를 약속받았는지 모르지만."
"그런 거 아닙니다."
강혁은 탄식하듯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오늘 보니 시한부 6개월이더군요."
"시한부라니 그게 무슨?"
"저의 잔여 수명 말입니다. 182일 남았다고 하네요."
"잠깐만요! 그럼 설마?"
김은아가 다시 놀라 두 눈을 부릅떴다.
그녀 또한 A급 각성자다.
전투력이 A급에 도달한 각성자의 상당수가 시스템을 통해 자신의 최대 잔여 수명을 알게된다는 걸 모를 리 없었다.
[이름] 김은아
[잔여수명] 28,652일
이대로라면 그녀는 앞으로 대략 78년 정도 더 살 수 있다.
누군가에게 살해당하거나 하지 않는 한 105세까지 살 수 있는 것이다.
'대부분 A급 각성자가 되면 무난하게 100세를 넘기는데?'
일부 과도하게 마나를 소모한 각성자의 경우 수명이 줄어들긴 해도 10여년 정도일 뿐, 강혁처럼 30세도 되지 않아 요절하게 되는 경우는 없었다.
"잘못 보신거 아닌가요? 그럴 리가 없어요."
"저도 잘못 본거라면 좋겠군요. 그런데 아닙니다."
곧바로 강혁은 오른손을 스캔 장비에 대고 자신의 잔여수명 창을 스크린에 띄웠다.
[이름] 차강혁
[잔여수명] 182일
"맙소사! 정말이군요."
강혁의 잔여 수명을 확인한 김은아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다시 쳐다봤다.
"이해가 안 되네요."
"아무래도 제가 그간 너무 몸을 혹사해서 그런 거겠죠."
강혁은 씁쓸히 웃었다.
그냥 분수에 맞게 최하급 헌터로 만족했으면 이런 일이 없었지 않을까?
위로 올라가보겠다고!
최상위 헌터가 되겠다고!
미천한 자질을 노력으로 극복하겠다며 몸을 갈아넣었는데.
결국 그게 수명을 갉아먹은 모양이었다.
"괜찮아요?"
김은아가 걱정스레 물었다.
"괜찮다고 말하면 거짓말이겠죠.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저의 운명이 여기까지라는데."
"병원이라도 가보시는게 어때요?"
"그게 무의미한 일이라는 걸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지만."
어쩔 줄 몰라하는 김은아를 보며 강혁은 큭 웃었다.
"그래서 그냥 6개월 동안 여행도 하고 맛있는 것 실컷 먹어보려고요."
그동안 여행이라는 걸 해본 적이 없었다.
또한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도 사치로 여기고 오직 수련에만 집중했다.
하지만 죽음이 얼마 안 남은 지금 생각해보니 그저 허무할 뿐이었다.
대체 무엇을 얻겠다고 그리 수련에만 집착했던 것일까?
"아무튼 저는 더 이상 각성자니 헌터니 하는 건 관심없습니다. 얼마 남지 않은 인생 최대한 즐겨보려고요. 오늘, 가능한 빨리 탈퇴 및 퇴사처리 부탁합니다."
"알았어요. 바로 처리해드릴게요."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이 일은 비밀로 해주세요. 알려지는 것 원치 않습니다. 그냥 조용히 잊혀지고 싶네요."
"네."
김은아는 사무실 밖으로 사라지는 강혁의 뒷모습을 딱하다는 듯 바라봤다.
* * *
다음 날.
강혁은 간단하게 짐을 꾸려 건물 밖으로 나왔다.
'후...'
고개를 돌려 높이 30층의 화려한 건물을 올려다 본 그의 입가에는 순간 뿌듯한 미소가 피어나기도 했다.
'내가 정말 열심히는 살았지.'
그건 명백한 사실이었다.
열심히 정도가 아니라 처절할 정도로 노력했다.
E급 헌터에서 A급 헌터로 승급한다는 건 불가능의 영역에 도전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
놀랍게도 그는 그런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었지만.
'그런 미친 노력이 미래의 수명을 갈아넣는 거라는 걸 알았으면 절대 안 했을 거다.'
강혁은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2년의 헌터 과정 수료 후 무려 8년 가까운 시간을 근무해온 회사에서 나오니 기분이 좀 많이 우울하긴 했다.
'이제 나는 잊혀지겠지.'
길드에서도.
세상에서도.
그는 완전히 잊혀지게 될 것이다.
오직 수련에만 집중한 미치광이로 살다보니 사무적인 관계의 동료들은 몇 있지만 실제로 친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미련은 없어.'
나왔으니 뒤돌아보지 않는다.
[Web 발신]
XX은행.
은행 702,042,230원.
'벌써 들어왔네.'
퇴직금이었다.
김은아가 빨리 처리해준다더니 정말이었군.
7억이 넘는 돈.
그러나 그의 재산은 이게 다가 아니었다.
지난 10년 동안 게이트를 돌며 번 돈들. 틈틈이 게이트에서 획득한 진귀한 아이템들을 팔기도 했고, 주식에 투자하기도 했다.
'다 팔자.'
곧 죽는데 주식과 집이 다 무슨 소용일까?
그는 고아 출신에 결혼도 하지 않아 돈을 남겨줄 존재도 없었다.
그 동안 부자가 되겠다며 악착같이 모았는데.
'억울해서라도 다 쓰고 죽어야지.'
다음 날부터 며칠에 걸쳐 그는 보유한 주식과 주택 등을 모조리 처분했다.
그것들을 퇴직금이랑 합치니 103억 정도.
'내 재산이 이렇게 많았나?'
불우하고 가난했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제법 부자가 된 것이지만 그래봤자 무슨 소용인가?
수명이 이제 반 년 정도 남았을 뿐인데 말이다.
모든 게 허무할 뿐이지만 그가 전재산을 현금화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S급 장병기인 백룡대도(白龍大刀).
소설 삼국지의 관우가 사용하던 청룡언월도와 유사한 형태의 병기다.
국가수호원 소속 각성무기연구소에서 괴물같은 무기를 만들어낸 것이다.
물론 이보다 대단한 무기들도 있다. SS급 중에는 수천억을 넘어 조단위 무기도 있다 했으니까.
그런 건 꿈도 꾸지 못하지만.
백룡대도는 가격이 딱 100억이었다.
보통 때는 팔찌의 형태로 착용하고 있다가 전투 시 마나를 주입하면 거대한 대도의 형태로 바뀐다.
S급 각성무기인 만큼 그 위력은 게이트의 3성급(★★★) 보스 괴물도 단번에 조각내버릴 만큼 강력하다 들었고.
'드디어 그걸 살 수 있겠구나.'
어차피 죽으면 못 쓸 돈.
마지막으로 갖고 싶은 무기를 사는 거다.
그러고도 3억이 남는다.
그걸로 여행도 하고 먹고 싶은 것도 먹으면 되리라.
* * *
5개월 후.
강혁은 강원도에 위치한 산에 들어왔다.
지난 5개월 동안 소원대로 세계 여행도 하고 맛있는 것도 실컷 먹었다.
그러다 보니 들어간 비용이 대략 1억.
아직 2억이 남았다.
남은 돈을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 몽땅 털어서 강원도에 위치한 이곳 산을 구매한 것이다.
도로와 인접하지 않은 맹지(盲地)인데다 지형도 무척이나 험악했지만 왠지 이 산이 마음에 들었다.
'시세보다 꽤 비싸게 샀어.'
급하게 매입하느라 1억도 안 되는 산을 2억이나 주고 샀다.
물론 후회는 없다.
어차피 곧 죽을 상황인 그에게는 재산가치 따위는 중요하지 않으니까.
'그냥 조용히 죽을 장소를 찾았는데.'
고민 끝에 산으로 선택했다.
사실 아무 산에나 들어가 죽더라도 무슨 상관일까?
그러나 그는 남의 땅에서 죽는 건 민폐라는 생각에 산을 구매한 것이다.
마지막 사치라면 사치였다.
'여기서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생을 마감한다.'
지금은 팔찌로 변환된 백룡대도와 함께 말이다.
강혁은 자신이 죽었을 때 누군가 와서 백룡대도를 챙기는 걸 원하지 않았다.
무의미한 일일 수도 있지만.
그로서는 저승이라는 곳이 있다면 평생의 재산을 다 털어 구매한 S급 장병기인 백룡대도도 가져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팔에 차고 죽으면 혹시 모르잖아.'
아닌 걸 알면서도 강혁은 집착을 버리지 않았다.
[이름] 차강혁
[잔여수명] 28일
'이제 딱 4주 남았네.'
강혁은 산의 가파른 절벽 쪽으로 향했다.
천길 낭떠러지까지는 아니어도 엄청나게 높은 절벽.
신기하게도 그 중간에 수풀에 가려진 자그만 동굴의 입구가 하나 보였다.
'저기가 딱이야.'
최후를 맞이하기에 딱 적당한 장소.
누구든 쉽게 접근하기 힘든 험악한 지형에 위치해 있었지만 강혁은 망설임없이 절벽을 타고 올랐다.
"후... 이제는 이런 것도 힘이 든다."
본래라면 이보다 더 험악한 암벽도 가볍게 기어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체력이 쉽게 고갈되는 것은 물론이고 마나조차 적지않게 소모되었다.
'고작 이 정도에 지치다니. 내가 정말 죽기는 죽는 모양이구나.'
잔여 수명 기간이 줄어들수록 이전보다 쉽게 지치고 회복도 느려진다고 했다.
그런 현상이 점차 진행되다가 수명이 한 달 남았을 때부터는 더욱 급격히 체력과 마나가 고갈되고.
마지막 10일은 각성의 힘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물론 일반인의 체력에도 미치지 못한 채로 무력하게 누워있다가 사망에 이르는 식이었다.
'더 늦지 않게 산에 들어오기 잘했어.'
강혁은 저 동굴을 자신의 무덤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포기하지 않고 동굴까지 기를 쓰고 올라갔다.
'의외로 큰 동굴이네?'
동굴 입구는 다리를 쭈구린 채 앉은 걸음으로 이동해야 할만큼 비좁았고 심지어 기어가야 하는 구간도 있었다.
다행히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넓어지는 구조였다.
'근데 웬 솥이?'
동굴은 어두컴컴했지만 입구를 통해 들어온 햇빛이 비치는 장소에 다리가 세 개 달린 괴상한 솥이 하나 놓여 있었다.
외부로는 특이한 동물의 문양이 양각되어 있어 마치 박물관에서 보던 고대 유물 같아 보였는데.
'신기할 정도로 깨끗해.'
특이하게도 솥은 누군가 닦아놓기라도 한 것처럼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하고 매끈했다.
'이 솥에다 라면 끓여 먹어도 되겠는데?'
배낭에 약간의 식량은 준비해왔다. 죽을 때까지 그냥 굶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당연히 식량 중에는 라면도 몇 봉지 있었다.
냄비도 챙겨오긴 했지만 강혁은 이 다리 세 개 달린 괴상한 솥이 마음에 들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마치 오래 전에 잃어버린 솥을 다시 찾은 듯한 친근한 느낌.
'진짜 라면을 끓여?'
엉뚱한 생각이지만 왠지 끌렸다.
그렇지 않아도 배가 고프던 참이었는데.
'못 할 게 뭐냐.'
곧바로 물을 부은 후 솥 아래 버너를 배치해 불을 켰다.
부글부글.
잠시 후 물이 끓기 시작하자 라면과 분말수프를 넣었다.
'냄새 좋고.'
배에서 꾸루룩 소리가 들린다.
그러나 라면이 완전히 익으려면 좀 더 기다려야 한다.
그렇게 약 2분이 지났을까?
화악!
갑자기 솥 안에서 정체불명의 빛이 뿜어져나왔다.
현대수선전 2화
'웬 빛?'
솥의 끓는 물 속에 넣은 라면이 잘 익기를 기다리던 강혁은 갑자기 괴상한 빛이 뿜어져나오자 깜짝 놀랐다.
화악! 확!
처음에는 색을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빛이었지만 이내 푸르스름하게 변하더니 마치 청금석처럼 진한 파랑색이 되었다.
그게 다가 아니었다.
바로 이어서 시뻘건 빛이 생겨나더니 그 옆으로 눈부신 황금빛이 피어났고, 다시 신비한 백색의 빛과 흑색의 빛까지 한데 어울려 나선형으로 회오리치기 시작했다.
그렇게 생겨난 오색(五色)의 광채는 대략 30초 정도 솥 주변을 휘돌다가 일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대체 뭐지?'
워낙 황당한 일이라 강혁은 꿈을 꾸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이 솥이 뭔가 대단한 기능을 가진 아이템인 건가?'
게이트에서 괴물들을 죽이면 희박한 확률로 각종 마도구 아이템들이 드롭된다.
그런 것들을 숱하게 보아왔던 강혁이라 신기한 기능이 부여된 아이템이 존재한다는 것에 놀랄 건 없었다.
'이상해. 이 솥에서는 마나의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는데.'
마도구 아이템이라면 아무리 허접한 것이라도 미약하나마 마나의 기운을 풍기는 게 정상.
그러나 이 솥은 모양만 좀 괴상할 뿐 매우 평범한 철제 냄비일 뿐이었다.
'설마 나도 감지 못하는 특별한 아이템인 건가?'
S급을 넘어선 SS급, 혹은 SSS급으로 분류되는 보물 중에는 특별한 감별 능력이 없이는 확인이 불가능한 것들이 있다 듣긴 했지만.
'그래봤자 고작 솥일 뿐이야.'
그리고 설령 SSS급이면 뭐하나.
앞으로 28일 후면 죽을 몸인데 말이다.
'라면이나 먹자.'
솥에서 정체불명의 오색빛 광채가 뿜어져나와 왠지 좀 찜찜하긴 했다.
혹시 먹고 죽는 건 아닐까?
그렇다 해도 강혁은 라면을 버릴 생각이 없었다.
'뭐 죽으면 죽는 거지.'
28일 후에 죽으나 오늘 죽으나.
젠장!
어차피 죽는다 생각하니 딱히 며칠 더 살겠다는 미련도 사라진다.
지금은 그냥 라면을 먹는데 집중하자.
먹는 게 남는 거다.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곱다고 했으니 말이야.
후룩! 짭짭!
'왠지 더 감칠맛이 나는 것 같은데 기분 탓인가?'
면발이 더욱 쫄깃한데다 국물 맛도 끝내준다.
'진짜 맛있어.'
너무 맛있어서 눈물이 날 지경이다. 인생 라면을 여기서 먹게 될 줄이야.
후루룩! 후룩!
강혁은 솥의 국물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먹어치웠다.
"잘 먹었다. 이 솥 진짜 대박이네. 내일 또 끓여먹어야지."
그런데.
"······?"
왜 이리 몸이 개운한 건가?
놀랍게도 라면을 먹었을 뿐인데 온몸에 기운이 넘치기 시작했다.
'이건... 생명력 물약을 마셨을 때랑 비슷해.'
말도 안 되는 일.
고작 라면을 먹었을 뿐인데 그런 일이 벌어진다고?
[당신의 고갈된 체력과 마나가 모두 회복되었습니다.]
역시나 착각이 아니었다.
체력과 마나가 최대치까지 회복!
아직 각성자로서의 능력은 남아있어 체력 회복과 같은 특별한 일이 벌어지면 이같은 알림이 들려온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었다.
[당신의 최대 잔여 수명이 10일 늘어났습니다.]
경악할 만한 내용의 알림이 귀를 울렸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
수명이 늘어났다고?
[이름] 차강혁
[잔여 수명] 38일
믿기지 않지만 정말이었다.
알림을 듣고 확인해 보니 정확히 10일의 수명이 늘어나 있었다.
이게 진짜 현실일까?
혹시 꿈은 아닐까?
기쁘기도 하지만 너무도 황당한 일이라 잘 실감이 나지 않았다.
수명을 늘려주는 SSS급 아이템!
그게 바로 이 괴상한 솥이었던 것이다.
'그럼 한 번 끓여먹을 때마다 10일 씩 수명이 늘어나는 식인가?'
정말로 그런지는 시험해보면 알게 되겠지.
라면 한 봉지 더!
곧바로 솥에 물을 넣고 끓인 후 라면과 분물수프를 넣고 기다렸다.
그런데 이번에는 한참을 기다려도 아까처럼 오색 광채가 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라면은 잘 익은 터라 먹어보기로 했다.
후룩! 쩝쩝...
"음... 맛이 별로인데?"
맛이 현저히 떨어졌다.
아까의 그 인생 라면 맛이 아니었다.
어째서 이번에는 솥의 신비한 효과가 적용되지 않는 걸까?
그래도 혹시 모른다는 생각에 강혁은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몽땅 다 먹었다.
'제발! 단 하루라도 늘어나라.'
[이름] 차강혁
[잔여 수명] 38일
안타깝게도 수명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아무래도 딱 한 번만 적용되는 효과였던 모양이다.
실망감 때문인지 아니면 맥이 풀려서인지.
갑자기 눈꺼풀이 무거워지더니 눈이 저절로 감기며 졸음이 엄청나게 밀려왔다.
"으...! 왜 갑자기 잠이...?"
강혁은 그대로 동굴 바닥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 * *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강혁은 갑자기 뭔가가 몸을 짓누르는 것을 느끼고 깜짝 놀랐다.
그런데 몸이 마비라도 된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눈을 뜰 수가 없어.'
눈꺼풀이 너무 무거워 움직일 수가 없었다.
설마 가위에라도 눌린 것일까?
다행히 힘겹게 눈을 뜨는데 성공했는데 뜻밖에도 괴상한 형체의 뭔가가 그를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불덩어리를 연상케하는 시퍼런 두 개의 안광.
악귀처럼 흉악하게 일그러진 인상.
그 아래 우람한 근육질의 상체를 그대로 드러내고 하체에는 조선 시대에서나 볼법한 갑옷 바지를 입고 있었다.
또한 길이가 30센티는 될 법한 커다란 두 발은 맨발 그대로 내놓은 상태인데 마치 시체의 발처럼 푸르댕댕하게 굳어 있었다.
'괴...괴물!'
강혁은 경악해하면서도 괴물의 정체가 뭔지 살펴봤다.
그동안 그는 괴물들이라면 게이트에서 질리도록 많이 봤고 또 질리도록 죽여봤으니까.
'처음 보는 녀석인데?'
더구나 마나의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일단 안심이었다.
성급(星級) 괴물은 아니라는 뜻이니까.
성급 괴물 중 가장 하위인 1성(★) 괴물이라 해도 제법 많은 마나를 보유하고 있으니 말이다.
'여긴 게이트도 아닌데 왜 저런 괴물이?'
무시무시한 괴물이 노려보고 있었지만 강혁의 표정은 눈에 띄게 여유로워져 있었다.
갑자기 몸이 굳어있어서 놀랐을 뿐 잠시 후 몸이 풀리면 저깟 괴물 쯤은 한 주먹에 때려죽일 자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잠들어 있어도 그렇지. 고작 저런 하급 괴물이 가까이 오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할 줄이야.
왠지 한숨이 나왔다.
예전 같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
아마도 죽을 날이 가까워지자 감각이 심각하게 무뎌진 모양이었다.
"내 조화역천정에다 밥을 해먹은 녀석이 네놈이더냐?"
그러다 험악한 외형의 괴물의 입에서 사람의 음성이 들려나오자 강혁은 귀를 의심했다.
괴물이 어떻게 사람의 말을?!
"왜 대답이 없느냐? 당장 대답하지 않으면 네놈의 머리통을 부숴버리겠다."
괴물이 해머를 연상케하는 쇠방망이를 번쩍 쳐들었다.
"자...잠깐만요!"
강혁은 황급히 입을 열었다.
괴물처럼 보이지만 사람이었던 건가?
여전히 몸이 마비된 듯 움직이지 않은 상태라 이대로 저 쇠방망이에 맞으면 정말로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것이다.
"혹시 조화역천정이라는 게 저기 있는 세 발 달린 솥을 말하는 거라면 제가 거기다 라면을 끓여먹은 게 맞습니다."
강혁은 솔직하게 말을 이었다.
"죄송하게 됐습니다. 버려진 솥인 줄 알았거든요."
일단 몸이 풀릴 때까지는 시간을 벌어야 할 것이다.
그러자 괴물이 더욱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강혁을 노려봤다.
"조화역천정(造化逆天鼎)은 하루에 한 번밖에 사용할 수 없는 물건이니라. 그런데 무도한 네놈 때문에 내가 오늘 굶게 생겼구나."
하루에 한 번?
어쩐지.
그래서 두 번째 라면을 끓여먹을 때는 아무런 신비한 효과가 발생하지 않았던 것이다.
처음 한 번 끓여먹었을 때는 수명이 10일이나 늘어났는데 말이다.
'그런데 왜 계속 몸이 굳어있는 거야?'
강혁은 이상함을 느꼈다.
A급 각성자인 그에게 하급 괴물의 마비독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즉, 약간의 시간만 지나면 움직일 수 있어야 정상인 것이다.
마나를 통해 독기운을 누를 수 있으니까.
그런데 마나가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설마 마나가 흩어진 걸까?
천만에!
마나가 그대로 있지만 그의 통제에 따르지 않고 있는 것이다.
17세 때 마나를 각성하고 헌터 과정을 통해 마나를 다루는 법을 배운 이후 단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는데.
"소용없는 짓이다! 네놈이 무슨 짓을 해도 내가 금제를 풀어주기 전에는 움직일 수 없느니라."
"당신이 내 몸에 금제를 걸었다는 말입니까?"
"물론이다. 보아하니 네놈이 인간들 사이에서는 제법 힘을 쓸 것 같다만 그래봤자 내 앞에서는 한낱 벌레에 불과할 뿐이지. 어디 자신 있으면 그 금제를 한 번 풀어보거라."
"으윽! 내 몸에 무슨 짓을 한 거냐?"
강혁은 기를 쓰고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꿈쩍도 할 수 없었다.
그 모습을 보며 괴물이 가소롭다는 듯 키득댔다.
"생기가 많이 느껴지지 않는 걸 보니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녀석이로군. 그래도 조화역천정에다 밥을 해먹었으니 수명이 하루는 늘었을 테지. 운이 아주 좋은 녀석이로구나."
순간 강혁의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잠깐만요! 방금 그 말 사실입니까? 정말로 저 솥에다 음식을 해먹으면 수명이 늘어나는 겁니까?"
그러자 괴물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 솥이 공연히 조화역천정이라 불리우겠느냐? 나에게는 그저 원기 회복에 도움이 되는 평범한 밥솥에 불과하지만 네 녀석과 같은 평범한 인간에게는 비록 하루 뿐이지만 수명이 늘어나는 역천의 효과가 적용되는 것이다."
A급 각성자인 강혁을 보고 평범한 인간이라니.
그런데 틀린 말이 아니었다.
강혁은 괴물의 정체가 심상치 않음을 확신했다.
'SS급 아니... 어쩌면 SSS급 각성자 정도 되는 수준이 분명하다.'
마나의 기운조차 감지할 수 없는 무서운 존재!
전세계에서 SSS급 각성자의 숫자는 몇 명 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게 아니면 최소 6성 아니, 어쩌면 말로만 듣던 7성급 재앙종 괴물일 수도 있었다.
그런 괴물들은 사람의 모습을 하기도 하면서 말도 한다고 했으니 말이다.
설마 그런 건가?
강혁은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대체 당신은 누구십니까?"
"그건 너 따위 녀석이 알 것 없다. 감히 허락없이 내 조화역천정을 사용하였으니 네놈을 어떻게 죽여야할지 고민이구나."
"한 번만 봐주십시오. 어차피 저 며칠 못 삽니다. 아까 보셨듯이 수명이 얼마 안 남았습니다."
정확히는 38일 남았다.
아까까지는 지금 죽으나 그때 죽으나 그게 그거라 생각했는데 막상 괴물에게 맞아죽을 상황이 되니 삶에 애착이 갔다.
"흐음... 틀린 말은 아니구나. 비록 오늘 하루 수명이 늘었기는 해도 어차피 곧 죽을 놈을 굳이 때려죽일 필요는 없겠지."
다행히 괴물도 강혁을 측은하게 생각했는지 번쩍 쳐들었던 쇠몽둥이를 아래로 내렸다.
'후우!'
비로소 강혁은 안도했지만 한편으로 의아하기도 했다.
'근데 왜 하루라는 거지?'
사실은 하루가 아니다.
그는 무려 그 10배 즉, 10일이나 수명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물론 굳이 그 사실을 괴물에게 말할 필요는 없으리라.
"그럼 용서해주시는 겁니까?"
강혁은 조심스레 물었다.
그러자 괴물이 잠시 고심하는 듯하다 말했다.
"그냥은 어림없고 네 녀석이 한 가지 내가 시키는 일을 해내면 용서해주겠다. 나를 따라와라."
그 순간 온 몸을 억누르던 마비의 금제가 사라졌다.
강혁은 기다렸다는 듯 벌떡 일어났다.
'몸이 정상으로 돌아왔군.'
다시 체내의 마나를 그의 의지로 통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S급 장병기인 백룡대도도 건재하고!
괴물의 뒤통수를 노려보는 강혁의 두 눈이 섬뜩하도록 차갑게 빛났다.
현대수선전 3화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구나."
그런데 괴물이 강혁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힐끗 뒤돌아 그를 노려봤다.
그 순간 다시 강혁은 몸이 마비되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제 네놈의 처지를 알았느냐? 네놈의 금제는 풀린 것이 아니다. 잠시 네 몸을 움직이게 해준 것일뿐 내 허락없이 일정 반경을 벗어나는 순간 금제가 발동되게 되어 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당신이 시키는 일만 하면 보내주는 겁니까?"
"물론이다. 내 말만 잘 들으면 굳이 얼마 살지 못할 놈을 죽일 이유가 없지 않겠느냐?"
괴물은 동굴 안쪽으로 들어갔고 강혁은 뒤따라갔다.
동굴은 생각보다 꽤 깊었고 미로처럼 여러 갈래길이 나오기도 했다.
"이곳이다. 저 아래로 내려가 잎사귀가 자줏빛으로 빛나는 약초가 보이면 즉각 뽑아서 여기에 담아오면 된다."
괴물은 투박하게 생긴 모종삽과 자그만 망태기 하나를 강혁에게 내밀었다.
"약초가 상하지 않게 조심해라. 제대로 안 하면 네놈의 머리통을 부숴버릴 것이다."
그 말과 함께 괴물이 손짓을 하는 순간 강혁의 시야가 밝아졌다.
괴물이 무슨 스킬을 펼쳤는지 어둑한 동굴 속을 대낮처럼 훤히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라이팅 스킬인가? 이 정도는 나도 할 수 있는데...'
강혁은 망태기를 허리에 매달고 삽을 그 안에 넣은 후 아래로 조심스레 내려갔다.
'뭐가 이렇게 깊어?'
설마 끝도 없는 절벽같은 곳이 동굴 안에 펼쳐져 있을 줄이야.
특유의 괴력과 민첩성을 가진 강혁과 같은 각성자가 아니라면 쉽사리 내려가기 힘든 지형이었다.
'직접 캐오면 될 것을 왜 나에게 시키는지 모르겠네.'
SSS급으로 추정되는 괴물의 능력이라면 이런 곳쯤은 쉽게 내려가 약초를 캘 수 있을 텐데 말이다.
'표정을 보니 아래에 있는 뭔가를 두려워하는 듯했어.'
혹시라도 SSS급 괴물이 두려워하는 뭔가가 저 아래에 있다면?
그러나 어차피 도망칠 수도 없는 상황이니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뭐가 있든 조심하면 되겠지.'
약초 하나만 캐오면 된다고 했으니 말이다.
그렇게 한참을 내려가자 바닥이 나왔다.
'저건?'
뜻밖에도 자줏빛 잎사귀의 약초는 바닥에 널려 있었다.
'잘됐네. 멀리 갈것도 없이 바로 캐면 되겠어.'
혹시 주변에 뭔가 위협적인 존재가 있나 살펴봤지만 다행히 그런 건 없었다.
다만 뭔가 뒷골이 서늘하고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듯한 느낌.
왠지 기분이 찜찜했다.
'젠장! 귀신이라도 있는 건가?'
팍! 팍!
강혁은 서둘러 삽을 움직여 약초를 캤다.
마음은 조급했지만 두 번 일을 하고 싶지 않아서 최대한 조심스럽게 약초의 뿌리 하나도 상하지 않게 뽑았다.
생소한 일은 아니었다.
게이트에서 각종 물약의 재료로 쓸 약초를 꽤나 채집해봤던 터라 상당히 능숙한 편이었다.
'그러고 보니 처음 보는 약초네.'
솔직히 무슨 약초인지 알고 싶지도 않았다.
빨리 올라가 괴물에게 이 약초를 던져주고 동굴 밖으로 나가고 싶을 뿐.
"벌써 올라오느냐? 약초는 캐왔겠지?"
"예. 망태기 안에 넣어놨습니다."
강혁이 금방 올라오자 괴물은 놀란 눈치였다.
그는 곧바로 망태기에서 약초를 확인하더니 입을 헤죽 벌려 웃었다.
"크하하하! 역시나 자룡초가 그곳에 있었구나."
그 모습을 본 강혁은 안도했다.
그게 자룡초라는 건가?
놈의 기뻐하는 표정을 보니 뭔가 대단한 약초인 모양이었다.
"훌륭하다. 뿌리 하나도 상하지 않게 잘 캐왔구나. 혹시 이전에 약초를 캐본 적이 있느냐?"
"······."
강혁의 채집 능력은 여명 길드에서도 알아줄 정도였지만 그것을 사실대로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괴물의 번뜩이는 눈빛.
자칫 능숙하다 말했다가는 약초 노예로 부려질 것 같은 불안감에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오늘 처음 해본 일입니다."
그러자 괴물의 눈에서 다시 시퍼런 안광이 번쩍였다.
"처음인데 이 정도라는 건가? 그 말이 사실이라면 네 녀석은 약초 채집에 대단한 자질을 가진 것이구나."
이런!
그러고 보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 건가?
그렇다고 오랫동안 약초를 캐봤다고 말할 수는 없는 일.
강혁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자질이 아니라 그냥 운이 좋았을 뿐이죠. 그보다 약속대로 당신의 조건을 들어줬으니 이제 저는 가보겠습니다."
그러자 괴물이 묘한 눈빛으로 강혁을 바라봤다.
"물론이다. 가고 싶으면 가도 된다. 하지만 나와 거래를 하나 하지 않겠느냐?"
"거래라고요?"
"내일부터 9일 동안 하루에 한 번씩 오늘처럼 저 아래 내려가서 약초를 하나씩 캐오너라. 그렇게 하면 네게 조화역천정을 10년 동안 빌려주도록 하마. 어떠냐?"
10년이라고?
하루에 한 번 음식을 해먹으면 하루의 수명이 늘어나는 조화역천정을 무려 10년이나 빌려준다고?
그럼 강혁의 수명은 10년이 늘어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정말입니까?"
"강요는 하지 않는다. 네 스스로 선택해라. 나와 거래 하겠느냐?"
"······."
강혁은 아래에 위험한 뭔가가 존재하는 건 분명히 느꼈다.
또한 괴물이 약속을 지키지 않을 수도 있고.
그렇다 해도 10년의 수명이 걸린 일이라면 모험해볼 가치가 있었다.
'아니, 10년 이상일 지도 모르지.'
그는 라면 한 번 끓여먹었는데 하루가 아닌 무려 10일의 수명이 늘어났다.
만약 매번 그렇게 된다면 10년이 아닌 100년...!!!
설마 그런 허황된 일이 벌어지지는 않겠지만.
어찌됐든 최소한 10년은 보장받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이다.
"그 거래 수락합니다."
강혁이 비장한 눈빛을 지으며 외치자 괴물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끄덕였다.
"잘 생각했다. 그럼 내일 다시 올 테니 여기서 쉬도록 해라."
"그럴 거 없고 그냥 오늘 나머지 아홉 뿌리를 다 캐오면 안 됩니까?"
내려가서 약초 한 뿌리 캐오는데 대략 1시간 정도 걸렸다.
그럼 굳이 내일로 미룰 필요가 있을까?
그리고 한 번에 한 뿌리만이 아니라 아홉 뿌리를 다 캐면 굳이 또 다녀올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게 그리 쉬운 일이었으면 내가 처음부터 그렇게 하라 시켰겠지. 영기가 깃든 약초는 그 삽으로 하루에 한 뿌리 밖에 캘 수 없다."
"약초에 영기가 깃들어요? 그런 것도 있습니까?"
그러자 괴물이 싸늘한 눈빛으로 강혁을 노려봤다.
"너는 몰라도 된다. 내일 이 시간에 다시 올 테니 그때까지 여기 머물고 있도록 해라. 나를 속이고 이 동굴에서 나갈 생각은 버리는 게 좋을 것이다."
"그런 일은 없으니 걱정마십시오."
조화역천정 10년 계약이 걸린 일.
어차피 강혁도 밑져야 본전이었다.
수명이 38일 남았는데 못할 게 뭔가?
이 모험이 성공하면 대박이 나는 거고, 아니면 그냥 죽는 거고.
* * *
다음 날 아침.
강혁이 잠에서 깨어나 보니 머리맡에 조화역천정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벌써 아침?'
그러고 보니 정신없이 잔 것 같았다. 갑자기 졸음이 밀려와 쓰러져 잔 건 맞지만 그 사이 이렇게 시간이 지나 있을 줄은 몰랐다.
'무슨 잠을 이렇게 오래 잔 거야?'
그는 아무리 피곤해도 이토록 오래 잠을 잔 적이 없었다.
몇 시간만 자면 충분했으니까.
'틀림없어. 그 괴물 놈의 짓이야. 내가 도망치지 않게 그놈이 내 몸에 무슨 수작을 부린 게 분명해.'
그러나 몸의 어디를 살펴봐도 딱히 이상은 발견되지 않았다.
마나도 체력도 최상의 상태.
배가 조금 고픈 것 외에는 모든 게 정상이었다.
'그나저나 어제 일이 꿈만 같군.'
수명이 늘어난 걸 눈으로 확인하지 않았으면 그냥 허망한 꿈을 꿨다고 생각했으리라.
[이름] 차강혁
[잔여 수명] 37일
그러나 절대 꿈이 아니었다.
28일 남았던 수명이 어제 10일 늘어 38일이었다가 하루가 지난 오늘 37일로 표시되고 있는 것이다.
수명을 늘려주는 솥.
'정말 초대박급 아이템이야. 이런 게 현실에 존재하다니 믿기지 않아.'
그런 만큼 과연 앞으로 9일 후에 괴물이 약속대로 조화역천정을 빌려줄지는 의문이었다.
뭔가 대비를 해야할 텐데 지금으로서는 딱히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지. 일단은 저기다 또 라면을 끓여먹자.'
과연 오늘도 수명이 늘어나나 확인해볼 필요도 있으니까.
'그래. 어차피 밑져야 본전이잖아. 먹는 게 남는 거야.'
곧바로 그는 솥에 물을 붓고 라면을 끓이기 시작했는데.
화악!
역시나 어제처럼 솥에서 신비한 오색 광채가 피어났다.
이어서 조리된 면을 먹어보니 어제 처음 먹었던 그 인생 라면 그 맛이었다.
[당신의 최대 잔여 수명이 3일 늘어났습니다.]
[이름] 차강혁
[잔여 수명] 40일
라면을 모조리 먹어치우자 곧이어 들려오는 알림.
이번에는 3일?
어제는 10일이었는데 왜 오늘은 3일일까?
'설마 수명 증가 효과가 랜덤하게 적용되는 건가?'
그런데 왜 괴물은 한 번 사용에 하루의 수명이 늘어난다고 말했을까?
그래도 괴물이 말한 하루보다는 길어서 다행이었다.
'어쨌든 그놈 말대로 이 솥은 하루에 한 번만 신비한 능력이 작동하는가 보네.'
그렇게 솥을 살피고 있을 때 뒤쪽에서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밥을 다 먹었으면 어서 내려가서 자룡초 한 뿌리를 캐오지 않고 뭐하느냐?"
어느새 괴물이 나타나 특유의 살벌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 다녀오려 했습니다."
강혁은 어제처럼 망태기를 허리에 두르고 삽을 그 안에 넣은 후 절벽 아래로 내려갔다.
미끄럽고 험한 지형이었지만 게이트에서 이 못지 않은 험악한 지형을 수없이 드나들던 강혁이었다.
게다가 어제 한 번 다녀온 경험이 있던 터라 그 사이 요령이 생겨 오늘은 더욱 수월하게 내려갔다.
'내려오는 건 문제가 아닌데...'
바닥에 가까워질 수록 엄습하는 섬뜩한 기운!
오늘은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으윽! 어제보다 훨씬 더 강렬해.'
몸서리치는 오한까지!
정말로 귀신이라도 있는 것일까?
두 발이 바닥에 닿는 순간 전신에 소름이 돋았고 뒷목에는 식은땀이 차올랐다.
그러나 주변을 아무리 살펴도 뭔가는 보이지 않았다.
'정말 기분나쁜 곳이다.'
혹시 모른다는 생각에 팔찌 상태인 S급 장병기 백룡대도를 무기로 변환시켜 목표로 찜해 둔 자룡초 옆에 세워놨다.
그리고 조심스레 삽으로 자룡초 주위를 파냈다.
팍! 팍!
그러던 강혁이 돌연 삽을 땅에 꽂더니 번개처럼 뒤를 돌았다.
백룡대도가 땅에서 뽑혀나옴과 동시에 그의 몸이 그대로 앞으로 돌진하며 전방의 한 공간을 갈랐다.
촤각!
"끼아악!"
뼈가 잘리는 소리와 함께 뭔가가 맥없이 나동그라졌다.
머리에 뾰족한 흑색 뿔이 솟아있는 붉은 비늘 거대뱀.
놈은 목이 잘렸는데도 몸체가 멀쩡히 살아움직이며 다시 덤벼들었다.
강혁은 차분히 대도를 휘둘러 뱀의 몸체도 동강냈다.
그러자 어둠 속에서 비슷하게 생긴 또 다른 뱀들이 대거 모습을 드러냈다.
'흑각독사...?'
게이트에서 흔히 보던 괴물 중 하나다.
성급이 아닌 일반 등급의 괴물이라 별로 상대하기 어렵지 않지만.
워낙 기척이 없이 움직이는 데다 맹독을 지니고 있어 실수로라도 물리는 순간 즉사할 수도 있었다.
'여기가 괴물 뱀들의 소굴이었나?'
잔뜩 긴장했던 강혁의 입가에 싱겁다는 듯 조소가 피어났다.
곧바로 그의 대도가 몇 번 번쩍이는 순간 앞의 흑각독사들이 모조리 동강나 널브러졌다.
'별것도 아닌 놈들이지.'
그런데 왜 이리 오싹한 기분이 드는 것일까?
괴물 뱀들을 모조리 해치웠는데도 그러한 섬뜩한 느낌은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
'확실히 뭔가 있긴 있는 것 같은데...'
방금 전 뱀들이 나온 쪽 동굴 안.
그곳에서 숨막히는 살기가 피어나오고 있었다.
현대수선전 4화
'저 안에 뭐가 있는 거지?'
정체불명의 강력한 살기가 피어나는 또 다른 동굴.
시야에서 꽤 멀리 어둠 속에 숨겨진 동굴이다 보니 어제는 발견하지 못했다.
'저 동굴이 꽤 깊어 보이는데 어디까지 이어져 있는 걸까?'
그러고 보면 이곳 괴물의 동굴 절벽 아래에는 괴상한 약초들만 있는 게 아니라 또 다른 동굴들로 이어지는 지하 세계가 펼쳐져 있는 것이 분명했다.
'왠지 기분이 찜찜해. 가능하면 접근하지 않는 게 좋겠다.'
강혁은 공연히 동굴 안으로 들어가 위험을 자초하고 싶지 않았다.
빨리 캐고 올라가는 게 현명한 일.
잠시 후 자룡초 한 뿌리를 채취하는데 성공했다.
백룡대도를 팔찌로 변환해 착용한 후 곧바로 절벽을 타고 올라가자 괴물이 특유의 푸른 안광을 번뜩이며 기다리고 있었다.
"자룡초는 가져왔느냐?"
"예. 여기 한 뿌리 캐왔습니다. 확인해 보십시오."
강혁이 망태기를 넘기자 괴물이 그 안을 확인하더니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오늘도 제법 훌륭하구나. 그런데 혹시 위험한 일은 없었느냐?"
"흑각독사들이 나타나 조금 힘들었습니다."
"흑각독사?"
괴물이 고개를 갸웃하며 묻자 강혁은 뱀의 모양을 알려줬다.
"머리에 검은 뿔이 있는 붉은 색 뱀으로 길이가 3미터 정도 됩니다."
순간 괴물이 놀란 듯 두 눈을 부릅떴다.
"그건 귀각혈사가 아니냐?"
"귀각혈사는 또 뭡니까?"
"네놈이 만난 그 뱀들은 귀각혈사(鬼角血蛇)라 불린다. 그놈들이 있는 곳에는 근처에 삼두귀각혈사(三頭鬼角血蛇)가 반드시 있느니라."
"삼두...? 머리가 세 개 달려있는 뱀입니까?"
"물론이다. 그것이 나타나면 네놈의 하찮은 실력으로는 상대하기 불가능할 터..."
괴물은 뭔가 고심하는 듯하더니 강혁에게 웬 종이 하나를 건넸다.
"받거라. 이 호신부를 몸에 지니고 있으면 귀각혈사들이 네 몸에 접근하는 걸 막아줄 것이다."
호신부?
뭔가 했더니 부적이었나?
그러고 보니 종이에는 핏빛으로 적힌 괴상한 글자들이 마치 살아있는 듯 꿈틀거리고 있었다.
왠지 찜찜하다는 생각에 강혁은 손을 저었다.
"그 뱀들이 귀각혈사인지 흑각독사인지 모르겠지만 제가 알아서 처리할 수 있으니 걱정마십시오."
그러자 괴물이 비릿한 조소를 흘렸다.
"오늘은 네놈이 운이 좋았을 뿐이다. 그것들은 귀독을 가진 놈들이라 물릴 경우 네놈은 인지가 사라진 실혼인이 되고마니 주의해야 할 것이다."
맙소사!
"뱀들에게 한 번 물린다고 영혼을 잃어버려요?"
"잃어버리는 게 아니라 사실상 그대로 죽는 거지. 그런데도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이는 터라 실혼인이라 말하는 것이다. 쉽게 설명하자면 너희들이 말하는 좀비와 비슷한 부류라 할 수 있다."
맙소사!
뱀에게 물리면 좀비가 된다고?
정말로 그런 거라면 그 뱀들은 그가 알고 있던 흑각독사가 아닌 게 분명했다.
'실수로라도 물리면 안 되겠군.'
강혁은 황급히 괴물이 내민 호신부를 받아들었다.
"정말로 이 부적을 가지고 있으면 그 뱀들이 안 덤벼듭니까?"
"물론이다. 그러나 삼두귀각혈사에는 통하지 않으니 그놈이 나타나면 이걸 사용하도록 하여라."
괴물은 야구공 크기의 붉은 색 구슬 하나를 내밀었다.
"이건 뭐죠?"
"화탄구라고 하는 법기(法器)다. 본래는 영력이 있어야 쓸 수 있는 물건이다만 네놈은 영력을 사용하지 못하니 제한적이나마 내가진기를 통해 쓸 수 있도록 해주마."
"내가진기...?"
"큭! 너희들은 그것을 마나라 부르지 않으냐? 영력에 비하면 하잘것없는 힘이다만 그래도 지금은 그것이라도 네놈에게 있어 다행이구나."
곧바로 괴물은 화탄구의 사용법에 대해 알려줬다.
마나를 주입해 집어 던지면 적중된 대상을 태워버리는 무서운 무기.
영력이라는 괴상한 힘으로 생성되는 화염이라서 매우 강력한 화력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네놈이 상상하는 것 이상의 열기가 생겨나겠지만 걱정마라. 너에게는 그 열기가 미치지 않을 것이니 말이야."
"그럴 수도 있습니까?"
"물론이다. 주의할 것은 반드시 화탄구를 사용한 후에 회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잃어버린다면 네놈은 살아서 나갈 생각을 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잃어버리면 죽인다고 협박을 하는 걸 보니 괴물은 이 화탄구라 불리는 법기를 매우 아끼는 모양이었다.
그런데도 아낌없이 화탄구를 빌려주는 걸 보면 강혁이 동굴 절벽 아래에서 캐오는 자룡초라는 약초가 그만큼 더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럼 이제 그만 쉬도록 해라. 나는 내일 다시 오도록 하마."
그 말이 끝나는 순간 강혁은 급격히 졸음이 밀려왔다.
'으... 또 잠이?'
참아보려했지만 저항이 불가능했다.
그는 그대로 쓰러져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그런 그를 괴물이 한동안 골똘히 내려다봤다.
"특이한 녀석이야. 어째서 이 녀석은 저 아래 비경(秘境)에 내려가도 무사한 것인지 모르겠군."
괴물은 혼란스러워하면서도 기뻐하는 표정이었다.
"덕분에 전설로만 듣던 자룡초를 구할 수 있게 되었다. 나머지 자룡초만 마저 구할 수 있다면 나 또한 자룡지기를 이용해 비경에 진입할 수 있을 터..."
일순 괴물의 눈빛이 탐욕스러우면서도 사악하게 번쩍였다.
강혁을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에서 강한 증오와 살기가 피어났다.
"자룡초들을 마저 구할 때까지만 네놈을 살려두마. 어차피 그대로 둬도 감히 역천의 힘을 사용한 죄로 천겁의 벌을 피하지 못하겠지만 말이야."
10년의 약속?
당연히 괴물은 강혁에게 그 약속을 지킬 생각이 없었다.
"그렇지. 이 녀석이 달아나지 못하게 막아두는 게 좋겠군."
괴물은 동굴 입구 쪽을 향해 손짓을 하며 뭐라 주문을 외우고는 어딘가로 홀연히 사라졌다.
* * *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깨어난 강혁은 조화역천정이 머리 맡에 놓여있는 걸 발견했다.
동굴 3일 차.
[이름] 차강혁
[잔여 수명] 39일
본래라면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어야 했던 그는 이 괴상한 조화역천정이라는 솥의 신비한 능력으로 인해 조금씩 수명이 늘어나고 있는 중이었다.
오늘은 또 얼마나 수명이 늘어나려나?
'라면도 이제 한 봉지밖에 안 남았어.'
그래도 배낭에 쌀과 통조림, 에너지 바 등이 남아있으니 내일부터는 라면이 아닌 쌀로 밥을 해먹어도 될 것이다.
솥에 물을 부은 후 버너를 켰다.
물이 끓을 때까지 잠시 바깥 구경을 하기로 했다.
입구까지 나가려면 기어가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지만 그래도 동굴에만 있었더니 답답해 푸른 하늘과 숲이 보고 싶었다.
'여기서 일정 구간은 나도 기어가야 간신히 오갈 수 있는데 그놈은 어떻게 여기에 들어올 수 있는지 모르겠군.'
괴물의 덩치는 강혁의 두 배는 될 정도로 우람했다.
정상적으로는 절대 이 동굴에 진입이 불가능한 것이다.
몸을 축소시키거나 안쪽으로 공간이동을 하는 스킬이라도 있다면 모를까?
대체 그 괴물의 정체는 뭘까?
영력이라는 듣도보도 못한 괴상한 능력을 사용하는 존재.
현재로서는 7성 재앙종 괴물일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이런!'
잠시 기어가던 강혁은 알 수 없는 힘에 뒤로 밀려나는 자신을 발견했다.
어느새 그는 조화역천정이 놓여있는 지점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몇 번을 해도 마찬가지.
마나를 끌어올려 전력을 다해봐도 소용없었다.
강혁의 몸에 금제라는 것을 펼쳤다고 하더니.
동굴 밖도 마음대로 나가지 못하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내가 도망치지 못하게 한 거군.'
강혁은 치가 떨리지 않을 수 없었다.
과연 그 괴물이 자룡초 10뿌리를 구하면 약속대로 조화역천정을 10년 동안 빌려줄 것인가?
천만에!
강혁도 처음부터 놈이 순순히 그 약속을 지킬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뭔가 방법을 찾아봐야 할 것이다.
부글부글.
그 사이 솥의 물이 끓고 있어 라면과 분말수프를 넣었다.
잠시 후 완성된 라면을 먹자 수명이 7일 늘어났다.
[이름] 차강혁
[잔여 수명] 46일
'오늘은 7일!'
정말로 수명 증가 효과는 랜덤 적용인 모양이다.
지난 사흘 동안 각각 10일, 3일, 7일이 증가했으니까.
수명이 이런 식으로 늘어나다니 정말 믿기지 않았다.
괴물의 의도를 알 수 없어 우울했던 기분이 순식간에 좋아졌다.
"밥 다먹었으면 어서 가서 자룡초를 뽑아오너라."
식사를 마치자 괴물이 귀신처럼 알고 나타나 약초를 캐오라 다그쳤다.
"그러죠. 지금 바로 다녀오겠습니다."
강혁은 삽과 망태기를 챙겨 동굴 아래로 내려갔다.
오늘은 호신부와 화탄구도 챙긴 상태였는데, 정말로 호신부 덕분인지 귀각독사라 불리는 괴상한 괴물 뱀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덕분에 별다른 어려움없이 자룡초 한 뿌리를 캐오는데 성공했다.
계속해서 4일 차는 3일.
5일 차는 8일.
6일 차는 4일.
7일 차는 10일의 잔여 수명이 늘어났다.
* * *
8일 차 아침.
잠에서 깬 강혁은 잔여수명을 확인했다.
[이름] 차강혁
[잔여 수명] 66일
'두 달 넘게 남았네.'
본래라면 20일 정도 남았을 수명이 조화역천정 덕분에 늘어나서 벌어진 일.
수명이 늘어나니 기분은 좋지만 한편으로 불안감도 늘어났다.
며칠 사이 계속 괴물의 동정을 살펴봤는데 역시나 순순히 내보내줄 것 같지가 않았으니까.
그래서 강혁 또한 나름 대비책을 마련해 두었다.
'그놈이 뭔가 매우 중요한 부분을 숨기고 있으니 이대로는 안 돼.'
그게 뭔지 모르지만 물어봐도 절대 알려주지 않을 것이다.
조화역천정에 밥을 해먹으면 또 수명이 늘어나겠지만 오늘은 솥을 이용하지 않고 조용히 대기했다.
"네놈! 뭐하고 있는 것이냐? 일어났으면 당장 밥을 해먹지 않고 왜 멀뚱히 앉아 있는 것이냐?"
그때 괴물이 나타나 노한 눈빛으로 외쳤다.
"배가 고파죽겠는데 물과 식량이 모두 떨어져서요. 시내로 나가서 식량을 좀 사와야 할 것 같으니 동굴 밖으로 좀 내보내주십시오."
지난 며칠 동안 강혁은 괴물 몰래 배낭 속의 식량들을 안쪽 절벽 아래로 던져놓았다.
그러다 보니 배낭 속은 텅 비어 있었다.
'식량이 없다는데 잠시 내보내주겠지.'
이 안에서야 대책이 없지만 일단 밖으로 나가면 괴물을 상대할 방법을 만들어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길드나 국가수호원에 도움을 요청하면 되니까.
당연히 국가수호원은 A급 각성자의 구조 요청을 절대 모른 척할 리 없었다.
문제는 이곳이 통화권 이탈 지역이라는 것. 스마트폰 배터리도 그 사이 방전되어 버렸다.
따라서 반드시 동굴을 나가야 한다.
가까운 마을이라도 가서 배터리를 충전하면 어디든 연락을 취할 수 있고, 그러면 여명 길드나 국가수호원에서 조치를 취해줄 것이다.
'국가수호원에서 괴물만 죽여주면 나는 상황을 봐서 조화역천정을 챙기면 된다.'
수명을 늘려주는 조화역천정은 절대 포기하고 싶지 않은 보물이었다.
그렇게 강혁 나름대로 머리를 써서 계획을 짜놓았지만.
"큭! 밖에 나가서 네놈의 동료들을 데려온다고 날 상대할 수 있을성 싶으냐?"
괴물은 강혁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싸늘히 대꾸했다.
"그런 거 절대 아닙니다. 그냥 식량만 구해올 생각입니다."
"닥쳐라! 내가 네놈의 시커먼 속을 모를 거라 보느냐? 그러나 너같은 놈들 수백이 몰려와도 내 손짓 한번에 몰살시킬 수 있음을 잊지마라."
순간 강혁은 가슴이 서늘해졌다.
A급 각성자 수백이 몰려와도 혼자서 몰살시킨다고?
그건 지구 최강의 SSS급 각성자라 해도 불가능한 일.
그러나 왠지 괴물의 말이 허언같지가 않았다.
'으... 꼼짝을 할 수가 없어.'
수백의 각성자들이 몰려와도 지금 강혁처럼 모두 몸이 마비되어 버린다면?
그럼 꼼짝없이 몰살당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받거라."
툭. 툭.
그때 괴물이 뭔가를 강혁의 발 아래로 던졌다.
매우 오래되어 보이는 자그만 가죽 주머니 2개.
"이게 뭡니까?"
"쌀 주머니와 물 주머니다. 매일 하루를 버틸만한 쌀과 목을 축이고도 남을 물이 나올 것이니 그거면 네놈의 주린 배를 채우고 갈증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아이들 소꼽장난에나 쓸법한 작은 주머니에서 매일 쌀과 물이 나온다니 황당했다.
"손바닥보다 작은 주머니들에서 그만큼의 쌀과 물이 나온다고요?"
그러자 괴물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 또한 투박해보여도 법기(法器)들이니라. 네놈의 그 하찮은 지식으로 영력의 조화를 어찌 짐작이나 하겠느냐? 시간이 없으니 어서 그걸로 밥을 지어먹고 자룡초를 캐오도록 해라."
이로써 식량 확보를 빌미로 동굴 밖으로 나가는 건 불가능해졌다.
'자룡초를 다 구하면 저놈은 날 분명 죽일 거야.'
알면서도 무력하게 당할 생각은 없었다.
이런 상황도 그의 예측 범주에 있었기에 최후의 방책을 세워놓았다.
'결국 그 방법뿐인가?'
강혁의 두 눈이 비장하게 빛났다.
* * *
9일 차 아침.
깨어나 보니 조화역천정 옆으로 투박한 주머니 두 개가 보였다.
아직 괴물은 오지 않은 상태.
'서두르자.'
강혁은 재빨리 두 개의 주머니를 챙겼다. 또한 괴물이 준 호신부와 화탄구도 잊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망태기를 두르고 그 안에 삽도 집어넣었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못할 짓이 뭐냐?'
곧바로 그는 비장한 눈빛으로 조화역천정을 번쩍 쳐들고는 동굴 안쪽으로 뛰었다.
절벽이 보이는 순간 망설임없이 조화역천정을 아래로 던졌다.
그리고 그 역시 지체없이 움직였다.
이제는 눈 감고도 알아볼 만큼 익숙해져 그는 빠른 속도로 절벽을 타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당장 올라오지 못하겠느냐?"
대략 20미터 쯤 내려왔을 때.
괴물이 절벽 위쪽에 나타나 강혁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고 있었다.
"약초 캐러 내려가는 중입니다."
"닥쳐라! 조화역천정을 아래 던져놓은 걸 보니 그 아래서 버티겠다고 잔머리를 굴리는 모양인데 과연 네놈의 뜻대로 될 성 싶으냐?"
눈치도 빠르군.
그러나 강혁은 괴물의 말대로 다시 올라갈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더욱 속도를 높여 아래로 뛰듯이 내려갔다.
"어리석은 놈! 네놈 뜻대로 될 줄 아느냐?"
순간 괴물이 허공을 계단처럼 딛고 빠르게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강혁은 흠칫 놀랐다.
그동안 괴물은 뭔가를 두려워해 절벽 아래로 내려오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은 아무런 망설임 없이 하강하고 있을 줄이야.
이대로면 수 초 내에 잡히고 말 것이다.
'정말 악마같은 놈이군.'
잡히면 끝장이다.
아마 죽어도 곱게 죽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도 예상했지.'
어쩔 수 없이 이제 모험을 할 때가 온 건가?
비장한 표정으로 괴물을 한 번 노려본 강혁은 그대로 절벽 아래로 다이빙하듯 몸을 던졌다.
현대수선전 5화
강혁은 자신을 바라보는 괴물의 눈빛에서 갈수록 살기가 짙어지는 걸 감지했다.
놈은 강혁이 자룡초 10뿌리를 캐다 바치면 조화역천정을 10년 동안 빌려주겠다 말했지만 애초부터 그 약속을 지킬 생각은 없어 보였다.
결국 강혁은 결단해야 했다.
괴물을 죽일 수 없다면 도망이라도 쳐야한다고 말이다.
'내 힘으로 괴물을 죽이는 건 불가능해.'
상대는 영력이라는 정체불명의 힘을 사용하는 터라 강혁으로서는 맞설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괴물이 펼친 금제로 인해 동굴 밖으로 나갈 수 없음을 알게 되자, 결국 강혁은 최후의 선택을 하고야 말았다.
'지하 절벽 밑으로 피한다.'
괴물은 그 아래 있는 뭔가를 무서워해서 쫓아오지 못할 가능성이 높으니까.
물론 아닐 수도 있지만 강혁으로서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괴물도 강혁이 설마 그쪽으로 도망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는지 밖으로 나가는 것만 막아놓았을 뿐 그 외에는 별다른 조치를 해놓지 않았다.
덕분에 강혁은 놈에게 받은 쌀 주머니와 물 주머니는 물론 조화역천정까지 몽땅 챙겼다.
쌀과 물만 있으면 매일 조화역천정에다 밥을 해먹을 수 있고, 그로인해 매일 수명도 늘어날 것이다.
"네놈이 감히 그 따위 허튼 수작을 부리다니! 절대 용서할 수 없다!"
그렇게 조화역천정을 절벽 아래로 던지고 내려가는 걸 발견한 순간 괴물도 비로소 강혁의 의도를 눈치챈 듯했다.
놈은 화가 머리 끝까지 치솟았는지 우레같은 소리를 내며 허공을 날아 내려왔지만 강혁은 그보다 앞서 절벽 아래로 몸을 던져버렸다.
콰앙!
까마득한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건 스스로 죽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
그러나 강혁 또한 나름 자신이 있었다.
일순간 마나의 힘을 이용해 몸을 쇠처럼 단단하게 만드는 강체(强體).
그는 사실상 그걸로 지금껏 먹고살았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게이트에서 강력한 적을 만나 도주할 때 절벽에서 뛰어내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때마다 강체로 몸을 보호한 덕분에 큰 부상을 입지 않을 수 있었다.
"으윽... 생존기가 통해서 천만다행이군!"
지금도 마찬가지.
피부가 좀 찢겨나가긴 했지만 뼈도 멀쩡하고 큰 부상을 입은 부위는 없었다.
문제는 괴물이었다.
혹시라도 놈이 그동안과 달리 아래까지 내려온다면?
그러나 다행히 괴물은 위에서 삼분의 일 지점까지 따라왔다가 멈춰서더니 뭔가에 기겁한 듯 위로 후다닥 달아나버렸다.
"휴우...!"
강혁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괴물을 따돌리는 데는 성공한 것이다.
'가장 걱정했던 것이 괴물의 금제였는데 여기까지는 통하지 않는 건가?'
괴물 앞에서는 온몸이 마비된 것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만약 여기서도 그런 상태라면 최악이라 할 수 있지만 무엇 때문인지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강혁은 잠시 몸의 상태를 살피고는 큰 이상이 없다 판단하자 일어나 물건들을 챙겼다.
'조화역천정도 멀쩡하고 통조림들도 대부분 그대로 있다.'
혹시라도 조화역천정이 부서지거나 찌그러지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놀랍게도 흠집 하나도 나지 않았다.
망태기와 삽, 쌀 주머니와 물 주머니, 그리고 호신부와 화탄구도 별다른 이상은 없어 보였다.
아쉽게도 침낭은 찢어졌고 스마트폰도 박살이 나버리고 말았지만, 식량과 물, 솥 등 생존에 필수적인 것들은 건재하니 다행이었다.
'그래도 여기서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당장 괴물에게 붙잡혀 죽을 걱정은 덜었지만 그렇다고 절벽 아래에서 계속 지낼 수는 없을 것이다.
어디로 통하는지 알 수 없는 동굴.
저기를 통해 밖으로 나갈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동굴로부터 숨막히는 살기가 뿜어져나오고 있어 문제였다.
'혹시 저 안에 삼두... 어쩌고 하는 거대 뱀 괴물이 있는 건가?'
삼두귀각혈사(三頭鬼角血蛇).
머리가 세 개 달린 거대 귀각혈사로 놈을 해치우려면 반드시 화탄구를 사용해야 한다고 했는데.
'급하게 서두를 건 없어. 일단은 여기서 버틴다.'
아무리 화탄구가 대단한 화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섣불리 모험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보다는 조화역천정의 신비한 힘을 이용해 최대한 수명을 늘리는데 집중하는 것이 현명하리라.
우선은 배가 무척 고프니 밥부터 지어먹기로 하자.
쏴!
쌀 주머니에서 쌀이 쏟아져나와 조화역천정 안에 쌓였다.
'정말 신기하네. 어제 몽땅 쏟았는데 다시 또 쌀이 생겨났어.'
비록 그가 딱 한 끼 정도 먹을 소량이긴 하지만.
매일 이 주머니에 그만큼의 쌀이 생겨나는 건 분명했다.
그것도 매우 깨끗한 쌀.
굳이 물로 씻어낼 필요도 없었다.
그냥 바로 물을 적당량 부어 밥을 지으면 되는 것이다.
'물을 붓고.'
쪼르륵.
물 주머니의 물을 조화역천정에 약간 쏟았다.
어제 몽땅 물을 마셨는데 그 사이 또 그 만큼의 물이 생겨난 것이다.
'물 주머니에는 대충 2리터 정도의 신선한 물이 매일 채워진다.'
간단히 밥을 짓고 나머지를 식수로 사용하면 그럭저럭 하루를 버틸 수 있는 양이었다.
'이런! 하필이면 버너가 고장이...'
고장 정도가 아니라 박살이 나 있었다.
열을 가할 화기도 없이 밥을 어떻게 지을까?
더구나 동굴 안 어디에도 불을 피울만한 재료는 보이지 않았다.
'화탄구를 이용해볼까?'
괴물에게 화탄구의 사용법은 배웠지만 아직 실제로 사용해본 적은 없었다.
삼두귀각혈사를 만나면 총 마나의 절반 이상을 주입해 던지라고 했지만.
그렇게 해야 놈을 태울만한 화력이 생성된다고 했다.
그말은 마나를 적게 주입하면 상대적으로 약한 화력이 생성된다는 뜻.
혹시나 싶어 미량의 마나를 화탄구에 주입해보았다.
화...화르르...!
신기하게도 화탄구가 금방 뜨거워지며 붉은 불꽃이 피어났다.
강혁은 손이 불에 탈까봐 깜짝 놀랐는데 아무렇지도 않았다.
화탄구의 화기가 그에게는 해를 끼치지 않을 거라더니 정말이었던 것이다.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지 않는 상황.
주머니들도 그렇고 법기라 불리는 물건들은 하나같이 신비한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불꽃이 이글거리는 화탄구를 조화역천정의 아래에 배치하자 예상대로 밥이 익기 시작했다.
'이야...! 냄새 미쳤네.'
밥 익는 냄새가 이토록 향긋할 줄이야.
하루에 한 번만 작동되지만 이 솥에다 라면을 끓이면 인생 라면이 되고, 밥을 지으면 인생 밥이 된다.
이미 어제 한 번 인생 밥을 먹어본 터라 강혁은 더욱 군침이 돌았다.
물론 그런 와중에도 계속 주변을 살피며 경계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백룡대도도 팔찌에서 무기로 변환시켜 근처에 꽂아둔 상태.
언제라도 적이 나타나면 공격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화악!
잠시 후 찬란한 오색 광채와 함께 밥이 완성되었다.
꽤 허기도 진 상태라 강혁은 순식간에 밥을 먹어치웠다.
[당신의 고갈된 체력과 마나가 모두 회복되었습니다.]
특히 체력 회복 효과는 경이적이었다.
찢긴 피부와 여러 타박상 부위가 말끔하게 치료된 것이다.
[당신의 최대 잔여 수명이 4일 늘어났습니다.]
[이름] 차강혁
[잔여 수명] 74일
역시나 수명이 또 늘어났군.
강혁은 흐뭇하게 웃으며 잔여 수명을 확인했다.
"크르...!"
그때 돌연 들려오는 괴성.
깜짝 놀란 강혁은 대도를 쥐고 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노려봤다.
살기가 짙은 동굴 안에서 뭔가가 나오고 있었다.
'삼두... 그놈인가?'
강혁은 조화역천정 밑에 뒀던 화탄구를 잽싸게 챙겨 언제라도 집어던질 준비를 마쳤다.
"크르...!"
"크크크크!"
그런데 동굴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들이 심상치 않았다.
한놈이 아니었다.
'사람?'
어둠 속 흐릿한 실루엣들을 보니 두 팔에 두 다리를 가진 사람의 형상이었다!
혹시 동굴 위 그 괴물 놈과 같은 부류일까?
'그 놈과 비슷한 영력을 가진 자들이라면 답이 없는데...'
영력 앞에서 각성자로서의 힘은 그저 무력하기만 했던 터라 강혁은 긴장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다 점차 가까워지고 있는 사람들의 정체를 파악한 강혁은 다시 경악했다.
두 눈에서 흑색의 음침한 안광을 번뜩이며 다가오는 자들. 그들의 피부와 살은 썩어문드러져 있었다.
'살아있는 자들이 아니군.'
언제 죽었는지 알 수 없을 만큼 부패한 시체들.
'좀비들이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좀비는 게이트에서는 꽤 자주 출몰하는 괴물들이다.
그런데 지금 나타난 좀비들은 게이트에서 봤던 좀비들과는 기질 자체가 달랐다.
하나같이 움직임도 민첩하고 날카로운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대부분 성급(星級) 좀비들!
다행이라면 대부분 1성 정도라는 것. 2성이 몇 보이지만 3성은 없었다.
S급 장병기인 백룡대도를 쥐고 있는 강혁은 3성 좀비도 어렵지 않게 상대할 수 있었다.
그 때문인지 강혁의 표정에는 금세 여유가 넘쳤다.
다만 좀 특이한 건 좀비들이 들고 있는 무기였다.
'잠깐, 저건 각성무기들 같은데?'
각성무기는 국가수호원 휘하 각성무기연구소 혹은 대형 길드에서 마정석을 이용해 제조한 특수무기다.
강혁이 쥐고 있는 백룡대도도 각성무기 중 하나.
그런데 어떻게 저 좀비들이 각성무기를 쥐고 있을까?
설마 저 좀비들... 각성자들이었나?
각성자들이 죽어 언데드로 변하는 경우가 게이트 안에서야 간혹 벌어지기도 하지만, 게이트도 아닌 이런 심산의 동굴 속에서 왜 이런 일이?
강혁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무래도 여긴 내가 처음이 아닌 것 같다...'
괴물의 협박에 의해 이곳 지하 동굴로 약초를 캐러 내려왔다가 실혼인 즉, 좀비가 되어버린 자들.
그렇다.
그보다 앞서 각성자 수십 명이 이곳에 내려왔던 것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들은 모두 좀비가 되었고 강혁은 멀쩡한 상태라는 것.
'대체 몇 명이나 그놈에게 속아 좀비가 된 건가?'
각성자들의 실종은 드문 일이 아니다.
게이트에 들어갔다가 괴물에게 잡아먹혀 시체조차 찾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니까.
"자칫했으면 나도 저꼴이 될 뻔한거군."
이유야 어쨌든 저들은 이제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다.
과거에는 각성자였지만 지금은 사악한 좀비일 뿐.
"어쩔 수 없지."
게이트에서 이미 다수의 각성자 좀비를 죽여본 적이 있던 터라 강혁은 담담히 백룡대도를 앞으로 겨눈 채 좀비들을 향해 성큼 걸어갔다.
'······?'
그런데 좀비들이 어느 이상 다가오지 않고 뒤로 피했다.
당장이라도 덤벼들 것 같은 험악한 기세들과는 달리 대략 20여 미터 이내로 접근하는 좀비는 하나도 없었다.
또한 좀비들 다리 아래로 검은 뿔 붉은 비늘 뱀들 즉, 귀각혈사들의 모습도 보였는데 그놈들도 마찬가지였다.
'부적의 위력이 생각보다 대단하구나.'
동굴 위 괴물이 준 호신부(護身符).
그것은 강혁이 현재 상의 주머니에 보관 중이었다.
호신부가 귀각혈사들뿐 아니라 좀비들도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왜 다 기어나온 것일까?
호신부를 두려워한다면 좀비들은 물론 귀각혈사들도 저 동굴에서 나오지 않았어야 정상일 것이다.
그런데도 밖으로 나왔다는 건 다른 뭔가가 그것들을 떠밀었다는 뜻.
'바로 저놈!'
강혁의 시선이 좀비들의 뒤쪽을 향했다.
어둠 속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초대형 괴물.
하나의 몸체와 이어지는 세 개의 거대 뱀 머리들이 강혁을 사납게 노려보고 있었다.
언뜻 봐도 최소 5성급(★★★★★).
S급 각성자라 해도 단신으로는 상대하기 불가능한 재앙종 괴물이었다.
'삼두귀각혈사!'
강혁은 공포심에 온몸이 얼어붙을 것 같았지만 본능적으로 한 손을 움직여 상의주머니에서 화탄구를 꺼내쥐었다.
현대수선전 6화
삼두귀각혈사!
흑색의 뿔을 가진 머리가 세 개. 전신이 붉은 비늘로 뒤덮인 뱀의 길이는 언뜻 봐도 20미터가 넘어 보였다.
음침한 녹색의 안광을 번쩍이는 중앙 머리의 크기는 양 옆 두 개 머리를 합친 것보다 컸다.
중앙 머리는 고요히 고정되어 있는 반면 양 옆의 머리들은 잠시도 멈추지 않고 움직였다.
그중 왼쪽 머리로부터는 몸서리치는 차가운 기운이, 오른쪽 머리로부터는 가히 용암을 방불케하는 뜨거운 기운이 뿜어져나왔다.
쩌저저정! 화...화르르르!
냉기가 뻗쳐오는 곳은 금세 빙판이 되어버렸고, 열기가 엄습하는 곳은 순식간에 불구덩이로 변했다.
호신부가 삼두귀각혈사의 공격까지 막아주지는 않는 터라 강혁은 재빨리 움직이며 냉기와 열기를 피해냈다.
그때마다 삼두귀각혈사의 머리들이 각각 입에서 다시 냉기와 열기를 뿜어냈지만 강혁은 그보다 앞서 움직이며 피해를 입지 않았다.
동시에 백룡대도를 휘둘러 그의 앞에 거치적거리는 귀각혈사들과 좀비들을 동강냈다.
서걱! 촤각!
그것은 반사적인 동작이었다.
머리가 판단하기 이전에 그의 몸이 알아서 움직였다.
왼손에 화탄구를 쥐고 있는 터라 오른손만으로 무거운 백룡대도를 휘둘러야 했지만, 그럼에도 그의 공격은 빗나가는 법이 없었다.
'일단은 잡몹들부터 처리한다.'
호신부 덕분에 놈들이 먼저 접근하지 못하고 있을 뿐.
강혁이 접근하면 기다렸다는 듯 달려드는 터라 절대 방심할 수 없었다.
서걱! 퍽! 콰직!
좀비들의 목을 가르고 몸체에서 떨어져 나온 머리들은 발로 찼다.
괴력이 실린 그의 발에 차인 좀비의 머리들이 축구공처럼 날아가 다른 좀비들의 머리와 격돌해 부서졌다.
"끄아아악!"
"키아악!"
각성 이후 헌터 훈련을 마치자마자 사실상 게이트에서 살았던 그였다.
매 주마다 최소 한 번 게이트 공략!
그렇다고 다른 날에 게이트에 안 들어간 것이 아니다.
공략이 없는 날에는 길드에서 각성자 수련용으로 개조한 게이트에 들어가 미친 듯 수련에 몰두했다.
말이 수련이지 게이트에서는 늘 괴물들과의 실전이었다.
그런 실전으로 다져진 그의 움직임에는 작은 동작 하나에도 군더더기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쩌저저정! 화르르르!
그런 그의 뒤쪽으로 삼두귀각혈사가 내뿜은 냉기와 열기가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빙판과 불구덩이의 지속 시간은 대략 4초...'
그 이후에도 냉기와 열기는 남아있지만 그 정도는 강혁에게 별 위협이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따라서 놈의 공격이 미치기전에 미리 피하는 것이 최선.
강혁이 쉬지않고 달리며 위치를 변경하고 있는 이유였다.
'여기가 비좁은 공간이었다면 꼼짝없이 당하고 말았겠군.'
절벽 아래는 꽤 방대한 공터의 형태다.
강혁은 섣불리 삼두귀각혈사에게 접근하지 않고 놈의 공격을 피하며 최대한 기회를 노렸다.
그러자 그간 잠자코 있던 삼두귀각혈사의 중앙 머리가 돌연 입을 쩍 벌리며 번개처럼 강혁을 향해 날아들었다.
'이런!'
강혁은 황급히 피하며 반사적으로 백룡대도를 휘둘러 놈의 머리를 가격했다.
까가강!
'S급 무기를 튕겨내? 진짜 5성 재앙종이 맞구나.'
놈의 엄청난 괴력에 하마터면 대도를 놓칠 뻔했다.
'백룡대도로 피해를 입힐 수 없다면 답이 안나오는데.'
본래라면 무조건 도주해야 하지만 지금은 빠져나갈 방법이 없었다.
절벽 위로 달아나면 더 무시무시한 괴물이 기다리고 있으니 말이다.
방법은 하나.
놈을 죽여야 한다!
거듭되는 삼두귀각혈사의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강혁은 왼손의 화탄구에 마나를 계속 주입했다.
'정말 저 5성 재앙종을 이 화탄구로 처리할 수 있는 건가?'
어느새 마나의 태반이 화탄구 속으로 빠져나갔다.
최소 절반의 마나를 주입해야 승산이 있다 했지만 강혁은 그 이상 주입했다.
혹시라도 화탄구에 맞아도 놈이 죽지 않는다면 끝장이니까.
기회는 단 한 번 뿐.
성공 가능성을 높이려면 최대한 근접해야 한다.
워낙 빠르고 날랜 녀석이라 멀리서 던지면 피할 우려가 있었다.
'지금이다.'
냉기와 열기 공격에 이어진 중앙 거대 머리의 습격을 피해내며 강혁은 놈의 몸체로 근접했고 그 즉시 화탄구를 투척했다.
순간 삼두귀각혈사가 흠칫 놀라더니 바람처럼 뒤로 물러났다.
콰아아앙!
화탄구가 떨어진 지점에 수류탄이라도 터지듯 폭발이 일었고 이어서 무시무시한 화염이 솟구쳤다.
활활! 화르르르!
그러나 강혁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최대한 근접해서 화탄구를 던졌는데도 놈이 아슬아슬하게 그 반경에서 벗어나 피해버린 것이다.
두 번의 기회가 없다 생각해 마나의 3분의 2 정도를 주입해 시도한 최후의 일격이 무산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큰일이군.'
이제 삼두귀각혈사에게 치명타를 입힐 방법이 없는 상황.
그렇다고 도주도 불가능하고.
그로서는 최악의 위기가 닥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것을 눈치챈 것일까?
삼두귀각혈사의 세 머리들이 제각기 의기양양한 눈빛을 번뜩이며 강혁을 노려봤다.
놈은 이미 화탄구의 착탄지점에서 멀어진 것은 물론이고 그 사이 강혁의 뒤편으로 돌아가 빠르게 접근 중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화탄구에서 일어난 불길을 두려워하는지 그쪽을 계속 경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직 화탄구 화염의 위력은 사라지지 않았어.'
처음 화탄구를 던졌을 때와 다름없이 엄청난 불길이 회오리치고 있었다.
이는 그만큼 마나를 많이 주입했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순간 강혁은 갈등했다.
저 상태의 화탄구를 손에 쥐고 뱀에게 돌진하면?
'화탄구의 저 열기가 나에게는 아무 피해를 주지 않는다고 했지만.'
이미 조화역천정에 밥을 지으며 그것은 확인했다.
하지만 그때는 손바닥만한 크기의 자그만 불꽃이었고, 지금은 건물 하나를 태울만한 거대한 화염폭풍이었다.
섣불리 다가들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 사이 화염폭풍에 휘말려 순식간에 재로 변한 좀비들과 귀각혈사들이 한둘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삼두귀각혈사가 잔뜩 독이 올라 미친 듯 폭주하고 있어 더 이상 놈의 공격을 피하기도 쉽지 않았다.
심지어 그 사이 체력이 떨어진 강혁의 움직임은 눈에 띄게 둔해지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중앙의 거대 머리가 혀를 날름거리며 더욱 난폭하게 달려들었다.
'젠장!'
강혁은 어쩔 수 없이 화탄구의 화염 폭풍 안으로 돌진했다.
이대로 저 괴물 뱀에게 잡아먹히느니 차라리 타죽는 게 깔끔할 것이다.
화아아! 화르르르!
엄청난 열기가 엄습해오는 걸 느끼며 이대로 죽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잠시 엄청나게 뜨거웠을 뿐 딱 거기까지였다.
뜨겁긴 하지만 그의 몸은 물론이고 입고 있는 옷도 멀쩡했다.
'이게 진짜 가능한 거냐?'
상상을 초월하는 법기의 신묘한 능력.
강혁은 도무지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그러나 놀라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는 화탄구를 손에 쥔 채 고개를 뒤로 홱 돌렸다.
우...움찔!
순간 그를 추격해오던 삼두귀각혈사가 대경실색한 듯 멈춰섰다.
그러다 강혁이 미친 듯한 속도로 돌진해오자 놈은 꽁지가 빠져라 달아나기 시작했다.
"딱 거기서라!"
강혁은 최후의 마나까지 짜내서 전력질주를 펼쳤고 덕분에 삼두귀각혈사의 꼬리를 따라잡는데 성공했다.
화활...!
단지 그것뿐이었는데.
꼬리 부위에 화염이 붙는 순간 그 화염이 순식간에 삼두귀각혈사의 몸체 전체로 퍼져나가 그것을 완전히 뒤덮었다.
"끄...끄아아아악!"
"꾸아아아악!"
"끄어어어어억!"
놀랍게도 S급 각성무기로 아무리 후려쳐도 꿈쩍도 하지 않았던 5성 재앙종 괴물이 화탄구의 화염 앞에서는 무력하기 이를 데 없었다.
놈이 몸부림치는 것도 잠시, 이내 뒤집어졌고 그대로 통구이가 되어버렸다.
'냄새 죽인다!'
고소한 냄새가 사방에 진동하는 것도 잠시, 어느새 화염은 놈을 시커먼 재로 만들어버렸다.
가장 두려워했던 거대 보스 괴물이 쓰러졌지만 강혁은 긴장을 풀지 않았다.
보스를 죽였다고 끝이 아니니까.
아직 잡몹들이 상당수 남아있었다.
좀비와 귀각혈사들.
그리고 삼두귀각혈사 못지않은 또다른 괴물이 저 동굴 안에서 튀어나올지 알 수 없는 일.
'여기는 실제 게이트는 아니지만 사실상 게이트나 다름없는 곳이다.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그는 이런 험지 안에서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섣불리 긴장을 풀거나 방심을 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았다.
그래서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주변을 날카롭게 살폈다.
다행히 그동안 동굴 안에서 엄습해오던 섬뜩한 살기는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은 삼두귀각혈사만한 괴물이 더 이상 동굴 안에 없다는 뜻.
'그럼 이제 저놈들만 남아있는 건가?'
삼두귀각혈사가 쓰러졌지만 좀비들과 귀각혈사들은 사라지지 않고 멀리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호신부를 두려워해 달려들지 않고 있을 뿐 놈들의 눈빛에는 악독한 기운이 가득했다.
'일단은 저놈들부터 다 죽이자.'
저 동굴이 밖으로 뚫려있다는 보장이 없는 터라 이곳은 어쩌면 강혁이 앞으로 상당기간 머물러야 할 지도 모르는 공간이었다.
그러려면 아주 작은 위협 요소라도 모두 제거해야 한다.
좀비는 물론이고 귀각혈사 한 마리라도 살아있으면 불안해서 잠을 자기도 힘들 것이다.
그 사이 화탄구는 언제 강렬한 열기를 내뿜었냐는 듯 특유의 미지근한 상태로 돌아왔다.
강혁은 그것을 주워 상의 주머니에 넣고는 백룡대도를 휘두르며 먼저 좀비들을 도륙했다.
"쿠아아악!"
"끼아악!"
좀비들이 사납게 반격했지만 백룡대도의 백금빛 날이 번쩍일 때마다 놈들은 무력하게 동강이 났다.
이어서 귀각혈사들도 마찬가지.
강혁은 구석의 틈까지 꼼꼼히 살펴 은신해있는 놈들을 모조리 도륙했다.
그러고 나자 비로소 긴장감이 약간 풀리며 피로감이 엄습해왔다.
'잠깐만 쉬자.'
이를 악물고 정신력으로 버텼을 뿐 이미 체력과 마나가 바닥 상태였다.
괴물들은 모두 처치했지만.
강혁은 여전히 경계하는 눈빛으로 멀리 동굴 쪽을 살피고 있었다.
아직 안심할 수 없었다.
고작 삼두귀각혈사가 이 동굴의 보스였다면 절벽 위 괴물이 그토록 두려워하며 내려오길 꺼리지 않았을 테니까.
'그놈이 두려워하는 뭔가가 저 동굴 안에 분명히 있다.'
대체 뭐가 있는 것일까?
또 다른 강력한 괴물일까?
현재로서는 그럴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다만 그 또 다른 괴물이 강혁에게는 별다른 적대감을 뿜어내지 않고 있었다.
아직까지는 말이다.
'섣불리 접근하지 말고 지켜보는 게 좋겠지.'
공연히 괴물을 자극해서 화를 자초할 필요는 없으리라.
그러던 강혁은 주변을 다시 살피며 인상을 찌푸렸다.
'이런! 통조림과 건조식품들이 모두 타버렸어.'
화탄구의 열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 전에 삼두귀각혈사가 내뿜은 화염이 동굴 도처를 불바다로 만들며 벌어진 일.
침낭은 물론이고 배낭까지 모조리 타버린 상태.
그 안에 들어있던 여벌의 옷이나 테블릿, 지갑도 모두 재로 변해 있었다.
주민등록증과 운전면허증을 비롯한 신분증들과 각종 카드도 모조리 타버렸는데.
다행히 각성자 헌터 자격증은 타지 않고 남아있었다. 그것은 웬만한 충격이나 열기 등에도 버틸 수 있게 특별한 공법으로 만들어진 덕분이었다.
'그 외에는 다 타버린 건가?'
그러다 근처 잿더미에서 반짝이는 두 개의 주머니를 발견했다.
물 주머니와 쌀 주머니!
믿기지 않게도 그것들은 아주 멀쩡했다.
가죽 주머니들이 그 뜨거운 열기에서 멀쩡하게 버티고 있을 줄이야.
당연히 조화역천정도 작은 흠집 하나 없었다.
괜히 법기들이 아닌 모양이다.
두 주머니들을 챙기며 강혁은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매일 보충되는 쌀과 물, 그리고 수명이 늘어나게 만드는 신비한 솥.
생존을 위한 최고의 조합이리라.
'그래도 여기서 굶어죽을 일은 없겠네.'
또한 삽과 망태기도 멀쩡했다.
열기에 재로 변했어야 할 삽 자루는 물론이고 가장 먼저 타서 없어졌어할 망태기도 작은 손상 하나 보이지 않았다.
설마 이것들도 법기들이었던 것일까?
'잠깐, 저 빛은?'
일순 강혁이 긴장한 표정으로 멀리 동굴 쪽을 노려봤다.
화악!
갑자기 강렬한 자색의 광채가 동굴 안에서부터 폭풍처럼 뿜어져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현대수선전 7화
보라색 광채는 연거푸 뿜어져나왔다.
확! 화아악!
광채가 번쩍일 때마다 강혁이 있는 절벽 아래 공터 전체가 환한 자색빛으로 물들었다.
'왠지 나에게 들어오라는 신호를 보내는 것 같은데.'
그러나 동굴로 접근하지말라는 경고의 의미인지 아니면 안으로 들어오라는 초청의 의미인지 확실히 알 수 없었다.
물론 저 동굴 안에 있는 뭔가가 나쁜 마음을 품고 있었다면 강혁은 이미 죽은 목숨이어야 정상일 것이다.
따라서 강혁에게 적대적인 존재는 아닐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그조차도 함정이라면?'
강혁이 그 동안 온갖 게이트들을 돌며 산전수전을 다 겪었는 데도 지금과 같은 상황은 그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그는 힐끗 고개를 돌려 바닥에 놓은 조화역천정을 내려다봤다.
만약 저 신비한 솥을 얻지 못했다면 어차피 죽을 몸이니 못할 게 뭐냐는 심정으로 동굴 안에 들어가봤겠지만.
지금은 그의 수명을 대거 늘릴 수 있게 된 터라 섣불리 죽음을 자초하는 모험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 서두를 것 없잖아.'
그 사이 자색 광채는 사라지고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주변은 다시 정적과 어둠으로 뒤덮힌 상태.
다행히 강혁은 라이팅 스킬을 주기적으로 펼칠 정도의 마나는 남아있어 시야 확보는 어려움이 없었다.
'일단 며칠 더 지켜보자.'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해 마나와 체력을 꽉 채워둘 필요가 있었다.
마나와 체력이 바닥 상태이다 보니 몸이 무겁고 졸음이 깊게 몰려왔다.
'너무 피곤해. 눈을 좀 붙여야겠다.'
강혁은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백룡대도는 언제든 휘두를 수 있게 양손으로 꽉 쥔 채 눈을 감았다.
꽤 불편한 자세지만 이런 식으로 휴식을 취하는 건 게이트에서 많이 해봤던 터라 이력이 나 있었다.
* * *
한편 그때 절벽 위쪽에서는 괴물이 인상을 찌푸린 채 아래 쪽을 살피고 있었다.
"자룡초 두 뿌리만 더 구하면 자룡지기를 얻을 수 있거늘... 그놈이 그런 식으로 도주할 줄은 미처 몰랐구나."
괴물의 이름은 루한이었다.
그는 안타까움과 초조함이 가득한 눈빛으로 계속 절벽 아래를 살폈다.
"화탄구와 조화역천정을 비롯한 법기들이 내게 돌아오지 않는 걸 보면 그놈이 아직 살아있음이 분명하다."
루한의 두 눈이 사납게 번쩍였다.
강혁을 법기들의 임시 주인으로 인식시켜둔 터라 만약 그가 죽으면 법기들은 즉각 루한이 있는 곳으로 돌아오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아직 그것들 중 단 하나도 회수하지 못했다.
루한은 그 생각을 하자 더욱 화가 치밀었다.
"교활한 놈 같으니! 절벽에서 추락하고도 살아남을 자신이 있었던 게로군."
루한이 허락하지 않았다면 강혁이 무슨 수를 써도 그 법기들을 사용할 수 없었다.
화탄구만이 아니라 조화역천정도 마찬가지.
강혁은 자신이 우연히 조화역천정을 발견해 사용했다 생각하고 있지만 애초에 그 솥을 노출시킨 것은 루한인 것이다.
물론 그것을 빌미로 자룡초를 캐오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강혁이 불시에 절벽 아래로 도주함으로 인해 루한의 그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버리고 말았다.
"흥! 제법 잔머리를 썼다만 네놈 뜻대로 될 것 같으냐?"
루한은 강혁이 가지고 간 법기들을 회수하는 건 걱정하지 않았다.
"그래봤자 어차피 네놈은 곧 죽는다."
조화역천정의 수명 증가 효과는 딱 10회에 한정되어 있으니까.
즉, 강혁의 수명이 기껏 늘어봤자 10일 뿐.
루한은 강혁이 조화역천정을 통해 매 번 하루가 아닌 며칠, 심지어 10일까지 수명 증가 효과를 얻었음을 상상도 하지 못한 터라 금세 강혁이 죽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게 아니어도 네놈은 역천의 힘을 사용한 대가로 곧 죽을 운명이니라."
역천(逆天).
정해진 수명을 임의로 늘리는 건 천리(天理)를 거스르는 것이다.
그런 일을 하는 이는 반드시 천벌을 받게 되어 있었다.
물론 특별한 경지에 이르면 천벌을 피할 수는 있지만.
"영력이 없는 하찮은 각성자 놈에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지. 네놈은 전신이 찢어지는 처절한 고통에 울부짖으며 죽게 될 것이다."
루한의 입가에 음침한 미소가 피어났다.
* * *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벽에 기대고 잠이 들었던 강혁은 두 눈을 뜨고 주변을 살폈다.
'아침인가?'
햇빛이 전혀 들지 않는데다 스마트폰도 시계도 모두 부서진 터라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 알 방법은 없었다.
라이팅 스킬 만으로 시야를 확보해야 하는 상황.
[이름] 차강혁
[잔여 수명] 73일
그래도 잔여 수명이 1일 줄어든 걸 보니 날이 지난 건 분명했다.
그는 기계적으로 조화역천정에 쌀과 물을 부었다.
또한 화탄구를 꺼내 미량의 마나를 주입한 후 열기가 오르자 조화역천정의 아래에 배치했다.
'이제 기다리면 된다.'
낮밤도 구별할 수 없는 이 지하 세계에서 그나마 유일하게 낙이 있다면 맛있는 밥을 먹는 것이다.
덤으로 수명까지 늘어나니 개꿀이 아닐 수 없으리라.
화악!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멀리 동굴 안쪽에서 또 다시 어제와 같은 신비한 자색의 광채가 번쩍였다.
화악! 확! 화악!
광채는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는 걸 빠르게 반복했다.
강혁은 왠지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깜빡이는 자색 광채가 마치 경고등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뭔가를 하지 말라는 강력한 경고!
'배가 고파서 조화역천정에 밥을 지어먹으려는 것 뿐인데 그걸 하지 말라는 건가?'
강혁은 실소를 흘렸다.
그러고 보니 스스로 말도 안 되는 망상을 떠올린 것 같아서였다.
왜 갑자기 자색 광채가 또 요란하게 반짝이는지 궁금하긴 했지만, 설마 그게 밥을 먹지 말라는 뜻이겠는가?
'잠깐... 저건?'
그러던 강혁이 돌연 두 눈을 부릅떴다.
잠시 멀리 자색의 광채를 주시하다가 조화역천정에서 오색의 빛이 피어나 고개를 돌렸는데 어제와 달리 괴상한 형상의 환영이 피어나 있었던 것이다.
'그 괴물 놈이야.'
강혁을 이 절벽 아래로 도주하게 만든 바로 그 괴물의 모습.
놀랍게도 신비한 오색의 광채 위로 괴물이 아주 의미심장하게 키득대고 있는 환영이 생성되어 있었다.
강혁은 찜찜한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먹게 되면 왠지 크게 후회할 것 같은 섬뜩한 예감.
'배 고픈데...'
밥 냄새가 정말 기가 막혔다.
어제처럼 인생 밥이 또 완성되었을 테니 당연할 것이다.
그러나 강혁은 지속적으로 엄습해오는 불길한 느낌에 결국 한숨을 길게 내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역시 안 먹는 게 좋겠다.'
틀림없이 괴물이 저 조화역천정에 뭔가 꿍꿍이를 부려놓았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거야 그렇다 치고. 왜 내게 그걸 알려주는 거지?'
강혁은 갑자기 생겨났던 괴물의 환영이 그냥 나타난 것이 아님을 직감했다.
동굴에서 뻗어나온 자색 광채가 분명히 뭔가 신비한 조화를 부려 그에게 알려준 것이다.
더 놀라운 일은 그 자색 광채가 지금은 도합 10개로 나뉘어서 근처 바닥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또 내게 신호를 보내고 있군.'
신기하게도 자색 광채들은 모두 자룡초가 있는 곳에 내려앉아 있는 상태.
'자룡초 10뿌리... 그걸 나보고 먹으라고?'
실제로 그런 말이 귀에 들려오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강혁은 마치 그런 내용의 말을 들은 듯 착각이 들었다.
'절벽 위 그 괴물도 자룡초 10뿌리를 캐려했지.'
그만큼 자룡초가 귀하다는 뜻이리라.
'일단 저거라도 먹자.'
배가 고프니 약초라도 뜯어먹어 허기를 채우는 게 낫겠다는 판단에 강혁은 자룡초를 캐먹기로 결정을 내렸다.
'근데 저거 하루에 한 뿌리만 캘 수 있는 거 아니야?'
절벽 위 괴물이 한 말이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강혁이 10뿌리를 캐먹기 위해서는 앞으로 10일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일단 캐보자.'
팍! 팍!
순간 자룡초가 그대로 땅에서 튀어나온 걸 본 강혁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라? 약초가 금방 캐지네.'
삽질이 매우 수월한 것도 신기하지만 대충 몇 번 팠는데도 자룡초가 아무런 손상없이 쉽게 뽑혀나왔다.
그럼 혹시 다른 것들도?
혹시나 싶어 자색 광채가 어려있는 다른 자룡초들도 캐봤는데 그것들도 쉽게 뽑혀나왔다.
그렇게 자룡초 10뿌리를 불과 몇 분만에 확보할 수 있었다.
『시간이 많지 않구나. 다 뽑았으면 어서 그 약초들을 섭취하도록 하라.』
이번에는 아주 선명하게 들리는 웬 여성의 음성.
뭔가 범접할 수 없는 미증유의 위엄이 느껴졌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두렵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내가 누군지는 곧 알게될 터, 길게 설명할 시간이 없으니 그대는 어서 자룡초 10뿌리를 섭취하도록 하여라.』
강혁은 왠지 음성의 말대로 따라야 할 것 같은 생각에 더 이상 묻지 않고 자룡초 1뿌리를 들어 입에 넣고 씹었다.
'먹을 만하네.'
맑고 청량한 맛.
약초라서 당연히 무척 쓸 것이라 생각해 각오를 단단히 했는데 생각보다 맛이 좋았다.
덕분에 나머지 9뿌리도 빠르게 먹어치웠다.
그렇게 10뿌리가 모두 그의 뱃속으로 들어간 순간.
츠츠츠.
갑자기 몸에서 자색의 빛이 피어나 강렬히 휘돌다 이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되었다. 이제 자룡지기(紫龍之氣)가 그대의 몸에 생성되었으니 이곳 자룡비경(紫龍秘境)은 더 이상 그대를 적으로 여기지 아니할 것이다.』
자룡지기? 자룡비경?
여성은 도무지 알 수 없는 말을 하고 있었다.
'내 몸에 자룡지기라는 힘이 생성됐다는 것 같은데?'
잘은 모르겠지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에게 이곳은 낯설고 불편한 장소였는데 지금은 마치 집에 온 것처럼 편안한 느낌이었으니까.
『들어라. 이곳은 자룡지기가 없이는 생존이 불가능한 비경. 그대가 지금껏 무사한 것은 내가 그대를 보호했기 때문이지. 그러나 그것은 잠시일 뿐, 나의 힘이 한계에 다다라 그대가 만일 자룡초를 섭취하는데 망설였다면 지금쯤 이미 실혼인이 되었으리라.』
망설이다 자룡초 10뿌리를 먹지 않았다면 좀비가 되었을 거라는 뜻.
정말이라면 소름끼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제 이 비경의 어떤 힘도 그대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니 염려말고 이 안으로 들어오도록 하라.』
"그러죠."
여성의 말대로 동굴로부터 어떤 위협적인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일. 강혁은 백룡대도를 쥔 채로 걸어갔다.
그리고 동굴 안으로 들어가 잠시 걷던 강혁은 앞쪽 허공에 풍선처럼 떠 있는 뭔가를 발견했다.
자주색 머리카락 아래 백금처럼 눈부신 피부를 가진 여성.
그녀는 가부좌 자세를 취한 채로 고요히 눈을 감고 있다가 강혁이 다가가자 눈을 번쩍 뜨고 그를 쳐다봤다.
그녀는 두 눈의 홍채 또한 자줏빛이었는데 단연코 강혁은 지금껏 이토록 아름다운 여자를 본 적이 없었다.
현대수선전 8화
여성은 외모만 보면 10대 후반 같기도 하고 20대 초반 같기도 했다.
그러나 단지 외모만 어려보일 뿐.
직감이지만 그녀는 인간이 아닌 어떤 특별한 존재 같았다.
세상에 여신이 존재한다면 딱 지금 이 모습이 아닐까?
"당신은 누구십니까?"
강혁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물었다.
그러자 여성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대와 나는 어차피 다른 세계의 존재. 우연히 연이 닿아 잠시 그대와 같은 공간에 있게 된 것일 뿐 많은 인연은 이어갈 수 없으니 나에 대해 깊은 관심은 갖지 마라."
여성은 입을 벌려 말을 했지만 그녀의 음성은 환청 비슷한 소리로 강혁의 귀를 울리며 파고 들었다.
"그럼 이름이라도 알려주십시오."
"루이즈."
"루이즈...? 그것이 당신의 이름입니까?"
"그러하다."
"그럼 한 가지만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루이즈 님?"
"그대는 무엇이 궁금한가?"
궁금한 건 아주 많다.
그중 가장 궁금한 건.
"혹시 당신이 아까 저에게 조화역천정에 지은 밥을 먹지 말라 경고한 게 맞습니까?"
"그러하다. 내가 누차 경고하였으나 그대가 알아듣지 못하여 답답했는데 그대가 용케 알아들어 최악의 상황은 면했구나."
"최악의 상황이라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러자 루이즈는 나직하게 탄식했다.
"그대는 수선자가 아닌 범인이라 조화역천정의 힘을 10회 사용하게 되면 그 즉시 천겁(天劫)이 시작되어 처참히 죽게 된다."
"천겁이 뭔데요?"
"역천의 죄과로 주어지는 하늘의 형벌이다."
"역천이라면? 설마 제가 하늘의 뜻을 어겼다는 겁니까?"
"그대는 이미 정해진 수명을 임의로 늘린 역천의 죄를 지었으니 장차 천겁을 피할 수 없다."
들어보니 조화역천정의 능력을 10회 사용하면 하루 즉, 24시간 안에 천겁의 형벌을 받아 즉사하게 된다.
강혁의 경우 10회를 사용하기 직전 천만다행히 루이즈의 도움으로 그것을 중단했다.
그러나 안심할 건 아니었다.
이미 역천의 힘을 9회 사용한 터라 당장 벌을 받지 않을 뿐, 죽기 전에 어떤 식으로든 천겁의 형벌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그 천겁은 언제 떨어질지 알 수 없다고 했다.
당장 내일일 수도 있고, 어쩌면 수명을 다해 죽기 직전일 수도 있고.
'하...!'
강혁은 사실을 알고 나니 맥이 빠졌다.
천겁의 저주를 피할 수 없다고?
워낙 허무맹랑한 소리이지만, 그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어차피 그는 이제 73일 안에 죽을 운명이라 별로 겁날 것도 없었다.
'조화역천정 덕을 좀 보나 했더니 의미없는 짓이었군.'
대략 두 달 남짓 수명이 연장되었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아야 할 판.
그렇게 강혁이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자 루이즈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나 너무 걱정마라. 나를 만난 것이 그대의 행운, 그대가 만일 나를 도와준다면 나 또한 그대가 천겁을 피할 수 있게 도와주도록 하마."
"천겁을 피할 수도 있는 겁니까?"
"물론이다. 그대가 나를 도우면 그대의 정해진 수명까지 별다른 천겁이 펼쳐지지 않을 것이다."
"그럼 제가 어떻게 당신을 도울 수 있습니까?"
"나를 위해 저 안쪽에 있는 약초를 뽑아오면 된다."
약초? 또 약초인가?
강혁은 고개를 갸웃했다.
"어떤 약초 말입니까?"
"저 안에 들어가면 만년자룡초가 있다."
"만년자룡초? 자룡초가 만년을 묵은 건가요?"
"그대의 말대로다. 그것을 채취해 나에게 가져다 준다면 나는 그에 대한 보상으로 그대가 천겁을 피할 수 있도록 도와주도록 하지. 또한 도깨비가 더 이상 그대를 해치지 않도록 해주마."
"도깨비라니 그게 무슨 말이죠?"
"너를 이곳으로 보낸 그 요수 녀석 말이다."
"그 괴물이 도깨비였다고요?"
"연기8성의 경지에 이른 저계 요수다. 아주 하찮은 수준이다만 그대의 힘으로는 죽었다 깨도 그 요수를 당해낼 수 없을 것이다."
강혁에게는 넘사벽과 같은 존재인 그 괴물이 사실 도깨비였을 줄이야.
그런데 더욱 놀라운 건 루이즈는 그런 도깨비 괴물을 아주 하찮다 말하고 있었다.
"이제 알았느냐? 그럼 어서 가서 만년자룡초를 캐오도록 하여라."
"도깨비를 손쉽게 해치울 만한 당신 정도 능력이면 그냥 직접 캘 수도 있을 텐데 왜 저에게 부탁하는 겁니까?"
그러자 루이즈가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만약 그게 가능했다면 내가 어찌 그대에게 부탁을 했겠느냐? 그대는 느끼지 못하겠지만 나는 여기서 움직일 수 없는 몸이다. 나의 원신을 지탱하던 미량의 본원지기마저 그대를 돕느라 거의 소모한 상태이니 말이야."
들어보니 루이즈는 아주 대단한 능력을 가진 다른 세계의 존재인데 무슨 사정이 생겨 큰 부상을 입고 이곳에서 요양 중인 것 같았다.
그러나 그냥은 치료되지 않고 만년자룡초라는 것을 섭취해야 하는 모양이었다.
"도와줄 생각은 있습니다만 그 전에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이라고?"
강혁이 갑자기 조건을 달자 루이즈는 어처구니가 없는 듯 그를 매섭게 노려봤다.
그녀의 노한 시선과 마주치자 강혁은 순간 몸서리치는 두려움이 엄습해왔지만 이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차피 저는 천겁인지 뭔지 큰 관심이 없습니다. 당신이 천겁을 피할 방법을 알려준다 해도 그것과 관계없이 곧 죽을 몸이거든요. 제 수명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루이즈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강혁을 잠시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탄식했다.
"그대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이해가 되는구나."
그녀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럼 어디 그대의 조건을 말해보거라. 내게 무엇을 원하느냐?"
"당신이 구체적으로 누구인지, 그리고 왜 만년자룡초가 필요한지 제대로 설명해주십시오."
순간 루이즈의 표정이 다시 차가워졌다.
"그대와 나는 전혀 다른 세계의 존재이니 나에 대해 깊은 관심을 두지 말라 하였다. 벌써 잊은 것이냐?"
"그래서 묻는 것입니다."
강혁은 담담히 말을 이었다.
"입장 바꿔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돕겠습니까? 혹시라도 당신이 엄청나게 사악한 존재라면 내가 당신을 도왔다가 세상이 멸망하기라도 하면요? 나야 어차피 곧 죽을 몸이니 세상에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자 루이즈가 난감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무슨 뜻인지 알겠다. 그대의 그 신중함이 무척 마음에 든다만 나로서는 그대에게 내가 누군지 이름 외에는 알려줄 것이 없다. 그 이유는 그 또한 천리를 거스르는 것이기 때문이지."
"고작 정체를 알려주는 게 역천과 비슷한 죄라는 겁니까?"
"그러하다. 솔직히 말한다면 내가 그대를 은밀히 도와 이곳 비경에서 생존하게 했던 것도, 또한 자룡초를 섭취하게 해서 자룡지기를 얻게 한 것도 사실은 해서는 안 되는 일. 나 스스로 추후 천겁을 각오하고 한 일이었다."
"그게 정말입니까?"
강혁이 깜짝 놀랐다.
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루이즈가 천겁을 각오했다니.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왜 그런 일을 한 겁니까?"
"당연히 나 또한 그대에게 도움을 받기 위함이었다."
이유없이 구해준 게 아니라는 뜻.
강혁을 이용하기 위해 살려줬다는 얘기였다.
"그러나 그대의 말을 들어보니 단지 그것만으로는 나를 도울 이유가 충분치 않을 수 있겠구나."
루이즈는 잠시 고심하더니 기이한 미소를 지으며 강혁을 바라봤다.
"그럼 내가 그대에게 내건 조건에 그대의 수명을 늘릴 방법도 추가하도록 하마."
"수명을 늘리는 게 가능합니까?"
"그대는 이미 조화역천정으로 경험하지 않았느냐? 내가 알려주는 방법은 그런 하찮은 수준이 아니라 수십 년 이상 수명을 늘릴 수 있다. 당연히 천겁을 피할 방법도 알려줄 것이다."
수명을 늘리는 행위는 이유불문 무조건 역천으로 인해 천겁의 벌을 받게 되어 있다.
그런데 그런 천겁에서 죽지않고 살아남을 방법이 또 존재한다니 신기한 일.
'그럼 얘기가 달라지지.'
루이즈의 정체 운운하며 조건을 달긴 했지만 사실 그녀의 정체가 뭔지 꼭 알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수십년 이상의 수명에 천겁이라는 부작용도 피할 수 있다면 강혁으로서는 절대 거절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그럼 어떤 식으로 저의 수명을 늘려줄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알려주십시오. 그것을 듣고 결정하겠습니다."
설령 수명을 수십 년 늘리는 게 가능하다고 한들 무슨 수를 써도 성공할 수 없는 허무맹랑한 것이라면 의미가 없으리라.
그래서 일단 들어보고 판단하기로 했다.
그저 달콤한 말만 듣고 무턱대고 만년자룡초를 캐다 바칠만큼 그는 순진하지 않았다.
'만년자룡초! 왠지 대단한 약초같은데 차라리 그걸 내가 먹으면?'
루이즈와의 협상이 여의치 않으면 저 동굴 안쪽에 있다는 만년자룡초를 먹어치울 생각도 있었다.
그 약초가 도깨비 괴물을 하찮다 말할만큼 엄청난 능력을 지닌 루이즈의 상처를 치료하는데 도움이 될 정도라면?
당연히 강혁 자신에게도 분명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될 지 모르니 말이다.
그런데 루이즈는 강혁의 그 마음을 훤히 내다보고 있었다.
"만년자룡초는 적어도 금단의 경지에 이르지 않으면 그 기운을 다스릴 수 없는 약초이지. 그대가 혹여라도 나의 말에 의심을 품고 그것을 스스로 섭취한다면 그 즉시 한줌의 먼지도 남지 않고 녹아버릴 것이다."
"금단의 경지? 그건 뭡니까?"
"영력을 수련하여 이룰 수 있는 경지 중의 하나로 축기경을 돌파하면 이룰 수 있다."
영력? 축기경? 돌파?
강혁은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중 한 단어는 귀에 익었다.
"잠깐만, 지금 혹시 영력이라고 했습니까?"
"그러하다. 그대는 전에 영력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느냐?"
"절벽 위에 있는 도깨비 놈이 바로 그 영력을 쓰는 괴물이었죠. 그놈에게는 제가 가진 마나의 힘이 전혀 통하지 않았습니다. 영력이 대체 무슨 힘이기에 그리 대단한 능력을 발휘하는 지 모르겠군요. 그럼 혹시 당신도 영력을 쓸 수 있는 겁니까?"
영력을 쓸 수 있냐고?
그 말이 그리 어이없는 질문이었을까?
루이즈가 뭔가 묘한 표정을 짓더니 슬쩍 미소를 지었다.
아주 잠깐의 순간 피어난 미소!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순식간에 본래의 차가운 표정으로 돌아갔지만.
강혁은 너무도 아름답고 눈부신 그녀의 미소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면 그녀가 그나마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어 정말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고 방금 전처럼 밝게 미소 지으며 뭔가를 부탁한다면 그냥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녀 스스로 그것을 모르는 것인지 그런 방법은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그대가 가진 마나라 불리는 내가진기의 힘은 영력에 비하면 아주 하찮은 수준이니 당연한 일이지. 마나로 아무리 대단한 경지를 이루어도 영력을 가진 연기초기의 수선자를 당해내기가 쉽지 않다. 하물며 도깨비 녀석은 연기중기의 막바지로 조만간 연기후기에 이를 수선자이니 그대가 무슨 수를 써도 그를 이기는 건 불가능하다."
영력을 흡수해 그것을 활용할 수 있게 되면 그들을 수선자 혹은 수도자라 부른다고 했다.
가장 기초적인 경지가 바로 연기경(煉氣境).
연기경은 1성부터 12성까지 존재하는데 도깨비는 무려 연기8성에 이른 엄청난 능력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연기12성에 이른 수선자 중 아주 소수만이 그것을 돌파해 축기경(築基境)에 이를 수 있다."
"축기경에 이르면 어느 정도 강해지는 겁니까?"
"그대를 괴롭히던 도깨비보다 강한 연기후기 수선자 수십 명이 덤벼도 축기1성을 당해내지 못한다. 그럼 답이 되었느냐?"
맙소사!
연기8성의 도깨비만 해도 상상을 초월한 강자인데 그런 도깨비보다 강한 수선자 수십 명을 단신으로 물리칠 수 있는 능력이 불과 축기1성이라는 것.
정말 그런 경지가 실재하는 것일까?
강혁은 허무맹랑한 소설 속 얘기를 듣는 기분이었다.
"그럼 축기경에도 1성부터 12성까지 있는 겁니까?"
"물론이다. 고된 수련과 천운이 따라줘 축기12성에 이른 이들 중에서 아주 극소수만이 희박한 확률로 그 한계를 돌파할 수 있는데 그것이 바로 금단(金丹)의 경지이니라. 만년자룡초는 적어도 금단10성의 경지에는 이르러야 그 기운을 다스릴 수 있는 영초. 그러니 그대는 혹여라도 그에 대한 욕심을 갖지 마라."
순간 강혁의 표정은 경악으로 가득 찼다.
"그럼 루이즈 당신은 금단10성의 경지에 이른 것입니까?"
현대수선전 9화
그러자 루이즈의 표정에 다시 어이없다는 듯 가벼운 조소 비슷한 미소가 피어났다가 사라졌다.
마치 금단10성 정도는 그녀에게는 아주 하찮은 수준이라는 듯.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경지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은지 고개를 흔들었다.
"나에 대해 깊이 알려하지 말라 하지 않았느냐? 이제 그대가 궁금한 것을 알려줬으니 어서 가서 만년자룡초를 캐오도록 하여라."
"아직 제가 어떤 식으로 수명을 늘릴 수 있는지 알려주시지 않았습니다."
강혁은 그 말을 듣기 전에는 움직이지 않겠다는 듯 단호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루이즈가 끄덕였다.
"조화역천정의 천겁은 그대가 영력을 수련해 연기1성의 경지에 이르면 자연스레 회피할 수 있다. 하여 나는 그대를 연기1성의 수선자로 만들 생각이다."
맙소사!
영력을 쓰게 해준다고?
마나로는 어쩌지 못하는 신비한 힘 영력.
화탄구와 조화역천정 같은 각종 법기들이 가진 신비한 능력도 모두 영력에서 비롯된 것이라 했다.
정말로 그 황당무개한 힘을 쓸 수 있다면?
강혁의 가슴이 세차게 두근거렸다.
"정말 저도 영력을 쓸 수 있는 것입니까?"
"물론이다. 본래 영력을 흡수하려면 몸에 영근(靈根)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그대는 영근이 존재하지 않아 수선자가 되는 건 불가능한 운명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저계 수선자들의 상식일 뿐 나와 같은 고계 수선자에게는 영근이 없는 이에게 영근을 만들어주는 건 별로 어렵지 않은 일이지."
그 말과 함께 루이즈는 영근이 뭔지 간략히 설명해줬다.
영근에는 여러 종류가 있는데 물(水), 불(火), 흙(土), 나무(木), 쇠(金), 바람(風), 벼락(雷)과 같은 것들이 대표적이었다.
종류 불문 최소 하나의 영근이 존재해야 영력을 쌓을 수 있는데 간혹 여러 개의 영근을 가지고 있는 특별한 존재도 있다고 했다.
"영근이 많을수록 좋은 겁니까?"
"꼭 그런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하나 뿐일지라도 영근 자체의 자질이 매우 뛰어난 것이 경지를 높이는데 훨씬 유리하기 때문이야."
그 후로 장황한 설명이 이어졌는데 강혁은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영근의 개수보다는 자질이 더 중요하다는 뜻은 이해했다.
"영근은 타고나는 것이라 했는데 저에게는 영근이 없다는 것이군요?"
"안타깝게도 그러하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나를 만난 것이 그대에게는 매우 큰 행운. 만년자령초 옆에 영과(靈果)가 존재하니 나는 그것을 그대에게 복용시킬 생각이다."
"영과는 뭐죠?"
"그것이 있어야 그대에게 영근을 생성시킬 수 있다. 그러니 그대는 만년자령초와 함께 영과도 채취해야 할 것이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런데 아직 저의 수명을 늘리는 방법에 대해서는 설명해주지 않으셨습니다."
"연기1성에 진입하는 순간 그대는 연기장생단이라 불리는 특별한 단약을 복용할 수 있게 되는데 그것은 한 알 당 수명 2년이 증가하는 효력이 있지."
"단약 한 알에 2년이라고요?"
강혁은 깜짝 놀랐다.
하루도 아니고 한 달도 아니고 1년도 아니고 무려 2년이란다!
믿기지 않았다.
정말 그런 꿈의 단약이 존재한다는 말인가?
루이즈는 오연한 표정으로 끄덕였다.
"그러하다. 나는 그대에게 연기장생단을 제조하는 방법을 알려줄 생각이다."
단약을 주는 게 아니라 만드는 방법을 알려준다고?
강혁은 더욱 경악했다.
"그럼 그 단약을 만들어 먹기만 하면 수명이 계속 2년씩 증가하는 겁니까?"
"그러면 얼마나 좋겠냐만 연기경에는 오직 12알의 연기장생단만 복용이 가능하다. 그보다 더 먹는다 해도 수명이 늘어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러나 연기장생단 12알을 한 번에 다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 했다.
연기1성에 1알.
연기2성에 1알.
연기3성에 2알.
연기4성에 2알.
연기5성에 3알.
연기6성에 3알.
이런 식인 것이다.
"그럼 저의 영력 경지가 연기6성에 이르러야 도합 24년의 수명 증가가 가능하겠군요. 제가 연기6성에 이르는 게 가능한 일입니까?"
"이곳 자룡비경에는 영력의 샘이 존재하고 있으니 내가 알려주는 심법을 꾸준히 수련한다면 그대가 연기6성에 이르는 것은 비교적 빠른 시간에 가능할 것이다."
강혁은 고심에 잠겼다.
'24년을 더 살 수 있게 된다고?'
그것도 그냥 되는 게 아니고 스스로 수련을 통해 경지를 높여야 가능한 일.
좀 더 길면 좋겠지만.
솔직히 그거라도 어디인가?
이대로면 73일 후에 죽게되는 강혁으로서는 매우 솔깃한 제안이 아닐 수 없었다.
"결국 영력이라는 걸 수련해도 제가 늘릴 수 있는 수명은 최대 24년인 거군요."
"그렇지 않다. 만일 그대에게 특별한 천운이 주어져 연기12성의 경지를 돌파해 축기경에 진입할 수만 있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그대의 수명은 추가로 최소 100년 이상 늘어나게 될 것이다."
"추가 100년이요? 그게 정말입니까?"
"그뿐이 아니다. 축기경에 진입하면 축기장생단을 복용할 수 있는데 그 또한 12알까지 가능하다. 당연히 연기장생단보다 축기장생단의 효능이 훨씬 뛰어나니 그것까지 합치면 그대의 수명은 그대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늘어나게 되리라."
"그럼 축기경을 목표로 수련해야겠군요!"
강혁이 상기된 표정으로 말했지만 루이즈는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다만 크게 기대하지는 않는 게 좋을 것이다. 연기경 수선자가 1000명 있다면 그중 한두 명만이 축기경에 진입할 수 있지. 특별한 행운과 엄청난 고통! 이 두 개가 균형을 이뤄줘야 하기에 매우 어려운 게 당연하다."
"행운과 고통?"
"나를 만난 이상 행운은 이미 그대에게는 넘친다고 봐야하겠지. 경지를 높이려면 그만큼 뛰어난 심법을 수련해야 하는데, 내가 알려주는 심법은 축기경 정도가 아니라 금단경 이상의 경지도 가능한 최상위 심법이기 때문이야."
금단경 이상이라고?
강혁의 가슴이 다시 세차게 뛰었다.
"혹시 금단경이 되면 또 수명이 늘어나는 겁니까?"
"물론이다. 그때는 200년이 추가로 늘어나게 되고 금단장생단으로 또 수명을 늘릴 수 있다."
맙소사!
200년이 또 늘어난다니.
그럼 단약을 먹지 않는다 해도 금단경에 이른 사람은 보통 사람에 비해 수명이 총 300년이 늘어난다는 뜻.
그래서일까?
강혁은 루이즈의 경지가 더욱 궁금해졌다.
그녀가 금단경을 하찮게 여기는 걸 보면 최소 그보다 한 단계 위의 경지일 것이다.
어쩌면 몇 단계 더 위일 지도 모르고.
대체 얼마나 강한 것일까?
불쑥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는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물어보지 말라고 했는데 또 묻는 건 실례야.'
그리고 지금은 루이즈의 경지가 뭔지 아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강혁 자신의 경지를 높이는 게 중요한 것이다.
"그럼 당신이 알려준 심법만 수련하면 저 역시 금단경 위의 경지도 이룰 수 있다는 뜻입니까?"
"내가 알고 있는 심법은 오직 하나 뿐. 내가 수련한 그 심법을 그대에게 전수할 생각이다. 그 말은 곧 그대가 무수히 경지를 돌파하면 내가 이른 영역까지 이를 수 있음을 의미한다만, 실제로는 축기경은커녕 연기12성에 이르기만 해도 기적이라 생각되는구나."
그녀는 현실적으로 강혁이 축기경에 진입하는 건 불가능하다 생각하고 있었다.
'수명이 문제야. 아무리 내가 천령심법을 전수한다 해도 인간 수선자의 경우 연기1성에서 연기12성에 이르려면 최소 40년의 시간은 필요할 터인데.'
보통은 제 아무리 뛰어난 수선자라 해도 연기12성을 달성하려면 최소 80년 이상 걸리는 게 정상이었다.
그러나 천령심법과 영력의 샘이라는 천고의 기연으로 인해 강혁은 대략 40년 정도면 연기12성까지 이를 가능성이 생겼다.
그렇다 해도 강혁은 앞으로 최대 24년의 수명만 늘릴 수 있을 뿐.
그 안에 연기12성에 이르는 건 불가능하다고 봐야 했다.
하지만.
만약 강혁에게 또 다른 천운이 따라주어 24년 안에 연기12성에 이른다고 치자.
연기12성에 이른 수선자들 중에서도 축기경을 돌파하지 못하고 수명이 다해 죽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상위 경지 돌파는 역천의 천겁을 뚫어야하는 만큼 엄청난 행운이 수반되지 않으면 시도조차 못하고 죽을 수 있다.
당연히 강혁이 축기경을 돌파하는 건 꿈도 꾸지 못할 일.
하물며 축기경을 넘어 금단경에 이른다는 건 사실상 망상에 가깝다고 봐야하리라.
그러나 강혁의 눈빛은 아까에 비할 수 없이 진지해져 있었다.
처음에는 황당무계하다 생각했는데 왠지 점점 확신이 들었다.
만약 축기경에 들 수만 있다면 웬만한 A급 각성자, 아니, S급 각성자보다도 훨씬 더 오래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단명할 예정이라 절망으로 포기했던 인생.
그런데 오래 살 수 있는 희망이 생겨났는데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무슨 고통을 감내하고라도 축기경에 진입한다. 아니, 기왕이면 금단경도 도전해보는 거다.'
곧바로 그는 루이즈를 향해 물었다.
"아까 연기경을 넘어 축기경에 진입하려면 행운과 더불어 엄청난 고통이 있어야 한다고 했는데 그 고통은 어떤 걸 의미합니까?"
"영력 수련에는 엄청난 고통이 따른다. 특히 내가 그대에게 전수할 심법은 그 고통이 더하다. 그대가 수련에 미친 독종이 아니라면 축기경 돌파는 기대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순간 강혁의 두 눈이 강하게 빛났다.
"지금 수련에 미친 독종이라 했습니까? 다른 건 몰라도 미친 듯 수련하는 것은 자신있습니다만."
화염처럼 이글거리는 강혁의 안광을 보며 루이즈는 뜻밖이라는 듯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저 눈빛! 범상치 않아.'
강혁의 눈빛에서 열망 정도가 아니라 광기(狂氣)가 넘쳤다.
그녀가 무수히 보아왔던 고계 수선자들에게도 저런 정도의 눈빛은 흔치 않았다.
'저 광기! 단지 지금의 일시적인 각오가 아니라 지금껏 그리 살아온 것이구나.'
강해지고자 하는 열망을 넘어선 광기가 없다면 절대 상위 경지에 이를 수 없는 법.
루이즈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정말로 그대가 그런 각오를 가지고 있다면 축기경도 노려볼 수 있겠지. 혹여라도 그대가 진정 축기경에 진입한다면 그때는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으리라."
"새로운 세상이요?"
"그때가 되면 자연스레 알게 될 것이다."
"그렇군요. 그럼 이제 가서 만년자룡초와 영과를 따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자 루이즈는 그것들을 채취하는데 주의할 사항을 알려줬다.
까다로운 내용이었지만 게이트의 약초 채집 스킬 만렙에 가까운 강혁에게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그는 자신있는 미소를 지어보이고는 곧바로 동굴 안쪽으로 향했다.
'정말 만년자룡초라는 게 있기는 한 건가?'
아무리 영초라지만 고작 풀이 1만년이 넘도록 자란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더구나 먹으면 영근이 생기는 영과라는 과일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을까?
그런데.
그러한 의문은 동굴 안으로 잠시 들어가자 즉각 풀렸다.
전방에 신비한 빛의 광채가 물처럼 가득 차 있는 거대한 웅덩이 같은 것이 나타났는데, 그 웅덩이의 중앙에 작은 섬처럼 솟아있는 지대가 하나 있었다.
바로 그곳에 잎사귀가 자수정처럼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는 약초가 보였던 것이다.
'저것이 만년자룡초?'
보통의 자룡초보다 10배는 거대한 크기. 루이즈가 알려준 그 생김새 그대로였다.
현대수선전 10화
'만년자룡초는 영력의 샘 중앙에 위치해 있다고 했는데 그럼 저 신비한 빛의 웅덩이가 영력의 샘인가 보군.'
영력의 샘이 있는 곳에서 심법을 수련하면 매우 빠른 속도로 영력을 흡수할 수 있다고 한다.
모든 수선자들이 꿈에라도 찾기 원하는 최적의 영력 수련장이 바로 눈 앞에 펼쳐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 영력 수련에 대해 문외한인 강혁은 이 영력의 샘이 그토록 대단한 장소인지 잘 실감하지 못했다.
'일단 만년자룡초부터 캐자.'
루이즈는 강혁이 영력의 샘에 무턱대고 들어가면 전신이 녹아버릴 거라고 했다.
영력의 샘을 유심히 관찰하면 일정 주기로 떠오르는 큼직한 돌들이 나타나는데 그것들을 딛고 중앙까지 건너가야 하는 것이다.
강혁은 루이즈가 알려준 대로 타이밍을 기다렸다가 한 발 한 발 디딤돌을 딛고 중앙으로 접근, 만년자룡초가 있는 지대에 도달했다.
슥. 스슥.
최대한 신중하게 만년자룡초 채취 작업에 착수했다.
만년자룡초는 오직 한 뿌리뿐이라 실패하면 돌이킬 수 없으리라.
약초가 상하지 않게 캐야하는 터라 고도의 집중력과 조심성이 필요했다.
완료!
다행히 무사히 만년자룡초를 뽑아 망태기에 넣는데 성공했다.
'굉장히 피곤하네.'
약초를 한 뿌리 뽑았을 뿐인데 체력과 마나가 절반 이상 소모될 줄이야.
강혁은 잠시 숨을 몰아쉬고 다시 신중하게 돌들을 딛고 영력의 샘 바깥으로 나왔다.
그리고 주변을 살펴보니 루이즈의 말대로 칠색의 빛깔을 가진 딸기 형상의 과일 하나가 보였다.
'저게 바로 영과라는 거군.'
그 즉시 영과도 따서 망태기에 넣었다.
"으윽...!"
순간 강혁은 몸의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영과를 따는 순간 마나가 대거 몸에서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체력도 엄청나게 소모되었다.
약초 한 뿌리 캐고 과일 하나 땄을 뿐인데 마나와 체력이 완전히 바닥나 버린 것이다.
게이트에서 수많은 약초를 채취해봤지만 이런 경우는 정말 처음이었다.
'괜히 영초나 영과가 아니겠지.'
강혁은 심호흡을 몇 번 한 후 몸의 균형을 잡았다.
이로써 모든 임무 완료!
만년자룡초와 영과를 얻었으니 이제 루이즈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면 될 것이다.
'근데 저것들은 뭐지?'
영력의 샘 주위에 나 있는 수많은 풀들 사이로 웬 보석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영력의 샘 주변에는 온갖 기이한 약초나 과일들이 보였는데, 그중에서 지금 강혁이 채취한 만년자룡초와 영과가 가장 귀한 것이라 했다.
물론 그렇다 해서 다른 약초나 과일들이 쓸모없는 건 아니었다.
연기장생단을 만들 때 필요한 영초(靈草)들이 이곳에 상당수 존재한다고 했으니까.
구체적으로 어떤 영초들인지는 그녀에게 배워야 할 것이다.
그보다 웬 보석들이 곳곳에 있는 것일까?
각종 약초들 사이에서 반짝이는 가지각색의 자그만 돌멩이들.
'저 붉은 색 돌은 루비는 아닌 것 같은데, 이 녹색 돌도 에메랄드나 옥은 아닌 것 같고.'
보석은 분명한데 처음 보는 것들.
아무래도 영력과 관련된 보석들이란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그것들을 줍는데는 체력이나 마나가 소모되지 않았다.
반짝이는 보석들을 10여 개 주워 주머니에 넣고는 루이즈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루이즈 님! 만년자룡초와 영과를 가져왔습니다."
곧바로 망태기에서 약초 한 뿌리와 과일 하나를 꺼내 앞에 놓았다.
그러자 루이즈는 그중에서 만년자룡초를 낚아채듯 손에 쥐고는 감개무량한 표정을 지었다.
"만년자룡초를 이토록 상처없이 채취해오다니 아주 훌륭하구나."
그녀는 매우 기뻐하며 강혁을 칭찬했다.
"잠시만 멀리 가서 대기하거라."
"예."
강혁은 그녀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멀찌감치 물러났다.
그리고 동굴의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고갈된 체력과 마나를 회복하려면 휴식이 필요하리라.
최고의 휴식은 수면!
'한참 걸릴 것 같으니 좀 자고 일어나자.'
곧바로 그는 눈을 감고 잠이 들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화아아아악!
갑자기 강렬한 빛이 엄습해와 강혁은 잠에서 깨어났다.
'으윽! 눈부셔!'
그러던 그는 멀리서 루이즈의 몸이 해처럼 환하게 빛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까와는 비할 수 없이 강렬한 기운이 그녀에게서 느껴졌다.
"몸이 회복되신 것입니까, 루이즈 님?"
"그대의 이름이 차강혁이라 했지?"
"예. 맞습니다."
루이즈가 빙긋 미소를 짓더니 강혁을 보며 손짓했다.
"차강혁! 그대가 만년자룡초를 가져다 준 덕분에 나의 본원지력이 일부 회복되어 원신이 흩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앞으로 많은 세월이 필요하겠지만 나의 본래 능력을 완전히 회복하는 것도 가능할 것 같구나."
"그렇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이제 나는 이곳에서 더 이상 머무를 수 없다. 내가 이곳에 있는 것 자체가 천리를 거스르는 것이기 때문이야."
"지금 바로 떠나신다고요?"
강혁이 놀라 물었다.
설마 약속도 지키지 않고 떠날 생각인 것인가?
"불안해할 것 없다. 내가 떠나기 전 그대와 약속한 것은 모두 지킬 것이다."
강혁은 어느새 그녀의 앞으로 끌려가듯 이동해 있었다.
"먼저 그대에게 영과를 복용시켜 영근을 만들어줄 뿐 아니라 영력이 연기1성의 경지에 이르게 해주마. 눈을 감아라."
"예."
그가 눈을 감자 입이 저절로 벌어지더니 칠색 빛깔 영과가 새처럼 날아들어 그의 목구멍 아래로 사라졌다.
화아아악!
동시에 몸 안에서 뭔가가 폭발하는 듯한 엄청난 충격을 느끼며 강혁은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