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검술 성생님 케르고(2)
70. 검술 선생님 케르고(2)
고블린 기사 케르고.
그의 부모는 노예였다.
자연스레 케르고 또한 태어나는 순간 노예가 되었다.
케르고는 그것에 대해 불만을 가진 적이 없었다.
그는 평생 동안 한 순간도 노예가 아니었던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랬던 그의 인생이 한 기사를 만나고 바뀌었다.
-재능이 있는 놈이군.
기사들 중 최고라고 칭송받는 왕실의 수호기사.
그곳의 단장이 케르고를 거둔 것이다.
단장은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무작정 케르고를 자신의 종자로 삼았다.
그때부터 케르고는 새로운 세계에 눈을 떴다.
말 그대로 별천지.
혀를 대는 것만으로도 기절할 것 같은 황홀한 음식을 맛보았으며, 보는 순간 눈이 튀어나올 만큼 미인인 고블린도 만났다.
그들을 보며 케르고는 다짐했다.
-높은 곳으로 올라가자.
단순히 종자가 아닌 기사가 되자.
최강의 기사가 돼서 온갖 부귀영화를 누려보자.
케르고에게는 가능성이 있었다.
자신을 거둔 단장의 안목대로 정말 검에 대한 엄청난 재능이 있었기 때문이다.
보통 3살 때부터 검을 배우는 다른 고블린들과 달리 케르고는 8살이 되어서 검을 들었다.
하지만 금세 또래들을 제치고 9살이 되던 해. 마침내 '기사 훈련소'에 입소할 수 있었다.
-케헬헬헬!
온 세상을 가진 것 같았다.
세상의 중심이 자신인 것 같았다.
그러나 세상은 냉혹했다.
기사 훈련소의 대부분이 귀족의 자제였으며, 그나마 귀족이 아닌 이들도 돈이 많은 부호의 자식들이었다.
케르고처럼 노예 출신인 교육생은 아무도 없었다.
-버러지 같은 놈.
-단장께서는 무슨 생각으로 저런 쓰레기를 들이신 건지.
그곳에 자신의 편은 없었다.
교육생, 교관, 심지어 훈련소 소장까지 직접 찾아와 면박을 줬다.
자신은 유서 깊고 전통 있는 기사 훈련소의 수치였다.
케르고는 점점 지쳐갔고, 그 정신은 마모됐다.
더 이상 검을 들기 싫었다.
훈련은 지겨웠고 힘들 뿐이었다.
그랬던 그에게 변화가 찾아온 것은 최근이었다.
"으아아아!"
살벌하게 생긴 인간.
검술 실력은 형편없으면서 힘만 무식하게 강하다.
따로 검술을 배운 적은 한 번도 없어 보인다.
게다가 재능도 평범하다.
고블린으로 치면 평생을 노력해도 중급 기사나 될 수 있을지 의문일 수준.
그 재능을 엄청난 전투 경험과 신체 능력으로 메우는 느낌이었다.
-채앵, 챙!
하지만 인간은 끊임없이 노력했다.
자신의 목숨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굉장히 강한 힘을 가진 것이 분명하지만, 오직 검술 실력의 상승이 목적인지 다른 기술을 사용하지는 않는다.
-서걱.
"무슨 생각하냐!"
잡생각이 길어졌던 탓일까.
케르고의 팔에 긴 검상이 생겼다.
예전이라면 기겁할만한 상처였지만, 이제는 묵묵히 바라볼 뿐이다.
"케륵!"
케르고가 다시 정신을 집중했다.
인간과 싸우며 자신의 정신은 다시금 날카로워지고 있었다.
그동안 막혀있던 장벽들이 생사를 오가는 전투 속에서 빠르게 무너져 겼다.
요즘 들어 다른 고블린들이 자신을 더욱 멀리하는 것이 느껴졌지만 상관없다.
어차피 처음부터 그들은 적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이대로 계속 강해진다.
그러면 그들은 더 이상 자신의 걸림돌조차 될 수 없을 것이다.
-채앵, 챙.
"좋아! 계속 몰아붙이라고!"
케르고와 강현의 검이 어지럽게 얽혔다.
**
[능력 중급 검술의 등급이 상승합니다]
들려오는 음성에 강현이 환호했다.
"됐다!"
무려 열흘 만에 이른 쾌거였다.
중급 검술이 마침내 C등급으로 올라 상급 검술이 된 것이다.
"수고했다."
"케르르..."
강현의 앞에는 지난 열흘 동안 함께한 고블린이 서있었다.
강현의 검술 선생님.
저 고블린 덕에 강현의 검술 실력은 빠르게 증가했다.
기존의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방식에서 놈이 휘두르는 방식을 따라한 것이 컸다.
이제는 오직 검만으로 고블린 세 마리를 제압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처음 만난 저 고블린만큼은 한 번도 이길 수 없었다.
"몬스터도 강해지는 건가?"
놈은 오히려 강현보다 더욱 빠르게 강해지는 것 같았다.
"휴우, 도대체 왜 너만 이길 수가 없냐?"
강현이 바닥에 주저앉으며 말했다.
케르고 또한 쉬는 것으로 받아들였는지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케륵!"
지난 열흘 동안 케르고는 이 기행에 완벽히 적응한 상태였다.
내심 만족하기도 했다.
그의 실력 또한 유례없이 빠르게 증가하고 있었으니.
"너는 이제 내 검술 선생님이니까. 특별히 살려준다. 다른 놈한테 죽으면 안 돼. 알겠냐?"
"케륵!"
"그래그래. 케륵인지 캬륵인지. 듣기 싫어 죽겠네. 쯧."
혀를 찬 강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목적을 이뤘으니 이제 기사 훈련소를 졸업할 때가 온 것이다.
발길을 돌려 입구로 향하던 강현이 멈춰 섰다.
"야!"
케르고를 부른 강현이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강현. 강현이다."
"케륵?"
"내 이름이 강현이라고 인마. 강현! 알겠어? 강.현."
갑작스러운 강현의 자기소개에 케르고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케르고."
"케르고? 그게 이름이라고?"
"케르고. 강현."
케르고가 강현과 자신의 이름을 반복하며 손가락을 왔다갔다 움직였다.
"오케이. 케르고. 다음에 또 볼 수 있으면 보자. 간다."
콧잔등을 한번 슥 문지른 강현이 쿨하게 뒤돌았다.
"케륵! 강켠!"
케르고가 강현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해석하자면, '또 보자. 강현!' 이란 뜻이었다.
이것은 지구인과 몬스터의 첫 우정이었다.
**
"안유서엉-!"
길드 사무실.
문을 박차고 들어온 강현이 소리쳤다.
"형. 어디 갔다 왔어요? 심심해 죽는 줄 알았네."
"그렇게 심심했냐?"
"예."
"그럼 나와 새꺄. 한판 뜨자."
"예?"
갑작스러운 강현의 말에 안유성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한판 뜨자고. 저번이랑 같은 룰로."
"그 사이에 뭐가 바뀐 것 같지는 않은데..."
안유성이 강현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그건 붙어보면 알겠지."
**
강현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핏물이 떨어졌다.
베데스 길드 사무실은 단숨에 호러 영화 세트장으로 변했다.
"벌써 며칠 째야?"
"그날 이후로 계속 저 상태라고..."
"나는 무서워서 출근하기도 싫어진다니까?"
이제는 제법 늘어난 배데스 길드의 사무원들. 그들은 강현이 등장할 때마다 풍겨오는 고약한 냄새에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누구 하나 나서서 말할 수 있는 이는 없었다.
"하아..."
자신의 자리로 강현이 쓰러지듯 의자에 몸을 기댔다.
"씨발..."
강현은 정말 자신 있었다.
이기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그날처럼 무방비하게 당하지는 않으리라 생각했다.
결과는 5전 5패.
여전히 안유성과의 격차는 높기만 했다.
"오? 이거 괜찮은데? 나체 강현 시리즈에 새로 넣으면 되겠어."
바닥에 앉아있는 안유성이 무언가를 조몰락거리고 있었다.
발가벗겨진 채로 만세를 하고 있는 강현의 피규어였다.
'개새끼...'
강현이 대련에서 패배할 때마다 새로운 피규어가 출시됐다.
불과 사흘 만에 무려 다섯 개의 피규어가 제작된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속도였지만, 안유성은 개인 사비까지 털어 넣고 있는 것 같았다.
당연히 시장 반응은 최악이다.
강현은 이제 사회적으로 변태의 반열에 올라 있었다.
-요즘 강현 무슨 생각으로 사는 거냐? 피규어 볼 때마다 토악질이 올라온다.
-ㄹㅇ. 몸 좋아서 자랑하고 싶은 마음은 알겠는데 이건 정도가 심해. 어디 노출증 환자도 아니고.
-판매 실적도 저조하던데 무슨 생각으로 저딴 걸 계속 찍어내는지 모르겠음.
-그것도 그건데 꾸준히 사주는 놈들이 있다는 게 더 신기함.
-나는 처음 사탄의 인형이 나았다. 이제는 인터넷에서 강현 사진만 봐도 소름이 끼친다.
인터넷에서 게시글을 보던 강현이 스마트폰을 던지려던 것을 억지로 참았다.
"형. 또 어디가요?"
"던전."
"어? 그럼 같이 가요."
"꺼져!"
괜히 심술을 부린 강현이 사무실을 박차고 나갔다.
**
"이기고 싶다. 격하게 이기고 싶다!"
강현이 붉게 충혈된 눈으로 소리를 질렀다.
본인의 약점을 개선하고 능력을 강화시킨다는 본래 목적은 완전히 잊은 것처럼 보였다.
'검을 다루는 기술. 그 자체는 놈이나 나나 별 차이가 없다. 중요한 건 다른 데 있어.'
지난 몇 번의 대련 이후 강현이 깨달은 것이었다.
안유성은 어떤 무기든 금세 이해하고 곧잘 다루었지만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지는 않았다.
'안유성은 그냥 싸움에 있어서는 타고난 놈이야. 균형감각, 동체시력, 판단능력, 육체를 활용하는 것까지. 모든 것을 최대로 활용해서 단순한 스텟 이상의 효율을 낸다.'
그렇기에 강현은 끊임없이 고민했다.
어떻게 해야 안유성을 이길 수 있을까.
압도적인 피지컬, 힘의 우위로 찍어 누르는 방법밖에 없는 것일까.
'피지컬, 터프한 전투 스타일은 분명 강한 무기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언제까지고 상급 육체 재생, 부활만 믿고 막무가내로 밀어붙일 수는 없었다.
그 한계를 이미 맛봤기에 새로운 돌파구를 찾고자 시작한 대련이다.
"내가 잘하는 것... 나만의 강점..."
길을 걸으며 중얼거리던 강현이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다.
"케륵!"
"오랜만이다. 사흘 만인가?"
한동안 매일같이 붙어살아서일까.
고작 사흘이 지났을 뿐이었지만 굉장히 오랜만에 만난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너 좀 피곤해 보인다?"
강현이 케르고를 보며 말했다.
사실 케르고의 상태는 조금 피곤해 보이는 정도가 아니었다.
강현과 함께 있을 때보다 무수히 많은 상처를 입고 있었으며 눈가에서는 흉흉한 빛이 맴돌았다.
"케르르..."
"그래. 말해 뭐하겠냐. 나도 답답하니까 몸부터 풀자."
빌게인의 장검을 든 강현이 자세를 잡았다.
"그럼 갈까?"
말을 하며 강현이 튕기듯 달려 나갔다.
순간 케르고의 검에 희미한 빛이 감돌았다.
'뭐지?'
강현의 예민한 감각은 그것이 마력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스킬을 쓰는 건가.'
그동안 케르고가 스킬을 사용하는 것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간혹 스킬을 사용하는 몬스터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들은 대부분 마법형 몬스터다.
격투형 몬스터가 스킬을 사용한 다는 기록은 소문으로 밖에 듣지 못했다.
'상관없어. 하던 대로 한다.'
여차하면 자신도 스킬을 사용하면 그만이었다.
강현은 더 이상 고민하지 않고 검을 맞부딪혔다.
-까앙!
둘의 검이 맞부딪히는 순간 강현의 검이 크게 떨려왔다.
"뭐야!?"
검을 부딪치자마자 강현은 느낄 수 있었다.
빌게인의 장검에 금이 갔다.
다급히 물러난 강현이 검의 상태를 확인했다.
이름 : 빌게인의 장검
등급 : B
내구도 : 287/500
능력 : 광전사, 내구도 강화
"이런 미친!"
그동안 아무리 강현이 험하게 써도 내구도가 거의 달지 않았던 빌게인의 장검이다.
"한 번에 100이 넘게 나갔어?"
그런 장검의 내구도가 어마어마한 폭으로 감소해 있었다.
"너. 무슨 짓을 한 거냐?"
"케륵!"
강현이 노려보며 말하자 케르고가 씨익 웃었다.
강현은 알지 못했지만, 지난 사흘간 케르고는 던전 안의 수많은 고블린들과 혈투를 벌였다.
고블린들이 강현과 함께 다니는 케르고를 완전히 적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케르고는 그들 사이에서, 심지어 자신의 교관이었던 고블린들이 단체로 덤벼 와도 버텨냈다.
그리고 그 결과.
마침내 검에 마력을 싣는 경지에 들어섰다.
"케르륵."
케르고는 더 이상 강현이 밉지 않았다.
자신을 이렇게까지 강하게 해 만들어 주었으니 말이다.
"게르, 케르륵(그러니 이제 죽어라)."
웃으며 말을 한 케르고가 전력으로 달려갔다.
-까앙!
다시 한번 검을 부딪친 강현이 뒤로 물러섰다.
이번엔 최대한 검을 흘려냈지만 그럼에도 10에 가까운 내구도가 달았다.
"이 새끼가. 뭐 좀 배웠다 이거냐?"
케르고는 강현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계속해서 검을 휘둘렀다.
-스걱!
속수무책으로 밀리는 강현의 몸에 점차 상처가 늘어가기 시작했다.
"오냐. 한번 해보자."
"케르..."
"으아아!"
[분노의 사자후가 발동됩니다]
[모든 적들의 사기와 능력치가 감소했습니다]
분노의 사자후를 사용함과 동시에 강현이 모든 버프를 활성화했다.
"어금니 꽉 깨물어라."
-촤아악!
강현이 바닥을 박차는 순간 충격을 견디지 못한 바닥에 거미줄처럼 금이 갔다.
복도를 달리는 강현은 좀 전보다 2배는 빨리진 것처럼 느껴졌다.
"케륵?"
강현의 완전 버프 상태.
케르고는 지켜본 적은 있지만 실제로 겪어본 적은 없었다.
그리고 그 상태의 강현은 케르고의 예상보다 훨씬 강한 것 같았다.
"케루룽."
당황한 케르고가 머리를 긁적이며 민망하다는 듯이 웃었다.
"늦었어. 이 새끼야."
-퍼억!
71화 검술 선생님 케르고(3)
71. 검술 선생님 케르고(3)
"후, 좀 살 것 같네."
케르고를 흠씬 두들겨 패준 강현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맥주 한 캔만 있으면 딱 좋을 것 같은데 말이야. 그렇지?"
"..."
전신에 피멍이 들어 퉁퉁 부은 케르고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물론, 답한다고 해도 강현이 이해할 리도 없었지만.
"그런데 아까 사용한 그 기술. 도대체 뭐야? 스킬이 맞기는 한 건가? 아냐. 스킬이라기엔 뭔가 묘하게 달라."
강현이 마력을 민감하게 느끼게 되면서 깨닫게 된 것이 있다.
스킬을 사용할 때 마력의 이동이 묘하게 어색하다는 것이다.
아직 정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강현은 항상 무언가 이상하다고 생각해 왔었다.
"그런데 저놈이 사용한 그 기술은 그런 어색함이 전혀 없었단 말이지."
반면 케르고의 기술은 굉장히 자연스러웠다.
마력 그 자체가 고유의 힘을 모두 발휘하고 몸에 부하를 주지 않는 느낌.
그 차이가 어디서 발생한 것인지 강현은 궁금했다.
"마력, 마력이라..."
순간 강현의 머리가 번뜩였다.
"저거 나도 할 수 있지 않을까?"
강현의 전투에 대한 재능, 센스는 좋게 말해도 평범한 수준이다.
그러나 마력만은 달랐다.
아직도 주위에서 자신만큼 민감하게 마력을 느낄 수 있다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강현은 어쩐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 잘하지도 못하는 검이나 붙잡을 게 아니었어. 다음 목표는 저 기술이다."
강현이 케르고를 열정 가득한 눈으로 응시했다.
"케륵...?"
"그러니까. 잘 부탁해 선생님."
이해할 수 없었지만 케르고는 확신했다.
다시 지옥길이 열렸다는 것을.
**
일주일 뒤.
흉흉한 기세를 뿜어내며 강현이 길드 사무실에 들어섰다.
"잘 지냈냐."
"강현님. 오셨습니까."
오랜만에 등장한 강현을 신성아와 길드원들이 반겼다.
"저 길드장님..."
한쪽에서 업무를 보고 있던 한재문이 강현에게 걸어왔다.
"왜?"
"그... 신태길 팀장님이 왜 연락이 안 되냐고 길드로 찾아오셨습니다."
"아, 좀 바빴어. 직접 올 정도면 뭐 중요한 일이래?"
"네. 그게…."
"잠시만."
한재문이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강현이 멈춰 세웠다.
"그건 좀 이따가. 지금은 더 중요한 게 있거든."
강현이 사무실을 두리번거렸다.
"안유성은?"
"저 여기 있어요."
강현의 부름에 구석에 있던 안유성이 손을 들었다.
"잘 지냈냐?"
"당연하죠. 요즘 나체 강현 시리즈에 새로 출시한 메가 근육 강현의 시장 반응이 괜찮아요. 특히 열혈 마니아층이 아주 탄탄한 편이죠."
"그래. 피규어... 좋지. 크큭."
강현이 실성한 사람처럼 웃음을 실실 흘렸다.
"한판 뜨자."
"자신 있어요?"
"장난하냐. 당연한 거 묻지 마라."
"형. 지금 피곤해 보이는데."
"네 걱정이나 해. 인마."
"저야 좋죠. 안 그래도 새로운 디자인이 떠올랐는데 잘됐네요."
신작 피규어를 출시할 생각에 안유성도 실실 웃었다.
"오늘 너 죽이고, 그 역겨운 피규어 전부 박살 낼 줄 알아라."
"역겹다니 너무한 거 아니에요? 제 예술혼이 들어간 작품들인데."
"닥치고 따라와."
강현과 안유성이 인근에 위치한 능력자 전용 훈련장으로 향했다.
"후우..."
첫날 이후로 건물 옥상에서 싸움을 벌이는 일은 없었다.
다른 층에 있는 사람들의 신고도 신고였지만, 자칫하다가는 옥상이 무너질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야야. 또 왔어."
"오늘도 완전히 몰골이네."
"어차피 끝나면 피범벅일 테니 그냥 안 씻고 온 거 아냐?"
"그럴지도."
"그나저나 강현 말이야. 매일같이 깨지는 거 보면 소문도 과장인 것 같아."
그때였다.
속삭이던 능력자들과 강현의 눈이 마주쳤다.
"커헉!"
능력자들이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무슨 눈이 저렇게 살벌해...'
도저히 눈을 마주할 수가 없던 그들이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준비됐냐."
방해꾼들을 처리한 강현이 몸을 풀었다.
"룰은 같다."
"예."
"그럼 시작한다."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강현이 전력으로 달려나갔다.
"뭐가 바뀌긴 한 거예요?"
기존과 별다를 것이 없어 보이는 전략에 안유성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거야 붙어 보면 알겠지."
강현과 안유성의 검이 어지럽게 얽혔다.
눈 깜짝할 새에 수십 회가 넘어가는 공방이 오고 갔다.
그 모든 공격 하나하나에 어지간한 능력자들은 일격에 무너뜨릴 힘과 기술이 담겨 있었다.
"역시 별거 없는데요?"
하지만 이들에게는 일상이다.
강현의 검술 실력이 조금 더 향상된 것 같지만 그뿐.
안유성과 강현 사이에 존재하는 전투 센스는 고작 그 정도로 메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제 끝낼게요. 얼른 끝내고 피규어 디자인이나 해야겠네요."
안유성이 지루한 표정을 지으며 검을 휘둘렀다.
-채앵!
단순한 휘두르기.
하지만 안유성은 그것으로 강현의 무게중심을 무너뜨리고 타이밍을 빼앗았다.
'이제 형은 중심을 잡지 못해 허우적거릴 거고, 나는 마무리로 형을 쓰러뜨린다.'
그리고 쓰러져있는 강현의 목에 칼을 가져다 댄다.
굉장히 단순해 보이는 행동들이지만 모든 것이 상대에게 치명적 이토록 철저하게 계산되어 있었다.
안유성이 강현에게 마지막 일격을 가하려던 때였다.
"응?"
"재미 다 봤냐?"
순간 강현의 몸에서 무언가가 거칠게 뿜어져 나왔다.
안유성은 그것이 마력이란 것을 단번에 눈치챘다.
"어, 어? 형 스킬 쓰면 안 되죠."
"이거 스킬 아니야. 새끼야!"
강현의 몸에서 나온 마력은 순식간에 눈에 보일 정도로 유형화되더니 검으로 모여들었다.
마력이 깃든 검이 푸르스름한 빛을 띠기 시작했다.
'이런!'
안유성의 육감이 강하게 울렸다.
저 공격은 받아낼 만한 성질이 아니었다.
검을 휘두르던 안유성이 다급히 몸을 뒤로 뺐다.
"늦었어!"
하지만 애초에 신체 스펙은 강현이 더 위다.
뒷걸음질로 강현에게서 도망칠 수는 없었다.
푸른 선을 그리는 강현의 검격.
안유성은 결국 검을 마주 휘둘러 방어할 수밖에 없었다.
-콰앙!
강현의 검과 안유성의 검이 충돌하자 폭발이 일어났다.
갑작스러운 굉음에 주위의 시선들이 몰리고, 그들의 시야에 바닥에 쓰러진 안유성이 들어왔다.
"형. 이건 반칙이잖아요. 하하..."
안유성은 자신의 목에 겨눠진 강현의 검을 보며 허탈하게 웃었다. 그가 들고 있던 검은 완전히 산산조각이 난 채로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뭐가."
"이번에 새로운 스킬이라도 배워 온 거예요?"
"스킬은 지랄. 내가 연습해서 터득한 능력이라니까. 능력. 몰라? 상태창에 있잖아."
"그걸 어떻게 믿어요?"
"내가 자존심도 없이 그딴 거짓말이나 치는 놈으로 보여? 내가 이거 익히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휴우, 알겠어요."
사실 안유성도 강현이 스킬을 사용한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마력의 움직임이 달라.'
강현처럼 완전히 마력을 느끼는 것은 아니지만 안유성도 육감의 도움으로 어느 정도 마력의 흐름을 인지한다.
'정제되지 않고 거칠게 움직이는 느낌. 임의로 마력을 통제한 건가.'
보통 스킬을 사용할 때는 발동하는 순간 정해진 루트를 따라 마력이 움직이는 느낌이다.
그러나 방금 강현이 사용한 것은 그러한 것을 완전히 무시하고 오로지 자신의 의지로 마력을 조종한 느낌이었다.
"형. 그거 아직 완성된 거 아니죠?"
"어. 어떻게 알았냐."
원래는 케르고처럼 강한 절삭력을 가지는 것이 목표였다.
하지만 강현의 마력 컨트롤은 아직 그 정도로 정교하지 못했다.
결국, 마력을 욱여넣듯이 뭉쳐서 휘두른 결과 강한 마력 폭발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래도 이렇게 하는데 내가 얼마나 개고생했는데."
"피규어 파는 게 어지간히도 싫었나 보네요."
"몰라서 물어?"
안유성도 강현이 전부터 마력에 대한 감각이 뛰어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스킬이 아닌 임의로 마력을 움직인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역시 형은 재미있어요. 크큭."
"뭐라는 거야? 미친 새끼."
검을 거둬들인 강현이 후련한 표정을 지었다.
"씨발! 이겼다아아!"
강현은 훈련장이 떠나가라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는 곧장 바닥에 쓰러지듯 누웠다.
"아으... 대가리 깨지겠네."
마력을 마음대로 통제하는 것은 엄청난 집중력을 요구했다.
그렇지 않아도 피곤한 상태에서 마력을 움직였더니 온몸이 징징 울리는 것 같았다.
-우우우웅
"형. 전화 안 받아요?"
"아?"
괜히 머리를 긁적인 강현이 스마트폰을 꺼냈다.
"크흠, 진짜 몸이 울리는 거였구나."
액정을 확인하자 신태길의 이름이 떠 있었다.
"여보세요."
-예. 강현 씨. 오랜만입니다.
전화 너머로 평소보다 지쳐있는 듯한 신태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에요?"
-중요한 일입니다.
"그거야 만날 하는 말이고."
-하아, 말장난할 기운 없습니다. 내일 시간 됩니까?
"내일? 시간이야 되죠."
-그럼 지난번에 공략 회의를 했던 회의장으로 와주시기 바랍니다.
"거긴 또 왜요?"
-요즘 뉴스도 안 보십니까?
안 봤다.
한동안 검과 마력에 미쳐 있었으니 그런 것들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뉴스?"
-지금 온 세상이 그 이야기만 하는데, 강현 씨만 참 태평합니다.
"제가 좀 평화주의자긴 해요."
강현의 말에 잠시 동안 정적이 이어졌다.
"뭐요? 불만 있음 말로 해요."
-내일 두 시에 뵙겠습니다.
신태길은 그 말을 끝으로 통화를 종료했다.
**
세계 던전 관리 기구.
그중에서 대한민국 지부의 본청.
그곳의 11층에는 대회의실이 자리 잡고 있다.
지난 'C등급 던전 공략 회의' 이후, 처음 방문하는 장소였지만 강현은 제법 익숙하게 회의장을 찾아갔다.
-철컥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이미 앉아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몇몇은 제법 익숙한 얼굴이었고 몇몇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오셨습니까."
앞에 서 있던 신태길이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이번에는 안 늦었죠?"
"예. 딱 1분 전에 오셨습니다."
"휴우... 다행이다."
"적어도 5분 전에는 와달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사소한 건 신경 쓰지 말고 얼른…"
말을 하던 강현의 어깨를 누군가가 두드렸다.
"잠시 지나가지."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화룡의 길드장. 박호연이 보였다.
"뭐야? 나보다 늦은 인간도 있는데 왜 뭐라 하고 그래요?"
강현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박호연은 순간 눈을 치켜떴으나, 금세 다시 눈을 내리깔았다.
"딱히 시비를 붙고 싶지 않으니 없으니 그쯤 하지. 조용히 지나가고 싶다."
"낯짝도 두껍네. 거대 길드장 정도 되면 기본 옵션으로 깔리는 건가?"
솔직히 던전 공략 이후 화룡 길드와 박호연에 대해 완전히 관심을 끊었었다.
어련히 알아서 무너지겠거니 하는 생각에서였는데 아직도 이런 자리에 참석할 정도로 건재할 줄은 생각지 못했다.
"두 분 다 그만하시죠. 이제 회의가 시작됩니다."
신태길의 말에 강현이 자리를 비켜주었다.
박호연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조용히 자리로 들어갔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오만방자한 태도를 보이던 전과는 조금 달라진 모습이었다.
"이제 모두 모였군요."
비로소 모인 특수 능력자 관리팀 전원.
"다들 바쁘신 분들이니 빠르게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그들을 둘러보며 신태길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72화 세계 던전 정상회담(1)
72. 세계 던전 정상회담(1)
회의장에 입장한 강현은 다른 능력자들의 면면을 살피고 있었다.
능력자 연합 - 최동우
단군 - 한세연
불사 - 한명도
화룡 - 박호연
이들은 이미 C등급 던전 '베난디의 숲'에서 안면을 튼 사이.
강현은 관심사는 이들이 아닌 오늘 처음 보는 능력자들이었다.
'마력이 특출하게 뛰어난 사람은 없다.'
강현이 유일하게 상대를 가늠할 방법은 마력을 느끼는 것이다.
마력 자체가 전투 능력을 대변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하나의 잣대가 되기에는 충분했다.
'높은 사람은 40중반을 넘어가는 것 같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나보다 아래다.'
스텟은 능력자의 전투 성향에 따라 분배된다.
따라서 레벨이 비슷하더라도 마력은 큰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완전히 마법 성향으로 보이는 몇몇 능력자를 제외하면 강현보다 높은 마력을 가진 이는 없는 것 같았다.
"뭐하는 짓이야?"
그때였다.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강현이 고개를 돌렸다.
"응?"
강현은 이런 자리에서 절대 볼 수 없으리라 생각한 사람을 보고 당황했다.
"응가 같은 소리 하네. 불쾌한 기운을 풍기는 것도 모자라서 마력으로 사람을 훑다니. 듣던 대로 변태적인 기질이 다분한 인간이야?"
목소리의 정체는 작은 체구에 귀여운 외모로 눈길을 사로잡는 여성이었다.
코스튬 플레이를 즐기는 듯한 그녀의 복장은 절로 바다 건너 섬나라를 연상시켰다.
"이 로리 오타쿠는 뭐야?"
"뭐, 뭐?!"
"중2가 튜토리얼을 통과할 수 있는지는 처음 알았네."
겉으로는 태연하게 여성을 도발했지만, 강현은 내심 놀라는 중이었다.
'내가 마력으로 탐색하는 걸 느꼈어?'
마력을 느끼는 것이 자신만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자신처럼 마력을 느끼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게다가 이 여성은 자신보다 강한 마력을 풍기는 이들 중 하나였다.
"뭐라고!? 이 자식이 지금..!"
강현의 도발에 걸려든 여성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강현 또한 얌전히 있을 성격은 아니었기에 마주 일어났다.
주위에 있던 능력자들은 말리기는커녕 오히려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둘을 바라봤다.
'소문으로만 듣던 강현은 어느 정도일까?'
'한세연, 최동우 보다 개인 전투력은 윗줄이라는 말도 있다.'
'재미있겠네.'
완전히 판이 깔리자, 도리어 여성은 식은땀을 흘렸다.
'뭐야... 사람이 아니라 몬스터랑 마주하는 것 같아.'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기세.
여성은 후들거리려는 다리를 필사적으로 붙잡았다.
"일어나면 어쩔 건데?"
"으... 으윽!"
강현이 건방진 눈빛으로 말했지만 여성은 대답할 수 없었다.
그러자 힘에 부치는 여성을 본 몇몇 능력자들이 그녀의 주위로 모여들었다.
강현의 기운이 분산되자 비로소 편안해지는 느낌에 여성이 한숨을 돌렸다.
"뭐야. 다 해보자는 거야?"
자신을 노려보는 능력자들을 마주 보며 강현이 웃었다.
사실 이곳에 모인 이들은 강현에게 경각심과 불쾌감을 가지고 있었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이 장소에 있는 능력자 대부분이 그러했다.
이것은 단순히 강현에게 따라붙는 소문이나, 험악한 인상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유는 하나.
강현은 정말 실제로 위협적인 기세를 풍기고 있었다.
잔인한 가정 파괴범 : 몬스터에게 가정이 없다는 것은 편견입니다. 경악할 만큼 잔인한 방법으로 수많은 가정을 파괴한 '당신에게만' 주어지는 칭호.
효과 : 근력 +2, 디스루핀의 적대감. 칭호 보유자는 타인에게 본능적인 공포감을 불러일으킨다.
누군가가 선물한 굉장한 칭호.
그렇지 않아도 험악한 인상에 칭호의 효과가 더해지자, 강현은 숨만 쉬어도 시비를 걸고 위협하는 것처럼 보였다.
지금 이곳에 있는 이들은 국가에서 특별히 관리하는 최고의 능력자들이다.
당연히 이런 불쾌한 압박감을 받은 적은 거의 없었기에 강현에게 호전적일 수밖에 없었다.
"재미있네. 내 편은 없다는 거지?"
느껴지는 적대감에 강현이 씁쓸하게 웃었다.
"흥, 당연하지. 어디 동네 건달처럼 하고 다니는 당신 편이 있을 줄 알아?"
주위에서 자신의 편을 들어주자 기세 등등해진 로리 오타쿠가 당당하게 말했다.
"너 같은 코스프레 충한테 그런 말을 듣고 싶지는 않은데..."
"닥쳐!"
누군가 말했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고.
언뜻 보기에는 만화에 나오는 마법 소녀와 조직폭력배 두목의 다툼 같았지만, 현장에 있는 이들은 당장이라도 유혈이 낭자할 것 같은 살벌한 분위기에 전신의 긴장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아, 또 시작이군...'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신태길이 한숨을 내쉬었다.
"강현 씨. 윤나래 씨. 그쯤 해주시지 않겠습니까? 다른 분들도 자리로 돌아가 주시죠."
"하지만 여기 이 양아치가…!"
"오늘 시간이 그렇지 많지 않습니다만."
"강현 동생도 거기까지만 해."
강현과 다투던 여성, 윤나래도 신태길과 최동우가 나서자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나 최동우는 항상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다니는 평소와 달리 상당히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중요한 일인 듯하니 그만하고 회의를 시작하지."
최동우는 강현처럼 최근에 급부상한 루키가 아니다.
튜토리얼을 완벽하게 졸업하고 초창기부터 완전한 강자로 자리매김한 절대적 강자.
게다가 성품도 뛰어나 인망까지 높은 그의 말에 다른 능력자들은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다.
"크흠, 누가 뭐라 했소?"
"얼른 시작합시다."
얼추 분위기가 정리되자 신태길이 본격적으로 회의를 시작했다.
"다들 바쁘신 분들이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약 한 달 후. '세계 던전 정상회담'이 한국에서 열립니다. 정부는 그날 여러분들에게 회의장의 경호를 맡기려고 합니다."
"경호?"
"예. 아시다시피 아직 테러의 위협이 끝난 상황이 아닙니다. 남은 6주의 시간 동안 정부는 총력을 동원해서 수도권의 던전을 클리어. 테러의 원천을 봉쇄할 겁니다."
"테러리스트 들은 어떻게 할 생각인가?"
"동시에 테러리스트들을 쫓는 수사 또한 계속 진행됩니다. 이 모든 것들은 만약을 대비한 것이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잠시만요."
"예. 말씀하시죠."
한세연이 신태길의 말을 끊고 들어왔다.
"결국은 당일 회의장 경호에 저희 모두가 나서야 한다는 건가요?"
"맞습니다."
"일의 중요성은 알겠습니다만, 저는 그런 일에 시간을 낼 수는 없습니다."
"..."
"저는 적도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일어날지 확실치도 않은 일에 시간을 버리기 위해 여기 소속된 것이 아닙니다."
"맞아. 나는 그렇게 한가하지 않아."
"경호라면 군·경으로 충분하지 않겠나?"
한세연의 말에 몇몇 능력자들이 동조했다.
"하아, 여러분들에게만 말씀드리는 겁니다만... 이미 군이 한차례 박살이 난 상태입니다. 그 때문에 대통령께서 여러분이 나서는 것이 좋겠다고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리 대통령의 지시라 해도 계약상 우리를 강제할 수는 없을 텐데요."
한세연의 말이 맞았다.
이들과 정부의 사이는 계약 관계. 그 계약에서 절대적 갑은 능력자였다.
"우리가 많은 편의와 혜택을 누린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군대처럼 반드시 명령대로 움직이는 조직은 아니죠."
"예..."
"용건이 이것뿐이라면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일정이 많이 밀려 있어서."
한세연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녀의 의견에 동조하는 몇몇 능력자들 또한 회의장에서 벗어났다.
"하아..."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 신태길이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따라 다들 까칠하네.'
한세연의 돌발행동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항상 한세연의 올곧은 모습만 봐왔던 강현도 내심 놀라며 흥미진진하게 상황을 지켜봤다.
"그러면 여기 남은 분들은 제안을 수락한다고 봐도 되겠습니까?"
"보상을 들어봐야겠죠."
"그래. 맨입으로 할 수는 없지."
특수 능력자 관리팀이라는 조직을 만들 때부터 예상했던 문제.
너무 뛰어난 이들을 제약 없이 모으다 보니 통제가 힘들어진다.
최대한 당근을 이용해 이들을 의도대로 움직이는 것으로 방향을 정했지만 역시나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보상에 대한 부분은 각자 따로 저에게 말씀해 주시죠. 무엇을 원하시든 최대한 맞춰 드리겠습니다."
**
그 후로 회의는 흐지부지 끝났다. 그러나 제법 많은 이들이 회의장을 떠나지 않고 남아 있었다.
여기 있는 모두가 유명한 것은 아니었지만, 유명세를 떠나서 강자라는 것은 검증된 사실이었기에 서로 안면을 트는 것이었다.
"저는 이번에 신생 길드의…."
"아, 그렇군요."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 그 중심에는 강현과 최동우가 있었다.
"선연호 일은 미안하게 됐네."
"형님이 미안할 게 있나요."
"아니야. 내 사람이 한 일이니 나에게도 책임이 있는 거지. 정말 미안하네. 후우..."
최동우는 선연호와 관련된 사건으로 인해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는 듯했다.
"그나저나 형님은 이번에 참가하실 거예요?"
"무조건 해야지. 보상이 없더라도. 아니... 내가 대가를 내는 한이 있더라도 참가할 생각이네!"
"..."
"그 최민준이라는 놈이 감히 대한민국 능력자 연합과 나를 가지고 놀았어. 절대로 가만있지는 않을 걸세."
"예..."
강경한 최동우의 말에 강현이 머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는 어떻게 할 생각인가?"
"당연히 해야죠. 그놈한테는 여러 가지로 갚아줄 것도 있고. 이번에 보상으로 챙기고 싶은 것도 좀 있어서요."
"그렇구먼. 그날 잘 부탁하지."
"저야말로."
그때였다. 순간적으로 적대적인 마력이 강현의 몸을 훑었다.
깜짝 놀란 강현이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뭐야?"
그곳에는 회의 초반부터 강현과 다투었던 여성, 윤나래가 있었다.
윤나래는 입을 쭉 내민 채로 강현을 노려보고 있었다.
"뭐가."
"왜 사람을 빤히 쳐다봐. 기분 나쁘게."
"나는 나체 피규어나 파는 변태한테 관심 없어. 연합장님한테 할 말이 있어서 기다리는 거니까 신경 쓰지 마."
"아니, 이 오타쿠가 쓸데없이 시비를…."
"둘 다 그만하게."
둘 사이에 또다시 불꽃이 튀려 하자 최동우가 중재에 나섰다.
"강현 동생은 그런 사람이 아니야. 아주 정의롭고 멋진 남자지. 그리고 나래 양도 뛰어난 마법사이고 훌륭한 여성이니 이렇게 다투지들 말게."
"하지만 징그러운 피규어를 파는 건 사실, 팩트! 인데요?"
"그건 다 사정이 있어서…."
"그만. 앞으로도 계속 볼 사이에 이런 행동은 좋지 않아. 나래 양도 거기까지만 해."
"쳇..."
강현은 언젠가 윤나래의 콧대를 아주 납작하게 눌러 주리라 다짐했다.
"그래서 볼 일이 뭔가?"
"지난번에 제안하신 능력자 연합 직속 팀에 들어가는 것. 거절한다는 말씀드리려고요."
"역시... 그렇게 됐구먼."
"네. 죄송하지만 아직은 혼자 다니는 게 편해요."
대화를 들은 강현은 어떤 상황인지 곧바로 이해했다.
'이 꼬맹이를 동우 형님이 영입하려는 건가.'
윤나래가 어떤 능력을 갖추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마력에 대한 감이 뛰어나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최동우도 그녀가 뛰어난 마법사라고 했으니 어중이떠중이 수준은 아닐 것이 분명했다.
"하하. 그럼 어쩔 수 없지. 나중에라도 생각이 바뀐다면 언제든지 찾아오게. 나는 환영이니까."
**
이야기가 끝나고 최동우는 강현에게 사과의 의미로 식사를 대접하고 싶다고 했다.
강현은 선연호의 일에 그리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거절했지만, 끈질긴 최동우의 요청에 결국 승낙하고 말았다.
절대로 메뉴가 소고기라는 말에 마음을 바꾼 것이 아니었다.
"역시 고기는 소고기죠."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네. 하하!"
겉면이 노릇하게 익은 한우 갈빗살. 윤기가 흐르는 고기를 한 번에 세 점이나 집은 강현이 소금에 살짝 찍어 입에 욱여넣었다.
입안에서 줄줄 흐르는 육즙! 코를 파고드는 육향에 강현이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고기도 아주 남자답게 잘 먹는구먼. 하하하..."
"예. 쩝쩝. 제가 보기보다 대식가입니다."
"보기에도 그렇게 보인다네..."
잠시 후.
입으로 30만 원이 넘는 거금이 들어가자 적당히 배가 찬 강현이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동우 형님."
"응?"
"아까 그 나래인지 뭔지 하는 꼬맹이를 영입하려는 이유가 있어요?"
"아, 윤나래 양 말이구먼."
"예."
강현은 내심 윤나래의 능력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러나 그녀에게 직접 물어봤자 욕이나 먹을 것이 분명했기에 참아왔었다.
"음... 우선 그녀는 회복 마법에 뛰어나다네."
"..."
"물론, 전과 달리 회복과 관련된 스킬, 능력이 시장에 많이 풀렸기는 하지.
"예."
예나 지금이나 힐러는 귀하다.
그러나 최동우의 말처럼 회복 마법이 제법 흔해진 지금은 그 가치는 예전 같지 않았다.
"그것만 가지고 형님이 영입하기 위해 노력한다? 납득이 가지는 않네요."
"그렇지. 정말 중요한 건 그녀의 전투 능력이야."
"전투 능력..."
강현이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나래 양은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고 혼자서 던전을 공략하고 있네. 단순히 회복 마법 하나만 가지고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지."
"그렇죠. 아무리 회복 능력이 뛰어나도 마력 문제가 있고. 회복하기 전에 죽으면 끝이니까요."
"맞아."
혼자서 던전을 클리어하는 것이라면 강현도 지겹게 해 본 일이다. 때문에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전투에 대한 감각이 아주 뛰어나. 직접적인 무력은 조금 떨어지더라도 전투를 보조할 만한 것들을 많이 가지고 있지."
"보조요?"
"자세한 이야기는 프라이버시도 있으니 해줄 수 없다네. 하하."
"쳇..."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그녀는 올라운드형이야. 어떤 조직에 들어가서, 어떤 상황에 부딪히든지 아주 유연하게 대처할 인재라네."
"그렇군요."
어느 정도 이야기를 납득한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이도 저도 아닌 잡캐란 거네.'
73화 세계 던전 정상회담(2)
73. 세계 던전 정상회담(2)
"준비는?"
"완료했습니다."
"그래."
고개를 끄덕인 최민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가지."
"예."
길고 좁은 복도는 어두운 조명만이 간간이 빛을 내고 있었다.
발걸음 소리가 울리며 유난히 또렷하고 크게 들려왔다.
"후우..."
최민준은 금세 복도 끝에 도착해 숨을 골랐다. 그리고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을 열었다.
문을 연 최민준의 앞에 밝은 공동이 나타났다.
그곳에는 날카롭게 눈을 빛내는 수백 명의 능력자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와아아아!"
최민준의 등장과 동시에 쏟아지는 환호.
잠시 눈을 감고 그것을 만끽하던 최민준이 손을 들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공동이 조용해졌다.
모든 이들이 최민준의 얼굴을 뚫어지라 바라봤다.
"풍전등화(風前燈火). 현재 세계의 운명은 바람 앞에 놓인 등불과도 같다. 그러나 평화에 찌든 멍청이들은 눈앞에서 떨어지는 칼날을 외면한 채 모두를 속이고 있지."
조용하지만 힘 있는 목소리가 공동을 울렸다.
"멍청이들은 칼날을 피할 생각도, 붙잡을 생각도 없다. 그저 모두의 눈을 가리고 안심해도 된다는 거짓을 속삭일 뿐이다."
"..."
"저들의 손에서 멸망하는 세계를 그저 지켜만 보겠는가?"
"아닙니다!"
최민준의 말에 능력자들이 큰 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너희들은 선택했다. 나와 함께 세상을 구하기로."
"..."
"때마침 하늘도 우리를 도와 기회가 주어졌다. 바로 내일. 세계를 위험 속에 버려두는 무능한 놈들이 대한민국에 모인다."
"..."
"우리는 놈들을 죽인다. 그리고 새로운 세계. 우리의 세계를 열어야 한다!"
모인 이들의 눈이 붉게 빛나며 호흡이 거칠어졌다.
"물론 쉽지 않겠지. 많은 이들이 죽을 것이고, 어쩌면 실패할지도 모른다."
"..."
"두렵나?"
"아닙니다!"
공동을 울리는 우렁찬 목소리.
만족스러운 반응이었다.
"세상은 우리를 테러리스트라 부른다. 멍청한 소리지. 우리가 테러리스트인가?"
"아닙니다!"
"그래. 이제 세상도 그 사실을 알게 될 거다. 내일. 우리는 더는 테러리스트가 아닌 세상의 구원자. 영웅으로 거듭난다."
**
인천 국제 공항.
세계적으로 유명한 이 공항에 외국인이 돌아다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공항을 걷는 두 명의 남녀에게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휘유~ 한국은 작은 나라라고 들었는데 생각보다 발전했어?"
금발에 포마드 머리를 한 남성이 휘파람을 불며 주위를 둘러봤다.
"너는 어느 시대를 살다가 온 거냐. 한국의 국가경쟁력은 어지간한 유럽 국가를 넘어선 지 오래야."
그러한 남자를 보며 갈색의 단발을 한 여성이 고개를 저었다.
"정말? 몰랐군. 그렇다고 해도 정상회담을 왜 이런 나라에서 하는 거야? 미국에서 하면 될 일을. 게다가 얼마 전까지 계엄 상태였다면서?"
"던전 사태 이전이든 이후든 한국의 치안은 세계 최고 수준이야. 그 계엄 사태도 현재 타국에서는 일상으로 일어날 법한 수준이었지.
거기에 능력자들의 실력도 상당히 높은 편이라고 하니 충분히 겪어볼 만한 가치가 있어."
"네가 무슨 한국 대변인이야? 왜 이렇게 편을 들어."
"나는 그저 사실을 말했을 뿐이야."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남성이 인상을 찌푸렸다.
"어쨌든 가자고. 우리 대통령을 기다리게 하면 안 되지."
공항을 걷는 남성과 여성.
그들의 뒤를 백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일사불란하게 뒤따랐다.
전원이 완전 무장을 한 채로 흉흉한 기세를 내뿜고 있는 이들의 정체는 바로 미국의 서열 1위 길드 워리어즈(Warriors).
그중 금발의 남성은 길드장인 에든, 갈색 단발을 한 여성은 부길드장 엘라였다.
미국 최고라고 불리는 이들이 세계 던전 정상회담에 참석하는 미국 대통령을 경호하기 위해 한국에 상륙했다.
**
제2차 세계 던전 정상회담.
무려 100개국에 달하는 세계의 지도자들이 이 회담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에 모였다.
급변하는 던전의 난이도.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던전의 부산물.
날이 갈수록 심각해지는 능력자의 범죄.
이 외에도 튜토리얼 이후 바뀐 세계에 대해 토의하기 위해 모인 이 자리는 역사적으로 손꼽히는 대규모 회담이었다.
"많이들 모였네."
"그러게요. 오랜만에 짜릿짜릿하니 좋은데요?"
"가만히 있어. 미친놈아."
그리고 그들을 호위하기 위해 모인 엄청난 수의 능력자들.
하나같이 강력한 힘을 지닌 이들이 모이자 강현 또한 밀려오는 흥분을 애써 억눌렀다.
"월드 클래스라 그런지 역시 재미있네."
"몇몇 놈들은 1대1로 힘들지도 모르겠어요."
"그러게. 특히 미국 쪽에 저 노랑머리. 딱 보니 우리 과다."
"형도 보고 있었어요? 크큭."
그때 멀리서 앉아있던 금발의 남성, 에든과 강현의 눈이 마주쳤다.
에든이 싱긋 웃으며 손을 흔들자 강현도 마주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새끼. 언제 봤다고 아는 척은."
손과 입을 따로 놀리던 강현이 이내 멈추고는 주위를 둘러봤다.
에든 외에도 감각에 걸리는 강자들이 많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동우 형님이랑 한세연. 그 둘이 제일 괴물인 줄 알았는데, 역시 세상은 넓어."
"예. 이 정도 전력이면 설사 테러가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단번에 제압될 것 같습니다."
신성아의 말에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그동안 테러범의 수법은 던전 내부의 메인 코어를 제거해서 몬스터를 쏟아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현재 인근의 모든 던전은 완벽하게 클리어 된 상태.
때문에 이곳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직접 쳐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머리가 텅 비어있지 않은 이상 여기를 공격하는 미친놈은 없겠지."
당장 여기 있는 전력만 모이더라도 어지간한 나라 하나 뒤집는 것은 일도 아닐 것이다.
게다가 회담 장소 주위에는 엄청난 수의 군인까지 대기하고 있다.
회담장 근처는 완전히 통제되어 출입조차 불가능한 상황.
"어떻게 생각하냐?"
"뭘요?"
강현의 물음에 안유성이 고개를 돌렸다.
"너 그 예지인가 예언인가 할 수 있잖아."
"둘 다 아닌데."
"어쨌든 인마. 오늘 일 터질 것 같냐?"
"글쎄요..."
대답하는 안유성이 씨익 미소를 지었다.
"새끼 불길하게…. 응?"
-타앙!
갑자기 들려온 소음.
아주 작은 소리였지만 그것은 분명 총성이었다.
일반인들은 알지 못했지만 몇몇 능력자들은 강현처럼 눈치를 챈 것인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
"후우..."
한차례 허리를 흔든 김병장이 부르르 떨었다.
"아~ 시원하다."
"김병장님. 걱정도 안 되십니까?"
"뭐가 인마."
옆에서 같이 소변을 보며 서 있는 박상병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소문 다 들었지 않습니까. 오늘 테러리스트들이 올지도 모른다고."
"야 시바. 테러리스트고 뭐고 해 봤자 몬스터보다 위험하겠냐? 내가 죽인 고블린만 열 마리는 넘어."
"농담이 입에서 나옵니까?"
"됐어. 나도 X같으니까 조용히 해. 좀 있으면 말출인데 이딴 거지 같은 작전에 투입시키고 말이야."
"휴..."
"다 쌌으면 가자."
"예."
박상병은 김병장의 맞후임이었다. 성격이 소심했던 박상병은 신병시절 관심병사 딱지까지 붙을 정도로 군생활을 적응하지 못했다.
그런 박상병을 항상 도와주던 김병장.
평소 장난기가 많아 가끔 짓궂을 때가 있는 김병장이었지만 박상병은 항상 그에게 의지하고 고마워할 뿐이었다.
"저... 김병장님."
"왜."
"지금까지 고마웠습니다."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라. 누가 뒈지냐?"
"그게 아니라... 이 작전만 끝나면 김병장님은 말출 나가시지 않습니까. 그러면 앞으로 거의 볼 일은 없을 거고..."
"그래서?"
"고맙다는 말은 꼭 제대로 하고 싶었습니다."
"야. 오글거리는 소리 집어치워. 그리고 못 보기는 왜 못 보냐? 너도 곧 전역할 거고, 밖에서 연락하면 언제든지 볼 수 있는데."
"저 그렇게 바보 아닙니다. 군대만 아니었으면 제가 김병장님 같은 분 만날 수 없는 인간이란 거 잘 알고 있습니다."
자존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박상병의 모습에 김병장은 열이 올랐다.
"야. 박윤우. 다시는 그딴 소리 하지 마라."
"..."
"하지 말라고."
"예. 죄송합니다..."
"네가 별 볼일이 없기는 왜 없어. 이 새끼야. 사실 나는…."
"김병장님!"
"어, 으읍..?!"
갑자기 박상병이 김병장의 입을 틀어막았다. 당황하던 김병장은 박상병을 거칠게 뿌리치고는 상기된 표정으로 바라봤다.
"무슨 짓이야!?"
"뭔가 이상합니다."
"뭐?"
"밖이 너무 조용합니다."
박상병의 말에 그제야 김병장이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귀를 기울였다.
'확실히 뭔가 이상하다.'
조금 전까지 들리던 병사들의 잡담, 부산스럽게 움직이던 소음들이 들리지 않았다.
"조용히 움직이자. 조정간 단발로 바꿔놔."
"예."
항상 안전 상태에 위치해 있는 조정간이 단발로 움직였다.
예전이라면 병사 임의대로 이런 지시를 내리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 그러나 몇 번의 사건 이후로 병사의 재량에 따라 사격할 수 있도록 지침이 바뀌었다.
"무슨 일일까요..."
"나도 모르지. 천천히 나가자."
"혹시, 테러리스트들이 온 건 아니겠죠?"
잔뜩 겁을 집어먹은 박상병이 울먹이며 말했다.
"야.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그러면 이렇게 조용하겠냐."
"아니면 왜 이렇게 조용한데요?"
"몰라 새끼야! 조용히 해."
천천히 움직이며 공용 화장실 입구에 도착한 김병장이 조심스럽게 문에 기대었다.
그리고 슬쩍 고개를 내밀었다.
"이게 뭐야..?"
그의 앞에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전부... 다 쓰러져있어."
"예?"
"얘들이 전부 쓰러져 있다고. 뒤진 것 마냥."
모든 군인이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김병장은 그들이 실제로 죽은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씨발... 진짜로 죽은 거야."
"예, 예?! 으읍!"
"조용히 해 인마!"
김병장은 당황해서 소리치려는 박상병의 입을 틀어막았다.
"심호흡하고 침착해. 이럴 때일수록 냉정해야 한다고. 진정했으면 고개를 끄덕여."
박상병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 그제야 김병장이 그의 입에서 손을 뗐다.
"일단은 소대장부터 찾자. 무전기만 구하면 바로 지통실에 연락한다."
"예..."
김병장과 박상병은 재빠르게 움직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소대장의 시체는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끔찍하네...'
눈을 뒤집은 채로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소대장. 눈과 피부 곳곳에 붉은 반점처럼 점상 출혈이 일어나 있는 것이 목을 졸려 죽은 것 같았다.
"우, 우웁!"
"쉬잇!"
비위가 약한 박상병은 처음 보는 처참한 시체에 연신 헛구역질을 해댔다.
"역시 여기 있네."
소대장 또한 같은 생각을 한 것인지 그의 옆에는 무전기가 놓여 있었다.
하지만 그는 끝내 무전을 하지 못하고 숨을 거뒀을 것이다.
"후우... 여기는 들개삼, 들개삼. 보라매, 들리는가?"
-치이이익...
"내가 잘못 만진 건가?"
평소 무전기를 다뤄본 경험이 거의 없는 김병장이 무전기를 툭툭 때렸다.
"아닙니다. 제가 옆에서 통신병이 하는 걸 유심히 지켜본 적이 있는데, 지금 제대로 하고 계신 겁니다."
"그래? 그런데 왜 안 받는 거야."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후우! 여기는 들개삼, 들개삼, 긴급 상황이다."
-치이이이...
계속되는 무전에도 무전기에서는 신경질적인 잡음만 들려올 뿐이었다.
"씨발... 이게 무슨 일이야?"
"김병장님. 무섭습니다..."
"괜찮아. 떨지 말고. 지통실까지 가보자."
"예..? 이대로 숨어 있는 게 좋지 않을까요?"
"안 돼! 무슨 일이 있을 줄 알고. 게다가 지금 이건 우리 목숨만 걸린 일이 아니야. 정신 차려."
"..."
"알겠으면 가자."
그 뒤로 보이는 광경은 한결같았다.
시체. 시체. 시체.
어제까지만 해도 함께 웃고 떠들던 중대원들이 모조리 싸늘하게 식은 채로 누워 있었다.
박상병은 이제 완전히 패닉 상태에 빠져든 것 같았다.
"기, 기, 김벼, 김병장님! 이거 이상합니다. 그냥 이대로…."
"탈영하자고?"
"..."
"너는 가라. 나는 지통실까지 확인해 봐야겠으니까."
싸늘한 김병장의 말에 박상병이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그럼 저도 가겠습니다..."
마침내 둘은 회담 장소 인근에 위치한 지휘 통제실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곳도 다른 곳과 다를 바가 없었다.
내부를 확인해 보니 영관, 장관 계급과 관계없이 사이좋게 눈을 뒤집은 채로 죽어 있었다.
이미 온갖 통신 장비들은 망가진 후였다.
"하아..."
"김병장님 이제 어떡합니까?"
"어떡하긴! 그냥 튀어…."
그때였다.
옆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김병장의 고개가 재빠르게 돌아갔다.
"누구냐?!"
"아직 남은 놈들이 있었나?"
재빠르게 사격 자세를 취한 김병장의 눈에 익숙한 얼굴이 들어왔다.
'최민준...'
사전 교육 때 수십 번도 넘게 들어서 각인돼 버린 이름.
자신 같은 말단 병사와 마주칠 일은 절대로 없으리라 생각했지만 이렇게 현실이 되어 나타났다.
"흡!"
고민은 없었다.
한차례 숨을 들이켜고 근 2년간 수백 번 반복한 사격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방아쇠에 걸쳐진 손가락을 당겼다.
"어?"
손가락은 움직이지 않았다.
"씨발, 이거 왜이래?!"
"으으으.. 죽을 거야. 죽을 거야!!!"
"박상병! 정신 차려 이 개새끼야! 빨리 총 들어!"
김병장이 호통쳤지만 박상병은 주저앉은 채로 오들오들 떨고 있을 뿐이었다.
"쓰레기 같은 놈이군."
-콰앙!
순간 김병장의 사고가 멈췄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박상병의 머리가 터져나가며 피가 분수처럼 쏟아지고, 날아온 육편의 그의 얼굴을 때렸다.
"박윤우... 야..."
박상병을 부르는 김병장의 목소리가 덜덜 떨려왔다.
"박윤우...!"
김병장이 애타게 불렀지만 박상병은 더 이상 대답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야이, 개새끼야아! 으아아!"
죽인다.
오직 방아쇠를 당겨 저 남자를 죽인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손가락이 부러질 것처럼 아팠지만 온 힘을 다해 움직였다.
'조금만, 조금만 더...!'
-달칵
순간 김병장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타앙!
"음?"
최민준이 자신의 볼을 쓰다듬었다. 손바닥에는 오랜만에 보는 자신의 붉은 피가 묻어나 있었다.
"재미있는 놈이군. 능력자였나."
"하아, 하아..."
김병장은 천천히 숨을 골랐다.
당장 욕을 날리고 싶었지만 밀려오는 격통에 머리가 새하얗게 불타올랐다.
부러진 손가락은 퉁퉁 부어올라 원래보다 두 배는 커진 것 같았다.
"크어억..!"
순간 무언가가 김병장의 목을 조여오기 시작했다. 강력한 압박에 김병장은 숨을 쉴 수조차 없었다.
"너. 이름이 뭐지."
"…까."
"뭐?"
미약하게 들려오는 소리에 최민준이 인상을 찌푸렸다.
잠시 김병장에 대한 구속을 약하게 한 최민준이 다시 물었다.
"이름이 뭐냐. 내 밑으로 들어와라."
그제야 최민준은 김병장의 말을 제대로 들을 수 있었다.
"좆까."
"오랜만에 근성이 있는 놈을 만나서 마음에 들었는데... 어쩔 수 없지."
김병장은 다시 목이 조여 오는 것이 느껴졌다.
'다들 이렇게 죽은 건가...'
육체의 괴로움이 정신을 아득하게 했지만, 그보다 고통스러운 것은 마음의 아픔이었다.
'너는 죽어서도 내가 저주한다.'
김병장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희미해지는 의식을 붙잡은 채로 최대한 최민준을 노려보는 것뿐이었다.
"마지막으로 묻는다. 내 밑으로 와라."
"즈, 좆..."
"좆까! 이 미친 새끼야!"
갑자기 옆에서 들리는 말소리에 최민준이 다급하게 마력방패를 둘렀다.
-와장창!
그러나 급조한 방패는 유리처럼 깨어지고, 공격에 직격당한 최민준이 대포알처럼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반갑다. 우리 초면 맞지? 하도 징글징글하게 들어서 매일 부대낀 것 같네. 시발."
시원하게 옆차기를 날린 강현이 만족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74화 세계 던전 정상회담(3)
74. 세계 던전 정상회담(3)
-타앙!
"방금 들었냐?"
"못 들었습니다만."
"총성이야."
말을 한 강현이 다급히 밖으로 뛰쳐나갔다.
"어디가십니까?!"
"너희는 길드원들이랑 여기 좀 지키고 있어."
신성아는 강현을 붙잡으려 했지만, 그는 이미 회담 장소를 나간 뒤였다.
"안유성 씨는 안 쫓아가십니까?"
"이번에는 여기 있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나저나 누나. 그 징그러운 존댓말 좀 안 하면 안 돼요?"
"예...?"
갑작스러운 안유성의 말에 신성아가 당황했다.
"나이도 저보다 많은데 그냥 편하게 말해요."
"크, 크흠... 아, 알겠다. 유성아..."
얼굴을 붉힌 신성아가 밀려오는 어색함에 기괴한 목소리를 냈다.
"하아, 됐어요. 그냥 평소처럼 해요."
"예. 저도 이게 편합니다."
약속이라도 한 듯이 각자 팔짱을 낀 둘. 그 상태로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혹시 강현 님이 어디로 가신 건지 아십니까?"
"저는 점쟁이나 예언가 같은 게 아니라니까요. 저도 몰라요."
"예..."
다시 내려앉은 침묵.
그때 갑자기 안유성이 벌떡 일어났다.
"오!"
"무슨 일입니까?"
"온다. 누나 무기 들어요."
"예?"
순간 회의장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경호원으로 보이는 자들이 부산스럽게 돌아다녔다.
"각하. 피하셔야 합니다."
"그게 무슨 말…."
"모두 침착하세요!"
그 모습을 지켜보며 안유성이 미소를 지었다.
"왔다."
-콰아아앙!
엄청난 굉음과 함께 회담 장소 외벽이 순식간에 박살 났다.
단번에 벌집처럼 구멍이 숭숭 뚫린 건물에 수백 명의 괴한이 난입하기 시작했다.
"크아아아!"
언뜻 보기에는 인간과 비슷한 형체를 한 침입자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인간이 아닌 몬스터에 가까운 모습을 띠고 있었다.
"익숙한 놈들이네."
침입자들을 확인한 안유성이 길드원들을 바라봤다.
"전에 싸워봤죠? 알다시피 신체능력이 우리 길드장 급으로 사기적이니까 알아서 사려요."
"예."
"그럼 먼저 갑니다!"
길드원 전원이 무사할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아무리 최근 급격한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해도 지금 난입한 놈들 몇 명만 덤벼도 위기일 것이다.
"죽으면 그것밖에 안 되는 거지 뭐. 크큭."
비명,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
허공을 떠돌던 먼지는 뿌려지는 피가 가라앉혔다.
피아의 구분도 확실히 되지 않는 전장 한가운데서 오직 안유성만이 편안해 보였다.
"적이다!"
"대통령을 지켜라!"
"젠장. 어디서 온 놈들이야?!"
"우리가 수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유리하다. 수비적으로 하나씩…."
"크아악!"
"이것들 보통 놈들이 아니야!"
혼란의 도가니.
갑작스럽게 날벼락을 맞은 이들이 살충제를 맞은 파리처럼 미친 듯이 뛰어다녔다.
'저놈들, 최종 버전 같은 건가?'
상황을 지켜보는 안유성의 눈이 날카롭게 찢어졌다.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아. 여기서 최고라며 무게 잡는 놈들 대다수는 얼마 버티지도 못하겠어.'
기술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압도적인 신체 스펙 차이.
마치 강현이 그러했던 것처럼 놈들은 엄청난 신체 능력으로 모든 것을 압도했다.
"크아아!"
이윽고 안유성에게도 한 남자가 달려들었다. 놈은 두 팔이 꼬챙이처럼 변한 상태였는데, 굉장히 날카롭고 단단해 보였다.
-파앗, 팟!
놈의 팔이 공기를 가를 때마다 나는 소리가 귓가를 할퀴었다.
안유성은 침착하게 모든 공격을 피했으나, 놈은 끈질기게 따라붙으며 팔을 내질렀다.
아차 하는 순간 온몸에 구멍이 날 법한 상황.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에서도 안유성은 유쾌하게 웃었다.
"하하하! 역시 세잖아!?"
순간 안유성이 놈의 양팔 사이로 교묘하게 몸을 틀어 접근했다.
"크윽?!"
갑자기 다가온 안유성을 보고 놈은 당황했다. 송곳처럼 변한 손으로는 밀착된 안유성을 공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피부가 단단하던데 여기도 그럴까?"
놈의 품으로 파고든 안유성은 작은 단검 두 개를 든 채였다.
그는 지체하지 않고 적의 양쪽 눈에 단검을 쑤셔 넣었다.
"크아아아아아아!"
"안 죽어?"
꽤나 깊숙하게 들어갔음에도 놈은 고통에 괴성을 내지를 뿐 쓰러지지 않았다.
안유성은 곧장 메이스를 꺼내 다시 한번 단검 끝을 정확하게 가격했다.
-콰직!
단숨에 손잡이 끝까지 단검이 들어가고, 놈은 조용해졌다.
"이거 그냥 메이스로 쳐서는 하루 종일 패야겠어. 왜 이렇게 단단한 거야?"
놈들의 방어력은 예상보다 더욱 강했다.
이전처럼 머리 한번 내려치는 것으로 깔끔하게 끝내는 것은 무리일 것 같았다.
"시간이 많았으면 좀 더 즐겼을 텐데!"
하나하나 붙잡고 즐기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안유성은 빠르게 움직이며 놈들을 사살하는 것보다 무력화하는 것에 집중했다.
"크아아아!"
-콰앙.
안유성은 지형지물 따위를 전혀 신경쓰지 않고 공중을 내달렸다.
그러면서 정확하게 침입자들의 급소를 가격했다.
그 활약에 수많은 적들이 쓰러지는 듯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놈들은 상처를 회복하고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완전히 마무리하지 않으면 다시 회복하는 건가.'
강력한 신체 능력.
뛰어난 회복력.
목숨을 내다 버린 과감함.
"다행히 전투 센스가 모자란다는 것까지 강현 형이랑 빼닮았네. 크크큭."
물론, 강현의 전투 센스가 부족하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안유성의 기준에서였다.
"죽어어!"
그때 전장의 소음을 뚫고 유독 날카로운 외침이 들려왔다.
소리가 들린 방향을 바라보자 작은 체구에 특이한 복장을 한 여성이 고전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코스프레?"
그녀의 이름은 윤나래.
대학교 2학년.
교내 코스프레 동아리 부회장을 맡고 있었다.
**
"이것들은 뭔데 안 죽는 거야?!"
윤나래는 확실히 최동우가 탐낼 만한 인재였다.
여러 명의 적들이 자신을 노리는 상황에서도 치명상을 피하며 잽싸게 몸을 움직였다.
다급한 와중에도 여러 마법을 조합해 놈들을 공격했으나 위력이 부족했다.
공격이 적중해도 다른 놈들의 방해로 마무리를 할 수 없는 상황. 그사이 공격당한 놈은 몸을 회복하고 다시 전투에 참가했다.
결국 윤나래의 마력만 바닥나는 악순환이 반복되며 그녀는 점차 지쳐갔다.
"허억, 허억!"
도저히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사실 일대일로 싸우더라도 이길지 장담하기 힘든 놈들이다. 그런 강자 여럿을 상대로 버티고 있으니 그것만 해도 대단한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죽으라고...? 싫어! 나는 아직 못해본 게 많다고!'
아직 해보지 못한 코스튬 플레이들을 생각하며 의지를 다잡았다. 그러나 그것과는 무관하게 점차 그녀의 몸에 상처가 늘어갔다.
"아악!"
순간 피하지 못한 공격이 윤나래에게 적중했다.
고통에 얼굴을 일그러뜨린 윤나래에게 놈들이 모여들었다.
"안돼..."
끝이다.
흉측한 마수가 뻗어 왔다.
검게 물든 혐오스러운 손바닥 안에서 인생의 주마등이 스쳐갔다.
천천히 다가오는 손 뒤로 웃고 있는 놈의 얼굴이 보였다.
모든 것이 슬로우 모션처럼 느리게 보이는 상황 속에서 윤나래가 눈을 감으려 할 때였다.
'어...?'
순간 놈의 얼굴 옆에 등장한 피 뭍은 메이스.
메이스에 달린 거대한 못이 놈의 관자놀이를 꿰뚫는다.
동시에 자신을 바라보던 놈의 눈이 크게 치켜떠졌다.
-파아앙!
귓가를 때리는 굉음과 함께 시간 감각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머리에 메이스를 맞은 놈은 엄청난 속도로 날아가 벽에 부딪혔다.
"크르륵... 큭!"
부들부들 덜던 놈은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이 목에 틀어박히고 나서야 움직임을 멈췄다.
"뭐야!? 덕분에 살았어! 응..? 너는?"
고마움에 인사를 하려던 윤나래가 멈칫했다.
"어디서 봤더라?"
"지금 그게 중요해요?"
피식 웃은 안유성이 다가오는 놈에게 재차 메이스를 휘둘렀다.
"크에엑!"
자신이 그토록 고전하던 놈들이 순식간에 나가떨어진다. 그 모습을 보며 윤나래의 눈이 풀렸다.
'멋있어...'
자신처럼 코스튬 플레이를 즐기는 것인지 제법 화려한 가죽 재킷.
곳곳에 흔들리는 해골 액세서리들. 드러난 피부로 보이는 문신.
모든 것들이 마음에 들었지만 가장 좋은 것은 따로 있었다.
"잘생겼어..."
"나도 아니까 좀 돕죠?"
얼떨결에 튀어나온 혼잣말에 윤나래가 얼굴을 붉히며 뛰쳐나갔다.
"뭐라는 거야! 흥!"
처음 만나는 둘이었지만 금세 합을 맞춰가며 적들을 공략했다.
둘 모두 전투에 대한 감각이 탁월했고, 특히나 윤나래가 서포터적인 능력이 뛰어났기에 예상보다 훨씬 큰 시너지를 냈다.
"이것도 재미있는데?"
누군가와 이렇게 합을 맞춰본 경험은 신성아 외에 처음이었다. 그런데 윤나래와의 협동은 그보다 훨씬 죽이 잘 맞았으며 효율적이었다.
'뭐하는 남자야...?'
윤나래 또한 계속해서 놀라고 있는 중이었다.
'정말 완벽해.'
항상 몇 수 앞을 내다보고, 최적의 효율로 움직였다.
게다가 오늘 처음 만난 자신의 공격을 마치 원래 본인의 것이라도 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활용했다.
"크아악!"
"이놈들부터 없애!"
1+1=3 이 되는 마법.
둘의 협공에 순식간에 적들이 죽어나가자 회담장에 있는 많은 시선들이 모여들었다.
"저들은 대체..."
워리어즈의 부길드장 엘라 또한 그들의 싸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세계는 넓다는 건가... 그래도 덕분에 살았군."
**
"적이다!"
"대통령을 지켜라!"
사방에서 고함소리가 들려오고, 엄숙했던 회담 장소는 한순간에 악마의 놀이터로 변모했다.
그 혼란 속에서 엘라는 빠르게 정신을 수습하고는 길드원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핵심 인물들을 보호해!"
이곳에 모인 워리어즈의 길드원은 모두 백 명. 다른 국가들은 대부분 열 명 내외로 호위를 데려왔지만 워리어즈는 달랐다.
오늘 회담 장소의 경호를 총책임지는 5개의 길드 중 하나로 뽑혔기 때문이다,
때문에 엘라는 미국 인사들뿐만 아니라 이곳에 있는 모든 이들을 지켜야 했다.
"제기랄! 이럴 때 에든은 어디로 간 거야?!"
놈들이 들이닥치기 직전에 금발의 길드장, 에든은 갑자기 회담 장소를 벗어났다.
-방금 무슨 소리가 들렸어. 금방 올 테니 기다려!
그리고 에든이 떠난 지 5분도 지나지 않아 이 사달이 벌어졌다.
"부길드장. 걱정하지 말라고."
"맞아. 우리가 언제 에든 없이 안 싸웠나?"
"그래. 우리는 전사들(워리어즈)이야."
엘라가 초조해하자 길드원들이 웃으며 말했다.
"하아. 알겠어. 대신 평소처럼 날뛰면 안 돼. 우리 목적은 경호라는 걸 잊지 마."
"당연하지."
"그럼 나는 평소대로 움직일 테니 잘 부탁해."
말을 한 엘라가 눈 깜짝할 새에 배경에 녹아들었다. 엘라는 기척을 숨기고 난전 속으로 뛰어들었다.
'뭐하는 놈들인지는 모르겠지만, 방해한 대가를 치러줘야겠어.'
그녀의 전투 성향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암살자.
조용히 접근해 단번에 급소를 찌르는 그녀의 공격에 많은 적들이 반항조차 하지 못하고 절명했다.
그 적들 중에는 당연히 몬스터뿐만 아니라 인간도 포함되어 있었다.
'시작은 너다.'
한 습격자가 애처롭게 떨고 있는 남성을 공격하고 있었다.
놈의 뒤로 다가간 엘라는 단숨에 목을 향해 단검을 그었다.
-푸욱
'젠장. 얕아!'
원래대로라면 단숨에 놈의 경추를 끊어냈어야 할 단검이 고작 피부를 베어내는 것에서 그쳤다.
"크아악!"
-퍼억, 콰앙!
아주 짧은 순간의 당황, 당황으로 인한 멈칫거림의 결과는 치명적이었다.
놈이 휘두른 팔이 엘라의 옆구리에 정통으로 가격 되고, 그녀는 단숨에 수 미터를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쿨럭! 어지간한 몬스터보다 단단한데?"
태연하게 말했지만, 그녀의 속은 엉망이었다.
'젠장. 무슨 위력이... 갑옷을 입었는데도 갈비뼈가 나갔어.'
방심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적의 능력이 예상보다 뛰어났을 뿐이었다.
'이 정도 수준이라면 길드원들도 위험해. 에든이 있어야 하는데.'
걱정스러운 마음에 길드원들을 바라보자 예상대로 고전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이것들은 뭐야?!"
"정면으로 맞서지 마! 협공으로 차근차근 상대해!"
수많은 전투 속에서 살아남은 베테랑답게 아직은 버티고 있었지만 언제 무너질지 몰랐다.
"크아아!"
"저쪽이다!"
놈들은 철저하게 교육받았는지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너무 많은 길드가 모여 협력하지 못하는 이쪽과 달리 놈들은 하나의 집단이다.
선택과 집중. 재빠른 히트 앤 런으로 벌써 엄청난 수의 사상자들이 나왔다.
그리고 이제 놈들의 표적은 워리어즈 길드였다.
"하아압!"
길드원에게 치료받은 엘라도 재빨리 전투에 합류했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젠장! 위력이 부족해!"
놈들의 실력, 수준 자체가 높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엄청난 신체 능력과 회복력은 그것을 무마하고도 남았다.
"합공으로 단번에 죽여야 돼! 아니면 금세 회복한다!"
"크윽. 무리하지 말고 시간을 끌어라!"
순간 놈들 사이에서 터져 나온 고함에 엘라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뭐? 시간을 끌어?'
이전부터 한국에 관심이 많았던 그녀이기에 용케 놈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놈들은 빠르게 상황을 끝내고 도망쳐야 할 텐데... 시간을 끌다니?'
그녀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당장 날카로운 칼날들이 사방에서 날아왔기 때문이다.
-타앙!
"쳇!"
시간을 끄는 것 따위에 신경을 쓸 때가 아니었다. 이대로라면 피해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아니, 어쩌면 모두 죽을지도 몰랐다.
"하하하! 재미있잖아?"
"크아아아! 이놈부터 처리해!"
그때 멀리서 들리는 광소에 그녀의 눈길이 돌아갔다.
그곳에는 방어구도 제대로 갖춰 입지 않은 채 락밴드 같은 차림을 한 남자가 미친 듯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콰앙! 콰앙! 쾅!
"저게 뭐야...?"
저런 움직임은 미국의 최상위권에 위치한 능력자들도 보이지 못하는 것들이다.
언뜻 보면 단순하게 무기를 휘두르는 것 같지만 그 안에는 치밀한 계산과 센스가 담겨 있었다.
-피웅! 퍼엉!
그리고 뒤에서 날아온 마법은 적절하게 그를 보조하며 그의 능력을 120% 이상 발휘하도록 도와 주웠다.
"세계는 넓다는 건가... 그래도 덕분에 살았군."
다행히도 놈들은 저 둘을 먼저 처리하기로 합의한 것 같았다.
워리어즈를 공격하던 놈들 중 일부가 둘에게 달려갔다.
"지금이야! 전력으로 밀어붙여! 회담장을 벗어난다."
경호 따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이 틈을 활용하지 못하면 워리어즈도 끝이다.
"이쪽으로!"
엘라는 미국 대통령과 함께 당장 움직일 수 있는 요인들을 데리고 회담장 밖을 향해 나아갔다.
"조금만 더 버텨!"
저 멀리 입구가 보였다.
마침내 밝은 햇살 사이로 나서려던 그때 그들의 앞을 누군가가 막아섰다.
"어디를 가는 거냐."
유창한 영어로 말을 하는 남자.
그는 전신에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리고 있었다.
차갑고 날카로운 느낌을 풍기는 외모는 평소라면 작업이라도 걸어볼 만큼 매력적이었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저 남자 치워!"
엘라의 말에 길드원들이 앞으로 달려 나갔다.
"거기 아이돌 스타. 좀 거칠어도 이해하라고!"
거구의 워리어즈 길드원들이 남자에게 달려갔다.
호리호리한 체형의 남자는 스치기만 해도 날아갈 것 같은 위태로운 모습. 그러나 남자는 태연하게 손을 뻗었다.
"파티에 가장 중요한 손님이 떠날 수는 없지."
동시에 그에게서 붉은 실과 같은 것들이 뿜어져 나왔다.
그것들은 단숨에 길드원들의 육체를 옥죄었다.
"크윽, 이게 뭐야?!"
"몸이 안 움직여!"
"엘라! 어떻게 좀 해봐!"
그 모습을 보며 남자가 차갑게 웃었다.
"마력이 조금 들겠지만 바쁘니 어쩔 수 없지. 죽어라."
"크아아아!"
"끄윽, 끅!"
미국 1위 길드.
최고의 정예.
그곳에 소속된 이들이 제대로 힘조차 써보지 못하고 전신이 터져나가며 잔혹하게 죽었다.
"말도 안 돼..."
믿을 수 없는 장면에 다리가 풀린 엘라가 자리에 주저앉았다.
"에든 어디 있는 거야..."
75화 초면(1)
75. 초면(1)
"반갑다. 우리 초면 맞지? 하도 징글징글하게 들어서 매일 부대낀 것 같네. 시발."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응시한 최민준의 인상이 와락 구겨졌다.
"강현..?"
"그래. 나도 존나 반가우니까 인상 풀어 새끼야."
"정말 끝까지 질척거리는 군. 내 실수다. 진작 너를 죽여야 했어."
"할 수나 있고?"
"그건 두고 보면 알겠지."
최민준의 말과 동시에 스물 가량의 능력자들의 나타나 그의 뒤에 섰다.
"좀 하는 놈인 줄 알았더니. 결국 쪽수로 밀어붙이는 잡놈이네."
"마음대로 지껄여라."
"근데 이쪽도 나름 숫자를 맞춰 왔거든."
미소를 지은 강현이 목청을 가다듬었다.
"크흠, 헤이! 컴 히어. 헬프미. 헬프미!"
초등학교 수준의 투박한 영어.
왜 강현이 인턴만 하고 쫓겨났는지 알 것 같은 수준이었다.
그러나 의미가 전달되는 것에는 문제가 없었기에 하나둘 능력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모인 이들이 열 명.
"다들 초면이지만 인사는 잠시 뒤로 미루죠. 오케이?"
이들은 회담 진행 중에 강현처럼 외부에 이상이 있음을 느끼고 밖으로 뛰쳐나온 능력자들이었다.
그중에는 미국 1위라 불리는 에든 또한 끼어 있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잘 부탁해 코리아 친구!"
모두 다른 국적에 말도 통하지 않았지만 상관없었다.
이들은 모두 강자이며, 싸우기 위해 이곳에 왔다. 그리고 눈앞에 적이 있다. 이러한 상황에 대화는 필요 없었다.
"가자!"
[분노의 사자후가 발동됩니다]
[모든 적들의 사기와 능력치가 감소했습니다]
강현의 외침과 동시에 최민준의 몸에서 붉은 마력이 뿜어져 나왔다.
"뭔지는 모르지만 안 건드리는 게 좋아 보이네."
강현을 포함한 열한 명의 능력자들은 제각각 마력을 피하며 최민준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딴 잡기술 따위!"
에든이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마력을 대검으로 쳐냈다. 손아귀에서 느껴지는 얼얼한 충격에 그가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에 제대로 된 싸움을 하겠어."
수적으로는 최민준 일당이 2배 정도 많지만, 이곳에 그것을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2배, 3배 많으면 열 배의 수적 열세에도 승리를 쟁취한 역전의 전사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능력자들의 얼굴에 점차 당혹이 어리기 시작했다.
"이놈들 보통이 아니야!"
"제길! 속도가 너무 빨라!"
"이건 뭐야? 몸이 안 움직여!"
적들 하나하나가 상식 밖의 강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 한순간이라도 저 붉은 마력에 붙잡히면 그걸로 끝이다.
온몸에 수백 킬로그램의 추를 매단 것 같은 느낌에 능력자들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이런, 씨발!"
강현 또한 금세 붉은 마력에 붙잡혔다.
"모이면 뭐가 달라질 거라 생각했나? 너희들은 모두 여기서 죽는다."
"닥쳐! 이딴 것쯤... 흐아아!"
"발악하지 마라. 소용없으니."
강현은 몸을 휘감은 붉은 마력을 끊어내기 위해 온 힘을 다해 쥐어뜯었다.
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고 전신에 핏줄이 올라섰다.
"무식한 놈. 이건 완력으로 끊어낼 수 있는 게 아니…."
순간 최민준이 멈칫했다.
강현을 구속하고 있던 마력이 점차 뜯겨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현재 모든 스킬을 활성화한 강현의 근력은 무려 65에 달한다. 그 상식 밖의 무식한 괴력을 최민준의 마력은 버텨내지 못했다.
"이게...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짓이냐?!"
"이때까지 쪼렙들 상대로 재미 좀 봤냐?!"
마침내 강현이 붉은 마력을 완전히 찢어발겼다. 동시에 최민준을 향해 전력으로 내달렸다.
깜짝 놀란 최민준은 황급히 모든 마력을 강현에게로 집중했다.
'저딴 괴력이라니. 인간이 맞기는 한 거냐?!'
사전에 강현에 관한 이야기는 들었지만, 이 정도인 줄은 몰랐다.
순전히 완력으로 자신의 마력을 끊어내는 것 따위, 어지간한 대형 몬스터가 아니고서야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흐아아! 소용없다고 새끼야!"
"와우! 저 친구 제대로 터프하잖아?!"
최민준의 고유능력 마력 유형화. 최민준은 이것을 잘 다루기 위해 거의 모든 스텟을 마력에 투자했다.
덕분에 어떤 능력자든 이 마력에 붙잡혀 벗어난 자가 없었다.
붙잡는 순간 승리한다.
하나의 법칙처럼 굳어진 진리가 강현의 앞에서 산산조각 났다.
'제기랄. 상성이 좋지 않아...'
그때 강현의 손에서 푸른 마력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제 좀 더 쉬운데? 어쩌냐?"
강현은 이제는 완전히 종잇장처럼 손쉽게 붉은 마력들이 찢어발기고 있었다.
'마력 유형화? 아니 조금 다르다. 마력을 방출하고 있는 건가?'
무엇이든 간에 강현에게는 자신의 스킬이 통하지 않았다.
"좋았어! 풀려났다."
"너. 거기서 딱 기다리라고."
설상가상으로 강현에게 집중하는 사이 다른 이들이 구속을 풀어버렸다. 최민준은 위기가 왔음을 직감했다.
"모두 한계를 돌파한다! 당장!"
최민준의 명령에 부하들이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그작!
입 속에 작은 알약을 넣어두고 있던 그들이 그것을 깨물었다.
"끄윽, 끄으윽!"
"으아아아!"
놈들은 원래도 인간과는 한참 거리가 있는 외형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약을 복용한 순간 이제는 더 이상 인간이라 부를 수조차 없는 모습이 되었다.
"또 변신이냐? 네들이 무슨 파워레이저냐?!"
강현은 계속되는 변신에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이럴 때가 아니다. 놈들이 변신할 시간을 줘서는 안 됐다.
"어택! 어택! 킬! 에너미 라잇 나우!"
강현이 입사 당시 준비했던 영어를 총동원해 상황을 알렸다. 그리고 곧장 앞에 있는 적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카강!
그러나 공격은 놈이 든 손에 허무하게 막혀버렸다. 예상과는 달리 놈들의 변신이 너무 빠르게 끝난 것이다.
"푸후후..."
완전히 비대해진 몸집.
내뿜는 숨결에서 거친 김이 뿜어져 나왔다. 장대하진 놈들의 키는 3m에 근접했고 붉은 눈에서는 흉흉한 괴기가 흘러나왔다.
"뭐, 최종 진화 그런 거냐..?"
"오우! 쒯."
"한국은 도대체 무슨 괴물들을 키우고 있는 거야?"
마력에 대한 감이 뛰어나지 않은 이들도 확연히 느껴질 만한 엄청난 압력. 단순히 수치상의 높음을 떠나서 마력 자체가 불쾌한 공격성을 띠고 있었다.
-부우웅!
거대한 손이 날아들었다.
고개를 숙여 그 공격을 피한 강현의 머리 위로 소름 끼치는 풍압이 느껴졌다.
"흐읍!"
"크아아!"
빈틈으로 빌게인의 장검을 휘두른다. 검이 놈의 살갗을 찢어냈지만, 예상만큼 깊지 않았다.
"이거 역대급으로 단단한 놈이네."
단순히 힘과 무기의 날카로움만으로 베어낼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우르그의 망치를 꺼내 들어야 하나? 아냐. 이놈들 속도면 오히려 내가 당할지도 몰라.'
우르그의 거대 망치를 꺼내 든다면 확실히 타격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놈들의 재빠른 움직임을 생각하면 맞추는 것조차 쉽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일단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본다!'
검에 마력을 불어넣는 것은 최후의 수단으로 남겨둬야 한다.
아직 완전하지 않을뿐더러, 마력과 정신력 소모가 너무 컸다.
강현은 우선 몸의 스피드를 최대로 끌어올렸다.
당장 부딪히는 것밖에 방법이 없어 보였다.
-챙, 챙, 채앵!
"일도양단!"
강현이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며 놈을 압박했다.
금세 놈의 몸 곳곳에 상처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저건 정체가 뭐야?"
"저런 움직임이라니. 레벨이 80이라도 되는 건가..."
다른 능력자들이 강현의 속도를 보며 감탄했다.
"크아아악!"
"얌전히 죽어!"
강현도 아직 스텟에 대한 완벽한 통제가 이뤄지는 수준은 아니었지만 그건 놈들도 마찬가지.
놈들은 본능적으로 공격을 가했지만, 몸놀림은 힘만 강한 어린아이 수준으로 전보다 더 떨어져 있었다.
'뭐야?'
그때였다.
검을 휘두르던 강현이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파지직...
검에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설마... 아니겠지?'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왔으나 도리가 없었다.
당장 적이 눈앞에 있고 강현은 적을 죽어야만 한다.
"뒤져!"
강현이 놈의 두개골을 향해 전력으로 검을 내려쳤다.
-챙그랑!
동시에 빌게인의 장검이 수십 조각으로 부러져 허공으로 흩날렸다.
"이런 시벌..."
강현이 부러진 검을 허무하게 바라봤다.
"도대체 왜? 너 B등급 무기잖아. 인마!"
빌게인의 장검은 무려 B등급에 내구도 강화 기능까지 내장되어 있다.
평소에 입고 다니는 로날드의 갑옷처럼 자가 수복을 하지는 않지만 어지간해서는 이조차 빠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빌게인의 장검이 부서졌다.
"설마!"
강현은 얼마 전 케르고와 싸웠던 것이 생각났다.
그때 케르고에 의해 빌게인의 장검 내구도가 크게 닳았었다.
'이 고블린 새끼... 돌아가면 넌 뒤졌다.'
강현의 고민은 오래가지 못했다.
"크억!"
당황으로 인해 생겨난 빈틈.
그 짧은 순간을 놓치지 않고 이뤄진 놈의 공격이 강현에게 적중했다.
-피슈웅, 콰앙! 콰과광!
대포알처럼 날아간 강현이 건물에 부딪히자, 외벽이 굉음을 내며 허물어졌다.
"여기까지인가. 저 한국인 친구가 없으면 싸움이 힘들어질 것 같은데..."
"안타깝지만 저런 공격에 당하고서는 버틸 수가 없지."
싸움의 기본은 회피다.
압도적으로 강한 공격에는 방어 조차 감당하기 힘든 충격을 안겨준다. 그런 공격에 정통으로 당했으니 능력자들은 강현이 최소 중상을 입었으리라 생각했다.
"쿨럭! 아오... 시발. 오랜만에 제대로 맞았네."
하지만 강현은 그런 예상을 가볍게 깨버렸다.
짜증을 내며 콘크리트 더미를 밀쳐낸 강현이 어깨를 주물렀다.
"뭐야? 왜 저렇게 멀쩡해?"
"크하하하! 정말 재미있는 친구야."
강현은 알 수 없는 외국어들을 을 뒤로하고 몸을 풀었다.
"그래. 어차피 평타만 쳐서는 답도 없는 놈들이야."
단단하고 빠른 놈들.
계속 일반적인 공격으로 싸운다면 전투에서 이기더라도 모두가 지쳐 쓰러질 것이 뻔했다.
강현은 좀 더 과감하게 움직이기로 결정했다.
"크와아아아!"
"저 새끼가..."
강현에게 일격을 가한 놈은 상당히 만족스러웠는지 입을 크게 벌린 채로 포효하고 있었다.
그런 놈을 보며 이마에 힘줄이 돋은 강현이 단숨에 놈의 어깨 위로 뛰어올랐다.
그리고 크게 벌어진 놈의 입으로 양팔을 깊숙이 쑤셔 넣었다.
"커어억?!"
당황한 놈의 눈이 치켜떠졌다.
놈은 다급히 입을 다물려했으나 강현의 완력과 피부의 단단함은 괴물로 변한 놈 못지않았다.
"마력폭발!"
내부에서 일어난 폭발에 놈의 몸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크아아아아!"
-퍼엉!
비대한 몸이 수백 갈래로 터져나가며 허공에 흩어졌다.
그 뜨거운 피와 살점이 강현의 뺨을 후려쳐 따갑게 했다.
"후우..."
강현이 자신의 양 손을 내려다봤다. B등급 장비인 로날드의 갑옷이 잔뜩 망가져 있었다.
"몇 번만 더 하면 갑옷이 다 깨지겠는데..."
그리고 그 뒤에는 직접적으로 자신의 팔이 타격을 받을 것이다.
애초에 마력폭발은 이렇게 근접 용으로 만들어진 스킬이 아니었다.
"터프가이! 멋지잖아!"
"저런 무식한 놈."
주위에서 들려오는 외국어를 무시하고 강현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뭐야. 이거 어디 갔어?"
그러나 그 어디에도 최민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
"후우..."
최민준이 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잠재웠다. 당장에라도 강현과 결판을 내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조금만 기다려라. 저놈들만 처리하면 그때는 정말 네 차례다. 강현."
마침내 회담장에 도착한 최민준. 그는 맞은편에서 나오는 이들을 보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하늘이 나를 돕는군.'
워리어즈와 미국 대통령이었다.
다른 것들은 몰라도 미국 대통령만은 꼭 해치워야 했다.
"어디 가는 거냐."
"저 남자 치워!"
뒤쪽에 위치한 여성, 엘라의 말에 우락부락한 길드원들이 달려왔다.
무심하게 그들을 보던 최민준이 손을 들어 마력을 뿜어냈다.
"크윽, 이게 뭐야?!"
"몸이 안 움직여!"
"마력이 조금 들겠지만 바쁘니 어쩔 수 없지. 죽어라."
빠른 시간에 강한 압력을 가하기 위해서는 더욱 많은 마력이 든다.
평소라면 마력을 아끼기 위해 천천히 죽도록 하겠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었다.
"크아아아!"
"끄윽, 끅!"
전신이 터져나가며 잔혹하게 죽는 길드원들. 그 모습에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최민준이 앞으로 걸어갔다.
"으으... 죽어! 크아악!"
사명감에 의해서. 또는 조여 오는 공포를 이기지 못해서. 어떠한 이유로 달려들든지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모두가 공평하게 몸이 사로잡히고 죽어나갈 뿐이었다.
"이러는 이유가 뭐야?!"
"그건 나중에 지옥에서 알려주지. 지금은 좀 바빠서."
"크아악!"
사실 최민준도 여기 있는 모든 길드원들이 한 번에 달려든다면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많은 강자들을 단숨에 제압하는 것이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기세에 압도된 이들은 주춤거리며 물러날 뿐이었다.
'예상대로군. 이대로 조금만 더 압박해서 대통령만 처리하고 빠진다.'
결국 압박을 버티지 못하고 도망치는 자들이 생겨났다.
"으아아! 저건 괴물이야. 도망쳐!"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수는 없어!"
"멍청이들아. 안 돼! 도망치지 말라고!"
부길드장 엘라가 말렸지만 이미 상황을 걷잡을 수가 없었다.
한두 명이 도망치기 시작하자 남은 이들에게도 빠르게 동요가 퍼져나갔다.
"크큭. 그래... 그게 너희들의 벌레 같은 진정한 모습이다."
-타타타탓!
그때였다.
뒤쪽에서 들려오는 뜀박질 소리에 최민준의 고개가 재빠르게 돌아갔다.
"흐읍?!"
그곳에는 전신에 피범벅을 한 지옥의 화신이 달려오고 있었다.
그 손에 들린 무식하게 거대한 망치를 본 최민준이 다급하게 방어벽을 전개했다.
"늦었어. 새꺄!"
-콰앙!
강현의 망치와 최민준의 마력 방어벽이 충돌했다.
-쨍그랑, 쨍그랑, 쨍그랑!
'안 돼, 안 돼, 안 돼!'
마력으로 이루어진 방어벽은 허무하게 깨어졌다.
거대한 망치가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최민준에게 다가왔다.
'이런 젠장...'
-퍼억!
망치에 맞은 최민준이 마치 총알처럼 재빠르게 허공을 갈랐다.
강현은 그 모습을 보며 시원하게 웃었다.
"홈러언-!"
76화 초면(2)
76. 초면(2)
"홈러언-!"
최민준은 엄청난 속도로 허공을 날아 단 1초 만에 회담장 반대쪽 벽에 처박혔다.
"마무리는 확실하게 해야지!"
최민준이 이 공격을 맞고도 살아남았으리라 생각지는 않았다.
그러나 마무리는 항상 확실해야 한다.
빠르게 최민준이 부딪힌 곳을 향해 달려가자 곧 콘크리트 더미 사이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그가 보였다.
"이것도 어지간히 질긴 놈이네."
"끄윽, 끅... 네놈... 후, 후회할 거다..."
"후회? 무슨 후회? 나중에 지옥에서 만나서 복수하려고? 아뎃쓰요! 필요 없으니 넣어둬. 하하하!"
강현이 유명CF를 따라 하고는 정말 재미있다는 듯이 한참을 웃어젖혔다.
"그럼, 이만."
그러나 언제 그랬냐는 듯 곧장 정색을 하고는 우르그의 망치를 번쩍 들어 올렸다.
"사요나라."
-콰앙!
전력으로 망치가 내려쳐지고 굉음과 함께 먼지가 피어올랐다.
"젠장... 또 뭐야?"
그러나 강현의 표정은 짜증으로 잔뜩 일그러졌다. 그의 앞에 서있는 정체불명의 복면인 때문이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안고 있는 남자 내려놔. 나랑 두더지 잡기 게임 중이었거든?"
"..."
강현의 부탁에도 복면인은 묵묵부답이었다.
'젠장. 마력도 다 떨어져 가는데... 일단 우르그의 망치로 해결될 놈은 아니야.'
아주 짧은 순간 엄청난 속도로 최민준을 채갔다. 뛰어난 운동능력과 과감함을 지니고 있지 않다면 불가능한 행위였다.
'어떻게든 여기서 놈을 끝내야 해. 설사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결심을 마친 강현이 우르그의 망치를 집어넣었다. 그리고 가지고 있던 예비 검을 꺼내 들었다.
"좋게 말할 때 내놔!"
강현이 재빨리 달려가 검을 휘둘렀다.
복면인과 강현의 검이 어지럽게 얽혔다.
'젠장! 이거 뭐하는 놈이야?!'
고작 몇 번 검을 부딪혔지만 강현은 직감했다.
'검술로는 상대가 안 돼.'
안유성과 부딪혔을 때보다 더 높은 벽이 느껴진다.
몸도 성치 않은 상태에서 싸울 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채앵!
검을 크게 휘두른 강현이 한발 물러섰다.
'하아, 실전에서 아직 쓸 기술이 아니기는 한데...'
강현의 마력이 피어올라 장검에 깃들기 시작했다. 장검은 푸르스름한 빛을 내며 밝은 빛으로 타올랐다.
"...!"
그 모습에 순간 복면인의 눈이 크게 떠졌다.
"쫄지마. 간다."
이제는 시간도 여유도 없었다. 이 한방에 모든 것을 베어낼 각오로 강현이 전력으로 달려갔다.
'뭐야!?'
순간 복면인의 검에도 마력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강현의 그것보다 훨씬 정교하고 날카로운 마력이었다.
-채앵! 콰앙!
둘의 검이 부딪혔다.
동시에 마력이 폭발하며 굉음이 울렸다.
강현은 적이 건재함을 알아차리고 쉴 새 없이 검을 휘둘렀다.
-챙, 콰앙! 채앵, 쾅! 콰앙!
강현은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 짜내서 정신없이 몰아쳤다.
그러나 어떤 경로로 검을 휘두르던, 얼마나 강력하게 검을 휘두르던 적은 모든 공격을 받아내고 있었다.
'도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괴물이야?!'
분명 신체능력은 자신이 압도하고 있었다. 더 빠르고, 더 강했다. 그러나 모든 공격이 적의 손에서 허무하게 막혔다.
적은 강현의 공격을 아주 간발의 차로 피하거나 교묘하게 흘려내고 있었다.
"젠장! 좀 죽어어!"
-스걱!
정신없이 검을 휘두르던 그때, 결국 강현의 빈틈 사이로 적의 공격이 날아들었다.
"크윽!"
전투 도중 찢어진 갑옷의 틈으로 정확하게 파고드는 검격.
옆구리를 타고 올라오는 불에 덴 듯한 통증에 강현이 미소를 지었다.
'이까짓 거 아무것도 아니야.'
강현은 지체 없이 검을 휘둘렀다.
"죽어어!"
당연하게도 통증에 강현이 멈칫하리라 생각한 복면인의 눈에 처음으로 당황이 깃들었다.
"젠장!"
그러나 공격은 아슬하게 적의 팔을 스치고 지나쳤다.
"시발..."
동시에 강현의 검에 감돌던 푸른 마력도 꺼지고, 전신에 강한 탈력감이 몰려왔다.
결국, 마력이 모두 떨어진 것이다.
"아직 멀었어!"
강현은 마력이 바닥났음에도 다시 달려들었다.
복면인은 가볍게 그 검을 피하고 재차 강현의 다리에 검을 휘둘렀다.
-스걱!
평소라면 빠르게 아물었어야 할 상처지만 마력이 떨어진 지금은 계속해서 피가 흘러나왔다.
다리의 근육이 잘린 강현이 절뚝대며 움직였다.
복면인은 그 모습을 싸늘하게 바라봤다.
"뭐하냐. 마무리 안 하고."
"..."
복면인은 더 이상 강현을 몰아붙이지 않았다.
"야! 어디가!"
단진 곧장 최민준을 데리고 회담장을 벗어날 뿐이었다.
"으아아아! 시바알-!"
강현의 분노에 찬 비명이 회담장을 울렸다.
**
"고생하셨습니다."
"살아있었어요?"
"저도 제 몸 하나 지킬 수준은 됩니다."
신태길의 말에 강현이 피식 웃었다.
"개판이네요."
전투는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상처뿐인 승리였다.
셀 수도 없이 많은 사상자.
그들 중 대부분이 나라의 고위직에 있었고 그중에는 심지어 대통령도 있었다.
"일단 얼굴 좀 닦으시죠."
신태길이 건넨 수건을 받은 강현이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그러나 그사이 눌어붙은 피는 쉽게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
"아, 좀 살겠네. 고마워요."
"별말씀을."
"그나저나 이제 어떡할 거예요?"
"뭐가 말입니까?"
"이렇게 개판 쳐놨는데. 신태길 씨 잘리는 거 아니에요?"
"지금 제 직장이 문제입니까?"
"그것도 그러네요. 하하."
신태길은 어딘가 오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처럼 보이다가도, 때로는 분노에 타오르는 미친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여기 모여 있었군. 그래."
"동우 형님."
피곤한 기색으로 걸어오는 최동우가 둘 사이의 침묵을 걷어냈다.
"강현 동생도 고생이 많았구먼."
피범벅이 된 강현의 모습을 본 최동우가 씁쓸하게 웃었다.
"뭐 다 그렇죠."
"그놈은 놓친 거지?"
"예. 이번에야 말로 제대로 복수를 했어야 하는데."
"후... 나도 놈을 쫓아가려 했는데 차마 여기 사람들을 두고 떠날 수가 없었네."
"어쩌겠어요. 다음에 만나면 진짜 납작하게 만들어 줘야죠."
"하하하! 하긴 자네 그 망치 한방이면 안 될 것도 없겠구먼."
재미있다는 듯이 크게 웃던 최동우가 돌연 정색을 했다.
"그나저나 마지막 그 복면인의 정체는 누군지 알겠는가?"
"형님도 보셨나 보네요."
"그렇게 소란을 피웠는데 모를 수가 없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칼 하나는 기가 막히게 쓰더라고요."
마지막까지 최민준을 지켜낸 그 검술을 떠올리며 강현이 쓰게 웃었다.
"너무 자책하지 말게. 자네는 충분히 노력했어."
"위로는 됐습니다."
"하하하, 그렇지. 그래야 자네 답지."
"..."
"그런데 말이야. 그자... 어쩐지 여성 같지 않던가?"
최동우의 말에 강현이 생각에 잠겼다.
'여자라고...?'
확실히 몸매를 가려주는 옷을 입고 있었지만 체격 자체가 커 보이지는 않았다. 게다가 복면에 가려진 얼굴도 굉장히 작은 편이었다.
"아우를 막을 정도로 강자에, 여성, 그리고 이 자리에 없는 사람. 어쩐지 누군가 떠오르지 않나?"
"한세연..."
"거기까지만 하시죠."
이야기를 듣던 신태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복면인이 여성이라고 확실시되는 상황도 아니고, 한세연 씨라고 확정 지을 만한 것은 더욱 아닙니다."
"그렇지. 그건 나도 알고 있네만…."
"그러니 우리끼리 이런 추측은 무의미하다는 겁니다. 아니 오히려 나쁘게 작용될지도 모르죠."
"..."
"한세연 씨에 대한 것은 제가 따로 알아볼 테니 여기까지만 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알겠네."
신태길의 말에도 강현의 표정은 풀어질 줄 몰랐다.
'한세연... 한세연이라...'
강현은 그녀가 싸우는 것을 바로 앞에서 목격한 적이 있었다.
튜토리얼 이후 처음으로 죽음을 맞이한 그 날.
강현은 오크들 틈을 누비는 한세연의 검술을 보며 자괴감에 빠졌었다.
'닮았나? 비슷했던 것 같기도 하고....'
베난디의 숲에서도 한세연과 전투를 치르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때는 지금과 또 많은 시간이 흐른 상태다.
강현의 머리가 점차 복잡해졌다.
'하아, 모르겠다.'
결국 강현은 생각을 포기했다.
복면인에 대한 것은 신태길이 자세히 알아봐 줄 것이다. 게다가 지금은 그런 것을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저기 신태길 씨."
"예."
"이름난 아이템 제작자나 수리공 같은 사람들 없어요?"
"갑자기 그건 왜 물으십니까?"
신태길의 질문에 강현이 말없이 빌게인의 장검을 내밀었다.
"으흠..."
완전히 박살이 난 붉은 장검을 보며 신태길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이거 튜토리얼에서 받은 B등급 장비 아닙니까?"
"맞아요."
"어떻게 하면 이게 박살이 납니까? 그 정도 장비라면 내구도 관련 기능은 기본으로 붙어 있을 텐데..."
신태길이 대놓고 무식한 사람을 보듯이 강현을 쳐다봤다.
"그냥 쓰다 보니 뭐... 그래서 있어요. 없어요?!"
강현은 괜히 발끈하며 소리쳤다.
"있기는 합니다만... 차라리 새로운 무기를 구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안 돼요. 이거 꼭 있어야 돼요."
"아이템 관련 제작, 수리를 하는 능력자들이 등장하고 있지만 벌써부터 B등급 장비를 만질 수 있는 이는 찾기 힘들 겁니다."
"일단 찾아보시고, 그동안 대체로 쓸 만한 장비도 하나 구해줘요."
"그런 건 이제 좀 직접…."
"내가 던전 돌면 아이템이 안 나오는데 어떡해요?! 나도 찾아볼 테니까 같이 좀 구해줘요."
"하아, 알겠습니다."
신태길은 그렇지 않아도 아픈 머리가 더욱 지끈거리는 느낌에 고개를 저었다.
"푸하하하!"
그때였다.
옆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강현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곳에는 비교적 멀끔해 보이는 안유성이 걸어오고 있었다.
"형. 그건 무슨 꼴이에요?"
"시비 걸지 마라. 안 그래도 빡치니까."
강현은 혼자만 깨끗한 안유성을 보니 괜히 기분이 상했다.
"너는 어째 깔끔해 보인다? 어디서 놀다 왔어?"
"무슨 소리예요. 제가 오늘의 에이스였는데."
"지랄하네."
순간 안유성의 뒤에서 걸어오던 여성과 강현의 눈이 마주쳤다.
"너, 너는?!"
"피규어 변태?!"
"뭐야. 형도 아는 사이였어요?"
**
전투가 끝나고, 처참한 광경이 펼쳐졌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윤나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주체할 수 없었다.
'어쩌면... 이 남자와 나는 천생연분일지도 몰라!'
윤나래는 제법 귀여운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고백 또한 셀 수 없이 받아 봤다.
하지만 연애 경험 0회.
평범한 사람들의 외모로는, 평범한 사람들의 능력으로는 그녀를 만족시킬 수 없었다.
'이 사람은 달라. 반드시 붙잡아야 해!'
속으로 다짐을 하던 그때, 안유성이 어느새 말도 없이 떠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자, 잠시만요!"
"...?"
"말도 없이 가면 어떡해요?!"
"갈게요."
한마디 말을 던지고 미련 없이 돌아서는 안유성. 그 무표정하고 차가운 모습조차 잘생겨 보였다.
"안돼요! 저기, 그러니까..."
"뭐예요? 한판 하자고요?"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직설적인 말에 윤나래의 볼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물론, 안유성은 한번 붙어보자는 뜻으로 한 말이다.
"이름. 알려줘요."
"안유성."
"저는 윤나래라고 해요."
"예."
"아니, 가지 말고! 잠시만 멈춰봐요!"
"하아, 용건이 뭔데요? 저도 그쪽이랑 싸우는 게 재미있긴 했는데, 이제 싸움도 끝났고 길드로 돌아가 봐야 하거든요? 용건 있으면 빨리 말해요."
길드로 돌아가야 한다는 안유성의 말에 윤나래의 머리가 번뜩였다.
'길드가 있었어?!'
현재 자신은 무소속이다. 저런 수준의 남자가 소속된 길드라면 아마 보통 길드는 아닐 것이다.
"저도! 저도 같이 길드에 가고 싶어요. 괜찮죠?"
"그래요."
안유성은 시원하게 대답했다.
그 뒤를 졸졸 따라가며 윤나래는 속으로 되뇌었다.
'그래. 저 남자가 좋아서 따라가는 건 맞아... 하지만 꼭! 그것 때문은 아니지. 저런 남자가 어떤 길드에 소속되어 있는지 궁금하잖아? 분명 소규모의 알려지지 않은 정예 길드 같은 곳일 거야!'
그때 앞에서 안유성의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드디어...!'
"피규어 변태?!"
"뭐야. 형도 아는 사이였어요?"
강현을 보는 순간 윤나래는 모든 퍼즐이 맞춰지는 듯했다.
동시에 억장이 무너져 내렸다.
'소규모 정예 길드. 어쩐지 익숙한 얼굴... 이 남자도 저 변태 옆에서 같이 팔리던 피규어 남(男)이잖아!'
절망에 휩싸인 윤나래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이 훈남이 저 변태랑 같은 부류라니...'
"여긴 무슨 볼일이냐?"
"..."
"뭐냐고."
윤나래는 고개를 숙인 채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옆에 있던 안유성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같이 싸웠던 여자인데. 싸움 끝나고 나서도 따라오더라고요."
"그래?"
턱을 쓰다듬는 강현에게 무언가 촉이 오기 시작했다.
"그래. 안유성이 잘생기긴 했지... 그렇지?"
"뭐, 뭐?!"
"이놈이 생긴 것만 보면 어지간한 아이돌은 명함도 못 내밀 급이란 말이야. 충분히 혹할 수 있어. 그래."
"아니야! 아니라고!"
윤나래의 발작과도 같은 과민반응에 강현의 입꼬리가 더욱 올라갔다.
"근데 이걸 어쩌나? 그 미모의 남자는 이미 길드에 들어가 있고... 그 길드장이 나네...?"
"강현 씨. 방금 건 좀 소름 끼쳤습니다."
한껏 치켜떠져 광기로 번들거리는 강현의 눈동자를 본 신태길이 고개를 저었다.
"으으... 헛소리하지 마. 이 변태야!"
소리를 지른 윤나래가 다급히 자리를 떴다.
"크하하하하-!"
멀리서 들려오는 강현의 쩌렁쩌렁한 웃음소리가 더욱 그녀를 괴롭혔다.
"기다려라... 다음번에 내 신상 코스튬으로 전부 깜짝 놀라게 해 주겠어! 그딴 피규어가 아니라 진짜 예술을 보여줄 거라고!"
윤나래는 오기에 가득 차서 주먹을 꼭 쥐었다.
77화 길드 확장(1)
77. 길드 확장(1)
상태창을 바라보는 강현이 고민에 휩싸였다.
▫이름 : 강현
▫칭호 : 튜토리얼 졸업자 외 3개
▫레벨 : 65
▫상세 능력치 :
·근력 30 (+4)(+2)
·순발력 30 (+3)
·체력 31 (+3)(+8)
·마력 33 (+3)(+4)
·추가 스텟 : -
▫고유 능력 : 부활
▫능력 : 상급 검술(C), 하급 방패술(E), 최하급 석궁술(F), 중급 체술(D), 하급 둔기술(E), 마력감지(D), 독 내성(E), 마력운용(E)
▫스킬 : 분노의 사자후(C), 상급 육체 재생(A), 일도양단(D), 거인의 힘(B), 마력폭발(C), 웨인의 비기(C), 엔트리아의 외피(B)
제법 다채로운 변화가 일어났다.
둔기술과 엔트리아의 외피, 마력폭발의 등급이 상승했고 마력운용 이라는 능력이 새로 생겨났다.
레벨이 올라 모든 기본 능력치가 30이 넘어선 것도 눈에 띈다.
"아마 이 수준에 아직도 레벨업 없이 스텟이 오르는 인간은 나뿐이지 않을까?"
이전에 한시환과의 대화에서 알 수 있듯이 보통은 레벨업 이외에 수단으로 기초 스텟을 증가시키지 못한다.
너무 고되고 힘들기 때문이다.
차라리 그 시간에 몬스터를 잡아서 레벨업을 하고 장비를 맞추는 게 더 이득이다.
특히나 이미 스텟이 높은 상태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상급 검술이라..."
강현의 시선이 능력의 가장 앞에 위치한 상급 검술(C)에 고정됐다.
"포기해야 하나... 검은 진짜 매일매일 지겹도록 휘둘렀는데."
이제는 정말 검에 대한 미련을 버리려 했으나 그러지 못했다.
이번에 복면인과 만나며 또다시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다.
"마력운용으로 돌파구를 찾은 줄 알았는데, 상대도 마력운용을 사용할 수 있다는 걸 간과했어."
케르고와 함께 힘겹게 얻은 마력운용은 자신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그래. 내 탓이지. 재능도 없으면서 검이 박살날 정도로 무식하게 몽둥이처럼 휘둘렀으니 검술이 올라갈 일이 없지."
예전의 강현은 제법 검의 기교에 신경을 썼었다.
남들과 비슷한 수준의 체력을 가진 그가 우위에 서기 위해서는 무엇 하나라도 더 앞서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너무 강해져 버렸어."
정확히는 '몸만' 너무 강해져 버렸다.
언제부터인가 남들보다 압도적으로 강해진 신체 스펙.
그 덕에 어지간한 공격은 피하기보다 그냥 맞아 준다.
피할 시간에 맞아주고 주먹 한 번 더 휘두르는 것이 이득이었기 때문이다.
즉, 앞을 가로막으면 뛰어넘기보다는 부숴버렸다.
강현은 그 편이 더욱 효율적이고 편했다.
"내가 힘만 센 멍청이가 된 건가."
그런 것 같았다.
"하아. 시발..."
마지막에 나타나 최민준을 채간 정체불명의 복면인. 그자의 검술이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내가 연습한다고 따라잡을 수 있을까?"
상태창 시스템은 언뜻 보면 공정해 보이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같은 스킬이라도 가진 자의 재능에 따라 차원이 다른 성장 속도를 보여준다.
강현이 지금보다 더 노력한다고 해서 그 복면인을 따라잡을 수 있을 거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아아아! 몰라!"
결국 답답함에 자리를 박찬 강현이 소리를 내질렀다.
"뭐!"
"아닙니다..."
자신을 쳐다보는 한재문에게 괜히 눈을 부라리던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신태길 팀장?"
-예.
"그렇지 않아도 전화하려 했는데 이 타이밍 딱 맞췄네요."
-그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게 어떻습니까?
"그러죠."
**
신태길은 만나자마자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평소보다 더욱 예의 바른 모습이었다.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갑자기 오글거리게 왜 그래요?"
"..."
"뭐 부탁할 거 있죠?"
"크흠... 일단 앉으시죠."
짧은 순간이지만 강현은 불안하게 떨리는 신태길의 눈동자를 놓치지 않았다.
"강현 씨부터 말씀하시죠."
잠시 후.
따뜻한 차가 나오고 신태길이 입을 열었다.
"뭐가요?"
"저한테 전화하려 했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신태길 씨도 할 말이 있어서 전화했잖아요."
"강현 씨 말씀부터 듣고 말하겠습니다."
"쳇."
강현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기로 했다.
"검술, 내성, 마력에 관련된 스킬하고 능력 좀 구해줘요."
"정말 무지막지한 걸 아무렇지도 않게 말씀하시는군요."
"크흠..."
"다른 건 그렇다고 쳐도 강현 씨는 이미 검술을 익히고 계시지 않습니까?"
신태길의 의문은 당연했다.
모든 능력자는 자신이 자주 사용하는 무기에 대한 능력, 스킬을 자연스럽게 익혔기 때문이다.
"그런 기본능력 말고, 검술을 보조할 만한 획기적인 그런 스킬 있나 찾아봐 줘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내성 능력은 아무거나 상관없어요. 불이든 전기든 뭐든 구할 수 있는 건 다 구해줘요."
"그것도 구해보겠습니다."
예상보다 시원스럽게 나오는 대답에 강현은 조금 당황했다.
"구해달라는 입장에서 할 말은 아니지만은, 지난번에 엄청 구하기 힘들다 하지 않았어요?"
"맞습니다."
"그런데 구해준다고요?"
"어떻게든 구해 보겠습니다."
"좋네요."
어쨌든 구해준다고 하니 강현이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아, 그리고..."
"또 뭐가 있습니까?"
"지난번에 말한 무기 수리는 어떻게 됐어요?"
"그건 아직 알아보고 있는 중입니다. 정보가 들어오는 데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신태길의 대답에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요."
"하아, 또 있습니까?"
"진짜 마지막이에요."
계속되는 강현의 요구에 신태길이 지친 표정을 지었다.
"이번에 사람들 잔뜩 죽었잖아요?"
"예."
"제가 알기로는 장비 정부에서 다 수거했죠?"
"예..."
능력자가 죽으면 그 순간 가진 장비와 인벤토리에 있는 모든 것들이 떨어진다.
다른 나라 혹은 길드에 소속된 능력자들의 장비는 그곳에서 수거했겠지만, 테러리스트의 장비는 명목상 가져갈 이들이 없었다.
"저한테 몇 개 빼줘요."
"..."
"안돼요?"
"어떤 걸 원하십니까?"
"일단 무기. 가능하면 검으로. 무조건 단단하고 무거울 것."
"예."
"그리고 액세서리. 종류에 관계없이 스텟을 무조건 많이 올려주는 것들로."
사실 이번에 정부에서 수거한 아이템들은 모두 처분해서 각 국가, 길드에 보상금으로 이용될 예정이었다.
그것으로는 갚아야 할 보상의 일부밖에 안 되겠지만, 그것이라도 붙잡아야 할 만큼 정부의 상황은 절박했다.
그럼에도 신태길은 강현에게 아이템을 주기로 약속했다.
"하아... 알겠습니다."
"오늘따라 유독 대답이 시원시원하네요."
한차례 미소를 지은 강현이 고개를 내밀며 턱을 괬다.
"자, 이제 신태길 씨 차례네요. 오늘 보자고 한 이유가 뭐예요?"
"지금 정부의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그렇겠죠."
단순히 좋지 않다고 표현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한승훈 대통령의 자리는 위태로웠고 국가 전체로도 대단한 위기였다.
"능력자들에 대한 경각심 또한 극에 달했습니다. 내부에서는 지금이라도 능력자들을 제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
"특수 능력자 관리팀도 예산만 잡아먹는 쓸데없는 부서라고 없애야 한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고요."
"그래서요?"
"하지만 대통령께서는 기존의 방침을 바꾸지 않으실 생각입니다."
"흠..."
의외의 대답이었다.
한승훈 대통령이 처음부터 능력자 친화적인 정책을 펼쳤지만, 자신의 자리가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그러한 판단을 내렸다는 것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생각이 있다면 앞으로의 미래가 능력자들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건 그렇죠."
"지금 대한민국이 그나마 외국의 압박에서 버틸 수 있는 것도 이번 사건에서 뛰어난 수준의 능력자들을 보유했다는 것을 보여줬기 때문이죠."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이러니하게도, 이 사건으로 대한민국이 세계적인 능력자 강국이란 것이 알려졌다는 겁니다. 거기에는 강현 씨의 역할도 컸습니다. 미국의 워리어즈 길드가 배데스 길드를 극찬했거든요. 특히 길드장 에든이 강현 씨를 아주 마음에 들어했습니다."
"예? 나는 모르는 사람인데?"
"금발에 대검을 사용하는 남자입니다."
그제야 강현은 그가 누구인지 떠올랐다.
"아, 확실히 그 남자도 유독 강하긴 했어요."
"예. 그도 튜토리얼을 완벽히 졸업한 사람이니까요."
그것은 강현도 이미 예상했던 것이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
"이번 사건으로 세계는 알았습니다. 정말 강한 능력자들 앞에서는 군대도 소용없다는 걸요."
"확실히 그랬죠."
"아직 능력자가 나타난 지 1년도 지나지 않은 시점입니다. 앞으로 2년, 3년 뒤에는 이들이 얼마나 강해질지 상상조차 할 수 없죠."
"흐음..."
"게다가 몬스터는 또 어떻습니까? 며칠 전 세계 최초로 B 등급 던전이 등장했습니다. 따라서 앞으로 최소 A 정도는 있을 거라 예상할 수 있습니다."
"예."
"현재 난이도의 상승폭으로 봤을 때, B 혹은 A 부터 붕괴되는 국가가 나올지도 모른다는 예측도 있습니다."
모든 이야기를 듣자 강현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
"사실 저는 강해져야 한다는 것 외에 다른 문제를 고민한 적이 없었는데, 충분히 공감이 되네요."
"예. 대통령께서는 국가. 아니, 세계의 명운이 능력자에 달려있다고 믿습니다. 저 또한 그렇고요."
"그래서 그 이야기를 나한테 하는 이유가 뭐예요?"
"그래서! 저희는 강현 씨를 키우기로 했습니다."
"예?"
뜬금없이 자신을 키운다는 말에 강현이 당황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예요?"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강현 씨를 지원하겠다는 말입니다."
"왜요?"
"이유는 지금까지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아니. 제 말은 그게 아니고."
강현이 신태길의 말을 끊었다.
"저 말고 단군 길드나, 능력자 연합에 동우 형님도 계시고. 아니면 다른 10대 거대 길드들 있잖아요?"
"예."
"그렇게 이미 거대해진 단체를 지원하는 게 더 효율적인 것 같은데, 왜 하필 저를 키운다는 거예요?"
"으음, 약간의 오해가 있었군요. 저희가 강현 씨만 키우겠다는 건 아닙니다. 다만 강현 씨에게 가장 많은 투자를 하겠다는 거죠."
"그러니까 왜 나한테 가장 많은 투자를 하냐고요."
솔직히 강현은 이해되지 않았다.
강현도 자신이 강하다는 것은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혼자서 움직이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배데스 길드 또한 강하지만, 이미 자리 잡은 거대 길드들에 비하면 부족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보다는 10대 길드나 능력자 연합 같은 단체를 이용하는 게 효율 측면에서 훨씬 나아 보였다.
"그건 강현 씨의 가능성 때문입니다."
"가능성?"
"예. 사실 저희가 분석했을 때, 순수 무력 측면에서는 이미 강현 씨가 국내 최고가 아닐까 조심스럽게 예측하고 있습니다."
"한세연 씨가 있는 데도요?"
"예. 그리고 앞으로 더욱 성장할 여지도 많다고 보이고요."
"흐음, 하지만 결국 세력이 있어야 하잖아요?"
"그건 맞습니다."
"그런데 지금 배데스 길드원은 스무 명도 채 안되는데... 수준도 솔직히 안유성을 제외하면 타 길드보다 압도적으로 뛰어난 것도 아니고."
강현의 의문에 신태길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씀입니다만... 강현 씨."
"예?"
갑작스레 신태길이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지금 거대한 길드를 이끄는 자들의 공통점이 뭔지 아십니까?"
"졸라 세다는 거? 아, 화룡은 제외하고."
"아닙니다."
"그러면?"
"야심가라는 겁니다."
예상외의 대답에 강현이 미간이 좁혀졌다.
"야심가?"
"예. 지금 그 길드장들은 모두 강하고, 리더십이 뛰어난 자들이 맞습니다. 하지만 그에 걸맞은 야망 또한 엄청난 자들이죠."
"나는 그 야망이 없어 보이고?"
"비교적 그렇습니다."
어느 정도 사실이었기에 강현은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영웅 같은 거랑은 거리가 먼 사람인데요? 내가 생각해도 그다지 이타적인 인물도 아니고."
"상관없습니다."
"예...?"
"그렇다고 강현 씨를 키워서 뜻대로 움직이게 하겠다. 이런 생각은 아닙니다. 강현 씨가 뜻대로 움직일 사람도 아니고요."
"잘 아네요. 크큭."
"저희가 원하는 건 그저 강현 씨와 배데스 길드가 더욱 성장하는 겁니다. 아무도 건들지 못할 정도로 말이죠."
"그게 국가에서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요?"
"어떻게 생각하셔도 좋습니다. 그저 대통령께서는 남은 1년 반 정도의 임기 동안 최대한 모든 대비를 하려고 하십니다. 본인이 자리에서 물러나도 다른 사람이 뒤엎지 못할 만큼."
그 후로도 제법 오랜 시간 동안 대화가 이어졌다.
이미 찻잔은 식은 지 오래였고, 벌써 해가 뉘엿뉘엿 기울고 있었다.
"오늘 한 말은 다 이해했어요."
"그래서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뭘 어떻게 해요?"
"예?"
"나 키워준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있어요?"
"하하하. 그렇게 생각해주시면 감사하죠."
순간 미소를 지으며 말하던 강현의 표정이 돌변했다.
"대신."
"..."
"나는 지금까지처럼 내가 움직이고 싶을 때만 움직입니다."
"예."
"후회하지 마요."
"이미 돌이키긴 너무 멀리 왔습니다."
신태길이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녁으로 소고기 사줘요."
"저는 다음 일정이…."
"방금 지원하겠다면서요?"
"하아, 가시죠..."
한숨을 내쉰 신태길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으나 강현이 붙잡았다.
"신태길 씨."
"예?"
"맥주도."
78화 길드 확장(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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