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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184

174화 거짓의 대가(代價)(1)

174. 거짓의 대가(代價)(1)

던전 안의 몬스터가 코어를 지키는 것은 본능과도 같은 것이다.

머릿속에서 울리는 목소리가 끊임없이 인간을 죽이고 코어를 지키라고 요구하기 때문이다.

만약 목소리의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몬스터는 불안에 휩싸이고 고통이 밀려온다.

그래서 대부분의 몬스터들은 무작정 그 목소리를 따른다.

하지만 메인이 부서지고 던전이 무너지는 순간, 그들을 괴롭히던 목소리는 거짓말처럼 사라진다.

그리고 몬스터는 가장 원초적인 '생존 본능'에 눈을 뜬다.

오직 살아남기 위해 무작정 포탈을 향해 달리는 것이다.

바로 지금처럼.

"캬아아악-!"

좁은 포탈로 달려 나가는 수천의 몬스터로 인해 난장판이 벌어졌다.

급한 것은 몬스터뿐만이 아니었다.

"나와 이 새끼들아!"

메인 코어가 부서졌을 때 밖으로 나가지 않으면 죽는다는 것은 상식.

능력자들도 또한 던전 밖으로 나가기 위해 서로를 밀치며 죽을 힘을 다해 달렸다.

그런 혼란의 도가니 속에서 강현 일행 또한 몬스터 사이를 비집으며 코어를 향해 달리던 중이었다.

"갑자기 이게 뭔 지랄이야!?"

"혼란을 틈타 누군가가 메인 코어를 부순 것 같습니다."

"그렇겠지!"

강현이 앞에서 달려가는 리자드맨을 집어던지며 말을 이었다.

"누가 이런 짓을 벌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중요한 건 저놈이 던전 밖에 풀려난다는 거야."

혼란스러운 와중에 유유자적 포탈을 향해 날아가는 대제사장 코시크를 보며 강현이 말했다.

"안 되겠다. 아까 했던 거 한 번 더 하자. 윤나래. 버프 걸어봐."

필시언의 해머를 앞세워 단번에 포탈까지 길을 뚫을 셈이었다.

하지만 윤나래가 고개를 저었다.

"그거 몸에 부담 많이 가는 거잖아요. 안 그래도 정상이 아닌데 한 번 더 사용하면 밖에서 제대로 싸울 수 있겠어요?"

"강현 님. 그것보다는 보스가 나간 이후에 다 같이 전력으로 리자드맨들을 밀어버리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저도 그게 좋을 것 같네요."

일행이 모두 반대를 하자 강현이 고민했다.

"그럴까..."

지금은 모두가 보스의 시선을 끌지 않기 위해 최대한 소란을 일으키지 않고 이동하는 중이었다.

"그래. 그렇게 하자."

어차피 조만간 보스는 던전 밖으로 나갈 것이다.

그때 일행이 다 같이 움직이면 충분히 제시간에 던전을 빠져나갈 수 있으리라.

**

던전 밖으로 나온 리자드맨들을 맞이한 것은 수많은 총탄 그리고 포탄 세례였다.

-투두두두두! 콰앙!

불과 몇 분 만에 전쟁통으로 변한 던전 입구.

자신들을 향한 무차별적인 공격에 리자드맨들이 눈을 뒤집으며 인간들에게 달려갔다.

"상황은!?"

"피해가 제법 있지만 충분히 막을 수 있습니다. 예상외로 숫자가 많아 보병의 추가 지원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외곽의 제32보병사단에 연락해!"

소장 조문성이 지시를 내리며 흐르는 땀을 닦았다.

'생각보다 괴물들이 더욱 강하군.'

던전이 붕괴하면 수많은 몬스터가 밖으로 나오리라는 것은 이미 예상한 바였다.

문제는 몬스터의 수준.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총과 탱크 앞에서는 무력하게 죽을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놈들은 말 그대로 '괴물'이었다.

몇 발의 총알이 박히고도 미친 듯이 달려와 어떻게든 병사들을 찢어 죽였으며, 어지간한 상처에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이는 중국에서 능력자를 억압하는 정책을 펼치면서, 타국보다 능력자를 경시하는 풍조가 있던 탓에 생겨난 문제였다.

능력자를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으니, 자연스럽게 능력자가 상대하는 몬스터 또한 그리 강할 것이라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이런 사실을 모르는 조문성은 그저 사전 조사에서 실수가 있었다고만 생각했다.

'어쨌든 승리하는 것은 우리다.'

예상보다 강한 적에 조금 당황했지만, 문제없다.

상황은 여전히 자신의 통제하에 있었다.

"괴물들의 대장이라는 놈은 어디 있나?"

"아직 보이지 않습니다."

"준비해라. 곧 나올 거다. 그때 모든 화력을 쏟아부어야 한다."

"예."

소장 조문성이 명령을 내릴 때였다.

"소장님! 괴수들의 대장으로 보이는 개체가 출현했습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코시크가 던전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당장 모든 화력을 쏟아부어!"

소장 조문성의 명령에 모든 화기가 일시에 코시크에게 포탄을 쏟아냈다.

정밀한 타격이 가능한 미사일은 던전에서 흘러나오는 마력으로 인해 사용할 수 없었지만, 기본적인 야전포는 얼마든지 활용할 수 있었다.

가용 가능한 모든 포(砲)가 직접 조준으로 코시크를 향해 사격했다.

-콰과과과광!

너무 가까운 거리에 있었던 탓에 간혹 아군의 사격에 피해를 입기도 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

소장 조문성에게는 그저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일 뿐이다.

"멈추지 마라!"

괴수들의 대장은 상식 밖의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물론 소장 조문성은 이 정도 공격에 당하고도 살아있는 생명체가 존재하리라 생각지는 않는다.

그래도 뭐든지 확실한 것이 중요하기에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모든 것이 순조롭게 끝나가는 듯했다.

"소장님! 거대한 마력 반응입니다!"

모니터를 바라보던 장교 하나가 큰소리로 외쳤다.

"그게 무슨 소리야?"

"31연대가 있는 방향입니다!"

31연대라면 이곳에서 3km 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은 부대였다.

장교가 가리킨 방향을 보자 구름이 갈라지며 번개 같은 것이 뭉쳐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저게 뭐지...?"

점점 거대해지던 그것은 이내 강렬한 빛과 함께 바닥으로 떨어지고,

-콰와아아아!

31연대가 있던 자리가 초토화됐다.

"..."

모두가 그 장면을 멍하니 바라보며 입을 벌렸다.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소장 조문성이었다.

"당장 31연대에 연락해! 무슨 일이야! 생존자는!?"

"그게... 연락이 닿지 않습니다..."

장교의 말에 소장 조문성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건가!?"

조문성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고작 한 번의 공격이었다!'

단 한 번의 공격에 증발해버린 기갑 연대.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17연대에 마력반응입니다!"

"17연대에 연락이 되지 않습니다!"

"보병사단의 지원 병력이 대규모 마법 공격에 당했다고 합니다!"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보고들.

조문성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냐는 말이야!"

분명 모든 것이 자신의 통제하에 있었다.

계획은 완벽했고, 위대한 조국이 세계에 그 위용을 떨칠 일만 남아 있었다.

분명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그런데 왜...!"

흥분한 조문성이 탁자를 내쳤다.

그때였다.

"소장님... 괴수들의 대장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한 장교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대규모 마법 피해로 보스에게 날아가던 공격이 멈춘 상태였고.

그사이 보스가 있던 곳의 흙먼지가 가라앉고 있었다.

서서히 드러나는 지면은 운석이라도 떨어진 듯한 거대한 크레이터가 생겨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처음과 같은 자세로 의자에 앉아 있는 코시크.

놈은 허공에 뜬 채 오만하게 주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것이 정녕 피와 살로 이뤄진 생명체란 말인가..."

그때 조문성과 코시크의 눈이 마주쳤다.

묘하게 반달을 그리는 코시크의 눈.

소장은 놈이 비웃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끝이군... 이렇게 허무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날아온 마력빔이 지휘 통제실을 박살냈다.

**

던전 밖으로 나오자마자 매캐한 화약 냄새가 코를 찌르고, 사방에서 굉음이 터져 나왔다.

"이게 뭔 지랄이야!?"

강현은 도대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겨우 혼잡하던 던전을 빠져나왔더니 던전 밖은 더한 혼란이 벌어지고 있었다.

'갑자기 던전 브레이크가 발생하는 것도 모자라서, 이제는 무슨 군대가 화약을 들이붓고 있네.'

도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일단 살고 보자.'

강현이 재빨리 리자드맨의 사체를 들어 방패처럼 이용했다.

"여기 사람 있다 이 새끼들아!"

곤란한 것은 강현뿐만이 아니었다.

리자드맨 틈에 섞여 있던 능력자들 또한 총탄과 포탄에 맞아 죽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저런 미친놈들!"

놈들은 애초에 여기 있는 모두를 죽이려는 생각인 것 같았다.

저들이 비록 세계적으로 알아주는 능력자라고 해도 강현처럼 맨몸으로 총탄을 튕겨내지는 못한다.

이미 지쳐있던 능력자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하며 온몸에 구멍이 뚫리고 사지가 잘린 채 죽어 나갔다.

"안유성. 네가 윤나래 데리고 따라와."

"알겠어요."

현재 신성아는 상처로 몸을 가누기 힘든 상황이고 윤나래는 마력을 과다 사용해서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강현은 안유성과 함께 윤나래와 신성아를 옮기기로 했다.

"나는 걸을 수 있어요."

윤나래가 스스로 움직이겠다고 했지만, 강현은 요지부동이었다.

"시키는 대로 해! 가능하면 마력은 쓰지 말고. 지금은 이게 제일 베스트야."

때마침 보스를 향하던 포격이 멈추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당한 설움을 갚으려는 듯 코시크가 쏘아내는 마법의 향연.

"지금이 기회다. 가자!"

신성아를 안아 든 강현이 재빨리 움직였다.

"강현 님. 죄송합니다..."

"됐으니까, 회복하는 데 전념해."

"예..."

강현은 앞을 막아서는 리자드맨을 베어내며 서서히 던전 근처를 벗어났다.

다행히 리자드맨은 군대를 공격하는데 정신이 팔린 상태였기에 뚫고 나가는 데 그리 힘들지 않았다.

"후우... 살았다."

잠시 후. 던전에서 약 1km 정도 떨어진 곳에 도착한 강현이 겨우 숨을 돌렸다.

"아주 신나게 노네."

고개를 돌리자 여전히 마법을 난사하고 있는 코시크가 보였다.

"상당히 지친 것 같습니다."

"그래? 내가 보기엔 비슷한 것 같은데."

"표정과 행동, 마력의 흐름을 봤을 때 처음보다 확실히 둔해졌습니다."

신성아의 말에 강현이 의문을 표했다.

"마력의 흐름이 보여?"

"얼마 전부터 미약하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 마력이 보인다니 신기하네."

원래 신성아는 마력에 대한 재능이 없었다.

정확히는 평범한 재능이었다.

강현과 윤나래, 안유성 모두가 마력을 뛰어나게 다뤄서 많이 부족한 것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어쨌든 마력을 다루는 데 있어 특출난 편은 아닌 것이다.

"아무래도 제 고유능력이 조금 발전한 것 같습니다."

"고유능력이 발전할 수도 있구나... 그래서 네가 화살을 날렸을 때 저놈이 그렇게 화를 낸 거야?"

"그것도 맞습니다만... 그때는 운이 좋아 더 좋은 타이밍에 공격이 들어갔습니다."

"어쨌거나 네 능력이 강해졌다는 건 좋은 거지."

항상 일행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시무룩해 있던 신성아를 떠올리며 강현이 피식 웃었다.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일단 이동하자. 조금 더 떨어지는 게 안전하겠어."

"예."

아직도 포탄들이 보스를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언제 눈먼 포격에 당할지 몰랐기에 일행은 조금 더 떨어진 곳으로 몸을 피하기로 했다.

"응?"

그때였다.

강현이 향하던 곳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있는 것이 보였다.

"여기요! 좀 도와줘요!"

통역 능력이 있었기에 강현은 손을 흔들며 큰소리로 외쳤다.

강현의 목소리를 들은 사람들이 저들끼리 뭐라 수군대기 시작했다.

"뭐라는 거야?"

강현이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채고, 동시에 군인들이 일행을 향해 총을 겨누기 시작했다.

"전부 실드 켜!"

강현이 외치자 윤나래와 안유성이 재빨리 마력 실드를 켰다.

-투두두두!

실드 위로 쏟아지는 총알들.

"이런 개새끼들이!"

'웨인의 비기'를 활성화한 강현이 빠르게 앞으로 달려갔다.

"히이익!"

당황으로 인해 잔뜩 커진 눈동자가 가까워지고, 강현은 그대로 군인의 머리를 후려쳤다.

-파아악!

단순 주먹질에 사람의 머리가 폭발하듯 터져나갔다.

-투두두두!

동료가 잔인하게 죽었지만, 놈들은 총격을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래. 한번 해보자!"

아무래도 긴 밤이 될 것 같았다.

**

"쿠르르, 푹륵..."

대제사장 코시크가 거칠게 숨을 헐떡였다.

"내가 이겼다..."

처음 보는 괴상한 무기들이 자신을 덮쳐왔으나, 물러나지 않았다.

영문은 모르고 낯선 땅에 왔음에도 오직 이것 하나만을 바라보며 모든 적을 처치했다.

"위대한 크록타시여..."

코시크의 품에서 나오는 지도.

아니, 정확히는 음식물 포장지.

"크흐흐흐... 클클!"

그것의 정체도 모른 채 코시크가 신이 나서는 낄낄거렸다.

"자칫하면 큰일 날 뻔했어."

어째서인지 이곳은 자신이 있던 곳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마력이 희박했다.

그런 상황에서 사방에 대규모 마법을 난사했더니 마력이 남아나질 않았다.

'아직 회복이 완벽하지 않았나...'

게다가 인간의 화살에 당했을 때 상처 입은 마력 회로가 제대로 아물지 못한 것도 코시크를 더 궁지에 몰아붙였다.

"그러나 나는 승리했다."

코시크는 최선을 다해 싸웠다.

오직 이 순간을 위해서.

"어떻게 해독(解讀)해야 하지?"

코시크가 지도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딱히 마력은 느껴지지 않는군."

지도에서 뭔가 특별한 것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은 위대한 크록타가 만든 지도.

암호화된 상태일 것이 분명했다.

어쩌면 제법 오랜 시간이 걸릴지도 몰랐다.

"우선 간단한 해독 마법을 사용해 봐야겠군."

코시크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지도를 향해 몇 가지 마법을 사용했다.

그러자 예상외로 쉽게 종이의 내용이 읽히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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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를 읽던 코시크의 눈이 꿈틀거렸다.

"이게 무슨 암호인가...?"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투둑, 하고 끊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크워어어어어-!"

코시크가 엄청난 비명과 함께 마력을 폭사시켰다.

"감히! 감히! 감히 이 몸을 속여!"

강현의 얼굴이 또렷이 떠올랐다.

"어디냐! 어디 있냔 말이다!"

제법 실력이 있는 놈이었으니 살아있을 것이 분명하다.

아직 멀리 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어서 놈을 찾아야 한다.

절대로 쉽게 죽이지 않으리라.

1년. 아니, 몇 년이고 고문을 반복해서 제발 죽여달라고 사정하게 만들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도 끊임없이 고문해 결국에는 완전히 백치로 만들어버리고 말겠다.

분노로 인해 코시크의 눈이 점차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죽인다... 감히 대제사장인 나를... 나를 능멸해!"

코시크의 눈이 분노로 완전히 뒤집히던 그때.

뒤쪽에서 빠르게 접근하는 마력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인간... 겁을 상실했군."

아무래도 죽일 놈이 제 발로 찾아온 것 같았다.

175화 거짓의 대가(代價)(2) - 20.01.21

175. 거짓의 대가(代價)(2)

강현은 근처에 있던 군인들을 모조리 정리하고, 겨우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이것들 하는 짓거리가 영 찝찝하다 싶기는 했는데, 이렇게까지 미친놈들일 줄이야."

중국은 이곳에서 능력자를 모조리 죽이고 사건을 덮어버리고 싶었던 것 같았다.

"요즘 시대가 어떤 때인데 말이야."

"능력자를 억압하고 통제하는 정책을 펴다 보니 잠재력과 전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신성아의 지적은 정확했다.

중국은 능력자의 중요성이나 강함에 대해 정확하게 인지하지 못했다.

더불어 그런 능력자들이 목숨 걸고 싸우는 몬스터가 얼마나 강한지까지도.

"자업자득이라 생각합니다."

신성아의 말에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거짓말을 한 놈은 대가를 치러야 하지 않겠어?"

강현이 시선을 돌려 멀리 있는 코시크와 놈이 박살 내는 중인 중국의 군대를 바라봤다.

"B등급만 돼도 군대로는 막기 힘들다는 거. 알만한 사람은 다 알지 않나? 그런데 A등급 보스를 군대로 막을 생각을 하네."

강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우리한테는 좋은 기회지."

강현이 인벤토리에서 마력 포션 꺼내 마셨다.

"크으, 거의 다 마셨네. 비싼 건데."

갑작스러운 강현의 행동에 일행의 시선이 몰렸다.

"갑자기 포션은 왜 마셔요?"

윤나래가 물었다.

"가서 저놈 처리해야지. 보니까 다 죽어가는 것 같은데, 지금 아니면 언제 처리하겠어?"

"이대로 도망치는 게 낫지 않아요? 어차피 여기는 한국도 아니고..."

윤나래는 이대로 떠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회로가 망가져서 한동안 제대로 마력을 쓰기 힘들다고 했지.'

윤나래의 상태를 보면 그런 생각을 하는 것도 이해가 됐다.

하지만 강현은 뜻을 굽힐 생각이 없었다.

"내가 무슨 인류를 위해서! 이딴 숭고한 생각으로 저 사지에 뛰어들려는 건 줄 알아? 절대 아니지."

"그러면 뭔데요?"

"여기까지 와서 개고생했는데 뽕을 뽑아야 할 거 아냐."

강현이 씨익 웃으며 안유성을 바라봤다.

"그렇지 않냐?"

"당연하죠. 역시 형이 뭘 안다니까요."

안유성이 활짝 웃으며 일어나 엉덩이에 묻은 흙을 털어냈다.

그러자 신성아도 따라 일어났다.

"강현 님. 저도 가겠습니다."

"아냐. 몸도 못 가누면서 어디를 가려고."

"그래도 지원 사격 정도는..."

"됐어. 여기서 윤나래를 지킬 사람이 하나 정도는 있어야지."

강현의 말에 신성아가 입을 꾹 다물었다.

"어차피 나는 죽어도 다시 살아나잖아. 잊었어?"

"그건 알고 있지만..."

"괜찮다니까. 여기서 대기하고 있어. 얼마 안 걸릴 거야."

강현은 신성아의 어깨를 두드려 주고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

"가자."

무심하게 자신을 데리고 가는 강현을 보며 안유성이 입을 열었다.

"형. 저는 죽어도 다시 안 살아나는데요."

"어쩌라고."

"저는 걱정 안 해줘요?"

"네가 어디서 뒈질 놈이냐? 혹시라도 쫄리면 말해. 지금 빠져도 뭐라 안 할 테니까."

강현의 도발에 안유성이 씨익 웃었다.

"농담으로 한 말인데 세게 나오네요. 혹시 긴장했나?"

"긴장은 지랄."

저 멀리 코시크의 거대한 몸이 점차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짧게. 단기전으로 간다."

갑작스러운 강현의 말에 안유성이 고개를 돌려 바라봤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5분. 그 안에 처리할 거야."

강현은 전투를 시작하자마자 빌게인의 장검에 내장된 광전사를 사용할 생각이었다.

"괜찮겠어요?"

"놈이 지쳐있는 지금,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몰아붙여야 돼. 잘못하면 던전 안에서처럼 쪽도 못 쓰고 당한다."

강현의 말에 안유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포터 제대로 해줘. 무슨 말인지 알지?"

"당연하죠. 참고로 5분 넘으면 저는 그냥 형 버리고 갈 거예요."

광전사 사용 시간인 5분이 지나면 강현은 완전히 무기력한 상태에 빠진다.

그때까지 보스를 처치하지 못하면 사실상 패배.

즉, 죽음이었기에 자신만 도망치겠다는 말이었다.

"네가 남겠다고 해도 보낼 생각이었어 새꺄."

그렇게 둘의 5분 보스 공략 계획이 세워졌다.

"크워어어어어-!"

그때 보스가 괴성을 지르는 것이 들려왔다.

자세히 본에 손에 보존식 포장지를 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멍청한 놈. 저걸 아직도 들고 있어?"

강현이 낄낄거리며 빌게인의 장검을 들어 올렸다.

"이제 알아차렸나 보네요."

"타이밍 좋고, 그럼 먼저 간다!"

강현이 땅을 박차며 코시크를 향해 달려갔다.

**

"이노옴-! 죽을 자리를 찾으러 왔구나!"

강현이 등장하자 코시크가 노호성을 터뜨렸다.

그렇지 않아도 잔뜩 화가 나 있던 코시크는 강현을 보고 완전히 눈이 뒤집혔다.

볼살이 분노에 파르르 떨릴 정도로 화가 나 있는 코시크.

엄청난 속도로 놈에게 달려간 강현이 빌게인의 장검을 휘둘렀다.

검에는 강현의 푸른 마력이 날카롭게 둘러진 상태였다.

"뒤져!"

"소용없다!"

코시크는 재빨리 마력 실드로 강현의 검을 막아내려 했다.

-지지지직!

그러나 강현의 압도적인 근력에 마력 실드가 찢겨나가며 검이 코시크의 몸을 꿰뚫었다.

"쿠어어! 이놈이 감히!"

코시크는 자신의 강력한 마력 실드가 이렇게 허무하게 찢겨나갈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코시크가 당황하며 몸을 하늘로 띄었다.

"어디 가냐!"

그때 강현의 앞에 마력으로 된 발판이 생겨나고, 강현은 그것을 밟고 빠르게 코시크를 쫓았다.

"이놈! 자만하지 마라!"

코시크가 재차 마력 실드를 생성했다.

처음보다 훨씬 크고 단단해진 실드.

동시에 강현을 향해 온갖 마법들을 쏟아부었다.

"이딴 것쯤!"

강현은 검을 휘둘러 날아오는 마법을 쳐냈다.

가끔 검으로 쳐내는 것이 불가능하거나, 놓친 마법이 강현의 몸을 강타했다.

'이 정도는 맞아도 돼.'

하지만 현재 강현의 체력은 광전사로 엄청나게 증가한 상태.

급하게 쏘아낸 마법으로는 강현에게 제대로 된 피해를 줄 수 없었다.

-콰직!

또다시 마력 실드에 검이 꽂혔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실드를 뚫지 못하고 절반 정도만 박힌 상황.

그것을 본 코시크가 웃었다.

'크큭, 멍청한 놈. 이제 뭘로 공격할 생각….'

그때였다.

강현이 인벤토리에서 필시언의 해머를 꺼냈다.

"못질이다! 이 새꺄!"

강현이 해머를 휘둘러 검의 손잡이 부분을 내려쳤다.

-콰아앙!

굉음과 함께 쏘아져 나간 검이 코시크의 배를 완전히 꿰뚫었다.

"크아아아!"

생전 처음 느끼는 고통에 코시크가 비명을 내질렀다.

코시크는 어째서 자신이 인간 따위에게 밀리는지 알 수 없었다.

'도대체 왜. 대제사장인 내가!? 너무 지친 것인가? 아니, 애초에 저놈이 인간이 맞긴 한 건가!?'

도저히 인간의 뼈와 근육으로 낼 수 없는 움직임이었다.

몇백 년에 한 번씩 대륙을 호령했던 인간의 전설적인 영웅도 저렇게 신체 능력이 뛰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후우, 정신 차려야 해. 단기적으로 신체 능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리는 마법을 사용한 것이 분명하다.'

결론은 하나다.

시간을 벌어야 한다는 것.

분명 강현도 한계가 있을 것이다.

게다가 자신은 너무 지쳐있었다.

낯선 환경에서 계속 전투를 지속했고, 마력까지 부족한 상황이다.

'나는 위대한 크록타를 모시는 대제사장이다. 이런 곳에서 죽을 자가 아니란 말이다.'

코시크가 마음을 다잡으며 강현을 노려봤다.

"째려보면 어쩔 건데!"

강현이 재차 필시언의 해머를 휘둘러 오는 순간, 코시크가 재빨리 몸을 뒤쪽으로 날렸다.

'일단은 작전상 후퇴를...'

그때 무언가가 코시크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크어억!"

"어디 가려고?"

언제 있었는지 기척조차 감지하지 못한 인간이 휘두른 메이스였다.

코시크가 흐릿해지려는 의식을 붙잡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어째서 감지하지 못한 거지? 아니,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어서 이곳에서 벗어나야 해!'

다행히 뒤쪽을 막고 있는 인간은 그리 강하지 않은 것 같았다.

코시크가 안유성에게 재빨리 마력을 쏘아냈다.

-위이이잉!

레이저처럼 쏘아진 코시크의 강대한 마력이 수십 갈래로 갈라졌다.

회피를 완전히 차단한 공격.

"...!?"

하지만 인간은 묘기라도 하듯이 허공에서 몸을 비틀어 모든 마력을 피해냈다.

"아이! 찢어졌네. 다 피할 수 있었는데."

마법에 스친 탓에 찢어진 옷을 보며 짜증을 내는 인간.

처음에는 황당하고 어이가 없었지만, 점차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이놈들이... 적당히 하란 말이다!"

감히 대제사장인 자신을 속인 것으로도 모자라 눈앞에서 무시하고 있었다.

머리끝까지 분노가 차올라 이성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적당히는 뭘 적당히 해. 새꺄."

'아차..!'

안유성 때문에 정신이 팔렸던 탓에 순간 강현을 잊어버렸다.

그 대가는 거대한 해머.

강현이 휘두른 필시언의 해머가 코시크의 시야를 가득 메웠다.

'크록타여...'

짧은 순간.

오직 마법과 진리에 모든 것을 바친 자신의 생이 파노라마처럼 흘러갔다.

'허무하군.'

-파아아악!

코시크의 거대한 머리가 터져나가며 사방에 피와 살점이 날렸다.

**

"후우... 아슬아슬했다."

전투가 끝나자마자 광전사의 사용 시간인 5분이 종료됐다.

밀려오는 탈력감에 강현이 털썩 주저앉았다.

"야. 아이템 챙겨. 얼른 뜨자."

강현의 말에 안유성이 보스에게서 나온 아이템을 챙겼다.

"끝났어요."

"그래? 다 됐으면 빨리 가자."

강현의 말에 안유성이 고개를 저었다.

"안 되겠는데요?"

"그게 무슨 말..."

인상을 찌푸리던 강현도 곧장 이유를 알아채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근처에서 몇몇 능력자들이 무기를 빼 들고 나타났기 때문이다.

"하아... 하여간 좆같은 하이에나 새끼들."

욕이 절로 나오는 상황이었다.

"코쟁이들. 용케 살아있었네."

나타난 것은 레일러와 미국의 능력자들이었다.

"그러는 너는 다 죽어가는군."

바닥에 앉아 움직이지 못하는 강현을 보며 레일러가 말했다.

"내가 다 죽어간다고? 아닐걸?"

"허세는 통하지 않는다. 네가 보스를 죽이고 얼마 지나지 않아 힘이 빠지는 것을 확인했으니까, 아마 순간적으로 낸 강한 힘의 부작용이 온 것이겠지."

레일러는 강현의 힘이 다한 것을 확신하는 것 같았다.

강현이 한숨을 내쉬며 어떻게 이 상황을 타개할지 고민하던 때였다.

"레일러 씨. 멈추시죠."

뒤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장명호... 이 쥐새끼 같은 놈."

나타난 것은 장명호와 중국의 능력자들이었다.

레일러가 장명호를 보며 사납게 웃었다.

"쥐새끼라니. 말씀이 심하십니다."

"쓸데없는 가면은 벗도록 하지. 다 알고 있으니까. 메인 코어를 부순 것도 네놈이지?"

레일러의 말에 장명호가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쉽군요. 죄송하지만 A등급의 아이템은 저희가 가져가야겠습니다."

"준보스 아이템을 꿀꺽한 거로는 성에 안 찼나?"

"이런, 거기까지 알고 계셨습니까?"

흥미진진하게 둘의 대화를 듣던 강현이 인상을 팍 찌푸렸다.

"뭐야. 그때 아이템 도둑놈이 저 새끼였어?!"

"정말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도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장명호가 정말 미안하다는 듯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리고 이제 보스가 잡은 아이템도 내놔라?"

"예."

천천히 들어 올려지는 장명호의 고개.

그 얼굴에는 기괴한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조국을 위해 여러분들은 여기서 죽어주셔야겠습니다."

"하아... 진짜 가지가지 하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강현이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 그리고 너."

강현이 레일러와 장명호를 손으로 가리켰다.

"한꺼번에 덤벼. 이기는 놈이 보스 아이템 가져가는 거다."

"크하하하하! 강현 씨. 미치신 겁니까!? 지금 상황에 그딴 허세라니. 덕분에 정말 오랜만에 이렇게 크게 웃어보는군요!"

장명호가 날카로운 웃음을 토해내며 눈물을 닦아냈다.

"저 쥐새끼 같은 놈에게 동의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확실히 미친 건 분명한 것 같군."

레일러도 강현이 허세를 부린다고 생각했는지 피식 웃었다.

"하아... 진짜 피곤해 죽겠네... 왜 이렇게 혓바닥이 길어? 됐으니까 덤비라고 새끼들아."

강현의 말에 레일러와 장명호가 서로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처리한 다음 다시 우리끼리 분배를 결정하도록 하죠."

"동의한다."

각자 무기를 꺼내 드는 레일러와 정명호.

둘은 동시에 강현을 향해서 빠르게 짓쳐들어왔다.

'타이밍이 중요해...'

강현은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으며 때를 기다렸다.

마침내 장명호와 레일러가 휘두른 무기가 강현에게 닿기 직전.

'전사의 죽음.'

강현이 '전사의 마지막 불꽃'에 내장된 전사의 죽음을 사용했다.

*전사의 죽음 – 5초간 근력 5배 증가

단숨에 강현의 근력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증가하고,

"뭐야!?"

"이게 무슨!?"

양손으로 레일러와 장명호를 붙잡은 강현이 씨익 웃었다.

"뒤져."

강현이 그대로 팔을 휘둘러 둘을 바닥에 내쳤다.

-콰아앙!

둘은 강현의 압도적인 근력에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인형처럼 휘둘렸다.

"끄으으..."

갑작스럽게 벌어진 상황에 둘이 바닥에서 신음했다.

강현은 양손으로 각각 레일러와 장명호의 머리를 붙잡았다.

"잘가라."

그리고는 전력으로 팔을 모아 서로의 머리로 박치기를 시전했다.

-콰직!

레일러와 장명호의 머리가 서로 부딪치며 그대로 부서졌다.

"내가 아이템 가져가는 데 또 불만인 놈. 지금 말해."

강현이 주위를 돌아보며 말하자 모두가 고개를 돌려 피하기 급급했다.

"없으면 간다."

-콰아아앙!

강현이 땅을 박차자 굉음이 일어나며 몸이 엄청난 속도로 하늘로 떠올랐다.

"형. 나도 데려가야죠."

안유성이 그런 강현을 웃으며 뒤따랐다.

**

"형. 여기서 뭐해요?"

기세 좋게 달려나간 강현은 그리 멀리 가지 못했다.

약 1km정도 떨어진 곳에 엎드려 있는 강현을 보며 안유성이 물었다.

"죽는 중이다."

"괜찮아요?"

"괜찮을 리가 있겠냐? 커헉!"

강현이 말을 하던 도중 기침과 함께 피를 토해냈다.

"시벌..."

"그러게 왜 허세를 부려서."

"거기서 그렇게 안 했으면 너랑 나 둘 다 죽었어 인마."

"하긴 그것도 그러네요."

"야. 나 좀 뒤집어 줘봐."

강현은 달려가던 도중 엎어진 것인지 바닥에 이마를 대고 있었다.

하지만 강현은 몸을 뒤집기는커녕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는 처참한 상황이다.

'전사의 죽음'을 사용한 상태에서 무리하게 근육을 움직인 탓에 전신의 뼈가 부서지고, 근육이 찢겨나갔기 때문이다.

"어어, 그래. 그렇게."

안유성이 무성의하게 강현의 몸을 뒤집어 주었다.

"후우... 이제 좀 살겠네."

바닥에 누워 하늘을 보게 된 강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살 수 있어요?"

"솔직히 모르겠는데... 아마 죽을 것 같다."

안유성의 물음에 강현이 곰곰이 생각하던 강현이 대답했다.

"형. 그러면 그냥 지금 죽을래요? 형은 한국에서 일어날 테니까 우리 데리러 오면 되잖아요."

솔직히 나쁘지 않은 방법 같기도 했다.

여기서 살아난다고 해도 몸을 회복하는 데는 아마 하루 이틀로는 힘들 것 같았으니까.

깔끔하고 죽고 재빨리 돌아와서 일행을 구출하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었다.

"야야. 그거 안 집어넣냐."

하지만 결정을 하기도 전에 메이스를 꺼내는 안유성을 보자 죽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지는 강현이었다.

"쩝."

"너 방금 입맛 다셨지? 이 새끼가 형한테 어딜..! 쿨럭, 쿨럭!"

역정을 내던 강현이 다시 피를 토해내기 시작했다.

"시벌... 아무래도 안되겠...어..."

점차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제법 오랜만에 느끼는 것이지만, 강현에게는 아주 익숙한 감각이기도 했다.

"야... 이거..."

강현이 마지막 힘으로 품을 뒤져 핸드폰을 건넸다.

핸드폰은 예전에 신태길이 준 것으로 위성 전화가 가능하며 마력으로 움직이기에 1년 동안 충전이 필요 없는 물건이었다.

"이게 뭔데요?"

대답할 기운도 없었다.

안유성이 핸드폰을 받자마자 강현의 팔이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기, 기다려... 돌아온다..."

그렇게, 강현의 숨이 끊어졌다.

176화 마력탄의 사수(1)

176. 마력탄의 사수(1)

중국의 A등급 던전이 클리어 되고 며칠이 흘렀다.

-중국의 군대가 우리를 공격했다.

-21세기에 벌어진 대테러 사기극

'크록타의 위대한 성지' 공략 당시 갑자기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나고 밖으로 도망쳐 나온 능력자들.

그들은 중국 군대가 몬스터들 사이에 능력자가 있었음에도 포격을 가했다고 말했다.

심지어는 살아남은 능력자들에게 직접적으로 총격을 가했다는 주장까지 나오는 상황.

-중국은 미리 준비를 하고 있었다.

-던전 브레이크를 일으킨 것도 중국의 짓이 분명하다.

여러 추측이 나오는 중이었지만 아직 결정적인 증거가 없었다.

-던전의 보스 코시크가 중국 군대를 쓸어버리지 않았다면 당하는 것은 우리였을 것이다.

우습게도 능력자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보스가 '지나치게 강력해서' 였다.

대제사장 코시크는 사방에 대규모 마법을 난사하면서 중국의 포위망에 구멍을 냈고, 그 덕에 포위를 뚫고 달아난 능력자들이 본국에 연락을 취해 돌아갈 수 있었다.

이 모든 사실이 알려지고 나서 전 세계는 중국에 항의했다.

"중국에서는 오해다. 모든 것은 몬스터가 나가지 못하게 하는 과정에서 생긴 사고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사실을 부인하고 있습니다만. 이미 사건이 너무 커져 버린 만큼 쉽게 빠져나가지는 못할 겁니다."

신태길이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말했다.

"역시 이상한 쪽으로 대가리 굴리는 놈들 치고 마무리가 좋은 꼴은 못 보죠."

강현이 머리가 터져나간 장명호와 레일러를 떠올리며 말했다.

"아무튼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뭐, 그래도 이번에는 나쁘지 않았어요. 좋은 경험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보스가 가지고 있던 아이템은 내가 싹 쓸어왔으니까요."

강현이 씨익 웃으며 자신의 인벤토리에 잠들어 있는 아이템들을 떠올렸다.

보스에게 얻은 아이템은 총 세 개.

A++등급의 지팡이.

A등급의 반지.

A+등급의 목걸이.

아직 이것들을 누구에게 어떻게 분배할지는 결정하지 못했지만, 어쨌든 자신의 손에 들어온 아이템이다.

기분이 좋지 않을 수 없었다.

"외국에서 아이템 가지고 뭐라 하는 곳은 없어요?"

"가끔 저희 쪽으로 항의가 오기는 합니다만, 현재 세계의 시선이 모두 중국에 몰린 터라 무시해도 될 정도입니다."

"어떤 놈들이 항의를 해요? 내가 잡은 거 내가 쓰겠다는데."

"그들도 딱히 아이템을 가져가려고 하는 행동은 아닐 겁니다. 그저 자신들이 양보한다는 식으로 한국에 생색을 내려는 거죠. 나중을 위해서요."

"웃기는 놈들이네."

"원래 이 바닥이 그렇습니다."

신태길이 쓰게 웃으며 담배를 재떨이에 지졌다.

"그나저나 세계적인 슈퍼스타가 된 느낌은 어떻습니까?"

"어떻기 뭘 어때요. 똑같지."

강현이 피식 웃었다.

이번 던전 사건 이후 강현은 전 세계적으로 유명 인사가 돼 있었다.

-A등급 던전의 보스를 죽인 남자.

-지상 최강의 남자.

-한국의 강현. 그는 누구인가?

원래도 여러 가지 사건들로 능력자들 사이에서 제법 유명세를 타던 강현이었지만, 이번에는 정말 제대로 인지도가 상승했다.

A등급 던전의 보스를 최초로 죽였다는 타이틀.

세계의 이목이 중국에 몰린 만큼 파급력은 더욱 커졌다.

"몸값이 좀 뛰었겠죠?"

"조금 뛰었다고 말할 수준이 아닙니다. 현재 A등급 던전이 있는 국가 중에 무려 3분의 1이 천문학적인 금액을 약속하면서 강현 씨를 파견해 줄 수 없냐고 요청하고 있으니까요."

"그래요? 나쁘지 않네요."

자신의 몸값이 뛰고 찾는 곳이 많아진다니, 썩 기분이 괜찮았다.

"그래서 강현 씨. 혹시 생각 없으십니까?"

신태길이 은근한 시선을 보내왔다.

"왜요?"

"외국에 생색도 내고, 빚을 지어둬서 나쁠 건 없습니다."

신태길의 말에 강현이 황당하다는 눈빛을 하며 신태길을 바라봤다.

"왜 그렇게 보시는지. 방금 원래 이 바닥이 그렇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신태길 씨. 점점 얼굴에 철판이 두꺼워진다는 생각 안 들어요?"

신태길이 한숨을 내쉬었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 아니겠습니까."

"그거 나이 들고 있다는 증거예요."

강현의 나이로 공격하자 신태길의 이마에 힘줄이 돋았다.

"그런 말씀 하지 마시죠. 저랑 별반 다를 거 없는 분이. 강현 씨도 한 달 후면 30살이지 않습니까?"

"이미 35살한테 그런 말 듣고 싶지 않은데."

강현은 1991년생, 신태길은 1985년생이다.

한 달 후, 2020년이 되면 둘은 30살과 36살이 된다.

대한민국 평균 33세의 유치 찬란한 대화였다.

"아무튼, 다른 A등급 던전에 가실 생각은 없으신 겁니까?"

"일단 한동안은 그럴 생각이에요. 만약 가더라도 저만 갈 거고, 길드원은 A등급 던전에 안 보내려고요."

"강현 씨가 그렇게 나올 정도면 던전이 많이 위험하긴 했나 봅니다."

신태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강현이 갑자기 눈을 크게 떴다.

"아, 정정할게요. 정확히는 메인 코어를 공략하러 갈 일은 없을 거예요. A등급 던전에 들어가더라도 노말 코어까지만 공략하겠죠."

"노말 코어만 말입니까? 굳이 그렇게 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A등급 던전에 가더라도 노말 코어까지만 공략하겠다는 강현의 말에 신태길이 의문을 표했다.

"이번에 경험해보니까 확실히 알겠어요. 아직은 A등급 던전을 클리어할 때가 아니에요. 어차피 노말 코어만 부숴도 던전을 유지하는 데는 문제 없잖아요?"

"그건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굳이 잘난 능력자들 죽여가면서 메인 코어를 부술 이유가 없다는 거죠. 내가 위험을 좋아하는 놈이기는 한데, 그래도 A등급 메인 코어는 아니에요."

신태길은 강현이 말한 것의 의미를 곰곰이 생각했다.

"확실히 급하게 A등급 던전을 클리어야 될 이유는 어디에도 없긴 합니다."

이번 중국 사태로 확실하게 확인된 사실은, A등급 던전이 클리어된다고 해서 주변의 마력 밀도가 낮아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도리어 던전이 부서지며 흘러나오는 마력에 더욱 농밀해지는 상황.

이 말은 결국 던전을 클리어해도 전처럼 전자기기를 사용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어차피 전기가 마정석 에너지로 대체되는 것은 거부할 수 없는 흐름이니까요. 굳이 높은 품질의 마정석과 아이템을 얻을 수 있는 던전을 부술 이유가 없기는 합니다."

신태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결론을 말하면. 제 생각은 그래요. 지금은 A등급 던전에 적응하고, 더욱 능력을 키울 때다. 굳이 무리하게 A등급 던전을 부술 필요는 없다. 아니, 오히려 남겨둬서 성장의 밑거름으로 써야 한다. 이거죠."

"만약 한국에 A등급 던전이 생겨나면 강현 씨 이야기를 꼭 참고해서 대응하도록 하겠습니다."

신태길의 말에 괜히 민망해진 강현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나저나 길드원분들은 잘 쉬고 계십니까?"

"그놈들이야 여전하죠."

안유성과 신성아. 윤나래는 강현이 돌아오기까지 약 3일을 중국에서 숨어 지내야 했다.

듣기로는 그사이에 중국군의 끈질긴 추격이 있었다고 한다.

-형. 왔어요? 생각보다 늦었네요.

강현이 그들을 찾았을 때 상당히 초췌한 모습이었는데, 걱정했던 것과 반대로 안유성은 굉장히 해맑게 웃고 있었다.

-나름 재미있었어요.

-미친놈.

모든 일이 끝나고 한국에 돌아온 일행은 현재 몸을 회복하고 다시 평소처럼 지내는 중이었다.

이후로도 신태길과 강현은 시시콜콜한 근황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러던 도중 시계를 확인한 강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할 말 끝났으면 갈게요."

"벌써 가십니까?"

"예. 오후에 약속이 있어서."

오늘 오후에는 정서빈과의 약속이 있었다.

평소와는 달리 먼저 강현에게 만나자고 요청한 정서빈 연구소장.

-꼭 신성아 씨랑 같이 오셔야 해요.

정서빈은 어째서인지 신성아와 같이 오라고 몇 번이나 신신당부했다.

그 기세에 강현은 어쩔 수 없이 알겠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강현 씨. 다음에 또 뵙도록 하죠"

"신태길 씨도 수고해요. 그럼 이만."

강현이 서둘러 밖으로 나오며 전화기를 들었다.

**

강현이 연구소에 들어서자마자 본 것은 굉장히 다급하게 달려오는 정서빈이었다.

"하아, 일찍 오셨네요!"

달려온 탓인지 조금 거칠게 숨을 내쉬는 정서빈.

"무슨 일 있어요? 왜 뛰고 그래요?"

"그냥요!"

"예... 그럴 수 있죠..."

어쩐지 잔뜩 들떠있는 것 같은 그 모습에 강현이 조금 당황했다.

"그나저나 웬일이에요? 먼저 보자고 하고."

"신성아 씨는 같이 오셨어요?"

정서빈은 강현의 물음에 답하지 않고 대뜸 신성아부터 찾았다.

"여기 있습니다."

강현의 뒤에 있던 신성아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반가워요! 정말 잘 왔어요!"

그러자 정서빈이 신성아의 손을 붙잡으며 정신없이 흔들었다.

"너 혹시 따로 정서빈 소장 만났어?"

강현이 신성아를 찌르며 몰래 속삭였다.

"아닙니다..."

정서빈과 신성아는 이번이 두 번째 만남이었다.

그것 외에는 둘 사이에 접점이라고는 딱히 없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정서빈은 굉장히 신성아를 반겼다.

'이 여자가 왜 이러지...?'

사실 당황한 것은 신성아도 마찬가지였다.

신성아는 왜 정서빈 소장이 자신을 이렇게까지 반기는지 전혀 예상가는 바가 없었다.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얼른 안으로 들어가죠!"

정서빈이 신성아의 손을 붙잡은 채로 연구소 안으로 이동했다.

강현은 안중에도 없는 모습이었다.

"참나. 이럴 거면 나는 왜 불렀어?"

강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두 여성의 뒤를 따랐다.

**

"짜잔!"

정서빈이 눈을 크게 뜨며 입으로 효과음을 냈다.

"예...?"

도대체 이 여자가 왜 이러는 걸까.

잔뜩 들떠있는 정서빈을 바라보며 강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놀랍지 않아요?"

"어... 놀랍기는 하네요."

정서빈의 앞에 놓인 것은 바로 총.

최근에 자주 보기는 했지만, 사실 한국에서는 제법 귀한 몸이다.

일반인들은 평생 한 번 볼까 말까 한 그런 물건인 것이다.

"총이라니. 예. 대단하네요. 진짜 깜짝 놀랐어요."

강현이 뒷목을 붙잡으며 신성아를 바라봤다.

"성아야. 나 너무 놀라서 쓰러진다. 붙잡아. 얼른."

강현의 장난에 정서빈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강현 씨! 이건 그냥 총이 아니라고요! 무려 마력탄을 발사하는 마총(魔銃)! 엄청나지 않아요?"

"아..."

앞에 놓인 물건에 대한 기대치가 아주 조금 상승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런 강현의 기색을 느꼈는지 정서빈이 잔뜩 들떠서는 설명을 이었다.

"기존의 총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알죠?"

"대충은요."

총기의 종류는 매우 다양하다.

하지만 근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대부분 총은 같은 원리로 총알을 발사한다.

방아쇠를 당기면 공이가 탄피를 치고, 그 순간 탄피 안에 있던 화약이 폭발하며 그 가스에 의해 총알이 날아가는 것이다.

이 내용을 이해하는 데는 딱히 높은 지식수준이 필요하지 않다.

강현 또한 군대에서 주워들은 것들로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이것 좀 봐봐요."

정서빈이 총알을 집어서 강현에게 보여주었다.

"이 총알이 기존의 것들과 다른 점은 화약 대신 마정석 가루가 들어간다는 거예요!"

"돈 잡아먹는 괴물이겠네."

강현의 담백한 감상에 정서빈이 인상을 팍 찡그렸다.

"한 발당 얼마나 해요? 만 원? 이만 원?"

강현의 가격을 묻자 정서빈이 곤란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싼 건 5만 원에서 비싼 건 20만 원 정도...?"

참고로 일반적인 총알의 판매 가격은 종류에 따라 모두 다르긴 하지만 어지간해서 5,000원을 넘지 않는다.

국내에서 대규모로 생산되는 총알의 경우에는 심지어 500원 정도.

"아, 안 사요. 안 사."

그런데 한 발당 5만 원이 넘는 터무니없는 가격이라니.

강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에이. 우리 사이에 장사를 하겠어요? 당연히 원가로 넘겨주죠."

"원가가 얼마인데요?"

"방금 말한 가격이 원가인데요?"

강현이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정서빈을 바라봤다.

"눈으로 욕하지 말아요."

"아무 말도 안 했어요."

"방금 속으로 욕했잖아요."

정서빈이 인상을 팍 구기며 말했다.

"욕먹을 만한 가격인 걸 본인도 아니까 다행이긴 하네요."

분당 최소 몇백만 원을 잡아먹는 괴물이다.

강현이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해도 돈을 땅바닥에 버리는 짓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돈 문제는 차차 해결하면 되죠! 진짜 중요한 건 돈 따위가 아니잖아요?"

"그럼 뭔데요."

"바로 성능이죠! 성능."

정서빈이 본격적으로 영업을 시작했다.

177화 마력탄의 사수(2)

177. 마력탄의 사수(2)

"바로 성능이죠! 성능."

정서빈은 정말 중요하다는 듯이 두 번이나 강조해서 말했다.

"후우... 성능이 뭐 어떤데요?"

강현이 '사실 별거 없을 것 같지만 한번 들어나 보자.' 라는 표정을 최대한 열심히 지으며 말했다.

"우선, 이 마력탄은 일반 총탄보다 어마어마하게 빠르게 날아가요!"

"구체적으로 얼마나 빠릅니까?"

일반 총탄보다 빠르다는 설명에 신성아가 관심을 보였다.

"으음... 성아 씨. 혹시 총알이 얼마나 빠른지 알아요?"

"잘 모릅니다."

"보통 권총탄은 초당 300m, 소총탄은 초당 800m 정도를 날아가죠. 가끔 1,000m가 넘는 것도 있고요. 그런데 이 마력탄은 무려!"

정서빈이 손가락 두 개를 펼쳤다.

"초당 2,000m 입니까?"

"정답! 엄청나죠?"

1초에 2000m.

음속의 약 6배.

분명 빠른 속도이기는 하다.

하지만 설명을 듣는 강현은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게 의미가 있어요?"

솔직히 아무리 능력자가 인간의 한계를 초월했다고 해도, 총알을 보고 피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굳이 저렇게 비싼 돈을 주고 속도를 높이지 않아도, 어차피 총알은 못 피하는 것이다.

"딱히 총알 속도가 2배가 된다고 해서 뭔가 대단한 이점이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강현의 물음에 정서빈이 고개를 저었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시네요."

정서빈이 엄지와 검지를 펼쳐 총 모양의 손을 만들어 강현을 겨눴다.

"듣기로는 강현 씨가 웬만한 총알은 다 튕겨낸다던데. 맞아요?"

"뭐... 철갑탄이나 대구경 탄이 아니라면 튕겨내긴 하죠."

"이건 강현 씨처럼 단단한 것을 뚫기 위한 용도로 개발됐어요. 여기에 철갑탄을 입히면, 아마 탱크 장갑도 뚫을걸요?"

"그 정도라고요?"

일반적으로 철갑탄이라고 해도 현대 전차와 장갑차의 두꺼운 장갑을 뚫지는 못했다.

만약 정말로 전차의 장갑을 뚫을 정도면. 어지간한 몬스터는 급소에 맞는 순간 즉사라고 봐야 했다.

"충분히 가능할 거라 봐요. 속도가 무려 두배라고요. 운동에너지가 얼마나 차이 날지 감이 오지 않아요?"

운동에너지.

강현은 뭔가 어려운 주제인 것 같으니 대충 고개를 끄덕이기로 했다.

"예. 뭐... 오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이건 대 괴수용으로 제작된 아주 대단한 총알이라는 거죠. 무려 탄두까지 특수 제작했다고요. 솔직히 저도 위력이 얼마나 나올지 상상이 안 돼요."

쉴 새 없이 자랑하던 정서빈이 옆에 있던 총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이건 그런 엄청난 총알을 발사하기 위한 아주 대단한 총이다. 이거예요!"

온갖 수식어가 붙은 화려한 정서빈의 소개에 강현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나쁘지는 않네요."

"듣자 하니 신성아 씨가 활을 주로 사용하신다던데, 이참에 이걸로 바꿔보는 건 어때요?"

무기를 바꾸는 것이 어떻겠냐는 정서빈의 물음.

강현이 신성아를 바라봤다.

"어떤 것 같아?"

"괜찮은 것 같습니다. 저도 활로는 한계를 느끼고 있던 참이니까요."

신성아의 긍정적인 대답에 정서빈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조울증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극단적인 표정 변화였다.

"그런데 심각한 문제가 있어요."

문제가 있다는 정서빈의 말에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돈 먹는 하마라는 게 엄청나게 심각한 문제기는 하죠."

"아니! 돈 문제 말고요!"

"그럼 뭔데요?"

"성장이요. 현재 대부분 능력자가 총을 쓰지 않는 이유도 성장 때문이잖아요?"

강현은 단번에 정서빈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이해했다.

"확실히 총기를 사용했을 때 레벨업이 느리다는 건 던전 사태 초창기에 밝혀진 사실이죠."

"그래서 이걸 신성아 씨에게 주는 게 맞는지 모르겠네요."

"흐음..."

강현은 한동안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을 이어갔다.

그러다 무언가가 떠오른 듯 고개를 끄덕이는 강현.

"저는 괜찮을 것 같은데요?"

"그런가요?"

"지금 상황을 던전 초창기랑 비교하기는 무리가 있으니까요. 아마 이 총을 사용한다고 해서 성아한테 문제가 될 것 같지는 않아요."

누구보다 레벨이 높은 강현이기에 어떤 식으로 레벨업이 이뤄지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군대가 고블린 같은 약해빠진 놈들을 쏴갈기는 거랑 지금 성아의 상황을 비교하는 건 말이 안 되지.'

처음 군대가 레벨업을 하지 못했던 이유는 분명하다.

'전투가 너무 쉬웠으니까.'

그 당시의 몬스터는 나약했고, 총기 앞에서 무력했다.

게다가 숫자 또한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지.'

지금은 홀로 일개 사단을 박살내는 몬스터도 나오는 상황이다.

이런 때에 저 마력 총을 사용하는 것은 신성아의 전투를 돕는 것이지, 성장을 막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렇지 않아요?"

"솔직히 저는 레벨업에 관해서는 잘 몰라요. 이 분야에서는 강현 씨가 더 해박할 테니 맞겠죠. 들었을 때 딱히 논리적으로 이상한 것 같지도 않고."

정서빈 또한 강현의 생각에 동의했다.

"너는 어떡할래? 쓸 거야?"

"예. 사용하고 싶습니다."

신성아 또한 성장이 다소 느려지는 부작용이 있다 해도 총기를 사용하고 싶었다.

이 총이 자신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줄 것만 같았다.

"좋아. 결론 났네. 그래서 이건 얼마예요? 공짜로 줄 건 아니잖아요."

강현이 가격을 묻자 정서빈이 볼을 긁적였다.

"조금 비싸요. 여기 권총 2자루는 하나당 1,000만 원 정도. 소총은 3,000만 원. 여기 대물 저격용 총은 1억이요. 물론 제작비 기준이에요."

"왜 이렇게 비싸요? 총알 말고 총은 딱히 바뀐 게 없는 거 아니었어요?"

"사실 진짜 변화는 총알보다는 총에 있어요. 솔직히 겉모양만 총일뿐이지 완전히 다른 무기거든요."

총과 총알.

기존과 같은 외형을 하고, 총알을 날려 공격하는 것까지 같았지만 그 작동 원리는 완전히 달랐다.

거기에 마법적인 조치까지 깃들어 있었기에 비싸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굳이 이렇게 현대 총 모양으로 할 필요가 있었어요?"

"그게 멋있잖아요!"

정서빈의 해맑은 대답에 강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성아 씨. 이 총. 사용하실 거죠?"

"예."

신성아가 총을 사용한다고 하자 갑자기 정서빈이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기 시작했다.

그녀는 대물 저격총을 번적 들더니 신성아에게 건넸다.

"성아 씨. 이걸로 자세 한 번 잡아보시겠어요!?"

"예? 예... 알겠습니다."

엉거주춤 총을 받아 든 신성아가 영화에서 본 것처럼 자세를 취했다.

"꺄아아아! 이거야!"

핸드폰을 들어 연신 사진을 찍는 정서빈.

"제가 요즘 마력탄의 사수라는 소설을 재미있게 보고 있거든요!"

"그래서요?"

"그 소설을 실제로 구현하면 얼마나 멋질까 해서 만들었지 뭐에요!"

"..."

강현은 고작 그딴 이유로 이런 괴물들을 만들었냐는 말이 목 끝까지 치밀어 올랐으나, 잘 참았다.

'성아한테는 잘됐네.'

이과가 덕질을 하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주는 좋은 예였다.

**

"벌써 가려고요?"

"볼일 끝났으면 가야죠."

총기를 챙긴 강현과 신성아는 곧장 연구소를 떠나려 했다.

그런 둘을 바라보는 정서빈의 눈에는 아쉬움이 가득 담겨 있었다.

"성아 씨. 총알 떨어지면 꼭 직접 들러서 사줘요! 그럼 원가보다 싸게 해 드릴게요!"

"예..."

신성아가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그럼 갑니다."

더 있으면 또 이상한 포즈를 요구하고 사진을 찍을지 몰랐다.

강현은 서둘러 연구소를 나가려다 갑자기 멈춰 섰다.

"아, 잠깐만. 여기 이거."

그러더니 인벤토리에서 가죽 재킷을 꺼냈다.

불과 며칠 전에 받은 재킷은 온통 흙먼지에 찢긴 상태였다.

"신경 써서 만들어준 건데 미안해요."

"아니에요. 다시 수리하면 되죠. 아! 혹시 이번에 중국에서 보스 마정석 안 가져왔어요?"

아이템을 챙길 당시 경황이 없어 마정석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강현의 설명을 들은 정서빈이 아쉬워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깝네요. 그게 있었으면 진짜 제대로 된 작품 하나 만들어 볼 생각이었는데."

"다음에 구하면 가져올게요. 일단 대충 수선만 해줘요."

"알겠어요."

정서빈이 웃으며 재킷을 받았다.

"그럼 둘 다 다음에 또 봐요."

"정서빈 씨도 수고해요."

강현과 신성아가 손을 흔들며 연구소를 떠났다.

**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

한국에서는 간단하게 북한이라고 부르는 나라.

던전과 능력자로 인해 변해버린 세상이지만 북한은 여전히 최고의 수령이 나라를 통치하고 있었다.

그들은 능력자들의 존재를 경계했으며 몬스터 따위는 위대한 조국의 '조선인민군'이 처치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굉장히 구시대적인 사고방식.

그것은 북한의 롤모델이라 할 수 있는 중국이 큰 화를 입고 나서도 변하지 않았다.

그런 북한 평안북도의 한 산골.

평소 새의 지저귐이나 풀벌레가 우는, 말 그대로 자연의 소리밖에 들리지 않는 이곳에.

-찌지지...직!

귀를 찌르는 듯한 인위적인 소음이 일기 시작했다.

점차 일그러지는 공간.

-화아아악!

마침내 비틀리던 공간이 활짝 열리며 엄청난 마력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 공간의 틈으로 한 인영이 걸어 나왔다.

-철컥, 철컥...

나타난 자는 검은 갑옷으로 전신을 감싸고 있었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며 자신이 있는 장소를 파악했다.

"마력이 부족하군."

자신의 있는 세계보다 훨씬 밀도가 낮은 마력에 대한 그의 감상이었다.

그는 한동안 숲을 걸었다.

그가 걸을 때마다 갑옷이 철컥거리는 소리가 숲을 흔들었다.

조금 시간이 흐르자, 그의 주위로 수많은 인영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검은 로브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있는 자들.

"오셨습니까."

로브를 입은 자들은 그에게 다가가 무릎을 꿇고는 고개를 숙였다.

"너는 누구지?"

"오칼 올룬이라고 합니다."

대답하며 머리를 덮던 로브를 치우자 새하얀 두개골이 드러났다.

"오칼 올룬. 이곳이 대한민국이 맞는가?"

그, 검은 갑옷의 말에 오칼이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이곳은 대한민국과 영토를 맞대고 있는 다른 국가입니다."

"음?"

"아무래도 이동하시던 도중 좌표가 조금 뒤틀린 것 같습니다. 간혹 있는 일입니다."

"그런가."

조용히 고개를 주억거리던 그가 돌연 검을 빼 들었다.

"그런데 너희는 왜 여기 있지?"

"..."

"너희는 분명 대한민국에 있어야 할 텐데."

"그것이..."

그의 물음에 잠시 머뭇거리던 오칼이 말을 이었다.

"몇 달 전, 바노 쿨사께서 당하신 이후로 모든 제자가 대한민국을 떠났습니다."

"도망쳤다는 말인가..."

"죄송합니다!"

그의 말에 오칼 올룬을 포함한 언데드들이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고개를 들어라."

그가 말을 하며 검을 다시 검집에 집어넣었다.

"바노 쿨사. 놈의 잘못을 너희들에게 떠넘겨서는 안 되겠지."

바노 쿨사.

쿨사들 중 가장 오랜 세월을 버텼으며 동시에 가장 강하다고 알려진 리치.

바노 쿨사는 그와 함께 위대한 아곤의 은총을 받은, 동기이기도 했다.

'오만한 놈. 결국 그 꼴이 났구나.'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그. 검은 갑옷이 한 발짝 앞으로 걸었다.

"오칼 올룬. 이 나라에 다른 제자들이 있나?"

"예."

"그들을 모두 모아라. 우선 이 나라부터 정복을 시작한다."

"알겠습니다. '가투 아사스'시여."

가투 아사스.

올룬 → 쿨사 → 아사스로 이어지는 지구에 처음으로 등장한 쿨사 위의 직위를 가진 자였다.

178화 평화로운 일상 - 20.02.17

178. 평화로운 일상

평화로운 12월.

강현은 여느 때처럼 사무실에 앉아서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캬하! 시원하네."

단숨에 한 캔을 비워내고 탄성을 내뱉던 순간.

"응?"

몸을 훑고 지나가는 낯선 마력에 강현이 인상을 찌푸렸다.

"뭔가 이상한데..."

마력은 더 이상 던전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지구의 마력 밀도가 점차 높아지고, 강한 능력자가 많아지면서 도심 속에서도 심심찮게 마력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강현의 몸을 훑고 지나간 것은 뭔가 달랐다.

굉장히 미약하지만, 농밀하고 어둡고 불쾌한 마력.

'잘못 느꼈나?'

그때 인상을 찌푸리는 강현을 보고 신성아가 다가왔다.

"강현 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아무것도 아냐."

고개를 저은 강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들 모였지?"

"예. 회의실에서 대기 중입니다."

"오케이. 가자!"

**

회의실에 들어서자 아주 익숙한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왔어요?"

가볍게 손을 들어 인사하는 안유성,

"빨리빨리 시작해요."

그리고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 조급해 보이는 윤나래.

"보채지 마. 금방 끝날 거니까."

일행은 A등급 던전 크록타의 위대한 성지 공략 이후 처음으로 모인 것이었다.

"오늘 왜 모인지는 다들 알지?"

오늘은 평소처럼 모여서 노닥거리는 것과는 조금 달랐다.

강현이 굳이 '회의'라고 힘을 준 것은 그만큼 오늘 대화할 내용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아이템 나눈다면서요?"

"그래. 슬슬 나눠야지."

회의 주제는 바로 아이템 분배.

던전의 보스 코시크를 죽이고 나온 아이템을 누가 가질 것인가에 관한 이야기였다.

"미리 말했듯이 아이템은 총 세 개야. 전부 꼼꼼하게 확인해."

강현이 말을 하며 인벤토리에서 아이템을 꺼내 테이블 위에 두었다.

모든 이들이 시선이 몽롱하게 빛나는 아이템에 모여들었다.

이름 : 대제사장 코시크의 반지

등급 : A

내구도 : 295/300

설명 : 리자드맨 21대 대제사장 코시크가 사용하던 반지다.

능력 : 마력 10 스텟 증가, 마력 회복속도 20% 증가, 수호의 빛

*수호의 빛 : 외부로부터 완벽히 차단하는 강력한 실드를 생성한다.

첫 번째 아이템은 반지였다.

강력한 마법사였던 코시크의 이름을 달고 있는 만큼 굉장히 훌륭한 성능의 반지.

"이건 누가 가지는 게 좋을까?"

강현의 말에 윤나래가 번쩍 손을 들었다.

"저요!"

"왜?"

"제가 할게요. 누가 봐도 저한테 딱 필요한 아이템 아니겠어요?"

윤나래의 말에 강현이 피식 웃었다.

"웃기네. 어딜 봐서?"

"마력을 올려주잖아요!"

"여기에 마력이 중요하지 않은 사람도 있냐."

물론, 마법 위주로 전투를 벌이는 윤나래는 다른 일행보다 더 마력이 중요하기는 했다.

하지만 능력자는 근본적으로 마력을 이용해 전투를 벌이기에 결코 다른 이들에게 필요하지 않은 것은 절대 아니었다.

"그럼 누가 가질 건데요?"

"으음..."

솔직히 강현도 누가 쓰는 게 좋을지 잘 판단이 서질 않았다.

"저 수호의 빛이라는 게 얼마나 강할까?"

"처음 던전을 나왔을 때 보스가 공격당하고 있었잖아요? 그때 쓰던 거에요."

강현의 질문을 안유성이 받았다.

"그래? 어떻게 그렇게 잘 아냐?"

"감이죠. 감."

안유성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래. 너 잘났다."

어쨌든 안유성의 말이 사실이라면 저 아이템은 신성아나 윤나래가 쓰는 것이 좋아 보였다.

강현과 안유성에 비해 둘은 원거리에서 싸울 일이 많았고 방어력이 약했기 때문이다.

"으음... 어떡하지."

강현이 인상을 찌푸리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야. 이건 놔두고 일단 다음 아이템부터 확인하자."

강현이 반지 옆에 있는 지팡이를 집어 들었다.

이름 : 리자드맨 대제사장의 지팡이

등급 : A++

내구도 : 10000/10000

설명 : 크록타의 성지에서 대제사장의 직위를 맡은 리자드맨들에게 대대로 내려오는 지팡이. 전설에 따르면 세계수를 가공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사용자의 마력 운용을 돕는다. 워낙 단단하기에 둔기로 사용해도 괜찮은 무기가 될 것 같다.

능력 : 마력 운용률 50% 증가, 마력 회복속도 40% 증가, 내구도 강화, 자가 수복

"흐음..."

이번에는 무려 A++등급의 아이템이었다.

"이건 누가 가질래?"

윤나래가 번쩍 손을 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요!"

"왜?"

강현의 물음에 윤나래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누가 봐도 저한테 딱 필요한 아이템 아니겠어요?"

"아까 반지도 그렇다면서."

"둘 다 누가 봐도 저한테 필요한 아이템이죠!"

"뒤질래?"

윤나래의 황당한 야심에 강현이 인상을 구겼다.

"둘 다 안 주는 수가 있어."

"아! 잘못했어요."

아이템을 주지 않겠다는 협박에 윤나래가 금세 얌전해져서는 자리에 앉았다.

"후... 모르겠다. 일단 마지막 아이템도 보자."

일행은 마지막 남은 아이템은 목걸이를 확인했다.

이름 : 차원의 목걸이

등급 : Z

내구도 : 1000/1000

설명 : 최초로 A등급 던전의 보스를 잡은 그대에게 건네는 선물.

능력 : 체력 20 스텟 증가, □□

*□□ : ???

가운데 호박색 보석이 들어간 단출한 디자인의 목걸이.

"으음..."

목걸이는 지금까지 본 아이템 중 가장 미묘한 것이었다.

"일단 체력 20 스텟 증가가 미쳤긴 하네."

비록 '□'이나 '?'가 거슬리긴 했지만 다른 것들을 다 빼고 스텟 증가만 보더라도 굉장히 훌륭한 아이템이었다.

"이거 냄새가 나는데..."

강현이 설명에 ?표가 적힌 아이템을 보는 것은 처음이 아니었다.

"예전에 이스터 에그 생각나?"

과거 C등급 던전 '베난디의 숲' 공략 당시 화룡 길드의 박호연에게 내기로 얻어낸 이스터 에그.

그것에도 이 목걸이처럼 '?'가 잔뜩 적혀 있었다.

"이건 아무래도 강현 님이 가지시는 게 좋겠습니다."

신성아가 조용히 의견을 제시했다.

"저도 그게 좋아 보이네요."

거기에 거드는 안유성.

"그래도 될까?"

"예. 아무래도 이 모든 걸 기획한 '관리자'가 직접 강현 님을 위해 만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흐음..."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이건 형이 가지는 게 맞는 것 같네요."

둘의 의견에 윤나래도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동의."

윤나래도 체력 20 스텟이 탐이 나긴 했지만, 그보다는 다른 것들이 더 중요했다.

이렇게 모두가 동의하자 강현이 잽싸게 목걸이를 가져갔다.

"오케이. 이건 내가 가져가고. 그러면 이제 두 개 남았네."

이제 남은 것은 반지와 지팡이.

이번에도 윤나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말해."

"솔직히 말해서 여기서 지팡이 쓸 사람은 저밖에 없잖아요?"

"그래서."

"제가 지팡이 쓸게요."

윤나래의 말에 강현이 얼른 지팡이를 잡아챘다.

"지팡이 맡겨놨냐?"

"나눠줄 거라면서요!"

"회의를 거친다고 했지 너한테 지팡이 준다고는 안 했는데. 그리고 말이야."

강현이 지팡이의 설명을 다시 확인했다.

"이거 안 보여? 무려 A++등급이라고. 소고기도 투쁠러스가 최고인데! 이런 귀한 걸 맨입으로 그냥 가져가려 하네."

강현의 말에 윤나래가 입을 삐쭉 내밀었다.

"참나. 주기 싫으면 싫다 해요. 치사하기는..."

솔직히 강현도 이 지팡이를 윤나래가 쓰는 게 옳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주려니 배가 아픈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최대한 골려주고 줘야지.'

강현이 씨익 웃으며 윤나래를 바라봤다.

"가질래?"

"네!"

강현의 말에 윤나래가 언제 토라졌냐는 듯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냈다.

"이거 주면 말 잘 들을 거냐?"

"당연하죠! 길드장님! 충성! 충성! 길드에 뼈를 묻겠습니다!"

윤나래가 과장되게 경례까지 하며 말했다.

지팡이를 위해 자존심이고 뭐고 다 갖다 버린 모습.

"그럼 안 줘야겠다. 나는 너 계속 보기 싫거든."

하지만 이어지는 강현의 말에 윤나래의 얼굴이 기괴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으으...! 감히 오크 주제에 사람을 가지고 놀아!?"

"뭐? 오크? 뒤지고 싶냐?"

벌떡 일어선 강현이 지팡이를 꽉 쥐었다.

"또 때리려고!? 때릴 거면 지팡이라도 주고 때려! 지팡이도 안 주고 때리면, 그게 사람이냐!?"

"네가 방금 사람이 아니라 오크라며!"

"아악! 아파! 아프다고!"

"아프지 말고 죽어!"

'내구도 강화'에 '자가 수복'까지 달린 내구도 10,000짜리 지팡이는 아주 단단했다.

**

그날 저녁. 윤나래는 결국 지팡이를 쟁취할 수 있었다.

강현은 차원의 목걸이를 바로 착용했고.

대제사장 코시크의 반지는 신성아에게 돌아갔다.

일행은 아무런 아이템도 가지지 못한 안유성에게 미안해했는데, 정작 본인은 신경 쓰지 않았다.

-진짜 괜찮냐?

-괜찮다니까요. 필요하면 나중에 사면 되죠.

안유성이 한사코 자신은 괜찮다고 했기에 결국 코시크의 반지를 신성아가 가져갈 수 있었다.

'뭐, 본인이 괜찮다고 하면 그걸로 된 거지.'

어차피 아이템은 3개였고 누군가는 가지지 못할 수밖에 없었다.

안유성이 자진해서 양보하겠다는데 굳이 나설 필요는 없었다.

'그나저나 체력이 한 번에 많이 올라서 그런가. 느낌이 확 다르네.'

강현은 기존에 착용하던 체력 10스텟 증가 반지를 빼고, 차원의 목걸이를 착용했다.

▫이름 : 강현

▫칭호 : 튜토리얼 졸업자 외 5개

▫레벨 : 90

▫상세 능력치 :

·근력 40 (+4)(+10)

·순발력 41 (+4)

·체력 43 (+3)(+20)

·마력 41 (+3)(+10)

·추가 스텟 : -

▫고유 능력 : 부활

▫능력 : 마력감지(A), 마력운용(A), 강현식 사투(A), 베일의 검술(B), 열기내성(C), 독 내성(D), 냉기내성(D), …

▫스킬 : 거인의 힘(A), 마력폭발(A), 분노의 사자후(A), 상급 육체 재생(A), 마력장(A), 일도양단(A), 엔트리아의 외피(A), 웨인의 비기(A), …

"든든하네."

이번 전투로 레벨과 스텟이 제법 올랐다.

능력들도 상승했고 무엇보다도 강현의 주력 스킬이라 할 수 있는 '웨인의 비기'가 A등급에 달성했다.

웨인의 비기(A)

능력 : 활성화 시 마력을 제외한 모든 스텟 80% 증가. 시간이 지날수록 육체가 붕괴된다.

처음 스텟 30%에서 증가에서 시작한 스킬의 효과는 어느새 80% 증가가 되어 있었다.

그만큼 육체의 부담도 증가했지만, 강현은 굉장히 만족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칭호도 하나 얻었네."

정신이 없어서 확인하지 못했는데, 보스 코시크를 잡고 받은 칭호가 있었다.

강현은 곧장 상세 설명을 확인했다.

최초의 A급 보스 사냥꾼 : A등급 던전의 보스를 최초로 사냥한 사냥한 자에게 주어지는 칭호.

효과 : 순발력 +2, 던전의 메인 코어 근처에서 추가로 신체 능력이 향상된다.

조금 애매한 능력의 칭호.

'칭호는 많을수록 좋으니까.'

어차피 칭호는 중첩으로 효과를 받기에 다다익선이었다.

그렇게 강현이 한창 상태창을 들여다볼 때였다.

"강현님. 도착했습니다."

옆에서 신성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벌써 도착했어?"

"예."

"그래. 얼른 가자. 배고프다."

오늘의 회식 장소에 도착한 일행이 서둘러 차량에서 내렸다.

**

회식 메뉴는 당연히 소고기다.

"어서 오세요!"

강현은 이미 인근에서 유명한 소고기 마니아였다.

근처에 있는 거의 모든 고깃집 단골이나 마찬가지였기에, 식당 주인은 강현을 보자마자 반겼다.

"잠시만요. 불 넣어드릴게요."

잠시 후.

활활 타오르는 숯이 가운데 놓이자 일행은 서둘러 고기를 불판에 올렸다.

"어허, 고기 탄다! 조심해야지."

윤나래가 고기를 태우자 강현이 재빨리 집게를 뺏어 들었다.

"이렇게. 이렇게 하란 말이야."

"오호... 역시 잘하네요."

강현이 현란한 스킬로 고기를 굽자 윤나래가 감탄했다.

'헤헷. 바보.'

사실 윤나래도 고기를 못 굽는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경험상 이렇게 하면 강현이 직접 굽는다는 것을 알았기에 항상 고기를 못 굽는 척을 했다.

"얼른 먹어! 더 익으면 질겨."

강현이 노릇하게 구워진 고기를 각자의 접시로 날랐다.

일행은 어미 새의 먹이를 받아먹는 아기 새처럼 얌전히 고기를 받아서 먹었다.

"크흐, 이거지!"

맥주는 시원했고, 고기는 언제나처럼 환상적으로 맛있었다.

모든 것이 완벽한 순간이었으나, 하나 문제가 있었다.

"와하하하! 마셔마셔!"

"형님! 감사합니다!"

"그래그래. 짜식들아. 건배해!"

강현 일행이 들어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들어온 한 무리의 남자들.

그들은 일행과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는데, 식당이 떠나가라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대고 있었다.

"뭐하는 놈들이야?"

강현이 인상을 찌푸리며 소음이 진원지를 확인했다.

약 20명의 남자.

모두가 엄청난 덩치를 가지고 있었다.

몇몇은 능력자인지 마력이 느껴지기까지 했다.

'동네 양아치들인가?'

사실 마력이 느껴진다 해도 강현의 수준에서 보면 일반인과 딱히 다를 것이 없어 보였다.

'확실히 질이 좋은 놈들은 아닌 것 같은데.'

옷 밖으로 드러난 팔의 문신.

짧은 스포츠머리.

여러 가지를 종합해 봤을 때 뒷골목에 종사하고 있는 남자들인 것 같았다.

'어휴. 신경 쓰지 말자.'

조금 시끄럽긴 했지만, 강현은 좋게 넘어가기로 했다.

오늘은 나름 좋은 날이었으니까.

원래 식당이란 곳이 항상 시끌벅적한 곳이 아니던가.

'내가 식당 전세 낸 것도 아니고 말이야.'

강현은 최대한 화를 억누르며 '그럴 수도 있지.' 라고 생각했다.

그 순간.

"이 새끼가 어디서 형님 말씀하는데 말이야!"

남자 중 하나가 큰소리로 호통을 치며 손으로 고기를 집어 던졌다.

맞은편에 있던 덩치는 잽싸게 그 고기를 피했다.

-슈우웅

허공을 날아온 큼지막한 고기.

-철퍽

그렇게 날아온 고기는 거짓말처럼 강현의 뒤통수에 처박혔다.

"어쭈? 피해? 죽고 싶냐!?"

고기를 던진 남자는 자신이 던진 고기에 누군가 맞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하필 강현이란 것은 알지 못했고.

그것이 남자의 최대 실수였다.

굳은 얼굴로 일어난 강현이 천천히 남자들에게 걸어왔다.

남자들은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도 모른 채 여전히 저들끼리 고함을 치며 떠들어 댔다.

"어떤 새끼냐."

남자들에게 다가간 강현이 조용히 읊조렸다.

"이건 또 뭐야?"

"방금 새끼라고 했냐?"

강현을 본 남자들의 인상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형님. 혹시 강현 아닙니까?"

그때 한 남자가 강현을 알아본 것인지 조용히 속삭였다.

"강현? TV에 나오는 그 강현?"

"예. 맞는 것 같습니다."

형님이란 자도 강현이 누구인지 정도는 들어서 알고 있었다.

"지가 강현이면 강현이지. 노는데 왜 참견이야?"

하지만 동생들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하는 남자들을 보며 강현이 어금니를 꽉 깨물며 미소를 지었다.

"야. 고기 집어 던진 거 어떤 새끼냐고."

그러자 옆에 있던 퉁퉁이를 닮은 남자가 벌떡 일어났다.

"당신이 강현이면 다야? 초면에 새끼라니.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

퉁퉁이는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콰직!

강현이 퉁퉁이를 들어 올려 그대로 천장에 처박아버렸기 때문이다.

퉁퉁이는 머리가 천장에 박힌 채로 대롱대롱 흔들렸다.

자세히 보면 부들부들 다리가 떨리는 것이 죽은 것 같지는 않았다.

"마지막으로 묻는다. 어떤 새끼냐."

한순간에 퉁퉁이를 현대 미술로 만들어버린 강현.

드디어 남자들이 사태 파악을 하기 시작했다.

주위의 모든 시선이 고기를 던진 형님에게로 향했다.

인상을 찌푸린 형님은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씨... 잘못 걸렸네.'

형님은 본인이 지을 수 있는 최대한의 험악한 인상을 지으며 강현을 똑바로 노려봤다.

그도 강현이 무서웠지만, 차마 동생들 앞에서 약한 모습.

즉, 가오가 상하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고기가 날아간 건 미안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고작 그런 일로 사람을 때리고 이 지경으로 만듭니까?"

"뭐?"

"당신 유명한 능력자인데, 민간인들한테 이렇게 폭력을 휘둘러도 되냐 이 말입니다!"

형님의 말에 남자들이 동조했다.

"맞습니다!"

"야야. 얼른 영상 찍어."

"SNS에 다 폭로해야 해."

믿기 힘들지만, 요즘은 조폭이 더 경찰에 고자질도 잘하고, SNS도 굉장히 좋아한다.

영화에서 나오는 멋진 깡패의 모습은 말 그대로 영화일 뿐.

현실은 그저 양아치 집단에 가까운 것이다.

"하... 어이가 없네."

그들의 반응에 강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것들을 진짜 반 죽여야 되나...'

솔직히 강현은 남자들에게 정의구현을 실현하고, 신태길 찬스를 쓰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여러모로 귀찮은 일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 강현이 고민하던 순간,

"음?"

갑자기 땅이 흔들리며 모든 조명이 꺼졌다.

동시에 덮쳐오는 강대한 마력.

"뭐야? 무슨 일이야!?"

"불 켜! 불!"

"핸드폰으로 비춰봐!"

"스마트폰이 작동이 안 됩니다!"

한순간에 벌어진 정전 사태에 당황한 양아치들이 허둥지둥하였다.

'근처에 설마 A등급 던전이라도 터진 건가...'

그것 외에는 이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강현은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도중 돌연 미소를 지었다.

"잘됐네."

잘 생각해보니 이건 기회였다!

던전 덕분에 목격자도, 녹화 장치도 없는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다.

"때려도 증거가 안 남으면 그만이잖아? 그렇지?"

강현이 실실 웃으며 주먹을 꽉 쥐었다.

"어금니 꽉 깨물어라. 공짜 양악 시술 들어간다. 양아치 새끼들아."

강현의 단단한 주먹에 맞은 남자들의 턱이 차례대로 박살났다.

179화 각개전투(1)

179. 각개전투(1)

검은 갑옷의 언데드, 가투 아사스.

그가 검을 휘둘렀다.

-촤아아!

그 가벼운 움직임에 수십 개의 머리가 허공을 나르고, 피가 사방에 분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이놈들이 마지막인가."

"예."

이곳에는 하켄 차원에 비해 인간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처음 가투 아사스는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군대를 말살하려 했으나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놈들의 수뇌부만 처리한다.

그렇게 시작된 북한 지도부 암살.

북한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수많은 군대. 강력한 능력자.

그 어떠한 것들도 가투 아사스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오로지 파괴만을 원하는 자.

그러면서 자신의 전투력 또한 일개 사단급을 넘어선다.

이 모든 것이 합쳐지자 엄청난 시너지를 발휘했다.

불과 3일. 3일도 지나지 않아 북한의 최고 수령을 포함한 지도부 대부분이 죽었다.

"이렇게 쉬운 일을 망치다니. 요즘 쿨사들은 300년 전과 다른 건가?"

다른 세계에서도 자신보다 나이가 어린 자들이 탐탁지 않게 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았다.

"어쨌든. 정리가 끝났으니 조금 쉬어도 되겠지."

가투 아사스는 북한의 수령이 앉아 있던 의자에 천천히 몸을 뉘었다.

언데드라 육체의 피곤함은 없었지만 오랜만에 길게 전투를 벌여서인지 정신적으로 피곤했다.

"이 자리에서 살아남은 놈들을 지켜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군."

아직 북한에는 많은 군대와 능력자들이 남아 있었으나 가투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은 스스로 자멸할 것이 분명하니까.

"국왕이 죽은 왕국의 운명은 정해져 있지."

이제부터는 자신이 나서지 않아도 이 나라는 서서히 죽어갈 것이다.

자신이 할 일은 그저 조용히 무너지는 왕국을 지켜보며, 어떻게 다음 국가를 공격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다.

"오칼 올룬."

"예."

가투의 말에 로브를 뒤집어쓴 언데드, 오칼이 고개를 숙였다.

"현재 이 세계에 쿨사가 얼마나 남아 있지?"

"다섯입니다."

다섯이라는 말에 가투 아사스가 손가락을 까딱이며 의자를 두들겼다.

-똑, 똑, 똑, 똑...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 한동안 계속 까닥거리던 손이 돌연 멈췄다.

그리고 입을 여는 가투 아사스.

"그들에게 전해라. 나 가투 아사스가 명하니, 이제 본격적인 침공을 시작하라고."

**

"들어와."

문밖에서 들리는 노크 소리에 신태길이 말했다.

"무슨 일이지?"

말을 하면서도 신태길의 눈은 여전히 바쁘게 서류를 훑고 있었다.

"보고드릴 것이 있습니다."

"말해."

"최근 북한의 정세가 이상하다고 합니다."

갑작스럽게 나온 북한이라는 말에 신태길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래서?"

"상부에서는 특수 능력자 관리팀에서 움직여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여기 관련된 협조 공문입니다."

신태길이 부하가 내미는 서류를 건네받았다.

"협조 공문이라... 웃기는군."

내용은 뻔한 것이었다.

북한에서 내부에 전쟁이라도 난 것처럼 총과 미사일을 쏘고 있다는 것.

"알겠으니까 나가봐."

"예."

부하가 밖으로 나가자 신태길이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필요할 때만 이런 식으로 나온다 이건가."

던전 사태 이후 북한에서 총격이 벌어지는 것은 늘 있는 일이었다.

북한은 총과 포로 몬스터를 잡을 수 있다고 믿었으며, 실제로 그것을 행동으로 실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무언가 평소와 다른 일이 벌어진 것 같았다.

"연락이 끊어졌다라."

일반 국민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대한민국과 북한의 수뇌부는 주기적으로 연락을 취했다.

필요할 때마다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는 그런 사이.

그런데 그 연락이 완전히 끊어진 것 같았다.

상부에서는 이것에 대한 조사를 신태길에게 맡기고 싶어 했다.

신태길이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강한 무력을 지휘하고 있으며, 문제가 발생했을 때 꼬리를 자르기도 가장 쉬웠으니까.

"어떻게든 예산을 한 푼이라도 주지 않으려고 발악하던 놈들이 이제 와서 협조라."

자신에게 삿대질하며 호통을 치던 장관들을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신태길은 피식 웃으면 공문을 갈기갈기 찢었다.

-툭.

쓰레기통으로 직행하는 공문.

"그렇지 않아도 A등급 던전 때문에 머리가 아픈데, 시간만 날렸군."

그렇게 북한에 대한 것은 신태길의 머리에서 사라졌다.

**

"요즘 머리 많이 아프죠?"

며칠 만에 신태길을 만난 강현의 안부 인사였다.

신태길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예. 하필이면 던전이 생겨도 왜 그런 곳에 생겼는지."

던전은 청계산 입구의 근처에 생성됐다.

다행히 서울 중심부는 아니고 외곽이라 그리 큰 피해가 발생하지는 않은 상태.

하지만 던전의 마력이 흘러나오며 머지않아 강남까지 전자기기를 사용할 수 없을 것이다.

그때가 되면 얼마나 큰 피해가 발생할지 신태길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전자장비를 마력장치로 교체하는 건 아직인가 보죠?"

"국가기관은 대부분 교체가 끝난 상황입니다. 하지만 아직 민간기업. 그것도 대기업처럼 자금력이 강하지 못한 중소기업들은 여전히 교체율이 10%도 되지 않는 상황입니다. 일반 자영업자분들은 말할 것도 없고요."

"문제이기는 하네요."

"후우... 어쩌겠습니까. 시대의 흐름이 이런 것을. 그래도 한국은 변화에 잘 대처하고 있는 국가에 속합니다. 아마 세계에서 한 손가락에 꼽히는 수준이 아닐까 싶습니다."

"확실히 이번에 중국에 갔을 때 느낀 건데, A등급 던전 터지고 나니까 완전히 유령도시가 됐더라고요."

그에 반해 서울은 외곽인 것을 고려하더라도 여전히 던전 인근에 불이 밝혀져 있었고, 자동차까지 심심찮게 돌아다니는 상태였다.

"아무튼, 오늘 보자고 한 이유가 뭐예요? 어차피 안 들어도 뻔하겠지만."

"이유가 뭐라 생각하십니까?"

이 시국에 신태길이 자신을 보자고 한다.

그렇다면 이유는 뻔했다.

"당연히 A등급 던전 때문이겠죠."

"예. 맞습니다."

"또 무슨 부탁을 하는지 일단 들어나 봅시다."

강현이 다리를 꼬며 거만한 표정을 지었다.

"한국의 10대 길드의 길드장분들을 모실 생각입니다."

"모아서 뭘 하는데요?"

"일차적인 목표는 강현 씨께서 그분들에게 A등급 던전이 어떻게 다른가 설명하는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다 함께 노말 코어까지 공략하는 게 목표입니다. 다른 길드들에 A등급 던전에 대한 경험을 안전하게 쌓을 수 있게요."

"흐음..."

강현이 신태길의 말을 곰곰이 생각했다.

"그러니까 나보고 세상에서 자기가 제일 잘난 줄 아는 인간들 모아다가 교육하고, 노말 코어까지 다 같이 으쌰으쌰 하자고 설득하고, 직접 관광 가이드가 돼서 던전 투어도 시켜줘라?"

"예."

신태길이 제법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제대로 뻔뻔하게 나가기로 작정한 것 같았다.

"장난해요?"

"강현 씨가 아니면 누가 하겠습니까?"

"보수는요?"

모든 일에는 오고 가는 것이 있어야 하는 법이다.

강현의 생각에 자신과 한국의 10대 길드가 모이면 아무리 A등급 던전이라 해도 노말 코어는 그리 어렵지 않게 공략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굳이 공짜로 움직여줄 필요는 없다.

"원하시는 게 있습니까?"

"솔직히 말하면 요즘 너무 풍족한 생활을 하고 있어서 딱히 필요한 게 없긴 하네요."

돈. 장비. 능력.

정말 어쩌다 보니 모든 걸 갖춰가고 있었다.

새삼 모든 것이 부족했던 과거의 그 시절이 떠올랐다.

'흐음... 어쩌지.'

사실 보수가 없더라도 더 강해지기 위해서 A등급 던전에 들어갈 생각이긴 했다.

하지만 굳이 보수를 받을 수 있는 상황에서 그것을 내치고 싶지는 않았다.

'오랜만에 애들이나 챙기자.'

무언가가 떠오른 강현이 씨익 웃었다.

"그럼 이렇게 하죠."

"예. 말씀하시죠."

"이번에 청계산 입구 근처 땅값이 완전히 바닥으로 떨어졌잖아요?"

근처에 A등급 던전이 생기며 모든 전자기기가 사용 불가능하게 됐으니 당연한 이야기였다.

"거기에 우리 새로운 길드 하우스 크게 지어줘요. 당연히 전부 마정석으로, 훈련장은 물론이고 편의시설까지 싹 다."

강현의 말에 신태길이 미간을 찌푸리며 고민했다.

"또 돈이야기 하려 하죠? 공사비 나오는 거 보고 나도 좀 보탤게요. 어차피 땅값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고, 기존에 거기 건물들 재활용하면 그렇게 돈이 많이 들 것 같지도 않은데?"

고민하던 신태길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 정도는 충분히 가능할 것 같습니다."

"오케이. 하는 김에 인근에 땅도 좀 더 사둬야겠네. 언제 확장해야 할지 모르니까."

그렇게 미래 '배데스 타운'이라 불리게 되는 도시의 건설 계획이 시작됐다.

**

던관 관리 기구 본부의 11층 대회의실.

이곳은 강현에게 꽤나 추억의 깃든 장소였다.

"그때는 참 재미있었지."

이곳 엘리베이터에서 처음 화룡 길드장 박호연을 만나 신경전을 벌였고, 수호자 길드의 길드장 박세현이 괴물처럼 변하기도 했었다.

"그러고 보니 남은 건 나밖에 없구만."

화룡의 박호연은 베난디의 숲에서 강현과 내기를 벌였다가 지고, 길드원들까지 대부분 잃게 된다.

그 이후로 서서히 침몰.

여전히 길드를 이끌고 있긴 하지만 과거처럼 10대 길드에 오르내리는 명성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수호자 길드는 박세현이 괴물로 변해 죽고 난 뒤로 완전히 중소 길드로 전락해 버렸다.

길드의 핵심 인원이 강현의 배데스 길드에 흡수된 탓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길드의 간부들이 욕심에 알력 다툼을 벌이다가 결국 자멸한 것이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그런 이들을 떠올리며 강현이 조용히 턱을 쓰다듬었다.

"내가 길드장 생활을 스물여덟에 시작했다. 그때 길드장 시작한 놈들이 100명이라 치면은 지금 나만큼 사는 놈은 나 혼자뿐이야."

강현이 갑자기 영화 도박꾼의 철용 성대모사를 시작했다.

"나는 어떻게 여기까지 왔느냐? 박호연 제끼고, 박세현 보내고, 한세연 같이 뒤통수치는…."

"흠, 흠!"

그때 들려오는 기침 소리.

"으아아아! 씨발! 깜짝이야!"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니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단군의 길드장 한세연이 보였다.

"뒤통수가 뭐 어떻다고요?"

"왔으면 기척을 내요!"

괜히 민망해진 강현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쪽에 이상한 놀이에 열중해서 못 알아차린 걸 왜 제 탓으로 돌리는지 모르겠네요."

한세연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강현이 이상한 놀이에 열중하고 있었던 것은 맞지만, 한세연이 온 것을 몰랐던 이유는 그만큼 그녀가 완벽하게 기척을 숨겼기 때문이다.

A등급에 달하는 강현의 마력감지에 걸리지 않을 정도로 한세연의 움직임은 은밀했다.

"왜 이렇게 일찍 왔어요? 아직 회의까지는 시간이 남았는데."

강현의 말에 한세연이 눈을 가늘게 떴다.

"말 돌리지 말아요. 강현 씨. 방금 뒤통수치는 년이라고 했죠? 그거 제 이야기인가요?"

"아직은 년이라고 안 했거든요. 그런데 한세연 씨 이야기는 맞아요."

강현의 솔직한 대답에 한세연이 피식 웃었다.

"그나저나 왜 이렇게 일찍 왔어요? 아직 30분은 넘게 남았는데."

강현이 시계를 확인하며 말했다.

"강현 씨한테 할 말이 있어서요. 아마 여기 먼저 와계시지 않을까 해서 일찍 나왔어요."

"할 말?"

한세연과는 딱히 친한 사이도 아니고, 무언가를 같이 한 적도 없었다.

애초에 단독행동으로 외부에 비밀을 엄수하는 단군 길드에서 자신에게 할 말이 무엇일지 짐작 가는 바가 없었다.

"강현 씨. 혹시 우리가 처음 만난 날. 기억하나요?"

"대충은요."

그때 강현은 친구 김태수를 통해 단군 길드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때 제가 말했죠. 이 모든 일을 알고 있는 신적인 존재가 있고, 저희 쪽에는 그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능력자가 있다고. 기억나시나요?"

"아... 그랬나?"

솔직히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정말 중요한 내용이라 저도 말하고 나서 후회했는데, 괜한 걱정이었네요."

강현의 멍청한 반응에 한세연이 피식 웃었다.

"여하튼, 오늘은 그것에 관해 이야기해 주려고 이렇게 먼저 왔어요."

관리자.

던전, 몬스터, 기타 이 모든 일을 계획하고 실행한 존재.

여러 가지 사건으로 굉장히 친숙하게 느껴졌지만, 사실상 지금까지 딱 2번밖에 만나지 못했었다.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물어볼 게 있어요."

"뭔데요?"

"강현 씨. 관리자가 누구인지는 알고 있죠? 당연히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하지만, 이전에 튜토리얼을 5단계까지 졸업했다는 기록이 있어서 확인차 물어보는 거예요."

강현은 튜토리얼 졸업 후, 능력자 교육 학교에 입학할 때 튜토리얼을 5단계까지 통과했다 거짓말한 이력이 있었다. 세간에는 강현의 강력한 힘을 보고 8단계 졸업자라고 알려져 있었지만, 강현의 공식적인 기록은 어디까지나 5단계 통과자인 것이다.

"와, 나도 잊고 있던 걸 다 기억하네요. 한세연 씨. 스토커예요?"

"최대의 경쟁자. 라이벌인데 이 정도는 조사해야죠. 그래서, 5단계까지 통과했다는 건 당연히 거짓말이겠죠?"

"예. 거짓말이죠. 8단계까지 통과했어요. 당연히 관리자도 알고 있고."

이제 와서 굳이 숨겨야 할 필요가 없었기에 강현은 솔직하게 말했다.

"그렇군요..."

여기까지는 한세연도 모두 예상했던 바이기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중요한 것은 이제부터다.

"그런데, 왜 관리자가 강현 씨를 찾죠?"

"예?"

관리자가 자신을 찾는다는 말에 강현의 눈이 크게 떠졌다.

"말씀드린 그대로예요. 정확히는 관리자가 강현 씨의 이름을 불렀어요. 도대체 이유가 뭘까요?"

180화 각개전투(2)

180. 각개전투(2)

"말씀드린 그대로예요. 정확히는 관리자가 강현 씨의 이름을 불렀어요. 도대체 이유가 뭘까요?"

한세연의 말에 강현이 눈을 크게 떴다.

"내 이름을 불렀다고요?"

"네. 관리자와의 대화라는 게 일반적인 의사소통과는 조금 달라서 이해하기 힘들긴 하지만... 확실히 강현 씨의 이름은 들었어요."

"하아... 그 양반이 또 무슨 일이래."

강현이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을 본 한세연이 눈을 빛냈다.

"관리자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 같은 반응이네요."

"뭐, 잘 안다고 말하기는 그렇고. 그냥 일이 좀 있었어요. 아무튼, 중요한 건 이게 아니라 그 양반이 내 이름을 말했다는 거잖아요?"

"그렇죠."

강현이 자세한 이야기를 꺼리는 듯하자 한세연도 더 캐묻지 않았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다른 이야기도 많이 했는데, 너무 단편적인 것들이라 무얼 말하는지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어요."

"뭐라 했는데요?"

"연결. 위기. 아곤…."

한세연이 말을 할 때였다.

회의실에 문이 열리며 다른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한세연은 눈치를 보며 입을 다물더니 강현의 곁을 지나치며 조용히 읊조렸다.

"남은 이야기는 다음에 하죠."

**

회의실에 모인 이들은 30명 정도로 제법 많았다.

강현은 자신이 예상한 것보다 많은 사람이 모이자 신태길을 바라봤다.

"10대 길드만 온다면서요?"

"최대한 많은 길드가 경험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좀 더 모셨습니다. 그래도 10대 길드 중에 공석도 있는 상태라, 결과적으로 17개의 길드가 참여하기로 했습니다."

신태길의 설명에 강현이 인상을 찌푸렸다.

"미리미리 좀 말해주지."

"저는 분명 말했습니다. 그런데 강현 씨가 상관없으니 알아서 하라고 손을 휘저으셨죠."

"아... 그랬나? 하하."

괜히 민망해진 강현이 어색하게 웃었다.

"다 모인 것 같군요."

회의실에 가득 들어찬 사람을 보며 신태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마이크를 툭툭 두드리며 이목을 모았다.

"아. 지금부터 한국 최초 A등급 던전 '다키란의 미로'에 대한 설명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신태길의 말에 회의실이 조용해지며 사람들의 눈이 모였다.

"사전에 말씀드렸듯이 이번 공략은 A등급 던전의 클리어 경험이 있는 강현 씨를 중심으로 이뤄질 겁니다. 던전의 완전한 공략보다는 어디까지나 안전하게 경험을 쌓는 것에 중점을 두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말을 끝낸 신태길이 강현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아아. 배데스 길드의 길드장. 강현입니다. 반갑습니다."

박수 소리는 없었다.

무거운 침묵.

한국 최고 길드의 길드장들이 보내는 따가운 시선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긴말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이제 강현에게 이런 일은 일상이나 다름없었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강현이 말을 이었다.

"이번 공략에 대장은 나고, 내가 원하는 대로 공략할 겁니다. 불만 있으면 지금 말하십쇼."

예고에 없던 강현의 폭탄 발언.

신태길이 눈을 부릅뜨고는 강현을 노려봤다.

마치 '지금 이게 무슨 짓입니까!?' 라고 눈으로 외치는듯했다.

'저 양반이 당황하는 건 오랜만에 보내. 크큭.'

피식 웃은 강현은 찡긋- 윙크를 해주고는 다시 앞을 바라봤다.

살벌한 표정을 하고 있는 길드장들이 찢어 죽일 기세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귀찮으니 그냥 편하게 말합니다. 다들 자기 동네에서 한가락 하는 대단한 인물들인 건 알겠는데, A등급 던전은 차원이 달라요. 괜히 혼자 할 수 있다고 나대다가 똥오줌 지리면서 후회하지 말고 그냥 내 말에 따르게 좋다. 이 말입니다. 알았죠?"

알았을 리가 없다.

몇몇 길드장은 더 이상 참기 힘들다는 듯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해지고 있었다.

"자, 그래도 내가 너무 독단적으로 정해버리는 건 말이 안 되니까. 당신들한테도 선택지를 두 개 줍니다. 하나.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난다. 둘. 꼽으면 나랑 대장 자리 놓고 한판 뜬다."

강현의 입에 진한 미소가 걸렸다.

"붙어서 이기면 주지 스님 자리 줄 테니까 그때 가서 마음대로 하면 됩니다. 여기까지. 질문 있어요?"

정적이 내려앉았다.

길드장들은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고민했다.

기선 제압을 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왜?

아무도 나서지 않나?

이대로 강현을 따라야 하나?

모두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혼자서 강현에게 덤비기에는 두려웠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한세연에게 시선이 몰렸다.

여기서 일대일로 강현에게 비견된다고 평가받는 것은 그녀가 유일했기 때문이다.

한세연도 그런 기색을 알아차렸는지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봤다.

"저는 딱히 생각이 없습니다. 다들 알아서 하시길."

그리고는 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정면을 바라봤다.

그러자 다음으로 시선을 향한 것은 불사 길드의 길드장 한명도였다.

불사 길드는 초창기부터 단군에 이어 국내 길드 2위 자리를 굳건히 지킨 강한 길드였다.

지금은 비록 배데스에게 2위를 빼앗겼지만, 여전히 3위에 기록되며 4위 길드보다 큰 차이로 앞서고 있다고 평가받았다.

"다들 왜 나를 쳐다봐? 알아서 해. 나는 저 친구가 하자는 대로 할 거니까."

하지만 한명도는 과거 C등급 던전 '베난디의 숲' 공략 당시부터 강현에게 호감이 있던 사람이었다.

게다가 사리 분별과 계산이 정확했기에 여기서는 강현의 말을 따르는 것이 좋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아무도 없으면 이렇게 진행하는 거로 합니다. 나중에 딴말하면 안 돼요."

강현의 말에 길드장들이 조급해졌다.

이대로면 강현이 모든 권력을 쥐게 된다.

여기 모인 모두가 자신의 길드, 혹은 더 나아가 지역에서 왕처럼 군림하는 능력자.

이렇게 패권을 내려놓는 것은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그것에는 한세연, 한명도와 달리 강현은 급부상한 신예 느낌에, 워낙 가벼운 분위기를 하고 있어 묘하게 깔보는 마음을 가지고 있던 탓도 있었다.

"이건 말도 안 됩니다."

결국, 참지 못한 한 남자가 손을 들었다.

"뭐가 말이 안 되는데요?"

"던전 공략의 대장을 단순 무력으로 정하다니. 말이 됩니까? 그것도 당신이 말한 것처럼 지금까지와 비교할 수도 없는 위험한 A등급 던전을 말이죠."

남자의 말에 강현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요?"

"공략대의 대장은 단순 무력보다는, 지력이 중요하다 이겁니다. 전략, 전술, 던전과 공략대에 대한 이해, 장악력, 카리스마. 이런 것들이야말로 공략대의 대장이 갖춰야 할 덕목이다. 이겁니다."

"뭔 말인지는 알겠으니까. 요점만 말해요. 요점만."

강현의 말에 남자가 주위를 둘러봤다.

"여기 모인 사람들은 대부분 서로가 누군지 알고 있을 겁니다."

전국에서 최고로 평가받는 길드의 길드들이 모였으니, 다들 이름과 얼굴 정도는 아는 사이였다.

"그러니 투표로 결정합시다. 그렇게 하면 최소한 가장 많은 사람에게 신뢰받고 있는 사람이 대장이 될 수 있습니다."

"싫은데."

"뭐요!? 지금 그렇게 떼를 쓸 때가 아닙니다! 그러고도 당신이…."

"아아, 됐고. 하나.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난다. 벌써 잊었나?"

강현의 장난스러운 말에 남자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강현. 당신이 딱히 머리 쓰는 일에 능하지 못하다는 건 이미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입니다. 언제까지 그렇게 막무가내로 나갈 수 있을 것 같습니까? A등급 던전은 국가의 안전과 직결되는 문제인데, 이 일이 밖으로 나갔을 때 반발이 없을 거라 장담하냐 이 말입니다."

"거 말 존나 많네. 길드장은 아가리로 해 먹었나."

강현이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그리고 뭐? 내가 머리 쓰는 일에 능하지 않아?"

강현이 뒤로 돌아 벽을 향해 섰다.

그리고는 전력으로 이마를 벽에 들이받았다.

-콰아아앙!

단숨에 두꺼운 콘크리트 벽이 박살나며 사람이 통과할 만한 거대한 구멍이 뚫렸다.

"나 머리 잘 쓰는데?"

**

폭풍 같았던 회의가 끝이 났다.

결국 강현은 공략대의 대장이 되었고, 그것에 불만은 가진 길드 6개가 빠져나갔다.

그렇다고 해도 노말 코어까지 공략하는 데는 차고 넘치는 전력이었기에 강현은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왜 그러셨습니까?"

하지만 여기 세상 모든 짐을 짊어진 것처럼 피곤함에 찌들어있는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뭐가요?"

강현의 반문에 신태길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까?"

"신태길 씨. 들어봐요."

"예. 듣고 있습니다."

"오늘 모인 사람들 전부다 대장님대장님 하면서 떠받드는데 익숙해진 놈들이라고요. 내가 이렇게 안 했으면, 나중에 던전 공략 갔을 때 분명 개판 됐다니까요? 아니 던전 가기도 전에 서로 대장질하겠다고 난리 쳤을걸요? 안 봐도 비디오지 뭐."

"확실한 게 아니지 않습니까..."

"100% 확실해요. 내가 그런 꼴을 한두 번 본 게 아니라니까요. 이렇게 초반부터 기선 제압을 해서 휘어잡아 놔야 그나마 말을 들을까 말까라고요."

이러나저러나 이미 벌어진 일이다.

"후우... 알겠습니다."

이번 던전 공략에 관해서는 강현에게 모든 것을 위임하기로 결정했기에 신태길은 더 이상 이것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기로 했다.

"뭐, 말은 이렇게 했어도 내가 던전에서 막 지휘를 하고 그런 건 아니에요. 공략은 한세연 씨나 한명도 였나? 그 사람들한테 맡기려고요."

"예?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렇게까지 대장을 한다고 난리를 쳐놓고 지휘권을 넘긴다는 말에 신태길이 당황했다.

"내가 던전 공략 경험은 많아도, 많은 사람을 이끈 경험은 딱히 없어서요. 던전 공략도 일반적인 공략이라 하기도 좀 그렇고... 아무튼, 지휘에는 딱히 능력도 재능도 없으니까 앞에서 몸이나 대면서 실질적인 머리한테 힘만 실어준다. 이거죠."

"강현 씨... 정말 다시 봤습니다."

강현의 대답에 신태길이 감탄했다.

"제가 지금까지 강현 씨에 대해 오해하고 있었군요."

"뭘 또 그렇게까지... 이 정도는 기본이죠. 하하!"

신태길의 칭찬에 머쓱해진 강현이 괜히 큰 소리로 웃었다.

"그래서. 이 벽은 어떡하실 겁니까?"

"예? 갑자기 무슨 벽이요?"

뜬금없는 벽 이야기에 강현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시치미 떼지 마시죠. 이 건물 3년도 되지 않은 신축입니다. 그런데 강현 씨가 와서 이 대회의실만 두 번이 박살 났군요."

"사소한 건 넘어갑시다. 이거 뭐 얼마나 한다고."

"하... 오늘 내일, 대회의실 사용 예약 건만 3건 인데..."

"우리 길드 회의실 빌려줄 테니까 쓰라 해요."

"됐습니다!"

신태길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싫으면 싫은 거지 왜 화를 내고 그러나."

괜히 신태길의 신경을 더 긁는 강현이었다.

**

며칠 후.

강현은 이른 아침부터 길드 사무실에 출근했다.

조금 뒤, 던전 공략이 시작되면 한동안 일행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강현 님. 정말 혼자 가십니까?"

"어. 던전 이름이 미로인 것도 그렇고, 사전 조사대 말을 들었을 때 좀 길어질 수 있겠다 싶더라고."

강현은 이번 던전 공략에 혼자서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A등급 던전에 대한 위험도 때문인 것도 있었지만, 너무 오랜 시간 길드의 핵심 간부들이 공석인 것도 문제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잘 갔다 와요."

누워서 스마트폰 게임을 하던 안유성이 건성으로 손을 흔들었다.

"웬일로 네가 따라나선다는 말을 안 하냐?"

"글쎄요... 이번에는 왠지 밖에 있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안유성의 말은 마치 던전 안에 들어가면 큰 화를 입을 것이다. 라는 것처럼 들렸다.

"이게 공략 초장부터 초치네. 쯧."

혀를 찬 강현이 올리엔을 바라봤다.

그러자 올리엔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강현. 잘 다녀와요."

"올리엔도 애들이랑 잘 놀고 있어. 너무 안에만 있지 말고, 한 번씩 나가서 소고기도 사 먹고."

"네. 걱정하지 말아요. 여기 길드원분들이 얼마나 잘 챙겨주는데요."

"그래. 그럼 간다."

강현은 가볍게 손을 흔들고는 던전이 있는 곳을 향해 떠났다.

그때까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강현이 던전에 간 사이, 현실에서 어떤 사건이 터질지는.

181화 각개전투(3)

181. 각개전투(3)

A등급 던전 '다키란의 미로'

이번 던전 공략에는 강현을 제외하고 총 11개의 길드에서 2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여했다.

모두가 전국 최상위에 위치한 길드였기에 더 많은 숫자를 동원할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은 것은 던전의 특성이었기 때문이다.

'미로'

좁은 공간에서 여러 갈래의 복잡한 길을 오가야 한다.

너무 많은 인원이 들어가는 것은 득보다 실이 클 수 있다는 판단에 최대한 적정 인원을 맞추었다.

"듣던 대로네."

던전에 들어서자마자 강현이 내뱉은 감상이었다.

다섯 갈래로 뚫려있는 통로.

말 그대로 미로에 걸맞은 시작이라 할 수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왔으면 조금 당황했을 수도 있겠어."

만약 아무런 정보 없이 들어왔다면 조금은 당황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전 조사팀에서 던전에 대한 정보를 어느 정도 알려준 상태라 당황하지 않을 수 있었다.

"전부 주목해요. 주목."

강현이 목청을 높이자 200명이 넘는 능력자들의 시선이 모였다.

"시작 통로 5개니. 미리 말한 대로 5팀으로 나눠서 진입할 겁니다. 여기까지 불만 있는 사람 없죠?"

강현이 말한 것은 공략 전 회의를 통해 협의를 끝마친 내용이었다.

사전에 정한 5개의 팀을 이끄는 팀장은 다음과 같다.

1팀 – 배데스 길드 강현

2팀 – 단군 길드 한세연

3팀 – 불사 길드 한명도

4팀 – 블랙나이츠 이청운

5팀 – 신사 길드 임현성

여기까지는 순조로웠으나 문제는 다음이다.

"아무도 이리로 안 오네."

어느 팀에 들어갈 것인지는 길드의 자율에 맡겼는데, 강현이 있는 1팀으로 온다는 길드가 단 하나뿐이었던 것이다.

'코리안메이지'라는 이름을 가진 길드로 총 20명의 능력자를 데리고 강현이 있는 1팀에 합류했다.

그렇게 나눠진 공략팀은 다음과 같다.

1팀의 공략 인원은 총 21명.

2팀은 단군 홀로 공략할 것이라 미리 밝혔기에 단군 길드원 15명.

그리고 3팀 4팀 5팀에 각각 40명 50명 80명 정도가 들어간 상황이었다.

'이런 식으로 나온다 이거지?'

이것의 의미는 분명했다.

강현이 독선적으로 행동하는 것에 대해 시위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필연적으로 강현은 팀장 자리를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고, 결과적으로 다른 길드의 길드장이 새로운 팀장이 될 것이다. 라는 게 저들의 시나리오일 것이다.

"뭐, 마음대로 하라지."

머리를 긁적이던 강현이 눈앞의 여성을 바라봤다.

머리를 파란색으로 염색하고 화려한 로브를 입은 여성.

왕따가 된 분위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길드를 이끌고 온 그녀는 무심하게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저기요. 선유라 씨라 했나?"

"네?"

강현의 말에 푸른 머리칼의 여성, 선유라가 고개를 돌렸다.

"왜 이쪽으로 왔어요?"

선유라는 코리안메이지 길드의 길드장이었다.

20명의 능력자가 이곳에 온 것은 온전히 그녀의 판단 때문이라 할 수 있었다.

"강현 씨가 공략 경험이 있으니 안전하지 않을까 해서요. 다른 쪽에 가봤자 환영받지 못할 것 같기도 하고."

"환영받지 못한다고요?"

"그게... 저희 길드는 미국의 워리어즈 길드의 지원을 받고 있거든요. 강현 씨가 아실지 모르지만 지금 대부분의 길드가 워리어즈 길드의 한국 상륙을 경계하는 분위기라서요."

마치 다른 사람의 일을 이야기하듯 편하게 말하는 선유라.

그녀의 태평한 태도에 강현이 피식 웃었다.

"워리어즈면 에든이 길드장으로 있는 거기죠? 미국에서 잘나가는."

"네. 맞아요."

이전에 에든이 한국 쪽으로 길드를 확장할 것이라고 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선유라의 길드인 것 같았다.

'이런 우연이 다 있네.'

괜히 에든이 생각이 나 반가운 마음이 들었지만, 그것도 잠시.

강현은 이들을 데리고 무사히 노말 코어까지 갈 자신이 없었다.

"차라리 선유라 씨가 팀장 맡을래요?"

"네?"

"그러면 저기 있는 놈들도 좀 오지 않을까 해서."

갑작스러운 제안이었지만 선유라는 진지하게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떨어지는 입술.

"아마 소용없을 거예요. 제 길드가 여기서 가장 영향력이 약한 곳이기도 하고, 이미 여러 가지 의미로 찍힌 상황이잖아요."

"그런가?"

"네. 제가 팀장을 맡아도 별로 달라지는 건 없을 거예요. 하하."

선유라는 여전히 남일을 말하듯 태평한 모습이었다.

그 대책 없는 긍정주의에 어쩐지 에든이 떠오르는 강현이었다.

"해맑은 건 좋은데. 그러다 죽는다니까요. 그러면 그냥 지금이라도 다른 쪽으로 옮겨요. 눈칫밥 먹는 게 죽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으음..."

"듣자 하니 길드원 대부분이 마법 쪽이라면서요? 저쪽 불사의 한명도 씨가 있는 3팀에 말해줄 테니까 그리로 들어가요."

"네..."

잠시 고민하던 선유라는 강현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유일하게 남아 있던 선유라 길드마저 떠나고, 강현은 완전히 홀로 남았다.

그러자 다른 능력자들이 강현이 있는 방향을 은근히 바라봤다.

그 시선이 마치, 어서 팀장 자리를 내려놓고 꺼져! 라고 말하는 듯해서 강현은 웃음이 나왔다.

'차라리 잘 됐어.'

보통 사람들 같으면 낙담하고, 팀장의 자리를 넘겼겠지만, 강현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다.

'다시 한번 극한까지 달려 보자.'

강현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정말 죽을 만큼 극한의 상황에 몰려야 했다.

이것은 분명 그리 달가운 상황은 아니다.

그럼에도 강현은 이 위기를 기회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자, 그럼 공략 시작합시다. 다들 코어에서 봐요."

강현이 손을 흔들며 가장 먼저 미로로 들어가려 하자 도리어 능력자들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특히나 가장 많은 사람이 모여있었지만, 평균적인 전력은 가장 약한 5팀.

그곳에 모여있던 길드장들이 강하게 반발했다.

"강현 씨! 뭐하는 겁니까?"

자신을 붙잡는 목소리에 강현이 돌아봤다.

"또 왜요."

"지금 당신 혼자서 저기로 들어간다는 겁니까!?"

"우리 팀에 아무도 안 들어오려 하니 혼자 들어가야죠."

강현의 말에 말을 한 남자가 기가 찬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오만이 아주 하늘을 찌르는군! 그렇게까지 팀장 자리에 탐을 내 줄이야. 하지만 목숨 아까운 줄 아셔야 합니다."

"맞아. 아무리 강현이라지만 너무 자만하는 거 아냐?"

"팀장 자리 내려놓고 다 같이 공략하면 될 것을... 끝까지 고집을 부리는군."

능력자들의 반발에 강현이 손을 들었다.

"오케이. 거기까지."

고개를 끄덕이던 강현이 필시언의 해머를 꺼내 들었다.

그러면서 천천히 몸을 푸는 강현.

"전에 이야기했지? 꼽으면 덤비라고. 이기면 공략대 대장 자리 준다니까?"

"..."

"그게 아니면 닥치고 말 들어. 그리고 이깟 팀장 하면 뭐가 그렇게 떨어진다고 여기에 집착을 해? 나는 이 던전에 순수하게 레벨업 하러 온 거고, 잿밥에는 관심 없으니까 너희들끼리 알아서 나눠 먹든 갈라 먹든 다 해 먹어 쳐드시라고. 알겠어?"

"당신 정말 계속 그런 식으로…!"

한 능력자가 목청을 높일 때였다.

"거기까지만 하시죠."

지금까지 이야기를 듣고 있던 한세연이 돌연 검을 빼 들었다.

그러자 모두 동시에 약속이라도 한 듯 무기를 꺼내 드는 단군 길드원들.

"던전에 들어와서 이게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군요. 어쨌거나 공략대의 대장은 저기 있는 강현 씨고, 저 남자는 여러분의 권한과 자유를 최대한 보장해 줬습니다. 그런데 뭐가 더 필요한가요?"

모두의 예상을 깨고 한세연이 강현 편을 들자 5팀의 능력자들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강현이랑 한세연이랑 사이가 나쁜 게 아니었어?'

5팀의 능력자들은 애초에 한세연을 끌어들여 강현을 내칠 생각을 하고 있다.

하지만 한세연이 보인 예상 밖의 태도로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크흠. 맞아. 던전 공략 도중 이렇게 다투는 것도 좋지 않지."

"각자 팀을 나눠서 하는 건데 알아서 하면 되는 거 아니겠어?"

그렇게 5팀의 능력자들이 물러나자 한세연이 몰래 강현을 보며 씨익 웃었다.

그 모습이 묘하게 건방져 보여서 강현의 입이 툭 튀어나왔다.

"누가 도와달라 했나. 쯧."

괜히 불평한 강현이 그대로 미로 안으로 들어갔다.

**

"난리도 아니군..."

신태길이 보고서를 들여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중국, 호주 브라질, 폴란드, 이집트까지... 정말 이러다가 세계가 멸망하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야."

방금 말한 5개 국가는 이번에 언데드들이 들고일어난 곳들이었다.

아직 보고서에는 적혀있지 않지만, 신태길은 저들이 강현의 말한 '쿨사'라고 존재들이 아닐까 하고 짐작했다.

한국에서 일어난 일은 다행히 제대로 준비가 되기 전에 강현이 발견해서 해결했고, 미국은 제법 큰 타격을 입었지만, 결과적으로는 강현이 쿨사를 처리함으로써 끝이 났다.

공교롭게도 지금까지 나타난 쿨사 둘이 모두 강현에게 당한 것이다.

"으음..."

다른 국가도 어느 정도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어서, 이번 사건이 터지자마자 강현의 지원을 요청했었다.

하지만 강현은 현재 A등급 던전을 공략하고 있는 상황.

던전 안에 있는 사람을 불러올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강현이 던전 밖에 있었다고 해도 그 요청에 따랐을지는 의문이다.

'이제 강현 씨는 완전히 통제에서 벗어났다고 봐야 하니까.'

지금까지는 함께한 의리 때문인지 강현이 자신을 따라주고 있으나 언제까지 이런 상황이 유지될지는 모르는 일이다.

신태길도 이제 강현에 대한 의존도를 낮춰야 할 때가 온 것이다.

"게다가 북한의 정세도 심상치 않으니... 역시 거절해야겠지."

한승훈 대통령에게 이번에 온 파견 요청은 전부 거절해야 한다는 내용의 문서를 작성하던 도중이었다.

-똑똑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야?"

"보고드릴 게 있습니다."

신태길이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북한에서 지원 요청을 해왔습니다."

"뭐? 분명 지도부와 연결이 끊어졌다고 들었는데."

"예. 이번에 연락 온 곳은 북한의 수령이 아닌, 장성 중 하나입니다."

"그런가..."

생각보다 북한 내부의 상황이 심각한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이야기가 왜 우리 쪽으로 넘어온 거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신태길에게 직접적으로 그런 보고가 올 이유는 없었다.

신태길은 능력자에 관한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지 외교관이나 군인이 아니었다.

"그게.. 북한에서 군대가 아닌 능력자 파견을 요청했습니다."

"능력자를?"

"검은 갑옷을 입은 정체불명의 능력자와 그를 따르는 단체가 북한 전체를 들쑤시는 상황이라고 합니다. 북한에서는 그 정체불명의 능력자를 처리할 사람을 한국에서 파견해 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하아... 위쪽에서는 이미 승낙했나 보군."

신태길의 말에 부하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역겨운 놈들.'

언제나 윗선에는 신태길과 능력자를 제멋대로 휘두르고 싶어 한다.

능력자들을 옹호하는 대통령이 힘을 점점 잃고 있는 지금.

그들의 이런 행동은 갈수록 노골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알겠으니 나가봐."

"예."

부하가 보고서를 내려놓고 밖으로 나갔다.

신태길은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한동안 보고서를 멍하니 바라봤다.

"이러나저러나 강현 씨의 빈자리가 크긴 하군."

아무래도 이번에 강현이 던전 공략을 위해 떠나있는 시간은 아주 길게 느껴질 것 같았다.

182화 각개전투(4)

182. 각개전투(4)

대한민국 능력자 연합.

대한민국의 능력자라면 누구나 가입과 탈퇴가 자유로운 곳이다.

초창기의 능력자 연합은 능력자의 자유와 권리를 위해 힘쓰는 비영리 단체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무력의 필요성을 절감한 최동우는 능력자 연합 내 직속 무력 단체를 만들기에 이른다.

즉, 대한민국에서 가장 거대한 길드가 탄생한 것이다.

"내가 북한 땅을 밟는 날이 올 줄이야."

그런 능력자 연합의 최고 정예 300명.

그리고 그들을 이끄는 연합장 최동우가 휴전선을 넘어 낯선 북한 땅을 걷고 있었다.

'잘하는 짓인지 모르겠군.'

최동우가 이 낯선 땅에 찾아온 것은 신태길의 부탁 때문이었다.

-10대 길드 대부분이 A등급 던전을 공략하는 중입니다. 최동우 씨가 아니면 갈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최동우는 처음부터 공익을 위해 움직인 사람이다.

하지만 아직 대한민국도 안전하지 않은 상황에서 같은 민족이라 해도 타국, 아니 적국이나 마찬가지인 북한을 지원하는 것이 맞는가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윗선에서는 이미 능력자를 파견하기로 확정을 내린 상태입니다. 최동우 씨가 가지 않는다면 어떤 식으로든 다른 누군가가 갈 겁니다.

-으음...

-하지만 그렇게 간 능력자들은 분명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고 당할 게 뻔합니다. 허무하게 목숨을 잃게 될 거라는 말입니다.

-그게 무슨 뜻인가?

-그만큼 현재 북한을 휘젓고 있는 적이 강하다는 뜻입니다. 어지간한 능력자는 손조차 쓸 수 없을 만큼.

결국, 최동우는 승낙했고 이렇게 북한 땅에 와 있었다.

자신을 따라주는 고마운 정예 연합원 300명과 함께.

"잘 오셨습니다."

목적지에 도착하자 제법 나이가 있어 보이는 군인이 웃으며 최동우를 반겼다.

"반갑습니다."

최동우는 손을 내밀었다.

"대한민국 능력자 연합의 연합장 최동우입니다."

"조선인민군 제567대련합부대 상장 안창복입니다."

**

조선인민군.

즉, 북한군의 군 체계는 한국과는 많은 부분이 다르다.

이는 한국은 미군의 편제를 따랐고, 북한은 구소련군의 편제를 따르면서 생긴 차이점이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최상급 제대가 군단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간단하게 설명하면 '군단장이 모든 것을 지휘한다'는 뜻이다.

물론 북한에도 총참모부가 있지만, 현재 평양과는 완전히 연락이 끊어진 상태.

"그래서 더욱 상황이 복잡하게 돼버렸소."

북한의 최고 지도자.

모든 군견의 목줄을 쥐고 있던 그가 죽자, 구속에서 풀린 사나운 투기견들이 서로 으르렁대는 것이 현 상황이었다.

"서로 눈치만 보고 있소. 평양을 향해 진군하려 해도 뒤가 무서워서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있지."

상장(☆☆☆) 안창복은 안타까운 마음에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지긋이 나이가 들어 머리가 희끗희끗해지고 주름진 그의 얼굴.

그는 근래 벌어진 사건들 때문인지 잠조차 제대로 자지 못한 것 같았다.

"나는 이제 조국에서 반역자로 낙인찍히겠지만, 물러서지 않을 생각이요. 이대로 내버려 두면 조국은 멸망하고 모든 인민들이 죽을 텐데... 도저히 그 꼴을 두고 볼 수는 없었소. 그래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같은 민족인 남조선에 도움을 요청한 거요."

"예..."

제 2군단. 대외적으로는 567대련합부대라 불리는 안창복의 부대는 황해북도 평산군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는 개성공단 바로 위쪽으로 북한에서 가장 한국과 가까운 군단 중 하나였다.

덕분에 최동우는 빠르게 이동해 이곳에 지원을 올 수 있었다.

"대충 어떤 상황인지는 알겠습니다. 군벌들이 서로를 견제하는 상황에서 각개격파를 당하고 있다는 것이군요."

"정확하오."

"적들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고 싶습니다."

최동우의 말에 안창복이 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말하면... 미안하지만 나도 그다지 아는 것이 없소."

"그게 무슨 말입니까?"

"워낙 신출귀몰한 놈들이고 놈들을 만난 사람은 모조리 죽었기 때문이요. 듣기로는 검은 갑옷을 입은 칼을 쓰는 무사가 있다 하는데... 인간이 아니라 악마 같은 놈이라는 것밖에는 아는 게 없소..."

"으음... 군대의 힘으로도 어쩔 수 없는 적입니까?"

최동우의 물음에 안창복이 피식 웃었다.

"내 군단에 병사들이 얼마나 있는지 아시오?"

"모릅니다."

"병사가 7만 명에 달하고 전차와 포가 1,000대가 넘소. 북조선 전역에 이런 군단들이 산재하고 있지. 하지만 놈들에게는 머릿수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소."

"어째서입니까?"

"놈들은 그 어떤 포위진도 거침없이 뚫어버리고 지휘관들의 목을 떼갔으니까. 병사가 많으면 뭘 하겠소? 머리가 없으면 모두 오합지졸인 것을."

"하지만 이곳에도 능력자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들과 힘을 합쳐도 무리였습니까?"

최동우의 물음에 안창복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능력자... 초인들을 말하는 거구만."

"예."

"그래. 초인들은 강하지... 혼자서 수십 수백 명의 병사를 상대하니 말이오. 하지만 그놈들 앞에서는 초인도 그저 어린 애새끼나 다름없었다 하오. 우리 수령 동지를 지키는 초인들이 북조선 최고들인데 이렇게 당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소?"

안창복의 말이 맞았다.

정말 북한의 능력자들이 적을 감당할 수 있었다면, 애초에 대한민국에 능력자를 파견해 달라고 요청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그전에 북한의 지도자가 그리 허무하게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흐음..."

최동우는 이 사태를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생각하자 벌써 머리가 지끈거렸다.

'적도 강하지만 북한 내에서도 견제하거나 공격하는 세력이 있을 테고... 여러 가지로 골치 아픈 점이 많아.'

자칫하면 적과 싸우는 도중 뒤통수에서 총알이 날아올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최동우의 고민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안창복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염치없지만 부탁하겠소. 놈들을 처치하지 못한다면 이 나라는 완전히 무너질 것이고, 그러면 이 땅은 사람이 아닌 괴수들의 땅이 될 거요. 남조선에서도 그런 상황을 바라지는 않을 것이라 믿소."

"알겠습니다."

최동우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안창복 상장과의 만남 이후 최동우가 이동한 곳은 황해북도의 사리원시였다.

사리원시는 안창복 상장이 있던 평산군과 같은 황해북도지만 조금 더 평양에 인접해 있었다.

-어제 제 380대련합 부대 군단장 이상배 중장과의 연락이 끊어졌소.

-당한 겁니까?

-아마 그런 것 같소. 380부대는 평양이 위기에 처했을 때 가장 먼저 달려간 부대였으니까. 현재 남은 병사 중 내 휘하로 편입한 부대에게 연락을 취했으니 그들에게 가시오. 동무를 도와줄 것이오.

그렇게 도착한 사리원시는 평산군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매캐하게 감도는 화약 냄새.

곳곳에서 들려오는 신음소리.

저 멀리서는 미약한 폭발음이 간혹 들려오기도 했다.

이 사태가 정말 전쟁으로 번졌다는 것을 실감하게 해주었다.

최동우 또한 지난 2년간 생사를 넘나드는 전투를 벌여왔으나, 눈앞에서 보는 현대의 전쟁이라는 것은 조금 다른 종류의 중압감을 주었다.

"반갑습니다. 제 380대련합부대 제 5보병사단 부사단장. 대좌 문규광입니다."

"능력자 연합의 연합장. 최동우입니다."

최동우를 맞이한 것은 마른 체격의 대좌(대령)이었다.

"군단장님께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이렇게 발 벗고 나서서 도움을 줘서 감사합니다."

문규광이 호감 어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여기는 상황이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최동우의 말에 문규광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현재 사단장께서는 군단장님과 함께 연락이 두절된 상태입니다. 해서 부사단장인 제가 임시로 부대를 지휘하고 있습니다."

"이곳에 군대 말고 능력자, 그러니까 초인은 없습니까?"

"우리 북조선은 지금까지 따로 초인 부대를 육성해서 운용해 왔습니다. 초인부대에 들어가지 않은 초인은 성장이 법적으로 금지돼 있습니다."

쉽게 말해 국가의 통제하에 모든 능력자가 성장을 해왔다는 뜻이었다.

"그 초인부대는 어떻게 됐습니까?"

"전멸했습니다."

능력자가 모두 죽었다는 문규광의 말에 최동우가 당황했다.

"전부 죽었다는 뜻입니까..?"

"적어도 우리 사단에 있던 초인 부대는 모두 전멸했습니다. 다른 사단에는 아직 남은 곳이 있다고는 하는데... 연락이 끊어진 부대들이 워낙 많아서 확실한 건 없습니다."

"후우... 알겠습니다."

솔직히, 도대체 어떻게 돼먹은 나라인가? 라는 생각부터 들었다.

능력자를 이렇게 억압해 왔다면 지금까지 던전은 어떻게 클리어한 것일까?

최동우의 의문은 금세 해결됐다.

-애애애앵~!

갑자기 부대 전체 사이렌이 울렸다.

"무슨 일입니까?"

"괴수들입니다!"

문규광 대좌는 서둘러 부하들을 지휘했다.

곧이어 곳곳에서 총성이 들리고, 폭발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캬아아아아!"

-투두두두

밀려드는 몬스터와 그것들을 총화기로 제압하는 군인들.

최동우는 이곳에 오는 길에 쓰레기 더미들로 세워진 방벽을 봤는데, 이제야 그 용도를 알 수 있었다.

그것들은 모두 조금이나마 몬스터들의 진군을 늦추기 위해 세운 벽인 것이다.

"크아악!"

밀려드는 몬스터의 군세가 심상치 않았다.

전투가 벌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벌써 십여 명의 병사가 목숨을 잃었다.

"저도 돕겠습니다."

최동우의 말에 문규광 대좌가 고개를 저었다.

"돕는다면 저 총탄 속으로 들어가야 할 텐데 안될 말입니다. 남조선 동무들은 따로 할 일이 있으니 힘을 아끼는 게 좋을 겁니다."

"아닙니다. 이곳에서 병사들의 피해가 없도록 도울 수 있습니다."

"으음..."

고민하던 문규광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래도 항상 아군의 오인사격을 조심해야 합니다. 초인들도 머리에 바람구멍이 나면 죽는 것은 마찬가지니."

문규광의 걱정을 뒤로하고, 최동우는 연합원들에게 다가갔다.

"포메이션 D를 전개한다. 다들 낯선 곳이니만큼 더 신중해야 돼!"

"예!"

"좋아. 움직여!"

최동우의 말에 300명의 능력자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실드 전개!"

"화염 마법은 자제한다. 여기는 던전이 아니라고."

"소형은 총으로 충분히 처리되니까, 대형 몬스터 위주로 저격해!"

오랜 시간 함께 하며 합을 맞춘 능력자들은 마치 한 몸인 것처럼 유기적으로 움직였다.

몬스터들이 있는 곳에 광범위 마법이 작렬하고 대형 몬스터에게는 활과 창이 날아들었다.

마법과 총탄의 화망(火網)을 뚫고 접근하는 적은 실드로 저지한 후에 근접 전투에 능한 능력자들이 모여 단숨에 처치했다.

최동우와 연합원들의 활약으로 전선은 빠르게 안정돼가고 있었다.

그렇게 무난하게 전투가 끝날 것 같다고 생각하던 순간,

"보스급 몬스터입니다!"

숲을 헤치고 거대 몬스터가 나타났다.

'파이크리'라는 이름을 가진 놈은 마치 거대한 고슴도치와 같은 외양을 하고 있었다.

"쏴라!"

-콰과과광!

파이크리를 향해 유탄과 대구경 기관총들이 총알을 쏟아부었다.

"키에에에-!"

하지만 놈이 몸을 둥글게 말자 모든 공격은 단단한 가시에 막혀 별다른 피해를 주지 못했다.

5m는 될법한 거대 괴수가 점차 가까워지자 군인들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으아아!"

"온다! 괴물이야!"

연합의 능력자들이 파이크리를 향해 공격을 가했지만, 역시나 결정적인 피해를 주지는 못했다.

이대로라면 놈은 부대 안으로 들어와서 대량살상을 일으킬 것이 뻔한 상황.

"모두 나와!"

그때 최동우가 달렸다.

최동우는 손에 거대한 창을 쥔 상태였는데, 몸에서 나오는 마력이 창으로 흘러가며 마치 불에 타는 것과 같은 화려한 장면이 연출됐다.

-타앗!

달려가던 최동우가 파이크리의 코앞에서 강하게 점프했다.

허공을 나르는 최동우의 몸이 활처럼 꺾이고, 강하게 창을 쥔 양손이 머리 뒤로 한계까지 당겨졌다.

"흐으으읍!"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처럼 전신의 근육을 한계까지 당기는 최동우.

"죽어라!"

마침내 모든 것이 풀어짐과 동시에 한 줄기의 빛처럼 창이 쏘아졌다.

-푸슈우욱!

창은 정확하게 파이크리의 미간을 꿰뚫고 깊숙이 들어갔다.

1.5m가 넘어가는 창이 단숨에 절반 이상 틀어박힌 것이다.

그 상황에서 최동우가 몸을 회전해 화려한 돌려차기를 날렸다.

-콰아앙!

최동우의 뒤꿈치가 정확히 창끝에 틀어박히고, 창은 그대로 파이크리의 머릿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캬학, 캭, 키에..."

머리에 구멍이 난 파이크리가 괴한 소리를 내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점차 뒤집히는 파이크리의 눈동자.

마침내 파이크리가 완전히 움직임을 멈췄다.

-쿠웅

놈의 거구가 쓰러지자 흙먼지가 일며 땅이 조금 흔들렸다.

동시에 사방에서 함성이 터졌다.

"와아아아아-!"

183화 각개전투(5) (1)

183. 각개전투(5)

최동우가 파이크리를 사살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투는 끝이 났다.

최동우는 연합원들의 피해 상황을 꼼꼼하게 점검한 뒤, 문규광 대좌에게 돌아갔다.

"정말 대단합니다!"

최동우를 본 문규광이 환하게 웃으며 손뼉을 쳤다.

"이렇게 강한 초인은 처음 봤습니다! 남조선에서 정말 대단한 분을 보내셨습니다!"

잔뜩 들떠서 연신 감탄사를 쏟아내는 문규광.

전투 직전까지 잔뜩 무게를 잡던 것과는 상반되는 모습이었다.

최동우도 그것이 싫지는 않았던지라 흐뭇하게 웃었다.

"큰 피해가 없어서 다행입니다."

"이게 최동우 동무 덕분입니다. 남조선의 초인들은 다들 이렇게 강한 겁니까?"

"하하. 제 입으로 이런 말을 하기는 쑥스럽지만, 그렇지는 않습니다."

"하긴 그랬다면 남조선에서 진작에 이 한반도를 통일하고도 남았겠습니다! 하하하!"

문규광의 농담에 최동우가 미소를 지었다.

"그나저나, 어째서 던전 밖에 이렇게 대규모 몬스터 무리가 있는 겁니까?"

부대를 습격한 몬스터 무리.

최동우가 의문인 것은 북한군이 이런 상황에 제법 익숙한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이게... 사연을 전부 말하자면 조금 깁니다."

"부탁드립니다. 이곳의 사정을 최대한 상세히 알아두는 것이 사건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최동우의 말에 문규광 대좌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북조선은 이 던전 사태의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모든 괴수들을 군대가 처리해 왔습니다."

"군대가 직접 던전 안에 들어가서 처리했다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우리 모두 그것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최동우는 문규광의 말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한국도 처음에는 군대를 이용해 던전과 몬스터를 처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것을 멈추고 던전에 대한 모든 것을 능력자에게 넘겼다.

이것에 대해서는 최동우도 최근에서야 신태길에게 들은 것인데 미국의 입김이 있었다고 한다.

-그때 미국에서 가능하면 군대로 몬스터를 처리하지 말라고 조언했습니다.

-능력자의 성장 때문인가?

-예. 초창기부터 미국은 능력자의 육성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여러 조언을 해왔습니다. 그때 한승훈 대통령께서 모두의 반대를 무릅쓰고 미국의 조언을 받아들여 현재의 대한민국 시스템이 갖춰진 겁니다.

아마 폐쇄된 국가인 북한은 이런 과정이 없었을 것이다.

능력자의 성장은 그들에게 경계의 대상이었을 테고, 초창기의 몬스터는 군대만으로 충분히 대응할 수 있었다.

북한은 그런 상황이 영원할 것이라 믿은 것이다.

이것은 비단 북한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세계적으로 여전히 사회주의, 공산주의, 혹은 독재 체제를 취하는 국가 대부분에서 공통으로 나타나고 있는 현상이었다.

'북한은 유독 그것이 심한 것 같기는 하지만...'

그때, 이어지는 문규광의 말이 최동우를 상념에서 깨웠다.

"시간이 갈수록 괴수들은 강해졌고, 우리 인민군은 이 상황을 통제하는 것의 한계를 느끼고 있습니다."

던전은 점점 많아지고 강력해졌다.

북한군은 그런 몬스터와 매일 전쟁을 벌여 땅을 지켜냈지만,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제대로 소탕하지 못한 몬스터는 숲으로 숨어들었고, 시골 지역에서는 주민들이 몬스터에게 몰살당하는 사건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그렇게 괴수들과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고 있었는데 이번 사건이 터진 겁니다."

사실 문규광 대좌도 알고 있었다.

언젠가는 이런 사태가 터지리라는 것을.

하지만 갑작스레 나타난 검은 갑옷과 정체불명의 마법사들은 이 사태를 더욱 가속해버렸다.

국가의 원수가 죽고, 하루에도 계급장에 별을 단 군인이 몇 명씩 죽어 나갔다.

이런 상황에서 군대가 제대로 움직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남조선 동무에게 이런 말을 하기는 부끄럽지만... 높은 곳에 앉아있는 장성들은 대부분 군대를 자신의 거처 주변으로 모았습니다."

"시민보다는 본인들의 목숨을 챙기려 했던 거군요."

"맞습니다. 그때부터 괴수들이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나서 이제는 거의 매일 놈들과 전쟁을 치러야 하는 수준이 된 겁니다."

이 사실을 전하는 문규광도 답답한 것인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으음... 아무래도 빠르게 이동해야겠습니다."

문규광의 말을 들은 최동우는 다급해졌다.

이곳까지 오는 길에 보았던 폐허가 된 마을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지금, 이 순간에도 무고한 사람들이 죽어 나간다고 생각하자 최동우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놈들은 평양에 있습니까?"

"이틀 전에 확인된 위치는 평양이었습니다. 그 이후로는 연락이 끊겨서 잘..."

"알겠습니다."

굳을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최동우가 짐을 챙겼다.

"바로 가시는 겁니까?"

"예. 시간을 지체할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조심하십시오. 동무. 남조선의 동무가 도우러 오는 것을 반대한 부대도 많았습니다. 안내하는 병사에게 최대한 호의적인 부대들이 있는 방향으로 인도하라 말은 해 뒀지만... 좋지 않은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참고하겠습니다."

빠르게 대화를 끝낸 최동우는 곧장 연합원들과 함께 곧장 평양길에 올랐다.

**

평양 만수대 언덕에 있는 김일성과 김정일의 동상.

높이만 무려 20m가 넘어가는 거대한 동상 앞에 가투 아사스가 서 있었다.

"불쾌하군."

감히 인간 주제 이렇게 숭배받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가투 아사스가 검을 뽑아 휘둘렀다.

-채앵!

날카로운 소음과 함께 한 줄기의 빛이 뻗어 나가 두 개의 동상을 관통했다.

그러자 깔끔하게 잘려나가며 무너지는 동상들.

-쿠구구구궁!

거대한 동상의 상체가 바닥에 떨어지며 굉음이 일었다.

가투 아사스는 검을 집어넣고 뒤로 돌아섰다.

그러자 무릎을 꿇고 기다리고 있는 언데드, 오칼 올룬이 보였다.

"무슨 일이지."

"쿨사들의 침공에 대해서 보고드릴 것이 있습니다."

"말해라."

"현재 침공을 시작한 쿨사 다섯 중 단 하나를 제외하고 모두 고전하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한심한 놈들."

가투 아사스는 아무리 쿨사라고 해도 이런 땅에서 고전하고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하나를 제외한다는 말은 성과가 있는 쿨사가 있다는 뜻이겠지?"

"예. 중국이라는 국가에서 움직이는 페마 쿨사입니다."

"중국?"

"가투 아사스께서 계시는 이 땅과 인접한 국가입니다."

"중국... 페마 쿨사라..."

가투 아사스는 팔짱을 낀 채로 고심했다.

"현재 이 나라에 있는 제자들은 총 몇이지?"

"이곳에는 올룬만 열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중 다섯을 중국의 페마 쿨사에게 보낸다. 그리고 나머지 다섯은 나와 함께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로 즉시 이동한다."

이미 북한이라는 나라는 멸망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가투는 시간을 지체할 것 없이 곧장 대한민국을 처리하기로 했다.

중국은 이미 성과를 내고 있다고 하니 올룬을 추가로 지원한다면 높은 확률로 국가를 함락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대한민국, 북한, 중국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땅을 휘하에 두게 되는 것이다.

'그때부터는 그분이 오시기 전까지 차근차근 영역을 넓히면 되겠지.'

생각을 정리한 가투 아사스가 발걸음을 뗐다.

"시간이 없다. 즉시 이동한다."

**

최동우와 300명의 연합원은 빠르게 북진했다.

이동하는 도중 최동우는 예상치 못하게 악의를 가진 북한군과 마주치면 어떡해야 하나 고민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보이는 것은 끝없이 펼쳐진 논밭.

그리고 폐허들.

간혹 움직이는 생명체라고는 몬스터 밖에 없었다.

"끔찍하군..."

"평양에 가까워질수록 더 심해질 겁니다."

최동우가 중얼거리자 운전을 하던 군인이 말했다.

'도대체 나라가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뭘 한 건지...'

최동우는 차마 북한군 앞에서 이런 말을 할 수는 없었던지라 목 끝까지 올라온 말을 참아냈다.

대신 답답함에 가슴 깊은 곳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음..? 잠시. 여기서 멈춰주게."

그때였다.

전방에서 빠르게 접근하는 마력을 느낀 최동우가 차량을 세웠다.

"B등급 보스 정도인가..."

단순히 마력으로 느껴지는 것은 B등급 던전의 보스와 엇비슷한 수준이었다.

최동우가 차량에서 내리자 다른 연합원도 차례대로 내리기 시작했다.

"무언가가 오는군요."

"모두 준비해."

조금 더 시간이 지나자 총 4개의 마력이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보스만 넷이라고..?'

각자 차이가 느껴졌지만 모두 강력한 마력을 품고 있었다.

최동우는 적들이 몬스터가 아닌 마력에 특화된 능력자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잠시 후.

"왔군."

최동우의 예상처럼 나타난 이들은 머리끝까지 로브를 뒤집어쓴 정체불명의 4인이었다.

빠르게 허공을 날아오던 그들은 최동우와 연합원을 보고 멈춰 섰다.

"누구십니까?"

통역능력을 익히고 있는 최동우가 대표로 물었다.

거수자 넷은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라고 하는 거지?"

거리가 멀어서 그런지 저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들리지 않았다.

그때, 놈들에게서 강한 마력이 모이기 시작했다.

"젠장! 적이다! 모두 대비해!"

최동우의 외침과 동시에 어디선가 강한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에 펄럭이던 로브가 벗겨지며 놈들의 머리가 드러났는데, 그곳에는 새하얀 사람의 얼굴이 아닌 두개골이 있었다.

그들은 가투 아사스가 가는 길을 확인하기 위해 정찰을 나와 있던 '올룬'이었던 것이다.

"인간들을 섬멸한다."

"가장 앞에서 창을 든 놈을 조심하도록."

올룬들은 빠르게 허공을 유영하며 사방으로 마법을 난사했다.

연합원들은 흩어져서 각자 마법에 대비했지만 그럼에도 빠르게 사상자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마법을 쏴! 뭐하는 거야!?"

"이미 하고 있어! 그런데 피하거나 실드에 막힌다고!"

그렇지 않아도 강력한 놈들이 제공권을 가지고 있으니 더욱 상대하기 까다로웠다.

그 모습을 본 최동우가 인벤토리에서 투창용 창을 꺼내 들었다.

최동우가 창을 강하게 움켜쥐자 그의 두터운 팔 근육이 성이라도 난 것처럼 불끈거렸다.

굳게 창을 움켜쥔 손아귀에서는 불꽃과도 같은 마력이 흘러나갔다.

마침내 퍼져나간 마력이 창 전체를 뒤덮고, 창이 마력에 불타오르자 최동우가 도움닫기를 시작했다.

"흐읍, 크하-!"

최동우가 거친 숨을 토해냄과 동시에 빛처럼 쏘아지는 창.

창은 단숨에 올룬 하나의 실드를 뚫고, 놈의 두개골 코앞에서 멈춰 섰다.

"방심했군... 큰일 날 뻔했어."

자신의 두개골과 불과 1cm도 되지 않는 거리에서 멈춘 창을 보며 올룬이 당황했다.

그 순간,

-콰아앙!

또다시 날아온 창이 완전히 실드를 박살내며 올룬의 두개골을 그대로 관통했다.

"막을 수 있는 성질의 공격이 아니다. 모두 회피해라."

남은 올룬들이 비행 속도를 높이며 최동우의 창을 회피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이미 전투의 흐름은 연합에게로 넘어와 버렸다.

연합원들도 정신을 차리고 제대로 대응을 하기 시작하자 올룬들은 금세 수세에 몰렸다.

-파가각!

얼마 지나지 않아 두 번째 올룬의 두개골이 창에 관통돼 산산조각이 난 채로 허공에 비산했다.

세 번째, 네 번째 올룬의 운명도 마찬가지.

채 30분이 흐르지 않아 모든 올룬들이 두개골이 부서진 채로 바닥에 흩어졌다.

"후우..."

단시간에 급격하게 몸을 움직인 최동우의 가슴이 빠르게 오르내렸다.

"피해는?"

"부상자 육십에 사망자 스물입니다."

"생각보다 피해가 크군..."

"죄송합니다."

"아니야. 자네가 죄송할 것 없지. 내가 좀 더 빠르게 처리를 했어야 됐는데..."

부상자는 마법으로 치료하면 금세 완쾌하겠지만, 이미 죽어버린 자를 되살릴 수는 없었다.

낯선 타지에서 죽어버린 스무 명의 청년들.

자신을 믿고 따라와 준 그들에게 미안할 따름이었다.

"그 가족들에게 어떻게 말을 전해야 할지..."

던전 사태 이후 최동우에게 죽음이란 항상 따라다니는 익숙한 것이었지만, 겪을 때마다 아릿한 가슴의 통증은 전혀 익숙해지지 않았다.

"음?"

그때였다.

또다시 이곳으로 빠르게 접근하는 두 개의 마력이 느껴졌다.

"모두 전투에 대비해라!"

죽은 동료들을 추도할 틈도 없이 또다시 전투가 벌어질 것 같았다.

**

'뭔가 이상해...'

최동우가 인상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현재 빠르게 접근하고 있는 두 개의 마력.

하나는 조금 전에 처리한 해골들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문제는 다른 하나.

'지금까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마력이야.'

그 어떤 B등급의 보스도 저런 마력을 가지지는 못했다.

적의 마력은 단순히 강한 것뿐만 아니라 묘하게 불쾌한 느낌까지 풍기고 있었다.

"불안하군."

두 개의 마력은 금세 최동우가 있는 곳에 당도했다.

하나는 로브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있었고, 다른 하나는 칠흑 같은 어두운 빛깔의 전신 판금 갑옷을 입고 있었다.

최동우는 단번에 저자가 이번 모든 사태의 원흉은 '검은 갑옷의 검사'라는 것을 알아챘다.

"모두 포메이션 S를 전개해!"

'포메이션 S'는 소수의 강한 적을 포위할 때 사용하는 대형이었다.

최동우의 말에 능력자들이 쏜살같이 흩어지며 2명의 적을 둘러쌌다.

"연합장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마찬가지로 검은 갑옷의 마력을 느낀 연합원이 침을 삼키며 물었다.

"내가 저 갑옷을 맡을 테니 너희들은 최대한 빠르게 로브를 처치해. 특히 갑옷을 입은 자를 조심해야 돼. 절대 가까이 붙어서는 안 된다."

"알겠습니다."

둘의 대화를 끝으로 정적이 내려앉았다.

"..."

누군가 침을 삼키는 소리까지 들려올 정도로 짙은 고요.

먼저 움직인 것은 가운데에 있던 검은 갑옷이었다.

-채앵!

언제 뽑았는지도 모를 만큼 재빠르게 뽑힌 검이 휘둘러지고,

-촤아아악!

쏜살같이 뻗어 나간 마력이 단숨에 수십 명의 능력자를 깔끔하게 절반으로 갈라버렸다.

상체와 하체가 분리된 능력자들이 부릅뜬 눈을 한 채로 바닥에 쓰러졌다.

그 한 번의 공격으로 최동우는 직감했다.

"젠장! 모두 도망쳐라-!"

놈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184화 각개전투(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