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novel

2

13화. 붉은 깃발(6)

[킬 수에 따른 보너스를 책정합니다.]

[킬 수 ― 154 킬]

[놀라운 업적!]

[압도적인 킬 수를 기록하셨습니다!]

[추가 보너스를 받습니다.]

[154 킬을 달성하셨기 때문에 기본급 x 2의 보너스를 지급받게 됩니다.]

붉은 깃발 표식을 얻은 다음부터는 계속해서 전투의 연속이었다.

덕분에 정신없이 돌아다니느라 머리 굴릴 새가 없었는데,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엄청난 킬 수를 기록한 것이다.

'154킬······.'

참가한 플레이어 여덟 명 중 한 명을 내가 혼자 잡은 셈.

이렇게 놓고 보니 징할 정도로 싸우긴 한 것 같았다.

띠링!

[최초의 업적!]

[콜로세움에서 붉은 깃발전이 시작된 이래 최초로 처음부터 끝까지 붉은 깃발을 지켜냈습니다.]

[최초의 기록을 세웠기 때문에 추가로 x 3 의 보너스를 지급받게 됩니다.]

'붉은 깃발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낸 사람이 내가 최초라고?'

생각지도 못했던 추가 보상.

하지만 나는 곧장 이해했다.

모든 플레이어들에게 표적이 된다는 것은 무척 끔찍한 일이었다.

심지어 12시간 동안.

'하얀 가면이 아니었다면 회귀하자마자 비명횡사할 뻔했지.'

인간의 체력엔 한계가 존재했었으니까.

띠링!

[하위리그-블러드나이트176 의 8경기를 종료합니다.]

[파이트 머니로 11,200 P 를 지급받았습니다. (팀 '투지' 수수료 4,800 P 차감)]

[기본급 +2,000 P / 승리 수당 +2,000 P / 추가 보너스 +12,000 P / 수수료 -4,800 P]

[다음 경기부터는 기본급을 3,500 P 로 책정합니다.]

[소속된 팀의 팜으로 이동합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띠링!

[모든 상태를 100%로 회복합니다.]

내 몸을 감싼 하얀 빛이 사라지자, 익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직경 100미터 정도의 울타리가 쳐져있는 공터, 그 위로 덮여있는 파란색의 반투명한 막.

그리고 오밀조밀하게 붙어있는 네 개의 건물과 그 앞에 서 있는 하얀색 원피스를 입고 있는 아세리안의 모습까지.

'돌아왔어.'

이곳에서 생활한 지 고작 5주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마치 집에 돌아온 것 같았다.

그만큼 이곳에서 내가 편안함을 느끼고 있다는 뜻이겠지.

"안우진님!"

양손을 가슴께에 모은 채 서 있던 아세리안이 도도도도, 달려왔다.

"다녀왔습······."

"꺄! 너무 좋아! 안우진님 최고였어요!"

그녀는 앞에 서더니 내 손을 잡고 방방 뛰기 시작했다.

뭐야, 왜 이래?

내 팔이 그녀의 움직임에 맞춰 위아래로 정신없이 움직였다. 아세리안은 한참동안이나 기쁨을 표출한 뒤에야 내 손을 풀어주었다.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 처음에 랜덤으로 붉은 깃발에 당첨되셨을 땐 엄청 마음 졸이면서 봤는데, 결국 끝까지 버텨내실 줄이야! 특히 마지막에 빅터라는 검객과의 정면 대결은 숨도 못 쉬면서 본 것 같아요!"

"나쁘지 않았나 보군요."

내 말에 아세리안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살짝 꼬았다.

"나쁘지 않았냐는 표현으로 끝낼 말이 아니에요! 마지막엔 해설하는 신들도 방방 뛰고 난리가 났었다니까요? 막 저 플레이어 도대체 누구냐고, 새로운 네임드가 탄생했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었어요!"

그녀의 열변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내 플레이를 보고 이렇게까지 흥분하는 사람의 모습을 처음 봤기 때문이다.

'이런 기분, 나쁘지 않네.'

"저는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좀 쉬어야겠네요."

다시 팜으로 돌아오며 체력이 100%로 회복되긴 했지만, 온 신경을 곤두세운 채 12시간이나 싸워댔더니 정신적으로 피로감이 무척 심했다.

진이 빠지는 기분이랄까.

하지만 나는 숙소로 돌아갈 수 없었다.

"아뇨! 절대 안 돼요! 무려 팀 투지 소속으로 뛴 플레이어가 첫 승을 거둔 날인데 파티해야죠! 쉬는 건 내일 푹 쉬고, 오늘은 파티해요, 파티!"

그녀는 나를 강제로 잡아끌고 식당으로 향했다.

경기를 뛴 건 나인데, 그녀가 더 신나 보였다.

누가 보면 자기가 뛴 줄 알겠어.

"포인트 많이 벌어와서 그렇게 기분이 좋습니까?"

"네! 좋아요! 근데 그건 두 번째로 좋은 이유에요."

"그럼 첫 번째는 뭡니까?"

"안우진님이 무사히 살아 돌아 오셨다는 것! 제가 진짜 얼마나 많이 걱정 했는 줄 아세요? 미션 들을 때까지만 해도 아, 안우진님이면 이번 경기도 무사히 끝내고 오시겠구나 했는데 갑자기 붉은 깃발이 딱! 그때 저 완전 심장 철렁했어요······."

"······."

"그래도 내가 봐온 안우진님이라면 어떻게든 하겠지, 분명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 거야, 라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끝까지 경기를 지켜볼 수 있었던 거지, 그게 아니었으면 무서워서 경기를 보지도 못했을걸요?"

'그래서 이렇게 기분이 업되어 있었구나.'

그제야 나는 아세리안이 왜 이렇게 흥분해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나를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를······ 걱정하고 있었다라······.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이다.

1회차에 내가 소속되어 있던 곳은 팀 '정의'.

그곳에 있을 때는 나를 걱정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계약에 의해 나를 관리해주고 단련시켜주는, 업무적인 관계였을 뿐.

그들은 나를 도구로밖에 취급하지 않았으니까.

'10년이 넘었구나.'

마지막으로 날 걱정해주던 건 우리 가족들 뿐.

그마저도 이젠 없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에.

그런 의미에서 오랜만에 겪어 본, 누군가가 날 걱정하는 감정은······.

'나쁘지 않네.'

무척 좋았다.

식당의 테이블.

'실제로 요리하는 건 처음 보네.'

아세리안은 작게 노래를 흥얼거리며 음식을 만들고 있었다.

그녀는 언제나 나보다 일찍 일어나서 아침 식사를 준비했고, 점심과 저녁도 내가 훈련을 끝내고 식당에 가보면 언제나 차려져 있었다.

나는 늘 앉던 의자에 앉아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포인트가 얼마나 있지?'

[남은 포인트 : 22,100 P ]

이제까지 고작 두 경기를 뛰었는데, 무려 22,100 포인트나 보유하고 있었다.

현재 근력이 21인데, 이 정도면 단숨에 30을 찍고도 남을 양이었다.

'정말 많은 걸 얻을 수 있는 경기였어.'

단순히 포인트만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무기 중 가장 강력한 건 바로 경험.

나는 이번 경기를 통해 또 새로운 경험을 축적시켰다.

일단 활에 대한 이해도가 엄청나게 상승했고, 덕분에 앞으로 궁수를 만나더라도 잘 상대할 수 있는 자신감이 생겼다.

궁수가 근접 물리 계열의 플레이어들을 상대할 때 어떤 방식으로 움직이고, 어떤 유형으로 공격하는지 알게 되었으니까.

물론 그렇다고 해도 궁수는 여전히 내게 위협적인 존재다. 노련한 궁수들은 숙련된 사냥꾼과 같으니까.

하지만 이전처럼 무력하게 당하진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두 번째로는 스킬의 방향성이었다.

'다수의 약한 적들을 상대하는 스킬은 필요 없어.'

이번 경기를 통해 확실히 깨달았다.

다수를 상대로 조금 어려울 순 있을지언정, 나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주진 못한다.

그 이유는 바로 하얀 가면 덕분이었다.

'고작 일반 등급인데도 이 정도인데, 합성을 통해 여기서 등급이 더 높아지면 다수의 약한 적은 내 상대가 안 돼.'

문제는 빅터와 같은 강자와 상대할 때이다.

열 명의 적을 쓰러트려도 나보다 강한 단 한 명의 고수를 만나 죽는 곳이 콜로세움이었으니까.

만약 빅터와의 전투에서 고수를 상대할 때 유용할 만한 스킬이 단 하나라도 존재했다면 그렇게 속수무책으로 밀리진 않았을 것이다.

'이제라도 알았으니까 상관없어.'

다음에 만나면 절대 그런 식으로 무기력하게 밀리진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중개 거래소 오픈'

띠링!

[<약초:블랙 허브>]

[티르너노그 성계에서만 나는 약초. 아직 어디에 사용해야 하는지 알려져 있지 않다.]

[등급 : 희귀]

[판매가 : - G]

[물건이 거래소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조금만 있으면 블랙 허브의 가격이 미친 듯이 상승할 테니까.

그때가 되면 블랙 허브를 팔아서 완벽에 가까운 스킬트리와 템트리를 맞출 수 있을 것이다.

이미 뭘 살 건지도 대충 생각해 놨고.

"많이 배고프죠? 거의 다 됐으니까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괜찮습니다. 천천히 하시죠."

"아참, 이번에 플레이어 몇 명을 영입할까 생각 중이에요."

"영입이라면, 랜덤 뽑기가 아니고 다른 팀의 플레이어를 사 오시겠다는 거군요."

"네, 맞아요. 이미 눈여겨보고 있는 플레이어들도 몇 명 있구요. 그래서 곧 사용인을 들일 생각이에요. 지금까지는 안우진님이 혼자서 잘 해와 주셨기 때문에 버틸 수 있었지만 관리해야 할 인원이 늘어나면 저도 좀 버겁거든요."

'사용인이라. 하긴 지금도 좀 늦긴 했지.'

사용인은 콜로세움에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경기 뛰는 걸 거부하는 플레이어들을 말한다.

그들은 경기에 나서지 않는 대신, 팜에서 살아가며 각종 궂은일을 도맡아 처리한다.

'요리나 청소, 빨래 같은 걸 천사들한테 시킬 순 없지. 그들은 고급 인력이니까.'

애초에 팀 투지처럼 지금까지 사용인이 없던 게 조금 비정상적이었다.

천사도 없고, 사용인도 없다.

그렇다고 내가 요리나 청소, 빨래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결국 그 일을 아세리안이 해왔다는 뜻이다.

여신이라는 초월적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이게 모두 다 안우진님 덕분이에요. 더미 경기와 붉은 깃발전, 두 경기밖에 안 뛰셨는데도 엄청난 포인트를 벌어다 주셨잖아요. 정말 감사드려요."

아세리안이 나를 힐끔 보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 덕분이라······.

"아뇨."

"······?"

내 단호한 목소리에 아세리안이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저도, 팀 투지에 소속되어 아세리안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이런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했을 겁니다. 그러니까 저는 정당한 수수료를 지불한 셈이니, 그렇게 고마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건 내 진심이었다.

만약 팀 성장에서 계속 있었더라면.

아니, 혹시 팔리더라도 다른 팀으로 갔더라면.

이렇게 빠른 속도로 스텟을 올리지 못했을 테니까.

팀 성장은 애초에 공장 컨셉이었고, 다른 팀들도 어느 정도 플레이어들을 육성시키며 자기들 방식에 맞는 매뉴얼을 확립해 두었을 것이다.

그런 팀들에 갔었다면 지금처럼 내 방식대로 훈련할 수 없다. 팀에 소속된 많은 플레이어들이 팀에서 만들어 둔 커리큘럼에 따라 훈련을 할 텐데, 나 혼자만 단독으로 훈련을 한다? 절대 불가능하다.

그건 그동안 팀이 쌓아뒀던 매뉴얼을 무너트리는 짓이었으니까. 허용할 리가 없다.

"안우진님······."

내 목소리에 담긴 진심을 느낀 것일까?

아세리안이 감동했다는 듯 말끝을 흐렸다.

후.

이런 분위기 적응 안 되네.

손발이 오그라들 것 같았다.

'정말 다행이야.'

가면을 착용하고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짠!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이름하여, 아세리안 특선 메뉴!"

테이블 위에 온갖 음식들로 가득했다.

도대체 그 짧은 시간에 몇 개나 만든 거야?

아니 애초에 이걸 우리 둘이 다 먹을 수나 있나?

"······ 맛있어 보이는군요."

"그쵸? 앗, 잠시만요! 아직 준비 안 된 게 있어요!"

내가 포크를 들려고 하자 아세리안이 급히 제지했다.

그러더니 그녀는 부엌 한켠에 있는 냉장고에서 무언가를 꺼내왔다.

두 개의 와인 잔과 함께.

"엘 쁘리메르 비노 예요. 제가 신위를 처음 부여받게 되었을 때 아버지께서 하사하신 와인이죠."

"소중한 의미가 담긴 와인일 텐데 이런 날 마셔도 되겠습니까?"

"그럼요! 이런 날이니까 따는 거죠!"

아세리안이 소믈리에 나이프를 손에 쥐더니 코르크에 쑥, 넣었다.

뽕!

청량한 소리와 함께 퍼져가는 달달한 향기.

그녀가 와인 잔에 적당한 양을 따르더니 내게 넘겨주었다.

"오늘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 앞으로도 우리 더 화이팅해요!"

그녀가 와인 잔을 들더니 내게 내밀었다.

건배를 하자는 뜻.

나도 피식 웃으며 잔을 들었다.

그때였다.

띠링!

[하위리그-블러드나이트176 경기가 모두 끝났습니다.]

[과반수 이상의 관객들이 당신을 '퍼포먼스 오브 더 블러드'로 선정하셨습니다!]

[과반수 이상의 관객들이 당신을 '파이트 오브 더 블러드'로 선정하셨습니다!]

"······!"

"······!"

알림창을 보자마자 아세리안과 내 눈이 마주쳤다.

우리 둘 다 멍하니 입을 벌린 채 서로를 응시할 뿐이었다.

['퍼포먼스 오브 더 블러드' 보너스로 7,000 P를 지급받았습니다. (팀 '투지' 수수료 3,000 P 차감)]

['파이트 오브 더 블러드' 보너스로 7,000 P를 지급받았습니다. (팀 '투지' 수수료 3,000 P 차감)]

"꺄······."

"······?"

"꺄아아아아악!"

희열에 찬 아세리안의 목소리가 식당 안에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그 모습에 나는 피식 웃었다.

나와 기쁨을 공유할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건.

무척 좋은 일이었다.

그렇게 나와 아세리안은 밤 늦게까지 서로의 잔을 채워주며 즐거운 시간을 이어갔다.

────────────────────────────────────

────────────────────────────────────

14화. 신입 플레이어(1)

다음 날 아침.

"좋은 아침이에요, 안우진님. 좀 푹 쉬셨나요?"

"예."

평소와 같은 시각에 일어나서 식당으로 향하자 아세리안이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런데 식당 한쪽에 처음 보는 사람이 있었다.

"아, 여기는 오늘부터 팜에서 식사와 청소를 맡아 처리해줄 사용인이에요."

"이, 이세연 입니다. 앞으로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저에게 말씀해주세요."

"안우진 입니다."

사용인으로 고용된 사람은 20대 중반 정도의 여성이었는데, 누가 봐도 지구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것도 나와 같은 대한민국 국적의.

'대부분의 사용인이 지구 출신이긴 하지만.'

지구는 이제 냉병기의 시대가 끝났다.

덕분에 평생동안 검 한번 잡아보지 못한 사람이 전체 인구 중 99.99% 정도 될 것이다.

그런 지구 출신이 콜로세움에 입장해서 하루아침에 검을 잡고 피를 뿌리며 싸울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런 의미에서 콜로세움에 입장했지만 플레이어 자격을 포기하는 사람이 무척 많았다.

이세연도 그런 사람 중 한 명일 것이고.

'뭐 내 알 바는 아니지만.'

나는 수저를 들고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수프를 한입 떠먹었다.

"······."

순간 나도 모르게 입에 머금은 수프를 뱉을 뻔했다.

'웩.'

이게 무슨 맛이지?

분명 비주얼은 수프인데······.

아, 혹시 내가 모르는 새로운 음식인가?

순간 나도 모르게 새로 들어왔다는 사용인을 쳐다보았다.

"아······."

마침 그녀 또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상태였다.

우리의 두 눈이 서로 마주쳤다.

"마, 맛이 없으신가요?"

이세연이 양손을 모은 채 어깨를 떨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무척 긴장했다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다시 수프 그릇을 내려다보았다.

맛이 없냐고?

더럽게 맛없다.

내 모습에서 무언가 이상함을 감지한 것인지 아세리안이 황급히 부엌으로 다가갔다.

아마 이세연이 만든 음식들의 맛을 보러 간 것이리라.

'알아서 아세리안이 잘 말하겠지.'

그사이 나는 수저를 들고 다시 꾸역꾸역 먹기 시작했다.

후.

쉽지 않네.

그렇다고 아침부터 고생해서 아침 식사를 차려 준 이세연에게 뭐라고 하고 싶진 않았다.

아마도 요리를 처음 해본 것일 터.

아세리안도 곧 알아차릴 테니까 차차 개선될 것이다.

"꺅! 이, 이게 뭐예요? 세연, 요리할 때 간 안 봤어요?"

부엌에서 아세리안의 뾰족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러자 이세연의 안색이 하얗게 질리더니 손을 벌벌 떨었다.

"아······ 제가 요리는 처음이라······."

"아! 그럼 미리 말씀을 하셨어야죠! 사용인 경력 1년 차라더니 그동안 요리도 안하고 뭐 했어요?"

"처, 청소랑 빨래만······."

"아······. 다음부턴 처음 하는 게 있으면 처음 한다고 얘기 좀 해 주세요. 처음부터 다시 만들어야 하니까 준비 좀 해주시구요. 안우진님, 제가 금방 다시······."

"잘 먹었습니다."

나는 수저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아세리안이 입을 벌린 채 나와 식판을 번갈아 보았다.

"그걸······ 다 드신 거예요?"

"예."

솔직히 못 먹을 정도는 아니었다.

나는 10년이란 세월을 콜로세움에서 살았으니까.

말이 10년이지, 경기 안에 들어가 있던 시간까지 합치면 15년은 족히 될 것이다.

아레나에서는 경기가 얼마나 되었든, 1시간밖에 지나지 않는다.

한 번 스토리 미션같은걸 진행하게 되면 한 달씩 지나는 것도 부지기수였다.

'아레나에서 맛있는 음식을 찾는 건 사치에 불과하지.'

그동안 셀 수도 없을 만큼 맛없는 음식을 많이 먹어왔다.

살아남기 위해선 뭐라도 먹어야 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나는 입맛이 까탈스러운 편은 아니었다.

다만 그동안 아세리안이 만들어준 음식들이 너무 맛있었다는 게 문제였달까.

"아······ 죄송해요. 점심 식사부터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할게요."

"차차 나아지겠죠."

"바로 체력 단련장으로 가실 거죠? 인수인계만 좀 더 해 주고 바로 갈게요."

"그럼 체력 단련장에서 뵙죠."

길게 한숨을 내쉬는 아세리안을 뒤로하고 숙소를 나섰다.

이전과 같은 평범한 일과가 다시 시작되었다.

스트레칭을 하고 근력 민첩 체력 위주의 혹독한 단련을 실시한다.

그리고 점심을 먹고 오후부터 무기술을 훈련한다.

다만 이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내 손에 활이 아닌 검이 들려 있다는 것이다.

"도무지 이해가 안 되네요."

한참 동안 허수아비를 향해 목검을 휘두르고 있는데 아세리안이 옆에서 말했다. 그녀는 뭐가 못마땅한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

"아니, 왜 손바닥에서 피를 흘리고 계신 거예요?"

"굳은살이 없으니까요."

"그니까 제 말이요. 왜 굳은살이 없는 거죠?"

그녀의 말에 나는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 사이 물집이 잡히고, 터지길 반복하며 손바닥에 피가 흥건한 상태였다.

오후부터 내가 한 훈련은 목검을 들고 내려치기와 찌르기, 베기 같은 기본적인 동작들이었다.

검을 단련한다면 가장 먼저 배워야 할 기초 동작들.

그동안 수만 번은 휘둘러 본 동작들이지만 문제가 있다면 내 몸은 검을 휘둘러 본 적이 없다는 점이었다.

그렇기에 손바닥이 쓸려 피가 나는 것이고. 그렇기에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검을 휘둘러 본 적이 없으니까요."

"······더미 경기에서는요? 거기서 막 검으로 애들 슥삭 하셨잖아요. 그럼 그때 검을 처음 잡아보신 거라구요?"

음.

뭐, 말하자면 그렇게 되겠네.

그렇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잡아봤습니다."

"제가 얼마 전에 활이 안우진님께 딱 맞는 무기라고 말씀드렸던가요? 정정할게요. 그냥 안우진님은 천재인게 틀림 없어요. 싸움의 천재. 세상에! 검을 처음 잡아본 사람이 30명이나 되는 플레이어들을 혼자 죽였다니! 심지어 저번 경기에서는 창도 잘 쓰셨잖아요!"

그녀는 당장이라도 방방 뛰고 싶은데 여신이라는 체면 때문에 꾸욱 참고 있는 표정이었다.

그녀의 모습에 나는 피식 웃었다.

천재라······.

뭐, 그녀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렇게 느낄 수도 있지만 나는 천재가 아니었다.

'오히려 둔재 축에 속하지.'

내게 조금이나마 재능이 있었다면, 하고 바래왔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왕도 그랬지 않은가.

―나를 탓할 것 없다. 그대의 재능이 여기까지였을 뿐.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자 씁쓸했다.

절망 속에서 헤매고 있던 시기였으니.

'다행이네.'

나는 처음으로 가면을 쓰고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내 표정을 아세리안에게 들키지 않을 수 있었으니까.

후욱!

나는 다시 목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재능이라.

'나에게도 재능이 있긴 하지.'

재능이라는 게 남들보다 특출난 무언가를 뜻하는 것이라면.

포기하지 않는 마음.

그것 하나만큼은 누구보다 뛰어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피식-

나에게도 한 가지 커다란 재능이 있긴 했다.

체력 단련실 안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아세리안은 잠시 후 있을 저녁 식사를 위해 식당으로 갔다.

아직까진 이세연의 요리 솜씨가 미숙해서 그녀가 옆에서 알려줘야 했으니까.

'검을 먼저 단련하길 잘했네.'

원래는 활 다음에 채찍을 훈련하려고 했다.

내가 궁수 다음으로 상대하기 까다로워하는 상대는 채찍이나 유성추, 연검을 사용하는 플레이어.

긴 리치와 빠른 속도, 예측할 수 없는 공격 패턴 등 상대로 만나게 되면 여간 곤란한 게 아니었다.

'하지만 사용하는 사람을 만나기가 무척 힘들지.'

문제는 그런 무기들을 사용하는 플레이어가 별로 없다는 것.

그래서 내가 당장 채찍이나 사슬낫 같은 무기들을 훈련한다고 해도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점이다.

그에 반해 검은 거의 대다수 플레이어들이 사용하는 무기다.

'멍청하게, 이 정도면 제법 검을 쓴다고 생각했지.'

고작 중급검술인 주제에.

그래서 검객들을 상대하더라도 충분히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빅터를 만나면서 생각을 고치게 되었다.

'진짜 검의 달인들을 만나면 여전히 상대하기가 힘들어.'

내가 검을 먼저 수련하게 된 이유였다.

중급검술과 상급검술 사이에는 큰 갭이 존재했으니까.

최소 상급검술.

목표는 최상급검술.

이번 수련을 통해 내가 올라가고자 하는 경지였다.

빡!

내가 휘두른 목검이 허수아비를 때리며 경쾌한 소리를 만들어냈다.

현재 내가 하고 있는 건 내려치기 1,000회.

무척 기본적인 수련이다.

중급검술을 가지고 있는데도 기초 수련부터 시작한 이유는 별 게 아니었다.

'내 검 끝이 흔들리고 있으니까.'

내 머리는 검을 어떻게 휘둘러야 하는지 이해하고 있지만, 내 몸이 따라주지 않는 상태.

그래서 검 끝이 흔들리지 않을 때까지 기초 수련을 진행할 예정이었다.

후욱!

'윽!'

다시 한번 내려치려는데 목검이 손에서 빠져 애먼 곳으로 날아갔다.

손아귀 힘이 빠져서 목검을 놓친 것이다.

손바닥을 내려다보자 여기저기가 터지고, 쓸려서 땀과 섞인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손이 잘게 떨리며 아릿한 통증이 배어 나왔다.

초감각으로 인해 온몸의 신경이 예민해져 있는 상태.

덕분에 통증 또한 더욱 크게 느껴졌다.

젠장.

장갑이라도 끼고 해야 하나.

'안 돼.'

하지만 나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이 통증을, 이 상처를 버텨내야 한다.

이건 말하자면 검을 휘두르고자 하는 사람이 감내해야 할 통과 의례.

손바닥이 터지고, 쓸려나가며 연약한 피부를 단련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최상급검술을 각성하기 위해선 이 과정을 반드시 지나가야 한다.

'조금만 더 하면 돼.'

오늘 내가 계획한 목표는 내려치기, 베기, 찌르기 각각 천 회씩.

베기와 찌르기는 이미 끝난 상태다.

이제 내려치기 100번 정도만 더 하면 오늘 일정도 끝.

허수아비 옆에 잘 개어져 있는 수건을 들고 땀과 피를 닦아낸 나는 다시 목검을 들고 휘둘렀다.

빡!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엄청난 고통이 찾아왔지만.

포기하지 않는다.

훈련을 끝나고 체력 단련실을 나서자 공터에 나와 있는 아세리안이 보였다.

그런데 처음 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세 명의 남자들이 공손히 손을 모은 채 서서 아세리안의 말을 귀담아듣고 있었다.

모두 처음 보는 사람들.

복장을 보니, 사용인은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면.

'새로 영입한다던 플레이어 들인가 보군.'

"아, 안우진님! 훈련 다 끝내셨나요? 마침 잘 나오셨어요. 여긴 오늘부터 새롭게 팀 투지의 가족이 된 분들이에요."

"아, 네."

"찬경 이라고 하오. 무림 출신이고, 9번의 경기에서 살아남았소."

세 명의 남자들 중 왼쪽에 서 있던 중년인이 나를 위아래로 살펴보더니 한쪽 입꼬리를 올린 채 손을 내밀었다.

그는 회색 무복을 입고 있었는데, 나와 손을 맞잡자 꾸욱 하고 힘을 주었다.

덕분에 터진 손아귀에서 통증이 밀려왔다.

시작부터 기싸움이라도 하자는 걸까.

하지만 나는 이들과 어울려 줄 생각이 없었다.

말하자면.

굳이 감정 소모를 할 가치가 없는 존재들이랄까.

"안우진 입니다."

그래서 나는 담백하게 내 소개를 마쳤다.

"지든이라고 한다. 발리노르 출신이고, 7번의 경기에서 살아남았다."

두 번째로 자기소개를 한 인물은 커다란 사각 방패와 글라디우스를 들고 있는 청년이었다. 그 역시 터진 내 손아귀를 보더니 피식 웃음을 흘렸다.

"듀리크요. 미드가르드 출신이고 마찬가지로 7번의 경기에서 살아남았지."

마지막으로 소개한 듀리크는 바이킹 투구를 쓴 채 거대한 도끼를 들고 있는 남성이었다.

특이사항이 있다면 덩치가 어마어마하게 크다는 것 정도?

그 역시 나를 무시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하긴. 검을 처음 잡아봤다는 건데, 무시할 만도 하겠네.'

나는 나머지 둘에게도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우리의 통성명이 끝나자 아세리안이 짝! 하고 손뼉을 쳤다.

"자기 소개도 끝났고, 일단 들어가서 식사라도 하면서 남은 대화를 이어가실까요? 마침 저녁 식사 시간이니까요! 그 이후에 숙소를 배정해 드릴게요. 안우진님도 시장하시죠? 어서 들어가요!"

아세리안이 앞장서서 숙소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나머지 세 사람도 아세리안을 따라갔다.

그런데 지든이라고 소개한 청년이 따라가는 와중에 나를 힐끗 돌아보더니 피식, 하고 웃었다.

음.

인성이 별로 좋아보이진 않았다.

'조만간 날을 잡아서 서열 정리부터 해야겠군.'

────────────────────────────────────

────────────────────────────────────

15화. 신입 플레이어(2)

"좋은 아침이에요, 안우진님."

식당으로 들어서자 아세리안이 인사를 건네왔다.

평소와 같은 아침.

아세리안은 오늘도 빵을 입에 문 채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부엌에 서 있던 이세연이 말없이 고개를 숙이기에 나 또한 한 번 끄덕여주고 자리에 앉았다.

테이블 위에는 한 개의 식판만이 놓여져 있었다.

내가 평소 먹는, 아세리안의 맞은편 자리.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자리에 앉았다.

"어제 새로 들어온 플레이어들은 같이 식사를 안 합니까?"

"아 찬경, 지든, 듀리크요? 1시간 뒤에 먹을 거예요. 그들은 따로 훈련할 거거든요. 안우진님은 평소처럼 하고 싶은 훈련을 하시면 돼요."

음.

그니까 말하자면.

나는 알아서 잘 하니까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건가?

'그런 식으로 하면 안 될텐데.'

그렇게 되면 새로 왔다는 플레이어들이 차별이라고 느낄 수도 있다.

왜 똑같은 플레이어들인데, 나는 자유롭게 훈련하고 자기들은 빡세게 훈련하는지에 대한 불만이 생길 수도 있고.

괜히 각 팀들이 훈련 매뉴얼이라는 걸 만들어 두는 게 아니었다.

'그렇게 해야 하니까.'

인간의 심리라는 게 원래 그렇다.

남의 떡이 더 커 보이고,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

분명 무언가 문제가 생길 것이다.

'뭐, 내 알 바는 아니지.'

하지만 나는 아세리안에게 이런 얘기들을 굳이 말해주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팀 투지는 아세리안의 개인 소유.

그녀가 알아서 할 일이다.

나는 빠르게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식사는 어제보다 훨씬 먹을 만했다.

스트레칭을 마치고 시작된 하체 근력 운동.

하체는 검을 쓰든, 창을 휘두르든, 활을 쏘든 무조건 단련해야 하는 부위다.

활을 쏠 때까지만 해도 하체 근력이 부족해서 화살이 똑바로 나가지 않는다는 느낌은 받지 않았다.

그런데 검을 휘두르다 보니 어쩌면 검 끝이 흔들리는 게 하체 근력이 부족해서 그런 게 아닐까, 라는 생각 때문에 오늘부터 시작하게 되었다.

"쉬면 안 돼요!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어어! 5개만 더 하면 2분 쉴 수 있어요! 쉬면 안 된다니까요!"

"일어나세요, 2분 끝났어요! 네? 죽을 것 같다구요? 안 죽어요. 이미 다 해 본 훈련법이에요!"

체력 단련실 한쪽에서는 아세리안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어제 새로온 세 명의 플레이어들은 고작 두 세트만에 퍼져 바닥과 한 몸이 되어 있었다.

"아니이이이! 일어나시라니까요? 이걸 왜 못 버티지? 뭐라구요? 훈련이 너무 막무가내라구요? 그런 말을 하려면 끝까지 해 보고 판단하세요!"

아세리안은 무척 답답하다는 듯 조막만 한 주먹으로 가슴을 콩콩 두드렸다.

'답답하겠지.'

세 사람의 움직임은 나보다 더 민첩하고, 빨랐다.

즉, 나보다 스텟이 더 높다는 뜻이다.

아세리안이 오랜 시간 고르고 고른 플레이어들인데 어중간한 녀석이 영입될 리가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찬경과 지든, 듀리크는 아세리안이 뭐라고 소리치든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니, 일어나지 못했다.

뭐, 이해는 된다.

'정말 쉽지 않은 훈련이니까.'

내 사기적인 정신 스텟으로도 겨우 버텨낸 훈련을, 저들이 첫날 바로 해낼 가능성은 그렇게 높지 않았다.

그렇게 따지자면 저들은 운이 나쁜 축에 속한다.

하필 내가 들어온 바로 다음 기수로 들어왔으니까.

이미 아세리안의 눈은 높아질 대로 높아진 상황.

그런 의미에서 저 세 사람은 아세리안이 부푼 마음으로 데려온 플레이어들이었기에 기대도 크고 실망도 클 것이다.

'내 할 일이나 하자.'

나는 그들에게 신경을 끈 채 바른 자세를 유지하며 아주 천천히, 스쿼트를 시작했다.

모든 근력 운동의 핵심은 올바른 자세에서 나온다.

그리고 빠르게 할수록 자세가 흐트러진다.

그래서 천천히 하고 있었는데, 바닥에 쓰러진 세 사람이 나에게 묘한 눈초리를 보내왔다.

"저······ 여신님. 그런데 저자는 어째서 이 훈련에 참여 하지 않는 겁니까?"

"안우진님이요? 저분은 알아서 잘하시니까요. 여러분도 잘 한다면 자유롭게 훈련할 수 있도록 해드릴게요. 근데, 지금 여러분은 아. 주. 형편없어요."

"그, 그게 무슨······."

아세리안의 말에 나는 쯧, 하고 혀를 찼다.

본인 딴에는 자극을 받아 더 열심히 하라는 뜻에서 얘기했겠지만, 나를 무시하고 있던 세 사람의 입장에선 자존심이 상할 수밖에 없는 얘기였다.

'한동안 피곤하겠군.'

애초에 저런 식으로 자극을 주려면 내가 저 세 사람과의 서열을 정리한 이후에 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서열을 정리하더라도 내게 앙심을 품을 수도 있으니까.

'서열을 정리해도 언제 몰래 다가와서 칼침을 놓을지 알 수가 없지.'

나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질투만큼 추잡스러운 감정이 없다.

'그래도 결국 정리를 한번 해야 하긴 해.'

아무래도 아세리안에게 단련장을 지어달라고 해야 할 것 같았다.

그곳에선 칼을 맞아도 금방 치유가 되니까.

그 안에서 반쯤 죽여놓으면 앙심이고 뭐고 다 사라지겠지.

"꺄악!"

야심한 밤, 누군가의 비명이 팜에 울려 퍼졌다.

나는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침대 옆 협탁에 올려놓은 검부터 뽑아 들었다.

"이, 이러지 마세요. 제, 제발······."

"흐흐, 가만히 있어! 사용인 주제에 감히!"

귓가에 들리는 미세한 말소리.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상황 파악을 하는 데엔 충분했다.

'진짜 짜증 나게 하네.'

들어온 지 고작 하루만에 사건사고를 일으켜?

나는 방에서 빠져나와 소리가 들리는 근원지로 향했다.

그리고는 이세연의 방 앞에 서서 굳게 닫혀 있는 문을 거세게 발로 찼다.

쾅!

"그쯤 하지."

방 안에 들어가자 이세연의 양손을 움직이지 못하게 붙잡은 채 우악스러운 손길로 옷을 벗기고 있는 세 명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갑작스러운 내 등장에 세 사람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뭐라고?"

"발정 난 개새끼라서 귀도 먹었나 보군."

"······하, 이거 진짜 미친 새끼네?"

발리노르 출신의 지든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피식 웃더니 이세연을 내팽개친 채 내게 다가왔다.

그러더니 내 이마에 본인의 이마를 갖다 대더니 으르렁거렸다.

"진짜 뒤지고 싶냐. 여신님이 아낀다고 눈에 뵈는 게 없어? 널 죽이지 못해서 우리가 그동안 가만히 있었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냐?"

"······."

"왜, 방금 전까진 뚫린 입이라고 잘도 지껄이더니. 죽여버린다고 하니까 갑자기 겁나?"

그러자 곁에 있던 듀리크도 한 마디를 보탰다.

"아 혹시 이년, 네가 찜해둔 년이냐? 푸흡, 이걸 어째? 우리가 오늘 따먹을 생각인데. 아, 혹시 생각 있으면 말해. 무릎 꿇고 빈다면 한 입 줄까 말까 고민 좀 해 볼 테니까."

하.

순간 진심으로 고민했다.

'서열 정리고 뭐고 그냥 죽일까.'

사실, 여성 사용인에 대한 성적 학대는 모든 팜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이곳에선 성욕을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지.'

여성 플레이어를 상대로 할 순 없으니.

말하자면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암묵적인 룰이랄까.

문제는 그렇게 강간당한 사용인들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평소라면 떨지 않을 오지랖을 부리고 있는 것이고.

'팜에 존재하는 유일한 사용인이니까.'

찬경과 지든, 듀리크는 나보다 더 스텟이 높고, 7번 이상의 경기에서 살아남은 플레이어.

그들을 영입하는데 아세리안이 제법 많은 포인트를 썼을 것이다.

그렇다는 건 현재 팀의 재정이 그리 좋지 않을 것이고.

그녀가 없으면 당장 내일 아침 식사부터 꼬인다.

'이세연이 어떻게 되더라도, 아세리안이 어떤 제스처를 취하긴 쉽지 않아.'

그들을 제법 비싼 포인트를 주고 사 왔을 테니까.

결국 그렇게 된다면 이세연에게 인수인계 해 주었던 일들을 다시 아세리안이 한다는 것인데, 그럼 알게 모르게 팀의 운영이 삐걱거릴 것이다.

지금까진 내가 알아서 잘 해왔기에 큰 문제가 없었던 것이지, 저 세 명을 훈련시키면서 나까지 신경 쓰고, 그 외의 자잘한 부분을 처리하기엔 시간이 부족할 테니까.

'결국 사소하지만, 많은 부분에서 나한테까지 악영향을 끼칠 확률이 커.'

가령, 경기 오퍼가 들어왔지만 놈들 때문에 바빠진 아세리안이 며칠 뒤에 오퍼를 확인한다든가 하는.

그렇게 되면 기껏 들어왔던 오퍼가 취소된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하네.'

그리고 저들이 지금까지 하는 꼴을 봤을 때, 팀에 자연스럽게 융화될 스타일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원래 있던 팀에서도 그런 문제가 있었기에 매물로 내놓았던 걸 테고.

그렇다면 저들과의 생활은 장기적으로 봤을 때 득보다 실이 더 많을 것이다.

그렇게까지 생각이 이어지자 순간, 녀석들을 그냥 죽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참자.'

하지만 나는 죽이고자 하는 마음을 잠시 접었다.

모든 일에는 절차가 있는 법이니까.

저들을 죽이는 것은 일단 아세리안을 설득한 이후에 해도 늦지 않다.

'다시 판매해 달라고 해야겠어.'

내가 강하게 어필한다면 저들을 다시 판매할 것이다.

그 포인트로 팜에 있는 건물을 업그레이드 할 수도 있을테고.

그리고 굳이 칼을 뽑지 않더라도 저들을 순한 양으로 만들 수 있는 마법의 단어를 알고 있다.

"아무래도 아세리안님을 호출해야겠군."

저들은 신입 플레이어들이 아니다.

7번 이상의 경기를 경험했다면 못 해도 콜로세움에 들어온 지 1년 이상은 지났다는 것.

그리고 그런 이들에게 팀의 주인이란 존재는 정말 아득히 높고, 두려운 존재라는 것이다.

'사실 아세리안처럼 여신이 직접 팜에 나와서 플레이어들을 관리하는 경우가 드물지.'

내 예상대로 아세리안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세 명이 움찔했다.

"그만 가세. 흥이 깨져서 더 이상 못 하겠군."

그제야 지금까지 가만히 있던 무림 출신의 찬경이 입을 열었다.

역시 9전이나 경험한 베테랑.

치고 빠져야 할 때를 정확하게 구분하고 있었다.

"하, 씨발. 엄마한테 이르는 애새끼도 아니고."

찬경이 먼저 방을 나서자 거대한 덩치를 가지고 있는 듀리크도 한 마디를 툭 뱉더니 방을 빠져나갔다.

방에 남은 사람은 이제 나와 이세연, 그리고 지든.

"너. 조심해라."

지든은 방을 서성이며 화를 가라앉히더니 내게 다가와 어금니를 꽉 깨문 채 말했다.

지든까지 빠져나가자 방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이세연은 이불로 몸을 꼬옥 감싼 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그 모습에 한숨을 내쉬며 방을 나설 때였다.

"정말 가, 감사합니다."

이세연이 눈물을 글썽이며 내게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고마워 할 필요 없습니다. 나를 위해서 한 행동이니까요."

이세연에겐 정말 미안하지만.

나는 진심으로 내게 방해가 되지 않았다면 굳이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누군가를 신경 쓰기엔.

내 스스로가 너무 절박했으니까.

다음 날 아침.

똑같은 일상이 시작되었다.

식당으로 들어서자 빵을 문 채 무언가를 열심히 쓰고 있는 아세리안의 모습.

그리고 주방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내게 말없이 고개 숙일······.

'어?'

나와 눈이 마주친 이세연이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눈가가 제법 부어있었다.

밤새 눈물이라도 흘린 모양이었다.

'쯧.'

신경 쓰지 말자.

나는 이세연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곤 자리에 앉아 묵묵히 식사를 시작했다.

'일단 아세리안에게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야겠어.'

"아세리안님 잠시 시간······."

"아, 죄송해요. 잠시만요! 이것만 짜고······!"

쯧.

아세리안은 세 사람의 훈련 커리큘럼을 새로 짠다고 정신이 없었다.

아침 식사 시간이 아니면 얘기하기가 쉽지 않은데.

이 시간을 제외하고는 아세리안과 단둘이 얘기를 나눌 시간이 없었다.

그녀는 요즘 세 사람을 케어한다고 그들과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으니까.

"내일 아침 식사 때는 시간 좀 비워주세요.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네, 정말 죄송해요!"

그날 밤.

평소와 같은 시간에 잠자리에 들어, 숙면을 취하고 있을 때였다.

움찔.

'살기?'

어디선가 미세한 살기가 느껴지자 눈이 번쩍 떠졌다.

스르릉-

나는 일단 검부터 뽑아 들었다.

그때 작게 들려오는 지든의 말소리.

"하, 그 개새끼를 어떻게 하지? 지금 당장이라도 죽여버리고 싶어. 넌 어때, 듀리크."

"나도 죽이고야 싶지. 하지만 건들 수가 없잖아. 그 녀석은 여신이 아끼는 놈이라고."

"일단 기절시킨 다음에 목을 매달아 버리자고. 그렇게 하면 놈이 자살을 했는지, 누구한테 살해당한 건지 어떻게 알 거야?"

어디서 느껴지는 살기인가 했더니, 지든과 듀리크가 나를 몰래 죽이기 위한 작당모의를 하고 있었다.

순간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진짜 미친 새끼들이네. 고작 그거 했다고 날 죽이려고 작당모의를 하고 있어?'

"난 찬성일세. 여신의 분노는 걱정하지 마시게. 오히려 녀석이 죽으면 여신은 우리에게 더욱 집착할 수밖에 없게 될 테니."

뒤이어 들려오는 찬경의 목소리.

말 수가 별로 없고, 과묵하기에 셋 중에서 그나마 나은 놈인 줄 알았는데, 녀석도 똑같은 인간이었다.

"크하하, 그렇게 된다면 우린 더 이상 눈치 볼 것 없이 생활해도 되겠는데? 당장 죽여버리자고!"

지든의 웃음소리와 함께 끼이익-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방 문이 열릴 때 나는 경첩 소리.

녀석들이 날 죽이러 오고 있었다.

────────────────────────────────────

────────────────────────────────────

16화. 신입 플레이어(3)

'역천자 칭호 적용.'

띠링!

[<신화업적:역천자>을 적용합니다.]

[칭호의 효과로 모든 스텟이 + 20% 상승합니다.]

나는 일단 특전부터 적용시켰다.

'상황이 좋지 않아.'

[이름 : 안우진(닉네임 : 렌)] [소속 : Team 투지]

[리그 : 하위리그]

[근력 : 30(+5)] [민첩 : 41(+7)] [체력 : 42(+7)]

[정신 : 105(+17)] [지력 : 14(+2)] [마력 : 0]

[각성 능력 : <초감각> <고급살기> <특급마나운용> <고급창술> <중급검술> <상급단검술> <상급투척술> <중급박투술> <하급치료술> <상급궁술>]

[보유 스킬(0/5) : 없음]

[업적 특전 : 모든 스텟 + 20%] [차원 특전 : 없음] [종족 특전 : 없음]

[남은 체력 : 53%]

젠장.

저 정도로 미친 새끼들이었을 줄이야.

설마 들어온 지 이틀만에 날 죽이려 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찬경, 지든, 듀리크 셋 다 나보다 스텟이 높은 플레이어들이고, 격전지는 아마도 내 방이 될 것이다.

가로 4미터, 세로 3미터의 조그만한 방.

그마저도 침대와 협탁, 책상 같은 가구들 때문에 더 좁아진 상태다.

그런데 이런 좁은 공간에서 저 셋의 협공을 막는다?

심지어 훈련이 끝나고 숙면을 취한 지 얼마 안 되서 체력도 별로 없는데?

'쉽지 않겠는데.'

녀석들이 복도에서 내 방으로 걸어오고 있다.

그러니 공터로 빠져나가는 것은 불가능.

나는 서둘러 침대 밑에서 콜로세움에 처음 들어왔을 때 지급받았던 방패부터 꺼내 들었다.

창을 쓸 순 없었다.

휘두를 공간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좁은 공간에서의 다수와의 싸움.

피할 공간도 없다.

결국 공격을 피하지 못하고 막아야 하는 상황이 자주 발생한다는 건데 그렇다면 방패는 필수였다.

"지금쯤이면 잠들었겠지?"

"안 자고 있어도 상관없지 않겠나. 어차피 상대는 이제 막 검을 잡아본 초보일세."

"하긴, 그것도 맞군요. 그럼 바로 들어가자고."

녀석들이 방 문 앞에 도착해서 작게 속삭였다.

이윽고 침묵 속에서 달칵! 하는 소리가 들리며 문이 열렸다.

그리고 마주치는 세 쌍의 눈빛.

"······우리 얘길 다 듣고 있었군."

내가 무장한 채 기다리고 있자, 듀리크가 작게 읊조렸다.

"상관없지. 안 그래도 저 새끼한테 자기가 왜 죽는 건지는 알려주고 싶었거든. 차라리 잘 됐어."

지든이 목을 좌우로 풀며 말했다.

"흠집을 내선 안 되네. 최대한 깔끔하게 처리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게."

그러자 찬경이 당부하듯 말했다.

'다행이야.'

좋지 않은 상황이지만 그나마 내게 유리한 점이 두 가지 있었다.

첫째는 녀석들이 방심하고 있다는 것.

내가 검과 방패를 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 사람은 그다지 긴장한 모습이 아니었다.

맨몸으로 싸우는 격투에서도 한순간에 훅 가는데, 하물며 검까지 들고 있는 상태에서 방심을 하고 있다는 건?

'죽여 달라고 목 빼놓고 있는 거나 다름이 없지.'

거기다가 놈들은 나를 생채기 하나 없이 제압하려고 마음먹은 상황.

물론 막상 자기들이 죽어 나가면 생포고 뭐고 검을 휘둘러대겠지만, 일단 처음 한 수 정도는 치명적인 일격을 가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굴 먼저 죽여야 할까.'

나는 일단 우선순위부터 정하기로 했다.

풍기는 기세로만 봤을 땐 찬경부터 먼저 죽이는 게 맞다.

고수들이 바글바글한 무림 출신에, 9전이나 경험한 베테랑.

아마 십중팔구 셋 중에서 가장 강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찬경을 우선순위에서 지워버렸다.

'상성만 봤을 땐 지든이야.'

찬경은 검을, 듀리크는 거대한 도끼를, 그리고 지든은 검과 방패를 들고 있다.

좁은 공간에서 벌어지는 난전 상황일 때 방패만큼 까다로운 게 없을 터.

녀석이 방패를 든 채 나를 구석으로 밀어 넣는다면 안 그래도 좁은 공간에서 더욱 최악의 상황이 연출될 수 있었다.

'지든부터 먼저 죽인다.'

우선순위를 정한 나는 놈들을 노려보았다.

마침 지든, 듀리크, 찬경 순으로 방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후후, 그렇게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마음 같아선 그 좆같은 가면을 벗긴 다음에 눈알부터 뽑아버리고 싶지만, 아쉽게도 널 편안하게 보내줘야 하거든."

지든이 검과 방패를 내린 채 여유롭게 걸어왔다.

내 공격 따위는 언제든지 막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은연중에 느껴졌다.

'지금!'

나는 순간적으로 지든에게 다가가 검을 찔러 넣었다.

"어딜!"

챙!

그러자 지든이 방패를 들어 올리며 내 검을 막아냈다.

하지만 내 공격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녀석이 방패를 들어 올리는 바람에 시야가 좁아진 사이, 내 방패로 녀석의 방패를 후려쳤다. 그러자 방패를 쥔 지든의 왼손이 뒤로 살짝 밀려났다.

그로 인해 나타난 조금의 틈.

나는 그 틈 안으로 다시 한번 검을 찔러 넣었다.

'잘 가라.'

띠링!

[<피의 회복> 능력으로 체력이 1% 회복됩니다.]

경기중이 아니다 보니까 킬 콜은 뜨지 않았지만, 체력을 1프로 회복했다는 알림창만으로도 지든이 죽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든! 제, 젠장! 이 개자식이!"

지든이 쓰러지자 듀리크와 찬경이 서둘러 방 안으로 들어왔다.

고작 세 명이 무장한 채 서 있을 뿐이지만 방이 꽉 찬 느낌이었다.

듀리크가 거대한 도끼를 든 채 왼쪽에서 당장이라도 나에게 달려들 기세였고, 찬경은 한층 더 깊어진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다.

지든이 순식간에 죽는 모습을 봐서인지 함부로 달려들진 않았다.

"듀리크, 방금 녀석의 움직임을 봤는가? 절대 검을 처음 잡아본 솜씨가 아닐세. 긴장하게."

"알겠소, 형님. 함께 합공합시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여신한텐 놈이 먼저 공격했다고 하면 될 것 아니요."

매일 몰려다니다 보니 어느새 호형호제하는 사이로까지 발전한 모양.

우리는 한참 동안 서로의 눈치를 보며 대치했다.

긴장했는지 한층 격렬해진 호흡, 빨라진 심장박동, 내 어깨선을 살피려는 듯 빠르게 움직이는 눈동자, 그리고 당장이라도 움직일 수 있도록 낮아진 자세까지.

'곧 공격해 들어오겠군.'

"죽어!"

내 생각이 끝까지 이어지기도 전에 듀리크가 빠른 속도로 내게 쇄도했다.

녀석의 거대한 도끼는 단숨에 날 두 동강 낼 기세였다.

팡!

나는 재빨리 곁에 있던 침대 협탁을 발로 차 녀석에게 밀어 넣었다. 그사이 오른쪽에서 날 향해 달려드는 찬경의 검을 방패로 막고, 검으로 녀석의 허벅지를 노렸다.

"헛!"

순간 화들짝 놀라며 뒤로 빠지는 찬경. 그와 교대라도 하듯 협탁을 치우고 다시 내게 달려드는 듀리크.

'젠장. 확실히 치고 빠지기가 안 되니까 쉽지 않은데.'

듀리크의 도끼를 피하며 빈틈으로 검을 찔러 넣으려고 했지만 그걸 알아챈 찬경이 빠르게 다가와 검을 휘둘렀다.

챙! 콰직! 챙! 챙! 쾅!

나는 방 안에 있는 테이블과, 박살 난 채 나동그라진 협탁을 이용해 계속해서 둘이 동시에 공격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았다.

덕분에 아직까진 두 명에게 동시에 공격당하는 상황이 벌어지지 않았지만 그것도 이젠 한계였다.

더 이상 침대 말고는 이용할 만한 가구가 존재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군. 찬경부터 처리해야겠어.'

듀리크가 앞에서 날 막아서고, 찬경이 뒤에서 빈틈을 찌르며 들어오는 상황.

듀리크를 죽일 기회가 여러 번 있었지만, 모두 찬경의 방해로 무산되고 말았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녀석들은 좁은 공간에서의 난전 경험이 없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좁은 공간에서는 무기를 크게 휘둘러선 안 된다.

애초에 크게 휘두를 공간이 나오지 않기도 하고, 잘못하면 동료가 다칠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짧고 간결하게 끊어칠 줄 알아야 하는데, 듀리크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덕분에 찬경은 내가 공격을 피하는 사이 노출된 빈틈을 노리고 들어오다가, 듀리크의 도끼에 흠칫 놀라며 피하기 바빴다.

보다 못한 찬경이 뒤에서 소리를 질렀다.

"이봐! 듀리크! 협공을 하자고 하지 않았나! 자네는 지금 나까지 죽일 셈인가? 제발 좀 보면서 도끼를 휘두르게!"

"미, 미안합니다. 형님!"

찬경의 타박에 듀리크가 당황하며 도끼를 거두어들였다. 지금부터라도 동작을 작게 유지하려는 것이다.

'빈틈!'

나는 그 틈에 듀리크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찬경이 급히 검을 뻗으며 품속으로 들어가는 나를 견제하려고 했지만, 내 방패에 막혀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리고······.

푸슉!

거구, 듀리크의 목에서 피가 흩뿌려졌다.

"커, 커헉······."

띠링!

[<피의 회복> 능력으로 체력이 1% 회복됩니다.]

"듀리크!"

챙!

듀리크가 양손으로 꿰뚫린 목을 부여잡는 사이, 나는 곧바로 당황하고 있는 찬경에게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찬경이 내 검을 뿌리치며 바닥에 엎어진 듀리크를 곁눈질로 살폈다.

"······."

"······."

순간 우리 둘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나는 마지막 남은 사냥감의 빈틈을 찾기에 여념이 없었고.

찬경은 내 실력에 놀라 당황한 듯 보였다.

"자네, 실력을 숨기고 있었군."

"글쎄. 숨긴 적은 없는 것 같은데. 그냥 당신 지레짐작이 아닌가?"

그러자 찬경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자네 말이 맞아. 그저 내 예상이었을 뿐이었지. 어떤가? 지금이라도 나와 화해하는 것이. 사실 지든이 자네에게 악감정이 많아서 한 손 보탠 것뿐이지, 나는 그대에게 아무런 유감이 없다네."

"······."

"현명하게 생각했으면 좋겠군. 그대가 아무리 강하다곤 하지만, 나까지 쓰러트리기엔 쉽지 않아 보이는데······."

찬경의 말에 나는 슬그머니 경계하는 자세를 풀었다.

그러자 내 몸짓을 더 이상 싸울 의향이 없다고 판단한 찬경도 검을 늘어뜨리며 낮췄던 자세를 원상태로 만들었다.

'멍청하긴.'

나는 그 틈에 다시 찬경에게 달려들었다.

내가 갑자기 공세를 펴자, 찬경이 당황하며 소리쳤다.

"이, 이게 무슨! 그렇게 보지 않았는데, 비겁한!"

찬경은 내 기습적인 공격에 주도권을 놓치긴 했지만, 그래도 제법 잘 막아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녀석에겐 불행하지만, 나는 바로 직전에 빅터라는 검의 달인과 생사결을 경험한 상황.

찬경도 검을 제법 쓰긴 하지만, 빅터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푹.

"끅······."

찬경은 복부가 꿰뚫린 채 허망하다는 표정으로 바닥에 쓰러졌다.

내가 설마 진짜로 살려줄 거라 생각했나?

그렇다면 날 한참 잘못 본 것이다.

언제 어디서 칼침을 놓을지 모르는 자를 내가 살려둘 리 없으니까.

"사, 사, 살려주시게. 부디 한 번만······. 나, 난 반드시 이뤄야 할 소원이······."

찬경은 안색이 새하얗게 질린 채 내게 빌었지만, 나는 가차 없이 녀석의 목을 베어버렸다.

띠링!

[<피의 회복> 능력으로 체력이 1% 회복됩니다.]

떼구르르-

이곳에 사연이 없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들을 가치도 없는 말이었다.

나는 검을 뽑으면, 목적을 다할 때까지 절대 검집에 넣지 않으니까.

그래서 검을 뽑을 땐 신중해야 한다.

'후, 겨우 끝났네.'

나는 검과 방패를 바닥에 떨어트리고 침대에 가서 털썩 앉았다.

[현재 시각 : 00:17:52]

격한 훈련을 끝내고 잠도 별로 자지 못한 상태에서 깨어나 싸워댔더니 힘이 쭉 빠졌다.

'하.'

방을 둘러본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온 사방에 가득한 핏자국. 부서지거나 깨진 가구들.

내 방에 성한 물건이라고는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침대마저도 피에 잠긴 상황이었으니까.

이 상태로는 오늘 잠은 다 잤다고 봐야 할 것이다.

방 안에서 피비린내가 진동을 했다.

'후, 이걸 언제 치우지.'

타다다닥-

그때 누군가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이 숙소 안에는 나와 이세연뿐.

'혹시 아세리안이 온 건가?'

그런 의문으로 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바라보고 있자 맨발로 식칼을 든 채 덜덜 떨고 있는 이세연의 모습이 나타났다.

문 앞에 선 그녀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 다행이다. 무사하셨······ 우웩."

그러더니 주변을 살펴보다 갑자기 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세 명의 거구가 피를 쏟으며 죽어 있는 모습은 보기 좋은 광경이 아니었으니까.

이해는 한다.

이해는······.

하.

피비린내에 토사물 냄새까지.

갑자기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

────────────────────────────────────

17화. 신입 플레이어(4)

아세리안은 고단했던 하루를 끝내고 자신의 성지로 돌아왔다.

'하아, 바쁘다 바빠. 오늘 하루도 고생 많았어!'

침대에 털썩 앉은 아세리안이 어깨를 부드럽게 톡, 톡 두드렸다.

팀에 고작 세 명의 플레이어가 더 들어왔을 뿐인데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다.

하지만 아세리안은 이렇게 바쁜 것이 좋았다.

'아직은 병아리들이지만, 분명 내가 최선을 다한다면 금방 성장할 거야.'

이 고단함이 결국 더 큰 보상으로 돌아올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처음에는 실망이 무척 컸다.

찬경, 지든, 듀리크는 그녀가 오랫동안 눈여겨 보고 있었지만, 포인트가 부족해서 데려오지 못했던 플레이어들.

그들을 데려올 수만 있다면 앞으로는 탄탄대로가 이어질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근데 꽝이었다니이이.'

아세리안이 침대 위에서 버둥거렸다.

막상 그들을 데려와 놓고 보니까 실망스러운 부분이 많았기 때문.

훈련의 커리큘럼을 반도 소화하지 못한 채 퍼져버릴 줄은 몰랐다.

같은 훈련을 어느 누군가는 그들보다 스텟이 한참 낮은 상태에서도 끝까지 완주했었는데.

'내일부터는 훈련의 강도를 낮춰야 하나?'

당장 내일부터 그들을 어떻게 훈련시켜야 할까 고민하자 머리가 아파왔다.

하지만 아세리안은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좋은 생각만 하자. 좋은 생각!'

좋은 생각을 하자고 마음 먹자 한 남자가 떠올랐다.

그러자 갑자기 배시시 웃음이 흘러나왔다.

'헤헤, 어디서 이런 복덩이가 굴러왔나 몰라?'

아세리안이 철퍼덕 침대에 엎드려 양 손바닥으로 턱을 받친 채 생각했다.

안우진.

자신의 첫 번째 플레이어.

아직 하위리그에서 두 경기밖에 뛰지 않았지만, 그를 보고 있으면 그런 확신이 들었다.

이 남자가 밑바닥에 있는 자신을 끌어올려 줄 것이라고.

이대로라면 멀지 않은 시기에 중급신으로 승급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후후, 어디 댓글이 얼마나 늘었나 볼까?'

아세리안은 요즘 일과를 끝내고 들어와서 커뮤니티를 보는 낙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커뮤니티에 들어가자 제일 먼저 최상단에 있는 베스트 게시글 3개가 눈에 들어왔다.

―2만 여 관중들의 손에 땀을 쥐게 했던, 단 한 명의 플레이어.

―추천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경기, 하위리그-블러드나이트176의 8경기.

―하위리그-블러드나이트176, 그 경기를 꼭 봤어야 하는 이유.

놀랍게도 모두 안우진이 뛰었던 경기의 게시글들.

조회수도 100만이 넘어가고 있었다.

아세리안은 그중 가장 위에 있는 게시글을 눌렀다.

―2만여 관중들의 손에 땀을 쥐게 했던, 단 한 명의 플레이어.

하위리그-블러드나이트176 경기에서 초신성이 등장했다. 주인공은 팀 '투지' 소속의 플레이어 '렌'.

처음 들어보는 팀명과 닉네임에 고개를 갸웃하는 신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처음 등장한 플레이어가 8경기, 붉은 깃발전에서 깃발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내며 최초의 기록 업적을 세웠다. 그것도 무려 1,000명이나 참가하는 대형 경기에서.

붉은 깃발전의 룰과 미션을 모르는 이는 존재하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그렇기에 경기 내용만 간략하게 소개하겠다.

처음 아레나에서 돋보인 건 단연 팀 '몬스터'의 '붉은 거미' 였다. 컨텐더이자 은신술의 대가인 붉은 거미는 한 곳에 매복해 있다가 지나가는 플레이어들을 습격하는 방식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하지만 경기 시작 30분 후, 붉은 깃발의 주인이 정해지면서 경기 분위기가 급변했다. 그 대상은 모두 알다시피 팀 '투지'의 '렌' 이었다.

그는 검은색 로브를 머리까지 덮은 채 하얀 가면을 쓰고 있어서 어두울 때 보면 얼굴만 둥둥 떠다니는 레이스를 연상케 하는 플레이어였다.

활을 사용하는 궁수였기에, 붉은 깃발전의 특성상 금방 다른 플레이어들에게 둘러싸여 깃발을 빼앗길 줄 알았는데, 그때부터 렌의 무대가 시작되었다.

붉은 깃발의 표식이 보이는 순간부터, 아레나에 존재하는 900명의 플레이어들이 렌에게 달려들었지만, 그 어느 누구도 그에게서 깃발을 빼앗지 못했다.

그는 시야가 넓고, 민첩했으며, 체력이 뛰어났다. 근, 원거리를 따지지 않고 상대를 사냥할 줄 아는 '진짜 사냥꾼' 이었다.

물론 위기가 없던 것은 아니다. 개인전으로 출전했지만, 파티를 이루고 깃발을 빼앗으려는 플레이어들도 있었고, 준 컨텐더 급 플레이어들의 습격도 있었다.

특히 마지막에는 컨텐더인 '붉은 거미'를 처치한 빅터라는 검객을 만나 죽기 직전까지 밀리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렌은 제한 시간이 끝날 때까지 살아남았고, 블러드나이트176의 주인공이 되었다.

플레이어 렌은 이 경기로 인해 퍼포먼스 오브 더 블러드와 파이트 오브 더 블러드, 두 개의 보너스에 동시에 선정되었다.

두 개의 보너스에 동시에 선정되는 경우는 하위리그에서 10번밖에 존재하지 않았고, 그 경기들이 모두 베스트 전당에 올랐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경기가 얼마나 박진감 넘쳤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아직 이 경기를 보지 않은 신이 있다면, 반드시 포인트로 다시보기를 결제하여 시청하길 바란다.

└진짜 미쳤더라. 이게 막 스텟이 엄청 높아서 플레이어들 찢고 다닌 경기가 아니라, 죽을랑 말랑 죽을랑 말랑하면서도 끝까지 버텨낸 경기라 더 대박이었음ㅋㅋㅋㅋㅋㅋ

└다시보기로 보고왔더니 소름돋네;; 다른걸 다 떠나서 넓은 시야와 판단력이 개쩔었다···.

└투지? 처음 들어보는데 신생팀인가 보네. 그런 팀에서 저런 네임드가 나오다니ㄷㄷ

└ㄴㄴ 아직 네임드는 아님. 딱 봐도 스텟이 낮아보이잖음.

└응, 그 스텟 낮아보이는 녀석이 스텟 높다는 놈들 다 찢고다님~

└ㅅㅂ 나 그날 직관하고 왔다. 그날 관객 2만명 다 바지에 지렸더라.

└진짜 그날 생각만해도 소름돋음 ㅋㅋㅋㅋ 마지막에는 다들 경기에 집중하느라 한마디도 안해서 엄청 조용했음 ㅋㅋㅋㅋㅋ 그러다가 경기 끝날 때 다같이 소리지르는데 와;; 다시 생각해도 소름돋넼ㅋㅋㅋ

'후후, 우리 안우진님이 좀 대단하긴 하지.'

아세리안은 침대에 엎드린 채 발을 동동 굴렀다.

눈부신 재능.

그런 재능을 가지고 있음에도 엄청난 노력을 쏟아붓는 노력파.

그 힘든 훈련을 우는소리 한 번 하지 않고 소화해내는 악바리.

그 외에 분석 능력이라던가, 판단력, 과감함, 성실함 등.

우리 안우진님은 뭐 하나 빠지는 곳이 없었다.

'1,200 포인트에 이런 플레이어를 영입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지!'

찬경과 지든, 듀리크를 영입하는데 쓴 돈이 3만 포인트 정도 되니, 거의 거저나 다름없는 가격이었다.

솔직히 지금 심정으로는······ 10만 포인트를 준다고 해도 팔지 않을 것 같았다.

'좋았어. 안우진님을 중심으로 조금씩 팀을 키워 나가는 거야!'

아세리안이 그런 생각을 하며 이만 잠자리에 들려고 할 때였다.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띠링!

[소속 플레이어 '안우진' 이 긴급 호출 중입니다.]

[소속 플레이어 '안우진' 이 긴급 호출 중입니다.]

[소속 플레이어 '안우진' 이 긴급 호출 중입니다.]

[소속 플레이어 '안우진' 이 긴급 호출 중입니다.]

[소속 플레이어 '안우진' 이 긴급 호출 중입니다.]

무려 5번의 긴급 호출.

순간 아세리안은 심장이 철렁하는 느낌이었다.

이런 식으로 긴급 호출이 왔다면 무슨 일이 생겼다는 뜻.

아세리안은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팜으로 공간이동을 했다.

헐레벌떡 숙소 안으로 들어서자 싸늘한 공기 사이로 피 냄새가 묻어나왔다.

타다다다닥-

아세리안은 여신이라는 품위도 잊은 채 서둘러 안우진의 방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나타나는 세 개의 시신과 핏빛의 향연.

그 안에서 안우진만이 고요하게 앉아 있었다.

"대, 대체······."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희망찬 내일을 꿈꾸고 있었는데.

앞으로는 계속 좋은 일밖에 없을 줄 알았는데.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진 거지?

왜, 이곳에서 이 세 사람이 싸늘하게 죽어 있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이게."

그래서 물어보았다.

이 진실을 알고 있을, 태연하게 앉아 있는.

"어떻게 된 일이죠."

한 남자에게.

차가운 표정의 아세리안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그녀는 언제나 에너지가 넘쳤고, 항상 밝게 웃고 있었으니까.

뭐, 충분히 오해할 만한 상황이긴 했다.

내가 새로 들어온 세 사람을 탐탁지 않게 생각한다는 것 정도는 아세리안도 알고 있었을 테니.

하지만 나는 잘못한 게 없다.

무척 떳떳한 입장.

애초에 그녀가 그들에 대해 말할 시간도 주지 않았으니까.

"왜 대답을 못 하시죠? 지금. 제가.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고 있지 않나요."

차가운 냉기가 스며든 아세리안의 목소리가 귓가에 꽂힌다.

그때 곁에서 손을 벌벌 떨고 있던 이세연이 입을 열었다.

"그, 제, 제가 말씀드릴게요."

이세연은 그동안 알게 모르게 세 사람이 나에게 시비를 걸어왔던 것이며, 자신을 덮치려고 했던 일, 내가 구해줬던 일, 그리고 오늘도 찾아오진 않을까 두려움에 떨고 있는데 세 사람이 무기를 든 채 내 방으로 향했던 일들을 아세리안에게 말했다.

아세리안은 무표정한 얼굴로 이야기를 듣다가 점점 미간이 찌푸려지더니, 이내 아랫입술을 깨물며 내 곁에 털썩 앉았다.

그녀는 작게 '다행이야. 안우진님 대신 그들이 죽어서 정말 다행이야.' 라고 읊조리고 있었다. 그러더니 벌떡 일어나 나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숙였다.

"미, 미안해요······."

아까와 달리 한껏 풀이 죽은 얼굴.

그 모습을 보자 나도 마음이 약해졌다.

솔직히 그녀의 잘못이 아니었으니까.

팀에 들어온 지 고작 이틀 만에 이런 깽판을 벌일 미친놈들이란 걸 그녀가 어떻게 알겠는가.

그렇기에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 다 같이 내 방을 치우느라 꼬박 밤을 새워야 했다. 나는 시체를 치우고, 두 사람은 내 방에 가득 튄 피를 닦아냈다.

나 혼자 정리해 보겠다고 했는데, 이세연과 아세리안이 꼭 도와주겠다고 해서 셋이서 정리를 했다.

"잘못했으면 세 사람한테 안우진님이 죽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까 열받아서 안 되겠어요. 마음 같아선 세 사람을 다시 살려내 죽여버리고 싶을 지경이에요."

공터 한쪽에 구덩이라도 파서 묻으려고 했는데, 아세리안이 나를 말렸다.

그리곤 꼴도 보기 싫다며 세 사람의 육체를 신성 마법으로 불태워버렸다.

새벽 내내 청소를 마치고, 다시 평소와 같은 식사 시간.

아세리안은 여전히 침울한 표정으로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있었고, 이세연은······.

오히려 기분이 좋아 보였다.

하긴.

'언제 자기를 덮칠지 모르는 놈들이 사라졌으니까.'

식사를 마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 좋은 일이 있었긴 했지만, 그건 그거고 훈련은 훈련이다.

프로는 하기 싫을 때도 하는 게 프로니까.

나는 식당을 나서면서 아세리안을 힐끗 쳐다봤다.

그녀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테이블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팜을 쑥대밭으로 만든 사건이 있고 나서 1주일이란 시간이 흘렀다.

아세리안은 그 이후로 나를 더욱 신경 쓰기 시작했다.

오히려 다른 플레이어에 대한 영입의 마음을 접은 듯 보였다.

그렇다고 랜덤 뽑기를 통해 신입 플레이어를 받아들이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나 하나만 잘 키우자는 생각인 것 같았다.

'그건 그거대로 골치가 아픈데.'

물론 나에게 올인한다는 건 그것대로 좋은 일이지만, 문제가 있었다.

결국 더 높은 효율의 훈련을 하려면 건물의 등급이 올라가야 한다는 것.

한마디로 많은 포인트가 필요하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그걸 나 혼자서 경기를 뛰어 수수료로 충당하기엔 부족한 부분이 많았다.

나 이외의 다른 플레이어들이 들어와 같이 성장해 나가는 게 가장 좋은 일이긴 한데.

흠.

어떻게 할까.

하루 종일 고민했지만 결론은 한 가지 밖에 나오지 않았다.

'차라리 이렇게 된 거, 정말 내게 맞는 완벽한 팜을 만들어야겠어.'

그렇게 해서 내게 딱 맞는 완벽한 팜 꾸미기 1단계가 시작되었다.

나는 요즘, 자주 멍을 때리고 있는 아세리안에게 다가가 입을 열었다.

"랜덤 뽑기를 하죠. 신입 플레이어들을 잘 육성시킬 수 있도록 팁을 드리겠습니다."

────────────────────────────────────

────────────────────────────────────

18화. 신입 플레이어(5)

"신입 플레이어를 키워보란 말씀이신가요?"

"예. 아세리안님은 이미 빠르게 육성하는 법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구태여 비싼 포인트 들여가며 검증된 자원을 뽑을 필요가 없죠."

"하지만, 스텟이 높다고 꼭 잘 싸우는 것도 아니잖아요."

아세리안은 신입 플레이어에 대해 무척 부정적인 것 같았다.

뭐,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긴 하다.

신입 플레이어가 하위리그 첫 경기에서 살아남을 확률은 3% 내외.

결국, 100명을 뽑아봤자 3명만 살아남는다는 뜻이다.

그것도 첫 경기에 한해서.

'열심히 키워놨는데, 다 죽는 것만큼 힘 빠지는 일도 없지.'

하지만 랜덤 뽑기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그렇다고 계속 비싼 돈 들여가며 플레이어들을 영입해 올 생각이십니까? 애초에 그들은 멀쩡한 자원이 아닙니다."

"그러면요?"

"한번 입장 바꿔서 생각해 보시죠. 아세리안님이라면 잘 싸우고 있고, 팜에도 잘 녹아든 플레이어를 판매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잘 싸우곤 있는데 늘 사건을 일으키는 플레이어를 판매하시겠습니까."

"······."

"이번 일을 통해 깨닫는 게 좀 있었을 텐데요."

아세리안이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팀이 성장하려면 많은 숫자의 플레이어를 굴리는 것은 필연적입니다. 그런데 영입을 통해 성장시키는 게 어렵다면, 결국 신입 플레이어를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죠."

"하아,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뭘 하든 해낼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있었는데······. 과연 신입 플레이어들을 받아들인다면 그들이 잘 해낼 수 있을까요? 결국······ 결국, 살아남는 플레이어들은 스텟이 높은 플레이어가 아니잖아요."

"그래서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신입 플레이어들을 잘 육성시킬 수 있도록 팁을 드리겠다고. 그 팁은 단지 스텟 적인 부분에만 국한된 게 아닙니다."

그러자 아세리안이 허리를 바로 세웠다. 내 말의 뜻을 이해한 것이다.

어느새 초롱초롱해진 눈빛.

"그 말씀은······ 테크닉 부분까지 하신 말씀이신 거죠?"

"테크닉이라고 하긴 그렇고. 잘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해두죠."

"자, 잠시만요. 내가 노트랑 볼펜을 어디다 뒀더라?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아으, 이게 도대체 어디 간 거야?"

아세리안이 허둥지둥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훨씬 보기 좋네.'

마치 시든 꽃에 듬뿍 물을 준 느낌.

뭔가, 오랜만에 그녀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날 저녁, 아세리안은 랜덤 뽑기를 통해 4명의 신입 플레이어를 받아들였다.

일주일 후.

"좋은 아침입니다, 안우진님."

네 명의 신입 플레이어들이 체력 단련실로 들어오며 나에게 인사를 건넸다.

아세리안이 그들에게 나를 어떻게 설명했는지는 모르지만, 나와 눈이 마주치면 항상 쭈뼛대기 바빴다.

뭐, 대충 엄청 무서운 사람이라고 했겠지.

"예."

나는 가볍게 인사를 받은 채 스트레칭을 집중했다.

그러자 병아리들도 한쪽에 자리를 잡은 채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나쁘지 않네.'

이번에 들어온 플레이어들은 남자만 네 명.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면 어쩌나 했는데, 모두들 지금까진 잘 지내고 있었다.

특별히 인성에 문제가 있는 사람도 없는 것 같고.

"자, 모두들 식사도 맛있게 끝냈으니 스트레칭부터 시작하죠!"

오늘도 얼굴에 웃음꽃이 핀 채 화이팅이 넘치는 아세리안.

지금이야 저렇지만, 신입들이 막 들어왔을 땐 울상이었다.

―어떡하죠, 안우진님······ 저들 중에 검을 잡아본 사람이 한 명도 없대요. 한 명은 농부였다고 그러고, 한 명은 대장장이, 상인, 아이돌 가수······.

―좋네요.

―좋다뇨? 제 말을 제대로 들으신 것 맞아요? 검을 잡아본 사람이 한 명도 없다니까요?

―차라리 잘 됐죠. 어중간하게 배워서 나쁜 습관이 들어있을 바에야, 애초에 새로운 도화지 위에 그리는 게 더 빠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어지는 내 말에 아세리안도 곰곰이 생각하더니, 차라리 잘 됐다는 듯 박수를 짝! 하고 쳤다.

그렇게 시작된 그들과의 훈련.

모두들 서툴지만, 아세리안의 훈련을 잘 따라와 주었다.

덕분에 아세리안도 지난 일의 상처를 지워내고, 오히려 요즘은 더 밝아진 것 같달까.

'잘됐네.'

신입 플레이어들을 뽑자고 말하길 잘한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스트레칭을 마무리하고 근력 운동을 시작하려 할 때였다.

"안우진님, 오늘 무슨 훈련 하시나요?"

"근력이요."

"아······ 오늘 혹시 체력 훈련으로 바꾸시면 안 될까요?"

아세리안이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고 눈을 찡긋했다.

"할 순 있습니다만, 뭐 때문에 그러시죠?"

"아, 신입 플레이어분들한테 시범이 필요할 것 같아서요."

"시범이라면······?"

"안우진님이 짜두신 체력 훈련 강도가 제법 높잖아요. 그래서 애초에 완주할 수 없다는 생각을 깔고 들어가는 것 같아서요. 한 번이라도 완주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저들도 완주할 수 있지 않을까요?"

아세리안의 말에 나는 내심 감탄했다.

오, 생각보다 연구를 많이 하나 보네.

인간이란 생물은 참 단순해서, 불가능해 보이는 것들도 실제로 누군가 해내는 것을 보는 순간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바뀐다.

그래서 아세리안이 내게 이런 부탁을 하는 것이리라.

"뭐, 할 수는 있습니다. 근데 제가 하기엔 강도가 너무 낮아서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 부분은 제가 다 해결할 수 있으니까요!"

아세리안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근력 훈련을 위해 집었던 덤벨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 사이 아세리안은 신입 플레이어들에게 가서 말했다.

"오늘은 특별히, 우리 안우진님께서 여러분이 할 체력 훈련의 시범을 보이실 거예요! 자, 모두 박수!"

짝짝짝짝짝-

'이 분위기 참 적응이 안 되네.'

저번 주와 너무 극과 극인 분위기라 더 그런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의 변화가 훨씬 좋았다.

원하는 대로 분위기를 만들 수 있다는 것.

이게 신입 플레이어를 받았을 때의 가장 큰 장점이었다.

"안우진님은 여러분보다 스텟이 더 높거든요? 그래서 여러 가지 제약을 좀 걸 거예요."

아세리안이 내게 방독면을 내밀었다.

'······이걸 끼고 하라고?'

내가 오늘 신입 플레이어들의 훈련으로 짜 둔 프로그램은 머피 라고 불리는 크로스핏에서도 초고강도로 분류되는 훈련.

3킬로미터 달리기 - 턱걸이 100개 - 푸쉬업 200개 - 스쿼트 300개 - 버피 테스트 100개를 이어서 하는 것이었다.

세트로 나눠서 하는 건 한번 뒤처지는 순간 포기하게 되지만, 머피로 하면 중간에 좀 쉬더라도 끝까지 완주할 수 있으니까.

근데, 저 프로그램을 방독면까지 끼고 하면 내가 해낼 수 있을까······?

'어쩔 수 없지.'

나는 아세리안이 건네주는 방독면을 받아서 얼굴에 썼다.

다행히 하얀 가면은 굳이 벗지 않아도 방독면을 쓸 수 있도록 알아서 두께를 줄여주었다. 거의 맨얼굴에 하얀색 종이를 덮어놓은 느낌.

"앗, 잠시만요!"

막 훈련을 시작하려고 자세를 잡자 아세리안이 나를 만류했다.

그리곤 모래주머니를 질질 끌고 와 내 팔다리에 매달았다.

"······이것도 끼고 합니까?"

한 개당 거의 3킬로그램 가량, 합치면 12킬로그램이나 나가는 엄청난 무게였다.

방독면을 끼고 해도 될까 말까인데, 이것까지 추가하라고?

하지만 불행하게도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아세리안은 벨트를 가지고 오더니 거기에 쇳덩이를 주렁주렁 달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가오더니 허리에 매달았다.

'미친. 무게가 몇이야?'

착용하는 순간 몸이 훅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몇 키로 입니까?"

"15킬로그램이에요."

아세리안이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너무 과하지 않습니까?"

"이 정도는 되야 저들도 할 수 있다는 걸 알죠. 안우진님은 충분히 해낼 수 있어요. 자, 화이팅!"

이거 할 수 있는 거 맞지······?

그렇다고 신입들도 있는데 여기서 꼴사납게 완주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도 없고.

'······역천자 칭호 적용.'

나는 고작 체력 훈련을 하는데 특전을 킬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아흔여덟, 아흔아홉, 백! 그만!"

"헉, 허억, 헉, 헉, 허억."

아세리안의 외침에 나는 무너지듯이 바닥에 철퍼덕하고 누웠다.

눈앞이 핑 돌았다.

[남은 체력 : 17%]

내가 그 상태로 꼼작도 못 하자 아세리안이 서둘러 다가와 방독면을 벗기고, 사지에 묶인 모래주머니를 풀었다.

"잠깐 엉덩이 좀 들어보세요."

찰그락- 짤랑- 땡그랑-

발뒤꿈치로 밀어 허리를 들자 그녀가 벨트에 고정되어 있던 쇳덩이들을 풀었다.

후.

이제야 살 것 같네.

"결국 이걸 30분 만에 해내셨네요. 온몸에 30킬로그램을 두르고 30분 안에 끝내는 게 가능할 줄이야."

아세리안이 감탄했다는 듯 손뼉을 짝, 짝 쳤다.

"안우진님이 하는 거 잘 봤죠? 여러분도 충분히 완주하실 수 있어요."

"네! 저희도 할 수 있습니다!"

"좋아요! 모두들 그럼 달리기부터 시작하세요!"

네 명의 신입 플레이어들이 나란히 체력 단련장 트랙을 뛰기 시작했다.

그 사이 아세리안은 내게 다가와 고사리 같은 손으로 어깨를 주물러댔다.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 안우진님."

"후······. 저는 휴식의 방에 가서 좀 쉬겠습니다."

"네. 아, 참. 오후에 신입 플레이어들에게 무기술 교육하는 거 아시죠? 만약 못 일어나시면 제가 깨우러 갈게요."

"······."

"아하하, 그런 표정 짓지 마셔요. 어차피 이 네 명만 잘 키우시면 안우진님이 고생할 일도 끝이잖아요."

젠장.

내가 아세리안에게 제안한 것은 네트워크 시스템이다.

내 밑으로 네 명의 신입 플레이어들을 받는다.

그러면 스텟 훈련은 아세리안이 맡고, 무기술이나 대련, 그리고 콜로세움에 참가했을 때 꼭 필요한 몇 가지 훈련을 내가 맡는다.

그렇게 육성시켜서 어느 정도 완성이 되면, 그들 밑으로 또 각각 4명씩 새로 뽑는다. 그래서 그들에게 또다시 무기술 등등의 훈련을 맡긴다.

이런 식으로 피라미드 구조로 내려가다 보면 어느새 수십, 수백 명의 플레이어들이 육성된다.

결국 난 처음 네 명만 잘 교육시키면 되는 셈.

'어쩔 수 없지.'

이런 시스템은 사실, 탁월한 효과를 지녔지만 쉽게 적용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신생팀에서밖에 시도할 수 없는 구조니까.

그리고 첫 스타트를 잘못 끊으면 밑으로 줄줄이 어긋나기 시작한다.

한마디로 적용하기엔 제약이 많은 시스템이랄까.

'뭐, 단점만 있는 건 아니지.'

이렇게 하면 결국 내 입맛에 맞게 플레이어들을 육성시킬 수 있다.

그리고 나는 단순히 싸우는 기술만 알려줄 것이 아니다.

분위기.

이 팜에서는 모두 바른 인성을 갖고, 향상심을 가진 채 훈련에 집중한다.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갈 수 있기에 장기적으로 보면 내게 큰 도움이 되는 구조였다.

"오후에 뵙죠."

그래서 나는 비척비척 걸어가면서도 아세리안에게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여러분이 아직 어떤 무기에 맞는지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첫 경기에서 살아남으려면 반드시 거쳐 가야 하는 무기가 있습니다. 바로 글라디우스와 방패죠."

"넵."

"사실 초보일수록 창이 유리합니다. 리치가 길기 때문에 유효타를 넣기 무척 유리하거든요. 그런데도 제가 글라디우스와 방패를 추천한 이유가 있습니다. 싸움의 가장 기본은 방어고, 한 번이라도 방어에 성공하는 순간 상대에겐 틈이 발생할 수밖에 없죠. 그리고 그 틈을 찌르고 들어가기엔 글라디우스만 한 무기가 없습니다."

"아······."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은 일단 검방술로 시작할 겁니다. 질문 있는 분 있습니까?"

내 말에 네 명의 신입 플레이어들이 고개를 저었다.

"그럼 앞으로의 일정을 설명하도록 하죠. 여러분은 먼저 검 하나에만 익숙해지는 훈련을 할 겁니다. 그리고 나서는 방패 하나에만 익숙해지는 훈련을 하고, 그 뒤에 검과 방패를 함께 들고 다니며 훈련을 할 겁니다. 오늘은 검에 익숙해지는 것부터 시작하죠."

네 명의 플레이어들이 허수아비 앞에 주욱 늘어섰다.

이들이 오늘 할 훈련은 찌르기와 내려치기, 베기 각각 500회씩.

글라디우스가 찌르기에 특화된 무기이지만, 그렇다고 내려치기와 베기를 아예 안 하는 것도 아니다. 상황에 따라 사용할 수도 있는 만큼, 속성교육보단 기초를 탄탄하게 잡고 나가는 것이 좋다는 생각에 내려치기와 베기도 훈련에 추가했다.

"내리치는 순간에 숨을 멈춰야 몸의 떨림을 잡을 수 있습니다. 그래야 검이 바르게 나아갈 수 있죠."

"다리를 어깨 넓이로 비스듬히 벌리세요. 하체가 안정되어야 합니다."

"집중! 한 번을 휘두르더라도 제대로 휘둘러야 합니다. 기초가 바로 서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집중하세요."

나는 네 명의 플레이어를 매의 눈으로 관찰하며 그때그때 필요한 조언을 해 주었다.

하지만 조언을 해 주면 당장은 나아졌지만, 금세 집중력을 잃고 검 끝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보다 못한 내가 플레이어들에게 말했다.

"지금부터 횟수를 세지 않겠습니다. 500개를 다 채우지 않아도 되니까 1분에 한 번씩만 휘두르세요."

"1분에 한 번씩이요······?"

"네, 천천히. 빠르게 휘두르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정확하게 원하는 곳에 검을 찔러넣는 게 중요하죠. 그러니까 지금부터 1분에 한 번씩 휘두르세요."

그러자 어설프지만 신입들의 검 끝이 흔들리는 경우가 확연하게 줄어들었다.

차라리 잘 됐다.

이렇게 천천히 휘두를수록 어디가 어떻게 움직이고, 어떤 메커니즘으로 검 끝이 목표물로 향하는지 알 수 있으······.

'아.'

말하는 순간 어떤 생각이 뇌리에 번득였다.

혹시, 아직도 내 검 끝이 흔들리는 것에 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닐까.

나도 모르는 어떤 부분에서 검로를 막아서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나는 신입들이 제대로 하는지 감독하는 것을 내팽개친 채 검을 들고 허수아비 앞에 섰다.

'처음부터 해보자.'

숨을 참자 순식간에 몸의 떨림이 잦아들었다.

왼발을 천천히 한 발짝 내딛고, 검을 쥔 오른팔을 뒤로 젖혔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안우진님······?"

내가 교육하는 동안 뒤에서 열심히 수업 내용을 필기하던 아세리안이 갑작스러운 내 행동에 어리둥절하다는 뉘앙스를 풍겼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의문을 풀어줄 여유가 없었다.

뭔가 잡힐 듯 말 듯 한 이 느낌이 먼저였다.

내디딘 발의 축을 회전시키며 무릎, 골반, 허리를 연속으로 천천히 틀었다.

이 회전의 힘이 오른팔에 전해져서······.

'이게 문제였군.'

오른쪽 팔꿈치가 허리에서 떨어져 있었다.

분명 정확한 자세를 습관처럼 만들어놨었는데.

회귀하고 육체스텟이 달라지면서 어느새 자세가 무너진 것이다.

하.

나는 팔꿈치가 떨어지는 걸 최대한 의식하며 힘차게 허리를 돌렸다.

빡!

검 끝이 정확하게 허수아비의 심장 부분을 찌르고 있었다.

띠링!

[<상급검술>을 각성하셨습니다.]

'하.'

수업을 하는 와중에 오히려 내가 배움을 얻고 말았다.

────────────────────────────────────

────────────────────────────────────

19화. 신입 플레이어(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