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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장. 오랜만입니다 (4)

오랜만이라는 말.

특별히 하대도 아니었으나 그렇다 하여 존대도 아니었다.

아무리 르메인의 앞이었다 해도 또 아무리 란델과 플란츠가 있는 곳이었다 해도 실리케에게 그 이상의 높임을 할 수가 없었던 탓이다.

그 이유를 모를 이는 이 곳에 없었으므로 칼리안을 탓하는 이는 없었다. 물론 실리케도 그 중 한 명이었다.

시종이 빼 주는 의자에 앉은 실리케가 곧바로 입을 열었다.

"그래. 오랜만이구나."

칼리안에게 여전히 하대를 하니 실리케 역시 예의를 차리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딱히 존대를 기대하지도 않았던 칼리안은 신경쓰지 않고 식사를 이어나갔다.

"무슨 일이지."

칼리안을 쳐다보는 실리케를 향해 르메인이 물었다. 무미건조한 목소리였다.

실리케는 이러한 홀대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초대되지 않은 식사 자리에 찾아올 때부터 이미 각오했을 것이다. 실리케가 르메인을 보며 말했다.

"얼굴이 많이 좋아지셨습니다, 전하."

"보던 것을 안 보게 되었으니."

르메인은 굳이 가릴 것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런데 지금 다시 보이는군."

르메인이 꺼내든 것이라 믿기 어려울 정도로 적대적인 말이었다.

르메인의 눈에 안 보이다 보이게 된 실리케는 노골적으로 불편함을 드러내는 저 말에도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마치 남의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인 것이다. 그러더니 칼리안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3왕자가 잘 다녀왔는지 그것이 궁금해서 왔어요."

그리고 칼리안을 향해 웃는 얼굴을 꺼내 보였다.

르메인은 마치 칼리안에게로 향하는 실리케의 시선을 가로채듯 말했다.

"굳이 그것을 확인하러 온 것인가."

"탈이 많던 아이였으니까요."

탈이 많았다니.

친부와 계모의 기싸움을 조용히 듣고 있던 칼리안의 눈썹 끝이 잠시 움직였다.

저 정도의 음해에 기분이 나빠져서는 아니었다. 평생 일으킨 탈과 궁 밖을 나갔던 잠깐 사이에 벌인 탈 중에 어떤 것이 더 많은지 가늠이 어려웠던 탓이다.

'네가 부리려던 두 형제가 모두 나로 인해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면 그때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칼리안이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 르메인이 조용하지만 위엄 있는 소리로 경고의 말을 보냈다.

"실리케. 왕자에 대한 말을 신중히 꺼내도록."

실리케는 가벼운 말실수였다는 듯이 웃었다. 칼리안은 일상적인 안부인사를 들은 사람처럼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보시다시피 잘 다녀왔습니다."

"그리 보이는구나."

"앓고 갔던 감기가 워낙 독했던지라. 밖에서는 그만큼 큰 탈을 줄 것이 없더군요."

실리케의 독을 언급하자 르메인의 얼굴이 다소 경직됐다.

아무도 입을 열지 못할 시간이 잠시 흘렀다. 그 뒤에는 실리케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것 참. 다행이구나."

"덕분입니다. 워낙 저에게 신경을 써주시니."

칼리안이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칼리안의 대답에 플란츠가 웃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그리고 실리케는 아주 잠시동안 웃음을 지웠다.

더는 말싸움을 하고 싶지 않으니 이만 나가달라는 말이 칼리안의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때문에 칼리안은 물잔을 들어 물과 말을 함께 삼켜냈다. 들어오라 한 것이 르메인이었으니 칼리안이 나가라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칼리안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실리케가 이번에는 르메인 쪽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전하."

칼리안은 질렸다는 표정을 그대로 지어보였다.

란델 쪽에서 한숨 소리가 들렸다. 슬슬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는 모양이었다. 물론 실리케는 신경쓰지 않았다.

"지그프리드의 땅에서 놀라운 일이 있었다 하던데. 혹시 들으셨나요?"

르메인이 대답 없이 실리케를 쳐다봤다.

실리케가 자상한 어머니와 같은 얼굴이 되어 칼리안을 보았다.

"상서로운 일이 있었다며 사람들의 칭찬이 헤이시아 궁에까지 들어오니, 정말 놀랍고도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단다."

"기쁘셨다니 다행입니다."

칼리안이 마음 속으로 실소했다. 무슨 말을 꺼내려 저렇게 거창한 칭찬을 입에 담는지 얼추 예상이 되었다. 실리케의 시선이 다시 르메인을 향했다.

"그런데 함께 들려오는 말이 있다기에 그것을 여쭤보고 싶네요."

시스파니안의 둥지에서 있었던 일과 묶여 있는 소문은 딱 하나뿐이었다. 적당히 운을 뗀 실리케가 르메인의 푸른 눈을 노려보듯 쳐다보며 꺼내지 말아야 할 소리를 입 밖에 냈다.

"정말로 다음 왕세자로 칼리안 저 아이를 생각하고 계시는 것인지. 그것을 알려주세요."

칼리안의 눈이 가늘어졌다.

정확히 칼리안이 예상한 바로 그 말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눈에 보이는 것이 없구나. 실리케.'

왕세자.

세 명의 왕자가 있는 이 자리에서 그 말은 하나의 금기어와도 같았다. 실리케가 그것을 꺼내놓은 것이다. 그것도 하필 칼리안을 걸고 넘어지면서.

르메인이 아무 말 없이 실리케를 쳐다봤다.

저 말에 르메인이 무슨 대답을 하겠는가.

그렇다 할 수도 아니라 할 수도 심지어 대답 없이 실리케를 내쫓을 수도 없다. 긍정의 뜻으로 받아들여질 테니까.

일단은 이 쯤에서 저 질문을 멈추게 하려 칼리안이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르메인 쪽에서 여유로운 대답이 흘러나왔다.

"얼마 전에 마나실 경이 그런 말을 하더군."

'스승님?'

의외의 이름이 이 자리에서 나오자 칼리안이 나서려던 것을 참고 르메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제일 마음에 안 드는 놈부터 카밀론에 보내라. 그렇게 하면 알아서 사라질 것이다, 라고. 허나 모두가 소중한 나의 아들인 것을. 그 때문에 내 고민이 깊었는데."

그렇게 말한 르메인의 눈이 왕자들을 한번씩 훑었다.

곧 르메인의 푸른 눈동자가 실리케를 깊이 응시했다. 르메인은 아무런 감정도 들어가지 않은 목소리로 말을 맺었다.

"지금 그대가 고민을 덜어주려 하고 있군. 고맙게도."

실리케가 고개를 숙였다.

일그러진 얼굴을 감출 부채가 없어서였다.

칼리안도 고개를 숙였다.

웃음을 참을 수가 없어서였다.

'아아.'

앨런 마나실의 입에 세렌티의 영광 있으라!

* * *

르메인을 궁지에 몰아넣을 생각으로 왔던 길이다.

칼리안을 세자위에 올리겠다 하면 편애하는 것이냐며 반발하려 했고 올리지 않겠다 하면 그 말을 약속해달라 요구하려 했다. 대답을 미룬다면 기사단 카에라를 움직인 이유를 추궁하려 했다.

그런데 르메인은 그냥 플란츠를 세자위에 올리겠다는 말로 오히려 실리케를 협박해왔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상황인지.

"더 할 말이 없다면 나가도록. 정말로 결정을 내리기 전에."

그렇게 말한 르메인이 문 근처에 선 시종들을 향해 손짓을 보냈고 시종들이 문을 열었다. 그 이상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 실리케에게 도움이 될 리가 없었다. 괜한 걸음을 하게 된 실리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신의 오만함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겠지만 나를 이렇게 대한 것을 후회할 날이 올거예요. 반드시."

전 왕비 아이샤가 죽은 뒤 브리센의 힘을 얻으려 실리케를 왕비로 들였던 그 날부터 이미 후회만 하고 있었다는 말을 르메인은 굳이 전해주지 않았다.

여전한 태도의 르메인을 뒤로한 채 실리케가 다시 또각 또각 소리를 내며 밖으로 나갔다.

'브리센 변경백을 돌려보내고 온 것이 천만다행이군.'

실리케의 뒷모습을 보던 칼리안이 이런 생각을 했다.

이런 상황에 그레이까지 수도에 들어왔다면 당장 내전이 벌어져도 이상할 것이 없었으니까.

어쨌거나 앨런 마나실에게 잘 배운 말 한마디로 실리케를 내보낸 르메인이 고개를 돌려 플란츠를 살폈다. 그리고 실리케를 대할 때와는 판이하게 달라진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너에게 악의가 있어 한 말이 아니니라. 왕비와 너를 같은 선에서 보고 있지 않으니 오해 말거라."

실리케에게 했던 이야기에 혹시라도 플란츠가 신경을 쓸까봐 우려한 것이다. 플란츠가 담담하게 말을 받았다.

"압니다."

그 대답에 고개를 끄덕여보인 르메인은 가라앉은 분위기를 둘러보는 듯한 눈을 했다.

"너희들의 백부가 어찌 지내고 있는지 모두 알 것이다."

칼리안의 백부라 함은 곧 르메인의 친형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가 지금 어떻게 지내는지는 칼리안만 빼고 다들 아는 모양이었다. 둘의 표정이 그리 좋지 않았다.

베른은 타국 국왕의 형이 어떻게 되었는지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옛 칼리안은 자신이 왕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으므로 르메인이 어떻게 왕위에 올랐는지나 남은 형제가 어떻게 되었는지에는 일부러 관심을 두지 않았다. 관심을 가져봐야 자신의 어두운 미래만 미리 알게 되는 꼴이었으니까.

'얀에게 물어봐야겠네.'

그리고 지금의 칼리안은 르메인에게도 형이 있었다는 것은 알았으나 그 사람이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까지 관심을 둘 만큼 여유롭지를 않았다.

"나는 너희들 중 그런 삶을 살아가게 될 이가 없기를 바란다. 같은 일이 되풀이되지는 않았으면 좋겠구나."

그렇게 말을 마친 르메인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식사를 더 이어나갈 분위기가 아니었으므로 왕자들도 마찬가지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 * *

연회장 밖에서 기다리던 중 실리케가 들어갔음을 알게 된 얀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왔다.

"석찬은 잘 하셨습니까?"

"응. 별 일 없었으니 걱정하지 마."

이 말을 듣고서야 안심하는 얀을 보며 칼리안이 웃었다.

잠시 뒤, 가장 늦게 체르밀에 도착한 칼리안이 말했다.

"잠깐 걷자. 소화가 안돼."

얀은 칼리안이 키가 크기 시작하면서 얼마나 많은 양을 먹고 잘 소화해내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얀은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냐는 표정 대신 알겠다는 말만 하며 칼리안의 옆에서 나란히 걸었다.

오늘만 두 번째로 호수 옆을 걸어가는 동안 칼리안이 조금 전 르메인이 전했던 말을 들려줬다.

"전하의 형님이 어떻게 되셨는지, 혹시 알아?"

"그것이······."

조금 복잡한 표정이 된 얀이 대답을 이었다.

"본래 세자위에서 밀려난 왕자들은 스무 살이 넘으면 카이리시스를 떠납니다. 자신의 영지를 하사받고 그 곳에서 지내요. 사병을 거느리지 못하고 왕실에서 병사들을 보내준다는 것과 카이리시스에 닷새 이상 머물지 못한다는 것을 빼면 별다른 제약이 없어요."

그것은 싸움 없이 세자위를 받지 못한 다른 왕자들에 대한 것이었다.

"그건 나도 알아. 그런데 전하께서 굳이 말씀을 하셨으면 이번에는 결과가 조금 달랐다는 뜻인 것 같은데."

"네. 그랬어요."

역시나 얀이 다시 입을 열어 설명을 이어나갔다.

"사실 과거에도 그렇게 여생을 보낸 왕자들은 그리 많지 않으셨어요. 대부분은 형제가 왕이 된 이후 광장에 레니시타 잎이 깔리거나······."

참수형이나 교수형에 처해진다는 뜻이다.

섣불리 말을 꺼내기 어려운 주제였으니 얀이 잠시 말을 멈췄다가 입을 열었다.

"외딴 곳에 갇혀 평생을 보냅니다."

"외딴 곳이라."

"선왕께서는 시스파니안의 축복으로도 고쳐지지 않는 병을 앓았다고 합니다. 때문에 일찍부터 왕세자를 결정했고, 그 분이 지금 전하세요."

"그랬지."

"왕세자위가 결정된 직후에 전하의 형님이신 아스난 님께서 그 일에 반기를 들었고, 아스난 님은 지금 지그프리드령보다 더 남쪽에 있는 베레카 협곡의 깊은 곳에 지어진 탑에 계십니다."

그 말을 들은 칼리안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미래를 걱정하는 것으로 보였던지 얀이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마세요. 왕자님께서 카밀론에 들어가지 못하시면 저희 집으로 모셔갈 생각이니까요."

당당하게 꺼내놓는 얀의 계획에 칼리안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되려면 지그프리드는 공작령이 아니라 왕국이 되어야 할 텐데."

카이리스에 독립을 선언하고 전쟁이라도 벌이지 않는 이상은 왕세자위에서 밀려난 왕자를 데리고 살 수 없을 테니 말이다.

"못할 것 있겠습니까."

"너무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것 아냐?"

악의 없이 오로지 칼리안만 생각하여 해주는 말에, 칼리안이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튼 전하께서는 형제들이 서로 피 튀는 싸움이나 하다 죽거나 갇혀 살게 되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라는 말을 해주신 거겠네."

"가능한 일일까요."

잠시 가늠해보던 칼리안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평화로운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겠지."

지금 저 둘과 사이좋게 지낸다니.

꿈에서도 이뤄지기 어려울 말이다.

그렇게 칼리안이 잠시동안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 왕자님."

얀의 조용한 목소리가 칼리안을 불러세웠다.

얀을 쳐다보니 그 시선이 칼리안의 허리춤에 닿아 있었다.

얀의 눈길을 따라간 칼리안의 눈이 날카롭게 변했다. 칼리안의 허리춤 정확히는 재킷의 주머니 안에서 붉은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속에 든 것이 무엇인지 칼리안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엘프 루카로부터 받아왔던 검은 조약돌이었다. 시스파니안이 지니고 있으라 했기 때문에 버릇처럼 항상 주머니에 넣어두고 다녔던 것이었으나 지금처럼 빛이 나는 것은 한 번도 보지 못했었다.

[실드]

갑작스러운 상황에 칼리안이 긴장하며 얀의 앞에 실드 하나를 만들었다. 혹시라도 폭발 같은 일이 벌어질까봐 걱정한 것이다. 곧 칼리안은 조심스러운 손길로 조약돌을 꺼내려다 다시 한번 미간을 찌푸렸다.

정원의 한 구석 장미 나무 아래 자라난 작은 꽃가지.

이 쌀쌀한 날에 홀로 피어있는 붉은 장미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단순한 꽃이었다면 그저 이상하게 생각하고 넘겼을 것이다.

작은 꽃이 참 늦게도 피었구나 하고 지나쳤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으므로 칼리안의 입에서 의문 가득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왜?"

장미는 조약돌과 똑같은 색의 빛을 내고 있었다.

칼리안의 눈과도 닮은 피같이 붉은 빛을.

제14장. 오랜만입니다 (5)

- 엘프 시아, 장미, 조약돌, 시간의 축, 시스파니안.

그리고 세렌티.

순식간에 떠오르는 여러 단어들을 뇌리에 새긴 칼리안이 한 발을 뗐다. 그러자 얀이 나서며 말했다.

"제가 살펴볼게요. 위험하니 물러나 계세요."

무슨 용기인지는 몰라도 얀이 이런 말을 했고 칼리안은 고개만 가로저었다. 그리고 한 걸음씩 뒤로 걸었다.

대여섯 걸음을 물러서자 조약돌의 빛이 사라졌다. 물론 꽃의 빛도 사라졌다.

다시 앞으로 몇 걸음.

꽃과 돌이 함께 빛난다.

칼리안은 곧 장미 정원을 한바퀴 돌며 주위를 살폈다. 하지만 같은 빛을 내는 것은 찾지 못했다.

같은 꽃이 더 없음을 확인한 칼리안이 다시 본래 서 있던 곳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신중한 걸음으로 꽃 앞으로 걸어가 왼손에는 돌을 든 채 오른손을 내밀어 꽃잎을 건드렸다.

그러자

- 파스스······.

붉은 꽃잎이 순식간에 시들더니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와 함께 조약돌의 빛도 사라졌다.

생각지 못한 모습에 섣불리 손을 댔다는 것을 깨달은 칼리안이 당혹스러운 소리를 냈다.

"이런."

떨어진 꽃잎은 곧 검게 타들어간 재와 같이 바스러져 공기 중으로 흩어져 버렸다.

마치 멈추어 놓았던 시간이 한 순간에 흐른 것 같다고 칼리안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다 무의식적으로 떠오른 그 생각의 꼬리를 잡아챘다.

'시간.'

장미가 언제 피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만약.

"만약 오래 전부터 피어 있던 것이라면."

그렇게 가정한 칼리안의 눈이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남들보다 한 발 앞선 시간의 말을 듣고 대답하던 시아.

그리고 시간을 멈추어 둔 것처럼 오랫동안 피어 있던 꽃.

"역시, 틀어진 시간을 바로잡는 것인가."

그렇게 생각하던 칼리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만약 시간을 바로잡는다면 가장 먼저 바로잡혀야 할 것은 칼리안 자신이 아닌가. 그런 칼리안이 멀쩡히 서서 이 곳에 있으니 지금 떠올린 결론은 정답이 아닐 가능성이 높았다.

- 그녀는 네가 조급하게 굴지 않기를 바란다.

시스파니안의 음성이 기억을 헤집고 올라왔다.

그것이 주는 답답함 때문에 칼리안은 치미는 욕지거리를 집어넣으려 아주 오랫동안 눈을 감았다 떴다.

"눈 앞에서 시간이 흘러갔는데 조급하게 굴지 말라니요."

그리고 냉소하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 * *

앨런은 따로 집사나 하인을 두지 않았다.

어지간한 것은 마법으로 대충 해결할 수 있었던데다, 마법사들이 으레 그렇듯이 집에 외부인이 드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는 이유가 컸다.

그러다보니 카이리시스에서 앨런이 고용한 사람은 딱 한명. 마부 오스카 뿐이었다.

"마나실 님 오늘은 귀가가 빠르시네요."

벌써 반년 가까이 앨런의 유명한 자개 마차를 몰고 있는 오스카가 이렇게 말하며 친근해보이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빠르다 해도 이미 어둠이 내려앉은 뒤였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새벽이 아닌 밤 공기를 맡으며 집에 돌아가려는 길이었다. 그나마도 르메인이 왕자들과 석찬을 가지기로 하지 않았으면 언감생심 꿈도 못 꾸었을 일이리라.

오스카의 인사에 앨런이 그와 비슷하게 웃으며 말했다.

"빨리 도망가세."

"네? 도망이라니요?"

오스카가 놀라서 물었고 앨런은 대답 대신 일단 마차에 올랐다. 마부석 뒤의 들창 너머로 어딘가 신난 듯한 앨런의 목소리가 전해져왔다.

"전하께서 석찬에 가셨다네. 그 사이에 대강대강 정리해두고 몰래 도망쳐 나오는 길이니 얼른 가야 하네."

분명 르메인은 석찬 이후 마법사단에 대한 일을 마저 하자는 말을 했었다. 그리고 앨런은 그 말을 못들은 척 급한 일만 대충 마무리한 뒤 이렇게 빠져나온 것이었다.

자신이 없어진 것을 알면 르메인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괜스레 우쭐해진 마음에 앨런의 입이 다시 열렸다.

"오늘 리베른에 살던 며느리와 손녀가 도착했네. 전하께서는 어찌 그리도 무심하신지. 이런 날은 알아서 집에 가보라 하는 것이 도리 아닌가? 늙은이 부려먹는 것에 아주 재미가 드셨으니."

오스카가 큰 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

"그러셨군요. 알겠습니다. 얼른 도망가겠습니다."

오스카는 곧 말의 고삐를 고정시킨 끈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앨런이 한숨을 쉬었다.

마차를 향해 누군가 황급히 달려오고 있음을 알아차린 것이다.

르메인이 보낸 사람이 아니면 집에 가려는 앨런을 붙들러 올 이가 없었다. 때문에 앨런이 입을 열어 구시렁거렸다.

"아니, 대체 밥을 어디다 말아드시고 왔기에 벌써 아셨나?"

"네?"

앨런에게 달려오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아직 눈치채지 못한 마부가 되물었고 앨런은 대답 없이 다시 한번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곧 멀리서 황급히 앨런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나실 경, 기다려 주십시오. 전하께서 찾으십니다."

그제야 앨런의 한숨과 푸념 소리를 이해한 오스카가 들창 너머로 말을 전했다.

"마나실 님. 아무래도 도망 못가시겠습니다."

결국 앨런은 빨리 출발하지 못한 것을 조금 미안해하는 오스카를 뒤로 하고 터덜터덜 아르피아 궁으로 되돌아와야 했다.

르메인을 만나면 꼭 한 소리를 해 줘야지. 그런 다짐을 하면서.

그런데 시종이 앨런을 안내한 것은 집무실이 아니었다.

아르피아 궁의 후원 한 가운데에서 익숙한 기운 하나가 멀뚱히 있는 것이 느껴졌으므로 앨런은 눈썹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아드님이 끊으신 것을 대신 드시나."

또 술을 마시자는 것이다. 그것도, 이런 쌀쌀한 밤에.

앨런이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그리고 더 걸을 것 없이 손가락 한 번을 움직여 르메인의 바로 앞으로 워프했다. 술잔에 술을 따르려던 르메인이 슬쩍 고개를 드는 것이 보였다.

"이렇게 오는 것을 보니 마법사가 맞기는 맞군."

얀이 그랬던 것처럼 꽤 놀라지 않을까 했는데 의외로 무덤덤하다. 재미가 사라진 앨런이 툴툴거리며 말했다.

"이런 날 밖에 앉아 술 드시면 입 돌아갑니다."

그리고는 손을 튕겨 르메인 주변의 온도를 조금 올렸다. 몸이 따뜻해진 것을 느낀 르메인의 입에서 피식 웃는 소리가 났다.

"역시 술 상대로 마법사만한 이가 없지."

르메인이 자신의 맞은편 바닥을 손으로 툭 쳤다.

다른 말 없이 르메인의 손이 닿은 곳에 털썩 앉은 앨런이 르메인의 손에서 술병을 건네 받아 술을 한 잔 따라주었다. 그리곤 그 앞에 놓인 빈 잔에 자신의 것도 따랐다.

세 왕자와의 저녁을 말아먹고 온 뒤에 갑자기 술이라니.

무슨 일이 있는지 묻는 대신 앨런이 르메인의 잔에 자신의 잔을 부딪히며 말했다.

"지난 것을 생각해보아야 속만 아픕니다."

"사람 속 들여다보는 마법도 있나."

"그런 것이 있겠습니까."

신통방통한 앨런의 눈치가 어디 칼리안에게만 쓰이겠는가. 멍하니 먼 곳을 보던 르메인이 고개를 돌려 앨런을 쳐다봤다.

"뻔한 일이지요. 모두가 성인이 된 왕자들 셋을 한꺼번에 보고 왔으니, 이런 자리가 앞으로 얼마나 더 있을지 착잡하셨을 것 아닙니까. 경쟁에서 밀릴 두 놈을 걱정하다보니 먼 곳에 갇힌 형 생각도 나고 실리케를 들인 것이 후회도 되고 하신 것이겠지요."

그러게 하나만 낳을 것이지 왕자를 셋이나 만들어 놓고는 왜 후회를 하는 것인지.

잠깐 이런 생각을 하던 앨런은 칼리안이 막내라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휘휘 저었다. 르메인이 셋을 낳았으니 자신이 그런 어여쁜 제자를 만난 것이 아닌가.

"어떻게 참 잘도 알아보는군."

"그냥 앞길만 보고 사시지요."

그 속을 어떻게 알았는지를 알려주지 않는 것으로 오늘의 이른 귀가를 막은 르메인에 대한 복수를 마친 앨런이 이렇게 말했다.

그 후로 둘은 말 없이 술잔만 주고 받았다.

개울에 흐르는 물 소리가 익숙해져 풀벌레 소리가 더 크게 느껴질 때 쯤 앨런이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세 왕자님을 다 합쳐도 체이스 하나 못 따라간다 생각했습니다."

"세크리티아의 왕세자 말인가."

르메인은 뜬금 없이 왜 남의 자식들을 비교하고 있느냐는 말 대신 조용히 말을 받았다.

앨런은 고개를 끄덕끄덕했고 르메인이 피식 웃었다.

"그 뱀 같은 성정의 데블란 밑에서 어떻게 그런 아들이 났는지 신기하다고, 나도 그리 생각한 적이 있었지."

"네. 아무튼 전하의 세 아드님이 체이스만큼 대단한 인물은 아니지만 그래도 두고 보니 영 천치들은 아니더군요. 다들 알아서 제 살길은 마련해두고 움직일테니 걱정 마시지요."

그 말을 들은 르메인의 눈이 잠시 앨런을 응시했다.

제 살길 마련하기 힘들어보이는 한 놈이 있었기 때문이다. 곧 르메인이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만에 하나 칼리안이 길을 잃게 되거든."

그렇게 나온 말이 한동안 이어지지 않았다. 르메인은 술을 한 모금 더 마신 뒤 말을 이었다.

"경에게 부탁을 하고 싶네."

만약 칼리안이 왕세자위에 앉지 못하면 칼리안을 살려서 도망쳐 달라는 말이었다. 굳이 그것을 앨런에게 부탁하는 이유는 하나였다. 칼리안이 밀려나는 상황이라면 그때 자신이 살아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대라면 그런 사정을 잘 알테고 또 칼리안을 굉장히 아끼니 이런 부탁 정도야 들어줄 것 같은데."

그런데 진지한 고민 끝에 건넨 르메인의 말을 들은 앨런이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가 전하의 막내 아드님을 챙겨갈 일이 있을는지."

"그것이 무슨 뜻인가."

앨런이 거절의 의사를 보였다고 생각한 르메인의 얼굴이 크게 찌푸려졌다. 그것을 본 앨런이 장난기 다분한 눈을 하며 물었다.

"새끼 코끼리 한 마리가 전하의 막내 아드님을 얼마나 애지중지하는지 아십니까?"

그리고 이어진 말에 앨런의 워프에도 담담했던 르메인의 눈이 치켜떠졌다.

칼리안이 밀려나게 된다면 칼리안이 아니라 나머지 두 왕자의 살길과 카이리스의 앞길을 걱정해야 된다는 것을, 그러니 앨런은 자신이 나설 필요가 없다는 의미로 고개를 가로저었다는 것을 알게 된 까닭이었다.

결국 술이 완전히 깨버렸다.

* * *

칼리안은 이틀 동안 조찬에 나가지 않았다.

여독이 아직 풀리지 않았다는 진심과 핑계가 반반 섞인 이유를 댔다.

"왕자님. 혹시 내일도 조찬을 물릴 생각이십니까?"

결국 이틀 째 되는 날 밤, 얀이 우려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실리케가 왕세자를 언급하고 간 것과 연관을 짓는다거나 혹은 칼리안의 건강을 염려하는 소리가 나온다거나 하는 것들을 걱정해서 하는 말이었다.

"내일까지만. 모레부터는 갈게."

아침 하나 마음대로 못 하는 생활로 돌아온 것을 여실히 깨닫거나 불평하는 대신 칼리안은 이렇게만 대답했다.

얀도 칼리안이 왜 조찬에 나서지 않는지 알고 있었으므로 다른 잔소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게 전해둘게요. 그럼 저도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주무시기 전에 창문 꼭 닫으시고요."

"알았어."

그렇게 끝인사를 전한 얀이 밖으로 나가 문을 잠근 뒤 혼자 남은 칼리안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나왔다.

"후우."

칼리안이 조찬에 나가지 않는 이유는 딱 하나.

란델 때문이었다.

칼리안은 빛난 것이 단지 장미꽃이었다는 이유만으로 란델을 연관지었다. 논리적인 근거는 단 하나도 없었다. 그저 란델이 가꾸는 정원이었던 까닭이었다.

조약돌과 란델이 관련되어 있으리라는 의심까지는 아니었다. 단지 장미의 시간을 멈춰놓은 것이 혹시 란델은 아니었을까 하는 것에 생각이 미쳤을 뿐이었다. 신관들이 태어나는 텐실의 피가 란델에게도 흐르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뜬구름 잡는 의심을 뒷받침할 근거가 아무것도 없으니 우선은 란델의 행보를 지켜보아야겠다는 결정을 내린 칼리안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을 하는 과정에서 무의식적으로 란델을 의심하는 눈길을 보낼까봐 일단 란델과 마주치지 않으려 하고 있었다. 사람 마음을 꿰뚫는 것이 앨런과 비슷한 수준이 아니던가?

그렇게 잠자리에 누워 이런 저런 생각을 이어가던 칼리안은 곧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 동이 트기 직전의 어두운 새벽.

- 사락······.

바람에 커튼이 흔들리는 소리가 나고 감겨 있던 칼리안의 눈이 스르륵 떠졌다.

'침입자.'

누군가의 소리 죽인 발걸음을 느꼈다.

그리고 얀은 분명 방문을 잠궜다.

얀이 가진 열쇠가 아닌 다른 것으로 열면 시스파니안이 만든 경보 마법이 발동된다. 그러니 방문으로 누군가 들어온 것은 아니었다.

그러다 답답한 기분에 창을 열어둔 채로 잠에 들었다는 것이 생각났다. 창문의 경보 마법이 발동되지 않은 것이다.

'얀의 말을 잘 들었어야 했는데. 귀찮은 일이 생기겠네.'

칼리안이 살짝 웃었다.

그리고 여전히 누운 채로 침입자가 가까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벌써부터 이리 환영해주니. 몸 둘 바를 모르겠네.'

실리케. 혹은 란델.

과연 누가 보낸 손님인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잠시 후 침실 커튼을 조용히 젖히는 소리가 났다.

이제 완연히 가까워진 침입자의 기색을 살피던 칼리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익숙한, 하지만 이렇게 찾아올 것이라 예상하지 못한 사람의 기운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칼리안은 '검'을 만들려던 것을 미루고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리고 날카롭게 빛나는 눈으로 침입자를 쳐다보며 말했다.

"뭡니까."

침입자는 얼굴을 가리지도 않은 채였다.

그리고 그는 칼리안이 깨어난 것에 놀라지 않았다. 경계심 가득한 칼리안의 말에도 그리 신경을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는 칼리안의 눈을 마주보며 낮은 목소리를 냈다.

"마법이나 좀 쓴다더니, 바람결에 깰 줄을 알고."

그것이 누구든 이 시간에 창문으로 들어온 이를 반겨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때문에 칼리안은 불쾌한 낯빛을 굳이 가리지 않으며 입을 열었다.

"왜 오셨는지 물은 겁니다. 이런 시간에, 이런 식으로."

눈빛부터 목소리까지 온 몸으로 적대감을 드러내는 칼리안을 보며 손님의 한쪽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제14장. 오랜만입니다 (6)

도대체.

초대 받지 않은 자리에 마음대로 걸음하는 것은 실리케를 닮은 것인가?

방문으로 나가 긴 복도를 지나 계단을 내려온 뒤 다시 긴 복도를 걸어와 방문을 두드리는 대신, 창문으로 나와 바로 아래 창문으로 들어오는 효율적인 방법으로 칼리안을 찾은 사람.

바로 윗방 사는 플란츠였다.

아무리 형제라지만 어떻게 일국의 왕자가 잠들어 있는 방에 침입할 생각을 한단 말인가. 당장 기사라도 불러내면 어찌하려고.

하는 생각을 하다가 체르밀 궁의 기사들도 결국 브리센 가문의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때문에 칼리안은 짜증 섞인 작은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여전히 날이 선 목소리로 세 번째의 같은 질문을 했다.

"말을 나누러 오신 겁니까. 싸움을 나누러 오신 겁니까."

플란츠의 대답은 짧았다.

"말."

사람들이 모두 잠들어 있을 가장 어두운 시간에 나눠야 할 말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도 다름아닌 칼리안과 플란츠의 사이에서.

때문에 칼리안은 플란츠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 뒤에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나 불을 켜고 가운을 걸쳐 입었다. 플란츠와 '말'이라는 것을 한번 나눠보기로 한 것이다.

"차는 못 드리고 술은 없습니다."

칼리안의 말에 플란츠가 피식 웃었고 칼리안은 테라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새벽 공기가 찼지만 어차피 칼리안은 기온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플란츠야 뭐, 감기에 걸리든지 말든지.

플란츠가 뒤따라 나와 테라스의 의자에 앉자 칼리안이 잠시 주문을 외운 뒤 마력을 운용했다.

[사일런트]

굳이 플란츠의 앞에서 마법을 쓴 것은 물론 이 조용한 새벽에 둘의 대화 소리가 밖에 새어나갈까 우려한 까닭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플란츠가 칼리안의 정체를 그만 의심해줬으면 하는 마음이 더 컸기 때문이었다.

플란츠는 사일런트의 반투명한 막을 본 뒤에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칼리안이 그런 플란츠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말했다.

"하실 말씀, 듣겠습니다."

이런 칼리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장미가 사라졌던데. 네 짓일테지."

칼리안이 잠시 웃었다.

어쩐지 범상치 않은 꽃인 듯 하더니.

꽃을 보았을 때 칼리안이 예상했던 것처럼 꽃은 계속 시들지 않고 피어 있었던 것 같았다. 그것도 플란츠가 관심을 가졌을 만큼 오랫동안.

직접 살려뒀던 장미도 아닌 마당에 장미를 없앤 것까지 부인할 필요는 없었으므로 칼리안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이런 날에 홀로 피어있는 것이 신기하여 자세히 살펴보다 그리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오히려 플란츠를 추궁하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꽤 아끼시는 꽃이었나 보군요. 꽃 한 송이 사라졌다고 이런 무례한 방법으로 찾아오시다니."

그 말에 플란츠가 멀리 장미 정원 쪽을 쳐다보며 대답했다.

"한 번 보고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꽃 한 송이 없앴다고 이렇게 꼭꼭 숨어 있는 것을 보니 그냥 꽃이 아니라는 걸 아우님도 눈치를 챈 것 같은데."

플란츠는 단순히 그 꽃이 오랫동안 피어 있었기 때문에 이상하다고 여겼던 듯 했다. 칼리안이 이상함을 느낀 것과는 이유가 조금 달랐다.

그리고 또 하나 칼리안이 조찬에 나가지 않는 이유도 얼추 눈치챈 모양이었다. 물론 칼리안이 그 이유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거나 플란츠의 말을 인정할 필요는 없었다.

때문에 칼리안은 플란츠의 생각을 정정해주듯 대답했다.

"제 시종이 말을 전했을 텐데요. 여독이 풀리지 않아 못 간 겁니다. 꽃 때문이 아니라."

그 말에 플란츠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장미 정원 쪽에 보내두었던 시선 그대로 입을 열었다.

"란델 형님에게 정원에 한 달이 넘도록 시들지 않는 장미가 있는 것을 아는지 물었는데 모르는 일이라 대답하더군."

"한 달······."

칼리안이 잠시 놀란 눈을 했고 플란츠는 대답 대신 말을 맺었다.

"신관의 능력이 아니라면 그렇게 오랫동안 생명을 이어둘 수는 없는데. 신관이라는 점을 란델 형님께서 왜 숨기는지를 모르겠어서."

그냥 밝히면 되는 것을 숨기니 그 뒤에 뭔가 더 있으리라 여겨지는 것이다. 때문에 플란츠는 란델을 향한 의심을 지울 수가 없었다.

칼리안도 장미를 살려둔 것이 란델이라 생각은 하고 있었다.

둘의 차이가 있다면 플란츠는 의심되는 것을 곧바로 물어보았다는 것이었고 칼리안은 자신이 의구심을 가졌다는 사실을 감추려 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것을 곧이곧대로 물어보셨다는 겁니까."

이 말을 들은 플란츠가 고개를 끄덕이자 칼리안이 실소하며 말했다.

"안다, 내가 했다. 이런 대답을 기대하고 물으신 겁니까."

"건방지기는."

칼리안의 비꼼에 플란츠가 한 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사실 의심되는 것을 저렇게 노골적으로 물어보면 누가 인정하겠는가. 거칠 것 없는 그 행동이 실로 플란츠답다고 해야 할지, 어리숙하다고 해야 할지.

새벽 바람에 흐트러진 머리를 잠시 쓸어 넘긴 플란츠가 다시 입을 열었다. 칼리안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닌 다른 이야기였다.

"형님에게는 내가 태워버렸다 했으니 그렇게 알라는 말, 전해주려고."

"그 말을 해주려고 오셨다는 말씀이십니까."

칼리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플란츠가 그 장미를 자신이 없앴다는 핑계를 대줬단 말이라는 것을 알아듣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칼리안도 의심을 하게 되었음을 란델이 알지 못하도록 나서줬다는 그 행동을 칼리안은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째서입니까."

"의심하는 것을 안 들키려고 조찬에 안 나온 것 아니던가."

"제 말은."

칼리안이 매서운 눈으로 플란츠를 쳐다봤다.

"왜 형님이 란델 형님의 눈에서 저를 가려주셨는지를 물어보는 겁니다. 차라리 저까지 경계하는 것이 형님께는 더 좋은 일일 텐데요. 게다가 형님께서는 저도 의심하고 계셨잖습니까."

그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플란츠는 칼리안을 도울 사람이 아니다. 플란츠가 옛 칼리안을 얼마나 모질게 대했는지 잘 알고 있으니 장담할 수 있었다. 플란츠는 절대로 칼리안에게 좋은 일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형님과 저. 그럴만한 사이가 아닌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기억은 하나보지."

그렇게 말한 플란츠가 잠깐 웃음소리를 냈다.

역시 여전히 칼리안의 정체를 의심하고 있는 듯한 태도였다. 의심이 아니라 확신일지도 몰랐다.

칼리안은 기억에 대해 대답하는 대신 다시 물었다.

"왜 나서서 숨겨줬다는 것인지, 그것을 물었습니다."

그 말에 플란츠가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칼리안이 그런 플란츠를 쳐다봤다. 플란츠의 눈이 헤이시아 궁이 있는 곳을 향했다.

실리케가, 있는 곳이다.

"무슨 힘을 가지고 있든 어차피 란델 형님은 이기지 못할 테니까. 나처럼."

"란델 형님이 형님의 어머니에게 이길 수가 없으니 저를 돕기로 했다는 말씀으로 들리는데요."

칼리안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것은 곧 칼리안이 실리케를 축출해주기를 바란다는 소리이기도 했다.

"지금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정확히 아시는 것이 맞습니까."

칼리안의 질문에 플란츠는 고개를 돌려 칼리안을 쳐다봤다.

동생이 암살되고 형이 타국으로 도망치고 아버지가 의문사했다. 그렇게 비어있는 왕좌에 오른 뒤에는 미친 왕이라 불렸다.

그것을 기억하는 칼리안이 플란츠의 눈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리고 그 안에 담긴 것을 보게 되었다.

그렇게 한동안의 시간이 지나고 난 뒤.

칼리안이 나지막한 목소리를 냈다.

"형님은······ 카밀론 궁에 가실 생각이 없으셨던 거군요."

플란츠는 대답하지 않는 것으로 답을 전했다.

* * *

지금 칼리안이 원치 않던 두 번째 삶을 살고 있는 것은 플란츠가 일으킨 전쟁이 그 원인이 된 것이나 다름 없었다.

그리고 옛 칼리안이 그런 삶을 살다 간 이유에도 플란츠의 멸시와 괴롭힘이 상당한 몫을 했었다.

때문에 칼리안은 플란츠와의 대화 한 번으로 그에 대한 증오를 모두 털어내지는 못했다. 실리케에게 권력을 가져다 줄 도구 이상의 취급을 받지 못했던 플란츠에 대한 연민을 느끼거나 동정심을 가져 줄 만큼 착한 사람도 되지 못했다.

다만 아르센 헤르츠에게 그랬던 것처럼 과거에 있었던 악연의 그림자를 플란츠에게 투영시키진 않겠다 하는 정도로는 마음을 바꿨다. 거기까지가 지금의 칼리안이 해줄 수 있는 가장 큰 이해였다.

그리고 그렇게 플란츠를 '이해'해주기로 한 것의 결과로 칼리안은 빠지려 했던 조찬에 참석하기로 마음을 바꿨다.

결국 플란츠가 그 새벽에 찾아와 하고자 한 말은 란델이 의심하지 않도록 알아서 눈을 가려 놨으니 괜히 몸을 사려서 의심받지 말고 아침밥 먹으러 오라는 것이었으니까.

'밥 먹으라는 말 뒤에 붙여둔 것들이 너무 많았지만.'

조찬에 가겠다는 칼리안의 말에 얀이 좋아하며 준비를 서둘렀다. 때문에 평소보다 조금 일찍 준비가 끝났다. 물론 플란츠가 창문 너머로 다시 사라진 이후 칼리안이 다시 잠들지 않았던 탓도 있었다.

아무튼 그렇게 시간이 남게 되었으니 칼리안은 아직까지도 방 한 구석에 잔뜩 쌓여 있는 선물 상자를 보며 얀에게 말했다.

"선물 지금 보자. 확인 하고 조찬에 가면 될 것 같아."

이틀간 생각에 빠져 있느라 미뤄뒀던 선물을 열어보려는 것이다. 다만 플란츠와의 대화를 통해 떠올린 것이 있었으므로 칼리안은 두 개의 조건을 더했다.

"기사 가문, 그리고 적당히 믿을 만한 이들이 보낸 선물만."

"마법사가 아니라 기사 가문 말씀이십니까?"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덧붙였다.

"지금 당장 능력이 있는 마법사들은 스승님의 마법사단에 소속될 거야. 그리고 앞으로 능력이 있을 마법사는 마법학원을 통해 내 수중으로 들어올 테고. 그렇게 되면 그들의 가문도 자연스럽게 나와 손을 잡게 되니 굳이 가문을 따로 챙길 필요는 없어."

이렇게 마법사들의 힘을 얻었다면 기사 세력은 불필요한가.

당연히 아니었다.

"마법사들이야 당연히 강하지만 많지 않잖아. 일순간 브리센이 사라져버렸을 때 카이리스 이곳 저곳에 퍼져 있는 귀족들이나 다른 나라에서 싸움이라도 걸어오면 마법사단만으로 대처하기 어려울 수 있어."

칼리안의 말대로였다.

브리센의 기사단은 르메인을 위협하면서 한편으로는 카이리스와 카이리스의 왕실을 보호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이 하루 아침에 사라지면 왕실의 위협과 왕실의 안위가 함께 사라진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이 바로 칼리안이 지금 당장 칼을 들고 나가 실리케와 브리센 후작을 암살해버릴 수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레이와는 달랐다. 그야말로 필요악인 것이다.

"필요악이 없게 하려면 브리센의 기사단을 대신할 기사 세력이 있어야 해. 그렇다 해서 코끼리들을 내 자리 싸움에 끌어들일 순 없으니 나에게 호감이 있다는 기사 가문들과 손을 잡아야지."

언젠가 슬레이만이 그의 딸 드미레아에게 말했던 것처럼 지그프리드는 왕을 옹립하는 이들이 아니었다. 때문에 그들을 카이리시스로 불러올 수는 없었다.

칼리안의 이런 설명에 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많은 선물 중 몇 개를 골라내어 칼리안의 앞에 늘어놓았다. 중소 규모의 기사 가문들에서 보내온 선물이었다. 그 수가 예상보다 많았으므로 잠시 선물상자들을 바라보던 칼리안이 말했다.

"하나하나 만나보기 어렵겠는데."

우선은 그들의 이름을 잘 기억해 둔 칼리안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식당으로 향하는 내내 브리센의 눈길을 끌지 않으면서 만날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 * *

호밀 쿠키.

브리센에 의해 세력이 많이 기울었다는 기사 가문의 가주 에이프린 백작이 보내온 것은 백작 부인이 직접 만들었다는 호밀 쿠키였다. 온갖 보석이나 귀한 가죽으로 만들어진 선물들과 많이 달라서 칼리안이 가장 마음에 들어했던 것이기도 했다.

바로 그 쿠키 하나를 집어들어 입에 넣은 앨런이 물었다.

"란델 왕자에 대한 뒷조사를 해 볼 요량이십니까? 필요하시다면 협회장을 불러와 드리지요."

그 말에 별 탈 없이 조찬을 마치고 돌아와 앨런과 마주보고 앉아있던 칼리안이 소리내서 웃었다. 카이리스 마법사 협회의 협회장 겸 폴룬 마법학원의 교장 겸 칼리안 전용 정보조직의 보스를 맡고 있는 에우리아의 얼굴이 생각난 까닭이다.

"협회장은 안 와도 됩니다. 소용 없는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란델은 지금의 저와 비슷해요. 숨기고 있는 것이 어떤 힘인지 직접 제 입으로 말하고 드러내지 않는 이상은 알 수 없으니 뒤를 캐도 나오는 것이 없을 겁니다."

누군가가 칼리안이 사실은 베른이라는 것을 밝혀내려면 칼리안이 직접 그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것이 아닌 이상은 절대로 칼리안이 숨긴 것을 밝힐 방도가 없다.

란델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내가 신물의 힘을 쓸 수 있다고 말하지 않는 한은 알아낼 수가 없을 터였다.

"하나 궁금한 것은 대체 왜 남들이 다 보는 정원에 그 장미를 피워냈느냐는 것입니다. 덕분에 다들 란델을 의심하게 되었으니까요."

그 말에 앨런이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어차피 밝혀지지 않을 비밀이라면 한 번쯤 드러내도 괜찮다고 생각했을 수 있지요. 이리 생각이 깊으신 우리 왕자님도 키리에를 구하겠다며 오늘만 사는 것처럼 굴었던 적이 있지 않습니까."

도박장에 가서 칼부림을 했던 날을 말하는 것이었다. 오랜만에 앨런의 가시를 들은 칼리안이 부끄러움에 얼굴을 조금 붉혔다.

사실 앨런의 말이 정답이었다.

칼리안이 레넌을 축출했다는 소식을 듣고 정원에 나갔던 란델이 칼리안을 닮은 장미가 있기에 피워냈을 뿐이니까. 그것을 모를 칼리안은 그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하나 얻은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곧 칼리안이 주머니 속에서 검은 조약돌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두며 말했다.

"어찌됐건 이것과 란델의 힘이 왜 반응했는지를 알아보려면 란델이 움직이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정원에 꽃을 피운 이유도 숨겨왔던 것도 스스로 꺼내놓을 테니까요. 그런데 란델을 움직이게 하는 방법은 딱 하나 아닙니까."

그렇게 말한 칼리안을 보는 앨런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언젠가 앨런이 르메인에게 이야기 한 적이 있었다. 칼리안이 실리케를 내보내면 란델도 움직일 것이라고.

"실리케를 축출하는 것. 그래서 저와 란델이 둘만 남으면 그때는 숨긴 것을 내어놓을 수밖에 없을 겁니다."

칼리안이 그 때의 앨런과 같은 말을 하고는 뒤를 이어 말했다.

"물론 저도 마찬가지고요."

잠든 신의 신력을 사용하는 신관이 숨긴 것이 클지.

소드마스터의 기억을 가진 마법사가 숨긴 것이 클지.

열어보면 알 것이다.

"그래서 말인데 한 가지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말씀하시지요."

칼리안이 앨런의 것을 닮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보이다 다시 입을 열었다.

"전하와 독대를 하고 싶습니다. 아무도 모르게요."

아들이 제 아버지를 몰래 만나보고자 한다는 그 말에 앨런이 재밌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귀족들의 입맛에는 도무지 맞지 않을 호밀 쿠키 하나를 더 집어먹었다.

제15장. 하나만 묻겠습니다 (1)

르메인이 항상 부려먹기만 한다는 앨런의 말은 정말 개똥같은 소리였다. 분명히 르메인은 앨런을 부려먹는 만큼 대우를 해주고 있었다.

왕궁에서 일하는 이들 중 르메인의 집무 공간인 아르피아 궁에 개인 집무실을 가지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 바로 앨런이었으니까.

"와······"

앨런의 집무실이 있는 곳에 처음 와본 칼리안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아직 집무실에는 들어가보지도 않았으니 집무실의 시설이나 넓이에 감탄한 것은 아니었다.

"엄청난데요."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웃음을 터뜨렸다.

아르피아 궁의 엄숙한 복도에 자신의 웃음소리가 울리는 것을 깨달은 뒤에야 간신히 웃음을 멈춘 칼리안이 말했다.

"스승님께서 전하와 항상 붙어 계시게 된 이유를 한 눈에 알겠습니다. 전하께서 스승님을 너무 잘 챙겨주셔서 불평을 하신 거군요."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아르피아 궁 가장 상층에 위치한 두 개의 집무실을 쳐다봤다.

역대 카이리스 국왕들의 초상화가 빼곡히 걸린 복도의 왼쪽에는 르메인의 집무실이 있었고 오른쪽에는 앨런의 집무실이 있었다.

즉 르메인은 자신의 집무실 바로 맞은편에 앨런이 일할 곳을 마련해 준 것이다.

문만 열면 국왕이 있으니 카이리스에서는 별다른 작위도 없는 앨런에게 이보다 더한 대우가 과연 어디 있겠는가.

"그런 말씀 마시지요."

옆에 있던 앨런이 이렇게 툴툴거렸다.

본래 나르실관에서 일하던 그에게 더 크고 좋은 방을 준다기에 왔더니 르메인의 맞은편 방이었다. 싫다고 하니 르메인은 그럼 그냥 자신의 집무실에 책상 하나를 더 놓겠다고 했다. 국왕의 이런 파격적인 대우에 울며 겨자먹기로 새 집무실에 들어온 지도 벌써 몇 달이 지났다.

"매일 얼마나 시달리는지 아마 가늠도 안되실 겁니다."

앨런의 주 업무는 마법사단 발칸과 관련된 것이었다. 물론 르메인과 함께 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르메인이 자신의 몫을 하나 둘 앨런에게 넘겨놓기 시작했다.

덕분에 '왕자에게 마법을 가르치는 스승이 남는 시간에 국왕의 일을 조금 돕는' 것을 생각했던 앨런은 이제 일하고 남는 시간에 왕자의 마법을 간신히 보아주는 정도가 되어 있었다.

물론 앨런이 칼리안의 스승을 자처했던 것은 왕궁 안에 들어오기 위한 하나의 명분에 불과하긴 했다. 게다가 칼리안 역시 옛 칼리안이 잘 익혀둔 지식으로 혼자서도 마법을 잘 수련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전하께서 내려주시는 일거리가 어찌나 하해와 같은지."

하염 없는 푸념을 늘어놓는 앨런을 보며 칼리안의 웃음이 다시 시작됐다. 앨런은 얼른 집무실 문을 열어 웃음을 끊지 못하는 제자를 안으로 들여보냈다.

그렇게 앨런의 집무실 안에 들어선 칼리안은 웃음을 지우려 노력하며 소파에 앉았다.

지금 칼리안이 이렇게 앨런을 따라 아르피아 궁으로 온 것은 르메인과의 독대를 위해서였다. 칼리안의 부탁을 듣기가 무섭게 앨런이 이 곳으로 칼리안을 데려온 것이다.

'어차피 전하와 왕자님은 아무리 몰래 만난다 해도 다 들키게 됩니다. 그러니 그냥 제 집무실에 볼 일이 있다 하고 당당히 가시지요. 그 편이 낫습니다.'

덕분에 칼리안은 앨런과의 대화를 마치자마자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매우 많은 이들의 인사를 받으며 당당히 아르피아 궁에 도착했다.

"잠시 계십시오. 이제 전하를 몰래 모셔 올 터이니."

앨런이 이렇게 장난스레 말하며 나간 뒤 칼리안의 심장이 다시 두근두근 소리를 냈다. 르메인과의 비밀스러운 만남을 칼리안이 요청했던 것은 맞았지만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곧바로 만날 줄은 몰랐던 까닭이었다.

칼리안은 앨런의 집무실 소파에 앉아 목을 가다듬고 얼굴 근육도 몇 번 움직여보고 또 옷매무새도 점검하는 등 부산을 떨었다. 긴장한 것이다.

오래지 않아 문이 다시 열리며 앨런이 먼저 들어오고 그 뒤를 따라 들어서는 르메인이 보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칼리안이 정중하게 예를 취했다.

"그래."

짧은 말로 칼리안의 인사를 받은 르메인이 칼리안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고 앨런은 다시 밖으로 나갔다. 독대를 원한다 했으므로 자리를 비켜주는 것이다.

조금 전까지 재밌다는 듯 웃으며 이 곳에 온 사람이 맞을까 싶을만큼 진지한 표정이 된 칼리안이 르메인을 향해 말했다.

"갑작스러운 요청에도 이렇게 나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하."

그 말투가 상당히 딱딱했다. 그런 칼리안의 얼굴을 보던 르메인이 편안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게 어려워하지 말거라."

칼리안이 어색하게 웃었고 르메인의 말이 이어졌다.

"석찬에서 왕비의 언행을 마음에 담아 둔 것은 아닌지 걱정하였는데 웃고 떠드는 것이 들려오니 좋더구나."

아무래도 복도를 울리는 칼리안의 웃음과 대화 소리를 들은 모양이었다. 민망해진 칼리안이 사과를 전하려는데 르메인의 말이 먼저 나왔다.

"나쁘게 생각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염려하지 말거라. 오히려 그런 말에 휘둘리지 않을 만큼 단단하게 자란 것 같아서 마음이 놓였으니."

진심어린 르메인의 말에 칼리안은 세크리티아의 국왕 데블란에게도 가져본 적 없던 깊은 감사의 의미를 담아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런 것은 조금도 신경쓰지 않습니다 전하. 마음을 써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래. 다행한 일이다."

르메인이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르메인은 아주 잠시동안 칼리안의 눈을 깊이 응시했다. 그리고 조금 뜸을 들이더니 입을 열었다.

"마나실 경이 하는 말이, 네가 또 뭘 부술 생각을 하고 있으니 한번 들어보라 하던데."

걱정과 우려가 함께 들어있는 말이었다. 그런 르메인의 말을 듣기가 무섭게 칼리안의 눈이 문 쪽을 향했다. 앨런이 있을 곳이었다.

지금 르메인의 말만 들어보면 그야말로 플란츠의 몇 배 쯤 되는 망나니가 따로 없지 않은가.

칼리안이 저도 모르게 작은 한숨을 쉬었다. 어쩐지 그 마음을 잘 알 것 같아서 르메인은 칼리안의 한숨 소리에 대해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곧 칼리안이 앨런을 향한 원망의 눈빛을 접고 르메인을 쳐다보며 대답했다.

"네 전하. 부술 것이 있기는 있습니다."

르메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을 부술 것인지 마음의 준비를 해 둘 테니. 이야기 해보거라."

"당연히 브리센입니다."

르메인의 시선이 창 밖을 향했다.

"레넌 브리센 자작과 그레이 브리센 변경백을 말함이더냐."

"아닙니다. 특정 한 명이 아닌 브리센 후작가 그 자체를 말씀드리는 겁니다."

르메인은 그에 대해 다시 우려하는 대신 가능한 담담하려 애쓰며 말했다.

"그래.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지. 계속 말하거라."

"우선은 기사 가문의 귀족들을 만나볼 생각입니다. 때문에 그것이 혹시 전하께 누가 될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너의 세력이 커지는 것이 나에게 해가 되거나 혹은 내가 경계할 문제가 될지를 묻는 것이더냐."

"네, 전하."

즉 자신의 힘이 커지는 것을 르메인이 어찌 생각하게 될지를 묻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당돌한 질문이다.

그것을 이해한 르메인이 실소하며 말했다.

"그 스승에 그 제자라 하더니."

"그것이 무슨 말씀이십니까."

"네가 마법학원을 만든다 하였을 때 마나실 경이 같은 것을 물었지. 헌데 이제는 기사들이구나."

그렇게 말한 르메인이 칼리안을 보며 퍽 자상한 아버지 같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래. 괜찮으니 원하는대로 해보려무나."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의 뜻을 전한 칼리안이 부탁하고자 하는 일에 대해 구체적인 설명을 이어나갔다.

"제가 대화를 나눠보고자 하는 몇몇 이들이 있습니다만 브리센의 눈을 피해야 합니다. 혹시 석찬 자리에서 플란츠 형님에게 말씀하셨던 것을 조금 키워서 추진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석찬에서 르메인이 꺼낸 말은 모두 빈말이 아니었다. 때문에 르메인은 칼리안의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무엇을 이야기하는지를 바로 알아차렸다.

"사냥을 말하는 것이냐?"

"네 전하."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설명을 이어나갔다.

"식사 중 자연스럽게 나온 이야기인데다 제가 아닌 플란츠 형님에게 권하셨던 일이었습니다. 때문에 갑자기 추진된다 해도 의심할 자가 적을 것입니다."

르메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칼리안의 말을 주의 깊게 들었다.

"게다가 사냥대회이니 기사 가문의 귀족들이 모두 참여한다 하여 이상하게 여겨질 것이 없지 않겠습니까. 왕비께서도 자리하지 않을 것이고 곧 브리센 변경백에 대한 소문이 퍼질 것이니 브리센 후작 역시 오지 못할 것입니다."

그 말에 르메인의 표정이 다소 어두워졌다. 사냥대회 한 번 여는 것이 어려웠던 탓은 아니었다. 칼리안의 말에서 무언가를 깨달은 르메인이 조용히 물었다.

"브리센의 눈은 피해야 한다 말하면서 정작 플란츠가 반드시 참석할 수 밖에 없는 자리를 마련해달라 하는구나. 혹시 플란츠와 왕비가 서로 등을 돌린 것이냐."

"네. 최소한 플란츠 형님은 마음을 돌린 것으로 여겨집니다."

르메인은 다소 착잡한 얼굴을 했다.

그리고 곧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어려울 것 없는 일이다. 준비하라 일러두마."

흔쾌한 허락에 칼리안은 다시 한번 감사의 뜻을 전했다. 그리고 조금 전보다 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부탁드리고자 하는 것이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얘기하거라."

이어진 칼리안의 말은 르메인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카이리시스와 지그프리드령 사이에 대규모 이동 마법진을 만들어두고 싶습니다. 추후에는 다른 지역으로도 연결되도록 하고자 합니다."

"지그프리드라."

코끼리들의 땅. 그곳과 카이리시스를 잇는 이동 마법진.

"만약의 경우 지그프리드의 기사들이 사흘만에 카이리시스를 뒤덮을 수도 있겠구나."

"맞습니다, 전하."

"마나실 경을 통해 네 시종이 지그프리드의 장자임을 들어 알고 있다. 가주인 지그프리드 공의 성정 역시 잘 알고 있지만······ 지금 네가 꺼낸 이야기는 그들에 대한 신뢰만으로 쉽게 결정할 수 있을 문제는 아닌 것 같구나."

르메인은 한동안 생각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쉬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던 터라.

"향후에 다시 답을 줄 테니 조금만 기다려주려무나."

"그리하겠습니다."

결국 르메인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답을 했다.

* * *

사람 취향이란 본래 어느 한 순간 손바닥 뒤집히듯 바뀐다.

베른이 즐겨 마셨던 커피를 칼리안이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 바로 그 증거였다.

실리케의 앞에서 몸 속의 독을 풀었던 그 날에 마신 것이 커피였기 때문에 칼리안은 특별히 누가 주는 것을 거부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커피를 먼저 찾아서 마시지도 않았다. 은근한 거부감이 드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안 이후 얀은 단 한번도 칼리안에게 커피를 내어 준 적이 없었다.

항상 커피를 달고 사는 앨런이지만 그 역시 이런 칼리안의 속마음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체르밀 궁에서는 커피를 마시지 않았다.

때문에 르메인과의 대화를 마친 칼리안과 함께 체르밀 궁으로 되돌아온 앨런은 무엇을 마실지 묻는 얀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아무 것이나 주면 되네."

그리고 앨런의 맞은편에 앉아있던 아르센은 같은 것을 묻는 얀에게 정중히 대답했다.

"진한 커피 한 잔만 부탁드려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네."

흔쾌히 답한 얀은 눈 밑이 퀭해진 이 마법사의 앞에 심연의 어둠을 담은 듯한 고농축 커피를 툭 내려놓았다.

민트차를 한 입 머금다 곁눈질로 커피를 본 앨런은 아르센을 향해 부드럽게 말했다.

"자네. 그거 다 마시면 죽을걸세."

"특별히 다를 것은 없을 것 같습니다."

과로로 죽든 아공간 비슷한 색을 내는 커피를 마시고 죽든.

아르센은 별 거부감 없이 커피 한 잔을 쭉 들이켰다.

그 모습을 본 칼리안이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공간이동 마법진을 개발하지 못해 그러는 겁니까."

특별히 아르센을 압박한 적 없던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어차피 르메인도 바로 답을 주지 못하겠다 했으니 급할 것이 없던데다가 저러다 아르센이 발칸의 군단장이 되기도 전에 죽을 것 같아서였다.

"일단 오늘은 좀 쉬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냥 일반적인 마법진으로 만드세요. 경비를 강화하면 됩니다."

이렇게까지 아르센을 혹사시킬 생각은 아니었으므로 칼리안은 자신이 주문했던 것을 물렸다.

"아닙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아르센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답을 내었습니다, 왕자님. 맹세의 인이 발동하는 원리를 변형했습니다. 다수의 대상과 마법진 사이의 사용 계약이 가능합니다."

그럼 잠이 아니라 생명을 줄일 것 같은 저 커피는 왜 마셨냐고 묻는 듯한 눈의 칼리안을 향해 아르센이 씩 웃으며 말을 맺었다.

"왕자님께서 이동 마법진을 독점하실 수 있습니다."

참으로 마음에 드는 말이다.

칼리안이 아르센을 보며 신뢰의 미소를 보였다.

"고생했습니다."

칼리안의 이 말을 듣기 전에 잠들까봐 얀의 커피를 들이켰던 아르센은 그대로 칼리안의 소파에 졸도하듯 쓰러졌다. 그리고 오랜만의 단잠에 빠져들었다.

그것을 본 앨런이 칼리안을 향해 물었다.

"저 친구 할 일은 더 없습니까?"

"네. 마법진 구축이야 마법사 협회의 마법사들을 파견시켜 진행할 생각이니까요."

"그럼 저 친구는 이제 다시 한가한 마법사가 되었겠습니다."

앨런이 그것을 왜 묻는지 눈치챈 칼리안이 차마 대답하지 못하자 그 얼굴에서 마음대로 대답을 찾은 앨런이 흡족하게 웃었다.

마법사단의 일이 아르피아 궁에 잔뜩 쌓여 있거늘.

장래 군단장이 될 이가 이리 한가해서야 쓰나.

제15장. 하나만 묻겠습니다 (2)

며칠이 더 지났다.

항상 푸른 잎의 르니에리 화분으로 가득했던 실리케의 온실이 완전히 텅 비어 있었다. 칼리안과 만나 맹세의 인을 교환하고 돌아온 날 실리케의 화풀이에 전부 깨져버렸다.

그 이후 실리케는 며칠 전까지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때문에 실리케의 온실도 깨끗이 치워지기만 한 뒤 새로 채워 넣어지지 않은 채로 몇 달을 보냈다.

그런 온실의 한가운데 마련된 응접실 안에서 실리케가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 걸음 걸음마다 냉기가 흐르는 것 같아서 시녀들은 차마 그 곁으로 갈 엄두도 내지를 못했다.

또각.

- 차르륵

또각.

- 차르륵

손에 들린 부채를 접었다 폈다 하며 온실 안을 서성이던 실리케가 제 자리에 멈춰 서며 입술을 깊이 깨물었다.

그레이 브리센이 오지 않는다.

수도 인근까지 온 것은 분명했다. 그 후로 갑작스럽게 소식이 끊겼다.

레넌이 갑자기 사라진 것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가능성 자체를 의심하지는 않았다. 평범한 사람이었으니 이유가 있다면 납치가 되든 살해가 되든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레이는 그럴 수 없지 않나.

지금 실리케는 그레이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고 생각하여 불안해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레이가 어떤 다른 마음을 품고 사라진 것이 아닌지를 의심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 실리케에게 시녀장이 달려와 몇 마디 말을 전했다.

"그레이 브리센 변경백이 수도 인근에 도착했을 때 에반 브리센 후작이 보낸 자들이 공격을 했다 합니다. 이로 인해 변경백이 큰 부상을 입고 변경백령으로 돌아갔다는 소식이 일파만파 퍼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들은 실리케가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아버지가? 어째서?"

"그것이······. 후작위를 빼앗고자 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돌아가서 두번 다시는 카이리시스로 돌아오지 말라는 경고를 들었다고 합니다. 지금 그에 대한 이야기로 귀족가가 매우 소란합니다."

귀족들의 입은 정말로 빨랐다.

수도로 요양을 오던 그레이가 에반으로부터 공격을 당했다는 소문 역시 삽시간에 번져나갔다.

그도 그럴 것이 그레이는 소드마스터였다.

그런 이가 아버지로 인해 재기가 힘들 정도의 큰 부상을 입었다 하니, 이보다 더 재미있는 소식이 또 어디있을까.

실리케가 미간을 찌푸렸다.

손에 들린 부채를 몇 번 펼쳤다 접기를 반복한 뒤, 실리케의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후작의 자리를 노릴 것 같아서 미리 쳐냈다. 이런 시점에."

그러다, 뭔가 이상한 것이 있다는 듯 실리케가 다시 시녀장을 향해 물었다.

"아버지가 직접 가신 것도 아닐텐데 누가 변경백에게 부상을 입힐 수 있다는 말이냐."

"변경백은 이미 부상을 입어서 수도로 오는 중이 아니었습니까. 때문에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대답을 들은 실리케의 눈이 번뜩였다.

실리케가 다시 한번 입술을 깨물다 입을 열었다.

"아니야."

그레이는 부상을 입어 온 것이 아니었다.

카이리시스에 올 때 그렇게 핑계를 대라 시킨 것이 바로 실리케였다. 그 후 플란츠를 세자위에 올리는 것을 도우면 에반 브리센 후작을 축출한 뒤 그 자리에 그레이를 앉혀주겠다고 그렇게 말을 했었다.

- 차르륵!

실리케가 머릿속으로 몇 가지 가정을 떠올렸다.

그레이의 계획을 안 에반 브리센이 직접 나서서 공격했다.

그레이가 실리케를 배신한 뒤 핑계를 대고 돌아갔다.

아니라면 드러나지 않은 누군가가 그레이를 공격했다.

곧 실리케가 날카롭게 뜬 눈으로 시녀장을 보며 말했다.

"브리센 변경백령으로 치료약을 보내라. 변경백이 정말 부상을 당해 변경백령에 있는 것이 맞는지와 누구에게 공격을 당했는지를 정확히 확인하고 오거라. 가능한 빠르게 직접 눈으로 보고 와야 한다."

시녀장이 허리를 숙이며 그렇게 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그리고 당장 테일 경을 찾아서 데려오거라."

테일은 칼리안으로 인해 왕궁에서 물러난 기사단 파벨의 부단장이었다. 실리케를 대신하여 여러번 검을 휘둘렀던 이였기도 했다. 돈만 준다면 무엇이든 하였으니 급한대로 그레이를 대신해 수족 노릇을 해 줄 사람으로는 그보다 나은 이가 없을 터였다.

시녀장이 황급히 밖으로 빠져나간 뒤 실리케가 다시 한번 온실 안을 서성였다.

실리케는 지금 자신이 가정한 세 가지를 모두 확인해보려 하고 있었다. 첫 번째와 두 번째는 그레이를 만나고 온 시녀가 확인을 시켜줄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테일을 통해 확인해 볼 참이었다.

드러나지 않은 누군가라는 것을 떠올리니.

"왜 자꾸."

칼리안.

"······ 네가 생각나는지."

- 차르륵!

실리케는 불쾌한 예감을 떨치려 애쓰며 방으로 돌아갔다.

* * *

그날 오후 르메인의 중대 발표가 있었다.

발칸이라는 이름의 마법사단을 창단할 준비가 모두 끝났으며 일주일 뒤 창단식을 거행한 뒤 곧바로 운영을 시작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발칸의 임시 군단장은 앨런 마나실.

부군단장은 아르센 헤르츠였다.

그날 오전 그레이에 대한 소식으로 얼굴을 찌푸렸던 실리케는 그 소식에 또 한번 인상을 찌푸렸다.

"파벨의 건물과 훈련장을 쓰겠다니······ 전하께서 예전의 일들을 모두 잊으신게지."

다시 한번 실리케의 심기가 불편해졌음을 안 시녀장이 어쩔 줄을 몰라했다. 실리케의 입 속에서 까드득 하고 이를 악무는 소리가 났다.

"기사단 파벨이 사라졌다 하여 나의 힘이 없어진 것이 아닐진대. 거기가 어디라고 마법사들을······."

그렇게 말하던 실리케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아니지."

그것을 따져 묻기에는 시기가 좋지 않다는 것을 상기한 것이다.

브리센 후작이 자신의 아들을 불구로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돌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 실리케가 르메인의 뜻을 반대하면 사람들의 시선이 다시 실리케에게로 향하게 될 터였다.

"전하께서 모아 놓은 마법사가 서른 명이라 했느냐."

"네 그렇습니다."

실리케가 비웃음을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것 가지고는 무엇도 하실 수 없을 테니. 군대 놀이가 하고 싶다 하시는데 구경은 해드려야지. 일단 알겠다."

그렇게 말한 실리케가 몸을 돌렸다. 그러자 시녀장이 다시 조심스러운 말로 그녀의 발을 붙들었다.

"말씀하신 이를 데려왔습니다."

그 소리를 들은 실리케의 얼굴이 조금 펴졌다. 파벨의 기사 테일이 찾아온 것이다. 실리케가 곧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만나러 내려갔다.

응접실 앞에서 주변을 모두 물린 실리케가 홀로 들어갔다. 테이블 앞에 평범한 옷을 입은 남자 한 명이 앉아있었다. 테일이라는 그 기사였다.

테일은 전형적인 기사란 이런 것이라 말하는 듯한 외모를 지닌 자였다. 게다가 행동거지가 반듯하고 말수도 적었다. 때문에 처음 보는 이들은 테일의 진짜 모습이 어떤지 상상도 하지 못한다.

다만 실리케만은 알고 있었다.

그의 손에 당장 금화 세 개만 쥐여줘도 왕궁 밖의 그 누구든 죽여서 데려올 자라는 것을.

- 잘그락.

때문에 실리케는 응접실에 앉은 테일의 앞에 돈이 든 주머니를 먼저 건넸다. 그 내용물을 확인한 테일이 물었다.

"상대할 이가 여러 명입니까?"

돈이 꽤 많았기 때문에 묻는 말이었다.

실리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한 명이니라."

그 말에 테일이 의뭉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얼마 전에도 한 명을 상대하고 큰 돈을 받았기 때문이다.

레넌 브리센.

그를 잡아다 후작의 앞에 데려다 놓은 두 기사 중 한 명이 바로 테일이었다. 물론 테일은 입이 무거운 기사였으므로 실리케는 그것을 영원히 모를 터였다.

"누구입니까."

칼리안의 로젤리타를 수행했고 왕궁에 머무르지 않으며, 앨런 마나실의 가족이 아닌 자.

실리케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르센 헤르츠라는 마법사다."

오늘 하루 그레이와 함께 카이리시스 귀족들의 입에 열심히 오르내린 발칸의 부군단장. 그 이름을 테일도 들었다.

"그레이 브리센과 마주쳤는지 마주쳤다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아내 오면 된다. 알아낸 뒤에는 그 입을 잘 막아두어야 할 것이다. 잘 처리하면 그 두 배를 더 주마."

돈 주머니가 무거웠던 이유를 깨달은 테일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주머니를 품 속에 넣은 뒤 실리케의 응접실을 빠져나왔다.

* * *

그리고 그날 저녁.

얀은 굉장히 들뜬 얼굴을 하고 있었다.

"드디어 우리 왕자님에게도 세력이라는 것이 생기는 것 아닙니까."

물론 발칸과 관련된 내용 그 어디에도 칼리안의 이름은 없었다. 하지만 얀은 마법사단 발칸이 칼리안의 군대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직 서른 명 뿐이지만 곧 엄청나게 늘어날 겁니다. 그러니 왕자님도 이제 당당하게 다니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얀의 말에 얀과 나란히 서서 칼리안이 샤워를 마치고 나오기를 기다리던 키리에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지금보다 더 당당해지셔도 괜찮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진심 가득한 그 말에 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플란츠나 란델 왕자에게 어찌나 치이고 사시는데요. 특히 플란츠가 우리 왕자님께 얼마나 독한 짓을 하는지 알면 그런 말 못할 겁니다."

칼리안이 그 플란츠와 반쯤 손을 잡았다는 것을 알면 정말 놀랄 얀이 이렇게 말했다. 때문에 샤워실 안에서 얀의 말을 들은 칼리안이 잠깐 난처한 얼굴을 했다.

플란츠와의 일을 얘기해줘야 하는데 저래서는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지 걱정이 된 탓이다.

그렇게 복잡한 마음을 안고 샤워를 마친 칼리안은 간단한 예복을 갖춰 입었다. 그리고 세뉴관에 마련된 연회장으로 이동했다. 아직 발칸이 공식적으로 창단된 것은 아니었으나 르메인이 창단을 발표한 것을 기념하는 가벼운 석찬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오래지 않아 연회장 안에 들어선 칼리안은 그 어떤 때보다 더 많이 집중된 시선 때문에 잠시 발을 멈칫했다.

"칼리안 왕자님께서 오셨다!"

그들은 전국에서 모인 마법사였고 칼리안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본 이들은 많지 않았다. 그랬으니 모두 한 마음 한 뜻으로 칼리안을 살피기 시작한 것이다.

- 그 눈이 정말 시스파니안의 것처럼 붉은지.

덕분에 칼리안은 마법사들 모두와 일일이 눈을 마주치며 인사를 해주어야 했다.

'란델과 플란츠가 오지 않은 것이 어찌나 다행인지.'

실리케는 물론이었고 둘 모두 그럴싸한 이유로 불참을 알려왔다. 칼리안이 이렇게 주목 받는 것을 보이지 않아도 되니 반겨할 일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혼자 실소하던 칼리안에게 마지막으로 아르센이 다가왔다. 상당히 피곤한 얼굴이었다. 때문에 칼리안은 미안한 마음을 담아 말했다.

"헤르츠 경. 괜찮습니까."

"곧 안 괜찮아 질 것 같습니다, 왕자님."

솔직한 대답에 칼리안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창단식 날에도 연회가 있을테니 오늘은 그냥 가서 쉬세요."

그러자 아르센의 표정이 조금 밝아지다 말았다.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갈 수가 없었던 까닭이다.

"신경을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석찬이 끝난 뒤 다시 마나실 님을 뵈러 가야 합니다. 게다가 이대로 마음대로 집에 가버리면 과연 내일 마나실 군단장께서 무슨 말을 할지 상상도 되질 않습니다."

그 얼굴을 보던 칼리안이 다시 웃었다.

"스승님께는 제가 말을 잘 전해두겠습니다."

"하지만······."

"쉴 수 있을 때 쉬어요."

이 순간 칼리안에게 진심으로 고마움을 느낀 아르센이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그럼 오늘은 먼저 가보겠습니다."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가는 길에 잠들지 말고."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뜻 모를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물론 아르센은 그것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저 앨런이 쫓아올 것 같은 느낌에 얼른 걸음을 옮겨 마차에 올랐을 뿐이었다.

아르센의 집은 세뉴 강을 건너가야 있었기 때문에 도착하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칼리안은 잠들지 말라 했지만 사람 눈꺼풀이라는 것이 어디 그렇게 마음대로 되는 것이던가.

- 다각 다각.

규칙적인 말 발굽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던 아르센의 눈이 스르르 감겨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세뉴 강을 건넌 뒤.

마차의 불안한 흔들림과 마부의 급박한 목소리가 아르센을 깨우기 전까지.

"헤르츠 님!"

이상한 기분에 슬쩍 눈을 뜬 아르센을 마부가 다시 불렀다.

"일어나십시오!"

그제야 정신이 든 아르센이 다급히 몸을 일으켰다.

그와 함께 마차가 심하게 요동쳤다.

- 쿵!

항상 평온하던 아르센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아르센은 아직 달리는 마차의 문을 확 열었다.

평소보다 몇 배는 빨라진 마차가 정신 없이 달리고 있었다. 익숙하지 않은 풍경이 휙휙 지나갔다.

아르센은 이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하는 대신 적당해 보이는 곳을 눈에 담으며 마부를 향해 소리쳤다.

"그대로 계속 달려 도망가게!"

그리고 신속하게 마력을 운용했다.

[텔레포트]

그와 동시에 아르센의 몸이 마차에서 사라졌고 그가 조금 전 보아두었던 곳에 정확히 나타났다.

달리는 마차에서 바닥으로 몸을 옮긴 아르센은 곧바로 실드를 생성해 몸을 보호했다. 그러자 마차를 뒤따라 온 것 같은 여러 마리의 말이 아르센을 둘러쌌다.

달빛에 번뜩이는 칼날이 모두 아르센을 향하고 있었다.

의심되던 상황이 맞음을 깨달은 아르센이 침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반갑네."

오로지 빠르고 효율적인 대인 공격 마법만을 연구해 온, 그리하여 번개보다 빠른 속도로 얼음창을 만들어내는, 이제 고작 스물 여덟의 5서클 마스터 마법사.

"마법사단 발칸의 부군단장. 아르센 헤르츠라 하네."

아르센 헤르츠의 얼음이 시린 빛을 머금은 채 쏘아져 나갔다.

제15장. 하나만 묻겠습니다 (3)

버릇 같은 자기 소개가 끝나기 무섭게 번뜩이는 얼음창 두 개가 기사들을 향해 쇄도했다.

- 쌔애액!

- 콰직!

날카로운 것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뼈가 바스러지는 소리가 거의 동시에 들렸다.

빠르다!

감각이 좋은 한 명은 거의 낙마하듯 뛰어내리며 간신히 피해냈다. 나머지 하나는 가슴에 바람 구멍이 생긴 채로 말 위에서 떨어졌다. 그에게서 흘러내린 피가 금세 웅덩이를 만들어냈다.

대비할 틈도 없이 한 명이 죽자 기사들이 서둘러 말에서 내렸다. 그들이 가까이 오도록 굳이 기다려 줄 용의는 없었으므로 아르센이 다시 손을 움직였다.

- 쉬이익! 쉬익!

두 개의 얼음창이 아르센의 정면에 서 있던 기사에게 연달아 날아갔다. 검을 휘둘러 하나를 쳐낸 그는 곧바로 날아오는 두 번째 얼음창에 맞아 죽었다.

- 쿵!

육중한 몸이 쓰러지는 소리에 남은 기사들의 눈빛이 흔들렸다.

대상을 정하고 계산하고 주문을 외우고 발동시킨다.

그것이 마법사의 전투가 아닌가?

- 쌔애액!

- 서걱!

칼잡이의 안일함을 비웃듯 파열음이 다시 이어졌다.

어두운 밤에 날아드는 아르센의 얼음은 그 자체로 암기였다.

보이는 순간 죽는다!

- 풀썩.

테일의 옆에 있던 기사 한 명이 바닥에 엎어졌다. 관통된 목에서 검붉은 피가 울컥 쏟아져 나왔다.

'무슨, 미친!'

말에서 내려 아르센을 포위하는 그 짧은 순간에 셋이 줄었다.

테일은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기사 일곱의 한가운데에 선 아르센이 고개를 돌렸다.

다음 타깃을 찾는 시선이 정면을 향함과 동시에 아르센의 뒤에 서게 된 두 기사가 일사불란하게 달려들었다. 각각 아르센의 목과 심장을 겨눈 채였다.

그들의 검이 바람처럼 휘둘러졌다.

그것을 조금 늦게 알아차린 아르센이 고개를 돌렸다. 이미 지척에 다다른 검날이 아르센의 눈동자에 비춰졌다.

그리고.

- 팅! 티딩!

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경쾌한 금속음과 함께 아르센의 실드가 두 번 빛났다. 목표의 옷자락조차 스치지 못한 두 개의 검이 튕겨나왔다.

망연자실한 표정이 된 두 기사가 다시 검을 뻗어내려 할 때, 어느새 날아온 얼음조각이 그들을 덮쳤다. 갈비뼈가 으스러지는 소름끼치는 소리가 여지없이 이어졌다.

- 카드득! 콰직!

한 명이 심장을 꿰뚫린 채 바닥에 널브러졌다. 폐가 사라진 또 한 명은 심장을 잃은 동료를 한동안 부러워하다 피거품을 게워내며 죽었다.

그 꼴을 고스란히 지켜보던 테일이 이를 악물었다.

'젠장!'

지금까지 테일이 살아있는 것은 실력이 아니다. 운이 좋았을 뿐이다. 테일이 그것을 가장 잘 알았다.

눈 깜짝 할 새 후작가의 정예 기사 다섯이 죽어나갔으니까!

'잘못 건드렸다.'

아르센은 테일에게 충분히 후회할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

엄습해오는 서늘한 느낌에 테일이 고개를 비트는 순간 차가운 얼음의 날이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베인 것인지 목에서 화끈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아르센의 실드가 다시 빛났다.

- 티딩! 팅!

테일이 공격받는 순간을 노려 실드를 내리친 두명이 물러났다. 그리고 자신에게 날아올지 모를 얼음을 막기 위해 정면을 주시했다.

- 쉬이이익!

그런 기사들을 농락하는 것처럼 이번 얼음창은 한 명의 머리 위에서 생성되어 그대로 내리꽂혔다.

- 쿠웅!

불운한 타깃이 된 기사가 정수리부터 턱까지 꿰뚫린 채 절명했다. 얼음 끝을 따라 흘러내린 붉은 피가 바닥을 적셨다.

테일은 그저 아르센의 시야에서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살았다. 산 것을 안 순간 테일의 몸이 바닥을 박찼다.

아르센을 향해서가 아니었다. 도망치기 위해서였다.

그런 테일의 움직임을 본 다른 기사들 역시 슬금슬금 도망 칠 때를 보았다.

그 때 기사 한 명이 아르센에게로 달려들었다. 예리한 칼날이 실드와 아르센을 함께 갈라낼 것처럼 날아들었다.

아르센은 실드의 방어력이 얼마나 남았는지 혹은 저 칼날의 예리함이 얼마나 될 지를 가늠하는 대신 입을 열었다.

[텔레포트]

낮은 목소리와 함께 아르센의 모습이 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와 함께 아르센에게 검을 휘둘렀던 이를 제외한 기사들이 저마다의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물론 테일도 그 중 하나였다.

아르센의 신형이 테일의 바로 뒤에서 나타났다. 보기만해도 소름끼치는 얼음창이 테일과 또 다른 기사 한 명을 향해 쏘아졌다.

테일이 허리를 뒤틀며 등 뒤로 검을 휘둘렀다.

이 기적적인 움직임이 그의 목숨을 살려냈다. 텅 하는 소리와 함께 얼음창이 튕겨 나간 것이다.

- 푸욱!

그와 함께 앞서 달려나가던 기사의 눈에서 생명의 빛이 빠져나갔다. 눈동자만 간신히 움직여 그것을 본 테일의 손이 떨렸다.

'오지 말았어야 했다.'

꽤 강한 마법사라 생각했다.

그래서 왕궁에는 알려지지 않은 아홉 명의 동료를 더 불렀다. 테일을 포함하면 합이 열이다. 열 명이 나누고도 충분한 돈이었던데다 성공하면 두 배를 더 주겠다 했으니 당장 나눠가지는 돈이 그리 아깝지 않았다.

테일이 헛웃음을 지었다.

'성공할 생각을 했다니. 고작 열 명으로.'

짧은 판단으로 오늘 당장 죽게 생긴 테일의 눈에 뒤늦은 후회가 가득 어렸다.

실리케조차 아르센이 어떤 이인지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그 돈은 분명 많았지만, 그것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아르센을 둘러싼지 5분도 지나지 않은 시간.

열 명의 기사 중 셋이 남았다.

- 쌔액!

- 콰직!

아니, 둘이다.

등을 돌린 채 미친듯이 달리던 이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얼음창을 피하지 못했다. 결국은 거대한 얼음창에 몸이 꿰뚫린 채 죽었다.

그의 시체가 강둑 아래로 굴러떨어진다. 세뉴강의 맑은 물에 검붉은 피가 퍼져나갔다.

아르센에게 검을 휘둘러 본 한 명 그리고 도망을 포기한 테일. 이제 둘 밖에 남지 않았다.

그제야 아르센의 공격이 멈추었다.

"이제 둘이 남았네."

아르센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둘 중 누가 살겠나. 나는 한 놈만 필요하다네."

그리고 이렇게 물어왔다.

* * *

아르센이 나간 직후 여유로운 얼굴로 탄산수를 한 모금 마신 칼리안이 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키리에."

주변에 아무도 없었으니 언뜻 본다면 혼잣말같기도 했다.

이제 막 석찬이 시작되어 분위기가 소란스러웠다. 서로에게 자신을 소개하는 인사 소리도 컸다. 잔을 부딪히는 소리도 끊이지 않았고 이곳 저곳에서 식기 부딪히는 소리도 작지 않았다.

그 가운데 흘러나온 칼리안의 목소리에 칼리안으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서 얀과 함께 서 있던 키리에가 곧장 다가왔다. 엘프의 피가 준 영향인지 몰라도, 키리에는 상상 이상으로 청력이 좋았으니까.

"네, 왕자님."

칼리안이 잠시 키리에를 바라보다 말을 전했다. 주변의 소리에 묻혀 아무도 듣지 못했겠지만 오로지 키리에만은 칼리안의 말을 전부 알아들었다.

"······ 할 수 있겠어?"

말을 마친 칼리안이 마지막으로 이렇게 물었다.

키리에는 고민 없이 대답했다.

"네."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고 키리에는 그 길로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키리에의 뒷모습을 보던 칼리안이 자리에서 일어서 앨런이 있는 곳을 잠시 쳐다보았다. 르메인과 어떤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앨런이 자연스럽게 칼리안을 보았고 칼리안은 다른 말 없이 연회장에서 나갔다. 그러자 앨런이 곧바로 칼리안을 따라나왔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칼리안이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레이에 대한 소식이 오늘 전해졌으니 실리케가 움직였을 겁니다. 제가 그레이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은 아닌지를 확인하고 싶어 할 것이라서."

"안그래도 헤르츠 경이 보이지 않기에 궁금해하고 있었지요."

곧바로 상황을 이해하고 이렇게 답한 앨런의 눈이 둥글게 휘어졌다. 흥미로운 상황을 눈 앞에 둔 것 같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실리케의 암수가 헤르츠 경을 향했겠군요. 제가 다녀오면 될는지요?"

그 말에 칼리안이 웃었다.

"시스파니안이 토끼를 잡는 모양새가 나와서야 되겠습니까. 지금 헤르츠 경을 공격하는 이들을 잡는 것에 굳이 스승님의 힘이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스승님께서는 그저 들어가셔서 전하께 알려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그만큼 아르센을 믿고 있다는 말이겠지만 아르센 한 명으로도 충분히 처리가 가능하다고 여기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실리케는 지금 브리센 후작이 자신의 편인지 아닌지도 의심하고 있을 겁니다. 불안할거예요."

그레이가 실리케를 도우러 온 것이 형제간의 깊은 우애 덕분이 아니라는 것은 칼리안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분명 모종의 거래가 있었을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의 실리케가 그레이에게 제시할 수 있는 것은 후작의 작위 외에는 없다. 그런데 후작의 자리는 거저 나오지 않는다. 심지어 왕의 자리처럼 이양할 수도 없다. 반드시 에반 브리센이 죽어야 생기는 것이다.

따라서 실리케는 에반이 실리케의 계획을 눈치채고 그레이를 직접 처벌했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있을 터였다.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려 변경백령에 사람을 보내도 돌아오려면 며칠이 걸립니다. 그 전까지는 후작이 직접 그레이를 공격했던 것이 아닌지를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하겠죠. 그러니 실리케는 후작의 기사를 마음대로 부릴 수가 없어요. 자칫하면 그들의 칼이 자신에게 향할 테니까."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깊은 조소를 머금은 채로 헤이시아 궁 쪽을 바라봤다.

"더군다나 실리케는 헤르츠 경을 만나본 적도 없습니다. 헤르츠 경의 무력이 어느정도 되는지도 알려져 있지 않으니 고작해야 기사 몇 명을 불렀을까 말까. 그러니 헤르츠 경 한 명이면 충분한 상대가 될 겁니다."

앨런의 양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처음 만났을 때는 그렇게나 거부감을 느끼더니.

"로젤리타에 다녀온 뒤 헤르츠 경에 대한 믿음이 꽤 굳건해지셨군요."

그 말에 칼리안이 앨런을 쳐다보며 씩 웃었다.

"믿을 수 밖에요. 이 곳에 오기 전에 마지막으로 만난 이였으니."

처음 칼리안이 아르센을 본 날 보여준 반응을 보고 베른과 아르센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을지 얼추 눈치를 챘던 앨런이었다. 지금의 대답을 듣고 자신의 예상이 맞았음을 확신한 앨런이 혀를 내둘렀다.

* * *

'가는 길에 잠들지 말고요.'

그 말이 무슨 뜻이었는지 이제야 이해한 아르센이 앞에 세워둔 둘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칼리안 공격이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혼자 보냈다!

"믿음에 감사를 드려야 할지, 아니면 방임에 원망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왕자님."

아르센이 이렇게 중얼거렸다.

칼리안이 무슨 이유로 자신의 실력을 철썩같이 믿는지 몰랐으니까.

그런 아르센을 보는 테일과 또 다른 기사의 얼굴이 크게 일그러졌다. 둘의 손에는 여전히 검이 들려 있었다. 아르센과의 거리는 불과 한 보 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르센은 저렇게 다른 생각에 빠져 있는 것이다.

물론 둘 모두 그런 아르센을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검을 들어올리기도 전에 아르센의 얼음이 이미 몸을 관통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아르센이 둘을 보며 다시 물었다.

"이제 정했나? 누가 살고 누가 죽을지."

말은 이렇게 했지만 사실 아르센은 둘 다 살려둘 생각이었다.

서로 살기 위해 경쟁하듯 정보를 뱉어내게 할 참이었다.

테일이 입을 열었다.

"저를 살려주십시오. 그리고 칼리안 왕자님께 데려가 주십시오. 그럼 제가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왕궁에는 칼리안도 있지만 실리케도 있다.

왕궁까지만 가면 실리케가 살려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 말에 옆에 서 있던 기사가 매서운 눈으로 테일을 노려봤다. 아무리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다지만 그와 테일은 12년을 함께 지냈다. 그런 동료를 어찌 저렇게 쉽게 버린단 말인가?

"알겠네. 그럼······"

협박을 위해 다른 한 놈 쪽으로 손을 가져가던 아르센이 잠시 멈칫했다. 그리고 먼 곳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 다그닥, 다그닥!

빠른 속도로 달려오는 말 발굽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아르센이 앞에 선 둘을 그대로 둔 채 고개를 돌려 다가오는 이를 살폈다. 잠시 후 거리가 조금 더 가까워지자 아르센이 씩 웃었다.

"방임이 아니셨군."

아르센을 찾아 온 것은 바로 키리에였다.

말에서 내린 키리에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것을 본 아르센이 난색을 표했다.

"조금 늦게 왔군. 그냥 가게. 오래 볼 것이 못 되네."

온통 가득한 피 냄새 곱게 죽지 못한 시체들.

그리 나이가 많지 않은 키리에가 그런 모습을 보았을 리 없다 생각한 것이다.

아르센의 말처럼 처음 보는 광경임은 맞았다. 하지만 키리에는 그저 담담했다.

"더 독한 곳에서 지냈습니다. 괜찮습니다."

그렇게 말한 키리에가 살아있는 두 기사를 잠시 쳐다보다 아르센을 향해 물었다.

"둘을 왜 남겨두신 겁니까."

키리에의 질문에 아르센은 별 생각 없이 테일을 가리켜보이며 입을 열었다.

"왕자님께서 확인하실 것이 있지 않겠는가? 안그래도 왼쪽에 있던 친구가 왕자님을 뵙겠다 하기에······."

- 서걱!

아르센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오른쪽 기사의 목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머리가 사라진 몸뚱이가 둔중한 소리와 함께 허물어졌다.

검을 지닌 채 긴장하고 있던 브리센의 정예 기사. 그런 이의 목을 순식간에 내리친 것은 키리에였다.

피가 방울방울 맺힌 단검을 털어내며 서로 다른 색을 지닌 키리에의 눈이 아르센을 향했다.

"데려올 필요 없다 하셨습니다."

테일이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제15장. 하나만 묻겠습니다 (4)

실리케의 기사단 파벨.

테일은 바로 그 파벨의 부단장이다.

그런 테일이 지금 모든 것을 포기한 얼굴로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마법사가 쏘아대는 얼음을 피해 이제껏 살아남은 것이 기적이거늘. 고작해야 팔뚝 길이의 단검으로 동료의 목을 떨궈낸 소년의 입에서는 그야말로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이 튀어나왔다.

'데려올 필요 없다.'

당연히 칼리안의 전언일 터였다.

배후고 뭐고 궁금할 것도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테일은 그냥 포기했다.

당장 목에 구멍이 나든 아니면 목이 사라지든 둘 중 하나는 될 판이다. 동료까지 팔아가며 살고자 했는데 지금 남의 비밀 지켜주는 것이 중요하겠는가?

포기하고 나니 항상 무거웠던 입이 절로 열렸다.

"두 분께서는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제가 왕자님께 드릴 말씀이 정말 많이 있습니다."

어떻게든 왕궁에만 가면 실리케가 살려줄 것이라고. 테일은 여전히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었다.

따라서 테일은 얌전히 두 손을 모으고 선 채 제멋대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들으면 칼리안의 앞에 데려가지 않고는 못배길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때마침 저를 잘 살려두셨습니다. 제가 왕비께 직접 의뢰를 받았습니다. 이것 보십시오. 여기 이렇게 돈 주머니도 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테일의 말은 끝이 날 줄 몰랐다.

테일은 비단 실리케의 돈만 받은 것이 아니었다. 레넌과 에반으로부터도 돈을 받고 값에 맞는 많은 일들을 했다.

"칼리안 왕자님의 시종에게 레넌 브리센이 건네준 뭔가를 전달했다던 시녀를 처리한 적이 있습니다. 필요하다면 제가 증언을 하겠습니다."

얀에게 처음으로 독차를 건넨 후 사라졌다던 시녀의 이야기였다. 그에 대해서는 아르센도 어느정도 들은 바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테일의 짓인 모양이었다.

다만 아르센은 칼리안이 이미 그 일을 묻어두겠다며 실리케와 맹세의 인을 나누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테일 역시 시녀를 왜 죽였는지는 정확히 알지 못하는 상태인 듯 하니 그런 증언이 이제 와 필요할 리 만무했다.

"그것은 이제 소용이 없네. 그리고 왕자님께서는 그 때의 일은 생각도 하기 싫어하신다네."

칼리안의 앞에서 진한 커피를 쭉 들이켰던 아르센이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테일의 뒤에 서 있던 키리에를 쳐다봤다. 이제 그만 처리하고 가자는 뜻이었다. 키리에가 반 걸음 앞으로 나왔다.

- 저벅.

키리에의 발자국 소리가 생명줄 끊어지는 소리라는 것을 알아들은 테일이 얼른 둘을 만류했다.

"제가 중요한 것을 하나 더 알려드릴 수 있습니다! 이건 정말 중요한 내용입니다."

그 말에 키리에가 다시 뒤로 물러나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안도한 테일이 재빨리 입을 열었다.

"후작님의 자금원이 어디인지 아십니까?"

"뇌물 아닌가."

"물론 그것도 큽니다만 그것은 비정기 수익 아닙니까. 정기적인 자금원은 따로 있습니다. 궁에서 나온 뒤 제가 담당하고 있는 곳입니다."

결국 테일은 꼭꼭 닫아 두었던 상자를 열기에 이르렀다.

테일이 비장의 한 수라는 듯한 표정으로 목소리를 깔았다.

"카이리시스에 사설 도박장이 있습니다. 사람을 놓고 도박을 하는데 하루 오가는 돈이 상상 이상입니다. 어디에 있는지 알려드릴테니 저를 칼리······."

"혹시 '시스파니안의 깊은 술냄새' 4층을 말하는 겁니까."

테일의 입이 조용히 닫혔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르센이 키리에를 보며 물었다.

"그거 설마 술집 이름인가?"

"네. 그렇습니다."

"그 이름 한번 경박하군."

"겉으로는 술집이지만 지하에 도박장들이 있습니다. 특별히 대단한 정보는 아닙니다."

테일이 입술을 물어뜯다가 비장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레넌 브리센. 그가 누구 때문에 실종된 것인지 아십니까?"

누구긴.

우리 왕자님이지.

아르센의 입에서 긴 한숨이 나왔다. 그다지 궁금해하지 않는 것이 분명했지만 테일은 목소리를 높였다.

"심지어 레넌 브리센이 멀쩡히 살아 있는 것은 모르셨을 겁니다! 어디에 있는지 궁금하시면 저를 칼리안 왕자님께,"

아르센이 테일의 말을 자르며 키리에에게 물었다.

"레넌은 브리센 후작가에 감금됐을 거라 하셨던가?"

"네.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그것은 칼리안의 예측이었다.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한 아르센이 긴 하품을 했다.

테일의 눈꼬리가 틀어졌다. 레넌 브리센도 통하지 않는 것이다.

조금 전 떨어져내린 동료의 머리가 아까부터 계속 테일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제 그만 포기하고 따라오라 말하는 것 같이 느껴졌다.

테일은 레넌에 대해 이야기 할 때보다도 더 낮은 목소리로 아주 은밀한 것을 알려준다는 듯이 말했다.

"이번에 변경백님이 다치신 것은 아마도 후작께서 직접 나서서 진행하신 일이 맞을 겁니다. 후작님 말고는 변경백님을 다치게 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누구긴.

그것도 우리 왕자님이지.

아르센의 눈이 점점 감겨들어갔다. 아닌게 아니라 정말 피곤했다. 이동 마법진 개발때문에 며칠을 잠을 못 잤다. 그 후 딱 한번 단잠을 자고 난 뒤 곧바로 앨런에게 붙들렸다.

몸도 피곤하고 스트레스도 심한 상태에서 오랜만에 마력까지 펑펑 썼으니 이렇게 세월 좋게 대화나 나눌 정신이 되지 못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테일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후작님께서는 사실 검의 길에 오르신지 굉장히 오래 되셨습니다. 저와 저기 강둑에 누워있는 놈. 이렇게 둘이 후작님의 검이 다 부서진 것을 봤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변경백님께 숨기셨습니다."

그 말에 느슨해지던 아르센의 눈꺼풀에 힘이 들어갔다. 아르센이 비로소 관심을 가지며 말했다.

"그것은 왕자님께서 조금 좋아하실 지도 모르겠군."

"맞습니다. 후작님과 변경백님의 관계가 나쁘다고는 해도 어느 정도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았으니까요. 변경백으로 봉해지기 전에 두 분 사이에 큰 싸움도 한 번 있었는데 왕자님을 뵙게 해주시면 그에 대해 자세히······."

거기까지 들은 아르센이 손을 들어 테일의 말을 잠시 막았다.

"자네는 아는 것이 참 많은 것 같네."

그리고는 이렇게 입을 열었다.

그 말에 테일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원하는대로 칼리안과 대면을 시켜주리라는 생각을 한 것이다. 하지만 아르센의 말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자네가 살아있던 것은 아는 것에 비해 입이 무거워서였을 것 같네. 안 그런가?"

어쩐지 온전한 칭찬은 아닌 것 같았으므로 테일은 대답 없이 아르센을 쳐다봤다. 아르센은 그런 테일 대신 키리에를 보며 조용히 물었다.

"왕자님께서 정말 데려오지 말라 하신 것이 맞는가?"

"네. 다만 정말 도움이 될 이라면 재량껏 결정하라 하셨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아르센이 다시 테일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래서. 그 비밀들을 우리에게 알려준다는 핑계로 왕궁에 가면 실리케가 자네를 구하겠다 나서주기라도 할 것 같던가."

그렇게 많은 비밀은 알면서 정작 실리케가 어떤 사람인지는 잊었던 테일이 서둘러 입을 열었다.

"그것은······!"

그 순간 키리에의 단검에 달빛이 담겼다.

차가운 날이 테일의 목을 스치듯 지나갔다.

- 서걱!

결국 테일은 말을 모두 마치지 못했다.

- 퉁!

조금 전 떨어져내린 과묵한 기사의 머리 옆으로 테일의 머리가 데굴 굴러갔다. 실드를 펼쳐 피가 튀는 것을 막은 아르센이 떨어진 테일의 머리를 잠시 바라보며 말했다.

"한 번 무거웠던 입은 계속 무거워야 하네. 괜한 머리를 쓰려 입을 열면 명이 줄어드는 법이라네."

곧 아르센이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내쉰 뒤 키리에를 보며 말했다.

"도우러 와 줘서 고맙네. 이제 자네는 이만 궁에 돌아가게. 내 마부가 신고를 했을 테니 곧 수도 치안대 병사들이 올 걸세. 내가 자초지종을 설명해주고 돌아가겠네."

키리에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테일이 조금 전까지 손에 들고 있던 돈 주머니를 집어들어 품에 넣은 뒤 말했다.

"제가 하겠습니다. 헤르츠 경은 눈에 띄지 않아야 합니다."

"그것이 무슨 말인가."

키리에가 자신의 말 안장에서 검은 로브를 꺼내 아르센에게 건넸다. 그리고 칼리안이 전한 말을 마저 꺼냈다.

"아무에게도 연락을 취하지 말고 마나실 경의 저택에서 닷새 동안 푹 쉬라 하셨습니다."

이유까지는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아무튼 푹 쉬란다.

그 말에 아르센의 입이 웃다 말다 했다.

휴가는 휴가인데 앨런의 집에서 지내는 휴가라니.

이것을 좋아해야 할지 싫어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였다.

* * *

후작이 도박장을 운영하고 있다는 것은 완전히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요긴하게 쓰일 정보였다.

그리고 또 하나 후작이 실력을 숨기고 있었다는 것 역시 모르던 사실이었다. 칼리안의 옆에서 키리에의 말을 함께 들은 앨런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일전에 브리센 상단을 사겠다 했을 때 후작이 너무 성급하게 화를 낸다는 생각을 했었지요."

앨런은 '칼잡이'라는 자신의 말에 곧장 살기를 내비쳤던 에반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러다 또 금방 고분고분해졌는데 어쩌면 제 눈을 가리려고 일부러 그리 굴었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말에 칼리안이 그럴 수 있다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후작을 한번 만나보면 정확히 확인해 볼 수 있겠네요. 이제 저도 중앙 귀족 회의에 참석을 할 수 있으니 기회는 많이 있을 겁니다."

곧 칼리안은 작은 종이에 몇 가지 말을 적어 얀에게 건넸다.

"지금 보내줘. 변경백령으로 보내면 돼."

전서구를 보내라는 말이었다.

그것을 받아든 얀이 밖으로 나간 후 칼리안은 고생했다는 짧은 말로 키리에를 격려한 뒤 이만 쉬도록 돌려보냈다.

그렇게 앨런과 둘이 남게 되자 앨런이 사일런트를 발현했다.

칼리안에게 할 말이 있다는 의미였으므로 칼리안이 앨런의 얼굴을 응시했다.

"전하께서는 마법사단의 부군단장을 해치려 한 이를 직접 만나보고 싶어하셨습니다."

왜 테일을 붙들어오지 않고 굳이 전부 죽여 없앴느냐는 말이었다.

칼리안은 테이블에 놓인 주머니를 쳐다봤다. 채 마르지 않은 핏자국이 있는 그것은 실리케가 테일에게 건넸던 돈 주머니였다.

"파벨이 여전히 왕궁 안에 있던 기사들이라면 그렇게 했겠지만 지금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 자는 이제 실리케가 아니라 후작의 사람입니다. 그러니 레넌의 일에도 관여를 했겠죠."

예전에는 실리케의 심부름을 했지만 이제는 에반의 수족이 되었다는 것. 그것 때문에 잡지 않고 전부 죽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 자가 왕궁 안에 잡혀 있으면 후작이 경계할 겁니다. 그 자가 밝혀낼 비밀들을 빌미로 전하나 제가 어떤 것을 요구할지 알 수 없으니 신경을 곤두세우겠죠."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앨런의 앞에 놓인 호밀 쿠키를 가리켜보였다. 어찌나 많이 보냈는지 아무리 먹어도 도통 줄어들지를 않는 것이다.

"저 아직 다른 귀족들 만나보지도 못했잖아요. 그래서 후작은 아직 저에게 관심을 가지면 안됩니다. 지금은 그레이와 실리케의 사이에서 줄다리기만 하게 두는 것이 낫습니다."

즉 칼리안을 경계한 에반이 실리케와 다시 손을 잡는 것을 막고자 했다는 소리였다.

칼리안이 실리케와 에반을 한꺼번에 상대할 수는 없었다. 아직 그만큼의 세력은 되질 않았다. 그래서 야금야금 그들의 세력을 줄여가는 중이었다.

레넌과 그레이를 실리케의 손에서 떼어냈다. 그리고 그레이가 원인이 되어 실리케와 에반의 사이가 틀어지기 시작했다.

칼리안은 그 상태를 최대한 유지시키면서 이용해 먹을 생각이었다.

곧 칼리안이 테이블의 주머니를 툭 쳐보이며 씩 웃었다.

"대신 실리케는 더 많이 불안해져야 하고요."

테일이 죽었다. 테일과 함께 있던 아홉의 기사도 함께 죽었다.

그런데 아르센도 사라진다. 앞으로 닷새 동안은 아르센이 살아있는지 죽었는지도 알 수 없을 터였다.

만약 아르센이 살아있다면 테일로부터 무엇을 들었을까.

들었다면 그것을 칼리안에게 전했을까.

그리고 칼리안은 자신의 수족을 공격한 실리케를 어떻게 할까.

등등.

"실컷 고민해보라 해야죠."

머리를 싸맬 실리케를 생각하니 칼리안의 입에 진한 웃음이 어렸다.

제15장. 하나만 묻겠습니다 (5)

처음에는 눈을 감자마자 바로 뜬 줄 알았다.

앨런의 집에 도착해 잠들었을 때에도 밤이었는데 잠에서 깬 뒤에도 여전히 밤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또 바로 깼다 하기에는 이상하게 몸이 개운했다.

그래서 한참을 멍하게 상황을 따져보던 아르센은 잠들기 전보다는 시간이 이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덕분에 하루를 꼬박 잠으로 보내고 다시 밤이 되어 일어났다는 것을 가까스로 깨달았다. 스무 시간을 넘게 잠만 잔 것이다.

- 꼬르륵.

정신이 드니 공복감이 밀려들며 뱃속이 요동을 쳤다.

칼리안이 정말로 단단히 얘기를 해 두었으므로 앨런은 잠들어 있는 아르센을 깨우지 않고 왕궁에 나갔다. 그리하여 다시 밤이 되어서야 부스스 일어나는 호사를 누리게 된 아르센이 비척비척 방을 나섰다.

집에 불은 켜져 있었으나 인기척은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아르센이 앨런의 부엌에서 계란같이 생긴 것 몇 개를 찾아내 접시에 깨뜨려 넣었다. 그리고 손가락 끝에 작은 불을 일으켜 대충 대충 익혔다.

곧 아르센은 소금조차 넣지 않고 매우 원시적인 방법으로 만든 그것에 날 빵을 곁들여 꾸역꾸역 먹기 시작했다. 무언가 상당히 부족한 듯한 맛이었으나 지금 입에 들어가는 것이 닭의 알인지 오리의 알인지도 구분 못하는 아르센이 무얼 더 하겠는가.

- 탁.

그런 아르센의 앞에 모락모락 김이 나는 닭고기 스튜가 놓여졌다. 매우 향기로운 냄새에 취해 스튜를 쳐다보고 있으니 잔소리 비슷한 말이 들려왔다.

"대사막의 전사들도 그런 식으로는 안 먹어, 아저씨."

"아······ 고맙다."

앨런의 손녀인 베로니카였다.

오히려 열 여섯의 히나보다 더 어른스러운 베로니카는 이제 친해졌으니 서로 말을 놓을 때가 되었다고 선언했다. 그리고는 저렇게 편하게 아르센을 대하고 있었다. 아르센이 딱 제 나이의 두 배라는 것을 제외하면 크게 문제될 것은 없었다.

"나 말고 할아버지께 고마워해. 할아버지께서 어디 나가지 말고 아저씨 챙겨주라고 하셨으니까."

베로니카와 알고 지낸지도 벌써 한 달이 훌쩍 넘었지만 할아버지라는 그 말이 여전히 생소했다. 아르센보다 젊은 외모의 앨런에게 손녀가 있다는 사실이나 그런 앨런을 스스럼없이 할아버지라 부르는 모습이 아직 익숙하지가 않았던 탓이다.

"자빠져 자다 굶어 죽기 딱 좋게 생긴 꼴이라고."

하지만 손녀가 맞긴 맞았다.

"아저씨는 절대로 집 밖에 나가면 안된다고 했으니까 필요한 것이 있으면 나한테 말해주면 돼. 내가 도와줄게."

아르센은 스튜를 한 입 먹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베로니카가 그 옆에 앉더니 아르센이 구워낸 오리알을 집어먹었다. 그 뒤에는 그저 굽기만 했을 뿐인데 해괴한 맛을 만들어낸 아르센의 요리 솜씨에 매우 감탄하며 입에 든 것을 뱉어냈다.

그 정도는 아닌데 하고 중얼거리던 아르센이 물었다.

"혹시 내가 왜 나가면 안되는지 말씀하신 것이 있나?"

아르센은 여전히 자신이 왜 나가면 안되는지를 몰랐다. 일단 시키는대로 오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유 정도는 듣고 싶었다. 앨런에게 들은 것이 있었는지 베로니카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왕비가 아저씨를 많이 찾을거라고 그러셨어. 왕궁을 빼면 여기만큼 안전한 곳은 없으니까 더 묻지 말고 그냥 여기 있어."

아아.

완벽하게는 아니지만 그래도 적당히 칼리안의 뜻을 이해한 아르센이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그리고 앞에 놓인 치킨 스튜를 다시 떠먹기 시작했다.

왕비가 찾는다 하니 이를 어쩌나.

덕분에 잘 쉬게 생긴 아르센이 씩 웃었다.

* * *

다음 날 아침.

에반 브리센 후작은 집사가 전해온 말을 들은 뒤 아프지도 않은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레이가 다친 것에 자신이 얽혀 있다는 얼토당토 않은 소문에 대해서도 미처 파악이 되지 않았는데 문제가 또 생긴 탓이다.

'이상한 소문이 또 돌고 있습니다, 후작님.'

특별히 칼리안이 의도한 것은 아니었으나 에반에 대한 좋지 않은 소식이 하나 더 퍼지고 말았다. 마법사단 발칸의 부군단장 아르센 헤르츠가 귀가 중 습격당해 행방이 묘연한 까닭이다.

아르센의 마부와 '아르센에게 전할 말이 있어 뒤를 따라갔던' 키리에의 증언이 있었고 세뉴 강변에 널브러진 열 구의 시체가 증거가 되었다. 모두 브리센 후작가의 기사들이었다.

시체들의 몸에 난 상처가 워낙 제각각이었던 탓에 아주 매끈하게 목이 잘린 시체가 섞여있던 것이 그리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얼음창으로 사람을 꿰뚫을 수 있다면 얼음칼을 만들어 목도 베어낼 수 있겠거니 생각한 것이다.

- 브리센 후작이 이번에는 아르센 헤르츠를 납치했다!

때문에 이런 소문이 생겨났다.

정작 에반이 직접 손을 댄 레넌의 일은 그리 주목되지 않았었다. 그런데 만난지 십 년도 더 된 그레이나 심지어 얼굴도 모르는 아르센의 일에 에반이 얽혀 있다는 이야기가 계속 퍼져나가고 있었다.

하필이면 그 날 오후에 르메인이 아르센을 입에 담는 바람에 관심이 쏠려 있었다. 바보가 아닌 이상 르메인이 브리센에 대응하기 위해 발칸이라는 것을 만들었음을 모를 이가 없었다. 그런데 발칸의 창단이 발표되기가 무섭게 아르센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브리센 기사의 시체가 있었으니.

에반 스스로가 생각해도 자신이 의심 받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아닌가?

"이 일로 오늘 오후에 카에라의 기사들이 방문할 것이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대놓고 후작저를 조사하겠다니. 전하께서는 내가 전하의 세력을 건드렸다고 생각하시나보군."

첩첩산중이 따로 없다.

'그레이의 문제까지 있으니 당장 르메인과 대서서 좋을 것이 없다.'

이렇게 생각한 에반은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겠다. 도착하거든 정중히 안내해라."

그렇게 말하던 에반이 미간을 확 찌푸렸다. 이 일의 원흉이 된 한 놈이 생각난 탓이다.

"그런데 대체 테일은 무슨 일로 그 놈과 얽혔다 하더냐?"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에 에반의 앞에 서 있던 집사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날 낮에 테일이 궁에 다녀왔다 합니다. 아마도 왕비님께서 부르셨던 것이 아닐까요?"

아닐까요, 라는 말로 조심스레 묻기는 하였어도 분명 그 이유일 터였다. 실리케가 부르지 않는 이상 쫓겨난 기사단의 기사가 왕궁에 들어갈 방법이 없었다.

"실리케······. 또 실리케인가."

레넌과 손잡고 멍청한 짓을 벌여서 가문에 아직까지도 회복되지 않는 상처를 남기더니 이제는 제 아비를 아주 구렁텅이에 몰아넣기 시작했다. 대체 왜 후작가의 기사를 멋대로 부려 이 사달을 내었단 말인가!

곧 에반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지금 바로 궁으로 가겠다."

"왕비님을 만나보실 생각이십니까?"

그 말에 에반의 눈에 노기가 들었다.

"아예 내 손으로 자식을 죽여 없애는 꼴이 보고 싶더냐!"

지금 에반은 실리케를 만나면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를 만큼 화가 나 있었다. 말 한 글자 한 글자마다 피어오르는 무시무시한 기운에 말을 잘못 꺼냈음을 안 집사가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후작님."

"······ 왕자를 만날 것이다."

"플란츠 왕자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럼 지금 란델이나 칼리안을 만나 무얼 하겠느냐."

"네. 알겠습니다."

에반이 직접 플란츠를 만난다 하는 것이 의외였으나 집사가 그에 대해 이유를 물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때문에 집사는 그저 다시 한번 허리를 숙여 보이며 서둘러 준비를 하겠다 답했다.

* * *

칼리안은 먹구름 가득한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 사냥대회 날짜가 잡혔습니다. 사흘 후 토요일입니다. 그런데 혹시라도 비가 많이 와서 땅이 심하게 젖으면 미뤄질 수도 있다고 하네요.

왕자들과의 석찬에서 사냥 이야기가 나왔으니 지난 봄에 취소된 사냥대회를 이번에 개최하자는 르메인의 의견에 특별히 반대하는 이들은 없었다. 그렇게 며칠동안 날을 골라 개최일이 확정된 뒤 거짓말처럼 하늘이 흐려졌다.

하루 빨리 기사 가문의 귀족들을 만나야 하는 칼리안이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에는 비가 오지 말아야 할텐데.'

봄의 사냥대회도 폭우 때문에 취소되지 않았던가.

그러고 보면 저 비가 칼리안의 앞을 참 많이도 가로막는다.

레넌은 돈으로 치우고 그레이는 몽둥이로 치웠는데.

쓸데없이 비를 내리는 하늘은 무엇으로 치워야 하나.

창 밖을 보며 이런 소득 없는 생각이나 하고 있는 칼리안의 귀에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형님께서는 사냥에 함께 가십니까."

하필 딱 사냥 생각을 하던 차였기 때문에, 하마터면 칼리안이 입을 열어 그럴 것이라 대답을 할 뻔했다.

간신히 입을 다물고 상념에서 벗어난 칼리안이 방금 질문한 플란츠를 흘깃 쳐다봤다. 란델 역시 플란츠를 일별한 뒤 대답했다.

"가지 않을 생각이다."

란델은 저 사냥대회가 무엇때문에 이렇게 급히 진행되는지 알지 못한다. 그저 르메인이 플란츠와 둘이 가려던 사냥에 다른 이들을 초대하는 정도라 생각을 하고 있을 터였다.

결국 르메인이 플란츠를 위해 마련한 자리인 것이나 다름이 없다 여길테니 그런 곳에 란델이 참석할 리 없었다. 게다가 사냥은 란델의 취향에도 맞지 않았다.

"가끔씩 바깥 바람도 쐬시는 것이 좋을텐데요."

굳이 한번 더 권하는 플란츠를 본 칼리안이 속으로 웃었다. 정말로 란델이 그 자리에 왔으면 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안 올것을 알고 하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란델이 무심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걱정해주니 고맙구나."

걱정을 해주는 쪽이나 걱정에 고맙다 답하는 쪽이나.

저들의 말에서 진정성을 찾느니 실리케에게서 인간성을 찾는 일이 빠를 것이다.

그렇게 두 형의 대화를 들으며 얌전히 밥을 먹던 칼리안에게 란델의 시선이 닿았다.

"발칸의 부군단장인 이가 실종되었다 들었다. 네가 걱정이 많겠구나."

칼리안이 고개를 들어 란델을 쳐다봤다.

'관심도 없어 하던 마법사단 이야기를 굳이 꺼내시는군.'

아르센과의 개인적인 친분 때문에 걱정이 클 것이라는 소리가 아니었다. 발칸과 칼리안이 아무 상관이 없다 알려졌음에도 굳이 칼리안을 지목해서 '부군단장'을 걱정하는지 묻는 것이다.

곧 칼리안은 이틀 전에 사라진 뒤 여전히 속 편히 잠이나 자고 있을 아르센을 떠올리다 대답했다.

"로젤리타 기간 동안 많이 익숙해진 이였으니 아무래도 신경이 쓰입니다. 그래도 저보다는 전하와 스승님의 걱정이 더 크실 것 같습니다."

아마 이 정도면 훌륭한 답이 될 것이다.

란델에게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대답이니까.

란델이 칼리안을 한동안 응시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칼리안은 생각이 깊어지는 것을 감추려 샐러드를 집어먹었다.

로젤리타를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이 정도로 스산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대화가 있든 없든 식사 자리에서 눈치 싸움이 벌어지지는 않았다.

'그저 마음에 없는 안부 혹은 날씨 얘기나 주고 받는 것이 다였건만.'

그 이유가 칼리안이 성인이 되어서인지 혹은 플란츠가 술도 끊고 옷도 잘 갖춰 입고 다녀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란델에게 슬슬 심경의 변화가 오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칼리안은 저런 란델을 혼자 감당하기 싫었던 플란츠가 아침밥 먹으러 오라는 소리를 한 것은 아닐까 하는 또 다른 소득 없는 생각을 하며 식사를 마치고 가장 먼저 식당 밖으로 나왔다.

"지금쯤이면 전서구는 이미 도착 했을테지?"

변경백령으로 보낸 칼리안의 편지를 말함이었고 곁으로 다가온 얀이 대답했다.

"네 어제 오후에 도착했을 겁니다."

"그래. 그럼."

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칼리안이 무언가를 말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 우뚝.

그러다 돌연 입을 닫고 발도 멈추었다.

칼리안의 눈이 벽 너머의 먼 곳을 향했다.

체르밀 궁 밖에서 아주 흥미로운 기세 싸움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을 느낀 탓이다.

끝 모를 공포감과 살기가 서로의 크기를 재고 있었다.

이 카이리시스에 저런 기운을 내세울 이들은 칼리안을 제외하면 딱 둘 뿐이다. 때문에 칼리안이 작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내 스승님이 왜 이렇게 화가 나셨을까."

"마나실 경이요? 화가 나다니요?"

옆에 서 있던 얀이 무슨 소리냐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칼리안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웃으며 대답했다.

"테라스에 있을테니 차 좀 준비해줘."

앨런 마나실과 에반 브리센의 기 싸움이라니.

대단한 이들이 서로 붙어 으르렁거리는데 느긋하게 구경이나 해주는 것이 도리가 아니겠는가?

제15장. 하나만 묻겠습니다 (6)

그레이 브리센 변경백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힘겹게 앉았다.

그리고 전서구 편에 보내졌다는 편지를 펼쳤다.

그레이가 스스로 일어나 앉는 것을 본 집사가 감격스러운 얼굴을 했다. 자신이 정말 큰 일을 해냈다는 만족감 때문이었다.

칼리안의 매타작으로 허리가 부러졌던 그레이가 이렇게 앉아있는 것에 집사의 공이 크기는 했다. 빠르게 처신한 덕분에 집사는 그레이로부터 아주 큰 돈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약 일주일 전.

다 죽어가는 그레이를 마차에 태운 집사는 일단 인근에 치유사가 있는지를 먼저 확인했다. 그리고 레딩턴 성에 텐실의 치유사가 머물고 있다는 이야기를 간신히 접할 수 있었다.

집사는 그 길로 이틀을 꼬박 달려 레딩턴 성에 도착했다. 그 뒤 레딩턴 영지 관리 대리인직을 맡고 있던 신관 말콤 체티쉬를 만나게 되었다.

"이 분은 브리센 후작가의 장남이신 그레이 브리센 변경백이시오. 돈은 얼마든지 지불할 수 있으니 꼭 좀 치료해주시오."

그때 말콤은 칼리안에게 덜미를 잡혀 체포된 헤일 라트란 백작을 대신할 새 영지 관리인에게 인수인계를 하던 중이었다. 그 일로 텐실로 돌아가는 것을 잠시 미루고 있었던 참이었다.

의식을 잃은 그레이의 입에서 '칼리안'이라는 이름이 계속 튀어나왔다. 덕분에 말콤이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 자를 이 모양 이 꼴로 만든 것이 칼리안 왕자님이구나!'

라고.

치유사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린 그레이는 묘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말콤에게 이렇게 말했다.

"무조건 단전부터 고쳐놓거라. 무조건!"

그레이의 말을 들은 말콤은 아주 잠시 고민했다.

꿈에서 만나도 이가 갈리는 헤일이 그렇게나 좋아하던 브리센 가문 사람의 청을 들어주어야 할지.

혹은 헤일로부터 해방시켜준 뒤 텐실에서 목숨을 부지하게 해 줄 장문의 편지까지 써준 칼리안의 편을 들어주어야 할지.

고민의 시간은 길지 않았고 말콤은 곧 치유를 시작했다.

단전의 손상된 조직을 이어 붙이지 않고 아물게 한 것이다.

앞으로 그레이가 다른 어떤 치유사를 만나더라도 절대로 고칠 수 없도록.

대신 적당히 일어나 걸을 만큼 허리는 붙여놔주었다. 물론 검을 다시 잡을 수 있을 정도로 깨끗하게 치유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그레이는 반쯤 고쳤으나 검을 다시 들기는 힘들 몸으로 변경백령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칼리안이 모르는 사이에 은혜를 잘 갚은 말콤은 재빨리 인수인계를 마치고 텐실로 출발했다.

아무튼 그런 과정을 거쳐 제 스스로 일어나 앉아 편지를 펼쳐든 그레이가 갑자기 온 몸을 떨기 시작했다.

칼리안이 보낸 편지였기 때문이다.

'잊지 말라고 협박까지 하려는 것인가!'

이성보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이미 나은 상처들이 다시 아파오는 것이다.

손에 들린 것은 전서구 편에 온 짧은 몇 문장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레이는 그것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그리고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에야 간신히 편지의 내용을 읽어 내려갈 수 있었다.

곧 그레이의 표정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칼리안이 보낸 편지가 단순한 협박이 아니었던 탓이다.

- 레넌은 죽거나 실종되지 않았다. 후작의 저택 지하에 온전히 감금되어 있다. 만약 후작이 죽고 레넌을 되찾으면 실리케는 너와 레넌 중 누구에게 작위를 주고 싶어 할까.

실리케가 수족같이 부리던 레넌이 사라졌기 때문에 자신을 불렀다는 것을 그레이 역시 잘 알고 있었다.

- 곧 실리케의 사람이 너에게 갈 것이다. 처신 잘 하거라.

만에 하나 몸이 나아 칼리안에 대한 복수를 꿈꿀 수 있게 되더라도 그것은 아주 먼 훗날의 일일 터였다. 그러니 당장은 실리케나 레넌 혹은 에반 브리센 후작의 손에 죽지 않는 것이 더 중요했다.

결국 그레이는 이를 악물며 집사를 불렀다.

칼리안의 말이 사실인지를 확인해보기 위해서였다.

* * *

다 큰 어른들의 싸움이라는 것도 기실 알고보면 별 것 없다.

한 쪽이 건드리고 한 쪽이 못 참으면 싸움이 된다.

즉 앨런이 건드렸고 에반이 참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 싸움이라는 소리였다.

"방금 뭐라 지껄였나, 마법사?"

······ 이렇게 말이다.

물론 처음부터 앨런이 에반을 건드리지는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앨런이 그 정도로 막돼먹은 인사는 아니었으니까.

그러니 이렇게 된 자초지종을 설명하자면.

그 날 아침 자리에서 일어난 앨런은 일단 커피 한 잔을 마셨다. 그리고 도통 일어날 생각을 않는 아르센의 생사를 대충 확인한 뒤 베로니카의 배웅을 받으며 레이첼과 함께 집에서 나왔다.

지금 왕궁에서는 기사단 파벨이 사용했던 건물인 빌헬름 관을 마법사들에게 맞게 개조하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때문에 레이첼은 왕궁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빌헬름 관으로 갔다. 그리고 앨런은 아르피아 궁에 들러 르메인과 아침식사를 했다.

'칼리안 왕자님이 말하기를 이 참에 브리센 후작에게 조금 더 압력을 행사하셔도 좋을 것 같다 하더군요.'

'그래. 안 그래도 오늘 후작의 저택을 수색할 예정이네. 그나저나 헤르츠 경은 무탈한 것인가?'

'죽은 것처럼 잘 살아있으니 걱정 않으셔도 됩니다.'

대충 이런 이야기가 오갔다.

그 뒤 앨런은 칼리안을 만나러 체르밀 궁으로 갔다.

그리고 그 입구에서 플란츠를 보러 온 에반과 딱 마주쳤다.

물론 둘은 두 번째 만나는 것이었다. 다만 처음의 만남이 비밀리에 이뤄졌던 탓에 앨런은 첫인사를 다시 건넸다.

"앨런 마나실입니다."

그런 앨런을 잠시 노려보던 에반은 무언가를 씹어 뱉는 듯한 얼굴을 하며 자신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에반 브리센."

그 말에 앨런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 서로 갈 길 가자며 조신하게 옆으로 비켜선 앨런을 향해 에반이 입을 열었다.

"부하 한 명이 사라졌는데 얼굴이 참 태평하기도 하군."

앨런의 아랫사람이 사라진 일 때문에 골치가 아프던 차에 정작 앨런은 그리 걱정거리가 없어 보이니 부아가 치민 것이다.

그런데 그 말을 듣는 앨런 역시 편한 속이 아니었다. 누가 시켰건 결국은 에반의 기사들이 아르센을 공격한 것이 아닌가.

아무리 아르센이 멀쩡히 돌아와 앨런의 오리알이나 깨먹고 있다지만 브리센으로부터 선제 공격을 당했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부하가 열 명이나 죽었다던 후작께서도 퍽 태평한 얼굴을 하고 계시는군요."

따라서 앨런의 입에서도 이렇게 곱지 않은 대꾸가 튀어 나왔다.

에반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앨런은 에반이 주먹을 쥐는 것을 슬쩍 쳐다본 뒤 속 시원하게 말을 이었다.

"만약 제 아랫사람이 그리 죽어 돌아왔다면 이렇게 쉬이 왕궁에 찾아오기보다는 당장 장례부터 신경을 쓰겠습니다. 무엇 때문에 죽었던 그것이 윗사람의 도리 아니겠는지요."

졸지에 윗사람 구실도 못하는 이가 된 에반이 앨런을 향해 잇소리를 냈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 누굴 가르치려 드는 것인가. 설마 전하의 앞에서까지 그리 건방지게 행동하는가?"

당연히 르메인의 앞에서는 더 건방지게 행동한다.

"후작께서 참견하실 영역이 아닙니다. 선은 지키시지요."

카이리스에서 앨런은 평민이나 다름 없다. 그럼에도 앨런은 능력이 있다는 이유로 중앙 귀족 이상의 대우를 받고 있었다.

그런 앨런이 에반의 말에 단 한 마디도 지지 않는 것이 에반의 이성을 자꾸 흩트려 놓았다. 에반이 그 뒤틀린 심기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이런 작자를 총애하며 옆에 두고 있으니 전하의 안목도 결코 믿을 것이 못되는군."

그리고 에반이 체르밀 궁이 있는 곳을 노골적으로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그 스승에 그 제자라 하니 3왕자의 성품도 알 만 하고."

앨런이 짧은 웃음 소리를 냈다.

르메인을 넘어서 칼리안까지 저 입에 담겨졌으니 그나마 참고 있던 앨런의 입이 완전히 풀려버렸다.

"고작 마법사 한 명을 잡겠다며 덤비다 정예기사 열이 죽어 나간 기사 가문보다는 믿을 만 하겠지요."

방금 앨런이 언급한 것은 지금의 에반에게 있어 가장 굴욕적인 부분이었다. 그것을 푹 찌른 앨런이 계속 입을 열었다.

"그런데 듣자하니 시신들이 누운 모양새가 사방으로 도망가다 죽은 꼴이라 하더군요."

앨런의 시선이 에반의 머리부터 발 끝까지를 천천히 훑어 내려갔다 올라왔다.

"그 스승에 그 제자라 말씀하셨으니. 후작의 칼 솜씨가 어느 정도인지 저도 좀 알 것 같습니다."

순간 에반의 눈에서 살기가 피어올랐다 가라앉았다.

에반이 간신히 참고 넘기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입을 아주 조심해서 놀려야 할 것이다, 마법사."

"후작의 검이나 조심해서 놀리시지요. 나에랑샤 거리의 건달들도 돈 받고 사람 잡아가는 짓은 안 합니다. 부끄러워서."

하다하다 건달이란다.

"닥치거라!"

칼리안이 말하기를 앨런 마나실의 입에 세렌티의 영광 있으라 하였으니. 닥치란다고 닫아질 입이었으면 그런 말을 했겠는가.

앨런이 확연한 조소를 입에 띄우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얼마를 받았다고 합니까."

그렇게 물은 앨런이 한 마디를 덧붙였다.

아주 작은 소리로 하지만 또렷하게.

"물론 그 날보다 더 많이 받지는 못했겠지요."

- 당신이 당신의 자식을 팔아 치운 그 날보다.

앨런의 눈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 눈에 담긴 말을 들어버린 에반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쇳소리 섞인 음성이 에반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방금 뭐라 지껄였나, 마법사?"

그와 함께 에반의 온 몸에서 살기가 피어 올랐다.

일전에 에반의 서재에서 보였던 것과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 짙은 살기였다. 그때 모든 힘을 내보이지 않았던 탓에 다시 한번 살기를 꺼내보인 듯 했다.

딱히 의도한 것은 아니었으나 또 한번 기 싸움을 하게 되어버린 앨런이 혀를 찼다. 아무리 에반이 7서클 마법사를 제대로 겪어본 적이 없다지만 저택에서 한 번 부딪혔던 일을 통해서도 배운 것이 전혀 없는 모양새였기 때문이다.

아마도 에반은 6서클에 그냥 1서클만 더하면 그것이 바로 7서클이라 생각하는게 분명했다. 대륙에 7서클 마법사가 고작 세 명 뿐이라는 사실만이라도 기억해내면 좋으련만.

"나는 그리 무르지 않다 하였는데, 그새 잊으셨나 봅니다."

확실히 에반의 살기는 강했다.

체르밀 궁 안에 있던 칼리안이 그것을 느꼈을 정도였으니 어설픈 힘은 아니었다.

다만 그 상대가.

앨런 마나실이었다.

"이리도 주제를 모르시니······ 정말 어찌 감당하실는지."

그 말과 함께 지극히 원초적인 공포가 온 몸을 죄여왔다.

- 사아아······.

형언할 수 없는 위대한 이의 앞에 무릎 꿇은 듯한 느낌이 에반을 엄습했다.

에반의 살기만 더 짙어진 것이 아니었다. 앨런의 공포 역시 마찬가지였다. 에반은 깊고 깊은 구렁텅이에 홀로 침잠하는 공포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 그의 귀에 앨런의 목소리가 울렸다. 에반의 살기에는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듯한 평온한 목소리였다. 그 소리의 울림에도 공포가 있었다.

"생각을 좀 하시지요."

그것을 이겨내려는 듯 에반의 살기가 한층 짙어졌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것처럼 앨런의 공포감이 몇 배로 늘어났다.

곧 앨런이 고개를 살짝 숙여 에반의 눈을 직시했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뗐다.

"내가. 누구인지."

그와 함께 또 한 번 앨런의 기운이 에반을 짓눌렀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에반은 더 이상 버티지 못했다.

결국 에반이 이를 악물며 살기를 흩었다. 그것을 느낀 앨런도 피어를 멈추었다.

곧 에반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홀로 강한 것은 결코 오래 남지 못한다, 마법사."

순간 앨런의 머릿속에 칼리안의 모습이 떠올랐다.

때문에 앨런은 여유롭게 답할 수 있었다.

"나는 홀로 강하지 않으니 상관 없습니다만. 그레이 브리센 변경백이 누구를 믿고 또 무엇을 바라고 여기 오려 했는지 생각해보신 적 있습니까?"

에반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앨런의 시선이 노골적으로 움직였다. 실리케가 있는 헤이시아 궁을 향해서였다.

"브리센은 홀로 강하고자 하는 이들이 너무 많군요. 얼마나 오래 갈지는 내가 지켜보지요."

결국 에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아무래도 에반이 생각해야 할 것이 많아보였으므로 앨런은 그런 에반을 내버려두고 자리를 떠났다.

* * *

차를 가져다 달라는 칼리안의 말에 얀이 곧바로 움직였다.

방금 나온 곳이 식당이었으니 얀은 재빨리 식당 옆에 마련된 다과 준비실로 갔다. 그리고 그 곳에서 따뜻한 코코아 그리고 코코아에 잘 어울릴 옥수수 쿠키를 준비해 칼리안의 방으로 갔다.

얀에게 알렸던 바와 같이 칼리안은 테라스에 나와 있었다. 이제 날이 많이 추워졌으므로 얀은 테라스 테이블에 차를 놓고 다시 방으로 가 가디건을 챙겨왔다.

"감기 걸리십니다."

얀이 이렇게 말하며 가디건을 건넸고 칼리안은 그것이 굳이 필요치 않다는 말 대신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가디건을 받아 걸쳐 입었다.

곧 칼리안의 옆에 선 얀이 물었다.

"무엇을 그리 보십니까?"

거칠거칠한 식감이 매력적인 옥수수 쿠키를 한 입 베어 문 칼리안이 멀리 보이는 체르밀 궁 입구 쪽을 가리켜보였다. 그리고 쿠키를 우물우물 씹어 삼킨 뒤 입을 열었다.

"저기."

인공 호수와 장미 정원을 빙 둘러 가야 체르밀 궁의 입구가 있었기 때문에 얀에게는 그저 두 사람이 서 있는 것 정도만 가늠이 되었다. 눈에 힘을 잔뜩 주며 누가 있는 것인지 확인하려는 얀을 본 칼리안이 뜻 모를 소리를 했다.

"오싹오싹하네, 아주."

여전히 얀은 이해가 잘 안된다는 것처럼 고개를 갸우뚱했다.

"저는 무슨 일인지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기분 좋은 일이 하나. 그리고 재미있는 일이 하나."

앨런이 이겼으니 기분이 좋았고

에반의 오러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으니 재미가 있었다.

"늙어 죽어가는 사자인 줄 알았더니. 이빨이 꽤 날카롭네."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한참을 웃었다.

제15장. 하나만 묻겠습니다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