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그레이 브리센 변경백은 대륙의 세 번째 검이었다.
에반 브리센 후작은 그보다 먼저 검의 길에 들어섰다.
그러니 적어도 세 손가락 안에는 들어가는 시기에 소드마스터가 된 에반이 눈을 치켜떴다. 지금 막 들어서는 칼리안을 본 뒤였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에반은 대문까지 닫고 겨울 내내 수련만 했다.
이쯤 했으면 됐겠지 싶어 문을 열고 나온 터였다.
그런데 칼리안에게서 오러의 힘이 여전히 느껴지지 않았다.
검의 길에 오른지 아직 일 년도 채 되지 않은 애송이인데 겉보기로는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일 뿐이었다. 슬레이만의 말마따나 칼 근처에도 못 가본 얌전한 왕자 꼴이었으니까.
단단히 각오하고 왔음에도 얼굴 표정이 일그러지지 않도록 막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물론 그런 에반의 속내는 모조리 칼리안에게 까발려지고 있었다. 의도했던 상황이었으므로 칼리안은 우스워하지 않고 조용히 에반의 앞 쪽으로 걸어와 섰다.
에반은 그 때까지도 생각에 깊이 잠겨 있었다. 때문에 칼리안의 뒤에 서 있던 얀이 입을 열었다.
"브리센 후작. 일어나 예를 보이십시오."
집안 내력임이 틀림 없다.
먼저 예의를 차리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렇게 엎드려 절 받는 식으로 에반의 인사를 상대한 칼리안이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에반이 맞은편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자마자 입을 열었다.
"무슨 일로 내 형님이 아니라 나를 만나고자 청했습니까."
차 한 모금 마시지 않고 꺼내든 그 말에 에반의 눈썹이 꿈틀했다.
칼리안과 에반은 지금 처음 만난 것과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일전에 실리케를 축출하는 과정에서 아르센을 매개로 접점을 한번 가졌었다. 때문에 에반은 그 일을 빌미로 칼리안과 브리센이 손을 잡는 것에 대해 얘기를 좀 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왕궁을 찾아온 상태였다.
그런데 칼리안은 시간이 아깝다는 티를 풀풀 풍겨대고 있었다.
다만 앞에 있는 이는 앨런처럼 멋대로 성질을 부릴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때문에 에반은 떨떠름한 얼굴을 지우며 말했다.
"검의 길에 오르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왕자님."
"고맙습니다."
칼리안이 짧게 대답했다.
그러더니 에반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칼리안 역시 여전히 에반의 오러를 느끼지 못해서 그리 보는 것이었으나 에반이 그것을 어찌 알겠는가. 그저 다음 말을 빨리 꺼내고 헤어지자는 종용의 뜻으로 밖에는 받아들여지질 않았다.
'내가 이 곳에 괜히 왔구나.'
결국 에반은 꺼내봐야 손해일 것이 분명한 '칼리안과 브리센의 동맹' 이야기는 일단 접어두고 그럴싸한 방문 사유를 입 밖에 냈다.
"사실은 플란츠 왕자님께서 잘 지내고 계신지를 확인하고 싶어 왔습니다. 아무래도 저를 직접 보는 것은 꺼려하실 듯 해서 말입니다."
그 말을 들은 칼리안이 짧은 웃음 소리를 냈다.
대놓고 비웃음을 보인 것이다.
그것을 본 에반의 눈썹이 다시 꿈틀했고 칼리안이 냉랭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한 계절 얼었다 녹은 강물 소리는 내 귀에도 들립니다."
세뉴 강이 얼었다 녹을 만큼 시간이 지난 뒤에야 플란츠의 안부를 묻느냐는 질책이기도 했고 에반의 꿍꿍이 가득한 행보를 다 지켜보고 있었다는 말이기도 했다.
어찌됐건 그 속내를 다 들킨 것은 분명했으니 에반의 얼굴이 한 겨울의 세뉴 강처럼 꽁꽁 얼었다.
* * *
같은 시간.
새로 추가 된 20명의 발칸 대원에 대한 평가 결과 보고를 위해 르메인을 찾은 앨런이 편지 한 장을 들어보이며 말했다.
"이것이 왕궁에서 나와서 라트란을 들렀다가 다시 왕궁으로 왔더군요. 아무래도 사람이 남아나는 모양입니다."
앨런에게 줄 편지가 굳이 라트란 백작령을 거쳐 다시 왕궁으로 돌아온 뒤에야 받게 되어 하는 말이었다.
앨런이 건네준 보고서를 보고 있던 르메인이 고개를 들어 편지를 보았다. 그리고는 카이리스에서 일을 할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를 알려주는 것보다는 조금 더 나을 대답을 했다.
"발송이 다 끝난 모양이군. 백작에게까지 도착한 것을 보니."
새로운 호칭이 이제 조금 익숙해진 앨런은 별다른 거부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들고 있던 편지를 다시 훑어보며 입을 열었다.
"두 번째 초대장이라니. 지나가는 시간이 어찌나 빠른지 감회가 새롭습니다."
금박으로 화려하게 치장된 편지에는 르메인의 서른 아홉 번째 탄신 기념일 축제에 초대한다는 내용이 온갖 미사여구와 함께 적혀 있었다.
르메인의 생일은 5월이었다. 때문에 세크리티아와 리베른 텐실에 보내는 초대장은 새해 초에 이미 발송되었다. 그 다음으로는 먼 곳에 거주하는 카이리스의 귀족들에게 그리고 마지막으로 카이리시스 인근에 머무는 귀족들에게 보내졌다.
그러니 앨런은 마지막의 마지막에 발송된 초대장을 받은 것이라 보아도 될 터였다.
"이번에는 작년처럼 버리지는 말도록."
괜한 트집을 잡으려 들었던 일을 꼬집는 말에 앨런의 입가에 웃음이 들었다. 새 초대장 달라는 앨런을 스승님으로 삼아버렸던 칼리안의 당돌한 모습이 생각난 까닭이다.
"걱정 마시지요. 제가 받은 초대장은 시스파니안이 와서 버리라고 하셔도 못 버립니다."
그렇게 말한 앨런이 테이블에 놓여 있던 상자에서 초콜릿 하나를 집어들어 입에 넣었다. 그러자 낯설면서 친숙한 새콤달콤한 맛이 입 안에 퍼졌다.
"귤 잼이 들었나 봅니다. 카이리시스에서는 귤을 접하는 것이 그리 쉽지 않을 터인데. 리베른의 것입니까?"
"세크리티아."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한 르메인이 초콜릿 상자를 앨런 쪽으로 밀었다.
"단 것은 백작이 좋아하니 가져다 먹게. 새로 봉해진 남작이 세크리티아에서 구했다며 보내왔는데 손이 잘 가질 않는군."
그 말을 들은 앨런이 르메인에게 보이지 않을 묘한 미소를 지었다.
세크리티아의 귤이라니.
앨런보다 몇 배는 좋아할 사람이 딱 한 명 있지 않은가.
르메인이야 칼리안이 세크리티아 기사의 기억만 가지게 된 것으로 알고 있으니 떠올리지 못했겠지만 앨런은 아니었다. 때문에 앨런은 더 먹지 않고 그의 어여쁜 제자에게 고스란히 전해줄 요량으로 상자를 집어들며 물었다.
"혹시 전하의 탄신일 축제에 세크리티아에서는 누가 오는지 회신이 있었습니까?"
"아직. 답이 오려면 시간이 좀 걸릴 테지."
칼리안에게 있어 귤만큼 반가운 사람이 오게 될지.
퍽 기대되는 눈을 한 앨런이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 * *
꺼려하던 이를 마주치는 것만큼 곤욕스러운 일이 또 있을까.
에반과의 짧은 대화를 마치고 체르밀로 돌아오는 길에 결국은 란델을 마주치고 말았다.
체르밀로 들어가는 세 개의 계단을 사이에 두고 칼리안이 계단 위에 선 란델을 향해 고개를 숙여 보였다.
"란델 형님을 뵙습니다."
예전 같았다면 '그래' 라는 말과 함께 지나갔을 란델은 발을 멈추고 칼리안을 내려다봤다.
플란츠였다면 인사는 건넸고 할 말은 없으니 먼저 가겠다며 자리를 떴을 것이다. 하지만 차마 그런 것을 따라할 수는 없던 칼리안은 속을 알 수 없을 이 첫째 왕자가 빨리 자신에게서 관심을 접고 가던 길을 가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 날 네게 응하지 않아서 미안하구나."
정말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란델은 여전히 계단 위에 선 채로 이런 말을 건네왔다.
매사 무관심한 란델이 '그 날'이라 기억하며 지칭할만한 날은 딱 하루다. 마지막으로 란델을 마주쳤던 날. 실리케를 몰아냈던 바로 그 날이다.
란델은 자신이 치유력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을 칼리안이 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플란츠가 피를 쏟아내던 그 상황에서 치유사를 찾다 말고 란델을 불렀으니 눈치를 못 채면 그야말로 얀이다.
칼리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히나가 오기 전, 치유사를 찾던 칼리안과 눈을 마주친 뒤 일어나 나가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 날의 도움 요청에 응하지 않은 것을 이제와 사과하는 중이라는 것도 알아들었다.
다만 칼리안은 그 일로 인해 마음이 편치 않아 그런 표정을 지은 것이 아니었다.
'계단 위에서······ 결례인데.'
같은 서열의 왕자를 계단 위에 선 채로 내려다본다는 것은, 아무리 란델이 장자라 하더라도 칼리안에게 취해서는 안될 행동이었으니까.
칼리안은 입으로는 사과를 말하면서도 정 반대의 모습을 보여주는 첫째 형을 슬쩍 올려다봤다. 란델은 여전한 얼굴과 표정으로 칼리안을 보고 있었다.
푸른 눈이 여전히 깊고 어둡다.
그리하여 마치 푸른 짐승의 아가리 속에 고개를 처넣는 기분이 든 칼리안이 웃었다.
"고작 세 칸짜리 계단으로 속마음을 보이십니까."
여전히 아래에 선 칼리안이 란델을 고스란히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 뒤 천천히 계단을 밟고 올라섰다. 조용한 체르밀 궁에 계단 밟는 소리와 칼리안의 목소리가 함께 울렸다.
"오래도록 피어 있었다던 그 작은 장미. 그것이 무슨 뜻이었는지 이제야 이해를 했습니다."
"그것을 보았더냐."
- 타박, 타박.
"네. 보았습니다. 다만 왜 그렇게 꺼내두셨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는데, 말라 비틀어지고 시들어있지 말고 보기 좋게 제대로 피어 있으라는 뜻이었나 봅니다. 보기 좋게, 다만."
- 타박.
"······ 란델 형님의 발 밑에서."
마지막 계단을 올라간 칼리안이 같은 높이에 있는 란델의 눈을 쳐다봤다. 란델이 칼리안의 시선을 마주 바라봤다. 높낮이 없는 목소리가 조용히 들려왔다.
"그래. 그런 생각이었지."
"저는."
칼리안의 입에서 적개심 가득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싫습니다."
능력있고 말 잘 듣는 착한 동생은 베른이 이미 한 번 했다.
그러니 칼리안은, 안 할 거다.
제18장. 가진 것이 많아서 (3)
"아주 자알 하셨습니다."
혼났다.
"한 겨울 잘 보내고는 반 나절도 안 되어 에반 브리센 후작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란델 왕자와는 완벽하게 척을 지셨습니다. 그것도 그렇게나 성질을 부려가며 그리 만드셨으니 참 자알 하셨습니다."
하루아침에 일을 다 틀어버렸으니 앨런의 입에서 좋은 말이 나올 리가 없었다.
"하시는 김에 란델 왕자와 브리센 후작을 한 자리에 불러다놓고 서로 통성명이나 해주시지 그러셨습니까. 이 참에 둘이 잘 지내봐라 했으면 딱 좋았겠습니다."
에반의 검술 실력까지 칼리안보다 좋을지는 알 수 없지만 오러를 쌓아 온 시간의 간극을 좁히는 것이 쉽지는 않았음을 다시 확인했다. 결국 앨런에게도 더는 숨기지 않고 이 내용을 알렸다.
게다가 란델이 칼리안을 동등한 관계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도 명확히 알게 되었다. 간혹 도와주기도 하고 말을 받아주기도 했던 그 모든 행동들이 칼리안이 '그럭저럭 쓸 만한 도구'로 커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때문에 거부했고 이것도 앨런에게 말했다.
그래서 혼났다. 아니, 혼나고 있었다.
"후작 쪽이야 그간 쌓인 것이 많으셨겠지요. 저도 압니다. 그래도 아직은 브리센이 꼬리를 말고 있으니 오러 차이가 나든 말든 한번 쯤 화내실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말한 앨런은 속이 답답해 안되겠다는 듯 손가락을 튕겼다. 테라스 문이 활짝 열리며 찬 바람이 훅 들어왔다.
좀 살겠다는 표정이 된 앨런의 시선이 다시 칼리안에게로 닿았다.
"브리센은 그렇다 치더라도 란델 왕자의 속알맹이가 하루 이틀 의뭉스러운 것도 아니었는데 그걸 굳이 들쑤셔서 불씨를 만들다니. 왕자님답지 않게 왜 그리 날을 세우고 오셨습니까. 평소였다면 어떻게 대응할지 결정할 때까지 적절히 몸을 사렸을 분께서요."
충분히 귀 기울이며 앨런의 말을 다 들은 칼리안이 씩 웃으며 말했다.
"초콜릿 맛있네요."
신나게 얘기했더니 이러고 있다.
"이런 어여쁜 제자가 또 어디에 있을는지."
앨런에게서 피어가 조금 새어나왔다.
태연한 얼굴로 스승이 흘린 공포감을 떨쳐 낸 칼리안이 초콜릿 안의 귤 향을 한껏 느끼며 조금 전 란델과의 일을 떠올렸다.
'아쉬운 일이구나.'
발 아래 서지 않겠다 한 칼리안의 말에, 란델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로 이렇게 대답했다. 그리고 더 이상의 말 없이 자리를 떴다.
"생각없이 날만 세우고 온 것은 아니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 이상 어떤 걱정을 하지 말라 하십니까."
"란델 형님은 제가 브리센과 등진 것을 확신하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겁니다. 브리센 후작 쪽은 아직까지는 몸을 사릴 테니 그 쪽도 걱정할 필요 없고요."
"란델 왕자 쪽은 그렇다 하더라도, 브리센 후작 쪽은 어찌 그리 보십니까. 실리케도 사라졌으니 당장 세 왕자 중 한 명을 붙들어야 살 판 아닙니까."
"제가 플란츠 형님과 한 배를 탔으니까요."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거리는 머리카락을 잠깐 쓸어넘긴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형님이 실리케의 비밀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 알고 있는 비밀이 있으면 그걸 저에게 말했는지, 말하지 않았는지도 모를 테고. 그러니 불안할 것 아닙니까."
"실리케의 비밀이라면, 전 왕비 아이샤에 대한 말씀이십니까."
"네. 하다못해 독이라도 구해다 주었을 테니 브리센 후작이 그 일에 관여하지 않았을 리 없습니다. 그리고 아이샤의 독살 사실을 제가 이미 알고 있으리라고는 생각 못 할 겁니다. 다만 플란츠 형님이 그 일을 알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의심은 할 테고요."
플란츠와 실리케가 얼마나 가까웠는지 에반은 모른다. 그러니 에반은, 실리케가 아이샤를 독살했다는 사실을 칼리안은 모르더라도 플란츠는 알고 있지 않을까 걱정하리라는 말이었다.
"브리센 후작이 란델 형님과 손을 잡을 생각을 하더라도 우선은 플란츠 형님을 떠올릴 수 밖에 없을 겁니다. '혹시 플란츠 왕자가 아이샤에 대한 일을 알고 있는가. 안다면 그것을 칼리안에게 전했는가.' 하고요."
앨런이 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제가 그 이야기를 전해듣고 텐실에 알린다면 텐실 왕가에서 브리센을 노릴 테니, 예전엔 어땠을지 몰라도 지금은 섣불리 란델 형님에게 손 내밀지 못할 겁니다. 지금까지 그래온 것처럼요."
결국 란델은 플란츠와 브리센 쪽을, 브리센은 란델과 텐실 쪽을 신경쓰느라 당장의 칼리안을 견제하지는 못하리라는 뜻이었다.
그런 이유로 마음 놓고 성질을 한 번 부려 본 칼리안이 초콜릿 하나를 더 집어 입에 넣었다.
달았다.
그리운 곳의 향이 입 안에 퍼진다.
* * *
잠결에 손을 뻗으니 희고 보드라운 것이 손가락 끝에 닿았다.
부드럽게 뭉클거리는 느낌이 나쁘지 않아서 잠시 가만히 있던 플란츠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그것이 결코 기분만 좋고 넘어갈 일이 아님을 깨닫고는 몸을 확 일으켰다.
언뜻 보면 쿠션 같기도 한 둥글납작한 것이 플란츠의 옆에서 단잠에 빠져 있었다.
당연히 칼리안의 고양이였다.
"또 왔네."
정작 칼리안의 방에는 제 발로 간 적 없다는 이 놈의 고양이는 여전히 틈이 날 때마다 찾아왔다. 세상 모르고 잠을 자고 있는 놈 덕에 잠이 깬 플란츠는 더 잘 생각도 들지 않아 그냥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다시 한번 움직임을 멈췄다.
침실 커튼 너머 소파 위에 고양이 주인이 앉아있는 것을 본 탓이다.
이렇게 올 일은 더 없을 것이라 해놓고 칼리안이 또 왔다.
두 번은 못하겠다던 앨런이 한번 더 수고를 해주고 간 덕분이었다.
"뭐야."
"어떻게 깨워야 하나 고민하던 참이었는데 다행이네요."
꽤 깊이 잠이 들었던 탓이었는지 아니면 칼리안이 조금 더 조용히 움직일 수 있게 된 까닭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무튼 이번에는 고양이와 고양이 주인이 들어온 것을 전부 다 눈치채지 못했다.
"제가 아침부터 어딜 좀 가야해서 조찬에 못 갑니다."
"그런데."
"아. 조찬에 못 간다는 것을 말씀드리려는 것이 아니라, 조찬에 못 가니 드릴 말씀도 못 드릴 것 같아서 왔습니다."
높낮이 없는 목소리에, 플란츠는 대답 없이 칼리안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근시일 내에 브리센 후작이 형님을 찾을 겁니다. 빠르면 오늘일 수도 있고요."
"······ 그래."
"상대하기 불편하시겠습니까."
실리케의 일에 에반이 꽤 크게 관여를 했기 때문에 플란츠가 에반을 어떻게 생각할지는 칼리안도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묻는 말이었다.
사실 에반과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지내기에는 썩 보들보들한 사이가 아닌 것은 맞았다. 하지만 얼굴 보는 것이 꺼려질 만큼도 아니었다. 따라서 플란츠는 별 것 아니라는 말투로 대답했다.
"상관없어."
커튼 때문에 플란츠는 칼리안의 얼굴을 볼 수 있지만 칼리안은 플란츠의 표정을 살필 수가 없었다. 때문에 저 말이 진심인지 아닌지를 구분하기는 어려웠으나 칼리안은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플란츠가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잘 대접해서 보내면 되나."
칼리안이 에반에게 얼마나 큰 무안을 주고 되돌려 보냈는지는 플란츠도 알았다. 그러니 에반이 그 다음으로 란델이나 자신을 찾아오리라는 것 정도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 처신을 어찌 해야 하나 아직 결론을 못내렸는데 칼리안이 그 문제를 대신 풀어 준 셈이었다.
"잘 하실 필요까지는 없고 적당히만 대접해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플란츠가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입을 열었다.
끄덕여 봐야 안 보일 테니까.
"알겠으니, 가."
"그리고 아침부터 드릴 말로 적절하지는 않겠지만."
"또 뭐."
칼리안은 자리에서 일어서는 대신 말을 한번 더 골랐다. 조금 꺼내기 어려운 말 하나를 더 전해야 했다. 덕분에 한동안 말이 이어지지 않자 플란츠가 잠깐 고개를 돌려 헤이시아 궁 쪽을 쳐다봤다.
"내 어머니와 관련된 일인가."
정말 어찌나 눈치가 빠른지.
"네. 맞습니다."
"말해."
"브리센 후작이 형님께서 뭔가를 알고 있는지를 떠보려 할 수 있습니다. 미리 알고 계시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요. 알고 계신다는 티도 내시고 저에게 말했다는 티도 내셔야 합니다."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주의하라는 듯 말을 이었다.
"비밀은 아는데 저한테는 말 안했다는 것처럼 보이면 형님 죽습니다."
플란츠가 피식 웃었다.
요즘 죽을 일 참 많아졌다 싶어서였다.
"무슨 일인데."
"아이샤 전 왕비는 독살됐습니다."
커튼 너머에서 한동안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리고 대답 대신 짧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잘 알아들었다는 뜻일테니 칼리안은 더 이상의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간단히 고개를 숙여보인 뒤 제 방으로 돌아갔다.
* * *
에우리아 세이렌은 평소보다 조금 일찍 집에서 나왔다.
본래는 폴룬 마법학원으로 가서 교장 에우리아가 되어야 하는 날이었으나 그 날은 달랐다. 카이리스 마법사 협회 건물로 간 것이다.
마차가 협회 건물 앞에 다다를 때 쯤 무언가를 발견한 에우리아는 낭패한 듯한 얼굴이 되었다.
"레이븐이 벌써······. 큰일났네."
이제 카이리시스 사람들이 모두 알아보는 오른쪽 발목에만 하얀 털이 난 검은 말이 마굿간에 있었기 때문이다.
약속 시간보다 30분을 빨리 왔는데 칼리안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서둘러 마차에서 내린 에우리아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건물 안에 유난히 사람들이 많았다. 에우리아를 만나러 온 칼리안을 보기 위해 몰린 것이다. 하여튼 호기심 많은 마법사들이 건네오는 인사를 듣는 둥 마는 둥, 에우리아는 마법사들 사이를 헤치며 자신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이미 차를 반쯤 마신 칼리안이 이제 막 들어온 에우리아를 보며 웃었다. 딱 봐도 허겁지겁 달려온 티가 난다.
"내가 일찍 온 것이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죄송합니다, 왕자님."
칼리안에게 예를 보인 에우리아가 곧바로 책상으로 걸어가 편지 한 장을 들고 왔다.
"여기, 아이즌 에이프린 백작으로부터 온 소식입니다. 어제 저녁에 도착했습니다."
기사 세력의 준비가 어느정도 되어 가는지 적혀 있었는 서신.
한 달에 한 번씩 아이즌은 이렇게 에우리아를 통해 칼리안에게 연락을 취했다. 그리고 칼리안은 이렇게 보고받은 내용에 대한 지시사항과 지원금을 다시 에우리아를 통해 그들에게 보내고 있었다.
편지를 읽던 칼리안이 잠시 침음을 냈다. 그간 문제 없이 준비가 되어 가고 있다는 내용만 적혀 있었는데 이번에는 아니었다.
"전염병이라니."
"네. 기사 가문 중 한 곳의 영지에서 전염병이 돌았다고 합니다. 영지민과 기사들 중 열에 한 명이 죽는 피해가 있었다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추위가 가시면서 문제가 생긴 듯 합니다."
"이젠 카이리스에 치유사들도 없으니 많이 어려웠겠습니다. 그래도 지금은 소강을 보이고 있다 하니 다행이네요. 전하께서도 아시는 일인지 말씀을 드려봐야 되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잠깐 뒤를 봤고, 얀이 다가와 수표 한 장을 내려놓았다.
본래 생각했던 것보다 금액을 더 높게 쓴 칼리안이 그것을 에우리아에게 전하며 말했다.
"내가 도울 수 있는 것이 이것 뿐이군요. 폴룬 남작 통해서 필요한 물품을 함께 보내세요. 인근의 다른 영지들도 피해가 있다면 그 곳들도."
"네 왕자님. 그렇게 하겠습니다."
곧 칼리안이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그런 칼리안을 배웅하려던 에우리아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수표에는 평소 지급하던 금액보다 '0'이 하나 더 붙어 있었다.
"영지 복구가 아니라 영지 구매가 가능할 돈을 주셨네."
에우리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왕자에게 지급되는 용돈이 아니라 칼리안의 사비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 * *
청년은 지닌 성격만큼이나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의 손에는 얼마 전 카이리스로부터 도착한 초대장이 들려 있었다.
맞은편에 앉아있던 기사가 걱정 가득한 눈을 하며 물었다.
"정말 가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위험할 수 있습니다."
청년은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나실 경을 좀 만나야 해서. 바쁘다 하니 내가 가야지."
청년의 고집을 잘 아는 기사는 더 이상 만류할 수 없음을 알고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을 본 청년이 작게 웃었다.
바람이 불었다.
청년의 긴 청은발이 잠시 흔들렸다.
제18장. 가진 것이 많아서 (4)
칼리안이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건드렸다.
생각할 거리가 있을 때 보이는 두 번째 버릇이다.
주변에 꽤 많은 이들이 있었으나 그렇다 하여 소란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칼리안은 다른 이들의 이야기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손 끝에서 소리가 나지 않게 신경을 썼다.
중앙 귀족의 정기 회의가 진행되는 회의장.
성인식을 치르고 난 뒤 칼리안도 참석하고 있는 자리에서, 커다란 원탁에 둘러앉은 귀족들 중 가장 젊어 보이는 이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올 초에 있던 큰 비로 텐실의 피해가 크다 합니다."
- 그해 봄, 텐실에 유례없는 수해가 발생했다.
- 텐실의 신관들은 세렌티를 경배하는 마음이 부족한 탓이라 했으나 다른 이들은 그것이 운하 건설을 위해 물길을 막아서 생긴 일이라 했다.
사실 칼리안은 회의에 드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시간을 거슬렀다는 이유로 칼리안 혼자만 알고 있는 내용이 언급되면 마음이 편치 않았기 때문이다.
"수해가 생기면 가장 부족한 것은 식량이 아니겠습니까."
- 카이리스에서 이를 돕기 위해 식량을 지원했으나 텐실에서는 거절했다.
- 이 일로 양국의 사이가 한동안 좋지 않았다.
이번 일도 마찬가지다.
적어도 카이리스에서 지금 언급되는 '식량'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는 것은 칼리안 뿐이었다.
때문에 고민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양국의 우호 관계 유지를 위해 밀을 지원하는 것이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저 음흉한 놈의 입을 틀어 막을지, 떠들도록 그냥 둘지.
카이리스와 텐실은 밀 수확 시기가 달랐다.
수해가 있다 해도 1월에 마지막 수확이 끝난 텐실의 밀은 각 영지의 저장고에 안전하게 잘 쌓여 있었다. 정작 부족한 것은 따로 있었음에도 넘쳐나는 밀을 지원했으니 거절하는 쪽이나 거절 당한 쪽이나 서로 기분이 상할 수 밖에.
즉, 이것은 양국의 사이를 멀어지게 하여 란델의 입지를 좁히려 한 브리센의 수작이었다.
칼리안의 기억과 같은 일이 반복되는 것을 보니 브리센은 아직 란델의 편에 설 생각은 없는 듯 했다. 플란츠를 염두에 두었거나 칼리안에게 여전히 마음이 있는 것이리라.
"결정을 해주시면 담당자를 정하겠습니다, 전하."
아무튼 란델의 입지만 좁아지고 말 일이면 저 입을 그냥 둘 텐데 칼리안은 그럴 수가 없었다. 칼리안의 금고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는 폴룬 상단이 텐실과 다이아몬드 거래를 하고 있지 않은가.
'나서야 되나. 그냥 둬야 되나.'
앨런과 키리에, 그리고 멜피르를 제 옆에 둔 것과 마법사단을 만든 것. 칼리안이 아는 정보를 활용해서 벌인 일은 이 정도였다.
'그것만으로도 미래가 꽤 많이 바뀌고 있는데 상단 수익을 위해 양국 관계에 영향을 미칠 일에 내가 직접 간섭을 해도 될지.'
고민이 깊어진 칼리안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런데 그때 예상 외의 말이 들려왔다.
"필요치 않다."
르메인이었다.
이어진 르메인의 말은 칼리안이 생각한 것과 거의 같았다. 왜 밀이 필요하지 않은지 르메인은 이미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칼리안의 손가락이 잠시 멈췄다.
그리고 그 손가락은 테이블 위에 작은 곡선을 그렸다.
얼굴에 띄우지 못할 웃음을 손 끝으로 만들어냈다.
'과거의 전하께서는 저 의견이 잘못됐음을 알면서도 반박하지 못하신 거였군.'
그러니 결국은 칼리안이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많은 것을 바꾼 셈이었다. 때문에 칼리안은 가벼워진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만약 지원을 한다면."
지금껏 조용히 앉아만 있던 3왕자가 처음으로 입을 열자 장내의 모든 이들이 칼리안을 쳐다봤다. 그리고 칼리안은 여유로운 목소리로 정답을 말했다.
"소금을 보내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만. 지금 텐실은 염전과 소금 저장소가 모두 물에 잠겼을 테니."
르메인이 칼리안을 보며 살짝 웃는 것이 보였다.
'아무래도 안되겠군.'
그리고 그런 모습을 지켜본 에반 브리센 후작이 마뜩치 않은 것이 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의도했든 아니든 저 놈이 브리센의 일을 또 방해한 셈이 아닌가. 저 놈과 손을 잡는 것은 안되겠어.'
결국 에반은 란델의 손을 잡기 위해 일단 플란츠를 만나보기로 결정을 내렸다. 플란츠가 아이샤에 대한 일을 알고 있는지, 아닌지를 떠보기 위해서.
* * *
중앙 귀족 회의가 끝난 후.
플란츠에게 만남을 청한 에반은 귀족들과 적당히 끝인사를 나눈 뒤 약속 장소로 발을 옮겼다. 다른 이들과 따로 인사를 나눌 필요가 없는 플란츠는 이미 에반을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사실 에반이 플란츠에 대해 알고 있던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여러모로 실리케를 많이 닮았다는 것 평판이 그리 좋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칼리안과 손을 잡았다는 것.
그런 이유로 플란츠와는 절대로 손 잡을 일이 없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회의 중 있던 일 때문에 란델 쪽으로 마음이 많이 기운 상태였다.
그런데 에반은 세뉴 관의 응접실에 앉아 자신을 쳐다보는 플란츠를 본 직후 한 가지 사실을 더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생각을 잘못했구나.'
플란츠의 얼굴 어디에서도 에반에 대한 악감정을 찾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저는 왕자님께서 제 얼굴 보기를 꺼려하실 줄 알았습니다."
"내가 그래야 할 이유가 있나."
물론 플란츠는 에반에 대해 특별한 감정을 지닐 이유가 없었다.
애초에 실리케를 축출해야 한다 마음을 먹은 것이 플란츠 자신이었으니 그 일에 도움을 주었다 해서 에반을 멀리 할 이유가 없었다.
다만 플란츠가 무엇 때문에 그런 마음을 먹었는지는 모를 에반은 지금 자신을 대하는 플란츠를 보며 한가지 잘못된 가정을 만들어내게 되었다.
'플란츠가 실리케와 그리 사이가 좋지 않았고 때문에 칼리안과 잠시 손을 잡고 실리케를 몰아낸 것인가.'
라고.
그리하여 에반은 이런 생각의 끝에 마음을 살짝 바꿨다.
'칼리안보다 이 놈을 먼저 만났어야 했구나. 이 놈이 정말로 나에 대한 적의가 없다면 칼리안도 란델도 아닌 이 놈과 손을 잡는 것이 가장 나을 테지.'
에반은 괜히 칼리안을 먼저 찾아가서 그런 취급이나 받은 것을 잠시 후회했다. 그리고 플란츠에게 걸어가 간단한 예를 보인 뒤 맞은편에 앉아 말을 건넸다.
"그간 얼마나 마음 고생이 많으셨습니까."
플란츠의 앞으로 걸어가는 그 잠시동안 고민을 마친 결과로 나온 소리였다.
에반의 첫 말을 들은 플란츠가 한쪽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플란츠는 플란츠대로 에반이 자신을 '써먹기 좋은 호구'로 보았다는 것을 파악했으니까.
똑똑한 플란츠는 그 때부터 에반을 '적당히' 상대해주기 시작했다.
* * *
칼리안은 웃음을 참는 것이 역력한 표정이 되었다.
에반이 플란츠를 들춰보고만 갈 줄 알았다.
아이샤에 대한 비밀을 칼리안이 알고 있다면 계속 칼리안에게 손을 뻗을 것이고 아닌 것 같아 보인다면 란델에게 가리라고 그렇게 생각을 했다.
실리케로 인해 서로 껄끄러울 것이 분명한 플란츠를 제 편으로 만들 생각은 안하겠지, 라고.
그런데 브리센은 플란츠를 선택했다.
"형님의 좋은 머리에 감사드립니다."
플란츠는 자신이 왕이 될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꿍꿍이 모를 란델을 왕으로 세울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때문에 플란츠는 에반이 란델에게 가지 못하도록 그 마음을 붙들어놨다.
적당히 자존심을 세워줘 가며 에반과 손을 잡은 것이다.
또 건방진 소리를 하는 칼리안을 향해 피식 웃은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발칸의 일. 내일부터 맡도록 하지."
"네. 그렇게 하면 에반과 손을 잡은 뒤 일부러 발칸의 일을 맡은 것처럼 보일 테니. 발칸의 힘까지 브리센의 손에 들어온다 생각할 브리센 후작이 얼마나 좋아할지 궁금하네요."
이렇게 말하며 고개를 끄덕이던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그럼 그 후에 형님과 제 사이가 적당히 나빠져야 할텐데요."
"언제는 좋았던 것처럼 들리는데."
그 말에 칼리안이 씩 웃었다.
"아무튼 며칠 안에 제가 브리센과 사이 나빠질 일을 하나 하겠습니다. 기껏 도와드린 둘째 형님이 브리센과 손 잡은 것에 대한 화를 냈다 보여질 만한 것으로요."
"그래."
플란츠는 그것이 무엇인지 묻지 않았다.
그다지 궁금하지도 않았고 알아서 잘 하리라고 생각했던 까닭이다.
칼리안 역시 플란츠가 발칸에서 무슨 일을 해야 할 지 구체적으로 알려주지 않았다. 알아서 잘 할 테니까.
그저 미친 왕이라 불렸던 이를 상관으로 맞이하게 될 아르센만 고생길에 오를 뿐.
물론 칼리안이 신경쓸 바는 아니었다.
* * *
과거 언젠가 앨런이 키리에를 보며 물은 적이 있었다.
'자네는 여섯 번째 검이 될 생각인가?'
이런 뜬금 없는 질문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하루 18시간.
키리에가 칼리안의 수련실에 틀어박혀 검술을 수련하는 시간이다. 칼리안에게 배우든 칼리안과 대련을 하든 혹은 홀로 연습을 하든. 키리에는 그 시간을 채우고 나서야 하루를 마무리했다.
칼리안이 시킨 것이 아니었다. 스스로 그리 하고 있었다.
'왕자님께서 하나 줄여 놓은 소드마스터의 수를 다시 늘려놓고 싶은지 궁금해서 그러네.'
그리고는 어리석은 질문을 했다고 생각했다. 검을 쥔 그 누구라도 그것을 바랄테니 괜한 질문을 한 셈이 아닌가 하고.
그런데 예상 외로 키리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작지만 결코 자신 없지 않은 목소리가 대답을 내어놓았다.
'아닙니다. 저는 왕자님께서 쓰실만한 검이 되고 싶을 뿐입니다.'
'왕자님께서 쓰실만한 검이라. 사실 그것이 더 어려운 일 아니겠나.'
이미 칼리안은 그 스스로 강자였으니까.
'네. 왕자님께서 쓰실만한 검이 되려면 검의 길에 오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니까요.'
눈치 빠른 앨런이지만, 앨런조차 그런 키리에를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얀이야 어차피 오래 전부터 칼리안을 모셔왔었고 아르센은 어쩌다보니 칼리안에게 코가 꿰였다. 물론 앨런은 자신이 무엇 때문에 칼리안을 돕는지 스스로 잘 알았다.
칼리안이야 베른으로서의 과거가 있으니 키리에를 아낀다지만 키리에에게 그런 과거를 모두 알려주지는 않았다. 정확히는 키리에가 왜 자신을 따랐는지, 키리에의 과거에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려주지 않았다.
이 과묵한 소년이 대체 칼리안의 무엇을 보고 칼리안에게 제 생을 바치기로 했는지 그것을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쓸만한 검이라니. 그것 참 어려운 것을 하겠다고 나서는구나.'
다만 앨런은 앨런이었으므로 굳이 키리에의 속마음을 캐묻지 않고 이렇게만 대꾸했었다.
"키리에."
그리고 그 쓸만한 검을 칼리안이 불렀다.
그 후에는 '브리센과 사이가 나빠질 일' 하나를 지시하며 물었다.
"할 수 있겠어?"
언젠가 했던 것과 똑같은 질문이었다.
키리에는 만약 '할 수 없다'는 대답을 하더라도 칼리안이 자신을 탓하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그래서 곧바로 대답했다.
"네."
칼리안은 이번에도 다른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고 키리에 역시 간단한 인사만 마친 뒤 곧바로 칼리안의 방에서 나갔다.
그리고 그날 밤.
한 마리의 갈색 말이 왕궁에서 나왔다.
말이 향한 곳은 퍽 이상한 이름의 술집이었다.
- 시스파니안의 깊은 술냄새
혈혈단신으로 그 곳에 찾아간 키리에는 칼리안이 건넸던 검을 뽑아들었다. 그리고 주저 없이 술집 안으로 들어갔다.
"일행이 있으십니까?"
그렇게 묻던 점원의 눈이 키리에의 손에 들린 검에 가 닿았다.
그가 경계의 눈빛을 하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나자 키리에는 다른 말 없이 손가락을 세워 아랫층을 가리켜보였다.
"문만 열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점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달려가 비밀 문이 있는 방을 열었다.
아래로 내려가는 방에 들어선 키리에는 칼리안이 알려준대로 비밀 통로를 열었다. 그리고 3층을 지나쳐 4층부터 찾아갔다.
욕설과 고함 환호성이 가득한 곳.
그 곳에 도착한 키리에가 손에 쥔 검을 다잡았다.
그리고 오래 전 칼리안이 키리에를 꺼내오기 위해 들어섰던 사무실을 향해 발을 옮겼다.
제18장. 가진 것이 많아서 (5)
차 한잔을 내려놓은 시종장 라울이 창문을 열며 말했다.
"잠시 쉬시는 것이 어떠십니까. 바람이 좋습니다."
오늘따라 유난히 따뜻한 바람이 불어왔다.
작년 이맘때만 같았어도 그런 말을 절대 듣지 않았을 르메인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지."
곧 르메인이 찻잔을 손에 들고 창가로 가 섰다.
그 모습을 보는 라울이 기분 좋은 미소를 짓고 밖으로 나갔다.
어느 날부터인가 더는 강박적으로 일에 몰두하지 않게 된 르메인은 이제 아르피아 궁이 아닌 카밀리아 궁에서 잠을 잤다. 집무 공간과 거주 공간을 오가는 시간조차 아끼던 습관을 버린 것이다.
르메인 역시 자신이 많이 변했으며 그 변화에 칼리안과 앨런의 공이 크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변화의 시작점이 바로 작년의 국왕 탄신 기념일 축제라는 것도 모르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작년의 축제에서 벌어진 일이 참으로 많았다.
성대하게 벌어지는 축제인 만큼 매 해 말도 많고 탈도 많기는 했지만 어디 작년만 했을까.
"이번에는 좀 조용하려나 했더니."
때문에 올해의 축제는 작년에 비하면 조용히 지나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어찌됐건 실리케와 관련된 일이 마무리가 되었으니 말이다.
르메인이 책상으로 다시 걸어가 서랍을 열었다.
그 안에는 전서응을 통해 도착한 편지 한 장이 있었다.
본래대로라면 제대로 된 편지로 전달해야 하나 방문자 선정에 시간이 지체되어 부득이하게 새를 이용한다는 설명이 편지 내용의 8할이었다.
격식에서 어긋난 편지를 받은 르메인이 불편해할까 눈치를 보는 듯한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편지의 내용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딱 두 줄이었다.
먼저, 누가 오는지에 대한 설명.
그리고 안전을 위해 그들이 카이리스 왕궁에 도착하기 전까지 방문자 정보를 비밀에 부쳐달라는 부탁이 적혀 있었다.
그것을 보니 왜 그렇게 회신이 늦었으며 또 왜 그렇게 눈치를 보는 내용으로 도배를 했는지 곧바로 알 수 있었다. 격에 맞지 않는 편지를 받아 심기가 불편해진 르메인이 방문자에게 해를 입히지는 않을까 우려한 것이다.
'대체 나를 어떻게 보고 그런 걱정을 하는지.'
르메인이 헛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곧 다시 창 밖을 보며 혼잣말을 이었다.
"이번에도 시끌시끌하겠군."
* * *
키리에가 큰 숨을 들이쉰 뒤 내뱉었다.
점원은 건드리지 않는다.
손님은 아쉽지만 보낸다.
철창 속 '투견'들은 놔준다.
그리고 '그들'은 전부 죽인다.
'할 수 있겠어?'
'네.'
키리에로서는 당연한 대답이었다.
키리에에게 있어 이 도박장은 언젠가 반드시 왔어야 할 곳이었다. 그 언젠가가 오늘이 되었을 뿐.
칼리안은 다른 목적으로 이 일을 계획했겠지만 키리에는 참아 온 복수에 대한 허락인 것으로 받아들였다.
- 서걱!
입장료를 받던 사내의 목이 바닥을 굴렀다.
사내의 몸이 허물어졌다. 입장료 2 플로린, 손가락 두 개를 펼친 채였다.
사내의 죽음을 시작으로 키리에의 검이 도박장에 있는 이들의 생과 사를 구분하기 시작했다. 실수도 없었고 두 번의 검격도 없었다.
마치 아르센의 얼음창처럼, 키리에의 검이 한 번 지나간 자리에는 어김없이 생명이 떨어졌다.
"으아아악!"
'생'을 허락받은 이들이 비명을 지르며 앞다투어 계단을 올라갔다. 4층의 소란을 느낀 무사들이 더 들이닥치겠지만 상관 없었다.
- 촤악!
- 서걱!
그렇게 거침 없이 도박장의 사람들을 베고 찌르며 앞을 향해 가던 키리에가 잠시 발을 멈췄다.
도박장 한 가운데 설치된 철창.
무수한 '투견'들이 서로 싸우며 유흥거리를 주었던 바로 그 곳. 그 철창의 그늘에 한 남자가 숨어 있었다. 키리에는 주저없이 그를 향해 걸어갔다.
사회자였다.
그가 키리에의 얼굴을 쳐다봤다.
잊기 어려운 서로 다른 색의 두 눈이 사회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 나는 아무 것도 안했어!"
언제나 유쾌한 목소리로 '괴물 눈알'을 소개하던 입에서 두려움에 가득 찬 말이 터져 나왔다.
'이런. 너무 놀라지 마십시오. 종종 있는 일입니다.'
손님들 앞에서 키리에의 동료 한 명이 죽었을 때 사회자는 그렇게 말했었다. 문득 그 날이 생각난 키리에가 낮은 목소리를 내뱉었다.
"했습니다."
- 촤아악!
사회자의 피가 철창 안으로 흩뿌려졌다.
창살을 타고 뚝뚝 흘러내리는 피를 바라보던 키리에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 사이 4층의 소란을 알고 십여 명의 사내들이 더 내려왔다. 그래서 모두 죽였다.
그렇게 이어진 키리에의 복수가 사무실 문 앞에서 잠시 멈췄다. 네 명의 사내가 예리한 검을 든 채 키리에를 막아서고 있었던 까닭이다. 그들은 키리에도 아는 이들이었다.
바로 사무실의 남자를 지키던 네 명의 검사였다.
"이 새끼, 여기가 어디라고!"
가장 덩치 큰 사내가 이런 말과 함께 검을 뻗자 나머지 셋의 검도 키리에에게 내리떨어졌다.
그런데 이제껏 무표정하던 키리에의 얼굴에 작게 웃음이 띄워졌다.
'느리다.'
처음 이 곳에 붙들려 왔을 때는 저들이 그리도 무서웠는데.
- 카캉!
검을 한 번 떨쳐내는 것으로 그들의 공격을 빗겨낸 키리에가 다시 팔을 움직였다. 한 번의 베기에 두 명의 목에서 피분수가 터졌다.
남은 둘 역시 오래 살아있지 못했다.
비명을 지르던 머리가 먼저 떨어졌고 도망치던 마지막 사내의 머리가 철창 앞까지 굴러갔다.
키리에는 그 머리가 어디까지 가는지 보지 않은 채 사무실 문을 벌컥 열었다. 그리고 아주 잠깐 발을 멈칫했다.
사무실 안이 비어 있었다.
칼리안과 키리에의 몸값을 놓고 흥정을 하던 남자는 그 곳에 없었다. 대신 남자가 늘 앉아 있던 곳 뒤편의 거대한 금고 안에서 숨 죽인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선 채로 검을 쥔 손목을 빙글 빙글 돌리던 키리에가 조용히 걸어가 금고 문을 열었다.
- 쉬이익!
기다렸다는 듯, 한 자루의 단검이 날아왔다.
키리에가 검을 들어 그것을 쉬이 막아냈다.
- 카앙!
단검은 튕겨나가지도 않았다. 그대로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아르센의 얼음에 비한다면 우스운 속도다.
칼리안이 던진 단검이었다면 검과 목을 같이 꿰뚫었을 것이다.
키리에가 금고 안으로 발을 들였다.
그러자 찢어질 듯한 비명소리와 함께 남자의 고함 소리가 금고 속을 윙윙 울렸다.
"오지 마! 더 오면 죽여버린다!"
독기가 잔뜩 오른 남자가 여자 한 명을 방패 삼은 채 키리에에게 소리를 질렀다. 남자의 손에 들린 나이프가 여자의 목에 닿아 있었다.
'저 자가 마지막.'
키리에가 한 걸음을 앞으로 걸었다.
남자의 나이프가 여자의 목에 가는 상처를 냈다.
"꺄아아악!"
"오지 말라고, 괴물 새끼야!"
키리에의 발이 잠시 멈췄다.
키리에는 누구인지도 모를 여자를 인질로 잡은 남자와 붙들린 여자를 한 번씩 봤다.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던 키리에가 다시 한 걸음 앞으로 걸었다.
사무실에 들어섰을 때 숨을 죽인 소리는 둘이었다. 겁에 질려 흐느끼는 소리는 없었다.
때문에 키리에는 거칠 것 없이 검을 뻗었다.
서늘한 날이 겹쳐 서 있는 이들의 심장을 향해 내리꽂혔다.
- 콰직!
살과 근육 뼈가 끊기는 소리가 금고 안을 잠시 울렸다.
여전히 이름을 알지 못하는 이 곳의 관리자와, 함께 금고 속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여자의 숨이 같이 끊겼다.
정적이 찾아들었다.
키리에의 물색 머리를 타고 붉은 피가 뚝뚝 떨어졌다. 모두 다른 이들의 피였다. 도박장의 모든 이들을 제 손으로 죽여 없앤 키리에는 한동안 말 없이 서 있었다.
그렇게 잠시 시간이 지난 뒤, 키리에는 주변을 뒤져 나갔다. 그 후 금고 안에 쌓인 장부들 중 적당해보이는 것들을 꺼내들고 밖으로 나갔다.
1층의 술집이 텅 비어 있었다.
점원도 손님도 모두 도망친 듯 했다. 덕분에 조용히 밖으로 빠져나온 키리에는 말 안장의 가방에 장부들을 챙겨 넣은 뒤 속삭이듯 말했다.
"돌아가 있어."
레이븐의 형제 말은 레이븐 만큼은 아니었지만, 엘프의 피가 흐르는 소년의 말을 알아들을 만큼은 똑똑했다. 따라서 키리에가 매어 준 가방을 등에 진 채로 왕궁을 향해 다각 다각 돌아가기 시작했다.
점점 작아지는 말 발굽 소리를 듣다 온 몸에 밴 피 냄새에 코 끝을 찌푸렸을 때 쯤, 수도 치안대가 도착했다.
얼굴조차 식별되지 않을 만큼 온 몸이 피에 젖은 소년이 검을 들고 서 있는 것을 본 치안대원들이 일제히 검을 뽑았다.
"무기를 내려놓거라!"
키리에는 그들이 오기까지 한참을 기다렸다는 말 대신 순순히 검을 내려놓고 손을 들어올렸다.
그 뒤에는 그들을 보며 침착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
"나는, 칼리안 왕자님의 시종입니다."
* * *
아르센이 불만 가득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발칸의 임시 군단장이기도 한 앨런이 그런 아르센을 어르고 달래듯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생각해보게. 저 분을 자네 아랫사람으로 두는 것은 아무래도 안 되지 않겠는가? 그렇다고 내가 물러나고 저 분을 군단장으로 두자니 그도 안 될 일이 아닌가? 그러니 부군단장이 둘이 된 것이라네."
그 말에, 아르센이 오해하지 말라는 것처럼 곧장 대꾸했다.
"제가 지금 부군단장이 한 명 더 늘어나는 게 싫어서 이러겠습니까. 왜 반대하는지 군단장님께서도 잘 아시면서 이러십니까."
아르센의 얼굴과 말투가 평소와 달리 매우 격양되어 있었다.
아무리 혈연 지연이 우선시되는 왕궁이지만 그래도 칼리안은 능력을 중시하고 공정한 인재 편성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나.
"오시는 것이 칼리안 왕자님이셨으면 제가 당장 제 자리라도 내어드렸을 겁니다. 그런데 아니지 않습니까."
아르센은 지금 상황이 영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을 했다.
칼리안의 결정이라 하면 두 말 없이 따르던 아르센이 생각 외로 심하게 반발하자 앨런이 혀를 쯧 찼다. 아르센이 당사자를 코앞에 둔 채 말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앨런으로서도 상당히 난감했던 것이다.
아르센은 그런 앨런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뜬금없이 부군단장에 임명됐다는 2왕자를 보며 뚱한 얼굴로 물었다.
"마법사셨습니까?"
마법사도 아닌 놈이 무슨 발칸 부군단장을 하느냔 말이었다.
당연히 그 의미를 잘 알아 들은 플란츠는 매우 여유있는 자의 얼굴을 한 채 한 쪽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그리고 짧게 답했다.
"왕자다."
능력이 왕자다.
특기가 왕자다.
할 줄 아는 바, 왕자다.
그러니 그깟 마법사 나부랭이가 아니어도 발칸 부군단장 쯤은 할 수 있지 않겠나.
재수없다. 세상사 참 더럽고 치사하다.
플란츠가 요 며칠 계속 빌헬름 관을 왔다갔다 하며 발칸 대원들이 훈련을 받는 양을 지켜볼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어딘가 계속 뒷맛이 찝찝하더니 결국은 일이 이렇게 됐다.
아르센이 불만을 채 지우지 않은 목소리를 다시 냈다.
"왜 플란츠 왕자님께서 발칸의 영역에 손을 대십니까."
아르센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몰래 욕을 했으면 했지 앞에서 대놓고 이런 식으로 직언을 했던 적은 없었다. 그만큼 불만이 큰 것이다.
물론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플란츠 왕자님께서는 브리센 후작과 같은 길을 가기로 하셨다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발칸이 아니라 카렌이나 라온으로 가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래도 제 형이라고 칼리안이 숨긴 것까지 내놓으면서 기껏 살려주고 지켜줘가며 지금까지 목숨줄 연명시켜 놨더니 에반 브리센과 손을 잡았단다. 그러니 아르센의 입에서 고운 소리가 나올 리 만무했다.
플란츠가 아르센에게서 시선을 떼어 앨런을 쳐다봤다.
"마법사들 말버릇은 다 이따위인가."
그 '마법사들'에 앨런 본인도 포함된다는 것을 앨런 역시 잘 알았다. 오래 전 플란츠에게 '미친 짓'을 운운했던 일 때문에 하는 소리일 터였다.
앨런은 부드럽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발칸의 마법사들은 다 이모양이지요. 제일 윗 줄 입이 이러니 다른 것을 보고 배울 수 있겠습니까."
앨런의 말에도 가시가 가득했다.
"아아."
이제야 상황을 제대로 파악한 플란츠가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내 아우님이 말을 안 했군."
칼리안은 플란츠에게 많은 신경을 쓰는 듯 하면서도 의외로 그리 섬세하질 못했다. 앨런에게 말하여 발칸의 부군단장 자리를 만들어 플란츠를 넣어주는 것까지는 해놓고 플란츠가 에반과 실제로 손을 잡지는 않았다는 중요한 말을 잊은 것이다.
다만 앨런은 칼리안이 말을 하지는 않았어도 대강의 사정을 눈치는 채고 있었다. 그저 어여쁜 제자가 손해를 보아가며 플란츠를 도왔으니 그에 대한 앙금을 털어낸 것 뿐이었다.
물론 이런 눈치 면에서는 거의 얀과 비슷한 수준인 아르센은 그냥 몰랐다.
둘을 잠시 지켜보던 플란츠가 소파 깊숙이 등을 기대며 다리를 꼬고 앉았다. 그리고 고개를 살짝 치켜들었다. 그렇게 참으로 왕자다우면서도 왕자답지 않은 자세를 한 뒤에는 나른한 눈으로 둘을 쳐다봤다.
"늙은 마법사는 알면서 저러고. 젊은 마법사는 몰라서 저러고. 가관이군."
반대로 속을 들킨 앨런이 슬쩍 웃었고 아르센이 다시 화가 난 얼굴을 했다.
지금 이 상황에서 그나마 다행인 점이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플란츠가 앨런과 아르센의 빈정거림을 두고 이들이 왕자를 모욕했다며 처벌을 할 성격은 아니었다는 것.
"저는 도저히······!"
- 끼익.
그리고 또 하나는 화가 난 아르센이 발칸의 부군단장을 때려치겠다는 말을 하기 직전에 칼리안이 들어왔다는 것이다.
셋이 모여 있는 것을 본 칼리안이 조금 의외라는 표정이 되었다. 다만 그보다 중요한 문제가 있다는 듯 플란츠를 보며 말했다.
"형님. 제가 이전에 말씀드렸던 일을 지금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내일부터 저와 사이 나쁘게 지내주시면 됩니다. 후작이 화를 많이 낼 테니 잘 달래주세요."
"그래."
이 대화에 어딘가 조금 잘못된 것이 있음을 안 아르센의 표정이 묘하게 바뀔 때 쯤.
칼리안의 시선이 이번에는 앨런을 향했다.
"그리고 스승님. 부탁드릴 일이 있습니다."
앨런이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칼리안을 쳐다봤고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오늘 스승님 이름을 좀 써야 합니다."
바로 이해하기에는 어려운 말이었다.
곧 지금 진행되고 있는 일에 대한 칼리안의 설명이 이어졌다.
그제야 비로소 '플란츠가 에반과 거짓으로 손을 잡았다'는 것을 알게 된 아르센의 얼굴이 하얗게 탈색됐다.
그런 것을 알 리 없을 칼리안은 시종일관 진지한 얼굴로 말을 마친 뒤 나갔고 앨런 역시 칼리안이 부탁한 일을 하기 위해 서둘러 사라졌다.
조용한 방에, 이제 플란츠와 아르센만 남았다.
제18장. 가진 것이 많아서 (6)
그 늦은 밤.
한 마리의 말이 카이리시스를 질주했다.
에반 브리센 후작의 귀는 수도 치안대 안에도 있었다.
그 귀는 수도 내에서 말을 달릴 수 없다는 법도 무시한 채 바삐 달렸다. 도박장에서 발생된 일에 대해 에반에게 알리기 위해서였다.
덕분에 누구보다 빠르게 소식을 전해들은 에반은 일단 침착한 모습으로 그를 돌려보냈다.
그리고 생각이라는 것을 하기 시작했다.
과거 아르센을 이틀 재워주기로 했을 때 도박장에 대해 입을 닫기로 했던 칼리안이었다. 물론 약속을 언제까지고 지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렇게 빨리 뒷통수를 칠 줄이야.
"플란츠의 배신에 대한 앙갚음이로군."
그리고 이것이 에반의 결론이었다.
에반의 옆에 서 있던 파벨의 단장이었던 기사가 말했다.
"맞습니다. 그런 이유가 아니고는 갑작스럽게 그곳을 공격할 이유가 없습니다."
에반이 칼리안과 플란츠의 사이를 의심하지 않도록 벌인 일이라는 것은 둘 모두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튼 에반이 굉장히 난처해진 것은 사실이다.
증거를 가져갈 것이라면 조용히나 가져갈 것이지 죄 죽여버린 것도 모자라 치안대에 잡혀버리다니.
그런 생각을 하던 에반이 갑자기 주먹을 움켜쥐었다.
칼리안의 시종이 왜 그렇게 바보같이 잡혔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된 까닭이었다.
"일부러 잡혔구나, 일부러."
"그것이 무슨 말씀이십니까?"
기사가 물었고 에반이 그를 보며 짧게 설명했다.
"본래는 치안대에서 조사를 했어야 할 일이 아니더냐. 그러니 왕실에서 조사하게 하려고 일부러 잡힌 것이다."
"후작님께서 관여하지 못하게 하고자 했다는 말씀이십니까?"
에반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끼어들까봐 왕실에서 직접 조사하게 하려고 머리를 썼어."
그 말대로, 에반의 입김을 배제하려면 왕실에서 직접 조사에 나서야 한다. 그런데 왕실에서는 왕족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일이 아닌 이상은 먼저 나설 수 없었다. 당연하겠지만 칼리안이 도박장과 연관이 있을 리 만무하니, 키리에가 연관이 있다 하더라도 왕족 본인의 일이 아닌 이상은 왕실에서 나서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리고 왕족과 연관되지 않은 일에 왕실에서 나서는 경우는 단 하나다. 왕실에서 사건을 조사해달라며 치안대가 요청할 때.
"범인이라고 잡힌 놈이 왕자의 시종이라는데 치안대에서 처벌을 할 수가 있겠나. 그러니 치안대에서는 왕실에 요청을 보낼 테지. 그렇게 되면 왕실은 '어쩔 수 없이' 사건에 대한 조사를 진행할 것이 아니더냐."
"그렇게 된다면 후작님께서 도박장의 일을 조용히 덮으실 수도 없어지는 것 아닙니까."
"그렇지······ 만만치 않은 놈이다. 실로 만만치 않은 놈이야."
에반이 잔뜩 날카로워진 목소리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 * *
호위 시종일 것이다.
치안대원들의 이런 말에 수도 치안대 대장인 데칼은 고개를 갸웃했다. 3왕자에게 호위가 필요한가? 하는 의문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지간한 실력자가 아니면 이런 일은 불가능합니다, 대장님.'
마흔 일곱이 죽었다.
검이나 도끼를 쓰든 혹은 금고 안에서 발견되었던 여자처럼 독 묻은 암기를 쓰든, 철창 앞에 죽어있던 남자 한 명을 제외한 모두가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평범한 소년이 마력탄 하나 없이 한 자루 검으로 마흔 일곱의 무사를 죽일 수는 없다. 때문에 그의 대원들이 키리에를 보며 호위 시종일 것이라고 생각을 한 것이다.
'철창 뒤에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습니다. 그 아래 사람들이 붙들려 있을테니 풀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아무 저항 없이 붙들려 온 키리에는 치안대 중앙 지부에 도착한 뒤 딱 이렇게만 전했다. 그 외에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데칼의 궁금증을 더 키우고 있었다.
물론 그가 궁금해하는 것은 또 있었다.
'무슨 사정이길래 왕자님의 시종이 이런 일을 벌였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키리에를 보는 데칼의 눈은 마흔 일곱을 죽인 살인자를 보는 것과는 조금 달랐다.
물론 키리에가 3왕자의 사람이라는 말 때문에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까닭도 있지만 그보다는 데칼 역시 키리에가 알려준 도박장 아래층의 참상을 둘러보고 왔던 탓이 더 컸다.
사람이 해서는 안될 짓. 딱 그 말이 맞을 것이다.
때문에 데칼은 지금 키리에를 보며 사람을 죽인 아이가 아니라 짐승을 죽인 아이 정도로 생각하는 중이었다.
"총 열 아홉 명 구조했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서 두 구의 시신이 더 발견됐습니다. 모두 상처가 심각한 상태였는데 검상은 아닙니다."
치안대원 한 명이 데칼에게 다가와 이런 말을 했다.
"격투 도박장이니 서로 싸우다 다친 것인가."
"그런 것 같습니다. 뼈가 많이 부러져 있었고 치료를 받지 못한 것 같았습니다."
데칼이 잠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키리에는 들려오는 말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조금 더 빨리 구했더라면 혹은 칼리안에게 부탁을 해봤더라면 하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기적일지는 모르겠으나 키리에 역시 그들을 구하러 간 것이 아니었다. 그저 칼리안의 필요에 의해 찾아간 키리에가 자신의 복수를 했을 뿐이었으니까.
"그런데 대장님. 그 곳 어쩐지 귀족 세력과 연관이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렇겠지. 그 정도 규모의 도박장인데 귀족과 연관되어 있지 않을 리가 있겠나."
물론 고위 귀족일 것이다.
때문에 데칼은 키리에가 칼리안의 시종임을 밝혔다는 말을 듣자마자 왕궁에 소식을 전했다.
"일단 왕궁으로 기별을 했으니 기다려 보자고. 저 소년이 정말 시종이 맞다면 궁에서 사람이 올 테니까."
그렇게 말한 데칼이 긴 숨을 쉬었다.
이번 일 치안대 선에서 조사할 사건이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치 그 생각에 대한 대답인 듯한 말이 들려왔다.
"이 일에 대해서는 더 관여하지 말게. 나머지는 왕실에서 확인할 터이니."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린 데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은색에서 시작해 붉은 빛으로 진해지는 그 머리 색깔. 알아보지 못할 수가 없었다.
"마나실 백작님 맞으십니까?"
왕궁에서 사람이 오리라고는 생각했지만 기사들이 올 것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앨런 마나실이 왔다.
앨런은 데칼의 인사에 간단히 고개를 끄덕여보인 뒤 키리에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앉아있는 의자에까지 흥건하게 고인 핏물에서 시선을 치운 앨런이 물었다.
"다친 곳은 없는가?"
"괜찮습니다."
짧은 대답이었고 앨런은 손가락을 튕겨 키리에의 몸에 묻은 피를 씻어주었다. 그제야 드러난 얼굴이 생각보다 더 어린 것을 본 데칼이 속으로 놀랐다.
하기사 검의 길에 오른 3왕자의 나이도 이제 고작 열 다섯이다. 그런 3왕자의 측근이라면 저 나이에 그 정도의 무력을 지니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찌됐건 왕실에서 사건을 조사하겠다 하니 데칼로서는 환영할 일이었다. 때문에 키리에는 매우 빠르게 앨런의 손으로 돌아왔다.
"필요하신 내용이 있다면 말씀해주십시오. 최대한 도움을 드리겠습니다."
앨런은 데칼과 몇 마디 말을 나누며 키리에를 인계받았다는 서류에 서명을 했다. 그러고 나니 데칼이 아주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했다.
"그런데 백작님. 증거품의 경우에는 곧바로 드리기가 어렵습니다. 치안대에서 먼저 확인한 뒤에 왕실로 전달될 겁니다."
"나도 그 정도는 알고 있네."
왕자의 시종이야 왕자의 사람이니 곧바로 내어주었으나 증거품은 치안대에서 찾아낸 것들이므로 바로 인계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다른 불만을 보이지 않은 앨런은 가벼운 인사치레를 건넨 뒤 키리에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
* * *
아르피아 궁 버금가게 안전하다던 앨런의 마차는 편안하기로는 아마 칼리안의 욕조만큼은 될 터였다. 이전에 이 마차를 타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때와 지금은 남은 체력부터가 달랐다.
그러니 잠이 들 만도 했으나 키리에는 한결같은 얼굴로 앉아있을 뿐이었다. 그것을 보던 앨런이 툭 던지듯 물었다.
"왕자님이 시킨 것이 저들의 몰살이 아니었을 것 같은데. 자네에게 그런 일을 시키실 분이 아니지 않은가."
키리에가 살짝 웃었다.
"굳이 다 죽여 놓고 나니 속은 좀 시원해졌는가?"
굳이 다 죽이지 않았더라도 치안대는 올 것이고 조사 결과는 똑같을 것이다. 그러니 칼리안이 정말 도박장의 모든 이들을 전부 죽이도록 시켰을까.
아마도 아닐 것이라고 앨런은 생각했다.
"왕자님께서는, 누굴 죽이고 누굴 살릴지 제가 정하면 된다 하셨습니다."
관련된 이들을 하나도 살려두지 않은 것은 아르센이 마차에 불덩이를 집어던진 것과 같은 일이었다. 그날 레딩턴 영지의 운동장을 수도 없이 달리며 배운대로 칼을 썼다.
"왕자님께서 책임져주실 수 있으리라는 것을 믿고 마음껏 복수를 했습니다. 그래서 시원합니다."
앨런은 그런 키리에를 보며 손속이 과했다는 등의 미련한 말은 하지 않았다. 죽일 놈 죽였다는데 뭔 말을 하겠나.
"그래. 다 없애라 시켜서 억지로 없앤 것보다야 나을테지."
"아마 억지로 시키셔서 한 일이었어도 다르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 말에, 묻어두었던 앨런의 궁금증이 다시 떠올랐다.
"자네는 왕자님의 무엇을 보고 그렇게 구는 것인가?"
키리에는 이제 열 일곱이다. 얀과 같은 나이다. 그런 소년이 마흔 일곱 명을 죽이고 와서는 왕자가 그 일을 억지로 시켰어도 선뜻 했으리라 말하고 있으니 궁금할 밖에.
"왕자님께서 보낸 시간에 제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까지는 말씀해주시지 않았습니다만. 왕자님께서는 세크리티아의 왕제이며 기사였다 하셨습니다. 그런 왕자님과 제가 인연이 있었다면 제가 이 곳을 떠나 세크리티아에 갔다는 말이 됩니다."
그렇게 말한 키리에가 손에 들린 검을 쳐다봤다.
"왕자님께서 처음에는 저만 구해가겠다 하셨습니다. 히나가 함께 있는 것을 모르셨던 것 같습니다. 히나가 함께 있는 것을 알면서도 저만 찾으실 분이 아니니까요. 그러다 저희 둘을 모두 구해주신 뒤에는 제가 아니라 히나에게 계속 질문을 하셨습니다."
담담하게 이어나가는 목소리 끝이 갈라졌다.
마른침을 삼켜낸 키리에가 앨런을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히나의 귀가 잘린 것인지 자른 것인지, 본래부터 말을 못했는지 물어보셨습니다. 마치 히나를 처음 보신 것처럼요. 그 후에는 저희에게 아무 일이 없었던 것을 알고 다행이라 하셨습니다. 그 날을 떠올리니 이유를 알 것 같았습니다. 제가 무슨 일을 겪고 세크리티아에 갔을지 말입니다."
검의 손잡이를 꾹 쥔 키리에가 말을 맺었다.
"그래서 이렇게 구는 겁니다."
칼리안이 무엇을 구해주었는지 이미 다 알아낸 키리에의 말에 대해, 앨런은 다른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하여간 칼리안은 여기저기 다 들키고 다니는 데에는 남다른 재주가 있는 놈이다. 어떻게든 들키고 있으니.
* * *
그날 새벽, 치안대 중앙지부에 큰 불이 났다.
사람은 다치지 않았으나 지부에서 보관중이던 도박장 관련 증거품이 소각됐다.
에반이 지시한 일은 아니었고 에반의 '귀' 노릇을 했던 이가 멋대로 저지른 일이었다.
"칼리안 그 놈이 어떤 놈인데 증거들을 고스란히 치안대에 다 넘겼겠느냐! 이미 그 놈의 방에 차곡차곡 잘 쌓여 있을게다!"
따라서 귀 노릇을 했던 이는 칭찬 대신 이런 노호성을 듣게 되었다.
에반은 정말이지 속이 터질 지경이었다.
"네 놈이 지른 불 때문에 오히려 이목만 더 집중될 것이 아니냐!"
결국 에반은 적당히 꼬리만 자르고 끝내려던 계획을 포기했다.
꼬리 대신, 자신을 따르던 귀족 한 명을 골라 잘못을 덮어씌우는 것에 간신히 성공했고 덕분에 또 한번 세력이 줄어들게 되었다.
그 일이 있던 날 밤.
에반의 집 앞을 서성이던 예쁘장한 왕자가 에반의 '귀'를 붙잡아 건넨 온갖 협박에 잔뜩 겁을 먹은 에반의 귀가 치안대에 불을 냈다는 것은 전혀 모르는 채였다.
제19장. 형님 (1)
도박장의 일이 터진 그날.
칼리안은 밤새도록 증거자료를 훑어봤다.
도박장의 운영과 상납에 대한 내용들이었고 그 안에 에반의 이름은 없었다.
예상했던 일이었으니 크게 상심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주 목적은 플란츠와 칼리안의 관계를 가리는 것이었고 겸사겸사 에반의 세력이나 줄여보자며 던진 돌이었으니까.
그렇게 아침이 되었고 르메인이 칼리안을 불렀다.
키리에가 연관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칼리안은 키리에에 대해서 언급하는 대신 르메인에게 있어 다소 뜬금없는 말을 꺼내들었다.
"브리센 후작이 란델 형님과 손잡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플란츠 형님이 브리센 후작의 손을 잡았습니다. 플란츠 형님의 의도를 후작이 의심하지 못하게 하려고 제가 후작의 도박장을 건드린 것입니다."
그 후 이어진 상황 설명을 들은 르메인은 정말 놀랐다. 어느정도 알고는 있었지만 칼리안의 덫 놓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던 탓이다.
일련의 설명을 마친 칼리안이 르메인을 보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 일이 너무 커져서 후작이 다른 마음을 먹으면 상황만 악화될 수 있습니다, 전하."
이 일로 에반을 지나치게 궁지에 몰았다가 에반이 에라 모르겠다 하고 란델에게 손을 뻗거나 혹은 르메인에게 반기를 들까 걱정이 되어 꺼낸 말이었다.
"그러니 조사에서 드러나는 이가 있다면 그 자를 걸러내는 것으로 마무리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르메인이 옆에서 아무 말 없이 앉아있던 앨런을 쳐다봤다. 에반이 지닌 기사단과 발칸의 힘을 잠시동안 재어 보았다.
그 판단의 결과로 르메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래. 그렇게 하마."
"감사합니다."
아무리 세력이 줄어들었다 해도 브리센이다.
여전히 그의 기사단은 건재했다. 지그프리드와 나란히 카이리스 양대 기사가문이라 불리는 그 위명이 실리케의 일 하나로 사라질 리 없었다.
"그렇다면 후작이 누구를 앞세울 것이라 생각하느냐."
"게레스 자작입니다."
"지난 회의에서 텐실에 밀을 보내자 말한 이로구나."
"네. 맞습니다."
"브리센 후작과 친분 있는 이들 중에 도박장을 운영했다 꾸며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의 재력이 있는 귀족들은 많이 있는데. 왜 게레스 자작을 생각했는지 이유를 물어도 되겠느냐."
칼리안의 대답이 곧바로 이어졌다.
"아스트리샤 거리의 건물들 중 상당수가 그의 것이라 들었습니다. 게레스 자작은 그 정도로 재력이 많지만 지닌 사병은 그리 뛰어나지 않습니다. 브리센 후작이 이번 일로 금전적인 손해를 보았다고는 하나 영지에서 올라오는 수익이 있으니 당장 돈이 부족하지는 않을 겁니다. 헌데 전 왕비의 일로 브리센에서 발을 뗀 기사 가문들은 많은 상태입니다. 그러니 후작은 돈보다는 사병을 지닌 귀족을 더 중요하게 여길텐데, 지금 브리센 후작이 버릴 만한 패 중에 사병 없는 귀족은 게레스 자작 뿐입니다."
대답을 하는 것에 주저함이 없다. 에반 브리센 뿐 아니라 그와 손잡은 귀족들의 상황 역시 정확히 보고 있었다.
르메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래. 알겠다. 이만 물러가 보거라."
"네, 전하."
조용히 대답한 칼리안이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보인 뒤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유력 용의자에 '샤일 게레스' 라는 이름이 적혀있는 조사관의 보고서가 르메인에게 전달됐다.
그것을 본 르메인이 설탕에 조린 감을 집어 우물거리는 앨런을 쳐다봤다. 그리고는 상당히 뿌듯해하는 눈으로 말했다.
"내 아들이 참으로 비범하군."
어쩐지 '내 아들'이라는 단어에 굉장한 자부심이 들어가 있었다. 때문에 앨런은 얼른 입에 든 것을 삼켜낸 뒤 입을 열었다.
"제 제자가 참으로 비범한 것이지요."
앨런이 우아한 동작으로 감 하나를 더 집어 입에 넣었고, 르메인은 마치 앨런의 말을 전혀 듣지 못했다는 듯한 얼굴로 자신의 말을 이었다.
"누굴 닮아 그리 영특한지. 놀라울 따름이네."
앨런이 떨떠름한 얼굴을 했다.
만약 입 안에 달달한 감이 들어있지 않았다면, 지는 것 질색인 앨런은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체이스를 닮았지요.
뱀 같은 데블란이나 소 같은 르메인은 안 닮았습니다.
* * *
뱀 같은 데블란의 혈육으로 태어나 체이스의 교육을 받고 자란 뒤 소 같은 르메인의 아들로 살고 있는 복잡한 인성의 칼리안은 욕조에 몸을 푹 담근 채였다.
정확히는 따뜻한 물이 받아진 검은 욕조에 몸을 담근 채, 손가락으로는 물 표면을 톡톡 치며 눈을 내리뜨고 있었다. 한마디로, 정말 생각이 많은 상태였다.
때문에 칼리안의 취침 준비를 도우려던 얀은 발소리도 내지 않고 방 밖으로 도로 나왔다. 그리고 할 말이 생겨 칼리안의 방에 들어가려던 키리에를 막아섰다.
"지금 왕자님 방해하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키리에는 더 묻지도 않고 곧장 돌아갔다.
그 늦은 시간에 다시 수련장에 가는 모양새여서, 얀이 잠시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도박장의 일이 처리되고 두 달이 지났다.
게레스 자작의 모든 재산이 몰수됐다.
사실상 에반의 편에 서 있었다는 것 외에는 도박장과 관련 없는 이였으니 에반과 손을 잡은 매개체가 된 재산만 몰수하여 에반에게 다시 돌아가지 못하도록 하는 선에서 일을 마무리 지었다.
그리고 르메인은 키리에에게 살인에 대한 죄를 묻지 않았다. 다만 시종으로서 궁 밖에서 검을 휘두른 것에 대한 책임을 물어 두 달간의 직무 정지 처벌을 내렸다.
근신도 아닌 직무 정지.
왕궁 밖을 나가야 하는 처분이었다.
그 말을 들은 칼리안이 참 묘한 웃음을 지었다.
'안 그래도 다녀올 곳이 있었는데, 잘 됐네.'
외부에 나갈 일이 생긴 와중에 직무 정지라니.
키리에가 왕궁에 없어도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터였다. 그러니 그것은 처벌이라기 보다는 왕궁 밖으로 키리에를 내보내기 위한 근사한 핑곗거리라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게 두 달을 나갔던 키리에가 카이리시스에 돌아온 것이 오늘이었다. 그리고 키리에는 칼리안을 보자마자 짧은 인사만 마치고 곧바로 이렇게 말했다.
'카이리시스로 오는 길에 텐실의 축하사절단 행렬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수가 지나치게 많습니다.'
일반적인 축하 사절단은 호위를 포함해 50을 넘지 않는다.
'백 명 가까이 됩니다. 신관들이 포함된 것 같았습니다.'
칼리안이 눈을 내리떴다.
일반적인 경우의 두 배 가까이 되는 수가 카이리스에 들어왔다.
당연히 칼리안은 곧바로 르메인을 찾아가 이 내용에 대해 물어보았고 르메인은 이렇게 대답했다.
'일전의 무례를 사과하고 소금 지원에 대한 보답의 뜻으로, 텐실에 돌아갔던 이들을 포함해서 서른 명의 신관을 보내겠다 하더구나.'
그것을 수락하기로 한 르메인의 결정에 대해 칼리안이 왈가왈부 할 수가 없었다. 말만 들어보면 기분은 나쁘더라도 의심할 내용은 아니었다. 텐실에서 신관을 보내온 것이 하루 이틀 일도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불안했다.
그 말을 듣고 돌아온 칼리안은 한 나절 동안 테이블을 톡톡 치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하고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을 의문들 때문에 욕조에 들어가 또 생각에 잠긴 채였다.
"란델 형님이 뭔가를 하려는 것 같은데."
붉은 빛을 내던 장미를 보았을 때에도 그랬다.
근거는 조금도 없으면서 무조건 란델이 떠올랐다. 헌데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키리에의 말을 듣자마자 란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신관을 데리고 도모할 일이 뭐가 있을까······."
이렇게 중얼거린 칼리안이 깊은 숨을 내쉴 때.
발소리도 내지 않고 자리를 비켜준 얀과는 그 배려심의 깊이부터가 다른 한 명의 말이 욕실 밖에서 들려왔다.
"나와."
생각에 잠긴 동생의 깊은 고민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매우 애증하는 둘째 형님의 목소리. 단박에 인상을 찌푸린 칼리안이 짜증 가득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네."
나오라시니 나가야지, 별 수 있나.
많고 많은 생각을 떨치고 일어나 가운을 걸쳐입고 밖으로 나갈 수 밖에.
둘은 여전히 '사이가 좋지 않은' 채였다.
그말인즉슨 여전히 할 말이 있어도 대놓고 하지 못하는 상태라는 소리다.
처음에는 아르센을 통해 간단한 말을 전달하곤 했다.
문제는 아르센이 두 달 사이에 플란츠가 의외로 인내심 많은 성격임을 깨달았다는 것에 있었다. 덕분에 아르센이 플란츠에게 조금씩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물론 플란츠의 인내심이 걸어오는 싸움을 참아줄 만큼은 아니었으니 둘은 얼굴만 보면 서로 으르렁거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저 정도면 말려야 하지 않을까요, 스승님?'
'저 정도면 화목한 것이니 걱정 마시지요.'
그런 둘을 보며 칼리안이나 앨런이 중재를 했을 리 없지 않나.
당연히 내버려뒀다. 나름 괜찮은 구경거리였으니.
아무튼 그런 일의 결과로 칼리안과 플란츠는 그냥 서로 창문을 잠그지 않고 자기로 하는 것에 의견을 모았다. 아르센을 통해서는 제대로 된 의사 전달이 불가능했으니 말이다.
"이런 이른 시간에 무슨 일이십니까."
"변경백이 돌아올 것 같은데."
"그레이 브리센 변경백이 또 카이리시스로 온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아직 맞은 자리가 많이 쑤실 텐데.
이런 생각에, 칼리안이 잠시 실소했다.
"이상하네요. 브리센 후작이 변경백을 불렀을 리는 없을텐데요."
그레이는 더 이상 소드마스터가 아니었다.
플란츠는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다. 물론 누가 그렇게 만들었는지는 말하지 않았지만.
어찌됐건 에반이나 란델은 그레이가 더 이상 소드마스터가 아니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소드마스터가 아님을 들키는 순간 목이 떨어지리라는 것을 그레이가 가장 잘 알 테니 그레이는 어떻게든 그 일을 숨겨왔을 터였다.
"후작은 변경백에게서도 오러를 느끼지 못할테니, 혹시 만난다면 자신보다 변경백이 강해졌다 여길 겁니다. 오러가 다 사라져서 그렇다고는 생각하지 못할 테니까요. 그런 변경백을 무턱대로 수도에 불러올 이유가 없습니다. 게다가 변경백령의 사병을 탐낼 이유도 아직은 없고요."
"후작도 정보를 전해 듣고 놀라던데."
"그럼 혹시."
잠시 말을 멈춘 칼리안이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켜보였다.
그레이를 부른 것이 란델인지를 묻는 것이다.
"아마도."
플란츠의 고개가 위 아래로 움직였다.
칼리안은 라트란 백작령에서 만났던 신관 말콤 체티쉬가 그레이에게 무엇을 했는지 모르고 있었다. 그저 에우리아가 전해주는 정보를 통해 그레이가 어느새 걷고는 있다는 이야기만 들은 상태였다. 다만 파괴된 단전에는 오러가 다시 쌓이지 않으니 그레이가 실력을 회복할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것만은 잘 알았다.
"왜 부르셨을까. 왜 오겠다 하는 걸까······."
서른 명의 신관. 그레이.
그리고 란델.
연관성이 떠오르지 않아 생각이 깊어지던 칼리안의 얼굴에 흥미롭다는 듯한 웃음이 드리워졌다.
"재미있는 수수께끼를 내주시는군요, 형님."
칼리안의 혼잣말이었다.
문제가 어렵다고 좋아하는 것이다.
세상에 이런 미친놈이 어딨냐는 눈으로 자신을 보는 또 다른 형의 눈초리는 신경쓰지 않은 채였다.
* * *
앞을 살피던 기사의 눈이 찌푸려졌다.
곧 그가 뒤를 따라오는 일행을 보며 말했다.
"잠시만."
그 말에, 왕도를 따라 카이리시스로 향하던 이들이 말의 고삐를 당겼다. 그 기사만큼 시력 좋은 사람이 일행 중에 또 없었기 때문에 모두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곧 기사가 말 머리를 돌려 일행의 한 가운데 있던 이를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는 무슨 일이냐는 듯 고개를 돌리는 그에게 말했다.
"멀리 앞에 텐실의 신관들로 보이는 이들이 있습니다."
평상시와 달리 더 늘어난 텐실의 축하 사절단을 보게 된 이가 비단 키리에만은 아니었다.
모든 왕도는 결국 카이리시스로 통하니, 서로 다른 곳에서 출발했어도 결국 같은 길에서 마주칠 수밖에. 그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었으므로 기사의 말을 들은 이가 말했다.
"마주치면, 인사나 하면 되지."
태평한 말이다.
텐실과 그들은 완벽한 적대관계였다.
그럼에도 인사나 하겠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다만 이런 모습을 하루 이틀 대면한 것이 아니었던 기사는 그에 대해 별다른 말 없이 다시 설명했다.
"신관들로 보이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른 명입니다."
고집 피우지 말라는 뜻이 담긴 말을 들은 이가 작게 웃었다.
"인근에서 하루를 보내고 가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알았어. 거의 다 왔을텐데, 아쉽네."
그제야 고개를 숙여보인 기사가 물러났다.
곧 일행이 지낼 만한 영지를 알아보도록 지시하는 기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가 나지막한 소리로 입을 열었다.
"신관이 서른 명이라."
깊이 내려온 하얀 후드 아래, 붉은 입술이 긴 호선을 그렸다.
제19장. 형님 (2)
아침부터 광장을 오가는 걸음이 분주했다.
르메인의 탄신 기념일 축제 준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왕궁 만큼이나 광장도 넓었던 탓에 광장 이곳 저곳을 꾸미고 구조물을 설치하는 작업이 오랫동안 진행됐다.
그렇게 많은 이들이 바쁜 하루를 시작할 때.
- 다각, 다각!
경쾌한 말 발굽 소리가 광장을 울렸다.
작업이 끝나기 전까지 일반인의 광장 출입은 금지되어 있었으니 이것은 광장이 아니라 왕궁을 찾은 손님이 왕도를 지나가는 소리일 터였다.
'이번엔 또 누가 오셨나.'
그런 생각에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이들이 깜짝 놀라며 일제히 몸을 세웠다. 그리고 황급히 고개를 숙여 예를 보였다. 왕궁에 찾아오는 어떤 이가 아니라 왕궁에서 나오는 '어떤 분'이 낸 소리라는 것을 확인한 탓이었다.
"왕자님이시다!"
검은 머리, 검은 정장. 그리고 검은 말.
호위도 대동하지 않고 왕궁 밖을 나올 수 있는 왕자.
당연히 칼리안이었다.
평소의 칼리안은 느릿하게 걸으면서도 유난히 큰 발굽 소리를 내는 말에 오른 채 사람들의 인사를 전부 받아주곤 했다. 그런데 오늘따라 바쁜 일이 있는 듯 인사를 건네는 이들에게 가볍게 눈만 맞춰 주며 어디론가 서둘러 가고 있었다.
어딜 그리 바삐 가는지.
자신을 보는 이들의 의문을 뒤로한 채, 달리기 직전의 속도로 움직이는 레이븐에 올라 세뉴 강의 다리를 건넌 칼리안은 정말 오랜만에 바넨샤 거리에 들어섰다.
'로튼 대장간'
그렇게 도착한 익숙한 이름의 상점 안으로 쑥 들어가니 여전한 근육질의 주인이 소스라치게 놀라 일어났다. 그리고 굉장히 어색한 동작으로 인사를 올렸다.
덕분에 주인이 앉아있던 의자가 우당탕 소리와 함께 넘어졌으나 그에 신경 쓸 정신도 없는 듯 했다. 이 모든 것이 예법에는 전혀 맞지 않는 행동들이었으나 오히려 그것이 보기 좋았던 칼리안이 조용히 웃었다.
"오랜만이네."
마치 언젠가 봤었다는 듯한 말.
한참을 정신 없이 헤매던 주인의 머릿속에, 1년 전에 찾아왔던 수상한 소년의 목소리가 겹쳐 들렸다.
"아, 혹시 작년에······!"
"기억을 해주는군."
그때 일을 생각하며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마음이 없었겠냐만은, 칼리안은 일단 이 곳에 직접 오게 된 들뜬 마음부터 해결하고 싶었다.
"얼마전에 내 시종이 좋은 재료 하나를 맡겼을걸세."
그리고는 제 눈을 가리켜보이며 덧붙였다.
"눈 색이 서로 다른 아이인데. 그것도 기억을 하려나."
"네, 왕자님. 기억 납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바로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그래. 알겠네."
칼리안의 허락을 받은 주인이 물건을 치우면서 걷는 것인지 쓸어버리면서 걷는 것인지 구분할 수 없을 만큼 허둥거리며 가게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두 자루의 검을 들고 나와 칼리안의 앞에 공손히 내려놓았다.
"여기 있습니다."
검을 보는 칼리안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그토록 기다린 재료, 운철로 만든 검이었다.
키리에가 두 달 동안 밖에 나갔던 이유가 된 물건이기도 했다.
운석을 습득해 직무 정지가 끝나는 날에 맞춰 돌아오느라, 키리에는 이제 막 완성된 이동 마법진까지 이용했다.
"운철이라니,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어떻게 이런 것을 찾으셨습니까."
"어쩌다보니 그리 되었네."
운석이 떨어진 곳과 시기를 칼리안이 기억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과거 베른이 이것을 매우 탐냈었기 때문이었다.
브리센 상단에서 우연히 운석을 주워 경매를 한다기에 참여했는데 결국은 지고 말았다. 그 일을 너무나 아쉬워하는 베른을 본 체이스가 데블란에게 청해서 검을 하나 선물했는데 그것이 바로 베른과 마지막을 함께했던 세크리티아 왕실의 보검이었다.
참으로 많은 것을 떠올리게 하는, 하지만 정작 가져본 적 없던 그 검을 드디어 손에 쥔 칼리안이 감개무량한 얼굴을 했다.
"최상급 중에서도 다시 최상급에 해당되는 운철이라 합니다, 왕자님. 오러를 쓰신다 해도 몇 대를 걸쳐 모두 견뎌낼 겁니다."
물론 그럴 것이다.
아르센에게 당하지만 않는다면.
아무튼 칼리안은 매우 흡족한 얼굴로 두 자루의 검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흑빛에 가까운 짙은 재색의 날이 예리한 기운을 뻗어내고 있었다.
"둘 중 어떤 것이 왕자님께서 사용하실 검입니까?"
그 질문에, 의미 모를 미소를 지은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둘 모두 내 것이 아니네."
더 효율적인 칼리안만의 검이 있으니 굳이 이 귀한 운철을 낭비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 이유로 결국 이번 생에서도 칼리안이 직접 쓰지는 못할, 두 자루의 검.
둘 중 더 날렵한 검신을 자랑하는 검은 당연히 키리에의 것이었다. 그리고 남은 하나도 칼리안의 것은 아니었다.
검을 들고 가볍게 휘둘러보며 확인하는 모습을 본 주인이 괜스레 뿌듯하다는 듯 다시 말했다.
"제가 다 기쁩니다, 왕자님. 작년에 오셨을 때는 검을 들어올리지도 못하셨······."
······ 아차.
주인의 말과 칼리안의 움직임이 동시에 우뚝 멈췄다.
'내가 입을 잘못 놀렸구나!'
주인은 주인대로 말 실수를 했다고 여겨서였고 칼리안은 칼리안대로 비밀을 또 들켜버린 듯 해서였다.
'아, 맞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에는 제 손으로 검을 들지도 못하던 이가 1년도 안되어 소드마스터에 올라버린 것이다. 그게 말이 되는가? 당연히 안 되지.
또 들켰냐는 앨런의 잔소리가 귓가를 윙윙 울렸다.
"아, 그······."
칼리안이 자연스러운 웃음을 지으려 노력하는 것이 분명한 얼굴로 어색하게 말했다.
"다들 알지 않나. 그 때, 그래. '감기'를 앓던 중이라서."
"아······ 전 왕비의······ 아, 네. 알아들었습니다."
그 때 칼리안이 앓은 감기가 실리케의 독이었음을 모를 이가 카이리시스에 있을까.
주인은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을 하며 의문을 지웠다. 거짓말 못하는 칼리안의 어색한 말도 입 밖에 내기 어려운 이야기를 꺼내놓는 이의 난처함 정도로 알아서 잘 이해하고 넘어갔다.
추억이고 나발이고.
칼리안은 그 곳에 더 머물지 못하고 서둘러 나왔다. 더 있었다가는 진짜로 들킬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얼른 레이븐에 올라 폴룬 마법학원으로 갔다.
* * *
"새로운 내용은 없었습니까?"
아마도 로튼 대장간의 주인이 보았다면 고개를 갸웃거렸을 것이다. 검을 보며 그렇게나 신나 하더니 그런 얼굴은 어느새 싹 사라져 있었다.
다시 한번 마법사들의 정보망을 한껏 이용한 에우리아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네, 왕자님. 텐실의 신관들로부터는 아직 특별한 움직임이 없습니다. 그레이 브리센 변경백도 여전히 변경백령에 있습니다."
"플란츠 형님 말만 들으면 당장이라도 올 기세였는데 꽤 느리네요."
그 말에 에우리아가 잠깐 웃다 대답했다.
"아무래도 지그프리드 공작 때문이 아닐까요?"
"지그프리드 공작이라······."
"이동 마법진 덕분에 이전과 다르게 움직이고 있으니까요. 본래 지그프리드령에서 카이리시스로 오려면 두 달 전에 출발을 했었는데 한 달이 채 남지 않도록 움직이지 않으니, 아마도 지그프리드 공작이 이번 축제에는 참석하지 않으리라 여긴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그프리드 공이 이번에는 오지 않을 줄 알고 카이리시스로 돌아올 생각을 했다는 말입니까."
"네. 제 생각에는 그렇습니다, 왕자님. 그래서 호기롭게 이곳에 오겠노라 말을 했는데 지그프리드 공작이 어느새 수도의 공작저에 도착했다 하니 일정을 미룬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레이가 아직 모르는 것.
바로 이동 마법진이다.
슬레이만은 이제 두 달 전에 출발할 이유가 없었다. 이동 마법진이 있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슬레이만은 딱 닷새 전에 공작령을 떠났고 이미 카이리시스에 있는 지그프리드의 저택에 도착한 상태였다.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가능성 높은 말입니다. 마법진이 이런 식으로 영향을 미칠 줄은 몰랐는데 나쁘지는 않군요."
그레이가 슬레이만을 피해야 할 이유는 딱 하나였다.
그레이의 오러가 아무리 강해졌다 해도 슬레이만보다 강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슬레이만이 그레이의 오러를 느끼지 못한다면 분명 누구든 이상하게 여길 터였다.
"그럼 그레이는 카이리시스에 오는 것을 탄신일 축제가 지난 뒤로 미루려 하겠네요. 지그프리드 공과 마주치면 안되니까."
"네. 제가 말씀드린 이유가 맞다면 그렇게 움직일 것 같습니다, 왕자님."
칼리안의 말에 긍정을 표한 에우리아가, 고개를 끄덕이는 칼리안을 보며 두 번째로 알아보던 내용에 대해 전했다.
"그리고 텐실의 신관들 중에, 수도로 오는 길에 혹시라도 빠져나와 다른 짓을 하는 인원이 있는지 확인해달라 하신 것도 살펴보았습니다만. 텐실의 신관들은 흩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인원 그대로 어제 카이리시스에 입성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뒤 잠시 생각을 마친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신관 중에 혹시 말콤 체티쉬라는 자가 있는지 알아봐주세요."
"네, 왕자님."
"그 외에도 계속해서 신관들 꼼꼼하게 살펴보세요. 브리센 변경백 쪽도 그렇고."
"네. 걱정 마십시오."
칼리안은 자신의 말에 선뜻 대답하는 에우리아를 보며 한 가지 말을 덧붙였다.
"아무렇지 않게 이것 저것 시키고는 있는데, 마법진 구축 때문에 고생한 협회의 마법사들을 내가 너무 부려먹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앞에 놓여 있던 레몬차를 한 입 마시고 내려놓은 에우리아가 대답했다.
"힘든 일은 해도 하기 싫은 일은 절대 못하는 것이 마법사입니다. 다들 좋아서 돕는 일이니 마음에 두지 않으셔도 됩니다."
칼리안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에우리아의 말은 맞았다.
마법사들은 힘든 일은 해도 하기 싫은 일은 절대 못한다. 그래서 빌헬름 관의 발칸 대원들은 오늘도 열심히 힘들 예정이었다.
물론 플란츠 덕분이다.
지금 플란츠가 가르치고 있는 일은 움직임 둔한 마법사들이 죽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주문을 외우고 마법을 발현하는 그 사이를 파고드는 공격에 죽지 않는 것, 그리고 발칸 대원 전체가 마치 한 사람처럼 주문을 외고 마법을 발현하게 하는 것을 1차 목표로 삼았다.
그 결과로 마법사들이 빠릿하게 움직이고 모두가 한 몸처럼 호흡할 수 있게 하기 위한 체력 훈련이 매일같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칼리안이 왕궁 밖에서 에우리아를 만나고 있던 그 시간. 플란츠는 어김없이 빌헬름 관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평소와 달리 산책을 겸해 마차를 타는 대신 천천히 걷고 있었다.
빌헬름 관은 르메인이 있을 아르피아 궁을 지나가야 있었는데, 아르피아 궁 인근에 다다랐을 즈음 시종이 말을 건넸다.
"왕자님. 그런데 오늘 오찬에 함께 하실 손님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란델 왕자님은 다른 일정으로 오찬 참석이 어렵다 하셨습니다."
축제를 앞두고 있었으니 왕자들 역시 다시 바빠졌다. 매 식사마다 모임이 있었다. 더 이상 작년처럼 마음대로 굴 수가 없었던 플란츠 역시 그런 일정에 빠지지 않았다.
"손님 누구."
"마나실 백작을 포함한 두 명이라 하는데 다른 한 명에 대한 정보는 전달되지 않았습니다."
국왕과 왕자들 그리고 앨런과 연관이 있는 누군가라니. 묘한 조합이다.
슬레이만인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던 플란츠가 이내 아닐 것이라는 결론을 냈다. 만약 그였다면 굳이 숨길 이유가 없었으니까.
어쨌거나 오찬에 들면 알 수 있을 일이었으니 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던 플란츠가 무언가를 보고 잠시 발을 멈췄다.
"누구시길래 왕궁에서 얼굴을 가리고······."
뒤에서 같은 모습을 본 시종이 이렇게 작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플란츠가 발을 멈춘 것도 같은 이유였다.
카이리스 왕궁에서, 그것도 아르피아 궁으로 들어가려는 이가 하얀 로브의 후드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 모습이 굉장히 시선을 끌고 있었다.
따라서 플란츠는 제자리에 선 채 계속해서 그를 보게 되었다.
그 시선을 느낀 것인지 혹은 우연인지.
로브를 입은 이 역시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플란츠 쪽을 바라봤다. 후드가 없었더라도 눈이 정확히 마주칠 만한 거리는 아니었으나 플란츠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그가 정확히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때문에 천천히 상대방을 살피던 플란츠의 눈에 날이 섰다.
"어째서 여기에 있지."
수행원들의 수, 그들의 복장, 호위중인 기사의 기운. 로브 아래 보여지는 긴 청은발.
그리고.
알 수 없는 거부감.
단 한 번도 본 적 없었으나 플란츠는 알 수 있었다.
"······ 세크리티아의 왕세자가."
마치 그 말을 들은 것처럼.
하얀 로브의 청년, 체이스 듀라한 세크리티아가 플란츠에게로 천천히 다가왔다.
제19장. 형님 (3)
플란츠의 앞에 선 체이스의 발걸음이 멈추었을 때.
르메인의 집무실에 들어서려던 앨런의 움직임도 멈췄다.
앨런이 관자놀이를 주무르며 중얼거렸다.
"······ 어찌 여기를 찾아왔을까."
오찬에 온다던 또 한 명의 손님이 누구인지를 알아챈 순간 앨런은 평소와 달리 전혀 침착하지 않은 얼굴로 르메인의 집무실 문을 노려봤다. 친애해 마지않는 카이리스의 위대한 국왕 전하께서 사상 최악의 개똥같은 일을 벌인 것이다.
칼리안은 과거의 체이스가 카이리스에 왔었다는 말을 한 적 없었다. 만약 올 것을 알았다면 철 모르는 새끼 오리처럼 그렇게 신이 나서 왕궁 밖으로 나가지는 않았을 터였다.
당연한 일이다.
베른이 있던 시간에서 체이스는 왕세자의 몸으로 타국에 올 만큼 위험천만한 일을 벌이지 않았으니까.
'베른이 없는 것이 어떤 영향을 주었기에 체이스가 직접 이 곳으로 왔다는 말인가?'
체이스가 누구를 만나겠다고 이 곳까지 왔을지는 모를 앨런은 그저 이런 생각에 황망해 할 뿐이었다.
게다가 하필이면 체이스와 플란츠가 만난 것 같았다. 둘 모두 베른과 연관된 기억이 없을 텐데도 풍겨오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앨런은 르메인의 집무실에 가려던 것을 미루고 밖으로 향했다. 혹시라도 칼리안이 보기 전에 체이스를 데리고 들어오기 위해서였다.
'흔들릴 것이다.'
칼리안은 분명히 흔들릴 터였다.
준비할 시간을 줘야 했다.
아르피아 궁의 건물 내에서는 공격마법이나 이동마법은 전혀 쓸 수 없었다. 국왕의 안전을 우려한 시스파니안의 혜안에 마음 깊이 감사하며 앨런은 걷는 속도를 더 높였다.
* * *
"만나서 반갑습니다."
이것이 체이스가 플란츠에게 건넨 첫 마디였다.
왕족 대 왕족.
본래대로라면 체이스와 플란츠의 수행원이 서로가 누구인지를 설명하는 과정이 있었어야 했다. 그런데 체이스가 나선 것이 너무 빨랐다.
그런 체이스가 꺼낸 것은 정말 평범한 한 마디였고 별 다를 것 없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칼리안의 말버릇이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든 플란츠는 또 한번 깊은 거부감을 느꼈다. 생전 처음 보는 놈을 상대하는데 왜 자꾸 내 동생 놈 냄새가 나느냐는 말이다.
칼리안이 누구를 닮았는지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으니 플란츠는 지금 이렇게까지 불쾌한 기분이 드는 이유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반가운 것은 알겠는데."
플란츠가 여전히 체이스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 낮은 목소리를 냈다.
체이스는 분명 다른 나라의 세자였다.
게다가 아무리 대국 카이리스라고는 하나 세크리티아가 카이리스의 종속국인 것도 아니었다. 양국의 사이가 나쁜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수행원들이 설명을 하지 않았더라도 둘은 이미 서로가 누구인지를 알고 있었다. 그러니 먼저 예를 보여야 할 것은 분명 플란츠였다.
하지만 플란츠는 체이스를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감히. 일국의 왕자 앞에서 낯을 가리는 것은 어느 나라의 예법이지."
주변의 공기가 하얗게 얼어붙는 느낌이 든다.
카이리스의 2왕자.
플란츠이기에 보일 수 있는 실로 오만한 태도였다.
로브 안의 이가 체이스라는 것을 익히 알고 있던 시종의 입이 벌어졌다. 동시에 체이스의 뒤에 서 있던 기사에게서 강렬한 투기가 뿜어져 나왔다. 동요하지 않은 것은 오로지 플란츠 자신과 체이스 뿐이었다.
로브 아래로 보이던 체이스의 입술이 작은 웃음을 지었다.
빌어먹을.
저렇게 웃는 꼬락서니도 칼리안과 똑같다.
이런 생각에 플란츠가 다시 날 선 말을 꺼내들려 할 때 체이스가 손을 움직였다. 그는 앞으로 나서려는 기사를 물린 뒤 천천히 손을 올려 후드를 벗었다.
"내가 계속 이런 차림으로 오다 보니."
청은색의 긴 머리카락이 잠시 흔들렸고 짙은 보라색의 눈이 플란츠를 향했다.
"잠시 잊고 있었습니다. 플란츠 왕자."
그저 설명을 했을 뿐, 그 말에 미안함이나 변명은 들어있지 않았다.
순간 플란츠는 로브 아래 든 생김새가 칼리안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에 저도 모르게 안도했다. 그리고는 이제야 알아봤다는 듯 천연덕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 이런."
그렇게 말한 플란츠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래도 천만다행으로 양 쪽 입술이 고르게 올라갔다.
그리고 정말 간신히 예의에 어긋나지 않을 만큼 고개를 숙여 보인 뒤 물었다.
"세크리티아 왕세자께서 이 먼 곳까지 무슨 이유로 오셨는지."
플란츠 역시 사과의 뜻 따위를 입에 담을 성격이 아니었다.
일부러 이렇게 삐딱하게 구는 것임을 모를 리 없건만 체이스는 그리 신경쓰지 않는 얼굴로 플란츠의 예를 받은 뒤 답을 전했다.
"축하할 일과 만날 이가 있어 왔습니다."
이렇게 말한 체이스가 잠시 고개를 돌렸다.
그러더니 칼리안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던 엄청난 크기의 왕궁을 둘러보며 말했다.
"하여 이렇게 생각지 못한 대화도 나누게 되니, 이 곳이 어디인지 비로소 실감이 됩니다."
너랑 대화하러 온 것은 아니니 텃세 그만 부려라.
체이스의 말이 플란츠의 귀에는 이렇게 잘 바뀌어 들렸다.
사실 플란츠를 보러 온 것은 아니라 해도 먼저 말을 건 것은 체이스였다. 따라서 플란츠의 대답도 계속 곱지 않았다.
"카이리스까지 오셨는데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모르셨을 리 없을 텐데."
텃세 부리는 것이 당연하단다.
알고 왔을테니 그냥 참으라는 상당히 공격적인 말이었다.
플란츠를 보필하게 된 지는 그리 오래 되지 않았지만 궁에서는 오래 있었던 시종 레릭은 플란츠의 심기가 뒤틀릴 때 어떻게 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기사 테일란은 체이스가 평소 이렇게까지 예민하게 굴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때문에 이 둘은 지금 굉장히 난감해하고 있는 상태였다.
두 왕족의 대화는 양국의 관계에도 영향을 줄 수 있었다.
때문에 중재가 필요했으나 레릭은 왕자와 왕세자의 대화에 끼어들 수가 없었고 테일란은 나서지 말라는 체이스의 뜻에 반할 수가 없었다.
"실로 오랜만에 뵙습니다, 체이스 저하. 그리고 좋은 아침입니다, 플란츠 왕자님."
그래서 그 둘은 이렇게 들려온 목소리에 세상이 밝아지는 느낌을 받았다.
* * *
아르피아 궁의 밖의 이런 상황을 눈치챈 이는 또 있었다.
르메인에게 얼굴을 비추러 왕궁을 찾아왔던 공작, 슬레이만 혼 지그프리드였다.
"허어······. 르메인. 아주 대단한 이를 초대했군."
슬레이만이 이름을 부르며 편히 대하고 있음에도 마주 앉아 있던 르메인은 그리 언짢은 얼굴이 아니었다.
사실 둘은 꽤 막역한 사이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르메인과 슬레이만이 아니라 르메인의 형 아스난과 슬레이만이 둘도 없이 절친한 사이였다. 그러다보니 르메인과도 격이 없어지게 되었고 둘만 있는 사석에서는 늘 이렇게 대화를 해온 터였다. 그러니 아마도 르메인의 앞에서 그를 이름으로 부를 수 있을 사람은 이 세상에 딱 슬레이만 뿐일 것이다.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는 듯한 슬레이만의 말에 마주 앉아있던 르메인이 물었다.
"세크리티아 왕세자?"
그 말을 들은 슬레이만이 한참을 웃었다.
항상 조용하던 르메인의 집무실이 떠들썩하게 울렸다.
르메인의 아들인 칼리안이 숨겨둔 것을 알았어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던 슬레이만이다.
뿐만인가. 친우가 왕위에 오르고자 일을 도모하다 실패하여 탑에 갇힐 때에도 코끼리로서의 본분을 잊지 않았다.
그런 슬레이만이 세크리티아 왕세자에게 관심을 가지겠는가.
"내가 언제 왕족을 보고 놀라던가! 당연히 검이지."
왕세자와 함께하는 검.
대륙의 첫번째 검, 테일란 카스트린. 그가 왔다는 소리였다.
"세크리티아의 국왕이 아들에게 왕세자위를 내릴 때 테일란을 함께 내렸다 하더니 이 곳까지 함께 왔나 보군."
"익히 알려진 사실 아닌가."
슬레이만의 감탄에 적당히 대답하던 르메인이 무언가를 깨달은 얼굴이 되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곳에서 카스트린 경이 온 것을 어떻게 알았나."
"아, 그의 오러를 느낀 게 아니라 투기를 뿜고 있어서 알아챘네. 내가 과연 카스트린 그 자의 오러를 보고 죽을 날이 있으려나 모르겠군."
"카스트린 경이 왜 이 곳에서 투기를 뿜는다는 말인가?"
"여기 왕자 중 한 놈이랑 세크리티아 왕세자가 싸움이라도 벌이나보지."
그 말을 듣기가 무섭게 르메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르메인의 팔을 슬레이만의 커다란 손이 붙들어 앉혔다.
"국왕 전하 엉덩이가 이렇게 가벼워서야. 마법사가 나갔으니 알아서 잘 하겠지."
"왕자와 세크리티아 왕세자간에 다툼이 있으면 안 되지."
이렇게 대꾸한 르메인이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도 슬레이만의 말을 들어 밖으로 직접 나가지는 않고 대신 창가로 걸어가 멀리 보이는 무리를 지켜보기 시작했다.
무리로 다가간 앨런이 체이스를 데리고 아르피아 궁으로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오래지 않아 플란츠가 자리를 떠나는 것도 볼 수 있었다.
"투기가 가라앉았군. 그것 보게, 별 일 아니래도."
한동안 그 모습을 지켜보던 르메인이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슬레이만의 말을 대충 흘려들으며 체이스가 들어오는 모습에 집중한 탓에 창 밖에 있던 또 다른 누군가를 보지 못한 채였다.
저 멀리 왕궁 입구.
제자리에 못박힌 듯 서 있던 한 마리의 검은 말을.
* * *
칼리안이 조용히 웃었다.
"······ 그래서였구나."
아침부터 그리도 설렜던 것이.
도무지 마음의 갈피를 잡을 수 없을 만큼 애가 탔던 것이.
검 때문이 아니었다.
칼리안이 시선을 내렸다.
레이븐의 고삐를 쥔 손이 새파랗게 변해 있었다.
레이븐은 자꾸만 앞으로 달려나가려고 했다.
그것을 말렸다.
죽을 힘을 다해 말렸다.
* * *
그날 오찬에 들기 위해 준비하는 칼리안의 안색이 너무 좋지 않아서 얀의 걱정이 컸다.
"아무래도 오찬을 물리고 쉬시는 것은 어떠십니까."
평소 같았으면 웃기라도 하며 대답할 칼리안은 차게 굳은 얼굴로 고개만 가로저었다. 그리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키리에를 데리고 다녀올게. 지그프리드 공이 궁에 들었다 하니 만나고 와."
굳이 그럴 필요 없다는 대답을 하려 했으나 차마 거절하기가 어려운 얼굴이었다. 때문에 얀은 그렇게 하겠다 대답한 뒤 키리에를 불러왔다.
오찬이 있을 자리에 가는 동안 키리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얀보다 더 걱정스러운 얼굴로 칼리안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조금 전 앨런이 보낸 사람이 짧은 말을 전했기 때문이었다.
- 세크리티아의 왕세자가 카이리스를 찾았다.
그 이상의 설명은 필요하지 않았다.
칼리안의 웃는 얼굴이 왜 저모양인지도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마차에서 내린 칼리안이 세뉴 관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복도를 따라 한참 걸어가 연회장의 입구에 섰다.
문을 열려는 기사의 손길을 키리에가 막았다.
이곳까지 걸어온 칼리안의 발걸음 소리가 결코 일정하지 않았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잠시 있다 들어가십시오."
칼리안의 입에서 긴 숨이 들고 났다. 그리고는 스스로에게 하는 말인지 혹은 키리에에게 건네는 말인지 모를 말을 꺼냈다.
"······ 어차피 모르실테니."
칼리안이 누구인지 체이스는 모른다.
조금쯤 어색하게 굴어도 체이스는 어차피 모를 것이다. 앨런은 이해할 것이고 플란츠는 어색함을 눈치는 채겠지만 크게 관심가지지 않을 터였다. 그러니 괜찮다고 칼리안은 생각했다.
곧 칼리안의 눈이 문 앞에 서 있던 기사들에게 향했다.
문이 열리고 칼리안의 입장을 알렸다.
한 걸음씩 칼리안이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비로소 그 얼굴을 마주했다.
······ 형님.
제19장. 형님 (4)
사력을 다해 멈춰야 했던 것이 비단 레이븐만은 아니었다.
마지막 순간에 그토록 찾았던 체이스가 눈 앞에 있었다. 때문에 손과, 발과, 말과, 눈빛까지, 모두 다 잡아당겼다. 칼리안은 정말, 죽을 힘을 다해 잡아당겼다.
"정말 만나고 싶었습니다, 칼리안 왕자."
그렇게 마음을 다스리던 칼리안의 머릿속이 순간적으로 새하얗게 변했다. 지금 당장 칼리안이 하고 싶은 말이 아닌가. 그런데 그 말을 꺼낸 것은 오히려 체이스였다.
아무것도 모를테니 그 이름난 3왕자를 비로소 만났다는 생각 때문에 저리 말하는 것이다.
동요하지 말자.
동요하면 안 된다.
칼리안이 간신히 웃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저 역시, 같습니다."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을 하고는 있었으나 체이스라는 그 이름만은 입 밖으로 내질 못했다. 이름을 말했다가는 형님이라는 말이 함께 튀어나올 것 같아서였다.
그래서 짧은 말 끝에 입을 다물었다.
"인사는 차차 나누셔도 될 터이니 우선 앉으시지요."
눈치 빠른 앨런이 이런 말로 잘 나서 주었다.
덕분에 다른 말을 더 하지 않고 자리에 앉게 된 칼리안이 잠시 고개를 숙였다.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칼리안을 한번 본 앨런이 소리 없이 혀를 쯧 찼다. 똑똑하게 굴던 놈이 체이스 앞에서는 영 맥을 못추고 있지 않은가.
당연한 일이니 탓할 마음은 없었다. 그저 안쓰러운 마음만 들었다. 그리고 이 사달을 만든 그 놈의 르메인이나 빨리 들어와서 오찬을 시작하고 끝내주기를 바랄 뿐이다.
물론 칼리안이 평소답지 않은 것을 눈치 챈 것이 비단 앨런만은 아니었다. 플란츠도 묘한 눈으로 칼리안을 보고 있었다.
'아우님이 오늘따라 왜 저러나.'
이런 얼굴을 한 채였다.
그런 플란츠와 눈이 마주친 뒤에야 칼리안은 비로소 정신을 조금 차렸다.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체이스만은 아니라는 것을 제대로 깨달은 것이다.
이제까지 마음 먹고 잘 적응해 온 칼리안으로서의 생을 한 순간에 물거품으로 만들 수는 없다. 그것을 상기한 칼리안은 테이블 밑의 주먹을 꽉 쥐고는 다시 체이스 쪽을 쳐다봤다.
그러다 주먹 쥔 손에 다시 한번 힘을 주어야 했다.
체이스의 곁을 지켜야 했던 베른보다 먼저 발칸의 수도 입성을 막아선, 그리하여 그 목숨으로 세크리티아의 멸망을 사흘 뒤로 미뤄 주었던 테일란 카스트린. 베른의 스승이기도 했던 그가 이제는 제자를 보는 눈이 아닌 매우 흥미로운 상대방을 살피는 얼굴로 칼리안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 스승님.'
칼리안이 왕궁 입구에서 체이스를 발견했을 때 곁에 있던 테일란도 보았다. 때문에 칼리안은 세뉴 관에 들어서기 전에 오러를 가리고 있던 마법을 해제한 상태였다.
들키는 재주가 남다른 칼리안이 이 와중에 이것을 챙길 수 있었던 것이 실로 다행한 일이었다. 만약 테일란이 칼리안의 힘을 느끼지 못했다면 무슨 일이 생겼을지 모를 일이니까.
테일란이 칼리안을 쳐다보는 것을 느꼈는지 앞에 앉아 있던 체이스가 부드러운 웃음과 함께 칼리안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얼마 전에 칼리안 왕자가 검의 길에 올랐다는 소문을 듣고 많이 놀랐습니다."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칼리안은 다시 한번 짧게 대답했고 체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플란츠를 보며 말했다.
"사적인 이야기지만 나로서는 참 부러운 일입니다, 플란츠 왕자. 저런 동생을 두었으니."
그리 부러우면 그냥 데려가서 네 동생 삼으시라고.
체이스를 만났을 그 때부터 심사가 꼬여있던 플란츠는 그렇게 대답을 할까 하다 잠시 옆에 앉은 칼리안을 쳐다봤다.
사실 별 생각 없이 돌렸던 시선이었다.
그런데 칼리안의 얼굴이 보였다. 그래. 그 얼굴이 보였다.
플란츠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제야 알았다.
계속 느껴온 거부감의 이유가 저 세크리티아 놈한테서 칼리안 냄새가 풀풀 났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리고 왜 그렇게 칼리안 냄새가 났는지, 그 이유를.
도저히 상식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알게 되었다.
때문에 플란츠는 다시 고개를 돌려 체이스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그리고 비꼼이라고는 전혀 들어있지 않은 말로 대답을 전했다.
"당연히.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까."
"세상 어디에 내어놓아도 자랑스러운 내 동생이 아닙니까."
세상 둘도 없을 다정한 형의 모습이 되어 이렇게 말을 맺었다.
둘의 사이가 얼마나 안 좋은지에 대해서는 세작들을 통해 이미 다 들었을 텐데도, 체이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체이스만 고개를 끄덕였다.
앨런과 키리에는 자신들의 귀를 의심하느라 다른 곳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특히 앨런은 순간적으로 플란츠가 다시 술에 손을 대는지를 의심한 자신의 모습을 반성했다.
체이스가 하필 '동생'이라는 말을 언급하는 바람에 다시 한번 혼이 나가버리는 기분이 되었던 칼리안 역시 그 말을 들었다. 왜 어울리지도 않는 다정한 말을 했는지도 곧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과찬이십니다······ 형님."
칼리안이 작은 웃음소리를 냈다.
플란츠.
또 알아냈구나.
······ 실로 애증하는 형님 같으니.
* * *
르메인을 만나고 나온 슬레이만이 옆에 서 있던 얀을 쳐다봤다. 그리고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네가 한 말에 대해서 나도 들었다."
"무슨 말이요?"
"칼리안이 소드마스터에 올랐던 이유에 대해 르메인에게 뭐라 했는지를 말이다."
"아, 그 일이요."
아무것도 모르는 채 말똥말똥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는 얀을 보며 슬레이만이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차마 저 얼굴에 대고 화를 낼 수가 없다.
"그래. 내가 가끔 그런 생각을 하긴 했다. 이 놈이 내새끼가 맞나, 하고."
누가 봐도 슬레이만의 새끼다.
일단 그 머리 색과 눈 색부터가 똑같았으니 나란히 놓고 보면 얀은 분명한 새끼 코끼리였다.
때문에 얀이 인상을 찌푸렸다.
"아버지 자식이 맞으니까 지금까지 안 들키고 있죠. 귀티가 영 안나니까요."
누가 봐도 얀은 공작 아들로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었다. 물론 슬레이만 역시 일국의 공작으로 보기에 어려움이 있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러니 둘은 어엿한 부자지간인 것이다.
그런 얀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슬레이만이 입을 열었다.
"그렇지. 내새끼가 맞긴 맞지."
"네. 맞죠. 갑자기 그런 말씀은 왜 하시는데요."
그나마 칼리안이 내치지 않고 잘 보듬어주면서 데리고 다니는 것에 감사할 따름이다.
"그냥. 내가 마음이 참 복잡해서 그런다."
심지어 칼리안은 얀이 공작 아들이라서 참아주고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그야말로 은인이 따로 없다. 아비로서 칼리안에게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애잔한 얼굴을 한 슬레이만이 곧 손을 들어올려 얀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그래······. 건강하게만 살아라. 너만 좋으면 됐다."
평생 얀을 보며 저 말만 한 탓에 얀이 정말 건강하게만 살고 있다는 것을 왜 모르겠냐만은 이제 와서 또 무슨 말을 하겠는가.
부스스해진 머리를 다시 묶던 얀이 물었다.
"오늘 세크리티아의 세자께서 오셨다던데요. 혹시 만나보셨어요?"
카이리스까지 그렇게나 명성이 자자한 체이스였다. 때문에 실제로 보았을 때 어떤 느낌일지 궁금했던 터였다. 그런데 칼리안이 오찬에 얀을 두고 가는 바람에 만나보지 못했으니 슬레이만에게 묻는 것이다.
그런 얀을 보며 슬레이만이 험상궂게 웃었다.
"내가 세크리티아 왕세자를 만났으면 오늘 이 왕궁에서 하나는 죽어 나갔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세자를 호위한다는 테일란이라는 기사 말이다. 세자를 내가 만났으면 그 놈도 만났을 것 아니냐. 만났으면 한 번은 겨뤄봐야 하지 않겠느냐."
그러자 얀은 무슨 되도 않는 말을 하고 있느냐는 듯 대꾸했다.
"아버지가 진다면서요. 레아 아직 어려요. 오래 사셔야죠."
"요 이쁜 내새끼 같으니."
아비한테 한다는 말 한번 곱기도 하다.
* * *
플란츠 덕분에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오찬을 마쳤다.
그렇게 방으로 돌아온 칼리안은 곧바로 테라스에 나왔다.
체이스는 이 곳에 보름을 머물다 간다 했다.
앨런을 만나러 온 길이었으니 앨런과의 대화가 길어진다면 그 일정도 더 늘어날 수 있으리라 했다.
보름은 긴 시간이다.
그러니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나아질 터였다.
- 탁!
그렇게 스스로를 다스리며 테라스 의자에 앉아있는데 누군가 다가와서는 테이블에 무언가를 내려놓았다. 고개를 돌려보니 술이었다.
그것을 본 칼리안이 실소했다. 그리고 이런 밝은 대낮에 왜 찾아왔냐는 말 대신 조용한 목소리를 냈다.
"술 끊었습니다."
안마신다는 것과 끊었다는 것은 많이 달랐다. 게다가 그 말은 칼리안의 입에서 나올만한 소리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란츠는 별다른 반응 없이 칼리안의 옆에 앉았다.
"내 아우님께서 술을 끊으셨다니 마실 사람이 없군."
"형님 드십시오. 좋아하셨잖습니까."
"마셨던 적 없는데."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칼리안이 놀란 얼굴로 고개를 돌려 플란츠를 쳐다봤다.
"그 동안 술을 마신 척 연기를 했었다는 말씀이십니까."
플란츠는 별 것 아니라는 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서로 숨겼던 것을 하나씩 들켰으니 없는 셈 치면 되겠군."
"술 안 마신 비밀과 제 비밀을 같은 값으로 쳐주신다니. 계산이 참 후하시네요."
칼리안이 소리내서 웃었다.
잠시 뒤 칼리안은 몸을 일으켜 침실에 있는 금고로 갔다. 그리고 그 안에서 검 한 자루를 꺼내왔다. 오전에 찾아왔던 두 자루의 운철 검 중에 둘 중 덜 날렵하고 더 묵직한 검.
바로 브리센 가의 검술에 맞춰 만든 것이었다.
"레이븐을 주셨으니 그 값이라 생각했는데. 셈이 틀렸네요."
그 검을 플란츠의 앞에 내려 둔 칼리안이 이렇게 입을 열었다. 그리고는 손바닥의 흉터를 보여주며 말했다.
"레이븐은 그냥 이 흉터 값으로 치고 그 검은 제 비밀 값으로 치면 맞겠습니다. 형님 술 안 드신 것은 그냥 제가 비밀로 삼겠습니다."
플란츠는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레이븐은 본래부터 흉터 값이 맞았으니 딱히 할 말도 없었다.
"어차피 헤르츠 경에게 검도 잃으셨으니 형님 쓰십시오."
그 망할 놈의 마법사.
플란츠의 눈매가 급격히 사나워졌다.
잠시 그렇게 짜증을 내던 플란츠가 손을 뻗어 검을 뽑아들었다. 그러더니 곧 부드럽게 뽑혀나온 그 검날에 완전히 매료된 표정이 되었다. 얼마 전 아르센이 검을 부쉈던 일에 대해서는 잊은 얼굴이었다.
칼리안이 설명을 덧붙였다.
"만든 이의 말로는 오러 정도는 충분히 담아낼 것이라 했으니 열심히 수련하시라는 의미로 드리는 겁니다."
"비밀 지키는 값으로는 과한데."
"과하지 않습니다."
칼리안은 그 검이 원래 플란츠가 썼던 것이라는 소리는 굳이 하지 않은 채 이렇게만 말했다.
다만 남은 한 자루의 원래 주인이어야 했을 슬레이만에게 갈 검이 없었다. 그것은 키리에에게 줄 생각이었다.
슬레이만에게 갈 검을 뺏게 된 것은 그냥 모자란 아들 잘 맡아주는 값인 셈 치기로 했다. 칼리안의 계산은 꽤 정확하니까.
곧 검을 옆에 내려 둔 플란츠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설명을 좀 해 줘야 하지 않나."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다른 사람의 동생 소리에 왜 내 아우님이 죽었다 산 얼굴을 하는지."
이해가 되는 듯 하면서도 결코 이해되지 않는 일이었다.
"이미 다 알아내신 것 같던데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칼리안이 짧은 주문과 함께 사일런트를 발현했다. 어느 정도는 이야기를 해 줘야 할 것 같아서였다.
대신 그보다 앞서 한 가지 물을 것이 있었다.
이제는 답을 알 것 같았지만 그래도 한 번쯤은 물어보고 싶던 말이었다.
"만약······."
그렇게 운을 뗀 칼리안이 아르피아 궁 쪽을 쳐다봤다.
지금쯤 그 곳에 있을 체이스를 떠올리는 것이다.
"형님께서 정말 원하는 것이 생겼다고 했을 때. 그런데 그것이 다른 사람 손에 있다고 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다른 놈 손에 든 것 뺏는 취미 없는데."
"그것이 정말로 필요하다면. 그래도 그냥 두시겠습니까."
"그래."
왜 그런 것을 묻는지는 몰랐으나 플란츠는 일단 대답을 건넸다.
칼리안이 착잡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대체 전쟁은 왜 일으켰는지 생각하는 것은 바보같은 일이다. 누군가 플란츠의 성격을 바꿨든 혹은 플란츠를 대신해 전쟁을 일으켰든, 어차피 지금의 플란츠는 답을 모를 질문이 아닌가.
답을 안다 해서 바뀔 것도 없었으니.
그냥 플란츠가 실제로 어떤 생각을 하는지 확인했으면 그것으로 되었다는 마음이 들었다.
"시간이 거꾸로 흘렀습니다."
그래서 칼리안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플란츠는 칼리안을 쳐다보지 않았고 칼리안의 말이 짧게 이어졌다.
"저는 저 분의 동생이었고 지금은 형님의 동생입니다."
그 이상을 말할 수는 없었다.
남의 것 뺏는 취미 없다는 이 원수같은 형님이 뭘 했는지 어찌 알려주겠는가.
그러다 문득 오찬에서 보였던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며 웃었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렇게 구는 것이 쉽지는 않네요."
플란츠는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더 놀라지도 않았다. 하도 놀랄 것이 많다보니 그 정도는 이제 그냥 그러려니 하게 되어 버렸다.
그리고 플란츠는 술을 끊었다던 칼리안의 연세가 실제로 어떻게 되시는지는 묻지 않기로 했다. 똑똑한 플란츠는 모르는 것이 득이 될 때도 있다는 것을 잘 알았으니까.
그래서, 자신이 칼리안의 무엇을 빼앗았는지도 묻지 않았다.
제19장. 형님 (5)
한동안 말 없던 앨런의 입이 열렸다.
"그래요. 이제 정해도 되겠습니다, 왕자님."
이럴 땐 대꾸하지 않는 것이 답임을 알고 있었으므로 칼리안은 얌전히 앨런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왕자님 비밀을 누구에게 알려주실 것인지 미리 정해주시지요. 모르는 놈 얼마 남지도 않았으니 알려주실 순서 정하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 같습니다."
칼리안이 걱정되는 마음에 서둘러 일을 끝내고 와 보니 이번에는 플란츠에게 비밀을 말했단다.
물론 칼리안은 정말로 플란츠에게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시간이 되돌아갔다는 것과 체이스와의 관계만 말했다. 나머지는 그간 칼리안이 보여준 행동이나 이전에 둘러댔던 말들을 잘 엮은 플란츠가 혼자 알아낸 것이다.
······ 라고는 해도.
아니 아무리 그래도 너무하지 않느냔 말이다. 차라리 얼마나 더 들키고 다닐지를 지켜보는 것이 속이 편할 판이 아닌가?
곧 앨런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게 변했다.
화를 내야 하는데 오늘 체이스의 일로 마음 고생 한 것을 알고 있으니 다른 말을 더 못하는 중이었다.
때문에 칼리안은 조금 전 플란츠가 놓고 간 술을 얼른 건넸다. 하다하다 로튼 대장간의 주인에게까지 들킬 뻔 했다는 것, 아니 어쩌면 조금 들켰을지도 모른다는 것은 절대 말하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하면서.
"이제 정말 더 없을 겁니다."
그나마도 확답이 아니다.
그 말에 하도 기가 차서 결국은 앨런의 입에서 짧은 한숨이 나왔다. 그와 함께 칼리안이 생글생글 웃었다. 스승의 화가 풀렸다는 것을 눈치 챈 것이다.
아무튼 화가 풀렸다 해서 얽힌 속까지 풀린 것은 아니었으니 앨런은 칼리안이 건네준 술을 혼자 따라 마셨다. 그리고는 저도 모르게 놀란 눈을 하며 물었다.
"왕자님의 형님이 그간 이런 것을 마셨었답니까?"
마시려고 구한 술이 아니라 여기저기 뿌려대려고 구한 것이었으니 모르긴 몰라도 상당한 독주였을 터였다.
아무튼 칼리안은 별다른 대답 없이 앨런의 빈 잔에 술만 더 따라줬다. 제 비밀 지키는 건 젬병이어도 남의 비밀은 잘 지키는 칼리안이니까.
"한 잔 안하시겠습니까? 어차피 다 들킨 판에."
"저 술 끊었어요, 스승님."
여전히 앙금이 남아있는 앨런의 말에 칼리안이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 * *
많은 이들이 참으로 속 시끄러운 하루를 보낸 다음 날.
그 원인을 불러온 르메인을 위한 카이리스 국왕 탄신 기념일 축제가 시작되었다.
사실 르메인이라 해서 생일 맞이가 특별히 다르지는 않았다.
눈을 뜨자마자 붉은 석류 주스를 마시는 것도 붉은 색 가득한 음식으로 아침 식사를 시작한 것도 똑같았다. 다만 칼리안과 달랐던 것이 있다면 나이 수 만큼의 라프라니아 꽃을 받지 않았다는 것 뿐이다.
칼리안이야 메를린이 챙겼었다지만 르메인은 아니었다. 때문에 르메인은 이른 아침부터 떨떠름한 표정으로 찾아온 앨런과 그 옆에서 서른 아홉 송이의 라프라니아 꽃을 들고 있는 시종장 라울을 보며 질색하는 얼굴을 했다.
"그것이 무엇인가."
르메인의 질문에 라울이 느리지만 정중한 말투로 대답했다.
"네 전하. 마나실 백작이,"
"버리게."
르메인이 라울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이렇게 말했다.
덕분에 앨런은 하나도 익지 않은 배를 씹은 표정이 됐고 라울이 매우 난처한 얼굴을 했다.
앨런은 르메인이 무엇을 오해할지 익히 예상했다. 때문에 억울했다.
"오해 마시지요."
세상에서 앨런이 꽃을 사 주는 이는 딱 한 명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녀 베로니카 뿐이었다. 몰래 체이스를 불러오기나 하는 르메인 같은 놈에게 앨런이 무슨 이유로 꽃을 챙겨 주겠는가?
그러니 당연히 그 꽃은 앨런이 준비한 것이 아니었다.
"저는 다른 이유 때문에 따라 들어온 길입니다."
앨런은 르메인의 방에 꽃과 함께 들어온 이유 즉 손에 들린 보고서를 르메인의 책상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매우 마뜩찮다는 얼굴로 말했다.
"꽃은 어여쁜 제 제자가 전해달라 한 것이니 버릴 필요 없이 잘 받으시면 됩니다."
그 말을 들은 르메인의 눈이 다시 라울에게로 향했다. 다시 한번 발언권을 얻은 라울이 조금 더 빠르고 정중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네. 마나실 백작이, 칼리안 왕자님이 보내온 꽃을 가져다 준 것입니다."
쓸데 없는 앨런의 이름이 들어가 있었지만 결론은 칼리안이 준비해서 앨런 편에 전한 것이라는 소리였다.
사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메를린의 말을 들은 얀의 의견을 수락한 칼리안이 다시 메를린을 통해 꽃을 준비시킨 뒤 앨런과 라울의 손을 거쳐 르메인에게 전달한 것이라 해야 맞을 테지만. 칼리안도 그런 것을 알아서 챙길 만큼 세심한 성격이 되지는 못했으니 말이다.
어차피 아침 일정으로 르메인에게 인사를 하러 오겠지만 다른 형제들이 있는데 칼리안만 꽃을 들고 가기가 어려워서 미리 보냈을 뿐이었다.
르메인이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고 라울은 조심스럽게 책상 위에 꽃을 올려놓고 밖으로 나갔다. 붉은 꽃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앨런이 이 상황을 빚어낸 근본적인 원인에 대해 질문했다.
"새 결혼은 안 할 요량이십니까?"
그 말에 르메인은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을 얼굴에 드러냈다. 어떻게 보면 답답한 것도 같기도 하고 또 어떻게 보면 화가 난 듯한 표정이었다.
"그 이야기 좀 그만."
따라서 이렇게 나온 대답에 앨런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지간히도 시달리는 모양이란 생각이 든 탓이다.
그럴만도 한 것이 안 그래도 최근 들어 새 왕비를 맞이하라는 이야기를 너무 많이 듣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왕자가 셋이나 있고 머지않아 란델이 결혼을 해야 할 나이인데 그런 말이 나오니 짜증이 날 수밖에.
- 똑똑.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시종장 라울이 다시 들어왔다.
이제 세 왕자가 탄신일 축하 인사를 위해 올 것이라는 말이 이어졌고 앨런은 그 말을 들으며 밖으로 나왔다.
르메인의 생일을 기념하는 행사가 이어지는 동안 앨런은 체이스와 이야기를 좀 나눠 볼 생각이었다. 앨런을 만나러 왔다던 체이스가 정작 어제 하루 종일 다른 일정으로 바빴던 탓에 앨런과 따로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 * *
르니에리에서 벗어나니 이제는 장미다.
이러다가는 세상의 온갖 꽃이 다 꺼려질 것 같은 기분에 꽃봉오리 가득한 장미 정원을 보던 칼리안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별 생각 없이 창 밖을 보았을 뿐인데 기분이 급격히 가라앉았다.
장미를 보니 생각이 났다.
오늘만은 마주침을 피할 수 없을 사람. 바로 란델이었다.
칼리안의 기분이 영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아채기라도 한 것처럼 품 속의 고양이가 이상한 울음소리를 냈다.
"므에옹!"
'나는 칼리안 왕자님의 고양이입니다.'
고양이가 지금 칼리안의 품에 안겨 있었다.
맞다.
고양이는 아직까지도 이름이 없었다.
레이븐의 이름은 단박에 지었던 칼리안이었으나 고양이 이름은 지어주지 못했고 다른 이들은 칼리안의 고양이에 감히 마음대로 이름을 붙이질 못했다.
아무튼 히나는 칼리안 왕자님의 고양이라고만 불리는 녀석을 칼리안에게 맡겨두고 광장의 일을 지원하기 위해 나갔다. 그리고 그 고양이를 칼리안으로부터 다시 받아들며 얀이 말했다.
"이제 가셔야 합니다. 고양이 털 떼세요."
"응."
여전히 정원에 시선이 닿아있던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 왕자의 정복에 새하얗게 내려앉은 고양이 털을 마법으로 털어낸 뒤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얀과 키리에를 대동한 채 아르피아 궁으로 갔다. 르메인이 이미 아르피아 궁에 나와 있었으므로 올해에도 그 곳에서 왕자들을 맞이하기로 한 탓이다.
"대화 나누고 나오세요."
그런 말과 함께 르메인과의 대면 자리에 칼리안을 보내 둔 얀과 키리에는 다른 시종들과 함께 르메인의 집무실 밖에 조용히 서 있었다.
그러다 제 옷에도 고양이 털이 붙은 것을 본 얀이 그것을 떼어내는데, 멀리서부터 저벅 저벅 하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르메인은 물론 왕자들까지 모두 집무실 안에 든 상태였고 시종이나 시녀들은 발소리를 내지 않았다. 때문에 누구의 발소리인지 알기 위해 고개를 든 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딱 보아도 누구인지 알 수 있을 청은색의 긴 머리, 체이스였다.
르메인 집무실의 맞은편. 그러니까 앨런의 집무실에 찾아온 체이스가 잠시 발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자신에게 예를 보이는 시종들 중 키리에를 향해 걸어왔다.
"어제 보았던 아이구나. 칼리안 왕자의 시종이었지."
그리고는 이렇게 아는 체를 했다.
생각지 못한 상황이었으나 그래도 그 동안 얀에게 배운 것이 있었으므로 키리에는 당황하지 않고 정중히 대답했다.
"세크리티아의 왕세자께 인사드립니다. 칼리안 왕자님의 시종입니다."
그러자 체이스가 부드러운 음색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네 검술이 아주 뛰어나다 들었다. 그 술집에서의 일도 들었고. 세크리티아의 새들은 참 부지런하거든."
"저하."
세크리티아의 세작을 통해 도박장의 이야기를 전해들었다는 소리였으니 깜짝 놀란 기사 테일란이 체이스의 말을 막아섰다.
키리에가 속으로 잠시 웃었다.
칼리안이 비밀을 잘 들키는 것은 아무래도 체이스를 닮은 모양이다. 심지어 체이스는 제 비밀도 아니고 세크리티아의 비밀을 입에 올리고 있었으니 그나마 칼리안이 낫다고 보아야 할 일이다.
아무튼 테일란의 저지에 살짝 웃어보인 체이스가 다시 키리에를 보며 물었다.
"이렇게 기억이 난 것도 인연일테니. 네 이름이나 알고 싶구나."
순간 키리에가 머뭇거렸다.
얀이 얼른 키리에를 쳐다보았다. 왕족이 이름을 물을 때 머뭇거려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세크리티아라 해서 다르지 않은 예법이었다.
다행히 체이스는 별다른 말 없이 키리에의 말을 기다렸다.
"키리에, 입니다."
성은 일부러 말하지 않았다.
세크리티아에서는 성이 없는 평민도 왕궁에서 일을 한다 했으니 그렇게만 말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그런데 체이스는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물었다.
"성은 없느냐."
고개 숙인 키리에가 눈을 질끈 감았다.
"제 성은······ 베른입니다."
체이스의 눈이 아주 잠시 놀란 빛을 띄었다. 그러나 곧 다시 웃는 낯이 된 체이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키리에 베른. 그것이 네 이름이구나."
"네. 그렇습니다."
이만 체이스의 앞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음에도 체이스는 키리에를 놓아주질 않았다. 소드마스터인 칼리안이 데리고 있는 아이인데다 무력도 강하다 하니 관심이 간 듯 하다고, 얀은 그렇게 생각을 했다.
"신기한 일이구나. 네가 가진 성은 세크리티아의 왕실에 내려오는 아주 오래된 말이다. 알고 있느냐."
칼리안은 베른이라는 이름에 무슨 뜻이 담겼는지 알려준 적 없었다. 그저 좋은 의미라는 말만 했을 뿐 정확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었다.
"세크리티아 왕실에 내려오는 말은 제가 알지 못합니다."
양신 전쟁이 발생했을 때보다도 훨씬 전에 사용했다던 대륙의 고대 언어. 그것이 전해져 내려오는 곳은 오직 세크리티아 뿐이었다. 그러니 카이리스의 키리에가 그것을 알리는 만무했다.
체이스 역시 키리에가 그 뜻을 알고 있기를 기대한 것은 아니었는지, 다시 입을 열어 설명을 해주었다.
"베른. 잊히지 않을 영웅이라는 뜻을 지닌 말이다. 그러니 너에게도 썩 어울리겠구나. 카이리스에서는 의미가 없을지라도 좋은 뜻이니 기억해두려무나."
"그렇게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하나도 감사하지 않습니다.
잊히지 않을 영웅이라니.
정말 그런 뜻이라면, 그 말은 완전히 틀렸으니까요.
* * *
앨런은 체이스와 키리에의 대화를 중간에 끊지 못했다.
괜찮겠지 생각해서 그냥 두었던 것인데 베른이라는 이름까지 언급되는 것을 깨닫고는 뒤늦게 후회를 했다.
결국 키리에의 감사인사가 끝나기 무섭게 집무실 문을 연 앨런이 서둘러 체이스를 불렀다.
"바깥 분위기가 이렇게나 화기애애하니 홀로 듣고 있기가 적적합니다. 어서 드시지요."
그 말에 고개를 돌린 체이스가 키리에를 보며 짧은 인사를 건넨 뒤 앨런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테일란을 포함한 모든 수행원들을 밖에 둔 채였다.
문이 닫히고 앨런의 맞은편에 앉은 체이스가 뒤늦은 대답을 했다.
"이곳에서 그 말을 듣게 되어 반가운 마음에 대화를 좀 나누느라 늦었습니다."
"네. 듣고 있었습니다."
곧 앨런이 커피잔을 들어 한 모금을 마시고 내려놨다.
전날 마신 술 때문인지 속이 타는 느낌이 든 까닭이다.
"커피 좋아하는 것은 여전하군요, 마나실 경."
세크리티아에서는 남작이고 카이리스에서는 백작인 앨런이었으므로 무어라 불러야 할지 고민하다 그냥 존칭만 붙이기로 한 모양이었다.
"항상 일이 많으니 이것이 없으면 이제 불안합니다."
"이해합니다. 항상 있던 것이 없으면 불안한 마음."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말한 체이스가 잠시 앨런의 커피잔을 쳐다봤다.
커피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던 수증기가 흩어지는 모습이 서너 번 쯤 반복되었을 때 체이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항상 없던 것이 생겨나도 불안하더군요."
그 말이 가진 뜻을 가늠하기가 어려웠던 앨런이 체이스를 쳐다봤다.
"잊어서는 안될 것을 잊고 있었습니다. 내가."
항상 잊고 지내던 기억이 떠올랐다는 그 말을 하기 위해 이 먼 타국까지 찾아온 체이스가 앨런을 쳐다봤다.
제19장. 형님 (6)
시덥지 않은 생일 축하 인사와 형식적인 감사 인사가 오간 뒤 르메인이 세 아들을 향해 먼저 말을 건넸다. 그런데 그 내용이 오래 전 함께했던 석찬 때와는 또 달랐다.
"칼리안. 어제는 평소 외출하는 날이 아니었음에도 왕궁을 벗어났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스스로 지킬 수 있는 것을 알기 때문에 궁 밖에 나가는 것을 허락은 하였으나 너무 잦은 것 같구나."
꼭 흔한 아버지들과 같은 표정을 하며 이런 말을 한 것이다.
"그리고 플란츠. 헤르츠 경은 실력이 뛰어난 자다. 그런 이와 매일 다툼이 있다는 말이 나에게까지 들려서야 되겠느냐."
뿐만 아니라 아르센과 계속 싸움을 해대는 플란츠에게 이렇게 우려 섞인 소리도 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무려 르메인이 잔소리라는 것을 하게 되었다는 소리다. 앨런의 잔소리를 하도 듣는 바람에 스스로도 잔소리를 하게 된 모양이었다.
일국의 국왕이 아들들을 앞에 놓고 잔소리를 하는 모습에서 느껴지는 이질감 때문에 칼리안은 체이스에 대한 일도 잠시 잊고 웃음을 참느라 애를 쓰고 있었다.
그런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르메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란델을 향해서였다.
"조만간 함께 산책이나 하자꾸나. 곧 장미가 많이 피겠더구나."
"알겠습니다, 전하."
하필 장미 얘기다.
란델은 별다른 기색 없이 간단한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렇게 이어진 대화도 끝이 난 뒤 모두 일어서 나가려는데 갑자기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르메인이 입을 열었다.
"플란츠. 잠깐 있거라. 전할 말을 내가 잠시 잊었구나."
"네. 전하."
그렇게 플란츠를 남겨놓고 칼리안과 란델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지금껏 칼리안을 기다리고 있던 키리에의 표정이 매우 좋지 않았다. 때문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물으려 하는데 뒤에서 칼리안을 불러세우는 소리가 들렸다.
"칼리안. 산책이나 하자꾸나."
르메인이 했던 이야기를 똑같이 꺼낸 것은 란델이었다.
* * *
- 잊고 있어서는 안될 것을 잊고 있었습니다. 내가.
체이스가 잊지 말아야 했던, 하지만 잊게 되었던 것.
앨런을 찾아오기까지 두 달이 걸렸으면서 그에 대해 말을 꺼내는 것에 또 한번 시간이 필요했다. 체이스는 다시 한참동안 말을 골랐다.
"이런 얘기를 믿을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다시 나오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던지, 어느새 커피잔에서는 더 이상 김이 오르지 않고 있었다.
"그래도 마나실 경이라면 들어는 주지 않을까 해서."
"말씀하시지요. 듣겠습니다."
앨런은 그 속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조금쯤 짐작한 채로 고개를 끄덕였고 체이스는 커피에 시선을 둔 그대로 입만 열어 말을 시작했다.
"시간의 축이 사라졌다 말한 것을 기억합니까."
예상대로 시간의 축이 언급되었다.
"네. 기억합니다."
"지난해 봄, 축이 사라지던 그 날 그 자리에 내가 있었습니다."
죽은 베른이 칼리안의 몸을 지니고 눈을 떴던 바로 그 날을 말하는 것일 터였다. 앨런은 대답 없이 다음 말을 기다렸다.
체이스가 자신의 머리를 툭툭 건드려 보이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몇 달 전부터 생소한 기억들이 하나씩, 마치 꿈을 꾸는 것처럼 그렇게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겪지 않은 일에 대한 기억이 하나씩 머릿속에 새겨질 때 얼마나 소름돋는 기분을 느꼈는지에 대해서는 덧붙이지 않았다.
"믿기 힘든 일이었으니 처음에는 그저 긴 꿈을 꾼 것이라 여겼습니다. 그러다 기억 속의 일들이 그대로 반복되는 것을 느낀 뒤에는 의심을 했습니다. 아, 물론 몇번인가는 내가 미쳐가는 것 같다고도 생각했고."
체이스의 입에서 나오기에는 상당히 거친 표현이 들어 있었다. 혼자 혼란스러워하던 그때가 생각났는지 기운 빠진 웃음 소리를 내던 체이스가 말을 이었다.
"그러다 결국은 믿을 수 밖에 없게 됐습니다. 단순한 착각 혹은 내가 미쳐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가 겪었던 일을 기억해내고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앨런도 잘 아는 바와 같이 체이스는 신중한 사람이었다.
눈 앞에서 시간의 축이 사라진 뒤 변화를 겪었음에도 스스로의 기억이 단순한 착각이 아니라는 것을 온전히 믿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을 터였다.
"마치 앞으로의 일을 보고 온 것처럼."
앨런이 관자놀이를 주물렀다.
베른과 체이스가 겪었다 말하는 현상이 서로 달랐다.
그러니 체이스는 스스로 시간을 되돌아온 것이 아닐 터였다. 그저 시간의 축이 지워낸 일들을 기억해내고 있을 뿐.
시간의 축이 사라지던 자리에 있던 탓인지 혹은 다른 이유가 더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어찌됐건 중요한 사실은 체이스가 이미 사라진 일들에 대한 기억을 떠올렸다는 것에 있었다.
"언제부터 언제까지, 얼마큼을 기억하십니까."
앨런의 질문에 체이스의 표정이 조금 달라졌다.
체이스의 말을 들은 앨런은 놀라지 않았다. 들은 말을 되묻지도 않았다. 단지 확인이 필요한 것에 대해 묻고 있었다.
체이스가 작게 웃었다.
"진작 올 걸."
혼자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을 안 허탈감 때문에 체이스가 잠시 그렇게 웃었다.
"말했듯이 축이 사라진 것은 지난 봄. 꿈을 꾸기 시작한 것은 겨울부터 시작된 일이고 과거의 일들은 거의 다 기억합니다. 앞으로의 일은 때때로 생각 나는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고."
그 말에 앨런은 목구멍까지 튀어나오는 질문 하나를 간신히 삼켜 넣었다. 차마 베른을 기억하느냐는 그 말을 먼저 꺼낼 수 없어서였다.
그것을 본 체이스가 입을 열었다.
"그것 때문에 아무래도 직접 내 눈으로 확인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축하 할 일이 하나.
그리고 만날 이가 한 명.
그것이 체이스가 이 곳에 온 목적이었다.
"무엇을 확인하고자 했다는 말씀이십니까."
"아무래도······."
체이스의 말은 잠시동안 이어지지 않았다.
'잊지 말아야 했던' 기억을 다시 떠올리고 있는 것 같았으므로 앨런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체이스가 한참만에 입을 열었다.
"내 형제가, 여기에 있는 것 같아서."
앨런이 소리내서 웃었다.
긍정할 수도 그렇다고 부정할 수도 없던 탓에 웃었다.
이미 죽었어야 할 왕자가 저렇게 버젓이 살아서는 체이스의 기억과 유난히 다른 행보를 걷고 있으니 어찌 모르겠는가.
"혹, 저하의 아우를 시간의 축으로 살리려 하셨습니까."
시스파니안으로부터 내용을 들었던 칼리안이 이미 아니라는 이야기를 했었지만 직접 답을 듣고자 꺼낸 질문이었다.
"그것을 빼앗기 위해 일으킨 전쟁, 그리고 지키기 위해 받아들인 전쟁입니다. 시간의 축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내 형제가 죽었습니다. 그리 떠난 것을 살리겠다고 시간의 축을 사용할 만큼 내 생각이 짧지는 않습니다."
시스파니안이 이미 답했던 내용과 같았다.
"그러니 나는 끝까지 지켰을 뿐. 손 대지 않았습니다."
상황이 그 지경이면 한번 돌려볼 만 하지 않느냐고.
앨런은 그런 말이 튀어나오는 것을 간신히 삼켰다.
불만과 답답함이 가득해 보이는 앨런의 얼굴 때문에 체이스가 부드럽게 웃었다. 그리고 문득 생각났다는 것처럼 화제를 돌렸다.
"어제 나를 보았을 때의 반응을 보니 아무래도 내가 기억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 안 될 것 같았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내용에 대해 굳이 이야기하지 말아주었으면 합니다."
다시 칼리안에 대한 이야기였다.
"잘 있는 것을 확인했으니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뭐라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앨런은 그저 한참 뒤에 고개만 끄덕였다.
체이스가 꺼내둔 갑작스러운 이야기를 들으며 당황하고 놀란 탓에 잊은 것이 둘 있음을 미처 깨닫지 못한 채였다.
칼리안과 이런 이야기를 할 때 늘 꺼내두던 사일런트를 잊었고, 문 밖에 가만히 서 있던 시종이 있음을 잊었다.
따라서 이번에도, 키리에는 다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