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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46화

15장 밑바닥에서

드드드드드드득!

순간 하수도 전체가 지진이라도 난 듯 요동쳤다.

동시에 안쪽에서 통로를 꽉 채운 괴물이 미끄러지듯 다가온다.

얼굴 전체가 먹장어 같은 흉측한 주둥이로 되어 있고, 주둥이 속에는 드릴처럼 보이는 이빨이 나선형으로 촘촘히 박혀 있다.

아오, 망할.

저 끔찍한 얼굴은 진짜 데스웜이다. 대체 저게 지금 왜 여기 있는 걸까?

의문의 답을 내리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먼저 '아이스 오브 템페스트'를 통로 속으로 냅다 집어 던진 다음.

'룩카르!'

쿠궁!

바위의 정령을 소환, 실시간으로 명령을 전달했다.

'템페스트가 먹히면 너도 저 녀석 입 속으로 주먹을 날려서....'

-알겠다.

쩌적!

마법을 집어 삼킨 데스웜이 얼굴부터 얼어붙는 순간, 몸을 날린 룩카르가 녀석의 입속으로 어퍼컷을 날렸다.

콰직!

동시에 데스웜의 머리통이 박살나며 흩어졌다. 룩카르는 살 더미를 뚫고 천장에 박힌 주먹을 뽑으며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부를 때 마다 험하게 쓰는군. 전에 박살난 몸이 회복된 지도 얼마 안 됐는데.

그새 룩카르의 오른 주먹은 넝마가 되어 있었다. 데스웜의 이빨이 워낙 날카로워야 말이지.

'미안. 근데 험한 일 아니면 굳이 널 왜 부르겠어?'

-그것도 맞는 말이군.

룩카르는 석상 같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난 통로 안으로 걸음을 옮겨 죽은 데스웜의 시체를 살폈다.

"어째서 이런 곳에.... 응?"

이건 뭐지?

어째 자세히 보니, 내가 기억하는 데스웜과 뭔가 다르다.

데스웜은 이계의 3차 웨이브부터 적의 군세에 포함되는 괴물.

눈과 귀는 물론이고 머릿속에 두뇌조차 존재하지 않는 이형의 생물이다.

무작정 땅속을 파고들어 지반을 파괴하고, 한순간 솟구치며 균형을 잃은 인간들을 마구잡이로 집어 삼킨다.

그런데 이 녀석은.... 일단 박살나긴 했지만 눈도 있고 뇌도 있네?

"이건 아마도...."

뒤늦게 따라온 디디가 괴물의 시체를 살피다 말했다.

"황자님, 이건 쥐잡이 뱀입니다."

"뭐? 뱀? 무슨 뱀?"

"쥐잡이 뱀이라고 합니다. 원래부터 하수도에 사는 생물중 하나입니다."

"이게?"

"물론 이렇게 크지도 않고 이빨이 저런 식으로 생기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다른 특징은 동일합니다. 제가 몇 번이나 먹어 봤기 때문에 확실히 압니다."

"잠깐, 먹어봤다니.... 응?"

드드드드!

그때 새로운 진동이 머리 위를 울렸다.

무심코 고개를 들자 그때까지 발견 못한 또 다른 통로가 눈에 들어왔다.

"설마...."

급한 대로 통로 안쪽으로 불덩어리를 쏘자, 내부가 확 밝아지며 안쪽의 참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출구만 하나고, 내부는 수없이 뚫린 무수한 통로의 집합체.

모든 방향으로 입체적으로 구멍이 뚫려있고, 안쪽 깊은 곳에 데스웜들의 끔찍한 주둥이 여러 개가 얼핏얼핏 보인다.

이런 망할!

저 놈들이 왜 여기에 군락을 차리고 있는 거야! 여기가 무슨 이계의 왕국이냐?

후. 아니지, 침착해야지.

이런 좁은 공간에 데스웜이 마구잡이로 몰려오면 대처가 힘들다. 나는 얼어붙은 디디의 어깨를 툭 치며 명령을 내렸다.

"빨리 입구로 튀어!"

"네. 황자님."

디디는 팔다리를 크게 휘저으며 뒤로 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 자리에 굳건히 서 있는 룩카르에게 마지막 명령을 내렸다.

"또 힘든 부탁을 해야겠네. 여기서 시간 좀 끌어 줘."

-맡겨라.

쿵!

룩카르는 힘 있게 발을 구르며 버티는 자세를 취했다. 나는 디디를 따라 원래 있던 수로길로 달리며 소리쳤다.

"늑대 만나는 건 일단 보류! 우선 나가자! 당장은 하수구 밖으로 나가 대책부터 마련해야겠어!"

"알겠습니다!"

디디도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수로길에서 몸을 돌려 왔던 길을 향해 뛰려는 순간.

푸확!

한순간 수로 전체가 뒤집어 솟구쳤다.

솟구친 액체는 왔던 길을 빈틈없이 틀어막았다. 자세히 보니 끈끈한 젤리 같은 것들이 하나로 뭉쳐 거대한 구조물을 만들고 있는데....

'슬라임?'

이 또한 이계의 괴물이다.

오던 길에 수로의 하수가 묘하게 출렁거렸던 이유가 이놈들 때문이었나?

"아니! 이건 또 여기 왜 있는데!"

급한 대로 불덩어리를 날리자 정면에 몰려오던 거대한 덩어리가 끔찍한 소리를 내며 타올랐다.

치이이이익!

하지만 소멸한 덩어리보다 더 거대한 군체가 끊임없이 몰려든다!

으, 안 돼. 압도된다. 나는 고개를 휘휘 저으며 템페스트를 양 손으로 동시에 구사했다.

"저리 꺼져!"

손바닥을 떠난 불꽃이 적에게 닿은 순간, 활개 치는 화염의 날개가 폭발하듯 퍼지며 모든 것을 휘감았다.

그리고 온 하수도가 새빨갛게 타올랐다.

투명한 회색이었던 슬라임 군체가 언제 그랬냐는 듯 붉은 빛으로 물들고, 동시에 대량의 수증기를 뿜으며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여기에 작열하는 불꽃이 거대한 기류를 만들며 공간 자체를 단숨에 관통해버렸다.

앗, 이건 실수.

나는 프로텍션 매직으로 몸을 감싸며 뒤에 있는 디디의 몸을 덮쳐 쓰러뜨렸다.

"머리 숙여!"

그리고 폭발이 일어났다.

며칠 전에 제스를 상대했을 때는 탁 트인 야외라서 상관없었다.

하지만 이곳은 밀폐된 하수도다. 나는 등 뒤로 쏟아지는 맹렬한 폭발을 느끼며 디디에게 소리쳤다.

"눈 꽉 감아! 그리고 내 말 잘 들어!"

"네! 황자님... 윽!"

"말도 하지 마! 듣기만 해! 폭발이 끝나면 바로 늑대가 있는 곳으로 달려! 하수도 출구는 이미 틀렸어!"

"하지만 황자님이 방금... 우웁!"

"말 하지 말래도? 방금 얼핏 봤는데 저 괴물이 통로 끝까지 꽉 찼어! 템페스트 두 발을 날렸는데도 턱도 없을 정도로 많아! 그러니 일단 늑대 있는 곳으로 도망쳐! 지금!"

후폭풍이 사그라지는 것을 느끼며 급하게 디디를 일으켜 세웠다. 디디는 공기가 뜨거운지 양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뒤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이쪽입니다! 황자님도 따라 오세요!"

"먼저 가! 알아서 따라 갈게!"

나는 혹시나 서로 떨어지지 않도록 생명감지 마법을 발동시켜 디디의 신호를 확인했다.

그런데 으악.

세상에 맙소사.

생명감지 덕분에 주변에 퍼져 있는 어마어마한 양의 새로운 생명이 함께 느껴진다.

끝도 없는 슬라임의 향연.

"아니, 어디 무슨 게이트 열렸냐?"

이건 그냥 많다 수준이 아니다.

방금 날려 버린 만큼의 새로운 덩어리가 후방에서 합류하며 군체의 몸집을 키우고 있다. 나는 몰려오는 군체에 적당히 화염마법을 던지며 계속 뒷걸음을 쳤다.

"통했으면 좋겠는데...."

바로 그 순간, 방금 지나친 오른 편 통로에서 데스웜 하나가 폭발하듯 수로 쪽으로 솟구쳤다.

드드드드득!

동시에 슬라임 군체가 데스웜의 몸을 집어 삼켰고, 데스웜은 슬라임의 몸속에서 미친 듯이 날뛰며 내부를 헤집어 놓기 시작했다.

"걸렸다!"

나는 즉시 비행마법으로 몸을 띄우며 멀어진 디디를 추격했다.

뒤쪽으로 무슨 천지가 뒤집히는 소리가 울리는데....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다!

"디디야!"

이윽고 내달리는 디디의 머리 위에 도착했다. 디디는 고개를 바짝 치켜들며 나와 눈을 마주쳤다.

"황자님!"

"계속 달려! 아니, 내가 안고 날아갈 테니 등짐 버려!"

"네!"

디디는 커다란 등짐을 옆으로 집어 던졌다. 동시에 내가 녀석의 겨드랑이 사이에 팔을 집어넣고 안아 올리려는 순간.

"아극!"

양 어깨에서 뭔가 뿌직하는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끔찍한 통증이 번지기 시작했다. 뭐지 이거? 설마 인대가 찢어졌나?

"아.... 미안! 다시 놓을게!"

나는 1미터쯤 들어 올렸던 디디의 몸을 다시 바닥에 놓아버렸다.

"읏!"

착지에 성공한 디디는 잠시 휘청거리다 계속 달리며 소리쳤다.

"황자님! 괜찮으십니까!"

"괜찮아! 근데 조심해!"

동시에 꽝소리와 함께 좌우의 벽이 폭발하며 새로운 데스웜이 머리를 들이 밀었다.

생명감지로 적의 출현을 미리 감지한 나는, 녀석들의 대가리에 각각 얼음 마법을 쏘아대며 계속해서 디디의 뒤를 쫓아 날았다.

그런데 한참 달리던 디디가 미끄러지듯 앞으로 고꾸라졌다.

"앗!"

그 와중에 새롭게 연결되는 오른 편의 수로에서 대량의 생명반응이 쏟아지는게 느껴졌다.

"또 슬라임이야!"

그 와중에 상하좌우에서 데스웜으로 추정되는 생명체가 맹렬히 접근하고 있다. 나는 디디의 앞에 착지하며 급히 몸을 숙였다.

"업혀! 당장!"

"황자님!"

그런데 그때였다.

슥!

천장 쪽에서 흐릿한 뭔가가 엄청난 속도로 떨어지며 디디의 몸을 물어 낚아챈다.

"디디야!"

"크르!"

새카만 털을 가진 늑대였다.

녀석은 나를 스치듯 지나치며 새파란 눈으로 쏘아 본 다음, 이내 엄청난 기동력으로 정면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

"황자님! 걱정 마세요! 이게 르갈입니다!"

늑대의 달리는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입에 물린 디디의 목소리가 한순간에 멀어졌다.

동시에 수로에서 새로운 슬라임 군체가 도보 쪽으로 기어 올라왔고, 사방의 벽이 박살나며 또 다른 데스웜들이 수로 쪽으로 박력있게 고개를 들이 민다.

"이건 뭔 놈의 괴물 천지야!"

일단 디디의 생명신호를 추적하며 전속력으로 비행했다.

그동안에도 사방에서 괴물들이 쏟아졌지만, 늑대는 자신의 모습을 흐릿하게 감추며 적들의 포위망을 잽싸게 벗어났다.

* * *

그렇게 얼마나 도망쳤을까.

늑대가 멈춘 곳은 녹슨 톱니바퀴가 잔뜩 달린 방이었다. 그보다 늑대가 달리던 속도가 무시무시하던데, 입에 물렸던 디디는 무사할까?

"...기계실이군요."

마침 늑대의 입을 빠져나온 디디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내 쪽을 돌아보았다.

"르갈의 말로는 괴물들이 여기까지는 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안심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말하는 거 보니 일단은 괜찮아 보이는구만.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여기가 어디라고? 기계실?"

"수로 방향을 바꾸는 장치가 있는 방입니다. 오래 전에 장치가 고장 나 지금은 사용할 수 없지만요. 몸은 괜찮으십니까? 황자님?"

"응. 당연하지. 문제없어."

아니, 실은 문제가 아주 많다.

갑자기 급하게 움직였더니 숨이 차고 온몸의 뼈마디가 삐걱거린다. 특히 좀 전에 디디를 들어 올리려는 순간 어깨가 고장 나버렸고.

설마 회전근개가 파열된 건가?

대체 얼마나 무거운 걸 들었다고 이지경긴가 싶지만, 원래 내 몸은 처음부터 이 모양이다.

그보다 팔이 아예 위로 들리질 않는데.... 으악, 이거 통증이 장난 아니구만.

가까스로 손만 살짝 올려 어깨에 회복 마법을 쏟아내던 중, 늑대가 내 쪽으로 눈을 번뜩이며 이빨을 드러냈다.

"크르...."

어우 저 송곳니 봐.

까딱 물리면 정수리에서 턱까지 뚫고 나올 기세다.

근데 이 녀석, 정면에서 보니 생각 보다 엄청 말랐는데?

기본 사이즈는 소 두 마리를 붙여 놓은 정도로 거대한데, 몸에 살이 하도 없어 긴 허리와 다리가 유독 도드라진다.

단순히 외견만 보면 그동안 내가 봤던 모든 에이션트 울프 중 가장 초라하다. 털도 짧고 부스스 한 게 전체적으로 꾀죄죄하고.

그나마 털색이 검은 빛이라 독특한 위압감이 느껴졌다. 아무튼 겉모습은 저래도 디디의 친구라니 친하게 지내는 게 좋겠지?

"안녕? 이름이 르갈이라고? 디디 친구지? 나도 디디의 친구 같은 건데...."

"이곳에서 당장 나가라."

어우 깜짝이야. 늑대는 갑자기 사람의 말로 경고를 시작했다.

"이곳은 인간이 들어올 곳이 아니다. 당장 나가. 안 그러면 내가 물어 죽이겠다."

"르갈! 안 돼!"

순간 디디가 펄쩍 뛰어올랐다. 디디는 늑대의 등 위로 올라타 목을 조르며 소리쳤다.

"이 분은 내가 모시는 높은 분이야! 절대 해치면 안 돼! 위협도 하지 마!"

"높은 분?"

"제국의 황자님이야. 황제의 아드님."

"허?"

늑대는 눈을 크게 뜨며 내 쪽을 살폈다. 그리고는 입 고리를 올리며 비웃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믿을 수가 없군. 굶고 자란 빈민가 애들보다도 작고 말랐는데 이게 황자라고?"

"그건 그러니까...."

"여기에 하수구 밑바닥까지 내려오는 황자가 세상 천지에 어디 있지? 이거 사기꾼 아닌가?"

이 자식, 초면에 말 너무 심하게 하는 거 아냐? 성질나면 확 불로 구워 늑대 통구이로 만들어 버린다?

"...아니, 그럴 수야 없지."

"뭐라고?"

"작아서 미안하게 됐다고. 암튼 황자 맞아. 이름은 클로드고. 정식 관계는 디디의 고용주야."

"흠, 반응이 재미없군."

늑대는 내 쪽으로 다가와 코를 킁킁대며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눈살을 팍 찌푸렸다.

"그래서? 제국의 황자란 놈이 어째서 여기까지 내려왔지? 당장이라도 꺼져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만."

"쌀쌀맞기는. 디디랑은 이렇게 찰싹 붙으면서 나한텐 왜 이렇게 적대적인데?"

그러면서 은근슬쩍 늑대의 콧잔등에 손을 얹으려 했다. 하지만 늑대는 엄청난 속도로 고개를 빼며 이빨을 드러냈다.

"크르! 무슨 헛소리냐? 그게 당연한 거다."

"진정해 르갈. 이 분은 나쁜 사람 아니야."

마침 아래로 내려온 디디가 늑대의 앞가슴을 강하게 긁어 주었다. 늑대는 기분이 좋은 듯 금방 표정을 풀며 말했다.

"흐음.... 설명이 필요한가? 에이션트 울프는 원래 인간을 싫어한다. 냄새도 파장도 모두 안 맞아. 다만 이 녀석은 그 중에도 특별하다."

그리고는 디디의 얼굴에 볼을 비비기 시작했다. 음, 보고 있자니 뭔가 살짝 부러운 느낌이 드는구만.

"디디는 뭐가 그렇게 특별한데?"

"이 녀석에게 이야기는 들었나? 처음 하수도에서 건져냈을 때부터 친숙한 느낌이 들었다. 인간 중에 이런 느낌을 가진 녀석은 매우 드물지."

아마도 그게 '마수 친화력'이란 능력의 실체일까?

물론 아직은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다. 나는 내색하지 않고 잠자코 녀석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47화

15장 밑바닥에서

"그리고 이 녀석은 내 '코어'를 받았다. 그래서 모든 게 나와 가깝게 느껴져. 하지만 넌 그런 게 전혀 없는, 말 그대로 전형적인 기분 나쁜 인간일 뿐이다."

"코어?"

"그래. 코어가 뭔지 아나?"

"디디에게 들었어. 실은 그 코어를 좀 받을 수 없을까 해서 왔는데.... 혹시 하나 줄 수 없을까?"

말 나온 김에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을 꺼냈다. 르갈은 곧장 눈을 가늘게 뜨고 털을 부풀리기 시작했다.

"코어를 달라고? 어째서?"

"아는 사람이 독에 중독됐거든. 아주 지독한 독이야. 영약도 안 듣고 신성마법도 안 통해. 디디 이야기로는 네가 만드는 코어가 모든 독을 해독할 수 있다고 하던데."

"사실이다. 그래서? 내가 그걸 왜 너한테 줘야 하지?"

르갈은 턱을 치켜들며 건방진 표정으로 답했다.

왜냐고?

안 그러면 여기서 네놈을 죽이고 배를 가른 다음 그 안에 황제를 쑤셔 넣어야 하니까!

후우....

물론 그렇게 협박할 수는 없는 노릇.

물론 이럴 줄 알고 미리 협상안을 준비했다. 내가 에이션트 울프와 친하게 지낸 적은 없어도 녀석들의 생태에 대해서는 빠삭하게 꿰고 있거든.

"코어를 주면 나도 네 소원을 들어줄게."

"소원?"

"예를 들면 정기적으로 대량의 사슴 고기를 여기로 보내 준다던가."

"사슴 고기라니...."

"그것도 영원의 숲에 사는 사슴으로."

"...!"

녀석, 눈 동그래지고 입가에 침 고이는 거 봐라.

에이션트 울프의 주식은 사슴이다. 그런데 수십 년 동안 이런 하수도에 처박혀 살았으니, 분명 고향의 사슴고기 맛이 무척이나 그립지 않을까?

"그런 비겁한 조건을.... 큭! 필요 없어! 소원? 내 소원은 지금 당장이라도 네놈이 내 구역에서 사라지는 거다!"

표정이 헬렐레 풀어지려던 늑대는 순간적으로 자존심을 찾으며 이빨을 드러냈다.

쳇, 비싸게 굴기는.

그런데 당당하게 소리치는 것 치고는 표정이 별로구만. 나는 금방 원인을 파악하고는 노골적으로 양 어깨를 으쓱였다.

"내 구역? 괴물로 꽉 찬 여기 하수도 말이야? 암만 봐도 네 구역이 아니라 괴물들 구역 같은데?"

"...."

"자, 그러지 말고 이야기 좀 하자. 엠퍼로드의 하수도가 언제부터 이런 괴물 천지가 된 거야? 처음부터 이러진 않았을 텐데?"

"...물론이다."

르갈은 기가 죽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이렇게 된 건 열흘 전부터다. 그 전에는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다."

열흘 전이라.

뭔가가 떠오를 것 같기도 한데 당장은 잘 모르겠다. 잠시 생각하던 나는 화끈하게 새로운 교환 조건을 제시했다.

"좋아. 그럼 내가 하수도의 괴물들을 깨끗하게 정리해 줄게. 그럼 대가로 코어를 줘."

"네가?"

"응. 내가."

"...혹시 제국의 군대를 하수도에 투입할 생각인가? 엄청난 대군을?"

"나한테 그런 권한은 없어. 혼자 할 거야."

순간 르갈의 긴 주둥이에 헛웃음이 번졌다.

"너 혼자? 대체 무슨 자신감이지? 방금 그렇게 죽어라 도망친 주제에?"

"아까는 디디가 있어서 제대로 싸울 수 없었어. 걱정 마. 제대로 싸우면 싹 정리 가능하니까."

"황자님 말씀대로야. 방금은 날 챙기면서 싸우느라 전력을 내실 수 없었어."

마침 디디가 르갈의 턱을 긁어주며 분위기를 맞췄다. 르갈은 의아한 표정으로 주둥이를 흔들었다.

"영문을 모르겠군. 어떻게 이런 허약한 인간이...."

"황자님은 강한 분이야. 제국의 누구보다도. 그러니 믿어도 돼."

"제국의 누구보다 강하다니, 그걸 어떻게 증명하지?"

"혼자서 사령군의 군대를 물리치셨어.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사령군? 설마 네크로폴리스의 그 사령군을 말하는 거냐?"

순간 늑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녀석은 명백히 조심스러워진 눈으로 내 몸을 살피기 시작했다.

"역시 육체 능력은.... 형편없어. 그렇다면 마법으로 모든 걸 해결 하겠다는 뜻이군. 아직 나이는 어려 보이는데. 소위 인간들이 말하는 '아크위저드' 급은 되는 건가?"

"아니, 그 아크 위저드보다 내가 두 배 는 더 강해."

허풍이 아니라 정말이다. 실제로 리치의 마력결정 덕분에 마력의 한계가 두 배 이상 올랐으니까.

그러자 르갈은 내 쪽으로 아예 코를 들이밀고는 상세히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킁.... 음. 확실히 마력의 냄새가 풍기긴 하는군. 안으로 응집해 있지만 아주 강해."

"마력을 냄새로 알 수 있어?"

"높은 수준의 마력을 다루는 자는 땀에서 독특한 냄새가 난다. 다만 이 하수도에서는 내 코가 예전만큼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이 정도라면 거짓은 아니겠지."

늑대는 조용한 눈으로 한동안 내 얼굴을 응시했다. 그리고는 갑자기 배를 바닥에 깔며 편한 자세를 취했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군. 디디?"

"응. 르갈."

디디가 얼른 르갈의 목을 껴안으며 대답했다. 르갈은 입을 다물고 뭔가를 웅얼거리다 말했다.

"네가 모시는 이 녀석, 좋은 인간이냐?"

"응. 좋은 분이야. 이렇게 신분이 높은 분인데도 나한테 잘 해주셔. 예전 사관학교 사람들처럼 막 대하거나 노골적으로 부려먹지도 않고, 거기에 배움의 기회까지 주셨어."

"배움의 기회?"

"얼마 전부터 기사 수업을 받고 있어. 그것도 나이트 마스터에게. 그거 말고도 잘 먹고 쑥쑥 크라고 항상 먹을 걸 챙겨 주시고,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나도 함께 데려가 주셔서 경험을 쌓을 수 있게 해주셔. 정말 고맙고 감사한 분이야."

음. 이거 눈앞에서 대 놓고 칭찬 릴레이를 듣고 있자니 낯이 좀 뜨겁구만.

그래도 효과는 탁월했다. 날 보는 늑대의 표정이 처음에 비해 확연히 풀어진 걸 보면.

"디디는 나만큼이나 인간을 싫어한다. 그런데 이 정도로 좋게 말하는 게 신기하군. 좋아. 그럼 믿어보겠다. 애초에 디디가 신뢰하는 인간이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데려오지도 않았을 테지."

"그래. 나 괜찮은 사람이니까 한번 믿어 봐."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르갈은 그 와중에도 뭔가 마음에 안 드는 듯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하지만 역시 파장이 안 맞아. 냄새도 그렇고. 이래서는 아무리 좋은 소리를 들어도 호감이 안 든다. 그러니 네가 먼저 내 코어를 받아라."

"뭐?"

그 순간, 르갈이 몸을 크게 꿀렁이고는 뭔가를 토해냈다.

"퉤악!"

그것은 점액에 둘러싸인 녹색 빛의 구슬이었다. 르갈은 자신이 토한 구슬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게 바로 코어다. 오직 300년 이상 생존한 에이션트 울프만이 몸 에서 코어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오...."

"클로드 황자. 네가 이걸 받아들여 나와 가까운 존재가 되는 게 먼저다. 우리의 거래는 그 다음에 시작하지."

늑대는 자신이 토한 구슬을 앞발로 툭 밀었다. 나는 내 쪽으로 굴러온 구슬을 집어 들며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 거래고 뭐고 내 목표가 바로 이 코어를 다른 사람에게 주는 건데...."

당장 이걸 가지고 도망치기만 해도 당장의 목표는 완수하는 셈이다. 물론 그렇다고 엠퍼로드의 지하에 이계의 마물들이 설치는 꼴을 가만 놔둘 생각은 없지만.

"설마 그걸 들고 도망치려고?"

순간 르갈의 눈에 푸른 안광이 번뜩였다.

"그럼 우리 관계도 여기서 끝이다. 앞으로 그런 비열한 인간에게 디디를 맡길 생각도 없고!"

그리고는 갑자기 주둥이를 쫙 벌리며 디디를 왁 물며 몸을 일으켰다. 나는 순간 움찔하며 위를 향해 손을 뻗었다.

"디디야! 괜찮아?"

"괜찮습니다 황자님! 르갈은 절대 저를 다치게 하지 않습니다!"

디디는 자신의 안전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사지를 마구 버둥거렸다. 나는 그제야 쓴웃음을 지으며 손에 쥔 구슬을 앞으로 내밀었다.

"도망 안칠 테니까 그만 놔줘. 그래서 이걸 어떻게 하는 건데?"

"먹어라."

늑대는 디디를 다시 바닥에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구슬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먹으라고? 이걸? 네가 토 한 건데?"

"그냥 입안에 넣기만 하면 자연스럽게 흡수된다."

"하지만 방금...."

"더럽다고 생각 할 필요는 없다. 에이션트 울프는 체액마저도 해독과 치료 효과를 가지고 있으니까. 내 몸에서 나오는 건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게 약이다."

그건 사실이긴 하지.

아무튼 이 귀한 코어를 내가 직접 사용하는 건 너무 아깝지 않나? 잘만하면 황제뿐만 아니라 황태자도 같이 살려낼 수 있을 것 같은데?

"이걸 당장 먹으라고 주는 걸 보면, 나중에 내가 필요한 코어를 하나 더 줄 수 있다는 뜻이지?"

"물론이다. 내 안에는 비축된 코어 세 개가 더 있다."

"세 개? 그럼 혹시 하나 말고 두 개 줄 수 있어? 실은 내가 살려내야 할 사람이 두 명이라서."

"욕심도 많군."

늑대는 눈살을 찌푸리며 한동안 생각하다 말했다.

"정말 하수도를 정화한다면 두개가 아니라 세 개라도 전부 주겠다. 내가 가지고 있어 봤자 쓸모없는 물건이니까."

"좋아. 약속 지키는 거다?"

나는 곧바로 손에 쥔 코어를 입으로 가져가며 물었다.

"그런데 이거 건강한 사람이 먹으면 혹시 부작용 같은 거 있어?"

"부작용?"

"난 중독된 것도 아니라 멀쩡한 몸이잖아. 멀쩡한데 이거 먹어도 되나 해서."

"부작용 따윈 없다. 대신 너의 그 툭 치면 바스라질 것 같은 연약한 육체가 미세하게나마 우리 에이션트 울프에 가까워 질 거다."

"응?"

"난 보인다. 네 온몸의 근육과 뼈는 물론, 신체를 구성하는 모든 것이 비명을 지르고 있다는 걸."

르갈은 킁하는 소리를 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 꼴로 사람 구실을 하며 사는 게 신기할 정도군. 차마 눈 뜨고 봐줄 수 없을 정도다."

"야, 내가 약골이긴 해도 그 정도는 아니야."

"과연 그럴까? 아무튼 코어를 먹으면 부작용은커녕 조금이라도 건강해 질 거다. 이 녀석도 처음엔 털오라기 하나 못 쥘 만큼 허약했는데, 코어를 흡수하고 나서는 쥐잡이 뱀을 직접 사냥해 먹을 정도로 건강해 졌으니까."

늑대는 눈을 감고 디디에게 얼굴을 비볐다. 디디는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한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정말입니다 황자님. 전에 단장님이 절 칭찬하셨던 이야기만 해도, 대부분 제가 코어를 흡수했기 때문에 생긴 특성일 거라 생각합니다."

"그럼 이걸 먹으면 나도 너처럼 유연한 관절이나 체력을 얻을 수 있다는 소리야?"

"분명 그럴 거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너처럼 야생 동물 같은 움직임도 생기고?"

"그것은.... 아마도 제가 몇 년 동안 르갈과 함께 지냈기 때문에 생긴 습관 같습니다만, 그래도 코어의 영향이 어느 정도 있을지도 모릅니다."

암튼 먹으면 무조건 대박이란 소리잖아? 나는 뜻밖의 성과를 기대하며 손에 쥔 녹색 구슬을 입안에 쏙 집어 넘었다.

"허으어, 이거 삼키지 않고 그냥 입안에 넣고 있으면 된다고?"

"그래. 잠시 기다리면 네 몸 안으로 흡수 될 거다. 이제 겨우 봐줄만한 인간으로 바뀌겠군.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르갈은 별거 아니라는 듯 다시 배를 깔고 누우며 하품을 했다. 나는 입안의 구슬이 점점 작아지는 걸 느끼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거 뭔가 가스 같은 게 나오는 거 같은데.... 근데 시간이 걸린다고?"

"흡수 되서 몸이 받아들이는데 까지 30분 정도 걸린다. 뭔가에 중독되어 있다면 그만큼 시간이 더 걸릴 테고."

"중독? 문제가 있긴 했는데 대충 영약 먹고 다 고쳤어."

이젠 라니아가 주는 해독의 영약을 마셔도 몸에 큰 변화가 생기지 않는다.

만성적인 통증이나 머릿속에 안개처럼 낀 뿌연 느낌도 사라진지 오래고. 늑대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턱 끝으로 내 몸을 가리켰다.

"그런데 너, 방금 부상을 입지 않았나? 그런 냄새가 났었는데."

"아, 어깨가 살짝. 회복마법으로 대충 고쳤어. 지금은 괜찮아."

"코어를 흡수하는 과정에서 부상을 입었던 부위에 통증이 올 수 있다. 미리 알아두면 놀랄 일도 없겠지."

"그래? 그러고 보니 정말 어깨 쪽이 쑤시는데.... 켁."

나는 말을 끝낼 새도 없이,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어깨 아픈 거?

그런 건 아무것도 아니다.

갑자기 온몸의 근육이 풀리며 그 수십배의 격통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으.... 으극...."

목 근육까지 경직되어 비명조차 지를 수가 없었다.

나는 그렇게 아무것도 해보지 못한 채, 앞으로 고꾸라지며 천천히 눈을 감기 시작했다.

뭐야 이거, 갑자기 왜 이래? 대체 내 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48화

16장 악의 근원

그리고 다시 눈이 떠진 순간.

"으... 으아아악!"

반사적으로 방금 지르지 못한 비명이 터졌다. 방금 대체 무슨 일이야? 아파 죽는 줄 알았다고!

....

근데 또 지금은 별로 아픈 데가 없네? 다리가 좀 쑤시는 걸 제외하면.

"황자님! 괜찮으십니까? 황자님?"

옆에 찰싹 붙어 있던 디디가 다급히 안부를 물었다. 나는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후우... 괜찮, 괜찮아. 조금 전에는 진짜 죽는 줄 알았지만."

"흠, 조금 전이 아니다."

그러자 반대편에 있던 르갈이 콧김을 뿜으며 말했다.

"넌 꼬박 사흘 동안 기절해 있었다. 아마 몰랐던 모양인데, 네 몸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독이 쌓여 있었다."

그리고 잠시 침묵이 찾아왔다.

사흘?

정말 내가 사흘 동안 기절해 있었다고? 잠깐 눈만 감았다 뜬 거 아니었어?

그런데 내 몸에 쌓인 독이라니, 그거라면 이미 해결됐을 텐데?

"내가 전에 뭔가에 중독되긴 했어. 근데 지난 몇 달 동안 고생해서...."

"전부 해독했다고? 그렇지 않다."

늑대는 단박에 내 말을 부정했다.

"분명 강력한 해독제를 써서 해결했다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독의 일부가 해독제를 피해 몸 깊숙한 곳으로 숨어 잠복해버렸다. 관절이나 신경 안쪽으로."

"독이 무슨 지능이라도 가진 것처럼 해독제를 피해 숨었다고?"

"그래서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독이라 말한 거다. 물론 이와 비슷한 걸 본 적이 없는 건 아니다만...."

르갈은 심각한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이내 고개를 저으며 본론으로 돌아왔다.

"네가 기절한 이유는 흡수된 코어가 숨어있던 독소와 반응했기 때문이다. 분명 고통스러웠겠지."

"고통 정도가 아니라 완전 죽는 줄 알았어. 의식이 한순간 사라지더라."

"정말 지독한 독이었다. 코어의 힘으로도 완전히 제거하는데 이틀이 걸리더군. 그런데 여기서 또 다른 변수가 추가로 등장했다."

"또 뭔데?"

"네 몸엔 독을 제외하고도, 어떤 영약의 성분이 대량으로 쌓여 있었다."

영약? 무슨 영약?

"영약이라니, 그동안 먹은 게 많아서 어떤 영약을 말하는지 모르겠는데."

"인위적으로 육체를 성장시키는 효과를 가진 영약이다."

아, 그럼 성장의 영약이네.

"그거라면 최근에 엄청 마셔대긴 했어. 효과는 별로 없었지만."

"인간들의 영약 수준이 많이 발전했군. 엘프도 그런 건 못 만드는데."

르갈은 혀를 내두르며 말을 이었다.

"하필 그 영약이 효과를 발휘하는 장소가 독이 잠복한 장소와 일치했다."

"오, 그래서?"

"덕분에 독에 막혀버린 영약이 효과를 내지 못하고 계속 주변에 쌓여있었다. 그런데 코어의 힘으로 숨은 독을 모두 제거하자, 쌓인 영약이 갑자기 제 효과를 내며 활동을 시작했다. 아주 맹렬하게. 그래서 네가 하루 동안 더 기절해 있던 거다."

"성장의 영약이 제 효과를 냈다고? 그렇다면...."

나는 곧장 일어나 내 몸을 살폈고, 그리고 경악했다.

"뭐야 이거!"

세상에!

키가 자랐다!

그 증거로 발등을 덮던 바짓단이 발목까지 올라왔다고!

"키가 컸어! 그 잠깐 사이에 키가 쭉 컸다고!"

"축하드립니다. 황자님. 주무시는 동안 몸이 성장하시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습니다."

옆에 선 디디가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나는 엉겁결에 나보다 손가락 두 마디 정도 작아진 디디를 껴안으며 소리쳤다.

"고마워 디디야! 나 진짜 키 컸어! 방금 전까지 너랑 비슷했는데 이젠 내가 더 크다고!"

"다시 한번 경축 드립니다. 그런데 다른 곳은 괜찮으십니까?"

"다른 곳? 여전히 팔 다리가 쑤시긴 하는데...."

"그건 성장통이다."

옆에 있던 르갈이 재밌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인간이 눈에 보이는 속도로 자라는 건 흥미로운 광경이었다. 그래봤자 여전히 조그맣다만."

"아니? 그건 네가 몰라서 그래."

하, 이 늑대가 뭘 모르고 함부로 말하는구만.

"이 정도면 엄청 큰 거야. 이 망할 놈의 몸은 진짜 수십 년 동안 무슨 짓을 해도 제대로 자랄 생각을 안 했거든."

"수십 년? 디디 말로는 네 나이가 올해로 16살이라던데?"

"아니.... 그러니까 대충 그런 기분이라고. 아무튼 이 정도면 진짜 많이 자란거야."

거의 100년에 달하는 지난 시간동안 난 항상 작고 또 작았다. 후우.... 과거를 떠올리니 갑자기 눈물 나려고 그러네.

대충 148cm 정도였던 키가 155cm 정도는 된 거 같다!

물론 16살에 155cm이면 여전히 한참 작긴 하지만.

그래도 지난 아홉 번의 회귀 동안, 나는 단 한 번도 지금 이상의 키를 가져 본 적이 없다.

아무튼 일단 혈이 뚫린 것 같으니, 여기에 자연적인 성장이 더해지면 나중엔 160cm이나 170cm정도까지 노려 볼 수 있지 않을까?

"정말 좋아하시는 것 같아 저도 기쁩니다. 황자님이 이렇게 기뻐하시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습니다."

디디도 보기 드물게 미소를 지으며 다시 축하의 인사를 건넸다. 나도 활짝 웃으며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라도 알아주니 다행이다. 저런 덩치 큰 늑대가 이런 조그만 생물들의 고뇌를 이해할리 없지."

"이해 못해서 미안하군. 하지만 넌 여전히 작고, 말랐고, 형편없는 신체능력을 가지고 있다."

늑대는 정말 모르겠다는 얼굴로 물었다.

"물론 사흘 전과 비교하면 엄청난 발전이 있었다.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네 육체는 여전히 약해 빠졌다. 고작 이 정도로 세상을 얻은 것처럼 기뻐할 필요가 있나?"

"시끄러. 지금 날아 갈 것 같은 기분이니까. 분위기 좀 깨지 마."

르갈을 향해 눈을 흘기며 투덜거렸다. 중요한건 단순히 키만 큰 게 아니라는 것.

우선 나는, 지금까지 스스로에 대해 완전히 잘못 알고 있었다.

그동안 해독의 영약의 꾸준한 복용으로 머릿속의 안개가 사라졌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겨우 사물을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걷힌 수준에 만족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이 말이지. 지금 내 머릿속은 그야말로 화창한 가을 하늘같은 청명함 그 자체다.

주변에 있는 모든 사물이 마치 해상도가 높아진 것처럼 선명하게 보인다. 하필 그렇게 선명해진 게 더러운 지하 하수도라는 것이 안타깝긴 하지만.

아무튼 완전히 다시 새로 태어난 기분이다.

몸의 컨디션도 완전히 달라졌는데, 마치 물에 젖은 솜이불을 벗어 던진 듯 온몸이 가볍다.

아, 그러니까.... 그렇구나.

이게 바로 진정한 정상인의 몸이었다.

지난 모든 회귀동안, 나는 실제로 단 한 번도 완벽하게 제스의 독으로부터 해독된 적이 없었다!

그래서 비정상을 정상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던 거다.

세상에 이 관절 부드러운 거 보라지. 어깨를 빙빙 돌리는데도 통증이 없고, 양 손을 등 뒤로 돌린 채 손바닥을 마주 댈 수도 있다!

"갑자기 뭐 하는 거지?"

"이게 원래 안됐던 건데 되는 게 신기해서."

와, 내가 정말 그동안 끔직한 몸으로 살았었구나.

꽃이 지고 나서야 봄인 줄 알았습니다...가 아니라, 몸이 정상으로 돌아오고 나서야 그동안 비정상인 줄 알게 되었습니다. 흑흑. 진짜 눈물나려고 그러네.

"흠, 아슬아슬해서 못 봐주겠군."

르갈은 여전히 내가 못미더운지, 불안한 얼굴로 연신 고개를 흔들었다.

"역시 네 육체는 너무 약하다. 차마 양심상 너 혼자 저 괴물들을 뚫어내려 보내는 짓은 못하겠군."

"응? 나 혼자 할 수 있다니까?"

"됐다. 목적지까지 내가 데려다주지."

"목적지라니?"

"하수도를 점령한 괴물들이 발생한 장소가 있다. 내가 그곳까지 널 데려다 줄 테니, 너는 마지막 순간에 마법으로 그 장소를 파괴해라. 아크위저드라니 그 정도 화력은 낼 수 있겠지?"

"그야 뭐...."

나는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르갈은 몸을 숙인 다음 커다란 주둥이를 쩍 벌리며 짧게 요구했다.

"타."

"입속에 타라고? 등에 올라타면 안 돼?"

"그 조그만 손으로는 내 속도를 감당할 수 없다. 그러니 빨리 들어와라. 아니면 내가 널 잡아 먹을까봐 무섭기라도 하나?"

텁텁.

르갈은 턱을 위아래로 움직이며 뭔가를 씹는 시늉을 했다. 나는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디디에게 시선을 돌렸다.

"디디야? 저거 괜찮을까?"

"르갈이 장난치는 겁니다. 걱정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암만 그래도...."

눈살을 찌푸리며 늑대의 쩍 벌린 입안을 살폈다. 그리고는 한숨과 함께 조심스레 안쪽으로 몸을 들이 밀었다.

"내 평생 늑대 입속에 제 발로 들어갈 줄은 몰랐는걸...."

* * *

늑대는 바람처럼 하수도를 질주했다.

세상에 입속에 타고 있는데도 속도감이 장난 아니다. 정말 등에 올라탔으면 버티지 못하고 나가 떨어졌겠네.

"흔들리지 않게 뭔가 잡아라. 이빨이라던가."

르갈의 말에 곧바로 송곳니를 붙잡았다. 입속에서 목소리를 들으니 무슨 동굴 속에 메아리가 울리는 것 같구만.

"발이 목구멍 속에 들어간 거 같은데 불편하지 않아? 다리를 좀 오므릴까?"

"이 정도는 상관없다. 그보다 역시 신기한 인간이군."

"나 말이야?"

"그래 너."

"왜?"

"황제의 아들이 이런 하수도 밑바닥에 직접 내려오는 것도 모자라, 늑대의 입속에 들어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 하나?"

"뭔 소리야. 네가 들어오라고 해 놓고."

"그렇다고 넙죽 들어오는 게 이상하지 않나? 넌 대체 지금까지 어떤 인생을 살아 온 거지?"

그야 네놈이 상상도 못 할 끔찍한 인생을 살아왔지. 나는 한숨을 내쉬며 별것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디디가 보증해줬으니 믿는 거야. 네 덕분에 키도 컸고. 그리고 내가 새로운 사건에 약해."

"새로운 사건?"

"그동안 똑같은 일을 계속 반복하고 살았거든. 그래서 새로운 일이 생기면 호기심에 눈이 돌아가는 버릇이 있어."

"똑같은 일이라. 그런 거라면 나도 알 것 같군."

말투를 보니 이 녀석도 자극에 목이 말랐던 모양이다. 하긴 수십 년 동안 하수도에 틀어 박혀 살았을 테니 좀 심심했을까?

물론 그렇다고 아무 대비 없이 늑대 입속에 들어간 건 아니다.

여차 하면 즉각 실드 오브 라이트를 발동해 몸을 보호하고, 추가로 화염 마법을 날려 속에서 부터 통구이를 만들어 버릴 준비가 되어 있단 말씀.

아무튼 내가 웅크린 곳은 르갈의 혓바닥 위다. 입을 살짝 벌리고 있어 외부의 공기가 빠르게 들어오지만, 정작 사방이 캄캄해서 밖의 풍경이 제대로 보이진 않는다.

"너무 어두운데, 마법으로 불을 좀 밝히면 안 될까?"

"내 입속에서 화염 마법을 쓰겠다고?"

"아니, 그거 말고."

곧바로 빛을 내는 신성 마법인 라이트(light)를 사용했다. 덕분에 벌어진 이빨 틈새로 칙칙한 하수도의 풍경이 모습을 드러냈다.

"재주도 좋군. 신성마법과 원소 마법을 동시에 쓰다니. 마법사이면서 동시에 신관인 건가?"

"비슷해. 너야말로 인간 세상에 대한 지식이 예사롭지 않은데? 디디한테 배운 거야?"

"그 반대다. 내가 디디에게 인간 세상에 대한 지식을 알려줬지."

"어떻게?"

"난 50년 넘게 하수도에 있었다."

르갈은 잠시 침묵하다 말을 이었다.

"여기 있다 보면 위쪽 세계의 이야기를 자주 듣게 된다. 난 귀가 아주 밝거든."

"하수도에서 지상의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가 들려?"

"하수관이 연결된 집의 1층이라면."

"대단한데? 어디 자주 들리는 곳이라도 있어?"

"흥미로운 이야기가 나오는 곳은 주로 길드다. 매직 길드나 나이트 길드, 용병 길드는 물론이고 각종 상인들의 길드가 있지. 아니면 귀족들의 저택이라던가."

뭐야, 알고 보니 엠퍼로드 최고의 정보원이 여기 있었네?

이 사실이 알려지면 엠퍼로드 전체가 뒤집어 질지도 모른다. 나는 속으로 혀를 내두르며 물었다.

"취미가 아주 고상하네. 혹시 내 이야기는 들은 거 없어?"

"정신 나간 막내 황자의 기행에 대한 이야기? 몇 년 전 부터 자주 들렸다. 술에 취해 흉기를 휘두르다 대신을 죽일 뻔했다지? 도박장에서 난동을 부리는 건 일상이고."

"으음...."

"최근엔 사람이 바뀌었다는 소리도 들렸다. 아무튼 그런 녀석이 디디를 거뒀다고 생각하니 썩 내키진 않는군."

"걱정 마. 요즘은 정신 차리고 잘 하고 있으니.... 읍!"

순간 르갈이 속도를 높였다. 나는 입속으로 강한 바람이 새어 들어오는 느끼며 고개를 숙였다.

"갑자기 왜?"

"불을 꺼라 황자. 여기서 부터는 위험 구역이다."

곧바로 라이트를 해제했다. 동시에 사방에서 쿵쿵대던 르갈의 맥박과 근육의 떨림이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마치 무음모드처럼, 주변의 모든 것이 적막하다.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49화

16장 악의 근원

"이건...."

"방금 은신을 발동시켰다."

르갈이 속삭이듯 말했다.

"에이션트 울프는 어둠 속에서 몸을 숨기는 기술을 쓸 수 있다. 그중에도 특히 내 은신은 탁월하지. 작정하고 발동하면 저 괴물들도 날 발견하지 못한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들 은신을 쓸 수 있었지? 물론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꼴이지만.

"다만 이 상태로는 싸울 수가 없다. 그저 소리를 내지 않고 달리는 게 고작이다."

"그래? 그런데 지금...."

생명감지 마법을 발동시키자 어마어마한 숫자의 괴물이 느껴졌다. 나는 숨을 죽이며 괴물들의 간격을 확인했다.

"괜찮겠어? 사방에 괴물이 쫙 깔린 거 같은데?"

"빈틈을 노려야지. 이대로 괴물의 발생장소까지 달리겠다."

"빈틈이 별로 없어 보이는데.... 진짜 와글와글 하구만."

"사실이다. 하지만 불도 껐는데 네가 그걸 어떻게 알지?"

"생명을 감지하는 마법이 있거든. 그런데 너야 말로 아무것도 안 보일 텐데 어떻게 달리는 거야?"

"내 눈은 어둠속에서도 사물을 구분할 수 있다. 동시에 냄새와 소리로 입체적인 공간을 투시한다."

"오...."

"하지만 인간에겐 아무것도 없지. 참으로 불편한 종족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말하면 또 할 말이 없긴 한데, 뭐 종족마다 장단점이 다른 법이니까."

그때 감지 마법의 범위 안으로 엄청난 숫자의 괴물이 추가로 쏟아졌다.

말도 안 돼. 뭐지 이 무지막지한 숫자는?

이건 내 처음 예상보다도 훨씬 많찮아? 이 정도면 싹 쓸어버릴 수 있다고 장담 못하겠는데?

"세상에, 숫자가 너무 많아."

"너도 알겠나? 확실히 감지마법이 효과가 있는 모양이군."

"효과 있다마다. 으아 저 데스웜들 서로 뭉쳐 있는 거 봐."

"데스웜?"

"내가 붙인 이름이야. 굴 파고 돌아다니는 기다란 괴물."

"그 녀석들 말인가? 적절한 이름이군. 그만큼 무서운 놈들이지. 그런데 이건.... 쳇."

르갈이 혀를 차는 순간 몸이 위아래로 크게 흔들렸다. 나는 전방에 나타난 대규모의 슬라임을 감지하며 긴장했다.

"앞에 꽉 막혔어. 저거 뚫고 지나갈 수 있어? 모양이 통로를 완전히 틀어막은 것 같은데?"

"못 뚫는다."

"뭐?"

"빌어먹을. 며칠 전까지는 괜찮은 통로였는데, 이렇게 되면 한참을 돌아가야겠군."

"잠깐!"

르갈이 몸을 틀려는 순간, 나는 녀석의 입 밖으로 손을 내밀며 소리쳤다.

"지금 잠시만 멈춰!"

"뭐? 왜?"

르갈이 급브레이크를 밟은 순간, 나는 입 밖으로 쭉 뻗은 손에 템페스트 마법을 발동시키며 소리쳤다.

"눈 감아!"

그 순간, 회오리치는 불꽃의 흐름이 정면을 향해 날아갔다.

강렬한 빛에 사방이 빛나며 통로에 꽉 찬 슬라임 군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슬라임은 갑작스러운 빛에 위축된 듯 몸을 움츠렸다. 동시에 불덩어리가 거대한 화염의 날개를 펼치 단숨에 녀석들을 휘감았다.

그리고 폭발이 일어났다.

콰광!

'프로텍션 매직.'

먼저 르갈의 몸에 절대 방호마법을 걸어 주었다. 그러자 르갈은 기다렸다는 듯이 지면을 박차며 정면을 향해 몸을 날렸다.

"잠깐! 그렇다고 폭발 속으로...."

푸확!

녀석은 폭발과 화염과 녹아내린 슬라임의 벽을 한순간 돌파했다. 그리고는 텅 빈 통로를 질주하며 혀를 꿈틀거렸다.

"강력한 방어 마법이군. 덕분에 빠르게 통과할 수 있었다."

"설명도 안했는데 그걸 알았어?"

"몸에 걸린 순간 바로 알았다. 인간도 그 정도는 알 수 있지 않나?"

"인간은 말해주지 않으면 몰라. 후.... 간 떨어지는 줄 알았네."

"간은 내가 떨어질 뻔했다. 제국의 누구보다 강한 인간이라더니, 디디가 그렇게 말한 이유가 있었군."

동시에 무수한 괴물들이 폭발이 일어난 곳으로 몰려드는 게 느껴졌다. 아하. 그래서 르갈이 저렇게 서둘러 돌파한 거였구나.

"조금만 지체했으면 다시 포위될 뻔했네. 저게 대체 몇 마리야? 무슨 폭포수처럼 밀려오는데?"

"그래서 바로 움직인 거다. 여긴 얼마 전까지만 해도 평화로운 곳이었는데, 지금은 정말 끔찍한 곳이 되어 버렸다."

"자세히 설명해 줄 수 있어?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날짜를 따지면 정확히 13일 전의 일이다. 그때부터 하수도에 기묘한 냄새가 풍기기 시작했다."

"냄새?"

"나는 곧장 냄새의 중심을 향해 달렸다. 그곳엔 핏물이 고인 웅덩이가 있었지. 그것의 영향으로 주변의 생태계가 변화하고 있었다."

"핏물 때문에 생태계가 변했다고? 무슨 핏물이 그래?"

"인간의 피 같은데.... 정확한건 아무 것도 모른다. 사실 그걸 피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언어도단이지. 그냥 맹독 그 자체였다. 혈독이라고 해야 할까?"

"혈독이라니, 사람의 피가 독이라고?"

"그 독이 하수도의 생물들을 완전히 바꿔버렸다. 네가 데스웜이라 부른 것도 마찬가지다. 원래 이곳에 살던 쥐잡이 뱀이 혈독에 노출되어 그런 괴물로 변했다."

쥐잡이 뱀이라.

그러고 보니 디디가 죽은 데스웜을 보고 그렇게 말했다. 실제로 이계의 데스웜과는 구조적으로 큰 차이가 있었고.

"그럼 슬라임은?"

"슬라임? 그 찐득한 덩어리들을 말하는 건가? 그 역시 하수도 벽에 붙어살던 점균무리가 변이된 괴물이다."

"역시 혈독 때문에?"

"그렇겠지."

"그래서 그 혈독 웅덩이를 나보고 제거하라고?"

"방금 그 엄청난 화염 마법 정도면 충분할 거다. 내가 용기를 못낸 바람에 책임을 떠넘기는 것 같아 미안하군."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네가 왜 미안한데?"

"처음 웅덩이를 봤을 때, 내가 그것을 다 마셔버렸다면 일이 이 지경으로 커지진 않았을 것이다."

"뭐?"

"에이션트 울프는 주변에 독이 발생하면 그런 식으로 정화한다. 하지만 난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다. 우리는 모든 종류의 독에 면역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본 순간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르갈은 말 그대로 치를 떨며 몸서리를 쳤다.

"두려워서. 두려워서 차마 다가 갈 수 없었다."

나는 손에 쥔 송곳니가 강하게 흔들리는 걸 느끼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고 그걸 마셔버리면 안 되지. 죽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독을 앞에 두고 죽음이 두려워 피하는 건 에이션트 울프의 수치다. 그런 의미에서 난 이미 자격을 잃은 셈이다."

"자격? 무슨 자격?"

"...."

르갈은 대꾸하지 않았다. 이거 뭔가 상처를 건드린 건가? 분위기 더 무거워지기 전에 화제를 돌려야 겠구만.

"뭐 암튼.... 그럼 그 혈독 웅덩이를 내가 제거한다 치면, 이미 괴물로 변해버린 놈들은 어떻게 해?"

"그건 그냥 내버려 두면 된다."

"응?"

"괴물들은 혈독을 중심으로 멀리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하수도의 외곽으로 도망치면 쫓아오지 못하는 거지."

"아까 기계실처럼?"

"며칠 전에는 무리에서 이탈한 괴물이 영역 밖에서 하루 정도 헤매다 말라 죽는 것도 봤다. 그러니 만악의 원흉인 웅덩이를 제거하면, 다른 괴물들도 하루 안에 모두 사라질 거다."

그게 사실이라면 정말이지 깔끔한 결말이 아닐 수 없다. 이 엄청난 숫자의 괴물을 하나씩 전부 처리하는 것도 너무 힘든 일이고.

"제발 그렇게 되면 좋겠네. 그런데 그 망할 혈독은 대체 어디서 흘러 온 거야?"

"물론 위에서 흘러 내려왔다."

"위 어디?"

"도착하면 알려주마. 너와도 관계된 장소니까."

"나? 갑자기 여기서 내가 왜 나오?"

바로 그때, 생명 감지의 범위 안에 새로운 무언가가 들어왔다.

"...."

"왜 갑자기 몸을 떨지?"

"방금 감지 범위 안으로...."

"너도 느꼈나보군. 그게 바로 혈독의 웅덩이다."

르갈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근데 이거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거든요? 애초에 이런 게 여기 있으면 안 되는 거라고!

이계의 군대.

그것도 최소 간부급 이상에서 느껴지는 불길한 감각이 그곳에 도사리고 있다.

괴물로 치자면 광전사나 감염군주 이상이려나?

"여기다. 내려라."

르갈이 몸을 낮추며 입을 쩍 벌렸다. 나는 조심스럽게 밖으로 기어 나와 몸을 일으켰다.

"여긴...."

도착한 곳은 지금까지와 다를 바 없는 하수도.

하지만 상류가 막혔는지 수로에 물이 흐르지 않았다.

대신 가운데 푹 파인 웅덩이에 핏물 같은 것이 잔뜩 고여 있을 뿐.

"이게 바로...."

핏물은 그 자체로 희미한 빛을 내며 주위를 밝혔다. 자세히 보니 혈관처럼 미세하게 주변으로 퍼지며 꽤나 먼 곳까지 영역을 펼친 상태였다.

까득....

불길한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팔뚝만한 굵기의 뱀이 혈관 줄기에 달라붙어 있는 게 보였다.

"쥐잡이 뱀이군. 덩치를 보니 이제 막 변이를 시작한 것 같다."

"정말 이것 때문에 괴물로 변하는구나."

다만 느낌은 엄청나게 불길하지만, 그 자체로는 딱히 위험하지 않은 것 같다.

그저 주변의 생물들을 위험하게 변이 시킬 뿐.

여기에 이미 괴물이 된 놈들은 웅덩이를 중심으로 일정 범위 안에 들어오지 않으려 한다.

일종의 성역 같은 걸까? 덕분에 처리하기 쉬워서 다행이네.

근데 위에서 내려왔다고?

고개를 들자 위쪽과 연결된 하수관이 보였다.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르갈에게 물었다.

"위가 어딘데? 나랑 관계있다는 건 또 무슨 소리고?"

"이 위는 황궁이다."

황궁? 여기가 황궁 아래였어?

"...정확히 황궁 어디?"

"정확한 위치는 모른다. 이야기를 들어보면 황자가 사는 별궁인 것 같더군. 출입하는 사람들이 별궁의 주인을 '섭정 전하'라고 불렀다."

"아...."

탄식이 절로 나온다.

제스.

이제야 일이 어떻게 된 건지 감이 온다.

열흘, 아니 정확히 13일 전의 그날 밤.

제스는 인간이 아닌 광전사의 모습으로 되어 내 앞에 나타났다.

지금까지 한 번도 일어나지 않은 일이긴 하지만, 어쨌든 녀석은 이계에서 접촉한 스파이를 통해, 자신을 광전사로 바꿀 물질을 손에 넣었을 것이다.

그런데 양 조절에 실패한 걸까?

녀석은 사용하고 남은 물질을 하수도에 버렸고, 그것이 여기 쌓여 하수도를 마치 이계의 괴물 양성소처럼 바꿔 놓은 것이다!

세상에 맙소사.

미쳤냐 제스?

그렇게 위험한 물질을 왜 하수도에 버리고 지랄인데? 하긴 미쳤으니까 인간의 몸을 버리고 광전사가 됐겠지만.

"후.... 망할 제스. 이놈은 죽어서도 민폐를 끼치는구만."

"별궁의 주인이 죽었나?"

"응. 내가 죽였어."

"네가? 형제간의 권력다툼 같은 건가? 궁중암투?"

"그런 드라마틱한 이야기는 아니고.... 자세한건 나중에 알려줄게. 일단 이거부터 끝내고 디디한테 돌아가자."

그리고는 웅덩이를 향해 지체 없이 화염의 템페스트를 날렸다. 그런데 그 순간.

출렁!

웅덩이에 고인 핏물이 갑자기 한데 모여 위로 솟구쳤다.

"으어.... 클로드...."

심지어 솟구친 핏물이 사람의 형태로 뭉치며 말까지 했다! 방금 내 이름을 불렀다고!

그리고 폭발이 일어났다.

"크.... 크아아악!"

녀석은 불구덩이 지옥 속에서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 쳤다. 나는 기겁하며 녀석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제스...."

정확히는 제스의 형상으로 뭉친 핏덩이에 불과하지만.

아무튼 템페스트를 버텨낸 녀석은 하얀 연기를 뿜으며 구덩이 위로 기어 올라왔다. 뭔데 이거? 왜 템페스트를 맞고 끄떡도 하지 않는 건데?

"빨리 해! 눈치 챈 괴물들이 떼로 몰려오고 있다!"

그때 뒤에 있던 르갈이 소리쳤다. 나는 이를 악물며 양 손에 각각 새로운 불덩어리를 만들었다.

"클로드.... 네, 네 놈 만큼은 용서 못해.... 황가의 혈통을 더럽힌 네놈은...."

"죽은 놈이 뭔 헛소리야! 에잇!"

두발의 템페스트가 동시에 작열한 순간, 녀석은 겨우 형태가 무너지며 증발하기 시작했다.

"크.... 크어.... 클로드...."

"됐다!"

녀석은 내 쪽으로 팔을 뻗으며 마지막 연기와 함께 소멸했다. 동시에 르갈이 뒤에서 날 낚아채듯 입에 물었다.

"르갈!"

"입 닫아! 혀 깨문다!"

르갈은 그대로 몸을 돌려 뒤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푸확!

동시에 온 사방에서 수십 마리의 데스웜과 슬라임 떼가 몰려들었다. 하지만 르갈이 엄청난 기동력으로 괴물들 사이를 파고들었고.

촥!

심지어 벽을 타고 달리거나, 짧은 순간이었지만 천장을 타고 질주하며 쏟아지는 괴물의 포위망을 아슬아슬하게 돌파했다.

"으아...."

속도가 너무 빨라 눈이 제대로 안 떠진다. 나는 르갈의 입속에 몸을 쑥 집어넣은 뒤에야 가까스로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후, 이건 뭐 어미 주머니 속으로 파고드는 캥거루도 아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