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성배기사 (5)
넓지 않은 막사였기 때문에 세 사람이 들어온 것만으로도 꽉 찬 기분이 들었다. 로튼해머는 아이작의 손에 붕대를 감아주는 이솔데를 보고 멈칫했다.
"선남선녀가 그렇게 자상하게 챙겨주는 걸 보니 아주 보기 좋군요."
"생명의 은인을 돌봐주는 거니 아이작 씨가 부담스러워할 말은 마세요. 단장님."
로튼해머가 놀리려는 듯 말했지만 이솔데는 능숙하게 넘겼다.
"여튼 제가 얘기한 것 게벨 씨에게 여쭤봐 주시고 답변 주세요. 게벨 씨의 결정이 중요하니까."
이솔데는 붕대를 챙겨 들고 나갔다. 로튼해머와 아이작이 이제 중요한 이야기를 할 것이란 걸 알아본 눈치였다. 아이작은 게벨에게 좋은 일인데 왜 그의 결정이 중요한가 생각했지만, 물어볼 기회를 놓쳤다. 로튼해머는 잠시 그녀가 나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아이작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우리 세대에 천재가 또 하나 더 나타날 거라곤 생각 못 했는데."
다른 또 한 명의 천재가 누구인지 굳이 묻지는 않았다.
'그 천재가 바로 제 뱃속에서 소화됐지만 말입니다....'
아이작은 적당히 겸손을 표하기로 했다.
"이안이라고 했던가요? 그래도 실력이 대단하던데요. 아직 경험이 부족한 신입이라서 그렇지 나이를 생각하면...."
"신입? 하하."
로튼해머는 소리내어 웃었다.
"이안은 내 아들이자 직접 가르친 제자야. 수련생이었던 시절에도 바르바리 토벌에 데려가 몇 번이나 실전을 경험했고. 상급 검술을 다루는 데에는 미진한 감이 있지만, 또래 중에서는 그 아이를 이길 수 있는 아이가 없다고 자신하네."
"...."
"원래는 다른 신입 성기사를 내보내려 했었지. 그런데 자네 실력을 보니 보통이 아니더군. 그래서 급하게 바꿨어."
그런 녀석이 차세대 성기사들의 미래라니. 생각보다는 성기사들 수준이 떨어지는 모양이다.
아니면 아이작이 먹어 치운 칼센의 재능이 미쳤거나.
아이작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눈치챈 듯 로튼해머가 미소 지었다.
"늙은이 같은 말이지만 여명군을 경험해 본 세대와 아닌 세대의 수준 차이가 크긴 해. 게다가 최근에는 성기사들 수준도 전체적으로 많이 떨어졌고. 아무래도 산적 토벌과 성전은 다르니까."
"아... 그렇군요."
아이작은 금방 납득했다.
게벨만 해도 대단한 실력이다. 로튼해머도 싸우는 걸 직접 보진 않았지만 느껴지는 기세가 게벨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진 않았다.
"차세대를 기대할 만한 희망도 있긴 했지. 어이없이 꺾이긴 했지만."
또 칼센 이야기다. 자꾸 언급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로튼해머는 아쉬움과 동시에 기시감, 그리고 아이작에 대한 경고를 칼센이라는 인물 하나로 계속해 던지고 있었다.
"그래도 오늘 이 자리에서 새로운 미래를 본 것 같군."
"제게 과분한 기대를 걸고 계신 것 같은데요."
"내가 키운 제자를 일방적으로 짓밟아 버린 천재에게 어찌 기대를 안 하겠나? 게다가 그 천재가 힘들고 고생만 하는 숭고한 성배기사의 길을 걷겠다고 자청하는데."
'이건 비꼬는 건지 말리는 건지.'
아마도 말리는 것일 것이다. 자꾸 칼센 이야기가 나오는 걸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아이작은 뒤이어질 로튼해머의 말도 예상할 수 있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권하네. 아이작, 브리엔트 성기사단에 들어오게."
***
아이작은 미묘한 침묵을 지킨 채 로튼해머를 바라보았다.
"자네라면 내가 전적으로 밀어줄 수 있네. 내 후임 자리까지도 생각해볼 수 있고."
"이안이 실망하겠는데요."
"자네라면 납득할걸. 납득 못 하겠다고 하면 코뼈를 눌러놓게."
로튼해머는 진지해 보였다. 성기사단의 자산을 전적으로 사용하도록 허락해 주겠다는, 어마어마한 선택지였지만 아이작의 결심은 달라지지 않았다. 로튼해머가 저렇게 부득부득 아이작을 꼬드기려고 하는 데에는 그의 실력 말고도 다른 이유가 엿보였다.
그를 감시하기 위함이리라.
"제가 혼자 나돌아다니다가 이상한 꼬드김에 속아 배교라도 할까 봐 걱정하시는 거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로튼해머는 쓴웃음을 지었다. 속내를 들켰다는 민망함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되레 당당하게 아이작을 바라보았다.
"내가 누굴 생각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면 내가 왜 걱정하는지도 알겠군."
"칼센 밀터 얘기겠지요. 그냥 터놓고 말씀하십시오."
"좋아. 나는 칼센을 수련생이었던 시절부터 개인적으로 알고 있었네. 조용하고, 겸손하고, 상냥한 젊은이였지. 아무도 녀석이 배교할 거라고는 생각 못 했어."
그러나 가장 뼈아픈 배교는 가장 독실한 신자가 저지르는 것이니.
"솔직히 나는 자네를 보면서 강한 기시감을 느꼈네. 뭐, 녀석만큼 겸손하거나 상냥하지는 않은 것 같지만 나이에 맞지 않는 재능은 놀라울 정도로 닮았지."
"그래서 옆에 두고 감시하고 싶으신 겁니까?"
"그렇지. 그러면 안 될 거 있나? 명예와 부, 모든 것이 녀석에게 보장되어 있었어. 심지어 명천사가 되는 것까지도! 그런데도 녀석은 배교를 선택했지."
로튼해머는 그렇게 말하고 잠시 침묵하다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솔직히 녀석이 주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배교할 만큼의 사정이 뭐였는지 궁금할 정도야."
아이작은 마지막 말은 못 들은 척했다.
자칫 잘못하면 로튼해머도 배교자로 몰 수 있는 발언이었다. 칼센과의 관계가 어떤지는 모르지만, 그의 배교가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준 것은 분명했다.
평생을 빛의 법전에 헌신해온 성기사단 단장을 흔들 만큼.
"나는 녀석이 주변인들과 많이 이야기하지 않았다고 들었네. 그래서 엉뚱한 결론을 내린 걸지도 모르지. 그래서...."
로튼해머는 강렬한 눈빛으로 아이작을 응시하며 말했다.
"자네도 황야를 혼자 돌아다니다가 같은 전철을 밟게 되는 건 아닌가 걱정이 되었을 뿐이네."
아이작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말씀드렸지만, 그 건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왜지?"
아이작은 자신의 이마를 툭툭 짚으며 말했다.
"저는 예브하르 수도원장님께 증명을 받았습니다."
빛의 법전에 대한 믿음이 부족할 경우 화상을 입히는 기적.
잘못하면 목숨을 앗아갈 수도 있는 기적이지만, 아이작은 그것을 몇 년 전 수도원장에게 받았었다. 로튼해머는 잠시 멍한 표정을 하다가 눈을 크게 떴다.
"믿음의 증명? 배교했다는 증인이 있을 때에나 실행하는? 그걸 너만큼 어린애한테?"
확실히 비정상적인 상황이었던 모양이다.
아이작은 속으로 수도원장을 욕했지만 그 역시도 대가를 치렀으니 조금만 하기로 했다.
"예. 그리고 수도원장님의 손목이 불타서 재가 되었지요."
"기적을 수행한 수도원장의 손목이 날아갔다고?!"
로튼해머는 막사 바깥까지 들릴 정도로 쩌렁쩌렁하게 외쳤다. 이게 어느 정도 일인지 모르겠지만 그만큼이나 충격적인 일인 듯했다.
아이작은 재빨리 입가에 손가락을 가져갔다.
"예브하르 수도원장님께 누가 될 수도 있는 일이니 떠들지 말아주십시오. 수도원장님은 신중하신 분입니다. 분명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느끼셨겠지요."
로튼해머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겠군. 너 정도의 재능과, 불과 얼마 전 이 근처에서 칼센이 배교를 저지르고 사라진 사건을 생각하면...."
또 칼센과 연결 지어서 어떻게든 납득한 모양이다.
어쨌든 '믿음의 증명' 기적을 받았다는 말은 로튼해머에게 대단한 신뢰감을 준 것 같았다. 로튼해머는 더 이상 아이작이 배교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품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대신 순수하게 그의 실력을 탐내게 되었는지, 계속해서 브리엔트 성기사단으로 끌어들이려고 했다.
***
"아직은 곁에 두고 한참 가르쳐야 할 때라고 생각하지만...."
아이작을 설득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로튼해머는 어쩔 수 없이 약속대로 그를 성기사로 인정해주기로 했다. 물론 성기사로 인정받는 과정은 '인정합니다' 한마디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일반 기사들처럼 봉토와 충성맹세로 이뤄지는 것도 아니었다.
'게임에서야 성기사단이 소속된 수도원을 찾아가서 퀘스트 받고 가입하는 걸로 땡이지만.'
이 세계에서는 적어도 실력을 보증해 줄 상급 성기사와 사제가 한 명씩 필요했다.
어찌됐든 그리하여 아이작을 성기사로 임명하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장소는 아이작의 결투를 위해 마련된 공터가 사용되었다.
첫 번째 문제인 증인이 될 사제와 성기사들은 차고 넘쳤다. 아이작의 실력을 인정해 줄 로튼해머의 직위도 충분했다. 게다가 이단심문관인 이솔데까지 증인으로 나서 주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였다. 성기사단마다 전해지는 일종의 '전통'을 수행해야 했다.
여기서 아이작은 조금 긴장했다. 게벨이 '성기사단마다 가입할 때 절차가 다 다르다'고 했는데, 예로 든 것들이 전부 기상천외한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다섯 번은 토할 때까지 술을 마시거나, 성기사들이 단체로 달려 들어서 구타를 하거나, 뺨을 한 대씩 얻어맞거나... 아무래도 군사 조직이다 보니 주로 얻어맞는 것들이 많았다.
'성기사단이란 사실 대학생들이랑 크게 다를 게 없을지도.'
"준비됐나?"
로튼해머는 아이작을 향해 씩 웃으며 다가갔다. 아이작은 이빨 몇 개 날아가는 것까지는 각오했다. 하지만 로튼해머가 칼을 뽑아 들자 정색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고개 숙이고."
다행히 칼로 얻어맞는 건 아닌 모양이다. 로튼해머는 의외로 평범한 기사 작위식처럼 검을 옆면으로 눕혀 아이작의 어깨에 올려놓았다.
"나, 브리엔트 성기사단 단장 로튼해머는 세상에 질서와 빛을 가져다주신 빛의 법전의 이름으로 아이작에게 묻겠다."
"예."
"그대는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돕고 약한 자를 괴롭히지 않을 것을 맹세하는가?"
"예."
"그대는 악에 맞서고 힘 있는 자의 부조리에 분노할 것을 맹세하는가?"
"예."
"나, 브리엔트 성기사단 단장 로튼해머는 세상에 질서와 빛을 가져다주신 빛의 법전의 이름으로 성기사 아이작의 숭고한 여정을 축복한다."
딱. 로튼해머는 검 옆면으로 아이작의 양쪽 어깨를 두들겼다. 아플 정도는 아니었다. 이내 아이작은 로튼해머의 손에 이끌려 일어났다. 사방에서 성기사들과 수련생들이 몰려와 아이작의 성기사 임명을 축하해 주었다.
아이작은 얼떨떨해진 기분으로 축하를 받았다.
생각보다 쉽게 끝났다. 이게 전부인가? 싶을 때 로튼해머가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아쉽군. 우리 성기사단에 들어오면 얼굴에 똥을 바르고 성기사들에게 한 대씩 얻어맞는 전통이 있는데... 성기사 임명까지만 해서 입단 신고식은 치르지 못하겠군."
아이작은 그저 애매하게 웃어 보였다.
그때 아이작의 의심을 깨뜨리는 메시지가 나타났다.
[성기사로의 전직이 진행되었습니다.]
[전직 조건 완료!]
[성물을 소지하고 있어 성배기사로 전직이 가능해집니다.]
[성배기사로 전직하시겠습니까?]
의식보다는 오히려 이쪽이 진짜라고 봐야 할 것이다.
아이작은 '예'를 선택하기 전에 잠깐 고민했다. 망설이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수십 번 반복해서 결론을 내렸듯, 아이작은 결정했다.
단지 버프가 좋아서, 혼자 다니는 게 편해서... 그런 문제가 아니다.
'나는 혼자 다녀야 해.'
아이작은 붕대에 감싸여 있는 왼손 손바닥을 문지르며 생각했다.
헤인켈을 처치하면서 느꼈다. 그가 가진 검술의 재능도 분명 대단하지만, 이 빈약한 몸으로는 한계가 분명하다. 아이작은 가진 자원을 총동원해야 이 세계에서 버티며 살아남을 수 있었다.
성배기사를 함으로서 받을 수 있는 '숭고한 여정' 버프도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그보다는 아이작은 혼자 다녀야만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컸다.
예를 들어 아이작의 지금 검술 실력으로는 로튼해머나 게벨을 이길 수 없다. 동시에 일반 성기사 둘만 상대해도 이기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촉수를 사용한다면, 어떤 적까지 상대할 수 있을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이미 명천사가 될 예정이었던 칼센까지도 처치해 버린 마당에 어지간한 적들은 다 죽일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반면 성기사단은 활용할 수 있는 자원이 많지만, 촉수를 들키면 오히려 적이 될 가능성도 있다.
아이작의 행동을 제약하는 족쇄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성배기사를 택했지.'
중요한 것은 결과다.
촉수만 직접 보지 않는다면 아이작이 무모한 곳에 뛰어들었다가 적의 머리를 들고 나오는 것만으로도 그를 칭송하고 떠받들 것이다.
물론 평생 혼자 돌아다닐 생각은 없었다.
'2년. 여명군이 시작되기까지의 2년 동안만 성배기사로 돌아다니자.'
그동안 아이작은 적당히 명성을 떨치고, 강한 놈들을 포식하고, 성물을 찾아 강해지면 된다.
그때쯤이면 굳이 촉수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될 것이다.
37화. 성배기사 (6)
[성배기사로의 전직을 진행합니다.]
[신들이 당신의 숭고한 여정을 지켜봅니다.]
['숭고한 여정' 특전이 부여됩니다.]
[신체 능력이 30% 상승합니다.]
[신앙 능력이 30% 상승합니다.]
[난관에 처할수록 특전의 효과가 강화됩니다.]
아이작이 성배기사로 전직한 순간 알림들이 줄줄이 떴다.
아이작은 신체와 신앙 능력 30% 상승 효과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단순히 전직한 것만으로도 1/3은 더 강해진 셈이다. 심지어 난관에 처하면 특전이 강해진다고 했으니, 이것은 최소치에 불과했다.
'원래 이 정도는 아닌 걸로 아는데... 분열 예식 때문인 모양이군.'
게임에서도 구하기 힘든 EX급 성물이라 버프의 효과도 큰 모양이다. 여기서 성물을 찾으면 찾을수록 그 효과도 중첩되어 강해질 테니 기대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제 뭘 할 생각인가, 우리 성배기사?"
아이작에게 성기사 임명식을 마친 뒤, 로튼해머와 브리엔트 성기사단은 본거지로 돌아갔다. 남은 것은 게벨과 이솔데뿐이었다.
아이작은 가만히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일단 근처를 돌아보면서 북쪽으로 갈까 합니다."
"북부? 엘릴 왕국으로 가는 것도 좋을 텐데."
성배기사의 기원은 엘릴 왕국에서 시작되었다. 성배란 그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붉은 성배 클럽'이 훔쳐간 엘릴의 심장에 대한 은유다.
패왕 엘릴의 승천 후, 그 후계를 이은 왕들은 무희가 훔쳐 간 성배, '엘릴의 심장'을 되찾아오는 것에 집착했다. 신앙을 위해서든 영광을 위해서든 많은 성배기사들이 성배를 찾아 여정을 떠났지만, 무희는 사람들 속에 숨어 지내는 은밀한 종교가 된 상태였고, 결국 성배는 되찾지 못했다.
하지만 여정을 떠난 성배기사들은 세계를 돌아다니며 무수한 업적과 전설을 남겼다. 이제 성배는 단순히 하나의 성물을 가리키는 것을 넘어 신앙의 이상향쯤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빛의 법전에서도 성배기사를 우대하는 것이 바로 그 때문이었다.
성배기사를 아직도 가장 크게 후원하는 곳도 엘릴 왕국이고, 유명한 성배기사들도 주로 그곳에서 배출되었기 때문에 게벨이 추천하는 것이었다.
"저도 그쪽을 생각해보긴 했는데, 뭐라도 들고 방문해야 좀 더 대우받지 않겠습니까?"
사실 아이작이 가진 '분열 예식' 성물은 붉은 성배 클럽의 성물이지만, 동시에 엘릴 교단의 성물이기도 하다. 심지어 무희가 엘릴의 가슴을 째고 심장을 훔쳐 갈 때 쓴 칼이 바로 이 칼이다.
신의 피가 묻은 물건이니 다른 성물이고 자시고 아이작이 이 칼을 들고 가서 정체를 밝히기만 한다면 정말 성배라도 찾은 것처럼 호들갑을 떨겠지만, 지금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보상은 잠깐이야. 어차피 들고 다닐 수도 없고.'
아이작에게 중요한 것은 2년 뒤 있을 여명군에서 충분히 한자리할 수 있을 만큼 강해지는 것. 그걸 위해서라면 금전적인 보상보다는 분열 예식을 직접 사용하는 것이 나았다.
"북쪽에 성물이 있다고 로튼해머 단장님이 얘기해 주시더군요. 우선 그곳을 뒤져보려고 합니다."
"그렇군."
사실 로튼해머가 해준 말은 아니고, 아이작이 미리 알고 있는 정보였다. 지금 이 수도원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성물이기도 했다.
아이작의 예상대로라면 아직 발굴되지 않은 유적이니 방해가 될 만한 놈들도 없을 것이다.
'물론 이 정보는 여명군이 시작될 무렵의 정보니까 완전히 일치하진 않겠지만....'
게벨은 잠시 길게 한숨을 내뱉더니 아이작을 바라보았다. 아이작은 문득 게벨이 잠깐 동안에 갑자기 늙어 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미 나름대로 다 준비가 된 것 같으니 내가 더 조언해줄 필요가 없겠구나."
"그동안 도움을 주신 것만으로도 대단히 감사합니다."
"아니지, 이거 하나만 더 챙겨가라."
게벨은 수도복 안에 입고 있던 가슴받이를 벗었다. 정강이받이와 벨트까지도 풀어서 아이작에게 넘겨주었다. 아이작은 당황해서 거절하려고 했지만 게벨은 완고하게 내밀었다.
"전부 성기사 장비들이다. 낡고 안에 깃들어있던 기적들도 마모되어서 사라졌지만, 그래도 쓸만할 거다."
"아니, 이런 것까지는 필요 없는데...."
"널 위해서가 아니라 성기사들의 명예를 위해서다. 성배기사란 놈이 거렁뱅이처럼 돌아다니면 정신병자 취급받을 테니 최소한의 갑옷은 갖춰 입어야지."
게벨의 말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복장이 신분을 보증해 주는 세상이다. 로튼해머에게서 성기사임을 인정받은 증표를 받긴 했지만 일일이 다 확인시켜 줄 순 없다. 게벨은 아이작이 거절할 틈도 주지 않고 갑옷들을 억지로 씌웠다.
아이작은 체구 차를 고려하면 그에겐 꽤 클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게벨의 몸에 딱 맞아 보이던 갑옷들은 아이작의 몸에 닿은 순간 그 이음새들이 수축하며 아이작 몸에 바싹 밀착했다.
처음부터 맞춤 제작된 것처럼.
"딱 맞지? 그 기능은 기적이 아니라 세상의 화로 장인들이 손댄 거라 사라지지 않을 거다. 좋은 칼도 한 자루 있으면 좋겠다만...."
아이작이 툭하면 검을 부숴 먹기 때문에 남은 검이 없었다. 물론 분열 예식도 정말로 '좋은' 검이지만, 그건 함부로 꺼내 들기 어려운 물건이었다.
"제 검을 빌려드리죠."
그때 이솔데가 나서더니 자신이 가지고 있던 '심판의 검'을 꺼내 들었다.
아이작도 게벨도 놀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단심문관 장비 아닙니까?"
"분실했다고 하죠. 그리고 드리는 게 아니라 빌려드리는 거예요."
이솔데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성배기사라면 언젠가 성유물을 반납하기 위해 교단으로 돌아오시겠지요. 그러면 언젠가 다시 만날 날도 올 겁니다. 그때라면 아마 이 검보다 더 좋은 검도 가지고 계실 테니, 그때 돌려주시면 됩니다."
심판의 검이라면 이미 게임 안에서도 중상급에 속한다. 그걸 대체할 정도의 검이라면 아이작이 꽤나 성공했을 때의 이야기가 될 것이다.
"앞으로 이름을 날릴 성배기사가 맨손으로 돌아다니게 할 순 없으니까요."
"...감사합니다."
아이작은 게벨 때와 달리 거절하지 않고 넙죽 받아들였다. 갑옷은 그다지 욕심이 없었지만, 심판의 검은 정말 탐나는 물건이었던 탓이다. 그 자체로 교단의 높은 사람임을 인증하는 장비이기도 했고. 만약 교단과 문제가 생긴다면 심판의 검을 보여 주는 것만으로도 어지간한 문제는 해결될 것이다.
그때 이솔데가 아이작에게 가까이 다가와 속삭였다.
"게벨 씨는 어떻게 하겠다고 하시던가요?"
아이작은 이솔데의 제안을 떠올렸다. 게벨이 원한다면 성기사로 복직시켜 명예를 되찾아 줄 수도 있다던 제안. 아이작도 그것 때문에 게벨과 대화를 나누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게벨은 제안을 거절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게벨 씨는 아발란체 성기사단에서 탈퇴하고 싶은 생각이 없으십니다."
"...그렇군요. 그럴 줄 알았습니다."
이솔데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게벨이 배교자의 멍에를 벗는다는 것은 아발란체 성기사단이 배교자임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게벨이 더 이상 그 조직에 속하지 않고, 탈퇴했음을 증언해야 한다.
하지만 게벨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 아발란체 성기사단은 그저 무고한 희생자였으니까.
"뭐, 언젠가는 게벨 씨의 억울한 사정도 밝혀지겠지요. 아무리 숨어지낸다 해도 두각을 드러낼 사람이니."
이솔데 입장에서는 노골적으로 교단의 판단에 맞설 수 없었다. 그러니 저런 식으로 중립적으로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작도 그녀의 말에 동감했다.
애초에 게벨이 계속 수도원에 있을 것이라고는 아이작도 생각하지 않았다.
게벨은 여명군이 시작될 때 아이작의 곁에 있게 될 테니까.
***
이솔데는 보고를 위해 교단으로 돌아가고, 게벨은 수도원으로 돌아갔다. 게벨에게는 수도사들에 대한 작별 인사도 대신 부탁했다.
예정에 없이 수도원을 나서게 되었지만 갑작스럽다고 느껴지진 않았다.
'이미 떠날 준비가 되어 있었으니.'
이솔데가 수도원을 방문했을 때 이미 아이작은 떠날 준비를 마쳐 놓은 상태였다. 그녀가 방문한 이유는 자신과 상관없었지만, 덕분에 이렇게 바로 훌쩍 떠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애초에 개인 소지품은 많지도 않았고, 포식 능력 때문에 식량도 준비할 필요 없었다.
'드디어 떠나는군.'
이 순간을 오랫동안 기다려오긴 했지만, 막상 떠나려고 하자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아이작은 지나치게 허전함을 느끼지 않으려 노력했다. 마침 그에게 이정표가 되어 줄 새로운 능력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성배기사가 되면서 찾아온 변화는 버프만이 아니었다.
[파수자의 등대(EX)의 조건이 만족되어 활성화되었습니다.]
아이작은 성배기사로 전직한 뒤 나타났던 메시지 하나를 다시 떠올렸다.
도무지 활성화 조건을 알 수 없어서 그냥 그림의 떡으로 남겨 두고 있던 파수자의 등대.
칼센 밀터의 궁극기이기도 했던 그 스킬이 마침내 활성화된 것이다.
'헤인켈의 예를 보면 포식으로는 선천적인 능력만을 습득할 수 있는데... 칼센이 이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성체였다는 뜻이겠군.'
대체 성체씩이나 되는 양반이 왜 배교를 저질렀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파수자의 등대는 빛의 법전에서도 최상위급 기적이다. 칼센의 탄생에 적어도 천사나 신의 의지가 개입했다는 뜻이다.
'뭐... 중요한 건 아니지.'
중요한건 '바로 그 칼센'의 궁극기가 자신의 몸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게임 속에서 파수자의 등대는 아주 강력한 방어 스킬로 묘사된다.
일정 시간 동안 무적이나 다름없는 상태가 되고, 주변에 강력한 버프 능력을 부여한다고.
하지만 설정상 묘사되는 것은 다르다.
'파수자는 혼란으로 가득 찬 우주에서 질서의 기준을 잡는 자이며, 등대는 어둠으로 가득한 이 세계에서 유일한 이정표이자 변하지 않는 존재를 은유한다. 파수자의 등대는 혼란과 어둠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바른 것과 그른 것을 골라주는 무오(無誤)한 존재이며... 뭐 그렇게 묘사되던 것 같은데.'
너무 거창한 설명이라 대체 어떻게 구현될지조차 상상도 되지 않는다.
아이작은 모처럼 얻은 궁극기를 맥 빠지게 사용하는 것은 원치 않았지만, 그렇다고 정확한 효과도 모른 채 사용했다가 곤란에 빠지고 싶지도 않았다.
아이작은 몸을 가다듬은 뒤, 파수자의 등대 능력을 발동시켰다.
이내 그의 눈이 밝은 섬광으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
성기사단이 휩쓸고 지나간 계곡은 을씨년스러웠다. 민간인 피해를 염려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곳곳이 기적으로 그을리고 박살 난 바위들로 가득했다.
계곡에 안개가 스며들 무렵, 희뿌연 안개 속에서 사냥꾼 복장을 한 세 사람이 등장했다.
2m에 이르는 장신의 사냥꾼 두 명과 그 가슴팍에 올까 말까 한 작은 체구의 소녀였다.
사냥꾼들은 성기사들이 뒤집어놓은 이 계곡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인상을 쓰며 사방을 경계했지만, 소녀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녀가 찾는 것은 따로 있었다.
그녀는 혈흔을 찾고 있었다.
이 계곡에서 뱀파이어들이 떼죽음을 당했다. 그러나 혈흔은 찾을 수 없었다. 당연했다. 뱀파이어의 피는 해가 뜨면 모두 먼지가 되어서 남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가 찾고 있는 혈흔은 특별했다. 지워지지도, 사라지지도 않는다.
문득 소녀는 계곡 한복판에서 멈춰 섰다.
그녀는 바닥을 더듬더듬 더듬다가 이내 무언가를 발견한 듯 바닥에 손을 꽂아 넣었다. 손은 바닥을 두드리는 대신 마치 액체처럼 퍼지면서 사방에 붉은 피를 흩뿌렸다. 잠시 후 손을 뽑아 들자, 상처 하나 없는 손이 나타났다.
그 손에는 짧은 검 한 자루가 쥐어져 있었다.
검은 이내 형태를 잃고 흐물흐물 무너지다가 소녀의 손을 타고 다시 흡수되었다.
"엘릴의 피다. 확실하군. 여기서 분열 예식이 적출됐다."
사냥꾼들 사이에서 탄식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중 한 명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설마 헤인켈 공작님께서...."
"아니. 백부께서는 돌아가신 것 같다. 누군가에게 살해당했군. 다행히 아버지 걱정처럼 배교를 저지른 건 아닌 것 같은데...."
그녀는 바닥을 엉금엉금 기어 다니며 다시 무언가 흔적을 찾기 시작했다. 검을 찾을 때처럼 손을 땅에 박아넣기를 반복하던 그녀는 이내 곧 고개를 갸웃거리며 멈춰 섰다.
"뭐지?"
소녀는 뭔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뭔가 발견하셨습니까?"
"시체가 끌려가거나 재가 된 게 아니다. 먹혔어. 이 자리에서."
38화. 황금우상 상단 (1)
섬뜩한 침묵이 흘렀다. 그들에게 식인이나 흡혈은 어색한 풍습이 아니다. 오히려 권장되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문화권이나 신앙에서는 그런 행동을 절대 하지 않는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소녀의 말은 같은 교단 안에 헤인켈을 살해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었다.
잠시 침묵하던 소녀는 허리를 세우며 사냥꾼들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돌아가라. 여기서부턴 나 혼자 추적하겠다."
"소공녀님."
"분열 예식을 잃어버린 상태로 돌아갈 순 없어. 가문의 물건을 무단 사용한 것은 백부님이니 우리 가문이 책임지고 찾아와야 한다. 하지만 이게 다른 가문과도 얽힌 문제라면 상황이 복잡해진다. 돌아가."
사냥꾼들은 그녀를 두 번은 말리지 않았다. 왈라이카 사냥꾼들의 힘의 척도는 노련함이나 단련보다는 혈통에 달렸다. 이 자리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소녀였다. 사냥꾼들이 돌아간 뒤에도 소녀는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서 허공을 응시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차마 사냥꾼들에게 말하지 못한 정보 때문에 의문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만약에라도 누군가에게 들킨다면 가문이 뒤집힐 수도 있는 정보였기에 그들을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다.
'붉은 살점의 예지자가 대체 왜 여기서 언급되는 거지?'
남은 혈액에서 읽어낸 정보는 붉은 살점의 예지자를 부르짖는 비명으로 가득했다.
***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지난 3개월 간, 아이작은 수도원을 벗어나 북부로 향했다.
게임에서 묘사된 것도 그랬지만 이 시대 사람들에게는 국경의 개념이 일반인들에게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애당초 빛의 법전이 중심을 이루고 있는 백제국조차도 원래는 '게르토니아 제국'이라는 번듯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
아이작이 지내던 수도원 역시 백제국 산하의 작은 공국에 포함된 곳이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지배자보다는 종교가 더 중요하다 보니, 같은 신앙끼리는 거의 같은 나라처럼 묶어 취급하곤 했다.
'일반인들은 그냥 백제국, 그리고 반대되는 불사 교단쪽 나라들을 흑제국이라고 부르는 거고....'
나라는 자주 바뀌고 통치하는 사람도 바뀐다. 하지만 신앙은 그 자리에 계속 남는다. 그래서 '빛의 법전'이 중심을 이루는 나라는 다 백제국으로 부르고 적대 국가는 흑제국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영역은 우호적인 신앙끼리도 묶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엘릴 교단은 엄연히 다른 신앙이지만 빛의 법전에서 파생되었고, 사이도 좋았기 때문에 백제국의 영역으로 묶였다. 반면 붉은 성배 클럽은 불사 교단과 결코 사이가 좋은 편은 아니지만, 어쨌든 빛의 법전으로부터 배제당하는 입장이라 흑제국으로 엮이는 편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아이작은 아무리 먼 거리를 여행하더라도 어지간하면 백제국을 벗어날 일이 없었다. 백제국은 영토가 아니라 개념의 영역이었으니까.
하지만 백제국이라고 다들 똑같은 신앙, 똑같은 신념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바르바리 같은 놈들이 그렇다.
"가진 거 다 내놔!"
"다 내려놓고 도망치면 목숨은 살려준다!"
아이작은 산비탈 위쪽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고 눈을 가늘게 떴다.
목소리들은 아이작을 겨냥한 것이 아니었다. 설사 아이작을 보더라도 과연 그들이 똑같은 말을 했을지는 알 수 없었다. 지난 겨울 내내 산짐승을 잡아먹으며 헤맨 아이작의 꼴은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니까.
산적 같은 꼴이라는 뜻이다.
산적들이 상인들을 포위하고 창칼로 위협하고 있었다. 상인들은 벌벌 떨면서도 마차를 둘러싼 채 스태프나 창 비슷한 것들을 들고 맞서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산적들의 수가 상인들보다 적었다. 산적들은 6명인데 반해, 상인들은 마차 밖에 있는 인원만 8명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싸움은 사기긴 하지만.'
적을 죽일 각오가 되어있는 소수의 사람들과 겁먹은 군중이 부딪치면 모래알처럼 부서지는 것은 군중이다. 그런 의미에서 산적들은 꽤 살벌한 기색을 내뿜고 있었다. 싸움이 붙는다면 상인들 중 절반 이상은 죽을 것이 뻔했다. 아니, 항복하더라도 살려둘지 의문이었다.
아이작은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겼다.
상인들에게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던 산적들은 아이작이 그들 곁을 스쳐 지나가고서야 화들짝 놀라 창칼의 방향을 바꿨다.
반대로 상인들은 아이작을 산적 일당 중 하나라고 생각한 건지 비명을 지르며 창으로 찌르려고 했다. 하지만 따닥, 하는 소리와 함께 창은 바닥을 찔렀다. 뭘로 어떻게 쳐낸 것인지 본 사람은 그 자리에서 아무도 없었다.
"넌 뭐야! 너도 죽고 싶지 않으면 꺼져!"
산적이 날카롭게 외쳤다. 그제야 상인들은 화색을 띠었다. 산적과 일당이 아니라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안심할 수 있었다.
"용병입니까? 돈은 얼마든지 드릴 테니 저희 좀...!"
"케산 지방에서 출발해 쇠르로 가는 상단 맞습니까?"
상인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가 어떻게 알았냐는 듯 아이작을 보았다. 아이작은 마차에서 흘러나오는 냄새를 맡고 자기가 제대로 찾아왔다는 것을 확인했다. 아이작은 검집의 칼을 느슨하게 뽑으면서 산적들을 향해 돌아보았다.
"자, 나는 신앙이 없다. 거수."
갑작스러운 말에 산적들은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놈들은 아이작의 여유로운 태도와 아까 창을 쳐내던 모습에서 긴장감을 느끼고 있었다. 결국 한 놈이 창으로 간을 보듯 대범하게 찔러왔다.
아이작은 좀 더 강한 '설득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빡! 요란한 소리와 함께 창대가 부서지고, 산적의 머리가 바닥에 처박혔다. 이번에는 그나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두가 볼 수 있었다. 아이작이 그렇게 움직였기 때문이었다.
아이작은 간단하게 창대를 낚아챘다. 산적은 창을 비틀어 빼앗으려고 했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아이작의 왼손에 손바닥만큼 스며 나온 촉수와 빨판과 이빨이 창대를 꽉 물고 있었다. 아이작을 통째로 들어 올리지 않는 이상 창을 빼앗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아이작은 그대로 창을 빼앗고는 남자의 머리가 바닥에 처박힐 정도로 내려쳤다.
굳이 칼을 휘두르지 않고 묘기를 부린 이유는 한가지 뿐이었다.
"너희들 다 죽이면 이 한겨울에 땀난다. 쫓아가서 죽여도 마찬가지지. 곧이곧대로 말하면 살려줄 테니까 말해. 나는 신앙이 없다, 거수."
땀이 나고 말고는 중요한 문제였다. 우선 아직 추운 계절이었고, 둘째로 아이작의 체질 문제는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상태였다. 잔챙이들을 쫓아다니면서 힘을 빼고 싶지 않았다.
산적들은 아이작의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알고 우물쭈물하다가 하나둘 무기를 내려놓았다. 하지만 유독 눈에 띄게 살기를 띠던 두 놈은 기어코 아이작을 향해 달려들었다.
"개새끼가!"
아이작은 일찌감치 놈들이 결국 달려들 것임을 알고 있었다. 도적질보다 살인에 더 관심이 많아 보이는 놈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아이작의 검이 검집에서 뽑혀 나왔다.
심판의 검이 겨울 햇빛을 여러 갈래로 부서뜨렸다.
***
두 구의 시체와 기절한 한 명을 정리한 뒤, 아이작은 다른 네 명을 꽁꽁 포박한 뒤 무릎 꿇려두었다.
그리고 자신이 죽인 두 명을 물끄러미 관찰했다.
바르바리 산적들이 다른 산적들에 비해 유독 포악한 것은 놀랍지 않은 사실이다. 사후세계를 포기한 이들은 더 이상 두려울 게 없으니까. 하지만 이들은 증오에 가까운 살의를 보였다. 그건 결코 평범한 일이 아니었다.
'상인들한테 원한이라도 있나? 내가 알기론 그냥 평범한 상인들인데.'
그 점이 신경 쓰여서 물끄러미 바라보는 사이, 한 상인이 아이작에게 다가왔다.
"저... 기사님? 성함을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응? 아, 아이작이다."
아이작은 상대가 자신을 기사라고 불렀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 지난 겨울 동안 그가 성기사라는 것을 알아본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후줄근한 행색도 행색이지만 도무지 건장해지지 않는 체구와 여리여리한 외모 때문이기도 했다.
애초에 방금도 상인들이 자신을 용병이라고 부르지 않았던가.
'아, 그냥 기분 좋으라고 하는 얘기인가?'
반면 상인은 아이작이 성을 언급하지 않은 걸 보아 귀족이 아닌가?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작은 모처럼 얻은 우위를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성기사도 귀족으로 취급되기는 마찬가지다. 신분제를 좋아한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남들은 마음껏 누리는 특권을 굳이 포기할 생각도 없었다.
아이작은 웃사람의 태도를 유지하며 말했다.
"왜 그러지?"
"저놈들 살려두실 겁니까? 이 계곡에서 죽은 사람들이 꽤 됩니다. 산적들 중에서도 흉포한 놈들이죠. 고아하신 마음씨는 잘 알겠습니다만 분명 살려두면 또...."
상인들은 자신들을 위협했던 산적들에게 복수하고 싶어서 안달이 난 모양새였다. 어쩌면 그들의 지인들의 복수가 포함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이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작정하고 살인하던 놈들은 방금 다 죽였다. 살아있는 놈들한테는 용건이 있어."
"하지만...."
아이작은 다시 한번 상대방의 착각과, 신분제의 편리함에 감사했다. 아이작은 가타부타 설명하는 대신 상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상인은 아이작에게서 알 수 없는 강렬한 위압감을 느끼고 숨을 삼켰다. 그제야 그는 상대방이 방금 사람 둘을 죽였으며, 그 사실에 눈 깜짝도 안 하는 인물이라는 사실을 다시 되새겼다.
"어쨌든, 케산 지방에서 출발한 상단 맞지?"
"예. 그런데 왜 저희를 찾으신 건지...."
"딱히 너희들을 찾은 건 아니다. 케산 지방에서 물건을 사간 상인들을 찾고 있었거든."
아이작은 마차에 다가가 짐칸의 모포를 훌쩍 젖혔다. 상인들은 어어 하면서도 말리지 못했다. 안에는 두터운 포대에 감싸여 있는 식물 구근들이 잔뜩 실려있었다.
아이작이 맡은 냄새는 그 구근의 냄새였다.
아이작이 포대를 내려놓자 상인들은 서둘러 다시 짐칸을 정리했다.
"로어커스 구근을 실은 마차라, 가져가면 돈 좀 벌겠군."
"어, 어떻게 그걸...."
"들은 이야기가 있어서."
로어커스는 향이 풍부한 꽃이다. 예쁘기도 하고, 게임에서는 마법 저항 능력을 낮추는 포션 재료로도 쓰이지만 그 이상의 가치는 없다.
이 꽃이 문제가 되는 것은 다른 이유가 있었다.
'로어커스 값이 엄청나게 오르고 있다고?'
아이작이 케산 지방에서 트롤에게 잡아먹힐 뻔한 상인 한 명을 구해 주고 얻은 정보였다. 상인은 가진 돈이 얼마 없었고, 대신 돈이 될 만한 정보를 주었다.
북부 대도시인 쇠르에서 로어커스가 유행해 가격이 폭등 중이라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특이한 모양, 특이한 향을 내는 로어커스는 다른 로어커스에 비해 10배, 20배 가격에도 사들인다고 했다.
이 정보를 접한 상인들은 서둘러 로어커스를 짊어지고 쇠르로 향했다. 하지만 봄가을에 피는 로어커스는 이 한겨울에는 다 시들어 버린다. 때문에 취급하는 것은 대부분 구근이었다.
"어떤 모양으로 필지도 모르는 구근을 금화를 주고 사들인다면서?"
"예, 예. 들을 때마다 가격이 올라가고 있다고 하니 다들 눈이 돌아가고 있지요. 다들 가져가서 한몫 잡아보려고 합니다."
"이 구근을 내게 팔 생각은?"
상인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작에게 돈이 있는지 없는지가 의문스러워서가 아니라 파는 게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죄송합니다만 이 구근은 이미 사기로 한 사람이 있어서...."
"내가 그 사람한테 팔면 되지 않나?"
"그러니까 이게... 그 팔 권리를 산 사람이 또 있는데, 기사님께는 다소 복잡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상인은 뭔가 구구절절 설명하려고 했지만 아이작은 웃으며 손을 저었다. 어차피 아이작은 상인이 팔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
상인은 아이작이 복잡한 개념을 피한다고 생각했지만 정반대였다.
아이작에게는 너무 익숙해서 더욱 놀라운, 현대적인 개념이었다.
'선물거래잖아?'
간단하게 말하자면, 지금 쇠르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튤립 파동과 비슷했다.
물품의 비정상적인 폭등과 그 거래 물품을 둘러싼 복잡한 거래방식. 이게 꼬이고 꼬이면서 로어커스의 가격이 원래의 가치보다 훨씬 올라가고 있었다.
그러다 보면 누군가는 로어커스 가격이 오를 것을 예상하고 미리 로어커스를 사들이고, 누군가는 로어커스가 도착하기도 전에 그 소유권을 판다. 여기에 경쟁이 붙으면 로어커스를 '거래할 권리'까지도 사고팔게 된다.
전형적인 선물거래였다.
상인은 로어커스를 단순히 운반할 뿐 이미 소유자는 이리저리 오가는 상태였다. 결국 누가 로어커스를 갖게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아이작이 이 사태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이 가격 폭등이 결국 여명군의 시작과 연결되기 때문이었다. 결국 로어커스의 가격 폭등은 튤립이 그랬던 것처럼 끔찍한 폭락으로 이어지고, 백제국 경제가 거덜 나는 도미노 효과를 일으킨다.
정치적, 경제적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백제국은 전쟁을 선택한다.
물론 겨우 로어커스 파동 하나 때문에 여명군이 일어나진 않는다. 여명군은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유로 발생하는 사건이니까.
다만 그중 한 축 정도는 차지할 것이다. 결국 국민들의 불만이 들끓으면 위정자들은 전쟁으로 시선을 돌리는 법.
당시에는 게임적 배경에 불과했지만 지금 아이작에게는 실시간으로 벌어지는 사건이었다.
'여명군이 일어나는 게 나한테는 좋지만... 이걸 어떻게 이용할 수는 없을까?'
39화. 황금우상 상단 (2)
아이작은 어차피 성물을 찾으러 쇠르로 가는 길이었다.
기왕 이 사태에 휘말리게 된다면 최대한 자기한테 유리한 쪽으로 이용하고 싶었다.
"저, 그러면 사례금은 얼마나 원하시는지...."
그때 상인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이작은 공짜로 도와줄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상인이 먼저 입을 열어 준 것이 고마웠다. 하지만 그는 푼돈으로 만족하기 위해 쇠르로 가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 고맙지만 나도 쇠르로 가는 길이니 사례는 거기서 받도록 하지."
"쇠르에서요?"
"상단 조합이 있지 않나? 거기서 얘기하지."
상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임시방편으로 사례하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뜯어내려고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듯했다. 하지만 목숨을 구원받았으니 별말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곧 바뀌었다.
"황금우상 상단이지? 거기 지부장에게 내가 방문할 거라고 전해."
상인은 황금우상 상단을 언급하자마자 눈을 크게 뜨더니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러다 아이작의 말이 예상했던 것과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 그런데 방문하실 예정이라면 저희와 함께 동행하시는 게 아닙니까?"
"아니야. 나는 저 친구들한테 볼일이 있어서."
아이작은 산적들을 가리켰다. 살아 있는 산적들에게 용무가 있다고 했던 아이작의 말을 떠올린 상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조심스럽게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아이작에게 전했다.
소의 머리뼈가 새겨진 동화 한 닢이었다. 어느 나라에서도 통용되는 화폐가 아니었다.
"제 이름은 비히크라고 합니다. 방문하시거든 안내원에게 그걸 보여주십시오."
"그래. 고맙군."
상인들은 다시 한번 아이작에게 고마움을 표한 뒤에 마차를 끌고 움직였다. 마차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던 아이작은 다시 산적들을 향해 돌아섰다. 산적들은 아이작과 눈이 마주치고 움찔했다.
이제 이 산적들에 대한 용건을 해결할 차례였다.
"자... 그러니까 너희들 전부 신앙이 없다는 거지."
"...예."
"저기 기절한 놈도?"
"예."
신들이 버젓이 존재하고, 그 이름으로 기적도 부리며, 심지어 살아있는 신이 땅 위를 배회하는 세상인데 신앙이 없다는 것은 스스로 약자를 자처하는 일이다. 신앙심이라곤 눈꼽만큼도 없는 아이작조차도 눈앞의 '무신론자'들이 이상해 보일 정도였다.
그러니 이 세계 사람들 눈에는 어떻게 보이겠는가.
사람들은 그들을 단순히 '이상한 사람'을 넘어서 '문명화되지 못한 자들', '가르침 받지 못한 자들', 심지어 '신에게 버림받은 불쌍한 족속', '야만인', '신을 이해할 수 없는 모자란 지성'으로 취급하곤 했다.
보통은 '바르바리'라고 부르며 멸시했다
이런 바르바리들은 아홉 신앙을 믿는 국가 어디서도 주류에 속할 수 없었다. 쫓겨나거나 배척당하면 양호한 수준으로, 자연히 가질 수 있는 직업도 산적이나 강도, 화전민, 유목민 정도니 로튼해머가 해 왔던 것처럼 토벌당하는 일도 잦았다.
하지만 아이작은 바르바리들을 그렇게만은 보지 않았다. 애당초 아이작의 눈에는 아홉 신앙의 신들 모두 그냥 게임 캐릭터나 설정처럼 보였으며, 그중에서도 이름 없는 혼돈은 당최 왜 자신에게 힘을 빌려주는지도 알지 못하는 상태였으니까.
오히려 아이작이야말로 진짜 중의 진짜 바르바리였다.
그래서 아이작은 그들에게 기회를 주기로 했다.
"너희 신앙 가져볼 생각 없냐?"
"...신앙이요?"
바르바리들 사이에서 거부감이 스쳐 지나갔다.
바르바리들이 신앙을 갖지 않게 된 이유들은 다양했다. 아홉 신앙에 원한을 가져서, 그냥 세상에 없는 새로운 신을 믿고 싶어서, 이미 믿고 있던 고대신이 죽어 버려서, 신앙 자체에 회의감을 가져서, 교단에 죄를 짓고 도망치거나 쫓겨나서... 등등.
신앙을 가지고 싶어도 가질 수 없거나, 가질 생각이 없는 자들이 태반이었다.
하지만 아이작은 그들을 위해 대체재를 제안할 생각이었다.
"무슨 신앙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건 꼭 지금 알려고 할 필요 없고."
아홉 신앙 중 어떤 것을 말하냐는 뜻이었지만 아이작은 대답을 회피했다.
"일단 들어봐. 진지하게 믿을 필요도, 제물을 바칠 필요도 없어. 그냥 간단한 규칙만 몇 가지 지키면서 살면 되니까."
바르바리들은 미심쩍은 것을 넘어서 불편한 기색이었지만 그렇다고 칼 든 상대 앞에서 싫다고 뺄 수도 없었다. 그러다 한 바르바리가 슬쩍 손을 들었다.
"그 신앙을 가지게 된다면 기사님처럼 강해질 수 있습니까?"
"아니. 그렇게 쉽게 힘을 가지려고 하면 도둑놈이지."
"그러면 왜 저희가 그 신앙을 가져야...."
"그러면 내가 살인강도인 너희들을 왜 살려두어야 할까?"
그걸로 설득은 끝이 났다.
바르바리들은 얌전히 입을 다물고 아이작의 말에 귀 기울일 채비를 마쳤다.
"자, 그러면...."
그렇게 바르바리나 다름없는 성기사는 날강도 같은 포교를 시작했다.
"우선 저 하늘 위에 날아다니는 스파게티 괴물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
"좋아, 그러면 내가 가르쳐준 것들 명심하고 나쁜 짓 하지 말고 살아."
"예. 어르신."
아이작은 설교를 마친 뒤 바르바리들을 포박에서 풀어 주었다. 바르바리들은 이렇게 쉽게 풀려난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머뭇거리며 서로 눈치를 살폈다. 결국 한 바르바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 어르신. 좋은 가르침이기는 했습니다만 이 말씀이 저희에게 어떤 도움이 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이작은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수염이 부숭부숭한 피곤한 안색의 중년 남자였다.
'산적 치고는 좋은 놈이군.'
사실 아이작 앞에서 그냥 알아들은 척하고 도망간 다음 잊어버렸어도 될 일이다. 아이작도 당연히 말 몇 마디로 그들을 개종시켰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묻는다는 사실 자체가 그가 아이작의 설교에 흔들렸으며, 개종의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였다.
"그냥 신앙이 있다고 아니꼽게 구는 놈들이 있어서 해준 말이야. 그냥 앞으로 '나한테는 지켜야 할 신앙이 있다' 정도만 생각하고 살아."
각 신앙에는 나름의 도덕과 규율이 있고, 거기에 맞춘 사후세계를 보장한다. 하지만 바르바리들에게는 그런 것이 없었다. 그래서 막 살게 되는 경향이 있는데, 아이작은 그걸 좀 바로잡고 싶었다.
그래서 아이작은 그동안 느슨한 도덕 규범을 만들어서 전파하면서 다녔다.
이름 없는 혼돈은 통째로 교단이 날아갔기 때문에 교리도 경전도 없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아이작이 새롭게 즉흥적으로 새롭게 써야 했다. 게다가 이름 없는 혼돈의 규범에는 나쁜 짓을 하면 지옥에 가고, 좋은 일을 하면 천국에 간다는 법칙조차도 없었다.
그냥 가급적이면 나쁜 짓 하지 말고 남들한테 너무 신경 쓰면서 살지 말라는 것이 전부였다. 과연 이 느슨한 교리가 누군가를 교화할 수 있을지 의문이긴 했다.
하지만 오히려 느슨하기 때문에 지키기도 쉬웠다.
이들 대부분은 메이저 종교의 엄격한 규율과 제약에 거부감이 있어서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이다. 그런 그들에겐 '남들한테 민폐 끼치지 말고 남을 신경 쓰면서 살지 말라'는 느슨한 교리가 색다르게 다가갔다.
혹은 아이작의 남다른 외모와 매력에 쉽게 넘어갔거나.
항상 그러했듯, 이번에도 아이작은 교리 전도에 성공했다.
[이름 없는 혼돈의 교리가 전파되었습니다.]
[세상에 이름 없는 혼돈의 영향력이 강해집니다.]
아이작이 교리 전파를 하기 시작했을 때 나타난 메시지였다.
4명 모두 아이작의 말을 귀담아들은 상태였다. 아이작의 매력 스탯은 이 사이비 교주스러운 구도에서 강력하게 발휘될 수밖에 없었다.
아이작이 임의로 만든 교리였지만 시스템은 이를 이름 없는 혼돈의 교리로 인식하는 듯했다. 어쩌면 아이작이 세상의 유일한 신도이자 교리 전파자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일 수도 있었다.
그가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사람들이 이름 없는 혼돈의 교리를 받아들일 때마다, 아이작은 그의 기척과 영향력을 느낄 수 있었다.
신앙심이 강해질수록 더욱 뚜렷해졌다.
아직 눈앞의 바르바리들은 이제 막 아이작의 말을 마음에 담아 둔 정도기만 한 듯, 뚜렷하지는 않았다.
"그럼... 돌아가 보겠습니다."
바르바리들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아이작에게 인사한 뒤 시신을 수습해 돌아갔다.
아이작은 돌아가는 그들의 영향력이 멀어져가는 것을 느끼면서 생각했다.
'이걸로 바르바리 산적들의 본거지 위치도 추적할 수 있겠군.'
아이작은 자신이 저지른 일에 어느 정도 책임감을 느끼는 사람이었다.
분명한 기척은 아니지만, 어차피 온 세상에 이름 없는 혼돈의 신도라고 할만한 사람은 극소수였기 때문에 위치를 특정하기는 쉬웠다.
언젠가 아이작은 이렇게 흩뿌린 신앙이 자신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이작은 자신이 언제고 이름을 날리고 명성을 높이다 보면 자신만의 세력이 필요하게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전도는 그때를 위한 씨앗이었다.
다른 신앙들로부터 버림받고 주린 자들이야말로 아이작의 지지기반이 되어 줄 것이다.
"지힐렛."
아이작이 부르자 숲속에 있던 기이한 짐승이 튀어나왔다. 아이작이 역병신 지힐렛의 사체를 기반으로 만들어낸 혼돈의 자손, 지힐렛이었다. 한동안 마음껏 포식하지 못한 지힐렛의 몸은 많이 줄어든 상태였지만 그래도 어지간한 말만 한 덩치였다.
아이작은 능숙한 태도로 그 등 위에 올라탔다.
지힐렛은 별 명령이 없어도 아이작의 의지를 느끼고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탑승감이 편하다고는 말할 수 없었지만 인적이 드문 숲속이나 계곡 사이를 달리기에는 말보다 훨씬 나았다. 사람들의 시선만 없으면 벽도 탈 수 있으니까.
'로어커스 사태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일단 쇠르로 가자. 어차피 거기서 성물을 찾기로 했었으니까.'
***
아이작은 쇠르에 도착하자마자 후끈한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 남부 지방 곳곳에서 올라온 마차들에서 흙과 로어커스 구근 냄새가 물씬 풍겨왔다. 이제 초봄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곧 로어커스를 심을 때가 온다. 너무 늦기 전에 농부들에게 팔기 위해 서둘러 가져온 것이다.
하지만 시장에 농부는 거의 보이지 않고 머리가 벌게진 상인들만 보였다. 상인들은 복잡해진 거래 시스템에 핏대를 올려 가며 흥정하고, 싸우고, 간신히 협상하고 있었다. 누가 봐도 광기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있는 시장 분위기였다.
아이작은 시장을 지나쳐 중심가에 있는 한 상회에 도착했다.
금색 황소가 간판에 그려진 상회였다.
"어서오세...."
상회의 안내원은 꾀죄죄한 차림새의 아이작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지만, 그가 내민 동전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둘러 어딘가로 달려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2층에서 익숙한 얼굴이 뛰어 내려왔다.
아이작이 구해 주었던 바로 그 상인, 비히크였다.
"기사님, 오셨군요. 바로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비히크는 그를 서둘러 안내하려다가 곧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아이작을 돌아보았다.
"저, 그런데 아이작 님."
"왜 그러지?"
"바로 지부장님께 안내해드릴 수도 있습니다만 혹시 식사와 목욕, 휴식 중 급하신 것은 없으십니까?"
그제야 아이작은 자신의 행색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한동안 제대로 된 식사를 한 적도, 목욕을 한 적도, 지붕 있는 곳에서 쉰 일도 거의 없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지금 아이작은 자기가 얼마나 냄새나는지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이작은 비히크의 처지를 이해해 주기로 했다.
"우선 좀 씻도록 하지."
40화. 황금우상 상단 (3)
상회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든다.
그중에는 먼 거리를 온 상인들도 있고, 상회에서 극진하게 대접해야 할 사람들도 있기 때문에 숙박시설을 운영하는 것은 당연했다. 규모가 작은 상단이라면 따로 여관을 잡아주기도 하지만 황금우상 상단은 대륙 전체에서도 손꼽을 정도로 거대한 상인 연합. 당연히 안에 숙박 설비를 갖추고 있었다.
'음... 그래도 이런 시대에 개인 욕탕을 마련해줄 정도라니.'
아이작은 오랜만에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며 묵은 때를 녹여 냈다. 생각해보니 이 세계에 들어온 이래로 뜨거운 물에 목욕한 것은 거의 처음이었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있으니 날이 서 있던 긴장감도 말랑말랑해지는 것을 느꼈다.
온수는 일일이 장작을 태워서 데우는 구조였기 때문에 아이작이 오래 목욕하면 할수록 돈이 나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누구도 아이작에게 눈치를 주거나 독촉하지 않았다.
씻고 나가자 하녀가 수건을 들고 서 있었다. 하녀는 아이작에게 수건을 건네주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멈춰 섰다.
"왜 그래?"
"아, 아뇨!"
하녀는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이면서 황급히 수건을 넘겨주고 허둥지둥 앞서나갔다. 허우적대는 하녀의 뒤를 따라가니 식당이었다. 가운데 아이작을 위해 비워둔 듯한 테이블이 보였다. 아이작이 그곳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는 사이, 그를 향해 시선이 쏠리기 시작했다.
"어이, 저것 봐."
"아니, 저거...."
북적대던 식당은 술렁이는 분위기로 번졌다.
그중에는 아이작이 구해 주었던 상인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조차 아이작을 알아보지 못했다. 때가 가득 타 있던 아이작이 시간을 들여 씻고 나오자 군중을 사로잡을 정도의 외모가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거....'
아이작은 슬슬 부담감을 느꼈지만 내색하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그동안 너저분한 꼴로 다니거나 수도원에서 맨날 아는 얼굴만 부딪쳐 실감하기 힘들었는데, 막상 겪어 보니 이것도 꽤 부담이라는 것을 알았다.
'생각해 보니 남들 다 바닐라 외형을 쓰고 있을 때 나 혼자 모드 깔고 매력 99 찍은 얼굴을 하고 있으니....'
이런 외모를 즐기는 것도 게임 속에서나 하는 거지 실제로 하려니 곤혹스러웠다.
다행히 아이작이 자리에 앉자마자 요리가 나왔다. 향신료와 꿀을 발라 구운 돼지고기와 와인에 절여 끓인 닭 요리, 갓 구운 흰 빵이 먼저 나왔다. 하나하나 풍미가 굉장하고 재료를 아끼지 않은 요리들이었다.
아이작은 시선을 신경 쓰는 대신 음식을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불에 닿은 요리를 먹는 것은 거의 2주 만인 것 같았다. 그리고 이내 사람들의 시선은 다른 의미로 감탄하기 시작했다. 대체 저 가느다란 체구에, 저 요리들이 다 어떻게 들어가는 거지?
아이작이 상인들 앞에서 중세 스타일 먹방을 찍고 있는 사이, 그는 자신만의 생각에 빠져 있었다.
'상인들을 구해 준 것치고는 과한 대접이군.'
아이작은 일단 황금우상 상단의 접대 점수에 합격점을 주었다. 하지만 황금우상 상단이 결코 손해 보는 짓을 하지 않는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에게 거래와 흥정, 탐구는 신앙이자 교리였으니까.
'아홉 신앙 중 하나인 황금우상... 상인들의 신앙이지.'
그리고 아이작이 이 세상에 넘어오기 전에 마지막으로 엔딩을 봤던 그 신앙이기도 했다.
황금우상 상단은 그 구조가 특이했다.
음모와 비밀스러운 결사로 이루어진 붉은 성배도 왈라이카 왕국이라는 구심점이 있다. 하지만 황금우상 상단은 그 어떤 구심점이 되는 국가가 없었다. 곳곳에 무역 거점으로 취급되는, 사실상 황금우상 상단이 지배하는 도시가 있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그들의 관심사는 세금과 규제뿐이었다.
애초에 무역을 위해 온갖 국경을 넘나드는 그들에게 국가는 크게 의미가 없었다. 오히려 불필요한 긴장감만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높았다.
대신 그들은 자본을 지배했다.
돈이 필요한 자들에게 돈을 빌려주고, 물류를 유통시키고, 권력자들에게 뇌물을 바치거나, 자신들을 적대하는 자들에게 돈을 주고 평화를 샀다.
그 결과 어떤 신앙의 국가든 황금우상 상단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심지어 언데드로 이루어진 국가인 흑제국에서조차 황금우상 상단을 찾을 수 있었다.
물론 상업이 발달하기 위해 반드시 확보되어야 하는 것은 치안이다. 때문에 상대적으로 치안이 좋은 백제국 쪽에서 황금우상 상단이 제일 번성하고 있었다.
모든 상인들이 황금우상 상단의 신도는 아니겠지만, 그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은 분명했다.
***
아이작이 어느 정도 식사를 마쳤을 때, 비히크가 찾아왔다.
아이작은 그의 얼굴보다 그가 양손에 들고 온 맥주를 더 환영했다. 하지만 비히크는 아이작의 얼굴을 보고 잠시 얼어붙은 듯 멈춰 섰다.
목이 메이던 아이작은 비히크의 태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맥주잔을 빼앗아 한입에 다 털어 넣어 버렸다.
비히크는 간신히 아이작의 대각선 자리에 앉았다.
"보기보다 호쾌하시군요."
"나는 늑대도 한입에 삼켜봤어."
비히크는 농담이라고 생각한 듯 웃었다. 하지만 아이작이 웃지 않자 떨떠름한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침 그가 기다리던 한 중년 여인이 다가왔다.
비히크가 재빨리 그녀를 소개했다.
"저희 상회 지부장님이신 캐틀린 쉬버 님이십니다."
캐틀린은 아이작을 빤히 바라보다가 모두가 하고 싶었지만 차마 못 하던 말을 꺼냈다.
"이렇게 잘 먹는 천사분은 처음 보는군. 천국에서는 밥을 안 주는 모양이지?"
"아이작이다. 아리엣 수도원 출신."
캐틀린은 아이작의 짧은 말투에 잠시 눈을 가늘게 떴다.
"연장자 대우는 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군요. 성기사님."
성기사라는 말에 비히크는 눈을 크게 떴다. 실력을 보고 기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지만 성기사까지는 생각 못 한 듯했다. 아이작은 재밌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가 목욕하는 사이 장비라도 점검했나?"
"그런 무례를 저지를 리는 없지요. 다만 이쪽도 정보가 좀 빠른지라...."
캐틀린은 테이블 위에 얹어둔 물소 해골 문양 동전을 두드리며 말했다.
"...새로 나타난 젊고 아름다운 성배기사님께서 우리 쪽 사람들을 몇 번 구해 주신 것을 알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동선이 자연스럽게 쇠르로 향하고 있던 것도 알고 있었죠."
"'그' 성배기사님이셨습니까?!"
비히크가 반사적으로 낸 소리에 식당 안의 시선들이 쏠렸다.
"'그' 성배기사라니?"
되물은 것은 오히려 아이작이었다. 비히크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새로 성배기사가 나타나 활동한다는 이야기가 상인들 사이에서 알음알음 돌고 있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엘릴을 제외하면 성배기사는 멸종된 거나 다름없다고 여겨지고 있었으니까요. 헛소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성배기사는 일반인들 사이에서 흥미진진한 이야깃거리였다. 특히나 성배기사라는 개념이 엘릴 왕국을 제외하면 거의 전설 속에서나 나오는 직업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오지나 위험한 곳을 지나다니는 상인들에게는 더 유명한 이야기였다.
'하기사 오락거리가 부족한 시대니까.'
즉, 캐틀린은 비히크가 보고하기도 전에 이미 아이작이 도착할 것을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물론 그녀를 직접 이렇게 찾아올 것이라곤 생각 못 했겠지만.
그제야 아이작은 이 극진한 대접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투자가치가 있는 투자처라고 생각한 모양이군."
"황금우상 상단은 전통적으로 성배기사들의 후원자였습니다. 우리 사람들을 구해주신 것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해주 십시오."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아이작은 속으로 웃으며 생각했다.
이렇게 부담을 덜어 놓고 편한 분위기가 되었을 때 앓는 소리를 하면서 어려운 부탁을 하는 것이 황금우상의 전략이었다.
하지만 황금우상 상단이 성배기사들의 후원자인 것 역시 거짓말은 아니다. 성배기사가 객지에 고립되었을 때, 사정이 생겨서 신분을 숨겨야 할 때, 급하게 자본이 필요할 때 의지할 곳은 늘 황금우상 상단뿐이다.
'게임에서도 던전이나 적지에서 적절히 나타난 상인 덕분에 목숨을 건지는 일이 많았지... 뭐, 게임이니까 그렇게 표현되는 거겠지만.'
물론 공짜는 아니다. 한번 빚을 지우면 황금우상 상단은 성배기사에게 돈 대신 보호나 무력을 부탁한다. 다른 신앙의 성기사에게 부탁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들의 특권이다.
"그러지 말고 본론으로 들어가지."
아이작은 빈 그릇을 옆으로 밀어내며 말했다.
"로어커스 때문에 내게 부탁할 게 있는 거 아닌가?"
***
셋은 식사를 마치고 장소를 옮겼다. 상회 근처에 구성된 시장이었다.
캐틀린과 아이작은 그 시장의 열기를 흠뻑 느끼며 걸었다.
무역거점인 대도시답게 쇠르는 시장의 규모도 어마어마했다. 아이작은 그 안에서 열기만큼이나 짙은 로어커스 향을 맡을 수 있었다.
욕심의 냄새였다.
시장의 열기가 정점인 곳은 단연 로어커스 거래 시장이었다.
아직 시장에 현물로 도착하지도 않은 로어커스 구근은 물론, 로어커스가 성장한 다음 핀 꽃봉우리의 양, 거기서 나올 새로운 구근, 그리고 그 구근을 팔아서 얻게 될 수익까지 세분화해서 팔고 있었다.
비단 로어커스만이 아니라 로어커스를 키우기 위해 필요한 비료, 농기구, 마차 등등 수많은 것들이 거래되고 있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몰리면서 다른 꽃들의 가격도 덩달아 오르고 있었다.
'이미 다들 정신 나갔군.'
아이작은 생각 이상으로 광기 어린 상황에 기가 막혔다.
처음에는 이걸 어떻게 써먹을까 생각했었다.
현대라면 폭락 지점을 예측하고 숏에 배팅하여 돈을 벌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경제 시스템은 그 정도로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지도 않고, 사태가 벌어졌을 때 회수할 수 있을지도 장담하기 힘들었다.
'그렇다고 말려? 아니, 이건 누가 통제할 수 있는 수준을 벗어났어.'
인간의 욕심은 컨트롤할 수 없다. 아이작이 '곧 로어커스가 폭락하고 제국 경제가 망한다'라고 떠들어도 무시당할 것이다. 사실 알면서도 '나는 아니겠지' 하면서 뛰어들게 만드는 것이 인간의 욕심이다.
결국 폭락과 거래 시장이 거덜 나는 것은 예정된 미래였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캐틀린이 시장을 벗어나면서 물었다. 아이작은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사람의 욕심이 미쳐 돌아가는 것뿐인데 어쩔 도리가 있나? 황제라도 찾아와서 거래 금지를 시키면 모르겠지만."
"상단 수뇌부는 걱정이 많습니다."
"폭락 때문에?"
"아뇨. 로어커스 때문에 물류가 막혔습니다."
아이작은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시장에는 온갖 농기구와 씨앗들이 거래되고 있었지만, 곧 찾아올 봄을 대비한 종자나 식량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겨울이 지나고 첫 수확을 거두기 직전의 봄이 가장 궁핍한 것은 아이작도 아는 상식이었다.
"어지간한 농부들은 봄을 대비한 종자를 구비해 두지만, 충분한 양은 아닙니다. 우량종자를 계속 공급해 주는 상인들이 있었으니까요. 가뜩이나 봄철엔 식량도 부족합니다. 그래서 인근 주민들의 민심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아이작은 상인들을 습격하던 바르바리 산적들을 떠올렸다. 그들은 아이작보다 상인들을 더 죽이고 싶어 했다. 상인들에게 식량을 맡겨 둔 건 아니겠지만 이득 때문에 로어커스만 만지작거리고 생필품을 다루지 않는다면 원한을 품을 법도 했다. 게다가 그들은 대부분 혹독한 상황 속에서 살고 있을 테니.
"불안한 상황이라는 건 알겠는데, 내가 할만한 일이 있나?"
차라리 상인이나 귀족들을 설득해 다른 유통망을 확보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아직 아이작의 영향력은 그냥 떠돌이 칼잡이에 불과했다.
하지만 캐틀린은 그에게 확실한 용건이 있었다.
"로어커스를 대량으로 사들이는 사람이 누군지 조사해 주셨으면 합니다."
"화훼 수집가들 사이에서 유행한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그것도 어느 정도는 사실입니다만, 그 정도 수요로 이런 광기가 형성될 리가 없습니다. 뭔가 다른 배후가 있는데, 저희 쪽 인맥으로는 도저히 알아낼 수 없습니다."
"알아내지 못했다?"
황금우상 상단의 교리 중 하나는 미지에 대한 탐구다. 그들이 단순히 알아내지 못했다는 것만으로 포기했을 리가 없다.
캐틀린은 애매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쪽 사람들이 살해당했다는 거군."
위험을 교묘하게 덮고 아이작을 끌어들이려 했던 것이다. 아이작의 얼굴에 언짢음이 담기자 캐틀린의 얼굴에 초조함이 스쳐 지나갔다.
"이런 거 저런 거 숨기면서 떠보려고 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죄송합니다. 저희는 그저...."
아이작은 잠시 생각했다.
어차피 아이작은 쇠르에 황금우상 상단에 관련된 성물을 찾으러 왔다. 그리고 상인들을 구해 준 것을 핑계로 정보를 좀 뜯어보려고 했는데, 오히려 그쪽에서 아이작에게 부탁해 온 것이다.
협상을 하려면 부탁하는 입장보다는 부탁받는 입장이 낫다.
'이거... 성물 냄새가 나는군.'
어쩌면 그 배후자가 성물과 관련이 있는 놈일지도 모른다.
어차피 아이작은 캐틀린의 제안을 받아들일 생각이었지만, 고압적인 태도를 유지하며 까탈스럽게 대답했다.
"좋아. 다만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저희는 가진 게 돈뿐입니다. 돈이라면 충분히 약속드릴 수 있습니다."
만족스러운 대답이었다. 하지만 아이작은 자신이 돈에 미친놈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서 점잖게 대답했다.
"내 수중에 로어커스가 조금 있는데, 한 달 뒤에 황금우상 상단이 지금 가격으로 전부 사줬으면 좋겠군."
41화. 돈 냄새 (1)
"로어커스... 말입니까?"
캐틀린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그녀는 일단 빠르게 아이작의 심중을 살펴보는 눈치였다.
사실 아무리 살펴봐도 아이작이 로어커스를 많이 가지고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방랑하는 성배기사의 특성상 많은 자산을 소유할 수 없다. 이는 성배기사의 상징인 청빈과도 연결이 되었다.
캐틀린은 설마 그 청빈하다는 성배기사가 돈 욕심을 부리는 건 아니겠지 싶었다.
'시장을 잘 몰라서 그냥 한번 건드려보는 건가?'
캐틀린은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성배기사가 청빈함을 앞세우긴 하지만 그렇다고 여정에 돈이 안 드는 것은 아니다. 배고프고 춥다 보면 좀 더 넉넉하게 여정을 떠나고 싶은 마음도 자연스레 들 테니까. 하지만 용병처럼 돈을 요구하기는 그러니, 여정 도중에 얻은 물품을 처분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
아마 이 성배기사도 비슷한 생각을 한 모양이다.
"지금 가져오신다면 현재 시장가에서 제일 높은 가격으로 쳐 드릴 수도 있습니다만...."
"지금은 내가 가지고 있질 않거든. 수량도 확실치 않고."
"그럼 한 달 뒤에는 가지고 계신단 말씀이십니까?"
"그래. 참고로 좀 많을 수도 있어."
캐틀린은 아이작의 말에 웃고 말았다.
그래 봤자 개인. 아이작이 마차 열 대를 끌고 오더라도 황금우상 상단에게는 전혀 부담이 아니었다. 황금우상 상단이 유통시키는 물류의 양은 그 백배는 넘을 테니까. 심지어 캐틀린이 뒷조사한 바로는 아이작이 가지고 다니는 짐은 몸에 소지하고 있는 것이 전부였다.
"한 달 뒤에는 지금보다 로어커스 가격이 훨씬 더 많이 오를 텐데요. 왜 굳이 지금 가격으로 사줬으면 좋겠다는 겁니까?"
아이작은 그 질문에 기다렸다는 듯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나는 돈놀이를 하지 않는다. 지금 물건을 가지고 있지 않으니 당장 팔 수는 없지만, 시세가 올랐다는 이유로 과도한 이익을 챙길 생각도 없네."
그 말이 진심인지 아닌지는 캐틀린이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결국 캐틀린은 이 세상 물정 모르는 성배기사가 어쭙잖게 장사에 손을 댄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만약에 대한 생각도 했다.
'로어커스 가격이 떨어질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로어커스 가격이 몇 배씩 폭등할 때마다 했던 생각이었다. 갑자기 불어닥친 열풍인 만큼 갑자기 꺼질 확률도 높았다. 하지만 현재로선 그런 징조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만약 이 성배기사가 내가 모르는 정보를 가지고 있어서 폭락을 감지하고 있다면....'
캐틀린은 상단이 입을 수 있는 손해를 가늠해 보았다. 로어커스의 시세가 지금의 절반, 아니, 1/10 수준으로 떨어지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 정도 수준이 되면 상단 전체 거래 물량을 걱정해야 하지, 개인이 취급하는 정도의 물량을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이 젊고 가난한 성배기사가 취급할 수 있는 물자의 양이란 결국 정해져 있으니까.
애당초 원래 아이작에게 주려고 했던 보상금을 생각하면 훨씬 적은 액수였다.
'이 세상 물정 모르는 성배기사가 이득을 보지 못하더라도 적당히 챙겨줘야겠군.'
캐틀린 입장에서는 일만 제대로 마무리된다면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충분히 가치 있는 거래였다.
"정확히 한 달로 표기해도 되겠습니까?"
"그래."
"수량은 미정으로 하겠습니다."
아이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캐틀린은 비히크를 시켜 계약서를 작성했다.
[황금우상 상단은 한 달 뒤 아이작이 가져오는 로어커스를 현재가에 전부 구매하도록 한다.]
옆에는 로어커스의 현재가가 얼마인지도 정확하게 표기했다. 캐틀린은 아이작이 물류의 수송 비용이나 보관 비용 같은 것을 계산했을지 궁금했다.
아이작이 계약서를 검토하고 서명하는 모습이 묘하게 능숙해 보여 마음에 걸렸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이걸로 계약은 성립되었습니다. 아이작 님. 황금우상이 이 계약을 보증합니다. 위반자는 청구보증에 의해 정당한 대가가 징수될 것입니다."
***
[황금우상 상단의 용병으로 고용되었습니다.]
[행운이 소폭 상승합니다.]
[안목이 소폭 상승합니다.]
황금우상 상단의 용병으로 고용되자 아이작에게 축복이 부여되었다. 다른 상단에는 부여되지 않는, 황금우상 신앙만이 가진 특권이었다. 하지만 급이 높은 계약은 아니어서 그런지 혜택이 두드러지게 크지는 않았다.
아이작이 계약을 마친 뒤 제일 먼저 향한 곳은 쇠르의 슬럼이었다.
이 시기의 자본 시장은 제로섬이다. 누군가 더 가지면 다른 사람은 무조건 더 잃을 수밖에 없다. 특히나 지금처럼 비정상적으로 특정 품목만 비대하게 유행하면 반드시 망하는 사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쇠르의 슬럼은 그런 사람들로 가득했다.
원래 다른 품목을 취급하던 상인이나 유행을 알지 못했다가 크게 손해를 본 상인, 한몫 잡아보려는 욕심으로 기어들어온 용병, 주린 배를 쥐고 흉흉하게 눈을 빛내는 바르바리... 어두컴컴한 골목과 하수구 사이사이에서 사람들이 서성였다.
활기찬 화훼시장의 모습과는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여기서 황금우상 상단의 정보원들이 살해당했다 이거지.'
아이작은 아무 생각 없이 바닥부터 헤매지 않았다. 우선 황금우상 상단이 조사하던 정보들을 모두 넘겨받았다. 그 정보들은 이리저리 헤맨 끝에 슬럼을 가리켰다.
양지의 시장에서도 자본이 비정상적으로 흐르고 있는데, 음지에서조차 자본이 이상하게 흐르고 있다는 정보였다. 정보원들은 그걸 조사하다가 살해당했다.
'용의자를 꼽기에는 너무 많군.'
살벌한 눈빛들을 보아하니 로어커스 유행으로 손해를 본 사람들이 한둘이 아닌 듯했다. 어깨만 부딪쳐도 죽일듯한 눈빛이었다.
아이작은 그 살의 어린 눈빛을 보며 캐틀린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그런데, 찾고 나면?'
'예?'
'로어커스를 사들이는 놈을 찾고 나면 그다음은 어떻게 하지? 해치워 달라고?'
'아, 아뇨. 그런 무도한 짓을 성배기사님께 어떻게 부탁하겠습니까. 그저 저는 누가 왜, 어떤 목적으로 로어커스를 사들이는지가 궁금할 뿐입니다.'
'정말 관상 목적이라면 그냥 큰돈을 날리는 걸 텐데.'
'그러면 우리 사람을 해치울 리도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그거대로 정보니까요.'
로어커스는 관상용으로도 가치가 있지만, 실용적인 면에서는 그저 마법 저항력을 낮추는 효과가 있다는 것 말고는 의미가 없었다. 당장 리치나 드래곤을 잡기 위해 모으는 게 아니라면 물가 교란이 일어날 정도로 필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뭔가 있는데....'
로어커스 붐 배후에는 단순한 시장 교란이 아니라 뭔가 비밀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황금우상 상단도 그게 궁금해서 아이작을 고용한 게 분명했다. 통제할 수 있다면 통제하면 좋겠지만, 돈벌이가 되는 무언가가 있다면 자기들도 알아야 할 테니까.
'우선 정보원을 죽인 놈들부터 찾으면 되겠지.'
말끔하게 씻고, 푹 자고 나온 아이작은 이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 도련님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런 도련님에게는 당연히 파리가 꼬인다.
"아가씨! 물건 좀 보세요!"
골목에서 뛰어나온 아이들이 아이작을 둘러싸고 온갖 잡동사니들을 내밀며 사 달라고 독촉했다. 구운 쥐, 비둘기, 어디서 훔쳤는지 모를 특이한 돌... 하지만 녀석들의 목적은 다른 데 있었다.
꼬마 중 한 녀석이 아이작의 허리춤에서 동전 주머니로 향했다. 조용히 끈을 잘라 훔쳐 가려던 순간, 아이작의 손이 녀석의 손목을 낚아챘다.
"악!"
아이작이 달리 팔을 비튼 것도 아닌데 꼬마 아이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이작의 시선을 끌던 아이들이 화들짝 놀라 멀어졌다. 꼬마의 비명에 거리의 시선이 아이작에게로 쏠렸다.
"어이, 너 뭐야? 왜 애를 괴롭혀?"
꼬마의 비명에 한 무리의 남자들이 기다렸다는 듯 모여들었다. 커다란 솥을 걸어놓은 모닥불 주변에서 서성이던 바르바리들이었다. 꼬마 아이를 구하겠다는 정의감보다는, 꼬투리를 잡았다는 눈치였다.
소도 잡을 것 같은 커다란 칼을 보면서 아이작은 꼬마의 손을 놓아주었다. 꼬마의 손에서는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너 이 새끼 애 손을...."
"그냥 긁힌 거니까 놀라지 마라."
정확히는 왼손이 반사적으로 움직이면서 꼬마의 손을 물어뜯은 흔적이었다. 남자들은 상처가 깊지 않다는 것을 금방 알아봤지만 그렇다고 분위기가 누그러들진 않았다.
아이작은 주변을 살펴보았다. 으슥한 골목에, 주변의 시선은 거의 없고, 누구 하나 죽어 나가도 찾으러 올 것 같지도 않았다.
"야, 곱상한 놈. 가진 거 다 내놓고...."
"식상한 말은 생략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자."
아이작은 칼집에서 칼을 느슨하게 뽑으면서 말했다. 아이들이 꼬이도록 내버려 둔 것, 비명을 지르게 만든 것, 남자들이 모여들 때까지 기다린 것, 전부 의도한 것이었다.
"너희들 중 신앙인 있으면 일단 손들어."
***
아이작의 검술은 살벌하다.
특히 일 대 다수의 싸움이라면 누군가를 죽이지 않고는 끝을 보기가 힘들었다. 특히 촉수를 쓸 수 없는 상황에서 부족한 체력을 생각한다면 한 번에 한 명씩 죽여 버리는 쪽이 유리했다.
그런 의미에서 아이작은 여기서도 한 두세 명은 목을 잘라야 나머지를 고분고분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작이 여유 있게 칼을 뽑아 들자마자 남자들은 바로 무기를 내리고 손을 들었다.
"뭐야? 너희 다 신앙인이라고?"
"예... 이 친구랑 저 친구는 빛의 법전 신도고, 저쪽은 엘릴, 나머지는 황금우상 신도였습니다."
아이작은 도망치려고 하던 놈들의 오금을 걷어차 주저앉힌 다음 심문을 시작했다. 그리고 얻은 결론은 어이없게도 그들 중 바르바리는 한 명도 없다는 것이었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바르바리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황금우상 신도였다는 자는 사채를 쓰고 계약을 어기는 바람에 지옥에 갈까 봐 무서워서 신앙을 버렸다니까.
"그런데 왜 그렇게 바르바리 같은 꼴을 하고 다녀?"
남자들은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피다가 입을 열었다.
"그래야 무서워하니까요?"
아이작은 깊게 한숨을 내뱉었다. 하는 꼴을 보아하니 이놈들이 황금우상 상단의 정보원을 죽였을 것 같지는 않았다.
"얼마 전에 이 골목에서 사람이 죽은 일이 있었다. 황금우상 상단의 정보원이었는데, 거기에 대해 아는 사람?"
"저희는...."
"모른다거나 결백하다거나 하는 도움 안 되는 소리는 닥치고 있고 그냥 아는 것만 얘기해."
놈들은 우물쭈물하다가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그, 저희가 만나 뵌 적 있는 분 같기는 합니다. 황금우상 상단 분들은 특유의 말투가 있거든요. 저희가 파는 것에 대해 관심을 가지시더군요. 그래서 그냥 몇 가지 알려드렸을 뿐입니다."
"파는 것?"
"예. 기사님이 오해하시고 계신 것처럼 저희는 강도 같은 게 아니구요...."
"그런 놈들이 칼을 들고 협박해?"
"...그저 좋은 물건을 추천드리려고 했던 것뿐입니다. 원래 거리의 남자들은 그런 식으로 친해지는 거잖아요?"
"아, 강매로군."
아이작은 남자들의 수작을 알아보았다. 일부러 험악한 분위기를 만든 다음 화해를 조장하면서 하찮은 물건을 고가에 강매하는 것이다. 이러면 경비대에 걸리더라도 강도질까지는 아닌 셈이고, 누군가 피를 보거나 죽을 염려도 없다.
나름 순박한 강도들인 셈이다.
"왜? 너희들도 구운 쥐 고기라도 팔려고 했나? 정보원이 많이 배고팠대?"
아이작이 묻자 남자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다 결국 누군가 입을 열었다.
"기사님, 요즘 로어커스 잘 나가는 거 아시지 않습니까?"
"로어커스?"
갑자기 로어커스 이야기에 아이작은 의아한 듯 물었다.
"예. 그런데 그... 아시겠지만 저희 같은 서민이나 손 작은 놈들은 이런 시장에서 뭐 하나 쥐기 힘들잖습니까. 로어커스 한 송이 사고 쫄쫄 굶는 것도 한계가 있고요."
개인 투자자는 현대나 이세계나 힘든 법이다. 아이작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그래서 한 명씩 배 곯으면서 로어커스를 사들일 바에야, 돈을 모아서 우리끼리 세력을 만들자고 합의한 겁니다. 그러다가 로어커스를 팔고 수익이 나오면 그 수익금을 나눠 갖기로 한 거죠."
아이작은 조금 감탄했다. 이들은 기초적인 형태의 펀드를 시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이작의 감탄은 순수하게 감탄으로 끝나지 않았다.
"누구야?"
"예?"
"너희들끼리 그런 구조를 만들었을 만큼 똑똑해 보이진 않는데. 똑똑하면 여기서 강도질을 하지는 않겠지. 누가 너희들에게 그런 걸 시켰지? 그리고 강매해서 판다는 건 뭐고?"
그제야 신나서 떠들던 남자는 우물쭈물하며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로어커스 문양이 투박하게 새겨진 나무 동전, 아니 목전이었다.
"이 로어커스 코인을 가지고 있으면 우리 조직이 가지고 있는 로어커스를 팔 때마다 수익금을 비례해서 나눠줍니다. 저희도 이미 여러 번 수익금을 받았구요."
아이작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그러니까 내가 로어커스 코인이라는 걸 사면."
"그 개수만큼 수익금을 나눠줍니다!"
"그런데 너희들은 그걸 나한테 왜 팔려고 하는 거고?"
"판 돈으로 로어커스 코인을 더 살 수 있을 테니까...."
보아하니 자기들이 구매한 것보다 조금 더 비싸게 판매해 차익을 챙기려고 한 모양이었다.
"너희들은 얼마나 샀냐?"
남자들은 머뭇거리면서도 품속에서 수북할 만큼 목전들을 꺼냈다. 먹지도 인정받지도 못할 목전들을 보며 아이작은 뒤통수가 땡기는 것을 느꼈다.
'로어커스 폭등만이 문제가 아니었군.'
폰지 사기에 다단계, 코인질까지.
욕심이 쇠르 시민들의 뺨을 후려갈기고 있었다.
42화. 돈 냄새 (2)
로어커스 폭등까지는 자연스럽게 일어날 수도 있다. 튤립 폭등도 누군가의 의도로 일어난 일이 아니었으니까. 비정상적인 시장 흐름에 덩달아 사기나 손해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현대에서도 수십 년에 한 번 일어날 법한 사기들이 한꺼번에 일어나?'
이건 비정상적인 상황이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다분히 악의적인 의도를 가진 누군가가 시장을 뒤흔들고 있었다.
그것도 상인 한두 명이 머리 맞대고 벌일만한 일이 아니었다.
'나 말고 혹시 또 다른 빙의자가 있나?'
아이작은 혹시나 하는 생각을 해 봤지만 곧바로 부정했다. 자신이 네임리스 카오스에 빙의하게 된 계기는 세계 최초로 이름 없는 혼돈을 제외한 여덟 신앙을 엔딩으로 봤기 때문이었다. 인제 와서 다른 누군가가 추가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았다.
'그렇다면 신의 개입?'
이쪽이 오히려 가장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면 가장 의심되는 대상은 역시 황금우상이다.
아이작은 황금우상 상단 엔딩을 보면서 그들이 결코 건전하게 돈을 벌어들이지만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건전한 상거래는 황금우상의 한 속성에 불과하다.
캐틀린은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지만, 교단 수뇌부의 판단과 말단의 입장은 다를 수 있으니까.
만약 그렇다면 아이작은 복잡한 집안싸움에 말려든 것일 수도 있었다.
'일단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염두에 두고 행동해야겠군.'
아이작은 남자들을 돌아보았다.
"그 로어커스 코인이라는 건 어디서 샀냐?"
"그건 뭐하러 알려고 해?"
당연하지만 이 시건방진 남자들이 한 말은 아니었다.
***
아이작이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2층 창문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애꾸눈 여자가 보였다. 그리고 주변에 부쩍 많아진 노숙자와 거지들도. 아이작은 그 넝마들 사이에서 칼붙이들이 번뜩이는 것을 발견했다.
아이작은 고개를 슬쩍 기울이며 대답했다.
"손님한테 예의가 없군?"
"코인 사고 싶으면 그 아저씨들한테서 사. 쪼잔한 소매 고객은 취급 안 한단다. 다 유통 단계를 거치는 거지."
애꾸눈 여자는 실실 웃으면서 말했다.
어느새 골목은 나가는 길목까지 노숙자들이 짊어지고 온 짐과 망가진 수레로 가로막혔다.
아이작과 대화하던 남자들은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깨닫고 얼어붙었다. 녀석들은 도망치기 위해 흩어지려고 했지만 살벌한 눈빛의 노숙자들에게 둘러싸이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아무리 봐도 코인을 팔러 직접 찾아온 것 같진 않았다.
"너희들이 황금우상 상단의 사람을 죽였나?"
"잘 모르겠는데. 본인한테 한번 물어봐. 천국이나 지옥, 둘 중 어딘가에 있겠지."
애꾸눈 여자가 신호를 준 순간, 노숙자들이 달려들었다.
아이작은 여자의 말을 듣고 이들이 진짜 바르바리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신앙인들은 천국이나 지옥으로 농담하지 않는다. 그걸로 농담할 수 있는 사람들은 사후세계를 부정할 수 있는 바르바리뿐이다.
아이작이 칼을 뽑아 든 순간, 바르바리 암살자들은 그 칼날에 몸을 던지는 대신 넝마를 집어 던졌다. 넝마 속에는 보통 칼로 끊기 힘든 철망이 섞여 있었다.
아이작의 몸이 순식간에 넝마와 철망에 휘감기자, 옥상과 골목 사이사이에 대기하던 궁수들이 가차 없이 화살을 날렸다.
퍽, 퍼퍽.
넝마 뭉치는 삽시간에 화살 꽂이가 되었다. 화살이 연달아 저항 없이 꽂히자 노숙자들 중 한 명이 힐끗 애꾸눈 여자를 올려다보았다.
'계속 할까요?'
애꾸눈 여자는 방심할 생각이 없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노숙자들은 쓰레기 더미에서 창을 꺼내 들고 화살 꽂이가 된 넝마 뭉치를 꿰뚫었다. 엉망진창이 되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애꾸눈 여자는 눈살을 찌푸렸다.
'너무 쉬운데.'
그녀가 황금우상 상단의 정보원을 죽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정보원의 수준은 점점 높아졌고,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그들이 당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성배기사를 고용했다는 이야기에 바짝 긴장했다. 그녀는 모을 수 있는 인원은 다 모아서 철저한 함정을 파두고 놈을 기다렸다. 질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이렇게 맥 빠지게 이길 거라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녀석이 떠들어대던 말에 비하면 별거 없어 보이는....'
"누구지?"
그때 들려온 목소리에 애꾸눈 여자는 숨을 들이켰다. 고개를 돌리려고 했지만 끈적한 공기와 썩어들어가는 피 냄새가 그녀를 꼼짝도 못 하게 만들었다.
"내가여 길 올걸 알고 있었 군."
애꾸눈 여자는 목소리와 함께 등 뒤에서 전해지는 기분 나쁜 온기만으로도 뒤에 있는 '무언가'의 크기가 거의 2, 3m에 이른다는 것을 예상할 수 있었다. 어설프게 인간의 목소리를 흉내 내는 그것은 뼈인지 칼인지 모를 것을 그녀의 턱 밑에 들이댔다.
"일 단멈 춰."
애꾸눈 여자가 손을 들어 올렸다. 노숙자들은 공격을 멈추고 창을 다시 뽑아냈다. 아이작을 둘러쌌던 넝마가 피로 흥건하게 물든 것을 보고 그의 죽음을 확신했다. 하지만 철망을 걷고 시체를 꺼내기 위해 손을 내밀자, 빨갛게 물들었던 넝마가 다시 원래 색으로 돌아가는 것이 보였다.
노숙자들이 경악하기도 전에 아이작의 검이 넝마 밖으로 튀어나오며 가까이 있던 노숙자의 목을 찔렀다. 단숨에 넝마를 걷어 낸 아이작의 몸에는 상처 하나 보이지 않았다.
'역시 이럴 때는 쓸모 있군... 붉은 탄원.'
[붉은 탄원(S)]
[사용자의 신체가 일시적으로 붉은 안개 형태로 변해 지형지물에 방해받지 않고 움직일 수 있습니다. 붉은 안개 상태에서는 모든 물리적 타격을 무효화할 수 있습니다.]
헤인켈 굴마르를 포식하고 얻었던 능력이었다.
물리 타격을 무효화할 수 있어, 이렇게 기습을 당했을 때 일시적으로 공격을 넘기기에는 유용했다. 넝마에 휩싸였을 때 그대로 붉은 탄원을 쓰고 빠져나가서 반격을 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면 아이작은 붉은 안개의 형태를 들키게 된다. 그러면 아이작은 여기 있던 사람들을 전부 다 죽여야 했다.
'그럴 수는 없지.'
자신은 숭고한 여정을 떠나는 성배기사여야 한다. 흉흉한 피비린내 나는 소문이 붙게 둘 수는 없었다.
대신 아이작은 확실한 본보기 몇 개만 만들기로 했다.
가장 먼저 목이 찔린 노숙자를 힘껏 밀어붙여 다른 놈에게 내동댕이쳤다. 궁수들이 그제야 황급히 다시 활을 들어 올렸지만 아이작은 틈을 주지 않고 바로 다른 노숙자에게 붙어 칼을 휘둘렀다.
아이작이 멈추는 순간은 오직 다른 노숙자의 몸에 칼을 꽂는 순간뿐이었다. 한 번의 칼질에 한 명의 팔, 다리, 혹은 목이 날아갔다. 노숙자들의 비명이 연달아 터져 나왔다. 호흡을 고르거나 불규칙한 눈빛의 교환조차 없었다.
그저 기계적으로 목숨을 분쇄해 나가는 아이작의 모습에는 거친 싸움에 익숙한 바르바리 강도들 조차도 침착하게 대응할 수 없었다.
"대장, 대장님!"
결국 도움을 요청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이작은 힐긋 2층 창문을 올려다보았다. 어두운 방 안에 애꾸눈 여자가 창백한 표정으로 꼼짝 못 하는 것이 보였다.
아이작과 눈이 마주친 그녀는 간신히 항복 선언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분 께내 려다보 면서 말하 지 마 라."
그때 등 뒤에서 섬뜩한 목소리가 속삭였다. 동시에 뭉뚝하고 축축한 무언가가 단숨에 그녀를 내팽개치듯 2층 아래로 던져 버렸다. 애꾸눈 여자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1층 골목의 쓰레기더미 진창 속에 처박혔다.
그녀는 입안에 들어간 구정물을 토해내며 간신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하지만 그녀가 마주친 것은 섬찟하게 내려다보는 아이작의 눈이었다.
아이작은 2층에서 눈을 빛내는 붉은 눈동자─지힐렛에게 고마운 감정을 보낸 뒤, 다시 그늘 속으로 숨어들게 만들었다. 원래 축축한 지하에서 잘 살던 쥐답게 지힐렛은 그 커다란 덩치에도 불구하고 능숙하게 잘 숨어들었다.
"항복, 항복한다. 제발...."
애꾸눈 여자가 화급히 아이작에게 항복 선언을 했다. 그 순간 아이작의 칼이 여자의 오른손을 찍어버렸다. 여자의 비명이 다시 터져 나왔다.
"항복은 잘했어. 잘한 일이긴 한데... 부하들이 그렇게 죽어 나갔는데도 본인은 아무런 고통 없이 넘어갈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지?"
애꾸눈 여자는 고통스러워하는 와중에도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타는 냄새가 지독하게 풍겨왔다. 심판의 검이 가진 효과로 인해 바르바리인 그녀의 살과 피가 타들어가고 있었다. 이미 손등을 중심으로 거뭇하게 탄화된 손은 잘라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혀를 자르지 않은 이유는 물을 게 많아서야. 무슨 뜻이냐면, 내가 묻는 걸 숨길 때마다 쓸모없는 부위들을 자를 거고 혀는 제일 마지막이 될 거란 뜻이다."
***
애꾸눈 여자의 이름은 자클렛이었다. 생각보다 그녀는 고분고분 순순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바다 건너 북부에서 왔다던가, 신앙을 버리게 된 구구절절한 사연과 최근 먹고 살기 힘들어진 사정으로 부하들까지 끌고 왔다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까지 알게 될 정도로.
아이작은 그런 쓸데없는 이야기가 본론으로 들어가는 걸 피하려는 개수작이라고 판단하고 왼손까지 찔러버렸다. 그제야 아이작은 담백한 본론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누가 판다고?"
"유크하르 르벤 자작이요!"
자클렛의 남아 있는 한쪽 눈앞에서 심판의 검이 어슬렁거리자 그녀는 발악하듯 이름을 부르짖었다.
자클렛과 이 바르바리 강도들은 유크하르라는 작자에 고용되었는데 딱히 놀라운 일도,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원래 용병이란 족속은 돈 받으면 용병이고 못 받으면 산적인 법이니까.
그래서 제대로 된 전문 용병들이 인정받는 것이다.
"유크하르 르벤에 대해 말해봐."
유크하르 르벤 자작은 쇠르에서 활동하는 암시장 큰손의 이름이었다.
놈은 귀족 작위를 이용해서 사채부터 밀수입, 암거래, 장물 등 온갖 안 좋은 방식으로 돈을 벌어들이고 있었다. 쇠르 암시장에 유통되는 물자 중 그의 손을 안 거치는 것이 없다고 할 정도였다.
문제는 그 유크하르란 놈이 로어커스 사태 이후 사업 영역을 확장해 다단계와 폰지 사기, 코인질까지 동원해 쇠르 밑바닥에 있는 돈이란 돈을 다 끌어모으고 있다는 점이었다.
심지어 자클렛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슬럼의 거지도 로어커스 코인 한두 개는 가지고 있다고 할 정도였다. 나중에 로어커스 가격이 폭등하면 폭등할수록 로어커스 코인의 가격도 급등할 것이라면서.
결국 유크하르는 존재하지도 않는 로어커스를 팔아치우는 셈이었다.
'그 정도 규모로 움직이면 황금우상 상단이 모를 리가 없는데.'
아이작은 잠시 생각하다가 물었다.
"유크하르는 왜 그렇게 쇠르에 모이는 로어커스를 죄다 사 모으고 있지?"
"예?"
아이작은 심판의 검을 자클렛의 왼손에 가져다 댔다. 자클렛은 기겁하며 몸부림쳤다.
"아니, 아니! 질문 내용을 이해 못 해서 그렇습니다! 유크하르는, 그러니까! 로어커스를 많이 사들이고 있긴 한데, 그게 제가 알기로는, 주목할 만큼 엄청 많은 양도 아니에요!"
"많지 않다?"
아이작이 자클렛에게 들은 양은 정말 '별거 아닌' 양이었다. 물론 일반인에게는 많은 양이지만 상단이 다룬다기에는 적은 편에 속했고, 황금우상이 취급하는 로어커스의 양에 비하면 티끌만 한 수준이었다.
'그럼 대체 누가 로어커스를 사는 거야?'
어처구니없지만 결론은 하나로 통했다.
정말로 화훼 애호가들이 사는 것이다.
그리고 로어커스 가격이 계속 오를 거라고 기대하고 있는 수많은 머저리들도.
아마도 절대다수의 로어커스들은 그 투자자라는 이름의 머저리들이 보유하고 있을 것이다. 자고 일어나면 로어커스 가격에 금화 한 개가 더 붙는 데 팔기 쉽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그 와중에 가격 왜곡이 일어나면서, 유크하르는 갖은 사기까지 동원해 돈을 끌어 모으고 있는 것이다.
결국 유크하르의 목적은 로어커스가 아니라 로어커스를 통한 가격 왜곡이었다. 놈들은 가격 왜곡과 유행을 일으킬 수 있다면 로어커스가 아니라 뭐라도 상관없었을 것이다.
'캐틀린이 이 사실을 들으면 어처구니없어 하겠군.'
물론 다른 생각도 해봐야 했다. 황금우상 상단이 과연 이 일과 무관할까 하는 생각.
유크하르가 온갖 사기를 통해서 돈을 벌어들이고는 있지만, 최대 수혜자는 가장 많은 로어커스를 끌어모은 황금우상 상단이다.
'뭔가 이상한데....'
아이작은 어딘가 마음에 걸렸다. 그가 찾는 것은 로어커스를 누가 사들이는지였다. 유크하르가 로어커스 사태를 이용해 돈을 벌고 있다는 것은 확실한데, 그건 돈을 버는 방식이지 로어커스 현물을 사들이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어쨌든 황금우상 상단의 정보원이 유크하르를 조사하려고 했다가 죽은 것은 확실했고, 놈이 로어커스 유통과 관련 있는 것도 분명했다.
자세한 것은 만나서 물어보면 될 것이다. 하하호호 담소를 나누면서 대화할 일은 없겠지만.
아이작은 자클렛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놈 좀 만나야겠다."
43화. 돈 냄새 (3)
유크하르의 집은 쇠르 중심부에서 약간 빗겨 나간 강변 거리에 있었다. 쇠르를 관통하는 강변에 위치한 이곳은 물류의 중심지이자 수많은 방문객들이 찾는 환락가이기도 했다. 놈의 집은 그중에서도 제일 규모가 큰 집이었다.
"유크하르는... 이 근처에서 제일 큰 조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쇠르 시장과도 친하다고 들었구요."
쇠르는 황금우상 상단의 무역 거점 중 하나인 만큼 시장 역시 황금우상의 지배하에 있었다. 점점 이 일이 황금우상 상단과 무관할지 의문이 들었다.
자클렛은 아무래도 아이작의 행동이 내키지 않는 듯했다. 하지만 아이작이 벌인 묘기를 봤을 때, 둘 중 어느 쪽이 더 무서운지 확신하기 힘든 눈치였다.
아이작은 자클렛의 말을 무시하고 유크하르의 저택 정문을 바라보았다.
자클렛 말대로 꽤 늦은 저녁임에도 유크하르의 저택 주변에는 경호원들과 순찰을 도는 경비병들이 심상찮게 보였다. 경호원들은 바르바리들과 다르게 제대로 무장을 하고 있었고, 경비병들은 건드리기가 아무래도 껄끄러웠다.
암시장을 지배하고 있던 암흑가의 큰손을 만나러 갈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이작은 자클렛을 통해 몰래 잠입할 수도 있고, 지힐렛을 이용해 밤중에 은밀하게 숨어들 수도 있다. 혹은 배신자들을 잠입시켜 두건을 씌우고 끌고 나올 수도 있었다.
아이작은 길게 고민하지 않았다.
성배기사답지 않은 짓이었기 때문이다.
아이작은 성배기사답게 저택 정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쾅.
요란한 굉음이 새벽녘 저택을 뒤흔들었다.
"뭐야? 무슨 일이야!"
환락가라고는 해도 다들 잠에 들 새벽이었다. 허겁지겁 마당으로 모여든 경호원들은 바닥에 엎어진 거대한 철문을 보고 경악했다. 방금 그 굉음은 철문이 넘어지면서 난 소리였다. 그리고 그 위를 성큼 아이작이 넘어오고 있었다.
"무슨... 침입자다!"
경호원들은 서둘러 무기를 꼬나쥐고 아이작을 둘러쌌다. 거대한 철문을 무너뜨렸으니 무슨 힘이 있을지 모른다는 것도 있지만, 다른 누가 또 쳐들어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무너진 정문 쪽을 자꾸 돌아보게 만들었다.
"뭐해! 당장 쳐!"
나름 상급자인 듯한 남자가 외쳤다. 경호원 몇이 아이작을 향해 창을 내질렀지만, 아이작은 간단하게 흘려보내며 창대를 후려치고, 발로 밟아 떨어뜨렸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못해도 기사급이다! 자작님께 당장 알려!"
기사급이라는 말에 병사들은 둘러싸기만 하고 거리를 벌렸다. '검술'은 당연하지만 성기사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도 얼마든지 검술을 단련할 수 있었다. 기사들은 그런 검술을 익힌 자들을 의미했는데, 대부분 일반인을 훨씬 상회하는 능력을 가졌다.
아이작은 병사들이 충분히 마당 밖으로 튀어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저택 안에서는 무슨 연회라도 하고 있었던 건지 제법 잘 차려입은 사람들도 무슨 일인가 하며 나오기 시작했다.
곧 범상치 않은 기세의 사람들과 날카로운 인상의 중년 남자가 나타났다. 아이작은 경호원들이 길을 터주는 것을 보면서 저놈이 유크하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부유한 놈이니 당연히 기사급에 해당하는 경호원도 데리고 있을 것이다.
"너는 뭐하는 놈...."
"나는 성배기사 아이작이다."
아이작은 충분히 사람들이 모였다고 판단했을 때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크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모두가 아이작을 주목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목소리는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아이작을 둘러싼 사람들의 눈동자가 급격하게 흔들리면서 술렁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성배기사? 요즘도 성배기사가 있어?"
"아니, 성배기사라고 해도 왜 여기에...."
성배기사라는 호칭 자체는 전설에서 자주 회자되기에 경호원들이 당황하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아직 아이작의 이름이 퍼지기에는 시간도, 업적도 부족했다.
다만 이 자리에서 적어도 한 사람만큼은 다를 것이다.
아이작은 유크하르가 입술을 깨무는 모습을 자세히 관찰했다. 그러나 그의 침묵을 다르게 해석한 경비대장이 거칠게 외쳤다.
"웬 미친놈이 오밤중에 와서 행패야? 궁수!"
테라스 위에서 대기하던 궁수들이 저마다 활시위를 매겼다. 그러나 유크하르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경비대장이 당황하는 동안 유크하르가 다가왔다.
"유크하르 르벤 자작이요. 성배기사면 밤중에 민가로 쳐들어와도 되는 거요?"
아이작은 입술 끝을 끌어올렸다.
유크하르가 이 바닥에서 그렇게 발이 넓다면 아이작이 성배기사라는 것 정도는 이미 파악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를 죽이는데 경호원을 쓸 수는 없었다.
'성기사를 도시 한복판에서 죽일 수는 없지.'
쇠르는 백제국 영향권에 있다. 귀족인 유크하르는 당연히 빛의 법전 교인이든 아니든 그런 행세를 하고 있어야 한다.
빛의 법전 교인이 빛의 법전 성배기사를 죽인다면 지옥 직행이다. 죽어서 지옥에 가기 싫다면 배교하거나 바르바리가 되는 수밖에 없는데, 가진 게 많은 유크하르도, 다른 경호원들도 그럴 수가 없었다.
즉, 아이작이 정체를 대놓고 까발리며 들어와도 유크하르는 아무것도 못 하는 것이다.
'손을 쓴다면 바르바리를 써야 했는데 그 기회는 날렸지.'
그래서 자클렛의 암습이 유달리 철저했을 것이다. 유크하르가 신신당부했을 테니까.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여기서 보장받을 수 있는 것은 아이작의 목숨뿐이다.
중요한 것은 지금부터였다.
"이단의 성물을 숨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왔다. 즉시 반납해라."
아이작의 목적은 처음부터 이것이었다.
***
아이작은 경비대원들을 죽이거나 견제당하는 일 없이 흙발로 유크하르의 저택에 들어섰다.
연회 중이었던 저택은 여기저기 초대받은 듯한 손님과 음식들, 그리고 술잔들이 널려 있었다. 유크하르는 그 분위기를 수습해보려는 듯 연회장으로 나갔다.
"별 일 아닙니다. 여러분. 교단에서 오해가 생긴 듯하여 소란이 벌어졌을 뿐입니다. 계속 파티를 즐겨주십시오."
고급 옷을 차려입은 손님들은 불안한 듯한 눈빛을 주고받았지만 더 이상 소란이 벌어지지 않는 것을 보고 술잔을 나눴다. 이제 그들의 눈빛은 불안보다는 흥미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그 시선 대부분은 유크하르와 함께 들어온 젊은 성기사, 아이작에게로 향해있었다.
그때 아이작은 연회장에 있던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황금우상 상단의 쇠르 지부장, 캐틀린이었다.
그녀는 놀란 눈으로 아이작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작은 입술에 손가락을 대고 유크하르를 따라갔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유크하르는 아이작을 접객실로 안내했다. 그리곤 들어오자마자 하인들에게 최고급 와인과 술상을 차려오라고 지시했다. 어쩌면 술에 독이 들어있을지도 모른다. 칼 든 병사들더러 난입하라는 지시일지도 모르고.
하지만 아이작은 어느 쪽이든 신경 쓰지 않았다.
유크하르는 아이작의 맞은편에 앉았다.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성배기사님."
"아직 업적이라고 할만한 것도 이룩하지 못했는데."
"왈라이카의 인간사냥꾼들로부터 밤새워 추적당하고도 살아남으셨다고 들었습니다. 게다가 브리엔트 성기사단의 성기사도 일방적으로 꺾었다고요."
유크하르는 귀족이지만 아이작에게는 정중할 수밖에 없었다. 자작이라는 계급이 낮게 취급되어서가 아니라, 아이작을 인정해 준 교단의 권위를 존중해서였다. 이 세계에서 교단의 권위는 압도적이었으니까.
"아부를 들으러 온 게 아니다. 유크하르."
하지만 아이작은 고압적인 자세를 유지했다. 예의를 차릴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상대방보다 위에 있는 듯한 태도를 취하는 쪽이 유리했다. 이런 놈들은 자기보다 약하다고 판단하면 금방 말썽을 부리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이작의 생각과 달리 유크하르는 그다지 기가 눌리는 듯한 모습이 아니었다. 아이작은 눈살을 찌푸렸다. 정말 찔리는 게 없거나, 아니면 성배기사를 압도할 만한 뒷배경이 있다는 눈치였다.
아이작은 유크하르의 비밀을 찔러보기로 했다.
"네가 가지고 있지? 양치기 목상."
유크하르는 기가 막히게 내심을 숨겼다. 하지만 아이작의 눈은 속일 수 없었다. 어느새 그의 왼쪽 눈은 혼돈의 눈으로 보랏빛에 물들고 있었다. 혼돈에서 기어 올라온 보이지 않는 촉수가 유크하르의 내면을 훑기 시작했다.
['그걸 어떻게?']
***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유크하르는 아이작조차 놀랄 만큼 태연하게 연기했다. 아이작을 경계하는 탓인지 내면에 세워진 마음의 벽이 단단해서 자세히 들여다볼 수는 없었지만, 단편적인 정보만으로 충분했다.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눈꺼풀 뒤에서 촉수가 기어 올라오고 말 것이다.
아이작은 혼돈의 눈을 거두고 입을 열었다.
"나는 처음부터 양치기 목상을 찾으러 쇠르에 왔다. 그게 어디 있는지는 천천히 수소문해볼 생각이었는데, 이 도시에 로어커스로 난리가 나 있더군."
"...."
유크하르의 얼굴에 처음으로 약간의 초조함이 내비쳤다.
당연하지만 아이작은 네임리스 카오스에 있던 모든 성물을 기억하지는 못한다. 다만 게임 클리어에 필수적인, 혹은 매우 강력한 성물만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그중에서 양치기 목상은 게임 클리어에 필수적이지도, 강력하지도 않지만 가진 기능이 특별했다.
바로 일정 수치 이하의 정신력을 가진 존재들의 감정을 조종하는 것이다.
보통은 이름답게 짐승들을 통제하거나 적대적인 몬스터들을 우호적으로 만들거나 할 때 쓰였다. 양치기가 양 떼를 통제하듯이 쓰는 물건이다.
하지만 인간처럼 높은 지능을 가진 존재는 통제할 수 없다.
"처음에는 이 사태와 양치기 목상을 연결시키지 못했지. 사람은 양치기 목상으로 통제가 안 되니까. 그런데... 문득 왜 로어커스일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
"글쎄요. 왜일까요?"
"간단하지. 로어커스는 마법 저항력을 낮추는 효능이 있거든."
마법 저항력은 마법만이 아니라 신성력에도 영향을 미친다.
유크하르는 우선 로어커스를 고가에 대량으로 사들이면서 유행을 인위적으로 퍼뜨렸다. 물론 그 혼자서 시세를 조종할 정도로 큰돈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욕심은 도미노와 같다.
로어커스를 누군가 급하게 대량으로 사들이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자 온갖 소문이 나돌았다. 로어커스에 새로운 효능이 발견되었다던가, 해외에서 크게 유행하기 시작했다던가.
그러면서 유행에 민감한 상인들도 하나둘 끼어들었다. 온갖 종류의 로어커스들이 쇠르로 밀려들었다. 로어커스가 가진 본연의 능력, 마법 저항력 약화는 구근이든, 개화 형태든, 말려 찧은 것이든 차를 탄 것이든 상관없었다.
쇠르가 로어커스 향으로 가득 차자 자연스럽게 도시 전체의 마법 저항력이 약해졌다.
그 말인즉슨, 평소라면 이런 짓거리에 동참하지 않았을 놈들도 조금씩 동참하게 되었단 소리다. 그리고 양치기 목상으로 군중 의식에 욕심을 부추기면 그만이다.
하지만 진짜 유행을 폭발시키기 위한 단계는 바로 그다음이다.
황금우상 상단을 이 유행에 끼우는 것이다.
그때 문이 열리고 하녀가 술병과 잔 두 개를 가져왔다. 여러 가지 다과들이 테이블에 놓였지만 아이작도 유크하르도 그곳에 시선을 두지 않았다.
"나가서 기다릴까요?"
"금방 치울 것 같으니 기다리거라."
유크하르의 지시에 하녀는 문 옆에서 대기했다. 하지만 아이작은 하녀를 가만히 주시했다. 평범한 하녀라기엔 단련한 사람 특유의 움직임과 묵직한 긴장감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독과 병사, 둘 다 준비한 것 같았다.
하지만 아이작은 태연히 술병을 기울여 유크하르의 잔에 따랐다.
"파티가 꽤 성대하더군?"
"...."
이 최고급 와인, 손님들에게 나가는 모든 술상에도 달콤한 향을 가진 로어커스가 첨가되어 있었다. 유크하르가 충동질하고자 한 진짜 대상들은 군중보다 큰돈을 가진 거상들과 권력자들이었다. 그들에게는 특별히 마법 저항력을 크게 떨어뜨리기 위해 직접 로어커스를 탄 술을 먹이고 욕심을 부추긴 것이다.
그 결과 유크하르는 크게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쇠르, 나아가 제국 전체를 삼킬 수도 있는 대폭등의 서막을 열 수 있었다.
"자, 그러면 여기서 문제."
아이작은 테이블을 술이 가득 담긴 잔을 톡톡 두드리면서 말했다.
"사실 로어커스가 유행하는데 아무런 이유가 없었고, 성물에 의해 조종당했을 뿐이라는 것을 밝히면 어떻게 될까?"
아이작의 손가락이 툭, 술잔을 밀어 쓰러뜨렸다.
44화. 돈 냄새 (4)
주르르륵. 술잔이 테이블을 타고 가득 던지는 것을 보면서도 유크하르는 시선을 두지 않았다. 대신 그는 아이작의 질문에 즉답했다.
"죽겠지요."
모호한 말이었다. 아이작이 죽는다는 건지, 자신이 죽는다는 건지.
유크하르는 자신의 발언이 너무 도발적이라고 느꼈는지 말을 이었다.
"지금 로어커스에 관계된 권력자, 상인, 기사가 얼마나 되는지 아십니까? 하다못해 농부들까지도 끼어든 판입니다. 행복으로 머릿속이 불타고 있을 그들에게 '당신들이 사들인 보물은 사실 쓰레기'라고 선언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유크하르는 아이작을 평안한 자세를 유지하며 말했다.
"그들이 당신 말을 들을 것 같습니까? 전 재산이 걸려 있는데? 당신의 말을 무시하거나, 아니면 좀 더 심각한 일을 벌일지도 모르지요. 가격이 떨어지는 일을 막기 위해서라도."
아이작은 유크하르가 동요하지 않는 이유를 알아차렸다. 그는 양치기 목상이 들키더라도 크게 문제될 거라는 생각을 안 하고 있었다.
이미 너무 많은 이들이 로어커스 사태에 얽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양치기 목상으로 충동질하지 않아도 쇠르 전체가 욕망의 관성으로 굴러가고 있었다. 끝에 파멸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도 멈출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되었으니, 성배기사님. 저도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한 말씀 해봐."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황금우상 상단에는 성기사가 없습니다."
뜬금없는 말이었다. 지금 여기서 갑자기 왜 황금우상 상단과 성기사 얘기가 나온단 말인가. 유크하르는 아이작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
"심지어 사제도 없고, 천사도 없다고 하지요. 황금우상 상단에 있는 것은 교인뿐이라고."
황금우상 상단이 아홉 신앙들 주에서도 제일 경계 받지 않고 다른 신앙의 구역에 스며들 수 있는 이유. 그것은 바로 황금우상 상단엔 사제도 성기사도 천사도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황금우상이라는 신이 있는지조차도 의심받곤 했다.
하지만 상인들은 방랑하는 길에서 신의 은총을 느꼈고, 그의 가호로 파산에서 벗어났으며, 예상외의 행운으로 큰 이익을 거뒀다고 증언했다. 그런 상인들의 믿음 덕분에 황금우상 상단은 상인들 사이에서 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왜 그럴까요?"
"사제와 성기사가 있으면 각자의 입장이 있을 테고, 입장이 다르면 분쟁이 생기겠지. 분쟁이 있으면 상인들이 다른 신앙들 사이로 스며들어 거래하기가 힘들어질 테고."
이윤추구라는 제일 중요한 교리를 달성하지 못하게 되는 셈이다. 황금우상 상단으로 이미 엔딩을 본 아이작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성기사와 사제는 없을 수 있지요. 천사도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황금우상이라는 신은 정말 존재할까요?"
"갑자기 신학 토론인가?"
"다른 신앙들은 사제를 통해 신과 소통합니다. 그런데 황금우상 상단에는 사제가 없습니다. 즉, 신과 소통할 방법이 없다는 뜻이지요. 정말 존재하는지도 모르겠고."
"무슨 말인지 알겠군. 너 황금우상 상단 교인이냐?"
"예."
아이작은 대충 구도를 알 것 같았다. 쇠르에는 두 명의 지부장이 있었던 셈이다. 한 명은 양지에서 정당한 거래를 추구하는 캐틀린, 한 명은 음지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어들이는 유크하르.
캐틀린이 음지에서 일하는 유크하르가 무슨 일을 벌이는지 몰라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분야가 전혀 다르기도 하고, 애초부터 유크하르는 황금우상 상단 안에서도 견해가 상당히... 선을 넘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다른 신앙의 성기사가 와서 이래라저래라하는 게 짜증 난다 이거냐?"
"틀린 말은 아니군요."
유크하르는 아이작을 노려보며 말했다.
"황금우상 상단에도 성기사가 있었으면 당신이 이렇게 와서 행패부리지 못했을 텐데 말입니다. 사제가 당신의 호주머니에 저주를 걸어서 구멍을 낼 수도 있겠군요."
"쫀쫀한 저주로군."
아이작은 코웃음쳤다.
"그러면 나도 한마디 할까?"
"해보십시오."
"내일까지 양치기 목상을 준비해 와. 조용히 넘기면 로어커스 거품도 조용히 꺼지게 해주지. 하지만 내가 다시 올 때에는 고분고분하다고 대화로 끝나지 않을 거다."
"...."
유크하르는 아이작을 노려볼 뿐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제아무리 황금우상 상단 교인이라 하더라도 백제국 안에서 빛의 법전 성기사를 죽이는 것은 사회적 자살행위였다.
황금우상 상단은 그런 일이 벌어지면 꼬리 자르기를 위해서라도 유크하르를 죽일지도 모른다.
아이작은 유크하르가 내놓은 술병을 들어 올렸다.
"이상한 게 섞이긴 했어도 좋은 술 같네. 이건 내가 가져간다."
***
"아이작 님!"
아이작이 유크하르의 저택을 나와 숙소로 돌아가고 있을 때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캐틀린이 마차 밖으로 몸을 내밀고 아이작을 부르고 있었다.
그녀는 마차에서 뛰어내리다시피 내리며 아이작에게 다가왔다.
"방금 어떻게 된 거지요? 왜 르벤 자작의 저택에...."
"저놈이 범죄조직 두목이라는 건 알고 있었나?"
캐틀린은 눈살을 찡그렸지만 몰랐다고 잡아떼지는 않았다.
"르벤 자작이 범죄에 손을 댄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거리를 둘 수는 없지요. 쇠르에서 제일 큰 검은 손이랑 사이가 안 좋으면 장사를 망치기 쉬우니까요."
아이작은 캐틀린의 입장을 이해했기 때문에 탓하지는 않았다. 캐틀린은 장사꾼이지 판사나 영웅이 아니다. 장사꾼은 자기 소속된 사람들이 다치지 않고 물건이나 잘 팔면 그만인 것이다.
"놈이 로어커스로 사기를 쳐서 큰돈을 벌어들이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장사를 위해 자주 어울리기는 했지요. 하지만 제가 알기론 로어커스를 많이 사들이지는 않고 있었습니다. 다른 상단과 비슷한 수준이고, 우리 상단에 비하면 1/10수준이었죠."
아이작은 딱하다는 듯 캐틀린을 바라보았다.
캐틀린도 로어커스 술을 마셨을 테고, 양치기 목상으로 욕심을 충동질 당했을 것이다. 이번 로어커스 폭등 사태에 황금우상 상단이 크게 한몫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녀 역시 이용당한 셈이다.
'하지만 양치기 목상으로 조종당하지 않았다면 과연 유행에 끼어들지 않았을까?'
그럴 리는 없다. 결국 그녀는 좋든 싫든 유크하르와 손을 잡게 되었을 것이다.
아이작은 결국 입을 뗐다.
"전부 유크하르에게 조종당한 거다."
아이작은 그동안 자신이 알아낸 것들을 캐틀린에게 설명했다. 로어커스 폭등은 유크하르가 양치기 목상으로 인위적으로 일으켰다는 것. 이를 위해 쇠르의 거상들과 권력자들에게 로어커스 술을 먹이고, 욕심을 부추겼다는 것.
지금 이 로어커스 폭등에는 사실상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것.
캐틀린은 이야기를 들을수록 표정이 썩어들어갔다. 특히 로어커스 폭등에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것을 듣고 뺨을 몇 번이나 만졌다.
"틀림없이 로어커스의 숨겨진 효능이 드러났거나 전쟁 준비 때문일 거라고 예상했습니다만...."
"세상 모든 일이 근거가 있어서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
캐틀린은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러면... 로어커스가 어디로 흘러가는지는 추적해 봐도 의미가 없겠군요. 다 뿔뿔이 흩어져서 값이 오르길 기대하는 사람들에게로 흘러갔을 테니."
"뭐, 그렇겠지?"
캐틀린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가 아이작에게 물었다.
"이걸로 의뢰는 끝난 셈이군요."
"유크하르는 어떻게 할 생각이지?"
"놈은 상단 안에서 해결하겠습니다. 바르바리를 고용해서 시켰다고는 하나, 같은 상단 사람을 해쳤으니 우리 손으로 해결해야 맞겠지요. 각자 영역을 존중하면서 활동하는 것이 원칙인데 이런 일까지 벌일 줄이야...."
아이작은 캐틀린에게 자클렛을 소개해 주기로 했다. 신앙도 신의도 없는 바르바리이므로 순순히 자백할 것이다. 어쩌면 자클렛의 손에 유크하르가 죽을지도 모르겠다.
"계약서는 원칙대로 진행하실 생각입니까? 원하신다면 지금이라도 현금으로 지급해드릴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이게 본론일지도 모르겠다.
캐틀린은 아이작의 말을 듣고 이미 로어커스 가격이 하락할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유크하르의 말대로 이미 쇠르는 욕심의 관성으로 굴러가고 있으니 드라마틱한 하락은 없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하락은 하락이니까.
어쩌면 지금 아이작과의 계약을 해결하는 게 더 싸게 먹힐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얼마나?"
하지만 아이작은 이야기를 들어보기나 하기로 했다. 그리고 캐틀린이 제안한 액수는 상상 이상으로 많았다. 유크하르의 저택을 사들일 수도 있는 거액이었다.
"그렇게나?"
"상단이 큰 손해를 입을 수 있었던 것을 막아주셨으니 이 정도면 싼값입니다."
오히려 캐틀린은 후련해 보였다.
그녀 말대로 로어커스 가격이 하락한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알았으니 황금우상 상단은 손실을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잘 빠진다면 오히려 이득을 남기고 나올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이작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황금우상이 보증을 선 계약서가 있으니 합의를 보더라도 어기지 않는 쪽이 좋겠군. 한 달 뒤에 보는 걸로 하지. 내 신앙은 아니지만 그래도 신은 신이니까...."
아이작은 그렇게 말하다가 잠시 멈칫했다.
"황금우상 상단에는 성기사가 없다고 하더군."
"예? 그거야...."
"...그게 정말일까?"
다른 신앙에서는 신의 맹세를 깨뜨릴 경우 저주가 내려지거나 최악의 경우 성기사나 천사가 찾아간다.
하지만 황금우상에는 그런 존재가 없다.
유크하르는 황금우상 상단 소속이면서 사제도 성기사도 천사도 없다는 게 원망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그런 결핍을 가진 사람이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
다른 교단이 그러하듯, 사제의 기적과 성기사의 힘을 원할 것이다.
유크하르가 원하는 것은 돈도 권력도 아니다.
아이작은 자신에게 황금우상 상단의 성기사가 찾아올 것이란 걸 직감했다.
***
늦은 새벽, 쇠르에 깊은 안개가 가라앉았다.
아이작은 캐틀린이 마련해준 고급스러운 시설의 숙소에서 머물고 있었다. 황금우상 상단이 직접 운영하는 이 숙소는 현대인 기준에서 봐도 훌륭한 설비과 접객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동시에 그 말은 아주 많은 직원들이 숙소를 위해 일한다는 뜻이었다. 기계가 없는 이 시대에 현대만큼이나 편한 설비를 운영하려면 전부 인력으로 때우는 수밖에 없으니까.
덕분에 낯선 사람이 자연스럽게 스며들어도 그 사실을 눈치채는 사람은 없었다.
왜냐면 그도 그럴 것이 평범한 하녀 복장을 하고 있는 여자였으니까.
하녀는 빨래 바구니를 든 채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들 사이를 지나갔지만 어떤 의심도 받지 않았다. 카운터에서 명부를 확인하고, 마스터키를 빼돌린 뒤 목표 지점까지 가는 과정에서도 아무런 제지가 없었다.
곧 하녀는 한 방에 도착했다. 마스터키로 열고 들어간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녀는 방의 구조를 확인하듯 둘러보다가 침대가 있는 자리로 다가갔다. 침대 위에 서서 잠시 위를 노려보던 하녀는 불현듯 천장을 향해 손을 빠르게 내질렀다. 동시에 허공에서 붉은 창이 돋아나와 단숨에 천장을 꿰뚫었다.
콰쾅. 지붕까지 꿰뚫리는 굉음이 울려 퍼졌다.
하지만 하녀의 얼굴이 꿈틀거렸다. 기대했던 살과 뼈를 꿰뚫는 촉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우수수 쏟아지는 먼지 속에서 하녀는 몸을 붉은 안개로 변화시키며 솟구쳐 올랐다. 창으로 뚫린 천장의 구멍으로 붉은 안개가 스며들었다. 재빨리 몸을 원래 상태로 되돌린 하녀는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기대했던 사람은 없었다.
"왈라이카 인간 사냥꾼? 또 너네야?"
하녀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목표, 아이작이 갑옷부터 칼까지 완전무장을 한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역시 그 하녀였군. 어쩐지 어지간한 기사들보다 눈빛이 살벌하더라니."
45화. 등대를 밝히는 자 (1)
"이미 예상하고 있었군."
하녀가 차갑게 말했다.
"예측하기 어려운 일은 아니지. 다만 그게 왈라이카 인간 사냥꾼일줄은 몰랐는데...."
아이작은 황금우상 상단의 성기사가 올 것이라고 예상했다.
성기사가 없다고 알려진 황금우상 상단이 가질 수 있는 성기사.
그것은 바로 용병이었다.
황금우상 상단은 다른 신앙의 성기사들이라도 거리낌 없이 고용하고 서로 싸움 붙일 수 있는 힘이 있었다. 캐틀린이 아이작을 고용하고, 유크하르가 지금 눈앞의 왈라이카 사냥꾼을 고용했듯이 말이다.
그들은 그것을 힘이라고 생각하지 않을지 몰라도 황금우상 상단이 아닌 다른 신앙들 중 누구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황금우상 상단에 고용된 용병들은 황금우상이 내린 행운 버프도 부여받을 수 있었다.
쉬익!
하녀는 날카롭게 창을 내질렀다. 아슬아슬하게 스치는 창날의 궤적에서 아이작은 익숙한 느낌을 받았다. 보통 솜씨가 아니었다. 아이작이 예전에 계곡에서 상대했던 왈라이카 사냥꾼들을 상회하는 능력이었다.
'거의 헤인켈과 비슷하거나 약간 아래? 상당한데.'
아이작은 바짝 긴장하며 태세를 갖췄다. 순수 실력으로만 부딪치면 아슬아슬할 수도 있었다.
물론 아이작은 정정당당하게 싸울 생각이 없었다. 상대방도 그럴 테니까.
"너 헤인켈 굴마르랑 무슨 사이냐?"
하녀는 아이작의 말을 무시하려는 듯했지만, 창끝이 흔들렸다. 숨기려고 해도 붉은 안개로 변하는 능력이며 창을 다루는 솜씨며, 같은 사람에게 배운 것이 분명했다. 아이작은 이 하녀가 굴마르 공작가 소속이라는 것을 간단하게 알아보았다.
"설마 헤사벨 굴마르? 굴마르 공작가의 후계자는 아니겠지?"
하녀는 이를 악물었다. 숨길 수 없는 표정 변화였다. 들켰다고 화를 내기에는 너무 극적인 감정 변화였다. 그녀의 얼굴에는 수치심과 초조함이 담겨있었다.
"굴마르 공작가의 후계자가 대체 왜 여기서 하녀 옷을 입고 용병질을 하고 있냐?"
"야!"
하녀는 결국 소리를 지르며 창을 거칠게 휘둘렀다.
와드드드드득! 엄청난 완력에 벽과 기둥이 뜯겨 나가며 거대한 상처를 남겼다.
아이작은 그 모습을 보면서 어이없는 기분을 느꼈다.
"진짜네?"
헤사벨은 결국 힘이 빠진다는 듯 창끝을 내렸다. 아이작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바로 이삭 검술: 여덟 갈래를 발동하면서 빠르게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방 안의 벽과 바닥, 천장이 여덟 개의 궤적으로 찢어발겨지며 헤사벨을 향해 쇄도했다.
싸울 의지를 잃고 대화를 준비하려던 헤사벨은 갑작스러운 아이작의 태세 전환에 당황했다. 창이란 무기는 원래 미리 준비하고 있지 않으면 사전 동작이 큰 편이었다.
콰자자자작!
아이작은 자신이 발동시킨 여덟 갈래의 동작 중 두 개의 궤적은 헤사벨에게 상처를 입혔지만, 나머지는 모두 튕겨 나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짧은 틈이지만 헤사벨도 상급 검술, 아니 상급 창술을 발동시킨 것이다. 그녀가 창을 휘두르고 찌른 자리마다 벽이 매끄럽게 관통된 흔적이 보였다.
아이작이 피하거나 막지 않았으면 정확히 그의 몸에 구멍을 냈을 자리였다.
헤사벨의 몸에 톱에 뜯겨 나간 듯한 상처가 두 군데 생겨났지만, 금방 피안개 형태로 피어오르며 아물었다.
아이작은 촉수를 꺼내지 않는 한 상대를 죽이기 힘들다는 것을 깨닫고 입을 열었다.
"우리 대화할까?"
"이 개...."
그녀는 욕설을 중얼거리려다가 황급히 입을 막았다. 아이작은 어깨를 으쓱였다.
"대체 너희 피빨이들이 백제국 깊은 곳까지 와서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것도 황제나 대귀족도 아니라, 변방 도시의 범죄자 대부 밑에서 일하고 있어? 무슨 음모라도 꾸미나?"
아이작은 혹시 왈라이카 사냥꾼들이 아리엣 수도원에서 그랬던 것처럼 여기서도 음모를 꾸미고 있나 생각했다. 물론 정확히는 불사 교단의 음모였지 붉은 성배의 음모는 아니었지만.
헤사벨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다가 창끝을 들어 아이작을 겨냥했다.
"네놈 때문이다!"
"나?"
"백부님이 가지고 있던 분열 예식, 네가 훔쳐 갔지? 나는 그걸 회수하기 위해 왔다!"
붉은 성배 클럽의 성물인 분열 예식. 그거라면 확실히 굴마르 공작가의 후계자가 목숨 걸고 쫓아올 법도 했다. 그렇다고 군대를 끌고 들어올 수는 없으니, 혼자거나 소수정예만 끌고 왔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설명이 되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그런데 왜 메이드복을 입고 있냐니까?"
"닥쳐!"
헤사벨은 다시 창을 휘둘렀다. 아이작은 헤인켈에게 그랬던 것처럼 붉은 살점의 예지자를 흉내 내볼까 생각했다. 하지만 그럴 여유는 없을 것 같았다.
밖에서 요란한 발소리가 들려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누구냐!"
헤사벨이 피운 요란에 뒤늦게 경비대원들과 숙소를 지키는 경호원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설비가 훌륭한 숙소인 만큼 경비병력도 많았다. 헤사벨은 아이작을 노려보았지만, 그녀는 이미 기회를 놓쳤다.
헤사벨은 금방 쇠르를 덮은 안개 속에 섞여 붉은 안개가 되어 사라졌다.
아이작은 그 붉은 안개의 흐름을 놓치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