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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서울 역에서. - 여기까지 무료입니다. >

뉴서울 미리내 제약회사.

이동우 사장은 자신의 심복인 본사 미래전략실 전주학 차장을 불러 밀담을 나누고 있었다.

"지금 뉴서울 변두리 쪽에 짓고 있는 공장이 태홍 바이오 확실하지?"

"확인하고 왔습니다. 신종로구에 20층짜리 지점 건물도 매입했다고 들었습니다."

"이 새끼들이 간뎅이가 부었나?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태홍 바이오의 뉴서울 진출.

지금까지는 구례에서만 사업하던 향토 기업이라 설쳐대도 가만히 있었는데.

촌놈들이 뉴서울을 우습게 봐도 분수가 있지.

"특허청 동향은? 포자 독 해독제와 회복제 신청이 들어왔어?"

"수소문해보니 아직은 들어오지 않았답니다."

"그래? 뉴서울 식약청은?"

"거기도 아직 소식이 없습니다."

구례가 아닌 다른 지역에서 약을 팔려면 허가를 받아야 한다.

많이 간소화됐다고 하지만 구례보다는 훨씬 엄격하고 복잡하다.

"우리 연구는 어떻게 되고 있어?"

"죄, 죄송합니다만, 이렇다 할 성과가···."

그동안 미리내 제약 연구소에서 수도 없이 연구를 해왔다.

태홍의 해독제와 회복제를 카피하기 위해.

일단 카피만 성공하면 미리내 제약이 먼저 특허를 내면 되니까.

하지만 진전이 없었다.

같은 성분이라도 똑같지 않다는 것까진 밝혀냈다.

분명 특별한 가공 처리 과정을 거쳤다.

문제는 그게 무엇인지 감도 잡을 수 없었다.

전주학이 이동우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오히려 놈들의 서울 진출이 기회일 수도 있습니다."

"왜지?"

"이곳에서 약을 팔려면 식약청 허가를 받아야 하고, 특허도 낼 게 뻔하니까···,"

"공무원 놈들 매수해서 제조식을 입수해보자?"

"네! 맡겨만 주십시오."

이동우는 고민했다.

현재로선 그 방법이 가장 빠르겠지.

게다가 뉴서울에선 자신들이 왕이다.

거미줄처럼 깔린 인맥.

김태주, 그놈의 인맥이라 해봐야 군부 말고는 없을 터.

"조용히 추진해봐. 꼬리 남기지 말고."

"네!"

처음 해보는 일도 아니다.

이미 특허청과 식약청엔 다달이 미리내 제약의 월급(?)을 받는 공무원들이 많이 있다.

"참! 그리고 조만간 김태주가 뉴서울로 상경한다는 정보가 있습니다."

"언제? 무슨 일로?"

"한 일주일 남았을 겁니다. 뉴서울 지점 방문과 공장 준공식이 목적인 듯합니다."

"훗! 제 발로 여길 기어들어 온다는 말이지?"

뉴서울.

삼한제국 문화와 경제의 중심.

사실 제국민은 둘로 나뉜다고 해도 무방하다.

뉴서울 시민과 지방 사람.

단순히 돈만 많다고 뉴서울 시민이 될 수 있다고 착각하면 오산이다.

'본때를 보여줘야겠군.'

그동안 태홍 바이오 촌놈들에게 함께 사업을 해보자고 수없이 러브콜을 날렸다.

하지만 굴욕만 당했다.

로열티 계약이나, OEM 위탁생산, 업계 최고의 계약서를 제시해도 번번이 거절.

진짜 많이 양보한 거였다.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줬다.

나중에 생산 노하우를 습득하면 되니까.

태홍 바이오 총괄 경영자에게 직접 접근도 해봤다.

전직 미리내 그룹 미래전략실 과장이었던 백서연, 권유가 먹힐 줄 알았다.

심지어 자신이 직접 전화까지 했다.

제조식을 가지고 오면 평생 써도 다 못 쓸 돈을 주겠다.

그러나 그녀는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결국 전화번호를 차단당하기까지.

이렇게 어이없이 무시당한 적이 있었나?

'쯧쯧, 이래서 노비들은 잘 대해주는 게 아니야.'

최연소 과장까지 달아줬는데, 그 은혜는 모른 척 내팽개치고, 이젠 그룹의 적이 되어버린 년이다.

좋다.

이참에 얼굴이나 보자.

"확실한 일정 알아봐."

"네!"

"마중 한번 나가보자고."

촌놈이 뉴서울로 상경하는 데 가만히 있으면 쓰나?

신고식 제대로 치르게 해줘야지.

※ ※ ※

백서연은 태홍 바이오 총괄경영자 신분이지만 동시에 김태주의 개인비서이기도 했다.

'준공식 일정은 맨 뒤로 미뤄야겠어.'

회장님께서 특허가 나올 때까지 뉴서울에 머무른다고 하셨으니, 준공식은 마지막 일정이 될 터.

'호텔은 예약 완료, 차량도 나왔고, 운전은 각성 장교 수행원들이 맡으면 되니까.'

비서실에 맡기면 그만이지만 그녀가 직접 일정과 의전을 챙기고 있었다.

나중에 쓸만한 비서를 채용하기 전까진.

태홍 바이오의 뉴서울 입성.

지역 기업에서 벗어나 전국구 기업으로서 발돋움하는 순간.

그렇다고 해서 신문이나 방송에 떠들고 다니진 않을 예정이다.

보도자료 같은 것도 돌리지 않았다.

급하면 지들이 취재를 오겠지, 취재를 와도 응해주지 않을 생각이고.

상경의 주목적은 뉴서울에서 근무하게 될 직원들을 만나고 그들을 격려하는 행사.

구례 직원들은 모두가 안다.

김태주 회장님이 얼마나 대단한 분이신지.

그래서 한마음 한뜻으로 똘똘 뭉쳐 있고.

그러나 뉴서울은 아니다.

새로 들어온 직원들에게 자신들이 근무하는 회사가 얼마나 대단한 곳인지 각인시켜 줄 것이다.

물론 과도한 의전은 좋지 않다.

자칫하면 관심받고 싶어 하는 시골 졸부라는 인상을 줄지도 모른다.

적당하게, 품위 있게.

그런데 골치 아픈 일이 생겼다.

백서연을 찾아온 도민수 소령.

"하아, 제가 적당하게 선별해달라고 부탁드렸잖아요."

"···그, 그게, 어쩌다 지리산 전군에 소문이 나는 바람에, 그리고 각성 장교들이 요즘 한가해서,"

도민수 소령이 가지고 온 의전 수행원 명단.

5명으로 부탁했는데, 10명을 적어왔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 중 5명은 무보수로 지원했습니다. 숙박비나 식비 또한 자비 부담하기로 약속받았고요."

"제가 지금 돈 때문에 이러나요? 무슨 회장님이 갱단 보스도 아니고 10명이 우르르 따라가면 보는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어요?"

"···역시 안 되겠죠?"

풀죽은 도민수 소령의 모습.

이러니 또 마음이 약해졌다.

처음 태홍 바이오에 파견 나와 궂은일 도맡아 하면서 나름 친해진 사이인데.

"···알았어요. 10명 모두 채용할게요."

"가, 감사합니다."

"카드 드릴 테니 백화점 가셔서 정장과 구두 한 벌씩 사 입으세요. 영수증 가져오시는 거 잊지 마시고."

"알겠습니다. 으음, 그런데···,"

"왜요?"

"무슨 화장품 쓰세요? 피부가 너무 좋아지셔서, 아름다우십니다. 하하하···."

호들갑을 떨다가 싸늘한 백서연을 보고 찔끔하더니.

"저, 전 이만 부대로 돌아가겠습니다. 수행 훈련 철저하게 해서 다시 오겠습니다."

도민수가 돌아가고 난 뒤 백서연은 주머니에서 손거울을 꺼내 얼굴을 비춰보았다.

화장은 하지도 않은 얼굴.

30대의 나이지만 20대 초반이 부럽지 않을 정도의 피부였다.

'흐음, 그래도 기분은 좋네.'

혹시 김태주 회장님은 화장품도 만들 줄 아시나?

그랬으면 좋겠다.

※ ※ ※

드디어 출발 당일.

태주는 백서연과 함께 구례 기차역에 도착했다.

뉴서울까지 가는 수단은 기차가 최고.

태주는 자신을 수행하러 온 도민수 소령 일행을 보며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검정색 양복을 입고 태주의 뒤에서 뻣뻣하게 서 있는 그들.

죄다 주니어 익스퍼트, 미들 익스퍼트 등급의 각성 장교였다.

레귤러 이하의 위관급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분명 짬에서 밀렸겠지.

"저 조폭 두목 같아 보이진 않죠?"

미안한지 울상을 지으며 말하는 백서연.

"회장님, 죄송해요. 제가 너무 오버했나요?"

"괜찮아요. 이것도 좋네요."

"네!"

VIP 객차 하나를 통째로 빌려 김태주와 백서연, 그리고 수행원 10명이 뉴서울 역으로 출발했다.

도착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무려 12시간 정도.

뉴서울 중앙 기차역도 크기가 어마어마했다.

현재 사람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교통수단이 바로 기차니까.

스르르르르, 끼익!

태주가 탄 기차가 뉴서울 역에 도착했다.

승차장으로 내려 역내로 들어가는 일행.

그런데 모습이 범상치 않다.

무슨 레이드 팀도 아니고, 얼굴에 각성 문신을 한 10명의 검은 양복 입은 자들이 단 한 사람을 에워싸고 걸어간다.

좀처럼 보기 힘든 광경.

사람들은 그 모습을 힐끗 쳐다보며 수군댔다.

'연예인인가?'

'아니면 고위급 정치인?'

'딱 봐도 몰라? 조폭이잖아.'

'제국 경찰들은 저런 놈들 안 잡아가고 뭐 하나 몰라.'

'쉿! 듣겠다.'

사람들의 보는 시선이 따갑다.

그런 시선을 은근히 즐기는 듯한 각성 장교 수행원들.

백서연은 서둘러 태주를 따라가면서.

"역을 나가시면 차량이 대기 중입니다."

"오늘 일정은요?"

"없습니다. 호텔로 바로 갈 겁니다."

"그래요?"

어서 가서 푹 쉬어야지.

"백서연 총괄 경영자님은 수행원들과 함께 좀 노세요. 오랜만에 뉴서울 오신 건데."

"놀 시간이 없습니다."

항상 바쁜 백서연.

호텔 가서도 일은 해야 한다.

구례 본사가 잘 돌아가는지 보고도 받아야 하고.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찾았다."

"저기다!"

"저 사람 맞아?"

"빨리빨리 가."

카메라, 마이크와 녹음기를 들고 부리나케 달려오는 일련의 무리들, 모두 기자들이었다.

백서연이 재빠르게 대응했다.

"도소령님."

이미 각성 장교들은 움직이고 있었다.

태주를 양옆으로 네 사람씩 에워싸고, 두 명은 앞으로 나가 손을 올려 카메라 촬영을 막았다.

촤라라락! 촤촤촤촤···.

카메라 플래시 터지는 소리.

"김태주 회장님! 뉴서울 진출에 대해 한 말씀만 해주십시오."

"해독제와 회복제를 구례 이외의 도시에서도 판매할 예정입니까?"

"군부와 커넥션이 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지리산 마수 부산물을 구매하는 과정에서 특혜가···,"

"회복제는 마수 사냥에 있어 필수적인 물건으로 알고 있는데, 그걸 독점 생산한다는 건 기업윤리에 어긋난다고 보는 시각이 많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지금이라도 공신력 있는 제약회사와의 협업을 통해 가격을 낮추고 생산량을 끌어 올릴 생각은 없으십니까?"

세상이 망하고 다시 재건되었지만 변하지 않는 것들이 많았다.

그중의 하나가 바로 기레기들.

바로 그때!

저벅저벅.

맞은편에서 나타난 한 무리의 사람들.

갑자기 태주 일행을 보고 멈칫하더니, 곧 앞으로 빠르게 다가와 진행 경로를 막아섰다

그 모습을 놓칠세라 기자들은 연신 셔터를 눌러대고 있었고.

통통한 몸집의 남자가 태주 앞으로 손을 내밀며 나왔다.

"이거 누구신가 했더니, 여기서 만날 줄이야. 태홍 바이오 김태주씨죠? 뉴서울 구경하러 오셨나?"

이건 또 뭐야?

태주가 말을 하려는 찰나, 백서연이 먼저 나섰다.

"이동우 사장님?"

"아! 백과장이었군. 우리 회사 그만두고 나가더니 얼굴이 좋아졌어. 반갑네. 한때 한솥밥 먹던 직원이 이렇게 성공한 모습을 보니 흐뭇하군. 하하하!"

짐짓 호탕하게 웃는 이동우.

그러나 백서연의 표정이 싸늘하게 변했다.

이 새끼 때문이구나.

기자들도 단순히 취재를 나온 게 아니었다.

이동우의 사주를 받았겠지.

"이게 무슨 무례입니까? 회장님 앞길을 막다니, 예의도 안 배웠나요? 그리고 전 백과장이 아니라 태홍 바이오 총괄경영자입니다."

"오! 총괄경영자! 대단하시네."

"비켜요! 걸리적거리지 말고."

태주는 실로 감탄했다.

이게 바로 걸크러쉬지.

하지만 이동우는 유들유들 능글맞은 표정으로.

"백과장 많이 컸어. 아무튼 내가 김태주씨와 나눌 이야기가 있어서 말이야."

"비키라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못 비키겠다면?"

이 새끼, 아까부터 살살 긁네.

도민수와 각성 장교들이 앞으로 우르르 걸어가.

"자자, 물러납시다. 길 막지 마시고."

그래도 이동우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도 각성자 수행원들을 데리고 왔다.

"넌 뭐야? 저리 안 비켜?"

"하아, 싹 치워버려!"

"누가 할 소리!"

도민수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한주먹감도 안 되는 새끼들이 머리 꼿꼿이 세우고 노려보고 있지만, 차마 건드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차차착! 찰칵, 차차칵!

계속 이어지는 기자들의 플래시 세례.

태주 또한 얼굴을 찡그렸다.

분위기가 묘해졌다.

난데없이 벌어진 대치 상황.

태주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봤다.

그리고 이동우의 속셈을 알아차렸다.

'이것들 봐라?'

마치 마중 나온 것처럼 뉴서울 역에 나타난 이동우, 그리고 취재한답시고 우르르 몰려와 셔터를 눌러대는 기자들.

또 기자들 틈에 몰래 익스퍼트 등급의 각성자 한 명도 섞여있었다.

문신을 숨기려고 마스크까지 썼다.

태주는 픽, 하고 웃었다.

그리고 이동우 사장에게 눈을 맞추면서.

"야!"

"···뭐라고? 지금 나보고 야라고 불렀나?"

"셋 셀 때까지 비켜라. 그럼 그냥 넘어가 준다. 하나!"

이동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더니 폭소를 터뜨리면서.

"크크크크크, 아이고, 배야! 너 정말 웃기는 놈이네? 크크크, 뭐? 넘어가 줘? 여기가 구례인줄 아나 본데···,"

"둘!"

"흐흐흐, 뭐, 이해해. 듣기론 학교 교육도 제대로 못 받았다지? 파주에선 폐인처럼 방구석에만 틀어박혀 있었고."

"셋!"

"오! 셋 다 셌구나. 이제 그냥 안 넘어가겠네? 뭘 어쩌려고, 날 치기라···, 음? 자, 잠깐!"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뒷걸음질 치는 이동우 사장.

"어어어?"

하지만 태주는 이동우의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양손은 바지 주머니에 넣고 그저 멀리서 살기만 놈에게 실어 보냈다.

마수만 피어를 사용할 줄 아나?

살기를 이용하는 무공들이 얼마나 많은데.

마침 적당한 무공이 있다.

마음에 기를 실어 사람을 죽이는 의형살인(意形殺人)엔 훨씬 못 미치지만 최소한 망신을 줄 수 있다.

이동우는 주춤주춤 계속 뒤로 물러났다.

왜 저러는지 다른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

태주의 살기는 오로지 이동우만을 향해 있었으니까.

살기가 더더욱 거세졌다.

이동우는 숨이 턱 막혀왔다.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

'왜 이러지?'

결국엔,

털썩!

두 무릎을 꿇고 말았다.

스사앗!

살기가 절정으로 치달았다.

"으으으···."

태주의 살기는 이동우의 몸 전체 근육을 한순간에 경직시켜 버렸다.

그리고 살기를 단번에 확 풀어버리면···.

툭!

"히익?"

팽팽했던 근육이 순식간에 이완된다.

주르륵!

이동우는 자신의 괄약근을 통제할 수가 없었다.

바지가 흥건하게 젖어 들었다.

그것도 모자라 뉴서울 역 타일 바닥으로 강이 되어 흘렀다.

심약한 사람들이 엘리트 마수의 피어에 당했을 때 종종 오줌을 싸곤하는 이유였다.

촤촤촤촤촤촤촤촥!

카메라 플래시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려왔다.

어느새 백서연도 스마트폰으로 그 장면을 찍고 있었다.

< 뉴서울 역에서. - 여기까지 무료입니다. > 끝

ⓒ 꾸찌꾸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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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유창고 - 유료 시작(골드 이벤트) >

미리내 제약 이동우는 적합자였다.

반면 회장인 아버지는 각성자.

어릴 땐 각성을 기대했지만, 재능 탓인지, 운 탓인지 서른 후반의 나이에도 아직 적합자에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그는 꿀릴 게 없었다.

각성이 뭐가 중요해?

설령 마스터라고 해도 겁나지 않았다.

지금도 자신이 부르면 만사 제치고 달려올 마스터들이 수두룩한데.

오늘도 슈페리어 등급의 각성자를 데리고 왔다.

원래 이동우는 잔인한 성격.

목적을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도 가리지 않는 소시오패스.

살인, 납치, 폭력···,

일말의 주저함도 없었다.

그렇게 미리내 제약이라는 왕국을 만들어왔다.

그래서 태홍 바이오가 뉴서울에 진출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그저 가소롭기만 했다.

결국 자신의 왕국 안에 흡수될 것이다.

이동우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김태주가 뉴서울에 상경한 이상 신고식을 거하게 치러주면서 이곳이 만만하지 않다는 걸 똑똑히 각인시켜 주려고 했다.

물론 김태주에 대해서도 따로 조사했다.

마스터에 필적하는 무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그래서 함정을 팠다.

서울에 올라오자마자 구설수를 만들어 사회적으로 매장시켜 버린다.

그 연극에 스스로 출연하기로 했다.

일부러 갈등을 유도하고, 놈이 반응만 해주면 된다.

적당히 연출해주면 데리고 온 기자들이 없던 사실도 있는 것처럼 만들어, 거기에 살을 붙이고, 잔뜩 과장해서 신문이나 방송에 내보낼 것이다.

뉴서울 언론이 얼마나 매콤한지 직접 겪어보라지.

그리고 절반은 성공했다.

이미 충돌이 있었으니까.

내일 모든 신문과 뉴스에 도배가 될 것이다.

- 태홍 바이오 김태주 회장, 뉴서울 역에서 자신이 가던 길을 막았다며 갑질과 폭력 행사

- 우연히 만나 인사를 청한 기업인 E씨, 난데없는 봉변을 당해

- 여기는 구례가 아니다. 황실과 법을 무시하는 행위, 엄중한 조사를 통해 죗값을 치러야

이렇게!

그런데 이게 무슨 상황이지?

무릎을 꿇은 건 둘째치고, 바지에다가 오줌을 지려?

자신은 적합자다.

시스템 각성만 이루지 못했을 뿐, 웬만한 각성자 씹어먹을 정도로 강했다.

그동안 먹은 영약만 몇 개인가?

그런데 고작 눈만 마주쳤다고 바지에 오줌을 줄줄 흘리다니.

알 수 없는 기운에 사로잡혀 온몸의 근육이 바짝 굳어버렸다.

그리고 한순간에 풀려버린 긴장, 결과는 참혹했다.

"무, 무슨 짓을!"

"무슨 짓이라니? 내가 뭘 했다고?"

태주는 여전히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주저앉은 이동우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내가 웬만하면 그냥 가려 했는데···."

살찐 볼을 푸들푸들 떨고 있는 이동우.

"페어플레이하자. 개수작 부리지 말고."

"···."

"사업가로서 선을 지키면서 살려고 노력 중이야. 그런데 네가 먼저 그 선을 짓밟으면 그땐 나도 깡패가 되는 거야."

"···."

이동우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핏발 선 눈으로 죽일 듯 태주만 노려보고 있었다.

절대 인정하지 않겠다는 태도.

이런 놈은 그냥 두면 반드시 문제가 생긴다.

많이 겪어봤다.

강호의 당군악으로서 말이다.

"하아, 난 정말 모르겠단 말이야. 재벌가 자식들 정도면 교육도 잘 받았을 텐데, 너무 멍청한 거 아니야? 너만 그런가?"

"···."

"그냥 여기서 끝낼래?"

태주는 무한공간에서 머리카락만큼 가느다란 세침 하나를 몰래 꺼냈다.

스윽.

이걸로 놈을 찌르면 당장은 아니더라도 최소 닷새 안에 생을 마감할 터.

순간!

기자들 틈에서 구경만 하고 있던 한 남자가 마스크를 벗고 앞으로 걸어 나오며 태주에게 말했다.

"그만해 주시죠."

언제 나오나 했다.

"누구···?"

"처음 뵙겠습니다. 은하 길드 부길드장 전경철입니다. 미리내 제약회사와는 업무 협약을 맺고 있습니다."

"아하, 그러시구나. 그런데 기자들 틈에 숨어서 뭐 하셨나?"

전경철은 공손하게 머리를 숙였다.

"제가 대신 사죄드리겠습니다. ···어쨌거나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여기서 끝내는 게 어떻습니까?"

"시작도 거기서 했으면서, 끝내는 것도 마음대로 하시겠다?"

"그저 죄송할 따름입니다."

그러면서 전경철은 품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태주에게 건넸다.

"언제 한번 전화 주시죠. 사죄의 의미로 제가 뉴서울 풀코스로 대접해드리겠습니다."

"풀코스라, 말만 뻔지르르한 풀코스는 아니겠죠?"

"분명 만족하실 겁니다."

"그래요? 그럼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오늘 어때요?"

"···네, 네?"

"이따가 연락할게요. 저 혼자."

"어어, 그, 그렇게 하십시오."

태주와 전경철이 이야기하는 동안.

백서연은 기자들을 노려보며 싸늘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어떤 기사든 우리 회장님 이름이 거론된다면 내가 가만히 안 있을 거예요. 기사 똑바로 쓰세요."

그러고 나서 그녀는 이동우 앞에 쪼그려 앉으며 말했다.

"이봐요. 이동우 사장님."

"···."

"앞으로 사람 봐가면서 수작을 부리세요. 이 멍청한 재벌 새끼야!"

"···너,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알아?"

"어쩔 건데? 나도 눈 돌아가면 뵈는 게 없는 년이야."

"미친년이!"

백서연은 스마트폰을 이동우의 눈앞에 흔들었다.

"조금 전에 다 찍어뒀거든요. 누가 개망신당하는 현장을, 아주 줄줄 나오던데요? 양이 너무 많으셔. 전립선 튼튼해서 좋겠네."

"씨발!!!"

"제국 내 모든 인터넷 게시판에 올려버릴 수도 있어요. 제목을 뭘로 정할까요? <재벌 3세가 전립선이 너무 강하다> 이런 거? 원하시는 대로 정해드리죠."

"···그럼 네가 무사할 줄 알아?"

"나도 알아요. 그 정도 각오도 없이 내가 이러고 있을까 봐, 지금 당장 한번 해볼까요?"

이동우는 입을 다물었다.

이년, 알고 봤더니 완전 또라이다.

"잘 알아들었을 거라고 믿어요. 그리고 목격자들 입이나 막아요. 그럼 이만."

태주와 백서연 일행은 뉴서울 역을 나섰다.

미리 대기하고 있는 3대의 승용차들.

운전자는 각성 장교 수행원들이 맡기로 했다.

자동차에 타자마자 백서연이 태주에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회장님, 동선이 알려지게 해서."

"하하하, 그게 숨긴다고 숨겨지나요?"

"이동우 사장이 역까지 찾아올 줄은 정말 몰랐어요. 저도 처음엔 원만하게 풀고 싶었지만···."

"저쪽에서 작정하고 나왔던데, 백사장님은 신경 쓰지 마세요. 이 건은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네."

조수석에 타고 있던 도민호 소령도.

"죄송합니다. 회장님. 제가 미리 막았어야 했는데."

"하아! 이제부터 죄송하다는 말 금지입니다. 그리고 오늘 호텔 들어가서 같이 한잔합시다."

"수행원으로서 어떻게···."

"명령입니다. 아니면 오늘 기차로 구례에 내려가시든가."

단단히 엄포를 놓고.

그렇게 태주 일행은 호텔에 도착했다.

태주는 자신의 스위트룸에 딸린 미팅실에 사람들을 모았다.

그리고 룸서비스로 푸짐한 음식과 술을 시킨 후, 사람들과 만찬을 즐겼다.

사람들이 각자 자신의 방으로 돌아간 뒤.

태주는 늦은 밤에 전경철 은하 길드 부길드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풀코스 준비됐나요? 그럼 만납시다."

갑작스러운 전화에 당황하는 듯한 전경철의 목소리.

- 지, 진짜 오시겠다고요?

"그럼 거짓말이겠어요? 온다고 했잖아요. 나 혼자."

스마트폰 너머로 침묵이 흘렀다.

아마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는 모양.

이윽고.

- 호텔 앞으로 차를 보내도 되겠습니까?

"마음대로 하세요. 앞에서 기다릴게요."

- ···좋습니다. 두 시간 후에 차를 보내겠습니다.

두 시간이라,

그동안 뭔가를 꾸미겠지.

오늘 밤은 방해받지 않고 홀로 움직일 생각이다.

괜히 누군가 따라붙으면 거추장스럽다.

태주는 느긋하게 기다렸다.

뉴서울 풀코스.

과연 어떤 맛일까?

'참! 뭘 입고 가지?'

드레스 코드도 매우 중요하다.

'그냥 트레이닝복으로 입자.'

그리고 잠시 후.

호텔 앞에서 기다리던 태주 앞에 고급 승용차 한 대가 섰다.

문을 열고 나오는 이는 은하 길드 부길드장 전경철.

"모시겠습니다."

"이거 기대되네요. 솔직히 풀코스는 말만 들었지 한 번도 경험해본 적이 없어서."

"기대하셔도 좋을 겁니다."

태주는 승용차 뒷자리 앉았다.

그러자 차가 스르륵 부드럽게 출발했다.

풀코스에 이동우 코스도 나올까?

제발 나왔으면 좋겠다.

※ ※ ※

지구와는 다른 차원의 선계(仙界).

내공과는 다르게 선기(仙氣)는 심법을 통한 운기로는 보충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선기가 부족하다고 해서 선계 생활에 큰 지장을 초래하는 건 아니다.

그래도 불이익 몇 가지가 있다.

가끔 부여되는 인간계 강림에 제한을 받고, 신선술이 약해지며, 환수계의 영수들에게 무시를 당한다는 것 정도.

'가만히 생각하니 킹받는군.'

김태주와의 두 번의 영혼 연결 탓인지, 독선 당군악의 입에서 무심결에 지구에서 자주 쓰는 유행어가 튀어나왔다.

'무시당하고 살 수는 없지.'

선계에서 가만히 지내다 보면 조금씩 선기가 채워지기는 한다.

물론 빨리 채우는 방법도 있다.

선계의 보물인 천도(天桃) 복숭아를 먹으면 다 해결된다.

아마 채워지고도 남을 터.

그러나 그게 어디 구하기 쉽나?

차선책이 있다면 신선들에게 한 달마다 하나씩 지급되는 선도(仙桃) 복숭아를 먹으면 선기를 보충할 수 있다.

선기가 소량 들어있는 선도 복숭아.

천도 복숭아만큼은 못하지만 선기를 채우기에 더없이 효과적이다.

문제는 한 달에 한 개씩이라 수량이 부족하다는 것.

그래서 같은 동료 신선을 살살 꼬시는 중이었다.

"삼봉 선인, 하나만 부탁합시다. 우리 같은 강호 출신 아니오. 내 무당파와도 인연이 있으니."

"흐음, 내 손에 무한공간 술법진 새겨주면 생각해 보겠소,"

"아니, 그 술법진에 선기가 얼마나 많이 들어가는데, 복숭아 한 개 받고 새겨주면 오히려 내 손해요."

"그럼 일없고."

빌어먹을 도사 새끼.

청빈한 삶, 어쩌고저쩌고하더니 욕심만 덕지덕지 붙었다.

"···복숭아 6개 정도면 새겨줄 수 있긴 하오만."

"허어, 독선에 오르니 그대 얼굴에 독기가 좔좔 흐르는군. 6개월 치 선도를 달라니, 너무 염치없는 것 아니오?"

"···."

"그깟 무한공간이야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요."

이게 더 화가 난다.

감히 무한공간을 무시해?

이게 얼마나 신기하고 가치가 있는 술법인데.

무한한 공간에 어떤 물건이든 집어넣을 수 있는···.

'응?'

무심결에 자신의 무한공간을 살피던 당군악의 눈에 전에 보지 못했던 희한한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공간 가장자리 부분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자신이 설정하지 않았던 구역이었다.

'뭐지?'

물건도 들어있는 것 같다.

'꺼내 볼까?'

당군악은 그 구역에서 물건을 꺼냈다.

하나는 매우 잘 알고 있는 물건.

한 자루의 유엽비도.

'내가 넣어둔 건가?'

아마 그런 듯.

그런데 다른 물건들도 더 있었다.

스르릇!

손에 들린 작은 철제 물건.

"헉!"

당군악은 깜짝 놀랐다.

너무 놀라서 손이 벌벌 떨릴 정도.

우화등선한 이후 이렇게 경악한 건 처음.

'···스팸?'

기억이 난다.

김태주와의 영혼 연결로 그가 사는 세상을 간접 경험했을 때 알았던 물건.

'이게 왜···.'

하나가 더 있었다.

꺼내 보니.

"오!"

화려한 금박의 종이 상자가 있었고, 그 안엔 두 개의 유리잔과 검정색 병이 있었다.

이것도 안다.

'돔페리뇽이구나.'

최고급까지는 아니더라도 상당히 고급진 샴페인.

왜 이게 자신의 무한공간에 들어있지?

그것도 지구의 물건이?

'···아!'

그제야 당군악은 깨달았다.

'김태주였어.'

그에게 선기를 전해 무한공간을 생성하게 했을 때, 일종의 공유창고 같은 것이 만들어진 것이 틀림없다.

김태주와 당군악.

서로 영혼이 같고, 선기마저 동일하니.

'대박이군.'

선계에서 지구의 술과 음식을 맛볼 수 있다고?

흐릅, 군침이 싹 돈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삼봉 선인이 당군악에게 물었다.

"독선, 방금 꺼낸 물건들이 다 뭐요? 흉측한 암기는 알겠는데."

"신경 쓰지 않아도 되오. 바쁠 테니 이만 가보시오."

"아니, 신선이 바쁠 일이 뭐가 있다고."

당군악은 능숙한 손놀림으로 돔페리뇽의 마개를 땄다.

퐁!

소리마저 경쾌하다.

유리잔 하나를 들고,

꼬르르륵!

술을 따르니 황금빛 액체에 보글보글 올라오는 탄산 방울.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입으로 가져가 한 모금.

"크아!"

감동적이다.

이거야말로 천상의 맛 아닌가.

삼봉 선인은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당군악이 마시고 있는 액체, 술인 것 같은데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물건이다.

꿀꺽.

게다가 너무나 맛있게 마신다.

"저어, 독선."

"왜 그러시오? 아직 안 가셨소?"

"나, 나도 한 잔만 주시구려."

당군악은 그런 삼봉진인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게 얼마나 귀한 건데, 염치도 없이.

"선도 복숭아 3개."

"···무슨?"

"복숭아 3개면 생각해 보겠소."

"그런 말도 안 되는!"

"싫으면 말든가."

당군악은 스팸 캔도 땄다.

찌지직!

그리고 유엽비도로 작게 잘라서 입에 넣으니.

단짠이 어우러진 자극적인 맛.

"허허, 내 입안이 선계로구나."

삼봉 선인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복숭아 3개를 주겠소. 대신 그 술 한잔과 이 고깃덩어리 하나, 어떻소?"

"콜!"

"응? 코, 콜이라니,"

"좋다는 뜻이오. 복숭아 3개 먼저 주시오."

당군악은 복숭아 3개를 받고 스팸 조각 하나와 돔페리뇽 한 잔을 삼봉 진인에게 따라주었다.

서둘러 한 모금 입에 넣는 삼봉 선인.

"허허, 이런 술이 있었다니."

당군악은 다시 무한공간을 열었다.

아껴 먹어야지.

어디다 보관할까?

저 반짝반짝 빛나는 구역에?

하지만 바로 그 순간!

픽! 하고 사라지는 빛.

'응?'

다시 원래대로 돌아갔다.

'연결이 끊긴 모양이군.'

영혼 연결과 비슷하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연결되었다가 끊어지는 식.

'···다시 연결되겠지?'

꼭 되었으면 좋겠는데.

< 공유창고 - 유료 시작(골드 이벤트) > 끝

ⓒ 꾸찌꾸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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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려준다고는 안 했어. >

태주가 탄 자동차가 뉴서울 시내를 가로질렀다.

삼한제국의 수도 뉴서울.

과거 대한민국이라 불리었던 반도의 소국가였지만 지금은 연해주, 시베리아 접경, 중앙 초원과 맞닿을 정도로 영토가 커졌다.

그래서 삼한제국은 다민족 국가.

토착 민족인 한국계가 가장 많고, 중국계, 일본계, 몽골계, 아시아 남방계, 슬라브계, 심지어 아프리카계까지, 다양한 민족들이 함께 어울려 살아간다.

뉴서울은 원래 있던 도시를 재건한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새로 만든 계획도시였다.

넓게 곧게 뻗은 도로, 막힘없이 이어지는 교통, 최근에 지어진 듯 깨끗한 건물, 번쩍번쩍 빛나는 간판들.

그렇게 한참 시내만 돌던 자동차가 비교적 좁은 골목 안으로 쑥 들어갔다.

'···유흥가인가?'

풀코스라더니 진짜 술집에 데려가는가 보다.

'이러면 실망인데.'

끼익!

자동차가 멈췄다.

전경철 은하 길드 부길드장이 먼저 내려 문을 열어주었다.

"내리시면 됩니다."

"친절하시네."

"별말씀을, 그리고 죄송하지만 잠시 몸수색할 수 있게 허락해주시겠습니까?"

"얼마든지 하세요."

삐빅, 삐비빅,

탐지기를 태주의 몸 구석구석 가져다 대는 전경철.

뭐가 나올 리 있나?

"스마트폰도 안 가져오셨습니까?"

"거추장스러워서."

"네,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이쪽으로."

태주는 전경철의 안내를 받아 지하로 내려갔다.

계단이 꽤나 길었다.

'클럽인 것 같은데···,'

그러나 음악 소리는 하나도 나지 않고.

이제야 조금 기대가 된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어두운 조명과 함께 텅 비어있는 넓은 홀, 장사는 하지 않은 곳으로 보였다.

홀 한구석엔 탁자와 소파 몇 개가 놓여있었다.

그 뒤엔 험악한 인상을 풍기며 도열한 놈들이 9명 정도, 거의 적합자에 각성자도 한둘 섞였다.

'저것들 뉴서울 역에서 본 놈들이네?'

반가운 얼굴도 보인다.

소파에 앉아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이동우 사장.

그리고 그 옆에 소파에 상체를 깊숙이 기대며 다리를 꼬고 앉은 중년인 하나.

얼굴에 난 희미한 문신과 기세를 참고하면 마스터가 확실했다.

삐거덕, 출입구가 닫혔다.

뒤를 돌아보자, 절그럭, 절그럭, 전경철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쇠사슬로 들어온 문 손잡이를 꽁꽁 묶었다.

"뭘 봐? 이럴 줄 몰랐어?"

순식간에 돌변한 전경철.

밖에선 그렇게 친절하던 놈이

이동우도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태주를 노려봤다.

"참나! 진짜 혼자 온 거야?"

태주는 어깨를 으쓱해주면서 비어있는 소파 하나에 털썩 앉았다.

"어, 뉴서울 풀코스라고 얼마나 기대했는데, 뭐야? 아무것도 없잖아."

"클클클, 진짜 너 웃기는 놈이구나? 여기가 죽을 자리라는 건 알고 왔어?"

"아니, 몰랐어."

그러자 맞은 편에서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중년인이 입을 열었다.

"정말 희한하단 말이지."

"누구?"

"아! 내 소개하는 걸 잊었군. 은하 길드 길드장 이두창이라고 하네. 우리 이동우 사장과는 먼 친척뻘이지."

"그래요? 제 이름은 알고 있죠?"

"하하하, 알고는 있네. 김태주, 맞나? 각성자는 아닌 것 같은데···, 대체 뭘 믿고?"

"보시다시피, 이 험한 세상에서 믿을 건 오직 나 자신뿐이죠."

이두창은 태주를 내심 경계하고 있었다.

비록 구례 촌 동네지만 자신의 힘으로 회사를 그만큼 키워낸 사람이 멍청할 리가 없다.

그런데 왜 저렇게 태연하지?

자신이 처한 상황을 모를 리는 없을 텐데.

과연 믿는 게 뭘까?

특별한 무기라도 가지고 왔나?

설마 맨몸으로?

놈을 데리고 올 때 일부러 자동차를 빙 돌게 했다.

혹시라도 미행이 붙었나 확인해보려고.

몇 번이고 확인했다.

미행도 없었다.

그리고 몸수색할 때도 철저하게 조사했다.

스마트폰도, 추적 장치도, 그 어떤 전자제품도 없었다.

'자신을 믿는 다라, 적합자 주제에 너무 건방져.'

적합자라도 보유하고 있는 마나가 많으면 오히려 각성자보다 더 강할 수 있다는 사실은 알고있다.

당장 여기 있는 이동우도 스킬만 못쓴다 뿐이지, 비기너 등급의 무력 정도는 되니까.

그러나 고작 그걸 믿고?

'허세도 아니야.'

분명 뭔가가 있다.

곧 있으면 확인할 수 있겠지만.

이두창이 침묵하자 이동우가 빈정거리면서 말했다.

"겁이 없는 거야? 대범한 거야?"

"대범한 걸로 하자."

"하! 너 지금 우리가 널 어떻게 할 수 없을 거라 착각하는 건 아니겠지?"

"뭘 어떻게 할 건데?"

"좋아. 자세하게 알려줄게."

이동우가 태주의 귀에 얼굴을 바짝 들이대며 속삭였다.

복수심에 가득 찬 목소리, 증오가 절절 흘러넘치게.

"먼저 네 손가락 하나씩 자를 거다. 다음으로 발가락, 그리고 네 혀, 코와 귀, 보는 것도 필요 없을 테니 눈알도 파주고, 이쯤 되면 오줌도 질질 흐르겠지? 그 물건도 자르고, 다음으로 팔과 다리, 머리통만 빼고 통나무처럼 만들어 땅바닥에 굴려줄 거야."

태주는 한숨을 푹 쉬며 답했다.

"···후우, 여긴 뉴서울이잖아. 명색이 제국의 수도인데, 법도 없냐?"

"그래, 뉴서울이 맞아. 법률도 엄격하고, 하지만 너 같은 새끼들을 위한 법은 없어."

이동우는 담배 하나를 물고 불을 붙였다.

그리고 태주의 얼굴에다 연기를 후우, 뿜고는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너무 쫄지는 마. 네가 여기서 멀쩡하게 걸어 나갈 방법이 하나 있으니까."

"그게 뭔데?"

"포자 독 해독제와 태홍 회복제 제조식만 넘겨. 아! 모기 독 해독제는 필요 없으니까, 그걸로 밥 먹고 살면 되고, 내가 널 배려하는 거야."

"배려해주니 고맙긴 하지만···, 못 주겠다면?"

"뒈지는 거지. 또 백서연 그년도 죽이고, 백홍표와 고아원도 활활 태워 버릴 거야."

태주의 눈꼬리가 살짝 위로 치켜 올라갔다.

지금 한 말로 놈의 운명이 결정됐다.

원래 여기 온 목적은 이동우를 굴복시켜 특허 절차에 도움이나 받아 볼까였다.

하지만 그 생각은 접는다.

개심의 여지가 절대 없는 악인.

이런 눈빛을 가진 놈은 많이 만나봤다.

물론 당군악으로서.

"으음, 나도 나름 제약회사 회장님 소리 듣고 다닌다고, 내가 잘못되면 사람들이 가만히 있진 않을 텐데?"

"낄낄낄, 내 장담하지. 네가 이곳에 왔는 줄도 모를 거다. 목격자? 내가 그 정도 대비도 안 하고 널 불러왔을까? 호텔 앞은 물론 이동 경로의 모든 CCTV 카메라를 손봐뒀지. 그러니 헛된 기대는 접어."

"그럼 이곳에도 CCTV가 없나?"

"왜 그딴 게 필요하지? 찍어서 뭐 하려고? 난 절대 증거 같은 건 남기지 않아."

이동우는 환하게 웃었다.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은 모양.

슈페리어 익스퍼트와 마스터까지 왔다.

거기에 각성자 적합자 9명을 합해서 자신까지 총 12명.

그러나 놈은 혼자다.

아무리 특이한 능력을 갖췄다지만 절대 살아나갈 수 없을 것이다.

뉴서울 역에서 놈에게 당한 수모.

여기서 갚는다.

충분히 분이 풀릴 때까지 철저하게 괴롭히면서.

사실 제조식을 넘겨받는다고 해도 절대 살려둘 생각이 없다.

백서연 그년도.

"아, 그럼 잘됐네."

"···뭐?"

이동우는 무시하고,

태주는 이두창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런 식의 일 처리가 한두 번이 아닌 것 같은데···, 내 생각이 맞아?"

"자네, 우리 은하 길드 이름은 들어봤나?"

"솔직히 처음 들어봐. 이상하긴 해. 아무리 그래도 마스터가 있는 길드면 알려질 법도 한데 말이야."

태주의 말에 웃음을 터뜨리는 이두창.

"하하, 역시 멍청하지는 않군. 우린 사실 길드가 아니야. 법적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를 대신 해결하는 조직이랄까, 은하 길드는 막 만든 이름이고."

"역시, 근데 사람은 많이 죽여봤어?"

"당연하지. 네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이. 아마 내가 마수 밀집지대에 던져둔 시체들이 몇인지 넌 죽어도 모를 거다. 너도 곧 그렇게 될 거야."

"쯧, 마스터나 돼서 이런 짓이나 하고."

"이유야 단순해. 다 돈 때문 아니겠나."

그럴 줄 알았다.

마인은 아니지만 마인보다 더 좆같은 새끼들.

늘 하는 생각이지만 자신은 당군악과는 확실히 다르다.

만약 그가 여기 있었다면 먼저 팔다리 다 부러뜨려 놓고 대화를 했겠지.

아니, 대화가 무슨 필요가 있어?

역에서 만나자마자 죽였을 것이다.

태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클럽 홀 중앙으로 휘적휘적 걸어갔다.

"충분하게 대화를 나눴으면 이제 시작하자."

"하! 이 미친놈이?"

황당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는 이동우.

반면 경계하는 눈초리로 태주의 전신을 훑어보면서 무기를 빼드는 이두창과 전경철.

이두창의 날카로운 회칼에서 진한 강기가 솟아올랐다.

긴장감이 흘렀다.

물론 태주는 조금도 긴장하지 않았지만.

"저놈 잡아서 내 앞에 무릎 꿇려!"

이동우가 지시가 떨어지자 주위에서 공격 신호만 기다리던 조직원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눈 깔아!"

"씨발 놈, 넌 뒈졌어."

"아킬레스건 하나 자르고 시작한다."

"저 새끼, 손모가지는 내 거야."

지금까지 말을 너무 많이 했다.

따라서 대꾸해주기도 귀찮다.

그냥 죽이자.

근데 무슨 무공으로 이놈들을 처리할까?

솔직히 이게 가장 큰 고민.

암기는 피가 튄다.

피가 튀면 치우기 어렵고.

또한 독을 쓰면 놈들이 중독되어 죽으면서 바닥에 침이나 토사물을 질질 흘리겠지.

깔끔한 현장을 위해선 역시 맨손이 최고.

혈인독장은 독을 써야 하니 제외.

그럼?

'남자는 주먹이지.'

진주 언가의 언진명에게서 배운 언가권,

혈인독장과 비슷하지만 독을 쓰지 않고, 또 손바닥이 아닌 주먹으로 펼친다.

일명 뚝배기 깨기.

침투경을 언가권에 응용해 뇌를 곤죽으로 만들어버리기.

가장 깔끔하다.

태주는 달려오는 놈들을 맞이했다.

저벅저벅 걸어가서 주먹으로 앞에 오는 놈부터.

퍽! 콰직!

"끅?"

두개골도 깨지고 뇌도 박살나고.

뒤따라오는 놈의 공격도 슬쩍 피한 후에.

퍼억! 콰악!

칼날이 눈앞에서 번득였다.

칼을 든 손을 잡아 끌어당겨서 관자놀이에 한방.

퍽! 꽈득!

태주의 주먹이 은은한 강기로 휩싸였다.

간결한 동작으로 그냥 치고, 피하고 치고, 끌어다 치고···,

털썩, 털썩, 털썩.

도미노처럼 픽픽 쓰러진다.

3명이 동시에 쓰러뜨리자 이제야 사태를 파악한 조직원들.

"···어?"

"무슨?"

"주, 죽었어?"

"왜 이래? 일어나!"

태주는 기다려주지 않았다.

환영미리보로 놈들 사이로 뛰어 들어가.

퍽! 퍽! 퍼퍼퍽!

콰직! 꽈득! 콰지직!

털썩, 털썩, 털썩···,

추풍낙엽처럼 쓰러지는 조직원들.

어떻게 사람의 몸놀림이 저렇게 빠르지?

절대 두 방을 때리는 법이 없었다.

한방이면 끝이었다.

그제야 상대가 안 된다는 걸 깨달은 듯 나머지 조직원들은 이리저리 도망쳤다.

"으아아아!"

"사, 살려줘."

"안 돼!!!"

클럽 홀 중앙에는 오직 태주의 주먹만이 보였다.

이동우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 뭐야?"

앞으로 걸어가던 전경철의 회칼 든 손이 파르르 떨린다.

원래는 바로 합류하려고 했는데 두 발자국 걸어가니 벌써 6명이 죽었다.

"···이런!"

이두창도 아무것도 못 한 채, 태주의 몸놀림만 구경하고 있었다.

그도 전경철과 함께 가세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똑같이 타이밍을 놓쳤다.

'제기랄! 어째 찜찜하더라니.'

이두창은 빠르게 소파 뒤로 숨었다.

반쯤 넋이 나간 이동우와 전경철.

마치 저승사자처럼 앞으로 다가오는 태주.

"왜들 이래? 아까는 그렇게 기세등등하더니."

그러자 이동우가 벌벌 떨면서 손을 내저었다.

"가까이 오, 오지 마."

"갈 건데?"

전경철은 가만히 움직이지 않았다.

저 주먹을 피할 수 있을까?

자신할 수 없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놈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형님은 살금살금 소파 뒤로 숨어서 놈의 뒤편으로 이동하고 있었고.

이심전심, 이두창과 전경철은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 마음이 통하는 사이.

언제 어떤 식으로 공격해야 할지 머릿속에 그려진다.

두창이 형님이 급속 이동 스킬을 펼치는 순간이 바로 공격할 때.

자신은 놈의 상체, 목을 찌르고 형님은 하체, 허벅지를 베어버린다.

형님의 마나 블레이드 회칼이면 자르지 못할 것이 없다.

적이 마스터라고 가정해서, 안전하고 확실하게 죽일 방법을 찾던 과정에서 만든 합격술,

놈이 가까이 왔다.

전경철은 긴장했다.

꿀꺽.

침 한번 삼켜주고.

"잠깐!"

"응?"

"내가 잘못했다. 지금 내 손으로 이동우, 이 새끼 죽이고 끝내면 안 될까?"

"어. 안돼."

"이럴 필요까진 없잖아. 난 그저 지시에만 따랐을 뿐이라고, 네게 개인적 감정 따윈 없어."

"난 있는데?"

"이런 씨발 새끼가!"

순간!

태주의 목젖을 향해 기이한 궤적으로 날아드는 회칼.

휘릿!

동시에!

허벅지 뒤쪽에서 느껴지는 따가운 살기.

쉬잇!

'벴나?'

'찔렀나?'

그런데 손에 감각이 없다.

방금까지도 눈앞에 있는 놈이 순식간에 사라졌고.

"뒤, 뒤! 뒤에 있잖아! 머, 멍청아!"

스르륵,

어느새 이두창의 등 뒤에 나타난 태주,

마치 손뼉을 치려는 듯 이두창 머리 양쪽에 각각 두 손을 위치시켰다.

"혀, 형님!!!"

동시에 박수!

쫘악!

꽈지직!

이두창의 머리가 세로로 길게 짜부라졌다.

두 눈이 딱 붙어버릴 정도로.

그리고 멀리서 쏘아진 태주의 주먹이 어느 틈에 바로 앞까지 다가와,

츠팟!

"어···,"

퍼억!

뽀각!

전경철의 이마에 그대로 적중했다.

털썩.

이제 마지막 한 놈.

이동우는 이미 무릎을 꿇고 있었다.

"사, 살려주게. 제, 제발! 난 저런 놈들과는 달라."

"뭐가 달라?"

"쓸모가 있단 말이야. 황실과 고위 관리에 내 연줄이 많아. 자네가 뉴서울에서 날개를 펼 수 있도록 최대한 지원해주겠네."

사실 원래 목적이 이거였다.

이동우를 이용해 뉴서울에서 기반을 잡는 것.

"지원?"

"미리내 그룹 몰라? 특허청이든, 식약청이든, 미리내에서 월급 받는 공무원들이 수두룩하다고,"

"흐음, 날 도와준단 말이지?"

"그, 그래! 약속할게."

"그럼 뺨 한 대로 끝내자. 운 좋은 줄 알아."

"오! 그럼 살살···,"

스팟!

짜악!

회애애액!

뿌드득!

태주의 풀스윙에 목이 3바퀴나 돌아간 이동우.

"씨바아···,"

"살려준다고는 안 했어."

털썩.

< 살려준다고는 안 했어. > 끝

ⓒ 꾸찌꾸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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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홍 생기불끈 >

모두가 죽어버렸다.

여기서 멀쩡히 살아있는 사람은 태주 혼자.

별다른 죄책감도 들지 않았다.

죽여야 할 놈들을 죽인 것뿐이니까.

만약 이동우가 백서연이나 백홍표, 그리고 고아원만 들먹이지 않았어도 안 죽였을 것이다.

구례에서 두 명의 상임위원을 굴복시켰을 때처럼, 중독시키는 선에서 그쳤을 터, 애초의 목적이 그거였다.

중독시키되 살려는 주고, 취할 건 취하고.

나중에 개심의 싹이 보이면 완전하게 해독시켜주고.

하지만 살려두면 안 되겠다는 직감이 들었다.

이러다 나중엔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공격이 들어오겠지.

그전에 싹을 자르는 것이 최선이었다.

이두창과 전경철도 마찬가지.

힘을 가진 놈들이 마수들을 사냥하기는커녕 재벌의 하수인이 되어 추악한 짓을 저질러?

백번 죽어도 싸다.

'자, 이제 어쩐다?'

뒷정리는 확실하게.

먼저 놈들의 스마트폰과 신분을 알 수 있는 지갑등을 수거해 가루로 으깨거나 갈기갈기 찢어서 무한공간에 넣고.

'시체도 치우자.'

바닥엔 피 한 방울 없었다.

시체만 없애면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원래 무한공간에 들어가는 크기는 길이와 폭, 두께, 모두 1m.

다른 조건은 괜찮다지만 길이에 문제가 있다.

하지만 해결 방법은 있다.

접이식 자전거를 보관하는 것처럼 집어넣으면 된다.

사후 경직이 오기 전에 재빨리 허리를 굽히게 해서.

스르륵, 스르륵, 스르륵.

태주는 시체 위에 손을 뻗어 무한공간 기타 구역에 넣었다.

나중에 구례로 가서 지리산 밀림 깊숙한 곳에 던져놓으면 끝.

태주는 밖으로 나가 천천히 뉴서울 시내를 걸었다.

그렇게 한참을 돌아다니다가 택시를 잡아타고 원래 묵고 있던 호텔에 내린 후, 정문으로 당당히 걸어 들어갔다.

나중에 시간이 흐르고 흘러 이동우가 사라졌다는 걸 알아차리면 수사가 진행되겠지.

그러다 보면 자신도 용의선상에 오를지도 모르고.

어쨌거나 전경철과 통화를 한 기록이 남아 있을 테니까.

'그럼 어쩌라고?'

시체도 없고, 혈흔도 없고, 증거도 없고···.

한마디로 완전범죄였다.

'가서 푹 자고, 내일 지점 방문이나 준비하자.'

※ ※ ※

뉴서울 신종로 태홍 바이오 지점 사옥.

20층짜리 건물이지만 태홍 바이오가 사용하는 층은 맨 꼭대기 3개 층.

그러나 실제로는 한 개 층만 사용하고 있었다.

현재 근무하는 직원들은 약 20여 명, 공간이 많이 남았다.

아침부터 직원들이 청소하느라 부산을 떨었다.

구례 본사에서 회장님이 방문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그중에 백서연이 직접 영입한 사람들.

최동일 전(前) 미리내 전자 전무이자 현(現) 태홍 바이오 뉴서울 지점장, 그리고 구상천 부지점장, 마석우 영업부장에, 송수희 마케팅 팀장까지.

요즘 피곤에 쩔어 사는 최동일 태홍 바이오 뉴서울 지점장이 직원들에게 전했다.

"회장님께서 곧 도착하신다네. 하던 일 마무리하고 다들 앉아있어."

"마중 나가야 하는 거 아닙니까?"

구상천의 물음에 최동일은.

"아니, 그냥 편하게 있으라는군."

"아, 네, 알겠습니다."

드디어 실제 고용주가 온다.

자신들에게 월급을 주는 사람.

마석우 부장이 송수희 팀장에게 조용히 말했다.

"우리 회사가 잘 될까?"

"백사장님을 믿으세요. 마부장님도 그분만 믿고 왔잖아요."

"우리 백사장님이야 능력이 좋긴 하지, 하지만 난 회장님이 조금 그래."

"왜요?"

"여기서 포자 독 해독제와 회복제를 생산 판매하지 않으시겠다잖아."

"아···."

"무슨 약을 팔지는 모르겠지만, 이래서야 시작이나 제대로 할는지···."

솔직히 송수희도 그게 마음에 걸렸다.

그 두 약품은 이미 검증된 약이다.

특허도 받기 쉬울 것이고, 식약청 통과도 빠르게 진행될 텐데.

성공이 보장된 약은 냅두고, 신약을 만들어 팔겠다?

과연 성공할까?

뉴서울 약품 시장은 경쟁이 매우 치열하다.

하루에도 수십 가지의 약들이 시장에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그 와중에 몇몇 대기업들은 나눠먹기식으로 제국의 시장을 지배하고 있다.

예를 들어 미리내 제약은 영약과 마나 회복제, 발해 바이오는 각종 치료제, 후지 제약은 건강식품···.

태홍 바이오의 주력은 뭐니 뭐니 해도 모기 독, 포자 독 해독제와 태홍 회복제, 이것들을 뉴서울에서 팔면 무조건 대박나게 되어 있다.

그런데 이 약들은 구례에서만 판다니.

회장님 지시사항이라며 뉴서울에선 다른 약을 출시할 계획이란다.

직원들은 생산하게 될 약의 정체도 모르고 있었다.

특허가 통과되면 바로 생산에 돌입할 예정이라는 것만.

앞으로 넘어야 할 산들이 많다.

특허만 받으면 뭘 하나?

식약청 승인을 받아야지.

그때였다.

저벅저벅, 회사 사무실로 들어오는 사람들.

선두에 굉장히 젊어 보이는 청년이 앞장섰고, 그의 옆엔 백서연이, 검정색 양복을 입은 남자와 여자들이 따랐다.

직원들이 수군대기 시작했다.

남자, 여자들의 외모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뭐지? 저 조각상들은?'

'와! 얼굴이 장난이 아니네.'

'죄다 각성자들이야.'

'어? 정말이네. 문신 멋있다. 얼굴과 개잘 어울려.'

요즘 대기업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각성자들을 고용하고 있었다.

필요하기 때문이다.

재력으로 모든 게 해결되는 세상이 아니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

'그럼 맨 앞에 선 사람이 김태주 회장인가?'

'젊네.'

'그쵸? 얼굴도 잘생겼어요.'

'흐음, 차라리 나이가 좀 있어 보였다면···.'

'쉿! 조용. 듣겠어요.'

최동일 지점장이 달려와 태주 일행을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회장님. 처음 뵙겠습니다."

백서연이 중간에서 서로 소개해 주었다.

"회장님, 이분이 최동일 지점장입니다."

"아!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많이 피곤하시죠?"

"하하하, 아닙니다. 즐겁게 일하고 있습니다."

"쉬엄쉬엄하세요."

태주는 최동일 지점장이 보자마자 안쓰럽다.

잘하면 다크서클이 턱까지 내려오겠다.

구상천 부지점장과도 인사를 나누고.

"직원들과도 인사를 나눴으면 하는데···."

"대회의실로 모시겠습니다. 한꺼번에 하시죠."

태주가 회의실로 들어가자 사무실에 있던 직원들이 따라 들어갔다.

모두들 의자에 앉자.

"안녕하십니까. 김태주입니다. ···이렇게 여러분들을 만나게 되니 마음이 든든합니다."

말이 잘 안 나온다.

태주로서는 너무 어려운 일.

사람들 모아놓고 이야기하는 게 쉬울까?

마수나 마인들 조지는 게 쉬울까?

20명밖에 안 되는 직원들이지만 그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자 조금 부담스럽다.

그래도 꾹 참고.

"우리 다 같이 시원한 음료수 한 잔씩 마시고 시작합시다."

태주는 백서연에게 눈짓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회의실 밖에서 도민수가 커다란 아이스박스를 하나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각성 장교들이 박스에서 음료수 한 병씩을 꺼내 탁자에 앉은 모든 직원들에게 돌렸다.

"하나씩 마시고 이야기 나누세요."

"아! 네네, 감사합니다."

"제, 제가 돌려도 되는데···,"

"괜찮습니다. 편하게 앉아 계십시오."

회사직원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무려 각성자가 음료수를 서빙하다니.

그것도 심상치 않은 외모의 남녀가.

하도 송구스러워서 음료수를 받고도 마실 생각을 하지 못했다.

"참! 드시기 전에 알고 드세요. 이건 앞으로 태홍 바이오에서 출시하게 될 자양 강장제 시제품입니다. 꺼림칙하면 안 드셔도 되고요."

태주의 말에 직원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동시에 음료수 뚜껑을 돌려 따 마셨다.

우리 회사에서 출시할 음료라면 무조건 마셔야지.

자양 강장제는 약도 아니다.

편의점이나 마트에서도 파는 비타민 음료 같은 것.

회장님의 수행원들이 뒤에 있다가 직원들이 마시고 난 병을 하나하나 다시 수거해갔다.

그리고 간담회가 시작됐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고 갔다.

특별한 내용은 없었다.

지점 위치가 어떠니, 근무 여건은 괜찮은지, 회사 복지는 마음에 드는지.

그러다가 갑자기 손을 번쩍 들고 발언을 요청하는 한 명의 직원.

"마석우 영업부장입니다. 회장님께 요청을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네, 마부장님, 편하게 말씀하세요."

"다름이 아니라 포자 독 해독제와 태홍 회복제를 구례에서만 파시겠다는 결정을 재고해주시기 바랍니다."

"으흠."

"말씀드리기 죄송하지만 성공이 보장된 약품을 왜 판매하지 않겠다는 건지, 저로선 이해하기 힘듭니다."

예상했다.

성공이 보장된 약을 왜 뉴서울에서 팔지 않겠다는 건지, 자신이 직원이라도 불만을 가질 터.

사실대로 말해주자.

이들도 알아야 하니까.

"네, 이유를 설명해 드리죠."

직원들이 태주의 말에 집중했다.

"기존 태홍 바이오의 제품은 제조과정에서 특별한 가공 처리가 요구됩니다. 그걸 할 수 있는 기술자들이 많지 않아요. 그래서 생산량이 극히 부족한 실정입니다."

"그럼 기술자들을 더 많이 양성하면 되지 않을까요?"

"익히기 매우 어렵습니다. 나름 정교한 기술이라, 특허를 내지 않은 이유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처리 과정을 모르면 절대 카피할 수 없거든요."

"아!"

직원들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지.

아무런 이유 없이 구례에서만 팔까?

기술자 양성도 그렇다.

만약 열심히 키워놨는데 다른 제약회사에서 기술자를 빼가면?

회사가 망하는 거나 다름없다.

아직 질문이 남았는지 또 한 번 손을 드는 마석우 부장.

"감사합니다. 회장님 말씀을 들으니 이해가 갑니다만, 그런데 혹시 이번에 특허 예정인 신약은 특별한 가공 처리가 필요 없는 물건입니까?"

"맞아요. 정확합니다. 좀 전에 드신 자양 강장제가 주력이 될 겁니다. 그래서 특허와 식약청 허가를 받으려는 거고요."

"만약 특별한 가공 처리가 없다면 약의 효능이···,"

마석우는 말끝을 얼버무렸다.

원래 하려는 말은,

'···약의 효능이 떨어질 수 있다는 말씀이시죠? 경쟁력이 없는 약도 문제일 텐데요.'

라는 거였다.

직책이 영업부장이다 보니, 약품 경쟁력에 매우 민감한 마석우.

하지만 이번 신약의 개발자도 김태주 회장이라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제가 우려하는 건 건강음료 시장은 이미 포화상태라는 겁니다. 약효도 별 다를 바 없을 텐데, 경쟁력이 문제입니다. 가격이나 마케팅, 상대가 안 됩니다. 뚫고 들어갈 여지가 없습니다."

태주는 이런 사람이 좋다.

월급을 주는 고용주 앞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문제점을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용기.

"하하하, 약효는 걱정하지 마세요. 경쟁력도 충분히 있으니까. 흐음, 그러고 보니 슬슬 반응이 올 때가 된 것 같은데···."

"네?"

마석우는 그저 눈만 끔벅거렸다.

무슨 반응?

태주가 기다렸던 반응은 가만히 앉아있던 최동일 지점장에게서 먼저 나왔다.

여기서 제일 나이가 많은 사람.

요즘 지점 조직을 구성하느라 스트레스를 가장 많이 받는 최동일 지점장.

"···회, 회장님?"

"네, 말씀하십시오. 지점장님."

"이 자양 강장제···, 특별한 성분이 들어가지 않은 게 화, 확실합니까?"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약초들을 가공해서 만든 겁니다. 조합 배율이 남다르긴 하지만, 절대 해롭지 않습니다. 믿으세요."

긴꼬리 쎅토끼에게도 먹였다.

당연히 아무 일 없었고.

부작용이 있긴 했는데, 쎅토끼의 번식 활동이 두 배로 늘어났다.

밥만 먹고 나면 그 짓, 워낙에 약빨이 잘 받는 놈이라 그런 듯했다.

자체적인 임상시험도 끝마쳤다.

백서연도, 백홍표도, 그리고 본사에서 일하는 일부 직원들도 꽤 오래 강장제를 마셨지만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

"아아아, 이럴 수가."

최동일 지점장이 벌떡 일어났다.

초롱초롱한 그의 눈빛.

아니, 좀 전까진 피로에 절어 흐리멍텅했던 눈이?

또 격무에 시달려 양 볼까지 내려왔던 다크서클도 씻은 듯 사라졌다.

희한하다.

완전한 피로회복.

고작 음료수에 불과한 자양 강장제가 이렇게 극적인 효과를 보여준다고?

"···한 병 더 없습니까?"

"죄송합니다. 사람 수에 맞춰서 가지고 온 거라, 나중에 생산이 시작되면 마음껏 드세요."

젊은 사람들의 반응은 조금 느렸다.

아무리 젊더라도 일할 때 쌓이는 피로는 공평한 것.

다만 체력이 좋아서 잘못 느낀다 뿐이지.

그러나 마시기 전과 마시고 난 후의 차이는 분명했다.

"나도 그러고 보니 몸이 가뿐한데?"

"엥? 혹시 플라시보 아니야? 난 아직···, 어? 잠깐만! 글자가 왜 이렇게 잘 보여?"

"으아! 진짜 피로가 풀린다. 눈이 상쾌해. 안경을 벗어도 되겠는데?"

"찌뿌둥하던 몸이 이렇게 개운할 수가."

"나, 나도 마찬가지야. 세상에! 지금까지 마셨던 피로회복제는 다 가짜였어."

"···피로회복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마석우 부장도 일어나서 회의실 주변을 걸어봤다.

어제 과음해서 속이 불편했는데, 숙취가 어느새 사라져 버렸다.

'이거 진짜였어.'

약품 경쟁력?

이거 하나면 카페인 음료든, 피로회복제든, 제국 전체 건강음료 시장을 씹어먹을 수 있다.

흥분한 목소리로 태주에게 물어오는 마석우.

"회장님, 이 약 이름이 뭔지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올 것이 왔다.

제 입으로 말하기가 조금 어렵다.

그래서 태주는 백서연을 슬쩍 쳐다봤다.

"후,"

그녀는 한숨을 쉬더니.

"자양 강장제는 태홍 생기불끈입니다. 그리고 외상 치료제도 있는데 그건 태홍 새살쑥쑥이고요."

"···아!"

약 이름이 촌스러우면 어떤가?

효과만 있으면 되지.

이 자양 강장제의 무서운 점 하나.

일반인들도 언제 어디서나 사 먹을 수 있는 건강식품.

판매시장의 범위가 다른 약에 비해 훨씬 넓다.

희망이 보인다.

그깟 해독제와 회복제 없어도 된다.

태홍 바이오 뉴서울 지점은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

※ ※ ※

선계(仙界).

당군악은 매일매일 자신의 무한공간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대체 언제 반짝이나?

우연과 우연이 겹쳐 만들어진 김태주와 자신의 공유 공간.

분명 다시 연결될 것이다.

그게 언제일지 모르지만.

바로 그때!

그렇게 애타게 기다리던 순간이 오고야 말았다.

"떴다!!!"

반짝인다.

하지만 텅 비어있었다.

어때? 자신이 채워 넣으면 되지.

당군악은 재빨리 선도 복숭아 하나와 미리 준비해 놓은 두루마리 서신을 반짝이는 공간에 집어넣었다.

이제 기다릴 일만 남았다.

하지만 잘 될까?

김태주가 무한공간이 반짝이는 걸 인지해야 하고, 그리고 그 안에 물건이 있는지 확인도 해야 한다.

모든 건 운에 달렸다.

제발 편지를 읽어주길.

< 태홍 생기불끈 > 끝

ⓒ 꾸찌꾸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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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홍 새살쑥쑥 >

삼한제국 본토와 식민지 일본 열도를 오가는 교통수단은 배와 비행기.

육지와 마찬가지로 하늘과 바다 또한 마수들이 산다,

그러나 놈들도 영역을 지키기에, 그곳만 피해 가면 문제가 없다.

파주 영지 안주인 혼다 미쯔이는 항공편을 이용해 자신의 친정에 갔다.

규슈 영지에 도착해 자신의 아버지 혼다 카즈오를 만나 자신의 억울한 사정을 털어놓는 미쯔이.

태평이와 태천이, 두 아들이 마수 토벌 견학을 위해 지리산 마수 방어군단에 임시 배속을 받은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텐트 설치 훈련을 받다가 일반 병사에게 모욕을 당하고, 그로 인한 얼차려, 동료 사관생도들의 따돌림, 보급에서의 불이익, 그리고 중앙 제국군에 임관할 수 없을 거라는 저주, 굴욕적인 폭행까지.

"그래서 우리 손자들이 그 고생을 한 이유가 다 김태주란 놈 때문이다?"

"맞아요."

"증거는?"

"···어, 없어요. 그러나 지리산 마수 방어군단과 그놈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쯧쯧."

혼다 카즈오는 딸에 대한 불쌍한 마음보다 한심하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분명 내 피를 타고났을 터인데 이렇게 멍청할꼬.'

외손자들도 다를 바 없다.

아무리 나이가 어려도 그렇지.

같은 사관생도에게 반항 한번 못해보고 처맞아?

그 대상이 백두 그룹의 딸이라 해도 말이다.

"그래서? 이 애비가 뭘 해주길 바라느냐?"

"김태주, 그놈을 죽여주세요."

"하하하."

혼다 카즈오는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지리산 마수 토벌의 주역이자, 구례를 지배하다시피하고, 또한 황실에서도 눈여겨보고 있는 태홍 바이오의 회장을 죽여달라?"

"···."

"확실한 물증이 있으면 모를까. 네 머릿속 망상만으로?"

"망상이 아니에요."

"네가 우리 규슈 영지를 망하게 할 작정이구나."

"아, 아버지, 그런 뜻이 아니라."

"닥치거라!"

혼다 미쯔이는 찔끔하면서 고개를 숙였다.

뚝뚝 떨어지는 눈물, 그걸 보니 카즈오의 마음도 편치 않았다.

"마음을 굳세게 가져야 한다. 네게 우리 규슈 영지의 미래가 달렸어."

딸을 파주 영지로 시집 보낸 이유가 뭐겠나?

점점 바다로 가라앉고 있는 규슈 영지를 벗어나 본토로 가기 위함이었다.

단지 기후변화 때문만은 아니다.

얼마 전에도 큰 지진이 일어났다.

그래서 규슈 영지의 영역은 더 좁아졌고.

물론 지금이라도 가솔들을 이끌고 본토로 가면 되지만 어디에 정착하라고?

혼다 가문의 번영을 이어갈 영지 하나는 있어야 하지 않겠나.

그래서 무능하고 고지식한 김웅방 준장에게 시집을 보냈다.

영리한 머리로 남편을 휘어잡아 파주 영지를 장악하라고.

'그나저나 그냥 놔두면 아무것도 안 되겠군.'

밥이 다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변수가 나타났다.

잘못하면 파주를 김태주에게 빼앗길지도 모른다.

결단을 내릴 순간이 왔다.

"딸아."

"네, 아버지."

"넌 아직 네 남편을 사랑하느냐?"

그러자 표독스럽게 변하는 혼다 미쯔이의 눈빛.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워요."

"그래, 그렇구나."

카즈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조만간 너에게 물건 하나가 전해질 것이다."

"물건요?"

"절대 해독할 수 없는 독, 마스터라도 먹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지독한 약물."

"네?"

미쯔이는 깜짝 놀랐다.

독?

그걸 왜 자신에게?

"파주 영지 지배자가 부재하면 그 권리는 자연스럽게 첫째 외손자 태평이에게 넘어가겠지. 하지만 아직 태평이는 익스퍼트에도 이르지 못했으니···,"

카즈오는 자리에서 일어나 커다란 창 너머로 시선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후견인이 필요할 것이야. 게다가 그 후견인이 마스터라면 얼마나 든든할꼬, 예를 들어 네 오빠 같은, 손자들에겐 외삼촌 말이다."

"마, 맞아요. 오빠가 파주로 오시면 태평이와 태천이에게 튼 힘이 될 거예요."

"그러려면 네 남편은···,"

"아!"

미쯔이는 누군가가 자신의 뒤통수를 내려치기라도 한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

영지 후견인 제도.

영지 지배자가 부재, 혹은 어떤 원인으로든 사망했을 시, 영지 상속인을 뒤에서 도와주는 사람.

김웅방이 죽으면 당연히 그 직계, 태평이가 상속을 받는다.

하지만 태평이, 혹은 그의 자손이 마스터가 되지 못하면 다시 영지를 박탈당해 제국으로 귀속된다.

이때 필요한 것이 후견인.

태평이를 마스터로 키우든가, 태평이의 자식을 마스터로 키우든가.

혼다 지로는 마스터다.

혼다 카즈오의 아들이며 혼다 미쯔이의 오빠, 김태평 김태천의 외삼촌.

후견인으로서 부족함이 없을 터.

"무슨 말인지 이해했어요. 아버지. 하지만, 하지만···,"

"지금 당장 결정을 내리라는 건 아니다. 정 꺼림칙하면 하지 않아도 그만이고."

"···."

미쯔이는 침묵했다.

아무리 우유부단하고, 능력 없는 남편이지만 그동안 쌓은 정이 있는데.

게다가 두 아이의 아버지 아닌가.

반면 혼다 카즈오는 확신했다.

미쯔이가 하게 될 결정을.

어쨌거나 자신의 피를 타고 난 딸이니까.

여기에 또 하나 더.

만약 사위인 김웅방이 독으로 죽으면 누가 가장 의심받을까?

아내인 자신의 딸?

천만에!

그보다는 쫓겨난 아들이 가장 의심받지 않을까?

마나 거부자로서 아비에 의해 군에 강제 입대까지 당했고, 호적에서도 파였으며, 심지어 독을 잘 다룬다고 소문이 난 김태주 말이다.

그만한 살해 동기가 없다.

의심이 솔솔 피어오르게 군불도 때주고.

설령 의심만 받고 끝난다 해도 충분하다.

※ ※ ※

간담회가 끝나고 태주는 회사 직원들을 자신이 묵고 있는 최고급 호텔에 초대했다.

회식은 필수지.

그저 그런 식당이었다면 갑작스런 회식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많겠지만 호텔 라운지 하나를 통째로 빌려서 하는 초호화 회식인데 누가 마다해?

거기에 하나 더.

"와! 스테이크다!"

"내가 좋아하는 갈비찜도 있네?"

"흐음, 냄새가 끝장나. 배양육은 아닌 것 같고···,"

"양이 너무 많아요. 이거 다 먹을 수 있나?"

백서연이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오늘 회식을 위해 회장님께서 특별히 포자 독 낙타 고라니 3마리를 구례에서 공수해 오셨습니다. 마음껏 드세요."

그러자 호텔 라운지에 침묵이 흘렀다.

꿀꺽.

고라니 고기?

정말?

"어···,"

"어쩐지 냄새부터 장난이 아니더라니."

"자, 잠깐 사진 좀 찍고."

"나도."

여기저기서 들리는 카메라 셔터음.

찰칵, 찰칵, 찰칵···.

회식이 시작됐다.

누가 더 많이 먹는가 경쟁하듯 정신없이 포크와 칼, 젓가락을 움직이는 직원들.

"우하! 이 회사에 들어오길 잘한 것 같아."

"훗! 난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태홍 생기불끈 하나로 제약시장 휩쓸어 버릴걸?"

"영업하기 진짜 편하겠다."

"마케팅도 마찬가지지 않아? 광고나 필요하겠어? 하룻밤 편의점이나 슈퍼에 깔아버리면 며칠도 안되 매진될 거다."

"며칠은 무슨! 난 이틀 본다."

걱정도 있었다.

"그러고 보니 지금 공장은 너무 작은 것 같은데···,"

"맞아. 물량 대기 버거울 거야."

"거기에 그 뭐냐? 외상 치료제, 새살쏙쏙?"

"쑥쑥."

"그것도 효과가 있으면 쌍으로 시너지 효과가···."

송수희 마케팅 팀장이 은근하게 마석우 부장을 보며 말했다.

"한번 시험해봐요. 새살쑥쑥, 진짜 효과가 좋은지 보게."

"아니, 송팀장! 약효 실험해 보려고 생살을 자르라고?"

"약품 경쟁력 정도는 알고 영업해야죠."

"하아···,"

마석우는 고민했다.

살짝 손가락 정도 베어볼까?

그전에 먼저 회장님이 새살쑥쑥을 가지고 오셨는지 먼저 알아보고.

하지만 마석우가 상처를 낼 일은 없었다.

포자 독 낙타 고라니 스테이크가 너무나 맛있는 나머지 정신없이 칼질하던 한 직원의 손이 접시에 미끄러져 옆에 있던 다른 직원의 손등을 베어버렸다.

"아악!"

"헉! 미, 미안. 이걸 어째!"

새빨간 피가 줄줄 손등을 타고 흘렀다.

"내, 냅킨! 물수건 없어?"

"빨리 응급실 가자."

"아, 아니 고기는 마저 다 먹고 갈게."

"미쳤어? 이 와중에 무슨 고기."

"···고라니잖아. 이때 안 먹으면 언제 먹어?"

그걸 보고 가만히 있을 태주가 아니었다.

"이거 발라보세요."

"···네? 아! 회, 회장님."

"새살쑥쑥 시제품입니다."

"으음, 마, 많이 발라주세요."

태주는 납작한 원형의 금속 통을 열어 진득한 황색의 연고를 푹 찍어서 다친 손등에 발라주었다.

그러자 우르르, 손을 다친 직원에게 모여드는 사람들.

아무래도 제약회사 직원들이다 보니 약효에 대한 호기심은 어쩔 수 없었다.

효과는 바로 나타났다.

바르자마자 멎어버리는 피.

"···피가 안 나와?"

"최소한 지혈 효과는 끝내주네."

"진짜 안나? 상처 좀 벌려봐."

"꾹꾹 눌러야지."

"그래도 안나."

"쫙쫙 짜내. 그래도 피가 안 나오는지 보자."

다친 한 사람을 두고 난리가 아니었다.

"아씨, 다들 저리 가요! 안 그래도 아파 죽겠는데."

웅성웅성하며 자리로 돌아가는 사람들.

마석우 부장과 송수희 팀장도 다시 의자에 앉았다.

"쓸만하죠?"

"응, 저거도 꽤 괜찮네. 비록 생기불끈보단 극적인 효과가 없지만."

"하아, 할 일이 많겠어요. 마케팅 작업에, 가격 결정도 해야 하고."

"특허가 먼저야. 그리고 식약청 심사도 통과해야지."

"태홍 새살쑥쑥 홍보할 때 급속 지혈 문구도 추가하고···."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 후에도 계속되는 회식.

다들 먹성이 좋았다.

포자 독 낙타 고라니 3마리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리고 배도 부르고, 거나하게 취해서 회식이 끝나갈 무렵.

"으악!"

좀 전에 손을 다친 직원이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왜?"

"또 무슨 일이야?"

"피가 나?"

"설마 부작용이 있는 거야?"

흩어졌던 직원들이 다시 모였다.

"사, 상처가···."

"상처가 뭐?"

"붙었어요. 완전히 아물었다고요."

"···응?"

칼에 베였던 직원이 손을 번쩍 들었다.

"봐요! 흉터도 거의 없어요!"

"···미친!"

"그새?"

날카로운 칼이었다면 이해는 한다.

하지만 여기 스테이크 칼엔 톱니가 있었다.

즉 상처가 난 데가 매끄럽지 않다는 말, 저러면 잘 아물지도 않는다.

그런데 저렇게 깨끗하게?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마석우가 송수희에게 말했다.

"···홍보문구에 꼭 넣어. 급속 외상 치료."

"흉터 제거도 넣어야죠."

"급속이란 말이 중요해. 그걸 강조해야 해."

태주도 솔직히 놀랐다.

금창약, 아니 태홍 새살쑥쑥은 지금까지 자신만 사용했었다.

물론 효과야 뛰어났다.

바르면 상처가 아물 정도로.

하지만 자신은 기본적인 재생력이 남들과 다르지 않나?

저 직원은 마나 순응자, 일반인이고.

'전부터 느낀 거지만 확실해졌어.'

지구의 약초가 강호 무림의 약초보다 품질이 더 뛰어나다.

자이언트 반달곰 웅담만 해도 그랬다.

독은 또 어떻고?

물론 당군악의 기억을 그대로 흡수한 탓도 있지만 단시일 안에 7성에 오른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일 터.

'마나, 기(氣)의 농도부터가 차이가 나니까.'

지구가 훨씬 더 짙다.

아무튼 만족했다.

직원들이 자신이 만든 신약을 마음에 들어 하고, 이 정도면 미래비전도 보여준데다, 친밀감도 쌓은 것 같고.

태주는 백서연에게 물었다.

"내일 일정은요?"

"정해진 일정은 없습니다. 하지만 전 최동일 전무랑 특허권 신청 전략을 짤 계획입니다."

"그래요? 으음, 그럼 전 리더스 클럽이나 갔다 올게요."

"네!"

가서 인맥이나 넓혀보자.

※ ※ ※

회식이 끝나고.

태주는 자신의 호텔 룸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피곤하네.'

내향적 성격이라 그런지, 누구 만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또 아무리 무한공간이지만 사람의 시체를 넣고 뻔뻔히 돌아다니는 것도 그렇고.

'여기서 가장 가까운 마수 밀집지대가 어디야?'

스마트폰으로 검색해보니 마땅한 곳이 없었다.

당연하다.

여긴 삼한제국 수도 뉴서울.

마수 밀집지대가 있을 리 없지.

'결국 지리산으로 가야 하나.'

아니면 백두산 밀집지대로 한번 들려보던가.

'시체들은 잘 있겠지.'

무한공간은 시간이 멈춘 곳, 유기체가 절대 썩을 일이 없다.

처음에 넣었던 그대로 보존된다.

무한공간을 열어보니 기타 구역에 차곡차곡 쌓인 시체 더미.

그리고 한쪽 구석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공간.

"···어?"

반짝반짝?

자신이 설정한 구역이 아닌 곳.

거기에 물건을 넣었다가 빛이 사라져 꺼내지 못했던 것이 기억났다.

'반짝하면 꺼낼 수 있을지도.'

유엽비도 한 자루를 넣어둔 것이 떠올랐다.

물론 스팸이나 샴페인도 넣었지만 그거야 안 꺼내도 그만,

하지만 유엽비도는 아니다.

다시 챙겨야지.

태주는 반짝반짝 빛나는 구역에 집중했다.

그런데?

"뭐, 뭐야?"

유엽비도는 없었다.

스팸도, 샴페인도.

거기 들어있는 건 어린아이 머리통만 한 복숭아와 종이로 된 두루마리.

"이게 왜 여기에···,"

태주는 서둘러 두루마리와 복숭아를 꺼냈다.

스스슷!

잘못 본 게 아니다.

호텔 방안을 가득 채우는 복숭아 향기.

태주는 두루마리를 펼쳤다.

편지, 무려 한글로 쓰여 있었다.

- 나 당군악일세. 자네가 보낸 스팸과 돔페리뇽은 맛있게 먹었네. 너무나 놀랐어. 이렇게 지구의 문물을 직접적으로 경험할 줄이야, 원인에 대해 고민해봤네. 아마도 공유창고가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공유창고?

그 반짝이는 곳이 당군악과 물건을 함께 나눌 수 있는 공유 공간?

- ···그 공유창고가 언제 반짝이는지 나도 모르겠네. 다만 정해진 것도 아니고 발현 시간도 무척 짧아···,

후다닥!

태주는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호텔 룸 안의 냉장고를 열었다.

각종 고급 양주와 과자, 음료수들이 눈에 들어왔다.

지체하면 빛이 꺼질라.

손에 잡히는 대로 무한공간 공유창고에 집어넣었다.

또 뭐 없나?

될 수 있으면 비싼 거.

자신이 가진 가장 비싼 물건은 암기인데, 그거야 당군악에겐 별 쓸모가 없을 테고.

아아아!

죄책감이 밀려온다.

신선에게 스팸을 먹였다니.

이게 무슨 어처구니없는 짓인가?

"아! 시계."

무려 5천만 원을 호가하는 시계다.

하지만 서슴없이 공유창고로 직행.

아직 공간의 여유가 있다.

또 뭐가 있지?

그러나 그 순간!

픽! 하고 꺼지는 빛.

"이런!"

아쉽다.

몇 개 보내보지도 못했다.

그것도 눈에 차지 않는 것들로만.

"···다시 열리겠지?"

다음에 보낼 땐 제대로 준비해서 보내야겠다.

< 태홍 새살쑥쑥 > 끝

ⓒ 꾸찌꾸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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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서울에서 만난 전우(1) >

태주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돔페리뇽은 그나마 괜찮지만.

'신선에게···, 스팸?'

자신이 의도한 일이 아니지만 결과가 그렇게 됐다.

순 살코기도 아니고 자투리 고기와 지방을 갈아, 온갖 조미료, 첨가제를 섞어 만든 혼합육을, 무려 선계에 사는 고매한 선인에게 먹였다니.

물론 자신은 매우 좋아하는 음식이다.

따뜻한 밥에다 얇게 구운 스팸 한 장 올려 먹으면 그만한 반찬도 없다.

'후우, 빨리 알았더라면.'

설정하지 않은 구역이 반짝일 때 눈치챘어야 했다.

무한공간이 누구 때문에 만들어졌나?

바로 자신과 같은 영혼인 당군악의 선기에 의해서다.

다행인 건 여기가 뉴서울 최고의 고급호텔 스위트룸이라는 것, 그래서 룸바, 냉장고에도 꽤 고급스러운 술과 음료수, 과자와 안주들이 들어있었다.

막판에 자신이 차고 있던 손목시계도.

반면 당군악이 자신에게 준 건?

편지에 쓰여있었다.

아직도 그 향기를 호텔 방안에 가득 채우고 있는 선도 복숭아.

선계의 보물이자 오로지 선인만이 먹을 수 있는 전설의 과일.

태주가 공유창고에 넣은 잡다한 물건과는 차마 비교도 할 수 없는 귀한 물건이었다.

'미치겠네.'

이건 뭐, 비슷하기라도 해야 마음이 편하지.

맨날 받기만 하고, 정작 자신이 준 건 스팸이나 술, 군것질거리.

태주는 침대 위에 올려진 선도 복숭아를 두 손으로 들었다.

'이게 신선들이 먹는 거라고?'

정말 향기가 기가 막힌다.

머리가 어질어질할 정도로.

'흐음.'

자신은 혼원무상독령공을 익혔다.

그래서 영약은 먹어봐야 별 소용이 없다.

독으로 성장하는데, 영약은 먹어봐야 똥이 될 뿐.

하지만 선도 복숭아라면?

존재하는 모든 무형의 에너지 중에서 최상위에 위치하는 선기, 하위에 속한 어떤 에너지라도 포용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원래 독(毒)이라는 것도 자연의 일부분 아닌가.

독을 품고 살아가는 동식물들은 셀 수도 없이 많다.

인간이 자신들에게 해로운 물질을 독이라고 이름 붙였을 뿐이지, 독은 생태계에 있어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

당군악 또한 독선(毒仙)이라 불린다.

즉 선기는 독마저도 포용한다는 의미.

그래서 무한공간을 만들 때도 독정엔 아무런 영향이 없었다.

태주는 선도 복숭아를 입으로 가져가 한입 베어 물었다.

푹! 터지는 과즙.

입안에서 뿜어지는 강렬한 복숭아의 향기.

"흐릅."

미미(美味)!

씹을수록 황홀하다.

먹기 시작하니 멈출 수가 없었다.

어느새 두 손으로 잡아도 남을 만큼의 크기의 복숭아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

'씨도 없구나.'

씨가 있었다면 심어보기라도 했을 텐데.

그건 그렇고.

선도 복숭아엔 미량이라도 선기(仙氣)가 들어있다.

전엔 극히 제한된 상황에서 당군악에게 전해 받았지만 지금은 직접 입으로 섭취했다.

과연 독정(毒精)엔 어떤 영향을 미칠까?

새로운 독을 섭취하면 독정은 꿈틀하면서 반응한다.

하지만 복숭아로는 그런 반응은 나오지 않았다.

다만 선기가 독정에 스며든 건 확실했다.

스르르르르···,

독이 아니지만 마치 독처럼 독정은 선기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따뜻해.'

왠지 단전이 부드러워진 느낌.

이거 말고는 달라진 것이 없나?

어쨌거나 효능이 문제가 아니다.

그 맛이 너무나 좋은데.

'참! 이럴 때가 아니야.'

확실하게 준비해야지.

최고급 답례품으로.

공유창고가 반짝일 때 바로 집어넣을 수 있게.

크기는 여행용 캐리어 만하니 그 안을 꽉 채워야 한다.

'뭐가 좋을까?'

사실 어떻게 보면 단순하다.

강호 무림, 혹은 선계와는 다른 차별성을 지닌 지구만의 독특한 물건들이면 된다.

음식도 차별적인 것으로.

예를 들어 초콜릿이나 커피.

그건 이미 보냈고.

'독선에게 가장 필요한 걸 생각해내야 해.'

그렇다면?

'선계는 심심한 곳이잖아.'

2번째 영혼 연결 당시 당군악의 기억을 통해 알아낸 사실.

'무료함을 달래줄 물건이라면···,'

결론이 나왔다.

영화와 드라마.

지구의 다채로운 문화 컨텐츠.

그러나 즐기기 위해선 전기가 있어야 한다.

'휴대용 발전기 크기가 어느 정도지?'

찾아보니.

'공유창고 안에 충분히 들어가겠어.'

마나 결정체를 이용해 전기를 발생시키는 발전기.

'거기에 엘리트 마나 결정체를 넣으면 막 써도 최소 1년은 충분히 돌릴 수 있을 거야.'

전기 문제는 해결됐고,

다음은 컨텐츠.

OTT 플랫폼에 가입해서 정기 결제를 하고 완결된 드라마나 영화를 태블릿에 다운받으면 된다.

그럼 통신이 안되는 곳에서도 볼 수 있다.

'용량이 제일 큰 걸 구매해야지.'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즐길 수 있게 빔프로젝터와 접이식 스탠드형 스크린도 넣자.

다 들어갈지 모르겠다.

이걸 언제 다 준비한다?

어쩔 수 있나?

백서연에게 부탁해야지.

각성 장교 수행원들도 있고.

※ ※ ※

다음 날 아침.

태주는 백서연을 보자마자 어제 생각해뒀던 물건들의 구매를 부탁했다.

"···아, 네, 회장님 준비해드리겠습니다."

살짝 의문을 표하려는 듯하다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는 백서연.

그리고 태주는 도민수 소령을 따로 불러서.

"휴대용 발전기가 필요합니다. 될 수 있으면 크기가 작은 걸로, 돈은 얼마든 상관없어요. 무조건 최고급 제품으로,"

"마침 제가 뉴서울 시내에 아는 판매점이 있습니다. 연료로 쓰는 마나 결정체는 어떻게 할까요? 그쪽에다 이야기하면 자기들이 사서 장착해 주긴 하지만."

"마나 결정체는 이걸로 장착하라고 이야기해주세요."

"네!"

도민수는 태주가 준 결정체를 받았다.

그런데.

"어?"

"왜요?"

"이, 이거···, 엘리트 마나 결정체 아닙니까?"

"맞아요. 무슨 문제 있나요?"

"으아, 발전기에 엘리트를 꽂으시겠다고요?"

"네."

"어어, 에, 엘리트를 바, 발전기에···."

당군악에게 가는 발전기인데 뭐가 아깝다고.

반면 넋이 나간 표정의 도민수.

영약의 재료로 쓰이는 엘리트 마나 결정체.

이걸 전기 발전 용도로 사용하다니.

"저하고 같이 시내 나갑시다. 저도 볼일이 있어서요. 도소령님도 따로 일 보시고."

"···네, 네네."

오늘 볼일은 바로 리더스 클럽.

태주가 탄 자동차가 호텔을 출발했다.

뉴서울이 세워질 때 과거 서울의 지명을 그대로 따와 이름을 지은 데가 많다.

예를 들어 신종로, 신압구정, 신잠실 등등.

리더스 클럽은 뉴서울 시내, 신압구정에 위치한다.

태주는 차 안에서 리더스 클럽 사전 조사를 시작했다.

백서연이 미리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보고서만 읽으면 끝.

'사교 모임이네.'

제국 내에서 힘깨나 쓴다는 사람들이 모여 친교를 나누고 서로 정보를 공유하는 장.

아무나 초대장을 받지 못한다.

그리고 초대장을 받았다 하더라도 끝이 아니다.

리더스 클럽에도 빌어먹을 등급이 존재한다.

최하 브론즈부터 시작해서, 실버, 골드, 사파이어, 다이아몬드까지.

'쯧, 다단계인 줄.'

리더스 클럽에서는 순응자, 적합자, 각성자를 따지지 않는다.

가입 기준은 오로지 명성과 사회적 지위.

그래서 태주도 초대장을 받았던 것이고.

'다 와 가나? 무한공간은···,'

가끔 무한공간을 확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언제 반짝일지 모르니까.

반짝일 때 어떤 신호라도 느껴지면 좋겠는데.

거의 도착했다.

차창 너머로 보이는 10층 건물이 바로 그곳.

원통형 건물, 위로 올라갈수록 탑처럼 좁아지는 형태, 화려한 옥빛 대리석으로 마감한 외벽에, 유려한 글씨체로 '리더스 클럽'이라 새겨져 있었다.

"여기서 내려주세요."

"저희가 수행하겠습니다."

"아뇨. 혼자 들어갈게요. 도소령님은 제가 부탁한 발전기 구해주세요. 최대한 빠르게 부탁드립니다."

"네! 발전기에 엘리트 마나 결정체가 똑바로 장착되는지 옆에서 지켜보다가 다되면 바로 가지고 오겠습니다."

태주는 혼자 건물 정문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어떻게 오셨습니까?"

건물 정문을 지키는 가드들이 태주를 막아섰다.

"초대를 받아 왔습니다만."

초대장을 꺼내 보여주니.

"아! 환영합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가드를 따라가는 태주.

1층은 로비였다.

2층부터가 클럽인 듯.

가드를 따라 도착한 곳은 로비 뒤쪽에 위치한 사무실.

미리 연락을 받았는지 모델처럼 늘씬한 여자 한 명이 마중을 나왔다.

"김태주 사장님이시죠? 클럽 매니저 조미영입니다."

"네, 반갑습니다."

"초청장을 한참 전에 보낸 것 같은데 이제야 오셨네요."

"아, 바쁜 일이 있어서요."

"그래도 오셨으니 다행입니다. 일단 앉으시죠."

그리고 조미영의 친절한 설명이 시작됐다.

가입비와 회비, 등급별 회원의 권리와 의무, 그리고 클럽에서 주는 혜택들.

"김태주 회원님은 신입이시고, 물론 해독제 발명으로 큰 성공을 거두셨지만 신규 청년 기업인으로 분류되어 브론즈부터 시작하시게 될 겁니다."

최소 등급이구나.

불만은 없다.

원칙이 그거라면,

"가입비가 50억이지만 그렇게 비싼 건 아니에요. 회원님들끼리 친교를 나누고 서로 얻어가는 정보의 가치를 생각하면 그것도 싸죠."

태주도 이 말엔 동의한다.

정보도 질이 있다.

"정보뿐만이 아닙니다. 비록 브론즈 등급이지만 나름 전문직이나 중견기업 사장님들도 많이 계세요. 회원들끼리 서로 끌어주고 밀어주며, 목적하는 일이 더 쉽게 이뤄질 수도 있고요."

사실 그 부분이 마음에 안 들었다.

그들만의 리그, 그들만의 특혜.

마나 거부자였을 때를 생각해보자.

가입은커녕 초대장도 받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여기 온 목적은 잊지 않는다.

태홍 바이오 뉴서울 지점의 성공을 위해 하기 싫더라도 해야지.

"이제 가입하면 되나요?"

"네! 여기 서명만 하시면 브론즈 회원으로서 자격을 가지시게 됩니다. 가입비는 한 달 안에 납부해 주시고요."

"서명했습니다."

"리더스 클럽 가입을 축하드립니다. 김태주 회원님, 출입증 드리겠습니다. 이걸 목에 거시면 됩니다."

태주는 미리 준비된 갈색의 구리 명패가 달린 목걸이를 목에 걸었다.

"브론즈 등급회원님들은 2층만 이용하실 수 있어요. 실버등급은 3층이고요. 걱정하지 마세요. 금방 3층으로 올라가실 수 있을 거예요."

그래도 클럽 매니저는 사근사근하고 친절하네.

태주는 조미영 매니저와 악수를 한 후 사무실을 나왔다.

'2층이랬지?'

태주는 사무실을 나와 1층 로비로 왔다.

'어떻게 올라가나···.'

안내 부스에 물어볼까?

로비도 구경해볼 겸.

천천히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찰나.

"어이, 거기!"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

그런데 거기?

돌아보니 화려한 옷을 입은 두 명의 남자가 아니꼽다는 눈초리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불렀나요?"

"그래, 당신!"

"왜?"

"명찰을 보니 브론즈 같은데, 왜 자꾸 로비에서 서성거려?"

그러면서 손가락으로 자신의 명찰을 가리켰다.

빛나는 은색의 금속패.

'···참나!'

이런 동네였구나.

등급 따지는 게 군대 계급장보다 더 심한 것 같다.

'환장하겠네.'

역시 성미에 맞지 않는다.

확 탈퇴해버려?

그러나 어쩌겠나?

원래 가장의 어깨에 지워진 짐은 언제나 무거운 법이다.

"여기 얼쩡거리지 말고 빨리빨리 브론즈 클럽으로 올라가."

"그러고 보니 다른 속셈이 있는 거 아니야?"

"맞는 것 같은데? 로비로 들어오시는 높으신 분들, 눈에 한 번 들어보려고 기웃기웃하고 있는 거겠지."

이 새끼들 봐라?

"요즘 들어 저런 놈들이 부쩍 늘었군. 에이, 격 떨어지게."

"리더스 클럽도 물이 많이 흐려져서 그래. 브론즈 명찰 주제에 개나 소나 클럽 회원이라 떠들고 다니고."

···죽여버릴까?

참자.

요근래 많이 죽였다.

대신.

"어이, 거기!"

"어쭈? 너 지금 우리한테 거기라고 불렀···,"

찌릿!

미세하게 살기를 담아.

순간 매서워지는 태주의 눈빛.

"불러···, 부, 불렀어···, 요?"

당연히 쫄 수밖에 없었다.

"어, 거기, 너희 둘, 등급이 뭐야?"

"실버···,"

"그럼 너희 인성은 무슨 등급인 것 같냐? 스스로 판단해봐."

"···."

지구의 독마는 자비롭다.

아니라면 이미 독에 의해 저놈들 온몸이 녹아내렸을 텐데.

그때였다.

갑자기 한산했던 로비가 떠들썩해졌다.

실버 등급의 두 놈도 태주의 눈치를 보더니 엉거주춤 발걸음을 옮겼다.

"오, 오셨다."

"···어어, 빨리 가자고."

"나 어때? 이상한 데 없지?"

"없어. 나는?"

"괜찮아."

정작 높으신 분 눈에 들려고 기웃하는 건 저놈들이었다.

아마도 자신을 경쟁자로 판단하고 시비를 걸어왔을 것이다.

저들도 나름대로 열심히 살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귀엽네.'

다급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클럽 직원들도 총출동했다.

"빨리빨리, 서둘러!"

"매니저님께 연락했어?"

"어, 지금 나오실 거야."

"복장 점검하고!"

"양옆으로 열을 맞춰!"

다다다다.

구둣발 소리가 시끄럽게 들린다.

"시, 실례합니다. 조금만 비켜주세요."

방금 전에 만났던 조미영 매니저도 태주 옆을 지나치며 달렸다.

그리고 정문 밖에서 수행원들을 뒤로 대동하고 들어오는 젊은 남자, 얼굴 한쪽에 작게 새겨진 문신으로 보아 각성자 같았다.

조미영 매니저 및 클럽 직원들은 그가 걸어오는 길, 양옆에서 깊숙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누구지? 다이아몬드 등급쯤 되면 저런 대접을 받나?'

설마 그럴 리가.

'그런데 어디서 본 것 같아. 낯이 익어.'

순간!

당당한 자세로 들어오던 젊은 남자의 눈이 태주의 눈과 마주쳤다.

"···응?"

그리고는 우뚝 발걸음을 멈췄다.

정면으로 바라본 얼굴.

'아하!'

누군지 알겠다.

먼저 인사를 해야 하나?

그럴 필요도 없었다.

다다다다다!

젊은 남자가 눈썹이 휘날리도록 빠르게 돌진해오더니.

"기, 김태주 회장님! 태주씨! 아니, 형님!!!"

태주의 손을 덥석 잡았다.

"여기서 뵙다니 정말 꿈만 같습니다. 언제 뉴서울에 오셨습니까? "

"오래간만입니다. 잘 계셨죠? 그런데 왜 절 형님이라···,"

"덕분에 잘 있었습니다. 진짜 섭섭합니다. 형님하고 저는 지리산 마수 토벌 작전의 전우 아닙니까? 황실에 연락이라도 해주셨으면 제가 마중 나갔을 텐데."

"···."

리더스 클럽에서 최고 등급에 속하는 다이아몬드 회원이자, 황제의 막내아들 5황자 류진철이었다.

< 뉴서울에서 만난 전우(1) > 끝

ⓒ 꾸찌꾸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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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서울에서 만난 전우(2) >

조미영 리더스 클럽 매니저는 지금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김태주 회장과 황자가 아는 사이였어?'

어떻게?

구례에서 막 올라온 사람이 뉴서울에서 가장 고귀한 신분인 황족과 무슨 접점이 있다고?

'지리산 마수 토벌 작전 전우···, 설마?'

그 말이 사실이라면 황자가 지리산 토벌에 참여했다는 말이다.

원래 황실의 행사는 극비리에 진행되기 때문에 웬만한 정보통으로는 파악할 수 없었다.

'거기서 김태주 회장과 만났단 말이구나.'

자신의 추측이 다 들어맞았다고 치자.

그렇다고 저렇게 친밀감을 표시해?

심지어 황자가 저자세로 나오는 것 같다.

김태주 회장은 다소 귀찮아하고 있고.

'누가 보면 김회장이 황자보다 윗사람인 줄 알겠어.'

아무튼 둘은 친한 사이가 확실하다.

조미영은 가만히 김태주와 면담했던 당시를 떠올렸다.

혹시 트집잡힐 만한 일을 저질렀는지.

그의 심기를 거스르는 말을 했는지.

'···없었어.'

하지 않았다.

늘 했던 것처럼 공손하게 대했다.

그래서 살짝 안심이었다.

한편 류진철은 오늘 리더스 클럽에 정말 잘 왔다고 생각했다.

무료한 황실에서 죽치고 있느니, 바람이라도 쐬자고 나왔는데, 이렇게 반가운 얼굴을 보게 됐다.

생명의 은인.

김태주 회장.

그때 그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산청부대 스페셜 레이드 팀은 전멸했을 것이고, 자신도 목숨을 잃었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 일은 공개하지도, 공개할 수도 없었다.

황자가 토벌 작전 과정에서 죽음의 위기에 처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어떻게 될까? 토벌의 성과는 묻히고 말았을 것이다.

뉴서울에 와서도 한동안 바깥을 나가지 못했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도 못한 장소에서 이렇게 만나다니.

반면 태주는 류진철 황자가 부담스럽다.

지리산에서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뜬금없이 형님?

이렇게 사람 많은 데서.

"형님! 혹시 여기 회원이십니까?"

"방금 회원 가입을 했습니다. 그리고 형님이라는 말을 거두어 주십···,"

"오! 저랑 같은 회원이 됐군요. 이거 뿌듯한데요."

"···."

"그렇지 않아도 가입을 권유해 드리려고 했는데, ···실례지만 회원 가입의 목적이 무엇인지 물어봐도 될는지?"

지리산에서 황자가 리더스 클럽을 언급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가입 목적이라.

숨길 필요가 있나?

"제가 최근에 뉴서울에 태홍 바이오 지점을 하나 차렸습니다. 그래서 사업에 도움이 되어보고자 왔습니다만."

"하하하! 알만합니다. 형님도 역시 사업가셨군요."

그러더니 태주의 목에 걸린 브론즈 등급 명패를 물끄러미 쳐다보고는,

"···근데 브론즈 등급?"

"원래 최하 등급부터 시작한다고 해서."

"으음. 클럽 매니저가 그러던가요?"

"네, 잘 설명해주시더군요."

"아···,"

뭔가 곰곰이 생각하는 류진철 황자.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형님."

그리고 손짓으로 조미영 클럽 매니저를 호출했다.

"물어볼 게 있다."

"최선을 다해 답변드리겠습니다. 황자 전하."

"형님, 아니 김태주 회장님께 브론즈 등급을 부여한 것이 그댄가?"

"네? 마, 맞습니다."

"근거는?"

"원칙에 근거했습니다. 군납업체로서 커다란 성공을 거뒀지만, 최근에 회사를 설립한 신규 기업인이며, 그 외엔 달리 내세울 성과가 없기에···, 그럼에도 잠재력을 높이 평가해서 초대장을 보내게 된 겁니다."

"원칙이라···, 그렇군."

틀린 말은 아니다.

겉으로는.

하지만 리더스 클럽이 평범한 친목 단체인가?

제국에서 가장 많은, 양질의 정보가 오고 가는 곳.

그런데 이 클럽의 매니저라는 사람이 김태주에게서 얻어낸 정보가 고작 저거라면 문제가 있다.

일부러 그랬는지, 실수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많은 부분이 누락됐다.

자신의 목숨을 구해줬다는 건 극비 사항이니 모른다고 치고.

지리산 주둔 전 부대에서 군단장과 거의 동등한 대우, 구례에 나타난 마인 척살의 주역, 마수 토벌 작전에서의 결정적 기여.

조금만 발품을 팔면 알 수 있는 사실인데.

특히 리더스 클럽의 정보력이라면.

"초대장은 언제 보냈나? 지리산 마수 토벌 전인가, 후인가?"

"그 전입니다."

"그래? 혹시 구례에 마인이 나타났다는 뉴스를 들어본 적 있나?"

"들어본 적 있습니다."

"그럼 초대장을 마인 출현 이전에 보냈나? 후에 보냈나?"

"으음···, 제 기억이 확실하다면 그 전입니다."

"그렇군."

리더스 클럽의 초대장 발송은 김태주 회장이 구례에 회사를 차린 직후였다.

그러니까 포자 독 해독제가 판매되어 태홍 바이오의 이름이 뉴서울에 알려졌을 때.

"초대장을 보낸 뒤로는 추가적인 정보 수집은 없었나?"

"···하, 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쯧, 맨날 고급 정보, 질이 다른 정보 운운하더니 여기도 별 볼 일 없어졌군."

"무, 무슨 말씀이신지?"

황자 류진철은 자신의 목에 걸린 다이아몬드 등급 명패를 끌러 조미영에게 건넸다.

"오늘부터 리더스 클럽 탈퇴하겠네."

"···네?"

"못 들었나? 회원 명단에서 내 이름 지워도 돼."

"아, 아니! 전하! 가, 갑자기 이러시면···."

"예전의 리더스 클럽이 아니야. 클럽 주인장에겐 내가 따로 이야기하지."

당황한 표정의 조미영.

자신이 직접 한 김태주 회장의 등급판정에 대해 황자가 문제 삼고 나왔다.

그녀는 안절부절못했다.

황자가 탈퇴하면 자신이라고 무사할까?

"자, 잠시만 기다려주옵소서, 황자 전하, 제, 제가···,"

"이미 결정한 사항이다. 입을 다물라."

"아아!"

조미영의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얼마나 고생해서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한순간에 공든 탑이 와르르 무너지게 생겼다.

바로 그때.

태주가 황자 류진철에게 말을 건넸다.

"황자님."

"아! 죄송합니다. 못난 꼴을 보여드려서, 형님도 이깟 클럽 따위는 집어치우셔도 됩니다."

"···흐음."

"사업적인 부분은 제가 직접 돕겠습니다. 이렇게 허술한 클럽엔 기대할 것도 없습니다."

태주의 마음이 냉정하게 가라앉았다.

이건 일종의 갑질이었다.

이해는 한다.

솔직히 그의 존재 자체가 갑 아닌가.

그러나 여기 리더스 클럽에 가입을 결정한 것도, 브론즈 등급을 받아들인 것도 온전히 자신이 한 선택.

'황자면 황자지, 어디서 클럽을 탈퇴해라, 마라야?'

그와 갑질맨으로 함께 엮이는 건 전혀 바라지 않는다.

그래서.

"저는 클럽에 계속 다닐 겁니다만."

"···어? 네네?"

"조미영 클럽 매니저께서 저에게 판정의 이유를 충분히 설명해주셨습니다. 매우 친·절·하·게! 그래서 등록원서에도 서명했고요."

"···그, 그러십니까?"

"뭐, 황자님과 리더스 클럽에 함께하지 못하는 게 안타깝긴 하지만, 전 탈퇴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순간!

황자의 뒤쪽에서 덮쳐오는 살기.

그의 경호원들이었다.

아마 황실 근위병에 속한 자들이겠지.

자신의 행동이 건방져 보인 모양.

이유가 어떻든 황자가 보인 호의를 무시한 셈이니까.

근데 어쩌라고?

그 정도 살기는 가소롭지도 않다.

황자 류진철은 당황했다.

분명 김태주 회장도 자신이 불이익을 받았다는 걸 알고 있을 텐데.

'왜?'

단순히 탈퇴하지 않겠다는 의사만이 아니었다.

자신에 대한 완곡한 질책의 의도도 포함된 듯했다.

'내 일 처리 방식이 잘못됐나?'

그제야 류진철은 주위를 둘러봤다.

아직도 눈물을 흘리고 있는 조미영 매니저, 그리고 하늘이 무너진 듯한 표정으로 어쩔 줄을 몰라 하는 클럽 직원들.

'아!'

실수다.

감정에 치우쳤다.

그래서 뒤에 따라올 결과가 뭔지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자신이 탈퇴하면 그 여파로 여기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직장을 잃거나 불이익을 당할 것이다.

실수는 빠르게 바로 잡는다.

류진철은 조미영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리고 한참을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조미영 매니저."

"네?"

"···미안하다. 내 생각이 짧았어."

"화, 황자님?"

"내가 앞뒤 생각 없이 너무 매정하게 대했구나. 그 부분은 내 불찰이다."

"아니옵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사과의 의미로 탈퇴를 철회하겠다."

조미영은 류진철의 말에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등급판정에 대해선 아직 불만이 남았다."

"만회할 기회를 주십시오. 처음부터 낱낱이 들여다봐서 공정하게 판정하겠나이다."

"좋다. 그대를 믿겠다."

그러자 조미영이 쭈뼛거리며 태주에게 다가와,

"회, 회장님, 브론즈 명찰 다시 주세요."

"응? 전 브론즈로도 만족하는데."

"제발요···."

태주는 어쩔 수 없이 명찰을 다시 조미영에게 넘겼다.

황자가 이렇게까지 나오는데, 또 딴지를 걸면 이번엔 자신이 갑질을 한 셈이 된다.

그제야 만족한 얼굴의 류진철.

한마디 덧붙이는 걸 잊지 않았다.

"내가 형님이라고 부르는 분이다. 판정에 참고하도록,"

"반드시 참고하겠습니다."

조미영은 태주에게 눈을 돌렸다.

꾸벅 인사를 하는 모습에서 감사의 표현이 절절하게 느껴졌다.

살짝 윙크 한 번 해주니.

삽시간에 붉어지는 조미영의 얼굴.

'···어?'

그 뜻이 아닌데.

그건 그렇고, 그 실버 등급 두 명은 어디 있지?

이미 꽁지 빠지게 도망친 모양.

며칠 동안은 잠도 제대로 잘못 이루겠지.

높은 사람 눈에 들어보려고 열심히 사는 건 귀여웠는데.

아무튼 황자와 조미영 매니저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리더스 클럽은 사교모임이기도 하지만 일종의 정보단체 역할도 하는 것 같다.

예를 들어 강호 무림의 하오문 같은 곳?

황자 말대로 초대장은 회사가 막 체계를 잡아가던 때 발송된 것이 맞았다.

그럼 브론즈 등급도 잘못된 건 아니지.

당시만 해도 태홍 바이오는 구례 토착 기업 수준이었으니까.

'뭐, 지금은···,'

많이 달라졌긴 했다.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 ※ ※

태주는 황자 일행과 함께 리더스 클럽을 나왔다.

이래저래 도움을 받았으니 황자를 외면할 수는 없었다.

그를 따라가 호화롭고 은밀한 식당에서 밥 한 끼 같이 먹어주고, 따뜻한 차도 함께 나누고, 그럴 때마다 여지없이 쏟아지는 수다에 맞장구도 쳐줬다,

그런데 이 사람, 도무지 돌아가지 않았다.

오늘은 이만 헤어지고 다음에 클럽에서 만나자고 넌지시 운을 띄웠는데도 눈치가 없는 건지, 아니면 못 들은 척하는 건지.

황자를 따라다니는 황실 근위병들이 얼마나 힘들까?

좀 가줬으면 좋겠는데, 왜 집에 안 가?

"전 이만 급한 일이 있어서,"

"어떤?"

"회사에 가봐야죠"

"하하, 그럼 저도 회사 구경이나 해볼까요?"

"네?"

"지리산 마수 토벌의 전우이자 생명의 은인이 뉴서울에 회사를 차렸는데, 나 몰라라 하는 건 사람의 도리가 아닙니다."

"···."

그래, 끝까지 가보자.

"회사에 가시면 정체를 숨겨주시면···,"

"알겠습니다. 아는 동생 정도로 하면 될까요?"

"그렇게 하시죠."

태주는 류진철과 함께 회사로 들어갔다.

당연히 황실 근위병들도.

"회장님!!! 어서 오세요."

송수희 팀장이 반색하며 그를 반겨왔다.

"네, 어제 잘 들어가셨죠? 과음하셨던데."

"생기불끈 약효가 너무 좋아서요. 다음날까지 효과를 받는 것 같아요."

"하하, 다행입니다."

"백서연 사장님과 최동일 지점장님은 회의실에 계세요."

그러자 슬쩍 끼어드는 황자 류진철.

"안녕하십니까! 태주 형님 동생, 진철입니다."

"···아, 네네. 마케팅 팀장 송수희입니다."

송수희는 당황했다.

김태주 회장이 사무실에 들어왔을 때 잘생긴 젊은 남자가 함께 들어온 건 봤다.

상당히 낯이 익어서 전에 회장님을 따라다녔던 수행원 중 한 명일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아는 동생?

그것도 그렇고.

'진짜 어디서 봤더라?'

아무리 봐도 낯이 익다.

그때였다.

서류 뭉치를 챙겨 들고 회의실에서 나오는 백서연과 최동일.

태주를 보며 반갑게 인사했다.

"회장님, 클럽엔 잘 다녀오셨어요?"

"어서 오십시오. 회장님. 그렇지 않아도 특허 관련 사항에 대해 보고를 드리려고···."

"참! 어떻게 됐습니까? 문제점은 없었나요?"

빨리 특허를 받아야 뉴서울을 뜨지.

"까다로워요. 특허청에서 이것저것 요구하는 게 많아서, 약의 성분뿐 아니라 제조 과정, 원재료 확보처, 이런 말도 안 되는 것까지 첨부하라고 하네요."

"흐음."

"원래 이렇게까진 않거든요. 다른 제약회사들이 압박을 넣은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하고."

예상한 바다.

텃세를 부리는 거겠지.

그때였다.

백서연을 따라다니는 각성 장교 수행원 하나가 멍하니 태주가 있는 방향을 보고 있었다.

잠시 고개를 갸웃하더니, 눈도 한번 비벼보고, 혼잣말로 중얼거리다가···,

"헉!"

갑자기 비명을 지르면서 놀란 목소리로 외쳤다.

"화, 황자님?"

태주와 백서연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황자 류진철도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음? 자넨?"

"산청부대 소속 중령 김청석입니다. 스페셜 레이드 팀에서 황자님과 함께 싸웠던···,"

"오! 또 한 명의 전우를 여기서 보게 될 줄이야. 반갑네. 반가워, 아하! 형님, 아니 김태주 회장을 따라왔군."

"그, 그렇습니다."

순간 사무실에 흐르는 정적.

눈앞에 이 사람이 황자란다.

'···뭐?'

'세상에!'

'지, 진짜 황자님?'

'어디서 많이 봤다고 생각은 했는데···,'

'오황자님이시구나.'

삼한제국이 제정을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황자가 나타났다고 해서 엎드려 절하거나 하진 않는다.

그저 공손한 예만 갖추면 된다.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는 정도로만.

하지만 어느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너무 놀라서 입만 떡 벌리고 있을 뿐.

여기 이 사무실 직원 중에 황자를 이렇게나 가까운 거리에서 본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그리고 직원들은 황자가 김태주 회장을 보며 형님이라고 한 말을 분명히 들었다.

'대체 우리 회장님 정체가 뭐지?'

백서연도 깜짝 놀랐다.

황자를 인맥으로 두고 있다고?

김태주 회장님이?

하지만 놀람도 잠시.

황자 류진철이 백서연을 보며 말했다.

"좀 전에 특허 이야기 자세하게 들을 수 있을까요? 말도 안 되는 걸 요구했다면서요?"

그녀의 눈이 반짝 빛났다.

※ ※ ※

선계(仙界).

조금 전까지 독선 당군악은 초조한 마음으로 무한공간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했었다.

그러나 이젠 그 짓은 안 하기로 했다.

대신 가부좌를 틀고 앉아 조용히 명상하는 중.

무한공간의 공유, 이것도 어떻게 보면 영혼 연결과 같다.

그럼 연결될 때 반드시 어떤 신호가 있었을 것이다.

'너무 미약해서 알아차리지 못하고 넘어갔을 수도 있으니까.'

그걸 알아볼 참.

그래서 정신을 집중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사흘, 나흘···,

순간!

찌르르르!

머릿속에서 울리는 아주 미약한 신호.

'이건가?'

당군악은 무한공간을 열었다.

반짝인다.

"떴다!!!"

우렁찬 함성이 선계에 울려 퍼졌다.

< 뉴서울에서 만난 전우(2) > 끝

ⓒ 꾸찌꾸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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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계 장사꾼 >

당군악은 너무나 기쁜 나머지 덩실덩실 춤까지 췄다.

반드시 신호가 올 거라는 추측이 들어맞아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또 한 번의 연결이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앞으로도 계속 연결이 유지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다.

다른 세상의 나 자신과의 연결.

심지어 우화등선해서 선계에 왔는데도 끊기지 않았다.

그것이 무슨 이유로, 또 어떤 이유로 이루어지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알 필요가 있나?

쭉 연결된다는 것이 중요하지.

아무튼 미약하긴 하지만 공유창고가 연결될 때 어떤 신호를 받는지 알았다.

반짝이는 건 확인했고, 남은 건···,

과연 김태주가 자신이 보낸 서신을 봤을까?

독선 당군악은 공유창고를 열었다.

그러자,

"하하하!"

자신이 넣어두었던 선도 복숭아와 서신이 사라졌다.

김태주가 읽었음이 틀림없다.

또한,

'허허, 물건을 또 보냈군. 안 그래도 되는데···,'

당군악은 빠르게 공유창고를 비웠다.

그리고 미리 준비한 종이에 오늘 깨달은 바를 적은 서신을 2개의 선도 복숭아와 함께 집어넣었다.

삼봉 선인에게서 갈취한 선도 복숭아는 모두 3개였다.

전에 1개 보내고, 2개는 먹지 않고 남겨둔 것이다.

모조리 보냈지만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이어서 당군악은 김태주가 보낸 물건들을 확인했다.

'술이 많이 왔네. 흐흐, 대박이야.'

선계에도 술이 있다.

주선(酒仙) 태백 선인이 직접 만들어 커다란 술 단지 하나에 선도 복숭아 2개를 받고 팔고 있다.

사실 선계에서 선도 복숭아는 일종의 화폐.

여기 고인물 선인들은 자신이 기거하는 거처에 적게는 백여 개에서, 많게는 수천 개까지 선도를 보관해두고 있었다.

하지만 당군악은 갓 등선한 신선.

여분의 선도 복숭아를 가지고 있을 리 있나?

'어디 보자, 이건 맥켈란 18년 산(産)이군. 로열 살루트에, 발렌타인 30년짜리도 있고···, 역시 죄다 고급품이야.'

그밖에 로쉐, 고디바 초콜릿에, 고급 치즈, 달달한 캔디 종류, 인스턴트커피, 주전부리용 각종 과자도.

지구의 고급 양주가 무려 6병.

전에 받았던 돔페리뇽과 마찬가지로 기억 속에만 존재하지, 한 번도 먹어보지 못했다.

당군악도 주선(酒仙) 태백 선인의 술맛을 본 적이 있다.

다른 선인이 마시는 걸 옆에서 보다가 제발 한 입만! 하면서 딱 한 모금 마셔봤다.

인간계에서 흔히 마셨던 술인 백주였다.

그 외에도 황주, 죽엽청, 소홍주 등도 만들어 판다지만···.

물론 선계의 술은 인간계의 그것들보다 수준이 훨씬 높긴 하다.

그러나 처음 맛보는 지구의 술과 비교가 될까?

앞으로 김태주가 공유창고를 통해 물건을 계속 보내준다면, 그것들 죄다 처음 보는 거겠지.

그런데 뭔가 반짝반짝 빛난다.

급하게 꺼내느라 미처 확인하지 못했는데,

"응? ···아하!"

손목시계다.

김태주의 기억을 더듬어보아 롤렉스라는 명품 시계.

"이걸 직접 보게 되다니."

감개무량하다.

당군악은 금장 시계를 들어 손목에 차보았다.

딱 맞았다.

귀에 가까이 가져가 소리도 들었다.

채칵, 채칵, 채칵···,

규칙적인 초침 소리.

'흐음, 좋구나. 좋아.'

시간을 맞출 필요도 없다.

이 무료한 선계에서 시간을 알아서 뭐 하게?

멋으로 차고 다녀도 충분하다.

'아니지. 그래도 틈틈이 맞춰 놓을까?'

정말이지 복 받은 인생.

강호에서 이룰 거 다 이루고 선계에 등선해서, 지구라는 다른 세상의 문물을 직접 경험하는 호사까지 누릴 줄이야.

순간!

선계의 선인들이 당군악 쪽으로 슬금슬금 모여들었다.

좀 전 당군악이 외친 함성 때문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하면서 호기심에 찬 표정들.

당군악은 재빨리 시계를 찬 왼팔 옷소매를 위로 둘둘 말아 걷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왼무릎을 세우고 앉아 왼손을 그 위에 가만히 올렸다.

'자, 미개한 선인들아. 우주 만물이 얼마나 거대한지 모르는 우물 안 개구리들아. 지구 문물의 맛 좀 보거라.'

눈에 띄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다.

보란 듯이 내민 손목의 금장시계.

가까이 온 풍운 선인이 당군악에게 물었다.

"이보게, 독선."

"음? 무슨 일이오?"

"그대 손목에 금줄 말이오, 혹시 보패요? 어떤 기능이 있소?"

"아! 이거?"

당군악은 손을 위로 탁 떨치며 시계를 자랑했다.

그 행동이 얼마나 멋있는지 선인들이 흠칫 놀랐다.

"보패라면 보패지. 그냥 때를 알려주는 기능이랄까."

"때? 시간 말이오?"

"이 움직이는 초침이 한 바퀴를 돌면, 이 긴 침이 한 칸을 움직인다오. 또한 긴 침이 원을 한 바퀴 돌면 짧은 침도 조금 움직여 우리 기준으로 반 시진이 지났다고 보면 되오."

반 시진은 지구에서 한 시간.

그러자 탄성을 지르는 선인들.

"호오!"

"신기한 물건이군."

"시간을 알려준다니."

"빛도 나는구나. 금을 입혔나?"

"어디서 난 거요?"

"한눈에 봐도 매우 정교하게 만들어졌어."

선인들의 눈이 손목시계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채칵, 채칵, 채칵.

초침이 일정한 간격으로 돌아간다.

그 움직임의 규칙이 어김없다.

한 바퀴 도니 긴바늘도 정확하게 한 칸씩 움직인다.

그렇게 선인들은 옹기종기 당군악의 앞에 앉아 그의 손목만 바라보고 있었다.

지루하지도 않은 모양이다.

무려 한 시간 동안이나 말이다.

"긴 바늘 한 바퀴에 반 시진이 맞군."

"정확해."

"투시안으로 내가 안을 꿰뚫어 봤소."

"응? 뭐가 있는데?"

"백여 개 이상의 작은 톱니바퀴와 부품들이 서로 맞물려 돌아가더군, 이건 보패 중에 보패요."

선인들의 인정에 당군악은 우쭐해졌다.

급기야.

"···독선."

"왜 그러시오, 우령 선인?"

"이거 나한테 팔면 안 되겠소? 선도 20개 어떠시오?"

당군악은 픽하고 웃었다.

"선도 20개? 너무 염치가 없군."

동시에 터져 나오는 흥정.

"30개는?"

"난 40개."

"50개 주겠소."

"100개로 합시다."

하지만 당군악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이건 파는 물건이 아니오. 절대!"

선인들의 표정에서 안타까운 빛이 흘렀다.

안 판다는데 어쩔 수 있나?

"대신 팔 수 있는 것들이 있긴 한데."

당군악은 손가락으로 바닥에 놓인 고급 양주를 가리켰다.

"이건 뭐요?"

"술이요. 아주 특별한 술, 병당 선도 3개에 팔 생각이오. 딱 4병만."

적당하게 책정한 가격이다.

전에 삼봉 선인에게 돔페리뇽 한잔과 스팸 한 조각에 선도 3개를 받았던 것은 그가 하도 괘씸해서 그런거고.

너무 비싸면 안 팔린다.

선인들이 지갑을 열 수 있을 정도의 가격.

그러나 선인들은 심드렁한 표정.

주선이 선도 2개에 술 단지 하나를 파는데.

미쳤다고 저 작은 병을 선도 3개에 주고 사?

"술도 술이지만 이 병도 소유하게 되는 거요. 얼마나 아름답소? 호리병이나 자기 병과는 비교도 안···."

순간!

"독선, 그대는 이 술 한 병이 정녕 선도 3개의 값어치를 한다고 보오?"

주선(酒仙) 태백 선인이 왔다.

술도 잘 빚는 자이기도 하지만, 누구보다 술을 사랑하는 신선.

내심 기다렸다.

원래 바람잡이가 있어야 장사가 잘된다.

"흐음, 그럼 일단 한 잔 드셔보시지요. 마음에 들면 선도 3개에 가져가시고, 마음에 차지 않으면···, 그냥 가셔도 뭐라 하지 않겠소."

태백 선인의 미간이 꿈틀했다.

이건 자신에 대한 도전이었다.

'감히 나한테 술을 가지고 덤벼?'

기꺼이 응해준다.

"종류가 많군. 독선이 한 병 골라주시오."

"흠, 이건 어떠시오. 발렌타인이라는 술인데, 30년 묵었소. 마음에 들 거요."

"발랭···? 흠흠 마셔봅시다."

태백 선인은 기대도 안 했다.

'고작 30년 된 술을 가지고···,'

당군악은 천천히 발렌타인의 뚜껑을 열었다.

그러자 미리 준비한 듯, 태백 선인이 술잔을 앞으로 내민다.

쪼르르르.

술잔에 따라지는 황금색 액체.

태백 선인은 먼저 술의 향기를 맡았다.

'독특한 주향이로군.'

한 번도 맡아본 적이 없는.

그리고 한 모금 꿀꺽.

'흐음,'

지그시 눈을 감고 한 모금 더.

'하아.'

어느새 비어버린 술잔.

선인들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태백 선인의 입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좋군. 술을 빚을 때 정성을 들였다는 것이 느껴져. 무엇보다 새로운 술이라는데 점수를 주고 싶군. 인간계와 선계를 통틀어 이런 술은 결코 먹어보지 못했소."

당군악은 씨익 웃었다.

"이것도 하나 드셔보시오."

로쉐 초콜릿 한 알의 포장을 벗겨 건네자 태백 선인은 바로 입에다 넣었다.

우물우물.

몇 번 씹다가 눈을 번쩍 뜨는 태백 선인.

정수리가 띵하고 울리는 치명적인 단맛.

"이, 이것도 파는 거요?"

"선도 1개만 주시지요."

"그럴 게 아니라 이 술 4병 내가 다 사지. 아니 여기 있는 물건들 모두!"

하지만 태백 선인의 시도는 무위에 그쳤다.

"아니, 주선! 이게 무슨 심보요! 혼자서 다 가져가겠다고?"

"이거 사겠소. 기다리시오. 내가 찜했소. 선도 3개 가져올 테니."

"이건 내 거."

후다다닥!

흩어졌다 다시 모이는 선인들.

"빨리 한 병 주시오."

"여기···,"

"요건 얼마요?"

"선도 2개만 주고 가져가시오."

"이것도."

"선도 1개."

당군악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잘 팔린다.

장사를 하다 보니 재미도 있다.

부지런히 벌어야 한다.

김태주에게 선도를 계속 보낼 수 있게끔.

※ ※ ※

이고르 바라노프는 아마 슬라브계 제국민 중 가장 성공한 인물일 것이다.

처음엔 작은 술집에서 시작했다.

그는 타고난 운이 있었다.

특유의 친화력과 서비스 정신으로 작은 술집은 큰 성공을 거두었고, 점점 확장에 확장을 거듭해 대형 유흥주점으로 거듭났다.

이고르는 멈추지 않았다.

유흥업으로 번 돈을 바탕으로 새로운 사업을 시도했다.

회원제 시스템을 도입한 사교 모임.

그것이 리더스 클럽의 시작이었다.

운도 운이지만 이고르 바라노프는 능력도 있었다.

처음 회원을 모집할 때, 고위 공무원이나 유명 연예인, 군부의 장성, 황실 측 인사를 찾아가 그들을 클럽에 회원으로 등록시켰다.

첫 등록 회원들에겐 가입비, 월회비를 받지 않았다.

VIP들은 미끼였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올 때마다 선물 공세로 그들의 혼을 쏙 빼놓았다.

그러자 소문을 듣고 찾아온 사람들.

평소에 잘 만날 수 없는 고위층 관리, 지도층 인물들을 클럽에만 가면 만날 수 있다?

사업가들은 인맥이나 일 처리에 도움을 받고자 클럽에 가입하길 원했고, 이고르는 선별과정을 거쳐 앞으로 성공 잠재력이 있어 보이는 자들에게만 초대장을 보냈다.

클럽은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다.

그리하여 삼한제국 최고의 사교 클럽이 된 리더스.

하지만 열심히 쌓아왔던 평판이 하루아침에 무너질 뻔했다.

조미영 클럽 매니저에게 황자와 관련한 일을 보고 받은 리더스 클럽 오너, 이고르 바라노프.

"죄송합니다. 제 판단 실수였습니다."

"아니, 자넨 매뉴얼대로 한 게 맞아. 다만 우리가 정보를 제대로 취합하지 못했을 뿐이지."

생각지도 못했다.

태홍 바이오 김태주 회장과 오황자가 그렇게 밀접한 사이였다니.

그래서 재조사를 했다.

황실에 적을 두고 있는 회원들과 정보망을 동원해 오황자 류진철이 지리산 마수 토벌 작전에 참여한 것까지도 확인했고.

하지만 그 후에 일어난 사건은 아직 밝혀내지 못했다.

확실한 건 거의 생명의 은인이나 다름없는 대우를 하고 있다는 것 정도,

"어떡할까요?"

"뭘?"

"김태주 회장 등급 재판정 말이에요."

"황자가 힌트를 주지 않았나? 참고하라고."

"아! 그럼···,"

"다이아몬드 명찰 내줘."

황자에 대한 예우였다.

그럼 황자도 리더스 클럽에 빚을 지는 거지.

또한 김태주도 분명 뭔가 있는 자다.

정보도 정보지만 그의 잠재력을 과소평가한 부분이 있는 건 인정해야 한다.

"구례로 직원들 파견해."

"네."

"조용히 알아봐. 김태주 회장이 누군지, 그가 가진 능력이 무엇인지."

그래서 지금부터 밝혀볼 생각.

※ ※ ※

뉴서울 특허청 약품 심사과 손동욱 심사관은 요즘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불안감에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갑자기 돌변한 미리내 제약의 태도 때문이었다.

도무지 연락이 안 된다.

일을 시켰으면 대가를 주던가, 아니면 다음 일을 지시해주던가.

그래서 몰래 전주학 차장에게 전화도 해봤다.

하지만 돌아온 답변은 회사에 문제가 생겼으니, 당분간 조용히 있으라는 것.

전주학의 떨리는 목소리를 들으니 무슨 일이 생긴 것 같긴 한데, 대체 어쩌란 말인지.

오늘도 태홍 바이오에서 특허 관련 서류를 가지고 올 텐데,

그동안은 심사 신청을 계속 반려했다.

이 서류로는 특허가 불가능하다. 이게 빠졌다, 저게 빠졌다, 보완해서 가지고 와라···,

오늘도 분명 올 것이다.

벌써 세 번째다.

또 반려해야 하나? 아니면 심사를 시작해야 하나.

'한 번만 더 퇴짜를 놓아보고.'

더 이상 지시가 없으면 일단 심사에 들어간다.

딱 돈 받은 만큼만 해야지.

나중에 본격적인 심사에 들어가면 입질이 오겠지.

탈락시키라든지, 시간을 끌라든지.

그때는 조금 비싸게 받아먹을 생각이다.

순간!

서류뭉치를 한 아름 안고 나타난 태홍 바이오 백서연 CEO와 최동일 뉴서울 지점장, 그리고 옆에 직원인 듯 보이는 남자 하나 더.

"안녕하세요? 심사 신청 내러 왔어요. 오늘이 세 번째네요."

백서연의 말에 손동욱 심사관을 얼굴을 있는 대로 찡그렸다.

"네네, 또 오셨네요. 제가 첨부하라고 지시한 서류는 가지고 오셨나요?"

"아뇨. 그건 필요가 없는 것 같아서요. 알아보니까 본격적인 심사가 끝나고 특허가 확정되면 내도 되는 서류라던데요?"

"하! 이 양반들이···,"

손동욱은 코웃음 쳤다.

"필요한 서류는 내가 결정합니다. 공무원이 우습게 보여요? 당장 돌아가세요. 내가 이 자리에 있는 한 특허 심사는 꿈도 꾸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이상하네. 제가 준비한 서류라면 심사에 전혀 문제가 없을 거라고 분명히 들었거든요."

"진짜 꼴값 떠시네. 누가 그래요?"

그러자 백서연 뒤에 있던 남자가 앞으로 나오며 말했다.

"제가 그랬습니다."

"뭐야? 당신은 누군데?"

"황실 직속 제국 감사원 특별조사과 표성태 과장입니다."

"어? ···네? 누, 누구라고요?"

"여기 명함 받으시고, 지금부터 황제 폐하께서 제게 주신 권한에 근거해 특허청 특별 감사를 시행하겠습니다."

"아, 아니, 뭔가 오해가···, 자, 잠깐만요."

감사원 표성태 과장은 스마트폰을 들고 번호를 눌렀다.

"모두 들어와!"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사무실 안으로 들이닥치는 제국 경찰과 감사원 직원들.

손동욱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해 버렸다.

< 선계 장사꾼 > 끝

ⓒ 꾸찌꾸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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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배와 포용 >

황자가 직접 나서지는 않았다.

그저 자신의 수행원에게 특허청이 조금 수상하지 않냐면서 지나가는 말로 툭 던졌고, 수행원은 즉시 감사원에다 황자의 말을 전했다.

그리고 시작된 조사.

제국의 공무원이라면 누구나 두려워하는 기관이 바로 감사원, 황제 직속이며 감사의 범위도 넓었고 권한도 무지막지했다.

어떤 기관이든 감사원이 요청하는 정보라면 무조건 1순위로 처리해야 한다.

그래서 특허청 손동욱 심사관의 모든 신상 정보를 이미 다 턴 상황, 부동산을 포함한 개인 재산 파악, 본인 계좌, 가족 계좌, 그리고 통화기록.

특허청 압수 수색은 손동욱 말고도 다른 부정 행위자가 있는지 살펴보는 절차였다.

손동욱은 그 자리에서 제국 경찰에 체포되었다.

감사원 표성태 과장은 경찰의 협조를 받아 뉴서울 경찰청 취조실에서 손동욱 심사관과 마주했다.

"재산을 많이 모으셨더군요. 돈을 꽤 많이 받으신 것 같은데, 누구에게서 받았죠?"

"미리내 그룹 미래전략실 전주학 차장입니다."

"방식은?"

"현찰로 받았습니다."

손동욱은 이미 체념한 분위기.

형량을 깎아주겠다고 약속하자 진술이 줄줄 흘러나왔다.

"한 번이 아니죠? 미리내 제약의 지시를 받고 특허 심사를 지연시켰던 거."

"네, 3년 전부터 쭉, 어쩔 수 없었습니다. 말을 듣지 않으면 가족을 가만두지 않겠다고 협박하는 바람에···."

협박은 개뿔.

지 욕심 채우기 위해서 한 짓거리인 걸 모를 줄 알고.

증언이 나왔으니 잡아들여야지.

경찰이 출동해서 미리내 그룹 미래전략실 전주학 차장을 긴급체포했다.

"변호사 오기 전까진 아무 말도 하지 않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전 경찰이 아니니까."

표성태는 전주학에게 자신의 명함을 건넸다.

"···감사원?"

"네, 현재 카메라도 껐고, 녹음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나중에 경찰이 들어오면 그때 본격적인 심문이 시작될 겁니다."

"그럼 지금 뭐 하자고 날···,"

"궁금한 게 있어서요. 재벌가가 얼마나 공무원 사회에 깊숙하게 개입했는지."

"그걸 제가 어떻게 압니까? 전 재벌이 아닙니다."

"하지만 최측근이시죠. 손동욱 심사관이 다 자백했습니다."

스윽,

표성태는 손동욱의 진술서를 전주학 앞으로 밀었다.

"읽어보시죠."

그러자 전주학이 진술서를 눈으로 한번 스윽 보면서 말을 이었다.

"다 거짓말입니다."

"거짓말?"

"서로 연락처도 모르는데 무슨 전화를 했다고···,"

표성태는 어처구니없었다.

저렇게 거짓말을 태연하고 뻔뻔하게 하고 있다.

"지금 대포폰으로 전화했다고 안심하는 겁니까?"

"무슨 말씀이신지?"

"손동욱이 당신과 전화하면서 녹음도 하지 않았을 거라 생각하시나요?"

"···씨발."

표성태는 피식 웃었다.

"이봐요, 전주학씨, 당신이 구속되는 건 이미 기정사실입니다. 빠져나갈 생각도 말아요. 우리가 주목하는 건 당신 윗선입니다."

전주학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이동우 사장이 지시했습니까?"

"···."

"말 안 해요? 혼자 떠안으려고?"

"···."

"뭐, 어차피 이동우 사장 소환 조사하면 다 드러날 거니까."

그제야 입을 여는 전주학.

"···소환조사 어려울 겁니다."

"왜요? 재벌가 패밀리라서?"

"이동우 사장은···, 지, 지금 행방불명 상태입니다."

"하하하, 이미 빼돌렸다는 말이군요."

"아닙니다! 정말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찾는 중입니다."

"헛소리하지 마세요!"

표성태는 정말 몰랐다.

전주학이 이번엔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걸.

※ ※ ※

태주는 호텔 방에서 백서연의 전화를 받았다.

- 특허 심사가 곧 진행될 겁니다. 빠르면 일주일 안에 결과가 나올 거예요.

"수고하셨어요."

- 우릴 방해한 놈들은 역시 미리내 제약이 맞았습니다. 미리내 그룹 전주학 차장과 특허청 심사관이 짜고 우리 심사요청을 거절했다고···

"그럴 줄 알았어요."

- 그리고 이상한 소문도 들려오고 있는데,

"이상한 소문이라면?"

- 이동우 사장이 행방불명 상태랍니다. 알아서 도망친 건지, 아니면 진짜 무슨 사고를 당했는지 알 순 없지만.

"···."

태주야 이동우가 어디 있는지 안다.

아마 영영 찾지 못할 것이다.

"어쨌든 이제 식약청 판매 허가만 남았네요."

- 하지만 그건 신중하게 접근해야 할 것 같아요. 외부 개입이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어서.

"네, 열심히 준비해봅시다."

백서연의 말대로 제국 식약청은 깐깐하다.

그들이 정직하기보다는 식약청이 제국 내에서 가지는 역할 때문이다.

식품이나 약품을 어설프게 통과시켜 문제라도 생기면 큰일 난다.

식약청 전체가 박살이 나는 거다.

그래서 약품 판매 허가는 엄격할 수밖에 없다.

'특허 문제는 일단락됐고.'

오랜만에 수련이나 해보자.

원래 태주의 하루 일과는 항상 혼원무상독령공 수련으로 시작했다.

하지만 그동안 너무 바빠 수련을 게을리했다.

이제 여유가 조금 생겼으니.

너무 급하게 7성에 오른 터라 항상 독정(毒精)의 변화를 예의주시해야 한다.

독정은 독의 정화.

당연히 성질이 온순하지 않다.

오히려 그 힘을 드러낼 때는 마나, 혹은 내공보다 더 거칠고 광포해진다.

그래서 안정화 작업이 필요한 것이고.

독정의 안정화는 매우 중요하다.

그래야 독과 신체의 균형이 조절되기 때문이다.

만약 안정화에 실패해 독인이 주화입마를 당하면 어떻게 될까?

여타 심법처럼 단전이 파괴되는 걸로 끝나지 않는다.

자신이 쌓아 올린 독에 자신이 당한다.

혼원무상독령공으로 잠자고 있는 독정을 깨우는 태주.

지이이이이이···,

독정이 진동한다.

아주 천천히.

또한 조용하게.

'응?'

뭔가 이상하다.

매우 안정적이다.

'안정화?'

신체와 기운을 주고받으며 천천히, 조화롭게, 그리고 부드럽게 진동하는 독정, 이러면 완전히 안정화를 이루었다고 봐도 된다.

이렇게 빨리?

변화의 원인은 하나밖에 없다.

'선도 복숭아구나.'

정확하게는 독기마저 포용하는 선기.

겨우 복숭아 하나 먹었을 뿐인데, 독정이 완벽하게 안정화됐다.

그럴 수밖에.

오직 선계의 선인들만이 먹을 수 있다는 선도 복숭아 아닌가.

태주는 조금 더 집중했다.

확실히 독정은 선기에 영향을 받았다.

거칠고 매운맛에서 부드럽고 순한맛으로.

'이거 너무 순하면 안 되는데.'

명색이 독이다.

부드러워지면 어쩌자고.

순간!

찌이이이잉!

갑자기 맹렬하게 일어나는 독기.

거친 파도처럼, 무시무시한 육식동물의 발톱처럼, 주위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집어삼키려는 기세, 이번엔 너무 광포하다.

'어, ···이거 조절 가능한가?'

마음을 가라앉히자 순식간에 잠잠해지는 독정.

지이이이이···,

순해졌다가 매워졌다가, 또 순해졌다가.

'그렇군. 이제 알겠어. ···선기 때문이었어.'

선기는 포용의 기운이다.

반면 지배의 기운이기도 하다.

지배자가 관대하게, 피지배자들을 구슬리고 포용한다.

독기도 다를 바 없었다.

선기가 독정을 포용했다.

'···가만있자.'

독정에 스며든 선기 덕에 독정이 포용과 관용의 성질을 가지게 됐다면?

독기가 아닌 다른 기운도 감싸 안을 수 있지 않을까?

이를테면 마나 같은 거.

태주는 무한공간을 열었다.

그 안엔 엘리트 자이언트 반달곰 웅담으로 만든 영약이 들어있었다.

영약에 고밀도로 농축된 마나의 기운.

지금까지 영약은 자신에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실제로 영약을 제조할 때 만들고 남은 걸 먹어보기도 했다.

그러나 독정은 조금도 반응하지 않았다.

이제는 상황이 바뀌었다.

선기로 인해 성질이 달라진 독정.

마나도 지배하고 포용할 수 있다면···,

'해보자.'

태주는 서슴없이 영약을 꿀꺽 삼켰다.

잠시 후.

우우우우우우웅!

휘몰아치는 마나.

태주에게 마나가 밀려 들어왔다.

혈관을 통해 몸 구석구석으로 퍼져나간다.

당연히 독정에도 닿았다.

지이이이잉!

이게 웬 떡이냐는 듯 마나를 집어삼키는 독정.

마나가 독정으로 흘러 들어간다.

하지만 그 어떤 충돌도 없었다.

마치 독기를 빨아들이는 것마냥 마나를 흡수하고 있었다.

'아아···,'

독정이 마나를 포용했다.

동시에 지배했다.

그리하여 독정에 각인된 마나.

그럼으로써 독정은 또 한 단계 도약했다.

우우웅!

태주의 혈맥으로 독기가 흐른다.

독기를 따라서 마나도 흐른다.

그리고 시작된 무아지경의 경지.

태주는 깨달았다.

자신이 혼원무상독령공 8성에 올랐음을.

새로운 독이 아닌 오직 마나를 가지고 이뤄낸 성과였다.

※ ※ ※

잠시 후 태주는 눈을 떴다.

전신에서 차오르는 낯선 힘.

바로 마나였다.

'이러다 각성하겠네.'

혼원무상독령공 8성.

7성에 올랐을 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독기뿐만 아니라 마나도 함께 사용할 수 있다는 것.

하지만 영약의 효과는 이걸로 끝이다.

마나가 독정에 각인되었기에, 새로운 마나가 나오지 않는 이상 더 이상의 발전은 없을 터.

그래도 8성이 어딘가?

전혀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이게 다 당군악이 보내 준 선도 복숭아 덕분이었다.

어떻게 보답해야 하지?

뭐라도 주고 싶지만 무한공간의 공유창고는 반짝일 기미가 보이지 않고.

그런데 무한공간을 열 때마다 자꾸만 눈에 밟히는 것이 있다.

그 안에 보관된 사람들의 시신.

'도저히 안 되겠네.'

이참에 치우자.

뉴서울 주변엔 마수 밀집지대가 없지만 5시간 정도 기차를 타고 가면 적당한 곳이 있다.

이제 미리내 그룹에서 이동우 사장이 행방불명되었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아직 언론이나 뉴스에 나오지 않을 걸 보면 자체적으로 조사하는 중이겠지, 곧 공개 수사로 전환될지도 모르고.

태주는 먼저 스마트폰으로 백서연에게 메시지를 보내 내일은 뉴서울 관광을 할 예정이니 특별한 일이 아니고서는 연락하지 말아달라 부탁했다.

그리고 그날 밤, 호텔 밖을 나서는 태주.

한적하고 캄캄한 곳에서 무한공간에 넣어둔 청바지와 셔츠, 모자, 운동화를 꺼내 입었다.

으득, 스으윽!

역용술로 얼굴을 바꾸고,

뿌드득!

축골공으로 키를 줄였다.

8성에 오르니 변신의 정도가 극적이다.

스스로 봐도 누군지 모를 정도로.

현찰을 제외한 모든 소지품은 무한공간에 집어넣고.

태주는 택시를 타고 뉴서울 역에 도착해 매표소에서 심야 기차표를 끊었다.

"북경 거점으로 출발하는 가장 빠른 표 주세요."

북경 거점 도시까지 걸리는 시간은 약 5시간 정도.

그곳에서 일을 보고 나면 아무리 늦어도 내일 오후까진 뉴서울로 돌아올 수 있겠지.

북경, 옛 중국의 수도였던 베이징.

그러나 지금은 삼한제국의 최전방 마수 방어 거점 도시로 전락했다.

인류의 재건이 시작되었던 때는 지금으로부터 200년 전.

그 후, 100년이 지나면서 비교적 인구를 많이 확보한 나라들은 빠르게 옛 모습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인도와 중국, 그리고 미국, 유럽도.

특히 중국은 단시간 안에 인구 5억을 달성해 강대국의 면모를 재확인했다.

하지만 복원의 걸림돌이 있었다.

바로 마나에 의해 변이된 마수들.

마수와 인간은 공존할 수 없었다.

당연히 영토를 뺏고 빼앗기는 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고, 중국의 신공산당 정부는 결국 악수(惡手)를 두고 말았다.

중국 우한의 마수 대(大) 밀집지대.

핵무기 복원에 성공한 신공산당 정부는 10여 발의 핵탄두를 우한 일대에 쏟아부었고, 마수들은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당했다.

해치웠나?

착각이었다.

해치움을 당했다.

일부 살아남은 엘리트 마수들이 재변이를 이루었다.

그것이 바로 비욘드 엘리트 마수의 탄생.

비욘드 엘리트 마수들은 즉시 인간들에게 보복을 감행했다.

놈들을 막을 방법은 전무(全無)했다.

마수들에게 학살당하고, 영토를 빼앗기고,

그리하여 마수들에게 핵무기를 절대 사용하면 안 된다는 교훈만을 남기고 중국은 영영 몰락하고 말았다.

이제는 삼한제국의 영토가 된 북경.

저 한참 밑으로는 비욘드 엘리트 마수들의 영역.

북경 거점 남쪽으로는 마수 웨이브의 위험도 없다.

워낙 지역이 넓어서 웨이브가 일어나기 힘들뿐더러, 일어난다 해도 그 안에서 해결된다.

그래서 각성자들의 사냥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지역 중 한 곳.

구례와는 다르게 마수 부산물 판매에 있어 세금이 매겨지지만 다양한 마수들이 분포되어 있어 북경 거점은 항상 각성자들의 레이드 팀으로 북적인다.

태주가 탄 밤 기차가 새벽녘에 북경 거점 도시 역에 도착했다.

'시간이 없으니까···,'

당연히 북경 거점 지역에도 군대가 주둔하고 있다.

제국에서 강력한 축에 속하는 전투 군단이 무려 2개씩이나, 즉 6개 사단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북경 남쪽을 막고 있는 거대한 성벽.

몇몇 구간은 철책으로, 몇몇 구간은 돌로 쌓인 성벽으로, 그렇게 그 길이만 무려 400Km, 그런 이유로 이 성벽을 북경 '천리장성'이라 부른다.

천리장성엔 북경 주변 마수 출몰지역으로 통하는 문이 여러 개 있다.

그리고 곳곳에 설치된 CCTV들.

태주는 CCTV 카메라를 빤히 쳐다보았다.

어차피 진짜 얼굴도 아닌데.

새벽이라 그런지 사람이 거의 없었다.

태주는 성문을 통과해서 도시 밖으로 나갔다.

이 지역에서 가장 많이 분포하고 있는 마수는 '변종 솜뭉치 차우차우'.

과거엔 중국이 자랑하는 대형 견종이었지만, 마나에 의한 변이로 몸집이 더 커지고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을 가졌다.

털이 워낙 길어 움직이는 모습이 솜뭉치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놈들의 털은 고급 옷감을 만드는 소재로 이용되어 레이드 팀에게 인기가 많다.

솜뭉치라서···, 귀여울까?

천만에!

굉장히 포악하고 잔인하다.

특히 치악력이 엄청 강해서 웬만한 방어구는 씹어서 뜯어버릴 정도.

태주는 빠르게 달렸다.

곳곳에서 보이는 변종 솜뭉치 차우차우.

좀 더 안쪽으로.

표홀질풍보를 사용해서.

쐐애액!

한참을 가다 보니 마수의 숫자가 점점 늘어났다.

그래도 더 깊이.

그렇게 1시간을 달렸다.

자신을 덮쳐오는 솜뭉치 차우차우를 가볍게 따돌리면서,

'여기쯤이면 될 것 같네.'

태주는 무한공간에서 시체들을 꺼냈다.

드문드문 간격을 두고 하나씩.

툭, 툭, 툭, 툭···,

"컹컹컹!"

"크르르렁!"

"크아아악!"

시체들에게 달려드는 변종 솜뭉치 차우차우 무리들.

갈기갈기 찢겨 사라지는데 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태주는 북경 거점으로 발길을 돌렸다.

역용과 축골은 절대 풀지 않았다.

역으로 가서 표를 끊고 기다렸다가, 기차에 탑승하고 다시 5시간 걸려 태주는 비로소 뉴서울에 도착했다.

완전범죄의 완성이었다.

< 지배와 포용 > 끝

ⓒ 꾸찌꾸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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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한 놈 잡았다. >

태주가 북경 거점도시에서 뉴서울 역에 도착한 시간은 그날 저녁, 한참 동안 시내를 돌아다니다가 어두워지자 으슥한 곳에서 역용술과 축골공을 풀고 옷을 갈아입은 후 호텔로 돌아왔다.

슬슬 준비해야지.

공유창고가 반짝일 때 빠르게 물건 보낼 준비를.

자신도 편지를 썼다.

선도 덕분에 8성에 올랐다는 감사의 글을 시작으로 더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 서신으로 요청하라고, 뭐든 구해주겠다고.

당군악과의 2번의 영혼 연결 때문에 강호에서 쓰는 글과 언어도 구사할 수 있지만 그냥 편하게 한글을 사용했다.

당군악도 한글을 안다.

전에 그가 보낸 편지도 한글로 되어 있었으니까.

그다음으로 태주는 무한공간을 열어 공유창고와 똑같은 크기와 모양으로 하나의 구역을 설정했다.

이 안에 보낼 물건을 꽉 채워 넣어뒀다가, 공유창고가 반짝이면 바로 집어넣을 생각.

백서연이 가져다준 태블릿, 빔프로젝트, 이동식 스크린과, 도민수 소령이 구해온 엘리트 마나 결정체 장착 전기 발전기도 넣었다.

전기 발전기는 전열기, 냉장고, 에어컨, TV 등, 집안 가전제품을 하루 24시간 풀로 사용해도 1년은 거뜬할 거란다.

정작 전기가 필요한 건 태블릿이나 빔프로젝트 뿐이니 그보다 몇 배는 더 오래가겠지.

백서연이 사온 태블릿은 모두 3개.

개당 하나씩 서로 다른 OTT 플랫폼에 가입해 완결된 드라마와 영화를 우선적으로 다운받았다.

이게 가장 시간이 많이 걸렸다.

하지만 꾹 참고 모조리 받아야지.

세상이 거의 망했을 때 사람들은 많이 죽었지만, 인간이 이룩한 문화유산은 생각보다 많이 남아있었다.

예를 들어 문화 컨텐츠.

세계 곳곳에 위치한 각종 저장 장치에 보관된 영화, 드라마.

물론 상당히 많은 양이 사라졌지만, 다시 복원된 것도 수두룩했다.

세상이 살만해지자 인류는 과거 찬란했던 영상 컨텐츠들을 복원하고 퍼뜨렸다.

300년 전에 제작된 것들이긴 하지만 지금 봐도 충분히 재미있다.

그중 망하기 전 중국에서 유행하던 컨텐츠.

무협 드라마, 혹은 선협물.

'이런 것도 좋아할까?'

확실히 중국의 무협은 강호와 비슷한 점이 많다.

지구의 강호는 상상 속 세상이고 당군악의 강호는 실재하는 세상.

하지만 그 두 세상이 마치 우연처럼 기가 막히게 일치하고 있었다.

뭐, 어차피 멀티버스 다중우주의 세계니까.

'편지 교환이 가능하니 피드백을 받으면 되고.'

남은 여분의 공간엔 음식과 음료로 꽉꽉 채웠다.

이제 반짝이기만 해라.

갑자기!

지이잉!

스마트폰에서 울리는 메시지 알림음.

확인해보니.

- 안녕하세요. 리더스 클럽 조미영 매니저입니다. 바쁘신데 전화하면 결례가 될까 봐 이렇게 메시지로 남깁니다. 한가하실 때 언제든 클럽으로 들려주시길, 미리 연락을 주시면 준비하고 있겠습니다. -

'음, 등급 때문인가?'

그것 말고는 없지.

가봐야겠다.

뉴서울에서 계속 사업을 하려면 인맥과 정보가 필요하니까.

태주도 답장을 날렸다.

- 내일 오전 중에 방문하겠습니다. -

하루 종일 돌아다니느라 조금 지친다.

물론 육체 말고 정신적으로.

하지만 잘 시간이 없다.

태블릿에 컨텐츠를 다운받아야 하니까.

※ ※ ※

아침이 밝았다.

벌떡 일어나 샤워를 하고 양치도 하고.

룸서비스로 간단한 아침도 먹은 후.

딩동!

호텔 방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확인해보니 백서연 사장.

"어서 와요."

"회장님, 잘 주무셨어요? 참! 어제 뉴서울 관광은 즐거우셨는지···."

"네, 잘 놀았습니다."

그녀와 함께 향후 일정을 논의했다.

특허 심사가 의외로 빠르게 진행될 것 같아 뉴서울 공장 준공식 날짜를 앞당기자.

생산을 위해 구례로부터 숙련된 직원들을 파견해서 새 공장에 투입하자, 등등.

"그럼 오늘도 열심히 뛰어보겠습니다."

"무리하지 마세요."

태주도 외출할 준비를 했다.

뭘 입을까?

드레스 코드는 항상 고민이다.

'정장은 많이 입었고.'

그래서 오늘의 외출복은 환상 여우 가죽 코트.

움직이기에도 매우 편하고, 뉴서울은 날씨가 선선해 코트 입기에도 좋다.

이게 또 자신의 정체성 아닌가.

엘리트 독 발톱 삵을 잡을 때 걸레처럼 찢겼지만, 가죽 공방에서 정성껏 수선해서 바느질 자국만 살짝 보이고 나머진 멀쩡하다.

무엇보다 몰래 물건을 집어넣기에도 좋고, 꺼내기도 좋다.

태주는 코트를 걸치고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차를 준비하고 태주를 기다리고 있는 각성 장교 수행원.

"안녕하세요. 회장님."

"매번 고생이 많으시네요. 빨리 마무리하고 부대로 복귀하셔야 할 텐데."

"헉! 아, 아닙니다. 될 수 있으면 오래오래 있고 싶습니다."

"그래도 부대 생활이 그립지 않나요?"

"천만에요! 요즘이 제 인생에서 가장 행복합니다."

"···."

각성 장교 수행원 10명의 근무 형태를 보면 무슨 의미인지 이해가 간다.

먼저 태주에겐 1명이 붙는다.

운전해줄 사람 한 명만 있으면 된다.

그렇게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백서연과 최동일 지점장에게 각각 1명씩, 2명이 따라붙고, 태홍 바이오 뉴서울 지점에 또 2명이 배치된다.

그래서 총 5명.

나머지 5명은?

놀러 다닌다.

백서연이 하루마다 수당을 지급해주기 때문에 돈이 모자랄 일도 없다.

그렇게 격일로 교대근무만 하면 되니까, 얼마나 좋을까.

자동차가 신압구정 리더스 클럽으로 향해갔다.

차에 타고 있는 동안에도 가끔 무한창고를 확인하고.

리더스 클럽 정문에 멈춰선 태주의 자동차.

그러자 정문을 지키는 가드들이 부산하게 움직인다.

한 명은 귀에 착용한 인이어로 어디론가 연락을 취하고, 한명은 자동차로 부리나케 달려와서 문도 열어주고.

"어서 오십시오. 회원님."

"···네, 감사합니다."

누군지 알고 있나?

겨우 한번 방문했을 뿐인데.

태주는 차에서 내렸다.

정문 앞으로 걸어가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가드들이 문을 활짝 열었다.

멈칫!

태주는 안으로 걸어가다 말고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문이 열리자 보이는 로비의 풍경.

바닥엔 레드카펫이 깔려 있었다.

두 줄로 서서 공손하게 머리를 숙이고 있는 직원들.

"환영합니다!!!"

정면엔 중년의 금발 남자와 세련된 옷차림의 조미영 리더스 클럽 매니저도 있었다.

저벅저벅 걸어와 악수를 청하는 금발 남자.

"처음 뵙겠습니다. 리더스 클럽 오너, 이고르 바라노프입니다."

"네, 김태주입니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요란한 환대.

클럽에서 근무하는 모든 직원이 자신을 마중 나왔다.

로비 전체로 다 몰려온 것 같았다.

직원들 숫자만 대충 세어도 100여 명.

이고르 바라노프의 뒤엔 그의 경호원인듯한 각성자도 있었다.

같은 슬라브계로 보이는 외모, 왼쪽 뺨 하단에서 목으로 이어지는 곳에 새겨진 문신.

각성자는 고급 인력이다.

제국 최고의 클럽의 오너라 각성자를 경호원으로 고용하고 다니는 것 같은데···.

'흐음, 각성 경호원이라···,'

악수를 마치고 이고르 바라노프가 품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명찰을 꺼내 태주에게 두 손으로 건네며 말했다.

"다이아몬드 명패입니다. 플래티넘 원판에 다이아몬드로 장식했습니다."

"···다이아몬드 등급?"

"네, 전엔 몰라봬서 죄송합니다. 이제라도 실수를 바로잡을 기회를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거 과하네요."

씨익, 하고 웃는 이고르 바라노프.

말은 공손하게 하고 있지만 그의 얼굴엔 숨길 수 없는 자부심이 드러나 있었다.

"김태주 회원님께선 제국에서 20명도 채 되지 않은 다이아몬드 등급 회원이 되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짝짝짝짝!

기다렸다는 듯 로비 전체로 울려 퍼지는 박수 소리.

태주도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고르는 알고 있을까?

지금 엄청난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는 걸.

※ ※ ※

이고르 바라노프는 만족했다.

이 정도 예우면 충분하지.

황자의 귀에도 들어갈 테고.

백방으로 알아본 결과 김태주 회장이 마스터에 버금가는 실력자라는 소문도 들었다.

물론 많이 과장되었을 것이다.

각성도 안 한 사람이 어떻게 마스터를 상대하나?

아무리 따져도 김태주 회장은 다이아몬드 등급엔 미치지 못한다.

최대 골드 정도?

동종 업계인 미리내 제약의 이동우 등급이 골드인데.

그러나 무리를 해서라도 잡아둘 필요가 있었다.

생각보다 성공 잠재력도 있는 것 같고, 황자와의 관계도 그렇고.

생색은 내줘야지.

자격이 되지 않지만 힘을 써서 최고 등급을 부여했다는 사실을.

"다이아몬드 등급은 아무에게나 부여되지 않습니다. 현재 회원님들도 제국 10개 기업의 회장님이나 황자님, 그리고 최소 별 4개 이상의 장성들입니다."

"···아! 네네."

김태주의 다소 심드렁한 말투.

이고르 바라노프는 살짝 심기가 상했지만 끝까지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럼 다이아몬드 회원님들의 전용 공간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이쪽으로."

태주는 이고르와 조미영, 그리고 각성 경호원과 함께 다이아몬드 전용 엘리베이터를 탔다.

그런데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코를 킁킁거리는 태주.

"저기, 혹시 냄새 안 나나요?"

"무, 무슨? 글쎄요. 저흰 하루에 세 번씩 회원님들이 타시는 엘리베이터를 청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청결에 있어 단 한 번도 회원님들의 불만이 없었습니다."

"그래요? 전 냄새가 많이 나서."

이고르 바라노프는 뜨악한 표정,

이 새끼 뭐지?

기껏 다이아몬드 명패 발급해줬더니, 냄새가 난다고?

'진상인가?'

엘리베이터가 최고층에 멈췄다.

그러자 드러나는 공간.

한 층을 다 사용했는지 매우 넓었다.

"여기가 우리 클럽 최고 등급 회원분들이 서로 교류를 나누는 공간입니다."

번쩍번쩍 빛나는 조명 아래, 고풍스러우면서도 현대 감각에 뒤떨어지지 않은 소파와 탁자들이 놓여 있었고, 벽면엔 이름난 화가들이 그린 명화들이 걸려 있었다.

하지만 태주에겐 이 방의 화려함 따윈 눈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이곳이 사방이 막힌 방안이란 사실이 중요할 뿐.

태주는 천천히 방문 앞으로 걸음을 옮기며 이고르에게 물었다.

"경호원은 언제 고용하셨나요?"

"···네? 으음, 일주일 정도 됐습니다만, 그건 왜 물어보시는 건지?"

"고용하신 목적은?"

이고르 바라노프는 태주의 질문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진짜 진상인가 보다.

다이아몬드 등급 명패를 받고도 심드렁한 표정도 마음에 들지 않고, 엘리베이터에 냄새가 난다고 하질 않나, 이번엔 각성 경호원을 언제 고용했는지까지 물어보고.

조미영 매니저도 당황했다.

조금 전부터 이상해진 태주의 태도.

'왜 저러지?'

이고르는 꾹 참고 대답했다.

"이 일을 하다 보면 적이 많이 생깁니다. 주로 클럽 가입과 등급에 대한 불만이 가장 많죠. 나는 왜 가입이 거절되는 거냐? 등급을 올려달라···, 심지어 살해 협박도 들어오는 판국입니다."

"그렇군요."

태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물었다.

"마인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또 이어지는 황당한 질문, 이고르는 불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생각하고 말고가 어디 있습니까? 무조건 죽여야죠. 저의 숙부님이 유럽 마인 참사의 희생자였습니다."

"안타깝네요."

"맞습니다. 마인들은 변종 바퀴벌레 같은 새끼들입니다."

태주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근데 여기도 변종 바퀴벌레 한 마리가 보입니다만."

"무슨···? 아니, 자꾸만 왜 그러십니까? 불만이 있으시면 터놓고 이야길 하십시오."

"잡아서 보여드리죠. 그게 가장 빠른 것 같네요."

순간!

태주의 코트가 펄럭인다.

어느새 그의 손에 나타난 유엽비도 한 자루가 공기를 찢고 날아가 이고르를 향해 날아갔다.

츠핏!

"허억!"

아무것도 못 하고 꼼짝없이 굳어버린 이고르.

하지만 비도는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푸욱!

"아악!"

그의 뒤에 서 있던 각성 경호원의 어깨에 적중했다.

날아오는 힘에 밀려 벽에 처박힌 각성 경호원.

콰당!

"세르게이!!!"

이고르는 기겁했다.

눈 깜짝할 새에 이루어진 공격.

진짜 미친놈이구나.

다짜고짜 칼을 날려?

바로 그때!

"캬아아아악!"

찌지직!

각성 경호원 세르게이의 옷이 찢어졌다.

뿌드드드득!

순식간에 변하는 그의 몸.

팔다리가 길어지면서 얼굴도 변했다.

마수화.

마인을 판별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증거.

인간과 마수의 속성을 둘 다 가지고 있는 마인들.

그래서 겉으로 보면 절대 알아차릴 수 없다.

마인의 정체는 그들이 죽거나, 마수화 스킬을 발현할 때만 드러난다.

클럽 매니저 조미영이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악!"

이고르 바라노프는 주춤주춤 뒷걸음을 쳤다.

"···마, 맙소사!"

각성 경호원이 마인이었다고?

같은 슬라브계 제국민이라 믿고 고용했는데.

한편.

마인 세르게이는 김태주라는 놈이 마인에 대해 언급할 때부터 이미 긴장하고 있었다.

왜 굳이 이 상황에서 마인이란 말을 꺼내지?

마인의 덕목은 항상 조심, 또 조심하는 것.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탈출로부터 살피고 있었다.

도망갈 수 있는 경로는 저 방문.

하지만 김태주라는 놈이 막고 있다.

누구도 이 방을 나갈 수 없게끔.

'혹시 내 정체가 탄로 났나? 절대 그럴 리 없을 텐데.'

그러던 참에,

츠핏!

느닷없이 어깨로 날아온 투사체.

푸욱!

콰당!

"···씨발!"

들켰다.

세르게이는 바로 마수화를 시전했다.

"캬아아악!"

어쩔 수 없다.

무조건 탈출한다.

하지만,

"헛!"

바로 눈앞에 김태주의 얼굴이 보인다.

'이렇게 빨리?'

세르게이는 마수화로 변한 긴 손톱을 놈의 얼굴에 흩뿌렸다.

츠파파팟!

이건 탈출을 위한 사전작업.

동시에 도약 스킬을 이용해 힘차게 위로 점프했다.

이놈을 뛰어넘고 방문을 부순 뒤 탈출한다.

하지만,

덥석!

"···어?"

발목이 잡혔다.

천장이 빙글 돌았다.

바닥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휘리릿!

세르게이는 허공에서 반원을 그리며 그대로 바닥으로 처박혔다.

태주는 구례에서 마인을 잡을 때 오진형이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될 수 있으면 생포하면 좋았을 거란 말.

그래서 그렇게 하기로 했다.

마수로 변한 놈에게 표홀질풍보로 빠르게 접근해, 놈의 일격을 간단하게 피한 후,

펄쩍 뛰어오른 놈의 발목을 덥석 움켜잡았다.

반 바퀴 공중에서 돌린 후, 바닥으로 패대기.

콰앙!

"크아아악!"

벌떡 일어서는 놈을 혈인독장으로 한 방 먹이고.

퍼억!

"켁!"

탁!

로우킥으로 발을 걸어 앞으로 넘어뜨린 후,

꽈당!

무릎으로 놈의 척추를 눌렀다.

으드드드득!

척추뼈 부러지는 소리.

"끄어어어어···,"

이고르 바라노프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마수화로 변한 마인.

그러면 놈이 가진 각성 등급의 한 단계, 혹은 두 단계 이상의 전투력을 발휘한다.

자신이 직접 뽑아서 알고 있다.

세르게이는 주니어 익스퍼트.

마수화 스킬을 발현하면 최소 미들이나, 슈페리어일 텐데.

김태주 회장은 성인 격투기 선수가 유치원생을 상대하는 것처럼 놈을 가지고 놀았다.

이게 말이 돼?

태주는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클럽 매니저 조미영에게 말했다.

"조미영 매니저님, 마인 신고는?"

"···113이요."

< 또 한 놈 잡았다. > 끝

ⓒ 꾸찌꾸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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