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선계(仙界).
용궁 대장군 백경이 몰래 눈치를 보며 멀티플렉스 1층으로 들어섰다.
"주선."
"응? 백경, 여기 웬일인가? 독선이 보면 어쩌려고."
"자네가 줬던 술이 생각나서 도저히 참을 수 있어야지."
"흐음, 일단 앉게. 술친구를 쫓아낼 수야 있나."
주선이 바에서 병 하나를 까서 유리잔에 따랐다.
"지구에서도 최고급품인 싱글몰트 위스키라네. 이 한 병이 자동차 한 대 값이야."
"이, 이 귀한 술을···,"
감격한 백경은 조심조심 크리스털 술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크허, 좋구나. 과연 명불허전이군."
"한잔 더 할 텐가?"
"감사히 받지."
주선은 서두르지 않았다.
백경이 설마 술을 마시러 여기 왔을까?
용왕이 보냈을 것이다.
"그건 그렇고 독선을 한번 만나볼 수 없을까?"
"응? 큰일 날 소리! 벌써 잊었나? 선계에서 온갖 유세를 다 떨어놓고서는···,"
"사과하려고 그래. 다리 좀 놓아주게."
"···사과만?"
"겸사겸사 여의주도 팔고."
드디어 원하는 단어가 나왔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여의주라, 자네도 알다시피 상황이 바뀌었네. 곧 지구에서 짝퉁 여의주가 배송되면 여의주가 선계에서 굴러다녀도 거들떠보지도 않을 거야."
설마 그렇겠냐마는···,
"그, 그건 나도 알고 왔네."
"곤란하군. 독선이 그걸 살지 모르겠어. 그 양반도 뒤끝이 있거든."
"내 얼굴을 봐서 잘 좀 이야기해주게."
"거참! 여의주라, 그걸 어디다 쓸까···?"
그러면서 은근하게 물어오는 주선.
"물어볼 것이 있는데."
"뭐든! "
"만약 인간이 여의주를 품으면 어떻게 되나?"
"···인간? 흐음, 절대 안 되지. 아마 몸이 터져버릴걸?"
"그럼 신선은?"
"신선이야 상관없네. 여의주로 내단을 만들면 될 테니."
그렇단 말이지?
태주 대협은 이미 인간의 격을 넘어섰다.
충분히 여의주를 품을 수 있다.
"좋아. 내가 독선과 다리를 만들어주지."
"오오! 그럼 정말 감사하네. 내 결코 은혜를 잊지 않을 거야."
"그건 그렇고, 용궁에 여의주 말고 다른 보물은 없나?"
"다른 보물?"
"여의주만 팔면 끝인가? 지속적인 코인 수급처가 있어야지."
주선의 말이 맞다.
어차피 여의주 팔아봐야 좋은 가격 받지 못할 테고.
다른 걸 팔아서 충당해야 한다.
백경은 잠시 고민했다.
"글쎄, 제일 흔한 걸 따지면 오색진주 정도?"
"오색진주? 그건 효능이 뭐길래?"
"별거 없네. 몸에 지니고 다니면 피부가 보들보들하고 매끄러워진다는 거 말고는."
별거 없긴 왜 없어?
지구의 화장품 산업이 망할 수도 있는데.
"왜? 진주도 필요한가?"
"흐음, 부족하긴 하지만···, 내가 잘 말하면 독선이 사줄지도, 지구로 수출하면 되거든."
"그럼 더할 나위 없지. 잘 부탁하네."
"친구 좋다는 게 뭔가? 힘 한번 써보겠네."
주선의 미소가 비릿해졌다.
용왕 새끼, 여의주 인질 삼아 거들먹거릴 때가 좋았지?
넌 이제 호구 된 거야.
헐값에 여의주 강탈해주마.
< 넌 이제 호구 된 거야. > 끝
ⓒ 꾸찌꾸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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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긴 왜 오셨어요? >
태주는 과거 검선이 왔을 때도, 독선이 왔을 때도 마음껏 쓰라며 블랙 카드를 줬었다.
또 언제 지구로 올지도 모르는데, 후회 없이 놀다 갈 수 있도록.
그런데 검선이···,
"필요 없네."
"왜요?"
"올 때마다 신세 질 수 있나? 내 힘으로 경제 활동을 하면 돼."
"여기서 돈을 버시겠다고요?"
"벌어서 써야 보람이 있는 법이지."
대체 어디서 돈을 벌겠다고?
혹시 은행이라도 털려고 하나?
진짜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아 불안하다.
귀곡이야 황립 도서관에 있겠다고 하니 신경 쓸 일은 없다.
문제는 검선과 제천대성.
둘이서 황제, 금수호와 따로 속닥속닥 이야기를 나눈 후, 그런 결정을 내렸다.
무슨 작당을 했는지 물어도 대답을 안 해줬고.
후원금 믿고 그러는 건 아닐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신청한다고 바로 나오는 것이 아닌데.
"제가 돈을 빌려드릴게요. 나중에 후원금 나오면 갚으시고."
"어허, 친한 사이일수록 돈거래는 신중해야 하네."
"···."
뭔가 있다.
자기가 벌어서 자기가 쓰겠다는 자신만만한 표정, 아마 지구에 오기 전부터 계획했던 것 같다.
'나중에 알게 되겠지.'
태주는 신선과 검선을 믿기로 했다.
'그나저나 구례는 언제 갈 수 있나?'
아직도 그곳엔 사람이 바글바글하다.
파주도 그렇다.
자신 때문에 티제이 그룹 식구들이 고난을 겪을 것이 분명하다.
미안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시간이 지나면 조금 뜸해질 거야.'
그렇게 일주일이 흘러갔다.
※ ※ ※
삼한제국 구례.
태주의 예상대로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원인은 SNS 때문.
뉴서울에서 검선과 제천대성을 목격했다는 증언들이 속속 올라왔다.
또한,
- 김태주 회장도 뉴서울에 있다.
- 신선, 제천대성도 함께 있을 거야
그럼 그쪽으로 가야지.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해진 구례와 파주.
그동안 사생활이 없던 거나 마찬가지였던 티제이 그룹 사람들은 그제야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백홍표도 그중 하나.
그는 티제이 그룹의 모든 직책을 거절하고 오직 행복마을 촌장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구례 '행복한 마을'
예전엔 태홍 고아원이었지만 이젠 명칭이 바뀌었다.
이 일이 자신의 천직이라고 생각했다.
커가는 아이들을 보니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그도 라이브 방송을 봤다.
전설 속 존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의동생.
태주가 왕래하는 다른 세상은 신선들이 노니는 곳일 터.
마나 거부증 치료제, MRC의 주재료인 꽃, 복숭아, 신비로운 술, 그리고 마수를 퇴치하는 금속.
이것들이 다 어디서 왔겠나?
'태주와 만나게 된 건 하늘의 뜻일 거야.'
항상 감사하며 살고 있다.
태주 덕분에 행복 마을은 언제나 웃음꽃이 피어난다.
삼한제국 전체에서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데려왔다.
부모가 있지만 버려진 아이들도, 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인 아이들도.
모두 데려와서 먹이고 입히고 공부시켰다.
그 결과 마을이라는 명칭을 붙여도 될 만큼 거대해진 보육원.
마을 안에 뭐든지 다 있다.
초등, 중등, 고등학교에서부터, 도서관, 체육관, 놀이시설, 편의점···, 없는 게 없다.
원생들도 얼마나 많은지 하루에 들어오는 식자재만 해도 어마어마했다.
지금도 급식실엔 아이들이 상당히 많았다.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아 언제라도 오면 밥을 먹을 수 있게 해뒀으니까.
행복마을 대 급식실에 주차된 10대의 냉장 냉동 탑차.
이게 다 3일 안에 소모될 분량.
백홍표는 탑차 문을 열어서 직접 음식 재료들을 검수했다.
아이들 먹일 건데 질 나쁜 재료라도 섞여 들어오면 안 되지.
'고기 질은 좋은데, 양이 너무 적어.'
다음엔 좀 더 주문을 넣어야겠다.
이 정도 먹고 애들이 키가 크겠나.
"통과. 이 고기들, 냉동고에 보관하세요."
"알겠습니다."
백홍표의 허락이 떨어져야 식자재가 조리실 안으로 옮겨질 수 있었다.
다음은 야채.
"싱싱하네요."
"오늘 막 비닐하우스에서 온 것들입니다."
이것도 통과.
행복마을에 납품하는 상인들은 항상 좋은 재료들만 골라서 가지고 온다.
속일 수가 없었다.
속였다간 구례에서 장사 못한다.
백홍표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검수 작업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10대의 탑차 모두, 하나하나 문을 열어 봐야 직성이 풀렸다.
'다 끝났나?'
탑차들 모두 확인했다.
그런데,
'음?'
한 대가 더 있다.
오늘 들어오기로 한 차량은 10대, 이거까지 합하면 11대.
그래서 운전수들에게 물었다.
"이 차 몰고 오신 분?"
아무런 대답이 없다.
"운전자 누굽니까? ···없어요?"
이상하네.
운전자도 없고.
'이거 혹시···,'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탑차 문을 열었는데.
철컥!
"어···,"
잠겨 있는 문.
철컥, 철컥, 철컥···,
하는 수 없다.
백홍표는 냉동 탑차의 문을 힘으로 잡아 뜯었다.
우드드드득!
그러자 드러나는 내부.
식료품이 아니었다.
탑차 안에 가득 쌓여있는 상자들.
짙게 풍겨오는 이상한 냄새.
그리고 상자 위에 놓인 정체불명의 전자장치.
백홍표는 경악했다.
"서, 설마?"
딱 봐도 알겠다.
"미친!"
이건 폭탄이다.
탑차 전체에 폭탄이 가득 들어 있음이 틀림없다.
'이게 터지면?'
급식실과 가깝다.
아이들이 안에서 밥을 먹는 중이고.
"아이들에게 대피하라고 전하세요."
"네?"
"빨리! 서둘러요. ···이, 이거 폭탄일지도 모릅니다."
"헉! 아, 알겠습니다."
운전석으로 달려가는 백홍표.
이 차는 여기 있으면 안 된다.
그러나,
'키가 어디 갔지?'
마침 저 앞에 보이는 운동장.
아무도 없다.
그렇다면?
'···힘으로 밀어야겠군.'
찌그덩!
바퀴가 잠겨 있었지만 백홍표의 완력에 의해 밀리는 탑차.
그는 적합자.
평소 태주가 영약, 복숭아 등등 좋은 것이 생기면 다 가져다줬다.
비록 각성하진 못했어도 탑차 정도 미는 거야 어렵지 않았다.
"모두 마을에서 나가!!! 운동장엔 얼씬도 하지 마!"
드득! 드드드득!
차를 밀면서도 고래고래 고함치는 백홍표.
"다들 피해! 가까이 다가오면 안 돼!!!"
넓은 운동장 한가운데 탑차가 놓이자,
'됐어!'
이제 자신이 피할 차례.
그대로 뒤로 돌아 달려가려고 했는데,
콰콰콰콰콰콰콰쾅!
거대한 화염과 함께 폭발하는 탑차.
작은 버섯구름이 생길 정도의 엄청난 폭발이었다.
"커헉!"
폭풍에 휘말린 백홍표가 허공으로 훨훨 날아가 땅으로 떨어졌다.
슈우우웃! 쿠쿵!
와장창창!
행복마을 건물 유리창이 산산조각이 났다.
운동장엔 폭발로 인해 거대한 구덩이가 생겼다.
※ ※ ※
태주는 아직 뉴서울에 있었다.
구례와 파주를 피해 있었는데, 이젠 여기가 더 북적인다.
그들이 뉴서울에 있다는 SNS 소문 때문에.
'이건 뭐, 숨바꼭질도 아니고.'
검선과 제천대성을 만나지 못하자 사람들이 자신을 찾아다녔다.
티제이 그룹 뉴서울 지점, 리더스 클럽, 자신이 묵고 있는 숙소까지.
별수 있나?
또 자리를 피해야지.
'어디로···,'
뭐, 구례 아니면 파주밖에 없다.
혹은 양산이나.
그래서 짐을 싸려고 하는 순간!
지이이잉,
울리는 스마트폰.
백서연이었다.
"서연씨, 접니다. 무슨 일···, 네?"
태주의 안색이 굳어졌다.
"···당장 가겠습니다."
쐐애애애액!
만리비검이 남쪽으로 날았다.
발아래 보이는 구례 종합병원.
옥상에 착륙해서 병원 응급실로 달려가는 태주.
병원 복도를 꽉 채운 사람들.
"시, 시장님."
이정학 구례 부시장이 침통한 얼굴로 그를 맞이했다.
"어떻습니까?"
"그, 그게···,"
"됐습니다. 직접 확인할게요."
응급실 안엔 눈물로 얼굴이 범벅이 된 백서연이 의사와 함께 있었다.
그리고 침대에 누워 산소호흡기와 생명유지장치를 주렁주렁 달고 누워있는 백홍표도.
화상을 입었는지 온몸과 얼굴에 붕대가 칭칭 감겨 있었다.
"···형님."
태주가 천천히 침상 곁으로 다가갔다.
그의 손을 꼭 잡았다.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프다.
그러자 의사가 조심스럽게.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뭐?
"뇌사 상태입니다. 현대 의학으로는 살릴 방법이 없습니다. 안타깝지만 환자분의 유언에 따라 장기기증을···,"
뇌사.
뇌의 모든 기능이 정지했다.
기계의 도움 없이 자력으로 호흡이나 심장 박동을 못 한다.
죽은 거나 마찬가지라는 말.
털썩!
백서연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태주는 의사의 말을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
형님이 왜 죽어?
다시 살리면 된다.
그래서 단호하게!
"생명 유지 장치 절대 제거하지 마세요."
"···어음."
"제가 살립니다, 반드시!"
"아, 알겠습니다."
방법은 있다.
선계에서 해답을 찾는다.
'되살이꽃도 있다고 했어.'
그러나 시간이 조금 걸릴 것이다.
독선에게 상황을 설명해야 하고, 천계에서 꽃을 구해서 배송을 받아야 하니.
그동안에 이런 짓을 한 놈부터 잡는다.
"누가 이랬습니까? 범인은 밝혀졌습니까?"
서늘한 음성으로 이정학 부시장에게 질문하는 태주.
"철저하게 조사 중입니다. 지금 구례 전체에 외부 이동 중지 명령을 내렸습니다. 누구도 구례 밖으로 나갈 수 없게요."
"제정원에 와달라고 요청하세요. 도와줄 겁니다."
"바로 연락을 취하겠습니다."
"그리고 잡으면 전화하세요. 내가 직접 심문할 테니까."
으드득!
이빨을 꽉 깨물고 맹세했다.
이 일과 관련된 놈은 누구라도 살려두지 않겠다고.
※ ※ ※
황천계.
강림차사는 오늘도 업화궁 한구석에 짱박혀 전자담배를 빨며 스마트폰으로 지구에 새로 데뷔한 걸그룹 뮤비를 보고 있었다.
'오! 확실히 센터는 센터구나.'
노래도 잘하고, 춤도 잘 추고, 얼굴도 이쁘고, 몸매도 좋고,
얼마나 좋은 세상인가?
다른 세상 황천계에서 지구 삼한의 유명한 걸그룹 덕질도 할 수 있으니.
독선과 태주 대협 때문이다.
그들 때문에 무료한 상위계가 활력 가득한 세상으로 변하고 있다.
하지만 용왕이 분수도 모르고 깝치다가 된통 당하고 있는 중.
여의주가 뭐가 대단하다고.
그저 쓸만한 내단 정도 아닌가?
협상단을 보내 가격을 조율하고 있다지만 결국 홀딱 빼앗길 것이다.
그래도 싸지.
다 자업자득이다.
'참! 쇼핑몰에 전자담배 신상 액상이 출시됐다던데···,'
강림은 스마트폰으로 선계 쇼핑몰에 접속했다.
'가격 괜찮네.'
장바구니에 담고,
그런데 바로 그때!
"저어, 강림차사님."
어떻게 알고 저승사자 한 놈이 자신이 짱박힌 곳으로 찾아왔다.
에이! 귀찮게.
"왜?"
"곤란한 일이 생겼습니다."
"뭔데?"
"준비가 안 된 혼백이 넘어와서···,"
"쯧, 알아서 처리하면 되잖아."
종종 이런 경우가 있다.
아직 죽을 때가 아닌 인간이 운명의 어긋남으로 인해 황천계로 올라오는 것.
운명이 어긋난 혼백은 아직 생기가 남아있다.
살날이 많이 남았는데, 죽지 않아야 할 순간에 죽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일이 생기면?
다시 돌려보내면 된다.
생각보다 흔한 상황.
예를 들어 상갓집 병풍 뒤에 안치된 시신이 장례식 도중에 벌떡 일어난다거나, 심지어 무덤에 매장하는 순간에 관짝을 손으로 두드린다거나.
다들 황천계에서 돌려보낸 사람들.
"사정 설명하고 기억을 지워 돌려보내."
"그, 그게 그 혼백님이 천인 같으셔서요. 혼백이 너무 맑습니다."
"음? 처, 천인? 그럼 안 되지."
천인은 고귀한 존재.
그런데 잘못된 절차로 저승에 왔다니.
가볍게 처리할 문제가 아니다.
천인 혼백은 대함에 있어 정성을 다해야 한다.
"어디 계셔?"
"급한 데로 육신을 만들어 업화궁 귀빈실로 일단 모셨습니다."
"그래? 어떤 몸을?"
"당연히 천인의 몸이지요."
"잘했어."
천인에게 주어지는 육신과 죄인에게 주어지는 육신은 완전히 다르다.
죄인의 몸은 오직 고통만을 주기 위해 설계되었다.
다른 용도가 없다.
애초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간혹 천마와 혈마처럼 한계를 뛰어넘는 미친놈들이 나오긴 하지만.
반면 건강, 행복, 즐거움을 위해 정교하게 만든 육신을 부여받는 천인들, 인간 세상에서 주어진 몸보다 훨씬 뛰어나다.
더불어 생전의 모습과 나이도 그대로 유지된다.
어릴 때 죽으면 어린 몸, 늙어서 죽으면 늙은 몸.
물론 선택에 따라 바꾸는 것도 가능하다.
강림은 서둘러 명부책을 들고 업화궁 귀빈실로 달려갔다.
"아이고, 귀하신 분이···,"
고운 면포의 옷을 입고 귀빈실에 앉아있는 중년의 남자.
"여, 여기가 저승입니까? ···제가 죽은 게 맞나요?"
"하하하, 저승은 맞지만, 너무 일찍 오셨어요."
"···일찍이라뇨?"
"아직 사망하시지는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승으로 되돌아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아!"
남자가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죽은 줄 알았는데 다시 살 수 있다니.
"몇 가지 확인할 절차가 있으니 협조 부탁드리겠습니다."
"얼마든지요."
강림 차사는 명부책 폈다.
이것도 일종의 보패.
강호 무림에 사는 모든 인간의 이름과 나이. 사는 곳이 적혀있다.
찾기도 쉽고.
의식만 하면 저절로 책이 펴진다.
"인간계에서 사시던 곳이?"
"구례, 쭉 구례에서 살았습니다."
"···으흠, 구례라."
강호에 그런 지명도 있었나?
묘하게 귀에 익긴 하지만.
명부책도 펼쳐지지 않았다.
구례라는 지명이 없다는 말인데.
"혹시 성함이?"
"백홍표입니다."
"오! 그러시군요.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제가 확인해보겠습니다."
파르르르르.
빠르게 넘어가는 명부책.
백홍표라는 이름이 다수 보였다.
하지만 지금 앞에 앉아있는 천인과는 전혀 다른 인물들, 동명이인일 뿐.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의 강림.
"···진짜 구례라는 곳에서 오신 것이 확실합니까?"
"네, 삼한제국 구례."
"아하! 삼한제국에서 오셨구나. 그럼 지구?"
"그렇습니다."
"하하! 난 또 그것도 모르고, 하하하, 하하하하···, 어? 어음, 아아아···, 뭐, 뭐라고요?"
지구라니?
강림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사, 삼한의 구례? 태, 태주 대협이 있는?"
백홍표도 깜짝 놀랐다.
태주 이름이 여기서 왜?
설마?
"태주도 여기 왔습니까?"
"···와, 왔다 간 적은 있습니다만."
"무슨 말씀이신지,"
"사, 사실 그, 그게···, 아무튼 여긴 왜 오셨어요?"
"왜라니요? 제가 그걸 어떻게?"
황당하기 이를 데 없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전혀 다른 세상의 인간계.
지구의 혼백이 왜 황천계에?
염라대왕님이라면 알지도 모른다.
황천의 법칙을 주관하는 분이니까.
혹시 그 양반이 뭘 했나?
'물어봐야겠군.'
독선에게도 연락하고.
< 여긴 왜 오셨어요?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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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짜 연결되면 큰일인데…. >
구례 행복마을에서 일어난 폭발 사건.
얼마나 폭발이 컸던지 구례 전체에 진동이 느껴질 정도였다.
언론에서도 속보로 다뤘다.
<구례 행복마을 보육원 폭탄 테러 발생.>
<백홍표 원장 중태에 빠져, 불행 중 다행으로 원생들의 피해는 없어.>
<구례 부시장 이정학, 반드시 범인을 붙잡아 대가를 치르게 할 것.>
<황제 폐하 격노! 보육원 테러는 역적 행위에 준하는 것이라 선언.>
<지리산 방어 부대에 지시, 구례 봉쇄 명령. 수사를 방해하는 자는 엄하게 벌할 것을 천명.>
제정원이 수사단을 대거 이끌고 구례로 내려왔다.
현장에 남은 흔적이 있는지 조사하는 한편, 폭탄 트럭이 어디서 왔는지 추적에 들어갔다.
구례 시민들도 함께 분노했다.
자발적으로 CCTV 자료를 내어놓는 등, 수사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태주는 신선들에겐 알리지 않기로 했다.
그들이 할 일이 뭐가 있나?
범인은 제정원과 자신이 잡으면 된다.
지이잉!
스마트폰으로 걸려온 전화.
"네, 접니다."
귀곡 선인에게 연락이 왔다.
- 괜찮은가? 도와줄 것은?
"없어요. 마수 잡는 것도 아니고. 편하게 노시고 계세요."
- 그럴 수야 있나? 검선하고 제천대성에게 연락했네. 최대한 빠르게 구례로 가지.
"진짜 안 오셔도 됩니···,"
뚝!
끊긴 전화.
어쩔 수 없다.
도와주러 오겠다는데, 거절할 수도 없고.
사실 와도 별수 없겠지만.
수사는 빠르게 진행됐다.
제정원 문경식 차장이 직접 태주에게 보고했다.
"도난 차량으로 밝혀졌습니다. 식자재 납품 차량으로 위장해서 보육원 안으로 들어온 것 같습니다."
"누가 몰고 온 거죠?"
"추적 중입니다. 아시다시피 CCTV가 곳곳에 있는 게 아니라서···, "
행복마을 근처까진 차량을 확인할 수 있었지만, 첫 출발지가 어딘지 알아내는 것이 시간이 걸린단다.
"자동차 블랙박스와 대조하면서 찾아볼 계획입니다. 반드시 찾아내겠습니다."
문경식은 자신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구례 시민들의 협조가 엄청납니다. 심지어 자신들이 잡겠다고 나설 정도니까요."
제보 전화가 속출했다.
굳이 요청하지 않아도 시민들이 블랙박스 영상을 제출했다.
그리하여 시간이 흐르고,
"잡았습니다."
"누구죠?"
"이름은 조만구, 외부인이 아니라 현지인이었습니다."
"···구례 시민이라고요?"
"그렇습니다. 전과는 없고, 현재 자영업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조금 의외다.
외부인일 거라 생각했는데.
"확실한 거죠?"
"CCTV 영상과 블랙박스도 확인했습니다."
"자백은요?"
"당연히 부인하고 있습니다."
"제가 심문해도 되겠습니까? 제 집무실에서, 단둘이."
"네!"
문경식 차장이 용의자를 티제이 그룹 본사 집무실로 데리고 왔다.
태주를 보자마자 머리를 흔들며 부정하는 조만구.
"회, 회장님, 저, 전 절대 아닙니다. 정말 억울합니다."
"···."
"제가 그 차를 운전했다니요! 죄송하지만 전 아무런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후우, 그렇군요."
황천계의 보패, 손가락에 낀 판관의 반지가 반응하지 않았다.
즉 조만구의 말은 진실이었다.
혹시 판관의 반지가 잘못된 걸까?
실험해보자.
"조만구씨."
"···네네."
"지금부터 제가 묻는 말에 거짓말로 답해주세요."
"거, 거짓말요?"
"그래요. 진실 말고 거짓말."
조만구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아침에 뭘 드셨죠?"
잠시 생각하다가,
"제육 덮밥 먹었습니다."
지잉.
반응하는 판관의 반지.
거짓말.
"결혼하셨어요?"
"아뇨."
지잉.
거짓말.
"이 자리가 불편하시죠?"
"전혀···,"
거짓말.
"그럼 백홍표 원장님을 죽이셨어요?"
"아, 아닙니다!"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응답.
진실이었다.
'후우,'
난감하다.
판관의 반지는 정상적으로 작동한다.
'그런데 대체 왜?'
조만구와 만나기 전, 태주도 문경식 차장에게서 영상을 봤다.
폭발 차량을 운전한 이는 조만구가 확실하다.
그러나 필사적으로 부인하고 있다.
심지어 진실이었다.
그렇다는 말은?
'세뇌, 현혹, 혹은 최면, 그것 말고는 없어.'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으니 가장 가능성이 높다.
파훼할 수 있을까?
시도해볼 방법이 하나 있다.
바로 음공.
내공을 음성에 실어서 대상의 정신을 뒤흔드는 무공.
가장 대표적인 것이 불문의 사자후.
내공 대신 다른 기운을 실을 수도 있다.
사특한 기운을 물리치는 선기 말이다.
태주는 조만구를 노려보며 크게 외쳤다.
"갈(喝)!"
순간, 소스라치게 놀라는 조만구.
"정신 차리세요!!!"
"···헉!"
그의 표정이 멍해졌다.
그러더니 무언가 생각나는지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떠오르는 기억.
자신이 저지른 끔찍한 짓.
"으아···, 허엉! 허어어엉!"
울음을 터뜨리고는 말을 이어나갔다.
"제, 제가 한 게 맞습니다. 허엉, 흑흑, 제가 그 차를 운전했습니다."
"진정하고 자세히 말해보세요."
"그, 그게···,"
더듬거리며 말하는 조만구.
"우, 운전을 하던 중이었는데 접촉 사고가 났었습니다. ···아, 앞차가 갑자기 정차했거든요."
"그래서요?"
"보험 처리를 하려고 앞차 운전자와 대화를 시도했는데, 뜬금없이 제게 지시하더군요. 저쪽 유료 주차장에 냉동 탑차가 한 대 있는데, 그걸 몰고 시간 맞춰 행복마을로 가라고요."
"그놈 얼굴에 문양이 있었나요?"
"그, 글쎄요.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예상대로였다.
조만구는 세뇌당했다.
"도, 도저히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그냥 시키는 대로 했어요. 다른 냉동 탑차를 따라가 급식실 옆에 주차하고 나서 키를 뽑아 집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까맣게 잊어버렸습니다."
다 진실.
알만하다.
놈이 조만구를 죽이지 않았던 이유, 그를 범인으로 몰고 가기 위해서였다.
무조건 범인이 잡힐 테니, 그럼 완전 범죄가 되는 것이고.
"접촉 사고가 일어났던 장소는 알고 계시죠."
"기억납니다."
"그곳이 어딘지 알려주세요."
"네. ···그, 그런데 전 체포되겠죠?"
"···."
태주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뇨. 집으로 가시면 됩니다."
"아아아···,"
이 사람이 무슨 죄가 있나?
나쁜 새끼는 따로 있다.
수사는 다시 원점에서.
조만구가 접촉 사고를 일으켰던 장소와 시간을 중심으로.
제정원이 또 밝혀냈다.
"여기, 이놈입니다."
"···각성자는 아니네요."
"용의자가 확실합니다. 외모야 폴리모프 반지를 착용하면 되니까요."
폴리모프 아이템은 얼굴 모양은 물론, 문양마저 지울 수 있다.
제정원도 그걸 알고 있고,
그러면서도 용의자를 특정했다면?
"짚이는 놈이 있나 봐요?"
"네, 제정원에선 타국 정보기관과의 협조하에, 전 세계 주요 빌런들의 키, 체형, 걸음걸이, 행동의 버릇 등을 데이터 자료로 입력해두고 있습니다."
얼굴은 바꿔도 고유한 행동은 숨기지 못한다는 의미.
문경식이 태블릿을 태주에게 내밀었다.
"후동평, 중국계 청부업자입니다. 입력된 데이터와 거의 일치합니다."
찾았다.
추적부 작동 요건도 충분하다.
※ ※ ※
황천계.
염라는 이승의 세상사를 보여주는 연명경(然命鏡)으로 인간계를 관찰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대량 살상의 조짐이 있군.'
대전쟁이 기미가 보인다.
이곳의 인간계도 만만치 않은 곳.
마수는 없다고 하나, 흑도의 무리들, 사파의 미치광이들, 마교의 잔당들, 위선으로 똘똘 뭉친 정파들.
밥 먹고 하는 짓이라고는 늘상 칼질, 창질, 주먹질이었다.
그로 인해 하루에 죽어 나가는 사람만 몇 명인가?
지구는 마수와 마인이라는 공동의 적이라도 있지.
무림인들은 정파나 사파나, 오로지 사람 쳐죽이는데 골몰하는 새끼들.
원래 인간이 죽게 되면 혼백(魂魄) 대부분은 저절로 저승으로 올라온다.
그러나 죽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긴 혼백은 다르다.
특히 생전에 악독한 짓을 저지른 못된 놈들, 혹은 처절한 원한을 안고 죽은 사람의 혼백은 이승을 떠돌게 된다.
그런 놈들은 악령으로 변할 우려가 높기에 저승사자나 차사를 파견하여 강제로 끌고 와야 한다.
'앞으로 할 일이 많아지겠어.'
뭐, 이정도야 감당할 수 있다.
과거 정파와 마교의 대전쟁도 버텼는데.
연명경 관찰을 마치고,
염라는 업화궁 자신의 거처로 가서 시원한 캔맥주 하나를 땄다.
칙!
꿀꺽꿀꺽.
"크허! 좋아."
상쾌한 기분.
비록 신선들처럼 지구로 넘어갈 수는 없다손 치더라도 아무런 불만이 없다.
여기서도 즐길 거 다 즐길 수 있는데.
그래도 지구 냄새는 맡고 왔지 않나?
뭐, 다소 불미스러운 일이 생길 뻔했지만 금방 돌아왔으니 큰 탈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강림이 헐레벌떡 자신을 찾아오기 전까진 말이다.
"대, 대왕! 대와아앙!"
"이 새끼가, 또 별일 아닌 거 갖고 호들갑은."
"진짜 큰일이라니까요? 어, 어긋난 혼백이 황천으로 넘어왔습니다."
"이럴 줄 알았다. 어긋난 운명이 한두 번이야? 네가 알아서 처리해."
"하아, 잘 들어보세요. 무슨 일이 생겼는가 하면···,"
설명을 시작하는 강림.
그리고 염라의 눈이 부릅떠졌다.
"···뭐?"
"틀림없다니까요."
"배, 백홍표라는 자가 지구의 혼백이라고? 그것도 구례?"
"분명히 들었습니다. 태주 대협도 이름도 알고 있던데요."
"어으음···,"
이게 무슨 상황인가?
다른 세상 지구의 혼백이 황천계로 왔다고?
혼백이 차원 이동이라도 했나?
"구라치다가 걸리면···,"
"아시잖습니까? 거짓말이 아니라는 거."
환장하겠다.
왜 이런 일이?
'가만!'
순간 번뜩 든 생각.
'···혹시 내가 지구에 갔던 그때?'
5초도 안 되는 시간이었다.
그 틈에 법칙이 뒤틀리기라도 한 건가?
"그 지구 천인은 어디 계시는가?"
"귀빈실에 계십니다."
"내가 가볼 테니, 넌 당장 독선에게 연락해."
"네."
염라는 서둘러 귀빈실로 달려갔다.
그러자 보이는 인간, 강림의 말대로 천인이었다.
"안녕하시오. 저승에 온 걸 환영···, 아니지, 아무튼 난 염라라고 하오."
백홍표도 깜짝 놀랐다.
'여, 염라?'
신화에나 나오는 그 염라대왕?
'아아···,'
이승에선 신선과 제천대성, 저승에 오니 염라대왕.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한 가지 물어봅시다. 태주 대협과는 어떤 사이길래?"
"···네?"
"친척이오?"
갈수록 기가 막혔다.
이젠 폭탄 테러에 당해 죽은 건 별것도 아닌 사실이 되어버렸다.
저승이 실재한다는 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인데 황천계의 차사라는 사람과 심지어 염라까지 태주를 알아?
어쨌든 대답은 해줘야지.
"···피를 나눈 사이는 아니지만 의형제입니다."
"허어!"
염라는 눈을 질끈 감았다.
확실치는 않지만 짐작 가는 부분이 있다.
'역시 그 때문이었어.'
태주의 임시 등선, 그로 인해 황천계가 그와 인연을 맺었고, 더불어 자신도 5초간 지구를 방문했다.
'그때 인과율이 생겨버린 거야.'
태주 대협이 선계와 교류를 하기 이전엔 지구와 황천은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하지만 이젠 달라졌다.
태주, 그리고 그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이 황천과 연결됐다.
그 결과 일차적으로 태주와 친한 인간의 혼백이 황천으로 넘어왔고.
딱 요 정도에서 그치면 모르겠지만···,
복잡하게 얽혀있는 인간사.
인연이 인연을 부르고, 인간관계가 다리와 다리를 건너고, 또 건너게 되면?
'···미치겠군.'
물꼬가 터진 것과 비슷하다.
둑에 생겨난 작은 구멍은 더 크게 변해, 종래엔 둑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말 것이다.
'아니, 지구의 혼백이 왜 다른 세상으로?'
그쪽엔 저승도 없나?
그건 그렇고,
'실험이 필요하겠어.'
지구와 황천이 연결되었다는 가장 확실한 증명.
그것은 바로 '문'의 생성.
물론 전에는 되지 않았다.
황천과 지구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었기 때문에.
하지만 이번엔?
사자와 차사들을 내려보낼 문을 열 수 있다면 지구와 황천은 하나의 세상이나 마찬가지다.
염라는 정신을 집중했다.
그리고 자신이 과거에 가봤던 지구를 상상하며 문을 열었다.
치직! 치지지직!
허공에 생겨나는 검푸른 그림자.
하지만,
칙! 프식, 프시식!
곧 사라지고 말았다.
'허허,'
일단 문을 여는 건 실패.
그럼에도 불구하고 염라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아예 열지 못한 것이 아니라, 생기다가 말았기 때문이다.
절반의 성공이나 다름없다.
언젠가는 열 수 있다는 의미.
'진짜 연결되면 큰일인데···.'
염라는 반쯤 넋이 나갔다.
여기가 지옥인데, 또 다른 의미의 지옥이 펼쳐질까 두렵다.
'차사와 사자들을 더 영입해야 하나?'
지옥의 크기를 더 넓혀야 하는 것도.
"휘유···,"
한숨을 푹 쉬며 주섬주섬 품에서 전자담배를 꺼내 한 모금 깊게 빠는 염라.
달콤해야 할 담배 맛이 쓰디쓰다.
그 모습에 백홍표는 어안이 벙벙했다.
아니 무슨 염라가 전자담배야?
손목에 롤렉스 시계는 또 뭐고?
아무래도 자신이 늘 상상했던 저승의 모습과는 다른 것 같다.
그것도 아주 많이.
※ ※ ※
선계.
당군악은 용궁 협상단과 순조롭게 거래를 마쳤다.
용궁 현문 재상이 혀를 내두르며,
"독선, 진짜 독하시오, 독해."
"정 마음에 안 들면 도로 물리던가."
"···괜히 선명이 독(毒)이 아니군."
"등선하기 전 독마라고 불린 적도 있소."
"쯧쯧."
여의주 매입가격, 3백만 코인.
거의 강탈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미안한 감정은 일도 없다.
처음부터 마음을 곱게 썼다면 모를까.
그래도 상시적으로 용궁과 선계를 통하는 문, 더불어 선계 네크워크 설치, 그리고 전용 스마트폰을 무료 제공해주기로 했으니 이 정도면 된 거지.
당군악은 무한창고 안에 야구공 크기로 압축한 여의주와 편지를 넣었다.
협상단도 돌아갔고, 이제 배송 신호가 울리기만 하면···,
'염라도 만나봐야겠어.'
선계에 용궁과 통하는 문을 설치해야 하니까.
'···지구 상황은 어떻게 되고 있지?'
비욘드 마수 따위야 걱정할 것 하나도 없다.
염두에 두지도 않았다.
다만 검선과 제천대성이 무슨 사고를 치지 않을까, 그게 걸릴 뿐.
그런데 바로 그때!
자신을 애타게 부르며 헐레벌떡 달려오는 강림.
"독선, 도옥선!"
하아.
저렇게 부를 땐 꼭 무슨 일이 생기던데.
"무슨 일이오? 강림."
"호, 혼백이 올라왔소."
"그런데?"
"도, 독선과 관계된 혼백이란 말이오."
"응?"
자신과 관계되었다고?
인간계 사천 당가에서 누가 죽었나?
'···그게 무슨 대수라고.'
당군악은 이미 등선한 몸.
따라서 속세와는 연이 끊겼다.
설령 당가가 멸문한다 한들, 그건 인간계의 일 뿐, 자신은 개입할 수도, 개입해서도 안 된다.
"이미 끊긴 인연이요. 나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소,"
"그, 그게 아니라···,"
강림은 또 한 번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갑자기 안색이 굳어버린 당군악.
스팟!
빠르게 문을 통과해 황천계 업화궁 귀빈실로 가서.
"백원장!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당군악은 태주와의 영혼 연결로 백홍표가 어떤 사람인지 낱낱이 알고 있다.
또 지구에 갔을 때도 한번 만났었다.
그때는 신선인 걸 숨기고 태주와 과거부터 인연이 있던 사람으로 얼버무렸지만.
"헉! 어르신! 여, 여긴 저승인데···,"
"오해하지 말게. 난 안 죽었어. 선계에서 왔지."
"···선계? 거긴 또 어딘가요?"
아무래도 대화가 필요할 것 같다.
< 진짜 연결되면 큰일인데…. > 끝
ⓒ 꾸찌꾸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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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여야 할 놈은 죽이고(1) >
후동평은 청부업자인 동시에 마스터급 각성자.
방금 의뢰인과 전화 통화를 끝냈다.
1차 성공보수 입금.
블록체인 가상화폐로.
청부 결과에 만족한다는 뜻이다.
사실 조금 미진한 감이 있었다.
죽은 사람이 백홍표 원장뿐.
그것도 뇌사 상태.
고아 새끼들 몇 명만 더 죽었어도 더할 나위 없었겠는데.
뭐, 청부자가 만족하니까 상관은 없지만.
사업 초기부터 늘 함께 해왔던 백홍표가 죽었다.
김태주의 심적 타격이 엄청날 것이다.
하지만 아직 더 남았다.
2차 공격목표는 파주 영지와 공장.
지금 당장 착수하는 건 곤란하다.
구례 행복마을 테러의 진범이 잡히고, 사건이 잊혀질 때쯤 빵 터뜨릴 작정.
그때까지는 조용히 쉰다.
현재 후동평이 숨어지내는 곳은 베트남 공화국의 풀빌라 리조트.
사실 숨을 필요도 없다.
테러의 배후가 누구인지 어떻게 알아?
세뇌 현혹은 자신의 시그니처 스킬이다.
그러나 마스터가 되기 전, 스킬 숙련이 모자랐을 때 몇 번 실패를 맛본 적이 있었다.
세뇌 스킬이 간파당한 것.
힘이 약했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각국 정보부에 의해 추적당한 적이 있었고.
물론 지금은 아니다.
현재 자신의 등급은 마스터.
따라서 보유한 세뇌 스킬도 마스터 등급.
절대 인위적으로 풀 수 없다.
또한 대상이 세뇌에 걸렸는지 인지하지도 못한다.
지금 이 상황처럼.
"너 나한테 세뇌당했니?"
갑자기 누군가에게 물어보는 후동평.
"아닙니다. 전 진심으로 주인님을 따르고 있습니다."
대답은 정면이 아닌 엉덩이 밑에서 들려왔다.
"흠, 좋아, 다 좋은데, 낮다. 허리를 더 들어 올려."
"알겠습니다."
어떤 여인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엎드린 채 후동평의 의자 노릇을 하고 있었다.
혼자 지내면 심심해서 어떡해?
그래서 미리 점찍어둔 여자를 세뇌해 데리고 왔다.
부모도 친척도 없다.
오직 동생 하나가 있을 뿐.
"동생이 있다고 했지?"
"있습니다."
"성별은?"
"저와 같은 여자입니다."
"나이는?"
"15살입니다."
언니가 사라져서 찾고 있을 터.
'괜찮네.'
하나보다 둘이 더 좋지.
"이따 밤에 이리로 데리고 와."
"네, 같이 오겠습니다."
동생도 세뇌 스킬을 걸어 며칠 데리고 놀아보자.
어차피 여기 계속 있을 생각은 없다.
은신처를 옮길 예정.
그럼 세뇌한 두 명의 노예들은?
처리하고 가면 된다.
방법이야 간단하다.
가까운 바다로 가서 수평선을 향해 끝없이 헤엄치라고 하면 그대로 따를 것이다.
정말이지 세뇌 스킬은 무궁무진한 효용을 가진 스킬.
게다가 마스터급으로 숙련되었으니···,
"네가 보기엔 누가 더 위대하니? 나야, 김태주야?"
"당연히 주인님이십니다."
"그래, 그래. 착하구나. 힘만 강한 멍청이, 김태주와 나는 차원이 달라. 그치?"
"맞습니다."
만족한 미소의 후동평.
"내 스킬은 누구라도 피할 수 없단다. 김태주도 무조건 걸려들 거야."
그때였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흠칫!
후동평은 뒤통수가 싸늘해지는 걸 느꼈다.
누군가 왔다.
대체 어떤 놈이지?
천천히 고개를 돌려봤더니,
"···어어."
틀림없다.
"기, 김태주?"
"그래. 나다. 동평아!"
놈이 왜 자신을 찾아왔지?
또 여긴 어떻게 알고?
후동평은 인간 의자에서 일어나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순간!
핏!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털썩!
그대로 엎드려 잠에 빠진 여자.
태주는 그녀의 수혈을 짚어 잠을 재웠다.
그리고 후동평을 노려보며,
"세뇌 스킬, 어디 한번 걸어봐."
"···."
"무조건 걸 수 있다며?"
"···."
사실 아까부터 스킬을 발현하고 있었다.
그러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실망이군. 세뇌에 걸려보는 것도 새로운 경험인데."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누가 시켰지? 그거만 말해. 깔끔하게 죽여줄 테니까."
"시, 시키다니요?"
"네가 불쌍한 사람 세뇌해서 구례 보육원에 폭탄을 터뜨리게 했잖아."
"네?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네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거짓말.
스윽! 태주는 눈알만 데굴데굴 굴리는 후동평에게 가까이 다가가 속삭였다.
"잘 들어."
"···네?"
"어차피 네 입에서 진실이 나올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아. 곱게 물어보면 계속 거짓말이나 할 것이 분명하단 말이야."
서늘한 태주의 음성.
"분골착근이라는 점혈법이 있어. 뼈를 분쇄하고 근육을 잘라내는 듯한 고통을 주는 수법이지. 그걸 당하고도 끝까지 거짓말하면 널 인정해준다."
"···."
"오늘만 견뎌내면 풀어준다고."
"아, 아닙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다, 다 말하겠습니다."
"쉿! 조용."
태주는 후동평의 아혈을 짚었다.
고문.
삼한의 국민으로서 해서는 안 되는 범법행위지만.
지금 이 순간, 자신은 삼한의 제국민 김태주가 아니다.
강호의 절대독마.
"버텨봐."
"으으읍!"
놈의 몸 구석구석에다 손가락을 찔러넣었다.
쿡쿡! 쿡쿡쿡쿡!
"으읍! 으으으으읍!"
후동평의 눈동자에 핏발이 섰다.
끄득, 끄드드득!
뒤틀리는 뼈마디.
찌직, 찌지지직!
찢어질 듯 꿈틀대는 근육.
하지만 아무런 저항도 못 했다.
움직일 수도 없었다.
태주는 표정도 바꾸지 않고 묵묵하게 지켜만 봤다.
어떤 감정의 동요도 없었다.
잠시 후 분골착근과 아혈을 풀어주고.
"어때? 이제 이야기할 마음이 나나?"
"끄억, 허억, 헉헉, 마, 말하겠습니다. 누가 지시했냐 하면···,"
"아직 멀었군."
쿡쿡쿡쿡!
"끄으으읍!"
후동평은 억울해서 돌아버릴 지경이다.
아니, 다 이야기한다고 했는데 왜?
난생 처음 당해보는 고통이었다.
이미 바지가 축축하다.
오줌이라도 지린 것 같다.
그러나 그따윈 아무래도 좋았다.
이 고통을 멈출 수만 있다면 뭐든지 다 할 수 있다.
"끄르릅! 으읍!"
태주는 그렇게 세 번의 분골착근을 돌렸다.
사실 열 번 해도 만족스럽지 않을 터, 인간 같지도 않은 놈이기 때문에.
청부를 실행한 놈과 청부를 지시한 놈 중 누가 더 나쁜 새끼일까?
보통은 지시한 놈이 더 나쁘지만, 이 경우엔 후동평, 이 새끼가 더 악독하다.
청부의 수법이 문제.
불쌍한 사람을 세뇌해서 자신의 감당해야 할 죄를 떠넘기는 짓.
지금도 놈은 불쌍한 여자를 노예로 부리고 있었다.
심지어 미성년자인 동생까지도 세뇌하려고 했다.
"끄걱, 마, 말하겠습니다. 제, 제발···,"
이름이 줄줄이 나왔다.
기무라 전(前) 의원에 츠치다 전(前) 후지 그룹 회장까지.
그리고 청부의 목적도.
"수고했다."
"···사, 살려주시는 겁니까?"
"내가 왜?"
"뭐."
쿡쿡쿡쿡!
"끄읍!!!"
다시 분골착근.
독도 집어넣었다.
극악한 고통으로 천천히 죽어가는 후동평.
이놈이 죽으면 여인에게 걸린 세뇌도 풀리겠지.
후동평은 점차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통나무처럼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시체는 무한공간에 집어넣고.
다시 불타오르는 추적부.
기무라와 츠치다의 위치가 잡혔다.
태주는 만리비검을 타고 다시 하늘을 날았다.
쐐애애애액!
그리고 바다 한가운데에서,
풍덩!
갈매기가 싸지른 똥처럼 후동평의 시체가 물속으로 떨어졌다.
※ ※ ※
선계(仙界).
당군악을 따라 멀티플렉스로 온 백홍표.
'···여기가 선계?'
황당하기 이를 데 없다.
자신이 알고 있던 선계의 모습과 너무나도 달랐다.
첩첩산중에, 선학이 노닐고,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의 널따란 바위 위에서 바둑을 두는 신선들의 모습.
이것이 익히 알고 있던 선계의 모습 아닌가?
미리 얘기를 듣지 못했다면 이곳이 선계라고 꿈에도 생각 못 했을 터.
곧게 뻗은 도로, 저 멀리 보이는 놀이공원, 뛰어노는 아이들, 7층짜리 목조 건물 앞에 주차된 자동차들.
진짜 말도 안 되는 모습.
만약 지구로 돌아가 자신의 경험을 누군가에게 말해준다면 믿을까?
'그냥 지구와 똑같은데?'
이게 다 태주와 독선의 영혼 연결 덕분이란다.
영혼의 연결뿐만 아니라 서로의 물건도 교류해왔고.
신비한 복숭아와 술이 이곳에서 온 물건들.
멀티플렉스 안은 더 했다.
화려한 조명에 고급 소파와 안마의자들이 놓여있었고, 풍채 놓은 신선들이 삼삼오오 모여 낮잠을 즐기거나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허허, 저분들이 모두 신선이라니.'
심지어 작은 바에 바텐더까지.
당군악과 백홍표가 들어오자 그들을 맞이하는 주선.
"어서 오시오. 독선. 이분은 천인인가?"
"그렇소."
"못 보던 분이군. 이번에 새로 오신 거요?"
쫑긋.
천인이 왔다는 소리에 1층이 잠시 조용해졌다.
동시에 입에서 침을 질질 흘리며 자던 신선이 벌떡 일어나,
"으헤? 뭐, 천인? 해맑이가 왔어?"
"안 왔으니 그냥 그대로 주무시오,"
"···험험, 깜짝 놀랐네."
그러고는 다시 소파에 앉아 잠을 잤다.
드러렁, 쿨쿨.
'···.'
백홍표는 잠시 의심했다.
이들이 정말 신선 맞아?
주선이 만면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하하하, 그럼 많이 놀랐겠구려. 혹시 이름이?"
"···백홍표입니다."
"백홍표 대인, 난 주선 태백 선인이오. 천인으로서 선계에 오셨으니 내 술 한 잔 드리리다."
"아! 감사합니다."
"특별히 아껴둔 술이 있소."
한 번도 따지 않은 고급 위스키를 꺼낸 주선.
백홍표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이고, 그 비싼 술을···, 저기 저쪽에 이미 개봉한 보급형 위스키에 탄산수만 조금 섞어서 하이볼 한잔이면 충분합니다."
"어허! 하이볼은 요망한 하선고 년이나 마시는 거고, 모름지기 상남자라면 스트레이트를···, 어?"
주선은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 하이볼 칵테일은 또 어떻게 아시고? 독선에게 이야길 들으셨나?"
"살아있을 때 몇 번 마신 적이 있습니다."
"하, 하이볼을 말이오?"
"네, 가끔 가는 술집이 있습니다."
"···."
강호 무림에 하이볼을 파는 객잔이 있다고?
뭐, 죽엽청 하이볼이라도 파나?
"그 술집이 어디길래?"
"구례 캐슬 구역 안에 있죠."
"아! 구례, 그러면 그렇지. 난 또···, 엉? 구, 구례라면 지구?"
바로 그 순간!
신선들의 시선이 백홍표에게 집중됐다.
잠자던 그 신선도 벌떡 일어나서.
"으헤? 뭐, 구례? 지구? 태주 대협이 또 왔어?"
"···으음."
"쩝, 또 잘못 들었군. 그냥 자면 되는 거요?"
"아, 아니오. 정확히 들은 것 맞소."
"근데 태주 대협은 없잖소? 그럼 저 사람이 지구인이라도 되나?"
당군악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구인이 맞다고.
긍정의 표현에 깜짝 놀라 백홍표에게 몰려오는 신선들.
우르르르르,
"오오오!"
"지구인이다."
"진짜 구례에서 왔소?"
"가만있자, 구례라면···, 두 유 노우 김태주?"
"어허! 영어 쓰지 말고 삼한제국 말을 쓰시오."
이어지는 당군악의 부연 설명.
"이분은 태주의 의형이요. 혼백으로 올라와 천인이 됐지. 나하고도 각별한 사이라오."
신선들이 깜짝 놀랐다.
지구인임에도 모자라 태주 대협의 의형이라니?
"오오오!"
"귀인이시군. 게다가 천인이야."
"역시 얼굴색부터 달라."
"난 들어온 순간부터 알았네. 범상치 않은 사람이란 걸."
그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진 알 필요가 없다.
지구의 영혼이면서 태주 대협 의형제라는 게 중요할 뿐이지.
"나, 태주 대협하고 무척 친하오. 보시오, 여기 같이 찍은 사진도 있소."
"당신만 찍었나?"
"혹시 지구로 돌아갈 때 나 좀 데리고 가주시오."
"자자자, 흥분하지 말고···, 차례대로."
난리가 났다.
당군악은 그 모습을 찬찬히 스마트폰으로 찍었다.
황천계부터 찍어왔다.
태주에게 알릴 목적으로.
얼마나 걱정이 많을까.
이 영상보고 안심했으면 하는 마음뿐.
시간이 흐르고,
찌르르르,
기다렸던 배송 신호.
당군악은 여의주와 함께 백홍표의 선계 생활이 저장된 스마트폰을 공유창고에 넣었다.
※ ※ ※
츠치다와 기무라는 일본 땅에 있었다.
이놈들이 마지막.
황제가 자신의 죽음을 위장했을 때, 기무라가 찾아온 적이 있었다.
후지 그룹을 츠치다 회장에게 돌려달라며, 일본의 재건을 위해선 꼭 필요하다고.
'그때 죽이지 않은 것이 잘못이었나?'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한도 끝도 없다.
또한 헛소리한다고, 눈에 거슬린다고, 보는 족족 죽이면 그게 사이코패스지.
당시엔 황제에게 넘기는 것이 최선이었다.
이런 일이 생길 줄 어떻게 알았겠나.
인간의 앞일은 예측할 수 없다.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자신도, 황제도, 백홍표도.
그저 기무라와 츠치다는 치졸하고 허접한, 심성까지 최악인 폐급이라는 게 문제였다.
마침 놈들은 함께 있었다.
일본 독립국 인수 위원회라는 건물에.
투명부를 붙이고 정문으로 들어가 제일 위층으로 올라가는 태주.
벌컥!
문을 열었다.
그러자 기무라와 츠치다가 놀란 눈으로 출입문을 바라보는 순간.
스르륵.
태주가 모습을 드러냈다.
"헉!"
"···다, 당신은?"
딱 한 마디만 읊조렸다.
"후동평."
기무라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이윽고,
"어떻게 알았소?"
"알아서 뭐 하려고."
"흐흐흐, 맞아. 패장은 말이 없는 법이지."
허탈한 음성의 기무라.
"부탁 하나 합시다."
"무슨 부탁?"
"직접 자결할 테니, 잠시 시간을 주시오. 승자로서 아량을 베풀어 주시길."
"누가 보면 우리가 전쟁이라도 한 줄 알겠군."
"그럼 전쟁이 아니면 뭔가?"
"넌 그저 교활한 쥐새끼야. 나한테 직접 손을 쓰는 것이 두렵기 때문에, 남을 시켜 내 주변 사람들을 노린 추잡한 범죄자일 뿐이지."
"내 명예를 더럽히지 말···,"
츠핏!
암기가 날았다.
"네까짓 게 무슨 명예?"
푹!
이마에 유엽비도가 꽂힌 채 뒤로 넘어가는 기무라.
츠치다가 무릎을 꿇었다.
"제, 제발 목숨만은,"
"하나만 물어보자."
"뭐, 뭐든?"
"혹시 다른 계획도 있나? 요인 암살이라든지, 후동평 말고 또 청부한 업자가 있는지."
"이, 있소, 날 살려준다고 약속만 하면 다 말할 테니···,"
거짓말.
더이상 없다.
츠핏!
푹!
"끅!"
츠치다도 앞으로 고꾸라졌다.
'끝났네.'
시체는 그대로 내버려 두기로 했다.
경고 차원에서.
이제 남은 과제.
형님을 살려야 한다.
어떤 수단을 다 동원해서라도.
< 죽여야 할 놈은 죽이고(1) > 끝
ⓒ 꾸찌꾸찌
=======================================
< 죽여야 할 놈은 죽이고(2) >
구례 행복마을 테러 사건은 종결됐다.
태주가 문경식에게 직접 전화했다.
모두 해결됐으니 끝내도 된다고.
문경식 또한 자세한 사항은 묻지 않았다.
그가 됐다고 하면 된 거니까.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매일매일 태주는 구례 종합병원에서 백홍표의 곁을 지켰다.
선계 배송 신호를 기다리면서.
독선에게 사정을 설명한 후에 떠난 혼백도 다시 불러온다는 되살이꽃을 부탁할 예정.
염치없지만 어쩔 수 없다.
독선도 이해해 줄 것이다.
그도 자신과 백홍표의 관계를 잘 알고 있을 테니.
그런데 과연 확보할 수 있을까?
천계 자미궁 안뜰에서만 자란다는 천고의 보물인데.
물론 그냥 달라고 할 마음은 없다.
제대로 대가를 치러야지.
문제는 그만한 값어치를 대신할 보물이 지구에 존재하느냐는 것.
'후우, 삼한의 백화점 전체를 통째로 넘겨줘도 안 될 텐데.'
병실엔 태주 혼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검선과 제천대성, 귀곡도 함께 있었다.
"귀곡, 그대도 방법이 없소?"
"혼백이라도 붙어있다면 모를까, 이 상태에선···,"
"원숭이, 넌?"
"나라고 뾰족한 수가 있겠소?"
"지구엔 저승 같은 것도 없나? 만약 있다면 쳐들어가서 명부책을 찢어버리면 그만인데."
"맞소. 내가 해봐서 잘 알지."
"쯧쯧, 깽판 친 게 자랑이다, 자랑."
태주는 지구까지 어렵게 와서 병실을 지키는 신선들에게 미안한 마음, 미처 놀지도 못하고.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시도해볼 방법이 있으니까."
"···혹시 되살이꽃을 부탁할 생각인가?"
역시 귀곡이다.
눈치가 빠르다.
"맞습니다. 현재로선 그 방법 말고는 없네요."
검선과 제천대성도 동의했다.
"오! 그렇지. 되살이꽃이 있었군."
"흐흐흐, 그걸 잊고 있었구나. 태주 대협 걱정하지 마시오. 상제가 주지 않으면 내 훔쳐서라도 대령할 테니."
"하아, 맨날 도둑질이야. 천도에, 여의주에, 되살이꽃에···,"
"원숭아, 네가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
"···뭐, 그건 인정하오."
검선과 제천대성은 거의 단짝 수준.
맨날 티격태격하면서도 죽이 척척 맞았다.
이번에도 제대로 놀고 온 모양.
온몸을 명품으로 발랐다.
최고급 수트에, 구두, 선글라스, 클러치 가방···,
일해서 벌었다고는 하지만 돈 몇 푼으론 감당이 안 될 정도로.
"돈은 어디서 버셨어요?"
"···어음, 열심히 노력했네."
"어떻게?"
"저, 전문 분야에 잠시 조언을···,"
자세한 설명은 피하는 눈치.
'괜히 물어봤나?'
갑자기 병실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TV나 틀자.'
틱!
리모콘을 눌렀다.
마침 영화가 흘러나왔다.
오래된 고전 영화.
초능력자들을 소재로 한 거였다.
지금의 각성자들과 비슷하다.
그 당시 저 영화를 만들때만 해도 지구가 이렇게 변할 줄 누가 알았을까?
모두 영화에 집중했다.
에피소드 하나가 끝나고, 시작된 중간 광고.
그런데?
"어?"
평범한 가전제품 CF였다.
하지만 출연하는 사람이,
"검선님?"
"···."
확실하다.
검선이었다.
심지어,
"제천대성님도?"
"···."
귀곡도 몰랐다는 듯 멍하니 TV만 바라보다가,
"네놈들이 저길 왜?"
CF 내용은 이랬다.
결의에 찬 표정으로 뒤돌아선 검선.
그리고 그의 등을 향해 처절하게 외치는 제천대성.
- 검선!!! 정녕 가야만 하겠소?
- 세상을 정화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 나의 숙명이다.
- 허허허, 더는 말리지 못하겠군.
제천대성이 손에 들어 있는 긴 물건을 검선에게 건네며 말했다.
- 그렇다면 이거라도 가지고 가시오.
물건을 받아든 검선은 만족스러운 표정.
- 좋군. 싹 빨아들일 수 있겠어.
- 내 지켜보리다.
- 염려 말아라. 이 보물을 손에 들었는데, 어떻게 실패할까?
- 무운을 빌겠소.
제천대성이 검선과 눈을 마주쳤다.
검선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CG 처리를 한 마수들을 향해 막대기를 조준했다.
우와아아아아아앙!
셀 수도 없이 많은 숫자의 마수가 막대기 안으로 죄다 빨려 들어갔다.
동시에 하단에 나오는 자막.
제천대성이 공중제비를 돌며 힘찬 나레이션을 시작했다.
<남자의 청소기! 콰이슨 에어 머신! 비욘드도 빨아들인다!>
<한 톨의 먼지도 남김없이! 강하다! 오래간다! 무선이라 편리하다!>
<백두 전자가 심혈을 기울여 출시한 콰이슨 에어 머신 무선 청소기.>
<검선과 제천대성도 인정한 신제품.>
<가까운 백두 전자 대리점이나 할인 마트를 방문하세요.>
광고가 끝날 때쯤.
- 본 광고에 나오는 검선과 제천대성은 실제 본인임을 알려드립니다.
- 제국 황궁 비서실과 백두 그룹이 직접 보증합니다.
백두 전자에서 나온 무선 청소기 광고.
알만하다.
정욱철 회장과 검선은 서로 안면이 있다.
'···저렇게 돈 벌었구나.'
정욱철 입장으로서도 매우 좋은 기회였을 것이다.
무려 검선과 제천대성을 광고에 출연시켰다.
거액의 돈을 제시했을 터.
"험험,"
"하필 저게 지금 나오나?"
"민망하군."
빨갛게 달아오른 검선과 제천대성의 얼굴.
귀곡이 고래고래 고함치며 분통을 터뜨렸다.
"에라이, 이 화상들아! 제정신이오? 태주 대협의 의형은 혼백이 떠나있는 판에, 광고에 출연한다는 게 말이나 되오?"
"···아, 안될 것도 없잖소. 이런 상황인줄 몰랐는데."
"정당한 계약으로 돈을 번 거요."
"원숭이가 은행을 털자고 한 걸 내가 억지로 말려서 광고로 돌린 거고."
"은행은 검선이 먼저 털자고···,"
"쉿!"
아아아,
은행을 털 계획도 있었구나.
천만다행이다.
CF 출현이 훨씬 낫다.
"쯧쯧, 선계 망신은 검선과 원숭이가 다 시킨다더니."
검선과 제천대성은 태주의 눈치를 슬슬 보면서 잔뜩 움츠러들었다.
"잘하셨어요."
"···응?"
"청소기 엄청 팔리겠어요. 저도 몇 개 사야겠네."
"그, 그치?"
검선은 안도했다.
어찌 됐든 지구는 태주의 영역.
그가 괜찮다는데, 꼬장꼬장한 귀곡의 잔소리쯤이야.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오!"
귀곡이 뭔가를 느낀 듯 탄성을 지르며 말했다.
"걸려들었군."
"뭐가?"
"무한에서 신호가 왔소. 이동 술법진이 작동했어."
"응? 그렇다는 말은···,"
"덫이 작동했단 말이오."
비욘드를 지배하는 놈.
그놈이 무한으로 왔다.
"지금 가면 잡을 수 있나?"
"서두른다면···,"
"당장 갑시다."
검선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원숭아, 근두운 소환해서 귀곡과 함께 오너라."
"알겠소."
태주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도 갈게요."
"그대는 병실을 지키시오. 보호자가 있어야 하니."
"아···,"
"금방 돌아오리다. 그놈 모가지를 들고."
스팟!
사라진 신선들과 제천대성.
태주는 혼자 병실에 남았다.
"내가 잡아도 되는데···,"
아무튼 검선과 귀곡, 제천대성이 출동했다.
어떤 놈인지 모르겠지만 조금 불쌍하게 여겨졌다.
'뭐, 누군지 알 필요도 없고.'
어차피 죽은 목숨이니까.
그건 그렇고 배송은 언제 오나?
그때였다.
찌르르르.
머릿속에서 울리는 신호.
"왔구나!"
기다렸다.
"음?"
독선이 보낸 물건.
스마트폰 하나와 영롱한 칠색 빛을 뿌리는 야구공만 한 구슬 하나.
'이게 뭐지? ···결정체 같기도 하고.'
보기만 해도 상서로운 기운이 풍겼다.
보통 물건은 아닐 것이다.
그것보다 중요한 일이 있다.
태주는 공유창고에서 물건을 빼내고 비욘드 결정체를 차곡차곡 쌓았다.
더불어 백홍표의 사연을 담은 자필 편지도.
그리고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영상 하나가 담겨있었다.
쿡, 눌러 실행해보니.
"···어."
전혀 예상치도 못한 인물이 영상에 등장했다.
"무, 무슨?"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형님이 왜 거기에?"
신선들과 함께 노닥거리며 술판을 벌이고 있는 백홍표.
"내가 지금 꿈꾸고 있나?"
설마!
그냥 얼굴이 비슷한 어떤 분이겠지.
지금도 보인다.
병실 침상 위에서 생명 유지 장치를 달고 누워있는 백홍표의 모습이 말이다.
그가 바로 옆에 있는데.
쌍둥이일 리도 없고.
영상 속에 사람은 매우 즐거워 보였다.
이윽고 화면에 나와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당군악.
태주는 얼어붙어 버렸다.
"···뭐?"
백홍표가 맞았다.
"세상에!"
설명이 쭉 이어졌다.
그리고 깨달았다.
'형님의 혼백이 다른 세상의 황천계로 넘어갔다고?'
이렇게 된 원인.
바로 염라 때문이었다.
태주도 그때 염라가 지구에 넘어온 것 눈으로 목격했었다.
그로 인해 일어난 인연의 뒤틀림.
때마침 테러 사건으로 백홍표가 유명을 달리했고,
자신과 매우 친한 사이인 그의 혼백이 황천계로 올라가게 된 것.
"와!"
상상도 못 했다.
아니,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백홍표의 안부 인사도 있었다.
그 목소리도 그대로.
- 태주야. 난 잘 있단다. 죽은 줄 알았는데, 모처럼 휴가를 즐기게 됐네.
참나.
아주 싱글벙글, 살판이 났다.
- 신선님들 이야기로는 차원 게이트를 통해 지구로 갈 수 있다더군. 당장 갈 생각은 없고, 푹 쉬다가 갈 테니 걱정하지 마.
'···.'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온다.
태주는 당군악에게 보내려고 했던 되살이꽃 요청 편지를 공유창고에서 뺐다.
어쨌든 이제 한시름 놨다.
하지만 약간의 문제가 남아있다.
지구, 구례 종합병원.
침대에 누워있는 또 다른 백홍표.
천인의 자격으로 황천에서 새 몸을 받았지만···, 그럼 지구에 남은 몸은?
'화장해야 하나?'
그리고 하나 더.
영롱한 칠색 구슬의 정체도 알았다.
'여의주···,'
이걸로 뭘 하라고?
※ ※ ※
폐허 도시 무한.
파타갤라온은 당황했다.
자신의 둥지였던 무한 실내 축구 돔 경기장.
그 안에서 도무지 꼼짝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덫에 걸린 듯했다.
"무, 무슨?"
원래는 오지 않으려고 했다.
무한의 상황이야 너튜브 방송으로 다 지켜봤었다.
하지만 방송 이후의 상황이 궁금했다.
진짜 다 죽인 걸까?
드래곤 성체로 진화할 여지가 있던 비욘드도?
대체 그들의 힘이 어느 정도기에?
궁금증을 참을 수가 없었다.
직접 확인해봐야 한다.
지금은 사라졌겠지만 남아있는 전투의 흔적을 조사해보면 대충 신선과 제천대성의 힘을 유추해볼 수 있을 터.
그래서 텔레포트 마법진을 통해 무한으로 왔다.
그 결과 움직이지도 못하는 신세가 됐고.
'내 은신처는 어떻게 발견했지?'
게다가 알 수 없는 이 기운.
자신의 몸을 꽁꽁 옥죄고 있었다.
벗어나려고 해봤지만 하트의 마나도 일으킬 수 없었다.
'···안티 매직 필드?'
혹은 그 비슷한 것.
이걸 신선이 설치한 것이 확실하다면?
만만치 않다.
'서둘러야 해.'
여기 올지도 모른다.
파타갤라온은 온 힘을 다해 움직였다.
뿌드득!
우우우웅!
바닥에서 문양의 진식이 드러났다.
텔레포트 마법진과 교묘하게 겹쳐있었다.
'이거였군,'
방심했다.
그래도 원인은 알았다.
뿌득, 뿌드드득!
그는 계속해서 움직였다.
조금씩, 아주 천천히 움직이는 마나.
시간이 오래 걸렸지만 조금씩 균열이 생기기 시작하는 정체불명의 문양.
두둑, 두두두둑!
뭔가 끊기는 것 같은 느낌.
'됐어.'
비로소 마력을 움직일 수 있다.
그렇다면?
'해제.'
파타갤라온은 인간화 변신을 풀었다.
쑤우우우우욱!
지상 최강의 생명체.
한계를 극복해 용신의 면모를 갖춰나가고 있는 거대한 드래곤의 본체가 무한의 축구 경기장 돔을 뚫고 솟아올랐다.
"쿠오오오오오!"
윤기가 흐르는 검정색 비늘, 보통 드래곤보다 두 배는 큰 몸, 크고 아름다운 4장의 날개, 한 번의 휘두름만으로 고층빌딩을 무너뜨릴 수 있는 강대한 꼬리.
이것이 바로 파타갤라온의 본모습이다.
쿵!
그가 한발 앞으로 내디뎠다.
쿵!
또 한발.
쿵쿵쿵쿵!
계속해서···,
그런데?
멈칫!
"헉!"
또 움직여지지 않았다.
"이, 이런 간교한!"
덫은 하나가 아니었다.
곳곳에 설치되어 있었다.
"감히!"
이번 덫은 늪에 빠진 듯 다리가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한 발짝 움직이는데도 한세월.
어떻게 이 거대한 몸체를 물리력으로 제한할 수 있지?
곧 파타갤라온은 깨달았다.
'물리력이 아니야.'
시간.
시간의 흐름을 제어하는 수법.
'맙소사.'
시간에 관여하는 마법이라니.
이건 신의 영역 아닌가.
오직 파타갤라온 주변의 시간만 극히 느리게 흘렀다.
모든 것이 정지된 느낌.
힘으로 부술 수도 없다.
시간 마법은 자신도 불가능하다.
신이라면 모를까.
그때였다.
스르르륵!
"오!"
갑자기 몸이 자유로워졌다.
시간이 정상적으로 흐른다는 말.
그런데,
"응?"
순식간에 어두워지는 하늘.
무언가 해를 덮었다.
파타갤라온은 고개를 들었다.
"저, 저건?"
두두두두두···,
소나기가 내렸다.
하지만 액체로 된 비가 아니다.
하늘에서 원숭이가 비처럼 내려오고 있었다.
"우끽!"
"우끼기기긱!"
"끼기기긱."
"끼긱? 끼기기···,"
.
.
.
타닥, 다다닥, 다그닥, 다다다다다닥,
내려온 원숭이들이 파타갤라온 본체에 달라붙었다.
"이, 이익!"
투두두두두둑!
마치 벌떼 같았다.
한번 붙은 놈들을 절대 떨어지지 않았다.
마법을 펼칠 여지도 주지 않았다.
그리고,
멀리 저 하늘에서,
검을 밟고 선 신선과 구름을 탄 원숭이.
놈들이다.
만나지 말았어야 했는데 한 번의 뼈아픈 실수로 결국 마주하게 됐다.
"이 망할!"
폐부 깊숙이 숨을 들이마시는 파타갤라온.
그리고 하늘을 향해 브레스를 뿜었다.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
작은 국가 하나를 멸망시킬 수 있는 용신의 브레스.
신이 앞에 있어도 녹아버릴 것이다.
'해치웠나?'
그러나.
"생각보다 강하긴 하다만···, 맞추지 못하면 어떡할 거냐?"
등 뒤에서 들려오는 음성.
"어휴, 입 냄새."
"알고 보니 화생방 공격이었군."
"마스크라도 끼고 올 걸 그랬어."
파타갤라온은 저절로 몸이 떨렸다.
용신의 피부도 저릿저릿하게 만드는 끔찍한 마물의 살기, 그리고 마치 신을 마주한 것처럼 저절로 굴복하게 만드는 신령한 기운.
전자는 제천대성, 후자는 신선.
"끝냅시다. 시간이 아까워."
"···데리고 가서 용왕 놈과 한번 붙어보게 하고 싶군."
"싸움은 되겠소. 어차피 용왕이 이기겠지만."
바로 그때.
섬전처럼 머리를 뒤로 돌리는 파타갤라온.
그의 입이 열렸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거대한 금속 막대기가 정수리로 떨어지는 동시에.
휘이잇! 퍼억!
"켁!"
허공에 떠 있던 수천 개의 무형검이 용신의 비늘을 갈라버렸다.
서거거거거거걱!
"끄아아아아아악!"
그리고 다시 발동된 시간을 제어하는 술식.
퍽! 서걱! 퍽! 서걱! 퍽! 서걱···,
파타갤라온은 자신의 본체가 해체되는 모습을 눈 뜨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저항도 하지 못한 채 말이다.
기우뚱.
그 거대한 몸체가 천천히 땅바닥으로 쓰러졌다.
쿵!
"엥? 벌써 죽었나?"
"슬슬 손맛을 느껴보려던 참인데."
"배나 갈라보시오. 내단이 있으면 꺼내고."
"오! 내단! 소중한 에너지원이지."
신이 난 검선이 쓰러진 파타갤라온의 배를 갈랐다.
순간!
"아뿔사!"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소리를 지르는 검선.
귀곡이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왜 그러시오?"
"하아!"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더니.
"라이브 방송을 못 했소."
제천대성도,
"쯧쯧, 치명적인 실수로군."
귀곡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 둘과 같이 다니면 자신도 미친놈이 될 것 같아서 두려울 따름이다.
< 죽여야 할 놈은 죽이고(2) > 끝
ⓒ 꾸찌꾸찌
=======================================
< 염라의 스트레스 >
태주는 병실로 돌아온 검선 일행이 무한의 비욘드 우두머리를 잡았다고 말했을 때 그리 놀라진 않았다.
기문진의 귀곡, 검의 근본 검선, 상위계를 들었다 놨다 한 제천대성, 셋이 갔는데 못할 것이 뭐가 있어?
놈의 정체를 들었을 땐 살짝 놀라긴 했지만.
"용?"
"우리가 알고 있던 놈과는 많이 다르게 생겼소. 다리도 있고 날개도 있더군."
"드래곤 같은 거네요. 강했나요?"
"보통 용보다는 격이 높더라고. 거의 용신급?"
"동해 용왕과 비견할 만하더군. 물론 그보다는 훨씬 못 미치지만."
그 정도였다고?
동해 용왕은 그냥 용과는 차원이 다르다.
무려 강과 바다를 다스리는 용신(龍神).
그와 비견될 정도라면 엄청 강한 놈이라는 말인데.
귀곡이 둥근 흑수정 하나를 증거라며 보여줬다.
"용에게서 나온 내단이라오."
"드래곤 하트네요."
"용의 심장이라, 적당한 이름이군, 아무튼 이것도 여의주라고 생각하면 되오. 생긴 건 살짝 다르지만."
마침 선계에서 막 배송된 여의주가 있다.
"이거 하고 비슷하단 말이죠?"
"오!"
"여의주네?"
"여의주군."
태주는 선계에서 독선이 보내준 거라고 설명했다.
"용왕 새끼, 결국 굴복했구나."
"이미 선계 맛을 봤는데 당해낼 재간이 있나."
귀곡이 태주에게 물었다.
"그 여의주 잠시 살펴봐도 될는지?"
"네, 여기."
한 손엔 여의주, 한 손엔 드래곤 하트를 든 귀곡.
"흐음, 역시 성질도 비슷해."
"뭐가요?"
"여의주는 용의 정수라고 보면 되오. 용이 가졌던 능력과 법술, 힘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서 이걸 품게 되면 이 여의주를 품었던 용의 힘을 빌려 쓸 수 있는 거요."
"그럼 이 드래곤 하트도?"
"맞소. 그 괴룡의 법술이 담겨 있지."
"아···."
"어쨌든 둘 다 받으시오. 여의주는 좋은 날을 잡아서 목욕 재개하고 몸속으로 품어···,"
그때였다.
"어?"
"헉!"
"응?"
스우우웅,
흐물흐물,
스르르륵,
파아아앗!
갑자기 허공에 떠올라 하나로 합쳐지는 여의주와 드래곤 하트,
귀곡도 예상하지 못했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게 왜?"
그러자 검선이 조소하며 손가락질했다.
"사고 쳤네, 사고 쳤어. 귀곡이 사고 쳤다!"
"사, 사고라니! 단순히 합쳐진 거요."
"그게 바로 사고지. 두 개였는데 하나가 됐잖소."
"하, 하나가 어때서? 더 좋아진 걸 수도,"
"쯧쯧, 변명하고는···, 선계로 가서 소문이나 퍼뜨려야지."
"···."
귀곡은 당황한 기색이었다.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태주에게.
"미, 미안하오."
"괜찮습니다."
"진짜 그, 그럴 의도가 아니었어."
"괜찮다니까요. 귀곡님 말대로 서로 합쳐줬으니 오히려 더 좋아졌을 겁니다."
"후우, 정말 미안하오. 그래도 품는 데는 문제가 없을 거요. 그댄 이미 조화의 상징인 천도를 먹어 그 어떤 기운이라도 소화가 가능할 테니."
태주는 드래곤 하트를 흡수한 여의주를 잡아서 무한공간에 넣었다.
그리고 아직도 기분이 좋지 않은 귀곡이 안쓰러워 대화 주제를 전환했다.
"참! 되살이꽃은 없어도 될 것 같습니다."
"아니 왜? 그대 의형 살려야 하잖소."
"살아있는데요?"
"···응?"
"살아있다고요."
"무, 무슨 말인지 도통."
백홍표의 혼백이 황천을 통해 선계로 간 연유를 설명하자,
"내 이럴 줄 알았다. 염라 때문에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더라니까. 뭐, 덕분에 잘되긴 했지만."
"아마 모르긴 몰라도 염라 똥줄이 타들어 갈 거요."
"그렇지. 졸지에 황천의 영업장이 지구로 확대되게 생겼으니."
"흐흐흐, 여태까지 나 혼자만 사고뭉치인 줄 알았는데, 뭐 다를 게 없군. 염라나, 귀곡이나."
"···."
검선이 속을 살살 긁었지만 귀곡은 대꾸도 못 했다.
지은 죄가 있는데.
태주는 묘한 기분.
사후세계는 없는 줄 알았다.
죽으면 그걸로 끝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저승이라니.
'내가 죽으면 어떻게 될까?'
사실 쉽게 죽지도 못한다.
천도도 먹었고, 드래곤 하트 흡수한 여의주까지 품게 된다면.
"아무튼 태주 대협."
"네."
"슬슬 돌아갈 때가 온 것 같소."
"···벌써요?"
"인간도 아닌 것들이 셋씩이나 왔소. 이 정도면 오래 있은 거요."
"아."
섭섭하다.
또 언제 만날 수 있을까?
"다음에 제가 놀러 갈게요."
"하하하! 기다리겠소."
놀러 간다는 건 선계 등선을 의미한다.
근데 할 수 있을 것도 같다.
여의주를 품으면 또 한 번의 등선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까?
게다가 드래곤 하트까지 흡수한 건데?
그리고 며칠이 지난 후,
스팟! 스팟! 스팟!
검선과 귀곡, 제천대성은 지구에서 사라졌다.
비욘드 레이드 라이브 영상과 CF 광고를 남기고.
무선 청소기는 불티나게 팔렸다.
※ ※ ※
백서연은 아버지를 잃었다는 상실감에 한동안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밤마다 눈물을 흘렸다.
뇌사 상태.
아버지의 소생이 불가능하다는 의미.
하지만 그녀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김태주 회장님이 반드시 살려준다고 했으니까.
그런데 요즘 회장님의 행동이 수상하다.
전엔 매일매일 아버지가 계신 병실로 출근하다시피 했지만, 지금은 들여다보지도 않았다.
'설마···,'
백서연은 태주를 찾아갔다.
"회장님."
"아! 서연씨, 오셨어요?"
"···네."
활짝 웃는 그의 얼굴.
걱정 따윈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생명 유지 장치를 달고 병상에 누워계시는데.
대체 뭐지?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포기?
아버지를 버리려고 마음을 정했나?
"드,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마침 잘됐네요. 저도 서연씨에게 할 말이 있었는데."
"아! 그럼 회장님부터."
"아뇨. 전 이야기가 길어서, 서연씨가 먼저."
"네."
잠시 목소리를 가다듬고 조심스럽게.
"회장님, 아버지를 다른 곳으로 모시고 싶어요."
"어디로?"
"아메리카 공화국, 세계 최고라고 알려진 홉스 병원으로···, 아무래도 삼한보다는 의료 기술이 뛰어난 곳이라."
"흐음."
태주는 잠시 고민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어차피 뇌사 상태인데 구례에 있으나, 아메리카로 가나 별반 차이 없을 것 같습니다."
"···네?"
"비싼 아메리카 병원에서 괜히 돈만 낭비할 테고, 또 좀 있다가 이야기할 거지만···, 그렇게 할 이유가 사라졌어요."
"···."
백서연은 충격을 받았다.
어떻게 저런 말을?
"용건은 그게 답니까?"
"으음, 네네."
"그럼 저도 제 용건 얘기할게요."
"무, 무슨?"
"하나는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곧 등선···, 아니, 자릴 비워야 할 것 같다는 말이고요."
"아아···,"
"또 하나는, 이건 영상을 보면서 말씀드려야···, 어? 서연씨?"
태주는 깜짝 놀랐다.
백서연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니 왜 갑자기?"
"흑흑, 아버지를 포기하시는 건가요?"
"그, 그게 아니고."
"저도 알아요. 아버지가 가망이 없다는 걸."
"···."
"죄, 죄송해요.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제 마음은 그렇지 않아서."
오해가 생겼다.
자세한 사정을 막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임시 등선을 위해 자리 비운다고 말하고 나서 말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먼저 이야기할 걸 그랬나?
"진정하시고, 이거 좀 볼래요?"
태주는 백서연에게 선계에서 배송된 스마트폰 영상을 보여줬다.
"이, 이건···,"
"제가 방금 하려고 했던 말과 관련된 겁니다. 끝까지 보세요. 반가운 얼굴이 나올 거예요."
영상이 재생됐다.
멍하니 폰만 바라보던 백서연이,
"어머? 아, 아버지?"
"형님 맞아요."
"근데 이 사람들은 누구죠? 아! 부회장님도 계시네요. 이, 이거 언제 찍은 건지···?"
"정확한 날짜는 모르지만 확실한 건 폭탄 테러 사건이 일어난 후입니다."
"에?"
백서연이 대체 무슨 말을 하느냐는 듯 말했다.
"일어나고 난 뒤라고요? 일어나기 전이 아니라?"
답변 대신 백서연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하는 태주.
"지금부터 제가 이야기를 할 텐데, 아마 믿지 못할 수도 있을 겁니다."
"···."
"그러나 하늘에 맹세코 진실이니까···, 들어보실래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태주도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를 말이다.
그런데 들으면 들을수록 백서연에겐 너무도 흥미진진했다.
어느새 눈물을 멈추고 태주의 이야기에 흠뻑 빠져들었다.
"세상에!"
"놀라셨죠?"
"그 복숭아와 술도?"
"네, 거기서 온 겁니다."
"아아, 어쩐지···,"
여태까지 가졌던 모든 의문이 다 풀렸다는 표정이었다.
"어쨌거나 지금 아버지가 우린 나 몰라라 하고, 자긴 선계에서 신선놀음이나 하고 계신단 말이죠?"
"그런 셈이죠."
"하아, 진짜 얄밉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백서연의 얼굴엔 기쁨이 가득했다..
"회장님, 다음 배송은 언제죠?"
"곧 뜰 겁니다. 그런데 왜요?"
"아버지가 저기서 신세를 지고 있는데, 제가 뭐라도 챙겨서 보내야죠,"
"이미 많이 보냈어요. 신경 안 써도···,"
"이제부터 배송은 제게 맡겨 주세요. 좋은 걸로만 선별해서 보낼게요."
"···그럴래요?"
"네!"
태주의 이야기에 대해.
그녀는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
※ ※ ※
황천계.
업화궁에서 열린 긴급회의.
회의장 안이 연기로 가득 찼다.
심각한 표정으로 연초만 뻑뻑 피워대는 사자와 차사, 그리고 판관들.
지구의 혼백이 황천계로 올라왔다.
단순하게 넘겨버릴 사안이 아니다.
연결 통로가 생긴 거나 마찬가지.
비록 지금은 백홍표 천인 한 명이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 누구도 장담하지 못했다.
"지구 인구가 몇이나 된다 했습니까?"
"40억을 넘어 50억에 육박한답니다."
"맙소사!"
"무슨 인구가 그렇게 많아."
"한때는 70억까지 간 적도 있다고."
"허허."
모두 암담한 표정.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하지?
오도 판관이 퉁명스러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아무튼 전 모르겠습니다. 결자해지라고, 저지른 사람이 책임을 져야죠."
그러자 동조하는 지옥의 판관들.
"맞습니다. 우린 가만히 있다가 날벼락을 맞은 셈이니까요."
"쯧쯧, 좋다고 넘어가더니, 어떤 결과가 생길지도 모르고."
"아니, 자신의 위치를 모르나? 스마트폰으로 대리만족이면 충분한데, 지구를 왜? 천방지축 신선도 아니고."
"원래 욕심이 화를 부르는 법이지."
염라는 죽을 맛이었다.
판관들의 비난에도 달리 할 말이 없었다.
맨날 신선들을 보며 사고만 치고 다닌다고 핀잔을 줬는데, 정작 대형 사고는 자신이 치고 말았다.
"걱정하지 말게 단순한 오류일 뿐이야. 더 이상 지구 영혼이 이쪽으로 넘어올 일은 없을 거야."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당연하지. 우리가 40억의 인구를 어떻게 떠맡나? 나도 못 하네."
"아아, 생각만 해도 아찔합니다."
"그리고 이번 혼백도 결국 천인이었지 않나. 그래서 올라온 걸지도 몰라."
"정말요?"
"천계로 모시면 되니까, 지옥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때였다.
"대왕님! 대애왕님! 대애애왕님!"
강림이었다.
'···이런!'
염라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저 새끼가 저렇게 호들갑 떨면 대개 큰일이다.
"뭐, 뭐냐?"
"3명의 혼백이 또 올라왔습니다."
"···가, 강호 무림이겠지?"
설마, 설마, 설마, 설마, 설마···,
"아닌데요? 또 지구입니다만."
판관들이 욕설을 내뱉었다.
"아잇, 싯팔!"
"제엔장!"
"돌아버리겠군."
염라도 망연자실한 표정,
"···천인들?"
"죄인들입니다. 혼백이 탁하다 못해 시커멓습니다. 초열지옥과 한빙지옥에 한 백만 년 집어넣어 구웠다, 얼렸다 해도 모자랄 정도로."
"이름은?"
"뭐라더라? 아! 후동평, 기무라, 츠치다."
"태, 태주 대협 지인이더냐?"
"지인은 아니고, 나쁜 짓 하다가 태주 대협에게 걸려 죽임을 당한 듯합니다."
"하아."
그의 지인뿐 아니라 죽인 놈도 올라온다.
염라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대왕, 어쩔 겁니까?"
"···바, 방법이 있나? 지옥을 넓히고 차사와 사자, 판관 숫자를 늘려야지."
"말이야 쉽죠. 어느 세월에?"
"천천히 해보세, 아직 급한 게 아니니까."
"에잉!"
못마땅하다는 얼굴로 회의장을 빠져나가는 황천의 관리들.
'하아, 이 새끼들이,'
확! 지은 죄가 있기 때문에 조져버릴 수도 없고.
스트레스 때문에 미치겠다.
어디 풀 데가 없나?
이게 다 차원 이동의 빌미를 제공한 새끼들 때문이다.
빈센트 모레티와 자크 델루안이라는 마공학자들 말이다.
'쌍놈의 새끼들.'
그러나 이미 놈들의 영혼은 소멸했다.
존재 자체가 사라졌다.
잡아 족치지도 못한다.
선계와 지구의 문물교류로만 그쳤다면 좋았는데.
그러나 어떻게 보면 실수가 아닐 수도 있다.
이미 정해졌다고나 할까.
어쩌면 운명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스트레스는 풀어야지.
염라는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순간!
스팟! 하고 나타난 지옥의 죄인 한 명.
"헉!"
오래전 태주의 공유창고에 의해 황천으로 끌려온 데우스 리치 드렉 카락스.
"···왜?"
염라는 드렉 카락스의 물음을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정신을 집중해서.
지이이잉!
문을 열었다.
얼마 전 지구의 문이 열리다가 만 것을 깨닫고, 혹시 다른 세상의 문도 열 수 있는지 실험해봤다.
설마 했지만 열리는 곳이 있었다.
문이 열린다고 해서 좋은 것도 아니지만.
염라는 드렉 카락스의 멱살을 잡았다.
"가자!"
"어, 어딜?"
쑤욱!
문을 넘어가니.
"아아아아아!"
드렉 카락스는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익숙한 장소다.
비록 가보지는 못했지만 간접 경험으로 알 수 있는 곳.
"···마계."
자신과 영혼을 연결한 마왕 바포메트가 존재하는 곳.
휘이익, 털썩!
드렉 카락스가 황량한 마계 벌판에 내동댕이쳐졌다.
생과 사를 주관하는 신.
황천의 지배자 염라가 마계에 강림했다.
여긴 인간계가 아니다.
따라서 자신의 주관하에 들어올 일도 없다.
스트레스 해소용 공간일 뿐.
염라가 저벅저벅 걸었다.
물론 여기도 오래 있진 못했다.
하지만 그 잠시의 시간만으로 마계는 치명적인 피해를 당하고 말았다.
찌끄덩!
쩌저저저저적! 쩌적!
쿠쿠쿠쿠쿵!
그렇지 않아도 어둡던 마계의 하늘이 더더욱 시커메졌다.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대지 전체가 흔들렸다.
음습하게 피어오르던 마계의 기운도 무겁게 가라앉았다.
세상이 무너진 것 같다.
모든 마계 마물이 숨을 죽였다.
72계 마왕들도 공포에 떨었다.
"좋군."
염라의 유유자적한 마계 산책.
덕분에 스트레스 시원하게 풀었다.
< 염라의 스트레스 > 끝
ⓒ 꾸찌꾸찌
=======================================
< 승천 >
이제부터 선계 배송 준비는 백서연이 담당하기로 했다.
덕분에 태주는 직접 물건을 사러 갈 필요가 없어 편해졌고.
"OTT 방송 플랫폼 하나 인수해도 될까요? 마침 좋은 매물이 하나 나와서···,"
"플랫폼 인수?"
"신선님들이 드라마와 방송을 좋아하신다고 하셨잖아요. 번거롭게 일일이 다운받지 말고 OTT 플랫폼 자료 전체를 선계로 넘겨주면 될 것 같아서요."
"아!"
좋은 생각이다.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인수합시다. 투자도 아끼지 마세요. 양질의 컨텐츠를 위해."
"알겠습니다. 그리고 삼한의 유통 업체들에게 미리 주문을 넣었습니다. 어떤 물건이든 최고급 라인과 품질로 준비할 생각입니다."
"저 신경 쓰지 마시고 알아서 하시면 됩니다."
사실 그렇게까지 안 해도 되는데.
이미 독선의 무한공간엔 지구의 물건들이 엄청나게 많이 들어있을 것이다.
하루에 팔리는 양이 얼마나 된다고.
선계, 황천계, 천계 다 합쳐봐야 삼한의 시골 군 단위 인구만도 못하다.
그래도 다다익선.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
"참! 회장님, 아공간 가방이 몇 개 더 필요합니다."
"얼마나?"
"되도록 많이요."
태주가 원래 가지고 있었던 것과 빈센트 모레티가 가지고 있던 걸 합치면 아공간 가방만 10개가 넘었다.
특히 빈센트의 가방은 용량이 기존의 것보다 훨씬 크다.
"구례 전역의 치킨집에 의뢰했습니다. 종류별로 20개 이상씩 튀겨달라고, 소주, 맥주와 함께 아공간 가방에 넣어서 보내려고요."
신선들이 치맥을 좋아한다고 했더니, 바로 실행에 옮겼다.
"선계 전용 스마트폰도 제가 준비할게요. 동훈이와 협력해서."
백서연의 무시무시한 실무 능력.
구례 바이오 단지 대형 창고에 엄청난 양의 물건들이 차곡차곡 쌓였다.
태주는 아무 때나 가서 무한공간에 집어넣으면 되고.
"그런데 구례 병실 아버지 육체는 어떻게 하죠?"
요즘 그녀도 병실 출입이 뜸하다.
진짜 백홍표는 저 차원 너머에 있는데.
"일단 생명 유지 장치는 제거하지 말고 놔둬 보죠. 형님이 오시면 그때 가서 처리하는 걸로 하고요."
"네."
그리하여 며칠 후.
찌르르르!
또 한 번의 배송 신호가 떴다.
'게이트 발생기가 있으려나?'
공유창고를 확인해봤지만,
'없네.'
귀곡이 지구로 온 바람에 제작할 신선이 없어서 그런가?
대신 선도와 천계꽃, 흑암철, 그리고 오색빛깔의 진주가 가득했다.
더불어 선계 상황을 찍은 공기계 스마트폰도.
이쪽에서도 남아있는 비욘드 결정체와 백서연이 정성껏 준비한 물건들을 넣었다.
백서연이 직접 찍은 안부 인사 동영상이 든 스마트폰도.
그러고 나서 태주는 그녀와 함께 선계에서 보낸 영상을 확인했다.
- 동생 잘 있나? 난 정말 잘 있네. 내 평생에 해왔던 수고를 다 보상받은 기분이야.
"참나, 얼굴은 진짜 좋아 보이네요."
백서연이 허탈한 표정으로 말했다.
폭탄 테러로 사망하신 아버지가 천국에서 저렇게 행복하게 지내고 있을 줄이야.
심지어 영영 돌아가신 것도 아니다.
- 당분간 여기 있으려고, 서연이와 아이들에게 안부 전해줘. 굳이 알리고 싶지 않다면 안 해도 되고.
영상에서 선계 월드와 천인들의 모습도 나왔다.
- 백천인님! 누구한테 말씀하시는 거예요?
- 허허, 내 동생 태주에게 보내려고요.
- 와! 나도 한마디 하면 안 될까요오?
- 마음껏 하세요. 해맑 선녀.
- 헤헤, 안녕하세요오! 저 해맑이에요오! 저 잘 놀고 있어요오, 태주님도 놀러오세요오!
"하아,"
보고 있으니 태주도 심술이 날 지경.
저러니 계속 선계에 있으려고 하지.
"아주 꽃밭에서 놀고 있구나."
"···정신을 못 차리시는 것 같아요."
안 되겠다.
너무나 부럽다.
'나도 빨리 가야지.'
백서연도 해맑 선녀에게 꽂혀버렸다.
"이분이 해맑님이군요."
"굉장히 맑은 분이시죠."
"직접 뵙지도 않았는데 정말···,"
백서연이 주먹을 꼭 쥐며 다짐하듯 말했다.
"저 앞으로 착하게 살 거예요."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오시지 않았나요?"
"아뇨, 천계로 가기엔 턱없이 부족해요."
"···."
그럼 자신은?
'뭐, 이미 천계로 가긴 글렀고.'
착한 짓 해서 죽어야만 천계로 가나?
태주가 가진 특혜.
등선해서 가면 된다.
'그런 의미에서 등선 준비나 해볼까?'
※ ※ ※
중국 무한의 비욘드 레이드.
남김없이 모조리 토벌됐다.
놈들을 지배하던 그 용 새끼도.
옛 중국 땅 전역의 비욘드가 싹 사라졌다.
태주도 만리비검을 타고 다니며 마지막으로 확인했다.
비어있는 땅은 먼저 먹는 놈이 임자.
현재 전 세계에서 대규모 토벌 전쟁을 통해 중국 땅의 잔존 마수를 물리치고 깃발을 꽂을 여력이 되는 국가는 유럽과 삼한, 아메리카.
하지만 아메리카 공화국은 제외.
바다 건너에 있기 때문에 너무 멀다.
유럽 제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움직일 수 없었다.
그쪽은 다른 문제로 시끌벅적하다.
알렉스 카이사르 황제의 사망에 이어 율리안 황제마저도 실종됐기 때문이다.
그것도 메가 로마 유럽 제국 황궁 심처에서, 마치 하늘로 솟거나, 땅으로 꺼진 것처럼.
무슨 마가 꼈나?
제국의 황제가 연이어 죽거나 사라져버렸으니.
그래서 중국 땅 정벌 같은 건 생각할 수도 없었다.
삼한제국만 빠르게 움직였다.
제국군 중국 땅 진입 계획.
남아있는 건 엘리트 마수들과 일반 마수들 뿐이니 이 기회를 어떻게 놓쳐?
현재 활동하는 모든 개척 부대를 총동원할 예정.
시베리아에 파견된 부대만 빼고.
류태현 황제가 직접 움직였다.
보급 계획, 부대 구성, 지휘체계까지 손수 챙겼다.
그 와중에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황궁 비서관 금수호였다.
- 김태주 회장, 정벌군 총사령관을 맡아주게.
이 무슨 뜬금없는 소리야?
"전 군인이 아닌데요. 총사령관은 황제 폐하께서 하셔야죠."
- 군인이 아니면 총사령관 못 하나? 외부 영입으로 하면 돼. 그리고 사실 자네가 다 했잖아. 숟가락이나 얹으라고.
"숟가락 얹는 건 좋습니다만···, 썩 내키지 않네요."
- 부탁하네. 우리로서도 자네가 꼭 필요하네.
"저를 왜요?"
- 지구 유일 비욘드 헌터로서의 명성 때문이지. 동영상에 명명백백 찍혔잖아. 병사들도 바라고 있어. 김태주 중국 정벌 총사령관! 군인들 사기가 얼마나 올라가겠나?
"에이, 사기 문제라면 폐하께서 하시라고 하세요."
- 비욘드 마수를 때려잡은 사람 폐하인가?
하긴, 금수호의 말도 틀린 건 아니다.
- 이름만 올려두는 거야, 이름만! 아무것도 안 해도 돼. 우리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그저 편히 앉아서 공적만 챙겨.
"···그럼 뭐."
못할 것도 없지.
자신이 다 한 건 맞다.
비욘드가 사라졌기 때문에 군대도 투입할 수 있는 거고.
태주는 제안을 승낙했다.
하지만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비욘드 사라졌다고 군대를 막 밀어 넣을 수 있나?
최소 수개월은 걸릴 터.
그럼 그동안에···,
'등선하러 가자.'
물론 전처럼 임시로.
※ ※ ※
태주는 지리산 천왕봉으로 갔다.
갑갑한 자택 지하 수련실보다는 탁 트인 야외가 낫지.
여기까지 올라올 사람도 없고.
전에 천도를 먹었을 때 했던 임시 등선.
여의주도 천도만큼이나 귀한 보물.
또 올라갈 수 있지 않을까?
자신이 열심히 약 팔아 돈 버는 목적이 뭔가?
같은 영혼인 당군악에게 뭐라도 해주고 싶기 때문이다.
더불어 상위계의 번영도 이루고.
그분들 때문에 지구가 안전해졌다.
죽은 줄 알았던 형님도 행복해졌다.
얼마나 감사한가.
직접 가서 얼굴 보고 감사를 표하는 것이 사람의 도리.
'···물론 개인적으로 가고 싶기도 하고.'
여의주를 품는다.
여태까지 경험으로 보면 그냥 지나가지 않을 것이다.
최소한 영혼 연결, 혹은 무한공간 공유 반짝 이벤트, 가장 바라는 건 등선.
혼자 오진 않았다.
마침 데리고 갈 놈이 있다.
"이번엔 너도 같이 가보자."
"냥?"
"선계는 한 번도 못 가봤지?"
"냐아아···,"
일이삼백이와 함께 갈 작정이다.
요즘 이놈과 같이 있는 시간이 부족했던 탓도 있고, 워낙 귀여운 놈이라 신선들에게 자랑하고픈 마음도 있고.
그게 될는지 모르겠다.
아마 안 될 가능성이 더 높을 것이다.
게이트를 통한 차원 이동도 아니고, 보물에 의한 상승작용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니까.
'그래도 품에 꼭 안고 있으면···,'
되든 안 되든 일단은 해보는 거지.
일이삼백이야 혼자 남겨져도 알아서 잘 놀 것이고.
여의주는 먹는 것이 아니라 품는 것이다.
심장과 여의주가 결합하는 방식으로.
하지만 태주의 경우엔 살짝 다르다.
심장이 아닌 독령과 여의주의 융합.
운이 좋아 등선하게 되면 형님도 보고, 신선들도 만나고, 황천계 염라와 관리들, 해맑 선녀를 비롯한 천인들, 다 볼 수 있다.
그들을 위해 무한공간을 지구 물건으로 가득 채워왔다.
독선은 싫어할지 모르겠지만 선계 운동장에 부려놓고 마음껏 가져가라고 하고 싶어서.
'슬슬 해볼까.'
사실 걱정되는 부분도 있다.
일반 여의주가 아닌 드래곤 하트를 흡수한 여의주.
그로 인해 성질이 변화되었을 수도 있으니.
태주는 일이삼백이를 옷 속에 넣었다.
"들어가서 꼼짝 말고 있어."
"···냐?"
겁먹지 말고.
"냥."
바로 작업에 착수했다.
단전 부근에 여의주를 밀착시키고 혼원무상독령공 운용.
우우우우웅!
독령이 꿈틀거린다.
지이이이잉!
또한 진동했다.
흐물흐물, 스르륵.
단전으로 녹아 들어가는 여의주.
'됐어.'
츠츠츠츠츠!
드디어 독령과 여의주가 결합하기 시작했다.
"크윽!"
갑자기 불어난 기운에 단전이 찢어질 듯 아파왔지만.
"후우, 후우, 후우···."
계속 혼원무상독령공을 운기했다.
용의 힘이 담긴 여의주와 독령의 결합.
거기에 드래곤 하트까지.
우우웅!
대기 중 마나가 몰려들었다.
기운이 점점 불어나기 시작했다.
쩌적!
쿠쿵!
천왕봉 정상이 흔들거렸다.
쿠쿠쿠쿠쿵!
더더욱 심해졌다.
우웅! 우웅! 우웅! 우웅!
완전히 결합한 독령과 여의주.
'···어어?'
찌이이이잉!
강대한 기의 흐름이 태주의 몸속을 휘몰아쳤다.
너무 많이 불어나서 감당이 안 될 정도로.
"커헉!"
폭주하는 기운.
온몸이 부풀어 올랐다.
전신의 혈맥이 여의주, 하트, 독령의 복합적인 기운으로 가득 찼다.
그러나 빠져나갈 길은 없고,
쿠쿠쿠쿠쿵!
천왕봉뿐만 아니라 지리산 전체가 요동쳤다.
순간!
'아!'
간질거리는 정수리.
백회혈이 열렸다.
동시에 엄청난 기운이 한꺼번에 빠져나왔다.
쭈쭉!
빛이였다.
하늘과 태주의 몸을 연결하는 새하얀 빛무리.
마치 레이저 광선처럼.
쭈죽! 쭈주주주주죽!
백회혈을 뚫어버리고 하늘로 치솟아 올라갔다.
'아아아···,'
천지합일.
땅과 태주, 그리고 하늘이 이어졌다.
우르르릉! 우릉!
꽈광! 꽈과광!
바람이 세차게 불고, 천둥 번개를 동반한 먹구름이 몰려왔다.
후둑, 후두두두둑!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굵은 소나기로 내렸다.
스스스스스스···,
먹구름이 가는 막대 모양으로 뭉쳐지더니 태주에게 내려왔다.
그러면서 두꺼운 구름 기둥을 만들어냈다.
용오름.
과거 옛사람들에게 용이 승천한다고 여겨졌던 자연현상.
그러나 지금은 자연현상만이 아니었다.
실제 태주의 육신이 그 용오름을 통해 하늘로 떠오르고 있었으니까.
"뜨, 뜬다, 떠!"
"냐아앙?"
진짜 하늘로 올라갔다.
품 안에 든 일이삼백이도 함께였다.
어느새 지상이 까마득하게 내려다 보인다.
'이러다 우주까지 날아가는 거 아냐?'
여의주는 이무기가 용이 되려면 수행을 통해 필수적으로 얻어야 할 보물.
승천하기 위해선 여의주가 있어야 한다.
거꾸로 말해 여의주를 품으면 승천하는 것이고.
그랬다.
태주는 승천 중이었다.
등선이나 승천이나 비슷하다고는 하나, 문제는···,
'여긴 지구잖아.'
그가 품은 여의주는 다른 세상의 보물.
승천도 다른 세상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법.
천도를 먹었을 땐 바로 등선했었다.
선계의 보물이고, 독선으로 인해 선계와 인연을 맺었으니까.
하지만 여의주는 용궁의 물건.
용궁은 자신과 별 인연이 없다.
그 때문인지 승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모양.
올라가긴 했지만 방향을 찾지 못한 듯 이리저리 비틀리는 용오름.
옆으로 꺾었다가, 잠시 내려왔다가, 다시 쭉쭉 올라가고.
'호, 혹시?'
간단하다.
지구의 승천 길엔 목적지가 없다.
그리하여 용오름은 갈피를 잡지 못했다.
한참을 허둥대기만 하다가···,
슈슛!
대기권 돌파!
이제 보이는 건 막막하고 어두운 우주.
"미, 미친!"
당황스럽다.
등선을 기대했는데, 인간 우주선이라니.
그때였다.
태주의 몸속에서 막대한 기운이 한 번에 쑥 빠져나갔다.
"윽!"
쩌저저저저정!
목적지 없는 승천 길 앞쪽에 뭔가가 생겨났다.
'···게이트?'
투명한 문이었다.
즉 게이트가 만들어졌다.
'갑자기?'
게이트라니.
발생기도 가지고 있지 않았는데.
'설마···,'
간과한 사실 하나.
태주가 품은 여의주는 순수한 것이 아니었다.
무한의 비욘드 우두머리.
드래곤이 품었던 하트와 결합한 여의주다.
드래곤은 지구의 존재가 아니다.
놈도 어떤 방법으로든 지구로 건너왔을 것이다.
예를 들어 마도 공학의 거울 게이트 발생기처럼.
만약 놈이 그와 비슷한 차원 이동 마법을 지니고 있었다면?
그래서 여의주가 그 능력마저도 흡수했다면?
이유가 뭐든,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
"으아아아!"
"냐아아앙!"
쑤욱!
파아아앗!
태주와 일이삼백이는 승천의 길 앞에 놓인 게이트를 함께 통과했다.
※ ※ ※
여긴 어딜까?
게이트를 통과한 건 분명한데.
'···지구?'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보이는 건 푸른 하늘, 그리고 밑으론 푸르른 바다.
그리고 태주는 바다로 추락하는 중이었다.
쓔우우우우웃!
게이트를 만들어낸 탓일까?
독령이 바닥났다.
그래도 무한공간에서 만리비검을 꺼내,
스슷!
바다로 빠지기 직전 가까스로 그 위에 올라탔다.
"휴우,"
만리비검은 검선의 보패.
기를 사용하지 않아도 자체적으로 비행 능력을 갖추고 있다.
아무튼 다행이다.
"우주로 튕겨 나갈 뻔했네."
"냐아···,"
"괜찮아?"
"냥!"
일이삼백이도 괜찮은 것 같고.
현재 떠 있는 곳은 망망대해 바다.
먼저 여기가 어딘지 파악해야 한다.
지구? 아니면 다른 세상?
게이트를 통과했으니 지구일 가능성은 매우 적다.
선계가 아닌 것도 확실하고.
어쨌든 육지를 찾아보자.
그럼 어딘지 알 수 있겠지.
아무 방향이나 정해서.
쐐애애액!
만리비검이 날았다.
그렇게 한참을 갔는데.
"오!"
방향을 잘 찾아왔나 보다.
육지가 눈에 들어왔다.
'사람이 사는 마을이나 도시가 있나?'
태주는 계속 날아갔다.
이제 바다를 지나 육지로.
어느새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 보인다.
긴장된다.
그들의 모습을 보면 여기가 어딘지 알 수 있을 터.
한적한 곳에 내려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깨달았다.
"···아!"
사람들의 복색.
집이나 건물의 모양.
왁자지껄한 길거리.
태주에겐 너무나 익숙한 풍경이었다.
독선 당군악과의 영혼 연결을 통해서 말이다.
'···강호.'
맞다.
여긴 강호 무림의 세상이었다.
목적지가 없었던 지구에서의 승천.
갈팡질팡하다가 우연히 게이트가 열렸고.
그래서 도착한 곳이 승천의 목적지가 있는 강호 무림.
'여기서 승천하면 상위계로 오를 수 있나?'
하지만 문제는···,
'어떻게 또 승천하지?'
그야 나중에 선계 배송이 오면 물어보면 되고.
아무튼 강호에 왔으니.
'이참에 나도 관광이나 해보자.'
< 승천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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