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novel

20

※ ※ ※

태주는 기가 막혔다.

거울 속에서 누군가 나오긴 했다.

그것도 데굴데굴 굴러서 나왔다.

최근에 만났던 사람, 아니 신선.

지구가 아닌 선계에서,

나오자마자 구속부와 벽마부로 꼼짝하지 못하는 엘리트 자이언트 반달곰을 신기한 듯 손가락으로 쿡쿡 찌르고 있었다.

부적도 뗐다가 붙였다가, 그래도 엘리트 반달곰은 바르르, 떨기만 하지 움직일 생각도 못 했다.

"···검선님?"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시선을 돌리고는,

"오! 태주 대협!"

스팟!

단숨에 달려왔다.

"어, 어떻게 여길?"

"흐음, 그게 말이지···,"

검선이 태주에게 지구로 온 연유를 설명했다.

조금 두서는 없었지만 잘 알아들었다.

"그렇게 된 거군요."

"나, 나도 멀리 떨어져 있으려 했는데 발을 헛디뎌 그만, 하하하···,"

과연 그랬을까?

그나저나 큰일 날 뻔했다.

독선이 만약 그 게이트로 끌려 들어갔다면?

그래서 자신과 합쳐졌다면?

태주도 속박을 끊을 때 살짝 힘들었다.

그걸 끊어낼 수 있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자신과 독선이라 가능했지, 결코 만만한 힘은 아니었다.

'미리 알려줘서 다행이었구나.'

그러나 문제가 남았다.

게이트를 넘어서 여기 왔다 쳐도, 어떻게 돌아가려고?

"걱정하지 마시오. 뭐, 때가 되면 선계로 돌아가겠지."

"네?"

"그대도 알다시피 내가 여기로 건너온 건 정상적인 건 아니니까."

"뭐, 틀린 말씀은 아닌 것 같네요."

"난 지구에선 이질적인 존재라고 보면 된다오. 여기 있어선 안 된다는 의미지. 우리 세상으로 따지면 세상을 거스르는 행위나 다름없으니. 흐음, 역천(逆天)이라는 말 들어봤는지 모르겠군."

역천이라,

"···그거 조금 무서운 말이네요."

"에이, 별거 아니라오. 내가 역천 같은 거 한두 번 해봤겠소? 천기 거스르는 것쯤이야, 익숙한 일이오. 허허허,"

웃을 일이 아닌 것 같은데.

역천을 언급하고도 참으로 태연한 모습.

하지만 이상하진 않았다.

'오히려 신선답네.'

이들에겐 법칙과 규율은 깨라고 있는 것.

그래서 그들이 선계에 갇혀 있는 이유일 테고.

"아무튼 난 어떤 방식으로든 돌아가게 될 거요. 그 시점이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 네, 아쉽네요."

"그래서 말인데,"

"말씀하세요."

"내가 이왕 지구에 왔으니···,"

그때였다.

바스락!

저쪽에서 익숙한 기척이 느껴졌다.

"누가 오는군. 적인가?"

"아닙니다."

익숙한 기척이었다.

정연희일 것이다.

엘리트 마수 한 마리 잡아 온다고 해놓고선 아직도 안 오니 걱정되어 나타났겠지.

"내가 자리를 피할까?"

꼭 그럴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정연희도 검선과 인연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괜찮습니다. 다만 신선이시라는 것만 밝히지 말아 주셨으면···,"

"하하하, 나도 그 정도 눈치는 있소."

"지금부턴 말을 편하게 해주세요. 반말로."

"그럴까?"

이윽고 정연희가 모습을 드러냈다.

"회장님, 기다리다가 무슨 일이 있나 궁금해서···, 어머?"

그녀의 눈이 검선을 향했다.

점점 눈이 동그라졌다.

그리고 한동안 아무 말 없이 그저 바라만 봤다.

눈이 마주친 순간 알았다.

스마트폰에 저장되어있던 복마검법 시연 연상.

수도 없이 봤다.

하루에도 몇 번씩 시청했다.

느리게 재생, 빠르게 재생, 반복 재생, 확대와 축소···,

'저분이야.'

멋진 수트와 구두, 짧은 머리를 하고 있어 영상 속 모습과는 사뭇 달랐지만,

어떻게 모를 수가 있을까?

정연희는 당황했다.

무슨 말부터 먼저 해야 하지?

또한 호칭은 어떻게 불러야 하나?

순간!

"근골이 좋군."

"그렇죠?"

"저 소저가 가지고 있는 검도 내가 자네에게 준 것 같은데."

"아! 그러고 보니 미처 허락도 안 맡았습니다."

"괜찮네, 검이 주인을 찾아간 거지. 그리고 확실히 검후의 자질이 있어. 가르친 보람이 있네."

그녀는 깨달았다.

저분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스, 스승님!"

"···오!"

검선의 눈이 반짝였다.

스승이란 말을 들어본 지가 언제였더라?

'제자라,'

그것도 지구의 제자.

'이것도 인연인가?'

그래서 그녀를 보며 푸근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여줬다.

"그래."

"아!"

정연희는 감격했다.

자신을 제자로 인정하겠다는 뜻 아닌가.

참으로 보기 좋은 광경이긴 하지만···,

태주가 나서서 말했다.

"자자, 지금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요."

정연희를 보며.

"연희씨,"

"어, 네?"

검선의 정체에 대해 뭐라고 말할까.

드라마를 보며 삼한제국의 언어도 자연스럽게 구사해서 이질감도 전혀 없으니, 그냥 단순하게 둘러대자.

"이분이 산속에 오래 있으셔서 현재 마땅한 신분이 없는 상황입니다. 일상생활이나 휴대전화 개통도 해야 하고 그래서···,"

정연희는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그건 제가 알아서 할게요. 비서실에 연락해서 적당한 신분 만들어 보죠. 아무 탈 없이 처리하겠습니다."

하긴, 재벌집 손녀인데 그 정도도 못 할까.

"그런데 스승님 성함을 여쭈어봐도 될는지···,"

검선이 답했다.

"도빈, 도빈이란다."

적당한 이름이다.

"연희씨, 이분 모시고 잠시 우리 집에 가 있어 주실래요? 스마트폰도 개통해주시고."

"지금 바로 모시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전 예정된 실험, 마저 하고 갈게요."

사람들이 기다릴라.

도핑 물약 실험은 진행하고 가야지.

※ ※ ※

오늘 예정이었던 실험은 무사히 끝냈다.

결과는?

말할 필요가 있나?

주니어 익스퍼트로만 구성된 20명의 레이드 팀이 도핑 물약 지속시간 1분 정도를 남기고 엘리트 자이언트 반달곰의 숨통을 끊어놓았다.

이제 검선을 만나러 가보자.

하지만 그 전에.

태주는 티제이 바이오 보안 센터 김동훈에게 갔다.

그에게 지리산에서 수거한 초소형 드론을 보여주면서.

"어때, 동훈아, 이거 분해해서 조사해볼 수 있냐?"

김동훈은 드론을 꼼꼼하게 살펴봤다.

"어휴, 이거 제 전공 아닌데요? 마법 인챈트 도구잖아요. 여기 보세요. 문양 그려진 거."

"그래도 전자 부품 많이 들어갔잖아. 통신 장치도 있고."

"있으면 뭘 해요? 분해도 안 되는데,"

"분해도 못 해?"

"보통 마도구들은 분해하면 내부 장치들이 불타게 만들어졌어요. 만든 사람이라면 모를까."

곤란하다.

이걸 토대로 빈센트 모레티가 어디 있는지 추적해보려 했는데.

"그런데 드론은 왜?"

"아, 이게 지리산에서 우리 실험 현장을 찍고 있었어. 영상을 촬영해 어디론가로 전송한 것 같더라고, 혹시나 실험 결과가 유출되었을 가능성이···,"

"네? 진작 이야길 하시지. 그거라면 굳이 드론을 분해할 필요가 없어요."

"응?"

"어쨌든 지리산 중에서도 무선 신호가 연결된 곳이라는 이야기잖아요. 거기서 무선 통신에 접속한 아이피가 몇 개 되진 않을 테니까."

"그렇지."

드론이 찍은 영상이 인터넷상으로 전송됐다면 반드시 흔적이 남을 수밖에 없다.

"···되기야 하겠지만 아이피 추적은 불법이라서."

"상관없어. 내가 책임질게."

"하하, 그럼 뭐, 정확한 위치와 시간만 알려주세요. 그럼 영상이 어디로 전달됐는지 알아볼 수도 있을 겁니다. 조금 걸릴 거예요."

반드시 잡고야 만다.

영혼이 합쳐지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뻔히 알면서도 실행하려 했던 놈이다.

하마터면 구례시 전체가 사라질 뻔했다.

또한 영혼 연결자가 자신만 있나?

지금도 그들은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빈센트 모레티, 그놈이 살아있는 한은.

※ ※ ※

선계(仙界).

아직 신선들의 분노가 풀리지 않았다.

얼마나 좋은 기회였는데.

그걸 검선이 쏙 가로채버려?

정말이지, 같은 신선이지만 염치도 없고 가증스럽기까지 했다.

"나 혼자 독식, 나 혼자 지구 방문, 검선을 주인공으로 웹소설 써도 되겠소."

"도대체 양보란 걸 몰라. 욕심이 덕지덕지 붙은 영감탱이 같으니라고."

"검선이 아니라 욕선이야."

"하아, 또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군."

"되겠소? 태주 대협이 바보요? 한번 당한 걸 두 번 또 당할까."

"일부러 당해줄 수도 있잖소."

"그래 준다면야···,"

"어허! 태주 대협만 믿지 말고 우리가 직접 길을 찾아야지."

그리하여 우르르르, 황천계로 몰려갔다.

염라가 있는 업화궁으로 쳐들어가서,

"이보쇼! 염라, 지금 뭐하시오? 할 얘기가 있소."

"어후, 연기 때문에 숨을 못 쉬겠군. 두더지 잡나?"

"맨날 이렇게 연초나 피워대니 머리가 굳어버리지."

신선들이 마치 개떼처럼 들이닥치자, 염라는 골치가 아픈 듯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이놈들은 또 뭐가 문제여서 여길 왔을까?

"그래, 무슨 일로 왔는가?"

신선들은 기다렸다는 듯 앞다투어 불만을 쏟아냈다.

"지금 검선이 어디 갔는 줄 아시오? 문을 넘어 지구로 갔소."

"누가 문을 열었는지 짐작도 못 할 거요. 미친 과학자라 하더이다."

"아니, 개나 소나 문을 열어제끼는데, 우리 황천계는 뭘 하나 몰라?"

"능력이 없소? 이럴 거면 적당한 판관에게 대왕 자리 물려주고 내려오던가."

"지구에 열지 못하면 그 마계인지 뭔지, 그 동네라도 열어보시오."

"그것도 못 할걸?"

도무지 무슨 소린지···,

뭔가를 따지러 왔으면 전후 사정 정도는 상세하게 말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신선들에게 그걸 기대하는 게 멍청한 짓이긴 하다.

'그냥 독선에게서 듣는 게 낫겠어.'

마침 약속 시간이 다 됐다.

이 기회에 튀자.

"흐음,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군. 대표자 회의에 참석할 시간이라 난 이만, 놀다 가시오."

스우웅,

염라는 천계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여, 염라! 어디 가시오?"

"대답은 해주고 가야지."

"잡아!"

쑤욱,

그리고 문을 건넜다.

< 스승과 제자 > 끝

ⓒ 꾸찌꾸찌

=======================================

< 검선의 뉴서울 종횡기(1) >

태주는 볼일 다 보고 집으로 왔다.

자택에서 일하는 직원들이 그를 반겼다.

"회장님, 어서 오세요."

"네, 고생들 많으시죠? ···혹시 연희씨는?"

"손님분과 함께 지하 수련실에 계십니다."

"그래요?"

수련실로 내려가 보니 검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근골은 좋다. 그러나 검의 극의를 보려면 마음의 수양도 중요하다. 주위의 환경이나 유혹에 굴하지 말아야 한다. 마음이 흔들리면 검 끝도 흔들리는 법."

···검선이 할 이야긴 아닌 것 같은데.

누구보다 유혹에 약한 신선이 바로 검선 아닌가.

자신이 한 말이 맞는다면 검선의 검은 흔들리는 걸 넘어 거의 진동검 수준일 터.

'진동검이라, 그래서 그렇게 강한가?'

수련실엔 스마트폰이 거치된 삼각대가 세워져 있었다.

그 앞에서 검선이 천천히 검술을 시연하며 정연희를 가르치고 있었다.

태주가 들어서자.

"오! 왔군."

"제가 방해됐나요?"

"천만에! 거의 끝났네."

정연희는 땀에 흠뻑 젖어있었다.

"많이 배웠어요?"

"네, 복마검법의 미진한 부분을 다시 짚어주셨어요. 그리고 청련신보라는 보법도."

"아하."

혹시 그녀는 알려나.

검선에게 무공을 사사 받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일인지.

강호 무림에서도 이보다 더 큰 기연은 없을 것이다.

"검···, 아니 도빈님하고 단둘이 할 이야기가 있어서 그런데,"

"편하게 이야기 나누세요. 제가 나갈게요."

"아뇨, 연희씬 계속 수련실에서 연습하셔도 됩니다."

태주는 검선과 함께 자택 거실로 올라왔다.

홈바 에스프레소 기계에서 커피 두 잔을 내린 후, 푹신한 고급 소파에 앉아,

"아무튼 지구에 오셨으니, 뭘 하실지는 생각해 두셨는지,"

"흐음, 일단 물어볼 것이 있네."

"네, 뭐든요."

"강제로 문을 연 그놈 말이야."

"빈센트 모레티?"

"그래. 빈센트 뭐시기, 그놈부터 잡아야 하지 않겠나? 나야 그 덕분에 지구에 오게 됐지만, 그대로 내버려 두면 질서가 무너질 수 있으니."

무너지는 것뿐인가?

모스크바 대폭발을 생각해보면 세상이 멸망할지도.

"저도 찾고 있지만 아직은 행방을 몰라서요. 곧 알아낼 수 있을 겁니다. 이쪽저쪽에서 탐문 중이거든요."

해커 김동훈뿐만 아니라 제정원에도 부탁했다.

최대한 빠르게 찾기 위해서.

"그런가? 알아내면 연락해주게."

혼자서도 충분하다.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다면 모를까.

물론 연락이야 하겠지만.

"그럼 지금부터 자리를 비워도 되나?"

"···네, 괜찮습니다. 그런데 어딜?"

"이왕 지구에 온 거 실컷 구경이나 하고 싶어서,"

태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안내해 드릴까요?"

"자네야 공사다망하니 신경 쓰지 말게나. 조용히 놀다 갈 테니."

"어디로?"

"삼한제국에서 가장 큰 도시가 뉴서울이라지?"

"맞습니다."

"놀아도 큰물에서 놀겠네. 염려 놓으시게, 사고 칠 생각은 없어."

그럼에도 신경은 쓰인다.

무려 신선이 지구에 왔다.

그것도 선계에서조차 사고뭉치로 소문난 검선이.

생각은 해뒀다.

무한공간에서 카드 하나를 꺼내,

"받으세요. 검선님."

"응? 뭔가?"

"뉴서울에서 재미있게 노시려면 돈이 필요하시겠죠. 이 카드를 쓰시면 됩니다. 쓸 줄 아시죠?"

"오! "

검선이 반색했다.

"한눈에 봐도 고급스러운 카드군."

"블랙카드입니다. 한도 무제한이고,"

"하하하, 역시 대협이야, ···여, 염치없지만,"

"마음껏 긁으세요."

카드는 검선에게 주는 선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가 어디에서 뭘 하는지 알아볼 수 있는 도구이기도 하다.

카드를 긁으면 스마트폰으로 거래 내역이 전송되니까.

"슬슬 선계 배송 신호 뜰 때 되지 않았나?"

"그럴 때가 됐습니다만."

"이참에 안부 인사나 해야겠군. 내가 없어져서 다른 신선들이 걱정할지도 모르니."

에이 설마?

신선들이 검선을 걱정하겠나?

"안부 인사는 어떻게?"

"영상으로 찍자고."

태주는 공기계 스마트폰 하나를 꺼냈다.

"찍을까요?"

"그러세. 하지만 처음부터 바로 모습을 드러내는 건 촌스러우니까. 자네가 밖으로 나가서···,"

검선이 촬영 계획을 설명했다.

이건 뭐 영화 한 편 찍는 수준.

바깥으로 나가서 정원부터 촬영하고, 그리고 현관문을 열고 복도를 지나 거실로, 거실 천장과 전체모습을 빙 돌아가며 찍은 후에야 카메라 렌즈가 검선을 잡았다.

따사로운 햇살이 들어오는 거실, 전망창을 보며 선 남자의 뒷모습, 늘씬한 검정색 수트, 왼손은 바지 주머니에, 오른손은 커피잔을 들고.

검선이 천천히 뒤로 돌았다.

머리 뒤에서 비치는 태양 빛이 눈부셨다.

"모두들 안녕하시오? 보시다시피 여긴 지구라오, 태주 대협의 자택이지."

간단한 인사 후, 테이블로 걸어가 리모컨을 들고,

픽!

거실 벽 면에 달린 150인치 초대형 TV가 켜졌다.

이건 선계에도 보내지 못한 것.

"TV가 크군. ···오! 못 보던 드라마와 영화들이 많아. 모두 최근 거군. 선계엔 아직 없지? 난 바로 볼 수 있는데."

그리고 커피잔을 탁자에 두고 거실 한편에 있는 주방으로 걸어갔다.

태주의 공기계 스마트폰이 계속 그의 뒤를 따랐다.

검선이 냉장고를 열었다.

꽉 들어차 있다.

음료수와 술들이 종류별로.

맥주 한 캔을 꺼내 칙! 따개를 따고 한 모금 들이키고는.

"뭐, 선계에도 맥주가 있겠지만 지구에서 마시는 맥주는 역시 남다른 맛이야."

이건 자랑인가, 안부 인사인가?

"참! 이게 뭔 줄 아시나?"

검선이 양복 안주머니에서 태주가 준 블랙카드를 꺼냈다.

"무려 한도 무제한 카드라더군. 태주 대협이 마음껏 긁어도 괜찮다고 했소. 어찌나 고맙던지, 마음 씀씀이가 대해(大海)와 다를 바 없지 않소?"

자랑이었다.

그것도 매우 노골적이었다.

"같은 영혼이지만 참 비교되더이다. 복숭아 하나 갖다주면 코인 찔끔찔끔 입금해주는 그 누군가와 말이오."

위험한 발언인데.

선계 돌아가면 어쩌려고 저러나?

"어쨌든 선계에서 잘 지내시오. 뭐, 지구보단 재미가 없겠지만."

검선의 비릿한 미소.

온당한 권리를 누리는 승리자의 오만한 눈빛.

안부 인사 촬영이 끝났다.

이걸 본 신선들의 반응이 어떨까?

후폭풍이 대단할 것이다.

당사자도 아닌 태주가 걱정될 정도로.

"다 됐군. 이제 놀아볼까?"

"바로 뉴서울로 가시게요?"

"미적댈 필요 없지. ···혹시 아공간 가방 하나 남는 거 있나?"

"있습니다. 드릴까요?"

굳이 아공간 가방으로 물건을 보내지 않아도 되기에 그냥 가지고 있었다.

공유창고도 처음보다 거의 5배 이상 커졌고, 선계로 임시 등선했을 때 독선에게 무한공간 전체를 물건으로 가득 채워 넘겨주었다.

"고맙네.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지."

스팟!

검선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래, 이해하자.

겪어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상에 왔는데 얼마나 할 일이 많을까.

순간!

찌르르르,

기다렸다는 듯 선계 배송 신호가 울렸다.

태주는 방금 검선의 안부 인사가 촬영된, 따끈따끈한 공기계 스마트폰부터 안에 넣었다.

※ ※ ※

검선이 온 지 3일이 지났다.

모든 익스퍼트 대상 도핑 물약 실험도 무사히 마쳤다.

매우 성공적이었다.

엘리트 마수에게서 탈출하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사냥해버렸다.

주니어 익스퍼트 9분 컷, 미들 익스퍼트 5분 컷, 슈페리얼 익스퍼트는 2분 컷.

마지막 실험은 마스터 이정학 부시장의 원맨쇼.

3종 도핑을 한꺼번에 완료하고 8분 안에 엘리트 강철깃 부엉이를 혼자 잡아냈다.

이정학은 자신이 해내고도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엘리트 강철깃 부엉이.

마스터가 3명 있어도 잡기 힘들다는 극악의 난이도 사냥을 혼자서 해냈다.

"어때요? 약효는 쓸만한가요?"

"믿을 수 없을 정도로요. 그랜드 마스터라도 된 기분인데요."

"부작용은?"

"다소 지친 감이 있긴 하지만, 회복제만 복용해도 즉시 전투에 참가할 수 있을 정돕니다."

"시중에 나오면 살 의향은?"

"무조건 삽니다. 오픈런을 해서라도, 살 수 있는 만큼 최대한 사서 비축해놓을 겁니다."

예상보다 훨씬 괜찮은 반응.

다만 문제가 있다면 물약의 효과가 워낙 뛰어나서 레이드 팀들이 욕심을 부릴 수 있다는 건데···,

'확실하게 못 박아둬야겠어. 위기에 처했을 때만 사용하는 약이라고.'

가격도 비싸야 한다.

함부로 막 사용할 수 없게끔.

순간!

띠링,

스마트폰에서 메시지가 울렸다.

확인해보니.

[Web 발신]

백두 카드 5*6* 승인

김*주

98,000원 일시불

백두 호텔 뉴서울점.

그리고 케톡도 울렸다.

검선이 보냈다.

망고가 가득 올려진 시원한 빙수 사진과 함께.

'신선놀음이구나.'

하루에도 몇 번씩 울렸다.

정말 마음대로 긁고 다녔다.

수천만 원대 결제도 서슴없었다.

심지어 카드사에서 전화가 올 정도.

- 김태주 회장님, 백두 카드사입니다.

"네, 무슨 일이시죠?"

- 조금 전에 듀카티 모터스에서 4,190만원이 결제됐는데, 회장님 본인이 아니라서···,

"오토바이?"

- 네, 최신모델 바이크입니다.

"괜찮습니다. 저도 알고 있어요."

상남자다웠다.

태주의 눈치 따윈 보지도 않았다.

'뭐 이정도야···,'

검선이 그동안 해준 것에 비하면 새 발의 피다.

이제 실험도 다 끝났고, 동훈이, 혹은 제정원이 빈센트 그놈만 찾아내 주면 되는데.

레이드 도핑 물약 실험이 끝나자마자 군부에서 먼저 입질이 왔다.

태주를 만나기 위해 구례로 내려온 육군 본부 군수 사령관 오진형 대장.

별이 4개라 곧 있으면 육군 참모총장 자리에 영전할 예정이었다.

군수 사령관은 태주와의 인연 때문에 잠시 거쳐 가는 보직.

"그래, 김회장, 먼저 조건을 말해봐. 얼마면 되나?"

"얼마나 필요하신데요?"

"하하하, 무조건 전량 구매지. 우리 군에서 싹 사들일 거야."

"아시죠? 불가능하다는 거. 민간에 절반, 군부 절반. 이렇게 하죠."

"에이, 우리 사이에,"

"아직 수출 생각 없는 걸 다행이라고 생각하세요."

"쩝, 알겠네. 그럼 최대한 빨리 공급해줘."

자리에서 일어나는 오진형.

"어디 가시려고요?"

"오랜만에 지리산 마수 군단에나 들러보려고. 추억이 있던 곳이잖아."

"별 4개가 변방 방어부대에 가시겠다고?"

"···그럼 안 되나?"

"어휴, 제발 정신 차리시죠."

태주도 겪어봐서 안다.

별 하나만 떠도 하급 장교나 부사관, 일반 병사들이 생고생하는 판에.

"쩝, 지리산에서 구를 때가 좋았어. 괜히 진급해서는,"

오진형과 헤어진 후, 태주는 김동훈에게 가보기로 했다.

빈센트 추적이 성과가 있나 모르겠다.

가서 확인해봐야지.

그리고,

띠링,

여지없이 울리는 카드 결제 내역.

[Web 발신]

백두 카드 5*6* 승인

김*주

5,000,000원 일시불

아라비아 옥타곤

5백만 원을 한 번에 긁었어?

'아라비아 옥타곤···, 어디서 많이 들어봤는데,'

검색해봤다.

'여긴 클럽이잖아?'

뉴서울에서 가장 큰 클럽.

'룸이라도 잡았나 보네.'

돈이야 아무것도 아니다.

1억을 한 번에 결제한들, 뭐가 문젠가?

하지만,

'···신선이 클럽엔 왜?'

진짜 어디로 튈지 종잡을 수 없는 검선이었다.

※ ※ ※

천계 자미궁의 대전.

여래계는 불참했다.

원래 속세의 일에 큰 관심이 없는 그들이라 상위 계 대표자 회의에도 곧잘 불참하곤 했다.

용왕도 오지 않았다.

천계에 오려면 용의 본체로 승천을 해야 하는데, 몸이 피곤해서 올라갈 수 없다나?

서왕모 또한 도원 관리 핑계를 대면서 불참.

그래서 참석한 이는 상제와 염라, 독선 당군악.

상제가 먼저 용건을 꺼냈다.

그가 요청한 회의니까.

"천계의 존재 의미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그야, 천인들이 근심 걱정 없이 행복하게 사후의 삶을 영위할 수 있게 함이지요."

"맞네. 사방에 꽃이 피어있고, 감탄이 절로 나오는 경치에, 맑은 공기, 덥지도 춥지도 않은 기후, 과일과 곡식들이 저절로 자라고···, 이렇듯 천계는 아름다운 곳이지."

"그야말로 천국이죠."

상제는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나도 그런 줄만 알았네. 허나 인정할 수밖에 없어."

"인정이라면?"

"천계가 재미없다는 거, 평화롭지만 지루한 곳이야."

"···."

동의한다.

솔직히 그렇다.

천인들이 선계로 몰려오는 이유이기도 하고.

"그래서 독선이 힘을 써주게."

"무슨?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시오."

"천계도 변화시켜보세. 일단 거주공간부터 시작하는 게 어떤가? 최고급 아파트 같은 거 말이야."

"아···,"

"층간 소음이 없도록 튼튼하게, 주차장도 크게 만들고, 도로도 놓고, 주변에 상가 같은 것도 있어야겠지? 천인들도 일하면서 돈 버는 즐거움을 만끽하게끔."

당군악은 상제가 뜻하는 바를 알았다.

천계 신도시 건설.

그걸 원하고 있다.

"너무 덩어리가 커서···,"

"천군을 지원해주지. 노동력이 부족하진 않을 거야."

천군.

천계를 지키는 군대.

숫자만 해도 무려 수만 명이다,

이정도면 해볼 만하지 않을까?

"해보겠습니다. 먼저 모델하우스부터 만들어보죠."

그리하여 천계 신도시 건설 계획이 입안됐다.

염라도 대찬성.

"노동력이 부족하면 말만 하시게, 죄인들이야 얼마든지 지원해줄 테니."

"아마 부탁할 일이 있을 겁니다."

"좋아! ···그런데 물어볼 것이 있는데,"

"물어보시죠."

"검선이 지구로 넘어갔다는 게 사실인가? 업화궁으로 신선들이 몰려와서 알았네만."

"···하아,"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 아프다.

왜 하필 검선이 넘어갔을까?

"솔직히 궁금하군. 어떻게 세상과 세상을 넘는 문을 그리 쉽게 만들 수 있는지,"

"마도 공학이라는 학문이 있다고 합니다. 과학과 술법이 결합 된,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하면···"

염라는 당군악에게서 설명을 들었다.

"허허, 역시 세상은 넓고도 넓도다. 자존심이 상할 정도야."

어쩔 수 없다.

술법이라면 모르겠지만 마도 공학은 염라에게도, 상제에게도, 신선에게도 생소한 학문.

"그 빈센트라는 놈을 여기로 잡아들일 방법이 없을까? 그 드렉 카락스라는 놈처럼."

"글쎄요. 드렉이야 인간이 아니라서 무한공간에 들일 수 있었지만 빈센트는 인간이라서,"

"흐음, 만약 된다면 초혼령으로 놈의 지식과 경험을 들여다볼 수 있을 터인데."

"굳이 지구의 문을 열 필요는 없죠. 지금만 해도 충분합니다."

"아니, 신선들이 자꾸 난리를 치니까 그러지."

이해한다.

문이 항상 열려있기 때문에 황천계로 너무 쉽게 넘어가는 것이 문제.

"제가 단속하겠습니다. 신선들이 사적인 일로 황천계를 넘어가지 못하도록."

"고맙네. 참! 검선은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겠군."

"후우···,"

사실 당군악도 그게 제일 걱정이다.

선계 사고뭉치 중에서도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이가 바로 검선 아닌가.

"사고는 치지 말아야 할 텐데···."

"되겠나? 무조건 칠 거야. 그냥 수습 가능한 작은 사고이길 바라게."

"···."

지금은 어디서 뭐 하고 있을까?

< 검선의 뉴서울 종횡기(1) > 끝

ⓒ 꾸찌꾸찌

=======================================

< 검선의 뉴서울 종횡기(2) >

태주와 당군악의 영혼 연결.

무한공간 공유창고를 매개로 이루어지는 차원의 교류.

신선들은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지구의 문화를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간접 경험이 직접 경험과 비교가 될까?

선계에서 늘 해오던 생각들, 만약 지구에 가게 된다면 이것도 해보고 싶고, 저기도 가보고 싶었다.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특히 많이 나오던 장소 중 하나.

그곳이 바로 클럽이었다.

무슨 신선이 어울리지 않게 클럽 같은 곳에 관심을 보이냐 하겠지만,

어떻게 궁금증이 안 생길 수 있나?

화려한 조명과 저절로 흥을 돋우는 음악, 짝짓기, 즉 음양 교합을 목적으로 모인 수많은 젊은 청춘들.

음양의 교합이야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

그로 인해 세상이 유지되고, 문명이 이어진다.

젊은 남녀에게 적극 권장되어야 마땅하다.

물론 검선은 음양 교합을 목적으로 이곳에 온 건 아니다.

그저 호기심의 발로.

그리고 업적 타이틀 쌓기.

선계로 돌아갔을 때 '나 여기도 가봤소. 허나 별거 없더군.' 하는 자랑거리 정도는 있어야지.

먼저 입구 상황부터 지켜보자.

검선도 드라마를 봐서 알고 있다.

나이가 많고 행색이 추레하면 입구에서 밴 당한다는 걸.

'잘생기고 키 크면 무사통과로군.'

여자들도 마찬가지.

물론 생김새와 상관없이 들어가는 자들도 있다.

딱 봐도 돈 많게 생긴 사람들.

혹은 얼굴에 문양이 있는 각성자들.

이들은 용모, 성별 상관없이 무사통과였다.

'젊음에 돈, 그리고 각성자라···.'

조건이야 맞추면 된다.

잘생긴 용모는 기본으로 장착되어 있으니 젊어지기만 하자.

검선은 반로환동을 시전했다.

아아, 클럽 입밴 당하지 않기 위해 반로환동이라니.

···그게 어때서?

주름이 펴지고, 눈썹과 흰머리는 흑발로.

우수수수, 수염도 모근까지 뽑혔다.

'흐음,'

검선은 스마트폰으로 얼굴을 점검했다.

'잘생겼군.'

역시 어디 가도 빠지지 않는 얼굴이었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확실하게 해두는 것이 좋겠지?'

스르르륵,

각성 문양이 왼쪽 뺨에서 턱 밑까지 자연스럽게 생겨났다.

이젠 완벽하다.

누가 봐도 각성자 아닌가?

검선은 클럽 입구로 자연스럽게 걸어갔다.

줄도 서지 않았다.

지금까지 봐왔던 각성자들은 다 그렇게 했으니까.

하지만,

"잠깐만요, 혼자 오셨나요?"

"그, 그렇네만."

"각성자시군요. 각성자 증이 필요합니다. 요즘 가짜가 워낙 많아서,"

"안 가지고 왔는데?"

"어, 그럼 입장하실 수···,"

"대신 이건 있지."

검선이 입구 경비의 눈앞에다 태주가 준 블랙 카드를 흔들었다.

"아!"

경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VVIP만을 위한 백두 블랙 카드.

단순히 돈이 많다고 해서 가지지 못한다.

각성자들도 마찬가지.

최소 슈페리어 익스퍼트 이상은 되어야 발급될까 말까 한다.

그리 잘생기진 않았다.

각성자만 아니면 입구 밴 당할 얼굴.

하지만 입고 있는 옷들도 명품이고, 차고 있는 시계도 진품이고, 블랙 카드까지 소유했다면?

"들어가시죠. 혹시 찾으시는 MD 계시면···?"

"아무나 연결해주게."

그리하여 검선은 당당한 걸음으로 강남 최고의 클럽이라 알려진 아라비아 옥타곤에 입장했다.

샴페인 3병과 룸 비용이 선불 결제로 5백만 원이었다.

이로써 업적 타이틀 달성.

만약 게임을 하는 상황이라면···,

[업적을 달성하셨습니다.]

[최고급 클럽에 입장 성공한 클러버 신선.]

이렇게 뜨겠지.

※ ※ ※

드디어 꼬리를 잡았다.

김동훈이 아닌 제정원이 해냈다.

확실히 프로와 아마추어의 사이의 간극은 컸다.

제정원을 끌어들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황제와 금수호에게 모스크바 폭발의 원인이 무엇인지, 빈센트라는 놈이 어떤 흉계를 꾸미고 있는지 죄다 설명해야만 했다.

당연히 기절초풍할 수밖에.

제정원이 총력을 다했다.

다니엘은 인간이 아니다.

로봇? 혹은 사이보그, 아니면 골렘.

아무튼 그놈 자체가 전자 기계식 아티팩트.

놈은 외부에서 삼한제국으로 들어왔다.

원래 있던 장소는 유럽이나, 그곳과 가까운 곳이겠지.

그러나 소지품이 하나도 없었다.

스마트폰도, 신분증도, 돈도···,

그래서 며칠 전에 다니엘을 무한공간에서 다시 꺼내 스마트폰으로 모습을 찍어서 제정원 문경식 차장에게 보냈다.

이런 얼굴을 한 놈이 삼한에 입국한 기록이 있느냐고.

다행히 연락이 왔다.

- 회장님, 문경식입니다.

"아! 혹시 찾았나요?"

- 네, 매우 힘들었지만 찾긴 찾았습니다.

"어떻게?"

- 먼저 구례 공항 CCTV부터 훑었습니다. 최대 3일 전까지 들여다봤는데,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구례 기차역에 초점을 맞췄죠.

- 놈이 찍힌 영상이 있었습니다. 이틀 전 뉴서울 공항에서 출발한 기차를 탔더군요.

- 그래서 뉴서울 공항 CCTV 자료도 받아서 밤새도록 찾았는데, 한 가지 재미있는 장면을 발견했습니다.

- 뉴서울 공항 입국장에 내려 기차역으로 가는 도중에 한 쓰레기통에서 뭔가를 꺼내 갈기갈기 찢어버리는 모습을···,

"그거 혹시?"

- 맞습니다. 여권이었습니다. 그길로 공항 쓰레기가 이동되는 쓰레기처리장을 뒤졌죠. 경찰의 협조를 받아 놈이 찢어버린 위조 여권을 찾아 맞춰봤습니다.

"다행이네요."

여권의 얼굴은 같았는데 이름은 다니엘이 아닌 도미닉 존스였다.

아마 위장 신분일 것이다.

그 뒤로는 일사천리였다.

위조 여권을 토대로 놈이 어떤 경로를 통해 왔는지 역추적해본 결과···.

- 사우디 연방까지 확인했습니다. 그곳에서 버마, 그리고 베트남 왕국에서 삼한제국으로 들어왔고요, 현재 사우디 정부에 협조 공문을 보내 결과가 오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놈이 어디서 처음 출발했는지만 알려주세요. 참! 빈센트 모레티에 대한 추가 정보는요?"

- 그게, 모스크바 대폭발 당시 유럽제국의 주요 정부 인물들이 모두 사망하는 바람에···,

빈센트를 조금이라도 알고 있던 사람들은 다 죽었다는 말이다.

깔끔한 증거 인멸.

만약 구례에서도 폭발이 일어났다면 상황이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튼 폭발은 피했고, 빈센트를 추적할 증거도 확보해서 탐색이 진행되고 있으니.

'곧 결과가 나오겠군.'

그런데 검선은?

놈을 찾게 되면 연락 달라고 했는데···,

당연히 연락해 줘야 한다.

검선이 함께한다면 그 어떤 돌발 상황이 생겨도 힘으로 찍어 누를 수 있을 테니까.

'오늘은 클럽에 간듯하니, 내일 연락해봐야겠네.'

설마 큰 사고를 치는 건 아니겠지?

※ ※ ※

쿵쿵쿵쿵!

현란하게 움직이는 클럽 DJ의 손짓, 클럽 안에 가득 울려 퍼지는 EDM 음악, 펄쩍펄쩍 뛰어올라 환호성을 지르는 청춘들.

검선은 이 순간을 즐겼다.

2층 룸을 잡아서 들어왔기 때문에, MD가 부킹해준답시고 여인들을 줄줄이 끌고 왔지만, 샴페인 한 잔씩 따라주면서 함께 셀카 한 장 찍고 돌려보냈다.

그러고 나서 룸 밖으로 홀로 나가 지구의 청춘들이 노는 모습을 스마트폰으로 찍으며 지켜봤다.

업적을 달성했기 때문이다.

[클럽에서 부킹했지만 시크하게 거절한 신선.]

뭘 하던, 다 처음 아닌가.

인간계에서도, 선계에서도 해보지 못했던 경험.

'흐흐흐, 다들 기절초풍할 테지.'

하나하나 이루고 있는 업적들.

이게 모두 자랑거리다.

[지구에 강림한 최초의 신선.]

[지구에서 제자를 들인 일타 강사 신선.]

[VVIP용 블랙카드를 사용하는 재벌 신선.]

[신형 바이크로 시속 250km를 달성한 질주 신선.]

[최고급 망고 빙수를 시식해본 미식 신선.]

.

.

.

모두 다 영상이나 사진으로 찍어서 남겨야 한다.

그래야 허풍쟁이 취급 안 당한다.

전에 꿈에서 태주 대협을 만났다고 털어놓았을 때, 개꿈이라면서 얼마나 무시를 당했나?

이번엔 증거가 있으니 빼도 박도 못한다.

아마 부러워서 미칠 것이다.

단 하나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렇게 혼자 있으면 번호를 따려고 접근하는 여인도 있다던데···,'

그러나 한참을 기다려도 아무도 오지 않았다.

왜 그런지 알만했다.

'내가 너무 잘생겨서 그래.'

확실하다.

임자가 있을 거라고 지레짐작한 나머지 번호 따는 걸 아예 포기한 모양.

아깝다.

너무 잘생긴 것이 장애가 될 줄이야.

[클럽에서 젊은 처자에게 번호 따인 신선]이라는 타이틀을 획득할 기회인데, 물론 정중하게 거절할 생각이었지만.

그래도 다른 업적은 충분히 달성했으니까···,

'이젠 나가볼까?'

여기 말고도 앞으로 달성할 업적들이 너무나 많다.

그런데,

'응?'

저쪽에서 클럽 MD 한 명이 만취 상태의 처자 한 명을 억지로 끌고 오고 있었다.

'쯧쯧, 너무 과하게 마셨군.'

조화로운 음양 교합을 위해선 술도 적당히 먹는 게 좋은데.

그렇게 바로 옆을 스쳐 지나가는 순간!

여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매우 불순한 냄새.

술에 뭔가가 섞여 있었다.

이것 봐라?

'약을 먹였구나.'

클럽에서 이와 비슷한 일들이 종종 일어난다는 건 드라마를 통해서 봤다.

검선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무릇, 음양 교합은 남녀 간의 합의에 따라 진행되어야 하는 법.

'가만있을 수 없지.'

더불어 부조리를 척결하고 타이틀을 획득할 기회.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던 걸 직접 해보게 되는 건가?'

그것도 주인공에게만 주어지는 역할을?

'또 하나의 자랑거리가 생기겠군.'

검선은 천천히 뒤를 따라갔다.

※ ※ ※

츠치다 토모야는 삼한의 아파트 업계를 주름잡고 있는 일본계 대기업 후지 건설의 재벌 3세이자 동시에 아라비아 옥타곤의 주주였다.

츠치다가 오래전부터 공을 들여온 사냥감이 있었다.

배우였다.

단역으로 출연한 드라마가 히트 쳐서 이름값이 올라간 신인 여배우.

마음에 들었다.

얼굴은 물론, 몸매도 특등급.

그래서 단역임에도 인기가 많았다.

하지만 좀처럼 넘어오지 않았다.

촬영 현장, 혹은 매니지먼트 회사에 직접 찾아가 말을 걸어봤지만 씨알도 안 먹혔다.

그러다 알게 된 정보.

그 신인 여배우 이윤미가 오늘 친구들과 함께 아라비아 옥타곤에 놀러 왔다는 것.

아마 꿈에도 모를 것이다.

자신이 여기 주주라는 사실을

그래서 작업을 시작했다.

그녀의 친구들부터 유혹했다.

하나하나씩 곁에서 떨어뜨려 놓은 다음 술에다 약을 탔다.

친구들은 정신이 없을 것이다.

잘생긴 남자도 붙여주고, 최고급 술도 먹여서 취하게 만들어 놓았으니.

"야! 아직 멀었어? 다 됐다며?"

"걱정 마라, 지금 오고 있대."

"이거 여배우 얼굴 한번 보기 힘드네."

"얼굴만 보고 가려고?"

"에이, 그건 아니지. 기다린 수고가 있는데."

룸 안엔 친구도 한 명 있었다.

아라이 켄토라는 이름의 일본계 레귤러 등급 각성자였다.

"근데 츠치다."

"왜?"

"그년이랑 사귈 거냐?"

"낄낄낄, 사귈 것 같았으면 정공법을 쓰지, 약을 먹이겠어?"

"그럼 나도 한 입만?"

"나 먹은 다음, 네가 먹어라."

"오! 스고이!"

이윽고, 문이 열렸다.

눈빛이 몽롱하게 풀린 여자 한 명이 MD에게 거의 업혀서 왔다.

"왔구나. 이윤미 맞아?"

"흐흐흐, 맞네."

이윤미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도무지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소리치고 싶었지만 말이 나오질 않았다.

'치, 친구들은 어디 갔지?'

테이블 위에 놓인 맥주를 무심코 마셨을 뿐인데, 그때부터 정신이 오락가락했다.

그럼에도 저놈의 얼굴은 똑똑히 알아볼 수 있었다.

'···츠치다 토모야, 이 개새끼,'

발정 난 개처럼 껄떡대다가 제 뜻대로 되지 않자 이런 짓을 벌여?

여기서 빠져나가야 한다.

그러나 저항이 불가능했다.

몸부림칠 힘도 없다.

그저 놈들이 룸 안에서 하는 짓거리를 흐릿한 눈으로 바라보고만 있을 뿐.

츠치다가 MD에게 두툼한 돈뭉치를 건네며 말했다.

"수고했어. 이걸로 밥이나 사 먹어."

"감사합니다."

그러고는 이윤미의 머리채를 잡고,

"조센징 년아! 처음부터 스폰 제의 받아들였으면 이런 일도 없잖아? 우리 아파트 광고도 따 먹고,"

그 모습에 돈을 받은 MD가 슬슬 뒤를 돌아 문고리를 잡았다.

이제 밖에서 끝날 때까지 문단속만 하면···,

그때였다.

콰쾅!

문짝이 통째로 터져 나갔다.

"헉?"

퍼억!

나무 문은 그대로 날아가 MD의 머리통을 후려갈겼고.

"컥!"

뒤를 이어 각성자로 보이는 남자가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성큼성큼 걸어왔다.

"업적이 무더기로 널려있구나."

츠치다 토모야와 아라이 켄토는 깜짝 놀랐다.

얼굴을 보니 각성자 같은데, 여긴 왜?

아라이가 먼저 일어났다.

"칙쇼! 너 누구야?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하지만 답변 대신 큼지막한 주먹이 날아왔다.

퍼억!

"케엑!"

"허허허, 지구의 각성자를 패는 것도 흔한 경험을 아니지."

딱 한 방 맞았다.

그저 주먹질인데 피할 수도 없었다.

'어어어,'

츠치다는 당황했다.

퍽퍽퍽퍽!

친구 아라이는 레귤러급 각성자, 그런데 꼼짝도 없이 당하고 있었다.

처음 본 놈이 들어오자마자 웃으면서 다짜고짜 팬다.

"좋구나!"

퍽퍽퍽퍽!

주먹 한 방에 이미 쓰러졌지만 그래도 팬다.

심지어 한 손으로만 팬다.

다른 한 손은 스마트폰 영상을 찍으면서 말이다.

츠치다 토모야는 슬금슬금 일어나 자리를 피했다.

미친놈은 무조건 피하는 것이 상책.

하지만,

"어허, 어딜 가시려고."

"흐이익!"

퍽!

츠치다 토모야도 한 대 맞았다.

"꾸엑!"

퍽퍽퍽퍽!

검선은 힘 조절을 해가며 찰지게 팼다.

비록 손맛은 하나도 없었지만 이게 다 자랑거리 아닌가?

신선들을 모아놓고 자신의 무용담을 늘어놓을 생각을 하니 짜릿하기 그지없다.

한 놈 패다가 심심하면 또 한 놈 패고, 아예 두 놈 모아놓고 한 대씩 번갈아 가면서 패고, 계속해서 팼다.

나중에 있을 즐거운 순간을 기대하며 팼다.

순간,

"음?"

검선은 잠시 폭행을 멈췄다.

소파에 쓰러져있는 여인이 눈에 들어왔다.

"설마···, "

아직도 인사불성 상태의 그녀에게 다가가서.

"오!"

덥석 손을 잡았다.

그리고 선기를 일으켜 몸속에 있는 약 기운을 몰아내고는

"이상한 판사 윤아윤에 나오셨던 이윤미 배우님 아니시오? 거기서 주인공 동료 판사 역으로 출연하셨던."

"···아, 네네,"

"팬이요! 하하하."

한때 선계에서 최고 인기 드라마였던 이상한 판사 윤아윤.

특히 황천계 판관과 차사들에게 최고의 호평을 받았었다.

이윤미도 단역으로 출연해서 범죄자에 대한 호쾌한 판결로 선계, 황천계 사람들에게 시원한 사이다를 먹여줬다.

"같이 사진 한 번만···,"

이윤미는 어리둥절했다.

갑자기 나타나서 츠치다 토모야와 그 친구를 개 패듯이 패더니 느닷없이 자신의 손을 잡아와?

똑같은 놈인 줄 알았는데 그가 손을 잡자 약 기운이 싹 사라졌다.

그러고는 천진난만한 얼굴로 팬이라며 사진을 찍어달라니.

"그, 그러세요."

"영광이요. 내 동료들이 아마 놀라서 까무러칠 거요."

찰칵!

브이자를 하면서 함께 사진도 찍고,

[연예인과 셀카 찍어 포상받은 신선.]

"생각 같아선 드라마에 대해 좀 더 이야길 나누고 싶지만 험한 꼴을 겪었으니 잊어버리시고 집에 가서 푹 주무시오."

"···네."

"이놈들은 아직 덜 맞은 것 같아서."

그리고 또 팼다.

퍽퍽퍽퍽!

정신을 잃은 것 같아서 선기로 깨운 후 또 팼다.

퍽퍽퍽퍽!

"악! 악! 사, 살려···,"

"제, 제발 자, 잘못 했습···, 끄악! 아아악!"

그렇게 한참을 패고 있는데,

"꼼짝 마! 손 들어!"

어느 틈에 들이닥친 경찰.

검선의 눈빛이 반짝였다.

'업적이군.'

검선은 패는 걸 멈추고 고분고분하게 두 팔을 내밀었다.

"험험, 수갑 채우시오."

"···."

경찰들은 두 사람을 처참하게 짓이겨 놓고 해맑게 웃는 폭행 용의자를 보며 주춤주춤했지만,

철컥!

그래도 수갑은 무사히 채웠다.

[경찰에 체포되어 수갑 찬 용의자 신선.]

업적은 무궁무진하다.

< 검선의 뉴서울 종횡기(2) > 끝

ⓒ 꾸찌꾸찌

=======================================

< 검선의 뉴서울 종횡기(3) >

태주는 아침 일찍 전화를 받았다.

제정원 문경식 차장에게서 온 전화였다.

- 회장님, 다니엘이 어디서 최초로 출발했는지 알아냈습니다.

"오! 어딥니까?"

- 이집트 카이로, 사하라 초원 마수 밀집지대 전초 도시입니다.

아프리카였다.

그것도 대형 마수 밀집지대 근처.

- 일단 제정원 해외 요원들을 카이로에 급파했는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문제라뇨?"

- 이미 카이로 전역에 유럽 제국 정보원들이 쫙 깔려 있었습니다.

"아하!"

유럽 정부도 놀고 있던 것이 아니다.

하긴 바보가 아니라면야 모스크바의 참사에 빈센트 모레티가 관련되어 있다는 걸 눈치챘겠지.

폭발이 일어나고 나서 놈이 짐을 싸서 어디론가로 사라졌으니까.

'아직 못 찾았구나.'

필사적으로 노력했겠지만.

- 조금 전에도 유럽 정보국 M-19 측에서 문의가 왔습니다. 제정원 요원들이 무슨 이유로 카이로에 왔냐면서,

삼한 제정원이 가진 증거나 실마리가 궁금해서 그런 듯, 그러나 알려줄 필요는 없다.

"···다니엘의 존재는 숨기죠."

- 네, 알겠습니다. 독자적으로 알아보겠습니다.

태주도 카이로로 가볼 생각이다.

'그나저나 검선은···,'

연락은 해줘야 한다.

그래서 문경식과의 통화를 마치고 연락처에 저장된 검선의 번호를 누르려는 순간!

지이이잉!

마침 전화가 왔다.

검선인가?

'음?'

아니었다.

'연희씨가 왜?'

태주는 정연희의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설명을 다 들은 후에야,

"···하아, 결국 사고 치셨네."

뭐, 예상 못 한 건 아니다.

검선이 뉴서울에 혼자 관광을 간다고 했을 때 각오는 했다.

'그런데 경찰엔 왜 잡히셨지?'

그의 능력이라면 군대가 출동한다 해도 제멋대로 농락할 수 있었을 텐데, 고작 경찰의 힘으로 절대 구속할 수 없다.

스스로 잡혀갔으면 모를까.

'···나 때문일지도'

웬만하면 큰 사고 치지 않으려고 검선도 노력했겠지.

이런 이유로 정연희에게 전화했을 터,

자신에게 먼저 전화하지 않고.

'매우 곤란하시겠구나.'

마음이 편치 않았다.

솔직히 이 정도 사고는 사고 축에도 못 든다.

최소한 아무도 죽지 않았으니까.

'운신의 폭을 넓혀줘야겠네.'

적어도 삼한 제국에서만큼은 눈치 보지 말고 마음껏 놀 수 있도록.

자신도 검선에게 배려해 줘야 한다.

그래서 스마트폰을 들어 번호를 눌렀다.

※ ※ ※

검선은 경찰서로 끌려갔다.

그래서 또 하나의 업적 획득.

이것도 다시 못할 경험 아닌가.

정말 순간순간이 스펙타클하다.

지구에 안 왔으면 어쩔 뻔했나.

위기에 처한 불쌍한 여인을 구했다.

현장에서 망나니들도 응징했고,

그 과정에서 과한 폭력이 있었지만, 그래서 그놈들이 병원 중환자실로 실려 가 혼수상태에 빠졌다지만,

이제 선택해야 했다.

이대로 구치소에 들어가야 하나?

도움이라도 받아 혐의를 벗어야 하나?

구치소에 들어간다면,

[지구 경찰서 구치소에 갇힌 죄수 신선.]

더불어.

[구치소에서 탈옥한 쇼생크 신선.]

두 개의 업적을 동시에 획득할 수 있다.

그가 가장 바라는 경우.

하지만 문제가 있다.

혼자라면 무조건 그렇게 했겠지만 자신이 구해줬던 이윤미 배우도 경찰서에 끌려오고 말았다.

게다가 상황이 요상하게 흘러갔다.

"이윤미씨?"

"네."

"진술이 사실입니까?"

"도대체 몇 번을 말해야 하죠? 이놈들이 제게 약을 먹였어요. 그리고 몸에 힘이 풀려 무기력하게 끌려갔고···,"

"이상하네요."

"네?"

"왜 멀쩡하시죠? 현장에 출동한 경관들 증언도 같았습니다. 술을 드신 것 같지도 않았다고."

"그, 그게,"

약 기운이 싹 사라졌으니까.

그녀도 어찌 된 영문인지 알 수 없었다.

변명도 궁색할 수밖에.

"츠치다씨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하신 것 아닙니까?"

"뭐라고요? 저 배우예요. 츠치다가 먼저 스폰을 들먹이면서 날 강제로···,"

"증거 있으십니까?"

"네?"

"그렇잖아요. 지금도 멀쩡한 상황이시고, 또 배우시니 약에 취한 것처럼 연기할 수도 있고."

"···,"

이윤미 배우가 의심받고 있다.

이 상황에서 나 몰라라 하면 그녀는 어떡하나?

또 선계 신선과 황천계 관리들이 이 사실을 알아버린다면?

엄청난 비난에 직면할 터.

아마 두고두고 욕먹겠지.

특히 황천계 염라와 판관, 차사들은 자신을 신선 취급도 해주지 않을 것이다.

그들에게 이윤미는 스타 배우였으니까.

'흐음, 그래도 탈옥은 놓칠 수가 없는데,'

최상의 시나리오 아닌가?

그래서 갈등했다.

모른 체하느냐, 아니면···,

그런데,

벌컥!

"내 아들 중환자실에 보낸 새끼가 누구야!"

중년 남자를 필두로 양복을 입은 남자들이 우르르, 경찰서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누구십니까?"

그러자 뒤에서 안경을 낀 남자가 앞으로 나와,

"후지 건설 대표, 츠치다 쇼헤이 회장님이십니다. 전 츠치다 토모야 씨와 아라이 켄토 씨 법률 대리인이고요."

경찰들이 바짝 긴장했다.

후지 건설이라면 삼한 제국에서도 이름난 대기업.

아들이 폭행을 당해 중환자실에 있는데 경찰서에 들이닥친 건 당연했다.

"아! 회, 회장님. 어서 오십시오."

"조사는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현재 용의자 심문 중입니다."

"혹시 우리가 일본계라고 차별을 받는 건 아니겠죠?"

"그럴 리가요! 철저하게 진실을 밝혀내겠습니다."

변호사는 집요하게 수사에 개입했다.

"각성자 범죄 같은데, 마나 구속구는 제대로 채웠나요?"

"당연히 채웠습니다."

"보니까 삼류 배우 꽃뱀하고, 이 각성자가 한 패거리인 정황이 눈에 훤히 보입니다. 절대 넘어가지 않을 테니까 엄정하게 처리해주십시오."

검선은 눈이 동그래졌다.

아니, 이런 상황이라니.

탈옥보다 더 재미있게 흘러가지 않는가.

"또한 피해자들은 병원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습니다. 살인미수죄 혐의로 조사 바랍니다. 그리고 저 듣보잡 연예인은 공모 혐의로."

아아아.

절정으로 치달은 갈등.

검선은 깨달았다.

지구로 넘어온 이래, 바로 지금이 최고의 순간이란 걸.

너무나 짜릿하다.

선계에서 할리 바이크를 손에 넣은 후 이런 기분은 처음.

'허허, 이 상황을 누가 찍어줬으면 좋겠는데.'

증거가 필요하다.

의심 많은 신선 놈들에게 말로 하면 믿어줄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각성자 전담 경찰에게.

"여기 CCTV가 있소?"

"그건 왜 물어? 닥치고 대답이나 해. 이름과 주민번호!"

"도빈이라고 했잖소. 주민번호는 흐음···,"

"솔직히 말해! 당신 사기꾼이지? 왜 각성자 데이터 베이스에 당신의 이름이 없지?"

"그야···,"

각성자가 아니니까.

신선이니까.

'이쯤에서 결말을 짓는 게 좋겠지?'

이윤미 배우 사정도 있고.

검선은 손을 들고 경찰에게 말했다.

"나도 변호사 좀 부릅시다."

"하! 그럴 능력이나 되고?"

"일단 스마트폰이나 주시오."

경찰에게서 스마트폰을 받아들고 저장된 번호를 눌러서.

"그래, 나다. 내가 지금 곤란한 상황에 부닥쳤구나. 여기 경찰서인데···,"

자세하게 설명한 후,

"끝났어?"

"그렇소이다. 곧 사람을 보내준다고 했으니,"

경찰은 비릿하게 웃었다.

사람은 무슨,

제까짓 게 후지 건설을 어떻게 감당하겠다고.

"그럼 다시 시작해보자. 츠치다 토모야 씨에게 접근한 이유는?"

"묵비권 행사하겠소."

"지랄하네. 아직도 분간이 안 돼? 네가 건드린 사람이 누군지 알고 있어? 자그마치 후지 건설이야. 멍청한 놈아."

"알 바 있소?"

"···참나,"

시간이 흘렀다.

계속되는 심문에 묵비권 행사.

그러나 검선은 태연했다.

불안해하는 이윤미 배우에게도 눈을 마주쳐 걱정하지 말라며 신호도 보내줬다.

순간!

벌컥!

또 한 번 경찰서 문이 열렸다.

우르르르,

노년의 신사를 필두로 역시 검정 양복의 사람들이 경찰서 내부로 들이닥쳤다.

경찰들은 깜짝 놀랐다.

처음 후지 건설 사람들이 들어왔을 때, 누군지 물어야 했다.

츠치다 쇼헤이 회장의 이름은 들어봤지만 얼굴은 잘 몰랐기 때문에,

그러나 방금 들어온 저 노년의 신사가 누구인지 단박에 알아봤다.

워낙 유명한 사람이었다.

"어?"

"헉!"

"···서, 설마?"

"회장님! 여, 여긴 어쩐 일로?"

백두 그룹 정욱철 회장이었다.

츠치다 쇼헤이 회장이야 피해자의 아버지니까 그렇다 쳐도 정욱철 회장은 왜?

다들 놀랄 수밖에 없었다.

경찰들도, 후지 건설 변호사들도, 조사를 받던 이윤미 배우도.

그리고,

"여,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회, 회장님."

츠치다 쇼헤이 후지 건설 회장이 더듬거리며 물었다.

그러자 정욱철 회장이 싸늘한 눈빛으로,

"쯧쯧, 아들 단속 못 해 한 방에 훅 간 놈들 많이 봤지. 자네도 곧 그렇게 되겠군."

"무, 무슨?"

"회사나 잘 지키게.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정욱철은 비서를 보며 말했다.

"장비서."

"네!"

"백두 투자증권에 내일부터 후지 건설 공매도 시작하라고 해."

"알겠습니다."

한껏 신이 난 검선.

저절로 엉덩이가 들썩였다.

소설, 혹은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스토리를 실제 경험하다니, 더구나 자신이 주인공이었다.

'여배우도 있고.'

그래서 얼떨떨한 표정의 이윤미 배우를 보며 히죽 웃었다.

그녀의 눈빛이 몽롱해졌다.

검선은 가슴이 웅장해졌다.

"여기 도빈이라는 분이 어디 계시오?"

검선이 손을 들었다.

"나다."

정욱철은 고개를 갸웃했다.

반말도 반말이지만.

"응? 당신이? 손녀에게 들은 모습과는 전혀 다르군. 분명 나이가 많다고 들었는데."

"사정이 있었단다. 이리 가까이 오너라."

"···."

검선이 목소리를 깔았다.

그동안 감추고 있던 신선의 격을 정욱철에게만 아주 조금 드러냈다.

그러자 정욱철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젊은 놈이 자신에게 하대했지만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가까이 오라고 하니 따를 수밖에 없었다.

"복숭아를 먹었구나."

화들짝 놀라는 정욱철.

이 사람이 말하는 것이 평범한 복숭아일 리 있나.

"···어, 어떻게?"

"기연을 만났군. 보통 인간들은 절대 불가능한 기연을 말이다."

"어어어,"

"아마 남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장수할 것이다. 잔병치레 없이, 그러니 태주 대협의 은혜를 죽을 때까지 마음에 품고 살아야 할 것이다."

"아아아아···,"

정욱철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손녀가 왜 빨리 가보라고 했는지 알 것 같다.

이분은 귀인이시다.

이런 허름한 경찰서 따위에 계셔야 할 분이 아니다.

"제, 제가 모시겠습니다."

"그래, 일단 나가자꾸나. 저 여인도."

"염려하지 마십시오. 제가 다 처리하겠습니다."

검선은 어깨를 폈다.

그리고 거만한 자세로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이걸 보여주려고 여태까지 빌드업 했으니까.

경찰서에 있던 모든 사람이 떨고 있었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줄을 잘못 섰나?

대놓고 반말하는 젊은 남자, 정욱철은 화는커녕 고개를 숙이며 쩔쩔맸다.

삼한 최고의 대기업 회장 그 정욱철이,

앞으로 닥쳐올 후환이 너무나도 두려웠다.

소식을 듣고 왔는지 경찰 서장도 헐레벌떡 뛰어왔다.

후지 건설 츠치다 회장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회, 회장님!"

단숨에 달려가 정욱철에게 고개를 숙였지만···,

벌컥!

세 번째로 열린 경찰서 문.

사실 진짜는 따로 있었다.

"여기 서장이 누군가?"

허리에 검을 찬 백발의 남자가 들어왔다.

"흐익?"

"억!"

"으아아아···,"

"추, 충성!!!"

황실 궁정 비서관 금수호였다.

들어오자마자 정욱철을 보더니.

"응? 자넨 웬일인가?"

"···손녀 전화를 받고,"

"아! 그렇구만. 나도 김회장 전화 받고 왔지. 여기 도빈이라는 분이 누구···,"

"저, 저쪽에 계십니다."

"응? 듣던 모습과는 다른데?"

금수호가 검선을 보며 말했다.

"얼마나 고초를 겪었소? 이젠 걱정마시오. 김태주 회장의 부탁을 받았으니···."

검선도 금수호를 봤다.

'호오,'

꽤 강한 놈이다.

물론 인간 중에선 말이다.

그래서 금수호에게 손짓했다.

"너도 가까이 오너라."

"뭐?"

순간!

금수호도 느꼈다.

'허어···,'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엄청난 위엄이었다.

격이 다르다고나 할까.

황제 폐하?

저 남자에 비하면 초라할 정도였다.

슬금슬금 가까이 다가갔다.

"너도 복숭아를 먹었구나. 그것도 많이, 선주 냄새도 나고,"

"···마, 맞습니다."

"검은 쓸만하더냐? 태을신검 말이다."

"이 검이 호, 혹시?"

"내가 수집한 검 중 하나지. 태주 대협에게서 받은 모양이군. 그냥 받았을 리는 없을 테고, 그에게 꽤나 인정받고 있는 모양이구나."

"여, 열심히 도와주고 있습니다."

"그래,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금수호는 군기가 바짝 들었다.

차렷 자세로 묻는 말에 또박또박 대답했다.

"참! 여기 CCTV 영상을 따로 담아갈 수 있으면 좋겠군. 내가 필요하다."

"당장 담아드리겠습니다. ···서장!"

"넵!"

"들었지?"

"아, 알겠습니다."

서장이 빠르게 움직였다.

경찰들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츠치다 쇼헤이 후지 건설 회장도 마찬가지.

'대체 저 남자가 누구길래?'

황족이라도 되는가?

정욱철 회장이 회사를 잘 지키라며 공매도 친다고 했을 때도 속으로 코웃음 쳤는데···,

'심지어 금수호 비서관에 김태주 회장까지?'

진짜 회사가 망할지도 모른다.

아니 그렇게 될 것 같았다.

※ ※ ※

선계(仙界).

신선들은 의욕을 상실했다.

뭘 해도 재미가 없었다.

내키는 대로 지구를 활보할 그 얄미운 검선만 생각하면 분통이 터져 미칠 노릇.

"사고 치지 못하도록 태주 대협이 단단히 단속해야 하는데."

"맞소! 어디 가지 못하도록 아예 감금시켜야 하오."

"그대로 두면 지구가 멸망할지도."

뭐, 지구를 망하게 하겠냐마는,

솔직히 질투심 때문이란 걸 입 밖에 내진 않았다.

"죄다 실제로 보겠군. 하늘 높이 솟은 마천루도."

"비행기도 타보겠고."

"난 지하철이라도 타봤으면 좋겠소. 교통 카드 실제로 찍어보게."

"뉴서울엔 맛집도 그렇게 많다더이다."

생각하면 할수록 화가 치밀어 오른다.

"설마 연예인이나 배우 만나보고 그러는 건 아닐까?"

"에이, 그 바쁜 사람들을 어떻게,"

"연예인들이 늙은 칼오징어 따위를 잘도 만나주겠소!"

"늙은 거야 반로환동하면 간단하잖소."

"쯧쯧, 그래봐야 본판이 어디 가나? 젊은 칼오징어 되는 거지."

"그렇긴 하오."

그렇게 뒷담하니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선계 촌놈이 지구에 간들 뭘 할 수 있을까?

코나 안 베이면 다행이지.

< 검선의 뉴서울 종횡기(3) > 끝

ⓒ 꾸찌꾸찌

=======================================

< 이제 잡으러 갑니다(1) >

뉴서울 아라비아 옥타곤 클럽 사건은 전면 재수사에 들어갔다.

백두 그룹 정욱철에 이어, 궁정 비서관 금수호까지 들이닥쳤는데 말 다했지.

서장의 눈에 핏발이 섰고 경찰들이 필사적으로 발로 뛰었다.

클럽 직원들도 전부 소환해 사건의 내막을 철저하게 훑었다.

진상이 밝혀진 건 당연한 일.

피해자에서 용의자가 된 두 명이 누워있다는 병원 중환자실에도 경찰들이 출동해서 심문했다.

혼수상태라고 보기엔 의외로 멀쩡한 모습들,

검선이 사정을 많이 봐줬다.

주먹질 와중에도 선기로 내상을 치유해줘서···, 물론 오래 때리고자 하는 목적이었지만.

츠치다 쇼헤이 후지 건설 회장은 수행원들을 이끌고 쓸쓸히 퇴장했다.

내일부터가 걱정이다.

공매도도 쏟아질 것이고, 냉정한 눈초리로 자신을 노려보는 금수호 비서관도 무서웠다.

'최소 세무조사는 각오해야겠군.'

심하면 그동안 지어놓은 아파트에 불시 안전 점검이 들이닥칠 수도 있다.

그게 가장 큰 문제.

츠치다 쇼헤이도 안다.

부실로 지어놓은 것이 한두 군데가 아니라는 걸.

불량 콘크리트에, 철근을 50% 가까이 빼먹은 곳도 있다.

'하아, 멍청한 아들놈 하나 때문에···, 쯧, 이왕 할 거면 들키지는 말았어야지.'

한편, 검선은 경찰서장이 준 CCTV 영상을 몇 번이고 재생하면서 희희낙락했다.

형사와 나눴던 진술 녹음본과 영상의 싱크를 맞춰보니.

"좋구나. 스토리가 제법이야."

경찰서에 끌려와 담당 형사들이 자신과 이윤미 배우에게 윽박지르는 장면.

그리고 악역들이 우르르 찾아오고, 사기꾼과 꽃뱀으로 몰리면서 억울한 누명이 씌워지려던 순간!

극적으로 나타난 정욱철 회장과 궁정 비서관.

일부러 연출한다고 해도 이런 장면은 만들어 내지 못할 것이다.

정욱철은 검선의 옆에 딱 붙어서 연신 맞장구를 쳐댔다.

"드라마로 만들어서 그대로 내보내도 되겠습니다.

"험험, 목소리도 선명해, '묵비권 행사하겠소.' 거의 배우 수준이지 않은가?"

"하지만 영상이 그리 깨끗하지 않아서 이렇게나 헌앙하신 얼굴이 제대로 나오지 않은 게 안타깝습니다. 하하하."

"그런가? 하긴 뭐, 내가 한 얼굴 하지. 하하하."

"어이쿠, 두말하면 잔소리지요. 하하하"

옆에서 보면 젊디젊은 청년에게 비굴할 정도로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 우습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정욱철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분이 나보다 어리다고?'

어림도 없는 소리.

오히려 그 반대일 터.

분명 자신보다 나이가 많을 것이다.

황제 폐하도 200살 가까이 살았지만 겉으로 보면 중년의 나이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여기, 도빈이라는 분은?

불경스럽지만 황제 폐하는 이분과 비교도 되지 않았다.

넘을 수 없는 사차원의 벽, 넘사벽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더더욱 허리를 굽혔다.

검선도 그런 정욱철에게 호감을 표시했다.

눈치도 제법 있고, 순발력도 뛰어나고.

'확실히 상재가 뛰어나.'

자식 농사도 잘 지은 것 같다.

불행한 가정사로 인해 아들을 잃고 홀로 남은 손녀를 저리 잘 키운 걸 보면.

'마인 때문에 자식을 잃었다고 했나?'

정연희를 제자로 들이면서 살아온 인생사를 간략하게 들었다.

'흐음, 나도 마인들 몇 놈이나 잡아볼까?'

그러나 곧 생각을 접었다.

태주 대협이 하면 될 일이다.

그것도 아니지.

지구의 신선이나 다름없는 태주 대협이 마인 따위에게 신경 쓸 여유가 있을까?

그런 변변찮은 일은 밑의 것들이 하면 된다.

예를 들어 저 비서관이라는 놈 말이다.

바로 그때!

"저, 도빈님?"

배우 이윤미가 검선의 곁으로 슬며시 다가왔다.

"아! 무슨 일이시오. 배우님."

"전화번호 좀 받을 수···,"

"자, 잠깐 기다리시오!"

화들짝 놀란 검선은 즉시 이윤미의 말을 끊었다.

그리고 정욱철에게 자신의 스마트폰을 넘기며,

"부탁 좀 들어주게나."

"뭐든지 말씀만 하십시오."

"영상을 찍어주게, 이 스마트폰으로."

"···네? 어어, 아, 알겠습니다."

그러고 나서 부드러운 표정으로 이윤미에게 말했다.

"호오! 이상한 판사 윤아윤에서 주인공 친구역 조연으로 나오신 이윤미 배우님 아니시오, 그래, 내게 무슨 용건이?"

"···으음, 도와주셔서 너무 감사드려요. 제가 꼭 식사 대접을 하고 싶은데, 연락처라도."

"이윤미 배우님께서 제 전화번호를 원하신단 말이오?"

"아, 네네."

"하하하! 원래는 잘 알려주진 않지만···, 내 특별히 알려드리리다."

이로써 업적 또 하나 달성.

[드라마 여자 배우에게 번호 따인 셀럽 신선.]

하지만 나중에 전화가 온다 해도 그녀와 다시 볼 생각은 없었다.

신선으로서 속세의 인연을 여기저기 남기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자신은 신선이다.

인간과의 연은 신중해야 한다.

비록 다른 세상이라 하더라도.

정연희와 정욱철, 저 비쩍 마른 비서관이란 놈은 태주 대협과 연을 맺은 사이라 상관이 없다.

선도 복숭아로서 선기를 받아들인 자들 아닌가?

그럼 선계와도 인연을 맺은 거나 마찬가지다.

"어르신, 다 찍었습니다."

"허허허, 역시 일국 최고의 상단을 이끌만한 능력이군."

"하하하, 과찬이십니다."

영상 촬영하는 게 상단 운영과 무슨 관련이 있겠냐마는.

검선의 칭찬에 정욱철은 얼굴이 활짝 폈다.

"일단 밖으로 나가시지요. 뉴서울은 제가 책임지고 모시겠습니다."

"괜찮네. 혼자가 편하네."

해볼 것이 너무 많다.

언제까지 지구에 있을 수 있는지도 모르고.

그런데,

"저기, 바쁘지 않으시면 향후 계획이 무엇인지 여쭈어봐도···,"

금수호가 불안한 표정으로 검선에게 물었다.

그는 정욱철과 사정이 달랐다.

제국의 녹을 먹고 있는 공무원 아닌가.

이 정체 모를 각성자가 김태주 회장과 친분이 있는 사이라고는 하지만, 솔직히 너무 위험해 보였다.

그런 이유로 황제 폐하께도 이 자의 존재를 말하지 않을 생각.

"흠···,"

검선은 비서관이라는 자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아챘다.

"자네, 나하고 단둘이 이야기 나눠보세. 조용한 곳 없나?"

"···네, 이리로."

경찰서 내부 조용한 취조실에서.

"내 존재가 걱정되는 모양이군."

"그, 그게···,"

금수호는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너무 크신 분이라, 제가 감당해 낼 수 있을지 두렵습니다."

"이해하네, 삼한의 관리로서 어디서 왔는지도 모를 위험인물이 마음대로 뉴서울을 활보하는 건 부담이 되겠지."

"···위험하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만."

스슷,

검선의 얼굴에서 각성 문양이 지워졌다.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하지. 자네 말이 맞아. 난 위험해."

"어어,"

우웅,

스르르릇!

금수호의 신형이 마치 자석이 끌어당긴 것처럼 저절로 움직여 검선 코앞까지 이동됐다.

"허, 허억!"

저항?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마나 조차 움직이지 않았다.

검선의 코앞까지 끌려온 금수호.

"내가 마음만 먹으면 삼한의 제국군이 모두 몰려와도 날 막을 순 없을 거야. 전투기? 탱크? 핵무기? 각성자 부대? 아무리 몰려와도 손짓 한 번이면 끝나."

꿀꺽,

금수호는 마른침을 삼켰다.

허풍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진짜 그럴 것 같았다.

"날 무력으로서 막을 사람은 지구에 딱 한 사람만 존재하네."

"누, 누구?"

"누구겠나? 태주 대협이지. 그 양반 힘도 만만치 않거든."

"···."

"하지만 태주 대협의 얼굴에 먹칠하는 일은 절대 없을 거야. 그저 조용히, 있는 듯 없는 듯 놀다 갈 테니까 날 믿어보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남는 의문 하나.

대체 이 사람은 누구지?

"···혹시 영혼 연결자이십니까?"

"내가?"

"원숭이와 관련이 있으신지."

"뭐, 뭐라고?"

"얼마 전 유럽에 황금 원숭이 떼가 나타난 일이 있어서 여쭈어보는 겁니다."

검선은 얼굴을 팍 찡그렸다.

"난 영혼 연결자가 아니냐. 그리고 설령 영혼 연결자라 하더라도 원숭이라니, 어딜 봐서 고작 도둑 요괴 원숭이 따위와 날···,"

그때였다.

벌컥! 열리는 취조실 문.

"여기들 계셨네요."

태주였다.

"오! 김회장."

"···태, 태주 대협?"

반색하는 얼굴의 금수호.

그러나 검선은 슬슬 눈을 굴리며 눈치만 보고 있었다.

뭐라고 하는 건 아니겠지?

나쁜 짓 하는 두 명의 망나니를 살짝 만져준 것뿐인데.

태주가 한숨을 푹 쉬며 먼저 금수호에게 말했다.

"후우, 고생이 많으시네요, 비서관님."

"아, 아니 고생이랄 것까지야."

"공무에 바쁘신데 경찰서까지 오라고 해서."

"전혀 문제없네. 오히려 이분께서 나쁜 놈들 잡아주셔서 감사할 따름이지."

이번엔 검선에게 눈을 돌리고는,

"도빈님."

"내가 잘못했어. 다시는 안 그러겠네."

"아뇨, 잘하셨어요. 그놈들 살려주신 게 어딘데요."

"그, 그렇지? 헌데 왜 여기까지···,"

"일이 생겼어요. 그놈 어디 있는지 대충 알아냈습니다."

"아! 빈센트?"

"네."

"그럼 당장 잡으러 가세."

검선이 환하게 웃었다.

마침 잘 됐다.

그놈이라도 잡아서 점수를 따야 하니까.

"그런데 여기서 좀 멉니다. 저기 이집트 카이로 전초 도시라서···, 타고 갈까요? 날아갈까요?"

"응?"

"그러니까 비행기 타고 가실래요, 아니면 그냥 빠르게 만리비···,"

"아하!"

무슨 말인지 알겠다.

그렇다면?

"···시일을 다투는 일인가?"

"아뇨, 그리 급하진 않습니다."

"그럼 비행기 타면 안 되겠나?"

"흐음, 여권 만들어야 하는데."

그러자 금수호가 빠르게 나서서.

"당장 여권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편안하게 가시도록 퍼스트클래스 항공권 예약도."

여권?

검선이 냉큼 끼어들었다.

"여권 이름은 도빈이 아니라 동빈이라고 해주게."

"그렇게 해드리겠습니다."

"사진도 찍어야겠지?"

"네."

"그럼···,"

스르르륵!

젊어졌던 검선의 얼굴이 다시 본래대로 돌아갔다.

빠졌던 흰 수염도 다시 났다.

금수호는 흠칫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여권 사진은 본얼굴로."

아아아!

검선은 무척 기뻤다.

여권이 생겼다.

신선들 앞에서 자신의 얼굴과 이름이 떡하니 찍힌 삼한 제국의 여권을 내보이면 그들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여권은 내가 영영 가져도 될까?"

"당연히 가지셔야죠."

이로써 또 하나의 업적 획득이었다.

비행기 일등석 타면 2개인가?

사실 태주는 혼자 이집트로 가려고 했다.

검선이야 가도 그만, 안 가도 그만.

그러나,

'지구에서 겪은 일을 선계로 가서 자랑하고 싶으신 거 같으니까···,'

삼한 제국에서만 머무르게 할 수 있나?

외국에도 나가보고 그래야지.

겸사겸사 비행기도 태워드리고.

※ ※ ※

선계(仙界).

당군악은 그의 심복이라 할 수 있는 귀곡 선인, 그리고 갈홍 선인과 함께 천계 대표자 회의에서 논의됐던 상제의 제안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파트 단지는 될 수 있으면 천계 자미궁과 가까운 곳이 좋겠소."

"평수는 어떻게?"

"거의 1인 가구 아니오. 10평 이하로 합시다."

"그렇소. 원룸형 아파트가 가장 적당하지."

천계 신도시.

천인들을 위한 주거공간인 아파트 건설.

상당히 규모가 큰 사업.

시간이 엄청나게 걸릴 것이다.

재료 확보도 문제.

철근이야 황천계에 널려있는 흑암철이면 충분하지만 시멘트는 지구에서 받아야 한다.

더불어 인테리어에 필요한 내장재도.

재료도 재료지만 가장 중요한 것이 기술.

부실시공으로 아파트가 와르르 무너져 내리면 어떡하나?

물론 천인들이라 죽을 일은 없겠지만.

"술법으로 보완하는 건 한계가 있소. 지구 건설회사의 노하우가 필요하오."

"독선, 태주 대협이 혹시 건설회사를 소유하고 있나?"

"제약회사와 조선소, 해운회사···, 정도인데."

"이 기회에 하나 사라고 합시다."

"아니, 천계 아파트 만들라고 회사를 인수하란 말인가?"

"진정한 재벌이 되려면 건설회사 정도는 있어야지."

당군악은 회의의 주요 내용을 직접 글로 써 내려갔다.

태주의 의중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가 허락해야 사업이 진행된다.

순간!

찌르르르,

지구에서 배송 신호가 떴다.

"잠깐, 회의를 멈춥시다. 배송 떴소."

"오! 우린 신경 쓰지 말고 일 보시오."

당군악은 무한공간을 열었다.

물건을 교체하고, 편지도 넣고.

그런데 공유창고에서 공기계 스마트폰 하나가 들어있었다.

꺼내서 영상을 실행하자,

- 모두들 안녕하시오? 보시다시피 여긴 지구라오, 태주 대협의 자택이지.

검선이었다.

"음?"

"어?"

이어지는 안부 인사.

- 못 보던 드라마와 영화들이 많아. 모두 최근 거군. 선계엔 아직 없지?

- 지구에서 마시는 맥주는 역시 남다른 맛이야.

"하아···,"

"기고만장이군."

- 무려 한도 무제한 카드라더군. 태주 대협이 마음껏 긁어도 괜찮다고 했소.

"저, 저, 저런 망할!"

"저 새끼, 아니 검선, 지금 당장 데리고 올 수 없소?"

당군악이 그들을 진정시켰다.

"다들 마음을 편히 가지시오. 부러워하면 지는···."

- 같은 영혼이지만 참 비교되더이다. 복숭아 하나 갖다주면 코인 찔끔찔끔 입금해주는 그 누군가와 말이오.

"···뭐?"

비교된다고?

"이런 개썅···,"

미친 칼오징어 신선이!

- 어쨌든 선계에서 잘 지내시오. 뭐, 지구보단 재미가 없겠지만."

"제기랄! 폰을 콱 부수고 싶소."

"···이러다 화병이 생기겠어."

귀곡과 갈홍이 분통을 터뜨렸다.

이 둘은 선계에서 나름 점잖기로 소문난 신선들.

그런데 이들이 불같이 화를 낼 정도였다.

"상대적 박탈감이 어떤 기분인지 잘 알겠군.."

"왜 굳이 저런 영상을···?"

"흥! 당연히 자랑질 아니겠소?"

"선계 관종이 지구 관종으로 진화했어."

천운으로 지구에 갔으면 조용히 놀다 와도 모자랄 판에.

당군악도 마찬가지였다.

그렇지 않아도 영혼 합쳐짐 현상 때문에 지구에 가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운데.

이걸 신선들에게 보여주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마 분에 못 이겨 뒤로 넘어갈 것이다.

'그냥 놀고 오기만 해봐라.'

지구로 갔으면 최소한 빈센트, 그놈이라도 잡아서 태주의 근심을 덜어줘야 한다.

그것도 못 하고 민폐만 끼치고 오는 날엔···,

'선계 전용 스마트폰부터 정지시켜주지.'

당군악은 멀티플렉스 출입금지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 이제 잡으러 갑니다(1) > 끝

ⓒ 꾸찌꾸찌

=======================================

< 이제 잡으러 갑니다(2) >

빈센트 모레티가 숨어있는 사하라 초원 지하 벙커 시설은 이집트 카이로 전초기지와 가까운 곳에 있었다.

현재 그는 고심 중.

이집트 카이로에 세계 각국의 정보요원들이 쫙 깔렸다.

자신을 찾고 있음이 틀림없다.

모스크바 실험 때는 알렉스 카이사르는 물론, 정보국장 오거스트까지 사망해 모든 증거가 다 사라졌지만···,

반면 구례 지리산 실험은 그야말로 대실패였다.

영혼은 합쳐지지 않았고 따라서 폭발도 없었다.

그런 이유로 죽은 줄 알았던 골렘 다니엘이 김태주에게 사로잡혔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후우, 구례 지리산 실험이 성공했어야 했어.'

그랬다면 대폭발이 일어났을 테고, 그쪽으로 각국의 시선이 쏠렸을 건데.

곧 있으면 김태주도 이집트 사하라 사막으로 들이닥칠지도 모른다.

결정을 내려야 했다.

이곳 벙커 기지도 버리고 다른 은신처를 마련하느냐, 아니면 김태주와 일전을 벌이느냐.

하지만 김태주도, 자신도 어차피 같은 영혼 연결자.

뭐가 무섭다고 피하나?

'···와라, 죽여줄 테니.'

당연히 놈을 끝장낼 방법이 있다.

얼마 전 영혼 연결에서 자신과 같은 영혼인 자크 델루안과의 합일을 통해 방법을 찾아냈다.

다른 세상의 같은 영혼 자크 델루안.

그의 세상은 어떻게 망했나?

최초 영혼 연결 직후였다.

자크는 다른 세계가 있다는 걸 인지한 후 무차별적인 차원 게이트 실험을 감행했다.

이른바 '무작위 차원 게이트' 발생 실험.

실험에는 엄청난 에너지원이 필요해서 드래곤 하트까지 사용됐다.

그리고 멸망해버렸다.

거기서 나온 셀 수 없는 숫자의 괴생명체 무리에 의해서.

'자크가 만들었던 무작위 차원 게이트 발생기를 그대로 만들면 돼.'

문을 열어버리면 된다.

명칭은 무작위지만 이미 한 번의 실험으로 특정되었기 때문에 똑같은 연결 게이트가 발생할 것이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자크 델루안이 만들었던 게이트 발생기.

에너지가 엄청나게 많이 소모됐다.

'남아있는 모조 드래곤 하트가 8개, ···살짝 모자라나?'

지구의 빈센트가 보유하고 있는 에너지원.

마도 공학과 과학 기술의 힘을 빌려 엘리트 마나 결정체를 최대한 압축해서 만든 짝퉁 드래곤 하트였다.

짝퉁 하나당 엘리트 결정체가 3천 개 이상 들어있다고 보면 된다.

그러나 진본 드래곤 하트에 비하면 턱도 없는 수준.

그래도 열리긴 할 터.

지속 시간이 얼마냐가 문제겠지만.

'당장 설치해야겠군.'

놈이 자신을 찾아 이곳에 오는 순간!

지구에 파멸이 도래할 것이다.

※ ※ ※

태주는 검선과 함께 뉴서울 공항으로 왔다.

만리비검을 탔다면 일이삼백이와 함께 왔을 텐데, 비행기를 타야 해서 구례에 남겨뒀다.

뭐, 혼자서도 잘 노는 놈이니까.

현재 태주의 얼굴은 역용으로 바꾼 상태.

더불어 제정원이 만들어준 위장 신분으로.

검선은 비행기를 타는 와중에도 스마트폰을 가지고 노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가 지구에서 처음 개통한 스마트폰은 대포폰이었지만 제정원에서 여권을 만드는 와중에 정식으로 '동빈'이라는 이름과 주민번호가 발급됐다.

이제 서류상으로 검선은 완벽한 삼한 제국 시민.

그래서 인별그램이나, 케톡, 너튜브 등, SNS에 공식적으로 가입이 가능했다.

"···SNS로 소통하는 게 재미있으세요?"

"당연히 재미가 있지."

"신선이 속세와 인연을 맺는 건, 조화를 해치는 행위라고 하셨으면서···,"

"껄껄껄, SNS야 어차피 가상 세계이지 않나? 익명으로 소통하고, 또 대면하는 것도 아니고."

하긴, 그것도 맞는 말이다.

일반 사람들은 검선이 누군지도 모를 것이다.

"쯧쯧, 팔로워가 없군."

이제 갓 개설한 SNS 채널에 팔로워가 있을 리가.

그러나 다 방법이 있다.

검선은 정연희에게 메시지를 날렸다.

정연희는 꽤나 이름난 인플루언서.

스승이 '내 채널을 팔로우하도록 하여라.' 라고 명을 내리시는데 어떻게 거역하나?

잠시 후.

정연희를 시작으로 나름 유명하다고 회자되는 사람들이 검선의 채널에 팔로우를 눌렀다.

"오오오! 역시 내 제자야."

"···."

정말 착한 정연희였다.

혼자만 눌러도 되는데 인맥을 총동원한 모양.

나름 유명하다고 알려진 인플루언서들이 검선의 채널을 팔로워하기 시작했다.

좌표가 찍혔다.

일반인들도 줄줄이 늘어나고 있었다.

모두들 궁금했을 것이다.

유명 인플루언스들이 팔로워한 동빈이라는 사람이 누군지.

검선의 본격적인 방송은 이집트 카이로로 떠나는 비행기의 퍼스트클래스 좌석에 앉는 순간 시작됐다.

셀카봉을 장착한 스마트폰으로 라이브 방송 버튼을 누르자 우르르 들어오는 시청자들.

- DM돌격대님이 채널에 입장하셨습니다.

- 세날두님이 채널에 입장하셨습니다.

- 야꿍이님이 채널에 입장하셨습니다.

- user45874님이 채널에 입장하셨습니다.

.

.

.

검선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지구의 스트리밍 라이브 방송.

이것도 꼭 해보고 싶었던 일.

"허허허, 안녕들 하시오. 보시다시피 여긴 비행기 퍼스트클래스···,"

└ 아오! 씨발, 깜짝이야!

└ 뭐야? 영감탱이잖아?

└ 할배, 일등석 탔다고 자랑이라도 하고 싶었던 거야?

└ 아님, 세대 간의 소통이라도 해보고 싶었거나,

└ 잠이나 주무셔. 늙어서 잠이 없긴 하겠지만

└ 빠이!

"아, 아니, 잠깐, 그, 그게 아니라."

- 쫄리님이 채널에서 나가셨습니다.

- 딸기꼭지님이 채널에서 나가셨습니다.

- km34님이 채널에서 나가셨습니다.

- MZ새삥님이 채널에서 나가셨습니다.

- DM돌격대님이 채널에서 나가셨습니다.

- 세날두님이 채널에서 나가셨습니다.

.

.

.

"···나가지 마시오."

처절하게 부르짖었지만,

<현재 접속 중인 시청자 : 0명>

하는 수 없이 방송 종료.

그리하여 검선은 지구의 라이브 개인 방송의 매운맛을 보고야 말았다.

태주는 그런 검선이 안쓰러웠다.

"실망하지 마세요. 원래 처음은 힘들어요."

"사실 방송할 생각은 애초에 없었네. 아무리 가상 세계라도 함부로 인연을 맺으면 안 되는 법이니까."

이렇게라도 합리화해야지.

"잠이나 주무실래요? 아니면 식사라도."

"···식사부터 할까?"

하지만 검선은 포기하지 않았다.

'컨텐츠 방향을 잘못 잡아서 그래.'

너무 만만히 봤다.

짧은 영상, 긴 영상을 합쳐 하루에도 수백 수천 개씩 올라오는 개인 방송 컨텐츠 아닌가.

튀지 않으면 금방 묻힌다.

'비행기 퍼스트클래스로는 너무 부족했어.'

좀 더 자극적인 컨텐츠가 필요하다.

얼굴만 믿어서는 안 된다.

'다시 반로환동을···, 아니야.'

이렇게 된 이상 정면승부다.

먼저 방송 감각을 충분히 익히고 나서.

고민은 끝났다.

검선은 스마트폰을 다시 켰다.

이번엔 라이브가 아닌 영상 녹화로.

"험험, 여기가 어딘지 아시오? 비행기 일등석이라오. 내가 식사를 주문했는데, 오! 마침 승무원이 오는군."

현재 검선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일은 지구의 인플루언서로서 거듭나는 것.

빈센트 모레티?

그놈이야 소일거리에 불과하다.

※ ※ ※

비행기는 몇 군데 중간 기항지를 거쳐 이집트 카이로에 착륙했다.

거대한 사하라 초원, 마수 밀집지대와 인접한 도시.

마수 레이드에 특화됐다고 보면 된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절반 이상이 각성자들.

"이제 뭐부터 할 텐가?"

"먼저 외곽으로 나가보죠."

출국하기 전 제정원 문경식 차장의 브리핑을 듣고 왔다.

유럽 제국의 정보원들이 카이로 전체를 훑고 있다던데, 여전히 단서조차 잡지 못하고 있는 걸 보면···.

'카이로 시내엔 없을 거야.'

다니엘이 여기서 비행기를 탔다지만 그것도 연막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준비는 해왔다.

제정원이 유럽에서 활동하면서 빈센트 모레티에 대한 정보를 밑바닥부터 싹싹 긁었다.

빈센트 모레티라고 추정되는 사진도 가까스로 구해왔다.

비록 정보량이 부족하지만 읽고 또 읽고, 놈의 모습을 심상에서 구체화 시켰다.

태주와 검선은 카이로 바깥으로 나왔다.

어차피 사람도 없다.

역용술과 축골공도 풀어버리고.

변장을 유지하는데도 기운이 소모되니까.

'시작해보자.'

무한공간에서 추적부를 꺼냈다.

"단주 선인의 부적이군."

"네, 도움이 될 겁니다."

"처음부터 그걸로 추적하지, 그랬나?"

"찾는 대상이 불분명하면 통하지 않아서요."

"허면 지금은?"

"글쎄요. 만약 놈이 이 근방에 있다면···, 가까운 곳에선 확률이 좀 더 올라가거든요."

"에잉, 선계로 돌아가면 단주 선인에게 단단히 일러놓아야겠군. 부적 만들 때 선기를 팍팍 집어넣으라고."

근처에 있다면 분명 통한다.

태주는 추적부에 선기를 불어넣고 빈센트 모레티를 떠올렸다.

불타오르면 찾은 거다.

'제발 타올라라.'

이마저도 안 되면 놈을 찾는 것은 매우 어렵다.

한마디로 최후의 보루.

심상에서 구성한 빈센트 모레티의 정체.

황립 결정체 연구소 소장, 마공학자, 골렘 다니엘의 제작자···, 그리고 희미한 사진에서 본 겉모습.

순간!

화릇, 화르릇, 화르르르릇!

부적 하단부에서 일어나는 불꽃.

'됐어.'

추적부가 불타올랐다.

그러더니 사뿐사뿐 날아간다.

방향은 남서쪽.

태주의 심상에서도 미세하게 느껴진다.

놈이 사하라에 있는 게 분명하다.

정확한 위치를 짚을 순 없지만.

"쫓아가죠."

"알았네."

쐐애액!

태주와 검선이 각자의 검에 올라타고 불붙은 추적부를 뒤따랐다.

하지만,

피시시시싯.

금세 재로 변해 사라지는 부적.

'여긴가?'

확인해보자.

추적부를 한 장 더 꺼내서.

화릇!

이번엔 금방 붙었다.

역시 방향은 남서쪽.

쐐애액!

어느 정도 날아가자 또 꺼지고.

피싯,

비록 금방 사라졌지만 희망이 생겼다.

불이 붙었다는 것만 해도 어딘가?

또 한 장 더 꺼내,

화릇!

쐐애액!

피싯,

이렇게 대여섯 번 정도 과정을 더 거치자.

화르르륵!

불길이 일어나더니 추적부가 제자리에서 빙빙 맴돌았다.

"여기네요."

"···그런데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흐음, 아마 땅속에 있을 수도."

"지하 벙커처럼?"

사방엔 지평선.

광활한 초원 지대였다.

건물 구조물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초원의 변종 마수들이 어슬렁거리며 지나가고 있을 뿐.

단주 선인의 부적이 발동된 이상, 놈이 이 근처에 있다는 건 분명하다.

그럼?

하늘과 지상이 아니라면 땅 밑 말고는 없지.

"그럼 찾아보세. 난 이쪽으로 돌아보겠네."

"네."

태주와 검선이 수색을 시작했다.

땅속이라면 텅 비어 있을 테고, 발을 굴러보거나, 기를 움직여 탐색하면 느낌이 올 것이다.

쿵쿵! 쿵쿵!

천근추 수법으로 초원을 뛰었다.

우우웅,

기를 퍼뜨려보기도 하고.

순간!

"음?"

가까운 땅 위에서 뭔가 꼼지락거리는 게 보인다.

뭔가 부자연스럽게 움직였다.

행동도 느리고.

'···도마뱀인가.'

태주는 작은 도마뱀을 손으로 잡았다.

마수처럼 보이진 않았다.

삼각형의 머리, 꼬리와 네 발까지 달려있어 모습이 도마뱀과 다를 바 없었지만···.

'생각보다 무거워.'

태주의 눈과 도마뱀의 눈이 마주쳤다.

"어?"

지잉!

도마뱀의 안구가 기계음을 내며 작아졌다 커졌다 하며 초점을 맞췄다.

'···카메라 렌즈구나.'

로봇 도마뱀이다.

빈센트 모레티가 만든 물건 같았다.

놈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 새끼가···,"

그때였다.

쿠쿠쿠쿠쿠쿠쿵!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리는 지표면.

쩌어어억!

땅이 갈라지고 마치 거대한 탑처럼 생긴 구조물이 지표면을 뚫고 솟아올랐다.

"태주 대협!"

스팟!

검선이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며 달려왔다.

그리고,

찌이이이이잉!

파주주주주죽!

탑에서 쏘아지는 백색의 광선!

콰콰콰콰콰콰콰!

동시에 허공에서 직경 50m 크기의 거대한 거울 문이 생겨났다.

순식간이었다.

단 몇 초안에 모든 게 이루어졌다.

'저건?'

우우우우우우···,

모스크바와 지리산에서 목격한 거울 게이트.

다른 점이라면 엄청난 크기.

태주는 무한공간을 열었다.

만일을 대비해 암기로 사용할 수 있는 물건들을 가득 채워왔다.

게이트가 열렸다면 안에서 무언가 나올 것이다.

뭐가 나올까?

'···다른 세상의 인간?'

아니었다.

스멀스멀, 빨판이 달린 촉수 다발이 거울 게이트에서 먼저 빠져나왔다.

'하아, 씨발,'

촉수는 징그러운데.

하지만 그건 일부일 뿐.

쑤우우우욱!

공룡처럼 생긴 거대한 생명체가 좁은 게이트 문을 비집고 사하라 사막 초원에 모습을 드러냈다.

쿵! 쿵! 쿵!

'미친!'

그게 시작이었다.

쑤욱, 쑤우우욱, 쑥, 쑥! 쑥!

"꾸웩!"

"꾸이이익!"

"크라라락!"

다양한 크기와 형태의 생명체들이 괴성을 지르며 거울 게이트를 빠져나왔다.

"···대체?"

저것들은 뭐지?

큰 놈들은 고층빌딩만 했고, 작은 것들도 웬만한 덤프트럭보다 컸다.

우우우우우,

후두두두둑,

하늘을 나는 놈, 땅에서 걷는 놈, 지네처럼 기어 오는 놈,

수도 없이 나왔다.

한편,

검선은 멍하니 게이트만 바라보고 있었다.

수천 년을 인간계와 선계에서 살아온 그였다.

'무슨 생명체가···,'

저런 생명체는 처음 본다.

들어보지도 못했다.

가히 압도적인 광경이었다.

'저렇게 커?'

검선의 입이 저절로 떡 벌어졌다.

손도 바들바들 떨렸다.

가슴 또한 쿵덕쿵덕 쉴새 없이 뛰었다.

급기야 입술에서 흘러내리는 침.

"쓰읍,"

한번 들이마시고는,

"크하하하하하!"

검선은 크게 웃었다.

정말 엄청나게 기뻤다.

이런 행운을 맞이할 줄이야.

"컨텐츠로구나!"

그랬다.

참으로 신박한 컨텐츠.

이건 반드시 먹힌다.

동시 시청자들이 몇 명이나 들어올까?

심장이 뛸 수밖에 없었다.

아예 터져버릴 것만 같다.

기대감에 바르르, 떨리는 손으로 먼저 스마트폰을 들고 간단하게 제목을 달아 라이브 방송 버튼을 누른 후,

"라, 라이브 방송 시작하겠소이다."

파슷, 파슷, 파슷···,

검선이 뛰워 올 린 강기의 검, 수천 자루가 하늘 위로 솟아올랐다.

그리하여 이기어검(以氣馭劍).

수천 개의 검이 한꺼번에 거대 생명체들에게 날아갔다.

츠피리리리리릿!

동시에 각각 서로 다른 검법의 초식을 시전했다.

복마검법, 사일검법, 태극혜검, 제왕검형, 자하신검, 천둔검법···,

강기로 이루어진 수천 개의 검, 그것들 하나하나가 다 검선이 시전하는 검술.

그중에서도 검선이 가장 심혈을 기울인 부분.

바로 소중한 스마트폰의 안전.

부서지는 걸 방지하기 위해 세 겹의 강기 보호막을 덧씌웠다.

스마트폰이 라이브 촬영을 시작했다.

마치 드론처럼 스스로 하늘을 날았다.

이기어폰(以氣馭phone)이었다.

< 이제 잡으러 갑니다(2) > 끝

ⓒ 꾸찌꾸찌

=======================================

< 라이브쇼 >

예상은 했었다.

빈센트 모레티도 카이로에 정보요원들이 들어와 있다는 걸 알고 있을 것이다.

구례 실험의 실패로 자신이 추적당하고 있다는 것도.

둘 중 하나였다.

이미 도망갔거나, 아니면 무언가 대응하고 있거나.

도망은 아니었다.

기어코 뭔가를 저지르고야 말았다.

태주도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각종 암기와 흑암철 주괴를 무한공간에 가득 채워왔다.

그 숫자만 해도 무려 10만여 개.

저 초대형 거울 게이트에서 나오는 것들은 분명 마수가 아니다.

어딘지 모를 차원에서 살고 있었던 거라 짐작되는 괴생명체.

'비욘드 엘리트급도 꽤 보이는데···,'

옛 중국 땅에서 조우한 비욘드 엘리트 마수 흑악지룡.

그놈과 거의 비슷한 기운의 몇몇 괴수들.

그밖에 일이삼백이 본체보다 강한 것들이 수두룩했다.

'안 데리고 오길 잘했네.'

일이삼백이도 그렇고, 각성자들이나 군대는 막아낼 수 있을까?

어림 반푼어치도 없다.

큰놈 한 마리면 현대 무기로 무장한 군대도 단번에 썰릴 것이다.

대체 어디서 나온 놈들이지?

어쨌거나 빈센트 그놈이 연 것이 틀림없다.

그 새끼는 무슨 차원 게이트 전문가인가?

일단 저거부터 처리하고 보자.

땅속에서 솟아난 탑 말이다.

스우웅!

무한공간에서 흑암철 주괴가 쏟아져 나왔다.

파바바바박!

커다란 물줄기로 변한 흑암철의 격류가 탑의 밑동을 쳐버렸다.

콰콰콰콱! 콰콱!

철골로 이루어진 탑의 기초 지지대가 암기에 의해 파먹혔다.

기우뚱,

쓰러지는 대형 탑.

그러나 여전히 게이트는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더 많은 괴수들이 게이트를 통해 나왔다.

'검선님은···,'

츠핏! 츠피피피핏!

땅과 하늘, 동서남북에서 펼쳐지는 화려한 이기어검 쇼.

대충 세어봐도 5천여 개 이상의 강기 검이 각각 별개의 초식을 시전하며 괴수들을 베고 찔렀다.

'잘하고 계시네.

검의 신선(神仙).

아무리 다른 차원의 괴수라 해도 신의 힘을 어떻게 감당해?

※ ※ ※

빈센트 모레티는 김태주가 오지 말았으면 했다.

놈이 만약 자신의 은신처 가까이 오면 결국 금기의 문을 열어야 하니까.

그렇다면 지구 멸망을 피할 수 없다.

무작위 차원 게이트.

이름만 무작위였다.

다른 세상의 같은 영혼인 자크 델루안의 차원 게이트 발생기를 그대로 베껴 만든 것.

즉, 위치가 특정된 고정 차원 게이트.

사실 자크 델루안의 그것과는 다소 다른 점이 있다.

그가 만든 발생기의 에너지원은 진본 드래곤 하트.

반면 자신이 만든 발생기의 에너지원은 엘리트 마나 결정체를 압축한 짝퉁 드래곤 하트.

자크 델루안의 게이트는 거의 일주일 동안 유지되었지만, 자신의 게이트는 얼마나 유지될지 알 수 없었다.

'비욘드 엘리트 마나 결정체만 있었어도.'

최소 5일 이상 게이트를 유지할 수 있을 텐데.

게이트가 열리면 악몽이 펼쳐진다.

자크가 살던 세상을 멸망시켰던 그 공포의 크리처들이 튀어나올 것이다.

다른 세상엔 지성체만 존재하지 않았다.

대화도 안 되는, 오직 파괴 본능만 남은, 마수들보다 훨씬 더 끔찍한 무지성의 괴물.

크리처, 즉 생명체.

이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놈들은 포식자였다.

모든 것들을 먹어 치웠다.

마법과 마도 공학의 힘으로도 그 생명체들을 막아내지 못했고, 결국 세상은 아포칼립스로 변했다.

'열리고 나면 지구상에 살아남은 생명체는 없을 거야.'

절대 못 막는다.

핵무기를 갖다 퍼부어도 소용없다.

다른 세상의 9클래스 마법사들이 힘을 합쳐 메테오 스크라이크를 시전해도 그 크리처들을 막지 못한 판에.

열면 끝이다.

지구도 자크 델루안의 세상처럼 변한다.

아포칼립스, 현세의 지옥.

그래서 놈이 오지 말았으면 좋겠다.

자신도 근본은 지구인 아닌가.

앞으로 실험해 볼 것도 많고.

하지만,

'···결국 왔구나.'

정찰용 도마뱀 골렘에 의해 포착된 인간.

김태주였다.

심지어 늙은이 한 명도 끌고 왔다.

'네가 자초한 일이다. 날 탓하지 마라.'

빈센트 모레티는 차원 게이트 발생기를 실행했다.

8개의 모조 드래곤 하트 중 하나만 남기고 7개를 에너지원으로 집어넣었다.

찌이이이이잉!

지하 벙커에서 탑이 솟아올랐다.

파주주주주죽!

탑에서 쏘아진 에너지로 인해 초대형 거울 게이트가 발생했다.

그리고 공포의 크리처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끝났군.'

빈센트 모레티는 착잡한 심정으로 지구 멸망의 시작을 바라봤다.

정찰용 드론이 김태주에게 집중됐다.

'자, 이제 어떻게 나올 테냐?'

할 수 있는 게 있을까?

기껏해야···,

'그럴 줄 알았어.'

탑부터 부수겠지.

하지만 소용없다.

이미 열린 게이트였다.

또한 이번 연결로 길이 뚫렸다.

'거대한 댐에 바늘구멍을 낸 거지.'

그래서 닫혀도 또 열릴 가능성이 높다.

굳이 인위적으로 연결하지 않아도 말이다.

자크 델루안의 세상도 그랬다.

그런데?

"헉!"

빈센트는 경악했다.

탑을 부술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저렇게 쉽게?'

놈의 손에서 쏘아지는 흑색의 금속 덩어리.

벌떼처럼 움직이더니 탑의 밑동을 한 방에 쓰러뜨렸다.

"미, 미친!"

김태주, 김태주 하더니.

자신이 알고 있는 차원의 최강자들.

놈의 수준이 9클래스 마법사나 소드 카이저 정도는 될 거라고 짐작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과소평가였어.'

탑을 부순 김태주가 이번엔 크리처들을 공격했다.

결과는 다를 바 없었다.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렸다.

실로 무시무시했다.

"···무, 무슨?"

한 차원을 멸망시켰던 공포의 괴물들을 너무나 쉽게 죽이고 있었다.

저자를 과연 인간이라 칭할 수 있을까?

'아니야, 어차피 놈은 죽을 거야.'

크리처는 끝도 없이 나올 것이고, 김태주는 단 한 명.

그의 힘은 인정하지만 절대 홀로 감당하지 못한다.

순간!

문득 떠오른 생각.

그러고 보니 김태주는 혼자 오지 않았다.

늙은이 한 명과 같이 왔다.

그놈은 어떻게 됐지?

그래서 정찰용 드론 도마뱀의 머리를 돌렸다.

"···어어?"

빈센트는 눈을 의심했다.

"···마, 말도 아, 안 돼."

제대로 보고 있는 게 맞아?

※ ※ ※

현대는 개인 방송의 시대.

길이가 긴 영상을 짧게 축소해서 30초 혹은 1분 안에 볼 수 있는 쇼츠 영상이 유행하고 있지만, 주로 셀럽들이 자신의 일상을 보여주는 라이브 영상도 인기가 많다.

손가락 하나로 화면을 휙휙 쓸어가며 재미가 있으면 보고, 아니면 넘기고.

그 와중에 누군가가 실행한 라이브 방송이 커졌다.

시작은 왜소했다.

한 명의 시청자가 채널에 입장했다.

- 니남친지나간다님이 채널에 입장하셨습니다.

처음엔 채팅도 올라오지 않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 님? 이거 뭐임?

라이브 화면에 드러난 끔찍한 생명체.

콰콰콰콰콰!

그리고 그놈들을 두부 썰 듯 자르는 수천 개의 빛의 검.

이윽고 한 사람 또 들어왔다.

- 게이게이야님이 채널에 입장하셨습니다.

└ 어? 영화 촬영인가?

└ 글쎄, 위치 정보에 사하라 마수 밀집지대라고 뜨는데.

이번엔 3명이 한꺼번에.

└ ?

└ ??

└ 이거 마수임?

└ 아닌데?

잠시 후.

시청자들이 줄을 지어 들어왔다.

- user1475님이 채널에 입장하셨습니다.

- 금카좋아님이 채널에 입장하셨습니다.

- 오로라꼰대님이 채널에 입장하셨습니다.

- 어쩔진공청소기님이 채널에 입장하셨습니다.

- user8878545님이 채널에 입장하셨습니다.

.

.

.

└ 와! 특수효과를 입힌 영상인가?

└ 조작치고는 퀄리티가 너무 높네.

└ 이게 조작이겠냐? 라이브잖아, 멍청아!

└ ????

└ 세, 세상에!

└ 이거 찍고 있는 사람 누구?

└ 동빈?

└ 이 방 이름이 뭐지?

영화 촬영도 이렇게 찍지는 못한다.

대규모 전장의 한복판에 선 기분.

이기어폰.

스마트폰은 드론처럼 날아다녔다.

하늘로 치솟아 올라 먼 거리에서, 전장 한복판으로 들어가 근접으로, 또는 검선의 등 뒤에서,

채팅창이 폭발했다.

눈으로 읽을 수 없을 정도의 빠르기로 주르륵 올라갔다.

그러나 방송의 주체가 누군가?

바로 검선이었다.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동체시력

이기어폰으로 스마트폰이 훨훨 날아다니고 있음에도 천리전성과 금안공으로 자신의 시청자와 소통하고 있었다.

"허허, user32569님 어서 오시오. 오로라꼰대님도 들어오셨구려, 깍꿍님, 거물대박님, MZ민지님, kimws님, 솔로정숙이님, 빨돼지님···,"

랩을 하는 것처럼 입장하는 사람들의 닉네임들을 줄줄이 읊어댔다.

질문에 답을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천리전성, 기운에 자신의 음성을 실어 스마트폰 마이크 부분으로 보내.

"영화 촬영은 아니오. 실제 상황이오."

"여긴 사하라 마수 밀집지대 남서쪽인데, 난데없이 저 게이트 같은 것이 열려서 요괴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소이다."

"에이, 조작이라니, 말이 너무 심하군. 못 믿겠으면 나가든가."

"증거? 이쪽으로 직접 와보면 되지."

조작이 아니란 건 금방 밝혀졌다.

시청자 중엔 이집트 카이로 전초 도시에 있던 각성자들도 있었다.

각성자와 적합자들이 레이드 전용 SUV 장갑 자동차를 타고 사하라 남서쪽 방향으로 달렸다.

그러자 저 멀리 허공에 보이는 거대한 거울 게이트.

"아···,"

"미, 미친?"

"진짜였어?"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진 못했다.

저길 어떻게 가?

인증 사진과 영상이 SNS에 올라왔다.

덕분에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검선 라이브 방송의 시청자.

띠링, 띠링, 띠링, 띠링···,

후원도 쏟아졌다.

"어이쿠, 금카좋아님 후원 감사드리오. 재미없쥬님은 10만 원이나 하셨구려, ···헉! 중년여고생님 100만원? 허허허, 감사의 의미로 이기어검 춤을 보여드리리다."

강기의 검 100자루가 크리처들을 썰다 말고 씰룩씰룩 춤을 추기 시작했다.

한쪽에선 무자비하게 괴수들을 도륙하고, 또 한쪽에선 칼춤.

시청자들은 생전 처음 접하는 컨텐츠에 열광했다.

※ ※ ※

슈슈슈슈슈슛!

태주의 무한공간에서 빠져나간 암기들이 구름을 이뤘다.

그리고 비처럼 내렸다.

'다른 차원의 괴수라고?'

그럼 지구의 독에 저항력이 있을까?

물론 암기들이 놈들의 몸을 뚫어야 하겠지만.

언뜻 보기에도 철갑처럼 단단해 보이는 괴수들의 피부.

하지만,

푸푸푹! 푹푹푹푹!

가볍게 꽂혔다.

하긴, 선기와 강기를 입힌 암기가 저 정도를 못 뚫어낸다는 것이 더 말이 안 되지.

그리고 독기가 주입됐다.

독령이 만들어내는 독기는 능동적이었다.

괴수들에게 최적화된 독기의 성분으로 자동 조합됐다.

푸푸푸푹!

"끄이이익!"

하늘을 나는 괴수가 허공에서 몸을 비틀더니 떨어져 내렸다.

"꾸에엑!"

땅을 기어가던 괴수는 바닥에서 데굴데굴 구르다 녹았고,

태주의 암기는 괴수뿐만 아니라 초대형 거울 게이트 쪽으로도 날아들었다.

일부는 괴수들.

또 일부는 게이트에 대한 직접 공격.

괴수의 시체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떨어지고, 쓰러지고, 녹고, 가루가 되어 흩어지고···.

순간!

"음?"

다수의 괴수들이 카이로 전초 도시 방향으로 진로를 틀고 있는 모습이 태주의 눈에 들어왔다.

"이 새끼들이···,"

저놈들 중 단 한 놈이라도 도시에 진입하면 상상하기도 싫은 대규모 인명피해가 발생할 터

병력이 더 필요하다.

새어나가는 괴수들을 막아야 한다.

태주는 무한공간에 들어있던 제천대성의 털을 모조리 꺼냈다.

한 움큼 잡고 뿌리고, 또 뿌리고, 또 뿌리자···,

팡! 팡! 파파팡! 팡팡팡팡!

사하라 사막 초원에 나타난 수많은 분신 원숭이들.

"우끽!"

"우끼긱?"

"우끼우끼!"

"끼륵?"

그리고 1차 분열 시작.

몸을 털자 분신이 생기고, 또 몸을 털어 분신을 만들고.

파파팡! 파파파팡! 파파파파팡!

온통 찬란한 황금빛이었다.

눈이 부실 정도로.

'저쪽으로 새어나가는 괴수들 좀 처리해줄래? 나머지는 검선님 도와드리고.'

파팟!

분신들이 한꺼번에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 나갔다.

"우끼기기기기깃!!!"

우르르르르르,

대규모 분신 군단이 지상에 존재하던 괴수 무리들을 무참하게 들이받았다.

콰콰콰콰콰콱!

괴수들이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제천대성 분신들의 합동 공격에 몸체가 찢겨졌다.

검선은 신이 났다.

역시 태주 대협이었다.

슬슬 지루해질 때쯤에 이렇게 새로운 컨텐츠를 제공해주니.

"또 컨텐츠로구나."

교활한 요괴왕 제천대성의 냄새나는 털 뭉치 새끼들이 이렇게 반가울 데가.

쐐애애액!

이기어폰으로 움직이는 스마트폰이 황금원숭이들을 쫓았다.

그리하여 라이브 화면에 나타난 황금원숭이 떼.

이걸 보고 어떻게 참아?

└ 우끼기긱! 달려!

└ 원숭이 떴다!!!

└ 가즈아!!!

└ 찐이다. 찐.

└ 이거 진짜 제천대성이 지구에 나타난 거 아니야?

└ 어음, 그때보다 더 많아.

└ 씨발, 뭐해? 후원 날려!

└ 방금 적금 깼다. 무조건 쏜다.

띠링, 띠링, 띠링···.

연신 울리는 후원 알림음.

"히트다, 히트야!"

아아아,

검선은 가슴이 벅차올랐다.

당장 선계로 돌아간다 해도 여한이 없었다.

누가 이런 무대를 만들어줬지?

빈센트 모레티라는 놈 아닌가.

어떻게 보답해야 하나?

죽일 때 살살 죽이면 되겠지.

그 정도면 충분하다.

태주는 감탄했다.

만천화우라는 것이 막대한 진기를 소모하는 무공.

그래서 조금 지쳐 있었다.

무한공간에서 독과 선도를 씹으면서 펼쳤다.

하지만 검선은?

저 마르지 않은 선기를 보라.

선계 최강자다웠다.

저분이 진짜 신선이었다.

아무튼 분신 원숭이들이 참전하자 조금 여유가 생겼다.

여전히 끝도 없이 거울 게이트에서 홍수처럼 밀려 나오는 괴수들.

근본 원인을 제거해야 한다.

저 게이트 말이다.

우우우웅!

몸속에서 끓어오르는 선기.

천도를 먹은 후, 독령(毒靈)의 성질이 달라진 것 같다.

선령(仙靈)이라 불리어도 무방할 정도.

10만여 개의 선기 가득 찬 암기들이 거울 게이트를 타격했다.

채채챙! 챙챙챙챙! 챙챙!

우우우우우웅,

거울 게이트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태주는 멈추지 않았다.

선기를 쏟아부었다.

저게 깨어져야 이 난리도 끝나게 된다.

그가 이렇게 할 수 있는 이유.

바로 검선 때문.

저 게이트가 얼마나 유지될지 알 순 없지만 만약 하루를 넘어갔다면?

'도망쳤거나 여기서 죽었겠지.'

검선과 함께 오길 잘했다.

천만다행이었다.

찌직,

거울 게이트에 가느다란 실금이 생겼다.

< 라이브쇼 > 끝

ⓒ 꾸찌꾸찌

=======================================

< 검선, 귀환하다. >

검선의 라이브 채널이 폭주하고 있었다.

밀려드는 시청자에 서버가 뻗을 정도였다.

어쩔 수 없이 접속을 제한해야 할 정도로.

검선은 최고의 순간을 맞이하고 있었다.

신선으로서가 아닌 초보 개인 방송인으로서,

괴수 무리 따윈 소중한 컨텐츠에 불과했다.

이따위 것들을 잡아 족치는 게 뭐가 어렵다고?

하지만 너무 쉽게 잡으면 극적인 효과가 떨어진다.

가끔,

"헛!"

괴수의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이런!"

호들갑도 떨어주고.

그에게 있어 모든 선술과 무공은 오직 라이브 방송의 매끄러운 진행을 위해 필요한 것.

이기어폰도 마찬가지.

괴수들이 가득 찬 전장을 활보하며, 지상에서, 하늘에서, 줌이 필요하면 다가갔다가, 전체를 조망하려면 멀어졌다가.

"좋구나."

촬영용 드론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영상 또한 따로 폰에 저장되고 있었다.

제천대성의 분신들도 쓸만한 조역들.

한때 이놈들과 선도 쟁탈전에서 드잡이했던 걸 생각하면 지금도 그다지 마음엔 들진 않지만···,

다른 한편으론 컨텐츠의 한 축을 담당해주니 고마운 마음도 들었다.

또한 요괴 퇴치는 신선의 의무.

비록 다른 세상이라 할지라도,

'아니지. 이미 태주 대협과 인연을 맺었는데, 어찌 다른 세상이라고 할 수 있나?'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흐음?"

사실 조금 전부터 신호가 오고 있었다.

처음엔 이게 뭔가 싶었지만 곧 깨달았다.

'하아, 갈 때가 됐군.'

지구, 이 세상이 자신을 밀어내는 느낌.

더불어 원래 살던 세상에서 자신을 끌어당기는 느낌도.

'너무 많이 개입했어.'

여기도 차원의 질서가 있을 터.

자신은 이계의 존재,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다.

질서가 허락한 짧은 유희가 끝날 시간.

물론 거부할 수 있다.

그럴 만한 능력도 되고.

하지만 받아들였다.

그것이 순리니까.

아쉽기 그지없다.

또 올 수 있을까?

가기 전에 깔끔하게 정리나 해주고 가자.

※ ※ ※

태주는 독령으로 움직이는 10만 개의 암기로 거울 게이트를 계속 두드렸다.

츠피리리리릿! 파파파파파팟!

거울 게이트는 양방향이 아닌 일방통행이었다.

저쪽에서 여기로 나올 순 있지만, 여기서 저쪽으로 들어갈 순 없었다.

만약 들어갈 수 있었다면 암기도 거울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 사라졌겠지.

째챙! 챙! 챙! 채···앵! 째앵!

대형 게이트에 실금이 가기 시작했고, 유리가 깨어지는 소리도 들렸다.

괴수들은 제천대성의 분신들과 검선이 알아서 처리해주고 있었기 때문에 게이트를 직접 타격할 수 있었다.

째애앵, 쨍! 쨍! 쨍!

균열이 점점 더 커졌다.

'이제 곧 깨어지···,'

그때였다.

우우우우웅!

스르르르릇!

"뭐야?"

거울 표면의 금이 메워지기 시작했다.

심지어 게이트의 크기가 조금 더 커졌다.

"후우···,"

이러면 나가린데.

게이트가 열리고 난 지 1시간은 족히 지난 것 같다.

아직도 괴수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검선은 걱정 없지만···,

'제천대성의 분신 유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곧 분신들이 사라진다.

게이트 크기도 커져서 나오는 마물들의 숫자도 점점 늘어났고.

독령도 말라가기 시작했다.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게이트는 무조건 부숴야 해.'

금이 간 걸 보면 더 강하게 두드리면 반드시 깨어진다.

그래서,

- 검선님.

태주는 검선에게 전음을 날렸다.

- 응? 왜 그러나? 태주 대협.

- 게이트를 직접 제거해야 할 거 같아서요.

- 아하.

검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방송이 목적.

할 거 다 했다.

분량도 충분히 뽑았고.

- 그럼 빨리 부숴버리세.

스윽, 스으으윽.

검선의 강기 검들이 세로로 뉘어졌다.

동시에,

파숫! 파수수수수숫!

게이트를 향해 쏘아지는 빛줄기들.

태주의 암기도 가세했다.

츠피릿, 츠피리리릿!

째재재재쨍! 째재재재재재쨍!

거울 표면이 파도가 치는 것처럼 출렁였다.

찌직! 찌지직!

가장자리에서 생기는 커다란 금.

거미줄처럼, 점점 굵어지고 커졌다.

나오는 마수의 숫자도 줄어들기 시작했고,

결국,

쩌저저저저저적!

거울 전체로 균열이 발생하더니 눈부신 빛과 함께,

화아아아악!

그 커다란 균열이 단번에 박살 나면서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쨍그랑, 와장창! 파파파파파팟!

※ ※ ※

빈센트 모레티는 넋이 나갔다.

김태주나 저 늙은이나, 둘 다 인간이 맞아?

무려 하나의 차원을 멸망시킨 공포의 크리처들이다.

오직 파괴밖에 모르는 무지성 바이러스와 같은 놈들이기 때문에 초고도 마도 공학과 마법이 발달한 세상도 무기력하게 망했다.

그런데 저게 뭔가?

고작 단둘이서 저렇게 쉽게?

아니, 둘이 아니지.

뜬금없이 나타난 황금빛의 원숭이들.

그 숫자만 해도 백만이 넘어갔다.

'···역시 김태주가 불러낸 거였어.'

솔직히 원숭이가 강하면 얼마나 강할까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건 오산이었다.

밖으로 새 나가는 크리처들에게 개미 떼처럼 달려들더니 수적 우세에 힘입어 하나하나씩 찢어버렸다.

게다가 김태주의 공격으로 슬슬 금이 가기 시작하는 대형 차원 게이트.

에너지로 만들어졌지만 게이트 또한 물질이다.

외부의 힘이 지속적으로 가해지면 당연히 파괴된다.

다만 그 힘의 수준이 엄청나게 강해야 하지만.

'이럴 때가 아니야.'

모든 시도가 불발로 돌아갔다.

영혼 합침 실험도, 지구 멸망급 차원 게이트 개방도, 또한 지하 벙커의 위치도 발각됐고.

아무런 소득도 없었다.

무조건 도망가야 한다.

빈센트는 주변 정리부터 시작했다.

현재 그가 가지고 있는 아공간 가방은 10개 정도.

그가 만들어 세상에 풀어버린 평범한 아공간 가방과는 다르다.

내부 용량이 기존에 만든 것보다 훨씬 더 크다.

먼저 골렘들부터 담았다.

주로 건설에 특화된 기계 골렘들.

자율 의지가 없는 기계식이기에 아공간에 들어간다.

더불어 지금까지 연구했던 모든 자료와 결정체, 실험재료도.

모조리 다 쓸어 담았다.

이것들만 있으면 재기가 가능하다.

조용한 곳에다 새로운 근거지를 만들 수 있다.

여기서 도망칠 수만 있다면 말이다.

'탈출은 가능해.'

지금 저 둘은 게이트 괴수와 상대하느라 정신이 없다.

이틈을 타서 도망친다.

먼저 벙커 자폭 시스템 타이머를 맞춰두고···,

치르릇!

광학미채의 빛 왜곡으로 투명해진 신체.

그의 몸에도 다양한 마도 공학의 인챈트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삐걱,

빈센트는 지상으로 통하는 비상구를 열었다.

그리고 조용히 반대편으로 움직였다.

출구가 거울 게이트와 멀리 떨어져 있고, 또한 스텔스 기능으로 자세히 보지 않는 자신을 발견하는 건 어려울 것이다.

빈센트는 자신했다.

이대로 카이로로 들어가 비행기를 타고 떠나면?

도시에 정보요원들이 쫙 깔려있다고 하지만 그깟 놈들은 위협조차 되지 않았다.

자신을 어떻게 잡아?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으끽?"

"···어?"

황금빛 원숭이 한 마리가 느닷없이 앞을 막아섰다.

그러고는 뺨을 긁적이며 호기심 어린 눈으로 자신을 노려봤다.

보이나?

투명화 상태라 눈에도 잘 띠질 않을 텐데, 어째서?

갑자기 빈센트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쿡 찌르는 황금원숭이.

"이런 젠장!"

파츠츠측!

빈센트의 몸에서 강렬한 번개 줄기가 발산됐다.

엘리트 마수도 감전시킬 수 있는 마도 공학의 라이트닝 쇼크.

"우꺄가가각!"

원숭이가 괴성을 지르며 뻣뻣하게 굳었다.

프스스스, 노릿한 냄새를 풍기며 타들어 가는 털.

"감히 원숭이 따위가,"

빈센트는 계속 움직였다.

하지만,

"우끽!"

"으께겍?"

"끄극?"

"키악!"

어느새 100여 마리의 황금원숭이들이 빈센트 주위로 몰려왔다.

"헉!"

또 들켰어?

덥석!

황금원숭이 한 마리가 빈센트의 팔을 잡았다.

"이, 이놈이···,"

그러나 라이트닝 쇼크를 시전할 틈도 없이,

휘리릿!

"허억!"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가 땅으로 처박혔다.

쿵!

"악!"

그리고 빈센트의 수난이 시작됐다.

휘릿! 퍼억! 휘리릿! 쿵!

땅에 처박고, 날아가고, 다시 잡혀서 박고.

황금원숭이들이 장난감처럼 빈센트를 가지고 놀았다.

※ ※ ※

거울 게이트는 깨어졌다.

수도꼭지가 잠겼다.

물밀듯이 쏟아지던 괴수들도 이젠 없다.

남은 건 잔여 괴수 정리.

후두두두두둑!

비가 내렸다.

치명적인 독기를 머금은 은빛 찬란한 폭우가.

선기와 독기를 아끼지 않았다.

암기들은 유도미사일처럼 괴수들의 몸을 관통했다가 다시 올라갔다.

푸푸푸푸푸푸푹!

깨끗하게 정리되는 데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시체도 남지 않았다.

죽자마자 재로 흩어져 사라져버렸으니까.

마수는 부산물과 결정체라도 남겨주는데.

"끝났군."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뭘, 그걸 가지고···,"

그런데 검선의 표정이 좋지 않다.

"무슨 일 있습니까?"

"···별거 아니야. 돌아갈 때가 된 거지."

"네?"

태주의 눈에도 보였다.

검선의 몸이 점점 흐려지는 게 말이다.

"어···,"

갑작스러웠다.

하필 지금 헤어질 때가 왔다니.

검선이 영영 지구에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막상 때가 오니 섭섭한 마음은 어쩔 수 없다.

"더 놀다 가셔야 하는데, 저 때문에···,"

"어허! 이 정도면 마음껏 놀았어. 여한이 없네."

"하하하, 정말요?"

"···뭐, 미진한 감이 없진 않네만."

"선계 가시면 신선님들께 안부 전해주세요."

"당연히 그래야지. 참! 백두 호텔 주차장에 내가 사뒀던 오토바이가···,"

팟!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는 검선.

"아!"

진짜 가셨구나.

솔직히 미안하다.

지루한 선계에서 지구에 왔는데, 마음 편하게 쉬다 가게는 못 할망정, 거울 게이트 괴수 처리라는 궂은일에 그를 동원하다니.

이제 마무리하자.

태주는 황금원숭이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눈을 돌렸다.

'빈센트 모레티···,'

거울 게이트를 부수는 와중에도 놈이 탈출하려고 한다는 걸 눈치챘다.

그래서 분신들을 보냈고.

"우끼기기기긱!"

원숭이들이 마치 전리품을 바치는 것처럼 빈센트 모레티를 머리 위에 이고 태주에게 달려왔다.

그중 몇몇은 놈이 들고 있던 소지품들도 챙겨왔다.

생긴 모습이 아공간 가방 같은데···,

"수고들 했어요."

"끼기기긱!"

순간!

팡팡, 파파파파파파팡!

황금원숭이들도 사라졌다.

'다들 갔네.'

벌써 1시간이 지났나?

그래서 전장에 남은 이는 태주와 빈센트 모레티뿐.

"커헉! 너···,"

심하게 당한 것 같다.

역으로 꺾여있는 팔과 다리, 그 사이로 보이는 전선의 피복.

군데군데 벗겨진 피부에서 드러난 새하얀 금속.

이놈도 로봇이었다.

다니엘이란 놈과 다를 바 없는.

"나, 날 죽일 건가?"

"상황 봐서."

"흐흐흐, 그렇군. 하지만 잘 생각해라. 난 대마공학자야. 생각보다 쓸모가 많은···,"

태주는 빈센트 모레티에게 손을 뻗었다.

스슷!

'역시 들어가는구나.'

그럴 줄 알았다.

'꺼내 볼까?'

스슷!

"허억! 너너, ···내, 내게 무, 무슨 짓을 한 거냐!!!"

스슷!

다시 집어넣고.

빈세트도 선계로 보낼 생각.

그게 낫다.

아예 지구에서 사라지게 하자.

유럽 제국에서도 찾고 있는 놈이다.

자신이 빈센트를 데리고 있다는 걸 알면 그쪽에서 가만히 있을까?

자칫하면 국가적 분쟁으로 비화될 수 있다.

'그나저나···,'

땅에 떨어져 있는 10개의 아공간 가방.

이 안엔 뭐가 들어있을까?

기대된다.

인챈트 대마공학자의 소지품이니까

'집에 가서 살펴봐야겠네.'

태주는 만리비검을 꺼내 올라탔다.

쐐애애애액!

카이로와는 반대 방향으로, 눈에 띌 수 있으니 투명부도 붙이고.

콰콰콰쾅!

날아가는 등 뒤로 폭발음이 들렸다.

지하 벙커가 터지는 소리였다.

※ ※ ※

선계(仙界).

스팟!

멀티플렉스 앞마당에서 검선이 모습을 드러냈다.

"익숙한 천장···, 아니 하늘이군."

막 귀환했는데도 벌써 지구가 그립다.

'아무도 없나?'

아무튼 뒷수습은 해야지.

'화가 많이 났을 텐데···,'

그때였다.

신선 한 명이 비틀거리며 멀티플렉스 안에서 나왔다.

"음? 내가 많이 취한 모양이군. 왜 추잡한 관종 신선이 보이지?"

주선이었다.

눈을 있는 대로 찡그리면서 검선을 노려보다가···,

"···어? 진짜네?"

"하하, 안녕하시오. 주선."

검선은 푸근한 미소로 오랜만에 만난 동료 신선에게 귀환 인사를 건넸다.

"다녀왔소."

주정뱅이라도 얼굴 보니 좋네.

하지만,

"무슨 개수작이야? 다녀오긴 개뿔!!!"

그러고는,

"다들 나와 보시오!!! 검선이오! 검선이 왔소!"

주선의 외침을 들은 신선들이 멀티플렉스에서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마치 게이트에서 나오는 괴수들 같았다.

"선계 대표 관종이 왔다고?"

"어디야? ···오호! 내 이날만 기다렸다."

"저저저, 피부 번들거리는 것 좀 보시오!"

"얌생이의 표본이로다."

"어디 멍석 없소? 당장 저자를 말아야겠소."

"멀티플렉스 출입 금지시켜!"

"스마트폰은? 그것도 정지해야지."

검선은 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예상대로 반응이 좋지 않다.

어떡하지?

하는 수 없다.

"···커헉!"

외마디 비명과 함께,

검선은 가슴을 부여잡으며 풀썩 쓰러졌다.

"얼씨구?"

"절씨구?"

"갑자기?"

"쇼를 하시오, 쇼를!"

"연기력이 형편없어."

"지구에 갔으면 연기 학원이나 갔다 오지 그랬소?"

"왜? 이참에 데굴데굴 뒹굴어보시지? 예전에 지구에 갔던 그때처럼."

신선들의 가열 찬 비난에도 손을 바들바들 떨면서 스마트폰을 꺼낸 검선, 지구에서 가지고 온 폰이었다.

"허억, 마, 마지막 영상을 재, 재생···, 큭!"

"뭔데 그래?"

"뭐긴 뭐야, 자랑질이라도 하고 싶은 모양이지."

소식을 듣고 온 당군악이 검선에게서 스마트폰을 받아들었다.

"내게 주시오. 어디 한번 봅시다."

당군악이 스마트폰을 열어 앨범에 저장된 마지막 영상을 실행했다.

신선들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몰려들었다.

"···이건?"

"호오?"

"그 문 아니오? 꽤나 크군."

"허어, 문에서 흉측한 요괴들이 나왔다고?"

"찢어 죽일 놈들이! 대체 지구엔 왜?"

"태주 대협은? 무사한가?"

검선이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태주 대협은 다행히 아무 일 없소. 내가 죽을힘을 다해서···,"

"뭐래? 죽을힘? 우리가 바본 줄 아나?"

"장난치는 거, 뻔히 눈에 보이는구먼."

"죽을힘치고는 카메라 워킹이 예사롭지 않아. 공중에 띄워 움직였군. 관종이 어디 가나?"

"어랍쇼? 엄살 부리는 것 좀 보시오, 가증스럽군."

"칭찬이라도 해 달라는 것 같은데, 어림도 없지."

"이거 면피용이 분명하오."

반면 당군악은 만족한 듯 표정이었다.

그래도 뭔가 하긴 하고 왔다.

아무것도 안 하고 처놀고 왔으면 대가를 치르게 해줬을 텐데.

"빈센트는?"

"워, 원숭이들이 놈을 붙잡은 걸 화, 확인했소. 큭, 아, 아마, 태주 대협이 잡았을 거요."

"그렇소?"

"내, 내가 그놈들을 잡느라 어, 얼마나 고생을···,"

"흐음, 수고가 많았군. 엄살 부릴 필요 없으니 그만 일어나시오."

"그, 그럼?"

"잘했소. 돌아왔으니 푹 쉬시오."

검선이 히죽 웃으며 벌떡 일어났다.

"흐흐흐, 방금 다 나았소."

독선이 인정해줬으니 다른 신선들 눈치 볼 필요가 없다.

이제 자랑할 일만 남았다.

< 검선, 귀환하다. > 끝

ⓒ 꾸찌꾸찌

=======================================

< 결과 보고회 >

삼한 제국 파주.

정연희도 라이브 방송을 시청하고 있었다.

거대한 거울 게이트.

그 안에서 나오는 정체불명의 괴수들

그리고 놈들을 베고 찌르는 강기의 검.

'아아아!'

검들이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정교한 초식을 펼쳤다.

그중에 몇 개는 매우 낯익었다.

바로 복마검법.

'···스승님.'

복마검법의 정수를 화면 안에서 볼 수 있다니.

'회장님은···, 아! 같이 계시구나.'

김태주 회장의 얼굴은 화면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순간순간 스쳐 지나가는 그의 암기와 흑색의 금속 주괴.

혼자만 볼 수 있나?

이미 보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티제이 길드원들에게도 채널의 링크를 보냈다.

'후원도 해드리고 싶은데,'

최대 금액이 얼마지?

'할 수 있는 만큼 하자.'

삼한 제국 뉴서울 황궁.

황제와 금수호도 생방송을 지켜봤다.

"인간이 아니군.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진짜 인간일 수 없어."

"맞습니다. 저도 처음 본 순간 그렇게 느꼈으니까요."

"후우, 김회장은 그래도 인간적인 면모가 있는데."

"그런가요?"

"···아직은 말이지."

저 노인도 영혼 연결자라는 건 확실하다.

경찰서에선 부정했지만 저 무시무시한 능력을 어떻게 설명해?

누구나 다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아무튼 게이트라니, 빈센트 모레티, 그 새끼가 한 거겠지?"

"거의 확실합니다."

"매드 사이언티스트가 얼마나 위험한지 알겠군."

황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대체 그놈은 저 괴수들을 어디서 불러온 걸까?

자신은 감당해낼 수 있을까?

어림도 없을 것이다.

괴수 한 마리 처리하기도 버겁다.

김회장, 저 인간 같지도 않은 노인, 두 명의 영혼 연결자가 저기 없었다면?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쳤다.

"근데 유럽 제국에서 해명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무슨 해명?"

"사하라 초원 사태에 김태주 회장이 개입한 것이 의심된다면서···,"

"모른다고 해. 그리고 맞는다고 하면 지들이 어쩔 건데?"

"만약 빈센트 모레티를 빼돌리면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던데요?"

사실 황제의 죽음과 연관이 있어 빈센트를 체포하려고 한다지만, 그보다는 인챈트 마도 공학이 삼한 제국으로 넘어가는 걸 우려하고 있을 것이다.

"알렉스 카이사르의 뒤를 이은 율리안 황제도 야심이 큰 놈 아닙니까?"

"흥! 지랄, 뒈지고 싶으면 무슨 일을 못 할까?"

여하튼 라이브 영상은 빅히트를 쳤다.

└ 엄청나다, 엄청나.

└ 저 노인도 영혼 연결자겠지?

└ 그럼 각성자겠냐? 딱 보면 모르겠어?

└ 저 실력이면 비욘드 엘리트 마수도 가능하지 싶은데.

└ 아예 찢어버릴걸?

└ 좀 잡아줬으면 좋겠다.

└ 그런데 다시 보기 영상은 왜 안 올라와?

└ 기다리다 보면 나오겠지.

그러나 거기서 끝이었다.

사람들은 녹화 편집본이 올라오길 기다렸지만 영영 올라오질 않았다.

※ ※ ※

태주는 뉴서울에 잠시 들렀다가 구례로 돌아왔다.

빈센트 모레티도 잡았고, 이젠 저딴 게이트가 나타날 일도 없을 테니, 한숨 돌렸다.

레이드용 도핑 물약 대량 생산 계획도 잡고, 발모제도 연구하고···, 특히 발모제는 서둘러야 할 것 같다.

제천대성의 분신은 전략 무기나 마찬가지였다.

최악의 상황마저도 단번에 반전시키는 히든카드라고나 할까.

하지만 다 써버렸다.

비축분이 필요하다.

'다음 배송 때 한 움큼만이라도···,'

발모제는 발모제고,

일단 전리품 확인부터 해야지.

태주는 무한공간에서 빈센트 모레티가 가졌던 아공간 가방들을 꺼냈다.

그러나,

'안 열리네.'

잠겨있었다.

원래 시중에서 팔리는 아공간 가방은 락이 없는 상태로 나온다.

락을 거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다.

매번 담고 꺼낼 때마다 인증 절차를 거치는 것이 불편하니까.

태주도 잠금장치 없이 사용해왔다.

'놈을 꺼내서 해제하라고 시키는 것도 그렇고.'

괜히 꺼냈다가 무슨 짓을 저지를 줄 모른다.

지금까지 만났던 영혼 연결자 빌런 중에서 가장 위험한 새끼가 바로 이놈.

'싹 다 선계로 보내버리자.'

독선의 부탁도 있었다.

빈센트 모레티가 무한공간에 들어가는지 확인되면 꼭 선계로 보내달라고.

놈을 원하고 있는 이들이 매우 많다면서.

'대충 왜 그런지는 알 것 같지만···,'

빈센트 모레티는 게이트 전문가다.

또한 인챈트 마도 공학은 진법, 술법, 보패와 의외로 비슷한 점이 많다.

'지구로 통하는 문을 열고 싶은 거겠지.'

태주도 바라던 바였다.

신선들이 이곳으로 왕래할 수만 있다면 지구는 더 안전해질 터.

순간!

찌르르,

마침 배송 신호가 떴다.

공유창고에 물건을 빼고 집어넣고.

빈센트 모레티와 그가 만든 골렘 다니엘, 그리고 잠금 상태의 아공간 가방 10개도.

'참, 망고 빙수도 집어넣어야지.'

구례로 오기 전 태주는 뉴서울 백두 호텔에 들러 검선이 먹었던 망고 빙수를 100개 포장해서 무한공간에 넣어왔다.

그가 선계로 돌아가 신선들에게 자랑할 것이 분명하니까, 맛이라도 보라고 할 참, 더불어 백두 호텔 주차장에 있던 신형 바이크 한 대까지.

태주도 검선의 성격을 잘 안다.

신선들이 얼마나 약 올라 할까?

이제 물건 확인.

먼저 편지를 꺼냈다.

천천히 읽어 내려가는데.

"응?"

예상하지도 못한 내용이 적혀있었다.

'와! 역시 우리 독선님은 스케일이 커.'

천계 신도시 건설이란다.

선계 월드까진 이해하겠는데 대규모 오피스텔 단지라니.

하지만 만만히 볼 계획이 아니다.

장기적인 안목에서 바라봐야 한다.

건축 설계도부터 시작해서, 건설 자재, 장비, 해야 할 일이 한두 개가 아니다.

'혼자선 안 돼.'

그래서 편지에 쓰인 당군악의 조언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삼한 제국에서 진정한 재벌이 되려면 건설회사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겠냐는 제안.

안 그래도 생각은 하고 있었다.

생기불끈 등 약품은 날개 돋친 듯 팔리고 있고, 공급 물량은 부족하기 때문에 신규 공장 건설이 필요했다.

거기에 파주 영지 개발, 조선소 도크 확장, 해운업을 위한 추가 항만 건설···, 다시 생각해봐도 건설업은 필수.

'어디 괜찮은 회사 없나?'

태주는 백서연과 만났다.

"건설회사가 있어야겠어요."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반색하며 동의했다.

"좋은 생각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어요. 창업할까요? 아니면 인수쪽으로?"

"창업은 너무 시간이 오래 걸려요. 인수가 낫겠죠?"

"염두에 두고 계신 회사가 있으신지"

"아뇨. 지금으로선 없습니다. 최소한 대형 아파트 단지 정도는 자력으로 치고 나갈 수 있는 규모면 좋겠는데···,"

"흐음,"

백서연은 잠시 고민하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덩어리가 크긴 하지만···, 후지 건설 어떠세요?"

"후지 건설?"

"네, 현재 경영이 힘들 정도로 휘청이고 있습니다."

"자세히 말씀해보세요."

들어보니 검선이 지구에 와서 친 사고로 일어난 나비효과였다.

아라비아 옥타곤 사건.

거기서 검선에게 얻어맞은 놈이 후지 건설 대표의 아들.

금수호가 그냥 넘어갈 리 없었다.

삼한 제국 국토부에서 후지 건설 시공에 대한 특별 안전 점검을 시행 중이란다.

부실시공의 증거도 나왔고, 몇몇 아파트는 붕괴 위험이 있다며 주민들을 퇴거시키는 동시에 손해 배상 소송도 당했고.

심지어 세무조사에 공매도까지.

후지 건설의 주가는 바닥을 모르고 폭락했다.

"인수 여력은 충분한가요?"

"빠듯하지만 해볼 만합니다."

"그럼 작업 들어갑시다."

※ ※ ※

선계(仙界).

멀티플렉스 앞에 대형 플래카드가 걸렸다.

<검선의 지구 방문 결과 보고회>

영화 상영관 하나를 통째로 빌렸다.

극장에 신선들과 염라를 비롯한 황천계 관리들로 가득 들어찼다.

"뭐, 대단한 경험 했다고 보고회까지 여는 건지."

"별거 있겠소? 그저 건물 사진이나 몇 개 찍고, 지나다니는 사람이나 구경하다가 왔을 게 뻔하오."

"아니면 맛집 같은 데 가서 사진이나 찍었든가."

"우리가 그런 거 보면 부러워할 줄 아나?"

"뭐, 모른 척하고 응해줘 봅시다."

솔직히 궁금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는 게 아닌 생생한 날것의 지구 문명이.

첫 번째는 블랙 카드를 긁고 다니는 영상이었다.

아아, 자신만만한 표정의 검선, 얼마나 얄미운지.

- 일시불이요.

- ···금액이 상당한데요?

- 걱정 마시오. 무조건 긁힐 테니.

오토바이 매장에 들러 최신형 모델을 한 번에 긁고 호텔에 가서 고가의 망고 빙수를 사 먹고, 백화점 명품관에서 정신없이 쇼핑도 하고···.

"험험,"

"···예상대로 별거 없네."

"저런 거야 우리 쇼핑몰에도 있지 않나."

"지구에 가서 한다는 일이 겨우 쇼핑?"

"선계 카페에도 빙수 기계 들여놨소. 신메뉴로 선도 빙수 판매할 터이니 많이 오시오."

신선들은 애써 폄하했다.

부러우면 지는 거니까.

검선이 영화관 무대에 마련된 연단에 올라와,

"이게 바로 태주 대협이 준 블랙 카드요. 한도 무제한이라고 들어봤는지 모르겠군."

검정색 실물 카드를 꺼내 보여줬다.

"저런! 다시 반납하지 않고 왜 가지고 왔나?"

"지 카드도 아니면서."

"분실 신고하고 다시 카드 받는 게 얼마나 번거로운데."

"쯧쯧, 민폐로다, 민폐야."

다음 영상은 비행기 퍼스트클래스에 올라타는 장면, 최고급 와인에 스테이크를 썰어가며 승무원에게 극진히 대접받고 있었다.

게다가 실물 사진, 동빈이라는 한글 이름과 영문 이름이 박힌 여권까지.

"···."

"···."

"후우,"

"쩝."

"제기랄."

분하다.

퍼스트클래스는 몰라도 여권은 조금 부러웠다.

아무 데서나 구하지 못한다.

희귀하고 또 고유한 아이템.

저러면 이중국적자 아닌가.

지구와 선계, 양쪽에 적을 두고 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선들을 이를 악물었다.

"태주 대협에게 부탁하면 안 되나? 여권이야 충분히 만들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렇지. 우리라고 지구에 못 갈 것도 아니고."

"독선에게 건의해 봅시다."

검선은 비릿하게 웃었다.

슬슬 분위기가 잡혀간다.

고작 여권에 흔들리는 모습이라니.

'진짜는 따로 있지.'

그래서 재생한 아라비아 옥타곤 클럽에서의 영상.

사이키델릭한 조명과 정신없이 몸을 흔드는 지구의 청춘들.

보고회가 열리는 상영관이 발칵 뒤집혔다.

"검선! 제정신이오? 클럽이라니, 나이가 몇인데."

"아니, 클럽에 입장하려고 반로환동을 해?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먼."

"쯧쯧쯧, 같은 신선으로서 태주 대협 보기가 너무 부끄러워."

"허어, 룸을 잡으려고 오백만 원이나 긁었어?"

"염치도 없군."

"이게 자랑이라고?"

"설마 부킹까지 한 건 아니겠지?"

부킹도 했다.

클럽의 웨이터가 어여쁜 지구의 여인들을 방으로 데리고 왔다.

- 다들 편히 앉으시오.

- 이 오빠 뭐야? 말투가 왜 이래?

- 잘못 들어왔다. 대충 있다가 빨리 나가자.

- 니 남친하면 되겠네.

- 죽을래?

그러자 신선들이 조소했다.

"흐흐, 내 이럴 줄 알았다."

"반로환동해 봐야 본판이 어딜 가나?"

"그러게, 어시장에 가면 상인들이 환영해 줬을 텐데."

"낄낄낄, 역시 삼한의 처자들은 보는 눈이 있어. 딱 보니 아닌 줄 알잖아."

"지금까지 본 거 중에 제일 재미있었소."

검선은 서둘러 부킹 영상을 중지하고 다음 영상을 재생했다.

그런데 이번 것은 심상치 않았다.

젊은 여인 하나가 술에 만취해서 웨이터에게 업혀 가고 있었다.

- 아무래도 약을 먹은 것 같소. 내가 처리하지.

잠시 후, 문이 열리자 그 여인의 머리채를 잡고 행패를 부리고 있는 양아치 두 명이 보였다.

그리고 검선의 응징이 시작됐다.

퍽퍽퍽퍽! 퍽퍽!

양아치들이 정신없이 처맞았다.

주먹에 자비가 없었다.

눈살을 찌푸리는 신선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신선이 사람을···,"

"인간계의 일은 인간에게 맡겨두면 될 터인데."

"이번은 너무 심했어."

"잘 타이르면 될 일을···,"

하지만 여자의 신분이 밝혀지자.

"허어억! 저, 저 여인이, 이상한 판사 윤아윤에 추, 출현했던 이윤미 배우라고?"

"대, 대체 뭔 일이오?"

"정녕 연예인을 만났단 말인가."

"클럽에 가면 연예인 볼 수 있다고?"

신선들이 경악했다.

또한 부러워했다.

TV나 스크린에서만 보던 배우라니.

신선들에게 있어 그들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검선이 실실 웃으며 스마트폰도 보여줬다.

"여기 함께 찍은 인증사진이오. 전화번호도 따였다오."

도저히 믿을 수 없었지만 진짜였다.

특히 황천계 관리들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펄쩍 뛰었다.

염라도 마찬가지였다.

"저 새끼들이 감히 이윤미 배우를!"

"아니, 검선! 그냥 때리기만 했나? 어디 하나 잘라 와야지."

"왜 안 죽였소?"

"당장 지옥에 처넣어야 해."

"허허, 드라마에서만 나오는 건 줄 알았는데, 현실에서 어찌 저런 일들이,"

경찰들이 출동했고, 수갑까지 채워졌다.

"저런, 포쾌 놈들은 어디 가나 똑같군."

"뒷돈을 받았을 거야."

"아니, 왜 도망가지 않고."

"다음 영상은 탈옥이오?"

이미 신선을 비롯한 상위계 존재들은 검선이 틀어주는 영상에 푹 빠져버렸다.

욕하고, 통쾌해하면서, 분노도 터뜨리고.

이번엔 다른 영상.

스마트폰으로 찍은 게 아니었다.

화질도 떨어지고, 들리는 음성과 사람들의 입 모양도 잘 맞지 않았다.

하지만 그 내용은 절대 단순하지 않았다.

이윤미 배우와 검선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는 경찰들, 가해자인 주제에 피해자라며 지구의 권력자들이 들이닥치고, 묵비권 행사하고···,

"마, 망할 놈들이!"

"아니, 왜 묵비권을?"

"검은 국 끓여 먹었소? 단칼에 목을 베어야지."

"답답하도다, 답답해. 우리 배우님은 어찌할꼬,"

"난 더 이상 못 보겠소."

신선들은 손에 땀을 쥐었다.

극적으로 치닫고 있는 스토리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마침내 우리 편이 나타났다.

태주 대협의 지인인 대형 상단의 주인과 그리고 황궁의 권력자.

경찰들과 악인들은 숨을 죽이고 납작 엎드렸다.

결국 시원하게 터진 강렬한 사이다.

상영관에 있던 모든 이들이 하나같이 손뼉 치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짝짝짝짝!

열광적인 반응에 손을 흔들며 화답하는 검선.

마치 영화제 시상식 같았다.

박수는 끊이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짝짝짝짝짝짝···,

"속이 다 후련하군."

"역시 한 수가 있었어."

"믿고 있었다고."

"한 방 먹었군. 내 인정하지."

"내가 졌소. 자랑할 만해"

"쿠키 영상은 없나?"

대본도 없는 실제상황이었다.

드라마보다 훨씬 재미있었다.

별거 없을 줄 알았는데 크나큰 착각이었다.

검선도 당시를 회상하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인간과 신선의 삶을 살아오면서 이보다 더 가슴이 벅차올랐던 순간이 또 있었나?

영상이 다 끝났다.

여운이 남은 나머지, 누구 하나 자리를 뜨는 사람들이 없었다.

현재 신선들이 공통적으로 가진 생각.

검선이 미치도록 부러웠다.

아니, 지구에 간 지 며칠 됐다고 저런 일들까지 경험해?

나도 지구에 가볼 수만 있다면,

이런 기회가 다시 찾아와 준다면.

염라도 마찬가지.

'지구에 문이라···,'

솔직히 말해 열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검선이 지구에서 찍어온 영상을 보기 전까진 말이다.

그러나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

자신이라고 해서 지구에 가지 못할 것이 있나?

'무조건 열어야겠어.'

어쨌든 지구 방문 결과 보고회가 성황리에 끝났다.

검선의 목적이 달성된 건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 결과 보고회 > 끝

ⓒ 꾸찌꾸찌

=======================================

< 두 놈이네? >

300년 전 마나의 침범, 그 때문에 세상은 인구 절벽이라는 악몽을 맞이하게 되었다.

거의 모든 산업이 퇴보하거나 현상 유지에 급급했다.

마나에 적응하면서부터 인류는 서서히 발전을 시작해 지금은 300년 전의 문명을 거의 다 복구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중.

그중에서 가장 발달한 분야라면 역시 의약 분야.

다양한 약들이 발명됐고, 난치병이라 불리었던 병들도 정복됐다.

최근까지 인류를 괴롭혔던 마나 거부증도 MRC의 개발로 해결했고.

하지만 이상하게도 발모제 연구는 지지부진했다.

300년 전보다 좋아지긴 했지만 완벽한 발모제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탈모는 유전이기 때문이다.

물론 태주도 알고 있었고.

그러나 천계 꽃이라면 유전마저도 극복할 수 있을 터.

특허가 만료된 옛날 약으로 연구에 들어갔다.

기존 발모제에 천계 꽃을 첨가해 약효를 증진시켜보는 것.

주로 사용하는 천계 꽃은 천상화(天上花).

피부를 깨끗하게 해주는 성분이 들어있다.

즉, 막힌 모공의 찌꺼기를 청소해주고, 제 기능을 다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일단 동물 실험부터.

군데군데 털이 빠진 일반 원숭이 한 마리를 어렵게 구했다.

며칠간 발모제를 발라주자,

"우끽?"

풍성하게 자라나는 털들.

'효과가 있네.'

다소 부작용이 있었지만 음양화(陰陽花)를 첨가하니 곧 해결되었다.

몸의 균형을 바로 잡아주는 음양화는 MRC에도 들어가는 꽃, MRC야 서서히 생산을 줄여나가고 있는 터라 발모제에 쓰일 재료는 충분했다.

'이젠 사람에게 실험해볼까?'

지원자들을 모집해보자.

선계에도 보내 약효가 있는지 검증도 받아보고.

그렇게 연구하던 와중에 태주에게 메시지가 왔다.

- 잠시 뵈었으면 합니다.

'음?'

제정원 문경식 차장이었다.

구례에 있을 테니 아무 때나 찾아오라고 메시지를 보내자 그날 밤에 한달음에 달려왔다.

간단하게 인사를 나눈 후.

문경식은 바로 본론을 꺼냈다.

"회장님, 후지 건설 인수합병을 계획하고 들었습니다. 현재 주식을 매입하고 계시다고···,"

"아! 네, 아무래도 건설 분야가 필요할 것 같아서요."

뭐지?

인수하지 말라는 건가?

하긴 정부로선 특정 기업이 문어발식으로 확장하는 걸 좋아하지 않겠지.

이미 제약과 해운, 조선에 독점적인 지위를 가진 티제이 그룹인데, 건설까지 진출한다고?

분명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다.

그래서 말리러 온 줄 알았다.

그런데?

"저희 제정원도 후지 건설 인수에 적극 협조하겠습니다."

"···협조요?"

"네."

조금 당황스럽다.

협조라니,

"그게 사연이 좀 있습니다."

"뭐죠?"

"혹시 항한 독립투쟁이라고 들어보셨는지."

"아!"

항일이 아닌 항한 독립투쟁.

과거 400년 전, 그러니까 1910년부터 1945년까지, 대한제국이 일본의 식민지였을 때 일제의 식민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벌였던 저항운동이 바로 항일 독립투쟁.

그러나 문경식 차장이 말하는 건 항한 독립투쟁이다.

주체가 바뀌었다.

일본에 대항하는 게 아니라 삼한제국에 대항하는 일본계 제국민의 독립투쟁을 의미한다.

"일부 일본계 국민들이 옛 일본 땅을 되찾고 독립 정부를 구성하겠다는 야욕을 품고 있습니다."

"그게 이번 인수합병과 관계가 있습니까?"

"후지 건설은 항한 독립투쟁 자금줄 중 하나입니다."

"흐음, 그랬군요."

아직 옛 일본의 영광을 잊지 못하고 있는 일본계 제국민들이 있다.

잃어버린 자신들의 조국을 다시 재건하겠다는 꿈.

그 주요 세력 중 하나가 바로 후지 건설.

"원래는 티끌도 안 되는 소규모 조직이었지만 폐하께서 와병하고 계셨을 때 그 세가 매우 커졌습니다."

"알만합니다. 그때가 좋은 기회였겠죠. 하지만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고요."

"그렇습니다. 폐하께서 거뜬히 일어나셔서 건재함을 과시하고 난 뒤, 놈들의 야욕이 완전히 꺾인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요."

일본이 삼한제국의 영토가 된 건 자신들의 잘못이 컸다.

현재 삼한제국은 만주 일대와 시베리아 일부분, 그리고 일본 열도를 영역으로 하고 있다.

동아시아 전체가 삼한의 영토라고 보면 된다.

류태현 황제가 이룩한 업적이기도 했지만 시류를 잘 탄 덕분이기도 하다.

먼저 중국은 마수 밀집지대에 핵을 터트림으로써 스스로 자멸했다.

그 결과 일어난 비욘드 엘리트 마수의 범람.

중국 본토는 버려진 땅이 되고 말았다.

그럼 일본은?

기후 위기와 지진 때문에 일본 땅의 절반이 사라졌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존을 핑계로 한반도를 선전포고도 없이 침략했다.

그러나 류태현 황제가 세운 대진국에 의해 각개 격파되면서 거꾸로 반쯤 남은 일본 땅도 빼앗겼다.

이웃 나라의 뻘짓.

그 덕분에 대제국을 건설한 삼한.

하지만 일본은 중국과 다른 점이 있다.

아직 반이나 되는 땅이 남아있다.

그래서 중국계와는 달리 일본계는 분리독립의 명분이 있다.

"괘씸한 놈들입니다. 원하는 사람에겐 본토로 이주할 수 있게 해줬고, 일본 땅에 남겠다고 결정한 사람들에겐 자치권도 주고, 사실 지배라기보단 폭넓게 권리를 인정해 줬는데 뒤통수를 친 셈이지요."

태주라고 모를까?

일본계 제국민들의 땅에 대한 욕심.

자신이 그 당사자였는데.

과거 혼다 가문이 일으킨 파주 영지 사태가 어떻게 보면 그 축소판 아니었나.

"황제 폐하 생각은?"

"흐음, 이건 비밀이지만···,"

문경식 차장이 태주에게 가까이 와서 속삭였다.

"곧 일본국 분리독립을 승인하실 겁니다."

"네?"

금지가 아닌 승인이라고?

"일본 땅에 독립국을 건설하고 싶으면 마음대로 해라, 라는 뜻이죠."

"그럼 설마?"

분리독립 허용.

이 말의 의미는···,

"일본 땅을 버리겠다는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제국 입장에선 쓸모도 없는 일본 땅을 영토로 가지고 있어 봐야 부담만 될 뿐이죠. 대륙에 집중해도 모자랄 판에."

맞다.

어차피 개척할 땅은 널리고 널렸다.

"제정원에서도 항한 독립투쟁 지도부 명단을 이미 확보하고 있습니다. 츠치다 쇼헤이 후지 건설 회장도 그중 한 명이지요. 곧 추방령이 내려질 겁니다. 일본 땅으로."

분리 독립하고 싶으면 해라.

단! 삼한제국에서 이룬 부와 성공은 모두 반납하고 맨몸으로 떠나라.

제정원이 후지 건설 인수를 도와주겠다는 이유도 바로 이것이다.

"후지 건설뿐만이 아닙니다. 항한 독립투쟁에 발을 걸쳤던 모든 일본계 제국민들은 다 추방 대상입니다."

"···관계없는 사람들은?"

"당연히 선택권을 줄 겁니다."

어떻게 보면 정말 잔인하다.

독립하면 뭘 해?

지금도 일본 땅은 서서히 사라지고 있는데.

그리고 일본은 섬이다.

사방이 해양 마수로 득시글거리는 바다.

한마디로 고립된 땅.

거대한 감옥이나 다름없는데, 그곳에 독립국을 세워봐야 뭘 하겠나?

가라앉는 열도와 함께 죽으라는 말이지.

"후지 건설 인수하십시오. 제정원과 정부가 적극적으로 도와드리겠습니다. 백서연 사장과는 따로 만나볼 거고요."

백서연도 반색할 터.

잘하면 그 큰 회사를 거저먹게 생겼다.

'뭐, 자업자득이니까.'

그나저나 빈센트 모레티는 선계로 잘 배송됐는지 모르겠다.

※ ※ ※

빈센트 모레티는 자신이 지금 어디 있는지 짐작이 갔다.

'아공간···,'

혹은 그것과 비슷한 어떤 곳.

설마 드래곤의 아공간이라도 되나?

그럼 김태주의 배후 영혼이 드래곤?

'그래도 그렇지.'

살아 움직이는 인간이 어떻게 아공간에 들어가지?

아무리 자신의 몸 절반 이상이 골렘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분명 뭔가 있어.'

인간의 힘이라 여길 수 없었다.

신이라면 모를까.

아공간이든, 뭐든, 여긴 이상한 공간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흐르는지도 알지 못했다.

빛도 없고, 공기도 없고, 어둠만 가득한 공간.

인공심장이 결정체 에너지 엔진이기에 망정이지, 평범하게 호흡하는 인간이었다면 벌써 죽었을 것이다.

사고도 제한되어 있었다.

정신이 들었다가, 나갔다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앞으로 어떻게 될는지.

하지만 이 생각만큼은 확고했다.

김태주에 대한 복수.

죽인다.

반드시 죽여버리고 만다.

인조 짝퉁 드래곤 하트를 하나 남겨 둔 이유가 있었다.

다니엘처럼 빈센트 모레티도 자신의 몸 안에 인조 드래곤 하트가 장착된 차원 게이트 발생기를 삽입했다.

작동하기만 하면 거울 게이트가 열릴 것이고 다른 세상의 같은 영혼, 자크 델루안이 나와서 합쳐질 것이다.

펑!

핵폭탄보다 더 무서운 대폭발로 어떤 생명체든 살아남을 수 없을 터.

그렇게 되면 자신과 자크, 둘 다 소멸할 텐데, 같은 영혼에게 미안하지 않냐고?

괜찮다.

미리 합의를 봤다.

이런 날이 오면 서로가 마지막 실험의 대상이 되기로,

사실 자크 델루안은 시한부 삶을 살고 있다.

그가 살던 세상이 망했기 때문에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에너지를 공급할 수가 없었다.

길어야 3개월이었다.

차원 게이트 실험의 궁극적 목적이 뭐겠나?

영혼 합쳐짐 상태를 극복하여 자크를 안전하게 이 세상에 불러오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모든 실험은 실패로 돌아갔다.

남은 길은 하나다.

자신이 바깥으로 나오게 되면 즉각 발생기를 작동한다.

김태주, 그놈과 함께 사라질 것이다.

바로 그때!

스슷!

갑자기 달라진 환경.

빈센트의 눈에 하늘이 보였다.

커다란 건물도 있고, 그렇다면 야외인가?

아무튼,

'나왔구나.'

망설일 필요도 없다.

"죽어라!!!"

빈센트는 영혼 매개 차원 게이트 발생기를 작동했다.

화아아아악!

지이잉!

거울 게이트가 열리는 동시에.

치지지직, 치직!

자신의 몸을 옭아매는 빛의 사슬.

"이제 끝이다!!"

그러나,

"검선."

"알았소."

누구지?

'이게 무슨···,'

※ ※ ※

선계(仙界).

당군악은 제천대성을 조곤조곤 구슬렸다.

"한 움큼만 더 뽑으세."

"···이제 뽑을 데도 없소이다. 내 머리를 보시오. 완전 민둥산이지."

"힙합퍼 흉내 내느라 항상 모자를 쓰고 다니면서, 무슨 머리 타령."

"그, 그럼 겨드랑이나 사타구니에서 뽑으면 안 되겠소?"

"어허! 그건 좀 지저분하지. 거기 옆구리 쪽은 아직 털이 많이 있군."

"···."

진짜 이러다간 온몸의 털이 남아나지 못할 지경.

"그런데 왜 내 털이 그렇게 많이 필요한 거요?"

"자네도 봤지 않나. 검선의 지구 여행기."

"···아!"

물론 제천대성도 봤다.

요즘 영화나 드라마보다 더 인기가 많았다.

"그 게이트라는 곳에서 나오는 요괴들 말이오?"

"맞네. 물론 우리 태주가 놈들에게 당할 일은 없겠지만···, 그쪽 세상이 위험해지니까."

"그런 일이 있어선 안 되지. 지구가 망하면 물건은 어디서 조달한단 말이오?"

제천대성은 비장한 표정으로 옆구리에 붙어있던 털을 꽉 잡았다.

부우우욱!

한주먹 뜯고 요력을 불어 넘겨주니,

"허허허,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네."

"···이제 가도 되겠소이까?"

"어디 급한 일 있는가?"

"카페에서 선도 빙수를 판다더이다, 나도 먹어보려고···,"

그때였다.

찌르르르,

당군악의 머리에서 울리는 배송신호.

"떴군."

"오! 떴단 말이오?"

지나가던 신선도 들었다.

"떴다고?"

"그럼 그 새끼 왔나?"

"누구?"

"누구겠어? 빈센트라는 놈이지."

지구 배송 소식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당군악은 긴장했다.

과연 있을까?

공유창고를 열어보니.

'허어,'

두 놈의 인간이 있었다.

이 중에 누구지?

한 놈은 전혀 인간 같은 느낌이 없고, 나머지 한 놈은 그마나 인간성이 느껴지니,

'이놈이겠군.'

먼저 물건을 교체하고 나서,

금세 소문이 퍼졌는지 신선들이 멀티플렉스 앞마당으로 몰려왔다.

"표정을 보니 온 것 같은데,"

"빨리 꺼내 보시오."

"빈센트 새끼, 얼굴이나 봅시다."

"물어볼 것이 너무 많아."

당군악은 빈세트 모레티를 꺼냈다.

순간!

"죽어라!!!"

나오자마자 다짜고짜 빽빽 소리를 질러댔다.

신선들은 어리둥절했다.

"죽어?"

"나보고?"

"왜?"

"이 새끼, 언제 봤다고···,"

동시에,

화아아아악!

지이잉!

게이트가 열렸다.

빛의 사슬도 튀어나왔다.

"이제 끝이다!!!"

당군악은 이 현상이 무엇인지 바로 알았다.

"검선!"

그도 마찬가지.

"알았소."

빈센트를 끌어안고,

스팟!

거리를 벌렸다.

후두두두두둑!

빛의 사슬이 끊어졌다.

게이트 속박에서 벗어나자 빈센트는 깜짝 놀랐다.

"헉?"

뭐지?

이런 식으로 벗어난다고?

너무나 단순하게 끌어안고 도망치는 것만으로?

'이게 무슨···, 마, 말도 안 돼.'

게이트가 열릴 때 이뤄지는 속박은 차원의 힘에 의한, 즉 인간으로선 절대 벗어날 수 없는 규칙과도 같은 건데···,

'가만!'

자신을 끌고 가는 사람은 낯이 익었다.

김태주와 함께 사하라 사막에 왔었던 그 노인이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김태주는 보이지 않았다.

공통점이 있다면 죄다 노인이었다.

인간처럼 옷을 입고 있는 원숭이 한 마리도 있었고.

'경로당인가?'

그리고,

쑤욱!

거울 차원 게이트에서 낯익은 얼굴이 빠져나오고 있었다.

"와, 왔구나···,"

반가운 얼굴이다.

자신과 생의 마지막을 함께 할,

다른 세상의 같은 영혼 자크 델루안.

치지직! 치지지지직!

다시 생겨나는 빛의 사슬.

자크가 자신 쪽으로 끌려온다.

그러면 그렇지.

이제 영혼의 합쳐짐만이 남았다.

빈센트는 처절하게 부르짖었다.

"자크!!! 이리로 오라! 비로소 우린 하나가 될 것이다!!!"

하지만,

스슷!

"어?"

사라졌다.

자크 델루안이 말이다.

빈센트는 눈을 끔벅거렸다.

어디로 갔지?

알 리가 있나.

당군악이 자크 델루안을 무한공간에 집어넣었다는 걸.

그런 식으로 영혼 합쳐짐을 차단했다는 사실을.

신선들은 감탄했다.

빈센트 모레티가 지구로 배송된 것도 대단했지만.

"두 놈이네?"

"하나가 온 것도 고마운데 하나가 더 와?"

"이건 마치···,"

"원 플러스 원이군."

"행사 기간인 모양이야."

"역시 태주 대협이오, 하나면 부족할 거 같아서 하나를 더 보냈다니."

당군악은 무한공간에서 골렘 다니엘을 꺼내며 말했다.

"사실 투 플러스 원이라오. 한 놈 더 있었소."

"엥?"

"진짜네?"

"아니지, 이놈은 품목이 다르지 않소."

"맞소, 정확하게 합시다. 이건 사은품이고."

"그런가?"

빈센트는 넋이 나갔다.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이들은 누구지?'

또 여긴 어디고?

< 두 놈이네? > 끝

ⓒ 꾸찌꾸찌

=======================================

< 황천의 절차 >

발모제를 만드는 것도 시급하지만 당군악이 계획하는 천계 신도시 건설도 빼먹으면 안 된다.

그 출발점이 바로 후지 건설 인수.

이 회사를 통해 필요한 자재들을 구입하고 건설 노하우를 정리해서 선계로 보낼 계획.

인수작업은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그 이면에 복잡한 사정이 있다지만 그것까지 참견할 필요는 없고.

천계에 천인들을 위한 아파트를 건설한다.

과연 가능할까?

'안 될 게 뭐 있어?'

노동력은 충분하다.

황천계의 죄수들과 천계의 군대.

이들이 어디 보통 인간들인가?

솔직히 장비도 필요없다.

짓는 방법만 알려주면 된다.

먼저 모델하우스부터 만들어보자.

태주는 구례에 있는 조립식 하우스 전문 업체를 불렀다.

요즘 유행하는 오피스텔 구조도를 구해서.

"크기는 24평대로, 최신형 오피스텔 방을 그대로 구현해주시면 됩니다."

"지붕은 필요 없습니까?"

"네, 그냥 박스형으로 만들어주세요. 가구나 소파, 가전제품도 빌트인으로 넣고."

"알겠습니다. 회장님."

"재료도 좋은 걸로 써주세요. 진짜 집과 똑같이 튼튼하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모델 하우스가 다 만들어지면 이걸 통째로 선계에 보내야 하는데···,

'들어갈지 모르겠네.'

이게 걱정이다.

사실 면적은 충분하다.

무한공간이 얼마나 넓은데, 공유창고도 그렇고.

다만 한 번에 들어갈 수 있는 크기가 문제.

처음엔 대형 TV 한 대 넣기도 빠듯했다.

검선의 할리 바이크를 집어넣을 때도 얼마나 간당간당했나?

그러나 몇 번의 영혼 연결을 더 거치고, 더불어 천도까지 복용하니, 지금은 대형 리무진 세단도 척척 집어넣을 수 있는 크기가 됐다.

하지만 그보다 큰 물건은 실험해보지 않았다.

그럴 필요도, 기회도 없었으니까.

조금 전에 대형 덤프트럭이 들어가는지 실험해보긴 했다.

물론 그것도 아무 탈 없이 쑥 들어갔고.

태주는 양산항으로 왔다.

아메리카로 가는 대형 컨테이너들이 적재되어 있는 곳.

덤프 트럭도 들어가는 판에 컨테이너 하나 정도는 우습지.

그렇다면 몇 개까지 가능할까?

한번 쌓아보자.

20피트 컨테이너 하나의 넓이는 약 5평.

이걸 가로세로 합쳐 6개 놓으면 30평.

높이도 생각해서 2층으로 쌓으면 총 12개.

30평형 아파트 한 가구를 통째로 집어넣는 거나 다름없다.

'들어갈까?'

들어가야 하는데,

'해보면 되지.'

태주는 무한공간을 열었다.

그리고 정신을 집중해서···,

스슷! 쑥!

"오!"

단번에 사라지는 컨테이너 12개.

'미쳤구나, 미쳤어.'

이걸 왜 지금 해봤을까.

구례에서 짓고 있는 조립식 모델하우스도 충분하게 들어간다.

이쯤 되니 궁금하다.

들어갈 수 있는 최대 크기가 말이다.

이번엔 가로세로 합쳐 8개.

2층이면 16개, 평수로 40평.

스슷! 쑥!

'어라? 또 들어가네?'

40평도 문제없다.

그럼 50평은?

스슷, 쑥.

'···.'

할 말이 없다.

이렇게 쉽게 들어갈 줄은 몰랐다.

그러나 한계가 있었다.

딱 60평까지였다.

그 이상은 다 들어가지 않고 컨테이너가 땅에 남았다.

그래도 이 정도면 한 번에 못 들어갈 물건이 별로 없다.

'조립 시공 업체에게 연락해서 하나 더 만들어 달라고 해야겠네.'

무한공간에 넣고 다녀도 문제없을 것 같다.

야외에서 일이 있을 때 이거 하나 꺼내면 끝.

전기야 결정체 발전기를 연결하면 충분하고.

아무튼 다음 선계 배송은 모델하우스다.

선계와 천계에 지구의 실제 거주 공간이 첫선을 보이게 될 것이다.

'배송 문제는 해결됐고.'

순간!

지잉,

전화가 왔다.

받아보니,

- 여어, 김회장.

금수호 황궁 비서관이었다.

"네, 접니다."

- 다름이 아니라, 내일 황궁 만찬회가 열리네. 얼굴도 볼 겸 황궁에서 보세나.

만찬회라,

"꼭 참석해야 합니까?"

- 어허, 우리 만난 지 꽤 됐잖아. 반드시 참석해주게.

어쩔 수 없다.

"네, 황궁에서 뵙죠."

- 흐흐흐, 기다리겠네.

만찬회는 무슨,

그렇지 않아도 할 일이 많아 죽겠는데.

※ ※ ※

선계(仙界).

원 플러스 원.

하나가 왔는데 또 하나가 더 왔다.

두 개가 됐으니 선택의 폭이 넓어졌다.

빈센트 모레티는 선계 멀티플렉스 앞마당에서 구속부와 벽마부를 온몸에 덕지덕지 붙인 상태로 신선들에게 추궁을 당하고 있었다.

"뒈질래? 빨리 말해. 어떻게 하면 지구로 가는 문을 열 수 있나?"

"···."

"허어, 이놈 봐라? 내 말을 씹어? 눈알만 데굴데굴 굴리고, 감히 신선에게!"

"···."

"이놈 우리말 모르는 거 아냐? 삼한제국 언어로 또박또박 말했는데."

"···."

"외국인이라 우리말 모르는 건가?"

그러자 검선이 정색하며 끼어들었다.

"우리말이라니? 당신들이 삼한제국 국민이오?"

"무, 무슨?"

"여기서 정식으로 신분증을 가진 신선은 나밖에 없는데?"

"···제기랄!"

"어디 가서 함부로 삼한제국 국민이라 사칭하고 다니지 않았으면 좋겠소. 거슬리니까."

사실 빈센트 모레티가 삼한의 언어를 모를 리 없다.

그는 지구 최고의 석학, 모르는 언어가 있을 리가.

다만 이들이 자신들을 지칭하는 호칭.

바로 신선.

신선이란다.

이게 말이나 되나?

삼한제국 언어를 사용하는 신선이라니.

"영화나 소설 보면 마법사들이 머리에서 손을 대 정보를 막 빼내고 그러던데, 할 줄 아는 선인 있소?"

"쯧쯧, 무슨 세상이 판타진 줄 아나."

"···판타지 아닌가?"

"흐음, 듣고 보니 그렇네. 귀곡, 그대는 방법이 있을 것 같은데."

빈센트 모레티 앞에서 쪼그려 앉아 요모조모 살피던 귀곡 선인이 답했다.

"지금 연구 중이오. 헌데 이놈의 두뇌가 일반 사람들의 그것과 매우 달라서."

"다르다면?"

"뇌에 기계 장치 같은 것도 붙어있고, 금속 선 같은 것도 보이고."

"허어, 인간이 아니라 로봇이로군."

"변신 로봇인가?"

하나둘씩 의견을 내어놓는 신선들.

"너무 윽박지르지 말고 살살 구슬려봅시다."

"되겠소? 오자마자 자폭하려고 한 놈이잖소."

"낄낄낄, 자크!!! 이리로 오라! 비로소 우린 하나가 될 것이다!!! 막 이랬지."

"실로 장엄하더이다."

"난 눈물이 날 뻔했지."

신선들의 조롱에도 빈센트는 입을 열지 않았다.

지금 꿈인지 생시인지도 분간이 안 되는 판에.

"원숭아! 네 머리 긴고아를 이놈에게 씌워보자."

"흐음, 신선이 어찌 사람에게 고문하려 하시오?"

"씨발, 신선은 고문하면 안 돼?"

"···그런데 독선은?"

"황천계로 갔소. 아마 염라와 만나고 있을 거요."

황천계? 염라라니,

빈센트는 여전히 상황판단이 안됐다.

당군악은 자크 델루안을 무한공간에 넣고 염라와 대화 중이었다.

황천계의 법보로 이놈의 머리를 들여다볼 수 있는지 물어보기 위해.

염라가 잠시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해보기는 하겠지만 이대로 작업 진행하면 안 될 것 같네."

"왜 그러시오?"

"한 놈은 오늘내일하고, 또 한 놈은 길이 안 들었어. 빈센트, 그놈 선계 오자마자 헛짓거리했다며?"

염라의 말이 맞다.

빈센트는 영혼 합쳐짐으로 자폭하려고 했다.

놈과 같은 영혼은 생명이 다해가는지 보기에도 골골하고.

"드렉 카락스처럼 지옥으로 보내서···,"

"에이, 그놈이야 원래 안 죽는 놈이고, 영혼도 마귀라 다를 바 없는 놈이라서 지옥에 처넣고 벌을 주면 되지만, 이놈들은 금방 죽을 거야. 아니면 자살하거나."

"죽으면 영혼을 수거해서 몸에다 넣으면 되지 않습니까?"

지옥의 죄인들처럼.

그러나 염라는 머리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이놈들이 우리 인간계에서 왔나?"

"그건 아니지요."

"여기서 죽으면 영혼 자체가 사라질걸? 황천에도 절차가 있는 법이야. 아무 영혼이나 죄인으로 만들 순 없어."

"끄응,"

죽으면 끝이라는 말이다.

태주가 놈을 잡아서 보내준 성의가 사라지는 셈.

"그럼 방법이···,"

"한가지 해볼 것이 있긴 한데,"

"말씀해주십시오."

염라는 전자담배를 한껏 들이마시며 말을 이었다.

"일종의 편법이라고 할까? 절차를 따라보자고, 잘 될는지는 모르겠지만."

"흐음, 자세히?"

"그러니까···,"

황천계의 규칙.

인간계에서 누군가가 사망하면 차사나 사자들이 혼백을 데리고 와서 판관들의 판결을 거쳐 환생 혹은 지옥행이 결정되는 것.

환생이면 여래계로 보내고, 죄인이면 그 영혼이 지옥에 귀속된다.

그러면 마음껏 다룰 수 있다.

죽지도 않을뿐더러, 초혼령을 움직여 가지고 있는 지식을 쏙 빼먹는 것도.

"한번 해보세. 원 플러스 원이 좋은 게 뭔가? 한 놈 실패해도 한 놈이 있으니,"

"그렇죠."

"일단 이놈부터 작업해보지. 자크라고 했던가?"

"그럴 겁니다. 빈센트가 그렇게 불렀죠."

자크도 기계 몸을 가졌다.

그러나 군데군데 전선이 튀어나오고, 행동도 빌빌대는 것이 곧 죽는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게다가 이 자크라는 놈은 원본 아닌가? 차원 게이트 기술도 놈이 알아냈고, 빈센트는 영혼 연결로 습득했을 뿐이니."

"좋습니다."

"내게 맡기게. 강림에게 미리 일러뒀으니 알아서 처리할 거야."

순간!

스우웅!

황천계 업화궁에 문이 생겼다.

그 안에서 나오는 강림.

"대왕, 다녀왔습니다."

"적당한 장소는 물색했느냐?"

"네, 인간계에 서안(西安)이라는 곳이 있는데, 그곳에 흑점이라는 객잔이 존재합니다."

"흑점? 어디서 많이 들어왔는데."

"인간을 납치해서 인육으로 만두를 만들거나 강시를 제조하는 곳입니다."

"아! 이제 기억이 나는군."

"그런데 알고 보니 마교 잔당의 소굴 중 하나였습니다."

그러자 눈빛을 반짝이는 당군악.

속세의 인연에서 벗어나 신선이 되었다지만 마교는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마교 놈들이 아직 남아있단 말이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지요.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허허."

"흑점의 수장이 천마신공을 익힌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미 마공이 뇌를 침범해서 반쯤은 미친 거나 다름없으니, 놈에게 자크라는 놈을 던져주면 바로 죽일 겁니다."

"그래? 그럼 던져주고 오너라."

염라가 문을 열었다.

인간계로 통하는 문.

황천계 관리들이 가지는 특권.

신선들은 이 문을 통과할 수 없다.

오직 천계 상제만이 신선들의 인간계 강림 권한을 가지고 있다.

당군악이 무한공간에서 자크 델루안을 꺼냈다.

스슷,

자크는 밖으로 나왔다.

하지만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움직일 수도 없었다.

가슴팍에 붙여진 노란색 종이 때문 같은데.

'왜 이 지경이 됐지?'

자신이 사는 세상에서 거울 차원 게이트가 열렸다.

누가 불렀을까?

당연히 빈센트.

게이트가 열렸다는 뜻은?

두 가지였다.

빈센트가 차원 게이트 속박을 해결하여 자신을 구해줬거나, 아니면 과학자로서 실험 대상을 자신에게 직접 적용하는 숭고한 행위를 감행했다거나.

처음엔 해결된 줄 알았다.

게이트에서 나와보니 빈센트는 속박을 끊고 멀어지고 있었고, 그로 인해 영혼 합쳐짐 현상이 일어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착각이었다.

빈센트, 날 구해준 건가?

아니, 나도 잡혔어.

이런 식이었다.

강림은 구속부가 붙여져 꼼짝도 못 하는 자크 델루안을 어깨에 둘러멨다.

"자, 가보자. 인간계로."

인간계라니.

그럼 여긴 어딘데?

그리하여 자크 델루안은 인간계, 강호 무림이라고 부르는 세상으로 강림과 함께 쑥! 넘어갔다.

※ ※ ※

강호 무림 산서성 서안.

빈민가 쪽에 허름한 객잔이 하나 있었다.

평범한 듯 보이지만 사실은 흑점이라 불리는 마굴.

객잔의 주인은 제갈영호라는 이름의 무림인이었다.

원래 제갈세가의 후기지수, 그러나 조부이신 제갈천이 마교에 투신했다는 이유로 절대독마 당군악에 의해 가문이 멸문했다.

'이, 찢어 죽일 당군악!'

대세를 따르는 게 뭐가 잘못인가?

강호는 마교에 의해 먹힌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천마를 따랐던 것이고.

천마가 그렇게 허무하게 죽을 줄 누가 알았나?

알았다면 마교에 들어가지 않았겠지.

반드시 복수하고 만다.

대상은 바로 사천 당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싹 빨아먹을 것이다.

제갈영호의 조부이자 세가의 가주, 마교에선 뇌마라고 불리었던 제갈천이 죽기 전에 자신에게 남긴 비급, 천마신공.

본질이 흡정공이기에 흑점을 차려놓고 사람들을 납치해 정혈을 빨았다.

시체는 갈아서 만두로 만들었고.

자신있다.

비록 천마만큼은 아니지만 절대독마 당군악이 사라진 사천 당가는 충분하다고 여겼다.

'이제 곧···,'

그때였다.

쑤우우우욱!

콰쾅! 쾅쾅쾅쾅!

"끄아아아악!"

무언가가 객잔 지붕을 뚫고, 안에서 일하던 흑점 직원 하나를 으깨버리며, 마룻바닥을 관통해 제갈영호가 있는 지하까지 떨어졌다.

다가가서 보니 사람이었다.

"무슨···,"

제갈영호는 흠칫 놀랐다.

대체 이놈은 뭐지?

왜 하늘에서 떨어져?

그러나 정체는 중요하지 않다.

자신이 운영하던 흑점을 부쉈다.

거느리고 있던 부하도 죽였다.

살심(殺心)이 불처럼 일어났다.

전후 사정은 알 필요도 없다.

"이놈!"

제갈영호가 손날을 세웠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그리고 쓰러져있는 인간의 가슴팍에 찔러넣었다.

파직! 치지지직!

"응?"

철갑옷을 입었나?

마치 금속 덩어리에 찔러넣는 느낌.

하지만 이 정도로 천마신공의 마기를 막을 수 없다.

제갈영호는 강기를 일으켜 더 깊숙이 찔렀다.

파치치치칙!

원래 자크 델루안의 심장은 기계 몸을 움직이는 엔진과도 같은 것.

외부에서 공격이 닿자 오작동을 일으켰다.

찌이이이···,

동시에 폭발이 일어났다.

콰아아아아아앙!

"허억!"

입에서 피분수를 일으키며 뒤로 퉁겨나가는 제갈영호.

자크 델루안 또한 기계 몸이 산산조각 나버렸다.

순간!

스으으으윽!

어느 틈에 강림차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손을 뻗어 몸체에서 빠져나오는 자크 델루안의 혼백을 수거했다.

하지만 제갈영호는 죽지 않았다.

토혈하며 정신을 잃었을 뿐.

기껏해야 주화입마?

"아깝군. 나도 원 플러스 원으로 한 놈 더 데려가려고 했는데···, 아직은 때가 아닌 모양이야."

어쨌든 성공이다.

자크 델루안은 강호무림, 즉 인간계에서 죽었다.

혼백도 빠져나왔고.

이젠 황천계의 법칙을 적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

'나머지 한 놈도···,'

이런 식으로 인간계에서 죽여 혼백을 빼내면 된다.

< 황천의 절차 > 끝

ⓒ 꾸찌꾸찌

=======================================

< 자력갱생하라. >

츠치다 쇼헤이는 뉴서울 황궁에서 입궁 절차를 밟고 있었다.

오늘은 황제 폐하가 주재하는 제국 주요 인사 만찬회 모임이 있는 날.

정계, 재계, 학계, 문화계, 군부, 마스터급 민간 각성자 등, 거의 모든 인사들이 초청을 받았다.

모이는 사람만 해도 무려 3,000여 명.

츠치다도 초대장을 받아서 왔다.

자신은 후지 그룹의 회장 겸 후지 건설 사장이니까.

그룹의 규모는 백두와 비교할 바 못 되지만, 건설 부분만큼은 삼한제국 탑 수준이었다.

그런 후지 건설이 흔들리고 있었다.

아니, 갈기갈기 찢어지고 있다는 말이 어울릴 것이다.

불시에 세무 회계 조사가 들어왔다.

조사 한 번만으로 주식은 3연속 하한가를 기록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국토부의 특별 안전 점검 시행.

부실로 지어놓은 건축물들이 속속 적발됐다.

이게 치명적이었다.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콘크리트에 건축 폐자재 섞은 것도 발각되고, 철근 빼먹은 것도 들키고.

어마어마한 과징금과 심지어 철거 및 재건축 명령을 받았다.

과징금이든, 철거명령이든, 모두 다 합법적인 절차에 따라 이루어졌기 때문에 대응도 불가능했다.

후지 건설이 탈세와 부실시공을 한 건 명백한 사실이니까.

공매도 세력까지 뛰어들고, 주가가 폭락을 거듭하고, 주주와 은행, 채권단들이 움직이고···, 심지어 적대적 인수합병 소문까지 들려오고 있었다.

인수 주체는 티제이 그룹.

백서연 사장이라는 년이 주주들과 은행 채권단들을 만나고 다녔다.

티제이가 후지를 인수할 거라는 소문이 퍼지면 주가야 올라가겠지만 문제는 대량의 장외거래, 이걸 막을 방법이 없었다.

'대체 내가 뭘 잘못했길래.'

황궁과 티제이 그룹이 서로 합작해서 자신의 회사를 빼앗으려고 해?

'하이에나 같은 놈들···,'

외부적으로는 그 사건 때문이었다.

아들이 일으킨 성폭행 미수 사건.

자신도 영향력을 행사하려다 정욱철과 금수호에서 걸려 버렸고.

아들은 구속을 피할 수 없었다.

그래도 불복하지 않고 다 인정했다.

어쨌거나 죗값은 치르려고.

그런데 후지 그룹 전체가 위험해졌다.

더 나아가 대업에도 차질이 생긴다.

항한 독립투쟁.

자금줄에 문제가 생긴다는 의미.

'후우, 대일본 제국은 반드시 부활할 거야.'

항한 조직 규모는 의외로 큰 편.

전 분야에 골고루 흩어져 있다.

성본 변경을 통해 삼한식 이름을 사용하는 일본계 국민 중에도 있고, 성본 변경을 하지 않고 일본식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사람 중에도 있다.

거의 목적을 이룰 뻔했다.

과거 류태현 황제가 와병 중이었을 때가 절호의 기회였다.

마인에게 당한 일격으로 몇 년 동안이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류태현, 제국을 지배하던 절대 권력이 죽어간다.

어떻게 이 기회를 놓쳐?

이황후 세력에게 접근해 삼황자에 힘을 실어주는 한편, 일본계 세력을 결집하고, 일부 중국계와 연합해서 독립의 기치를 높이 세우려고 했다.

하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

와병 중이었던 황제가 다시 거뜬하게 일어났고, 규슈 영지 혼다 카즈오 일파 반란 사태로 인해 군부의 일본계 세력이 다수 숙청되어버렸다.

자칫하면 항한 독립투쟁 조직의 실체가 발각될지도 모른다.

지금은 다시 기회가 오기만을 바라며 수면 아래로 숨었다.

황제라고 천년만년 사나?

각성자라고 해도 결국 인간.

언젠간 반드시 죽는다.

황권을 향한 권력투쟁도 재개될 것이고.

여기서 가장 중요한 핵심.

그냥 독립만으론 안 된다.

독립을 위해선 막대한 돈이 필요했다.

현재 일본 열도는 자력으로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삼한제국은 일본의 독립을 위한 빨대가 되어야 한다.

기술이든, 자본이든, 군사력이든, 삼한의 자양분을 쪽쪽 빨아서 일본으로 넘겨야 한다.

그런데 이런 어이없는 사건이 발생할 줄이야.

츠치다 쇼헤이는 황궁 만찬장에 들어왔다.

들어오자마자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누군가를 찾았다.

'저기 있군.'

저자도 당연히 초대를 받았겠지.

츠치다는 그를 향해 빠르게 다가갔다.

"김태주 회장, 나 츠치다 쇼헤이요."

태주는 고개를 갸웃했다.

처음 보는 사람이다.

"누구신지?"

"츠치다 쇼헤이라니까!"

"흐음, 저 아세요?"

"···나, 난 후, 후지 건설 회장이오,"

"아!"

진작에 밝히지.

다짜고짜 와서 이름만 말하면 누군지 어떻게 알고?

붉게 상기된 표정으로 태주에게 바짝 다가와 으르렁거리는 츠치다.

"왜 이렇게까지 나오는 거지?"

"뭘요?"

"황궁과 작당해서 내 회사를 빼앗으려는 수작 말이야. 세무조사에, 안전 점검에, 채권단까지 만나고 있잖아."

이 새끼가···,

간덩이가 부었나?

"당신 회사가 그렇게 된 게 내 잘못이야?"

"···그, 그럼 아니라고?"

"내가 부실 공사를 했나? 탈세도 내가 한 거고?"

"···."

태주는 피식 웃었다.

알고 보면 딱한 놈이다.

미래가 어떻게 흘러갈지 아마 상상도 안 될 것이다.

"충고하나 하지."

"무슨···?"

"후지 건설 말고 다른 회사도 나한테 넘겨. 가격이 적당하면 사줄 테니까. 생각 있으면 여기서 구두로 계약하던가."

으드드득!

츠치다는 핏발 선 눈으로 태주를 노려보며 이빨을 악물었다.

"가, 감히!"

"몇 푼이라도 챙기고 싶으면 이게 마지막 기회야."

"···어림도 없다."

"뭐, 마음대로 하던가."

태주는 황제가 만찬회를 연 이유를 알고 있다.

여기 모인 3천여 명의 사람들, 이들 중 절반 이상이 일본계 제국민들.

아마 여기서 선포할 것이다.

일본 독립국 승인을 말이다.

이윽고,

만찬장 문이 열렸다.

황궁 비서관 금수호가 먼저 입장했다.

"황제 폐하께서 입장하시겠습니다. 모두 예를 갖추시오."

사람들이 고개를 숙였다.

저벅저벅, 강렬한 패도의 기세를 뿌리며 만찬장을 가로지르는 황제 류태현, 미리 설치된 연단에 올라 입을 열었다.

"다들 바쁜 일이 있음에도 이렇게 참석해줘서 고맙다."

의례적인 인사가 끝난 후.

"묻겠다. 삼한제국이 민주주의 국가인가?"

그러자 누군가가 나서서 답했다.

"아니옵니다. 삼한제국은 절대 군주정, 따라서 제국의 주인은 폐하이십니다."

"틀렸다. 삼한의 주인은 백성이다. 과거 대한의 국민들과 중국계, 일본계, 러시아계, 동남아시아계 등, 다양한 백성들이 함께 모여 삼한을 이루고 있다."

"황송하옵니다."

"이들 모두 삼한의 기틀을 이루는 소중한 백성들이다. 짐은 항상 그들에게 감사하고 있다. 하지만···,"

잠시 말을 멈춘 후 형형한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는 황제, 그리고 곧 말을 이어갔다.

"일부 제국민 중에 삼한의 백성이길 거부하는 자들이 있다고 들었다."

웅성웅성, 다소 시끄러워지는 만찬장.

황제가 아예 못을 박아버렸다.

"여기 항한 독립투쟁 조직원들이 있으면 손을 들어보라. 일본의 독립을 원하는 자들 말이다."

순간!

뚝!

만찬장에 침묵이 흘렀다.

특히 일본계 주요 인사들의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만찬회 초대인 줄 알았는데, 대숙청의 현장에 제 발로 걸어 온 건가?

"부정하지 마라. 그리고 걱정하지 말라. 짐이 이 자리에서 너희들을 지목한 건 벌을 주기 위함이 아니다."

그럼 뭐지?

"황명으로 명한다. 오늘부로 일본국의 독립을 승인하겠노라. 원하는 사람들은 제국민이 아닌 일본의 국민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

만찬장에 대형 폭탄이 떨어졌다.

갑자기?

"이제부터 일본 열도는 삼한의 영토가 아니다. 안전을 보장해 줄 테니 가고 싶으면 삼한을 떠나라."

여전히 만찬장은 침묵,

누구 하나 입을 여는 자가 없었다.

대체 황제의 의도가 뭐지?

진짜 독립을 승인하겠다는 말인가?

"물론 선택의 기회는 주겠다. 삼한의 국민으로 남을지, 일본의 국민이 될지."

황제의 말을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단!"

마나가 실린 무시무시한 목소리로.

"항한 독립투쟁에 관여한 제국민은 선택의 기회가 없다. 무조건 6개월 안에 모든 걸 정리하고 삼한을 떠나라. 무시하고 계속 남아있을 시엔 극형에 처하겠다."

일본계 국민들이 많이 거주하는 삼한의 남부 지역에서 선출된 의회 의원, 기무라 타케시가 손을 벌벌 떨면서 황제에게 말했다.

"···폐, 폐하."

"말하라."

"그렇다면 일본이 제대로 된 독립국이 될 때까지 제국에서 지원해주실 계획은 있사옵니까?"

"지원?"

황제가 코웃음쳤다.

"일본과 삼한이 서로 지원해주고 지원받고 그럴 사이더냐?"

"···네?"

"네놈도 역사를 배웠다면 잘 알 텐데. 독립의 의미가 옛 일본을 계승하겠다는 뜻 아닌가."

"어어, 마, 맞습니다만,"

"마나 침범 이후, 한반도가 혼란에 빠졌을 때, 선전포고도 없이 선제 침략해온 국가가 어디였나?"

"···우, 우리 조상들도 새, 생존을 위해서,"

"지금 네 말이 얼마나 얼토당토않은지 알고는 있겠지?"

기무라 의원은 반박할 수 없었다.

"명심하라. 장차 세워질 일본 독립국은 삼한의 우방이 아니다. 따라서 상호 간의 외교 관계는 수립하지 않겠다. 출입국도 엄격하게 규제하겠다. 경제 교류, 즉 수출입도 허용하지 않는다. 너희들의 힘으로 오롯이 자력갱생하라."

사람들은 이제야 깨달았다.

이건 독립 승인이 아니다.

잔인한 추방령이었다.

일본 열도라는 거대한 감옥에 가둬버리는.

츠치다 쇼헤이는 정신이 아예 나가 있었다.

항한 독립 조직 인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자력갱생?'

대체 무슨 수로?

모든 걸 빼앗기고 추방당할 위기.

한편 태주는 감탄했다.

'역시 카리스마 있어.'

비록 자신과 만날 땐 실없는 소리나 슬슬 해대는 허당이라고 해도 말이다.

외통수로 몰아넣었다.

일본 독립국이 세워져도 저들이 뭘 할 수 있을까?

전쟁?

지구 최강대국 중 하나인 삼한제국에게 어떻게 덤빈다고?

결국 스스로 고립을 선택한 거나 다를 바 없었다.

사실 현실적으로 보통의 국가나 인간관계에서 이런 식으로 매몰차게 소통을 단절한다는 건 결코 사이다가 아니다.

그러면 큰일 난다.

오히려 자해에 가깝다.

자신도 엄청난 피해를 받는다.

공동체 사회에서 서로 복잡한 경우로 얽혀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경우는 전혀 문제가 아니다.

삼한의 입장에서 일본 땅은 애물단지나 마찬가지.

그곳에 석유가 있나, 천연가스가 있나? 기껏해야 마수 밀집지대에, 게다가 땅 자체가 사라지는 중인데.

끊어내는 것이 훨씬 이득.

도의적 책임?

이 사태와 관련이 없는 이들에겐 선택권을 줬으니 문제될 것도 없다.

'그나저나 서연씨에게 마음껏 쇼핑하라고 말해둬야겠어.'

후지 건설 정도로 만족하려 했는데, 몇 개 더 사도 되겠다.

※ ※ ※

황천계.

자크 델루안의 혼백이 올라왔다.

신속하게 형벌을 내리고 죄인으로 처분.

뒤를 이어 같은 방식으로 빈센트 모레티의 혼백 또한 황천계로 올라왔다.

명부책에 이들의 이름은 적혀있지 않았다.

적을 필요가 있나?

또한 적지 않아도 된다.

염라가 판관의 저울추로 빈센트를 심판했다.

"빈센트 모레티, 네 죄를 네가 알렸다."

당연히 저울추는 악(惡)으로 이동했다.

빈센트와 자크,

이들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나?

빈센트는 황제를 비롯해 유럽 제국의 군대를 몰살시켰고, 자크는 자신의 세상을 멸망으로 이끌었다.

아무리 세상이 달라도 자신들이 지은 죄는 영혼에 새겨지는 법이니까.

진리를 탐구한다는 명목으로 아무런 죄책감 없이 사람들을 죽였다.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보다 더 한 놈들이다.

악마나 다를 바 없었다.

마귀 중의 마귀였다.

"널 지옥 형에 처한다!!!"

쾅!

판관의 망치가 휘둘러졌다.

그러자.

스르르륵,

인간의 신체가 생기더니 빈센트의 혼백이 안으로 들어갔다.

"됐나?"

"됐군."

"됐어!"

"그럼 이젠 막 조져도 안 죽는 건가?"

"우리가 데리고 가면 되오?"

염라가 손을 휙휙 내저으며 말했다.

"빨리 데리고 가시오."

어차피 편법으로 올라온 영혼이었다.

천지신명의 눈을 잠깐 속인 것이라고 보면 된다.

선계와 인연을 맺은 태주마저도 오래 있지 못했다.

지구가 검선을 밀어낸 것과 같은 이치, 세상의 순리는 절대 거스를 수 없다.

즉, 시간이 지나면 자크와 빈센트, 둘의 영혼은 자연스레 소멸할 것이다.

그러기 전에 빨리 뽑아먹어야지.

죄인 빈센트 모레티는 선계로 넘어왔다.

검선이 기다렸다는 듯, 잠겨진 아공간 가방 10개를 툭 던지며 말했다.

"열어라."

"···."

"어쭈? 반항인가?"

그러고는 강림을 보며.

"얘, 말 안 듣는데?"

"알았소."

원래 죄인들은 차사에게 꼼짝도 못 한다.

천마나 혈마처럼 영혼의 격이 높은 놈들은 반항할 수도 있지만, 빈센트 모레티는 그 수준까진 가지 못했다.

"열어."

강림이 명하자 벌벌 떨리는 손으로 아공간 가방의 수식을 건드려 잠금을 해제하는 빈센트 모레티.

"아싸!"

아공간 가방이 열렸다.

그 안에서 쏟아져 나오는 각종 골렘과 결정체들.

"오오오오!"

"이게 다 뭐요?"

"건설 장비 같은데,"

"···그런데 이거 어떻게 사용하지?"

"머리 좋은 신선들이 방법을 찾아내겠지."

선계에서 가장 머리가 좋다고 알려진 두 신선.

귀곡 선인과 갈홍 선인은 황천계에 있었다.

염라가 초혼령을 흔들었다.

딸랑! 딸랑! 딸랑!

그러자 자크 델루안의 일생이 마치 영화처럼 펼쳐졌다.

인챈트 마도 공학에 입문하면서부터 마침내 대마공학자가 되기까지, 자신의 세상에서 자크가 겪었던 수많은 기억과 사건.

귀곡과 갈홍은 간접 체험 방식으로 자크의 일생을 공부하는 중, 공책에 필기구를 준비해서 말이다.

그런데 당군악도 함께 끌려왔다.

역시 필기구를 지참한 채로.

"···내가 왜 마도 공학을 배워야 하는지,"

"어허, 독선! 생각이 왜 그리 짧소?"

"무슨?"

"그대가 마도 공학을 배워서 태주 대협에게 전해줘야지. 그럼 지구에서도 아공간 가방 만들고, 어? 골렘도 만들고, 어? 차원 게이트도···,"

"아니, 자, 잠깐 내가 무슨 수로? 지구에 갈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쯧쯧, 영혼 연결은 국 끓여 먹었나? 연결되면 자동으로 지식이 전해지지 않소. 그러니 우리 마도 공학, 열심히 공부합시다. 잘 가르쳐 줄 테니."

"···."

당군악도 머리가 나쁜 건 아니지만.

'···등선까지 했는데 공부하라고?'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태주에게 이득이 되는 거라면 해야지.

< 자력갱생하라. > 끝

ⓒ 꾸찌꾸찌

=======================================

< 공부도 좋지만 쉬어가면서 >

황제의 일본국 독립 승인.

후폭풍은 엄청났다.

만찬회가 끝나기도 전에 언론사들의 속보 경쟁이 이어졌다.

<속보) 황제 폐하, 일본국 독립 승인, 일본 열도 삼한제국 영역에서 제외.>

<속보) 일본 독립국 주도 세력들에게 6개월의 시한을 두고 삼한을 떠나라고 명령.>

<속보) 신생 일본국과는 외교 관계를 수립하지 않을 방침.>

<속보) 폐하께서 자비를 베푸셨다. 각자의 사유 재산은 인정할 방침.>

<속보) 단! 부동산과 건물, 공장 등 생산 시설은 제외, 오직 금융자산만 인정.>

이건 핵폭탄이나 마찬가지였다.

사실상 추방령.

물론 선택의 기회도 부여했다.

<일본계 제국민에 한해, 귀화 재신청 시행 예정.>

<본토와 열도 주민 모두 포함 대상.>

<가까운 관공서에 방문하여 재신청서 작성 가능.>

<결격 사유가 없으면 모두 승인 처리.>

결격 사유가 뭐겠나?

항한 독립투쟁에 협조했던 일본계 제국민은 제외하겠다는 의미.

이미 제정원이 명단을 다 확보했고, 명단에 없는 사람들도 차후 수사를 통해 밝혀내겠다는 입장.

속보를 보자마자 일본 열도에서 살던 제국민들이 먼저 짐부터 쌌다.

여기 있으면 갇힌다.

싹 정리하고 귀화 재신청해서 본토로 넘어가야 한다.

일반 일본계 주민들은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갔다.

승인이 거절되면? 이러다 자신도 추방되면 어떡하지?

분노가 독립을 주도했던 일본계 세력에게 돌려졌다.

책임은 그들에게 있었다.

주제도 모르는 것들이, 뭐, 독립?

정신이 나갔나?

쥐뿔도 가진 게 없으면서,

자신들이 가진 권력과 부는 다 삼한제국에서 나온 건데.

그 시점에서 제정원은 항한 독립투쟁 조직의 명단을 언론에 공개했다.

정계와 군부, 재계, 일부 언론계, 학계, 문화계, 각성자, 전반에 걸친 이름들.

비난이 쇄도했다.

당장 삼한을 떠나려는 요구가 빗발쳤다.

"뭐, 이렇게 됐네."

만찬회가 파한 후, 금수호 비서관이 태주에게 다가왔다.

"역시 폐하께선 화끈하시네요. 하지만 선의의 피해자는 없었으면 좋겠습니다만."

"걱정하지 마시게나. 혐의가 확실한 놈들만 쫓아낼 거야."

그리고는 종이 한 장을 꺼내 보여주면서,

"후지 그룹이 소유하고 있던 계열사 명단이네. 가지고 싶으면 찍어보게. 다 가져도 좋고."

"···이거 특혜 아닌가요?"

"특혜긴 하지만, 자네가 아니면 어디다 넘겨? 대신 완전 고용 승계 원칙만 지켜줘."

"그야 뭐,"

정리해고 같은 건 염두에 두지도 않았다.

오히려 사람을 더 뽑거나 연봉도 올려줄 생각이니까.

태주는 후지 그룹 계열사 명단을 찬찬히 훑어봤다.

후지 건설은 무조건 인수하고,

"제약도 있군요."

"규모는 작아. 주로 건강식품 만들어 파는 곳이거든."

그래도 제약 공장인데.

"그럼 후지 건설에, 후지 제약하고, 후지 철강, 후지 중공업, 또···, 후지 스마트팜 인수하겠습니다."

"응? 스마트팜은 왜? 농업 관련 회사 아닌가?"

"약품의 원료가 되는 약초나 독초를 채취가 아닌 재배 방식으로 전환할 생각이라서요. 키워서 써야죠."

"아하! 그렇군."

처음엔 약팔이로 시작한 회사.

갈수록 점점 커진다.

제약, 해운, 조선, 철강, 중공업, 스마트팜···,

"그런데 폐하께선?"

"집안 단속하러 가셨네. 그놈들이 황가 친인척들에게 접근한 정황도 있어서."

"골치 좀 썩이시겠어요."

"봐! 예전에 내가 했던 말 기억나지? 그러니까 자네도 결혼하지 말고 즐기면서 살아."

글쎄, 아직은 결혼 생각이 없지만 그렇다고 영영 하지 않겠다는 건 아니다.

좋은 사람이 생기면 못할 것도 없다.

금수호와 헤어진 후,

태주는 구례로 내려왔다.

조립식 하우스 시공업체에서 모델하우스가 다 완성됐다고 연락이 왔다.

현장엔 아무도 없었다.

그저 모델 하우스 한 채만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

'잘 만들었네.'

마음에 든다.

깔끔하게 지어졌다.

소형 발전기로 전력도 연결했고.

'넣어보자.'

스슷! 쑥!

무한공간으로 집 한 채가 쑥 들어갔다.

때마침 공교롭게도,

찌르르,

울리는 선계 배송 신호.

'조금만 늦었어도 못 보낼 뻔했어.'

모델 하우스도 넣고, 발모제도 넣고, 각종 잡다한 물건들도···,

'선계에선 뭐가 왔지?'

특별한 건 없었지만.

'오!'

제천대성의 황금 털이 들어있었다.

마침 다 써서 필요했었는데.

비축분이 마련되어 든든하다.

이 정도면 그 이상한 게이트가 한 번 더 열린다고 해도 충분할 터.

빈센트 모레티, 독선이 그놈은 어떻게 처리했는지 궁금하다.

선계로 보낸 건 잘한 결정이었다.

인첸트 마도 공학?

해로운 학문이다.

물론 아공간 가방 같은 이로운 물건도 만들어 낼 수 있지만, 또 없다고 해도 크게 불편한 것도 아니니까.

지구가 망하는 것보단 훨씬 낫다.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일본 독립 세력들이 땅을 치고 후회하며 황제에게 백기 투항했지만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가차 없이 내려지는 추방령.

부동산과 설비 매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6개월이 지나면 처분하지도 못하고 맨몸으로 떠나야 한다.

백서연이 지휘하는 인수 협상단이 후지 건설의 알짜 기업을 쏙쏙 빼먹었다.

점점 규모를 키워가는 티제이 그룹.

아메리카 공화국에서 인수한 화이벡 제약 공장들은 모두 티제이 바이오 제약으로 간판을 바꿔 달면서 현지에서 생기불끈과 새살쑥쑥, 양산에 돌입했다.

양산 조선소에서 대형 컨테이너선 8척과 2척의 유조선이 완성되어 항구에서 진수식을 거친 후, 태평양을 건넜다.

태주 또한 바쁘게 움직였다.

기어코 부작용 없이, 망가진 모근도 재생해서 머리를 쑥쑥 자라게 하는 발모제를 완성했다.

특허와 식약청 판매 허가도 빠르게 진행됐고.

곧 있으면 발모제가 시중에 풀릴 것이다.

태주도 이제 여유가 생겼다.

사실 여유라기보다는 무료함.

갑자기 선계가 그리워진다.

한 번 더 갔으면 좋으련만···,

'다들 잘 있을까?'

심심한데 일이삼백이나 보러 가야겠다.

놈이 어디 있는지는 잘 알고 있다.

바로 백서연의 집무실.

츄르와 간식이 끊이지 않는 곳.

요즘 태주와 함께 있는 시간보다 서연씨와 함께 하는 시간이 훨씬 더 많다.

'명색이 영수란 놈이···,'

자칫하면 완전 고양이가 될라.

야성을 깨워줄 필요가 있다.

같이 사냥이나 나가봐야지.

하지만 보통 엘리트 마수로는 턱도 없고,

그렇다면?

'중국···,'

버려진 땅.

온통 마수 밀집지대.

하지만 비욘드 엘리트 마수만 없다면 인류에게 크나큰 도움이 될 풍요로운 땅.

'때가 됐어.'

비욘드 엘리트 마수 레이드 말이다.

당장은 어렵고,

'슬슬 준비나 해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