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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태주가 구례 종합시장 공방으로 가서 흑암철 주괴를 가느다란 철사로 길게 뽑았다.

그 후, 연구실에서 긴꼬리 쎅토끼 한 마리를 들고, 지리산 마수 밀집지대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끼잉? 끼기기기긱! 끼기기기···,"

"무섭냐? 왜 이리 날뛰어?"

쎅토끼 목에 목줄을 채워 움직이지 못하게 고정했다.

그리고 나무 기둥과 흑암철 철사로 얼기설기 간단한 울타리를 만들어 쎅토끼 주변에 설치했다.

여긴 자이언트 반달곰 출몰 지역.

쎅토끼는 먹이사슬 최하에 있는 마수라, 금방 잡아 먹힌다.

하지만 이 흑암철 울타리라면?

태주는 만리비검을 타고 하늘 위로 치솟아 올랐다.

그리고 기척을 죽여 조용히 아래 상황을 관찰했는데.

'왔구나.'

풀숲을 헤치고 나타난 자이언트 반달곰 한 마리.

쎅토끼의 울음을 듣고 나타난 모양.

'···진짜였어.'

분명 쎅토끼를 발견했음에도 불구하고 놈은 가까이 다가오지 못했다.

그냥 보자마자 도망갔다.

다른 놈들도 마찬가지.

조금 지나자 흑암철 울타리 주변은 거의 공동화됐다.

마수들이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변종 3줄 무늬 모기조차도 접근하지 않았다.

'미쳤구나. 미쳤어.'

지옥의 금속 흑암철.

마귀나 요괴뿐 아니라 마수들에게도 효과가 있다.

기가 막힌다.

천계 꽃에 버금가는 효용성.

사용할 곳이 너무나 많다.

태주의 머릿속에서 오만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예를 들어.

'흑암철로 철도를 깔면?'

기찻길 주변은 마수 안전지대가 된다.

또한,

'바다에도 적용되나?'

해양 마수들이 즐비한 넓은 바다에 말이다.

이것도 실험할 필요가 있다.

만약 이마저도 성공한다면?

'바닷길이 열리는 거지.'

물류 혁명.

그로 인한 세상의 변화.

'이러면 굳이 아메리카에 공장을 세울 필요가···,'

삼한 땅에 추가 공장을 세워 바닷길을 이용해 수출하는 것이 훨씬 편할 수도,

뭐, 화이백을 인수하는 것도 좋긴 하지만.

'어쨌든 선택지가 하나 더 늘었네.'

마음이 급하다.

바다에도 적용되는지 빨리 알아보자.

< 흑암철의 가치(1) > 끝

ⓒ 꾸찌꾸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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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흑암철의 가치(2) >

마나 침범 직후부터 바닷길이 끊긴 건 아니었다.

지구 온난화로 해안 도시가 잠기고, 마수들이 출현하기 시작했어도 배는 바다를 계속 돌아다녔다.

기존 조선소는 물에 잠겼지만, 새로 조선소를 만들어 선박을 건조해냈고.

뱃길이 완전하게 끊긴 건 50년도 채 되지 않았다.

바닷속이라 마나의 영향을 비교적 적게 받아서 그런 걸까?

육지와는 달리 해양 쪽은 마수들이 늦게 나타났다.

따라서 엘리트 해양 마수 출현도 상대적으로 매우 느렸다.

사실 일반 마수뿐이었다면 바닷길이 끊기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엘리트 해양 마수.

커다란 유조선도 단번에 수장시킬 힘을 가진 놈들.

그렇다고 모든 바다가 다 위험한 건 아니다.

가까운 바다, 특히 수심이 얕은 곳은 마수들이 살지 않는다.

그래서 고기도 잡을 수 있고, 가두리 양식도 가능하다.

먼 바다로 나가면 위험한 거고.

바닷길도 그렇다.

비교적 짧은 바닷길은 살아있다.

이를테면 제국과 옛 일본 열도를 연결하는 일부 항로.

과거 황제가 일본 정벌을 단행하는 과정에서 여러 시행착오 끝에 안전한 뱃길을 찾아냈기 때문이다.

지금도 규슈 영지와 제국을 오가는 페리호가 있다.

하지만 이 항로를 벗어나면 위험하다.

무수한 사고사례들이 존재한다.

태주는 먼저 소형 어선 한 척을 구했다.

가까운 바다, 주로 가두리 양식장에서 사용하는 배.

배 밑창에다 흑암철 철사를 그물모양으로 엮어서 고정한 후.

쏴아아악!

배를 타고 먼바다로 떠났다.

한참을 나아갔다.

이 정도면 마수가 나타날 법한 장소까지.

하지만 멀쩡하다.

'혹시 나 때문에 못 다가오는 건 아니겠지?'

쎅토끼를 대신 배에 태우고 자신은 만리비검으로 하늘 높이 날아올랐는데도.

'안전하네.'

심지어 쎅토끼의 목에 줄을 묶어 바다에 빠트렸다.

마치 낚시하는 것처럼.

그러나 입질도 오지 않았다.

'눈으로 확인해볼까?'

태주는 배의 속도를 저속으로 맞춘 후, 바닷속으로 들어갔다.

안력을 돋우어 살펴보니, 저 멀리 보이는 칼날 지느러미 백상아리 한 마리, 가장 대표적인 해양 마수.

게다가 크기가 예사롭지 않다.

'···엘리트?'

저정도 크기면 엘리트가 확실하다.

밑창에 흑암철 철사를 두른 배가 엘리트 칼날 지느러미 백상아리 쪽으로 다가갔다.

순간!

화들짝 놀라며 서둘러 반대 방향으로 헤엄치는 엘리트 백상아리.

'효과 확실하네.'

마지막으로 태주는 배 밑창에 장착한 흑암철 철사를 모조리 벗겨냈다.

그러고는 만리비검을 타고 다시 하늘 위로.

잠시 후.

쾅! 콰직! 콰앙!

해양 마수의 공격이 시작됐다.

어느 틈에 나타난 송곳 머리 박치기 돌고래.

어선은 순식간에 구멍이 뚫리고 조각조각 나버렸다.

확인은 끝났다.

정말이지 기가 막힌 결과였다.

배 전체를 흑암철로 만든 것도 아니다.

그저 철사로 만들어 대충 붙였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마수들은 접근할 엄두도 못 냈다.

제대로 만들어내면?

'뱃길이 열리는 거지.'

어디 뱃길뿐인가?

육상교통, 기찻길에도 혁명이 온다.

안전한 지역 철로는 기존의 철 그대로, 마수 밀집지대 근처를 지나는 철로는 흑암철을.

그것 말고도 흑암철의 쓰임새는 무궁무진하다.

하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문제점.

물량은 어느 정도일까?

수요를 다 감당할 만큼 지속적인 공급이 될까?

'될 것도 같은데···.'

분명 더 있을 것이다.

그것도 많이.

※ ※ ※

태주는 며칠간 흑암철 실험에 몰두했다.

알아볼 것이 너무나 많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실험했다.

철사를 다시 용광로에 녹여 갖가지 모양으로 성형했다.

녹여서 철판으로도 만들어보고, 용접해서 붙여보기도 하고.

효과는 다를 바 없었다.

몇 번을 녹여서 성형해도 효과는 사라지지 않았다.

마지막 실험.

합금.

다른 금속과 섞어봤다.

합금은 살짝 다른 결과를 냈다.

순수 흑암철과 흑암철이 절반 이상 섞인 합금, 30% 이하로 섞인 합금을 준비했다.

많이 섞인 건 순수 흑암철과 크게 차이 나지 않았지만, 적게 섞인 건 마수들의 접근을 허용했다.

만약 합금해서 쓴다면 적정 비율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할 터.

이제 최종 실험.

태주는 지리산으로 다시 가서 흑암철이 많이 섞인 철사를 가지고 자이언트 반달곰의 몸뚱이를 칭칭 감아버렸다.

과연?

"크켁? 케케켁? 케에에엑?"

공포에 못 이겨 몸부림치는 마수.

그러더니,

"쿠오오오오오오!"

광기에 휩싸여 미쳐 날뛰었다.

우지끈, 주위의 나무들이 손짓 한방에 쓰러진다.

'흠···,'

공포가 광기를 불러온 것 같다.

웨이브 때의 마수보다 더 미쳤다.

신령비도를 꺼내 간단하게 정리하고.

츠핏! 푸욱!

이런 식으로는 사용하면 안 될 듯.

흑암철은 마수들에게 공포를 느끼게 할 뿐이지, 무력화시키는 효과는 없는 듯하다.

실험은 끝났다.

태주는 구례 본사로 돌아왔다.

백서연을 따로 불러서.

"서연씨, 삼한제국에서 우리가 인수할 제약회사가 더 있나 알아보세요."

"···네? 제국에서? 그럼 화이백 인수는요?"

"생각이 달라졌어요. 굳이 인수할 필요가 있을까 싶어서."

"으음, 차, 찾아보겠습니다."

"그리고 삼한에 조선소가 있나요? 대형 선박을 건조할 수 있는?"

"어···, 있긴 있지만, 모조리 다 폐업한 상황이라."

한때 조선 강국이었던 삼한제국.

그러나 바닷길이 끊겨 죄다 망해버렸다.

"그런데 대체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는지?"

"아직 결정된 건 아니지만···, 바닷길을 통해 수출할 방법이 생길 것 같습니다."

"네?"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백서연.

"확실하다 판단되면 자세히 말씀드릴게요. 일단 알아만 두시라고."

"아, 알겠습니다."

"그리고 MRC 3차 출고도 끝났으니까 이제 생산량 슬슬 줄이고, 생기불끈과 새살쑥쑥 생산 비중을 높여요."

"바로 시행하겠습니다."

마나 거부증이라는 것이 심근경색처럼 당장 위험한 질병은 아니다.

천천히 진행되는 질병, 중증 이상의 환자들은 거의 다 치유된 거나 마찬가지니까, 생산량 줄여나가도 문제가 없다.

백서연과의 대화가 끝난 후,

찌르르르,

때가 되자 여지없이 울리는 천계 배송 신호.

'떴구나.'

중형 발전기 설치를 위한 나머지 부품들을 집어넣고, 그리고 신선들과 천인들이 주문한 물건도 넣고···,

그리고 흑암철 실험 결과 영상과 요청사항을 담은 공기계 스마트폰도 넣었다.

'수량이 충분할까?'

반드시 긍정적인 답변이 올 것이다.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아직 출국 날이 많이 남았다.

태주는 자택으로 가서 김동훈을 만났다.

"동훈아."

"회장님!"

"전에 이야기한 거, 준비는 잘 돼 가?"

"아! 인터넷 연결 없이 자체 인트라넷 구축하는 거 말이에요?"

"그래."

"장비들은 다 준비해뒀습니다. 그리고 설치하는 법을 영상으로 찍는 중이고요."

"될 수 있으면 자세하게, 영상을 보는 사람이 네트워크에 구성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고 가정하고."

"그렇게 하고 있어요. 근데 설치하는 사람이 누구길레? 제가 직접 가서 설치하면 안 돼요?"

"응, 안돼."

나도 선계는 못 가는데.

그러고 나서 태주는 일이삼백이와 시간을 보냈다.

선도 3개를 꺼내 하나씩 먹여주고.

"나 없다고 사고 치면 안 된다?"

"냐앙!"

"이참에 파주에 가 있어. 무슨 일 있으면 즉시 사람들 도와주고."

"냐아아아···,"

시간을 보내다 보니 미국으로 출국할 시간이 다가왔다.

고맙게도 황제가 전세기 한 대를 통째로 내어줬다.

뉴서울로 가서 하루를 보낸 뒤.

태주는 실무진들과 함께 비행기에 올랐다.

※ ※ ※

아메리카 공화국 캔자스시티.

뉴플라자 호텔에서 금융가, 투자업체의 거물들이 모였다.

대형 은행장, 헤지펀드, 사모펀드 운용자.

데이비드 모건이 이 모임의 우두머리다.

그가 화이백의 지분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태주가 아메리카에 입국해서 기자회견을 한 후, 주식거래 재개합시다."

"첫날부터 최고가 경신하겠어요."

"열심히 사 모아야겠네."

"최대한 뜯어내야죠. MRC 판매로 돈도 많이 벌었을 텐데."

데이비드 모건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우리에게 직접 접촉해올 겁니다. 절대 헐값에 넘기지 말아요."

"···백악관에서 개입하면?"

"흥! 지들이 뭘 어떻게 한다고?"

"여론을 이용할지도 몰라요. 인기가 많잖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도 대응할 정도의 힘은 있어요."

그랬다.

여긴 아메리카 공화국.

그리고 이곳을 지배하는 것은 자본의 힘.

오랜 세월 동안 구축해온 자본의 힘은 정치 권력보다 더 막강하다.

"놈이 방향을 틀면 어떻게 합니까? 예를 들어 화이백 인수를 포기하면?"

"맞아요. 백악관의 도움을 받아 신공장 건설을 추진한다거나···,"

사실 그게 가장 큰 걸림돌.

하지만 데이비드 모건도 대응책이 있었다.

"부지 선정도 힘들 거요. 우리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 그리고 적당한 부지를 찾았다고 해도 공사가 제대로 진행되겠소?"

"으흠, 그렇지, 공사를 하려면 아메리카의 건설회사를 이용해야 하고···,"

"그 건설회사는 우리가 움직일 수 있으니까."

"생산 설비를 확보하는 것도 어렵게 만들면 됩니다. 아마 10년이 지나도 공장을 완공할 수 없겠죠."

"슬쩍 충고만 해주면 되겠네요. 신공장 건설은 불가능하니 꿈도 꾸지 말라고, 아메리카 공화국에 진출하려면 화이백을 인수하는 길 말고는 없다고."

제일 먼저 할 일.

김태주가 화이백을 인수할 예정이라는 답변을 이끌어낸다.

동시에 주식거래 중지를 푼다.

협상에 들어가면서 은근하게 밀당하고, 주식이 폭등하길 기다리면?

'한몫 단단히 잡는 거지.'

※ ※ ※

선계.

놀이 공원들이 다 완공되어 갔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많다.

설계도를 보면서 작업을 진두지휘하는 귀곡 선인.

그는 등선하기 전에도 천재였다.

태주가 보내온 백과사전을 완독하고, 더불어 가끔 보내오는 과학 분야의 전문 서적도 섭렵하는 중, 따라서 지구의 과학 문명을 어떻게 선계에 적용할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여기가 발전소 부지가 될 거요. 전력선은 땅 밑으로 매설할 거고,"

귀곡 선인은 나뭇가지로 만든 지휘봉을 들고 죄인들에게 땅을 파야 할 곳을 정해주었다.

굳이 땅을 팔 필요도 없었다.

무림 출신 죄인 중, 지둔공을 익힌 놈들은 넘쳐나니까.

전력선을 잡고 두더지처럼 땅속을 헤집어 지나가면 그만.

철장 선인과 대목 선인은 어트렉션 제작에 들어갔다.

롤러코스터와 레일, 회전목마, 범퍼카, 바이킹···,

원래 사용할 수 있는 재료가 나무와 석재밖에 없었지만 다행히 황천계에서 흑암철을 생산하여 좀 더 튼튼한 놀이기구를 만들 수 있게 됐다.

이제 주괴 가격을 정할 때.

얼마나 필요하겠냐마는 그래도 수요가 있으니 매입은 해야지.

당군악이 염라에게 제안했다.

"주괴 하나당 10코인으로 합시다."

흑암철 광석이라면야 가격을 후려치겠지만 초열지역에서 녹여 주괴로 가공한 인건비는 감안해줬다.

그러나 염라는 만족스럽지 않은 듯.

"으흠, 좀 더···,"

"어허, 선도가 100코인이요. 이 주괴가 선도 10분의 1만큼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시오."

"···,"

염라도 같은 생각이었다.

이깟 철 덩어리 10개 있어도 선도에 비할 바가 아니지.

대량으로 팔 수만 있다면 10코인이 아니라 5코인에도 넘길 텐데.

아쉽지만 이 정도로 만족하고.

"문을 열어라."

지이잉!

초열지옥으로 통하는 문이 생성됐다.

그러자 줄줄이 나오는 죄인들.

두 손엔 흑암철 주괴들이 가득 들려있었다.

"이쪽에다 놓고."

차곡차곡 쌓이는 흑암철 주괴.

계속 쌓였다. 높이 높이.

신선들이 그 꼴을 보고 가만히 있었을까?

"저게 뭐야? 보기 흉측하게, 선계가 고물상인가?"

"이참에 처치 곤란한 쓰레기들을 선계에 떠넘기겠다, 이거지?"

"쌓아만 놓으면 누가 사줄 줄 알고?"

"맨날 죄인들만 대하더니···, 필요 없는 물건을 강매하는 것도 범죄 아닌가?"

"죄를 심판하는 황천계 사람들이 되려 죄를 저지르고 말이야."

쯧쯧거리며 손가락질하는 신선들.

염라와 판관들은 대꾸도 하지 않았다.

꾹 참고 못 들은 척했다.

"몇 개더냐?"

"5천 개 쌓았습니다."

"겨우?"

"다 팔릴지도 모르는데···,"

"이 새끼야! 어떻게든 팔아야지. 너 멀티플렉스 오기 싫어?"

"아, 아닙니다."

"황천계 광석들 모조리 녹여서 주괴로 만들어."

이판사판이다.

이렇게 된 이상 끝까지 간다.

녹도 슬지 않으니 가득가득 쌓아두면 언젠간 다 팔리겠지.

하지만 뜻대로 될까?

"그만! 여기까지요. 쌓아둘 공간도 없소."

당군악이 직접 제지하고 나섰다.

"서, 선계가 이리 넓은데, 그리고 만들어 둔 주괴가 더 있네."

"나중에 내가 반품하면 어쩌려고 그러시오?"

"그럼 그때 가져가면 되지."

딱하다, 딱해.

어떻게든 주괴를 팔아보려는 염라.

그래도 정에 이끌리면 안 된다.

사업은 냉정해야지.

"참 답답하오. 아무리 코인이 급하기로서니···,"

순간!

찌르르르,

당군악의 머릿속에서 울리는 배송 신호.

"떴군."

신선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떴소?"

"내가 주문한 양자 역학 서적 왔소? "

"오븐 치킨은? 내가 요새 기름진 게 물려서."

"우리 해맑이 먹을 아이스크림 빨리 주시오. 냉장고에 넣게."

당군악은 느긋하게 행동했다.

물건 빼고, 넣고, 마지막으로 태주가 보내온 공기계 스마트폰도 확인하고···.

순간!

"어?"

짤막한 경호성을 터뜨리는 당군악.

이게 정말이라고?

저 무겁기만 한 철 덩어리가···,

"아하!"

깜빡 잊었다.

태주 기준으로 지구 사람들을 판단하면 안 된다는 걸.

조금만 생각해도 이 흑암철이 얼마나 가치 있는가를 알아냈을 텐데.

'뭐, 지금이라도 보내면 되지.'

공유창고는 계속 반짝이고 있었고.

아공간 가방에서 물건을 빼내고, 서둘러 흑암철 주괴가 쌓인 곳으로 걸어가 스슷, 스스스스슷! 모조리 쓸어 담았다.

"응?"

"뭐···,"

"저걸 왜 담아?"

"서, 설마?"

아슬아슬하게 흑암철을 배송 보낸 당군악.

그러고 나서 염라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기대에 찬 염라의 눈동자.

"오늘부터 흑암철 주괴 최대한 대량 생산해주시오."

"허어, 그렇다면?"

"쓸모가 있다 하더이다. 내가 모두 사겠소."

"지, 진짜인가?"

"오늘 쌓은 주괴가 5천 개였던가? 5만 코인 입금해드리면 되겠군."

황천계는 축제 분위기였다.

"으하하하하!"

"대왕! 살았습니다."

"우리 황천계에도 볕들 날이 오고야 말았습니다."

"내가 뭐라고 했습니까? 팔릴 거라고 그랬죠?"

"그래, 강림 너 이 새퀴, 다 니 덕분이야."

"이럴 게 아니라. 죄인들 모조리 동원해서 초열 지옥으로 광석들 옮깁시다."

"그럼 죄인들 벌 줄 곳이 없어지는데요?"

"새로 만들면 돼. 그때까지 한빙지옥에 몰아넣어, 타거나 얼거나 아픈 건 마찬가지지."

기쁨에 취해 염라, 차사, 판관, 할 것 없이 서로 얼싸안고 만세를 불렀다.

"만세!"

"대왕님 만세!"

"흑암철 만세!"

"태주 대협 만세!"

그런데 어느 틈에 슬쩍 끼어들어 같이 만세를 외치는 신선들.

"만세, 만세, 만세!"

"···."

따가운 염라의 눈빛.

그럼에도 신선들은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대왕, 축하하오."

"내 이럴 줄 알았다니까. 역시 황천계야!"

"흑암철 주괴 본 순간 바로 느낌이 왔지. 저거 보통 물건이 아니라고."

"암! 그렇고말고, 선도와 비견할 만큼 보물이지. 난 처음부터 알았어."

"이제 코인 방석에 올랐구만. 앞으로 우리 친하게 지냅시다."

"도와줄 것 없소? 나도 일 잘하는데."

"나도 황천계에서 일하게 해주시오."

"나도!"

당연히 코웃음만 치는 염라였다.

어디서 어쭙잖은 태세 전환이야?

그리고 황천계에서 일을 시켜 달라니.

어림도 없다.

신선들이 왜 그러는지 불 보듯 뻔하다.

흑암철 도둑질해다가 따로 팔려는 걸 모를 줄 알고?

< 흑암철의 가치(2) > 끝

ⓒ 꾸찌꾸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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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혀 염두에 두고 있지 않습니다. >

태주 일행이 아메리카로 떠난 시각.

백서연은 삼한제국에 남았다.

해야 할 일이 있다.

김태주 회장님에게서 조선소가 필요한 이유를 들었기 때문이다.

'뱃길이 열릴지도 모른다고?'

그 말을 한 사람이 회장님이 아니었다면 개소리하지 말라고 면박이나 줬을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 백서연은 태주의 말을 굳게 믿었다.

그가 뱃길이 열린다고 했으니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다.

먼저 조선소 물색.

대형 컨테이너선을 건조할 수 있는 규모여야만 한다.

마침 적당한 곳이 있다.

거대한 조선 산업단지가 위치했던 양산.

50년 전쯤에 제국의 국책 사업으로 새로 건설한 조선소였다.

그러니까 해양 엘리트 마수가 출현하기 직전에 말이다.

인류는 오만했다.

처음엔 거대한 선박의 크기에 엘리트 마수들도 피해 다닐 거라 예상했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하필이면 양산 조선소에서 첫 번째 초대형 선박이 건조되자마자 엘리트 해양 마수의 습격이 시작됐다.

바다 곳곳에서 엘리트 해양 마수의 공격을 받아 침몰하는 선박들.

양산 조선소는 새로 만든 배를 띄워보지도 못하고 망해버렸다.

현재 양산은 평범한 어촌 지역.

가두리 양식과 근해 어업으로 먹고사는 곳.

백서연은 직접 양산으로 현지 조사를 나갔다.

혼자 가기 뭐해서 지리산 방어군단에 연락해 도민수 소령을 불렀다.

그녀의 눈에 들어온 조선 산업단지의 모습.

가동이 중단된 양산 조선소.

텅 빈 도크들만이 남아있었다.

삭막하고 을씨년스러웠다.

그런데.

"서연씨, 저기 보세요."

도민수가 손가락으로 뭔가를 가리켰다.

"네? 어딜···,"

"저 컨테이너선 보이시죠?"

"어머?"

바다가 아닌 육지에 올라와 있는 엄청난 크기의 대형 배, 길이만 해도 400m 가까이.

"저게 뭔질 아세요?"

"···배잖아요."

"겉모습은 그렇지만 양산의 명물인 선박 호텔입니다."

"아!"

그러고 보니 기억이 난다.

50년 전, 양산 조선소에서 처음 만들어 띄워보지도 못한 초대형 컨테이너선.

흉물로 변해버릴 위기에 처했지만 한 숙박 업체가 배를 싼값에 인수해 내부 개조를 거쳐 호텔로 만들었다.

인기가 있었다.

해안가 바로 옆에 위치해 풍경도 좋았고, 무엇보다 배를 개조해 만든 호텔이라는 장점이 있었기에

"꽤 잘 보존되었죠? 매년 페인트칠도 해서 녹도 슬지 않았고."

"괜찮네요."

"하지만 이 호텔도 사정이 좋지 않대요. 처음엔 배 호텔이라는 특징이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했지만···, 경영 상태가 방만해서 매물로 나왔답니다."

"그래요?"

가만!

백서연의 눈이 반짝였다.

김태주 회장님이 조선소를 알아보라고 한 목적이 뭐겠나?

배를 만들어 바다에 띄워보려는 것.

그런데 이미 만들어진 배가 있다면?

구조가 변경되었다고 해도 다시 원래대로 돌리면 그만이다.

새로 만들기보다 훨씬 쉽고 빠르다.

"저 호텔에 식당도 있겠죠?"

"당연하죠. 하지만 맛이 더럽게 없다던데."

"그럼 가봐요. 정말 맛이 없는지,"

"네! 가시죠."

배도 고픈데 잘 됐다.

정작 관심 있는 건 매물로 나온 배 호텔의 가격이지만.

※ ※ ※

태주가 탄 전세기는 마수 안전 항로를 통해 아메리카 공화국으로 가는 중.

'전세기라···,'

타보니까 마음에 든다.

푹신한 침대, 쾌적한 화장실, 심지어 샤워도 할 수 있다.

비행 마수 출몰 지역을 피하느라 이리저리 돌아가는 건 별로였지만.

'나도 하나 주문할까?'

전용기 탈 만큼의 재력은 된다.

흑암철 물량이 충분하면 그걸로 비행기를 제작해도 되고.

캔자스시티 공항에 도착하려면 아직 멀었다.

시간이 꽤 걸릴 것 같다.

그래서 비행기 안에서도 회의가 이뤄졌다.

태주와 함께 비행기를 탄 태홍 바이오 뉴서울 지점의 마석우 부장이,

"회장님, 제정원 문경식 차장이라는 분이 문건을 보내왔습니다."

"아···, 내용은 뭐죠?"

"화이백 지분 구조에 대한 보고서입니다."

제정원 일 잘하네.

화이백 인수하겠다고 입에서 꺼낸 적도 없는데.

물론 인수 합병을 한다면 화이백이 최적의 회사라는 건 누구나 예상 가능한 사실이긴 하지만.

태주는 보고서를 천천히 살펴봤다.

4명의 대주주가 50%가 넘는 지분을 소유하고 있었다.

카피약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갈 때 화이백 주가는 200달러대, 역대 최고가였다.

그러나 CEO 프레드 밀러가 구속되고 생산 중지 명령이 떨어지자 추락한 주가는 70달러대.

고점 대비 3분의 1 가격으로 하락했다.

이 정도면 인수할 만하다.

그러나 대주주들이 가만히 있을까?

보고서엔 최근에 알아낸 듯한 몇 가지 정보들도 적혀있었다.

태홍 바이오의 화이백 인수 의향이 확인되면 중지된 주식거래가 재개될 수 있다는 예측.

마석우 부장이 심각한 목소리로 태주에게 말했다.

"화이백은 거의 부도 수준까지 몰렸죠. 그런데 언제 망해도 이상하지 않은 회사의 주식을 다시 거래한다? 분명 배후가 있습니다."

태주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주식거래가 재개되면 인수가 어려워질 겁니다."

"그렇겠죠."

"아마 최고점인 200달러 이상 돌파할지도 모릅니다."

이미 세계적인 제약회사로 발돋움한 태홍 바이오.

무조건 성공이 보장되어 있었다.

생기불끈이 다시 판매된다고 생각해보라.

MRC보다 몇 배 더 많은 이익을 거둘 수 있다.

주식거래를 재개하도록 조종하는 놈들이 누구겠나?

탐욕스러운 대주주들이겠지.

순순히 당해줄 수 없다.

"계획을 수정하겠습니다. 화이백 인수는 후 순위로 미룹니다."

"어···, 그럼?"

"일단 신공장 건설로 초점을 맞추세요."

사실 그마저 안 할 수도 있다.

흑암철 수량만 확인하면.

"그럼 주주들과 접촉하지 말까요?"

"네, 후 순위가 아니라 그냥 폐기해도 좋습니다."

사실 태주는 확신하고 있었다.

황천계에 엄청난 물량의 흑암철이 있을 거라고.

같은 영혼이기에 누구보다 당군악의 마음을 잘 알고 있다.

만약 물량이 적었다면 흑암철 주괴를 보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천계 꽃을 보낼 때도 같았다.

마나 거부증 치료제를 만들고 남을 만큼 충분했기에 샘플을 보낸 거였다.

솔직히 흑암철의 존재를 미리 알았다면 아메리카로 오지도 않았을 터, 가겠다고 약속을 했기 때문에 이렇게 나선 거지.

이윽고,

태주가 탄 비행기가 캔자스시티 공항에 착륙했다.

공항 측 배려로 입국 수속도 생략한 채 입국장을 통해 밖으로 나왔는데,

"어···,"

"무슨 사람이?"

"많네요."

"지나갈 틈도 없겠네."

그를 환영하기 위해 모인 수많은 인파.

피켓을 들고 태주의 이름을 연호하고 있었다.

<김태주 회장님의 아메리카 방문을 환영합니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아메리카 마나 거부자 가족 모임.>

<태홍 바이오의 성공적인 아메리카 진출을 기원합니다.>

기자들이 떼로 몰려왔다.

촤라라라락! 촤라락!

사방에서 터지는 카메라 플래시.

"방문 목적이 궁금합니다."

"회장님! MRC 4차 출고는 언제쯤 진행되는 겁니까?"

"이전보다 물량이 줄어들 거란 예측이 있는데, 사실입니까?"

"생기불끈과 새살쑥쑥 생산은요?"

"아메리카 국민들이 피로회복 드링크제 출시를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태홍 바이오가 아메리카에 진출한다는 소문도 있던데 진위를 밝혀주십시오."

저지선을 뚫고 기자들이 몰려왔다.

앞으로 걸어 나갈 수도 없을 만큼.

다행히,

"회장님! 이쪽으로, 저희가 수행하겠습니다."

백악관에서 나온 경호원들이 태주 일행을 둘러쌌다.

하지만.

"우리가 모시겠습니다. 삼한 대사관에서 나왔습니다. 회장님."

아메리카 주재 삼한 대사관에서도.

그러자 작은 다툼도 일어났다.

"여긴 아메리카입니다. 손님 대접은 우리가 하는 게 맞죠."

"회장님은 우리 국민인데요? 걱정하지 마시고 돌아가세요. 삼한 대사관에서 책임집니다."

난리가 났다.

환영인파에, 기자에, 백악관에서 나온 사람들, 대사관에서 나온 직원들, 태주가 정리했다.

"그냥 같이 갑시다."

"네? ···네."

"어디로 먼저 갈까요?"

"기자회견장이 마련되어 있습니다만, 원하지 않으시면 취소해도 괜찮습니다."

"아뇨, 가보죠."

마침 잘 됐다.

좀 전에도 기자들이 질문을 해왔다.

인수 합병에 대한 의도를 떠보려는 모양인데, 확실하게 결정지어 주지.

태주는 기자회견장으로 이동해서 기자들의 질문을 받았다.

처음엔 간단한 질문들로, MRC를 개발하게 된 계기, 인류의 구원자가 된 소감이 어떠냐, 돈은 얼마나 많이 벌었냐, 결혼할 생각은 없냐? 취미는 어떻게 되냐···,

자연스럽게 대답해줬다.

물론 영어로.

통역 반지가 있으니 얼마나 편한지.

그러다가.

"회장님, 이번 방문 목적에 아메리카 공화국에 대한 투자 목적도 있으시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혹시 그럴 의향이 있으신지."

"글쎄요. 생각은 하고 있습니다만,"

"만약 투자하신다면 인수 합병입니까? 예를 들어 화이백 같은···,"

올 것이 왔다.

태주는 질문을 한 기자를 지그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화이백 인수 합병은 전혀 염두에 두고 있지 않습니다."

"···네?"

당황한 듯한 기자의 표정.

보통의 사업가들은 저렇게 단호하게 이야기하는 일이 잘 없다.

대충 두리뭉실하게 표현하는 법인데.

"···전혀요?"

"네, 절대로."

"앞으로 바뀔 여지는···,"

"없습니다."

웅성웅성, 기자회견장이 소란스러워졌다.

"그럼 신공장을 생각하고 계시는 겁니까?"

"고민 중입니다. 그것도 확실하게 정해지지 않았어요."

또 다른 기자가 손을 번쩍 들었다.

"질문하세요."

"먼저 MRC를 발명해주신 것에 대해 회장님께 경의를 표합니다."

"별말씀을."

"하지만 아메리카 공화국 시민들이 생기불끈 피로회복 드링크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비록 카피약이었지만 그로 인해 삶의 질이 달라졌다는 걸 깨달았거든요."

"그런가요?"

"네, 그래서 정중히 부탁드립니다. 하루 빨리 진품 피로회복 드링크가 아메리카 공화국에서 유통되기를."

기자의 말이 맞다.

아예 안 먹어봤으면 모를까.

그래서 태주도 화답했다.

"네, 최대한 빠르게 생기불끈과 새살쑥쑥이 아메리카 공화국에 공급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러자 처음 인수 합병에 물어봤던 기자가,

"대체 어떤 방법으로요? 신공장을 세우신다면 몇 년을 기다려야 할 수도 있습니다. 설마 수출을 염두에 두시는 것도 아닐 테고, 이럴 거면 차라리 화이백 인수 합병이 가장 편하고 합리적인 방법 아닙니까?"

태주는 과장된 몸짓으로 어깨를 으쓱하며 의문을 표했다.

"이상하네요. 아까부터 계속 화이백 인수를 언급하시는데, 제가 그렇게 대답해주길 바라는 겁니까?"

"···네, 네?"

"아니면 누가 질문하라고 시켰나요?"

모두의 시선이 그 기자에게 시선이 집중됐다.

어쩔 줄을 몰라 허둥거리다가,

"절대 아닙니다. 시키긴 누가 시킵니까? 단지 제 의견일 뿐입니다. 모두가 만족할 방안이 화이백 인수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지잉,

판관의 반지가 진동했다.

역시 거짓말이었다.

슬슬 끝내자.

"다시 한번 말씀드리자면, 화이백을 인수할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조용해지는 회견장.

"그러나 제 이름을 걸고 약속드리죠. 늦어도 6개월 안에 생기불끈과 새살쑥쑥을 아메리카 공화국으로 공급하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태주는 기자회견장을 빠져나갔다.

마석우 부장이 재빨리 옆에 붙어서 물었다.

"회장님, 숙소로 모실까요?"

"으음, 이후 일정은요?"

"오늘은 없습니다. 그리고 백악관 만찬은 회장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틀 뒤로 잡았습니다."

"그래요? 그럼 일단 푹 쉬고 내일 백화점으로 가봅시다. 쇼핑이나 해야겠어요."

빌리 피트먼 대통령과의 만남은 모레.

내일은 쇼핑.

백악관 만찬보다 중요한 것이 쇼핑이다.

물건 쓸어 담아야지.

※ ※ ※

태홍 바이오 김태주 회장의 입국 기자회견.

데이비드 모건과 투자자들도 생방송을 통해 지켜보고 있는 중.

"미친!"

이게 뭔가?

절대 화이백을 인수할 일이 없을 거라고?

전혀 염두에 두지 않는다니.

기자회견 직후, 주식거래가 재개되도록 미리 손까지 써뒀는데.

실제로 나스닥 시장에서 중지된 화이백 주식거래가 풀렸다.

하지만 폭등은커녕 더 떨어지고 있었다.

70달러대로 시작한 주가가 지금은 30달러대.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

김태주의 말 한마디에 이렇게 됐다.

원래 주가는 현재가 아닌 미래 가치에 의해 움직인다.

미래가 보이지 않으니 더 떨어지는 건 당연했다.

애초 거래 중지는 누가 주도했나?

자신들이 스스로 했다.

카피약 사태 때문에 하락의 폭이 너무나 심해서 더 떨어지지 않도록 손을 썼다.

반등의 기회를 잡을 때까지, 사람들의 기억에서 카피약 분쟁이 지워질 때까지, 그리고 호재거리를 찾아내어 주가 상승을 유도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렸다.

화이백은 저력이 있는 회사다.

가지고 있는 특허만 해도 몇 개인데.

그러나 김태주, 저놈 때문에 반등의 기회는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퍼킹!"

"망할 놈!!!"

"···죽여버리고 싶군."

학실하게 인수하겠다는 답변은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저 모호하고 애매한 표현이면 충분했다.

예를 들어.

- 고심하고 있다.

- 내부적으로 조율 중이다.

- 아직 결정하진 않았지만 가능성은 열어두고 있다.

- 적당한 가격이면 생각해 볼 수도.

이 정도 답변만 얻어내도 언론이 부풀려서 기사를 낼 것이고, 그럼 주가는 폭등하게 될 것이 뻔했다.

그런데 저렇게 단호하게 선을 그어?

"블러핑이 아닐까요?"

"그럴 겁니다. 주가를 의도적으로 떨어뜨려 협상에서 우위를 점하려는 수작일 테죠."

"욕심 많은 새끼가, 감히 장난질을 쳐."

조금 비싸게 사면 어때?

수년 안에 그보다 훨씬 많은 돈을 벌 수 있는데도 말이다.

"6개월 안에 생기불끈과 새살쑥쑥을 아메리카 공화국으로 공급하겠다고 호언장담한 걸 보면 답이 나오지 않습니까. 그 기간동안 화이백을 인수하겠다는 거겠죠. 백악관과 짜고."

다른 의견도 있었다.

"설마 수출이라도 하려는 건가?"

"어림도 없지, 비행기로 실어나르겠다고?"

"···아공간 가방이라면요?"

"아공간이라."

데이비드 모건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아공간 수납공간이 얼마나 된다고, 겨우 컨테이너 하나 분량이요. 아공간 가방이 100개, 아니 1,000개 있어도 모자랄 거요."

아공간 가방으로 생기불끈 수출은 턱도 없다.

전 세계로 풀린 아공간 가방을 다 모아도 100개가 안 될 텐데.

"대형 선박이라면 모를까, 컨테이너를 2만 개 정도 적재할 수 있는 초대형 배 말이오."

"그건 아공간 가방보다 더 현실성이 없지."

"그래요. 바다를 어떻게 건너겠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화이백 인수 말고는 아메리카 진출이 어렵다.

분노에 찬 표정으로 말하는 데이비드 모건.

"일단 내가 김태주를 만나보겠소. 백악관 만찬에서."

만나서 똑똑히 각인시킬 것이다.

개수작하지 말라고.

< 전혀 염두에 두고 있지 않습니다. > 끝

ⓒ 꾸찌꾸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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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평양을 건널 겁니다. >

호텔에서 하루 쉬고 다음 날.

태주는 캔자스시티에서 가장 큰 백화점에 왔다.

혼자 쇼핑하고 싶어서 미리 협조를 구했다.

오전만 휴무, 오직 태주만을 위해서 비워놓기로.

쇼핑을 위해 아공간 가방 하나는 선계로 보내지 않고 남겨뒀다.

삼한 제국에서 살 수 없는 걸로만 골라야지.

백화점에 도착하자.

"환영합니다. 김 회장님! 캔자스 메이스 백화점에 와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잘 부탁할게요."

백화점 사장이 직접 나왔다.

태주가 메이스 백화점을 방문했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광고효과니까.

"저어, 하, 함께 사진 찍어도 될는지···,"

"그럼요."

이미 얼굴이 알려질 대로 알려졌다.

숨길 필요도 없다.

본격적인 쇼핑 시작.

태주의 쇼핑 방식은 아메리카에서도 변하지 않았다.

"여기부터 저쪽까지 다 사겠습니다."

"···이, 이것들 다 손목시계입니다만."

"바로 살 수 없는 건가요?"

"가격이 비싸서,"

"상관없습니다."

스슥!

결제하고 쓸어 담고.

"오! 아공간 가방이군요. 몇 번 봤지만 볼 때마다 신기합니다."

명품 매장에선,

"이거, 그리고 이거, 포장해주세요."

처음 본 물건은 무조건.

스슷!

전자제품 코너에서도,

"블렌더 믹서기 30개 주세요."

과일을 갈 수 있는 블렌더, 선도 갈아먹기 딱 좋겠다.

"이건 제빙기인가요? 꽤 크네."

"맞습니다. 근데 이거도 아공간 가방에 들어갈지···,"

스슷!

안 들어가면 무한공간에 집어넣으면 되고.

"오! 들어가는군요. 회장님이 가지고 계신 아공간 가방은 상당히 비싼 것 같습니다."

"···구하기 어렵긴 하죠."

곧 선계에 중형 발전소가 돌아갈 것이다.

가전제품들을 더 보내도 전력 수급엔 문제없을 터.

이것저것 막 사들였다.

특히 식품관에선 시간을 좀 지체했다.

역시 아메리카 공화국이었다.

곳곳에 널린 혈관 파괴 식품들.

뭐, 하나같이 칼로리가 엄청나게 높지만 이걸 먹는다고 신선들이 성인병에 걸릴 이유도 없고.

스슷, 스슷, 스슷···,

대충 쇼핑을 끝내고 백화점 1층으로 다시 왔다.

그런데?

멈칫,

발걸음을 멈추는 태주.

백화점 1층에 마련된 전시실이 눈에 들어왔다.

'저건···,'

앙증맞은 크기의 자동차.

투도어 쿠페, 컨버터블 오픈형 빨간색 스포츠카가 화려한 자태를 뽐내며 전시되어 있었다.

호텔 사장이 옆으로 슬쩍 다가와서,

"회장님, 관심 있으십니까?"

"그럼요."

"테라셀에서 나온 신형 전기차입니다. 한번 충전으로 2,000km 주행할 수 있고요."

선계로 보내고 싶다.

물론 경박한 스포츠카보다는 중후한 대형 세단이 신선들에게 어울리겠지만···.

'저 쿠페는 작기 때문에 공유창고 안에 들어갈 수 있겠어.'

넣어볼까?

"저, 이거 사겠습니다."

"사셔도 상관은 없지만 어떻게 가지고 가실 건지···,"

태주는 혼자서 스포츠카 앞에 다가갔다.

그리고,

스슷,

무한공간으로 직행.

"헉!"

"세, 세상에?"

"···저게 들어가?"

메이스 백화점 직원과 사장이 깜짝 놀랐다.

아무리 아공간 가방이라도 자동차를 집어넣어?

'한 대만 보내보자.'

독선 당군악이 탄 빨간색 스포츠카가 선계 도로를 달리는 상상을 하니 마음이 웅장해진다.

옆자리에 태울 사람이 있으면 더 좋고.

아무튼 메이스 백화점 전체를 다 사버릴 기세로 정신없이 쇼핑하고 있는 와중에.

지이잉.

스마트폰으로 국제전화가 걸려왔다.

'음?'

백서연에게서 걸려온 전화.

이쪽은 낮이지만 그쪽은 밤일 텐데.

급하게 보고할 거라도 있나?

"서연씨, 네네, 바쁘진 않습니다. 무슨 일로···, 네?"

태주의 눈이 살짝 크게 떠졌다.

"선박 호텔요?"

아직 남아있었다니.

"복원은 가능합니까? ···아! 가능할 것 같다고요."

물론 배를 수리하려면 조선소를 가동해야 한단다.

그거야 황제의 도움을 받으면 되고.

하지만 먼저 선결되어야 할 조건.

배가 엄청나게 크다.

흑암철 몇 개 가지고는 턱도 없겠지.

'슬슬 배송 신호가 올 때도 된 것 같은데···,'

순간!

찌르르르르.

'떴구나.'

과연?

"서연씨, 끊지 말고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저번 배송에서 흑암철이 필요하다고 당군악에게 영상으로 이야기해뒀다.

분명 전달되었겠지만 이번 배송에 물량을 보내올 리는 없고···,

태주가 원하는 건 당군악의 메시지.

물량 충분하다, 다음 배송에서 보내주겠다, 이런 내용.

흑암철이 당장 오지 않아도 괜찮다.

그가 메시지만 보내줘도, 바로 작업 들어간다.

그래서 무한공간을 열고 공유창고를 확인했는데,

'···와!'

역시 독선.

강호의 절대자로도 모자라 신선이 된 그.

자신과 영혼이 같다는 것이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이게 다 몇 개야?

공유창고 한 구역에 차곡차곡 쌓여 있는 흑암철 주괴.

언뜻 세어봐도 수천 개.

이럴 때가 아니다.

물건을 옮겨놓고, 태주는 방금 메이스 백화점에서 구매한 물건들을 채워 넣었다.

당연히 오픈형 쿠페, 컨버터블 스포츠카도.

그리고 다시 전화로 백서연에게,

"선박 호텔부터 매입하세요. 수리 기술자들도 섭외하고, 조선소는 제가 따로 금수호 비서관과 통화하겠습니다."

생각보다 수출이 빠르게 이루어질 것 같다.

백악관 만찬만 끝내고 삼한으로 돌아가자.

※ ※ ※

다음날,

태주는 백악관 만찬장에 왔다.

아메리카 공화국 각계 인사들이 모두 초청된 자리.

"빌리 피트먼 대통령님과 MRC 개발자이자 태홍 바이오 대표, 김태주 회장님이 입장하십니다."

대통령보다 태주의 소개 수식어가 더 길었다.

만찬장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짝짝짝짝!

끝없이 이어지는 박수.

이윽고 시작된 연회.

사람들이 태주 주위로 몰려들었다.

"회장님, 뉴셀트 제약의 마이클 원스입니다. 우리 회사 주업종이 위탁생산(CMO)입니다. 시간 있으시면 방문해주셔서···,"

"카일 해들러 상원의원입니다. 언제 한번 시간을 내어주세요. 만약 신공장을 지으시려면 우리 지역에···,"

"오! 이제야 얼굴을 보게 되는군요. 인피니티 클랜의 트로이 매카시입니다. 보시다시피 각성자고 등급은 마스터입니다. 회장님 소문이 이곳까지 들려오더군요."

인사하고, 명함 나누고, 악수하고.

정신이 없었다.

그 와중에 빌리 피트먼 대통령이 직접 와서 태주를 구해줬다.

"인기가 너무 많은 것도 곤란하겠어요. 적당한 것이 좋지. 대통령인 나도 순서를 기다려야 할 정도니."

"하아, 빨리 끝났으면 좋겠네요."

"뭐가 문젭니까? 시간도 많으니 천천히 즐기세요. 이왕 왔으니 며칠 동안 관광도 하고, 참! 댈러스에 내 소유의 농장이 있는데···"

"아뇨, 만찬 끝나고 내일 삼한으로 갈 겁니다."

"음? 어, 레이첼이 실망할 텐데."

"레이첼?"

"내 딸 말입니다. 김회장님 덕분에 목숨을 구한."

"아!"

태주도 들은 적이 있다.

빌리 피트먼의 딸, 레이첼이 마나 거부자였다는 사실을,

"지금은 괜찮나요?"

"3차 접종까지 마쳤습니다. 현재는 일상생활에 아무런 문제가 없어요. 완치되려면 한두 번 더 맞아야 하지만."

"다행입니다. 안부 전해주세요. 힘내라고···,"

그때였다.

태주에게 다가오는 중년의 남자.

"김태주씨? 이제야 만나게 되는군요. 반갑습니다. 데이비드 모건입니다."

"누구시죠?"

이름만 대면 누군지 아나?

빌리 피트먼이 대신 말해줬다.

"데이비드 모건, 별명이 아주 많지, 아메리카 금융가의 마왕, 이익이라면 아이들 쿠키 판 돈도 갈취하는 추악한 하이에나, 지옥에서 온 고리대금업자, 뭐, 화이백의 대주주 중 한 명이기도 하고."

"아,"

누군가 했더니.

매서운 눈초리로 데이비드 모건을 노려보는 빌리 피트먼.

"데이비드, 당신이 된통 당한 건 잘 알고 있어. 근데 여기까지 올 줄은 몰랐군. 부끄럽지도 않나? 구걸하러 온 것도 아니고."

"오! 빌리, 난 그저 이야기만 하러 왔을 뿐입니다. 당신은 시간이 많잖아요. 난 김회장을 만날 기회가 이번이 아니면 없을 것 같아서."

"나도 그래. 만찬이 끝나면 김태주 회장과 헤어져야 하거든."

"···그렇게 일찍?"

태주가 답을 해줬다.

"맞아요. 내일 비행기 탈 겁니다."

"···으음, 정말 화이백을 정말 인수할 생각이 없단 말이오? 난 협상할 준비가 됐는데."

"기자회견장에서 충분히 설명한 걸로 압니다만."

"허허, 우리 솔직해집시다. 태홍 바이오가 아메리카에 진출하려면 가장 합리적인 방법이 화이백 인수 아니오?"

"그럴까요? 다른 방법도 많습니다만."

"어떻게? 빠른 시일 안에 피로회복 드링크제를 공급하겠다는 말은 결국 거짓말이었군."

뭐래?

"꽤 단호하게 말했다고 생각했는데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나 보네요. 화이백 안 삽니다."

"흥! 가격을 떨어뜨려 헐값으로 살 생각 마시오. 또 신공장 건설은 꿈도 꾸지 않는 게 좋을 거요."

이 새끼 봐라?

따로 면담 들어가야 하나?

'한번은 참아준다.'

여긴 삼한이 아니라 아메리카니까.

어차피 또 볼 사이도 아니고.

대신.

"대통령님, 부탁이 있습니다."

"뭐든지!"

"제가 발표하고 싶은 내용이 있는데, 자리를 마련해주시죠."

"중요한 거요?"

"네, 세상이 발칵 뒤집어질 겁니다. 원래는 삼한으로 돌아가 하려고 했지만, 여기도 괜찮을 것 같네요."

"오! 영광이로군. 당장 준비하겠소."

아직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데이비드 모건을 뒤로 한 채, 태주는 만찬 회장 안에 마련된 연단에 섰다.

"안녕하세요, 태홍 바이오 김태주입니다."

태주가 입을 열자 조용해지는 만찬장.

"입국 당시 기자회견장에서 제가 했던 말 기억나시죠? 생기불끈과 새살쑥쑥을 빨리 공급하겠다고, 그래서 지금 그 방법에 관해 설명하고자 합니다."

사람들이 연단 가까이 몰려왔다.

"그전에 다시 한번 말하겠습니다. 화이백 인수합병은 제 계획에 없습니다. 혹시라도 화이백 주식을 보유하고 계시는 분은 빨리 손절하세요."

데이비드 모건이 태주를 따갑게 노려봤다.

"신공장 건설은 계속 추진하겠습니다. 물론 시간이 오래 걸리겠죠. 공장이 건설되기 전까지는 약품을 직접 수출할 계획입니다. 다만 비행기를 통한 방식은 아니라···,"

잠시 뜸을 들이면서,

"컨테이너를 2만 개 이상 적재할 수 있는 초대형 선박으로."

그러자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

웅성웅성, 소란스러워지는 만찬장.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선박이라면 바다 아닌가? 혹시 공상과학에서나 나오는 것처럼 하늘을 나는 배? 뭐든 다 터무니없다.

그런데,

"네, 초대형 컨테이너선으로 태평양을 건널 겁니다."

순간!

만찬장에 흐르는 침묵.

충격이었다.

바다를 건너겠다고?

엘리트 해양 마수가 득시글거리는 태평양을?

빌리 피트먼 대통령도, 보좌관과 참모들도, 그리고 백악관에 초대된 기자들과 각국 대사들도,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바닷길 복원의 시작입니다. 그 첫 번째가 생기불끈과 새살쑥쑥 수출이고."

폭탄이 떨어졌다.

기자들은 스마트폰을 들고 고래고래 소리쳤다.

"특종 떴다! 1면 비워두라고!"

"제목은 바닷길 복원!"

"컨테이너선 태평양을 건너다, 이건 어때?"

"헛소리 아니라니까?"

"젠장, 방법이 뭔지 어떻게 알아? 태홍 바이오 김태주 회장이 직접 말했어."

데이비드 모건의 얼굴이 보기 거북할 정도로 일그러졌다.

※ ※ ※

선계.

죄인들 노동력에만 의존했던 황천계가 흑암철로 대반전을 이뤄냈다.

수량도 엄청나다.

황천계에 높이 솟아오른 산들은 거의 다 흑암철 광석이라고 봐도 될 정도.

현재도 엄청난 양을 캐내고 있었고.

지구로 보낼 것이 아니었다면 처치 곤란에 애물단지, 하지만 지금은 보물 그 자체, 광석 녹여서 열 근의 주괴로 만들면 무려 10코인을 준단다.

염라는 상위 계 최고 부자로 떠오를 것이 확실시됐다.

물론 혼자 먹진 않는다.

사자와 차사, 그리고 판관들에게 수당으로 나눠줘야 한다.

그리하여 하루아침에 황천계 사람들의 지위가 변했다.

멀티플렉스는 황천계 차사와 판관, 사자들로 가득했다.

강림은 주선의 칵테일 바에서.

"소맥 한잔 시원하게 말아보시오. 치킨도 내어오고."

"양념? 프라이드? 아니면 구운 거?"

"근본으로, 프라이드 한 마리."

"오케이."

판관들은 쇼핑몰에서 선글라스를 고르느라 정신이 없었고.

"나하고 어울리나? 판관 필이 나야 할 텐데."

"오오, 기깔나는군."

"흐흐, 이걸로 사야겠어."

"가격표를 봐. 엄청 비싸."

"긁으면 되지. 할부로."

염라도 여성복 매장에서,

"이거 어떤가? 어울릴까?"

"좀 튀어 보입니다만, 해맑 선녀님 스타일에 맞지 않습니다."

"이건?"

"공주님 옷 같은데요?"

"해맑이 공주 맞잖아. 딱 좋군."

"그럼 이 모자와 구두도 함께 선물 하시지요."

"그럴까?"

모두들 코인을 펑펑 써대고 있었다.

당군악은 비어있는 진열대를 채우느라 정신이 없었고.

그의 광활하고 거대한 무한창고엔 태주가 보내오는 지구의 물건들이 그득 쌓여 있었다.

장사가 잘됐지만 당군악은 불만스러운 표정.

이 사람들이 제정신인가?

그래서,

"주목!!!"

쇼핑몰 안에 퍼지는 당군악의 음성.

그리고는 염라를 보며.

"대왕!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응? 왜···,"

"내가 주문을 넣지 않았소이까?"

"그, 그랬지."

"나흘 안에 흑암철 주괴 10만 개, 무게로는 600톤."

"···."

염라의 등줄기로 식은땀이 흐른다.

주문받은 건 사실이지만···,

"그런데 이게 뭐요? 매일 멀티플렉스에서 돈이나 펑펑 써대고, 납품 날이 지척인데 수량이나 맞출 수 있겠소?"

"어음, 그, 그게 아니라."

"주문량 달성할 때까지 멀티플렉스 안엔 얼씬도 하지 마시오!"

"후우."

염라는 한숨을 쉬었다.

돈을 벌면 뭘 하나?

쓸 시간이 없는데.

그리고 인력도 부족한 상황.

'진짜 신선들 힘이라도 빌려야 할지 모르겠군.'

험한 일이야 죄인들이 다 한다.

하지만 그들을 감독하고 생산과정을 관리할 인원이 있어야 한다.

놀고먹기만 하는 신선들에 비해 사자와 차사, 판관들은 언제나 바쁘다.

하루에 황천계로 넘어오는 망자의 숫자만 해도 몇 명인가?

그러자 슬금슬금 염라 옆으로 다가오는 신선들.

서로 주거니 받거니 대화를 나누면서.

"험험, 내가 인간계에 있을 때 대장간에서 일해본 경험이 있지. 광석 녹이고 제련하는 건 일도 아니야."

"그대도? 나도 그렇소.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네."

"노는 것도 지겨워. 누가 일이나 시켜줬으면 좋겠군."

"흑암철 주괴 30개만 일당으로 주면 난 충직한 노예가 될 거요."

"싸다, 싸. 신선들 부리는데 주괴 30개면 거저 아닌가."

염라는 깊게 한숨을 쉬었다.

'후우,'

정녕 믿어도 되려나?

어디로 튈지 모르는 신선들을?

어쩔 수 없다.

"흑암철 광석 운반 및 주괴 제련 감독 관리자 20명! 선착순 지원이요."

신선들이 눈썹과 수염을 휘날리며 달려왔다.

"나!"

"나도!"

"내가 지원하겠소."

"줄을 서시오!"

"순서를 지켜."

"어허! 밀지 말라고!"

난리가 났다.

먼저 하겠다며 번쩍번쩍 손을 치켜든다.

하지만 염라는 일당을 비싸게 줄 생각이 없다.

일 잘하는지 검증도 못 한 판국에.

"일당은 흑암철 주괴 10개."

신선들이 가만히 있을 리 있나?

"···겨우?"

"에잉!"

"도둑놈일세."

"우리보고 열정 페이나 받으면서 일하란 말인가?"

"악덕 사장이군."

"여긴 노동청도 없나?"

"이러면 주휴 수당은 기대도 못 하겠어."

하지만 염라는 얼굴색 하나 안 변한 채, 냉정하게 등을 돌렸다.

"싫으면 말든가."

그러자 염라의 어깨에 손을 턱 올리는 신선.

"흑암철 주괴 10개면 선도 하나와 같은 가치 아니오. 충분하군. 내 열심히 하리다."

"생각해보니 적당한 일당이야."

"일을 시켜만 주는 것도 감사하지."

여전히 신선들이 미덥지 못한 염라였다.

선도도 너무나 뻔뻔하게 훔쳐 가는 그들인데.

"호리병박은 반입금지요. 자루 같은 것도 안 되고."

"어허, 우리가 도둑인 줄 아시오?"

"밑장 빼기 안 할 테니 걱정 말고."

"아예 발가벗고 일하겠소."

그래.

믿자.

믿어보자.

저래 봬도 신선들이다.

우화등선 아무나 하나?

< 태평양을 건널 겁니다. > 끝

ⓒ 꾸찌꾸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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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이었다. >

백악관 만찬회가 끝났다.

데이비드 모건은 김태주를 만나 의사를 한 번 더 확인하고 싶었지만 이미 사라진 후였다.

'간다더니 진짜 갔나?'

어이가 없었다.

블러핑이었다면 아메리카 공화국에서 며칠간 머물면서 밀당했을 것이 분명했지만 아예 떠나버렸으니···.

기사도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김태주 회장의 백악관 만찬 선언.

MRC 발명만큼이나 위력적이었다.

<태홍 바이오 김태주 회장의 백악관 선언! 끊긴 바닷길이 복원될 것이다.>

<컨테이너선으로 태평양을 건너겠다. 실현 가능성은?>

<엘리트 해양 마수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가 관건.>

<뜬구름 잡는 허풍일까? 아니면 확신에서 나온 진심일까?>

<만약 그의 말이 실현된다면 인류는 또 한 번 진보할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이비드 모건은 여전히 믿을 수 없었다.

'생각할수록 황당무계하군.'

태평양 횡단이라니.

초대형 컨테이너선을 타고 바다를 건넌다고 치자.

일반 마수들은 그 커다란 선박을 어찌하지 못할 것이다.

체급 차이는 무시할 수 없으니까.

또한 제철소에서 생산되는 일반 강철에도 결정체가 섞여 있어 웬만한 마수의 공격엔 흠집도 나지 않을 거고.

그러나 엘리트 해양 마수라면 다르다.

그놈들도 마나 보호막과 강기를 다룰 수 있다.

배의 밑창이 아무리 두꺼운들, 설령 엘리트 결정체가 섞인 철판으로 배를 만들었다고 해도 마수의 강기 공격에 종잇장처럼 찢겨 나갈 것이다.

'절대 불가능해.'

강기를 온전하게 막는 건 불가능하다.

세계 최고의 제철 기술을 가진 아메리카 공화국도 엄두를 못 내는 상황.

'그럼 해양 마수 레이드를 계획하려는 건가?'

각성자 레이드팀을 배에 태워 엘리트 마수에 대비한다고 해도 문제.

어떻게 싸울 건데.

깊고 깊은 태평양.

해양 마수를 막으려면 바닷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물론 마스터들은 강하다.

몇 명이 모이면 엘리트 마수 정도는 가볍게 사냥할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육지에서나 적용되는 이야기.

물속이라면 전투력이 절반 이하로 뚝 떨어질 것이 뻔하고.

절반이 뭐야?

몸이나 제대로 움직일 수 있겠나.

해양 엘리트 마수의 먹잇감이 될 것이 뻔하다.

'멍청한 놈!'

데이비드 모건도 김태주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단순한 제약회사의 대표가 아니라는걸, 각성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마스터보다 더 강한 무력을 갖췄다는 걸.

'그걸 믿고 이렇게 나대는 모양인데.'

놈은 제 발등을 스스로 찍었다.

'그래, 어디 한번 끝까지 가보자.'

이제 데이비드 모건에게 화이백 같은 건 아무 상관 없다.

김태주, 그놈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모욕했다.

지금부터 그 대가를 치르게 할 생각.

데이비드 모건은 스마트폰을 꺼내 번호를 눌렀다.

그리고 몇 시간 후,

아메리카 공화국의 모든 언론에서 동시에 기사가 쏟아져 나왔다.

<절대 건널 수 없다. 전문가들, 어떤 방법으로든 태평양 횡단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판단,>

<주장은 거창했다. 하지만 방법도, 설명도, 계획도 없었다.>

<제약회사 대표의 무책임한 발언, 이건 신약 개발 차원이 아니다.>

<설마 태평양에 독을 풀려는 건가? 환경단체의 반발은 어떻게 감당하려고?>

※ ※ ※

삼한 제국 뉴서울 황궁.

황제와 금수호는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대화라기보단 태반이 한숨.

"후우."

"···하아."

"나 원 참,"

"이걸 어떻게···,"

처음, 아메리카 공화국을 방문 중인 김태주 회장이 전화를 걸어와 협조를 요청했을 땐 그야말로 황당함, 그 자체였다.

폐업한 조선소를 인수해서 다시 가동할 거라고? 조선 기술자들을 섭외해 달라고? 양산 조선소 근처에 세워진 선박 호텔을 인수해 바다에 띄우겠다고?

이게 무슨 쎅토끼 순결 서약하는 소리인가?

가까운 바다가 아닌 먼 바다로 항해하겠다는 말 아닌가?

진정한 의도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협조하는 척은 해야지.

삼한의 영웅이자 인류의 구원자인 그의 부탁을 어떻게 외면하나?

일단 양산 조선 산업단지는 국가 소유,

50년 동안 애물단지라서 민간에 파는 건 어렵지 않다.

그리고 조선 기술자들.

세월이 지나 현재는 70대 중후반에서 80대, 90대의 노인들, 거의 은퇴했거나 혹은 사망했을 것이다.

그래도 찾으려면 찾을 수 있다.

그렇게 고민하던 차에 아메리카 공화국 백악관에서 전해진 뉴스.

백악관 만찬 선언.

끊긴 바닷길을 복원하겠다.

태평양을 컨테이너선으로 건너겠다.

그럴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이게 과연 실현 가능성이 있을까?

대체 어떤 방법으로?

"독을 쓰려는 건 설마 아니겠지요?"

"···독? 태평양에 독을 푼다고?"

"김 회장이라면 가능하지 않을까요?"

"허허허, 자네 말이 사실이라면 진짜 걱정되는군."

"독 때문에 바다의 환경이 오염될까 봐서요?"

"무슨 소리! 고작 독으로 바다 환경이 변할 거로 생각하나?"

"으음, 그렇긴 하죠."

이미 바다 환경은 300년 전에 변했다.

마나의 침범, 갑작스러운 지구 온난화.

그로 인해 바다에 어떤 일이 생겼나?

각국의 원자력 발전소들이 물에 잠겼다.

동시에 심각한 방사능 유출이 일어났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방사능으로 인한 환경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마나의 피해가 방사능보다 강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마나는 방사능마저 먹어 치워 힘을 키워나갔다.

옛 중국 땅을 횡행하고 있는 비욘드 엘리트 마수의 예를 봐도 잘 알 수 있다.

"바다란 말이야, 그것도 태평양! 거기에 독을 푼다 한들 표시나 나겠어?"

태평양은 너무 넓다.

거길 횡단하려는 배의 크기도 엄청나고.

"아마 실패로 돌아갈 가능성이 높아. 바다에 어떤 마수들이 사는지 지금도 잘 파악이 안 되고 있잖아. 독에 면역을 가진 놈들이 있을지도 모르고."

"그래도 저렇게 자신 있게 주장한 걸 보면 뭔가 다른 수가 있지 않을까요?"

"흐음, 정녕 알 수가 없군. 대체 어떻게···."

그때였다.

지이잉,

금수호의 스마트폰에 울리는 메시지.

"아! 김회장이 뉴서울 공항에 도착했답니다."

"그래? 그럼 어서 황궁으로 들어오라고 하게. 대체 무슨 계획인지 이야기나 들어보지."

※ ※ ※

그렇지 않아도 시간이 없었다.

하지만 황제가 만나고 싶다고 해서 급하게 왔는데 물어본다는 말이,

"내가 태평양에 독을 풀다니요, 아니, 태평양이 무슨 동네 연못도 아니고."

기가 막힌다는 태주의 표정.

황제가 그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그, 그렇지? 독 안 풀 거지?"

"제가 모든 문제를 다 독으로 해결하는 사람인 줄 아십니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어. 근데 수호가···,"

발끈하면서 소리치는 금수호.

"제가 언제요?"

"아까 김회장이라면 가능하다면서?"

"김회장 독이 그만큼 강하다는 칭찬이었잖아요."

태주, 자신의 책임도 있다.

그냥 말만 내뱉고 자세한 사항은 설명하지 않았으니까.

오해는 풀어줘야지.

"어쨌든 독은 절대 아닙니다."

"그럼 뭘로? 힌트만 주시게."

태주는 무한공간에서 흑암철 주괴 1개를 꺼내 황제에게 건넸다.

"이걸로 건널 겁니다."

"응? 이게 뭔데?"

"일명 지옥의 철, 마수들을 쫓아내는 성질이 있죠."

"···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표정.

"아니, 보통 철 같은데···,"

"가지고 가서 실험해보세요. 끝나고 반납하시는 거 잊지 마시고."

"···정말?"

"일단 해보시라니까요. 전 양산 조선소에 가 있을 테니까."

"아, 알았네."

태주는 궁궐에서 빠져나와 만리비검을 타고 양산으로 날아갔다.

한참을 날아가자 발밑에 보이는 커다란 배 한척.

'저게 선박 호텔이구나.'

이미 구매했는지 선박 호텔은 크레인과 중장비를 이용해 비어있는 도크로 천천히 이동 중이었다.

도크에 안착하면 바로 수리 작업에 들어가겠지.

태주는 검에서 뛰어내려 선박 이동작업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백서연에게 다가갔다.

"회장님! 언제 오셨어요? 황궁으로 입궁하신다고 들었는데."

"갔다 왔습니다."

빠르게 수리 시작하자.

수리는 배 밑창 용접 작업부터, 흑암철을 철판으로 가공해서 배 밑창에 일정 간격으로 붙일 예정.

조선 산업단지라 흑암철 가공도 쉽게 할 수 있다.

노동력만 충원되면.

"여긴 제가 맡을게요. 서연씨는 생기불끈하고 새살쑥쑥 양산 작업 서둘러주세요. 최소 컨테이너 1만 개 분량 이상을 목표로."

"네! 찍어내 보겠습니다."

확실히 백서연은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

의심이라고는 단 한 점도 없었다.

당장 황제와 금수호만 해도 꼬치꼬치 캐물었는데.

구례 공장은 MRC 생산에 전념.

나머지 공장들은 죄다 생기불끈과 새살쑥쑥 생산에 집중한다.

설비는 충분히 갖춰져 있다.

뉴서울 공장과 백두 사이언스, 인수가 끝난 구(舊)미리내 태홍 바이오 공장, 더불어 파주 공장까지.

태주도 뉴스 기사를 봤다.

아메리카 공화국 언론에서 낸 다소 악의적인 보도.

불가능하다, 무책임하다, 태평양에 독을 풀려고 하나? 반드시 실패할 것이다···,

그러나 배의 수리가 끝나고 컨테이너선이 바다에 띄워지면 그들이 어떤 표정을 지을 건지 궁금하다.

배의 성능이 예전 그대로라면 태평양을 횡단하는 데 채 열흘도 걸리지 않는다.

잠시 후,

지이잉!

태주의 스마트폰으로 황제가 직접 전화를 걸어왔다.

- 자넨 대체 정체가 뭔가? MRC도 그렇고, 이 지옥의 금속이라는 물건도 그렇고, 외계인이야? 설마 신(神)인가?

실험해봤나 보다.

"외계인도 아니고, 신도 아닙니다."

그러나 조금 비슷하다.

같은 영혼이 신선이긴 하지.

- 이런 기적의 금속을 어디서···? 엘리트 마수들도 기겁하고 달아나더군.

"어떻게 생각하세요?"

- 이건 된다고 확신하네! 도와줄 건?

"노동자들이 필요합니다. 중장비들도."

- 최우선 국책사업으로 지정해서 지원해주지. 현재 진행 중인 국가 주도의 토목사업과 건설사업을 중단하는 한이 있더라도.

태주는 전화를 끊었다.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그나저나 사업체가 늘어나게 생겼다.

동시에 두 개씩이나.

조선업과 해운.

바다를 건너려면 흑암철로만 가능하니 전 세계 독점.

회사 창업 신고나 해두자.

이름은 무엇으로 지을까?

※ ※ ※

당군악은 흐뭇했다.

멀티플렉스 앞에 흑암철 주괴가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했다.

거의 건물 반 정도 높이만큼 올라갔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군."

다음 배송은 흑암철 주괴 10만 개, 600톤.

간신히 수량을 맞췄다.

초열지옥으로 파견된 신선들이 제 몫을 톡톡히 해낸 모양.

귀곡 선인과 갈홍 선인도 이 흑암철 주괴가 지구에서 어떻게 쓰일지 당군악에게 들었다.

"그러니까 그 큰 배로 한 번에 보낼 수 있는 물건의 양이, 봉지라면 5억 5천만 개 수준이라고?"

"허허, 그게 어느 정도인지 상상도 안 되는군."

"대체 300년 전의 지구는 어떤 세상이었는지 궁금해."

"내 말이! 그렇게 바다를 오가던 배들이 바다 요괴 때문에 멈춰 버렸다니, 얼마나 피해가 컸을꼬."

하지만 곧 바닷길이 복원될 것이다.

사실 흑암철로 바닷길을 건너는 건 편법에 가깝다.

바다 요괴들을 깨끗하게 쓸어버리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

"바다 요괴라면 어렵긴 해."

"그렇고 말고, 물속에서 헤엄치기도 어려울 텐데."

"수공을 익히면 안 될까?"

"수공은 인간 대 인간의 싸움에서나 의미가 있지."

맞는 말이다.

수공 가지고는 턱도 없다.

"동해 용궁의 고등어 새끼 한 마리만 지구에 보내도···,"

"고등어? ···아! 용궁 평위장군 말하는 거요?"

"그렇소. 그 등푸른 생선 놈."

바닷속에도 영물이 있다.

귀곡과 갈홍이 말하는 건 평범한 생선이 아닌 영물로 진화한 고등어, 용왕에게 제수받은 벼슬이 평위장군.

본체는 등푸른 영물 대형 고등어지만 인간으로 변신할 수 있고, 본체일 때의 힘과 능력은 신선이라도 무시할 수 없다.

바다 요괴 따위는 스쳐도 사망.

"문어도 괜찮지."

"용궁의 문어 승상 말이오? 그놈은 학사 출신이잖소."

"학사라고 얕보면 큰일 나오. 수틀리면 용왕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데."

"뭐, 그렇게 따지면 털게 문지기나 청상어 교위, 범고래 대장군도···,"

"쯧, 이런 이야기해 봐야 무슨 소용인가, 다른 세상으로 갈 수 있기나 하오? 우리도 못 가는 판에."

"하긴, 건너갈 수만 있다면···,"

당군악은 귀곡과 갈홍의 대화를 들으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 보니 상위 계 전체가 태주와 인연을 맺게 됐지만 용궁은 빠졌다.

여래계는 어차피 생각도 안 했고.

용궁엔 뭐가 있을까?

그쪽과도 거래할 물건이 있다면 좋을 텐데.

물론 태주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것이어야 한다.

바로 그때.

찌르르르,

때마침 뜬 배송 신호.

"왔군."

"오! 빨리 흑암철 집어넣으시오."

"다 들어갈까?"

"넣어보면 알겠지."

당군악은 공유창고를 확인했다.

그런데?

"헉!"

깜짝 놀랐다.

하지만 침착하게 먼저 흑암철 주괴와 선계 꽃들을 아공간 가방과 공유창고에 나누어 넣고.

"뭐요?"

"이상한 것이 왔소?"

"빨리 보여주시오."

당군악의 무한창고에서 붉은색의 무언가가 쑤욱 빠져나왔다.

생각보다 컸다.

"세, 세상에!"

"미친!"

투도어 쿠페, 컨버터블 오픈형 빨간색 스포츠카.

당군악은 운전석에 앉았다.

"타시오. 기분전환이나 합시다."

"···우, 우린 두 명이잖소. 남는 자리가 하나뿐인데."

"축골공 뒀다 뭐 할거요?"

부아아아아아앙!

빨간색 스포츠카가 선계 도로를 달린다.

부아앙, 부앙! 부아아앙!

원래 전기차는 소리가 나지 않는다.

그러나 액셀을 밟을 때마다 스포츠카 특유의 배기음이 외부 스피커를 통해 울렸다.

모두가 주목했다.

소리를 듣고 바깥으로 나온 신선들도, 선계 월드 공사를 진행 중인 판관과 차사, 사자, 죄인들도, 몰래 놀러 온 천계 신장들도, 그저 입만 떡 벌렸다.

천인 아이들이 타고 다니던 전동카보단 훨씬 큰, 아름답고 빼어난, 지붕 없는 스포츠카가 도로를 질주했다.

마주 달려오던 검선의 할리 바이크도 멈춰 섰다.

그리고 지나가는 스포츠카의 꽁무니만 하염없이 쳐다봤다.

여름이었다.

< 여름이었다. > 끝

ⓒ 꾸찌꾸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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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속고 속이고, 도둑질하고 도둑질당하고. >

황제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양산으로 군대를 파견하는 것.

최우선 국책사업.

당연히 보안과 경호부터 먼저 챙겨야지.

그래서 구례 지리산 방어부대가 출동했다.

오진형이 모자에 별 4개를 달고 나타났다.

"오! 별이 하나 추가되니 눈부시네요. 쳐다보지도 못하겠어요."

"쯧! 그러면 뭘 해? 보직이 없어서 놀고먹는 중인데, 그나마 자네라도 없었으면 어쩔 뻔했나."

"에이, 여기서도 별로 할 일이 없을걸요?"

"하지만 이름은 날릴 수 있지. 생각해봐! 바다로 진출하는 대역사에 나도 숟가락 하나는 얹을 수 있잖아."

은근히 자랑스러워하는 오진형 대장.

하긴! 황제가 직접 챙기고 세계가 주목하는 현장인데.

제국군 병력이 양산 일대에 쫙 깔렸다.

선박 호텔 복원 수리는 약 일주일 이후에 본격적으로 진행될 예정, 숙련 노동자들과 자문위원들, 그리고 장비들이 오려면 시간이 걸린다.

그동안 태주가 한 일은 회사 설립 신고.

신설 계열사 이름을 태홍으로 바꾸려고 했지만,

"태홍 조선? 안 돼! 내가 새회사 창업에 관여한 것이 뭐가 있나? 다 자네 거지."

백홍표가 극구 반대했다.

"그래도···,"

"이참에 제약회사 이름도 바꾸세. 태홍 바이오에서 '홍'자를 빼자고, 티제이 제약 어떤가? 국제적인 느낌도 나고."

"지금 손 떼고 도망가시려고요?"

"아니, 내가 하는 일이 없어서 그러지, 회사 이름에 내 이름 일부가 들어가 있으니 도통 부담스러워서, 내 지분도 다 가져가. 난 고아원 운영도 바빠."

"···."

그래서 새로운 회사의 이름은 '티제이 조선소' '티제이 해운'

하지만 이런 국가 기반 산업은 돈이 엄청나게 많이 든다.

아무리 약을 열심히 팔아도 초기 비용을 모조리 충당하는 건 불가능.

황제와 협의해서 제국 정부의 투자를 받기로 했다.

그래서 지분의 20%를 국가가 매입하는 걸로 결정.

국가 예산이 투입됐다.

이제 돈 걱정은 없다.

혹시라도 달라붙을 날파리 걱정도 안 해도 되고.

제국 정부가 해야 할 일이 하나 더 있었다.

컨테이너선 접안 시설이 갖춰진 대형 항구 복구.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조선소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양산 항구가 있다.

폐쇄된 조선소와 마찬가지로 뱃길이 끊겨 항구의 기능이 멈춘 곳.

시간을 다투는 대규모 토목사업.

제국 내 모든 건설 노동자들이 양산으로 몰려왔다.

양산의 땅값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무섭게 치솟았다.

그러나 백서연이 누군가?

호텔 선박 구매 협상에 들어갔을 때 이미 양산 조선소와 항구 주변의 알토란 땅을 일찌감치 매입해놓았다.

그리고 자문 역할의 노동자들이 양산 조선소에 왔다.

50년 전 이 컨테이너선을 만들 때 관여했던 사람들.

선체 설계, 용접, 엔진 기술자, 컨테이너 적재 및 하역 기술자 등등.

지금은 나이가 70대 후반에서 90대에 들어선 분들이었다.

지팡이를 짚고 힘겹게 걸어오는 노인들.

"어서 오십시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허허허, 김태주 회장님, 만나서 영광입니다."

"오시는 데 불편하신 건 없었는지,"

"죽을 나이가 되어서 그렇지, 아직 마음은 청춘인데요. 죽기 전에 내가 만든 배를 수리할 기회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다 김회장님 덕분입니다."

"하하하, 그럼 계약서 쓰시죠."

"계약서라니,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판에, 내버려 두세요. 그저 세끼 밥만 꼬박꼬박 챙겨주시고."

그럴 수야 있나.

"최소 여기서 10년 이상 근무하셔야 하는데요?"

"엥? 아마 그전에 죽을 텐데?"

"죄송하지만 그렇게는 못 합니다."

솔직히 미안하긴 하다.

90살 넘은 분들을 다시 불러 일을 시켜야 한다는 게.

"다들 일반인 분들이시죠?"

"으음, 그래요. 적합자였다면 한 30년 건강하게 더 살겠지만···."

"그럼 이 약 한 알씩 드세요. 계약금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단! 누구에게도 말하지 마시고."

"무슨 약이길래."

"별거 아닙니다. 일반인에서 적합자로 올려주는 영약이요."

"···허, 농담도 지나치십니다. 진짜라고 믿겠어요."

"진짠데요?"

"···."

흔들리는 눈동자.

제약회사 회장이 진짜 약이라고 하는데 안 믿을 수도 없고.

"이 귀한 걸 어떻게···,"

"이깟 약보다 어르신이 더 귀한 분들이라서요."

노인분들은 소중한 인력이다.

오로지 이들만이 끊긴 조선 기술을 후대로 이어줄 수 있다.

배를 한 척만 건조할 건가?

컨테이너선, 유조선, 가스선, 그리고 여객선.

앞으로 만들어야 할 배들이 얼마나 많은데.

※ ※ ※

본격적인 수리 작업 시작.

엔진도 다시 손보고, 배 밑창에 흑암철 철판도 용접해서 붙이고.

전체를 흑암철로 붙일 필요는 없다.

"가로세로 1m 모양으로, 간격도 1m씩, 바둑판 모양으로 붙인다고 생각하시면 된 겁니다."

"흐음, 어렵지 않습니다. 맡겨주세요."

사실 이것도 많이 넣은 거다.

아무래도 첫 운항이다 보니 신경을 많이 쓴 것.

노인들만 있는 건 아니었다.

젊은 노동자들도 채용했다.

그들을 가르치면서 함께 일하는 자문 노동자들.

젊은 세대와 노년 세대가 힘을 합쳤다.

영약을 먹고 건강해진 노인들은 자신이 가진 노하우를 아낌없이 젊은이들에게 전수해주었다.

이것이 진정한 세대 통합 아니던가.

제국 각지에서 규격화된 컨테이너들이 양산 항구에 들어왔다.

선적 목표는 최소 1만 5천 개.

그리고 생산하자마자 컨테이너 안에 채워지는 생기불끈과 새살쑥쑥.

엄청난 숫자였다.

제약회사 직원들이 매일매일 야근을 해가며 이룬 결과물.

이 기세라면 목표치를 훨씬 뛰어넘을 것이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딱 하나를 빼고는.

컨테이너선을 만들면 뭘 하나?

배를 조종할 수 있는 선장과 선원들이 없는데.

사실 위험 부담이 엄청나게 크다.

해양 마수의 공격으로 바다를 지나던 배가 수백 척이 침몰한 지 불과 50년밖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태평양을 횡단한다고?

게다가 첫 출항, 안전이 검증되었다면 모를까.

태주는 사람들을 모집하면서 거액의 위험수당을 제시했다.

또한 자신도 배에 함께 승선할 거라 약속했고.

그래도 지원자가 한 사람도 없었다.

의외로 문제는 다른 곳에서 풀렸다.

"회장님."

도민수 소령이 태주를 찾아왔다.

"무슨 일로···?"

"선원들 구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요?"

"여기 지원자 명단입니다."

"오!"

현역 제국군인들, 그리고 전역자들.

합쳐서 100명이나 지원했다.

"주로 전직 해군들이시네요."

"네, 나이가 많으시지만 선박 운항에 대한 노하우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대형 전함을 조종한 경험이 있는 해군 장교에, 부사관 항해사와 기관사들, 이들도 나이가 지긋한 퇴역 군인.

50년 전, 바닷길이 끊겼을 때 민간의 배만 운항을 중단했을까?

해군 함정들도 있었다.

그로 인해 숙련된 병력은 다 전역해 버리고 규모 또한 볼품없이 축소되어버린 제국 해군.

지금은 근해 마수 정찰 및 방어 임무만 맡고 있었다.

"제가 다 고용하겠습니다."

이게 웬 떡이냐.

굴러들어온 호박이다.

태주는 영약을 아끼지 않을 생각.

이분들이 오래오래 살아있어야 선박 항해 노하우가 후대로 전승된다.

그러자 도민수 소령이 쭈뼛거리면서.

"저어기, 저도 여기 입사하면 안 되겠습니까? 배 타고 싶습니다."

안 될 리가!

"전역하셔야 하는데,"

"즉시 신청서 내고 다시 오겠습니다."

선원들도 확보했다.

물론 배를 운항하려면 재교육을 받아야 하겠지만.

이제 수리만 완료되면 배를 띄울 수 있다.

총력전.

국가와 민간기업을 망라한, 삼한 제국의 역량이 총동원됐다.

시간이 흐르고,

작업을 시작한 지 두 달이 다 되어가는 시점.

드디어 도크에 물이 채워졌다.

그리고 배가 물 위로 떠 올랐다.

※ ※ ※

선계도 똑같이 시간이 흘렀다.

당군악의 오픈형 스포츠카는 이미 선계의 명물이 된 지 오래.

큰손들이 엉덩이를 들썩이고 있었다.

염라도, 서왕모도, 그리고 태상노군도.

주문이 가능한지, 만약 가능하다면 언제 받을 수 있는지.

하지만 가난뱅이 신선들은 손가락만 빨았다.

그 와중에도 코인을 모아 자동차를 구매하려는 신선들.

황천계 초열지옥.

흑암철 제련 작업은 이렇게 이루어진다.

총 30개 조.

즉 30개의 생산 라인.

각 조엔 광석 운반부, 광석 용해부, 주괴 틀 제작부, 쇳물 투입부, 주괴 틀 해체부, 완성 주괴 운반부 등으로 구성되어있고, 관리인이 한 명씩 붙는다.

하나의 조당 약 100명의 죄인들이 일한다.

10개 조는 차사와 사자들이 관리하고 나머지 20개 조는 신선들이 담당한다.

따라서 초열지역에서 동시에 작업하는 죄인들은 무려 3000여 명.

무엇보다 중요한 역할이 관리자들.

가만히 두면 죄인들은 절대 일을 안 한다.

그나마 죄를 적게 지은 놈들을 3000명 골라 작업에 투입했지만 천성이 죄인 아닌가?

그래서 채찍질을 해야 한다.

솔직히 염라는 반신반의했다.

관리자로서 신선들을 데리고 왔지만 이들이 제대로 일을 할까?

하지만 그건 기우였다.

신선들은 매우 일을 잘했다.

쉬는 날을 제외하고 두 달 동안 작업한 양만 해도 흑암철 주괴 80만 개가 넘었다.

"동작 봐라, 손 움직이는 게 보이지?"

"이 새끼야! 남들은 광석 두 자루씩 메고 오는데, 넌 무슨 배짱으로 한 자루야?"

"할당량 못 채우면 광석 대신 네놈들을 녹여주마."

"다 녹였으면 바로 틀에 부어!"

"차곡차곡 안 쌓아? 개수 세기 좋게!"

신선 관리자들의 생산량은 어마어마했다.

아아!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데리고 오는 건데.

잠시 후,

일이 끝나고 염라 앞에 모인 20명의 신선들.

"흠흠, 수고하셨소."

"빨리 일당이나 주쇼."

"그건 그렇고 일 시키면서 간식도 안 주나?"

"맞아! 새참은 줘야지."

미안한 마음이 절로 든다.

그래서 염라는 약속한 일당 주괴 10개에 보너스로 2개씩 더 얹어줬다.

"오! 보너스."

"역시 대왕, 난 믿고 있었소."

"빨리 문이나 열어주시오. 여긴 너무 더워서."

"오늘 일한 품삯으로 시원한 맥주 한 잔씩 마실라니까."

"허허, 알겠소. 내일하고 모레는 일이 없을 테니 이틀 정도 푹 쉬시오."

염라는 선계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지이이이잉!

그러자 문을 통해 들어가는 신선들.

20명이 차례대로 선계에 도착했다.

도착하고도 그들은 헤어지지 않았다.

약속이나 한 듯 줄을 지어 어디론가로 걸어갔다.

서로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이윽고.

선계와 환수계의 경계.

숲이 우거진 한적한 곳에 와서야

"단주 선인, 빨리 꺼내 보시오."

"···아무도 없지?"

"없다니까! 우리가 한두 번 이 짓 하나?"

단주는 바지 고쟁이에 손을 넣더니 주섬주섬 부적 하나를 꺼냈다.

"여기 있소."

"어허! 눈으로 확인하고 다시 넣읍시다."

"···날 그렇게 못 믿나?"

"단주 선인 같으면 믿겠소?"

얼굴을 잔뜩 찡그린 단주 선인.

하는 수 없이 부적을 찢었다.

찌이익!

순간.

후두두두두둑!

허공에서 쏟아지는 대량의 흑암철 주괴들.

"흐흐흐, 이게 몇 개야!"

"좋구나, 좋아!"

"자동차 곧 살 수 있겠군."

사실 모든 계획은 단주 선인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가 독선의 무한공간을 보고 착안해서 만든 공간 부적.

하지만 공간의 크기는 그리 크지 않다.

아공간 가방 부피의 절반 정도.

게다가 1회용.

담을 때는 상관없지만 꺼낼 땐 찢어야 한다.

"이게 매번 무슨 꼴이요. 확인한답시고 찢고, 또 만들어서 담고, 이거 한 장 만드는 데 선기가 얼마나 소모되는지 아시오?"

"그래서 매일 매일 우리 몫의 선도를 넘겨주고 있지 않소."

"좀 믿고 삽시다."

이렇게 하는 이유.

혹시라도 빈 부적과 바꿔치기 당할까 봐.

의심을 받아 억울한 표정의 단주 선인은 새 부적을 꺼내 바닥에 떨어진 흑암철 주괴를 다시 담았다.

"몇 개요?"

"1,000개는 넘겠는데,"

"1000개로 맞추고 빨리 숨겨둡시다."

흑암철 주괴가 든 공간 부적을 숨겨둘 장소는 평범한 바위였다.

그 위엔 모산 선인이 새긴 술법진이 있었다.

"자, 모두 손을 올리시오."

20명의 신선이 모두 바위 위에 손을 올려야 술법이 작동하고 바위가 열린다.

그런데?

"왜 안 열리지?"

"누가 또 손을 안 올렸어?"

"다 올렸는데···, 누가 올리는 척만 하고 있는 거 아니오?"

"참나! 단주 선인 뭐 하는 게요? 손을 바위에 딱 붙여야지."

"응? 내가 안 했나?"

능청스러운 단주 선인의 표정.

"쯧쯧, 알만하군, 알만해."

"뭐가?"

"단주, 그대도 모산 선인 술법진을 믿지 못해서 그런 거 아니오. 20명이 다 손을 대지 않아도 바위가 열리는지 확인하려고."

"···어차피 피차일반이지."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는 신선들.

결국 20명이 모두 다 바위 위에 손을 올리니.

쩌억, 갈라지는 바위.

그리고 그 안엔 공간 부적 18장이 들어 있었다.

한 장을 더 넣으니 19장, 그리고 1,000개씩 담고 남은 짜투리 주괴도,

"흐흐, 보기만 해도 배가 불러."

"이제 한 장만 더 있으면 나눠 가질 수 있겠군."

노는 날을 빼고 두 달 동안 빼돌린 흑암철 주괴만 약 4만여 개, 이것 말고도 신선들은 각자 주괴 1,000개가 든 공간 부적 하나씩을 이미 품에 지니고 있었다.

그럼 이 19장의 공간 부적은?

아직 20장이 되지 않았다.

20장이 되면 또 한 장씩 나눠가질 예정.

왜 이렇게 번거롭게?

싸움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서로 먼저 가지려고 다툴 것이 뻔하다.

그래서 주괴 1,000개 씩의 공간 부적 20개가 다 모이면 그 자리에서 나눠 가지려고.

이전에도 그렇게 했다.

"언제 팔까?"

"흐음. 보름 후면 선계 월드 개장일이지? 그럼 쇼핑몰 세일 이벤트 진행되겠군."

"흐흐흐, 세일이라, 그럼 그때가 좋겠어."

"아마 이번 세일은 엄청날 거요."

"뭐가 또 있나?"

"선계 월드 개장 이벤트는 기본이고, 태주 대협 태평양 무사 횡단 기원 이벤트도 열린다고 하니."

"오오오오! 그럼 몇 프로?"

"잘하면 50%, 반값 세일이지."

신선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연신 싱글벙글,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이제 돌아갑시다."

"여긴 얼씬도 하지 말고."

"어차피 우리가 모두 함께 와야 바위가 열릴 거니,"

"잠이나 푹 잡시다."

신선들은 다시 자신들의 거처로 뿔뿔이 흩어졌다.

바위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그때였다.

쐐애애애애액!

허공에서 떨어져 내리는 검.

그리고 검 위에 타고 있는 한 사람.

"흐음, 여기다 숨겨뒀군."

검선이었다.

선계에서 가장 오래된 신선 중 하나.

술법진은 그의 검 앞에서 갈가리 찢겨나간다.

모산 선인의 술법진도 마찬가지.

서걱!

바위가 일검에 갈라졌다.

그 안에서 19장의 공간 부적이 수줍게 모습을 드러냈다.

흑암철 주괴 1만 9천 개였다.

선도로 따지면 1,900개.

코인으론 19만.

'이 정도면 스포츠카 충분히 사겠지?'

속고 속이고, 도둑질하고 도둑질당하고, 대환장의 선계 세상이었다.

< 속고 속이고, 도둑질하고 도둑질당하고. > 끝

ⓒ 꾸찌꾸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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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평양 횡단, 출발! >

삼한 제국의 양산 조선소.

도크에 들어간 초대형 컨테이너선이 수리되는 과정은 전 세계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매일매일 태홍 바이오 너튜브 공식 채널을 통해 생중계됐다.

태주의 지시였다.

이왕 판을 벌이려면 크게 벌여야지.

호텔이었던 대형 건조물이 바다에 띄울 수 있는 선박으로 변하는 모습들, 과연 저 배가 태평양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세계 각국에서 의견이 쏟아져 나왔다.

└ 무슨 신무기라도 장착된 줄 알았다. 그냥 평범한 배였어.

└ 철판만 덧대면 뭘 해? 대마수용 신형 어뢰라도 장착해야 하는 거 아니야?

└ 완전 무방비잖아. 능동 방어 체계도, 공격무기도, 달린 게 하나도 없네.

└ 태평양에 진입하는 순간 침몰하겠지.

└ 오오오! 재밌겠다. 가라앉는 모습도 생중계해주나?

성공할 거라는 의견도 간간이 있었다.

└ 난 믿어. 이번에도 해낼 거야.

└ 맞아. MRC도 만들어 낸 사람인데.

└ 물론 분야가 다르긴 하지만···, 그렇다고 헛소리할 사람도 아니고.

└ 분명 한 수가 있을 거야.

그러나 학계 전문가들과 언론들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엘리트 해양 마수의 대비 방안은? 결국 아무것도 없었다.>

<평범한 컨테이너선, 강기 공격을 감당할 수 있을까?>

<죽음으로 향하는 무모한 여정을 중단해야 한다.>

<배에 타고 갈 승조 인원 약 50명, 그들의 생명은 누가 보장하나?>

부정적 시각은 점점 심해졌고.

<김태주 회장도 배에 탈 예정, 하지만 만용이다. 만약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태홍 바이오의 운명은? MRC는?>

<침몰할 시 발생하는 엄청난 인적 물적 피해를 어떻게 감당하려는가.>

<보험회사들, 컨테이너선 보험 가입 거부, 승조원들이 사망해도 보상하지 않겠다고 선언.>

전 세계가 한목소리로 배의 출항을 멈추라고 요구했다.

그럼에도 태주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황제도 그랬다.

어차피 항해가 성공하면 사라질 목소리들.

굳이 반응해줄 필요가 있을까?

다른 것에 신경 쓰기로 했다.

이미 백악관과 사전에 조율했다.

무관세 수출입 합의.

약품을 가득 실은 컨테이너선이 아메리카로 들어간다.

그럼 팔아야지.

태주가 백서연에게 물었다.

"계약은 다 체결됐죠?"

"네, 컨테이너 1만 9천개, 모조리 팔렸습니다. 하역하는 즉시 대금을 지급받기로 했습니다."

계약 주체들은 아메리카의 유통업체들.

유통업체야 손해 볼 것이 없었다.

배가 들어오지 않으면 없었던 일이 되고, 무사히 들어오면 물건 받고 돈 주면 되니까.

"우리가 싣고 올 물건들은요? 주문은 받았는지."

빈 배로 돌아올 수 있나?

올 때도 가득 채워와야지.

그것도 순조롭게 진행됐다.

"제국 정부가 밀과 옥수수, 대두, 냉동육류, 그리고 대마수 대응 첨단 무기들을 아메리카 공화국에 주문했습니다. 돌아올 때 실어 오면 되고요."

주로 식량과 무기들.

아메리카 공화국이 자랑하는 생산품들.

특히 밀과 옥수수, 육류는 삼한 제국보다 질이 좋고 가격이 싸다.

그리고 대마수 무기들.

성능과 화력이 뛰어나다.

농축산업과 무기 기술에 한해선 아메리카가 삼한 제국보다 낫다.

"이제 갔다 오는 것만 남았네요."

"···저도 따라갈까요?"

"가고 싶으세요?"

"뭐, 배 타고 태평양 건너는 경험이 흔한 건 아니잖아요."

"참으세요. 백사장님이 없으면 태홍 바이오는 누가 지켜요?"

배 타는 게 뭐가 좋다고.

지루하기만 하지.

시간이 흐르고 배의 수리가 끝났다.

도크에 물이 채워지고 컨테이너선은 천천히 양산 항구로 이동해 선적장에 배를 댔다.

생기불끈과 새살쑥쑥이 가득 채워진 수많은 컨테이너.

그 개수만 해도 무려 1만 9천 개, 목표치에서 4천개나 초과 달성.

대형 크레인이 컨테이너를 하나하나 들어 올려 배 위에 차곡차곡 선적했다.

걸린 시간만 해도 이틀.

드디어 배가 항구를 떠나는 출항일이다.

선조원들이 배에 올랐다.

태주도 일백이를 품에 안고 승선하려고 했는데.

순간!

"냥? 냐아아아! 냐앙!!!"

일백이가 바들바들 떨면서 승선을 온몸으로 거부했다.

"왜?"

"캬악!"

"···타기 싫어?"

"냥!"

"쫄?"

"···캭!"

일이삼백이도 태생이 마수.

영물로 진화하긴 했지만 아직 완전하지 않은가보다.

그래서 흑암철의 영향을 받는 모양.

"쯧쯧, 넌 그냥 여기 있어라."

그러자 백서연에게 달려가 품에 쏙 안기는 일백이.

선도를 더 먹여야 하나?

어쨌거나 좋은 현상이다.

비욘드 엘리트에 버금가는 일이삼백이마저 무서워할 정도라면.

진수식은 생략하기로 했다.

언론사들도 부르지 않았다.

배가 양산 항구로 다시 돌아오는 날, 축하 행사를 진행하기로 하고.

뿌우우웅!

마침내 초대형 컨테이너선, 티제이호가 양산항을 빠져나갔다.

※ ※ ※

300년 전 마나의 침범.

인류가 행성 궤도에 띄웠던 위성의 태반이 사라졌지만 남아있는 것도 많았다.

주로 통신용 위성,

때문에 위성을 통한 인터넷 연결은 여전히 가능했다.

당연히 GPS도 정상적으로 작동한다.

따라서 컨테이너선 티제이호의 이동 경로도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고.

언론사들의 취재 경쟁이 시작됐다.

그들이 원하는 그림이 있었다.

엘리트 해양 마수들의 공격을 받아 컨테이너선 티제이호가 태평양의 깊은 바다 속으로 침몰하는 장면.

그럼 취재는 어떻게?

민간 항공기를 이용하면 된다.

GPS로 티제이호의 위치를 확인하고 비행 마수가 없는 태평양 상공으로 비행기가 날아가 드론을 투하해서 영상을 촬영하는 것.

고성능 결정체 배터리를 장착한 드론의 최대 운용 시간은 20시간이 넘는다.

즉, 하루 종일 선박을 따라가서 촬영한 영상을 전송할 수 있다.

북진하던 비욘드 엘리트 흑악지룡을 관찰할 때도 이 방법을 사용했었다.

비용이 엄청나게 들겠지만 컨테이너선 태평양 횡단이라는 대사건을 취재하려면 이 정도 돈은 써야지.

출항 1일째.

데이비드 모건을 비롯한 화이백 대주주들이 TV 앞에 모였다.

곧 있으면 티제이호의 현 상황이 생방송으로 중계될 예정이다.

김태주, 그놈의 배가 해양 마수의 공격을 받아 바닷속으로 수장되는 광경, 어떻게 놓칠 수가 있나?

"아직 멀었나?"

"드론이 떠야지."

"이미 침몰한 것 같은데."

"그럴지도, 하루가 훌쩍 지났잖소. 이쯤이면 위험 지역에 들어섰을 텐데."

순간!

TV 화면이 전환되고 푸르른 바다의 모습이 화면에 들어왔다.

그 중앙에 하얀 물살을 일으키며 항해하는 컨테이너선 티제이호.

데이비드 모건은 살짝 실망한 표정.

"···아무 일 없군."

"아직 육지와 가까우니까."

"워낙에 배가 커서 일반 마수들은 건드릴 생각도 안 할거요. 하지만 곧 있으면 엘리트 해양 마수가 따라붙을 테지."

드론은 계속 티제이호를 따라갔다.

하지만 비행시간이 다돼 드론이 추락할 때까지도 항해는 순조로웠다.

출항 2일째.

여전히 GPS 신호는 살아있었다.

다시 항공기가 태평양으로 출격했다.

투하되는 원통형 드론 포탄.

수면에 가까이 다가가자 금속 원통이 갈라지고 드론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티제이호 바로 위에서 촬영을 시작하고 영상을 전송하는 드론.

여전히 아무 일 없었다.

이쯤 되자 횡단 실패를 예측했던 사람들의 마음이 점차 불안해졌다.

'이러다 진짜 성공하면 어떡하지?'

출항 3일째.

여전히 순항 중이었다.

왜 무사할까?

엘리트 해양 마수는 대체 어디 있는 걸까?

언론들이 슬슬 돌아서기 시작했다.

출항 4일째.

여론도 변했다.

태평양 한가운데 아닌가?

이런데도 무사하다면 거의 성공이나 마찬가지.

컨테이너선은 빠르게 바다를 질주하고 있었고, 그 어떤 마수의 위협도 보이지 않았다.

이제 사람들은 이유가 궁금해졌다.

대체 왜 멀쩡한 거지?

혹시 엘리트 해양 마수의 위치를 사전에 파악한 건 아닐까?

지도를 만들어서 놈들의 영역을 피해 가는 것일 수도.

출항 5일째.

이번엔 드론을 티제이호 앞쪽에다 투하했다.

그리고 배를 앞질러 고도를 높이니.

"아!"

데이비드 모건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드디어 기대했던 장면이 나왔다.

나머지 주주들도 벌떡 일어났다.

"저거 보이시오?"

"도끼 꼬리 범고래 같은데."

"크기로 봐선 엘리트가 확실합니다."

"이제 끝났군요."

형태가 생생하게 보인다.

물속에서 헤엄치고 있는 엘리트 도끼 꼬리 범고래의 모습.

태평양 최강의 엘리트 해양 마수.

일반이라도 무서운 놈인데.

크기는?

길이만 해도 100m가 넘어 보였다.

어마어마한 크기다.

티제이호 진행 방향 앞쪽에서 마주 보며 헤엄쳐오고 있었다.

거리는 약 2km, 점점 좁혀졌다.

곧 마주칠 것이다.

강기가 어린 꼬리 도끼가 선체를 찍어 박살 낼 것이다.

동시에 김태주의 황당한 꿈은 수면 아래로 침몰할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어?"

"무, 무슨?"

"이럴 수가···,"

갑자기 엘리트 도끼 꼬리 범고래가 급하게 방향을 틀었다.

심지어 당황한 듯 지느러미를 뒤틀면서 티제이호의 진행 경로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쳤다.

"도망간다고?"

"···왜?"

"마, 말도 안 돼."

데이비드 모건은 돌아버릴 지경.

이러면 배가 무사히 아메리카 공화국으로 들어온다.

화이백에 투자했던 거액의 돈이 물거품처럼 사라질지도 모른다.

서둘러 주가를 확인해보니.

"맙소사···."

그나마 살짝 반등했던 화이백 주가가 바닥을 모르고 추락하고 있었다.

출항 6일째.

엘리트 도끼 꼬리 범고래가 컨테이너선 티제이호에 화들짝 놀라 방향을 트는 장면, 세계인들도 경악했다.

└ 실화냐? 엘리트 해양 마수가 도망간다고?

└ 믿는 게 저거였구나.

└ 와! 꽁지 빠지게 튀는 거 봐라.

└ 역시 김태주 회장은 계획이 있었어.

└ 실패무새 새끼들 다 어디 갔냐?

└ 이 정도 왔으면 게임 끝났잖아.

언론과 여론은 완전하게 역전됐다.

부정적 내용은 온데간데없었고 찬양 일색의 기사들이 쏟아졌다.

출항 7일째.

순항하고 있는 티제이호도 축제 분위기.

태주는 선상 위에서 선원들과 함께 포자 독 낙타 고라니 고기 파티를 벌였다.

열심히 고기를 굽고 있는 도민수 소령, 아니 견습 항해사에게.

"절반은 넘었죠?"

"네, 빠르면 3일, 늦어도 4일 안에 아메리카 뉴 LA 항구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그쪽은 어떻게 되고 있답니까?"

"하역 작업 준비에 돌입했다고 연락 왔습니다. 빠듯하지만 입항일에 맞춰보겠다고."

이제 흑암철의 존재를 밝힐 때가 됐다.

물론 황천계나 선계 이야기는 빼고.

연금술 스킬로 우연히 발명했다고 포장하면서.

태주는 백서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 보도자료 뿌리세요.

- 네.

바다가 안전해졌다고 착각할라.

사람들이 멋모르고 배를 띄우면 큰일.

그전에 알려줘야지.

<성공의 비결은 배 밑창에 있었다.>

<배 밑창에 용접해서 붙인 까만 철판의 정체는?>

<일명 지옥의 금속, 마수 퇴치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김태주 회장이 창조한 또 하나의 기적.>

<컨테이너선뿐인가? 지옥 금속의 쓰임새는 무궁무진하다.>

고작 철판 하나로 마수를 쫓아내다니.

세상이 발칵 뒤집어졌다.

※ ※ ※

선계(仙界) 멀티플렉스 앞마당.

당군악은 기가 막혔다.

"안되오?"

"···."

"개당 10코인이지만 9코인에 넘기겠소."

"···."

"8코인?"

환장하겠다.

대체 이 많은 흑암철을 어떻게 구했단 말인가?

신선들 20명이 황천계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일당이라 해봐야 주괴 10개고, 또 검선(劍仙)은 황천계에서 일을 하지도 않는데.

"···검선, 이거 혹시 장물이요?"

"그게 중요하나?"

"중요하지."

"흐음, 솔직히 말하자면 장물의 장물이랄까."

장물의 장물.

알만하다.

훔친 걸 또 훔쳤다는 의미.

"아니, 정말 신선 맞소? 검선이 아니라 도선(盜仙) 아니시오?"

"응? 누가 보면 독선이 성인군자인 줄? 우리 천도도 같이 훔치려 했던 사이인데, 뭘 새삼스럽게."

"···."

할 말이 없다.

순간!

멀리서 들리는 시끌벅적한 소리.

"독선!"

"어디 계시오?"

"누가 흑암철 팔러오지 않았소?"

"이런 망할 도둑놈 새끼, 잡히면 그냥 두지 않으리다!"

"검선이 틀림없어. 내 술법진을 그렇게 간단하게 부술 수 있는 자가 검선 말고 또 있겠나?"

우르르르.

20명의 신선들이 앞마당으로 달려왔다.

스슷!

어느 틈에 사라진 검선.

"오호라!"

"내 이럴 줄 알았다."

"이 주괴들 보소."

"이거 다 우리 거요."

"단주 선인 빨리 담읍시다."

당군악이 제지했다.

"잠깐!"

"왜 그러시오? 우리 물건 우리가 가져가겠다는데."

"진짜 그대들 것이오? 훔친 게 아니고?"

"아, 아니, 그, 그게···,"

"황천계 보기 부끄럽지 않나? 맨날 죄인과 다름없는 황천계 놈들, 하면서 놀려댄 걸 잊었소?"

"···."

아무리 우화등선의 자격이 선(善)함의 정도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지만, 이건 너무 심했다.

우물쭈물하면서 변명하는 단주 선인.

"···부러워서 그랬지. 천계는 꽃으로, 황천계는 흑암철로 코인을 무한대로 얻는데 우린 이게 뭐요? 고작 하루에 선도 하나? 시계 하나를 사려고 해도 선도가 최소 300개는 필요한 판에."

신선들의 말도 일리가 있다.

당군악도 그 부분에 있어서 고민해왔고.

심지어 대책도 세워놨다.

하지만 먼저 바로잡아야지.

염라가 알면 가만히 있을까?

갈등이 생겨날 게 뻔하고, 조화로운 선계가 혼돈으로 치달을 수 있다.

"이 주괴들은 내가 압수하겠소."

갑자기 스르륵, 나타난 검선.

"그대가 무슨 권리로···,"

"신용패 압수할까? 멀티플렉스 출입 금지는 어떻소?"

"···."

"그대들이 훔친 것도 마찬가지요. 살려는 드릴 테니까 빨리 다 꺼내시오."

어쩔 수 없었다.

선계, 아니 상위 계 최고 권력자가 누군데.

신선들은 상심한 표정으로 흑암철 주괴가 든 공간 부적을 당군악에게 넘겼다.

얼마나 꿈에 부풀어 있었는데.

흑암철 주괴는 누군가의 스포츠카였고, 또 누군가의 소맥과 치킨이었으며, 명품 시계와 수트였고, 태블릿과 노트북이었다.

그러나 다 사라졌다.

당군악도 그 마음을 왜 모를까.

그래서.

"사실 이틀 후에 선계 월드 개장식에서 발표할 예정이었는데, 일찍 말해줘도 괜찮겠군."

"···뭘 말이오?"

"나도 선계가 기울어진 운동장이란 걸 잘 알고 있소. 당연히 균형을 맞춰야지."

귀를 쫑긋하는 검선과 다른 신선들.

"선계 특별 상생 지원금을 지급할 예정이오. 선계 신선이라는 누구나 다 적용되오."

"사, 상생 지원금?"

"1인당 선도 코인 15만 개씩."

잘못 들었나?

15만 코인의 선계 특별 상생 지원금이라고?

"어···,"

"음."

"15만? 선도 1,500개를?"

"지, 진심인가?"

"무르기 없기요!"

사실상 중앙은행이자 조폐공사의 지위를 가진 당군악.

뭐가 어렵나?

신용패에 숫자만 찍어주면 끝나는데.

또한 무한 공간에 가득 차 있는 지구의 물건들.

너무 많이 쌓여있었다.

한번 거하게 풀어버릴 때가 됐다.

"내가 거짓말하는 거 봤소? 나도 신선이요. 가재는 게 편이지."

신선들의 눈이 반짝였다.

설마 우나?

"···마, 만세!"

"만세! 만세! 만세!"

"독선 만세!"

"태주 대협 만세!"

"상생 지원금 만세!"

만세 소리에 멀티플렉스 안에 있던 다른 신선도 우르르 밖으로 나왔다.

"뭐요? 갑자기 만세라니?"

"좋은 일 있나?"

"상생 지원금? 선계에 코로나가 퍼졌소?"

그들도 이유를 듣고선,

"만세! 만세! 만세!"

모든 신선이 두 팔을 하늘 위로 번쩍번쩍 올리며 외쳤다.

축제였다.

그리고 이틀 후.

선계 월드 개장식.

펑! 퍼펑! 퍼퍼퍼퍼퍼펑!

선계 하늘 위로 폭죽이 피어올랐다.

< 태평양 횡단, 출발! > 끝

ⓒ 꾸찌꾸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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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지개벽 >

출항 9일째.

유유히 태평양을 지나는 티제이호.

이제 거의 다 왔다.

내일이면 NEW LA항에 입항할 수 있을 터.

티제이호의 선장은 전직 해군 함장 장동조였다.

비록 과거 자신이 탔던 배보다 훨씬 큰 컨테이너선을 책임지고 있지만, 재교육도 거쳤고, 기존 운항 노하우도 있어 임무 수행에 모자람은 없었다.

50년 전 이지스 구축함 뉴서울함의 함장이었던 장동조.

삼한 제국의 해군으로서 대양을 누비겠다는 부푼 희망을 품고 있었지만, 해양 마수의 범람에 의해 좌절됐다.

그 후, 육군으로 보직을 변경해 마수 사냥도 하고, 전역해서 민간 길드에 들어가 돈을 벌기도 했지만 푸르른 바다로의 꿈은 늘 안고 살아왔다.

그러다가 들어온 제안.

태홍 바이오의 김태주 회장이 태평양을 횡단하려고 한다.

어떻게 참아?

즉시 지원했다.

죽으면 어때?

살 만큼 살았다.

생의 마지막을 바다에서 맞이한다고 해도 상관없다.

오히려 땅에서 죽으면 후회하겠지.

하지만 자신의 선택은 신의 한 수였다.

50년 만에 태평양을 횡단한 컨테이너선의 선장으로 이름이 남게 되었으니까.

나이는 90이 넘었지만 슈페리어 등급의 각성자 출신이었고, 게다가 김태주 회장님께서 친히 영약을 하사해주셔서 단번에 마스터로 올랐다.

그래서 젊은 선원들보다 더 정정했다.

"난 지금도 실감이 안 나. 자넨 어떤가? 도민수 소령, 아니 견습 항해사."

"저야, 뭐, 오래전부터 옆에서 그분을 지켜봐서···, 근데 사실 이런 식일 줄은 전혀 예상 못 했습니다."

"어떨 거라 예상했는데?"

"직접 바닷속으로 들어가셔서 엘리트 해양 마수를 잡으실 줄 알았죠."

"허허, 그랬어도 실감 안 나는 건 마찬가지였을 거야."

아무튼 항해는 안전했다.

해양 마수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마수 탐지기는?"

"깨끗합니다. 물고기로 추정되는 어군 말고는···,"

어군 탐지기를 개조한 마수 탐지기.

가끔 바다 저 밑의 대형 마수들이 포착되긴 했지만 금세 사라졌다.

"참나, 마수가 피해 다니는 컨테이너선이라니."

"태평양 횡단은 이미 성공한 거나 다름없죠."

이게 다 김태주 회장 덕분.

조타실에서도 그분이 보였다.

컨테이너 위에 서서 먼바다를 바라보는 모습.

순간!

"헉!"

"어?"

깜짝 놀라는 장동조와 도민수.

"어디 가셨어?"

"···바다로 뛰어내린 것 같은데요?"

"서, 설마 사고는 아니겠지?"

"에이, 그럴 리가요. ···수영하러 가셨나?"

※ ※ ※

태주는 바다로 뛰어내렸다.

그리고 만리비검을 타고 컨테이너선에서 멀리 떨어졌다.

해양 마수.

과연 바닷속에선 레이드가 불가능한 걸까?

특히 엘리트 해양 마수.

전엔 흑암철 실험하느라 그냥 놔두고 왔지만, 지금은 시간이 널널하다.

실험 삼아 잡아봐야지.

한참을 날아가니 물 밑에서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풍덩!

바다 밑으로 들어가서.

등선 이전의 당군악은 수공을 익히지 않았다.

물에 들어갈 일이 뭐가 있나?

그래서 태주도 물속에선 제한을 받을 수밖에 없다.

'확실히 몸을 움직이는 건 어렵네.'

암기술은 통할까?

기운이 느껴지는 곳으로 팔다리를 움직여 잠수해 들어가자 해양 마수 한 마리가 보인다.

엘리트가 맞았다.

속도가 비교적 느린 엘리트 백촉 해파리.

'해파리면 독이 있을지도.'

잡아보자.

쓔웅! 쓔우웅! 쓩!

물살을 가르고 하얀 거품을 남기며 쏘아지는 유엽비도.

꿀렁꿀렁.

위협을 느낀 엘리트 백촉 해파리가 펄럭거리며 피하려고 했지만.

쩌어엉, 쩡!

강기 보호막이 깨어지고,

푸푸푹! 푹푹! 푹푹!

유엽비도가 작살처럼 박혔다.

부르르르,

몸을 떨면서 바다 밑으로 가라앉는 엘리트 백촉 해파리.

'통하긴 통하는구나.'

하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다.

물의 저항 때문에 암기의 속도가 느리다.

공기를 가르고 잔상을 남기며 빛살처럼 츠핏, 날아가는 맛이 없다.

태주는 가라앉는 해파리 쪽으로 헤엄쳤다.

경공도 쓸 수 없어서 몸놀림이 불편하다.

수공을 배웠으면 이보단 나았을 텐데.

독(毒)은 해파리 촉수에 있다.

칼로 촉수를 잘라서 무한공간에 넣고.

또한 엘리트 마나 결정체도.

'다른 엘리트 마수도 잡아볼까?'

푸앗!

태주는 다시 물 밖으로 나왔다.

한 번 더 만리비검을 타고 비행.

하늘 높이 떠올라 밑을 내려다보다가.

"오!"

초대형 돌고래 마수였다.

흑암철 실험할 때 바다에서 본 기억이 난다.

웬만한 보트만큼 큰, 하지만 매우 빨랐다.

'송곳 머리 박치기 돌고래였던가?'

하지만 저건 엘리트 마수.

일반 돌고래보다 훨씬 더 컸다.

풍덩!

바다로 잠수.

순간!

"뀨이이익!"

태주를 발견했는지 고음의 초음파를 뿌리며 무섭게 돌진해오는 놈.

스스스슷!

태주의 손에서 암기가 나타났다.

쓩! 쓔쓔쓔쓩!

무한공간에서 나오자마자 강기를 덧씌우고 쏘아졌다.

하지만,

'으음.'

피윳! 피유웃!

엄청난 속도의 몸놀림으로 요리조리 유엽비도를 피해 가는 돌고래.

'하아,'

물속에서의 돌고래는 무지하게 빨랐다.

태주의 암기도 만만치 않게 빨랐지만 그걸 다 피해내다니.

'초음파 때문인가?'

돌고래 마수가 가진 특유의 능력 마나 초음파.

그걸 쏴서 암기가 오는 경로를 미리 예측하는 것 같다.

바다라는 환경은 돌고래에겐 이점.

그러나 태주에겐 약점.

하는 수 없이 물 밖으로 머리를 내밀어.

푸앗!

만리비검을 꺼내 위에 올라타니.

파슛!

엘리트 송곳 머리 박치기 돌고래가 수면 위로 솟구쳐 올라 태주에게 달려들었다.

"너 잘 걸렸다."

츠피릿! 츠피피피핏!

쩌어어엉! 푸푸푸푸푸푹!

"끼에에에엑!"

단숨에 강기 보호막까지 뚫어버리고 유선형의 몸체를 관통하면서 날아가는 암기들.

돌고래 마수의 몸에 수백 개의 구멍이 뚫렸다.

뛰어올랐을 땐 멀쩡했지만 밑으로 떨어질 땐 이미 절명한 후였다.

'물 밖에선 껌이지.'

실험은 끝났다.

생각보다 만만치 않다.

'레이드는 안 되겠네.'

물론 만만한 놈도 있지만.

아무 탈 없이 안전하게 지나가는 걸로 만족하자.

배로 돌아가기 전에 엘리트 마나 결정체는 뽑아서 가고.

※ ※ ※

출항 10일째.

컨테이너선 티제이호는 물살을 가르며 나아갔다.

이제 다 왔다.

저 멀리 보이는 육지.

그리고 하늘엔,

투타타타타타,

위잉! 위이이이잉!

하늘을 가득 메운 방송사 헬리콥터들과 드론들.

난리가 났다.

- 역사적인 현장입니다. 태평양 횡단 성공, 지금 초대형 컨테이너선 티제이호가 NEW LA항으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 선상에 선원들의 모습도 보입니다. 그들도 우리처럼 감격하고 있을까요?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영웅들입니다.

- 우리가 어리석었습니다. 전 세계가 실패를 예감하고, 누군가는 고개를 흔들고, 또 누군가는 비웃고 조롱했지만, 이번에도 김태주 회장은 보란 듯이 증명해냈습니다.

티제이호가 하역장에 들어왔다.

순간!

퍼퍼퍼퍼펑! 펑펑펑펑! 펑펑펑펑!

미리 준비한 건지 항구에 배치된 수십 기의 대포에서 축포가 쏘아 올려졌다.

동시에 군악대가 연주를 시작.

하선용 사다리 계단이 배에 걸리자,

태주를 비롯한 승조원들이 천천히 육지로 내려왔다.

길게 깔린 붉은 카펫.

빌리 피트먼 대통령이 직접 마중을 나왔다.

"축하합니다. 미스터 킴!"

"감사합니다."

"오히려 제가 더 감사하죠. 아메리카 공화국이 바닷길 복원의 주인공이 됐잖아요."

"하하하, 그런가요?"

또 한 번의 천지개벽.

세상이 발칵 뒤집혔다.

그리고 여지없이 중심엔 태주가 있었다.

※ ※ ※

대망의 선계 월드 개장.

삼한 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놀이공원을 본떠 만들었다.

월드의 중심엔 멀티플렉스가 있고, 사방으로 쭉쭉 뻗은 도로, 길 양쪽으로 세워진 각종 어트렉션.

근처에 중형 결정체 발전소가 세워져 있어 에너지는 충분했다.

곳곳에 간이 충전소도 만들었다.

천인 아이들이 타고 다닐 작은 전동차를 위해.

천인들이 어디 아이들만 있나?

남녀노소, 다양한 연령대의 천인들도 선계 월드에 방문했다.

그리고 신선들과 도화궁 선자들, 황천계, 천계 관리들과 선녀, 천군들과 신장···, 상위 계 모든 존재가 개장식에 초대됐다.

펑펑! 퍼퍼펑! 펑! 펑! 펑!

개장식의 시작은 불꽃놀이.

폭죽 터뜨리는 거야 신선들도 인간계에서 충분히 경험했다.

명절에 곧잘 하는 놀이 중의 하나니까.

하지만 이건 지구에서 공수한 불꽃.

호풍환우의 능력을 갖춘 신선들이 일시적으로 어둡게 만든 하늘에서 화려하게 터졌다.

동시에 대형 스피커에서 흥겹고 경쾌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환상과 모험의 나라, 즐거운 축제,

행복이 살아 숨 쉬는 선계 월드.

시끌벅적, 요란하게 했다.

이런 상황에서 도저히 잠을 잘 수나 있나?

신선 한 명이 시끄러운 소리에 눈을 떴다.

선계 깊숙한 곳, 은밀한 거처에서 수년 동안 잠들어 있던, 그래서 선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아무것도 몰랐던 신선이었다.

"끄응,"

초췌한 표정으로 기지개를 켜면서.

"뭔 소리래? ···폭죽? 선계에서 무슨 폭죽놀이야? 시끄럽게,"

신선의 이름은 하선고였다.

원래 선명은 하선(何仙), 태상노군을 제외하면 선계에서 가장 오래된 신선 중 한 명, 검선과 쌍벽을 이룬다.

선명에 여성을 의미하는 고(姑)자가 붙어서 하선고(何仙姑), 이랑(二娘) 선인이라고도 불리었다.

선계는 지루한 세상이었다.

그래서 무료함을 이겨내는 신선들만의 방법이 있다.

하선고의 경우엔 잠이었다.

3년 동안 잠들어 있었다.

선계에서 뒹구는 것보다 훨씬 낫다.

그런데 외부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잠이 깨고 말았으니.

"미친 새끼들이 또 무슨 짓을 벌인 거지?"

같은 신선들이지만 어디로 튈지 모르는 망나니들.

틈만 나면 사고를 치고 다니는 천방지축 골치 덩어리.

하지만 그녀도 이해한다.

아무리 깨달음을 얻어 등선했더라도 지루하고 숨 막히는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가볼까?'

깨어난 김에 얼굴들이나 보고 다시 자자.

그리하여 하선고는 3년 만에 자신의 거처를 나섰다.

흐트러진 산발 머리에, 낡아서 구멍 나고 빛이 바랜 도복, 땟국물이 줄줄 흐르는 얼굴, 누가 보면 거지라고 해도 무방한 모양새.

저 멀리서 폭죽과 함께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곡조가 흘러나온다.

그쪽을 향해 터덜터덜, 하선고는 신발도 신지 않고 맨발로 걸었다.

'으음···,'

가까워질수록 소리는 더 커졌다.

그리고 꺄르륵, 웃음소리도.

'꺄르륵이라니, 신선들이 그렇게 웃을 리가 없잖아.'

순간 눈에 들어온 광경.

저 멀리 보이는 높은 목조 건물.

그 주위에 펼쳐진 기이한 구조물들.

"저건 또 무슨···,"

스팟!

하선고는 축지를 이용해 단숨에 달려갔다.

"아···,"

대체 여기가 어딘가?

선계가 맞긴 한 걸까?

'내가 잠을 덜 깼나?'

그게 아니면 도저히 설명이 안 되는 상황.

하나같이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천지개벽이라는 말이 모자라지 않을 정도.

히죽히죽 웃으면서 돌아다니는 낯익은 신선들만 없었다면 다른 세상에 온 줄 알았을 터.

'저 새끼, 주정뱅이 태백이잖아? 근데 저 옷은 뭐야?'

신선들 뿐인가?

선계에서도 쉽게 보기 힘든 천인들이 가득했다.

다들 환한 표정으로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하선고는 멍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오른쪽엔 용의 형상으로 만든 긴 물체가 보인다.

'청룡? 동해 용왕을 본 떤 건가?'

선계에서 용왕을 왜?

비루한 미물 지렁이 모형을 만들어서 뭐 한다고.

자세히 보니 바퀴가 달렸다.

천인들과 신선들, 황천계 차사로 보이는 사람들이 줄줄이 앉아 있었고,

'타는 거구나.'

하긴, 용 새끼 쓸모가 탈 것밖에 더 돼?

청룡 모형이 꾸불꾸불한 길 위를 이리저리 비틀며, 심지어 한 바퀴 뱅글 회전한다.

그럴 때마다 터져 나오는 환호성.

"꺄악!"

"으아아아···,"

"좋구나!"

왼쪽엔 커다란 배 같은 게 기둥 지지대에 매달려 있었다.

배 안엔 역시 사람들이 타고 있었고.

마치 그네처럼 앞으로 갔다가, 뒤로 갔다가,

"만세!"

"어이쿠!"

"잠깐! 머, 멈춰! 바, 바이킹 안전바가 들려!!!"

"세워주시오! 세우시오. 세워달라고! 제발···,"

"신선이 왜 이렇게 겁먹었어?"

"선기 봉인했잖아."

저 배 이름이 바이킹?

저쪽엔 나무로 만들어진 목마들이 있었다.

커다란 원판에 놓여 저절로 아래위로 움직이며 뱅글뱅글 돌아간다.

목마 하나에 타고 있는 신선 한 명.

아래위로 쫙 달라붙은 검정색 복색, 짧게 자른 머리와 수염.

'···태상노군?'

맞다.

태상노군이 회전하는 목마를 타고 허허, 웃고 있었다.

'뭐야? 저 노인네, 쓸데없이 해맑아?'

바닥엔 돌로 만든 길도 깔려있었다.

바퀴가 달린 희한한 탈것으로 오고 가는 천인들.

'이 맨들맨들한 돌길은 언제 깔았지?'

돌길은 사방으로 뻗어있었다.

순간!

저 앞에서 너무나 화려하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여인이 걸어왔다.

'응?'

또각또각, 뒤꿈치가 위로 잔뜩 올려진 신발, 짙은 원색의 가방, 그리고 반짝반짝 빛나는 목걸이와 귀걸이.

누구더라?

많이 봤는데.

설마?

"···서왕모?"

"누구···, 아! 하선고였군. 난 또 어디서 거지가 굴러들어왔나 했더니."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왜 선계가···,"

"뭐? ···또 어디서 잠이나 처자고 나온 모양이구나. 그럼 모르는 게 당연하지."

서왕모는 피식, 조소하며 말을 이었다.

"넌 그냥 잠이나 계속 자라. 천인들 보기에 부끄럽지도 않으냐? 그런 더러운 꼴로···."

"이런, 썅년이!"

"응, 꺼져! 거지 년아!"

그때였다.

부아앙! 부앙! 부아아아아아!

미끈한 빨간색의 탈것이 옆에 섰다.

반색하는 서왕모.

"어머? 독선 아니세요?"

"타시오. 한 바퀴 돌아봅시다."

"호호, 기다렸잖아요. 안 그래도 언제 태워주나 했는데."

서왕모는 마치 승리자가 된 표정으로 하선고를 향해 비웃음을 한번 날려주더니, 독선이라 불리는 신선의 옆자리에 냉큼 앉았다.

"가요, 독선."

"그런데 저분은?"

"미친 년이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답니다."

부아아아앙!

빨간 철마차가 굉음을 내고 빠르게 달려갔다.

'하아.'

하선고는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썅년이지만 서왕모의 말이 맞다.

이 휘황찬란한 공간에서 어울리지 않는 사람은 바로 자신뿐이었다.

그나저나 독선이란 사람은 누구지?

처음 보는 신선인데,

'잘 생기긴 했네.'

그러니 서왕모가 저렇게 질질 흘리고 다니지.

여하튼 선계가 이렇게 변한 이유나 알아보자.

누구에게 물어볼까?

저 주정뱅이 태백이는 헤롱헤롱 헛소리만 늘어놓을 게 뻔하고, 태상노군은 꼰대라서 잔소리만 할 테고, 똑똑한 귀곡이나 갈홍이면 적당한데,

"오!"

마침 적당한 신선이 보인다.

"야! 동빈아!"

그러자 하선고와 눈이 마주친 검선의 표정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 천지개벽 > 끝

ⓒ 꾸찌꾸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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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등 >

하역작업은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크레인을 이용해 컨테이너들이 차곡차곡 하역장에 내려졌다.

물건을 계약한 바이어들이 안달이 났다.

저마다 계약서를 들고 태주에게 달려와서.

"컨테이너 100개분 계약서입니다. 회장님, 인수확인증 사인 빨리 부탁드립니다."

"···통관절차는?"

"아! 그거 생략해도 된다고 통보받았습니다."

아니, 그래도 검사 정도는 해야 하지 않나?

검증된 물품이니 이해는 하지만.

바이어들은 마음이 급했다.

한시라도 빨리 물건을 팔아야지.

컨테이너들은 배에서 내리자마자 간단한 확인을 거쳐 차량을 통해 아메리카 각지로 이동됐다.

거의 드링크제와 외상 치료제.

8대2 비율로 가져왔다.

생기불끈이 8, 새살쑥쑥이 2.

생기불끈은 일반인들이 간절히 고대했고, 새살쑥쑥은 주로 의료계에서 원했다.

새로운 주문도 쏟아졌다.

"다음 선적 물량으로 생기불끈 600만 병, 계약될까요?"

"처음 물량의 두 배네요? 본사와 직접 의논하세요."

"···어떻게 구두 계약이라도,"

"한번 계약했으니 두 번째도 무리없이 진행될 겁니다."

"아! 감사합니다."

첫 계약자들.

자신을 믿어준 사람들이다.

혜택을 줘야지.

하지만 새로운 바이어들은 거래 뚫기가 매우 어려웠다.

"저, 남는 컨테이너 물량이 있습니까? 여분이 있으면 당장 사겠습니다. 거래 금액은 결정체로 드리죠."

"이번에 들어온 컨테이너는 모두 팔렸어요."

"그럼 다음 선적 물량을 미리 계약···,"

"글쎄요. 순서가 올지 모르겠네."

"네?"

이들은 티제이호가 절대 태평양을 건너지 못한다고 판단했던 사람들, 그런데 인제 와서 물건을 사가겠다고?

"우리와 처음 계약했던 바이어들이 우선이라···, 본사에 연락해보시죠. 혹시라도 남으면 모르겠지만."

그러나 남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도 초기 물량의 두 배씩 주문이 들어오는 판에.

하역작업은 저녁까지 진행됐다.

이윽고 밤이 되고, 선원들은 잠시 짬을 내어 NEW LA 시내로 놀러 나갔다.

열심히 배타고 와서 일했으니 밤엔 놀러 가는 게 맞지.

그러나 태주는 계속 배 위에 머물러 있었다.

딱히 어디 갈 데도 없고.

'타고만 있어도 좋네.'

남자들의 다양한 버킷 리스트.

리스트에 가장 많이 포함되는 항목.

바로 자신의 배를 가지는 것.

대부분 요트 같은 걸 상상하지만 자신은 무려 컨테이너선 오너다.

'나중에 요트도 만들어야지.'

순간!

태주의 기감에 무시할 수 없는 기운 몇 개가 느껴졌다.

그것도 배 바로 아래에서.

아무래도 각성자 같다.

'···마스터인가?'

점점 가까워진다.

타닥, 타다다닥!

높은 배 위를 직접 뛰어서 올라와 선상에 착지한 후, 태주에게 걸어오는 3명의 마스터 등급 각성자들, 남자 2명에 여자 1명.

'흐음.'

왜 왔지?

그중 한 명의 얼굴이 낯익다.

이름이 뭐더라?

누가 됐든 예의는 밥 말아 먹은 놈들.

"김태주 회장님, 한참 찾았습니다. 연락할 방법도 없고, 항구에서도 안 보이고, 그래서 배 위에 있나 싶어서 올라왔는데···,"

"누구시죠? 이 늦은 밤에, 정부 관계자는 아닐 테고,"

"구면이잖습니까? 백악관에서 인사를 나눈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글쎄요. 딱히 중요하지 않으면 금방 잊어먹어서."

남자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인피니티 클랜의 트로이 매카시입니다."

"아! 이제야 생각이 나네요. 죄송해요. 제 기억과 너무 달라서."

"뭐가 다르단 말이죠?"

"그때는 예의가 바르셨던 분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다짜고짜 허락도 안 구하고 남의 배 위로 뛰어오르는 지금과는 사뭇 달라서."

"···."

트로이 매카시는 눈을 가늘게 떴다.

'시건방진 원숭이 주제에,'

만찬장에서 나름 예의를 갖춰 대해줬더니, 자신이 뭐라도 되는 것처럼 기어오른다.

'역시 잘 대해주면 안 되는 거였어.'

김태주가 왜 이렇게 오만한지는 잘 알고 있다.

MRC 개발에, 태평양 횡단에, 그리고 각성자가 아님에도 마스터보다 강하다는 놈의 무력···.

문양도 없는 놈이 각성자보다 강해?

솔직히 말이 될까?

각성자가 아닌데도 마스터를 이겨?

'사기꾼 새끼,'

김태주는 각성자가 틀림없다.

그럼 얼굴 각성 문양은?

숨기는 방법은 꽤 많다.

그중에서도 가장 확실한 것이 폴리모프 아이템.

지금도 김태주는 손가락에 반지를 착용하고 있다.

그것도 2개씩이나.

트로이 매카시는 굳은 표정을 풀었다.

지금은 비즈니스가 우선.

"그 부분은 제가 사과드리겠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연락이 되지 않아서, 두 번 다시 무례할 일이 없을 겁니다."

지이잉!

태주의 손가락 황천계 판관의 구리반지가 진동했다.

거짓말이었다.

진심 어린 사과가 아니거나, 또 무례를 저지르겠다거나.

"···네, 받아들이죠. 그런데 무슨 일로?"

"제안할 것이 있어서요."

"제안이라면?"

"데이비드 모건 잘 아시죠? 저의 오랜 친구 중 한 명입니다."

이건 진짜였다.

그러고 보니 트로이 매카시가 백악관 만찬장에 왜 나타났는지 알만했다.

"그래서요?"

"제 친구 사정을 봐주십사 하고요. 데이비드도 자신의 잘못을 후회하고 있습니다."

거짓말.

"뭘 봐달라는 건지···,"

"화이백 지분 인수하시죠. 현지에서 직접 생산하는 게 더 빠르고 좋지 않습니까? 제가 적당한 가격에 거래될 수 있도록 중재하겠습니다."

이럴 줄 알았다.

"이미 마음이 떠났습니다. 그리고 수출이 더 편하기도 하고."

"흐음, 후회하실 텐데."

"안 합니다."

비릿하게 미소 지으며 트로이 매카시가 말을 이었다.

"보통 삼한 제국이나 유럽 제국 국민들이 착각하는 게 한 가지가 있습니다."

"착각?"

"삼한 제국은 민간보다 군부의 힘이 강하죠? 하지만 여긴 그 반대입니다. 민간의 힘이 훨씬 강해요. 백악관 믿다가는 큰코다칠 수도."

태주도 아는 사실.

이곳 각성자들은 대부분 민간 길드나 클랜으로 들어간다.

마스터도 민간에 많다.

아메리카 군대 소속의 각성자들은 소수, 그래서 무기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여기서 굳이 자신들의 강함을 내세운다는 말은?

"무력 행사라도 하겠다는 말입니까?"

"하하하, 그렇게 노골적일 리가요. 다만 예상치 못했던 사고가 날 수도 있을 겁니다."

"사고라."

"뭐, 약품을 실은 컨테이너 수송 차량이 사라진다거나, 아니면 마수의 습격으로 화물을 통째로 도둑맞는다거나."

"···마수?"

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키는 트로이 매카시.

태주도 고개를 들었다.

'응?'

달빛에 비쳐 그 거대한 몸체를 드러낸 마수 한 마리.

저 높은 상공에서 빙빙 돌고 있었다.

"타이탄 이글입니다. 우리 인피니티 길드의 상징이죠. 제 뒤에 있는 애나의 친구이기도 하고요. 컨테이너 하나쯤은 발톱으로 움켜잡고 날아오를 수 있는 놈입니다."

테이밍 스킬 각성자같다.

타이탄 이글은 아메리카에서 가장 흔한 비행 마수.

겉으로 보면 펫인지 마수인지 알 방법도 없고.

"그러니까 내가 화이백을 인수하지 않으면 사업을 방해하시겠다?"

트로이가 어깨를 으쓱하며 딴청을 피웠다.

"내가요? 그렇게 하겠다고 말한 적은 없는데, 그렇지, 마이클?"

"맞아. 트로이, 단순한 충고였을 뿐이야."

그런데도 김태주의 표정은 흔들림이 없다.

저 자신감은 대체 어디에서 올까?

트로이는 추측한 바가 있다.

'독이겠지.'

그것 말고는 없다.

각성자가 아닌 척 상대의 방심을 유도하면서 독을 살포하는 비열한 전투 방식.

하지만 대비를 해왔다.

자신도 수많은 독을 가진 마수들을 상대해왔다.

그 과정에서 중독도 당해봤고.

먼저 엘리트 마나 결정체와 변종 그리즐리 웅담으로 만든 종합 해독제.

간 기능과 신장 기능을 대폭 향상시켜 몸에 들어오는 독이 무엇이든 해독시킨다.

그리고 최고급 영약.

마나를 증폭시켜 독이 들어오자마자 태워버린다.

배에 오르기 전 이미 먹고 왔다.

슬슬 약효가 돌 때가 됐고.

또한 마스터만 3명.

동시에 그리고 하늘 위에서 지시만 기다리고 있는 엘리트 펫 타이탄 이글.

트로이는 자신이 없었다.

질 자신이 말이다.

한편 태주도 피식 웃었다.

'놀고 있네.'

솔직히 재미있다.

이런 경우는 진짜 오랜만.

아메리카라서 그런가?

삼한 제국이었다면 절대 일어나지 않았을 일.

그래서,

"그럼 미리 싹을 제거하면 되겠네."

"···뭐?"

"너희들만 없어지면 사고 같은 것도 일어나지 않을 거잖아."

"하! ···누구든 처맞기 전엔 다 계획이 있는 법이지. 어디 계속 그런 소릴 지껄일 수 있는지 보자."

트로이는 계속 눈을 김태주에게 고정한 채 말했다.

"잡아! 몇 군데 부러뜨려도 돼. 죽이지는 말고."

트로이는 각성하기 전 복서였다.

그래서 각성한 이후 그가 습득한 스킬도 복싱 관련한 것, 강기도 주먹에 맺혔다.

엘리트 아이템, 피스트 건틀릿도 착용했다.

"턱을 부숴 씹지도 못하게 만들어주마."

파파팟! 파팟! 팟!

순식간에 뻗어지는 원투 스트레이트와 라이트, 레프트훅과 어퍼컷.

복싱 특유의 정교한 연계 스킬이었다.

강기의 주먹은 모든 걸 부쉈다.

각성자든, 마수든.

이번에도 그럴 것이다.

그런데 허전하다.

맞는 느낌이 없다.

'어디 갔어?'

태주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

환영미리보.

실로 오랜만에 펼쳐보는 보법.

"헛!"

트로이 매카시는 흠칫, 놀랐다.

어디로 갔지?

놈의 움직임을 놓쳤다고?

그리고 눈앞을 가득 채운 커다란 손바닥.

'어···,'

태주의 손바닥이 트로이의 콧대를 강타했다.

빠각!

주저앉은 콧대.

뭉글뭉글 흘러나오는 코피.

당황함이 앞섰다.

고통은 뒤에 밀려왔다.

'이럴 리가 없는데···,'

무투계 각성자로선 세계 최강이라 자부하던 자신이었다.

'왜 맞았지?'

퍼억!

손바닥이 턱에 적중했다.

하늘이 돈다.

땅도 함께 돌았다.

"트로이!!!"

인피니티 클랜의 또 다른 마스터.

마이클이 어느새 꺼낸 긴 창을 두 손에 들고 태주의 목젖을 빠르게 찔러왔다.

"죽어!!!"

츠팟!

덥석!

"헉!"

어느새 창날을 한 손으로 잡아버린 태주.

창이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너, 넌?"

편하게 창을 앞으로 잡아당기니 무기력하게 끌려오는 마이클,

"어어?"

퍼억!

태주의 주먹이 역시 마이클의 코에 그대로 명중했다.

빠각!

"아악!"

테이밍 각성자 애나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도와줘!"

하늘에 떠 있는 엘리트 펫, 타이탄 이글을 불렀지만···,

"끼아아아악!"

근처에서만 빙글빙글 돌고 있는 타이탄 이글.

배 가까이 다가오지도 못하고 있었다.

'···못 내려와?'

타이탄 이글이 무서움을 느끼고 있다.

왜지?

'설마···,'

그리고,

츠팟!

놈이 자신의 앞으로 다가왔다.

애나도 마스터지만 전투 능력은 트로이나 마이클보다 못하다.

"자, 잠깐! 난 여자···,"

빠각!

"꺄악!"

태주는 망설이지 않았다.

여자는 무슨!

각성자에 남자 여자 구분이 어디 있어?

잘못했으면 평등하게 처맞는 거지.

그러나 죽일 생각은 없었다.

다들 마스터 아닌가?

기분 나쁘다고 싹 다 죽이면 마수는 누가 잡아?

퍽퍽퍽퍽!

매타작이 이어졌다.

퍼벅! 퍼버버벅! 퍽퍽!

자비 없는 폭력.

급기야.

"데, 데이비드 모건이야, 데이비드 모건! 그, 그놈이 시켰다고."

"사, 살려주세···,"

"제바알, 다, 다시는···, 안 그럴···,"

모두 다 진실.

뉘우친 것도 같지만,

하지만 확실하게 각인시켜 줘야 한다.

너그럽게 넘어갔다가는 나중에 복수한답시고 또 덤벼들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이놈들 말고 죽일 놈은 따로 있다.

※ ※ ※

하선고는 등선 전 인간계에서 검선과 동시대 인물이었다.

하지만 검선의 배분이 훨씬 높았다.

즉 인간이었을 땐 검선에게 말도 함부로 건네지 못했다.

혹자는 하선고가 검선의 제자라는 소문도 있었다.

그러나 등선한 이상 속세의 인연은 전부 사라진다.

동등하고 독립된 신선으로서 다 같이 평등하다.

남녀 구분조차 없다.

독선 당군악도 그랬다.

강호 무림의 인연을 중시했다면 삼봉 선인이나 매화 선인, 곤륜 선인들에게 고개를 숙여야 했을 터.

하선고는 검선에게서 선계가 왜 이렇게 변했는지 이야기를 들었다.

처음 독선이 등선한 후, 무한공간이라는 기상천외한 선술로서 다른 세상과 선계의 물건을 함께 공유해왔던 이야기.

하선고는 그저 멍하니 듣고만 있었다.

믿지 못할 이야기, 하지만 눈으로 똑똑히 보이는 데야.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데도 잠만 처자고 있었다고?'

여태까지 잠을 잔 시간이 너무나 아까웠다.

이렇게 재미있는 변화를 인지하지도 못하고,

"그러니까 신용패라는 물건을 발급받으면 된다는 거지?"

"그렇소."

"그 이벤트인가 뭐 시긴가 하는 걸로 나도 15만 선도 코인을 쓸 수 있고?"

"뭐, 그대도 신선이니까."

"당장 가자. 동빈아!"

"···."

검선을 한숨을 쉬며 말했다.

"후우, 하선, 내 전부터 누누이 말했지만, 서로 존대를···,"

"뭐래? 너도 까."

이런 망할 년이.

좋다.

"알았다. 따라와."

"오오! 역시 상남자 검선!"

하선고는 검선을 따라 멀티플렉스로 들어갔다.

입구에 걸린 대형 걸개.

[선계월드 개장 및 태주 대협 태평양 무사 횡단 기원, 전 품목 50% 세일!]

"저건 뭐야? 세일?"

"물건을 반값으로 살 수 있다는 말이다."

"아하!"

1층부터 북적북적한다.

벽면에 걸린 초상화 한 점.

"저 양반이 김태주?"

"그렇다."

"잘 생겼네."

검선은 귀곡 선인에게 다가가 자신의 용건부터 먼저 밝혔다.

"스?"

"안!"

"언?"

"담."

"확?"

"···담담?"

풀어보자면 주문한 스포츠카는? 안 왔다, 언제 오냐? 아마도 다음. 확실하냐? 안 오면 다음다음 배송, 이런 얘기들.

그러고 나서,

"귀곡, 새 신용패 하나 발급해주시오."

"누구? ···뭐요? 이 거지는? 황천계 죄수요?"

"잘 보면 누군지 알 거요."

"응? 잘 보라니, 땟국물이 좔좔 흐르는···, 어?"

하선고가 산발한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활짝 웃었다.

"나야, 귀곡아, 오랜만이다?"

"···거지보다 더한 게 왔군."

"너무 뭐라고 하지 마. 내가 니들에게 피해준 거 있어?"

그녀의 말이 맞긴 맞다.

말버릇 고약하고 성질 더러운 미친년이라는 걸 빼면 같은 신선.

"어쨌든 너도 자격이 있으니, 자, 여기, 신용패 받아라."

"고마워, 귀곡아!"

자, 그럼 다음 과정은?

"쇼핑몰부터 갈 거냐?"

"아니, 드라마부터 볼 거야."

"좋은 생각이다. 선계의 변화는 지구 문물에 기반한 것이니, 제대로 즐기려면 먼저 알아야지."

"그래서 말인데···,"

생긋 웃는 하선고.

"지구 드라마 중에 쌍년 하나 제대로 조지는 이야기 없어?"

"왜 없겠나? 흘러넘치지."

"계단 올라가면 영상 상영관이 있다. 거기로 가라."

"알았어, 동빈아, 그럼 이따가 봐!"

"그냥 혼자 놀아. 난 찾지 말고."

지구라,

과연 어떤 세상일까?

아무튼 이제 잠은 다 잤다.

< 평등 > 끝

ⓒ 꾸찌꾸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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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판 >

마수 펫, 타이탄 이글은 이미 어디론가로 도망쳤다.

어차피 흑암철의 영향을 받아 주인을 도와주러 오지도 못했던 놈, 슬쩍 살기를 발산하니 꽁지 빠지게 달아났다.

펫이 무슨 죄가 있나?

주인이 나쁜 거지.

항복 선언에도 불구하고 태주는 멈추지 않았다.

시원하게 팼다.

자근자근 다져놓았다.

두 번 다시 눈도 못 마주치게끔

아마 온몸의 뼈가 다 부러졌을 것이다.

마스터라서 금방 회복하겠지만 그래도 최소한 한 달은 꼼짝없이 누워있어야 할 정도로.

폭력의 효과는 일반인이나 각성자나 똑같다.

물리적, 정신적 피해를 동시에 끼치는 것.

당분간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도 살려준 게 어디야.

배에서 적당한 밧줄을 찾아 인사불성이 된 놈들을 줄줄이 엮은 후.

태주는 만리비검으로 NEW LA시 대형 병원으로 날아가 응급실 앞에다 던져뒀다.

누구에게 맞았는지 입에 올리지도 않을 것이다.

개망신을 당한 거나 마찬가지니까.

경찰에 신고한다 해도 백악관이 가만히 있겠나.

아무리 민간보다 위세가 약해도 국가기관인데.

'자, 그럼 다음으로···,'

데이비드 모건.

태주도 미리 알아봤다.

금융가의 마왕, 추악한 하이에나, 지옥의 고리대금업자.

총이나 칼로 사람을 죽여야만 살인자가 아니다.

이놈은 돈으로 사람을 죽인다.

오히려 더 많이 죽인다.

단언컨대, 자신은 비교도 안 될 것이다.

대형 금융 사기는 물론, 강제 인수합병, 주가조작, 그리고 폭력과 협박으로 지분 갈취하기, 청부살인···, 이놈 때문에 죽거나 자살한 사람이 엄청나게 많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한 번도 법의 심판을 받지 않았다.

고발이나 소송을 당해도 최고의 변호인단을 고용해 요리조리 빠져나갔고.

백악관에 알릴 생각조차 없다.

직접 처리한다.

태주는 무한공간에서 추적부를 꺼내 데이비드 모건을 떠올렸다.

화르르륵!

위치가 동쪽을 가리켰다.

아마 그놈은 수도 캔자스시티에 있을 것이다.

비행기로 3시간.

만리비검으로 날아도 그 정도,

지금이 밤 9시니까 잘하면 새벽녘까진 돌아올 수 있다.

'일단 전화부터 한 통화 하고.'

※ ※ ※

캔자스시티 금융가의 최고급 펜트하우스 맨션.

데이비드 모건은 좀처럼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캔자스 금융가에 투신한 이후, 많은 돈을 벌었다.

그동안 쌓아 올린 부의 가치가 얼마인지 자신도 모를 정도.

앞으로도 아메리카의 자본 시장을 장악할 것이다.

그러면 오래오래 살아야지.

그를 위해 일반인에겐 그다지 효과가 별로라는 엘리트 영약도 거액의 돈을 들여 10개씩이나 구매해 기어코 적합자까지 올라왔다.

데이비드 모건은 절대 자기 것을 순순히 빼앗기는 사람이 아니다.

투자했으면 무조건 이익을 내든지, 아니면 최소한 손해는 내지 말든지.

욕심?

그보다는 일종의 신념이고 가치관이었다.

자신이 찍은 목표물을 가로채는 자는 누구든 용서하지 않았다.

철저하게 짓밟았고, 때로는 실제로 사람을 시켜 죽여버렸다.

사실 화이백 지분을 눈 딱 감고 포기할 수도 있었다.

그것 때문에 망할 일은 없다.

손해는 다른 곳에서 벌충하면 그만.

하지만 이건 손익의 문제를 넘어섰다.

김태주는 자신의 투자 실패를 만천하에 드러나게 했고, 백악관 만찬에서 웃음거리가 되게 만들었다.

이젠 물러설 수 없다.

그냥 두면 자신의 체면은 땅에 떨어진다.

그래서 인피니티 길드를 움직였다.

김태주가 화이백 지분을 100억 달러에 인수하게 해준다면 그 10%인 10억 달러를 수고비로 주겠다고.

10억 달러가 걸린 일.

트로이 매카시는 무슨 짓을 동원하더라고 반드시 거래를 성사시킬 것이다.

아마 무력 행사가 제일 유력하겠지.

인피니티 클랜엔 마스터가 3명씩이나 있으니까.

이런저런 생각에 잠긴 데이비드 모건.

지금쯤이면 연락 올 때가 됐는데.

그때!

'응?'

거실 쪽 베란다 창문이 열려있었다.

아까 열어뒀다가 깜빡 잊고 닫지 않은 것 같다.

창문을 닫은 다음,

거실 홈바로 가서 싱글 몰트 위스키를 잔에 따라 한 모금 마셨다.

술의 힘을 빌려서라도 잠을 청해 봐야지.

그때였다.

"잠이 잘 안 오나 봐?"

"헉!"

등 뒤에서 들리는 음성.

"누, 누구야?"

고개를 돌려 보니 누군가 소파에 앉아있었다.

···환각인가?

"기, 김태주?"

"그래, 네가 보낸 선물은 잘 받았다."

"선물? 내가?"

"인피니티 클랜, 트로이 매카시 말이야."

"···."

처음엔 놀랐지만 데이비드 모건도 노회한 인물.

이런 경우 한두 번 당해보는 것도 아니고.

곧 평정을 찾고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트로이가 어쨌다고?"

태주는 씨익 웃었다.

반지의 진동으로 보아 거짓말.

"태연하게 거짓말하네. 금융가들은 다 너 같은가?"

"정말 아무것도 모르니까, 그보다 이렇게 밤중에 찾아온 이유는? 이렇게 쳐들어오면 내가 눈이나 깜짝할 것 같나?"

이것도 거짓말.

"트로이 말로는 내가 화이백 지분을 인수하면 그 대가로 거래 금액의 10%를 준다고 약속했다던데."

"훗! 어림도 없는 소리. 난 이미 화이백에 대한 미련을 버렸어."

3연속 거짓말.

"지금이라도 돌아가. 이곳 전체에 CCTV가 깔려 있어. 주거침입은 문제 삼지 않겠다."

"또 거짓말이군."

"···뭐?"

"넌 어떻게 입만 벌리면 구라야?"

태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움찔하는 데이비드 모건.

드르륵.

캔자스 금융가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베란다로 걸어가 창문을 연 태주,

"그래, 난 바빠서 이만 간다."

"···잘 생각했다. 다음에 또 볼 기회가 있겠지."

"아니, 없을 거야."

"흐음, 세상일이 어떤 식으로 흘러갈지 아무도 모르는 법이야. 그러니 장담하지 마."

"난 거짓말을 하지 않아. 우린 보고 싶어도 못 봐."

"왜?"

"넌 잠시 후에 죽을 거거든. 사인은 급성심근경색, 시체는 내일쯤 발견될 거고,"

데이비드는 생각지도 못한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라고?"

"말했잖아. 넌 여기서 죽어."

순간!

뜨끔!

가슴을 조여오는 격렬한 통증.

"크윽!"

비틀, 데이비드 모건은 홈바 의자를 손으로 잡고 쓰러지려는 몸을 가까스로 지탱했다.

"자, 잠깐!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아, 아무것도 모른다고 했잖아. 크헉!"

"넌 어째 죽는 순간까지 거짓말이야?"

"으윽, 오, 오해가···."

그의 눈동자가 절망으로 물들었다.

"난 여, 여기서 죽으면 안 돼. 으윽! 나, 난 데이비드 모건이라고,"

"네 이름이 죽지 말아야 할 이유가 되나?"

"이, 이런 제기랄···,"

"두고 가는 돈이 아깝긴 하겠지만, 남은 사람들이 너 대신 잘 쓸 거야."

"···제, 제발, 끄어억!"

결국 쓰러지는 데이비드 모건.

"으어어어어, 사, 살려 줘, 내, 내가 잘못···,"

죽일 놈은 반드시 죽인다.

그게 절대독마의 방식이다.

물론 여긴 강호가 아닌 지구.

현대의 법체계가 강호 무림보다 우수하고 선진적인 건 분명하다.

하지만 그로 인해 생겨나는 부작용들.

돈 많고 권력 있는 범죄자들은 감옥에 가서도 호의호식하고, 피해자들은 정작 아무것도 보상받지 못한 채 평생을 고통 속에서 산다.

절대 용납할 수 없다.

태주는 스마트폰을 들어 번호를 눌렀다.

"동훈아, 나다."

- 네! 회장님.

"잘 처리했지?"

- 맨션의 CCTV는 작동하지 않을 겁니다. 따라서 녹화될 리도 없고요.

"수고했다. 구례에 가서 보자."

태주는 죽어가는 데이비드 모건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다시 만리비검을 타고 NEW LA항으로.

도착하니 해가 막 뜨기 직전이었다.

아침이 되자 삼한 양산 항구로 싣고 갈 컨테이너들도 도착했다.

신선 식품 운반용 냉장 냉동 컨테이너, 대마수용 첨단 무기, 그리고 컨버터블 오픈 스포츠카 10대.

자동차는 개인적으로 구매했다.

선계에 보낼 예정.

부피가 커서 한 번에 한 대씩,

삼한 제국도 자동차 생산국이다.

바로 백두 그룹.

'연희씨 보기 미안하네.'

하지만 백두 자동차 라인에 컨버터블 오픈카가 없다.

주로 일반 경차, 중소형, 대형 세단, SUV, 트럭 같은 것.

'사실 대형 세단은 백두 자동차가 최곤데···,'

신선들에게도 중후한 리무진 같은 것이 어울리고.

공유창고에 들어가기만 했어도 보냈을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뿌우우우웅!

티제이호는 드디어 컨테이너 선적을 끝내고 다시 삼한 제국 양산항을 향해 출항했다.

※ ※ ※

모스크바 공화국의 한 저택.

네크로맨서 대마도사 드렉 카락스는 자신의 충직한 노예인 카르멘을 만나고 있었다.

"주인님, 모든 준비가 끝났사옵니다."

"마법진은?"

"아브라힘과 욘슨이 모스크바 곳곳에 설치를 끝냈습니다."

"그렇구나."

실행만 남았다.

드렉 카락스도 김태주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

MRC에, 태평양 횡단까지.

과거, 삼한 제국의 파주에서.

흑마법으로 에드워드를 희생시켜 놈과 간접 접촉을 했었다.

처음엔 연금술 영혼 연결자인 줄 알았던 김태주.

그러나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놈은 위험하다.

자신도 장담할 수 없을 만큼.

마기가 전혀 통하지 않았다.

더 거대하고 순수한 마기가 필요하다.

빠르게 의식을 진행해야 한다.

피와 영혼을 제물로 삼아 이뤄지는 소환의식.

그리하여 인간을 초월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

의식이 성공하면 자신의 격이 달라진다.

인간의 탈을 벗고 반신(半神)의 존재로서 거듭나게 되는 것.

그러면 김태주가 연결하고 있는 다른 세상 영혼의 정체가 무엇이든 걱정할 것이 없다.

기껏 해봐야 인간계, 혹은 중간계에서 가장 강한 절대자의 영혼이겠지.

놈은 인간의 한계를 넘지 못할 것이다.

영혼 연결이 수십 차례 이뤄진다고 해도 말이다.

인간이 어떻게 반신을 이겨?

"그럼 진행시켜라."

"알겠사옵니다. 주인님."

드렉 카락스의 지시를 받은 카르멘은 곧바로 마츠모토 장로와 접촉했다.

첫 시작은 내전 유발.

사람이 많이 죽으면 죽을수록 좋다.

그래야 의식이 더 완전해질 테니까.

※ ※ ※

삼한 제국에서도 태평양 횡단 성공은 축제였다.

벌써 양산항구가 떠들썩했다.

태평양 횡단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돌아오는 티제이호를 축하하기 위한 행사가 정부 차원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아메리카 공화국에서 생중계된 화려한 입항식.

그걸 본 황제는 친히 황명을 내렸다.

축하 행사를 더 성대하고 화려하게 준비하라고.

태평양 횡단.

이제 시작일 뿐이다.

양산 티제이 조선소에서 대형 선박 건조 계획을 줄줄이 발표했다.

컨테이너선을 비롯해 가스선과 유조선, 그리고 대형 군함까지.

조선소에 존재하는 10개의 도크가 꽉 채워질 것이다.

수많은 일자리가 창출될 예정.

조선에도, 해운에도, 무역업에도.

삼한 제국을 넘어 전 세계 각국에서 지원서가 쇄도하고 있었다.

제발 배를 타게 해달라.

나도 태평양을 횡단하고 싶다.

그 와중에 미리내 그룹 이병우 회장과 면담 중인 백서연.

이병우가 구례 태홍 바이오 본사로 그녀를 직접 찾아왔다.

비록 회장님과 악연이 있는 미리내 그룹이지만, 만나주기는 해야지.

"백사장님, 만나주셔서 감사합니다."

전과 달리 극히 저자세로 변한 이병우 회장.

심지어 굽신거리기까지.

어디 미리내 그룹뿐인가?

삼한의 10대 대기업도 그녀와 면담하기 위해 속속 약속을 잡으려고 했다.

"다음 출항에 컨테이너 3,000개만 배정해주실 수 없겠습니까?"

"글쎄요. 확답은 못 드리겠습니다."

뱃길이 열렸다.

따라서 컨테이너를 이용한 대규모 수출입의 시대도 함께 열릴 것이다.

미리내 그룹은 TV나 냉장고, 세탁기 같은 가전제품 수출을 노리고 있을 터.

지금까진 항공을 이용했다.

컨테이너 선박과 비교해 운송료가 20배 이상.

물량도 제한적이었다.

비행기로 보내봐야 얼마를 보낸다고

"3,000개가 안 되면 1,000개라도···,"

"으음, 최대한 노력은 해볼게요. 미리내 제약회사를 싼 가격에 팔아주신 고마움도 잊지 않고 있으니까요."

갑자기 아픈 곳을 찔러오는 백서연이었지만 이병우는 내색하지 않았다.

"···네.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현시대의 변화를 주도하고 있는 김태주 회장.

그에 동참하지 못하면 결국은 도태될 것이다.

무조건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이병우를 보내고 난 뒤, 백서연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처음 태홍 바이오에 입사하면서 회사를 삼한 최고의 대기업으로 만들겠다고 다짐했었다.

'목표를 이뤘네.'

제약회사에, 조선, 해운, 그리고 앞으로 만들어진 무역회사까지, 이젠 그룹을 만들 때가 됐다.

'사명 변경을 해야겠어.'

아버지도 말씀하셨다.

제약회사 사명을 티제이로 빨리 변경하라고.

티제이 그룹.

이제 김태주 회장님은 수많은 계열사를 거느린 진정한 그룹 '회장님'이 되실 것이다.

※ ※ ※

선계(仙界) 월드가 개장되었지만 누구나 다 놀이 공원을 즐기는 건 아니었다.

멀티플렉스에서 영상 컨텐츠를 즐기는 이들도 많았다.

가장 인기 있는 상영관은 막장 컨텐츠관.

주로 황천계 관리, 혹은 신장들에게 인기였다.

"참나, 학교 잘 돌아간다."

"와! 고데기로 머리만 마는 게 아니었군."

"저거 쇼핑몰에도 팔걸?"

"서왕모가 사 가지 않았소."

"혹시 저걸로 선자들을···,"

"에이! 설마."

요즘 제일 인기 있는 드라마였다.

'영광의 날'이란 제목.

주제는 학교 폭력과 복수.

재탕에, 삼탕, 사탕으로 사골처럼 우려서 재방송되고 있었다.

"시원시원하군."

"암, 복수는 저래야지. 복수만큼 속 시원한 것이 또 있겠소?"

"멋져! 부라보야!"

하선고도 숨죽이면서 스크린을 보고 있었다.

복수를 당하는 저 못된 년이 서왕모라고 상상하니 속이 후련하다.

정말이지 제대로 된 대리만족이었다.

며칠 동안 극장 안에서만 있었다.

다양한 영상물을 섭렵했다.

그것들만 봐도 다른 세상이 어떤 모습인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정말 희한해.'

저 지구라는 다른 세상과 이곳은 전혀 접점이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신선과 한 인간의 영혼을 매개로 이어져?

의도된 걸까? 아니면 우연일까?

의도라면 천지신명과도 버금가는 존재의 힘이 개입했을 것이고, 우연이라면 드라마에서 나오는 단순한 교통사고 같은 거다.

'···혹은 둘 다 일수도.'

세상만사가 그렇듯, 일어나는 사건들 대부분은 우연.

우엽이 겹치면 필연이 되는 것이고.

생각하면 복잡해진다.

단순하게 이 순간을 즐기자.

연결이 계속되는 한 재미는 영원할 테니까.

'아직 세일 기간이지?'

극장으로 올라오면서 잠깐 목격했다.

3층 쇼핑몰이라는 공간에 진열된 갖가지 지구 물건들.

무려 반값에 살 수 있다는데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되지.

< 심판 > 끝

ⓒ 꾸찌꾸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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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 발발(1) >

모스크바 왕국.

과거 러시아의 영광은 사라지고, 쪼그라질 대로 쪼그라들어 겨우 도시국가의 형태로만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소국.

러시아 시절 보유하고 있던 핵무기를 아직 가지고 있다지만, 그것 말고 기본 군사력은 변변치 않은 수준이다.

왕국 수호파와 공화 혁명파의 대립이 갈수록 격화되고 있었다.

한쪽은 모스크바의 왕정을 유지하자고 주장했고, 또 한쪽은 국왕의 하야를 요구하며 총선거 실시를 주장했다.

하지만 국민들의 시위는 왕국 정부군에 의해 철저하게 탄압받았고, 이에 반발해 공화파 지도부는 결사 투쟁을 선언하며 여론을 주도했다.

그 와중에 열린 군부대 시가행진.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 네콜라 로마노프 모스크바 국왕이 참석하는 대규모 행사가 열렸다.

군기 잔뜩 들어간 각성 군인들, 탱크와 장갑차, 미사일 발사차 등, 첨단 무기들이 총동원되어 세력을 과시했다.

연단 위에선 군부대의 사열을 받는 네콜라 로마노프 국왕.

국왕이 손을 흔들자 왕국 지지자 시민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그때였다.

우르르르르르르.

평상복을 입은 한 무리의 시민들이 접근 금지선을 넘어 무서운 속도로 돌진해왔다.

"뭐, 뭐야?"

"···테러범?"

"전하를 보호하라."

"각성자 경호팀! 다가오지 못하게 막아!"

"뭐하나? 발포해! 싹 다 죽여버려."

타탕! 타타타탕!

의문의 사람들은 총에 맞고도 끄떡없었다.

총알을 맞아 몸에 구멍이 생겨도 그 속도가 전혀 줄지 않았다.

분명 각성자가 아닌, 평범한 시민들이었다.

얼굴이 창백하다는 걸 빼면 말이다.

그리고,

붉은 광장 전체에 귀가 따가울 정도로 커다란 음성이 울려 퍼졌다.

"혁명을 위하여!!!"

"모든 권력을 신(新) 볼셰비키로!!!"

"모스크바 공화국 만세!!!"

순간!

콰콰콰콰콰쾅! 콰콰콰콰쾅! 콰쾅! 쾅!

시뻘건 화염이 광장을 뒤덮었다.

'됐군.'

블랙 마피아 장로 마츠모토는 인파들 틈에 숨어 비릿하게 웃었다.

상급 언데드 구울을 이용한 자살폭탄 테러.

배 속에다 폭탄을 숨겼기 때문에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네콜라 로마노프 국왕과 관리들, 다수의 정부 요인들이 그 자리에서 사망하고, 왕세자 미하일 로마노프가 즉각 왕위를 계승해 공화파 무리들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모스크바 내전의 시작이었다.

결국엔 터지고 말았다.

사실 예견된 전쟁이었다.

왕당파와 공화파의 대립.

수십 년간 지속되어 온 해묵은 갈등이었으니까.

딱히 충격이랄 게 있나?

일어날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는 느낌 정도?

※ ※ ※

유럽 제국.

수도 메가 로마에 지어진 중세풍의 거대한 성, 그곳이 바로 황궁이었다.

황제의 집무실.

중년의 남자가 있었다.

짙은 갈색의 머리카락, 역시 갈색의 풍성한 수염, 단순하지만 목 부분에서 올라와 왼쪽 뺨 중간까지 그려진 각성 문양.

유럽 제국의 지배자.

알렉스 카이사르 황제였다.

집무실 벽에 걸린 커다란 TV.

마침 화면에서 삼한 제국 태홍 바이오 김태주 회장 태평양 왕복 성공이란 속보가 흘러나왔다.

황제의 심복이자 제국 정보국 M-19 국장 오거스트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의외입니다. 대체 정체가 뭐길래?"

"연금술이겠지. 아마도 대현자 급일 테고."

"그럴까요? 현자 계열 같긴 하지만···, 무력도 상당하다지 않습니까?"

"이상한 일도 아니야, 대현자라고 해서 약해야만 하는 이유가 없으니까."

"빈센트 님과는 또 다르네요."

알렉스 황제는 손가락에 낀 반지를 빼내 오거스트에게 툭 던지며 지시했다.

"빈센트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반지가 너무 헐렁해. 검을 쓸 때 방해되는군."

그러자,

스르륵, 변하는 얼굴, 각성 문양도 사라졌다.

이것이 알렉스 카이사르의 본모습.

유럽 제국의 황제가 각성자가 아니라는 건 누구도 모른다.

초기 국가를 건설했을 때부터 각성자 행세를 해왔다.

권위를 내세우고 국가를 다스리기 편했으니까.

"빈센트 님에게 줄여달라고 할까요?"

"그래, 기왕이면 쓸데없는 장식 같은 것도 떼버리고."

폴리모프 반지였다.

빈센트는 아티팩트 제작자다.

역시 마법 인챈트 대마공학자와의 영혼 연결자였고.

빈센트와 만난 지는 거의 150년 전.

영혼 연결로 힘을 얻은 후, 프랑스 지역을 정벌하다가 우연히 만났다.

그때 수하로 거두어 잘 써먹고 있었고.

"아무튼 김태주의 배후 영혼이 연금술을 익힌 대현자 계열이라면 쓸모가 많겠네요. 영입할 필요가 있겠습니다만."

"아니다. 섣불리 접근하진 마라. 대현자라는 것도 추측일 뿐이야. 좀 더 알아보고 나서."

"네."

아무리 연결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영혼 연결자라지만 만만하게 보면 안 된다.

영혼 연결의 매카니즘, 절대 평범한 영혼과 이어지는 법이 없다.

김태주가 연결한 영혼도 한 차원의 최강자일 터.

"일단 우리도 배 한 척은 가지는 게 좋겠군."

"네, 특히 컨테이너선은 욕심이 납니다. 주문이라도 넣어볼까요?"

"외교 채널로 삼한 정부에 직접 의뢰해보아라."

"알겠습니다, 폐하."

알렉스 카이사르 황제는 자리에서 일어나 TV 화면 가까이 얼굴을 가져갔다.

화면에 나타난 동양인.

'김태주라···,'

강하다고 소문이 났긴 하지만 가소로울 뿐이다.

자신은 소드 카이저와 영혼이 연결됐으니까.

그것도 150년 전에.

연결된 이는 다른 세상 검의 황제 소드 카이저.

세계의 정복자이자 전쟁광, 아발란 제국의 황제 트릴리안 랜서.

그동안 영혼이 연결된 횟수만 무려 20번.

다른 영혼의 자신과 마찬가지로 알렉스에겐 주어진 사명이 있다.

황제가 해야 할 일이 뭔가?

대륙을 통일해 현명한 통치자가 다스리는 평화로운 제국을 만드는 일.

그래서 깨닫자마자 국가를 만들고, 마수를 몰아내 영토를 넓히고, 타국을 정복하면서 유럽 제국을 만들었다.

하지만 아직 멀었다.

다른 세상의 아발란 제국은 대륙을 통일했지만 유럽 제국은 지구 영토의 일부만 차지하고 있었다.

남부 유럽과 서부 유럽은 정복했어도 동유럽과 북유럽은 남아있다.

여러 가지 원인이 존재한다.

그중 제일 큰 이유는 바로 중국의 멸망.

유럽을 통일하고 동쪽으로 진출하려고 했지만 미친 중국 놈들이 마수 밀집지대를 소탕한답시고 제 땅에 핵무기를 떨어뜨린 것.

그리고 비욘드 엘리트 마수의 등장.

인류 공동의 적인, 최강 최악의 마수 출현.

그후로 국가 간 정복 전쟁은 중단되고 말았다.

하지만 알렉스는 포기하지 않았다.

언젠간 반드시 지구 전체를 통일해야지.

먼저 유럽 완전 정복부터.

그러려면 전쟁이 필요하다.

명분 있는 전쟁 말이다.

순간!

띠링!

M-19 국장 오거스트의 스마트폰에서 난 알림음.

"오! 드디어···,"

"무슨 일이냐?"

"폐하, 모스크바 왕국에서 내전이 일어날 것 같습니다."

"그래? 드렉 카락스인가?"

"그런 듯하옵니다. 놈이 기어코 발톱을 드러냈습니다."

알렉스 황제는 만족한 듯 미소를 지었다.

또 다른 영혼 연결자, 블랙 마피아의 수장, 최악의 네크로맨서 드랙 카락스.

예전부터 파악하고 있던 놈이었다.

하지만 잡지 않고 지켜만 보고 있었다.

쓸모가 있을 거라고 판단했으니까.

그래서 삼한 제국의 황제가 직접 블랙 마피아 수사를 요청해왔을 때도,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오리발을 내밀었다.

아무튼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놈이 움직였다.

모스크바 왕국 내전.

전쟁에 개입할 명분이 만들어졌다.

위치적으로 볼 때 동유럽의 끝, 그리고 북유럽과 맞닿은 국가.

마침내 유럽 전체를 정복할 기회가 오고야 말았다.

※ ※ ※

선계(仙界).

5일간의 개장식을 끝내고 선계월드는 잠시 문을 닫았다.

보수도 하고, 청소도 하고.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인력 문제.

관리할 직원이 부족하다.

잠시 닫고 대책을 세워봐야지.

그동안 다른 매장도 열었다.

바로 선계 카페와 무인 아이스크림 전문점.

지금은 인테리어 중이고.

멀티플렉스는 계속 운영했다.

하지만 이곳도 확장할 필요가 있었다.

사람들이 많아서 좁은 느낌이 들었다.

1층에서 장사 준비에 여념이 없는 주선 태백 선인.

사실 파는 술보다 자신이 직접 마시는 술이 더 많다.

그래서 늘 취해있었다.

"안녕, 주정뱅이야!"

주정뱅이?

누가 싸가지없이 함부로!

이런 말을 하는 년이 하선고밖에 더 있나?

"내가 누차 이야기했지? 말버릇 고치라, ···어?"

주선의 입이 떡 벌어졌다.

"독선이나 검선 못 봤어?"

"아, 아까 같이 나, 나갔는데,"

"알았어. 적당히 마셔라, 뼈 삭겠다."

"···."

술이 덜 깼나?

하선고가 맞긴 맞는데,

"저게 뭐야?"

갈홍 선인은 산책 중이었다.

수리 보수를 위해 문을 닫은 선계월드를 거닐며 추가하거나 뺄 것이 있나 점검하고 있었는데,

"오! 책벌레가 산책을 다 하네?"

책벌레?

누구겠나?

"하선고로군, 이제 실컷 즐겼으면 슬슬 거처로 돌아가 잠이나 처자···, 허억!"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는 갈홍.

"미, 미친?"

"뭘 그렇게 놀라? 어제도 봤으면서, 검선은?"

"···어음, 으어, 그, 그, 그게, 으아, 흠."

"어휴, 됐다. 다른 놈들에게 물어볼게."

갈홍 선인은 하선고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이거 포상인가?'

한편 단주 선인은 환수계로 가던 차였다.

또 주문이 들어왔다.

독선에게 부적을 납품하려면 재료가 있어야지.

주문 품목은 추적부와 투명부, 신속부.

요즘 태주 대협이 부적을 즐겨 사용한다고 들어서 뿌듯하다.

그런데,

"부적아!"

"누가 날 그딴 식으로 부르는가! 하선고, 너지?"

잘 만났다.

이참에 혼쭐을 내주려고 마음먹은 순간,

"···어이쿠, 씨발, 깜짝이야!"

"오, 제법 욕 잘하는데, 검선 봤어?"

"저, 저기 도, 도원에 갔소이다."

"음? 거긴 왜 갔데? 알았다. 고마워."

단주 선인도 우두커니 서서 입만 떡 벌렸다.

'드라마를 찢고 나왔나?'

당군악은 반드시 빼먹지 않는 하루 일과가 있다.

도원에 가서 선도 확인하기.

선계의 변화만큼이나 천도의 숙성도 빨라졌다.

검선과 귀곡, 종리도 함께 왔다.

"곧 있으면 저절로 떨어지겠군."

"맞소, 거의 다 익었어."

"아마 다음 배송이나, 다음다음 배송이면 천도를 보낼 수 있겠군."

감개무량하다.

드디어 태주에게 천도를 건네줄 때가 왔다.

지구를 위협하는 것이 마수뿐이라면야 굳이 먹을 필요는 없지만 문제는 영혼 연결자들.

얼마 전에도 사악한 기운을 쓰는 흑마법사라는 놈과 마주했다고 들었다.

그리고 그놈도 천마나 자신처럼, 한 세상을 풍미했던 절대자인 것이 분명하다.

정도(正道)가 아닌 사도(邪道).

목적을 위해서라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인들.

태주를 가만히 놔둘까?

물론 현재 태주의 성취는 인간계에서의 자신을 넘어선 지 오래, 거의 신선급이라 봐도 무방하다.

강호였다면 언제 등선해도 이상하지 않을 경지.

태주는 신선이나 다를 바 없다.

고작 인간 따위가 어떻게 신선을 넘봐?

하지만 당군악은 만족할 수 없었다.

방심은 금물.

그래서 무조건 천도를 먹여야 한다.

"이제 갑시다. 선계월드 재개장 준비도 해야지."

"참! 독선, 스?"

"안! ···좀 진중하게 기다리시오. 때 되면 오겠지."

"크험!"

"심심하면 도로나 더 만들든가."

그때였다.

"여기 다들 모여있었네?"

뒤에서 들려오는 말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허어,"

"대, 대체?"

"망측하도다!"

"누, 눈 둘 때가 없군."

달라진 외모의 하선고였다.

캡모자를 쓰고, 머리카락은 포니테일로 묶었다.

그것만이라면 다행이지만.

상의는 배꼽이 훤히 드러나 보이는 크롭티.

흰 발목 양말에 삼선 슬리퍼, 하의는 짧디짧은, 착 달라붙은···,

"···돌핀 팬츠?"

"어때? 어울려? 늘씬하지?"

"어어어? 보인다, 보여!"

"다리 들지 마시오!"

"희, 흰색, 아니, 난 안 봤어!"

돌핀, 돌고래, 미끈한 맨다리.

황당하기 이를 데 없다.

어찌 신선이 저리 망측하게.?

귀곡이 눈이 빙글빙글 돌아갔다.

종라는 헛기침만 했다.

검선은 가자미눈이 됐다.

그뿐만이 아니다.

피어싱도.

입술과 코, 그리고 배꼽이 반짝반짝 빛났다.

"···날라리?"

"일진녀인가?"

"담배도 입에 물고 다니지 그러냐."

하선고는 자신을 부르는 호칭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뭐래? 일진녀는 무슨, 힙걸 컨셉인데."

힙걸?

완전 일진녀구만.

"그러고 선계를 돌아다녔다고?"

"설마 불쌍한 신선들 패고 다닌 건 아니겠지?"

"삥도 뜯었어?"

하선고는 태연했다.

"무식한 패션 고자들아. 그냥 편하게 입는 거야. 나라고 지구 패션 스타일을 따라 하지 말라는 법이 있어?"

그런데 희한하다.

일진녀 하선고.

묘하게 잘 어울린다.

"참! 근데 이 천도, 지구로 보낼 거야? 김태주라는 인간에게?"

"알 필요 없다. 욕심도 내지 마라."

"욕심 안나. 그거 먹어서 뭐 하게? 그리고 난 독선에게 물었어."

하선고에게 지목당한 당군악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소, 이미 주인이 정해진 천도라 아무나 먹지 못할 거요."

"흐음, 과연 그럴까?"

"···무슨 말이오?"

"사실 한 명 있잖아."

"있다니, 누가?"

"천도를 이미 한번 먹어봤던, 그래서 그 맛을 잘 알고 있는 놈, 더불어 인과율과 천지의 법도를 단숨에 무시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새끼,"

설마?

"···제천대성?"

"맞아. 그 원숭이 조심해야 할걸."

"···."

제천대성이 천도를 노릴지도 모른다고?

어처구니없지만 가능성은 있다.

여래계에 든 놈이다.

비록 강제적으로 해탈 당했어도 부처의 자격을 가진 제천대성.

그에게 있어 정해진 인연이란 건 무의미하다.

"조심해야 해. 그 새끼, 무늬만 부처야. 아직 본성을 못 버렸잖아. 또 뚜렷한 목표도 있고."

"목표? 그게 뭐요?"

"당연히 여래계 탈출이지. 선계보다 더 지루한 곳이 여래계인데."

사실 제천대성의 천도 탈취 시도는 한번이 아니었다.

적덕선(積德仙)이란 신선이 있었다.

현재 선계엔 없고, 인간계를 떠돌고 있지만.

신선이라고 다 천방지축인가?

절대 아니다.

적덕선.

선행을 쌓아 등선한, 상제도 인정하고, 염라도 존경해마지않는, 만인의 모범이 되는 신선 중의 신선.

그런 신선에게 주어진 천도를 도둑질하려다 관음(觀音)에게 사전에 발각되어 끌려간 놈이 바로 제천대성.

원숭이의 천도 약탈 시도.

이번에도 시도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검선과 귀곡, 종리가 노성을 터뜨렸다.

"감히 원숭이 따위가, 태주 대협의 천도를!"

"전기면도기로 온몸의 털을 다 밀어주겠다."

"그러고 보니 원숭이 골 요리 안 먹어본 지 오래됐군."

당군악도 눈빛이 매섭게 빛났다.

감히 태주에게 주어질 천도를 빼앗겠다고?

어림 반푼어치도 없다.

< 전쟁 발발(1) > 끝

ⓒ 꾸찌꾸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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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 발발(2) >

아메리카 공화국.

생기불끈은 날개 돋친 듯 팔렸다.

카피약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뛰어난 진품 피로해소제.

아메리카 국민들은 열광했다.

그 와중에 터진 데이비드 모건의 사망 소식.

<금융 투자의 거물, 데이비드 모건, 자택에서 숨진 채로 발견.>

<부검 결과, 사인은 급성 심근 경색인 듯,>

<캔자스 금융가의 악마, 드디어 지옥으로 돌아가다!>

<화이백 부도설, 상장폐지 임박.>

그런데 기사는 금방 묻혔다.

뜬금없이 터진 모스크바 왕국 내전 소식 때문에.

<전쟁 발발, 모스크바 내전, 터질 게 터졌다.>

<네콜라 로마노프 국왕, 공화파로 보이는 테러범에 의해 암살.>

<새로운 왕이 된 미하일 로마노프, 신(新) 볼셰비키 공화파에게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

하지만 전쟁 기사보다 티제이호, 태평양 횡단에 대한 기사가 몇 배나 더 많았다.

금융 투자자 사망과 작은 도시국가 내전은 애초에 뉴스거리도 아니었다.

뉴스의 주인공인 태주는 바다 한가운데에서 있었다.

오는 데 열흘 걸렸으니 가는데도 그 정도 걸릴 터.

이 지루한 시간을 어떻게 때우나.

본업이 제약회사 회장이니 당연히 신약 개발해야지.

이번에 만들 신약은 레이드 관련 도핑 물약.

순간 근력 강화나 스피드업, 혹은 일시적 마나 증가에 초점을 맞출 생각.

부작용을 어떻게 줄일지가 관건이다.

미리 가지고 온 약초와 결정체들을 배합하고, 하나하나 실험에 들어갔다.

죽자고 일만 한 건 아니다.

쉬기도 해야지.

스마트폰으로 게임도 하고, SNS도 하고,

그러다가 뉴스에서 데이비드 모건 사망 소식과 전쟁 기사를 읽었다.

데이비드 모건 죽은 거야 그렇다 쳐도, 전쟁?

'아니, 지금이 전쟁할 때야?'

답답하다.

기껏 MRC 성공으로 한창 인류의 번영이 시작되려는 판에.

기사 댓글엔 너튜브 동영상 링크도 있었다.

붉은 광장에서 있던 사람이 찍어서 올린 듯했다.

링크 타고 들어가 보니 관련 영상이 꽤 많다.

태주는 그중 하나를 실행했다.

- 혁명을 위하여!

- 모든 권력을 신(新) 볼셰비키로

자살 폭탄 테러 영상.

창백한 인상의 사람들이 몸에 폭탄을 두르고 단상으로 돌진하는 장면.

'흐음, 이거 이상한데?'

겉으로 보면 평범한(?) 테러범 무리.

빠르고 날렵하긴 하지만 부자연스럽다.

머리와 상체는 꼿꼿이 세운 채 오직 다리만 움직여 달리고 있다.

팔도 이상하게 꺾여있고.

'인간이 이렇게 움직일 리 있나?'

다른 영상도 찾아봤다.

조금 더 가까이에서 찍은 테러범 모습.

표정이 딱딱하다.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마치 강시와 비슷하다.

확신이 섰다.

이건 인간이 아니다.

아니, 인간이지만 이미 죽어있다.

이를테면

'···언데드?'

자신만 이렇게 판단했을 리 없다.

눈썰미가 좋다면 누구나 이상함을 감지했을 터.

집히는 데도 있었다.

블랙 마피아, 흑마법사 집단.

'···알아봐야겠군.'

파주에서 처음 악연을 맺었다.

언제고 한번은 만나야 할 놈들.

그때도 준비 운운하면서 입을 놀렸었다.

준비? 그전에 조져야지.

어쨌든 삼한 제국 도착하자마자 모스크바로 가게 생겼다,

'자꾸 자리 비운다고 서연 씨에게 또 야단맞겠네.'

어쩔 수 없다.

가서 파헤쳐보자.

좁은 도시국가라서 돌아다니다 보면 마기의 냄새를 맡는 건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할 수 있는 건 한다.

굳이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없더라도 말이다.

천마도 그렇고, 흑마법사 집단도 그렇고, 세상엔 자신과 같은 영혼 연결자들이 꽤 많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과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우연과 우연이 겹쳐져 만들어진 공유 창고.

그게 없었다면?

'이렇게까지 강해지지 않았을 거야.'

혼원무상독령공 대성이나 독령은 꿈도 못 꿨겠지.

MRC나 태평양 횡단 또한 생각도 안 했을 테고.

1차 연결, 이건 다른 영혼 연결자와 다를 바 없다.

결정적 차이의 시작은 당군악이 깨달음을 얻어 등선하고 나서.

때마침 2차 영혼 연결이 선계에서 이루어졌다.

독선 당군악이 차원을 넘어 선기를 자신에게 전해 무한공간을 만들었다.

핵심은 이 모든 과정이 영혼 연결 도중에 이루어졌다는 것.

그로 인해 무한공간의 일부가 공유되어졌다.

즉 공유 창고의 탄생.

덕택에 선계와 직접 교류를 하게 된 것이고.

이런 경우가 또 있을까?

그리하여 연결된 존재는 당군악 만이 아니다.

선계, 천계, 그리고 황천계까지 함께 하고 있다.

이런 연결이 또 있을까?

태주는 다른 영혼 연결자들이 조금도 두렵지 않다.

독선과 검선을 비롯한 모든 신선, 해맑 선녀와 천인, 염라와 차사, 판관들이 도와주는데 뭐가 무서워?

게다가 지구에서도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그들도 자신에게 힘이 되어주는 조력자들.

그러고 보니 구례나 파주는 별일 없나?

일이삼백이도 궁금하고.

태주는 오랜만에 단톡방을 열었다.

알림을 꺼놓은 탓인지 읽지 않은 톡이 무려 1000개가 넘었다,

일단 태평양 바다를 배경으로 셀카 하나 찍고,

찰칵!

단톡방에 올린 후.

[태주] : 태평양 바다입니다. 도착해서 봅시다.

글들이 폭발적으로 올라왔다.

[TJ 길드 순철] : 와! 바다다!

[TJ 길드 창훈] : 싸부님! 다음에 제가 배 타면 안 될까요?

[TJ 길드 태균] :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TJ 길드 가은] : 안녕하세요. 길드장님, 아니 사부님.

.

.

.

제자들이 중심이 된 민간길드.

원래 태홍 길드였는데, 어느새 TJ 길드로 이름이 바뀌었다.

사실 제자들이라고 보기엔 좀 그렇다.

가르친 거라고는 오행신공 뿐, 검선의 동영상과 정연희가 다 키웠다.

그래도 오행신공은 당군악의 독문 기공.

막 퍼뜨리면 되나?

사제 관계라는 절차에 따라 전수해야지.

그리고,

[백원장님] : 허허허, 사진으로만 봐도 시원하군.

[파주 정연희] : 해양 마수와 싸워보셨어요? 물속에서의 전투는 어떠셨나요?

[백총괄경영자] : 마침 잘 됐습니다. 안 그래도 보고드릴 일이 있었는데.

[태주] : 보고라니요?

[백총괄경영자] : 모스크바 왕국 정부에서 태홍 회복제와 생기불끈 수출 요청 들어왔어요.

[태주] : 아!

전쟁의 여파가 구례에까지 미쳤나 보다.

[백총괄경영자] : 정가의 두 배라도 사겠다던데, 어떡할까요?

[태주] : 적당한 핑계 대고 거절하세요.

아무리 비싸게 판다고 하지만 이건 전쟁물자다.

타국에서 일어난 내전, 그 누구도 우리 편이 아니다.

버마 공화국이야 선악의 구별이 뚜렷했지만 이번 내전은 그것도 없다.

한쪽에 팔면 다른 쪽이 가만히 있을까?

[파주 정연희] : 저도 보고드릴 게 있어요.

[태주] : 뭐죠?

안부나 물을까 했는데 톡방으로 업무 처리할 판.

[파주 정연희] : 요즘 파주 DMZ 마수 밀집 지대가 심상치 않아요. 인구가 갑자기 늘어나서 그런지 마수들이 동요하고 있는 것 같아요. 경계를 넘는 일도 잦고.

파주 영지는 밀집 지대 바로 옆에 붙어있다.

공장이 세워지고, 일자리가 늘어나고, 영지 인구수도 폭발했고···.

변화가 일어났으니 당연히 마수들도 영향을 받겠지.

내버려 두면 사고가 일어날지도.

[태주] : 흐음, 슬슬 대대적으로 소탕할 때가 됐네요.

[파주 정연희] : 네,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언제쯤?

[태주] : 일단 전 참여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파주 정연희] : 아! 하긴 안 계셔도 무리는 없을 것 같네요. 우리 힘으로 해볼게요.

TJ 길드와 파주 영지군 만의 힘으로 돌파한다.

그들도 실전을 경험해봐야 한다.

정연희도 있고, 류진철도 있고, 그리고 일이삼백이도,

또한 배를 타면서 개발한 레이드용 도핑 물약.

이번 토벌 작전에서 실험해보고.

순간!

찌르르르!

바다 위에서 울리는 배송 신호.

"오! 언제 뜨나 했더니."

미리 준비했다.

선계 인트라넷 설치를 위한 1차 장비, 그리고 스포츠카 한 대, 나머지 잡다한 물품.

역시 흑암철을 가득 보내왔다.

짜투리 공간엔 선계 꽃과 선도를.

물건을 교체하고 난 뒤, 태주는 당군악이 보낸 공기계 스마트폰을 꺼냈다.

변화한 선계의 모습이 영상으로 저장된 폰,

지금은 자료를 저장하는 용도로만 사용하는 폰이지만, 인트라넷이 완성되면 곧 선계에서도 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디 얼마나 달라졌는지 볼까?"

이 순간이 제일 좋다.

태주는 컨테이너 위에 누워 영상을 실행했다.

※ ※ ※

이제 지구인지, 선계(仙界)인지 구분이 안 되는 세상.

요즘 신선들의 일과는 선계월드 안 카페에서 시작된다.

인간계에서 차를 발명하고, 널리 퍼뜨렸던 다선(茶仙) 작설 선인이 카페의 주인.

술 파는 주선의 영향을 받아, 거금을 들여 에스프레소 기계와 제빙기를 구매했다.

그리고 월세를 내는 조건으로 선계 카페를 개업한 것.

"아아 한잔."

"난 뜨아."

"아이스 바닐라 라떼, 아바라 한 잔 주시오. 시럽 펌핑 5번. 달달한 게 좋더라고."

"자몽 에이드 되오?"

선계 상생 보조금으로 주머니가 두둑해진 신선들이 카페에서 여유를 즐겼다.

"참! 하선고 봤소?"

"당연히 봤지. 쯧쯧, 망측하게."

"어찌 선계에 일진녀가···,"

"이제 문신 돼지만 옆에 있으면 완벽하겠군."

"그래도 삥 뜯기지 않아서 다행이오."

"과연 그럴까? 신용패 코인이라 망정이지 아마도 실물 화폐였으면 바로 뜯겼을 거요."

순간!

"헉! 돌핀이다."

"···하선고?"

"쉿! 조용히 하시오."

하선고가 카페에 왔다.

엉거주춤 서 있는 다선에게 다가가 음료를 주문하는 그녀.

"화이트 모카 프라푸치노 한 잔, 샷 하나 추가하고, 휘핑크림 잔뜩 올려서, 자바칩은 반은 그냥, 반은 갈아서, 아! 초코드리즐 많이, 카라멜 시럽 2번, 헤이즐넛 시럽 2번···, 다 들었지? 여기 텀블러에 담아줘."

이건 또 어디서 배웠지?

"자, 잠시만 기다리시오."

"그래."

곁눈으로 힐끔힐끔 쳐다보는 신선들.

그러자 하선고가 픽, 웃으며,

"뭘 훔쳐봐?"

신선들이 발끈했다.

"내가 언제 봤다고?"

"즈, 증거 있소?"

"난 그저 커피만 마셨을 뿐이오."

"아무리 그래도 내가 신선인데···,"

다선이 떨리는 손으로 건넨 화이트 모카 프라푸치노를 건넸다.

음료를 받은 하선고가 돌아서면서,

"나 괜찮지? 대놓고 봐도 돼. 본다고 닳니?"

"···허어,"

"···험험,"

"···."

순진한 신선들이었다.

원래 인간계에서도 하나에 몰두하던 그들이었기에 더더욱 그랬다.

여인들이 풍기는 분 냄새에 지극히 취약한 아싸들.

하선고는 텀블러를 들고 멀티플렉스로 갔다.

오늘도 드라마 한 편 때려야지.

그런데,

"와아···,"

멀티플렉스 앞에서 만난 사람.

"응? 여우네?"

미호 선자였다.

"왕모는 어디 가고 너 혼자 왔어?"

"···독선 만나려고, 근데 하선고 맞아···, 요?"

"보면 모르니? 왕모 년은 잘 있냐?"

"으음, 네."

"자꾸 왕모 년에게 휘둘리지 말고, 혼자 살아! 그게 편해."

"···."

"그럼 일 보고 가렴."

미호 선자는 하선고의 옷차림에 눈을 뗄 수 없었다.

완벽하다.

자신이 지향해왔던 모습이었다.

껄렁껄렁하면서도, 유혹적이고, 불량끼 가득한.

그래서 미호는 언젠간 꼭 따라 해봐야겠다고 다짐했다..

한편 당군악은 쇼핑몰에 있었다.

천도도 천도지만 선계월드 운영도 게을리하면 안 된다.

지금 그의 고민은 여전히 노동력.

선계월드는 잘 만들어뒀다.

그러나 운영할 직원들이 문제.

어트렉션을 관리하고, 간식거리도 팔고, 청소도 하고,

신선들이 하겠나.

두둑한 상생 지원금으로 일은커녕 놀기 바쁘다.

황천계 흑암철 관리 알바도 나가지 않고 있었고.

'괜히 돈을 줬나?'

그렇다고 천마나 혈마 같은 죄인 새끼들을 고용할 수는 없는 일.

뭔가 방법이 없을까?

그런데 바로 그때!

"저어, 독선님."

"미호 선자 아니시오? 어서 오시오. 무슨 일로···"

가만!

순간 번뜩 든 생각.

'아! 맞다.'

미호 선자는 환수계 출신, 본질은 여우다.

경지가 높은 영물들은 저렇게 인간의 모습으로 변할 수 있다.

'환수계에 올라온 영물들을 선계월드 직원으로 고용하면?'

오히려 신선들보다 더 낫다.

천인들도 좋아할 터.

그렇다면 그들을 끌어들일 방법은?

'통할지 모르겠군.'

시도해볼 방법이 하나 있다.

쇼핑몰에서 팔지 못하고 무한공간에만 보관해두고 있던 물건들.

태주는 선계에 배송을 보내기 위해 보통 백화점 하나를 통째로 사들인다.

그래서인지 미처 상표도 확인하지 못하고 들어오는 물건들도 있다.

예를 들어 애완동물 사료나 간식들.

겉으로 보기엔 사람이 먹는 음식으로 보인다.

처음엔 당군악도 먹을 뻔했다.

'여우는 개과였지? 확인해보자. 좋아하는지.'

당군악은 무한공간에서 개 사료를 꺼내 예쁜 접시에 담으며 말했다.

"이왕 오셨으니 이거나 드셔보시오."

"응? 뭐죠?"

미호는 코를 킁킁거렸다.

좋은 냄새가 난다.

그래서 자신이 여기 온 용건도 잊은 채 개 사료에 손을 가져갔다.

아드득, 꽈득.

입에서 부서지는 개 사료.

"음음, 으으음, 마, 맛있어요."

그런 것 같다.

미호 선자의 아홉 개 꼬리가 바람개비처럼 돌았다.

강아지용 개껌도 하나 주고.

"잘 먹는 거 보니 기분이 좋소."

"헤헤헤."

"근데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

"뭐죠?"

"다름이 아니라···."

당군악은 미호에게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환수계 영물들을 선계월드 직원으로 고용하려고 한다, 월급은 코인으로, 그리고 점심과 저녁, 간식 무료 제공.

"어떻소? 여기서 일하려는 환수계 영물들이 있을까?"

"음음, 반드시 있을 거예요."

미호도 확신했다.

그동안 인간들이 먹는 음식 중 자신과는 맞지 않는 것들이 많았다.

그래서 잘 사 먹지 않았고.

하지만 방금 독선이 준 이 음식은 너무나 맛있었다.

더구나 점심과 저녁, 간식도 무료제공이라니.

이걸로 유혹하면?

"제가 환수계로 가서 애들을 만나볼게요."

"허허, 그럼 잘 부탁드리오."

직원 문제도 해결됐다.

그건 그렇고,

"참! 미호 선자, 좀 전에 볼일이 있다하지 않았소?"

"아! 그거요? 서왕모께서 독선을 불러오시라고."

"···무슨 일인데."

"천도가 다 익었답니다. 와서 따가래요. 늦지 않게 도원으로···,"

잘못 들었나?

당군악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천도? 천도가 지금?

"익었다고?"

"네!"

"···왜 그걸 이제야 이야기하시오!!!"

"아니, 이, 이야기하느라 깜빡···,"

"허허, 전에 듣기론 며칠 남았다더니."

"글쎄요. 전 왕모님 명만 받고 온 거라."

"제기랄!!!"

츠팟!

당군악의 몸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내가 잘못했나?'

미호 선자는 혼자 남겨져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있다가, 위에서 내려오던 하선고와 만났다.

"여우야, 여우야, 뭐하니?"

"밥 먹는···, 아, 아니,"

"귀여운 것, 근데 왜 혼자?"

"으음, 사실은 그게···,"

미호 선자는 방금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그러자 눈빛을 빛내는 하선고.

'오랜만에 점괘나 볼까?'

미래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점을 쳐 예측하는 하선고의 선술, 가까운 앞날은 비교적 금방 나온다.

산통을 꺼내 좌라라라라락! 흔들다가 땅바닥에 탁 펼치니.

'응?'

이것 봐라?

"돌원숭이 새끼가, 단단히 미쳤구나! 넌 뒈졌어!"

하선고는 스산한 미소를 지으며 1층으로 내려갔다.

전쟁 발발.

천도를 둘러싼 상위 계 대전쟁의 서막이었다.

< 전쟁 발발(2) > 끝

ⓒ 꾸찌꾸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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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 발발(3) >

제천대성.

한때 돌원숭이었다가, 미후왕이 되었다가, 오공이라는 이름도 받고, 근두운도 타고, 용왕에게서 여의봉을 갈취하고, 염라를 협박해 명부의 이름도 지워버렸으며, 천계로 올라가 깽판도 쳤고, 천도도 훔쳐먹고···,

멋모르고 날뛰던 시절이 있었다.

치기 어린 행동인 건 자신도 인정한다.

떠올리면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

그렇다고 패악질만 저질렀나?

불경을 가져오기 위해 서역까지 다녀왔다.

투전승불(鬪戰勝佛)이라는 희한한 법명도 받았고.

그래서 지금은 여래계에서 지내고 있다.

여래계, 낙원이었다.

속세의 모든 고민과 근심이 사라진 곳.

아름다운 풍경에, 맑디맑은 공기, 춥지도 덥지도 않은 적당한 기온, 푸르른 식물들과 온순한 동물들, 조용하고 고즈넉한 분위기.

맞다.

지루했다.

재미가 하나도 없었다.

낙원이 아니라 감옥이었다.

석가여래에게 속았다.

목숨을 걸고 서역에 다녀온 대가가 감금이라니,

더럽고 치사했다.

교활한 관음은 또 어떻고?

머리에 쓰는 긴고아(緊箍兒)를 벗겨주긴 했다.

그러나 실체 긴고아는 눈속임.

사실은 무형의 기운이었고, 무시무시한 암시였다.

긴고아를 쓰지 않아도 그 효과는 그대로 남아있다.

그 때문에 매번 탈출을 시도할 때마다 저항도 못 하고 관음에게 잡혔고.

벗어나는 방법은?

불법으로 만들어진 무형의 긴고아를 파괴할 강력한 힘이 필요했다.

천도가 그 해답이었다.

그래서 제천대성의 모든 관심은 오로지 천도에 있었다.

천도는 자신의 희망이자 삶의 목적이었다.

천도의 힘으로 이 빌어먹을 무형의 긴고아를 완전히 파괴한다.

그러고 나서 여래들이 섣불리 침범하지 못하는 인간계로 도망가서 자유를 되찾는다.

마침내 기회가 왔다.

도원의 천도가 무르익었다.

주인은 개뿔!

먼저 먹는 놈이 임자지.

쐐애애애애액!

구름 한 조각이 도원을 향해 날아갔다.

그저 평범한 구름 같아 보이지만 그 안에 제천대성이 숨어있었다.

복숭아나무가 보였다.

그 한가운데 탐스럽게 열린 천도.

"오오···,"

감탄만 할 때가 아니다.

관음이 알아채기 전에 해치운다.

스르르륵!

구름이 사라지고 나타난 원숭이, 제천대성,

천도를 향해 저벅저벅 걸었다.

치직! 치지직! 치지지지···,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무력하게 부서지는 결계.

채채채채챙!!!

결국 마지막 하나 남은 진법도 박살나고.

"흐흐흐,"

제천대성은 천도 앞으로 바짝 다가갔다.

하지만 바로 그때!

"망할 돌원숭이 놈아, 거기서 꼼짝마라!"

서왕모였다.

"으잉? 서왕모? 그 옷은 뭐야?"

"멈추라고 했다!"

"멈췄는데?"

말하는 도중에도 천도를 향해 손을 뻗는 제천대성.

"어디서 개수작이야!"

촤라라락!

"흐에?"

서왕모의 손에서 그물이 뿌려졌다.

천라건곤망(天羅乾坤網).

그물에 갇히면 누구도 빠져나오지 못한다는 서왕모의 보패.

하지만 제천대성에겐 적용되지 않았다.

"키키킥!"

스스스슷!

순식간에 작아지는 몸.

토톡! 토톡!

벼룩처럼 뛰어 천라건곤망의 그물 구멍으로 쏙 빠져나오더니, 머리털을 뽑아서 훅하고 불었다.

동시에 어느새 나타난 4명의 제천대성 분신이 각각 좌우에서 그녀를 구속해버렸다.

"왕모야, 매번 고맙다. 이렇게 천도를 훌륭하게 키워줘서."

"이이익! 놔! 놔라!"

하지만 팔다리가 잡힌 왕모는 움직일 수 없었다.

"끼끼긱!"

"크켁!"

"에에에,"

"못 움직이지?"

분신술이 허상만 만들어내나?

절대 아니다.

본신만큼은 아니더라도 일반 요괴 정도의 힘은 충분히 가진 분신들이었다.

제천대성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천도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천도를 잡고서,

"어차피 먹힐 거, 앙탈 부리지 마라."

약간의 저항감이 있었지만···,

툭!

힘없이 가지에서 떨어져 제천대성의 손아귀로 들어온 천도.

기어코 손에 들어왔다.

이제 먹기만 하면 된다.

"내가 잘 먹어줄게."

입으로 가져가려는데.

순간!

스스스스스스스스···,

무언가 기분 나쁜 소리가 하늘 위에서 들렸다.

"음?"

뭐지?

고개를 들어보니,

"헉!"

까맣다.

수만 개의 직육면체 철 주괴가 온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스팟!

어느새 나타난 신선 한 명.

당군악이었다.

"비루한 원숭이 새끼야! 널 짓이겨 주겠다."

하늘에 떠 있던, 셀 수도 없이 많은 철 주괴가 순식간에 뾰족하게 변하더니,

콰콰콰콰콰콰콰!

빛살처럼 쏟아져 내려왔다.

"이크!"

하나하나가 무겁고 뾰족한 철 덩어리였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게 다가 아니었다.

신선의 손바닥에서도 철 주괴가 튀어나왔다.

"제기랄!"

파바박!

파박!

황급하게 데구르르, 구르는 제천대성,

만만히 볼 게 아니다.

하나하나가 엄청난 기운을 담고 있었다.

맞서면 위험하다.

하지만,

'안 맞으면 그만이지.'

스슷, 스스스슷.

몸에서 털이 떨어졌다.

그것들은 모두 원숭이로 변했다.

무한으로 증식됐다.

최초로 분열한 털이 분신이 되고, 그 분신의 털이 또 분열해 다른 분신이 되고, 다시 분열하고, 증식하고,

파바바바박!

분신들이 쏟아지는 뾰족 철주괴를 몸으로 막았다.

맞는 족족 사라졌다.

그래도 없어지는 것보다 늘어나는 원숭이가 많았다.

그리하여 잠시 후.

도원과 도화궁은 온통 원숭이들로 뒤덮였다.

※ ※ ※

1층 멀티플렉스로 내려갔던 하선고는 주선과 만났다.

"주정뱅이."

"···으응?"

"여기 스피커 방송 설비 있다며?"

"흐음, 있지."

선계 월드를 운영하면서 안내 방송을 위해 설치한 것.

"마이크 좀 줘봐."

"왜?"

"잔말 말고 가지고 와!"

주선이 서랍에서 마이크를 꺼내주자,

"여기 대고 말하면 돼?"

"너무 가까이 대진 말고,"

"알았어."

하선고가 방송을 시작했다.

찌잉!

"아아! 마이크 시험 중, 흠흠, 잘 들려? 아무튼 다들 주목해라."

선계월드에 설치된 스피커가 크게 울렸다.

"현재 원숭이 한 마리가 천도를 도둑질하려고 도원에 왔다. 태주 대협에게 약속된 그 천도 말이야."

갑자기 조용해진 선계.

오직 하선고의 목소리만이 들렸다.

"원숭이 한 마리야 독선과 서왕모만으로 처리할 수 있겠지만···, 돌원숭이에겐 조력자들이 있다. 정확히 말하면 앞으로 있을 거야. 혼자가 아니란 말이지. 잘못하면 태주 대협에게 갈 천도를 빼앗길 수도, 서둘지 않으면 늦어."

옆에서 가만히 듣던 태백 선인,

안색이 급변했다.

선반에서 도수 90도짜리 보드카 한 병을 꺼내 단숨에 들이켜고는.

"크억!"

취하면 취할수록 강해지는 그.

"원숭이라, 잡아서 안주로 먹으면 되겠군."

주선은 밖으로 나와 주차된 독선의 컨퍼터블 오픈카에 올라탔다.

목적지는 도원.

그러나 하선고가 그냥 내버려 둘 리 없었다.

"비켜! 주정뱅이 새끼야! 드라마 안 봤어? 어딜 음주운전 하려고."

"네가 운전하겠다고? 하선고, 넌 무면허잖아."

"독선은 면허가 있어서 타고 다니냐?"

"···."

"잔말 말고 옆에 앉아!"

부아아앙!

하선고와 주선이 탄 스포츠카가 도원으로 질주했다.

구미호로 변한 미호 선자도 밖으로 나와서.

'원숭이 놈이 우리 도화궁을 침범해?'

네발로 달려 스포츠카를 빠르게 쫓아갔다.

다다다다다닥!

다른 신선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갈홍 선인은 판관필을 꺼내들고 학사건을 이마에 질끈 묶었다.

"오늘이 원숭이 제삿날이 될 거요."

귀곡 선인은 술법 책을 들고 온갖 기문진이 그려진 장포를 입었다.

"갑시다. 원숭이 가죽 벗기러."

뿐인가?

거의 모든 신선이 자신만의 보패를 들고 도원으로 향했다.

단주 선인은 두툼한 부적 책을 손에 들고, 대목 선인은 나무를 자르는 톱을, 철장은 망치, 화선은 제 키만큼이나 큰 붓을 어깨에 멨다.

삼봉 선인, 매화 선인, 곤륜 선인도 마찬가지.

바짓가랑이와 펄럭이는 도포 소매를 끈으로 묶어 정리하면서.

"준비됐소?"

"진작 끝났지."

"오랜만에 몸을 풀어보겠군."

"일단 원숭이 다리 하나 자르고 시작합시다"

팟! 팟! 팟!

도원으로 달려가는 무림계 대표 신선들.

검선은 할리 바이크를 타고 가다가 하선고의 목소리를 들었다.

"···뭐?"

푸다다다닥! 푸륵, 푸드득.

도로 위에서 오토바이를 멈추고,

"간뎅이가 부었구나."

등에 메고 있던 검을 공중에 띄워 올라탄 후,

"검을 꼬챙이 삼아 꿰어서 불에 구워주지."

쐐애애애액!

도원을 향해 쾌속 비행했다.

다른 계의 존재들도 방송을 들었다.

미니 전동카로 선계 도로를 달리던 해맑 선녀는.

"옴마? 원숭이님이?"

제천대성,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이야기는 꽤 많이 들었다.

인간계에서도, 천계에서도.

"근데 나쁜 짓이에오오."

주인 있는 물건을 훔치다니.

"가서 말려야지."

부웅.

해맑 선인의 전동카도 도로를 달렸다.

그리고,

멀티플렉스 쇼핑몰에서 물건을 고르던 강림차사 또한.

"호오! 그렇단 말이지?"

지금 쇼핑할 때가 아니다.

급하게 내려와 보니 텅 비어있는 선계.

아마 전부 도원으로 달려간 모양.

'흐흐, 흥미진진하겠군.'

신선들과 원숭이가 일대 결전을 펼친다.

다시 없을 구경거리.

지구의 히어로 영화보다 저 재미있고 박진감이 넘칠 터.

'구경이나 가볼까?'

※ ※ ※

태주에게 배송할 목적으로 무한공간 안에 보관했던 흑암철 주괴 5만여 개, 그걸 뾰족하게 만들어 펼치는 독선 당군악의 만천화우.

암기로 사용할 수 있는 건 더 있다.

무한공간에 든 모든 쇠붙이를 총동원했다.

요리용 가위, 과도, 손톱깎이, 족집게, 스테이플러 심, 샤프 펜슬···.

후두두두두두둑!

독령을 통해 조종되는 금속의 물체들.

다른 것들은 건들지도 않았다.

오직 원숭이와 그 분신들에게만 정확하게 날아갔다.

피피피피핏!

푸푸푸푸푹!

분신이 만들어지자마자 소멸한다.

그러나 당군악의 목적은 진짜 제천대성.

눈으로 좇으면 놓친다.

모든 분신이 천도를 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중에 진짜는 단 하나.

'저놈이군.'

기가 느껴졌다.

놈이 천도를 먹게끔 놔두면 안 된다.

콰르르르르르!

암기가 급류처럼 제천대성으로 쏘아졌다.

제천대성은 당황했다.

반격은커녕 피하기에만 급급했다.

'대체 저 자식은 언제 등선한 놈이야?'

선계의 최강자라면 검선.

다른 신선들이야 분신으로도 충분히 상대 가능하다.

그러나 저놈은 결코 만만하지 않았다.

수십만 개의 물체를 저리 능숙하게 다뤄?

피피핏! 츠피릿!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머리와 가슴으로 날아드는 철괴와 물건들.

"아이고!"

정신이 없었다.

오히려 검선보다 더 까다로운 놈.

도무지 천도를 섭취할 기회를 주지 않고 있다.

'안 되겠네.'

이러다 관음이라도 달려오면 천도 탈취는 무조건 실패.

'혼자선 어려워.'

그도 한 수가 있었다.

만일을 대비해 세워둔 계획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