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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 아가씨, 발걸음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스럽게 걸으십시오. 바덴하임 놈들이 어디에 숨어 있을지 모릅니다."

"네, 할아버지."

데미언과 그의 동료들이 지나온 빈민가 공동묘지의 한복판.

마치 땅에서 솟아나기라도 한 듯,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사람들이 있었다.

희끗한 반백의 머리를 지닌 건장한 체구의 노인과 붉은빛이 감도는 갈색 머리를 지닌 잘 생긴 소년.

그리고,

"후우우..."

긴장된 한숨을 내쉬며 불안한 눈빛으로 사방을 살피는 아름다운 외모의 어린 소녀까지.

그들의 정체는 바덴하임 군이 점령한 영주성을 가까스로 탈출한 남작의 딸 니나 아르펜과 군무관 데론 베르켈, 그의 제자 아드리안이었다.

영주성 지하 비밀 통로의 출구가, 바로 이곳 빈민가 공동묘지 한복판으로 이어져 있었던 것.

이름 없는 자의 무덤으로 위장하여 만들어진 비밀 통로의 출구를 통해 지상으로 나온 그들은, 한껏 긴장한 채로 한밤의 공동묘지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 내 기억에, 도시 밖으로 나가는 땅굴이 이 근처에 있었다.'

데론은 영지의 군사적 업무를 총괄하는 군무관이었다.

그런 그가 리트베르크의 가장 중요한 도시인 리트렌의 성벽에 도시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개구멍'이 있다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원칙대로라면 그 땅굴을 틀어막아야 했겠지만...'

때론 원칙을 지키는 것보다 적당한 타협을 하는 게 현실에 더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경험 많은 데론은 잘 알고 있었다.

해당 땅굴은 리트렌 도시 내에 암약하는 도둑 길드가 만들고 관리하는 일종의 '영업 시설'이었다.

그들은 땅굴을 통해 도시 내로 밀수품을 들여오거나, 성문을 통해 정상적으로 도시를 왕래하지 못하는 이들을 돈을 받고 이동시켜주었다.

당연히 해서는 안 될 짓이었고, 가만 놔둬선 안 되는 놈들이었다.

하지만, 도둑 길드란 사람이 많이 모여 사는 곳이라면 어디든 자연적으로 생겨나는 독버섯 같은 존재.

그런 놈들이 관리하는 땅굴을 틀어막아봤자 결국엔 다른 곳에 똑같은 게 만들어질 뿐이었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위치를 아는 곳에 두고 꼼꼼히 감시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기에, 데론은 그 땅굴을 메우지 않고 그냥 놔두었다.

그리고 그 날의 선택이, 오늘의 데론에게 생명을 구할 한줄기 동아줄이 되었다.

"하아... 하아..."

가쁜 숨을 몰아쉬며 비틀거리는 소녀, 니나의 어깨를 감싼 데론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한다.

"거의 다 왔습니다, 아가씨. 이제 조금만 더 걸어가면..."

바로 그때, 결코 듣고 싶지 않았던 낯선 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거기 누구냐!"

"...!"

한밤의 정적을 깨뜨리는 날카로운 목소리.

그 즉시 니나의 작은 몸뚱이를 안아 든 데론과 아드리안은 근처 빈민가 건물의 그림자 속으로 몸을 숨겼다.

쿵쿵! 쿵쿵!

품 안에서 터질 듯 뛰는 니나의 심장 소리가 데론에게 전해진다.

'제발, 제발 그냥 지나가주길...'

하지만 데론의 간절한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곧 빈민가 골목에서 바덴하임 군의 복장을 갖춘 다섯 명의 병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뭐야? 아무도 없잖아, 이 새끼야!"

"아씨, 분명히 들었다니까? 뭔 소리가 났어."

"그냥 동물 소리 잘못 들은 거 아냐? 고양이나 길거리 똥개 같은 애들 있잖아."

"아, 이 미친 새끼가... 분명 사람 목소리였다니까? 넌 내가 개소리랑 사람 소리도 구분 못 하는 거 같냐?"

"뭐, 맨날 왈왈거리고 개소리를 하긴 하잖아? 푸흐흐..."

"이 씨발 새끼들이 진짜!"

데론은 깊은 밤이 만들어준 짙은 어둠 속에 가만히 숨어 대화를 나누는 바덴하임 병사들의 모습을 응시했다.

오가는 대화의 수준을 들어보니, 아무리 양보해도 정예라고는 할 수 없는 수준의 병사들이었다.

군기가 풀어진 놈들의 모습에, 검을 쥔 오른손이 자꾸만 움찔거렸다.

'... 그냥 베어 버릴까?'

저 정도 수준이라면, 자신과 아드리안이 한꺼번에 덤벼들어 한 호흡에 베어버릴 수도 있으리라.

'아니야... 혹시라도 실수가 나온다면, 돌이킬 수 없게 된다.'

저 다섯 명의 목숨을 한 번에 끊지 못한다면, 그래서 저들 중 한 놈이라도 도망을 치거나 주변의 다른 병사들을 부른다면 상상하기도 싫은 끔찍한 결과가 벌어지리라.

하여, 데론은 안전한 쪽을 택하기로 했다.

위험한 도박을 하기엔 지금 그의 품에 안긴 소녀의 존재가 너무 소중했기에...

'그냥 그대로 지나가라. 제발...'

그의 간절한 바람이 하늘에 닿은 것일까?

한참 흰소리를 떠들던 바덴하임의 병사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왔던 길을 돌아가기 시작한다.

점점 더 멀어지는 놈들의 발소리.

온몸의 털이 바짝 서도록 긴장했던 마음이 조금은 풀어지려던 찰나,

찍찍찍!

어디선가 나타난 쥐새끼 한 마리가 징그러운 울음소리를 내며 데론의 발밑으로 파고들었고,

"꺅! 어, 크읍!"

깜짝 놀란 소녀, 니나의 앳된 비명이 터져 나오고 말았다.

니나 자신도 모르게 나온 무의식적인 반응이었고, 그 즉시 하얗고 자그마한 손을 들어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으나 이미 일은 벌어진 후였다.

"뭐야?!"

"거봐, 시발! 누구 있댔잖아!"

"누구냐! 당장 튀어나왓!"

"이런 개새끼들이!"

촤앙! 촤아앙!

흉흉한 기세가 된 바덴하임의 병사들이 각자의 검을 뽑아 들며 달려오기 시작한다.

"... 이런!"

이제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깨달은 데론이 이를 악물며 뛰쳐나가려던 찰나,

쉬이이이잉! 퍼억!

"끄르륵...!"

되돌아오던 바덴하임의 다섯 병사 중 한 명이 정확하게 목울대를 꿰뚫어 버린 화살에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거꾸러졌고,

후우웅, 콰지직!

다른 한 명은 어둠 속에서 뛰쳐나온 건장한 사내의 검에 머리통이 쪼개져 쓰려졌으며,

푸화아아아악!

남은 세 명의 병사는, 환상처럼 어둠을 갈라낸 한 자루 검에 의해 한꺼번에 머리와 몸통이 분리되며 사방으로 피를 뿌렸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동시에 일어난 다섯 병사의 죽음.

그리고, 너무 놀라 할 말을 잃은 데론의 눈앞에 나타난 세 명의 사내.

그중 가장 큰 덩치를 지닌 잿빛 턱수염의 사내가 굵은 목소리로 데론에게 물었다.

"베르켈 경, 저를 기억하십니까?"

"자네는..."

한번 보면 쉬이 잊기 힘든 인상적인 사내의 외모.

그 즉시 사내의 이름을 떠올린 베르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기억나네. 용병대 푸른 방패의 대장이었지? 이름이... 겔베르트였던가?"

"예, 맞습니다. 용병 계약서를 작성할 때 영주성에서 뵈었었지요."

거기까지 말한 겔베르트가, 날카롭게 눈을 빛내며 말했다.

"바덴하임 놈들에게 부하를 잃고 탈출 중이었습니다. 저희와 함께 움직이시지요. 그편이, 모시는 분에게도 훨씬 안전할 겁니다."

"..."

뜻밖의 제안을 들은 데론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떨린다.

이 수라장의 한복판에서 만난 이들은, 과연 자신들의 목숨을 구해줄 귀인일 것인가?

아니면, 그들을 잡아 바덴하임에 팔아넘길 승냥이 떼인가?

일생일대의 선택을 앞둔 데론의 입이 쉽게 열리지 않자, 그 모습을 보다 못한 누군가가 앞으로 나섰다.

"베르켈 경, 지체할 시간이 없습니다. 바덴하임 놈들이 오기 전에 도둑 길드의 땅굴을 통해 도시 밖으로 탈출해야 합니다. 어서 결정을 내려주십시오!"

"...!"

땅굴의 존재를 알고 있다니?

깜짝 놀란 데론이 다급한 목소리로 자신을 채근하는 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한눈에 봐도 앳되어 보이는 얼굴과 거칠게 머리에 감싼 두건 사이로 삐져나온 금빛 머리가 보였다.

하지만 그보다도 데론의 시선을 잡아끈 것은 상대의 짙은 녹안(綠眼).

세상의 신비로운 기운을 모두 담은 듯한 맑고 깊은 그 눈빛에 이끌린 데론이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좋네, 함께 가도록 하지."

"잘 생각하셨습니다, 베르켈 경."

꾸벅, 데론에게 고개를 숙여 보인 녹안의 소년이 이번에 데론의 뒤편에서 겁먹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소녀, 니나에게 말했다.

"지금부터 저희가 모시겠습니다. 그 어떤 적도, 아가씨에게 해를 끼칠 수 없을 겁니다. 저의 이름을 걸고 약속드리겠습니다."

"...!"

어딘가 낯익은 얼굴을 한 소년의 말에, 니나가 홀린 듯이 입을 열었다.

"... 이름."

"예?"

"이름이요. 이름을 걸고 약속하신다면서요."

"아..."

그제야 질문의 의도를 파악한 녹안의 소년이 니나의 눈을 바라보며 대답한다.

"저는... 푸른 방패의 용병, 데미언입니다."

필사의 탈출 (5)

"... 일단 주변에 보이는 놈들은 없습니다, 이동하시죠."

"그러지."

도둑 길드의 땅굴을 통해 도시 밖으로 나온 이후로도, 나는 선두에 서서 일행을 이끌었다.

리트렌 주변의 지리에 빠삭한 데론의 지식과 흐릿한 달빛 아래서도 대낮처럼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나의 압도적인 시력이 합쳐진 덕에 우리 일행의 이동 속도는 엄청나게 빨랐다.

단 한 가지 걸리는 것이 있다면 완전히 탈진해버린 니나의 존재였는데...

"아드리안... 괜찮아? 많이 무겁지?"

"저는 괜찮습니다, 아가씨. 걱정하지 마세요."

그 문제 또한, 호위인 아드리안이 니나를 업고 이동하면서 해결되었다.

"베르켈 경, 전방에 큰 바위 보이십니까?"

"... 보이네."

"그 뒤쪽 그림자에 숨어 잠시 쉬었다 가겠습니다."

"알았네, 그리 하도록 하지. 마침 아가씨도 많이 지치신 것 같으니..."

땅굴을 빠져나와 한참을 이동한 후에야 숨을 돌리게 된 우리 일행.

길바닥에 쓰러져도 곧바로 잠이 들 수 있을 만큼 피곤했지만, 아직은 그런 여유를 부릴 수가 없는 처지다.

"대장, 그리고 베르켈 경."

"음?"

"... 무슨 일이신가."

날카로운 눈으로 주변을 살피던 겔베르트와 탈진한 니나의 상태를 살피던 베르켈이 나의 부름에 응답한다.

"잠깐, 저랑 회의 좀 하시죠."

***

늦가을의 새벽녘, 밀려오는 한기가 소녀의 가녀린 몸을 괴롭히기 시작한다.

"흐윽..."

덜덜덜, 무섭게 떨리기 시작하는 니나의 몸.

오늘, 생애 가장 비극적인 하루를 맞은 열두 살 소녀가 한데 모은 무릎 위에 얼굴을 묻은 채 떨고 있었다.

가슴을 저미는 깊은 슬픔에도 불구하고 눈물은 나지 않았다.

너무 추운 날씨에 눈물조차 얼어버린 것일까?

아니면, 아직도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현실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 아버지.'

두 눈 꼭 감은 소녀의 머릿속에 아버지 바일 아르펜 남작의 얼굴이 떠오른다.

언제나 그녀에게 따뜻하고 인자했던 아버지.

영원히 그녀의 곁에 머물며 든든한 그늘이 되어줄 것이라 믿었던 아버지.

하지만, 이제 소녀는 남은 생을 홀로 외로이 아버지의 빈자리 속에 살아가야 할 것이다.

'아버지, 저는 이제 어떡해야 해요? 내가 혼자 어떻게...'

"아가씨."

어둠 속으로 한없이 가라앉던 소녀의 마음을 깨운 누군가의 목소리.

깜짝 놀라 고개를 든 소녀의 눈에, 너저분한 모포 한 장을 손에 든 믿음직한 인상의 소년이 보였다.

그녀의 호위, 아드리안.

그가 걱정 어린 눈빛으로 자신의 어린 주인을 바라본다.

"아가씨, 아까 만났던 도둑 길드 녀석한테 얻은 모포입니다. 냄새도 나고, 보잘것없는 물건이지만... 그래도 추위를 버티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아드리안은 손에 든 모포를 널찍하게 펴 니나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이토록 암울한 상황에서도 자신을 먼저 챙기는 충직한 소년.

그 따뜻한 마음에, 니나는 추위로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억지로나마 움직여 미소를 지었다.

"따뜻하네. 정말 고마워, 아드리안. 덕분에..."

"모포는, 제가 아니라 저분이 챙겨 주셨습니다."

"아...?"

니나의 눈빛이 옆쪽으로 향해 슬쩍 옮겨진 아드리안의 시선을 뒤따른다.

심각한 얼굴로 군무관 데론 베르켈, 용병대장 겔베르트와 무언가를 이야기 중인 누군가의 얼굴이 보였다.

자신의 이름을 푸른 방패의 용병 데미언이라 소개했었던 녹안(綠眼)의 소년.

열여섯인 아드리안과 별로 차이가 나보이지 않는 앳된 얼굴을 하고서 노기사인 데론 못지않은 담대함과 침착함을 보여주고 있는 사내.

그 기이한 조합만큼이나 눈에 띄는 소년의 외모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니나는 불현듯 기시감을 느낀다.

'... 가만, 왜 낯이 익지?'

눈을 가늘게 뜨고 데미언의 얼굴을 바라보는 니나.

'아!'

그 순간 머릿속을 스치는 지난날의 기억이 있었다.

"저 사람... 분수대에서 어머니를 생각하며 울던 그 사람이잖아?!"

***

"무조건 남쪽으로 가야 하네."

리트베르크 측 인원을 대표하는 데론 베르켈과 대장 겔베르트, 나까지 셋이 모인 회의 자리였다.

앞으로의 진행 방향을 묻는 나의 말에 데론은 단호한 어조로 남쪽으로 갈 것을 주장했다.

"돌레이 강만 건너면 신성교국의 영토가 지척이야. 거기까지 가기만 하면 바덴하임 놈들이 추격해오지 못할 걸세."

"하긴, 황금백이 지닌 돈의 위세가 대단하다지만 교황의 권위까지 넘볼 수는 없겠죠."

겔베르트 역시 그 의견에 동의한다는 듯 묵묵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물론, 나는 그 말을 호락호락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베르켈 경. 강은 어떻게 건너실 생각입니까?"

"돌레이 강은 폭이 넓긴 하지만 수심 자체는 그렇게 깊지 않다네. 건장한 남자라면 맨몸으로도 충분히 건널 만하지."

"저희는 그렇다치고, 니나 아가씨는 어떻게 강을 건넙니까?"

"아가씨는 어린아이라 몸이 작으시니 적당한 널빤지나 통나무를 뗏목처럼 활용하면 될 걸세."

"흐음..."

데론의 의견은 일견 타당해 보였다.

리트베르크와 영지를 맞대고 있는 지역은 총 세 곳.

북동쪽으로 백작령 바덴하임이 자리하고 북서쪽엔 남작령 노이베른이, 남쪽으로는 신성교국이 경계를 맞대고 있다.

이번 전쟁을 일으킨 원수, 바덴하임 쪽으로는 당연히 도망칠 수 없다.

북서쪽 노이베른 방면으로의 도주 역시 불가능했다.

노이베른의 영주인 아몬 렘볼트(Amon Rembolt) 남작은 황금백(黃金伯)의 충성스러운 봉신이었으니까.

반면, 남쪽의 신성교국은 황금백의 영향력이 전혀 미치지 않는 지역.

데론이 강을 건너는 위험까지 감수하며 남쪽을 탈출 루트로 주장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선택이었던 거다.

하지만...

'절대로, 강을 건너선 안 된다.'

원작의 내용을 기억하는 나는 돌레이 강을 건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고 있었다.

그곳에서 데론과 니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바덴하임의 수색조 병사들.

그리고 그들의 선두에 흉포한 송곳니를 드러낸 '바덴하임의 사자' 에리히 프라이슬러가 서 있을 것이다.

'에리히와 만나면 데론은 반드시 죽게 된다. 그런 일은 막아야 해.'

머릿속으로 원작의 흐름을 되짚어 보며, 나는 스킬 '창조주의 눈'을 활용해 데론의 능력치를 살폈다.

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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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론 베르켈 / Lv. 53

소속: 없음

클래스: 기사

고유 특성:

- 리트베르크의 수호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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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레벨 50을 넘기는 강력한 능력치의 기사 데론 베르켈.

거의 육십에 가까운 그의 나이를 생각하면 그야말로 '노익장'이라는 표현이 아깝지 않은 실력이었다.

하지만 강 건너에서 만나게 될 에리히 프라이슬러는 무려 레벨 88에 달하는 <로스트 킹덤> 세계관 내 최강자의 하나.

나이에 비해 믿어지지 않을 만큼 고강한 실력을 지닌 데론이었지만, 에리히를 상대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나랑 겔베르트가 합세하면 결과가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상대할 적이 에리히 한 명이라면 모를까, 무수히 많은 바덴하임의 기사와 병사들이 진을 치고 있을 터.

'강을 건너면 우린 다 죽는다. 가면 안 돼.'

원작에서 에리히가 휘두른 검에 맞아 쓰러지던 데론의 모습이 생각났다.

펠리노어 왕국 3대 기사단 중 하나로 불리는 '사자기사단' 출신의 선후배인 두 사람.

15년에 달하는 까마득한 연배 차이가 있는 만큼 기사단 활동 당시 선배인 데론을 깍듯이 모셨던 에리히다.

데론 역시 남다른 검의 재능을 지닌 후배 에리히를 아꼈고, 자신의 경험과 기술을 아낌없이 그에게 전수했다.

기회가 날 때마다 '차기 왕국제일검이 될 재능'이라며 후배 에리히를 추켜세워 주었던 데론.

가장 존경하는 선배 기사가 누군지 물을 때마다 '리트베르크의 수호신, 데론 베르켈'이라는 대답을 빼먹지 않았던 에리히.

하지만 그런 그들의 오랜 우정은 잔혹한 운명의 장난으로 서로에게 검을 겨누는 끔찍한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원작 소설에서 존경하던 선배 기사 데론을 쓰러뜨린 후 '왕국은 오늘 최고의 기사 한 명을 잃었다'고 침통하게 말하던 에리히의 모습이 생생히 기억난다.

'그 부분을 게임으로 만들 때 감정이 차올라 몇 번이나 눈물을 흘렸었지. 후우...'

한편, 두 사람이 싸우는 틈을 타 니나를 데리고 필사적으로 강가를 거슬러 도망치던 아드리안.

그런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부하들에게 추격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리던 모습 역시, 에리히라는 기사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 아무튼, 그렇게 데론이 죽고 난 뒤에 니나와 아드리안은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기며 도주를 하게 된다.'

하지만, 현실에선 다를 것이다.

그 모든 원작의 흐름을 꿰고 있는 내가 있으니 말이다.

'데론은 여기서 죽어선 안 돼. 무조건 살려서 데려가야 한다.'

데론은 당장 처한 상황에서도 큰 힘이 될 인물이었지만, 무엇보다 내 미래 계획의 실현을 위해서 반드시 살려야 할 중요한 인재였다.

그러니, 그가 강을 건너게 두어선 안 된다.

문제는 이 어르신을 어떻게 설득하냐는 것인데...

"으잉? 저 새끼 저거... 야, 막내야. 이리 와봐, 빨리!"

바로 그때, 리트렌 도시 방면을 감시 중이던 엔리케가 다급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히든 피스 '구원의 성배'를 통해 인간이 지닌 시력의 한계를 돌파한 나만큼은 아니었지만, 활을 주무기로 삼는 엔리케 역시도 보통 사람보다는 월등한 시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그가, 무엇인가를 발견한 모양이다.

"뭔데 그래요?"

"저기, 저쪽 봐봐. 횃불 들고 달려가는 놈들!"

엔리케가 가리킨 방향으로, 한 떼의 병력이 바삐 이동 중인 것이 보였다.

"저쪽으로 가는 거면... 돌레이 강 건너는 다리가 있는 쪽 아니에요?"

"그래. 신성교국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지."

워낙 먼 거리인데다 캄캄한 새벽이었기에, 엔리케와 나를 제외한 다른 이들은 바덴하임 군의 행렬을 제대로 살피지 못했다.

그냥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다는 정도만 살필 수 있는 정도?

주름진 눈을 잔뜩 구기며 어둠 속을 응시하는 데론에게, 내가 말했다.

"... 베르켈 경."

"음?"

"저기, 바덴하임 군 행렬의 맨 앞에 은빛의 사자 투구를 쓴 기사가 있습니다."

"...!"

내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를 리 없는 데론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역시 에리히... 이토록 빠르게 움직이다니."

"에리히 프라이슬러가 우리의 의도를 파악하고 강 건너로 이동 중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계획을 바꿔야 하지 않겠습니까?"

"..."

나는 이때다 싶어 데론에게 남쪽으로 향하자는 계획을 바꿀 것을 넌지시 제안했다.

그리고, 내 말을 들은 데론의 답은...

"... 아무래도, 그렇게 해야겠군."

에리히 프라이슬러가 얼마나 무서운 기사인지 누구보다 잘 아는 데론이었다.

그가 강 건너에서 병사들과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다면, 그 포위망을 돌파할 가능성은 희박했다.

"남쪽이 아닌, 다른 곳으로 탈출로를 잡아보세."

"좋습니다. 그렇게 하시죠."

원작에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던 '리트베르크의 수호신', 데론 베르켈.

그가 자신의 목숨을 구할 일생일대의 선택을 하는 순간이었다.

***

"죄송합니다, 프라이슬러 경. 남작의 딸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벌써 다섯 번째로 듣게 된 부하의 보고.

그 말을 듣고 살짝 얼굴을 찡그린 에리히가 서서히 밝아오는 동쪽 하늘을 바라본다.

"분명히 이쪽으로 올 것이라 예상했거늘..."

자신이 아는 데론이라면 전쟁을 일으킨 바덴하임이나 황금백의 충성스러운 봉신이 다스리는 노이베른 쪽으로 도주하기보단 강을 건너 신성교국으로 도피하는 쪽을 선택할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날이 밝도록 데론과 그가 보호하는 남작의 딸이 이동한 흔적을 찾아내지 못했다.

그 얘기인즉...

"북쪽으로 향한 것인가. 그렇다면... 노이베른이겠군."

그쪽 방면으로 군사를 이끌고 달려간 사령관 틸레인의 얼굴을 잠시 떠올린 에리히가 엄한 목소리로 외친다.

"수색조 절반을 남긴 뒤 나머지는 리트렌으로 돌아간다. 서둘러라!"

"예, 알겠습니다!"

자신의 명령에 서둘러 움직이는 병사들의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던 에리히의 시선이 문득 서쪽으로 향한다.

그곳엔 펠리노어 왕국과 브리카니아 왕국, 신성교국까지 3개국에 걸쳐 솟아오른 거대한 장벽, 버니언(Bunyan) 산맥이 장대한 위용을 뽐내며 서 있었다.

"설마..."

순간적으로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에 놀라 입을 벌리는 에리히.

하지만, 이내 그는 고개를 흔들어 머릿속 생각을 떨쳐내 버렸다.

"허,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군. 저곳이 어떤 곳인데..."

버니언 산맥은 각종 몬스터의 천국이라 불리는 위험한 지역.

고블린과 코볼트, 오크는 물론 '산중제왕(山中帝王)'이라 불리는 오우거와 미노타우로스까지 등장하는 곳이었다.

바덴하임 군의 추격을 피하겠다고 버니언 산맥으로 향하는 것은, 늑대가 무섭다며 사자의 아가리로 걸어 들어가는 것과 진배없었다.

"후... 틸레인이 남작의 딸을 잡았는지 모르겠군."

잠시 떠올렸던 말도 안 되는 생각을 완전히 지워낸 에리히가 천천히 리트베르크의 주도, 리트렌을 향해 말머리를 돌렸다.

붉은 송곳니의 대군주 (1)

"... 우리는 왕국 북서부 끄트머리에 있는 다닐렌츠 영지로 가고자 하네."

리트베르크 영지를 빠져나가 어디로 갈 거냐는 겔베르트의 물음에 대답을 고민하던 데론.

하지만 처절한 전쟁의 수라장을 함께 헤쳐나오며 쌓인 믿음 때문일까?

잠깐의 고민 끝에 그는 숨기지 않고 자신들의 행선지를 알려주었다.

그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바로 남작령 다닐렌츠(Danilenz).

펠리노어 왕국 북서부의 변경 지대에 위치한 카릴베르크(Karilberg) 가문의 영지였다.

영지 면적 자체는 상당히 큰 편이나 북부 아이펠(Aifel) 산맥에서 먹이를 찾아 내려오는 몬스터의 습격이 잦은 탓에 군비 지출이 많고, 그로 인해 영지 발전이 더딘 곳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랬던 곳이 니나의 도착과 함께 큰 번영을 맞이하게 된다.'

사실 니나가 스스로 뭔가 대단한 업적을 세웠다기보다는 작가가 대놓고 '주인공 밀어주기 용 설정'을 퍼부으면서 영지가 부흥하게 된 것이지만, 어쨌건 니나의 덕인 건 맞았다.

'갑자기 영지 내에서 금광과 철광이 발견되고, 그저 흉악한 괴수인 줄 알았던 몬스터가 고품질의 가죽과 모피를 안겨주는 복덩이로 탈바꿈하고, 솜씨 좋은 장인과 기사들이 영지에 몰려드는 말도 안 되는 일이 연이어 발생하지.'

그리고 이번엔, 그 대단한 행운들을 오롯이 나의 업적을 만들어볼 참이었다.

"다닐렌츠라..."

한편, 데론에게서 나온 그 이름을 들은 겔베르트가 턱수염을 쓸며 뭔가 복잡한 표정을 짓는다.

그 변화를 놓치지 않은 데론이 넌지시 겔베르트에게 묻는다.

"자네, 그 지역에 뭔가 사연이라도 있는겐가?"

"예? 아... 제가 사실 다닐렌츠와 가까운 안할트 출신입니다. 그래서 잠깐 옛날 생각이 났습니다."

"으흠... 그런 사연이 있었구만."

겔베르트가 안할트 출신이라고?

'그건 또 처음 알았네. 왕국 북부 출신인 건 대강 알았다만...'

겔베르트가 뭔가 복잡한 사연을 가지고 있다는 건 진즉 알았다.

하지만 원작에서는 초반에 너무 빨리 죽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추가 설명이 제대로 나오지 않아 나로서도 겔베르트의 사연을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일개 용병이라기엔 너무나 고강하고 정련된 검술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더불어 난전(亂戰)에 특화된 용병답지 않게 돌아가는 전황을 읽고 병력을 지휘하는 능력이 탁월했다.

예전엔 그 지휘 능력이 용병이 되기 전 군에 오래 몸담았던 부대장 메이슨의 조언 덕분이라 생각했는데, 2년 넘도록 푸른 방패 용병대에서 경험해본 바에 따르면 확실히 병력 지휘의 재능은 겔베르트 본인의 것이 맞았다.

그 정보를 종합한 결과, 나는 겔베르트가 과거에 군 장교였거나 기사 출신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 거기에 안할트 출신이라는 새로운 정보를 알게 됐군.'

뭐, 당장의 생존에 필요한 정보는 아니었지만, 이 <로스트 킹덤>의 세계에 떨어진 이후 가장 먼저 마음을 준 겔베르트였기에 궁금한 것도 사실이었다.

'언제가 사연을 듣게 될 날이 오겠지.'

그렇게 나 혼자 속으로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 와중에, 겔베르트가 데론에게 질문을 던졌다.

"실례지만, 행선지를 다닐렌츠로 잡으신 이유가 있습니까? 북서부 끝에 있는 곳이라 이곳에서 거리가 너무 먼 곳인데..."

"음, 그게... 돌아가신 우리 영주님과 다닐렌츠의 영주인 구스타브 카릴베르크 남작이 젊은 시절 왕도에서 동문수학한 친우 사이라네."

"아... 그런 사연이 있었군요."

"내가 영주성에서 탈출하기 직전, 영주님께서 생전에 그분과 주고받았던 편지 몇 통과 영주의 인장을 건네주셨지. 그 물건들을 다닐렌츠로 가져가 보여주면, 아가씨를 보호해 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네."

그렇게 말하는 노 기사의 눈빛에 진한 슬픔과 회한이 어린다.

지켜내지 못한 주군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며 괴로워하는 것이겠지.

하지만 처한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 감정에 장단을 맞춰줄 겨를이 없었다.

"저, 베르켈 경? 죄송하지만...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다음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내 말에 참담했던 옛 기억에서 벗어난 데론이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 내가 너무 감상에 빠져 있었군. 그래, 데미언 자네에겐 뭔가 뾰족한 수가 있는가?"

그 질문을 던진 데론뿐만 아니라 겔베르크와 엔리케, 아드리안과 니나까지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로 쏠린다.

이 어려운 상황에서 한 줄기 희망이 되어줄 답변을 기다리는 눈빛들.

그렇게,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내 입에서 나온 답변은...

"지금부터 우리는, 버니언 산맥을 향해 갈 겁니다."

***

내가 처음 그 말을 꺼냈을 때, 사람들은 '내가 지금 뭔 미친 소리를 들은 거지?' 정도의 의미를 담은 듯한 표정을 보였다.

특히, 리트베르크 측 사람들을 대표하는 데론의 반대가 가장 심했다.

"버니언 산맥이라니! 말도 안 되는 생각이네! 자네는 그곳이 어딘지 모르는가? 지천에 깔린 풀과 나무만큼이나 몬스터가 많은 곳이네! 버니언 산맥과 접해 있는 영지에서 몬스터 토벌로 쓰이는 예산이 얼마인지는 알고 하는 소리인지... 허!"

아마도 데론 자신이 직접 그 몬스터 토벌을 진행했던 군무관 출신이었기에 더욱 할 말이 많았던 것 같다.

그가 얼굴까지 벌겋게 변해서 반대 의견을 쏟아내는데, 옆에 있던 겔베르트가 데론을 진정시켰다.

"워워, 베르켈 경. 진정하십시오. 일단 데미언이 하는 얘기를 끝까지 들어보시죠. 제가 꽤 오랫동안 지켜본 녀석입니다. 근거 없이 허튼소리를 하는 놈은 아닙니다."

"후우우..."

겔베르크의 만류를 들은 데론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흥분했던 마음을 가라앉힌다.

"크흠, 미안하네. 내가 너무 흥분을 했구만. 아가씨의 안전이 걸린 일이라 민감한 반응이 나올 수밖에 없다는 걸 이해해주게."

"저는 정말로 괜찮습니다, 베르켈 경. 마음 쓰지 마십시오."

빈말이 아니라 정말로 괜찮았다.

이 지역 사람들에게 버니언 산맥이 어떤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곳인지는 나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전생 기준으로 생각하면 피라냐랑 악어 떼가 우글거리는 아마존강을 맨몸으로 헤엄쳐서 건너자는 소릴 한 거나 마찬가지이니... 그것도 새파랗게 어려서 경험도 없어 보이는 놈이 말이야.'

오십 대 중반을 훌쩍 넘은 베테랑 중의 베테랑인 노 기사 데론이 보기에 아직 성년도 지나지 않은 내 모습이 얼마나 미덥지 않아 보이겠는가.

그런 놈이 주군의 귀한 딸을 모시고 몬스터들이 우글거리는 사지(死地)로 걸어 들어가자는 소리를 했으니...

'나 같았으면 바로 귀싸대기... 아니, 그 정도는 아니겠지만 고운 말이 나오지는 않을 테지.'

하지만 데론은 언성만 조금 높였을 뿐이지 욕을 하거나 반말을 꺼내지 않았다.

미친 소리를 들은 사람의 반응치고 이 정도면 아주 양반이라 할 만했다.

'역시 에리히 프라이슬러가 깊이 존경하는 기사도의 화신(化身)다우시네... 아주 점잖으셔!'

실력으로 보나 인품으로 보나, 내가 계획하는 미래의 그림에 아주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아무튼, 나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런저런 생각을 접어둔 채 다시 진지한 얼굴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버니언 산맥에 몬스터가 우글거린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저 역시도 버니언 산맥과 경계를 접한 영지 텔마르크 출신이니까요."

"그런데 어찌..."

"지금 베르켈 경이 보여주시는 그 반응이, 바로 우리가 버니언 산맥을 탈출 루트로 삼아야 할 가장 결정적인 이유입니다."

"...!"

눈을 빛내며 꺼낸 나의 말에, 데론이 뭔가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짓는다.

물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었지만.

"아이씨, 막내야! 난 도통 뭔 소린지 이해가 안 간다. 그러니까, 그냥 알기 쉽게 설명 좀 해줘!"

자신의 모든 잠재력을 활 솜씨에 쏟아부은 사나이.

그래서 다른 면은 조금 손색(?)이 있는 남자, 엔리케가 잔뜩 미간을 찌푸리며 나에게 묻는다.

그 뒤로 보이는 아드리안 역시 말은 못 안 했지만(그는 스승인 데론이 나와 대화 중이라 감히 끼어들 생각을 하지 못했다) 불만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었고.

하지만, 그 두 사람과 달리 내가 하는 말의 진짜 의미를 알아차린 데론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래... 세상 사람들 모두 버니언 산맥 쪽으로는 접근하지 않는 걸 '당연한 상식'처럼 말하지. 그럴 만해. 온갖 몬스터 우글거리는, 엄청나게 위험한 땅이니까 말이야."

거기까지 말하고 잠시 말을 끊은 데론이 나를 심상치 않은 눈빛으로 바라본다.

굳이 추측해보자면, '이 자식, 제법인데?' 정도의 눈빛이랄까?

"즉, 데미언 자네의 말은... 그런 사람들의 '상식'을 역이용해보자는 말인 것 같은데... 내 추측이 맞는 건가?"

"예, 그렇습니다."

슥, 스슥-

발로 흙바닥을 긁어내 평평하게 면을 고른 나는 그 위에 검 끝으로 대강의 주변 지역 지도를 그려냈다.

"자, 여기가 현재 우리가 있는 곳입니다. 정황상 신성교국으로는 갈 수 없게 되었으니, 남쪽으로의 길은 생각하지 않겠습니다. 남은 건 북쪽으로의 탈출 루트뿐인데, 리트베르크와 맞닿은 노이베른, 그다음 영지인 델멘부르크를 통과해야 합니다. 모두 황금백의 영향력이 미치는 곳이죠."

"그렇지, 두 영지 모두 백작의 봉신들이 다스리는 곳이니까."

"예, 맞습니다. 바덴하임의 병력은 물론 황금백의 명령을 받은 노이베른과 델멘부르크의 수많은 병력이 북쪽으로 향하는 모든 길을 틀어막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적게 잡아도 3천 명이 넘을 텐데, 그 포위를 뚫는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죠."

원작의 이 시점엔 살아남은 사람이 니나와 아드리안 둘 뿐이었다.

그 두 사람은 데론이 목숨을 바쳐 벌어준 시간(더불어 에리히가 도주를 눈감아 주었기에)을 이용해 가까스로 도망쳤고, 거지꼴이 되어 신성교국 외곽 지역을 헤매다가 작은 마을에 도착한다.

마을 사람들에게 자신들을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리트베르크 출신의 오누이라 소개한 니나와 아드리안.

두 사람은 그 마을에서 바덴하임 백작이 자신들이 죽었다고 생각할 때까지 쥐죽은 듯 숨어 지냈고, 1년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마을을 찾은 어느 상단 행렬에 끼어 왕국 북부로 향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그 흐름을 따라갈 수가 없게 됐다.'

나의 개입으로 진작 죽었어야 할 푸른 방패의 용병 겔베르트와 엔리케가 살아났고, 리트베르크의 군무관 데론 베르켈 역시 목숨을 건졌다.

이 많은 사람을 다 데리고 신성교국으로 넘어가 숨어 살수도 없는 일이고, 애초에 그럴 필요도 없었다.

"저와 겔베르트 대장, 엔리케, 베르켈 경과 아드리안의 무력을 합치면 어지간한 몬스터 정도는 상대할 수 있습니다. 오우거나 미노타우로스 같은 대형급 몬스터가 출몰하는 깊은 산속을 피해 낮은 능선으로 조심스럽게 이동하면 황금백의 영향력이 미치는 지역을 벗어날 수 있을 겁니다."

"음..."

내 설명을 들은 데론이 생각에 잠긴다.

우리 일행의 다른 한 축인 겔베르트는 이미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내 의견을 지지한다는 반응 보여주었고, 엔리케도 마찬가지.

그리고 마침내,

"... 좋네, 그렇게 하도록 하지."

우리 일행의 실질적 리더, 데론의 최종 승인이 떨어졌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베르켈 경. 제가 선두에서 일행을 이끌겠습니다."

혹시나 그의 마음이 변할까 싶어 냉큼 그렇게 대답한 나는 그 즉시 버니언 산맥을 향해 이동할 준비를 시작했다.

'됐어, 재수 없게 오크 부족 전체랑 맞닥뜨린다거나 오우거 같은 놈에게만 걸리지 않으면, 문제없을 거야.'

거기에 더해, 내가 버니언 산맥을 지나는 탈출 루트를 주장한 가장 큰 이유가 있었으니...

'붉은 송곳니의 대군주... 그 전설의 몬스터가 남긴 힘을 챙겨 먹을 수 있겠군. 하하하!'

그것은 바로, 내가 <로스트 킹덤>에서 차지할 세 번째 히든 피스의 존재였다.

붉은 송곳니의 대군주 (2)

"오늘은 여기서 머물겠습니다."

"하아, 하아... 고생했네, 데미언."

"어우, 드디어!"

"고생했다, 막내야!"

내 말을 들은 일행 모두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버니언 산맥이 탈출 루트로 결정된 이후, 선두로 나선 나는 어마어마한 속도로 일행을 이끌었다.

사방이 한 치 앞도 분간하기 힘든 칠흑 같은 어둠이었지만, 한밤중에도 대낮과 차이 없는 시야를 지닌 나에겐 아무 의미 없는 조건이었다.

"어후, 죽겠다. 데미언 너는 힘들지도 않냐? 맨 앞에서 늑대며 뭐며 걸리는 놈들 있으면 다 쳐내면서 왔잖아?"

등 뒤에 들쳐 맨 배낭을 끌러 그 안에서 자그마한 수통을 꺼낸 겔베르트가 갈라진 목소리로 물을 들이켜며 물었다.

어지간한 짐승만큼이나 체력 좋기로 소문난 그마저도 헉헉거릴 만큼 지독히도 힘들었던 지난 몇 시간.

하지만 히든 피스의 가호를 받아 강화된 나의 육체는 이 정도로 바닥을 보이지 않았다.

아, 그렇다고 하나도 안 힘들다는 건 아니고.

"뭐, 버틸 만해요."

"허! 참나... 아침부터 저녁까진 리트렌 성벽에 붙어서 개싸움 벌이고, 그 이후엔 도시 탈출해서 여기까지 오느라 개고생 했는데 버틸 만하다고? 이야아, 확실히 젊은 게 좋긴 좋네. 야, 엔리케! 안 그러냐?"

"하아... 하아... 말... 시키지... 마요... 뒤질 것 같으... 쿨럭, 쿠헥!"

... 저러다 숨 넘어 가겠네.

바닥에 누워 당장이라도 죽을 듯이 헐떡거리는 엔리케를 안쓰럽게 쳐다보았다.

나 정도는 아니지만, 엔리케도 특유의 밝은 밤눈을 사용해 일행의 맨 뒤에서 사방을 정찰하며 움직인 터라 다른 사람들에 비해 체력 소모가 배로 클 수밖에 없었다.

가뜩이나 체력 면에서 그리 뛰어난 편이 아닌 엔리케에겐 가히 죽음의 행군과도 같았으리라.

'근데, 저쪽도 대단하긴 하네.'

이번엔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캄캄한 어둠 속, 잔뜩 지쳐버린 두 명의 늙고 젊은 사내가 어린 주인을 위해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주변을 뒤져 긁어모은 굵은 나뭇가지과 큼지막한 바윗돌, 나뭇잎 등을 가지고 어떻게든 니나를 위한 간이 천막을 만들어 주겠다며 저 고생을 하는 것이다.

자기 때문에 쉬지도 못하고 육체노동 중인 두 사람을 본 니나가 당장이라도 눈물을 뚝뚝 흘릴 듯한 눈동자로 말한다.

"할아버지! 저 이런 거 없어도 괜찮아요! 나 진짜 괜찮으니까, 제발 앉아서 좀 쉬세요!"

"하아, 저희가 안 괜찮습니다, 아가씨. 잠시만 기다리고 계시면 얼른 쓰실만한 천막을..."

그런 데론의 모습이 대단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공감이 갔다.

'하긴... 나라도 손녀딸 같은 애 데리고 있으면 몸이 부서지건 말건 뭐라도 해주고 싶겠지.'

그 옆에 있는 아드리안은 너무 힘이 들었는지, 입도 뻥긋하지 못하고 그저 헉헉 거친 숨만 내쉬며 나이 많은 스승의 일을 돕고 있었다.

"어흑... 큭!"

얼씨구? 휘청거리기까지?

문득 아드리안의 나이가 나보다도 한 살 어린 열여섯이라는 게 생각났다.

저거, 청소년 노동 착취 아냐?

"... 저 둘이 번갈아 가며 니나 아가씨를 여기까지 업고 왔어. 진짜... 대단하네."

내가 데론과 아드리안의 모습을 유심히 살피는 것을 본 겔베르트가 옆에서 말했다.

중간중간 두 사람이 너무 힘들어 보였는지 겔베르트가 니나를 업겠다고 나섰지만, 그건 자신들의 일이라며 끝끝내 니나를 맡기지 않았다고 한다.

"흐음, 대장 생김새가 좀 산도적 같긴 하니까..."

"뭐 이 새끼야?"

"암튼, 여기서 야영지 정비 좀 하고 계세요. 저는 주변 순찰 좀 돌고 오겠습니다."

"아니, 인마! 아까 하던 말 계속해봐! 생김새가 뭐 어째?"

"좀 멀리까지 돌아보고 올 테니까 저 늦어도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저 갑니다!"

"야잇! 인마!"

억울해하는 겔베르트를 뒤로 한 채 나는 서둘러 야영지 주변 순찰에 나섰다.

일행 없이 홀로 나선 길이기에, 이동 속도는 여럿이 움직이던 때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빨랐다.

'일단 주변에 몬스터 서식지는 없는 것 같고...'

산으로 올라가는 초입이긴 했지만, 동굴이나 계곡, 나무가 빽빽하게 자라 있는 숲처럼 몬스터들이 모여 서식지를 이룰만한 지형이 드문 장소였다.

'뭐, 그럴 것 같아서 여기서 야영을 하자고 한 거긴 하다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꼼꼼하게 확인해야 한다.

왜냐하면...

슈우욱! 촤악! 퍽!

"켁!"

"끄르르륵!"

내가 휘두른 검에 목이 잘리고, 머리통이 꿰어진 작은 괴물 두 마리가 쓰러진다.

"고블린 새끼들... 멀리도 나왔네."

방금 내가 잡은 이놈들처럼, 본래 서식지에서 멀리 떨어진 곳까지 정찰을 나온 놈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고블린이라 다행이네."

고블린은 여러 몬스터 중에서도 코볼트와 더불어 최약체로 알려진 개체.

그런 놈들이 이렇게 설치고 다니는 것을 보면, 적어도 근방에 오크나 트롤 같은 상위 개체는 없다고 봐야 했다.

"이쯤이면 된 거 같은데, 슬슬 돌아갈... 음?"

주변 정찰을 마치고 야영지로 돌아가려는데, 저 멀리 보이는 특이한 지형이 눈에 들어왔다.

절벽 아래 위치한 커다란 동굴 하나.

그 동굴의 입구엔 마치 건물의 테라스처럼 길게 바윗돌이 튀어나와 있다.

마치 애니메이션 <라이온 킹>에서 원숭이 제사장이 새끼 사자 시절의 심바를 들어 올리던 장소 같은 모습이었는데...

'... 찾았다!'

나는, 그 특이한 장소의 정체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곳은 바로 내가 노리는 세 번째 히든 피스가 잠들어 있는 곳,

위대한 오크 대군주의 동굴, '타이랄의 궁전'이었다.

***

그것은, 역사에 기록되기도 전인 아득히 오래된 옛날의 일이었다.

아직 문명의 힘을 공고히 쌓아 올리기 전의 나약했던 인간과 야생의 힘을 앞세운 몬스터가 대륙의 주도권을 두고 오랜 전쟁을 벌이던 때.

거대한 자연의 기운을 품은 버니언 산맥의 한 자락에서 오크에게 빛나는 영광을 가져다줄 것이라 예견된 오크 대전사 '위대한 자 타이랄(Tiral The Great)'이 나타났다.

그는 대단한 힘을 지닌 오크들 사이에서도 비교 불가한 압도적인 완력과 거대한 체구를 지닌 위대한 전사였다.

타이랄의 힘은 대형종 몬스터인 오우거와 단독으로 맞설 수 있을 만큼 강력했으며, 그 힘을 기반으로 휘두르는 거대 전투 도끼 '붉은 송곳니'는 미노타우로스의 뿔마저 일격에 베어버릴 정도의 엄청난 위력을 보여주었다.

그는 자신이 속한 버니언 산맥의 오크 일족 '붉은 주먹'을 이끌며 주변 수십 개에 달하던 오크 일족들을 통합, 거대한 오크 연합 왕국을 구축하고 그 자신이 왕위에 올랐다.

역사상 처음으로 오크들의 왕국을 세운 위대한 지도자 타이랄.

그는 인간들에게 빼앗긴 대륙의 주도권을 되찾아 오겠다는 목표 아래 버니언 산맥의 모든 몬스터를 자신의 휘하에 끌어모았고, 마침내 인간들과의 전쟁을 선포한다.

하지만 출정을 하루 앞둔 밤, 타이랄이 속한 '붉은 주먹' 일족의 숙적이었던 '회색 바위' 일족의 배신으로 그는 암습을 당하게 된다.

한밤중, 수백 마리에 이르는 고블린과 코볼트를 앞세운 회색 바위 일족의 대전사들이 위대한 오크 왕의 거처를 습격했던 것.

분노한 타이랄은 처절한 싸움 끝에 모든 배신자를 쓰러뜨리지만, 그 자신도 큰 상처를 입어 목숨을 잃고 만다.

오크, 아니 대륙 전체 몬스터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자였던 타이랄.

그의 죽음 이후 구심점을 잃고 사분오열된 오크 연합 왕국은 결국 스스로 무너지고 말았고, 그 뒤로 몬스터들은 대륙의 패권을 영원히 인간들에게 내어주고 만다.

***

"위대한... 자, 오크... 대군주... 타이랄."

절벽을 기어올라 동굴 앞에 선 나는 동굴 벽에 새겨진 고대 오크의 언어를 더듬더듬 읽어내렸다.

까마득한 옛날 옛적 소실되어 지금은 아는 이가 하나도 없는 고대 오크 일족의 문자(文字).

대체 이걸 내가 어떻게 읽을 수 있는 건지는 모르겠...

"... 아니지. 내가 이 세계관의 창조주 중 하나이니까, 당연한 건가?"

창조주라는 설정이 이럴 때 참 편하긴 하다.

"일단 내가 예상했던 장소가 맞다는 얘기고..."

머나먼 선사(先史) 시절 오크를 몬스터 중 으뜸으로 만들어 준 문명의 상징, 오크 문자의 흔적을 뒤로하고 나는 천천히 동굴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달빛조차 들지 않는 깊은 동굴이었으나 히든 피스의 힘으로 안력을 끌어올린 나에게 어둠 따윈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 뭐 제대로 남아 있는 게 없네."

동굴 안은 텅 비어 있었다.

뭔가 대단한 오크 왕국의 보물 같은 게 남아 있지 않을까 기대했건만, 동굴을 채우고 있는 것은 뽀얗게 쌓인 먼지들뿐.

지나온 수천 년의 세월이 이 공간을 채우고 있던 모든 것을 의미 없는 먼지로 돌아가게 만든 것이겠지.

"... 더불어 이 장소에 걸린 저주 탓도 있을 것이고."

대륙 역사상 처음으로 몬스터들로 이루어진 왕국을 건국한 위대한 오크 대군주, 타이랄.

하지만 그 위대한 업적이 무색하게도 타이랄은 믿었던 동족들의 배신으로 끔찍한 죽음을 맞이했다.

자신의 거처로 삼은 버니언 산맥의 동굴, '타이랄의 궁전' 내부로 밀려 들어오는 수백의 고블린과 코볼트, 그리고 '회색 바위' 일족의 오크 대전사들과 죽는 그 순간까지 처절한 전투를 치렀던 타이랄.

차가운 동굴 바닥에 쓰러져 그가 눈을 감던 순간, 위대한 오크 대군주의 피를 제물로 삼은 지독한 저주가 완성되었다.

"확실히, 동굴로 올라오는 내내 이 근처에서 몬스터들 구경도 못 하긴 했지."

그 저주의 내용인즉, 타이랄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고블린과 코볼트, 오크가 이 동굴 안으로 들어오면 목숨을 잃게 된다는 것.

아무리 지능이 형편없는 몬스터들이라 한들, 생존의 본능만은 살아 있는 법.

오랜 기간의 학습으로 동굴에 가면 죽는다는 것을 깨달은 고블린과 코볼트, 오크들은 이 장소 주변에 얼씬도 하지 않게 되었다.

"애초에 오우거나 미노타우로스 같은 대형종 괴수 놈들은 동굴이 작아서 들어올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을 것이고..."

저벅저벅-

동굴 관련된 저주의 내용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나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마침내 그 발소리가 멎었을 때,

저벅저벅, 턱-

나는 동굴 안쪽 넓은 공간에 놓인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돌로 만들어서 그런가, 아주 멀쩡하게 형태 유지를 하고 있네."

그것은, 돌을 깎아 만들어진 큼지막한 의자였다.

아마도 오크 왕국의 군주였던 타이랄을 위한 왕좌(王座)였을 터.

하지만, 내가 진실로 관심 있는 것은 그런 지나간 영광의 증거 따위가 아니었다.

"... 여기 있다."

드디어 찾았다.

돌로 만든 왕좌의 등받이 부분.

그곳엔 자세히 보지 않으면 결코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의 크기를 지닌 쇳조각이 하나 박혀 있었다.

으직-

손으로 돌 틈새에 끼인 쇳조각을 빼냈다.

벽에 박힌 못처럼 뽑기 어려우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그 생각이 무색하게도 쉽게 빠져나왔다.

"보자... 새끼손톱 크기 정도 되려나?"

표면에 기이한 붉은빛이 도는 정체불명의 쇳조각.

이것이 바로 내가 <로스트 킹덤>의 세계에서 세 번째로 얻게 된 히든 피스,

위대한 오크 대군주 타이랄의 거대 전투 도끼, '붉은 송곳니'의 도끼날 조각이었다.

붉은 송곳니의 대군주 (3)

히든 피스, '붉은 송곳니의 도끼날 조각'을 얻은 후 나는 서둘러 일행들이 있는 야영지로 돌아왔다.

곧바로 히든 피스의 능력을 흡수할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혹시라도 지난 두 번의 경우처럼 내가 오랜 시간 기절해버릴 경우 그동안 일행들에게 무슨 일이 생기지 않을까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야, 너 뭐야 인마?! 어디까지 갔다 왔길래 이제야 왔어?"

야영지에 온 나를 보고 불침번을 서던 엔리케가 눈을 부라렸다.

입으로 볼멘소리를 내뱉는 와중에 눈빛엔 반가움이 가득 담겨 있어서 그 모습이 지쳐있던 날 웃음 짓게 했다.

"저 아까 주변 정찰 다녀온다고 말하고 갔는데? 좀 멀리까지 돌아보고 올 테니까 늦을 거라고... 대장한테 얘기 못 들으셨어요?"

"아, 물론 들었지. 들었는데... 늦어도 너무 늦었잖아, 새끼야. 하도 안 돌아오길래 너한테 무슨 일 난 줄 알았다."

"무슨 일이 나기는... 제 실력 못 믿으세요? 아고고, 피곤하다!"

털썩, 엔리케의 옆자리에 엉덩이를 대고 주저앉았다.

원하던 것을 생각보다도 훨씬 빨리 손에 넣고 돌아왔다는 안도감 때문일까?

긴장이 풀린 몸이 스르륵 늘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니지. 이건 그냥 피곤해서 그런 걸지도?'

하긴, 구원의 성배 덕에 강화된 신체를 믿고 오늘 하루 참으로 무리를 많이 했더랬다.

전날 이른 새벽 눈 떴을 때부터 전투를 시작해 꼬박 하루가 지날 동안 잠 한숨 못 자고 이러고 있으니...

'애초에 에리히 그 양반이랑 성벽 위에서 맞다이 뜰 때부터 체력은 간당간당했지.'

리트렌 전투에서 맞닥뜨린 '바덴하임의 사자', 에리히 프라이슬러와의 대결은 나의 체력과 정신력을 순식간에 고갈시켰다.

조금이라도 삐끗하면 바로 목이 날아갈 수도 있다는 긴장감에 체력과 정신력의 소모가 극심했기 때문이다.

'... 그 뒤로는 솔직히 성배 빨로 버틴 거나 다름없지.'

성지(聖地) 에셀바흐에서 얻은 나의 두 번째 히든 피스, 구원의 성배가 내게 가져다준 가장 값진 선물을 하나 꼽으라면 단연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으로 강화된 회복력이었다.

그 무지막지한 회복력 덕분에 나는 에리히와 격전을 치르며 바닥을 쳤던 체력을 금세 다시 채울 수 있었다.

'체력뿐만 아니라 사자 아저씨한테 당한 상처도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아물었지.'

물론, 상처가 완전히 나은 것은 아니고 출혈이 멈추는 정도로만 회복이 된 터라 통증은 여전했다.

하지만 에리히 정도 되는 양반한테 칼 맞고서 반나절 만에 질질 흐르던 피가 멈췄다면, 충분히 미쳤다고 말할만한 수준의 회복력이었다.

'그래도 어디 팔다리 안 잘리고 살가죽만 베인 거라 다행이었지... 어휴!'

그야말로 살벌했던 에리히의 검을 생각하니 팔뚝과 목덜미에 절로 소름이 돋았다.

턱-

"음?"

그 어느 때보다 고됐던 하루를 되새기고 있는데, 별안간 엔리케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혹시, 근방에 몬스터라도 나타난 건가?

하지만 뒤따라온 엔리케의 목소리는, 그런 나의 걱정을 무색하게 하는 것이었으니...

"야, 이거라도 좀 먹어라. 네 몫으로 챙겨둔 거야."

엔리케의 손에 들려있는 것은, 다름 아닌 사슴 고기를 얇게 저며 만든 육포.

생각해보니 종일 그 힘겨운 하루를 보내며 뭘 제대로 먹은 기억이 없었다.

견물생심이라고, 먹을 거 보니까 갑자기 허기가 몰려오는 기분이다.

"아...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어울리지도 않는 예의 떨지 말고 빨리 먹어 새끼야."

"하하, 예."

엔리케에게 건네받은 육포를 입에 넣고 질겅질겅 씹었다.

육포 특유의 딱딱한 질감과 짭짜름한 소금 맛이 입안 가득 퍼져나간다.

"어우..."

엄청 배고픈 상태에서 갑자기 입안에 짠맛이 확 도니까 현기증이 나는 것 같다.

내가 멍한 눈빛으로 육포를 씹는 것을 바라보던 엔리케가 다시 시선을 전방의 풀숲으로 돌리며 말한다.

혹시라도 듣는 사람이 있을까 싶어 한껏 낮춘 목소리였다.

"원래는 저기 꼬마 아가씨 몸 상태 생각해서라도 불 피워서 물 좀 끓이고, 거기에 육포 넣어 고깃국 흉내 좀 내볼까 했었는데..."

"했는데?"

"우리 꼬마 아가씨가 자긴 괜찮으니 그냥 육포만 먹자고 하더라. 사방 깜깜한데 불 피우면 혹시 몬스터들이 그 불빛 보고 달려들어서 위험한 거 아니냐면서."

"음..."

"분명 그게 맞는 말이긴 한데... 우리처럼 건장한 어른도 아니고, 열두 살 난 어린 꼬마애가 추워서 파랗게 변한 입술로 오들오들 떨면서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까... 참, 대견하면서도 마음이 미어지더라고. 에잉!"

엔리케의 말을 들으며 잠들어 있는 니나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니나는 데론과 아드리안이 나뭇가지와 나뭇잎을 엮어 정성스레 만든 간이 천막 안에서 죽은 듯이 곯아떨어져 있었다.

낙엽을 잔뜩 끌어모아 한기를 어느 정도 막은 바닥에 내가 리트렌에서 탈출할 당시 도둑 길드원에게 얻은(이라 쓰고 뺏었다고 읽는다) 모포를 깔고 위엔 갬비슨 갑옷을 이불처럼 덮고 있었다.

니나가 덮고 있는 저 갬비슨의 주인은 아마도...

'... 아드리안이겠지. 녀석, 기특하네. 엄청 추울 텐데.'

니나가 잠든 간이 천막 바로 옆, 낙엽을 채워 넣은 구덩이에 들어가 미동도 없이 잠든 아드리안이 보였다.

내 짐작대로 아드리안은 갬비슨 없이 얇은 웃옷 한 장만 걸치고 잠들어 있었는데, 추운 것인지 어깨와 목을 잔뜩 웅크린 자세였다.

'아이고, 저러다 목에 담 걸리겠네.'

알다시피 갬비슨은 천으로 만든 의복에 두꺼운 솜과 양털, 헝겊 부스러기, 혹은 아마포 여러 겹을 채워 두껍게 만든 갑옷이었다.

가격 대비 방어력이 좋은 탓에 용병부터 기사들에 이르기까지 가장 널리 쓰이는 갑옷이었고, 지금처럼 야지에서 비박을 해야 할 경우엔 탁월한 보온 효과를 발휘해주는 생존 장구이기도 했다.

그런 갬비슨을 주군인 니나에게 양보하고 본인은 바들바들 떨며 자는 모습이 어찌나 안쓰럽던지, 내가 입고 있는 옷을 벗어주고 싶을 정도...

... 까지는 아니고.

'아드리안, 원래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옛말이 있단다.'

한 살 차이 밖에 안 나는 주제에 너무 꼰대 같은 발언이었지만, 사실 내 몸속에 담긴 영혼은 전생의 삶까지 더해 마흔을 넘긴 나이인지라 절로 그런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어차피 이 동네는 따뜻한 날씨 탓에 겨울에도 눈 구경하기 힘들다는 대륙 중부였다.

꽤 추울 테지만, 그래도 얼어 죽을 정도는 아닐 거다.

'하여간... 알아서 잘 살아남아라, 아드리안. 형이 열심히 응원할게! 청춘 만세! 파이팅!'

그렇게 마음속으로 아드리안에게 응원의 말을 건네며, 나는 입안에 남은 육포 조각을 마저 씹기 시작했다.

***

내가 야영지에 돌아와 두어 시간쯤이 지났을 무렵, 서서히 동쪽 하늘이 붉은 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아침 해가 떠오르기만을 기다리던 나는 피곤이 덕지덕지 묻은 얼굴로 힘겹게 눈을 뜬 일행들에게 새벽의 정찰 결과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뭐? 동굴을 발견했다고?"

"예. 여기서 4, 50분 정도 떨어진... 아니지, 그건 제가 혼자 이동했을 때 기준이니 우리 일행이 다 같이 움직이는 거면 넉넉히 두 시간 정도면 도착할 거리에 있습니다."

"크흠! 동굴이라, 동굴..."

내 말을 들은 겔베르트가 뭐라 확답을 내놓지 않은 채 슬쩍 데론을 바라보았다.

나 역시 일행의 최종 결정권이 누구의 손에 있는지 잘 알고 있기에, 이번엔 데론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희야 이런 강행군을 버틸 수 있다지만 영주성에서 곱게 자라신 니나 아가씨는 아닙니다. 더구나 아직 나이도 어리시니..."

"흐음..."

"앞으로도 쉽지 않은 여정이 될 텐데, 아가씨의 몸 상태를 생각하면 무조건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해야 합니다. 따뜻한 모닥불과 음식이 있는 곳에서 말이죠."

구구절절 옳은 내 말에 데론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래... 자네가 확인한 그 동굴이라는 곳 말이야."

"예."

"혹시 몬스터나 야생동물이 사는 곳은 아니던가? 괜히 들어갔다가 더 큰 위험을 만날 수도 있네."

예상했던 물음에 나는 지체하지 않고 답을 내어놓았다.

"제가 직접 동굴 안쪽 깊은 곳까지 들어가 확인을 하고 왔습니다. 아주 오랫동안, 누구도 드나들지 않았던 곳이 분명합니다. 동굴 안팎으로 그 어떤 동물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건 그거대로 이상하지 않나? 동굴처럼 머물기 좋은 곳에 아무런 흔적이 없다니?"

이 역시 예상했던 질문이었다.

"아마도 동굴로 올라가는 길이 위험하고 복잡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길이 위험하다?"

"예, 저는 절벽을 타는 빠른 길로 올라갔는데 그나마 완만한 쪽도 가파르고 위험한 바윗길을 기어오르듯 하여 올라가야 합니다. 인간이었다면 어떻게든 돌을 깎고 나무로 계단을 놓았겠지만, 지능이 떨어지는 몬스터들은 그리 할 수 없었겠지요."

사실은 동굴에 들어가면 죽는 저주가 걸려 있어 몬스터가 접근한 흔적이 없는 것이었지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으니 대신 생각해낸 이유였다.

'그리고 뭐 실제로 길이 험하기도 하고 말이지...'

다행히 내가 한 설명이 그럴듯하게 들렸는지, 마침내 데론의 입에서 원하던 답변이 떨어졌다.

"좋네. 자네가 발견한 동굴로 향하도록 하지."

"잘 생각하셨습니다, 군무관님."

데론의 말에 꾸벅 고개를 숙이며 내가 말했다.

"가시는 길은, 제가 뚫겠습니다."

***

뜬눈으로 밤을 버텨낸 첫 번째 야영지를 떠나 데미언이 발견했다는 동굴로 향하는 길.

길을 아는 데미언이 일행보다 훨씬 앞에서 홀로 이동했고 나머지 일행의 선두엔 겔베르트가, 그 뒤로 데론과 아드리안이 니나를 앞뒤로 호위하듯 움직였다.

불침번을 서느라 눈이 시뻘겋게 충혈된 엔리케는 일행의 맨 뒤에서 언제라도 화살을 날릴 수 있게 준비하며 따라오고 있었다.

'데미언 이 친구의 솜씨는 다시 봐도 정말 대단하구나.'

가는 걸음마다 놓인 늑대와 들개 따위의 야생동물과 몬스터의 시체들.

그것들이 모두 일행의 선두에 선 데미언이 앞서 처리한 결과라는 것을 안 데론은 놀라움에 혀를 내둘렀다.

'모두 일격으로 숨통을 끊었어. 한 녀석에게 두 번 이상 검을 휘두르지 않았다.'

한 마디로 상대의 가장 치명적인 급소를 단번에 꿰뚫었다는 뜻인데, 저 정도 나이에 이토록 과감하고 정밀한 검술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게 놀라울 뿐이었다.

그것도 심지어 열일곱이란 어린 나이에!

'아드리안이 괜히 실망하지 않게 옆에서 열심히 챙겨줘야겠구나. 후우...'

자신이 감히 맞설 수도 없을 만큼 아득히 높은 재능을 지닌 소년을 마주한 제자 아드리안이 혹시나 상처를 받지 않을까 걱정하는 스승의 우려였다.

바로 그때, 그들보다 몇 걸음 앞서서 걷던 겔베르트의 굵직한 목소리가 제자 걱정에 잠겨 있던 데론의 정신을 일깨웠다.

"... 거의 도착한 것 같습니다, 군무관님. 저기 보시죠."

"음?"

멀리, 겔베르트가 손짓으로 가리키는 숲의 틈새로 웅장하게 치솟은 바윗 절벽 위의 동굴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

"수고했다, 데미언. 나머지 식량 구하고 땔감 찾아오는 일은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너는 저기 동굴 안쪽 깊은데 들어가서 조용히 눈 좀 붙여라. 제발 좀 인마! 너 그러다 죽어!"

"그래, 그리 하도록 하게. 밤새도록 정말 고생 많았어. 앞으로의 일정을 위해서라도 지금은 푹 쉬게. 수고했네, 데미언."

내가 발견한 동굴, '타이랄의 궁전(물론, 나를 제외한 일행들은 동굴의 이름을 알지 못했다)'에 도착한 겔베르트와 데론은 둘이 짜기라도 한 것처럼 내게 휴식을 권했다.

리트렌을 탈출해 이곳까지 오는 동안 모두를 위해 내가 얼마나 희생했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 그럼. 죄송하지만, 가서 눈 좀 붙이겠습니다. 혹시라도 무슨 일 생기면 바로 깨워주십시오."

그리고 나는, 그런 두 사람의 제안을 마다하지 않았다.

왜냐고?

'... 동굴 구석에 짱 박혀서 얼른 히든 피스 빨아먹어야지.'

빨아먹는다는 표현이 좀 이상하지만, 어쨌든 '붉은 송곳니의 도끼날 조각'이 가진 힘을 얻기 위해 나는 일행들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동굴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후우..."

그리고 품속에 넣어두었던 '붉은 송곳니의 도끼날 조각'을 꺼내어...

꿀꺽-

아주 단순무식하게, 입에 넣고 삼켜버렸다.

"크흡, 끄으..."

날카로운 도끼날 조각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간다.

식도를 가르고 내장을 조각조각 찢는 아픔이 찾아오기 시작하...

"... 지를 않네? 뭐야, 어떻게 된 거지? 불량인가?"

생각과 달리, 고통스럽지가 않았다!

내가 삼킨 도끼날 조각은 마치 작게 부서진 사탕 조각처럼 천천히 목구멍 안에서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이게 말이 되나 싶었는데, 생각해보니 게임 속 세상으로 넘어온 주제에 말이 안 될 건 또 뭔가 싶었다.

'어... 뜨겁다.'

뜨거웠다.

마치 뜨거운 음식을 먹었을 때 식도와 위장을 따라 몸이 천천히 뜨거워지는 것처럼, 육체가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크흠, 이거 너무 졸린데...'

가슴에서 시작되어 팔다리, 머리로 퍼져나가는 뜨거운 기운.

뜨겁다고 표현했지만 아주 펄펄 끓는 정도는 아니어서, 마치 적당히 버틸만한 온도의 찜질방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서서히 녹아내리는 몸, 자연스럽게 감기는 눈.

산처럼 쌓여있던 피로가 한꺼번에 눈꺼풀 위로 무너져 내렸다.

'어흑, 졸립... 다...'

언제 잠들었는지도 모르게 끊겨버린 의식.

그리고 내가 다시 눈을 떴을 때,

팟-!

『 데미언 / Lv. 64

소속: 푸른 방패 용병대

클래스: 용병

고유 특성:

- 창조주(創造主)

- 검성(劍聖)

- 무골지체(武骨之體)

- 붉은 송곳니의 대군주

보유 스킬:

- 창조주의 눈(신화 등급)

- 리히테나워 류(전설 등급)

- 오크 왕의 분노(전설 등급)

보유 아이템:

- 빼어난 롱소드(고급 등급)

- 고급 아마포 갬비슨(고급 등급) 』

마침내, 나는 레벨 60의 벽을 깨뜨렸다.

붉은 송곳니의 대군주 (4)

'와, 히든 피스 한 방에 레벨이 이렇게나 올랐다고?'

눈에 띄게 변한 상태창의 내용을 보자 감탄이 절로 나왔다.

히든 피스를 흡수하기 직전 나의 레벨은 49였다.

하지만 지금 내 눈앞에 보이는 상태창 속 레벨의 수치는 무려 64.

우리 일행 중 가장 고강한 능력치의 소유자인 노 기사 데론의 레벨 53을 넉넉하게 추월한 수준이었다.

'오크 왕이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대단한 캐릭터였나 보네, 허허허...'

역사상 전무후무했던 오크 일족의 통일을 이뤄내고, 왕국을 세워 인간들에게 뺏긴 대륙의 주도권을 찾으려 했던 오크 대영웅.

위대한 자 타이랄(Tiral The Great).

그가 남긴 히든 피스 '붉은 송곳니의 도끼날 조각'은, 주인의 명성에 걸맞은 어마어마한 효과를 지니고 있었다.

'레벨 열다섯 칸을 한꺼번에... 대체 경험치를 얼마나 준 거야?'

지금 내가 발 딛고 살아가는 <로스트 킹덤>은 어디까지나 (내가 만든) 게임 시스템에 기반을 두고 있는 세계.

레벨이 높아질수록 위로 올라가는데 필요한 경험치의 양은 더욱 많아진다.

즉, 같은 레벨 1의 상승이라고 해도 49에서 50이 되는 데 필요한 경험치보다 50에서 51로 올라가는데 요구되는 경험치의 양이 훨씬 더 많다는 얘기다.

그런 상황에서 한 번에 15나 되는 레벨이 올랐으니 놀랄 수밖에.

'보자... 레벨 64면, 어디 가서든 맞고 다니진 않겠네.'

뭐, 사실 그렇게 맞고 다닌 적이 없긴 했다.

처음 <로스트 킹덤>의 세계에 떨어져 고생했던 극 초반기를 제외하면, 지금까지 에리히 프라이슬러를 제외하고 1대1 대결에서 나를 상대로 우위를 가져갔던 적은 하나도 없었다.

그나마도 에리히가 원작 속 네임드 중의 네임드로 꼽히는 양반이라 밀렸던 것이지, 내가 약해서 그런 건 아니었다.

'레벨 49일 때도 에리히 상대로 어찌어찌 버티긴 했으니까... 다시 만나면 해볼 만하겠는데?'

<로스트 킹덤> 세계관 등장인물 중 손꼽히는 강자(强者)인 에리히 프라이슬러를 상대로 '해볼 만하다'는 생각을 품을 수 있다니...

그것만으로도 내가 얼마나 강해졌는지를 증명하는 것 같아 기뻤다.

하지만 그보다 더 고무적인 사실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 드디어, 상급 기사의 경지에 도달했다.'

상급 기사(Superior Knight).

<로스트 킹덤> 세계관 내에서 레벨 60의 벽을 깨뜨린 기사를 따로 이르는 표현이다.

물론, 이 레벨 60이라는 기준은 원작 소설을 게임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상급 기사의 대단함을 직관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부여한 자격이었다.

게임의 레벨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원작 소설 내에선, 상급 기사의 강함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다.

[... 상급 기사에 대한 정확한 사전적 정의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와 관련해 보편적으로 쓰이는 기준은 분명히 존재한다.

바로 '대형종 몬스터인 오우거를 단독으로 잡아 죽일 정도의 강함'을 지닌 기사를 흔히 상급 기사라 칭하는 것이다...]

혼자서 오우거를 사냥할 수 있다는 것.

그 사실은, 상급 기사가 보통의 기사들에게 주어지는 '인간병기'의 칭호를 넘어서서 가히 '전술병기' 수준의 강함을 지녔다는 의미가 된다.

그렇다면 상급 기사의 자격을 판가름하는 기준이 되는 대형종 몬스터, 오우거는 얼마나 강한 존재일까?

그 질문의 답 또한, 원작 소설 속 오우거에 대한 설명을 보면 알 수 있다.

[... 드래곤이나 드레이크, 와이번, 그리폰처럼 신화와 전설 속에나 등장하는 괴수를 제외하고 우리가 실제로 맞닥뜨릴 수 있는 몬스터 중 가장 강력한 개체는 무엇인가?

그 답은, 단연 '산중제왕(山中帝王)'이라 불리는 오우거(Ogre)일 것이다.

대형종 몬스터의 수좌에 올라 있는 괴수답게, 오우거는 평균 5미터에 달하는 체고와 주먹질 한 번에 집채만 한 세콰이어 나무를 부러뜨릴 정도로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이런 오우거를 잡기 위해선 적어도 백여 명 이상의 숙련된 병사들과 원숙한 기량의 기사들이 여럿 필요하다.

사냥의 방식은 대강 이러하다.

오우거를 둘러싼 궁수들이 쉴 새 없이 화살을 쏘아 놈의 집중력을 흐트러뜨리고, 다섯 명이 동시에 들어올려야 할 정도로 길고 무겁게 제작된 대(對) 오우거 용 강철 장창 여러 자루를 동시에 사방에서 찔러넣는다.

기사들은 그런 병사들을 지휘하며 돌발 상황에 대비하고, 직접적인 공격에도 가담한다.

여기에 더해, 이 오우거 사냥에 투입되는 병사들은 최소 1년 이상 손발을 맞춰 훈련한 정예라는 조건이 필요하다.

이러한 만반의 준비를 하고도 오우거를 상대로 한 싸움에서 인명피해를 피할 수는 없으니, 과연 '걸어 다니는 재앙'이란 수식어에 어울릴만한 존재라 하겠다...]

오우거가 얼마나 강한 존재인지, 잘 보여주는 소설 속 내용.

상급 기사는, 바로 그런 오우거를 홀로 사냥할 수 있을 정도의 강함을 지닌 존재였고...

"... 그리고 이제, 나도 그런 사람이 된 거지."

나직한 목소리로 혼잣말을 꺼내며, 동굴 깊은 곳에 누였던 몸을 천천히 바로 세웠다.

우둑, 우두둑-!

앉은 자세에서 손목과 팔목, 머리를 이리저리 돌리며 몸 상태를 점검했다.

"너무 좋네."

전신에서 느껴지는 충만한 에너지.

히든 피스의 능력을 흡수하며 몸에 쌓였던 피로를 말끔히 날려버린 탓에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던 몸이 날아갈 듯 가벼워졌다.

"... 이러다 레벨 더 오르면 진짜 날아다니는 거 아냐?"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며 홀로 웃음을 짓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충전은 끝났다.

이제 다시 움직일 시간이다.

"자, 그럼... 어디 새로 얻은 히든 피스 성능 확인 좀 해볼까?"

***

겨울잠 깬 곰 마냥 동굴 깊은 곳에서 터벅터벅 걸어 나온 나를 보며 깜짝 놀란 일행들.

왜 그렇게 놀라느냐고 물어보니, 내가 잔다고 말하고 안쪽으로 들어간 후로 고작 30분밖에 지나지 않았다고 했다.

어쩐지, 자고 나왔는데 휑하니 모닥불도 없고 아까랑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더라니.

"자, 그럼... 이렇게 하시죠. 제가 겔베르트 대장, 아드리안 님과 함께 주변을 정찰하며 땔감과 식량을 구해오겠습니다. 엔리케 조장은 저 다음으로 눈이 좋으시니, 동굴 입구에서 경계 임무를 부탁드립니다. 데론 경께서는 동굴 안쪽에 머물며 아가씨를 보호해주십시오."

일행들에게 미리 생각해두었던 계획을 읊어주었다.

당연히, 격렬한 반대가 쏟아졌다.

"야, 너는 피곤해서 자야겠다고 말했던 놈이 꼴랑 삼십 분 만에 다시 기어 나와서 정찰을 가겠다고?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어?"

"그래 이 새끼야! 객기도 적당히 부려야 참고 넘어가 주지... 죽으려고 환장했냐? 여기서 지금 죽여줘? 확 마빡에 화살을 꽂아 줄까부다!"

일단 겔베르트와 엔리케는 아주 직설적인 화법으로 나에 대한 자신들의 애정(?)을 과시했고,

"이보게, 데미언. 우리를 염치없는 자들로 만들 셈인가? 자네가 지난밤 내내 한숨도 못 자고 우리를 위해서 산속 정찰을 다니지 않았나? 그리고, 이 동굴로 오는 길에 몬스터들과 싸운 것도 자네였어. 잔말 말고, 어서 들어가서 더 쉬게나. 나머지 일행들 마음 불편하게 만들지 말고. 어서!"

데론의 경우엔 좀 더 연륜이 느껴지는 말솜씨로 나를 설득하려 했다.

물론, 나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저 괜찮습니다. 이런 극한 상황에서 등 대고 누워 마음 편하게 삼십 분이나 잤으면 많이 잔 거죠. 다들 저한테만 잠 못 잤다고 하시는데, 따지고 보면 엔리케 조장도 불침번 서느라 거의 못 잤습니다."

"그건 그렇지만..."

"그리고 주무셨다는 것도, 언제 몬스터 튀어나올지 모를 위험한 장소에서 불도 못 피우고 선잠 잔 거 아닙니까? 그건 뭐 잔 것도 아니죠."

"허허..."

청산유수로 쏟아지는 나의 답변을 들은 데론이 헛웃음을 흘리는 게 보였다.

'저놈 저거, 싸움만 잘 하는 줄 알았는데 말도 잘하네'

... 대강 이 정도의 의미를 담은 웃음인 것 같다.

"다시 생각해도 그게 최적의 계획일 겁니다. 안 그래요, 조장?"

"음? 어, 그게..."

엔리케가 뭐라 대답하기 전에 잽싸게 말을 잘랐다.

"그래요, 엔리케 조장은 제 말에 공감하시는 것 같고. 대장은요?"

"야, 인마! 지금 그걸 말이라고..."

"아, 역시! 대장이 제 편 들어줄 거라고 믿었습니다."

뭐라 잔소리를 쏟아낼 것 같아 겔베르트의 입도 냉큼 틀어막아 버렸다.

"이로써 제 의견에 찬성하는 사람이 저를 포함해 셋입니다. 데론 경과 아드리안 님이 계시지만,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 이 계획대로 움직이시는 것으로 하..."

"잠깐만요, 제 의견은 왜 안 물어보시죠?"

"...!"

억지 섞은 우격다짐으로 정찰 계획을 밀어붙이려던 나의 행동에 제동을 건 사람.

바로, 데론의 곁에 가만히 앉아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니나였다.

"저도 일행의 한 사람으로서 의견을 말할 권리가 있을 텐데요. 그렇지 않나요?"

"예, 물론 그렇..."

"만약에 할아버지... 아니, 데론 경과 아드리안, 제가 그쪽의 의견에 반대한다면 똑같이 찬성 셋, 반대 셋이 되는 건데요. 왜 결정이 났다고 말씀하시는 건지 모르겠군요."

"..."

할 말이 없었다.

니나의 말에 논리적으로 어긋나는 부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그것보다...'

여기서, 니나가 끼어들 줄은 몰랐다.

세상 하나뿐인 가족인 아버지를 여의고, 평생 살아온 고향 리트렌에서 도망쳐 나온 것이 바로 어제였다.

침략자의 손에서 도망치기 위해 범죄자 놈들이나 이용하는 땅굴 속을 기었고, 거친 풀숲을 정신없이 뛰어야 했으며, 몬스터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산속에 쓰러져 잠을 잤다.

늘 모든 것이 갖춰진 영주성에서 안온하게 자라온 열두 살 소녀가 감당하기엔 너무나 잔혹한 비극.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쳐버려서, 이 먼 곳까지 데론과 아드리안에게 번갈아 업혀 이동해야 했던 니나였다.

당연히 이 상처에서 회복하려면 며칠은 더 걸릴 거라 생각했는데...'

'역시, 주인공이라 다르네. 우리 니나, 너무 대견하다!'

나를 바라보고 있는 니나의 커다란 눈망울 속에서, 자신을 덮친 거대한 비극을 이겨낼 의지의 씨앗이 싹을 틔우고 있었다.

평범한 이들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굳건한 정신력.

그것이야말로 이 거대한 이야기의 주인공으로서 니나가 지닌 최대의 재능이었다.

가슴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감격을 애써 갈무리하며, 나는 공손하게 답했다.

"아닙니다, 아가씨. 아무래도 이런 일엔 경험이 없으시다 보니, 저희끼리 의논하는 것이 나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아가씨께 무례를 범하려 한 것은 아니니, 용서해주시길."

한껏 예의를 차린 목소리로 말하며 나는 고개를 숙였다.

"..."

내 말을 듣고도 가타부타 말이 없는 니나.

혹시 화 난 건가?

다행히,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다.

"... 저를 무시하려는 의도로 그러신 게 아니라는 것 알고 있어요."

고된 상황에 지쳐 파리해진 입술로, 니나가 이야기를 시작한다.

열두 살의 어린 나이를 믿을 수 없을 만큼 어른스럽고 의젓한 말투였다.

"다만, 데론 경의 말처럼 어제부터 데미언님이 너무나 많은 짐을 홀로 지고 계신 것 같아서, 걱정스러웠어요."

"...!"

"이토록 어려운 상황에서 저희를 돕기 위해 나서주신 것,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이제 리트베르크를 대표하게 된... 흠흠, 사람으로서 이 말을 진작 드렸어야 하는 데 제가 너무 늦었네요. 죄송해요."

"아, 아닙니다! 아가씨! 어찌 그런 말씀을..."

니나의 입에서 나온 말에 깜짝 놀란 내가 펄쩍 뛰며 손사래를 쳤다.

아니, 얘가 갑자기 왜 이렇게 어른스러운 얘기를 하고 그런담?

"아무튼... 데미언님. 혼자서 모든 걸 다 하려고 들지 마세요. 모두 함께 힘을 합쳐서 해내야죠. 우린... 동료잖아요."

"아닙니다, 아가씨. 저는... 큼, 괜찮습니다."

시커먼 아저씨들이 빨리 들어가서 쉬라며 윽박지르듯 하는 말만 듣다가 어린 니나가 걱정하는 말을 듣자 울컥,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아, 이게 바로 아빠들이 딸 바보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인가?

'니나야, 걱정하지 마라. 내가 어떻게든 너를 무사히 다닐렌츠까지 데려다주마!'

원래부터도 그랬지만, 지금 이 순간부터 더욱더 니나를 위해 살아갈 것을 다짐하며 나는 고개를 숙였다.

***

"크롹?! 컥!"

콰직!

섬전(閃電)처럼 뻗어 나간 나의 검이 오크의 머리통을 꿰뚫는다.

"크롸아아아!!!"

내게 머리통이 꿰뚫려 죽은 오크의 근처에 있던 다른 놈들이 녹슨 도끼를 마구잡이로 휘두르며 덤벼들었다.

나를 죽이려고 덤벼든다기보단, 어딘가 겁에 질려서 허둥대는 듯한 모습이었다.

투쟁심으로 이름 높은 오크들이 대체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일까?

"드루와, 이 새끼들아!"

쉬이이이이잉!

스가각! 푹! 콰지직!

베고, 찌르고, 쪼갠다.

신들린 듯이 사방을 휘젓는 나의 검 끝에 걸린 오크들의 머리와 팔다리가 사정없이 잘려나간다.

후둑! 후드득!

토막 난 오크들의 사체가 사방으로 떨어지며 둔탁한 소음을 냈다.

하나, 둘, 셋... 합이 다섯.

한 호흡에 다섯이나 되는 오크를 썰어 넘겼다.

쉽다.

너무 쉬운 싸움이었다.

물론, 예전에도 오크를 상대로 싸울 때 별 어려움을 느낀 적이 없었지만, 지금은 흡사 풀을 베어 넘기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팟-!

『 고유 특성:

- 붉은 송곳니의 대군주

상대 몬스터 전의(戰意) 상실 효과(대형종 이상 제외) 』

바로, 세 번째 히든 피스의 힘을 흡수하며 얻은 고유특성 '붉은 송곳니의 대군주'와,

『 보유 스킬:

- 오크 왕의 분노(전설 등급)

몬스터 상대로 전투 시 공격력 400% 증가 』

전설 등급의 스킬, '오크 왕의 분노' 덕분이었다.

"와, 막내 너 미쳤냐? 갑자기 왜 이러는데?"

나와 함께 정찰 임무에 투입된 겔베르트가 혀를 내두르며 감탄했다.

정찰 도중 발견한 오크 부락에 뛰어들어 차 한 잔 마실 시간에 전부 다 도륙을 내었으니, 놀랄 수밖에.

"와아..."

함께 정찰 임무에 따라온 아드리안은 너무 놀란 나머지 뭐라 말도 하지 못했다.

아니, 그냥 안 친해서 말을 못 하는 건가?

"후우... 일단 여기 쓸 만한 게 있는지 좀 뒤져 봅시다. 그런 다음에 상황 봐서 복귀하던가, 아니면 더 둘러 보든가 하자고요."

"그래. 그러자."

한 차례 싱거웠던 전투를 마치고, 우리는 각자 전리품 습득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다시, 텔마르크 (1)

우리는 오크 부락을 쓸어버린 뒤 얻은 전리품을 들고 동굴로 복귀했다.

돌아온 동굴엔 따뜻한 모닥불이 만들어낸 훈훈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생각보다 쓸만한 게 좀 있었습니다. 일단, 오크 놈들이 거주지로 쓰던 천막을 걷어왔습니다. 동굴을 떠나 야영할 때 쓰면 될 겁니다."

"오, 식량도 챙겨온 겐가?"

"예, 베르켈 경. 오크 놈들이 먹으려고 잡아둔 것인지 죽은 토끼와 사슴이 쌓여 있더군요."

"음, 피가 아직 굳지 않은 걸 봐선 잡은 지 오래되지 않은 것 같네."

"그래서 가져왔습니다. 손질이 잘 되어 있지 않아서 냄새는 좀 나겠지만... 그래도 굶는 것보다는 낫죠."

"음? 막내야, 이건 왜 뜯어왔냐? 뭔 풀이야?"

"아, 그건 허브의 일종인데... 고기 삶을 때 물에 함께 넣고 끓이면 비린내가 좀 가셔요. 저희야 뭐 대강 참고 먹는다 치더라도 아가씨께서 좀 힘드실까봐..."

내가 한가득 짊어지고 온 정찰 임무의 전리품들을 데론과 엔리케에게 하나하나 설명하는 동안, 동굴 벽에 기대앉은 겔베르트는 심각한 표정이 되어 무언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아마도 오크들을 쓸어 버릴 때 보여준 나의 실력 때문에 충격을 받은 듯했다.

그리고, 나는 그런 그의 반응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팟-!

『 겔베르트 / Lv. 47

소속: 푸른 방패 용병대

클래스: 용병 』

스킬, '창조주의 눈'을 통해 파악한 겔베르트의 현재 레벨은 47.

네임드가 아닌 평범한 기사 정도는 웃으면서 가볍게 때려잡을 수 있을 정도의 대단한 능력치였다.

'진짜 대단하네... 2년 전 처음 만났을 때 레벨이 43이었으니, 1년에 두 단계씩 올라간 셈인가?'

겔베르트 정도의 높은 능력치를 지닌 이들은 레벨 한 단계 올리기가 쉽지 않았다.

게임 <로스트 킹덤>의 시스템 설계 자체가 레벨 40을 기준으로 성장세가 크게 꺾이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이었다.

게임 내 시간을 기준으로 거의 1년간 꾸준히 수련을 거듭해도 레벨 한 단계를 올릴 수 있을까 말까 할 수준이랄까?

'... 나야 히든 피스 덕분에 손쉽게 레벨을 올릴 수 있지만, 다른 이들은 그러한 방법이 불가능하지.'

나처럼 '꼼수'를 쓰지 않고 정석대로 한다면, 타고난 재능과 뼈를 깎는 노력이 동반되어야 가능한 것이 레벨 상승이었다.

더구나 나처럼 상태창을 볼 수 없는 다른 이들은 자신의 실력이 늘었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가 없기에, 레벨이 올라도 그저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 그리고 그런 착각은, 수련의 의지를 꺾게 마련이다.'

분명 잘 해내고 있는데, 뚜렷한 성과가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제풀에 지쳐 포기하고 그 자리에 머무는 이들이 대다수였다.

그런 상황에서 수련을 멈추지 않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겔베르트는 실로 대단한 의지의 소유자라 할 만했다.

'근데, 옆에서 미친 듯이 성장하는 나를 보고 있으니 허탈감이 든 것이겠지.'

쉽게 말해, '현타'가 왔다고 표현하면 되려나?

우직하게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는 거북이 옆에 토끼도 아니고 치타쯤 되는 속도로 뛰어가는 놈이 나타나면 거북이 입장에선 맥이 풀릴 수밖에.

'하, 이걸로 대장이 상처받아서 괜히 수련 때려치우거나 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바로 그때,

"... 데미언."

심각한 얼굴을 한 겔베르트가 나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어... 아, 예. 대장."

대체 무슨 얘기를 하려고 그러지?

몰려오는 긴장감에 마른 침을 삼키던 그때...

"몸 상태 괜찮으면, 오랜만에 나랑 대련이나 할까? 동굴 입구가 꽤 널찍하던데..."

"...!"

"왜, 싫어?"

"어, 아니요. 그게..."

겔베르트가 이 타이밍에 이런 제안을 할 줄은 몰랐다.

'그러고 보니, 대장이랑 대련한 지도 꽤 오래됐네.'

처음 용병대에 들어와 모든 것이 어설펐던 시절엔 매일 같이 겔베르트와 검을 맞대며 가르침을 받았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용병대 임무가 바빠지고, 내가 겔베르트의 실력을 확실하게 넘어서기 시작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나는, 나에게 검을 가르쳐준 스승의 자존심을 지켜주고 싶었다.

겔베르트는, 한참 어린 후배이자 제자에게 추월당해버린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누구의 책임이나 잘못이 아닌, 뭐라 말로 설명하기 불편한 그 상황 속에서 자연스럽게 우리의 대련은 중단되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나를 보는 겔베르트의 눈빛엔 일말의 부끄러움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저, 자신보다 명백히 높은 실력을 지닌 강자(强者)에게 가르침을 청하는 이의 간절함만이 담겨 있을 뿐이었다.

"대장이랑 대련, 진짜 오랜만이네요. 전 좋습니다!"

내가 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겔베르트가 괜히 민망한 듯 코끝을 쓸며 대답한다.

"크흠, 그래? 그럼... 내가 근처에서 튼튼한 나뭇가지 몇 개 주워올게. 둘 다 피곤하니까, 진검 쓰는 대신 가볍게 길만 짚어보자고. 괜찮지?"

"하하, 알겠습니다."

"그럼... 나, 갔다온다?"

그 말을 남기고 머쓱하게 돌아서는 겔베르트.

나에게 말을 건네기 전보다 한층 크고 넓어진 한 남자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생각한다.

'역시 내 생각이 맞았어... 겔베르트, 당신은 리트렌에서 죽기는 아까운 사람이었어요. 하하하!'

***

"후우..."

산 아래에서 능선을 타고 올라오는 바람에 땀을 식히며 겔베르트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 개 털렸네."

말 그대로였다.

검로(劍路)만 짚어보는 식으로 가볍게 진행하려 했던 데미언과의 대련.

하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끓어오르는 호승심이 그걸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대련이 진행될수록 두 사람의 손에 들린 나뭇가지의 움직임이 더욱 빨라졌다.

가볍게 하던 것이 어느새 필사적인 것이 되었고, 잔잔했던 호흡이 숨넘어갈 것처럼 거칠어졌다.

하지만...

"와씨, 한 대도 못 때렸네."

겔베르트의 손에 들린 나뭇가지는 데미언의 몸에 끝끝내 닿지 않았다.

반면, 데미언의 나뭇가지는 겔베르트의 몸 곳곳에 얼얼한 충격을 남겼다.

팔, 다리, 가슴, 어깨, 등, 엉덩이, 허벅지, 종아리.

머리를 제외한 온몸에 데미언의 공격을 허용했다.

그나마 머리를 맞지 않은 것도 데미언이 배려해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도... 좋네."

얻어터지기에 바빴던 시간이지만, 왜인지 상쾌한 기분이었다.

왕국 내에 몇 없는 금빛 용병패의 소유자.

기사를 제압하는 용병.

텔마르크 영지 최강 용병대의 대장.

그런 자잘한 명성들에 취해 잃어버렸던 젊은 날의 초심(初心).

정의롭고 강한 힘을 지닌 멋진 기사를 꿈꾸었던 어린 날의 기억이 새록새록 되살아나는 느낌이었다.

"확실히 배우는 게 많네. 와... 데미언 이 새끼, 아까 거기서 어떻게 피한 거지? 분명 공격이 들어갔다고 생각했는데..."

일방적이었던 데미언과의 대련 내용을 복기하며, 묵묵하게 성장 중인 겔베르트였다.

***

리트베르크의 주도(主都), 리트렌 한가운데 우뚝 솟아 있는 영주성.

이 성의 본래 주인이었던 리트베르크의 영주, 바일 아르펜 남작이 썼던 집무실 책상에 칼날 같은 기세를 풍기는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는 두꺼운 갑옷 차림 아래 잘 단련된 근육질의 팔다리와 날카로운 눈매, 견실한 턱을 지녔다.

책상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좌중을 압도하는 가공할 기세를 뿜어내는 사내의 이름은 에리히 프라이슬러.

나흘 전 바덴하임 군의 선봉장으로 전장에 나서 끈질기게 버티던 리트렌의 성문을 열어젖혔고, 그 전공을 인정받아 잠시 내려놓았던 바덴하임 영지 군무관의 지위를 회복한 사나이.

그가, 잔뜩 긴장한 기색의 부하에게서 지시한 임무에 대한 보고를 받고 있었다.

"... 하여, 수색조들의 보고를 종합한 결과 남작의 딸과 군무관 데론 베르켈은 버니언 산맥 방면으로 도주한 것이 확실해 보입니다."

톡- 톡-

부하의 보고를 들은 에리히가 손가락 끝으로 책상을 두드린다.

"하, 버니언 산맥이라... 설마 했던 생각이 진짜가 되었군."

"군무관님, 그쪽으로 수색조를 추가 투입할까요?"

에리히의 옆에 부동자세로 서 있던 사나이, 틸레인 슈타우터가 조심스레 묻는다.

리트베르크 정벌군 사령관으로서 성공적으로 임무 수행에 성공한 그였다.

바덴하임으로 복귀한다면 출세의 탄탄대로가 기다리고 있을 터.

하지만, 바덴하임의 모든 군사적 권한을 손에 쥔 군무관의 자리로 복귀한 에리히 앞에선 그저 얌전한 부하로서의 모습을 보여줄 뿐이었다.

"... 지금 신성교국 방면으로 나간 수색조가 총 몇 개지?"

"예, 10인 1개 조로 총 24개 조가 나가 있습니다."

"24개라... 그럼, 4개 조만 남기고 20개 조를 버니언 산맥 방면으로 투입하도록. 추가로 리트렌에 있는 병력 중에서도 수색조를 편성해 보내도록 하지."

"추가 병력은 얼마나 보냅니까?"

틸레인의 질문에 잠시 생각에 잠겼던 에리히가 곧바로 대답한다.

"똑같이, 20개 조를 보내게."

"알겠습니다. 도합 40개 조, 4백 명이 되겠군요."

"그래, 그 정도 성의는 보여야 목표를 놓치더라도 각하에게 보고드릴 면이 서겠지."

"넵, 알겠습니다."

에리히의 명령을 받은 틸레인과 병사가 꾸벅 고개를 숙인 후 집무실을 빠져나가려는데...

"틸레인 경."

"예, 군무관님."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재깍 몸의 방향을 돌리며 대답하는 틸레인이었다.

"버니언 산맥 반면으로 투입하는 수색조 모두에게, 산맥 안으로의 진입은 절대 금지라는 지침을 내리게. 괜히 몬스터들과 충돌하면 병사들이 다칠 거야."

"예? 하지만, 수색을 하려면 진입은 피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의아한 목소리로 되묻는 틸레인에게, 에리히가 건조한 눈빛으로 대답한다.

"육십이 다 된 노 기사와 자라다만 애송이 종자, 열두 살 난 꼬마 여자아이."

"...!"

"어설프기 그지없는 그 조합으로, 온갖 몬스터가 우글거리는 산맥 안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은가?"

"음, 하긴..."

에리히의 말을 들은 틸레인이 고개를 끄덕이다,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각하께서 남작 딸의 죽음을 확인하려 하시지 않겠습니까? 아무래도 이번 전쟁 자체가 오트만 공자님의 죽음에 대한 복수전이다 보니..."

틸레인의 말을 들은 에리히의 표정에 미세한 균열이 생긴다.

'복수전이라...'

대외적으로 알려진 리트베르크 침공의 이유.

양 영지 간의 혼담을 논의하고자 외교 사절의 자격으로 리트베르크를 방문했던 바덴하임 백작의 막내아들, 오트만 바이츠제커의 죽음.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정당한 분노 앞에 펠리노어 왕국의 지배자인 왕실조차 고개를 끄덕였고, 이 전쟁은 정당한 명분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 그저 탐욕이 빚어낸 추악한 전쟁일 뿐이지.'

백작의 막내아들인 오트만 바이츠제커의 죽음에 어떤 진실이 숨겨져 있는지 알고 있는 에리히로서는 그저 불쾌하고 씁쓸한 마음이 들 뿐이었다.

하지만 전쟁의 내막을 모르는 틸레인에겐 결코 들켜서는 안 될 속마음.

흔들리던 표정을 다잡은 에리히가 특유의 냉막한 말투로 말한다.

"... 그 부분은 신경 쓰지 말게. 백작 각하에겐 내가 잘 말씀드릴 테니."

"군무관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알겠습니다."

대대로 바덴하임 백작 가문을 섬겨온 봉신 가문 프라이슬러 가의 당대 가주(家主)이자, 백작에게 가장 큰 총애와 신뢰를 받는 가신 에리히가 하는 말이었다.

더 이상의 걱정과 의문은 쓸데없는 것임을 깨달은 틸레인이 고개를 조아리고 조용한 발걸음으로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하아..."

답답함이 느껴지는 깊은 한숨.

자리에서 일어서 집무실 내부를 이리저리 거닐던 에리히가 툭 던지듯 혼잣말을 내뱉는다.

"에리히, 에리히야... 너는 지금, 기사로서 옳은 길을 가고 있느냐?"

***

"준비 다 되셨습니까?"

"그래, 다 되었네."

결연한 눈빛을 한 노 기사 데론이 가장 먼저 대답한다.

그의 옆에 선 갈색 머리의 소년, 아드리안 역시 뭐라 대답은 안 했지만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믿음직한 눈빛을 보여주고 있었다.

"좋습니다, 대장은요?"

"준비 끝. 야영할 때 쓸 천막이랑 훈제로 만든 비상식량도 다 챙겼어. 네가 만들어 준 이거, 아주 든든하다"

내가 머릿속 기억을 뒤져 어설프게나마 만든 나무 지게에 한가득 짐을 실은 겔베르트가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그는 일행을 위한 짐꾼 역할을 자처했는데, 나와 엔리케는 각각 앞뒤로 넓게 움직이며 정찰 및 경계 임무를 해야 했고, 데론과 아드리안은 니나를 보호해야 했기 때문이다.

'뭐, 그런 이유를 다 제외하더라도 우리 중 나 다음으로 겔베르트가 체력이 제일 좋으니까...'

다음으로, 엔리케.

"나도 준비 끝. 이거 사거리가 좀 짧은 게 문제인데, 어차피 숲속에서 쏠 거니까 상관없을 거야."

그는 며칠 전 고블린 부락을 뒤져 얻은 화살을 한 움큼 쥐어 내게 흔들어 보였다.

안 그래도 화살이 다 떨어져서 불안해하던 엔리케였는데, 정찰 임무 중 발견한 고블린 놈들이 큰 선물을 주었다.

체구가 작은 고블린 놈들이 쓰던 화살이라 사람이 쓰는 화살보다 크기가 작은 게 문제였는데 엔리케가 고블린 활을 뺏어 사용하면서 문제가 사라졌다.

확실히 장인은 도구를 안 가린다더니, 몇 번 쏴보더니 금세 감을 잡더라고.

"그럼, 마지막으로..."

우리 일행의 홍일점이자 막내, 니나.

사실 딱히 할 줄 아는 것도, 해야할 일도 없는 그녀였지만, 니나는 그 존재만으로도 우리에게 힘이 되었다.

이 작고 어린 소녀를 어떻게든 지켜내겠다는 할아버지, 아저씨, 오빠들의 뜨거운 의지(意志).

우리들의 가슴 속에서 절절 끓어오르는 그것이, 지친 몸과 마음을 다잡아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도 준비됐어요!"

물끄러미 바라보는 나의 시선에 자그마한 양 주먹을 힘차게 들어 올리며 대답하는 니나.

힘들다고 어리광을 피우거나 슬픔에 젖어 눈물을 흘려도 뭐라 할 이가 아무도 없건만, 니나는 애써 밝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참 대견하다, 대견해.

생각 같아선 머리라도 쓰다듬어 주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데론 아재의 검이 내 손목을 자르려 들 것 같아서 참았다.

"자,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가시죠."

리트렌 탈출 닷새째가 되던 날의 아침.

우리는, 안온했던 동굴을 떠나 다시 어둑한 숲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다시, 텔마르크 (2)

콰앙!

"키익!!!"

자신의 눈앞에 보이는 인간을 죽이겠다는 생각으로 앞뒤 안 가리고 달려들던 고블린 한 마리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토해내며 뒷걸음질을 쳤다.

목표였던 인간이 재빠르게 들어 올린 둥근 모양의 나무 방패에 정면으로 몸을 부딪친 탓이다.

"흐으읍!"

방패를 들어 고블린의 전진을 가로막은 인간, 리트베르크의 군무관 데론 베르켈이 이를 악물며 들고 있던 방패를 수평으로 휘두른다.

퍼억!!!

앞서 충격으로 휘청거리는 고블린의 머리에 정확하게 방패의 모서리 부분이 찍힌다.

으직, 하는 소리와 함께 두개골이 깨진 고블린이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옆으로 풀썩 쓰러진다.

머리 부분이 눈에 보일 정도로 움푹 파인 모습이 방패에 실렸던 위력을 짐작하게 했다.

"후우우...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리트베르크 무력을 상징하는 노 기사 데론 베르켈의 보호를 받는 존재, 리트베르크의 영주 가문 아르펜 가(家)의 유일한 핏줄인 니나 아르펜이 데론의 너른 등 뒤에서 침착하게 대답한다.

"네, 할아버지. 저는 걱정하지 마세요, 괜찮아요!"

"장하십니다! 곧 끝날 테니, 조금만 더 버텨 주시길!"

리트베르크의 모두가 사랑했던 커다란 눈망울의 어린 소녀는, 이제 사납게 덤벼드는 몬스터의 모습을 보고도 떨지 않을 수 있는 용기를 갖게 되었다.

"키이이잇!!!"

"어딜 감히!!!"

쾅!

또 한 마리. 데론의 방패에 얻어맞은 고블린이 안면이 깨져 바닥을 나뒹군다.

쓰러졌던 놈이 다시 일어서기도 전에 망치처럼 휘둘러진 데론의 오른발이 턱을 걷어찼다.

콰직!

"켁!"

데론에게 턱을 걷어차인 고블린이 짧은 비명과 함께 다시 바닥에 쓰러진다.

턱뼈가 완전히 부서져 덜렁거리는 것이 보였는데, 충격이 어마어마했는지 눈을 까뒤집은 채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흐랏차!"

콰앙! 쾅!

데론이 방패를 휘두를 때마다 여지없이 머리통이 깨지고, 내장이 터지며 튕겨 나가는 고블린들.

분명 방패란 방어의 목적을 갖고 만들어진 물건이었으나 데론의 손에 들린 방패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공격 무기가 되어주고 있었다.

"하! 좋구나!"

며칠 전 오크와의 전투에서 얻은 참나무 방패의 견고함이 마음에 들었는지, 데론이 자신도 모르게 감탄을 터트린다.

고블린 머리통을 얼마나 깼는지 너무 많아 셀 수조차 없었다.

주 무기인 검은 아직 휘두르지도 않았는데, 방패만으로도 고블린 따위는 가볍게 격살할 수 있는 막강한 실력.

이것이 바로 '리트베르크의 수호신'이라 불리던 기사 데론 베르켈의 위엄이었다.

"키이이익!"

"캬아악! 캬캿!"

혼자서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이번엔 두 마리의 고블린이 서로 다른 방향에서 달려들었다.

그래도 제법 그럴듯한 무기를 들고 다니는 중형종 몬스터 오크들과 달리 작고 볼품없는 고블린들의 무기.

인간의 기준으로 보면 길어봐야 숏소드, 보통은 단검 수준의 짧은 날을 지닌 무기를 사용했는데, 그나마도 싸구려 잡철을 두드려 만든 것이라 내구성이 형편없었다.

하지만, 그런 칼이라도 맞으면 살이 찢기고 피가 흐르는 법.

더구나 데론은 등 뒤에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할 니나가 있는 상황이니, 더더욱 방심할 수 없었다.

콰쾅! 까아앙!

동시에 울려 퍼지는 충격음.

하나는 데론의 왼손에 들린 방패에서, 다른 하나는 오른손에 들린 검에서 나는 소리였다.

방패와 검을 함께 휘두르며 서로 다른 방향에서 가해지는 고블린의 공격을 막아내는 데론.

양손을 동시에 움직여야 하는 어려운 상황이었으나, 데론의 눈빛에선 한 치의 흔들림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캬앗! 캬아아아!"

"키이익! 키킷!"

카아앙! 터엉! 쾅! 태엥!

상대가 그저 방어에만 치중하자 자신들이 유리한 상황이라고 생각한 고블린들이 신나게 데론을 공격했다.

찌르고, 때리고, 베고.

하지만, 고블린들은 공격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자신들이 서 있는 위치가 처음과 달리 어느 한쪽으로 몰리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을 땐, 이미 죽음의 그림자가 성큼 다가와 있었다.

쿠콰앙!!!

"케륵!"

"케에엑!"

데론이 힘차게 뻗어낸 방패에 부딪힌 고블린들이 숨통 틀어막히는 소리를 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비척거리며 물러나는 두 고블린의 모습을 본 데론이 우렁찬 외침을 터트린다.

"자, 지금!!!

"옙! 흐아아앗!"

이어, 데론의 단호한 외침을 들은 누군가가 무서운 기세로 달려들어 검을 크게 횡으로 휘둘렀다.

슈우우우우우웅!!!

푸화아아악!

검이 휘둘러진 방향으로 거세게 피를 뿌리며 두둥실 떠오르는 두 고블린의 머리.

단 한 번의 검격으로 목을 잃은 놈들의 시체가 서로 엉켜 허우적거리다 와르르 무너진다.

"하아, 하아!"

스승 데론의 도움을 받아 깔끔하게 고블린 두 마리를 처리한 사내,

갈색 머리의 소년 아드리안이 검에 묻은 고블린의 피를 털어내며 사방을 경계한다.

"잘했다, 아드리안. 자신 있게 잘 휘둘렀어!"

"예, 스승님."

스승의 칭찬을 받고도 냉정한 눈빛을 잃지 않는 아드리안.

속에서 끓어오르는 피를 참지 못하고 냉큼 뛰쳐나갈 만도 하련만, 그는 공을 탐하기보단 오로지 니나의 곁에 머물며 그녀를 지키는 것에 집중할 뿐이었다.

"흐아아아아!"

콰지직!!!

하늘 높이 치솟았다가 떨어진 바스타드 소드가 덤벼들던 고블린의 몸을 장작을 쪼개듯이 양단한다.

그 잘린 몸뚱이가 바닥에 쓰러지기도 전에 땅을 박찬 검의 주인, 겔베르트가 폭풍 같은 기세로 한데 뭉쳐 있는 고블린 무리를 덮쳤다.

"다 갈아 마셔주마, 이 새끼들아!!!"

사냥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자신들에게 돌진해오는 겔베르트의 모습을 본 고블린들이 기겁하며 각자의 무기를 들어 올렸다.

하지만, 다 의미 없는 짓이었다.

카카카캉!

겔베르트가 휘두른 검과 부딪친 고블린들의 무기가 단번에 부서지고 깨어져 사방으로 튀어나간다.

"케르륵!"

"캬악!"

그 부서진 무기의 쇳조각에 눈을 찔리고, 몸 이곳저곳이 베이고 찢겨 나간다.

으득, 푸화악!!!

하지만 그 아픔을 느낄 새도 없이 밀어닥친 겔베르트의 후속 공격에 머리통이 깨지고, 몸통이 부서진다.

"후우우...!"

눈 깜짝할 새 뭉쳐 있던 고블린 여섯을 도륙 낸 겔베르트가 뜨거운 숨을 토해냈다.

퍽! 퍽! 퍽!

그때, 어디선가 들려오는 둔탁한 소음.

그의 시선에 쉴 새 없이 날아드는 화살에 머리통이 꿰어 쓰러지는 고블린들의 모습이 보였다.

누구의 솜씨인지, 굳이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가 있다.

"저 새끼는 진짜 싸울 땐 다른 인간이 되는 것 같아."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겔베르트의 시선 끝에서 정신없이 화살을 날리고 있는 한 사람.

"더 들어와 봐, 이 좆만 한 괴물 새끼들아! 다 덤비라고오오오!!!"

전투의 고양감으로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한 엔리케가 사방에서 몰려드는 고블린들을 향해 고함을 내지른다.

퍽! 퍽! 퍽! 퍼억!

그에 손을 떠난 화살들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고블린의 머리와 몸통에 꽂히는 것을 본 아드리안이 혀를 내두르며 감탄한다.

"정말 대단한 활 솜씨... 볼 때마다 놀랍습니다, 스승님."

"그래. 나도 꽤 오래 살았다만 저 정도의 역량을 지닌 궁사는 처음 보는구나."

한마음으로 엔리케의 귀신 같은 활 솜씨에 감탄하는 스승과 제자.

하지만, 감탄을 넘어 이른바 '경외(敬畏)'의 감정을 느끼게 할 정도의 활약을 보여주는 사람은 따로 있었으니...

"흐으읍!!!"

푸화아아악! 으지직! 콰직!

한번 그의 검이 번뜩일 때마다 최소 대여섯 마리의 고블린들이 쓰러졌다.

다른 이들에겐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덤벼들던 녀석들이 어찌 된 영문인지 등을 보이며 도망치기 바쁘다.

혹은, 도망갈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그 자리에 멈춰서서 허둥거리기가 일쑤.

그 모두가 벼락처럼 떨어지는 검 앞에 평등한 죽음을 맞이한다.

"상대가 누군지 알고 덤볐어야지, 이 미련한 괴물 새끼들아!!!"

맹수처럼 포효하며 겁먹은 고블린들을 거세게 몰아붙이는 녹안(綠眼)의 소년.

데미언.

그는 전쟁의 화마에 휩싸인 리트렌을 극적으로 탈출한 뒤 바덴하임 군의 추격을 피해 버니언 산맥으로 숨어들었고, 벌써 열흘 하고도 엿새째 필사의 도주를 이어가고 있는 니나 일행의 실질적 리더였다.

스각! 촤아악! 콰직!

깊은 숲속에 쉴 새 없이 몰아치는 잔혹한 혈풍(血風).

데미언이 가는 걸음마다 고블린의 목이 가을날의 낙엽처럼 우수수 떨어졌다.

"케르륵! 키야아아악!"

남아있던 고블린 무리 중 가장 큰 덩치를 지니고 있던 녀석이 그 모습을 보고 분노에 찬 괴성을 내질렀다.

눈앞에서 너무나 허망하게 죽어 나가는 동족들의 모습이 놈의 가슴에 끝 모를 분노를 안겨주고 있었다.

"... 너구나."

데미언은 뾰족한 못이 박힌 곤봉으로 바닥을 후려치며 길길이 날뛰는 커다란 고블린의 모습에 주목했다.

놈은 다른 고블린의 서너 배는 될 법한 큰 덩치와 검붉은 피부, 거기에 더해 머리 한가운데 큼직한 뿔 하나를 달고 있었다.

한눈에 보아도 보통의 고블린과는 궤를 달리하는 강력한 모습.

하지만 데미언은, 전혀 긴장하지 않은 얼굴로 놈의 이름을 읊조릴 뿐이었다.

"... 홉 고블린(Hobgoblin)."

녀석은 고블린 일족의 지도자 역할을 하는 중형종 몬스터의 하나로, 일반 고블린과 비교해 월등한 체구와 힘, 압도적인 지능을 지니고 있었다.

며칠 전부터 먹잇감으로 노리던 인간들을 잡기 위해 백여 마리에 달하는 일족의 대병력을 이끌고 나온 터.

하지만 맛난 고깃덩어리 정도로 생각했던 인간들에게 무참히 사냥당하는 부하들의 모습을 보며, 그는 비통한 울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울음이 채 그치기도 전,

타타타탁!

고블린들이 흘린 피로 질척해진 숲길을 달려 힘차게 뛰어오른 데미언의 검이,

"캬아아아아아!!!"

쉬이이이이잉- 콰지직!!!

놀라 괴성을 지르는 홉고블린의 머리통에 수직으로 틀어박혔다.

휘잉-

이미 데미언이 지나고 없는 허공에 뒤늦게 휘둘러지는 홉고블린의 곤봉.

맥빠지는 바람 소리가 한 차례 들린 뒤, 홉고블린의 어깨 위에 올라탄 자세로 검을 찔러넣었던 데미언이 붙잡은 검 자루를 두 손으로 힘차게 뒤틀어 빼낸다.

"흐으읍!"

으지직- 촤악!!!

홉고블린의 머리통을 꿰뚫고 목뼈를 따라 몸통에 박혀 있던 검이 피를 뿌리며 밖으로 빠져나온다.

시뻘건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검의 길을 따라 으스러진 하얀 뼛조각들이 튀어나오고, 홉고블린의 어깨를 발판 삼아 위로 뛰어오른 데미언이 멋지게 공중제비를 돌며 바닥에 착지한다.

그리고,

후웅- 철퍼덕!!!

생기를 잃고 무너지는 홉고블린의 몸.

버니언 산맥의 일각을 차지하고 있던 고블린 일족 '핏빛 바람'의 지도자가 허망하게 목숨을 잃는 순간이었다.

"캬아아앗!!!"

"키아악! 캬악!!!"

홉고블린의 죽음과 동시에 무기를 내던지고 숲속으로 사라지는 고블린들.

자신의 감각이 닿는 모든 범위 내에서 고블린이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데미언이 그제야 참았던 한숨을 내쉰다.

"휴우, 귀찮은 고블린 새끼들..."

그렇게 혼잣말을 던지고 뒤를 돌아보는데, 사방에 깔린 고블린의 시체를 뒤져 쓸만한 물건을 챙기고 있는 일행들의 모습이 보였다.

데미언이 홉고블린을 잡아내는 순간 승리를 확신하고 서둘러 전장 정리에 나선 것이다.

"참나, 아직 싸우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도와줄 생각은 않고 물건부터 챙깁니까? 너무하네!"

데미언이 괜히 볼멘소리를 해보지만, 이미 이런 상황에 익숙해져 버린 일행들은 꿈쩍 않고 하던 일에 집중할 뿐이다.

"야, 시끄러! 고블린 피 냄새 맡고 다른 놈들 몰려오기 전에 빨리 물건이나 챙겨."

"자자, 고블린 화살 보이면 저한테 주십쇼!"

"흐음, 스승님! 이 칼은 제법 쓸만해 보이는데요? 가져갈까요?"

"그래, 급할 때 투척용으로 쓰면 될 것 같구나. 챙기거라."

"... 허."

그 모습을 바라보며 헛웃음을 짓는 데미언.

바로 그때,

"데미언 오빠, 고생하셨어요! 덕분에 무사했네요. 에잇, 이거 닦아야죠!"

전투의 피로를 말끔히 씻어주는 귀여운 소녀의 목소리.

어느새 데미언의 곁으로 다가온 니나가 그의 얼굴에 묻은 고블린의 피를 닦아주고 있었다.

"아이고, 아가씨. 오빠라니요! 고귀한 귀족 가문의 핏줄께서 천한 용병에게 그리 부르시면 안 됩니다."

지난 생애부터 '가슴으로 낳은 딸'이라 부를 만큼 니나를 아꼈던 데미언.

엄연히 존재하는 신분의 격차에도 불구하고 오래 알고 지낸 오누이 사이처럼 따뜻하게 자신을 대해주는 그녀의 태도에 데미언은 속으로는 뛸 뜻이 기뻤지만, 끝까지 예의를 차리려 노력했다.

하지만 지난 보름 새 마음의 키가 훌쩍 자라난 소녀는 작은 머리를 도리도리 흔들며 이렇게 대답할 뿐이다.

"아니에요, 제가 타고난 핏줄을 고귀하게 만들어주던 리트베르크 영주 가문의 권한은 이제 사라지고 없는걸요."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저에게 무엇보다 고귀한 건, 보잘것없는 저를 지키기 위해 목숨 걸고 싸우는 분들의 존재입니다. 그러니, 앞으로는 제 앞에서 스스로를 천한 용병이니 뭐니 깎아 내리는 말은 하지 말아주세요. 아셨죠?"

"아가씨... 감사합니다."

감격으로 벅차오르는 가슴을 느끼며 겨우겨우 말을 끝맺는 데미언.

매일 같이 몰려드는 몬스터들을 상대로 치열한 전투를 치르며 니나와 일행들은 새로운 '가족'을 이뤄가고 있었다.

***

그로부터 사흘 뒤,

"... 이런 미친."

목적지인 텔마르크 영지를 불과 이틀 앞둔 어느 산기슭에서,

"크워어어어어어어어!!!"

마침내 니나 일행은, '산중제왕(山中帝王)' 오우거와 마주하게 되었다.

다시, 텔마르크 (3)

오우거(Ogre).

혹은,

'오거'라 불리는 존재.

놈들은 서구 유럽 문화권에서 아주 오래전부터 등장해온 유서 깊은 식인 괴물이었다.

오우거는 각종 신화와 전설, 문학 작품 등에 왕왕 등장하여 특유의 포악하고 잔인한 면모를 유감없이 선보였다.

특히 판타지 세계를 다룬 게임과 소설 등에서는 거의 필수적으로 등장하는 몬스터였는데, 각각의 작품마다 오우거를 다루는 방식이 판이하게 달랐다.

어떤 작품 속의 오우거는 오크보다 조금 강한 수준의 힘과 체력을 가진 몬스터로 묘사되었다.

반면, 또 다른 작품 속에선 오우거가 드래곤을 제외하면 감히 그 어떤 몬스터도 대적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로 등장했다.

그리고 <로스트 킹덤>의 오우거는, 그 두 가지 사례 중 후자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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