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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

다음날.

상급반 교실.

에른은 수련생들과 떨어진 자리에서 엎드린 자세로 명상을 하고 있었다.

최근 그에게 주어진 실마리.

이는 절정으로 올라가기 위한 동아 줄이 되고 있었다.

폐관수련을 핑계로, 아카데미에서 벗어나 저택 생활을 했을 때.

그때 움트게 했던 삼화(三花)의 첫 번째 꽃망울.

이제는 두 번째 꽃망울도 서서히 개화를 시작하고 있다.

'현천태을신공이 8성에 이르면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 그러면 패왕군림보와 쇄혼경천검… 다른 절 정무공도 다룰 수 있겠지.'

신기한 일이다.

분명 자신의 무재는 평범 그 자체 일 텐데.

일류도, 초일류도 스스로 이뤄낸 게 아니고 코인 써서 흡수했을 뿐이다.

그런데 최근의 성취는… 구매한 게 아니라 혼자 힘으로 쌓아 나간 것.

차곡차곡 흡수된 무공 지식과 풍부한

내공이 재능을 끌어올려 준 것일까.

물론 전에도 몇 번, 그런 느낌을 받기는 했다.

무공을 흡수할 때마다 새로운 지평 이 열리고 몰랐던 깨달음이 뇌리를 강타하니까.

'그거하고 이건 좀 다른데… 뭔가 내가 진짜 천재가 된 느낌?'

열여섯에 절정의 경지, 대륙으로 치면 영웅급의 깨달음을 참오하고.

아직 도달하진 못했지만 성취를 보 고 있다는 자체로 역대급이다.

페이웨어를 앞질러 가고 있으니까.

'환골탈태의 영향도 있겠지… 몇 번만 연습해도 몸이 바로 받아들여 버리니.'

어찌 됐건 좋은 일이다.

매 경지마다 [흡수]로 해결하려다 간 번 코인을 다 무공에만 써야 할 테니까.

또 진짜 초강자들은 자기 무공을 쉽게 판매하려 하지 않을 터.

발전의 여지 없이 코인만 믿다가는 한계에 봉착하고 말 것이다.

잡생각을 하면서 설렁설렁 운기하 는데도 순간 무아지경에 빠졌다.

에른의 전신.

고오오오.

잠깐 넋을 놓은 사이, 푸른 빛이 돌면서 기류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안 돼!'

교실에서 삼화를 내보인다면 이건 뭐 변명의 여지가 없다.

번득 정신을 차리면서 내공을 회수 했다.

'왜 이러지?'

평소에는 조심, 또 조심하며 운기 하느라 이런 적이 없었는데.

달라진 건 하나뿐이다.

'아, 씨… 이놈의 환골탈태. 집중력 도 덩달아서 올라갔나 보군.'

원인 진단은 바로 되었다.

문제는....

에른이 얼른 주위를 둘러봤다.

"엇...

"에, 에른?"

놀란 얼굴로 바라보는 상급반 학생들.

봤나? 이걸 뭐라고 하지?'

연공 중에 광휘가 온몸을 감싼다.

특급 기사만이 보일 수 있는 퍼포 먼스.

기묘한 눈빛을 보내는 수련생들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내, 내가 지금 본 게 그거지? 그 거 맞는 거지?'

' 대박...

'아니야. 그건 불가능해. 우리, 환 각을 보고 있는 걸지도 몰라.'

불신에 찬 반응들.

에른도 잠깐 동안 어찌할 줄을 몰 랐다.

낭패감이 막 표정으로 드러나려는 차.

겨우 눈치챘다.

학생들의 시선이 자신뿐 아니라 다 른 누군가에게도 번갈아 향하고 있 다는 걸.

낭패감 대신 안도감이 차오른다.

'유형화되기 전에 잘 끊었나 보네. 역시 내가 그런 초보적인 실수를 할 리가.'

아무렇지 않은 듯, 그 다른 누군가

와 눈을 마주쳤다.

"...셀리나 루페브르?"

"반가워요, 에른 스틸가드."

셀리나가 자리로 와서 악수를 청했다.

오늘의 그녀는 지금까지 본 그 어

느 때보다 화사하면서 풋풋했다.

수련복이 아닌 가끔 입는 아카데미

정복.

대놓고 매력을 드러내는 연회복과

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반가워요/..? 이건 또 뭐 하자는

거지?'

에른은 맞잡지 않았다.

대신 작은 목소리로.

"뭔데? 손바닥에 독침이라도 숨겼 나?"

"아니라는 거 알면서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예요? 나하고는 악수도 하기 싫다는 거죠?"

셀리나가 근심 어린 표정을 짓자 남자 수련생들이 광분했다.

"매몰찬 자식! 감히 셀리나 님의 악수를 거부해?"

"건방진 새끼… 전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이게 그렇게 화낼 일인가?'

에른은 과열된 분위기를 가라앉히 기 위해 셀리나와 악수를 했다.

그러자.

"추잡한 놈! 감히 그 더러운 손으 로 셀리나 님의 손을 만져?"

"나... 나도 악수할 거야!"

뭘 해도 증오의 대상이 되는 죽음 의 이지선다.

'그래, 셀리나는 원래 이 정도 인 기였지. 하여간 남의 마음 뺏는 데 에는 천재군.'

그녀의 속셈이 대강 보였다.

에른이 손을 놓자 셀리나가 웃었다.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아찔한 현기 증을 일으키는 미소였다.

"나 그쪽에 관심 있어요. 잠깐 밖 에서 볼래요?"

[114 화]

셀리나의 충격 선언.

수련생들은 가슴 한가운데에 커다 란 돌이 떨어지는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쿵!

"이, 이럴 수가...

"셀리나 님이 에른을...?"

"방, 방금 한 말 너도 들었냐?"

"아니, 안 들려… 안 들려. 아무것 도 못 들었어."

경악하는 반응과 현실 부정의 단계 에 이른 학생들.

그중 실천적인 몇몇은 현 상황을 인정하고 해결책을 찾으려 했다.

"저기, 카시엔?"

"..2"

소란 속에서도 묵묵히 교재를 넘기 고만 있는 카시엔.

1학년 서열 1위, 그리고 필기시험

에서도 항상 만점인 그다웠다.

"말해."

"저기 나가는 두 사람 말이야. 에른 자식하고 셀리나 님. 너… 보고 만 있을 건 아니지?"

"보고만 있지 않으면 뭐?"

"이대로 에른이 셀리나 님하고 가 까워지게 둘 거야? 나서야 하지 않 겠어?"

"내가 왜'?"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한 카시엔의 표정에, 학생들은 낯 뜨거운 칭찬을

연발했다.

"그렇잖아, 명실상부 1학년 톱은 넌데. 어디서 2위 주제에!"

"그래그래. 한갓 찬물에도 위아래 가 있는 법이지. 교내 최고의 미녀 한테는 학년 수석이 어울려."

"에른 저 새끼 봐. 헤벌레해서 따 라 나가는 거. 저걸 보고도 아무 생 각이 안 든다면...

이것들이 진심으로 하는 말일까?

그냥 방해해 줄 사람이 필요한 것 이다.

유치한 언사 속에 숨은 뜻을 알아 챈 카시엔이 쓴웃음을 지었다.

"찬물? 위아래? 셀리나 선배는, 누 군가의 전리품이 아니다. 그리고, 에른은 결사반대면서 나는 또 괜찮은 이유가 뭐지?"

"그, 그야 너, 넌 완벽하니까! 실 력, 외모… 아무튼 모든 면에서. 너 라면 우리도 깨끗이 단념할 수 있 지."

"1, 2등이 차이가 나면 얼마나 난 다고. 거기다 난...

카시엔은 잘 알고 있다.

1학년 수석이라는 건 허명에 불과 하다는 것과.

서열전을 치르지 않아 1위를 유지 할 뿐이지, 에른이 손가락만 까딱거 려도 알아서 내려와야 할 위태로운 처지라는 것.

'철혈 백작님께 몇 수 주워 배운 정도인 줄 알았지… 처음에는.'

무승부로 그쳤던 에른과의 첫 대 결.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보았던 상 승의 묘리는 단순한 흉내를 넘어선, 에른이 온전히 터득한 것이었다.

그리고 클럽에서 파르스와 붙으면 서 선보인 오러는....

카시엔이 고개를 저었다.

거기까지 떠올리니 숨이 턱 막혀 온다.

까맣게 타들어 간 속도 모르고.

학생들은 어떻게든 자신을 충동질 해 에른에게 붙이려고 야단이었다.

"아카데미 역사에 남는 건 [카르 숨]뿐이지. 누가 [투마 숨]을 기억하 겠어?"

"승부의 세계에서 2등은 꼴찌하고

같은 거라고. 1등과 2등은 엄청난

차이지!"

카시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엄청난 차이가 맞기는 하네.

2등과 1등."

"그게 무슨 말이야?"

미묘한 뉘앙스 차이.

학생들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카시 엔이 한숨을 쉬었다.

"다들 알게 될 거다. 얼마 안 가

서."

*

"조용해서 좋네. 아무도 듣는 사람 없고. 여기 괜찮아요, 에른?"

"...존댓말은 그만하지? 좀 거북 하네."

에른의 입꼬리가 실쭉 올라갔다.

셀리나.

오늘은 청순, 단정 그 자체인 모 습.

그러면서도 감출 수 없는 아름다움 이 물씬 풍겨 나온다.

하지만 에른은 차가운 시선을 유지 할 뿐.

붉은 꽃 같은 셀리나의 입술이 떨 렸다.

"내, 내가 그렇게 싫은… 거야?"

이쪽은 향하는 눈빛은 너무도 애절 해서, 웬만큼 모질지 못하고서야 도 저히 그렇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에른은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했다.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이.

"싫다기보단, 가증스럽지?"

왜 셀리나가 교실까지 찾아와서 대 놓고 관심 표명을 했을까.

앞으로 그녀를 사모하는 남학생들 은 이쪽을 적대할 것이다.

사랑에 눈먼 사람보다 물불 안 가 리는 부류가 또 있을지.

가슴 앓는 이의 집착과 질투.

때로는 광신자나 결사 집단보다도 더 무섭고 끈질기다.

"눈물이 그렁그렁하네. 그래도 속 으론 굉장히 만족스럽지?"

"내, 내가? 왜...?"

"애들 반웅 보니까 계획대로 된 거 같던데. 아주 증오로 불타오르더라 고."

"아...

셀리나가 손을 내저었다.

"나, 난 그럴 의도가 아니었어…. 미, 미안해."

"이게 그 말로만 듣던 셀리나 표 재앙인가? 무한 서열전보다 더 피 말리게 한다는."

"아, 아니 난…. 널 만나고 싶은데 방법이 없어서. 교실로 찾아가는 것

말고는...

에른은 셀리나의 눈을 들여다보면 서.

"연기 그만하지? 이제 보는 사람도 없고. 근데 너 실수했어."

"군사학 시간에 졸았나? 급소를 찌 르지 못할 거면, 아예 검을 빼 들지 말았어야지."

원래도 아카데미에선 사방이 적이었다.

이제는 완전히 수하가 된 지르칼

과,〈비상〉클럽원들 정도를 빼면.

그 외에는 작은형 제이슨과 굳이 꼽자면 룸메이트인 드미트리까지?

그뿐 아니라 애초에 1학년 애들은 에른에게 전혀 위협이 안 되었다.

그야말로 양 떼로 숨어든 사자라.

양들이 사자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을까?

귀찮게라도 할 수 있다면 대성공이었다.

그렇기에.

셀리나는 거둬 가는 것도 없이 선

공을 낭비한 셈이었다.

'그만큼 분하고 억울했단 건가? 그 렇긴 하겠지.'

공터에서 있었던 일.

고귀한 그녀가 언제 그런 봉변을 당해 봤겠나.

제대로 따져 보지도 않고 행동에 나선 것도 이해는 간다.

"그, 그게 무슨 말이야?"

셀리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급소는 뭐고 검을 빼 드는 건 또 무슨 말...

"후... 이제 그만 솔직해지자."

"솔직해지자니. 난 거짓말한 적 없 어."

그녀의 눈이 우수에 젖었다.

"그날 이후로 생각 많이 했어. 네 생각, 그날 했던 말…. 처음엔 마냥 밉기만 했어. 왜 내 마음을 몰라주 는지. 왜 미타를 더 좋아하는지."

"..2"

이건 예상 못 했는데?

쏘아붙이는 반응 대신 담담한 어조 와 반성하는 자세.

그녀답지 않다.

너무도.

셀리나의 말이 이어졌다.

"날 때부터 예쁘다는 말을 듣고 자 랐어. 그냥 예쁜 것도 아니고 '그 누구보다도'란 말이 꼭 앞에 붙었 지. 남자들은 전부 날 떠받들어 줬 고."

"그랬겠지."

"처음엔 그게 마냥 달갑지만은 않 았어. 검을 배운 것도 그래서였지. 선천적으로 주어진 것에 기대기보단

내 힘으로 뭔가를 이뤄 보고 싶었으 니까. 그런데...

"그런데?"

"왜 이렇게 되어 버린 걸까…. 아 니! 오늘은 날 속이고 싶지 않아. 사실 알아. 익숙해져 버린 거야. 너 무 편하고 좋으니까."

셀리나가 자조하듯 웃었다.

"아하하, 완전히 초심을 잃었잖 아... 나."

" O "

"그때 네가 나타난 거야. 다른 애

들과는 너무 다른. 그래서 더 끌렸 는지도 몰라."

에른의 얼굴이 굳었다.

셀리나가 긴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날 이렇게 대한 사람은 네가 처음 이거든."

"...그래서?"

"좋아해 주지 않아도 좋아. 사귀어 달라는 것도 아니야. 그저, 네 마음 에 들 수 있도록 노력해 볼게. 미타 처럼."

셀리나는 에른의 표정을 곁눈질했다.

"그래도… 될까?"

"그러든지."

살짝.

그녀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근데, 이 말 하려고 찾아온 거야?"

"그것도 있고...

순간 심각한 얼굴로 변한 셀리나.

"실은 테인이 우리 사이를 질투하 고 있어."

"테 인이?"

"입학 때부터 끈질기게 대시를 해 왔거든. 그때마다 번번이 거절해 왔 고...

"잠깐. 우리 사이? 우리 사이가 뭔 데."

"당연히 해명했어. 내 일방적인 감 정일 뿐이라고. 근데 그렇게 말하니 까 더 화를 내더라. 길길이 날뛰면 서 너뿐 아니라 비상 클럽까지 없애 버리겠다고 맹세하던걸."

셀리나의 근심 어린 눈.

그녀가 무거운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아마 오늘 중으로 테인이 연승전 을 제안할 거야. 진 클럽은 폐쇄하 는 조건으로."

"연승전? 미친 거 아니야?"

"그치. 그냥 클럽 문 닫으라는 거 지. 그러니까 하지 마."

"온갖 자극적인 도발을 해 올 거야. 이거 안 받으면 남자도 아니라 고. 날 포기하는 건 물론이고 앞으 로 말도 붙이지 말라고. 그럴 텐 데… 그래도 절대 승낙하면 안 돼."

셀리나가 애원했다.

"날 위해서라도 그래 줬으면 좋겠 어. 네가 어떻게 만든 클럽인데...

또르르.

투명한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보석 같은.

그리고 절로 보호 본능을 불러일으 키는.

에른은 잠시 숨을 멈췄다.

그러지 않고선 배길 수 없었다.

무언가가 터져 나올 것 같아서.

그 모습을 보며.

'저거 필사적으로 감정 숨기는 거 봐. 그래, 이렇게 나오는 게 정상이 지. 지도 남잔데.'

속마음과는 반대로, 셀리나는 처연 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널 못 보게 된다고 해도 괜찮아. 2년 뒤엔 테인도 졸업할 거고, 그때 까진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알았어."

"그래 잘 생각… 웅?"

"하라는 대로 하겠다고. 연승전 제 안하면 꼭 거절할게."

"뭐... 뭐?"

"왜 그렇게 놀라? 원래 같았으면 하라는 반대로 하겠지만… 너, 오늘 다시 봤어."

에른은 셀리나와 눈을 맞췄다.

"무개념인 줄만 알았는데, 반성도 할 줄 알고. 날 향한 마음도 고맙게 받을게. 그리고 연승전? 까짓것 남자 아니게 되면 어때? 거절하지 뭐."

"어… 그, 그래도 그런 모욕은… 참기 힘들지 않아?"

"참을 수 있어. 널 위해서. 이제 가 봐도 되지?"

셀리나는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 벙 찐 표정.

반면, 에른의 입가에는 물결 같은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

그녀와 헤어지고.

에른은 배를 잡고 웃어 젖혔다.

"참느라 혼났네. 너무 웃겨 주는 거 아니야?"

한번 터진 웃음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그야말로 뻔히 보이는 수.

'웬 개과천선 컨셉? 말만 번지르르 하게 한다고 우리 셀리나가 달라졌 구나~ 해줄 줄 알았나?'

얕아도 너무 얕다.

에른이 알기로, 그녀가 아카데미

행을 선택한 이유는.

'예쁜데 검까지 잘 쓰면 내 가치가 더 올라가니까. '

'얼굴에 상처 날까 걱정 안 되냐 고? 어차피 남자들은 내 털끝 하나 안 건드려. '

'기사가 될 생각은 없어. 그냥 한 때의 유흥일 뿐. '

또한 그녀 사전에 반성이란 건 없 다.

반성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무언가 를 이루기 위한 수단인 것이겠지.

그 무언가는, 먼저 호감을 끌어내 고 그것으로 연승전을 받아들이게 만든다는 계획.

원래 사람은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은 법이다.

말리면서 은근히 부추기는 상황은 종종 마주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이었으면 홀랑 넘어갔을 지 모르나, 에른은 셀리나가 찾아올 것을 알고 있었으니.

'몰랐어도 안 통했겠지만.'

애초에 테인이 셀리나를 마음에 담

아둘 리가 없다.

동류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차가운 피가 흐르는 사람들끼리 무 슨 감정이 생기겠나.

전생에도 둘 사이엔 아무 일도 벌 어지지 않았다.

"아, 재밌었다."

*

즐거워하는 에른과 달리, 셀리나는

심사가 복잡했다.

'큰소리 다 쳐 놨는데… 클럽에는 뭐라고 말하지?'

걱정과 함께 조금 엉뚱한 생각도 들었다.

'에른, 정말로 날 다시 본 걸까? 날 위해 모욕을 참겠다는 말도 진심 이고?'

하긴, 이번에는 완벽했다고 자신한 다.

대사부터 감정 표현까지 전부 다.

실수가 있었다면, 에른이 보통 이

상한 놈이 아니었다는 거.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연승전을 포기할 줄은 몰랐다.

그래도 자기한테 넘어온 건 확실한 것 같은데.

'그냥 이걸 계기로 잘 지내볼까?'

그러나 클럽에 들어선 순간, 모든 게 착각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녀를 본 테인이 다가와서 어깨를 두드려 줬다.

"에른이 연승전을 받아들였다."

"그, 그게 무슨...?"

"아까 교실로 찾아와서 하겠다고 하더군. 어떻게 한 건진 모르겠지만, 정말 목에 방울을 달았어. 수고했다, 셀리 나."

칭찬을 듣고도.

셀리나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지고 있었다.

그보다 일그러질 수 없을 만큼.

'이게… 날 또 가지고 놀았어? 절대 가만 안 둬!'

[115 화]

〈비상〉이 새 거처를 찾았다.

지혜관을 벗어나 교내 밖 번화가 의 3층 건물로.

"말씀하신 그대로 준비했습니다. 내부 인테리어도 완비했구요."

마쿠스가 고개를 숙이자.

"와...

건물 외관을 구경하는 회원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장학금에 이어 자유로이 이용할 수 있는 클럽 건물까지.

겨우 한 층을 쓸 뿐인 21클럽과 는 비교가 안 된다.

복지도, 시설도.

'대체 왜 우리들을 모은 건진 모 르겠지만...

다들 비슷한 생각을 떠올렸다.

'어찌 됐건 좋은 일이지.'

에른은 회원들의 반응을 살피다가 마지막으로 샤펠과 휴인을 봤다.

둘의 얼굴에도 흡족한 미소가 떠

올라 있었다.

명문가 출신으로, 좁은 기숙사를 쓰기 전까진 최고의 환경에서 지 내온 두 사람.

이들이 보기에도 괜찮다면 뭐.

"여, 여기를 우리가 쓰게 된다 이거죠?"

흥분한 바리온에게, 마쿠스의 대 답은.

"그렇습니다. 3층 전부 다요. 그 냥 편하게 이용하시면 됩니다."

"가, 감사합니다. 그럼… 들어가 봐도 될까요?"

"물론이죠."

"이야!"

바리온을 필두로 미타, 벤자민, 데이븐이 안으로 달려들어 갔다.

휴인도 얼른 뒤따랐고.

"뭔 호들갑은."

그렇게 말하는 샤펠도 꽤 기쁜 듯 보였다.

회원들이 모두 건물로 들어가자 마쿠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렇게나 좋을까요? 전 잘 모르 겠습니다."

"뭐. 기숙사, 교실, 훈련장… 쳇바 퀴 돌듯 하다 보면 자기 공간이 절 실해지니까. 잠깐이라도 해방감을 느낄 공간이 있다는 게 좋은 거지."

"아, 그렇습니까."

"수련생들이 21클럽에 영입되고 싶 어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지. 그래서 우리 클럽이 무조건 더 크고 좋아야 하는 거고."

"이쪽은 일곱 명밖에 안 되는데도요?"

"지금까지는."

에른이 말을 끊었다.

"그렇지만, 앞으로는 달라질 거다. 위치도 좋고 건물도 번쩍번쩍한데. 얼마나 들었지? 혹시 상회 운영 자 금을 끌어다 쓴 거면 보충해 줘야겠 는데...

수도의 노른자위 땅에 들어선 3 층짜리 신축 건물.

전에 변두리 저택을 5만 골드에 구입한 적이 있다.

최소한 그 이상은 나가지 않을까?

"아, 그런 거 아닙니다. 저희 여유 있어요. 신용도 있구요. 상회 운영에 영향 끼칠 정도는 아닙니다."

"하긴, 매달 고정적으로 벌어들이 는 게 있는데. 어음이라도 발행했 나 보지?"

"...어떻게 아셨어요?"

"우리 상회가 가파르게 성장하고 있다곤 하지만, 몇만 골드를 한 번 에 턱턱 쓸 정도는 아직 아니니까. 운영 자금도 안 건드렸으면 돈 나 올 구석은 뻔하지."

그리고 수도에서 한가락 하는 인 사들은 모두 알고 있다.

블랙 스네이크의 새로운 보스들이 테아로스의 밤거리를 장악했고,

필라프 상회가 그들의 독점적 파 트너가 되었다는 사실.

현재 필라프 상회가 발행하는 어음 은 현금에 준하는 가치를 지녔다.

"뭐, 다 시간문제일 뿐이지만. 요 즘엔 큰손들한테 연락 좀 오고 그 러지? 투자해 주겠다고."

''그, 그건 또 어떻게?"

마쿠스가 눈을 크게 떴다.

평생을 상인으로 잔뼈가 굵은 그 도 큰물에 올라온 건 이번이 처음.

그래서 하루하루가 놀라움의 연

속이었다.

기쁘면서도 어리둥절하기만 한데.

아직 소년에 불과한 어린 회주는 너무도 여유롭고, 이걸 또 당연한 듯이 받아들이고 있다.

이미 한번 겪어 보기라도 한 것 처럼.

'스틸가드라서 저리도 비범한 걸 까? 아무리 그래도...

물론 에른도 대규모의 상회를 운 영하는 건 처음이다.

영지를 경영해 본 경력이 있어

조직을 어떻게 굴려야 하는지, 상 회들의 생리는 또 어떻게 되는지 꽤 잘 아는 편이었지만.

스케일이 점점 커지면서 전생의 지식으로도 감당 안되는 수준에 이르렀다.

'꽤 버거웠겠지.'

금왕과의 거래로 받은 노상인의 지식이 없었더라면 말이다.

만금상회는 제5 무림계 최대 규 모의 초거대 상회.

거기에 비하면 아직 필라프와 에

른 상회는 구멍가게에 불과하다.

"그 투자 말인데요… 어떻게 할까 요? 일단은 회주님과 상의한 뒤에 결정하겠다는 답신을 보냈습니다만."

"부회주는 어떻게 생각해?"

"블랙 스네이크와의 거래만 해도, 아직 온전히 저희 힘으로 소화하 기 어려운 정도죠. 거래처는 날로 늘어만 가는데, 설비나 인력은 태 부족이니… 굵직한 자금줄이 들어 온다면 훨씬 빠른 성장을 보일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겠지. 하지만 상회에서 자금

은 곧 권력이야. 남의 돈이 들어오 면 그만큼 우리가 발언권을 잃어."

"그러면 어떻게...?"

"일단은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텨 봐. 못 버틸 정도가 되면 숨 트일 방법을 찾아볼 거니까, 걱정 마."

정 안 되면 계좌의 코인을 금으 로 바꾸면 된다.

지금은 2계에서 자리 잡는 중이 고, 샤일로크를 잡기 위해선 최대 한 모아야 하기 때문에 함부로 꺼 내 쓸 수 없지만.

'그래도 애써 일군 상회가 남의 손을 타게 둘 수는 없지.'

그리고....

에른의 눈이 빛났다.

"조금만 버티면 가을이니까."

"그, 그렇군요...

마쿠스의 눈에도 희망의 빛이 떠 올랐다.

가을.

수확의 계절이자 연회의 계절.

현재 수도 각지의 서늘한 지하 창

고에는 필라프 상회가 사재기해둔 포도주들이 궤짝째로 쌓여 있다.

마개가 따일 날만 기다리면서.

"그러니까, 투자는 필요 없겠지?"

"예… 남은 동안은 제가 어떻게든 해 보겠습니다."

미래를 내다보고 사둔 포도주들 을 생각하니 급 든든해진다.

에른이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으 하

그런데 어째, 목이 많이 무거웠다.

에른의 머리 위에 올라가 있는 사리 탓이다.

"근데 얘는 왜 이러지?"

사리는 최근 저택-상회를 오가며 거의 실비아와 지내고 있었다.

기숙사 방에서 혼자 노는 것보단 그게 낫겠다 싶어 그녀에게 맡긴 것이다.

그래도.

어쨌거나 사리는 에른을 어미로 인식한다.

주기적으로 에른을 만나지 못하

면 그거대로 외로움을 타서.

어느 정도냐면, 식욕을 잃고 그 좋아하는 쇠붙이도 마다할 정도.

해서 마쿠스가 데리고 나온 건데, 오늘 사리는 반갑게 달려들긴 했 어도 에른에게 올라온 뒤론 쭉 잠 만 잤다.

몸을 부비면서 애교를 부린다든 지, 먹이 달라고 조른다든지 하는 평상시의 모습 대신.

"도로롱… 코오."

몸을 돌돌 말고, 풍성한 자기 꼬

리를 베개처럼 벤 채로.

정신없이 잠만 자고 있다.

"야, 너 밤에 안 자고 뭐 하냐?"

에른이 사리의 젤리 같은 코를 살짝 눌렀다.

그런데도.

"도로로롱...

"이게 주인이 묻는데 잠만 퍼질러 자고… 부회주, 얘 요즘에 뭐 하길 래 이러지?"

"그건 저도 잘.... 밤사냥이라도 다니나? 실비아 서기 방에 가 보

면, 갈 때마다 자고 있던데요."

"그래? 얼마나 됐지?"

"한 3, 4일 됐나. 뭐, 피곤해질 일이라도 있는가 보죠?"

"글쎄...

불가살이가 피곤을 느낀다니 말 이 되는 얘긴가.

쇠붙이를 씹어먹고 금속을 소화 시키는 녀석이.

더 크려고 이러는 건 아닐 터이다.

변신이 가능해졌으니, 성체가 됐 다고 봐야 하겠고 생김새나 몸집

도 전혀 변한 게 없으니까.

그래서 더더욱.

갑자기 왜 수면 모드에 돌입했는 지 이유를 모르겠다.

'괴수가 이상 증세를 보인다면, 거기에는 분명한 원인이 있다. 이 걸 놓치지 않는 게 프로 테이머의 자세!'

괴수황제 그랑뷔트가 몇 번이고 강조한 말이다.

〈세상에 나쁜 괴수는 없다〉, 불 가살이편에서만 해도 여러번 언

급된 문구.

그런데 뇌리에 저장된 지식을 뒤 져 봐도 원인이 짐작되지 않았다.

"이상하네… 당분간은 내가 데리 고 있을게. 실비아한테 전해줘."

"알겠습니다. 뭐… 더 시키실 일은?"

"아, 그거 있잖아. 시간 빠듯하니 까 바로 준비 시작해 줘."

"규모는 얼마나...?"

"최대한 크게. 기왕 일을 벌일 거 면 크게 해야지. 기억에서 잊혀질 수가 없도록."

에른이 씩 웃었다.

"그리고 아주 빼도 박도 못 하게. 비용은 내가 지불할 테니까 성대 하게 해 줘."

"적당한 업체를 알아보겠습니다. 그런데 회원들은 이거 알고 있습 니까?"

"얘기하러 가야지."

에른의 미소가 짙어졌다.

"분위기 어떻게 되려나 궁금하군."

*

궁금할 것도 없이 예상대로였다.

".…"뭐?"

"맙소사…."

"내가 잘못 들은 거지? 맞지?"

"저기 리더님, 제정신이야?"

새 클럽 건물은 모두의 마음에 들었다.

넓디넓은 1층 홀과 전원에게 하 나씩 주어진 개인 방.

시설도, 가구도 고급스럽고, 그래

서 만족스럽다.

최대한 많이 수용하려는 목적으 로 지어진 기숙사와 비교하면 그 야말로 궁전과도 같은 장소.

건물 뒤쪽으로 나가면 넓은 연무 장이 마련되어 있어 조용히 수련 에 매진할 수도 있었다.

'아카데미에 와서 이런 호사를 누 리게 될 줄이야.'

'우리 집보다 더 좋아...

'난 집이 없어.'

그런데 단꿈에 빠진 듯한 회원들.

그 넋 나간 여섯 개의 표정을 일 거에 깨뜨리는 에른의 충격 선언은.

"우리, 21클럽하고 연승전 하기로 했 다. 진 쪽은 클럽 문 닫는 조건으로."

"그, 그게 무슨 말이야...?"

"말 그대로의 말."

벤자민이 물었다.

"문 닫는다고 하면 정확히 어떤?"

"〈비상〉이란 이름은 사라지는 거고 우리 모임도 없어지는 거지. 물론 이 장소도."

"그… 그건 안 돼!"

"왜 그런 미친 짓을!"

회원들이 아우성쳤다.

아예 처음부터 주어지지 않았다 면 모를까.

이런 좋은 곳을 줬다 뻿다니.

줬다 뺏는 것보다 치사한 게 세 상에 어딨냔 말이다.

절대 용납할 수 없다.

아우성이 커져만 가자.

"잠, 잠깐. 얘들아."

휴인이 회원들을 진정시켰다.

"에른도 다 생각이 있으니까 하기 로 한 거겠지. 연승전 날짜가 언젠 데? 1년 뒤? 반년 뒤?"

"5일 뒤."

"하… 하하..... 호, 혹시 이거 테

인 그 인간이 꾸민 짓이야?"

휴인이 주먹을 쥐고 흔들었다.

"테인이라면 그러고도 남아. 대체 어떤 비열한 짓을 했길래?"

"별거 안 했어. 연승전 어떠냐고 묻길래 괜찮은 거 같아서 하자고 했지. 조건도 마음에 들었고."

*

에른은 미친 게 분명하다.

〈비상〉회원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그래도 입장은 조금씩 달랐다.

'나야 뭐… 비상 없어진다고 해서 마탑에 못 가게 되는 건 아니니까. 그건 그렇고, 앞으로 장학금은 어 떻게 되려나?'

약간은 무덤덤한 반응과.

'계란으로 바위 치기지. 21클럽, 강함. 우리, 약함. 결과? 뻔함. 당 연한 거잖아. 똑똑한 친구인 줄 알 았는데...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

'재밌긴 할 거 같다. 무리수인 거야 맞겠지만, 내 정확한 실력을 알 수 있긴 하겠어.'

좋은 경험으로 여기는 회원도 있고.

'난 믿어. 어렵겠지만, 에른이라면 무슨 수가 있을 거야. 그때 그 쾌

검만 봐도...

그래도 한 명만큼은 무조건적인 신뢰를 보냈다.

연승전 당일.

"진짜 어디가 이상해진 거 아니 야?"

셀리나가 혀를 내둘렀다.

대련 장소가 무슨 야외 연회장처 럼 꾸며져 있었다.

연승전을 위해 에른이 제1 훈련 장을 빌렸다는 얘기를 듣고 정신

나간 거 아니냐고 생각했었다.

'겨우 5대5 연승전 하면서 왜 그 큰 훈련장을? 그냥 아무 대련장에 서나 하면 될걸.'

그런데 막상 와 보니 바닥에는 융단이 깔려 있고 테이블엔 음식 까지 세팅되어 있는데....

대련보다는 거의 파티 분위기에 가깝다.

한곳에 모인 21클럽 회원들.

"이게 다 뭐야...

"자기가 알아서 준비하겠다더니,

이걸 위해서?"

다들 어처구니없어하는 가운데, 테 인은 관전자로 온 방문객들의 면면 에 주목했다.

"아니, 저분은...? 개망신을 이렇 게까지 공들여서 당하려고 하다니, 완전 돌은 놈이군."

[116 화]

"어... 2기사단장님?"

테인의 시선을 따라간 하르틴.

그의 눈에 놀라움이 떠올랐다.

옹기종기 모인 21클럽 회원들의 반응은.

"뭔 헛소리야. 기사단장이 왜 연 승전 따위를 보러."

"이게 평범한 연승전 스케일은 아

니지 않나?"

"그건 그렇지. 고용인들 차려입은 것 좀 보}. 대련 한 번 하려고 대체 골드를 얼마나 때려 박은 거야?"

"지금 그게 중요해? 정말 저분이 멜로 님이라고?"

모두가 테인을 바라보자 그가 고 개를 끄덕였다.

비웃음을 머금은 채로.

"맞아. 전에 뵌 적 있거든."

그리고 쏟아지는 독설.

"나 참… 조용히 지면 시간이 묻 어줄 수도 있었을 텐데. 곧이 왕실

기사단장 보는 앞에서 참패하는 굴욕을 맛보려는 건. 이거 뭔 신종 피학행위인가?"

"그러게.... 그래도 멜로 단장님 을 뵙게 됐으니까. 에른 덕분에 눈 호강 하네."

멜로 타니안.

눈호강이란 말이 틀리지 않았다.

길게 늘어뜨린 검은 장발의 소유자.

남자가 하면 굉장히 꼴 보기 싫 어지는 스타일임에도 그는 무난히 소화해 했다.

마냥 젊은 나이도 아니고 이제 40대에 접어든 중년인데!

나바로를 대표하는 [5 대 기사]의 일인.

왕실 기사단장이며 여전히 손꼽 히는 미남자.

뭇 여인들에게 사모와 동경의 대 상이면서, 그럼에도 남성들에게 질 투보다는 존경을 받는.

그가 곁을 지나가자 21클럽 회원 들의 눈이 몽롱해졌다.

"대체 저분을 어떻게 초대한 거지?"

"스틸가드잖아. 인맥이 있겠지."

그 추측이 맞았다.

멜로 타니안은 훈련장 한가운데 로 향했다.

마지막으로 비무대를 점검 중인 에른에게 다가가서.

"오랜만이다."

"아, 숙부님!"

돌아선 에른의 얼굴이 환해졌다.

멜로는 레바단과 형 동생 하는 사이 다.

두 사람 다 영웅급이며 나바로의 5대 기사로 꼽히는데.

나이까지 비슷해 라이벌 의식을 가질 만한데도 이상할 정도로 사 이가 좋았다.

2기사단장으로 취임해 바빠지기 전 에는 스틸가드에도 자주 방문해 와 서, 전생의 에른은 스스럼없이 멜로 를 대했다.

아버지가 실종되고 가세가 기울 면서는 어쩔 수 없이 서먹해지고… 나중에는 연락도 끊기게 되었지만.

그래도 마지막까지 손을 내밀던

사람 중 하나라 딱히 원망스럽다 거나 하진 않았다.

"왜 그렇게 반가워하지? 평소엔 소 닭 보듯 하더니."

"에이, 제가 언제 그랬다고 그래 요. 단원들은?"

"그거 때문에 이렇게 살갑게 대하 는 거구나? 당연히 데리고 왔지."

멜로가 턱짓을 했다.

열댓 명의 건장한 남자들이 정렬 한 채, 이쪽을 보고 있었다.

"어, 정말이네? 감사해요."

"네가 안 하던 부탁을 다 하는데, 이거 안 들어 줬다간 두고두고 섭섭 해 하겠다 싶었지. 그래서 억지로 휴가들 쓰게 하고 끌고 온 거다. 이 숙부의 노력을 알아주겠지?"

"그럼요."

멜로에게 부탁을 한 이유가 있었다.

2기사단은 1기사단과 함께 왕실 을 대표하는 무력 집단이다.

1기사단에 비하면 살짝 처지는 감 이 있긴 해도, 왼손도 오른손 못지 않게 중요한 법.

아카데미의 우수 졸업자들만 입 단 가능한 곳이고....

해서 당연히.

'21클럽 출신들 많이 왔네. 잘됐군.'

유서 깊은 클럽을 물려준 선배들 을 앞에 두고.

패배를 선사함은 물론, 손수 클럽 간판까지 내려 준다.

이보다 좋은 선물이 또 있을까?

그때, 멜로가 몸을 낮추어 속삭여 왔다.

걱정하는 투로.

"너… 자신 있는 거지?"

"물론이죠."

"하긴, 그러니까 이렇게 판을 벌 린 거겠지. 그렇지 않고선...

멜로가 주위를 둘러봤다.

그 외에도 꽤 많은 명사들이 이 자리에 모였다.

에른이 수도 각지에 날린 초대장 덕분이었다.

'21클럽 대 비상 클럽. 클럽의 존 폐를 걸고 붙는 연승전. 꼭 보러 오세요… 라고?'

'아카데미에서 뭔가 준비했나 본 데?'

'에이... 애들 싸움 보러 가서 뭐 하냐. 시시하게.'

'모르는 소리 말아. X밥 싸움일수 록 재밌는 거 몰라?'

그건 그랬다.

인간을 초월한 특급 기사들의 명 운을 건 대결이야 관전하는 자체 로 절로 가슴이 웅장해지겠지만.

막상 전투가 시작되면 너무 빨라 서 뭐가 보이지도 않고 어지럽기

만 할 뿐이다.

초대장에 흥미를 느낀 귀족과 부 호들.

미래의 에이스감이 누구인지 탐 색하기 위해 찾아온 각 가문의 인 사 담당자까지.

관전자들 수준이 너무 높아져 버 리자 아카데미에 비상이 걸렸다.

원장, 부원장이 교관들 죄 끌고 나와서 손님맞이 하고 있는 걸 보 면 말 다 했다.

"지더라도, 졌지만 잘 싸웠다… 이

런 반응이면 괜찮지. 그런데 변명의 여지도 없이 깨진다면."

"알아요, 숙부님. 이 자리에서는 내가 스틸가드를 대표한다는 거. 걱 정하시는 일 같은 건 없을 거예요."

"그래?"

멜로는 속으로 생각했다.

'막내가 원래 이렇게 어른스러웠 던가? 아니 애초에, 이런 일을 벌 일 능력이 되긴 했었나. 이건 애들 소꿉장난 수준을 넘어섰는데...

의아한 눈빛.

그가 손을 내밀었다.

에른이 맞잡자 찌릿한 느낌이 손 목을 타고 올라왔다.

[전투 악수].

의도를 알아차리고 실력의 일부를 내보이자 멜로의 낯빛이 변했다.

"너...'?"

"내 말 맞죠?"

"그, 그렇긴 하다만."

"아, 그리고 부탁 하나 더 들어주 시면 안 될까요?"

"어떤?"

에른은 멜로와 함께 한쪽 테이블 로 향했다.

거기 앉은 두 사람은 기사 아카 데미에선 쉽게 볼 수 없는 차림이었다.

로브를 둘러입은 캔달과 어떤 여자.

동행인 또한 마탑에서 온 것 같 았다.

"조카 왔구나."

캔달이 벌떡 일어나 에른을 맞이 했다.

"에이."

반가운 목소리는 옆의 얼굴을 보 자마자 쏙 들어가 버린다.

"너냐? 멜론."

"...멜론이 아니라 멜로다."

"멜론이나 멜로나."

"그게 같으면 널 캐달이라고 불러 도 되겠군. 한 3년 만이지? 캐달."

"난 상관없거든. 그럼 이제 자기가 멜론이라는 걸 인정하는 건가? 너 3 년 사이에 참 많이도 시들었다."

"너만 할까."

쌔애앵.

둘 사이로 냉랭한 기류가 흐른다.

에른이 흠흠 헛기침을 했다.

"유치하게 왜들 그래요? 음...r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멜로와 캔달의 앙숙 관계는 익히 아는 사실이라 쪽팔리긴 해도 이 상할 것까진 없었다.

그보다는, 자신을 보는 여자의 시 선 탓이다.

기이한 열기로 일렁이는 그녀의 눈빛.

그녀는 엄청난 미녀였다.

헐렁한 로브를 걸치고 있지만, 단 추를 제대로 여미지 않아서 안에 입은 의상이 그대로 보인다.

딱 달라붙어 몸의 굴곡이 도드라 지는 블랙 드레스.

드레스에 로브라니.

정말 괴이한 조합인데도 잘 어울 리는 게 신기했다.

'...누구지?'

기억을 더듬어 봤지만 알 수 없 었다.

'저런 미녀면 연회에서 한 번쯤은 마주쳤을 텐데? 하긴, 마법사니까 사교계하곤 담쌓을 법도.'

뚫어질 듯 이쪽을 바라보던 여자 가 혀로 자기 입술을 핥았다.

'...왜 저래?'

시선이 머무는 것도 잠시일 뿐.

에른은 목에 소름이 돋는 걸 느 끼고 캔달을 옆으로 끌고 갔다.

"저기, 숙부님?"

"o 으9"

"저 사람 누구예요?"

"아, 그게. 네 재능 말이다."

재능이란 말이 나오자마자, 에른 의 표정이 싹 굳었다.

"여기서 그 얘기가 왜 나오죠?"

"아니, 물어보니까."

그가 말하는 재능이란....

마법사들 사이에서 전설처럼 도는 이야기가 있다.

[미식안(美式眼)].

백만 명 중 하나 있을까 말까 하 다는 마법 재능.

목격했다는 소문만 무성하지 내 눈 이 바로 그 눈이다〜 라고 공식적으 로 밝힌 사람은 아직 나오지 않아서.

실제로는 그보다 더 희귀할 것이라 고 짐작만 하는.

'마법 수식에서 아름다움을 본다고 했나... 그 용어가 갑자기 떠올라서 다행이었지.'

미식안을 가진 사람은.

간결하면서 효율적인 수식에선 극 상의 아름다움을.

조금 비효율적이어도 발동은 되는

수식을 보면 그저 평범함만.

발동도 안 되는 엉터리 수식과 마 주하게 되면 그 끔찍한 자태를 견디 지 못해 머리를 쥐어뜯거나 비명을 지르게 된다고 하는데.

연구실에서 있었던 일은, 그저 에른이 [흡수]한 마법 지식이 대륙의 수준을 월등히 앞선 탓에 벌어진 해 프닝.

하지만 어떻게 그리 말하나.

믿어줄 리도 없고.

캔달을 납득시키려면 이 수 밖에는

없었다.

"그만 하세요. 저 스틸가드입니다. 제 길은 검이거든요?"

"알지, 알아. 근데 그 뛰어난 재능 을 썩힌다는 게 좀 그래. 꼭 마법人} 가 되지 않더라도 이걸 활용할 수 있는...

"그만하시라고 분명히 말했어요."

에른의 목소리가 나직해지자 캔달 이 찔끔하며 입을 다물었다.

"...넌 어째 갈수록 네 아버지를 닮아가는 거 같다."

"그 아버지에 그 자식이라고들 하 잖아요. 혹시 다른 사람한테 말하진 않으셨죠?"

"어, 뭐… 뭘?"

"미식안 얘기요."

"당, 당연히 안 했지. 우리 조카 앞 길 막을 일 있나."

6서클 마법사가 쩔쩔매는 모습은 쉽게 볼 수 있는 광경이 아니다.

"호오.…"

멀찍이 선 멜로가 눈에 이채를 띠 우며 이쪽을 쳐다봤다.

"그만하죠."

미식안에 대해선 아는 사람이 적으 면 적을수록 좋다.

괜히 멜로의 관심을 끌 필요는 없 었다.

"그래서 나한테 부탁할 일이라는 게?"

"멜로 숙부님하고 같이 해주실 게 있어요."

"그 멜론 인간하고?"

"네."

"이거 고민되네. 뭔데 그러지?"

에른의 말을 들은 캔달의 눈에 황 당함이 떠올랐다.

"...그걸 다 해 달라고?"

"달리 부탁드릴 사람이 없어서. 와I, 싫으세요?"

캔달이 뒤를 돌아봤다.

미녀 마법사와 눈빛 교환.

그가 한숨을 푹 쉬었다.

"하, 하지 뭐...

"거절하실 줄 알았는데 의외로 선 선히 승낙하시네요? 뭐 찔리는 거라 도 있으신가?"

"하하, 그, 그런 게 있을 리 있나. 사랑스런 조카 부탁인데. 멜론하곤 말도 섞기 싫지만… 참아야지."

"그럼 저쪽에 준비된 자리로 가셔 서요...

-아, 아. 반갑습니다. 관전자 여러 분.

공명 마법으로 증폭된 목소리가 곳

곳으로 울려 퍼졌다.

착석한 방문객들은 의아해하며 주 위를 두리번거리는데.

-놀라실 거 없습니다. 캔달 리스케 르라고 합니다. 마탑의 대표 마법사 죠. 오늘 연승전의 음향과 진행 및 중계를 맡았습니다.

"...리스케르 경?"

"그분도 연승전 구경 온 건가?"

-도움 말씀 주실 놈… 아니 분 나 오셨습니다.

-멜로 타니안입니다.

중후하고 듣기 좋은 목소리.

"멜로 타니안? 2기사단장 목소리네?"

"...뭐 이런 연승전이 다 있어? 무슨 왕실 토너먼튼가?"

"6서클 마법사에 영웅급이 해설?! 왕실 토너먼트도 이렇게는 안 해."

"여태껏 살면서 별꼴을 다 봤지만 이런 구경은 처음 해봄세."

덕분에 관중들의 분위기는 후끈 달 아올랐다.

반면, 비무대 옆 대기석에 앉은 〈비상〉회원들의 기분은 땅을 파고 들어갔다.

벤자민이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이… 이거 꿈이지? 좀 말도 안 되 게 생생하긴 한데, 꿈이 맞을 거야."

넋 나간 얼굴로 끄덕거리는 데이븐.

"그, 그럴걸?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상황이잖아. 이런 일이 실제로 벌어질 수가 있어?"

"아니."

바리온이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되게 생생한 꿈이라면 내 가 좀 꿔봐서 알거든."

"아카데미 관계자들에 선배들, 왕 실 기사단, 테아로스의 명망가들. 죄 다 우리의 패배를 구경하려고 모여 있지만... 이건 지독한 꿈같은 게 아 니야. 현실이지."

[117 화]

연승전.

기사 왕국 나바로에선 대련, 결 투, 토너먼트만큼이나 흔히 들어볼 수 있는 말이다.

개인전을 단체전으로 확장한 방식.

일대일 대결의 승자는 다음 대전 에도 이어 출전한다.

지치고 힘들어도 그만둘 수 없다.

기권하기 전까지는.

그렇게 참가자가 남지 않을 때까 지 대결을 계속한다.

최후의 승자가 나온 팀이 최종 승리.

그런데 단체전 방식이 꼭 승자 연전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멜론… 아니 멜로 경.

캔달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가 마법에 의해 증폭 되어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전부터 궁금했습니다만, 단체전 을 꼭 연승전으로만 할 필요는 없 지 않습니까?

-연승전이 아니라면 어떤?

-순번을 정해서 다전제로 승패를 정해도 되고, 또 진정한 단체전이 라면 다대다 전투가 더 걸맞지 않 나 하는데.

-푸핫, 진정한 단체전? 연승전 방식으로 정착된 데에는 다 이유 가 있어요. 그것도 모르는 겁니까?

-나 마법사거든요? 여기에 기사만 있는 것도 아니고. 검의 길을 걷지 않는 관중 분들을 위해서 설명 좀.

-캔달 경이 언급한 방식으로 단 체전을 진행할 때도 있었지요. 과 거에는. 그런데 앞서 말한 방식들 에는 큰 문제가 있습니다.

_어떤...?

-전략성. 다전제는 어떤 매치업 이 나오는지가 관건이 됩니다. 앞 서는 전력이어도 매치업에서 불운 이 따르면 완패라는 뜻밖의 결과 가 나오기도 하지요. 그리고 다대

다 전투는 지휘관의 기량과 그 휘 하의 전술 수행 능력에 영향을 받 기 때문에.

캔달이 기사가 아닌 관중들을 대 변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몇몇 이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략성이 있어야 좋은 거 아닌 지요?

-문외한다운 질문이군요. 아닙니다.

—왜...?

-단체전은 기사단이 [스쿼드]의 우열을 가리기 위한 목적으로 하 는 것. 다른 모든 요소를 배제하고 순수한 힘과 체력의 총합으로 부 딪히자는 겁니다. 그런 점에서, 연 승전은 가장 적합한 방식입니다.

"아, 그래서 승자 연전을 하는 거 였구나… 몰랐네."

이제야 알았다는 듯 끄덕이는 사 람들.

캔달과 멜로가 대화를 주고받는 동안, 비무대에서는 첫 대련이 준

비되고 있었다.

21클럽의 선봉은 테인.

"이거 참...

그는 주춤주춤 걸어 나오는〈비 상〉의 선봉을 확인하곤 헛웃음을 흘렸다.

"에른 이 새끼. 하여간 유머 감각 은 인정해 줘야 한다니까."

-저 학생은 테인 칼슨이군요.

-칼슨이면?

-공작 저하의 장남. 그런데 상대 편도 낯이 익은데...?

-그러게요. 좀 닮은 것 같기도?

캔달의 말대로 두 사람은 닮았다.

테인은 냉막한 인상, 오만한 표정.

반면 마주 선 상대는 불안한 눈빛 과 주눅 든 자세라… 너무 상반되는 데도 공통점을 찾을 수 있었다.

그 이유는.

-멜로 경, 주최측이 마련한 자료를 보니까…〈비상〉의 선봉은 휴인 칼 슨이라고 합니다.

-형제 대결?

-첫 경기로 칼슨 대 칼슨이라. 재 밌네요.〈비상〉에는 스틸가드의 3남 인 에른이, 21클럽엔 차남 제이슨이 있는 걸로 아는데… 이러다 스틸가드 대 스틸가드가 나올 수도?

꾸욱.

목검을 쥔 손이 축축했다.

중압감을 견디지 못해 질끈 감아 버린 눈.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흘렀다.

" 후우...

심호흡과 함께.

휴인이 눈을 떴다.

어지러운 시야를 가득 채우는 것 은 가장 증오하는 동시에 두려워 하는 얼굴이었다.

유년기의 악몽 같은 존재이자 그 의 영혼에 목줄을 채워버린 인물.

"널 나한테 붙이는 건 장난하자는

거지? 겁먹은 꼬라지를 보아하니 자진해서 나온 건 아닐 테고."

테인은 휴인을 벌레 보듯 쳐다봤다.

동생한테 이런 눈빛을 내비치는 형이 또 어디 있을까.

아무리 태어난 배가 다르다고 해 도 그렇지, 두 사람은 엄연한 혈육 이었다.

"대답 못 하는 거 보니까 맞는가 보구나. 무슨 도살장에 끌려 나온 송아지 같군."

"도망자는 도피처로 도망친들 환 영받지 못하는 법. 비상에 붙어 봐 야 여전한 찬밥 대우일 테지."

"아, 아닌데? 의견 조율하고 나왔 거든? 그리고 에른이 형 같은 줄 알아? 얼마나 잘해주는데."

"흐음…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

테인은 반박하지 않았다.

대신, 싸늘하고 감정 없는 눈으로 휴인을 내려다볼 뿐.

"그런데 너…. 못 보던 사이에 꽤 나 건방져졌다?"

"뭐, 뭐가? 사람들 기다리는 거 안 보여? 대, 대련이나 시작하지?"

휴인이 목검을 꺼내자 판정을 담 당한 교관이 다가와서 물었다.

"준비 끝났나?"

테인이 고개를 저었다.

"첼라스 교관님이시죠? 잠시만요."

"뭐 잠시만? 귀빈들이 저렇게 기 다리고 있는데!"

"잠깐이면 됩니다."

교관을 물린 테인이 휴인에게 말 했다.

"시간 없으니까 용건만 말하지.

돌아와라."

"모지리 반푼이일지라도 칼슨은 칼 슨. 칼슨이 스틸가드 밑에 있으면 보 기 안 좋다."

"...미쳤어? 내가 왜?"

"지금 네 앞에 누가 있는지 봐라."

"누구긴 누구야? 형이지."

" 결국."

테인이 말을 잘랐다.

"도망쳐 봐야 내 손아귀 안이란 거 다. 지금은 에른이란 피난처가 편하 고 좋겠지. 근데 걔가 널 영원히 보 호해 줄까? 결국은 내 앞으로 돌아오 게 될 거다. 그때는 무릎 꿇린 채로."

맞는 말이다.

테인은 칼슨 가의 장남이고 정식 후계자이니까.

공작위를 물려받을 명분도, 능력 도 충분히 있는 그이다.

"기권해라. 그리고 내 밑으로 돌아

와. 그러면 배반한 건 없던 일로 해 주지."

"...정, 정말?"

"난 뱉은 말은 지키는 사람인 거 알잖아? 보복도, 징벌도 없어. 그냥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오는 거다."

"원래... 대로?"

"어차피 비상 클럽은 오늘로 문을 닫 게 된다. 너 따위가 험난한 아카데미 에서 홀로 생존할 수 있을 성싶으냐."

뇌리에서 온갖 생각들이 휘몰아

치기 시작했다.

휴인이 고개를 떨궜다.

"...저 친구 왜 저러지?"

"컨디션이 안 좋은가?"

관중들의 눈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이 최악의 형제 사이를 모르는 이들은 의구심을 품을 뿐이었지만.

좀 아는 사람들과 21클럽 회원들 은 휴인이 그럼 그렇지 하는 반응 이었다.

다만, 비상의 대기석에서는 걱정 스러운 시선만을 보내고 있었다.

"저기, 클럽장. 이게 과연 맞는 걸까...?"

"그건 보면 알게 되겠지."

한가운데에 앉아 있는 에른.

회원들과는 달리 그의 눈빛은 곧 고 맑았다.

"테인이 선봉으로 나올 줄 알았다 면서. 그걸 알고도 휴인을 내는 건 너무 가혹한데...

"아니."

에른이 고개를 저었다.

"언젠가는 넘어야 할 산이고 벗어

나야 하는 그늘이야. 그날이 오늘 일 뿐이지."

"그래도...

휴인은 여전히 머리를 푹 숙이고 만 있다.

"공작님 자제분이 참 특이하구만."

"대련하러 나와서 왜 기도를 하나?"

관중들의 술렁임이 커져만 갔다.

그러나 다시 눈을 감은 휴인에게 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정적.

기이한 적막과 고요 속에서 앞으 로 테인이 가해올 위해들이 떠올 랐다.

'테인이 공작이 된다면… 그렇게 되면 난...

부들부들 떠는 휴인.

테인이 비아냥거렸다.

"슬슬 결정을 내려야 하지 않겠어? 이러다 관중들 무대 난입하겠군."

'이대로는 안 돼!'

휴인은 벌벌 떨리는 손을 주머니 안으로 가져갔다.

용기의 반지가 손끝에 잡힌다.

고마운 사람이 선물해 준.

손가락에 끼우자 가슴에서 뜨거 운 무언가가 솟아나며 그가 한 말 이 문득 기억났다.

'넌 공작이 될 거다.'

눈을 뜨고 정면을 응시한다.

두 줄기 푸른 눈빛이 허공에서 충돌했다.

의외의 결기에, 테인이 흠칫했다.

".…"뭐지?"

놀란 그에게 목검을 겨누며.

휴인이 입을 뗐다.

"시작하자, 대련."

"흥, 후회하지나 마라."

"안 흐 11. 어차피 죽었을 몸."

"뭐?"

이미 한 번 에른에게 목숨을 빚졌다.

다시 테인의 손아귀로 돌아가게 된 다면 못다 한 일을 마무리 지으면 그만이다.

"...내 발로 돌아가는 일은 없어.

절대."

그리고 선봉전이 시작되었다.

두 클럽의 명운을 건 첫 번째 대결.

-어떻게 보십니까, 멜로 경?

-모두가 예상하는 바대로 되지 않을지.

-그 말은 실력 차이가 많이 난다는?

-그렇죠… 결과는 나와 있다고 봐야 합니다.

멜로의 말대로였다.

퍽! 퍽! 퍽! 퍽!

"컥!"

쓰러진 휴인 위로 목검이 쏟아졌다.

이제는 대련이라고 보기도 어렵 고 거의 몽둥이찜질에 가까웠다.

"모자란 녀석! 어릴 때부터 예측 능력이 형편없더니 설마 이렇게 될 줄도 몰랐던 거냐."

"흐, 흐억...

휴인은 제대로 숨도 쉬지 못했다.

관중들은 쫙 펼친 손가락으로 눈 을 가렸다.

"어우, 애들 싸움이라고 우습게 볼 게 아니네."

"지켜보는 내가 다 아프군...

"두 사람 형제 맞아? 뭐 저렇게 살벌해?"

'너무 심하게 하면 이미지 나빠지겠어.'

테인은 목검을 거두고 돌아서서 턱짓했다.

"거… 거기까지!"

첼라스가 마나를 담아 외쳤다.

"패배를 인정하나, 휴인 칼슨?"

"대답 없으면 진 걸로 간주하겠다."

그 말에.

"인정 못 해!"

시체처럼 쓰러져 있던 휴인이 벌떡 일어나 테인의 등으로 달려들었다.

방심을 노리고, 마지막 남은 의지 와 힘을 모조리 긁어모아 가하는 일격!

".…"나 참."

그러나 테인은 보지 않고도 알고 있었다.

"그런다고 날 이길 수 있는 게 아 니란... 음?"

돌아서는 순간, 테인의 눈이 화들 짝 커졌다.

쑤웅!

휴인의 주먹이 코앞으로 날아_오고 있다

바람을 가르며.

'...미친?!'

머리가 새하얘진다.

뭐 어떻게 응수해야 하는지.

떠오르지 않았다.

뭔가를 하기에는 너무도 짧은 시 간만이 주어져 있어서.

퍼억!

'젠장!'

퍼 퍼 퍼 퍽!

콰득! 콰드득!

테인은 인상을 쓰며 다시 휴인을 매타작했다.

"그, 그만! 테인의 승리다!"

첼라스가 달려와서 둘 사이를 갈 라놓았다.

-방,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겁 니까, 멜로 경?

-휴인 칼슨… 졌지만 칭찬해 주 고 싶은 한 수였습니다.

—네?

-테인의 코를 보세요. 이걸 위해 서 맞고만 있었던 겁니다.

-그 말은?

-어차피 지는 건 확정이었으니까요.

누가 봐도 압도적인 테인의 승리.

그러나 그는 그리 자랑스러워 보 이지 않았다.

일그러진 얼굴.

코에서는 피가 줄줄 흘러나왔다.

"젠장! 이게 무슨 굴욕이야!"

뚜둑.

테인은 부러진 코를 맞추곤 손등 으로 피를 닦으면서 들것에 실려 나가는 휴인에게로 갔다.

"미친놈. 겨우 이거 하려고 마나 를 아껴둔 거냐."

"...헤헤. 덕분에 한 방이라도 먹 일 수 있었잖아. 에른 말이 맞았어."

".…"뭐?"

테인은 비상의 대기석으로 고개 를 돌렸다.

에른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한쪽 눈을 찡긋 해 보이는 그.

"휴인을 붙인 게 이거 때문에

테인의 눈동자에서 불길이 화륵 피어올랐다.

"이따위 장난이나 친 걸 후회하게 해 주지."

분노로 떨리는 목소리가 비무대를 지나쳐 귀로 들어왔다.

'장난친 거 아닌데.'

에른은 만족한 듯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반지의 도움을 받긴 했지만 해낸 건 해낸 거다.

평생을 복종하고 두려워한 형의

코삐를 아작냈으니.

'아주 의미 있는 일이지.'

휴인이 칼슨다워지기 위해서는 테 인이란 족쇄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휴인은 그걸 해냈다.

모두가 주목하는 자리에서.

족쇄를 푸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깨뜨려 버리면서.

선봉전을 내줘도 될 만한 가치가 있었다.

'그것도 그렇고 누가 나갔어도 결 과는 같았을 테니까.'

테인이 부들대며 각오한 대로였다.

그는 차봉과 중견으로 나온 미타와 샤펠도 깔끔하게 격파해 버렸다.

"...에, 에른? 이거 어떻게 해?"

"어떡하긴. 다음 차례는 바리온이 다. 가서 보여주고 와."

[118 화]

바리온 대 테인.

테인이 파죽의 3연승을 거두자 더 이상 긴장감 넘치는 승부라는 표현 을 쓰기 어려워졌다.

아니, 그런 정도를 넘어서서.

-선봉이 눈 시퍼렇게 뜨고 남아 있는데 네 번째 주자가 나와야 하 다니....

캔달이 조용히 혀를 찼다.

'이거 완전 밸런스 붕괴인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멜로 경?

-안 좋게 생각합니다.

-아니, 그런 뚱한 반응은…. 그래 도 저보다는 학생들 잘 아실 거 아닙니까. 어… 테인에 대해서 말 씀해 주시죠.

-어떤 부분을?

-혹시 테인 학생은 21클럽의 슈 퍼 에이스? 선봉으로 나와서 기세

확 잡고 가려는 전략이죠, 이거?

-그렇다고 볼 수도 있고.

-그럼 테인만 잡으면 〈비상〉도 희망이 있는 거 아닙니까?

-글쎄요. 테인이 그 정도라고 하 긴 어렵습니다. 자료를 보면 3학 년 서열 4위라. 21클럽에는 3학년 서열 1위, 3위도 있습니다.

_음.

-거기에 상대하러 나온 바리온이 라는 학생은 2학년이고. 서열이… 97위? 이거 뭐 가망이 없는데요.

-하하, 가망 없다는 말씀은 좀.

연구실에서 캔달은 호랑이보다 무서 운 대표 마법사로 통했다.

차라리 귀신을 속이지 스승을 속 인다는 건 불가능했다.

도제 마법사들 갈아 넣어서 연구 실 적 만들어 내는 데에는 도가 터 있고.

연구실 2년 차까지는 몇 마디 말로 도 눈물 쥐어짜게 만드는 독한 혀의 소유자.

본인부터가 6서클 실력자라 말만

앞서는 스타일도 아니다.

그런 무게감 있는 인물.

마탑의 카리스마로 불리는 캔달 이다.

그런데 그는 오늘, 이 자리에서 왠 지 모를 흥분과 짜릿함을 느꼈다.

'왜 이렇게 기분이 업돼 있는 거지?'

억지로 와 앉아 있는 건데.

에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는 거라 처음에는 부글부글 짜증만 올라왔다.

그런데 이제 그런 감정은 완전히 가라앉아 버렸다.

왜일까?

워낙 똑똑한 사람이라 곧 이유를 알아차렸다.

'나… 무대 체질인지도? 에른 때 문에 몰랐던 적성을 발견한 건가?'

그의 쇼맨십.

환호하는 관중들을 보면 신이 나 고, 반응이 없으면 기운이 빠진다.

그래서 캔달은 다 죽어가는 분위 기를 살리기 위해 애썼다.

-가망이 없는 걸 없다고 하는데.

— 이 새 끼 … 아니 단장님 . 그러 지 마시고. 희망적인 얘기를 해주시죠.

- 여기 보니까 바리온 학생이 최근 대련에서 2학년 서열 3위를 꺾었다 고 하네요.

-그, 그럼 학년 에이스 아닙니까?

'.…"쟤가?'

관중들의 시선이 몸 푸는 바리온 을 훑었다.

코삐가 부러진 채이고, 3연전을 치르면서 땀에 푹 젖고 생채기도

많이 난 테인이다.

그럼에도 테인은 귀티가 잘잘 흐 르는 데 반해 바리온은.

"그냥 평민 애 같네."

"그것도 아직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그럴 수밖에.

바리온은 산골 출신 고아다.

소질과 잠재력은 눈에 띄는 종류가 아니니 얕잡아 보는 것도 이상한 일 은 아니다.

의외라는 눈빛들이 그를 훑고 지 나쳐 가고.

-에이스라. 그렇겠죠. 그래도 어렵 습니다.

-왭니까? 2학년이나 3학년이나 겨우 한 살 차이인데.

-저 시기의 한두 살 차이는 크지 요. 1년 사이에 오러 유저가 되어 버리는 경우도 종종 있곤 하니.

-아니, 희망적인 분석을 해 달라니까?

-.…"달라니까?

—달라… 아하하, 달라는 겁니다.

바리온과 테인이 마주 보고 섰다.

교관이 두 사람의 상태를 점검한다.

캔달이 멜로의 귀에다 비난하듯 속삭였다.

'분위기 살려 놓으면 조지고, 살려 놓으면 조지고. 그거 좀 그만하지?'

'내가 뭘?'

'긴장감 유지시켜 달라고.'

'뭐 잘못 먹었나? 왜 그래?'

준비가 끝나자 첼라스 교관이 물러 나고 네 번째 대결이 시작되었다.

타앗!

먼저 비무대를 박찬 것은 이번에 도 테인이었다.

스스슷!

4연전 중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 는 쾌속한 움직임.

캔달이 한숨을 쉬었다.

—어... 어떻습니까?

-안타깝게도 빠릅니다. 변수가 있 다면 테인의 체력 정도였는데, 여기 까지 너무 수월하게 와 버려서 오히 려 몸만 풀린 거 같네요.

-허어.

-상대의 선봉에 카드를 세 장이나 쓴 건 뭐, 그럴 수도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그렇게 했으면 최소한의 성과 는 얻었어야 합니다. 체력을 다 빼놓 는다거나.

-아, 예.

-비상과 21클럽. 스쿼드 차이가 너 무 나는군요. 슬슬 의문이 듭니다. 왜 두 클럽이 대결하기로 한 건지....

멜로의 눈에 실망감이 떠올랐다.

그러나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박진감이라는 것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파파파팟!

슈읏!

현란한 풋워크, 살 떨리는 거리재기.

그리고… 이윽고 충돌.

따닥! 탁, 탁!

E}E} 타 탁!

오가는 서로의 검격이 눈을 어지럽

혔다.

-너, 너무 빠른데요? 멜로 경. 지 금 서로 몇 대씩 때린 겁니까?

-총 25합을 나누었고 테인의 공 세가 14합, 바리온이 11합입니다.

-14대 11이면 바리온 학생도 꽤 하는군요.

-그건 스코어가 아닌데… 오히려 그 반대라고 보}야.

앞선 세 경기와는 비교할 수 없 는 수준 높은 대결이었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거 없다더니

이 집이 그러네.

...하고 퍼지던 수군거림이 쏙 들어가고, 관중석은 침 삼키는 소 리만 들릴 정도로 조용해졌다.

바리온과 테인은 3급 중에서도 상 급의 경지.

현란한 오러를 뿌리며 싸우는 상위 기사들의 대련에 비하면 비주얼적으 론 좀 쳐질지는 몰라도.

두 사람 다 기술적으로는 거의 완 성되어 있고, 또 공격 위주의 스타 일이라 보는 재미가 상당했다.

'윌리엄이 자존심 접고 승복할 만 하군. 왜 이렇게 세?'

미세하지만, 조금씩 밀리고 있다.

우위를 뺏기지 않으려면 더 많이 움직여야 한다.

테인은 이를 악물고 검을 휘둘렀다.

따다닥! 따닥!

합을 겨룰수록 드는 생각은 의문, 의혹, 의아함.

바리온이 지닌 실력에 비해 유독 대련에 약해 하급반까지 내려갔다는 얘기는 워낙 유명해서 테인도 알고

있었다.

'...그래도 상급반 수준이었을 뿐이 지 1, 2위를 다투던 건 아니었잖아. 그 런데 그 이상?! 이게 말이 되는 건가?'

그러나 테인이 모르는 게 있다.

올라가기는커녕 수직 낙하하기만 하 는 서열, 이대로라면 언젠간 찾아오 고 말 퇴학이라는 기사 실격 판정.

여기에서 어떻게든 벗어나기 위 한 바리온의 몸부림, 절치부심을.

수모와 멸시, 그리하여 더더욱 이 를 악물고 노력.

감옥살이 같았던 2년은 헛된 시 간이 아니었다.

쑤웅!

퍽!

정타가 나왔다.

갈비뼈가 부러지는 듯한 충격.

"크헉!"

테인의 입에서 헛바람이 튀어나 왔다.

겨우 쳐든 목검 위로 마나가 잔뜩 실린 바리온의 연격이 쏟아졌다.

'안 되겠어.'

실력 차를 느낀 테인이 휙 몸을 날 리자 관중석에서 실망 가득한 한탄이 터져 나왔다.

-테, 테인 학생이 데굴데굴 굴러서 공격을 피합니다. 비무대가 더러워 서 청소하는 걸까요.

-그럴 리가.

-멘트 좀 받아 주죠? 급 밀리기 시작하는 건 아까 말한 체력 변수 가 터졌다고 보}야?

-전혀 아닙니다.

멜로가 고개를 저었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오히려 몸 만 풀려서 테인에게 더 좋아졌다고.

-...그럼 그 뜻은?

수도 귀족들, 그리고 클럽의 대선 배들 앞에서 창피한 꼴을 보였는 데도 테인은 개의치 않았다.

'비난의 화살… 얼마든지 쏘라고 해. 전부 경외의 눈빛으로 뒤바꿔 주지.'

얼굴을 아래로 하고 바닥에 엎드 린 자세.

'이걸 내가 쓰게 될 줄은 몰랐는 데...

테인은 남몰래 입으로 손을 가져 갔다.

-테인 학생… 혹시 큰 충격을 받 은 건 아닌지? 뇌진탕이라면 큰일 인데요. 멜로 경?

-제가 보기엔 그냥 창피해서 저 러는 것 같습니다만….

그 말대로였다.

교관이 상태를 확인하러 가니 테 인은 괜찮다며 툭툭 털고 일어나 서는 바리온 앞으로 왔다.

"계속하지."

"...오세요."

"이번에는 다를 거다."

"보면 알겠죠."

"건방진 놈. 자신감 충만이라 이거냐?"

파스슷!

대련을 재개하자 테인의 몸이 순 간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곧이어.

탁! 탁! 따닥!

굴욕감이 그를 각성시킨 것일까.

잠깐의 공수 교환 후.

따다다다다다닥!

테인의 공세가 바리온을 완전히 짓눌러 버렸다.

'이, 이게 이-닌데?'

지켜보는 관중들과 마찬가지로, 바 리온은 숨도 쉬기 어려워졌다.

손에 쥔 땀이 검병 아래로 뚝뚝 흘러내린다.

'갑자기 이렇게 사람이 달라질 수 있는 건가?'

묵직하게 들어가던 공격은 솜방망 이가 되어 버렸고 철벽같은 방어는 놋그릇처럼 맞을 때마다 우그러진다.

"컥!"

바리온이 피를 토했다.

마나를 끌어올려 방비했음에도 해 소하지 못한 충격이 내부로 흘러들 어 내장 기관을 뒤흔든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테인의 무자비한 타격.

-멜로 경, 어떻게 된 겁니까?

-내가 뭘…?

-바리온 학생 실력이 더 뛰어나다면 서요?

-그런 말한 적 없습니다.

-말로는 안 했어도 뉘앙스가 그 랬잖아요!

-잘 모르겠는데…. 아무래도 승패는 갈린 거 같으니 중지시켜야 되겠습니다. 교관님?

꼭 2기사단장의 권위 때문이 아니 더라도 교관이 개입해야 할 타이밍 이었다.

첼라스가 다시 둘 사이를 갈라놓았다.

"여기까지다."

"아, 아뇨... 더 싸울 수 있습니다!"

바리온의 눈에 핏발이 섰다.

제 몸 하나 가누기 힘든 상태로

보이는데도 그는 간신히 똑바로 서서 목검을 들어 올렸다.

"대런… 계속할 겁니다… 교관님...

"가, 가능하겠어? 왜 무의미한 짓을."

"무의미하지… 않아요. 단체전이니 까요...

테인의 체력을 조금이라도 더 빼 고야 말겠다는 결연한 의지.

"말려야 하는 거 아닐까?"

미타의 말에 에른이 고개를 내저었다.

"내버려 둬."

"우린 바로 내려오라고 했으면서 바리온은 왜?"

그녀와 샤펠은 테인에게 패배한 탓 에 여기저기 검붉은 멍이 들어 있긴 했지만, 비무대에 선 바리온에 비하 면 멀쩡함 그 자체라고 봐야 했다.

"내가 이런 판을 왜 만들었다고 생각해?"

"그...

"미쳐서? 정신 나간 변덕 때문에? 다들 그렇게 생각하지?"

회원들은 그렇다고 대답하지 못했다.

"어, 아니...

"오늘은〈비상〉을 완성하는 자리다."

"그게 무슨 말이야?"

"휴인도 그렇고, 다른 회원들도 그렇 고. 다 뭔가를 얻어갈 거야. 근데 바 리온은 아직 날개를 펼치지 못했거든. 괴로워도 좀 기다려 주자."

퍽! 퍽! 퍼억!

퍼퍼퍽!

고조되었던 긴장감은 가라앉은 지 오래였다.

이제는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구

타만 이어질 뿐.

쓰러진 바리온에게 테인이 애원하 듯 말했다.

"야… 나도 지친다. 보는 시선도 있 고. 그만 좀 하자."

O O...

바리온은 붉게 웃으며 고인 핏물 을 퉤 뱉어냈다.

"그, 그게 내 목적이거든?"

"이러거나 말거나 어차피 비상은 지게 되어 있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건데?"

그러게 왜 이렇게까지 하고 있는 걸까.

테인의 말을 들으니 낯선 질문처 럼 느껴졌다.

'비상이 폐쇄되는 걸 막기 위해서?'

글쎄다.

클럽에서 제공하는 혜택들을 놓치 고 싶지 않기는 하다만, 꼭 그래서 만은 아니 었다.

'테인 말이 맞지. 이런다고 승패가 달라질까.'

하지만 이대로 내려갈 수 없다.

스스로 용납이 안 되었다.

"알 것 같아."

"...보답할 방법이 이것밖에 없 으니까. 나처럼 모자란 놈이 할 수 있는 건 역시."

"뭐라는 거야?"

바리온이 비척비척 일어났다.

테인은 그가 검을 주울 때까지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바리온이 다시 히쭉 웃었다.

"...진짜 그러네."

"누, 누구한테 말하는 거냐?"

테인이 의아해하며 시선을 따라가 자 대기석에 앉은 에른이 나왔다.

미소를 띠우며 입술을 달싹거리는 그.

바리온은 테인은 안중에도 없이 고개를 끄덕여 댔다.

환한 웃음을 지으며.

-저 두 사람,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바리온 학생은 많이 맞아서 머리 가 이상해진 모양이군요. 근데… 클 럽 리더 에른? 4연패를 눈앞에 두고 웃고 있어요?

테인이 목검으로 바닥을 찍었다.

"지금 뭐 하자는 건데? 패배를 인 정하든지, 계속 싸우든지. 둘 중 하나만 해."

"천사님이 나한테 해준 말이 있어. 이 세계의 주인은 나이고, 그래서 뭐

든 할 수 있다고. 덕분에 눈을 뜰 수 있었지."

"...미친 거냐?"

"에른이 그러네. 그때하고 비슷한 상황 같지 않냐고. 여긴 꿈이 아니고 난 그냥 뭣도 아닌 2학년일 뿐이지 만, 해낼 수 있을 것 같지 않냐고."

바리온이 손에 힘을 주었다.

마지막 남은 마나와 잠력을 전부 긁어모으면서.

그리고.

화아아아앗!

우윳빛 광채가 바리온의 검을 뒤덮 었다.

[119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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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란 관중들이 기립했다.

양측 대기석, 특히 21클럽의 회원 들은 숨을 멈춘 채, 눈을 비비고 또 비벼 보지만.

그러고도 자기가 본 것을 믿지 못 했다.

캔달이 말을 더듬었다.

-방, 방금 그거....

-오러 맞습니다. 그것도 아주 선명한.

-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죠?

-다 봐 놓고 굳이 반복은. 우리 모 두 목격한 겁니다. 새로운 오러 유저 의 탄생을.

왕실 2기사단장의 공언.

공신력은 확실하다.

대륙에, 아니 나바로만 해도 오러 유저는 많지만 열일곱에 2급은 대단 한 업적이었다.

두고두고 언급될 만한.

"자네, 오러가 처음으로 생성되는 순 간을 본 적이 있나?"

"있을 리가. 수확한 포도가 숙성 되는 과정을 본 적은 있어도."

"그건 양조장만 가면 볼 수 있는 건 데. 아무튼, 나만 처음이 아니었군."

"대단해.... 이토록 아름답고! 이렇 게나 처절하다니."

도처에 널려 있는.생화만 해도, 정작 개화하는 순간을 목격하기란 어 렵다.

그런데 기사혼의 상징인 오러.

그 찬란한 빛이 최초 발현되는 바로 그때를 목격하다니.

관중들은 전율에 휩싸인 채, 이 놀 랍고도 상징적인 순간을 음미했다.

누가 봐도 패배가 확실했던 상황.

교관의 판정을 거부하며 처참해질 지경까지 버틴 끝에 만들어 낸 것이 기에 감동은 배가 되었다.

다소 감성적인 몇몇은 시큰거리는 코 를 찡긋거리거나 몰래 눈시울을 쿡쿡 찍어 대기도 했다.

-대단하긴 합니다만… 아쉽네요. 테인 학생의 4연승입니다.

-혼신의 힘을 쏟아 부어 오러를 만들 어 냈지만, 단 일 함이 모자랐습니다.

쿵!

어느덧 오러도 사라져 버렸고.

바리온은 테인에게 목검을 겨눈 자세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어...

테인의 낯빛은 사색으로 변해 있었다.

바리온이 목검에 우윳빛 오러를 휘감고 다가왔을 때는, 정말 심장 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갑자기 태엽 풀린 인형처럼 멈춰 버렸기에 망정이지.

'...한 번만 제대로 휘둘렀어도.'

쓰러져 있는 건 바리온이 아니라 자신이 될 뻔했다.

"어서 옮겨...!"

교관들이 황급히 달려와 바리온 을 들것에 실었다.

이제는 오러 유저가 된 귀하신 몸.

자칫 잘못되어 회복에 문제라도 생긴다면 국가적인 손실이었다.

관중석에서는 눈치 게임이 시작됐다.

각 가문의 인사 담당자들.

"어이, 클라우스?"

"오랜만이다, 다리우스."

"우리 정보 공유 좀 할까? 들어본 적 있어? 바리온이란 이름?"

"아니, 완전 낯설지. 넌?"

"나도 그래. 보고서에 이름 한 번 올 라온 적 없는 거 같은데."

"성은? 진행자들이 성을 말했던가?"

"안 했지."

"그렇다는 건...

평민!

그 말은 특정 가문 소속이 아니라

1— IX

두 사람의 눈이 번쩍 뜨였다.

"비켜!"

"악! 비겁한!"

추격전이 벌어졌다.

그들뿐 아니라 다른 가문의 인사 담

당자들도 들것을 따라 달리고 있었다.

바리온에게 가장 먼저 영입 제의를 넣기 위해.

'의식도 없는 애한테 뭔. 그리고, 그런다고 영입이 되나? 하여간 설 레발들은...

아까부터 에른의 입꼬리는 내려올 줄을 몰랐다.

바리온이 만신창이가 된 것은 가슴 아프긴 하다만, 2급의 회복력이라면 곧 훌훌 털고 일어날 터.

어린 나이에 벽을 넘어섰다는 것

을 더 축하해 주고 싶다.

그 이유가 가장 크고, 다음으로는.

'역시 드림 머신이 효과가 있긴 있어.'

꿈속 각성이 현실에까지 영향을 미 친다는 사례를 하나 더 수집했다.

바리온이 3급 중에서도 상위의 수 준에 올라 있다는 거야 에른도 익히 아는 바였다.

하지만 그 수준에 몇 년을 머물러 있어도 오러의 선택을 받지 못하는 경우는 너무도 많다.

'결국 벽을 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정신적인 성장인 건가.'

그리고 어떤 계기.

처절할 정도로 버티던 바리온에게 에른은 한 줄기 [전음]을 보냈다.

내력에 목소리를 실어 특정 대상에 전달하는 1계 무인들의 의사소통 수단.

꿈에서 겪었던 장면을 상기 시켜 주자, 바리온은 현실의 벽도 부숴 버리면서 2급에 올라섰다.

-놀라운 건 놀라운 거고. 연승전 은 계속돼야겠죠? 이제 〈비상〉에

는 단 한 명만이 남아 있습니다.

여러 시선이 비상의 대기석으로 향 해 왔다.

다소 흥이 가신 관중들, 종막이 가 까워지자 약간 풀어진 듯한 아카데 미 관계자들.

비웃음을 보이는 21클럽 회원들 과 졸업생들도.

-그렇다면 비상의 마지막 주자, 대 장은?

비상 클럽에 대해 어느 정도 아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누가 나올지 알 고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관중들은.

휙!

금발의 소년이 대기석을 뛰어넘어 비무대로 올라오자 의문 섞인 표정 을 떠올렸다.

"뭔가 많이 어려 보인다?"

"마지막에 나와서 얻어터지기엔 너무 예쁘게 생겼는데...

일반적인 시각으로는 그저 패전처리

나 하러 나온 것으로 보인다.

-아까 말씀드렸죠? 스틸가드의 3 남, 비상의 클럽장. 1학년 에른 스틸가드입니다. 스틸가드 대 칼슨이 성 사됐습니다.

캔달이 분위기를 띄워 보지만 관 중들은 시큰둥했다.

"스틸가드...? 근데 3남이면 별거 없잖아. 장남이 나왔으면 모를까."

"1학년 대 3학년이면 안 봐도 뻔

한 거 아닌가."

"5대 0으로 허무하게 끝나면 항의 할 거다. 바쁜 사람 불러 놓고 뭣들 하는 짓이야?"

이런 반응들.

하지만 에른의 진면목, 아니 그가 드러낸 일부의 면모를 아는 사람 들은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이제부터 공략 시작이다.... 과연.'

'에른이 쉽게 지진 않겠지만, 그래 도 5연승은 너무 어려운 미션.'

' 가능할까?'

긴장감은 비무대 위에서도 감돌 았다.

"드디어 올라왔군."

테인이 반겨주자 에른이 고개를 까 딱거렸다.

"의외로 의연해 보이네?"

"그럼 뭐, 두려워 떨기라도 할 줄 알았나?"

"응. 이렇게 눈빛 쏴 주면 꼬리 내리고 도망칠 줄 알았거든."

에른이 살기를 흘렸다.

클럽에서의 굴욕이 다시금 떠오

를 만한데도 테인은 꽤 태연히 받 아들였다.

"재미있는 장난을 쳤더군. 나한테 휴인을 붙이는 건…. 내가 선봉으로 나올 줄 어떻게 알았지? 얻어걸린 건가."

"얻어걸리긴, 너라면 당연히 선봉. 그걸 어떻게 몰라?"

"내가 마지막에 나올 게 뻔하니까."

여기에는 테인도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최고 에이스가 대장으로 나오는 게 연승전의 불문율이다.

상징적인 의미뿐 아니라 전략적 으로도 그렇게 하는 게 승률이 더 높아서.

"선봉으로 나오면 4승까지는 가능 하다는 계산을 했겠지. 연승해서 주 목받아 좋고, 나한테 져도 4승 후 1 패니까 핑계가 좋잖아. 풀 컨디션이 었으면 이겼을 텐데, 마나를 다 써 버려서요… 어때, 내 말이 틀려?"

정곡을 찔렸는지.

테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말 두렵지 않았으면 이따위 꼼 수를 썼을까? 패배의 명분을 쌓았으 니 잃을 게 없어 괜찮다. 그러니까 안 내려가고 내 앞에 서 있는 거고."

"...꿈꾸는 소리 하고 있군. 내가 할 말은 이것뿐이다."

테인이 목검을 들어 올렸다.

"비상은 오늘로 끝. 약속 지킬 준 비나 하거라."

"후회할 텐데."

"우회는 뻔히 보이는 계략이나 짜

는 스틸가드의 머저리들한테나 예약 돼 있는 거고."

"...그게 무슨 말이지?"

"알 거 없단다. 어차피 금방 알게

될 거니까."

곧 교관의 신호가 떨어졌고.

다섯 번째 연승전 대결이 시작되었다.

-어떻게 보십니까, 멜로 경?

-5 연승은 없을 겁니다.

-그걸 어떻게 장담… 으으으음?

캔달뿐 아니라 지켜보는 모두가 두 눈 가득 물음표를 떠올렸다.

에른의 목검이 비무대 뒤편으로 핑그르르 날아가고 있었다.

턱!

검은 기사가 최후의 순간까지 놓 지 말아야 하는 것.

그런데 에른은 놓는 정도가 아니 라 아예 밖으로 던져 버렸다.

테인이 미간을 좁혔다.

"...뭐 하자는 거냐?"

"내가 궁금한 건 못 참아서. 별수 있나. 가장 죻은 대화 수단을 쓰는 수밖에."

"저, 저기!"

그때, 첼라스 교관이 가장자리로 달려왔다.

"검에 무슨 문제라도?"

"그런 거 없어요. 이따 다시 쓸 거니까 그냥 거기 두시면 됩니다."

-뭐, 뭡니까? 갑자기 웬 박투술?

대련 중에 저래도 되나요?

-안 될 건 없습니다. 왜 저러는 지는 모르겠지만....

-혹시 스틸가드에만 전수되는 가 문의 비전이 아닐지?

-강철의 숨결이라면 유명하지만, 박투술은. 제가 알기론 없습니다.

콰작!

멜로의 해설을 정면으로 반박하 기라도 하듯.

마나를 두른 주먹이 테인의 목검을

아작 내 버렸다.

"뭐... 뭐냐?"

눈을 부릅뜬 테인.

에른은 놀랄 틈조차 주지 않고 느 린 보법을 발휘해 그의 품으로 파고 들어 갔다.

여기서 느리다는 건 극성으로 펼치 는 천변보나 막 익히기 시작한 패왕 군림보보단 느리다는 뜻이다.

전투에서 속도는 상대적인 개념.

상대보다 한 발짝만 앞서면 느려도 빠르다.

"컥."

목울대를 후려치자 테인의 입에 서 막힌 듯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아파서 숨도 쉬기 어렵지만 넋을 놓고 있다가는 더 큰 고통이 찾아올 게 자명하기에.

테인은 유년기에 배운 박투술의 기본을 떠올리며 손을 휘저었다.

그러나.

'어림도 없지!'

에른에게는 가소로울 뿐이었다.

1계에는 금나수법이라는 무공이 있다.

적의 손목을 낚아채고 움켜쥐기 위해 만들어진 무공.

대륙에선 활용도가 떨어진다고 생각해 따로 [흡수]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주워들은 개념으로도 충분하다.

'테인을 압도하는 것 따위는.'

손목을 잡아 비틀고 일장을 뻗어 가슴을 가격한다.

푸왁!

테인이 피를 뱉어냈다.

"이건 바리온의 몫."

감정 없는 목소리에 테인의 온몸 에 소름이 돋았다.

이게 바리온의 몫이라면 다른 사 람들 몫도 있다는 거 아닌가.

4연승의 대가를 다 치러야 한다고?

아무리 공략법대로 하기로 했어 도 그것만은 사양이었다.

'교관! 기권합니다, 기권!'

그런데 첼라스의 반응이 이상했다.

뚱한 얼굴로 눈만 끔벅이고 있으니.

'내 말 안 들려? 기권이라고!'

포기 의사를 밝히는 데도 주저함 이 없는 에른의 손속.

테인의 양쪽 어깨 관절을 후려쳐 간다.

"이건 누구 몫이지…? 모르겠네. 그냥 내 몫인 걸로 하자."

'미친 새끼! 그럴 거면 애초에 몫 을 왜 따진…. 아… 내, 내 목소리!'

아파서 미처 몰랐다.

고래고래 소리를 치는데도 음성 이 나오지 않는다는 거.

갑자기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원인을 알아내자 안도감이 들었다.

'그래서 반응이 없던 거였어!'

테인이 양팔을 높이 들어 올렸다.

팔로 엑스자를 그리면 무슨 뜻인 지 알아먹으리라.

그런데....

'파, 팔도...?'

적당히 붙어 주다가 힘만 빼놓고 빠질 생각이었다.

몇 대 맞는 거야 감수한 바이고, 스 타일 구기기 전에만 기권하면 되는 거니까.

그런데 기권할 수단과 방법을 없 애 버리면 어쩌자는 건데?

'뭐... 뭘 어떻게 한 거냐, 에른!'

"혼란스러워? 그렇겠지."

점혈이란 개념을 모르는 테인으 로선 당연한 반응.

아혈이 찍혀 말을 할 수 없고, 어 깨의 혈도가 점해져 팔을 올릴 수 없는 거지만.

대륙에서 그 원리를 아는 사람은 이제는 오직 한 명뿐이다.

에른은 웃으면서 그를 구타하기 시

작했다.

테인이 소중한 회원들에게 그러했듯.

퍼억! 퍽! 퍽!

빡! 빠각, 빠가가각!

살벌한 타격음.

테인이 쓰러질 때마다 에른은 허공 섭물을 발휘해 그를 일으켜 세웠다.

이 모습이 내막을 모르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테인 학생 대단합니다. 바리온 학

생의 투지를 보고 뭔가를 느꼈던 걸 까요? 이제는 패배를 인정할 법도 한데. 계속 도전함니다.

'투지 따위가 아니라고! 그만… 제 발 그만하자!'

숨넘어갈 듯한 호흡과 함께 테인 이 입 모양으로 애원했다.

'나, 나한테 물어볼 거 있다며! 알 려줄게, 그러니까 그만...

"아, 그거? 실은 알고 있어. 넌 작 은형을 믿은 적이 없다는 거. 나 낚

으려고 믿어준 척한 거잖아. 맞지?"

'...91'

. .

[120 화]

비상 대 21클럽.

이번 연승전은 단순한 단체 교류 전이 아니었다.

각 [스쿼드]의 우열을 가리는 수 준을 넘어 서로의 자존심과 평판, 그리고 존폐까지.

걸 수 있는 것은 모조리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어느 한쪽은 몽땅 잃고 쓸쓸히 퇴장해야 한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연승전이 성 사되기 전부터 물밑에서 수 싸움이 벌어졌다.

테인이 주도한 밀실 대화.

"우리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자. 에른이 머리에 화살이라도 맞았다 면 모를까. 연승전을 넙죽 받아들 인다는 게 말이 되는지."

"멀쩡히 두뇌 돌아가는 놈이라면 받을 리 없겠지?"

"...그 근본 없는 클럽에 에른 빼 고 인물이 있나? 그나마 바리온? 바 리온만 잡을 수 있다면 무조건 4연

승이니까, 말 안 되는 거 맞다."

"워낙 오만한 새끼잖아. 혼자서 다 이긴다는 얼척 없는 마인드인지도?"

"오만하긴 해도 멍청한 놈은 아니 야. 지구전으로 몰고 가면 무슨 수 로 대장전을 이겨? 지가 뭔 드래 곤 통뼈도 아니고."

"질 게 뻔한데, 제이슨을 내세워 서 연승전을 제안한다라… 뭔가 있 는 게 분명해."

"테인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맞겠 지. 그럼 그냥 판 엎을까?"

"미쳤어?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친다 는 건 더 말이 안 도H. 우리 힘으로 비상을 날려버릴 수 있는 기회라고."

"그러면?"

"이쪽도 뭔가를 준비해서 가야지."

그 '뭔가'가 대체 뭘까.

에른의 머릿속에서 몇 가지 키워 드가 떠오르고 또 사라졌다.

테인이 따로 준비한 게 있으리라 는 건 알고 왔다.

제이슨이 귀띔해 주기도 했지만, 테인의 성향을 모르는 게 아니고…

사람 심리라는 게 그러하니까.

연승전에서 패한다면 잃을 게 많

은 쪽은 단연 21클럽이다.

아무리 승리를 장담하더라도, 판

돈이 너무 커지면 두려움이 스멀

스멀 올라오게 된다.

'뭐라도 안전장치를 마련하는 게

일반적이지.'

아쉽게도 제이슨은 그 안전장치

가 뭔지 알아내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몸으로 부딪쳐 봐

야만 했다.

에른은 연승전을 이어가면서, 21 클럽의 전략을 어렵지 않게 눈치 챘다.

테인에 이은 차봉은 카시엔.

1학년 서열 1, 2위… 기대되는 대 결인 만큼 치열한 접전이 예상되었 으나.

"...역시 상대가 안 돼."

카시엔이 검을 내렸다.

몇 수 겨뤄 보지도 않고 전의를 상실해 버리자.

사교계에 발 걸치고 있는 관중들

은 검술보다는 둘의 외모 대결에 집중했다.

"이거도 에른 승! 둘 다 미친 미 모지만, 번갈아 보다 보니까 알겠 다. 에른 쪽에 더 시선이 가."

"인정이긴 한데. 스타일이 극과 극이라. 카시엔은 은발 냉미남, 에른은 금발에 더 따뜻한 인상이고. 이 정도면 취향차라고 봐야지."

"...그렇다는데? 어떻게 생각 하냐?"

에른은 질문을 던지면서 피식 웃 었다.

별생각 없을 줄 알기 때문이다.

졸업 후 사교계로 직행했던 그와 는 달리 카시엔은 자기 외모를 전 혀 활용하지 않았다.

'외모도 경쟁력인데. 왜 그랬는지 모르겠네.'

[카르 숨]을 딴 뒤론 왕실 기사 단에 들어가 착실히 기사 커리어 르 싸아으 바!

s o' /A e =.

"저 목소리가 다 들린다는 말이 군. 그것도 선명하게."

미친 미모라는 극찬을 받았음에

도 카시엔의 표정은 어두웠다.

"격차가 더 벌어진 건가?"

분한 듯 주먹을 꽉 쥐며.

혼잣말로.

"...좁혔다고 생각했는데."

"뭘 좌절하고 그래? 너 많이 발전 했어. 이건 진심이다."

절치부심한 것은 바리온뿐만이 아 닌 모양이었다.

테인은 에른이 심은 엉터리 묘리에 빠져들어 실력이 더 퇴보했는데.

카시엔과는 살짝만 검을 섞어 본 걸로도 알겠다.

이화접목과 차력타력의 원리를 일 부 깨달아 실전에 적용하는 수준.

'진짜 천재는 천재라니까.'

에른은 어느새 그를 인정하고 있었다.

이제는 카시엔을 부러워할 입장 도 아니고, 저 높은 곳에서 굽어보 는 위치라.

전생에 내내 품었던 질투와 시기, 열등감으로 버무려진 악감정은 이

미 희미해져 버렸다.

그것도 그렇고.

"뭐 하는 거냐! 카시엔!"

"웬 돌발 행동? 공략법대로 가라고!" 대기석에서 악쓰는 21클럽 회원들. 선배들이 눈을 부라리는데도 카

시엔은 검을 들지 않았다.

"이렇게 될 거야 알고는 있었지.

하지만 이 정도나 차이 날 줄은…

괴물 같은 놈'."

"너도 충분히 괴물이야. 얼마 안 가 오러 유저가 되겠지. 그만하면

자랑스러울 만도 하지 않나?"

"...위로 따위는 필요 없어. 졌다."

깨끗이 승복하는 모습도.

뒤이어 출전한 비상의 3학년 라 인업들을 상대해 보니 더더욱 비 교가 됐다.

-아, 라디엘 학생… 패색이 짙어 지니까 대놓고 수비만 하는데요? 이건 좀.

-그게, 저러는 데에는 다 이유가….

-이유요? 마법사인 저도 압니다.

체력, 그리고 마나 소모를 유도. 최대한 힘 빼놓은 상태로 대장전 에 들어가겠다는 거 아닙니까.

-그게 연승전의 묘미인 겁니다. 스쿼드 대결이라는 게 애초에 그 런 거라.

-그래도 그렇지 3학년들이 1학 년 상대하면서 저러는 건, 너무하 지 않아요? 3번째 주자로 나왔던 하르틴 학생도 그렇고… 특히 라디 엘은 3학년 서열 3위나 됩니다. [데어 숨] 예정자면서 자존심도 없는지?

-승리를 위해서는 자존심을 내려 놓아야 할 때도 있는 법입니다.

-글쎄… 사람들 의견은 다른 거 같은데.

"우우우우! 이건 아니지!"

"정정당당히 승부해라."

"너무 속 보인다!"

에른이 테인을 쓰러뜨렸을 때만 해도.

훈련장에 모인 관중들은 비상의 승리 가능성을 0으로 봤다.

그도 그럴 것이, 에른은 비상의 대장급이라곤 해도 1학년에 불과 했고.

3학년인 테인을 꺾었다지만 5연전 을 펼치며 몹시 지친 상태였을 테니.

에른 스틸가드가 연승을 이어갈 수 있을까?

1패라도 하면 그것으로 끝인 절 체절명의 상황.

이미 변수 없는 대결이라고 보고 자리를 뜨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vs 카시엔 승.

vs 하르틴 승.

거기에 라디엘 상대로도 거의 승 기를 잡았다.

수비에만 급급하게 할 정도로 몰 아치는 중.

"그냥 앉아 있기를 잘했네."

"먼저 간 사람들, 나중에 여기까지 따라잡은 거 알게 되면 후회 좀 하 겠어."

"근데 이번 대결도 이기면 호, 혹 시 리버스...?"

"이보게, 조용히 하게나. 언급하 면 부정 타는 거 모르나? 이럴 때 는 이렇게 말하는 게 관례일세."

"어떻게요?"

"그… '그거'가 나올는지도?"

선봉에게 무력하게 휩쓸려 나갈 수도.

최후의 1인이 모조리 뒤바꿔 버 릴 수도.

모든 게 가능한 연승전.

'그거'란 그중에서도 가장 기막히 고 극적인 시나리오.

관중들은 느끼고 있었다.

대역전극이 벌어지려 한다고.

물론 저간의 사정을 모르는 사람 들에게만 그랬다.

-철통같은 수비도 계속 맞다 보 니까 균열이 나는군요. 라디엘 학 생이 더 버티지 못하고 비무대에서 내려옵니다. 꼴좋군요.

-저기, 중립은 지키시는 게?

-흠흠. 좀 흥분했네요. 아무튼, 마지막 대결인 대장전으로 접어듭

니다. 에른 스틸가드 대 파르스 이 레온. 파르스 학생은 3학년 서열 1 위에… 음, 어....

자료를 읽는 캔달의 얼굴이 굳었다.

-오, 오러 유저? 역전극은 여기 까진가....

-흠. 섣불리 판단할 게 아닙니다.

-오러도 없이 오러 유저를 무슨 수로?

-그건…. 지켜보면 알게 됩니다.

파르스가 비무대에 올라왔다.

독특한 비주얼에 관중들의 시선 이 그에게로 쏠렸다.

이제 열여덟인데도 어지간한 성인 장신보다 최소 한 뼘은 더 큰 키에.

통상의 비율을 훌쩍 넘는 비상식 적으로 긴 팔다리.

그가 씩 웃으며 에른에게 말을 건 네 왔다.

"예상했던 대로 대장전에서 만나 게 되는군."

"나한테 깨진 주먹은 다 나았나?"

"닥, 닥쳐! 그땐 방심했을 뿐이라고!"

"그럼, 이번에는 다르다는 거네?"

"물론이다."

-우리 조카… 아니, 에른 학생에 게도 가능성이 있다는 말입니까?

-제가 보기엔 그렇습니다. 문제는 벌 써 5전째라는 건데… 지금까지 소모된 마나와 체력을 무시할 수 없어서.

"멜로 경 말씀 들었지? 넌 여기까

지다."

자신하는 파르스의 태도를 보고 에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켜보자는 건 못 들었나? 그쪽 귀는 듣고 싶은 말에만 선택 적으로 열리나 보지?"

"긴말 필요 없고, 시작하자!"

파르스가 목검을 쳐들자 일렁이 는 붉은 빛이 검신을 감쌌다.

-붉은 오러! 저런 것도 있습니까?

-희귀하죠. 눈앞에서 보는 건 저 도 처음입니다.

눈요깃감으로는 최고다.

훗날 적월광륜이라 불리게 되는 파르스의 고유 오러가.

"와... 빛깔 좀 봐 "

관중들의 경탄을 싣고.

허공을 찢으며 에른에게로 몰아 쳐 들어왔다.

쑤웅! 쏴아아악!

오러가 나온 이상, 이제는 목검 대련이라는 게 의미가 없어졌다.

장인이 벼린 날붙이보다 날카롭 고, 드워프제 화약보다 더한 폭발

력을 잠재한.

특급 아래에서는 최강의 공격 옵션.

일단 오러가 분출되면 오러 없는 상대방은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박탈감과 허무함을 느끼면서 도 망치는 것 말고는.

입학 초기의 에른이었다면 그렇 게 했을지도 모른다.

겨우 1급 수준에 벌써부터 오러를 내보인다는 건 너무 위험 부담이 크 니까.

하지만.

'초일류를 지나, 절정이 가까워지고 있다… 거기다 난 마검사고. 다른 무기들도 많지. 오러 정도야 뭐.'

공개해도 좋을 타이밍.

이미 21클럽 회원들에게는 보여 준 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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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저건?

캔달이 말을 더듬었다.

관중들은 숨을 멈추었다.

에른의 목검에서 흘러나오는 오러.

아름다운 은빛보다 더 큰 놀라움 을 선사하는 것은 여기에 담긴 의 미였다.

"저 학생, 1학년이라고 하지 않았나?"

"1학년? 열여섯 오러 유저?"

"스틸가드...

훈련장에 모인 이들은 단순한 구 경꾼이 아니다.

절대 범부가 아닌, 수도와 나바로 전체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명사와

권력자들.

물론 전부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에른의 초대장을 받을 정도라면 최소한의 식견과 분석력을 갖췄다 고 봐야 한다.

"스틸가드 가문 말이야. 3대째에 오러 유저는 장남뿐인 걸로 기억 하는데. 내가 아는 게 맞지 않나?"

"그 기억 정확함세."

"왜 막내에 대해선 들은 게 없지?"

"그렇다는 건, 레바단 백작이 일 부러 감추고 있었다는...?"

바로 오늘, 아니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에른이 오러 유저라는 사실 은 외부에 알려져 있지 않았다.

21클럽 회원들, 지르칼, 마쿠스 등… 알 사람은 알고 있었지만 각 자의 사정에 의해 입 다물고 있었 던 터라.

"스틸가드 전체가 꼭꼭 숨기고 있 을 정도의 재능이면 어느 정도란 거지?"

"열여섯 오러 유저가 어디 흔한 가? 수십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자질일세."

"...그, 그렇다면 말로만 전해져 오던?"

스틸가드의 피가 남다르다는 것 은 대륙 전체가 인정하는 바였다.

신화급 아버지에 영웅급 아들이 라니, [인간의 시대]에 그런 핏줄 은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3대째에 가서 는 그 진하던 피가 묽어졌다는 평.

가장 뛰어난 키르안이 그저 삼석, [데어 숨]으로 졸업했을 따름이니까.

그래서 유니콘과도 같은 존재였다.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그러나 언젠가는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 만 하는.

스틸가드의 진정한 이름을 잇는 세 번째 천재.

그, 에른 스틸가드가 자신의 진면 목을 드러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관중들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연승전을 계획한 것도 다 이 순 간을 위해서?'

'지금까지 잘 숨겨 오다가 갑자기

공개하는 이유가 뭘까?'

'모르겠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냐, 에른 스틸가드!'

[121 화]

펑! 펑! 콰앙-!

목검과 목검이 부딪힐 때마다 폭 발음이 울려 퍼졌다.

단 한 번의 충돌로도 목숨을 앗 아가기에 충분한 파괴력.

은빛과 붉은빛이 교차하며 연속 해서 굉음을 만들어냈다.

흔히 볼 수 없는 광경이다.

오러 유저, 그것도 미성년 두 명 이 펼치는 빛의 검무는.

그러나 관중들은 기계적으로 둘 의 동선을 쫓을 뿐, 대련에 몰입하 지 못했다.

'레바단 백작은 [카르 숨] 출신 중 에서도 손에 꼽는 실력자이지. 20대 에 각성급, 30대에 영웅급이 되었고.'

'그런 그도 저토록 어린 나이에 오러를 만들어내진 못했다.'

'남들보다 빨리 성과를 얻었다고 해서 꼭 더 멀리 가는 것은 아니지. 그러나 검의 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재능들은 대부분 조숙한 천재였다.'

'건국황제만 해도 그래. 열일곱에

각성급이란 미친 성장 속도. 그랬기 에 초월급까지 갈 수 있었던 거다.'

'라제칸 님은 충성심의 화신으로 길이 남은 분이다. 그런 위인이라 백작위 따위에 만족하셨던 거지. 레 바단 백작은? 아버지와 비교하면 꽤나 손색이 있어. 본인도 그걸 알 아서 스틸가드에서 나오지 않는 것 이고.'

'만약 장성한 에른 스틸가드가 아버 지의 한계인 영웅급을 넘어선다면?'

'...향후 강철의 심장은 정계를 좌지우지할 폭풍의 핵으로 거듭나

게 될지도 모른다.'

이런 식으로.

사고의 흐름이 이어진다.

다른 사람들도 여기까지 생각했을까?

아니면 미처 못 그린 그림, 떠올리 지 못한 가능성을 보고 있는지도?

곁눈질하느라 이리저리 구르는 눈 동자, 복잡한 속내.

맹렬히 두뇌 회전하는 소리가 멀 리서도 다 들렸다.

'겨우 오러 하나 보여준 거 가지 고 왜들 저래? 오버하긴.'

에른은 피식거리는 입꼬리를 주 체하지 못했다.

이게 스틸가드의 이름값이다.

신화급을 탄생시킨 가문.

위대한 혈통에서 간만에 나온 천 재가 아니었다면 이렇게나 호들갑 을 떨지는 않았을 터이다.

'머리에 쥐나도록 고민하라지.'

공개할만해서 공개한 것이다.

언제까지고 3, 4급 행세만 할 수 는 없으니까.

2급까지는 괜찮다는 판단.

이제부턴 아카데미는 물론 수도 전 체가 에른 스틸가드란 이름을 주목 할 테지만, 입학 전과는 모든 면에서 비교할 수 없는 발전을 이룬 참이라.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제국도...

아직도 관중들은 왜 에른이 본 실력 을 드러낸 것일까 궁금해 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알지 못한다.

이 또한 진면목이 아닌 극히 일부 에 불과하다는 것을.

마찬가지로, 파르스는 물론 21클럽

회원들도 단체로 착각하는 중이었다.

"에른 스틸가드! 대련 중에 어딜 한눈을 파는 거냐...!"

"아, 미안. 결례를 범했네."

에른은 딴생각을 하면서 관중들을 살피고, 그런 와중에도 파르스의 붉 은 공세를 족족 받아내고 있었다.

쉽고 가볍게.

그리고 대충 대강.

[카르 숨] 졸업 예정자이고, 3학 년 최강자고 뭐고.

초일류고수 대 갓 2급의 대결이다.

약간의 위기 상황이라도 있다면 이 유를 막론하고 부끄러워 고개도 못 들고 다닐 일.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다.

"뭐, 뭐냐… 너!"

"뭔데! 대체 왜 아직까지 버티는 거냐고!"

두 눈 가득 의혹을 띄우는 파르스.

콰앙! 지지지직!

둘의 목검이 다시 맞부딪히고.

힘겨루기가 시작되며 서로의 오 러가 스파크를 만들어 내자.

대화하기에 딱 적당한 거리가 되었다.

에른이 말을 던졌다.

"누가 할 소리를. 그새 뭐 좋은 거 라도 챙겨 먹었나 보지?"

"뭐, 뭐가?"

"몰라보게 좋아졌어. 힘도, 지구 력도, 오러 지속력도."

"그, 그러는 넌! 왜 아직도 오러 가 유지되는...!"

'나야 뭐.'

파르스가 어이없어하는 것도 무 리는 아니었다.

4연전으로 최대한 지치게 만들고, 오러 유저, 그것도 향상된 파르스를 붙여 대장전 승리를 이끌어 낸다.

'이쯤 했으면 할 만큼 한 거 아닌 가 싶겠지.'

그러나 21클럽 회원들에게 보여준 신위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으니.

교묘한 계책도 기본 전제부터가 잘 못되면 모래성처럼 무너지는 법이다.

파시 A

대련이 이어지자 영원히 샘솟을 것 같았던 파르스의 오러도 점차 희미해졌다.

오러가 꺼지면 승리도 같이 꺼진다.

"이, 이건 말도 안 돼...

불안한 파르스의 눈빛을 절망으로 물들게 하는 것은 여전히 선명한 에른의 은빛 오러.

"끝도 없을 거 같더니, 결국 바닥을 보이긴 하네. 어떻게… 계속할 건가?"

"어, 으어어...?!"

에른이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 를 보여주자 파르스가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얼굴색이 납빛으로 변해선.

'괜, 괜히 오기 부리다가는 테인 처럼 되겠지...?'

이제 대장전 결과는 파르스에게 별로 중요한 게 아니었다.

패배는 기정사실.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개처럼 두 들겨 맞지 않는 게 더 중요했다.

그는 마지막 남은 마나를 긁어 모

아서는 젖 먹던 힘을 다해 내달렸다.

"으아아아아!"

몸을 돌려 에른의 반대 방향으로, 비무대 밖으로.

분하고 치욕스럽지만 명예와 긍 지도 처맞기 전까지만 유효할 뿐 이었다.

그렇게 대장전의 결과는, 파르스 의 장외패.

-4연패 후 5연승.... 비상 클럽…

아, 아니 에른 스틸가드의 승리입니다.

-아무리 학생들 대결이라지만 5대 5 연승전에서 리버스 스윕이!

저벅, 저벅.

에른도 비무대에서 내려오자 〈비 상〉회원들이 달려왔다.

실려간 휴인과 바리온을 제외한 미타, 벤자민, 데이븐.

항상 쿨한 태도, 난 마법사 지망이 니까 너희들하곤 달라〜 라는 듯이 벽치고 다니는 샤펠도 지금만큼은 얼

굴 가득 환한 웃음을 떠올렸다.

"우, 우리 이긴 거 맞지? 그치?"

"판정이 그렇게 나왔으니까 그렇겠지."

"와! 클럽 문 안 닫는다! 나 말이 야, 에른 너… 믿고 있었다고!"

벤자민이 흥분한 데이븐에게 핀 잔을 줬다.

"뭘 믿어. 아까까지만 해도 우린 다 망했다고 해 놓고."

"그, 그건 객관적인 전력 분석. 에른이 오러 유저인 줄 몰랐으니까."

승리가 기쁜 건지, 클럽 시설을 앞으

로도 이용할 수 있게 돼서 기쁜 건지.

그래도 미타만큼은 진심이 느껴졌다.

"결과 보고 말하는 거라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지만, 나… 난 네가 이 길 줄 알았어. 이렇게 쉽게 해낼 줄은 몰랐지만."

"내가? 아니, 우리가라고 해야지."

"우리는 테인한테 맞은 것밖에 없 는데...

그거야 맞는 말이지만.

회원들이 있어 클럽이 존재하는 것이고 클럽 대 클럽으로 붙었기

에 21클럽의 문을 닫아버릴 수 있 었던 거다.

"자."

미타가 붉은 털 뭉치 같은 것을 건넸다.

"어, 고마워."

사리 였다.

출전하면서 에른이 잠깐 맡겨두 고 간.

"도로롱…."

주인이 5연승을 하고 돌아왔는데 도 사리는 눈도 뜨지 않았다.

이제는 거의 동면에 들어간 게 아닌가 싶을 정도.

낯선 미타의 손길에도 캬르릉거 리지 않는 걸 보면 말 다 했다.

"...근데 이 아이는 왜 잠만 자 는 거야?"

"글쎄다."

에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도 그걸 알고 싶단 말이지."

*

화기애애한 비상과는 정반대의 분 위기.

21클럽의 대기석은 거의 초상집 을 연상하게 했다.

무겁게 가라앉은 공기, 이렇게 됐 는데도 못 믿겠다는 표정들.

경기 내용이라도 좋았냐 하면 그 런 것도 아니다.

하늘 같은 선배들까지 모셔 놓고 추태만 보였으니 대체 이걸 무슨 수 로 수습할까.

"21클럽이 이런 말도 안 되는 방

식으로 없어질 줄은 몰랐군."

멜로의 관전 소감.

캔달이 공명 마법을 중지하자 둘 의 대화는 탄성과 환호, 그리고 좌 절에 묻혀 더 이상 관중들에게 들 리지 않았다.

"그러게나 말이야. 단순한 수련생 패거리로 볼 곳이 아니잖아. 기사 들 사이에선 최고의 연줄 아닌가?"

"그것도 그렇고 너무 상징적이야. 다른 사람도 아니고 스틸가드한테, 그것도 리버스 스윕으로 무너졌다 는 게. 21클럽 출신들이 이걸 어

떻게 받아들일지...

멜로가 미간을 좁혔다.

"잠깐, 멜론. 너 알고 있었지?"

"뭘 말이냐."

"에른이 오러 유저라는 거. 그래 서 지켜봐야 한다고 했던 거잖아?"

"뭐, 대강."

"알았으면 재깍재깍 말을 했어야지. 내가 얼마나 가슴 졸인 줄 알아?"

"진행 잘만 하더만."

"그건 프로 의식이라는 거다. 심

적인 동요에도 티 내지 않는. 아

니, 생각할수록 열 받네. 마법사라

고 따돌리는 거야, 뭐야?"

"..어디 가?"

"어디겠어? 조카 있는 곳이지."

캔달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테이

블 사이를 돌아다녔다.

" 음?"

그런데 에른의 모습이 보이지 않

았다.

"...얘는 어딜 간 거야?"

캔달 말고도 에른을 찾는 사람들

은 많았다.

그 같은 사소한 이유에서가 아니 라 스틸가드의 3대째 천재와 안면 을 트기 위해.

"에른 어디 갔어?"

"일부러 피하는 건가?"

웅성대는 귀족들.

그때.

—이쪽이야.

머릿속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울 렸다.

주위를 둘러본 캔달의 표정이 굳 었다.

*

약품과 포션 냄새가 코를 찌르는 회복실.

붕대를 둘둘 감은 학생이 병상에 서 각혈을 하고 있었다.

피가 앞섶을 적시자 푸른 머리카 락과 강렬한 대비를 일으켰다.

"쯧쯧… 그러게 무리한다 싶더라

니."

반개한 눈이 활짝 열리고, 흐릿한 윤곽이 선명하I지자.

"너, 너...!"

에른을 본 테인이 벌떡 몸을 일 으켰다.

"네가 왜 여기 있는 거지?"

얼굴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오 싹해지는 기분.

"병문안."

"병... 문안?"

에른은 절대 부상자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는 것은.

"설, 설마 파르스까지...?"

"그 선배, 판단 좋던데? 유불리를 기가 막히게 파악하더라고. 누구하 곤 다르게."

테인의 눈이 부릅떠졌다.

21클럽이 졌다.

클럽 리더로서,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최악 중의 최악.

그가 이불을 쥐어뜯었다.

"말도 안 돼! 그럴 리가 없어!"

"저기, 좀 진정하지?"

"꺼져! 밖에 누구 없어…! 읍!"

테인의 입이 막혀 버렸다.

도저히 기사의 것이라곤 생각할 수 없는 부드러운 손.

그런데도 그 안에 담긴 힘이 엄청 나 목소리가 새어 나오지 않았다.

에른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 말 못 하게 하는 기술 있는

거 알지? 아까 당한 거."

끄덕끄덕.

"또 벙어리 되기 싫으면 그냥 조 용히 있어. 그쪽 괴롭히려고 온 거 아니거든. 대화나 좀 하자고."

테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놓는다."

"의외로 말을 잘 듣네? 으으… 냄 새."

손바닥에 벌건 피가 묻어 있다.

에른은 털어내는 걸로도 모자라 하얀 천을 가지고 와서 박박 닦아 냈다.

테인은 아직도 현실을 받아들이 지 못했다.

넋을 잃고 허공만 응시하는 그.

"뭘 준비했길래 그렇게 자신만만 한가 했거든. 근데 고작 잠력 격발 제였어? 실망이다, 테인."

"...잠꼬대나 할 거면 가라."

잠력 격발제.

기사들 사이에서는 금지된 약물

로 통한다.

"복용하면 체력, 힘, 마나… 전투 에 필요한 모든 게 증폭되지. 문제 는 잠재력을 끌어다 쓰기 때문에 부작용이 크다는 거. 많이 쓰면 폐 인 되기 십상이야."

"뭐라는 건지."

에른이 궁금해 했던 안전장치의 정 체였다.

테인이 바리온을 압도할 수 있었 떤 이유.

파르스의 오러가 끊임없이 생성

되었던 것도.

"내 말 맞지?"

"헛소리는 너희 클럽에나 가서 해 라. 거기라면 잘 받아줄 테니까."

테인은 인정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지금도 단체로 혀 깨물고 죽어야 하지 않나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판에, 잠력 격발제라는 더러운 수 까지 썼다는 게 알려진다면.

"증거 있어?"

"증거? 너하고 파르스가 살아 있

는 증거지. 실력 있는 치료사한테 데려가면 그 자리에서 알아낼걸?"

에른이 웃었다.

누군가에게는 한없이 아름다운, 천상의 미소처럼 보일 터이나.

테인에게는 소름 끼치는 악귀의 얼굴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또 그 웃음!

기억을 더듬어 보면, 에른이 저런 표정을 지을 때마다 다시는 떠올 리기 싫은 일들이 일어났다.

테인이 떨기 시작했다.

최대한 숨긴다고 숨겨 보지만, 잘 되지 않았다.

"...원, 원하는 게 뭐냐?"

[122 화]

"별로 원하는 거 없어. 약속만 지

켜 준다면."

" 약속 9"

"말꼬리가 왜 올라가지?"

그렇게 말하는 에른의 눈꼬리도 같

이 올라가고 있었다.

"진 클럽은 문 닫기로 한 약속 말

이다. 설마 오리발 내밀 생각?"

"아, 아니지. 다른 약속 말하는 줄

알았어."

"안 지켜도 괜찮아. 뭐라고 하지 않을게. 애초에 너란 인간한테 별 기대치가 없었으니까."

"...정말이냐?"

"대신, 테인 칼슨이 신성한 연승전 을 더럽혔다는 걸 모두가 알게 되겠 지."

"아, 안 돼!"

엄청난 치욕이다.

그것도 그렇고 두려움이 엄습했다.

이 사실이 아버지, 냉혈공작의 귀 에 들어간다고 생각하니.

루터 칼슨은 채혈을 하면 보관 용 기에 살얼음이 낄 거라는 말까지 듣 는 진짜배기 냉혈한.

소공작이라 해도 얄짤없다.

가문의 명성에 먹칠을 한다면.

"치료 끝나는 대로 클럽 해체해. 건 물에서도 방 빼고."

"방… 방을 빼? 어떻게?"

"팔든, 부수든 방법은 자유."

"애초에 내 소유의 건물이 아니다. 선배님들이 차곡차곡 모은 돈으로 마련한 거라."

"잘 쪼개서 그분들한테 돌려주면 되겠네."

"뭘 쪼개서 돌려주… 건물이 무슨 장작개비냐?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두 사람은 연승전을 하기로 하면 서, 클럽이 보유한 부동산까지 판돈 으로 걸었다.

일단 테이블 위에 올려놨으면, 패자 는 깔끔하게 손 털고 물러남이 옳다.

이렇게 되기 싫었다면 애초에 참여 하지 말았어야지.

곤란한 처지는 알겠지만 그가 감당

해야 하는 몫이었다.

"방법은 알아서 찾아. 선배들한테 의견을 구하건, 아카데미에 기부를 하건."

"...알았다. 그거면 되는 거지? 그럼 잠력 격발제에 대해선 입 다무 는 거다."

"마나에 대고 맹세해."

"뭐?"

테인이 인상을 구겼다.

"미쳤어? 내가 왜."

"피차 신뢰 없는 관계인 거 알잖

아. 격발제 부작용 사라진 뒤에, 그 때 가서 입 씻을 수도."

"하! 오늘 일, 본 사람만 수백이다. 몇 시간 안으로 교내 전체에 소문 다 퍼질 거고. 해체하지 말라고 해 도 할 거야. 뭔 놈의 걱정은."

"당연히 해체 선언은 하겠지. 그런 데, 다른 이름으로 다시 뭉치면 어쩔 거야. 21클럽은 사라졌고 이제부터 우린 22클럽이다〜 하고 철판 깔면?"

"...제정신으로 하는 말이냐."

"뭐든, 확실하게 해야지."

차원거래로 배운 게 있다면… 중요 한 약속일수록 토씨 하나까지 꼼꼼 히 따져야 한다는 것.

무심코 넘겨버린 말, 계약서의 글 자 하나가 좋은 거래를 최악의 건으 로 만들어 버릴 수가 있다.

에른은 결국 테인에게서 마나의 맹 세를 받아 냈다.

대강의 내용은 이러했다.

1. 21클럽은 해산된다.

2. 다른 교내 사조직 활동도 금지된

다. 비회원이 설립한 클럽이더라도 일단 21클럽 출신이 가입하면 21클 럽의 후신으로 취급한다.

3. 〈비상〉에 보복하는 모든 행위 일체를 금한다. 린치, 따돌림, 폭언, 폭행, 무한 서열전… 모두 금지된다.

4. 테인 칼슨은 위 사항이 준수되 도록 회원들을 관리한다. 제대로 지 켜지지 않을 경우 묵인, 방조, 은밀 한 동조인 것으로 간주, 이는 맹세 를 어긴 것이다.

"됐냐."

마나를 머금어 웅장하게 울리던 목 소리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마나의 맹세.

마나를 증인으로 세우는, 대륙에서 가장 강력한 맹약 중 하나다.

이를 어긴다면 대자연에게 미움을 사서 마나를 사용할 수 없게 되기 에.

마나가 밥줄인 기사와 마법사에게 는 죽더라도 지켜야 하는 약속이었다.

"넌 진짜 이상한 놈이야. 알아?"

"철저한 거라고 해 줘라."

"젠장!"

테인이 푸른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그렇게 해도 답답한 속이 가라앉지 않는지 가슴까지 두드린다.

"어쩌다가 이런 놈한테 걸려서 이 꼴이...

"누가 잠력 격발제 쓰래? 멍청하긴."

"멍청? 그건 걸릴 수가 없는 거였 어! 특유의 폭발 반응도 없고 드러 나지 않는 선에서 전투력을 끌어올 려 준다. 부작용도 다른 격발제에

비하면 없다고 봐도 좋을 정도고. 문제는...

"나를 만났다는 거겠지."

아무도 테인을 의심하지 않았다.

바리온이 오러를 생성하기 전까지 는 다들 그를 더 높이 평가하고 있 었으니까.

자기도 2급이 실력의 전부였더라면 왜 졌는지도 모르고 무릎을 꿇었을 지도?

그런데 안타깝게도, 에른은 파르스 의 그릇을 정확히 계량하고 있었다.

그 짧은 사이에 그릇을 그렇게 키 워 왔다면 둘 중 하나다.

기연을 만났거나, 꼼수를 부렸거나.

'무조건 꼼수지. 파르스는 [카르 숨] 치고는 무난한 재능이니.'

그것도 있고.

"우웩!"

테인이 또 각혈을 했다.

이번에는 붉은 덩어리 같은 게 나 왔다.

"웩…! 우욱!"

피를 닦아낸 테인이 민망한 듯 말 을 덧붙였다.

"사기꾼 새끼. 부, 부작용 없다면서!"

"사기꾼이 아닐지도."

"뭐?"

에른이 한숨을 쉬었다.

"잠깐 기다려 봐라."

테인을 놔두고 치료실에서 나왔다.

문 옆에 놓인 의자.

그 위에서 사리가 자고 있었다.

"쿠울…."

"너 진짜 왜 그러냐. 불안하게."

에른은 의자에 앉으면서 사리를 무 릎 위에 올렸다.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건 아니지?"

계속 잠만 자는 것만 빼면 아파 보이지는 않는다.

털을 쓰다듬으면 여전히 부드럽고 푹신, 촉촉하고.

하도 많이 자서 눈곱이 좀 낀 것 만 빼면 겉보기에는 이상이 없는 듯 한데.

또 죽은 것처럼 자는 와중에도 밥

때가 되면 귀신같이 깨어나서 묵철 괴 한 덩이 뚝딱하고 다시 꿈나라로 떠나는 사리라.

'이쯤 지났으면 아는 사람 나왔을 지도 몰라.'

화륵.

주위를 둘러본 에른의 좌안이 빛나 기 시작했다.

푸른빛에서 붉은빛으로, 그리고 아 지랑이 같은 기운으로.

-에른 : 정보 구합니다. 4계 괴수

〈불가살이〉를 아시는 분. 갑작스런 동면 증상에 대해 알고 싶은데요. 정보료 톡톡이 쳐 드립니다. 메시지 주십시오.

총 세 개 채널에 올려둔 글이다.

그런데 메시지는 물론이고 꼬릿말 까지 뒤져 봐도 정보를 가진 교류자 는 나타나지 않았다.

눈빛이 가라앉았다.

"하긴.…"

4계인이 채널 두 단계 아래로 내

려올 일이 얼마나 되겠나.

0계나 1계는 더욱 관심 밖일 것이 고.

또 4계인이 봤다 해도 그렇다.

'괴수황제도〈세나괴〉에서 언급 안 한 증상… 아무나 알 리 없겠지. 어 떻게 해야 사리가 원래대로 돌아오 려나.'

솔직히 모르겠다.

복잡한 머릿속.

그리고 낯설었다.

이런 기분.

항상 미래 지식과 특전을 이용한 압도적인 정보 우위를 바탕으로 판 단을 내려왔던 에른이었다.

그랬기에 과감한 결정이 가능했고, 덕분에 지금껏 이룬 성과는 꽤 자부 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사리가 이상 증세를 보이는 데도 어찌할 방도가 없으니.

갑자기 칠흑 같은 어둠이 눈앞에 펼쳐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뭐, 별거 아니겠지. 그래야 하 고...

에른은 수건을 가지고 와서 사리의 눈곱을 떼어 주면서 인벤토리를 뒤 졌다.

[보유 물품]

[지식&정보]

연이어 하위 카테고리를 누르자 원 하는 지식이 나왔다.

-활인의결 진단편(지식)

[분할], [저작권 보히

: 생사신으1(生死神醫)라 불렸던 전 설적인 의원, 허작이 남긴 의학서다.

허작은 제2 무림계에서 만인지적 (萬人之敵)으로 불렸다.

무공이라곤 치료에 필요한 내가기 공만 익혔음에도 만인을 상대할 수 있다는 별명을 얻은 이유는.

그의 털끝 하나라도 건드렸다간 허 작에게 생명의 빚을 진 초인들이 가 만두지 않을 것이라.

활인의결은 생사신의의 의술을 종

망라한 귀중한 의서.

진단편에는 허작의 진찰 기법과 비 결, 각종 사례가 실려 있다.

"1계는 이게 특징인가? 치료사 프 로필이 뭐 이리 화려해?"

어느 정도 과장이 섞였을 수 있겠 지만.

꽤 높은 가격에 판매되고 있고, [저작권 보히 품목인 걸 보면 어쨌 거나 귀중한 책인 것은 맞는다고 봐 야 한다.

무림만물상에 재고를 쌓으면서 구 하게 된 물건인데, 되팔기엔 써먹을 데가 있어 보여서 가지고 있었다.

'제일 먼저 테인한테 써먹게 될 줄 은 몰랐지만...

약간의 고민 끝에 [흡수]를 터치.

[흡수가 시작됩니다』

['내 머릿속의 스펀지'의 효과가 적 용됩니다.]

활인의결 진단편의 볼륨은 상당했 다.

질병의 종류는 많고도 많고 그것들이 몸에서 발현되는 증상과 징후 또 한 너무도 다양하니 당연한 것.

그러나.

깨달음과 심오한 사유, 체득된 지 식이 아닌 종이에 적힌 활자를 흡수 하는 거 니 까.

이 정도는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면 충분했다.

[흡수가 완료되었습니다.]

'그럼... 알아보러 갈까? 하긴, 좀 궁금하긴 했어.'

다시 테인의 병상.

이불 위가 온통 피로 물들어 있었다.

"각혈이 안 멈추나 보군."

"치료사는...?"

"밖에 없던데. 불러다 줘?"

"아, 안 돼!"

"왜?"

"알잖아... 내상이 이렇게 심한 걸 보면."

"눈썰미 좋은 치료사는 의심할 수 있겠지. 대련에서 졌다고 이렇게 되 지는 않으니까."

"어차피 금방 사라질 증상이야. 너 도 약속 지키기로 했었지? 꼭 지켜 라."

"뭘 그렇게 보}? 대답 안 흐fl?" 금방 사라질 게 아니다.

칼슨의 후계자를 요절하게 만든 그 증상인데.

전생에 테인은 아카데미를 졸업하 고 몇 년 뒤, 돌연 요절하고 만다.

잦은 각혈과 호흡 곤란 증세.

그리고… 시름시름 앓던 끝에 사망.

냉혈공작은 온갖 치료 마법과 신성 력을 동원해 아들을 치료하려 했으 나 백약이 무효했다.

턱.

"...뭐 하는 거냐?"

"있어 봐."

에른은 테인의 손목을 잡고 진맥을 시작했다.

눈을 감고 집중하자 허작의 가르침 이 떠올랐다.

'가볍게 진기를 흘려 넣어 신체를 내관한다. 오장과 육부를 지나며… 이때 맥의 변화를 느낀다. 엇?'

탁!

테인이 결국 에른을 쳐냈다.

"뭐 하냐고!"

"뭐긴…."

생각을 정리해 본다.

'폐장에 종양이 있다. 시간이 지나 면서 종양이 커지고, 그래서 호흡에 도 문제가 생긴 거야.'

치료 마법과 신성력은 몸 안의 나 쁜 기운을 없애 준다.

그런데 종양은 어떻게 보면 신체의 일부.

'외과적으로 절제하지 않으면 제거 할 수 없다… 그래서 뭔 수를 써도 낫지 않던 거였어.'

에른의 표정이 심각해진 것도 모르 고, 테인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드러 냈다.

"다짜고짜 내 손목을?! 뭐 때문 에… 이런 건지… 설명해라."

"...나도 유쾌하진 않거든? 뭐가 예쁘다고 도와주고 있는 건지."

"돕긴 뭘 도와? 이게 미쳤나."

적반하장의 태도.

에른의 말투가 날카로워졌다.

"그냥 닥치고 내 말 들어. 아까 너 멍청하다고 했지? 그거 알아? 넌 생 각보다 더 멍청해. 그냥 멍청한 것 도 아니고 아주 똥멍청이라고!"

"뭐, 똥멍… 진짜 단단히 미쳤냐?

에른 스틸가드, 연승전 한 번 이겼 다고 아주 눈에 뵈는 게 없지?"

"시끄러! 잠력 격발제는 신체를 활 성화시킨다. 그것도 엄청. 그래서 순 식간에 커져버린 거야. 하필 써도 잠력 격발제 같은 걸 쓰냐."

테인은 자기 손으로 본인 수명을 단축시킨 셈이었다.

그러고도 아무것도 얻지 못했고.

처음으로 테인이 딱하다고 느껴졌 다.

"뭐라는 건지… 괴상한 말이나 늘

어놓을 거면 꺼져."

알아낸 것을 전부 말한다면 테인이 믿어 줄까?

'전혀.'

그렇다고 모른 척 넘어가기에는 뭔 가 좀 찔린다.

'진단법만 배웠지, 치료법을 흡수 한 건 아니니까. 그래도 최대한 진 행을 늦추려면...

마음이라도 편해지기 우]흐L

에른은 테인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

봤다.

내부를 저미는 듯한 금안과 마주하 자 테인이 흠칫했다.

"자, 자꾸 왜 이래?"

"앞으로 잠력 격발제 같은 건 쳐다 도 보지 마. 폭식, 과한 수련, 음주 도 금물이고. 아, 가장 중요한 거. 스트레스 받지 마라. 알았어?"

"갑자기 뭔...

"조금이라도 오래 살고 싶으면 명 심해. 난 할 만큼 했다."

에른은 그 말만 하고 치료실을 떠

났다.

혼자 남은 테인은 테인대로 어이없 어했다.

그가 소리쳤다.

떠나버린 에른의 뒤에다 대고.

"내가 지금 스트레스 받는 게 다 누구 때문인데. 사람 놀리나? 아, 스트레스 받아...

[123 화]

"...오랜만일세. 에른 학생."

사리를 품에 안고 밖으로 나오자 말쑥한 중년 남자가 앞을 가로막 았다.

단정한 머리에 깔끔 그 자체.

믿음직한 옆집 아저씨 같은 느낌 의 그는 에른이 아는 사람이었다.

감찰기사단 단장 제니츠.

옆구리에 찬 검만 아니었어도 기 사보다는 상단의 회계 담당이나,

행정 관료처럼 보인다.

'하지만, 겉모습에 속아선 안 되 지.'

저래 보여도 별명이 미친개라서.

막상 대화해 보면 미치지도, 개 같 지도 않아서 놀라움을 자아내지만.

남들이 그렇게 부르는 데에는 이 유가 있을 것이다.

"반갑습니다."

가볍게 목례하자 제니츠가 고개 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그 동물은?"

"제가 키우는 녀석인데요. 뭐 문 제라도?"

"문제라니, 전혀 없지. 그냥 의외 라서 말일세."

"무언가에 정을 주는 스타일은 아 니라고 봤거든. 그게 사람이든 동 물이든."

"그렇게 보고 계셨다면 잘못 보셨 네요."

"하하, 그런가?"

제니츠가 싱글싱글 웃기 시작하

는데 눈은 전혀 웃지 않고 있다.

날카로운 바늘 끝과 마주한 듯한 느낌.

저번에 취조 받았을 때에는 바람 빠진 공처럼 물렁하기만 했는데.

무엇이 그를 변하게 했는지는 오 래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바쁘신 분이 여긴 어쩐 일로?"

"어쩐 일은. 세기의 대결이 벌어진 다는데, 당연히 구경하러 와야지."

"...과장이 심하시네요. 올해의 대결

은커녕 이달의 대결도 안 될 텐데요."

"좀 많이 과장이긴… 하군. 그래도 내가 말일세, 보고 싶은 것도 많고 알고 싶은 것도 많은 나이라서."

"실제로 놀라운 장면들도 많이 나 왔고. 21클럽의 충격패, 그것도 리 버스 스윕으로! 후배들 중에 21클 럽 출신 꽤 있거든? 걔들 오늘 잠 은 다 잤지. 분해서 폭음하다가 내 일 새벽쯤 길거리에 파이 몇 판씩 구워댈걸?"

"파, 파이라… 발상도 참."

비슷한 점이 없는 건 아니지만 뭔 이런 생각을 다 하나 싶다.

'이래서 미친개인가? 살짝 미친 거 같긴 한데.'

"거기에다 새로운 오러 유저의 탄 생…! 그리고 뒤이어 또 탄생. 아 니, 이건 탄생이 아니라 공개인가? 아무튼 못 봤으면 땅을 치고 후회 했을 걸세. 그만큼 대단했어."

"다행이네요. 와서 보셨으니까."

"자네 좀 섭섭해. 나만 쏙 빼놓고 초대장 돌리고. 동료 기사한테 전 해 듣지 못했으면 이 좋은 구경을

못 할 뻔했잖은가."

"죄송함니다. 괜히 시간만 뺏는 것 같아서 그랬거든요."

"시간을 삣어? 절대 아니지. 난 오늘 기적이 일어난 걸 목격했네. 그것만으로도 발걸음 할 가치가 있 었어."

"기적이라면, 연승전 결과 말씀인 가요?"

"아니."

제니츠가 웃음을 딱 멈췄다.

그와 함께, 겉으로나마 화기애애했

던 분위기도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다른 사람들은 심각해지긴 했어 도 의문스러워 하지는 않더군. 바 리온 효과겠지? 바리온도 오러 유 저인데 에른 스틸가드도 오러 유 저일 수 있지〜 뭐 이런?"

"임팩트가 크긴 했죠. 멋있더군요."

"근데 난 의문이 들어. 얼마 전까 지 4급 수준이었던 학생이 그새 오 러 유저로 올라서는 게 가능할까? 다른 게 기적이 아니라 그게 진짜 기적이지."

'역시.'

제니츠는 얼마 전, [마나 측정]으로 에른이 4급이라는 걸 확인했다.

[마나 측정]은 [전투 악수]와는 다 른 가장 확실한 실력 측정법.

상대방의 몸 안 가장 깊숙한 곳 까지 들어가 마나 하트를 직접 건 드리는 방식이라.

"그때 [강철의 숨결]이 5성에 가 까운 4성 경지라고 말했던가? 결 국 5성에 올랐나 본데. 그러면 3 급까지는 충분히 된다고 보}. 그런 데 2급은… 기적이라도 일어나지 않은 다음에야."

"[강철의 숨결]은 기적을 만들어 내는 마나 호흡법이니까요. 5성의 경지는 2급 수준까지 포괄합니다. 다른 가문의 호흡법과는 다르죠."

« O "

"5성에 올라가니 그동안 품고 있던 실마리가 도움이 되더군요. 그리고, 아시잖아요. 1급이니까. 오러는 만들 어내는 게 아니라 주어지는 것이라 는 걸."

"무슨 특별한 계기라도?"

"절박감이죠. 소중한 사람들을 지 켜야 한다는."

"역시 캐릭터가 안 맞는데...

제니츠가 보이는 의혹의 눈빛은 전혀 수그러들지 않는다.

"실력을 숨기고 있었다고 보시는 건가요?"

"그건.…"

제니츠가 턱을 만지작거렸다.

'더 말이 안 되긴 하지. 나하고 디 르카 경을 둘 다 속이려면 특급이어 야 가능한데… 저 나이에 특급이면 건국황제를 뛰어넘는 천재라는 거 아닌가. 확률을 비교하면...

그가 입을 열었다.

"...그런 건 아닐세."

"무슨 생각 하시는지 알아요. 오러 만들어 내고 나도 잠깐 기분 묘했으 니까. 설마 이거 의심받는 거 아니 야…? 하고. 그래도 그렇지. 저 1급 아니고 2급이거든요?"

아카디오에서 만들어 낸 철벽의 알 리 바이.

그러나 디르카는 쿤츠의 흉수로 에른을 지목하면서, 에른이 1급 수준 이라면 모든 의문이 해결된다고 주 장했다.

검증해 보니 4급 상위 정도여서 꿀 먹은 벙어리 꼴이 되어 물러났 지만.

"1급은 아니긴 해. 공교롭게도 한 단계 아래지만."

"저 의심 받는 거 맞군요."

"그 짧은 시간에 오러 유저가 된다 는 건 말했다시피 기적에 가까워. 수상한 것은 사실이지. 날 초대 안 한 것도 그렇고."

"그건요… 감찰하시느라 바쁘실 텐데 이런 일로 귀찮게 해 드리기 싫어서."

"내 앞에서 오러를 보이기 싫어서 그런 건 아니고?"

"무슨 그런 속 보이는… 단장님께 선 수도의 모든 소식을 듣는 분이 시죠. 어차피 알게 될 텐데 초대하 나 안 하나 달라질 게 있어요?"

"스틸가드 가에 나온 오러 유저… 오늘 안으로 급보가 날아오긴 했 겠군."

"역으로 생각하면, 일부러 초대하 는 게 제 발 저리는 거 아닌지? 나 결백하다고 어필하는 거 같잖아요."

"그런가?"

제니츠의 고개가 끄덕여지려는 차.

"아니지. 역의 역으로. 진짜 결백하 다면 어떻게 보일지는 개의치 않을 테니까. 초대하는 게 더 결백해 보 이네. 역시 수상해!"

"...이만하시죠."

할 일이 없었으면 역의 역의 역이 나, 역의 역의 역의 역까지도 주고 받았겠지만.

그럴 기분도 아니고 상황도 아니 었다.

'기척?'

그것도 두 사람의.

에른이 제니츠의 너머를 바라보 려 하자, 그가 어깨를 틀어 앞을 가로막았다.

"아무튼. 이 정도 심증으로 수사를 개시할 수는 없겠지. 그래도… 조심 하는 게 좋을 걸세. 나 자네한테 좀 배신감 느끼고 있으니까."

"...저 물린 건가요?"

제니츠는 두 손가락을 자기 두 눈에 댔다가 에른을 향해 꽂았다.

"쉽게 떼어내진 못할 걸세. 으음?"

제니츠도 뒤늦게 기척을 느낀 듯. 그가 뒤를 돌아봤다.

병동 쪽으로 남녀가 다가오고 있었다.

"...캔달 경?"

남자는 에른도 제니츠도 아는 사람.

약간 떨어진 거리에서 걸어오는

여자는 에른이 모르는 사람이었다. 스치듯이 얼굴만 보고 지나쳤던.

'그 눈빛 이상한 마법사...?'

에른은 그저 무심할 뿐.

반면, 그녀의 얼굴로 시선이 간 제니 츠는.

"헉...!"

미친개라 불리는, 비리 기사들에 게는 사신과도 같은 감찰기사단의 수좌.

그의 낯빛이 새하얗게 질려 가고 있었다.

"어, 음…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다음에 봄세."

"그러시죠."

"가기 전에 잠깐...?"

아까부터 그의 시선이 가슴팍 쪽 으로 자꾸 향하긴 했었다.

눈짓으로 허락해 주자 제니츠는 사리의 등을 톡톡 쓰다듬어 보곤 몸을 돌려 황급히 내뺐다.

그런데.

"...감찰 기사단장 아니신가?"

"아, 안녕하십니까."

캔달이 그를 불러세우자 제니츠가 멈춰서서 허리를 90도로 꺾었다.

"전 바쁜 일이 있어서… 또 뵙겠

습니다!"

후다다닥.

'왜 저러지?'

이상한 행동을 보이는 것은 제니 츠뿐만이 아니었다.

가까이 온 캔달 역시 몹시 떨떠 름해 보였다.

"조, 조카. 회원들하고 같이 안 있 고 왜 여기… 있어?"

"잠깐 볼 일이 있어서요. 그건 그 렇고 숙부님 표정이…. 제니츠 단 장님도 그렇고, 두 분 껄끄러운 사

이인가요?"

감찰 기사단의 수사 대상은 기사 들로 한정되어 있지만, 제니츠라면 또 모른다.

수사를 이유로 마탑을 들쑤신 적 이 있을지도.

"껄끄러워? 내가? 기사단장하고? 왜?"

"그럼 왜 이런 분위기인데요?"

캔달이 여자의 눈치를 살폈다.

"그게...

'연인일까?'

캔달은 멜로 숙부와는 달리 세월 을 정면으로 맞은 중년 남성.

여자는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웠 지만 젊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전혀 안 어울려. 있을 수 없는 일 은 아니지만, 가능성이 떨어지겠지.'

그런데 단순한 동료 마법사라기 엔 캔달의 태도가 이상했다.

에른은 여자에게 물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누구시죠?"

여자가 입을 뗐다.

고혹적인 붉은 입술이 열리고.

"그 족제빗과 생물은 뭐지, 소년? 패밀리어인가?"

패밀리어는 마법을 통해 주인과 영적으로 연결된 동물을 뜻한다.

마법사도 사회인인지라 주로 소 동물들을 패밀리어로 삼곤 하니, 사리를 보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 도 무리는 아니었다.

"아닌데요. 전 마법사가 아니라서."

"그럼 왜 데리고 다니는 거지? 정 서 안정을 위해서? 인간과의 관계

에선 유대감을 얻지 못하니까?"

"예?"

"그것도 아니면 유사시를 대비? 음... 그건 아니겠네. 작아도 너무 작아."

«..2"

느닷없는 소리나 해대는 이 여자.

대체 뭘까.

가뜩이나 사리 걱정으로 마음이 무거운데 유사시 어쩌고 하고 있 으니 기분이 더 가라앉아 갔다.

에른의 눈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보고 캔달이 나섰다.

"스, 스승님. 제가 대신 말씀드려 도...?"

'스승님?'

"그러도록 해, 범재."

"아, 넵! 에른 스틸가드, 예의를 갖추거라. 이분은 시에라 펠가스 님이시다."

"...예?"

캔달의 소개가 불만스러운지 시에 라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이봐, 범재. 수식어가 너무 짧잖

아. 똑바로 해."

"아, 알겠습니다. 제14 마탑주이 시자 나바로 유일의 7서클 대마법 사, 대륙 7대 마법사이신 시에라 펠가스 님이시다. 함당한 예의를 갖추도록."

"어...

에른의 입이 떡 벌어졌다.

수도에 온 이후로 가장 놀란 순 간이 아닐까 싶다.

시에라 펠가스.

'이 여자가 그 여자라고?'

악명이 하늘을 찌르는 대마법人h

그녀가 뜨면 눈도 마주치지 마라… 아니 그냥 근처에 있지를 마라.

무슨 최악의 꼴을 당할지 모르니까.

나바로 정계에서 도는 꿀팁이었다.

귀족들조차 기피하고 왕실에서도 그녀의 부탁이라면 일단 들어주고 본다는.

'별명이… 기억이 날 듯 말 듯 한데'

전생의 에른은 마법이나 마법사 에 대해선 거의 관심이 없었다.

캔달과의 친분이 없었더라면 마

탑에 가볼 생각조차 않았을 것.

그런데도 들어봤을 정도면.

".…"에른?"

"아, 예."

에른은 얼른 표정 관리를 하고 깍듯이 예를 표했다.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에른 스틸가드라고 함니다. 대마법 사님."

시에라가 픽 웃었다.

"스틸가드라? 어린 것이 가문에서 보고 배운 건 있는가 보구나."

그렇게 말하는 그녀도 끽해야 이 쪽보다 7, 8살 정도 많아 보일 뿐 인데.

'원래 숙부님보다 나이 많지 않던 가? 근데 어떻게 저렇게나 어려 보일 수가...?'

시에라의 눈이 번득였다.

요사한 보랏빛 눈동자.

"지금 속으로 생각했지?"

" 네?"

"저 미모는 분명히 변신 마법으로 꾸며낸 걸 거야… 마법이 풀리면 쭈

글쭈글한 얼굴이 나오겠지? 라고."

"아, 아닌데요."

"범재?"

시에라가 캔달을 바라봤다.

"또... 해야 됩니까?"

"말해."

"후.."

캔달이 한숨을 쉬었다.

"6서클인 내가 보증하지. 스승님 께서는 그 어떤 마법도 발동 중이 아니시다."

'이건 무슨...

미친개가 가더니 이젠 미친 여자 가 온 건가?

어이없어하는 찰나.

훅!

시에라의 얼굴이 가까이 들어오 면서 달콤한 향기가 풍겨 왔다.

"소년, 자세히 보니까… 너 피부 가 장난이 아니구나? 다시 태어나 기라도 한 것만 같아. 비결이 뭐 니...?"

문득 두 단어가 떠올랐다.

'이 여자, 미친 게 확실해. 그래, 별명이… 남부의 광녀!'

[124 화]

남부의 광녀.

물론 시에라 펠가스 앞에서 그 말을 입에 담고도 무사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대륙을 다 뒤져도 극소수.

자꾸 별명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 려고 하지만, 그럴 때마다 에른은 속으로 꾹 삼켰다.

'그래도 이 시기에는 그렇게까지 미치진 않았던 거 같은데...

그녀의 악명과 황당한 행각.

본격적으로 귀에 들어왔던 것은 졸업 이후부터인 것으로 기억한다.

주로 사교계에서.

아름다운 외모와 대륙에서 손꼽 히는 천재적인 실력.

왕실조차 함부로 대할 수 없는 대마법사이니, 우러러봄이 마땅한 인물인데....

입만 열면 품위라곤 없이 확 깨 는 발언만.

상식 밖의 기행도 빼놓을 수 없다.

얼마나 씹기 좋은 유형인지.

시에라 펠가스는 나바로 마법계 의 정점이자 사교계의 단골 가십 거리였고 좀처럼 최고의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뭘 그렇게 쳐다보지, 소년?"

마차 안.

맞은편에 앉은 시에라가 눈썹을 추켜세웠다.

보석같이 특이한 눈에 비하면 눈 썹도, 머리카락도 검은색으로 평범 했다.

'의외군...

그녀가 누구인지 깨닫고 나니까 이런 사소한 평범함도 의외의 요 소가 된다.

"왜, 봐도 봐도 신기하니?"

"예?"

"어떻게 이런 미모가 있을 수 있 나 싶지?"

자화자찬이 거슬리긴 박하기 어려웠다.

하다만

그러나 아름다움보다

더 놀라운

것은 그녀의 나이.

'숙부님도 이젠 40대 중반에 접 어들었지… 아마? 스승급 배분이면 최소로 잡아도 10년 차이 아닌가.'

그 나이에 어떻게 20대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걸까.

"소년, 왜 또 그런 눈으로 보나?"

"그런 눈이라요?"

"의심하는 눈. 정체를 밝히면 사 람들이 꼭 그렇게들 보더구나. 이 봐, 범재."

"예, 스승님."

"다시 읊어 봐."

"또, 또요?"

"...너 좀 많이 기어오른다? 요 즘 들어 심해졌어. 6서클에 오르 고 나니까 에고가 막 비대해지고 그러니?"

"그, 그런 거 아닙니다."

"그럼 다시 읊어. 이번에는 풀버 전으로."

캔달이 또 한숨을 쉬었다.

"스승님께서는 아름다움을 유지하 기 위한 그 어떤 마법도 발동 중

이 아니시다. 이건 6서클인 내가 보증할 뿐 아니라, 대륙 7대 마법 사들도 인정한 사실이지."

"그리고?"

"...그렇다는 건, 마법으로 교묘 히 속이는 다른 늙다리들과는 차 원이 다르다는 것. 스승님은 자연 미인이 확실하시고, 세월도 비껴간 분이시다."

'하...

캔달의 얼굴이 자괴감으로 물들 었다.

그도 어디 가면 마법의 대가 대 접을 받는 몸.

6서클이면, 기사로 치면 영웅급 에 준한다.

그런데 이따위 아부나 해야 하다니.

"잘했어, 범재. 앞으로도 초심 잃 지 말도록."

"...예."

둘의 관계.

아무리 사제지간이라 해도 너무 하다 싶다.

에른이 입을 열었다.

"저기… 마탑주님?"

"말해, 소년."

"숙부님을 범재라고 부르시는 이 유가…'?"

둘 사이에 무슨 특별한 에피소드 라도 있는가 했다.

그런데 시에라의 반응은 왜 그런 당연한 걸 묻냐는 듯.

"범재니까 범재라고 하지 뭐라고 해?"

"아니, 6서클이 범재면 5서클은

둔재인가요?"

"맞아, 둔재."

"그럼 4서클은?"

"천치. 그 아래로 침팬지, 앵무새, 물벼룩... 다양하게 있으니까 일일 이 묻지 말고."

"...그래도 전 소년이라고 불러 주시니 황송하네요."

"소년의 재능은 아직 측정되지 않 았으니까. 나 같은 천재일지, 아니 면 물벼룩일지. 기대되네."

"천재라됴?"

" 알잖아."

시에라의 눈에 열기가 떠올랐다.

훈련장에서 보았던 그 눈빛.

캔달은 안절부절못하기 시작했다.

"저, 저기… 조카님?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네."

"설명 안 하셔도 알아요."

반면 에른은 차분했다.

"마탑주님이 아시는 거죠? 미식안 에 대해서."

"어... 어떻게?"

"뻔하죠. 마탑주님이 제 검술 재

능에 관심을 보이시겠어요? 친히 오실 이유라면 그거 밖에는."

"그, 그게 내가 알려드리려고 알 려드린 게 아니고."

"범재 말이 맞아. 본 대마법사가 추론해 낸 거지."

시에라가 다리를 꼬았다.

아슬아슬한 드레스를 입고 저러 니 허벅지 라인이 그대로 다 드러 나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는다.

아예 무신경한 태도.

이런 걸 보면 겉모습은 속여도 오

래 산 내면은 속일 수 없다는 건가?

'하긴, 40살 차이 나면 그냥 핏덩 이로 보이긴 하겠군.'

그러나 에른도 사춘기 소년이 아 니라서 이 정도로는 당황하지 않 는다.

눈길을 주지도, 그렇다고 시선을 피하지도 않고.

"흐음… 제법인걸? 아무튼, 범재 가 얼마 전에 새로운 공식을 들고 왔거든. 그런 건 처음 봤어. 그토 록 창의적이고… 간결하면서도 아 름다운!"

시에라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눈에서는 경탄의 빛이 홀러나왔다.

"근데 그 공식은 범재가 생각해낼 수준이 아니었지. 어디서 베껴 온 거냐고 추궁하다 보니까."

"...제 이름이 나왔군요. 그렇게 밝히지 말아 달라고 했는데."

"미, 미안하다."

캔달이 머리를 숙였다.

그와 함께, 에른의 뇌리에서 캔달 의 목소리가 들렸다.

-조카야, 나다. 메시지 마법이니까

놀라지 말고 반응도 보이지 말고.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봤잖냐. 내가 어떤 취급 받는지. 정말 끝까지 말 안 하려고 했는데… 스승님이 막무가내로 나오면 나로서 는 방도가 없어. 면목이 없다.

찌릿.

시에라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뭐지? 이 마나 흐름은? 또 내 욕 하니?"

"아, 아닙니다. 스승님. 생략된 부 분을 말해주느라고."

"됐고, 본론으로 들어가지. 소년, 정말 미식안의 소유자야?"

에른이 고개를 끄덕였다.

"배운 적 없는 수식들이 너무 쉬 우니까, 아마 그렇지 않을지...

"그래…? 확인해 볼까?"

지잉.

시에라의 오른손에서 작은 마법 진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화앗!

푸른 빛이 그녀의 검지 끝에서 머문다.

"[라이트 펜슬]이니까 놀랄 것 없 어, 소년. 종이하고 펜이 없어서."

그녀가 손가락을 움직이자 허공 에 푸른 글씨가 새겨졌다.

스스

빠른 손놀림.

얼마 지나지 않아 복잡한 마법진 하나가 그려졌다.

"여기서 비효율 구간을 찾아봐."

대륙의 마법은 2계의 수준에 비 하면 한참이나 뒤떨어져 있다.

서클과 마나량은 정신의 단련으

로 늘리고 쌓는 것이라, 여기서도 대마법사면 2계에서도 꽤 대단한 마법사이기는 할 것이다.

'셜린은 3서클, 샤일로크는 5서클 에서 좌절했다고 하니...

에른이 흘끗 마법진을 봤다.

"왜, 못하겠어? 아쉽네. 찾으면 이거 주려고 했는데."

시에라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은은한 빛을 흘리는 돌멩이 하나.

'상급 마나석?'

"뭔지 알아?"

모를 리가 있나.

마나석 거래로 이만큼 큰 에른이다.

지금도 2계에선 주요 품목으로 다루고 있고.

광채만 슬쩍 봐도 등급 측정이 가능할 정도다.

"음... 이상하네. 기사들은 백이면 백, 이거만 보여주면 눈이 탐욕으 로 그득그득 차던데. 막 갖고 싶고 그러지 않아?"

'200코인짜리 가지고 탐욕은.'

물론 준다면 거절할 생각은 없다.

200코인이 뉘 집 개 이름은 아니 니까.

"미식안이면, 당연히 찾아낼 수 있겠지. 아니면, 범재한테 거짓말 을 했거나."

묘한 표정의 시에라.

에른이 손을 내밀었다.

"자요."

"뭐지, 소년?"

"여기, 저기, 거기, 또 저기… 네 부분이요. 찾았으니까 주세요."

"뭐...?"

시에라가 벌떡 일어났다.

환골탈태한 에른의 피부 상태에 감 탄할 때보다도 훨씬 과격한 반응.

짝짝.

캔달이 손뼉을 쳤다.

"대단해, 역시 전설의 미식안. 내 가 하나 찾을 동안 네 개를 다 찾 아 버리는군!"

"...개가 아니야."

"예?"

시에라의 두 눈에서 자색 안광이 줄기줄기 쏟아져 나왔다.

수사적 표현이 아니다.

정말로 보랏빛이 레이저처럼 쏘 아진다.

"스, 스승님!"

"아…."

시에라는 눈빛을 거두고 에른의 무릎 위로 올라왔다.

"왜 이래요?"

"네 개 아니라고. 세 개지!"

그녀가 마법진을 가리켰다.

"여기가 왜 비효율 구간이지? 물론

효율을 감소시키는 부분이긴 흐fl. 하 지만, 마법을 발동시키기 위해선 어 쩔 수 없이 필요한 비효율이라고!"

"그 부분이 찌그러져 보이는 걸 저보고 어떡하라는...

"그럴 리가 없어. 필요한 비효율은 엄밀히 따지면 비효율이 아니다. 미 식안이면 그것도 봐야 하는 법."

"마법사들이 아직 개선 방법을 알 아내지 못했나 보죠."

"뭐라고?"

"그 손 줘 봐요."

에른이 시에라의 섬섬옥수를 꼭 쥐 었다.

"이거 안 놔?"

"글씨 쓰는 마법 다시 써 주세요. 고쳐 보게."

"흥, 그래. 어떻게 바꾸나 보자."

시에라가 [라이트 펜슬]을 다시 사 용하자 에른은 그녀의 손목을 잡고 말한 부분을 고쳤다.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셜린에게서 흡수한 마법 지식 중.

'...로피컬 기법이면 뚝딱인데, 뭐

가 비효율 구간이 아니라는 거야?'

로피컬 기법은 2계에서는 마법사 들의 기본기로 정착되어 있는 테 크닉이 다.

대부분의 비효율 구간을 단박에 제 거할 수 있어 다들이렇게 불렀다.

무적의 면도날이라고.

로피컬의 발견으로 마법사 지망 생들이 얼마나 편해졌는지.

덕분에 커다란 골머리에서 해방 된 지망생들은 로피컬을 거의 마 법의 신으로 추앙한다고 했다.

문제가 너무 쉽게 풀리기 때문에 마도대학에선 필기시험 중에는 이 기법을 금지하기도 한다는데.

'이론적인 면에선, 대륙의 마법은 너무 발전이 안 되어 있어. 그런데 도 대마법사가 일곱이나 되다니, 신기한 일이지.'

에른은 시에라의 손을 놓고 그녀 를 봤다.

"이렇게 바꾸니까 정상적으로 보 이는데요?"

"이,이건...?"

마법진을 몇 번이고 살펴본 그녀 가 에른과 눈을 맞췄다.

잔뜩 상기된 두 뺨, 흥분한 보라 색 눈동자.

"그 눈, 정말 미식안이 맞잖아…!"

시에라는 에른에게 상급 마나석 을 건넸다.

"자, 가져. 난 약속은 지키는 사 람이야."

"고맙습니다."

"감사는 미식안이 나타난 것으로 충분하고. 소년, 아니 신동. 이것

도 개선해 봐."

그녀는 손가락을 튕겨 마법진을 지우고 정신없이 수식을 써 내려 갔다.

그 모습에, 에른은 잠시 정리가 필요하다는 걸 느꼈다.

"저기… 마탑주님?"

"왜, 신동."

"제가 지금 마탑주님 초대로 마탑 에 가고 있잖아요? 그 이유는 제 가 미식안이기 때문이고."

그렇지."

"저한테 바라는 게 뭔지, 그것부 터 정확히 알려준 다음에 뭔가를 시키시는 게 순서 아닐까요?"

"일리 있어."

시에라가 손을 거뒀다.

"짧게 설명하지. 풀어내야 하는 문제가 있다. 쉽지 않은… 아니 무 지 어려운. 난 거기에 한동안 매달 려 있었고 한계를 느낀 참이지. 그 런데 미식안이 도와준다면 돌파구 가 생길지도 몰라."

" O "

"날 도와라. 그러면 섭섭지 않게 보답해 주지."

"섭섭하지 않게면… 어떻게요?"

"신동, 너 좀 당돌한 거 알지?"

"뭐, 제가 좀."

"그럴 자격이 있기는 하다만. 좋아. 나 시에라 펠가스, 날 돕는다면 그 대의 후견인이 되어 주겠노라."

웬 후견인?

에른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그게 보답이 맞나?'

남부의 광녀를 뒷배로…?

오히려 마이너스가 아닌가 싶다.

분위기가 싸해진 것을 느낀 캔달 이 끼어들었다.

"저기… 음, 흐}하. 스승님, 이러지 마시고."

"내가 뭘?"

"제 조카는 검의 길을 걷는 아이 입니다. 이 자리에서 급히 결정할 사항이 아니지요."

"왜? 스틸가드라서? 스틸가드에서 태어난 작자들은 뭐가 그렇게 잘났

길래 하나같이 마법을 무시한단 말 이냐?"

"그, 그런 뜻이 아니고. 이게 강제 로 시켜서 될 일이 아니잖습니까?"

시에라가 코웃음을 쳤다.

"못 시킬 것도 없지. 내가 존재하 는 한, 마탑은 불락의 요새. 지 애 비가 기사단을 끌고 아들을 찾으 러 온다 해도 내가 눈 하나 깜짝 할까 보냐? 할애비가 살아 돌아온 다면 몰라도."

그녀의 눈에 광기가 어린다.

'이거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예요?'

눈빛으로 묻자 캔달이 메시지 마 법을 보냈다.

-나… 나도 모르겠는데? 저렇게까 지 완성하고 싶은 마법이 있으실 줄 으

'하긴, 남부의 광녀의 속을 누가 알까. 이거 손 놓고 있다간 꼼짝없 이 수식 노예 될 수도 있겠는데?'

창 밖을 보니 마탑이 점점 가까 워지고 있었다.

마탑은 마법사의 홈그라운드.

심리적으로도 그렇지만 실질적으 로도 엄청난 어드밴티지를 받는다.

마나 폭포.

사실상의 무한 동력.

에른의 두뇌가 빠르게 회전했다.

'눈 돌아간 것만 봐도 그렇고… 애초에 말이 통하는 상대가 아니 야. 마탑에선 전설급도 어떻게 못 하는 게 7서클이지. 일단 들어가 면 못 나올지도 모른다.'

그가 결심을 굳혔다.

'어렵겠지만, 해 보는 수밖에.'

[125 화]

자이온 대륙에는 이런 금언이 있 다.

-금화 자루가 검을 휘둘러 주지 는 않는다.

죻은 말이고 맞는 말이다.

돈으로는 죽은 자도 부릴 수 있 다고 하지만, 엄연히 불가능한 일 이 있는 법.

금뭉치로는 기사혼을 무너뜨릴 수 없다.

마찬가지로 골드를 싸 들고 가도 위대한 깨달음의 지혜를 사들일 수는 없다.

그렇기에 영웅급, 전설급에 오른 기사가 추앙을 받고, 대마법사 또 한 뭇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것.

하지만.

'그건 대륙의 상식일 뿐이지.'

시야를 차원 밖으로 넓히면.

모든 상식이 무너진다.

선조들의 통찰과 사유도 이 좁은 세계에서만 적용될 뿐이라는 것.

에른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

생각은 신중히, 결단은 빠르게.

결정을 내렸으면 행동은 과감히.

다그닥, 다그닥...

마차가 질주한다.

어차피 별로 시간도 없다.

냉각된 분위기.

애써 밝은 체하는 에른의 목소리 가 침묵을 깨뜨렸다.

"저기, 대마법사님?"

"왜?"

"너무 건너뛰셔서 따라잡을 수가. 다리 찢어지겠는데요."

"뭐라는 거야?"

"제가 싫다고 한 것도 아니고, 숙 부님께서도 무작정 안 된다고 하신 것도 아닌데. 급발진하실 것까진."

"급발진...?"

시에라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싫다고 말은 안 했지. 근데 그 벌레 씹은 표정은…? 내가 벌레보 다 싫다는 거지? 끔찍이도."

"아, 아닌데요."

'좋지는 않지. 당연히.'

시에라 펠가스를 후견인으로 둔 다라.

나바로에 그녀의 진노를 감당하 고 싶은 사람은 없으니 어지간해 선 귀찮아질 일은 없을 것이다.

문제는 그녀와 한데 묶여 기피

대상이 되리라는 점.

괜히 엮이다 보면 상회 운영에도 지장으로 작용할 수 있다.

애초에 보호자가 필요한 것도 아 니고.

그러나 이런 속내를 드러냈다간 그녀의 광기가 광풍처럼 몰아닥칠 터이다.

에른의 머릿속이 급 가속했다.

"그러네요. 저도 제 마음 몰랐는 데, 이제 알겠습니다. 싫어요."

"뭐라...?"

''조, 조카…?"

시에라보다도 캔달의 표정이 더 심하게 변했다.

-자극하지 마! 이 상태의 스숭님 한테는 무조건 하자는 대로 하는 게 상책이다.

그가 옆에서 고개를 마구 저으며 양팔로 엑스자를 그리는데도 에른 은 그만두지 않았다.

"아시다시피, 전 스틸가드입니다."

"...그래서?"

시에라가 활짝 웃었다.

왠지 불길한 웃음.

"스틸가드니까, 강철의 심장이니 까. 마법사 따위의 도움은 개나 주 라는 거구나?"

~°1, 이젠 웃으시네? 에른, 진짜 큰일 났다. 이걸 어떻게 하냐....

캔달이 발을 동동 구른다.

그럼에도.

빙긋.

에른은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런 뜻은 아니구요. 스틸가드의 혈통으로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죠. 높은 관심과 기대치, 조금 도 빠짐없이 충족시켜야만 한다는 압박감…. 솔직히 말하면 전 별로 못 느꼈지만요."

"흥, 그 나이에 오러 유저니까 이 상할 것도 없지."

"그러게요. 이보다 더 잘 할 수가 있을까요?"

"하지만 스틸가드라서 힘들었던 게 없지 않았어요. 기대치를 웃도는 성 장을 보여도.... 주위에서 하는 말 이라고는 핏줄이 좋아서, 지원 빵빵

하게 받았으니까… 폄하하는 얘기뿐."

실제로는, 폄하가 아니라 게으르고 재능 없다는 정당한 평가를 받았지만.

달라진 모습을 보인 이후로는 반 전이 주는 놀라움 때문일까, 대견 하다는 말만 들었던 것 같다.

꾸며낸 얘기라 그런지, 감정 이입 이 잘 안 되는데.

'슬픈 생각, 슬픈 생각...

에른은 얼굴을 싹 바꿔 한껏 시 무룩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물론 가문이 있어 지금의 제가 존

재하는 것이겠죠. 그래도 가끔은 그 런 생각을 해요. 내가 스틸가드가 아니었다면, 평범한 가문에서 태어 났더라면, 에른 스틸가드가 아닌 에른 그 자체로 평가받을 수 있지 않 았을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대마법사님께서 제 후견인이 되어 주신다면 정말 좋을 거예요. 마탑주 이시고, 대륙에서 손꼽히는 마법사 에, 나바로를 지키는 양대 거목… 어느 정신 빠진 인간이 감히 절 건 드릴까요."

시에라가 팔짱을 꼈다.

"잘 아네, 신동. 적당히 맛 간 정 도로는 어림도 없지. 그렇게 잘 알 면서 왜 거부하는 건데?"

"나무가 크면 그늘도 넓은 법이라 고 했던가요. 그늘이 시원하고 좋 지만 햇볕이 닿지 않아 그 아래 풀들은 높이 자라기 어렵죠."

"흠."

"스틸가드란 이름… 고맙고 자랑 스럽지만, 가끔은 버겁고 거추장스 럽다고 느낄 때도 있어요. 그런데 더 크고 무성한 나무가 들어선다

고 생각하니까. 네, 확신이 섭니 다. 싫은 게 맞아요."

마지막 한 마디를 위한 빌드업.

캔달은 이게 맞나? 라는 표정으 로 눈을 끔벅거리는데.

"내 위명이 부담돼서 그랬다… 그 렇단 말이지?"

시에라의 입꼬리가 슬금슬금 말 려 올라가고 있었다.

싸늘한 눈빛은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진 지 오래.

'통했나? 통한 거 같은데...?'

에른이 얼른 대답했다.

"후견인이 되어 주시겠다고 했을 때, 사람들의 반응부터 떠올랐어 요. 시에라 님의 비호를 받는 운수 좋은 놈, 성장이 빠른 것도 마법의 도움을 받은 거겠지… 부러움을 감 추기 위한 말인 거 아는데도. 내가 그걸 감당할 수 있을까 하고."

"거목? 스틸가드보다 더 크고 무 성? 남들이 부러워한다고?"

시에라는 손가락으로 자기 머리 카락을 비비 꼬면서 웅얼거렸다.

"...정, 정말 그렇게 생각해?"

"그럼요."

"흐흥… 흐, 흠! 그런 이유였다면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지만. 그렇 더라도, 난 신동이 필요해."

에른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도움이 되었으면 싶어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나바로의 수 호신, 시에라 님의 부탁이니까."

"수호신…? 흠흠. 원하는 걸 말해. 나 대가 없이 사람 부리지 않아. 어지간한 거면 다 들어줄 테니까."

"글쎄요… 별로 바라는 게 없어서."

에른의 눈빛이 변했다.

"시간을 좀 주시면 안 될까요?"

"웬 시간?"

"뭐가 좋을지 고민해 봐야 하고, 그거 말고도 생각할 게 많아요. 지 금까지 미식안을 숨겨 왔는데… 이 렇게 드러나게 될 줄도 몰랐고."

"얼마면 되는데. 한 10분?"

"아… 뇨. 한 사나흘은 주셔야."

"안 도fl! 그렇게는 못 기다려."

" 하루는요?"

"그것도 길어. 일단 내 방에 가서 얘기하자."

시에라의 눈에 다시 광기가 돌아 오려 한다.

'역시 말로 구슬리는 건 한계가 있어...

에른이 강수를 꺼냈다.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저한테 는 중대한 일이라. 일단 대마법사 님과 마탑에 들어가면 보는 눈도 있을 것이고… 아, 이미 제니츠 단 장님이 봤구나. 아무튼 생각을 정 리할 시간이 필요해요."

" 얼마나?"

"한 세 시간...?"

"너무 길어. 한 시간."

"두 시간은요? 대신, 보답이라고 하긴 뭐하지만… 이거 개선해 드릴 게요."

에른이 허공에 쓰여진 수식을 가 리키자 을라가던 시에라의 눈꼬리 가 슬며시 내려왔다.

"정말?"

"마탑에 들어가기 전에, 온전한 혼자만의 공간, 거기에서 고심할

2시간을 주시겠다고. 이름을 걸고 약속하신다면요."

"개선이 된다면 그렇게 하지. 대 륙 7대 마법사, 나 시에라 펠가스 의 이름을 걸고 약조하노라."

"들으셨죠?"

캔달이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 그, 그래."

- 너, 설마… 아니지?

불안한 눈빛을 받으며, 에른은 로 피컬 기법을 사용해 수식의 비효

율 구간을 잘라냈다.

"아, 아름다워...

시에라는 홀린 듯이 간결해진 수 식을 둘러봤다.

"마탑주님… 약속은?"

"아, 약속. 약속 지켜야지. 이봐, 길잡이. 마차 세워."

그녀는 수식에 빠져 있어서 에른 이 사리를 데리고 마차에서 내리 는데도 눈길만 한 번 주고 말 뿐 이었다.

"두 시간이다, 신동. 여기서 기다

릴 테니까 적당한 곳에 가 있다가 돌아와. 그렇지 않으면...

"당연하죠. 마탑주님과의 약속인 데. 감히 어떻게."

에른은 정중히 허리까지 숙인 뒤 에 마차에서 몸을 돌렸다.

그렇게 스무 걸음쯤 걸었을까?

'내가 미쳤냐?'

에른은 코너를 돌자마자 경신술을 발휘했다.

겨우 얻어낸 두 시간.

그 안에, 시에라의 손아귀에서 벗

어날 방법을 찾아야 한다.

"꺄악! 뭐야?"

"방, 방금 뭐가 지나갔냐?"

평소 같으면 길거리에서 실력을 내보이지 않았을 테지만, 지금은 비상 상황.

에른은 놀란 행인들의 반응에도 개의치 않고 내공을 두 다리로 쏘 아 보냈다.

'이게 잘한 선택일까?'

모르겠다.

어쩌면 마탑에서 협상했어도 얘

기가 잘 풀렸을지 모른다.

의외로 기분파인 것 같았으니까.

비위를 잘 맞춰 준다면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을 찾았을지도?

'물론 그럴 수도 있지. 근데 또 돌변한다면?'

수틀리면 눈에 뵈는 게 없는 성격.

불안정한 시에라의 기분에 자신 의 행로를 맡긴다라.

선장 없는 배에 올라탄 격이다.

'뭐, 영 답이 안 나오면 시간 내 로 돌아가면 되는 거고.'

*

필라프 상회.

때 아닌 회주의 방문 소식을 듣고 마쿠스가 얼른 뛰쳐나왔다.

실비아 또한.

"회, 회주님...!"

간만의 재회다.

필라프의 모습을 한 에른, 그리고 아직도 잠에 빠져 있는 사리까지.

반가움에 동공이 일렁이는 그녀.

"사리야…!"

에른이 팔을 내밀자 실비아가 얼 른 사리를 품에 안았다.

장밋빛 뺨으로 부드러운 털을 문 지르면서.

"얼마나 보고 싶었는 줄 알아? 요 잠꾸러기...

천진하게 반기는 실비아와는 달 리 마쿠스는 의아한 얼굴이었다.

그가 다가와 귓속말을 했다.

"저기… 회주님. 연승전 중 아니 신지?"

"응, 다 끝났어. 잘 마무리됐고… 준비 끝내주게 해 줬더라. 수고했 어, 부회주."

"예, 뭐. 시키신 대로 한 것뿐인 데요. 그런데 어쩐 일로?"

"아, 그게."

에른이 씩 웃었다.

"내가 좀 귀찮은 일에 휘말렸거든."

"어떤...?"

"2시간쯤 뒤에 시에라 펠가스가 찾아올 거야."

"시에라 펠가스라. 중요 고객입니

까? 이름이 어딘가 익숙하네요."

"익숙하겠지. 수도에서 가장 악명 높은 사람 중 한 명이니까."

"그렇습니까? 그럼 대접을 확실히 해야겠… 잠, 잠깐?!"

마쿠스의 눈이 커졌다.

"시, 시에라 펠가스요? 그 유명하 신...

더 커질 수가 없을 만큼.

"악명도 유명의 일종이긴 하지."

"그, 그, 그, 그… 분이 저희 상회 에는 왜? 그것도 겨우 두 시간 뒤

에요?"

"하긴, 2시간은 너무 이른가?"

"그럼요! 청소도 해야 하고. 다과 도 최고급으로 준비해야 하는데."

"나 찾으러 바로 상회부터 오진 않을 테니까. 2시간 반 정도?"

마쿠스의 낯빛이 하얗게 질려 가 지만, 아직 중요한 부분은 말도 꺼 내지 않았다.

"고객이 아니고 나 잡으러 오는 거야."

"예... 예에? 그게 무슨?"

"말 그대로. 그러니까 직원들 미 리 퇴근시키고. 실비아하고 사리는 어디로 피신 보냈으면 하는데...

"그 정도로 심각합니까?"

"아마도. 부회주한테 부탁할 게 있어. 남아서 시에라 펠가스한테 메시지를 전해 줬으면 해."

"그, 그건 좀...

"걱정 마. 대마법사 체면이 있지, 민간인을 건드리진 않아. 하라는 대로만 하면 상회가 피해 입는 일

은 없을 거야."

"아, 알겠습니다. 떨리지만… 회주 님을 위해서라면."

"고마워, 부회주. 잊지 않을게."

에른은 마쿠스에게 메시지를 전 하고 실비아와도 따로 얘기했다.

"...그래, 지르칼의 별장이면 시 에라라도 단기간에 찾을 수는 없 겠네. 사리하고 잘 숨어 있어."

"무, 무슨 일인진 모르겠지만요. 몸조심하셔야 해요!"

"물론이지. 내 몸이 가장 큰 재산

인데."

지시를 마친 에른은 지하실로 내 려갔다.

비장한 각오치고는 모양새가 영 안 난다.

대마법사를 상대하기 위해서라기보 단 두려워 숨는 것처럼 보이니까.

하지만.

'내 머릿속을 믿는다. 분명 시에 라 펠가스도 약점이 있어.'

누구보다도 오만하고 자기 확신 에 찬 시에라지만, 그녀도 영원한

승자였던 것은 아니었다.

기억에 의하면, 그녀도 자존심을 구긴 적이 있다.

그것도 이변이라 불릴 정도로 처 참하게 털린 적이.

-시에라 펠가스, 대마법사 아르 엘도와의 마법 대결에서 완패!

-7서클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졸 전을 보여줬다죠? 체면이 말이 아 니겠어요.

-아르엘도 님이 그랬다는데. 족쇄

를 찬 채로 덤비다니, 자기로선 이 해할 수 없다고… 무슨 뜻일까요?

'이거구나!'

번쩍 눈을 뜬 에른이 머리에 쓴 드림 머신을 벗어냈다.

현재 실력으론 7서클에 비빈다는 것은 말이 안 됐다.

7서클이면 거의 전설급 전투력이라 고 봐야 하니까.

하지만 꿈의 내용대로라면.

'가능성, 충분히 있다.'

화르륵.

에른의 눈이 붉게 빛났다.

계단을 오르고, 상회를 떠나면서.

필요한 물품을 닥치는 대로 사들 였다.

['내공(30년)'을 구매했습니다.]

『탈혼령(귀물)'을 구매했습니다.]

『역천단' 20개를 구매했습니다.]

['진천벽력탄' 15개를 구매했습니

다.]

『천뢰구' 10개를 구매했습니다.]

『신선폐' 200mL을 구매했습니다.]

['용독술 입문(지식)'을 구매했습니

다.]

['암기술 입문(지식)'을 구매했습니다.]

['진법학 총론(지식)'을 구매했습니다.]

[126 화]

이동 중에 무려 5만 코인을 썼다.

이렇게 코인을 팍팍 써댄 적이 있 었나?

바로 떠오른다.

〈환골탈태〉만 해도.

코인만 4만 5천에, 태양신군에게 기타 온갖 비싼 물품들을 안긴 덕분 에 겨우 살 수 있었고.

'그건 필요한 지출이긴 했지.'

앞으로도 계속 쓸 자기 몸.

2계로 올라가기 위해〈완전히 탈바 꿈한 자〉위상이 필요하기도 했고.

하지만 이번에는 경우가 좀 다르다.

앞뒤 안 재고 일단 지르고 보는 거라.

'뭐, 남으면 무림만물상 재고로 돌 리면 되는 거긴 하지만.'

7서클 마법사를 감당하려면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야 한다.

인벤토리에 저장해 둔 물품이나, 제휴 상점의 재고 정도로는 안 되

고… 채널 전체에서 가능성을 끌어 모아야 했다.

그것도 있고.

'...이만하면 뜰 때도 되지 않았나?'

1계에서 구매를 멈추지 않는 이유.

입질이 와야 할 타이밍이라.

언제 달성할 수 있을지 까마득하기 만 하고, 감조차 안 잡히던 업적이 었는데.

길고 긴 행군의 끝이 보이는 듯한 느낌이었다.

별생각 없이 걷다 보니까 목적지가

성큼 다가와 있는?

에른은 [섭리의 눈]으로 얼마나 남

았는지 확인했다.

[업적 달성까지 필요한 사용량 -

1500]

'애매하네. 뭘 더 사지?'

흡수 중인 내공과 지식들을 보니.

['진법학 총론(지식)', 흡수 진행

98%....]

『용독술 입문(지식)', 흡수 진행

96%....]

['내공(30년)', 흡수 진행, 92% ....]

['암기술 입문(지식)', 흡수 진행

75%....]

다른 건 거의 끝나 가는데 암기술 은 다소 늦게 흡수를 시작한 터라, 아직 시간이 더 필요했다.

'용량 큰 건 안 되겠고. 내공 약간

정도라면 흡수할 수 있을 거 같은데.'

어쨌거나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 이 내공이다.

단전의 수용량을 넘어서는 수준만 아니라면.

환골탈태도 했고, 현천태을신공의 추가적인 성취로 그릇 자체는 모자 라지 않는 편.

이 30년 내공을 모두 흡수하고 나 면, 거래소 기준 192년 치의 내공을 보유하게 되는 셈이다.

그런데 192는 뭔가 애매한 숫자라.

200년을 채우기로 하고 내공을 추 가 구매했다.

['내공(8년)'을 구매했습니다.]

[캐시백- 288코인을 받습니다.]

"...이런 날이 오긴 하는군. 다 무림만물상 덕분인가."

금빛 예감이 눈앞을 간지럽힌다.

찰나 동안 호흡이 정지했다.

곧이어 떠오르는 메시지는.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황금왕 四 : 1계 채널에서 100만 코인을 사용하십시오.]

[달성 보상! 10만 코인을 받습니다.]

[보유 코인 : 181671]

10만 코인 입금!

실탄이 든든하게 채워졌다.

에른은 8년 내공도 홉수로 돌리고 가볍게 운기 했다.

쏴아아아.

웅혼한 내공이 몸 안을 누빈다.

이제 내공이 3갑자를 넘어섰으니… 추가 8년 치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진법학 총론(지식)', 흡수 완료.]

『용독술 입문(지식)', 흡수 완료.]

에른이 하늘을 봤다.

'빠듯하군. 빨리 준비하자.'

그는 주위의 돌과 바위, 나무 등을 이용해 진을 설치했다.

아직 지식이 완전히 체화된 게 아 닌 데다, 시간 여유도 없어서 복잡 한 진을 만들 수는 없었다.

그저 생문과 사문을 정하고, 이쪽 에 유리하게 작용할 몇 가지 장치만 추가할 뿐.

대략적인 배치를 정하고 나니, 그 다음부터는 단순 노동이었다.

에른은 기물을 나르면서 2계 채널 에 접속했다.

파스스스.

회색빛이 왼쪽 눈을 감돌고.

채널 디자인이 바뀌었다.

반짝반짝.

'음'?'

가장 먼저 에른을 반기는 것은 점 멸하는 [메시지] 카테고리였다.

거래할 상황은 아니지만.

이미 습관이 되어 버려 그런지 터 치부터 하고 봤다.

그런데 최상단에 뜬 메시지는 가격 문의나 거래 요청이 아닌.

[??? : 에른 보아라.]

'뭐지? 웬 물음표 세 개?'

닉네임을 이런 식으로 지을 수도 있던가?

닉네임만 봐도 교류자의 성향을 대 강 파악할 수 있다.

에른처럼 자기 이름을 그대로 쓰는 사람이 있고.

가명이지만 본명으로 써도 이상할 게 없는 교류자도.

닉네임에 별 의미를 두지 않아서인 지 단순 고유 명사나 문자열로 자신 을 정의하는 경우도 있었다.

'통후추', '오트밀쿠키'나 'mokl26' 갇으

여기까지가 정상인 라인.

그런데 본인의 정체성과 개성을 드 러내기 위해서, 혹은 관심받기 위한 목적으로 닉네임을 만드는 교류자들이 있다.

'종이맛빨대용납못해', '차원최강전 투마법사'.

이런 정도야 뭐 애교로 봐줄 수 있지만.

'솔직 히정 령도안키우는놈들이사랑 이 뭔지 나알겠냐', '마나석따위에나의 존하는 나약한놈들' .

이쯤 되면 거래가 아니라 여러 차 원에 자기 존재감을 각인하는 게 목

적이라고 봐야 한다.

그런데〈???〉라니.

이런 닉네임은 처음 봤다.

당연히 뭐 하는 놈인지도 모르겠고.

이 와중에도 불쑥 드는 호기심은

손가락을 가만히 있지 못하게 했다.

메시지를 클릭하자.

[추잡하고 조심성 없는 놈.

그런 주제에 욕심도 더럽게 많아요.

네가 한 짓을 전부 알고 있다.

끄나풀을 쓰면 모를 줄 알았나?

당분간 몸 사리고 있는 게 좋을 거야.

아, 내가 누구냐고?

너무 궁금해 하진 말어, 곧 알게 될 거니까.

그러니… 목 깨끗이 씻고 바른 자 세로 기다리고 있어라.]

"끄나풀? 추잡? 뭐라는 거야? 욕 심 많은 건 인정이긴 한데...

에른은 잘못 들어온 메시지인가 하

고 넘겨 버렸다.

설사 맞는다고 한들, 횡설수설하는 내용을 봐선 혼자 간직한 원한을 내 보이는 이상한 부류 같다.

평소에도 관심 밖인 놈들, 지금은 더더욱 신경 쓸 때가 아니니.

스슷.

에른의 몸이 빠르게 움직였다.

양어깨에 큼지막한 바윗돌을 얹은 채로.

*

"...나 지금 물먹은 거야? 에이, 설마."

약속한 2시간이 한참 지났음에도 시에라 펠가스는 한동안 에른을 기 다렸다.

그러나 결국은 그녀도 인정해야 하 는 순간이 왔다.

"에른…!"

노기로 뒤덮인 얼굴.

시에라가 벌떡 일어나자.

"스, 스승님? 뭘… 어떻게 하시려고?"

"신동 잡으러 간다. 잡아서 아주

주리를 틀어 줘야지."

"그러실 것까진...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감히 나하고 한 약속을, 헌신짝 버리듯 해? 이딴 좁은 마차에서 두 시간을 기다려 줬 는데...!"

"이, 일단 진정하시구요."

"시끄러, 범재. 신동 찾으려면 어디 로 가야 하지? 아카데미부터 쳐들어 갈까?"

"그, 그건 안 됩니다."

시에라가 코웃음을 쳤다.

"조카 사랑이 대단하시군. 뭐, 친조 카도 아니잖아? 마법사가 스틸가드 하곤 왜 그렇게 친하지?"

"사랑보다도… 마탑주님께서 움직이 시면 갈등의 씨앗이 됩니다. 기사들이 들고일어날 수도 있는 민감한 문 제라 이겁니다. 그리고 조카가 바보 도 아닌데 아카데미에 숨겠습니까."

"그건 그래. 범재, 오늘따라 머리가 꽤 잘 돌아가는군. 그럼...

시에라의 보랏빛 눈동자가 번득였다.

"어디로 숨었나, 우리 에른? 넌 나 보다 잘 알겠지. 아카데미가 아니라

면 어딜까?"

캔달이 한숨을 푹푹 쉬었다.

이런 긴 한숨, 오늘만 벌써 몇 번 째인지 모르겠다.

'내가 뜯어말린다고 들어먹을 분이 아니지. 괜히 이곳저곳 들쑤시는 것 보다는 차라리...

캔달이 입을 열었다.

"몇 군데 짐작 가는 곳이 있습니다. 대신, 하나만 약속해 주십시오."

"또 약속..?"

"적당한 훈육이라면 괜찮습니다.

오러 유저니까 몸도 튼튼할 테고. 하지만 영구적인 장애를 입힌다거 나... 하는 수준까지 간다면 곤란합 니다. 스틸가드 대 마탑 구도가 되 면 다른 기사들도 뒷짐만 지고 있진 않을 테구요."

"약속하지. 마음 같아선 괘씸한 놈, 사지를 찢어 버리고 싶지만… 미식 안은 소중하니까."

파밧!

장소를 알려주자 시에라가 뭔가를 중얼거리는가 싶더니, 그녀의 몸이 순간 사라져 버렸다.

"[텔레포트]를 이렇게나 빨리?"

대마법사라는 걸 감안해도 엄청난 속도다.

캔달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스승에 대해서 그보다 잘 아는 사 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시에라 펠가스는, 평소에도 괴물이 지만 열 받으면 받을수록 진가를 드 러 낸다.

분노 버프라고나 할까?

보통은 흥분하면 두뇌 회전이 느려 지기 마련인데, 그녀는 반대였다.

엄청난 연산력과 캐스팅 속도.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저 상태라 면....

"...괜찮을까, 조카?"

*

테아로스 외곽.

야산 정상.

시에라 펠가스는 단 세 번의 텔레 포트로 괘씸한 놈이 숨은 장소를 찾

아냈다.

'괘씸 정도가 아니지.'

그녀는 배신감마저 느끼고 있었다.

그 시커먼 속도 모르고 세 치 혀 에 놀아났으니… 불쾌한 모욕감이 전신을 뒤덮었다.

대마법사가 된 이후로, 이런 기분 을 느낀 적이 있던가?

'없지, 단 한 번도!'

허공에 뜬 그녀가 입술을 달싹거리 자 목소리가 산 전체를 진동시켰다.

- 에른 스틸가드! 좋은 말로 할 때 나오지?

시에라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입은 웃고 있지만 눈은 한 서린 것처럼 차갑기만 하다.

-이 산… 마차로 돌아서 갈 때마 다 불편하다고 생각했었지. 이렇게 된 거, 그냥 평지로 만들어 버릴까?

그녀가 심장의 마나를 끌어올리자

강력한 기운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엄청난 존재감!

무슨 마법을 써야 놈을 산과 함께 날려버릴 수 있을까, 고민하는 그때.

-나도 환경 파괴 좀 해 봐서 알거 든요? 그거 할 짓이 못 돼요.

-에른?

-자연은 물려주는 게 아니라 후손 들에게 빌려 쓰는 거라는 말도 있잖 아요?

-뭔 개소리… 잠깐, 메시지 마법?

시에라의 눈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마법… 아니, 마검사?! 그런 놈이 미식안의 고뇌를 운운했단 말이냐!

-마법 아닌데요. 그렇게 믿고 싶다 면 믿으셔도 되고.

-너 어디야? 지금 간다.

-제가 가려고 했는데, 오신다면야 환영이죠. 지금 정상에 떠 계신 거 보입니다. 전 중턱에 있어요.

-딱 기다려!

시에라가 고도를 낮췄다.

희끄무레한 실루엣 주위로 돌과 나 무들이 배치된 게 보였다.

'뭐야, 저건?'

웬 소꿉장난?

착!

바닥에 내려선 시에라가 사방을 둘 러보며 어이없다는 웃음을 흘렸다.

"산에 숨어서 뭘 꾸미는 건가 했는 데… 이따위 돌무더기들은 뭐지?"

에른도 웃음으로 그녀를 맞이했다.

"두고 보면 알게 되실 겁니다. 그 건 그렇고… 제대로 찾아오신 거 보 니까 마쿠스 부회주가 잘 알려줬나 본데요."

"그 늙다리 이름이 마쿠스인가? 뭐, 사실대로 말 안 하면 목 위가 허전해질 거라고 했더니 술술 잘도 불더군."

"그 외엔, 혹시 해코지를 했다거나?"

"알아서 뭐 하게?"

에른의 눈이 가라앉았다.

그가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쪽이 몸서리치게 싫다거나 그런 건 아니야. 나한테 화난 것도 이해가 가고. 거짓말한 미안하지만… 거기서 빠져나오려면 그 수밖에 없었어."

"갑자기 반말? 정녕 돌았구나, 신동?"

"그런데 만약, 내 사람을 건드렸다 면. 만에 하나라도 그렇게 했다면."

차분한 목소리.

그는 전혀 화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대가를 치러야 할 거야. 대마 법사라도 예외는 없어."

"진짜 미친 거야?"

시에라는 캔달을 데리고 오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데.

반응해줄 사람도, 증인도 없으니 그저 헛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저기, 신동? 객기는 여기까지 부 리는 걸로 할까? 나 너무 어이없어 서 말이 안 나와. 그냥 적당히 혼 좀 나고 마탑으로 가면 되는 건데."

"객기인지 아닌지는 보면 알겠지."

"..2"

파슷!

순간 에른의 몸이 사라졌다.

놀라운 속도.

다시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는 푸 른 뇌전을 동반한 검기로 시에라를 덮쳐 가고 있었다.

"난 지는 싸움은 안 하는 주의거든!" '고작 오러 따위로… 가소로운!' 맹렬한 기세와 마주하고도, 피식거

리며 캐스팅하는 시에라.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마력이 이어지지 않아...?' 촤악

[127 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