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레벨 3이다!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자부심으로 가슴이 벅찼다.
난 이 동굴을 정복할 것이다!
모든 몬스터가 나의 놀라운 힘 앞에 경의를 표할 것이다!
···
먼 훗날 언젠가는 말이다.
지금은 일단 몸을 낮추고 정찰에 주력해야 했다.
정면으로 싸워서 이길 수 있는 몬스터가 거의 없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래도 상급 은신을 얻자, 지난 번에 봤던 수직 통로로 들어가서 더 깊은 곳까지 정찰할 자신감이 생겼다.
커다란 통로에서는 어떤 페로몬의 흔적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리고 위험이 너무 크다고 판단해서 포기하기는 했지만, 수직 통로 아래에 뭐가 있을지 무척 궁금하기도 했다.
아마 시력과 은신 스킬이 모두 높아지지 않았다면 엄두를 내지 못했을 테지만···
이제 저 아래에 뭐가 있는지 알아볼 때였다!
나는 빠르게 더듬이를 청소한 뒤 (늘 반짝반짝 빛나게 유지해야 한다) 둥지를 나와 수직 통로 쪽으로 향했다.
좋아, 이건 좀 까다롭군.
수직으로 된 벽을 타고 내려가는 건 아직 좀 긴장되는 일이었다.
인간이라면 절대 맨몸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니까!
게다가 벽을 타고 아래로 내려가는 것과 바닥이 보이지 않는 검은 구멍 아래로 내려가는 건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
천천히, 천천히 가자!
나는 느린 동작으로 수직 통로를 내려가기 시작했다.
통로 안은 예상보다 훨씬 더 밝았다.
벽을 타고 이어지는 혈관들이 맥동하며 은은한 푸른빛을 발하고 있었다.
일반적인 햇빛이나 내가 원래 살던 세계의 전등처럼 밝지는 않았지만, 여태까지 내가 지나쳐 온 다른 동굴들에 비하면 상당히 밝은 편이었다.
내가 밑으로 내려가는 내내 벽 전체를 뒤덮고 있는 혈관들이 1분 정도 간격으로 맥동했다.
그때마다 드리우는 푸른 빛은 마치 이 수직 통로 자체가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지게 만들었다.
게다가 확신하기는 어렵지만···
아무래도 아래로 내려갈수록 빛이 더 밝아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50미터쯤 내려간 나는 깜짝 놀랄 만한 장면과 마주쳤다.
저게 대체 뭐지?
벽의 혈관 위로 마치 파란색 잔디처럼 보이는 뭔가가 자라나 있었다.
그 식물처럼 보이는 무더기 한가운데 길게 줄기가 뻗어 있고, 꼭대기에 작고 푸른 꽃 한 송이가 피어나 있기까지 했다.
이 동굴 안에 식물이 존재한다고?!
어떻게?
햇빛이 전혀 들지 않는 곳인데?
어쩌면 저 벽의 혈관이 양분을 제공하는 걸까?
나는 작고 푸른 꽃에 얼굴을 들이밀고 자세히 살폈다.
아름다웠다.
이 놀라운 발견을 뒤로 하고 계속 통로를 내려가자, 푸른 잔디와 꽃이 점점 더 자주 눈에 띄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다른 반가운 소식이 나타났다.
페로몬이다!
동족들이 남긴 화학 신호를 감지하자 내 더듬이가 미친듯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내 친구들, 내 동족, 나와 같은 개미들!
결국 이 길을 택한 것이 정답이었다.
내가 태어난 둥지에서 온 정찰병은 이 수직 통로를 이용해서 알을 훔쳐간 도둑놈들을 쫓아온 것이 분명했다.
얼마나 용감한 정찰병인가!
부지런한데다 대담하기까지!
나도 그처럼 둥지에 보탬이 되는 개미가 되어야 할 텐데!
나는 새로운 발견에 흥분해서 계속 아래로 내려갔다.
40미터쯤 더 내려가자 통로가 갑자기 끝났고, 대신 왼쪽으로 샛길이 이어졌다.
여기서부터는 지금까지와 달리 직선 통로가 아니라 이리저리 꺾이고 구불구불한 형태라, 내가 내려가는 속도도 느려졌다.
나는 모퉁이를 돌 때마다 극도로 주위를 경계했다.
거미나 다른 종류의 몬스터들이 그 뒤에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특히 이렇게 깊은 곳에 있는 몬스터들은 위쪽에 있는 놈들보다 더 강할 터였다.
또 하나의 모퉁이를 돌자, 통로가 갑자기 넓어졌다.
그리고···
대체. 이게···
이게 뭐지?
지하 세계
이게 가능한 일인가?
내 (아주 작은) 눈 앞에 불가능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마법처럼 기이한 식물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엄청난 크기의 지하 세계였다.
기괴한 모양의 나무와 커다란 버섯들이 빛을 발하며, 내가 수직 통로에서 봤던 식물과 비슷한 푸른 잔디와 꽃들 위로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나무 줄기 자체에 푸른색 혈관이 퍼져서, 일정 간격으로 빛을 발했다.
마치 풍경 전체가 맥동하는 것처럼 보였다.
말도 안 돼.
···
대체 여기는 뭐하는 곳이지?!
어떻게 지하에 이 정도 규모의 공간이 있을 수가 있는 거야?
반대편 벽이 보이지도 않는데?!
천장은 거의 60미터 위에 있고!
게다가 이렇게 울창한 생태계라니?
분명 저 안에는 온갖 몬스터들이 득실대고 있을 터였다.
그 생각을 하자 내 작은 개미 심장이 더 작아지는 듯했다.
이 거대한 공동 어딘가 내가 태어난 개미 둥지가 있을지도 몰랐다.
아니면 둥지는 심지어 더 깊은 곳에 있고, 단지 정찰병이 여기를 지나왔을 뿐일지도...
어느 쪽이든, 내가 이 공간을 탐사해야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나는 좌절감을 억누르기 어려웠다.
내 앞에 펼쳐진 풍경은 신비롭고 경이롭지만, 아무 것도 모르는 처지에 마음 편히 감상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저렇게 넓은 공간에 서식하는 몬스터들은 얼마나 크게 자랄까?
또 이처럼 번성하는 생태계에서 얼마나 많은 바이오매스를 섭취할까?
전혀 알 수가 없다...
젠장!
마음을 굳게 먹자!
나는 할 수 있다!
이 공간을 정복하고 내가 태어난 둥지로 돌아갈 수 있어!
하지만!
우선 위쪽으로 돌아가서 레벨을 좀 올리고 와야겠다···
...
왜, 뭐.
이건 어디까지나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이 공간을 탐험하기 전에 레벨을 좀 더 올리고 더 많은 변이를 확보해야 했다.
미지에 도전하기 전에 이미 알고 있는 영역부터 정복하는 게 순서겠지.
그러니 일단 도로 올라가자!
나는 서둘러 수직 통로를 올라와서 둥지로 귀환했다.
만약 저 '메인' 통로가 내가 전에 있던 공동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사실이라면, 언제 인간 병사들이 들이닥칠지 몰랐다.
만약 정말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거기서 쉽게 경험치와 바이오매스를 얻을 방법이 사라진다.
결국 준비가 부족한 상태로 저 아래쪽의 넓은 공간으로 나아가야 할 테고···
그런 점을 고려하면···
빠르게 행동에 나설 필요가 있었다.
어느 정도 위험을 무릅쓰더라도 과감하게 움직여야 했다.
경험치와 바이오매스를 손에 넣지 못하면 더 깊은 곳에서 생존할 수 없을 테니까.
그렇다고 느긋하게 경험치와 바이오매스를 모으고 있을 시간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싸움에 나설 때였다.
나는 마음을 굳게 먹고 메인 통로로 돌아갔다.
그리고 즉시 천장에 붙어서 은신 상태를 취한 뒤, 더듬이를 흔들고 눈을 굴리며 사냥감을 찾았다.
최대한 많은 바이오매스를 얻으려면 아직 사냥한 적 없는 종류의 몬스터를 노려야 했다.
그래야 새로운 종을 섭취할 때 얻는 보너스 포인트를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민달팽이나 (으···) 꼬리가 세 개인 쥐, 아니면 악어 괴물을 잡아야 한다는 뜻이다.
거대한 악어 괴물은 도무지 쓰러뜨릴 수 있는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놈들은 이 주변의 다른 어떤 몬스터보다 무시무시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민달팽이 한 마리가 내 왼쪽의 벽을 타고 미끄러지는 중이었다.
이제는 주린 배를 쥐고 앉아서 사냥감을 이틀 동안 집중적으로 연구할 여유가 없었다.
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포식자 모드로 들어간 나는 징그러운 민달팽이 괴물의 뒤쪽으로 몰래 접근하면서, 놈이 남긴 점액질의 흔적을 밟지 않으려고 조심했다.
사냥을 하려다가 오히려 사냥감이 되는 일이 없도록, 계속 주위를 경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민달팽이는 가까이서 보니 한층 더 징그러웠고, 크기가 거의 내 두 배는 될 것처럼 보였다.
길고 미끌거리는 몸뚱이는 밝은 색의 가시로 뒤덮여 있었다.
아무래도 몸에서 자라나는 가시 같았다.
절대 저걸 건드리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민달팽이의 머리 부분에는 두 개의 줄기가 튀어나와 있었다.
눈인지 더듬이인지 모르겠지만 공격할 만한 약점일지도 몰랐다.
가까이서 보니 놈의 몸에서는 끊임없이 점액이 흘렀다.
아마 바닥에 기름칠을 해서 좀 더 빠르게 이동하기 위한 수단 같았지만, 뭔가 다른 이유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살짝 뒤로 물러선 나는 바위 뒤에 숨어서 산성 용액을 발사했다.
푸슝!
...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민달팽이는 계속 벽을 타고 미끄러져 나아갔다.
내가 산성 용액을 발사한 사실조차 모르는 듯했다.
어느 정도는 예상한 일이었다.
두꺼운 점액이 내 산성 용액을 막아낸 것이다.
아마 내가 턱으로 놈을 물어도 정확히 같은 일이 벌어질 터였다.
빌어먹을 민달팽이···
하고 많은 방어 수단 중에 꼭 점액을 선택했어야 했냐?!
꼭 그렇게 역겨운 짓을 해야 했냐고!
그렇게 나온다면, 좋아.
한때 인간이었던 내 지성의 힘을 보여주지!
···
사실 이건 지구의 개미들도 사용하는 방법이긴 하다.
민달팽이가 느릿느릿 벽을 타고 나아가는 동안, 나는 재빨리 주위의 흙을 찾았다.
그리고 턱 가득 흙덩이를 물고 민달팽이의 뒤쪽으로 다가갔다.
나는 민달팽이의 옆구리에 흙덩이를 올려놓고 나서 재빨리 물러난 다음 놈의 반응을 지켜봤다.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민달팽이는 내가 한 짓을 느끼지도 못한 게 분명했다.
구헤헤헤헤.
재빨리 움직여서 네 차례 더 흙덩이를 민달팽이의 몸 뒤쪽에 올렸다.
흙덩이는 빠르게 주위의 점액을 흡수해서 질척하게 변했다.
나는 끈적거리는 공으로 변한 흙덩이를 턱으로 민달팽이의 몸에서 떼어낸 다음, 그 자리에 새로운 흙을 올렸다.
10분 정도 이 과정을 반복하자, 일정한 부위의 점액질을 완전히 제거할 수 있었다.
민달팽이는 계속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럼 이번에는 어떻게 되는지 보자고.
나는 다시 한 번 민달팽이로부터 물러났다.
그리고 적당한 엄폐물 뒤에 숨어서 산성 용액을 발사했다.
산성 용액이 내가 점액질을 벗겨낸 부분의 부드러운 살갗에 닿자 마자, 놈이 깜짝 놀라서 몸을 떨었다.
이번에는 느낌이 오나 보지?
그럼 한 발 더 먹어라!
푸슝!
이번에도 명중이다!
이제 민달팽이는 눈에 띄게 고통스러워하며 몸을 뒤틀고 있었다.
산성 용액이 놈의 몸뚱이를 계속 태우면서, 실제로 끈적한 살갗에서 김이 올라오기도 했다.
으으으.
역겨운 소리와 함께 민달팽이의 몸뚱이 앞쪽이 벽에서 떨어졌다.
머리 부분을 들어올린 놈이 고개를 돌려 자신을 공격한 상대를 찾으려고 했다.
민달팽이의 일부가 벽에서 떨어지자, 비로소 놈의 '발'이 보였다.
달팽이나 민달팽이들이 움직일 때 사용하는 불규칙한 모양의 근육이 공중에서 꿈틀거렸다.
놈의 머리에서는 흔히 민달팽이에게 달렸을 거라고 예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길다란 줄기들이 적을 찾기 위해 맹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순간 뭔가 불길한 느낌이 들면서, 머리 속에 빛의 속도로 어떤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저렇게 느린 민달팽이 몬스터들이 여기서 어떻게 먹이를 구하는 걸까?
분명히 식물은 없고, 그럼 다른 몬스터들을 사냥한다는 말인데···?
그런 생각이 들자 마자 나는 엄폐물 뒤에서 뛰쳐나왔다.
그리고 민달팽이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해 달렸다!
뒤를 돌아보자 민달팽이가 혼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벽에서 떨어진 몸의 앞쪽 절반이 잔뜩 수축하더니, 숨겨져 있던 입이 벌어지며 날카로운 이빨들이 드러났다.
다음 순간 민달팽이의 몸이 스프링처럼 앞으로 늘어나며 입에서 진한 점액이 스프레이처럼 뿜어져 나왔다.
내 뒤쪽의 벽을 뒤덮은 점액은 즉시 부글거리는 거품을 일으키며 바위를 녹였다.
끈적한 산성 용액이라니!
보기만 해도 내 산성 용액보다 훨씬 위력적이었다.
나는 멈추지 않고 계속 천장 쪽으로 달렸다.
그러다가 고개를 돌려 민달팽이 쪽을 살폈다.
놈은 이제 잔뜩 화가 난 듯, 두 눈을 사납게 흔들며 방향을 바꿨다.
그리고 내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크게 벌린 입 안에서, 무시무시한 이빨들이 번뜩였다.
아무래도 민달팽이가 단단히 빡친 모양이다.
나는 놈이 내뱉는 죽음의 산성 용액에 아무런 대비책이 없었다.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서 울고 있을 수는 없다.
어차피 개미는 눈물을 흘리지 않기 때문이다.
내게 남은 선택지는 저 민달팽이를 끝장내는 것 뿐이었다.
문제는 내 몸 속에 저장된 산성 용액의 양이 무한하지 않다는 거다.
보통은 한 번에 세네 발이 한계였다.
아직 산성 용액이 다시 생성될 때까지 얼마나 걸리는지 테스트해본 적이 없다.
그러니 이제 한 발을 더 쏘고 나면 얼마나 기다려야 다음 번 발사가 가능할지 알 방법이 없었다.
턱으로 민달팽이를 공격하는 건 무의미했기 때문에, 산성 용액이 내 유일한 무기나 마찬가지였다.
어떻게든 한 발 남아 있는 산성 용액으로 결정타를 먹일 필요가 있었다.
문득 한 가지 방법이 떠올랐지만, 너무 큰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너무 서두르는 바람에 이런 가능성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나는 턱을 악물고, 낮은 자세로 울퉁불퉁한 바위 벽의 틈새를 따라 민달팽이 쪽으로 나아갔다.
[잡기 스킬이 레벨 4가 되었습니다.]
드디어!
대체 얼마나 벽이나 천장에 매달려 있어야 잡기 스킬의 레벨이 오르는 거야?!
설마 전투 중일 때 매달려 있는 시간만 반영되는 건가?
어쨌든 지금 그걸 신경 쓰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전투 상황이니까!
민달팽이는 이제 자기가 뿌려 놓은 산성 용액 때문에 생긴 진창 위를 미끄러져 움직이면서,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고 있었다.
아마 두꺼운 점액질의 보호를 받기 때문인 것 같았다.
나는 이 몬스터가 보통 산성 용액을 뿌려서 적을 무력하게 만든 다음 다가가서 잡아먹는 식으로 사냥을 할 거라고 짐작했다.
좋아, 한 번 해보자.
나는 조심조심 놈으로부터 10미터 거리까지 다가갔다.
민달팽이는 전혀 두려운 기색 없이 계속 내 쪽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한 뒤 미리 생각한 작전을 실행에 옮겼다.
뒤쪽 다리로 일어선 다음, 당당하게 꽁무니를 앞으로 내밀고 좌우로 흔들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곧추선 놈의 눈(으로 생각되는) 줄기 앞에 대고 말이다.
어때 민달팽이 친구!
내 엉덩이가 마음에 들어?
몸길이 2미터가 넘는 괴물 민달팽이는 자기 눈 앞에서 엉덩이를 흔드는 개미에게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혼란스러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놈은 놀란 듯 제자리에 멈추더니, 몸을 젖히고 날카로운 이가 즐비한 입을 크게 벌렸다.
지금이다!
발사!
[산성 용액 발사 스킬이 레벨 4가 되었습니다.]
완벽한 사격이었다!
지글지글 끓는 산성 용액이 엄청난 속도로 날아갔다.
그리고 막 몸뚱이를 압축시키며 산성 용액을 쏘아낼 준비를 하던 민달팽이의 얼굴 부위에 명중했다.
놈의 크게 벌린 입 안으로 내가 발사한 산성 용액이 쏟아져 들어갔다.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민달팽이가 온몸을 뒤틀더니, 벽에서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철썩 소리와 함께 동굴 바닥에 부딪힌 뒤에도 몸 속이 타 들어가는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계속 꿈틀거렸다.
놈의 등에 나 있는 단단한 가시들이 바닥의 돌에 긁히며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다른 놈들이 저 소리를 듣고 몰려들지 않아야 할 텐데···
어쨌거나 작전이 완벽하게 성공했다.
나는 일부러 민달팽이가 산성 용액을 발사하게 도발했다.
그런 다음 놈이 입을 벌렸을 때 그 안을 향해 내 산성 용액을 발사했다.
전신을 두꺼운 점액질로 보호하고 있는 적에게 단 한 발로 치명적인 타격을 입히기 위해서는 그 방법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바닥에 떨어진 채 괴로움으로 몸부림치는 사냥감을 계속 관찰했다.
놈이 이걸로 죽어야 할 텐데···
[레벨 4 알키오네움 슬러그를 처치했습니다.]
[경험치를 얻었습니다.]
이겼다!
수확
민달팽이가 마침내 꿈틀거림을 멈추고 축 늘어져, 2미터 길이의 역겨운 점액질 덩어리로 변했다.
이제 나도 내려가서···
그러니까, 이제 와서 드는 생각이지만···
정말로··· 저걸··· 먹을 수 있을까?
개미도 토할 수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거의 그런 기분이 든다···
멍청하게 굴지 말자.
지구의 인간들도 달팽이 요리를 잘만 먹잖아!
바이오매스의 원천은 하나도 낭비할 여유가 없으니 그만 징징거리고 가서 저 민달팽이를 처먹어!
으으.
민달팽이의 시체에 다가간 나는 놈의 몸뚱이를 뒤덮고 있는 점액질을 살폈다.
더 이상 몸에서 분비하고 있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아직 거의 모든 부위가 두꺼운 점액질로 덮여 있었다.
전부 먹으려면 이걸 어떻게 해야 할 텐데···
나는 부지런히 흙을 퍼다 날라서 민달팽이의 점액질을 대충 걷어낸 다음 식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채 반도 먹지 못해서 배가 가득 차고 말았다.
···양이 정말 많구나.
[새로운 바이오매스의 원천을 섭취했습니다: 알키오네움 슬러그. 1 바이오매스를 얻었습니다.]
[알키오네움 슬러그의 기초 정보가 잠금 해제되었습니다.]
[알퀴오네움 슬러그: 산호초 민달팽이. 강력한 산성 용액으로 적을 공격합니다. 등에 있는 가시에는 독이 있습니다.]
[1 바이오매스를 얻었습니다.]
민달팽이의 맛은 예상보다 더 역겨웠다.
게다가 그 미끌거리는 질감이란···
당장 남은 부위를 다 먹을 수는 없어서, 빠르게 벽에 굴을 파고 시체를 숨긴 다음 내 둥지로 돌아왔다.
비록 생사가 걸린 싸움에서 살아난 직후지만, 승리에 취해 쉬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시간이 제한되어 있으니 페이스를 올려야 했다.
더 이상 위험을 피하기만 할 상황이 아니었다.
나는 새로 획득한 바이오매스를 소모해서 주무기인 산성 용액을 +2로 업그레이드했다.
그리고 변이를 견디고 난 뒤, 더 많은 사냥감을 찾아 다시 메인 통로로 향했다.
몸 속의 분비샘에 산성 용액이 다시 축적되는 감각이 어렴풋이 느껴졌다.
아직은 한 번 발사할 분량밖에 되지 않는 것 같았다.
사냥을 하기에는 부족한 양이라, 당분간은 정찰에 주력하기로 했다.
잡기 스킬의 레벨이 오른 효과는 체감이 어려웠다.
천장을 기어 다닐 때 몸무게를 지탱하기가 조금 더 쉽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그게 다였다.
물론 지금으로서는 아무리 작은 이점이라도 의미가 있었다.
잡기 스킬이 레벨 5가 되면 뭘로 발전할까?
설마 그것도 그냥 상급 잡기 스킬이라고 부를 셈이냐, 시스템?
나는 다시 한 번 은밀하게 움직이며 동굴 안을 누볐다.
여기저기 몬스터들이 작은 무리를 지어 돌아다니는 모습이 보였다.
한 쌍의 도마뱀 개들이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고, 발톱 지네 떼가 바위 틈을 기면서 먹이를 찾고 있었다.
그때 내 시야 한 구석에 뭔가가 움직이는 기척이 느껴졌다.
나는 늦지 않게 고개를 돌려서, 친숙한 형상이 벽의 바위틈 속으로 기어 들어가는 모습을 포착했다.
내 옛 친구인 가시 도마뱀 아니신가!
첫 사냥을 떠올리자 거의 향수에 가까운 감정이 느껴졌다.
호숫가를 떠난 이후로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몬스터였다.
그럼, 다음 번 사냥감이 정해졌다.
첫 사냥과 마찬가지로 벽이라는 지형적 특성과 내 산성 용액을 이용해서 놈을 공격하겠지만, 이번에는 함정을 준비할 여유가 없었다.
내 산성 용액과 턱을 믿고 정면으로 싸워야 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전진해서 마지막으로 가시 도마뱀을 봤던 위치의 조금 위쪽 벽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아래로 내려가며 놈을 찾았다.
업그레이드한 더듬이와 시력 덕분에, 어렵지 않게 바위 틈에 숨어서 쉬고 있는 가시도마뱀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바이오매스를 투자한 보람이 있군!
적의 위치를 파악한 나는 천천히 움직이며 산성 용액을 발사할 때 발판으로 삼기 적당한 자리를 찾았다.
지금 발사할 수 있는 산성 용액은 한 발 혹은 두 발 뿐이었다.
이번 사냥에 성공하려면 신중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지붕을 가로질러 도마뱀의 반대편으로 자리를 옮겼다.
놈의 얼굴을 곧바로 노릴 수 있는 위치였다.
그런 다음 한 번에 다리 하나씩 조심스럽게 옮기며, 최대한 놈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모두 단 한 발로 성공하기 위한 준비였다.
도마뱀이 쉬고 있는 덕분에 나는 놈의 5미터 거리까지 몰래 다가갈 수 있었다.
나 자신조차 믿기 어려울 정도의 인내심을 가지고 움직이느라, 그만큼 접근할 때까지 거의 15분이 걸렸다.
이렇게 오래 은밀하게 움직이려니 엄청난 집중력이 필요했다.
결국 목적한 위치에 도달했을 때에는 완전히 지쳐 있었다.
하지만 지난 번 싸움이 너무 위험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최대한 승산을 높인 뒤 시작하고 싶었다.
나는 천천히 몸을 돌려 꽁무니를 도마뱀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며 신중하게 겨냥했다.
푸슉!
명중이다!
가까운 거리의 움직이지 않는 목표를 향해 쏜 덕분에, 내 산성 용액은 정확히 가시 도마뱀의 얼굴에 명중했다.
도마뱀은 눈을 감은 채 울부짖으며 발톱으로 얼굴에 흐르는 산성 용액을 닦아내려 했다.
나는 놈의 정신이 팔린 틈을 타서 위쪽으로부터 빠르게 접근했다.
도마뱀이 산성 용액을 털어내기 위해 고개를 마구 흔들자, 등에 달린 길다란 가시가 위협적으로 허공을 갈랐다.
나는 독이 있는 가시에 찔리지 않도록 조심하며 다가가 턱으로 놈을 물었다.
사실 내 턱은 그리 강력한 무기가 아니었다.
일개미의 턱은 주로 굴을 파거나 흙을 옮기고 물건을 나르기 위한 용도라서, 그리 날카롭지도 뾰족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턱 안쪽의 '이빨'도 아주 무딘 탓에, 도마뱀의 살갗을 찢거나 파고들지 못했다.
불독 개미와 같은 몇몇 종은 보기만 해도 무시무시한 길고 날카로운 턱을 가졌다.
또 집게턱 개미는 엄청난 힘으로 턱을 다물 수 있는 스프링 같은 근육을 자랑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특징이 없는 내 턱은···
불쌍한 가시 도마뱀을 문다기보다 반복적으로 꽉 쥐고 있었다.
물론 놈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짜증나는 일이겠지만, 물어서 그리 큰 상처를 입힐 수는 없었다.
뭐, 그럼 횟수로 승부하는 수밖에!
이얍!
으럇!
나는 뒤로 물러났다가 다시 달려들기를 반복하며, 내 턱으로 도마뱀의 머리통을 짓누르고 또 짓눌렀다.
[물기 스킬이 레벨 4가 되었습니다.]
레벨 4 스킬이 또 하나 생겼군!!
훌륭해!!
가시 도마뱀은 내 공격을 막기 위해 등의 가시를 마구 휘둘렀다.
하지만 놈의 움직임은 너무 느렸고, 가시의 궤적은 너무 뻔했다.
산성 용액 때문에 눈을 뜨지 못하는 도마뱀은 내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지 못했고, 그래서 가시를 크게 휘두를 수밖에 없었다.
그걸 피하는 일은 너무 쉬웠다.
결국 놈은 무너지고 말았다.
[레벨 3 가시 도마뱀을 처치했습니다.]
[경험치를 얻었습니다.]
+
지난 며칠 동안 티투스 사령관은 정신없이 바쁘게 지내야 했다.
예정에 없던 대규모 원정을 조직하기 위해 준비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여왕의 전폭적인 지원이 큰 도움이 되었다.
티투스는 원래 전선의 일반 병사들을 지원받아 경비 초소의 공백을 메꾸는 정도를 기대했다.
하지만 여왕은 무려 자신의 왕실 경비대를 파견했다.
실력과 규율 면에서 일반 병사들과 비할 수 없이 우수한 병력이었다.
거울처럼 반짝거리는 화려한 갑옷 차림의 왕실 경비대가 나타나서 여왕의 이름으로 필요한 조치를 취하기 시작하자, 모든 준비가 일사천리로 진행되기 시작했다.
티투스는 돌나무로 만든 책상의 매끄러운 표면을 손으로 쓸었다.
돌나무는 던전 깊은 곳에서 나무처럼 자라지만 돌보다 더 단단한 신비로운 식물이었다.
던전을 탐사하던 도중 돌나무에 매료된 티투스는 자신의 책상을 만들기 위해, 이 거대한 석판을 직접 등에 짊어지고 나왔다.
티투스의 손이 책상 아래쪽에 붙어 있는 나무 서랍의 옆 부분을 향했다.
그리고 숨겨진 장치를 누르자, 작게 찰칵하는 소리와 함께 책상 표면의 일부가 튀어나왔다.
1초 전까지만 해도 아무런 이음매도 보이지 않던 부분이었다.
튀어나온 부분을 들어내자 부드러운 천 위에 놓인 여섯 개의 유리병이 보였다.
각 유리병은 작은 룬 문자가 새겨진 은제 마개로 덮여 있었다.
그 중 두 개는 비어 있었지만 나머지 네 개의 유리병 안에는 푸른색으로 빛나는 액체가 들어 있었다.
유리병이 내뿜는 푸른빛이 어두운 사무실 안을 가득 채웠다.
티투스는 한숨을 내쉬며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 올렸다.
그러자 피부 위에 그려진 복잡한 문양이 나타났다.
이상한 기호들로 이루어진 동심원이 문신이 아닌 뭔가 다른 방식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마치 금방이라도 맥동할 것처럼 생동감 넘치는 그림이었다.
유리병 하나를 집어 든 티투스는 은빛 마개를 곧바로 팔에 새겨진 문양의 중심 부분에 가져다 댔다.
처음에는 느리게, 그러다가 점점 빠르게 티투스의 팔에 새겨진 원들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회전 속도가 빨라지자, 유리병 안의 액체가 줄어들었다.
동심원은 유리병 안의 액체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점점 빠르게 회전했다.
악물었던 이를 풀며, 티투스는 유리병을 천 위에 다시 내려놓고 소매를 내렸다.
그리고 책상의 비밀 공간을 원래대로 감쪽같이 돌려놓았다.
티투스는 한동안 다시 유리병을 사용할 일이 없기를 바라며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언제나처럼, 유리병 안의 액체를 주입하자 여태까지 무거운 줄도 몰랐던 몸이 가벼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책상에서 일어선 티투스는 사무실 구석에 세워 놓은 거대한 전투 도끼를 들어서 어깨에 걸쳤다.
이제 녹슨 무기에 다시 날을 세울 때였다.
+
"왜 저 자들을 함께 데려가는 거지?"
도넬란이 미린에게 물었다.
미린은 자기도 모른다는 의미로 말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 역시 왜 군단의 고참병들이 이미 사형 선고를 받은 한 무리의 죄수들을 던전 안까지 데리고 왔는지 의문이었다.
도넬란과 미린, 두 훈련병은 드디어 각자의 직업에서 레벨 30이 되었다.
미린은 레인저였고 도넬란은 화염마법사였다.
훈련병이 레벨 30이 되면 정식 군단병으로 진급한다.
그리고 그 진급식은 던전 깊은 곳에서 열렸다.
미린은 마침내 정식으로 군단병이 된다는 사실이 기쁘면서도 불안했다.
훈련병들 중 누구도 진급식이 어떤 종류의 행사인지, 그리고 왜 던전 깊은 곳에서 열리는지 알지 못했다.
고참 군단병들이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린은 새삼 일반인들이 심연의 군단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다는 사실을 느꼈다.
최초의 던전이 열리고 인류 문명이 멸망 직전에 이르렀을 때 처음 나타나 지금까지 삼천 년 동안 유지되어 온 사설 군사 집단 레기온에 대해서, 누구나 들어본 적은 있지만 아무도 자세히 알지는 못했다.
미린은 마음을 다잡았다.
곧 레기온의 비밀은 그녀 자신이 지켜야 할 비밀이 될 터였다.
도넬란과 미린은 현재 훈련병들이 '초보 사냥터'라고 부르는 지역을 순찰하는 중이었다.
이 공동 안의 몬스터들은 던전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괴물들 중 가장 약해서, 초짜들의 훈련 대상으로 적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던전 용병들은 이 사냥터에서 부상을 당하곤 했다.
던전 내부의 몬스터들이 지상의 몬스터들과 완전히 다르다고 아무리 경고를 해도 귀담아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던전 안에 서식하는 레벨 1 몬스터는 지상의 레벨 10 몬스터를 쉽게 때려잡을 수 있을 정도였다.
멍청한 용병 놈들은 레기온 입장에서 지속적인 골칫거리였다.
레벨 업과 몬스터 코어 같은 값나가는 부산물에 눈이 멀어 막무가내로 달려들다가, 결국 레기온의 구조대가 출동해야 하는 사태를 만들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매일같이 원정을 위한 준비 작업이 이어졌다.
일단 공동으로 가지고 온 보급품들은 벽의 비밀 장치를 통해 아래층으로 내려보냈다.
도넬란은 미린에게 대지 마법사들이 바위를 뚫고 만든 다음 환영으로 가려 놓은 승강 장치에 대해 알려줬다.
밧줄과 도르래로 움직이는 승강 장치를 통해 보급품을 내려 보내면, 더 아래쪽에 마찬가지로 숨겨진 장소에서 다시 찾을 수 있는 원리였다.
"원정에 나설 준비는 됐나, 훈련병들?"
어디선가 자신만만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의 주인이 호민관 아우릴리아라는 사실을 알아챈 도넬란과 미린은 즉시 부동자세를 취했다.
"갑옷과 장비를 모두 철저히 점검했습니다, 호민관님!"
도넬란이 다급하게 말했다.
그 열성적인 태도에 노련한 호민관이 미소를 지었다.
"장비에 대해서 물어본 게 아니야, 훈련병들. 군단병이라면 장비를 항상 최고의 상태로 유지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
호민관의 푸른 눈동자가 예리하게 빛나며, 그녀 휘하의 어떤 군단병이라도 장비를 항상 최고의 상태로 유지하지 못하면 후회하게 될 거라는 점을 시사했다.
"여기를 물어본 거지."
호민관이 손가락으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던전은 나나 사령관처럼 오래 굴러먹은 병사들에게도 위험한 장소야. 우리가 아직까지 살아 있는 이유는 우리가 결코 그 위험을 과소평가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이제 너희 둘은 아래로 내려가서 진급식을 치를 텐데, 물론 그건 영원히 기억에 남을 만한 사건이지. 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흥분해서 주의를 게을리하면 안돼."
"명심하겠습니다, 호민관님."
두 훈련병이 그렇게 대답하며 다시 한 번 경례를 붙였다.
"호민관님, 정확히 언제쯤 저희가 던전 밑으로 내려가게 됩니까?"
미린이 묻자 아우릴리아가 고개를 흔들었다.
"얼른 내려가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는 모양이군, 그렇지? 나도 그렇게 젊을 때가 있었으니 뭐라고 하지는 않겠어. 몇 시간 뒤면 여기 상층부를 깨끗이 청소한 다음 '숲'으로 내려가서 야영 준비를 하게 될 거야."
진화의 단서
휴, 정신없이 바쁜 하루였다.
흔히 큰 위험에는 큰 보상이 따른다고 하는데 정말 맞는 말이었다.
원래도 그 점을 몰랐던 건 아니지만, 가능하면 위험을 최소화하고 싶었다.
하지만 상황이 내가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설 수밖에 없도록 몰아붙였고, 다행히 그만한 대가를 얻을 수 있었다.
나는 잠시 내 상태창을 감상했다.
=====
레벨: 4
힘: 15
강인함: 12
영리함: 25
의지: 18
HP: 28
MP: 0
스킬: 땅파기 레벨 4; 산성 용액 발사 레벨 5; 잡기 레벨 4; 물기 레벨 4; 상급 은신 레벨 1; 터널 센스 레벨 3
변이: 눈 +3, 더듬이 +2, 산성 용액 +2
종족: 갓 부화한 일개미 (포르미카)
스킬 포인트: 1
바이오매스: 4
=====
나는 가시 도마뱀과 벽 속에 숨겨 놓았던 산호 민달팽이의 나머지 부위를 먹어 치워 2개의 바이오매스를 더 얻었다.
그리고 홀로 돌아다니는 산호 민달팽이를 한 마리 더 발견하고 곧바로 사냥에 나섰다.
앞서 민달팽이를 사냥할 때의 작전을 그대로 되풀이한 끝에, 놈의 입 속으로 산성 용액을 발사해 치명상을 입힐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내 반응이 좀 느렸던 탓에 민달팽이가 뿌리는 산성 용액을 완전히 피하지 못했다.
끈적한 산성 용액이 내 몸에 살짝 튀었고···
맙소사, 정말이지 따가웠다.
내 흉곽 뒤쪽의 갑각 일부가 녹아내렸고, 다행히 내부 장기까지 다치지는 않았지만 HP가 10이나 줄어들었다.
극히 일부가 튀었을 뿐인데 생명력이 3분의 1이나 깎이다니...
갑각을 더 단단하게 만들고 싶은 유혹이 심하게 들었지만, 현재로서는 우선 순위가 더 높은 업그레이드가 너무 많았다!
다행히 새로 사냥한 민달팽이를 모두 먹어치우자 (시간이 꽤 걸렸다) 8 HP가 회복되었고 갑각의 손상도 거의 복구됐다.
그리고 연달아 전투를 벌인 덕분인지 산성 용액 발사도 드디어 레벨 5가 되었다!
상급 스킬로 발전할 준비가 된 것이다.
구입하고 싶은 기초 스킬이 더 있기는 했지만, 내가 가진 가장 효과적인 공격 수단을 향상시킬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산성 용액 발사 -> 향상된 산성 용액 발사. 비용 1 스킬 포인트: 업그레이드된 산성 용액 발사 스킬, 원거리 발사의 범위는 물론 위력과 정확도가 모두 향상됩니다.]
구입!
스킬을 배울 때마다 찾아오는 기분 좋은 느낌이 즉시 내 머리 속을 채웠다.
이제 나는 더 멀리서 더 정확하게 산성 용액을 발사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적에게 더 큰 피해를 입힐 수 있게 되었다.
좋아!
이번에는 더 까다로운 선택을 할 차례였다.
바이오매스 말이다.
정말이지 눈을 +4로 업그레이드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여태까지 다른 몬스터들보다 월등한 시력을 가진 덕분에 유리한 점이 많았기 때문이다.
홀로 다니는 사냥감을 발견하고, 다른 몬스터들의 접근을 감지하는 등···
하지만 사냥을 통해 더 많은 바이오매스를 얻고 싶다면, 전투 능력을 성장시키는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
산성 분비샘을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하면 바이오매스가 하나 남는다.
그걸로는 다리나 갑각 혹은 턱을 업그레이드할 수 있을 터였다.
차분히 한 번 따져보자.
갑각 업그레이드는 아마 별 의미가 없을 것이다.
어차피 내 방어력은 형편없고, 갑각이 +1이 된다고 해서 큰 변화는 기대하기 어려웠다.
차라리 민첩성을 높이는 편이 나았다.
만약 다리를 +1로 업그레이드해서 기동력이 높아지면···
전투는 물론 정찰과 도주도 용이해질 테니 효율적이라고 볼 수 있다.
턱을 +1로 만드는 건 그다지 끌리지 않았다.
턱이 더 크고 강해지면 굴을 더 잘 팔 수 있을 테고, 날카로워지면 전투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겠지만···
여태까지 내가 턱으로 물 수 있었던 상대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가시 도마뱀 뿐이었다.
그럼 결국 +4 눈이냐 아니면 +3 산성 용액과 +1 다리냐의 선택인 셈이다.
계속해서 감각을 최우선으로 발전시켜야 할까?
내 본능은 그러기를 원하고 있었다.
더 아래에 있는 미지의 환경으로 나아가면···
최대한 적보다 유리한 상황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적이 나를 보기 전에 내가 먼저 적을 발견해야 했다.
그러니···
결정했다.
[눈 +4를 구입하겠습니까? 4 바이오매스를 소모합니다.]
마음의 준비를 하고···
그래.
아옳옳옳옳옳옳옳옳옳옳옳옳!!
이루 말할 수 없는 간지러움이 찾아왔다.
내 눈이 커지면서 주위의 갑각이 자리를 내주기 위해 변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이건··· 고문이야··· 제발 멈춰줘!
난 변이가 정말 싫다.
아니, 변이가 좋기는 하지만···
그 과정은···
어쨌든 고통이 지나가고, 내 시력이 한층 더 좋아졌다.
게다가 눈이 더 커지면서 앞으로 튀어나온 덕분에, 시야각이 넓어졌다.
심지어 고개를 돌리지 않고도 뒤쪽에서 실룩거리는 내 몸통이 보일 정도였다!
놀라운데.
여전히 인간의 시력에 비하면 떨어지지만 여기 판게라에서 처음 다시 태어났을 때보다는 훨씬 더 좋아졌다.
훌쩍···
수고했어, 나 자신.
이제 곧 친구들이 기다리는 둥지로 돌아갈 수 있을 거야.
그러니 서두르자!
최대한 빨리 경험치와 바이오매스를 모으는 거야!
언제 인간들이 이 통로로 쏟아져 들어와서 몬스터를 닥치는 대로 죽일지 모르니까.
메인 통로로 돌아간 나는 다시 한 번 천장에 매달려서 사냥감을 물색했다.
가능하면 새로운 종을 사냥해서 추가 바이오매스를 얻고 싶은데···
충분히 휴식을 취했으니, 어쩌면 저 칼날 꼬리 쥐를 노려볼 수 있을지도···
다만 놈들은 좀처럼 혼자 다니는 법이 없었다.
언제나 두세 마리가 뭉쳐서 움직일 뿐 아니라, 동작이 매우 빨랐다.
게다가 두꺼운 털가죽 때문에 내 산성 용액이 제대로 통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었다.
털가죽이 없는 부위는 놈들의 얼굴과 발, 그리고 꼬리 뿐이었다.
적당한 기회가 생길 때까지 기다려 보자.
어어, 이게 뭐지?
멀리서 갑작스런 진동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몬스터들끼리 싸움이 벌어진 것 같았다.
나는 그쪽으로 이동하면서, 이렇게 자주 싸움이 벌어지는데도 불구하고 몬스터들의 수가 많다는 사실이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어디서 자꾸 수가 보충되는 걸까?
그냥 벽에서 튀어나오기라도 하나?
아니면 내가 그랬을 거라고 생각되는 것처럼, 정상적으로 태어날까?
여기서는 그 무엇도 섣불리 단정하기 어려웠다.
예를 들어···
동굴 안이 한층 더 밝아지지 않았나?
동굴 벽이 내뿜는 빛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밝아지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 이제는 확실히 알 수 있다.
분명히 빛이 더 강해졌다.
하지만 왜?
전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그 이유를 알지 못한 채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자 네 마리의 발톱 지네들이, 이번에는 세 마리의 늑대처럼 생긴 몬스터들과 싸움을 벌이는 모습이 보였다.
늑대들의 꽁무니에는 모두 길다란 파충류의 꼬리가 달려 있었다.
(언제나처럼) 지네들의 수가 더 많았고, 적들을 상대로 맹렬한 공격을 퍼붓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지네들이 이 구역의 일진인 듯했지만, 늑대들도 날카로운 송곳니를 번뜩이며 강력한 꼬리를 휘둘러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이거 작은 개미가 어부지리를 취하기 딱 좋은 상황처럼 보이는데···
나는 은신을 유지한 채, 적당히 자리를 잡았다.
지난 번에 싸움을 관전할 때보다는 조금 더 멀리 떨어진 위치였다.
산성 용액 발사 스킬도 업그레이드한 만큼, 최대한 안전을 확보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는 꽁무니를 신중하게 조준한 뒤 적당한 순간을 기다렸다.
치열하게 싸우던 몬스터들이 잠시 떨어져서 서로를 위협했다.
그리고 그 순간 내가 산성 용액을 발사했다.
푸슝!
내 꽁무니에서 쏜살같이 날아간 산성 용액이, 발톱으로 적을 위협하던 지네에게 명중했다.
지네는 즉시 뒤로 물러나서 수많은 다리가 달린 몸을 흔들며 끔찍하게 따가운 용액을 떨쳐내려고 했다.
그러자 늑대들이 적의 진형이 무너진 틈을 놓치지 않고 공세를 취했다.
두 마리가 아직 멀쩡한 지네들을 견제하는 사이, 한 마리가 내 산성 용액에 부상을 당한 지네의 왼쪽으로 돌진했다.
늑대는 문제의 지네를 무리로부터 떨어뜨려 1대1 대결 구도를 만들었다.
흥미진진한 전개였다.
나는 늑대가 이긴다는 쪽에 걸었다.
지네도 나와 같은 생각인지, 독침이 달린 꼬리를 들어올려 적을 위협하면서 뒤로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늑대는 전혀 겁먹지 않고 몸을 날렸다.
휙!
지네가 번개 같은 속도로 꼬리를 내밀어, 마치 전갈 같은 자세로 독침을 찔렀다.
하지만 늑대는 놀라운 민첩성을 발휘해서 몸을 비틀어 그 공격을 피했다.
목표를 놓친 지네의 독침이 바위에 부딪혔다.
늑대는 지네가 꼬리를 거둘 여유를 주지 않고 상대의 옆구리를 공격했다.
놈은 날카로운 발톱에 찔릴 위험을 감수하고 주둥이로 지네를 무는 대신, 두꺼운 꼬리를 엄청난 기세로 휘둘렀다.
퍽!
늑대의 꼬리에 강타당한 지네가 동굴의 돌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지네의 두꺼운 외골격이 부서지며 쩍 하고 갈라졌다.
난 깜짝 놀랐다.
엄청난 공격이잖아!
만약 내가 저 꼬리에 맞는다면 그대로 납작한 팬케이크가 되어버릴 터였다.
무서워라!
지네는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아 보였다.
바닥에서 꿈틀거리며 거의 움직이지도 못했다.
늑대가 눈에서 살기를 번뜩이며 천천히 놈에게 다가갔다.
마치 '어때, 이제 네 주제를 알겠냐 벌레 새끼야' 라고 말하듯 여유로운 태도였다.
하지만 놈이 마무리를 하려는 순간,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공중을 가르며 날아온 산성 용액이 늑대의 옆구리를 강타해, 즉시 그 살을 녹이기 시작한 것이다.
아이고, 이런.
흐흐흐흐흐.
결정적인 순간에 방해해서 미안하다, 늑대야.
하지만 난 아직 싸움이 끝나기를 바라지 않거든.
물론 산성 용액 한 발로 늑대를 죽일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건 지네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내 산성 용액에 맞았던 지네가 이제 어느 정도 회복이 되었는지, 다시 싸움판에 가세했다.
놈은 멀쩡한 동족 세 마리가 역시 상처 없는 늑대 두 마리와 대치하고 있는 쪽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지금이 결정적인 순간이다.
지네들 중 한 마리가 아직 살아 있기는 하지만 거의 전투 불능 상태가 되었고, 늑대들 중 한 마리도 내 산성 용액에 부상을 입었다.
결과적으로 싸움이 다시 팽팽해진 셈이다.
이제 지네들은 싸움이 그리 내키지 않는 듯했다.
위협적인 자세를 취하면서도 자기들보다 덩치가 큰 적수들을 향해 적극적으로 덤비려는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내 산성 용액에 맞은 늑대는 부상을 입었지만 싸우지 못할 정도로 심각한 상태는 아니었다.
놈은 산성 용액이 어디서 날아왔는지 알아내려 하지 않고, 벌레 무리와 싸우는 동료들을 돕기 위해 돌아섰다.
그 순간···
푸슉!
또 한 번 산성 용액이 늑대를 맞췄다.
늑대는 고통스러운 비명 소리와 함께 바위 위를 마구 구르며 산성 용액을 닦아내려 했다.
기회다!
라고 생각한 세 마리의 지네들이 일제히 돌진했다.
수백 개의 작은 다리들이 빠르게 움직이자, 지네들은 거의 땅 위를 흘러가는 것처럼 보였다.
순간적으로 정신이 팔렸던 늑대들은 반응이 너무 늦었고, 결국 한 마리가 지네의 발톱에 붙잡히고 말았다.
늑대는 사납게 으르렁거리며 자신을 공격하는 지네를 떨쳐냈다.
그리고 육중한 꼬리를 휘둘러 그 지네를 멀리 쳐냈다.
하지만 그 사이 다른 지네 한 마리가 꼬리의 독침을 찔렀다.
그 사이 나는 지붕에서 벽을 타고 내려와, 싸움이 벌어지는 장소 근처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독침에 당한 늑대는 분노로 울부짖으며 자신을 찌른 지네에게 몸을 날렸다.
그리고 날카로운 이와 발톱으로 지네를 공격했다.
그 옆쪽으로 접근하던 또다른 지네는 늑대가 휘두르는 꼬리에 맞고 날아갔다.
한 마리는 독침에 찔렸고 또 한 마리는 내 산성 용액에 부상을 입었다 보니, 이제 늑대들 쪽이 한참 불리했다.
하지만 지네들은 네 마리 중 한 마리가 죽기 직전이고 나머지 셋도 모두 어느 정도 다친 상태였다.
독침에 찔린 늑대는 자신의 최후를 예감했는지, 더 이상 몸을 사리지 않고 날뛰었다.
죽기 전에 한 마리라도 더 데리고 갈 작정으로 보였다.
그 모습에 고무된 다른 두 마리의 늑대들도 용감하게 앞으로 나섰다.
[레벨 3 발톱 지네를 처치했습니다.]
[경험치를 얻었습니다.]
그 사이 나는 전장의 외곽에서 거의 죽어가고 있는 지네 한 마리를 턱으로 몇 차례 빠르게 물어 숨통을 끊었다.
그리고 조용히 놈의 시체를 끌어서 가까운 바위 뒤로 옮겼다.
저쪽에서는 싸움이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남아 있는 세 마리의 지네들은 살아남기 위해 독침이 달린 꼬리를 계속 앞으로 휘두르며, 필사적으로 달려드는 늑대들을 물러나게 만들려고 했다.
독침에 찔린 늑대는 여전히 사납게 으르렁거렸지만, 온몸에 독이 퍼졌는지 제대로 싸우지 못하고 있었다.
여기저기 발톱에 긁히고 물린 자국이 난 마지막 늑대는 결정적인 순간에 비틀거리다가 어깨에 독침을 맞았다.
치명타였다.
성난 늑대는 사방에서 날아드는 발톱과 이빨에 아랑곳 않고 지네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마지막 힘을 다해 꼬리를 휘둘러, 두 마리의 지네를 한꺼번에 날려버렸다.
날아간 지네들은 동굴 벽에 요란하게 부딪혔다.
늑대의 도마뱀 꼬리가 발휘하는 힘은 믿을 수 없을 만큼 강력했다.
벽에 부딪힌 지네들은 다리가 부러지고 갑각이 갈라진 채, 거의 움직이지도 못했다.
이제 남아 있는 건 상처 입은 지네 한 마리와 산성 용액에 다친 늑대 뿐이었다.
둘 다 심하게 상처를 입어서 제대로 싸울 상태가 아니었다.
두 놈은 천천히 서로의 주위를 맴돌며 빈틈을 노렸다.
이 시점에 문제의 늑대는 앞다리를 심하게 물려서 절뚝거리고 있었다.
지네 역시 다리 몇 개가 부러진 탓에 움직임이 느렸다.
그리고 마치 누군가 신호라도 보낸 것처럼, 두 마리가 동시에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두 괴물은 서로의 몸뚱이를 발톱으로 움켜쥐고 물어뜯었다.
지네는 늑대의 목을 물었고, 늑대는 지네의 머리 바로 뒤쪽을 물었다!
누가 버틸 것인가?
둘 다 아니었다.
모든 힘을 소진한 두 마리의 괴물은 천천히 그리고 동시에 무너졌다.
나는 그림자 뒤에 숨어서 이 처절한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세 마리의 늑대들은 모두 탈진해서 쓰러진 채, 생사의 기로에 놓여 있었다.
그 적수인 지네들도 비슷하게 무력화된 상태였다.
···
흠···
후후···
으하하하하하하!
멍청한 놈들!
너희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내 손바닥 위에서 놀아났다!
싸움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봤지만, 정작 나로서도 어쩌면 이렇게 잘 풀렸는지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였다.
모든 괴물들이 죽지는 않은 채 숨만 겨우 붙어 있었다.
아마 HP가 1 정도 남았겠지.
전례 없이 풍족한 경험치와 바이오매스의 잔치였다!
사람의 적응력이란 참 놀라운 것 같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평범한 인간이었다.
정상적인 사회 속에 살았고, 누군가를 해치는 일은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심지어 어릴 때에도 누구와 심하게 싸워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 세계에 오고 나서 며칠 지나지 않아, 벌써 이런 싸움에 익숙해져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목숨을 걸고 싸운 다음 적을 먹이로 삼는 경험은 생명의 소중함에 대한 내 태도를 빠르게 바꿔 놓았다···
어쩌면 저들이 사람이 아니라 몬스터라서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나 자신은?
나도 몬스터가 아닌가?
뭐, 감상은 나중으로!
지금은 우선 저기 쓰러져 있는 몬스터들을 마무리할 때였다.
특히 늑대들이 독 때문에 죽어버리기 전에 말이다!
나는 늑대들 사이를 효율적으로 움직이며, 턱으로 놈들의 숨통을 끊었다.
[레벨 4 루푸스 드라코 커브를 처치했습니다.]
[레벨 3 루푸스 드라코 커브를 처치했습니다.]
[레벨 4 루푸스 드라코 커브를 처치했습니다.]
[경험치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지네들도 마무리했다.
아쉽게도 놈들 중 하나는 이미 죽은 뒤였지만, 나머지 놈들은 늦지 않게 처치할 수 있었다.
[레벨 2 발톱 지네를 처치했습니다.]
[레벨 3 발톱 지네를 처치했습니다.]
[경험치를 얻었습니다.]
[레벨 5가 되었습니다. 1 스킬 포인트를 얻었습니다.]
[레벨 상한에 도달했습니다. 진화 메뉴를 이용할 수 있습니다.]
···
무무뭐뭐뭬에라?
정말로?
내가 진화할 수 있다고?!
아니, 일단 진정하자.
진화라는 단어가 얼마나 매력적이든, 우선은 무슨 일이 일어나기 전에 눈 앞에 쌓여 있는 바이오매스부터 획득해야 했다.
시체들이 저렇게 널려 있으면, 언제 다른 괴물들이 침을 흘리며 몰려들지도 모르니까!
그때 내 더듬이가 공기를 뒤흔드는 진동을 감지했다.
나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왔다!
놈들이다!
희미한 발소리가 천둥처럼 동굴 안을 울렸다.
아마 첫 번째 공동과 연결되어 있을 거라고 짐작되는 먼 쪽으로부터 들리는 소리였다.
잠깐만.
이건 아니지.
안돼, 지금은 아니라고.
이럴 순 없어!
새로운 세계
나는 최대한 빨리 시체들을 파먹기 시작했다.
바이오매스를 하나라도 더 건지기 위해서였다.
[바이오매스의 새로운 원천을 섭취했습니다: 루퍼스 드라코 커브, 1 바이오매스를 얻었습니다.]
[루퍼스 드라코 커브의 기초 정보가 잠금 해제됩니다.]
[루퍼스 드라코 커브: 늑대 드래곤 유체. 무시무시한 늑대 드래곤의 유생체로. 불꽃에 강한 저항력을 가집니다.]
맙소사, 이 놈들이 새끼였다고?
미쳤군.
어쨌든 계속 먹자!
소리는 점점 더 커졌지만, 아직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정확히 뭐가 다가오고 있는지 알았다.
그래서 기분이 끔찍했다.
한 시간, 아니 십 분만 더 있으면 되는데!
아니, 생각하지 말고 빨리 먹기나 하자!
[1 바이오매스를 얻었습니다.]
빨리.
계속.
먹자.
[1 바이오매스를 얻었습니다.]
젠장, 벌써 배가 부르다.
이제 늑대 드래곤 한 마리를 먹었을 뿐인데 배가 터질 것 같잖아!
잠깐!
뭔가 역겨운 생각이 떠오르는데···
내가 집에서 개미들을 길렀을 때 알게 된 사실 말이야.
개미들은 위가 두 개지···
그리고 정찰병과 일꾼들은 언제나 먹이를 둥지로 가져와.
때때로 이런 개미들은 '사교용 위'에 먹이를 담았다가, 둥지로 돌아온 뒤 게워내서 다른 개미들이 먹게 하기도···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꿀단지 개미들은 이런 특징이 극대화된 사례였다.
몇몇 일개미들은 스스로를 살아 있는 식량 창고로 바꿔서, 기이할 정도로 부풀어 오른 배를 한 채 둥지 안에 머물며 동료들에게 먹이를 공급했다.
어쨌든 그러니까 내 개인 위가 꽉 찼다면···
사교용 위를 채울 때다!
더 먹자!
나는 지네 한 마리의 시체로 다가가서 최대한 빨리 살점을 집어삼켰다.
점점 커지는 병사들의 발소리가 내 등을 후려치는 채찍처럼 나를 재촉했다.
이제 발소리 말고도 무기가 부딪히는 소리, 불꽃이 타오르는 소리가 점점 더 가까이서 들리고 있었다.
바이오매스 하나만 더 얻으면 바로 달아나야지!
빨리.
빨리.
[1 바이오매스를 얻었습니다.]
드디어!
가자가자가자.
최대한 빨리 둥지로 돌아간 다음 수직 동굴을 내려가는 거야.
나는 전속력으로 달리려고 했지만, 바이오매스를 잔뜩 처넣은 배가 너무 무거워서 땅에 질질 끌렸다.
아으으으으.
나한테 왜 이러는데!
나는 여섯 개의 다리를 최대한 빠르게 놀리며 무거운 몸을 질질 끌고 동굴 벽으로 다가가서 오르기 시작했다.
몸이 너무 무거워!
올라가, 올라가, 올라가라고 이 뚱보 개미야!
나는 겨우 내 둥지가 있는 동굴을 향해 천천히 기어 올라갔다.
뒤쪽에서 몬스터들이 포효하는 소리와···
인간 병사들이 놈들을 학살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내 둥지가 보인다!
10미터만 더 가면 돼!
그리고 뭔가 다른 것도 보인다!
병사들이 보이기 시작했어!
고급 은신!
너만 믿는다!
영차!
영차!
점점 더 많은 병사들이 시야에 들어오고 있었다.
병사들은 조직적으로 움직이며 마주치는 모든 몬스터를 해치웠다.
작은 동굴들을 지나칠 때마다 마법과 화살을 안쪽으로 날린 다음, 병사들을 들여보내 살아 있는 몬스터가 있는지 확인하게 했다.
이 안의 몬스터를 완전히 소탕할 셈이야!
마침내 둥지가 있는 동굴에 도착한 나는 재빨리 내가 흙으로 막아 놓은 부분을 타고 올라갔다.
그리고 천장 쪽의 틈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다가···
끼어버렸다!
배가 너무 빵빵해진 탓에 틈을 지나갈 수가 없었다!
제기랄!
이건 너무하잖아!
당겨!
나는 여섯 개의 다리를 전부 사용해서 벽을 붙잡고 있는 힘껏 몸을 끌어당겼다.
그러자 실제로 '퐁' 하는 소리가 나며 몸이 틈을 통과했다.
하지만 그 기세 때문에 벽을 놓치고 얼굴부터 바닥에 떨어졌다.
어휴···
어쨌든 간신히 숨 돌릴 틈이 생겼으니, 이제 바이오매스를 빠르게 사용하고 나서 수직 통로를 내려가야 했다.
[산성 용액 +3과 다리 +1을 구입하겠습니까? 4 바이오매스를 소모합니다.]
그래, 얼른!
그러자 즉시 변이할 때마다 느끼는 끔찍한 감각이 찾아왔다.
특히 분비샘은···
하지만 이번에는 괴로워하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두려움이 간지러움을 능가하고 나를 계속 움직이게 만들었다.
나는 곧장 수직 통로까지 기어간 다음,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무게가 불어난 탓에 내려가는 속도가 너무 느렸다.
아래로 떨어져서 즉사하지 않으려면 빵빵한 배를 조심스럽게 움직여야 했고, 발 디딜 곳도 신중하게 선택해야 했기 때문이다.
+1로 업그레이드한 다리가 내 무게를 안전하게 감당할 수 있기를 바랄 수밖에.
수직 통로를 반쯤 내려갔을 때, 위쪽에서 굉음이 들리더니 흙먼지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잠시 뒤에야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깨달을 수 있었다.
놈들이 내가 흙으로 쌓아 놓은 벽을 부순 거야!
곧 내 둥지를 지나서 이 수직 통로가 있는 곳까지 올 거란 뜻이고!
나는 위험할 정도로 내려가는 속도를 높였다.
성급하게 디딜 곳을 선택할 때마다 발톱이 벽에서 미끄러졌다.
어쨌든 그래도 도중에 추락하는 일 없이 수직 통로의 바닥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 안전하지 않았다.
병사들이 이 수직 통로로 내려올지도 모른다.
그러니 여기 오래 머물 수는 없었다.
나는 수직 통로의 바닥을 벗어나, 거대한 지하 동굴로 통하는 좁은 길을 따라 나아갔다.
하지만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기 전에 중요한 할 일이 있었다.
부디 시간이 충분하기를 바랄 수밖에.
[진화 메뉴를 사용하겠습니까?]
그래!
[현재 종의 레벨 한계에 도달한 걸 축하합니다. 진화는 몬스터의 형태를 변화시키고 능력치를 증가시킵니다.
경고: 진화를 선택하면 앞으로 덜 진화된 생물을 섭취했을 때 얻는 경험치와 바이오매스의 양이 줄어듭니다.
다음과 같은 선택이 가능합니다:
- 성체 일개미로 진화 (포르미카)
- 몬스터 코어를 압축]
오호!
선택지가 두 개라고?
시간이 없으니 어서 자세히 설명해봐!
[성체 일개미 – 갓 부화한 일개미의 성체. 기본 능력치가 상당 폭으로 높아지고, 새로운 스킬들이 잠금 해제됩니다.]
[압축 마나가 몬스터 코어에 흡수되었습니다. 코어를 통해 MP를 축적하고 사용할 수 있으며, 커스텀 진화에 사용할 수 있습니다. 필요한 마나의 100%를 축적했습니다.]
좋아···
그러니까 이 나무 개미 종족의 성체로 진화하면 당장 능력치가 크게 높아진다는 거지.
하지만 그보다 다른 선택지가 더 끌렸다.
그러니까 내 몸 속에 정말 몬스터 코어가 있는 거로군!
게다가 거기에 MP를 저장할 수 있고!
그러면 언젠가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되겠지!
마법!
그런데, 내가 필요한 마나의 100%를 축적했다고?
대체 언제?
그냥 돌아다니기만 해도 마나가 흡수되거나···
아니면 그 호수의 물인가?
그 끔찍한 맛의 물이 마나였던 걸까?
성체 일개미로 진화하면 당장 살아남을 가능성이 크게 높아질 터였다.
능력치 말고도 유용한 스킬들이 더 생길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마법을 사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너무 매력적이었다!
지금은 큰 도움이 되지 않더라도 길게 보면 엄청난 일이니까 말이다!
나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리스크를 감수하기로 했다.
[진화하는 대신 몬스터 코어를 압축하겠습니까?]
···그래!
다음 순간 내 시야가 온통 어두워졌다.
...
내가 얼마나 오래 의식을 잃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천천히 시야가 돌아오며 다리에 감각이 느껴졌다.
내 가슴 부위 안쪽에서 뭔가가 들끓어 오르다가, 서서히 작은 공 모양으로 뭉쳐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마 새로운 몬스터 코어일 터였다.
나는 지친 몸으로 일어서서 천천히 통로를 다시 나아가기 시작했다.
아무리 힘이 없어도 여기 앉아서 쉬고 있을 수는 없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병사들이 수직 통로를 내려와 여기까지 들이닥칠지 몰랐다.
계속 움직여야 했다.
조금씩 정신이 돌아오고 머리가 맑아지기 시작했다.
나는 상태창을 확인했다.
=====
레벨: 1 (코어)
힘: 15
강인함: 12
영리함: 25
의지: 18
HP: 30
MP: 10
스킬: 땅파기 레벨 4; 향상된 산성 용액 발사 1; 잡기 레벨 4; 물기 레벨 4; 고급 은신 레벨 1
변이: 눈 +4, 더듬이 +2, 산성 용액 +3, 다리 +1
종족: 갓 부화한 일개미 (포르미카)
스킬 포인트: 1
바이오매스: 0
=====
뭐야 이게?
왜 도로 레벨 1이야!
그간의 내 노력과, 축적된 경험과, 이상할 정도로 좋았던 운은 어쩌고?
여기까지 살아남는 게 쉬웠는 줄 알아?
이런 법이 어딨어!
나는 비통한 심정으로 새로운 상태창을 살폈다.
MP가 0에서 10으로 바뀐 걸 보자 기분이 좀 나아졌다.
아마 이 몬스터 코어라는 게 나나 이 지하의 다른 몬스터들이 마법을 익히기 위한 열쇠 같았다.
그래서 그렇게 많은 몬스터들이 공동의 호수에 모여들었던 거였다.
그 물을 마시면 어떤 식인지 몰라도 마나를 흡수할 수 있고, 그 결과 코어를 형성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나는 코어를 압축하느라 능력치를 크게 올릴 기회를 포기했는데···
그 대가로 얻은 MP가 고작 10이라니?
이게 정말로 잘한 결정일까?
이제 여태까지 경험한 것보다 한층 더 위험한 환경을 탐사해야 하는데···
능력치가 높아졌다면 편리했을 텐데 말이다.
이미 늦었지만 내가 잘못된 선택을 한 건 아닐지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마나를 사용할 수 있다는 생각에 눈이 멀어서 말이다.
어쩌면 레벨 1로 돌아간 게 그리 나쁜 일이 아닐지도 몰랐다.
다시 레벨을 5까지 올린 다음 진화를 할 수 있는 거 아닐까?
그러는 과정에서 스킬 포인트도 모을 수 있고 말이다.
어쩌면 실제로 더 나은 결과일지도 몰랐다.
스킬 포인트를 획득할 두 번째 기회를 얻었을 뿐 아니라···
진화를 하지 않았으니 나와 같은 진화 전의 몬스터를 사냥해서 더 빠르게 경험치와 바이오매스를 모을 수 있을 테니까.
일단 스킬 포인트 하나를 가지고 있지만, 당장 사용하지는 않기로 했다.
현재 몇몇 스킬들이 레벨 4였고, 레벨 5가 되면 업그레이드가 가능했다.
마나 감지나 주문 시전 같은 스킬이 나올까 봐 스킬 목록을 확인해 보지도 않았다.
그런 유혹에 저항할 자신이 없어!
하지만 정신 차리자!
소중한 스킬 포인트를 낭비해선 안돼!
통로의 끝에 이르렀을 때에는 육체와 정신이 모두 정상 컨디션으로 돌아왔다.
이 앞에는 내가 지난 번에 언뜻 봤던 거대한 지하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한 뒤 앞으로 나아갔다.
정말로 거대한 공간이었다.
천장까지 높이가 거의 60··· 어쩌면 70미터에 달했다.
더 이상 천장에 붙어서 다니기는 어려울 듯했다.
혹시 떨어지기라도 하면 그대로 죽고 말 테니까.
왼쪽과 오른쪽의 벽들은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저 멀리까지 뻗어 있었다.
+4까지 업그레이드를 했지만 아직 시력이 충분히 높지 못해서, 벽이 어디까지 이어져 있는지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눈에 대해서는 그간 많은 생각을 해봤다.
나는 곤충이라 인간의 눈과는 다른 겹눈을 가지고 있었다.
인간과 달리 안구를 젖은 상태로 유지할 필요가 없어서, 눈을 깜빡이지 않아도 괜찮았다.
···사실 눈꺼풀이 없어서 깜빡일 수도 없었다.
그리고 내 눈은 하나의 초점을 가지지도 않았다.
인간은 초점을 맞춰서 하나의 대상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다.
반면 내 눈은 동시에 여러 방향을 볼 수 있지만, 말하자면 해상도가 크게 떨어졌다.
그러다 보니 흐릿한 시야 때문에 답답할 수 밖에 없었다.
특히 멀리 떨어진 뭔가를 보려고 할 때는 말이다.
물론 덕분에 여태까지 습격을 당하지 않을 수 있기도 했다.
거의 모든 방향을 동시에 볼 수 있으니까.
나는 여전히 눈부터 업그레이드했던 게 옳은 선택이라고 믿었다.
아마 내 신체 부위 중 눈이 가장 먼저 +5가 될 터였다.
그리고 스킬이 5레벨에서 업그레이드가 가능한 걸 고려할 때···
변이가 +5에 도달하면 무슨 일이 생길지 기대되지 않을 수 없었다.
뭔가 새롭고 획기적인 변이가 가능하지 않을까?
응, 시스템?
···
아 그래, 뭐.
직접 알아볼 수박에 없겠지.
그래도 뭔가 힌트가 있으면 좋을 텐데···
잡생각은 이만.
이제 새로운 환경을 탐사할 때였다.
좁은 통로에서 나와 거대한 공동에 들어선 나는 아래로 비탈진 길을 천천히 내려갔다.
공동의 거대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마치 완전한 하나의 세계가 이 안에 존재하는 듯했다.
바이옴이나 테라리움처럼 말이다.
아래쪽으로 내려가면서, 나는 눈에 잔뜩 힘을 주고 최대한 멀리까지 보려고 애썼다.
어느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도 기이하게 뒤틀린 나무들과 거대한 버섯들, 그리고 바닥을 뒤덮은 풀들이 보였다.
그리고 이··· 숲 전체가···
이제는 익숙해진 푸른빛을 내며 맥동하고 있었다.
너무나 이질적인 풍경이라, 처음으로 내가 다른 세계에 왔다는 게 실감날 정도였다.
나는 앞쪽 다리로 조심스럽게 바닥의 풀을 건드렸다.
그리고 혹시 반응하는지 보기 위해 뽑기도 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걸 확인한 뒤, 나는 거대한 버섯으로 다가갔다.
버섯은 인간 신장의 두 배를 훌쩍 넘길 만큼 높이 자라 있었다.
잠시 주저하다가, 발톱으로 버섯을 건드렸다.
그리고 아무 반응도 없자 조심스럽게 턱으로 버섯을 한 웅큼 떼어냈다.
먹을 수 있는 걸까?
버섯 줄기는 부드러운 섬유질이었고, 내 턱으로 어렵지 않게 떼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작은 조각을 떼어내자 마자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
나는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방금 그건 대체 뭐였지?
내가 베어 문 자리에서 보라색 액체가 천천히 흐르고 있었다.
일종의 산성 용액인가?
HP를 확인해 보자 내가 경미한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버섯을 물었다가 HP가 깎인 게 어리석어 보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뭔가 정보를 얻었다는 사실에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버섯은 산성 수액을 가졌군.
못 먹는 거다.
좋아.
버섯 때문에 얼굴에 화상을 입었지만 새로운 정보를 얻었다는 생각애 기분이 좋았다.
나는 오른쪽의 벽을 따라 나아가며 숲의 가장자리를 탐사했다.
인간들이 내려올 경우를 대비해서 수직 통로로부터 멀리 떨어져야 하지만, 나중에 은신처를 만들려면 벽 가까이 머무를 필요가 있었다.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도망쳐서 숨을 장소가 있어야 마음이 편한 법이니까.
10분쯤 지났을 때, 나는 이 아래에 얼마나 많은 괴물들이 있을지 궁금해졌다.
왜냐하면 아직 하나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들 어디 있는 거지?
캬르릉!
내 의문에 대답이라도 하듯, 날카로운 울음 소리가 동굴 벽에 메아리쳤다.
나는 번개처럼 바위 틈에 숨어서 최대한 몸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리고 몇 초 뒤, 무시무시한 울음 소리의 주인공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나, 또 하나, 그리고 또 하나의 흐릿한 형상들이 천장에서 떨어져 나오더니 거대한 날개를 펴고 숲 위를 날았다.
나는 멀리서도 놈들이 송곳니가 삐져 나온 커다란 아가리와 날카로운 발톱이 달린 다리를 가졌다는 점을 알아봤다.
모두 일곱 마리가 사납게 울면서 숲 속으로 내려갔다.
아래쪽의 뭔가와 싸우는 중이 분명했다.
몇 분 뒤 놈들이 다시 나무 위로 날아올랐다.
날카로운 발톱으로 뭔가를 움켜쥔 채였다.
나는 날개 달린 괴물들에게 붙잡힌 채 몸부림치는 사냥감을 주시했다.
위쪽 동굴에서 봤던 놈들보다 두 배는 더 큰, 커다란 지네였다.
지네의 몸에는 발톱에 긁힌 상처가 가득했다.
의기양양한 사냥꾼들은 힘없이 꿈틀대는 지네를 가지고 천장의 둥지로 돌아갔다.
무서워라!
개척자
아무래도 내 자신감이 좀 과했다는 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스킬 레벨이 오르고 코어를 압축하자, 나는 꽤 강해진 기분이 들었다.
물론 앞을 가로막는 모든 적을 때려부술 정도로 강해졌다고 느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 숲을 탐사하는 동안 내 몸은 건사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아니었다.
아까 그 지네는···
놈은 거대했다!
내가 위쪽에서 본 지네가 진화한 형태가 분명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저렇게 커지다니?
나도 성체 일개미로 진화하면 몸길이 3미터에 키 2미터 정도로 커지는 건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놈은 위쪽에서 내려온 괴물에게 속수무책으로 사냥을 당했다!
내가 전처럼 천장을 기어 다니려고 했거나, 무턱대고 숲 속으로 들어갔다면 같은 꼴을 당했을 거라는 생각에 소름이 돋았다.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어차피 여기로 내려오면 훨씬 강한 몬스터들과 마주치게 될 줄은 이미 알고 있었다.
또 능력치를 즉시 높이는 진화 대신 몬스터 코어를 압축하면서 감수해야 하는 리스크도 충분히 이해한 상태에서 결단을 내렸다.
설마 이 거대한 지하 세계에 내가 사냥할 수 있는 먹잇감이 하나도 없을 리는 없다!
그러니 나아가자!
은신 스킬과 뛰어난 감각에 의지해서 살아남는 거야!
나는 방금 본 장면에 대한 두려움을 떨치고, 결연하게 숲 속으로 나아갔다.
물론 은신 상태로.
울창한 숲 속으로 들어가자, 마치 지상으로 나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머리 위의 나무들과 거대한 버섯들 때문에 동굴 천장이 거의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나무에 달려 있는 잎사귀를 흥미롭게 쳐다봤다.
분명 햇빛을 받아야 할 필요가 없을 텐데 왜 저렇게 커다란 잎사귀를 가지고 있는 걸까?
지상의 나무들처럼 작은 잎사귀가 많이 달려 있는 게 아니라, 거의 땅에 닿을 만큼 크고 길다란 잎사귀가 몇 개씩 매달려 있었다.
대부분의 잎사귀는 진한 보라색이었지만 때때로 붉은색이 뒤섞여, 주위 풍경을 한층 더 다채롭게 만들었다.
아마 이 나무들은 푸르게 빛나는 혈관으로부터 에너지를 얻을 터였다.
나는 이제 바닥을 온통 뒤덮고 있는 이 혈관 안을 흐르는 물질이 마나라고 추측하는 중이었다.
어쨌든 이 나무들이 개미를 잡아먹는 식충식물이 아니라고 100% 확신할 수 없는 한, 되도록 잎사귀에 닿지 않게 조심조심 움직여야 했다.
설사 이 아래에 있는 식물들조차 나보다 강하다고 해도 놀랄 일은 아닐 테니까 말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 더듬이에 뭔가 진동이 느껴졌다.
나는 자세를 낮추고, 바닥의 무성한 수풀 속에 몸을 숨긴 채 진동이 느껴지는 쪽으로 다가갔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 장소에 대한 정보를 더 얻어야 하기 때문에 겁먹고 달아날 수는 없었다.
마치 사냥감을 노리는 고양이과 맹수처럼 낮은 자세로 천천히 움직이며, 나는 목표 지점 주위에 커다란 원을 그리는 것처럼 나아갔다.
눈으로는 최대한 모든 방향을 경계하며, 수풀 사이로 더듬이를 살짝 내밀어 진동을 다시 한 번 감지했다.
[고급 은신 스킬이 레벨 2가 되었습니다.]
좋아!
업그레이드 스킬의 레벨이 올랐군!
정말 오래 걸렸다!
아마 업그레이드 스킬은 기초 스킬보다 레벨 업까지 훨씬 더 긴 시간이 필요한 듯했다.
다행히 내가 가장 의지하고 있는 은신 스킬의 레벨이 딱 좋은 타이밍에 올랐다!
의욕이 되살아난 나는 계속해서 내가 진동을 느낀 쪽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마침내 거대한 악어 괴물을 발견했다!
아니 대체 저 놈들은 왜 이렇게 여기저기 있는 거야?!
다행히 진화한 버전이 아니라, 위쪽에서 본 것과 같은 모습이었다.
물론 그래도 무섭기는 마찬가지였다.
놈은 내가 이 세계에 와서 처음으로 본 몬스터였고···
그때 하필 개미를 산 채로 뜯어먹고 있었다!
만약 개미도 악몽을 꿀 수 있다면 내 꿈에는 놈이 나왔을 터였다.
지금 내 눈 앞의 악어 괴물은 부상을 입은 상태처럼 보였다.
한쪽 팔의 길게 베인 상처에서 녹색 피를 흘렸다.
몸 여기저기 다른 상처들도 있었다.
아마 거친 싸움을 벌인 직후인 듯, 길다란 송곳니가 난 커다란 아가리를 벌린 채 가쁜 숨을 몰아쉬는 중이었다.
···이빨은 너무 자세히 보지 말자!
이건 다시없을 기회였다.
지금이 아니면 저 무시무시한 악어 괴물과 1대1로 싸워서 이길 만한 기회를 만나기 어려웠다.
드디어 내 두려움을 극복하고 전에 얻지 못했던 추가 바이오매스를 얻을 때가 온 것이다.
한 번 해보자!
나는 결심이 흔들리기 전에 재빨리 산성 용액을 발사했다.
이거나 먹어라 악어 놈아!
+3 산성 용액이 번개 같은 속도로 날아가, 상처 입은 악어 괴물에게 명중했다.
나는 산성 용액이 놈의 상처를 통해 몸 속으로 스며들어 더 큰 피해를 입힐 수 있도록 신중하게 조준했다.
악어 괴물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더니, 내 쪽을 돌아보며 커다란 아가리를 벌렸다.
그리고 그 순간, 푸슝.
또 한 발의 산성 용액이 놈의 얼굴을 덮쳤다!
산성 용액의 절반 정도는 곧바로 악어 괴물이 벌리고 있는 입 속으로 들어갔다.
나머지 절반은 사방에 흩어졌지만, 나는 충분히 만족했다.
맛이 어떠냐?
이런 식으로 계속 몬스터들의 입 속을 향해 산성 용액을 발사할 거라면, 아예 기술 이름을 붙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아가리 샷'이라든지···
그건 좀 아닌가···
악어 괴물은 목구멍 안쪽이 타 들어가는 통증에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원래도 심한 상처를 입고 있었던 걸 고려하면, 놈에게는 정말이지 운수 나쁜 날일 터였다.
산성 용액이 날아온 방향을 파악했는지, 악어 괴물이 녹색 비늘을 번뜩이며 거대한 몸집으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이크!
나는 여섯 개의 다리를 총동원해서 재빨리 옆으로 뛰었다.
덕분에 악어 괴물의 무시무시한 돌진을 가까스로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악어 괴물은 나를 지나치는 순간, 길다란 손톱이 달린 팔을 크게 옆으로 휘둘렀다!
촤악!
다행히 맞지는 않았지만 엄청난 바람 소리가 내 머리 바로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만약 맞았다면 그대로 즉사했을 만큼 무시무시한 위력이 느껴졌다.
순간 악어 괴물의 생명력이 내 예상보다 훨씬 더 많이 남아 있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집중하자.
어차피 이제 와서 무를 수도 없어!
악어 괴물이 다시 이쪽으로 돌아서는 찰나, 나는 뒤를 더 잘 보기 위해 고개를 기울이며 뒷다리로 자세를 잡았다.
발사!
하지만 놀랍게도 악어 괴물은 내 공격을 예측하고 왼쪽으로 몸을 날렸다.
···제법 영리하잖아?
만약 놈의 몸이 온전한 상태였다면 산성 용액을 완전히 피했을 터였다.
하지만 이미 심한 부상을 입고 있는 탓에 움직임이 느렸다.
산성 용액의 일부가 놈의 몸 위에 쏟아져서, 부글거리며 피부를 녹였다.
앞선 두 차례의 공격까지 고려하면, 악어 괴물의 생명력이 그렇게 많이 남았을 리는 없었다.
나는 계속해서 움직였다.
한 자리에 가만히 있으면 나보다 훨씬 덩치가 큰 악어 괴물이 쉽게 거리를 좁힐 수 있을 터였다.
정면 대결로는 내게 아무런 승산이 없었다!
악어 괴물은 심한 부상을 입었지만, 여전히 살기가 등등한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최대한 거리를 벌린 채 놈의 주위를 맴돌았다.
이 악어 괴물은 정말로 튼튼했다!
일반적인 성인 남성보다 키가 작았지만, 좌우로는 훨씬 더 컸고 전신이 근육질이었다.
고작해야 사람의 무릎 높이에 불과한 내 입장에서는 엄청나게 거대한 적이 아닐 수 없었다.
올려다보기만 해도 위협적이다!
놈도 시간이 지날수록 자기가 불리해지는 걸 아는지, 사납게 으르렁거리며 나를 향해 돌진해 왔다.
피해야 한다!
하지만 왼쪽?
아니면 오른쪽?
나는 여섯 개의 다리를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놀리며 좌우로 움직였다.
무서운 기세로 달려드는 악어 괴물을 혼란스럽게 만들기 위한 페인트 동작이었다.
악어 괴물은 나를 향해 달려오면서 오른쪽 팔을 뒤로 젖혔다.
길고 날카로운 손톱이 차갑게 빛났다.
저걸 정통으로 맞으면 나는 즉사다!
어디로 피하지?
내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침착함을 잃지는 않았다.
순간적으로 번뜩이는 영감에 따라, 나는 악어 괴물이 예상하지 못할 법한 방향으로 움직였다.
놈을 향해 정면으로 달려든 것이다!
악어 괴물이 휘두른 손톱이 내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더듬이 하나가 놈의 손톱에 걸려서 끊어졌다!
날카로운 고통에 현기증이 났지만, 나는 자세를 낮추고 악어 괴물의 다리를 턱으로 물었다.
그리고 놈이 균형을 되찾기 전에 체중을 실어서 있는 힘껏 잡아당겼다.
[물기 스킬이 레벨 5가 되었습니다. 업그레이드가 가능합니다.]
타이밍 죽이고!
당장 업그레이드해!
[물기를 단단히 물기로 업그레이드하겠습니까? 1 SP를 소모합니다.]
그래, 빨리!
악어 괴물이 반응하기 전에, 나는 뒤로 물러났다가 다시 한 번 놈의 다리를 물었다.
피해를 입히는 동시에 놈을 넘어뜨리기 위한 공격이었다.
그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내 턱이 희미하게 빛나더니, 새로운 힘이 느껴졌다.
이게 새로운 스킬인가?
드디어 뭔가 액티브 스킬이 생긴 건가?!
있는 힘껏 악어 괴물의 다리를 물자, 턱을 통해 놈의 비늘이 부서지는 느낌이 전해졌다.
조금 전보다 훨씬 더 강력한 물기였다!
나는 예상 외의 위력에 놀란 나머지 잠깐 멈칫하고 말았다.
그리고 악어 괴물은 그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놈은 몸의 균형을 유지하려는 노력을 포기하고 스스로 쓰러지며 꼬리를 휘둘렀다.
그 결과 내 옆구리를 꼬리로 강타할 수 있었다!
쾅!
나는 족히 3미터는 날아갔다!
엄청난 고통이 옆구리에 느껴졌지만, 나는 애써 무시했다.
이 싸움에 질 수는 없었다.
지지 않을 것이다!
나는 방금 공격으로 상당한 데미지를 입었고, 갑각 여기저기가 찌그러졌다.
다리도 하나 부러진 것 같았다.
겨우 일어서서 상태창을 확인해 보니, 과연 HP가 반으로 줄어 있었다.
하지만 분명 적도 나만큼 다쳤을 터였다.
이제 결판을 낼 때다!
저 악어 괴물은 정말 터프한 놈이었다.
원래 입고 있던 부상에 산성 용액을 연거푸 맞았고 그 중 한 발은 입을 통해 몸 속으로 들어가기까지 했다.
거기다 내가 새로 얻은 단단히 물기 스킬 때문에 다리까지 심하게 다쳤는데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일어서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게 내버려둘 수는 없지!
나는 부러진 한쪽 다리를 질질 끌고 놈에게 다가갔다.
악어 괴물이 다시 일어서게 둘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악어 괴물은 전과 달리 내 턱이 두려운지, 이빨과 발톱을 마구 휘두르며 내가 자신을 물지 못하게 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러느라 다시 일어서지는 못했다.
이제 시간은 내 편이었다.
놈의 공격을 허락하지만 않으면 살아남는 건 내 쪽이었다.
하지만 악어 괴물 역시 그 점을 알고 있는 듯했다.
바닥에서 구르던 놈이 갑자기 나를 향해 꼬리를 휘둘렀다.
길고 두꺼운 꼬리가 바닥을 쓸며 나를 향해 날아왔다!
점프!
나는 아직 멀쩡한 다섯 개의 다리로 최대한 높이 뛰어올랐다.
그리고 모든 다리를 들어올려 몸에 바짝 붙였다.
불과 몇 밀리미터 차이로 악어 괴물의 꼬리가 내 아래를 지나갔다.
꼬리 공격이 빗나가자, 놈이 제 힘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에서 회전하며 내게 등을 보였다.
기회다!
나는 재빨리 달려들어 악어 괴물의 등에 올라탔다.
놈의 이빨이나 발톱이 닿지 않는 위치였다.
나는 있는 힘껏 턱으로 놈을 물었다!
주저할 겨를도 없이, 물고 물고 또 물었다!
악어 괴물은 사납게 몸부림쳤지만, 나는 모든 힘을 다해 놈을 물고 또 물었다.
그때마다 적에게 피해가 누적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점점 잦아들던 악어 괴물의 움직임이 마침내 멈췄다.
[레벨 7 가라로쉬 인판템을 처치했습니다.]
[경험치를 얻었습니다.]
[레벨 2가 되었습니다. 1 스킬포인트를 얻었습니다.]
[레벨 3이 되었습니다. 1 스킬포인트를 얻었습니다.]
···
이예예예예예예쓰!
누가 근처를 지나가고 있었다면 아마 개미 한 마리가 악어 괴물의 시체 위에 서서, 앞쪽 두 다리를 허공에 흔들며 소리없이 환호하는 괴상한 장면을 봤을 터였다.
그야말로 의기양양한 기분이었다.
그토록 두려워했던 적을 물리쳤기 때문이다.
나 자신의 두려움을 정복한 것이다!
정말이지 아슬아슬한 싸움이었다.
내 능력을 한계까지 발휘했고, 엄청난 고통을 경험하기도 했다.
···
사실 지금도 엄청난 고통을 경험하고 있다!
아야야야야!
더듬이 한 쪽이 잘려나갔잖아!
너무 아파!
진짜 아프다고!
빨리 먹이를 섭취해서 HP를 재생시켜야 했다.
승리 포즈를 취하고 좋아할 때가 아니었다.
[새로운 바이오매스의 원천을 섭취했습니다: 가라로쉬 인판템. 1 바이오매스를 얻었습니다.]
[가라로쉬 인판템의 기초 정보가 잠금 해제됩니다.]
[가라로쉬 인판템: 가라로쉬의 자식. 가라로쉬의 어린 새끼인 이 고등 생물은 강력한 턱을 가졌습니다.]
어린 새끼?!
이 괴물이 어린 새끼라고?
대체 가라로쉬가 뭔데?
무슨 이름 같은데, 혹시 이 놈들이 전부 어떤 한 마리의 새끼인 거야?
···나중에 생각하고 일단은 먹자!
머나먼 길
배가 가득 찰 때까지 뭐시기··· 유생체를 먹어 치우자 3개의 바이오매스를 얻을 수 있었다.
이제 바이오매스는 4개, 스킬 포인트는 2개가 모였다.
좋아!
식사 덕분에 내 HP는 23/30까지 회복됐고, 고통도 덜해졌다.
하지만 이렇게 탁 트인 장소에 더 오래 머무는 건 위험했다.
나는 숨어서 바이오매스와 스킬 포인트를 사용할 수 있는 은신처를 만들기 위해, 부드러운 땅을 찾았다.
숲 속을 5분 정도 탐색한 끝에, 적당히 부드러운 땅을 발견했다.
나는 최대한 빨리 구멍을 팠다.
지면으로부터 수직으로 굴을 만든 다음, L자 형태로 옆쪽을 파서 작은 둥지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끝에 다시 수직으로 구멍을 파서 숨을 수 있는 장소를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눈에 띄지 않도록 입구를 흙으로 막았다.
당연히 완벽한 위장이라고 하기는 힘들었지만, 완전히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는 것보다는 최소한의 조치라도 하는 편이 나았다.
휴.
아직도 치열한 전투로 인한 흥분이 다 가시지 않았다.
몇 차례나 죽을 고비를 넘겼지만 결국 적을 쓰러뜨리고 승리를 얻었다.
전에는 한 번도 경험해본 적이 없는 흥분과 스릴이었다.
지구에 살 때 익스트림 스포츠를 즐기던 사람들이 이해가 될 정도였다.
하지만 이건 익스트림 스포츠 따위와 비교도 할 수 없었다.
실제로 목숨을 걸고 하는 싸움이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앞으로도 강력한 적에게 도전할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그 악어 괴물이 부상을 당한 상태가 아니었다면 싸움을 시작하지도 않았을 터였다.
놈을 발견한 건 순전히 행운일 뿐이니, 승리감에 취할 이유는 없었다.
그럼 이제 잔뜩 쌓인 포인트를 써볼까!
나는 단단히 물기 스킬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바이오매스 세 개를 소모해 턱을 두 차례 업그레이드하고, 마지막 하나의 바이오매스로는 갑각을 +1로 만들기로 했다.
그러면 공격 수단이 늘어나는 동시에 방어력을 조금이나마 올려줄 터였다.
변이 과정이 끝나고 (난 그 과정이 정말 싫다!) 스킬 포인트를 투자할 때가 됐다.
스킬 포인트가 두 개라니, 전에 없던 풍족함이다.
성장에 가속도가 붙고 있었다!
스킬 목록을 확인하니 새로운 스킬들이 추가되어 있었다.
=====
질주: 1SP, 짧은 거리를 빠르게 이동하지만 스태미나 소모도 커집니다.
발톱 공격: 1SP, 발톱으로 더 정확하고 빠르게 공격할 수 있습니다.
깨물기: 1SP, 물기의 관통력이 높아지고 적이 떨치기 더 어려워집니다.
마나 조작: 1SP, 흡수한 마나를 조작하는 기초 스킬
=====
나왔다아아아!
마나 조작은 마법을 사용할 단초가 되어줄 스킬이었다!
나는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마나 조작을 사고도 스킬 포인트가 하나 남았다.
발톱 공격은 그다지 가치가 없어 보였다.
내 발톱은 전투보다 벽이나 천장에 매달리는 용도에 적합했기 때문이다.
턱이 많이 강해졌기 때문에 깨물기 스킬로 무는 공격의 위력을 높이는 편이 더 나을 듯했다.
깨물기는 관통 능력을 부여할 뿐 아니라, +2로 성장한 턱 그리고 단단히 물기 스킬과 함께 사용하면 상당한 피해를 입힐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따스한 느낌이 내 머리를 감쌌다.
왜 스킬을 배우는 건 이렇게 기분이 좋은데 변이는 그렇게 괴로운 걸까?
모든 과정을 마친 나는 다시 상태창을 확인했다.
=====
레벨: 3 (코어)
힘: 15
강인함: 12
영리함: 25
의지: 18
HP: 30
MP: 10
스킬: 땅파기 레벨 4; 향상된 산성 용액 발사 1; 잡기 레벨 4; 단단히 물기 레벨 1; 고급 은신 레벨 2; 깨물기 레벨 1; 마나 조작 레벨 1
변이: 눈 +4, 더듬이 +2, 산성 용액 +3, 다리 +1, 턱 +2, 갑각 +1
종족: 갓 부화한 일개미 (포르미카)
스킬 포인트: 0
바이오매스: 0
=====
이 놀라운 성장을 보라!
변이는 상당히 여러 부위에 걸쳐 있었다.
시스템의 설계 상 어느 정도는 불가피한 일이었다.
만약 내가 눈을 한 번 더 업그레이드하려면 바이오매스가 5나 필요했기 때문이다.
바이오매스 다섯 개면 다른 부위를 두세 차례 업그레이드해서, 전체적인 전력을 강화할 수 있었다.
그러니 다른 부위부터 강화할 수밖에 없었다.
다리와 갑각은 여전히 +1에 불과했지만, 나는 정말이지 눈을 +5로 만들고 싶었다.
신체 부위가 +5까지 성장하면 어떻게 되는지 궁금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스킬처럼 어떤 식으로든 다른 길이 열리는 걸까?
나는 이 세계의 마치 게임 같은 시스템에 대해서 최대한 많은 걸 알아낼 필요가 있었다.
그래도 악어 괴물을 상대로 승리한 덕분에, 나는 이 새로운 세계에 대해 조금 자신감이 생겼다.
어쩌면 정말로 살아서 개미 둥지를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몰라!
그러니까···
언제나 그럴 자신이 있기는 했지만!
헤헤.
···
우선 급한 일부터 처리하자.
마나 조작 스킬을 구입하자 즉시 그 사용법이 내 머리 속에 들어왔다.
스킬을 구입했다고 해서 내 두뇌 혹은 기억이 즉시 변한다는 사실이 조금 꺼림칙했다.
시스템이 대체 어떤 원리로 그렇게 하는 걸까?
하지만 고민해 봤자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런 의심을 일단 뒤로 미뤘다.
새로 얻은 지식에 따르면, 나는 공기 중에서 마나를 흡수해 몬스터 코어에 저장했다.
마나를 사용하려면 먼저 몬스터 코어에서 끌어낸 다음 특정한 형태로 만들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마나 조작 스킬이 필요한 것이다.
이 스킬로 나는 MP를 사용해 뭔가를 하는 첫걸음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럼 시도해 볼까.
정신을 집중하자 내 몸 속 한가운데에 존재하는 코어가 느껴졌다.
마치 열기가 뭉친 공 같았고, 어떤 에너지로 희미하게 맥동하고 있었다.
그 에너지가 바로 내 마나였다.
나는 마나를 끌어내기 전에, 먼저 머리 속으로 원하는 형태를 확실히 정할 필요가 있었다.
첫 시도니까 단순한 편이 좋겠지?
그러면···
나는 마나가 내 입에서 안개처럼 뿜어져 나오는 모습을 떠올렸다.
그냥 입에서 마나 증기가 나오는 거니까,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정신력을 최대한 집중해서 내 안으로 침잠했다.
내 코어는 이제 겨우 포도알 정도 크기에 불과했다.
아마 나중에 더 키울 기회가 있겠지.
그러면 MP도 좀 늘어날 테고···
잠시 후 내 의식이 코어 안으로 빨려들어갔다.
마치 크리스탈로 만들어진 세계 안에 들어간 느낌이었다.
모든 방향에 기하학적인 면이 보였기 때문이다.
마나는 그 공간 안을 유유히 떠다니며 원을 그리고 있었다.
내가 아무 조작도 하지 않는다면 계속 이 상태로 있을 터였다.
그러다가 코어 안의 에너지가 내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마나가 천천히 움직이더니, 내 생각에 따라 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맙소사 엄청 힘들잖아!
정신력을 총동원한 끝에 겨우 마나가 코어 밖으로 나와 내 몸 안을 통과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내 목구멍에 압력이 느껴졌다.
마치 식도 안에 물이 들어찬 기분이었다.
입을 크게 벌리자, 투명하게 빛나는 기체가 밖으로 나왔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하아.
미친듯이 어렵잖아!
고작 이걸로 완전히 지치다니!
아직 내 마나 조작 능력이 서툰 건 당연하지만, 그래도 아무런 위력도 없는 마나 증기를 한 모금 뿜었을 뿐인데···
마법은 어렵구나.
하지만 그래서 더 배우고 싶었다!
MP 소모량을 확인하자 고작 2 포인트가 줄어 있었다.
겨우 2포인트를 쓰기가 그렇게 힘들었다고 생각하니 좀 좌절스러웠다.
그래도 계속 연습하면 스킬 레벨이 오르겠지.
그리고 스킬 레벨이 오르면 연습도 더 쉬워질 테니, 훈련 속도가 빨라질 테고···
레벨이 낮을 때 부지런히 훈련해 두면, 반드시 나중에 도움이 될 거야!
나는 억지로 의지를 끌어 모아 다시 한 번 마나를 내뿜는 연습을 했다.
끄으으으응.
*파하*
맙소사 진짜 너무 어렵잖아?
이래서 과연 마법을 쓸 수 있을까?
나는 세 차례 더 연습해서 MP를 모두 소모했지만, 마지막에는 정신 집중을 유지하지 못하고 마나를 끌어내던 도중 몸 안에서 흩어지게 만들고 말았다.
그리고 너무 지친 나머지 휴식을 좀 취하기로 했다.
여기서는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방법이 없어서 답답했다.
스마트폰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말이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그리 시간이 많이 지난 것 같지 않았다.
아직 배가 다 꺼지지 않은 걸 보면 대략 세 시간 정도 휴식을 취한 듯했다.
커다란 악어 괴물을 완전히 소화시킬 때까지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했다.
바닥났던 MP는 6까지 다시 회복되어 있었다.
다시 10이 되기 전에 굳이 소모하려고 애쓰지는 않을 생각이었다.
지금 연습을 더 하면 정신적으로 탈진한 상태로 밖에 나가게 될 텐데, 그건 너무 위험했다.
가진 MP를 모두 소모할 때까지 연습했지만, 마나 조작 스킬의 레벨은 1도 오르지 않았다.
마법을 배우는 과정이 몹시 지난할 거라는 사실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려면 우선 살아남아야겠지!
밖으로 나가서 탐사를 계속할 시간이다!
둥지 밖으로 나온 나는 흙과 식물을 옮겨서 입구를 가렸다.
이 둥지로 돌아올지 여부도 모르지만, 이런 식으로 몇 군데 숨을 장소를 만들어 놓으면 생존 가능성이 높아질 터였다.
작업을 마치고 나서 나는 주위를 재빨리 돌아봤다.
근처에 다른 생물은 보이지 않았고, 더듬이에 감지되는 진동도 없었다.
다행히 바이오매스를 소화시키면서, 잘렸던 더듬이가 다시 자라기 시작했다.
앞으로 먹이를 더 섭취하면 원래대로 돌아올 것 같았다.
지금은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못한 탓에 더듬이로 느끼는 감각이 예전의 70% 정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불만을 가질 수는 없었다.
그 싸움으로 상당히 많은 걸 얻었으니까.
그만한 대가를 지불할 가치가 있었다.
지금 급선무는 사냥이 아니라 정찰과 정보 수집이었다.
정말 탐나는 사냥감이 아닌 이상은 정보 수집을 위해 그냥 지나칠 생각이었다.
오늘치 위험은 이미 충분히 감수했으니까!
근처에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에 만족하며, 나는 땅에 바짝 붙어서 이동을 시작했다.
이 거대한 공동은 그저 경이로울 따름이었다.
지하에 이만한 공간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니까, 지구의 지하 동굴들이 얼마나 큰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이 안에는 도시 하나를 통째로 집어넣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천장보다 높은 고층 건물들만 제외하면 말이다.
이런 일이 자연적으로 가능할 리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수풀 속을 헤치고 나아가며, 모든 방향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특히 날개 달린 괴물들을 떠올리며 머리 위쪽을 주시했다.
곧 숲의 지형이 완전히 평평하지는 않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여기저기 언덕이 있을 뿐 아니라 천장까지 닿는 커다란 종유석도 보였다.
아마 그런 장소에는 많은 생물들이 살고 있을 터였다.
더 안전한 장소 같지만, 그만큼 경쟁도 치열할 수밖에 없었다.
한동안 그런 곳 가까이는 접근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이렇게 넓은 공간을 돌아다니자, 내 눈이 더 큰 약점으로 느껴졌다.
만약 인간의 눈처럼 멀리 있는 대상에 초점을 맞출 수 있다면, 나무 위에 올라가서 멀리까지 살필 수도 있을 텐데···
내 겹눈은 동시에 모든 방향을 경계하는 목적에는 탁월했지만, 멀리 있는 대상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4까지 변이해서 볼 수 있는 범위가 상당히 늘었는데도 말이다.
때문에 높은 곳에서 내다보는 방식으로 숲의 전체 형태를 확인할 수가 없었다.
결국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머리 속으로 지도를 만들어야 했다.
[터널 센스 스킬이 레벨 3이 되었습니다.]
···이 스킬을 활용해서 말이다.
터널 센스로 인한 방향 감각 덕분에 나는 길을 잃지 않고 움직일 수 있었다.
터널 센스 스킬도 레벨이 오를 때가 되긴 했지.
어떤 스킬들은 다른 스킬들에 비해 유독 레벨 성장이 느렸다.
잠깐!
뭔가가 온다···
다리와 더듬이로 진동이 느껴졌다.
뭔가 큰 놈인 것 같았다.
나는 재빨리 주위 지형을 살폈다.
여기저기 흩어진 바위 위에 커다란 버섯들이 자라고 있었다.
그 사이 공간에는 기이한 모양의 나무들이 무성했다.
뒤틀린 나무 뿌리들이 그물처럼 지면을 뒤덮고, 심지어 바위까지 파고든 모습이 보였다.
저걸 이용할 수 있겠어!
나는 달아나려고 시도하다가 붙잡히는 대신, 은신 스킬을 활용하기로 했다.
상대의 청력이나 감각이 뛰어나다면 내가 도망치는 걸 알아차릴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혹시 발까지 빠르다면 그대로 붙잡힐 수밖에 없었다.
알 수 없는 일이니, 숨는 편이 나았다.
나는 조용히 나무 뿌리가 잔뜩 뭉쳐 있는 곳으로 다가가서 그 사이로 들어갔다.
그런 다음 흙으로 뿌리 사이의 빈틈을 메우고 몸을 숨겼다.
신중하게 자리를 잡은 덕분에, 눈 가까운 곳에 있는 구멍으로 바깥을 살짝 내다볼 수 있었다.
쿵.
쿵.
무거운 발소리가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다.
거대한 몬스터가 분명했다.
마침내 놈이 시야에 들어오자, 나는 거의 기절할 뻔했다.
대체 저게 뭐야!?
보디가드
비늘로 뒤덮인 거대한 손이 앞으로 뻗어나와 단단한 땅을 움켜쥐었다.
어두운 녹색의 비늘들은 숲이 발하는 빛을 반사시키며 반짝였다.
손가락마다 달린 무시무시한 손톱들은 휘어진 칼날처럼 날카로워 보였다.
놀랍게도 손톱 하나하나가 내 머리통 만한 크기였다.
잠시 후 두껍고 강력한 근육질의 팔이 몬스터의 나머지 부분을 앞으로 끌어당겼다.
날카로운 이빨이 즐비한 길고 뾰족한 턱 뒤로 차가운 눈알이 번뜩였다.
거대한 주둥이가 다물려 있는데도 이빨이 그대로 드러나 보여서 마치 음흉한 미소를 짓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괴물의 눈빛에 드러나는 잔인한 지성은 내게 공포심을 안겼다.
몬스터의 등 쪽에는 비늘을 뚫고 커다란 가시들이 튀어나와 있었다.
스파이크처럼 날카로운 가시는 하나하나가 족히 30cm 길이는 되어 보였다.
놈은 몸뚱이를 바닥에 밀착한 채로, 은밀하고 빠르게 움직였다.
괴물이 내 눈 앞을 지나갈 때, 나는 뒤쪽에 달린 한 쌍의 더 짧지만 강력한 팔을 볼 수 있었다.
몸뚱이 중간에 달린 이 팔들이 낮은 자세를 지탱하는 듯했다.
그렇게 지나가던 괴물이 갑자기 으르렁거리더니 입에서 새빨간 불꽃을 뿜어내는 바람에, 나는 거의 소리를 지를 뻔했다.
성대가 없어서 다행이지.
그리고 마침내 거대한 뒷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직립 보행도 충분히 가능할 만큼 두껍고 강력한 다리였다.
하지만 놈은 마치 지구의 악어처럼, 낮은 자세로 빠르게 움직이는 편을 선호하는 듯했다.
몬스터는 몸길이는 주둥이부터 꼬리까지 대략 12미터 정도였다.
12.
미터.
농구 골대 네 개를 위로 쌓아 놓은 정도의 길이다.
거의 볼링 레인에 육박하는 길이기도 했다.
물론 길다란 꼬리까지 포함한 길이지만, 그래도···
너무 큰 거 아냐?!
도저히 싸워볼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로 크잖아!
대체 어째서 여기 저렇게 커다란 놈이 돌아다니는 건데?!
그러니까, 생긴 모양으로 볼 때 놈은 분명 그 악어 괴물의 성체였다.
아직도 그 커다란 몬스터들이 유생체라는 점을 납득하기 어렵지만 말이다.
성체 역시 악어와 비슷한 모습을 했지만, 팔이 한 쌍 더 있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물론 입에서 불을 뿜는 데다가 말도 안 되게 크다는 점도 마찬가지로 예상 밖이었다.
크기 차이가 너무 심해서, 악어 괴물이 저렇게 변한다는 걸 상상하기 힘들었다.
혹시 한 번이 아니라 두 번 진화해서 성체가 되는 걸까?
비늘의 크기로 볼 때 내 산성 용액으로는 아무런 피해도 입히지 못할 만큼 두꺼울 듯했다.
저 괴물은 살아 있는 탱크나 다름없었다.
무게만 해도 몇 톤은 나갈 거야!
만약 여기 저렇게 크고 무시무시한 놈들이 더 있다면 차라리 위로 돌아가서 인간들을 상대하는 편이 낫겠어!
거대한 괴수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땅을 타고 전해지는 진동 때문에 내 작은 다리들이 흔들렸다.
그리고 그 순간 뭔가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내 머리 속에 떠올랐다.
나는 곧바로 숨어 있던 장소에서 나와 거대한 악어의 뒤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내 머리 속에 떠오른 건 지구의 빨판상어였다.
빨판상어는 고래나 상어처럼 더 큰 생물에게 붙어 다니면서 숙주가 남긴 찌꺼기를 먹었다.
큰 고기들은 빨판상어가 기생충도 잡아먹기 때문에 그런 공생 관계를 허락했다.
물론 이 괴물에게 협력을 제안하거나 놈의 이빨을 청소해줄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어쩌면 나는 한동안 아주 안전하게 지낼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한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물론 어이없게 들릴 수도 있지만···
이 주변의 거의 모든 몬스터는 이 거대한 괴물을 피하려고 들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어떤 놈이든 나를 노리려면 먼저 이 커다란 친구를 상대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저 악어의 눈에 띄지만 않으면, 난 엄청나게 안전한 셈이다!
상급 은신 스킬을 사용하면 충분히 가능할 테고···
놈의 그림자에 숨어서 주위를 정찰하는 동시에 은신 스킬의 레벨도 올릴 수 있었다.
물론 위험성이 있지만 충분히 해볼 만한 시도였다.
나는 거대한 괴물의 뒤를 조심조심 따라갔다.
덩치가 워낙 크다 보니 걸음을 딛을 때마다 움직이는 거리도 길었고, 소리를 내지 않으면서 따라가기가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놈이 내는 소리가 워낙 커서 내 발소리는 내 귀에도 잘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다음 한 시간 동안 나는 거대한 괴물을 경호원 삼아 숲 속을 누볐다.
그리고 그러면서 숲의 기이한 풍경에 계속해서 놀랐다.
한 번은 화려한 색의 꽃잎 한복판에 내 머리통 만한 보석이 매달려 있는 거대한 꽃을 지나치기도 했다.
거대 악어가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바람에 그 꽃을 오래 감상할 여유는 없었지만···
나는 그 옆을 지나치면서 뭔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커다란 꽃잎들은 바닥에 겹겹이 쌓이듯 펼쳐져 있었고, 한복판의 보석은 똑바로 위를 향했다.
바닥에 늘어진 두꺼운 꽃잎들은 어쩐지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마치 거대한 다이아몬드가 자리하고 있는 중심부로 손님들을 끌어들이는 환영 카펫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또 한 번은 거대 악어의 앞쪽에 있는 덤불에서 갑자기 커다란 지네가 나타나기도 했다.
위쪽에서 마주쳤던 지네들의 진화형으로 보이는 놈은 내가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하지만 내 친구 거대 악어라면?
사실 물어볼 필요도 없는 일이다.
거대 악어는 속도를 거의 늦추지도 않고, 앞발로 놈을 짓밟아 뭉갰다.
나는 거대 악어가 멈춰서 지네를 먹는 대신, 소중한 바이오매스를 그대로 두고 걸어가 버려서 놀랐다.
하지만 다음 순간 진화 메뉴에서 봤던 내용이 떠올랐다.
덜 진화한 먹이를 통해서는 바이오매스를 얻기 어렵다는 내용 말이다.
아마 거대 악어에게는 이 지네가 아무 소용도 없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한테는 소용이 있지!
으깨진 거대 지네의 시체를 보고 신나서 달려가다가, 문득 처량한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지네의 시체는 엄청난 무게에 눌려서 사방으로 내장이 튀어나온 상태였다.
으음···
아무리 나라도 이건 식욕이 떨어지는군···
하지만 바이오매스를 포기할 수는 없지!
내가 지금 식욕을 따질 때냐!
[새로운 바이오매스의 원천을 섭취했습니다: 아둘투스 웅귀부스 스콜로펜드라. 1 바이오매스를 얻었습니다.]
[아둘투스 웅귀부스 스콜로펜드라의 기초 정보가 잠금 해제됩니다.]
[아둘투스 웅귀부스 스콜로펜드라: 성체 발톱 지네. 이 계통의 진화를 선택한 발톱 지네는 완력이 증가하지만 그다지 영리해지지 못합니다.]
흥미롭군.
그러니까 여러 계통으로 진화할 수 있다는 말인가?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재빨리 한 입을 더 삼켰다.
[1 바이오매스를 얻었습니다.]
좋아!
나는 지네를 채 4분의 1도 먹지 못하고 다시 거대 악어의 뒤를 쫓아가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든든한 보디가드를 놓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러기 직전에, 지네의 잔해 속에서 뭔가 반짝이는 물체를 발견했다.
지네의 머리 바로 뒤쪽에 작고 반짝이는 보석 같은 구체가 드러나 있었다.
저건··· 내가 생각하는 그건가?
나는 가까이 다가가서 턱으로 구체를 움켜쥐었다.
[호환하는 몬스터 코어를 발견했습니다. 코어를 강화하거나 몬스터를 재구성하겠습니까?]
맞네!
몬스터 코어다!
거대 악어가 점점 멀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메시지의 내용을 자세히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코어 강화!
구체가 즉시 사라지더니 타오르는 듯한 에너지가 내 몸 속을 소용돌이쳤다.
에너지가 점점 더 빠르게 소용돌이치자 내 코어가 뜨거워졌다.
결국 모든 에너지가 코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나는 여전히 뜨거운 코어를 느끼며 헐레벌떡 거대 악어의 뒤를 쫓았다.
그러면서 상태창을 다시 확인했다.
=====
레벨: 3 (코어)
힘: 15
강인함: 12
영리함: 25
의지: 18
HP: 30/30
MP: 9/12
스킬: 땅파기 레벨 4; 향상된 산성 용액 발사 1; 잡기 레벨 4; 단단히 물기 레벨 1; 고급 은신 레벨 2; 깨물기 레벨 1; 마나 조작 레벨 1
변이: 눈 +4, 더듬이 +2, 산성 용액 +3, 다리 +1, 턱 +2, 갑각 +1
종족: 갓 부화한 일개미 (포르미카)
스킬 포인트: 0
바이오매스: 2
=====
새로운 발견이다!
그러니까 다른 몬스터의 코어로 내 코어를 강화할 수 있고, 그러면 최대 MP가 늘어난다는 거지?
환상적이군!
그럼 마나 조작 연습을 한 번 더 할 수 있는 셈이다.
그리고 시스템을 통한 성장에 대해 한 가지를 더 배우기도 했다.
MP를 늘리고 싶다면 몬스터 코어를 더 많이 찾아야 하겠군.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여태까지 내가 보고 겪은 걸 종합해 보면, 한 차례 진화를 거친 몬스터만 코어를 가진 것 같다.
그건 곧 내가 여태까지 사냥했던 것보다 더 강력한 몬스터들만 코어를 가졌다는 뜻이다.
이번에는 운이 좋았지만, 앞으로도 이런 식으로 쉽게 몬스터 코어를 얻을 수는 없을 터였다.
어쨌든 지금은 거대 악어를 부지런히 쫓아가자!
거대 악어는 그리 서두르지도 않았지만, 순전히 크기 때문에 아주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놈의 거대한 꼬리가 옆으로 드리우는 그림자 속으로 다시 들어가 숨기 위해 열심히 달려가야 했다.
그리고 잠시 후 거대한 괴물이 마침내 목적지에 도달했다.
갑자기 숲이 끝나고 탁 트인 풍경이 눈 앞에 펼쳐졌다.
호수였다.
거대한 호수의 표면이 신비로운 푸른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우리는 한 시간이 넘게 이 거대한 공동의 중심부를 향해 이동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아직 중심부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호수의 지름은 족히 백 미터는 되어 보였다.
심지어 호수로부터 작은 강과 시내들이 흘러가는 모습도 보였다.
나는 이 호수의 물이 지하에서 솟아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지하수가 여기서 솟아올라 저런 작은 강들을 만드는 것이다.
물 속에서 마치 춤을 추듯 느리게 회전하고 있는 수많은 푸른 빛줄기가 내 눈을 사로잡았다.
마치 DNA 이중 나선 패턴 같군···
호수의 근원과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수많은 빛줄기들은 어떤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마나다!
나는 같은 현상을 위쪽의 호수에서도 본 적이 있었다.
비록 이보다 훨씬 더 약하고, 빛줄기는 거의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런 호수도 마나를 머금고 있어서, 온갖 몬스터들이 에너지를 흡수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자신들의 코어를 압축하려고 말이다.
그러니 이 커다란 호수는 마나 밀도가 더욱 높을 게 분명했다!
위쪽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몬스터들이 호수의 물을 마시고 있었다.
어쩌면 이 중 상당수는 이미 코어를 압축했고, 이미 사용한 MP를 보충하기 위해 물을 마시러 왔는지도 모른다.
눈에 들어오는 다양한 몬스터들 중 몇몇 종류는 이미 본 적이 있는 놈들이지만, 나머지는 아주 낯설었다.
진화 전의 평범한 지네 한 무더기도 눈에 띄었다.
무더기 속에 뭔가 좀 다르게 생긴 놈이 보이는 것 같기도 했지만, 꿈틀거리는 몸뚱이들이 워낙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확신하기는 어려웠다.
늑대 드래곤 유생체의 진화한 버전도 보였다.
위쪽에서 본 놈들보다 더 크고 위협적일 뿐 아니라, 목 주위에는 위풍 당당한 갈기까지 휘날리고 있었다.
그리고 눈이 마치 불타는 것처럼 보였다.
멀리 떨어져 있어서 자세히 살피기는 어려웠지만 눈 주위의 공기가 열기로 일렁이고 있는 걸 보면···
잠깐, 눈이 정말 불이라고?
한 번도 본 적 없는 다른 생물들도 있었다.
박쥐 머리가 달린 거대한 고릴라처럼 생긴 몬스터나, 떼로 몰려다니며 시끄럽게 울어대는 원숭이 같은 놈들도 있었다.
그리고 내가 처음 여기 왔을 때 하늘에서 내려오는 모습을 봤던 가고일과 비슷한 괴물들도 보였다.
저 멀리에는 가시 도마뱀이 진화한 형태가 분명한 괴물이 어슬렁거렸다.
진화 전보다 많이 크지는 않았지만, 더 근육질에 가시가 훨씬 길고 날카로웠다.
어떤 괴물은 꼭 갑옷을 두른 들소처럼 보였다.
돌처럼 단단해 보이는 판들이 얼굴과 등을 보호하고 있었다.
호수 주위를 둘러보자 계속해서 새로운 몬스터들이 눈에 띄었다.
나는 몬스터의 종류가 이렇게 다양하다는 사실에 놀랐다.
대체 이 아래에 얼마나 많은 종류의 몬스터가 있는 거지?
전부 기억해두는 것만 해도 힘들 정도였다!
원정대
안타깝게도 호수 주위의 몬스터들 중 대부분은 나보다 훨씬 더 강해 보였다.
앞으로도 사냥감은 신중하게 선택해야 할 것 같았다.
거대한 악어가 호숫가로 다가가자, 근처의 몬스터들이 잽싸게 자리를 비켰다.
악어는 호수 바로 곁의 평평한 진흙 위에 편안하게 자리를 잡고 엎드려서 마나가 충만한 물을 들이켜기 시작했다.
실로 이 구역의 왕다운 모습이로군!
호숫가의 수많은 몬스터들 중에서도 거대한 악어와 1대1로 맞설 수 있을 만한 놈은 보이지 않았다.
이런 무시무시한 후손을 만들어내는 가라로쉬라는 놈은 대체 뭘까?
호수 주변의 평화 협정은 여기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서, 나도 악어 괴물 바로 옆의 호숫가로 다가가 한 모금을 마셨다.
크어어어억!
푸하!
여전히 목구멍이 타는 듯한 느낌이었다.
다만 이번에는 그 느낌이 내 몸 속에서 마치 해변의 파도처럼 넘실거리다가, 서서히 코어 속으로 스며들었다.
상태창을 확인하자 MP가 2만큼 회복되어 있었다.
역시 그랬군!
나는 MP를 최대치까지 채우기 위해 한 모금을 더 마신 다음, 가만히 앉아서 타는 듯한 느낌이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
호숫가에 있는 동안 공짜로 MP를 회복할 수 있다면, 마나 조작 스킬을 훈련하기 완벽한 기회였다.
배가 너무 고파서 사냥을 나가기 전까지는 쉬지 않고 훈련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흥분해서 은신처를 만들 만한 부드러운 땅을 찾은 다음 열심히 파기 시작했다.
거대 악어가 물을 마시고 있는 자리로부터 가까운 위치였다.
저 무시무시한 괴물의 존재가 다른 놈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해줄 테니까 말이다.
작은 굴을 파고 들어간 다음, 즉시 마나 조작 스킬의 훈련을 시작했다.
전과 마찬가지로 코어에서 끌어낸 마나를 입까지 흐르게 만든 다음 작은 마법 구름을 만들어냈다.
파하!
여전히 말도 안 되게 어렵고 엄청난 집중력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세 번째로 성공하자 시스템이 나를 독려했다.
[마나 조작 스킬의 레벨이 2가 되었습니다.]
만세!
그 말을 기다렸다고!
나는 신나서 같은 과정을 계속 반복했다.
마나 조작 스킬의 레벨이 오르자, 코어에서 마나를 끌어낸 다음 내가 원하는 곳까지 이동시키는 일이 아주 조금 쉬워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물론 1레벨로 그리 큰 차이를 기대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가시적인 성과가 나온 덕분에 나는 MP를 (그리고 정신력을) 모두 소진할 때까지 여섯 번이나 연습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리고 완전히 지친 상태로 다시 호수를 찾아 MP를 채웠다.
한 모금 마실 때마다 엄청난 느낌이 찾아왔기 때문에, MP를 모두 채우는 데에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지금 시점에서 실망스러운 일은, 거대 악어를 따라 꽤 먼 거리를 이동했는데도 불구하고 개미 둥지에서 나온 정찰병이 남겼을 법한 페로몬의 자취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아무런 흔적도 없었다.
나는 호숫물을 계속 마시면서 그 점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
잠깐!
만약 이 공동 안의 모든 몬스터들이 물을 마시기 위해 여기로 온다면···
내가 태어난 둥지의 개미들도 올 수 있다는 얘기잖아!
둥지의 정찰병이 이렇게 풍부한 마나 원천을 발견했다면, 그 존재를 둥지에 알리지 않았을 리가 없지!
근처에 동족들의 자취가 남아 있을지도 몰라!
나는 MP를 모두 회복하자 마자 더듬이를 흔들며 호수 주변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잘려 나간 더듬이는 다행히 원래의 절반 수준까지 자라나 있었다!)
동족들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였다.
호수 주변의 다른 몬스터들이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지만, 나는 놈들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심지어 나도 모르는 사이 늑대 드래곤의 꼬리를 밟고 지나가기도 했다.
다행히 놈은 너무 놀라서 재빨리 반응하지 못했고, 그 뒤에는 호수의 평화 협정을 깨뜨리기 싫었는지 굳이 내 뒤를 쫓지 않았다.
호수 주위를 반쯤 돌았을 때, 더듬이에 이제는 친숙해진 향기가 느껴졌다.
찾았다!
+
지금까지 원정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미린은 그 사실을 아주 감사하게 생각했다.
왕실 경비대와 레기온은 힘을 합쳐 상층부의 몬스터를 소탕했다.
다가올 웨이브를 대비해, 수백 마리의 저레벨 몬스터들을 미리 처치한 것이다.
보통은 그렇게 높은 레벨의 전사들이 던전의 상층부를 통과하는 데 이 정도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고레벨의 레기온 군단병들에게 이런 장소는 아무런 위협도 아니었고, 설사 대여섯 마리의 몬스터를 매달고 걸어가도 아무런 부상조차 입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모든 샛길과 통로, 작은 동굴까지 체계적으로 청소하느라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었다.
최고의 전사들이 모인 왕실 경비대와 던전에서 싸우기 위해 살아가는 심연의 군단은 서로 힘을 합쳐 이 어려운 임무를 최대한 빠르게 수행했다.
"저 사람들은 한가해 보이네."
도넬란이 동굴 한쪽에 모여 서서 웃고 떠드는 고참 군단병들을 가리키며 투덜거렸다.
"내가 너라면 그렇게 대놓고 쳐다보지 않겠어. 목소리도 낮출 테고."
미린이 자신의 석궁에 손을 얹은 채 동굴 안쪽을 살피며 말했다.
"아우릴리아 호민관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고급 듣기 스킬을 가졌다는 소문을 들었거든. 고참병들이 네가 징징거리는 소리를 들으면 바위에다 변소를 파게 시킬지도 몰라."
"우리처럼 레벨도 낮고 힘도 약한 훈련병들이 몬스터 처리를 도맡아 하고 정식 군단병들은 경계만 서는 게 납득이 가지 않아. 지난 열 시간 동안 파이어볼을 하도 날려서 손끝이 까매질 정도라고."
도넬란이 신음했다.
도넬란은 원래 불평 불만이 많은 성격이 아니지만, 반나절이 지나도록 계속해서 주위를 경계하며 몬스터와 싸운 탓에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게다가 이 근처의 몬스터들은 레벨이 너무 낮아서 도넬란과 같은 훈련병조차 사냥으로 경험치를 거의 얻지 못했다.
즉 별다른 대가가 없는 노동인 셈이었다.
"조금만 더 참아, 멍청아."
미린이 나무랐다.
"곧 첫 번째 개활지로 가서 전진 기지를 만들 테니까. 요새화를 마치고 나면 휴식 시간이 주어질 거야."
"그래, 땅을 더 파야 한다는 이야기로군."
미린은 계속 불평하는 도넬란에게 눈을 부라렸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해가 가기도 했다.
도넬란처럼 화염 마법에 특화된 마법사들은 종종 "폭발 기술자"라고 불렸다.
다수의 낮은 레벨 몬스터들을 한 번에 쓸어버리는 일에 가장 뛰어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넬란은 미린보다 훨씬 더 혹사당하고 있었다.
"좀 어때? 졸리지는 않나?"
백인대장 알렉시가 두 사람에게 다가오며 물었다.
두 훈련병은 즉시 경례를 붙였다.
"괜찮습니다, 백인대장님!"
도넬란이 열정적인 목소리로 외쳤다.
"앞으로 열 시간은 더 싸울 수 있습니다."
알렉시가 코웃음을 쳤다.
"어림없는 소리. 한 시간만 더 지나도 서서 코를 골 텐데."
단단한 체격의 백인대장이 두 훈련병의 어깨를 두드렸다.
"명심해, 너희 같은 훈련병들에게 이 임무는 일종의 통과 의례야. 그러니까 혹사당할 각오를 해두라고. 임무를 마치고 나면 아마 죽었다가 다시 태어난 기분이 들 테니까."
미린이 인상을 찌푸렸고, 도넬란은 신음을 흘렸다.
그 모습을 본 알렉시가 웃음을 터뜨렸다.
"너무 걱정하지는 말라고. 첫 번째 개활지에 도착하고 나면 나나 다른 고참병들이 나설 테니까."
알렉시가 두 사람에게 몸을 기울이며 의미심장하게 속삭였다.
"너희들은 잘 모르겠지만 고레벨 군단병들은 여기보다 더 깊은 던전에서만 제대로 싸울 수 있거든. 여기서는 우리가 능력을 발휘하기 어려워."
도넬란은 알렉시의 말을 농담으로 받아들인 듯, 웃으며 물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몬스터들이 너무 약해서요?"
"아니아니."
알렉시가 손가락을 흔들었다.
"여기 위층에는 마나가 너무 희박하거든. 첫 번째 개활지까지 가야 그나마 움직일 만하다고. 거기 가면 좋은 구경을 하게 될 거야. 특히 우리 사령관님을 눈여겨 보라고. 그 분은 살아있는 전설이니까."
"알렉시!"
돌굴 건너편에서 누군가가 외쳤다.
세 사람은 즉시 차렷 자세를 취했다.
"아우릴리아 호민관님!"
나이든 여성 장교가 사나운 눈빛으로 알렉시를 노려봤다.
"훈련병들을 데리고 놀 시간이 있거든 그 둘을 데리고 보급품 수레로 가서 삽 세 자루를 가지고 오게. 그렇지 않아도 변소가 부족하니까!"
도넬란이 울상을 지었다.
두 훈련병이 속으로 자신들의 백인대장을 욕하며 터덜터덜 걸어가자, 티투스가 조용히 웃었다.
"제가 너무 지나쳤다고 생각하십니까?"
아우릴리아가 한쪽 눈썹을 치켜들며 물었다.
티투스는 어깨에 걸쳐 놓은 거대한 전투 도끼를 고쳐 쥐며, 아우릴리아에게 되물었다.
"자네의 진급 원정 때를 기억하나?"
"그걸 어떻게 잊겠습니까. 사령관님께서 저희를 거의 갈아버린 뒤에, 다시 한 덩이로 뭉쳤다가 재차 갈아버리셨는데 말입니다."
아우릴리아의 대답에 사령관이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이제 내가 여태까지 본 최고의 장교들 중 하나가 되었지. 우리는 군단병들을 어르고 달래지 않네, 아우릴리아. 그냥 녹여서 액체로 만든 다음 우리의 틀에 부어버리니까. 만약 저 꼬마들이 오늘밤 잠들 때 울지 않는다면 우리가 뭔가 실수를 한 거겠지."
"알렉시는요?"
"···"
티투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우리의 수다쟁이 백인대장에게는 내가 이따 한 마디 해 두도록 하지."
아우릴리아가 인상을 찌푸렸다.
사령관이 '한 마디' 하고 나면, 알렉시는 한동안 수다를 떨지 못할 터였다.
회복에만 몇 주는 걸릴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왕실 경비대에게 웨이브 전까지 수행해야 할 임무는 명확하게 전달했나, 호민관?"
티투스가 물었다.
"네, 사령관님. 이제 던전 입구와 상층부에 대한 경비는 그들에게 맡기고 내려가면 될 것 같습니다. 생각보다 더 우수한 병력이더군요. 원정에서 돌아오면 여왕 폐하께 개인적으로 감사를 드리고 싶은 마음입니다."
티투스가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왕실 경비대가 우수한 병력이라는 말은 맞지만, 티투로서는 여왕이 최정예 병력을 보내서 던전의 상층부를 지키도록 한 일이 꼭 최선의 방법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어쨌든 이제 위쪽 동굴의 청소를 모두 마쳤으니, 개활지로 전진할 때였다.
거기서부터 던전의 진짜 힘이, 그리고 진짜 가치가 드러났다.
몬스터 코어는 던전의 심부에서 수확할 수 있는 귀중한 것들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광물과 강력한 크리스탈들, 그리고 몬스터들이 제공하는 경험치 자체도 값을 매길 수 없는 자원이었다.
원정대가 던전 아래로 더 깊이 내려갈수록, 티투스의 움직임도 점점 편해졌다.
여러 해 동안 던전 안에서 싸워온 티투스는 지상에서 장시간 동안 머물기가 힘들었다.
지상의 사무실에서 서류를 작성하거나 예산을 관리하는 일은 티투스에게 맞지 않았다.
티투스는 손에 도끼를 들고 있을 때, 혈관에 마나가 흐를 때 더 편안한 느낌을 받았다.
한 시간 뒤 원정대는 던전의 심부를 향해 전진을 개시했다.
티투스는 대열의 선두에 서서 군단병들을 이끌고 어둠 속을 나아갔다.
때때로 앞을 가로막는 몬스터들을 처치해 가며 십 분쯤 걸어가자, 갑자기 동굴이 넓어지며 '숲'이라고 불리는 거대한 지하 공간이 나타났다.
숲의 푸른빛이 군단병들의 얼굴을 비추며 일렁거렸다.
레기온의 병사들은 질서 정연하고 빠르게 야영지를 설치했다.
대지 마법사들이 강력한 주문을 사용하자, 동굴 바닥의 부드러운 흙에서 벽이 솟아나 임시 방벽을 만들었다.
훈련병들은 수레에서 보급품을 내리고, 천막을 세우고 변소로 쓸 구덩이를 팠다.
티투스는 날카로운 눈으로 부하들이 임무를 수행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이번 원정에 참여한 백 명의 레기온 중, 스무 명이 진급을 앞둔 훈련병이었고 나머지가 정식 군단병이었다.
의료와 보급 그리고 요리를 위한 보조 인력도 스물 다섯 명이 따라왔다.
심연의 군단은 이곳에 리리아로 통하는 길목을 봉쇄하는 전진 기지를 건설하고, 웨이브 기간 동안 방어할 계획이었다.
그리고 또한 여기를 거점으로 개미 둥지를 찾기 위한 정찰을 시작할 예정이었다.
갑자기 숲 가장자리에서 무시무시한 포효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나무들 사이에서 성체 번개 주먹 고릴라가 나타났다.
분노에 가득한 몬스터는 커다란 주먹으로 바위를 찍으며 군단병들을 향해 돌진해 왔다.
티투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던전의 이렇게 높은 층에서는 영리함이 형편없이 떨어지는 몬스터와 마주치는 경우가 흔했다.
그래서 번개 주먹 고릴라가 자살에 가까운 돌격을 감행하는 것도 그리 놀랄 일은 아니었다.
불꽃 원숭이는 다양한 계통으로 진화할 수 있지만, 유일하게 번개 주먹 고릴라가 될 경우에는 원래 가지고 있던 영리함을 거의 잃어버린다.
대신 무시무시한 힘과 전기 마나에 대한 높은 친화력을 얻고, 그 결과 주먹에서 번개를 뿜어낼 수 있게 된다.
고릴라가 가까이 다가와도 레기온의 병사들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티투스 홀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몬스터가 자신을 향해 달려들자, 비로소 전투 태세를 취했다.
티투스는 한 손으로 자신의 유명한 전투 도끼를 들어올렸다.
거대한 도끼는 날을 세운 무기라기보다 커다란 쇳덩어리에 더 가까워 보였다.
티투스는 고릴라가 달려오는 쪽을 향해 도끼를 수직으로 휘둘렀다.
도끼날이 바위를 내리치자 마치 운석이 땅에 떨어지는 듯한 어마어마한 굉음이 울렸다.
먼지가 가라앉았을 때, 동굴 바닥에는 30미터에 달하는 균열이 생겨났다.
균열 좌우로는 정확히 절반으로 갈라진 고릴라의 시체 두 쪽이 놓여 있었다.
불청객
페로몬의 자취를 발견했다!
역시 내가 태어난 둥지의 개미들도 이 호수를 이용하는 모양이다!
믿을 수 없이 좋은 소식이었다.
그냥 여기서 기다렸다가 동족을 만나서 둥지로 돌아갈 수도 있다는 뜻이니까 말이다.
나는 호수에서 조금 떨어진 곳까지 자취를 추적했다.
분명히 길이 이어지고 있었다.
개미들이 어떤 길을 더 자주 이용할수록 페로몬의 자취가 강해진다.
이 길은 그리 자주 이용했다고 보기는 어려웠지만, 내 동족들이 최소한 몇 차례에 걸쳐 이 호수를 방문했던 건 분명했다.
나는 다시 안전한 호수 가까이로 돌아와, 나도 모르게 기쁨의 댄스를 췄다.
근처의 몬스터들이 의아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마 춤추는 개미를 별로 본 적이 없는 모양이다.
어쨌거나···
곧 새로운 가족과 만날 수 있다!
며칠 동안 홀로 던전 속을 헤매다 보니, 나를 잡아먹고 싶어하지 않는 존재와 만난다는 생각만으로 가슴이 벅찼다.
그리고 이 세계에서 나를 낳아준 어머니도 만나게 될 터였다.
여왕 말이다.
여왕개미는 얼마나 클까?
전생에는 별로 효도도 하지 못하고 죽어버렸다.
어쩌면 이 세계에서는 다를지도 모른다.
어머니 여왕에게 도움이 되는 자식이 될 수 있을지도!
후!
너무 흥분된다!
하지만 우선 진정하자.
내가 어디 있는지 잊어서는 안 된다.
여기는 극히 위험한 장소였다.
정신줄을 놓고 있다가는 언제 죽게 될지 몰랐다.
나는 적당한 장소를 찾아서, 지난 번처럼 L자 모양의 굴을 판 뒤 그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어둠 속에 편안하게 앉아서 다시 마나 조작 훈련을 시작했다.
*파하*
내가 작은 마나 구름을 뿜어낼 때마다 작은 굴 안이 잠깐 밝아졌다.
*파하*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MP를 모두 소모했고, 이번에도 마지막에는 정신력이 바닥나서 마나를 제대로 인도하지 못하고 실패했다.
아직 갈 길이 멀었다.
훈련을 마치고 나는 휴식을 취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곤충에게 있어서는 잠이나 마찬가지인 명정 상태에 접어들었다.
어느새 이런 방식의 휴식에 점점 더 익숙해지고 있었다.
눈을 감지 않고도 긴 시간 동안 가만히 앉아서 조는 방식 말이다.
한참 뒤 나는 몸과 마음이 모두 회복된 상태로 꺠어났다.
휴.
여기서 너무 흥분되는 사건이 많이 벌어졌다.
잠시 차분하게 상황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호수 근처에 머물면서 마나 조작 스킬의 레벨을 올린다는 원래 계획도 나쁘지는 않았다.
게다가 동족들이 나타나면 함께 둥지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도 생겼다!
또다른 선택지는 내가 직접 페로몬을 추적해서 둥지를 찾아가는 거였다.
하지만 그러려면 너무 큰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가만히 기다려도 동족과 만날 수 있을지 모르는데 말이다.
그냥 여기서 스킬 레벨을 올리며 개미 친구들을 기다리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내가 레벨을 올리고 싶은 또다른 스킬은 굴파기였다.
비록 화려한 스킬은 아니고, 사실상 전투 상황은 물론 평소에도 특별히 유용하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나는 굴파기가 좋았다!
만약 누군가 내게 개미의 가장 큰 장점이 뭐냐고 묻는다면, 둥지를 건설하는 믿을 수 없는 능력이라고 답하겠다.
그리고 굴파기야말로 둥지 건설의 핵심이었다!
게다가 굴파기는 레벨을 올리기도 쉬웠다.
그냥 파기만 하면 되니까···
나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내 작은 은신처를 확장하기 시작했다.
지면으로부터 1미터 아래에서 여러 방향으로 작고 좁은 통로를 만들었다.
여기저기로 흙을 파 나가다가, 바위가 나오면 거기서 멈추거나 더 아래로 파고 들어갔다.
어째서인지 굴을 파고 있으니 마음이 편안하고 즐거웠다.
턱으로 흙덩이를 이리저리 옮기면서, 코만 있다면 콧노래를 부를 듯한 기분이었다.
이 주변의 흙은 특히 축축해서, 호수 반대편으로 굴을 확장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얼마 지나지 않아 커다란 나무 뿌리에 가로막혔다.
나는 때때로 지상까지 굴을 파서 작은 숨구멍을 만드는 동시에 주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살폈다.
그러면서 파낸 흙을 밖으로 버리기도 했다.
굴파기에 너무 열중한 나머지 스킬 레벨이 올랐다는 메시지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여섯 시간 동안 굴을 파고 있었다.
그리고 굴파기 스킬은 5가 되어 있었다!
만약 스킬 포인트가 남아 있었다면, 뭐가 나올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굴파기 스킬을 업그레이드시켰을지도 모른다.
···
문득 배가 고프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사냥을 나설 때가 된 것 같았다.
혹시 물을 마시러 온 내 동족이 없는지 살피기도 하고 말이다!
나는 신이 나서 굴 바깥으로 나간 뒤 호수 주변에 동족이 보이는지 살폈지만 안타깝게도··· 없었다.
갖가지 몬스터들이 물을 마시고 있었지만 개미는 한 마리도 없었다.
음··· 뭐.
언젠가는 나타나겠지!
이제 할 일은 사냥을 시도하거나, 아니면 내가 파 놓은 굴 안에 들어가서 마나 조작을 연습하는 것뿐이었다.
잠깐만···
저게 뭐지?!
멀리서 뭔가가 호수 근처의 작은 언덕을 넘어오고 있었다.
너무 멀어서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아무래도 내가 아는 모습 같았다.
그리고 몬스터가 아니었다!
나는 두 번 생각할 겨를도 없이 굴 안으로 뛰어든 다음 나무 뿌리가 나올 때까지 호수 반대편으로 달렸다.
대체 인간들이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언덕 위에 나타난 건 틀림없이 인간의 그림자였다.
설마 나를 쫓아서 여기까지 온 건가?
너무 빠르잖아!
나는 최단 거리나 다름없는 수직 통로로 내려왔다.
하지만 놈들은 여기까지 오기 위해 구불구불한 동굴을 멀리 돌아와야 했을 텐데?
게다가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저 인간들은 내가 지상 가까이 갔을 때 봤던 병사들과 뭔가 달랐다.
자세 때문인가?
갑옷이 다른가?
잘 모르겠군···
내 일부는 더 자세히 살펴보고 싶어했고, 다른 일부는 최대한 빨리 여기서 도망치고 싶어했다.
젠장!
이렇게 인간과 마주칠 때마다 무턱대고 도망칠 수는 없어!
설사 인간이 극도로 위험한 존재라고 해도, 내 은신 스킬이 최소한 잠깐은 통할 거야.
그리고 몬스터들을 따라다녀 봤자 얻을 수 있는 정보가 거의 없지만···
인간들을 염탐하면 아마 엄청나게 많은 걸 배울 수 있겠지!
그럼 결정했다.
심호흡 한 번 하고···
나는 땅굴을 통해 다시 호수 쪽으로 돌아가다가, 도중에 만들어 놓은 숨구멍을 발견하고 조심스럽게 머리를 내밀었다.
더듬이는 이제 거의 다 자라난 상태였다.
먹이를 조금 더 먹기만 하면 끄트머리까지 완전히 복구될 것 같았다.
어쨌든 감지 능력에 큰 지장은 없었다.
좋아, 아무도 없군.
나는 천천히 지상으로 올라온 뒤 몸을 최대한 땅에 바짝 붙이고 은신 모드에 들어갔다.
그리고 커다란 원을 그리며 내가 인간들의 그림자를 봤던 언덕의 뒤쪽으로 돌아갔다.
인간들의 시야에 노출되지 않도록 극도로 조심하면서 말이다.
저기 있다!
나는 무성한 수풀 속에 몸을 숨기고 더듬이만 내놓은 채, 인간들 쪽으로 조금 더 다가갔다.
다섯 명의 인간들이 모두 내게 등을 보인 채 호수를 응시하고 있었다.
보다 정확히는 호수 주변의 몬스터들을 보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인간들의 주의가 다른 쪽을 향한 틈을 타서 좀 더 가까이 다가갔다.
[고급 은신 스킬이 레벨 3이 되었습니다.]
사랑한다, 시스템.
인간들은 내가 전혀 모르는 언어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지만,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서로 이야기를 계속하면서 손짓으로 호수 쪽을 가리켰기 때문이다.
그리고···
뭔가에 합의한 것 같았다.
내가 지켜보는 가운데 다섯 명의 인간들이 뿔뿔이 흩어져서 무기를 뽑았다.
그리고 그 중 하나가 지팡이를 치켜들고 집중하기 시작했다.
지팡이의 머리 부분에서 빛나는 룬 문자들이 떠오르더니 점점 속도를 높이며 회전했다.
잠시 후 지팡이 위에서 이글이글 타오르는 거대한 파이어볼이 생겨났다.
언덕 건너편에서 그 모습을 본 몬스터들이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감히 호수 주변에서 공격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듯한 소리였다.
몬스터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인간이 지팡이를 휘둘렀다.
그리고 파이어볼이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무슨 일이 생겼는지 궁금해할 필요는 없었다.
땅이 미친듯이 흔들리더니 폭발로 인한 엄청난 빛이 주위를 온통 밝혔기 때문이다.
몬스터들이 시끄럽게 울부짖고 포효하는 소리가 들렸다.
파이어볼 때문에 상당수의 몬스터가 다쳤고, 그보다 더 많은 수가 화난 것 같았다.
나는 다른 네 명의 인간들이 서로를 향해 낄낄거리며 무기를 들고 언덕을 내려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호수 쪽으로 진격하는 인간들은 곧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주문을 사용한 인간은 언덕 위에 남아 있었다.
여자인가?
내 시력이 형편없는 탓에 분간하기 힘들었다.
마법사는 또다른 주문들을 준비했다.
아까보다 조금 더 작은 불꽃 덩어리들이 허공에 나타났다.
그리고 창 모양으로 변해서 연달아 아래쪽의 몬스터들을 노리고 날아갔다.
호수의 평화가 이런 식으로 깨지는 걸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그러니까···
사실 놀랄 일은 아니었다.
인간들이 뭔가 귀중한 자원을 발견하면 남들과 공유하려고 할까?
그 자원을 독점할 만한 힘이 있다면, 과연 남들도 이용하게 내버려둘까?
아마 아닐 것이다.
매복을 하고 있다가 누구라도 접근하면 죽이겠지.
혹은 울타리를 쳐서 아예 접근도 못하게 할 것이다.
인간들이라면 어떤 자원이든 독점해서 힘을 기른 다음 더 많은 자원을 차지하려 들 터였다.
이곳의 몬스터들은 아주 어리석었다.
만약 시스템을 통해 영리함 수치를 본다면, 아마 대부분의 몬스터들이 10 이하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내가 쉽게 속이고, 유인하고 함정에 빠뜨릴 수 있었다.
몬스터들은 어째서인지 마나 호수라는 자원을 차지하거나 통제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심지어 그 주변에서는 싸움을 벌이지도 않아서, 자신은 물론 다른 몬스터들도 혜택을 누리게 했다.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어리석은 일이었다.
게다가 인간에게 있어서 몬스터란 무엇일까?
그저 자원 혹은 경험치에 불과할 터였다.
만약 내가 이 세계에서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저들과 같은 행동을 했을 것이다.
몬스터들을 죽이고 경험치를 얻은 다음, 그 코어를 내다 팔고 자축했겠지.
하지만 난 이 세계에서 인간으로 태어나지 않았다.
뭔가 다른 존재로 태어났다.
난 몬스터였다.
그래서인지 인간들이 호수의 평화를 깨뜨리는 장면을 보자···
화가 났다.
나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몸을 돌리고, 조준을 하고···
산성 용액을 발사했다.
푸슝.
산성 용액이 허공을 가르고 날아가 여자 마법사를 맞췄다.
나는 그녀의 뒤통수를 제대로 겨냥했다.
팟!
산성 용액은 일종의 방어막에 가로막혔다.
산성 용액이 방어막 위로 흘러내리자 마법사를 보호하고 있던 투명한 구체의 형태가 드러났다.
놀라서 돌아선 마법사가 기습 공격의 출처를 찾으려고 했다.
나는 무성한 수풀 속에 몸을 완전히 숨기고 있는 상태였다.
저 마법사가 지상에 있던 경비들이 사용했던 것과 같은 탐색 장치를 지니고 있지는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그녀는 잠시 이쪽을 노려보더니 다시 아래쪽 호수에서 벌어지고 있는 싸움으로 주의를 돌렸다.
푸슝.
다시 한 번 산성 용액이 허공을 갈랐다.
산성 용액이 보이지 않는 방어막에 부딪혀 지글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마법사가 홱 돌아서더니 손에서 불길을 뿜었다.
불길은 여자 마법사의 근처에 있는 수풀을 모조리 태웠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가까이 있지 않았다.
그래도 열기 때문에 아직 회복 중인 더듬이가 움찔거렸다.
뜨거워라!
난 이런 공격으로 내가 뭘 하고 싶은 건지도 잘 알 수 없었다···
그저 여자가 아래쪽의 몬스터들에게 마법을 날리는 걸 막고 싶었다.
그럼 이제 그 시도가 성공했으니··· 어떻게 할까?
마법사는 불에 탄 수풀의 잔해를 살피며 산성 용액이 어디서 날아왔는지 알아내려고 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난 내 사랑스러운 얼굴을 보여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원하는 걸 찾지 못한 마법사는 눈에 띄게 초조한 기색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래쪽에서 벌어지는 싸움으로 주의를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 몬스터들과 싸우는 동료들이 그녀의 지원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다른 곳에 오래 신경 쓸 여유가 없는 모양이었다.
마법사가 다시 등을 돌리자, 나는 숨어 있던 장소에서 나와 조금 더 멀리로 위치를 옮겼다.
그리고 나무 뿌리 사이에 몸을 숨긴 채 다시 마법사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마법사는 계속 불꽃의 창들을 만들어서 아래쪽으로 날려보내고 있었다.
지팡이 끝에서 생겨난 불덩이가 길쭉한 창 모양으로 변한 뒤 날아가는 식이었다.
나는 마법사가 다시 한 번 주문을 시전하려 할 때를 맞춰 산성 용액을 발사했다.
[향상된 산성 용액 발사 스킬이 레벨 2가 되었습니다.]
좋았어!
거리가 멀어진 탓에 조준이 덜 정확했지만, 그래도 산성 용액의 대부분이 방어막에 부딪혀서 지글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유리가 깨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방어막이 사라지더니, 그 표면을 흐르던 산성 용액이 아래로 떨어졌다.
그리고 그 중 일부는 마법사에게 튀었다.
마법사는 산성 용액이 로브를 태우자 성난 비명을 지르며 마법 시전을 즉시 중단했다.
그리고 산성 용액이 자신의 살까지 태우기 전에 털어내려고 몸부림을 쳤다.
나는 내가 실제로 마법사에게 어떤 타격을 줄 수 있을 거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래서 산성 용액이 마법사에게 피해를 입히는 모습을 보자 충격을 받았다.
마법사의 지원이 원활하지 않은 만큼, 아래쪽으로 내려간 네 명의 인간들은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을 터였다.
이제 마법사를 방해한다는 원래 목표는 충분히 달성했으니, 호수 쪽으로 내려가서 상황을 살펴보기로 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숨어 있던 장소를 나왔다.
그리고 마법사나 다른 인간들과 마주치지 않도록 주의하며 언덕 주위를 멀리 돌아서 호수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대학살의 현장을 목격했다.
십여 마리의 몬스터들이 죽어서 호숫가에 쓰러져 있었다.
그 중 몇 마리는 언덕 위의 마법사를 향해 돌진하다가 다른 네 명의 인간들에게 당한 것처럼 보였다.
반면 좀 더 조심스러운 몬스터들은 모두 도망치고 없었다.
인간들은 이제 몬스터의 시체를 뒤지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인간들이 다리에 차고 있던 길다란 나이프로 몬스터의 시체를 가르고 코어를 찾는 모습을 지켜봤다.
인간들은 코어가 나오지 않으면 투덜거렸고, 반짝거리는 작은 보석을 발견할 때마다 희희낙락했다.
언덕에서 내려와 동료들과 합류한 마법사가 성난 표정으로 뒤쪽을 가리켰다.
그리고 산성 용액에 타버린 로브를 보여주며, 자신이 당한 기습 공격에 대해 설명하는 듯했다.
다른 네 명의 인간들은 그녀의 모습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잠시 후 커다란 덩치의 전사가 허리에 차고 있던 가방에서 병 혹은 플라스크처럼 생긴 뭔가를 꺼내 여자 마법사에게 건넸다.
마법사는 감사 인사를 하더니 즉시 마개를 열고 병 안의 내용물을 마셨다.
힐링 포션인가?
코어 수확을 마치자, 인간들은 다시 무리지어 언덕 위쪽으로 올라갔다.
거리가 멀어지자 인간들의 형체가 흐려지더니 이내 완전히 사라졌다.
사방에 널려 있는 몬스터의 시체들을 보자 멍한 기분이 들었다.
원래 인간이다가 몬스터로 다시 태어난 나는 이 세계에서 어떤 윤리관을 가져야 하는 걸까?
어쨌든 내 눈 앞에는 무수한 바이오매스의 원천들이 널려 있었다.
몬스터라면 결코 낭비할 수 없는 자원이었다.
그러니 일단 먹고 나중에 생각하자.
변이
던전이 잔해를 흡수해서 시체가 모두 사라지기 전에, 나는 일곱 개의 바이오매스를 획득할 수 있었다.
전에 없이 풍족한 수확이었다.
재빨리 머리를 굴려서 내가 전에 먹어본 적 없는 종류의 몬스터 셋부터 한 입씩 섭취해 세 개의 추가 바이오매스를 확보한 덕분이었다.
그런 다음 배가 찰 때까지 먹어서 네 개의 바이오매스를 더 얻었다.
[스킨틸람 헤드위의 기초 정보가 잠금 해제되었습니다.]
[세르펜스 카니스의 기초 정보가 잠금 해제되었습니다.]
[라케르타에 테람의 기초 정보가 잠금 해제되었습니다.]
원래 가지고 있던 두 개의 바이오매스와 합치니 모두 아홉 개였다.
혹시 인간들이 다시 돌아올까 두려웠던 나는 방해받지 않고 변이를 선택하기 위해 아까 만들어 놓았던 은신처로 향했다.
물론 빵빵해진 배 때문에 입구를 좀 더 넓혀야 들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시간을 들여 입구를 흙으로 막았다.
나는 눈을 +5로 업그레이드할 생각이었다.
이 근처의 다른 몬스터들보다 우월한 시야를 유지하고 싶었을 뿐 아니라, 변이가 5단계에 이르면 어떤 기회가 생기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스킬은 레벨 5가 되면 고급 스킬로 발전하는 만큼, 신체 부위에도 추가 혜택이 있을지 몰랐다.
[눈을 +5로 업그레이드하겠습니까? 5 바이오매스를 소모합니다.]
좀 긴장되는데···
···업그레이드하겠어.
[이제 메뉴에서 고급 변이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아하!
그러니까 뭐든 레벨 5가 중요한 이정표로군!
그럴 줄 알았어!
여태까지 눈에만 바이오매스를 열 다섯 개나 썼으니 대가가 돌아올 때도 됐지!
그리고 내 머리 속에 선택 가능한 시력 업데이트의 긴 목록이 떠올랐다.
정말로 선택지가 이렇게 많다고?!
열 감지 시야, 동작 감지 시야, 마나 시야··· 그리고 투시?!
맙소사 엄청나잖아?
나는 각각의 선택지에 대한 설명을 확인하며 한참 고민한 끝에 결정을 내렸다.
굉장히 유혹적인 선택지들에도 불구하고 (투시를 할 수 있으면 정말 유용할 것 같았다!) 결국 좀 더 평범한 변이를 선택했다.
약점을 보완하고 장점을 살리기 위해서였다.
내 선택은 초점 겹눈이었다.
설명에 따르면 이거야말로 내가 그동안 줄곧 원했던 변이였다.
인간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한 쌍의 커다란 눈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곤충의 겹눈은 언제나 같은 곳을 볼 뿐 움직이지 못하는 수백 개의 작은 눈을 모아 놓은 형태였다.
전에도 말했지만, 이런 겹눈은 거의 모든 방향을 동시에 볼 수 있다는 장점을 가졌다.
특히 내 눈은 변이를 거쳐 원래보다 튀어나온 덕분에 거의 고개를 돌리지 않고도 후방까지 살필 수 있었다.
하지만 인간과 달리 먼 거리의 대상에 초점을 맞추기는 어려웠다.
이제 그 약점을 극복할 수 있게 됐다.
초점 겹눈으로 변이하면, 양쪽 겹눈에 각각 멀리 초점을 맞출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부분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소한 일정 방향에 대해서는 더 멀리까지 볼 수 있게 되었다.
여전히 눈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는 없어서, 멀리 떨어진 다른 방향을 보려면 머리 전체를 돌려야 했다.
하지만 그래도 이 업그레이드를 하면 나는 인간과 개미의 눈이 가진 장점을 모두 확보할 수 있을 터였다.
멀리 초점을 맞추면서, 주위의 모든 방향도 경계하고.
궁극의 눈인 셈이다!
나는 즐겁게 변이를 확정했다.
아우!
이 느낌을 깜빡했다!
머리 안쪽에서부터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날카롭고 고통스러운 느낌이 찾아왔다.
여태까지 겪었던 통증보다 백 배는 더 심했다.
칼로 찔리는 기분이야!
아니 바늘로!
내 눈!
으갸갸!
나는 여섯 개의 다리로 바닥을 마구 긁었지만 별 도움은 되지 않았다.
통증은 계속 이어졌다.
계속.
계속.
그러다 마침내 멈췄다.
[산성 용액을 +4로 업그레이드하겠습니까? 4 바이오매스를 소모합니다.]
아니···
···그래.
젠장.
산성 용액 분비샘의 변이는 눈만큼 심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끔찍했다.
+5 변이가 엄청난 이득을 가져다주는 걸 확인했기 때문에, 나는 모든 부위를 최대한 빨리 그만큼 성장시키고 싶었다.
산성 용액은 이미 +3이었고 현재 시점에서 내 주무기였기 때문에, 최우선으로 업그레이드할 대상이었다.
[현재 진화 단계에서는 더 이상 눈을 업그레이드할 수 없습니다.]
흐음.
그러니까 어떻게든 진화를 하지 않으면 신체 부위를 +5 이상 변이시킬 수 없다는 거로군?
하지만 크게 신경이 쓰이지는 않았다.
어차피 2레벨만 더 올리면 진화를 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터였다.
바이오매스를 모두 사용한 나는 굴 안에 숨어서 다시 마나 조작을 연습했다.
MP가 바닥날 때까지 마나 연기를 입으로 내뿜고 나자 정신적으로 그로기 상태가 되었다.
하지만 노력의 대가가 돌아왔다!
[마나 조작 스킬이 레벨 3이 되었습니다.]
나는 상태창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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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 3 (코어)
힘: 15
강인함: 12
영리함: 25
의지: 18
HP: 30
MP: 12
스킬: 땅파기 레벨 5; 향상된 산성 용액 발사 2; 잡기 레벨 4; 단단히 물기 레벨 1; 고급 은신 레벨 3; 깨물기 레벨 1; 터널 센스 레벨 4; 마나 조작 레벨 3
변이: 눈 +5, 더듬이 +2, 산성 용액 +4, 다리 +1, 턱 +2, 갑각 +1
종족: 갓 부화한 일개미 (포르미카)
스킬 포인트: 0
바이오매스: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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