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미로 환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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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에서 던전 속 몬스터 개미로 환생했다!
[인외물/성장(진화)물/영지... 아니 둥지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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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 Chrysalis
원작: Ryan McGrath
팀 YAGI
번역/번안: 정현정/정대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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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위는 온통 눈부신 하얀 빛이었다.
그리고 어디선가 장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환영한다.]
어··· 감사합니다?
굉장히 따스하고 친절한 목소리였다.
[너는 죽었다.]
젠장.
...
내가 죽었다니 그게 무슨 뜻이지?
그리고 이 목소리의 정체는 대체 뭐야?
정말로 내가 죽었다면, 어떻게 이 목소리를 듣는 거지?
지금 나한테 귀가 있기는 한가?
그럼 여기는 천국?
뭐, 지금 상태도 편안하기는 하지만···
영원히 이렇게 아무 것도 없는 공간에 있어야 한다면 좀 심심할 것 같은데?
[안심해라, 넌 곧 새로운 세계에서 깨어나 다시 삶을 살게 될 테니.]
목소리는 어딘지 모르게 마음을 안정시켜 줬다.
깊고 부드러운 음색이 편안하면서도 지혜롭게 들렸다.
[넌 판게라의 세계에서 다시 태어날 것이다.]
[그곳에서 새로운 운명을 개척해 나가야 한다.]
어···
소설 같은 데서 봤던 것처럼 이계로 전생하는 건가?
정말?!
잠깐만.
침착하자.
집중해서 설명을 들어보자고!
[넌 다음과 같은 상태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오···
=====
레벨: 1
=====
게임 시스템인가!
=====
능력치:
힘 15
강인함 12
영리함 25
의지 18
HP: 30
MP: 0
=====
흠.
어쩐지 강해 보이는데?
하지만 MP가 0이라는 건 좀 그렇군.
=====
스킬:
땅파기 레벨 1
산 쏘기 레벨 1
잡기 레벨 3
물기 레벨 2
=====
좋아, 스킬이로군!
그런데···
물기?
산 쏘기?
검술이나 마법이 아니라?
스킬들이 뭔가 좀··· 이상한데?
=====
종족: 갓 부화한 일개미 (포르미카)
=====
···.
잠깐.
잠깐만.
이게 무슨 소리야?!
개미?
그냥 개미도 아니고 갓 부화한 일개미?!
이건 내가 생각했던 이계 전생이 아니잖아!
내가 전생에 죄를 많이 지어서 벌을 받는 건가?
벌레로 태어날 만큼 나쁜 짓을 한 기억은 없는데...?
[너에게는 하나의 스킬 포인트와 하나의 바이오매스가 주어진다.]
[가서 네 운명을 개척해라.]
운명을 개척하라니, 무슨...
개미의 운명?
헛소리하지 마!
다음 순간, 나는 주위의 하얀 빛이 변화하는 걸 느꼈다.
빛은 점점 더 응축되더니 형체를 이루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서히 내 새로운 몸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몸은 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여섯 개의 다리, 두 개의 더듬이, 좌우로 벌어지는 턱과 단단한 외골격.
갓 부화한 탓인지 아직 희끄무레한 색이기는 하지만···
어느 모로 보나 개미의 몸이었다.
나는 한 마리의 개미가 되었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하라고?
유리 상자에 든 애완용 개미를 기른 적은 있지만, 그렇다고 개미가 뭘 해야 하는지 아는 건 아니다.
...설마 그것 때문인가?
개미를 기른 적이 있어서 개미로 전생한 거야?
상자 안에 갇혀 살던 개미들의 저주라도 내린 건가?
...
어쨌든 주위 상황부터 파악해야 할 것 같은데···
내가 처음으로 알아차린 건, 내 시력이 형편없다는 사실이었다.
주위가 온통 어두운 가운데 앞쪽 벽면이 희미한 푸른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 이상은 더 자세히 보려고 해도 시야가 온통 흐릿하기만 했다.
마치 고개를 돌릴 때마다 눈에 보이는 장면이 산산이 흩어졌다가, 잠시 뒤에야 다시 자리를 잡는 느낌이었다.
그러고 보니 개미는 시력이 극도로 낮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심지어 몇몇 종들은 완전히 장님이었다.
적어도 난 그 정도로 운이 나쁘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이 거지 같은 시력을 보완하려면 다른 감각에 익숙해져야 할 것 같았다.
그렇지, 더듬이!
내 기억이 맞다면, 개미는 더듬이를 이용해서 냄새를 맡고 공기의 흐름을 파악해서 근처의 움직임을 감지할 수 있을 터였다.
나는 아직 색이 하얀 더듬이를 부지런히 흔들며 감각을 시험했다.
오오...
뭔가 느껴지는 것 같은데.
정확히 뭔지 분간할 수 없는 몇 가지 냄새를 감지할 수 있었다.
주위 공기는 조금 퀴퀴했는데, 아무래도 지하라서 그런 것 같았다.
하지만 잠깐.
개미들은 분명 페로몬과 후각으로 동료와 의사 소통을 할 텐데...
내 동료 개미들은 다 어디 있는 거지?
다른 개미들이 옆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새로 태어난 동료를 환영해야 맞는 거 아냐?!
왜 아무도 없지?
잠깐!
근처에서 뭔가 냄새가 느껴졌다.
나는 왼쪽으로 몸을 돌리고 더듬이를 맹렬하게 움직였다.
이거다.
나 자신과 아주 비슷한 냄새가 나는 뭔가가 근처에 있었다.
여러 감각을 통해 수집한 정보를 분석한 결과, 내가 길다란 동굴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동굴의 벽에서는 희미한 푸른 빛이 맥박치듯 뿜어져 나왔다.
돌로 된 부분과 흙으로 된 부분이 뒤섞인 벽이었다.
아주 천천히, 나는 동족의 냄새를 쫓아서 움직였다.
처음에는 여섯 개의 다리가 어색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익숙해졌다.
통로가 꺾이는 모퉁이에 다가가자 뭔가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소리지?
뭐가 부서지는 소리인가?
걱정하지 말라고 친구들!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나도 함께 도울 테니까.
개미 둥지의 영광을 위하여!
나는 더듬이를 맹렬하게 흔들며 모퉁이 너머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러자 뭔가가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개미 한 마리가 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서, 여섯 개의 다리를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집게 모양의 턱은 부질없이 열리고 닫히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그 위로 길다란 주둥이가 활짝 열린 채,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두 개의 강력한 손이 발버둥치는 개미를 붙잡고 그 주둥이로 가져갔다.
주둥이가 닫히자, 아까 들었던 부서지는 소리가 터널 안에 울려 퍼졌다.
개미는 침묵 속에서 고통으로 몸부림쳤다.
무시무시한 포식자는 턱을 몇 차례 더 움직이더니 고개를 홱 젖히고 뜯어낸 살점을 목구멍으로 삼켰다.
...
야야야야.
뭐야 뭐.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두 발로 걷는 악어라니, 무슨 몬스터 같은 건가?
나는 놈의 몸 뒤쪽에서 땅을 쓸며 흔들리는 거대한 꼬리를 볼 수 있었다.
강해 보이는 두 개의 손이 먹잇감인 개미를 짓눌렀다.
내 동족은 여전히 꿈틀거리며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곧 힘이 다할 것처럼 보였다.
다행히 악어 괴물은 내게 등을 보인 채였다.
날 그렇게 보지 마, 친구!
나보고 어쩌라고?
저 거대한 악어 괴물을 상대로 싸우기라도 하라고?
나보다 네 배, 아니 다섯 배는 더 큰 놈인데!
여기는 개미 둥지가 아니었다.
다른 개미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무리도 없고 지원도 없었다.
우리 같은 어린 일개미들을 보호해야 할 병사들은 한 마리도 없었다.
그런 와중에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이 상황에서 내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전략은···
도망치는 거다!
몬스터가 식사를 마치고 날 발견하기 전에 달아나야 돼!
나는 내 자신의 다리에 걸려서 넘어지며, 황급히 뒤로 돌아서 왔던 방향으로 터널을 되돌아갔다.
달려, 달려, 달려!
잠깐!
이렇게 무작정 달리다가 반대편에서 또다른 몬스터와 마주치면 어쩌지?
그럼 게임 오버라고, 게임 오버!
생각하자.
개미처럼 생각해!
너무 급하게 멈춰 서는 바람에 다리가 뒤엉켜서 엉덩방아를 찧었다.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무작정 달아나는 것 말고 다른 선택지도 있었다.
난 개미니까.
개미가 하는 일이 뭘까?
그야 굴을 파는 거지!
나는 더듬이와 앞다리를 이용해서 근처의 벽을 최대한 빠르게 살폈다.
여기다!
찾았어!
이 부분의 벽은 돌이 아니라 부드러운 흙이야!
목숨을 걸고 파야 돼!
정말 목숨이 걸린 일이니까!
나는 앞발을 들어서 미친 듯이 벽을 긁기 시작했다.
내 다리들은 여전히 하얀색이었고 살짝 투명하기까지 했다.
너무 연약해서 제대로 굴을 팔 수가 없었다!
...잠깐만.
애초에 개미들은 다리로 굴을 파지 않잖아.
나는 처음으로 얼굴 앞쪽에 달린 집게 모양의 턱을 좌우로 벌렸다.
두꺼운 턱이 좌우로 벌어졌다가 다시 닫히는 모습이 내 눈에도 보였다.
그래, 굴은 머리로 파는 거야!
나는 벽에 얼굴을 가져다 대고 턱을 최대한 크게 벌린 다음, 있는 힘껏 다물었다.
턱도 아직 완전히 단단해진 건 아니지만 그래도 흙을 쉽게 파고들었다.
하하!
나는 쉬지 않고 굴을 판 끝에 내 몸이 들어갈 만한 작은 터널을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 들어가서 입구를 무너뜨렸다.
나 자신을 완전한 어둠 속에 가둔 것이다.
들키면 죽는다!
어두운 은신처 속에서 몸을 떨며, 나는 현재 내가 처한 상황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이 상황은 너무 이상했다.
새로운 개미는 수많은 동료들과 보호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개미굴 안에서 태어나야 하는 것 아닌가?
대체 왜 저런 끔찍한 짐승이 있는 터널 안에서 혼자 태어난 거야!
조금 전에 봤던 불쌍한 동족을 고려할 때, 나 혼자만 이런 가혹한 상황에 처한 건 아닌 듯했다.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은 하나밖에 없었다.
약탈이었다.
내가 속한 개미굴을 뭔가가 공격해서, 몇몇 알을 훔쳐 나온 거다.
그리고 맛 좋은 간식 거리를 자기가 사는 동굴로 가져온 거지.
심지어 아까 그 악어 같은 짐승이 그런 약탈을 저지른 장본인이 아닐 수도 있다.
누군가 훔쳐 나온 알을 다시 또 가로챈 걸지도 모른다.
그러다 내가 들어 있는 알을 떨어뜨렸고, 덕분에 나는 무사히 부화한 것이다.
결국 이렇게 굴을 파고 숨어서 들키지 않기만 바라는 처지가 되었지만.
나는 또 내가 몇 밀리미터 크기의 평범한 개미라는 생각도 버렸다.
두 발로 걷던 그 악어 머리의 짐승은 결코 지구에 존재하는 생물이 아니었다.
애초에 그런 생물이 자연적으로 진화했을 리 없다.
게임 같았던 이 세계의 시스템까지 고려하면, 내가 본 그 놈이 일종의 몬스터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 또한 어떤 지하 미궁이나 던전에 서식하는 몬스터일 터였다.
무섭잖아!
내 몸 속에도 모험가들이 원하는 몬스터 코어 같은 게 있을까?
내가 죽으면 돈이나 아이템을 떨어뜨리나?
시작부터 너무 하드 모드잖아!
도움말 같은 것도 없나?
잠깐.
그러고 보니 아까 무슨 스킬 포인트랑 바이오매스가 어떻다고 하지 않았나···?
상태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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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템 강림' 이전의 세계는 우리에게 수수께끼로 남아 있고, 그 시대에 대한 기록은 모두 수 세기 전의 '대격변' 도중에 사라지거나 잊혀졌다. 오늘날처럼 정확한 숫자로 표시되는 상태창이 없었을 때 사람들은 어떻게 서로를 판단했을까?
그때는 사회가 더 평등했을까? 인간의 가치를 정확한 숫자로 가늠할 수 있는 지금은 각자의 역할과 사회 구조가 공고히 유지된다. 하지만 모든 것이 모호했던 그 시절에는 개인의 삶에 더 큰 자유가, 더 많은 선택지가 존재하지 않았을까?
많은 이들은 시스템이 우리를 발전시켰고, 대재앙과 맞서 싸울 힘을 부여했다고 여긴다. 하지만 우리는 '강림'을 통해 우리가 무엇을 얻었는지는 알아도, 무엇을 잃었는지는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이단자 일라리온이 저술한 "강림 이전의 사회에 대한 소고" 15페이지로부터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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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
그러니까 스킬 포인트와 바이오매스를 사용할 수 있다는 거지?
만약 이게 게임 비슷한 상황이라면 무슨 메뉴 같은 걸 열어서 포인트로 내 자신을 성장시킬 수 있을 텐데.
그런 메뉴에 어떻게 접근할 수 있을까?
음··· 레벨 업!
안되는군.
접속 종료!
로그아웃!
···
뭐, 시도는 해볼 수 있는 거잖아?
상태창!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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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 1
능력치:
힘 15
강인함 12
영리함 25
의지 18
HP: 30
MP: 0
스킬:
땅파기 레벨 1
산성 용액 발사 레벨 1
잡기 레벨 3
물기 레벨 2
바이오매스: 1
스킬포인트: 1
=====
그래, 이게 내 상태창이로군.
얼핏 보면 숫자들이 제법 커 보이지만 실제로는 엄청 낮은 능력치겠지?
갓 부화한 일개미의 능력치가 그리 높을 리는 없으니까 말야.
그런데 저 스킬들은...
잡기?
뭘 잡는 능력이라는 건가?
[잡기: 어떤 표면이나 물건을 놓치지 않고 붙잡는 능력. 예를 들어 벽을 타고 이동할 때 사용합니다.]
내가 생각만 하면 스킬에 대해 설명해 주는 도움말 시스템이 상태창에 붙어 있는 건가?
좋은데!
그러니까 잡기 스킬은 내가 이 여섯 개의 다리로 뭔가를 붙잡는 능력을 높여준다는 거로군.
그걸로 벽이나 천장에 매달려 이동할 수도 있고?
개미들이 벽이나 천장을 타기도 한다는 사실을 완전히 잊고 있었다.
여기서 나가면 바로 시도해 봐야지...
벽과 천장을 탈 수 있다면 굳이 바닥을 기어다닐 필요가 없으니까.
어디 다른 스킬들도 한 번 볼까?
[물기: 턱이나 이로 정확하고 강력하게 대상을 무는 능력을 높여줍니다.]
[땅파기: 땅을 더 빠르고 효율적으로 팔 수 있도록 무의식적인 가이드를 제공합니다.]
[산성 용액 발사: 몸에서 나오는 천연 산성 용액으로 원거리 공격을 시도할 때 정확도를 높여줍니다.]
좋아···
개미들 중 여러 종이 꽁무니에서 개미산이라고 불리는 산성 용액을 발사할 수 있다고 들었다.
그러니까 나도 그렇게 산성 용액을 쏘는 몬스터 개미인 모양이다.
적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않고도 공격할 수단이 있다는 건 아주 유용했다.
적어도 지금으로서는, 적과 붙어서 싸우기라도 하면 곧바로 목숨을 잃을 것 같으니까 말이다.
그러니까 난 물 수 있고, 벽을 탈 수 있고, 땅을 파고 산성 용액을 쏠 수 있다는 건가?
내가 처한 상황을 고려할 때, 생존 수단이 그리 충분해 보이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가장 부족한 건 정보였다.
여기가 어디인지, 나 같은 개미와 아까 봤던 악어 몬스터 말고 또 어떤 생물들이 사는지, 지상이 얼마나 먼지 혹은 이 세계에 지표면이 존재하기나 하는지 등등···
그야말로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였다.
아무래도 내게는 성대가 없는 모양이라, 설사 누군가가 몬스터 개미와 대화할 의향이 있다고 해도 의사 소통을 할 방법조차 없었다.
즉 정보를 원한다면 스스로 알아내야 한다는 의미였다.
내가 만든 이 작은 은신처 밖으로 나가서 말이다.
흠···
무서워!
무섭다고!
나처럼 작고 약한 개미 몬스터가 얼마나 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는 저 바깥 세상으로 나가야 한다고?
그건 미친 짓이야!
휴, 진정하자.
패닉 상태에 빠지는 건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침착하게 행동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어쨌든 그래서···
내가 가진 포인트들을 어떻게 사용할 수 있지?
[스킬 포인트를 사용하겠습니까?]
물론이지!
그러자 또다른 창 하나가 내 머리 속에서 열렸다.
=====
스킬 포인트: 1
바이오매스: 1
=====
[스킬 포인트(SP)로 새로운 스킬을 구입하거나 기존의 스킬을 업그레이드할 수 있습니다.]
[바이오매스로는 몬스터의 육체를 강화하거나 변형할 수 있습니다.]
[구입 가능한 스킬 목록:
은신: 1SP, 숨거나 보이지 않게 움직이는 능력을 높여줍니다.
질주: 1SP, 짧은 거리를 이동하는 속도를 높여주지만 스태미나 소모도 늘어납니다.
베기 공격: 1SP, 더 강하고 정확한 베기 공격입니다.
깨물기: 물기의 관통력이 높아지고 적이 떨쳐내기가 더 어려워집니다.
터널 센스: 지하에서 방향 감각을 높여줍니다.]
[구입 가능한 육체 강화 목록:
외골격+1: 외골격을 단단하게 만들고 일반 공격에 대한 저항력을 높여줍니다.
턱+1: 턱을 단단하게 만들고 관통력을 높여줍니다.
다리+1: 민첩성을 높여줍니다.
눈+1: 시력을 높여줍니다.
더듬이+1: 공기의 흐름과 냄새를 더 잘 감지할 수 있게 해줍니다.
산성 분비선+1: 체내에서 분비하는 산성 용액의 농도가 짙어지게 해줍니다.]
선택지가 많은데!
고르기가 어려워!
합리적으로 생각해 보자.
더 빨리 달릴 수 있으면 적으로부터 도망치는 데 도움이 될 테고, 터널 센스를 선택하면 지하에서 길을 잃을 위험이 줄어들 테고, 악력이나 산성 분비선은 전투 능력을 높여줄 테고···
일단 무엇보다 생존이 우선이지.
목숨이 붙어 있어야 성장과 발전도 가능한 거니까.
지금 전투 능력을 선택하는 건 자살 행위야.
어차피 이길 수 없는 상대에게 덤비면 곧바로 게임 오버일 테고, 속도를 높인다고 해도 나보다 빠른 적과 마주치면 소용이 없지···
아무런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어떤 생물이 나보다 강한지 혹은 나보다 빠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갓 부화한 일개미인 나는 이 근방에서 가장 약하다고 가정하는 편이 맞을 거다.
좋아!
결정을 내렸어.
눈+1과 은신을 선택한다!
[눈+1과 스킬: 은신을 구입하겠습니까?]
네, 주세요.
그러자 즉시 내 눈에 천 마리의 모기한테 동시에 물린 것처럼 미칠 듯한 간지러움이 느껴졌다.
으아아!
나한테 이러지 말아줘!
이 다리로는 눈이 간지러워도 부빌 수조차 없다고!
그러다 내 눈을 찌르고 말 테니까!
다행히 간지러움이 오래 가지는 않았다.
1분쯤 지나자 증상이 나아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가 숨어 있는 어둡고 좁은 굴 속에서는 정말로 시력이 좋아진 건지 확인하기 어려웠다.
어쨌든 눈이 전보다 조금 더 커진 건 확실했다.
이게 육체 변이라는 건가?
고작 1분 만에 육체가 전보다 더 성장하는 거야?
거의 사기에 가까운 능력이잖아.
지구의 인간이 조금이라도 육체를 성장시키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하는지 생각하면 말이지.
심지어 인간은 아무리 애를 써도 시력을 높이는 일 따위는 불가능하다고.
이 바이오매스라는 포인트를 더 얻어야겠어!
육체 성장 포인트가 충분히 많다면 상대적으로 나약한 개미라는 종족의 한계를 극복하고, 이 동굴 속에서 더 안전하게 지낼 수 있을 거야.
[바이오매스는 다른 생물을 섭취해서 획득할 수 있습니다.]
오호라.
그런데 왜 하필 은신과 시력 향상을 선택했냐고?
좋은 질문이다.
적을 상대로 맞서 싸우기도 그렇다고 도망치기도 너무 위험하다면, 살아남기 위한 유일한 길은 처음부터 적에게 발견되지 않는 거다.
들키면 무조건 죽을 테니까!
이 세계에서 생존하는 법을 배울 만큼 오래 살기 위해 내가 선택한 방법은 일단 숨는 거였다.
그리고 시력은···
잘 안 보이니까 답답하잖아!
인간의 시력에 익숙한 내가 개미의 눈에 적응하는 건 도저히 무리야...
애초에 움직이지 않는 대상은 거의 보이지도 않으니까!
원래 개미는 수만 마리의 약한 개체가 모여야 겨우 강해지는 군집 생물이다.
각각의 개미가 가진 감각은 형편없지만, 단체로 움직이기 때문에 적이나 사냥감을 찾아낼 수 있다.
하지만 난 혼자였다.
낮잠을 자는 드래곤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 위로 올라가면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
말도 안 되지.
적어도 5미터 두께의 돌을 투시해서 바퀴벌레가 꿈틀거리는 모습을 볼 수 있을 때까지는 시력을 우선적으로 높일 생각이다.
어쨌든 좋아...
이제 거의 반 시간 정도 숨어 있었다.
포인트도 썼으니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다.
용기를 내자.
나가서 이 세상을 탐험해 보는 거야!
나는 아주 조심스럽게 막아 놓았던 입구의 흙을 치웠다.
곧 내가 태어난 동굴로 통하는 작은 구멍이 뚫렸고, 나는 그 틈으로 더듬이를 아주 살짝 내밀었다.
아무런 냄새도, 어떤 진동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이로군.
나는 빠르게 입구를 넓힌 뒤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고개를 좌우로 돌렸지만 양쪽 모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점점 어두워지는 동굴이 시야 가장자리에서 살짝 휘어져 있을 뿐이다.
오른쪽 길로 갔을 때 내 동족을 잡아먹고 있는 짐승과 마주쳤다.
확실한 위험이 있는 방향이니 그리고 갈 수는 없다.
왼쪽 길로 갈 수밖에.
이제 계획의 다음 단계를 실행에 옮길 때였다.
아직 여섯 개의 다리에 그리 익숙하지 못한 터라, 나는 아주 천천히 벽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벽을 타고 올라간 뒤···
마침내 천장에 매달렸다.
내 작은 발톱들이 천장을 단단히 움켜쥐고 있었다.
성공이다!
천장에 거꾸로 매달려 움직이면서 새로 얻은 은신 스킬까지 사용하면, 적에게 들키지 않고 지나갈 수 있겠지!
음하하!
거꾸로 매달려 있느라 머리에 피가 쏠려서 그런지도 모르지만, 갑자기 자신감이 차올랐다.
가자!
넘치는 자신감에도 불구하고, 나는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천장을 따라 나아갔다.
더듬이와 앞다리를 사용해서 잡기 적당한 곳을 파악한 뒤 뒤쪽 다리로 단단히 움켜쥐며 조금씩 전진했다.
상당한 집중력이 필요한 일이라 이동 속도가 느렸지만 괜찮았다.
무사히 지나가는 매 순간이 내게는 작은 승리처럼 느껴졌다.
시력이 좋아진 덕분에 전에는 알아차리지 못했던 몇 가지 세부 사항을 파악할 수 있었다.
동굴 안에는 온통 푸른 빛을 발하는 선들이 이리저리 뻗어 있었다.
마치 바위 안에 흐르는 혈관처럼 보였다.
무수히 뻗어 있는 선들 중 어떤 것들은 두꺼웠고 어떤 것들은 좀 더 가늘었으며, 어떤 선들은 너무 가늘어서 거의 보이지 않았다.
일정한 간격마다 빛이 맥박처럼 그 선을 타고 움직이며 동굴 안을 일시적으로 밝혔다.
마치 동굴 자체가 살아있는 것처럼 기괴한 현상이지만, 어째서인지 몰라도 선에서 나오는 푸른 빛은 내 마음을 편하게 만들었다.
거의 그 빛이 내게 힘을 주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저 푸른 선들...
내가 이 장소를 이해하기 위해 알아내야 할 점들 중 하나였다.
어쨌든 푸른색의 빛 덕분에, 나는 내 겉껍질이 점점 더 단단해지면서 검은색으로 변해가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예전에 취미 삼아 개미를 길렀을 때가 생각났다.
갓 부화한 개미들의 외골격은 하얀색으로 말랑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검고 단단해졌다.
아무래도 내가 생각보다 벽 속의 은신처에 오래 있었던 모양이다.
한 시간 정도 조심스럽게 나아간 끝에, 나는 동굴이 꺾어지는 부분에 이르렀다.
그리고 모퉁이를 돌자 갑자기 엄청나게 넓은 동공이 나타났다.
어마어마하잖아!
이 안에 축구 경기장이 몇 개는 들어가겠는데?
순간 더듬이를 통해 무수한 진동과 냄새가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몬스터들이다!
몬스터들
으르렁거리는 소리, 쉭쉭거리는 소리 그리고 이를 가는 소리가 드넓은 공동의 벽에 메아리쳤다.
수많은 진동이 더듬이에 느껴지는 바람에 현기증이 났다.
공동 안에는 수많은 몬스터들이 득실거렸다.
아마 동굴의 중요한 교차로로 보이는 이 장소에서, 놈들은 서로 싸우거나 어디로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최대한 빠르게 공동 안으로 진입해서, 천장에 매달려 있는 종유석의 그림자 속에 몸을 숨겼다.
그리고 몸을 최대한 천장에 밀착시킨 채 공동 안을 살폈다.
벽에서 맥동하던 기이한 푸른 선들은 공동 안까지 이어져 있었다.
드러난 모든 표면 그리고 심지어 바닥과 천장의 종유석까지 휘감은 채 부드러운 푸른 빛으로 주위를 밝혔다.
공동 한가운데에는 지름이 20미터 정도 되는 커다란 호수가 보였다.
자세히 보니 천장에서 호수로 물이 쏟아지고 있었다.
아마 그 위쪽에 강이나 지하수가 흐르는 듯했다.
호수 바닥에도 푸른 혈관이 분포하고 있는지, 수면이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내 작은 개미 심장을 주둥이 바깥으로 튀어나오게 만들 뻔한 건, 호수 주위에 모여 있는 수많은 몬스터들의 모습이었다.
이게 무슨 악몽 같은 광경이지?
아직 시력이 충분히 좋지 않아서 자세한 모습을 알아보기는 어려웠지만, 호수가 발하는 빛 덕분에 대략적인 형태는 식별할 수 있었다.
먼저 나와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는 두 놈은 일종의 개 혹은 늑대처럼 생겼지만, 파충류의 꼬리가 달려 있었다.
길쭉한 주둥이 안에는 날카로운 이빨이 가득했다.
이 두 마리는 교대로 물을 마시면서 주위를 경계했고, 다른 놈들이 가까이 오면 꼬리로 바닥을 훑으며 경고하듯 으르렁거렸다.
그 옆에는 아까 봤던 놈과 같은 악어 괴물이 있었다.
놈은 앞발에 체중을 싣고 몸을 숙인 채 길쭉한 주둥이로 호수의 물을 마시는 중이었다.
다른 몬스터들은 놈을 두려워하는 듯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다.
나 같아도 그러겠다!
아무래도 악어 괴물은 여기 있는 몬스터들 중에서도 강한 축에 속하는 듯했다.
그러고 보니 호수 주위에서는 전혀 싸움이 벌어지지 않고 있었다.
어쩌면 이 동굴에 사는 몬스터들끼리 물을 마실 때에는 서로 건드리지 않는다는 무언의 협정이라도 맺고 있는 걸까?
놀라운 일이었다.
저렇게 끔찍하게 생긴 괴물들이 서로 평화롭게 지내다니.
놈들도 나처럼 바이오매스를 먹어 치워서 더 강해질 수 있다면 말이다.
어쨌든 정말 평화 협정이라도 있는 거라면 좀 더 가까이 가봐도 괜찮을 것 같군...
나는 천장에 바짝 붙어서 한 번에 다리 하나씩 움직이며, 아주 천천히 호수 쪽으로 다가갔다.
아주 느리게···
내가 개미가 아니라서 땀을 흘릴 수 있었다면 그게 바닥에 떨어져서 두 번째 호수를 만들 정도였다.
발로 잡을 곳을 매번 확인하고, 아주 천천히 더듬이를 흔들며 주위의 기척을 살폈다.
[은신이 레벨 2가 되었습니다.]
그렇지!
스킬 레벨 업이라!
좋구나!
아무래도 스킬은 사용할수록 성장하는 모양이다.
지금 같은 경우는 아래쪽에 있는 몬스터들의 눈에 띄지 않고 움직인 덕분에 은신 스킬의 레벨이 올랐고 말이다.
이건 좋은 기회다!
여기 계속 숨어서 아주 천천히 움직이는 동시에 몬스터들을 관찰하면, 정보를 얻는 동시에 은신 스킬을 올릴 수도 있을 터였다.
일단 진정하자.
너무 흥분했다가 일을 그르치면 안되니까.
나는 몇 차례 천천히 심호흡을 한 뒤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몬스터가 득실거리는 곳에서는 한 번의 실수로도 목숨을 잃어버릴 수 있으니, 세 배는 더 조심해야 했다.
혹시라도 싸움이 벌어지면 곧 내 죽음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었다.
들키면 곧바로 죽는 거다.
신중하자!
호수에 더 가까이 다가가자 건너편에 있는 몬스터들의 모습이 조금 더 뚜렷하게 보였다.
움직이는 언덕처럼 보였던 형상은 알고 보니 서로 뒤엉켜서 꿈틀거리며 물을 마시고 있는, 수많은 지네처럼 생긴 생물의 무리였다.
지네들의 길다란 몸뚱이에 달린 수많은 다리들 중 가장 앞쪽의 한 쌍은 게나 가재처럼 집게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 뒤로 즐비한 다리들도 모두 끝이 뾰족했다.
징그러워!
지네 괴물의 생김새는 정말이지 혐오스러웠다.
열 마리도 넘는 놈들이 서로 뒤엉켜 있었다.
지네들이 꿈틀거리며 움직이는 모습을 보자 살짝 구역질이 나려고 했다.
나는 놈들로부터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도마뱀처럼 생겼지만 등 쪽이 가시로 뒤덮인 작은 짐승이 보였다.
근처에 있는 괴물들 중에서 가장 덜 위협적으로 보였지만, 다른 놈들이 가까이 다가가지 않는 걸로 볼 때 저 가시에 뭔가가 있는 듯했다.
이렇게 숨어 있는 중에도 한 가지 생각이 나를 흥분시켰다.
저 무시무시한 괴물들은 모두 내가 바이오매스를 얻을 수 있는 대상이었다.
수확을 기다리는 경험치 덩어리란 뜻이다!
물론 그러려면 먼저 준비가 필요했다.
다음 몇 시간 동안 나는 혹시라도 들키지 않도록 계속 자리를 옮기며 아래쪽의 몬스터들을 관찰했다.
특히 놈들이 호수를 떠나서 어디로 가는지 눈여겨봤다.
지네들은 공동의 반대쪽으로 사라졌고 어째서인지 악어 괴물도 같은 쪽을 향했다.
개들은 내가 있던 동굴과 가까운, 남쪽의 작은 통로로 들어갔다.
가시 도마뱀은 벽을 타고 오르더니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또다른 벽타기 선수로군?
언젠가는 너도 내가 잡아먹을 거다, 형제.
흐흐흐.
원래 있던 괴물들이 사라지자, 또다른 놈들이 그림자나 바위 뒤에서 나타나 호수에 다가갔다.
두 시간 뒤, 마침내 보상이 돌아왔다.
[은신이 레벨 3이 되었습니다.]
드디어!
그렇지 않아도 다리가 아프던 참이야!
천장에 매달려 있는 건 지속적으로 에너지를 소모했고, 나는 태어난 뒤로 아무 것도 먹지 못했다.
나는 굶주림에 지쳐 있었다.
하지만 당장 식량을 구할 때는 아니었다.
아직은 너무 일렀다.
나는 원래 있던 동굴로 돌아간 뒤, 내 작은 은신처에 들어갔다.
휴!
사방이 막힌 좁은 장소에 들어오고 나서야 비로소 안전해진 기분이 들었다.
개미의 본능 때문일까?
아무려면 어때!
지금은 할 일이 많다!
나는 은신처 안쪽의 공간을 넓히면서, 새로 파낸 흙을 공동으로 이어지는 동굴 입구에 가져다 쌓았다.
턱으로 흙을 판 다음 몸으로 단단히 뭉치는 과정을 반복하자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졌다.
보통 개미들이 굴을 넓힐 때에는 파낸 흙을 입구 주위에 언덕처럼 쌓아서 물이 안쪽으로 흘러들지 않게 한다.
하지만 이 안에 비가 올 리는 없었다.
게다가, 나는 아무도 여기 개미가 있다는 사실을 알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이 동굴의 양쪽을 흙으로 완전히 막아버리고, 천장에 내가 드나들 수 있는 작은 틈새만 남길 생각이었다.
그렇게 하면 더 큰 괴물들이 이 동굴 안까지 나를 쫓아오지 못할 터였다.
물론 그래봤자 흙일 뿐이니까 작정하면 뚫고 들어올 수 있겠지만···
굳이 그런 귀찮은 일을 하지 않고 돌아서기를 바랄 뿐이다.
[땅파기가 레벨 2가 되었습니다!]
하하!
이제 더 빠르게 팔 수 있겠군!
몇 시간 동안 흙을 옮긴 끝에, 나는 공동으로 이어지는 동굴의 한쪽 끝을 완전히 막고 천장에 작은 틈새만 남길 수 있었다.
땅파기 스킬도 3으로 올랐다.
그리고 완전히 지쳤다.
낮잠을 자야겠어!
이제 훨씬 더 넓어진 은신처의 입구를 봉한 다음, 나는 여섯 개의 다리를 늘어뜨리고 부드러운 흙 위에 엎드렸다.
너무 배고파!
배가 허기로 요동치고 있었다.
일단 좀 자고 일어나면, 첫 번째 먹잇감을 사냥하러 갈 생각이다.
이미 목표는 정해둔 상태였다.
첫 번째 사냥
너무···
너무 배가 고프다!
공동의 천장에 매달려 있는 내 머리 속에는 오직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식샤!
인간일 때 먹었던 온갖 맛있는 음식들이 머리 속에 떠올랐다.
초콜릿, 케이크, 스테이크, 빵···
그래 심지어 빵조차 그립다!
지난 이틀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했더니 거의 정신이 나갈 지경이었다.
악어 괴물이 소처럼 보여서 놈을 잡아먹기 위해 뛰어내릴 뻔했다.
심지어 지네들도 국수 가락처럼 보였다.
상대를 가리지 않고 잡아먹으려고 들다가 죽기 전에 이 허기를 어떻게든 해결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지난 이틀에 걸쳐 계획을 세웠다.
그동안 내내 공동 안의 모든 움직임을 면밀히 관찰했다.
호수 위쪽의 천장에 너무 오래 매달려 있다가 그대로 잠들어서 호수에 빠질 뻔하기도 했다.
만약 그랬다면 단지 예상치 못한 수영을 하는 걸로는 끝나지 않았겠지···
어쨌든 덕분에 내 은신 레벨은 4까지 올랐다!
그리고 땅파기 스킬은 3레벨이었다.
음하하하하!
나는 준비했고, 성장했고, 배고프다!
휴.
물론 이런 스킬들이 당장 허기를 달래는데 별 쓸모가 없다는 건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뭐라도 얻을 수 있는 건 얻어야 했다.
다행히, 곧 첫 번째 먹잇감을 사냥할 수 있을 듯했다.
그때 내 더듬이가 갑자기 꿈틀거렸다.
사냥감이 가까이 온 걸 느낄 수 있었다.
나는 호수로부터 멀리 떨어진 천장의 어두운 구석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근처에는 푸르게 빛나는 혈관도 없어서, 주위에는 짙은 그림자만 가득했다.
내가 선택한 사냥감은 공동의 이쪽 편을 둥지로 삼고 있다가, 매일 한 차례씩 바닥으로 내려가 호수에서 물을 마시곤 했다.
놈은 이 공동 안에서 유일하게 단독으로 생활하고, 예측할 수 있는 동선을 가진, 내가 이길 수 있을 것 같은 몬스터였다.
그리고 드디어 놈이 나타났다!
가시 도마뱀은 조심스럽게 벽을 타고 내려가는 중이었다.
이제 행동에 나설 때였다.
은신 상태를 유지한 채 낼 수 있는 최고 속도로, 나는 놈의 머리 위쪽을 향해 기어갔다.
배에서 느껴지는 굶주림이 내게 더 빨리 움직이라고 재촉했다.
걱정하지 마 배야!
실망시키지 않을 테니까.
다행히 가시 도마뱀이 거의 수직으로 선 벽을 타고 내려가는 속도는 상당히 느려서, 나는 어렵지 않게 놈에게 다가갔다.
가시 도마뱀은 내 바로 아래에서 반대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놈의 등에 나 있는 가시들은 마치 돌로 만든 것처럼 단단해 보였다.
저기 찔리면 분명 엄청나게 아프겠지.
부정적인 생각은 그만!
내 배가 나만 믿고 있다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나는 사냥감의 위쪽으로 움직였다.
나는 사냥꾼의 눈을 하고 있었다.
...독수리의, 호랑이의 눈을!
나는 신중하게 공격할 때를 가늠했다.
타이밍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지금이다!
나는 재빨리 몸을 굽히고, 가시 도마뱀을 향해 산성 용액을 쏘아냈다.
산성 용액은 엄청난 속도로 허공을 가로질렀고, 바위에 부딪혀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가시 도마뱀의 발을 뒤덮었다.
완벽한 공격이었다.
좋아!
지난 며칠 동안의 훈련이 빛을 발하는군!
가시 도마뱀은 다리가 타는 듯한 고통에 비명을 지르며, 몸을 돌려 공격자를 찾으려 들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은신 따위 집어치우고, 전속력으로 놈을 향해 벽을 타고 내려가는 중이었다.
이제 계획의 2단계에 접어들었다.
가시 도마뱀은 내가 접근하는 걸 보자 완전히 돌아서서 송곳니를 드러낸 채, 등의 가시들을 앞으로 기울여 최대한 많은 면적을 가리려고 했다.
하지만 놈에게는 장소가 나빴다.
벽에서 나와 싸우겠다고?
내 레벨 3 잡기 능력으로 이런 벽을 타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게다가 나는 가볍고 빠르지만, 가시 도마뱀은 무겁고 느렸다.
놈이 산성 용액에 발까지 다쳤으니 그 차이는 더욱 벌어졌다.
그래도 나와 맞설 테냐?
그럼 죽어라!
그렇게 말하기는 했지만, 나는 여전히 겁을 먹고 있었다.
내 첫 번째 전투, 첫 번째 사냥이었다.
여기서 실패하면 아마 내 목숨도 끝일 테니, 집중해야 했다.
가시 도마뱀은 근접전을 예상하고 나를 기다렸지만, 나는 놈에게 다가가기 직전 갑자기 몸을 돌려 한 번 더 산성 용액을 발사했다.
어떠냐!
이건 예상 못했지?
나는 벽을 움켜쥔 여섯 개의 다리를 부지런히 놀려서 다시 방향을 바꿨다.
이제 발 뿐 아니라 얼굴에도 산성 용액을 뒤집어 쓴 도마뱀이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내 산성 용액은 그 자체로 적의 숨통을 끊기에는 아직 너무 약했다.
나는 놈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고, 우리는 벽에 매달린 채 서로의 주위를 돌며 어색한 춤을 추기 시작했다.
가시 도마뱀은 뒤로 물러나며 송곳니와 가시를 내밀었고, 나는 턱을 휘둘러 놈의 다리나 얼굴을 물기 위해 애썼다.
전투의 소음이 공기 중을 울리고, 벽과 종유석에 반사되어 내 더듬이를 떨리게 만들었다.
지난 며칠 동안 몬스터들이 서로 싸우는 도중 새로운 놈이 나타나서 어부지리를 취하는 장면을 몇 차례나 목격했다.
싸움을 질질 끌어서는 곤란했다.
나는 가시 도마뱀의 호흡이 거칠어졌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벽에 매달려서 몸무게를 지탱하는 동시에 싸움을 벌이느라 에너지 소모가 큰 모양이었다.
이제 거의 다 됐다.
하지만 그때 갑자기 자포자기한 도마뱀이 나를 향해 돌진해 왔다.
놈의 등에 솟아난 가시들이 내 눈을 찌르려고 들었다.
피해야 돼!
나는 순간 떠오른 영감에 따라, 다리를 넓게 벌리고 몸을 벽에 바짝 붙였다.
이런 각도로 벽에 매달리려니 있는 힘을 다해야 했다.
하지만 덕분에 도마뱀의 가시가 내 머리 위로 지나갔다.
기회다!
나는 도마뱀이 다시 물러나기 전에 앞으로 돌진해서, 놈의 머리를 턱으로 물었다.
가시 도마뱀이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를 냈지만, 나는 봐주지 않고 턱을 더 단단히 조였다.
미안 도마뱀아.
하지만 난 배가 고파!
이제 마지막 단계였다.
나는 모든 힘을 끌어모으고, 마음의 준비를 한 뒤···
뛰었다!
내 턱에 머리가 물린 도마뱀이 나와 함께 벽에서 떨어져 나왔다.
놈은 필사적으로 바위에 매달리려 했지만, 발에 산성 용액을 뒤집어쓴 데다 싸움으로 지친 탓에 내 무게까지 감당할 기운이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함께 아래로 떨어졌다.
콰직!
충격에 온몸이 경직된 나는 가시 도마뱀을 놓치고 말았다.
하지만 이것 또한 내 계획의 일부였다.
바닥에 등을 대고 누운 상태일 때, 나는 극도로 취약했다.
빨리 일어서야 돼!
나는 여섯 개의 다리를 필사적으로 버둥거린 끝에 겨우 몸을 굴려 일어설 수 있었다.
눈에 정신을 집중하자, 내 불쌍한 사냥감이 나보다 훨씬 더 곤란한 처지에 처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긴 가시와 단단한 껍질을 가진 도마뱀은, 내가 어제 놈이 호수를 다녀간 뒤 공들여 파 놓은 함정에 그대로 박혀 있었다.
음하하하하!
봤느냐, 멍청한 도마뱀 놈아?
이게 바로 우수한 인간의 지성과 레벨 3의 땅파기 능력이 결합한 결과다!
나는 일부러 함정 바닥을 부드럽게 만들어서 놈의 긴 가시가 흙 속을 파고들게 했다.
꼼짝없이 걸려든 도마뱀은 다리를 허우적거리며 함정에서 빠져나오려고 애쓰고 있었다.
이게 내가 지난 이틀 동안 고안해 낸 작전이었다.
나는 내 모든 능력들을 총동원해서 가시 도마뱀과 싸웠다.
산을 쏘고, 벽에 매달려 싸우고, 턱으로 물고, 인간의 지성 그리고 심지어 땅 파기 스킬까지 활용해서 승리를 쟁취했다.
하지만 도마뱀을 등부터 떨어지게 만들기 위해서는 나 역시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다행히도 가시 도마뱀은 매번 일정한 경로로만 움직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내 함정은 허사로 돌아갔을 터였다.
나는 사냥감이 꼼짝 못하게 된 모습을 보며 비로소 긴장을 풀었다.
그리고 도마뱀의 부드러운 배 부분을 향해 산성 용액을 두 번 더 쏘아냈다.
[산성 용액 발사 스킬이 레벨 2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빨리?
어쩌면 일상보다 전투 상황에서 사용할 때 스킬이 더 빠르게 성장하는지도 몰랐다.
그렇게 많은 몬스터들로부터 몸을 숨기고 있어도 은신 스킬의 레벨이 오를 때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렸던 걸 생각하면 말이다.
일단 주린 배를 채운 다음 곰곰히 생각해 볼 문제였다.
나는 산성 용액을 사용해서 도마뱀의 숨통을 끊을 수 있기를 바랐지만, 일이 그렇게 쉽게 풀리지는 않았다.
십여 분 동안 불쌍한 도마뱀의 비명 소리를 들으며 기다리던 나는, 마침내 결심을 내리고 턱을 이용해서··· 어··· 마무리를 했다.
[물기 스킬이 레벨 3이 되었습니다.]
살아 있는 생명을 빼앗는 일은 그리 유쾌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스킬 레벨이 오른 덕분에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승리의 만찬
나는 사냥에 나서서 싸웠고, 승리를 얻었다.
뭔가 복잡한 기분이었다.
예전 삶에서는 어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이렇게 고통과 인내를 감수했던 적이 없었다.
그리고 이런 성취감을 느껴본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하루하루를 살았을 뿐이다.
=====
[레벨 2 스피네타 라케라토스를 처치했습니다.]
[경험치를 얻었습니다.]
[레벨 2가 되어 1 스킬 포인트가 주어집니다.]
=====
갑자기?
레벨 2가 되었다고?
신나는군!
그러니까 그 도마벰이 스피네타··· 라케라토스?
대체 그게 무슨 뜻이지?
라틴어인가?
그러고 보니까 내 종족은 포르미카라고 나와 있지 않았나?
취미로 개미를 기를 때 언뜻 봤지만, 개미의 라틴어 학명이 포르미카였던 것 같은데?
이세계에 라틴어라니, 좀··· 이상하군.
하지만 다른 몇 가지 의문에 대한 답을 얻었으니 그 문제는 잠시 제쳐두기로 했다.
우선, 나는 이제 이 세계에서 다른 생물과 싸워서 이기면 경험치를 얻고 레벨업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둘째로, 레벨업을 하면 스킬 포인트가 생긴다는 점을 알았다.
셋째로, 그건 다른 생물들도 마찬가지였다.
왜냐하면 이··· 스피네타 머시기의 레벨이 2였기 때문이다.
물론 원래부터 레벨 2로 태어났을 수도 있지만, 그게 아니라면 놈이 한 차례 레벨 업을 했다는 뜻이다.
이 점들에 대해서는 나중에 더 깊이 생각해 보자.
지금 당장은 두 가지 더 급한 문제가 있었다.
첫째, 이대로 사냥감을 놔두면 다른 놈들이 냄새를 맡고 나타날지도 모른다.
그리고 두 번째··· 배가 너무 고프다! 빨리 먹어야 돼!
나는 더 이상 기다리지 않고 구덩이 안으로 들어가 도마뱀에게 접근했다.
부러진 네 다리와 내게 물린 상처, 그리고 산성 용액에 녹아내린 살갗이 보였다.
정말이지 처참한 모습이었다.
미안, 도마뱀아.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은 벌어진 일이고, 나는 마침내 첫 끼 식사를 앞두고 있었다.
개미의 입이 얼굴 아래쪽에 있다는 걸 아는 사람?
대다수는 집게 모양의 턱이 입이라고 생각하거나, 아니면 입이 그 턱 뒤쪽에 있을 거라고 여긴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턱은 사실상 머리에 달린 손에 더 가깝고, 진짜 입은 그 아래쪽에 있다.
나는 도마뱀의 살점을 한 입 베어물었다.
흠···
이 맛.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역겹다.
심각하게 역겹다.
엄청나게 배가 고픈데도 불구하고, 맛있는 식사가 아니었다.
[새로운 원천: 스피네타 라케라토스로부터 바이오매스를 섭취했습니다. 1 바이오매스를 얻었습니다.]
[스피네타 라케라토스의 기초 정보가 잠금 해제됩니다.]
오!
너무 빠르게 너무 많은 걸 얻어서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나는 먹는 동시에 생각을 해야 했다.
그러니까 새로운 종을 사냥할 때마다 바이오매스 하나를 얻을 뿐만 아니라, 정보를 잠금 해제한다는 건가?
기초 정보?
그걸 어떻게 확인하지?
나중에 실험해볼 필요가 있었다.
최대한 빠르게 도마뱀을 먹어치우자, 배가 엄청 불렀다.
가슴과 연결된 배 부분이 전보다 훨씬 부풀어오른 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리고 식사를 마치자 마자, 또다른 소식이 찾아왔다.
[1 바이오매스를 얻었습니다.]
바이오매스가 하나 더!
이번 사냥의 전리품은 실로 풍성했다.
계획이 성공하고 보상도 얻었으니, 이제 둥지로 돌아가서 다음 번에 할 일을 생각할 차례였다.
나는 더듬이를 흔들어 주위를 살피며 다시 벽을 타고 올라갔다.
그리고 천장을 통해 호수 위를 지나, 내 은신처가 있는 동굴로 향했다.
호수 주위에는 여전히 수많은 몬스터들이 득실댔지만, 자기들끼리 경계하느라 너무 바빠서 머리 위로 지나가는 나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덕분에 안전하게 돌아올 수 있었다.
마침내 은신처로 복귀한 나는 시간을 들여 내 현재 상황을 파악하고, 다음 행동을 계획하기로 했다.
먼저 상태창부터 확인했다.
=====
레벨: 2
능력치:
힘 15
강인함 12
영리함 25
의지 18
HP: 30
MP: 0
스킬:
땅파기 레벨 3
산성 용액 발사 레벨 2
잡기 레벨 3
물기 레벨 3
은신 레벨 3
변이: 눈+1
종족: 갓 부화한 일개미 (포르미카)
바이오매스: 2
스킬포인트: 1
=====
하하!
내 믿을 수 없는 성장을 보라!
어려운 상황에서 시작했지만 지금까지 살아남았을 뿐 아니라, 먹이도 구하고 레벨과 스킬을 올렸다.
나는 이 결과가 매우 자랑스러웠다.
나는 어떤 역경이라도 이겨내고 살아남을 거다.
그게 내 영혼의 불타는 야망이었다.
이제 아주 중요한 선택을 할 차례였다.
2개의 바이오매스 포인트를 어디에 쓸지, 여러 선택지를 신중하게 고려해야···
눈!
눈을 +2로 올려줘!
[눈을 +2로 성장시키겠습니까? 2개의 바이오매스를 지불합니다.]
그래!!!
그러자 곧바로 지난 번과 같은 미칠 듯 가려운 느낌이 찾아왔다.
나는 바닥에 등을 대고 구르면서 여섯 개의 다리로 벽을 마구 긁으며 그 고통을 참았다.
정말 지랄맞네...
마침내 간지러움이 사라지자, 시력이 한결 더 좋아진 걸 느낄 수 있었다.
인간의 눈에 익숙한 나에게는 개미의 낮은 시력이 엄청나게 답답했다.
상대가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거의 인식할 수도 없다는 사실이 무섭기도 했다.
물론 눈이 +2가 된 지금도 평균적인 인간의 시력만큼 좋지는 않았지만, 처음보다는 훨씬 나아졌다.
여전히 사물이 흐릿하게 보였지만, 눈 앞에서 다리를 흔들어 보니 움직이는 대상을 인지하는 능력이 상당히 좋아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 정도 발전 속도라면 눈이 +4는 되어야 전생만큼 시력이 좋아질 것 같았다.
어쩌면 +5는 되어야 할지도.
+2가 될 때 바이오매스 두 개가 들어간 걸 보면, 다음 번 성장은 아마 세 개가 필요할 터였다.
그러니 +5는 고사하고 +3도 얼마나 오래 기다려야 가능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적어도 한동안은 지금 수준의 시력을 가지고 헤쳐나갈 필요가 있었다.
어쨌든 나는 이번 성장이 만족스러웠다.
시력을 높여서 정찰 능력이 발전했을 뿐 아니라, 일반적인 개미와 달리 공동체의 조력 없이도 단독으로 행동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스킬 포인트를 사용할 차례였다.
어떤 스킬을 선택할지는 이미 생각해둔 바가 있었다.
여전히 정부 수집이 우선 순위였고, 직접적인 전투 능력보다 정찰과 생존이 더 중요했다.
그러니 어떤 스킬을 얻어야 하는지 길게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터널 센스였다.
방향 감각이 좋아지면 둥지로부터 더 먼 범위까지 돌아다니며 정보를 수집할 수 있었다.
물론 전투나 사냥을 위한 능력을 높이지 않으면 식량을 얻기 위해 계속 더 불리한 싸움을 해야 한다는 단점도 존재했다.
하지만 나는 정찰과 탐색을 우선한다는 처음 생각을 고수했다.
어차피 내 전투 능력은 완전히 쓰레기니까...
스킬 포인트 하나를 전투 스킬에 투자한다고 해서 그 사실이 갑자기 변할 리는 없었다.
첫째도 생존, 둘째도 생존, 셋째도 생존이었다!
그리고 생존을 위해서는 지식이 필요했다.
지식이 없으면 이길 수 있는 사냥감을 찾을 수도, 이기지 못할 적을 피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 이 세계에 대해 전혀 몰랐다.
아는 거라고는 내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동굴 속에 있으며, 그 안에는 기괴한 몬스터들이 득실거리고, 벽에는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는 빛나는 혈관들이 가득하고, 스킬과 레벨업 그리고 바이오매스를 사용해서 변이할 수 있는 게임 같은 시스템이 존재한다는 것 뿐이었다.
이 세계는 뭔가 좀··· 이상하지 않나?
아직 인간은 한 명도 보지 못했고, 이 세계에 인간이 산다는 어떤 증거도 없었다.
어쩌면 오직 몬스터들만 사는 세계일까?
생물이 살 수 있는 지표면이 있기는 할까?
혹은 모든 생물이 지하에 사는 세계일까?
의문점이 너무 많았다.
이런 무지는 나를 너무나 불안하게 만들었다.
내가 처한 상황을 더 분명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었다.
터널 센스는 내 행동 범위를 넓혀서, 더 멀리까지 이동한 뒤에도 무사히 상대적으로 안전한 장소로 돌아올 수 있게 해줄 터였다.
내 둥지 말이다.
[터널 센스 스킬을 배우겠습니까? 1 스킬 포인트를 지불합니다.]
그래!
마치 머리 위에 샤워기를 틀고 물줄기를 맞을 때처럼 따스한 느낌이 찾아왔다.
차이가 있다면 그 온기가 머리 속까지 전해지는 느낌이었다.
만약 눈 업그레이드와 동시에 스킬을 구매했다면 느끼지 못했을지도 모르는 감각이었다.
눈이 변이할 때처럼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그 간지러운 느낌을 떠올리기만 해도 등줄기가 서늘했다.
온기는 곧 사라졌고, 나는 터널 센스를 습득했다.
당장은 별다른 차이가 느껴지지 않지만··· 탐험에 나서면 아마 효과를 느낄 수 있겠지.
일단은 여기 온 뒤 처음으로 배가 부른 상태니까, 우선 좀 쉬고 체력을 회복한 다음···
용감하게 탐험에 나서는 거다!
물론 은신 상태로.
위험한 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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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많은 왕국들이 스스로 '대격변'을 이겨내고 위대한 운명을 쟁취했다고 자부하지만, '대학'은 이런 왕조들을 있는 그대로 평가하고 있다: 훨씬 더 위대했던 문명이 붕괴되고 난 잔해 속에서 모래성을 쌓으며 놀고 있는 어린아이들과 다름없다고 말이다.
또한 '대격변'이 인류의 정신에 지속적인 공포를 남겼다는 사실 또한 분명하다. 우리 종족은 어쩌면 발 밑의 땅이 적으로, 악몽의 근원으로 돌변했을 때의 두려움으로부터 영영 해방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레기온 대학 기록 제 5권: 213-289년"으로부터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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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계에 태어난 뒤 처음으로 배가 부른 상태가 되어 행복하게 잠이 들었던 나는, 개운한 기분으로 은신처에서 깨어났다.
이제 (조심스럽게) 다음 번 도전을 시작할 차례였다.
나는 동굴 안을 더 탐사해서 내가 처한 상황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다음 번 사냥감도 찾아야 했다.
하지만 그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첫 식사를 마치고, 스피네타 라케르토스에 대한 기초 정보를 잠금 해제했다는 알림을 받았다.
이제 그 정보에 접근해서 뭔가 알아낼 수 있는지 볼 때였다.
잠금 해제!
정보 접근!
열려라 참깨!
···
스피네타 라케르토스!
[스피네타 라케르토스: 가시 도마뱀, 날카로운 가시에 변이된 독을 보유하고 있다.]
오호!
이거였군.
그러니까 스피네타 라케라토스가 가시 리자드란 말이지.
그리고 다른 정보는···
가시가 날카롭다?
가시에 독이 있다?
그거야 생긴 꼴을 보자 마자 알 수 있는 거 아닌가?
뭐, 그래서 '기초' 정보인가 보군.
아마 내가 그 도마뱀을 더 많이 사냥해서 먹을수록 상세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거겠지.
일단 그렇게 정리해 두고 다음 과제를 시작해 볼까.
나는 둥지를 나서서 천장을 타고 공동 안의 호수 위쪽으로 접근했다.
어느새 익숙해진, 서로를 경계하며 호수의 물을 마시는 몬스터들의 모습이 나를 맞이했다.
눈이 +2로 진화한 덕분인지 호수가 예전보다 더 밝게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문득 저 몬스터들은 모두 물을 마시고 있는데, 나는 며칠 동안 갈증을 전혀 느끼지 않았다는 사실이 의아했다.
나와 저들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는 걸까?
그게 바로 오늘 알아보려는 점이었다.
나는 이 수수께끼를 밝히기 위해 대담하고 용감한, 어쩌면 어리석은 자살 행위에 가까운 도전에 나섰다.
거의 습관적으로 느리게 움직이며 천장을 가로질러 가까운 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벽을 타고 공동의 바닥으로 내려갔다.
그런 다음 처음에는 천천히, 하지만 점점 더 커지는 자신감에 속도를 높이며 호수를 향해 접근했다.
가장 먼저 나를 눈치챈 건 파충류의 꼬리가 달린 늑대처럼 생긴, 내가 도마뱀 개라고 이름 붙인 녀석이었다.
그러고 보면 이 동굴 안에는 도마뱀 비슷한 몬스터의 비율이 상당히 높았다.
이족 보행하는 거대한 악어 괴물도 그렇고, 내가 사냥했던 가시 도마뱀도 결국 다 파충류였다.
무슨 이유라도 있는 걸까?
개가 나를 보자 마자 으르렁거리는 바람에 살짝 긴장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내가 계속 다가가자, 놈이 천천히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꼭 나를 두려워하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놈을 주시하며 계속 호수에 다가갔다.
내가 호수가 발하는 빛의 범위 안에 들어가자, 지네 무리도 내 존재를 알아차렸다.
하지만 놈들의 반응은 매우 달랐다.
덩어리처럼 엉켜 있던 지네들은 나를 보자 마자 더 맹렬한 속도로 꿈틀거리며 사납게 쉭쉭거렸다.
잠시 후 놈들 중 한 마리가 덩어리에서 빠져나오더니 수많은 다리를 놀리며 내 쪽으로 몇 미터를 다가왔다.
그리고 상체를 세우더니 날카로워 보이는 턱과 집게를 위협적으로 딸깍였다.
하지만 더 이상 다가오거나 공격할 기미를 보이지는 않았다.
휴!
나는 지네들이 쉭쉭거릴 때부터 겁에 질린 상태였다.
저 흉측한 놈들은 예닐곱 마리가 뭉쳐 있었고, 만약 공격해 온다면 있는 힘을 다해서 도망칠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다행히 호숫가의 평화는 유지되었다.
내가 생존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데에도 불구하고 나를 순식간에 죽일 수 있는 이 모든 괴물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기로 결심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
그동안 호수에 다가가거나, 물을 마시거나, 떠나는 몬스터들이 공격을 당하는 장면을 한 번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단 한 번도 말이다.
사냥감을 찾는 이틀 동안 나는 수많은 다툼을 보고 들었다.
하지만 호숫가에서 다툼이 벌어진 적은 없었다.
이 호수에는 뭔가 중요한 점이 있었고, 그게 단순히 수분 공급인 것 같지는 않았다.
어쨌든 나는 아직 전혀 갈증을 느끼지 못했다.
이 세계의 몬스터 생리학은 그리 간단해 보이지 않았다.
나는 계속 걸어가서 호숫가에 도착했다.
이렇게 가까이 접근하니 호수의 빛이 너무 강해서, +2의 눈으로도 물 안쪽을 들여다보기 어려웠다.
동굴의 벽에 가득한 맥박치는 선들이 호수 가운데의 바닥으로 모여드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부분의 빛이 가장 강렬했다.
호수의 물 자체는 이상한 동심원을 이루며 흐르고 있었다.
어떤 조류나 바람도 없는데 말이다.
마치 용암처럼 물이 스스로 소용돌이쳤다.
계속해서 상체를 일으킨 채 나를 위협하려 드는 멍청한 지네를 무시하고, 나는 수면으로 입을 가져가서 한 모금을 들이켰다···
따가워!
맙소사 따갑잖아!
이게 뭐야, 염산인가?!
타는 듯한 감각이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 몸을 통과해서 배까지 흘러갔다.
그리고 다시 배로부터 열기가 퍼져 나가, 마치 갑각에 불이 붙은 것처럼 느껴졌다.
으아아!
이 괴물들이 이것 때문에 호수를 찾는 건가?
이 고통스럽고 타는 듯한 죽음의 물을 마시려고?
대체 왜?
여기가 매저키스트들의 동굴이라도 되나?!
타는 듯한 감각이 서서히 잦아들자, 나는 어이없는 눈빛으로 호수 주위의 다른 괴물들을 돌아봤다.
너네 대체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야?!
여러 괴물들이 나를 마주 응시했다.
으음··· 부담스럽군.
나는 다시 천천히 소용돌이치고 있는 호수로 시선을 돌렸다.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 때문에, 마치 해파리처럼 투명한 듯하면서도 완전히 들여다 보이지는 않았다.
잠시 몸 상태를 점검하자, 어떤 식으로도 나빠진 것 같지는 않았다.
서둘로 상태창을 열고 확인했지만 HP도 아무 이상 없었다.
희한하군.
이건 정말 이상했다.
대체 이 몬스터들은 왜 이 호수로 모여드는 걸까?
기이한 휴전 협정까지 지켜지는 걸 보면 틀림없이 뭔가 중요한 이유가 있을 텐데?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주변의 몬스터들이 내게 말해줄 것 같지도 않고 말이다.
물을 마셔보기 전보다 오히려 더 아리송한 기분으로, 나는 떠날 준비를 했다.
···가기 전에 한 모금만 더 마셔볼까?
으아아!
따가워!
아우!
아우!
으···
끔찍했다.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고 하더니 정말이로군.
나는 다른 몬스터들을 경계하며 천천히 뒷걸음질로 호수에서 멀어졌다.
대부분의 괴물들은 내가 떠나는 모습을 보자 살짝 안심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다시 물을 마시기 시작했다.
멍청한 지네는 여전히 상체를 세운 채 나를 위협했다.
거의 놈이 욕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나중에 두고 보자, 지네 새끼야.
그림자 안으로 들어서자 마자, 나는 돌아서서 벽을 향해 달렸다.
그리고 동굴 천장의 짙은 어둠 속으로 몸을 감출 때까지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아아, 마음이 편하다.
당분간은 밝은 곳으로 나가지 말아야지...
이제 호수에 대한 수수께끼도 (어느 정도는) 조사했으니, 동굴 안을 탐험하며 새로 얻은 터널 센스를 활용해 지도를 만들 차례였다.
나는 계속 빛의 혈관이 퍼져 있는 위치를 피하고 종유석의 그림자를 이용해 어둠 속에 머물면서, 공동의 가장자리를 따라 이동했다.
그런 식으로 호수는 물론 내 은신처가 있는 동굴로부터 전에 없이 멀리 나아갔다.
그러면서 동굴의 벽을 따라 자리잡고 있는 크고 작은 동굴 입구들을 발견했다.
그 중 몇 군데에 다가가자 안쪽에서 기이한 공기의 흐름이 느껴졌다.
저 안에 뭐가 도사리고 있을지 누가 알까?
나는 천천히 하지만 꾸준히 십 분을 더 나아갔다.
그러자 동공이 한층 더 넓어져서 동시에 양쪽 벽을 볼 수 없게 되었다.
나는 양쪽 벽이 모두 눈에 들어오게 하기 위해, 조심조심 가운데 쪽을 향했다.
와우!
거대한 동굴의 입구가 내 앞에 나타났다.
호수로부터 대략 삼십 분쯤 이동해서 발견한 이 동굴 입구는 거의 공동의 바닥부터 천장까지 이어질 정도로 높았고 너비도 그만했다.
입구 너머의 통로는 분명히 더 깊은 지하를 향해 아래로 기울어져 있었다.
하지만 돌의 모양이 뭔가 이상했다···
저건···
계단인가?!
이웃
저거 계단 맞지?
나는 작은 두 눈을 빛내며, 계단을 자세히 살피기 위해 동굴 입구 쪽으로 다가갔다.
동굴 입구의 바위를 직접 깎아서 만든 계단이었다.
대체 누가 이 단단한 바위를 깎아서 계단을 만들었을까?
당연히 인간이지!
인간의 문명...!
이 세계에도 인간형 생물이 살고 있다는 첫 번째 증거였다.
환상적이군!
흥분과 불안이 동시에 느껴졌다.
이 세계에는 대체 어떤 종류의 판타지 종족이 살고 있을까?
엘프?
드워프?
기왕이면 섹시한 엘프 아가씨가 있으면 좋겠네.
생각해볼 점들이 많았다.
왜 다른 곳이 아니라 이 동굴에만 계단을 만든 걸까?
사실 답은 뻔했다.
여기가 자주 오가는 동굴이라, 이동의 편리를 위해 계단을 만들었을 터였다.
그 말은 다른 계단들도 있을 수 있다는 의미였다.
위로 올라가는 계단도 말이다.
지상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을지도 몰라!
나는 재빨리 벽을 타고 내려가서 계단에 접근했다.
사실상 처음으로, 전생에서 익숙하던 사물과 내 크기를 비교해볼 수 있는 기회였다.
만약 이 세계의 주민들이 지구인과 비슷한 크기라고 가정하면, 내 덩치가 어느 정도 되는지 가늠해볼 수 있을 터였다.
그냥 계단 위에 서기만 해도 말이다.
흐으음.
아무래도 내가 처음에 생각했던 것보다 좀 작은 모양인데?
계단의 폭과 높이를 고려할 때, 내 키는 성인의 무릎 높이 정도였다.
몸길이는 그러니까··· 대략 1미터 정도 되려나?
하지만 잠깐!
그럼 동굴 안에서 마주친 그 모든 무시무시하고 거대해 보였던 몬스터들이, 인간의 관점으로 보면···
상당히 작다는 뜻이잖아?
늑대 괴물은 기껏해야 허리 높이, 그리고 심지어 나보다 더 작았던 가시 도마뱀은 오소리 정도 크기일 테고···
그 거대한 악어 괴물도 키가 인간의 어깨 높이 정도라고?
실은 전부 약한 놈들인 거 아냐?
정말 그런 거라면 다행이었다.
덕분에 내가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럼 이 던전 안 어딘가에 놈들보다 더 크고 강력한 존재들이 있을지도 몰랐다.
그런 놈들은 최선을 다해 피해야겠군.
우연이라도 마주치는 일이 없도록···
강력한 몬스터들은 아마 던전의 더 아래쪽에 살고 있을 터였다.
게임을 보면 항상 그런 식이고, 이 세계는 이상할 정도로 게임과 비슷하니까 말이다.
반대로 생각하면 지상에 가까워질수록 더 안전한 장소라는 뜻이기도 했다.
나는 동굴 입구로부터 몸을 돌려 반대쪽으로 향했다.
그렇지!
여기저기서 인공의 흔적을 더 찾아볼 수 있었다.
바닥에는 이동을 편리하게 하기 위한 발판들이 보였고, 일정 간격으로 인간의 머리 높이 정도에 돌을 파낸 자국이 나 있었다.
조명을 위한 횃불을 놓는 자리일까?
앞으로 나아갈수록 점점 더 많은 문명의 자취가 눈에 띄었다.
그리고 통로는 점점 더 위쪽으로 경사지기 시작했다.
어쩌면 지상이 아주 가까울지도?
주위를 둘러보자 이 부근에서는 동굴이 거의 일직선이고 작은 샛길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동굴 벽의 푸르게 빛나는 혈관들도 훨씬 밀도가 낮고 가늘어서, 더 깊은 곳보다 훨씬 어두웠다.
덕분에 내가 은신 상태로 다니기는 더 쉽군.
계속 가보자...!
내 심장이 세차게 뛰고 있었다.
어쩌면 정말로 이세계의 주민을 보게 될지도 몰라!
궁금한 점이 너무 많았다.
어떻게 생겼을까?
무슨 종족일까?
마법을 할 줄 알까?
모험가 길드나 던전 탐험 같은 것도 있을까?
어쩌면 나와 의사 소통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일종의 수화나 바디 랭귀지로 말이다.
인간/개미 몬스터의 관계에 새로운 장을 여는 거다!
이 세계의 주민들이 몬스터의 몸에 인간의 정신이 갇혀 있는 경우를 얼마나 자주 봤을까?
어쩌면 내가 최초일 수도 있었다.
동굴은 점점 더 좁아졌고, 계단이 나타나는 빈도도 높아졌다.
그리고 경사는 점점 더 가파르게 위를 향하고 있었다.
저건··· 그건가?
맞는 것 같은데.
햇빛이다.
나는 동굴 벽에 희미하게 반사되는 햇빛을 보고 더듬이를 세차게 흔들었다.
이제 지상이 바로 코 앞인 모양이다!
새로운 세계의 바깥 공기 냄새에 흥분한 채, 나는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그럴수록 주위는 점점 더 밝아졌다.
오오!
저 앞에 뭔가가 있다.
아무래도 벽처럼 보이는데···
나는 더 잘 보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햇빛 때문인지 평소보다 눈이 더 잘 안 보였다.
아무래도 더 가까이 가 봐야···
맞다, 동굴 한쪽에 인공적인 벽이 만들어져 있었다.
벽에는 아마 안쪽에서 밖을 내다보기 위한 용도로 보이는 좁은 홈들이 나 있었다.
경비 초소인가?
생각해 보면 여기다 경비 초소를 만들어 놓는 게 당연했다.
그래야 던전 입구를 감시하면서 혹시나 몬스터가 지상으로 나오려 할 경우 막을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아마 지금도 안에 경비가 있을 터였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홈을 통해 붉은 빛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 안쪽에서 누군가 의자에 앉아 있다가 황급히 일어서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갑자기 벽 안쪽에서 두 명의 사람들이 나타나, 동굴 바닥보다 1미터 정도 높아 보이는 발판 위에 올라섰다.
인간이다!
진짜 인간이야!
엘프가 아니라서 살짝 아쉽기는 하지만, 그래도 인간이야!
인간 둘은 모두 금속 갑옷 안에 검은 가죽 옷을 받쳐 입은 차림이었다.
허리에는 검을 차고 종아리까지 올라오는 가죽 장화를 신었다.
하나는 남자였고 하나는 여자였다.
여자의 손에 들린 수정처럼 보이는 구슬이 붉은 빛을 내고 있었다.
몬스터의 접근을 알리는 장치 같은 건가?
두 사람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구슬이 붉게 빛나는 원인을 찾으려는 듯했다.
아마 내가 은신 상태라 잘 보이지 않는 거겠지.
잠시 후 남자가 두 손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믿을 수 없게도, 남자의 손이 눈부시게 빛나기 시작했다.
남자는 집중하려는 듯 눈을 감았다.
빛이 마치 룬 문자처럼 기이한 형상을 이루더니 천천히 손 주위를 맴돌았다.
나는 충격에 사로잡혀 그 모습을 지켜봤다.
마법이다!
이 세계에는 마법이 있어!
저 사람들이 내게도 마법을 가르쳐줄 수 있을까?
몇 초 뒤 남자가 양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동굴 안에 빛이 퍼져 나갔다.
그리고 벽에 걸려 있던 횃불들로부터 뜨거운 불꽃이 쏟아져 나와, 동굴 안의 어둠을 몰아냈다.
옆에 서 있던 여자가 수정 구슬을 앞으로 내밀자, 붉은 빛이 뻗어 나가 적의 위치를 가리켰다.
그러니까···
나를 말이다.
···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
여자 경비가 재빨리 벨트에 달린 주머니에 수정 구슬을 넣더니, 등에 매고 있던 석궁을 손에 들었다.
남자는 내게 시선을 고정한 채 다시 한 번 양손을 들어올렸다.
날 공격하려는 거다!
달아나달아나달아나달아나달아나.
이런 멍청한 놈 같으니, 몬스터 주제에 무슨 생각으로 몬스터를 막는 경비들 앞에 태연히 나타난 거야!
나는 여섯 개의 다리를 최대한 빠르게 놀리며 미친 듯이 동굴 안쪽으로 달렸다.
타오르는 횃불 때문에 눈 앞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비틀거리고 넘어지면서도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뒤쪽에서 고함 소리와 발자국 소리가 들렸지만 돌아볼 여유는 없었다.
불덩이 하나가 내 오른쪽을 스쳐 지나갔다.
잠시 후 또다른 불덩이가 내 바로 앞에 있는 바위를 강타했다.
이거 파이어볼이야?
정말로?
무슨 개미 한 마리 잡으려고 파이어볼을 날려!
나는 엄폐를 위해 바위와 종유석 사이를 누비며 계속해서 전속력으로 달렸다.
달려달려 이 병신아!
목숨을 건지면 바보짓에 대한 체벌로 내 자신의 산성 용액을 뒤집어써야 할 것 같았다.
아니면 심지어 그 망할 호수의 물을 마시든지!
석궁 화살이 내 바로 옆의 바닥을 맞춰서, 부서진 돌 조각이 내 갑각에 튀었다.
깜짝이야!
맞을 뻔 했잖아!
뭔가 도움이 필요했다.
적들의 주의를 돌릴 방법이라든지···
어쩌면?!
전속력으로 달린 덕분에, 오래지 않아 동굴이 더 넓어지고 이리저리 샛길이 나 있는 구역에 접어들 수 있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더듬이를 흔들며 샛길을 지날 때마다 안쪽의 냄새를 확인했다.
여기는 아무 것도 없어!
여기도 아무 것도 없네!
개똥도 약에 쓰려면···
찾았다!
세 번째 샛길 안쪽에서 내가 찾던 역겨운 냄새가 풍겼다.
나는 급하게 몸을 틀어 꽁무니를 샛길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연달아 세 차례 산성 용액을 발사했다.
그러느라 시선이 쫓아오는 인간들 쪽을 향했고···
숙여!
나는 황급히 다리를 쭉 뻗으며 자세를 낮췄다.
석궁 화살이 내 머리 바로 위를 지나가 뒤쪽의 바위에 부딪혔다.
젠장, 상황이 좋지 않은데!
티투스
티투스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책상 뒤에 앉아 있었다.
투박하게 느껴질 정도로 아무런 장식도 없이 단단한 책상은 여러 가지 면에서 주인인 티투스와 닮아 있었다.
책상의 두꺼운 돌나무 판은 티투스가 직접 던전의 두 번째 스트라타(층)에서 지상으로 가져왔다.
돌나무를 관통할 수 있는 못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책상을 만들기가 쉽지는 않았다.
그렇게 완고하고 굴하지 않는 특성이 티투스가 돌나무를 좋아하는 이유였다.
티투스의 두꺼운 손가락 사이에는 접혀 있는 종이 한 장이 들려 있었다.
화난 필체로 휘갈겨 쓴 편지였다.
티리아 챕터의 용병 조합이 보내온 또다른 항의 서한이었다.
티투스는 다른 손으로 레기온 코트의 주머니 안에 손을 넣어, 벨트에 체인으로 연결되어 있는 금속 상자를 꺼냈다.
편지를 내려 놓은 티투스는 두꺼운 손가락이 자꾸만 미끄러지는 바람에 인상을 찌푸리며, 네 번의 시도 끝에 겨우 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에서 푸른 빛이 쏟아져 나와 티투스의 얼굴을 비췄다.
티투스는 안에 담긴 내용물을 잠시 노려보다가 상자를 거칠게 다시 닫았다.
그리고 상자를 안주머니에 도로 넣었다.
티투스는 서랍을 열고 백지 한 장을 꺼내서 펜으로 답신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그리 외교적인 서한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티투스는 원래부터 멍청이들을 친절하게 대하는 일에는 소질이 없었다.
그 점이 바로 티투스가 이 임무를 원하지 않았던 이유들 중 하나기도 했다.
티투스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방 한 구석의 서랍장 뒤에 처박힌 채 먼지만 쌓여 가는 거대한 전투 도끼를 쳐다봤다.
도끼와 손잡이를 합쳐 2미터에 육박하는 길이의 전투 도끼는 몇 년 동안이나 손질을 하지 않은 탓에 녹슬어 있는 모습이었다.
티투스는 한숨을 내쉬며 편지를 접어서 왁스로 봉인한 뒤, 오늘 발송할 서신들을 모아 놓은 쟁반 위에 올렸다.
다음 번으로 개봉한 편지 역시 불만을 제기하는 내용으로, 발신자는 '길'의 주교였다.
편지를 막 읽으려는 찰나 발소리가 들리더니 몇몇 사람들이 사무실로 들어왔다.
티투스는 맥박이 세차게 뛰는 걸 느꼈다.
어쩌면 서류 업무를 미룰 핑계 거리가 생길지도 몰랐다.
10분 뒤, 전방 요새에 도착한 티투스는 거대한 문을 한 손으로 열어젖힌 뒤 폭풍처럼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근무 중이던 레기온 군단병들이 고개를 숙이며 주먹을 갑옷의 가슴 부분에 가져가 절도 있는 경례를 붙였다.
센추리온(백인대장)들이 황급히 따라 붙었지만, 티투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던전 입구를 향했다.
던전의 입구는 높이와 너비가 모두 4미터 정도로, 보급 수레나 대규모 원정대가 충분히 지나갈 수 있을 만큼 컸다.
입구 주위로는 사방 30미터에 평평한 석재가 깔렸고, 3미터 높이의 원형 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벽 뒤에 항시 대기하고 있는 궁수와 마법사들이 동굴 밖으로 쏟아져 나오는 몬스터들을 학살하기 위한 공간이었다.
티투스는 던전 입구를 잠시 바라보다가 어둠 속으로 걸어 내려갔다.
당장이라도 깊은 층까지 내려가 던전의 공기와 풍부한 마나를 폐에 담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하지만 티투스는 두꺼운 손가락으로 돌벽을 만지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계단을 내려가자 첫 번째 경비 초소가 보였다.
경비 초소에는 보통 두 명의 레기온 군단병이 주둔했지만, 지금은 분대 전체에 해당하는 다섯 명이 들어가 있었다.
숙련된 병사들은 던전 안에서 하는 침묵의 경례, 그러니까 왼쪽 가슴에 손바닥을 올리고 그 위에 오른 주먹을 가져다 대는 동작을 취했다.
사령관 티투스는 고개를 끄덕인 뒤 계속 걸음을 옮겨 세 군데 경비 초소를 더 지나쳤다.
마지막 초소에는 열 명의 레기온 군단병이 주둔했고, 두 명의 마법사가 교대로 동굴 안을 밝히는 불꽃을 유지하고 있었다.
티투스가 여전히 뒤를 따르는 두 센추리온을 거느리고 다가가자, 초소 안에서 한 여자가 병사들과 함께 지도를 들여다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여자가 티투스를 보더니 부하 병사들을 해산시키고 경례를 붙였다.
"티투스 사령관님."
"아우릴리아 호민관."
티투스가 마주 경례한 뒤 아우릴리아 옆으로 다가가서 테이블 위의 지도를 내려다봤다.
지도에는 던전 1층의 모든 통로와 마나 집적 지점이 표시되어 있었다.
"상황이 어떤가, 호민관?"
"15분 전 몬스터 하나가 이 경비 초소에 접근했다가 달아났습니다. 보초를 서던 병사들이 센추리온에게 보고한 뒤 동굴 안까지 추적에 나섰습니다."
"달아났다라."
티투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첫 번째 층의 몬스터가 위험을 인식하고 달아날 정도의 지성을 보이는 건 드문 경우였다.
아무래도 곧 웨이브가 발생할 징조로 여겨졌다.
"웨이브 방어 준비는 어떻게 되어가나?"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사령관님. 하지만 방금 말씀드린 사건을 고려하면 일정을 다소 앞당길 필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알겠네. 이번에는 나도 위력 정찰에 참여하지."
그러자 아우릴리아가 난색을 표했다.
"외람되지만 사령관님, 굳이 직접 나서실 필요는···"
"뭔가 낌새가 심상치 않아. 내가 직접 정찰대와 함께 내려가 봐야겠네."
아우릴리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뒤 한숨을 내쉬었다.
이 완고하고 늙은 사내는 결코 편히 지내려고 하지 않았다.
명령만 내리면 기꺼이 던전 안으로 들어갈 일개 군단의 병사들을 거느리고 있으면서, 굳이 직접 정찰에 나서겠다고 하니 말이다.
하지만 바로 그래서 티투스가 최고의 사령관이기도 했다.
그때 어두운 동굴 안쪽에서 다섯 명의 병사들이 나타나, 횃불이 비추는 범위 안으로 들어왔다.
병사들 중 둘은 동료의 부축을 받으며 절뚝거리고 있었다.
모든 병사들이 갑옷 위에 몬스터의 피와 살점을 잔뜩 뒤집어썼지만, 다행히 심하게 다친 자는 없어 보였다.
티투스가 경비 초소 밖으로 나와서 병사들을 맞이했다.
병사들이 황급히 경례를 붙이자, 티투스가 손을 내저었다.
"됐네, 어쩌다 부상을 당한 건가?"
병사들이 인상을 구겼다.
"별 일 아닙니다, 사령관님. 기습 공격을 당해서 경미한 자상과 가벼운 중독을 입었을 뿐입니다."
"즉시 군의관을 찾아가게. 웨이브를 앞둔 지금은 모든 병사들이 최선의 상태를 유지할 필요가 있으니까. 그래서 추적하던 몬스터는 죽였나?"
병사들이 잠시 침묵하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티투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처음에 그 몬스터를 본 두 명이 누구지?"
그러자 병사들 중 남자 하나와 여자 하나가 손을 들었다.
"자네들은 날 따라오게."
+
난 정말 바보인가?
아무래도 바보가 맞는 것 같다.
1미터가 넘는 개미라는 흉측한 몬스터의 모습을 하고서 인간 병사들이 지키는 경비 초소에 인사를 하러 간 걸 보면 말이다.
가히 바보들의 왕이라고 하기에 손색이 없다.
전 세계의 바보들이 이 위대한 업적을 듣는다면 나를 섬기는 종교를 만들어서 바보들의 신으로 숭배할 정도였다.
···
맙소사, 그래도 목숨을 건져서 다행이지...
화살과 마법을 피하며 두 명의 병사들에게 쫓기던 나는, 도중에 그 빌어먹을 지네들의 냄새가 풍기는 샛길을 발견했다.
다행히 놈들은 외출 중이 아니었고, 내가 둥지 안쪽을 향해 산성 용액을 쏘자 미친듯이 성을 내며 뛰쳐나왔다.
열 마리도 넘는 지네들이 몰려드는 바람에 자칫하면 내가 먼저 놈들에게 당할 뻔했다.
하지만 다행히 나를 쫓던 병사가 날린 파이어볼에 몇 마리가 맞았고, 그러자 모든 지네들이 방향을 돌려 병사들을 향해 돌진했다.
덕분에 나는 그 틈을 타서 동굴 안쪽으로 도망칠 수 있었다.
하지만 세 명의 병사들이 더 합류해서 놀랄 만큼 빠르게 지네들을 도륙한 뒤, 계속 내 뒤를 쫓아왔다.
나는 계속 달아나면서 세 무리의 지네들을 더 끌어내 병사들과 싸움을 붙였다.
세 무리나!
그런 뒤에야 겨우 어둠 속으로 몸을 숨길 수 있었다.
병사들의 전투 스킬은 무시무시했다.
검을 휘두르자 번쩍이는 빛이 5미터나 날아가서 몬스터를 베어냈다.
또다른 병사가 손에서 쏘아내는 불꽃은 지네들을 말그대로 구워 버렸다.
무서워라!
그런 적들을 상대로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깨물기?
5미터 밖에서 검을 휘두르는 병사를 물 방법은 없어 보였다.
뭐, 그래도 경험이 최고의 스승이라는 말이 맞다.
어쨌든 이번에 저지른 바보짓 덕분에 많은 점을 알아낼 수 있었다.
마법의 존재, 인간 사회의 존재 그리고 병사들에 비해 내가 얼마나 약한지 등등.
또 내가 어떤 식으로 피해를 입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화살 때문에 튄 돌 조각에 맞고 파이어볼에 그을리자 내 HP는 15까지 떨어졌다.
평상시의 절반으로 말이다.
다행히 그래도 다리는 멀쩡하게 움직였지만, 돌조각에 맞은 갑각이 부서졌다.
이제 HP를 회복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아마 시간이 지나면서 회복되겠지만··· 더 빨리 부상을 치료할 수단이 없을까?
지금으로서는 그게 가장 시급한 문제였다.
순간 이 재난으로부터 내가 이득을 얻어낼 기회가 떠올랐다.
병사들은 자신들이 죽인 수많은 지네들의 시체를 그대로 남겨 놓고 돌아갔다.
그 시체 더미는 내게 보물 창고나 마찬가지였다.
바이오매스...
바이오매스를 손에 넣을 수 있다!
다른 놈들도 시체를 노리고 모여들기 전에 서둘러야 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미 지네들의 시체를 향해 다가가는 몇몇 괴물들이 보였다.
싸움이 벌어질 가능성을 최소화하기 위해, 나는 곧장 던전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시체 더미를 향해 달렸다.
혹시 병사들이 다시 나타나지 않을까 경계했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서둘러야 한다!
나는 산산이 조각난 지네의 몸뚱이 중 커다란 덩어리를 입에 물고 (윽) 가까운 벽에 나 있는 틈새로 달려갔다.
벽의 틈새를 이용해 즉시 작은 구멍을 판 뒤, 음식을 그 안에 넣어두고 더 많은 전리품을 위해 재빨리 돌아갔다.
그렇게 세 차례를 왕복하고 나자 어느새 수많은 괴물들이 몰려들었고, 여기저기서 먹이를 차지하기 위한 싸움이 벌어졌다.
심지어 어느 샛길에서 나타난 지네들조차 동족의 시체를 먹기 위해 달려들었다.
으웩!
나는 소란을 피해 재빨리 두 차례를 더 왕복했고, 커다란 덩어리 하나만 남긴 채 나머지 살점이 들어 있는 구멍의 입구를 막았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해야 할 텐데.
그리고 내가 미리 챙겨 놓은 큰 덩어리와 함께 둥지로 돌아왔다.
대체 그렇게 많은 몬스터들이 다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겠다.
먹이를 놓고 싸움이 벌어지자 그 소리 때문에 더 많은 놈들이 모여들었다.
내가 나머지 전리품을 가져올 수 있도록 저 소동이 빨리 끝나야 할 텐데···
일단 지금은 먹기부터 하자!
나는 정신없이 도망치느라 완전히 지친 상태였고, 식사가 내 에너지와 체력을 회복시켜 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얌!
···
으으.
끔찍한 맛이다.
[새로운 바이오매스의 원천을 흡수했습니다: 웅귀부스 스콜로펜드라. 1 바이오매스를 얻었습니다.]
[웅귀부스 스콜로펜드라의 기초 정보가 잠금 해제됩니다.]
로어마스터
오, 새로운 종을 사냥한 보너스로군.
나는 계속 지네 고기를 먹으면서 새로 획득한 기초 정보를 확인했다.
[웅귀부스 스콜로펜드라: 발톱 지네. 강력한 발톱과 꼬리 부분에 독이 있는 가시를 가졌다.]
아니나 다를까 기초 정보는 이번에도 별 쓸모가 없군.
발톱 지네라고?
발톱이 달린 지네라는 건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다고···
생각해 보면 정말 상상력이 부족한 이름 아닌가?
하긴 원래 네이밍이 어렵긴 하지.
[1 바이오매스를 얻었습니다.]
휴.
겨우 식사를 마쳤다.
나는 상태창을 열었다.
=====
레벨: 2
힘 15
강인함 12
영리함 25
의지 18
HP: 17
MP: 0
스킬:
땅파기 레벨 3
산성 용액 발사 레벨 2
잡기 레벨 3
물기 레벨 3
은신 레벨 3
변이:
눈 +2
종족: 갓 부화한 일개미
스킬 포인트:0
바이오매스:2
=====
생명력이 회복되고 있다!
2포인트나 올랐어!
환상적인 뉴스였다.
계속 먹기만 하면 HP가 회복되어 완벽하게 건강한 개미가 될 수 있다는 의미니까.
그럼 이제 새로 얻은 바이오매스를 사용해야지.
드디어 변이가 가능하다!
···
뭔가 기분이 이상하군.
난 그렇지 않아도 원래 인간이다가 몬스터가 된 건데, 변이를 왜 이렇게 기뻐하고 있는 거지?
어쨌든 뭘 할지는 이미 생각해둔 바가 있다.
산성 용액 +1 그리고 더듬이 +1!
[산성 용액과 더듬이를 성장시키겠습니까? 2 바이오매스가 소모됩니다.]
그래 부탁해.
다만 간지럼증은 사양할게.
···
헉.
으악!
이런 씨-
우갸갸갸!
너무 간지러!
나는 앞다리로 계속 더듬이를 청소했지만 별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최근 들어 나도 모르게 점점 더 자주 하고 있는 동작이었다.
개미들이 항상 더듬이를 깨끗하게 관리하기 위해 노력하고, 심지어 팔꿈치에 더듬이의 먼지와 각질을 제거하는 특수한 털까지 달려 있다는 사실은 인간일 때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털로 아무리 더듬이를 닦아도 미칠 듯한 간지러움은 줄어들지 않았다.
게다가 몸 속 깊숙이, 아마 개미산을 분비하는 기관이 있는 부위에서 느껴지는 간지러움은 어떻게 할 방법조차 없었다.
다행히 잠시 후 간지러운 느낌이 사라졌다.
휴.
더듬이를 성장시킨 건 눈을 업그레이드한 것과 마찬가지로 감각 기관을 확장하기 위해서였다.
주변의 냄새를 맡거나 공기의 흐름을 파악하는 능력을 높인 것이다.
그리고 산성 용액이 농도를 높여서 처음으로 전투 능력을 성장시켰다.
지금으로서는 산성 용액이 내가 가진 유일하게 믿을 만한 공격 수단이기 때문이다.
이제 다시 둥지 밖으로 나가서, 아비규환의 현장을 지나쳐 내 나머지 전리품을 가져와야 했다.
천장에 붙어 동굴을 지나가는 동안, 아래쪽에서 벌어지던 싸움이 어느새 잦아들고 수많은 괴물들이 각자 영역을 확보한 채 식사에 열중하고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덕분에 예상보다 쉽게 일을 처리할 수 있었다.
나는 천장을 통해 네 차례 왕복하며 지네 고기를 둥지로 옮겼다.
이건 놀라운 성공이었다.
물론 병사들이 만들어낸 수많은 지네 시체들 중 일부만 챙겼을 뿐이지만, 그 과정에서 거의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꽤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그럼 먹자!
식사를 마치자 2 바이오매스를 더 얻었고, HP는 5가 회복되었다.
나는 이번에 획득한 2개의 바이오매스는 일단 가지고 있기로 했다.
바이오매스를 하나 더 얻어서 시력을 한 단계 더 올릴 생각이었다.
혹시 나중에 싸움이 벌어졌던 장소로 돌아가 보면 나 같은 작은 개미가 수집할 만한 찌꺼기들이 남아 있지 않을까?
일단은 기다려 봐야겠다.
+
"알버튼! 알버튼! 문 열어 이 멍청아!"
두 명의 젊은 군단병은 한쪽에 서서,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자신들의 사령관이 단단한 철문을 두드리는 모습을 지켜봤다.
티투스의 커다란 주먹이 세차게 문들 두드릴 때마다 돌로 만들어진 천장에서 먼지가 떨어져 두 병사의 머리카락 위에 떨어졌다.
이 두 병사들은 문제의 몬스터를 처음 봤을 뿐 아니라 가장 자세히 본 자들이었다.
그래서 티투스는 두 병사가 최대한 빠르게 치료를 받게 한 뒤, 리리아의 레기온 요새로 데려왔다.
병사들은 사령관을 따라 요새의 지하로 내려왔다.
땅 밑의 공기는 먼지와 습기로 눅눅했다.
사실 티투스는 그리 오래 문을 두드리지도 않았지만, 빠르게 인내심을 잃어버리는 중이었다.
"당장 문을 열지 않으면 네놈의 멍청한 책들에 불을 붙여서 땔감으로 써버리겠어, 알버튼!"
티투스가 외쳤다.
그러자 문이 즉시 열리며 안에서 학자들이 입는 갈색 로브 차림의 초췌한 남자가 나타났다.
남자의 얼굴은 마치 철사처럼 뻣뻣한 수염으로 온통 뒤덮여 있었다.
"이 무식한 고릴라가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이 책들은 천 년에 걸친 레기온의 역사가 담긴 소중한 기록이라고!"
수염 난 학자가 티투스를 향해 소리쳤다.
"이제야 깨어난 모양이군."
"난 항상 깨어 있지."
학자가 투덜거리더니 턱수염을 긁적이며 물었다.
"지금 몇 신데?"
티투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두 명의 젊은 병사들에게 따라오라고 손짓한 뒤 문 안으로 들어갔다.
병사들은 잠시 머뭇거리다 그 뒤를 따랐다.
방 안은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어디나 먼지투성이였고 여기저기 양피지와 책, 두루마리가 잔뜩 어질러져 있었다.
방 가운데에는 몇 개의 탁자가 놓여 있고, 사방의 벽은 커다란 책장들이 차지한 모습이었다.
책장 안에는 가죽으로 장정하고 멋들어진 필체로 제목을 쓴 두꺼운 책들이 가득했다.
재빨리 방 안을 훑어본 티투스는 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외쳤다.
"청소!"
그리고 알버튼이 아직 청소를 할 필요가 없고, 괜히 치운답시고 병사들이 들락거리면 연구에 방해가 된다며 투덜거리는 소리를 무시한 채 말을 꺼냈다.
"군단 훈련병 미린, 군단 훈련병 도넬란, 이쪽은 우리 군단의 로어마스터인 알버튼일세. 알버튼, 우리는 여기 두 훈련병이 오늘 던전에서 목격한 생물을 기록과 대조해서 식별하기 위해 자네를 찾아왔네."
알버튼이 미심쩍은 표정으로 두 훈련병을 쳐다봤다.
"지난 며칠 동안 던전 탐사를 금지하지 않았나? 던전 입구를 지키는 보초들이 무슨 식별할 수 없는 생물을 볼 기회가 있다는 거지? 우리가 더 이상 훈련병들에게 가시 도마뱀이 어떻게 생겼는지 가르치지 않기라도 하는 건가?"
"만약 그렇다면 그건 로어마스터인 자네 책임이겠지, 알버튼."
티투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가 자네에게 물어보려고 하는 몬스터는 개미일세."
그러자 로어마스터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개미라면··· 포르미키데?"
"그래."
알버튼이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아무 말도 없이 한쪽 벽에 기대어져 있는 나무 사다리를 들고 방 구석으로 향했다.
그리고 사다리를 올라가 책장 높은 칸에 있는 책 한 권을 꺼내더니 위태위태한 동작으로 다시 내려왔다.
쾅!
알버튼이 두꺼운 책을 탁자 위에 내려놓자 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훈련병들은 책 표지에 금박으로 새겨져 있는 '포르미키데'라는 제목을 볼 수 있었다.
훈련병 미린이 잠시 주저하다 티투스에게 물었다.
"사령관님, 리리아 지하에서 개미 몬스터를 목격하는 경우가 드물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고작 한 마리가 나타났을 뿐인데 그렇게 심각한 일입니까?"
도넬란 역시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티투스를 쳐다봤다.
"개미 한 마리는 물론 약하지만, 놈들은 결코 한 마리만 다니는 법이 없지. 수백 마리, 수천 마리 심지어는 수만 마리가 무리를 이루네. 다른 어떤 종류의 몬스터보다 조직적이고, 고통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을 뿐 아니라 언제나 굶주려 있지.
개미 무리는 던전 안에서 거대한 영역을 차지하고 힘을 기르네. 그리고 두 번째 스트라타 혹은 더 높은 곳에 자리를 잡았다면 더 많은 먹이를 찾기 위해 지상으로 나올지도 몰라. 개미 무리가 지상까지 진출한다면 그건 그야말로 대재앙일세.
지난 역사 동안 그런 일이 두 차례 벌어졌고, 개미 무리를 물리치기 전까지 수많은 왕국들이 폐허로 변했지."
"그 두 차례의 사건 당시에···"
로어마스터가 두 젊은 군단병을 돌아보며 덧붙였다.
"사람들이 충분히 빠르게 대처하지 못했던 이유는 개미들의 굴을 파는 능력 때문이었어. 놈들은 던전 입구로 나오는 게 아니라 민가의 지하실이나 심지어 성의 지하 감옥을 통해서 갑자기 나타나곤 했으니까. 어쩌면 지금 이 방 주위에서도 놈들이 굴을 파고 있을지 몰라."
알버튼이 낄낄거리며 말하자 훈련병들이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주위의 벽을 둘러봤다.
"자, 이제 그 개미의 생김새에 대해 말해보라고. 과연 우리가 아는 놈인지..."
두 젊은 병사가 자신들이 본 생물에 대해 설명하자, 알버튼은 뭐라고 중얼거리며 앞에 놓인 커다란 책의 페이지를 넘겼다.
책의 페이지에는 각각 서로 다른 종류의 괴물 개미를 상세하게 묘사한 그림이 그려져 있고, 그 밑에는 글로 설명이 적혀 있었다.
레기온이 수 세대에 걸쳐 축적한 지식이었다.
"커다란 눈이라고 했나? 그건 아주 드문 경우로군. 최소한 장님개미일 가능성은 배제할 수 있겠어. 그나마 다행이지."
알버튼이 중얼거리자, 티투스가 훈련병들에게 설명했다.
"장님개미들은 시력이 거의 완전히 퇴화한 종족일세. 하지만 장님개미의 여왕은 매달 백만 개도 넘는 알을 낳을 수 있고, 무리 하나가 오천만 마리 규모로 커지기도 하지. 게다가 놈들은 제자리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이동하면서 마주치는 모든 걸 먹어 치우거든.
수백만 마리의 몬스터들이 떼로 몰려들어 우리를 죽이려 든다고 생각해 보게. 앞이 보이지 않는 정도가 무슨 대수겠나?"
"산성 용액을 발사해서 지네 무리를 유인했다고?"
알버트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그것도··· 드문 일이로군."
"뭔가 찾았나, 로어마스터?"
티투스가 물었다.
"검은색 몸에 산성 용액을 발사했다면 분명 포르미카 종일 거야. 크기로 볼 때 이제 갓 부화한 녀석이겠지. 하지만 몇 가지 이상한 점들이 있군. 아마 눈을 변이시킨 모양인데 개미들은 그러는 경우가 극히 드물거든. 게다가 다른 몬스터를 유인해서 대신 싸우게 한 다음 도망치다니, 개미 몬스터가 그렇게 지능적으로 행동하는 경우 또한 아주 드물지."
티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동의하네. 갓 부화한 개미의 영리함 수치는 보통 3 아니면 4지. 하지만 이 개미는 분명 그보다 훨씬 더 높을 걸세. 또 뭘 알아냈나?"
"어쩌면 우리는 아주 운이 좋은 걸지도 모르네, 사령관."
"어째서지?"
"자네가 아까 말했지만, 개미 몬스터가 단독으로 행동하는 경우는 없다시피 하지. 그리고 개미들이 첫 번째 스트라타에서 나타나는 경우도 거의 없고. 그럼 지상과 그렇게 가까운 곳에서 갓 부화한 놈이 혼자 돌아다니는 걸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나?
내 생각에는 던전의 더 아래쪽에서 개미 둥지에 대한 습격이 벌어진 것 같아. 아마 아직 그리 오래되지 않은 무리라 습격을 완전히 물리치지 못했겠지. 그 결과로 습격자들이 알을 훔쳐서 지상 가까운 층으로 올라왔고, 어쩌다 그 중 하나가 부화했을 거야."
"덕분에 우리는 개미 둥지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훨씬 더 일찍 알아차리게 된 거로군."
"그렇지. 아마 여왕은 기껏해야 두 달 전에 둥지를 꾸리기 시작했을 거야. 다만 던전 안에서 가장 약한 몬스터 개체라고 해도 좋을 어린 일개미 한 마리가 대체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의아하군.
내가 들은 바에 따르면 이 개미는 적어도 한 번 이상 눈을 변이시켰어. 어쩌면 두 번일지도 모르지. 대체 어떻게 바이오매스를 구했을까? 그리고 어째서 일반적인 개미를 훨씬 능가하는 수준의 영리함을 보이는 걸까?
이건 아주 희한한 일이야, 사령관."
"동의하네."
티투스가 말했다.
"하지만 한 마리의 일개미보다는 개미 둥지에 대응하는 일이 훨씬 더 중요하지. 우리는 그 둥지를 찾아서 없앨 원정대를 조직해야 하네. 하필 웨이브가 발생하기 직전이라니, 타이밍 한 번 더럽군."
알버튼이 인상을 찌푸렸다.
"우리끼리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 같은데, 사령관."
"맞는 말일세."
티투스가 말했다.
"그러니 자네 고모님께 말씀을 드려봐야지."
그 말에 알버튼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강제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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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필멸 종족의 창조물이 아니다. 심지어 '찰'의 전성기에도 세계에 그만한 변화를 가져올 힘은 없었다. 길은 하늘에서 강림했고, 이후 이 세계가 나아갈 길을 비춰왔다. 길은 어떤 종족, 피부색 혹은 사상도 가리지 않고 포용한다. 그러므로 우리 또한 길을 포용해야 한다.
우리는 길을 통해서만 더 위대한 존재가 될 수 있다. 시스템은 우리를 발전시키지만, 모든 필멸 종족이 하나로 단결해야만 최종 목표로 향한 길을 추구할 수 있을 것이다.
'신성한 길의 책'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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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너무 정신없이 바쁜 하루였다.
나는 오늘은 좀 더 차분한 날이 되기를 바랐다.
오늘 내 유일한 목표는 바이오매스 하나를 더 손에 넣어서 눈을 +3으로 성장시킨 다음, 둥지를 지상에서 좀 더 먼 장소로 옮기는 거였다.
하지만 아무래도 내 바람처럼 평화로운 날이 될 것 같지는 않았다.
대체 왜 여기 인간 병사들이 득실거리는 거지?!
내가 둥지에서 나와 공동으로 들어갔을 때, 이미 그 안에 병사들이 가득했다!
병사들은 체계적으로 공동 안을 수색하며, 주변 동굴로부터 몬스터들을 유인해낸 다음 압도적인 힘으로 척살하는 중이었다.
천장의 그림자 속에 숨어서 내려다보니 병사들은 호수 주위에 일종의 진지를 꾸리고 있었다.
호수 기슭에는 여러 개의 나무로 만든 삼각대가 설치되었다.
그리고 삼각대에 매달린 크리스탈 같은 장치가··· 호수의 빛을 흡수하는 건가?!
대체 저게 무슨 기술이지?
그리고 뭘 흡수하고 있는 거야?
저 크리스탈의 정체가 뭔데?
그리고 무엇보다, 난 어떻게 살아서 여기를 빠져나가지?
병사들은 공동을 완전히 점령한 상태였다!
지금은 은신 능력으로 숨어 있지만, 난 어제 이미 병사들이 몬스터 감지 장치를 사용하는 모습을 봤다.
병사들의 곁을 몰래 지나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설사 그럴 수 있다 해도···
내가 도망칠 길은 계단이 있는, 아래로 내려가는 커다란 통로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병사들도 분명 거기를 통해서 던전 아래로 내려가려 할 텐데!
내 둥지에 계속 숨어 있어야 할까?
아니, 그건 안될 일이었다.
병사들이 내가 막아 놓은 동굴 입구를 발견하면, 분명 몬스터의 둥지라고 판단해서 청소를 시작할 터였다.
어쩌면 이미 그 동굴을 인지한 상태일지도 몰랐다.
흙이 무너져 있는 걸 보고 그 안에서 뭐가 나왔다는 걸 알고 있을지도!
그렇다면 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빌어먹을 인간들...
나한테 남은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선택지는 거의 확실한 죽음을 의미했다.
내가 탈출할 방법은 둥지를 지나서 동굴의 반대편으로 나가는 거였다.
처음 악어 괴물과 마주쳤던 쪽으로 말이다.
혹시 이건 늑대를 피해서 호랑이 굴로 들어가는 고전적인 사례가 아닐까?!
내가 그림자 속에 숨어서 둥지가 있는 동굴 근처로 다가갔을 때, 병사들은 이미 호수의 이쪽 편을 수색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병사들은 횃불을 흔들며, 혹시 몬스터가 숨어 있을지도 모르는 동굴과 틈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놈들이 내 둥지가 있는 동굴에 이르기 전까지 남은 시간이 별로 없었다.
대체 왜 저렇게 열심인 거야?
좀 쉬엄쉬엄 하라고...
젠장.
더 이상 망설일 여유가 없었다.
현실을··· 혹은 죽음을 마주할 때였다.
나는 서둘러 동굴 안으로 들어와서 내 둥지를 향했다.
그리고 반대쪽 천장에 미리 만들어 놓은 틈을 이용해 둥지를 떠나려고 하니, 가슴이 조금 아팠다.
둥지는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어느 정도) 안전한 장소였고, 하나뿐인 내 안식처였다.
비록 며칠 동안이지만 고마웠어, 둥지야.
정말 집처럼 느껴졌는데···
비록 가족은 없었지만.
그러고 보면···
내가 태어난 둥지를 찾을 수 있다면, 아마 거기가 내게 가장 안전한 장소일 터였다.
이미 인간들과는 접촉을 시도해 봤으니 (그 결과는 그리 좋지 않았고) 어쩌면 이제 동족을 찾아갈 때인지도 몰랐다.
개미 종족을!
약탈자가 부화하지 않은 알을 가지고 얼마나 멀리 올 수 있었을까?
어쩌면 개미 둥지는 내 생각보다 더 가까이 있을지도 모른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여왕 개미를 찾아가는 거야.
그러니까... 엄마를!
부디 안전하게 숨어서 거기까지 갈 수 있어야 할 텐데.
나는 둥지를 나와서 아직 제대로 탐색해본 적이 없는 동굴의 반대쪽을 향했다.
처음 깨어난 날, 동족 하나가 무시무시한 두 발 악어에게 먹히는 장면을 봤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랑 다르지!
난 이제 2레벨이고, 바이오매스 포인트도 몇 개 사용했으니까.
그때만큼 약하지 않아!
나는 여섯 개의 다리로 천장을 단단하게 붙잡고 조심스럽게 나아갔다.
더듬이를 사방으로 부지런히 흔들면서, 눈으로는 모든 그림자를 살폈다.
동굴 안이 지난 번보다 더 환해 보이는 건 그냥 기분 탓일까?
아무래도 벽을 따라 퍼져 있는 혈관들이 더 밝게 빛나고, 맥동하는 빈도도 더 높아진 것 같은데?
왜지?
조심조심, 나는 지난 번에 괴물을 봤던 모퉁이로 다가갔다.
빌어먹을 난 이 장소에 심각한 트라우마가 있다고!
제발 몬스터가 없기를.
제발 몬스터가 없기를···
모퉁이 너머로 살짝 고개를 내밀자, 다행히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휴!
이리저리 눈을 굴려봐도 여기서 잡아 먹힌 개미나 그런 짓을 저지른 괴물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앞쪽의 통로는 왼쪽으로 완만하게 구부러져 있었다.
(물론 내가 볼 때는 오른쪽이지만··· 왜냐하면 난 거꾸로 매달려 있으니까···)
그리고 아마 터널 센스 덕분이겠지만, 나는 통로가 완만하게 아래쪽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지상으로부터 더 멀리, 더 깊은 지하를 향하는 통로였다.
이건 좋은 소식이로군.
빌어먹을 지상과 더러운 인간 군대로부터 멀어질 수 있으니까 말이야!
나는 조금 더 대담하게, 하지만 여전히 은신 상태로 전진했다.
잠깐.
내 더듬이가 공기 중에서 뭔가를 감지하기 시작했다.
불과 100미터쯤 앞에서 공기의 흐름이 변했다.
나는 곧바로 그 이유를 알아차렸다.
통로가 둘로 갈라지는 지점이었다.
흐음.
나는 모든 감각을 동원해서 어느 쪽이 더 안전할지 알아내려고 애썼다.
근처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더듬이를 열심히 흔들어 봤지만 아무런 낌새도 느낄 수 없었다.
나는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길을 잘못 선택하면 곧바로 죽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어느 쪽으로 가든 곧바로 죽을지도 모른다.
더 이상 망설일 수는 없었다.
[더듬이를 성장시키겠습니까? 2 바이오매스를 소모합니다.]
질러!
으갸갸갹!
나는 은신 상태를 유지하느라 미친 듯이 간지러운 더듬이를 문지를 수조차 없었다.
꼭 이래야만 하는 거야?!
겨우 간지러움이 지나가자, 내 더듬이는 처음 업그레이드를 했을 때보다 눈에 띄게 길어졌다.
나는 새롭게 향상된 감각으로, 다시 한 번 갈림길 중 어느 쪽이 덜 위험한지 파악하려고 시도했다.
잠깐!
이게 뭐지?
왼쪽 갈림길에서 느껴지는 희미한 냄새를 포착하자 내 개미 몸뚱이 전체가 따끔거리기 시작했다.
이 냄새는 내게 뭔가를 전하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대체 뭐지?!
나는 강렬한 감각에 이끌려 왼쪽 길을 선택했다.
이 감각의 정체가 뭔지는 몰라도 위협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았고, 그래서 조사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다른 선택지도 없고 말이다.
나는 계속 천장에 매달린 채, 언제나처럼 조심조심 전진했다.
계속 나아갈수록 냄새는 점점 더 분명해졌다.
원래는 옅은 안개처럼 느껴졌지만 이제 진한 연기 같다고 할까?
이쪽 통로의 벽들은 완전히 돌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익숙한 푸른 혈관이 거미줄처럼 사방에 퍼져 있는 모습이었다.
내 작은 발톱이 돌로 된 표면을 움켜쥘 때마다 작은 소리가 울렸다.
나는 네 개의 다리로 몸을 지탱한 채, 나머지 두 개의 다리를 움직이는 동작을 반복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아직도 개미의 몸에 완전히 익숙해진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간 많은 발전이 있었다.
단지 네 개의 사지가 여섯 개의 다리로 대체된 게 아니었다.
원래 두 다리로 걷고 두 팔을 쓰던 내가 팔은 없고 다리만 여섯 개인 몸에 적응하기는 결코 쉽지 않았다.
몇 분 더 전진하자 나는 마침내 냄새의 진원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기는 아무 것도 없는데?!
나는 혼란스러워하며 주위를 이리저리 둘러봤지만, 분명 아무 것도 없었다.
통로는 계속 완만하게 왼쪽을, 그리고 아래를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냄새를 풍길 법한 시체나 생물 혹은 식량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더듬이로 앞쪽의 돌을 건드리며 주변 천장과 바닥에 배어 있는 냄새를 추적했다.
더듬이 끝으로 여기저기를 살피던 나는 불현듯 뭔가를 깨달았다.
페로몬!
말을 못하는 개미가 어떻게 서로 의사소통을 할까?
개미들은 어떻게 둥지에서 먼 곳까지 식량을 찾기 위한 원정을 떠났다가 돌아올까?
그 답은 페로몬이었다.
개미들은 페로몬을 분비해서 다른 개미들이 감지하고 따라올 수 있는 냄새의 흔적을 남겼다.
나는 이 페로몬이 식량을 찾으러, 혹은 도둑 맞은 알들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나온 정찰병 개미들이 남긴 흔적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내 동족이 나를 집으로 부르고 있었다!
이건 그야말로 대발견이다!
둥지가 나를 찾고 있었다.
잃어버린 아이를 찾기 위해 등대를 밝혀 놓은 것이다.
그래도 너무 흥분하지는 말자.
지난 번에 흥분했을 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기억해야 한다.
난 아직 그때 깎인 HP를 완전히 회복하지도 못했다.
통로 바닥에 배어 있는 냄새를 조사한 뒤, 나는 곧바로 천장에 붙어서 다시 은신 상태로 돌아간 다음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다음 번 자취를 발견할 때까지는 계속 길을 따라 전진할 필요가 있었다.
앞으로 나아갈수록 통로는 점점 더 방향이 불규칙했고 이리저리 구부러졌지만, 그래도 계속 아래를 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앞쪽에서 공기가 진동하는 걸 감지했다.
저 앞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게 분명했다.
조심해야 돼!
30미터 앞에서 통로가 다시 한 번 둘로 갈라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 통로들은 점점 더 복잡해질 것 같았다.
길을 찾기가 쉽지는 않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터널 센스 스킬이 레벨 2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내게는 터널 센스가 있다!
스킬 설명에 따르면 터널 센스는 지하에서 방향 감각을 유지할 수 있게 해줬다.
어쩌면 스킬 덕분에 지금까지 통로가 아래를 향하고 있다거나, 이리저리 구부러져 있다는 점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건지도 모른다.
앞으로는 방향을 찾거나 지나온 길을 기억하기 위해 이 스킬에 의지해야 했다.
양쪽 갈림길 모두 페로몬의 흔적은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길이 갈라지는 지점에 표식을 남기기로 했다.
이렇게 하면 경로를 기억하는데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턱으로 바위에 간단한 화살표를 남긴 다음, 나는 오른쪽 갈림길로 들어섰다.
그리고 10분 뒤 허겁지겁 다시 원래 위치로 돌아왔다.
큰일날 뻔했네!
당분간 이쪽 길로는 절대 갈 일이 없겠어...
오른쪽 길로 들어서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곧 통로가 살짝 넓어져서 일종의 공동을 이루고 있는 지점에 도착했다.
늑대 도마뱀의 무리가 그 공동을 차지하고 있었다.
다섯 마리의 늑대 도마뱀들은 바위 위에 배를 깔고 앉아서 최근 죽은 걸로 보이는 사냥감의 뼈를 물어뜯는 중이었다.
은신 상태로 놈들을 지나칠 자신이 없었던 나는 즉시 방향을 돌려서 꽁지가 빠지게 달아났다.
이리로 가면 죽는다는 표식을 뭘로 남기지?
나는 죽음을 의미하는 X, 그리고 늑대 도마뱀의 꼬리를 나타내는 ~ 표식을 오른쪽 갈림길에 남긴 다음 왼쪽 통로로 향했다.
제발 이쪽 길은 좀 더 안전하기를!
다행히 몇 백 미터를 나아가는 동안 통로 안은 아주 안전했다.
잠깐...
계속 천장을 걷던 나는 한쪽 다리를 들어올린 채, 내 앞의 공간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이게··· 내가 생각하는 그건가?
거미 vs 곤충
내 앞에는 거의 보이지 않는, 가느다란 은빛 선들이 복잡하게 뻗어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다리를 거두고 뒤로 몇 걸음 물러나서 앞쪽의 은빛 선들을 천천히 살폈다.
시력을 +2만큼 올리지 않았다면 아마 제때 발견하지 못했을 터였다.
통로 전체에 걸친 가느다란 거미줄이 벽에서 나오는 은은한 푸른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자칫하면 머리부터 거미줄에 걸려서 꼼짝없이 죽음을 맞이할 뻔했다.
몬스터 거미라니!
나는 몸을 떨었다.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다.
멍청한 거미 자식!
네가 무슨 곤충 세계의 왕이라도 되는 것 같아?
어?!
힘든 일은 거미줄이 다하잖아!
넌 우리 개미처럼 정직하고 성실한 일꾼이 아니라고.
여기 우리 동족 2백 마리만 있었어도, 너 따위는 아무 것도 아니야!
거미줄을 주의 깊게 살펴도 거미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놈이 근처에 있지 않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나는 망설였다.
이 통로로 계속 나아가거나 아니면 돌아가서 늑대 도마뱀 가족 곁을 몰래 지나가야 했다.
그 정도로 은신 스킬에 자신이 있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이쪽 통로에 있는 거미에 대한 정보를 좀 더 얻어야 현명한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잠시 고민 끝에 바닥으로 내려와서 굴러다니는 돌 몇 개를 모았다.
그리고 턱을 이용해서 가까운 거리로 돌을 던지는 연습을 했다.
돌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통로 안에 메아리쳤다.
나는 어렵지 않게 요령을 파악한 뒤, 돌 몇 개를 거미줄과 가까운 위치에 나란히 늘어놓았다.
그런 다음 머리를 흔들며 돌 하나를 거미줄로 던졌다.
돌이 부딪히자 거미줄 전체가 흔들렸다.
하지만 돌은 거미줄에 달라붙지 않고 바닥에 떨어졌다.
나는 지체없이 두 번째 돌을 던진 다음, 재빨리 물러나서 그림자 속에 몸을 감추고 거미줄 쪽을 지켜봤다.
처음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돌 때문에 거미줄이 흔들리자 눈에 훨씬 더 잘 보였다.
거미줄은 촘촘한 그물처럼 통로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결국 흔들림이 멎었지만, 나는 계속해서 기다렸다.
온다!
놈이 천장으로 움직이고 있어서 거의 놓칠 뻔했다.
그림자 속에서 다리 하나가 나타났고, 또 하나가 나타났다.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거미는 거미줄을 흔든 먹이를 찾았다.
으, 징그러워라...
뚱뚱한 몸에 여덟 개의 털이 숭숭 난 다리가 달린 (다리가 너무 많잖아!) 거미는 조심스럽게 거미줄을 건드리며 먹이를 찾았다.
이제야 생각난 거지만, 거미는 나와 같은 곤충이 아니라 거미강이라는 독자적인 분류에 속했다.
나는 머리, 가슴, 배의 세 부위와 여섯 개의 다리를 가졌지만 거미는 (역겹게도) 여덟 개의 다리에 머리와 몸통 두 부위로 되어 있었다.
이 거미는 강대한 곤충 종족에 속하지 않았다.
먹이 사슬의 더 하위에 존재하는 놈이었다.
자세히 보니 놈의 몸 크기는 나 정도였다.
그리 높은 레벨의 몬스터는 아닐 가능성이 높았다.
거미가 천장에서 내려와 거미줄 위에 올라섰다.
그리고 거미줄 여기저기를 더 자세히 살피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자 내 머리 속에 어떤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우리 다리 많은 친구가 멈출 때까지 기다렸다가···
거미는 느린 속도로 거미줄 위를 돌아다니며, 조금 전 느낀 진동의 원인을 파악하려 했다.
그리고 나는 거리를 가늠하며 꽁무니로 신중하게 놈을 겨냥했다.
기다려··· 기다려···
···발사!
슈슉!
나는 최대한 멀리 산성 용액을 쏘아냈다.
그리고 적에게 내 위치를 들키지 않기 위해 발사 직후 서둘러 자리를 옮겼다.
거리가 너무 먼 탓에 정확도가 떨어져서, 산성 용액은 내가 의도한 대로 거미의 몸통을 맞추는 대신 오른쪽의 다리들 위에 흩어졌다.
거미는 즉각 반응해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놈은 검은 액체가 뚝뚝 떨어지는 끔찍한 송곳니를 드러낸 채, 거미줄 위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여덟 개의 눈으로 적을 찾아내려 했다.
놈의 시력은 틀림없이 나보다 우월할 터였다.
업그레이드를 했다고 해도, 내 시력이 거미의 타고난 눈을 뛰어넘을 가능성은 낮았다.
대부분의 거미들은 눈이 무려 여덟 개였다!
주로 단독 사냥을 하는 거미는 뛰어난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놈이 나를 발견하지 못하는 걸 보면 은신 스킬이 제 몫을 하고 있는 듯했다.
아직도 통로 이쪽이 아니라 거미줄에 주의를 집중하고 있는 걸 보면, 들키지 않은 채 적을 해치울 수 있을지도 몰랐다.
나는 매의 눈으로 거미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한동안 난리를 치던 거미는 이제 좀 진정했는지 조심스럽게 거미줄의 가장자리, 벽 쪽을 향해 이동했다.
놈의 눈들이 벽의 푸른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났다.
자기가 제대로 몸을 숨겼다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멍청한 거미 같으니...
내가 계속 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넌 완전히 멈춰 있지!
천천히, 아주 천천히 나는 두 번째 발사를 준비했다.
각도와 높이를 고려하고, 바람은 걱정할 필요 없고, 머리 속에 포물선을 그려본 다음···
발사!
나는 재빨리 몸을 돌려 산성 용액이 거미의 머리를 맞춘 다음 털투성이 몸뚱이로 흘러내리는 장면을 지켜봤다.
거미는 고통스러운 쉭쉭 소리를 내며 몸부림쳤다.
그리고 자기를 공격한 적을 찾기 위해 눈을 번뜩였다.
하지만 난 이미 거기 없지롱!
나는 산성 용액이 명중한 걸 확인하자 마자 서둘러 자리를 옮긴 뒤였다.
어디 한 번 나를 찾으러 와 보시지, 멍청한 거미 놈아!
거미줄을 벗어날 용기가 있다면 말이야!
...
말은 자신만만하게 했지만, 사실 나는 혹시라도 놈이 거미줄에서 내려와 내게 달려들지 않을까 벌벌 떨고 있었다.
그래서 결국 갈림길이 시작되는 지점까지 후퇴했다.
최악의 경우 늑대 도마뱀들이 있는 근처에 숨거나, 아니면 놈들의 어그로를 끌어서 거미와 싸움을 붙여 놓고 늑대 도마뱀 소굴을 지나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다행히 거미는 나만큼이나 조심스러운 성격 같았다.
생각해 보면 당연히 그렇지 않을까?
놈은 그저 거미줄을 쳐 놓고 먹이가 걸려들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되니까.
심지어 거미줄에 걸린 사냥감이 제풀에 지치거나 죽을 때까지 기다리면, 굳이 싸울 필요도 없다!
사실상 공짜로 바이오매스를 얻는 셈이다.
거미로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로 이 던전이 이지 모드가 되는 것이다...!
운 좋은 거미 놈을 향한 분노가 내 안에서 들끓었다.
내가 그 모든 고난을 겪는 사이 놈은 여기 편하게 앉아서 공짜 XP를 모았다는 말이지.
그 생각을 하니 분노와 억울함이 하늘을 찌를 듯했다.
이 분노를 달래기 위해서라도 거미 놈을 반드시 죽일 테다!
물론 신중하게 고려해본 결과 내가 이길 것 같아서 하는 말이다.
그런 판단을 내린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먼저 지금 동굴 안은 이상할 정도로 밝았다.
내가 여기 처음 왔을 때라면 거미와 거미줄을 포착하기 어려웠겠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두 번째로 거미의 크기는 예상보다 작았고, 그래서 어쩌면 나만큼 약할지도 몰랐다.
거미줄이 놈에게 주는 이점만 배제한다면 내가 이길 수도 있었다.
유일한 문제는 거미줄이 아닌 장소에서 놈과 싸워야 한다는 거였다.
그리고 그 1단계는 이미 완료했다.
두 차례의 산성 용액 공격으로 놈의 HP가 아마 5는 줄었을 것이다.
놈이 식량을 구해서 체력을 회복하지 않는 이상, 계속 그렇게 유인해서 원거리 공격을 하면 된다.
간단하다.
다만 내 계획의 약점은···
내가 거미를 이기기 위해서는 여러 차례 매복 공격을 성공해야 하지만, 거미는 단 한 번만 내게 독니를 박아도···
끝이라는 사실이다.
더듬이, 앞으로!
눈, 크게 뜨고!
뇌, 정신 바짝 차려!
절대로 실수가 있어서는 안돼!
나는 혹시 거미가 숨어 있지 않을까 모든 틈새를 확인하며, 다시 한 번 거미줄을 향해 나아갔다.
거미의 모습은 어디서도 보이지 않았다.
놈은 아마 거미줄 뒤에 안전하게 숨어서 상처를 핥고 있을 터였다.
···혀가 있다면 말이지만.
거미가 보이지 않으니, 지난 번과 마찬가지로 거미줄을 흔들어 놈을 꾀어내야 했다.
나는 다시 돌 몇 개를 찾아서 가져다 놓고 하나씩 거미줄로 던졌다.
이번에는 놈이 틀림없이 먹이가 걸렸다고 생각하도록, 네 개의 돌을 던져 거미줄을 더 많이 흔들었다.
그리고 재빨리 어둠 속에 숨어서 기다렸다.
그리고 기다렸다.
계속 기다렸다.
그렇게 삼십 분을 기다려도 털이 난 다리 하나 보이지 않았다.
안 나온다고?
쫄았냐?
나한테 완전히 겁먹은 거야?
뭐, 그것도 나쁘지 않다.
하지만 먼저 확실히 해 둘 필요가 있었다.
나는 다시 한 번 돌을 가져다가 턱을 이용해서 거미줄로 던졌다.
이번에는 돌을 일곱 개나 던져서 거미줄을 쉴 새 없이 흔들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물러나서 지켜봤다.
나와라, 거미!
하지만 여전히 아무 일도 없었다.
내가 돌을 던지는 소리가 그치고 나자 동굴 안은 완전히 고요했다.
첫 번째 사냥을 통해, 나는 몬스터에게 있어 인내가 필수라는 사실을 배웠다.
죽음은 어디에나 도사리고 있었고, 안전 장치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만약 이 거미 놈이 나와 인내심 싸움을 벌이려는 거라면, 기꺼이 받아줄 용의가 있었다.
나는 한 시간 정도 기다리다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거미는 내가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더 심하게 다쳤거나, 아니면 지난 번에 산성 용액으로 목욕을 한 기억 탓에 이쪽으로 오기를 꺼리는지도 몰랐다.
그래서 나는 작전의 2단계에 돌입했다.
더듬이로 더 작고 가벼운 돌들을 찾아서, 내 얼굴에 달린 손 – 흔히 턱이라고 알려져 있는 – 을 이용해 거미줄 가까이로 옮겼다.
충분히 많은 돌을 확보한 뒤, 나는 다시 한 번 거미줄을 흔들기 시작했다.
아까 던졌던 더 무거운 돌들과 달리, 작고 가벼운 돌들은 거미줄을 그리 세게 흔들지 못했다.
대신 무거운 돌들이 하지 못했던 일을 했다.
거미줄에서 떨어지지 않고 계속 붙어 있었다.
휙, 휙, 휙.
나는 계속해서 거미줄에 작은 돌을 던졌다.
어떤 돌들은 튕겨져 나오거나 떨어졌지만, 상당수가 거미줄에 그대로 붙었다.
거미줄 전체를 돌로 뒤덮을 필요는 없었다.
그저 내가 붙들리지 않고 지나갈 만한 통로만 확보하면 된다.
적의 본거지로 침투할 수 있도록 말이다.
돌을 반쯤 던진 뒤, 나는 다시 한 번 물러나서 숨었다.
혹시나 계속 흔들리는 거미줄 때문에 놈이 나타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렇게 삼십 분을 기다리고 나서 작업을 재개했다.
거미가 나타나지 않을 것이 확실해지자, 나는 최대한 많은 돌을 거미줄에 던지기로 했다.
만약 저 빌어먹을 거미줄에 다리 하나라도 붙들리면 빠져나갈 수 없을 테니까.
결국 나는 충분히 지나갈 수 있을 만한 크기의 통로를 확보했다.
그리고 더듬이를 부지런히 놀리며 어떤 돌들을 밟고 지나갈지, 혹시 끈끈이가 남아 있는 곳은 없는지 신중하게 확인했다.
그런 다음 마침내 적의 소굴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게 싸움의 가장 위험한 단계였다.
비록 퇴로를 확보해 놓기는 했지만, 놈의 소굴 안에 숨겨진 거미줄이 더 있을지도 몰랐다.
아주 조심해야 했다.
나는 한 걸음 한 걸음 신중하게 나아가며, 눈으로는 끊임없이 벽과 천장을 살폈다.
한 순간만 집중력을 잃어도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최대한 은신 상태를 유지하려고 애썼지만, 어두운 그림자는 점점 더 줄어들고 있었다.
동굴 벽을 따라 흐르는 푸른 빛은 지난 며칠 동안 눈에 띄게 강해졌다.
하지만 그건 나에게만 불리한 점이 아니었다.
적도 나만큼 숨기를 좋아하는 놈 같으니까 말이다.
거미 소굴 안으로 들어오자 여기저기 벽과 바닥에 거미줄이 보였다.
그 중 몇몇은 너무 가늘어서 빛이 밝은데도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나는 실수로 거미줄을 밟지는 않을까 거의 매 걸음마다 동작을 멈추고 아래를 살폈다.
···저게 뭐지?
벽 가까이 뭔가 형상이 보였다.
뭔지 잘 모르겠는데···
그냥 바위인가 아니면···
다리!?
이거나 먹어라 개자식아!
나는 번개처럼 산성 용액을 발사했다.
[산성 용액 발사 스킬이 레벨 3이 되었습니다.]
좋아!
명중했나 보군!
이제 할 일은 하나였다.
맞다, 줄행랑이다!
음하하하하!
넌 날 따라잡지 못할 거다, 거미 놈아!
나는 협곡을 달리는 바람처럼, 초원을 가로지르는 가젤처럼, 창공을 누비는 솔개처럼 내달렸다.
으앗, 거미줄이다!
걸렸어!
거미줄에 걸렸다고!
놈이 날 잡으러 올 거야!
여기서 이렇게 죽는 건가?
내 동족들을 만나보기도 전에?
너무 많은 후회가 남는다!
지금 죽기에 난 너무 어리다고!
그러니까··· 아직 부화하고 나서 한 달도 지나지 않았어!
[레벨 1 푸에르 아라니아를 처치했습니다.]
[경험치를 얻었습니다.]
제발 날 죽이지 마 거미야!
난 아직 할 일이 많아.
내가 포켓몬처럼 진화할 수 있는 건지는 아직 잘 모르지만, 만약 그렇다면 얼마나 멋지겠어?
너도 내가 그 점을 확인하기 전에 죽기를 원하지는 않지?
그리고··· 그리고···
···
뭐라고?
주위를 살피자 내 다리 하나가 바닥의 거미줄에 붙어 있었다.
하지만 힘을 줘서 다리를 당기자 쉽게 떨어졌다.
나는 아까 거미를 봤던 곳으로 돌아갔다.
작은 거미는 산성 용액 때문에 심한 화상을 입은 채, 바닥에 등을 대고 하늘로 향한 여덟 개의 다리를 움츠린 채 널브러져 있었다.
···
미안 거미야.
내가 널 너무 과대평가했구나.
고속도로
[새로운 바이오매스의 원천을 섭취했습니다: 푸에르 아라니아. 1 바이오매스를 얻었습니다.]
[푸에르 아라니아의 기초 정보가 잠금 해제됩니다.]
[1 바이오매스를 얻었습니다.]
[푸에르 아라니아: 새끼 거미. 갓 태어난 거미 몬스터로, 거미줄을 이용해 먹이를 사냥합니다.]
나는 아주 부끄러웠다.
내가 이 거미를 향해 느꼈던 분노, 경멸···
놈이 거미줄에 편안히 앉아서 바이오매스를 잔뜩 얻고 있다는 생각은 완전히 오해였다.
녀석은 레벨 1짜리 아기 거미 몬스터였다.
아마 태어나서 한 번도 바이오매스를 얻어본 적조차 없었을 것이다.
가엾어라.
네 존재가 너무 가엾구나!
그리고 네 최후는···
미안하다 새끼 거미야!
내 산성 용액 두 발은 녀석에게 이미 심한 부상을 입혔다.
녀석은 산성 용액을 뒤집어쓴 탓에 거의 바닥난 HP를 회복할 방법도 전혀 없었다.
내가 싸움을 계속하기 위해 둥지로 쳐들어왔을 때, 녀석은 이미 빈사 상태였다.
그래서 산성 용액을 한 발 더 맞자 그대로 죽어버린 것이다.
고작 레벨 1이니, 아마 내가 얻은 경험치는 소량에 불과할 터였다.
하지만 녀석의 시체를 먹자 (맛은··· 상상에 맡기겠다) 2 바이오매스를 얻을 수 있었다.
이제 눈 +3이 될 때가 멀지 않았다.
일단 멀쩡한 시력을 얻고 나면, 내 몸의 다른 측면에도 신경을 쓸 수 있을 터였다.
어쩌면 드디어 제대로 싸울 수 있는 무기를 얻게 될지도 몰랐다.
아니, 성급하게 행복 회로를 돌리지는 말자.
우선 적어도 성체 개미가 될 방법을 찾아야 했다.
갓 부화한 개미가 아니라 말이다.
레벨을 더 올려야 하는 걸까?
그러려면 사냥터부터 찾아야 할 텐데···
불쌍한 거미를 해치운 탓에 최소한 앞으로 나아갈 길은 뚫렸다.
내게는 계속 전진하는 것 외에 선택지가 많지 않았다.
나는 작은 돌과 흙으로 둥지 반대편에 있는 거미줄에 길을 만든 다음 그 위로 지나갔다.
은신 모드 진입!
다시 천장으로 올라간 나는 조심스럽게 통로를 따라 나아갔다.
그리고 머지 않아 뭔가를 발견했다.
어둠 속을 향해 수직으로 내려가는 통로였다.
터널 한가운데 뚫린 구멍은 지름이 4미터 정도였고, 그 안까지 뻗어 있는 푸른 혈관에도 불구하고 바닥이 보이지 않았다.
대체 얼마나 깊은 거지?!
그 너머로도 동굴이 계속 이어져 있었기 때문에, 나는 다시 한 번 선택의 기로에 처했다.
깊은 곳일수록 더 위험하다고 가정하면, 이 구멍에 대한 탐사는 나중으로 미루는 게 맞았다.
그래도 나는 더듬이로 구멍 주위를 세심하게 살피며, 혹시 동족이 남긴 자취가 없는지 확인했다.
아무 것도 없었다.
나는 조금 실망하는 동시에 조금 안도했다.
자취가 없으니 그걸 따라 더 아래로 내려갈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더 위쪽으로 가는 것도 마찬가지로 위험하니 (빌어먹을 인간들 때문에 말이다) 어쩌면 내려가는 편이 더 현명한 걸지도···
으!
골치가 아프다!
아마 결국에는 모든 선택지를 확인할 수밖에 없을 터였다.
그러니 쓸데없이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전진!
나는 구멍을 지나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물론 계속 주위를 살피는 걸 잊지 않았다.
그리고 이십 분쯤 뒤 또다른 변화를 마주쳤다.
알고 보니 내 작은 동굴은 훨씬 더 큰 통로로 연결되어 있었다.
반대쪽의 공동과 비슷한 장소로 말이다.
이 커다란 통로는 폭이 30미터, 높이가 20미터에 달했다.
그리고 여기저기 내가 지나온 것과 비슷한 작은 동굴들의 입구가 보였다.
이게 의미하는 바는···
더 많은 몬스터들!
이미 바위 사이로 몇몇 놈들이 돌아다니는 모습이 보였고, 소리는 더 많이 들렸다.
혹시 이 통로와 예전 그 공동이 연결되어 있을까?
크게 돌아서 결국 멀어지려 했던 그 공동으로 다시 돌아온 건 아닐까?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우선 나는 작은 동굴 안으로 돌아와서 팔 수 있을 만한 부드러운 부분을 찾았다.
100미터쯤 후퇴해야 했지만 다행히 적당한 벽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서 새로운 둥지를 만들기 시작했다.
동굴 벽에 굴을 파고, 그 과정에서 나온 흙과 돌로는 커다란 통로와 연결된 입구를 막았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도무지 안심할 수가 없었다.
몇 시간쯤 걸린 끝에 나는 어둡고 아늑한 둥지를 완성했다.
그리고 커다란 통로와 이어진 입구도 완전히 막았다.
천장 쪽에 내가 드나들 작은 틈새만 남겨 놓고 말이다.
뿐만 아니라:
[굴파기 스킬이 레벨 4가 되었습니다.]
큰 쓸모가 없는 스킬이기는 하지만, 레벨이 올랐다고 하니 뭔가 발전한 기분이 든다!
생각해 보면 이미 처음 이 세계에 깨어났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했다.
내 감각은 날카로워졌고, 산성 용액은 더 강해졌으며 다양한 스킬 레벨도 올랐다.
아직 전투 능력은 형편없지만··· 그래도 말이다.
이 정도면 자부심을 가져도 되지 않을까?
어쨌든 둥지를 완성했으니, 이제 낮잠을 잘 시간이다!
새로운 지역을 탐사하고 사냥감을 찾으려면 우선 체력을 비축해야 했다.
그래서 나는 우선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단단한 갑각을 바닥에 대고 여섯 개의 다리를 쭉 펼쳤다.
하지만 눈꺼풀이 없다 보니 눈을 감을 수는 없었다.
그건 퍽 이상한 기분이었다.
과거 개미를 길러본 경험상 녀석들은 실제로 잠을 자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멈춰서 휴식을 취할 뿐이었다.
그렇게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으니 점차 의식이 몽롱하게 표류했다.
모든 외부 자극이 배경으로 밀려나고 정신이 감각과 분리되었다.
뭐랄까 실제로 눈을 감지는 않았지만··· 눈을 감았다고나 할까.
잠시 후 나는 몸을 흔들며 깨어났다.
다리를 모아서 몸을 일으킨 뒤, 다시 움직일 준비를 마쳤다.
머리 속이 개운해졌다!
컨디션을 회복했으니, 이제 탐사에 나설 때가 됐다.
지금 당장 신경이 쓰이는 문제는 두 가지였다.
첫째, 나는 바이오매스 하나를 더 얻어서 시력을 한 번 더 향상시켜야 했다.
그리고 나면 눈 +4는 잠시 뒤로 미루고 육체의 다른 측면을 업그레이드할 계획이었다.
다리 힘이나 갑각, 턱 혹은 산성 분비샘을 강화하면 좀 더 자신 있게 사냥을 할 수 있을 테니까.
둘째로, 나는 더 많은 경험치를 확보해야 했다.
레벨을 올리면 능력치가 높아지거나 성체 개미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내가 생존할 가능성도 상당히 높아질 터였다.
사실 나에게는 안전하게 경험치를 획득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아이디어가 있었다.
커다란 통로에 몬스터의 수가 충분히 많다면, 그 방법을 시험해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커다란 통로로 들어가 재빨리 천장의 바위틈에 자리를 잡았다.
내 은신 스킬은 레벨 3에 머무르고 있었다.
여기서 몬스터들의 시선을 피하며 레벨을 좀 더 올릴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주위를 살피니 커다란 통로는 내 왼쪽에서 완만하게 위쪽을 향하다가 구부러져 있었다.
나는 이 통로가 내가 원래 알던 공동과 이어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떨치기 어려웠다.
설마 그 먼 거리를 빙빙 돌아서 다시 병사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온 건 아니겠지?!
어쨌든 던전의 이 구역은 이 커다란 '메인' 통로와 거기 연결된 수많은 작은 동굴들로 이루어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작은 동굴들 안에는 더 작은 몬스터들이 둥지를 틀고 있을 터였다.
그러니까 커다란 통로는 고속도로고 작은 동굴들은 뒷골목인 셈인가?
대충 그렇게 생각해도 되겠지.
나는 더듬이를 흔들며 통로가 아래로 경사진 쪽으로 나아갔다.
[터널 센스 스킬이 레벨 3이 되었습니다.]
오호라.
내가 머리 속으로 방향을 찾고 지도를 그리려고 하면 터널 센스가 오르는 건가?
시스템이 내 생각을 들여다본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좀 이상한데···
뭐, 그래도 스킬 레벨이 오르는 자체는 좋은 일이지.
이쪽 방향에서 내가 원하는 걸 발견할 수 있다면 좋겠는데...
나는 이 통로에서 이미 두 종류의 새로운 몬스터들을 발견했다.
첫 번째는 커다란 쥐처럼 생겼지만 꼬리가 세 개였고, 각 꼬리마다 날카로운 가시가 달려 있었다.
그리 가까이 지내고 싶지 않은 녀석들이었다.
두 번째는 일종의 연체 동물 같았는데, 길고 미끌미끌해 보이는 몸뚱이가 화려한 색의 가시로 뒤덮여 있었다.
꼭 등에서 산호초가 자라는 듯한 모습이었다.
크기가 내 두 배에 달하는 데다가, 벽을 타는 능력도 있었다.
이미 그 중 두 마리가 거의 수직으로 벽을 오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징그러운 민달팽이 놈들 같으니!
그렇게 빨리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저 화려한 색의 뿔에 독이 없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혹시 모르니 놈들이 지나간 자리는 피하기로 했다.
아하!
내가 기다리던 반가운 소리!
저 앞쪽에서 몬스터들이 서로 으르렁거리며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속도를 높여서 앞으로 나아갔다.
막타의 중요성
이 세계는 이상할 정도로 게임과 비슷한 시스템이 작동하고 있었다.
지금 내게 가장 필요한 정보는 그 시스템의 정확한 작동 원리였다.
예를 들어, 몬스터가 죽으면 어떤 식으로 시스템이 경험치를 주는 걸까?
피해를 입힌 양만큼 경험치를 얻는 건가?
아니면 막타를 치기만 하면 모든 경험치를 독차지하는 건가?
여태까지 전투 중에 경험치를 얻었다는 메시지를 접한 적은 없었다.
언제나 사냥감이 죽고 나서야 그런 메시지가 나타났다.
그러니까 최소한 뭔가가 죽어야 경험치를 얻을 수 있다는 건 알겠다.
그럼 이제 몇 가지 가설을 확인해 보자.
앞으로 나아갈수록 싸우는 소리는 점점 더 커졌다.
나는 천장의 그림자 속에 몸을 숨긴 채 누가 싸우고 있는지 살폈다.
그러자 네 마리의 발톱 지네들이 악어 괴물과 뒤엉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지네들은 내가 여태까지 본 몬스터들 중에서도 제일 싫은 놈들이다.
저 지네들은 지네들이 엄청 대단한 줄 안다니까!
네 마리의 발톱 지네들은 훨씬 더 크고 난폭한 악어 괴물을 포위하고 있었다.
각자 번갈아 가며 몸을 앞뒤로 흔들어 악어 괴물의 주의를 끌었다.
동료들이 공격할 기회를 만들려고 하는 모양이었다.
악어 괴물은 네 마리의 움직임을 모두 놓치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지네들이 계속 원을 그리며 움직이고 있어서 쉽지 않아 보였다.
악어 괴물은 이미 몇 군데 상처를 입어서, 몸 여기저기 녹색 액체가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결코 만만한 상대는 아니라서, 이미 지네 한 마리가 두 동강이 난 채 악어 괴물의 발 밑에 널브러져 있었다.
휙!
콰직!
몬스터들은 발톱을 휘두르고 이빨을 들이밀며 치열하게 싸움을 벌였다.
스릴 넘치는데!
나는 싸움 구경에 정신이 팔려 주위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도록 주의했다.
바보처럼 남들이 싸우는 모습을 보다가 몰래 다가온 민달팽이한테 잡아 먹힐 수는 없으니까.
놀랍게도 대부분의 몬스터들은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근처로 다가가지 않으려고 했다.
위험한 괴물들이 벌이는 싸움에 끼어들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난 기꺼이 끼어들 생각이었다.
악어 괴물이 지네 한 마리를 향해 아가리를 들이밀면서 발톱을 휘둘러 다른 지네들을 견제했다.
길다란 꼬리는 등의 약점을 방어하기 위해 맹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다 놈이 갑자기 몸을 웅크리며 자세를 낮췄다.
금방이라도 도약할 듯한 동작이었다.
지금이다!
악어 괴물이 앞쪽의 지네를 향해 몸을 날리는 장면을 보며, 나는 재빨리 뒤로 돌아섰다.
그리고 지네들 중 한 마리를 조준한 뒤 산성 용액을 발사했다.
명중!
나는 다시 한 번 꽁무니를 조준하고 이번에는 악어 괴물을 향해 산성 용액을 발사했다.
산성 용액이 놈의 왼쪽 옆구리에 명중하더니 사방으로 튀었다.
이때쯤 거대한 악어 괴물은 이미 목표로 한 지네를 입에 물고 고개를 좌우로 흔드는 중이었다.
악어 괴물의 강인한 턱이 점점 더 깊이 파고들면서, 외골격이 부서지는 소름 끼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죽음의 문턱에 놓인 지네는 격렬하게 몸부림치며 온몸을 꿈틀댔다.
하지만 악어 괴물이 과감한 공격을 하느라 자신을 노출시키자, 내 산성 용액을 뒤집어쓴 놈을 포함한 다른 세 마리의 지네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앞으로 달려들었다.
놈들은 동족의 죽음에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 환희에 차서 꿈틀거리며 악어 괴물의 살갗에 이빨과 발톱을 박아 넣었다.
지네들 중 한마리가 몸을 웅크리더니, 꽁무니에 달린 가시를 악어 괴물의 등에 꽂았다.
어떤 종류의 독을 주입하는 게 분명했다.
악어 괴물은 분노로 포효하며 고개를 세차게 흔들어 물고 있던 지네를 두 동강 냈다.
반토막이 난 지네를 어둠 속으로 내던진 악어 괴물은 나머지 벌레들을 처리하려 했다.
하지만 내가 발사한 산성 용액 때문에 화상을 입은 데다, 지네의 독 때문인지 점점 움직임이 느려지고 있었다.
세 마리의 지네들은 어느새 악어 괴물로부터 떨어져서, 원을 그리며 그 주위를 맴돌았다.
이미 입힌 상처와 독이 적을 쓰러뜨릴 때까지 기다리려는 심산 같았다.
내 산성 용액에 맞았던 한 마리는 다른 놈들보다 좀 더 멀리 물러나서,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마 조금 전 자신을 공격한 적이 어디 숨어 있는지 찾는 듯했다.
구헤헤헤.
네놈 머리 위에 계시다!
나는 다시 한 번 산성 용액을 발사해서, 놈의 꼬리에 명중시켰다.
지네는 쉿쉿거리며 몸을 움츠리고 구슬 모양 눈을 굴리며 내가 숨어 있는 곳을 찾으려 했다.
백날 두리번거려 봐라, 멍청아!
여느 때라면 내가 이렇게 대담하게 굴지 않겠지만, 지네들의 사냥은 거의 성공 직전이었다.
나는 놈들이 나를 찾기 위해 다 잡은 먹잇감을 포기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다시 한 번 천장의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지켜봤다.
크게 다친 악어 괴물은 이제 거대한 턱을 벌리고 가쁜 호흡을 몰아쉬는 중이었다.
하지만 부리부리한 두 눈은 여전히 분노로 번뜩이고 있었다.
지네들은 강대한 적에게 합당한 경의를 보이며, 놈이 전진할 때마다 조금씩 뒤로 물러나서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
내 산성 용액에 맞은 놈은 부상이 꽤 심한 듯 느리게 움직였다.
놈은 악어 괴물로부터 충분히 거리를 벌리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공격에 나설 정도로 가깝지도 않은 어정쩡한 위치에 있었다.
악어 괴물은 이제 거의 빈사 상태인 듯, 더 이상 싸울 여력이 없어 보였다.
숨 쉬는 것조차 고통스러워 보일 정도였다.
악어 괴물의 흐릿한 두 눈은 마지막 목표, 내 공격에 부상을 입은 지네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크왕!
마지막 힘을 짜낸 악어 괴물이 죽기 전에 한 마리라도 더 데려갈 작정으로 부상당한 지네에게 돌진했다.
나머지 지네들이 악어 괴물의 뒤를 노리고 접근하는 사이, 부상당한 지네는 옆으로 몸을 피하려 했지만 산성 용액을 뒤집어쓰고 나서 너무 긴 시간이 지났다.
지네들이 시간을 끄는 동안 악어 괴물도 상당히 약해졌지만, 내 산성 용액 또한 놈의 껍질을 서서히 녹이며 피해를 입혔다.
그 상처로 인해 움직임이 느려진 지네의 몸뚱이를 악어 괴물의 날카로운 발톱이 갈랐다.
촤악!
지네는 악어 괴물의 공격을 받고 휘청거렸지만 쓰러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산성 용액으로 인한 피해에 발톱 공격까지 더해지자, 그야말로 심각한 상태가 되었다.
마지막 남은 힘으로 공격을 성공시킨 악어 괴물도 기력을 모두 소진했는지 바닥에 쓰러졌다.
내 작은 개미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완벽해!
멀쩡한 지네들이 사냥감을 마무리하기 위해 접근할 때, 나는 다시 한 번 꽁무니를 조준했다.
마지막 발사인 만큼 더욱 신중해야 했다.
푸슉!
산성 용액이 중상을 입은 지네에게 다시 한 번 명중했다.
지네는 화상으로 인한 고통에 몸부림쳤다.
어째서인지 나는 지네 몬스터들에 대해서는 거의 동정심이 일지 않았다.
놈들의 징그러운 외모 때문일까?
내가 그 정도로 외모지상주의적인 사고 방식을 가지지는 않았는데···
두 마리의 멀쩡한 지네들이 몸을 돌려 다친 동족을 살피더니, 이내 쓰러진 악어 괴물에게 다가가 숨통을 끊었다.
그 커다란 괴물이 숨을 거두는 순간, 나는 살짝 긴장했다.
···
시스템 메시지는 없었다.
나도 놈에게 피해를 입혔지만, 경험치는 전혀 얻지 못했다.
적에게 피해를 입히기만 해서는 경험치를 얻을 수 없다는 의미였다.
막타를 쳐야 했다!
[레벨 3 웅귀부스 스콜로펜드라를 처치했습니다.]
[경험치를 얻었습니다.]
[레벨 3이 되었습니다. 1 스킬 포인트를 얻었습니다.]
이렇게 말이다!
분명 악어 괴물이 피해의 80% 이상을 입혔겠지만, 내가 산성 용액으로 숨통을 끊었기 때문에 경험치를 얻은 것이다.
음하하하!
남아 있는 두 마리의 지네는 동족의 죽음에 별로 개의치 않는 듯했다.
놈들 중 한 마리는 즉시 가까운 벽에 위치한 동굴 안으로 달려갔다.
또다른 한 마리는 악어 괴물의 시체 주위를 맴돌며, 자신들이 손에 넣은 바이오매스를 지키기 위해 계속 쉿쉿거리는 소리를 냈다.
잠시 후 동굴 속에서 다섯 마리의 지네들이 몰려나와 재빨리 악어 괴물의 시체를 둘러쌌다.
그 중 한 마리는 내가 죽인 동족의 시체를 둥지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야!
그건 내가 죽인 거야, 이 더러운 도둑놈아!
나는 천장에 숨어서 지네들을 노려봤다.
[은신 스킬이 레벨 5가 되었습니다. 업그레이드가 가능합니다.]
오호, 이건 또 무슨 소리지?
이따가 이 업그레이드가 뭔지 알아봐야겠다.
지금은 일단 아래쪽 상황을 지켜봐야 하니까...
지네들은 힘겹게 얻은 바이오매스를 확보하기 위해 빠르게 움직였다.
악어 괴물은 물론, 싸움 도중 두 동강이 난 첫 번째 지네의 잔해까지 챙겨서 동굴로 돌아갔다.
정말이지 알뜰한 놈들이었다.
심지어 동족의 시체조차 버리지 않을 정도로···
일반적인 곤충의 습성을 고려하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많은 종들이 동족의 시체가 가진 소중한 양분을 낭비하지 않고 섭취했다.
게다가 이 던전 안의 생존 경쟁은 극도로 치열했다.
딱히 비난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저··· 저 역겨운 몬스터들에게 어울리는 행동일 뿐이다.
어쨌든 지네들이 매우 민첩하고 효율적으로 움직였다는 점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놈들은 사방에 득실거리는 경쟁자들을 피해, 빠르게 소중한 바이오매스를 자신들의 동굴로 운반했다.
하지만···
만약 나한테 제대로 된 입이 달렸다면 야비한 미소를 지었을 터였다.
멍청한 지네 놈들!
나는 속으로 음흉하게 웃으며, 종유석 기둥을 타고 내려갔다.
그리고 아까 악어 괴물이 반토막을 내서 던졌던 지네의 시체를 향해 다가갔다.
마지막 상품은 내 거다!
심연의 군단
웨이브의 원인은 수수께끼다. '대격변'으로 알려진 재앙이 시작된 때부터 던전 아래에서 생겨난 몬스터의 해일이 지상을 침범하는 일이 반복되어 왔지만, 우리는 대체 왜 갑자기 이런 몬스터 '웨이브'가 발생하는지 그 이유를 아직도 알아내지 못했다.
몇몇 학자들은 던전 안의 몬스터가 너무 줄어들어, 일반적인 생성으로는 적당한 – 무엇을 위해 적당한지는 알 수 없지만 - 개체 수를 유지하기 어려울 때 웨이브가 발생한다고 주장했다. 몬스터의 개체 수가 적을수록 웨이브 발생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증거들도 존재한다.
하지만 드물기는 해도, 던전에 몬스터가 가득한 시기에 웨이브가 발생했던 기록도 있다.
-리리아, 어비스 레기온의 로어마스터, 알버튼의 개인 기록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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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이 좋아 보이는군."
"전혀 좋지 않아."
"좋을 때가 있기나 한가?"
"시끄러워."
"그냥 보고일 뿐일세."
"헛소리. 궁정 전체가 지켜보는 가운데 하는 알현이 '그냥 보고'라고?"
티투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자네 고모님께서 그렇게 하기를 원하시는 데 난들 어쩌겠나."
알버튼이 인상을 찌푸리며 목을 죄는 옷깃을 손으로 잡아당겼다.
"내가 고모님과 만나기 싫어한다는 거 알잖아."
"레기온에 들어와서 정말 용감해졌군 그래?"
"닥쳐."
"닥치십시오, 사령관님이라고 해야지."
두 남자는 잠시 서로를 쳐다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티투스와 알버튼 둘 다 이런 종류의 공식적인 행사를 좋아하지 않았다.
티투스는 단추와 레이스가 잔뜩 달린 궁정 예복 안에서 거대한 어깨를 불편하게 움츠렸다.
티투스가 걸친 외투의 왼쪽 가슴에는 검은색 바탕에 푸른색 실로 레기온의 문장이 수놓아져 있었다.
우람한 팔 안쪽에는 거울처럼 반짝이게 닦아 놓은 의장용 투구를 끼운 채였다.
알버튼도 평소와 달리 우아한 로브를 입고, 수염을 짧게 깎은 뒤 기름을 발라 정리한 모습이었다.
레기온의 대외 활동, 특히 주둔 중인 국가의 귀족들과 소통하는 절차를 관리하는 부서에서 반항하는 로어마스터를 거의 의자에 묶어 놓다시피 하고 꾸민 결과였다.
티투스 역시 궁정에 출두하는 일이 그리 내키지 않았지만, 적어도 알버튼이 그런 꼴을 당하는 장면을 보자 즐거웠다는 사실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티투스와 알버튼은 대기실에서 시종이 자신들의 도착을 알릴 때까지 대기하는 중이었다.
불편한 옷차림으로 잠시 기다리자, 궁내부의 관리가 나타나 두 사람을 데리고 들어갔다.
알현실의 화려한 문 앞에 서자, 안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심연 군단의 사령관 티투스, 심연 군단의 로어마스터 알버튼!"
시종이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그러자 두 사람을 안내하던 관리가 사자 머리가 조각된 굵은 돌 지팡이를 세 차례 바닥에 내리쳤다.
티투스와 알버튼은 그 소리를 들으며 거대한 알현실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궁정의 시종들과 관리들, 귀족들이 좌우로 비켜서서 왕좌로 향하는 길을 내어주며, 두 사람을 주시했다.
거대한 아치형 창문들을 통해 들어온 햇빛이 화려하게 조각된 기둥들을 비추는 모습은 언제 봐도 인상적이었다.
리리아는 오랜 세월 번성해 왔고, 알현실은 그 부와 영향력을 매우 잘 반영하고 있었다.
왕좌 위에 앉아 있는 여인은 나이가 들었지만 그 눈빛에는 여전히 날카로운 지성이 드러났다.
베리타 여왕은 지난 서른 해 동안 현명하고 자비롭게 리리아를 다스려 왔고, 백성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리고 그 기간 동안 레기온에 변함없는 신뢰를 보여주기도 했다.
왕좌로 다가가면서, 티투스는 여왕의 주위에 모여 있는 신하들 사이에 그다지 마주하고 싶지 않은 얼굴이 끼어 있는 걸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마치 그런 생각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리리아 용병 조합의 수장인 코린이 티투스에게 도발적으로 윙크를 날렸다.
티투스는 한숨을 내쉬고 알버튼을 돌아봤다.
알버튼은 완전히 긴장한 표정으로 베리타 여왕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별 도움은 되지 않을 것 같았다.
티투스와 알버튼은 왕좌 앞에 서서 경례를 붙이고 부동 자세를 취했다.
"편히 쉬도록, 레기온."
베리타 여왕이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감사합니다, 폐하."
티투스가 절도 있게 대답했다.
여왕은 궁정의 시선이 집중된 탓에 거의 패닉 상태에 빠져 있는 알버튼에게 시선을 돌렸다.
"알버튼, 얼굴을 보니 반갑구나. 연구에 전념하느라 너무 오래 나를 찾아오지 않았잖니. 이렇게 정식 알현이 아니면 내 조카를 만나기도 어렵다니."
티투스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예상한 대로 여왕이 정식 알현을 고집한 까닭은 알버튼을 요새 지하에서 끌어내기 위해서였다.
이 멍청한 로어마스터가 가끔이라도 몸단장을 하고 궁정을 방문해 자기 고모를 기쁘게 해줄 생각을 도통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왕이 이렇게 거창한 자리를 마련한 이유는 좀처럼 얼굴을 내밀지 않는 조카를 교묘하게 벌 주기 위해서가 분명했다.
"죄송합니다, 폐하··· 어, 그러니까, 고모님."
알버튼이 웅얼거렸다.
말을 듣지 않는 조카가 곤란해 하는 모습에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베리타 여왕이 주변의 신하들에게 말했다.
"오늘 이 자리에는 도시의 주요 인사들이 모였네. 던전 내부의 상황과 향후 대처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서지."
여왕이 다시 티투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설명을 부탁하네, 티투스 사령관."
여왕의 말에 알현실 안이 조용해지자, 티투스가 목청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던전 내부의 마나 레벨이 빠르게 증가하고 있습니다. 아마 앞으로 사나흘 안에 첫 번째 층에서 웨이브가 발생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에 더해, 보초를 서던 군단병들이 지상 가까이 나온 몬스터를 목격했습니다. 그리고 이 몬스터의 특징 때문에, 레기온은 던전의 심부로 원정을 벌여 놈들의 둥지를 제거하고자 합니다.
레기온의 자원을 몬스터 둥지 소탕에 투입하기 위해, 그동안 웨이브로부터 도시를 보호할 병력 지원을 폐하께 공식적으로 요청하는 바입니다."
티투스가 보고를 마치자, 몇몇 관리들이 드러내 놓고 웃는가 하면 못마땅한 표정으로 인상을 찌푸리는 자들도 있었다.
용병 조합의 공식적인 가죽 갑옷에 고급스런 푸른 망토를 걸친 코린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제가 발언해도 되겠습니까, 폐하?"
그녀가 여왕을 향해 물었다.
"그러게."
여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용병들의 지도자가 옷매무새를 바로한 뒤 알현실 안의 사람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지난 백 년 동안 리리아 시는 베리타 여왕 폐하와 그 선조들의 현명한 통치 아래 번영해 왔습니다. 시민들은 대재앙 이래 천 년 동안 찾아보기 어려웠던 평화와 번영을 누렸죠."
코린의 말을 듣고 티투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짐작이 갔기 때문이다.
"그 기간 동안, 심연의 군단이 줄곧 던전 내부의 활동에 대한 감시와 관리 권한을 행사해 왔습니다. 하지만 군단의 지속적이고 고압적인 방해 행위에도 불구하고, 던전 탐사는 리리아의 경제적 초석이 되었죠. 모두 용병 조합의 용감한 구성원들이 던전 내부의 자원을 채취한 덕분입니다."
코린이 티투스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리고 지금 레기온은 고작 개미 한 마리에 기겁해 위대한 여왕 폐하께 도시 방어를 위한 지원을 요청하며, 스스로 자신들의 의무를 다할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자인하고 있습니다."
여왕이 눈썹을 치켜들었다.
"하고 싶은 말이 뭔가, 코린?"
용병 조합의 수장이 여왕에게 고개를 숙이자, 그녀의 풍성한 갈색 머리카락이 폭포처럼 아래로 쏟아졌다.
"용병 조합이 직접 던전 출입에 대한 권한을 보유하고, 구성원을 직접 감독할 수 있게 해 주시기를 폐하께 다시 한 번 청원하는 바입니다. 연합 상인 길드 또한 이 청원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코린이 손짓하자, 알현실에 있던 몇몇 비인간 종족들 중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종족의 기원을 보여주는 은빛의 물처럼 투명한 피부를 한 브라시안 상인이었다.
"저희 길드는 던전 탐사에 대한 제한을 완화하면 2년 안에 발생하는 수익이 두 배가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폐하."
브라시안의 목소리는 인간들에게 거의 노래처럼 들렸고, 말을 마친 뒤에도 알현실 안에 메아리처럼 울렸다.
여왕이 신중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그 청원은 기각하지, 코린. 만약 개미 몬스터의 출현이 별 일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역사책을 뒤져보라고 권하고 싶군.
우리의 자랑스러운 도시는 옛 왕국의 폐허 위에 세워졌네. 그 왕국은 던전의 위험성을 과소평가하는 실수를 범한 탓에 멸망했고.
던전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그 모든 자원에도 불구하고, 던전은 광산이나 농장이 아닐세. 던전은 위협이고, 그에 걸맞게 취급해야 해."
여왕이 티투스를 향해 손짓했다.
"역사책을 읽어보면 몬스터들이 점령했던 이 땅을 해방시킨 장본인이 심연의 군단이라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을 걸세. 때문에 리리아의 지배자는 언제나 군단을 신뢰해 왔지."
코린이 우아하게 왕좌를 향해 절했다.
"저는 과거의 역사보다는 미래의 번영에 더 관심이 많습니다, 폐하. 물론 던전을 경계할 필요는 있지만, 무작정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여왕은 손을 흔들어 그 말을 물리치고 왕좌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알현실 안의 모든 시선이 여왕에게 모였다.
"웨이브가 지속되는 동안 왕실 경비대를 레기온의 지휘 아래 배치하도록 하지. 그리고 던전을 감독할 권한이 레기온에게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공언하겠네. 사령관, 이 몬스터들의 둥지를 확실히 소탕할 수 있겠나?"
티투스가 주먹을 가슴으로 가져가 경례를 붙였다.
"저희는 어비스 레기온, 심연의 군단입니다, 폐하."
티투스는 코린을 돌아보며 말했다.
"지난 삼천 년에 걸쳐, 판게라 전역의 모든 국가에서 이 한 가지는 언제나 분명했습니다. 땅 밑에서는, 그 어떤 상대도 레기온의 힘을 당해낼 수 없습니다."
+
지네의 시체는 그리 보기 좋은 모습이 아니었다.
두 동강 난 몸뚱이 안쪽에서 내장이 온통 쏟아져 나왔고···
으으···
그래도 이 끔찍한 잔해 안에 있는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달콤한, 달콤한 바이오매스!
나는 애써 마음을 다잡고 시체를 한 번에 반토막씩 내 둥지로 옮겼다.
···이제 이걸 먹어야겠지.
맙소사 정말 끔찍한 식사다.
너무 역겨워서 거의 굶는 편이 낫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거의··· 말이다.
사실 '거의'가 핵심이다.
굶어 죽을래 아니면 으깬 지네를 먹을래?
그럼 먹어야지!
[1 바이오매스를 얻었습니다.]
음.
보통은 한 마리당 바이오매스 하나인 모양이로군.
나는 다른 때와 달리 남아 있는 잔해에 관심을 가졌다.
내가 몬스터의 모든 부위를 먹을 수는 없었다.
이빨, 껍질, 발톱 같은 것들은 너무 단단해서 소화시킬 수가 없으니까 말이다.
그럼 이 조각들은 다 어떻게 되는 거지?
그렇게 한 시간 정도 기다리자, 희미한 푸른빛이 남아 있는 조각들을 감쌌다.
그리고 내 눈 앞에서 그 조각들이 땅 속으로 스며들었다.
이게 무슨···
소름 끼쳐!
시체의 잔해가 이렇게 곧바로 토양에 흡수된다고?
그럼 이 동굴 자체가 적극적으로 몬스터의 시체를 흡수한단 말인가?
뭐 때문에?
정보를 더 얻을수록 의문이 더 늘어만 간다···
뭐, 어쨌든 지금 중요한 일은 그게 아니지.
내게는 이제 세 개의 바이오매스와 하나의 스킬 포인트가 있었다.
먼저 바이오매스부터···
[눈을 성장시키겠습니까? 3 바이오매스가 소모됩니다.]
좋아, 그렇게 해···
으으으으.
그갸갸갸갸갸갹.
간지러움이 지난 번보다도 더 심하잖아아아아!
어떻게??
어떻게 거기서 더 심해질 수가 있지!?
마치 벌떼 전체가 내 눈알이 종족의 숙적이라고 판단한 듯한 느낌이었다.
내 눈에 엄청나게 강렬한 간지러움이 느껴졌다.
한참 동안 바닥을 구르고, 몸부림치고, 벽에 머리를 부딪힌 끝에 겨우 간지러움이 사라졌다.
휴.
그럼 이제 스킬 포인트를 사용하자.
[스킬 포인트를 사용하겠습니까?]
당연하지!
메뉴가 떠오르자 또다른 수수께끼 하나가 풀렸다.
아까 은신 스킬이 레벨 5가 되어서 업그레이드가 가능하다는 메시지를 접했는데, 구매 가능한 스킬 목록을 보자 새로운 선택지가 하나 생긴 상태였다.
[은신 -> 상급 은신. 비용 1 스킬 포인트: 업그레이드된 은신 스킬로, 스킬의 소유자에게 잠재적인 적들의 주의를 끌지 않는 패시브 능력을 추가로 부여합니다. 이 능력은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을 때 크게 증가합니다.]
오호라!
그러니까 스킬 레벨이 5가 되면 스킬 포인트 하나를 써서 상위 버전으로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거로군?
흥미로워!
당연히 이 스킬을 선택해야지.
눈에 띄지 않는 건 죽지 않는 것과 같은 뜻이니까!
새로운 패시브도 아주 유용해 보이고···
이제 내 상태창은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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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 3
힘: 15
강인함: 12
영리함: 25
의지: 18
HP: 30
MP: 0
스킬: 땅파기 레벨 4; 산성 용액 발사 레벨 3; 잡기 레벨 3; 물기 레벨 3; 상급 은신 레벨 1; 터널 센스 레벨 3
변이: 눈 +3, 더듬이 +2, 산성 용액 +1
종족: 갓 부화한 일개미 (포르미카)
스킬 포인트: 0
바이오매스: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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