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비밀결사
백룡 길드의 본부는 높고 쾌적한 빌딩이었다.
관리가 잘 되어있어서 금방 완공된 것 같은 느낌.
굳이 와보고 싶진 않았지만, 아침에 운전기사가 기습적으로 실어줬다.
고속 엘리베이터에서 딴지를 걸어봤자 이미 늦었다.
"갑자기 여긴 왜 온 거죠?"
"로완 님께선 백룡길드에 가입해주셔야겠습니다. 이제부터는 아비가일 님과 함께 움직일 때가 많을테니까요."
"아..."
현재 재단 내에서 내 역할은 아비가일의 에스콰이어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이게 맞을 것이다.
운전기사는 계속해서 설명했다.
"곧 다가올 승급시험은 치루지 않아도 좋습니다. A급으로 자동 합격될테니까요."
B급도 아니고 A급 승급시험을 그냥 넘겨버리다니.
재단이 헌터 협회에 끼치는 영향력은 엄청났다.
한국 최강의 헌터이자 1위 길드의 주인인 아비가일.
그런 그녀가 재단의 핵심 간부인만큼, 당연하다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어쩔 수 없네. 이제부터 헌터 활동은 겉치레 정도만 할테니까...'
계약서에 서명한 나는 곧장 내 사무실로 안내받았다.
아비가일이 통째로 사무실로 쓰고있는 최상층의 바로 아래층이다.
"A급 헌터에겐 개인 사무실이 주어집니다. 당분간은 제가 서번트로서 전담하겠습니다."
"서번트? 에스콰이어나 나이트의 행동을 보좌하는 역할인가요?"
"빨리 배우시네요. 서번트는 레이븐과 함께 재단에서 가장 인원수가 많습니다."
전투는 재단의 기본 방침이 아니다.
재단이 가장 중시하는 것은 비밀의 유지와 예방.
지금까지는 첩보 조직이라는 인상이 압도적으로 강하다.
지난번처럼 사교도들과 직접 전투를 벌이는 것은 최후의 방법이다.
"백룡 길드에 있는 재단 회원들을 알고 싶으십니까?"
"아뇨... 어차피 일일이 구분할 자신도 없고."
아비가일과 눈앞의 서번트를 제외하곤 죄다 일반인으로 취급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처음부터 모르고 있으면 내색할 수도 없다.
"현명하시군요. 어차피 상대쪽에서 로완 님을 알아볼 겁니다."
"앗, 로완이 왔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온 아비가일이 반갑게 인사했다.
우리는 그대로 차를 타고 재단의 지부로 향했다.
그곳은 보통 '볼트'라고 불린다.
나는 여전히 눈가리개를 쓰고 이동해야 했다.
[우리들의 세계는 종이로 된 성이나 마찬가지다.]
내용을 알고 있으니까 저 사악한 필기체도 어찌어찌 읽을만하다.
그대로 대문을 넘자 프리스트 토시아키가 인사헀다.
지난번처럼 깔끔한 백의차림이다.
"로완 씨. 어서 오십시오."
"안녕하세요 토시아키 씨."
토시아키의 뒤에는 애콜라이트로 보이는 남녀들이 여럿 있었다.
개중에는 지난번 실습 시험을 함께했던 윤하린도 보였다.
아비가일을 주제로 막말을 해버려서 첫인상을 망쳤지만, 그 뒤로 보여준 모습은 그럭저럭 괜찮았다.
그녀도 나를 알아보곤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앗, 에스콰이어 로완 님. 다시 만났네요."
"... 안녕하세요."
지난번에는 다신 못 볼 것처럼 인사를 나눴지만...
에스콰이어와 애콜라이트는 곧잘 만날 수 있는 사이인 것 같다.
오늘은 재단 활동에 필요한 지식을 배우는 날.
프리스트 토시아키가 직접 수업을 시작한다.
나는 물론이고 다른 애콜라이트들도 자리를 잡는다.
'과연 어떤 걸 배울 수 있을지...'
나는 아직 턱없이 약하다.
외신들을 물리치기 위해선 물 불을 가릴 처지가 아니다.
다행히 토시아키의 목소리는 제법 듣기 편하다.
"앞서 서번트께서 설명해주셨겠지만, 그림자 재단은 오직 외신을 막기 위한 조직입니다. 외신을 막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합니다! 오늘은 정확히 뭘 어떻게 해야하는지 배워봅시다."
"오오..."
"사교도 학대자. 학대의 장인 프리스트 토시아키의 수업을 들을 수 있다니!"
애콜라이트들은 벌써부터 감격했다.
다른 지부에서 유학온 인원도 있는 모양이다.
"가장 먼저 묻겠습니다. 인류에게 있어서 최악의 상황은 무엇입니까?"
"그야... 상위의 외신이 온전하게 소환되는 것입니다."
윤하린이 손을 들며 발언하자 토시아키가 피식 웃었다.
"좋습니다. 80점 정도의 대답이네요. 사실 하위의 외신은 인류의 힘으로 어떻게든 격퇴가 가능합니다. 문제는 상위의 외신입니다."
뱀들의 어머니나 디곤같은 존재들을 말하는 것이리라.
"물론, 모든 외신의 소환은 반드시 막아야 합니다. 하위의 외신이 상위의 외신을 데려올 수도 있으니까요."
"그럼... 어째서 80점인가요?"
"인류에게 있어 최악의 상황은, 상위의 외신이 장기적으로 소환되는 것입니다."
토시아키가 진지한 어조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보통 외신은 다른 차원에 오래 머무를 수 없습니다. 상위의 외신이라면 대형 사교도 집단이 년 단위로 준비해도 5분 남짓입니다."
"..."
상위의 외신이 5분 남짓 강림해도, 인명피해는 최소 수천만 명...
재수없으면 억 단위의 인명피해가 나올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곧 인류의 멸망을 의미하진 않는다.
재단에게 있어 최악이라곤 볼 수 없다.
"하지만, 외신을 오랫동안 차원에 묶어둘 수 있는 시설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신전이군.'
한 발짝 앞서 되뇌이자 토시아키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현재 지구에는 외신의 신전이 단 하나도 없습니다."
'오... 이놈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자기네 일은 똑바로 하는구나?'
이건 확실히 감탄할만하다.
자랑스러워해도 좋은 부분이다.
"만약 외신의 신전이 건설되면 지구는 혼돈 그 자체가 될 겁니다. 사람들은 외신에게 의존하여 그들의 노예나 다름없어지겠죠."
그것은 소인족 세계를 보면 아주 잘 알 수 있다.
외신들의 기분에 의해서 나라가 지워지고 역사가 바뀌는 혼돈의 도가니.
그렇게 되어버리면 여러모로 끝장이다.
"재단의 궁극적인 목적은 현 상황을 최대한 길게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 방법 중 첫 번째가 바로 예방이죠."
외신에 대한 정보를 차단하여 소환 자체를 막는다.
가장 모범적인 방법이지만, 언제나 성공할 수는 없다.
만약 레이븐과 서번트들이 작전에 실패하면 내가 나설 차례다.
"예방에 실패하면 진압 단계로 넘어갑니다. 외신 소환의 원흉인 사교도들을 처리하고, 신전이 있으면 부숩니다. 관련 지식도 처분합니다."
"..."
"일반적인 적들... 그러니까, 총알과 군인으로 해결이 되는 적들은 크게 신경쓰실 필요가 없습니다. 놈들은 풋맨들이 알아서 처리할 겁니다."
토시아키의 시선은 내쪽으로 향해있었다.
이제부터는 오롯이 나를 위한 강의다.
"하지만 외신의 하수인은 특별한 방법으로만 퇴치할 수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난번에 한 마리 봤어요."
"그럼 이야기가 빠르겠군요. 이제부터 한 종류씩 차근차근 설명해드리죠. 먼저 언데드입니다."
달칵.
깨끗한 테이블 위에 큼지막한 리볼버가 놓였다.
재단에서 직접 제작한 듯, 이질적이면서도 세련된 디자인이다.
"아토카가 소멸됐으니, 당분간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만... 가장 쉬운 상대니까 먼저 짚고 넘어가죠."
"잠시만요! 아토카가 소멸됐다구요? 완전히?"
애콜라이트 한 명이 내 대신 질문하자 뒤쪽에서 구경하던 아비가일이 엷게 웃었다.
"예, 하위의 외신은 아비가일 님의 무기로 완전히 처리할 수 있습니다."
역시. 어제 헤르반에게서 들었던 말이 사실이었다.
아토카는 아비가일에게 당해서 완전히 소멸됐다.
"애초에 언데드 계열 외신들은 대처가 비교적 쉽죠. 피를 못 나눠주니까 추종자 만들기도 번거롭고... 하수인들은 대부분 이걸로 처리가 가능합니다."
달칵.
매우 고풍스럽게 세공된 탄환이 테이블 위에 올라왔다.
토시아키가 내게 하나를 건넸다.
"살펴보십시오."
"이게 뭐죠? 보통 총알은 아닌 것 같은데."
"성수로 담금질한 철을 은으로 도금해서 특별한 주문과 문양을 새겨넣고, 성인의 뼛가루를 섞은 겁니다. 실전에선 어떤 놈이 나올지 몰라서 그냥 다 넣었죠."
"..."
의외로 굉장히 실용적이고 사치스런 조직이었다.
"99%의 언데드는 이걸로 구제가 가능합니다."
"이거 맞고 안 죽는 1%는 뭐하는 놈들이죠?"
"아토카같은 존재들이죠."
철컥.
리볼버를 들어서 무게를 가늠해본 나는 다음 강의로 넘어갔다.
"다음은 에스콰이어 로완께서 지난번에 상대하셨던 어인족이군요. 그 흉물은 아마 신전의 가디언이었을 겁니다."
"가디언..."
"예, 이름 그대로 신전을 지키는 놈들이죠. 신전의 건설에 앞서 가디언부터 소환한 겁니다."
그러고 보니 내 신전에도 가디언 하나쯤은 있는 게 좋을 것 같다.
헬리온 왕국의 전사들은 도통 의지가 안 된다.
토시아키의 강의를 경청하며, 가디언에 대해서 고민해봤다.
'과연 어떤 종류의 가디언이 좋을까...'
"어인족은 웬만하면 불로 상대하시는 게 좋고, 악마족은 성화. 성수는 의외로 효과가 없습니다."
"... 가디언 중 가장 까다로운 종류는 뭐죠?"
이런 건 전문가에게 물어보는 게 낫겠지.
즐거운 표정으로 잠시 고민하던 토시아키가 어렵지 않게 답했다.
"금속 골렘은 정말로 상대하기 힘들죠. 총알이나 폭탄도 잘 안 먹히고, 제대로 만들면 약점이랄 것도 거의 없으니..."
"음, 금속 골렘이라."
결정했다.
내 신전의 가디언은 금속 골렘으로 해야겠다.
볼트에서의 교육은 정말이지 값졌다.
외신활동에서도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는 지식이 한가득이다.
"그럼, 이쯤에서 로완 님의 장비를 한 번 살펴볼까요? 작전에 필요한 장비들은 서번트나 애콜라이트들이 갖다주겠지만요."
"제 장비요?"
나는 품 속 깊이 숨겨둔 뱀 송곳니 단검을 떠올리며 혀를 찼다.
그 때, 아비가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만하면 됐어."
"아, 벌써 시간이 다 됐습니까? 그럼 오늘은 이만..."
"로완이, 가자."
"... 수고하셨습니다."
혼란스러운 기분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비가일은 뱀 송곳니 단검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다.
'내가 들키지 않도록 도와준 건가?'
아비가일을 따라서 현관을 나서자 예의 문구가 다시 눈에 박혔다.
아무래도 기시감이 들어서, 헤르반에게 물어봤다.
분명 녀석의 입에서 들었던 것 같다.
'헤르반.'
[예, 주군.]
'우리들의 세계는 종이로 된 성이나 마찬가지다. 기억하느냐?'
[물론입니다. 대소환사 에이코그가 사라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말 아닙니까.]
'!'
대소환사 에이코그.
분명 그런 이야기를 들었지.
내 추종자인 타샤의 재능이 에이코그와 비슷한 수준이라고 했다.
소인족 세계의 실종된 대소환사가 남겼던 말이 그림자 재단의 모토가 됐다.
과연 우연일까?
그럴 리가 없지.
재단은 어떻게든 에이코그와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맞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수상한 것이 당연한 단체라지만 그걸 감안해도 너무 수상하다.
철컥.
서번트가 운전하는 차에 타자 그녀가 백미러로 나를 힐끔거렸다.
같은 조직원들이라도 서로를 감시하는 형국이다.
내가 안대를 착용하려 하는데 아비가일이 그것을 막았다.
"됐어. 얼른 가자."
"네."
단원들은 기본적으로 수평적인 관계라지만, 아비가일은 특별취급이다.
대체할 수 있는 인력이 아예 없는 나이트라서 그런 걸까?
가문의 입김도 조금 작용하는 것 같다.
"로완이는 우리집에서 밥 먹고 가자."
"... 굳이?"
"로완이랑 밥을 못 먹으면 업무효율이 떨어질 것 같아."
웃기시네.
아비가일의 업무효율은 언제나 100%다.
그냥 칼 한 번 휘두르면 다 죽는데 무슨.
나는 아직 이 녀석의 헌터 능력이 정확히 뭔지도 모른다.
내 앞에선 굳이 능력을 사용할 필요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제 직장 상사인지라 무턱대고 거절하기도 그렇다.
단둘이서 물어보고 싶은 것도 있다.
"... 알겠어요 나이트 님."
"좋아!"
"..."
백미러에 서번트의 놀란 눈이 반사됐다.
아비가일이 이런 식으로 남을 대하는 게 흔한 일은 아니다.
나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체 하며 돌아가는 길을 차분히 살펴봤다.
그런데, 그 때 다시금 헤르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비밀결사에서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이번에는 정문으로 당당히 찾아왔군요.]
'비밀결사?'
[예, 외신을 막기 위해서 활동하고 있는 그...]
'아...'
순간 머릿속에 번갯불이 쳤다.
지구에 그림자 재단이 있듯이, 소인족들의 세계에도 비슷한 비밀조직이 존재한다.
전설의 세 모험가를 파견해서 숲의 요새를 습격했던 바로 그놈들이다.
'생각해보니 저쪽 세계에서 훨씬 먼저 만났군. 나를 꼬드기려 온 건가?'
척안의 로완은 외신치곤 대화가 잘 통하는 것으로 알려져있으니 협력을 구하러 온 것일지도 모른다.
'헤르반. 곧 갈테니 손님으로 대우하라.'
[예. 정중하게 대우하되 감시는 하겠습니다.]
'바로 그거다.'
나는 걱정반, 기대반의 심정으로 새로운 만남을 기다렸다.
29화. 결사단 만들기
이른 아침.
나는 시현 공방으로 출근했다.
어제 아비가일에게 너무 오래 붙잡혀 있어서, 소인족 비밀결사와의 회담은 조금 미뤄졌다.
대신 지금, 그녀의 서번트가 내 집을 점검해주고 있다.
혹시라도 도청장치 따위가 있을까봐 살펴보는 것이다.
덕분에 시간이 좀 비어버린 나는 가디언 골렘의 재료를 찾아보러 왔다.
헤르반의 말에 의하면, 금속 골렘을 만들기 위해선 핵이 되는 금속을 정해야 한다고 한다.
강철로 만들면 강철골렘이 되고, 황동으로 만들면 황동골렘이 되는 식이다.
시현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내게 인사했다.
"왔냐?"
"지난번에 그 폐기품 챙겨왔어."
"거기 대충 놔둬. 또 필요한 건 없어?"
"장비는 괜찮은데, 금속을 좀 찾고 있어."
"금속?"
내 이야기에 흥미를 보인 녀석이 작업대에서 시선을 올렸다.
늦지 않게 미리 준비해놓은 변명을 꺼내들었다.
"요즘 염동력 훈련 중이라... 뭐 튼튼한 금속같은 거 없을까?"
"훈련용? 순수하게 강도만 따지는 거야?"
철컥.
시현이 열쇠로 벽장을 열자 제법 크고 두꺼운 금속판이 종류별로 몇 개나 들어있었다.
진짜 별 게 다 있구나 싶다.
"이게 다 뭐야?"
"재료 샘플. 방어구용으로 만들어놓은 거야."
녀석은 은색의 금속판을 하나 꺼내들었다.
"이게 티타늄. 항공기 재료로 자주 쓰이는 거다."
"오, 이게 그렇게 튼튼하다면서?"
"사실 티타늄은 그렇게까지 튼튼하진 않아. 무게가 가벼워서 그렇지."
슬쩍 들어보니까 확실히 가볍다.
나는 그대로 염동력을 끌어올려서 티타늄판을 향해 쏘아냈다.
쩌어억!
철이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금속판에 자그마한 구멍이 뚫렸다.
"확실히 약하네."
"잠깐, 아무리 그래도 합금인데 그걸 뚫었다고?"
시현이는 내가 B급인 줄 알고 있었는지라 크게 당황했다.
"훈련장에서 측정해보니까 이미 A급 수준이라던데? 그래서 다음 승급시험에 응시하려고."
"이야, 너 진짜... 좋아. 그럼 이걸로 해봐. 텅스텐 중합금이야."
"텅스텐?"
내가 좀 머쓱해질 정도로 감격한 시현이 훨씬 더 무거운 금속판을 안겨줬다.
"이건 전차 장갑판으로 쓰여."
"그렇게 들으니까 확실히 있어보인다."
하지만 나는 이제 한국에 7명뿐인 A급 헌터다.
이런 것도 못 뚫어서야 부끄럽다.
나는 염동력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리며, 가상의 점을 향해서 극한까지 집중시켰다.
콰지직!
제법 두꺼운 금속판을 가까스로 관통시켰다.
시현은 살짝 어이가 없는 표정이었다.
"A급 염동력자 중에서도 이걸 뚫을 수 있는 놈은 거의 없을텐데..."
"근데 우리가 입는 전투복은 왜 그 모양이야?"
"텅스텐 중합금은 전투복에 못 써. 이건 너무 무겁고, 연성이 약해서 충격을 받으면 깨져버리거든. 그럼 착용자는 파편 때문에 다치겠지?"
"아하."
초보자의 눈높이로 설명해준 시현이 구멍뚫린 금속판을 휙 던져버리곤 다른 곳으로 향했다.
"텅스텐보다 단단한 거라면... 이거다."
녀석이 꺼내든 것은 기묘하게 빛나는 금속 주괴였다.
내 주먹보다 조금 더 큰데, 어두운 색을 띄고 있다.
"이건 또 뭔데?"
"시혀니움."
"..."
시현이는 아주 뿌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정말 내키지 않는 심정으로 다시 물어봤다.
"... 시혀니움? 정말 그게 최선이었어?"
"아직 설명도 안 했잖아."
"네가 직접 능력을 써서 만든 특수금속 같은 거겠지 뭐."
본인이 만든 장비에도 이름을 잘 안 붙이는 놈이니까 뻔하다.
정곡을 찔린 시현이 내 눈을 살짝 피하며 주괴를 건네줬다.
아까의 텅스텐 합금보다 훨씬 묵직하다.
"닥치고 뚫어봐."
"이건 너무 두꺼운데."
"귀퉁이만 노려도 되니까 한 번 해보라고."
콰드득!
내 염동력의 창에 꿰뚫린 주괴가 크게 움찔거렸으나...
정작 표면에는 자그마한 흠집하나 없었다.
단순히 단단한 것이 아니라, 내 힘에 반응하는 것 같다.
"이거 뭐야? 느낌이 좀 다른데?"
"적응형 금속. 공격의 종류에 따라서 성질을 바꿔. 지난번에 네가 줬던 독극물에서 아이디어를 얻었지."
"그런 게 가능해?"
"시제품 단계는 벗어났어. 이제 단가만 좀 낮추면 돼."
시현은 아예 주괴를 넘겨줬다.
"가져가. 부수는데 성공하면 말하고."
"정말 가져가도 돼?"
"그래. 근데 시혀니움 진짜 별로냐?"
"이름 바꿔라 진짜. 네 명예를 위해서 말하는 거야."
다른 건 다 만들어도 이름은 잘 못 만드는 것 같다.
저 어설프게 애교부리는 것 같은 이름이라니.
'고맙다 시현아. 이걸로 최강의 가디언을 만들어볼게. 겸사겸사 지구도 좀 지키고...'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게 된 나는 묵직한 품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때마침 현관을 나서던 서번트가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한다.
"도청장치는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조심하십시오. 요즘 집음기 성능이 장난 아니니까요."
"집음기요?"
"네. 위층과 아래층, 옆집은 가까운 시일 내에 수색할 예정이지만... 아파트 동 건너편에서 도청을 하면 방법이 없습니다."
"... 명심하죠."
남의 집을 마음대로 수색하시겠다?
아주 막 나가시는군.
재단의 사람들은 준법정신따윈 전혀 없는 것 같다.
사실 이 여자도 좀 의심스럽지만...
아비가일이 나를 도와주라고 누누이 당부했으니 당장은 믿어도 될 것이다.
"만약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언제든지 연락주십시오."
"알았어요."
그녀를 배웅하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몇 시간이고 도청 장치나 카메라를 찾아봤지만...
그 비슷한 것도 찾아볼 수 없었다.
나름대로 찾는 방법을 공부해봤는데도 성과가 없다.
'서번트가 새로 설치해놓진 않은 건가...'
덕분에 이제 겨우 외신활동을 재개할 수 있게 됐다.
'헤르반, 불러라.'
[오직 당신의 이름을 외칩니다!]
파아앗!
숲의 요새에 도착하자 소인족들이 엄숙하게 무릎을 꿇고 있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역시 이방인들이다.
숲의 요새를 통해서 내게 만남을 청해온 비밀결사원들이 넙죽 엎드려 있다.
요즘은 자잘한 기도를 받지 않고 있으니까, 달리 내게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녀석들의 앞에 죄인처럼 꿇어앉아 있는 것은 전설의 세 모험가들이었다.
아무래도 옛 인연때문에 안내역을 맡게 된 것 같다.
나는 평소 헤르반이 앉던 자리에 앉아서 인사했다.
"모두 잘 왔다. 이번에는 제대로 정문으로 들어왔구나."
"로완이시여, 용서해주십시오!"
비밀결사의 대표로 보이는 사내가 큰 소리로 외쳤다.
"미천한 저희들이 너무 성급했습니다! 당신께서 이런 분인 줄 아셨다면 그런 무례를 저지르진 않았을 것입니다."
"이런 분?"
"예, 해신 데아곤을 물리치고 헬리온을 지켜주신 분! 세계의 수호자시여! 당신이야말로 저희가 찾아헤메던 존재입니다!"
후드 속에서 흐뭇하게 웃으며 속으로 박수를 쳤다.
이 녀석들은 내게 협조를 구하러 온 것이 맞다.
그림자 재단은 모든 외신들을 배제한다는 행동방침을 가지고 있지만...
소인족들의 세계는 다르다.
이미 신전이 수도없이 세워진데다, 지금도 우후죽순처럼 만들어지고 있다.
외신의 도움 없이는 외신을 몰아낼 수 없는 상황이다.
이 상황에서 그림자 재단처럼 융통성 없게 운영하면 망한다.
'나쁘지 않군.'
어차피 다른 외신들은 모두 나의 경쟁자요, 적이다.
녀석들을 알아셔 견제해주겠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다.
"... 내게 무엇을 원하지?"
"외신들에게 맞서기 위한 힘과 지식을 원합니다! 세계의 수호자시여!"
비밀결사는 거듭 수호자란 칭호를 강조했다.
"저희들의 세계를 보십시오! 온갖 외신들이 난립하여 혼돈의 도가니가 된 이 꼴을! 사람들은 외신들에게 의존하여 발전을 멈추고, 생각하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이대로 가면 온 세상이 신들의 나라처럼 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무엄하다."
헤르반이 살짝 나서려 했지만 내가 그를 제지했다.
저 녀석의 말에는 틀린 구석이 전혀 없었다.
"저희 결사의 비원은 단 하나, 인간의 시대를 되찾는 것입니다! 부디 저희를 불쌍히여기시어 힘과 지식을 선사하소서!"
"..."
나는 전설의 세 모험가를 슬쩍 돌아봤다.
이 세계에도 그림자 재단같은 조직을 만들게 되는 건가?
썩 나쁘진 않을 것 같다.
내가 즉석에서 지어냈던, 세계의 수호자라는 칭호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그림자 재단에서 얻은 지식을 이렇게 빨리 써먹을 수 있을 줄은 몰랐다.
"좋다."
"오오오!"
"단, 우리들의 협력은 비밀로 하는 것이 좋겠다. 서로를 위해서 말이지."
"물론입니다!"
외신을 적대하는 비밀결사가 외신의 도움을 받는 것도 좀 웃기다.
나로서도 다른 외신들의 관심을 받고싶진 않다.
"결사단 내부에 비밀조직을 만들겠습니다. 오직 그곳에서만 로완님과의 협력을 논의하도록 하죠."
"그래. 으음?"
담담히 동의했던 나는 다음 순간 머릿속에 번갯불이 치는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림자 재단 내부의 이너서클.
재단의 고위직만 소속되어있다는 조직에서 묘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설마, 그림자 재단 놈들도...'
아니다.
아직 증거가 너무 부족하다.
섣부른 억측은 위험하다.
애써 동요를 감추고, 결사단을 위한 선물을 준비했다.
"너희들의 이름은 결사단이면 되겠지?"
"장막 속의 결사단입니다."
"좋다, 결사단. 그럼 먼저 내 피를 하사하겠다."
손쉬운 의사소통이 가능하도록, 결사단의 대표에게 피를 한 방울 떨어뜨렸다.
이어서 자그마한 혈액 앰플을 건넸다.
"이것은 결사단 전사들의 몫이다. 신중하게 사용하라. 성과를 보이지 못하면 두 병째는 없을 것이다."
"물론입니다!"
"필요한 지식은 차차 전수해줄 것이다. 또 필요한 것이 있나?"
"부끄럽사오나 결사단에 은이 너무나도 부족합니다! 외신들의 하수인들을 상대하기 위해선 은이 필수적인데... 사악한 외신들이 은광을 보이는 족족 무너뜨려버렸습니다."
"은? 내가 해결해주겠다."
은은 진짜 헐값이다.
지난번에 샀던 10g짜리 골드바가 100만원 정도 했는데, 은은 1kg에 100만원이 조금 넘는 수준.
"감사합니다 로완이시여! 결코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결사단장과 전설의 세 모험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물러갔다.
회담을 끝낸 나는 비로소 추종자들에게 집중할 수 있었다.
"헤르반. 신전 건설은 어떠냐."
"문제없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다만, 가디언의 제작을 늦지 않게 시작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소재는 구해왔다. 이것으로 강철 골렘을 만들어보는 것은 어떠냐."
턱.
내가 품 속에서 시현이가 만든 주괴를 꺼내들자 모두가 탄성을 내질렀다.
"오오오... 아주 강력한 마법의 힘이 느껴집니다."
"이 금속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
잠시 침묵했던 나는 고심 끝에 내뱉었다.
"... 로와니움."
"로와니움! 로완 님의 이름을 받은 금속이다!"
"신성한 금속이니 조심스럽게 다루도록!"
미안하다 시현아.
내 창의력도 거기서 거기인 것 같다.
그래도 시혀니움보단 로와니움이 낫지 않은가?
시혀니움은 이상하게 애교부리는 것 같다.
다만 주괴는 내 주먹만한 크기라서 크게 의지가 되진 않았다.
내 본체에 비하면 너무나도 작다.
"크기를 좀 키울 수 있겠느냐?"
"예! 원본이 이만큼이나 있으면 마법으로 복제하는 것은 쉽습니다."
"그래? 좋다. 최대한 크게 만들어보도록. 아, 그리고..."
나는 헤르반을 따로 불러서 조용히 말했다.
"또 하나 부탁이 있구나."
"무엇이든 말씀하십시오."
"실종된 대소환사 에이코그의 흔적을 찾아보아라. 아무래도 놈이 나의 세계와 연관된 것 같다."
"에이코그 말씀이십니까? 그리 하겠습니다. 대소환사의 유산을 찾는 것은 모든 소환사들의 비원이지요."
"무리할 필요는 없다. 알겠지?"
당부를 마친 뒤에는 신전의 건설현장을 구경하러 갔다.
추종자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거대한 기둥을 세우는 것을 보고있자 입꼬리가 절로 휘었다.
30화. 치유의 손
깊은 산 속의 요양병원.
아침부터 이런 곳으로 끌려온 나는 표정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불행 중 다행으로 아비가일은 곁에 없지만, 이번만큼은 그것이 살짝 아쉽게 느껴졌다.
'얘는 왜 꼭 필요할 때 없는 거야?'
이제와서 투정해봤자 소용없다.
그녀에겐 그녀 나름대로의 스케줄이 있을테니까.
운전기사 겸 서번트의 안내를 듣게 된 나는 더더욱 기분이 참담해졌다.
"너무 갑작스럽게 모셔서 죄송합니다. 늑대인간 사태는 최대한 시급하게 해결할 필요가 있어서..."
"이번에는 늑대인간인가요?"
"예. 완전한 진압 작전입니다. 로완 님은 에스콰이어로서 풋맨들을 지휘해주십시오."
재단의 전투 계급은 풋맨과 에스콰이어, 나이트로 나뉜다.
하지만 가장 아랫계급인 풋맨들도 어지간한 특수부대는 뺨때리는 수준이라고 들었다.
'풋맨은 전원 헌터라던데... 지인이 있는 건 아니겠지?'
나는 후드를 눌러쓰곤 서번트가 건네준 007가방을 열어봤다.
안쪽에는 리볼버와 은도금 탄환이 들어있었다.
"쏴죽이면 되는 거군요?"
"늑대인간들은 약점이 많죠. 은탄에도 약하고, 짐승이라서 불에도 약하고... 야행성이라 아침에 약합니다."
"그건 저도 마찬가지인데요."
아침부터 끌려나온 억하심정을 좀 담아서 말하자 서번트가 엷게 웃었다.
"면목이 없습니다."
재단 놈들은 대체로 마음에 안 들지만, 이 여자와 프리스트 토시아키는 꽤 마음에 든다.
어쨌든, 늑대인간은 약점이 정말 많은 편이다.
대신 늑대 외신의 추종자들은 멀쩡한 사람을 물어서 감염시킬 수 있다.
추종자를 늘리기가 쉬워서 재빨리 처리해야 한다.
"그런데 왜 이런 산골짜기 요양병원에 늑대인간이 있는 거죠?"
"건강 문제 때문입니다."
"건강?"
"늑대인간이 되면 불치병도 다 나을 수 있습니다. 재생력이 매우 뛰어나서, 다 죽어가던 사람도 건강해지죠. 보름달이 뜰 때엔 거의 불사신입니다."
"그건 좀 부럽네요."
"... 대신 인육을 탐하게 되죠."
그래서 요양병원에서 늑대 외신 신앙이 퍼진 건가.
건강과 이성을 맞바꿀 정도로 힘든 처지였다니.
씁쓸한 일이다.
나는 어디선가 들어본 말을 떠올렸다.
이미 지옥에 살고있는 사람이 악마의 권유를 거절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재단에서 정보통제에 목숨을 거는 이유가 있다.
"도착했습니다."
"이제부턴 맡겨요."
이쯤되자 슬슬 익숙한 느낌마저 든다.
상대가 한 때 인간이었다는 것만 제외하면, 헌터 일과 똑같다.
요양병원의 아래에는 벌써 단원들이 몇 명이나 모여있었다.
그들이 나를 보고 어색하게 인사했다.
"에스콰이어 님, 오셨습니까. 다들 장비는 지급 받았죠?"
"왜 이런 대낮에 진압하는 거야..."
"그야 밤에는 늑대인간이 강해지니까요. 보름달도 곧이고... 주변 지역은 완벽하게 확보해뒀습니다."
"좋아, 가죠."
문득, 익숙한 모습이 보였다.
일전에 서유림과 함께 던전 공략을 진행했던 팀원이다.
설마 저 양반도 재단 소속이었을 줄이야.
내가 그를 알아보자 그도 나를 알아보곤 마스크 속에서 웃었다.
후드나 마스크를 써도, 정작 전투복이 그대로라서 서로 알아본다.
'여벌의 전투복을 달라고 할까...'
저벅, 저벅.
급조된 팀은 천천히 비탈길을 올라갔다.
요양병원 건물은 심하게 낡아서, 과연 제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까 의심되는 수준이었다.
예전에는 정신병원이었다고 한다.
"풋맨 팀, 진입합니다."
"크르륵..."
낙엽이 전혀 청소되지 않은 복도의 저편에, 기이한 형상이 어색하게 서 있다.
굵은 털이 숭숭 난 늑대인간은 우리를 보자마자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콰아아아!"
타앙!
풋맨들은 주저없이 총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살해를 생업으로 삼은 이들답게 상대의 공격 행동을 확인하자마자 움직였다.
"공격 행동 확인. 소탕 개시."
"산개!"
탕, 타앙!
풋맨들은 능숙하게 흩어져서 건물 곳곳에 숨어있던 늑대인간들을 처리했다.
그것은 전혀 어려운 작업이 아니었다.
보통은 저쪽에서 소리를 지르며 튀어나온다.
'오, 이런 식으로 움직이는 건가...'
나는 팀장으로서 자리를 지키며 상황을 확인했다.
이제부터 나만의 비밀결사를 만들어갈 예정인지라 빠짐없이 한쪽 눈에 새겼다.
그림자 재단은 마음에 안 드는 놈들이지만 여러모로 배울 점이 많다.
외신을 저지하는 분야에선 의심의 여지가 없는 대선배다.
'원래 에스콰이어가 나설 필요도 없는 현장인데... 전력을 좀 넉넉하게 보냈군. 괜히 죽거나 다치면 안 되니까.'
[건물 2층에서 가디언 확인!]
"수신 완료. 간다!"
즉시 염동력의 창을 짜내며 계단을 올랐다.
다른 놈들과는 체급부터 다른 늑대인간이 풋맨 하나를 후려치고 있었다.
콰직!
염동력으로 그것을 막자 놈이 이쪽을 돌아본다.
시뻘겋게 충혈된 두 눈 아래로 침이 줄줄 흘러내린다.
"키에에!"
탕, 탕, 타앙!
주저없이 탄창을 비우며 염동력의 창을 쏘아내자 겨우 놈의 돌진이 멈췄다.
뒤늦게 자세를 회복한 풋맨들이 놈에게 집중사격을 퍼부었다.
은탄에 맞을 때마다 늑대인간의 강건한 육체가 힘없이 쪼그라든다.
내가 구해줬던 풋맨이 놈의 심장에 은제 말뚝을 힘껏 처박았다.
콰득!
"가디언 처리 완료! 남은 개체 있나?"
[상황 종료. 처리반 진입 중... 현장 확보 부탁드립니다.]
"명령 확인."
"이야, 고생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에스콰이어 님. 덕분에 살았습니다."
"별말씀을. 이거 뒤처리는 어떻게 하죠?"
"늑대인간들의 사체는 수거하고, 나머지는 모두 불태울 겁니다."
태울 수 있으면 불태우는 것이 재단의 기본 방침인 것 같다.
이런 지구온난화의 주범들 같으니라고.
나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풋맨들과 인사를 나눴다.
서번트가 운전해주는 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오자 평소보다 분위기가 시끌벅적했다.
"무슨 행사라도 있나요?"
"아, 방한 행사입니다. 치유의 손 라우라 폭스 님께서 한국에 방문하신다고 하셔서요."
"치유의 손이요?"
분명 영국 소속 S급이었나?
별명대로 치유계열 헌터라서 전투는 안 하고 해외순방을 자주 다닌다.
다른 치유 헌터들과 격이 다른 능력으로 헌터들의 치료에 집중하고 있다.
"아비가일 님도 방한 기념 행사에 참여하고 계십니다."
"바쁘겠네요."
기왕이면 계속 바빠줬으면 좋겠다.
그러나 내가 그렇게 생각하기 무섭도록 차량이 길드 건물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행사는 이미 끝났습니다. 이제 합류하시죠."
"..."
즐거운 시간은 끝났군.
속으로 궁시렁거리며 사무실로 올라가니 아비가일이 한 발 먼저 기다리고 있었다.
녀석은 내가 살짝 미안해질 정도로 반갑게 인사했다.
있지도 않은 꼬리가 마구 흔들리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이다.
"로완이 잘 다녀왔어? 이번 임무는 어땠어?"
"평소처럼 지독했지."
"금방 적응될 거야. 커피 마실래? 유나 씨, 나랑 로완이 커피!"
"아, 네. 바로 가져오겠습니다."
서번트는 즉시 아래층으로 향했다.
저 여자 이름이 유나였구나 싶지만 확신하긴 이르다.
아비가일은 사람의 이름을 잘 외우지 못한다.
저것도 잘못 불렀을 가능성이 있다.
"... 치유의 손 방한 기념 행사에 다녀왔다면서?"
"잘 아네! 참고로 라우라도 재단 소속이야."
"뭐야?"
이놈의 재단은 진짜 장난이 아니다.
적어도 헌터업계는 거의 다 먹어치웠다고 봐야겠다.
"근데 너 그런 코디는 누가 골라줘?"
오늘의 아비가일은 평소보다 조금 활동적인 차림새였다.
무릎 위로 올라오는 롱부츠란 것을 살면서 처음 본다.
아비가일은 자신있게 대답했다.
"보통 내 팬클럽에서 추천 코디 목록을 만들어줘!"
"거 참 세레브 리티한 삶이네."
내가 황당해하고 있자 그새 커피가 도착했다.
같은 건물의 카페에서 사온 듯한 아메리카노에는 종이빨대가 꽂혀있었다.
아비가일이 그것을 보자마자 인상을 찌푸렸다.
"앗, 종이빨대야? 난 이거 싫은데."
"죄송합니다. 그것밖에 없다고 해서..."
"괜찮아. 에잇."
툭.
아비가일은 컵에서 종이빨대를 뽑아내더니 그대로 툭 던져버렸다.
나도 종이빨대를 좋아하진 않지만, 저건 좀 심했다.
물론 아비가일이 서번트에게 무슨 억하심정이 있는 건 아니고... 그냥 먹으면 된다고 생각한 것이리라.
"..."
서번트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바닥에 버려진 종이빨대를 내려봤다.
'요즘 좀 호전된 줄 알았는데... 네가 그럼 그렇지.'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염동력으로 종이빨대를 집어들었다.
다른 건 몰라도 이런 행동은 확실히 교정을 해줘야 한다.
"응? 로완이 뭐해?"
푹.
나는 대답 대신 그녀가 버렸던 종이빨대를 컵에 꽂아넣곤 빨아마셨다.
그러자 아비가일이 허둥지둥한다.
"앗, 그거 더러운데..."
"네가 버렸잖아."
일부러 싸늘하게 말하자 그제야 반성의 기미가 보인다.
우리들의 학창시절은 대충 이런 느낌이었다.
믿기 힘들겠지만, 내가 최대한 사회화 교육을 했던 결과물이 바로 저거다.
"너 요즘 남들에게 너무 막 한다? 주변에서 떠받들어주니까 눈에 보이는 게 없지?"
"아, 아니. 그게..."
열심히 눈알을 굴리던 아비가일이 뒤늦게 잘못을 눈치채곤 서번트에게 사과했다.
"미안해 유나 씨.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아, 아뇨... 저는 괜찮습니다."
서번트는 아비가일이 사과했다는 사실 자체가 놀랍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아비가일의 교육에는 나름대로의 테크닉이 필요하다.
방금 했던 것처럼 내가 직접 보여주거나, 아니면 먹을 것으로 꼬시는 방법이 잘 먹힌다.
"진짜 미안해. 다신 안 그럴게."
"됐어. 두고 보자고."
나는 그렇게 대꾸하곤 서번트에게 조용히 물었다.
"진짜 이름이 유나에요?"
"아뇨... 전 이나입니다. 성이나. 그냥 개명신청 할까요?"
"그럴 줄 알았어요. 이름은 바꾸지 마세요."
다들 왜 이리 이름을 쉽게 바꾸는 거야?
서번트, 성이나 씨는 다음 활동까지 쉬고 있으라며 어디론가 가버렸다.
정작 다음 활동이 뭔지는 안 가르쳐줬다.
덕분에 뻘쭘하게 소파에 앉아서 쉬고 있는데...
그리웠던 헤르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의 마도서 집필 때문에 연락한 것 같다.
[로완이시여! 당신의 지혜를 구합니다! 혹시 시간 괜찮으십니까?]
'왜 그러지?'
[로완 님께선 차원의 수호자이십니다. 그렇다면 마땅한 반려가 있을 것입니다. 아닙니까?]
반려라면, 연인을 말하는 거겠지?
지난번에 가족관계에 대해서 대충 설명해줬을텐데...
나는 살짝 불편한 기분으로 되물었다.
'너는 몇 명이나 데리고 있는데?'
[옛, 저는 처가 하나에 첩이 셋입니다!]
'...'
하긴, 헤르반은 아주 능력있는 녀석이니까 저럴만도 하다.
다른 놈도 아니고 헤르반이니까 특별히 봐주기로 했다.
'여기서 없다고 하면 쪽팔리는데...'
나는 문득 고개를 돌려서 아비가일을 쳐다봤다.
성격이 엉망이라서 그렇지 얼굴은 확실히 최상급.
관상용으론 이만한 녀석이 없다.
남자고 여자고 죄다 홀려버리는 미모의 소유자다.
여기선 아비가일을 상상 속의 여친으로 설정해야겠다.
'나는 오직 한 명의 여인을 사랑하노라.'
[오오오... 감복했습니다. 저도 이제부터는 처 한 명만 놔두고...]
'아니, 그러진 마라. 아깝게.'
기왕 뻥을 쳐버렸으니까 나중에 사진이라도 보여줘야 할 것 같다.
내가 스마트폰을 꺼내들자 부담스럽게 눈을 맞추고 있던 아비가일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로완이 뭐해?"
"... 사진 한 장 찍을래?"
"응? 사진? 그치만 흔적이 남는 자료는 최대한 피해야 하는데? 특히 디지털화된 자료는 더더욱..."
"싫으면 말고."
아무래도 재단의 규칙상 안 되는 것 같다.
아주 빠르게 포기하자 저쪽에서 오히려 미련이 남아 달라붙었다.
"아니다. 사진 정도는 괜찮겠지. 찍을래, 찍을래! 나 셀카봉도 있어!"
넌 앞으로 비밀유지같은 소리 하지마라.
그대로 아비가일에게 맡겨두자 제법 괜찮은 사진이 찍혔다.
"옳지, 턱 조금만 더 당기고... 제대로 붙어야지. 찍는다?"
이 녀석, 소통 기술은 엉망이면서 사진 잘 찍는 기술은 나름대로 공부한 것 같다.
사진 속의 내 얼굴은 어색하게 굳어있지만 어차피 음영처리를 할 것이다.
"음, 됐다. 그... 고마워 로완아. 나한테 아까같은 소리 해주는 건 로완이밖에 없어."
"알면 됐어. 그런데 다음 일정이 뭐야?"
"아하, 아직 못 들었어?"
사진이 든 스마트폰을 다시 품 속에 넣자 타이밍 좋게 문이 열렸다.
나는 지금껏 화면 속에서나 봤던 인물을 보곤 속으로 혀를 찼다.
치유의 손, 라우라 폭스.
은근히 장난스런 미소를 머금은 그녀가 서번트 성이나의 안내를 받아서 들어왔다.
키는 의외로 작다.
아비가일이 그녀를 보며 무척 뿌듯하게 말했다.
"지금부터 로완이의 눈을 고쳐줄게!"
"내 눈을?"
"응! 한쪽 눈이 계속 안 보이면 불편하잖아?"
"... 그, 그렇네."
나는 도저히 거절할 핑계를 찾지 못한 채 얼어붙었다.
치유의 손이라는 이명을 가진 헌터가 아비가일에게 고개를 꾸벅 숙여보였다.
31화. 엑소더스
"이거, 재발 가능성이 높은가요?"
수술과 회복이 '성공적'으로 끝난 뒤, 내가 의사에게 가장 먼저 물어봤던 것이다.
원래 양쪽 다 안 보이던 것이 한쪽은 보이게 됐으니까, 성공은 성공이다.
의사는 확답을 주기 힘들다는 듯, 곤란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재발 확률이 아주 낮진 않아요."
정말이지 애매모호한 대답이었다.
다시 고장날 사람은 고장난다는 정도의 느낌.
내 오른쪽 눈이 안 보이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왼쪽에 비해서 수술이 좀 늦어버렸기 때문이다.
왼쪽 눈은 멀쩡히 잘 보여서, 일상생활에는 큰 지장이 없지만...
그 날부터 나를 괴롭히는 것은 다름아닌 재발의 위험성이었다.
멀쩡한 왼쪽 눈마저 다시 한 번 고장나버리면 도저히 원래대로 돌아갈 수 없을 것만 같은 불안에 사로잡혔다.
앞서 현대 의학의 굉장함을 실감했으나 회복과정은 제법 길고 고통스러웠다.
그런데, 이번에 세계 최고의 치유 헌터를 초대해서 내 눈을 고쳐주겠다고 한다.
설마 내 눈 하나 고치자고 먼 걸음을 한 것은 아니겠지만...
솔직히 조금 감격스럽다.
'결국... 고치게 되는 건가.'
"로완아, 잘 됐지? 이제 양쪽 다 잘 보일 거야!"
아비가일이 생글생글 웃으며 말하는 사이.
치유의 손 라우라 폭스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나를 빤히 쳐다봤다.
환자를 관찰한다기보단 남의 장난감을 구경하는 듯한 느낌이다.
"이 사람이 언제나 말씀하시던 그..."
"응! 내 동기야. 이번에 에스콰이어가 됐어."
언제나 말하고 다녔던 건가.
애써 이해하지 못한 체 하고있자 라우라가 한 발짝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가슴속으로 마음의 준비를 했다.
'이제와서 치료하기 싫다고 하면 이상해 보이겠지?'
내가 오른쪽 눈을 치료하기 싫은 것은 어디까지나 척안의 로완으로서의 입장이다.
외신활동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당연히 환영이다.
아예 초대도 하지 않았다면 또 몰라.
세계 최고의 치료 헌터가 코앞에 있는데, 굳이 치료를 안 받겠다고 하면 진짜 미친놈처럼 보일 것이다.
'외신 소환에 이상이 생길지도 모르지만... 헤르반은 똑똑하니까 알아서 잘 해결해주겠지.'
잘 생각해보면 이미 신전까지 지어놓았는데 이제와서 어떻게 될 것 같진 않다.
결국 나는 얌전히 치료를 받기로 했다.
"자, 잘 부탁드립니다."
"걱정마세요. 이런 간단한 치료는 수천번도 더 해봤으니까."
치유의 손 라우라 폭스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살짝 건방져보일법도 하지만, 환자의 입장에선 그저 믿음직스럽다.
처억.
라우라가 그대로 내 얼굴에 손을 얹자 아비가일이 옆에서 무척 걱정스럽게 쳐다본다.
나는 섬세한 느낌의 마력이 몸 속으로 파고드는 느낌을 받았다.
"읏."
"아직 시작도 안 했어요. 이건 단순한 검진."
"네에..."
치유계 헌터라도 그냥 능력 발동하고 끝이 아니다.
인체는 매우 섬세하기 때문에, 그냥 때려부수는 것보다 훨씬 정밀한 제어가 필요하다.
치유의 손은 그 이름값에 어울리는 솜씨를 보여줬다.
마력으로 내 몸을 만지작거리며 순식간에 상태를 파악하고 치료법을 결정했다.
"역시 망막이 제대로 안 붙었네요. 일반적인 수술로는 이게 한계였겠죠."
파아앗!
내가 무어라 대꾸할 새도없이 능력이 발동되며, 치료가 끝났다.
얼떨떨한 기분으로 왼쪽 눈을 감아보자...
끝없이 흐릿하던 오른쪽의 시야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조금 소름끼칠 정도로 선명한 광경이다.
"우왓..."
"굉장하죠? 제 능력은 사물을 완전한 상태로 되돌리는 거에요. 얼마든지 감탄하셔도 좋아요."
"정말... 대단하네요. 이렇게 순식간에 끝나버릴 줄은 몰랐어요."
솔직하게 감탄하자 무척 만족스러운 웃음이 돌아왔다.
아무래도 이런 소리를 듣는 게 삶의 낙인 것 같다.
사실 나같아도 저런 걸 즐길 것이다.
"수술했을 때엔 가스가 빠질 때까지 3개월 내내 고생했는데..."
"이번엔 그럴 필요 없어요. 겸사겸사 다른 곳도 좀 고쳐뒀어요. 그럼 앞으로도 재단을 위해서 힘내주세요."
치유의 손은 정말로 바쁜 듯, 그대로 방을 나가버렸다.
쓸데없이 뿌듯한 얼굴의 아비가일이 신경쓰여서 뒤늦게 물었다.
"설마 네가 부른 거야?"
"아, 아니야! 그냥 일본 간다길래 겸사겸사 들러달라고 했어."
"아. 일본..."
그러고 보니 얘도 얼마전에 일본에 레이드 출장 다녀왔지.
아무래도 해당 레이드에서 다친 헌터들을 치료하러 방문한 것 같다.
나는 두 눈을 똑바로 뜬 채 피식 웃어버렸다.
"고마워."
"엇... 저, 정말?"
"응. 정말로 고마워."
너무 제멋대로였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기껏 걱정해줬는데 싫은 소리를 하기도 힘들다.
아비가일이 제자리에서 방방 뛰며 박수를 치자 뒤에 있던 서번트, 성이나 씨도 슬쩍 웃었다.
그런 아비가일을 보고있자 순간 속에서 울컥하는 것이 있다.
'이 녀석은 감정이 없지 않아. 확실히 남을 생각해주고 있어.'
재단 놈들이.
정확하게는, 어사일럼 가문 놈들이 애를 엉망으로 망가뜨려놓았지만...
이대로 가면 고쳐지는 것도 시간문제일 것 같다.
적어도 대학교 시절보단 훨씬 좋아졌다.
고층 사무실의 창가에 서서 두 눈의 성능을 즐기던 나는 이런저런 정리를 위해서 집으로 돌아갔다.
성이나가 운전해주는 차 안에서, 조심스럽게 주문을 했다.
"아까 풋맨이 전투복을 보곤 저를 눈치채던데... 혹시 여분의 전투복을 얻을 수있을까요?"
"물론입니다. 최신형으로 몇 벌 준비하죠. 또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언제든지 말씀해주세요."
치수는 묻지도 않는 건가?
그 정도 정보는 진작 가지고 있겠지.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여러분들께서 해야할 일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서번트의 존재의의입니다."
사뭇 자랑스럽게 대꾸하는 그녀를 보고있자 재단도 아주 싫진 않게 됐다.
적어도 직원 복지는 확실하다.
그런데, 불법 수준의 썬팅 너머로 경치를 즐기던 것도 잠시.
내 오른쪽 눈의 시야가 일그러졌다.
지직...
"읏?"
설마 싶어서 왼쪽 눈을 감아보자, 시야 전체가 완전한 암흑으로 물들었다.
치료를 받기 전에도 흐릿하게나마 보였던 오른쪽 눈이 완전히 나가버린 것이다.
"로완 님? 왜 그러시죠?"
"아, 아녜요. 잠깐... 눈물이 나와버려서요."
곧이곧대로 말하려던 나는 순간 등골이 오싹해져서 대충 둘러댔다.
치유의 손 라우라 폭스는 세계 최고수준의 치유 헌터.
그녀가 치료 과정에서 실수를 저질렀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만약 뭔가가 잘못됐다면 내 쪽이 문제일 것이다.
몹시 당황하던 내 머릿속에서 라우라 폭스의 말이 스쳐지나간다.
'굉장하죠? 제 능력은 사물을 완전한 상태로 되돌리는 거에요.'
사물을 완전한 상태로 되돌린다.
완전한 상태...
즉, 나는 한쪽 눈이 안 보이는 게 완전한 상태라는 것이다.
내가 척안의 로완으로 활동한지 꽤 됐으니, 마냥 억지스러운 해석은 아닌 것 같다.
'외신활동이 영향을 끼쳐버린 건가? 큰일이네. 오른쪽 눈이 움직이지 않으면 머지않아 들킬텐데...'
황급히 스마트폰 카메라로 살펴보자 오른쪽 눈이 왼쪽 눈의 움직임을 따라온다.
이건 불행 중 다행이다.
아무래도 나는 양쪽을 모두 쓸 수 없는 운명인 것 같다.
"도착했네요!"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내일도 잘 부탁드립니다."
서번트 성이나와 헤어져서 집으로 돌아온 나는 기진맥진한 기분으로 소파 위에 퍼졌다.
눈을 아예 고칠 수 없다는 것은 상당한 충격이었다.
오늘은 더 이상 아무것도 하고싶지 않다.
그러나... 소인족들은 그런 나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속으로 끙끙 앓고있자 비교적 생소한 기도가 들려왔다.
[로완이시여! 로완이시여! 제발 양제국을 살려주십시오!]
'양제국?'
지난번에 나한테 헛짓거리를 한 뒤로 채널을 차단해뒀는데...
무슨 큰 일이라도 생긴 것일까?
소환사 메이린의 절박한 목소리가 심상방벽을 관통했다.
완전히 무시하기도 좀 그러니, 일단 상황을 보기로 했다.
그대로 오른쪽 눈을 감자 저쪽 세계가 전보다 더 선명하게 보였다.
드높은 곳에서 관조하는 느낌인데, 이젠 추종자들의 시야에 의지하지도 않는 것 같다.
'뭐지?'
"와아아아!"
"관문을 지켜라!"
양제국에서는 난데없는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것도 제법 대규모다.
신들의 나라와의 국경선을 차단해주고 있는 요새에, 기괴한 생김새의 봉사종족들이 마구잡이로 몰려들고 있다.
저 멀리, 외신의 것으로 보이는 그림자도 보인다.
거대한 전갈형태의 외신이 아주 천천히 접근하고 있다.
양제국의 병사들이 분전하곤 있지만, 저들을 완전히 막는 것은 힘들 것 같다.
'신들의 나라에서 침공해온 건가?'
양제국은 원래 신들의 나라와 비교적 가까웠다.
숲의 요새와 달리, 중립국이라는 완충지대가 아예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제국이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전대 황제가 신앙하던 뱀신 덕분이다.
뱀신 자체는 그리 강하지 않지만, 엄청난 맹독을 품고 있는데다...
녀석을 건드리면 뱀들의 어머니가 나설 수도 있어서 다른 외신들이 쉽게 손을 대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그런 사정을 모르는지라 얼떨결에 해치워버렸다.
'그 결과가 이거네. 못 막겠는데?'
전장을 보자마자 각이 나왔다.
저쪽 외신은 신전을 통해서 제대로 소환됐으며, 봉사종족들을 대거 동원해서 침공해왔다.
신전이 없는 양제국에선 못 이긴다.
외신이야 독 단검으로 어떻게든 처리한다 쳐도 봉사종족의 물량공세를 막아낼 방법이 없다.
그나마 숲의 요새가 비교적 가까우니, 그쪽의 신전이 완공되었다면 또 몰라.
아직 한창 공사중이라서 가망이 없다.
'그러게 헛짓거리 하지 말고 빨리 신전이나 세울 것이지.'
투덜거리면서도 주변을 확인한 다음, 메이린과 양제국 소환사들의 부름에 응했다.
파아앗!
포탈을 통과하자 소환사들이 목이 터져라 외친다.
"로완이시여!!"
"너희들의 오만함이 불러일으킨 사태다."
"..."
억하심정을 조금 담아서 내뱉자 분위기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하지만 이대로 다 죽으라 할 수도 없는 노릇.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녀석들에게 명했다.
"너희들은 나를 따르는 사람들을 이끌고 서쪽으로 가라."
"서쪽이라 하심은..."
"숲의 요새다! 마법군주 헤르반과 로완 님의 추종자들이 있는 숲의 요새!"
"하지만, 이제와서 떠나기엔 너무..."
본인들의 땅과 왕궁에 미련이 남지 않을 수는 없다.
하지만 나도 달리 방법이 없다.
타샤가 만들어내는 포탈은 소인족 수십명 정도를 옮기는 것이 고작이다.
이만한 인원수를 모두 옮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뭐, 안 오면 그것대로 좋고.'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넙죽 엎드려있던 양황이 나섰다.
황제는 즉시 마차를 대령하여 냉큼 올라탔다.
"피난이다! 어서 도망쳐야 한다!"
"... 능숙하군."
"도망치는 것은 익숙합니다. 사내가 대업을 이루기 위해선 물러나야 할 때도 있는 법!"
"우리도 가자!"
메이린을 위시한 소환사들도 즉시 피난준비를 시작했다.
신하들은 아직 미련이 남은 듯 했지만, 안 따라오는 편이 더 좋을 것 같다.
"백성들에게도 알려라."
"하, 하지만 발이 느린 백성들이 합류하면 피난이 느려질텐데..."
양황이 불안하게 대꾸했다.
과연 자칭 피난의 스페셜리스트.
나는 그런 녀석을 꾸짖었다.
"내가 너희들을 보호할 것이다. 어서 가거라!"
"가, 가자! 서쪽으로!"
"질서를 지켜라! 문을 열어라!"
와르르르!
소인족들은 개미떼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대탈주가 시작됐다.
32화. 엑소더스(2)
양 제국 사람들의 피난은 최대한 빠르게 진행됐다.
물론 녀석들의 딴에는 빠르단 것이다.
사실 내가 보기엔 느려터졌다.
게다가 전갈 신의 봉사종족들은 피난민들을 쫓아오고 있다.
양황을 비롯한 수뇌부들이 달아나버리면 통치가 힘들어지니까 굳이 뒤쫓는 것이리라.
적지 않은 숫자의 백성들이 따라붙은 탓에, 피난 행렬은 제법 길게 이어졌다.
나름대로 고르고 고른 핵심 인재들인데도 이 모양이다.
이 정도면 내가 직접 소환과 역소환을 반복하며 포탈로 실어주는 것도 힘들다.
나는 불안해하는 추종자들의 앞에서 선언했다.
"숲의 신전이 완공되면 이 땅을 되찾겠다."
"오오, 감사합니다 로완이시여! 저희들은 당신을 실망시켰는데도..."
"당신만을 믿고 따르겠습니다!"
양 제국은 지리적으로 굉장한 이점을 안고 있다.
이곳을 제대로 점령해둬야 신들의 나라를 제대로 막아낼 수 있다.
숲의 요새에서 건설중인 신전이 완성되면 원정도 썩 어렵진 않을 것이다.
"허억, 허억..."
"다들 힘내라! 약속의 땅은 그리 멀지 않다!"
대부분의 피난민들은 군말없이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나를 믿는다기보단, 달리 선택지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제국의 핵심 인재들이다. 전갈 신의 사교도들에게 사로잡히면 봉사종족이 될 수도 있어!"
"히이익..."
전갈 신의 봉사종족은 전갈의 하반신에 인간의 상반신을 지닌 흉물이다.
그런 괴물이 되느니 도망이라도 쳐보는 것이 낫다.
피난 과정에서 가장 열심히 투덜거리는 것은 다름아닌 양황이었다.
가족들과 함께 마차에 탑승한 녀석은 자꾸만 자식들을 밖으로 집어던졌다.
"내려라! 마차가 느려지지 않느냐!"
"폐하! 진정하십시오. 아직 적군이 보이지도 않습니다!"
"에에잇, 이렇게 어물쩡거리다간 금방 따라잡힐 것이야! 로완 님께서 서둘러야 한다고 말하셨잖나!"
"..."
전부터 생각하던 건데, 이놈은 대업을 이루고 싶은 게 아니라 그냥 처자식을 버리고 새장가나 가고싶은 것 같다.
어째 행동 하나하나가 새장가를 위한 포석이다.
'당장 전투가 벌어질 것 같진 않군. 먼저 일을 좀 해둘까.'
파아앗!
거실로 돌아온 나는 옷을 갈아입곤 지난번에 부탁받은 실버바를 사러 갔다.
1Kg짜리답게 크기가 매우 커져서, 내 손바닥만하다.
거울로 써도 될만큼 미끈한 표면이 일품이다.
"여기요."
"..."
금은방 주인은 현금을 받아들곤 살짝 의아해했지만 이내 불필요한 관심을 접었다.
100만원이 넘는 액수를 현금으로 지급하니 당연히 이상해보이겠지만...
골드바도 아니고, 실버바를 달랑 하나 사가는데 굳이 문제삼을 필요는 없겠지.
비상용 현금을 사용해버린 나는 쓰라린 기분으로 집에 돌아갔다.
카드를 쓰면 추적당할 수도 있으니까 어쩔 수 없었다.
'운동이라도 갈까? 아니, 그만한 여유는 없어. 언제 상황이 발생할지 몰라.'
양제국에서 숲의 요새까지의 이동시간은 소인족 세계 기준으로 고작 5~6일 정도.
아무리 길게 잡아도 지구 시간으로 하루면 끝난다.
녀석들에게 하루 정도는 투자해주자.
물론 다른쪽 일도 함께 처리할 생각이다.
'결사단장. 선물을 준비했다.'
[오옷, 감사합니다 로완이시여! 지금 바로 소환준비를 시작하겠습니다.]
파아앗!
집으로 돌아와서 결사단에게 실버바를 넘겨주곤, 이런저런 노하우를 가르쳐줬다.
대부분은 그림자 재단에서 배운 것인데 그것도 꽤 큰 도움이 되는 것 같다.
녀석들은 특히 조직 운영에 대한 노하우를 귀담아서 들었다.
"계급을 세부적으로 분리하고, 쉽게 연상하기 힘든 줄임말과 단어를 많이 사용해라. 너희들은 비밀결사다. 직관적일 필요는 없다."
"명심하겠습니다!"
"신입들을 섣불리 실전에 밀어넣지 마라. 실습 시험에도 만전을 기하라. 가입 전에 실습 시험을 치루는 것은 불허한다."
"감히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
나도 입단 맹세를 마친 뒤에야 실습 시험에 투입됐는데...
따로 이유를 듣진 못했다.
나는 스스로에게 질문해본 직후에 답을 깨닫곤 피식 웃었다.
"실패해도 되는 임무가 아니잖나."
"과, 과연... 저희들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서로를 끊임없이 감시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겨라. 상대를 믿고 싶다면 먼저 의심하라."
결사단의 지도를 마칠 즈음.
양제국의 소환사 메이린에게서 기도가 올라왔다.
[로완이시여! 송구하오나, 피난의 준비가 미흡하여 식량이 다 떨어져가고 있습니다. 이번 끼니가 마지막이 될 것 같습니다.]
'내가 너희들을 배불리 먹일 것이니 걸음을 늦추지 않도록.'
[가, 감사합니다!]
7배속으로 상황이 발생하니까 바빠 죽겠네 진짜.
파아앗!
거실로 귀환한 다음, 배달 어플을 열었다.
지금까지는 사악한 배달비로 인해서 거의 써본 적이 없는 어플이었지만...
달리 방법이 없다.
재단에 이야기하면 배달비 정도는 줄 것 같다.
'얘들에게 뭘 먹이지? 현대의 배달음식은 자극이 너무 강할지도 몰라.'
심약한 소인족들을 위해서 심사숙고하던 나는 결국 죽을 주문했다.
녀석들은 쌀을 먹는 문화권이니 죽도 잘 먹을 것이다.
게다가 소인족들의 정량에 맞춰서 분배해주기도 편하다.
'일단 하나면 되겠지. 우와, 배달비 장난 아니네.'
딱 하나 시켰는데, 총 결제 금액의 20%가 배달비로 날아갔다.
다행히 배달은 제 때 왔다.
파아앗!
소인족들은 내가 준 죽을 맛보곤 어쩔 줄을 몰라했다.
"저, 전복죽이라니! 피난 중에 이런 호사가..."
"너무 신선하고 맛있어요!"
"과인에게 조금만 더..."
"아직 많이 남았으니까 걱정마세요!"
내륙 출신이라 그런지 아주 환장을 한다.
그렇게 환장하는데도, 배달 전복죽 하나로 녀석들이 다 먹고도 남았다.
"다 먹었으면 휴식이다! 신발을 벗어서 발을 쉬게 하고 눈을 좀 붙여라!"
"아앗, 비다! 비가 내린다!"
"으아아앙..."
'돌겠네.'
파아앗!
나는 녀석들을 언덕 위로 올려보낸 다음 텐트를 쳐줬다.
헌터용 장비 세트에 포함되어 있어서 다행이다.
'사실 헌터가 던전 안에서 야영할 정도면 진짜 갈데까지 가버린 거지만...'
염동력으로 지주핀을 박고, 순식간에 텐트를 완성시키자 감회가 남다르다.
원래 내 헌터 능력에 썩 만족하는 편이 아니었는데...
최근에는 내 능력이 염동력이라서 다행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비가 제법 거세게 내리자, 메이린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나는 녀석에게 조용히 물었다.
"비가 오래갈 것 같으냐?"
"아닙니다. 이맘때의 비는 짧고 거세게 오는 편입니다.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것을 말해보거라."
"약속의 땅에 도달하려면 좁은 바다를 건너야 하는데, 물이 불어나거나 하면 힘들 것 같습니다."
바다가 마지막 장애물인 셈인가?
하지만 장애물이 꼭 적들의 편인 것은 아니다.
저 말은, 바다만 건너면 당분간 안심할 수 있다는 뜻이니까.
"거의 다 왔다. 흔들리지 말고 힘내거라."
"예!"
파아앗!
다행히 비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그러나, 마침내 바다에 도달한 피난민들은 이내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아아앗! 배가... 배가 모두 망가졌습니다!]
[항구 전체가 쑥대밭이 되어서...]
주민들을 실어줘야 했을 항구는 이미 쑥대밭이 되어있었다.
도처에 널려있는 선원들과 어부들의 시체를 본 나는 비로소 상황을 눈치챘다.
'전갈 신의 짓이군.'
놈은 기동력이 뛰어난 병력을 우회시켜서 항구를 먼저 처리한 것이다.
외신답지않게 치밀한 전략이었다.
당황한 피난민들이 나를 향해서 울부짖었다.
[로완이시여!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너희들은 나를 믿고 기다리거라. 헤르반!'
[예, 주군!]
'오랜만에 실력을 발휘해줄 때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파아앗!
양제국의 소환사들은 이미 한계에 도달하여, 나를 제대로 소환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나는 가까운 숲의 요새에서 최상의 컨디션으로 소환되어 바다로 향했다.
그러나 내가 도착하기도 전에 전갈 신의 하수인들이 피난민들의 행렬을 따라잡았다.
녀석들은 피난민들을 완전히 포위한 채 큰 소리로 호통쳤다.
"네놈들이 멀리도 도망쳤구나! 그러나 위대한 전갈의 외신 자낙께선 자비로우시다! 마지막으로 개종의 기회를 주겠다!"
"아아, 기껏 여기까지 도망쳤는데..."
녀석들이 피난민들을 쉽게 죽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는 양제국의 핵심인재들을 고스란히 빼왔다.
가능하면 어떻게든 붙잡아서 봉사종족으로 만들고 싶겠지.
그 사이, 바다에 도달한 나는 상상 이상의 폭에 혀를 찼다.
지도로 봤을 때엔 뭐 이렇게 좁은 바다가 있는가 싶었는데...
막상 눈앞에 두니까 바다는 바다다.
'어떻게 하지? 전갈 신 자낙이 도착하는 건 시간문제일텐데...'
녀석이 아직 소환 상태를 해제하지 않았다면 피난민들이 몰살당하는 것은 순식간이다.
그렇다고 이쪽에서 배를 사용하자니 저놈들이 가만히 있을 리도 없다.
배에 타기도 전에 모두 학살당할 것이다.
절체절명의 상황에 몰린 피난민들이 마구 울부짖었다.
"지, 지금이라도 개종을!"
"멍청하긴! 신앙을 잃는 것은 곧 죽음을..."
"우리는 로완님께서 보살펴주신 덕에 이곳까지 올 수 있었다! 벌써 그 은혜를 잊어버린 것이냐!"
"맞아! 로완님께선 전복죽을 주셨다!"
우습지만, 마지막 순간에 기억나는 것은 의외로 저런 사소한 것인 모양이다.
피난민들의 앞을 막아섰던 메이린이 큰 소리로 외쳤다.
"로완님께선 믿고 기다리라 하셨다! 저기 그분께서 오셨다!"
"멍청한 것들. 바다 건너의 외신이 무슨 의지가 된단 말이냐! 모두 쳐라!"
자고로 종교단체란 것은 언제나 이성적으로 움직이진 않는 법이다.
전갈 신의 봉사 종족들은 주저없이 피난민들을 습격했다.
나는 멀리서 염동력으로 장벽을 치며, 마음을 굳혔다.
파앗!
말도 안 되는 짓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해내야 한다.
추종자들이 나를 믿어주고 있는 와중에, 내가 나를 의심해버리면 끝장이다.
'좋아. 기적을 일으켜볼까.'
전신의 힘을 그 어느때보다도 강하게 끌어올린다.
하나 남은 눈으로, 바다를 똑바로 쳐다본다.
비록 하나하나 다 챙겨줘야 하는 녀석들이라곤 해도, 나를 믿고 따라와준 놈들이다.
여기서 그냥 내버릴 수는 없다.
"후우우, 하앗!"
쿠르르릉!
염동력이 발동되며, 기묘한 소음이 울려퍼졌지만 아직은 조금 부족하다.
내가 더 힘을 넣자 마침내 기적의 전조가 보이기 시작했다.
쩌어억...
등 뒤에서 벌어지는 기적을 목격한 피난민들이 미쳐 날뛰었다.
"아앗, 바다... 바다다!"
"뭣?"
"바다가... 바다가 갈라지고 있다!"
쩌어어어억!
내 염동력이 바다를 좌우로 힘껏 밀어낸다.
검푸른 물이 옆으로 밀려나며, 바다의 밑바닥이 드러난다.
수족관을 연상시키는 바다의 단면이 사뭇 아름다워보인다.
피난민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곳으로 뛰어들었다.
"가자!"
"아앗, 멈춰라 이놈들!"
"미친 것이냐! 바다에 들어가다니..."
아직 갈라지지 않은 부분이 있었지만, 피난민들은 망설이지 않았다.
그래서 나도 망설이지 않기로 했다.
신전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는데도, 믿음이 힘을 만들어낸다.
"그아아아앗!"
콰르르르릉!
바다가 더욱 넓고 길쭉하게 갈라지자, 마침내 두 개의 땅을 잇는 길이 완성됐다.
피난민들은 소리 높여 환호하며 서둘러 길을 통과했다.
"로완! 로완! 로완이시여!"
"자, 잡아라! 자낙께서 분노하실 것... 끄헉?!"
콰직!
봉사종족의 우두머리가 으깨져버리자 더 이상의 추격은 없었다.
나는 스스로의 업적에 놀란 나머지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이것은 운하를 만드는 것이나 해일을 막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수준의 일이었다.
힘을 지속적으로, 균등하게 써야하기 때문에 난이도가 훨씬 높다.
얼마 전까지의 나였다면 근처에 신전이 있었더라도 엄두를 내지 못했으리라.
"로완이시여!!"
결국 무사히 바다를 건넌 피난민들이 앞다투어 내게 달려들었다.
나는 쓰게 웃으며 녀석들의 칭송을 즐겼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칭송받을 자격이 있다.
33화. 탈환 준비
"푸후우..."
테스트가 끝난 직후. 나는 깊게 숨을 내쉬었다.
테스트라곤 해도 전력을 다하진 않았다.
이번 것은 재단 지부에서의 테스트.
높은 평가를 받는 것보단 의심을 받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
지금 숨을 몰아쉬고 있는 것도 연기의 일종이다.
'최대 출력의 50% 정도 썼나?'
그러나 서번트, 성이나는 명백히 놀란 눈치였다.
"결과가 나왔습니다! 이 정도면... A급에서도 상위권이네요. 어떻게 이 정도로 빠르게 성장하신 거죠?"
"눈 대신 염동력을 쓰기 시작한 이후로 팍팍 늘더라구요."
거짓말은 안 했다.
그 훈련은 정말로 효과가 좋았으니까.
멀찍이서 흐뭇하게 웃고있던 아비가일도 나를 조금 거들어줬다.
"내가 로완이에게 보내준 자료는 도움이 됐어?"
"그래... 그 동영상 강의는 너무 쓸만해서 놀랐다니까."
"엣, 동영상 강의요? 설마 길드 내부 교육용 자료를 유출하신 건가요?"
"응! 백룡 길드의 것이라면 결국 내 거잖아. 무슨 문제 있어?"
"... 아뇨. 문제 없습니다."
성이나는 아주 빠르게 설득을 포기했다.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는 것은 설명하지 않는 것이 맞다.
그 상대가 아비가일이라면 더더욱!
"정말 대단하시네요. 아니, 뒤늦게 개화하셨다고 해야하나... 어쨌든 A랭크 승급은 문제없을 것 같습니다!"
"고마워요."
성이나가 다른 업무로 자리를 비우자, 아비가일이 내쪽으로 쪼르르 다가왔다.
녀석은 몸을 살짝 숙여서 앉아있던 나와 눈높이를 맞추더니 살짝 걱정스럽게 물었다.
"로완이, 오른쪽 눈 다시 안 보여?"
"... 어떻게 알았어?"
상대가 워낙 괴물이라서 이 정도는 썩 놀랍지도 않지만, 이유 정도는 알아두고 싶다.
"오른쪽 눈은 반응속도가 좀 늦어. 라우라 다시 한국 오라고 할까?"
"S급 치유헌터가 네 애완견이냐? 좋을대로 부르게? 문제없어. 어차피 염동력으로 커버돼."
"그래도..."
아비가일이 재단 사람들에게 내 증상을 떠들어대면 곤란하다.
나는 고심 끝에 오른쪽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이건 우리들만의 비밀이야. 알겠지?"
"... 응! 나랑 로완이만의 비밀! 아무에게도 말 안 할게!"
해맑게 웃은 아비가일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손가락을 걸었다.
비밀을 강조하는 것은 미취학 아동 상대로 잘 먹히는 팁이라고 들었는데...
왜 얘한테도 잘 먹히는지 모르겠다.
역시 재단 출신이라서 그런가?
아비가일이 좀 허술해보여도 비밀 유지는 이미 생활화 된 것 같다.
휴식을 마친 나는 곧장 재단의 서고로 이동했다.
프리스트 토시아키는 자리를 비운 것 같지만, 애콜라이트 윤하린이 나를 맞이했다.
"어서오세요! 에스콰이어 님, 찾으시는 자료가 있으신가요?"
"평소의 공부죠 뭐. 저, 질문이 있는데요..."
"네! 제가 답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요."
속으로 다시 한 번 리허설을 한 다음, 애써 대수롭지 않게 질문을 건넸다.
"외신들은 동물의 모습의 형태를 본딴 경우가 많나요? 예를 들어서 늑대라든가, 생선, 전갈이라든가."
"음, 그렇네요. 언데드 계열의 유령이나 정령 계열도 있지만... 역시 동물계 외신이 많죠."
애콜라이트 윤하린은 별다른 위화감을 느끼지 못한 채 성심성의껏 대답해줬다.
전갈의 외신 자낙에 대한 정보를 듣고 싶었지만 아직은 좀 이르다.
"동물계 외신은 대부분 해당 동물의 특징을 가지고 있어요! 독이라든가, 비늘이나 날개라든가! 비행 능력 같은 것도 온전히 보유하고 있는 경우가 많아요."
"그럼 약점도 비슷하겠네요?"
"네! 늑대라면 불, 생선도 불, 전갈도 불이네요!"
"..."
염동력자 말고 화염 능력자였으면 좋았을 걸 그랬다.
윤하린은 관련 서적을 잔뜩 가져다줬다.
"애콜라이트나 프리스트가 아닌 사람이 과도한 지식을 습득하는 건 권장되지 않지만... 이건 사냥용으로 작성됐으니까 괜찮을 거에요. 그리 심도있는 내용이라고 볼 수 없어요."
"아하, 감사합니다."
두꺼운 책에 질려버렸지만 확실히 도움이 될법한 내용이 많았다.
천천히 페이지를 읽어보던 나는 은근슬쩍 전갈 신에 대한 책을 손에 쥐었다.
[전갈의 외신 XXX는...]
외신의 이름은 완전히 지워져 있었다.
심지어 글자수도 일부러 틀리게 해놓았다.
외신을 소환하기 위해선 이름을 제대로 발언하는 것이 필수니까, 당연하다면 당연한 조치다.
'검열해놓았군. 빈틈이 없네 진짜. 음... 전갈은 의외로 물에 강한 건가? 물 속에서도 일주일은 버틸 수 있다고?'
이 녀석도 엄청 까다로울 것 같진 않다.
외신이라고 해봤자 대부분은 칼로 찌르니까 죽더라.
그와 별개로, 전갈 외신 자낙은 격이 상당하다고 한다.
신들의 나라에서도 중견급 이상.
바다 원툴이었던 해신 데아곤과는 다르다.
'피난행렬을 우회해서 항구를 습격한 걸 보면, 추종자들도 상당히 똑똑해보였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덤비자.'
공부를 마친 나는 문득 호기심이 생겨서 조용히 물었다.
사실 이 질문은 일종의 도박인데...
위험해도 한 번 짚고 넘어가는 것이 좋겠다.
"그럼 뱀의 외신은 없나요? 전갈과 비슷하게 독을 쓰니까..."
"뱀이요? 뱀이라... 이상하게 들어본 적이 없네요. 상당히 메이저한 동물인데 말이죠."
"아, 그런가요? 감사합니다."
윤하린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이 양반도 사회성이 은근히 떨어져서, 능숙하게 거짓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뱀들의 어머니는 격이 아주 높아보였는데...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건가?'
소인족의 세계에선 헤르반이 가장 먼저 언급했을만큼 강력하고 유명한 외신이다.
하긴. 질문자와 답변자, 고독한 늑대같은 외신들도 재단의 자료에서 찾아볼 수는 없었다.
'두 세계는 확실히 격리되어 있는 것 같네.'
"아, 로완 님.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오늘은 이만하면 됐나요?"
"네. 돌아가죠. 아비가일은 먼저 갔군요?"
서번트 성이나가 운전해주는 차를 타고 돌아가던 나는 조수석에서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오늘은 꼭 물어봐야 하는 것이 있다.
"저... 성이나 씨."
"네! 무슨 일인가요?"
"혹시 재단에서 활동 보조금 같은 거 나오나요? 최근 헌터 활동을 아예 못했더니 슬슬 생활비가..."
"아앗, 진작 말씀하시지... 당연히 나옵니다!"
다행이다.
명색이 재단인데 자금지원도 못 받았으면 진짜로 아니꼬울 뻔했다.
성이나는 서류가방에서 돈다발을 하나 건네더니, 어디론가 연락을 넣어서 통장도 좀 채워줬다.
차마 대놓고 세어보진 못했지만 언뜻 봐도 상당한 액수다.
"세탁이 완료된 활동 자금입니다. 활동용이라곤 해도 진짜 작전에만 쓰셔야 하는 건 아니고, 생활비나 취미 용도로도 3할 정도는 쓰셔도 돼요!"
"크흑."
"엇... 왜 그러셔요!"
"지난달 당직비, 3만원 받았는데..."
나는 순간 눈물이 차올라서 말을 잇지 못했다.
재단 놈들, 아무리 봐도 헌터 협회보다 훨씬 일을 잘 한다.
법률을 밥먹듯이 어긴다는 것만 제외하면 정말 훌륭한 집단이다.
"B급 헌터 주말 당직비... 3만원인가요?"
"그게 이번 년도에 인상된 거에요."
"... 더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말씀하세요!"
집 앞에서 내린 나는 마트에서 장을 보곤 소파에 늘어져서 오른쪽 눈을 감았다.
가장 먼저 살펴보는 곳은 역시 숲의 요새다.
양제국 출신의 피난민들을 받아들인 숲의 요새는 다행히 잘 돌아가고 있었다.
숲은 단위면적당 생산량이 거의 최악이지만, 주변국들에게서 공물이 많이 들어와서 당장 먹고 사는데엔 지장이 없었다.
게다가 한창 신전 공사중이었다는 것이 컸다.
[높게! 더 높게 세워라! 그분의 위엄이 제대로 드러나야 한다!]
[도망칠 때 가져온 금입니다. 녹여서 신전 지붕에 씌우죠!]
[저도 조각상을 하나 만들겠습니다.]
[유리 세공은 제 전문이죠. 화려하고 색이 들어간 유리창으로...]
안 그래도 노동력이 필요한 판국이었다.
양제국의 핵심 인재들이 들어와서, 신전의 건설은 매우 가속되었다.
게다가 양제국 사람들도 건물을 꽤 잘 짓는 편이었다.
[저긴 저렇게 시공하면 안 됩니다. 모양이 맞는 작은 돌로 틈새를 확실히 메꿔줘야 합니다.]
[만약 그런 돌이 없다면?]
[그럼 직접 만들어야죠.]
[으음, 우린 숲 사람들이라 이런 건 잘 모르니 자네가 지휘하게. 로완 님께 바칠 신전이니 조금도 모자람이 있어선 안 돼.]
[맡겨주십시오.]
눈 앞에서 바다를 갈라버린 덕에, 피난민들의 신앙심은 거의 피크를 찍었다.
이대로 가면 양제국을 되찾는 것도 그리 오래 걸리진 않겠다.
시선을 좀 돌려서 타샤쪽을 보자 내가 줬던 시혀니움... 아니, 로와니움이 눈에 띄게 커져있었다.
이대로 가면 내 본체만큼 커질 것 같다.
헤르반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그녀를 칭찬했다.
[굉장하군. 복제 마법으로 이 정도까지 불릴 수 있을 줄이야... 너야말로 대소환사 에이코그의 재림이다.]
[요령을 익히고 나니까 쉽던데요. 하지만 이걸 어떻게 골렘으로 만든다는 거죠?]
[거기서부터는 빛나는 재능보다는 노련함이 필요하다. 그건 내 전문이지.]
헤르반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타샤도 처음보다는 얼굴이 무척 밝아졌다.
[재료는 갖춰졌다. 우리들의 신이 최강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겠다.]
[네!]
[너희들은 출전 준비를 시작하라. 로완께서 가까운 시일 내에 양제국을 탈환하실 것이다.]
뜨겁게 달아오른 얼굴을 돌려서 헬리온 왕국을 살펴봤다.
숲의 왕국은 알아서 잘 하고있는지라 걱정할 필요가 아예 없다.
헬리온의 추종자들은 비교적 잠잠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저쪽은 또 저쪽대로 날뛰고 있다.
[로완의 적들이 그분의 영토를 흙발로 짓밟았다! 너희들 중 누가 영광스런 전쟁에 동참할 것이냐!]
[나다! 내가 그분과 함께할 것이다!]
[오직 최고의 전사들만이 그분과 함께 갈 수 있다!]
[그분의 적을 다 죽여!]
다들 핏발 선 눈으로 고함을 질러대는데, 솔직히 좀 섬뜩할 정도다.
아주 큰 도움은 안 되겠지만 나름대로 고맙다.
'헬리온의 애들이 참 착해.'
헬리온에서 그나마 눈에 띄는 존재가 있다면 전사대장이다.
어인족과의 전투에서 한쪽 눈을 잃어버려서, 내 피를 하사받은 녀석이다.
'멀쩡히 살아있었군. 다행이네.'
외신의 피는 일반적인 인간들에겐 너무 강하다.
보통 소환사거나, 아니면 최소한 베테랑 모험가 수준은 되어야 감당할 수 있다.
그래서 녀석에겐 하루에 몇 번씩 나눠서 복용시켰다.
[지난번의 추태를 다시 보여드릴 수는 없다!]
[승리를 거두지 못하면 돌아오지 마라!]
흐뭇하게 웃으며 눈을 뜨자 후배님, 서유림에게서 문자가 와있었다.
그러고 보니 유림이를 본지 꽤 오래 됐다.
[선배, 요즘 뭐해요?]
[열심히 살고 있지 뭐. 너는 별 일 없지?]
[저야 뭘 별 일 없는데... 성우현 선배는 외국으로 파견 나갔대요. 들었어요?]
[아니. 별 일이네.]
외국 파견이라.
재단이 그런 식으로 조작해둔 건가?
나는 새삼 안쓰러워졌다.
아마 파견지에서 실종당하거나 전사했다는 식으로 처리될 것 같다.
[괜찮으시면 밥이나 한 번 먹어요.]
[좋아. 이번에는 내가 살게.]
간단하게 약속을 잡곤 소파 위로 털썩 쓰러졌다.
지난번의 엑소더스 작전 때 쌓였던 피로가 뒤늦게 몰려들었다.
'유림이에겐 여러모로 신세졌지. 활동자금 받은 걸로 소고기나 사줄까?'
즐거운 기분 속에서 꿈도 없는 잠이 찾아왔다.
34화. 재능개화
서유림은 좋은 후배다.
사려깊은 성격과 훌륭한 사회적 기술, 그리고 나쁘지 않은 외모와 은근히 야무진 구석까지...
그런 그녀가 약속장소에 지각하는 것은 상당히 드문 일이다.
'무슨 일 있나?'
근처의 식당에서 간단히 식사를 해결한 나는 프랜차이즈 카페에 앉아서 그녀를 기다렸다.
시내라서 그런가 나처럼 혼자온 사람은 거의 없었다.
괜히 외로워져서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재생했다.
요즘 하도 살떨리는 일이 많다보니, 이런 대수롭지 않은 행복도 살짝 호사스럽게 느껴진다.
'입원과 회복 기간 동안에는 음악에게 신세를 많이 졌지.'
눈 상태가 가장 나빴을 때엔 스마트폰을 조작하는 것조차 힘들었지만...
이젠 그럴 걱정은 없다.
소박하지만 달가운 휴식을 즐기고 있자 은근슬쩍 다가온 서유림이 내 귀에서 이어폰을 빼앗았다.
나름대로 힘이 좀 들어간 것 같은 외출복이다.
여성 헌터들은 평소 전투복 차림으로 다니는 것이 좀 억울해서 그런지 저런 경우가 많다.
"늦어서 미안해요 선배. 근데 음악소리 너무 큰 거 아녜요? 볼륨이 너무 크면 머리에 안 좋대요."
"아, 들어본 적 있는 것 같아. 근데 외로운 것도 머리에 안 좋대. 둘 중 어느쪽이 더 나쁜 거야?"
요즘 소식들을 들어보면 과연 몸에 좋은 음식과 활동이 있긴 한가 싶다.
어쩌면 현대 사회 자체가 개인들에게 적대적일지도 모른다.
서유림은 내 질문에 쓰게 웃었다.
"지금 늦었다고 꼽주는 거예요?"
"넌 좀 늦어도 돼. 그래서, 네가 웬일로 늦었어?"
"선배는 은근히 뒤끝 있으시다니까... 죄송해요. 고등학교 동창들에게 붙잡혀 있었어요."
"동창?"
친구가 아니라 동창이라고 표현하는 것을 보면 그리 친한 사이는 아닌 것 같다.
굳이 더 이상 캐묻지 않고 다른 이야기나 하려는데, 카페 입구에서 다섯 명의 여자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그녀들은 음료를 대충 주문하곤 이쪽을 향해서 일직선으로 다가왔다.
'설마...'
"앗, 유림아, 또 만났네?"
"너 일 있다고 먼저 가려던 게 남자 만나는 거였어? 그냥 솔직하게 이야기해주지."
"... 너희가 여긴 웬일이야?"
서유림은 썩 반갑지 않은 얼굴로 마지못해 대꾸했다.
그녀가 이런 표정을 짓는 것은 처음 본다.
서유림의 고등학교 동기들은 멋대로 옆쪽 테이블을 붙이더니 멋대로 합석했다.
"안녕하세요! 오빠도 헌터 맞으시죠?"
"앗, 나 얼마전에 뉴스에서 본 것 같은데... 맞아, 황금세대! 황금세대의 임로완 맞죠?"
"아, 네..."
뭔가 묘하게 가식적인 말투.
서유림은 함께 휘말려버린 나에게 무척 미안한 표정이다.
다섯 명의 여자들은 사뭇 자랑스럽게 본인들을 소개했다.
이쪽이 쫓아내고싶은 눈치를 보여도 그냥 기세로 밀고들어오는데...
나는 적당히 걸러들었다.
"유림이 진짜 출세했다니까. 저는 네트워크 마케팅 전문 이사 XXX입니다."
'다단계네.'
"저는 프리미엄 리셀 사업을..."
'되팔이고.'
"크립토 커런시 트레이더인 OOO입니..."
'얘는 백수야? 아니. 백수보다 나쁘네.'
"클래식 카를 취급하고 있어요. 언제 한 번 보러오시..."
'중고차겠지.'
"이동통신업을 하고있는 ㅁㅁㅁ에요. 근데 폰이 좀 낡으셨네요. 혹시 최신형으로 바꾸실 생각 있으시면..."
'마지막은 폰팔이냐.'
다섯 명 모두 아주 주옥같은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
각자의 분야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이 보기 좋다.
물론 직업에는 귀천이 없으며, 재단에 소속되어 범죄를 밥먹듯이 저지르고 있는 내가 그녀들을 차별할 권리는 없다.
그래도 시작부터 진한 색안경이 씌워지는 것은 사실이다.
나는 문득 슬픈 기분이 되어서 서유림을 살짝 돌아봤다.
유림은 내 눈을 살짝 피했다.
'유림아... 너는 도대체 어느 나라에서 살다왔니?'
고등학교 동창이란 녀석들이 죄다 이 모양 이 꼴이라니.
욕망으로 번들거리는 그녀들의 눈을 보고있자 상황이 대충 이해됐다.
'일부러 따라온 건가. 출세한 동창생을 호구잡으려고 하는군.'
타겟을 잘못 잡았다... 라고 볼 수도 있겠다.
헌터들이 돈을 많이 버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대부분은 착각이다.
진짜 최상위권 헌터들은 억수로 많이 벌지만 그거야 모든 분야의 공통사항이다.
보통 헌터들은 주말당직비 3만원씩 겨우 받아가는 처지다.
물론 저쪽도 아주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다.
서유림은 다름아닌 한국대 헌터학과 출신이니까.
서유림의 동기나 선후배들 중에는 실제로 최상위권 헌터들이 그득하다.
이 여자들은 어떻게든 그런 헌터들을 엮으려고 하는 것이다.
유림이는 사람이 너무 좋으니까 잘못하면 넘어갈 수도 있겠다.
내가 비난을 각오하고 그녀들을 떨쳐내려던 찰나.
삐빅.
주머니 속에서 스마트폰이 짧게 울렸다.
즉시 확인해보자 발신자 표시제한 번호에서 문자가 도착해 있었다.
[2]
"나는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
"아, 네. 선배."
재단에서의 연락.
코드2는 작전 관련 알림사항이 있다는 뜻이다.
'오늘은 비번일인데 호출이라니.'
속으로 불평하면서도 화장실에서 초소형 이어피스를 꺼내 작동시켰다.
첩보 영화에나 나올법한 이어피스는 정말 놀랄만큼 작으며, 최대 2시간 연속 사용이 가능하다.
이런 걸 보고있으면 기술의 발전이 두려워진다.
톡.
이어피스를 꽂아넣자 서번트, 성이나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대답없이 들어주세요. 현재 로완님께 접촉한 사람들은 레이븐들의 감시 대상입니다.]
"..."
뭐지?
설마 외신 관련 인사들이란 말인가?
저 여자들은 사교도따윌 할 수 있을만큼 똑똑해보이진 않았는데?
만약 그녀들이 보여준 모습이 연기였다면 정말 대단한 것이다.
빠른 걸음으로 화장실을 빠져나가자 듣기 좋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정확히는 소속 단체를 주시하고 있습니다. 평범한 다단계 회사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사교도 단체로 추정됩니다.]
"그럼 빠지겠어."
[!]
내가 멋대로 대답하자 저쪽에서 당황했지만...
내 뜻은 명확했다.
"서유림은 일반인이야. 끌어들일 수 없어."
[끌어들일 필요 없습니다. 해당 단체는 페이즈 1입니다.]
외신 관련 단체는 크게 3개의 페이즈로 구분할 수 있는데...
페이즈 1은 진짜 별볼 일 없는 수준이다.
사교도로 추정되는 구성원 한 명이 섞여있는 정도.
성이나는 내 의지를 존중하겠다는 듯 말했다.
[로완님께선 단순 정찰만 해주시면 됩니다. 동행인이 위험해질 일은 절대 없습니다. 만약 그래도 납득이 되지 않으신다면 지금 당장 장비의 전원을 종료해주십시오.]
'...'
솔직히 말해서 재단은 마음에 안 드는 구석이 많다.
하지만 인류에게 꼭 필요한 일을 하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비번인 내게 연락을 넣어왔다는 건 나름대로 급하다는 것이겠지.
외신 관련 업무는 신속하고 정확하게 처리할수록 좋다.
내가 고심 끝에 장비를 끄지 않자 안도의 한숨이 들려왔다.
[감사합니다. 두 분께서 위험해질 가능성은 없습니다.]
"선배. 오셨네요. 슬슬 일어날까요?"
"앗, 벌써 가시게요?"
[가능하면 저 사람들을 따라가주시기 바랍니다. 누가 사교도인지 추정 정도만 해주시면 됩니다. 증거의 확보는 저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말은 쉽군.
그래도 평소의 임무에 비하면 안전한 것은 맞다.
상대는 소수라니까, 여차하면 내가 쓸어버릴 수 있다.
결국 나는 여자들의 권유를 못 이기는 체 하며 아지트로 따라갔다.
후줄근한 건물의 다단계 설명회 정도를 생각했건만.
예상보다 훨씬 번듯한 건물이다.
'돈을 뿌려서 사람들을 부려먹는 건가.'
외신의 권능을 조금이라도 이용하고 있다면, 현대 사회에서 돈을 긁어모으는 것은 굉장히 쉬울 것이다.
이런 식으로도 사교도 활동을 하다니 조금 신기하다.
"선배, 정말로 들어가실 거예요?"
"응, 네 친구들이라니까 잠깐 이야기라도 들어봐야..."
눈치없는 선배 겸 남친 후보를 연기하고 있자 다섯 얼간이들이 굉장히 좋아했다.
"역시 황금세대! 의리가 있으시네요!"
"그럼 바로 들어가시죠!"
건물로 들어가자 명백히 사기꾼처럼 생긴 녀석들이 사장이니 이사니 하는 직함을 달고 꺼드럭거리는 중이었다.
직원은 고작 5명 정도인데... 촌극도 이런 촌극이 없다.
다단계치곤 영업이 잘 안 되는 듯, 방문객은 우리 정도다.
대충 이야기를 들으며 한 명씩 자세히 살펴봤지만 구별은 잘 되지 않았다.
'내가 보기엔 모두 수상해보이는데... 싹 다 감옥에 처넣고 싶네.'
"그래서, 저희가 이번에 헌터들을 대상으로 한 특별 서비스를 계획중인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듣는 것도 슬슬 질려갈 즈음.
문득, 멀찍이 물러나있는 경리 직원에게서 이상한 아지랑이 같은 것이 보였다.
나는 눈을 휘둥그레 떴지만, 옆자리의 서유림은 여전히 짜증스런 얼굴이다.
'뭐지? 나한테만 보이는 건가?'
혹시 몰라서 양쪽 눈을 한 번씩 깜빡거려보자...
검게 물든 오른쪽 눈에서 반응이 왔다.
원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야 할 눈에, 보이지 않아야 할 것이 보인다.
경리 직원은 전신에서 계속 불길한 기운을 내뿜고 있다.
본능적인 혐오감과 거부감이 느껴지는 기운이었다.
'아무리 봐도 저것밖에 없는데...'
나는 잠깐 서유림과 함께 자리를 빠져나와 태연히 말했다.
"여기 좀 수상하지 않아? 아무래도 다단계같아."
"그걸 이제야 알았어요?"
"응, 특히 경리가 수상해."
"제가 보기엔 싹 다 한통속이거든요?
서유림이 내게 투정하는 사이 성이나에게서 반응이 왔다.
[경리 직원이군요. 확인했습니다. 이제 자리를 이탈하셔도 좋습니다.]
그대로 서유림과 함께 건물을 빠져나가려 하자...
불량한 문신을 가진 자칭 이사가 우리들의 앞길을 막았다.
놈은 보기 흉하게 으스대며 위협적으로 말했다.
"아직 이야기 중인데 어디 가시는 거죠? 사람이 기본적인 예의가..."
"... 너 지금 현역 헌터 앞에서 센 척 하는 거냐?"
도저히 이해가 안 돼서 물어보자 놈의 얼굴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세상에 상식이 없는 놈들이 너무 많다.
"착하게 살아."
녀석의 어깨를 두드려주곤 서유림과 함께 회사를 탈출했다.
유림이는 내게 괜히 사과했다.
"제가 죄송해요. 쟤들을 확실히 떼어놓고 왔어야 했는데."
"아냐, 시간도 때우고 잘 됐네. 이제 저녁 먹으러 가자. 내가 소고기 사줄게."
"전 돼지가 더 좋아요. 진심으로."
"그래도 안 얻어먹겠다곤 안 하네."
그대로 맥주까지 한 잔 한 다음, 집으로 바래다주곤 돌아왔다.
어설픈 사기꾼들과 진짜 사교도의 결말은 별로 궁금하지 않았지만...
다음 날 아침 뉴스를 보자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다.
[어젯밤, 불법 다단계 업체 기습 수사 도중 경리 직원이 자살하여 경찰의 과잉 대응 논란이...]
'재단이 처리했다는 건 진짜 사교도였다는 뜻인데...'
재단은 반드시 증거를 확보한 뒤에야 처리 작업을 시작한다.
민간인 피해를 줄이고 싶다기보단 그냥 일처리가 철저한 것이다.
손으로 눈을 만지는 것이 좋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오른쪽 눈을 살짝 어루만져봤다.
사실 이제와서 더 나빠질 구석도 없다.
'이 눈은 뭐지? 외신의 흔적같은 걸 본 건가?'
하루가 다르게 몸이 바뀌어서 무서울 정도다.
하지만 이제와서 원래대로 돌아가는 것은 사양이다.
두 눈이 다 보일 때보다 지금이 훨씬 낫다.
그런데, 늦기 전에 아침을 해결하려 하자마자 추종자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완이씨여! 외신의 습격입니다!]
[부디 중립국을 보호하소서!]
[왕국의 평화를 되찾아주시는데샤앗!]
'뭐지? 썩 대단한 상대는 아닌 것 같은데... 아, 얕보였군.'
아무래도 전갈의 외신 자낙에게 양제국을 빼앗긴 탓에 다른 외신들이 나를 만만하게 보는 것 같다.
나는 짜증스레 전투복과 장비를 챙기며 포탈로 걸어들어갔다.
이번 상대는 특별히 고통스럽게 죽여버리기로 결정했다.
35화. 투명외신
파아앗!
포탈을 통과하자 중립국이 반쯤 작살나고 있었다.
중립국이라곤 해도 숲의 요새에 공물을 바치는 국가.
사실상 아군 직전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상대편 외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웅크리고 있는 소환사들에게 물었다.
"적은 어디있지?"
"여기입니다!"
"응?"
사악!
몸 주변에 펼쳐놓은 염동력에서 반응이 왔다.
나는 반사적으로 힘을 끌어올려 보이지 않는 공격을 막았다.
쿵!
두꺼운 염동력의 장벽이 거세게 흔들렸다.
'뭐지 이거?'
"적은 외신... 투명 외씬입니다!"
"투명 외신?"
"끄아앗, 왕국 실각테챠앗!"
그러고 보니 재단의 서고에서 읽어본 적이 있다.
투명 외신 하그멤논.
서둘러 기감을 끌어올려봤지만, 딱히 감지되는 것이 없다.
'염동력을 꽤 넓게 펼치고 있었는데... 공격 받기 직전까지 감지를 못했어. 그냥 투명해지는 것뿐만은 아니군.'
탐지를 방해하는 효과도 있는 건가?
어쨌든 염동력을 미리 펼쳐둬서 살았다.
'마침 좋은 게 있지.'
투명 외신이라고 하자 허리띠의 주머니에 생각이 미쳤다.
일전에 애콜라이트가 사용했던 가루 약품인데, 특별한 방법으로 조제되어서 숨겨진 것을 드러내는 효과가 있다.
과연 외신을 상대로도 효과가있을진 모르겠지만...
근처에 신전도 없는 외신이니까 그리 강력하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주머니로 손을 가져가기도 전에, 오른쪽 눈에서 반응이 왔다.
"큿!"
사아악...
살짝 지끈거리던 오른쪽 눈이 보일 리 없는 형상을 포착했다.
길쭉하면서도 징그러운 촉수로 이뤄진 외신의 모습이 반투명하게 보였다.
'저건가? 아직 가루는 뿌리지도 않았는데...'
역시 이 눈은 이상하다.
하지만 나는 이번에도 한 번 믿어보기로 했다.
'온다.'
슈욱!
바람을 가르는 소리도 없이 날아드는 촉수.
나는 일부러 직전까지 가만히 있다가, 기습적으로 단검을 휘둘러서 촉수를 잘라냈다.
"키에에엑!"
내 반격에 당한 투명외신이 소름끼치는 비명을 질러댔다.
"오오오, 척안의 로완께서 반격하셨다!"
"투명 외신은 이미 죽은데스!"
"방심하지 마! 저 투명 외신은 다른 외신들의 경계를 사서 신들의 나라에서도 쫓겨난 존재..."
불필요한 해설을 귓등으로 흘리며 염동력을 끌어올린다.
콰득!
다시 뒤로 빼내려던 놈의 몸이 보이지 않는 손에 붙잡혔다.
꼼짝도 못하는 놈에게 단검을 꽉 쥐고 달려들었다.
콰지직...
불쾌한 파육음이 아주 요란스럽게 울려퍼졌다.
날카로운 단검으로 베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냥 쇠꼬챙이로 몸을 들쑤시는 느낌이다.
놈은 고통스럽게 몸부림쳤으나 염동력의 구속에서 탈출할 수 없다.
'비슷하게 소환된 상대를 그냥 묶어버리다니... 염동력이 확실히 강해졌군.'
예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용법이다.
중립국의 성벽을 초토화시켜놓은 것을 보니, 투명 외신의 힘이 약한 것 같지도 않다.
"끼아악..."
"양 제국이 약한 거지, 내가 약한 게 아니다!"
쿠득, 콰지직...
짜증을 듬뿍 담아서 실컷 찔러댄 뒤에는 마무리로 독 단검을 꺼내들었다.
겁에 질린 놈의 몸에서 불길한 기운이 마구 치솟아올랐다.
나는 오른쪽 눈으로 그것을 보곤 직감했다.
'역소환으로 도망치려고 한다!'
콰득!
뱀 송곳니 단검을 박아넣곤 저장된 독액을 모두 주입시켰다.
"키이이이엑!"
결국 투명 외신의 몸은 소름끼치는 비명과 함께 흩어졌다.
제 때 도망치지 못했으니 상당한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오오오오!"
"척안의 로완께서 투명 외신을 물리치셨다!"
"우리들의 응원이 도움이 된 것 같아!"
"로완이씨여! 저희가 어떻게 보답하면 되겠습니까!"
"..."
도움은 개뿔.
장비를 챙기곤 소환자들을 돌아봤다.
도시가 반쯤 초토화되어서 바닥에 주저앉아있는 소인족들.
저 불쌍한 모습을 보자 뭘 받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놈들은 평소에 공물을 바쳤으니까 조금은 서비스해줘도 되겠지.'
염동력으로 성벽 정리를 조금 도와주곤 다시 몸을 돌렸다.
"괜찮다. 너희들은 내 보호 아래에 있으니..."
"로완이씨여!!"
"역시 수호자!"
"투명 외신의 소환사들은 어디에 있지?"
"놈들은 이미 처리했습니다!"
"그럼 됐다. 상처를 치유하고 상실을 이겨내거라."
파아앗!
집으로 돌아온 나는 뒤늦게 아침 식사를 했다.
외신의 피가 마구 튀어서, 하마터면 다시 씻고 옷을 빨아야 할 뻔했지만...
염동력으로 싹 다 막아버려서 살았다.
띵동!
갑작스런 초인종 소리에 현관으로 나가보자 서번트 성이나가 완벽한 정장 차림으로 서 있었다.
손에는 옷걸이를 들고있는데, 내 몸에 딱 맞는 헌터용 전투복이다.
"벌써 완성됐어요?"
"좋은 아침입니다. 들어가도 될까요?"
"아, 네. 좋은 아침이에요."
성이나를 집 안에 들이자 그녀가 내게 전투복을 넘겨주곤 주방으로 향했다.
방탄 플레이트가 들어가는 상의만 대충 걸쳐보자 몸에 딱 맞았다.
'치수는 가르쳐준 적도 없는데 말이지.'
성이나는 내 아침 식사를 발견하곤 고개를 갸웃거렸다.
"시리얼인가요?"
"단백질 시리얼이요."
일반 시리얼보다 단백질 함량이 훨씬 높은 대신, 훨씬 비싸고 유통기한도 짧은데다 맛도 이상하다.
그래도 몸으로 뛰는 직업이라서 억지로 챙겨먹고 있다.
성이나는 새삼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했다.
"어제는 비번이셨는데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놈을 잡아낼 수 있었어요."
"증거는 확보됐나요?"
"네. 꽁꽁 숨겨져있어서 힘들었어요. 그래도 로완님께서 주신 정보를 바탕으로 자택을 수색했죠."
내가 준 정보라고 해봤자 한 놈 찍어준 것밖에 없었지만...
그것도 나름대로 큰 도움이 된 것 같다.
하긴, 재단은 언제나 인력부족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집단이다.
이런저런 업무가 너무나도 많다.
"죄송합니다. 원래 에스콰이어께서 직접 나설만한 일은 아니었는데..."
"아녜요."
전투복을 옷장에 넣고 시리얼을 마저 해치우자 성이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찾으신 건가요?"
"네?"
"놈은 정말 용의주도해서 레이븐들도 상당히 고생했습니다. 의심받을까봐 섣불리 잠입하지도 못했죠. 설마 경리였을 줄이야..."
나도 오른쪽 눈이 아니었다면 굳이 경리를 의심하진 않았을 것이다.
잠시 고민하다가 대충 둘러댔다.
"헌터들 특유의 감이란 게 있잖아요."
"그런가요?"
"네. 아비가일은 저보다 더 날카로울 걸요."
"... 그렇긴 하죠. 고생하셨습니다. 오늘은 편히 휴식을 취해주십시오. 아, 이걸 잊을 뻔했군요."
겨우 납득한 성이나가 내게 자그마한 카드를 건네줬다.
별 것 아닌 플라스틱 카드지만 보자마자 감격이 차올랐다.
[A랭크 헌터 임로완]
내가 그토록 바라마지 않았던 A급 헌터증.
정작 편법으로 너무 쉽게 얻어버렸지만...
딱히 허무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지금의 내겐 더 큰 목표가 있다.
"A랭크 승급, 축하드립니다. 로완님께선 이미 자체 테스트를 통과하셨으니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부담없이 받아주십시오."
"감사합니다. 조심히 가세요."
볼일을 마친 성이나를 돌려보내곤 소파에 앉아서 오른쪽 눈을 감았다.
숲의 요새의 신전은 빠르게 완성되어가고 있다.
전쟁 준비도 척척 진행되어 딱히 도와줄 곳이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양제국에 남겨진 사람들은 어떨까.
나는 정신을 집중하여 그쪽을 살펴봤다.
양제국은 워낙 땅이 넓어서, 숨어사는 소환사들과 추종자들이 적잖게 남아있었다.
'볼 수 있을까? 오... 보인다!'
양제국의 수도는 이미 전갈 신 자낙의 봉사종족들에게 점령당한 상태다.
녀석은 아주 다급히 신전을 짓고 있다.
무수한 시민들이 신전 건설에 동원되었는데, 상당히 고통스러워보인다.
"어서 지어라! 2주 안에 완공하지 못하면 너희들은 모두 죽는다!"
"아니, 신전을 어떻게 고작 2주만에... 끄아악!"
전갈 신의 봉사종족들은 채찍을 들고 반항하거나 머뭇거리는 시민들을 때렸다.
신전 근처에 피와 시체가 잔뜩 보이는데, 저걸로 신전을 지으려는 것인가 의심될 정도다.
일부의 봉사 종족들은 직접 돌을 들고 신전 건설에 동참했다.
이제 보니 봉사 종족들의 숫자가 너무 많다.
저 정도면 본국을 지킬 병사들도 남아있지 않겠다.
'이건... 설마 본진을 버린 건가?'
전갈 외신 자낙의 본거지는 신들의 나라다.
놈은 이미 그곳에 신전까지 하나 가지고 있다.
하지만 신들의 나라는 외신들이 득실거리는 복마전.
그곳은 외신에게도 딱히 편안한 장소가 아니다.
그래서 자낙은 본국을 빼앗기는 한이 있어도 양제국을 완전히 점령하려는 것이다.
일단 양제국의 신전이 완성되면, 고향따윈 어찌되도 좋다는 계산이다.
'골치아프게 됐군.'
저놈도 양제국에 진심이라서, 양제국을 탈환하는 것이 더 어려워졌다.
신전 공사는 이쪽이 좀 더 일찍 끝날 것 같지만...
탈환에 걸리는 시간도 계산해야 한다.
"큭... 모두 참고 버텨라. 척안의 로완께서 반드시 돌아오실 것이다!"
"이미 저희를 버리고 달아났는데 어떻게 믿으란 말입니까..."
"그럼 이대로 저 전갈 놈들의 노예가 되어 살겠다고?"
"아프고 힘든데챠앗..."
전갈 신의 통치가 너무 가혹해서, 양 제국의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반란을 결심했다.
오자마자 신전 짓겠답시고 노역을 강제하는데 곱게 납득할 리 없다.
원래 저런 대규모 토목공사는 느릿느릿하게 해도 나라가 휘청거리는 수준으로 개고생인데...
저렇게까지 서두르면 과장없이 백성들의 시체로 산을 쌓게 된다.
강이 핏물처럼 붉게 물든다.
'저렇게 신전을 지어봤자 큰 효과도 없을텐데... 녀석에겐 봉사종족이 있으니까 다르려나?'
외신에게 무조건 충성하는 종족이 있다는 것은 확실히 든든하다.
반란군은 신전에 대한 사보타주까지 계획했으나, 봉사종족들의 감시가 너무 심해서 불가능했다.
집에서 초조하게 컨디션 조절을 하며 기다리자 마침내 희소식이 들려왔다.
[주군! 신전의 완공이 코앞입니다. 앞으로 이틀 안에 끝날 것 같습니다!]
'잘 했다 헤르반. 가디언 쪽은 어떻지?'
[송구하오나 그쪽은 좀 더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작전을 미룰까요?]
'아니. 예정대로 진행한다. 가디언 하나 없다고 자낙 따위에게 지진 않겠지. 양 제국의 백성들이 고통받고 있으니 서둘러야 한다.'
[너무나도 자비로우십니다. 기쁘게 받들겠습니다.]
재단의 근무 비번일은 오늘까지다.
오늘 안에 자낙과 결판을 낸다.
'컨디션 조절을 빡세게 해야겠네.'
간단하게 장비를 손질하며 TV를 켜자 때마침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한국에 새로운 A급 헌터가 탄생했다는 희소식!
아나운서가 이제 A급만 8명이라며 우쭐거리고 있지만, 사실 성우현이 죽었으니 여전히 7명이다.
딱히 나를 타겟으로 한 뉴스는 아니고...
원래 A급이 상당히 희귀한만큼, 승급 사실 자체가 뉴스거리다.
[이번 승급시험을 통과하신 임로완 씨는 황금세대의 일원으로서, 상당히 오랫동안 힘든 시간을 보내왔는데요...]
[그야말로 고진감래라는 말이 어울리는...]
삑.
작게 혀를 차며 TV를 꺼버렸다.
그런데, 또다시 발신자 표시제한으로 전화가 왔다.
서번트인 성이나다.
'아까 와놓곤 왜 또... 오늘도 갑자기 동원하는 건 아니겠지?'
"여보세요."
[로완 님. 내일의 일정이 캔슬됐습니다.]
"어째서요?"
비번일이 늘어난 것 자체는 희소식이지만 살짝 당황스럽다.
성이나도 조금 놀란 목소리로 사정을 설명했다.
[저희쪽에서 감시중이던 사교도가 모시던 외신, 하그멤논이 갑자기 완전 소멸해버려서...]
"뭐라구요? 완전 소멸이요?"
심지어 하그멤논이라면 내가 아침에 한 판 붙었던 그 투명 외신이 아닌가.
[이유는 모르겠지만, 썩 나쁜 일은 아니죠. 그럼 편히 쉬어주시길 바랍니다.]
성이나는 놀란 내 목소리에 만족한 듯 몇 마디 더 하곤 전화를 끊어버렸다.
조금 전의 내 반응엔 추호의 거짓도 없었다.
정말 상상도 못했던 소식이었으니까.
'하그멤논도 죽었다고?'
나랑 붙었던 외신들이 줄줄이 황천길을 건너고 있다.
아토카 때는 아비가일이 끼어있어서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신전도 뭣도 없었던 하그멤논이 갑자기 왜 죽는단 말인가.
'설마 이것 때문인가?'
문득 독 단검. 바이퍼를 꺼내서 살펴보자 뱀의 송곳니가 음험하게 빛난다.
데아곤 때도, 하그멤논 때도. 결정타는 모두 독 단검의 독액으로 넣었다.
외신을 소멸시킬 수 있는 무기.
그게 아니라면 설명이 안 된다.
'이것도 아비가일의 대검과 비슷한 종류인 건가? 어쩌면 데아곤도 이것 때문에 사라졌을 수도...'
이러니까 신들의 나라에서 지금껏 양 제국을 가만히 내버려뒀지.
다시 단검을 집어넣고,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신전이 완공되길 기다렸다.
내 것을 되찾을 때가 다가오고 있다.
36화. 탈환
때가 됐다.
저녁을 든든하게 챙겨먹고, 마침내 완공된 신전으로 향했다.
파아앗!
"오직 척안의 로완을 경배하라!"
"로완께서 한쪽 눈으로 꿰뚫어보신다!!!"
숲의 신전은 헬리온의 것보다 한층 웅장했다.
숲 속에 녹아들어있는 것 같으면서도, 그 위엄을 확실히 뽐내고 있다.
천천히 신전의 옥좌에 앉자 막대한 힘이 밀려들어온다.
처음 신전을 이용했을 때의 쇼크는 없지만...
힘이 증폭되는 감각은 그 이상이었다.
아무래도 이쪽 신전의 완성도가 좀 더 높고, 추종자들의 신앙심도 강렬하기 때문이리라.
"로완이시여! 저희들의 보잘 것 없는 선물을 받아주십시오!"
"그동안 고생이 많았다. 너희들의 선물이 흡족하구나. 이제 내 것을 되찾으러 갈 때다."
"망설임 없이 받들겠습니다!"
모든 준비를 마친 우리는 주저없이 양제국으로 진군했다.
병력은 그리 많지 않으나, 고르고 고른 정예병이다.
어차피 봉사종족이 상대라면 일반적인 병사들은 별 도움이 안 된다.
살기등등한 정예들의 대열에서 한 전사가 말했다.
"외신 사냥이다!"
"아직 멀었어. 그리고 로완도 외신이야. 눈치 챙겨 전사."
"..."
결사대로 복귀했던 전설의 세 모험가들도 이번 원정에 참여했다.
결사대의 존재 자체는 극비사항이지만, 전설의 세 모험가가 나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은 이미 유명한 일화다.
저벅, 저벅...
손쉽게 바다를 건넌 우리는 양제국의 수도로 향했다.
다들 내 핏물 정도는 나눠받아서 행군 속도가 매우 빠르다.
'새삼 느끼는 거지만... 이 녀석들을 데리고 탈출하길 잘 했군.'
만약 양제국의 핵심 인재들을 데리고 탈출하지 못했다면, 녀석들은 고스란히 봉사종족으로 변했을 것이다.
그럼 자낙은 양제국을 순식간에 장악해버렸겠지.
"다들 조심해라. 놈은 이미 고향을 버렸다! 하지만 우리는 로완님의 인도아래에 고향을 되찾을 것이다!"
직접 갑옷을 입고 말 위에 오른 양황이 병사들을 독려했다.
헤르반과 타샤 등. 숲의 요새의 에이스들은 내 소환을 유지하느라 신전에 발이 묶여있다.
그대로 조금 더 진군하자 마침내 적군의 대열이 보였다.
자낙의 봉사종족들이 방어를 위해서 출전했다.
'신전은 아직인가? 역시...'
후드 속에서 오른쪽 눈을 감아보자 완공 직전의 신전이 보였다.
내 것과 비교하면 굉장히 허접스러워보이지만...
부족한 시간 내에 열심히 작업한 결과물이다.
"자낙, 세계의 수호자에게 겁먹었느냐! 어서 나와라!"
"끄아악!"
콰드드득!
나는 봉사종족들을 손쉽게 쓸어버리며 외쳤다.
염동력을 가볍게 휘두르자 흙의 파도가 일어나 놈들을 갈아버렸다.
이번엔 신전에서 직접 소환된만큼, 이딴 놈들이 아무리 달려들어봤자 소용없다.
'아, 헤르반.'
[말씀하십시오 주군!]
'혹시 다른 외신의 신전을 빼앗을 수 있나?'
[예! 신전의 기능은 외신을 이 세계에 묶어두고, 신앙을 힘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즉석에서 헤르반의 강의가 시작됐다.
지구에는 신전이 아예 없는만큼, 재단에서도 관련 정보를 거의 얻을 수 없었다.
[그 기본적인 기능은 어떠한 외신의 신전이든 동일합니다! 따라서 다른 외신의 신전을 빼앗으면 정상적으로 사용이 가능합니다. 당장은 성능이 좀 낮아지겠지만요.]
'좋군. 양 제국에는 따로 신전을 지을 필요가 없겠어. 자낙 덕분에 수고를 덜었다.'
콰드득!
또다시 흙의 파도를 일으키자 내 앞에 제대로 남아나는 게 없었다.
그렇게 수도가 점점 가까워지던 중, 마침내 자낙의 모습이 드러났다.
아직 신전이 완성되지 않아서 살짝 불안정해 보였지만...
덩치만큼은 나보다 크다.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무형무색의 압력이 내 피부를 저릿하게 만든다.
'저 놈, 강하군. 최소 A급 최상위권 수준이다.'
전갈 외신에겐 특별한 능력이 없다.
독을 가지고 있다지만 마비독 수준이라서, 뱀 외신의 그것에 비할 바는 아니다.
그러나 특별한 약점도 없다.
신들의 나라에서 살아남은 진짜배기 외신.
근육질의 인간형 상체를 지닌 놈이 수도의 앞에 당당히 버텨섰다.
나름대로 정예만 모아서 왔는데, 비교적 약한 놈들은 벌써부터 떨고있다.
"으윽, 저게 이번 상대..."
"로완님보다 훨씬 크지 않아?"
"멍청한 것. 싸움은 크기로 결판나는 게 아니다. 자꾸 겁쟁이같은 소리를 하면 목을 베어주겠다!"
헬리온에서 원정을 나온 전사대장이 윽박지르자 아군이 조금 진정됐다.
전갈의 외신 자낙이 두꺼운 입술을 벌려서 말했다.
놈이 말하기만 해도 천지가 진동한다.
"척안의 로완! 이번에는 도망가지 않는 것이냐?"
"자낙! 나의 것을 되찾으러 왔다! 나의 땅과 나의 명예, 그리고 나의 사람들!"
의외로 소인족들의 말을 할 줄 아는 건가?
생긴 것과 달리 지능적인 놈이다.
나는 두 자루의 단검을 뽑아들곤 가장 익숙한 자세를 취했다.
요즘 내가 많이 강해졌다지만 방심해도 될만한 상대가 아니다.
저놈은 위험하다고 헌터의 본능이 외치고 있다.
"전군, 공격 개시! 로완 님을 따르라!"
파아앗!
오랜만에 괜찮은 성량을 보여준 양황이 즉시 말을 타고 달리기 시작했다.
내 추종자들은 삼삼오오 흩어져서 자낙의 뒤에 있는 수도를 노렸다.
어차피 추종자들의 수준으론 제대로 소환된 외신에게 타격을 입히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놈을 우회하여 신전으로 향하려는 것이다.
"이런 버러지같은 놈들이!"
소인족들은 자낙이 한눈을 팔게 해주는 정도만 해도 제 몫을 다하는 것이다.
나는 너무 늦기 전에 놈에게 덤벼들었다.
그러자 자낙이 기다렸다는 듯 두 자루의 환도를 들고 맞섰다.
'쌍검충?'
채앵!
자낙의 환도가 기괴하면서도 골치아픈 궤도를 그렸다.
비겁하게 쌍검을 쓰다니...
내 정정당당한 쌍단검과는 다른, 더러운 술수다.
'잘못하면 밀리겠군.'
한 방 한 방이 묵직해서, 염동력으로 보조하지 않으면 그대로 꺾여버릴 것 같다.
게다가 사이사이에 날카로운 꼬리 공격이 날아든다.
날카로운 꼬리의 끝에서는 독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다.
전갈은 신체구조상 후방에서의 공격에 매우 약하다고 들었는데...
그런 잔재주를 부릴 여유조차 없다.
섣불리 거리를 좁힌 것은 실수였을지도 모르겠다.
그 사이 내 추종자들은 무사히 도시에 침입했다.
양 제국의 수도는 이내 격렬한 전투에 휩쓸렸다.
"죽여라! 척안의 로완을 위하여!"
"신전으로!"
"사교도들을 죽여라! 사교도들은 죽여도 된다!"
녀석들은 나름대로 분발했으나, 아무래도 본진에 쳐들어간 격이라서 숫적으로 너무 불리하다.
자낙은 봉사종족을 수두룩하게 만들고도 나와 맞싸움이 될만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내가 신전에서 멀리 나온 탓에 살짝 약해진 것도 있다.
'내가 어떻게든 해야 돼.'
파캉!
뱀 송곳니 단검으로 몇 번 공격을 시도했지만, 자낙은 이것만큼은 아주 철저하게 막아내고 있다.
팽팽한 싸움을 이어가던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자낙은 전투기술의 수준이 다르다.
한 100년 동안 밥먹고 칼싸움만 한 것 같다.
정공법으론 절대 못 이긴다.
"세계의 수호자 좋아하시는군!"
"비겁한 쌍검충이..."
"뭐야?"
얼빠진 얼굴의 자낙에게 염동력을 쥐어짜내어 정의의 기습을 날렸다.
전갈의 약점인 꼬리 부분을 정확하게 노린 일격.
그러나 자낙은 꼬리를 크게 흔들어서 그것을 흘려내곤 내게 독침을 꽂아넣었다.
염동력으로 막으려 하지만 독침을 저지할 수 없다.
"큿..."
"네 머리를 신전에 걸어주마! 네 추종자들은 너 때문에 죽는 거다!"
그 사이, 내 추종자들은 마침내 신전에 도달했다.
그러나 적들은 신전 주위를 완전히 둘러싸고 있었다.
"저놈들 다 죽여!"
"전사대장님, 저건 못 뚫어요!"
"비겁자! 겁쟁이!"
"... 와아아아!"
절체절명의 순간.
예정에 없던 지원군들이 적들의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이어서, 옆에서, 앞에서. 계속해서 몰려든다.
"죽여라! 침입자들을 죽여!"
"일어나라!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저놈들이 우리를 다 죽일 거다!"
예로부터 과도한 토목공사는 폭동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가혹한 공사에 동원되었던 양 제국의 시민들이 득달같이 일어났다.
부지깽이나 작은 칼, 삽이나 곡괭이 따위로 무장한 녀석들이 봉사종족들에게 우르르 덤벼든다.
놈들은 전투 직전까지 신전 공사를 하느라 반란 예비군이었던 시민들을 제대로 치워두지도 못했다.
"이, 이것들이..."
크게 당황한 자낙이 다시금 내게 집중했다.
어차피 그래봤자 외신의 입장에선 개미떼에 불과한 놈들이다.
지금 당장 나만 빠르게 해치울 수 있으면, 그래서 신전을 지킬 수 있으면 아직은 수습이 가능하다.
'예상대로군.'
저런 조급함은 아주 자연스럽게 실수를 만들어낸다.
나는 코앞까지 들이닥친 독침에 왼쪽 어깨를 내줬다.
푸욱!
마비독이 빠르게 퍼져나가며, 피부 아래의 혈관이 불길한 색을 띤다.
자낙이 비릿하게 웃으며 환도를 휘두르려던 찰나.
나는 녀석의 옆구리에 독 단검을 꽂아넣었다.
"끄아악?! 크윽, 어, 어떻게..."
헌터에겐 헌터의 방식이 있다.
앞서 양제국의 피난민들을 쫓다가 죽은 봉사종족들이 제법 있었는데...
녀석들의 사체에서 독액을 채취하여 혈청을 만들었다.
자낙은 독이 그리 강하지 않은 편이라서 이걸로 대응이 가능했다.
"네 추종자들은 너 때문에 죽는 거야."
아까 들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며 독 단검의 버튼을 눌렀다.
자낙의 전신이 순식간에 검게 썩어들어갔다.
"읏."
"끄아아악!"
황급히 녀석에게서 떨어지자 고통스런 비명과 함께 외신의 형상이 무너져내렸다.
언제 봐도 무시무시한 효과다.
"외신, 물리쳤다!"
"끼에엑!"
자낙의 죽음을 느낀 봉사종족들은 그대로 제자리에서 굳어버린 채 꼼짝도 못했다.
성난 시민들이 신전으로 몰려들어서 황금으로 된 조각상을 부수고 자낙의 상징물을 뭉개버렸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곤 진지한 고민에 빠졌다.
'그냥 다 부수고 새로 지을까?'
그대로 빼앗아서 쓰면 된다지만, 신전의 건설로 고통받은 시민들의 분노가 장난 아니다.
덕분에 괜히 찝찝해졌다.
그러나 양제국 출신의 추종자들은 그걸 차마 두고보지 못해서 시민들을 진정시켰다.
사실 저거 부수면 본인들이 다시 지어야 하는 것이다.
"그만, 그만! 모두 그만하라! 거짓된 외신을 처단했으니 평화가 찾아올 것이다!"
"나라를 버리고 도망쳤던 황제가 무슨 자격으로..."
시민들 중 한 명이 외치자 헬리온의 전사대장이 앞으로 나섰다.
그러나 양황은 별로 화난 기색조차 없이 그를 진정시켰다.
지금껏 반평생을 도망다녔는데 이제와서 저런 소리를 들어봤자 타격이 없다.
"로완께선 자낙 따위와는 다르다! 오늘, 너희들의 헌신에는 마땅한 보상이 따를 것이다! 황제가 직접 약속한다!"
"..."
"전쟁은 끝났다. 모두 집으로 돌아가서 상처를 돌보고 처자식들을 챙겨라."
파아앗!
나는 사태가 겨우 진정된 것을 보곤 거실로 돌아왔다.
이 이상 소환을 유지하면 소환사들에게 무척 부담이 될 것이다.
'자낙... 예상보다 훨씬 강했네. 하마터면 큰일날 뻔했어.'
지친 몸을 소파에 앉히자 입에서 단내가 풍겼다.
얼른 거실로 가서 찬물을 한 잔 마시는데, 주머니 속에서 벨소리가 들려왔다.
띠리리링...
"누구지? 시현이?"
이 녀석이 웬일로 전화를 다 했대?
A랭크 승급 축하라도 해주려는 건가?
신기해하며 전화를 받자 겁먹은 듯 덜덜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 로완아... 나 좀 도와줘.]
"... 너 지금 어디야?"
[공방! 공방이야.]
"바로 간다."
뚝.
전화는 곧바로 끊어졌다.
나는 컵을 내려놓곤 주저없이 현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부아아앙!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서 난폭운전을 시작하자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성이나가 연락을 걸어온다.
[로완 님? 차량이 움직였다는 신호가 왔는데 어디로 가시나요?]
"제 차에 추적장치 붙여놓았어요?"
[보호 목적으로요!]
이 양반들, 정말 선을 위태롭게 넘는군.
나는 속으로 혀를 차며 대꾸했다.
"시현이가 도와달래서요."
[무슨 일인가요?]
"저도 아직 몰라요."
[물어보지도 않으신 거예요?]
"물어볼 필요가 없죠."
과속방지턱 앞에서 급브레이크를 밟으며 대답했다.
"어차피 할 일은 똑같은데."
[...]
부아아앙!
아파트를 나선 차량이 시현공방을 향해서 폭주하기 시작했다.
37화. 양아치
시현이는 사회성이 썩 좋지 않다.
녀석은 전형적인 일벌레 스타일로, 본업 외의 다른 영역은 한없이 빵점에 가깝다.
하지만 친구는 많다.
대한민국 최고의 대장장이 헌터인만큼, 가만히 있어도 친구가 몰려든다.
개중에는 사회적으로, 물리적으로 힘이 있는 친구들도 많다.
'하지만 이번에는 나를 불렀지.'
녀석은 아비가일의 전화번호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비가일이 아니라 나를 불러줬다.
그것이 기쁘면서도 살짝 당혹스럽다.
아비가일에게는 불가능한, 섬세한 일처리가 필요한 건이라는 뜻이다.
'어차피 가보면 알게 될 거야.'
끼이익!
시현공방의 주차장에 차를 대충 대놓곤 건물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조금 늦은 시간이었는데, 공방의 꼴은 장난이 아니었다.
건물의 유리창이 거의 다 깨져있고 간판은 완전 박살.
과장 좀 보태면 폭격이라도 맞은 것 같다.
'몬스터라도 쳐들어왔나?'
별의 별 생각을 다 하며 시현을 찾아보자 공방 구석에서 제수씨와 함께 있었다.
잔뜩 겁먹은 얼굴이 안쓰럽다.
"로, 로완아!"
"이게 다 무슨 일이야?"
"공격을 받았습니다."
방어구용 금속판 샘플을 들고 있던 제수씨가 새파랗게 질린 시현을 대신하여 설명해줬다.
시현이는 현재 무소속으로 활동하고 있는 프리랜서 대장장이.
실력이 워낙 좋은지라... 녀석을 영입하려는 시도는 끊이지 않았다.
헌터들은 본인의 힘에 취한 경우가 많아서, 다소 거친 방법도 곧잘 쓴다.
그러나 시현의 뒷배는 대한민국 헌터협회 그 자체라서 내로라하는 길드들도 억지로 끌어들이진 못했다.
"그럼 도대체 무슨 길드가 이 따위 짓을 했다는 거죠?"
"길드가 아니에요."
"네?"
"뒷배가 누군진 몰라도, 겉보기엔 그냥 양아치들 같아요."
제수씨가 처음부터 차근차근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인간들, 갑자기 불쑥 찾아와서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더라구요. 자기들이 길드를 만들 건데 무작정 들어오라거나... 그래서 거절했더니 다음 날부터 테러가 시작됐어요."
"테러라면..."
"돌을 던져서 유리창을 깨고, 간판을 부수고, 가게 앞에 쓰레기를 뿌리고, 오토바이로 큰 소리를 내면서 주변을 맴도는 식이죠."
놈들의 수법을 듣고 나서야 겨우 감이 잡혔다.
이놈들, 완전 프로다.
한두번 해본 솜씨가 아니다.
"아슬아슬하게 선을 지키고 있군요."
"선을 지킨다고? 그게?"
시현이 어이없다는 듯 물었지만 불행히도 그것이 사실이다.
"기껏해야 집유받을 정도로만 하고있잖아. 그런 걸로 고소하거나 신고해봤자 제대로 처벌받지도 않아. 이 정도론 구속도 절대 안 돼."
물론 당하는 입장에선 환장할 노릇이다.
시현이가 A급이라지만 대장장이 헌터답게 전투능력은 거의 없어서, 만만하게 여기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여기서 헌터가 엮이면 일이 한층 더 복잡해진다.
만약 내가 염동력으로 지나가던 사람의 발을 걸면, 내가 제대로 처벌을 받을까?
헌터 능력까지 사용하면 얼마든지 꼬장을 부릴 수 있다.
"아마 조직 이름도 따로 안 붙였을 거야. 경찰에게 마크당하기 싫을테니까. 제대로 현대화가 되어있는 조직이네. 혹시 미성년자도 있었나요?"
"맞아요!"
"일처리 확실하네."
명령은 위에서 내리고, 실행은 미성년자들에게 시키는 것이다.
현직 헌터들은 괜히 엮였다가 문제생길까봐 몸을 사리겠지.
물론 그래도 무모한 것은 마찬가지다.
'헌터 협회와 직계약된 시현이를 건드리다니... 뒤가 없는 놈들이군.'
돌을 던져서 창문을 깨버렸다면 이미 상해 사건으로 발전하기 직전이다.
게다가 이번 건은 언론을 타고 크게 소문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 정도면 아무리 게으른 경찰이라도 머지않아 움직일 것이다.
하지만 경찰이 제대로 움직여줄 때까지 시현이와 제수씨가 다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제수씨는 답지않게 주눅든 목소리로 말했다.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한 다음부터 점점 더 심해졌는데... 제가 실수한 걸까요?"
"아뇨. 아무것도 잘못하신 거 없어요."
나는 두 사람을 위해서 단언했다.
"상대가 짐승이었을 뿐이죠. 그런 걸 상대하는 건 제 전문입니다."
"자, 잠깐! 너 뭘 어떻게 하려고?"
"너는 가게 문 닫고 안전한 곳에서 쉬고있어."
곧바로 가게를 나와서 미리 꽂아놓은 이어피스를 켰다.
"다 들었죠? 얼른 찾아요."
[로완 님...]
"뭣하면 제가 직접 찾아도 돼요. 좀 더 오래걸릴 뿐이지만. 아니면 아비가일에게 전화라도 할까요?"
[... 조금만 기다려주시죠.]
운전석으로 들어가 스마트폰으로 조사를 시작했다.
자낙과의 전투로 인한 피로가 남아있지만, 어차피 잔챙이들 상대다.
각종 SNS를 조사해보자 금방 정보가 나왔다.
사실 실행범으로 미성년자를 쓰는 시점에서 비밀유지따윈 불가능하다.
녀석들은 바이크를 타고 어디서 폭주했네, 어느 형님이랑 술을 마셨네 하고 자랑해대면서 온갖 범죄의 흔적을 남겨뒀다.
시현 공방의 습격도 아주 자랑스럽게 떠들어댔다.
현직 헌터를 상대로 일을 저지른 것을 무슨 무용담처럼 적어놓은 것이다.
"이놈들인가."
[아지트를 찾았습니다. 시외 슬럼 구역의 체육관이에요.]
"근처에 사람은 없겠네요."
[로완 님, 정말로 하실 건가요?]
"저 안 그래도 친구 몇 명 없어요."
다시 차에 시동을 걸며 퉁명스레 대꾸했다.
시현이는 내가 가장 힘들 때 아무 대가도 없이 도와줬던 친구다.
이제와서 못 본 체 할 수는 없다.
"죽이진 않을 겁니다."
하지만 병신으로 만들어주겠다.
내가 낸 세금이 그딴 놈들의 장애연금으로 쓰인다는 게 좀 불만스럽지만...
그 정도는 참아줘야겠지.
[... 알겠습니다. 그럼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결국 성이나가 설득을 포기하곤 애원했다.
[로완 님의 자택에서 여벌 전투복을 가져올게요. 돌입 전에 작전도 제대로 세우고...]
"좋아요."
[근처의 대기 지점으로 가주세요.]
빠르게 전투복을 가져온 성이나가 직접 장비를 챙겼다.
원래 서번트와 레이븐은 역할구분이 희미하다고 한다.
옷을 갈아입던 나는 그녀가 꺼내든 집음기를 보곤 혀를 찼다.
"그게 최신형 도청 장비인가요?"
"네. 구형 장비는 사거리가 기껏해야 100미터 정도... 하지만 이건 비교도 안 됩니다. 음질도 훨씬 깨끗하구요."
어디 실력 구경 좀 해볼까?
성이나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나가서, 체육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주차했다.
그대로 체육관 쪽으로 집음기를 겨누자 안쪽의 대화 소리가 고스란히 들려온다.
"사람이 많네요. 어림잡아도 30명 이상..."
"동네 양아치들을 다 긁어모은 건가."
근처 건물의 옥상에 설치된 소형 카메라의 렌즈가 우두머리로 보이는 놈을 포착했다.
카고팬츠와 로카티를 입은 남자인데, 태평하게 앉아서 병나발을 불고 있다.
[형님, 이번에 거기 진짜 괜찮을까요? 그놈들은 헌터 친구도 많을텐데...]
때마침 시현 공방 이야기가 나오고 있어서 귀를 기울였다.
욕설이 너무 많이 섞여있어서 듣기 고통스러울 정도였지만 적당히 걸러냈다.
[형님 말고 보스라 했잖아! 보스!]
[아, 네. 보스...]
[헌터든 뭐든 상관없어. 오히려 얼른 좀 찾아오면 좋겠다고.]
[예에?]
[너희들, 내가 이번 건을 왜 했는지 몰라?]
놈은 아주 대단한 계획이라도 있는 것처럼 지껄였다.
[그놈에겐 헌터 친구가 많으니까, 복수를 하고 싶겠지?]
[아, 예. 보스.]
[근데 헌터가 사람 패러 오는데 증거를 남기겠냐? 아니겠지? 자기들이 알아서 흔적을 다 지워줄 거 아니야?]
[그렇군요! 역시 형님이십니다!]
[보스, 새끼야! 보스!]
그러니까, 처음부터 헌터를 끌어들이기 위해서 일을 저질렀다는 건가?
하긴. 내 경험상 똑똑한 놈들은 이런 범죄를 잘 저지르지 않는다.
[기왕이면 A급이 오면 좋겠는데... 아비가일 그년이면 더 좋고.]
[정말 아비가일도 이길 수 있습니까?]
[그럼. 그것만 있으면 뭐...]
"... 갑니다. 체육관 전원 내려줘요."
"네."
차에서 내려 움직이자 체육관의 불이 뚝 꺼졌다.
근처의 가로등도 완전히 죽어버려서 암흑 속에 잠겨버렸다.
미리 암적응을 끝내뒀던 나는 염동력을 펼친 채 천천히 다가갔다.
당황한 양아치들이 이곳저곳에서 스마트폰 불빛으로 서로를 비췄다.
"뭐야, 정전이야?"
"얼른 불 좀 켜봐 이것들아! 끄아악?!"
어둠 속에서 양아치 한 놈의 팔이 부자연스런 각도로 꺾였다.
비명이 순식간에 들불처럼 번져나간다.
"누, 누구냐! 아극!"
"헌터다! 헌터가 왔어!"
"다들 연장 챙겨! 끄헉..."
조폭 흉내를 내고 있지만, 정작 상해죄로 잡혀갈까봐 시민들 몸에는 손도 못 대는 놈들이다.
아무리 많이 몰려있어봤자 현역 헌터의 상대가 될 리 없다.
거의 최대 사거리에서 얼굴을 숨긴 채 한 명씩 차근차근 불구로 만들어주는데, 자칭 보스가 뒤로 팍 튀어나갔다.
이제와서 도망치는 건가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놈은 어디선가 오래된 석판같은 것을 가져와서 높게 치켜드는 것이 아닌가.
내 오른쪽 눈이 검은색 석판에서 위험한 기운을 포착해냈다.
'저건...'
황급히 장애물 뒤로 몸을 피하곤 염동력을 최대로 끌어올렸다.
그러자 석판에서 검은색 연기가 흘러나와 주변을 휩쓸었다.
스스슷!
"끄아악?!"
"갸하아..."
다른 양아치들은 고통스러워하며 그대로 돌처럼 굳어버렸다.
통신기 너머에서 놀란 성이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르곤의 숨결... 외신 관련 물품입니다!]
'진짜로 믿는 구석이 있었군!'
설마 이딴 곳에도 사교도가 숨어있었을 줄이야.
나는 미친 듯 웃는 놈의 목을 주저없이 날려버렸다.
"하하, 어디냐! 얼른 나... 끄헉?!"
데구르르...
머리를 잃어버린 몸이 앞으로 고꾸라지자 연기가 멈췄다.
다행히 내 몸과 장비는 염동력 덕분에 무사했다.
근처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성이나가 호들갑을 떨었다.
[로완 님... 사교도를 물리치셨군요!]
"아, 네. 결과적으로 그렇게 됐네요."
[아주 훌륭하십니다! 지금 바로 지원팀을 부를게요. 모든 게 완벽해졌어요!]
"..."
아까와는 완전히 바뀐 태도.
모로 가도 외신만 조지면 된다는 재단식 사고방식이다.
원래 이런 놈들이란 걸 알고 있었지만 아직 적응이 안 된다.
뒤늦게 현장에 도착한 성이나가 조심스럽게 석판을 확보하더니, 바닥을 굴러다니던 양아치들을 봤다.
개중에는 아직 어찌어찌 숨이 붙어있는 놈들도 있었다.
"사, 살려주세, 끄윽..."
법 없이도 살 것처럼 굴어놓곤 제법 한심한 꼴이다.
성이나는 소음기를 권총과 결합하더니 놈들을 주저없이 쏴죽여버렸다.
팟, 피슛!
빠르게 작업을 완료하자 시체 처리반이 도착했다.
그들에게 뒤처리를 맡기곤 잽싸게 현장을 빠져나갔다.
"후우. 결국 잘 해결됐네요. 외신 관련 물품까지 확보할 수 있을 줄은..."
"그 석판은 어떻게 하실 거죠?"
"일단 프리스트 토시아키에게 맡겨서 감정하고, 만약 위험성이 없다면 재단에서 사용합니다. 어지간하면 파괴할 거에요."
"그렇군요."
나는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적어도 놈들 때문에 대한민국의 장애연금이 낭비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잡아도 잡아도 계속 나오는 걸까요? 저런 양아치 놈들까지 외신 관련 물품을 보유하고 있다니..."
"그건 던전 때문입니다."
성이나가 의외로 딱 잘라서 말했다.
"헌터 시대가 시작된 이후로, 다른 차원의 도구나 지식이 넘어오는 경우가 급격히 늘어났습니다. 재단의 입장에선 차원 곳곳에 구멍이 뚫린 거죠."
"그렇군요."
나도 그 혜택을 좀 봤다고 할 수 있을까?
어쨌거나 상황이 끝났으니 시현에게 전화를 넣어서 안심시켜줘야겠다.
"여보세요, 시현아. 상황 종료다. 알고 보니까 그놈들이 나쁜 짓을 많이 했더라고. 안심하고 쉬어."
[야, 그게 무슨 소리야. 너 어떻게...]
삑.
전화를 끊고 노곤한 몸을 시트에 기대었다.
묘하게 생글거리고 있는 성이나가 나를 집으로 데려가줬다.
38화. 이너서클
"제가 죽인 거 아니에요."
이른 아침.
시현공방에서 식사를 대접받던 내 입에서 나온 첫마디였다.
내 옆자리에 앉은 제수씨가 덜덜 떨고있어서, 보다못해 한 마디 해준 것이다.
로비에 걸려있는 대형 스크린에서는 어젯밤에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에 대한 보도가 나오고 있었다.
시외 지역의 낡은 체육관에 불이 크게 나서, 창고는 완전히 전소.
창고를 불법으로 점거하고 있던 불량배 조직들도 거의 다 사망해버렸다는 소식이다.
놈들은 밖에서 문을 걸어잠근 채 안쪽에서 자기들끼리 난투극을 벌였는데...
그것 때문에 화재로 인한 피해가 겉잡을 수 없이 커졌다고 한다.
'대본을 너무 대충 쓴 거 아닌가?'
실사정을 아는 자연스럽게 그런 감상이 들 수밖에 없었다.
물론 사고 발생 몇 분만에 호다닥 준비했으니, 천하의 재단이라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제수씨는 여전히 나를 믿어주지 않았다.
맞은편에 앉은 시현이 녀석과는 대조적인 반응이다.
시현이는 씁쓸하게 웃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자기야, 로완이가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잖아."
내 앞에서도 자기라고 부르다니, 아주 스윗하셔.
속으로 코웃음을 치면서도 열심히 변명했다.
"저는 그냥 좀 혼내줄 생각이었어요. 자기들끼리 치고박다가 싸그리 타죽어버릴 줄은 몰랐죠."
진짜 억울하다.
이번에는 정말 불구로 만드는 선에서 끝내줄 작정이었으니까.
만약 놈들의 보스가 외신의 도구를 꺼내들지 않았다면, 양아치들이 떼죽음을 당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 그렇겠죠... 경찰에서도 사고라 하고."
결국 제수씨도 내 결백을 믿어줬다.
시현이는 만감이 교차하는 얼굴로 겨우 내뱉었다.
"그래도 고맙다. 연락하자마자 바로 달려와줘서..."
"넌 인마, 경비업체라도 써라. 돈도 많이 벌면서."
"안 그래도 조금 전에 계약했어. 협회에서 부담해주겠다더라."
사실은 내가 더 고맙다.
많고 많은 지인들 중에서 하필이면 나를 가장 믿어줬다는 점이.
물론 다짜고짜 해결해달란 건 아니고, 단순히 의논 상대를 찾은 것이었을 수도 있지만.
어쨌거나 조금 정도는 빚을 갚은 기분이 됐다.
"이번에는 별 도움이 안 됐지만, 만약 필요하면 언제든지 다시 불러."
"아냐, 도움이 안 되긴 무슨... 그런데 갑자기 왜 백룡 길드에 가입하기로 했어? 지난번에 뉴스에 나왔던데."
"A급이 되니까 길드 없인 제대로 활동이 안 되겠던데? 흑사자보단 역시 백룡이 낫겠다 싶어서. 너는 어떻게 무소속으로 활동하냐?"
"그야 나는 장인이니까..."
느슨해진 분위기 속에서 잡담과 식사를 즐긴 뒤엔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가는 도로는 웬일로 좀 널널헀으나...
엑셀을 밟자마자 돌연 폭발적인 활력이 치솟았다.
"큭?"
심장이 미친 듯 뛰며, 마력이 끝도 없이 샘솟는다.
나는 익숙한 종류의 감각에 당황한 채 혀를 찼다.
겨우 빨간불이 되어서 브레이크를 밟고 오른쪽 눈을 감자 양 제국의 전경이 보였다.
[로완이시여! 당신께 이 신전을 바칩니다!]
'아, 저건가.'
전갈의 외신 자낙이 급조했던 신전.
그것이 내 것으로 재탄생했다.
가혹한 일정에 쫓겨서 부랴부랴 만든 신전이지만, 양 제국 사람들의 건축 솜씨가 어디가진 않아서 토대는 상당히 튼튼했다.
그래서 자낙의 상징물을 치우고, 내 것으로 채운 다음 약간의 보수공사를 하는 것만으로 재활용이 가능했다.
'헤르반 녀석, 당장은 성능이 좀 낮아진다면서...'
양 제국은 인구수가 많아서 그런지, 숲의 신전에 비교해도 결코 꿀리지 않았다.
자낙이 무리하게 욕심을 냈던 것이 납득될 정도다.
양황과 메이린도 제법 잘 해주고 있었다.
녀석들은 백성들이 배우기 쉽도록, 노래와 이야기를 이용해서 포교를 진행했다.
'역시 수완이 있어. 알아서 잘 하고있군.'
양황은 저래봬도 밑바닥에서 기어올라온 입지적인 인물이다.
새장가 욕심만 빼면 제 몫은 충분히 하는 녀석이다.
반면... 헬리온 왕국쪽은 아직 좀 불안한 감이 있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그쪽을 자세히 살폈다.
헬리온 왕국에는 헤르반이나 양황같은 에이스가 없어서, 내가 직접 한 명 만들기로 했다.
그것이 바로 전사대장이다.
하지만 태생적인 에이스가 아니라서 조금 손색이 있다.
이번 양제국 전투에서도 종군한 녀석은 웬 농부들을 윽박지르고 있었다.
녀석들은 다른 신에게 풍년을 기도하다가 걸린 것 같다.
잔뜩 열받은 전사대장이 전사들을 우르르 데려가서 외쳤다.
[새끼... 이단!!]
[예, 예에?]
[감히 로완 외에 다른 신의 이름을 입에 올리다니! 이런 은혜도 모르는 놈들!]
[하, 하지만 시벡은 헬리온에서 전통적으로 모셔온 풍년의 신입니다! 강과 풍년을 관장하는 신으로서...]
농부가 억울하다는 듯 말했으나 전사대장은 기어이 칼을 뽑아들었다.
스르릉!
[멍청한 놈! 그 시벡이 우리들에게 뭘 해줬느냐! 결국 강이 말라서 아주 힘들게 농사짓고 있는데!]
[데뎃...]
은근히 설득력이 있는 주장에 할 말을 찾지 못하는 농부들.
나도 살짝 감탄하며 가만히 지켜봤다.
뇌까지 근육인 줄 알았는데 말하는 게 은근히 똘똘하다.
[로완님께선 전사이자 수호자이신데 풍년도 만들어주시는 것입니까?]
[이단!!!]
[아, 아뇨! 이단이 아니라 질문입니다! 이 천것들의 무식을 용서하십시오!]
전사대장은 거의 미쳐 날뛰며 말했다.
[로완께선 존나 강하고 존나 지혜로우시다! 한 손으로 운하를 만드시고 다른 손으로 바다를 가르신다!]
[오오...]
내가 눈 아래로 피식 웃어버리자 이야기가 갑자기 이상한 곳으로 샌다.
[로완께서 농경에도 능하시다는 것은 고대 왕들의 무덤을 보면 알 수 있다!]
[예엣? 무덤?]
[고대 왕들의 무덤 벽화에는 로완께서 씨를 뿌리고 비를 내리시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 자식... 갑자기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고대 헬리온의 사람들이 그런 걸 만들었을 때엔 내가 태어나지도 않았다.
그러나 전사대장은 아주 뻔뻔스럽게 우겨댔다.
[고대 왕들의 무덤은 이미 무너지지 않았습니까?]
[네놈, 로완 님의 대전사인 내가 거짓말을 한다는 것이냐!]
[아, 아뇨! 그건 아닙니다! 앞으로는 로완님께 풍년을 기도하겠습니다!]
[좋다. 만약 다시 한 번 이상한 기도소리가 들려온다면 그 입을 찢고 목을 베어주겠다!]
만족스럽게 웃으며 칼을 집어넣은 전사대장이 시장으로 가서 비슷한 짓을 했다.
[무식한 놈들! 상인이라면 당연히 로완님께 기도해야지!]
[사, 상인들도 말입니까?]
[고대 왕들의 무덤 벽화에는 로완께서 황금의 비를 뿌리시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
무덤이 이미 망가져서 들킬 염려가 없으니까 아주 막 지르시는군.
애초에 일반 시민들이 언제 고대 왕들의 무덤 벽화따위를 구경했겠는가.
머리가 지끈거려서 어쩔 줄을 모르겠는데, 정작 소환사들과 왕족들은 그런 광경을 아주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다.
[음, 좋아. 도움도 안 되는 잡신들 집어치우고 싹 다 로완님으로 바꿔.]
[아직 멀쩡한 무덤이 몇 개 있는데... 어떻게 할까요?]
[아, 그래? 뭐하고 있나? 가서 로완님 벽화 몇 개 그려!]
문화재 훼손에도 망설임이 없다.
즐길거리가 없는 사막에 살다보니 다들 정신이 이상해진 것 같다.
그러나 저 어처구니 없는 역사왜곡은 실제로 효과가 있어서, 헬리온 신전에서 흘러들어오는 힘이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이거 참, 말리기도 좀 그렇고... 이제 농사짓는 법이랑 장사하는 법도 공부해야 하나?'
그대로 숲의 요새를 둘러보고, 오랜만에 결사대 관리도 좀 도와주려는데...
삐빅!
스마트폰이 다소 불길한 소음을 토해냈다.
이건 재단 전용 문자 수신음이다.
"제발..."
외신과 엮여있던 양아치들을 처리한지 12시간은 됐나?
이번에는 별 일이 아니길 바랄 뿐이다.
그러나 문자의 내용은 내 기대를 완전히 배반했다.
[페이즈 3 상황 발생. 긴급 소집.]
'최악이군.'
재단의 외신 단체 분류법은 총 3개의 페이즈로 나뉜다.
페이즈 1은 지난번처럼 별 볼 일이 없다.
비교적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는 단계다.
페이즈 2는 해당 단체에 사교도로 확인된 인물이 셋 이상 포함된 상태.
여기서부터는 철저하고 완전한 박멸이 필요하다.
참고로 비율따윈 따지지 않는다.
사교도들은 벌레와 같아서, 셋이나 발견됐다는 것은 얼마든지 더 존재할 수 있다는 뜻이다.
문제는 페이즈 3이다.
신전 건설 단계.
신전에 대해서 인식하고, 실제로 건설을 시도하고 있으면 페이즈 3으로 분류된다.
재단의 모든 자원을 투입해서라도 막아야 하는 사태다.
'어디지? 설마 한국인가?'
속으로 열심히 투덜거리면서도 빠르게 장비를 챙겨서 나갔다.
엑셀을 미친 듯 밟아서 재단 지부에 도착하자 프리스트 토시아키가 나를 마중나왔다.
"어서 오시죠. 드디어 올 것이 왔군요."
"상황이 심각한가요?"
"썩 좋진 않습니다. 대응이 상당히 늦어버려서요... 나이트 아비가일께서 저쪽 방으로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
"저쪽 방이요?"
프리스트 토시아키가 가리킨 곳은 이너서클 멤버 전용 내실이었다.
정작 한국 지부의 이너서클 멤버는 아비가일과 토시아키 씨 정도밖에 없는 것으로 알고있지만.
"토시아키 씨는 안 들어가시나요?"
"저는 명목상 이너서클의 멤버일뿐, 들어가본 적은 없습니다. 정치보단 연구가 체질에 맞거든요."
"아하..."
"안쪽에 손님들이 많습니다. 다른 지부에서 지원을 와주셨죠."
살짝 떨리는 심정으로 이중문을 열고 들어가자 여러명이 이미 착석해 있었다.
지난번에 봤던 치유의 손 라우라 폭스를 비롯하여, 이름만 대면 알법한 유명 헌터들이다.
심지어 이미 은퇴한 사람도 보인다.
그들은 나를 보곤 크게 당황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구냐! 여긴 일반 단원이 들어와도 되는 곳이 아닌데..."
"지난번에 나이트 아비가일께서 추천하셨던 그 에스콰이어군."
"아무리 에스콰이어라도 여기에 오면 안 되지. 내 얼굴을 봐버렸잖아!"
나도 덩달아서 굳어있자 뒤늦게 아비가일이 들어왔다.
지난번에 내 눈을 치료해줬던 라우라 폭스가 가장 격하게 따지고 든다.
"나이트 아비가일! 아무리 총애하는 에스콰이어라도 이건 좀 아니죠! 얼른 내보내세요!"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인 아비가일은 밝게 웃으며 인사했다.
녀석 특유의 4차원 화법이다.
"다들 안녕! 오랜만이야!"
"아비가일 씨..."
"으응? 로완이 때문에 그래? 로완이는 너희들보다 훨씬 자격이 있는데?"
"뭐라구요?"
녀석의 말에 진심으로 발끈하는 회원들.
금방이라도 싸움이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에 염동력을 살짝 끌어올렸다.
아비가일은 여전히 긴장감 없이 헤실헤실 웃으며 내게 말했다.
"로완아, 그거 보여줘. 그거."
"그거라니..."
예쁜 손가락이 쿡쿡 찔러대는 곳은 내가 뱀 송곳니 단검을 숨겨둔 곳이다.
역시 아비가일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어차피 녀석이 협조해주지 않으면 내 비밀유지따윈 불가능하다.
무슨 속셈인지는 몰라도 당장은 어울려주기로 했다.
그런데, 내가 단검을 꺼내자마자 이너 서클 회원들의 얼굴이 완전히 바뀌었다.
"헉!"
"그, 그건..."
"어째서 에스콰이어가 신물을 가지고 있는 거지?"
"..."
이너서클 멤버들 정도 되면 한 눈에 알아보는 건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서 살짝 굳어있는데...
가장 열심히 따지고 들던 라우라 폭스가 갑자기 무릎을 털썩 꿇었다.
사시나무처럼 몸을 떤다는 것이 이런 걸까?
그녀는 이내 바닥에 양손을 짚곤 천천히 머리를 조아렸다.
정신을 차려보니, 아비가일을 제외한 회원들도 모두 똑같은 짓을 하고 있었다.
"사, 사도께 큰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무슨 짓이든 할테니 부디 용서를..."
"..."
기가 막혀서 아무말도 안 나온다.
옆에서 뿌듯하게 웃고있는 아비가일이 그리도 원망스러울 수 없다.
어쩔 줄을 몰라서 시선을 살짝 돌렸던 나는 문득 벽면의 그림이 바뀌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름다우면서도 기묘한 여인의 그림인데, 아까전까지만 해도 분명히 없었다.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구도와 분위기 덕분에 곧바로 정체를 알아봤다.
'뱀들의 어머니...'
뒤늦게 상대를 인식한 심장이 금방이라도 고장날 것처럼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무표정하던 초상화의 눈동자가 내쪽으로 슬쩍 회전하더니, 희미하면서도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 우주의 사슴 >
대충 짐작 정도는 하고 있었다.
외신에게 맞서기 위해선 외신이 필수.
하다못해 외신의 도움이라도 받아야 한다.
나도 소인족들의 세계에서 비슷한 짓을 하고 있다.
재단에 뱀 외신 관련 정보가 아예 없었을 때부터 심증 정도는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직접 확인하는 것은 역시 충격적이었다.
잠시 옆방으로 자리를 옮긴 채, 아비가일을 마주한다.
녀석은 묘하게 뿌듯한 얼굴이다.
"흐아, 지금까지 입이 근질거려서 혼났어!"
많고 많은 외신들 중 하필이면 뱀들의 어머니가 협력 상대였을 줄이야.
독사 소굴에 떨어져버린 기분이다.
나는 더듬더듬 아비가일에게 물었다.
머리가 너무 어지러워서 상황을 한 번 정리해야겠다.
"너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지?"
"으응? 알고 자시고... 내가 뱀신님께 기도했는 걸?"
"기도?"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하는 아비가일.
지난번에 그녀와 함께 헌터 협회에서 당직을 섰던 날이 떠오른다.
"그 날, 로완이가 강해지고 싶다 말했잖아? 그래서 어머니께 기도했어! 로완이를 한 번 봐달라고!"
"..."
이번에는 정말 아연실색 할 수밖에 없었다.
당직이 끝난 직후, 나는 꿈 속에서 뱀들의 어머니를 만났다.
당시에는 양 제국에서 뱀신과 한 판 붙었기 때문인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뭐가 더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아비가일이 단검을 보고도 그냥 넘어갔구나.'
애초에 본인이 불렀으니까!
머리가 지끈거리는 와중에도, 생존을 위해서 열심히 고민했다.
지금까지 뱀들의 어머니가 보여준 모습은 아주 나쁘진 않다.
재단과 협력관계인 것을 보니, 당장 인류의 적이 될 가능성은 낮다.
"그럼... 나는 지금까지 열심히 헛짓거리 했던 건가? 뱀들의 어머니를 만났을 때 추종자 제안을 받았는데..."
"으응? 아냐!"
아비가일이 이상한 곳에서 기겁하며 대꾸한다.
"만약 그걸 받아들였으면 뱀신님께서 로완이에 대한 흥미를 잃었을지도 몰라."
"그래?"
"응! 어머니께선 너무 순종적인 사람은 좋아하지 않으시거든! 오히려 적당히 제멋대로인 편을 선호하셔!"
만약 뱀들의 어머니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오히려 큰일날 뻔했다.
그녀에게 반항했던 것이 정답이었던 셈이다.
듣다보니 좀 어이가 없다.
"진짜 이상한 성격이네. 내가 아는 누구랑 비슷해."
"그래? 누가 또 어머니처럼 멋진 성격을 가지고 계신데?"
"..."
이건 곧이곧대로 말해봤자 기뻐하겠군.
그래서 그냥 입 닫고 있기로 햇다.
"그... 뱀들의 어머니가 재단의 주인인 것 맞지?"
"응! 어머니께선 다른 외신들과 달라. 우리들을 아끼고 사랑하시는 보호자야!"
아비가일은 완전히 광신도 수준인 것 같으니까 적당히 걸러들어야겠다.
"그 사실은 이너서클 멤버들 정도만 알고있는 거지?"
"응! 로완이도 입조심 해!"
"물론이지. 그럼 사도는 또 뭔데?"
"어머님께 직접 축복받은 존재들! 내가 사도고, 로완이도 사도야!"
적극적으로 설명하던 녀석이 갑자기 본인의 대검을 간단하게 분해했다.
그러자 안쪽에 내장되어 있던 송곳니가 불쑥 튀어나온다.
"봐봐! 나도 가지고 있어! 로완이의 칼과 내 칼은 자매검인 거야! 물론 내쪽이 언니!"
"그, 그렇군..."
아비가일도 나와 같은 무기를 쓰고 있었던 덕에 외신을 살해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대충 상황파악을 마친 나는 당장 급한 일부터 처리하기로 했다.
뱀들의 어머니는 이미 재단을 장악한지 오래다.
어쩌면 이 조직 자체가 그녀를 위한 것일 수도 있겠다.
내가 여기서 당장 뭘 어떻게 해보는 것은 힘들다.
아직 정보가 너무 부족하다.
'그럼... 우선 신전부터 조져볼까.'
"설명해줘서 고마워."
"응! 얼마든지 더 물어봐!"
다른 이너서클 멤버들이 있는 방으로 돌아가자, 그곳에선 학구적이면서도 진지한 토론이 펼쳐지고 있었다.
이 자리의 대부분은 세계적인 헌터들이지만...
남몰래 지켜온 신앙을 마음 편히 밝힐 수 있는 곳은 여기뿐인 것이다.
"한 가지 고민이 있다."
"뭐든 말해보게 형제여."
"뱀신께선 처녀시겠지?"
"이름부터 뱀들의 '어머니'신데?"
"외신들의 가족활동이 우리들의 것과 똑같으리라 생각하나?"
이딴 놈들이 그림자 속에서 인류를 수호하고 있다니.
결국, 격렬한 토론 끝에 뱀들의 어머니는 처녀인 것으로 잠정됐다.
두 눈을 질끈 감고있자 아까 봤던 라우라 폭스가 슬금슬금 다가온다.
그녀는 여전히 무릎꿇은 채 울상이 되어있다.
"사도님, 혹 불편하신 곳은 없으신지..."
"됐어요. 몰라서 그런 거니까 용서하겠습니다."
"가,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사도라는 호칭은 불편하지만...
재단 내에서의 지위가 상승한 것은 나쁘지 않다.
이 녀석들의 비밀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테니까.
내가 보기에 재단은 아직 숨겨둔 것이 상당히 많다.
그 사이, 마침내 브리핑 준비가 끝났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너서클의 멤버들은 자리에 착석하여 원격으로 브리핑을 받았다.
멤버들의 정체를 숨기기 위한 조치다.
[그, 그럼 브리핑을 개시하겠습니다!]
서번트 성이나가 평소보다 좀 더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신전이 건설되고 있는 현장은 시외의 사이비 교단 본부입니다. 해당 법인은 거대한 지하 시설을 건축 중인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신전이라고 확신한 경위가 무엇이지?"
이너서클 멤버들 중 한 명이 질문했다.
외신을 막고 신전을 부수는데엔 다들 진심인 것 같다.
[그것은... 건설 현장을 자세히 살폈기 때문입니다! 사이비 종교 집단은 원래 집중 감시대상이구요.]
"지하 시설이라면서? 그런데도 현장 감시가 가능했나?"
[하지만 물자와 노동력의 이동과 인건비의 흐름 등등은 확실히 추적할 수 있었습니다. 해당 현장에서는 자재를 빼돌리지도 않고, 노동자들도 교단 사람과 베테랑들로 엄선하여 아주 장시간 동안 건설하고 있습니다.]
"... 그게 이상한 건가?"
[보통은 있을 수 없는 일이죠. 건설업체들은 하청에게 모든 부담을 떠넘기는 식으로 이익을 챙기니까요.]
아무래도 대한민국에서 건물을 제대로 지을 줄 아는 것은 외신 숭배 사이비 종교단체 정도인 것 같다.
어쨌거나 추가 증거가 제시되어, 신전의 건설은 확실해졌다.
[발견이 조금 늦어졌지만, 한국 지부는 이번 작전에 총력을 기울이겠습니다. 주변 지역의 통제와 언론, 지방 정부, 중앙 정부와의 협조는 완벽합니다.]
"가서 박살내기만 하면 된다는 거군."
"신전 건설까지 진행중이라면 외신 소환 정도는 충분히 가능하겠죠. 교전 위험이 아주 높습니다."
"괜찮습니다. 우리에겐 사도가 둘이나 있으니."
"왜 한국에만 사도가 두 분이나 계신 거죠? 저희도 모시고 싶은데... 축복받은 땅 같으니라고."
세계적인 S급 헌터들이 내게 의지하는 것은 전혀 기분좋지 않고 오히려 부담스럽다.
나는 그냥 조용히 묻어가고 싶다.
[신전을 건설중인 것은 우주의 사슴, 곤멜입니다.]
원래 외신의 이름은 극비사항이지만, 지금은 비상상황이라서 재단이 소유한 모든 정보가 공개되었다.
[이미 가디언도 소환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럼 신전 파괴의 장애물은 크게 두 가지. 외신과 가디언이군요."
만약 재단이 건설 현장을 공격하면, 추종자들은 당연히 외신을 소환하여 막으려 할 것이다.
"중상급 정도의 외신이라... 아비가일. 상대할 수 있겠어?"
"신전이 완공되지도 않았으니까 어떻게든 될 걸? 이번엔 동료들도 많고!"
아비가일을 비롯한 대부분의 멤버들은 외신을 저지하는데에 투입되기로 했다.
그쪽은 어떻게든 한다쳐도 아직 가디언이 남아있다.
"가디언은 어떻게 하죠?"
"그쪽은 로완이가 맡는 걸로!"
"오오... 역시 사도가 둘이나 있으니 든든하군요."
높게 평가해주는 것은 고맙지만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걱정된다.
그래도 외신을 상대하는 것보단 쉬울 것 같아서 납득했다.
어떻게든 독 단검을 꽂아넣으면 이길 수 있다.
'외신에게도 통하는 무기가 있다는 건 정말 든든하네.'
[그럼 6시간 뒤에 작전 지역으로 이동하겠습니다. 모두 충분한 휴식을 취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너서클의 멤버들은 즉시 장비를 점검하고 식사를 주문하거나 휴게실로 이동했다.
나는 아비가일과 나란히 앉은 채, 오른쪽 눈을 슬쩍 감았다.
아까 못 봤던 숲의 요새로 시선을 옮긴다.
[음? 로완 님! 가디언 골렘이 거의 다 완성됐습니다!]
'오오...'
내가 가디언으로 선택한 로와니움 골렘.
어두운 빛깔의 인간형 금속 덩어리는 이미 말도 안 되는 크기가 되어있었다.
사실 마법으로 로와니움을 복제한다곤 해도, 대충 지팡이를 휘두르면 훅훅 불어나는 것은 아니다.
그 과정은 연금술에 가까웠다.
매 시간마다 연금솥에 정량의 재료를 투입하는 까다로운 공정이다.
자칫 졸아버리면 재료를 몽땅 날려버릴 수도 있다.
타샤를 비롯한 추종자들의 피땀어린 작품.
그것을 보고있자 자연스럽게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잘 했다. 잘도 이 정도까지 해냈군.'
[그리고... 앞으로 로완님께 올려지는 기도는 저희들이 1차로 관리해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하라.'
마침 양제국의 메이린도 비슷한 의견을 올려서 망설임없이 허락했다.
나날이 폭주하는 기도를 나혼자 처리하는 것도 고생이다.
기왕 추종자들이 있으니까 써먹어도 되겠지.
내가 뿌듯하게 웃고있자 아비가일도 옆에서 생글생글 웃었다.
내 영혼까지 꿰뚫어보려는 듯한 시선이 언제나처럼 부담스럽다.
언제나 하고싶은 말을 다 하면서 살던 것 같던 녀석이었지만, 꼭 그런 것도 아니었던 것 같다.
"뱀신님도 로완이를 좋게 봐주셔서 다행이야! 로완이라면 그럴 줄 알았어!"
"다음부턴 미리 말이라도 해줘라. 진짜 놀랐다고."
"앗, 그래? 미안해..."
나를 다짜고짜 뱀신에게 일러바친 건 좀 그렇지만...
나쁜 뜻이 있었던 건 아니었으니까 관대하게 용서해주기로 했다.
어쨌거나 결과는 좋았고.
'뱀들의 어머니와 만나고 검은 피를 왕창 토해냈는데, 그 뒤로 몸이 엄청 가벼워졌단 말이지...'
다만 이너서클 밖에서는 여전히 에스콰이어의 직위를 유지하기로 했다.
괜히 일반 회원들의 이목까지 사버려서 좋을 것이 없다.
어차피 아비가일을 앞세우면 어지간한 건 다 통과될 것이다.
'그나저나 저 초상화는 너무 미화된 거 아니야? 저렇게 안 생겼던데...'
새삼 뱀신의 초상화를 감상하며 휴식을 취하자...
마침내 시간이 됐다.
이너서클의 멤버들은 여러대의 차량에 나눠타서 현장으로 향했다.
프리스트 토시아키가 직접 내 장비를 챙겨주곤 배웅해줬다.
"특제 탄환과 소음 기관단총입니다. 조심히 다녀오세요."
"감사합니다."
부우웅...
한참을 달리던 차량은 물 좋고 경치좋은 산골짜기에 멈춰섰다.
이너 서클의 멤버들은 프로답게 일찍부터 낌새를 눈치챘다.
"아까 입구에 이상한 건물이 있던데..."
"위장된 감시초소겠지. 이미 제압됐대."
"저쪽이 입구인가? 대형 건물도 있군."
"폐교된 대학 부지 전체를 사들인 거야."
"가자. 봉사할 시간이다."
우르르...
대원들은 빠르게 지하 시설로 진입했다.
근처는 이미 풋맨들과 에스콰이어들이 제압해둔 상태다.
무슨 터널공사라도 하는 것처럼 거대한 현장이 인상적이다.
지나치게 깔끔한 공사현장에선 비인간적인 분위기마저 느껴졌다.
다행히 조명은 제대로 갖춰져 있다.
"선행팀, 보고바람."
[현재 위험 거리까지 접근했습니다. 아직 신전을 육안으로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 어엇?!]
쿠르르릉...
깊은 지하에서 짐승의 울음소리같은 진동이 퍼져나왔다.
통신이 완전히 끊긴 와중, 검은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이 포착됐다.
"앗, 눈치챘네. 곧 외신이 소환될 거야."
"서둘러!"
대원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앞으로 뛰쳐나갔다.
건설용 조명조차 닿지않는 어둠 속에 한층 짙은 어둠이 자리잡고 있다.
금방이라도 심장이 멈춰버릴 것 같은, 싸늘한 불안감이 피부 속으로 스며든다.
'이 자식, 진짜배기군.'
지금까지의 상대들과는 격이 다르다.
나는 떨리는 다리를 억지로 옮겨서 어둠과 혼돈의 심장부로 내달렸다.
< 가디언 >
어둠 속에서 기이한 색채가 번뜩인다.
어두운 곳에 있다가 빛이 보이면 안심이 되는 것이 인지상정.
그러나 저 빛은 오히려 사람들을 매우 불안하게 만들었다.
사슴의 것처럼 두 갈래로 빛나는 뿔을 보고, 선두의 대원이 말했다.
"봉사 종족 확인. 소탕 개시."
투두두두!
대원들의 총이 불을 뿜자 총염이 불쾌한 색채를 물리친다.
에스콰이어들과 풋맨들이 앞장서서 진입하며 대열을 형성했다.
"까아아악!"
무어라 형언하기 힘든 울음소리와 함께 기괴한 생김새의 봉사종족들이 달려들었다.
우주의 사슴이라곤 해도, 사슴다운 부분은 뿔 정도밖에 없다.
그 아래쪽은 불쾌하게 뒤틀려있는 모습이다.
제대로 직시하고 싶지도 않을만큼 추악하고 이질적인 형상.
투두두!
다행이 총탄은 제대로 먹히는 느낌이었지만...
이내 녀석들의 뒤쪽에서 한층 더 거대한 형상이 등장했다.
일반적인 봉사종족들보다 수십배는 더 큰 사슴이다.
"곤멜이다! 우주의 사슴 곤멜!"
"외신 소환 확인!"
분명 저만한 대형 외신이 소환될만한 공간은 없었을텐데.
마치 지하공간 전체가 왜곡되어 있는 것 같다.
선두에 있던 에스콰이어 하나가 달려들었지만, 이내 무형의 압력에 떠밀려서 가볍게 날아가버린다.
어둠 속으로 끝도 없이 굴러떨어진다.
"키카각..."
"로완이, 가!"
아비가일과 나이트들이 대검을 휘두르며 놈에게 달려들었다.
외신이나 가디언에게 제대로 피해를 입힐 수 있는 무기는 총 2정.
내 단검과 아비가일의 대검뿐이다.
미리 계획했던대로, 내가 가디언을 맡고 아비가일이 외신을 맡아야 한다.
"죽으면 안 된다?"
"너도 다치지 마라."
"응!"
나는 외신을 지나쳐서 더욱 깊은 곳으로 뛰어들었다.
저만한 외신에게 가디언이 없을 리는 없으니, 아마 신전 앞에 배치되어 있을 것이다.
그렇게 무작정 안쪽으로 내달린지 얼마나 됐을까.
슬슬 시간감각까지 어그러지는 것을 느끼던 중, 다시금 불길한 색채가 나타났다.
어둠의 심장부에 건설된 신전은 장엄하면서도 모독적이었다.
'저거다!'
사슴의 뿔을 형상화한 듯한 생김새의 기둥을 향해서 염동력을 집중시킨다.
그러나, 신전의 안쪽에서 섬뜩한 울음소리가 터져나왔다.
"키이이익!"
파바바밧!
은빛의 사슴이 무서운 속도로 나를 향해 돌진해온다.
형형색색으로 빛나는 뿔이 너무나도 크고 날카롭다.
콰앙!
염동력으로 놈의 옆쪽을 후려쳤으나, 돌진의 기세는 거의 꺾이지 않았다.
결국 나는 놈의 발을 걸고 넘어져서 겨우 피할 수 있었다.
콰드득!
놈의 뿔에 닿은 바닥이 아주 깔끔하게 잘려나갔다.
직접 맞으면 어떻게 될지, 상상도 하고싶지 않다.
나는 잽싸게 신전을 노렸지만, 놈은 빠르게 자세를 회복해서 다시 달려들었다.
불길한 색채가 길쭉한 망토처럼 놈의 궤적을 수놓았다.
'가디언. 못 이길 것까진 없을 것 같은데... 신전을 아주 철저하게 보호하고 있어.'
아비가일과 나이트들은 오래 못 버틴다.
아무리 불완전한 소환이라지만...
저만한 외신을 상대로 이기긴 커녕, 시간벌이만 해도 기적이다.
그러니 내가 어떻게든 해야 한다.
콰직!
다시금 가디언의 발을 묶어두곤, 뱀 송곳니 단검을 염동력으로 날렸다.
그러나 놈은 힘으로 구속을 풀곤 내게 달려들었다.
단순한 돌진 공격이지만 상상 이상으로 터프하고 귀찮다.
몇 번이고 맞아도 다시 일어나는 모습은 가디언의 귀감이다.
"끼아악!"
'이 와중에도 송곳니 단검은 확실히 피하고 있어. 이대로는 신전을 부술 수 없는데...'
염동력으로 큰 걸 한 방 날리려면 준비시간이 필요하다.
어떻게든 도움이 될만한 게 없을까?
초조함에 시달리던 나는 문득 헤르반과 타샤를 떠올렸다.
조금 황당해보이지만,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게 될까? 아니... 된다! 확실해! 이미 검증 해봤잖아?'
슈욱!
짧은 고민의 틈새를 매섭게 파고드는 뿔.
나는 염동력으로 스스로의 몸을 쳐서 가까스로 회피했다.
잘못하면 뼈가 부러질 수도 있는 방식이라서 쉽게 시도할 수 있는 회피는 아니다.
땅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헤르반을 불렀다.
'헤르반! 지금 당장 가디언을 보내라!'
[로완이시여!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헤르반은 즉시 작업에 착수했다.
혼란스런 머릿속에서 다시 한 번 계획을 점검했다.
소인족 세계와 지구 사이에선 물자와 생명체의 이동이 가능하다.
그것은 지금껏 몇 번이고 입증했던 사실이다.
특히, 소인족 세계에서도 포탈을 통해 지구로 올 수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나는 그것을 이용하여 타샤를 고향 마을에서 구해냈다.
'그러니까... 내 가디언도 이곳으로 불러들일 수 있어!'
나와 비슷한 크기로 제작된 가디언 골렘이라면 쓸만한 전력이 되어줄 것이다.
파바밧!
곤멜의 가디언이 다시 한 번 나를 향해 질주했다.
과장없이 제로백이 2초 이하로 나올 것 같은 가속이다.
아차하는 순간 거리가 아찔하게 좁혀진다.
심지어 점점 더 빨라져서, 이젠 거의 예측으로 피한다.
"키하아악!"
놈의 뿔이 한층 더 커져서, 도저히 피할 수 없겠다 싶던 순간.
마침내 포탈이 열리며 가디언이 등장했다.
쿵, 쿠웅...
묵직한 발소리와 함께 등장한 것은 어두운 빛깔의 금속 골렘이었다.
불길한 색채를 거부하듯, 우아하게 빛난다.
지방 한 점 없는 체형의 녀석이 상대의 앞을 당당히 가로막았다.
[로완이시여! 저희에게 하시듯 명령하소서!]
"저놈을 맡아!"
"오직 로완을 숭배하라!"
미리 녹음된 것 같은 목소리가 터져나오며, 로와니움 골렘이 돌진했다.
거대한 체격에 어울리지 않는 기민함.
일직선으로 달려들던 사슴의 뿔이 골렘의 거대한 손에 붙잡혔다!
콰드득!
단단한 지반도 아이스크림처럼 파내던 뿔이었지만...
로와니움을 손상시킬 수는 없었다.
로와니움은 뿔의 색채를 철저하게 반사하며 굳건히 버텨냈다.
골렘의 완력도, 사슴에게 전혀 지지 않는다.
오히려 압도하는 느낌이다.
"키에에엑!"
'이 자식들, 도대체 뭘 만든 거야?'
헤르반과 시현이의 노고에 감사하며 필사적으로 염동력을 쥐어짜냈다.
신전을 지키고 싶어하는 사슴이 발작적으로 몸을 비틀었으나, 골렘은 놈의 뿔을 그대로 박살내버렸다.
"끼악, 끄에엑!"
묵직한 펀치가 옆구리에 꽂히자 장난감처럼 날아가는 사슴.
염동력의 거창을 완성해낸 나는 힘껏 그것을 던졌다.
콰아앙!
폭탄이 터진 것 같은 소리와 함께 신전의 한쪽 벽면이 완전히 붕괴됐다.
파편을 막아낼 여력조차 없는데, 골렘이 내 앞으로 달려와서 벽이 되어줬다.
"굳건히 봉사하라!"
"우왓!"
쿠르르릉!
겉잡을 수 없이 번져나가는 붕괴.
결국 신전은 그대로 침몰하듯 쓰러졌다.
막대한 양의 흙먼지가 내쪽으로 밀려들자, 나는 반대쪽으로 몸을 던지듯 엎드렸다.
"신앙은 타협의 대상이 아니다!"
가디언 골렘이 나를 보호하듯 몸을 숙여줬으나...
막대한 양의 흙먼지가 자비없이 몰려들었다.
폐쇄된 지하공간이라서, 폭탄이라도 터진 것 같은 기분이다.
"크흡, 쿨럭, 콜록!"
입을 활짝 열어봐도, 산소가 들어오는 느낌이 없다.
들어오는 것은 흙과 먼지 뿐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방독면이라도 쓸 걸 그랬다.
나는 염동력과 비상용 공기통을 써서 겨우 살아남았다.
"지... 진짜 죽을 뻔했네."
"상황 종료 확인. 봉사 완료!"
골렘이 몸을 일으키자 자연스럽게 탈출구가 확보됐다.
새삼 탁월한 선택을 한 것 같다.
'사슴의 가디언은 역소환된 건가? 확실히 금속골렘이 최강이군요. 고마워요 프리스트 토시아키.'
힘없이 몸을 일으킨 나는 헤르반을 찾았다.
'수고했다. 정말 멋진 솜씨구나. 다시 데려가거라.'
[로완 님의 이름이 붙은 재료를 낭비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습니다.]
헤르반이 답지않게 우쭐거리는 것을 보니 걸작은 걸작이다.
골렘을 포탈 너머로 보내곤 터덜터덜 지하공간을 빠져나왔다.
바깥쪽에서 아비가일이 열심히 달려오고 있었다.
"로완아!!"
"임무 완료. 곤멜은 어떻게 됐어?"
"안쪽에서 큰 소리가 나마자마 역소환됐어! 신전 파괴 성공이야!!"
더 이상은 내 오른쪽 눈에 비치는 것이 없다.
이건 성공이라 봐도 되겠지.
다행히 대원들도 대부분 무사한 것 같다.
사상자가 상당하지만, 외신과 싸우고 이 정도로 끝나면 충분히 남는 장사다.
하지만...
'끝장을 내진 못한 건가.'
내가 해치웠던 외신들과 달리, 우주의 사슴 곤멜은 고향 차원으로 역소환됐을 뿐이다.
다른 사교도들이 소환하면 얼마든지 다시 튀어나올 수 있다.
이것이 승리라면 패배는 얼마나 더 절망적이란 말인가.
지친 몸을 이끌고 시설 밖으로 나가자 치유의 손 라우라 폭스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사도님! 다친 곳은 없으신가요?"
"나는 괜찮으니까 다른 사람들 먼저 봐줘."
"예!"
"오오, 정말 혼자서 신전을..."
"역시 그분께서 직접 선택하신 사도..."
멀리서 쑥덕거리는 나이트들과 합류하여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대검을 세워둔 아비가일이 내쪽으로 몸을 기댔다.
"... 무거워."
"너무하네!"
미안하지만 아비가일은 어느정도 무게가 나갈 수밖에 없는 체형이다.
나는 불평하면서도 자리를 지켰다.
"흐흠."
묘하게 흡족해하는 녀석과 함께 간식을 먹다가 늦기 전에 돌아갔다.
헌터들의 사냥과 달리, 화려한 기념파티따윈 없다.
어서 쉬고 싶었으니 오히려 잘 됐다.
"전투복은 세탁 맡겨야겠네."
"저 주세요!"
"앗, 이나 씨..."
서번트 성이나가 내 옷을 가져가줬다.
내가 이너 서클 멤버들의 방에 들어간 뒤로 이상하리만치 신경써주고 있다.
덕분에 편하긴 하다.
"그럼, 내일 봐 로완아!"
"당분간 휴가 좀 주라... 요즘 너무 열심히 일했다고."
"그렇게 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외신을 직접 마주했으니, 정신안정은 필수죠."
"앗, 그런가... 어쩔 수 없지. 그럼 푹 쉬어!"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으로 올라오자 그제야 마음이 놓인다.
당분간은 외신활동에 집중할 수 있을 것 같다.
정신안정이 필요하다는 말도 맞는 게, 아까부터 머리가 살짝 어지럽다.
다른 대원들의 상태는 나보다 훨씬 심각할 것이다.
천천히 목욕까지 마친 나는 시간을 좀 더 알뜰하게 쓰기로 했다.
'간만에 소소하게 가볼까?'
소인족 세계에서 휴식을 취하면 이론상 7배 더 쉴 수 있다.
물론, 그쪽에선 여러모로 신경써야 하는 게 많아서 실제로 그만큼 편하진 않겠지만...
녀석들이 어떻게 지내는지도 한 번 보고 싶다.
신전이 완성되어서 소환사들을 귀찮게 할 필요가 없다는 것도 메리트다.
이제 신전 근처라면 내가 원할 때 언제든지 갈 수 있다.
'양 제국은 얼마전에 다녀왔고, 헬리온 왕국은 좀 덥지. 이번엔 숲의 요새로 간다.'
파아앗!
소인족 세계에서의 휴가를 결정한 나는 평소보다 훨씬 아담한 사이즈가 되어 도착했다.
옥좌에 앉은 채로 소환되자, 신전에서 일하던 추종자들이 크게 놀라며 넙죽 엎드린다.
"로, 로완이시여! 여봐라, 지금 당장 환영 행사 준비를..."
"됐다. 조용히 둘러보러 온 것이니 옷을 가져와라."
"예!"
허름한 옷으로 갈아입고 신전을 나섰다.
주변의 나무들을 최대한 온전히 남겨둔 친환경적인 건축양식.
덕분에 적당히 그늘져서 선선하다.
'이게 내 집이란 말이지...'
흐뭇한 기분으로 웃으며 나서자 웬 새들이 내 주변을 맴돌았다.
이 녀석들이 내 위대함에 매료되어서 이러는 건 아닐 터다.
나는 피식 웃으며 조용히 말했다.
"헤르반. 얼굴을 비춰도 좋다."
[용서하십시오 로완이시여. 혹 로완님을 불쾌하게 만드는 일이 있을까봐 신중을 기했을 뿐입니다.]
"그렇게까지 신경쓸 것 없다."
[아니오, 그것이...]
헤르반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로완님의 땅에 다른 교단의 쥐새끼들이 숨어든 것 같아서...]
"쥐새끼들?"
[예.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다른 외신의 추종자들이 정보와 신도들을 빼돌릴 목적으로 잠입한 것 같습니다. 이미 몇 가지 징조를 포착했습니다.]
설마 사이비 종교계에서 추수꾼이라고 부르는 이들인가?
이상하게도 불안과 위기감보다는 감격이 앞섰다.
'나도 이제 메이저가 됐군.'
[무, 무슨 말씀이신지...]
'아니다. 그럼 그 첩자들은... 나름대로 정예겠지?'
[예. 다른 교단에 숨어들었는데 오히려 감화되면 안 되니까요. 이런 쥐새끼들은 능력과 신앙심이 입증되어야 합니다.]
"그렇군."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내뱉었다.
"가지고 싶다."
[예에?!]
"그 불쌍한 녀석들, 내가 가져야겠다."
[... 무엇이든 로완님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성심성의껏 모시겠습니다.]
오랜만에 놀란 헤르반이 이내 평정을 회복했다.
나는 즐거운 기분으로 신전에서 내려가 시내로 향했다.
< 삼종삼금(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