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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터 갓이 되어버렸다

글 데프프픗

소개

만년 C랭크 헌터 임로완은 한쪽 눈을 잃고 아우터 갓이 되었다.

#퓨전 #레이드 #이세계 #중세 #헌터

1화. 한쪽 눈의 헌터(1)

보통 '시력을 잃었다'고 하면, 눈 앞이 깜깜해져서 아무것도 안 보이는 경우를 연상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실제로 그렇지는 않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시력이 아주 심하게 나빠져서 형체를 제대로 분간할 수 없을 뿐.

희끄무레한 무언가 정도는 보이기 마련이다.

진짜로 시야가 깜깜해져서 안 보이게 되면 운이 아주 나쁜 것이다.

불행히도 나는 둘 다 경험해봤다.

전자는 과거형으로, 후자는 현재형으로.

"로완 선배, 이쪽이에요!"

단발의 여자 헌터가 작게 손을 흔들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이제와서 후배의 힘을 빌려서 공략팀에 합류하다니.

솔직히 부끄럽지만, 달리 방법이 없다.

나, 임로완은 만년 C랭크의 헌터.

만년이라고 해봤자 경력은 꼴랑 6년.

그동안 쌓아둔 빈약한 인맥은 눈 수술과 입원 기간 동안 거의 다 날아가버렸다.

그나마 조금 남아있는 소중한 인맥 중 하나가 바로 눈앞의 후배님이다.

나는 조금 머쓱한 기분으로 인사했다.

"누구세요? 제가 눈이 잘 안 보여서..."

"아, 진짜. 지금 농담할 때가 아니라구요! 눈은 좀 괜찮은 거 맞죠?"

"괜찮아. 사람 눈은 2개니까."

병명은 망막박리.

사소한 건 대충 넘어가고, 결과만 말하겠다.

나는 지금 오른쪽 눈이 제대로 안 보인다.

시야가 반절 가까이 날아가서 왼쪽 눈을 감으면 글자를 읽는 것도 어려울 정도다.

그리고 앞으로도 잘 안 보일 예정이다.

신기하게도 멀쩡한 왼쪽 눈이 알아서 시야를 보정해주기 때문에 일상생활에는 큰 문제가 없다.

하지만... 던전에서의 전투라면 어떨까?

오늘은 그걸 알아보기 위해서 후배의 팀에 끼어들기로 했다.

내 자랑스러운 후배님, 서유림은 여전히 걱정스런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피차 바빴는지라 퇴원 후에 만난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녀는 팀장을 만나기 전에 빠르게 안부를 확인했다.

"오른쪽 눈은 완전히 회복이 안 됐다는 거죠?"

"오른쪽은 치료가 늦어서 앞으로도 가망이 없대. 그나마 시야가 반절이나 남은 게 다행이지."

"치유 능력 같은 건 못 써준대요?"

"어림도 없대."

나는 병원에서의 대화를 떠올리며 코웃음을 쳤다.

헌터들의 치유능력이라는 게 놀랍긴 해도, 진짜 손만 대면 낫거나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부분은 수술과 비슷한 과정이 필요하다.

"병원에 대기자가 산더미라나? 나같은 경증 환자는 능력을 이용한 치료를 받을 수 없대."

"한쪽 눈이 안 보이는데 경증이라니..."

"그 병원에서 중증 소리를 들으려면 눈이 아예 뭉개져야 하더라고. 내 옆자리 환자가 그랬지."

수술이 어중간하게 성공해버린 것이 문제였다.

아예 실패를 해버려서 눈이 여전히 안 보였다면 의료계 헌터에게 조치를 받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병원에는 나보다 훨씬 상태가 심각한 환자가 많이 있었고, 의료 헌터의 숫자는 충분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결국 완치되지 못한 채 퇴원하게 된 것이다.

"그... 그래도 헌터 활동은 계속 할 수 있죠?"

"글쎄. 이제부터 봐야지."

사실은 여기에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결론이 나와버렸다.

나는 때마침 다가온 팀장과 즉석 면접에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유림 씨의 대학 선배시라구요? 눈 때문에 입원하셨다고 들었는데, 이젠 괜찮으신 건가요?"

"안심하세요. 여기까지 오는 동안 3번밖에 안 부딪혔으니까."

"... 예에?"

"선배!"

예전에는 잘 몰랐는데, 한쪽 눈이 안 보이면 균형감각에 문제가 생긴다.

공략팀장은 내 설명에 정중히 말했다.

"로완 씨는 염동력 헌터셨죠?"

"네."

"염동력은 조준이 중요할텐데... 죄송하지만 저희팀에서 활동하시긴 힘들 것 같습니다."

"이해합니다. 좋은 사냥 되세요."

나도 깔끔하게 포기했다.

만약 던전에서 실수를 저질러서 팀원에게 상처라도 입히면 어떻게 하는가.

이놈의 눈으로 전투는 무리인 것 같다.

적어도 제 몸은 가눌 수 있게 된 뒤에 해야겠지.

나의 후배님, 서유림은 울상을 지은 채 나를 붙잡고 성을 냈다.

"지금 장난해요? 이런 때엔 거짓말이라도 해야죠!"

"거짓말 했어. 사실은 5번 부딪혔거든."

"선배 진짜..."

"기껏 소개해줬는데 미안해. 내가 너한테 피해라도 주면 어떻게 해? 사냥은 좀 더 익숙해진 뒤에 해야겠어. 사냥 잘 해."

걱정스런 표정의 서유림을 놔두고 몸을 돌렸다.

사실 나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이것저것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오자 급격히 힘이 빠졌다.

돌아오는 길에는 안 부딪히려고 신경써서 그런가?

결국 아직 밤까진 한참 남아있는데도 침대에 벌러덩 누워버렸다.

회복 중에 하도 많이 자서 더 졸리지도 않을 것 같았는데, 꼭 그렇지도 않다.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나... 염동력으로 상하차라도 해봐?'

답도 안 나오는 고민을 하며 멍하니 누워있자 금방 졸음이 쏟아졌다.

나는 미련없이 눈을 감았다.

#

"외신이시여... 일어나십시오! 외신이시여!"

뒤늦게 눈을 뜨자, 처음 보는 세계였다.

조금 거창한 표현이지만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내 무릎에도 미치지 않는 성벽과 발톱만한 사람들.

이국적인 복장의 사람들은 거리를 가득 메운 채, 영문모를 언어로 지껄이고 있다.

마치 소인국 테마파크에 온 것 같은 기분에 기분이 멍해졌다.

"이건 또 뭐야?"

내가 자고 있던 사이에 집에 던전이라도 열린 건가?

이렇게 작은 던전은 지금껏 본 적이 없는데?

너무 놀라서 가만히 선 채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자, 성벽 위에서 그나마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하는 녀석이 외쳤다.

다만 외국인이 어눌하게 말하는 듯, 발음은 썩 좋지 않다.

"한쪽 눈의 위대한 외신 로완이씨여! 부디 악룡을 물리쳐 이 나라를 구해주십시오! 그대의 미천한 종들이 간절하게 비나이다!"

다들 이상한 옷을 입고 있는 와중에, 특히나 이상한 복장이다.

나는 고개를 조금 숙여서 녀석을 똑바로 봤다.

얼굴을 가까이 하지 않으면 제대로 알아보기도 힘들만큼 작았다.

"악룡? 드래곤을 말하는 건가?"

"그... 그렇습니다! 그 놈은 마법을 터득하고 나서 난폭해져서 선량한 우리들은 곤란해졌습니다!"

"아니, 내가 드래곤을 어떻게 잡아?"

작게 코웃음을 치는 와중에 호흡이 살짝 막혔다.

하지만 나쁜 징조는 아니다.

이제야 눈치챈 건데... 이 던전, 마력 농도가 장난 아니다.

원래 헌터는 던전에 들어와야 성장이 가능한데 이곳은 던전 중에서도 특출난 수준이다.

'뭐지 이 던전? 소인국 던전이라고 불러야 하나?'

"한쪽 눈의 외신 로완이여! 우리들의 희망은 그대뿐입니다!"

"외신?"

"크롸아아!!"

생소한 단어에 망설이던 찰나, 어디선가 흉포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흑색의 용이 빠르게 날아오는 것을 보곤 그나마 잘 보이는 눈을 부릅떴다.

용족은 원래 예외없이 S급 헌터들이나 잡는 최상급 몬스터인데, 저 녀석은...

"작네?"

아무리 잘 쳐줘봤자 내 무릎보다 키가 작다.

몸이 길쭉한데도 체적이 압도적으로 차이가 난다.

뒤늦게 나를 발견한 흑룡이 빠르게 몸을 돌렸으나, 나는 반사적으로 녀석을 붙잡아버렸다.

놈의 길쭉한 모가지가 아주 손쉽게 손에 들어온다.

"끼에에엑!"

"우왓!"

꽈악!

놀라서 손을 꽉 움켜쥐자 녀석이 몸을 크게 비틀다가 축 늘어졌다.

용의 시체를 든 채 멍하니 서 있는 내게 미친 듯한 환호성이 쏟아졌다.

대부분은 제대로 알아들을 수도 없는 언어이지만 드문드문 이해가 되는 게 섞여있다..

"겨, 경배하라! 외눈의 외신 로완께서 악룡을 물리치셨다!"

"위대한 아버지! 당신의 이름을 목이 닳도록 외치겠습니다!"

"됐으니까 얼른 돌려보내줘. 엇..."

집에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하자마자, 내 몸이 급격히 희미해졌다.

나는 흑룡의 시체와 함께 순식간에 침실로 돌아왔다.

2화. 한쪽 눈의 헌터(2)

한국대학교.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최고 명문대학이다.

약 10년 전, 그곳에서 한국 최초의 헌터 학과를 설립을 발표했다.

사람들은 다들 한국대 총장이 미친 줄 알았다.

게이트 열린지 몇 년이나 됐다고, 신설 학과를 만든단 말인가.

그러나 외국에서는 벌써 관련학과를 부랴부랴 만들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한국대는 옳았다.

지금의 헌터학과는 미친 수준의 입결을 자랑하는 한국대의 대표 학과다.

특히 한국대 헌터학과 1기는 '황금세대'라는 근사한 별명으로 불린다.

한국에 A랭크 헌터가 꼴랑 7명인데, 그 중 3명이 한국대 1기생인 것이다.

A랭크에 한정하지 않아도, 황금세대들은 각계에서 탁월한 성과를 보여주고 있다.

딱 한 명, 나만 빼고.

"어찌어찌 잘 도착했네."

자랑스런 황금세대 중 한 명인 나는, 고작 교통사고를 내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하고 있었다.

지금의 눈상태로는 운전도 많이 불안하다.

어제처럼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싶었지만 이런 걸 들고 그곳에 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조수석에 던져뒀던 흑룡의 시체를 집어들었다.

철컥.

차에서 내려 문을 닫자 큼지막한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시현 공방]

공방이라곤 해도 깔끔하고 세련된 기업 건물같은 느낌이다.

역시 황금 세대에서도 특히나 출세한 동기답다.

대장장이 헌터로서 A랭크를 찍은 건 한국 최초라던가?

"안녕하세요."

"어떤 일로 방문하셨습니까?"

"동기 좀 만나려구요."

자그마한 흑룡의 시체를 보여주자 금방 통과가 됐다.

황금세대 유일의 대장장이 헌터, 금시현은 후줄근한 작업복을 입은 채 나를 맞이했다.

"로완이 네가 웬일이냐? 눈은 좀 괜찮아?"

"나을만큼 나았어. 그것보다 이것 좀 봐줘."

곧장 흑룡의 시체를 공개하자 녀석이 보호 안경을 착용했다.

어제의 꿈인지 뭔지 모를 던전에서 얻은 전리품인데...

고맙게도 아직 부패는 진행되지 않은 상태다.

"이건... 용이잖아? 근데 엄청 작네? 보고되지 않은 종인가?"

대한민국 최고의 장인답게 금방 알아보는 시현.

녀석은 곧바로 이런저런 테스트를 진행해봤다.

비늘을 떼서 현미경으로 보고, 시약에 담그더니 망치로 몇 번 친다.

"경도는 진짜와 비슷한데, 너무 작아. 아종이 아니라 새끼였던 건가? 비율이 좀 이상하긴 한데."

"그런가봐."

"로완이 너 이거 어디서 구했어?"

"그냥 운이 좋아서 어쩌다보니 잡았어."

거짓말은 아니다.

일이 정확히 어떻게 된 것인지, 아직 나도 모르고 있으니까.

"기왕이면 생포하지 그랬냐. 좀 더 키울 수 있었다면 좋았을텐데."

시현은 흑룡이 어지간히도 아깝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물론 나도 할 말이 없는 건 아니었다.

"어느 세월에 성장할 줄 알고? 용은 원래 장수의 상징 아니었냐? 내가 몬스터 테이머도 아니고."

"그것도 그렇네. 그치만 크기가 너무 작아서 대단한 건 못 만들겠어. 방어구는 어림도 없고, 기껏해야 단검 정도?"

전리품은 장비로 만드는 것이 헌터들의 상식.

시현은 곧바로 가공을 제안했다.

"장검은 못 만들어?"

"용이라곤 해도 장비에 쓸 수 있는 부분은 한정되어 있으니까. 가장 단단한 척추뼈로 심을 만들고, 칼날은 비늘을 가공해서 쓴다. 이거 제대로 가공하면 날도 잘 안 죽을 거야."

"마음대로 해줘. 자투리는 네가 가지고."

마침 나도 단검을 쓰니까 마다할 이유는 없다.

자투리 재료를 보수로 넘기긴 해도, 대한민국 최고의 대장장이 헌터가 손을 써준다는 것이다.

나는 그보다 다른 부분에 집중했다.

"근데 너 용족 소재 만져본 적 있어?"

"당연하지. 지난번에 일본에서 한 마리 잡혔잖아. 그걸 좀 샀지."

"아, 그래..."

그렇다면 저건 진짜 용족 몬스터가 맞을 것이다.

덕분에 더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어제 일은 도대체 뭐였던 거지?'

꿈치곤 너무 선명하다.

심지어 전리품까지 고스란히 남아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곳은 던전의 일종이었던 것 같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자 시현이 나를 공방에서 쫓아내며 말했다.

"좋은 장비도 손에 들어왔으니까, 너도 얼른 B랭크 승급해."

"잘 만들어주고 말해 인마. 수고해라."

"오냐."

장비 제작을 맡기곤 차로 돌아오자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것이 들렸다.

[... 로완.]

희미한 목소리에 고개를 홱 돌려봤지만 주차장엔 아무도 없었다.

무슨 환청이라도 들렸나 싶어서 운전석에 몸을 밀어넣자 이번에는 더욱 선명한 목소리가 들렸다.

마치 내 귓가에서 속삭이는 것 같다.

[위대한 아버지 로완이시여, 영원토록 찬미받으소서!]

"미치겠네. 아버지는 누가 아버지야?"

아직 결혼도 안 한 사람보고 못하는 말이 없다.

내가 귀를 살짝 기울여보자 목소리가 더욱 다양해졌다.

[외눈의 외신이여, 미천한 쫑에게 금지된 지식을 내려주소서.]

[그놈을 쭉여주세요!]

[이 저주받은 땅에, 당씬의 이름으로 영원한 종말을...]

정말이지 거창한 부탁이었다.

도대체 어디서 내 이름을 주워듣곤 불러대는지, 그게 가장 궁금하다.

나는 고작 한국의 C급 헌터.

까놓고 말해서 나 정도의 염동력 헌터는 얼마든지 있다.

외모나 연예계 활동 따위로 주목을 받은 적도 없다.

'다른 놈이랑 헷갈린 건가? 조용히 좀 해주지...'

속으로 짜증을 내자마자 목소리가 씻은 듯 사라졌다.

불안한 기분으로 시동을 걸고 집으로 출발했다.

위이잉.

어찌어찌 무사고로 집에 도착해서 내리자 다리가 절로 떨렸다.

아직 해가 저물 때까진 한참 남았지만, 달리 일정이 없다.

수술과 입원, 회복으로 인해서 생활의 사이클이 완전히 파괴되어버렸다.

'설마 그게 진짜 흑룡이었을 줄이야.'

현직 대장장이에게 감정까지 받아봤지만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그 던전, 다시 들어갈 수는 있는 걸까?

거실에 주저앉아서 그런 생각을 하기 무섭도록.

또다시 이상한 목소리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척안의 외신 로완이 다시 한 번 강림하리라! 청컨대 미천한 노예에게 영생과 지식을 내려주시옵소서!]

다른 목소리들보다 훨씬 유창한 발음.

내가 코웃음을 치기도 전에, 푸른색의 포탈이 눈앞에 나타났다.

지금껏 던전 탐사 때 수도없이 봐서 도저히 헷갈릴 수 없는 포탈이다.

"뭐, 뭐야 이건?"

원래 이런 포탈은 발견과 동시에 헌터 협회에 보고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어제의 경험이 내 생각을 바꿨다.

'이번 던전도 어제와 비슷한 곳 아닌가?'

좀 황당했지만 어쨌든 보상은 확실했던 던전!

게다가 내 집 거실에 열렸으니까 소유권도 오롯이 내 것이다.

'한 번 들어가볼까? 여차하면 바로 빠져나오면 되니까...'

빠르게 결심한 나는 곧바로 장비를 갖췄다.

방탄사양의 헌터용 전투복을 걸치고, 방독면까지 준비한다.

다행히 어제 막 면접보러 나갔던지라 무기도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날카로운 단검을 몇 개나 장비한 나는 방독면을 쓰고 포탈 안으로 들어갔다.

파아앗!

엘리베이터에 탑승한 듯한 감각과 동시에 주변의 풍경이 바뀌었다.

자그마한 나무들이 수도 없이 솟아올라있는 숲.

그 한가운데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다.

발밑에는 복잡기괴한 도형들이 잔뜩 보인다.

던전의 마력 농도에 만족하던 나는 녀석들을 내려보곤 살짝 당황했다.

'뭐야, 어제보다 좀 크네?'

지난번에는 내 발톱만한 사람들이었는데, 이번에는 주먹만한 크기다.

여전히 작긴해도 명백한 차이.

당황한 채 가만히 서있자 놈들이 알아서 굽신거리기 시작했다.

머리를 숙이고 있으면서도 혹시 안 들릴까봐 목이 터져라 외쳐댄다.

"로완 님께서 부름에 응하셨다! 모두 경배하라!"

"feglawtfeo%:wehf..."

언어를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은 선두의 한 명 뿐이다.

나머지는 여전히 영문모를 소리를 지껄이고 있다.

나는 몸을 살짝 숙여서 그들을 좀 더 자세히 살펴봤다.

크기가 좀 작다는 것만 제외하면 영락없는 인간이다.

'신기하네.'

그나마 멀쩡한 눈을 열심히 굴리고 있자 잔뜩 주눅든 녀석이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무슨 제사장내지는 마법사같은 차림새의 남자다.

"외신이시여, 서투른 소환의 무례를 용서해주십시오!"

"서투른 소환?"

방독면 때문인지 목소리가 좀 이상하게 뭉개졌지만, 그렇다고 벗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놈은 용케 알아듣곤 열심히 떠들어댔다.

"지난번 소환만큼은 못하겠지만 열심히 준비했습니다! 그 어떤 마법사라도 로완 님의 진정한 육체를 강림시키는 것은 힘들겠지만요."

그러니까, 이놈들이 커진 게 아니라 내가 작아진 건가?

지난번 소환은 좀 더 실력 좋은 마법사들이 했던 모양이다.

나는 대충 알아듣곤 가장 궁금한 것부터 물어봤다.

기껏 의사소통이 가능한데 안 하는 것도 손해다.

"내 이름을 어떻게 알았지?"

"로완 님께서 악룡을 물리치시어 나라를 구한 것은 이미 유명한 일화입니다!"

"..."

지난번 소환의 내용이 벌써 퍼져나간 건가?

빨라도 너무 빠른데?

그는 내가 호기심을 보이자 아주 열심히 떠들어댔다.

보기보다 눈치가 빠른 녀석이다.

"경배받으시옵소서! 자비로운 외신이시여!"

"자비로운 외신? 다른 외신들은 너희를 돕지 않는 건가?"

"그, 그것이... 실은 의사소통이 가능한 외신 자체가 지극히 희귀하옵니다."

"오호."

'나같은 소환자가 더 있는 건가.'

녀석은 내가 궁금해하던 부분을 알아서 쏙쏙 알려줬다.

덕분에 늦게나마 상황파악이 됐다.

역시 이놈들이 모종의 목적을 가지고 나를 소환한 것이다.

아까 들었던 목소리들도 이곳 사람들의 것이리라.

"계속 말해라. 왜 나를 불렀지?"

남자는 눈에 띄게 반색하며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보니 조금 늙은 것도 같다.

"청컨대 제게 당신의 피를 나누어주십시오!"

"피?"

"맹세합니다. 저는 로완 님의 피를 오직 저 자신을 위해서만 사용하겠습니다. 그것으로 불로장생의 묘약을 만들어보려 합니다."

글쎄. 내 피에 그런 신묘한 효과는 없을 것 같은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기우뚱거렸다.

그래도 기껏 소환해줬는데 대놓고 거절하는 것은 좋지 않다.

이곳은 마력 농도가 굉장히 높아서, 이런 식으로 소환되기만 해도 아주 빠르게 강해질 수 있는 것이다.

"제 무례한 부탁을 용서해주십시오. 대가라면 무엇이든 지불하겠습니다!"

"무엇이든?"

"... 그렇습니다!"

내 주먹만한 녀석들이 무엇이든 해준다 해도 딱히 와닿진 않는다.

그래도 때마침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긴 했다.

지금의 내겐 이런저런 정보가 너무나도 부족한 것이다.

이 소인족과의 짧은 문답도 내게는 아주 귀중한 정보수집 활동이 되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녀석에게 말했다.

"맨 처음 나를 소환했던 놈들이 정확히 누구지?"

"콜렌 왕국의 궁정마법사가 악룡을 물리치기 위해서 소환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럼 그놈들이 내 이름을 어떻게 알고 있었는지 알아내도록."

놈들은 처음부터 내 이름을 알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무척 신경쓰였다.

마법사는 열심히 굽신거리며 약속했다.

"제 힘이 닿는 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반드시 알아내겠습니다."

"좋아."

나는 염동력으로 손가락을 찔러서 피를 한 방울 냈다.

단검도 있긴 하지만 그쪽에는 기름이나 독 같은 게 묻어있다.

평범한 단검이 아니라 헌터 장비라서, 함부로 손에 대어봤자 좋을 것이 없다.

"이거면 되겠지?"

내 딴에는 대충 한 방울 짜낸 것이지만, 소인족에겐 대접을 가져와서 받아내야 할 분량이었다.

마법사는 크게 만족하며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자비로운 외신 로완이시여."

녀석이 인사를 끝내자마자 내 몸이 빠르게 희미해져갔다.

벌써 돌아가고 싶진 않았는데, 아무래도 소환진의 효과가 다 되어가는 모양이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나를 이 던전으로 소환하는 것도 꽤 힘든 일인 것 같았다.

"정보를 입수하면 바로 알리겠습니다!"

소환 때와 마찬가지로 귀환도 순식간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거실로 돌아온 나는 포탈이 닫힌 것을 보곤 한숨을 내쉬었다.

"끝난 건가?"

여전히 믿기 힘든 경험이었지만...

던전에서 흡수한 마력은 그대로다.

어찌나 마력 농도가 높은지, 손발이 저릿할 정도였다.

"후우."

기껏 차려입은 헌터 장비를 다 벗기도 전에 스마트폰이 울려댔다.

느릿느릿 확인해보니, 가까운 지구대에서 연락이 와 있었다.

[C랭크 헌터 임로완 님. 금요일 당직 근무가 있사오니 당일 오후 17시까지 본대로 방문해주십시오. 자세한 사항은...]

"벌써 당직을 서라고?"

아직 던전도 못 돌고 있는 몸인데 기어이 근무표에 처넣었다니.

황당한 나머지 코웃음을 치면서도 그 날을 위해서 장비를 잘 정리해뒀다.

일반 헌터들도 경찰들처럼 교대제로 당직 근무를 서면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게 되는데...

지금의 내겐 그 얼마 안 되는 당직 근무비조차 절실하다.

의료보험이 있다곤 해도 수술에 입원까지 해버리면 돈이 자비없이 빠져나가버리는 것이다.

나는 괜히 씩씩거리면서도 간만에 편히 휴식을 취했다.

영문모를 기연에 자꾸만 가슴이 들뜨는 기분이다.

3화. 한쪽 눈의 헌터(3)

금요일 오후 5시.

나는 시간에 거의 딱 맞춰서 근무지에 도착했다.

특별할 것 없는 지구대에서의 당직 근무.

경찰 지구대의 공간을 빌려서 하게 되는데, 헌터 근무자는 나 하나뿐이다.

"수고하셨습니다."

"네, 수고하세요."

전번 근무자에게 인수인계를 받은 뒤 곧바로 당직근무를 시작했다.

다행히 경찰들처럼 중간에 순찰을 나가거나 할 필요는 없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그냥 가만히 자리만 지키고 있으면 되는, 편한 근무다.

아예 대놓고 폰질이나 하고 있는 경우도 많지만 나는 그래도 구색정도는 맞춰주는 편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기 무섭도록, 주머니 속에서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뭐지?"

[시현 공방입니다. 의뢰품이 완성되어 배송하려는데 주소지 확인을...]

벌써 흑룡 단검을 완성해준 건가?

나는 당직 근무 중이라고 대답했지만, 저쪽에선 문제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끼이익.

뭐가 문제없다는 것인지 제대로 이해하기도 전에 지구대 밖에서 커다란 차량이 한 대 멈춰섰다.

'마침 근처였구나?'

시현 공방의 이름이 새겨져있는 차량에서 예쁘장한 여직원이 한 명 내리더니, 내게 상자를 하나 안겨줬다.

놀란 경찰들이 구경을 나와서 쑥덕거린다.

"뭐야, 근무중에 배달인가?"

"헌터 장비네."

"임로완 님. 의뢰해주신 흑룡의 비늘 단검 장비가 완성됐습니다. 한 번 확인해주십시오."

"아, 네."

자그마한 상자보다도 여직원의 외모에 먼저 눈이 갔다.

이런 예쁜 사람을 고용해서 부려먹는다니, 솔직히 좀 부럽다.

그러나 막상 상자를 열자 금세 남부럽지 않은 기분이 됐다.

나는 단검을 집어들어서 자세히 살폈다.

비늘을 얇고 길게 이어붙여서 칼날처럼 만들어놓은, 특이한 단검이다.

"날카로우니 조심하십시오."

"가볍네요. 단단하고..."

날을 아주 잘 세워둬서 손가락을 대어보기도 겁난다.

여직원은 담담히 주의사항을 알려줬다.

"날은 어지간해선 상하지 않을 겁니다. 핏물만 잘 닦아주시고, 혹시라도 손상되면 공방으로 가져와주십시오. 수리용 부품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고마워요. 수령서에 서명할게요."

동기의 선물을 받아들고 몸을 돌리자 여경 하나가 놀란 눈으로 다가왔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헌터 유투브따위를 열심히 챙겨보는 것 같다.

"시현 공방이면 우리나라 제일의 공방 아닌가요? 예약금 다 내도 최소 1년은 기다려야 한다고 들었는데..."

그녀가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이런 지구대에 배치되는 헌터는 잘 해봤자 C랭크인 것이다.

B랭크부터는 헌터 협회나, 좀 더 규모가 있는 경찰서에 배치된다.

'너 따위가 어떻게 시현 공방에서 장비를 수령했느냐'로 들릴 수도 있는 말이지만, 그런 악의까진 없을 것이다.

저 여경과는 오늘 하루 동안 함께 근무할 예정인지라 완전히 무시하기도 그렇다.

결국 나는 대충 둘러댔다.

"공방 주인이 동문이거든요."

"동문이라면... 우와, 한국대 헌터학과 나오셨구나! 대단하시네요."

정확히는 동기이지만, 그걸 사실대로 밝혀봤자 내 얼굴에 먹칠하는 꼴밖에 안 된다.

황금세대에서 가장 뒤떨어진 사람이란 것은 자랑거리가 아니다.

'그래도 시현이가 신경 좀 써줬네. 나중에 고맙다고 해야겠다.'

예약금을 다 받고도 손님을 1년씩 기다리게 만든다니.

아주 배짱 장사를 하고 계신다.

그래도 장사가 된다는 뜻이겠지?

건물 안으로 돌아간 나는 자리에 앉아서 단검을 요리조리 살펴봤다.

특이한 무기이지만 볼수록 마음에 들었다.

가공이 무척 잘 되어서 비늘같은 느낌이 거의 없다.

'다시봐도 좋네. 이런 걸 또 얻을 수 있을까?'

내가 이상한 던전에 대해서 떠올리던 찰나.

낯익은 목소리가 예고도 없이 머릿속으로 파고들었다.

이제 슬슬 이것도 익숙해져간다.

[위대한 로완이시여! 당신의 피를 받은 종복이 애타게 부릅니다. 영원토록 찬미받으소서!]

'내 피를 받아? 지난번에 그놈인가?'

며칠 전에 나를 소환했던 마법사를 떠올리자 녀석이 계속해서 지껄여댔다.

[죄송합니다. 로완님의 존함이 어디서부터 알려졌는지 파악하는 것은 실패했습니다!]

"뭐야?"

지난번에 소환된지 한 3일 지났나?

꼴랑 3일 지나서 못 해먹겠다고 하는 걸 보면 나도 많이 얕보인 것 같다.

힘 닿는 곳까지 알아보겠다고 해서 기대했는데 괜한 짓이었다.

'너무 금방 포기하는 거 아니냐?'

[3주간 콜렌 왕국을 샅샅이 뒤져봤지만 한계에 부딪혔습니다. 부디 노여워 말아주십시오...]

'3주?'

분명 3일 전에 소환됐는데 3주라니?

하지만 덜덜 떨리는 목소리를 보니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다.

나는 뒤늦게 상황을 파악했다.

저쪽 세계는 시간의 흐름이 다른 것이다.

어쩐지 흑룡 사건이 너무 빨리 알려졌다 싶었다.

마법사는 부랴부랴 설명을 이어나갔다.

[로완 님을 소환했던 콜렌 왕국의 궁정마법사들은 대부분 죽거나 미쳤습니다!]

'죽거나 미쳐? 어째서?'

[무리도 아니죠. 저희처럼 미천한 존재들에게, 강대한 외신을 소환하는 것은 굉장히 버거운 일입니다.]

'... 그런가.'

하긴. 그 손톱만한 소인족들이 나를 소환해낸 것이 무척 신기하긴 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래저래 무리를 했던 것 같다.

[만약 저도 로완 님의 피를 나눠받지 못했다면 지금쯤 죽었을 것입니다.]

'불로장생의 묘약은 성공했나?'

[자애로우신 로완님의 보살핌 덕에 성공했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의 기도를 올립니다.]

진짜 내 피를 가지고 영생의 약을 만들었다고?

나는 반신반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못마땅하지만 이 정도로 만족해야 할 것 같다.

[만약 단서가 더 발견되면 바로 조사를 진행하겠습니다.]

'알겠다. 네 실패를 용서하마.'

저쪽이 나를 마구 추켜세워주니까, 나도 평범하게 말하기 좀 뭣하다.

괜히 있어보이게 말해야 할 것 같다.

녀석은 거듭 감사를 표하더니 마침내 조용해졌다.

심심해진 내가 슬슬 간식이나 챙겨볼까 하고있는데...

전화기를 붙들고 있던 여경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던전 생성! 던전 신고가 들어왔어요!"

"앗, 어디죠?"

"가까워요. B랭크!"

나는 별다른 놀라움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던전이 생성 자체는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지금껏 당직 근무를 서면서 몇 번이나 경험했던 사건이다.

B랭크라면 등급이 좀 높지만...

어차피 나 혼자 공략할 필요는 없다.

당직 근무자로서의 내 역할은 비상 사태에 대비하고, 일반 시민들의 출입을 통제하는 것.

공략은 다른 헌터들이 알아서 할 것이다.

즉시 장비를 챙긴 나는 순찰차에 실려서 현장으로 향했다.

야식을 못 챙긴 게 아쉽지만 불평할 때가 아니다.

"저기에요."

"완전 길 한복판에 생겼네."

신고자가 손을 흔들고 있는 곳에선 푸른색의 포탈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현장에 도착한 경찰들은 능숙하게 척척 차단선을 만들고 표지판을 세웠다.

솔직히 내가 할 일은 거의 없는 것 같다.

그런데, 길가로 물러나있던 여자가 나를 보자마자 득달같이 달려왔다.

기분탓인지는 몰라도 구경꾼이 굉장히 많다.

"저, 저기요! 헌터시죠?"

"그런데요?"

"제 아들... 제 아들이 던전 생성 때 휘말렸어요!"

"뭐라구요?"

갓 생성된 던전은 기본적으로 위험하지 않다.

그러나 민간인이 던전으로 들어가버리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생성 위치가 묘하더라니... 재수없게 휘말린 건가?'

저 위치라면 생성과 동시에 말려들었을 가능성도 있다.

애 엄마는 잔뜩 흥분한 나머지 횡설수설했다.

"고작 8살짜린데... 빨리 좀 구해주세요! 저희 애 아빠도 헌터에요!"

"진정하시고 제대로 말씀해주세요. 어쩌다가 들어간 거죠?"

경찰이 탐문을 시도하자 애 엄마가 더듬더듬 말했다.

"그, 길을... 걷고있는데, 갑자기 저게 나타나서... 안으로 빨려들어갔어요!"

"지금 바로 협회에 신고할테니 조금만 기다리세요."

"왜요? 지금 헌터가 있잖아요!"

경찰들은 애 엄마의 말에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고작 C랭크의 헌터.

B랭크의 던전에 단독으로 진입하는 것은 자살행위다.

"지금 진입하는 건 너무 위험해요. 던전 공략은 원래 6명 이상이 진행한다구요."

"아니, 그래도 저희 애가 지금 들어가있는데..."

애 엄마는 반쯤 미쳐서 말이 통하는 상태가 아니었다.

무리도 아니다.

던전 안에는 위험한 몬스터들이 득실거린다.

그리고 그 중 대부분은 인간에게 적대적이다.

'이대로 기다려도 되는 건가?'

신고가 들어온 것이 약 8분 전.

민간인이 던전 내부에서 15분 이상 생존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협회의 기동대는 절대로 제 시간에 못 맞춘다.

구출을 할 것이라면 너무 늦기 전에 들어가야 한다.

나는 아까 배달받은 단검의 손잡이를 꽉 쥐었다.

애 엄마가 울면서 미쳐 날뛰는 꼴을 보면서 계속 기다리는 것도 못 할 짓이다.

'아, 미치겠네 진짜.'

결국 참지 못하고 앞으로 나섰다.

애 엄마의 어깨를 꽉 움켜쥐고 큰 소리로 다그친다.

"사진!"

"네, 네에?"

"실종된 애 사진 보여달라고요!"

"여, 여기 있어요!"

그녀는 부랴부랴 스마트폰을 꺼내서 배경화면을 보여줬다.

장난기 넘치는 얼굴의 소년.

지금부터 목숨을 걸고 구하러 가야하기 때문인지, 별로 예뻐보이진 않는다.

나는 녀석의 얼굴을 기억하곤 진입을 준비했다.

서울은 전 세계에서 헌터 밀도가 가장 높은 도시인데...

이런 곳에서 던전 생성에 휘말리다니, 아이러니라고 볼 수밖에 없다.

"잠깐만요! 설마 혼자 가시려구요? 여기 B랭크 던전이라니까요?"

"공략할 생각까진 없어요. 구출만 시도할거에요. 실패해도 원망하진 마세요."

나는 경찰의 만류를 뿌리치곤 포탈 안으로 뛰어들었다.

다음 순간, 아스팔트의 도로는 지저분한 흙더미로 바뀌었다.

방독면을 착용한 채 한쪽 눈으로 잽싸게 주변을 훑는다.

'여긴... 숲인가? 나쁘지 않아.'

동굴같은 지형이라면 몬스터와의 조우 확률이 비약적으로 올라간다.

하지만 숲은 다르다.

아직 실종자가 운 좋게 생존해있을 가능성이 있다.

'망설일 시간이 없어.'

나는 후드를 뒤집어쓴 채 빠르게 이동했다.

원래도 눈이 아주 좋은 편은 아니었는데, 한쪽 눈으로 탐색하려니까 엄청 불편하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아주 조악한 목책이 나타났다.

어린아이가 대충 두들겨서 만들다가, 처절하게 실패한 것 같은 느낌의 구조물이다.

'이건 설마...'

"취르륵..."

가까운 수풀 너머에서 거슬리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초록색 피부의 몬스터들을 보곤 속으로 혀를 찼다.

오크족.

개개의 능력은 약한 편이지만 조직력은 강하다.

B랭크에서도 상위권으로 취급되는 몬스터다.

'오크 부락 던전이구나.'

오크는 인간을 식용으로 사용한다.

다만, 이게 꼭 최악의 소식인 것은 아니다.

왜냐면 놈들이 식량을 바로바로 소모할만큼 바보는 아니기 때문이다.

'오크들에겐 식량 비축 개념이 있지.'

"우와아악!"

때마침 들려온 비명소리를 따라가자 후줄근한 천막과 나무 우리가 보였다.

실종자는 이미 오크에게 붙잡힌 채 감금당한 것 같다.

나는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상황을 지켜봤다.

때마침 날이 어두워서 다행이다.

"취익..."

"쿠익, 쿠익!"

오크 부락은 전체적으로 소란스러웠다.

포로를 앞에 둔 두 녀석은 자기들끼리 치고박으며 싸우고 있었다.

아주 완벽하게 모범적인 오크들이다.

포로는 감금된 채, 거의 기절할 것 같은 표정이다.

'좋아. 당장은 걱정없겠다. 탈출 포탈의 위치를 확인하고 돌아오자.'

내가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오크 하나가 멋대로 나무 우리를 열었다.

오크들은 식량 비축의 개념을 가지고 있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있냐는 것은 또 별개다.

배고프면 저렇게 그냥 잡아먹어버릴 수도 있다.

'돌겠네.'

결국 나는 흑룡 단검을 뽑아들곤 놈들의 뒤로 접근했다.

심장이 미친 듯 뛰어서 금방이라도 고장날 것 같은 기분이다.

4화. 한쪽 눈의 헌터(4)

염동력은 상당히 괜찮은 힘이다.

무색무취무형의 힘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능력.

힘이 사용자의 눈에 보이지 않는만큼, 제어가 힘들지만 대처도 그만큼 힘들다.

하지만 그것도 일정한 경지에 도달했을 때의 이야기다.

나는 고작해야 C급 헌터.

내 염동력은 위력도 조작성도, 사정거리도 부족하다.

C급이라는 평가는 아주 정당하다.

염동력을 가늘게 제련하여 몬스터를 찌르거나 베어내는 헌터들도 곧잘 있지만...

지금의 내겐 무리다.

그래서 나는 문명인답게 도구를 쓴다.

미리 준비해놓은 단검을 염동력으로 쏘아내는 것이 내 전투방식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적이 두 마리.

나는 등을 보인 녀석들에게 직접 단검을 뽑아들고 달려갔다.

콰득!

흑룡의 비늘단검은 오크의 가죽과 살을 두부처럼 가르고, 단단한 목뼈까지 손쉽게 끊어버렸다.

사용자인 나조차도 소름이 끼칠정도의 성능!

처음 받았을 때엔 무기보단 예술품처럼 보였는데, 내가 쓰던 것보다 두세단계는 윗줄의 물건이다.

'여기서 살아나가면 시현이에게 밥이라도 사야겠네!'

과연 그 자식이 내가 사준 밥을 먹긴 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오크의 머리통을 따버렸다.

내가 직접 덮친 한 놈은 비명도 못 지르고 죽어버렸다.

문제는 염동력으로 처리할 예정이었던 나머지 한 놈이다.

"키엑!"

콰지직!

염동력으로 쏘아보냈던 단검이 놈의 뒷목에 틀어박혔다.

두 놈 다 보기 좋게 등을 보이고 있어서, 처음부터 목을 노렸다.

오크의 강점은 끝도 없이 쏟아져나오는 물량.

만약 놈들이 동료를 부르면 나는 끝장이다.

그런데, 언제나 위력이 좀 모자랐던 내 염동력은 제대로 놈의 숨통을 끊어버렸다.

다른 던전에서 흡수한 마력이 도움이 된 걸까?

자세한 맥락을 파악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이제부터는 시간 싸움이다.

적들이 피냄새를 맡고 시체를 발견하기 전에 탈출해야 한다.

"나와! 못 일어나겠어?"

"으읏..."

사로잡혀있던 소년은 너무 겁먹은 나머지 목소리도 제대로 못 내고 있었다.

차라리 잘 됐다.

만약 비명이라도 질렀다면 여간 곤혹스러운 게 아니었을테니까.

나는 녀석을 한쪽 어깨에 업어들곤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렸다.

"지금 데리고 나가줄테니까, 눈 감고 가만히 있어."

문제는 내가 아직 탈출용 포탈을 찾지 못했다는 것이다.

일반적인 던전의 탈출용 포탈은 던전 외곽에 랜덤하게 생성된다.

그것을 찾지 못하면 절대로 나갈 수 없다.

파밧!

후줄근한 천막과 울타리를 지나친 나는 서둘러 숲에서 포탈을 찾았다.

그나마 밤이니까 포탈이 있다면 잘 보일 것이다.

하지만 포탈의 흔적을 찾기도 전에 등 뒤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퍼졌다.

삐이이익!

듣기 싫은 나팔소리가 울려퍼지자 과장 없이 땅이 울리기 시작했다.

적어도 수십마리의 오크들이 만들어내는 발소리!

등골이 오싹해진 나는 이를 악물고 좀 더 속도를 높였다.

입원과 치료 기간 동안 일을 쉬어버렸더니 체력이 나빠진 것이 체감된다.

"히이익!"

오크들의 발소리가 점점 접근하자, 어린애가 잔뜩 쫄아붙었다.

눈 감고 있으라 했는데 하여간 말을 안 듣는다.

땀을 뻘뻘 흘리며 속으로 혀를 찼다.

'위험한데.'

나는 8살짜리를 하나 업고 있는지라 오크보다 빠를 수는 없다.

게다가 이대로 외곽을 빙 돌면서 탈출 포탈을 찾아야 하니까...

어지간히 운이 좋지 않으면 오늘이 내 제삿날이다.

그런데, 그런 내 시야의 끄트머리에 푸른색의 빛무리가 들어왔다.

몇 번이고 본 적이 있는 탈출 포탈의 광채!

아무렴. 이렇게 착하고 대견한 짓을 하고 있는데 운이 좀 따라줄 법도 하다.

그러나 오크들은 그 사이에도 빠르게 거리를 좁혀왔다.

속도를 낸다고 흔적을 처리하지 못했기 때문에, 발자국 따위가 고스란히 남아있을 것이다.

"취이익!"

슈욱!

오크들의 화살이 날아들었지만 내 근처에도 닿지 못했다.

조잡한 활에 조잡한 활솜씨.

오크족 궁사따윈 전혀 무섭지 않다.

그러나 무기투척은 다르다.

저놈들은 근력이 장난 아니라서, 말도 안 되는 거리까지 무기를 던질 수 있다.

"취륵, 취이이익!"

대장으로 보이는 오크가 명령을 내리자 놈들이 일제히 다리를 멈추더니, 투척 자세를 갖췄다.

조금이라도 명중률을 높이기 위해서 한꺼번에 던지는 것이다.

오크치곤 굉장히 똑똑한 전술.

IQ가 80은 될 것 같다!

"이런..."

그래도 저것만 피하면 탈출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염동력을 최고로 끌어올렸다.

완전히 막아낼 필요만 없다.

궤도만 망쳐도 살 수 있다.

"취이익!"

슈슈슉!

짧은 창이며 도끼, 정글도 따위가 어지럽게 날아들었다.

아이의 눈을 가리며 이를 악물었다.

티잉! 티이잉!

염동력은 또다시 내 기대를 배신하지 않고, 근처로 날아든 투척무기들을 모조리 튕겨내버렸다.

내가 봐도 감탄이 나올만큼 깔끔한 방어였다.

파밧!

억지로 속도를 높인 나는 나무 사이에 생성된 포탈로 뛰어들었다.

거의 넘어질 것 같은 기세로 아스팔트 도로를 밟자 근처의 사람들이 우르르 물러났다.

"나, 나왔다!

"헌터님?"

"모두 비켜요! 몬스터가 나올지도 몰라요!"

보통 몬스터들은 포탈 밖으로 잘 나오지 않으려 하지만...

오크족은 워낙 무식한 놈들이라서 혹시 모른다.

내가 포탈을 경계하고 있자 마침내 헌터 협회의 기동대 차량이 도착했다.

만약 여기서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면 실종자는 확실히 죽었을 것이다.

"엄마야!"

내 어깨에서 내려온 녀석이 뒤늦게 엄마를 찾아갔다.

엄마는 애를 안고 울먹거리며 아무말도 못했다.

"기동대, 이쪽이에요!"

"당직 근무자, 괜찮습니까? 지금 상황이 어떻게 되죠?"

"오크 부락 던전. 실종자 구출했고, 몬스터 탈출 가능성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수고하셨어요. 지금 바로 긴급 공략 준비한다!"

기동대에게 인수인계를 마친 나는 경찰차로 돌아가서 쉴 수 있었다.

밖에서 폴리스 라인을 지키고 있던 경찰들이 간식과 음료수를 갖다줬다.

"너무 고생하셨어요. 저흰 아무 도움도 못 돼서..."

"아뇨, 이게 제 일이잖아요. 운이 좋았네요 정말."

겨우 한 숨 돌리고 있자 다른 차량들이 속속 도착한다.

개중에는 방송국 차량도 몇 개나 있었다.

'벌써 소식을 듣고 온 건가? 엄청 빠르네.'

간만에 좋은 뉴스를 탈 수 있다고 기대하던 찰나.

익숙한 마크가 찍힌 카메라가 차단선을 지나쳐서 다가왔다.

그것을 본 나는 인상을 팍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내 기억에 남아있는 방송사였기 때문이다.

헌터중앙통신.

이름 그대로 헌터 관련 소식을 전문적으로 싣는 민영방송국이다.

말끔한 옷차림의 여자 보도원이 선뜻 다가와서 마이크를 들이민다.

"당직 근무자시죠? 잠깐 인터뷰 가능하실까요?"

반드시 인터뷰에 응할 것이라고 자신하는 듯한 웃음.

이건 미담 중의 미담이니까, 원래라면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긴 하다.

하지만 내겐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나는 뒷좌석에서 일어나며 마이크를 밀어냈다.

"헌터중앙통신의 취재는 거부하겠습니다."

"네에? 어째서요?"

"당신들이 2년 전에 썼던 황금세대 특집기사, 아직 기억하고 있거든요."

"엣..."

뒤늦게 나를 알아본 보도원이 눈을 크게 떴다.

나는 불쾌한 기분으로 잠깐 자리를 떠났다.

2년 전, 헌터중앙통신은 황금세대 특집기사를 작성했다.

당시의 황금세대 졸업생들은 이미 각자의 궤도에 오른 상태였다.

나만 빼고.

다들 잘 나가는 중이라고 보도하면 영 재미가 없으니까, 방송국에선 황금세대에서 가장 뒤떨어진 놈에게 집중하기로 했다.

덕분에 지금도 헌터중앙통신이라고 하면 이가 갈린다.

'됐다. 내 주제에 무슨 취재냐.'

이미 인수인계도 마쳤으니, 나는 지구대로 돌아가기로 했다.

"이제 그만 가죠."

"정말 인터뷰 안 하셔도 돼요?"

"할 이유가 없어요. 할 말도 없구요."

내가 차에 타려고 하자 애 엄마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나는 마주 인사하곤 미련없이 조수석에 탔다.

던전에서 시간을 꽤 잡아먹었는지, 금방 근무 시간이 끝났다.

나는 얼떨떨한 얼굴의 후번 근무자에게 인수인계를 해주곤 잽싸게 집으로 돌아갔다.

'내 능력, 확실히 강해졌는데?'

흥분이 좀 가라앉은 덕에 겨우 복기가 가능해졌다.

내가 마지막에 발휘한 염동력은 원래는 엄두도 못 낼 수준의 것이었다.

이상한 소인족들의 던전에서 흡수한 마력이 제대로 효과를 발휘해줬다.

"거긴 뭐하는 동네길래 마력이 그렇게 풍부한 거야?"

바꿔서 생각해보면, 그런 동네라서 외신따위를 소환할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본인보다 수백, 수천배는 더 크고 강대한 존재를 소환하다니.

헌터들에겐 상상조차 불가능한 일이다.

얼른 장비를 벗고 잠이나 좀 자볼까 싶던 중.

완전히 낯선 목소리가 내 머릿속에 울려퍼졌다.

[외신이시여! 위대한 외신 로완이시여! 미천한 쫑에게 금지된 지식을 내려주소서!]

내용 자체는 지난번에 언뜻 들어본 기억이 있다.

그런데, 발음이 굉장히 어눌하다.

앞서 나를 소환했던 놈들도 한국어를 엄청 잘하진 않았는데...

이놈은 좀 심하다.

"또 소환인가?"

혼잣말이 끝나기도 전에 또다시 포탈이 열렸다.

아직 장비를 벗기도 전이었는지라 코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길게 망설이진 않았다.

지금까지는 대박 한 번에 중박 한 번.

다른 헌터들이라면 돈을 내고서라도 들어갈만한 던전이다.

"좋아."

파아앗!

새롭게 소환된 장소는 드넓은 황야였다.

사람들의 크기는 2번째와 마찬가지로 주먹 정도.

소환자로 보이는 이들은 미친 듯 환호하며 제자리에서 방방 날뛰었다.

"끼요옷!"

"테챠아앗!"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지껄여대는 녀석들.

그 중 소환자로 보이는 놈이 큰 소리로 외쳤다.

"외신이시여! 외신 로완이시여! 쪠가 그대를 소환했습니다!"

어눌한 한국어로 말하던 녀석은 복잡기괴한 소환진을 가리켰다.

그런데, 그곳에서 제법 익숙한 문자와 문양이 보였다.

녀석은 그것을 아주 자랑스럽게 소개했다.

"이 소환진을 보십시오! 이게 있으니, 외신께선 저희의 부탁을 들어주쎠야 합니다!"

녀석이 가리킨 것은 다름아닌 태극기였다.

심하게 삐뚤빼뚤한데다, 그마저도 잘못 그렸다!

태극기는 그놈의 건곤감이 때문에 국기치곤 난이도가 높은 편이니까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아마 한국인들도 대부분 안 보고 그리진 못할 것이다.

내가 저걸 보고 애국심이 막 솟아나서 얘들을 도와줘야 하는 건가?

그것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자, 옆에 다른 글자도 보였다.

"그리고 이 마법의 주문이 위대한 존재를 구속할 것입니다!"

[로완만쎄]

녀석이 가리킨 곳에는 한글로 그렇게 쓰여있었다.

놀랍게도 저것들은 실제로 효과가 있었다.

얘들이 이렇게까지 해놓은 걸 보니까 무턱대고 밟아죽이기가 좀 그렇다.

"이건 또 어디서 배운 거야?"

"저는 마도서의 싸본을 가지고 있습니다! 외신의 언어도, 이 마법진도 모두 그곳에서 배웠습니다!"

"이야, 잘했네. 근데 좀 틀렸다."

"뭐랏?!"

진심으로 당황한 녀석에게 친절하게 태극기 그리는 법을 가르쳐줬다.

"여기, 세 줄이 왼쪽 위로 가고 여섯 줄이 반대편이다."

"오오옷, 위대한 외신의 지식! 모두 경배하라!"

녀석의 말이 끝나자마자 모두가 일제히 절을 했다.

구경하고 있으니 상당히 재미있지만, 먼저 한 탕 뛰고와서 좀 피곤하다.

나는 얼른 본론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이 녀석들 하는 짓이 귀여워서라도 어지간한 부탁은 들어줄 생각이다.

"왜 나를 불렀지?"

"위대한 외신 로완이시여! 미천한 쫑에게 금지된 지식을 내려주소서!"

"금지된 지식?"

"예, 저희들은 위대한 존재의 지식을 원합니다! 죽음과 생명의 비밀, 잊혀진 마법과 소환술, 저희들의 근원, 다른 외신들에 대한 지식..."

녀석은 신나게 떠들어댔지만, 내가 줄 수 있는 지식은 거의 없었다.

"별의 흐름, 이 땅이 평평한데도 일어나는 여러가지 문제에 관하여..."

"잠깐, 땅이 평평해?"

그나마 명쾌한 대답을 내놓을 수 있는 질문이 나왔다.

소환자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올려본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게... 이 땅은 평평하지 않아. 실제로는 둥글지."

지구평면설은 중세 시절에 이미 반박됐을텐데?

외신까지 소환한 놈들이 그걸 모르는 건가?

소환자는 내 말을 듣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머리를 감싸쥐고 외쳤다.

"땅이... 평평하지 않아? 둥글어? 끼에에에엑! 떨어진다아앗!"

"끼엑?"

"테챠아앗!"

소인족들은 소환자를 따라서 날뛰며, 서로를 부여잡고 미친 듯 울부짖었다.

개중에는 자해를 시도하는 이들도 몇 명이나 있었다.

나는 그 광란의 현장을 지켜보다가 말없이 거실로 돌아갔다.

5화. 한쪽 눈의 헌터(5)

당직 근무.

그 최악의 문제점은 생활 패턴이 완전히 꼬여버린다는 것이다.

던전에서 귀환하자마자 낮잠을 잔 나는 굉장히 어중간한 시간에 깨어났다.

오후 4시.

차라리 푹 잘 수 있었다면 좋았을텐데 더 이상 잠도 안 온다.

'밤에 다시 자야하는데... 간만에 훈련이나 나갈까.'

대충 몸을 씻고, 충전기에 꽂아놓은 스마트폰을 집어들자 메세지가 잔뜩 쌓여있는 것이 보였다.

아무래도 어제의 사건이 벌써 알려진 것 같다.

그나마 친한 사람들 것만 골라서 답장하고 나머지는 미뤄두기로 했다.

"응? 유림이네? 여보세요."

나를 던전 공략팀에 꽂아넣어줬던 후배가 보여서 전화를 받자 잔뜩 흥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선배! 몸도 안 좋은 사람이 도대체 무슨 짓이에요? 혼자서 던전에 들어가다니...]

"야, 비상사태였는데 어떻게 해..."

[됐고, 지금 뭐 해요? 시간 있으면 밥이나 먹어요. 어제 이야기 듣고싶으니까.]

"나 훈련장 다녀올테니까 그 다음에 보자."

[알았어요. 그 때 봐요!]

예정에도 없던 식사 약속.

뒤늦게 지갑을 확인해보자 상당히 위태로웠다.

지난번에 공략팀 소개도 받았으니 오늘은 내가 사야할 것 같은데, 조금 버겁다.

그래도 한 끼 정도는 어떻게든 될 것 같아서 잽싸게 훈련장으로 향했다.

가까운 헌터용 훈련장은 작지만 괜찮은 곳이었다.

그곳의 매니저가 나를 알아보곤 인사했다.

"로완 씨! 오랜만이시네요. 수술은 잘 끝났나요?"

"네. 아직 회원기간 남았죠?"

"다음달 말까지예요."

발병 직전에 3개월 회원권을 끊어뒀는데, 눈 수술받고 회복하느라 기간을 거의 다 날려먹었다.

정말이지 아까워 죽겠다.

매니저는 내 사정을 눈치채곤 조용히 말했다.

"로완 씨는 오래 다니셨으니까 1개월 서비스 드릴게요."

"정말요? 감사합니다."

"아녜요. 이번에 아주 화려하게 복귀하셨던데요."

나는 더 듣기가 겁나서 유산소부터 시작했다.

천천히 페이스를 높이며, 트레드밀 앞에 설치된 TV를 켜자 때마침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어제 XX구에서 발생한 던전에 시민 한 명이 빨려들어가는 사고가...]

핏!

늦지 않게 TV를 꺼버리곤 이어폰을 꽂고 음악이나 들었다.

눈 수술을 받은 직후에는 이어폰의 왼쪽과 오른쪽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해서 고생했다.

그래서 그냥 막 껴보던 나는 뒤늦게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다.

'어차피 귀로 들어서 구분도 못하면 굳이 구분할 필요도 없잖아?'

덕분에 요즘은 그냥 막 낀다.

퇴근 시간이라서 그런지 훈련장에는 사람이 많았다.

헌터 전용 훈련장이라서, 나를 알아보고 말을 걸어오는 경우도 있다.

"앗, 로완 씨. 한 건 하셨네요. 곧 훈장이라도 받는 거 아녜요?"

"설마요. 당직이나 좀 빼주면 좋겠는데."

"맞다. 퇴원하자마자 당직 세운 건 좀 너무했네요."

사실 퇴원은 진작 했고, 회복 기간이 길었던 것이지만...

굳이 정정하지 않고 대충 웃었다.

저녁 식사 약속도 있는지라 조금 일찍 시설을 나서자 약속장소에 서유림이 보였다.

한국대학교 헌터학과의 후배인만큼, 그녀도 제법 잘 나가는 현역 헌터다.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인상을 팍 찌푸렸다.

"선배 진짜 미쳤어요?"

"나도 하고싶지 않았어."

반갑게 인사를 나누며 가까운 식당으로 들어갔다.

언제나 TV가 켜져있는, 적당한 맛집.

서유림은 왈칵 짜증을 냈으나...

그래도 나를 걱정해주는 건 그녀 정도다.

"그런데 왜 던전에 혼자 들어가요? 그냥 공략팀 올 때까지 기다리지."

"공략팀 올 때까지 가만히 손 놓고 있었으면, 사람들이 날 놔뒀겠냐?"

만약 내가 나서지 않았다면 실종자는 틀림없이 죽었겠지.

하지만 그것은 결과적인 이야기다.

후배도 그것을 지적했다.

"실종자가 죽었을지 살았을지는 모르는 거예요."

"거기 구경꾼들이 날 어떻게 보고있었는지 알아? 그 애 엄마는 또 어떻고?"

나는 다음 날의 헤드라인을 어렵지 않게 상상해볼 수 있었다.

"지금쯤 뉴스에 이렇게 떴을 걸? '당직 헌터의 소극적인 대처가 만들어낸 참사. 헌터 협회, 이대로 괜찮은가...' 어때?"

"기자 하셔도 되겠네요. 뒷부분은 좀 낡은 것 같지만요."

유림은 한숨을 푹 내쉬며 기분을 좀 풀었다.

"그래도 잘 끝나서 다행이에요. 중간에 오크도 둘이나 쓰러뜨리셨다면서요?"

"그걸 누가 말해줬어?"

"그 실종자 애가 이미 인터뷰 했어요. 놈들이 쫓아오는 것도 혼자 뿌리치셨다고..."

분명 눈 감고 있으라 했는데, 말 더럽게 안 듣더라.

내가 작게 혀를 차자 그녀가 살짝 흥분한 채 말했다.

"선배, 완전 전성기로 돌아온 것 같은데요?"

"내 전성기라는 게 있긴 했나?"

유림은 내 말에 괜히 미안한 표정이 되었다.

나는 조금 씁쓸해져서 시선을 잠깐 피했다.

'그나마 대학교 시절이 전성기라면 전성기인가?'

헌터학과 졸업 전의 나는 확실히 유망주였다.

이론 시험은 항상 거의 만점이고, 실기도 나쁘지 않았다.

졸업까지의 4년 내내 상위 3위에서 떨어나가본 적이 없다.

그러나 헌터는 결국 현장에서 몸으로 직접 뛰는 일이다.

잔재주가 아무리 뛰어나봤자 능력이 약하면 소용없다.

내 염동력은 졸업 이후에도 거의 성장하지 않았고, 덕분에 나는 만년 유망주에서 만년 C랭크 헌터가 되어버렸다.

처음부터 전성기따윈 있지도 않았던 셈이다.

참고로 다른 성적 상위자 2명은 모두 각자의 분야에서 최고가 되었다.

"이제부터 전성기 하면 되죠!"

"... 고맙다."

"그리고 욕을 먹네 마네 해도, 실종자를 구하기 위해서 던전에 혼자 들어가는 건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선배는 역시..."

"그만해. 내 얼굴이 다 뜨겁다. 커피나 마시러 가자."

계산을 위해서 잽싸게 일어났지만 서유림이 선수를 쳤다.

현직 B급 헌터 최상위권의 속도는 장난이 아니다.

"선배는 커피나 사줘요."

"알았어."

"그런데 정말 어떻게 하신 거예요? 처음 이야기 들었을 때엔 다른 사람인 줄 알았다니까요."

"시현이가 새 장비를 만들어줬거든. 이거 봐."

근처의 프랜차이즈 카페에 들어가서 못 다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멀찍이서 싹싹하게 생긴 중년 남자가 천천히 걸어왔다.

그는 깍듯이 인사하며 곧장 용건을 밝혔다.

"실례합니다. 임로완 씨 맞으십니까?"

"누구시죠?"

"저는 흑사자 길드에서 나왔습니다. 회장님께서 로완 씨에게 꼭 보답을 하고싶다 하셔서... 허락만 해주신다면 직접 이쪽으로 오실 겁니다."

"흑사자 길드요?"

헌터라면 누구나 알만한 유명 길드.

한국에 7명뿐인 A급 헌터중 한 명이 직접 세운 길드다.

갑자기 그쪽에서 뜬금없이 보답을 하겠다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

'분명 실종자 애 아빠가 헌터라고 했지? 설마 흑사자 길드 마스터였을 줄이야...'

그게 아니라도, 이렇게까지 하는 것을 보면 최소 임원급은 될 것이다.

나는 갑자기 기분이 불편해졌다.

은근슬쩍 보답을바랬던 것은 맞지만 이런 식으론 아니었다.

"제가 짐작하는 그 이유 때문인가요?"

"네, 맞습니다. 이번에 구출해주신 실종자가 바로 회장님의 아드님입니다."

"일단 앉아서 이야기하시죠. 괜찮지 유림아?"

"물론이죠 선배."

다른 사람을 그냥 세워놓고 대화하는 것도 불편하다.

나는 몇 번 사양하다가 앉은 남자에게 곧바로 말했다.

"보답은 필요없습니다."

"아이고, 사장님. 저도 헌터 길드에서 일해서 잘 압니다. 그렇게 용감한 일을 해주셨는데 아무것도 안 받겠다뇨?"

"보답을 바라고 했던 일이 아니니까요."

만약 내가 실종자를 구하지 않았다면 언론에게 신나게 씹혔겠지만...

오직 그것때문에 내 발로 던전에 들어갔던 것은 아니다.

그것 이전에 나는 헌터니까, 내 일이니까 들어갔다.

게다가 저쪽에서 해주겠다는 보답도 상당히 뻔한 것이다.

그는 내가 대충 예상했던 제안을 꺼내들었다.

"저희 흑사자 길드는 로완 씨와 함께하고 싶습니다."

역시나 영입제안이 왔다.

요즘 이래저래 기연을 누리고 있지만, 남들이 보기에 나는 그냥 만년 C급 헌터.

이번 일도 어쩌다 생긴 요행이다.

과연 내가 이 남자의 말을 듣고 넙죽 입사한다면, 직장 동료들이 나를 제대로 봐줄까?

글쎄... 골칫거리나 웃음거리로 여기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제안은 감사하지만 제게 어울리는 곳은 아닌 것 같아요."

"흑사자 길드는 로완 씨같은 유능한 인재가 절실합니다. 정말 좋은 계약서를 가지고 왔으니 아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 사람이야 위쪽의 결정을 따르는 것뿐이겠지만...

말을 좋게좋게 하니까 확실히 듣기 편하다.

사회생활로 다져진 노련함이 묻어나온다.

그러나 내 마음은 이미 굳어졌다.

나는 왼쪽 눈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거 고친지 고작 2개월 됐습니다."

"아, 네... 그동안 고생이 정말 많으셨겠습니다."

"오른쪽 눈은 아예 맛이 갔어요. 왼쪽도 언제 다시 고장날지 모릅니다. 망막박리는 재발 위험이 낮다지만, 아예 없는 건 아니니까요."

내 설명에 남자는 물론이고 서유림의 얼굴도 딱딱하게 굳었다.

"자고 일어나면 눈이 다시 안 보일까봐 움찔움찔 합니다. 그러니 벌써 길드에 들어갈 수는 없어요. 동료들에게 폐를 끼치게 될 수도 있으니까."

"... 알겠습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야. 대신 명함을 드릴테니, 저희가 도움을 드릴 수 있는 일이 생기면 꼭 연락주십시오."

그는 그제야 납득하곤 자리를 떠났다.

그러자 서유림이 눈물이 글썽거리는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선배! 방금 말한 거, 진짜예요?"

"아니. 사실 별로 걱정 안 해."

"네에?"

"고장나면 다시 수술받지 뭐. 우리나라 의사들 실력 좋던데?"

나는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웃으며 말했다.

사실 재발에 대한 불안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런 걸 일일이 신경쓰면서 사는 것은 너무 손해라는 생각이다.

"만약 양쪽 눈이 모두 안 보이게 되면, 헌터 능력을 이용한 수술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선배, 그러지 말고 동기분들 힘을 좀 빌려요. 시현 선배님이나 아비가일 선배님에게 도와달라고 하면..."

서유림은 내 눈총에 입을 꾹 다물었다.

나라고 황금세대 동기들의 힘을 빌려볼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보다 더 심한 환자들의 기회를 빼앗을 수는 없다.

무엇보다도...

"유림아."

"네에?"

"가끔씩 동정이 과하면 상처가 될 수도 있어."

유림은 살짝 뉘우치는 얼굴을 보이면서도 당당히 대꾸했다.

"선배를 보고 있으니까 답답해서 그래요. 잘나신 동기들 덕 좀 보면 어때서요?"

"하하, 그러게."

얘는 내 병문안까지 와줬던지라 차마 나쁜 말을 못하겠다.

그녀는 카페를 나서며 들릴 듯 말 듯 작게 말했다.

"죄송해요."

"아냐. 방금 밥도 얻어먹었는데 뭘. 조심히 들어가."

"벌써 가려구요?"

유림은 그대로 나를 집까지 바래다줬다.

아직은 얘가 나보다 세다.

마침내 거실로 돌아온 나는 헌터 장비를 걸치곤 거실의 소파에 앉아서 귀를 열었다.

밥 잘 얻어먹고 커피도 한 잔 했으니, 이젠 노동의 시간이다.

정신을 집중해서 귀를 기울이자 금방 기도 소리가 들려왔다.

"인간과 의사소통이 가능한 외신은 희귀하다고 했지?"

대부분의 외신들에게 소인족들은 하찮은 존재일 것이다.

실제로도 그렇다.

크기로 보나, 존재감으로 보나, 능력으로 보나... 그들은 인간에 비해서 하찮다.

하지만 아직 약해빠진 내겐 귀중한 손님들이다.

신속, 친절, 정확.

나는 세 가지 모토를 명심하곤 때마침 열린 포탈 속으로 걸어들어갔다.

땅바닥에 넙죽 엎드린 채, 내 이름을 부르짖는 사람들을 보자 절로 입꼬리가 휘어졌다.

6화. 황금의 서

포탈을 통과하자, 다른 세계였다.

나는 눈에 익은 지형지물을 발견하곤 피식 웃었다.

같은 소환사에게 두 번째로 소환당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내 피를 나눠받은 마법사는 로브차림으로 손을 들고 부르짖었다.

"위대한 로완이시여! 기뻐해주십시오! 당신의 가장 충실한 종복이 명을 받듭니다!"

"응?"

내가 좀 어리둥절하자, 그가 조금 더 자세한 설명을 덧붙인다.

"콜렌 왕국의 궁정 마법사들이 사용했던 마도서의 사본을 입수했습니다! 이제 놈들이 어떻게 로완 님의 이름을 알고 있었는지 밝힐 수 있습니다!"

"... 잘했다! 포기하지 않았구나."

마도서란 아우터 갓에 대한 서적.

소환법은 물론이고, 기원이나 특징 등등. 다양한 관련지식이 실려있다고 한다.

바닥에 태극기나 그려놓고 있던 소환사들을 상대하다가, 이 녀석을 보니까 가슴이 막 벅차오른다.

진짜 뿌듯하고 대견해서 뭐라도 해주고 싶은 기분이다.

"그런데 왜 하필 사본이지?"

"놈들에게도 원본은 없었을 겁니다. 마도서의 원본은 아주 귀중하니까요."

마도서란 대부분 외신의 언어로 쓰여있어서, 무턱대고 읽으면 그대로 미쳐버릴 수도 있다고 한다.

소환자는 아주 신이 나서 나를 찬양해댔다.

"영원의 주인이신 로완이시여. 저는 당신의 자손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스르륵.

녀석이 로브를 벗어던지자 놀라운 모습이 드러났다.

지난번에는 분명 다 늙은 노인이었는데, 오늘은 근육이 알차게 들어차있는 청년의 모습이 되었다.

심지어 남근도 꼿꼿하게 서있다.

'불로장생의 묘약을 만든다고 했지? 내 피에 저런 효과는 없었을텐데?'

"외신의 피는 추종자들을 주인과 닮게 만든다고 들었는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영원토록 찬미받으소서!"

"챤미받으소서!!"

넙죽 엎드린 추종자들이 조금 어눌한 한국어로 복창했다.

저건 통역마법도 뭣도 아니다.

진짜 나 하나를 위해서 생소한 외계의 언어를 익힌 것이다.

나는 아직 소환자의 이름도 모른다는 것을 떠올리곤 곧바로 물었다.

"네 이름은 뭐지?"

"저, 저는 헤르반입니다! 당신의 가장 충실한 종복이 되겠습니다!"

헤르반은 격정으로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녀석은 곧바로 이번에 입수한 마도서의 사본을 가져오더니 양손으로 높게 치켜들었다.

"이것이 바로 황금의 서 사본입니다!"

"황금의 서? 지금 당장 읽어보아라. 읽기 힘들다면 바닥에 그려도 좋다."

내가 직접 읽어보기엔 마도서가 너무 작다.

안 그래도 눈이 나쁜데, 저런 거 보면 병이 재발할지도 모른다.

내 추종자들이 몸을 돌리고 있는 사이.

외신의 언어를 전혀 모르는 시종들이 땀을 뻘뻘 흘려가며 바닥에 물로 글자를 그렸다.

무척 삐뚤빼뚤하지만 알아보는데엔 큰 지장이 없다.

'응? 이건...'

가장 먼저 그려진 것은 다름아닌 태극기.

지난번의 소환자들도 이 마도서를 손에 넣었던 모양이다.

'근데 뭔놈의 책이길래 태극기가 맨 앞에 그려져있지? 무슨 군대 교본 같은 건가?'

궁금증을 참고 차분히 기다리자, 역시나 마도서는 한글로 쓰여있었다.

기계 번역기에 넣고 돌린 것처럼 문맥이 어색하지만 간신히 읽을 수 있는 수준.

그런데 그 내용이 묘하게 익숙하다.

[황금세대의 임로완... 우등 적용 범위. 한국대학교...]

'잠깐만, 이거 설마...'

분명 어디선가 읽어본 적이 있는 내용.

뒤늦게 그 정체를 눈치챈 나는 속으로 경악했다.

이것은 2년 전, 헌터중앙통신에서 작성했던 황금세대 특집 기사였다!

'이게 왜 여기서 나와?'

원래는 내 욕이 잔뜩 쓰여있는 기사였지만, 번역과 필사가 워낙 엉망진창이라서 원본을 제대로 알아보기도 힘들 지경이다.

덕분에 이 녀석들은 내가 강력한 외신인 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나를 그토록 괴롭혔던 특집 기사가 나를 이곳으로 불러주다니.

엄청난 아이러니다.

헤르반은 아까부터 내 안색을 살피며 전전긍긍했다.

"존경하는 주인이시여! 마도서가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이 마도서는 순 엉터리다."

잔뜩 화가 나서 말하자 추종자들이 일제히 몸을 부르르 떨었다.

"용서하십시오! 필사 과정에서 실수가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누가 이 마도서의 원본을 만들었지?"

"황금의 서 원본은 사상 최고의 소환사이자 마도사인 에이코그가 편찬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에이코그는 수많은 외신들의 총애와 원한을 사서 반쯤 미쳐버린 채 모습을 감췄지요."

[우리들의 세계는 종이로 된 성이나 마찬가지다.]

에이코그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은둔했다고 한다.

헤르반은 나를 달래려는 듯 큰 소리로 외쳤다.

"제가 주인님의 뜻을 받들어 새롭고 올바른 마도서를 편찬하겠습니다!"

"그래?"

"부디 허락해주십시오! 마도서의 원본을 편찬하는 것은 모든 마법사들의 꿈입니다."

"... 좋다."

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괴문서가 나돌아다니는 것을 가만히 지켜볼 수는 없다.

내 이미지는 내가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그럼... 주인님과 주인님의 세계에 대하여 알려주십시오!"

"..."

과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할까.

그 전에, 내가 누구인지 곧이곧대로 밝혀도 될까?

지구에서의 나는 고작해야 C급의 헌터.

반면 눈앞의 헤르반은 아무리 낮게 잡아도 이 지역 영주 정도는 되는 것 같다.

지가 나의 가장 충실한 종복이네 뭐네 하고 있는데, 거기에 찬물을 끼얹는 것도 못할 짓이다.

'정직을 지켜야 할 때가 따로 있지...'

"나, 나는..."

여기서 곧이곧대로 떠들어댔다간 다음 소환따윈 물건너간다.

그래도 거짓말은 하고싶지 않아서 끊임없이 갈등하던 찰나.

넙죽 엎드린 추종자들이 찬송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헤르반은 엄숙하면서도 장엄한 표정으로 그것을 지휘한다.

"동해물가 백두산이 마르고 달토록~"

'안 되겠다.'

덕분에 나는 마음을 정하곤 위엄있는 목소리로 내뱉었다.

"나는... 세계의 수호자다. 이형과 이능을 지닌 외적들로부터 나의 세계를 수호하는 책무를 맡고 있다."

"오오옷! 역시 전사셨습니까!"

"위대한 수호자에게 영광을!"

한 번 시작해버린 이상 멈출 순 없다.

그러니 뻔뻔스럽게 이어나갔다.

"그곳에선 지금도 나의 용맹을 찬양하고 있노라."

"영원토록 찬미받으소서!"

"불패의 존재를 경외하라!"

아니, 불패라곤 안 했는데...

아주 멋대로 뜯어고친다.

이래서 엉터리 마도서따위가 생기는 건가?

존경으로 두 눈을 빛내던 헤르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 주인님과 비견되는 존재가 있다면..."

"그 누구도 감히 나를 상대할 수 없다!"

나를 때리면 그게 바로 장애인 폭행이다!

내 대답에 추종자들이 다시 넙죽 엎드린다.

저기서 몸이 더 낮아질 수 있을 줄은 몰랐는데, 놀랍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들어라! 최고의 장인이 자진하여 무구를 만들어 내게 바친다. 검은 사자들의 왕도, 백룡의 주인도 내게 거절당해 눈물지었다. 시인들은 더 이상 나의 위업과 용맹을 표현할 단어조차 찾지 못하고 있다. 놈들에겐 너무나도 벅찬 과업이지."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계속 지껄이자 추종자 하나가 갑자기 뒤로 넘어졌다.

눈을 가까이 해서 자세히 살펴보자, 거품을 물면서 기절한 것이었다.

'뭐 이런 걸로 기절하고 있어? 귀여운 자식들...'

그러나 다른 추종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런 어설픈 놈이..."

"죽음으로 사죄해라!"

"감히 내 앞에서 피를 보이겠다고? 네놈들이 나보다 피를 잘 뿌린다는 것이냐?"

살짝 인상을 쓰며 내뱉자 두 놈이 추가로 기절했다.

나는 슬슬 소환시간이 다 되어가는 것을 느끼곤 마무리를 지었다.

"다시 세계를 수호할 시간이다. 기별하거라."

"미천한 종들의 유일한 정답이신 로완이시여! 앞으로도 길을 비추소서!"

'쟤는 어떻게 저렇게 말을 듣기 좋게 하지?'

저 정도는 되어야 아우터 갓을 소환할 수 있는 거구나.

새삼 감탄한 나는 눈 깜짝할 사이에 거실로 돌아와서 소파에 풀썩 주저앉아버렸다.

지금껏 제법 정직하게 살았다고 자부하는데...

오늘은 사기죄로 체포되어도 억울하지 않을 것 같다.

그래도 후회하기엔 이미 늦었다.

조금 전에 했던 말들이 진실로 변하도록 할 수밖에 없다.

'그나저나 어쩌다 2년 전의 특집 기사같은 게 저쪽 세계로 넘어간 거지?'

자문자답에 대한 결론이 나오기도 전에, 새로운 목소리와 포탈이 나를 불렀다.

[로완이시여! 강대한 외신 로완이시여! 부디 위기에 빠진 왕국을 구해주십시오!]

"오늘은 2연타인가."

하긴. 저쪽 기준으론 그새 날짜가 넘어갔을 수도 있겠다.

나는 망설임 없이 포탈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높다!'

소환 직후의 감상은 일단 눈높이가 높다는 것이었다.

거의 콜렌 왕국에서의 첫 소환 때와 비견될만한 눈높이.

내가 좀 더 본체에 가까운 상태로 소환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번에 소환된 나라는 온통 모래와 돌로 가득했다.

사막내지는 황야에 가까운 지형에, 인간들이 잔뜩 모여있다.

천막이나 돌로 된 건물도 잔뜩 보인다.

그리고, 그 앞에 소인족들이 개미처럼 잔뜩 엎드려 있었다.

제사장 느낌의 옷을 입은 지도자가 양팔을 벌리며 내게 무어라 외쳤다.

바로 옆의 소환사가 통역 겸 인사를 시작한다.

"로완이씨여! 소환에 응해주셔서 쩡말 감사합니다! 로완 만세!"

"콜렌 왕국을 도와주셨던 것처럼, 저희들도 도와주십시오!"

또다시 왕국에서 소환된 것이 딱히 놀랄 일은 아니다.

이 세계에서 아우터 갓을 소환하는 것은 인력과 자원을 꽤 많이 잡아먹는 것 같았으니까.

적어도 지역 영주나 국왕정도 되지 않으면 힘들다.

나는 미리 정해둔 모토를 속으로 되뇌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신속, 친절, 정확. 신속, 친절, 정확!'

"듣고있다."

"저희 헬리온 왕국은 주변국의 침공과 경제난으로 절체절명의 상황입니다! 부디 위대한 외신의 힘으로 왕국을 살려주십시오!"

"... 뭐?"

나보고 나라를 살려달라고?

정체불명의 신적 존재를 소환해서 나라의 운명을 맡기다니...

이 자식, 지도자 자격이 있는 건가?

이 정도면 세계 최악의 지도자 순위권도 노려볼 수 있을 것 같다.

'이쪽 세계에선 이게 상식인 건가?'

하지만 나는 미리 각오한대로 별 말을 하진 않았다.

외신 로완은 현명하고 강력하며 의지할 수 있는 존재여야 한다.

그 어떤 상황에도 당황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애써 가라앉히며, 질문을 시작했다.

다행히 시야가 엄청나게 높아서 주변 상황을 살피는 것이 굉장히 쉬웠다.

먼저 시야 끄트머리에 푸른색이 들어왔다.

"저건... 바다인가?"

"그렇습니다. 남쪽에는 다른 바다가 있지요."

일단 지형은 대충 파악됐다.

야자수와 바다가 공존하고 있는 지형.

여긴 이집트와 비슷한 곳 같다.

서로 다른 2개의 바다 사이에 끼어있는 땅이다.

"그럼 강은?"

"강은 얼마전에 말라버렸습니다. 워낙 작은 강이라서..."

이건 또 무슨 헛소리지?

강은 문명의 원류.

주변에 적당한 수원지가 없는데 나라를 세우고, 도시가 형성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애초에 나라를 만들면 안 되는 땅이다.

'다른 아우터 갓이 개입하기라도 한 건가?'

"이웃 왕국이 태양의 아우터 갓을 소환하여 지하수를 완전히 바닥내버렸습니다! 놈들은 이미 멸망했지만, 말라버린 강줄기는..."

역시나.

나는 즉시 놈들이 그려놓은 지도를 살펴봤다.

이 나라, 2개의 바다 사이에 끼어있는 주제에 제법 좁다.

주변에 다른 국가들도 많고, 쓸만한 천연자원도 거의 없는 것 같다.

'이놈들은 그냥 망해야겠는데?'

"지금까진 도대체 뭐 해먹고 살았지?"

"저희 헬리온 왕국은 석재 가공과 건축 기술로 유명합니다. 종이도 만들었는데, 요즘은 대체재가 생겨서..."

강도 없는데 무슨 종이를 만들어?

아, 얼마전에 말라버렸다고 했지.

경영쪽으론 경험도, 지식도 없는지라 속으로 진땀을 뻘뻘 흘렸다.

그런데 시야를 휘휘 돌리던 나는 남쪽의 바다가 생각보다 무척 가깝다는 것을 발견했다.

내가 몸을 움직일 필요조차 없이, 두 개의 바다가 눈에 들어온다.

"잠깐만... 남쪽 바다에서 북쪽 바다로 가려면, 엄청난 거리를 우회해야 하잖아?"

"맞습니다. 두 바다는 대륙으로 가로막혀 있으니까요."

"그냥 운하를 뚫으면 안 되겠나?"

만약 운하를 뚫으면 통행료를 달달하게 받아먹을 수 있을텐데?

자칭 건축의 귀재라는 헬리온 왕국의 소인족들은 난리법석을 피워댔다.

"운하를 만들기 위해선 엄청난 노동력이 필요합니다! 헬리온의 모든 백성들이 죽어도, 운하는 완성되지 못할 겁니다!"

"너희한테나 힘들겠지."

"데뎃?!"

나는 몹시 당황한 소인족들의 앞에서 선언했다.

"2주 뒤에 다시 소환해라. 너희들의 모든 역량을 동원하여 소환하는 게 좋을 거다."

"외, 외신이시여!"

녀석들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거실로 돌아갔다.

헌터장비를 벗어던진 나는 운하에 대해서 검색하기 시작했다.

7화. 왕국수호자

아침에 일어나면 가장 먼저 안약을 넣는다.

매번 넣는 게 귀찮긴 하지만 아주 싫진 않다.

어차피 예전에 비하면 편하다.

수술 직후에는 먹는 약까지 포함하여 7개의 약을 사용했다.

상태가 좀 호전된 뒤에는 5개.

퇴원한 다음에는 3개까지 줄였다가...

이젠 인공눈물 하나만 넣는다.

많이 넣는 안약은 하루에 6번도 넣었지만, 이젠 하루에 고작 2번.

얼른 작업을 마친 나는 샤워를 하곤 아파트의 놀이터로 향했다.

'놀이터에 가보는 게 도대체 몇 년 만이지...'

2주 뒤에 소환하라고 했지만, 시간적으로 그렇게 여유롭진 않다.

저쪽 세계의 1주가 지구의 1일.

즉. 지금 내게 남은 시간은 약 36시간 정도 된다.

'그 전에 확실하게 연습하고 넘어간다.'

놀이터에 도착한 나는 선명한 색깔의 놀이기구들을 보곤 속으로 혀를 찼다.

내가 어렸을 때엔 다 썩어가는 놀이기구를 타고 놀았는데...

그야말로 격세지감이다.

다행히 놀이터에는 내가 찾던 모래가 잔뜩 있었다.

문제는 어린애들도 잔뜩 있다는 것이다.

아직 날이 밝은데, 아이들이 학원에 가지 않고 놀이터에서 놀다니.

우리나라의 미래가 걱정된다.

녀석들을 애써 무시하며, 놀이터의 구석에서 모의 실험을 진행했다.

당연하지만 모래장난이나 하러 온 것은 아니다.

나는 운하 건설 예습을 해볼 생각이다.

그러나 남들이 보기엔 이것도 그냥 모래장난이었다.

"아저씨, 여기서 뭐해요?"

"와아! 헌터다. 아저씨 헌터 능력 보여줘요!"

염동력을 동원해서 모래를 조금 파헤쳐보자 멀찍이서 놀던 꼬맹이들이 우르르 다가온다.

나이는 대충 초등학교 고학년 정도 될까.

인생에서 가장 에너지가 넘치고, 시끄러울 때다.

괜히 방해를 받게 된 나는 애써 띠껍지 않게 물었다.

"너희는 학원 안 가니?"

"주말인데 학원을 왜 가요."

"남들이 쉴 때 공부해야 올라가는 거야."

대한민국의 사교육 열풍도 옛말이군.

속으로 그렇게 궁시렁거리며, 지갑에서 피같은 만원권 한 장을 꺼내들었다.

"가서 아이스크림이라도 사먹어."

"고맙습니다 어르신."

이놈들 봐라, 돈 받자마자 말투가 바뀌네?

겨우 혼자가 된 나는 본격적으로 연습을 시작했다.

소환자들을 위해서 운하를 뚫어주겠다고 예습을 하는 외신은 나밖에 없을 것이다.

'운하도 여러가지가 있었지?'

어젯밤에 나를 소환했던 헬리온 왕국은 운하를 만들기에 아주 적합한 지형이었다.

일단 완성만 해버리면 대박은 보장된다.

게다가 매우 평평한 지형이라서, 굳이 갑문을 만들거나 할 필요도 없다.

문제는 내가 실전에서 염동력으로 운하를 파야한다는 것이다.

외신의 육체적 능력은 정말 굉장하지만, 소환 유지 시간은 상당히 짧은 편이다.

작업을 제 때 끝내기 위해선 무조건 염동력을 써야한다.

파앗!

염동력이 발동되자, 놀이터의 모래가 한움큼 파졌다.

하지만 이 정도론 한참 부족하다.

나는 놀이터의 끝에서 끝을 조준하고 출력을 높였다.

파바밧!

"엇, 뭐야. 되네?"

아직 버거울 줄 알았는데, 의외로 단번에 성공!

게다가 깊이도 꽤 깊어서 30cm 정도는 파졌다.

이 정도면 소형 운하라고 부르기에 손색이 없다.

그동안 저쪽 세계에 불려갔던 보람이 느껴진다.

'이 정도면 B랭크 승급시험 정도는 그냥 통과하겠는데?'

잔뜩 흥분한 채, 운하에 물을 채워본 나는 대충 예상했던 사고를 맞딱뜨렸다.

기껏 채워놓았던 물이 모래에 흡수되어 스며들어가버린 것이다.

저쪽 세계의 운하는 바다와 연결될 예정이니, 물이 말라버릴 걱정따윈 없겠지만...

운하가 물살을 이겨내지 못하고 금방 무너져내리면 곤란하다.

적어도 파도 정도는 버텨낼 수 있어야 한다.

'사막의 운하에도 방파제 정도는 쌓아놓던데... 엇?'

놀이터의 바닥을 좀 더 깊게 파보자 자갈이 잔뜩 나왔다.

물이 천천히 스며들어서 모래가 썩지 않도록 조치를 취해둔 것이다.

덕분에 어렵지 않게 가닥을 잡을 수 있었다.

"모래를 파고, 물을 흘려보내기 전에 돌을 깔아놓으면 되겠네."

다행히 헬리온 왕국에도 돌 정도는 지천으로 널려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내 염동력의 정밀도뿐.

원래 마력량이 높아진다고 능력이 더 정밀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능력의 조작은 더욱 조잡해지는 경우도 많다.

그런 걱정을 하던 나는 문득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다.

"잠깐... 왜 이렇게 반듯해?"

간이 운하의 가장자리는 마치 자로 잰 것처럼 반듯했다.

내가 의도했던 이상적인 운하 그 자체!

심지어 능력을 약하고 좁게 썼던 것도 아니다.

이 정도면 눈 수술을 하기 전보다도 훨씬 정밀하다고 볼 수 있다.

"뭐지? 나 진짜 각성했나?"

도저히 믿기지가 않아서 몇 번이고 다시 실험해봤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염동력은 원래 제어가 힘든 것으로 유명한 능력인데 전혀 그런 느낌이 없다.

그래도 실험은 여기까지.

이제는 슬슬 힘을 아껴야 한다.

내일은 정말 전력으로 일해야할테니까.

놀이터에서 집으로 돌아와 바지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자, 유달리 얇은 느낌이 손에 잡혔다.

아까전에 애들을 쫓아내는데에 만원을 사용해서... 이제 잔고는 고작 2만원.

통장 잔고는 따로지만 그쪽도 그리 여유롭진 않다.

슬슬 일거리를 찾아야 한다.

'저쪽 세계의 추종자들은 금전적으론 거의 도움이 안 되니까...'

추종자들이 금을 산더미처럼 모아줘봤자, 내 입장에선 한 줌에 불과하다.

아니다. 한 줌이라도 순금이라면 돈이 좀 되려나?

이런 고민을 진지하게 할 정도로 궁핍하다.

어쨌거나 당장은 헬리온 왕국에 집중해야 한다.

만반의 준비를 갖추던 나는 결국 다음 날 밤을 맞이했다.

"슬슬 시간인가..."

[자비로운 외신 로완이시여! 헬리온 왕국을 구원하소서!]

녀석들은 48시간이 딱 되자마자 나를 소환했다.

완전무장 상태로 소파에서 일어나,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간다.

헌터용 전투복의 파우치에는 귀한 마나 포션이 들어있었다.

비상용으로 구해둔 것인데 이런 곳에서 쓰게 될 줄은 몰랐다.

'추종자들의 앞에서 물약이나 먹는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으니...'

꿀꺽, 꿀꺽.

포션병을 시원하게 비워버린 뒤에는 망설임 없이 포탈로 들어갔다.

넙죽 엎드린 추종자들이 내 이름을 연호하고 있었다.

"로완 만세!!"

"길을 열어라!"

지난번보다 시야가 좀 더 높아진 것을 보니, 내 권고대로 모든 역량을 동원하여 소환한 모양이다.

나는 즉시 운하 건설 작업을 시작했다.

헬리온 왕국의 사람들은 운하의 건설 예정지에 보기 좋게 표식까지 새겨놓았다.

'좋아, 이 정도는 되어야 도와줄 맛이 나지.'

쿠르르릉!

있는 힘껏 염동력을 끌어올리자 천지가 진동했다.

대규모 토목공사라곤 해도, 내 입장에선 놀이터의 흙장난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

다만 그 때보단 확실히 길이가 길다.

'아직 물이 들어오면 안 되니까, 여유공간을 좀 남겨두고... 간다!'

쩌어억!

내가 손을 들어올리자 대지가 좌우로 길게 쪼개졌다.

깜짝 놀란 소인족들이 혼비백산하여 바닥을 뒹군다.

녀석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빠르게 작업을 진행한다.

'모래를 퍼내는 건 됐고, 다음은 돌이다!'

모래를 그리 멀리 내다버리지 못했으니, 작업을 제대로 못하면 운하가 망가질 것이다.

나는 바위산 하나를 통째로 들어서 집채만한 바위만 골라냈다.

그리곤 염동력으로 잘게 부숴버린다!

콰드드득!

"끼에에엑!"

"외신의 진노다!"

"침묵 속에서 목도하라!"

홧김에 신경질적으로 외치자 숨소리마저 사라졌다.

몇놈은 진짜로 숨이 넘어간 것 같다.

겁나서 성질도 못 부리겠다고 속으로 투덜거리며, 조각난 바위들을 운하의 밑바닥과 옆면에 주욱 깔았다.

'만약 이걸로 부족하면... 아니. 난 해줄만큼 해줬어!'

말 그대로 산이 무너져내리며 운하의 반석이 완성되어간다.

넋을 잃은 소인족들이 경외심 가득한 시선을 보낸다.

그것을 즐기며 슬슬 마무리 단계에 들어가려는데, 돌연 소환사 한 명이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저토록 왜소한 몸으로 강대한 외신을 소환한 대가를 치루고 있는 것이다.

"쿨럭!"

"버텨라! 로완 님께 부끄럽지도 않으냐!"

'나보다 저쪽이 먼저 한계에 도달할 줄이야...'

운하의 양쪽 입구를 대충 완성한 나는 두꺼운 모래벽을 허물어버렸다.

원래는 수문을 설치할 예정이었는데 시간이 모자라서 안 되겠다.

직후. 운하의 양쪽에서 바닷물이 콸콸 쏟아져들어오더니...

마침내 두 개의 바다가 하나로 합쳐졌다.

소인족들은 제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미친 듯 환호했다.

"정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운하를..."

"왕국 수호자의 탄생입니닷!!"

"로완 만세! 로완 최고! 영원토록 경배하라!"

내가 운하를 완성하자마자 시야가 급격히 낮아졌다.

이미 한계에 도달해있던 소환사들이 즉시 크기를 줄인 것이다.

나는 스스로의 작품을 내려다보며, 아무렇지 않은 체 말했다.

"운하의 중앙에 다리와 수문을 설치하여 통행료를 징수하라. 그 정도는 스스로 할 수 있겠지?"

"예에! 구국의 외신이시여, 정말로 감사합니다! 당신의 자비와 당신의 지혜에 거듭 경탄합니다! 하지만 아직 근심거리가 하나 남아있습니다!"

"또 뭐지?"

생각지도 못한 소리에 혀를 차자 국왕으로 보이는 놈이 통역사 겸 소환사의 입을 빌려서 말했다.

"미천한 저희들은 아직 이 운하를 지킬 힘이 없습니다! 만약 외적이 운하를 노린다면..."

아주 나보고 처음부터 끝까지 다 해달라고 하는구나.

나는 무척 아니꼬운 기분이 됐지만...

이건 비교적 쉽게 해결이 가능하다.

"아둔하구나. 내가 직접 만든 이 운하를, 감히 누가 건드린단 말이냐."

"아앗, 로완이시여..."

"너희는 비석을 세워라. 내가 이곳에서 선포하노니, 헛되이 운하를 욕심내는 이들은 나의 분노를 사게 될 것이다!"

"모두 로완을 받들라! 유일무이하며 끝없이 존귀한 척안의 외신을!!"

소인족들은 다시 미친 듯 날뛰었다.

그런데, 소환사들의 우두머리는 여전히 걱정스런 표정이었다.

"고결한 로완이시여!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여쭙겠습니다!"

"진짜 마지막이다."

"저희는 과연 어떻게 보답하면 되겠습니까?"

아차, 그러고 보니 조건도 없이 너무 열심히 일해줬군.

나는 소환당하는 것 자체가 이득이라서 그쪽으론 생각이 좀 짧았다.

그래도 공짜로 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공짜는 노동의 값어치를 낮춘다!

"... 후일 내가 너희들에게 명하겠다."

당장 생각나는 게 없어서 뒤로 미룬 것이지만...

소인족은 온몸을 크게 떨며 두려워했다.

"아아, 헬리온의 미래가!"

"당신의 뜻대로 하십시오..."

"로완만세!!"

내 한 마디에 녀석들의 미래는 파멸했다.

이제 헬리온의 사람들은 다가올 미래를 두려워하여 밤마다 잠을 설칠 것이다.

'이 정도면 충분히 해줬어.'

파앗!

눈을 감았다 뜨자 사막의 열풍이 사라지고 거실의 풍경이 보였다.

나는 스스로의 업적에 뿌듯함을 느끼며 소파에 주저앉으려 했다.

소인족들이 목이 터져라 내 이름을 부르짖는 광경은 묘하게 중독성이 있었다.

그러나 아직 쉬긴 좀 이른 모양이었다.

나는 새로운 포탈을 발견하곤 혀를 차며 들어갔다.

아직 마력량에는 한참 여유가 있어서, 아까 먹었던 포션이 아까워질 정도였다.

"또 뭐냐."

"로완이시여! 외신 로완이시여!"

새롭게 소환된 곳은 드넓은 평원이었다.

초목이 바람에 흔들리는 가운데, 거대한 성채가 떡하니 버텨있다.

그러나 성채 안쪽의 사람들은 무척 힘들고 지친 얼굴이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를 불러낸 쪽은 성 안의 사람들이 아니었다.

성에서 조금 떨어진 평원, 무수한 병사들이 일렬로 주욱 늘어서있다.

나는 예상 외의 광경에 왼쪽 눈을 크게 떴다.

'전쟁이라도 하려는 건가?'

공성측의 책임자로 보이는, 화려한 의복의 사내가 소환사의 입을 통해서 외쳤다.

"로완이시여! 왕좌의 주인으로서, 그대에게 부탁이 있습니다!"

"뭐야?"

소환하자마자 다짜고짜 부탁이라니.

내게 이토록 무례하게 대한 놈은 처음이다.

내 태극기는 어디갔지?

애국가랑 김연아, 손흥민은?

하다못해 날 위해서 찬송가 정도는 불러줘야 하는 거 아니냐?

앞서 국뽕 컨텐츠를 진심으로 즐기진 않았는데...

막상 없으니까 또 섭섭하다.

그래도 일단 이야기 정도는 들어봐야겠지.

나는 소인족들의 친절한 이웃 로완이니까.

"말해봐라."

"부디 저 성을 함락시켜주십시오! 놈들은 간악하게도 저와 로완님을 모욕했습니다!"

"뭣?"

이몸께선 양쪽 다 오늘 처음 보는데?

게다가, 아무리 봐도 공성측의 병력이 압도적으로 많다.

제대로 공격하면 사상자가 발생할지언정 어렵지 않게 함락시킬 수 있을 것이다.

'설마... 이놈, 나를 용역깡패같은 걸로 생각하는 건가?'

아군 병력을 아끼려고 다짜고짜 외신을 소환하다니.

이쪽 세계는 정말이지 상식이 어떻게 된 것 같다.

나는 성벽 안에서 떨고있는 소인족들에게 슬쩍 시선을 던졌다.

저놈들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지만... 이런 취급은 달갑지 않다.

게다가 이번의 소환자는 내게 거짓말까지 해버렸다.

'너무 친절하게 대해주는 것도 좀 생각해봐야겠군.'

내가 세상의 법칙을 잠시 잊고 있었다.

쉽게쉽게 해주면 진짜로 쉬운 놈인 줄 안다.

결국 나는 국왕의 재촉에 마음을 정했다.

"어서 외신의 힘으로 이 전쟁을 끝내주십시오!!"

"좋다."

"데프픗... 끄헉?!"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기분나쁘게 웃던 놈의 몸이 순식간에 납작 뭉개졌다.

내 염동력에 당한 녀석은 핏물조차 제대로 뿌리지 못했다.

마치 짜증나는 모기를 잡은 것같은 기분이다.

"허억!"

"외, 외신이 노하셨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란 군대의 앞에서 선언했다.

"전쟁은 끝났다. 모두 집으로 돌아가라."

잠시 얼어붙어있던 소인족들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더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몸을 돌려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끼에엑!"

"레챠아앗!"

성채를 등진 내 앞에서 군대가 쥐떼처럼 흩어졌다.

8화. 다른 외신

헌터용 훈련장으로 향하는 내 발걸음은 무척 가벼웠다.

어제 소인족의 국왕을 뭉개버렸다는 죄책감따윈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헌터다.

적이라면 지성과 감정을 가진 상대라도 망설임 없이 죽인다.

학창시절부터 그렇게 훈련받았다.

소인족들이 나와 무척 비슷하긴 했지만...

그렇게 치면 지난번에 죽였던 오크들도 마찬가지다.

이제와서 차별대우를 하면 놈들이 섭섭해할 것이다.

'그나저나 운이 좋군. 벌써 측정실을 쓸 수 있게 되다니.'

헌터용 훈련장에는 여러가지 시설이 있지만...

그 중 가장 인기가 있는 것이 바로 측정실이다.

헌터 능력을 다각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시설은 전국에도 그리 많지 않아서, 회원들도 1개월에 딱 1번만 쓸 수 있다.

그마저도 일찍부터 예약을 안 하면 못 쓴다.

그런데, 이번에 훈련장의 매니저가 예약이 캔슬된 자리를 내게 주겠다는 것이었다.

때마침 염동력을 점검하고 싶었던 내겐 희소식도 이런 희소식이 따로 없다.

"안녕하세요."

"아, 로완 씨. 바로 들어가시죠. 워밍업 필요하신가요?"

"아뇨. 바로 부탁드릴게요."

위이잉.

나는 측정실에 들어가서 장비를 앞에 두곤 힘을 끌어올렸다.

A랭크까지 감당할 수 있다니까, 마음껏 내질러도 되겠지.

퍼억!

가장 먼저 펀칭머신처럼 생긴 장비를 밀어봤다.

염동력은 측정이 매우 간단하고 쉬운 편이다.

기계는 꽤 큰 각도로 꺾였지만, 마지막으로 측정해본 것이 꽤 오래돼서 어느 정도인지 감이 안 잡힌다.

측정실 밖에서 매니저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와앗! 아, 아니 이건..."

"계속할까요?"

"아, 네!"

다음으로 정밀성 측정.

개인적으로 내가 가장 기대하고 있는 부분이다.

나는 피아노 건반같은 느낌의 장비에서 빨갛게 표시된 부분만 잽싸게 눌렀다.

붉은 색 건반은 점점 더 많이, 빠르게 표시되었다.

"측정치... 나왔습니다! 굉장해요. 이 정도면 B랭크 최상위권이에요."

"정말인가요?"

"네, 특히 정밀성은 A랭크 수준이네요."

결과 용지를 받아본 나는 피식 웃어버렸다.

몹시 기분이 좋지만... 동시에 조금 씁쓸하기도 했다.

B랭크 최상위권.

황금세대의 동기들은 진작에 도달했던 경지다.

이제와서 이 정도로 만족해선 안 되는 것이다.

매니저도 내 기분을 눈치채서 아주 시원스럽게 축하해주진 못했다.

"그래도 이 정도면 굉장하잖아요. 언제 이렇게 발전하신 거죠?"

"병원 침대에서 훈련한 보람이 있네요."

"앗, 그러시면 안 되죠."

대충 둘러대며 평소의 루틴으로 돌아갔다.

다른 사람들은 워밍업을 하면서 드라마나 뉴스를 보거나 음악을 들었다.

나도 비슷한 짓을 하기로 했다.

'으음... 헤르반. 있느냐?'

[예, 주인이시여. 뭐든 분부하십시오.]

다른 소인족들도 내게 말 정도는 걸 수 있지만...

헤르반은 특별하다.

녀석은 내 피를 나눠받은 덕에 조금 더 쉽고 편하게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나는 짬을 내서 저쪽 세게에 대한 공부를 좀 하기로 했다.

'다른 외신들에 대하여 알고 싶다.'

[다른 외신이라 하심은...]

'부담갖지 말고, 비교적 유명한 놈들부터 읊어봐라.'

[알겠습니다 위대한 수호자시여. 특이한 것으로 유명한 외신이라면 역시 질문자와 답변자부터 시작해야겠군요.]

'질문자와 답변자?'

두 외신은 거대한 머리를 지닌 쌍둥이 외신인데...

질문자는 끊임없이 질문을 하고, 답변자는 끊임없이 그에 대한 답을 내놓는다고 한다.

녀석들의 화제는 정말이지 폭넓어서, 단순한 가정사부터 세계의 비밀, 진리까지 논한다.

'그럼 두 놈을 동시에 소환하면 많은 것을 알 수 있겠군.'

[바로 그 점이 문제입니다. 질문자와 답변자는 절대로 동시에 소환되지 않습니다. 한 쪽이 소환되면 다른 쪽은 소환이 아예 불가능해지죠.]

'흥미롭구나. 조금 더 일반적인 외신들에 대해서 이야기해봐라.'

일단 스타트는 잘 끊은 것 같다.

헤르반은 열정적으로 설명을 이어나갔다.

나도 운동기구의 강도를 조금 더 높였다.

[고독한 늑대라는 외신도 있습니다. 간단하면서도 특이한 성질로 인해서 비교적 자주 소환되는 외신이죠.]

'어떤 성질?'

[고독한 늑대는 혼자있는 것을 좋아해서, 소환 즉시 소환자를 포함해서 주변의 모든 생명을 거둬들입니다. 자살 희망자나 종말론자들에게 인기가 있습니다.]

혼자있는 것을 좋아한다면 소환은 왜 당해주는 건데?

슬쩍 웃어버리며 계속해서 경청했다.

[뱀들의 어머니! 매우 강력한 상위의 외신입니다. 다른 외신을 몇이나 거느리고 있지요. 매우 심술궂지만, 그나마 의사소통이 가능한 편이고...]

헤르반은 소환사답게 관련지식이 풍부했다.

나는 운동을 마치곤 샤워를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대충 감이 잡힌다.

'나처럼 정상적인 놈이 거의 없군.'

이 정도면 좀 더 배짱을 부려도 되겠다.

만약 내 소환에 실패하면, 소환사들은 말도 제대로 안 통하는 괴물들을 상대해야 하는 것이다.

외신들 중 대부분은 소인족들에 대한 살의나 무관심으로 무장하고 있다.

덕분에 외신의 도움을 얻어내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인 것 같다.

[그런데... 로완이시여! 감히 한 말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왜 그러지?'

[마도서의 작성을 위한 질문입니다. 로완님의 가족관계를 알고싶습니다!]

'가족관계?'

이제와서 호구조사라니.

정말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당황하자 헤르반이 황급히 보충설명을 덧붙였다.

[외신들은 워낙 강대하고 이해불능한 존재라서... 스스로 다른 외신을 창조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런 것 때문이었다니.

의외로 외신들 사이에서도 가족관계가 중요한 모양이다.

물론 워낙 이상한 놈들이니까,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가정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을 것이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 대답했다.

'나는 오롯이 완전한 존재다.'

[감사합니다! 로완님께 영원한 영광을!]

탈의실에서 몸을 말리고 훈련장을 나서려는데, 매니저가 갑자기 나를 붙잡았다.

"로완 씨! 헌터 협회에서 연락이 왔어요."

"갑자기 뭐죠?"

"그쪽에서 이번 측정 결과를 봤는데, 로완 씨는 승급시험 없이 B랭크 승급이 가능하대요."

"정말요? 잘 됐네요."

이래봬도 7년이나 활동한만큼, 승급에 필요한 실적은 진작 달성했다.

B급 헌터증 배송 주소를 확인한 나는 기분 좋게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제야 B급인가... 헌터증이 도착하면 새 일을 할 수 있겠어.'

사실 공략팀에 들어가는 것이 쉽진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번에 방송을 탔어도, 나는 고작해야 C급 헌터.

게다가 헌터들 중에는 내 행동을 아니꼽게 보는 이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이제 당직 근무자들이 지난번의 나와 똑같은 상황에 처하면, '임로완은 들어갔는데 너희들은 왜 안 들어가냐...'같은 소리를 들을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그게 내 잘못이라곤 생각 안 한다.

길을 걷던 나는 잠깐 귀를 열었다가 후회했다.

[로완이시여! 로완이시여! 부디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왕국의 흥망이 당신께 달려있습니다!]

[간악한 경쟁 상단을 부숴주십시오.]

[당신과 같은 불패의 전사가 되고 싶습니다!]

[고귀한 여인을 손에 넣고 싶습니다!]

지금쯤이면 내가 소환자를 뭉개버렸다는 소문이 퍼져나갔을텐데...

나를 찾는 목소리들은 오히려 전보다 더 많아졌다.

거의 폭주 상태라서, 귀를 닫아버리지 않으면 버거울 정도다.

'다른 건 몰라도 외신에게 연애문제를 상담하는 건 좀 아닌 것 같은데?'

역시 부탁을 잘 들어주는 외신은 희귀한 게 맞다.

이제부터는 좀 골라서 소환을 당하기로 했다.

마침내 거실에 도착한 나는 염동력으로 TV의 리모컨을 쥐었다.

인터넷 뉴스로 대세가 넘어간 시대라지만, 굳이 찾아볼 필요도 없이 알아서 떠들어주는 뉴스도 나름대로 편하다.

헌터 관련 뉴스를 방송 중이던 채널에선 늘 그랬듯 백룡 길드의 소식을 전했다.

[헌터 아비가일 씨가 이끄는 백룡 길드가 일본에서의 원정 레이드를 성공하고 귀국...]

아비가일.

황금세대의 필두이자, 한국의 유일한 S급 헌터다.

이름대로 외국산인데도 항상 성적 최상위권을 차지한 걸물.

하도 잘 나가서, 따로 찾아보지 않아도 거의 매일 소식이 들려온다.

"특별한 소식은 없네. 슬슬 일을 시작해볼까..."

무수한 기도 소리를 분간해내며, 신중하게 소환 상대를 고르던 도중.

문득 익숙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이건 헤르반이다.

[로완 님! 큰일입니다! 제발 도와주십시오!]

'헤르반?'

[외신입니다! 외신이 저희들의 터전을 침공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다른 외신과 부딪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이토록 빠를 줄이야.

나는 방탄복의 착용감을 확인하며 짧게 대꾸했다.

"불러."

파아앗!

익숙한 숲 지형에 도착한 나는 곧바로 흑룡의 비늘단검을 뽑아들었다.

저 멀리서, 뼈로 이뤄진 거인이 서서히 접근하고 있다.

"저놈은 뭐지?"

"아토카! 생명의 모독과 사령술을 즐기는 사악한 외신입니다!"

"키흐흑..."

뼈로 된 거신은 기분나쁘게 웃으며, 뚜벅뚜벅 걸어왔다.

척 봐도 상당한 존재감.

몬스터 기준으로 최소 A급 정도는 될 것이다.

놈이 걸음을 옮기기만 해도 주변의 숲이 썩어서 문드러지며, 기묘한 소리와 함께 무너져내렸다.

내 발밑에서 추종자들이 절망적으로 울부짖는다.

"끼에엑!"

"몰살이다!"

"야, 멈춰."

일단 말을 걸어봤지만 언어가 통할 리 없다.

놈은 다짜고짜 긴 팔을 크게 붕 휘둘렀다.

내가 슬쩍 움직여서 피하자, 휑하게 비어있는 놈의 눈구멍이 이쪽을 빤히 쳐다보게 됐다.

'뭐냐, 이 허접한 공격은.'

잽싸게 반격하려던 나는 생각보다 몸이 무겁고 둔한 것을 느끼곤 눈을 크게 떴다.

조금 전까지 훈련장에 있었는지라 확실히 알 수 있다.

지금 이 몸은 정상적인 컨디션이 아니다.

'저놈의 능력 때문인가? 아냐. 저놈도 허우적거리는데?'

살짝 당황하고 있자 발밑에서 헤르반이 외쳤다.

"죄송합니다 주인이시여! 제 소환이 불완전하여..."

그랬던 건가.

아무래도 소환사인 헤르반이 급하게 소환하여 내 힘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는 상태인 것 같다.

저쪽의 뼈 거신도 마찬가지.

놈은 원래 저것보다 훨씬 더 강한 존재인데, 소인족들의 소환술로는 놈을 온전히 소환할 수 없는 것이다.

'서로 약화됐다면 내가 훨씬 유리해!'

내쪽은 그래도 괜찮다.

나는 원래 그리 강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저놈은 지금 병에 걸려서 땅을 기어다니는 듯한 기분일 것이다.

그 기분은 나도 아주 잘 알고 있다!

"키히익!"

강렬한 역체감에 시달리던 놈이 왼쪽 손을 뻗었다.

나는 염동력으로 그것을 밀어내며, 흑룡 단검을 깊게 찔러넣었다.

저쪽의 움직임이 확실히 나보다 둔하다.

"세, 세상에..."

"위대하신 아버지! 숲의 평화를 되찾아주십시오!"

"세계의 수호자! 불패의 존재여!"

외신들의 싸움을 직관하게 된 추종자들은 광란 상태가 됐다.

나는 놈들에게 생각이 미쳐서 이를 악물었다.

지난번에 그토록 자랑을 해놓았는데, 쪽팔리게 이딴 놈에게 질 수는 없다.

"너같은 놈은 수백번도 더 잡아봤다!"

"그에에엑!"

콰드득!

흑룡 단검이 놈의 갈비뼈에 닿자 핏물 대신 뼛조각이 와르르 흘러내렸다.

염동력으로 상처를 넓히곤, 안쪽을 헤집어대자 허리가 폭발하듯 부서졌다.

"키힉, 아, 토카! 커시어, 파탄!!"

알 수 없는 언어로 지껄인 놈이 바닥에 쓰러지더니... 이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헤르반과 추종자들은 이미 정신을 차리지 못할 지경이었다.

순수한 열광이 드넓은 숲을 가득 채우고 있다.

"로완! 로완! 로완!"

"헤르반! 소환사를 찾아!"

"저쪽입니다!"

나는 녀석이 가리킨 방향으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사방팔방으로 빠르게 흩어지던 소환사들이 비명과 함께 뭉개져버렸다.

9화. 전설의 세 모험가

"수고하셨습니다."

늦은 밤.

나는 간만의 던전 공략을 마치고 팀원들과 함께 잔을 부딪혔다.

내 인생 첫 B랭크 던전 공략은 너무나도 무난하게 잘 끝났다.

공략팀을 소개시켜준 후배, 서유림이 괜히 호들갑을 떨었다.

"선배, 이제 저보다 강한 거 아니에요?"

"아까 기습당했을 때는 정말 아찔했는데, 너무 잘 막아주셨습니다."

"마침 제가 가까이 있었을뿐이에요."

나는 잔을 기울이며 쓰게 웃었다.

술을 즐기는 편은 아니었는데, 워낙 오랜만의 술맛이라서 달다.

던전에서 살아나왔다는 것보다도. 당분간 생활비 걱정을 안 해도 된다는 것이 더 안심된다.

그대로 술이 좀 들어가자 헌터들이 한층 솔직해진다.

"한쪽 눈을 잃으셨는데도 능력이 더 강하고 정밀해지다니..."

"티, 팀장님!"

"괜찮아요. 사실 저도 신기하니까."

그 뒤로 이래저래 찾아봤는데, 시력이 나빠지면 능력도 약해져야 정상이다.

나처럼 오히려 강해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역시 외신 활동 때문이겠지.'

물론 그쪽도 아주 쉽진 않다.

일전에 격퇴했던 외신, 아토카.

다짜고짜 나와 싸웠던 녀석은 아직 죽지 않았다.

내가 물리친 것은 녀석의 소환사들이 만들어준 분신일 뿐이라서, 본체에는 영향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다만 아주 효과가 없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로완이시여! 이제 아토카를 소환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겁니다.]

'왜 그렇지?'

[원래부터 인기가 있는 외신은 아니었습니다. 로완님께 처참히 패배했다는 소식이 퍼져나가면, 그마저도 완전히 잃어버릴테구요.]

외신이 소환자를 죽이는 것은 괜찮다.

강대한 외신을 소환하고 싶다면 목숨 정도는 걸어야 하는 것이 인지상정.

소환사들도 쪼잔하게 그런 걸로 무어라 하진 않는다.

하지만 그렇게 목숨걸고 소환한 외신이 별다른 활약도 못하고 격퇴당한 것은 좀 다른 문제다.

아토카는 급이 결코 높다고 볼 수 없는 외신이라, 소환사들의 도움이 없으면 저쪽 세계에서 뭘 하기도 힘들 것이다.

'급이 낮은 외신인데다 본체도 아닌 게 그 정도였다니.'

나는 압도적인 강점을 가지고 시작한지라 지명도가 굉장히 빠르게 올라갔다.

이 몸께선 다른 외신들보다 소인족들과 외모가 훨씬 비슷하다.

내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있자 술에 취한 헌터들이 본인들의 장비를 하나씩 자랑하기 시작했다.

슬슬 술자리도 마무리 되어가는 것 같다.

"이 총 어때요? 시현 공방에서 1년 넘게 기다려서 겨우 뽑았어요. 이번엔 써먹을 기회가 없었지만..."

"몬스터에게 총이 먹혀요?"

"몬스터 소재로 만들면 먹히죠. 얘 이름은 유언이에요."

"무기에 이름 붙이는 것 좀 안 했으면 좋겠는데..."

"네? 무기에 이름 지어주는 거 별론가요?"

흑룡 단검의 이름을 고민 중이었던 나는 입을 꾹 다문채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술자리가 끝난 뒤, 다음 날 아침.

나는 통장에 돈이 들어온 것을 확인하곤 조금 일찍 집을 나섰다.

오늘의 목적지는 다름아닌 금은방.

그곳의 10g짜리 골드바가 목표이다.

'요즘은 10g짜리도 파는구나. 이렇게 작은 게 100만원이 좀 안 된다니.'

실물로 마주한 10g 골드바는 엄지손가락 한 마디 정도의 크기였다.

이 정도는 기념품 느낌으로 곧잘 사가는 듯, 금은방 주인은 군말없이 골드바를 내줬다.

"조심히 가세요."

상당히 큰 지출이었지만...

외신 소환에는 재물이 많이 들어간다니 어쩔 수 없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장비를 걸치곤 헤르반을 불렀다.

"헤르반, 잠깐 보자."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바로 소환하겠습니다.]

하여간 얘는 빠릿빠릿해서 좋다.

헤르반과 추종자들은 크게 원을 그린 채 춤을 추며 나를 맞이했다.

"로완이시여! 다시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거 받아라."

내가 10g짜리 골드바를 내려놓자 추종자들이 탄성을 내지르더니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황금의 광채에는 사람의 마음을 빼앗는 힘이 있는 것이다.

"이, 이건... 설마 금입니까?"

"어째서 저희들에게 이런 큰 선물을..."

"나를 따르는 자들에게는 보상이 주어질 것이다."

헤르반은 나를 자주 소환했으니까 슬슬 자금이 말랐을 수도 있다.

녀석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몸을 숙였다.

저 10g짜리 골드바는 내 입장에서도 상당한 거금이었는데...

소인족들의 입장에선 얼마나 큰 액수일지,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영원토록 충성하겠습니다!"

"그나저나 상담하고 싶은 것이 있다."

"무엇이든 말씀하십시오!"

"이 몸, 좀 더 작게 만들 수는 없겠나? 나를 더 작게 소환하는 거다."

"예에? 그... 그야 물론 가능합니다. 오히려 쉽습니다!"

잘 됐다.

사실 작고 약하게 소환되는 것은 내 위엄을 떨어뜨릴 염려가 있지만...

이쪽 세계를 조용히 탐사하기 위해선 그쪽이 훨씬 나을 것이다.

"그리고 너희들의 언어를 배우고 싶다."

"그, 그런 영광을 제게 안겨주셔도 되는 겁니까?"

"나의 가장 신실한 추종자인 너라서 믿고 맡기는 것이다."

립서비스로 외신을 부릴 수 있다면, 그 반대도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다.

듣기 좋은 말 몇 마디 해주는 게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고.

헤르반과 추종자들은 다시 몸을 숙이며 찬사를 내뱉었다.

"그럼 곧바로 시작하겠습니다!"

"그래. 이곳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언어로 부탁한다."

"맡겨주십시오!"

이 세계의 언어를 알게 되면 외신으로 활동하는 것도 훨씬 쉬워지겠지.

언어 능력에는 크게 자신이 없지만, 내겐 나름대로 믿는 구석이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나는 어렵지 않게 기초적인 어휘를 터득할 수 있었다.

헤르반이 내 피를 나눠받은 것 덕분에 녀석의 힘과 지식이 내게 조금씩 흘러들어오는 기분이었다.

"대단하십니다! 이토록 쉽게 언어를 익히실 줄은..."

"이 정도로 일일이 놀랄 필요없다."

"실례했습니다."

내가 그렇게 내실을 다지던 와중.

숲에 세 명의 소인족들이 찾아왔다.

헤르반과 추종자들이 머물고있던 숲은 이미 요새화가 완료된 상태였는데...

목책 앞에 늘어선 소인족들은 척 봐도 보통이 아니었다.

다른 녀석들보다 덩치도 훨씬 크고, 크고작은 상처를 잔뜩 달고 있다.

녀석들은 입구에서 무어라 소란을 피우더니, 높은 목책을 단번에 뛰어넘어버렸다.

"끼에엑!"

"헤르반 님! 모험가들입니다!"

"모험가?"

"아마 로완 님을 노리고 왔을 겁니다! 멍청한 놈들!"

내 추종자들이 녀석들을 막으려 했지만 전혀 상대가 되지 않았다.

척 봐도 수준이 완전히 다르다.

"척안의 외신! 국왕을 시해하고도 무사할 줄 알았냐!"

"로완 님! 제게 맡겨주십시오!"

지난번의 소환 때문에 찾아온 건가?

헤르반은 자신있게 앞으로 나서며 양팔을 쭉 뻗었다.

그러자 세 명의 모험가들에게 강렬한 번개가 뻗어나갔다.

파지직!

녀석들은 헤르반의 공격을 어렵지 않게 받아내며 잽싸게 흩어졌다.

지팡이를 든 소인족이 헤르반을 묶어두는 사이, 활을 든 소인족이 내게 화살을 쏘았다.

"뭐야, 이것들."

마침 굉장히 작아진 상태였던 나는 제대로 반응도 못하고 한쪽 눈에 화살을 맞을 뻔했다.

그러나 화살은 내 염동력에 가로막혀서 닿지도 못하고 떨어졌다.

내가 몸을 굳힌 그 때, 검을 든 소인족이 기세좋게 외치며 점프 공격을 시도했다.

"결정타 데샤봇!"

티잉!

괜히 소리를 질러서 멀리 튕겨나가는 녀석.

나는 제대로 힘을 발휘하여 세 놈을 모두 묶어버렸다.

공중에서 묶여버린 놈들은 꼼짝도 못하고 내 앞으로 끌려왔다.

고전하던 추종자들이 키득키득 웃으며 녀석들을 조롱했다.

"네까짓 놈들이 로완 님께 될 줄 알았냐!"

"푸하핫! 모험가 옷이 아깝다!"

"로완이시여! 바로 처형을 준비하겠습니다!"

소인족 기준으론 굉장히 강한 것 같지만, 그래봤자 외신에겐 안 된다.

본인들도 이렇게까지 허무하게 당할 줄은 몰랐다는 듯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어, 어떻게 이 정도로 강한데샤앗!"

"외신 사냥꾼인 우리가 겨우 이런 곳에서..."

"외신 사냥꾼?"

아마 허접한 외신을 한두번 정도 격퇴해놓곤 으스대는 것이겠지.

같은 외신인 아토카에게 맞았을 때엔 좀 아픈 느낌이라도 있었는데, 지금은 간지럽지도 않았다.

나는 처형을 요구하는 추종자들을 진정시키곤 헤르반의 통역을 받아서 모험가들을 심문했다.

"나한테 현상금이라도 걸렸나?"

"위대한 아버지. 이놈들은 아마 비밀결사의 청탁을 받았을 겁니다."

"비밀결사?"

"감히 외신에게 대항하려는 어리석은 이들이죠. 가끔씩 이런 멋모르는 모험가들을 고용하기도 합니다."

소인족들도 참 고생이다.

이 녀석들을 여기서 뭉개버리는 건 아주 간단하지만...

고용주가 따로 있다면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 셈이다.

순간, 나는 좋은 생각이 떠올라서 충동적으로 물었다.

"메? 호?"

"무...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버지?"

"메시? 호날두?"

"가, 갑자기 뭐야!"

"둘 중 하나를 고르라는 것 같은데?"

"외신의 질문이다. 신중하게 대답해야 해!"

자기들끼리 쑥덕거리던 모험가들은 이내 결론을 내렸다.

녀석들 중 마법사가 소리를 질렀다.

"메시! 메시라고 말할 때 목소리가 좀 더 밝았어!"

"오, 그랬나? 눈치가 빠른 녀석이군."

아무래도 녀석들에겐 운이 따라주는 것 같다.

나는 녀석들을 살려보내기로 결심했다.

"헤르반. 이 녀석들을 놓아줘라."

"로... 로완이시여! 감히 당신의 뜻에 의문을 품고 싶지 않지만, 어찌하여 이런 놈들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겁니까!"

"이놈들, 꽤 유명한 모험가들이겠지?"

"예에... 그야 감히 외신에게 도전할 정도라면... 적어도 이 근처에선 모르는 이들이 없을 겁니다. 저도 이름은 많이 들어봤습니다."

그런 놈들이 내게 도전했다가 패배해서 돌아가면, 내 이름이 더욱 널리 알려지지 않겠는가.

녀석들을 죽이는 것보단 살려서 돌려보내는 것이 훨씬 낫다.

어차피 이놈들은 내게 별 위협도 안 된다.

"그럼 이제부터 너희들을 전설의 세 모험가라고 부르겠다."

"크윽, 비웃지 마라!"

"주인이시여! 부디 재고해주십시오! 이놈들은 당신의 자비를 받을 가치도 없는 놈들입니다!"

"헤르반. 너의 걱정도 이해되지만 두 번씩 말하게 하지 마라."

다만 그냥 놓아주는 것도 좀 못할 짓이다.

나는 손가락을 살짝 찔러서 피를 조금 낸 다음, 녀석들에게 억지로 먹였다.

"우왓! 무슨 짓이냐!"

이제 외신의 피를 나눠받았으니, 외신에게 대항한다는 비밀결사도 녀석들을 믿지 못할 것이다.

"자, 이제 돌아가라 전설의 세 모험가들아. 간신히 건져낸 목숨을 귀중하게 여겨야지."

"정말 미치겠군..."

"됐으니까 어서 가자고!"

세 모험가는 메다닥 숲 밖으로 사라졌다.

그제야 내 뜻을 눈치챈 추종자들이 고개를 깊게 숙였다.

"오오... 로완의 끝모를 지혜를 찬양하라!"

"감히 당신의 뜻을 의심해서 죄송합니다."

"됐고, 헤르반. 혹시 헬리온 왕국이라고 알고 있나? 사막 한복판에 있는 작은 왕국인데..."

이 세계의 왕국들은 생각보다 크지 않다.

총 인구 10만을 간신히 넘기는 경우도 부지기수.

까놓고 말해서 자칭 왕국이라고 불러야 할 정도다.

다행히 헤르반은 곧바로 알아들었다.

"예, 로완이시여! 당신께서 운하를 건설해주셨던 곳 말입니까?"

"그래. 여기서 얼마나 멀지?"

"이곳에서는 상당한 거리가 있습니다. 최소한 배타고 2개월 정도는..."

"그럼 넌 그곳의 소식을 어떻게 알고 있는데?"

"세계 곳곳에 저의 친우와 수하들이 있습니다."

역시 헤르반은 유능하다.

흡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요구했다.

"그곳으로 다시 가보고싶다. 헬리온의 사람들 몰래 말이야."

"제가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아주 어렵진 않을 겁니다."

"그래?"

"예. 그쪽의 소환사 친구들에게 부탁하면 됩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서두를 필요는 없다. 운하가 완성된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니... 느긋하게 하거라."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기꺼이 기다리기로 했다.

과연 헬리온이 어떻게 변해있을지, 기대가 되면서도 걱정이 됐다.

10화. 마녀

시간이 정말 정신없이 흘러간다.

'나 요즘 너무 열심히 사는 거 아닌가?'

외신 활동과 헌터 활동에 공부까지 병행하던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좀 바쁘면 어떤가.

병원 침대에 누워있던 시절보단 훨씬 낫다.

게다가, 요즘은 능력이 발전하는 것이 아주 확실하게 느껴진다.

나는 눈을 감고 염동력을 사용해보며 피식 웃어버렸다.

원래 염동력은 조작성이 극악이다.

본인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 힘을 다루는 것이 쉬울 리 없다.

그래서 나는 역발상을 해봤다.

"아예 눈을 쓰지 말자."

장님이 손 끝의 감각을 이용해서 사물을 파악하듯.

염동력을 이용해서 비슷한 짓을 시도해봤다.

처음에는 번번이 물건을 부숴먹었으나...

어느 순간 촉감이 확장되는 느낌과 함께 제어 능력이 눈에 띄게 상승했다.

염동력에 감각을 부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뒤로는 물건을 떨어뜨리는 정도는 있어도, 뭉개버리진 않게 됐다.

"시각이 내 능력의 발전을 막고 있었던 건가?"

쉽사리 믿기지 않지만, 지금으로선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뭔가 다른 요소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이 정도는 다른 염동력자들도 해봤을테니까.

슬슬 소인족 언어를 공부할 시간이 되자, 나는 책상 앞에 앉았다.

곧이어 헤르반의 공손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일한 주인이시여! 오늘도 당신께 봉사하겠습니다!]

"마도서 편찬은 잘 되어가고 있나?"

[크으... 제 일생일대의 과업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어봐주셔서 정말 영광입니다! 때마침 질문이 있습니다. 로완님께서는 속성이 어떻게 되십니까?]

"속성?"

내가 무슨 포켓몬이었나?

목소리에 의아함과 불쾌감이 담겼는지, 헤르반이 황급히 설명했다.

[보기보다 전통있는 분류 방법입니다!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괜찮다. 하지만 나는 그런 잣대로 구별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듣고보니 헌터들에게도 곧잘 통용되는 구분법이다.

나는 염동력 헌터니까, 굳이 따지자면 무속성이겠지.

헤르반은 내 대답에 크게 만족했다.

[위대하신 아버지.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아아, 그러고 보니 보고가 늦었습니다. 당신께서 놀라운 자비를 베푸시어, 천지사방이 당신의 이름과 영광으로 가득합니다. 감히 헤아릴 수 없는 큰 뜻에 다시 한 번 감복했습니다!]

헤르반은 똘똘한 녀석이지만... 요즘 미사여구가 점점 더 많아져서 알아듣기 힘들어지고 있다.

그런데도 굳이 말리고 싶진 않다.

이게 바로 칭찬의 마력이겠지.

'내가 지난번에 살려줬던 모험가들 이야기군.'

녀석들은 높은 명성을 지닌 정상급 모험가들.

그런 그들이 내게 패배하여 돌아온 것 자체가 훌륭한 홍보활동이 되었다.

그리고, 그 때는 따지고 보면 나도 억울한 구석이 있었다.

'나는 최소한의 피해로 전쟁을 끝냈다고.'

내가 소환자인 국왕을 죽이긴 했지만...

외신을 소환해서 그딴 부탁이나 하는 국왕이라면 없는 게 나을 것이다.

틀림없이 희대의 암군일테니까.

게다가 전쟁으로 인한 인명피해도 내 덕분에 압도적으로 줄었다.

'하지만 그걸 일일이 지적하는 건 외신답지 않아.'

그래서 억울하고 입이 근질근질거리는 와중에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척안의 외신은 억울함을 호소하지 않는다.

외신은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 외신은 두려워하지 않고, 외신은 변명하지 않는다.

오직 행동과 결과로 설명한다.

'내가 생각해도 정말 잘 참았어.'

만약 그 때 쓸데없는 말을 했다면 외신으로서의 위엄이 크게 실추되었을 것이다.

외신 아토카가 내게 패배했던 것 때문에 소환을 못 당하고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외신들에게 이미지 관리는 매우 중요하다.

요즘은 아예 거울 앞에서 무섭게 웃는 법도 연슴하고 있다.

슬슬 오늘도 생활용 소인족 언어를 배우려 하는데, 굉장히 이색적인 목소리가 머릿속으로 파고들었다.

요즘 대부분의 목소리는 내 심상장벽에 가로막히는데...

이번 것은 심상장벽을 뚫어버리곤 뇌리에 박혔다.

무엇보다도, 이 녀석은 한국어를 사용하고 있지 않다!

[도와, 주세요... 로완, 이시여...]

'뭐지?'

기본 중의 기본도 안 된 주제에 날 부르다니.

그래도 심상방벽을 뚫었으니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다.

게다가 목소리는 또 다 죽어가고 있다.

'어떤 상황인지 감도 안 잡히는군.'

나는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며 장비를 집어들었다.

"헤르반. 잠시 다녀오겠다."

[예, 주군!]

직후에 열린 포탈 속으로 들어가자, 다른 어떤 때보다도 후줄근한 광경이 펼쳐졌다.

다 쓰러져가는 오두막과 축사 등등이 주욱 펼쳐져있는 장소.

헤르반의 본거지인 숲 속 마을은 이곳에 비하면 신전이나 마찬가지다.

주민들은 죽도록 고생한 듯, 얼굴에 기미와 주름살이 가득했는데... 그마저도 짜증스럽게 일그러져 있었다.

뒤늦게 나를 발견한 놈들이 기겁하며 쇠스랑이나 도끼 따위를 집어들었다.

나는 그새 소인족 언어에 꽤 익숙해졌는데, 이 녀석들의 말은 사투리가 너무 심해서 제대로 알아듣기 힘들다.

"뭐, 뭐뭣! 거인이다!"

"경비대! 경비대에엣!"

"언제... 왜?"

"히이익... 사, 살려줘!"

아무래도 이놈들이 나를 소환한 것이 아닌 모양이다.

'지금 내 몸은 꽤 큰데?'

내가 의아해하던 가운데, 발밑에서 작게 꼼지락거리는 형체가 하나 보였다.

형체가 겨우 몸을 일으키자... 그것이 사람이란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 주세요."

"뭐라고?"

내 통역 능력이 아직 시원찮은 것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목소리에 힘이 없다.

너무 작아서 안 들린다.

그 사이, 마을 사람들은 우르르 몰려와서 나를 불안하게 올려봤다.

진흙투성이의 소환사가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짜내어 말했다.

"불태워... 주세요. 모두."

"모두?"

지금까지 날 소환했던 녀석들 중 가장 극단적인 부탁이다.

그 사이, 마을 사람들은 뒤늦게 상황을 눈치채곤 기겁했다.

"마녀다! 마녀가 거인을 불러왔다!"

"돌! 돌을 던져!"

나는 몹시 멍한 기분으로 마을 사람들이 돌을 집어드는 것을 지켜봤다.

바로 앞에 집채만한 거인이 버텨서 있는데, 겁도 없이 돌을 던지다니.

발밑의 소환자를 향한 학대와 멸시가 얼마나 일상화 되어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겨우 몸을 일으킨 소환사는 머리에 돌에 맞을뻔 했다가 내 염동력으로 구사일생했다.

진흙과 핏물로 범벅이 된 얼굴이 나를 올려다본다.

마을 사람들은 그 사이에도 지치지 않고 언성을 높였다.

"창녀의 자식! 거둬준 은혜도 모르고!"

"죽어라 개년아!"

각종 욕설은 가장 먼저 배웠는지라 아주 선명하게 들렸다.

등 뒤에서 나를 욕하는 목소리를 구분하기 위함이었지만...

이런 식으로 활용하게 될 줄은 몰랐다.

마을 사람들 중에는 내게 무어라 지껄이는 놈들도 있었다.

"꺼져!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이 바보, 거인에게 말이 통하겠어?"

"저 마녀부터 죽여!"

이쯤되자 나도 소환사의 뜬금없는 부탁을 진지하게 고려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전에 한 가지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다.

'헤르반.'

[분부하십시오!]

'너는 혼자서 나를 소환할 수 있겠나? 별다른 재물이나 도움 없이? 최소 집채만한 크기로.'

[그것은... 솔직히 말해서 제 능력으로는 힘듭니다.]

'외신의 언어도 모르는 소환사가 나를 홀로 소환하려면 어떻게 해야하지?'

헤르반은 의외로 길게 고민하지 않고 답했다.

[그건 대소환사 에이코그 정도의 재능은 있어야겠군요.]

'좋아.'

역시 이번 소환사는 보통 인재가 아니다.

나는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확인했다.

만약 마녀라고 불리지 않았다면 여자인 줄도 몰랐을 것이다.

"모두 불태워달라고? 그 안에는 너도 포함되는 거겠지?"

"상관... 없어요."

"좋다."

화르륵!

전투복 상의에서 라이터를 꺼내어 던지자 순식간에 불이 번져나갔다.

담배는 피우지 않지만, 재난용품으로 마련해둔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그것을 보곤 화들짝 놀라서 마구 울부짖었다.

"우와앗! 불이다! 불!"

"이런 빌어먹을 거인이!"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게 바로 이런 건가.

나는 서비스로 집을 몇 개 쓰러뜨려서 마을을 완전히 차단해버렸다.

"끼아악!"

"젠장, 평생 일만 하다가 이딴 곳에서..."

"와하하!"

비명이 교차하는 가운데, 내 발밑에서 번역조차 필요없는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성난 마을 주민들은 머지않아 불 앞에서 어둡게 흔들리는 조각들이 되어버렸다.

"꺼줘! 제발 꺼달라고!"

"나갈 수가 없어!"

"끄아악!"

"아하하하하!"

실성한 듯 웃던 소환사에게 매캐한 연기가 다가온다.

잽싸게 염동력을 펼쳐서 녀석을 보호하며, 예정에 없던 불구경을 했다.

마을 전체가 홀라당 타버리는 것은 제법 장관이다.

"키헥, 크윽..."

그대로 얼마나 지났을까.

비명이 멎은 마을은 완전히 잿더미가 되어있었다.

새카맣게 타버린 기둥이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폭삭 무너져내린다.

소환사는 본인이 왜 살아있는지 몰라서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저, 저어..."

"마녀는 여기서 타죽었다."

나는 제법 오래 고민했던 대사를 내뱉었다.

"가고싶은 곳이라도 있나?"

"..."

나는 고개젓는 소환사의 앞에 물약병을 눕혀뒀다.

원래는 희귀 몬스터의 혈액을 채취하거나 할 때 쓰는 것인데, 소독해뒀으니까 괜찮겠지.

망설이며 약병에 들어간 녀석은 죽은 듯 얌전히 누워있다.

'여기서 더 이상 볼일은 없어.'

파앗!

순식간에 거실로 돌아온 나는 헤르반을 불렀다.

"헤르반, 소환해라."

[예!]

다시 헤르반의 숲 속으로 소환된 나는 조심스럽게 약병을 내려놓았다.

희대의 재능을 지닌 소환사라니까, 거둬들여서 나쁠 것은 없을 것이다.

저 조막만한 녀석이 밥을 축내면 얼마나 축내겠는가.

"보살펴줘라. 앞으로 친하게 지내."

"마... 말씀하셨던 그 소환사입니까?"

"그래. 가능하면 교육도 좀 시키고."

내 집에서 햄스터처럼 길러볼까 생각도 해봤지만, 윤리적인 문제는 둘째치고...

미지의 병균이나 중력에 대한 영향 등등. 고려할 문제가 너무 많다.

나는 인간의 몸이 지나치게 섬세하고 연약하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알고 있다.

"의심 없이 받들겠습니다."

"..."

소환사는 무척 혼란스런 눈으로 날 올려봤지만, 이내 고개를 떨구곤 축 늘어졌다.

당장은 회복할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나는 내친김에 피도 한 방울 줬다.

녀석은 굳이 거부하지 않았다.

'또 한 건 했군. 슬슬 운하를 만들어줬던 헬리온 왕국에 가볼까? 아니야. 아직은 좀 이르지.'

거실로 돌아오자, 와이파이를 쓸 수 있게 된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뒤늦게 확인해보자 전혀 의외의 인물에게서 메세지가 도착해 있었다.

"아비가일?"

황금세대의 최선두, 한국 유일의 S급 헌터(수입산)이자 백룡 길드의 주인인 아비가일이 보낸 문자는... 다름아닌 대학교 동창회 초대였다.

참가여부를 조사하는 문자를 본 나는 즉답했다.

"내가 미쳤냐? 거길 가게? 절대 안 가지."

[부]

애초에 이제와서 동창회라니, 시대착오적이다.

한국대학교의 헌터학과는 워낙 명문이니까, 힘 세고 실력있는 동기와 후배들이 많이 모이겠지만...

그래서 더더욱 가기 싫다.

최소한 A랭크 정도는 찍지 않으면 면목이 없다.

그나저나 나 못지않게 바쁘신 몸께서 직접 이런 걸 조사하고 앉았다니.

아무래도 아비가일이 동창회장같은 역할인 것 같다.

주변 사람을 잘 챙기는 성격과는 거리가 멀지만, 그녀의 이름을 빌리면 사람이 구름처럼 모일테니까.

"음?"

메세지를 다시 확인해본 나는 문득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답장을 보냈을 때 떠올랐던 (1)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저쪽에서 정말 빨리도 확인한 것이다.

"성실도 하시지."

주머니에 스마트폰을 쑤셔넣곤 헌터용 훈련장으로 출근했다.

11화. 황금세대

훈련장을 나서자 타이밍 좋게 스마트폰이 울었다.

[밥 ㄱ?]

시간 절약, 에너지 절약의 극치와도 같은 메세지.

나는 이름을 보지도 않고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시현이네.'

이놈은 원래 이랬다.

때마침 밥 시간이라서, 망설임 없이 응답했다.

[유림이 데려가도 되냐?]

[ㅇㅇ]

[좋아.]

후배님, 서유림에게도 연락을 넣으며 식당으로 직행한다.

간만에 비싼 밥을 얻어먹을 수 있는 기회니까 그녀도 끌어들였다.

"어, 유림아. 시현이랑 밥 먹는데 너도 갈래?"

[네, 갈래요.]

식당은 아주 당연하다는 듯 예약이 되어있었다.

작업실에서 막 기어나온 몰골의 시현이 건성으로 손을 흔들며 나를 맞이한다.

"승급 축하한다. 내가 얼른 승급하라니까 승급됐네."

"고마워 죽겠네. 근데 여긴 무슨 가게야?"

"대게."

"대게? 갑자기?"

"회사 직원이 알아서 예약해준 거라서... 대충 먹어."

어지간하면 내가 사려고 했는데... 이건 차마 못 사겠다.

어차피 더럽게 잘 버는 놈이니까 그냥 한 끼 얻어먹어야겠다.

"단검은 괜찮아?"

"진짜 좋아. 근데 이거 이름을 뭘로 짓지?"

"너도 무기에 이름 붙이냐..."

"너는 장인인데 이름도 안 붙여? 구분하는데 불편하지 않아?"

"난 그냥 모델명을 써. 일일이 이름 붙이기엔 너무 많이 만들어서."

녀석에게 받았던 단검을 보여주고 있자 머지않아 서유림이 도착했다.

그녀는 새카만 봉지를 하나 들고왔다.

"안녕하세요 시현 선배. 로완 선배, 이거 받으세요."

"이건 또 뭔데?"

"블루베리에요. 이게 눈에 엄청 좋대요. 집에 가져가서 껍질째로 먹어요."

"유림 씨는 여전하네. 로완이 잘 챙겨주는 거."

"학교에서 신세진 게 있으니까요."

"이미 원금이랑 이자까지 다 갚았겠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예정에도 없던 포식을 즐겼다.

다들 동문이다보니 당연히 동창회 이야기가 나왔는데...

미처 상상도 못했던 증언을 듣게 됐다.

"그래서, 로완이 너는 이번에 동창회 가냐?"

"아니. 내가 돌았냐. 그런 곳에 가게."

"왜요? 선배가 뭐 어때서요!"

"그... 동창회는 돈 자랑하러 온 사람이랑 돈 빌리러 온 사람만 있다고 들었거든."

그런 의미에서 보면 동창회도 나름대로 괜찮은 자리인 셈이다.

나한테는 아니지만.

유림의 반박에 조금 기가 죽어서 대꾸하자 시현이 피식 웃었다.

"그래서 매년 안 왔던 거야? 한국대 헌터학과 동창회는 괜찮아. 사실상 동창회가 아니라 동문회 같은 느낌이니까."

"... 잠깐만, 매년?"

갑자기 이해가 안 돼서 되묻자 두 사람이 나를 빤히 쳐다봤다.

"동창회를 매년 했던 거야?"

"선배, 몰랐어요?"

"나는 이번에 처음 초대받았는데?"

"..."

식탁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시현이 두 눈을 질끈 감으며 물었다.

"동창회장이 누구였지?"

"아비가일 선배님이요."

"역시... 로완아, 나쁜 뜻은 없을 거야."

당연하지.

아비가일 어사일럼은 인간의 마음이 있긴 한지 의심되는 존재다.

"어차피 갈 생각 없었으니까 상관없어."

아무렇지 않은 체 하며 대게에 집중하려는데...

가게 앞에 고급차가 한 대 멈춰섰다.

내가 설마 하고있자 얼마 전에 뉴스에서 봤던 얼굴이 차에서 내린다.

아비가일을 발견한 식당의 사람들은 화들짝 놀라며 웅성거렸다.

"쟤 누가 불렀어?"

"너 보고싶대서 내가 오라고 했는데..."

시현이 내 눈을 피하며 말하자 아비가일이 태연히 걸어와서 합석했다.

누가 봐도 수입산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이국적인 외모.

그래도 불호보다는 호가 압도적으로 많을 것이다.

"오랜만이네."

멍한 느낌의 목소리와 함께 조합이 완성됐다.

한국대학교 헌터학과 황금세대의 성적 상위권 3인방.

조합의 효과는 내 정신이 나가버리는 것이다.

아비가일은 늘 그랬듯 다짜고짜 훅 치고 들어왔다.

"로완이는 왜 동창회 안 와?"

이제와서 생각난 건데...

요즘 나와 소통하는 소인족들은 한국어를 참 잘 한다.

몇몇 녀석들은 아비가일보다 더 잘 할 것이다.

나는 속에서 말이 막 끓어오르는 것을 참으며 간신히 몇 마디 골라서 내뱉었다.

"우리 학과, 동창회를 매년 했다면서?"

"그래."

"네가 처음부터 쭉 동창회장이었던 거지?"

"맞아."

"근데 왜 나는 이번 년도에 처음 초대한 거야?"

"로완이는 약하잖아."

아비가일은 안색 하나 바꾸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

"약해도 괜찮은데, 그걸 괜히 신경쓰니까 안 올 것 같았어. 맞다, 눈은 괜찮지?"

숨소리 하나 없는 테이블 위에서 그녀 혼자만 태연히 떠들어댄다.

"뉴스 봤어. 이번에 B랭크 승급했다면서? 약하고 눈도 안 보이는데 대단하네. 그치만 나한테 말했다면 진작 고쳐줬을텐데..."

나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가게 밖으로 뛰쳐나가자 애꿎은 서유림이 황급히 나를 쫓아왔다.

"잠깐만요 선배! 블루베리 놔두고 갔어요!"

"아, 미안... 기껏 선물해줬는데."

"아비가일 선배가 원래 저런 사람이었어요? 좀 4차원이란 소리는 들었지만 저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원래 저래."

지금쯤 시현이는 아비가일이 뭘 잘못했는지 열심히 설명해주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늘 그랬듯 실패하겠지.

항상 그랬다.

아비가일 어사일럼.

이국적이면서도 빼어난 외모와 천연덕스러운 성격 덕분에 학창시절부터 만인의 관심을 독차지했다.

나와 시현이도 처음에는 열심히 챙겨줬다.

그러나 한국 생활에 익숙해진 아비가일은 이내 쭉쭉 치고 올라와서, 어느덧 1등을 놓치지 않게 됐다.

졸업 즈음에는 다들 그녀의 성격에 질려버려서 주변에 남아있는 사람이 없게 됐다.

나는 서유림과 함께 적당한 카페에 들어가서 못다한 이야기를 했다.

그녀는 내 의견을 듣지도 않고 멋대로 주문했다.

"블루베리 스무디 2개요."

"야."

"블루베리가 눈에 진짜 좋대요."

"알겠어..."

"그래서, 어떻게 된 거에요?"

정말 어이가 없었던 것은, 아비가일이 무슨 외국 재벌집 딸내미였다는 것이다.

황금세대의 필두로 졸업한 그녀는 친가의 돈을 써서 곧장 헌터 길드를 설립했다.

그것이 현재 한국 최강인 백룡 길드.

나도 그녀에게 영입을 제안받았다.

"뭐라구요? 선배, 백룡 길드 영입 받았어요? 근데 왜 안 들어가셨어요?"

"금방 망할 줄 알았거든."

아까 봤던 것처럼, 아비가일은 현실감각이 거의 없다.

저런 유형은 의외로 학교나 직장에서 곧잘 찾아볼 수 있다.

흔히 말하는... 사회화가 덜 된 부류라고 해야하나.

그녀는 그 정도가 좀 심하다.

"근데 실력 하나로 다 발라버리더라."

"그야 한국 유일의 S급 헌터니까요..."

띠링!

스마트폰이 울어서 대충 확인해보자 아비가일이 메세지를 보냈다.

[미안해.]

세상에, 이렇게 빨리 사과하다니.

장족의 발전이군.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치를 떨었다.

"애초에 아비가일은 보통 사람들과 감성이 좀 많이 달라. 좀 안 좋은 쪽으로 어린애같다고 해야하나?"

"감이 잘 안 오는데요..."

"애들은 장난감에 금방 질려버리잖아. 그거랑 똑같아."

나는 지금도 그 날의 결정을 후회하진 않는다.

만약 내가 백룡 길드의 설립 멤버가 되어 아비가일의 뒤치다꺼리를 했다면, 진작 속 터져서 죽었을 것이다.

어찌어찌 운 좋게 살아남아도 금방 그녀의 관심을 잃어버렸으리라.

서유림과 수다를 떨던 나는 너무 늦기 전에 집으로 돌아왔다.

샤워를 마치고 머리를 말리는데, 헤르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로완이시여! 헬리온 왕국행을 위한 준비가 끝났습니다!]

"벌써? 뭐, 좋아."

내가 헬리온 왕국에 운하를 만들어준지, 그쪽 시간으로 2개월 정도 됐을까?

슬슬 운하를 이용한 사업이 궤도에 올랐을 것이다.

나는 점검차 몰래 한 번 가보기로 했다.

운하란 것이 유지보수가 많이 필요하다고 들었는데, 제대로 운영되고 있을지 걱정이다.

[로완이씨여! 이쪼깁니다!]

소인족들의 어눌하면서도 귀여운 말투를 듣자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조금 전에 좀 극단적인 사례를 상대하고 와서 그런지, 이 하찮은 녀석들에게 뭐라도 해주고 싶다.

'역시 니들이 최고다.'

파아앗!

포탈을 통과하자 다섯 명의 소환사들이 넙죽 엎드려 있었다.

헤르반의 지인이나 부하들 중, 헬리온 왕국의 근처에 살고있던 이들이라는데...

이번에는 눈높이가 눈에 띄게 낮다.

"로완이시여! 이토록 작은 몸으로 소환해서 무척 재성합니다! 소인들의 역량이 보잘 것 없어서..."

"오히려 좋다. 헬리온 왕국으로 안내해라."

"옛! 그럼 배를 타고 이동하시겠습니까?"

"그래."

이번에는 소인족들보다 조금 큰 크기로 소환되었는데, 무려 다섯 명이나 달라붙은 건가.

확실히 지난번의 마을에서 거둬들였던 소환사가 별종이긴 하다.

녀석은 헤르반의 숲 속에서 편히 요양중이라고 한다.

"이쪼깁니다!"

후드를 덮어쓴 채, 커다란 배에 탑승하자 배가 지체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실 내 기준으론 아주 크지 않지만 다른 배들에 비하면 체급이 월등하다.

나는 바다 구경을 하며 소환사들과 공용어로 대화를 나눴다.

"사람들이 헬리온 왕국의 운하를 많이 찾나?"

"그렇습니다! 모두들 운하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로완 운하를 이용하지 않으면 항해가 최소 3개월은 늘어나니까요. 통행료가 비싸지만 시간과 목숨보다 비싸진 않습니다."

"로완 운하라..."

아무래도 운하를 지키기 위해서 내 이름을 팔아먹은 모양이다.

내가 비석을 세우라고 했으니까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다.

'그나저나 이렇게 보니까 보통 사람들과 별다를 게 없네. 조금 더 하찮을뿐...'

나는 문득 아비가일을 떠올리곤 살짝 불쾌해졌다.

혹시 그녀의 눈에도 세상이 이렇게 보이는 것일까?

아비가일이 여러모로 거대한 존재란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찝찝한 감상과는 별개로, 배는 바람과 파도를 타고 시원하게 나아갔다.

흔들림이 무척 심했지만 미리 멀미약을 먹고 와서 큰 탈은 없었다.

애초에 이 몸이 어지러움을 느낄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슬슬 보일 겁니다."

"흐음."

이윽고 수평선 너머에서 모래로 가득한 지평선이 나타났다.

선원들은 무척 분주하게 움직이며, 운하에 들어갈 준비를 시작했다.

운하의 양쪽 끝에 설치된 거대한 비석이 표지판 역할을 하고 있다.

[로완 운하.

이 운하를 헛되이 욕심내는 이들은 척안의 외신 로완의 징벌을 받게 될 것이다.]

"흐흠."

조금 뿌듯한 기분으로 즐겁게 기다리자...

마침내 배가 운하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만약 길이 막히면 어떻게 하나 싶었지만, 아직 이 세계의 배들이 그 정도로 크진 않다.

이 정도면 인력으로 충분히 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곧 수문이다!"

"정지! 정지하시오!"

"엇차!!"

선원들과 운하의 직원들이 합심해서 늦지 않게 배를 세웠다.

운하의 한복판에 버텨선 수문 위에서 책임자로 보이는 직원이 외쳤다.

"이곳은 척안의 외신 로완께서 헬리온에게 선물해주신 운하다! 통행료를 납부하랏!"

"여, 여기 있습니다."

선원이 돈주머니를 바치자 책임자가 장대로 그것을 회수했다.

내가 아주 흐뭇하게 웃고있는데...

액수를 모두 확인하고도, 아직 수문은 열릴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좀 모자르군."

"통행료는 220길데 아니었습니까?"

"너희들의 성의가 모자라다는 뜻이다! 에이잉..."

'성의?'

내가 어이없어 하고있자 선장과 선원들이 쑥덕거리더니, 담배나 술같은 기호품을 갖다바쳤다.

헬리온 놈들은 통행료 외에도 따로 뇌물을 받아먹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여기까진 아슬아슬하게 괜찮다.

21세기 지구에서도 후진국으로 분류되는 몇몇 국가의 항구들은 여전히 뇌물을 요구한다고 들었다.

후진국이 괜히 후진국이 아닌 것 같지만...

사람이 하는 일에서 이런 건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그런데, 뇌물을 챙긴 놈들은 대담하게도 갑판 위로 내려와서 선원들을 주욱 세워놓는 것이 아닌가.

"다음은 여자다! 배에 여자가 있으면 어서 나와라!"

"여자가 무슨 상관이요?"

"배에 여자가 있으면 부정타는 거 몰라? 운하에 해를 끼치면 안 되니 우리가 관리해주지."

"..."

"어서 나와라! 위대하신 로완 님의 이름으로 명령한다!"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앞으로 나섰다.

소인족들을 애호할 생각으로 가득했던 내 마음이 어느새 학대로 기울어버렸다.

12화. 제국의 탄생

콰직!

"데보겍!"

요란하게 날뛰던 운하의 직원이 순식간에 뭉개졌다.

동행하고 있던 소환사들은 은근슬쩍 내게서 떨어진 상태였다.

자고로 화난 외신은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 현명한 선택.

역시 소환사들 정도 되면 똑똑하다.

반면 헬리온의 소인족들이 난데없는 폭력에 미쳐 날뛰었다.

"끼에에엑! 사, 살인이다!"

"경비대!"

"신의 선택을 받은 헬리온인에게 손을 대다니! 네가 그러고도 무사할 것... 갸악!"

콰지직!

다행히 지금의 사이즈로도 염동력은 제대로 발휘됐다.

내 경험상, 아무리 뛰어난 소인족들이라도 외신에게는 대항하기 힘든 것 같았는데...

과연 이 사이즈로는 어떨까.

나는 갑판에서 뛰어내린 다음 왕궁으로 직행했다.

얌전히 뇌물이나 좀 챙겼다면 모르겠지만...

내 이름을 멋대로 팔아먹었으니,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마... 막아! 에잇, 소환사들은 어디에 있지?"

"병원에서 찾는 게 더 빠를 것 같은데요..."

헬리온의 소환사들은 지난번에 상당히 무리를 했던지라 2개월이 지난 지금도 일상생활로 복귀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뻐엉!

뒤늦게 달려온 경비병들이 염동력 한 방에 무더기로 날아가버렸다.

지구에선 사람을 염동력으로 뭉개버리거나, 이렇게 가볍게 휙휙 던져대는 것은 꿈도 못 꿨다.

나는 소환을 당했을 때 오히려 더 강해지는 기분이다.

"네 이놈! 헬리온은 척안의 외신 로완의 보살핌을 받는... 끄엑!"

콰직!

가급적 봐주곤 있지만, 내 이름이 나올 때마다 확실하게 대응하고 있다.

결국 상황은 소환사들이 거의 기어나오다시피 해서야 비로소 진정됐다.

녀석들은 그래도 안목이 있는 듯, 나를 보자마자 넙죽 엎드렸다.

다른 소인족들이 그것을 보곤 크게 당황했다.

"아, 아니? 무슨 짓을..."

"로완이시여! 이 미천한 것들의 무례를 용서해주십시오!"

"로, 로완? 아니. 로완님께선 좀 더 크셨는데..."

"우둔한 것들! 얼른 닥치고 엎드려라!"

나를 막아서던 소인족들과 멀찍이서 구경하던 소인족들이 다급히 몸을 낮췄다.

왕궁으로 피신해있던 녀석들도 맨발로 뛰어나와서 무릎을 꿇는다.

"당신의 종복들이 도차캤습니다! 로완이씨여, 어찌하여 이리 노여워하씹니까!"

이번에는 통역을 거치지 않고 직접 읍소하는 국왕.

나는 최대한 감정을 억누르며 답했다.

척안의 외신은 동요하지 않는다.

"네놈들이 나의 마음을 도려냈다."

"예엣?!"

"내가 너희를 불쌍히여겨서 친히 운하를 만들어줬거늘, 네놈들은 내 이름을 팔아서 사리사욕을 채워?"

말하다보니까 속에서 좀 끓어오르는 것이 있었다.

내가 이 녀석들에게 해준 게 얼만데.

기왕 하는 김에 제대로 만들어주겠다고 예행연습까지 했던 것이 무색하게 느껴진다.

"저 운하를 다시 메워주랴?"

"죄, 죄송합니다 외씬이씨여! 제발 노여움을 푸러주시옵쏘서!"

그새 운하의 통행료 덕분에 살만해졌는지, 주민들의 옷차림과 시장의 물건들부터 바뀌었다.

내가 그대로 서 있자, 운하의 직원들이 우르르 달려왔다.

뒤늦게 상황파악이 된 소인족들이 눈을 질끈 감으며 이마를 땅에 찧었다.

"하찮은 이유로 위대한 이름을 더럽힌 점,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심지어 녀석들의 수법은 너무 조잡했다.

현대 지구에서도 후진국 세관원들이 뇌물을 요구한다곤 했지만...

그쪽은 적어도 부두에 정박해있을 때 뜯는다.

배가 운하 한복판에 떡하니 버텨서있는데 거기서 뇌물을 받아먹진 않는 것이다.

안 그래도 급조된 운하라서 수문이 중앙의 1개뿐인데다, 그마저도 양쪽을 통과하는 선박들이 함께 쓴다.

저 따위로 관리를 하면 금방 사고가 날 것이다.

"그 전에 내가 메워주마!"

앞뒤 다 잘라먹고 이야기했지만 효과는 충분했다.

"구국의 외신이시여! 그것만큼은 제발 용서해주십시오!"

"관련자들의 목을 베고,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또한 해당 선박의 통행료는 평생동안 무료로..."

내가 인상을 찌푸리고있자 바로바로 개선책과 보상책이 나온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건 저놈들이지, 내가 아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녀석들이 초대형의 건설 부지로 나를 안내하며 말했다.

"저곳을 보십시오! 오직 로완님을 위한 신전 건물 부지입니다!"

"... 신전?"

"그렇습니다! 헬리온 역사상... 아니, 이 대륙의 역사상 최대규모의 신전이 될 것입니닷!"

아무래도 내게 빚진 게 있으니 공물 겸 준비한 것 같은데...

솔직히 꽤 마음에 든다.

나는 마음이 급격히 약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차피 당사자는 뭉개버렸으니까 상관없겠지.

"좋다. 시간이 좀 걸려도 상관없으니 서둘러서 일을 그르치지 않도록 해라. 어차피 내겐 찰나에 불과하다."

"예, 로완이시여!"

"그리고... 소환사들은 내 앞으로 나오라."

"예엣!"

조금 전까지 입원해있었다는 것이 사실인 듯, 핼쑥한 얼굴의 마법사들.

개중 몇몇은 진짜 숨 넘어가기 직전처럼 보였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손가락을 그었다.

지금은 몸집이 작아서 불로장생의 효과까진 없겠지만, 건강 개선 정도는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소환사들은 내 영향력을 발휘하게 만들어주는 종복들이다.

그러니 이 정도는 해줘도 되겠지.

"너희는 내 피로 살아날지어다."

"아아, 로완이시여..."

"끝없는 자비에 감사드립니다."

녀석들은 불안해하면서도 넙죽 핏물을 받아먹었다.

살아날 수 있다니까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다.

'이쯤하면 됐겠지.'

만약 신전 지어준다고 안 했으면 그냥 엎어버렸을지도 모르지만...

적당히 마무리한 다음, 소환사들에게 인사하고 귀환했다.

"내 눈이 너희를 지켜볼 것이다."

"베풀어주신 자비가 헛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로완 만쎄!!"

집으로 돌아와서 주방을 둘러보자, 서유림이 선물해준 블루베리가 보였다.

선물받았는데 안 먹기도 그래서 먹어보자 실로 기묘한 감상이었다.

"이건 과일의 맛이 아닌데?"

달긴 커녕, 그냥 조금 새콤한 정도인데 아직 멸종이 안 됐다니.

정말 어지간히도 몸에 좋은 모양이다.

띠링!

블루베리를 입에 털어넣으며 스마트폰을 확인한 나는 작게 혀를 찼다.

얼마전에 승급을 해서 그런지, 벌써 다음 당직 근무가 잡혔다.

이번 근무지는 늘 가던 지구대가 아니라 헌터 협회 본부다.

나도 이제 B급 헌터라서 제대로 1인분 취급을 해주는 것이다.

남은 블루베리를 숙제처럼 해치우며 헤르반과 수다를 떨었다.

"헤르반?"

[예! 주군! 헬리온에서의 활약을 똑똑히 전해들었습니다. 크나큰 자비에 거듭 경탄하게 됩니다.]

"지난번에 전설의 세 모험가 말이다, 그놈들이 무슨 외신을 사냥했던 거지?"

놈들은 자칭 외신 사냥꾼이라고 했다.

내게 겁도 없이 덤볐던 것을 감안하면, 실제로 승리했던 경험이 있을 확률이 높다.

하지만 이번에 직접 체험해보니 대부분의 소인족들은 외신을 상대하기엔 너무 약했다.

[그것이... 사실 놈들이 사냥했던 건 외신이라고 부르기도 뭣한 상대였을 겁니다.]

"그래?"

[예. 외신의 피에서 탄생한 하위 종족이라든가... 소환 의식을 막아놓곤 외신에게 이겼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으음, 알겠다."

역시 외신은 외신으로 상대하는 것이 기본인 건가.

궁금증을 해결한 나는 물을 마시곤 욕실로 향했다.

"좀 일찍 잘까."

오랜만에 아비가일을 만났더니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너무 가까이 가면 이쪽이 녹아버리는, 태양같은 여자다.

직시하면 눈이 멀어버린다.

적정거리를 유지하며, 있는둥 없는둥 사는 것이 최고다.

"후우. 오늘도 열심히 살았다."

깔끔하게 몸을 씻고 잠자리에 든지 얼마나 됐을까.

제법 기분좋게 숙면중이던 나는 난데없는 기도소리에 잠을 깼다.

심상장벽을 제대로 익힌 뒤로는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별난 일이다.

[로완이시여! 척안의 외신이씨여! 부디 구원하소서!!]

[제발 끝내주십시오. 저 폭군의 통치를...]

[세계의 수호자여! 지금이야말로 수호하십시오!]

[무엇이든 바치겠습니다. 제발, 저 외신을...]

"뭐, 뭐야?"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울어대는 목소리들.

심지어 한둘이 아니다.

"염병, 모처럼 잘 자고 있었는데!"

투덜거리면서도 몸이 알아서 장비를 걸쳤다.

혹시나 싶어서 확인해보니 헤르반 쪽은 아니었다.

그쪽은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완전 신규 거래처인가? 소환사 물량은 많은 것 같은데... 한 번 보자고."

파아앗!

포탈을 통과하자, 외신이 몸부림치고 있었다.

거대한 뱀의 형상을 지닌 외신은 명백히 나보다 거대했다.

아마 저쪽 소환사들의 역량이 더 뛰어난 것이리라.

"쉬이잇!!"

삼각형의 머리가 위협적인 소리를 내며 흔들거렸다.

세로로 길게 찢어진 동공이 나를 노려본다.

거대한 백사의 주변에는 수도 없는 소인족들이 쓰러져 있었으나...

정작 녀석에겐 상처가 거의 없었다.

"수호자께서 와주셨다!"

"로완이시여! 저 외신을 물리쳐주십시오!"

"저희는 폭군에 맞서 일어났지만, 저 외신 때문에 대업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나마 화려한 복장의 사내가 내게 외쳤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무슨 반란군인 것 같다.

'물량이 많군.'

이 동네는 왠지 모르게 스케일이 크다.

나도 평소보다 좀 더 크게 소환됐는데, 무수한 병사들이 대지를 메우고 있는 것이다.

소환사들은 손에 손을 잡고 나를 올려다봤다.

"콜렌과 헬리온의 구세주! 세계의 수호자! 불패의 전사신! 마법군주 헤르반의 충성을 얻은, 살아움직이는 군단이시여! 메시의 이름으로 간청합니다!"

이놈들, 공부를 아주 열심히 했군.

나는 입꼬리를 내리기 위해서 무딘 애를 써야 했다.

이 정도면 제법 성의가 있는 녀석들이다.

"대신, 너희들의 소중한 것을 받아가겠다."

"우와아아!"

"바라던 바입니다!"

자세를 잡곤 뱀의 외신을 노려보자 헤르반이 경고했다.

[주군, 저놈은 뱀들의 어머니 휘하의 하급 외신입니다!]

'뱀들의 어머니?'

분명, 아주 강력한 외신이라고 했지.

하지만 본인도 아니고 부하라면 큰 문제는 없다.

이제와서 물러나는 것도 창피하다.

"물러가라!"

"쉬이잇!"

녀석은 더 이상 기다리지 않고 나를 공격해왔다.

날카로운 삼각형의 머리가 순식간에 이쪽으로 쏘아진다.

지난번에 상대했던 거신 아토카보다 훨씬 빠르고 능숙한 동작이었다.

티잉!

흑룡의 비늘단검으로 녀석의 머리를 견제하자, 녹색 독물이 줄줄 흐르는 독니가 보였다.

입가로 자연스레 미소가 번져나왔다.

'빠르고 강하군. 하지만 저런 상대는 익숙해.'

녀석은 묘하게 움직임이 직선적이고 조잡한 감이 있었다.

아마 타고난 포식자라서, 훈련을 제대로 쌓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수도없이 상대해봤던 몬스터 그 자체다.

슉, 슈슉!

부지런히 스웨이를 하던 녀석이었지만, 나는 공격의 타이밍을 놓치지 않았다.

어차피 이빨만 조심하면 별 거 없다.

염동력으로 장애물을 설치하고, 허리춤의 단검을 쏟아냈다.

'가라!'

파바밧!

대부분의 단검들은 놈의 비늘에 튕겨나갔지만, 흑룡 단검은 단단한 비늘을 손쉽게 갈라버렸다.

큰 상처를 입은 녀석이 발작적으로 달려든다.

"키익!"

날카로운 독니는 내 염동력에 가로막혔다.

왼팔을 내주는 체 했던 나는 그대로 놈의 머리에 단검을 박아버렸다.

놈의 몸이 연기처럼 변해서 사라지자, 발밑의 소인족들이 목이 터져라 환호성을 내질렀다.

"우와아아앗!"

"로완 만세! 로완 만쎄!"

"메시! 메시! 메시!"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연호하는 녀석들을 보니 미안하면서도 뿌듯하다.

그런데, 이번 외신은 아토카처럼 깔끔하게 사라지지 않고 바닥에 뭔가를 남겼다.

소환사들이 황급히 그것을 수습하여 내게 바쳤다.

"위대한 전사를 위한 전리품이다! 모두 찬미하라!"

'헤르반, 이게 뭐지?'

[저쪽 소환사가 사용한 촉매같습니다. 분명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겠죠. 챙겨둬서 나쁠 것은 없습니다.]

'의외의 전리품이군.'

자세히 살펴보자, 독물이 줄줄 흐르는 독니였다.

거의 내 주먹 크기 정도는 된다.

염동력으로 그것을 챙기곤 상대 진영을 살펴봤다.

뱀의 뒤에는 제법 커다란 성이 버텨서 있었는데, 그래봤자 내게는 모래성이나 마찬가지다.

내가 성벽 위의 녀석들을 내려다보자...

이윽고 대장으로 보이는 녀석이 나타났다.

화려한 의복의 사내는 웬 여자와 아이를 데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자비를 구하는 것인가 싶었는데, 들어보니 그게 아니었다.

"역적 놈들의 수괴는 들어라! 여기 네 처자식이 있다! 애꿎은 목숨을 지키고 싶다면 어서 군을 물려라! 지금이라면 모두 없던 일로 해주겠다! 이것은 황제 폐하의 명이다!"

"... 뭐야?"

지금 인질로 반란군 지도자를 설득하는 건가?

나는 녀석이 그걸 믿을만큼 멍청하진 않길 바라며, 흥미로운 기분으로 지켜봤다.

아까 내게 말을 걸었던 반란군 대장이 온몸을 부르르 떨더니...

이내 목소리를 높여서 대꾸했다.

"처와 자의 목숨이 아까워 대업을 그르칠쏘냐! 처는 새로 들이면 되고, 자는 또 낳으면 된다! 허튼 수작말고 천하만민들의 분노를 마주하라!"

"와아아아! 역시 새로운 황제는 여량밖에 없다!"

"로완과 여량이여, 제국을 이끄소서!"

"크윽, 이 놈이!"

성의 수비대장이 지체없이 칼을 뽑아들었으나...

놈의 뒤에 서 있던 부하들이 놈을 푹 찔러버렸다.

그리곤 성벽 아래로 시체를 내던지더니, 성문을 활짝 개방했다.

"모두 들어가라! 천하는 우리의 것이다!"

"큭, 새장가를 갈 수 있었는데... 아깝군."

"..."

나는 반군 대장 여량의 말을 못 들은 체 하며 반란이 성공하는 것을 구경했다.

오늘, 하나의 제국이 멸망하고 또한 새로 탄생했다.

13화. 어사일럼

시현 공방의 문은 이른 아침부터 열려있었다.

원래 손님을 받는 시간은 아니지만, 시현이는 워낙 일찍부터 일하고 있는 것이다.

덕분에 친구인 나도 혜택을 좀 받을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어서오십시오. 안쪽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언제 봐도 직원이 참 깍듯하다.

나는 하품을 하며 시현의 작업실로 들어갔다.

간밤의 수면을 방해받아버렸지만, 그만한 성과는 있었다.

건성으로 인사를 건넨 다음. 독물이 뚝뚝 흐르는 뱀 이빨을 시현의 앞에 내려놓았다.

두꺼운 장갑을 끼고 있던 그가 무척 반가우면서도 묘하게 찝찝한 얼굴을 보였다.

"이건 또 못 보던 재료네? 어디서 얻은 거야?"

"운이 좋았어."

유리병에서 조심스레 독니를 꺼내던 시현은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쇠로 된 집게가 독물에 닿자 순식간에 녹아버렸다.

염동력으로 그걸 옮겨주자, 녀석이 진지한 눈으로 물었다.

"로완아... 하나만 똑바로 대답해."

"뭔데."

"이거 불법적인 일로 얻은 건 아니지?"

"아냐. 그건 확실해."

소환용 포탈은 내 집의 침실에 열렸으니까, 비상상황으로 판단하고 혼자서 공략해버려도 불법은 아니다.

시현이 걱정하는 것은 도난품일 경우니까 괜찮겠지.

내 눈을 똑바로 보던 시현이 한시름 놓으며 말했다.

"그럼 세금 신고는 똑바로 해라. 나중에 큰일난다."

"... 그거 어떻게 해야하는데?"

"됐어. 내가 직원에게 말해둘게. 재료 감정부터 한다."

시현은 능숙하게 보호장비를 착용하곤 공구를 잡았다.

보안경을 쓴 두 눈이 독니에 못박혀있지만, 마스크 속의 입은 멈추지 않는다.

나는 멀찍이 떨어진 채 대화를 나눴다.

"근데 로완이 너 진짜 눈 안 고칠 거야? 지난번에 흑사자 길드에서도 오퍼 들어왔다면서?"

"어, 일상생활에는 지장이 없어."

"넌 일상생활만 하는 직업이 아니잖아."

"됐어. 괜히 손 댔다가 악화되면 어떻게 해."

사실 좀 답답하고 불편한 감이 없진 않다.

수술을 마친 뒤로, 그나마 멀쩡한 왼쪽도 시력이 꽤 떨어졌다니까.

그러나 나는 섣불리 수술을 시도할 수가 없었다.

지금은 척안의 외신 로완으로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혹시라도 눈을 고쳤다가 소환이 불가능해지면 어떻게 해?'

잘 생각해보면... 소인족들은 처음부터 나를 한쪽 눈의 외신이라고 불렀다.

내가 눈을 잃은 것과, 그 뒤로 소환당하게 된 것이 완전 무관하진 않을 것이다.

"헌터 능력으로 치료받는 것도, 다른 사람의 기회를 뺏는 것 같아서 좀 그렇고."

"너도 참 답답하다. 우왓!"

작게 투덜거리던 시현이 탄성을 내뱉었다.

감정 결과가 대충 나온 것 같다.

"이거 진짜 물건인데? 지난번에 가져왔던 흑룡의 비늘과 뼈보다 훨씬 단단해."

"그 정도야?"

"게다가 안에서 독이 계속 나와. 느리지만 무한하게 생성되는 것 같아."

치이익!

시현은 유리로 된 실험기구 안에서 매캐한 연기가 뿜어져나오는 것을 보여줬다.

채취한 독을 고기나 철물에 떨어뜨려봤는데...

둘 다 흔적도 없이 녹아버렸다.

'저거 맞았으면 큰일났겠네.'

이제 보니 내가 염동력자라서 상성이 무척 좋았다.

잔뜩 흥분한 시현이 계속해서 떠들어댔다.

"대상에게 적합한 독을 자동적으로 적용하는 건가? 산성이나 출혈독, 신경독의 성질을 다 가지고 있어!"

"척 봐도 대단해보이네."

"대단하지. 생물독이자 무기물 독인 셈이니까. 이거 도대체 어디서 구한 거야? 혹시 더 구할 수는 없어?"

"그건 힘들걸."

외신의 소환 촉매라서 그런지, 헌터들 사이에서 최고로 쳐주는 흑룡 사체보다도 평이 좋다.

"강도도 상당해서 무기로 쓰기 적합해. 이번에도 단검으로 만들어줄까?"

"그래."

"좋아. 풀탱 나이프로 만들어줄게. 그런데, 무리한 가공은 재료를 손상시킬 가능성이 높아. 그러니까 날은 제대로 못 세워. 찌르기용으로만 써."

"알았어. 세부사항은 모두 맡길게."

시현이는 최고의 전문가니까 저 녀석 말을 듣는 게 맞다.

어차피 독만 제대로 주입할 수 있으면 일격필살의 무기가 되겠지.

내가 자리를 떠나려 하자 시현이 다급히 말했다.

"그 뒤로 아비가일이랑 이야기 했어?"

"아니."

"그... 나쁜 뜻은 없었던 거 알지?"

"시현이 너도 알잖아. 나쁜 뜻이 없다고 다 용서가 되는 건 아니야."

아비가일은 태양같은 사람이다.

그리고 내 눈은 강한 빛에 취약해졌다.

이것도 수술의 후유증이다.

솔직히 그녀와는 더 이상 엮이고 싶지 않다는 것이 본심이다.

학창생활 4년 동안 엮였으면 충분하지 않은가.

시현은 내 눈을 슬쩍 피하며 내뱉었다.

"그래... 미안하다. 쓸데없는 소리를 해버렸네."

"넌 대게 사줬으니까 용서해준다."

"거 참 고맙네. 조심해서 가라."

"이번 작품도 기대할게."

시현과 헤어져서 집으로 돌아오자 텅 빈 거실이 나를 맞이했다.

TV를 켜서 비어버린 사운드를 채우는데, 굉장히 신경쓰이는 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흑사자 길드의 회장이란 양반이 사뭇 자랑스러게 웃으며 떠들어대는 중이다.

[흑사자 길드는 임로완 씨에게 특별채용을 제안했지만, 아쉽게도 본인에게 거절당했습니다.]

[특별채용이라. 단순한 보상 개념이었나요?]

[아닙니다. 임로완 씨처럼 책임감과 용기를 갖춘 분이라면 분명 자사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하여...]

잘도 지껄이는군.

방송을 지켜보던 나는 속이 뒤틀리는 것을 느꼈다.

처음부터 홍보목적일 것은 예상했지만, 막상 직접 보게 되니까 불쾌감이 장난 아니다.

원래 나는 들어가지도 못할 수준의 길드라고 자랑하는 격이다.

내가 TV를 꺼버리자 헤르반이 조심스럽게 나를 찾았다.

[주인이시여! 잠시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뭐지?"

[로완님을 따라서 한쪽 눈을 도려내고 싶어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만약 허락하신다면 저도...]

"뭣? 지금 당장 소환해!"

이건 또 무슨 헛소리란 말인가.

진심으로 기겁한 나는 서둘러 장비를 착용하곤 헤르반의 숲으로 향했다.

한쪽 손에 단검을 든 추종자들이 나를 열렬히 환영했다.

"세계의 수호자시여! 저희들의 공물을 받으소서!"

"저희도 한쪽 눈을 도려내고 로완님께 더욱 가까워지겠습니닷!"

"하지마!"

좋아하는 존재를 닮고싶은 것이야 그렇다쳐도 방법이 너무 극단적이다.

이참에 확실히 말해둬야겠다.

나는 목을 가다듬으며, 거울 앞에서 연습했던 무서운 표정을 사용했다.

"나는 스스로 눈을 버린 적이 없다! 이 눈은 전투에서 잃은 것이다!"

"아앗..."

"만약 자해 따위로 영광스런 상처를 모독하는 놈이 있다면, 영원토록 나의 분노와 저주를 받게 될 것이다!"

"요, 용서해주십시오! 로완이시여!"

소인족들은 들고있던 단검을 떨어뜨리며 몸을 숙였다.

하여간 이 녀석들 때문에 거짓말만 늘고있다.

헤르반이 몸을 떨며 이야기를 정리했다.

"그렇다면, 전투에서 용맹히 싸우다가 한쪽 눈을 잃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헌사가 되겠군요."

"... 그래. 헛되이 흉내낼 필요없다."

내 말이 끝나자마자 소인족들이 또다시 소란을 떨었다.

"좋아! 지금 당장 전쟁합시다 전쟁!"

"전쟁? 누구랑 하지?"

"아무나 상관없어! 존귀하신 분께 피와 영광을!"

"하지마라..."

내가 녀석들을 겨우 진정시킬 즈음.

멀찍이서 못 보던 소인족 하나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보통 소인족들보다 옷도 잘 입은데다, 나름대로 귀여운 외모다.

"저 녀석은 뭐지?"

"지난번에 로완님께서 맡겨주신 마녀입니다."

"아, 몰라봤군."

그 때는 얼굴이 진흙투성이라서 제대로 못 봤다.

헤르반이 목소리를 살짝 낮춰서 물었다.

"제대로 신도 교육을 해볼까요?"

"됐다. 믿고 싶으면 믿겠지."

"주인님, 어찌하여 그렇게 관대하십니까..."

"헤르반. 내가 너의 신앙을 구걸한 적 있더냐?"

일부러 말을 좀 세게 하자 헤르반이 곧바로 넙죽 엎드렸다.

"아닙니다! 오직 제 의지로 당신을 따르고 있습니다."

"너는 그리하여 나를 미소짓게 했다."

소인족들이라고 다 같은 소인족들이 아니다.

헤르반을 비롯한 소환사들은 특별 관리 대상이다.

강력한 외신들은 소환사들의 도움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강림할 수 있다고도 들었지만...

내게 그런 능력따윈 없다.

그러니 소환사들의 충성을 얻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소환사들을 억지로 따르게 해봤자 얼마나 가겠어?'

소란을 대충 수습한 나는 미련없이 귀환하기로 했다.

안 그래도 수면시간이 모자라서 피곤한데다...

나중에 당직근무까지 있어서, 지금 안 자면 정말 큰일난다.

추종자들에게 인사를 하고 몸을 돌리자, 멀찍이서 아까 그 녀석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덕분에 흐뭇한 웃음을 머금은 채 돌아갈 수 있었다.

"후, 식겁했네. 얼른 잘까."

알람을 맞춘 다음 몸을 씻고 눈을 붙였다.

한동안 푹 자던 나는 알람이 울리기 직전, 완벽한 타이밍에 깨어났다.

부활 성공.

느긋하게 배를 채우고, 몸을 씻은 다음 장비를 걸치며 현관을 나섰다.

오늘의 당직 근무지는 헌터 협회 본부.

근무자 자체가 워낙 많은 곳이라서 딱히 놀랍진 않다.

'직접 가보는 건 몇개월만인가...'

헌터 협회 본부에서의 당직 근무는 기동 타격대라는 느낌이다.

정말 심각한 상황이 벌어지면 즉시 출동해서 대응하는 역할.

하지만 그런 상황이 자주 있진 않다.

웬만하면 폰질이나 해도 될 것이다.

언제나 사람이 많은 본부 건물에 도착한 나는 어렵지 않게 당직실을 찾았다.

그대로 들어가려는데 익숙한 문양을 지닌 헌터들이 복도에서 일제히 나를 돌아봤다.

'저건...'

하얀색 용 문양이 근사하게 데포르메된 길드 패치.

나는 백룡 길드원들을 보자마자 몸을 굳혔다.

그들의 시선에선 이유모를 원망과 시기심이 느껴졌다.

"아, 왔네."

안쪽에서 튀어나온 목소리는 늘 그랬듯 몽롱하다.

아비가일 어사일럼은 반갑게 손을 흔들며 나를 재촉했다.

마음 같아선 그냥 몸을 돌려서 나가고 싶지만, 그랬다간 근무지 이탈이 되어버린다.

'아비가일의 짓이었나.'

당직 근무표를 조작하는 것 정도야 그녀에겐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불안감을 느끼면서도, 마지못해 당직실로 들어가자 아비가일 혼자뿐이었다.

다른 길드원들은 당직실에 들어오지도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아비가일은 아주 희미하게 웃으며 길드원들을 돌아봤다.

"너희는 가봐."

"회장님, 다시 한 번 생각해주십시오."

백룡 길드원들 중 한 명이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짜내듯 물었다.

"그래도 한 명 정도는 보좌로 남겨두시는 게..."

"너, 해고."

아비가일이 귀찮다는 듯 내뱉자 다른 길드원들이 즉시 움직여서 당사자를 포위했다.

나는 마치 전설처럼 전해들었던 사태에 경악했다.

원래 이런 녀석인 줄은 알고 있었는데... 전보다 훨씬 심해졌다.

난데없이 해고를 당한 길드원이 거의 절규하듯 외쳤다.

직장을 잃어버린 것보다도, 아비가일의 곁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몸서리치고 있다.

"자, 잠시만요 회장님! 잘못했습니다! 저는 회장님께 거스를 생각은..."

"얼른 데려가!"

"이런 시건방진 놈이..."

물론 노동법이라는 게 있으니까 바로 해고를 당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저 사람은 한직으로 좌천당해서, 완전히 쫓겨나는 그날까지 아무런 역할도 맡지 못하게 되겠지.

헌터 업계에선 꽤 유명한 이야기다.

이윽고 당직실의 문이 닫히자 나는 아비가일과 단둘이 남겨졌다.

그녀는 의자에 앉은 채 나를 빤히 쳐다봤다.

얼굴을 구석구석 핥아대는 것 같은 시선이다.

"지난번에는 미안해. 내가... 좀 오해의 여지가 있도록 말했어."

"그래?"

"응, 로완이는 약해. 그치만 대단해."

꿈꾸는 것 같던 목소리에 조금씩 열정이 담긴다.

"나는 너무 강하니까, 별로 대단하지 않아. 나한테 사냥은 그냥 단순노동이거든. 그런데 로완이는 달라."

벌써부터 글러먹은 것 같지만, 가만히 듣고 있을 수밖에 없다.

아비가일은 정말 열심히 본인의 생각을 정리해서 설명해줬다.

"엄청 약한데도 헌터로서 싸우고 있어. 말 그대로 목숨을 걸고 있는 거야. 정말 대단해. 솔직히 존경스러워. 네가 진정한 영웅이야!"

나는 속으로 많은 것을 포기하며 애써 담담히 대꾸했다.

"고맙다."

"정말로? 이해해주는 거야? 그럼 이제 내 길드 들어올래?"

"아니."

"..."

아비가일은 금방 시무룩해져서 고개를 떨궜다.

이 지옥같은 시간은 아직 끝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14화. 진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