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높이 100여 미터의 거대 지하 통로를 이동하고 있었다.
다행히 지난 보름 동안 괴수는 만나지 않았다.
울창한 대수림이 펼쳐져 있고, 언제 출몰할지 모르는 괴수를 경계하며 이동하는 것보단 이쪽이 확실히 안전하긴 했다.
하지만 밤낮을 구분할 수 없는 늘 어두컴컴한 시야와 습하고 눅눅한 환경이 사람을 불안하고 짜증 나게 했다.
덜컹!
순간 몸이 붕 떴다.
쿵!
"윽! 글래디스, 마차 좀 잘 몰아. 내 엉덩이 다 아작나겠어."
"제 솜씨가 아니라 길이 문제입니다."
마차를 모는 글래디스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젠장!"
내가 총지휘관이긴 하지만 특별 대우는 없었다.
난 보급품을 실은 마차에 타고 가고 있었다.
그래도 걸어서 이동하는 병사들보단 나았다.
"에테나, 괜찮아?"
"네! 괜찮습니다."
내가 탄 마차 주변은 엘프들이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철통같이 보호하고 있었다.
활과 칼로 무장한 그녀들은 인간보다 야간 시력이 좋았기에 걷기에 큰 불편함이 없어 보였다.
기이잉! 쿵! 쿵!
앞서가던 기간트 한 대가 뒤로 오더니 내가 탄 마차 옆에 붙었다.
[타일러 중위님, 너무 천천히 가는 거 아닙니까?]
콜벳 대위의 물음이었다.
"트라스의 개와 쿠훌린 용병대는 대수림의 전문 길잡이입니다. 그들이 속도를 줄였다는 것은 다 이유가 있을 겁니다."
[어제 식사하면서 보니까. 기간트 장교들이 너무 천천히 간다는 불만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요?"
[네, 분위기가 좋진 않습니다.]
"참고하겠습니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애써 무시했다.
그건 단지 핑계일 뿐이고, 근본적인 불만은 나 때문이겠지.
커널 사령관의 강한 경고가 있긴 했지만, 자기보다 계급이 낮은 자가 지휘한다는 불만이 있는 건 어쩌면 당연했다.
그랬기에 출발부터 삐걱대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보리스 소령과 내가 데려온 콜벳 대위를 빼곤 기간트 장교와는 대화도 식사도 함께하지 않았다.
솔직히 나도 그들과 함께 가긴 싫었다.
나를 믿지 않는 동료들과 위험한 곳에 가는 건 미련한 짓이기도 하고.
하지만 대수림에선 기간트가 꼭 필요했다.
당장 표범 꼭두각시 같은 E등급 수준의 괴수 하나만 나타나도 정신이 없을 테니까.
하지만 그것도 이번 임무까지다.
다음엔 기간트를 타는 내 마법인형과 함께 갈 테니까.
'어디, 내 새끼들 잘하고 있나?'
인형의 집을 열었다.
치타로 이름 붙인 표범(lv.9) 꼭두각시는 괴수 뼈를 향해 앞발을 힘껏 휘두르고 있었다.
팍! 팍!
표범 괴수의 발톱은 단숨에 사람 몸을 찢어버릴 정도였지만, 살짝 흠집만 날 뿐이었다.
역시 별 3개짜리 괴수 뼈는 정말 단단했다.
이런 부산물로 기간트를 만드니 강할 수밖에.
한 가지 아쉬운 것은 표범 꼭두각시의 레벨 오르는 속도가 현저하게 느려졌다는 것이다.
이건 신체 능력이 한계까지 오르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래도 현재 내 마법인형 중에서 가장 강한 것은 단연 이 녀석이었다.
그리고 요즘은 더그 마법인형에게 영혼 이동을 집중하고 있었기에, 이 녀석의 신체 스킬도 배우지 못했다.
지금 같은 상황에 야간 시력 스킬은 꼭 배우고 싶은데······.
짹(lv.3) 자동인형은 지금도 아무 말도 없이 구석에서 고독을 씹고 있었다.
사마귀(lv.7)는 여전히 비행 훈련.
이 녀석도 더는 레벨이 오르지 않아 잠정 휴업상태였다.
그래도 비행할 수 있는 꼭두각시는 여러 상황에 유용했기에 훈련은 필수였다.
그리고 마지막 마법인형!
쿵! 쿵!
더그(lv.6)가 탄 기간트 훈련기가 부산물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역시 마나인형이야!
꼭두각시 마법인형 중에서 더그처럼 이 세계 마나를 다룰 수 있는 인형을 마나인형으로 부르기로 했다.
처음, 이 마나인형을 훈련기에 태우고 영혼 이동을 통해 조종하려 했지만, 전혀 움직이지 않았기에 당황했다.
몸속의 마나를 어떻게 흘려보내야 하는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보리스 소령이 아니었다면 계속 삽질만 할뻔했어!'
그래도 상사 복은 있는지 보리스 소령과는 조금 더 가까워졌다. 그는 지금 내 처지를 이해하고, 내 지시를 한 번도 싫은 내색을 하지 않고, 잘 따랐다.
그리고 내가 기간트 기사들이 마나를 어떻게 운용하는지 물었을 때, 큰 힌트를 주었다.
기간트 기사는 자신의 마나를 이용해 기간트를 조종하는 것이 아니었다. 마석 배터리의 마나를 몸속에 통과시켜 확장 시키는 느낌으로 조종하는 것이라 말해 주었다.
이것은 기간트 싱크로율과도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그가 준 힌트를 통해 등 쪽에서 주입된 마석 배터리의 마나부터 느낄 수 있게 연습했고, 그 마나가 몸에 닿는 느낌이 들면 최대한 자신의 마나와 공명시켜 기간트 주변으로 뿌리는 느낌을 주었다.
그렇게 틈날 때마다 영혼 이동을 통해 연습하자, 드디어 며칠 전 처음으로 기간트 팔을 움직였고, 지금은 내가 직접 조종하지 않아도 더그가 훈련기로 부산물 사이로 빠르게 이동하고 언덕을 오를 수 있을 정도였다.
'이 정도면 한 달 안에 폰급 기간트도 조종할 수 있겠어!'
더그는 원래 비숍급 기간트를 움직이는 기사였다.
그러니 마나가 부족할 일은 없었다.
문제는 그가 조종할 기간트가 없었다.
그건 헬다임 장벽으로 돌아가서도 마찬가지.
아직 드워프들이 기간트를 만드는 건 먼 이야기였다.
전진 기지의 케네스 영감에게 부탁해도 되지만 거긴 구형 기간트밖에 없었기에 실전엔 큰 도움은 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기지에서 훔칠 수도 없고, 어디서 주인 없는 기간트 하나 안 떨어지나?
"응?"
"중위님, 무슨 일이십니까?"
글래디스가 물었다.
"아니야."
선두의 타냐 블랙과 쿠훌린이 멈췄다.
그러자 뒤를 따르던 기간트들이 정지했다.
지금 난 길잡이 용병들과 엘프들, 그리고 기간트 기사들과 운명의 실을 연결한 상태였기에 그들의 움직임을 알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그때 한 병사가 달려왔다.
"타일러 중위님, 엘다크 소령님께서 모셔오시랍니다."
"알았네. 자넨 후미로 가서 보리스 소령님을 모셔오게."
"네!"
일부러 보리스 소령을 불렀다.
엘다크 소령과는 대화가 통하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엘프들과 먼저 앞으로 이동했다.
***
[타일러 중위 왔는가.]
이 새낀, 내가 총지휘관인데 계속 반말이네.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어쩌겠는가.
상대는 기간트 기사에 계급도 높았다.
게다가 난 이런 부대를 지휘해본 경험도 없었다.
"무슨 일로 보자고 하셨습니까?"
[길잡이가 갑자기 길을 멈추더니 갈 생각을 안 해!]
"네?"
그때 쿠훌린이 코를 벌렁거리며 달려왔다.
"쿠오크! 타일러여! 냄새가 난다."
"무슨 냄새?"
"쿠오크! 이건 분명 땅굴 벌레 괴수 냄새다. 놈이 근처에 있다. 조심해라!"
"그래?"
오크의 야간 시력은 인간과 비슷했기에 별로였지만, 후각은 매우 뛰어났다.
내가 오크들을 트라스의 개와 함께 맨 앞에 배치한 이유기도 했다.
그가 냄새가 난다면 분명 근처에 땅굴 벌레가 있는 것이다.
기이잉! 쿵! 쿵!
그때 길잡이 타냐의 기간트도 다가왔다.
"타냐 블랙, 왜 멈춘 것이오?"
[진동이오!]
"진동?"
[미세하게 느껴지던 진동이 조금씩 커지는 것이 아무래도 불안하오. 돌아서 가야 할 것 같소.]
[돌아가다니! 그게 무슨 소린가!]
엘다크 소령의 목소리 톤이 올라갔다.
타냐가 말했다.
[근처에 땅굴 벌레 괴수가 있는 것 같소. 진동이 계속되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우리와 방향이 비슷한 것 같으니, 이틀 전 우리가 지나온 갈림길로 돌아가 우회하는 것이 좋을 것 같소.]
[허! 지금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이틀을 돌아가자고?]
[대수림에 이런 격언이 있소. 진동이 있는 곳엔 가지 마라. 그러니 멀리 돌아서 가는 것이 안전······.]
[그만!]
엘다크 소령의 비숍급 기간트가 나를 향해 몸을 돌렸다.
[타일러 중위, 지금부턴 내가 선두로 나서지.]
"네?"
[저들은 너무 속도가 느리다! 지금 이런 속도로 가다간 몇 달이 지나도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해!]
"엘다크 소령님, 하지만 길잡이들의 말도 일리가 있습니다. 괴수와 만날 가능성이 있다면 피하는 것이······."
[일리가 있긴. 이 진동은 며칠 전부터 계속 있었다. 저들은 너무 겁이 많아. 문제가 생기면 내가 책임질 테니 빠르게 이동하지.]
"저기! 멈추······!"
기이이잉! 쿵! 쿵! 쿵!
엘다크 소령은 자기 할 말만 하고 앞으로 나갔다.
"하아!"
썩을 놈!
'이 정도면 선 세게 넘었지?'
눈치를 보고 있던 기간트 기사들도 엘다크 소령의 뒤를 따라가려 했다.
아무래도 이대로 놔뒀다간 원정이고 뭐고 개판이 될 것 같았다.
결단을 내려야 했다.
"모두 제자리에 멈춰라!"
내 목소리를 들은 기간트 기사들이 멈칫했다.
"지금부터 움직이는 자가 있다면 명령 불복종으로 군법회의에 회부될 것이다. 그리고 장벽 사령관님께서 주신 권한으로 강제 귀환시키겠다."
자존심이 강한 기간트 기사들도 군법회의란 의미를 알고 있었기에 감히 움직이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엘다크 소령은 혼자서 너무 앞서가고 있었다.
보다 못한 워버린 대위가 말했다.
[타일러 지휘관님, 제가 모셔올까요?]
"놔둬라! 어디까지 가나 보자."
그때 후미에 있던 보리스 소령의 기간트가 도착했다.
[타일러 중위, 무슨 일인가?]
쿵! 쿠쿠쿠쿠쿠!
갑자기 지하 통로 전체가 심하게 흔들렸다.
"뭐야?"
"지, 지진이다!"
쿠앙! 파드드드득!
천정에 구멍이 뚫리면서 뭔가 거대한 것이 쏟아져 내렸다.
쏴아아아아! 콰콰콰콰쾅!
그리고 전방을 휩쓸고 땅속으로 지나가 버렸다.
길잡이들이나, 기간트 기사들, 병사들, 엘프들, 용맹한 오크들조차 너무 놀라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그리고 우리 앞에 지름 100여 미터가 넘는 거대 구멍이 생겼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
[내, 내가 땅굴 벌레 괴수를 눈앞에서 보다니!]
침묵을 깬 것은 타냐 블랙이었다.
[허! 거수다!]
[세상에! 우리가 그대로 전진했다면 저기에 다 휩쓸렸을 거야!]
기간트 기사들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엘다크 소령은?]
보리스 소령의 목소리가 들렸다.
[엘다크 소령은 어디 있나?]
[어? 방금 저 앞에 계셨는데······?]
[뭐라?]
그제야 다들 심각성을 인지했다.
[어서 수색하라! 엘다크 소령의 기간트를 찾아!]
[엘다크 소령님을 찾아라!]
아무리 찾아도 소용없을 것이다.
그는 이미 내 인형의 집에 있으니까.
'이런 식으로 마나인형을 늘리고 싶진 않았는데······.'
아니? 기간트 기사들에게 운명의 실을 연결한 것은 은연중에 이런 결과를 바란 것은 아닐까?
방금도 무의식적으로 운명의 실이 검게 변하자마자 기사회생 스킬을 사용했고, 성공하자마자 허수아비(lv.1)를 인형의 집에 넣었으니까.
아무튼, 마나인형이 둘로 늘었다.
그러니.
'기간트도 2대가 필요하겠네...'
26. 얼음 계곡 원정대(2).
26. 얼음 계곡 원정대(2).
전생의 기억이 떠오르니, 기분이 썩 좋진 않았다.
아니 기분이 더러웠다.
'그때도 그랬지······.'
사방에서 파도처럼 밀려오는 괴수!
치열한 전투!
어디선가 들려오는 비명!
누군지도 모르지만 나와 연결한 운명의 실타래가 검게 물들 때마다, 무의식적으로 기사회생 스킬을 남발했고 계속 마법인형을 만들었다.
괴수와 전투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고, 전투 마법인형은 계속 필요했으니까.
후회는 없었다. 죄책감도 없었다.
난 인류를 위해 괴수와 싸우고 있었고, 인류의 마지막 희망인 헌터였으니까.
하지만 방금까지 옆에서 함께 싸우던 동료가 바보처럼 멀뚱멀뚱한 표정으로 인형의 집에서 날 바라보고 있을 때의 기분이란······.
"젠장!"
나도 모르게 입에서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조금 전까지 엘다크 소령이었던 허수아비(lv.1)가 날 보며 눈을 깜빡인다.
지금도 그때와 비슷한 기분이 느껴졌다.
비록 엘다크 소령이 날 무시하던 사람이었고, 막무가내였고, 비호감이었지만 죽일 이유가 충분했던 프랭크 대령과는 상황이 달랐다.
엘다크는 아군이었으니까.
이건 전생의 트라우마였다.
그리고 인형술사의 딜레마.
'그렇다고 마법인형을 만들지 않으면 강해질 수 없고······.'
전에도 트라우마를 여러 번 겪었지만, 이번엔 전생 장면이 오버랩되며 좀 세게 다가왔다.
"험!"
글래디스가 헛기침했다.
"땅굴 벌레 괴수는 대수림에서도 천재지변 같은 겁니다. 중위님 탓이 아닙니다."
나도 안다.
하지만 지금 내 고민은 다른 것이었다.
"타일러 중위님! 힘내세요."
그녀가 내 표정을 읽었을까?
에테나가 날 위로했다.
"중위님 고민이 뭔지는 모르지만, 저는 중위님을 믿고 있습니다."
"······?"
"저는 알아요. 중위님께서 친절하고 상냥하시다는 것을요."
"아니, 너는 나에 대해 모른다."
"아니요! 전 압니다. 중위님은 저와 엘프들을 도와주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도와주고 계시고요."
"그거야 내가 필요하기 때문이지."
"이유가 있다고 해도 선의는 선의입니다. 그리고 중위님은 우리 엘프들의 마지막 희망입니다."
"내가 희망이라고?"
글래디스가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엘프어도 모를 텐데, 지금 무슨 대화를 하는지는 알까?
"엘프가 저렇게 중위님께 고마워하고 있지 않습니까. 힘내십시오."
"응?"
글래디스도 눈치는 있었군.
"그리고 드워프도 있지 않습니까. 그들도 중위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았다면, 지금쯤 살루스 전진 기지로 끌려갔을 겁니다. 그러니 드워프들도 중위님께 고마워할 겁니다. 그리고 중위님은 드워프들의 희망입니다."
"희망이라······."
글래디스에게도 같은 말을 들었다.
나를 따라온 쿠훌린 족장과 오크들이 떠올랐다.
자신들의 차원이 불타고 괴수들을 피해 이곳 세상에 왔다.
혹독한 환경인 대수림에서 변변한 무기도 없이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그들은 인간들의 의뢰를 받으며 용병으로 살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모든 일을 제쳐두고, 날 믿고 이곳까지 따라왔다.
생각해 보니 오크도 희망이 필요해 보였다.
그래서 레드불 제사장이 날 보자마자 선조의 영혼이 깃든 자라고 떠들었을지 모른다.
오크도 날 희망이라 생각하는 걸까?
"너무 깊게 고민하지 마십시오. 타일러 중위님은 지금 잘하고 계십니다. 윗분들도 그런 중위님을 믿고 계시고요. 그리고 저도 믿습니다."
글래디스까지 날 믿는단다.
피식 웃음이 흘렀다.
내가 언제부터 희망과 믿음의 아이콘이 된 거지?
가슴이 뭉클하다.
많은 이들이 날 희망이라고 생각하다니!
'그래! 그동안 너무 고민하고 전생의 트라우마에 지배를 받고 있었어.'
죽은 자를 마법인형으로 만드는 것은 그냥 내 능력일 뿐이다.
그 능력을 이용해 누군가를 지킨다면 그건 고인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 아니겠나.
받아들일 것은 그냥 단순히 받아들이자!
트라우마를 털어내자 마음이 후련해진다.
그때 문뜩 이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헌터 고강해가 이 세계 타일러의 몸에 빙의 된 것은 이계 난민들 때문일까?'
같은 멸망의 아픔을 가진 이들을 돕기 위해 다시 태어난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다시 얻은 기회. 다시 얻은 삶.
'이번 생은 누군가의 희망으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물론 내가 잘사는 게 먼저지만!
그러려면 강한 힘이 필요했다.
강한 자만이 희망을 품을 수 있는 곳이 여기 대수림.
그리고 이 세상이었으니까.
결론은 처음부터 나와 있었다.
내가 강해져야 한다.
그것이 희망이니까.
"글래디스! 마차를 몰아 앞으로 이동하게."
"네?"
"이제부터 우리 마차가 선두에 선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내가 지휘를 맡은 동안 부하들은 내가 지킨다!
엘다크 소령과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게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누구든 그냥 죽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
'사마귀! 앞으로 이동해!'
파드드드득!
사마귀 마법인형을 원정대의 400미터 앞에 배치해 주변을 살피며 이동하게 했다.
어둠 속에서 물체를 식별하는 능력은 사마귀 꼭두각시가 최고였으니까.
이제부턴 원정대를 위해 내 능력을 십분 발휘할 생각이었다.
***
긴 터널을 통과하고 대수림으로 나갔다.
지상은 위험했지만, 더는 길이 없었다.
착! 파드드득!
공중을 날던 사마귀 꼭두각시가 나뭇가지에 붙어 날개를 비볐다.
이건 뭔가를 발견했다는 신호.
'짹! 뭐가 있나 확인해!'
[네, 마스터.]
곧장 짹 자동인형을 사마귀 옆으로 보냈다.
이때 가장 조심해야 했다.
인형의 집에서 나오는 순간 마법인형은 잠시 정신이 멍해지며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했으니까.
짹이 정찰하는 사이 선두에 있던 엘프 에테나가 달려왔다.
"타일러님! 괴수들이 뭔가를 발견한 거 같아요."
"알았어."
난 일행을 향해 외쳤다.
"모두 정지하라!"
[정지하라!]
치이익! 쿵! 쿵!
"워어!"
기간트와 마차 행렬이 모두 정지했다.
길잡이 타냐의 기간트가 다가왔다.
[엘프가 뭔가 또 발견했소?]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짹에게 연락이 왔다.
[몸통 길이가 7미터쯤 되고, 다리가 10개인 거미형 괴수가 나무 사이에 숨어 있습니다.]
'알았어!'
난 뒤를 돌아봤다.
"워버린 대위!"
[네!]
"300미터 전방 나무 뒤에 괴수가 한 마리 숨어 있다. 좌측으로 천천히 이동해 뒤를 기습하게."
[네! 지휘관님!]
워버린 대위의 나이트급 기간트와 폰급 기간트 2대가 좌측으로 이동했다.
"폴린 대위!"
[네!]
"자네 편대는 우측으로 이동해 워버린 대위를 지원하게!"
[네! 지휘관님.]
폴린 대위의 기간트 편대가 달려갔다.
"쿠훌린, 혹시 괴수가 이쪽으로 도망칠지도 모르니까. 오크는 전투를 준비하고!"
"쿠오크! 타일러여! 알았다."
오크들이 무기를 들고 전투에 대비했다.
그 사이 후미에서 보리스 소령의 기간트가 달려왔다.
[타일러 중위, 무슨 일인가? 또 괴수가 나타났나?]
"2개 편대를 보냈으니, 곧 처리할 겁니다."
잠시 후.
기이이이잉! 쿵! 쿵!
기간트들이 죽은 거미형 괴수를 끌고 왔다.
[괴수를 처리했습니다. 지휘관!]
"쿠오크!"
"와아아아!"
오크와 병사들이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
"피해는?"
[제 기간트가 살짝 긁힌 정도입니다.]
"잘했다. 마석이 있는지만 확인하고, 사체는 버려라!"
[네!]
부산물이 아깝긴 하지만 그걸 분해할 시간도 없었고, 가지고 갈 수도 없었다.
치이이익! 철컹!
보리스 소령의 기간트가 나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대단하군. 자네와 용병들이 선두로 나서니, 우리가 한결 편해졌어. 다치는 병사도 없고.]
"조심해서 나쁠 게 뭐가 있겠습니까. 목숨은 다 소중하니까요."
뒤쪽에서 병사들이 쑥덕이는 소리가 들린다.
"와씨! 괴수들이 숨어 있는걸 알아내다니, 엘프들이 대단한데!"
"그런 엘프들을 통제하는 타일러 중위님이 더 대단한 거 아냐?"
"하긴, 엘프어와 오크어까지 완벽하게 구사하다니, 정말 대단한 사람이야."
사실 엘프들은 중간에서 내게 소식을 알리는 시늉만 하는 것이다.
엘프만이 내가 괴수를 다루는 것을 아니까.
내 사마귀 꼭두각시와 표범 꼭두각시가 앞에서 괴수를 발견하면 엘프에게 알리고, 엘프가 달려와 우리에게 알리면 짹이 최종적으로 확인하고, 내가 기간트 병력을 보내는 순서였다.
덕분에 이곳까지 오는 동안 몇 번의 전투가 발생했지만, 우리 피해는 거의 없었다.
가끔 괴수 숫자가 많거나 강한 괴수가 있을 때면, 싸우지 않고, 멀리 돌아가는 방법으로 회피했다.
그렇게 몇 번 상황이 반복되자, 병사들의 신뢰는 올라가고 기간트 기사들도 내 지시에 군말 없이 따랐다.
'그렇지! 이게 원팀이지!'
딱 내가 원하던 그림이었다.
이제야 원정대다운 모습이 되었다.
엘다크 소령의 죽음과 비숍급 기간트 한 대가 사라진 것은 안타까웠지만, 그걸 계기로 내가 전면으로 나섰고, 아무도 다치지 않고 한 달여를 이동하자, 하나의 팀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리 비호감 브라더스인 더그(LV.8)와 엘다크(lv.6) 꼭두각시는 훈련기를 나누어 쓰며 성장해, 둘 다 폰급 기간트 정도는 탈 수 있을 실력이 됐다.
이제 기간트만 구한다면, 내 마법인형만으로 따로 작전을 수행할 수 있을 정도였다.
[지휘관님, 마석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좋다! 다시 출발한다!"
[출발하라!]
내 명령에 부대가 움직인다.
'계속 명령만 받다가 통제하니까 좋군.'
이래서 다들 기를 쓰며 진급하고, 별을 달고 싶은가 보다.
이렇게 개고생하며 일했으니, 헬다임으로 돌아가면 진급하겠지?
물론 임무를 완벽히 완수해야겠지만······.
***
휘이잉! 휘이이잉!
'미친! 이게 대수림 날씨야?'
5분만 가만히 서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살인 더위에 호흡까지 턱턱 막히는 대수림인데 대체 어떻게 이런 추위가 가능한 걸까?
이곳은 지금 초겨울 날씨였다.
그것도 불과 한나절 차이로 날씨가 급변했다.
대체 얼음 계곡 안에선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야?
타냐 블랙의 조언대로 외투를 준비하지 않았다면 원정이고 뭐고, 그냥 포기하고 돌아갈 뻔했다.
그리고 추위에 약한 엘프들은 지금 망토에 외투까지 입었지만, 몸을 떨고 있었다.
"마르실 괜찮나?"
"크응! 우리가 살던 곳엔 겨울이 없었다."
마르실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추위도 추위지만, 긴 원정에 불만이 많은 것 같다.
어서 하이엘프 시노우엘을 구하러 장벽 너머로 가고 싶겠지.
우리 중에서 추위에 가장 강한 것은 의외로 오크였다.
그들은 지방층이 두꺼운지 지금도 팬티 같은 작은 천 조각만 걸치고 다녔다.
그랬기에 지금은 엘프를 대신해 오크들이 선두에 서고 있었다.
그들은 후각이 뛰어났기에 의외로 척후병으로 제격이었다.
사실 난 손과 얼굴 말고는 크게 춥지 않았다.
대수림의 더위를 막아주었던 조끼가 어쩐 일인지 추위까지 막아주고 있었다.
냉기는 사라지고 오히려 몸을 따뜻하게 데워주는 효과가 있었다.
조끼에 무슨 신체 보호 마법이라도 걸려 있는 걸까?
이번 임무만 완성하면 이 조끼도 이제 내 것이다.
"쿠오오오!"
쿠훌린의 위험 신호에 마차에서 일어섰다.
"정지! 모두 멈춰라!"
[정지하라!]
내 명령에 기간트와 병사들이 자리에 멈췄다.
그때 쿠훌린과 오크들이 달려왔다.
"왜? 무슨 일이야?"
"쿠오크! 계곡 입구에 괴수 시체 있다!"
"괴수 시체라고?"
"쿠오크! 괴수 시체 많다."
"그러니까 죽은 괴수가 많아?"
뭐지?
일단 확인해 봐야겠다.
"쿠훌린, 우릴 그곳으로 안내해!"
"쿠오크! 내가 앞선다."
"워버린! 날 따라와라!"
[네! 지휘관!]
"타냐, 나와 같이 갑시다."
우린 쿠훌린을 따라 얼음 계곡 입구로 달렸다.
[헉! 대체 이 괴수 시체는 뭐야?]
"상태가 깨끗한 것이 죽은 지 며칠 되지 않은 것 같소."
언뜻 봐도 30여 마리는 되어 보이는 괴수 시체.
몸길이 4미터의 늑대형 괴수 무리였다.
그리고 계곡 입구엔 성인 가슴 깊이에 폭이 이십여 미터 정도 되는 작은 강이 얼음 계곡 위에서부터 흐르고 있었다.
"앗! 차가워!"
물을 만지는 순간 깜짝 놀랐다.
물이 얼음장 같았다.
치이잉! 철컹!
타냐 블랙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기간트에 내렸다.
"이상하네. 여기엔 강이 없었는데?"
"강이 없었다고?"
"그렇소. 2년 전에만 해도 이곳은 그냥 골짜기였소. 그리고 날씨가 너무 따뜻해졌는데?"
"그 전엔 더 추웠단 말이오?"
타냐가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여긴 너무 추워서 영지 사냥팀도 거의 오지 않는 곳이오. 하지만 갑자기 없던 강도 생기고, 얼음 계곡에 무슨 변화가 생긴 것 같소."
난 시선을 돌려 강가에 널려 있는 괴수 시체를 살폈다.
"이 괴수를 아시오?"
"레이크란 괴수요. 이 일대에선 가장 강력한 놈들이고, 무리 사냥을 통해 자기 몸에 수 배나 되는 괴수도 잡아먹는 놈들이요. 이 정도로 큰 규모라면 우리 원정대 수준은 돼야 잡을 수 있소."
"그럼 이것들이 타인스 영지의 사냥팀을 공격했을 수도 있소?"
"충분히 가능하지. 이 정도 무리가 야간에 기습했다면 사냥팀이 전멸한 것도 이해가 가오."
"그럼 이 괴수들을 모두 죽였다는 건?"
타냐가 마른침을 삼켰다.
"더 강한 괴수란 말이지."
순간 소름이 끼쳤다.
여기 늑대 괴수는 최소 D등급 괴수였다.
설마, 이 많은 숫자를 한 마리가 다 죽인 건 아니겠지?
나와 타냐는 죽은 괴수의 상처를 살폈다.
"여기 좀 보시오. 무슨 날카로운 무기에 당했나? 단칼에 목이 잘렸는데?"
늑대 괴수의 목이 굴러다녔다.
그런데 칼 같은 날카로운 무기는 아니었다.
잘린 곳의 단면이 너무 거칠었다.
하지만 단번에 잘린 건 분명해 보였다.
"발톱? 아니면 이빨인가?"
"하지만 4미터 괴수의 목을 단칼에 자를 정도의 발톱이나 이빨이라면, 괴수의 크기가······."
순간 상상하기도 싫었다.
지하 통로에서 봤던 땅굴 벌레 괴수가 떠올랐다.
천재지변 수준이었으니까.
대수림의 전진 기지가 대부분 거신목에 있는 이유는 땅굴 벌레 괴수가 유일하게 뚫지 못하는 것이 거신목 뿌리였기 때문이었다.
"쿠오크! 발자국 있다!"
쿠훌린의 목소리에 강 건너편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보았다.
10미터나 되는 괴수의 발자국을!
"이런 괴수를 본 적이 있소?"
타냐 블랙이 고개를 격하게 흔들었다.
평생 대수림에 산 그녀도 처음 보는 것이라고 했다.
"다행히 발자국의 방향이 북쪽으로 향하고 있군."
"휴! 카야킨 기지 방향은 아니라 다행이오."
순간 둘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정도 크기의 거수는 거의 재앙 수준이었다.
게다가 땅굴 벌레 괴수는 무작정 땅만 파지 사람을 따로 공격하고 그러는 지능이 없었다.
하지만 이 거수는 자기보다 약한 괴수를 먹지도 않을 거면서 30여 마리나 잔인하게 죽였다.
마치 이 괴수들에게 분풀이한 것 같았다.
난 워버린 대위를 불렀다.
"일단 괴수 시체에서 마석만 채취하고 치우게. 그리고 계곡 입구에 베이스캠프를 설치하게."
[네! 지휘관.]
***
[타일러 중위, 조심하게.]
"네!"
보리스 소령과 기간트 부대가 얼음 계곡을 수색 중이었다.
병사들과 용병, 오크, 엘프는 따라오지 못했다.
지금부터는 기밀 군사작전이었으니까.
"여깁니다. 이리 들어가면 됩니다."
눈앞에 수십 미터의 거대 얼음 동굴이 있었다.
얼음 계곡의 시작이자 강이 시작 되는 곳.
이곳 얼음 동굴에서부터 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기간트가 불을 켜자, 불빛이 얼음 동굴을 비추고 영롱하고 신비로운 빛이 퍼져나갔다.
[중위, 대체 우리가 찾는 게 뭔가? 이제 말해 줄 때도 되지 않았나?]
"그건 찾으면 바로 알게 되실 겁니다."
내가 말을 내뱉자마자 누군가 외쳤다.
[찾았다!]
[저쪽이다!]
우린 일제히 소리가 들린 곳으로 향했다.
[비숍급 기간트?]
[아니! 이건 거신이네······!]
보리스 소령의 말대로 그건 얼음에 몸이 반쯤 박힌 거신 기사의 시체였다.
그리고 괴수에게 당했는지 가슴에 구멍이 뚫려 있었고, 얼음 속에 갇혀 있었기에 시신은 온전해 보였다.
'정말 있었네!'
이 거신은 무엇이 억울했는지 쓰러지지도 못하고, 무릎을 꿇은 채로 죽어 있었다.
기간트들이 하나둘 모이더니 가슴에 주먹을 대곤 고개를 숙여 잠시 묵념을 했다.
얼마나 오랜 시간, 이 얼음에 갇혀 있었을까?
[여기 또 있습니다!]
이번엔 몸이 반으로 잘린 거신의 시체였다.
나이트급 거신으로 얼음에 완전히 박혀 있었기에 꺼내긴 쉽지 않아 보였다.
쩌쩍! 쿠웅!
[뭐야?]
입구 쪽 천장에서 3미터나 되는 얼음 덩어리가 떨어졌다.
얼음이 녹으면서 동굴 전체가 불안해진 것이다.
[타일러 중위! 여긴 위험하니, 밖에 나가서 기다리게. 우리가 거신의 시신을 가지고 나가겠네.]
"네!"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임무는 완수했다.
거신의 시체 하나만 꺼내도 오리지널 기간트 한 대가 생기는 것이다. 그러니 오리지널 기간트 재료를 찾아오는 내 임무는 끝냈다.
'짹, 자네와 치타가 날 지켜주게.'
[네, 마스터.]
난 계곡 옆에 누워 사마귀 꼭두각시로 영혼 이동을 했다.
그리고 얼음 동굴 속으로 다시 들어갔다.
위험했기에 혼자 밖으로 나왔지만, 작업이 잘 진행되는지 살피고 싶었다.
'오! 총 4구인가?'
비숍급 거신 하나, 나이트급 거신 둘, 폰급 거신 하나가 얼음 속에 있었다.
그 말은 오리지널 기간트 4대가 생긴 것이었다.
윌리엄 사령관이 엄청나게 좋아하겠어!
이로써 내 진급은 확정이다.
보리스 소령과 기간트들은 얼음 동굴이 언제 무너질지 몰랐기에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비숍급 기간트부터 빼내기 위해 사력을 다하고 있었다.
'더 없나?'
근처엔 거신의 시체가 더 없었다.
난 사마귀 꼭두각시를 더 깊숙이 들여보냈다.
그리고!
얼음 속에 있는 또 다른 거신의 시체를 발견했다.
검은 갑옷을 입은 11미터 크기의 룩급 거신이다!
거신은 한쪽 무릎을 꿇고 한 손을 앞으로 뻗고 있었고, 그의 배에는 10미터 길이의 뼈 같은 것이 박혀 있었다.
아무래도 이곳은 거신들과 괴수가 싸웠던 장소였고, 거신들이 당한 모양이었다.
얼음을 뚫고 나온 거신의 손에 앉았다.
[운명의 실타래(lv.5)를 연결합니다.]
'뭐?'
27. 거신인형.
27. 거신인형.
머리에 망치를 맞은 듯 정신이 멍했다!
'사, 살아 있다고? 이 거신이?'
운명의 실타래는 살아 있는 생명체하고만 연결된다.
그러니 거신은 분명 살아 있었다는 의미.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거지?
동면? 냉동인간 뭐, 그런 건가?
사마귀 꼭두각시의 고개를 위로 올려 거신을 올려다봤다.
순간 거신의 눈동자가 날 향해 휙 움직이더니, 딱 마주쳤다!
'헉! 날 쳐다봤어!'
큰 충격에 사마귀 꼭두각시와 영혼 이동이 끊어질 뻔했다.
'어? 왜 이러지?'
갑자기 현기증이 몰려오며 내가 거신의 눈동자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가 내 의식 속을 들여다본다.
그리고 나도 동시에 그의 의식 속을 본다.
이게 뭐야? 마법인가?
처벅! 처벅!
"저쪽이다!"
"쫓아라!"
다섯 명의 기사가 괴수를 쫓고 있었다.
추격대의 리더는 제국의 상급 기사이자, 얼음의 마법사 암 드로운!
이건 이 거신의 기억이었다.
상대의 기억을 보는 그런 마법인가?
'우리가 쫓는 놈을 잘 봐라!'
뭐? 지금 내게 말한 거야?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이건 단지 기억일 뿐일 텐데······?
이상한 일이었지만 나는 그의 시선을 따라가고 있었고, 그는 내 존재를 알고 있는 듯했다.
"드라우켄이 저기 있다!"
"잡아라!"
머리에 날카로운 뿔이 박혀 있고, 어깨높이는 20미터에 몸길이가 40미터에 달하는 거대 괴수가 고개를 돌려 포효했다.
"쿠아아아아!"
쫓아 오지 말라는 경고인가?
놈은 특이하게 발바닥이 매우 컸고, 양어깨에 날카로운 칼날이 박혀 있었다.
A급 괴수?
아니야 저건 S급이야!
S급 헌터도 팀을 이루어야 잡을 수 있다는 괴수.
거신들은 지금 자신보다 몇 배나 큰 S급 괴수를 쫓고 있었다.
싸우면 상대가 되지 않을 것 같았지만, 기사들은 용맹했고 기세는 사나웠다.
그리고 드라우켄의 몸엔 부러진 창 2개가 박혀 있었다.
아! 놈은 상처 입었다.
"놈이 동굴로 들어간다!"
"가자! 가족들의 원수를 갚자!"
기사들의 분노와 슬픔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이들은 장벽을 지키는 기사들!
거신들은 대수림에 거대한 헬다임 장벽을 만들고 있었고, 이들은 접근하는 괴수를 막는 기사들이었다.
하지만 백색의 악마 드라우켄이 거신 마을을 공격했고,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수십 명을 학살했다.
그리고 장벽을 넘어 달아났다.
이들은 가족의 원수를 갚고, 놈이 다시 장벽을 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선발된 기사들!
그들은 수십 일을 쫓고 쫓아 이곳까지 왔다.
처음에 20명이던 병력은 줄고 줄어 이제 다섯밖에 남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
"크노엘! 조심해라!"
암 드로운이 맨 앞에서 달려가는 기사에게 소리쳤다.
하지만 지금 기사는 가족의 복수에 눈이 멀었다.
"크악!"
오래지 않아 그의 짧은 비명이 들렸다.
암 드로운이 뒤를 따라 달려갔지만, 크노엘은 이미 심장이 뻥 뚫린 채로 무릎 꿇고 죽어 있었다.
"으악!"
또 한 명의 기사가 비명을 질렀다.
괴수의 어깨 칼날에 기사는 허무하게 몸이 반으로 잘려 쓰러졌다.
그리고 번뜩이는 드라우켄과 눈이 마주쳤다.
"쿠아아아!"
놈이 나를, 아니 암 드로운을 향해 괴성을 질렀다.
"이야!"
다다닥! 푹!
뒤에서 달려든 기사의 검이 괴수의 엉덩이에 박혔다.
"크아아아!"
촤악! 서걱!
놈이 몸을 돌리자, 어깨에 있던 칼날이 기사의 머리를 잘랐다.
퉁! 투투퉁!
기사의 머리가 바닥을 굴렀다.
"으아아! 죽어!"
가장 작은 폰급 기사가 괴수를 향해 창을 들고 달렸다.
하지만 괴수는 위로 몸을 날렸고, 천장에 붙어 창을 피했다.
그리고 드라우켄의 긴 꼬리가 화살처럼 쏘아졌다.
취링! 푹!
"크헉!"
쿵! 콰앙!
몸을 뚫린 폰급 기사는 힘없이 쓰러졌다.
다닥! 촤악!
"끼이이이아!"
하지만 그의 희생이 헛되지는 않았다.
암 드로운이 검으로 괴수의 꼬리를 잘랐으니까.
"크앙!"
성난 괴수가 아래로 내려와 암 드로운에게 달려들었다.
그러자 암 드로운이 방패를 가슴에 댔다가 앞으로 내밀었다.
"얼음 방패!"
촤촤촤촥!
방패에 실시간으로 얼음이 얼더니 순식간에 3배 크기의 얼음이 붙었다.
콰아앙!
괴수의 발톱이 방패를 둘러싼 얼음을 산산 조각냈다.
그 순간 암 드로운이 방패를 들고 검을 찔렀다.
쉐엑! 푹!
"끼이아!"
몸통을 찔린 괴수가 괴성을 지르며 몸을 뒤로 팔짝 뛰었다.
그러더니 뒤를 돌아 쏜살같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어딜 달아나느냐?"
암 드로운은 괴수를 쫓았다.
'보아라! 놈은 영악하다!'
그는 지금 내게 말하고 있었다.
동굴 깊이 들어오자, 눈이 어둠에 침식됐다.
하지만 암 드로운의 눈이 보랏빛으로 물들자, 어둠 속에서도 사물 식별이 가능했다.
이건 마법이었다.
그때 뭔가 시커먼 것이 덮쳐왔다.
"얼음 방패!"
촤촤촤촥!
커다란 방패가 앞을 막았다.
쿠웅! 콰앙!
큰 충격에 얼음 방패가 산산 조각났다.
그 순간 암 드로운이 검을 크게 휘둘렀다.
서걱!
괴수의 머리가 반으로 갈라졌다.
그런데!
크기가 작다?
"크앙!"
다닥! 푹!
"크헉!"
달려든 드라우켄의 어깨 칼날이 배를 찔렀다.
"크르르릉!"
놈은 이빨을 드러내며 비웃고 있었다.
방금은 드라우켄이 이 동굴에 원래 살던 괴수를 죽이고, 암 드로운에게 던진 것이었다.
"크큭!"
암 드로운이 몸에 박힌 괴수의 칼날을 붙잡았다.
그리고 검을 내려놓고 허리춤에서 새하얀 구술을 꺼냈다.
"크릉?"
"이제 네놈은 억겁의 세월을 나와 함께 갇혀 있을 것이다."
암 드로운이 손을 강하게 움켜쥐자.
콰직!
구슬이 깨졌다.
그리고 괴수를 향해 손을 뻗으며 주문을 외웠다.
쩍! 쩌쩌쩍!
갑자기 공기가 차갑게 휘몰아치며, 주변이 얼어붙기 시작했다.
깨진 구슬을 들고 있던 암 드로운의 몸이 먼저 얼었고.
깜짝 놀란 드라우켄은 뒤로 피하려 했다.
하지만 암 드로운이 괴수의 칼날을 꽉 붙잡은 채로 얼었기에 빠지지 않았다.
"끼아아아아!"
괴수의 몸도 얼어붙기 시작했다.
그때 동굴 벽 한쪽이 무너지며 엄청난 물이 쏟아졌다.
그리고 그 물도 실시간으로 얼기 시작했다.
콰직! 콰직!
괴수는 괴수였다.
드라우켄은 입으로 자기 어깨를 물어뜯으며 기어이 칼날을 빼냈다.
그리고 몸을 움직이려 했다.
하지만 이미 놈의 몸도 반이나 얼음에 휩싸였다.
주변의 모든 것이 물에 잠겼고, 드라우켄도 한순간에 얼어버렸다.
'헉! 얼음 계곡을 만든 것이 마법이었어!'
꼭두각시 마법인형은 추위를 타지 않았음에도 순간 오한이 들었다.
대체 그 하얀 구슬은 뭐지?
그 엄청난 마법은 뭐야?
아쉽게도 거신의 의식을 더 보지 못하고 튕겨 나왔다.
'응?'
날 바라보는 거신의 눈에는 당혹감이 깃들어 있었다.
그도 내 안에서 뭔가를 본 것 같았다.
[아! 세상이 너무 많이 변했구나!]
그에게서 말할 수 없는 허무함과 회한 같은 복잡한 감정이 느껴졌다.
그는 지금 내게 의식으로 느낌을 전달하고 있음이다.
[이계의 전사여!]
이계? 뭐지? 내가 빙의 한 것도 알아?
난 고작 그의 작은 단편을 보았을 뿐인데, 그는 내 전생까지 본 것 같았다.
[한 가지만 부탁하겠다. 드라우켄이 아직 살아 있다.]
[나도 알아!]
얼음 계곡 입구에 있었던 괴수 시체들은 모두 드라우켄에게 죽은 것이었다.
[드라우켄을 반드시 잡아야 한다! 놈은 내 가족, 내 전부를 죽였다.]
그의 슬픔을 알고 있었다.
그의 가족과 연인이 모두 놈에게 죽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내가 드라우켄을 상대할 수는 없었다.
놈은 S급 괴수니까.
[지금은 약속할 순 없다. 하지만 내가 강해진다면 언젠가 그놈을 꼭 죽여주지.]
[고맙다. 이계의 전사여! 이게 지금 내가 줄 수 있는 최선이다.]
뭘 준다는 거지?
'윽!'
순간 내 머릿속으로 무언가 흘러들어왔다.
동시에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대체 무슨?
.
.
[언어 분석 진행률······100.00%]
[언어 분석이 끝났습니다.]
[거신의 언어를 습득했습니다.]
난 순식간에 거신의 언어를 습득했다.
원래는 거신의 갑옷 안쪽에 새겨져 있다는 거신의 언어를 보면서 언어를 추가로 분석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젠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암 드로운이 내게 큰 선물을 주었다.
[이계 전사여! 우리의 갑옷, 아니 기간트의 비밀을 알고 싶으면 메제트의 탑으로 가라!]
[메제트의 탑?]
[이계 전사여! 그대 앞길에 신의 축복이 가득하길.]
그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잠깐, 탑이 어디 있는지······.]
운명의 실이 검은색으로 물들었다.
[인형에게 기사회생(lv.4) 스킬을 사용했습니다.]
거신은 죽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의 의식을 보고 거신의 삶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은 수백 년을 살고, 태어나자마자 수백 년 동안 괴수와 끊임없이 싸웠다.
그리고 헬다임 장벽은 하루아침에 생긴 것이 아니었다.
수백, 수천 년 동안 거신들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진 결과물이었다.
'어째서 조용하지?'
진작, 기사회생 스킬 성공 여부가 나왔어야 정상인데?
그때였다.
운명의 실이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허수아비(lv.1) 마법인형을 만들었습니다.]
'서, 성공했다!'
이계 난민들을 돕기로 하니까 행운이 찾아오나?
얼음에 갇힌 거신이 내 마법인형이 되었다.
[레벨(lv.15)이 올랐습니다.]
[레벨(lv.16)이 올랐습니다.]
.
.
.
이게 무슨 일이지?
죽은 거신을 허수아비로 만든 것뿐인데, 계속해서 레벨업 알람이 떴다.
.
[레벨(lv.21)이 올랐습니다.]
[헌터 등급이 올랐습니다. (E -> D)]
[레벨(lv.22)이 올랐습니다.]
대체 어디까지 올라가는 거야?
.
.
[레벨(lv.30)이 올랐습니다.]
[레벨(lv.31)이 올랐습니다.]
[헌터 등급이 올랐습니다. (D -> C)]
.
.
[레벨(lv.37)이 올랐습니다.]
허! 대체 거신 마법인형의 잠재능력이 얼마나 높은 거야?
한꺼번에 인형술사 레벨이 22이나 오르다니!
게다가 헌터 등급도 2단계나 올랐다.
전생에 S급 헌터였던 동료를 마법인형으로 만들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어쩌면 전생에 한 번도 만들지 못했던 마법인형이 탄생할 수도 있겠네!'
분신인형보다 강력하고 뛰어난 다음 단계의 마법인형을······.
그리고 헌터 등급이 2단계나 올라가자, 내 인형의 집 공간이 몇 배로 늘었다.
비좁았던 공간이 축구장만 한 공간으로 대폭 늘었으니, 짹이 좋아하겠지?
서둘러 거신 허수아비를 인형의 집에 넣었다.
'아! 그렇구나!'
인형이 거인이니까 몸에 걸친 갑옷도 그대로 입고 들어갔다!
게다가 배에 박혀 있는 10미터 길이의 괴수 칼날까지 그대로 옮겨왔다.
쿵!
'헛!'
쿠쿠쿵!
거신이 사라지자, 커다란 공간이 생겼고 얼음 덩어리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얼음 동굴의 붕괴가 나 때문에 더 빨라졌다.
'사마귀, 들어가!'
사마귀를 인형의 집에 넣고, 영혼 이동 스킬을 풀었다.
"윽!"
본체로 돌아오자, 머리에 두통이 몰려왔다.
이미 코에서 코피가 흘러 내 상체를 적신 상태였다.
아마도 거신의 언어를 한꺼번에 배우면서 몸에 무리가 간 것 같았다.
늘 무표정했던 짹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마스터, 괜찮으십니까?]
"괜찮아! 둘 다 인형의 집에 들어가 있어."
[네!]
난 바로 얼음 동굴 입구로 달렸다.
입구에서 70여 미터 안쪽에 도끼로 얼음을 깨고 3번째 폰급 거신을 꺼내고 있는 기간트들이 보였다.
"동굴이 무너진다! 어서 나와!"
[뭐?]
쿵!
보리스 소령의 비숍급 기간트가 큰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쿵! 쿠쿵!
이미 안쪽에서부터 얼음 동굴이 무너지고 있었다.
[모두 거신의 시신을 챙겨 나가라!]
보리스 소령이 소리를 질렀다.
[헉! 동굴이 무너진다!]
[어서 나가!]
기간들이 이미 꺼낸 2구의 거신 시체를 들고 달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정작 보리스 소령은 폰급 거신의 다리를 덮은 얼음을 마저 깨고 있었다.
"뭐하십니까? 어서 나오십시오!"
이미 내 목소리는 무너지는 동굴의 굉음 때문에 들리지 않았다.
[됐다!]
보리스 소령은 기어이 세 번째 거신 시체를 어깨에 둘러메고 달리기 시작했다.
그사이 다른 기간트는 모두 동굴 밖으로 나왔다.
"어서 빨리!"
[소령님! 달리십시오!]
쿵! 쿵! 쿵!
집채만 한 얼음이 기간트 주변으로 내려꽂혔다.
하지만 보리스 소령은 멈추지 않았다.
그의 기간트가 거의 입구에 도착했을 때였다.
갑자기 소령의 기간트가 물이 흥건한 바닥에 미끄러지며 휘청였다.
[으헉!]
[위험해!]
기사들이 비명을 질렀다.
다행히 기간트가 다시 중심을 잡고, 입구를 향해 달렸다.
쿵! 쿠왕!
동굴 안쪽에서 엄청난 굉음이 들렸다.
보리스 소령의 기간트는 아슬아슬하게 빠져나왔다.
"입구에서 벗어나라!"
쾅! 콰콰콰쾅!
콰르르릉!
연이어 동굴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고, 수십 톤의 물과 얼음 파편이 입구에서 쏟아져 나왔다.
치이익! 철컹!
"휴! 큰일 날뻔했네."
보리스 소령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아니! 왜 이렇게 무리를 하신 겁니까?"
"거신을 하나라도 더 꺼내야. 내 차례가 올 것이 아닌가!"
"네? 아!"
무슨 말인가 했다.
그도 기사였다.
기사들의 꿈은 거신의 갑옷으로 만든 오리지널 기간트에 타는 것이었고, 보리스 소령도 마찬가지였다.
오리지널 기간트는 폰급만 되도 기본적으로 1단계 높은 나이트급 기간트를 상대할 수 있었고, 특별한 마법이라도 새겨져 있으면 2단계 높은 비숍급까지 상대할 수 있었다.
게다가 기간트와 싱크로율이 높을수록 개개인의 무예 실력을 뽐낼 수 있었기에 엠버 중령처럼 검술의 고수가 쓰면 그 위력은 더 올라간다.
하지만 지금은 미련한 짓이었다.
죽으면 기간트가 다 무슨 소용인가.
"젠장! 나이트급 거신 시체를 꺼내지 못했어!"
보리스 소령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난 피식 웃어줬다.
"그건 어차피 얼음에 깊이 박혀 있었으니, 나중에 얼음이 녹은 후에 꺼내와도 됩니다."
"아! 그렇군."
"그만 캠프로 내려 가시죠."
우린 거신의 시체를 챙겨서 베이스캠프로 내려왔다.
갑옷은 분리하고 거신의 시체는 정중히 묻었다.
제국에서도 가끔 거신의 갑옷이 발견되지만, 내부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기에 이처럼 온전한 시신은 처음이었다.
***
늦은 밤 피곤한 몸을 이끌고 텐트로 들어왔다.
거신의 갑옷을 찾는 임무도 완수했고, 오늘은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
하지만 잠은 자지 못할 것 같았다.
[인형의 집]
인형의 집을 열자, 거신 허수아비가 날 쳐다보고 있었다.
벌써부터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건 단순히 거대한 마법인형 하나가 생긴 것이 아니었다.
그는 마법사였고, 기사였다.
그 말은 거신인형은 마석 배터리가 필요 없다는 것이었고, 거신의 타고난 힘과 마나만으로 동급 기간트보다 더 강력한 힘을 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11미터의 룩급 거신!
레벨을 올리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진 모르지만, 그가 꼭두각시 레벨을 한계까지 올리거나 자동인형이 되었을 때, 전장을 누빌 그림을 상상해보라!
너무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것만이 아니지!'
600초의 딜레이가 있긴 하지만 거신인형의 힘이면 아무리 큰 기간트라도 얼마든지 인형의 집에 넣고 뺄 수 있었다.
그러니 기간트만 생기면 더그와 엘다크를 곧바로 실전에 투입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지금이야 내 마나인형이 둘밖에 없었지만, 나중에 더 늘어나고 기간트도 더 생긴다면!
내 인형의 집은 어디든 이동할 수 있는 기간트 항공모함이 되는 셈이다.
이러니 신날 수밖에!!
난 거신 허수아비를 꼭두각시로 만들기 위해 운명의 실을 한땀 한땀 붙이기 시작했다.
28. 마석 탐색기.
28. 마석 탐색기.
[운명의 실타래(lv.5) - 587/700]
[꼭두각시 제작에 실패했습니다.]
'뭐? 50개로 부족하다고?'
살짝 긴장했다.
일반적인 인간형 마법인형의 경우 운명의 실 50개면 충분히 꼭두각시로 업그레이드할 수 있었다.
'거신인형은 체격이 워낙 크니까 더 필요할 수도 있겠네.'
바로 수긍했다.
표범 괴수의 경우도 처음엔 50개로 연결했다가 나중에 20개를 더 연결했다. 크기도 크기지만 인간과 구조도 다르고, 쓰임이 다른 근육도 많아서 나중에 더 추가하고서야 레벨을 빠르게 올릴 수 있었다.
물론 현재 가장 많은 운명의 실타래를 쓰는 건 가장 작은 사마귀 꼭두각시였다.
다리도 많고, 날개까지 있었기에 90개나 되는 운명의 실이 연결된 상태였다.
그래도 아직 여유가 있었기에 거신인형의 몸에 한땀 한땀 운명의 실을 추가했다.
[운명의 실타래(lv.5) - 637/700]
그렇게 50개를 더 연결하고.
"꼭두각시 제작!"
[꼭두각시 제작에 실패했습니다.]
'뭐야? 100개로도 안 돼?'
하긴 잠재력이 S급 헌터 이상인데, 운명의 실 100개로 꼭두각시를 만들었다면 도둑놈이지.
다시 한번 더 스스로 위안으로 삼았다.
'일단 이번에도 안되면, 쿠훌린을 빼고 오크에게 연결한 운명의 실을 모두 회수하자. 엘프도 마르실과 에테나 것만 남겨두고 회수하고.'
그래도 부족하면 타냐 블랙과 기간트 기사들에게 연결한 운명의 실도 다 빼고.
최후의 경우엔 다른 꼭두각시와 연결한 운명의 실을 거둬들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까진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꼭두각시와 연결된 운명의 실을 삼 분의 이 이상 회수하면 기껏 올린 레벨이 초기화되니까.
다시 거신인형에 운명의 실 50개를 추가로 연결했다.
[운명의 실타래(lv.5) - 687/700]
이번에 돼야 할 텐데······.
손이 살짝 떨린다.
"꼭두각시 제작!"
마른침을 삼켰고 운명의 실을 지켜봤다.
그 순간 연결된 운명의 실이 일제히 초록색으로 물들었다.
[꼭두각시(lv.1) 마법인형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렇지! 됐다!"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150개 운명의 실로 이 거신인형을 움직일 수 있다면 남는 장사였다.
난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고 곧바로 양손과 양팔을 움직이는 훈련을 시작했다.
'크기가 커서 그런가? 컨트롤이 조금 힘드네.'
지금은 거신인형의 배에 박힌 칼날을 빼기 위함이었다.
표범 꼭두각시와 훈련용 기간트, 내 마법인형들이 모두 달려들었지만, 거신인형의 배에 박힌 칼날을 빼지 못했다.
더 강한 힘이 필요했기에 거신 스스로 힘으로 빼낼 생각이었다.
그렇게 동작을 연습하기를 세 시간.
이제 양손에 힘을 주고 팔을 당기거나 밀 정도로 훈련은 되어 있었다.
사실 영혼 이동을 통해 훈련하거나 내가 직접 칼날을 빼면 더 빠르겠지만, 그러진 않았다.
거신과 처음에 눈을 마주치고, 의식이 연결됐을 때 느꼈다.
이 거신인형과 난 싱크로율이 매우 좋다.
그러니 지금 영혼 이동을 하면 배가 뚫린 엄청난 고통을 느낄 테니까.
"자! 모두 힘내자!"
거신인형이 양손으로 배와 가까운 칼날을 잡았다.
그리고 표범 꼭두각시가 앞쪽에서 칼날 끝을 물었고, 더그가 탄 훈련용 기간트가 칼날 앞부분을 잡았다.
"힘내라! 당겨!"
내가 신호를 주자 다 함께 힘차게 당겼다.
촤아아아! 팟!
길이 10미터의 칼날이 빠졌다.
"휴! 잘했어!"
큰 고비를 하나 넘겼다.
'이제 갑옷과 장비를 벗자!'
거신인형이 양손을 움직여 자신의 장비를 하나씩 벗었다.
투구와 부츠, 컨틀릿은 스스로 벗었고, 갑옷은 표범 괴수와 더그가 탄 훈련기가 도와서 겨우 벗겼다.
그렇게 전부 벗은 거신인형의 모습은 인간과 똑같이 생겼다.
단지 거대할 뿐.
'헛! 잘생겼잖아!'
암 드로운은 꽃미남이었다.
난 암 드로운을 바닥에 눕혔다.
배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으니 당분간 회복에 전념해야 했다.
그리고 난 거신인형의 구멍 난 갑옷 내부를 살폈다.
'정말 거신의 언어가 새겨져 있네.'
마법진과 거신의 언어가 갑옷 내부에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다.
거신의 언어는 알아볼 수 있었는데, 마법진은 생소했다.
이건 상태창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
거신의 마법을 이해하는 스킬이라도 배우면 모를까.
'영혼 이동을 하다 보면 거신 마법도 배울 수도 있지 않을까?'
암 드로운은 기사이자 마법사였으니까, 어쩌면 가능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그는 나와 싱크로율이 매우 좋을 테니, 어쩌면 그의 얼음 마법이나 거신의 다른 마법을 스킬로 배울 수도 있었다.
벌써 거신인형에 스킬을 배울 생각을 하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물론 그 전에 마나부터 왕창 늘려야겠지만.
'근데 갑옷의 구멍은 어떻게 메꾸지?'
갑옷의 앞과 뒤쪽에 생긴 큰 구멍이 문제였다.
일단 괴수 부산물은 많으니까 적당한 것을 찾아서 덮어주면 되지 않을까?
드워프가 괴수 부산물을 가공할 수 있다니, 그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더그, 한곳에 잘 모아놔!'
기이잉! 척! 척!
더그가 탄 훈련기가 거신인형이 벗은 장비와 갑옷을 차례로 옮겼다.
그때 거신의 배에서 뺀 칼날 뼈가 눈에 들어왔다.
[드라우켄의 어깨뼈 - ★★★★★]
"오! 이건 대단한데!"
상태창으로 보자, 등급에 별 5개가 빤짝였다.
이건 S급 헌터의 장비 재료.
난 직접 나서서 싸우는 스타일이 아니었기에 S급 무기까진 필요 없었다.
하지만 마법인형들에게 좋은 무기를 줘야 당연히 더 잘 싸웠기에 전생에 많은 무기를 수집했었다.
그러나 S급 장비 재료는 나도 처음이었다.
'이거 내가 쓸까?'
이 정도 크기면 검이나 방패, 도끼 등 인간이 쓸만한 무기와 장비를 많이 만들 수 있었다.
지금 내가 입고 있는 특수 조끼처럼.
아니면 거신인형의 무기로 만들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암 드로운이 쓰던 검과 방패는 아직 얼음 동굴 안에 있었으니, 거신인형은 그걸 쓰면 된다.
"하아암!"
이젠 눈을 뜨기 힘들 정도.
지금은 거신인형도 나도 쉴 때였다.
***
"한참 걸리겠지?"
"한참 걸리겠는데요."
"쿠오크!"
쿠훌린이 침을 화살처럼 쏘며 이야기하자, 보리스 소령이 기겁하며 뒤로 물러섰다.
"오크가 뭐라고 하는 거야?"
"얼음이 녹으려면 한참 걸릴 것 같다는데요."
"그치!"
보리스 소령은 동굴 입구를 막은 거대한 얼음을 보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기간트로 얼음을 뚫고 들어갈까?"
"그러다가 또 무너지는 수가 있습니다."
"그치! 그건 너무 위험하지."
"네."
보리스 소령은 자신의 머리를 긁었다.
고민되겠지.
안에 아직 나이트급 거신의 시체가 하나 더 있었다.
그걸 놓고 가자니 너무 아까웠고, 챙겨서 가자니 언제 얼음이 녹을지 모르는 상황.
게다가 식량과 보급품도 계속 줄어들고 있었다.
그리고 돌아가는 길엔 다른 영지의 전진 기지엔 들릴 수 없었다.
거신의 갑옷과 장비를 보는 순간 누군가 눈이 돌아갈지 모르니까.
그러니 돌아가는 길은 최대한 빠르고 은밀히 이동해야 했다.
"한가지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말해 보게?"
"저 거신의 갑옷과 장비를 가지고 어떻게 기간트를 만드는 겁니까?"
"응?"
보리스 소령이 피식 웃었다.
"사실 나도 정확히는 모르네. 그저 할데가르나 다른 기간트 생산공장에 가져다주면, 6개월 후에 기간트로 만들어 준다는 것밖에."
"비용은요?"
"엄청나게 들겠지. 그거야 높으신 분들이 알아서 할 일이고."
보리스 소령이 미간을 좁혔다.
"그나저나 어서 얼음이 녹아야 할 텐데, 식량도 줄어들고 괴수도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데······."
"저기 이렇게 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보리스 소령에게 내 생각을 이야기했다.
"뭐? 원정대를 둘로 나누자고?"
"네! 돌아가는 길은 아실 테니, 보리스 소령님께서 기사들과 병사를 이끌고, 지금까지 찾은 거신 장비를 가지고 먼저 출발하십시오. 전 용병들과 얼음이 녹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나이트급 거신의 장비를 챙겨서 따라가겠습니다."
내 말에 보리스 소령이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곤 고개를 흔들었다.
"에이! 어떻게 우리만 돌아가겠나. 함께 왔으니 함께 가야지. 그리고 이곳은 위험한 곳이네."
"콜벳 대위님의 기간트만 남겨주십시오. 용병들의 기간트도 3대나 되고, 오크와 엘프도 있으니, 저희끼리 충분히 돌아갈 수 있습니다. 이곳까지 오는 길에 오크와 엘프들의 실력은 보시지 않았습니까."
"그건 그렇지만 전에 늑대 괴수 무리를 몰살한 거수가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일이네."
"그러니 더더욱 먼저 출발하셔야 합니다."
"······응?"
"생각해보십시오. 만약 그 괴수가 나타나면 우리가 제대로 상대할 수 있겠습니까? 룩급 기간트가 몇 대 있는 것도 아니고, 비숍급 기간트 한 대와 나이트급 기간트들로 그 괴수를 상대할 수 있겠습니까?"
보리스 소령이 미간을 찡그렸다.
그도 알고 있었다.
우리의 전력으론 늑대 괴수 무리를 죽인 그 거수를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을.
"십중팔구 우린 도망치기 바쁠 겁니다. 그럼 거신의 장비도 회수하지 못하고, 개죽음만 당할 겁니다. 그러니 소령님께서 먼저 장비를 챙겨서 돌아가셔야 합니다. 그리고 우린 근처에 숨어 있다가 얼음이 녹으면 나머지 장비를 챙겨서 뒤따라가겠습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드라우켄이 이곳에 다시 나타날 확률은 거의 없었다.
드라우켄은 거신들에게 당해 상처도 많이 입었고, 얼음 동굴에 오랜 세월을 강제로 갇혀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거신들에게 아주 호되게 당했으니, 장벽 반대 방향인 북쪽으로 도망친 것이다.
혹여 놈이 다시 돌아오더라도 상처 입은 몸이 완전히 회복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니 당분간 이 근처에 나타날 일은 없었다.
"차라리 그냥 다 함께 귀환하는 건 어떻겠나?"
"네? 나이트급 거신 갑옷을 포기하란 말씀입니까?"
"포기가 아니라, 나중에 더 많은 기간트를 끌고 다시 오면 되지."
난 고개를 흔들었다.
"그때가 되면 이미 소문이 다 퍼져 있을 겁니다. 다른 영지 사냥팀이나 타국의 사냥팀까지 죄다 이곳으로 몰려와 싸움이 날 겁니다."
"맞아! 그럴 가능성이 크겠군."
보리스 소령도 내 말을 듣자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제 임무는 거신의 시신을 확인하고, 장벽 사령부까지 거신의 갑옷과 장비를 가져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제가 마지막까지 남아 임무를 완수하게 해주십시오."
"하지만 여기에 남아 있는 것은 너무 위험하네."
"군인이 어찌 이 정도 위험에 물러서겠습니까. 제 한 몸 바쳐서라도 임무를 완수할 뿐입니다."
"허! 대단하군. 자넨 진정 훌륭한 군인이야."
"소령님께선 먼저 돌아가세요. 이건 총지휘관으로서 내리는 마지막 명령입니다."
내 명령에 보리스 소령의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 같았다.
결국, 내 설득으로 보리스 소령과 일행은 먼저 전진 기지로 출발하기로 했다.
이건 내 의도였다.
얼음 동굴 안에 있는 나이트급 거신 갑옷이야 내 것이 아니지만, 그 안에 있는 암 드로운의 검과 방패는 내가 챙겨야 했다.
괜히 잘못해 소령과 기간트가 먼저 수색했다간 무기를 빼앗길 수도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거신이 있었다는 의심을 할 수도 있고.
그러니 그와 기간트들을 먼저 돌려보내야 했다.
룩급 오리지널 기간트의 무기는 아주 비쌀 것이다.
그리고 이 일이 끝나면 곧바로 살루스 영지의 전진 기지로 가서 200여 명의 드워프를 구해야 했다.
전진 기지로 돌아갔다간 이번에 챙긴 거신의 장비를 가지고 곧바로 장벽으로 가게 될 테니까.
***
이른 새벽.
"쿠오크! 타일러여! 얼음이 거의 다 녹았다."
쿠훌린이 내게 소식을 알려왔다.
생각보다 얼음이 빨리 녹았다.
"좋다! 어서 가자!"
난 오크들과 곧장 동굴 입구로 향했다.
"쿠훌린 입구를 잘 지켜!"
"쿠오크! 타일러여! 우리를 믿어라!"
쿠훌린과 오크들이 그동안 동굴 입구를 잘 지켜줬다.
트라스의 개 용병들이나 콜벳 대위가 동굴에 들어가기 전에 내가 먼저 수색해야 했으니까.
지금 내가 가장 믿는 것은 오크들이었다.
그들의 처지가 가장 절박해 보였고, 또 나를 가장 잘 따르고 있었다.
사마귀가 동굴로 먼저 날아 들어갔고, 표범 꼭두각시도 수색을 시작했다.
나도 안으로 들어갔다.
아직 동굴의 물이 다 빠진 건 아니라 가슴까지 차 있었고, 가끔 집채만 한 얼음 덩어리도 보였다.
'거신인형 출격!'
쓰으윽! 쿵! 쿵!
처음 세상에 나온 거신인형이 잠시 일시 정지 상태였다.
배치 후 2, 3초 정도밖에 되지 않지만, 딜레이가 있었다.
그리곤 내 명령을 받아 날 자신의 어깨 위에 앉혔다.
11미터의 거신이 얼음을 치우며 앞으로 나갔다.
'어두우니까 조심······!'
그 순간 거신인형의 눈이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뭐, 뭐야? 지금 마법을 쓴 거야?'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지?
내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닌데, 거신인형이 어둠을 밝게 보는 마법을 사용했다.
물론 거신인형의 눈에도 운명의 실을 연결하긴 했지만, 마법도 모르는 내가 가르쳐 줄 순 없었다.
이건 사마귀나 표범 꼭두각시와 상황이 달랐다.
그 괴수들은 원래 야간 시력이 좋은 것이라 레벨이 오르고 신체 능력을 회복하면서 야간 시력도 좋아진 것이지만, 거신인형은 지금 마법을 사용하고 있었다.
'아! 아니면 마나를 눈에 집중한 건가?'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짹! 밖으로 나와!'
더 참지 못하고 짹에게 내 몸을 맡기고, 영혼 이동 스킬을 사용했다.
[영혼 이동(lv.5) 스킬을 사용했습니다.]
그동안 꾸준히 더그와 엘다크 꼭두각시에게 영혼 이동을 사용해 훈련용 기간트를 몰았기에 스킬 레벨이 상당히 올랐다.
이제 스킬 성공 확률은 70%.
살짝 긴장했다.
거신의 몸으로 들어가 이상해지는 것은 아닐까?
인형술사가 마법인형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닌데, 거신인형이 처음이라 조심스럽긴 했다.
[영혼 이동에 성공했습니다. 남은 시간 – 00:59:59]
점점 시야가 밝아진다.
그리고 어둠에 눈이 익숙해졌다.
마법이 아니구나!
나도 이제 이 세계 마나를 조금은 느낄 수 있었기에 알 수 있었다.
마나를 눈에 집중한 것이었다.
'이건 나도 할 수 있겠는데?'
아직 마나가 쥐꼬리만큼밖에 없었지만, 이 느낌을 기억해 연습한다면, 스킬이 없이도 어둠 속을 꿰뚫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거신의 몸에서 거대한 마나가 느껴졌다.
더그나 엘다크의 마나가 반딧불이라면 이건 마치 거대한 달빛 같은 느낌이었다.
'역시 싱크로율이 좋네!'
거신인형과의 싱크로율이 높았기에 짹처럼 자동인형이 되는 기간도 짧을 것 같았다.
그 전에 스킬이나 마법을 최대한 뽑아 먹어야겠다.
야간 시력이 좋아지자, 거침없이 앞으로 움직였다.
아직 전투 같은 격렬한 움직임은 할 수 없었지만, 걷거나 물건을 들어 올리는 정도는 충분히 수행할 수 있었다.
파드드득!
사마귀 꼭두각시가 뭔가를 찾았다.
그쪽으로 이동해 보니, 물속에 뭔가 있었다.
'어? 창이네!'
이건 폰급 거신이 사용했던 창이었다.
보리스 소령이 이건 미처 챙기지 못한 것 같았다.
'보는 사람도 없고, 내가 챙기기로 했다.'
오리지널 기간트 무기는 비쌌으니까.
그런데 내가 상태창을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창이 약간 푸르스름한 빛을 품고 있었다.
'뭐지?'
정신을 집중하고 눈으로 마나를 더 흘려보냈다.
그러자 창에서 점점 푸른 빛이 더 밝아졌다.
그리고 주변은 조금 더 어두워졌다.
고개를 들어 보자, 저 앞쪽으로 푸른 빛이 반짝였다.
난 빛이 나는 쪽으로 이동했다.
물은 점점 더 깊어서 거신인형의 허리까지 차올랐다.
그리고 빛이 나는 곳에 도착했다.
빛의 정체는 암 드로운이 사용했던 방패와 검이었다.
이것들은 폰급 기사의 창보다 훨씬 푸른빛이 진했다.
"크릉!"
그때 표범 꼭두각시가 헤엄을 치며 뭔가 커다란 것을 끌고 왔다.
그건 거대한 괴수 시체였다.
이 시체는 드라우켄이 죽여서 암 드로운에게 미끼로 던졌던 A등급 괴수로 원래 이 동굴에 살던 놈이었다.
그런데 괴수의 몸속에서 계속 푸른 빛이 반짝였다.
눈에 마나를 더 집중해봤다.
그러자 주변은 더 어두워지고, 괴수 몸속의 빛은 더 강렬해졌다.
검을 들고 괴수의 뱃속을 갈라봤다.
그 속엔 어른 주먹만 한 최상급 마석이 들어 있었다.
29. 악연.
29. 악연.
'최상급 마석이라니!'
이건 워낙 순도가 높았기에 마석 배터리를 몇십 개는 만들 수 있다고 들었다. 그리고 오리지널 기간트나 룩급 같은 상급 기간트를 제작할 때도 쓰인다고 했으니 가격이 엄청 비쌀 것이다.
전혀 생각지도 않은 행운에 피식 웃음이 흘렀다.
괴수를 물고 온 표범(lv.10) 꼭두각시 칭찬해!
'어째 점점 똑똑해지는 게 이 녀석도 자동인형으로 업그레이드하려나?'
표범은 이미 신체 능력이 만렙이라 더는 레벨도 오르지 않았지만, 아직까지도 가장 믿을만한 마법인형이었다.
거신인형의 고개를 천천히 돌려보았다.
동굴 속은 전보다 더욱 어두웠고 사물은 더 흐릿하게 보였다.
하지만 거신의 장비는 더욱 푸른빛을 뿜어낸다.
그때 커다란 바위 뒤쪽에 거꾸로 세워진 나이트급 거신 사체를 발견했다.
정확히는 투구와 갑옷, 장비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빛을 발견한 것이지만.
'저건 분명 조금 전까진 보지 못했던 것이었어!'
아니 바위 뒤에 있었기에 볼 수 없던 것이었다.
마석과 똑같은 푸른빛을 내는 것을 보면 거신의 갑옷과 장비엔 마석이 다량 함유되어 있을 것이다.
'아! 눈으로 마석을 보는구나!'
어쩌면 이 눈으로 마나를 보는 것일 수도 있었다.
마석은 마나의 결정체니까!
그런데 바위 뒤에 있는 거신의 갑옷이나 괴수 배 속에 있는 마석을 어떻게 보는 걸까?
이건 선뜻 이해하기 힘들었다.
'설마, 투시라도 하는 건가?'
아니면 마나를 강화한 눈으로 보면 마나가 없는 사물은 통과하고, 마나가 서려 있는 물체만 볼 수도 있다.
마법은 아니지만 뭔가 신비한 능력이었다.
암 드로운이 마법사라 그런 것인지 아니면 거신들의 원래 능력이었는지 궁금했다.
아니 그 전에 확인이 더 필요했다.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새로운 베이스캠프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미친! 확실해! 저건 마석 배터리야!'
멀리 보초를 서고 있는 용병 기간트의 등에 푸른 빛을 뿜어내는 마석 배터리가 보였다.
그리고 기간트의 기체에서도 약하지만, 희미한 푸른빛이 맴도는 것이 보였다. 아마도 일반 기간트에도 마석이 소량 함유되어 있는 것 같았다.
내가 놀란 것은 지금 거신의 눈은 동굴 벽과 계곡을 통과해 600미터나 떨어져 있는 베이스캠프의 마석 배터리를 탐지한 것이다.
허! 정말 벽을 뚫고 마석을 보다니!
'완전 마석 탐지기네!'
혹은 마나 레이더라고 불러도 될 것 같았다.
이제 난 거신의 눈으로 땅속이나 산속에 있는 마석 광산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물론 거리가 얼마나 될지 테스트를 더 해봐야겠지만 최소 600미터 안에 마석은 모두 탐지할 수 있었다.
마석을 품은 괴수를 찾을 때도 유용하겠는데!
등급이 높은 괴수일수록 마석을 품고 있을 가능성이 컸기에 이 능력을 이용하면 숨어 있는 강한 괴수를 쉽게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쩌면 거신 기사들이 대수림에서 드라우켄을 쫓을 수 있었던 것도 이 능력을 사용했기 때문이 아닐까?
하지만 전투에는 사용하지 못한다.
벽이나 나무, 바위 등 주변 사물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할 테니까.
오늘 거신인형 덕분에 마나에 관한 새로운 사실과 능력을 깨달았다.
눈에 집중한 마나를 천천히 거둬들이자, 곧 푸른 안광이 사라지고 보랏빛 눈으로 돌아왔다.
야간 시야는 이 상태가 딱 적당하네.
'어? 이건 잘하면 나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동안 더그와 엘다크로 영혼 이동을 하면서 훈련용 더미 기간트를 타고 꾸준히 연습했다.
덕분에 마나 운용에 대해 익숙해졌고, 내 마나도 제법 늘었다.
그리고 오늘 마나를 눈에 집중하는 법을 거신인형을 통해 배웠다.
아직 훈련기에 탈 마나 수준도 되지 않았지만, 보랏빛 눈 정도는 나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몸으로 돌아가면 연습해 봐야겠어!
'일단 이곳부터 정리할까.'
나이트급 거신의 시체는 동굴 입구에 옮겨다 놓았고,
이곳에서 챙긴 암 드로운의 검과 방패, 나이트급 기사의 검, 폰급 기사의 창, 그리고 괴수의 뱃속에서 찾은 최상급 마석은 모두 거신인형이 들고 인형의 집으로 들어갔다.
***
다음 날 아침.
우린 돌아갈 채비를 했다.
전날 거신의 시체를 정중히 묻었고, 용병들의 마차에 거신의 장비와 갑옷을 나눠 실었다. 그리고 밖에서 보이지 않게 커다란 포대로 이중으로 가리고 단단하게 포장까지 마쳤다.
"타냐 블랙, 욕심이 나지 않으시오?"
"뭐요? 아! 나이트급 거신 갑옷 말이군."
"그렇소."
타냐가 피식 웃었다.
"물론 욕심은 나지. 이걸 암시장에 팔면 우리 용병대 살림이 확 필 테니까. 하지만 이걸 꿀꺽했다간 제국에서 가만있겠소? 돈 때문에 33살 꽃다운 나이로 죽고 싶진 않소."
은연중에 그녀는 자기 나이를 밝혔다.
근데 33살이 꽃다운 나이인가?
아무튼, 나도 피식 웃어줬다.
"하긴, 살아남아야 부귀영화도 있는 법이지. 그럼 슬슬 출발합시다."
"알겠소. 내가 선두로 나서지."
타냐가 자신의 나이트급 기간트에 올라탔다.
기이이잉! 쿵!
[자! 집으로 돌아가자!]
[가자!]
"와아아아!"
용병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귀환을 가장 반기는 것은 엘프들이었다.
그녀들은 어서 장벽 너머로 가고 싶을 테니까.
나도 어서 집에 가서 쉬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 할 일이 남았으니, 긴장의 끈을 놓을 순 없었다.
'기다려라. 드워프! 내가 구하러 간다.'
나도 마차에 올라탔다.
"글래디스, 내게 무슨 할 말이 없나? 요즘 너무 조용해?"
"알아서 잘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뭐 제가 딱히 도움을 드릴 것도 없고······."
글래디스가 대놓고 섭섭함을 내비쳤다.
사실 요즘 글래디스와 함께 다니는 일이 거의 없었다.
아니! 내가 일부러 거리를 둔다는 것을 알고선 그녀도 자연스럽게 날 상관하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윌리엄 사령관의 사람이었고, 내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할 테니까.
그래도 엘프들과 가까워졌는지, 항상 그녀들과 함께 움직였기에 외롭진 않아 보였다.
"우리도 출발하지."
"이랴!"
용병들의 기간트와 마차가 먼저 출발했고, 우린 그 뒤를 따라 이동했다.
콜벳 대위의 기간트는 맨 뒤에서 우릴 따라왔다.
'그래도 돌아가는 길이라 마음은 가볍네.'
거신인형도 얻었고, 기간트 무기도 제법 챙겼으니까.
슬쩍 인형의 집을 들여다보니, 거신인형이 이젠 빠르게 달리기까지 했다.
하루가 다르게 신체 능력이 올라가니, 나도 깜짝 놀라고 있었다.
더그와 엘다크는 신체 능력을 따로 올리고, 훈련기에 타서 또 기간트 적응 훈련도 해야 하지만, 거신인형은 그 자체가 기간트나 마찬가지.
아니! 기간트보다 훨씬 더 좋다!
거신인형은 싱크로율이란 것이 아예 없었으니까.
'이 녀석의 레벨이 올라가면 얼마나 무서워질까?'
모르긴 몰라도 같은 룩급에선 상대할 기간트가 없을 것이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다른 마법인형은 걸음마를 떼거나 달리기 시작할 때면 최소 3레벨은 올라갔는데, 거신인형은 여전히 1레벨.
워낙 잠재능력이 크고, 성장 가능성이 커서 레벨이 잘 오르지 않는 것이라 여겼다.
그래서 내일부턴 빡세게 검술 훈련도 시키고, 표범 꼭두각시와 모의 전투도 시켜볼 생각이었다.
물론 영혼 이동도 시간 날 때마다 하고.
어서 빨리 강해져라! 거신인형!
'그나저나 윌리엄 사령관은 거신 장비를 모았으니 뭘 할 생각일까?'
비숍급 하나, 나이트급 둘, 폰급 하나.
이 4개로 기간트를 만든다면, 제국의 오리지널 기간트는 27개에서 31개가 된다.
이 정도면 모르긴 몰라도 윌리엄 사령관이 밀고 있다는 황자의 서열이 4번째에서 3번째로 급부상하지 않을까? 어쩌면 후계자 자리도 넘볼 수 있고?
후계 싸움이나 정치 싸움엔 관여하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그 정도 힘을 가지게 된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누구?
바로 나였다!
뛰어난 길잡이를 고용한 것도 나고, 내 마법인형과 엘프, 오크를 이용해 몇 번이나 위험한 상황을 예측하고 괴수를 처리하고 피해를 막은 것도 나다.
그러니.
'뭘 좀 더 얻어낼 수 있지 않을까?'
가는 길에 좀 더 고민해봐야겠다.
그러고 보면 돈과 기회는 다 대수림에 있구나!
새삼 깨달았다.
내 인형의 집엔 마석과 부산물이 많이 있다.
정말 많았다.
내가 장벽 안에만 있었다면, 이 많은 걸 다 모을 수 있었을까?
아무리 많은 마법인형을 만들었어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리니 기회는 이곳 대수림에 더 많았고, 앞으로 내가 돈을 왕창 벌기 위해서라도 대수림에 자주 와야 했다.
전엔 대수림이 두렵고 무서웠지만, 이젠 거신인형이 있으니 든든했다.
이제 더그나 엘다크가 탈 만한 기간트까지 생긴다면, 그땐 나 혼자 괴수 사냥도 가능할 것 같았다.
'이거 대수림에도 아지트나 전진 기지를 하나 만들어야 하나?'
진지한 고민이 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