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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랙힐 기지 북부군 사령관실]

"충! 부르셨습니까."

"내 특별고문이 회의에 끝까지 참석하지 않고, 어딜 다니는 건가?"

"이미 제가 아는 정보는 다 풀었습니다. 사실 회의는 딱 질색이거든요."

윌리엄 사령관이 피식 웃었다.

"회의를 많이 해야 좋은 안건이 나오는 거네."

"네네, 알겠습니다."

윌리엄 사령관이 시가를 입에 물었다.

"그런 거 많이 피시면 일찍 죽습니다."

"그래? 어쩐지 내 마누라가 다른 건 다 말려도 시가는 그냥 놔두더라니······."

이거 농담인가?

지금 웃어야 하나?

앗! 타이밍을 놓쳤다.

엠버 대령이 사령관의 시가에 불을 붙였다.

"하지만 어쩌겠나. 이 세상에서 내 머리를 아프지 않게 하는 것은 이 녀석밖에 없는데······."

뻐끔뻐끔 연기가 피어오르고.

윌리엄 사령관의 주름진 이마가 펴졌다.

"어때? 자네도 이제 중령이 됐으니, 시가를 배워보지 않겠나?"

"괜찮습니다. 전 벽에 그거 칠할 때까지 살 겁니다."

"젊은 사람이 재미없게."

윌리엄 사령관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좀 얄밉긴 하지만 자네 같은 사람에게 시집을 갔어야 했는데······."

그게 다 가문에 힘이 없어서가 아니겠습니다.

난 속으로 대답했다.

윌리엄 사령관의 정보 파일도 찾아서 읽었다.

윌리엄 호세스 사령관의 외조카는 자기 때문에 7황자에게 시집을 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윌리엄 호세스가 동부 전선에서 활약하며 별을 달고 승승장구하자, 7황자 측에서 혼담을 넣은 것이다.

문제는 정실도 아니고, 둘째 부인.

자식이 없었던 윌리엄은 형편이 어려운 여동생 식구들을 자신의 집에서 함께 살게 했다.

그리고 외조카를 자기 딸처럼 여겼다.

"휴우우!"

윌리엄 사령관이 시가를 재떨이에 올리곤 날 쳐다봤다.

"자네가 함께 가줘야겠어."

"네? 설마, 그건 아니겠지요?"

"자네가 생각하는 거 맞아."

"하아!"

나도 모르게 한탄을 담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지금 내 앞에서 한숨을 쉰 건가?"

"아닙니다."

어째 나를 엄청나게 띄워주더라니······.

"어차피 자네가 원하는 것이 가디언 제국과 협상 아닌가? 협상단의 호위 격으로 가는 것이니, 별일은 없을 거야."

"네······."

"그리고 협상이 잘돼야 자네가 여기서 빼먹을 것이 더 많지 않겠나?"

"네? 그게 무슨?"

갑자기 윌리엄 사령관이 엠버 대령을 향해 나가라는 손짓을 했다.

엠버 대령은 항상 옆에 두시던 분이 왜?

엠버 대령이 밖으로 나갔다.

왠지 싸늘하다.

비수가 날아와 가슴에 꽂힌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이전 카야킨 사령관이었던 프랭크 대령 말이네. 그 부하들 말로는 프랭크 대령이 빼돌린 괴수 부산물이 상당수 사라졌다고 하더군. 마석은 아예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

"그리고 살루스 전진 기지의 포로들 말로는 자신들을 공격한 것이 오리지널 기간트 같다는군. 그리고 살루스 병사들이 드워프를 빼돌린 것이 기간트라고 증언했네. 자네 이 점에 대해 뭐 아는 게 없나?"

"······."

왠지 다 알고 물어보는 것 같은데······.

"사실 나도 누구 짓인지는 모르네. 심증은 있으나 증거가 없으니 누굴 탓할 생각도 없고. 그리고 정체 모를 기간트가 우리를 공격한 것도 아니니까."

"그러시군요."

"솔직히 우리 제국에 피해를 준 것도 아니고, 어차피 다 각자 주머니로 들어갈 것이니, 얼마를 빼먹어도 상관없네. 지금처럼 증거만 없으면 누가 알겠나? 물론 나도 부하들도 알아서 챙기고 있네."

윌리엄 사령관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이 점은 마찬가지야. 우리 제국에 피해만 없다면, 적의 것을 빼앗아 챙기거나 혹은 우리가 모르는 것을 챙긴다면 나는 계속 못 본 척할 것이네."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앞으로 특별고문이 할 일이 많아질 거야. 이번에도 겉으론 협상단 호위 임무지만, 자네가 알아봐야 할 것이 따로 있네."

"말씀하십시오."

"협상은 매우 길게 이어질 거야. 같은 제국의 지휘관들끼리도 의견이 잘 안 맞는 법인데, 지금까지 창칼을 겨누고 있는 사이가 오죽하겠나. 그러니 자네는 협상단과 함께 그곳에 머물면서 가디언 제국의 지휘관들 성격이나 성품을 최대한 알아 오게. 협상이 잘 된다고 해도 언제 깨질지 모르는 평화네. 우린 전쟁에 미리 대비해야 하네. 그러니 내가 알아야만 하는 모든 정보를 캐오게."

"무슨 말씀이신지 잘 알겠습니다."

순간 윌리엄 사령관이 무섭게 느껴졌다.

황제가 이 사람을 대장으로 진급시키고, 북부군 사령관 자리에 앉힌 것은 그의 실력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사람은 북부군 사령관 자리에서 멈출 사람이 아니었다.

어쩌면 내가 동아줄 하나를 제대로 잡았을 수도······.

"저도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응?"

윌리엄 사령관이 피식 웃었다.

"내가 자넬 높이 평하는 이유가 이거네. 욕심이 없는 사람은 성취도에서 큰 차이가 나지. 그래 원하는 것이 뭔가?"

"헬다임 장벽과 가까운 영지를 하나 사고 싶은데요. 보다시피 제가 군에 묶인 몸이라······, 귀족 작위도 없고. 도움을 좀 받고 싶습니다."

윌리엄 사령관의 눈동자가 똥그래졌다.

"허! 자넨 내 생각보다 더 무서운 사람이었군."

아니요! 사령관께서 더 무서운 분이십니다.

아직은요.

윌리엄 사령관은 다 타버린 시가를 한참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를 쳐다봤다.

"좋아! 다른 건 잘 모르겠고, 자네가 작위를 받을 수 있게 내가 힘써보지."

"충! 감사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조언하자면, 영지를 사더라도 처음엔 뒤에 내가 있는 것처럼 분위기를 만들고 가는 게 좋아. 이 세상엔 젊은 사람의 성공을 시샘하는 자들이 많으니까."

"아! 무슨 말씀이신지 잘 알겠습니다. 그리고 정말 감사합니다."

나와 윌리엄 사령관과 협상은 잘 끝났다.

이제 가디언 제국과 협상하러 가자!

협상이 끝나기 전에 뭘 더 챙길 수도 있고.

이미 사령관이 허락했으니까.

62. 곰과 여우.

62. 곰과 여우.

'응? 시안 5군단장이 함께 간다고?'

이상한데?

어제까지 협상단 명단에 시안 오르도 7황자는 없었다.

그런데 왜?

"왜? 의외인가?"

"앗! 깜짝이야!"

뒤에서 불쑥 나타난 것은 윌리엄 사령관이었다.

뭐지? 이 양반 은신술도 익힌 거야?

옆을 쳐다보자, 엠버 대령이 웃음을 참고 있었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살금살금 접근했다고 알려줬다.

점잖은 양반이 이런 장난을 치시다니······.

"시안 황자님은 내가 가시라고 권했네."

"적진이 아닙니까? 왜 굳이 그런 위험을?"

"큰 공부가 되지 않겠나? 주변에 온통 말 잘 듣는 가신들이나 부하들밖에 없으니 너무 독단적으로 변하시는 같아서 말이야. 가디언 제국의 여우들과 협상을 하다 보면, 자신의 그릇을 좀 깨우치시겠지."

윌리엄 사령관의 표정에 왠지 근심이 엿보였다.

물가에 어린아이를 놓은 부모의 표정이 이럴까?

"그럼 협상단 대표는 누굽니까?"

"대표는 그래도 찰스 그레빌 정보국장이네. 저 사람의 능력은 내가 보증하지. 겉으론 덜렁거리고 곰처럼 보이지만, 안엔 여우가 열 마리는 들어 있네."

나도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겉모습에 속으면 안 되지.

"협상 기간은 그리 길지 않을 거야. 저들도 정치적으로 불안한 상태니까."

"그래요? 그건 다행이네요."

윌리엄 사령관이 피식 웃었다.

"혹시, 협상이 어그러지면 깽판을 쳐도 되겠습니까?"

"하하! 그러라고 자네를 보내는 거야."

"네?"

농담으로 한 말인데······.

이 반응은 뭐지?

"시안 황자님을 잘 부탁하네."

"호위 기사들이 잘하겠죠."

"난 자네 대답을 듣고 싶네."

"네네, 알겠습니다."

"좋아! 그만 가지."

윌리엄 사령관과 곧 출발할 협상단이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높으신 분들끼리는 마지막으로 따로 할 말이 있는 것 같아서, 호위 기사들 쪽으로 이동했다.

"와! 이젠 중령이시네요."

로제 소령이 내 계급장을 보더니, 입을 떡 벌렸다.

"하하! 미안하네. 내가 먼저 진급했군."

"아닙니다. 축하드립니다. 그런데 엘프 하사관은 함께 가지 않나요?"

"에테나 하사는 따로 할 일이 있어서, 함께 가진 않네."

"아! 그렇군요."

로제 소령이 방긋 미소를 지었다.

그게 그렇게 기분 좋아질 일인가?

아무리 봐도 그녀가 엠버 대령보다도 마나량이 많은 거 같은데······.

얼마 전에도 마나량을 살펴봤는데, 오리지널 비숍급 기간트에 타야 한다면 사실 그녀가 적임자였다.

그런데 그녀는 오리지널 나이트급 기간트에 타고, 마나량이 훨씬 부족해 보이는 파이컬 중령이 비숍급에 탈 예정이었으니, 뭔가 아쉬웠다.

군대라 계급에서 밀린 거겠지.

"축하하네. 타일러 중령!"

"감사합니다. 파이컬 중령님."

파이컬 중령 역시 5군단장이 협상단에 끼었기에 호위 기사로 차출된 것 같았다.

"그런데 바오트 대위가 안 보입니다?"

삼인방 중의 하나가 없으니 좀 허전해 보였다.

파이컬 중령과 로제 소령이 동시에 미소를 지었다.

파이컬 중령이 주변을 둘러보더니 작게 말했다.

"오리지널 기간트가 완성되어 이리 가져오고 있네."

"아! 축하합니다."

두 기사는 적진으로 가는 건 걱정되지 않는가 보다.

이렇게 좋아하는 걸 보면.

역시 기사들에겐 오리지널 기간트가 가장 큰 당근이었다.

"자! 모두 모이시오!"

엠버 대령이 큰 소리로 말했다.

윌리엄 사령관은 교장 선생님 훈화처럼 협상단과 호위 기사들에게 조심하라고 말하고, 또 최대한 적을 자극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이야기가 좀 길어진다.

이야기를 시작한 지 5분쯤 되자, 한두 명씩 졸기 시작했다.

그래, 원래 말이 많은 양반이었지······.

처음 열차에서 고막에 구멍이 뚫릴 정도로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났다.

지금이었다면 도망쳤겠지만, 그땐 겁많은 소위라 일주일 내내 참고 들었지.

기사들이 절반쯤 졸기 시작했을 때였다.

"그럼 무사히 다녀들 오게!"

"와아아!"

짝짝짝!

다행히 기사들이 전부 졸기 전에 마무리되었다.

기사들은 기간트에 올라타고, 시안 7황자는 로제 소령과 난 찰스 국장과 각자 마차에 올랐다.

"출발!"

목적지는 가디언 제국의 전진 기지.

우린 그렇게 적진으로 향했다.

***

[보르자 전진 기지]

어디로 가는 진 모르겠지만, 수십 대의 마장기가 주변을 오가고 있었다.

쿠쿠쿠쿠쿵!

마장기가 옆을 지나가자, 마차에 진동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썩을 것들!'

환영 인사를 이런 식으로 하네.

벌써 기 싸움에 들어간 것이다.

협상단이 왠지 힘들겠······.

어이없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찰스 국장은 침까지 흘리며 세상 모르게 자고 있다.

하! 강철 심장이시네.

아니면 진짜 생각이 없으신 건가?

이제 나도 조금 헛갈린다.

"찰스 국장님! 일어나십시오. 곧 도착합니다."

몸을 흔들어 깨우자, 그제야 눈을 떴다.

"응? 벌써 도착했다고?"

찰스 국장이 입에 묻은 침을 손등으로 쓰윽 닦았다.

"곧 도착합니다."

"하암! 어젯밤에 잠을 잘못 잤더니, 좀 피곤하군."

코까지 골고 주무신 분이······.

덕분에 제대로 자지 못한 건 나였다.

"워어!"

마차가 멈췄다.

내가 먼저 내리고, 찰스 국장이 내렸다.

그리고 또 다른 마차에서 시안 군단장과 로제 소령이 내렸다.

고개를 돌려 살펴보니 우리 주변으로 수십 기의 마장기가 철통같이 지키고 있었다.

기세를 제대로 꺾으려고 하는군.

며칠 전에 우리 협상단의 방문을 알렸기에 미리 준비한 것 같았다.

그때 입구에 서 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다가왔다.

'별이 몇 개야? 또 훈장은 왜 저렇게 많이 달고 나오셨을까?'

군복을 입은 장군들의 어깨엔 별이 반짝였고, 가슴엔 빈틈없이 훈장이 달려 있었다.

하지만 장군들 맨 앞에서 다가오는 인물은 군인이 아니었다.

빼빼 마른 중년인이었다.

"어험! 어서들 오시오. 난 이곳 전진 기지의 책임자인 라몬 아라곤 후작이오. 내가 귀국과 협상을 맡게 됐소이다."

저들도 최고 책임자는 나오지 않은 것 같았다.

그때 시안 5군단장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난 아베르크 제국의 7황자 시안 오르도요."

"예?"

라몬 후작의 뒤쪽에 있던 장군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설마, 우리 측에서 황자를 보낼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황자의 얼굴을 모를 정도로 서로 교류가 없었다.

"황족이 오셨군요. 영광입니다."

라몬 후작이 가슴에 손을 올리고 상체를 숙였다.

타국의 황족이지만, 예를 표하고 있었다.

만만치 않은 인물이네.

황족을 봐도 전혀 당황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을 슬쩍 훑어보는 여유도 있었다.

"그럼 안으로 드실까요?"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내가 나섰다.

"뭐지?"

라몬 후작이 날 노려봤다.

중령 나부랭이가 끼어들어서 화났나?

"우리 아베르크 제국의 협상단 대표를 소개해 드려야지요."

"······?"

찰스 국장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찰스 그레빌 중장입니다. 정보국 국장 자리를 맡고 있지요."

"그쪽이 아베르크 제국의 협상단 대표라고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하하!"

이번엔 라몬 후작도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둥글둥글하게 생겨서 배까지 나온 중년 아저씨의 모습에 살짝 실망하는 것도 같았다.

"저, 저기. 용무가 좀 급해서 그러는데? 화장실이 어디 있습니까?"

"뭐요?"

뿌우우웅! 푸직!

"흡!"

라몬 후작이 순간 인상을 찡그리며 코를 막고 뒤를 향해 손짓했다.

그러자 뒤쪽에서 중령이 다가왔다.

"큼! 중장님께 화장실을 안내해 드려라!"

"아이고, 감사합니다. 아침에 뭘 잘못 먹었나?"

찰스 국장은 안내하는 중령을 따라 허겁지겁 기지 안으로 들어갔다.

"허! 저런 사람이 아베르크 제국의 협상 대표라니!"

"이거 광대가 따로 없군."

그 모습을 보고 가디언 제국군 장군들은 고개를 흔들기도 했고, 비웃는 사람도 있었다.

우리 쪽 협상단 역시 창피해 고개를 들지 못했다.

나도 얼굴이 화끈거렸으니까.

하지만 난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참! 대단한 양반이네.'

이 주변을 봐라!

여기서부터 입구까지 이어진 길엔 오리지널 마장기 5대와 룩급 마장기들이 아래를 내려다보며 쭉 세워져 있었다.

누구라도 저 길을 걸어간다면 주눅이 들기 마련이었다.

만약 저기서 마장기들이 발이라도 한번 구르면 심장이 철렁 내려앉을 것이다.

이건 필히 여우 같은 라몬 후작이 철저히 계산하고 준비해 놓은 것이었다.

그런데 방금 찰스 국장의 화장실 해프닝 하나로 가디언 제국이 준비한 것을 단번에 허사로 만들었다.

'와우! 저런 건 타고 나야 할 것 같은데······.'

난 때려죽여도 저건 못할 것 같았다.

그동안 나도 얼굴이 두껍다고 생각했지만, 찰스 국장을 보니 아직 멀었다.

세상엔 특이한 사람이 참 많다.

그리고 다들 비웃고 있을 때, 두 주먹을 쥐고 인상을 찡그린 사람이 하나 있었다.

라몬 후작!

당신이 먼저 한 방 먹었네.

'그럼 곰과 여우의 대결인가?'

두 협상단 대표를 보니 그런 그림이 그려졌다.

그런데 방금 진짜 싼 거 아닌가?

우리도 기지 안으로 들어갔다.

***

신경 많이 썼네.

안내받은 방이 아주 깔끔하다.

게다가 시원한 냉기가 나오는 방이라니!

협상단에서 내 신분은 북부군 사령관의 특별고문이 아니라, 협상단 대표의 호위 기사였다.

그런데도 이런 좋은 방을 준 것을 보니, 가디언 제국의 형편과 살림이 더 좋은가?

'확! 전향해 버려?'

물론 농담이다.

아베르크 제국에 벌여놓고 뿌린 게 얼만데, 뼈를 묻어야지.

일단 좀 씻을까?

방에 화장실과 샤워실까지 있다니, 이 정도면 헬다임의 호텔 수준이었다.

물론 저들의 의도는 우리를 최대한 움직이지 못하게 하려고 만들었겠지만, 나는 전혀 상관없다.

물을 틀어놓고, 눈으로 마나를 뿜어냈다.

그리고 천천히 주변을 살폈다.

'입구는 정문 하나. 지하에 하나 더 있네!'

마석이 소량 포함된 거대한 문과 마장기들이 주변을 지키고 있었기에 문이 분명했다.

지하는 어디로 연결되어 있을까?

내가 듣기론 이곳 전진 기지는 지하 통로가 없다고 들었다.

그럼 새로 팠다는 소리였다.

나중에 확인해 봐야겠다.

'근데 여긴 왜 마장기가 지키고 있는 거지?'

거주 구역도 아니었고, 외곽에 마장기들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는 큰 건물이 하나 있었다. 안쪽에도 마나가 반짝이는 물체가 있는 것이 꽤 중요한 물건인 것 같았다.

여기도 나중에 확인해 봐야지.

고개를 천천히 돌려가며 이곳 기지의 전체 마장기 숫자를 파악했다.

'대략 350기 정도로군.'

나머진 그럼 전진 배치했거나 발굴지 근처에 주둔했을 것이다.

'응? 누구지?'

그때 바로 문 너머 내방에 상당한 수준의 마나를 품은 사람이 들어왔다.

로제 소령인가?

오늘은 도착한 날이라 다들 쉬기로 했는데?

일단 샤워를 끝내고 밖으로 나갔다.

소령 계급장을 단 사내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실례합니다."

나이는 20대 중후반.

꽤 젊은 나이에 초고속 진급한 것 같았다.

물론 나만큼은 아니지만.

"누구십니까?"

"엔리크 소령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협상이 끝날 때까지 중령님을 보좌하라는 명을 받고 왔습니다."

"아! 절 감시하러 오신 거군요."

"감시는 아닙니다. 그저 지내시는 데 불편한 점은 없는지, 또 식사는 입에 맞으시는지, 기지가 넓으니 길을 잃어버릴 수도 있어 옆에서 챙겨드리는 역할입니다."

"네. 그렇다고 합시다. 전 타일러입니다. 앞으로 잘 지내봅시다."

"네. 타일러 중령님."

엔리크 소령은 어색하게 웃었다.

"전 바로 옆방에 있습니다. 언제라도 필요하면 불러 주십시오."

"네. 그러죠. 아! 그리고 이런 냉기 나오는 방이라니, 아주 훌륭합니다. 우리 블랙힐 전긴 기지엔 사령관실 빼고는 안 나오거든요."

"아! 그렇습니까?"

"저녁 식사는 언제입니까?"

"왜요? 배고프십니까?"

"시간 없다고 점심도 대충 육포로 때웠거든요."

"그럼 식사하러 가시죠. 아직 식사 시간은 아니지만, 지금쯤 음식은 준비됐을 겁니다."

"오! 감사합니다."

엔리크 소령과 방을 나섰다.

우린 장교 식당으로 향했다.

고기 수프와 빵, 그리고 토마토를 곁들인 샐러드가 나왔다.

"이야! 가디언 제국의 짬밥이 좋네요."

"짬밥이요?"

"군대 밥 말입니다. 어서 드세요."

생각보다 맛있어서 놀랐다.

물론 우리가 온다고 하니, 특별히 준비한 것이겠지만.

"채소는 어떻게 수급합니까?"

"······?"

"생채소를 여기까지 옮기려면 냉기 장치가 달린 마차가 필요하다고 들었습니다. 설마 비싼 마석 배터리를 그런 데 썼나 궁금해서요."

"아! 채소는 여기서 직접 키워서 먹습니다."

"키워요?"

"장벽 너머 본국의 흙을 대량으로 옮기고, 씨앗과 묘목을 가져와 거신목 위와 주변에 텃밭을 조성해 사용하고 있습니다. 처음엔 비용이 많이 들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득이 됩니다."

"아! 그런 방법이 있었네요."

난 왜 그런 방법을 생각지 못했을까?

인형의 집에 흙을 잔뜩 챙겨와 난민 기지에 텃밭을 조성하는 방법을 고민해야겠다.

이건 돈이 문제가 아니었다.

대수림에서 말라비틀어진 건채소가 아니라 신선한 채소를 섭취할 수 있는 것은 큰 복이니까.

"그런데 이런 거 막 알려줘도 되는 겁니까?"

"뭐, 어떻습니까? 군사 기밀도 아닌데요."

"아! 어쩐지 채소가 신선하더라니. 한 접시 더 먹어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제가 가져다드리죠."

장교들 식사 시간이 됐는지, 하나둘 식당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그때였다!

중령 한 명이 엔리크 소령을 보더니, 손을 올리려다가 멈칫거렸다.

'허! 이것 봐라!'

난 빵을 뜯어 먹으면서 다른 곳을 쳐다봤다.

중령이 경례하는 걸 보면 최소 대령 이상, 어쩌면 고위 귀족일 수도 있었다.

'저 녀석도 나처럼 위장 신분이군.'

일이 재미있게 돌아가네.

63. 황자를 구하라(1)!

63. 황자를 구하라(1)!

정말 정치나 협상은 나와 맞지 않는 것 같다.

매일 아침에 같은 시각에 일어나 아침 식사를 하고 티 타임을 가진다.

그리고 오전 협상.

점심을 먹고, 담배를 피운다.

그리고 오후 협상.

저녁을 먹고, 방에서 책을 본다.

그리고 잔다.

'하아! 도대체 같은 말을 몇 번이나 반복하는지.'

그냥 내일부터 각자 알아서 땅을 팝시다.

그럼 될 것을 무슨 말이 저리 많은지······.

또 무슨 조약에 조항은 저리 많은지······.

오늘 아침도 식사 후에 찰스 국장과 회담장으로 향했다.

"협상은 아직 멀었겠죠?"

"왜 지겨운가?"

"두말하면 숨차죠. 아주 죽겠습니다."

"후후! 본래 이런 협상은 몇 달, 길게는 반년은 걸리는 법이지. 하지만 이번엔 그 정도로 오래 끌진 않을 거야. 저들도 후계 문제로 혼란스러워 웬만하면 협상을 빨리 끝내려고 할 거네. 우린 그걸 이용하면 되고."

"아!"

역시, 이 양반은 곰의 탈을 쓴 여우야.

"그런데 저쪽도 황자들끼리 황제가 되겠다고 싸웁니까?"

찰스 국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쪽은 우리보다 더 심하지. 우리 황제 폐하께서는 건강하시지만, 가디언 제국 황제는 병환 때문에 침대에서 업무를 본다는 소문까지 돌고 있거든."

"황제가 오늘내일한다는 말이네요."

"뭐, 그래도 워낙 좋은 약을 쓸 테니, 바로 죽진 않겠지."

그나마 다행이었다.

조금이라도 협상을 일찍 끝낼 수 있으면, 그만큼 발굴 작업도 일찍 시작할 수 있을 거고, 내 파밍도 일찍 시작할 수 있다는 말이니까.

그리고 영지는 사는 것도 생각보다 빨리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일단 회담이 시작되면 호위 기사는 정말 할 일이 없다.

회의실에 도착하자 저쪽 호위 기사들 역시 반대편에 마련된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동안 많이 친해진 엔리크 소령은 내 옆에 앉았다.

"저기, 타일러 중령님, 기간트도 타십니까?"

"응?"

이 녀석은 왜 이렇게 궁금한 점이 많은지, 날 보면 질문이 그치지 않는다.

내 마법인형이었다면 질문인형이라고 이름을 지었을 것이다.

"아니, 난 정보국 소속이야. 기간트는 기사들이나 타는 거지."

"아!"

엔리크는 왠지 아쉬운 표정이었다.

"아베르크의 정보국은 귀족들의 뒤를 캔다고 하던데, 비리를 많이 알고 있으시겠어요?"

"물론이야. 어느 귀족의 주방에 접시 숫자와 포크, 나이프 숫자도 알고 있을 정도지."

"오오!"

살짝 뻥을 치며 호응해줬다.

며칠 살펴보니, 이 녀석의 신분은 최소 투 스타 이상이다.

한번은 준장과 복도에서 마주쳤는데, 엔리크 소령이 못 보고 경례를 하지 않고 지나갔다.

그런데 준장이 그 모습을 보고도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못 본 척 그냥 지나갔다.

이게 말이 되는가?

이 녀석도 황족인가?

강한 의심이 든다.

'이제 엔리크의 정체를 캐는 것도 중요한 일이 됐다.'

그때 회담장으로 가디언 제국의 협상단이 들어왔다.

테이블에 앉은 가디언 제국군은 총 세 사람.

라몬 후작은 냉철하고 머리가 좋은 사람이지만, 상대를 잘못 만나 고생하고 있었다.

곰과 여우가 싸우면 답답한 쪽이 밀린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리고 세르게이 중장은 전형적인 군인으로 나처럼 성격이 급해 빨리 협상을 마무리 짓고 싶어 했다.

마지막으로 옐레나 소장.

30대 후반으로 그녀는 마나도 거의 없어 기간트 기사도 아니고, 지휘관 유형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런 중요한 회의에 참석하며 라몬 후작을 보좌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녀는 우리 정보국과 같은 정보 조직에 몸담은 것 같았다.

문제는 이곳에 있는 장군들과 호위 기사들의 성격이나 정보는 대충 알아냈지만, 다른 장군이나 장교들의 정보를 더 알아낼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우린 건물에 갇힌 신세였다.

물론 엔리크와 함께한다면 다른 곳에 갈 수도 있었지만, 뭐하러 의심 살 행동을 하겠는가.

우리가 머물고 회담하는 이 건물을 지키는 가디언 제국의 장교와 병사들도 슬슬 지쳐가고 있었다.

경비도 느슨해졌고, 처음보다 경계도 덜 한다.

원래 적군이라도 며칠 얼굴 비비고 함께 지나다 보면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윌리엄 사령관이 출발 전에 신신당부했기에 우리 쪽 협상단과 호위 기사들은 저녁을 먹고 나면 각자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러니 경비가 느슨해질 수밖에.

이건 나를 위한 배려였다.

윌리엄 사령관은 내 정보원이 잠입과 위장, 변장에 능하다고 알고 있었으니까.

'그럼 이제 내가 활동할 차례인가······.'

잠시 쉬는 시간에 슬쩍 엔리크 소령을 보며 말했다.

"혹시, 여기 술도 있나?"

"술이요?"

"며칠 잠을 설쳤더니, 오늘은 푹 좀 자고 싶어서 그래."

"아마 있을 겁니다. 제가 한번 구해 보지요."

"고맙네. 엔리크 소령."

***

늦은 밤.

엔리크 소령이 술을 가지고 찾아왔다.

이 녀석은 황족이 분명한데, 권위 의식은 찾아볼 수 없었다.

성격이 싹싹하기도 했고, 나보다 나이는 4살이 많았지만, 동생으로 삼고 싶을 정도였다.

게다가 정체불명의 음식도 만들어 왔다.

"혹시, 이거 자네가 직접 만들었나?"

"네, 요리는 처음이지만, 옆에서 하는 건 몇 번 봤습니다."

우린 테이블에 앉아 술을 따랐다.

"두 제국의 협상이 잘 마무리되도록 건배할까요?"

"아니 그딴 건 높으신 분들이 알아서 하라고 하고. 우리 건강을 위해 건배하지."

"네."

"건강을 위하여!"

"건강을 위하여!"

알싸한 술이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수저를 들었지만, 안주에 손이 선뜻 가지 않는 것은 짬통에 모인 잔반 같은 비주얼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녀석, 잔뜩 기대하는 얼굴로 안주와 날 계속 번갈아 본다.

젠장, 그냥 맛만 봐야겠군.

살짝 수저로 떠서 입에 넣었다.

"맛이 어떻습니까?"

"윽! 날 죽일 셈인가?"

"네?"

엔리크가 눈을 똥그랗게 뜨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너무 맛있어 죽겠군."

"아!"

엔리크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자넨 제대하고 요리사를 해도 먹고 살겠어."

"그 정도입니까?"

"그래, 재능있어. 간도 딱 맞고."

"감사합니다."

놀리는 맛도 있는 놈이야.

우린 그렇게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잔을 마시고 난 어지럽다며 그대로 침대에 쓰러졌다.

물론 진짜 술에 취한 것은 아니었다.

[사마귀 꼭두각시로 영혼 이동에 성공했습니다.]

내 알리바이는 엔리크 소령, 아니 엔리크 황족께서 해줄 것이니, 이제 밤마다 걱정 없이 기지를 수색할 생각이었다.

파다다다닥!

반경 700미터.

내가 사마귀 꼭두각시로 살필 수 있는 최대한의 거리였다.

지하 통로를 살피기엔 운명의 실타래 거리가 너무 짧았고, 첫날 봤던 수상한 건물로 곧장 날아갔다.

'대체 여긴 왜 지키고 있는 거야?'

가까이 가보니 이곳은 커다란 창고였다.

마장기 일곱 대가 지키고 있었고, 병사들도 상주하고 있었다.

어디 안으로 들어갈 구멍이 있을 텐데······.

그때 살짝 열린 창문으로 몸을 비비며 들어갔다.

'세 개나 찾았다고?'

창고 안쪽에 거신 갑옷 세 개가 놓여 있었다.

내가 저들의 발굴지를 살펴봤을 땐, 특별한 것이 없었다.

아마도 발굴 초기에 11번째 성문을 지키던 기사들이 입던 갑옷 같았다.

저들은 지금 황궁을 향해서만 전력 질주하고 있었으니까.

순간 이걸 다 챙기고 싶었다.

하지만 괜히 나 때문에 문제가 생겨 협상이 어그러질 수도 있었기에 꾹 참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기지 구조를 살폈다.

***

다음날도, 그다음, 또 그다음 날도 술을 핑계로 쓰러져 사마귀 꼭두각시에게 영혼 이동을 했고, 밤마다 기지 내부를 구석구석 정찰했다.

이제 이곳은 내 집 안방처럼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오리지널 마장기 주변은 언제나 경계가 철저하구나!

첫날은 5대나 있었는데, 지금은 단 2대뿐이었다.

나머진 어디에 있을까?

일단 이곳 기지 안에는 없었다.

천장에 매달려 주변을 살폈다.

솔직히 이곳 거주 구역은 카야킨보다 좋았다.

채소 텃밭도 있고, 이 정도면 사람이 살 수 있을 환경이 어느 정도는 조성된 것이었다.

그냥 나도 난민 기지를 영지로 만들어?

아니야!

고개를 흔들었다.

고대 거신들이 장벽을 만든 이유!

분명 아주 강력한 괴수가 대수림에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만약 그놈이 내려온다면, 전진 기지는 순식간에 휩쓸려버릴 수도 있었다.

'역시 안전하게 장벽 안쪽에 영지를 만들어야 해.'

무슨 일이 생기면 피신할 곳이 필요했으니까.

그리고 사람이 햇빛을 받고 살아야지, 아무리 좋은 환경을 만든다고 해도 24시간 해가 들지 않은 지하에 사는 건 좋지 않았다.

'응? 옐레나 소장?'

이 야밤에 어딜 바삐 가는 거지?

가디언 제국군도 여자가 별로 없었다.

그랬기에 호리호리한 체구의 그녀를 한눈에 알아봤다.

그녀는 주변을 살피더니, 외곽의 한 허름한 건물로 들어갔다.

'수상한데? 한번 따라가 봐야겠다.'

내부로 들어갔다.

먼저 온 세 사람.

그리고 뒤늦게 합류한 옐레나 소장.

"결단을 내려 주십시오. 소장님."

"맞습니다. 이대로 시간을 끌다간 기회가 사라질 겁니다."

무슨 결단을 말하는 거지?

모여 있는 세 사람의 계급은 준장 한 명에 대령 하나, 중령 하나였다.

한 사람은 누군지 알겠다.

중령은 거신 갑옷 창고를 지키던 비숍급 마장기 기사였다.

"하지만 사황자를 살해했다간 우리 모두 목이 잘릴 거네."

그때 준장이 말했다.

"실패하면 역적이지만, 성공하면 공신이 됩니다."

"자넨 목숨이 아깝지 않은가?"

"어차피 위험을 무릅쓰지 않으면, 큰 성공은 없습니다."

"······."

"그리고 겉으론 우리가 살해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지금 이곳엔 아베르크 제국의 협상단이 있습니다. 그놈들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면 됩니다."

"그렇게 되면 전쟁이 벌어질 것이네. 그리고 아베르크의 7황자도 여기 있고."

"타국이 무슨 상관입니까? 어차피 협상이야 시간을 끌기 위한 용도일 뿐입니다. 우리 제국의 마장기가 저들의 기간트보다 많습니다. 그리고 전쟁이 나면 오히려 저들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기 더 좋습니다."

"흠······."

옐레나는 고민하고 있었다.

허! 이 새끼들 봐라!

어이가 없었다.

"옐레나 소장님, 이런 기회는 다시 오지 않습니다."

"맞습니다. 사황자를 따르는 세력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지금도 보십시오. 곧 전쟁터가 될지도 모를 대수림까지 찾아오지 않았습니까. 이러다간 곧 우리 황태자 전하를 앞지르고 말 겁니다."

"그렇게 되면 아라곤 가문이 득세하고 우리 알브레 가문은 뒤로 밀릴 겁니다."

하아! 여기도 개막장이네.

순간 한숨이 흘러나왔다.

제국의 황제가 되기 위해선 온갖 더러운 일을 보고 겪고 하고 이겨 내야 한다고 들었다.

권력에 눈이 먼 놈들은 정상이 없군.

이윽고 결심이 섰는지, 옐레나 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절대 실수는 없어야 하네."

"물론입니다. 마장기 두 대로 건물로 진입하는 양쪽 도로를 막고, 제 수하들을 투입하겠습니다."

준장이 주먹을 쥐고 말을 이었다.

"일단 건물 안에 병사와 협상단을 모두 죽이면 끝입니다. 그리고 사황자가 죽으면 라몬 후작이나 다른 귀족들도 어쩔 수 없을 겁니다. 황태자께서 다음 황제로 등극하실 거니까요."

이런, 미친놈들!

지금 우릴 다 죽이겠다는 거네!

가디언 제국의 사황자를 죽이는 거야 자기들 마음이겠지만, 나까지 죽이겠다니 순간 분노가 끌어 올랐다.

'하아! 어째 내가 가는 곳마다 사건 사고가 끊이질 않네······.'

내 팔자인가?

물론 나야 거신인형과 마법인형이 있으니 절대 죽지 않겠지만, 7황자와 다른 사람들은 지금 내가 엿듣지 않았으면 꼼짝없이 당했을 것이다.

윌리엄 사령관!

아니! 능구렁이 영감, 이제 보니 내게 7황자를 부탁한 이유가 혹시나 이런 일이 생길지 몰라서였나?

그리고 저들이 말하는 사황자가 누굴 말하는지 알 것 같았다.

'황족인 줄은 알았는데, 사황자라니······.'

엔리크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무슨 제국의 황자씩이나 되는 사람이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 적국의 중령에게 굽신거린단 말인가.

이해 불가능이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동안 나를 따라다닌 것처럼 보였지만, 자연스럽게 협상 회담에도 빠짐없이 참석했다.

실제로 다들 그가 나를 감시하는 소령인 줄 알고 있었고.

'모든 것을 직접 봐야 하는 스타일인가?'

갑자기 상황이 복잡해졌다.

그냥 빠져나갈까?

지금이라도 협상단을 지하 통로를 이용해 빠져나가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저 녀석들은 분명 엔리크 사황자를 죽이고, 우리 짓으로 몰아갈 것이 뻔했다.

그럼 전쟁이 벌어질 거고.

솔직히 이젠 전쟁이 나도 큰 상관은 없었다.

내 파밍 작업이 늦어질 뿐이고, 난 그래도 승승장구할 테니까.

하지만.

'기사들과 병사들이 많이 죽을 텐데······.'

윌리엄 사령관의 측근들과 카야킨 기지의 기사들도 블랙힐 기지에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기지를 오가며 제법 친해진 기사와 병사들도 많았고.

내가 전쟁광도 아니고.

전쟁은 될 수 있으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좋다.

그것도 준비된 전쟁이 아닐 땐 그 결과도 좋지 못할 것이다.

병력도 우리가 열세였고.

'차라리 저놈들의 계획을 막고, 엔리크를 살릴까?'

그럼 상황이 어떻게 굴러갈까?

머리를 굴려 여러 가지 시나리오를 대입해 봤다.

어? 나쁘지 않을 거 같은데?

가디언 제국의 사황자를 구한 아베리크 제국의 중령!

물론 성공하면 협상도 유리하게 끌고 갈 수 있을 거고.

또 알아?

엔리크가 나중에 가디언 제국의 황제가 될 수도 있고.

"옐레나 소장님, 언제 실행할까요?"

"더 기다릴 필요가 있겠나? 귀족들은 내가 맡을 테니까, 지금 당장 시작하지."

"네! 알겠습니다."

지금이라고?

와! 결단력 보소.

생각할 시간도 없었다.

그럼 나도 당장 준비해야겠다.

그러고 보니.

'젠장! 내가 이젠 적국의 황자도 구해야 해?'

64. 황자를 구하라(2)!

64. 황자를 구하라(2)!

엔리크 소령은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

'쯧쯧! 곧 죽을지도 모르고, 세상 모르게 자고 있네······.'

엔리크는 술도 약하면서 왜 굳이 나와 같이 마시려고 했을까?

술만 주고 가도 될 텐데.

아! 엔리크란 이름도 가짜겠네.

지금이라도 사황자나 라몬 후작에게 계획을 말한다면 놈들을 잡아들일 수 있을까?

고개를 흔들었다.

'과연 누가 일개 호위 기사의 말을 믿을까?'

그들이 아니라고 오리발을 내밀면 끝이다.

나보단 자국의 장군들과 기사들 말을 믿겠지.

'그리고 미리 말해봐야 내가 구해준 거 티도 안 나겠지?'

아마 십중팔구 사건 자체를 무마하려 할 것이다.

이왕 황자를 구해주고 생색을 제대로 내려면, 확실하게 구해준 티를 내야 한다.

그래야 나중에라도 뭔가 얻어낼 수 있을 테니까.

[주군, 건물 앞으로 병사들이 몰려들고 있습니다.]

'벌써?'

옆 건물 옥상에 올라가 있는 내 자동인형 알리만이 알려왔다.

'혹시, 마장기도 있어?'

[비숍급 마장기 한 대와 나이트급 마장기 한 대가 양쪽 통로를 막고 있습니다.]

'병력은 몇 명이나 되지?'

[대략 300명쯤 되는 것 같습니다.]

300명이나?

쩝! 짧은 시간에 많이도 몰려왔네.

하지만 나도 지난 몇 개월간 놀고 있진 않았다.

나름 근력과 체력도 키웠고, 일반 스킬 레벨도 올렸다.

물론 인형의 집에서 암 드로운만 불러도 상황은 간단히 타개된다. 하지만 그럼 내 능력이 만천하에 알려질 테니, 좋은 시절은 끝이다.

그러니 이번엔 몸으로 좀 때우자.

위기는 아니지만, 최대한 위기처럼 보여야 한다.

'오랜만에 손맛 좀 즐기겠어.'

무기를 챙겼다.

'알리만과 네자드는 마장기에 타고 근처에 대기하고 있어. 내가 명령을 내릴 때까진 공격하지 말고.'

[네! 주군.]

다행히 놈들은 마장기를 이용해 공격하진 않았다.

마장기로 건물을 공격하면, 우리에게 뒤집어씌운다는 계획에 차질이 생기고, 자신들이 공격했다는 것이 알려질 테니까.

놈들은 암살에 성공하고 싶지, 죽고 싶은 것은 아니니까.

스르릉!

백색의 검신을 뽑고, 물 한 컵을 엔리크에게 뿌렸다.

촤아악!

"앗! 차가워?"

엔리크가 벌떡 일어났다.

"엔리크 소령, 적이다!"

"네?"

"누군가 우리를 죽이려고 건물을 포위하고, 병력을 잔뜩 끌고 왔다!"

"그, 그럴 리가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엔리크가 얼굴에 물기를 소매로 닦고는 술을 깨기 위해 고개를 흔들었다.

"설명할 시간이 없다. 무기를 들어라!"

콰앙!

난 방문을 발로 차서 열었다.

"적이다! 적습이다! 아베르크 제국의 기사들은 집결하라!"

끼익!

"타일러 중령님, 무슨 일입니까?"

내 목소리를 듣고 제일 먼저 나온 것은 로제 소령이었다.

"로제 소령! 정체 모를 자들의 습격이네. 어서 7황자님과 정보국장님을 깨워 3층 회의실로 모시게!"

"네? 네! 알겠습니다."

로제 소령이 빠르게 달려갔다.

그리고 파이컬 중령과 호위 기사들이 뒤늦게 검을 들고 복도로 우르르 몰려왔다.

"타일러 중령, 무슨 일인가? 적습이라니?"

"적이 공격했습니다!"

"적이라니?"

"설명할 시간이 없습니다. 모두 방어 대형을 갖춰야 합니다."

그때였다!

"으악!"

"기습이다! 막아라!"

아래층에서 소란스러운 병장기 소리와 병사들의 비명이 들렸다.

"젠장! 모두 검을 뽑아라!"

"어떻게 이런 일이? 누가 감히?"

술이 살짝 깬 엔리크는 지금 상황이 믿기지 않은 것 같았다.

이 녀석은 반드시 살려야 한다.

그래야 나중에 내게 떨어질 게 많다.

가디언 제국과 협상도 유리하고.

"엔리크 소령, 내 뒤로 서라!"

"네? 네."

엔리크를 뒤로 보내고 난 검을 겨눴다.

그때 한쪽 팔에 흰 손수건을 단 병사들이 계단을 우르르 올라왔다.

"모두 다 죽여라! 생존자를 남기지 마라!"

"와아아아!"

난 달려오는 놈들을 향해 백색의 검을 높이 들었다.

"이야!"

서걱! 서걱!

"크악!"

"으악!"

병사들이 창대와 함께 베어졌다.

[넵프로스의 촉수로 만든 커틀러스(공격력:★★★☆)]

괴수 촉수로 만든 레어급 명검.

클린드 부국장이 내게 이 검을 주면서 왜 아까워했는지 알 것 같았다.

닿는 순간 조금만 힘을 줘도 그 예리함에 모든 것을 반으로 가른다.

백색의 검신이 휘둘리면 어김없이 붉은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이야!"

다다닥!

병사가 창을 찌르며 달려들었다.

슬쩍 몸을 틀어 피하고 검을 올려쳤다.

서걱!

"으악!"

병사의 두 팔과 창대가 동시에 바닥에 떨어졌다.

난 비명을 지르는 병사를 발로 차서 계단 밑으로 밀어버렸다.

검을 휘두른다는 감각.

오랜만이었다.

인형술사라고 해서 뒤에서만 싸우고 근접 전투를 하지 않을 거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괴수는 그런 거 없다.

그냥 아무나 가까운 사람을 공격하니까.

헌터 시절 나도 마법인형과 함께 괴수와 싸웠고, 또 날 죽이려는 빌런들과도 치열하게 싸웠다.

지금이야 기간트가 있으니 굳이 맨몸으로 싸울 필요가 없었지만, 전생엔 밥 먹고 싸움만 했었지.

'그래! 이 감각이야.'

달려드는 병사를 베고 조금씩 전진해 계단으로 오르는 병사를 인정사정없이 찔렀다.

병사들은 내 상대가 아니었다.

"뭐 하고 있어! 어서 올라가!"

아래쪽에서 기사들이 소리쳤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계단이 하나뿐이란 것이다.

올라오는 병사들 계속 쓰러트리자, 보다 못한 기사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천천히! 뒤로 물러서라!"

난 복도로 물러섰다.

그러자 파이컬 중령이 말했다.

"타일러 중령, 좀 쉬게 이제 우리가 하겠네!"

"아닙니다. 아직 힘이 남았습니다."

그때였다.

기사들과 병사들이 검과 창을 겨누며 반대쪽 복도를 메웠다.

마장기를 다루는 기사들을 이런 곳에 쓰다니, 어이가 없었다.

"멈춰라! 지금 뭐 하는 짓이냐!"

기사들을 보자, 엔리크가 앞으로 나서 소리쳤다.

그런데!

"저기 루이스 사황자가 있다! 무조건 죽여라!"

"사황자를 죽여라!"

"뭐? 뭐라고?"

사황자는 순간 얼이 빠졌고, 가디언 제국 기사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난 사황자의 목을 휘감고 뒤로 물러섰다.

"놈들을 막아라!"

내 외침에 파이컬 중령과 호위 기사들이 앞으로 나섰다.

"으아아!"

"죽여!"

캉! 카카캉! 캉!

기사들끼리 대결!

3미터의 좁은 복도에서 서로를 죽이기 위해 기사들이 목숨을 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엔리크 소령! 정신 차리게."

이미 그의 정체를 다 알았지만, 난 루이스 사황자를 계속 엔리크라 불렀다.

자기 집 안방 같은 곳에서 자기 부하들에게 공격을 받고 있으니, 충격이 크겠지.

게다가 자기를 지키고 있는 것이 적국의 기사들이었으니······.

[주군. 진입로에 병사들이 몰려왔습니다. 하지만 마장기가 길을 막고 있어 전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움직일까요?]

알리만이 보고했다.

'아니다! 더 기다려!'

[네! 주군.]

지금 이 건물로 다가오는 병사들은 분명 황자의 호위병들이나 라몬 후작이 소란한 소리를 듣고 보내온 것이다.

하지만 마장기가 양쪽 길을 떡하니 막고 있으니, 마장기를 보내지 않는 한 인간들은 들어올 수 없었다.

"크윽!"

파이컬 중령이 신음을 흘렸다.

왼쪽 어깨에 부상이 생겼다.

그리고 다른 호위 기사들도 교대로 열심히 싸우고 있지만, 적들이 워낙 많았기에 하나둘 상처를 입고 있었다.

"천천히 물러나라!"

소리치고 난 앞으로 달려갔다.

몸을 날려 검을 휘둘렀다.

'양손 내려치기!'

가디언 기사가 검을 수평으로 들며 내 검을 막았······.

촤악!

검이 부러지고, 기사의 얼굴과 몸통이 반으로 갈라졌다.

"헉!"

"뭐야? 사람이 반으로 갈라졌어!"

내 괴력에 마장기 기사들이 경악하며 주춤거렸다.

킹콩 마법인형의 스킬을 여기서 쓰네!

킹콩 괴수가 양손을 모아 내려치는 스킬에 명검의 힘이 합쳐지니, 괴력이 발휘된 것이다.

하지만 팔이 후들거려 많이 쓸 순 없었다.

"부상자를 데리고 3층으로 물러서라! 기사들은 회의실 앞을 지켜라!"

"네!"

호위 기사들이 내 명령을 받고 회의실이 있는 3층으로 올라갔다.

"들어와! 이 새끼들아! 들어와!"

머뭇거리는 기사들을 향해 손짓했다.

"이야!"

한 기사가 검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나도 검을 마주했다.

'앞발 후려치기!'

캉! 휙휙휙! 푹!

상대 기사의 검날이 잘리며 천장에 박혔다.

기사는 잘린 검과 나를 보여 한 마디를 내뱉었다.

"제길!"

촤악!

기사의 몸을 긋고는 나도 계단을 향해 달렸다.

"어서 쫓아라!"

"놈들은 힘이 빠졌다."

'지금이야! 모두 나와!'

쾅! 콰앙!

내 자동인형들이 문을 열고 복도로 몰려나왔다.

내가 명령했다.

"쓸어버려!"

"주군의 명이시다! 적을 섬멸하라!"

"와아아아!"

촤악! 촤악!

자동인형 다섯이 기사들과 병사들을 옆에서 공격했다.

"으악!"

"뭐, 뭐야?"

내 자동인형들은 원래 살루스 왕국과 아리칸 공국 출신 기사들, 그리고 거신인형인 암 드로운 기사단장에게 혹독한 검술 수련을 받았다.

웬만한 기사나 병사들은 일격을 받기도 힘들었다.

"젠장! 밀리지 마라!"

"멈추지 말고, 계속 들어가라!"

"죽어!"

푹!

한 기사가 내 자동인형의 배를 찔렀다.

"어?"

자동인형은 멀쩡한 모습으로 기사의 머리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촤악!

"크헉!"

기사가 힘없이 허물어졌다.

내 자동인형은 검에 찔리거나 베어도 죽지 않는다.

물론 많이 찔리거나 여러 번 베이면 레벨이 초기화되거나 보이지 않는 운명의 실이 아예 끊어져 마법인형이 해지되기도 한다.

하지만 칼질 몇 번 정도는 버틸 수 있었고, 그걸 상대한 기사들한테는 언데드를 상대하는 것 같은 공포였다.

그렇게 자동인형들이 10분간 활약하며 길을 막았다.

'됐다! 모두 문 안으로 들어가!'

자동인형들이 복도에서 물러나 방 안으로 들어갔다.

난 곧장 그들을 인형의 집에 넣었다.

"어? 어디 갔지?"

"사라졌어?"

내 자동인형을 쫓아 들어간 기사들과 병사들은 당황했을 것이다.

그사이 난 3층으로 올라갔다.

"타일러 중령님, 괜찮으십니까?"

로제 소령이 다가왔다.

"시안 저하와 국장님은?"

"일단 회의실 안으로 모셨습니다."

"엔리크 소령은?"

"그게 지금 패닉 상태라······."

그때 기사들과 병사들이 다시 3층으로 우르르 올라왔다.

"어딜!"

다다닥!

촤악! 촤악!

로제 소령이 계단에 막 올라선 기사와 병사들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오! 역시 대단해!'

검술 실력은 언니인 엠버 대령 보다 떨어진다는 평가가 많지만 내가 보기엔 아니었다.

로제 소령이 적을 막고 있는 사이에 기사들이 지키는 3층 입구로 향했다.

"안에 테이블과 의자를 쌓아 바리케이드를 만들어라!"

내 명령에 기사들이 회의장 테이블을 눕히고 의자를 위로 쌓기 시작했다.

시안 7황자가 다가와 물었다.

"타일러 중령, 대체 지금 어떻게 돼가고 있는 건가?"

"지금 반역자들이 우리 협상단과 루이스 사황자를 죽이러 오고 있습니다."

"반역자는 무엇이고? 루이스 사황자라니?"

"여기 이분이 가디언 제국의 루이스 사황자이십니다. 저들은 사황자를 시해하려는 암살자들입니다."

"뭐?"

다들 몸을 떨고 있는 루이스 황자를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그럼, 여기서 도망쳐야 하는 것이 아닌가?"

"도망칠 장소가 없습니다. 다행히 루이스 황자를 구하기 위해 호위 기사들과 가디언 제국군이 지금 이곳으로 오고 있습니다. 그러니 여기서 조금만 버텨 주십시오."

"알았네."

시안 오르도가 검을 뽑았다.

"모두 바리케이드를 뒤로 와라!"

회의실을 정리하고 밖으로 나갔다.

그곳에선 로제 소령과 부상한 파이컬 중령이 필사적으로 적을 막고 있었다.

이제 딱 적당한 시기였다.

'됐다! 알리만, 네자드, 마장기를 공격해 길을 뚫어라!'

[네! 주군!]

두 자동인형이 나이트급 마장기를 끌고, 길을 뚫기 위해 달렸다.

이제 곧 병력이 올라올 것이다.

"뒤로 물러서라! 회의실을 지켜라!"

로제 소령과 파이컬 중령이 몸을 돌려 달려왔다.

검을 휘두르는 것은 엄청난 체력을 소모한다.

아무리 체력이 좋은 장사도 쉴 새 없이 싸울 순 없었다.

"어서 안으로!"

우리 셋은 회의실 입구에서 적을 맞이했다.

"어서! 뚫어라!"

"시간이 없다! 모두 죽여!"

와아아!

병사들이 파도처럼 밀려 들어왔다!

"기사들은 나와서 앞을 막아라!"

바리케이드 옆에 있던 기사들이 달려왔다.

일단 입구에서 최대한 적을 막았다.

하지만 들어오는 숫자는 점점 더 많아졌다.

"죽어!"

팟!

내 배를 검으로 찌른 기사!

"악! 타일러 중령님!"

옆에 있던 로제 소령이 소리를 질렀다.

난 비릿하게 웃으며 검을 내려쳤다!

촤악!

"커헉!"

기사는 힘없이 쓰러졌다.

로제 소령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 어떻게?"

구멍 난 제복 사이로 조끼를 살짝 보여줬다.

그제야 그녀도 내가 무사한 이유를 알아챘다.

[로트거너의 비늘로 만든 조끼(방어력:★★★☆등급)]

난 윌리엄 사령관이 준 레어급 조끼를 입고 있었기에 일부러 검을 맞아준 것이다.

최하급 괴수의 발톱에도 막은 적이 있으니, 인간의 검 정도는 얼마든지 막을 수 있었다.

전에 카야킨에 정보를 전달하러 갔을 때, 부관에게 찾아오길 잘했어.

역시 이런 건 현장직이 입어야 해!

"죽여라!"

"밀고 들어가!"

"모두 물러서지 마라!"

내가 목청껏 소리쳤지만, 다들 힘이 빠져 자연스레 뒤로 밀리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를 뚫고 안쪽으로 들어가는 병사가 있었다.

"이야!"

촤악!

"커헉!"

"응?"

엔리크 소령, 아니 루이스 사황자가 병사를 죽이고 앞으로 나와 내 옆에 있었다.

"빌어먹을! 내가 루이스 사황자다! 내 목을 가지러 왔느냐?"

촤악! 촤악!

"어서 가져가 봐라!"

루이스는 각성한 사람처럼 무섭게 검을 휘둘렀다.

'뭐야? 잘 싸우잖아!'

조금 전까진 샌님처럼 굴더니.

사실 그는 원래 뛰어난 기사였다.

마나량이 로제 소령과 비슷한 정도였으니, 마장기 역시 룩급 이상을 몰 것이고, 오리지널 마장기 역시 충분히 탈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다만 오늘은 충격이 컸을 뿐이었다.

"모두 물러서지 마라! 루이스 사황자를 지켜라!"

'어라? 저 양반은 왜 그래?'

시안 7황자 역시 루이스 사황자 옆에 서서 몰려오는 적을 막고 있었다.

그도 이제야 깨달은 것 같았다.

루이스 사황자가 죽으면 이곳에 있는 모두가 죽을 거라는 걸.

시안 7황자에겐 정말 좋은 경험이 될 거 같네요.

윌리엄 사령관 각하!

이건 나름 또 새로운 역사네.

두 황자가 적들을 맞이해 나란히 싸우고 있다.

이질적인 장면에 묘한 동질감이 느껴졌다.

65. 라이언 크로스.

65. 라이언 크로스.

"조금만 버텨라! 곧 병사들이 올 것이다!"

검을 휘두르며 반보 앞으로 나아갔다.

달려오는 적들을 먼저 막기 위해서였다.

서걱! 서걱!

후들거리는 팔로 적을 베어 넘겼다.

"로제 소령! 시안 황자님을 지켜라!"

"네!"

내 좌측에 있던 로제 소령이 시안 황자 옆으로 이동했다.

그쪽엔 파이컬 중령이 있었지만, 상처를 입은 몸이라 점점 뒤로 밀리고 있었다.

그리고 난 루이스 사황자의 앞을 지키며 필사적으로 막았다.

적들의 공격은 루이스 사황자에게 집중되어 있었기에 내가 있는 중앙이 가장 치열했다.

'이제 올 때가 됐는데······.'

나도 점점 힘에 부쳤다.

하지만 버텨야 했다.

여기서 거신인형을 불러내면, 여태까지 노력이 허사가 된다.

"커헉!"

콰앙!

"반역자들을 모두 처단하라!"

회의실 복도에서 우레와 같은 고함이 들렸다.

"으악!"

"크악!"

그리고 병사들의 비명이 들렸다.

'왔구나!'

드디어 루이스 사황자를 구하러 온 것이다.

'아슬아슬하게 딱 맞췄네!'

조금만 늦었다면 거신인형을 꺼낼 뻔했다.

얼마나 격렬하게 싸웠는지, 팔과 다리가 다 후들거린다.

오리지널 마장기에 타고 싸울 때보다 몇 배는 더 힘드네······.

"가디언 제국군 병사들이 도착했다! 조금만 버텨라!"

내가 소리쳤다.

두 황자도 아베르크 기사들도 다들 마지막 힘을 짜내고 있었다.

퍼억! 쿠웅!

복도에 병사가 날아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거구의 사내가 회의실 문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도끼로 눈앞에 병사를 사정없이 찍어 넘겼다.

쩌억!

"반란자들을 모두 죽여라!"

'응? 세르게이 중장?'

중장이 직접 올 줄은 몰랐다.

그는 타고난 무골이었고, 힘 또한 장사였다.

나이가 쉰 살이라고 들었는데, 지금도 현역으로 마장기에도 타고 있었다.

"황자 저하를 지켜라!"

"와아아!"

"반란군을 제압하라!"

문 안쪽으로 호위 기사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세르게이 중장과 기사들이 순식간에 회의실 안에 있던 기사와 병사들을 처리했다.

적을 모두 쓰러트리자, 세르게이 중장이 루이스 앞에 섰다.

쿵!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루이스 사황자 저하!"

바닥이 깨지는 줄 알았다.

세르게이 중장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호위 기사들도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황자 저하!"

루이스 사황자가 깊은 한숨과 함께 피 묻은 검을 자기 바지에 닦고, 검집에 넣었다.

"세르게이 중장, 나를 죽이려는 자들은 모두 제압했나?"

"아직 일부 반란군들이 마장기에 타고 저항하고 있습니다. 헤수스 준장이 직접 처리하러 갔으니 곧 제압할 겁니다."

"대체 이게 무슨 꼴인가. 여기 아베르크 제국의 기사들이 아니었다면, 난 이미 죽었을 것이네."

"송구합니다. 저하!"

"송구합니다. 저하!"

루이스는 고개를 흔들곤 나를 쳐다봤다.

난 검을 집어넣고, 손을 가슴에 올리며 고개를 숙였다.

라몬 후작이 황족에게 예를 표하는 모습을 보고 그대로 따라 한 것이다.

루이스는 살짝 미소를 짓더니, 내게 고개를 숙였다.

그때였다.

라몬 후작이 안으로 들어왔다.

"루이스 저하! 괜찮으십니까?"

"난 괜찮소. 라몬 경."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옐레나 소장이 들어왔다.

옐레나 소장은 무릎부터 꿇었다.

"죄송합니다. 저희 정보부가 불온한 자들을 미처 색출하지 못했습니다. 죽여 주시옵소서."

"괜찮네. 어차피 여긴 내 마음대로 온 곳이 아닌가."

난 순간 어이가 없었다.

저 미친년 얼굴 두꺼운 거 보소!

이 일의 주모자 격인 옐레나 소장이 기가 막힌 연극을 하고 있었다.

자신만 빠져나가겠다는 수작이었다.

하긴 이 일을 벌인 지휘관 셋만 죽인다면, 자신이 가담했다는 증거는 없으니까.

하지만 내가 다 봤지.

라몬 후작이 말했다.

"루이스 저하, 아직 상황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닙니다. 일단 안전한 곳으로 자리를 옮기시지요."

"알겠소. 여기 다친 기사들을 치료해 주고, 편히 쉴 수 있게 새 숙소를 알아봐 주시오."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오늘 사건은 일단락됐다.

물론 나는 아직 남았지만.

우린 루이스 황자를 따라 건물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난 루이스 사황자에게 다가갔다.

"멈춰라!"

루이스의 호위 기사들이 내 앞을 막아섰다.

그러자 루이스 황자가 뒤를 돌아봤다.

"그 사람은 괜찮다."

루이스가 날 향해 손짓했다.

내가 다가가자, 루이스가 말했다.

"타일러 중령, 고맙네. 내가 상황을 정리하는 대로 따로 인사할 것이네."

"그것이 아니고 잠시 시간을 좀 내주십시오."

"무슨 할 말이 있는 건가?"

"네, 중요한 일입니다."

루이스에게 귓속말했다.

난 옐레나 소장에 대해서 알려줬다.

루이스는 인상을 살짝 찡그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고맙네. 오늘 여러 번 신세를 지는군.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지."

"그럼 몸조심하십시오."

루이스는 깊은 한숨을 쉬고는 호위 기사들과 사라졌다.

그가 내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지는 모르겠지만, 옐레나 소장을 의심은 하겠지.

이로써 두 황자를 구하는 내 할 일은 다 끝냈다.

'휴! 오늘도 보람찬 하루 일을 끝냈군.'

오랜만에 몸을 쓰고, 스킬을 연거푸 사용했기에 체력이 바닥이었다.

"오늘 정말 대단하셨습니다."

로제 소령이었다.

"다친 기사들은?"

"파이컬 중령님만 팔을 좀 다쳤고, 다들 큰 부상은 아닙니다."

"다행이군."

"아까 보니까, 지휘 능력이 대단하시던데요!"

난 피식 웃어줬다.

인형술사는 원래 지휘자이자 지휘관이었다.

전생에 S급 헌터로 올라섰을 때는 항상 수백 명의 마법인형 군단을 지휘하며 괴수와 싸웠다.

그러니 지휘야말로 내 특기이자, 일상이었지.

"나보다 로제 소령 검술이 더 대단하던데."

"아닙니다. 언니에 비하면 아직 멀었죠."

"우리도 그만 가서 좀 쉬지."

온몸이 녹초가 됐다.

이대로라면 이틀은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동하면서도 쉴 순 없었다.

그럼 이제 나도 좀 챙겨볼까.

'암 드로운, 그쪽 상황은?'

[창고를 지키던 마장기들과 룩급 오리지널 마장기가 전투를 벌이고 있습니다.]

'누가 이기고 있지?'

[오리지널 마장기가 압도적으로 밀어붙이고 있습니다.]

'그러면 거기도 곧 끝나겠군. 거신 갑옷은?'

[이미 모두 챙겼습니다. 주군.]

'잘했어. 그럼 들어와!'

난 암 드로운을 인형의 집에 넣었다.

상황이 어수선한 틈에 거신 갑옷을 챙길 생각이었다.

사황자를 죽이려는 준장의 부대가 거신 갑옷을 지키는 부대라는 것을 알기에 암살이 실패하면, 이들을 잡으러 마장기가 올 것이고, 난 그 틈에 창고를 털 생각이었다.

그럼 거신 갑옷을 그들이 훔쳐 간 것으로 생각할 것이고, 그들이 아무리 변명을 해봐도 사황자를 죽이려 했기에 믿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난 그 시각에 루이스 사황자를 지키고 있었으니, 완전 범죄.

'힘들게 고생했는데, 이 정도는 챙겨도 되겠지?'

고생했으니, 보상은 내가 직접 챙기자.

윌리엄 사령관도 허락했고.

오늘도 보람찬 하루를 보냈다.

루이스 사왕자도 살리고, 나도 좀 챙기고.

이번 전투로 마장기 1대가 또 파손됐다.

이제 내가 사용할 수 있는 멀쩡한 기체가 단 3대밖에 없었다.

그래도 괜찮다.

거신 갑옷을 3개나 확보했으니까.

그것도 사이좋게 비숍급 1개, 나이트급 1개, 폰급 1개였다.

이걸로 오리지널 기간트를 만들면 나도 타고, 타냐와 트라스의 개 기사들에게 좋은 당근이 될 것이다.

물론 내 자동인형에게 줘도 되지만, 그들은 인형의 집을 활용한 전투 방식이 효과적이었기에 기간트의 질보단 양이 많아야 했다. 그것도 아주 많이 필요했다.

늘 출장이 많은 나니까.

'이제 나도 좀 쉬어야겠다.'

두 황자를 지킨다고 체력과 머리를 너무 썼다.

***

협상은 바로 다음 날 재개됐다.

상대 제국의 협상단에게 꼴사나운 모습을 보인 것뿐만 아니라 황자의 목숨까지 빚졌으니, 자존심이 상해 협상을 오래 끌 생각이 없어 보였다.

덕분에 귀환 시기도 앞당겨질 것 같다.

자리에 앉았는데, 왠지 허전하다?

내 옆에서 항상 떠들던 엔리크 소령이 없으니, 좀 심심했다.

사람이, 드는 표는 안 나도 나는 표는 난다고 하더니······.

"충!"

회담장으로 들어선 시안 황자에게 기사들이 경례했다.

나도 경례했고.

시안 황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경례를 받더니, 내게 다가왔다.

"타일러 중령, 어젠 잘 해주었네. 로제 소령에게 들으니 날 제일 먼저 보호하라고 했다고?"

그냥 보호하라고 했을 뿐인데?

제일 먼저란 말은 로제 소령이 추가한 것 같았다.

"당연한 것이 아닙니까. 아베르크 제국의 장교가 아베르크 제국의 황자님을 보호해야 하는 것은 무엇보다 최우선으로 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윌리엄 사령관께서 제게 목숨을 바쳐서라도 황자님을 보호하라고 특별히 명령하셨습니다."

"윌리엄 사령관께서? 역시, 그랬군."

시안 황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이 많아 보이는 얼굴이다.

어젯밤에 잠도 제대로 못 잤는지 눈도 충혈됐고.

"휴! 나는 너무 급히 달려왔어. 주변에서 자꾸 내 후계 서열이 오른다고 말하니, 어쩌면 내가 황제가 될 수 있다는 착각을 한 것 같네. 어제 루이스 사황자를 보니, 지금 내 자리는 단 한 순간에 사라질 수 있는 자리임을 깨달았네."

"······."

"고맙네. 타일러. 내 기사들과 날 지켜줘서."

"아닙니다."

시안 황자는 내 어깨를 한번 두드리더니, 회담장 테이블로 향했다.

'뭐지? 사람이 조금 달라졌네. 진짜 성장한 건가?'

자리에 앉자, 근처에 앉아 있는 호위 기사들이 날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맞은 편에 앉은 가디언 제국의 기사들까지 날 향해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왠지 하루아침에 유명인사가 된 기분이네.

회담장 반대편 문이 열리고, 가디언 제국의 대표들이 나왔다.

그런데 반가운 얼굴이 있었다.

옐레나 소장의 자리에 루이스 사황자가 앉았다.

어제 내 조언을 새겨들었나 보다.

그때 루이스 사황자가 날 보더니, 고개를 살짝 숙였다.

나도 고개를 숙여 답례했다.

그리고 반대편에 앉은 거구의 세르게이 중장 역시 날 보더니, 손을 살짝 들어 인사했다.

적국의 장군이 저러니, 왠지 부담스럽다.

그렇게 회담은 빠르게 진행됐다.

***

협상은 나흘 만에 끝났다.

'그래, 하면 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어!'

물론 나와 기사들이 사황자를 구한 것 때문에 우리 측에 조금 유리하게 협상이 진행된 것도 있었고.

결과적으로 앞으로 2년간 평화적으로 발굴하기로 합의했다.

가디언 제국의 발굴지가 있는 반경 10km 이내에는 침범하지 않기로 했고, 저들은 화산 지대 남동쪽을 우린 화산 지대 남서쪽에서 따로 발굴하기로 합의했다.

그리고 2년 후에 재협상을 하기로 했다.

'2년 후엔 황성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보지?'

지금 수준으론 힘들어 보이지만, 이제 대 놓고 발굴할 테니, 총력을 기울일 것이다. 그럼 그 기간 안에 가능할 수도 있었다.

그러니 우리도 빨리 발굴 작업을 시작해야 했다.

이건 매우 중요한 일로 거신 갑옷을 많이 찾아내는 쪽이 국력을 한 단계 높일 수 있었으니까.

아침부터 서둘러 마차로 짐을 옮겼다.

"우리 기지로 돌아간다니 마음이 놓여요."

로제 소령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파이컬 중령은 한쪽 팔에 붕대를 감고 있었기에 시안 군단장과 마차를 타기로 했고, 로제 소령이 중령의 룩급 기간트를 타고 돌아가기로 했다.

"제가 룩급 기간트에 탄다니, 조금 떨리네요."

"로제 소령은 충분히 가능할 거야."

"휴! 한 번 해봐야죠."

이건 어쩌면 로제 소령에게 기회가 될 수 있었다.

시안 5군단장도 그녀의 재능을 알아봐야 할 텐데······.

출발 준비가 끝날 때였다.

기지에서 우릴 배웅하기 위해 가디언 제국의 사람들이 몰려나왔다.

우리가 이곳에 도착했을 때보다 숫자가 더 많았다.

저 정도면 당분간 평화는 유지되겠지?

배웅하러 온 사람들 맨 앞엔 루이스 사황자가 있었다.

루이스와 협상단은 먼저 찰스 국장과 인사를 했고, 그리고 7황자와 짧은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 내게 다가왔다.

"타일러 중령, 이렇게 빨리 돌아간다니 아쉽군."

"언젠가 다시 만날 날이 있지 않겠습니까?"

루이스 사황자가 미소를 지었다.

"그땐 적이 아니었으면 좋겠군."

"그럼, 제가 좋은 술 한 병 가지고 가겠습니다."

"하하! 술안주는 내가 준비하지."

"맛있는 음식을 먹을 생각하니 벌써 군침이 돕니다."

루이스 사황자가 피식 웃더니, 한 발 앞으로 다가와 조용히 물었다.

"정말 궁금해서 그러는데, 내 정체는 언제 알았나?"

"솔직히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물론이네."

"첫날부터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윽! 그렇군."

루이스가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누가 봐도 실망한 표정이었다.

"그럼, 저들의 암살 계획은 어떻게 알았나?"

"그냥 우연이었습니다. 창문 밖을 보니, 갑자기 기사들과 병사들이 몰려오고, 마장기가 길목을 막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협상하고 묵는 건물에 사황자님께서 계셨고요. 이 상황을 종합해 보면 저들이 노리는 것이 무엇인지 바로 나왔습니다."

"옐레나 소장은?"

"골목에서 지휘관으로 보이는 장군과 대화를 하는 걸 봤습니다."

"그래?"

뭔가 석연치 않은 얼굴이지만, 믿지 않을 수 없을 거다.

증거도 없었고, 내 알리바이는 사황자가 가장 잘 알고 있었으니까.

"자네 말대로 암살자들의 지휘관을 추궁하려고 지하 감옥에 가둬 놨더니, 옐레나 소장이 직접 죽이러 오더군."

"함정을 파셨군요."

"아무리 나라고 해도 정보부 소장을 증거도 없이 범인으로 몰 순 없거든. 아무튼, 자네 도움이 컸네."

"뭘요. 우린 밤새 술잔을 나눈 사이가 아닙니까."

"하하하!"

루이스 사황자가 웃었다.

그가 손을 뒤로 뻗자, 라몬 후작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상자 하나를 건넸다.

그 안엔 은색 훈장이 들어 있었다.

"비록 적이긴 하지만 내 목숨을 구했으니, 그냥 넘어갈 수가 있어야지. 빨리 주려 했지만, 반대하는 사람이 많아 회의가 길어졌네."

난 시안 황자와 찰스 국장을 쳐다봤다.

두 사람 다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네. 이미 이야기를 끝냈어."

루이스 사황자는 내 가슴에 은색 훈장을 달아줬다.

중앙에 사자 얼굴 문양이 있고, 두 개의 검이 대각선으로 교차하면서 떠받치는 모양의 훈장이었다.

이왕이면 금색 훈장을 주지.

그래도 이게 어딘가!

적국의 황자에게 훈장을 받다니.

"감사합니다."

"가디언 제국은 경의 방문을 늘 환영하네."

"네? 경이요?"

처처처처척!

그 순간 주변에 있던 마장기들이 나를 향해 일제히 가슴에 주먹을 대고 고개를 숙였다.

"우리 가디언 제국은 라이언 크로스 훈장을 받은 자를 남작으로 대우하지. 축하하네. 타일러 빈스 남작."

뭐야?

나 방금 가디언 제국의 귀족이 된 거야?

66. 이곳에 제 터전과 삶이 있으니까요.

66. 이곳에 제 터전과 삶이 있으니까요.

쏴아아아아! 후두두둑!

대수림 날씨가 또 변덕을 부린다.

습기에 눅눅해진 마차는 블랙힐 기지로 향하고 있었다.

"그만 좀 쳐다보십시오. 얼굴 뚫어지겠습니다."

내 말에 찰스 그레빌 정보국장이 턱을 매만졌다.

"타일러 중령, 가디언 제국의 귀족이 된 소감이 어때?"

"뭐, 어깨에 힘 좀 들어가는 거 빼면 나머진 똑같습니다."

"그래? 아무리 루이스 황자의 목숨을 구했어도, 적국의 중령에게 라이언 크로스 훈장이라니, 저들의 노림수가 있나?"

난 가슴에 달린 훈장을 쳐다봤다.

"정말 이 훈장 하나로 제가 가디언 제국의 남작이 된 겁니까?"

"아까 가디언 기사들의 표정을 보지 못했나?"

"부러워하더군요."

"라이언 크로스는 가디언에서 세 번째로 영예로운 훈장이네. 전장에서 큰 공을 세우거나 황족이나 원수급 인물을 구했을 때만 받는 훈장이지. 그거 하나만 있어도 가디언 제국에선 풍족하게 먹고 살 수 있을 정도네."

"오! 그래요?"

루이스 황자가 생각보다 좋은 선물을 줬다.

라몬 아라곤 후작이 똥 씹은 표정을 할 만했다.

"국장님, 앞으로 저 섭섭하게 하면 확! 전향합니다."

"그것도 나쁘지 않겠군."

"네?"

"그럼 가디언 제국의 귀족이 우리 스파이가 될 테니까."

찰스 국장의 말에 살짝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절 너무 믿으시는 거 아닙니까?"

"자네보다 자네 상황을 믿는 거지. 전향하기엔 우리 제국에 너무 많은 것을 벌이지 않았나? 헬다임에 땅도 사고, 건물도 짓고 있다고 들었네. 게다가 대수림에 난민들의 전진 기지도 만들었고, 엘프들을 하사관으로 만들고, 이번에 안당고낙을 사육하겠다고 일을 벌였고, 게다가 영지도 산다고 했다면서?"

"영지를 산다는 소문은 어디서 들으셨습니까?"

"자네가 바쁠 것 같다고 윌리엄 사령관께서 나더러 좀 알아봐 달라고 하시던데?"

어라? 내가 바쁜 건 맞지만, 사령관에게 그런 부탁을 한 기억은 없는데······.

"윌리엄 사령관님과 국장님은 친하십니까?"

"어떤 의미로 물은 건가? 같은 7황자님 라인이냐고?"

"네."

"그런 건 아니네. 난 라인 같은 건 없네. 그저 가끔 쓸만한 정보를 서로 공유하는 정도지. 정보국 국장 자리에 있지만, 내 입은 상당히 무겁거든."

살짝 믿기지 않는다.

그래도 추밀원장이 물어보면 대답해야 하지 않나?

"다른 상관들에게 배운 적이 없나? 정보국에선 정보가 곧 무기야. 난 다른 높은 귀족들과 공유하는 정보가 꽤 있네. 그 때문에 내가 정보국장이 됐다고 할 수 있지. 하지만 내가 그 정보를 여기저기 마음대로 흘리면 어찌 되겠나?"

"다들 중요한 정보를 말하지 않겠죠."

"잘 알고 있군. 그러니 자네도 중요한 정보가 있다면 나와 공유하지. 대신 나도 자네가 필요한 정보를 제공해주고."

"서로 윈윈하자는 거군요."

찰스 정보국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조금씩 정보국에 대해서 알 것 같았다.

그리고 내가 챙긴 정보국 서류에 없는 고급 정보도 얼마든지 있었다.

찰스 국장이 갑자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는 자네는 7황자님 라인이 아니었나?"

"네, 아닙니다."

"그렇군. 난 또 윌리엄 사령관께서 하도 챙기시길래 7황자님 라인인 줄 알았네."

"외부에선 다들 절 그렇게 보겠군요."

찰스 국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좀 심각한데······.

"국장님, 이왕 말이 나왔으니, 헬다임 근처에 어디 적당한 영지가 없을까요?"

"영지라······."

찰스 국장이 잠시 뭔가를 떠올렸다.

"이건 고급 정보는 아니니 그냥 말해주지. 일단 영지를 가지고 뭘 하려고 하는지 용도를 말해보게."

"그냥 나중에 은퇴하고 남들 눈치 보지 않고, 편히 살고 싶어서요."

찰스 국장이 잠시 고민하더니. 깊은 한숨을 쉬었다.

"하아!"

"그게 그렇게 한숨을 쉴 일입니까?"

"당연하네. 영지란 것은 그냥 땅 하나 얻는 게 아니야. 그리고 자네 말대로 다른 사람 눈치 보고 살지 않으려면, 그만큼 막강한 기간트 군단과 군사력이 있어야 하고, 보급 물자를 뒷받침할 금화도 있어야 하고, 정치적으로 후원자도 있어야 하네."

나도 쉽지 않은 일이란 것은 안다.

"그리고 기본적으로는 영지민도 많아야 하고, 영지도 넓어야 하고, 영지민을 먹여 살릴만한 일감도 있어야 하고, 황제 폐하께 세금도 꼬박꼬박 내야 하지."

"쉽진 않군요."

"그것뿐이면 좋게? 기간트에 탈 기사도 뽑아야 하지. 훈련도 시켜야 하지. 영지를 지킬 병사도 뽑아야 하고, 행정관과 세무관도, 치안관과 법무관도 뽑아야 하지. 그리고 영지에 치료소도 있어야 하고, 기본 교육 시설도 있어야 하네. 또 도시와 마을을 잇는 도로도 관리해야 하고, 숲과 하천, 도시에 빈민가와 매춘부들도 관리해야 하고, 술집과 여관, 도박장, 건달들도 관리해야 하네, 물론 영지의 귀족들과 부자, 상인들도 챙겨야 하고, 이번처럼 제국 북부의 영지들은 대수림에 무슨 일이 생기면, 무조건 기간트와 병력을 보내야 하네. 아니면 금화를 많이 바치던가."

찰스 국장이 날 쳐다봤다.

"자! 이래도 영지가 갖고 싶은가?"

"그러니까, 금화와 똑똑한 관리인만 있으면 된다는 말이네요."

"응?"

찰스 국장이 의외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뭐, 틀린 말은 아니네. 영지의 대부분 문제는 금화만 있으면 해결되지. 거기에 능력 있는 관리인 한 명이면 충분하고."

"그런데 열거하신 거 다 잘하려면 아주 능력이 좋아야겠네요."

"물론이네. 보통 능력으론 어림도 없지. 아마 좋은 영지를 구하는 것보다 똑똑한 영지 관리인을 구하는 게 몇 배는 어려울 거야."

난 찰스 국장을 빤히 쳐다봤다.

"왜? 날 쳐다보지?"

"국장님이 꽤 능력 있어 보여서요."

"뭐? 난 벽에 똥칠할 때까지 정보국에 있을 거네."

"누가 뭐라고 했습니까? 하지만 저 같은 능력 있는 놈들이 밑에서 계속 치고 올라오고, 추밀원장님께서 물러날 생각을 하지 않으시면······."

"허! 황당하군. 지금 정보국 중령이 정보국 국장을 회유하려는 건가?"

"그냥 생각난 김에 떠올려 본 것뿐입니다. 어차피 지금 제 영지가 있는 것도 아닌데요."

"아무튼, 영지를 산다는 건. 엄청나게 큰 문제를 떠안는다는 말이네. 그런 영지를 살 정도 금화가 있으면, 난 그냥 수도에 저택 하나 사고 남은 인생을 편히 살겠네."

피식 웃었다.

"전 딸린 식구들이 좀 많아서요."

찰스 국장이 날 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래서 추천하는 영지는요?"

"음! 헬다임에서 가까운 영지라······. 갈리에는 영지 크기가 너무 작고, 아밀라 영지는 농지가 너무 부족하고, 카멕은 영지민도 적고 대부분이 산악 지대고, 발레리온 영지는······."

찰스 국장이 한 번 더 생각하다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거긴 다 좋은데, 비싸. 영주가 팔 리도 없고."

"오! 발레리온 영지를 사면 좋다는 말이군요."

"내 말 헛들었군. 거긴 영주가 영지를 팔 가능성이 없네. 서부에서 헬다임으로 연결된 철로와 기차역이 있어서 통행료도 꽤 받고 있고, 영지에 농지도 많아서 식량을 수출하지. 그냥 가만히 놔둬도 남부럽지 않게 살 텐데, 뭐하러 영지를 팔겠나?"

"뭐, 영주가 도박 같은 데 빠지면 팔 수도 있죠."

"응?"

찰스 국장이 날 의심 어린 눈빛으로 쳐다봤다.

"그거 근거 있는 정보인가?"

"아니요. 그냥 그랬으면 좋겠다는 바람이죠."

"허! 자네와 이야기하다 보면, 이상하게 말리는 기분이 든단 말이야. 이번 일도 그래 자네 때문에 내 머리가 터지겠어!"

"저 때문에 머리가 터져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찰스 국장이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왜 남작의 작위를 받아서는······."

"아! 훈장이요. 준다는데 그럼 거절합니까?"

"자네, 점점 말이 짧아지네."

"그건 죄송합니다."

"아무튼, 자네가 가디언 제국의 황자를 구해 훈장과 남작의 작위를 받은 거야 내 알 바 아니지만, 문제는 자네가 우리 제국의 7황자 저하도 구했다는 거야. 만약 우리가 이걸 그냥 넘어가면······."

"좀 모양새가 빠지겠죠. 그냥 제게 작위 하나 주면 되죠."

"그게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니야······."

찰스 국장이 머리를 감싸 쥐었다.

"아! 제가 구한 게 시안 황자님뿐만이 아닐 텐데요."

"응?"

"국장님의 목숨도 제가 구한 겁니다."

"······!"

두루뭉술 말을 잘하는 찰스 국장도 순간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제가 뭐, 큰 걸 바라는 건 아니고요."

"내, 내게 바라는 게 있나?"

"그냥 작은 정보 하나면 충분합니다."

"정보?"

"혹시 에테나 말고 엘프 보신 적 있으십니까?"

찰스 국장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

[블랙힐 전진 기지 북부군 사령관실]

가장 먼저 협상단의 대표인 찰스 그레빌 정보국장이 먼저 들어갔다.

20분쯤 되자 정보국장이 나오고, 시안 5군단장이 들어갔다.

10분 후에 시안 5군단장이 나오고, 호위 기사들이 한 명씩 들어갔다.

'뭐지?'

나보다 계급이 낮은 로제 소령도 들어갔다가 나왔고, 내가 맨 마지막이었다.

"타일러 중령님, 들어가십시오."

안으로 들어갔다.

"충! 타일러 빈스 중령, 다녀왔습니다."

윌리엄 사령관이 손을 들었다.

"오! 이게 누구야? 타일러 남작님이 아니신가?"

"큼!"

윌리엄 사령관이 내게 손짓했다.

"이리 앉으시게, 타일러 경."

"그만 놀리십시오."

"내게 귀족 작위를 부탁하더니, 얼마나 급했으면 가디언 제국의 작위를 받아왔나! 푸하하하!"

이젠 아주 배까지 잡고 웃으시네.

날 놀려 먹지 못해서 환장하신 분이시다.

"가디언 제국의 훈장이라니! 크하하!"

"제가 원해서 받은 건 아닙니다."

"내가 요즘 웃을 일이 없었는데, 자네 덕분에 실컷 웃었네."

윌리엄 사령관뿐만이 아니었다.

엠버 대령도 입까지 막고, 어깨를 들썩거리며 웃었다.

"지금 이게 웃을 일이 아닙니다. 전 죽을 뻔했습니다!"

"안 죽었지 않나?"

"시안 7황자께서도 돌아가실 뻔했다니까요!"

"자네가 함께 갔으니, 그럴 일은 없었을 거네."

"절 너무 믿으시는 거 아닙니까?"

"자네가 지금까지 실패한 임무가 없잖은가."

"그럼 다음 임무는 일부러라도 실패할 겁니다."

갑자기 윌리엄 사령관이 정색했다.

"어험! 타일러 중령, 그런데 시안 황자께선 어떻게 된 일인가? 조금 전에 대화를 나눠보니, 완전히 다른 분이 되셨던데?"

"그거야 죽음의 위기를 겪고 성장하신 거겠죠."

"그렇게 긴박했나? 다른 기사들의 말을 들으니, 자네가 적 기사들과 병사들을 다 처리했다던데?"

"제가 좀 많이 죽이긴 했지만, 아주 위험했습니다. 제 제복에 구멍이 몇 개나 뚫렸습니다."

윌리엄 사령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디언 제국의 정치 상황이 좋지 않다고 하더니, 정말 막장까지 갔군. 그래 루이스 사황자는 어때 보이던가?"

"뭐라고 할까요? 솔선수범하는 스타일입니다. 명령을 받은 것도 아닌데, 언제 전쟁이 벌어질지 모르는 대수림까지 일부러 찾아온 사람입니다. 최소 비숍급 오리지널 마장기에 탈 수 있을 정도로 마나량도 풍부하고, 검술도 수준급입니다. 그리고 일선 기사들과 장교들의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윌리엄 사령관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어쩌면 이번에 자네가 큰 실수를 했을 수도 있겠군."

"네?"

"루이스 황자를 살린 거 말이야. 지금 가디언 제국의 황태자는 알브레 가문의 꼭두각시에 불과하네. 지배력은 떨어지고, 카리스마는 찾아볼 수 없지. 그런 사람이 다음 황제가 돼야 우리 아베르크 제국에 유리할 텐데, 강력한 경쟁자가 살아 있으니······."

"제 생각은 다릅니다."

"응?"

윌리엄 사령관의 미간이 좁아졌다.

"루이스 사황자는 처음부터 전쟁이 아닌 협상을 원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이익 때문에 병사들을 전쟁으로 모는 그런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황태자는 알브레 가문의 꼭두각시니 또 다른 누군가의 힘에 의해 흔들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정치에 큰 혼란이 오면, 권력을 잡은 자들은 자신들의 문제를 외부로 돌리기 위해 언제든 전쟁을 벌일 수 있습니다. 전쟁이 나면 우리나 가디언 제국이나 모두 큰 희생을 치러야 합니다. 그럼, 두 제국에게 모두에게 불행이 찾아올 겁니다."

"자네 평화주의자였나?"

"그건 아닙니다. 누가 제 것을 빼앗으려 하거나 제 사람을 건들면, 전 제 모든 것을 걸고 몇 배로 갚아줄 겁니다. 그러니 평화주의자는 절대 아닙니다."

"흠······."

윌리엄 사령관이 시가를 들더니, 직접 불을 켰다.

깊게 한 모금 빨고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루이스 사황자에 관한 생각은 내가 틀렸을 수도 있겠군. 하지만 가디언 제국이 적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아. 이미 지난 300년간 큰 전쟁이 7번에 국경 분쟁이 30번이 넘는 것이 그걸 증명해 주네."

"그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가디언의 귀족 작위를 받았다고 해서 루이스 사황자나 가디언 제국을 옹호하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그들이 우릴 공격한다면 전 제 모든 능력을 다해 막을 겁니다. 이곳에 제 터전과 삶이 있으니까요."

윌리엄 사령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다짐이군. 그 마음 변치 않길 바라네. 피곤할 테니, 그만 나가보게."

"충! 가보겠습니다."

***

타일러 빈스 중령이 나가자, 윌리엄 사령관이 시가를 다시 들었다.

"이거 내가 호랑이 새끼를 키우고 있나?"

그때 엠버 대령이 말했다.

"방금 들으시지 않으셨습니까. 타일러 중령의 터전은 이미 우리 아베르크 제국에 있습니다. 그러니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만약 말이야. 우리 제국 쪽에서 누군가 타일러 중령이나 그의 터전을 건드린다면 어떻게 될까?"

"네?"

엠버 중령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 쪽에서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아니네."

윌리엄 사령관은 손을 휘휘 저었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이거 남작의 작위론 어림도 없겠어······.'

67. 마지막 선물.

67. 마지막 선물.

내가 조금 과했나?

어쩌다 보니 마음속에 있는 진심이 튀어 나왔다.

윌리엄 사령관은 내가 계속 잡고 갈 동아줄 같은 사람이었다.

더 눈치를 봤어야 했나?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야! 언제까지 계속 끌려다닐 순 없어.'

이번에 협상단 일만 해도 나더러 가디언 제국의 정보를 알아 오라고 시켰지만, 그건 부수적이고 진짜 목적은 시안 오르도 7황자의 보호였다.

실제로 내가 아니었다면, 7황자와 협상단은 모두 죽었을 거고.

'윌리엄 사령관이 내 능력을 어디까지 눈치채고 있을까?'

인형술사와 마법인형 같은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어느 정도 힘과 능력이 있는지는 대략 눈치챈 것 같았다.

그러니 날 믿고 시안 7황자를 보냈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날 뒤에서 조종하는 건가?

어쩌면 운명의 실타래보다 더 강력한 실로 묶일 수도 있었다.

'정보 공유도 그만해야겠어.'

윌리엄 사령관은 내가 영지를 구한다는 사실을 찰스 국장에게 말했다.

그것도 내 동의 없이.

내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라곤 하지만, 내 정보가 원치 않은 사람에게 들어갈 수도 있었다.

예를 들어 시안 7황자나 북부군 지휘관들에게.

일단 너무 깊게 엮이는 것은 좋지 않았다.

혹여 나중에 쓸데없는 황자들 정치와 세력 싸움에 내가 끼일 수 있었다.

전생에도 충분히 보지 않았나!

각국의 정부와 헌터 협회, 군대, 헌터 대기업, 길드 간의 알력 싸움과 그 속에서 희생된 수많은 헌터들.

인간들끼리 하나가 되지 않았으니, 최후엔 괴수에게 멸망한 것이었다.

그 더러운 판에는 다시 끼고 싶지 않았다.

'어? 잠깐, 그럼 영지를 사라는 조언도?'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윌리엄 사령관이 자기가 뒤에 있는 것처럼 영지를 사라는 조언 역시 날 위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론 내가 자기 라인이라는 것을 세상에 공표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윌리엄 사령관은 7황자라인이었고.

윌리엄 사령관은 정말 무서운 사람이네!

그와 함께하면 할수록 나도 모르게 7황자 라인으로 스며들고 있었던 같았다.

아니! 이미 한쪽 발은 완전히 담겨있나?

'허! 인형술사인 내가 인형처럼 조종을 당하다니······.'

세상엔!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더니!

윌리엄 사령관은 삼국지 조조 뺨도 후려치겠어!

차라리 누가 시비를 걸고, 머리가 깨지는 한이 있더라도 내 영지는 스스로 사고 개척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그래야 온전한 나만의 영지가 되지!

이거 황제 폐하가 하사한 조끼도 돌려줘야 하나?

아니야!

이건 내가 정당하게 얻은 거니 돌려줄 필요는 없었다.

앞으로도 윌리엄 사령관과는 계속 도움을 주고받아야겠지만, 당분간 거리를 두고 정보국장을 통해서 명령을 받는 게 좋겠어.

다행히 정식으로 특별고문으로 임명장을 받은 것도 아니고, 지금 난 북부군 소속이 아니라 정보국 소속이었다.

그리고 굳이 작위를 받지 않아도 어차피 정보국 준장으로 승진해도 남작과 같은 위치였다.

차라리 찰스 정보국장과 정보를 공유하는 게 낫겠어.

그 사람은 라인 같은 거 없으니까.

난 그 길로 찰스 국장을 찾아갔다.

***

찰스 국장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응? 자네 지금 블랙힐 기지를 나가겠다고?"

"네! 이제 가디언 제국과 협상도 마무리됐고, 발굴 작업이야 제가 있어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전 대수림의 아리칸 공국 움직임도 살펴야 하고, 정보도 더 모아야 합니다."

"그건 그렇네만. 그래도 작위는 받고 가야지."

"네? 작위요?"

찰스 국장이 피식 웃었다.

"자네 말대로 시안 황자 저하를 구했는데, 우리 제국군이 아무것도 안 하면 모양새가 빠지지 않겠나. 훈장도 당연하지만, 윌리엄 사령관께서 고민하시는 것은 작위네. 남작의 작위는 가디언 제국이 준 것과 똑같고, 자작은 참모나 관리직에 주는 작위라 영지를 가질 수 없으니 고민하시는 것이네."

그리고 백작 이상의 작위는 황제 폐하만 내릴 수 있으니 줄 수 없을 거고.

"그렇군요. 그럼 작위가 나오면 카야킨 기지에 저희 대수림 정보대로 알려주십시오."

"응? 정말 작위를 받지 않고 갈 건가?"

"네! 제가 부지런히 움직여야 정보국에도 좋은 거 아닙니까."

찰스 국장이 피식 미소를 지었다.

"자네도 이번 일로 꽤 성장했군."

"찰스 국장님의 조언이 있어서 가능했습니다. 감사합니다."

"후후! 알았네. 사령관께는 내가 급한 일 때문에 다른 곳으로 보냈다고 말하지."

"충! 감사합니다."

난 경례를 하고 밖으로 몸을 돌렸다.

"자네, 기간트도 없이 움직······."

봉쇄령도 풀렸겠다.

블랙힐 기지를 나와 곧바로 카야킨 기지로 향했다.

이곳에 계속 있다간 왠지 제대로 발목을 잡힐 것 같았다.

타일러 중령이 나가자, 찰스 국장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이거 타일러 중령의 능력을 상향 조정해야겠군.'

***

[카야킨 전진 기지 대수림 정보대]

"하아! 일이 정말 끝도 없이 밀려오는구나!"

알프레도 소위는 서류 뭉치에 파묻힐 지경이었다.

에테나 하사관이 가져온 정보를 서류화하는 것도 밀려 있는데, 다른 엘프 하사관들이 아리칸 공국의 움직임을 세세히 파악해 그려온 그림도 서류로 만들어 일일이 정리해야 했다.

'무슨 암호해독도 아니고······.'

그리고 제국의 전진 기지의 이계 난민을 파악해서 이계 난민 기지로 보내는 일을 왜 자신이 해야 하는지 몰랐다.

"그때 내가 왜 타일러 소령님을 따라 대수림에 왔을까? 그냥 못 간다고 하고 도망칠 것을······."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알프레도가 고개를 돌리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헉! 타일러 소령님!"

알프레도가 기겁했다.

"왜? 상사 뒷담화 까다가 걸리니까 사레 걸려?"

"그게 아니라······."

오랜만에 내 사무실로 들어왔다.

푹신한 긴 소파에 앉았다.

저번에 와서 내가 앉을 자리가 없다고 뭐라 했더니, 좋은 소파를 준비했네.

"그런데 왜 중령 계급장을 달고 계십니까?"

"정보국 장교가 왜 이렇게 정보가 느려? 중령이 된 지 몇 달이 지났는데."

"아! 축하드립니다."

타일러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던졌다.

"이게 뭡니까?"

"보면 몰라? 자네 계급장이야. 알프레도 중위."

"지, 진급입니까?"

"계급장은 여기 전진 기지서 얻었지만, 찰스 국장님께서 허락하신 거니까. 진급 맞겠지?"

"충! 감사합니다."

이 녀석도 벌써 대수림에 온 지 1년이 됐네.

부관 덕분에 징그러운 서류 지옥에서 탈출할 수 있으니, 진급이라도 시켜줘야지.

어차피 내 돈 드는 것도 아니고.

"그래 전에 말한 직원은 뽑았어?"

"네! 커널 사령관님이 소개하신 분인데요. 덕분에 서류 작업이 한층 빨라졌습니다. 머리도 좋고 일 처리도 빠르고요."

"다행이네. 기밀 서류는 맡기지 말고."

"물론입니다."

그런데 이 녀석 왜 직원 이야기하는데 얼굴까지 빨개지지?

어차피 나와 관련된 정보는 엘프에게 단단히 말해 놓았기에 이곳에 모이질 않는다.

그러니까 전진 기지의 병력 이동이나 아리칸 공국과 가디언 제국의 병력 움직임 위주로 정보를 파악하고 있으니, 그걸 모아서 헬다임 지부로 보내면 내 임무는 끝이었다.

아직은 엘프 인원이 얼마 되지 않아 정보량이 부족하지만, 앞으로 계속 늘어날 것이다.

그리고 가끔 큰 건이 생기면 찰스 국장하고 직접 거래해야지.

"참 에테나는 어디 있지?"

"여관에 있을 겁니다."

"왜? 이곳에 우리 숙소가 있는데?"

"어제 마르실 하사관이 와서 함께 나갔습니다."

"아!"

마르실 족장은 인간들과 섞이기 싫어했다.

신세 지는 것도 싫어했고.

"난 에테나와 함께 장벽 너머로 갈 테니까, 당분간 여기 못 올 거야. 그러니 정보 정리 잘하고 헬다임엔 꼬박꼬박 보고서 넣는 거 잊지 말고."

"네! 지부장님."

"그리고 에테나를 통해 내가 보낸 안당고낙 사육 정보 말이야. 그 건은 북부군과 관련된 사업이니까, 따로 보관하고 헬다임 지부엔 보고하지 말게. "

"아! 알겠습니다."

"그럼 나중에 보자고."

소파에서 일어났다.

딸랑!

그때 문을 열고 한 사람이 들어왔다.

"어?"

순간 몸이 굳어버렸다.

그리고 심장이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샤를린양, 인사하세요. 이쪽이 우리 사무실 지부장님······?"

알프레도 중위가 소개하다 말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색한 공기가 방안을 휘감았다.

"타일러님······."

"여긴 왜 오셨습니까?"

"그, 그러니까."

"제게 파혼 편지를 보내왔을 때, 우리의 인연은 끝났습니다."

난 문을 향해 걸었다.

왜 갑자기 심장이 빨리 뛰는지 모르겠다.

타일러 빈스의 기억 때문일 것이다.

그냥 이 상황이 싫었기에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제 의지가 아니었어요."

문을 열다 말고 멈칫했다.

"부모님의 강요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적은 겁니다. 그리고 바로 후회했고요."

사를린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그녀는 울먹이고 있었다.

그녀 덕분에 난생처음 가슴 뛰는 경험을 했었다.

첫사랑의 기억.

얼마나 강렬한 기억이면 자주 꿈을 꿨을까.

하지만 그건 타일러의 기억일뿐 내 기억은 아니었다.

"돌아가세요. 여긴 당신 같은 분이 있기엔 힘든 곳입니다."

"미, 미안해요. 사과는 직접 해야 할 것 같아서 온 겁니다."

순간 가슴이 아려왔다.

타일러의 몸이 반응하나 보다.

지금이라도 몸을 돌려 울먹이는 샤를린을 안아주고 싶었다.

그녀는 대수림에서 거의 1년 반을 버텼다.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는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나와 타일러는 엄연히 다른 사람이다.

그녀는 내가 아니라 타일러에게 사과했고, 타일러를 기다린 것이다.

몸을 돌렸다.

"알프레도, 다음 헬다임으로 돌아가는 행렬에 샤를린 양의 자리를 알아봐 주게."

"네, 알겠습니다."

"전 가지 않을 겁니다. 이미 그곳에 제 자리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곳도 당신의 자리는 아닙니다."

"앞으로 인생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다시는 다른 사람의 의견에 끌려가지 않을 겁니다."

그녀가 주먹을 쥐고 입술을 다물었다.

허! 그녀의 고집도 보통은 아니었다.

"그럼 마음대로 하십시오."

난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마음 한구석에 찜찜함이 남았다.

처음부터 타일러의 기억은 내 것으로 인정했으면서 샤를린의 기억은 계속 밀어냈다.

'젠장!'

인형의 집을 열었다.

서류를 하나 꺼냈다.

그리고 다시 사무실로 돌아갔다.

"충!"

알프레도는 어색하게 경례했고, 샤를린은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이거 받으십시오."

"이게 뭐죠?"

"암시장에서 떠도는 정보입니다. 위네스 가문의 것이 있어 샀습니다."

"우리 가문이라고요?"

"네, 가디언 제국이 우리 정보국의 서류를 빼돌렸단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아마도 일부 정보가 암시장 쪽으로 흘러온 것 같습니다. 혹여 누가 묻거든 암시장에서 샀다고 하십시오."

"하지만 이걸 왜?"

"위네스 가문은 사업에 망한 게 아닙니다. 사기를 당한 겁니다. 그것도 당신과 혼담이 진행 중이었던 빌란트 영지의 알베르 후작이 배후입니다. 그러니 당신은 이곳이 아니라 제국으로 가야 합니다. 가서 당신의 가문과 당신의 인생을 망친 복수를 해야지요."

샤를린은 떨리는 손으로 서류를 건네받고 몇 장 넘기기 시작했다.

그리곤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환갑이 넘은 그것도 부인까지 있는 알베르 후작은 남부 최대의 곡창지대를 가진 빌란트 영지의 영주였다.

고작 16살의 어리고 남부 제일이라는 아름다운 신부를 맞이하기 위해 그가 선택한 것은 정공법이 아니라 가문을 몰락시켜 헐값에 그녀를 사려 했다.

중간에 내가 끼어들어 실패하긴 했지만.

그녀가 이 정보를 가지고 어떻게 할지는 모르지만, 이제 내가 해줄 일은 없었다.

"고, 고마워요!"

"아닙니다. 그저 과거 약혼자의 마지막 선물로 여기십시오."

난 몸을 돌려 밖으로 나왔다.

뭘 바라고 한 일은 아니었다.

그저 타일러, 아니 내 마음이 편했으면 했다.

"타일러 중령님!"

저기 앞에서 에테나가 손을 흔들며 달려왔다.

"카야킨엔 언제 오셨어요?"

"방금. 그리고 좋은 소식이 있어."

"네?"

"시노우엘이 있는 곳을 알아냈어!"

"아!"

에테나가 밝게 웃었다.

우린 하이엘프 시노우엘을 찾으러 출발했다.

***

난 표범인형에 타고, 에테나는 안당고낙에 타고 대수림을 달렸다.

'어서 엘프 정보대부터 확보해야 해!'

그래야 대수림의 중요한 정보를 얻고 윌리엄 사령관이나 찰스 국장과도 협상할 수 있는 위치가 된다.

그러려면 어서 시노우엘을 찾으러 가야 했다.

찰스 국장을 구한 덕분에 중요한 정보를 얻었다.

다행히 황궁이 아니라 삼황자의 처가인 남부의 대귀족 라디프 바이마르 공작가였다.

처음부터 그쪽이 의심 가긴 했다.

그녀를 납치한 놈들이 프랭크 대령과 일당들이었고, 그들은 호엘 삼황자의 라인이었으니까.

'무슨 라인이 이렇게 많은지······.'

밤이 늦어 인근 나무 위로 올라갔다.

혹시나 몰라 킹콩 마법인형도 꺼냈다.

전보다 괴수인형 전력도 늘었다.

에테나는 표범인형 옆에 누워 자고 있었다.

그녀가 깰까 조용히 인형의 집을 열었다.

암 드로운과 내 자동인형들의 모습이 보이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역시 이 세상에 완전한 내 편은 마법인형들뿐이었다.

에테나는 내 편인가? 아니면 엘프들의 편?

"주군을 뵈옵니다!"

거신인형 암 드로운이 고개를 숙였다.

'어때 신입들 훈련은?'

"아직 마장기에 타기엔 조금 부족하지만, 검술 실력은 꽤 올라왔습니다."

'고생했어.'

이번에 가디언 전진 기지에서 거신 갑옷만 챙긴 건 아니었다.

나와 싸우던 반란군 기사들과 운명의 실을 연결했고, 그중에서 둘을 허수아비로 만들었다.

일부러 바로 인형의 집에 넣지 않고, 병사들이 시체를 치우기 직전에 챙겼다.

마법인형은 이처럼 계속 늘어나는데 기간트나 마장기가 너무 부족했다.

헬다임에 들려 수리가 필요한 수십 대의 기간트와 마장기를 놓고 갈 생각이었다.

이걸 다 케네스와 드워프들이 수리할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드워프들이 케네스의 기술을 많이 배웠어야 할 텐데······.

거신 갑옷도 있었지만, 그걸 기간트로 만들기엔 케네스의 기술력도 부족했다.

'잠깐, 바이마르 가문의 기간트 생산 정보를 빼낼 수 있을까?'

공교롭게도 하이엘프 시노우엘이 있는 공작가는 기간트를 생산하는 남부의 대영지였다.

타일러가 샤를린 위네스를 처음 만났던 연회 장소도 라디프 바이마르 공작가였고, 빈스 가문도 이곳에서 기간트를 사간다.

[자동인형 짹이 분신인형으로 업그레이드했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lv.51 -> lv,52]

'응?'

갑작스러운 메시지에 눈이 똥그래졌다.

A급 헌터가 되고 지독하게 오르지 않았던 레벨이 올랐고, 처음으로 분신인형이 만들어졌다.

그것도 살루스 왕국 블레이즈 사막의 붉은 모래를 찾으러 간 짹이었다.

내 자동인형 중에서 암 드로운이 가장 먼저일 줄 알았는데, 암살자 쨱이라니!

[분신인형이 생겼기에 병렬사고(lv.1) 스킬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제 난 짹이 어디에 있든지 하루에 한 번 그의 의식을 공유하고, 그의 행동에 관여할 수 있었다.

[병렬사고(lv.1) 스킬을 사용했습니다.]

짹의 의식과 접촉했다.

그 순간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다.

68. 분신인형.

68. 분신인형.

수천km.

낯선 거리를 이동했다.

지도를 보다 길을 모르면 묻고, 기차가 없으면 마차를 탔다.

마차도 없으면 무작정 길을 걸었다.

그렇게 가고 또 가고,

수일, 수십 일, 수많은 날을 지나 드디어 살루스 왕국에 도착했다.

하지만 진짜 여정은 지금부터!

붉은 모래를 찾아 꺼지지 않는 열기의 블레이즈 사막을 횡단했다.

타는 듯한 갈증과 내리쬐는 태양.

하루에도 몇 번씩 지쳐 쓰러지지만, 그분이 내게 준 생명은 쉬 꺼지지 않는다.

밤이 되면 다시 기운을 차리고, 다시 또 걷는다.

포기하고 싶을 때도 많았다.

그냥 가만히 누워 있으면 이 힘든 여정도 끝이 나겠지.

사막의 모래바람이 날아와 날 영원히 묻어버리겠지.

하지만 날 이끄는 운명의 실.

마스터가 날 기다린다.

그리고 다시 일어선다.

오아시스에서 사막의 도적을 만났다.

단검을 던져서 셋, 검으로 둘, 손도끼와 소도를 들고 치열한 혈투 끝에 나머지 다섯을 쓰러트렸다.

너무 힘들어 그 자리에서 쓰러져 사흘을 잤다.

그리고 다시 일어섰다.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거대 모래 폭풍을 만났다.

이번엔 정말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여기까지가 내 한계였다.

나도 더는 버틸 수 없었다.

그때 기적이 일어났다.

눈앞에 작은 바위산이 보였고, 그 바위틈에서 동굴을 찾았다.

그곳엔 먼저 온 사람들이 있었다.

사막의 유랑민들.

잔뜩 경계하던 내게 그들은 조심스럽게 물과 대추야자를 내밀었다.

그들은 내게 사막에서 모래 폭풍을 피하는 법을 알려줬고, 별을 보며 길을 걷는 방법도 알려줬다.

사막은 그들의 집이자, 터전이었고, 그들은 조상 대대로 이곳 블레이즈 사막에 살고 있다고 말했다.

그들은 친절했고, 나는 마스터에게 받은 제국의 금화를 내밀었다.

금화의 힘은 위대했다.

그들은 내게 붉은 모래가 있는 곳을 알려주고, 함께 가주기까지 했다.

왜 마스터가 금화를 좋아하는지 알 것 같았다.

드디어 붉은 모래를 찾았다!!

거대한 분지 속, 타는 듯한 불꽃의 모래.

뜨거운 눈물이 쉴새 없이 흐르고, 뛸 듯이 기뻤다.

사막의 유랑민들은 붉은 모래를 찾아 기뻐하는 날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마스터의 주변에는 기간트에 타는 자들이 가득했다.

아니 전부였다.

그리고 엄청난 힘을 가진 거신인형까지, 이제 쓸모없는 것은 나밖에 없었다.

난 기간트에 타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사마귀처럼 날지도 못했고, 표범처럼 강하지도 않았다.

매일 수 없이 단검을 던지고, 도끼와 검을 휘둘러 보지만 한계가 명확했다.

나는 이제 마스터에게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러나 마스터는 나를 믿었다.

그리고 내게 중요한 임무를 맡기셨다.

난 지금 그 임무를 수행 중이다.

배낭 가득 붉은 모래를 담고, 양어깨에 메고 다시 길을 떠난다.

짐의 무게만큼 돌아갈 때의 발걸음은 몇 배나 더 묵직했다.

하지만 마음은 훨씬 가볍다.

나도 마스터에게 쓸모 있는 몸이었다.

발이 푹푹 빠지는 뜨거운 사막을 건너 다시 제국의 북쪽으로 향했다.

걷고, 마차를 타고, 열차를 타고.

드디어 헬다임 역에 도착했다.

가슴이 벅차오른다.

지금 내 등에는 붉은 모래가 가득했다.

나를 믿어준 마스터께서 기뻐하실 모습을 떠올리니, 발걸음이 절로 가벼워진다.

"이 새끼, 감히 우리를 배신하고 헬다임 역에 당당히 들어와?"

"어이가 없네!"

순간 무언가 잘못됨을 느꼈다.

정체 모를 자들에게 공격을 받았다.

"저 새끼 잡아!"

난 싸우고 또 싸웠다.

하지만 놈들은 너무 많았고, 난 너무 지쳐있었다.

결국, 놈들에게 붙잡혔다.

이제 다 왔는데······.

허무하고 또, 허무할 뿐이다.

나는 사라져도 이 붉은 모래라도 마스터께 전해 드려야 하는데 자꾸 의식이 흐려진다.

[짹(lv.1) 분신인형과 의식을 연결합니다.]

'내 첫 번째 분신인형이라니!'

기대감을 안고 짹과 연결했다.

순식간에 공유된 짹의 의식!

그런데 가슴이 답답하고, 먹먹해졌다.

따로 설명을 들을 필요는 없었다.

의식의 연결과 동시에 나와 헤어진 후의 기억을 공유하고, 그 여정을 고스란히 느꼈다.

겨우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는데, 헬다임 역에서 사로잡힌 것이 허무했다.

그리고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다.

어쩌면 이런 감정들이 짹을 분신인형으로 만든 원동력일 수도 있었다.

내게 소식을 전하기 위한 간절한 마음이 연결됐고, 내 분신인형으로 거듭난 것이다.

[병렬사고(lv.1) - 하루에 한 번 15분간 분신인형의 생각과 의식을 공유한다. 의식이 병렬연결 되면 실시간으로 스킬을 전송할 수 있습니다.]

[현재 분신인형에 전송할 수 있는 스킬은 총 3개입니다.]

그렇다!

난 분신인형의 생각을 읽는다.

그리고 의식을 공유한다.

또한, 내 스킬을 보낼 수도, 분신인형의 스킬을 가져올 수도 있다.

원래는 대부분 분신인형의 스킬을 내가 빌려오지만, 지금은 그 반대였다.

분노가 끓어오르지만, 지금은 짹을 구하는 것이 먼저였다.

'짹, 너도 분하겠지만 침착해! 그래서 필요한 스킬이 뭐야?'

세 괴수 마법인형에게 추가로 익힌 스킬까지 난 총 6개의 스킬이 있었다.

짹 분신인형이 내게 의식을 전해왔다.

'알았다. 네게 전달한다.'

퍽! 퍽!

짹 분신인형이 누군가 휘두른 몽둥이에 맞았다.

그 고통과 분함도 고스란히 느껴졌다.

짹은 지금 양손을 뒤로 한 채로 의자에 묶여 있었다.

꼼짝할 수 없었기에 고스란히 당하고만 있었다.

[도약(lv.5) 스킬을 전송했습니다.]

[양손 내려찍기(lv.3) 스킬을 전송했습니다.]

[앞발 후려치기(lv.4) 스킬을 전송했습니다.]

그 순간 짹이 미소짓는 것이 느껴졌다.

"어라? 이 새끼 웃는데요?"

"뭐? 너무 맞아서 돌아버렸나?"

짹은 지금 꼼짝할 수도 없었기에 벗어나기 위한 스킬이 필요했다.

"도약!"

팟!

다리를 뻗고 스킬을 사용했다.

짹의 몸이 의자와 함께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뭐야?"

쾅! 콰직!

"으헉!"

짹은 덩치 큰 사내를 덮쳤고, 의자는 산산이 부서졌다.

덕분에 손이 풀렸다.

"양손 내려찍기!"

두 손을 모아 당황한 다른 놈의 대가리를 내려쳤다.

콰앙!

"커헉!"

놈이 힘없이 쓰러졌다.

짹은 서둘러 바닥에 떨어진 몽둥이를 들었다.

'짹, 거기가 어디야?'

의식이 공유된다.

이곳은 이미 전에 한번 와 봤던 곳이었다.

시장 저택의 지하 창고.

'곧장 하수도로 빠져나와!'

짹이 달리기 시작한다.

"뭐야?"

"이 새끼, 어떻게? 나왔어?"

앞발 후려치기!

퍼억! 퍼억!

몽둥이에 맞은 두 놈이 힘없이 쓰러진다.

그리고 뒤에서 또 다른 놈들이 추격한다.

'계속 달려!'

한참을 달리자, 하수도 여러 개가 모여서 거칠게 흐르는 대형 수로가 보였다.

다다다닥! 팟!

짹이 도약 스킬로 10미터의 넓이의 수로를 단번에 뛰어넘었다.

그러자 뒤에서 쫓아온 놈들은 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

짹은 하수도를 필사적으로 달렸다.

그러다 갑자기 멈춰 몸을 돌렸다.

'뭐? 붉은 모래를 찾아야 한다고? 됐어! 그건 내가 찾을 테니까, 당장 도망쳐! 네가 붉은 모래보다 소중하다고!'

내 의식을 몇 번이나 강하게 전달했다.

그제야 짹은 다시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제 15분이 다 됐다.

연결이 끊긴다!

'글래디스 일등 하사관을 찾아 몸을 숨겨!'

마지막 의식을 전달하자, 연결이 끊겼다.

으드득!

주먹을 쥐었다.

"하아! 그래, 그놈들이 남아 있었지."

헬다임의 시장인 쟝 볼타와 그의 아들 쟈크 볼타 남작.

그놈들은 삼황자의 측근으로 이전 장벽 사령관이 있을 때부터 많은 부산물과 마석을 빼돌린 자들이었다.

그리고 살루스 왕국과 공모해 신임 사령관을 암살하려 했다.

물론 증거는 나오지 않았기에 윌리엄 사령관은 살루스 야영지에만 경고하고 넘어갔다.

그때 다 쓸어버려야 했다.

하지만 장벽 사령관 역시 정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아니 제국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함이다.

결국, 완벽한 자유를 얻기 위해선 제국마저 넘어서야 한다는 뜻이었다.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은 거기까지 신경 쓸 틈이 없었다.

당장 문제는 현재 헬다임 장벽 사령부의 기간트와 병력 대부분이 대수림 너머 카야킨과 블랙힐 기지에 있다.

지금 헬다임 사령부에 남은 병력은 얼마 되지 않았기에 모두 장벽 관문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헬다임 시는 시장과 경비대의 소굴이나 마찬가지였다.

내 마법인형은 내 운명의 실타래 범위에 있을 때, 완벽해진다.

이 실타래 범위를 벗어나면 꼭두각시는 하루도 버티지 못하고 운명의 실이 끊어져 완전히 사라진다.

자동인형은 운명의 실타래를 벗어나도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보통 인간처럼 먹고, 마셔야 하며, 잠을 자기도 해야 한다.

또 지치기도 하고, 머리와 사지가 잘리는 등 크게 다치면 자동인형 역시 운명의 실타래가 끊어지고 결국 사라진다.

내 자동인형 암 드로운도 난민 기지를 지키고 있을 때, 엄청난 식사량을 감당하지 못해 주변의 괴수를 잡아먹기도 했다.

그러니 하루라도 빨리 짹을 찾아서 내 인형의 집에 넣어야 한다.

아니면 운명의 실이 모두 끊어져 소멸할 수도 있었다.

"타일러님! 지금 출발할까요?"

"응? 에테나, 언제부터 깨어 있었어?"

"한 10분 전부터요? 그보다 급한 일이 있으신 것 같은데, 어서 출발하죠."

"그래, 네 말대로 급한 일이 생겼어. 하지만 걱정은 하지 마! 어차피 가는 길목이니까 시간은 오래 잡아먹지 않을 거야."

"넵! 어서 가죠!"

우린 헬다임 장벽으로 달렸다.

'짹, 조금만 버텨라!'

내가 간다!

***

[헬다임 장벽 관문]

관문을 통과하자마자 에테나를 집으로 먼저 보내고, 글래디스부터 찾았다.

"글래디스!"

"타일러 소령, 아니 중령님! 또 진급하셨군요. 블랙힐 기지는 좀 어떻습니까?"

"짹, 짹은 어디 있지?"

글래디스가 야영지를 가리켰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 야영지에 있습니다. 그런데 대체 무슨 일입니까? 얼굴과 몸이 엉망이 된 채로 절 찾아왔었습니다."

"고맙네."

난 야영지를 향해 달렸다.

짹과 첫날 의식을 공유한 후로 병렬사고(lv.1) 스킬로 연결이 되지 않았다.

그만큼 위급한 상황이었다.

분신인형 짹이 운명의 실타래 범위로 들어오자마자, 인형의 집에 넣었다.

난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히 소멸하지 않았다.

그때 힘겨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스터, 죄송합니다. 붉은 모래를 찾았는데······.]

'아니야! 잘했어. 이제 좀 쉬어. 붉은 모래는 내가 찾아올 테니까.'

난 헬다임 시내로 방향을 틀었다.

"어? 정보원을 보러 가신다면서요?"

글래디스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곧장 시장 저택으로 향했다.

놈들이 마석과 부산물을 몰래 빼먹는 건 상관없었다.

하지만 감히 내 마법인형을 건드렸단 말이지.

그건 날 건든 것이나 다름없었다.

[헬다임 시장 저택]

끼이잉! 쿵! 쿵!

비숍급 기간트 2대가 시장 저택 앞에 섰다.

'그냥 다 밀어버려!'

내 자동인형들이 탄 기간트가 움직였다.

"뭐, 뭐야?"

"기간트다!"

기이잉! 쾅! 콰앙!

비숍급 기간트 2대가 정문을 박살 내고, 담장을 허물었다.

그리고 저택을 향해 움직였다.

"머, 멈춰라!"

저택에서 하인들과 경비들이 우르르 나와 앞을 막아보지만, 기간트를 막을 수는 없는 법.

"으악!"

"피해라!"

쾅! 쩌억!

거대한 도끼로 3층 저택을 부수기 시작했다.

쿠앙! 우르르! 쿵! 쿵!

도끼질 몇 번에 건물 절반이 무너져 내렸다.

잠시 후 경비대 병사들이 몰려왔지만, 기간트를 막을 방법이 없었기에 그저 지켜볼 뿐이었다.

그리고 소란한 소리를 듣고,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대체 누가 시장 저택을 부수는 거야?"

"난들 아나! 정말 시원하게 부수는데!"

저들은 누구한테 당했는지도 모를 거다.

이 기간트들은 살루스 왕국의 것이니까.

기간트들이 건물을 부술 때, 나도 자동인형들과 하수도를 이용해 놈들의 지하 창고로 들어갔다.

다행히 금방 붉은 모래를 담은 배낭을 찾았다.

그리고 안에 붉은 모래도 들어 있었다.

'세상에 족히 20kg은 되겠어!'

무겁다는 것은 의식 공유로 알고 있었지만, 직접 들자 가슴이 아려왔다.

이 무거운 것을 메고 사막과 제국을 횡단했다니!

두 기간트가 저택과 담벼락까지 완전히 부쉈지만, 기간트가 있는 장벽 수비대에선 아무도 오지 않았다.

그리고 난 기간트와 유유히 도시에서 사라졌다.

이게 끝이 아니었다.

단지 시작일뿐이었다.

지금은 시간이 없었기에 경고만 해준 거고, 알거지가 되고 헬다임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두고두고 괴롭혀줄 생각이었다.

난 집으로 향했다.

69. 시노우엘.

69. 시노우엘.

"와! 타일러 삼촌이다!"

진짜 천재 앨리슨이 달려와 와락 안겼다.

"앨리슨, 잘 있었어?"

"왜 이렇게 안 와? 나 보고 싶은데!"

"미안, 내가 바빠서 그렇지."

"앨리슨이 좀 도와줄까?"

"뭐?"

별로 잘해준 것도 없는데, 날 삼촌이라 부르고 친근하게 대해줘서 고마웠다.

"어라? 키가 한 뼘이나 커졌네?"

"아닌데! 10센치 커졌는데!"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그리고 보니 집에 돌아온 것이 거의 일 년만이었다.

그동안 대수림에 있었기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이제 안당고낙을 본격적으로 사육하면 대수림을 최대 3배 빨리 이동할 수 있으니, 더 자주 올 수 있겠지······.

"오! 타일러여! 왔는가!"

"타일러여! 오랜만이다."

구슬땀을 흘리던 글러드 왕자와 대장장이 드워프들이 반가운 얼굴로 다가왔다.

"그래, 다들 잘 있었나?"

"우리야 편안한 곳에 있지 않은가! 대수림에 있는 그대가 힘들지."

"걱정하지 마. 나도 그럭저럭 잘 지냈으니까. 그리고 라스칼하고 난민 기지의 드워프들도 잘 지내고 있어."

일단 일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오자마자 일 이야기부터 꺼내면 너무 정이 없으니까.

"여! 타일러, 왔나?"

"응? 케네스 영감님, 오늘은 멀쩡하시네요?"

"크하하! 아무래도 내가 어두운 곳에 살아서 치매가 심해졌나 봐. 그리고 드워프들이 만들어준 깨끗하고 웅장한 저택에 살아서 그런지, 전엔 하루에 한두 번씩 깜빡깜빡했는데, 요즘은 나흘에 한 번꼴로 확 줄어들었어."

"아! 그거 희소식이네요."

"희소식은 따로 있지. 날 따라오게."

공방 한쪽으로 이동했다.

그곳엔 이십여 대의 기간트가 멀쩡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어? 전부 수리했어요?"

"기간트 생산까진 아직이지만, 수리라면 이제 이골이 났네."

전에 내가 놓고 간 부서진 기간트를 전부 말끔히 고쳐놨다.

"와! 완전히 새것 같은데요!"

"다 드워프들 솜씨야. 저들의 솜씨가 하루가 다르게 늘고 있네. 내가 알려준 마석 용접 방식보다 저들의 부산물 접합 방법이 훨씬 견고하고 빨라."

"오! 다행이네요."

"아무튼, 요즘은 내가 드워프들에게 배운다니까!"

집에 돌아오자마자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드워프들의 실력이 일취월장하고 있었다.

머지않아 기간트 생산도 가능할 것 같았다.

이번에 대영지의 기간트 생산 공장을 몰래 보고 온다면, 그 기간도 짧아지겠지.

"그리고 마석 배터리도 모두 충전해 놨으니, 다 챙겨가게."

"잘하셨습니다."

탕! 탕! 탕!

식사 때를 알리는 냄비 두들기는 소리.

"타일러여! 오랜만에 솜씨 좀 발휘했네."

드워프 주방장이 율리히가 소리쳤다.

"오늘은 닭고기 스튜다!"

"오오!"

"밥이다! 가자!"

이 엄청난 환호성은 뭐지?

내가 돌아왔을 때보다 목소리가 더 크다.

순식간에 공방이 텅 비었다.

식탁에 앉자 음식이 접시 가득 나오고, 닭고기를 한입 베어 물자 입안이 황홀하다.

정말 맛있다니까.

"타일러, 이번에 내가 드워프 말을 조금 배웠는데, 들어보겠나?"

케네스가 괴이한 밝음으로 드워프 말을 했다.

솔직히 뭐라고 하는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다.

그러자 옆에 앉아 있던 앨리슨이 작은 머리를 흔들었다.

"난 드워프 말도 잘하는데!"

"어? 너 드워프 말도 배웠어?"

그때 율리히 주방장이 웃으며 말했다.

"하도 졸라서 좀 가르쳐 줬는데, 이젠 이 녀석 앞에선 농담도 못 해, 다 알아듣는다고!"

"나 엘프어도 배우고 싶은데!"

맞은 편에 앉은 에테나가 피식 웃었다.

눈치로 앨리슨의 말을 알아들은 것이다.

오크어까진 사람들이 배울 수 있었지만, 엘프어는 쉽지 않았다. 인간이 정령 말을 하는 것과 비슷한 이치였으니까.

"이봐! 여기 빵 좀 더 줘!"

"난 닭고기 스튜, 다 먹었는데!"

수십 명이 앉아서 먹을 수 있는 떠들썩한 이 식탁이 좋다.

'역시 집밥이 최고다!'

***

집을 나서기 전 50여 기나 되는 부서진 기간트와 마장기를 전부 꺼내 놓자, 케네스 영감과 드워프 대장장이들이 경악했다.

"이, 이게 대체!"

"모두 수리가 필요합니다."

"수리야 한다지만, 이 많은 기간트를 다 어디에 쓰려고?"

"기간트와 마장기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거 아닙니까."

그때 드워프 왕자 글러드가 말했다.

"타일러여! 건축가 드워프들도 저택 공사가 끝났으니, 우리 일을 도울 거다. 그러니 그대가 돌아올 때쯤엔 모두 수리가 끝났을 거다. 우리에게 맡겨두라고!"

"그래, 필요한 재료가 있으면 언제든 말하고."

드워프들이 활기가 넘쳤다.

자신들이 뭔가를 이루고 있다는 느낌에 활력을 느끼는 듯했다.

"그리고 거신 갑옷도 하나 놓고 갈 테니까. 어떻게 기간트로 만들 수 있을지 연구 좀 해줘."

폰급 거신 갑옷을 하나 꺼내 세워 놓았다.

기간트를 만드는 것은 단순히 절단면을 붙이거나 구멍을 메우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괴수 부산물로 골격과 내부를 채우고 모든 연결부마다 거신 마법진을 새기는 작업이라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언젠가는 해야 할 일.

"휴! 최선을 다해보겠다."

글러드 왕자도 이건 살짝 자신이 없어 보였다.

"내가 도울 거야! 타일러 삼촌은 걱정하지 마!"

앨리슨이 팔을 걷어붙이고, 글러드 왕자 옆에 섰다.

"앨리슨이 돕는다면, 해볼 만하지."

"좋아! 우리도 한번 기간트를 만들어 보자고!"

드워프들도 앨리슨의 능력을 알고 있었기에 의욕에 불타고 있었다.

"그럼 다녀올게."

앨리슨이 세상 섭섭한 얼굴을 했다.

아니 당장이라도 울 것 같았다.

"에테나 언니는 좋겠다. 타일러 삼촌이랑 맨날 다니고."

에테나가 앨리슨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곧장 밖으로 나와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는 출발하고 슬쩍 창문을 보자, 앨리슨이 어느새 저택 앞까지 따라와 날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이번에 다녀와서, 정말 학교를 알아봐야겠어.'

날 돕는 건 좋지만, 또래 친구들이 없으니 더 외로워하는 것 같았다.

앨리슨도 사람들과 섞이는 방법도 알아야 하고, 교육도 받아야 했다. 그래야 나중에 더 큰 일을 할 수 있는 법이니까.

머리가 좋으니 수업은 금방 따라갈 거고, 너무 특출난 능력 때문에 누군가 노릴 수도 있었기에 그게 걱정이었다.

호위로 누굴 보내지?

인형의 집을 열었다.

'짹, 벌써 움직이는 거야?'

이틀 만에 짹이 인형의 집에서 몸을 쓰기 시작했다.

[마스터, 이제 괜찮습니다. 그리고 전수해 주신 스킬 감사합니다.]

'응? 그건 무슨 소리야? 전수라니?'

짹은 내게 자신의 변화에 대해 말해줬다.

'뭐? 내가 전송해준 스킬을 모두 배웠다고?'

[그렇습니다. 마스터! 다만 배운 스킬 레벨은 1레벨입니다. 제가 더 열심히 연습하고 단련해 레벨을 올리겠습니다.]

어?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병렬사고 스킬에 이런 기능이 있었나?

아니면 짹이 특별한 건가?

전생엔 마법인형의 숫자가 워낙 많기도 했고, 대부분 나보다 강했기에 내가 마법인형의 스킬이 필요했지, 내 스킬을 마법인형에게 전송할 필요가 없었다.

'어? 그런데 스킬 레벨이 보여?'

[푸른 글씨가 허공에 보입니다.]

'그래, 무슨 말인지 알아보겠어?'

[네, 제국어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지난 이틀간 누워서 이것저것 눌러봤더니 무슨 의미인지도 알 것 같습니다.]

정말 분신인형이 맞네!

난 마법인형의 전체적인 업그레이드 상태를 보지만, 내 분신인형은 나처럼 스스로 상태창을 본다.

그리고 자신의 현재 레벨과 스킬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지금 레벨이 몇이야? 클래스는? 그리고 헌터 등급은?'

[레벨은 17, 클래스는 암살자라고 적혀 있습니다. 헌터 등급은 E등급입니다. 마스터.]

제대로 각성했네.

짹이 헌터가 된 거 같아 왠지 동질감이 느껴졌다.

'그런데 정말 내 스킬을 배웠다고?'

이건 처음 듣는 것이었다.

한 번 테스트해봐야겠다.

[병렬사고(lv.1) 스킬을 사용했습니다.]

[짹(lv.1) 분신인형과 의식이 연결됐습니다.]

곧바로 우리 둘은 의식을 공유했다.

그리고 가디언 제국의 보르자 전진 기지를 사마귀 꼭두각시로 수색하다 배운 스킬을 열었다.

[공간 거리 재기(lv.3) – 사마귀 괴수의 거리 재기 능력을 스킬로 만든 것으로 주변 배경과 움직이는 물체를 실시간으로 비교하며 3차원적 입체 공간 거리와 간격을 신속하고 정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스킬 사용 시 – 동체 시력과 순간 인지능력이 1.5배 빨라진다.(하루 사용 시간 – 15분)]

이 스킬은 일반 전투 상황에서 효과적이었고, 기간트에 타서도 기간트 반응속도가 빨라졌다.

[공간 거리 재기(lv.3) 스킬을 전송합니다.]

'방금 보낸 스킬을 계속 사용해봐!'

짹이 인형의 집에서 공간 거리 재기 스킬을 사용한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다른 스킬들을 써봐!'

짹은 이틀 전에 내가 전송해준 도약이나 앞발 후려치기, 양손 내려치기 등의 스킬을 거침없이 사용했다.

정말 짹의 말처럼 스킬을 전송하지도 않았는데, 내가 가진 스킬을 구사했다.

물론, 아직 레벨은 1이라 위력은 약했지만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일단 스킬을 배웠다는 것이 중요했다.

계속 스킬을 쓰다 보면 레벨은 올라가고 스킬 능력도 알아서 올라가니까.

15분 후.

병렬사고 스킬 유지 시간이 지났다.

'어때? 공간 거리 재기 스킬을 쓸 수 있어?'

[네, 가능합니다. 마스터, 기술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허! 분신인형에게 스킬 전수가 가능하다니!

새로운 능력을 깨우친 짹은 전보다 더 열심히 훈련에 임했다.

'짹! 앞으로도 네가 할 일이 많을 거야. 그러니까 다른 생각하지 말고, 꾸준히 실력을 쌓아!'

[마스터, 정말 감사합니다.]

기간트에 타지 못해 느꼈던 무력감이나 자신이 필요 없는 존재라고 생각했던 짹은 이제 안녕이었다.

그는 이제 성장하는 헌터니까.

***

[바이마르 대영지]

바이마르 가문은 호엘 삼황자 최측근이자 처가였다.

특이하게 영지의 이름이 가문의 이름이었다.

그만큼 오래 대영지로 군림했고, 또 가문의 힘이 강했다.

처음 빌헬름 뢰트겐이 기간트를 개발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쭉 기간트를 생산했고, 생산량도 현재 제국에서 3번째로 많았다.

아무래도 헬다임 장벽에서 거리가 가장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다른 대영지보다 가격이 조금 저렴했고, 제국 남부의 트와이트 대마경에서 괴수 부산물을 자체적으로 수급하고 있었기에 가격을 낮출 수 있었다.

그리고 남서쪽 국경 너머 살루스 왕국과 바다 건너 식민지에도 기간트를 수출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젠 살루스 왕국에 기간트 수출이 금지됐으니, 생산량을 줄여야 했고, 그만큼 금화를 벌 수 없었으니 약이 바짝 올라 있을 것이다.

'시노우엘은 어디에 있을까?'

그냥 평범한 저택에 살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바이마르 공작 가문의 저택은 500년 이상 된 거대한 성이었다.

내부는 타일러가 한번 들어가 봤지만, 건물도 많고, 정원도 여러 개라 길을 잃기에 십상이었다.

그리고 기간트 생산 공장은 성 뒤편의 산을 통째로 뚫어 만들었기에 성보다 더 진입이 어려웠다.

그때 에테나가 엘프의 귀를 쫑긋 세웠다.

그리고 입을 살짝 벌렸다.

우리가 침입할 내부 구조를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그래, 좀 알겠어?"

"네! 그리고 시노우엘님이 어디 있는지 찾았습니다."

"뭐? 찾았다고?"

"하이엘프는 일반 엘프보다 모든 능력이 월등합니다. 그리고 정령의 소리도 훨씬 잘 들으시고요. 제 신호를 받자마자, 위치를 알려주셨습니다."

"오! 일이 술술 잘 풀리네."

그런데 너무 일이 잘 풀리자, 조금 걱정됐다.

꼭 이러다가 한번 더럽게 꼬이던데······.

"일단 밤에 다시 오자."

보름달이 환하다.

누가 감히 남부 제일의 바이마르 공작가를 침입하겠나?

하지만 나와 에테나는 높은 성벽을 쉽게 넘었다.

내 마법인형들이 돕기에 이 정도는 껌이었다.

그리고 정원을 가로질러 외곽의 3층 건물에 멈췄다.

'여기라고?'

내 입 모양을 본 에테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손으로 2층을 가리켰다.

지하 감옥 같은데 갇혀 있을 줄 알았는데, 너무 멀쩡한 건물에 있었다. 아니 주변에 다른 건물보다 유난히 아름답고 웅장해 보였다.

'정말 라디프 공작의 노리개라도 된 건가?'

찰스 국장의 정보에 의하면 라디프 공작이 황궁에서 큰 연회가 있을 때면, 엘프를 항상 데리고 다닌다고 했다.

그리고 엘프 역시 웃는 얼굴로 사람들과 마주했다고 했다.

라디프 공작은 부인과 사별했고 자식은 넷이나 있었다.

아름다운 엘프를 지극 정성으로 대했을 수도 있었다.

혹시 우릴 따라가지 않는다면 어쩌지?

그녀는 힘든 대수림 생활을 오래 했다. 그러니 인간들의 호화로운 생활에 물들 수도 있지 않은가.

살짝 걱정됐다.

"경비병이 이동했습니다. 들어가죠."

에테나와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2층으로 올라와 중앙에 있는 응접실로 이동했다.

끼이익!

그런데 우리가 도착하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

시녀가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눈이 마주쳤다.

'젠장, 들켰나?'

"안으로 드십시오."

시녀가 우릴 향해 고개를 숙였다.

'뭐지? 이 반응은?'

"타일러님, 가시죠."

에테나가 내 팔을 끌더니, 응접실로 들어갔다.

그곳엔 푸른 눈의 길고 우아한 엘프가 서 있었다.

왜 몸에서 광채가 나는 거지?

나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그냥 아름답다고 표현하기엔 너무 부족했다.

그래! 여신!

여신이 한 명 서 있었다.

"시노우엘님!"

에테나가 달려가 시노우엘에게 안겼다.

시노우엘은 에테나의 머릿결을 쓰다듬었다.

시노우엘이 시녀를 보더니, 손을 살짝 내밀며 말했다.

"낸시, 그만 가서 일을 보세요."

"네! 전 가서 일을 보겠습니다."

인형처럼 대답한 시녀가 문을 닫았다.

뭐지?

"당신 제국어를 할 줄 아는군."

시노우엘이 날 쳐다봤다.

순간 깊고 푸른 눈에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

이상한 기분이 드네.

"그러는 당신은 누군데 엘프어를 할 줄 아는 거죠?"

난 시선을 피하고, 피식 웃어줬다.

여유로운 척을 하곤 있지만, 가슴이 떨려 죽겠다.

"이분은 타일러님이십니다. 우리 엘프들을 돕고 있어요."

에테나가 나에 관한 설명을 열심히 했다.

시노우엘은 이야기를 듣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아이들이 당신에게 신세를 졌군요."

"고맙다는 인사는 사양하지. 이제 당신도 내 신세를 질 테니까."

"전 여기 갇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든 떠날 수 있습니다."

"응? 무슨 개소리야?"

70. 세계수.

70. 세계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