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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어두운 밤.

여러 발소리가 숲에 울려 퍼졌다.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카오틱들의 발소리였다.

빨리 여기서 벗어나야 한다는 일념하에, 그리고 조금 전에 본 것들에 경악하면서.

'그리폰을 잡았다고?'

'우리는 못 잡은 그리폰을 혼자서 잡다니.'

'분명 소환 마법이었어. 그게 가능한 건가?'

자신들이 본 걸 믿을 수가 없었으니까.

특히 전투 과정이 그러했다. 온갖 무기를 쓴 데다가 그 귀한 소환 마법까지 쓰지 않았던가.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상대할 수 있는 놈이 아니다.'

'그리폰을 혼자서 잡는 놈을 어떻게....'

일방적으로 공격당하던 그리폰은 두 날개를 잃었고, 결국 목숨마저 빼앗겼다.

평범한 몬스터가 아니다. 이 고산지대의 지배자이자, 일종의 보스 몬스터인데.

그걸 혼자서 잡는 놈이 있다니.

'요즘 유명한 놈이라는 건 알았는데.'

제이드가 이를 악물었다.

여기로 오기 전에 정보를 구했었다. 정보가 많지 않아서 힘들었지만, 가능한 선에서.

저 레벨대에서 강한 놈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래도 어렵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다.

'이쪽이 수적으로 더 우위에 있었으니까!'

그 망할 그리폰만 아니었더라면.

설마 필드 보스를 유인해서 카오틱들과 싸우게 만들 거라고 누가 생각했겠는가.

제이드도 생각하지 못했다.

'이런 수치를 겪게 하다니. 이 원한은 잊지 않겠다. 돌아가거든 반드시 되갚아 주마.'

여섯 손가락의 힘으로, 반드시.

제이드는 숲을 달렸다. 그러다가 불현듯 숲이 이상할 정도로 조용하다는 걸 깨달았다.

'뭐지?'

자신과 함께 달리던 카오틱들의 발소리가 사라졌다. 기분 나쁜 적막만이 느껴질 뿐.

제이드의 걸음이 멈췄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부하들에게 문제가 생겼다.

제이드가 상황을 파악하려는 찰나.

"뭘 그리 조용히 움직이시나?"

"헉...!"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제이드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 눈에 보인 것은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한 줄기 섬광.

"...!"

반응할 새도 없이, 번개 같은 일격이 제이드의 급소를 정확하게 타격했다.

방어구를 무시하는 일격이었다. 끔찍한 고통에 제이드가 신음을 토해 냈다.

"끄어어어...."

"내가 그냥 보내 줄 거라고 생각했냐?"

퍼억! 명치를 걷어차인 제이드가 쓰러졌다. 그리고 주먹이 놈의 사지를 짓이겼다.

"크아아아악!"

"너는 쓸모가 있으니까 일단은 살려 주지."

진현우가 팔을 뻗었다.

하늘에서부터 날아온 매들이 그의 팔에 올라타더니, 제이드를 감시하듯 노려봤다.

제이드는 침음성을 흘렸다.

'나는 살려 준다니, 그럼 다른 녀석들은....'

다 죽였다는 건가.

그게 제이드가 마지막으로 한 생각이었다.

"기절했나?"

진현우는 기절한 제이드를 매들에게 맡겼다. 그리고 메시지창들을 확인했다.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고산지대의 정복자, 그리폰을 처리할 것.

―보상으로 고급 등급 칭호 [정복자를 정복 (효과: 모든 능력치 +3)]을 획득했습니다.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고산지대의 정복자, 그리폰을 혼자서 처리할 것.

―보상으로 영웅 등급 칭호 [고산지대의 진정한 정복자 (효과: 산악 지대에서 덜 지치며 이동 속도 +10% 증가)]를 획득했습니다.

칭호.

그리고.

―[모케라의 부탁 ―원한] 퀘스트를 완벽하게 수행했습니다. 보상으로 사념의 아이템과 스킬의 등급이 한 단계 상승합니다.

―[고산지대의 그리폰 퇴치] 퀘스트의 조건을 달성했습니다. 알렉산더에게 보고하여 약속된 보상을 받으십시오.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적정 레벨에 도달했습니다. '계승자' 칭호의 효과로 직업 퀘스트를 강제로 받습니다.

직업 퀘스트를 강제로 받았다는 메시지.

진현우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기다리던 게 왔군.'

56화

당하고는 못 산다

30레벨.

직업 퀘스트를 받을 수 있는 레벨이다.

진현우는 하피와 그리폰을 사냥하면서 충분한 경험치를 쌓았고, 각종 퀘스트를 완료한 보상을 받으니 30레벨에 도달할 수 있었다.

―띠링!

그러자 경쾌한 알림이 울렸다.

직업 퀘스트의 시작을 알리는 알림이었다.

[부서진 조각을 찾아 -1.]

· 난이도: A.

· 설명: 루윈 대륙에 있는 몰락한 고원. 그곳에 유일하게 남은 신전의 지하에 웨펀 마스터가 남긴 조각을 찾을 단서가 있다.

· 보상: 다음 퀘스트로 연계.

연계 퀘스트다.

이런 종류의 퀘스트는 하나하나의 보상은 약하다. 하지만 인내심을 갖고 끝까지 깼을 때 만족스러운 보상을 얻을 수 있다.

'몰락한 고원이라… 귀찮은 곳인데.'

프레아 왕국이 지배권을 완전히 상실한 지역이다. 그래서 카오틱들과 도적이 활개 치고 있고, 최근에는 언데드도 나타나고 있다.

당연하지만 플레이어들도 잘 안 간다.

'퀘스트를 깨려면 갈 수밖에 없겠지.'

진현우는 메시지를 닫았다.

사라져 가는 메시지창. 그 너머에 나타난 흐릿한 사념이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모케라의 사념이었다.

―감사합니다, 여행자.

모케라의 표정은 읽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그리 기뻐하지 않는 건 알 수 있었다.

"기분은 좀 풀렸습니까?"

―글쎄요. 후련하면서도 이상한 기분이 드는군요. 그냥, 제 가족이 왜 이런 불행을 겪어야 했는지… 그런 생각밖에 안 듭니다.

예상치 못한 불행이었다.

그리폰이 원래부터 흉폭했던 건 아니다. 한때는 사람들과 어우러져서 지내고는 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을 기점으로 흉폭해졌고, 모케라의 가족은 그리폰에게 죽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저희는 영혼이 되어 다시 만날 테니까요. 당신은 약속을 지켰습니다. 그러니 저도 약속한 보상을 줘야겠지요.

모케라가 웃으면서 말했다.

―이 힘이 도움이 되기를....

사념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작은 입자로 변하여 사라져가는 몸. 그 입자가 진현우에게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아이템, 영혼의 목걸이 (고급)의 등급이 상승했습니다. 스킬, 영혼 동물 소환 (B+)의 등급이 상승했습니다.

―특성, 영혼 중재 (A)를 익혔습니다.

A 등급의 특성.

진현우는 특성과 스킬을 확인했다.

· 영혼 중재 (A): 특수한 짐승형 몬스터를 사냥했을 때 '정수'가 드롭된다. 정수에 담긴 영혼을 중재하여, 해당 짐승형 몬스터를 소환 가능한 영혼 동물의 목록에 추가한다.

· 영혼 동물 소환 (A, Lv.1): 주술의 힘으로 영혼 동물을 정해진 숫자만큼 소환할 수 있다. 소환한 동물은 특수한 스킬을 쓴다.

* 영혼 결속: 소환자의 능력치의 20%가 소환한 동물들에게 추가된다.

* 현재 소환 가능한 목록: 늑대 (1), 매 (1).

진현우는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영혼 중재. 이 사념을 얻으러 온 이유다.

이게 있으면 강력한 짐승형 몬스터, 특히 보스 몬스터들을 소환물로 써먹을 수 있다.

[영혼의 목걸이 (영웅)]

―설명: 오랫동안 대를 이어 온 샤먼들의 보물. 크게 파손됐지만 다시 힘을 되찾았다.

―착용 제한: 진현우 외 착용 불가.

―효과: 영혼 친화, 숲의 가호, 달이 뜬 밤.

―스킬: 자연의 속박.

* 영혼 친화: '영혼 동물 소환' 스킬로 소환할 수 있는 늑대와 매의 숫자가 1마리 늘어나며, 소환한 동물들의 신체 능력이 강해진다.

* 숲의 가호: 모든 능력치가 +7 상승한다.

* 달이 뜬 밤: 달이 뜬 밤, 하루에 한 번 사용자와 그를 따르는 동물들을 크게 강화한다.

* 자연의 속박: 바닥에서 나무뿌리와 줄기를 일으켜 전방의 적들을 구속한다.

사념 아이템은 크게 바뀌지는 않았지만, 능력치가 추가된 것이 만족스러웠다.

소환한 동물들이 강해지는 옵션도 추가됐으니, 스킬의 '영혼 결속' 옵션과 함께 쓰면 소환한 동물들이 꽤 강해질 것이다.

[진현우]

· 레벨: 30

· 클래스: 웨펀 마스터

· 칭호: 폐성의 정복자

· 근력: 109 (+24) · 민첩: 104 (+24)

· 체력: 103 (+24) · 마력: 80 (+15)

상태창을 닫은 진현우는 그리폰이 드롭 한 아이템들을 확인했다.

[그리폰의 가죽 (영웅)]

―설명: 그리폰의 가죽이다. 굉장히 가볍고, 이유는 모르지만 바람의 기운이 느껴진다.

[흉포한 맹금의 팔찌 (영웅)]

―설명: 지역을 지배하던 흉포한 맹금류의 힘이 깃든 팔찌다. 깃털을 엮어서 만들었다.

―착용 제한: 레벨 30, 민첩 100.

―효과: 신속한 사냥, 재빠른 날개, 활공.

* 신속한 사냥: 착용자가 발사한 모든 투사체의 속도가 30% 빨라진다.

* 재빠른 날개: 이동 속도가 10% 빨라진다.

* 활공: 비행 상태일 때 능력치가 10% 강화하며 투사체의 대미지가 20% 증가한다.

꽤 재밌는 팔찌다.

특히 활공 옵션이 그랬다. 지금 진현우가 이 옵션을 활용할 방법은 하나뿐이다.

그리폰을 소환해서 탑승하는 것.

그리고 때마침.

[그리폰의 정수 (영웅)]

―설명: 그리폰의 영혼이 담긴 정수다. '영혼 중재' 특성을 가진 이만이 사용할 수 있다.

그리폰의 정수도 나왔다.

오직 영혼 중재 특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만이 얻을 수 있으며, 쓸 수 있는 아이템.

'그리폰을 소환하는 건 또 오랜만이네.'

진현우는 정수를 사용했다.

성난 그리폰의 영혼이 담긴 정수. 아이템을 쓰자 '영혼 중재' 특성이 발동했다.

그에게서 연녹색의 빛이 흘러나오더니 정수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그 빛이 성난 그리폰의 영혼을 서서히 달래기 시작했다.

―부르르르!

정수가 격하게 떨렸다.

하지만 조금씩 그 떨림은 약해졌고, 이윽고 정수의 떨림이 완벽하게 사라졌을 때.

―영혼 중재에 성공했습니다. '그리폰'이 소환 가능한 영혼 동물 목록에 추가됩니다.

* 현재 소환 가능한 영혼 동물의 목록: 늑대 (1), 매 (1), 그리폰 (1).

기다리던 메시지가 나타났다.

망설일 것도 없다. 진현우는 곧바로 영혼 동물 소환 스킬을 써서 그리폰을 소환했다.

순식간에 빠져나가는 엄청난 양의 마력.

―스으으...!

진현우의 눈앞에 탁한 청색의 기체들이 나타나더니 서로 뭉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피루루루루!

그의 앞에 그리폰이 나타났다.

조금 전 그가 사냥한 그리폰과 똑같이 생긴 그리폰이었다. 다른 게 있다면 몸이 반투명하고, 탁한 청색을 띠고 있다는 점.

그리고 덩치가 좀 작았다.

'아직 스킬의 숙련도가 낮아.'

그리폰은 지금의 영혼 소환 스킬 숙련도로는 완전하게 다루기 힘든 몬스터다.

숙련도가 오르면 나아질 것이다.

'마력 소모는 뭐, 역시 엄청나고.'

진현우는 각인된 심장 특성 덕분에 보통 플레이어보다 보유한 마력이 많다.

그럼에도 감당하기 힘들 정도였다.

―프르르… 키아아아아!

"야, 시끄러워. 좀 조용히 해 봐."

―피루....

진현우는 포효하던 그리폰을 타박했다. 그러자 기가 죽었는지, 그리폰이 고개를 숙였다.

그 일련의 과정을 지켜본 이가 있었다.

"너, 너는… 대체 뭐 하는 놈이냐?"

"뭐야, 정신이 들어?"

제이드였다.

그는 온몸을 덮치는 고통도 잊은 채, 경악한 눈으로 진현우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리폰을… 소환한다고?"

그것도 자기가 죽인 그리폰을 흡수해서.

자세한 상황을 모르는 제이드에게는 진현우가 그리폰의 영혼을 흡수한 것처럼 보였다.

사실 그게 틀린 말도 아니었고.

"도대체 무슨 클래스를 가졌길래...."

"그건 네가 알 필요가 없고."

"크아아악!"

진현우가 그리폰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그리폰이 거대한 발을 들어 올리더니 제이드의 두 다리를 힘껏 짓눌렀다.

그것도 이미 부서진 다리를.

"끄아악! 으아아아악!"

"지금부터 몇 가지 질문을 할 거다. 성심성의껏 대답해 줬으면 좋겠군. 그러지 않으면."

―피루루루루!

그리폰이 날카로운 부리를 떨었다.

안 그래도 그리폰 때문에 힘든 시간을 보낸 제이드다. 그의 얼굴이 두려움으로 떨렸다.

"즐거운 시간을 보내게 될 거야. 알겠나?"

"아, 알았어! 알았다고! 그만!"

자신의 부하 절반을 처리한 그리폰. 그리고 바닥을 알 수 없는 힘을 가진 진현우.

제이드는 완전히 전의를 상실했다.

"좋아, 너희 조직 이름은?"

"여, 여섯 손가락."

"흠, 여기로 온 이유는 뭐지?"

"칼리 길드가 널 영입하는 걸 도와 달라고 했다. 제안을 거절하면 손봐 주고, 그러고도 거절하면 아예 납치해서 처리하라더군."

진현우가 예상한 대로의 흐름이었다.

카오틱 길드는 돈만 주면 무슨 일이든 한다. 그래서 몇몇 플레이어 길드는 카오틱 길드한테 돈을 주고 더러운 일을 처리하곤 했다.

"그, 그리고 몰락한 고원의 카오틱들한테 현상금을 풀었다. 생사불문으로...."

"임천우가 자존심이 많이 상했나 보군."

진현우는 피식 웃었다.

임천우라면 그러고도 남을 놈이다.

"지금 칼리 길드의 상황은 어떻지?"

"상황이라니, 무슨...."

"길드 상황. 어느 층에 주로 힘을 쏟고 있고, 길드 하우스는 어디에 있고. 그런 거 말이야."

끄응, 제이드가 침음성을 흘렸다.

칼리 길드와 여섯 손가락은 꽤 밀접한 사이였다. 그래서 상대 길드의 상황을 잘 알았다.

원래라면 절대로 말해서는 안 되지만.

'그러면 난… 죽는다.'

제이드가 입술을 떨면서 말했다.

"임천우는 베테랑 길드원들을 데리고 비밀리에 3층으로 올라갔다. 점령지를 만들려고 여러 가지를 준비하고 있다고 들었다."

"길드 하우스는 3층으로 옮겼나?"

"아니, 아직은 2층에 있다. 하지만 언제든 3층으로 옮길 수 있게끔 준비하는 것 같았다."

"그래?"

진현우의 눈이 순간 번뜩였다.

베테랑 길드원들을 데리고 3층으로 올라갔다. 그럼 2층에 남은 전력이 많지 않다는 것.

'길드를 확장할 생각인가 본데.'

평생 2층에서 머무를 수는 없다.

칼리 길드가 여기서 더 성장하려면 어찌 됐든 3층으로 올라가야 한다. 그리고 거점이 되어 줄 점령지도 어떻게든 만들어야 하고.

길드로서는 당연한 판단이다.

'그리고 그게 나한테는 기회가 되겠지.'

어쨌든 임천우나 핵심 전력들은 2층을 떠난 상태. 한동안 돌아올 일도 없다.

길드 하우스도 아직 2층에 남아 있다.

"내가 또 당하고는 못 사는 성격이거든."

바로 직업 퀘스트를 하러 갈 생각이었는데, 그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생겼다.

진현우가 도끼를 움켜쥐었다.

"자, 잠깐만! 말하면 살려 준다고!"

"내가 살려 준다고 했던가? 대답 안 하면 즐거운 시간을 보내게 될 거라고 했지."

"뭐라고?!"

제이드가 혼자서 살려 줄 거라고 착각했을 뿐, 진현우는 애초에 살려 줄 생각이 없었다.

진현우는 도끼를 높이 들었다.

"잠...!"

―콰득!

살을 짓이기는 소리.

피가 요란스럽게 튀었다. 진현우는 얼굴에 묻은 피를 닦으면서 도끼를 털었다.

"내가 미쳤냐? 널 살려 주게."

카오틱. 그것도 청부 살인 의뢰를 받는 놈들이다. 살려 둘 이유가 조금도 없었다.

진현우는 코웃음을 쳤다.

"그리폰, 이거 처리해."

―피루루루!

목표가 정해졌다.

진현우에게 현상금을 건 칼리 길드. 놈들의 길드 하우스를 한바탕 뒤집어야겠다.

그는 숲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일단 시체부터 처리하고 가야겠군.'

오웬, 여섯 손가락 둘 다 그리폰과 싸우다가 죽은 것처럼 위장할 필요가 있다.

진현우는 바삐 움직였다.

57화

그러게 왜 건드려?

진현우는 호크스 마을로 돌아갔다.

받아 둔 퀘스트들을 완료할 필요도 있고, 골드 거래소에서 살 것들도 있기 때문이었다.

"하피 깃털을 이만큼이나 모아 오실 줄이야. 정말로 감사합니다, 여행자 님!"

"오오, 고기… 한동안은 안 굶겠군요."

퀘스트 중에는 목표를 달성하면 그 자리에서 바로 보상을 얻을 수 있는 게 있고, 퀘스트를 준 사람에게 보고해야 하는 것도 있다.

'그리폰 퇴치' 퀘스트도 아빌론에 있을 알렉산더에게 보고해야 보상을 받을 수 있다.

'일단 그 전에.'

진현우는 골드 거래소를 열었다. 칼리 길드 하우스를 공격하기 전에 살 것들이 있다.

―형상 왜곡의 스크롤 (A): 5,000G.

· 설명: 일정 시간 동안 장비의 겉모습을 바꾸는 마법이 담긴 스크롤이다. 겉모습만 바뀔 뿐, 아이템의 성능은 바뀌지 않는다.

―정적의 스크롤 (B): 3,000G.

· 설명: 일정 범위 안의 소리가 바깥으로 나가지 않게끔 하는 마법이 담긴 스크롤이다.

그리고 또 하나.

―점액 폭탄 (C): 500G.

· 설명: 터트리면 끈적한 점액질을 뿌려서 아주 잠깐 상대를 못 움직이게 하는 폭탄.

싸구려 폭탄을 다수 구매했다.

브로큰 월드에는 공격형 소모 아이템도 있다. 폭발 마법이 담긴 보옥 같은 것들.

하지만 크게 선호되지는 않는다.

'위력이 너무 약하기 때문이지.'

그나마 상태 이상 스킬이 담긴 것들이 쓸 만하기는 한데, 이것도 지속 시간이 짧다.

스크롤도 마찬가지다. 지속 시간에 문제가 있거나 위력이 약하거나, 둘 중 하나다.

그래도 잘 활용하면 아주 유용하다.

"좋아, 챙길 건 다 챙겼고."

진현우는 마을을 돌아봤다.

촌장과 마을 사람들이 얘기하는 게 보였다.

"뭐라고? 그리폰이 안 보인다고?"

"예, 촌장님. 어제 밤에 하도 시끄럽길래 찾으러 가 봤는데, 아무리 찾아도 없습니다."

"그럼 누가 죽였단 말인가?"

모두 크게 당황한 상태였다.

여섯 손가락이 마법으로 사람들을 물린 상태였기에 전투를 지켜본 이가 없었다.

그래서 더욱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구만. 일단 사람들을 추려서 그리폰이 있는가 수색하지!"

"예!"

산으로 떠나는 마을 사람들.

그들을 지켜보던 진현우는 등을 돌렸다.

'내가 처리했다고 말해도 되기는 하는데.'

칼리 길드 하우스를 처리하기 전까지는 그리폰의 생사는 숨겨 두고 싶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 촌장하고 또 말하기는… 귀찮아.'

말이 너무 많은 노인이다.

진현우는 혀를 내두르면서 마을을 떠났다.

* * *

고산지대 인근에 있는 구릉지.

광산이 있는 걸로 유명한 구릉지에 칼리 길드의 본거지, 길드 하우스가 세워져 있었다.

칼리는 근처의 사냥터와 광산을 통제하면서 제법 큰 이득을 보고 있는 중이었다.

"이번에 캔 광석량은, 흠. 좋군. 그리고 여기에 통제한 사냥터에서 들어온 이득이...."

길드장, 임천우는 3층으로 떠났다.

그를 대신해서 부길드장인 이석규가 길드 하우스를 전담해서 관리하고 있었다.

이석규가 불쑥 고개를 들며 외쳤다.

"어이, 부족 전쟁 건은 정리했나!"

"예! 최유성의 독단적인 행동인 방향으로 기사를 쓰라고 했습니다. 슬슬 잠잠해지고 있으니 조금 있으면 조용해질 겁니다."

"하, 별 병신 같은 놈 때문에...."

이석규는 최유성을 떠올리며 혀를 찼다.

인성은 개차반이라서 마음에 안 들었지만 그 실력 때문에 억지로 키웠던 놈이었는데.

그게 그런 식으로 날아갈 줄이야.

"최유성을 대신해서 진현우를 영입한다고 했었지. 오웬하고 연락은 아직도 안 되나?"

"예. 계속 해 보고는 있긴 한데요."

"여섯 손가락 쪽은?"

"그쪽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석규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유망주를 영입하러 간 이들이 모두 행방불명됐다. 어떤 사건에 휘말렸다는 뜻이다.

"죽었겠지?"

"그럴 확률이 높지 않을까요."

"문제는 누가 죽였느냐겠군. 그 유망주 이름이, 진현우였던가. 그놈이 죽인 건가?"

"모르겠습니다. 실력이 좋은 유망주라고는 들었습니다만, 아무리 그래도...."

길드원이 말을 흐렸다.

오웬과 함께 간 여섯 손가락의 숫자는 적지 않았다. 오히려 많은 숫자를 데리고 갔다.

2층으로 올라온 지 얼마 안 된 유망주가 그들을 상대로 싸워서 모두 죽여 버렸다고?

'믿기 힘든 이야기야.'

다른 방향으로 생각하는 게 맞다.

고산지대에는 몬스터들이 많다. 최근에 큰 위용을 떨치는 그리폰이라는 놈도 그렇고.

어쩌면 거기에 휘말렸을 수도 있다.

"사람을 보내야겠군. 길드원들을 보내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파악하게끔 해라."

"예, 부길드장님."

"그리고."

이석규는 진현우를 떠올렸다.

네메시스와 아그니스가 영입하려고 달려들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걸 거절하고 보류한 놈이 칼리 길드에 들어오려고 할까?

"카오틱들한테 현상금을 더 풀어라. 진현우는 영입하는 방향이 아니라 죽이는 방향으로 가지. 뭔가 느낌이 안 좋은 놈이야."

"괜찮겠습니까? 길드장님이...."

"영입해도 안 될 것 같으면 죽여도 된다고 하셨으니 상관없어. 그냥 죽이는 게 나아."

칼리 길드와 우호적인 관계도 아니다.

살려 두면 앞으로 귀찮아질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렇기에 지금 처리해야 한다.

이석규는 그리 판단했다.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예전에 쫓아낸 광부들이 또 와서 따지는데, 어떻게 할까요?"

"광부들?"

칼리 길드 하우스가 있는 구릉지에는 광산이 있다. 원래는 NPC 광부들이 일하던 곳인데, 칼리 길드가 힘으로 뺏어 버렸다.

쫓겨난 이들이 돌려 달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한테 따진다고 뭐가 바뀌나? 멍청한 놈들. 왕국한테나 가서 따질 것이지."

"가 봤자 의미가 없는 걸 아는 거지요."

"그건 그래. 프레아 왕국이 뭔 힘이 있나."

프레아 왕국은 영토의 지배권을 잃었다.

수도에 닥친 몬스터 웨이브를 막기에 급급한 상황. 그래서 왕국의 주요 자산을 길드들이 점령하고 있어도 대처할 방법이 없었다.

칼리 같은 길드들은 그런 틈을 노려서 광산을 차지했고, 큰 이익을 보고 있었다.

"그냥 쫓아만 냈더니 계속 오는군. 이번에 몇 명 죽여서 다시는 못 찾아오게끔 해라."

"그렇게 하겠습니다."

귀찮은 일은 죽여서 해결한다.

칼리 길드가 여태껏 써 온 해결 방식이다.

"좋아, 빨리 끝내고 쉬...."

―키아아아아!

"이게 뭔 소리야!"

이석규가 남은 일을 처리하는 데 집중하려는 순간, 바깥에서 소리가 들렸다.

끔찍한 괴물의 포효.

그는 황급히 밖으로 뛰쳐나갔다.

"뭐야? 어디서 들린 거야?"

"부, 부길드장님! 저쪽입니다!"

"저건...!"

소리가 들린 곳은 광산 쪽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광산을 향했다. 그런 그들의 눈에 보인 것은, 한 거대한 몬스터였다.

매의 머리 그리고 사자의 몸통과 거대한 날개를 가진 괴물. 바로 그리폰이었다.

"그리폰이잖아!"

"그… 그리폰이라고?!"

"고산지대에 있을 놈이 왜 여기 있어!"

광산 입구에는 칼리 길드원들이 있었다.

누군가 광산을 노리는 것을 막고, 내부의 광부들이 일하는 걸 감독하기 위한 이들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리폰이 나타나다니.

―피루루루루루!

"이, 이런 X발...! 싸워야 하나?!"

"아냐! 일단 광산 안으로 들어가! 길드 하우스에서 지원이 오는 걸 기다리면 돼!"

칼리 길드원들은 빠르게 판단했다.

광산 안으로 들어가면 그리폰이 공격할 방법은 없다. 일단 광산으로 도망치면 된다.

근데 발이 안 움직인다.

"큭, 발이 왜...!"

"뭐야, 이건!"

칼리 길드원들은 발밑을 봤다.

끈적한 점액질이 보였다. 아주 잠깐 발을 묶을 뿐, 금방 사라지는 점액질이었지만.

그 잠깐의 시간이 치명적이었다.

―캬아아아아아!

"크아아악!"

하늘에서부터 쏟아지는 깃털이 칼리 길드원들을 덮쳤다. 피가 튀고 비명이 터졌다.

하나하나가 날카로운 칼날 같은 깃털이다.

칼리 길드원들이 고통스러워하며 쓰러졌다.

"이, 이 X발...."

―피유우우!

커다란 매가 날아오르는 것이 보였다.

그들의 발밑에 점액 폭탄들을 던진 범인이었다. 그리고 그리폰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이게 대체 무슨 난리야!"

상황을 지켜보던 이석규가 경악했다.

고산지대에 있을 그리폰이 왜 여기에 있으며, 왜 칼리 길드를 공격한단 말인가.

이해할 수 없는 일 투성이였다.

"광산으로 가라! 침입자들을 대비해서 만든 장치들이 있으니까 그걸 써서 쫓아내!"

"예, 부길드장님!"

"젠장, 지원부터 불러야겠군."

이석규는 황급히 길드 하우스로 들어갔다.

이 근방엔 칼리 길드가 점령한 곳, 사냥터들을 통제하기 위해 길드원들을 배치해 뒀다.

그들을 불러서 그리폰을 처리해야 한다.

'몬스터가 나타나는 건 익숙한 일이다. 하지만 고산지대의 그리폰이 나타나는 건....'

뭔가 이상하다.

우연? 그것보다는 누군가의 속셈이 들어 있을 확률이 높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석규는 자신의 집무실로 향했다.

"응? 내가 불을 끄고 나왔었나?"

집무실은 어두웠다.

이석규는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불을 켜려고 했다. 그리고 바로 그때, 뭔가가 보였다.

저 너머, 그가 쓰는 책상.

그곳에 누군가 앉아 있는 것을.

"...!"

―크르르르....

불길함을 느낀 이석규는 곧바로 방을 나서려고 했다. 하지만 한발 늦었다.

쿠웅! 문이 닫혔다. 그리고 구석에서 대기하던 늑대 두 마리가 그의 양옆에 섰다.

"이, 이게 무슨!"

늑대의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이석규는 이 상황을 타파할 방법을 떠올리면서, 책상에 앉은 사람을 응시했다.

"네놈은… 누구냐?"

"너희가 죽이려고 했던 사람."

그 말을 듣자마자 떠오르는 이름이 있었다.

이석규의 몸이 떨렸다.

"지, 진현우?"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확실한 대답이었다.

"네가 여길 어떻게… 설마!"

이석규는 늑대들을 봤다.

반투명하면서 푸른빛을 띤 늑대. 평범한 늑대와는 생김새가 달라도 너무 다르다.

그래, 이건 늑대가 아니라 소환물이다.

"저 그리폰을, 네가 소환한 거냐?"

"보면 알잖아."

덤덤한 대답에 이석규가 할 말을 잃었다.

그 희귀하다는 소환 스킬을 쓰면서, 다른 몬스터도 아니고 '그리폰'을 소환했다고?

그게 가능하단 말인가? 그리고 무엇보다.

'전사 계통의 클래스라고 들었는데.'

있을 수 없는 일.

이석규의 눈빛이 떨렸다. 저 너머, 그림자 속에서 진현우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내 목에 걸린 현상금이 얼마지?"

"혀, 현상금이라니. 무슨 소리를...."

"그쪽 스카우터가 카오틱들을 데리고 날 협박하더군. 들어오지 않으면 보복할 거라나."

진현우가 책상에 꽂힌 도끼를 빼 들었다.

오른손에 쥔 도끼가 서늘하게 빛났다.

"그래서 다 죽였어."

"...!"

이석규는 크게 숨을 삼켰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진현우가 걸어왔다. 그리고 이석규는 그제야 눈치챘다.

바닥에 길드원들이 죽어 있음을.

"다음 차례가 누군지는 짐작이 가겠지?"

"이 미친 새끼가!"

이석규가 기습적으로 오른손을 내뻗었다.

손끝에 마력이 모였다. 하지만 마법이 채 발현되기도 전에 진현우의 늑대가 움직였다.

―크르르… 커허엉!

"큭, 으아아악!"

늑대들이 순식간에 이석규의 양팔을 물어뜯었고, 구현되려던 마법도 사라졌다.

마법사는 마법을 사용하는 와중에 큰 충격을 받으면 펼치던 마법이 캔슬된다.

그 탓이었다.

"그 스카우터가 그러더군. 칼리 길드는 원한을 잊지 않는다. 어떤 식으로든 되갚는다."

"끄아아! 크아아악!"

진현우가 손짓했다.

늑대들이 이석규의 양팔을 힘껏 문 채, 그를 주인의 앞까지 질질 끌고 왔다.

진현우는 허리를 숙여서 이석규와 눈을 마주쳤다. 그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나도 그래."

"잠...!"

퍼억!

도끼가 이석규의 얼굴을 강타했다.

그걸로 끝이었다. 진현우는 도끼에 묻은 피를 거칠게 털어 내면서 코웃음을 쳤다.

"그러게 왜 건드려?"

58화

전쟁 영웅

―피루루루루!

"젠장, 저 망할 놈이...."

드높은 하늘.

달을 등진 그리폰이 포효하고 있다.

칼리 길드원들은 그리폰의 공격이 닿지 않는 광산에 숨은 채 놈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다른 놈들은! 언제 도우러 오는 거야!"

"부길드장님이 부르셨을 거야. 기다려."

"하, X발! 그리폰이 왜 여기 있는 거냐고!"

칼리 길드원들은 그리폰과 싸울 생각도 못 했다. 고산지대에서 저 그리폰이 얼마나 악명을 떨치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 놈의 공격에 많은 길드원들이 당한 것도 싸울 의지를 꺾는 데 한몫했다.

―키아아아아아!

"귀청 떨어지겠다, X발!"

그리폰이 크게 포효했다.

그리고 주변을 한 번 둘러보더니.

"어?"

자리를 떠나기 시작했다.

그리폰은 거대한 날개를 펄럭거리면서 자기가 왔던 방향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마치 더는 볼 일이 없다는 듯이.

"뭐, 뭐야. 그냥 가는데?"

"…포기한 건가?"

칼리 길드원들은 당황했다.

고산지대의 그리폰은 흉폭하기로 유명하다. 그런데 이렇게 쉽게 물러날 줄이야.

그들은 조심스레 밖으로 나갔다.

"없지?"

"어, 없어."

"자, 잠깐만요! 저길 보세요!"

주변을 둘러보던 칼리 길드원들은 그리폰이 완전히 떠난 걸 확인하고 안심했다.

그때, 그들 중 하나가 어딘가를 가리켰다.

길드 하우스가 있는 곳이었다.

"기, 길드 하우스가...."

바로 그 길드 하우스가.

―화르르륵! 콰앙!

"부, 불타고 있는데요?"

화끈하게 타오르고 있다.

바닥부터 지붕까지, 하나도 남김없이. 거센 불길이 건물 전체를 집어삼켰다.

콰아앙! 건물이 붕괴하기 시작했다.

"저, 저, 저게 뭐야!"

"이런 X발! 길드 하우스가 왜 불타!"

"야! 야! 빨리 불 끄러 가야 돼!"

칼리 길드원들이 길드 하우스의 불을 끄려고 허겁지겁 달려갔지만 이미 늦었다.

불길은 너무 거셌고, 뒤늦게 잡았을 때는 건물이 모조리 전소하고 난 뒤였다.

"이, 이럴 수가...."

"길드 하우스가, 없어졌어."

모두가 전소한 건물을 멍하니 봤다.

갑자기 나타난 그리폰 그리고 불탄 길드 하우스. 모든 일이 너무도 갑작스러웠다.

저 멀리서 해가 떠오르는 것이 보였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누군가가 중얼거린 그 말이 모든 칼리 길드원들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었다.

* * *

그로부터 몇 시간 후, 세계의 탑 3층.

정예 길드원들과 함께 3층에서 점령지를 만들려던 임천우는 충격적인 소식을 접했다.

"뭐… 라고?"

임천우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의 비서가 와서 한 말은 그만큼이나 충격적이었으니까.

"…길드 하우스가 전소했습니다. 그리고 부길드장인 이석규 님도, 사망했습니다."

"그게 무슨...! 허, 뭔 개소리야! 멀쩡한 길드 하우스가 왜 불타! 이석규는 왜 죽고!"

"모, 모르겠습니다."

"모르면 알아 와야 할 거 아냐, 병신아!"

길드원이 몸을 떨었다.

피해는 그게 다가 아니었다.

"그, 그리고 점령지를 관리하던 길드원들의 상당수가 행방불명됐습니다."

"행방불명… 하!"

임천우가 목덜미를 움켜잡았다.

화가 나서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다.

"행방, 행방불명이라고. 찾아는 봤고?"

"…예. 모습은 보이지 않는데 핏자국들이 보였습니다. 그걸 생각한다면 아마도."

"죽었을 확률이 높다?"

"그렇게 판단하고 있습니다."

"대체 누가!"

몬스터가 죽인 것인가?

말이 안 된다. 길드 하우스를 불태우고 길드원까지 죽이는 건 몬스터가 할 짓이 아니다.

칼리 길드에게 원한이 있는 사람이 할 짓.

'이런 X발, 나하고 원한이 있는 놈들이 한둘이어야지. 누군지 짐작도 안 가는데!'

거슬리는 것들은 폭력으로 해결한다.

그걸 기본 방식으로 삼아 온 칼리 길드였기에, 사방에 적들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조, 좋아. 그럼 마지막으로 묻자. 길드 하우스에 보관해 뒀던 물건들은 어떻게 됐냐?"

"그, 그게...."

비서가 말을 더듬었다.

하지만 숨길 수도 없는 일. 그녀는 눈을 딱 감은 채, 임천우에게 진실을 고했다.

"모두 사라졌습니다."

"사라졌다고? 불탄 게 아니라?"

"예. 만약에 불탔다면 흔적이 남아야 하는데, 흔적이 없습니다. 아마도 태우기 전에 누군가가 모두 챙기고 가지 않았을까요."

임천우의 몸이 휘청거렸다.

최근 3층에서 점령지를 만드느라 길드 하우스에 있던 재산을 꽤 쓰기는 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많은 재산이 남아 있었는데, 그게 사라졌다니. 누가 가져갔다니.

"어, 어떤 개새끼가...."

이 정도로 조직적인 행동을 할 정도면 분명히 길드다. 그는 자신에게 이런 짓을 할 정도의 원한을 가진 길드들을 떠올렸다.

―까드득!

지금은 3층이 중요한 때가 아니다.

임천우는 등을 돌렸다.

"3층 공략은 중지한다. 어떤 새끼들이 한 건지 알아내서 받은 걸 죄다 갚아 줘야겠어."

그러지 않으면 분이 안 풀린다.

바삐 걸음을 옮기는 임천우. 그의 머릿속에 '진현우'라는 이름은 떠오르지도 않았다.

* * *

임천우가 그렇게 분노를 토하고 있을 때.

진현우는 칼리의 길드 하우스로부터 떨어진 곳에서 오늘의 수확을 확인하고 있었다.

"이야, 두둑한데?"

―크르릉?

길드 하우스에서 챙긴 것들이다.

칼리 길드가 보관하던 길드 재산. 아쉽지만 진현우가 쓸 만한 아이템은 많지 않았다.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하나.

[대마법사의 아공간 주머니 (영웅)]

· 착용 제한: 없음.

· 옵션: 아공간, 귀속.

* 아공간: 주머니 안에 아이템을 보관할 수 있는 큰 규모의 아공간이 존재한다.

* 귀속: 착용 시 귀속된다. 사용자가 죽을 경우 주머니 안의 아이템 일부가 드롭된다.

아공간 주머니였다.

플레이어 협회에서 줬던 작은 아공간의 주머니보다 보관량이 훨씬 많은 주머니.

이런 아이템은 부르는 게 값이다.

'이걸 길드에 보관하고 있었군.'

나머지 아이템들도 진현우가 쓰기에는 애매하다지만 팔아먹기에는 충분히 좋았다.

진현우는 아이템들을 주머니에 넣었다.

'억으로 두 자릿수는 족히 나오겠어.'

문제는 이걸 어떻게 처리하느냐지만, 네메시스한테 처리해 달라고 하는 수밖에.

진현우는 늘어지게 기지개를 켰다.

―가르르르.

옆에서 늑대가 코를 비비적거렸다.

진현우는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조금 전에 소환 해제한 그리폰을 떠올렸다.

"멍청한 칼리 놈들."

칼리의 길드원들은 그리폰과 싸울 생각도 하지 못했다. 고산지대에서 놈이 얼마나 악명이 높은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진현우는 그걸 이용했다.

'내가 소환한 그리폰이 약한 건 아니지만, 고산지대의 그리폰보다는 약해.'

어쩔 수 없다.

영혼 동물 소환의 숙련도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스킬 효과나 아이템으로 보충하고는 있지만, 그걸로도 아직 부족한 상황이다.

'그걸 칼리 길드원들은 모르지.'

그래서 고산지대의 그리폰인 척 허세를 부리면서 놈들이 겁에 질리게끔 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 허세는 아주 잘 먹혔다.

"역시, 유용한 스킬이야."

―그르르?

영혼 동물 소환 그리고 영혼 중재.

특수한 짐승형 몬스터를 처리하고 놈을 소환수로 부릴 수 있다는 게 굉장히 유용하다.

앞으로 쭉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것이다.

"좋아, 그럼 아빌론으로 돌아갈까."

―가르르르.

진현우의 곁에 있던 늑대가 화답했다.

그리폰을 타고 돌아갈까 했지만, 그랬다가는 너무 눈에 띈다. 그는 고산지대에 있을 마차를 이용하여 아빌론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 * *

수도 아빌론을 지키는 황금 기사단.

그들을 이끄는 기사단장, 알렉산더는 밀려드는 일거리에 골치를 썩이고 있었다.

"서쪽에 나타난 놀 무리가 마을을 괴멸했다… 기사단을 보내야겠군. 거기에 북쪽은, 후. 미치겠군. 여기도 또 몬스터인가."

프레아 왕국은 나라의 기능을 상실했다.

영토의 사방에서 몬스터가 나타나는 데다가 수도를 몬스터들이 계속 공격하는 상황.

결국 영토 상당수를 포기해야만 했다.

"광산, 광산은… 빌어먹을."

칼리 길드가 멋대로 점거하고 있는 곳.

처음에는 왕국을 대신해 몬스터들에게서 지켜 주고 일부 비용만 받겠다고 하더니, 지금은 광산 자체를 칼리 길드가 점거하고 있었다.

'되찾으려면 되찾을 수는 있다. 다만.'

그 피해가 너무 크다.

수도 아빌론을 지켜야 하는 알렉산더로서는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위험이었다.

그의 입에서 한탄이 흘러나왔다.

'이 나라가 왜 이렇게 됐단 말인가.'

영토를, 백성을 지킬 힘도 없다.

빼앗긴 광산을 돌려받을 여력조차 없다.

몬스터 웨이브가 시작된 이후로 프레아 왕국은 멸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느리지만, 확실하게.

"후우우...."

피로함에 눈두덩이를 매만진 늙은 기사는 다시금 서류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멸망해 가더라도 할 수 있는 건 해야 한다.

비록 희망은 희미할지라도.

"고산지대의 그리폰, 이놈은 어쩐다."

"단장님, 계십니까!"

"있다. 들어와라."

병사가 황급히 문을 열고 들어왔다.

척 봐도 급해 보이는 표정. 알렉산더는 안 좋은 소식을 예상하며 부하를 바라봤다.

"무슨 일이냐? 몬스터가 나타났나?"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고산지대 말입니다. 그리폰! 그놈을 죽인 사람이 왔습니다!"

"뭐라고!"

알렉산더가 놀라서 몸을 일으켰다.

고산지대의 그리폰. 하늘을 비행하는 그 까다로운 괴물을 잡은 이가 나타날 줄이야.

"어서 모시고 와라! 얼른!"

"예! 안 그래도...."

끼이익.

병사가 들어온 문이 다시금 열렸다. 그리고 그 너머에서 진현우가 천천히 들어왔다.

알렉산더와 진현우의 눈이 마주쳤다.

"반갑소, 여행자. 황금 기사단을 이끄는 알렉산더라고 하오. 그리폰을 잡았다던데."

"진현우입니다. 예, 맞습니다."

"증거를 볼 수 있겠소?"

진현우는 주머니를 뒤졌다.

그 안에서 거대한 심장이 나타났다. 그리폰을 잡았을 때 드롭된 퀘스트 아이템이었다.

"으음, 이건...."

알렉산더는 사람들을 불러서 심장이 누구의 것인지 파악하게끔 했다.

결과는 금방 나왔다.

"그리폰의 심장이 맞습니다."

심장이 그리폰의 것이 맞다는 것.

진현우가 함께 꺼낸 발톱들도 그리폰의 것이었다. 거기에 고산지대에 연락을 취해 보니 최근에 그리폰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고 한다.

모든 정황이 한 가지 사실을 가리켰다.

"저, 정말로 그리폰을 죽인 거군. 혼자 온 것이오? 다른 동료들은 같이 오지 않았소?"

"저 혼자 잡았는데요."

"혼자? 그럴 수가!"

알렉산더가 경악했다.

방 안에 있는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그리폰을? 그 괴물을 말이오?"

"집요하게 하늘에서 공격하는 놈을 혼자서 잡았다는 겁니까? 아니, 대체 어떻게."

"그리폰 그거 엄청 비겁하게 싸우잖소!"

주변이 시끄러워졌다.

진현우는 쉽게 처리했지만 그리폰, 특히 고산지대에 있는 그리폰은 강력한 놈이었다.

가뜩이나 산이라서 기동력이 제한되는 상황인데 상대방은 하늘을 마음껏 날아다니니까.

'여섯 손가락도 혼자서 절반을 처리했으니.'

괜히 보스 몬스터가 아니다.

그런 놈을 혼자서 처리했다고 하니 증거물을 보고도 쉽게 믿을 수가 없는 것이다.

알렉산더는 헛기침을 터트렸다.

"정말로… 놀랍군. 큼, 일단 이럴 때가 아니지. 이봐! 약속한 보상을 가지고 와라!"

"예!"

병사가 황급히 밖으로 뛰쳐나가더니 고급스러운 형태의 작은 상자를 가지고 왔다.

알렉산더가 그걸 진현우에게 내밀었다.

"열어 보시오."

진현우는 상자를 열었다.

안에 든 것은 반지와 설계도 그리고 제작에 필요한 핵심 재료 아이템이었다.

[마력 순환 반지 (영웅)]

―설명: 착용자의 마력 순환을 도와주는 반지다. 신체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

―착용 제한: 레벨 30.

―효과: 마력 순환, 피로 회복, 강화.

* 마력 순환: 보유할 수 있는 마력의 최대량과 마력 재생 속도가 20% 증가한다.

* 피로 회복: 빠르게 순환하는 마력이 신체의 피로 회복을 돕고 덜 지치게 만든다.

* 강화: 체력과 마력이 +5 증가한다.

[전쟁 영웅의 훈장 (영웅)

―설명: 전쟁 영웅의 장비 제작에 쓰이는 훈장이다. 화려한 문양이 새겨져 있다.

[전쟁 영웅의 장비 설계도 (영웅)]

―설명: 전쟁 영웅의 장비 중 원하는 부위 하나를 제작할 수 있다. 어떤 재료를 쓰냐에 따라서 아이템의 성능이 달라진다.

둘 다 만족스럽기 그지없는 아이템.

진현우는 상자를 닫았다.

"잘 쓰겠습니다."

59화

몰락한 고원으로

―퀘스트, '고산지대의 그리폰 퇴치'를 달성했습니다. 보상으로 명성 500과 많은 양의 경험치를 얻었습니다!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퀘스트를 깼다는 메시지가 나왔다.

그러자 진현우의 몸이 순간 번쩍였다. 명성을 얻었다는 걸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500이면 아직 한참 부족하네.'

수도 아빌론에는 특수한 상점이 있다.

명성을 교환해서 아이템을 살 수 있는 상점. 500이면 뭘 교환하기에는 너무 부족하다.

명성을 더 올릴 필요가 있다.

"어디, 보상은 마음에 들었소?"

"예, 좋네요. 이것 말고 또 할 일은 없습니까? 제가 몰락한 고원으로 갈 예정인데."

"몰락한 고원 말이오?"

알렉산더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몰락한 고원은 위험하기로 유명한 곳이다. 그래서 플레이어들도 잘 가지 않는 곳.

덕분에 일거리도 많은 곳이었다.

"물론 일거리는 많소. 다만 너무 위험한 곳이라서 혼자 가는 건 권하지 못하겠는데."

알렉산더는 목덜미를 매만졌다.

"어느 날부터 서쪽에서 어마어마한 사기가 뿜어져 나오더니 일대가 아예 망해 버렸소. 몬스터들에, 수배자에, 온갖 것들이 다 있지."

"괜찮습니다. 일거리가 뭐죠?"

"흠, 잠시."

알렉산더는 책상을 뒤적거리더니 다수의 서류를 꺼냈다. 퀘스트가 적힌 서류였다.

수집, 사냥, 여러 퀘스트가 있었다.

"마법을 부여해 둔 서류니 퀘스트가 끝났다고 보고하러 올 필요는 없소. 목표만 달성하면 그 자리에서 바로 보상이 지급될 것이오."

"그거 좋네요."

레벨은 틈틈히 올려 둬야 한다.

진현우는 퀘스트들을 모두 받았다.

"아, 묻고 싶은 게 있는데요. 몰락한 고원에 유일하게 남은 신전이 뭔지 아십니까?"

"유일하게 남은 신전? 흐으음."

알렉산더가 생각에 잠겼다.

몰락한 고원이 처음부터 그런 이름으로 불린 것은 아니다. 원래는 다른 이름이 있었다.

그리고 다른 이름으로 불렸을 때, 몰락한 고원은 신앙이 발달한 것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신전이 많이 있었지. 지금은 다 무너졌지만. 유일하게 남은 신전이라면, 음. 지도를 꺼내야겠군. 이걸 한번 보시오."

알렉산더가 루윈 대륙의 지도를 꺼내더니 몰락한 고원의 한 지점을 가리켰다.

"벤데일이라고 불리는 신전이오. 신전이면서 동시에 요새의 기능도 갖춘 곳이라서 몰락한 고원에 살던 사람들의 마지막 터전이지."

"요새면 쉽게 공략당하진 않겠군요."

"그럴 것이오. 아마도."

알렉산더의 얼굴이 씁쓸해졌다.

몰락한 고원에는 아예 접근도 못 하는 상황이니 어떻게 됐는지 알 수도 없었다.

그 사실이 씁쓸해서였다.

"출입이 까다로울 수도 있소. 내 이름으로 추천장을 하나 써 드리지. 도움이 될 것이오."

"감사합니다."

"천만에."

진현우는 추천장을 받았다.

이제 여기서 더 할 일은 없다. 곧바로 몰락한 고원으로 떠나려다가, 뭔가가 떠올랐다.

그는 등을 돌렸다.

"고산지대 근처에 있는 광산 말인데요."

"음? 아아, 여행자 길드가 점거하고 있는 광산 말이오? 그 광산에 볼일이라도 있나?"

"아뇨. 만약에 프레아 왕국이...."

문앞에 선 진현우가 고개를 슬쩍 돌렸다.

"그 광산을 되찾고 싶다면 지금이 기회일 겁니다. 그렇게 말해 두고 싶어서요."

"지금이 기회라고? 그게 무슨...."

알렉산더가 다급히 물었지만, 그 대답을 줄 진현우는 이미 방을 나간 뒤였다.

홀로 남은 알렉산더의 얼굴이 멍해졌다.

"지금이 기회다? 광산에, 아니 거길 점거한 칼리 길드한테 무슨 일이 생겼다는 건가?"

알렉산더는 침음성을 흘렸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는 모르겠지만.

"광산으로 척후병을 보내라! 칼리 길드에게 무슨 이변이 생긴 건지 알아 오도록!"

"예!"

일단 병사를 보내서 정보를 캐내기로 했다.

움직이는 건 그 뒤에 해도 늦지 않으니까.

* * *

설계도.

온라인 게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시스템, 아이템 제작에 필요한 일종의 도면이다.

성에서 나온 진현우는 도면을 확인했다.

[전쟁 영웅의 장비 설계도 (영웅)]

―필요한 재료: 금속 종류 ×5, 가죽 종류 ×2, 가죽끈 종류 ×3, 전쟁 영웅의 훈장 ×1.

설계도의 가장 큰 특징이 저것이다.

바로 재료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는 점. 금속 종류라고 되어 있으면 강철, 은, 금 같은 재료 중에서 원하는 걸 집어넣으면 된다.

그렇게 집어넣은 재료에 따라서 아이템의 성능에 특색이 생기거나 더 좋아지고는 한다.

"흠, 금속 종류라면...."

마침 떠오르는 게 하나 있었다.

진현우가 굴락을 잡으면서 얻은 강철.

[굴락의 갑옷 파편 (영웅)]

· 설명: 흑마법사의 마력으로 단련된 갑옷의 파편이다. 파편이라고는 하지만 워낙 커서 뭔가를 만드는 데 쓸 수 있을 것 같다.

[그리폰의 가죽 (영웅)]

―설명: 그리폰의 가죽이다. 굉장히 가볍고, 이유는 모르지만 바람의 기운이 느껴진다.

워낙 큰 파편이라서 이거 한 개로 제작에 필요한 금속 숫자를 다 채울 수 있었다.

거기에 저번에 얻은 그리폰의 가죽도 있다.

진현우는 생각에 잠겼다.

'금속은 이걸로 하고, 거래소에서 가죽 하나만 더 찾아서 사면 되겠군.'

재료에도 궁합이라는 게 있다.

궁합이 잘 맞는 재료들을 넣어서 아이템을 제작하면 더 좋은 아이템을 만들 수 있다.

진현우는 골드 거래소를 열었다.

"어디 보자."

좋은 제작 아이템을 만드는 법은 쉽다.

'등급 높은 설계도 그리고 비싼 재료.'

결국 돈을 얼마나 쓰느냐가 중요하다는 것.

그리고 이 재료를 넣으면 아이템에 어떤 옵션이 부여되는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

당연하지만, 진현우는 너무 잘 알았다.

―섀도우 워커의 가죽 (영웅): 100,000G.

· 설명: 그림자를 걷는 괴물의 가죽이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가죽이 흐릿하다.

―질 좋은 가죽끈 (고급): 10,000G.

· 설명: 질 좋은 가죽끈이다. 제작 아이템에 사용하면 결과물이 조금이지만 좋아진다.

11만 골드.

진현우는 아이템을 산 후 대장간을 찾았다. 그가 내놓은 재료들을 본 대장장이는 놀랐다.

"…눈이 돌아갈 것만 같은 재료들만 가지고 오셨군요. 허, 이 설계도대로 하면 됩니까?"

"예."

대장장이의 눈동자에 의욕이 가득 어렸다.

언제 이런 재료들을 다뤄 보겠는가. 자신의 실력을 늘릴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싶었다.

"좋습니다. 3일만 시간을 주십시오."

3일. 안 그래도 조금 쉬고 싶은 참이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3일 뒤.

"자! 확인해 보십시오! 제 걸작입니다!"

대장장이가 결과물을 내놓았다.

묵색의 강철을 베이스로 회색의 가죽이 덧대어진 형태의 부츠. 희미한 검은 바람이 부츠를 중심으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전쟁 영웅의 부츠 (영웅)]

· 설명: 전쟁에서 큰 위용을 떨친 영웅을 기리기 위해서 만든 부츠다.

· 착용 제한: 근력 100, 민첩 95, 체력 100.

· 옵션: 전쟁 영웅, 그림자 걷기, 바람 가호.

* 전쟁 영웅: 착용자가 지휘하는 부하들의 능력치가 10만큼 상승하며, 영웅의 위엄으로 부하들이 명령에 잘 따르게끔 만든다.

* 그림자 걷기: 발소리를 항상 최소화하며 착용자의 기척을 인지하기 어려워진다. 또한 어둠 속성 저항력이 40% 증가한다.

* 바람 가호: 이동 속도가 15% 증가한다. 바람 속성 공격의 대미지가 20% 상승한다.

괜찮은 아이템이 만들어졌다.

섀도우 워커의 가죽이 그림자 걷기 옵션을, 그리폰의 가죽이 바람 가호 옵션을.

그리고 흑마법사의 마력이 깃든 굴락의 갑옷 파편이 어둠 속성 저항력을 부여했다.

'꽤 오랫동안 쓸 수 있겠군.'

진현우는 곧바로 부츠를 착용했다.

대장장이가 착용해 보니 어떻냐는 듯 눈을 반짝거리면서 그의 감상을 기다리고 있었다.

"좋습니다. 기대 이상으로 잘 나왔네요."

"하하, 제 실력보다는 재료가 너무 좋아서 그런 거죠. 저한테 이런 아이템을 만들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행자님."

진현우는 대장장이에게 대금을 건넸다.

"다음에 또 오십시오!"

진현우는 아빌론의 서쪽으로 향했다.

고산지대와는 다르게 몰락한 고원은 마차가 없다. 카오틱과 도적들이 들끓는 곳이라서 마차가 다니기에는 너무 위험하기 때문이다.

"하, 걸어가는 수밖에 없나...."

가다가 카오틱하고 마주칠 거 같은데.

진현우는 한숨을 내쉬며 걸음을 옮겼다.

* * *

수도 아빌론은 몬스터들에게 시달리고 있지만, 그래도 활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몰락한 고원이 있는 서쪽으로 향하자 그런 활기도 조금씩, 빠르게 사라져 갔다.

"언제 와도 살풍경하군."

서쪽으로 가면 갈수록 눈에 보이는 광경이 황폐해졌다. 자연은 메말랐고, 식물들은 기이하게 뒤틀렸으며, 짐승들은 흉포해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카오틱! 카오틱이다!"

"흐흐, 멍청한 놈들. 겁도 없이 여길 와?"

"가진 거 다 내놓고 꺼져!"

카오틱들도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탑 1층에서는 거의 보기 힘든 놈들이었다. 위장해서 활동하는 놈들이나 만났지.

하지만 이 지역은 달랐다.

―카앙! 카드득!

"아아아악!"

여긴 카오틱이 세력을 펼친 지역.

놈들을 견제하는 플레이어 길드가 없으니 제 구역인 것처럼 활개 치고 다니는 것이다.

그럴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간단했다.

'몰락한 고원은 가치가 없는 데다가 점령하기에는 위험 요소가 너무 많으니까.'

대형 길드들이 관심을 가질 리가.

그 틈을 타서 카오틱들은 지역을 점령했고, 여기서 여러 활동을 하며 성장하고 있다.

그리고 길드들의 무관심은, 미래에 이 지역을 돌이킬 수 없는 재앙으로 몰아넣었다.

"...."

진현우는 시선을 위쪽으로 향했다.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그게 누구인지는 고민할 것도 없었다.

"…야, 보이냐?"

"어. 손님 하나 오네."

위쪽, 울창한 나무가 우거진 곳. 한 무리의 플레이어가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카오틱들이었다.

"뭐야, 겨우 한 놈이야? 돈이 될까?"

"목걸이에 팔찌…. 갑옷 입은 것도 그렇고 벗겨서 팔면 제법 짭짤할 거 같은데?"

"조심해. 실력 있는 놈일 수도 있어."

카오틱들이 숨을 죽였다.

그리고 저 아래에서 진현우가 피로가 가득한 얼굴로 터벅터벅 걸어 올라왔다.

―피유우우!

"…응?"

갑자기 들리는 매의 울음소리.

그 소리를 들은 진현우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돌아왔다.

그는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푸욱!

"멈춰라!"

진현우의 바로 앞에 화살이 꽂혔다.

맞히려고 쏜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위협하는 용도로 일부러 빗맞힌 것.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어딜 그렇게 바쁘게 가시나?"

"플레이어 양반, 이곳을 지나가고 싶으면 먼저 우리하고 대화를 해야 할 거 같은데."

무기를 쥔 채 적의를 드러내는 이들.

카오틱이었다. 숫자는 여섯. 둘은 나무 위에서 활을 겨누고 있고, 나머지는 내려왔다.

놈들이 히죽거리면서 다가왔다.

"일단 무기 버...."

―퍼어억!

카오틱이 무기를 버리라고 하려는 찰나.

진현우가 손바닥을 활짝 펼치더니, 손아귀에 들어온 도끼를 번개처럼 투척했다.

도끼가 카오틱의 이마를 꿰뚫었다.

"컥, 크어억...."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카오틱.

놈의 동료들이 멍한 눈으로 쓰러진 카오틱을 봤다. 상황 파악이 안 됐기 때문이었다.

휘리릭! 진현우는 돌아오는 도끼를 받았다.

"이 새끼가! 어, 우아악!"

―피유우우!

나무 위에 있던 카오틱들이 화살을 쏘려는 순간, 두 마리의 매가 그들을 덮쳤다.

날카로운 발톱이 눈을 할퀴었다. 매는 몸통을 들이박으면서 두 카오틱을 떨어트렸다.

바닥을 나뒹구는 카오틱들.

"상대를 보고 건드렸어야지."

"뭐, 뭐… 으아악!"

진현우의 신형이 섬광처럼 사라졌다.

몰락한 고원에 비명이 울려 퍼졌다.

"억, 끄으윽...."

남은 생존자는 하나뿐.

진현우는 놈의 목에 도끼를 겨눴다.

"자, 잠… 끄르륵!"

도끼가 카오틱의 목을 내리쳤다.

진현우는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 낸 후 다시 걸음을 옮겼다. 목적지가 멀지 않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저기군.'

메마른 황무지에 서 있는 건축물이 보였다.

두터운 장벽으로 에워싼 신전, 벤데일.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키아아아아아!

―저 신전을 함락해라! 어서!

엄청난 숫자의 언데드가 요새를 포위한 채, 금방이라도 함락할 것처럼 공격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걸 막는 수많은 병사들.

"그래, 언데드가 없을 리가 없지."

진현우는 한숨을 내쉬며 마력을 일으켰다.

그에게서 흘러나온 푸른 기운이 형태를 갖추었고, 금방 거대한 괴물의 모습으로 변했다.

바로 그리폰의 모습으로.

"일하자, 그리폰."

―카루루루!

진현우는 그리폰에 올라탔다.

60화

벤데일 공방전

몰락한 고원의 신전, 벤데일.

아니, 이제는 신전이라 부를 수 없다. 벤데일은 신전이라기보다는 요새에 가까웠다.

신전을 에워싼 장벽이 그를 증명했다.

―휘이이잉!

벤데일 내부에는 큰 시설과 여러 종교적인 시설 그리고 온갖 천막들이 펼쳐져 있었다.

많은 사람이 살고 있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은 보기 힘들었다.

그래서인지 도시는 끔찍히도 적막했다.

―우우우우우!

바로 그때.

뿔피리 소리가 신전을 울렸다. 성벽 위에 있던 성기사가 사람들을 향해 황급히 외쳤다.

"적습! 적습이다! 전투태세를 갖춰라! 시민들은 집으로 돌아가서 문을 잠그시오!"

"빌어먹을, 그놈들이 또...."

"어, 엄마아!"

"한스, 이리 오렴! 집으로 돌아가자!"

시민들이 황급히 집에 들어갔다.

성기사는 적막한 요새 내부를 돌아봤다.

'아름답던 신전이 어찌 이리 되었는가.'

이곳이 원래부터 삭막하지는 않았다.

아름다운 꽃이 피어 있었고 수많은 사람이 기도하기 위해서 찾아왔었다. 그리고 그들을 따스하게 맞이하던 사제들도 있었다.

'지금은 찾아볼 수 없는 풍경.'

꽃은 저물었고, 기도하기 위해 왔던 사람들은 목숨을 간수하기 위해 이곳에 피난 왔다.

사제들은 모두 전투에 나서야만 했다.

'모두, 그 괴물들이 나타난 뒤부터.'

성기사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곁에서 성벽 너머를 지켜보던 병사가 외쳤다.

"성기사장님! 저쪽에 놈들이 보입니다!"

"저 빌어먹을 괴물들이 또다시!"

도시의 저 너머.

황무지의 지평선에서 무수히 많은 적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썩어 가는 살, 뼈가 덜렁거리는 몸. 이미 죽었음에도 삐걱거리면서 움직이는 괴물.

"언데드다!"

언데드 군단이었다.

수많은 해골과 좀비들이 산 자에 대한 증오를 드러내면서 다가오고 있었다.

이 지역이 몰락한 고원으로 불리게 된, 사람들이 이곳으로 피난 오게 된 이유.

'언제까지 언데드들의 공격을 막아야 한단 말인가? 이 공격에 끝이 있기는 한 건가?'

어느 순간 땅과 자연이 메마르기 시작하더니 저 언데드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는 몰락한 고원이라 불리는 이 지역에 있던 마을들을 모두 멸망시킨 괴물들.

저놈들은 마지막으로 남은 도시, 벤데일을 멸망시키기 위해 계속 공격해 오고 있다.

'성녀님마저도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던가.'

성기사, 카단은 한 여성을 떠올렸다.

찬란한 백금발의 여성. 그녀는 오랫동안 벤데일 신전에 머물면서 그들을 도왔었다.

하지만 몇 달 전, 그녀는 사라졌다.

'그분만 계셨더라면.'

하지만 모든 게 의미 없는 가정.

카단은 입술을 깨물었다.

'어떻게든 막아야만 한다.'

이 도시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성기사장, 카단은 꺾일 것 같은 의지를 다잡으면서 병사들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겁먹지 마라! 몇 번이고 싸워서 이기지 않았더냐! 이번에도 우리가 이길 것이다!"

그렇다. 지금까지 도시는 적들의 공격을 수없이 막아 왔다. 이번에도 이길 것이다.

그래, 지금까지와 같다면.

"서, 성기사장님! 저기를 보십쇼!"

"여태껏 못 본 언데드가 보입니다!"

"뭐라고?"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병사들이 언데드들의 위를 가리켰다. 그곳에 여태 보지 못했던 언데드들이 보였다.

날개가 달린 짐승만 한 크기의 도마뱀. 뼈만 남은 비행형 언데드들이 날아오고 있다.

"스컬 윙입니다!"

"제길, 비행형 언데드들이 왜!"

지상의 언데드들은 괜찮다.

저놈들은 어떻게든 상대할 수 있다. 하지만 비행형 언데드들은 얘기가 다르다.

카단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쓰레기 같은 인간 놈들....

스컬 윙들의 선두에 언데드가 있었다.

온몸이 썩어서 뼈만 남은 본 와이번. 이번 언데드들을 이끄는 군단장일 것이다.

놈이 이를 드러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방해하다니...!

본 와이번이 카단과 눈을 마주쳤다.

먼 거리였지만 서로를 인지할 수 있었다.

―이번에는 막지 못할 것이다! 네놈들의 무력한 요새는 그분의 군대 앞에서...!

본 와이번이 노성을 터트렸다.

그리고 바로 그때, 소리가 들렸다.

―쉬이이익!

바람이 응집하는 소리가.

귀를 찢는 듯한 파공음과 함께, 저 먼 곳에서 한 줄기의 바람이 쏘아졌다.

카단은 인상을 찡그렸다.

'바람? 아니, 저건....'

화살이다.

청록색의 바람을 휘감은 화살이 인지할 수 없는 속도로 하늘로 쏘아졌다.

바로 본 와이번을 향해서.

―모두 쓰러질, 큭! 건방진...!

카단만 노려보던 본 와이번은 화살의 존재를 뒤늦게 눈치챘다. 하나 상관없다.

저 정도 화살은 쉽게 막을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고 막으려는 찰나.

―쉬이이익!

―...!

바람을 휘감은 화살이 분열했다.

다수로 나뉜 화살이 크게 산개하더니, 사방에서 일제히 본 와이번을 덮쳤다.

'상관없다. 인간 놈들의 화살 따위!'

본 와이번의 뼈는 강철과도 같다.

어지간한 칼날은 다 튕겨 내고 화살은 부러질 정도. 놈은 자신의 방어력을 믿었다.

하지만 그건 무의미한 자신감이었다.

―크아아아악! 이, 이 무슨!

화살들이 갑옷처럼 단단한 뼈를 강타했다.

그러자 뼈와 부딪친 화살촉에서 칼날 같은 바람이 일어나더니 놈의 뼈를 분쇄해 버렸다.

'그분이 만들어 주신 몸이 이렇게 쉽게!'

경악하는 본 와이번.

놈은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봤다. 그리고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저건, 대체!

―캬아아아아아!

매의 머리, 사자의 몸통을 가진 거대한 괴물이 본 와이번에게 날아오고 있었으니까.

그것도 엄청난 속도로.

―쿠우웅!

거대한 몸체가 본 와이번을 들이박았다. 그리고 날카로운 발톱이 놈의 몸을 낚아챘다.

움직이지 못하게끔 꽉 움켜쥔 발톱.

"거, 흉측하게도 생겼네."

―...!

그리폰의 추격타를 경계하던 본 와이번의 귓가에 믿을 수 없는 목소리가 들렸다.

바로 인간의 목소리.

본 와이번은 고개를 들었다.

―네놈은...!

"뭘 봐?"

그리폰의 등 위에 서 있는 사람이 보였다.

진현우. 그의 화살이 본 와이번의 가슴께를 가리켰다. 정확하게 놈의 '핵'이 있는 부위를.

끼이익, 활 시위가 당겨진다.

―아, 안 돼! 날 지켜라! 얼...!

본 와이번이 황급히 행동을 취하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화살은 그보다 빨랐다.

투우웅! 바람을 머금은 화살이 쏘아졌다.

'보인다. 본 와이번의 약점.'

강한 언데드에게는 핵이라는 것이 있다.

그 언데드의 몸을 구성하는 핵심 부위. 사람으로 따지자면 일종의 심장과도 같은 것.

당연하지만, 그런 핵이 있는 부위의 뼈는 특히나 단단하다. 핵을 지키기 위함이다.

―콰드드득!

하지만, 단 한 발.

진현우가 쏘아 낸 화살 한 발이 그 단단한, 핵을 보호하는 뼈를 일격에 부숴 버렸다.

감춰져 있던 사기를 머금은 구체가 보였다.

그는 곧바로 도끼를 움켜쥐었다.

―콰아앙!

―카아아아악!

그리고 몸을 내던지면서, 훤히 드러난 본 와이번의 핵을 도끼로 강타했다.

유리가 깨지는 소리를 내면서 부서지는 핵.

그걸로 끝이었다.

―이, 이런, 이럴 리가...!

자신의 몸체를 구성하는 핵을 잃은 본 와이번의 몸이 순식간에 붕괴하기 시작했다.

가루로 변한 뼈가 사방에 흩뿌려졌고, 이윽고 본 와이번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리고 숨 막히는 침묵이 찾아왔다.

"...."

"...."

군단장의 죽음.

당황한 언데드들이 진군을 멈췄다.

한편 카단과 병사들은 넋을 잃은 상태였다.

"서, 성주님. 이게 대체...."

"내, 내가 대체 뭘 본 것이냐?"

카단은 멍하니 하늘을 봤다.

드높은 하늘을 자유롭게 날고 있는 그리폰 그리고 그 위에 올라탄 진현우를.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 그리폰을 길들인 건가? 놀랍군."

그 자존심 강한 그리폰이 인간의 손에 길들여지다니. 그게 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사실은 길들인 것이 아니고 소환한 것이지만, 그런 사실을 카단이 알 리가 만무했다.

"성주님! 저 여행자가 싸우고 있습니다!"

진현우는 다시금 전투를 시작했다.

그리폰을 탄 채 하늘을 비행하면서, 다가오는 스컬 윙들을 화살로 격추하고 있었다.

카단은 그제서야 정신을 차렸다.

"이럴 때가 아니지. 용감한 병사들이여, 무기를 들어라! 놈들의 군단장이 죽었다! 용기를 갖고 저 언데드들을 모두 물리쳐라!"

그 외침에 병사들이 함성으로 화답했다.

강해 보이던 본 와이번이 일격에 죽는 모습을 보면서 사기가 오른 덕이었다.

진현우는 다시금 활을 들었다.

'약점이 명확한 놈이라서 잡기 쉽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본 와이번은 50레벨에 가까운 몬스터다. 일격에 죽이기 쉽지 않은 난적이었다.

하지만 언데드라는 특성상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고, 진현우의 클래스인 웨펀 마스터는 그런 약점을 후벼 파기에 최적화된 클래스였다.

"그리폰, 저놈들 오거든 알아서 잘 피해라."

―카루루루!

끼이익! 진현우는 화살을 당겼다.

여기 있는 사람들에게는 저 수많은 언데드가 두려워 마땅할 괴물처럼 보이겠지만.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저걸 다 잡으면 경험치가 얼마야?'

진현우에게는 경험치로밖에 안 보였다.

쏘아지는 화살. 언데드 사냥이 시작됐다.

* * *

하급 언데드는 지성이 없다.

그렇기에 놈들을 이끌 지휘관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 역할을 해 줄 군단장, 본 와이번은 진현우의 화살에 허망하게 죽었다.

―구우우우....

―캬아아아악!

당황한 언데드들은 진군을 멈췄다.

진현우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그리폰을 탄 채 스컬 윙들을 저격하기 시작했다.

병사들도 그를 뒤따랐다.

"쏴라! 날아다니는 놈들부터 죽여!"

"놈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화살에 맞아 추락하는 스컬 윙들. 언데드는 반격하기 위해서 진군하기 시작했다.

아직 거리는 충분하다. 진현우와 병사들은 최대한 많은 스컬 윙들을 미리 격추했다.

많은 언데드가 쓰러졌다.

―캬아아아아...!

―우우우...!

"빌어먹을 놈들, 숫자만 많아서는!"

하지만 놈들의 숫자는 너무도 많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정신을 가졌다.

언데드들은 큰 피해를 입으면서 성에 도달했다. 놈들이 성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기름을 부어라! 놈들을 태워 버려!"

―화르륵!

병사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언데드들에게 기름을 부었다. 그리고 떨어지는 횃불.

거센 불길이 일어났다.

―키아아아아악!

언데드들의 몸이 타올랐다.

하지만 놈들은 멈추지 않았다. 끈질기게 벽을 오르던 언데드들이 성벽 위에 도달했다.

하지만 그 숫자는 많지 않았다.

"저 새끼들 죽여!"

"개자식들이! 여기가 어딘 줄 알고!"

병사들이 언데드들과 맞서 싸웠다. 카단 역시 그들과 동참하여 검을 들었다.

'빠르게 처리해야 한다, 쌓이기 전에.'

아직은 언데드들의 숫자가 적다.

하지만 처리하는 게 늦어지면 지금 올라오는 언데드들이 놈들과 합류하게 될 터.

그 전에 처리해야 한다.

'강한 언데드들은 내가 직접...!'

거대한 사체 덩어리가 보였다.

하급 언데드들이지만 병사들이 상대하기에는 벅찬 몬스터들 역시 존재했다.

카단은 직접 놈들을 처리하려 했지만.

―콰드득!

"으, 으음!"

그보다 먼저 움직이는 이가 있었다.

언데드의 사지를 꿰뚫는 도끼들. 동시에 한 줄기 섬광이 언데드 사이를 관통했다.

연이어 진각을 밟는 소리와 함께, 건틀릿이 거대한 사체의 안면을 강타했다.

―쿠우웅!

완전히 머리가 파괴된 거구가 쓰러졌다.

그리폰에서 뛰어내린 진현우는 순식간에 언데드들을 처리하더니, 도끼를 높이 들었다.

콰아앙! 도끼가 대지를 강타했다.

―크, 크르륵!

―키아아악!

발아래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다.

언데드들이 버티지 못하고 쓰러졌다. 그런 놈들의 안면으로 도끼가 날아들었다.

콰득! 도끼가 언데드들의 머리를 으깼다.

"그리폰!"

―키루루!

진현우가 손을 뻗자 그리폰이 낚아챘다.

그는 그리폰과 함께 하늘을 활공하면서 사방의 언데드들을 저격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싸웠을까.

"적들이 물러납니다!"

수많은 언데드가 죽었다.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건지, 누군가 명령을 내린 건지.

남은 언데드들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우리가 이겼다!"

"빌어먹을 놈들! 또 오기만 해 봐라!"

함성이 성을 가득 울렸다.

그리고 진현우의 앞에 메시지가 나타났다.

―'벤데일 공방전'에 참가했습니다. 언데드들을 상대로 결정적인 활약을 했습니다!

―레벨이 2단계 상승합니다.

―명성이 500 상승합니다.

레벨이 올랐다는 반가운 메시지.

눈앞에 나타난 메시지를 지우던 진현우는 누군가 자신을 쳐다보는 것을 느꼈다.

"...."

"...."

카단이었다.

그가 만나서 할 얘기가 있다는 듯 손짓했다. 진현우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도 물어볼 것이 있었으니까.

61화

지하 보관고

전투가 끝나면 할 일이 더 많아진다.

요새 주변에 쌓인 언데드들의 사체도 치워야 하고, 피해를 받은 성벽도 보수해야 한다.

많은 이들이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부상자들은 이쪽으로 데리고 오십시오!"

"작업반! 서쪽 성벽부터 복구한다!"

"이 빌어먹을 언데드 놈들도 태워 버려!"

그렇게 지상이 바쁘게 돌아가는 가운데, 카단과 진현우는 신전 안으로 향했다.

"이름이 진현우라고 했던가. 놀라운 실력이었소, 여행자. 내 눈을 못 믿을 정도였지. 음, 이쪽으로 오시오. 지하는 여기 있소."

"예."

신전에는 지하가 있다.

주로 보관고로 쓰는 곳이다. 그래서 카단 입장에서는 딱히 볼 것도 없는데, 진현우가 지하에 볼일이 있다고 하니 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흠. 물어볼 것이 하나 있는데, 당신이 부렸던 그리폰 말이오. 길들인 것이오?"

"소환한 겁니다. 재주가 좀 있어서요."

"허, 재주라. 어마어마한 재능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소? 정말 대단한 능력을 가졌군."

카단이 혀를 내둘렀다.

그리폰을 길들였다고 해도 놀라울 텐데, 길들인 게 아니라 소환할 수 있다니.

그게 더 말이 안 되는 능력이었다.

"여기에 저 말고 다른 여행자가 있습니까?"

"없소. 원래는 있었는데, 지금은 다 떠났지. 보시다시피 워낙 위험한 곳이라서 말이오."

카단의 얼굴이 씁쓸함으로 물들었다.

아니, 씁쓸함 정도가 아닌 깊은 수심으로.

"성녀님도 우리 곁을 떠나셨지."

"성녀요?"

"음. 여행자지만 신께 선택받은 분이셨소. 오랫동안 수도 아빌론과 벤데일 신전을 오가면서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도와주셨었지."

아빌론에서도 들은 적이 있는 이름이다.

'흠, 이 시기면... 그 녀석이 한창 활동하다가 현자 타임이 와서 쉬는 시기였던가.'

성녀는 전생의 동료였기 때문에 어떤 사정이 있는지 대강 알고 있었다.

카단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분이 떠난 뒤부터 더 힘들어졌소."

"그렇군요. 가능하면 제가 그리폰을 소환했다는 건 바깥에 안 알려졌으면 하는데요."

"흠! 자기 재능을 뽐내야 할 때도 있지만 숨겨야 할 때도 있는 법이지. 그렇게 하겠소."

카단에게 있어서 진현우는 은인이다.

그가 있었기에 큰 피해 없이 언데드들을 막을 수 있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별다른 의구심 없이 선뜻 그리하겠다고 대답했다.

"근데 왜 지하를 보고 싶다는 것이오? 지하는 보관고라서 딱히 볼 것도 없을 텐데."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서요."

"흠, 그렇군. 도착했소."

긴 계단을 내려간 카단은 지하에 도달했다. 그는 크고 낡은 문을 천천히 열었다.

그러자 먼지가 가득한 창고가 나타났다.

"여기가 신전의 지하요. 좀 허전하지."

진현우는 주변을 돌아봤다.

여러 물건이 보관된 보관고. 원래는 이것저것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많이 비었다.

"뭐가 많이 없군요."

"옛날에는 많이 있었소. 이래저래 돈이 필요할 일이 많아서 팔다 보니 이렇게 됐소."

진현우는 목덜미를 긁적였다.

'조각을 찾을 단서도 판 건 아니겠지?'

여기 있는 것들을 팔든 말든 그건 카단 마음이다. 문제는 그렇게 판 것들 중에 웨펀 마스터의 조각을 찾을 단서가 있는가.

진현우는 보관고를 둘러봤다.

'안 보이는데.'

보관고를 샅샅이 뒤졌지만, 조각을 찾을 수 있는 단서라고 할 만한 건 안 보였다.

그러다가 문을 하나 발견했다.

"저 문은 뭡니까?"

"음? 아아, 대주교님의 방이오."

"지금은 안 쓰는 것 같은데, 맞나요?"

"맞소. 지금은 돌아가셨거든. 사람들을 언데드들로부터 구하기 위해서 희생하셨소."

진현우는 문 앞에 섰다.

보관고에는 별다른 단서가 없다. 퀘스트에서는 분명 지하라고 했으니, 남은 건 여기뿐.

"안으로 들어가도 될까요?"

"물론이오. 딱히 곤란한 것도 없으니."

카단은 흔쾌히 승낙했다.

진현우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내부는 백색으로 꾸며진 굉장히 검소한 방이었다.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평소에도 관리하는 모양이군요."

"그렇소. 대주교님을 존경하던 사제들이 많았으니까. 자진해서 관리하고 있지."

"흠."

진현우는 방을 이리저리 돌아봤다.

딱히 특별한 건 없는 방이다. 그런데 느낌이 온다. 그의 감각이 반응하고 있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몸이 떨린다고나 할까.

- 우우웅!

'아니, 진짜로 떨고 있잖아?'

휴대폰이 진동하는 것처럼 진현우의 아공간 주머니가 진동하고 있었다.

그는 주머니에서 진동의 원인을 꺼냈다.

부서진 검이었다.

"그건 무슨 검이오? 부러졌군."

"...."

진현우는 부서진 검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리고 다우징 로드처럼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진동이 가장 강해지는 지점을 찾아냈다.

대주교가 썼던 책상.

"상자가 들어 있군요."

"그 상자 말이오? 대주교님이 보관하시던 상자요. 내부는 본 적이 없어서 뭐가 들었는지 모르겠군. 뭔 짓을 해도 안 열려서 말이오."

책상 안에 작은 상자가 들어 있었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초라한 상자. 그런데 아무리 힘을 줘도 상자가 열리지 않았다.

따로 열쇠 구멍도 없다.

"그러니까 안 열린...."

잠깐 생각하던 진현우는 부서진 검을 작은 상자에 갖다 댔다. 그러자 검이 빛나더니.

- 딸칵.

"...열렸군. 으음?"

상자가 소리를 내면서 열렸다.

진현우는 상자의 내용물을 확인했다.

"아, 안에 뭐가 들어 있소?"

"크게 대단한 건 없고...."

카단의 눈이 기대감으로 반짝였다. 진현우는 그에게 상자에서 꺼낸 걸 보여 줬다.

"그건... 열쇠요?"

"예, 열쇠입니다."

상자에 든 것은 열쇠였다.

그 열쇠를 꺼낸 순간 상자에서 빛이 나더니 허공에 글자를 그리기 시작했다.

- 이 신전을 세운 분의 성소로 가십시오. 거기에 당신이 찾는 것이 남아 있습니다. 원래는 제가 직접 전해야 하지만, 기회가 없군요.

"오, 이건... 대주교님의 글씨체로군."

같이 글자를 본 카단이 그리 말했다.

자신이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미리 마법으로 전언을 남겨 둔 모양이었다.

"이 신전을 세운 사람이라면...."

진현우는 그 사람이 누군지 안다.

그의 주머니 속에 든 아이템의 주인이니까.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척 카단에게 물었다.

"마르실이라는 분이 세우셨소. 세상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선행을 펼치셨던 분이지. 그리고 먼 과거에 이 땅을 구하신 분이기도 하오."

"이 땅을 구했다고요?"

"음. 옛날에 이 땅에 '폭군'이라 불리는 강력한 언데드가 나타났었다더군. 그놈을 물리쳤던 분이오. 그 부상 때문에 돌아가셨고, 그분을 기릴 수 있는 성소를 따로 만들었지."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다.

'마르실의 검'과 관련된 퀘스트를 깨 본 적이 있기에 저런 내용을 알고 있을 수밖에.

퀘스트 내용도 훤히 꿰고 있다.

'성소의 지하에 석상이 있지. 그 석상한테 마르실의 검을 쥐여 주면 석상이 움직이고.'

석상과 싸워서 이기면 마르실의 검을 강화하고, 꽤 괜찮은 아이템을 하나 준다.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는 퀘스트라서 좋다.

다만 의아한 점이 하나 있었다.

'마르실의 성소에 숨겨진 게 있었나?'

성소에 갔던 적이 있고, 거기에 뭐 숨겨진 게 있는가 싶어서 다 찾아본 적도 있다.

웨펀 마스터의 조각과 관련된 건 없었는데.

[부서진 조각을 찾아 –2.]

· 분류: 직업 퀘스트.

· 난이도: A.

· 설명: 벤데일의 지하에서 조각의 단서를 찾아냈다. 이제 몰락한 고원에 있는 '마르실의 성소'에 숨겨진 부서진 조각을 찾아내야 한다.

· 보상: '부서진 조각' 획득.

진현우는 퀘스트 창을 껐다.

'일단 가 보면 알게 되겠지.'

바로 열쇠를 주머니에 챙기려다가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카단이 떠올랐다.

"마르실이라는 분의 성소에 가야 할 거 같은데, 이 열쇠를 가지고 가도 괜찮을까요?"

"음... 뭐, 괜찮지 않겠소? 우리는 아무리 애를 써도 열 수 없던 상자였는데 당신은 쉽게 열었잖소. 당신을 위해 준비된 것이었겠지."

카단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주교가 안배해 둔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대신 부탁할 것이 하나 있소."

"말씀하십시오."

"마르실 님의 성소는 동쪽의 마을에 있소. 원래는 순례지라서 관리하던 곳인데, 상황이 이렇다 보니 오랫동안 관리를 못 했지."

카단이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사람을 보냈더니 성소에 몬스터가 가득해서 도무지 접근을 할 수가 없다더군. 가능하면 그 몬스터들을 좀 처리해 줬으면 하오."

"어렵지 않군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아니, 쉽지 않을 것이오."

진현우가 가볍게 대답하자, 카단이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려는 듯 목소리를 낮췄다.

"웨어 울프들이 성소 안에 있소."

"그렇군요. 놀랍네요."

"...전혀 안 놀란 것 같은 얼굴 아니오?"

어떤 몬스터가 나오는지 이미 알고 있었기에 딱히 놀라고 말 것도 없었다.

카단이 볼을 긁적였다.

"크흠, 어쨌든 조심하시오. 웨어 울프 말고 웨어 베어도 보였다는 목격담이 있으니."

"예."

성소가 있는 마을은 던전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크게 걱정할 건 없었다. 웨어 울프든 웨어 베어든 '짐승형 몬스터'였으니까.

진현우에게는 쉬운 상대였다.

"다음 침공은 언제입니까?"

"언데드 말이오? 글쎄. 원래는 몇 달에 한 번이었는데 요즘엔 한 달에 한 번으로 줄었소. 여기서 더 줄어들지도 모르는 일이지."

카단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상황은 좋지 않소. 언데드들의 공세 주기는 점점 빨라지고 있고, 더 까다로운 언데드들이 나타나고 있지. 이번에도...."

큰 피해를 볼 뻔했다.

최소한의 피해로 넘어갈 수 있었던 건 진현우의 도움이 있었던 덕분이었다.

카단은 고개를 숙였다.

"당신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오. 새삼 고맙다고 해야겠군."

"언제까지 막을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글쎄, 이 신전은 한계에 달한 상황이오."

카단이 씁쓸하게 웃었다.

도망칠 곳이 있는 사람들은 이미 떠났다. 남은 이들은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

"이대로면 우리는 여기서 죽게 될 것이오. 그리고 저 언데드의 일원이 되겠지."

희망이 없다는 뜻이었다.

실제로도 그러했다. 전생에서 프레아 왕국이 멸망했듯이 이 신전도 멸망했었다.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막는 방법이 없는 건 아닌데.'

프레아 왕국과 이 신전.

두 가지를 동시에 구할 수 있는 방법을 진현우는 안다. 특수한 퀘스트를 받으면 된다.

문제는 퀘스트의 난이도가 너무 높다는 것이고, 지금의 진현우에게도 버겁다는 것.

'일단 직업 퀘스트부터 깨고 보자.'

진현우가 잠깐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카단은 손을 내저으면서 등을 돌렸다.

"쓸데없이 우울한 얘기를 했군. 어쨌든 잘 부탁하겠소. 청소가 끝나거든 나한테 말해 주면 되오. 그러면 보상을 챙겨 드리겠소."

"예."

그러자 퀘스트 창이 나타났다.

[성소의 불신자들.]

· 난이도: B.

· 설명: '마르실의 성소'로 가는 길을 막는 웨어 울프와 웨어 베어를 처리해야 한다.

· 보상: 경험치, 아이템.

직업 퀘스트를 깨는 김에 같이 하기 좋은 퀘스트였다. 진현우는 퀘스트를 받았다.

'그럼 가 볼까.'

마르실의 성소로.

* * *

진현우는 몰락한 고원 동쪽으로 향했다.

"음, 어디 보자... 이 근처일 텐데."

온 적이 있어서 길 찾기는 쉬웠다.

진현우는 빠르게 걸음을 옮겼고.

'여기군.'

목적지인 마을을 발견했다.

한때는 순례지로 쓰이던 마을이지만 이제는 사람들이 모두 떠나고 텅 빈 마을.

오랫동안 방치된 건물들은 먼지가 가득했고,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위태로웠다.

"흠, 여기가 성소인데."

마을 깊은 곳에 신전이 있었다.

바로 마르실의 성소다. 근데 문제가 있었다.

- 아오오오오!

신전에서 늑대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정확하게는 늑대가 아니다. 반인반수. 성소에 있는 웨어 울프가 울부짖는 것이다.

진현우는 사냥꾼의 장갑을 착용했다.

"늑대 사냥이나... 응?"

진현우는 문을 열려다가 이상함을 느꼈다.

'누군가 연 흔적이 있다.'

문에 흔적이 남아 있었다.

비교적 최근에 누군가 문을 연 것 같은 흔적. 진현우는 곧바로 추적을 발동했다.

바닥에 남겨진 발자국들이 보였다.

"...."

문 너머로 이어지는 발자국.

진현우는 인상을 찡그렸다.

'나 말고 누군가 들어간 건가? 그럼 웨어 울프들이 가만히 있지는 않았을 텐데.'

성소에 있는 몬스터가 침입자와 맞서 싸웠을 것이다. 그런데 피 냄새는 나지 않는다.

전투가 없었다는 뜻이다.

'뭔가 이상하다.'

진현우가 알던 것과는 다른 전개.

그는 도끼를 움켜쥐었다.

'경계하면서 움직여야겠군.'

성소 안에 누군가 있을지도 모른다.

진현우는 신중히 성소로 진입했다.

* * *

그리고 진현우가 막 성소로 진입했을 때.

"이건가? 여긴가? 아니, 아니야."

성소의 지하 심층부.

과거 세상을 순회하면서 곤경에 처한 사람을 구했던 성기사가 잠든 곳에서.

어떤 남자가 분통을 터트리고 있었다.

"캬아아악! 그분이 분명 여기에 있다고 했는데! 아무리 찾아도 없잖아! 뭐냐고!"

특이한 눈동자를 가진 남자였다.

흰 부분 하나 없이 새까만 눈동자에 핏빛처럼 붉은 동공, '역안'을 가진 남자였다.

"그 '유산'은 대체 어디 있는 거냐!"

유산.

남자의 입에서 나온 단어였다.

주변을 닥치는 대로 파괴하면서 날뛰던 남자는 확실히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보였다.

"그분의 말씀만 아니었다면 진작 다른 곳으로... 응? 뭐야, 또 침입자가 온 건가."

이 성소를 몬스터가 나타나는 곳으로 만든 장본인은 침입자의 존재를 눈치챘다.

바로 진현우를.

남자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어렸다.

"흐흐, 심심한데 마침 잘됐군."

가지고 놀 장난감을 찾은 미소였다.

62화

조건 달성

- 던전: 마르실의 성소에 진입합니다.

- 권장 레벨: Lv.45.

신전 내부는 어둡고, 굉장히 넓었다.

처음 들어오는 사람이라면 길을 헤매기 딱 좋은 구조였다. 물론, 진현우는 아니었다.

그는 이곳의 지리를 다 알고 있었다.

"내부에 웨어 울프들이 많단 말이지."

하나씩 상대하는 건 비효율적이다.

무엇보다 신전의 지하 심층부에 누가 있을지 모른다. 자신이 들어온 걸 알지도 모른다.

최대한 웨어 울프들을 빨리 처리해야 한다.

"그러려면... 흠."

진현우는 신전의 지도를 생각했다.

이 신전의 중앙에 넓은 강당이 있다. 신전에 있는 웨어 울프들을 다 유인할 수 있는 위치고, 통로가 둘이라서 상대하기도 쉽다.

'웨어 울프들을 유인하려면.'

쉬운 방법이 있다.

진현우는 자신의 팔을 내려다봤다.

'여기 있는 웨어 울프들은 오랫동안 갇혀 있었다. 굶주렸고, 후각이 예민하다는 뜻이지.'

진현우는 팔에 일부러 상처를 냈다.

순식간에 흘러나오는 피. 그는 피를 주변에 흩뿌리면서 피 냄새가 퍼지게끔 했다.

"혈액형 O형의 건강한 피다, 짐승 놈아."

먹이가 여기 있으니 찾아와라.

진현우는 자세를 낮추고 강당으로 향했다.

"늑대 사냥이나 해 볼까."

피 냄새가 사방으로 퍼진다.

* * *

- 크르르....

어떤 짐승이 신전을 배회하고 있었다.

아니, 그를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평범한 인간이라기에는 너무도 기괴했다.

- 크흐으으....

인간을 넘어선 덩치와 온몸에 자란 털.

마지막으로 인간이라기보다는 늑대에 가까운 얼굴과 야성으로 번들거리는 눈까지.

놈은 손톱을 날카롭게 세웠다.

- 배가 고프다... 배가....

입에서 침이 흘러나왔다.

이곳이 어디인지, 왜 여기에 있는지,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알 수 있는 건 이 배고픔뿐.

- 인간, 인간... 먹을 것....

신전을 배회하던 그는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어디선가 달콤한 냄새가 나고 있다.

바로 인간의 피 냄새.

- 냄새, 피 냄새가 난다... 크르릉.

그는 냄새가 난 곳으로 홀린 듯이 갔다.

어느새 두 손이 땅에 닿고, 인간처럼 걷던 그는 짐승처럼 신전을 내달리고 있었다.

- 냄새, 크릉, 피, 배고프다!

시야가 새빨갛게 물들었다.

넓은 신전을 재빠른 속도로 달리던 놈은 신전의 중심부에 있는 강당에 도달했다.

좁은 통로 너머에 있는 인간의 모습도.

- 무기, 없다. 피... 다쳤다!

어디서 다쳤는지, 피를 흘리며 신음하는 남자. 웨어 울프의 입에 광소가 어렸다.

- 찾았다, 먹이! 크허어어엉!

웨어 울프는 포효를 내질렀다.

땅을 박찬 그는 두 손을 높이 들어 올리고 단숨에 먹이를 덮치려고 했다.

하지만 바로 그때.

- 파스슥!

- 크허어엉?!

무언가가 폭발했다.

얼음이 깨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바로 아래에서 지독한 한기가 엄습했다.

순간적으로 몸의 움직임이 둔해졌다.

- 커허엉! 무슨 짓을...!

"짐승 사냥 하는 데는 덫이 딱이지."

휘릭! 어디선가 도끼가 날아왔다.

그 도끼를 받은 진현우는 몸을 돌리더니 곧바로 웨어 울프에게 도끼를 투척했다.

- 크아아악!

웨어 울프의 사지를 꿰뚫는 도끼.

진현우는 고통에 몸부림치는 놈의 뒷목을 붙잡고 자신에게로 끌어당겼다.

그의 무릎이 웨어 울프의 턱을 강타했다.

- 컥...!

뇌가 뒤흔들리는 충격.

웨어 울프가 휘청거리고 있다. 진현우는 손을 뻗어 도끼를 받고 스킬을 사용했다.

대분쇄. 그의 도끼가 붉게 물들었다.

"흐으읍!"

진현우는 도끼를 쥔 손을 크게 젖혔다.

그리고 일격.

- 콰드드득!

뼈가 짓이겨지는 소리.

엄청난 힘을 담은 웨어 울프의 목을 덮쳤고, 두꺼운 목을 단번에 베어 버렸다.

하지만 적은 그게 다가 아니었다.

- 크르르... 크아아아아!

"물어!"

다른 웨어 울프들도 피 냄새를 맡고 몰려들었다. 그를 포위한 채 달려드는 웨어 울프들.

진현우는 곧바로 영혼 늑대를 소환했다.

- 커허어엉!

- 크르윽!

늑대들이 웨어 울프들을 물고 늘어졌다.

진현우는 실피르를 쥐었다. 그리고 바람을 머금은 화살을 웨어 울프들에게 쐈다.

공기를 찢으며 쏘아지는 화살.

- 커헉...!

- 카아아악!

단번에 머리를 꿰뚫린 웨어 울프들이 즉사했다. 놈들은 동체 시력이 뛰어났지만, 진현우의 화살에는 반응조차 하지 못했다.

온갖 버프를 받으면서 속도가 더욱 빨라진 화살이다. 반응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 크아아아아! 먹이! 인간!

-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 먹는다!

'숫자 한번 더럽게 많네.'

강당으로 이어지는 통로는 둘.

진현우가 상대하던 웨어 울프들의 반대쪽 통로에서 또 다른 적들이 튀어나왔다.

그는 마력을 끌어올렸다.

- 쉬이이익!

순식간에 쏘아지는 검은 화살들.

그 화살에 적중한 웨어 울프들의 움직임이 느려졌다. 그리고 진현우가 땅을 박찼다.

- 크, 아악...!

어두운 강당에 섬광이 번쩍였다.

진현우는 웨어 울프 사이를 섬광처럼 누비면서 놈들의 목을 도끼로 베어 넘겼다.

그런 그를 영혼 늑대들이 지원했다.

- 쿠우웅!

웨어 울프의 거구가 계속해서 쓰러졌다.

그렇게 얼마나 싸웠을까. 넓은 강당에 웨어 울프들의 사체가 가득 쌓이고 말았다.

진현우는 도끼에 묻은 피를 털어 냈다.

'웨어 울프는 거의 다 처리했다.'

구석진 곳에 남은 놈들은 있을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웨어 울프는 처리했다.

하지만 아직 '놈'이 나타나지 않았다.

'웨어 베어, 이 신전의 보스 몬스터.'

지금은 이 신전에 웨어 베어 말고 다른 놈이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어쨌든.

신전의 보스 몬스터는 웨어 베어다.

놈은 신전 심층부에 부하들과 함께 자리 잡고 있다. 직접 찾아가야 한다는 뜻이다.

'어차피 위치는 알고 있다.'

진현우는 자세를 낮췄다.

보호색을 사용한 그의 모습이 어둠 속에 잠기듯이 사라졌다. 동시에 그의 기척이 사라지고, 발소리가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다.

전쟁 영웅의 부츠 효과였다.

'빠르게 웨어 베어를 처리해야 한다.'

신전 안에 진현우가 모르는 누군가가 있다.

가능하면 놈부터 먼저 처리하고 싶었지만 상대가 누군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상태.

일단 신전에 있는 몬스터들부터 처리해서 거슬리는 적들의 숫자를 최대한 줄여야 한다.

'웨어 베어가 있는 곳은....'

신전에는 여러 발자국이 남아 있었다. 웨어 울프들이 남긴 수많은 발자국.

그리고 그 사이에 곰 특유의 발자국이 남아 있었다. 진현우는 발자국을 추적했다.

놈들이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여기다.'

신전의 심층부.

그곳에 인위적인 공터가 있었다. 누군가가 손톱으로 파낸 것처럼 생긴 공터.

그 안에 웨어 울프들이 있었다.

"좋아...."

그리고 또 하나, 웨어 울프보다도 더욱 커다란 곰 형태의 반인반수도 보였다.

웨어 베어다.

- 구우우... 찾아야 한다. 빨리, 빨리.

놈은 다른 웨어 울프들과 함께 벽을 파는 등 무언가를 찾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진현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런 모습은 처음 보는데?'

이 던전은 이미 깬 적이 있는 곳이다.

그때도 웨어 베어를 만났었다. 당시에 만났던 웨어 베어는 아예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근데 지금의 웨어 베어는 뭔가 달랐다.

'뭘 찾고 있는 거지?'

다급하게 뭔가를 찾는 모습.

진현우는 의아함을 느꼈다. 그리고 불현듯 자신이 받은 퀘스트를 떠올렸다.

웨펀 마스터의 조각을 찾는 퀘스트.

부서진 조각이 여기 있지 않았던가.

'설마, 조각을 찾고 있는 건가? 왜?'

진현우는 여기로 들어오기 전, 입구에서 봤던 누군지 모를 자의 발자국을 떠올렸다.

그 발자국, 그리고 웨어 베어들의 행동.

심상치 않다.

'귀찮아지겠군.'

진현우는 혀를 차면서 자세를 낮췄다.

우선 저놈들부터 처리해야 한다.

* * *

웨어 베어는 벽을 파내고 있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이곳에 끌려왔을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 찾아야 한다, 찾아라. 크엉!

- 크르르, 찾고 있다!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는 걸, 카르, 찾는다고 찾을 순 있나?

- 쿠어어엉! 못 찾으면 우린 죽는다!

반인반수 계통의 몬스터는 지능이 있다.

어느 정도는 말도 할 줄 안다. 애초에 절반은 인간이니까 말하는 게 당연하기는 했다.

웨어 베어는 벽을 파면서 노성을 터트렸다.

- 나도, 쿠엉! 배가 고프다! 고기가 먹고 싶다. 인간! 저번에 먹은 인간은 맛있었는데!

- 그 멍청한 순례자들! 남겨 뒀어야 했다!

마르실의 성소에는 가끔씩 순례자들이 찾아오고는 한다. 그리고 그런 순례자들은 신전에 있는 짐승들의 먹잇감이 되고는 했다.

웨어 베어가 주륵 침을 흘렸다.

- 흐흐, 저번에 먹었던 그 인간은....

바로 그때.

공기를 찢어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웨어 베어가 그 소리에 반응하기도 전에 날카로운 뭔가가 살을 꿰뚫는 소리가 났다.

- 크아아악!

- 끄륵...!

고통에 찬 비명이 들렸다.

웨어 베어가 다급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웨어 울프들의 모습.

머리와 목이 꿰뚫린 부하들의 모습이었다.

- 무슨...?!

- 화, 화살... 커허어엉!

그건 화살이었다.

바람을 휘감은 화살들이 웨어 울프들을 꿰뚫었고 날카로운 회오리로 변했다.

바람이 그들의 살점을 찢어발겼다.

- 어떤 놈이냐!

대답 대신 화살이 날아들었다.

웨어 베어는 자신에게 날아오는 화살을 쳐 냈지만 그의 부하들은 아니었다.

화살이 그들의 사지를 노렸다.

- 가르르... 내 다리가...!

- 이 빌어먹을 놈이!

웨어 베어는 근처에 있던 거대한 돌을 들어서 화살이 날아온 방향으로 던졌다.

콰아앙! 벽이 부서지면서 먼지가 흩날렸다.

그 사이로 한 인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 네놈이냐!

"그럼 나지, 다른 누가 또 있나?"

진현우였다.

비웃음을 띤 얼굴. 웨어 베어는 거센 분노를 드러내면서 그에게 돌덩이를 던졌다.

- 쿠오오! 가라! 저놈을 물어 죽여!

- 크르르르...!

화살에 맞지 않았거나 경미한 부상을 입은 웨어 울프들이 일제히 돌진했다.

진현우는 날아오는 돌덩이를 피하면서 적들을 향해 도끼를 투척했다.

- 가르르! 어림없다!

- 인간, 네 목을 물어뜯어 주마!

웨어 울프들은 날아드는 도끼를 쳐 내면서 거세게 포효했다. 이윽고 돌덩이가 땅과 부딪치더니 거대한 먼지를 일으켰다.

순간적으로 시야가 가려진 상황.

- ...!

그 먼지 속에서 섬광이 번뜩였다.

우스운 말이지만, 그것 말고는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순간적으로 섬광이 번뜩이더니 무언가가 웨어 울프의 앞에 도달했다.

- 콰드득!

- 끄르르륵...?!

진현우였다.

뒤로 손을 뻗어 도끼를 회수한 그는 섬광과도 같은 속도로 도끼를 휘둘렀다.

날카로운 날이 웨어 울프의 목을 갈랐다.

- 빠, 빠르다!

- 저 인간... 강하다!

'섬광' 스킬의 효과였다.

스킬을 발동한 다음에 쓰는 스킬의 시전 속도를 굉장히 빠르게 만드는 효과.

진현우는 자세를 낮추며 돌진했다.

- 쿠우웅!

- 커허억!

힘껏 진각을 밟으며 내지른 파쇄권이 웨어 울프의 복부를 강타했다.

저절로 굽혀지는 허리. 그걸 기다렸다는 듯이 도끼가 놈의 머리를 내리찍었다.

- 인간...! 먹잇감 주제에!

웨어 베어가 땅을 박찼다.

거대한 몸뚱어리가 그 덩치에 맞지 않는 속도로 진현우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면서 내지르는 거대한 발톱.

- 카드득!

"음...!"

도끼로 발톱을 맞받아 낸 진현우의 눈이 커졌다. 자신의 도끼가 밀리고 있다.

게다가 팔에 느껴지는 충격.

- 쿠워어어어!

진현우의 팔이 크게 밀려났다.

웨어베어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거대한 두 발톱을 둔기처럼 휘둘러 댔다.

- 쿠웅! 콰아앙!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진현우는 몸을 비틀어 가면서 공격을 피했고, 놈의 발톱은 애꿎은 땅을 강타했다.

그럴 때마다 땅에 균열이 일어났다.

'무슨 놈의 힘이....'

진현우는 아슬아슬하게 웨어 베어의 공격을 피했다. 놈은 그게 답답했는지, 분노를 터트리면서 근처의 기둥을 뽑았다.

- 벌레처럼 피하는구나! 쿠오오오!

웨어 베어는 거대한 기둥을 무슨 몽둥이처럼 휘둘러 댔다. 한 번이라도 스친다면 치명상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정면에서 싸웠다가는 큰일 나겠군.'

확실히 힘은 강하다.

속도도 굉장히 빠르다. 아마 지구력도.

'그러면 느리게 만들어 줘야지.'

진현우는 순간적으로 검은 화살을 만들어 내서 웨어 베어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그리고 몸을 뒤로 굴렸다.

- 아프지도 않다, 인간...!

분노한 웨어 베어가 달려들었다.

놈이 발을 앞으로 내디딘 그 순간, 철컥하면서 무언가 작동하는 소리가 들렸다.

- 퍼어엉!

- 크하아악!

덫이었다.

진현우가 뒤로 몸을 굴리면서 순간적으로 설치한 폭발 덫이 웨어 베어를 덮쳤다.

그는 곧바로 스킬을 사용했다.

"눈을 할퀴어라!"

- 피유우우!

그에게서 두 마리의 매가 튀어나왔다.

푸른 매들은 순식간에 웨어 베어의 안면으로 돌진했고, 놈의 얼굴을 거세게 할퀴었다.

- 커허어엉!

순간적인 빈틈은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진현우가 망설임 없이 도끼를 투척했다. 분열한 도끼가 웨어 베어의 전신을 강타했다.

- 푸우욱!

- 크아아아악!

그리고 화살이 쏘아졌다.

정확하게 도끼가 꿰뚫은 상처들을 노리는 분열 화살. 스킬, '약점 분석'이 그가 만든 상처가 놈의 약점이라고 알려 줬다.

웨어 베어의 몸이 휘청거렸다.

- 대, 대장!

- 뭐, 뭘 하는 거냐! 날 도와!

웨어 베어는 아직 남아 있던 부하들을 다급히 불렀다. 상황을 지켜보던 웨어 울프들이 허겁지겁 진현우를 향해 돌진했다.

하지만 누구도 그를 막지 못했다.

- 쿠, 쿠오... 쿠오오오!

어느새 남은 것은 웨어 베어뿐.

진현우가 천천히 걸어오고 있다. 그 모습을 본 포식자의 몸이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놈이 발작하듯이 두 발을 높이 들었다.

그리고.

- ...!

섬광이 번뜩였다.

스킬을 쓴 진현우가 말 그대로 섬광처럼 웨어 베어의 앞에 도달했다.

놈의 코가 순간 움찔거렸다.

'냄새가 난다.'

짙은 피비린내.

그 냄새를 맡은 웨어 베어는 순간적으로 몸의 힘이 빠져나가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건 느낌 탓이 아니었다.

- 컥, 끄륵...!

콰드득! 반응할 새도 없이, 진현우의 도끼가 웨어 베어의 목을 쳤다.

목에 꽂힌 도끼. 진현우는 도끼를 주먹으로 후려쳐서 날이 더욱 깊이 꽂히게끔 했다.

- 인, 간, 끄르르륵!

- 쿠우웅!

파쇄권이 웨어 베어의 복부를 강타했다.

무너지는 거대한 몸. 진현우는 놈의 목을 꿰뚫은 도끼를 뺐다. 그리고.

- 서걱!

일섬.

놈의 너덜거리는 목을 단번에 갈랐다.

그걸로 끝이었다.

- 퀘스트 조건을 달성했습니다.

"쓰읍, 더럽게 힘드네."

쿠웅! 웨어 베어의 몸이 쓰러졌다.

진현우는 그제야 참았던 숨을 토해 냈다.

63화

괜히 긴장했다

진현우는 숨을 골랐다.

육체적으로 지친 것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마력이 고갈돼서 지친 것이 컸다.

'이놈의 마력은 아무리 올려도 부족하냐.'

섬광과 영혼 동물 소환 스킬은 A 등급인 만큼 마력을 많이 잡아먹는 스킬이다.

지금의 진현우가 마법사에 버금가는 마력 능력치를 가졌음에도 부족한 이유였다.

- 마력이 순환합니다. 빠르게 순환하는 마력이 신체의 피로 회복을 돕습니다.

- 금기의 지팡이를 착용했습니다. 지팡이에 담긴 마력이 고갈된 마력을 재생합니다.

진현우는 마력 순환 반지와 금기의 지팡이를 착용해서 빠르게 마력을 회복했다.

그리고 숨을 내뱉으며 메시지를 봤다.

-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 분열 투척, 특제 덫, 섬광, 검은 화살, 대분쇄의 숙련도가 상승했습니다!

-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적정 레벨보다 낮은 레벨에 혼자서 웨어 베어를 잡을 것.

- 보상으로 고급 등급 칭호 [혼자서 곰을 때려잡은 (효과: 근력/체력 +2, 짐승형 몬스터에게 주는 대미지 +5%)]을 획득했습니다.

현재 진현우의 레벨보다 월등히 높은 몬스터들이다. 덕분에 경험치나 숙련도를 평소보다 빠른 속도로 쌓을 수가 있었다.

그리고 메시지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 분열 투척과 특제 덫의 숙련도가 5레벨이 되었습니다. 새로운 효과가 추가됩니다.

분열 투척의 숙련도가 5레벨이 되었다.

스킬 같은 경우에는 숙련도가 올라가면 위력이 강해지거나 마력 소모가 줄어든다.

그리고 숙련도가 특정 레벨에 도달하면 스킬마다 다른, 특수한 효과가 추가된다.

· 분열 투척 (B, Lv.5): 있는 힘껏 도끼를 투척하여 적의 육체를 파괴한다. 더 많은 마력을 담을 경우, 도끼가 분열한다.

* Lv.5: 스킬의 위력이 20% 증가한다. 도끼가 분열하는 숫자가 8개로 늘어난다.

· 특제 덫 (B, Lv.5): 마력을 이용하여 특제 덫을 제작한다. 목록: 속박, 폭발, 빙결.

* Lv.5: 덫의 폭발 반경이 30% 증가한다. 상태 이상의 효과가 20% 강화된다.

바로 이것처럼.

진현우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좋네.'

둘 다 진현우가 애용하는 스킬이었다.

투척은 기습적으로 쓰기에 좋고, 덫은 상대가 방심했을 때 일격을 가하기에 좋다.

'도끼 등급만 올라가면 좋을 텐데.'

슬슬 퀘스트가 나올 때가 된 거 같은데 어째 안 나온다. 그게 못내 아쉬웠다.

진현우는 드롭된 아이템들을 확인했다.

그중에 반가운 아이템이 있었다.

[그리즐리 베어의 정수 (영웅)]

- 설명: 반인반수에게서 얻은, 짐승의 부분인 그리즐리 베어의 영혼이 담긴 정수다. '영혼 중재' 특성을 가진 이만이 사용할 수 있다.

"오, 운이 좋네."

웨어 베어도 짐승형 몬스터의 일종이다.

특수한 짐승을 사냥할 때 정수를 드롭 하는 영혼 중재의 발동 조건을 충족한다는 뜻.

하지만 웨어 베어는 절반은 인간이기 때문에, 그중에서 짐승인 부분만 영혼을 중재한다.

- 영혼 중재에 성공했습니다. '그리즐리 베어'가 소환 가능한 목록에 추가됩니다.

* 현재 소환 가능한 영혼 동물의 목록: 늑대 (1), 매 (1), 그리폰 (1), 그리즐리 베어 (1).

그 결과물이 이것이었다.

진현우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번 바로 소환해 볼까, 싶은 마음도 들었지만.

'일단은 아껴 둬야겠군.'

이 신전에 뭐가 있을지 모른다.

진현우는 곁에서 주변을 경계하고 있던 영혼 늑대들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주변에 아무도 없지?"

- 크르릉.

늑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신전에 먼저 들어온 사람이 있다. 만약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웨어 울프들한테 잡아먹혔을 텐데, 피 냄새도 안 나고 흔적도 없다.

'찝찝하군. 안 좋은 예감이 드는데.'

웨어 베어와 웨어 울프들이 뭔가를 찾고 있는 것도 그렇고, 영 예감이 안 좋았다.

그리고 전부터 이상하게 여기던 게 있었다.

'왜 신전에 웨어 울프가 있는 거지?'

이 괴리감.

지하 신전에 언데드도 아니고 짐승형 몬스터들이 있다는 게 옛날부터 이상했다.

마치 누군가가 데리고 온 것처럼.

'그것도 조각이 있는 곳에 말이지.'

불현듯 선대 웨펀 마스터의 말이 떠올랐다.

- 사람을 보는 눈이 없었군. 알아서는 안 될 것들을... 너무 많이 알아 버렸나....

- 부디 바라건대, 숨겨 둔 조각을... 그놈들이 찾아내지 못하기를, 바랄, 뿐....

그놈들.

진현우 말고도 웨펀 마스터가 숨겨 둔 조각을 찾으려고 하는 자들이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어쩌면.

'여기 있을지도 모르지.'

퍼즐의 조각이 대강 맞춰졌다.

진현우는 우선 신전의 지하로 향했다. 이 신전에는 지하가 있는데, 그곳에 마르실의 행적을 기리는 장소가 마련되어 있다.

그곳으로 가야 한다.

'신전이 아주 엉망이 됐군.'

신전은 말 그대로 개판이었다.

관리가 되었을 때는 아름다웠을 것 같은데, 지금은 죄다 부서져서 폐허나 다름없었다.

진현우는 지하로 내려갔다.

"웨어 울프는 없는 거 같지?"

- 가르르.

지하에 남은 웨어 울프는 없었다.

진현우는 영혼 늑대들과 함께 지하의 가장 안쪽으로 향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탁 트인 공동이 나타났다.

'그래도 여기는 제법 멀쩡한데.'

공동 가운데에 세워진 석상.

아마 마르실을 본떠서 만들었을 것이다. 원래라면 주변에 여러 장식이 있었겠지만, 장식은 다 부서지고 석상만이 홀로 남아 있었다.

'누군가 머물렀던 흔적이 있다.'

사람이 머문 흔적이 보였다.

근데 지금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누구와 마주친 적도 없다.

그게 뜻하는 것은 간단했다.

'날 지켜보고 있겠군. 그럼 아마도....'

진현우는 대강의 흐름을 눈치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척 마르실의 석상에 다가갔다.

듬직한 성기사의 석상이다.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았는데, 뭔가 허전함이 느껴졌다.

'두 손에 뭔가가 있어야 할 것 같은 느낌.'

그리고 그건 기분 탓이 아니다.

자세히 보면 가슴과 손바닥 사이에 자그마한 틈이 있었다. 딱 검이 들어갈 만한 틈이.

마르실의 검을 넣을 수 있는 틈이다.

'원래는 따로 정보를 얻어야 하는 거지만.'

마르실과 관련된 문헌을 읽으면서 얻어야 하는 정보다.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다.

진현우가 이미 알고 있는 정보였으니까.

그는 주머니에서 검을 꺼냈다.

"거기까지. 움직이지 마라."

그리고 그걸 석상의 양손에 집어넣으려는 순간, 바로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진현우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크흐흐, 이거 운이 참 좋군. 어이, 지금 뭘 하려고 한 건지 나한테 설명해라."

독특한 눈동자를 가진 남자가 보였다.

흔히 마족들의 눈이라고 불리는 역안을 가진 남자. 신체는 특이할 것 없는 인간의 형태였지만, 저놈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다.

진현우는 남자의 정체를 알아챘다.

"뭐야, 마인이냐?"

"오, 내가 누군지 한 번에 알아챈 건가?"

탑에는 플레이어들이 탑을 오르는 것을 막으려고 하는 세력들이 존재한다.

바로 대적자라는 존재들이다.

그리고 그 대적자들이 특별히 선택하여 더 많은 힘을 나눠 주는, 선택받은 존재가 있다.

'마인(魔人).'

바로 마인이다.

대적자에게서 카오틱보다 더 많은 힘을 선물받은 그들은 인간의 영역을 초월했다.

그 신체는 평소에는 인간으로 위장하고 있지만 인간이 아닌 괴물로 바뀌었으며.

그 힘 역시 플레이어를 넘어선다.

"어떤 놈인가 했더니, 괜히 긴장했잖아."

"크흐... 뭐라고?"

진현우의 말은 이상하게 들렸다.

마인이 아니라 다른 존재가 있는 줄 알고 긴장했는데, 마인이라서 안심했다는 듯한 말.

"마인이라서 안심했다고. 왜, 멍청해서 내 말이 이해가기가 좀 어렵나? 그럼 이해하고."

"...."

마인이 인상을 험악하게 구겼다.

명백한 도발이다. 마인은 저런 도발을 그냥 넘길 정도로 성격이 관대하지 않았다.

까드득, 마인이 이를 갈았다.

"네놈, 죽고 싶은 거냐?"

"어차피 살려 줄 생각도 없으면서 죽고 싶냐고는 왜 물어보는 거야? 누굴 바보로 아나."

"크흐, 이놈이...!"

마인은 당장에라도 눈앞의 인간을 찢어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은 참아야 한다.

저놈에게서 알아내야 할 것이 있다.

"...흐으, 인간. 넌 운이 좋다. 물어볼 게 없었으면 진작에 네놈을 찢어 죽였을 거다."

"오, 그래? 그거 다행이네."

마인이 날카로운 이를 드러냈다.

인내심이 시험받고 있다. 하나 참아야 한다.

"웨어 울프들을 다 죽였더군. 여기로 온 이유는 뭐지? 조금 전에 뭘 하려고 한 거냐?"

"석상에 검을 꽂으려고 했지. 이 석상이 감춰 둔 아이템이 있거든. 그게 필요해서."

"그 아이템이 뭐냐? 말해라!"

진현우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성기사의 아이템이야. 이 근방에 언데드들이 많으니 챙겨 두면 도움이 될 거 같아서."

"...성기사의 아이템."

마인은 천천히 그 말을 곱씹었다.

그리고 인상을 확 구겼다.

"그게 다냐?"

"...."

마인의 목소리에 짜증이 가득 담겼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심상찮은 실력을 가졌으면서 석상 앞에서 의아한 짓을 하던 놈이다.

그가 찾고 있던 조각과 관련이 있는 놈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어이가 없군. 운이 좋은 줄 알았는데, 흐. 아무래도 좋다. 그럼 네놈은 여기서...."

"그리고 하나 더."

진현우가 씨익 웃었다.

마인은 그 순간 허공을 강타했다. 그러자 주먹 끝에서 쏘아진 충격파가 그를 노렸다.

하지만 그게 진현우에게 닿는 일은 없었다.

- 피유우우!

"큭! 이놈이!"

갑자기 허공에서 튀어나온 매가 진현우를 대신해서 충격파를 막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마인을 덮치는 늑대.

"이딴 동물로 날!"

"막지는 못하겠지. 근데 시간은 벌었잖아?"

석상의 두 손이 마르실의 검을 쥐었다.

쿠우웅! 뭔가가 작동하는 듯한 소리가 났다.

- 화아악!

마르실의 검이 찬란한 빛을 내뿜었다.

그렇게 내뿜어진 빛이 석상에 깃들더니, 석상의 표면에 생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석상이 두 눈을 떴다.

- 내 검을 가지고 온 이름 모를 순례자여.

석상이 입을 열었다.

정확하게는 저 석상 안에 깃들어 있는 영혼의 잔재가 진현우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 자격을 증명....

"지금이 자격을 증명할 때인 거 같아요?"

- ....

하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석상은 마인의 존재를 인지했다. 정확하게는 놈이 가지고 있는 사악한 기운을.

성기사는 용납할 수 없는 기운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 순례자, 그대는....

석상은 진현우를 보면서 말을 삼켰다.

그에게서 더없이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다.

"크아아아! 건방진 놈, 죽여 주마!"

저 너머에서 마인이 돌진해 왔다.

눈으로 인지할 수 없는 속도. 진현우가 반격하려고 했지만, 그보다 먼저 석상이 나섰다.

석상이 두 팔을 앞으로 펼쳤다.

- 콰드드득!

"크윽! 돌덩어리가 날 방해하는 거냐!"

그러자 신성한 빛으로 이루어진 방패가 전개되면서 마인의 돌진을 막아 냈다.

이를 가는 마인. 석상이 입을 열었다.

- 이름 모를 순례자여, 선대의 유산을 찾으러 온 것인가? 그럼 네가 갈 곳은 저곳이다.

"...!"

석상에게서 한 줄기 빛이 흘러나왔다.

빛은 진현우의 주변을 맴돌더니, 그를 안내하려는 것처럼 앞서서 나아가기 시작했다.

'웨펀 마스터의 조각이 마르실의 성소에 있다길래 혹시나 했었는데, 역시.'

뭔가 연관된 것이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걸 궁금해할 때가 아니다.

'일단 조각부터 찾자.'

전투를 시작한 석상과 마인.

둘을 뒤로하고, 진현우는 빛을 따라나섰다.

64화

유수와 해일

석상이 서 있던 곳 뒤에는 벽이 있었다.

주변의 벽과 다를 게 없어 보이는 벽이다. 하지만 빛이 도달하자 벽에 변화가 생겼다.

- 스으으....

마치 아지랑이처럼 벽이 흔들리더니 열쇠를 꽂을 수 있는 홈 같은 것이 생긴 것이다.

뭘 위한 홈인지는 너무도 뻔했다.

- 끼이익, 드르르륵!

진현우는 벤데일 신전의 지하에서 얻은 열쇠를 홈에 꽂았다. 그러자 벽이 열렸다.

그 너머로 넓은 통로가 나타났다.

"기다려라! 네놈, 거긴... 크아악! 망할!"

- 여긴 지나갈 수 없다.

등 뒤로 마인의 노성이 들렸다.

진현우는 놈을 가볍게 무시하고 벽에 들어섰다. 그가 들어오자 다시금 벽이 닫혔다.

그리고 벽을 따라 어두운 통로를 나아갔다.

"여긴 처음 보는 곳인데."

마르실 퀘스트는 몇 번 깨 본 적이 있다.

게임에서 여러 번, 전생에서 한 번. 그 경험 속에서도 이런 전개는 겪어 본 적이 없다.

'퀘스트 내용이 바뀐 건가.'

웨펀 마스터의 직업 퀘스트를 받는 바람에 마르실 퀘스트의 내용이 변한 모양이다.

흔치 않지만 가끔씩 있는 일이다.

- 슈우우.

"여기냐?"

얼마나 걸었을까, 통로의 끝이 보였다.

빛무리가 통로의 끝에 있는 석문에서 맴돌고 있었다. 진현우는 바로 석문을 열었다.

드르륵, 열리는 석문.

"흠, 저건...."

그리 넓지는 않은 방이 보였다.

별다른 인테리어도 없는 삭막한 방. 유일하게 있는 것은 가운데에 있는 제단뿐이었다.

하지만 제단 위에는 아무것도 없다.

'열쇠를 넣을 홈도 안 보이는데.'

진현우를 인도하던 빛도 멈췄다.

살랑거리면서 제단 위를 맴돌고 있을 뿐.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진현우는 뭔가를 떠올렸다.

"이 제단에 아이템을 올려 두면 되는 건가?"

1층에서 웨펀 마스터로 전직했을 때 교관에게 받은 아이템들이 있었다.

웨펀 마스터의 비급과 부서진 검이다.

[웨펀 마스터의 비급 (전설)]

· 설명: 여러 대를 거듭하여 계승되어 온 깨달음이 담겨 있는 책이다. 원래는 웨펀 마스터로 전직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힘을 다했다.

[부서진 검 (일반)]

- 설명: 오래전에 부서진 검.

- 착용 제한: 없음.

- 효과: 없음.

* 사념의 기운이 느껴진다.

비급은 전직용 아이템이라 이제는 쓸모가 없지만, 버릴 수가 없어서 따로 챙겨 뒀다.

진현우는 두 아이템을 제단에 올려 뒀다.

그러자.

- 화아아악!

찬란한 빛이 진현우의 시야를 가득 메웠다.

눈앞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너무 눈부신 나머지 눈을 감으려고 했지만, 바로 그때.

희끄무레한 형상이 보였다.

- 이곳에 재앙이 일어날 거다. 원통하군. 내가 직접 해결하고 싶다만, 시간이 없어.

익숙한 목소리다.

진현우는 그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알아챘다. 일찍이 1층에서 그가 웨펀 마스터로 전직했을 때 봤던 기억에서 들은 목소리.

선대 웨펀 마스터의 목소리다.

- 그래도 이 조각을 여기에 놔둔다면 내 계승자가 찾아오겠지. 어쩌면 그 사람이 저 석상이 아끼던 땅을 구원해 줄지도 모른다.

선대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 물론, 악한 마음을 가져서 자격을 갖추지 못한 자라면 여기로 오지 못하겠지만. 그건 운에 맡기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겠군....

선대는 손을 뻗었다.

그에게서 강렬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 기운은 모조리 제단에 흡수되었다.

- 누군지 모를 계승자여, 부탁한다.

시야를 가득 메웠던 빛이 사라져 간다.

희끄무레한 형상도 점점 흐릿해졌다.

- 이 땅을....

진현우는 눈을 크게 떴다.

시야를 가득 메웠던 빛이 사라지고 제단이 강한 빛을 내뿜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 빛이 두 아이템에 깃들었다.

- 필요한 조건을 모두 충족했습니다. 부서진 검과 웨펀 마스터의 비급이 강화됩니다.

- 화아악!

부서진 검과 비급.

검은 여전히 부서져 있다. 하지만 차이점이 있다면 칼날의 밑동이 생겼다는 점이었다.

[부서진 검 (고급)]

- 설명: 오래전에 부서진 검이다. 조각의 일부를 되찾아 칼날의 밑동을 복구했다.

- 착용 제한: 웨펀 마스터만 착용 가능.

- 효과: 흡마검.

* 흡마검: 마력을 베고 흡수하는, 엄청난 예기를 지닌 검기를 일으킨다. 검기를 일으켰을 때만 웨펀 마스터의 스킬을 쓸 수 있다.

추가된 옵션은 하나뿐이었다.

그런데 그 옵션이 생각보다 매력적이다.

'마력을 베고 흡수할 수 있다고?'

게다가 조건도 없다.

'어떤' 마력이든 베고 흡수할 수 있다. 아무리 위협적인 마법이든, 어떠한 공격도 통하지 않는 방어막이든 이걸로 벨 수 있다는 것이다.

"아쉬운 건 지속 시간이 짧다는 건가."

짧은 시간이라고 적혀 있으면 보통 지속 시간이 몇 분 단위를 넘어서지 못한다.

아마 2, 3분. 길어야 5분일 것이다.

"그리고... 웨펀 마스터의 스킬."

진현우는 침을 꼴깍 삼키며 비급을 쥐었다.

[웨펀 마스터의 비급 (전설)]

· 설명: 여러 대를 거듭하여 계승되어 온 깨달음이 담겨 있는 책이다. 선대 웨펀 마스터의 깨달음 일부가 책에 새로이 기록되었다.

비급의 설명이 바뀐 것이 보였다.

진현우는 책을 펼쳤다. 중간부터 찢어졌던 비급의 몇 장이 새로이 추가되어 있었다.

그렇게 추가된 장을 두 눈에 담는 순간, 그의 머릿속으로 여러 지식이 흘러들어 왔다.

- 웨펀 마스터의 비급을 읽었습니다. 안에 담긴 깨달음이 머릿속에 새겨집니다....

스킬을 익히는 과정이다.

진현우는 머릿속에 강제로 새겨지는 지식들을 기억했다. 그리고 그 과정이 끝났을 때.

- 제1식: 유수, 제2식: 해일을 익혔습니다.

진현우는 스킬을 익히는 데 성공했다.

그는 곧바로 스킬 창을 열었다.

[웨펀 마스터]

· 제1식: 유수 (A, Lv.1): 그 태세는 흐르는 강물과도 같이. 적의 공격을 부드럽게 흘려 내거나, 그대로 상대에게 되돌려 준다.

· 제2식: 해일 (S, Lv.1): 그 위력은 거센 해일과도 같이. 한계치까지 검기를 응축한 후, 검을 휘둘러 수많은 검기를 쏘아 낸다.

'해일'을 본 진현우의 입이 벌어졌다.

"S 등급 스킬이라고?"

이 레벨대에?

지금 진현우는 34레벨이다. 이 레벨대에서는 A 등급 스킬만 있어도 엄청난 기연이다.

근데 A 등급도 아닌 S 등급 스킬이라니.

'이거, 내 마력이 감당할 수 있나?'

불길한 문구가 많았다.

한계치까지 검기를 응축한다는 문구.

'스킬을 쓸 때 마력을 모을 시간이 필요하다는 거고, 마력이 많이 들어간다는 거겠지.'

여러 스킬을 익힌 진현우이기에 잘 알았다.

무엇보다 뇌리에 새겨진 웨펀 마스터의 지식이 이 스킬이 뭔지 자세히 알려 주고 있었다.

"좋아."

진현우는 검을 허리춤에 매달았다.

"한번 시험해 보러 갈까."

밖에서 마인이 기다리고 있다.

* * *

마인.

대적자들이 선택한 존재.

특별한 힘을 받은 이들인 만큼, 그들은 평범한 플레이어와는 궤가 다른 힘을 가졌다.

- 콰아아앙!

- ...!

강렬한 폭음이 공동을 울렸다.

후드득! 돌이 떨어지는 소리. 석상은 절반이 날아가고 없는 자신의 왼팔을 인지했다.

그리고 저 너머의 마인을 응시했다.

- 과연, 괴물 같은 힘을 가졌군.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마인은 평범한 인간과 크게 다를 것 없는 신체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오른 근육, 그 피부를 덮고 있는 두꺼운 갑피, 한층 커진 덩치까지.

- 생김새도 괴물과 다를 게 없구나.

"크흐흐, 돌덩어리 주제에 말이 많군!"

인간이 아니다. 괴물이다.

마인의 특징이다. 평소에는 인간인 것처럼 위장하고 있지만, 대적자들에게 특별한 힘을 받은 그들의 본모습은 괴물로 변이했다.

그리고 그 힘 역시.

- 콰아앙!

- 으음...!

땅을 박차며 돌진하는 마인.

그 신형이 순식간에 석상에게 도달했다. 석상은 방어막을 전개했지만 무의미했다.

"크흐, 크하하하!"

마인이 내지른 주먹질 한 방.

주먹이 방어막과 충돌했고, 엄청난 충격파를 일으키면서 단번에 방어막을 찢어 버렸다.

놈이 두 주먹을 움켜쥐었다.

- 쿠웅! 후드득! 콰아앙!

마인이 일방적으로 석상을 공격했다.

샌드백이라도 패는 것처럼, 놈의 주먹이 어마어마한 속도로 석상의 전신을 파괴했다.

석상이 스킬을 사용할 시간도 없었다.

"느려... 느려 터졌군!"

석상이 검을 힘껏 내질렀다.

마인은 피할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검을 두 손으로 붙잡았다. 그리고, 콰드득!

올려친 무릎으로 검을 두 동강 냈다.

'이 정도로 강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마르실의 영혼의 잔재가 깃든 석상은 결코 약한 존재가 아니다. 단순히 레벨로만 따진다면 50레벨에 준할 정도의 힘을 가졌다.

그럼에도 마인을 막을 수조차 없다.

- 크, 으음!

마인의 주먹은 검게 물들었다.

그 주먹에 깃든 강렬한 마기가 석상의 무릎을 강타했다. 산산이 부서지는 한쪽 무릎.

석상이 천천히 기울어졌다.

'내가 막을 수 없는 존재다.'

석상은 순순히 그 사실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 몸뚱어리를 부숴...!"

- 이미 내 역할은 끝마쳤다.

"뭐라고?"

애초에 막을 필요도 없다.

석상이 할 일은 선대가 남긴 깨달음을 계승하러 온 후계자에게 시간을 벌어 주는 것뿐.

쿠우웅! 쓰러지는 석상.

그 너머에서 걸어오는 이가 있었다.

"하! 거기 있었나!"

진현우였다.

마인의 얼굴에 미소가 만개했다.

"크흐, 네놈은 쓸모가 많아. 목숨은 살려 주마. 그분이 원하실 테니까. 그리고...."

마인이 무릎을 구부렸다.

"네가 찾은 조각을 내놔라!"

그 무릎이 펴졌을 때, 마인이 폭발적으로 가속했다. 눈으로 좇을 수도 없는 속도로.

순식간에 진현우의 코앞까지 도달한 마인이 땅을 짓밟았다. 쿠웅! 갈라지는 땅.

마인의 주먹에 검은 마기가 어렸다.

- 화아아악!

진현우의 얼굴을 향해 쏘아지는 주먹.

일격에 치명상을 입을 정도의 위력이 담긴 공격이다. 하지만 진현우는, 그런 공격이 닥쳐옴에도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부러진 검을 쥔 채 서 있을 뿐.

'하! 죽고 싶어서 환장한 거냐?'

마인이 그렇게 생각한 순간.

부러진 검이 진동했다. 탐욕스럽게 마력을 집어삼키면서 새로운 날을 만들어 냈다.

검기로 이루어진 날을.

그리고 진현우가 검을 치켜세웠다.

'이미 늦었다.'

저놈이 뭘 하든 대응하기에는 늦었다.

주먹이 진현우의 얼굴 코앞까지 들이닥쳤다. 마인은 곧 주먹에 느껴질, 살을 터트리고 뼈를 짓뭉개는 촉감을 기대하며 광소했다.

그리고.

- 퍼어어억!

주먹이 닿았다.

촉감이 느껴졌다. 살을 터트리고 뼈를 짓뭉개는, 아니 '갑피'를 부수는 촉감이.

"커, 헉!"

마인은 고통에 찬 숨을 토해 냈다.

그래, 주먹은 닿았다. 진현우의 얼굴이 아닌, 바로 마인의 얼굴로. 자신이 내지른 주먹이 자신의 얼굴을 짓뭉개고 있었다.

"이, 이게 무슨...!"

마인은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주먹이 진현우의 코앞까지 들이닥쳤었다.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는 타이밍이었다.

그런데 주먹은 명중하지 않았다. 믿을 수 없게도, 마인 본인의 얼굴을 강타하고 말았다.

"무슨 짓을... 한 거냐?"

"네가 알아서 뭐 하게?"

"건방진!"

하지만 치명타는 아니다.

마인은 노성을 터트리면서 두 발을 땅에 고정했다. 그리고 폭풍우 같은 연격을 펼쳤다.

아무런 기교도 없는 연타. 하지만 압도적인 힘이 담겨 있기에 더없이 위력적이다.

- 퍼어억! 콰득! 퍼억!

"크, 학!"

하지만 닿지 않는다.

어떤 공격도 진현우에게 닿지 못했다.

그는 흐르는 강물처럼 평온하게, 신묘한 움직임을 보이면서 주먹을 검으로 흘렸다.

'내 주먹의 궤도를... 틀고 있다.'

주먹이 그리는 궤도를 검으로 틀어 버리고 그 힘을 이용해서 스스로를 공격하게 만든다.

두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묘기.

진현우는 폭풍우처럼 들이닥치는 공격을 모조리 흘려 내고, 마인에게 되돌려 주고 있었다.

"크하악! 헉, 허억!"

결국 뒤로 물러나게 된 것은 마인이었다.

일방적으로 공격을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그 얼굴과 몸뚱어리는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마치 일방적인 공격을 당한 것 같은 꼴.

"이제 끝났냐?"

이제는 진현우가 움직일 때였다.

그에게서 푸른 기운이 쏟아져 나왔다. 엄청난 양의 마력이 빠져나가는 것이 보였다.

위기감을 느낀 마인이 방어 태세를 취했다.

"그리즐리 베어!"

- 쿠어어어엉!

거대한 포효가 공동을 울렸다.

마인의 바로 등 뒤에서 들리는 포효. 그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지만, 한발 늦었다.

"이, 미친...!"

- 쿠오오오!

마인의 덩치를 아득히 넘어서는 거대한 곰이 놈에게 두 앞발을 휘두르고 있었다.

놈은 황급히 방어 태세를 취했다.

'막을 수 있는 공격이다. 하지만, 하지만!'

눈앞의 곰에게 아주 잠깐의 시간이라도 허비하게 되는 이 상황이 너무도 치명적이다.

마인은 고개를 돌렸다.

저 너머, 진현우의 모습이 흐릿해졌다.

'사라졌다. 어디로!'

진현우의 신형이 섬광처럼 사라졌다.

그 신형을 뒤늦게 찾아냈을 때, 진현우는 이미 마인의 바로 앞에 도달해 있는 상태였다.

부러진 검을 오른손에 쥔 채로.

- 우드득!

관절이 비명을 내질렀다.

진현우는 이를 까득 악물면서 상반신을 최대한 비틀었다. 그리고 왼발을 땅에 단단히 고정하면서, 오른팔을 힘껏 뒤로 젖혔다.

- 쉬이이익!

검이 탐욕스레 마력을 흡수했다.

진현우의 몸에 남은 마력을 모조리 빨아들이고, 한계치까지 마력을 응축했다.

이윽고 검이 검기를 한계치까지 응축했고.

"흐으읍!"

"...!"

진현우는 허공을 베었다.

마인은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힘을 한껏 모아서 자신을 공격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베다니.

순간 정적이 흘렀다.

'빗나간 건가? 아니, 이건.'

그런데 그때, 소리가 들렸다.

정적을 깨트리는 거센 해일의 소리가.

마인은 두 눈을 부릅떴다. 진현우가 벤 아무것도 없는 허공이 갈라지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 콰르르르르!

"으...."

수많은 검기가 쏟아졌다.

그것 말고는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검에 한계치까지 응축된 검기는 해방된 순간, 셀 수 없는 참격이 되어 마인을 덮쳤다.

"아아아아악!"

수많은 검기가, 참격이 마인을 베었다.

어떤 공격도 버텨 낼 수 있는 갑피가 쏟아지는 검기를 버티지 못하고 파괴됐다. 갑피가 보호하던 살점이 참격에 무자비하게 베였다.

피가 쏟아지고 비명이 울려 퍼졌다.

- 쿠웅!

모든 소리가 사라지고 이윽고 정적이 찾아왔을 때, 마인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마인이었던 잔해만 찾을 수 있을 뿐.

"후우."

진현우는 길게 숨을 토해 냈다.

동시에 사라지는 부서진 검의 칼날. 그는 경악이 어린 눈빛으로 자신의 검을 바라봤다.

'이게 말이 되나?'

진현우의 머릿속을 차지한 생각이었다.

65화

퀘스트 개방

석상은 일련의 전투를 지켜보고 있었다.

'놀랍군. 저 악마를, 저렇게 쉽게.'

그리고 감탄했다.

석상은 마르실의 영혼 일부가 깃든 존재. 가진 힘도 생전의 마르실에 비하면 부족하다.

그렇다고 그 강함을 무시할 수는 없는 수준인데, 마인에게는 상대조차 되지 못했다.

'시간을 버는 게 고작이었다.'

애초에 그럴 목적이기는 했지만.

석상이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일방적으로 마인에게 밀리고 있는 상황이기도 했다.

그런 마인을, 진현우는 너무도 쉽게 죽였다.

'저게, 그 남자가 원하던 후계자인가.'

석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한편.

'이게 말이 되나?'

진현우는 크게 놀란 상황이었다.

이번에 얻은 웨펀 마스터의 스킬, 해일을 사용하면서 느낀 소감이기도 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뭐 이런 위력이....'

괜히 S 등급이 아니다.

엄청난 숫자의 참격을 쏟아붓는 스킬. 이 레벨에서는 낼 수 없는 위력을 가졌다.

그리고 감당하기 힘든 마력 소비도.

- 마력이 고갈되었습니다. 한계치 이상의 마력을 사용한 부작용으로 일정 시간 능력치가 감소하며, 마력이 재생하지 않습니다.

"마력 소모도 미쳤어."

경고 메시지를 보니 기가 찼다.

진현우가 전생하고 난 뒤에는 본 적이 없는 메시지다. 전사 계통의 클래스임에도 마력이 높아서 저런 메시지를 볼 일도 없었다.

그런데 마력이 고갈되다니.

'마력이 소모될 요소가 너무 많아.'

일단 부서진 검의 옵션, 검기를 발동할 때에도 꽤 많은 양의 마력이 소모된다.

그다음으로 섬광.

'해일은 준비 시간이 길단 말이지.'

한계치까지 검기를 응축한다는 과정이 있기 때문에 준비 시간이 길 수밖에 없다.

그래서 다음에 쓰는 스킬의 시전 속도가 빨라지는 효과를 가진 섬광을 같이 써야 했다.

그 섬광도 마력 소모가 보통이 아니다.

'거기에다가 해일까지 써 버리니까.'

마른걸레라도 쥐어짜는 것처럼 해일이 진현우에게서 남은 마력을 모조리 가져갔다.

스킬 하나를 쓰는 데 3개의 과정이 필요하니 진현우라도 마력이 남아날 리가 만무했다.

'하지만 그만큼 위력은 확실하다.'

마인은 괴물이다.

50레벨에 준하는 석상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가졌다.

놈이 가진 갑피는 또 어떤가? 그 자체가 방어막이며, 웬만한 공격은 무시할 수 있다.

그런 괴물을 일격에 죽인 것이다.

'부서진 검의 옵션 덕분이기도 하겠지.'

엄청난 예기를 가진 검기를 일으키는 옵션.

지속 시간이 굉장히 짧다는 게 유감이었지만, 얼마나 효과적인지는 이번에 잘 체감했다.

진현우는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얻을 만한 스킬이었어."

귀찮음을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진현우는 그리 자평했다.

-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 퀘스트 '성소의 불신자들'을 완수했습니다. 카단에게 보고하여 보상을 받으십시오.

- 퀘스트 '부서진 조각을 찾아-2'를 완수했습니다. 다음 퀘스트를 받기 위해 성장하십시오.

-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대적자에게서 힘을 받은 존재, 마인을 혼자서 처리할 것.

- 보상으로 영웅 등급 칭호 [악을 처단하는 자 (효과: 악마 계통의 적에게 주는 대미지 +5%, 근력 +5)]를 획득했습니다.

메시지를 지운 진현우는 석상을 봤다.

마인과 싸우면서 만신창이가 된 석상. 하지만 눈동자는 여전히 선명하게 그를 응시했다.

- 사악한 자는 죽었나?

"예. 저 상태로 살아 있으면 괴물이죠."

마인은 석상보다 더 만신창이가 됐다.

성한 몸 부위가 없을 정도. 수많은 참격, 해일에 휘말려서 온몸이 난도질된 탓이었다.

- 목숨은 살려 두는 게 낫지 않았겠나?

"왜요, 심문하려고요?"

- 그래. 배후를 알아야 하지 않나.

"글쎄요. 딱히 의미는 없을 거 같은데."

마인은 대적자가 선택한 존재다.

강력한 힘을 줬고, 당연하지만 그 힘은 무상이 아니다. 제약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너한테 힘을 준 대적자가 누구냐고 물어본다고 한들 마인은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

'정확하게는 대답할 수가 없지.'

입이 묶인 상황이니까.

그걸 어떻게 할 방법이 없는 건 아닌데, 당장은 어찌할 방법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대적자와 마인. 같은 걸 노리는 이상, 탑을 오르다 보면 또 마주치게 되겠지.'

당장은 고민해도 해답이 없는 문제.

진현우는 그렇게 생각했다.

- 그렇군. 그럼, 이제 시험을....

"설마 그 상태로 시험하겠다는 건 아니죠?"

- ....

석상이 침묵했다.

마르실의 검과 관련된 퀘스트는 간단하다.

저 석상에게 검을 줘서 깨어나게끔 한 뒤, 시험하겠다고 덤비는 석상을 꺾으면 된다.

문제는 그 석상이 박살이 났다는 것.

- 음. 이 상태로 시험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냥 시험한 걸로 치고 넘어가죠?"

- 그렇다. 그대는 이미 자격을 증명했다. 자격을 증명한 자에게 또 자격을 증명하라고는 할 수 없는 노릇이지. 조금 아쉽기는 하다만.

진현우의 강함은 이미 증명된 셈이다.

석상은 생각보다 융통성이 있었다.

- 가져가라.

"완전히 부서졌는데요."

석상이 마르실의 검을 내밀었다.

진현우가 쥐여 준 검이다. 문제는 마인과의 전투에서 두 동강이 났다는 점이었다.

- 이건 진정한 모습이 아니다. 봐라.

석상은 남은 칼날을 완전히 부쉈다.

그리고 신성력을 끌어올리더니 마르실의 검에 불어넣었다. 그러자 변화가 일어났다.

- 우우웅!

"오오."

손잡이만 남은 마르실의 검에 신성한 빛으로 이루어진 칼날이 새로이 세워졌다.

SF 영화에서 볼 수 있는 레이저 검 같다.

[마르실의 성검 (영웅)]

· 착용 제한: 마르실의 인정을 받은 자.

· 옵션: 생명 존중, 악을 베는 검, 믿음의 힘, 악에게 두려움을.

* 생명 존중: 살아 있는 자를 상대로는 제대로 된 피해를 입힐 수 없다.

* 악을 베는 검: 언데드와 악마 계통의 몬스터에게 35%의 추가 대미지를 입힌다. 유령형 몬스터에게 제대로 된 피해를 입힐 수 있다.

* 믿음의 힘: 신성 계통의 스킬의 대미지가 20% 강화하며 신성력 소모량이 감소한다.

* 악에게 두려움을: 일정 반경에 있는 언데드와 악마 계통의 몬스터를 약화한다.

'성기사면 울면서 쓸 아이템인데.'

유감스럽게도 진현우는 성기사가 아니었다.

하지만 괜찮다.

- 그리고 이것도 가져가라. 힘을 잃었다만, 내가 살아 있을 적에 애용했던 방패다.

석상이 쓸 만한 아이템을 주니까.

그가 준 것은 낡고 부서진 방패였다.

[낡은 방패 (일반)]

- 설명: 원래는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을 것 같지만, 지금은 아무런 힘도 없는 방패다.

- 착용 제한: 없음.

- 효과: 없음.

* 사념의 기운이 느껴진다.

그것도 사념이 깃든 아이템.

진현우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어렸다.

- 신을 믿는 자들에게 물어보면 그 방패를 복원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줄 거다.

원래는 이어지는 연계 퀘스트로 복원해야 하는 아이템이다. 하지만 진현우는 이 아이템을 바로 복원할 방법을 갖고 있었다.

'기억 감정.'

진현우는 방패에 남은 기억을 감정했다.

방패는 생전의 마르실이 쓰던 것이었다. 평생 온 나라를 다니면서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돕던 성기사의 일생이 방패에 담겨 있었다.

'이런 사람한테 남은 한이 뭐가 있을까?'

누군가 본다면 그리 물을 것이다.

하지만 마르실에게는 한이 남아 있었다.

- 폭군을 완전히 봉인할 수 없었다. 언젠가 다시 나타나서 이 땅을 혼란스럽게 하겠지. 놈을 막을 방법이 없다는 것이, 한스럽구나.

과거에 복수를 천명하여 부활했던 폭군.

마르실은 가능한 모든 수단을 써서 폭군을 상대했고, 어떻게든 놈을 막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놈을 처단할 수는 없었다.

- 그 괴물을 없애야만 하는데.

그게 마르실에게 남은 한이었다.

진현우는 두 눈을 떴다.

- ....

"...."

석상이 진현우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저한테 바라는 게 있습니까?"

- 있다. 지금 지상의 상황은 어떻지?

"엉망입니다. 몬스터가 넘쳐 나죠. 이 근방은 언데드들 때문에 아예 몰락한 상황이고요."

-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석상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옛날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 과거에 이 땅을 다스리던 왕이 있었다. 현명하고 선정을 베풀던 왕이었지. 하지만 그 왕은 늙었고,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었다.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 왕은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조금 더 살아남아서 이 땅을 다스리고 싶어 했지. 그래서 접해서는 안 될 금기에 접했다.

석상의 얼굴이 씁쓸함으로 물들었다.

돌로 된 얼굴이기에 표정 변화는 조금도 없었지만, 진현우는 실제로 그리 느꼈다.

- 흑마법과 사령술이었지.

왕은 뛰어난 흑마법사와 사령술사들을 불러서 목숨을 연명할 방법을 구했다.

그건 실제로 효과가 있었다.

다만 문제는.

- 그때부터 왕은 인간이 아니게 됐다. 절반은 인간이지만, 절반은 언데드가 되었지. 그렇게 된 왕은 점점 인간성을 잃어 가기 시작했다.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겠군요."

- 그대의 말이 맞다. 선정을 베풀던 왕은 폭정을 저질렀고, 백성들을 끌고 가서 자신의 목숨을 연장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았지.

그리고 사람들은 폭정을 참지 않았다.

- 반란이 일어났다. 왕이 흑마법과 사령술을 쓴다는 걸 알아챈 성기사와 사제들이 주축이 되어서 일으킨 반란이었지.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결국 반란은 성공했다.

"왕을 죽였습니까?"

- 죽였다. 하지만 왕은 사령으로 남았고, 사령의 힘은 어떻게 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그 당시의 사령을 봉인하는 걸 택했지.

그로부터 긴 시간이 지난 지금.

- 그 봉인이 풀리려고 하고 있다. 내가 살아 있을 적에도 한 번 그랬던 적이 있지. 그때는 내가 목숨을 걸어서 봉인을 연장했었지만.

"이번에는 그렇게 안 되겠군요."

세간에는 마르실이 폭군을 물리쳤다고 알려졌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마르실은 폭군의 부활을 뒤로 미뤘을 뿐.

놈을 물리치지는 못했다.

- 폭군은 부활할 것이다. 이번에는 막을 수 없겠지. 놈은 이 땅의 생명을 모두 죽이려고 할 것이다. 반드시 그놈을 막아야만 한다. 그리한다면 이 땅의 이변도 사라질 것이다.

"몬스터들이 공격해 오는 것 말입니까?"

- 그렇다. 흉폭해진 몬스터들, 계속해서 나타나는 언데드들, 부패해 가는 땅. 그 모든 것이 폭군이 부활하는 것에 영향을 받았으니.

"...."

이 땅에 나타나는 몬스터 웨이브, 언데드.

그런 이변의 원인이 바로 폭군의 부활이다. 놈을 처리한다면 이변을 제거할 수 있을 터.

- '에픽 퀘스트'를 생성하는 데 필요한 모든 조건을 완수하셨습니다.

- '에픽 퀘스트'가 생성됩니다.

- 관련 이벤트의 시간이 단축됩니다.

진현우의 눈앞에 퀘스트 창이 나타났다.

[폭군의 복수.]

· 등급: 에픽 퀘스트.

· 난이도: S.

· 설명: 과거의 폭군이 부활했다. 폭군은 과거 자신이 다스리던 땅을 되찾기 위해서 수도 아빌론을 향해 진군할 것이다. 폭군과 언데드들을 막고 수도 아빌론을 지켜야만 한다.

· 보상: 골드, 경험치, 칭호, 결과에 따른 추가 보상들, 상위 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권한.

에픽 퀘스트.

해당 층의 미래와 큰 관련이 있는 퀘스트이며, 결과에 따라 미래가 바뀌는 퀘스트다.

이 퀘스트는 '유일하며', 오직 한 번의 기회만 주어진다. 실패한다면 영원히 사라진다.

다른 사람이 또 받을 수 없다는 뜻.

'전생에서 프레아 왕국은 완전히 무너졌다.'

에픽 퀘스트는 처참히 실패했었다.

부활한 폭군은 수많은 언데드와 몬스터를 이끌고 아빌론을 덮쳤다. 플레이어들은 폭군을 막지 못했고, 아빌론은 그대로 멸망했다.

'카오틱들이 폭군의 부활을 도왔지.'

놈들은 그 공로를 인정받았고 2층 전체를 자유롭게 쓸 수 있는 권한을 얻었다.

플레이어들은 정확히 반대의 처지였고.

'이번에는....'

그리돼서는 안 된다.

반드시. 그렇기에.

- 에픽 퀘스트를 수락하시겠습니까?

진현우는 퀘스트를 수락했다.

- 에픽 퀘스트를 수락하셨습니다. 2층 전역에 에픽 퀘스트의 존재가 알려집니다.

진현우가 퀘스트를 받은 순간, 2층에서 활동하던 플레이어들은 메시지를 보게 됐다.

에픽 퀘스트가 나타났다는 메시지를.

66화

대륙의 운명

진현우가 에픽 퀘스트를 받은 순간, 2층의 모든 플레이어들에게 메시지가 전해졌다.

- 에픽 퀘스트가 개방되었습니다.

- 세계의 탑 2층, 누구인지 알 수 없는 플레이어가 에픽 퀘스트를 수락했습니다. 그 결과에 따라서 2층의 운명이 바뀔 것입니다.

수도 아빌론.

지금은 몬스터 웨이브가 없는 시기. 플레이어들은 광장을 돌아다니면서 아이템을 거래했고, NPC들을 만나면서 퀘스트를 받고 있었다.

그들의 움직임이 모두 멈췄다.

"어, 오빠. 이거 나만 보이는 거야?"

"아니, 나도 보여. 에픽 퀘스트라는데."

"에픽 퀘스트가... 뭐야?"

2층에서 활동하는 플레이어라도 아직 경험이 부족하고, 지식이 부족한 건 마찬가지.

에픽 퀘스트가 뭔지 모르는 것도 당연했다.

갑자기 나타난 메시지가 뭔지 궁금해진 사람들은 곧 플레이어 커뮤니티로 몰렸다.

- 님들, 에픽 퀘스트가 뭐예요? 아시는 분?

- 성공하면 다 같이 행복해지고 실패하면 다 같이 불행... 아니, X되는 퀘스트요.

- 예? 그게 뭔 말이에요?

이 시기의 플레이어들이 겪은 에픽 퀘스트는 두 번. 아직도 정보가 부족했다.

그래도 이전에 에픽 퀘스트를 겪어 본 이들이 모르는 사람들에게 설명해 줬다.

설명을 들은 이들이 경악했다.

- 아니, 실패하면 진짜 X되는 거네?

- 옛날 사례를 생각해 보면 그렇겠지. 근데 에픽 퀘스트가 나타난 곳이 2층이라고? 이거 몬스터 웨이브랑 관련 있을 거 같은데?

- ㅇㅇ 나도 그렇게 생각함.

플레이어들은 제각기 추측하기 시작했다.

이전에 있던 에픽 퀘스트들도 해당 층에만 있는 특수한 상황과 관련된 것들이 많았다.

2층, 루윈 대륙의 특수한 상황은 몬스터 웨이브. 그와 관련된 퀘스트일 확률이 높다.

- 성공하면 몬스터 웨이브를 아예 없앨 수 있을지도 몰라. 근데 실패하면....

- 이거 프레아 왕국도 망하는 거 아냐?

- 어쩌면 고산지대도.

- ㄷㄷㄷㄷㄷ....

2층에서 활동하는 플레이어들로서는 걱정, 아니 두려울 수밖에 없는 미래였다.

안 그래도 활동하기 힘든 층이다.

그나마 안전지대라고 할 수 있는 고산지대에까지 문제가 생기면 아예 답이 없어진다.

- 에픽 퀘스트 도우면 보상 주지?

- ㅇㅇ 기여도에 따라서 보상 줄걸? 근데 퀘스트 받은 사람이 보상은 제일 많이 받음.

- 그래도 보상 주는 게 어디냐.

- 그건 그래. 저번에 다른 층에서 에픽 퀘스트 깬 플레이어들이 얘기하는 거 들었는데, 참가만 해도 보상 꽤 괜찮게 챙겨 준다더라.

지금까지 나타난 에픽 퀘스트는 극소수.

하지만 하나같이 보상이 좋았다. 퀘스트를 받은 플레이어만이 아니라, 퀘스트를 도운 플레이어들에게도 만족스러운 보상을 줬다.

- 그래도....

- 위험한 퀘스트 아님? 좀 무서운데.

플레이어들은 에픽 퀘스트의 소식을 접했지만, 아직까지는 돕는 걸 망설이는 분위기였다.

에픽 퀘스트가 생겼다는 소식은 플레이어를 넘어서 루윈 대륙의 NPC들에게도 전해졌다.

"...알렉산더 경, 그 말이 사실인가?"

수도 아빌론, 그 중심부에 있는 왕궁.

늘 프레아 왕국과 관련된 얘기가 오는 회의실에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이 대륙의, 운명이 바뀐다고."

황금 기사단의 단장, 알렉산더는 무릎을 굽힌 채 눈앞의 남자에게 예를 갖추고 있었다.

검소한 옷차림을 한 중년의 남성.

그 머리에는 왕관이 씌워져 있었다.

"예, 전하. 여행자들이 그리 말했습니다."

프레아 왕국의 국왕, 발샤스 2세.

그게 검소한 옷차림을 한 남성의 정체였다.

"당황스럽군. 알렉산더 경,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지 구체적으로 듣지는 못한 건가?"

"최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있습니다."

"아직까지는 모른다는 뜻이로군."

발샤스 2세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운명인지는 모르겠으나, 백성이 큰 피해를 입을까 봐 두렵구나. 알렉산더 경, 성의 방어를 조금 더 신경 써 주게."

"그리하겠습니다, 전하."

알렉산더가 깊이 고개를 숙였다.

발샤스 2세는 성군의 자질을 갖춘 왕이었다. 불필요한 사치를 싫어하며 백성들의 고통에 공감할 줄 안다. 하지만, 시기가 안 좋다.

"신께서도 이 대륙을 버리신 모양이로군."

온갖 재앙이 벌어지는 루윈 대륙의 상황은, 발샤스 2세가 감당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왕의 절망을 느낀 알렉산더는 이를 악물었다. 자신의 무력감이 너무도 크게 느껴졌다.

"으, 으으, 으아아악!"

그렇게 플레이어들과 NPC들이 에픽 퀘스트의 존재를 눈치챘을 때.

"그만! 그만해! 제발!"

몰락한 고원.

그 어딘가에 있는 지하 무덤.

살아 있는 자는 누구도 접근하지 않는 금지의 심층부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있었다.

"살려, 살려 줘! 아아악!"

"고통스러워, 아파... 으으으윽!"

추레한 차림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불길한 빛을 내뿜는 마법진 위에 묶인 채로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마법진이 빛을 내뿜을 때마다 그들의 몸이 말라 갔다.

마치 피를 빨리는 것처럼.

- 바쳐라, 너희들의 생명력을.

그리고 그건 사실이었다.

마법진은 그들에게서 생명력을 흡수하고 있었다. 그렇게 흡수한 생명력을, 이 무덤에 봉인된 누군가에게 바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생명력을 바친 이가 쓰러졌다.

"커억...."

- 다른 먹이를 데리고 와라.

"예!"

근처에서 대기하던 흑마법사들이 죽은 제물을 버리고, 새로운 제물을 데리고 왔다.

그 과정이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었다.

- 드디어....

끔찍하기 그지없는 과정.

그걸 광소하면서 지켜보는 이가 있었다.

- 드디어, 내 야망이 이루어진다.

마법진의 생명력이 전해지는 곳.

그곳에 거대한 옥좌가 있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옥좌에 앉은 거구의 괴물이 있었다.

독특한 형상의 괴물이었다. 몸의 절반은 해골, 절반은 썩어 가는 인간의 형상을 한 괴물.

- 나는 다시금 부활하리라. 내가 한때 다스렸던 이 땅을, 다시금 통치하리라.

괴물의 머리에는 왕관이 씌워져 있었다.

먼 과거 루윈 대륙을 다스렸던 왕, 폭군은 자신을 구속하던 봉인이 사라짐을 느꼈다.

그 입가에 짙은 미소가 어렸다.

- 그래.

폭군의 곁에 수하들이 도열했다.

아득히 먼 과거부터 그를 섬겼고, 또 그를 타락시킨 원흉이었던 흑마법사들이었다.

그런 흑마법사들의 뒤에는 폭군이 다스렸던 나라의 기사들과 병사들이 도열해 있었다.

- 나는... 불멸이다.

자신이 다스렸던 나라의 잔해 앞에서.

폭군은 복수를 다짐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