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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184화

대침공이 끝나고

전투가 끝났다.

대적자는 물러났다. 남은 것은 이 세상에 버려진 마인과 카오틱들을 처리하는 것이었다.

"마인들은 죽이고 카오틱들은 포획해라! 심하게 저항하는 놈들은 죽여도 상관없다!"

"저 괴물 놈들은 하나도 살려 두지 마!"

"주, 주인님! 저희를 왜!"

플레이어들은 남은 적들을 처리했다.

애초에 살려 둘 이유가 없다. 저놈들을 살려 두면 결국 탑에서 마주치게 될 테니까.

서울 전역에 피가 흘렀다.

"이 정도면 선방했다고 쳐야 하나."

진현우는 한숨을 내쉬며 주변을 둘러봤다.

몸에서 엄청난 탈력감이 느껴졌다. 아마 신성의 파편에서 신성을 끌어낸 대가일 것이다.

'챙길 건 따로 없군.'

대적자가 사라진 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애초에 본체도 아니고 분신이 강림한 수준이었으니 아이템이 떨어질 이유가 없긴 했다.

그래도 구트만은 드롭한 게 있었다.

[숨겨진 열쇠 (일반)]

· 설명: 특정 장소에서 쓸 수 있는 열쇠다. 사용할 경우 숨겨진 층에 진입할 수 있다.

하나는 열쇠 그리고 또 하나는 구체였다.

뭔지 모를 구체가 있어서 만지려고 하는 순간, 그 구체가 진현우의 몸속으로 흡수되었다.

그리고 메시지가 나타났다.

- 마인의 정수가 당신이 가진 아이템, 흑뢰의 회동 (전설)과 공명합니다....

진현우가 낀 반지가 불길하게 빛났다.

이윽고 반지가 녹아내리듯이 사라졌다.

- 흑뢰의 회동 (전설)을 흡수했습니다.

- 스킬, 흑뢰 (S, Lv.1)가 생성되었습니다. 보유한 마기가 큰 폭으로 상승합니다.

· 흑뢰 (S, Lv.1): 마기로 이루어진 뇌전을 일으킨다. 다양한 방법으로 뇌전을 쓸 수 있으며, 스킬을 강화하는 용도로 쓸 수 있다.

"이건 또 뭐야?"

진현우는 인상을 찌푸렸다.

멋대로 흡수되더니 가진 아이템을 멋대로 흡수하다니. 흑뢰의 회동은 강한 마기 내성과 흑뢰라는 힘을 쓸 수 있게 해 주는 아이템이었다.

'흑뢰를 딱히 쓴 적은 없기는 한데.'

진현우는 시스템창을 껐다.

마기 내성 옵션이 사라진 셈이라서 어찌 보면 손해라고 볼 수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는 이미 충분한 마기를 가졌기에 마기 내성이 크게 필요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뭐, S등급 스킬이 새로 생긴 셈이니까.'

나쁘지 않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열쇠.

"...."

진현우는 열쇠를 아공간에 챙겼다.

이건 조만간 쓸 일이 생길 것이다. 그리고 다음으로 이어질 위업 보상을 확인했다.

대적자와 싸우면서 얻은 보상이었다.

- 위업을 달성했습니다: 강림한 대적자를 상대로 싸우고, 살아남을 것.

- 보상으로 전설 등급 칭호 [대적자의 대적자 (효과: 대적자를 상대할 때 모든 능력치와 대미지 +20%)]를 획득했습니다.

- 위업을 달성한 대가로 특정 스킬들의 숙련도가 큰 폭으로 상승합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진현우는 그의 내면에 잠든, 고갈된 신성의 파편이 한층 성장하는 것을 느꼈다.

파편이 주변의 기운을 흡수하고 있었다.

- 신성의 파편이 주변에 남은 대적자의 기운을 흡수했습니다. 신성이 한 단계 성장합니다.

- 신성의 파편이 한 단계 승급했습니다.

신성의 파편이 B등급이 되었다는 메시지.

뭔가 바뀌거나 추가되지는 않았다. 파편에 깃든 신성의 양이 늘어난 정도에 불과했다.

그걸로 충분했지만.

'신성이라....'

백승현이 준 큐브에 담겨 있던 것.

아마도 자신이 탑 공략에서 하차한 뒤로 상층부를 공략하면서 얻지 않았을까.

'뭐가 됐든, 대적자를 상대하려면 이 신성을 어떻게든 키우는 수밖에 없겠군.'

진현우는 건물의 옥상으로 올라갔다.

전황은 이미 기울었다. 여기서 조금 쉬었다가 간다고 해서 전황이 나빠지진 않을 것이다.

'나름 최선을 다하기는 했는데.'

진현우는 서울의 건물들을 바라봤다.

대적자가 직접 강림했던 광장 인근은 말 그대로 쑥대밭이 됐다. 건물들은 무너졌고, 마인과 카오틱들로 인해 사방이 파괴된 상태.

'복구하려면 시간이 꽤 걸리겠군.'

그만큼 얻은 것도 많았다.

대침공은 대적자도 많은 힘을 소모해야 하는 작업이다. 실패한다면 아무리 대적자라고 한들 큰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다.

그걸 감안하고서라도 플레이어들에게 큰 피해를 입히려고 한 것이었지만 실패했다.

'이 정도 마인과 카오틱이 죽었으면 타격이 클 수밖에 없지. 이걸 잘 이용하면....'

탑을 조금만 더 올라가서 장치를 찾아내면 마인과 카오틱이 쓰는 층으로 갈 수 있다.

지금 놈들은 큰 피해를 입은 상황.

이 기회를 이용해서 놈들을 칠 수만 있다면, 놈들의 본거지를 아예 없애 버릴 수도 있다.

'이 열쇠가 있다면 가능하다.'

구트만을 죽이고 얻은 숨겨진 열쇠.

이게 그 실마리가 될 것이다.

"탑을 빨리 올라가야겠어."

난관이었던 7층 공략이 끝났다.

탑의 특징 중 하나인데, 어려운 층이 끝나면 그 뒤로 몇 층은 꽤 쉽게 올라갈 수가 있다.

상대적으로 난이도가 쉽기 때문이다.

- 캬후후.

"응?"

가만히 주변의 풍경을 둘러보고 있던 진현우의 어깨 위로 작은 덩어리가 올라탔다.

미호였다.

"잘 다녀왔냐? 내가 부탁한 건?"

- 네 말대로였느니라, 인간. 그 기생오라비처럼 생긴 인간이 재밌는 짓을 하더구나.

"보여 줘."

미호가 수정구를 건넸다.

그 수정구를 틀자 영상이 나왔다. 마인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유신의 모습이었다.

먼 곳에서 찍은 영상이지만 선명했다.

"안 들켰냐?"

- 확신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워낙 빠르고 은밀하게 움직여서 쫓아다니기가 쉽지 않았느니라. 가진 능력을 모두 사용해서....

"잘했어."

- 얘기를 끝까지 듣지도 않는구나!

진현우는 수정구를 아공간에 챙겨 뒀다.

- 제일 유명한 플레이어가 마인과 내통하고 있다라. 터트리면 재밌을 것 같구나.

"당장은 안 터트릴 거야."

- 그럼 언제 터트릴 것이냐?

"나중에. 일단 몇 명한테는 보여 주고."

지금은 너무 어수선한 상황이다.

나중에, 가장 필요한 때에 쓸 생각이다. 이 수정구가 유신에게 치명적일 타이밍에.

진현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뒷정리는 도와야지."

- 난 못 쉬었느니라....

마기를 조금이라도 챙겨야 한다.

진현우는 마인 사냥에 나섰다.

* * *

- 7층을 공략한 기념으로 열렸던 광장을 공격한 마인과 카오틱들이 모두 제압됐습니다. 협회 측에서는 인근을 순찰하면서 숨은 적들의 여부를 확인할 예정이라고 밝혔습니다.

- 같은 시기에 미국 역시 마인과 카오틱들의 공격을 받았지만, 미국의 랭커인 데이비드 로버츠의 지휘하에 방어에 성공했다고 합니다.

- 한편, 정부는 피해 규모를 산정....

대침공은 완전히 끝났다.

진현우는 광장 인근에 있는 임시 지휘소에 앉은 채, TV에서 나오는 뉴스를 보고 있었다.

지휘소에는 한창 회의가 진행 중이었다.

"대피소에 있는 사람들은 어쩝니까? 한동안은 거기에 머무르게끔 해야 할 것 같은데요."

"서쪽 빌딩에 숨은 적들을 발견해서 처리했습니다. 인근 지역도 계속 탐색하겠습니다."

"지방에 나타난 몬스터들은 어떻게 됐지?"

"게이트가 나타났었는데 대적자가 사라지면서 함께 없어졌다고 합니다. 먼저 나온 몬스터들은 현지의 플레이어들이 막고 있고요."

진현우는 스크린을 흘깃 봤다.

스크린에 지방의 상황이 나왔다. 대침공을 방어하는 데 성공한 서울의 플레이어들이 전이 마법진으로 지방으로 향하고 있었다.

"큰 피해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거 다행이군. 설마 대적자가 게이트의 원인일 줄이야. 대적자를 제때 막지 못했더라면 전국적으로 큰 피해가 일어났겠어."

"예, 그게...."

한창 회의를 하던 이들이 갑자기 진현우를 바라봤다. 대적자에 대한 얘기가 나와서였다.

- 사람들이 널 쳐다보는구나.

'나도 알아.'

다들 뭔가를 묻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지휘소에 묘한 분위기가 감도는 가운데, 누군가 천막을 열고 진현우에게 다가왔다.

"어디 있나 했더니 여기 있었군요. 아직 확실하지는 않지만, 인명 피해는 크지 않다고 하네요. 특히 민간인들은 더욱 그렇고요."

"그러면 다행이고요."

윤서희였다.

그녀는 진현우에게 커피를 건넸다.

"예. 미리 대비해 뒀으니까요. 재산 피해는 어떻게 할 방법이 없기는 했지만요."

건물과 같은 재산 피해는 컸지만, 인명 피해는 적었다. 윤서희와 임호석, 화련이 사전에 사람들을 대피시킬 준비를 해 뒀기 때문이었다.

그걸 위한 사전 작업이 되어 있었기에 민간인의 피해는 그리 크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윤서희는 주변을 돌아봤다.

강렬한 시선이 느껴졌다. 임시 지휘소에 있는 모든 이가 진현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저러는 건지는 물어볼 것도 없었다.

"...대단한 일을 하셨더군요."

"뭘 말입니까?"

"알면서 모르는 척은."

여기 있는 사람들이 진현우를 쳐다보는 이유라고 해 봤자 하나밖에 없다.

"대적자를 어떻게 상대한 거죠?"

"운이 좋았습니다."

"단순히 운으로 가능한 일입니까?"

윤서희가 실소를 터트렸다.

얘기를 훔쳐 듣던 이들도 못 믿는 눈치였다. 하지만 운이 좋았다는 게 거짓말은 아니었다.

'영약에 그런 효과가 있을 줄 알았나.'

영약과 세계수의 축복이 시너지를 내면서 신성을 끌어낼 방법을 가르쳐 줄 줄이야.

그건 생각도 못 한 행운이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설명하죠."

"기회라... 음, 알겠습니다."

윤서희는 주변 사람들을 흘깃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내통자가 어디에 있을지 모르는 상황이니 최대한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

그녀가 진현우에게 손짓했다.

"잠깐 나가죠."

진현우와 윤서희는 바깥으로 나갔다.

쑥대밭이 된 광장 인근의 풍경이 보였다.

"다른 지역 피해는 어떻습니까?"

"지방 쪽은 아까 들었으니 아실 테고. 서울의 다른 지역은 여기보다는 양호합니다. 미리 준비했고, 방어 시스템도 작동했으니까요."

광장 인근은 대적자가 나타났으니 어쩔 수 없었다. 오히려 대적자가 나타난 것치고는 피해가 굉장히 적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저 너머에서 샬럿과 임호석을 비롯한 플레이어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화련은 방어 시스템을 점검하는 중입니다. 또 공격해 올 가능성도 있으니까요."

"예. 그래서...."

진현우와 윤서희는 사람이 없는 곳으로 향했다. 그녀는 아이템으로 소리를 차단했다.

정적이 주변을 감쌌다.

"협회에서 얘기가 나왔습니다. 진현우, 당신의 랭크를 S등급으로 상향할 거라더군요."

"아직 사태도 안 끝났는데 급하군요."

"다른 적도 아닌 대적자와 싸웠으니까요."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대적자와 싸운 플레이어가 낮은 랭크에 있는 것도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으니까.

S등급은 많은 혜택을 준다. 그 혜택이 지금의 진현우에게 도움이 되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절 부르셨더군요. 그 작은 여우가 조용한 곳으로 부르라고 해서 불렀는데...."

"예."

진현우는 미호를 이용해서 윤서희에게 말을 전했고, 조용한 곳으로 부르게끔 시켰다.

한 가지 알려야 할 게 있기 때문이었다.

"이걸 한번 보시죠."

진현우는 윤서희에게 수정구를 건넸다.

유신과 마인이 함께 있는 모습이 기록된 수정구. 그 내용을 본 윤서희의 얼굴이 굳었다.

"이건...."

"유신과 제우스 길드는 내통자입니다."

진현우는 윤서희에게서 수정구를 받은 뒤, 다시금 아공간 속에 보관했다.

윤서희의 경악한 눈동자가 그를 향했다.

"이놈들을 처리할 수 있겠습니까?"

185화

10층을 향해

수정구의 내용을 본 윤서희는 얼굴에 경악을 가득 담은 채, 오랫동안 침묵했다.

머릿속에 생각이 소용돌이처럼 회전했다.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 없습니까?"

"네?"

"유신과 제우스의 행동 말입니다. 지금까지 플레이어 활동을 하면서, 그 둘의 행동에서 위화감 같은 걸 느낀 적이 있지 않습니까?"

진현우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에 윤서희는 생각에 잠겼다. 당연히 있다.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라 여러 번.

"탑의 공략을 방해한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통제를 가장 먼저 시작했던 것도 유신이었죠. 7층 이후로는 그만뒀지만...."

유신이 내통자라는 것을 전제로 하면, 그가 여태껏 보였던 행동들이 설명이 된다.

특히 7층에서 보였던 의문스러운 행동들이.

제우스 길드의 독단적인 행동 때문에 7층에서 한국의 플레이어들은 단합하지 못했다.

"시간을 끌 생각이었겠군요."

시간을 끈 이유가 뭔지는 말할 것도 없다.

폐허가 된 주변의 풍경만 보아도 유신이 왜 시간을 끌었는지 여실히 알 수 있었으니까.

윤서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자들을 처리할 방법은, 글쎄요."

"떠오르는 게 없습니까?"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일반적인 내통자라면 어려울 게 없다.

상대를 제압할 수 있을 정도의 전력을 데리고 가서 처리하면 될 일이니까. 윤서희를 비롯한 랭커라면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다.

"유신은 랭킹 1위를 오랫동안 차지했던 플레이어입니다. 지금은 그 자리에서 내려오기는 했지만, 자의로 내려온 거나 다름없죠."

하지만 상대는 유신.

일반적인 내통자와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제우스 길드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한민국 최강의 길드... 거기에 엮인 길드가 한둘이 아니고, 여러 산하 길드를 거느리고 있습니다."

"정면 승부로는 방법이 없겠군요."

"예. 저희 전력이 유신 측보다 우위에 있다면 모를까, 전력이 압도적으로 열세니까요."

그렇게 말한 윤서희가 진현우를 주시했다.

"물론 대적자와 상대한 플레이어가 여기 있으니까, 당신이 그때처럼 활약한다면...."

"힘들 겁니다."

진현우는 확신을 갖고 단언했다.

말을 꺼낸 윤서희가 살짝 당황할 정도였다.

"강림한 대적자를 막은 건 맞는데, 그건 제 능력이 그쪽으로 특화되어서 가능했던 겁니다. 같은 인간 상대로는 쉽지 않을 겁니다."

"대적자나 마인에게 특화된 능력이겠군요."

"예."

윤서희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얘기는 더 까다로워진다.

"싸우지 못할 건 없습니다. 협회나 여러 길드와 연합해서 싸운다면 가능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엄청난 피해가 뒤따를 겁니다."

윤서희는 주변을 돌아봤다.

폐허가 된 광경이 보였다. 안 그래도 큰 피해를 입은 상황. 복구하지 못할 건 없지만, 여기서 더 큰 피해를 입는 건 막아야 한다.

"지구에서 싸웠다가는 걷잡을 수 없는 피해를 볼 겁니다. 그건 피하고 싶군요."

"그러면 탑에서 처리해야겠군요."

"예. 가능하면 탑에서, 유신과 제우스 길드의 전력이 제한된 상황에서 싸워야 할 겁니다. 그런 환경을 조성할 수 있느냐가 문제지만."

"흠...."

진현우는 생각에 잠겼다.

탑에서 처리할 방법. 가능하면 유신과 제우스 길드를 안심시킨 상황에서 처리해야 한다.

'놈들이 우리를 함정에 빠트렸다고 생각하지만, 역으로 함정에 빠진 상황이 베스트지.'

방법이 떠오를 것 같기도 했다.

진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우리가 놈들이 내통자라는 걸 알고 있다는 걸 들키면 안 됩니다. 이 정보는 그쪽하고 저만 알고 있는 걸로 하죠."

"그러죠. 유신은 평소처럼 대하겠습니다."

"예. 그리고...."

진현우는 등을 돌렸다.

"조만간 유신을 칠 기회가 생길 겁니다. 그때를 대비해서 최대한 준비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당장은 놈을 칠 기회가 없다.

그렇다면 기회를 만들면 될 일.

'대전쟁을 막으려면 그렇게 해야 한다.'

진현우는 각오를 다졌다.

* * *

대침공은 끝났다.

네메시스를 비롯한 몇몇 길드들은 한국에 남아서 대침공의 피해를 복구하기로 했다.

광장 인근의 피해는 컸으나 인명 피해는 극히 적었다. 세간에서 기적이라고 부를 정도.

- 콜록! 이쪽은 큰 어려움 없이 방어했습니다. 그쪽과는 달리 대적자도 없었으니까요.

미국은 오히려 한국보다 상황이 좋았다.

데이비드와 그의 길드가 미국에서 큰 권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대침공을 방어할 준비를 은밀하게 끝마칠 수가 있었다.

- 당신에게 큰 도움을 받았다고 해야겠군요. 이쪽의 도움이 필요하면 말하십시오.

데이비드가 통화가 끊기기 전에 한 말이었다. 언젠가는 도움받을 일이 있을 것이다.

진현우의 어깨 위에 올라탄 채 대화를 훔쳐 듣던 미호가 불쑥 입을 열었다.

- 안 받아도 되는 것이냐?

"뭘 받아."

- 상 말이다. 그 인간들이 주려고 했던 거.

협회나 정부에서는 이번 일에 큰 공헌을 한 이들에게 큰 포상을 내리겠다고 했다.

훈장을 준다고 했던가.

"그게 밥 먹여 주냐?"

- 쿠후후, 그것도 그렇구나.

진현우에게는 딱히 필요 없는 것들이었다.

첫 번째 대침공을 막아 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전생에서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대침공을 겪어야 했고, 피해가 엄청났었으니.

이번 생에는 첫 시작점부터 달라졌다.

'그래도 이걸로는 부족하지.'

진현우는 대적자의 모습을 떠올렸다.

멸망의 목도자. 놈은 이번 대침공에서 많은 마인과 카오틱을 동원했고, 대거 잃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 검이 가진 효과를 생각한다면....'

부서진 검.

이 검은 대적자에게 피해를 입힐 수 있다.

실제로 이 검에 찔렸을 때, 대적자가 크게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봤다. 그걸 감안한다면 아마 놈의 본체에도 적잖은 피해가 갔을 터.

'쐐기를 박으려면 지금이 기회다.'

대적자도 본인이 입은 피해를 추스르기 위해서 부하들에게는 큰 신경을 못 쓸 터.

이 기회를 노려서 마인과 카오틱의 본진을 쳐야 한다. 다행히, 그럴 방법도 있었다.

[숨겨진 열쇠 (일반)]

· 설명: 특정 장소에서 쓸 수 있는 열쇠다. 사용할 경우 숨겨진 층에 진입할 수 있다.

구트만을 통해서 얻은 아이템이다.

자신의 기억이 맞는다면 이건 10층에 있는 미궁에서 쓸 수 있을 것이다. 거기서 사용해서 숨겨진 층으로 가는 길을 개척할 수 있다.

'마인, 카오틱.'

둘 다 지금 기세를 꺾어 둬야 한다.

방치했다가는 앞으로 더 귀찮아질 테니까.

"슬슬...."

진현우는 고개를 들었다.

그 시선이 향하는 곳은 탑이 있을 방향. 보이지는 않지만, 저 방향에 탑이 서 있다.

"탑을 공략해야겠군."

멈췄던 탑 공략을 재개할 때가 됐다.

* * *

탑 7층의 공략은 끝났다.

플레이어들은 오랫동안 7층을 공략하지 못하고 묶여 있었다. 그렇기에 8층을 공략하려는 플레이어들은 온갖 걱정을 안고 있었다.

"8층이 7층보다 더 어려우면 어떡하냐?"

"하, 먼저 들어갈 엄두가 안 나는데...."

"그것보다 다른 랭커들이 들어가는 걸 기다렸다가 상황을 본 다음에 들어가는 게 어때?"

플레이어들의 주 여론은 그러했다.

그래서 8층이 열렸음에도 섣불리 들어가지 않고 상황을 두고 보자는 여론이 강했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공략할 수 없는 층에 갇혀서 꼼짝없이 죽게 될 수도 있으니까.

"최대한 조심하는 게 좋지."

그게 플레이어들의 판단이었다.

당연히 틀린 판단은 아니었다. 8, 9층이 그들이 생각한 것처럼 어려웠다면 말이다.

'그렇게 어려운 층이 아니란 말이지.'

8, 9층은 연계된 층이다.

한 층을 공략하면 곧바로 다음 층으로 강제로 올라가서 공략하게 되는 그런 구조.

각 층이 주는 시련의 내용은 간단했다.

- 정해진 숫자만큼의 몬스터를 처리할 것.

- 나타난 보스 몬스터를 처리할 것.

나오는 몬스터의 수준을 생각하면 난이도가 아예 쉬운 건 아니지만, 그래도 약하다.

7층에 비하면 하품이 나올 정도였다.

"오늘 하루면 공략할 수 있을 겁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그럼, 거짓말을 뭐 하러 해?"

진현우는 몇몇 플레이어들을 데리고 선발대로서 8, 9층을 먼저 공략하기로 했다.

그들이 공략하면서 얻은 정보들이 기록으로 남아서 후발대의 공략을 도울 것이다.

- 8층: 맹목의 숲에 진입합니다.

- 이 숲에는 보이지 않는 몬스터가 다수 숨어 있습니다. 그 몬스터들을 제거하십시오.

8층은 지독히도 어두운 숲에 숨은 몬스터들을 찾아내서 일정 숫자만큼 죽이는 것이었다.

"라이트!"

- 신성한 빛이 지독한 어둠에 삼켜집니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이 숲에서는 빛이 굉장히 약해진다는 것. 스킬을 쓰든, 횃불을 쓰든 일정 반경 이상은 빛을 밝힐 수가 없었다.

이런 환경에서 숨어 있는 몬스터들을 찾아내서 처리해야 하니 다소 귀찮은 편이었지만.

"셰이드."

- 시이이이....

진현우에게는 큰 의미가 없었다.

상위 어둠의 정령, 셰이드. 거대한 어둠이 진현우의 그림자에서부터 솟구쳤다.

- 키히이익?!

- 캬아악!

셰이드에게서 검은 가시가 수없이 쏟아져 나왔다. 그 가시들이 사방으로 뻗었고, 어둠 속에 숨어 있던 몬스터들을 꿰뚫었다.

이 과정을 반복하기만 하면 된다.

"이 몬스터들, 안 위험합니까?"

"위험하지는 않아요. 숨는 것에만 특화된 놈들이니까, 찾기만 하면 처리하는 건 쉽죠."

8층이 쉬운 이유였다.

그렇게 일행과 함께 몬스터들을 얼마나 처리했을까. 모두의 눈앞에 메시지가 나타났다.

- 충분한 숫자의 몬스터를 처리했습니다.

- 숲의 심층부로 가십시오.

숲의 심층부로 가라는 메시지였다.

일행이 서로 눈치를 보는 사이, 진현우는 가장 먼저 앞장서서 숲의 심층부로 향했다.

심층부에 있는 것은 거대한 늪이었다.

"늪? 이건 또 뭐야?"

"잠깐만요. 진현우 씨!"

진현우는 늪에 발을 내디뎠다.

그러자 강한 힘이 그를 빨아들이더니 순식간에 삼켜 버렸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모두가 당황하는 사이, 늪이 다시금 솟구쳤다.

"어? 어어?"

"우아아아악!"

그 늪이 일행을 모조리 삼켜 버렸다.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감각. 뭔가 포탈을 이용하는 것과 비슷한 감각이었다.

그리고 그 감각이 끝났을 때.

"으, 으으... 여긴 또 어디야?"

"저, 저거! 저거 보세요!"

일행은 깊은 동굴에 도착해 있었다.

바닥과 천장이 모두 늪으로 되어 있는, 기괴하면서도 신기한 동굴이었다. 그리고 그 동굴의 한가운데에 흉측한 괴물이 서 있었다.

"나 저거 어디서 본 거 같은데."

"그렇죠? 저도 어릴 때 만화에서...."

"지금이 그런 얘기를 할 때입니까?"

온몸이 끈적한 액체로 된 괴물.

닿는 것들을 모조리 삼켜 버리는, '늪지 괴물'이라는 이름을 가진 보스 몬스터였다.

- 9층: 늪지대 동굴로 진입합니다.

- 보스 몬스터를 처리하십시오.

모두의 눈앞에 메시지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 순간, 멍청하게 서 있던 늪지 괴물의 얼굴에 붉은 눈동자 같은 게 나타났다.

놈이 플레이어들을 인식했다.

- 쿠오오오오오!

"우, 우아악!"

늪지 괴물이 토해 낸 포효가 동굴을 울렸다.

몸이 저절로 떨릴 정도로 강한 포효였다.

"저, 저거! 저거 어떻게 합니까!"

"당황하지 말고 침착하세요."

"아니, 이걸 어떻게 침착하게...!"

늪지 괴물은 나름 쉬운 보스 몬스터다.

확실한 약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진현우는 함께 온 플레이어들을 바라봤다. 정확히는 그 사이에 있는 붉은 머리의 여성을.

"화련."

- 화르르륵!

화련이 대답 대신 불길을 일으켰다.

그 불길을 본 늪지 괴물이 움찔거렸다. 마치 다가가서는 안 될 것을 목격한 것처럼.

진현우가 씨익 웃었다.

"태워 죽여."

- 키아아아아아아!

동굴을 가득 뒤덮는 불길.

늪지 괴물의 처절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186화

영원의 미궁 (1)

약점이 있는 몬스터는 상대하기 쉽다.

그것도 확실한 약점이 있는 놈이라면.

- 화르르륵!

- 키아아아아악!

거센 불길이 늪지 괴물을 덮쳤다.

놈의 몸에는 수많은 식물이 얽혀 있었는데, 그것들이 일종의 갑옷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 식물들이 단번에 불탔다.

"펜리스!"

늪지 괴물의 몸체가 드러났다.

진흙으로 이루어진 몸. 진현우의 등 뒤에서 나타난 마법진이 사나운 눈보라를 뿜어냈다.

눈보라가 늪지 괴물의 몸을 얼렸다.

진현우는 땅을 박찼다.

- 쿠아아악!

늪지 괴물이 그나마 얼어붙지 않은 진흙을 쏘아 냈다. 저 진흙은 평범한 진흙이 아니다.

닿는 것들을 녹이는 산성을 가진 진흙.

하지만 무의미했다.

- ...!

진현우의 신형이 순간 사라졌다.

공간 도약. 순식간에 늪지 괴물의 코앞에 도달한 진현우는 검을 쥔 팔을 힘껏 젖혔다.

그의 두 눈이 늪지 괴물의 몸을 훑었다.

놈이 가진 약점이 보였다.

- 푸우욱!

보이지 않는 검이 늪지 괴물을 꿰뚫었다.

그 순간 스사노오에 깃든 바람이 해방되었다. 거세게 날뛰는 바람이 사방을 할퀴면서, 늪지 괴물의 몸을 구성하는 진흙을 파헤쳤다.

얼어붙은 진흙이 처참하게 파괴되었다.

'저게 핵인가.'

그 안에 감춰진 핵이 보였다.

늪지 괴물의 몸체를 구성하는 핵. 진현우는 망설임 없이 핵을 찔러서 파괴했다.

그러자 놈이 맥 빠지는 소리를 내뱉더니, 거대한 늪지 괴물의 몸체가 붕괴하기 시작했다.

- 콰르르르!

그걸로 끝이었다.

보스 공략이 너무 쉽게 끝나자, 함께 왔던 플레이어들이 당황한 눈으로 진현우를 봤다.

완전히 무너진 늪지 괴물의 사체도.

"...진짜로 하루 만에 끝났네?"

샬럿이 황당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다른 플레이어들도 마찬가지였다. 후방에서 수정구로 늪지 괴물과의 전투를 기록하고 있던 플레이어는 수정구를 되돌려 보고 있었다.

진현우는 검에 묻은 잔해를 털어 냈다.

- 으음, 이놈은 정기가 없구나.

미호가 어깨 위에서 투덜거렸다.

진현우는 바닥에 널브러진 아이템들을 봤다. 늪지 괴물이 드롭한 아이템들이었는데, 그에게 필요할 만한 물건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팔면 돈은 될 것이다.

"팔아서 적당하게 나눠 주세요."

"아, 예. 알겠습니다."

진현우는 아이템을 처분해서 적당히 나누기로 했다. 나 혼자서 처리한 거나 다름없으니 독점하겠다고 말할 수도 있기야 하지만.

'이런 걸로 이미지 깎아 먹을 이유도 없지.'

어차피 진짜 보상은 곧 나온다.

진현우는 눈앞에 나타난 메시지들을 봤다.

- 축하드립니다. 8, 9층을 최단 시간에 공략했습니다. 당신의 기록이 새겨집니다.

-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8, 9층을 최단 시간에 기록하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할 것.

- 보상으로 영웅 등급 칭호 [스피드 러너 (효과: 모든 능력치 +10, 신체 속도가 +10% 상승합니다.)]를 획득했습니다.

- 보상으로 '늪지대의 상자'가 주어집니다.

자그마한 상자가 나타났다.

끈적한 진흙으로 만들어진 상자였다. 더 고민할 것도 없이 바로 상자를 개봉했다.

안에는 엄청난 양의 골드 그리고 여러 가지 재료와 자그마한 정수가 들어 있었다.

[늪지대의 정수 (영웅)]

- 설명: 늪지대의 정수가 담긴 결정체. 그 자체로는 별다른 효과가 없다. 하지만 아이템을 제작할 때 사용할 경우, 제작에 사용된 재료 아이템들의 효과를 크게 강화한다.

아이템을 본 진현우는 생각에 잠겼다.

이걸 어떻게 쓸 것인가.

'다음 층을 대비하는 용도로 쓸까.'

안 그래도 다음 층을 공략하려면 아이템 하나를 만들 필요가 있다. 그 아이템을 만들 때 쓰면 큰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진현우는 정수를 챙겼다.

- 9층, 늪지대 동굴을 공략했습니다. 연계된 사냥터와 던전들이 개방됩니다.

남은 메시지는 이게 끝이었다.

일찍이 공략했던 신들의 투기장과 비슷한 케이스였다. 층을 공략하는 데 성공하면 레벨을 올릴 수 있는 사냥터가 개방되는 형식.

- 10층: 영원의 미궁.

- 입장 가능 레벨: Lv.150~Lv.160.

10층으로 가기 위해서는 레벨을 150까지 올릴 필요가 있다. 진현우는 때마침 열린 사냥터를 이용해서 레벨을 올리기로 했다.

주변을 둘러보던 그는 일행을 찾았다.

"화련, 샬럿. 사냥이나 좀 하죠."

"사냥? 흠, 나쁠 건 없지. 좋아."

"어? 난 안 하고 싶...."

화련은 흔쾌히 수락했지만 샬럿은 달랐다.

일찍이 겪었던 기억이 있기에 진현우와 함께 사냥하는 것을 노골적으로 꺼렸다.

하지만 그걸 신경 쓸 진현우가 아니었다.

"그럼 해산합시다! 돌아갈 사람은 돌아가고, 남을 사람들은 알아서 행동하는 걸로!"

"아니, 나는 싫...."

9층 공략이 끝났음을 알리는 말이었다.

* * *

[진현우]

· 레벨: 150

· 클래스: 웨펀 마스터

· 칭호: 차원의 수호자

· 근력: 468 (+40) · 민첩: 387 (+40)

· 체력: 389 (+45) · 마력: 288 (+32)

· 마기: 205

진현우는 일주일 동안 9층의 던전과 사냥터들을 돌아다니면서 레벨을 올렸다.

빠르게 올렸지만, 그래도 이전과 비교하면 널널한 페이스로 사냥한 편이었다.

'굳이 빠르게 올릴 필요가 없으니까.'

그 이유는 간단했다.

- 10층: 영원의 미궁 공략에 필요한 인원수가 아직 모이지 않았습니다.

- 현재 대기 중인 인원수: 1명.

10층이 혼자서 진입할 수 없는 층이니까.

필요한 숫자의 플레이어가 모여야지만 입장할 수 있는 곳. 그렇기 때문에 다른 플레이어들이 10층에 도달할 때까지 기다려야만 한다.

강행군으로 사냥할 이유가 없었다.

"뭐야. 이 계집애가 힘들 거라면서 엄청 겁을 주더니, 생각보다 널널하잖아?"

"아, 아니. 저번에는 진짜로...."

"엄살이 심한 애네."

"나 억울해!"

화련에게 온갖 엄살을 부렸던 샬럿이 분통을 터트렸지만, 들어 주는 이는 없었다.

일행은 한국으로 귀환했다.

- 인간, 인간. 이제 한동안 쉬는 것이냐?

"그래야겠지. 딱히 할 게 없으니까."

그나마 할 게 있다면 8, 9층을 어떻게 공략했는지 그 내용을 협회에 보고하는 것 정도.

진현우는 협회에 낼 보고서를 작성하면서, 10층 공략에 필요한 아이템을 하나 찾았다.

"어디, 거래소가...."

오랜만에 거래소를 켰다.

온갖 아이템이 올라와 있는 거래소. 진현우는 그중에서 원하는 아이템을 찾았다.

- '꿰뚫는 자의 모노클' 제조법 (영웅): 1,000,000G.

모노클, 외눈 안경.

소모품 아이템이다. 그걸 감안하면 몹시 비싼 편이었지만, 진현우와는 상관 없었다.

어차피 남아도는 게 골드였으니까.

- '꿰뚫는 자의 모노클' 제조법을 구매했습니다.

- 1,000,000G를 지불했습니다.

허공에서 스크롤이 떨어졌다.

꿰뚫는 자의 모노클을 제작하는 법이 적힌 제조법이었다. 진현우는 그걸 챙긴 다음, 명장 강대훈을 통해서 네메시스에게 의뢰했다.

"희한한 아이템을 다 만드는군."

제조법을 본 강대훈은 신기해하면서도 금방 아이템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재료를 보며 아까워했다.

"이런 귀한 재료를 여기에...."

"아끼지 말고 그냥 써 주세요."

"아까운 줄을 모르는 놈이군. 쯧쯧."

강대훈은 늪지대의 정수를 아까워했다.

영웅 등급의 재료 아이템이지만, 특수한 효과 덕분에 큰 가치를 가진 재료기 때문이었다.

판다면 큰돈을 받을 수 있을 정도.

"이걸 일회용 아이템에 쓸 줄이야."

그러니 아까울 수밖에 없었다.

꿰뚫는 자의 모노클은 만드는 데 긴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불과 몇 시간 만에 완성된 모노클이 진현우의 앞에 나타났다.

[진실을 꿰뚫는 모노클 (영웅)]

· 설명: 숨겨진 것들을 꿰뚫고 진실을 바라볼 수 있는 모노클이다. 늪지대의 정수를 재료로 사용하여 가진 효과가 더욱 강화되었다.

사용할 경우 24시간 뒤에 사라진다.

· 착용 제한: 없음.

간단한 설명을 가진 아이템이었다.

강대훈이 늪지대의 정수를 아까워할 만도 했다. 다른 장비 아이템을 만드는 데 썼으면 이것보다 더 좋은 것들이 나왔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 진현우에게 필요한 건 그런 아이템이 아니라 이 모노클이었다.

"잘 쓰겠습니다."

"다음에는 망치를 두드릴 맛이 있는 것들을 가져와라. 제대로 된 장비 같은 것 말이야."

"가능하면요."

진현우는 모노클을 챙겼다.

'10층에서 길을 찾으려면 이게 필요하다.'

진실을 꿰뚫는 모노클을 만든 이유였다.

진현우가 가지고 있는 열쇠, 이 모노클을 이용하면 10층에서 숨겨진 길을 찾을 수 있다.

그걸 위해서라도 이걸 만들어야만 했다.

"남은 건 기다리는 것밖에 없나."

플레이어들이 10층에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진현우는 그동안 할 일을 하기로 했다.

* * *

그로부터 보름 뒤.

복구 작업을 도우면서 지내던 진현우의 눈앞에 보름 동안 기다렸던 메시지가 나타났다.

- 10층: 영원의 미궁 공략에 필요한 인원수가 모두 충족되었습니다.

- 24시간 내에 탑으로 진입하지 않을 경우, 다른 인원으로 대체됩니다.

10층 공략에 필요한 인원이 다 충족됐다는 메시지. 아마 그중에는 샬럿 같은 진현우가 아는 사람도 몇 명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진현우는 곧바로 탑으로 향했다.

- 바로 탑으로 가는 것이냐? 바쁘게도 움직이는구나. 나는 더 쉬고 싶느니라....

"그냥 평생 쉬지 그러냐?"

- 흠, 그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구나.

어깨 위의 미호가 투덜거렸다.

그 투덜거림을 무시하면서, 탑의 입구에 세워진 침식도를 알려 주는 표지판을 봤다.

- 현재 침식도: 37%.

두 개의 층을 한 번에 공략한 덕분에 침식도가 크게 떨어진 것이 보였다.

탑의 공략은 전생부터 이런 식이었다.

특정 층에서 막히면서 공략이 지지부진해지다가 침식도가 쌓이고, 그 층을 뚫으면 쉬운 층들이 이어져서 침식도를 떨어트리는 구조.

'10층에서 꽤 시간을 잡아먹었던가.'

전생에서 아마 그랬을 것이다.

쉽게 공략할 수 있었던 8, 9층과는 다르게 10층은 귀찮은 기믹이 있는 곳이어서였다.

'이번에는 빠르게 끝내야겠지.'

진현우는 탑의 문에 발을 내디뎠다.

- 세계의 탑에 방문한 것을 환영합니다.

- 현재 탑은 10층까지 개방되었습니다. 당신이 방문할 수 있는 층은 10층까지입니다.

- 10층으로 입장하시겠습니까?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

진현우는 탑에 진입했다.

- 10층, '영원의 미궁'으로 향합니다.

- 입장 가능 레벨: Lv.150~Lv.160.

- '영원의 미궁'으로 진입합니다.

시야가 새하얗게 물들었다.

* * *

눈을 떴다.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백색의 넓은 공간. 그리고 40명 남짓의 플레이어였다.

그중에 몇 명 익숙한 사람이 보였다.

그들과 가볍게 눈인사를 나누고 있으려니, 허공에서 이제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 10층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 해당 층의 이름은 영원의 미궁. 여러분은 각자 흩어진 채로 미궁의 각 포인트로 소환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앞을 가로막는 난관을 헤치고 영원의 미궁을 통과하십시오.

- 여러분의 건투를 빕니다.

10층의 기믹은 간단한 편이었다.

미궁을 통과하면 그걸로 끝. 미궁의 끝에 도달하면 다음 층으로 올라갈 권한을 얻는다.

지극히 간단한 기믹이었다.

'난이도는 그렇지 않은 게 문제지만.'

10층은 말 그대로 미궁이다.

다양한 형태의 통로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위치를 잘못 들면 함정에 당하게 된다.

거기에다가 길을 찾기 힘들게끔 만드는 온갖 장치가 미궁 곳곳에 설치되어 있다.

'가장 큰 문제는....'

미궁에 '괴물'이 있다는 것.

10층, 영원의 미궁을 지배하는 괴물. 놈이 플레이어들이 미궁을 통과하는 걸 막는다.

전생에 그놈 때문에 꽤 고생을 했었다.

정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는 다를 거다.'

진현우는 진실을 꿰뚫는 모노클을 만지작거리면서, 층이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187화

영원의 미궁 (2)

시간이 됐다.

새하얀 방에 모여 있던 이들의 시야가 새까매졌다. 어두워진 시야가 원래대로 돌아왔을 때, 플레이어들은 낯선 곳에 도달해 있었다.

"음...."

신비로운 색깔의 방이었다.

푸르면서도, 기이하게 빛나는 광석으로 만들어진 벽과 천장. 바닥도 마찬가지였다.

- 이상한 문양이 새겨져 있구나.

천장과 벽 그리고 바닥에는 뭐라 형언하기 힘든 형태의 문양이 가득 새겨져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아플 정도였다.

그리고 방의 너머로 어디까지 이어지는지 모를 통로가 펼쳐져 있는 것이 보였다.

- 혼자구나. 다른 사람은 없는 것 같느니라.

"그렇겠지."

방에 있는 건 진현우 혼자였다.

영원의 미궁은 넓다. 다른 플레이어들은 각자 다른 방에 소환됐을 것이다. 운이 좋으면 만날 수 있을 거고, 운이 없으면 못 만나겠지.

그래도 찾아야 할 사람들이 있다.

"일단... 움직여 볼까."

진현우는 방을 벗어나 통로를 걸었다.

일직선으로 쭉 이어진 통로. 어느 정도 걷자 통로가 곡선으로 휘었고, 거기서 조금 더 걷자 여러 개의 갈림길이 갑자기 튀어나왔다.

- 으아아아악!

- 오, 오지 마! 아무나! 도와주세요!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비명이 들렸다.

누군가와 싸우고 있는 듯한 소리도 역시도. 다급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미궁을 울렸다.

듣는 이의 마음이 절로 조급해질 정도였다.

- 길이 많구나.

"흠, 이쪽으로 가 볼까?"

진현우는 갈림길 중에 하나를 택했다.

오른쪽에 있는 갈림길. 별다른 정보나 확신이 있어서 선택한 건 아니었다. 그냥 말 그대로 저기가 마음에 들었기에 선택한 길이었다.

다시금 끝없는 통로가 이어졌다.

- 인간, 네가 만든 그 물건은 왜 안 쓰는 것이냐? 기껏 비싼 돈을 주고 만들어 놓고는.

"여기 주인 얼굴은 보고 쓰려고."

- 안 써도 볼 수 있는 것이냐?

"그쪽에서 찾아올 거야."

진현우는 아무 생각 없이 미궁을 걸었다.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여긴 길이 없어."

10층의 이름은 '영원의 미궁'.

괜히 그런 이름이 붙은 게 아니다. 이 미궁에서 길을 찾으려고 하는 행위는 무의미하다.

여기는 길을 '만들어 내야' 하는 곳이다.

- 덜컹!

통로를 얼마나 걸었을까.

장치가 작동하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 인간!

"나도 알아."

진현우가 서 있던 바닥이 갑자기 투명해지더니 그 아래에서 수많은 가시가 솟구쳤다.

그리고 그걸 피한 순간, 진현우의 머리 위에 있는 천장에서 그림자가 흘러내렸다.

- 키아아아악!

- 카아앙!

그림자가 쥔 검이 진현우를 덮쳤다.

맞부딪치는 칼날. 곧바로 반격하려고 했지만, 그림자는 천장 속으로 사라지고 없었다.

진현우는 혀를 찼다.

"재빠른 놈이군."

그 뒤로도 그림자의 공격은 계속됐다.

천장과 벽 그리고 땅에서 기습적으로 공격하면서 진현우의 신경을 분산시키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 쿵! 쿵! 쿠웅!

"아까부터 더럽게 거슬리네."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북을 치는 것 같은 소리. 그리 크지는 않은데 머릿속을 계속 울려서 거슬리는 소리였다.

머리가 파헤쳐지는 느낌이랄까. 귀를 움찔거리면서 소리를 듣고 있던 미호가 비웃었다.

- 누군지는 몰라도 재밌는 짓을 하는구나. 이 미궁의 형태 그리고 저 소리까지....

미호는 던전을 만들었던 적이 있다.

숲을 찾아오는 자를 현혹해서 잡아먹기 위한 던전. 그걸 만들었던 적이 있는 요물이었기에, 이 미궁이 어떤 곳인지 잘 알았다.

- 이 미궁은 사람을 홀리기 위한 곳이니라. 내가 보기에는 이 벽도 굉장히 수상쩍구나.

미호가 그렇게 말한 순간, 이상한 현상이 벌어졌다. 진현우의 앞에 펼쳐진 통로가 굉음을 내더니 갑자기 더욱 길어졌다.

사방에 새겨진 문양이 더욱 짙어졌다.

- 보거라. 이런 식으로....

"나도 알아."

- 그러니까 조심, 으응?

진현우가 태연스럽게 대답했다.

경고하려던 미호가 당황할 정도로.

"일단 미궁에 홀린 척이나 해야지. 그러면 이 미궁의 주인이 알아서 다가올 테니까."

- 하항, 그런 의도였던 것이냐?

미호가 알겠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계속해서 나타나는 그림자, 사방에서 들리는 비명과 정체를 알 수 없는 북 소리.

끝없이 이어지는 미궁까지. 모든 것이 미궁을 헤매는 사람을 홀리기 위한 요소들이다.

'그럼 넘어간 척해 줘야지.'

진현우는 일부러 짜증이 가득 섞인 표정을 지으면서 끝없는 미궁을 계속 걸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 신이시여, 제게 가호를!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진현우는 어깨 위에 있던 미호와 시선을 마주치고는 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해서 걸었다.

그러면서 아공간의 모노클을 꺼냈다.

- 이제 쓰는 것이냐?

"써야지."

모노클을 손으로 짓이겼다.

가루가 되어 흩날리는 모노클. 그것들이 진현우의 오른쪽 눈앞에 모이더니, 오직 진현우만 볼 수 있는 반투명한 모노클로 바뀌었다.

- 진실을 꿰뚫는 모노클을 사용했습니다.

진현우는 재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얼마 안 가 길이 꺾이더니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 시이이이이....

"뭐, 뭐가 이렇게 많아!"

그곳에서 진현우에게 익숙한 플레이어가 그림자들과 대치하고 있었다.

누구인지는 말할 것도 없었다.

"샬럿?"

"현우야!"

샬럿이었다.

그녀는 천사를 소환한 채, 서서히 거리를 좁혀 오는 그림자들과 혼자 싸우고 있었다.

진현우는 손을 크게 펼쳤다.

그 손에 쥐인 것은 검은 마창.

- 콰아아앙!

마창이 벼락처럼 쏘아졌다.

자색의 흑뢰를 휘감은 채 쇄도하는 마창이 샬럿을 공격하려던 그림자들을 덮쳤다.

흑뢰가 사방으로 튀면서 적들을 일소했다.

- 시이이익...!

살아남은 그림자들은 불만스러운 소리를 내더니 천장과 벽으로 스며들었다.

도망친 것이다.

진현우는 샬럿에게 다가갔다.

"괜찮아?"

"후우, 고마워. 적들이 너무 많아서...."

샬럿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성녀는 천사를 소환할 수 있기에 일반적인 사제에 비하면 방어 능력이 뛰어난 편이다.

그런 그녀라도 이런 공간에 혼자 덩그러니 남아 버리면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현우야, 넌 어디서 왔어?"

"저쪽. 저 그림자들이 계속 귀찮게 하던데."

"그러니까. 휴우, 혼자 있는데 자꾸 공격해 와서 어쩌나 싶었어. 네가 와서 다행이야."

샬럿은 진현우의 곁에 섰다.

"너하고 같이 움직이면 되겠다. 오면서 다른 플레이어들 소리는 못 들었어?"

"싸우는 소리는 여기저기서 들리던데."

"나도 들었어. 여기 근처에서 들렸는데 일단 거기부터 가 보자. 사람이 많아야 할 거 같아."

진현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앞장섰다.

샬럿이 그 뒤를 따랐다. 전위에는 전사가, 후위에는 사제가. 정석적인 구도였다.

둘은 주변을 경계하며 통로를 나아갔다.

"내 뒤에서 떨어지지 마. 뒤에서 뭐가 나타났다 싶으면 바로 나한테 말하고."

"응."

앞서 걸어가는 진현우.

샬럿은 그의 뒤를 바짝 쫓으면서 눈치를 봤다. 진현우는 전방을 경계하고 있었다.

뒤는 샬럿에게 맡긴 상황. 그녀는 지팡이를 쥔 손을 조용히 늘어트리면서 입을 열었다.

"이 미궁은 뭐 하는 곳일까?"

"글쎄."

진현우는 뒤돌아보지 않은 채 대답했다.

그 말을 들은 샬럿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그리고 그녀가 손을 움직이려는 순간.

"그건 네가 알겠지."

"...어?"

푸우욱!

부서진 검이 샬럿의 심장을 꿰뚫었다.

조금의 자비도 없는 손놀림. 샬럿은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심장을 꿰뚫은 검을 붙잡았다.

그 눈동자에 진현우가 담겼다.

"왜, 왜?"

더없이 차가운 표정의 진현우가.

그는 코웃음을 치면서 샬럿의 목을 베었다. 하지만 그보다 샬럿의 움직임이 빨랐다.

그녀가 믿을 수 없는 몸놀림으로 물러났다.

"샬럿은 너처럼 빠르게 움직이지 못해."

"무슨, 크으으윽...!"

샬럿,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샬럿인 척하고 있는 괴물이 가슴을 부여잡았다.

꿰뚫린 심장에서 검은 핏물이 떨어졌다.

"내 정체를...."

샬럿의 형체가 녹아내렸다.

색채가 사라지면서 그 안에 감춰져 있던 무채색의 몸체가 드러났다. 아무런 형체가 없는, 그림자가 뭉쳐서 만들어진 것 같은 몸체.

그 몸체가 꿈틀거리면서 요동쳤다.

- 어떻게 알아챘냐는 것이다!

진현우는 저 형체가 무엇인지 안다.

'도플갱어.'

상대를 흉내 내는 괴물.

하지만 저 도플갱어는 일반적인 도플갱어와는 다르다. 겨우 그 정도의 도플갱어였다면 영원의 미궁의 주인이 될 수 있을 리가.

'저놈은 상대의 능력을 흉내 낼 수 있다.'

저 도플갱어의 특징이었다.

영원의 미궁에 들어선 모든 플레이어를 파악하고, 그들의 형체를 자유롭게 흉내 내면서, 그들이 가진 능력까지 복사하는 괴물.

당연하지만 더없이 까다로운 괴물이었다.

"샬럿은 목 뒤에 점이 있거든."

- 말도 안 되는 소리. 내 흉내는 상대의 신체를 완전히 복사하는 것이다. 그깟 점이 있다는 걸 내가 흉내 내지 못했을 리가!

"맞아. 사실 점이 있는지도 몰라."

- 네놈...!

도플갱어가 이를 악무는 소리가 들렸다.

놈의 가슴께에서는 여전히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게 도플갱어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평소였다면 단숨에 회복되었을 상처인데, 이상할 정도로 회복이 되지 않고 있다.

- 크윽!

도플갱어의 몸이 꿈틀거렸다.

놈은 진현우의 형태를 흉내 낼까 몇 번 고민하더니 벽으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도망치려는 것이다.

- 넌... 마지막에 죽여 주마.

도플갱어는 그 말만 남기고 사라졌다.

놈이 사라지자 사방에 흩뿌려져 있던 검은 핏물들도 연기가 되어 없어졌다.

상황을 지켜보던 미호가 눈을 껌뻑거렸다.

- 인간. 저놈, 도망쳤는데 괜찮은 것이냐?

"상관없어. 보이거든."

- 뭐가 보인다는 것이냐?

진현우는 바닥을 바라봤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도플갱어의 핏물이 있던 곳. 지금은 핏물이 사라지고 없다.

하지만 진현우에게는 보였다.

"핏자국."

진실을 꿰뚫는 모노클이 진현우에게 사라진 핏자국을 선명하게 보여 주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조금 전에 도플갱어가 사라졌던 벽이 지금의 진현우에게는 반투명하게 보였다.

- 진실을 꿰뚫는 모노클이 거짓을 밝힙니다. 환영으로 빚어진 벽이 사라집니다....

그리고 그건 기분 탓이 아니었다.

반투명한 벽이 녹아내리듯이 사라졌다. 그 너머로 핏자국이 떨어진 통로가 나타났다.

'도플갱어한테 벽에 숨는 능력은 없다.'

놈의 능력은 어디까지나 흉내 내기.

도플갱어에게 상위 어둠의 정령인 셰이드나 할 수 있을 법한 능력은 가지고 있지 않다.

미궁의 주인인 도플갱어만 인지할 수 있는 환영 벽을 만들어 내서 눈을 속이는 것일 뿐.

- 벽이 수상쩍다고 생각했거늘 역시나.

벽이 사라지는 걸 본 미호가 감탄했다.

일반 플레이어라면 눈치챌 수 없다. 환영을 눈치채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미궁에 소리나 문양 같은 것들로 온갖 장치를 해 뒀기 때문.

'뭐, 이 녀석하고는 상관없지.'

미호는 애초에 매혹과 환각을 다루는 요호.

그렇기에 저 벽의 수상쩍음을 눈치챌 수 있었다. 진현우는 녀석을 펫으로 다루고 있었기에 정신 계열 공격에 대한 저항력이 높았고.

그러니 미궁에 홀리지 않을 수 있었다.

"좋아, 그럼...."

진현우는 넓은 미궁을 돌아봤다.

조금 전에는 보이지 않던 통로가 보인다.

"사람들이나 찾으러 가 볼까."

이 미궁에 있을 동료들을 찾아야 한다.

진현우는 걸음을 옮겼다.

188화

영원의 미궁 (3)

샬럿은 어두운 미궁을 걷고 있었다.

혼자 걷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행스럽게도 미궁을 걸으면서 만난 동료가 있었다.

"어후, 너랑 만나서 다행이야, 현우야. 혼자서 여길 어떻게 나가나 엄청 걱정했거든."

"그래?"

진현우였다.

미궁을 헤매던 도중에 만났는데, 오늘처럼 진현우가 반갑게 느껴진 건 처음이었다.

샬럿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서 1시간은 넘게 걸은 것 같은데 길을 못 찾겠어. 죄다 함정에, 몬스터에...."

"걱정 마. 길은 내가 알고 있으니까."

"진짜?"

샬럿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진현우는 대답 없이 앞을 걸어갔다. 그 뒤를 쫓아가던 샬럿은 그의 어깨를 바라봤다.

"근데 미호는 어디 갔어?"

"뭐?"

"미호, 영체 상태로 있는 거야?"

평소라면 진현우의 어깨에 올라타 있을 미호가 이상할 정도로 얼굴을 비치지 않는다.

진현우의 걸음이 순간 멈췄다.

"미호... 아아, 잠깐 따로 움직이기로 했어."

"아, 그래?"

샬럿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넘겼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잠깐 걸음을 멈췄던 진현우도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 입가에 묘한 미소가 어렸다.

"이쪽으로 가면 다른 동료가...."

진현우가 샬럿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앞에 나타난 골목을 돌려는 순간.

- 푸우욱!

"커, 윽...!"

불길한 창이 진현우의 목을 꿰뚫었다.

바로 옆의 벽에서부터 튀어나온 창. 짙은 마기가 목을 통해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샬럿이 경악하며 신성력을 일으켰다.

"혀, 현우야!"

"뭐."

"응?"

그런데 대답이 이상한 곳에서 돌아왔다.

창이 튀어나온 벽. 그 벽이 허물어지더니, 거기서 진현우가 무심한 얼굴로 튀어나왔다.

샬럿이 아연실색했다.

"어? 응? 현우는 여기... 어머?"

진현우가 두 명 있다.

샬럿은 당황한 눈으로 두 명의 진현우를 번갈아 봤다. 상식적으로 진현우가 두 명 있을 수는 없다. 그럼 하나는 가짜라는 것.

그녀는 방금 나타난 진현우의 어깨를 봤다.

"샤, 샬럿. 날 치료...."

"네가 가짜구나!"

"크허억!"

그 어깨 위에 미호가 올라타 있었다.

확신을 얻은 샬럿이 십자가를 휘둘렀다. 강한 신성력이 목을 꿰뚫린 진현우를 강타했다.

그 몸이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 비, 빌어먹을. 여길 어떻게...!

"기분 나쁘게 날 따라 하고 난리야."

- 크으윽!

검은 형체, 도플갱어가 나타났다.

놈은 이를 악물며 벽으로 스며들었다. 놈이 사라지는 걸 본 샬럿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게 뭐야?"

"도플갱어. 근데 좀 특이한 도플갱어."

"특이하다고? 어떤 점에서?"

"상대의 능력까지 흉내 낼 수 있거든. 네가 소환하던 천사도 흉내 내서 소환하던데?"

그 말을 들은 샬럿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나도 흉내 냈어? 으, 기분 나빠."

"걱정 마. 빠르게 처리했으니까."

"조금 전처럼?"

샬럿의 표정이 묘해졌다.

조금 전에 진현우가 도플갱어를 어떤 식으로 쫓아냈는지 봤기 때문이었다.

불쑥 목이 꿰뚫린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샬럿은 고개를 내저으며 생각을 털어 냈다.

"다른 사람들은?"

"뒤에 있어. 네가 마지막이야."

샬럿은 진현우의 등 뒤를 봤다.

벽 너머에 여러 플레이어가 보였다. 진현우가 이 미궁을 돌아다니면서 구한 이들이었다.

"마지막이라고? 그걸 어떻게 알아?"

"돌아다닐 수 있는 곳은 다 돌아다녔거든. 못 찾은 사람들은 저놈이 데려갔을 거야."

진현우는 골목 너머의 통로를 봤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잡다한 아이템을 하나 꺼내더니 통로에 굴렸다. 굴러가던 아이템이 중간에 멈췄고, 동시에 무언가가 작동했다.

- 파아앗!

"사라졌어."

그러자 바닥에서 검은 액체가 튀어나오면서 아이템을 삼켰고, 그대로 사라졌다.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날 포획하려고 했던 거구나."

도플갱어는 저런 식으로 목표를 유인해서 납치한다. 아니면 힘으로 납치하든가.

이번에는 전자의 방식을 택했는데.

'날 흉내 냈단 말이지.'

진현우는 입가를 매만졌다.

자신을 흉내 내서 힘을 얻었다면 샬럿은 정면에서 큰 무리 없이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굳이 샬럿을 함정으로 유인할 것도 없다.

그러지 않았다는 것은....

'양분이 부족하다는 건가.'

도플갱어가 사람들을 납치하는 이유.

진현우는 진실을 꿰뚫는 모노클을 이용해서 주변을 둘러봤다. 바닥과 벽에 도플갱어가 흘린 투명한 피가 남아 있는 게 보였다.

그 피는 미궁 사방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다친 놈이 활동량도 좋네.'

미궁 여기저기로 흩어진 핏자국.

진현우는 미궁 전체를 돌아보면서, 이 핏자국들이 돌아가는 공통된 지점을 발견했다.

아마 거기가 도플갱어의 본진일 것이다.

"이 정도면 대강 구할 사람은 다 구했고."

진현우는 뒤에 있는 이들을 봤다.

다양한 국적의 플레이어가 모인 게 보였다.

이제 남은 건 미궁의 주인을 죽이는 것.

"셰이드."

그림자가 솟구쳤다.

진현우의 등 뒤에서 솟구친 그림자가 사방으로 퍼지면서 통로를 어둡게 물들였다.

그림자가 그와 플레이어들을 감췄다.

"여기 주인 얼굴이나 보러 가자."

진현우는 플레이어들과 함께 전진했다.

* * *

영원의 미궁은 길이 없다.

단순히 길을 따라가기만 하면 그 이름대로 영원히 헤맬 수밖에 없는 미궁이다.

그 심층부에 넓은 공동이 있었다.

- 쿠후우, 스으으으....

아무것도 없는 공허한 공동. 유일하게 있는 것은 천장에 매달린 수많은 고치였다.

새까만 어둠에 감싸인, 호스 같은 것이 연결된 고치들. 그것들이 크게 맥박 칠 때마다 연결된 호스로 액체 같은 것이 빠져나왔다.

- 빌어먹을 인간 놈이.

호스들은 중심부로 연결됐다.

정확히는 그 위에 선 도플갱어에게로. 도플갱어는 눈을 감은 채 액체를 받아들였다.

그럴수록 그 몸이 더욱 짙어졌다.

- 먹이를, 불필요하게 낭비하게 만들다니.

도플갱어가 고개를 돌렸다.

놈의 시선이 닿은 벽이 굉음을 내면서 무너졌고, 그 너머에서 한 남자가 나타났다.

진현우였다.

- 네놈만 아니었더라면....

"그사이에 많이도 잡아 놨네."

진현우는 공동을 돌아보며 혀를 찼다.

뒤에 있던 플레이어들이 숨을 삼켰다. 천장에 매달린 고치의 모습은 그만큼 기괴했다.

"먹이는 많이 먹었냐?"

도플갱어가 괜히 미궁을 돌아다니는 게 아니다. 놈은 미궁의 사람들을 다양한 방법을 이용해서 이 공동으로 납치하고 있다.

그러는 이유는 지극히 간단했다.

'자신의 양분으로 삼기 위해서.'

저놈은 평범한 도플갱어가 아니다.

상대의 모습을 흉내 내고, 더 나아가서 능력까지 흉내 낼 수 있는 괴물. 당연하지만 그게 아무런 대가도 없이 가능할 리가 없다.

저게 그 대가였다.

'양분을 바쳐서 자신의 힘을 강화한다.'

지금의 놈은 많은 양분을 흡수했다.

도플갱어가 가진 힘, 누군가를 흉내 내는 능력의 효과가 최대치에 달했다는 것이다.

- 그래. 충분히 먹었지.

도플갱어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 몸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 조금 전에는 흉내 내지 못했던 힘을, 완벽하게 흉내 낼 수 있을 정도로.

액체처럼 흐물흐물해진 몸이 찰흙을 빚는 것처럼 움찔거리더니, 그 형상을 바꾸었다.

진현우에게는 더없이 익숙한 형상으로.

"날 흉내 낸 거냐?"

다시 한번 진현우의 형상으로.

도플갱어가 이번에 흉내 내기로 한 것은 진현우였다. 진현우는 맞은편에 선 도플갱어를 보면서, 거울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실제로 그러했다.

- 스읍, 후우우우....

도플갱어가 숨을 내뱉으며 몸을 떨었다.

조금 전에는 양분이 부족해 껍데기만 흉내 낸 수준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겉모습뿐만이 아니라 가진 힘도 흉내 낸 상황.

- 놀랍군. 이건....

다른 플레이어를 흉내 낼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힘이 몸 깊은 곳에서부터 느껴졌다.

그리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기술들도.

- 하, 하하! 이거 대단한 놈이군!

도플갱어가 흡족한 듯 웃었다.

느껴지는 힘이. 그리고 이 껍데기의 머릿속에 든 지식이 그를 만족시켰다. 도플갱어는 주변에 널브러진 검을 손에 쥐었다.

그리고 그 검을 손아귀에서 놨다.

- 촤르르륵!

그 손아귀에서 펼쳐지는 것은 환검.

수많은 환검이 사방으로 나뉘면서 진현우와 플레이어들을 덮쳤다. 플레이어들은 순간 놀랐지만, 이미 예상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 카드득!

제각기 방어 태세를 갖추는 사이, 진현우는 해일을 일으켜서 다가오는 환검들을 쳐 냈다.

도플갱어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 일어나라.

놈이 어디선가 본 듯한 깃발을 들었다.

쿠웅! 땅에 꽂히는 깃발. 그러자 바닥에서부터 수많은 어둠이 일어나 형체를 갖추었다.

진현우에게 익숙한 언데드의 형체를.

"이것 봐라?"

- 저놈, 재밌는 짓을 하는구나.

그뿐만이 아니었다.

벽에서부터 그림자들이 불쑥 튀어나와 진현우와 플레이어들을 노리고 있었다.

도플갱어의 모습이 순간 샬럿으로 변하더니 버프를 사용해 그림자들을 강화했다.

- 괜찮은 힘을 가졌구나, 계집!

"저, 저거! 기분 나쁘게 날 따라 했어!"

도플갱어는 금방 진현우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걸 본 진현우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샬럿, 요새를 이용해서 최대한 버텨 봐."

"안 그래도 그러려고 하고 있어!"

샬럿이 신성력을 일으켰다.

그녀의 주변으로 빛으로 이루어진 간이 성벽 같은 것들이 불쑥 솟구쳤다.

서울에서 썼던 신성 요새는 아이템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 그 아이템이 없으니 스킬의 효과가 약해질 수밖에 없다.

'빠르게 처리해야겠군.'

여기 모인 플레이어들은 어찌 됐든 탑의 최전선을 공략할 정도의 실력자들이다.

쉽게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동안 자신이 저 도플갱어를 처리하기만 하면 될 일이다.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온다.'

저 너머에서 도플갱어가 돌진하는 게 보였다. 놈의 신형이 한 줄기 섬광처럼 번뜩였다.

- 파지지직!

섬광과 함께 흑뢰가 일어났다.

사방으로 퍼지는 흑뢰가 플레이어들과 진현우를 노렸다. 진현우는 흑뢰들을 방어막을 이용해 요격하면서 신성한 방패를 전개했다.

놈의 검이 허공을 베었다.

- 서걱!

진현우의 사각지대에서 검기가 날아들었다.

그는 방패를 휘둘러서 검기를 쳐 냈지만 조금 늦었다. 검기가 그의 팔을 베고 지나갔다.

'자, 어떻게 할까.'

진현우가 혀를 차며 검을 휘둘렀다.

그 검 끝에서 펼쳐지는 것은 웨펀 마스터의 직업 스킬. 맞은편에서 공격해 오는 도플갱어도 똑같은 직업 스킬을 사용하고 있었다.

다른 스킬들도 마찬가지였다.

'가진 스킬은 다 따라 한다, 이거지.'

직업 스킬만이 아니었다.

놀랍게도 진현우가 기억 감정으로 얻은 스킬들까지도 흉내 내서 쓰고 있었다.

진현우는 바닥에 설치된 덫을 피하며, 도플갱어가 소환한 영혼 동물들을 베어 냈다.

- 카아아앙!

거기에 날아오는 도끼들까지.

더없이 귀찮은 놈이었다. 흉내 내는 주제에 위력이 뒤처지지 않는다는 것도 그러했다.

'아무리 잘 흉내 낸다고 한들.'

진현우는 정신을 집중했다.

도플갱어가 자신의 외형과 힘을 아무리 흉내 낸다고 해도, 흉내 내지 못하는 게 있다.

'이건 못 따라 하겠지.'

신성.

진현우의 주먹이 신성한 빛을 휘감았다.

189화

영원의 미궁 (4)

격전이 이어지고 있다.

진현우와 도플갱어는 서로가 가진 수단을 모두 사용하면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 모습은 흡사 거울을 보는 것만 같았다.

- 훌륭하군, 훌륭하다! 네 몸은!

"그거참, 고마운 칭찬이네."

도플갱어는 진현우의 껍데기에 만족했다.

이 정도의 힘을 가진 껍데기라니. 여태껏 도플갱어가 만난 적이 없는 껍데기였다.

말로 할 수 없는 충만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아직 부족하다.

- 공백이 약간 있군.

아직 진현우를 완전히 흉내 내지는 못했다.

다룰 수 없는 스킬이 하나 있었다. 지금의 도플갱어조차도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스킬.

놈은 모르는 기억 감정이라는 스킬이었다.

'상관없다. 이것도 저놈을 잡아먹는다면.'

그러면 공백도 사라질 것이다.

도플갱어는 상대를 잡아먹음으로써 흉내 내기의 완성도를 더욱 높일 수 있었으니까.

- 하, 하하하하!

도플갱어가 광소를 터트렸다.

놈은 진현우뿐만이 아니라 다른 플레이어를 연이어 흉내 내면서 그를 밀어붙였다.

진현우가 점점 밀리기 시작했다.

- 서걱!

도플갱어의 검기가 진현우의 손목을 깊게 베었다. 그 충격에 부서진 검을 놓쳤다.

그 모습을 본 도플갱어가 비웃었다.

- 네 껍데기는 내가 잘 써 주마!

도플갱어가 한 줄기 섬광으로 화했다.

순식간에 진현우의 코앞까지 들이닥치는 신형. 놈의 주먹에 익숙한 빛이 일렁거렸다.

성멸권이었다.

'좋아, 지금.'

이게 진현우가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그는 다가오는 성멸권을 인지하면서, 베이지 않은 왼손을 이용해 성멸권을 사용했다.

그의 주먹에 신성이 휘감겼다.

'멍청한 놈. 똑같은 기술을 써 봤자!'

도플갱어가 진현우를 비웃었다.

똑같은 기술에 똑같은 위력. 맞부딪치면 상쇄될 뿐이다. 차이가 있다면 지금의 진현우는 오른 손목을 크게 베인 상태라는 것.

'다음 공격으로 확실하게 죽인다.'

도플갱어는 진현우를 완전히 흉내 냈다.

그가 가진 힘까지도. 그보다 더 강하지는 않지만, 정확히 그가 가진 힘을 흉내 냈다.

그러니 상쇄시킬 수 있다.

도플갱어는 그렇게 판단했고.

- 화아아악!

- ...!

그 판단은 금방 어긋났다.

진현우의 주먹에 어린 빛이 더욱 강렬해졌다. 그에 비하면 도플갱어의 성멸권은 전등 앞의 반딧불이처럼 느껴질 정도로 강렬하게.

- 이, 이건....

도플갱어는 진현우를 따라 하려고 했다.

하지만 저것과 관련된 지식이 머릿속에 없었다. 저 말도 안 되는 신성력은 무엇이며, 저걸 어떻게 쓸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전혀.

- 왜냐? 어째서!

그 이유는 지극히 간단했다.

진현우의 내면에 깃든 신성은 도플갱어가 감히 따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 콰앙!

- 컥!

두 개의 성멸권이 맞부딪쳤다.

하지만 결과는 허무했다. 맞부딪친 순간 도플갱어의 성멸권이 내뿜는 빛이 삼켜졌다.

그 빛을 삼킨 진현우의 성멸권이 놈의 주먹과 팔을 짓이겼고, 몸체에 적중했다.

- 파아아앗!

- ...!

거대한 신성의 파도가 도플갱어를 덮쳤다.

놈이 뒤집어쓴 진현우의 가죽이 사라지면서 안에 있던 도플갱어의 검은 몸체가 드러났다. 거대한 신성이 그 몸을 남김없이 삼켜 버렸다.

- 으, 허어, 으으으....

공동을 가득 밝히던 신성이 사라지고 남은 것은 만신창이가 된 도플갱어의 몸이었다.

도플갱어가 바닥을 기었다.

- 아, 안 돼. 계약. 나는 계약을...!

진현우가 그 앞에 섰다.

"왜, 이건 못 따라 하겠냐?"

- 네놈...!

도플갱어가 분노를 터트리려고 했지만, 그보다 먼저 검이 놈의 목을 베어 냈다.

그걸로 끝이었다.

-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 레벨이....

- 특수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영원의 미궁에 숨어 있는 지배자를 찾아내서 제거할 것.

- 특수 업적을 달성한 보상으로 칭호 대신 관련된 스킬을 습득합니다.

진현우는 눈앞에 나타난 메시지를 지워 내고 주변을 돌아봤다. 도플갱어가 사라지자 주변에 가득하던 적들이 사라진 게 보였다.

전투가 끝난 것이다.

"각자 흩어져서 고치부터 파괴합시다. 최근에 온 사람들은 아마 무사할 겁니다."

"네, 네!"

플레이어들은 황급히 고치를 내렸다.

함께 온 플레이어들이 다수 보였지만 다행히도 그들은 무사했다. 하지만 오래전에 이 미궁에 온 사람들은 목숨을 잃은 상태였다.

"근데 이 사람들은… 어디서 온 거죠?"

"글쎄요."

플레이어가 죽은 사람을 보며 의아해했다.

사람이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 미궁인데 자신들 이전에 온 사람들은 대체 뭘까.

그건 이곳의 다른 이름을 알면 알 수 있다.

'차원의 미궁.'

영원의 미궁이 가진 또 다른 이름.

이 광활한 미궁의 곳곳에는 수많은 입구와 출구가 자리 잡고 있으며, 그곳을 통해서 다양한 세상의 생명체들이 흘러 들어오고 있다.

도플갱어는 그들을 먹이로 삼은 것이고.

'그게 아니었으면 진작에 굶어 죽었겠지.'

이 고치에 있는 사람들이 그런 이들이다.

영원의 미궁의 주인인 도플갱어가 사람의 힘까지 흉내 낼 수 있게 된 것도 그래서였다.

여기로 흘러 들어온 마인이 도플갱어와 접촉했고, 대적자를 통해서 강화시킨 것이다.

놈이 계약 타령을 했던 이유다.

- 10층, 영원의 미궁을 지배하던 도플갱어를 처리했습니다. 현재 미궁에 진입한 플레이어들이 모두 떠난 후 기믹이 변경됩니다.

뭐가 어찌 됐든 이제는 끝났다.

고치에 갇혀 있던 사람들을 풀어 주자 그들의 모습이 흐릿해지면서 사라졌다.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어디 보자."

- 뭐가 많이 없구나. 으음, 근데 정기는... 참으로 많구나! 이거면 성장할 수 있겠느니라!

도플갱어가 드롭한 아이템은 몇 없었다.

그런데 그중에 하나, 괜찮은 게 있었다.

[흉내쟁이의 구체 (일반)]

· 설명: 도플갱어가 지닌 구체다. 감정하면 어떤 힘이 담겼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 착용 제한: 없음.

· 옵션: 없음.

* 강한 사념이 남아 있다.

도플갱어의 사념이 남은 아이템이었다.

진현우는 곧바로 기억 감정을 썼다. 새하얗게 물든 시야 너머로 괴물의 일생이 보였다.

평범한 도플갱어로 태어났다가 우연찮게 이 미궁으로 흘러 들어왔고, 대적자의 선택을 받아서 특수한 힘을 가지게 된 괴물의 일생이.

- 당신이 가진 신성이 빛납니다. 도플갱어의 사념이 당신을 따릅니다....

진현우는 평소처럼 도플갱어의 사념을 강제로 지배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사념이 그를 따른다는 메시지가 나타났다.

- 기억 감정에 성공했습니다.

- 미궁의 지배자, '도플갱어'의 사념이 가지고 있던 힘을 전승합니다. 흉내쟁이의 구체 (일반)가 새로운 형태로 변화합니다.

- 스킬 '흉내 내기 (S)'를 새로 익혔습니다!

진현우의 몸이 잠깐 새하얗게 빛났다.

'또 신성인가.'

예상치 못한 상황이지만 이젠 익숙하다.

진현우는 아이템과 스킬을 확인했다.

[형태 없는 자 (전설)]

· 설명: 도플갱어가 지닌 구체다. 기억 감정의 효과로 가진 힘이 상당히 강화되었다.

· 착용 제한: 진현우 외 착용 불가.

· 옵션: 복제.

* 복제: 상대가 가진 아이템을 복제한다. 등급 이상의 아이템의 경우 시간이 짧아진다.

· 흉내 내기 (S): 도플갱어가 강대한 존재와 계약해서 얻게 된 힘이다. 상대방이 조금 전에 쓴 스킬을 약화된 형태로 흉내 낸다.

흥미로운 아이템과 스킬이었다.

상대가 가진 아이템을 복제할 수 있는 아이템과 스킬을 흉내 낼 수 있는 스킬.

도플갱어의 특색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리고 또 하나.

[포탈의 조각 (일반)]

· 설명: 포탈에서 일부러 떼어 낸 조각이다. 특정 포탈을 정상화시킬 수 있다.

특이한 아이템이 있었다.

진현우가 굳이 도플갱어를 처리한 이유. 아이템을 챙긴 후, 마지막 스킬을 확인했다.

· 탐색 (A): 미궁을 탐색하여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 대강이나마 알 수 있게 된다.

특수 업적의 보상으로 탐색 스킬을 얻었다.

미궁이니 대강 던전 같은 곳에도 적용될 것이다. 있어서 크게 나쁠 건 없는 스킬이었다.

무엇보다 당장 도움이 됐다.

- 탐색 스킬을 사용합니다.

"음...."

영원의 미궁의 주인은 죽였지만, 아직 10층이 완전히 공략된 것은 아니었다.

이 미궁의 클리어 조건은 출구를 찾는 것.

탐색 스킬이 11층으로 올라가는 출구가 어디에 있는지 대강이나마 알려 주고 있었다.

"현우야, 주변 정리는 다 끝났어."

"어. 그럼 이제 길만 찾으면 되겠네."

진현우는 플레이어들을 모은 후, 탐색 스킬을 따라서 10층의 출구로 향했다.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미궁의 주인이 죽은 이상, 이 미궁에 플레이어들을 위협할 요소는 몇 없었으니까.

"저기 같은데?"

"출구입니다! 후, 이번엔 쉽게 끝났네."

"다들 나갑시다!"

일행은 금방 출구를 발견했다.

푸르게 빛나는 포탈 형태의 출구.

플레이어들은 환호성을 터트리면서 출구로 나갔다. 샬럿도 출구로 나가려다가,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서 있는 진현우를 인식했다.

"넌 안 가?"

"난 따로 할 일이 있어서. 먼저 가라."

"무슨 일이길래? 나도 도와줘?"

진현우는 고개를 내저었다.

이다음 층은 샬럿이 크게 도움이 안 될 것이다. 그녀는 진현우의 행동에 의아해하면서도, 뭔가 뜻이 있을 거라 생각하고 따랐다.

모두가 떠나고 조용해진 미궁.

- 우리 둘만 남았구나.

"기분 나쁘니까 귀에 대고 속삭이지 마라."

- 말 한번 지독하구나!

남은 건 진현우와 미호뿐이었다.

진현우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가 여기 남은 이유는 숨겨진 출구를 찾기 위해서였다.

카오틱과 마인이 머무는 층으로 가는 통로.

거기로 가는 출구가 미궁 어딘가에 있다.

"시간 더럽게 잡아먹을 것 같은데."

- 나도 그냥 돌아가면 안 되는 것이냐?

"심심하니까 출구 찾으면 보내 줄게."

- 넌 도대체 나를 뭐라고....

혼자서 출구를 찾아다니면 심심하니까 미호를 데리고 돌아다닐 생각이었다.

진현우는 미궁을 나아가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힌트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어둡고,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포탈.'

거기에 진현우가 포탈의 조각과 열쇠를 던져 넣으면 새로운 통로가 개방된다.

진현우는 미궁을 돌아다녔다.

미궁은 짜증 날 정도로 넓고 복잡했다.

"다 부수고 다니고 싶네."

- 음, 그건 괜찮은 생각인 것 같구나.

진현우는 오랜 시간 미궁을 헤맸다.

하루가 꼬박 지날 정도. 하지만 무의미한 시간은 아니었다. 결국 출구를 찾았으니까.

"여기군."

눈앞에 거대한 포탈이 보였다.

다른 포탈과는 달리 빛이 어두우면서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포탈. 이런 포탈은 진입하는 순간 몸이 찢어지거나 이상한 곳으로 전이된다.

하지만.

- 포탈의 조각을 사용했습니다.

- 불안정한 포탈이 안정화되었습니다.

포탈의 조각을 쓰면 얘기가 달라진다.

불안정한 포탈이 금방 안정을 되찾았고, 진현우는 곧장 그 포탈에 열쇠를 던져 넣었다.

그러자 포탈의 색깔이 새까매졌다.

- 탑의 숨겨진 루트를 발견했습니다.

- 어두운 통로로 진입할 수 있습니다.

여태껏 본 적이 없는 메시지가 나타났다.

탑의 숨겨진 루트를 발견했고, 어두운 통로로 진입할 수 있다는 내용의 메시지였다.

진현우는 길게 숨을 내뱉었다.

"마인 놈들을 끝장내러 가 볼까."

놈들이 있는 층으로 갈 수 있는 통로.

진현우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190화

어두운 통로

눈앞에 보이는 것은 새까만 포탈.

숨겨진 층으로 갈 수 있는 통로로 가는 포탈이었다. 진현우는 먼저 미호를 내보냈다.

"야, 미호. 넌 돌아가 있어라."

- 음, 내가 따라가기에는 느낌이 안 좋구나.

미호도 순순히 따랐다.

포탈에서부터 심상치 않은 마기가 느껴져서였다. 미호 정도면 마기에 어느 정도 내성이 있지만, 너무 강한 마기는 힘들다.

미호가 떠나고 층에는 진현우만 남았다.

"좋아, 가 볼까."

진현우는 포탈에 발을 내디뎠다.

이제는 익숙한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감각. 그 감각이 사라졌을 때, 진현우는 낯선 통로에 와 있었다. 그것도 지독히 어두운 통로.

- 어두운 통로에 진입했습니다.

- 해당 통로를 공략할 경우 탑의 11층을 공략한 것으로 간주합니다. 참고하십시오.

진현우는 눈앞에 나타난 메시지를 지웠다.

이미 알고 있던 내용이다. 이 통로만이 아니라 카오틱과 마인의 본거지, 숨겨진 층을 공략하면 층 일부를 건너뛸 수가 있다.

공략한 걸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은근히 친절하단 말이지.'

전생에서부터 느꼈던 것이다.

이 탑이 묘하게 친절하다고. 뭐라고 해야 할까, 플레이어에게 친화적이라고 할까.

가끔 거기서 이질감을 느낄 때가 있었다.

'탑처럼 위험한 곳이 친절하다라....'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진현우는 주변을 돌아봤다. 통로는 어둠이 자욱하게 깔려 있어서 보이는 게 없었다.

당연하지만 저건 평범한 어둠이 아니었다.

'이 통로의 유일한 기믹.'

숨겨진 통로에는 별다른 기믹이 없다.

말 그대로 상위층으로 올라가기 위한 목적의 통로. 물론, 단순한 통로는 아니었다.

딱 하나 기믹이 존재했다.

- 통로 전체를 잠식하고 있는 지독한 마기가 당신의 몸을 침범합니다....

저 어둠, 마기가 자욱하게 깔려 있다는 것.

굳이 기믹이 있다고 하면 이 마기일 것이다. 일반적인 플레이어는 마기에 접하는 것만으로 침식당하고 온갖 부작용을 겪게 된다.

이 정도 마기면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한다.

'나하고는 크게 상관없는 얘기지.'

진현우는 마기 능력치를 가진 상태.

짙은 마기지만 크게 문제 될 건 없었다. 그의 몸은 이미 마기에 적응한 상태였으니까.

천천히 길을 나아갔다.

'딱 하나 문제가 있다면....'

길을 알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사방이 새까매서 보이는 게 없다. 광휘를 써도 통로의 어둠이 빛을 삼켜 버렸다.

그나마 진현우의 주변만 은은하게 빛날 뿐. 이 상태로 어둠 속을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셰이드."

- 시이이이....

그나마 다행인 점은 진현우의 그림자에 상위 어둠의 정령, 셰이드가 있다는 것.

셰이드는 마기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주변에 뭐가 있으면 알려 줘."

- 알, 겠다. 계약자....

그리고 또 하나는 진현우가 이곳의 길을 알아낼 수 있는 스킬을 갖고 있다는 점이었다.

진현우는 탐색 스킬을 사용했다.

- 탐색 스킬이 길을 안내합니다.

완벽한 스킬은 아니다.

대강이나마 길을 알려 주는 수준이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것도 감지덕지인 상황이었다.

눈앞에 새하얀 화살표 같은 게 나타났다.

길을 안내하는 화살표였다. 새까만 어둠 속에 새하얀 게 떠 있으니 인지하기는 쉬웠다.

'아마 통로를 지키는 파수꾼이 있을 거야.'

가능하면 놈들을 다 잡고 갈 생각이다.

아래층에서 레벨을 올리지 못했으니, 이 통로에서라도 최대한 레벨을 올려야 하니까.

진현우는 어둠 속을 걸어갔다.

그렇게 얼마나 걸어갔을까.

- 계약, 자. 무언가가... 온다....

"그래?"

그림자 속의 셰이드가 경고했다.

진현우가 그 말을 들은 순간, 짙은 어둠 속에서 형체를 알 수 없는 무기가 날아들었다.

카아앙! 셰이드가 그 공격을 쳐 냈다.

- 크르르르....

- 크흐....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보였다.

짙은 어둠에 동화되다시피 한 놈들이라서 어떤 형체를 가졌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나마 알 수 있는 것은 그놈들의 앞발이 거대한 낫처럼 생겼다는 것뿐이었다.

"많이도 몰려왔군."

- 계약자, 볼 수 있나...?

"잘 안 보여. 네 도움을 좀 받아야겠다."

진현우는 검을 빼 들었다.

적의 위치든 공격해 오는 타이밍이든, 주변이 너무 어두워서 파악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셰이드라면 다르다.

- 크게, 어렵지 않은... 일이로군....

"가능하면 말 좀 빨리해 주고."

- 노력, 하지....

셰이드의 그림자가 송곳처럼 쏘아졌다.

진현우는 그 궤적을 따라서 검을 내질렀다. 푸욱! 어둠 속에 있던 무언가를 꿰뚫었다.

끔찍한 비명이 통로를 울렸다.

- 키아아아아!

"오, 맞았나?"

손을 타고 전해지는 촉감.

그림자가 솟구치더니 망토처럼 진현우를 감쌌다. 어둠 속에 있던 괴물이 쏘아 내던 공격이 망토에 가로막혀서 튕겨 나갔다.

진현우는 곧바로 검기를 쏘아 냈다.

- 서걱!

- 크하아아아!

무언가를 베어 낸 감각이 느껴졌다.

진현우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좋아, 이거 할 만하네."

이곳의 파수꾼은 경험치를 꽤 줄 터.

그러면 해야 할 일은 간단하다.

"가면서 죽일 놈은 다 죽이고 가자."

경험치를 벌기에 좋은 곳이다.

* * *

어두운 통로에 사체가 쌓여 있다.

정확하게 형체는 알 수 없는 괴물들. 진현우가 며칠 동안 사냥한 놈들이었다.

"이렇게 생긴 놈들이었나."

가까이 다가가자 형체가 얼추 보였다.

온갖 종류의 짐승을 인간과 결합시킨 것 같은 형태. 몸 곳곳에 새빨간 눈 같은 게 달려 있었는데, 굉장히 그로테스크하게 보였다.

뭐가 됐든 통로에 있는 놈들은 다 죽였다.

[진현우]

· 레벨: 165

· 클래스: 웨펀 마스터

· 칭호: 차원의 수호자

· 근력: 477 (+40) · 민첩: 398 (+40)

· 체력: 400 (+45) · 마력: 300 (+32)

· 마기: 205

그렇게 사냥한 대가로 이전 층에서 올랐던 레벨까지 합해서 15레벨이 올랐다.

진현우는 걸음을 옮겼다.

"이제 더 없는 거 같지?"

- 느껴지는, 기척은, 없다....

"그래. 길만 찾으면 되겠네."

여전히 화살표가 떠다니고 있다.

진현우는 화살표를 따라서 통로를 걸었다. 더는 그를 공격해 오는 괴물도 없었다.

남은 건 길을 찾는 것뿐.

- 스으으윽....

"오, 사라졌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눈앞에 떠다니던 화살표가 사라졌다.

그리고 그 끝에 거대한 포탈이 보였다. 진현우가 들어온 것과 비슷한 포탈이었다.

그 포탈에 다가가자 메시지가 나타났다.

- 숨겨진 층으로 가는 길을 찾았습니다. 원하는 때에 포탈을 생성할 수 있습니다.

숨겨진 층으로 갈 수 있게 됐다는 메시지.

해당 층에 대한 정보가 보였다.

[타락한 자들의 도시.]

- 권장 레벨: 없음.

- 설명: 카오틱과 마인들이 본거지로 삼은 도시. 다양한 레벨의 카오틱들이 성장할 수 있게끔 다양한 사냥터와 던전이 존재한다.

- 점령 길드: 흑림.

* 이 지역은 '흑림' 길드가 지배하고 있다.

흑림.

마인과 카오틱의 길드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대표적인 길드였다.

대적자 주도하에 대침공이 벌어졌을 때도 흑림 소속의 카오틱이 가장 많았다.

'놈들도 큰 피해를 입긴 했을 건데.'

상당수의 카오틱과 마인이 죽었다.

타락한 자들의 도시도, 도시를 지배하는 흑림 길드도 만만치 않은 피해를 입었을 터.

간단하게 말하자면.

'지금이 기회다.'

대적자도 타격을 입은 상황.

카오틱과 마인을 뿌리 뽑기에는 지금이 최적이었다. 결코 놓칠 수 없는 타이밍이다.

당연하지만 혼자서는 불가능하다.

"일단 사람들을 좀 모아 봐야겠군."

진현우는 어두운 통로를 떠났다.

* * *

서울은 여전히 복구 작업이 한창이었다.

적지 않은 피해를 입은 상태였으니, 복구하려면 몇 달의 시간은 소비해야 할 것이다.

많은 이가 복구 작업을 돕고 있었다.

"상황이 좀 애매하긴 하네."

"뭐가 말인가?"

진현우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그의 옆에 있는 건 임호석이었다. 복구 작업을 거들다가 시간이 나서 만나러 왔다.

"나중에 설명할게요. 상황은 어떻습니까?"

"뭐,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지. 무난하게 복구 중이다. 시간이 오래 걸려서 그렇지."

"몇 달은 걸리겠죠?"

"몇 달? 연 단위로 걸릴 수도 있다."

마법을 이용한다면 시간이 단축되기는 하겠지만, 어쨌든 복구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진현우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상황에 적진을 친다는 생각에 동의해 줄 사람이 몇이나 될까가 문제겠군.'

- 사람들이 안 나설까 봐 걱정인 것이냐?

'약간.'

미호가 작게 코웃음을 쳤다.

진현우는 경치를 보는 임호석을 흘깃 봤다.

"제우스 길드는 뭘 하고 있습니까?"

"후발 주자로 10층 공략에 성공했다더군. 이번에 11층도 나서서 공략하고 있다던데."

"플레이어 활동에 열심이군요."

"그래서 더 의심스럽다만."

임호석과 윤서희 같은 이들은 유신과 제우스 길드가 하는 행동을 감시하고 있었다.

최근에는 탑 공략에 전념하고 있는 것 외에는 별다른 행동을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누군가 계단에서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임호석은 그에 맞춰서 아이템을 사용했다. 그들이 있던 건물 옥상에 결계가 펼쳐졌다.

인식을 저해하고 소리를 차단하는 결계.

"우리를 여기 부른 이유가 뭐지?"

계단을 오른 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수경과 윤서희였다. 화련은 11층을 공략하느라 탑에 있었기에 부를 수가 없었다.

그렇게 옥상에 모인 인원은 총 넷.

"할 얘기가 좀 있어서요. 은밀하게."

"은밀하게, 말이군요."

여기 있는 인원들은 진현우가 믿을 수 있는 이들이었다. 완벽하게 신뢰할 수는 없어도, 적어도 카오틱과 협력하지는 않을 이들.

그러면서도 큰 영향력을 가진 이들이었다.

"여러분들만 부른 건 간단합니다. 여기 계신 분들은 확실히 믿을 수 있는 분들이니까."

"흠...."

임호석이 눈가를 찌푸렸다.

저게 뭘 뜻하는지는 바로 알 수 있었다.

"믿을 수 있는 사람들만을 불러야 하는 안건이라는 거군. 이거 느낌이 안 좋은데."

"이번에는 또 뭘...."

윤서희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진현우가 저런 말을 할 정도면 심상치 않은 일을 가져왔다는 걸 짐작할 수 있어서였다.

이수경은 침묵을 지켰다.

"이번에 대적자 주도하에 대침공이 일어났죠. 그걸로 서울은 큰 피해를 입었고요."

"미국도 꽤 피해를 입었다더군."

"예."

진현우는 도시를 돌아봤다.

얼마 전, 수많은 마인과 카오틱이 이 도시를 침공하고 있던 모습이 떠올랐다.

"되갚아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진현우가 그렇게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이들이 침묵했다.

"대침공의 빚 말입니다. 마인 놈들이 마음대로 들쑤시고 갔는데 그냥 있을 겁니까?"

"어떻게 되갚겠다는 거지?"

"카오틱들에 대한 얘기가 있었죠."

"얘기?"

임호석이 의아해했다.

"탑에는 마인과 카오틱들만이 진입할 수 있는 숨겨진 층이 있다. 그 얘기 말입니다."

"음...."

듣던 이들이 인상을 찌푸렸다.

모두 들은 적이 있는 얘기다. 그리고 실제로 그럴 거라고 생각하고 있던 것이고.

"숨겨진 층. 사실상 놈들의 본거지죠. 거기로 가는 길을 찾아냈습니다. 제가 원하는 때에 그곳으로 가는 포탈을 열 수 있습니다."

"...!"

모두 숨을 삼켰다. 진현우가 했던 빚을 갚자는 말의 뜻을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놈들의 본거지를 공격하자는 겁니까?"

"예."

진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이 탑에 있는 카오틱과 마인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힐, 최적의 기회입니다."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그게 진현우의 생각이었다.

191화

환락의 도시 (1)

옥상에 침묵이 감돌았다.

누구도 섣불리 진현우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너무 큰 안건이었다.

여태껏 플레이어들은 일방적으로 공격당하기만 했다. 탑에게든, 카오틱에게든.

'그걸 역으로 공격하겠다고?'

'정말로 가능한 일인가?'

임호석과 윤서희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적의 본거지를 공격한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나마 입을 연 것은 이수경이었다.

"먼저 상대 전력을 알아야겠군요. 이번 대침공에 실패했으니 적들도 큰 피해를 보기는 했겠지만,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 않습니까."

"예. 저도 아무 생각도 없이 공격을 가자는 건 아닙니다. 먼저 전력부터 파악해야겠죠."

얘기를 듣던 임호석이 손을 들었다.

"카오틱한테 물어보는 건 어떻겠나?"

"지리 정도는 파악할 수 있겠지만, 정확한 전력은 파악하기 힘들걸요. 카오틱 중에서 그걸 알 정도의 지위에 있는 놈이 없어요."

윤서희가 대신 대답했다.

그녀는 카오틱들의 심문을 직접 담당하고 있었기에 어떤 상황인지 잘 알고 있었다.

"마인 정도는 되어야 하는데, 알잖아요. 마인은 관리할 수가 없어서 다 처리한 거."

"으음, 그건 그렇지."

마인들도 가능하면 포획해서 정보를 캐내고 싶었지만 그럴 방법이 없었다.

대적자와 계약한 마인을 어디에 가둬 둔다는 건 시한폭탄을 두는 거나 다름없다.

그것도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따로 방법이 있으십니까?"

이수경이 물었다.

진현우는 그녀를 바라보더니, 자신의 몸속에 있는 기운을 끌어냈다.

바로 마기를.

"이건...."

짙은 마기가 진현우를 감쌌다.

이수경이 인상을 찌푸리며 물러날 정도였다. 지켜보던 이들도 놀란 건 매한가지였다.

플레이어가 마기를 갖고 있다니.

"마기."

"이걸 이용할 방법은 없을까요?"

그 말에 이수경이 생각에 잠겼다.

진현우가 저 정도의 마기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이용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마법 물품으로 그 마기를 이용한다면 당신을 마인으로 오인하게끔 할 수 있을 겁니다."

"다른 사람은 못 데리고 갑니까?"

"음...."

이수경은 윤서희와 임호석을 바라봤다.

"한 명은 가능하겠군요."

"최대 두 명만 가능한 건가?"

"예. 그 이상은 눈에 띄지 않겠습니까?"

"그것도 그렇군."

여럿이 뭉쳐 다닐 수도 없으니.

꼭 필요한 최소한의 인원으로 돌아다니는 게 맞다. 거기서도 가능하면 강한 사람이.

진현우는 임호석와 윤서희를 응시했다.

"둘 중에 누가 가시겠습니까?"

"흠...."

윤서희와 임호석이 서로를 마주 봤다.

그걸 보던 이수경이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

"가능하면 은신할 수 있는 사람이 가는 게 나을 겁니다. 상황이 어떨지 모르니까요."

"그러면 내가 가는 게 맞겠군."

"전 은신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 은신. 아직 귀는 안 먹었다."

모두가 임호석을 의아하다는 듯이 봤다.

그 덩치로 무슨 은신을 하겠다고.

"탑에서 보상으로 얻은 스킬이 하나 있다. 등급도 괜찮아서 아이템으로 보정해 주면 어지간한 도적급으로는 은신할 수 있을 거다."

"보상으로 얻었다고요? 운도 없지."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지. 그게 여기서 도움이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임호석 같은 전형적인 전위형 전사가 은신 스킬을 얻었으니, 꽤 속이 쓰렸을 것이다.

이수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임호석 길드장님이 가시는 걸로 하시지요. 덩치가 크시니 위압감이 있을 겁니다."

"위압감이 필요한가?"

"마인인 척하려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흠, 그것도 그렇군."

체격도 곰처럼 커서 위압감도 있었다.

임호석이 진현우에게 동의를 구했다.

"내가 가지. 괜찮겠나?"

"전 상관없습니다. 그렇게 하죠."

진현우로서는 둘 중 누가 가도 상관없었다.

그래도 임호석이 은신 스킬을 가지고 있다고 하니, 그와 함께 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필요한 아이템들이 있습니다. 던전에 있는 것들인데, 던전의 위치는 제가 압니다."

"제가 찾아 오죠. 준비만 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이수경은 진현우에게 정보를 건넸다.

몇 개의 던전이 보였다. 탑 여러 층을 돌면서 구해야 할 것이다. 다소 귀찮은 편이었다.

"빠르게 끝냅시다."

가장 중요한 건 시간.

진현우는 옥상에 모인 이들에게 공략할 던전 목록을 나눠 준 후 곧바로 해산했다.

* * *

진현우는 한동안 여러 던전을 다니면서 이수경이 요구한 아이템들을 수집했다.

파라켈수스는 온갖 재료 아이템을 가진 곳이다. 그런 파라켈수스조차 가진 적이 없을 정도로, 하나같이 희귀한 것들이었다.

- 똥개 훈련이라도 하는 것 같구나.

"기분 나쁘게 말하는 재주가 있구나, 넌."

- 끄응... 머리를 누르지 말거라!

그 과정에서 한 가지 좋은 소식도 있었다. 미호가 한 단계 더 성장했다는 소식이었다.

[미호]

· 레벨: 150

· 종족: 요호

· 등급: 전설

[특성]

· 요호 (S), 정기 흡수 (S)

· 요호의 인정 (A+)

· 육미 (A), 흐릿함 (A)

[스킬]

· 마안 (A+), 매혹 (A+)

· 둔갑 (A), 혼령 불 (A), 광란 (A), 환상 (A), 분신 (A)

미호의 변화한 상태창이 보였다.

그리고 녀석이 새로이 익힌 것들도.

· 흐릿함 (A): 신묘한 힘으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공격을 흘려 낼 수 있다.

· 환상 (A): 원하는 대상을 복사한 환상을 만들어 낸다. 환상은 자유롭게 부릴 수 있다.

새로 익힌 스킬은 둘.

기존에 익힌 것들도 전반적으로 강화됐다.

"쿠후훗, 보거라!"

미호가 한층 더 커진 것이 보였다.

여우 형체로든, 인간으로 둔갑한 형태로든. 진현우는 그 모습을 무심하게 바라봤다.

"작아질 수는 없냐? 너 무거워."

"무겁다니, 못 하는 말이 없구나."

"뭐, 그래도 좋은 타이밍에 잘 컸네."

흑림이 지배하는 층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적들에게 들킬 가능성도 생각한다면, 미호가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진현우는 녀석의 머리를 꾹꾹 눌렀다.

- 그러니까, 그만, 누르란, 말이다!

어쨌든, 필요한 아이템은 모두 챙겼다.

진현우는 그렇게 모은 아이템들을 이수경에게 건넸다. 그녀는 며칠 동안 아이템을 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결과물이 나왔다.

[위장의 베일 (영웅)]

· 설명: 특수한 재료들을 조합하여 만들어 낸 베일. 겉모습을 원하는 대로 위장할 수 있다. 스스로 해제하기 전까지는 지속된다.

· 사용 제한: 없음.

· 옵션: 위장.

* 위장: 원하는 모습으로 위장한다.

[마기 증폭 장치 (영웅)]

· 설명: 특수한 재료들을 조합하여 만들어 낸 장치. 사용자가 보유한 마기를 증폭시키며, 그에 따른 변화가 수반된다.

· 사용 제한: 없음.

· 옵션: 증폭.

* 증폭: 보유한 마기를 증폭시킨다.

아이템은 두 개였다.

하나는 겉모습을 위장하는 아이템, 또 하나는 마기를 증폭시키는 아이템이었다.

이게 있으면 적들의 본거지로 간다고 하더라도 의심받지 않을 수 있을 거라고 했다.

"만약 의심받으면?"

"여기서 명복을 빌겠습니다."

"더럽게 불길한 말을 하는구만, 이수경."

임호석은 이수경이 한 말에 혀를 내둘렀다.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아이템들을 꺼냈다.

"이건 뭡니까?"

"좌표를 표시할 수 있는 장치입니다. 전이할 때 큰 도움이 되지요."

"흠...."

진현우는 아이템들을 살폈다.

이수경이 이걸 왜 건넸는가. 뻔했다.

"적 본거지를 공격할 때 꼭 타격해야 하는 지점이 있으면 이걸로 표시하라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타격함으로써 적이 가진 전력을 약화시킬 수 있는 지점. 나쁘지 않은 발상이었다.

진현우는 아이템들을 챙겼다.

"임호석 씨를 불러야겠군요."

정찰을 떠날 때가 됐다.

그리고 다음 날. 스케줄을 마친 임호석은 사자심 길드 하우스의 지하로 향했다.

그곳에서 진현우가 기다리고 있었다.

"길드 하우스가 좋군요."

"뭐, 우리도 돈은 많이 벌었으니까. 옛날에는 이 지역의 노른자라고 불리던 곳이지."

임호석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는 정장을 입고 있었는데, 넘치는 근육 때문에 정장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

"그 정장이나 좀 어떻게 하시죠."

"왜, 부담스럽나?"

"예. 제 눈이 터질 것 같아서요."

- 나도 보고 싶지 않으니라.

어깨 위에 미호도 투덜거렸다.

임호석은 코웃음을 치면서 갑옷을 입었다. 당연하지만 평범한 갑옷은 아니었다.

"인지 저해 마법이 부여된 갑옷이다. 이거면 놈들의 시선을 덜 끌 수 있겠지."

"도움이 돼야 할 텐데요."

"그러기를 바라야지."

진현우도 비슷한 갑옷을 입었다.

"그래서 포탈은?"

"여기 열 겁니다.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못 올 거다."

"좋군요."

진현우는 잠깐 정신을 집중했다.

숨겨진 루트를 공략한 보상으로 자신이 원하는 타이밍에 '타락한 자들의 도시'로 가는 포탈을 열 수 있게 되었다.

지금이 포탈을 열 때였다.

- 숨겨진 층으로 가는 포탈을 개방합니다.

진현우가 손을 내뻗었다.

그 손에서 짙은 어둠이 흘러나오더니 한데 뭉쳤고, 이내 익숙한 형태로 바뀌었다.

새까만 포탈의 형태로.

"...."

"...."

진현우는 임호석과 서로 눈을 마주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포탈에 발을 내디뎠다.

- 타락한 자들의 도시로 향합니다.

- 입장 가능 레벨: 없음.

두 남자의 신형이 사라졌다.

* * *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는 느낌.

이제는 익숙한 느낌이 사라졌을 때, 진현우와 임호석은 낯선 공간에 도달해 있었다.

"후우, 여긴...."

지독히도 어두운 하늘이 보였다.

구름도, 달도 없는 밤. 별조차 없었기에 하늘에서 내리쬐는 빛은 단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주변이 어둡지는 않았다.

"더럽게 밝군."

진현우의 시야 저 너머에 보이는 곳.

거대한 도시가 내뿜는 불빛이 주변을 밝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밤중이지만 불빛으로 가득한 도시는 한낮인 것처럼 밝았다.

- 길 막지 말고 비켜!

- 건방진 새끼가, 내가 누군 줄 알고....

- 성문에서 싸울 거면 둘 다 꺼져라.

도시의 성문에 많은 사람이 보였다.

사소한 일로 싸우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으르렁거리면서 그들을 협박하는 마인까지.

"마인이다."

"예. 저건 카오틱들이겠죠."

"음, 이건... 뭐라고 해야 할까...."

도시에서 나오는 카오틱들도 보였다.

장비를 갖춘 것이, 어딘가로 사냥을 가거나 던전을 탐험하러 가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그걸 본 임호석의 표정이 묘해졌다.

"생각보다 평범하군."

"왜요, 성문에 인간 시체가 막 매달려 있고 꼬챙이에 꿰뚫려 있을 줄 알았습니까?"

"흠, 그게 일반적인 이미지 아닌가?"

진현우는 피식 웃었다.

'겉으로만 평범해 보이는 거지.'

내부는 평범하지 않다.

잔인하다든가, 그런 의미가 아니다.

'환락의 도시.'

전생에서 카오틱이 자신들의 본거지에 대한 정보를 털어놓으면서 한 말이었다.

타락한 자들의 도시라는 이름을 갖고 있지만, 환락의 도시라는 이명도 갖고 있다고.

"자, 그럼."

진현우는 주변을 둘러봤다.

"위장할 사냥감을 찾아보죠."

위장의 베일을 쓸 타깃을 찾아야 한다.

192화

환락의 도시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