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그리고 다음 날.
"그래, 여기! 이쪽에 설치해!"
"이야, 이 비싼 마력석을 다 써 보네."
"마력 회로 제대로 확인해. VIP 의뢰니까."
진현우의 집에 수많은 이가 모였다.
아그니스 길드가 소개해 준 마법사나 연금술사 같은 이들이었다. 그들이 진현우의 집 주변에 뭔가를 설치하면서 집을 강화하고 있었다.
'역시 인맥이 최고야.'
원래라면 일정을 잡기도 힘들고 비용도 비싼 사람들인데, 화련 덕분에 일사천리였다.
양심상 비용은 자신이 처리했다.
그리고 또 하나.
"끄응, 끄으으응...."
미호는 과다 흡수한 정기 때문에 고통스러워했었다. 하지만 시간이 그걸 해결해 줬다.
방석에서 앓던 미호가 벌떡 일어났다.
"소화됐느니라!"
미호에게서 검보랏빛의 기운이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오더니, 녀석의 꼬리로 모였다.
그 기운들이 이내 형태를 갖추었다.
- 미호가 충분한 정기를 흡수하여 한 단계 성장합니다.... 꼬리가 두 개 늘어났습니다!
"오, 뭐야."
예상치 못한 메시지였다.
정기를 배가 터지도록 먹었으니 곧 성장할 줄은 알았는데, 두 단계나 성장할 줄이야.
[미호]
· 레벨: 90
· 종족: 요호
· 등급: 전설
[특성]
· 요호 (S), 정기 흡수 (S)
· 오미 (B+), 요호의 인정 (A)
[스킬]
· 마안 (A+), 매혹 (A+)
· 둔갑 (A), 혼령 불 (A), 광란 (A)
· 분신 (B)
전체적으로 스킬이 강화되었다.
그리고 새로이 생긴 스킬이 있었다.
· 광란 (A): 적을 짧은 시간 광란 상태로 만든다. 광란에 빠진 적은 능력치가 강화되며, 피아를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공격한다.
광란. 꽤 유용할 것 같은 스킬이다.
진현우는 강화된 스킬들을 확인하다가, 강화된 특성 중에 재밌는 게 있다는 걸 알았다.
· 요호의 인정 (A): 겉으로는 티격태격하지만, 속으로는 당신을 주인이라고 인정하고 있다. 주인의 대미지가 15% 상승하며, 정신 계열 공격에 대한 저항력을 대폭 강화한다.
글귀를 읽은 진현우가 피식 웃었다.
전에는 마지못해 주인으로 인정했다는 글귀가 적혀 있었는데, 내용이 완전히 달라졌다.
"인간, 왜 기분 나쁘게 웃는 것이냐?"
"웃는데 보태 준 거 있냐? 소화 끝났으면 준비해. 이제 슬슬 탑으로 가야 하니까."
"뭔가 기분이 나쁘구나...."
미호가 궁시렁거리며 어깨에 올라탔다. 그 몸이 전과 비교하면 무거워진 게 느껴졌다.
진현우는 곧바로 탑으로 향했다.
'샬럿은 못 온다고 했었지.'
2층에 일이 생겼다고 했던가.
금방 탑에 도착한 진현우는 탑의 입구 옆에 있는 표지판을 봤다. 침식률이 적힌 표지판.
58%. 꽤 위험한 수준이다.
'그래도 이 정도면, 뭐.'
아직은 괜찮다.
진현우는 탑에 발을 내디뎠다.
- 세계의 탑에 방문한 것을 환영합니다.
- 현재 탑은 7층까지 개방되었습니다. 당신이 방문할 수 있는 층은 5층까지입니다.
- 5층으로 입장하시겠습니까?
진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야가 새하얗게 물드는 것이 느껴졌다.
'5층은 빠르게 끝낼 수 있는 곳이다.'
5층은 굉장히 간단한 층이다.
별다른 기믹도 없고, 따로 공략이라고 할 것도 없다. 5층의 모든 것이 랜덤이기 때문이다.
- 5층, 보스 레이드.
- 이 층에 도달하는 자들은 무작위 환경에서 무작위 보스 몬스터와 싸워야 합니다.
- 보스 몬스터와 싸워 생존하십시오.
보스 레이드.
그게 5층의 이름이었다. 굉장히 간단하고, 그래서 굉장히 어려운 층이기도 했다.
플레이어들은 보스 몬스터를 상대할 때, 사전에 필요한 정보들을 입수하고 간다.
공략법을 준비하기 위해서다.
'근데 5층에서는 그게 안 된단 말이지.'
어떤 보스 몬스터가 나올지 모른다.
공략법을 준비할 수가 없다는 뜻이다. 임기응변에 의존해서 층을 공략할 수밖에 없다.
대신 빠르게 올라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보스 몬스터만 공략하면 그걸로 끝이니까.
- 대기실로 진입합니다.
시야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진현우는 사방이 새하얀 방에 서 있었다. 방에는 그를 비롯한 플레이어가 대강 30명 남짓 들어와 있었다.
'이번 층은 최대한 빠르게 끝낸다.'
시간을 길게 쓸 생각은 없다.
진현우는 그렇게 다짐했다.
152화
보스 레이드 (2)
5층, 보스 레이드.
그 대기실에는 30명 남짓한 플레이어가 모여 있었다. 그들은 주변을 둘러보면서 같이 5층을 공략할 플레이어가 누군지 확인했다.
그리고 그중에서 진현우를 발견했다.
'진현우?'
'이거 운이 좋다고 해야 하나....'
'생각보다 쉽게 깰 수도 있겠는데?'
진현우를 본 플레이어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믿기 힘든 속도로 탑을 공략했으며, 온갖 까다로운 퀘스트를 깬 사람이었으니까.
5층은 플레이어들끼리 경쟁하는 층도 아니니까 진현우의 존재가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 인간들이 널 쳐다보는구나, 인간.
'그러게. 업혀 갈 생각이라도 하는 거겠지.'
물론 그렇게 둘 생각은 없었지만.
그래도 5층까지 올라온 플레이어들이라서 그런지 장비의 상태가 생각보다 괜찮았다.
어쨌든, 대기실에 모든 플레이어가 모였다.
- 20분 뒤, 전장을 변경합니다.
- 곧 열릴 보스 레이드를 준비하십시오.
눈앞에 그런 메시지가 나타났다.
플레이어들이 긴장감 섞인 한숨을 내뱉었다. 그들 중 일부가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20분 뒤에 시작된다는데 그 전에 서로 클래스나 확인하죠? 진형을 어떻게 할지 생각하려면 클래스 정도는 알아 둬야 할 거 같은데."
딱히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플레이어들은 모여서 서로의 클래스를 공유했다. 자신의 클래스를 정확히 밝히기 싫다면 대충 어느 범주에 속하는지만 밝혔다.
그리고 진현우가 클래스를 밝혀야 할 때가 됐을 때,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전사 계통입니다."
"아, 전사 계통이요. 혹시 히든...."
"글쎄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진현우는 모호하게 대답했다.
그에게 직접적으로 클래스를 물어봤던 플레이어, 시안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역시 밝힐 리가 없나. 히든 클래스인 건 분명하단 말이지. 아 씨, 궁금했는데.'
진현우가 히든 클래스일 거라는 건 대부분의 플레이어가 짐작하고 있는 바였다.
그게 정확히 뭔지 알 수가 없어서 그렇지.
"뭐, 아무튼 좋습니다. 그럼 전사 계통이 15명, 궁수가 6명, 마법사가 5명, 사제가 4명이군요. 흠, 이 정도면... 조합은 괜찮네요."
"정석적으로 가는 게 낫지 않겠나? 전사들이 앞에서 어그로를 끌면서 탱킹하고, 나머지가 뒤에서 몬스터들을 처리하는 형태로."
"그게 낫겠죠."
우람한 근육을 가진 스킨헤드의 남자가 제안했다. 그 제안에 반대하는 이는 없었다.
어차피 대부분 여기서 처음 만난 사이.
정교한 전술을 구사할 정도의 유대는 없다. 정석적으로 싸워서 살아남을 수밖에 없다.
"지휘는...."
누군가 조심스럽게 그 말을 꺼낸 순간, 모두의 시선이 진현우에게로 쏟아졌다.
고난이도의 퀘스트를 수없이 깬 데다가 큰 규모의 전쟁에서 활약한 적도 있다.
지휘를 맡기에는 그가 제격이었다.
"앞에서는 제가 맡겠습니다. 뒤에서 도와줄 사람이 필요한데, 그건 그쪽이 해 주시죠."
"어, 저 말입니까?"
"예, 시안 씨."
시안.
진현우도 전생에 이름을 들은 적이 있는 플레이어다. 유명한 궁수 플레이어였던가.
여러 공략대를 이끌었던 남자기도 했다.
"뭐, 저야 상관없습니다. 이런 건 익숙하기도 하고, 후열에서 도울 사람도 필요하니까."
"좋네요. 그럼 그렇게 합시다."
시안은 별 거부 없이 수락했다.
그렇게 얘기가 끝난 후, 플레이어들은 무기를 점검하면서 시간이 지나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시간이 됐다.
- 20분이 지났습니다. 5층, 보스 레이드를 시작합니다. 환경의 변화에 대비하십시오.
아무것도 없던 새하얀 백색의 방.
주변의 풍경이 순식간에 바뀌기 시작했다.
- 첫 번째 전장에 진입합니다.
- 전장: 타오르는 황무지.
후각으로 지독한 탄내가 느껴졌다.
그다음으로는 피부를 자극하는 열기가.
"환경 한번 끝내주네."
사방은 황무지였다.
곳곳에 뜨거운 불길이 일어나는 황무지. 그곳을 둘러보던 진현우는 인상을 찡그렸다.
"첫 번째 전장이라고 했지?"
- 나도 분명히 그렇게 들었느니라.
"운이 안 좋군."
5층의 보스 레이드는 한 번에 끝날 때도 있고, 여러 번 해야지 끝나는 때도 있다.
이번에 진현우가 걸린 건 후자였다.
곁에 있던 시안이 혀를 찼다.
"버스 탈 수 있어서 운이 좋다고 생각했는데, 이거 참. 일이 이렇게 돼 버리나."
"모두 모여서 진형 갖추세요! 가장 안쪽에 사제, 마법사, 궁수, 바깥은 전사가 섭니다!"
플레이어들은 재빠르게 진형을 갖추었다.
사방은 황무지. 적이 어디에서 나타날지 모른다. 모두가 긴장한 눈으로 황무지를 살폈다.
그리고 이내 몬스터가 나타났다.
- 몬스터가 출현합니다.
- 첫 번째 몬스터: 화염 오크 부족장.
- 이 몬스터는 부족원과 함께 나타납니다.
황무지에 수많은 몬스터가 나타났다.
그건, 오크였다. 일반적인 오크보다 두 배는 큰 오크들. 게다가 몸에서 불길이 새어 나왔다.
화염 오크. 80레벨대의 몬스터다.
그리고 그 너머에 보스 몬스터가 서 있었다.
- 카아아아아아!
"오크 부족장이다. 처음부터 까다로운데."
시안이 혀를 찼다.
안 그래도 큰 화염 오크를 더 크게 만든 것 같은 오크 부족장이 고함을 내질렀다.
온몸이 흉터로 가득한 게, 산전수전을 다 겪은 노장처럼 보였다. 그래서 문제였다.
"숫자도 많습니다. 일단...."
"뭐야, 오크잖아?"
"응?"
시안이 플레이어들에게 경계심을 자극하려는 순간, 갑자기 진현우가 그리 말했다.
"시안, 지휘는 당신한테 맡기겠습니다. 다른 분들은 여기서 진형 갖추고 수비하세요."
"예? 뭐 하시려고요?"
진현우가 활짝 웃었다.
오크를 보자마자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그는 아공간에서 거대한 대검을 빼 들었다.
"이 묵직한 감각... 오랜만이군."
오크 슬레이어로 돌아갈 때다.
대검이 서늘한 빛을 내뿜었다. 저 너머에서 고함을 내지르는 부족장과 눈이 마주쳤다.
진현우의 신형이 섬광으로 화했다.
"아, 아니! 어디 가세요! 이봐요!"
순식간에 앞으로 뛰쳐 나가는 진현우.
그 뒷모습을 본 시안이 넋을 잃었다. 갑자기 대검을 빼 들더니 혼자서 돌진할 줄이야.
미치기라도 한 건가?
- 카아! 나약한 인간들, 다 죽인다!
- 태워 죽여 주마!
"X발, 도대체 어쩌라는 거야!"
"우리도 저거 따라가야 하는 겁니까?!"
플레이어들도 크게 당황했다.
시안은 그들의 모습에 냉정을 되찾았다.
"하, 씨. 뭐 자신이 있으니까 저러는 거겠지. 우리는 여기서 진형 유지하면서 버팁니다!"
"예? 그럼 저 사람은요?"
"자기가 알아서 하겠지! 무기 들어요!"
플레이어들은 무기를 들었다.
이윽고 충돌하는 두 무리. 전투가 벌어졌다.
* * *
진현우는 오크 한복판에 뛰어들었다.
무모하기 그지없는 단독 행동. 처음 그 모습을 본 오크 부족장은 비웃음을 터트렸다.
- 카학! 얼간이 같은 인간 놈이로군! 나를 노리는 것인가? 날 죽이면 끝날 줄 알고?
진현우가 노리는 건 오크 부족장이었다.
부족장은 그를 조소하며 부하들을 내세웠다. 직접 상대해도 되지만, 그럴 필요도 없다.
- 저 얼간이를 죽여라!
- 알았다, 부족장. 카아아아!
부족장의 친위대가 그의 앞을 지켰다.
저 너머에서 진현우가 돌진해 오는 것이 보였다. 그 길목에 있던 오크들이 그를 막았다.
모두 진현우의 돌진이 멈출 거라 생각했다.
- 콰아아아앙!
- 뭐, 뭐냐! 저것은!
아니었다.
진현우의 앞을 막았던 오크들이 굉음과 함께 날아갔다. 그게 다가 아니었다. 그 뒤의 오크들도 놈들을 뒤따르듯 날아가고 있었다.
- 지금, 뭐가 일어나고 있는 거냐?
부족장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진현우가 저 무식하게 생긴 대검을 휘두를 때마다 오크들이 무력하게 죽어 갔다.
대검은 죽은 오크들의 피를 흡수했고, 검신에 새겨진 룬 문자가 더더욱 붉어졌다.
그리고 그 빛이 절정에 달했을 때.
- 우, 우아아악!
- 괴물, 괴물이다! 카아악!
충격파가 오크들을 휩쓸었다.
충분한 피를 흡수한 오크 슬레이어의 룬이 해방되면서 대검이 강화된 것이었다.
땅을 타고 전방으로 나아가는 거대한 충격파가 앞을 가로막던 오크들을 집어삼켰다.
- 저, 저 대검! 나 알고 있다! 저거!
오크들을 학살하며 나아가던 진현우를 지켜보던 친위대 중 하나가 그렇게 외쳤다.
저 불길할 정도로 붉은 대검.
- 그, 그놈이다! 그놈이다! 시익!
- 다른 오크 부족들을 학살했던 인간! 우리의 신께서 그 위용에 만족해 상을 내렸던 놈!
진현우는 오크 학살자라는 칭호를 가졌다.
오크에게 주는 대미지가 증가하고, 오크들 사이에서 큰 악명을 떨치는 효과를 가진 칭호.
그 칭호의 효과는 확실했다.
- 카, 카아아아!
- 무, 무섭다! 저건 이길 수가 없다...!
오크들이 겁에 질려 물러났다.
처음 등장했을 때만 해도 위풍당당하던 놈들의 변화에 플레이어들도 크게 당황했다.
"저놈들 왜 저래?"
"몰라. 뭐 잘못 먹기라도 했나?"
"아니, 그걸 떠나서 저게... 가능한 거냐?"
진현우의 전투를 본 플레이어들은 혀를 내둘렀다. 혼자서 오크 진영을 뚫고 나가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기가 질릴 정도였다.
혼자 돌진하길래 미친 줄 알았더니.
'괴물인가?'
화염 오크면 무시할 수 없는 몬스터인데, 그 몬스터들을 너무도 쉽게 베어 내고 있다.
보고도 따라 할 수가 없는 전투였다.
오크들을 계속해서 베어 내던 진현우는 부족장을 지키고 있는 친위대까지 도달했다.
- 크, 크아아아아!
- 부족, 부족장을 지켜라! 목숨을 걸고!
무력하게 쓰러지던 오크들과는 달리, 친위대는 겁을 먹었음에도 부족장을 지키려 했다.
친위대의 몸에서 불길이 솟구쳤다.
진현우는 마력을 일으켰다.
"펜리스! 머리만 나와!"
친위대의 발밑에 마법진이 그려졌다.
놈들이 반응하기도 전에 마법진은 완성되었고, 그 너머에서 거대한 형체가 튀어나왔다.
- 크르르르릉!
- 우아아악?!
펜리스의 머리였다.
크게 입을 벌린 늑대의 대정령은 진현우를 가로막던 친위대들을 한입에 삼켜 버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 화아아악!
펜리스가 내뿜는 지독한 냉기가 휘몰아쳤다. 친위대의 불길이 꺼질 정도의 냉기였다.
황무지에서는 느낄 수 없는 추위에 친위대의 움직임이 굳었다. 진현우는 땅을 박찼다.
그 양손에는 대검과 도끼가 쥐여 있었다.
- 크흐아악! 이, 이놈이!
진현우가 크게 도약하며 부족장을 도끼로 내리찍었다. 그가 땅에 착지하자 거센 충격파가 일어나면서 주변을 뒤흔들었다.
부족장은 팔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인간 주제에, 어떻게 이런 괴력을!'
부족장은 코앞까지 도달한 진현우를 보며 경악했다. 놈은 자신의 몸과 쥐고 있던 할버드에 거센 불길을 일으켰다.
하지만 펜리스가 내뿜는 지독한 냉기 때문에 불길의 기세도 약하기 그지없었다.
- 마, 말도 안 된다. 이게...!
부족장이 할버드를 힘껏 내리쳤다. 진현우가 내지른 도끼가 할버드와 맞부딪쳤다.
콰직! 불길한 소리가 들렸다.
부족장은 떨리는 눈으로 할버드를 봤다. 그의 애병에 커다란 금이 난 것이 보였다.
- 무슨, 내가 이렇게...!
할버드가 굉음을 내며 부서졌다.
도끼, 용맹한 자가 가진 무기 파괴의 효과였다. 진현우는 도끼를 투척해 부족장의 사지를 꿰뚫었다. 냉기가 놈의 사지를 얼렸다.
- 이렇게 허망하게!
진현우는 대검을 뒤로 젖혔다.
그러곤 푸욱! 부족장의 심장을 꿰뚫었다. 곧장 위로 솟구친 대검이 놈을 반으로 갈랐다.
뜨거운 피가 진현우의 얼굴을 적셨다.
- 끄, 어어어어....
몸이 갈라진 부족장이 무릎을 꿇었다.
피를 잔뜩 머금은 오크 슬레이어가 부족장의 목을 마저 베어 냈다. 그걸로 끝이었다.
"...."
- ....
황무지에 침묵이 감돌았다.
서로 격하게 싸우던 플레이어들도, 오크들도 눈에 보이는 광경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 괴, 괴물이다! 괴물! 우리도 대수림의 오크 부족들처럼 몰살당할 거다!
"저게 진짜 말이 되나?"
엇갈린 반응이 황무지를 뒤덮었다.
153화
보스 레이드 (3)
화염 오크 부족장은 죽었다.
하지만 보스 레이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오크 부족장이 죽자 거대한 오우거가 나타났고, 다시금 보스 레이드가 이어졌다.
"다리! X발! 다리부터 노려!"
"오우거는 무릎이 약점이다! 무릎부터 쏴서 어떻게든 넘어트리면 돼! 쏴라!"
"죽여!"
하나같이 쉽지 않은 보스 몬스터였다.
하지만 사상자는 없었다. 플레이어들은 사상자 없이 인원을 유지하며 적들을 물리쳤다.
점점 합이 맞춰지고 있는 상황.
'이 정도면 진짜로 쉽게 깨겠는데?'
'저거 완전... 괴물이잖아.'
그 중심에는 진현우가 있었다.
몬스터가 나왔다 하면 저 남자가 먼저 달려가서 싸웠다. 혼자서 보스 몬스터의 어그로를 끌어 주니 전투가 쉬워질 수밖에 없었다.
"이걸로 세 번째인가요?"
"예. 슬슬 끝날 때가 된 거 같은데."
시안이 진현우에게 말을 걸었다.
세 번째 보스 몬스터를 죽였다. 진현우 덕분에 사상자는 없었지만 모두 많이 지쳤다.
쉬지 않고 싸웠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 마지막 전장에 진입합니다.
- 전장: 벼락 맞은 언덕.
하지만 쉴 시간도 없었다.
환경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세 번째 보스 몬스터와 싸웠던 환경, 숲이 사라져 가고 있다.
대신에 나타난 것은 높은 언덕이었다.
"비가 내리는군요."
"아오, 축축하게."
비가 내리는 언덕.
플레이어들은 주변을 돌아봤고, 언덕 곳곳에 새카만 그을음이 남아 있는 걸 목격했다.
"...벼락 맞은 거 같죠?"
"어. 이름값 제대로 하네."
"마법사들은 바로 방어막 준비해 주세요. 아무래도 번개와 관련된 보스일 거 같습니다."
진현우의 말을 들은 마법사들이 재빠르게 방어 마법을 영창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소리가 들렸다.
- 쿠르르르르...!
하늘에서 들리는 천둥 소리.
금방이라도 내리칠 것처럼, 먹구름 사이로 황금빛 전기가 튀는 것이 보였다.
그 너머로 어떤 형체가 얼핏 보였다.
"뭐가 보입니다."
"저건...."
먹구름 사이로 거대한, 드래곤을 닮은 괴물이 날고 있었다. 강철보다도 단단해 보이는 황금빛의 갑피를 가진 앞발이 없는 괴물.
- 몬스터가 출현합니다.
- 마지막 몬스터: 천둥 비룡.
- 키아아아아아!
천둥 비룡이었다.
놈의 황금색 눈동자가 지상을 훑었다. 비룡의 몸체에서 전류가 흐르는 것이 보였다.
진현우가 다급히 외쳤다.
"방어막! 낙뢰를 막아!"
"바, 방어막! 마법사! 얼른!"
"흐으읍!"
마법사들이 황급히 방어막을 전개했다.
그걸로도 부족할 것 같아서 진현우는 방어막 밑에 신성한 방패를 전개했다. 순식간에 갖춰진 두 겹의 방어막 위로, 낙뢰가 내리쳤다.
- 콰아아아앙!
천지를 내리치는 수많은 낙뢰.
천둥 비룡이 내뿜은 전류가 하늘에 닿았고, 그것들이 낙뢰가 되어 지상을 내리쳤다.
"끄으으으윽!"
"바, 방어막이...!"
낙뢰를 막던 방패가 파괴되었다.
그다음은 방어막이었다. 계속해서 내리치는 낙뢰가 방어막을 쉼 없이 강타했다.
결국 버티지 못한 방어막이 파괴되었다.
"꺄아아악!"
"크허억!"
내리치는 낙뢰가 플레이어들을 강타했다.
주변으로 흩뿌려지는 전격, 낙뢰가 내리친 지점에서 일어난 강한 폭발이 그들을 덮쳤다.
플레이어들의 진형이 단번에 무너졌다.
"커헉! 끄으으, 이게 뭔...!"
"또 온다!"
하지만 공격은 멈추지 않았다.
천둥 비룡의 거대한 날개에 황금빛 전류가 맺혔다. 이윽고 놈이 날갯짓을 하자, 황금빛 전류는 수많은 구체가 되어 지상을 덮쳤다.
"저 미친X이!"
"아, 안 돼!"
플레이어들은 낙뢰의 충격 때문에 아직 몸을 제대로 추스르지 못하는 상태였다.
저 공격을 방어할 수가 없다. 이대로면 치명적인 손실을 입을 수밖에 없는 상황.
시안의 얼굴에 절망감이 어렸다.
'이대로면...!'
바로 그때, 소리가 들렸다.
날카로운 검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였다. 그리고 순식간에 수많은 검이 하늘을 메웠다.
- 촤르르륵!
수많은 환검이 구체들을 베어 냈다.
플레이어들이 있는 방향으로 쏟아지는 것들만 정확하게. 그리고 거기서 그치지 않고, 하늘을 비행하는 천둥 비룡을 향해 쏘아졌다.
- 감히! 크르아아아아!
천둥 비룡이 날아오는 환검들을 낙뢰로 요격하면서 크게 분노했다.
진현우는 실피르를 꺼내 화살을 쏘아 내면서 시안을 봤다. 그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다들 정신 차리고 빨리 모여! 방진!"
"사제들은 부상자들을 회복시켜라! 크게 다친 사람들은 일단 방진 중심으로 데리고 와!"
"크으윽! 이게 무슨 꼴이야!"
대부분 낙뢰로 부상을 입었지만 죽지는 않았다. 하나 치명상을 입은 이는 여럿 있었다.
플레이어들은 다급히 방진을 구축했고, 사제들이 신성력을 쏟아부어 그들을 치료했다.
진현우가 시간을 벌어 준 덕분이었다.
- 인간, 네 화살이 효과가 없구나.
"그래, 너무 멀어."
진현우는 계속 화살을 쏘아 냈지만, 그중에서 천둥 비룡에게 닿는 것은 적었다.
놈은 실피르의 사거리로도 닿기 힘들 정도로 높은 곳에 있었다. 환검이든, 화살이든 놈에게 닿기 전에 추진력을 잃고 만다.
- 게다가 화가 잔뜩 난 것 같군. 후훗!
"내가 고생하는 게 즐겁냐?"
- 나쁘지는 않구나.
진현우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천둥 비룡이 그를 불쾌감 가득한 얼굴로 노려보고 있었다. 자신의 공격을 막은 인간의 존재가 불쾌하기 그지없는 눈치였다.
'그래도 꼴에 용이라고.'
자존심이 강한 모양이다.
천둥 비룡은 분노 섞인 포효를 내지르면서 더 거센 낙뢰들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벼락 맞은 언덕이 불타오르고 있다.
'자, 어떻게 할까.'
진현우의 머릿속에 공략법이 떠올랐다.
정석적으로 깨는 방법.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그 방법대로 하기에는 준비한 게 없다.
그러면 변칙적으로 깨는 수밖에.
"야, 멀리 떨어져라, 벼락 맞기 싫으면."
- 벼락? 또 무슨 짓을 하려고....
미호가 혀를 내두르며 물러났다.
곁에 있으면 자기도 호된 꼴을 당할 거라고 예측한 것이다. 그리고 그 예측대로였다.
'시안, 저 사람이 알아서 잘해 주겠지.'
진현우는 천둥 비룡과 싸우는 척하면서, 벼락을 맞을 최적의 타이밍을 계산했다.
그는 플레이어들이 있는 곳을 흘깃 봤다.
"저 망할 비룡 새끼 좀 떨어트리라고!"
"너무 높아! 화살이고 뭐고 안 닿아!"
"시안! 이대로면 다 죽어요!"
시안은 이를 악물었다.
천둥 비룡은 너무도 높은 곳을 비행하고 있었다. 화살도, 마법도 닿지 않는 위치다.
저놈을 떨어트리지 않으면 승산이 없는데, 떨어트릴 방법이 단 하나도 없는 상황.
'어떻게, 이걸 어떻게 해야....'
시안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아무리 고민해도 해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저절로 진현우에게로 향했다.
그라면 뭔가 해결책을 내주지 않을까.
"진현우 씨, 뭔가 좋은...!"
- 콰아아앙!
시안이 외친 순간, 벼락이 내리쳤다.
정확히 진현우를 향해 내리친 벼락. 시안은 그가 벼락을 어떻게든 막아 낼 거라 생각했다.
"크아아아악!"
"지, 진현우 씨?!"
근데 아니었다.
벼락이 진현우를 꿰뚫었다. 추가로 내리치는 벼락들이 그를 무자비하게 감전시켰다.
새카맣게 타들어 간 진현우가 쓰러졌다.
"서, 설마 벼락에 맞은 거야?"
"주, 죽은 건 아니겠지?"
"...."
플레이어들의 어안이 벙벙해졌다.
이전 보스 몬스터까지 진현우가 보여 준 위용이 대단했던지라 이렇게 당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해서였다. 시안도 그리 생각했다.
"아, 아니! 이럴 때가 아니지! 진현우 씨!"
"일단 구하고 봅시다! 저 사람이 죽으면 여기서 살아 나갈 방법이 없어요! 다 죽는다고!"
"우아아아아아!"
플레이어들은 빠르게 판단을 내렸다.
쉼없이 내리치는 벼락을 전사와 마법사들이 막으면서 시안이 황급히 진현우를 낚아챘다.
그리고 그를 방진 속으로 데리고 왔다.
"지, 진현우 씨! 괜찮습니까?"
"끄으으...."
진현우가 입에서 연기를 토해 냈다.
큰 부상을 입은 게 틀림없다. 시안이 다급히 치료하려 했지만, 그가 갑자기 손을 들었다.
"됐습니다. 행동이 빨라서 좋네요."
"예? 그게 무슨...."
"천둥 비룡의 눈에 제가 안 보이게끔 최대한 뭉치세요. 시간이 없습니다, 빨리!"
시안과 플레이어들은 의아해하면서 방진을 더욱 좁혔다. 전사들은 방패를 높이 들어 올려 진현우가 보이지 않게끔 만들었다.
천둥 비룡이 노성을 터트렸다.
"제가 여기 있는 것처럼 보이게끔 행동하세요. 천둥 비룡의 시선을 끌어야 합니다."
"뭘 하시려는 겁니까?"
"저놈을 떨어트려야죠."
진현우의 발아래에 있던 그림자가 솟구치더니 그를 집어삼켰다. 그림자 속으로 완전히 녹아든 진현우의 신형이 사라졌다.
시안의 어안이 벙벙해졌다.
"사라졌다?"
"천둥 비룡이 또 공격합니다!"
"미치겠네, 진짜!"
하지만 당황할 새도 없었다. 하늘에서 천둥 비룡이 크게 숨을 삼키고 있었다.
그 입에 뇌전이 모이는 것이 보였다.
"브레스다!"
드래곤의 브레스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천둥 비룡의 브레스도 강력한 건 매한가지.
플레이어들은 방어 태세를 갖추었고, 천둥 비룡이 브레스를, 거대한 낙뢰를 내뿜었다.
- 파지지지직!
"이, 망할... 크아아아악!"
"이, 이건, 못 버텨요!"
마법사들의 방어막은 얼마 가지 못했다.
그다음으로 전사들이 방어 스킬을 사용해 막으려 들었다. 그것도 오래 버티지 못했다.
브레스가 플레이어들을 덮친다.
"우아아아... 어?"
- 촤아아악!
들이닥치는 브레스에 플레이어들이 비명을 내지른 순간, 거대한 장벽이 솟구쳤다.
그림자로 된 장벽이었다.
장벽이 마지막으로 브레스를 막아 냈다. 비록 얼마 못 가 파괴됐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으아아아악!"
"그, 그래도 이 정도면...!"
브레스가 충분히 약해졌다.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버틸 수 있을 정도. 브레스를 덮어쓴 플레이어들이 신음했다.
그들은 금방 태세를 가다듬고 진형을 더욱 조였다. 마치 진현우를 지키는 것처럼.
- 그 인간을 내놔라! 크하아아아!
천둥 비룡이 분노하며 뇌전을 끌어모았다.
조금 전의 브레스를 쏘면서 꽤 힘을 소모한 탓에 충전할 시간이 필요해진 것이다.
그리고 그게 진현우가 노리던 순간이었다.
- 키아아아아아!
- 뭐? 캬하악?!
천둥 비룡의 등 뒤에서 괴성이 들렸다.
놈이 경악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 눈에 보이는 것은 그리폰, 그 위에 올라탄 진현우였다.
- 대체 언제... 크르륵! 감히!
그리폰이 천둥 비룡과 충돌했다. 날카로운 앞발이 천둥 비룡의 몸을 낚아챘다.
강력한 전격이 그리폰의 몸을 불태웠다.
- 키아아아악!
하지만 그리폰은 천둥 비룡을 놓지 않았다.
오히려 더 꽉 움켜쥐면서 놈이 움직이지 못하게끔 막았다. 그리고 그 위에 올라타 있던 진현우가 등을 박차며 천둥 비룡에게 돌진했다.
- 이놈...!
- 파지지지직!
천둥 비룡이 힘을 쥐어짜 냈다.
놈이 내뿜는 수많은 전격이 진현우를 향해 쏘아졌다. 그게 닿으려는 순간, 수호자의 갑옷이 강한 빛을 내뿜었다.
- ...!
수많은 방어막이 전격을 요격했다.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천둥 비룡이 순간 넋을 잃었다. 진현우는 높이 도약하며 검을 쥐었다.
그의 검기가 시퍼런 예기를 내뿜었다.
- 서걱!
- 크, 허억?!
칼날이 천둥 비룡의 날개를 베어 냈다.
하나. 비룡의 거대한 몸체가 휘청거렸다. 놈이 몸을 크게 비틀면서 진현우를 떨쳐 냈다.
진현우는 추락하면서 도끼를 투척했다.
- 쩌적!
- 케아아악?!
남은 날개에 분열한 도끼가 꽂혔다.
도끼가 머금은 냉기가 놈의 날개를 얼어붙게끔 만들었다. 천둥 비룡은 얼어서 움직이지 않는 날개를 당황한 눈으로 바라봤다.
놈의 거체가 추락하기 시작했다.
- 캬, 아아아아...!
한쪽 날개는 통째로 베였고, 남은 한쪽도 얼어붙은 탓에 당장은 못 움직이는 상황.
천둥 비룡은 무력하게 땅으로 추락했다.
쿠우웅! 거대한 충격이 사방을 뒤흔들었다.
"마법사는 바인드! 궁수는 속박의 화살!"
"쏴! 빨리!"
그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지상에 있던 플레이어들이 일제히 스킬을 사용했다.
속박 스킬이 천둥 비룡의 몸을 묶었다.
시안은 입술을 깨물었다.
"오래 못 갑니다! 금방 깨질 거예요!"
"저 괴물 같은 새끼!"
천둥 비룡의 힘은 어마어마했다.
놈이 거칠게 몸을 흔들자 속박 스킬들이 순식간에 깨지기 시작했다. 이대로면 얼마 못 가서 천둥 비룡의 구속이 해제될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저놈, 방어막을...!"
천둥 비룡이 힘을 쥐어짜 내서 뇌전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방어막을 전개하려고 했다.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서 달아나려는 것이다. 놈이 하늘로 올라가면 방법이 없어진다.
당연하지만, 그리 둘 생각은 없었다.
"펜리스!"
진현우는 가진 마력을 한계치까지 일으켰다. 바닥에 냉기로 이루어진 마법진이 형성되었고, 그 위로 거대한 형체가 나타났다.
- 크르르... 크허어엉!
- 키하아악?!
전신이 얼음으로 된 거대한 늑대, 펜리스가 천둥 비룡을 위에서부터 짓눌렀다.
그 몸에서 쏘아지는 수많은 얼음 송곳이 천둥 비룡을 꿰뚫었고, 놈의 비명이 퍼졌다.
놈이 구축하던 방어막이 흐릿해졌다.
- 파아아앗!
진현우는 광휘로 상처를 회복했다.
천둥 비룡과 함께 지상에 추락한 탓에 상태가 엉망이었지만,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
그는 마창을 빼 들었다.
- 크아아아아악!
분열하는 마창이 천둥 비룡의 전신을 꿰뚫었다. 지독한 마기가 놈을 잠식했다.
놈의 증오 어린 눈동자가 진현우를 봤다.
그는 땅을 박찼다.
- 이, 놈... 커억!
푸욱!
검기가 천둥 비룡의 미간을 꿰뚫었다.
놈은 고개를 거세게 흔들면서, 마지막 발악으로 진현우를 집어삼키려고 했다.
- 끄, 윽...!
하지만 무의미한 저항이었다.
그것보다 먼저 펜리스가 천둥 비룡의 목을 물어뜯었다. 놈은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질렀고, 진현우는 다시금 검을 높이 들어 올렸다.
그리고.
- ...!
천둥 비룡의 목을 내리쳤다.
거대한 머리가 땅에 떨어졌다. 놈은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자신의 몸을 바라봤다.
그 입이 브레스를 내뿜으려는 것처럼 몇 번이나 벙긋거렸지만, 무의미한 발악이었다.
- 키, 아, 아....
처절한 비명과 함께 천둥 비룡은 절명했다.
진현우는 피를 잔뜩 머금은 검을 축 늘어트리면서, 피로가 가득한 한숨을 내뱉었다.
"질긴 놈."
전투의 끝을 알리는 한숨이었다.
154화
당신이 원하는 보상
"헉, 허억!"
"주, 죽은 거 맞지?"
"이 새끼 살아나는 거 아냐?"
만신창이가 된 플레이어들이 죽은 천둥 비룡을 잔뜩 질린 눈으로 바라봤다.
목까지 베인 놈이 살아나지는 않겠지.
다행히도 부활하지는 않았다.
"아니, 여기가 이렇게 어려운 층이었나? 천둥 비룡이 나온다는 얘기는 못 들었다고!"
"나도 몰라. 우리 길드장 말로는, 어렵기는 한데 분명히 할 만한 수준이라고 했는데...."
"...."
플레이어들이 분통을 터트렸다.
저 말이 맞다. 5층 보스 레이드는 난이도가 있기는 하지만, 이 정도로 어렵지는 않았다.
천둥 비룡 같은, 제대로 된 준비가 없으면 상대할 수 없는 보스 몬스터가 나오지는 않는다.
그런데 천둥 비룡 같은 놈이 나온 이유는.
'나 때문이겠지.'
5층에는 참가한 플레이어들의 수준에 따라서 시련의 난이도를 올리는 기믹이 있다.
진현우는 능력치로만 본다면 이 층의 수준을 훨씬 넘어섰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
그의 존재 때문에 천둥 비룡이 나온 것이다.
- 양심의 가책은 안 느껴지느냐?
"크흠!"
그래도 뭐, 이 정도면 할 만큼은 했다.
누가 죽기라도 했다면 양심의 가책을 느꼈을 것이다. 안 죽어서 그나마 다행이지.
그리고 또 하나.
높은 난이도에 따른 선물이 있었다.
- 축하드립니다.
- 5층, 보스 레이드를 통과했습니다.
안도의 한숨을 내뱉은 모두의 앞에 무미건조한 메시지가 나타났다.
층을 통과했다는 메시지.
- 층을 통과한 보상으로, 각자의 기여도에 맞는 경험치 보상과 보물 상자가 주어집니다.
- 내용물을 확인해 보십시오.
퍼엉! 요란스러운 폭발음과 함께 각자의 앞에 보물 상자가 떨어졌다.
얼핏 보기에는 똑같아 보이는 보물 상자.
하지만 내용물은 각자 달랐다.
"오, 뭐야. 방패잖아? 어?"
"갑옷… 저, 전설급 갑옷이잖아?"
"와, 이게 얼마짜리야? 5층 보물 상자에서 이런 아이템이 나오는 건 처음 보는데."
다양한 아이템이 상자에서 나왔다.
플레이어들의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좋은 보상들이었다. 평소보다 난이도가 훨씬 높아진 시련을 극복하면서 보상이 강화된 것이다.
진현우는 주어진 보물 상자를 열어 봤다.
- 이번 층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 레벨이 5단계 상승했습니다.
- 당신이 원하는 보상이 주어집니다.
나타나는 메시지. 그리고 아이템이 나왔다.
진현우의 눈이 커졌다.
[B등급 스킬 승급권 (영웅)]
· 설명: 2개의 B등급 스킬을 승급시킬 수 있다. 단, 승급한 스킬의 숙련도는 초기화된다.
"내가 필요한 걸 어떻게 딱 알고."
B등급 스킬 승급권이었다.
지금의 진현우가 원하는 보상이었다. 애용하는 파쇄권의 등급을 올리고 싶었으니까.
"좋은 보상이 나왔습니까? 표정이 굉장히 좋은 걸 보니 좋은 게 나온 것 같은데요."
"예. 그쪽은요?"
"저도 뭐, 좋게 나왔습니다. 너무 어려워서 이게 뭔가 했는데 꽤 만족스럽네요."
시안이 말을 걸어왔다.
플레이어들은 천둥 비룡을 잡는 데 꽤 기여했다. 나름 만족스러운 보상은 나왔을 것이다.
그는 천둥 비룡의 사체를 아쉬운 듯 봤다.
"몬스터가 아이템만 드롭했어도 더 만족스러운 보상이 됐을 텐데요. 아쉽군요."
"흠...."
진현우는 천둥 비룡의 사체 앞에 섰다.
별다른 드롭 아이템은 없었다. 5층 보스 레이드는, 강한 보스 몬스터가 나오는 주제에 드롭 아이템은 주지 않는 걸로 악명이 높았다.
하지만 진현우에게는 달랐다.
'이런 귀한 보물이.'
조금 있으면 사라질 천둥 비룡의 사체가, 진현우에게는 무엇보다 귀한 보물로 보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영혼 중재.'
드롭 아이템이 나오지 않는 층인데, 진현우에게는 천둥 비룡이 드롭한 아이템이 보였다.
그건 정수였다.
[천둥 비룡의 정수 (영웅)]
- 설명: 천둥 비룡의 영혼이 담긴 정수다. '영혼 중재' 특성을 가진 이만이 쓸 수 있다.
천둥 비룡의 영혼이 담긴 정수. 망설일 것도 없다. 진현우는 바로 아이템을 사용했다.
정수가 격하게 떨렸고, 그 떨림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 기다리던 메시지가 나타났다.
- 영혼 중재에 성공했습니다. '천둥 비룡'이 소환 가능한 영혼 동물 목록에 추가됩니다.
* 현재 소환 가능한 목록: 늑대 (1), 매 (1), 그리폰 (1), 그리즐리 베어 (1), 천둥 비룡 (1)
조금 전에 상대했던 강력한 보스 몬스터.
천둥 비룡을 소환할 수 있게 되었다. 앞으로의 층에서, 특히 이다음 층에서 도움이 될 터.
진현우는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여러모로 얻은 게 많군.'
마음에 드는 보상들이다.
진현우는 주변을 돌아봤다. 벼락이 내리치던 언덕이 붕괴하는 것이 보였다.
지구로 돌아갈 시간이 됐다는 뜻이다.
"바로 다음 층으로 가실 겁니까?"
"좀 쉬었다가 갈 거 같은데요. 왜요?"
"아뇨."
진현우가 하는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던 시안이 어색한 미소를 흘렸다.
"가능하면 피하고 싶어서 말입니다. 그쪽하고 싸워서 이길 자신이 전혀 없거든요."
진현우는 다음 층의 기믹을 떠올렸다.
서바이벌이었던가. 그와 다음 층에서 마주치기 싫어하는 시안의 마음도 이해가 갔다.
그는 피식 웃으며 등을 돌렸다.
"다음 주에 가면 될 겁니다."
그때면 6층을 돌파하고 난 뒤일 테니까.
진현우는 지구로 귀환했다.
* * *
태평양의 한가운데에 있는 섬.
드높은 탑이 세워진 섬은 꽤 크다. 거기에다가 많은 유동 인구가 항시 드나드는 장소.
그래서 여러 편의 시설이 있었다.
"호텔! 이게 호텔이라는 것이냐?"
진현우는 거기서 호텔을 이용하기로 했다.
이왕 빌리는 거 가장 비싼 방으로 했다. 로얄 디럭스... 어쩌구 하는 스위트룸이었던가.
"근데 뭐 이리 경계가 삼엄해?"
호텔 주변부터 1층까지, 온갖 시큐리티 가드에 플레이어들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
마치 국빈이라도 찾아온 것처럼.
"으음, 나도 궁금해서 지나가던 사람을 매혹해서 물어봤느니라. 잘은 모르겠다만, 제우스? 그곳의 길드장이 왔다더구나."
"제우스? 유신이?"
예상치 못한 이름이었다.
그놈이 이 호텔에 있다니. 진현우에게는 굉장히 불쾌한 이름이라, 그는 인상을 구겼다.
'대전쟁의 원흉.'
전생에서 가혹한 통제를 일삼았으며, 탑의 공략보다는 자신의 이익을 추구했던 남자다.
그게 정도를 넘은 탓에 윤서희를 비롯한 플레이어들이 통제에 저항해 반기를 들었었다.
그 결과는 참혹했지만.
'왜 여기 있는지 나중에 알아봐야겠군.'
진현우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로얄 디럭스 어쩌구 하는 스위트룸은 그 이름답게 넓고,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방을 본 미호의 눈이 반짝거렸다.
"인간, 인간! 이 호텔이라는 곳에 있으니까 네 원래 집은 생각도 안 나는구나!"
"그럼 넌 여기서 살아."
"그, 그건 안 되느니라...."
원래라면 포탈을 이용해서 바로 한국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진현우의 집은 한창 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돌아가도 어차피 호텔 신세다.
'그럴 거면 여기서 빌리는 게 낫지.'
물론 단점은 있다.
더럽게 비싸다는 것. 물론 지금의 진현우에게 가격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도 시설은 나쁘지 않네."
"이 침대, 푹신푹신하구나! 쿠후훗!"
"정신 사나우니까 가만히 좀 있어라."
미호가 잔뜩 신난 게 보였다.
진현우는 그 모습을 시큰둥하게 바라봤다.
"룸서비스! 난 룸서비스도 받고 싶구나!"
"그건 또 어떻게 안 거야?"
"사람들이 말하는 걸 들었느니라."
진현우는 혀를 차면서 미호가 원하는 메뉴로 룸서비스를 시켰다.
미호가 처음 보는 음식들에 환호하는 동안, 진현우는 5층에서 얻은 보상을 꺼냈다.
'빠르게 쓰고 끝내야지.'
B등급 스킬 두 개를 승급시킬 수 있는 승급권. 이걸 어느 스킬에 쓸지는 이미 정했다.
"파쇄권. 그리고 검은 화살."
- B등급 스킬 승급권을 사용합니다. 파쇄권과 검은 화살의 등급이 한 단계 상승합니다.
승급권에서 새하얀 빛이 나오더니 진현우의 몸으로 깃들었다. 그리고 곧 변화가 느껴졌다.
- 파쇄권이 철권 (A)으로 승급했습니다. 검은 화살이 쇠약의 사슬 (A)로 승급했습니다!
· 쇠약의 사슬 (A, Lv.1): 명중한 적에게 강한 디버프를 부여하는 사슬을 소환한다. 적중할 경우, 사슬은 주변 적들에게 퍼진다.
두 가지 스킬이 승급했다는 메시지.
진현우는 쇠약의 사슬만 확인했다. 파쇄권이 뭘로 바뀌었는지는 볼 필요도 없었다.
어차피 이것도 승급시킬 거니까.
- A등급 스킬을 승급시킬 수 있는 권한을 사용합니다. 어떤 스킬을 승급시키겠습니까?
"철권."
3층에서 얻었던 보상.
그때는 쓸 일이 없어서 묵혀 뒀던 거지만, 드디어 이 보상을 쓸 일이 생겼다.
찬란한 빛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우캬악! 누, 눈이! 내 눈이이이!"
미호가 비명을 지르는 게 들렸다.
찬란한 빛이 진현우를 감쌌다. 그리고 조금 전에 느꼈던 뭔가가 바뀌는 듯한 감각이 들었다.
- 철권이 성멸권 (S)으로 승급했습니다.
· 성멸권 (S, Lv.1): 별을 멸하는 기운을 일으켜 주먹에 집중한다. 적에게 직접 타격하는 방식과 허공을 타격하는 방식으로 강력한 성멸의 기운을 방출할 수 있으며, 어떤 방식으로 쓰느냐에 따라서 위력이 달라진다.
성멸권.
이름이 굉장히 화려한 스킬이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별을 멸하는 주먹이라니.
"쓰는 법은 크게 다르지 않은 거 같고."
파쇄권도 직접 때리거나 허공을 타격하는 방식, 두 가지 방식으로 쓸 수 있었다.
하나 걸리는 게 있다면 성멸권은 어떤 방식으로 쓰느냐에 따라서 위력이 달라진다는 것.
'아마 직접 타격하는 게 더 세지 않을까.'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그랬다.
진현우는 자신의 주먹을 보며 정신을 집중했다. 체내의 마력이 바깥으로 방출되었고, 그렇게 방출된 마력이 낯선 기운으로 바뀌었다.
백색과 황색이 뒤섞인 찬란한 기운으로.
- 휘이이이이!
진현우의 주먹이 그 기운들을 탐욕스럽게 빨아들였다. 그렇게 흡수된 기운들이 주먹을 중심으로 거센 회오리처럼 소용돌이쳤다.
신성하면서도 파괴적인 기운이었다.
- 손님, 손님!
"아."
멍하니 주먹을 관찰하던 진현우는 황급히 기운을 사그라트렸다.
실내에서 스킬을 쓰는 건 엄금이랬는데.
"바보 같은 인간."
"시끄러워."
진현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 * *
진현우라는 존재는 탑을 등반하는 플레이어들의 뇌리 속에 확실히 새겨졌다.
대형 길드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부분의 길드는 아직 길드에 가입하지 않은 진현우를 탐내면서, 영입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었다.
"속보. 제우스의 길드장, 유신이 3층에서 세웠던 공헌도의 기록이 신예에게 깨지다."
그러지 않았던 길드들도 당연히 있었다.
대표적인 길드가 제우스였다. 한국의 5대 길드 중에서 단연 최고로 꼽히는 길드.
"재밌는 기사로군."
섬에 있는 호텔, 그 최상층.
가장 호화로운 방에서 제우스의 길드장, 유신이 기사를 무심히 바라보는 중이었다.
그 곁에는 길드의 간부들이 서 있었다.
"공헌도가 71,500이라... 놀라워."
"대, 대단한 기록은 아닙니다, 유신 님."
"유신 님이 다시 3층으로 돌아가신다면 그것보다 더 높은 공헌도를 얻으실 겁니다."
잘 정돈된 백색의 머리카락, 완벽에 가까운 몸. 유신은 눈부신 외모를 가진 남자였다.
그가 무심하게 중얼거린 말에, 곁에 있던 부하들이 식은땀을 흘리면서 말을 덧붙였다.
"내가 듣기로는 3층의 방식이 바뀐다고 들었다만. 공헌도가 없어진다고 하더군."
"그, 그게...."
"그럼 이 공헌도는 깨지지 않는 기록으로 남겠군. 확실히, 놀라운 기록이야."
유신의 손가락이 테이블을 두들겼다.
톡, 톡. 균일한 리듬. 그 소리가 울릴 때마다 간부들의 얼굴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또 무슨 짓을 하시려고....'
'제발 우리한테 불똥만 안 튀었으면....'
제우스의 길드장, 유신은 냉혹하면서 난폭하기로 유명했다. 자신의 명령을 거부하거나, 자신을 거스르는 이는 반드시 처리하는 사람.
그걸 가능케 하는 것은 그의 힘이었다.
- 최장기 랭킹 1위, 유신.
지금은 랭킹 1위에서 물러났지만, 유신은 가장 긴 기간 동안 1위의 자리를 지켰다.
물러난 것도 실력이 밀려서가 아니었다.
다른 랭커들이 보기에는 아직 숨긴 힘이 있는데, 자신이 원해서 내려온 것 같다는 느낌.
'저 남자는... 괴물이다.'
모두가 그리 생각했다.
"이 남자, 지금 몇 층에 있다고 했지?"
"얼마 전까지 5층에 있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층은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는 층이니까, 아마 지금쯤이라면...."
"6층으로 올라갔겠군."
유신이 눈을 감았다.
"6층이면 서바이벌이었던가. 카오틱들에게 연락을 보내라, 6층에서 놈을 노리라고. 사람을 따로 보내서 싸우는 걸 기록하도록."
"죽여도 괜찮겠습니까?"
"어차피 못 죽일 거다."
유신은 단언하듯이 말했다.
진현우라는 남자가 어떻게 싸우는지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면서, 마치 잘 아는 것처럼.
간부들은 고개를 깊이 숙였다.
"그리하겠습니다."
유신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간부들에게는 그게 축객령이나 다름없었다. 그들은 소리 없이 호텔의 방을 나섰다.
홀로 남은 유신은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진현우라."
조금 전에 본 기사들이 떠올랐다.
대형 길드와는 다른 방식으로 탑을 오르고 있는 남자. 침식률의 하락이 정체된 지금, 탑 공략을 이끌 새로운 등불이 될 수 있는 자.
"그래서는 곤란하지."
진현우가 자신의 자리를 위협할 수도 있다.
사실, 그런 건 아무 상관 없다. 랭킹이나 명성 따위는 얼마든지 다른 이에게 줄 수 있다.
하지만.
"탑을 공략하게끔 놔둘 수는 없다."
자신이 약속받은 것을 위해서라도.
유신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어렸다.
"그 누구든."
155화
신들의 투기장 (1)
다음 날, 진현우는 유신에 대해서 알아봤다.
그가 이 호텔에 머무르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알고 보니 7층 때문에 탑 바깥에서 다른 길드들과 온라인 회의를 했다는 모양이다.
"그게 다냐?"
"예, 예. 제가 더 아는 건... 없습니다."
"정말로 더 아는 건 없는 모양이구나."
호텔 지배인이 넋을 잃은 채 중얼거렸다.
미호는 진현우와 눈빛을 교환하더니, 호텔 지배인의 기억을 지우고 가던 길을 가게 했다.
"7층이라...."
"거기에 무슨 일이 있는 것이냐?"
"뭐, 있기는 하지."
진현우는 플레이어 커뮤니티를 열었다.
플레이어들이 남은 게시글들이 보였다. 거기서 7층에 대한 내용만을 따로 검색해 봤다.
여러모로 흥미로운 게시글들이 보였다.
- 7층 진짜 지옥 같다. 이게 뭐냐? 처음에만 해도 서로 협동하고 그랬었는데, 지금은 서로 못 믿고 점령지 못 뺏어서 안달이네.
- 침식률 너무 높은데 공략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제우스 길드가 좀 앞장서서....
- 지금 길드들끼리 점령지 놓고 싸우고 난리가 났는데 그게 되냐? 7층 저 꼴로 만든 게 제우스 길드하고 유신, 그 사람인데.
7층의 기믹은 점령이다.
여러 점령지를 두고 싸우는 층. 각각의 점령지마다 고유한 재료가 나오는데, 그 재료들을 모아서 특수한 아이템을 만들어야 한다.
그걸로 플로어 마스터를 죽이는, 어떤 의미로는 굉장히 간단한 층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재료들이... 값진 물건이란 말이지.'
거기서 문제가 벌어졌다.
제우스를 비롯한 길드들이 다른 점령지의 재료들을 탐내고 전쟁을 벌인 것이다.
그것도 야밤에, 기습으로.
- 제우스 얘네들 진짜 미친 건가? 다른 나라 길드들하고 회의할 것처럼 해 놓고 야밤에 몰래 가서 점령지 다 털어 버렸잖아.
- 그 뒤로 7층에서 다른 나라들은 우리나라 아예 상대도 안 해 준다고 하던데....
- 이러다가 못 깨는 거 아닌가요? 침식률 높아져서 지금 게이트 난이도도 높아지고 많이 나타나서 난리도 아니에요. 위험합니다.
- 우리가 뭐 할 수 있는 게 있긴 하고?
제우스 길드의 돌발 행동 때문에 7층의 길드들은 서로를 믿을 수가 없게 되었다.
기습으로 많은 점령지를 얻게 된 제우스와 그 동맹 길드들은 막대한 이득을 얻게 됐고.
"그게 7층의 공략이 지금까지 질질 끌린 이유라는 것이냐? 인간들의 탐욕이란...."
미호가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맞다. 한심한 이야기다. 그리고 이 한심한 짓을 벌인 중심은 제우스 길드와 유신이다.
'묘한 놈들이란 말이지.'
유신 그리고 제우스 길드.
전생에서 대전쟁을 일으켰던 가장 큰 원흉. 제우스 길드는 대전쟁 이후 힘을 잃고 몰락했다. 하지만 유신은 그렇지 않았다.
그 이유는 지극히 간단했다.
'유신이 사라졌으니까.'
대전쟁 이후, 유신은 자취를 감췄다.
죽었는가? 가능성은 있지만, 그럴 확률은 낮았다. 유신이 죽는 걸 본 사람이 없었으니.
그냥, 아무런 전조도 없이.
제우스의 길드장은 사라졌었다.
'그놈이 탑에서 보이는 행보는... 이상해.'
전생에서부터 그랬다.
탑을 공략하기보다는, 뭔가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듯한 느낌.
전생에서는 그 목적이 무엇인지 알아보기 전에 유신이 사라졌으니 알 수 없었다.
"이번에는 좀 알아봐야겠어."
그러려면 뭐가 됐든 7층으로 가야 한다.
먼저 공략해야 할 것은 6층.
"야, 일하러 가자."
"나는 더 쉬고 싶느니라...."
진현우는 침대에서 뒹굴거리고 싶어 하는 미호를 데리고 탑으로 향했다.
* * *
- 6층: 신들의 투기장으로 향합니다.
- 입장 가능 레벨: Lv.85~Lv.100.
- 콜로세움 대기실로 진입합니다.
백색으로 물드는 시야.
시야가 원래대로 돌아왔을 때, 진현우는 낡은 콜로세움의 대기실에 서 있었다.
콜로세움에 있는 건 그만이 아니었다. 70명 가까이 되는 인원이 같은 대기실에 있었다.
- 신들의 투기장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6층, 신들의 투기장.
이 층은 클래스마다 다른 시련을 부여받는 곳이다. 전투 계통, 생산 계통 그리고 사제 같은 이들까지. 모두 다른 시련을 받는다.
웨펀 마스터는 전투 계통에 속한다.
그리고 전투 계통이 받는 시련은.
- 30분 후 첫 번째 투기장을 개최합니다.
- 150명의 무작위 플레이어와 카오틱들이 같은 투기장에 소환됩니다. 그 인원의 3분의 1만이 남을 때까지 싸우고, 생존하십시오.
일종의 서바이벌이었다.
첫 번째 투기장이라는 단어에서 알 수 있겠지만, 한 번으로 끝나는 층이 아니다.
몇 번의 투기장을 거쳐야 끝나는 층이다.
그리고 또 하나.
- 첫 번째 투기장에서 큰 성과를 거둔 플레이어를, 탑의 신들이 주목할 것입니다.
- 신에게 선택받은 플레이어는 특별한 버프를 얻을 수 있습니다. 또한 해당 층에서는 설령 죽더라도 부활하여 탑 바깥으로 나갈 수 있으니, 죽음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 최선을 다하십시오.
이런 기믹도 있었다.
신에게 선택받는 기믹. 그리고 부활.
진현우가 먼 옛날에 받았던 튜토리얼과 비슷하다. 죽음이 진짜 죽음이 아닌 특수한 층.
'내 기억대로라면... 어떤 신에게 선택받느냐에 따라서 받을 수 있는 버프가 달라진다.'
가능하면 첫 번째 투기장에서 큰 활약을 해서 많은 신의 선택을 받는 것이 좋다.
거기서 자신이 역으로, 그중에서 마음에 드는 버프를 주는 신을 선택하는 그림으로.
"야, 저거...."
"하, 운도 더럽게 없지."
진현우는 대기실을 둘러봤다.
플레이어들이 속닥거리는 것이 들렸다. 그들의 시선이 몇몇 플레이어에게 쏠렸다.
튼튼한 갑옷을 입은 여자 성기사, 화려한 로브를 입은 남자 마법사, 수많은 검을 찬 검사.
"셋 다 랭커잖아? 미치겠네."
"랭킹 51위에, 78위, 86위까지...."
진현우도 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이들이었지만, 이 시대의 랭커인 모양이었다.
그는 곁에 있던 플레이어의 어깨를 찔렀다.
"저 사람들이 누굽니까?"
"뭐? 정말로 몰라서 묻는 건가?"
"모르니까 묻죠. 유명한 사람들인가요?"
플레이어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진현우를 보더니,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저 성기사는 알젠드라라는 여자다. 영국에서 대형 길드를 이끌고 있는 성기사지. 미친 광신도로 유명하지. 저 검사는 중국인인데, 또라이라서 사람들이 피하는 놈이고."
"또라이라고요?"
"그래. 수틀리면 죄다 베어 버리는 걸로 유명하지. 그래서 길드도 없는 놈이고. 이름이... 리쉬엔이었던가. 아마도 그랬을 거야."
사이코패스 살인마 같은 놈인 모양이다.
마지막으로 남은 건 마법사였다. 플레이어는 그에 대해서 설명해 주려다가 불현듯 진현우의 얼굴을 봤다. 그리고 화들짝 놀랐다.
"그리고 저 마법사는 미국인인데, 자기 인종에 자부심... 잠깐, 너!"
"예?"
플레이어가 갑자기 소리를 친 탓에, 다른 이들의 눈이 진현우를 향했다.
"미친, 저 사람도 있어?"
"와, 탑 오른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여기까지 왔어? 이번 기수는 그냥 포기해야 하나."
"아냐. 그래도 숨어서 잘 버티면...."
플레이어들이 속닥거리는 것이 들렸는지, 세 명의 랭커가 동시에 진현우를 바라봤다.
설명해 주던 플레이어가 재빨리 물러났다.
기묘한 긴장감이 실내를 장악했다.
"...."
"...."
"...."
진현우를 응시하는 세 가지 시선.
영체인 상태로 그의 어깨에 올라타 있던 미호가 입가를 가리며 쿡쿡 웃어 댔다.
- 인기가 많아서 좋겠구나, 인간.
'귀찮아질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진현우는 혀를 찼다.
첫 번째 투기장에서는 굳이 플레이어들끼리 싸울 필요는 없다. 카오틱들도 소환되니까 놈들을 죽여서 생존하는 것도 하나의 방책.
하지만.
'다음 투기장을 생각하면 귀찮아질 것 같은 놈들은 여기서 제거하는 것도 방법이다.'
그것 말고도 또 하나의 방법이 있다.
"어이, 동양인."
남자 마법사가 진현우에게 다가왔다.
가까이 다가오자 고급스러운 로브 안에 감춰진 얼굴이 드러났다. 마법사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흉터로 가득한 얼굴이 보였다.
"네 이름이 진현우라던데, 맞나?"
"맞는데, 뭐 할 말이라도 있나?"
"흠."
마법사가 인상을 찌푸렸다.
반말을 하는 게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다.
"난 휴즈다. 동양인, 네 실력이 좋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그 실력을 믿고 제안하고 싶다만, 나와 팀을 짤 생각은 없나?"
"팀이라...."
또 하나의 방법이 이것이다.
귀찮아질 것 같은 놈과 처음부터 동맹을 맺고 시작하는 것. 물론 상대를 잘 봐야 한다.
신의가 없는 놈이면 의미가 없으니까.
"거절하지. 혼자 움직이는 게 편해서."
"...나와 팀을 맺지 않겠다고?"
마법사, 휴즈는 자신의 제안을 거절했다는 걸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진현우는 그를 무심한 눈으로 봤다.
"누군지 모르는 사람하고 팀을 맺을 바에는 혼자 움직이는 게 더 낫지 않나?"
"누군지도 몰라? 나를?"
"그래."
휴즈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78위의 랭커인 자신을 모른다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그런데 뭘 어쩌겠는가.
'진짜로 모르겠는데.'
전생에서는 아마 대전쟁이나 그 이전에 죽었던 랭커일 것이다. 그런 랭커들까지 하나하나 기억할 정도로 기억력이 좋지는 않다.
휴즈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촌 동네 동양인이라서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 건가? 어이가 없군."
"내가 네가 누군지 알아야 하나?"
"하!"
휴즈는 다시금 어이가 없다는 듯이 실소를 터트리더니, 천천히 물러났다.
"그 판단, 후회하게 될 거다."
"어, 그래. 제발 후회하게 만들어 줘."
"...."
휴즈가 뭐라고 하든 그와 팀을 맺을 생각은 없었다. 누군지 모르는 플레이어였으니까.
신뢰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 흠, 인간. 널 보는 사람들이 많구나.
'알아. 근데....'
대기실의 플레이어들은 진현우를 지켜보면서, 휴즈와 나눈 대화를 듣고 있었다.
근데 몇몇의 눈빛이 마음에 걸렸다.
'날 노리는 놈들이 있는 것 같은데.'
- 나도 그 말을 하고 싶었느니라. 뭔가 눈빛이 탐욕스럽다고 해야 하나. 널 직접적으로 해치려는 것은 아닌 것 같다만....
'투기장에 들어가 보면 알겠지.'
여차하면 처리하면 될 일이다.
그리고 이내 30분이 지났다.
- 드르르륵!
- 콜로세움의 문이 열렸습니다. 두려움을 잊고, 신들 앞에서 용맹을 증명하십시오.
닫혀 있던 콜로세움의 문이 열렸다.
플레이어들은 긴장 어린 얼굴로 하나둘씩 문을 나섰다. 기나긴 복도가 이어졌다.
그리고 그 복도를 벗어나자.
- 와아아아아아!
- 휴우우우!
엄청난 함성이 플레이어들을 반겼다.
진현우는 강렬한 빛에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것도 없는 백색의 방이 가장 먼저 보였다.
그다음으로는 가득 찬 관중석이 보였다.
"저 관중들은 또 뭐야?"
콜로세움의 관중석에는 온갖 종족이 있었다. 인간, 드워프, 심지어는 오크 같은 몬스터까지. 그들이 투기장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그것도 열렬히 환호하면서.
"허, 동물원 원숭이라도 된 기분이네."
"여긴 올 때마다 불쾌하다니까."
플레이어들이 투덜거렸다.
그리고 저 너머의 문이 열렸다. 거기서 나타난 것은 플레이어와 비슷한 숫자의 카오틱들.
두 무리의 시선이 서로 교차했다.
"망할 카오틱 새끼들."
"난 저놈들만 죽일 거야."
플레이어들이 중얼거렸다.
저 너머에 있는 카오틱들도 아마 비슷한 말을 중얼거리고 있지 않을까 싶었다.
- 인간, 내 기분 탓이냐? 뭔가....
'저놈들도 날 쳐다보네.'
카오틱들의 상당수가 진현우를 응시했다.
시선이 느껴져서 피부가 따가울 정도였다. 진현우는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누가 수작을 부린 모양이군.'
그것도 플레이어, 카오틱 양쪽으로.
자세한 사정은 나중에 파악하는 수밖에.
- 첫 번째 투기장의 전장이 구축됩니다.
열렬한 환호 속에서, 아무것도 없던 새하얀 백색의 방이 밝은 빛으로 물들었다.
그 빛이 사그라들었을 때, 진현우는 여러 기둥과 쇠창살이 있는 방에 서 있었다.
- 생존자의 3분의 1만이 남을 때까지 싸우고, 생존하십시오. 당신을 주목하는 신이 생길 때까지 최선을 다하여 싸우십시오.
방에 있는 것은 진현우만이 아니었다.
그 말고도 소수의 플레이어, 그리고 다수의 카오틱들이 소환됐다. 카오틱들은 진현우를 보면서 씨익 웃더니 제각기 무기를 꺼냈다.
"이거 운이 좋군."
"흐흐, 타깃하고 같은 방이 걸릴 줄이야."
"흐으으음...."
다른 플레이어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카오틱들은 오직 진현우만 의식하고 있었다.
플레이어들도 그걸 눈치챘는지, 살아남기 위해서 진현우와 거리를 벌리기 시작했다.
- 건투를 빕니다.
그 목소리를 시작으로 사방에서 함성과 마법, 무기가 맞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다른 방에 소환된 이들이 싸우는 것이다.
진현우가 있는 방도 마찬가지였다.
"저 새끼 포위해! 저놈만 죽이면 돼!"
"운이 없구나, 진현우! 하필이면 우리, 카오틱이 많은 방에 갇히게 됐으니까 말이야!"
카오틱들이 마력을 일으켰다.
그들의 무기에 수많은 스킬이 어렸다. 모두 진현우를 향해 쏘아질 스킬들이었다.
"아니, 너희가 나하고 갇힌 거야."
진현우는 코웃음을 치며 검을 쥐었다.
156화
신들의 투기장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