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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화

이제 좀 자자

- '수도 헤이시스'를 탈환했습니다. 엘프 여왕이 오염된 샘을 정화했습니다. 세계수의 샘이 세계수가 힘을 찾는 걸 돕습니다....

수도 헤이시스를 탈환했다.

그 메시지는 전장에 있던 모든 플레이어의 눈앞에 나타났다. 메시지를 본 플레이어들은 처음에는 눈을 의심했다가, 이내 경악했다.

"헤, 헤이시스를 탈환했다고?"

"그게... 가능한 거였어?"

수도 헤이시스를 탈환하는 건 불가능하다.

탑 3층에 먼저 왔었던 유명 랭커들 그리고 대형 길드가 내린 결론이었다. 설령 가능한다고 한들 막대한 희생을 치러야만 할 것이다.

그런데 그걸 탈환했다니.

"대체 누가?"

모두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때.

- 세계수가 다시 활동합니다.

파아아앗!

세계수에게서 청록색으로 된 거대한 빛의 기둥이 솟구쳤다. 하늘 끝에 도달한 기둥이 부서졌고, 사방으로 청록색 빛이 흩어졌다.

그 빛이 거대한 장막을 이루었다.

- 키아아아아악!

- 안 돼! 세계수가! 모, 몸이... 크아악!

마족을 접근하지 못하게끔 하는 세계수의 장막이 대륙 전역에 펼쳐진 것이었다.

수많은 마족이 고통에 찬 비명을 토했다.

지켜보던 카오틱들이 당황했다.

"자, 자인 님. 장막이...."

"헤이시스가 탈환당했다고? 대체 무슨, 헤이시스에는 대악마 헬만이 있잖아! 왜!"

"대, 대악마가 죽은 것 같습니다."

카오틱들의 수장, 자인이 넋을 잃었다.

헤이시스를 빼앗겼다는 것은 대악마 헬만이 죽었거나, 그에 준하는 상태가 됐다는 것.

그리고 아마도 그걸 한 것은.

'진현우, 그놈이... 설마.'

그 말고는 없다.

자인은 몸을 떨었다. 어서 이곳에서 탈출해야 한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수장을 잃은 마족들은 싸울 수 없는 상태다. 이 전장에 더 이상의 승산은 없다.

- 키하아아아아아!

"하."

하나 이미 늦었다.

자인은 저 너머에서 몰려드는 몬스터를 봤다. 그 선두에 있는 거대한 히드라도.

그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게 자인의 마지막 유언이었다.

잠시 후, 처절한 비명이 사방을 울렸다.

* * *

수도 헤이시스의 전투는 얼마 지나지 않아 끝났다. 대악마 헬만이 죽으면서 마족들은 사기를 잃었고, 제대로 싸우지를 못했다.

진현우는 언데드들로 놈들을 막았다.

"진현우! 샘을 정화했습니다!"

엘프 여왕을 돕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엘프들과 함께 왕궁으로 들어갔고, 마기로 오염된 세계수의 샘을 정화했다.

대악마 헬만이 마기로 오염시켜서 자신의 힘을 되찾는 용도로 쓰고 있던 샘이었다.

"세계수의 샘은 수많은 영혼이, 생명력이 흐르는 곳입니다. 이걸 정화한다면 세계수가 금방 힘을 되찾을 수 있을 거예요."

목적은 세계수를 회복시키기 위해서.

그런데 여왕의 생각보다 효과가 더 좋았다.

- 세계수가 다시 활동합니다.

- 파아아앗!

샘의 도움을 받은 세계수가 금방 힘을 회복했고, 대륙 전역에 장막을 펼쳤다.

그게 기회였다.

"지금 다 죽이면 되겠네."

- 크하아아악!

진현우는 언데드 군단을 시켜서,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지르는 마족들을 공격했다.

그건 일방적인 학살이나 다름없었다.

"좋아, 그럼...."

- '약탈' 옵션을 사용합니다.

언데드 군단과 함께 마족들을 모조리 처리한 진현우는 갑옷의 옵션, 약탈을 썼다.

죽은 이들의 생명력이 흡수되었다.

지친 몸에 생기가 돌아오는 게 느껴졌다.

"살아 돌아와서 다행이구나, 인간. 난 네가 살아 돌아올 것이라고 믿고 있었느니라!"

"그런 놈이 내 정기를 먹으려고 해?"

"그, 그거언... 응? 인간. 네 갑옷이...."

"갑옷?"

진현우의 곁에 착 붙어서 아양을 떨던 미호가 그가 입은 갑옷을 가리켰다.

콰드득! 불길한 소리가 들렸다.

"어?"

진현우의 갑옷에서 나는 소리였다. 그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걸 느끼면서 갑옷을 봤다.

콰직, 콰지직! 갑옷이, 부서지고 있었다.

- '폭정의 상징'과 '폭군의 진노'에 깃들어 있던 폭군의 힘을 모두 소진했습니다.

- '검은 기운' 옵션이 제거됩니다. '폭정의 상징'과 '폭군의 진노'가 파괴되었습니다.

"아니, 이건...."

말 안 해 줬잖아.

대악마와의 전투에서 걸레짝이 됐던 갑옷이 더는 버티지 못하고 파괴되었다.

투구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또 하나.

- 강한 마기와의 전투로 인해 '마르실의 성검'이 가진 신성력이 고갈되었습니다. 한계에 달한 '마르실의 성검'이 파괴되었습니다.

"진짜 미치겠네."

마르실의 성검까지 파괴되었다.

진현우는 이마를 짚었다. 대악마를 상대로 영웅 등급 아이템이 잘 버텼다고 해야 할까.

투척하고 허벅지에 꽂고 별짓을 다 했으니.

"인간, 왜 갑자기 발가벗고 그러느냐."

"진짜 죽을래?"

"끄으응...."

순식간에 발가벗은 꼴이 됐다.

진현우는 한숨을 푹 내쉬면서 주변에 있던 아이템들을 대강 챙겨 몸을 가렸다.

그런 그에게 엘프들이 달려왔다.

"은인이시여! 괜찮으십니까?"

"몸은 괜찮습니다. 몸은 괜찮은데...."

진현우는 시무룩하게 장비들을 바라봤다.

대악마 헬만과의 전투는 생사를 오가는 격전이었다. 만약 폭군 세트의 옵션이 없었더라면 그대로 죽었을 정도로 치열한 전투였고.

그 치열함이 장비에 그대로 묻어났다.

"왜 갑자기 발가벗고 계십니까?"

"누군 벗고 싶어서 벗은 줄 압니까? 장비가 다 부서져서 그럽니다, 다 부서져서."

"아, 그건... 죄송합니다."

아드네아가 놀라서 사과했다.

척 보기에도 귀해 보이던 갑옷이 파괴됐으니 그럴 수밖에. 진현우는 손을 내저었다.

"목숨값이라고 생각해야죠. 이 갑옷이 아니었으면 진작에 죽었을 테니까요."

"어떻게 그런 약을 먹고 다시 살아났나 했더니, 그 갑옷 덕분이었군요, 진현우."

"예."

진현우는 주변의 바닥을 둘러봤다.

완전히 짓이겨진 헬만이 삼켜진 곳의 바닥에 아이템 두 개가 떨어진 것이 보였다.

그걸 줍자 메시지가 나타났다.

- '대악마 헬만'을 토벌했습니다.

-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에픽 퀘스트 '악과의 대전쟁'을 완수했습니다. 퀘스트에 참가한 플레이어들에게 보상이 주어집니다.

- 최소한의 피를 흘리면서 최적의 방법으로 퀘스트를 완수했습니다. 당신의 퀘스트 공헌도를 계산합니다....

- 공헌도 81%를 달성했습니다!

빰빠밤!

맥 빠지는 팡파르 소리가 들렸다.

- 엄청난 공헌을 했습니다. 엘프 여왕이 당신에게 합당한 공헌도를 하사할 것입니다. 생명의 전당으로 가서 확인하십시오.

- 70레벨에 도달했습니다. 상위 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최소 레벨을 달성했습니다.

- 섬광을 제외한 모든 스킬의 숙련도가 상승했습니다. 일부 스킬의 숙련도가 레벨 5에 도달하여 새로운 효과가....

진현우는 계속 뜨는 메시지를 치웠다.

지금은 메시지들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는 지친 듯 숨을 내뱉으며 아이템들을 챙겼다.

"후우...."

진현우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잔뜩 껴 있던 먹구름은 사라졌다. 그 사이로 청록색의 빛이 가루처럼 떨어지는 게 보였다.

그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다음 층들은 빠르게 끝낼 수 있는 층들이니까 조금은 쉽게 갈 수 있겠지.'

2층, 3층.

둘 다 너무 힘든 과정을 거쳤다. 사실 쉽게 가려면 쉽게 갈 수는 있었겠지만.

다행히도 이다음 층부터는 그럴 필요가 없는 층들이라서 빠르게 오를 수 있을 것 같다.

"그래도 뭐."

폭군의 효과로 상처가 회복되기는 했으나 몸이든 정신이든 지칠 대로 지친 상태.

진현우는 하늘을 보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나름 보람은 있네."

조금 전부터 참을 수 없는 충동이 몰려왔다. 진현우는 더는 참지 않고 땅에 드러누웠다.

'이제 좀 자자.'

놀라서 달려오는 이들의 발소리를 들으면서, 진현우는 수마에 몸을 맡겼다.

* * *

전쟁은 끝났다.

마족의 침공으로 시작됐던 하이아칸 대륙의 전쟁은 엘프의 승리라는 형태로 끝났다.

그것도 여태 없던 규모의 승전보를 울리며.

- 크아아악!

- 에, 엘프 놈들... 여기까지!

그리고 그동안 엘프들은 대륙에 남은 마족들을 절멸하는 작업에 임하고 있었다.

라시드는 활의 시위를 당겼고, 마지막으로 남은 마족의 머리가 화살에 꿰뚫렸다.

"대장님! 마지막 거점에 남아 있던 마족들을 토벌했습니다. 이제, 남은 마족은 없습니다."

"그래...."

살아남은 마족들은 도망치지 못했다.

마계로 돌아갈 방법이 없으니 도망칠 수가 없었다. 놈들은 그나마 장벽의 영향이 덜한 거점으로 도망갔고, 그게 놈들이 무덤이 됐다.

"빌어먹을 놈들. 네놈들 때문에 얼마나 많은 동족이... 후우. 카오틱 놈들은?"

"수뇌부들은 처리했습니다. 다른 놈들은 헤이시스를 탈환한 순간 도망친 것 같습니다."

"흥, 의리라고는 전혀 없는 놈들이군."

아드네아의 보고에 라시드가 코웃음을 쳤다. 동시에 뭐라 하기 힘든 감정이 느껴졌다.

"마족도, 카오틱들도 없다. 전쟁이 끝났다는 거겠지. 정말로 전쟁이 끝날 줄이야...."

드높은 나무에 오른 라시드는 지상을 돌아봤다. 마족이 침공하기 전과 비교하면 너무도 황폐해진 자연의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이제 마족은 없다.

'이 숲도, 금방 회복할 거다.'

라시드는 자연의 생명력을 믿었다.

그는 자연스레 어떤 이의 얼굴을 떠올렸다.

"진현우, 그 남자에게 감사해야겠군."

하이아칸 대륙에 남은 마족이 절멸되었고, 카오틱이 사라졌다는 소식은 여왕에게도 전해졌다. 소식을 들은 여왕은 크게 기뻐했다.

"이런 날이 올 줄 누가 알았을까요?"

모든 엘프가 그렇게 생각했다.

마족들의 기습에 처참히 패배한 채로 도망쳤고, 그 뒤로도 계속 마족들에게 당했다.

수도 헤이시스를 복구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생존하는 게 문제였으니까.

그런데 이런 날이 오다니.

'수도의 복구는... 오래 걸리겠군요.'

수도 헤이시스의 상태는 엉망이었다.

한동안 피난처 베카샤를 오가면서 헤이시스를 복구하는 작업을 진행하는 수밖에.

그녀는 흘깃 근방에 있던 천막을 봤다.

"그분은 아직 주무시고 계신가요?"

"예, 여왕님. 약사들이 집중적으로 관리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피로 때문이라고 합니다."

"다행이군요."

엘프 여왕은 이 상황을 누가 만든 것인지 잘 알았다. 진현우, 그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

그리고 그녀는 은혜를 갚을 줄 알았다.

"흠...."

여왕이 손아귀의 엘프 휘장을 바라봤다.

진현우의 휘장이다. 잠깐 생각하던 그녀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그의 공헌도를 책정했다.

휘장이 빛을 내뿜었다.

"전당의 이름이 갱신되겠군요. 진현우가 일어나거든 전당으로 가라고 해 주세요. 엘프의 영웅이니 극진하게 대접해야 합니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1위에 이름을 올렸던 남자가 분노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며, 여왕은 등을 돌렸다.

"세계수의 곁으로 돌아간 동족들의 명단을 추려 주세요. 기쁜 날이지만, 이 기쁜 날을 위해 희생한 이들을 잊을 수는 없으니."

"알겠습니다, 여왕님."

여왕의 머릿속으로 지금껏 겪었던 일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많은 동족의 죽음도.

그녀는 슬피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 3층, 하이아칸 대륙. 오랫동안 이어져 온 엘프와 마족 간의 전쟁이 끝나다.

- 최후의 승자는 엘프. 현재 엘프는 남은 마족들을 처리하는 과정에 있으며....

하이아칸 대륙의 전쟁이 끝났다는 소식은 탑 바깥, 플레이어들에게도 전해졌다.

"아니, 진짜로?"

"그 층에서 마족들을 다 몰아내는 게 가능한 거였어? 그거 제우스 길드도 못 했잖아."

처음 소식을 접한 사람들은 믿지 못했다.

대형 길드조차도 포기하고 공헌도만 챙긴 채 올라가지 않았던가. 그 정도로 하이아칸 대륙의 전쟁은 까다롭고, 불리한 전쟁이었다.

그런 전쟁에서 대승을 거두었다니.

"대체 누가?"

모든 사람이 의아해했다.

아직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자세한 상황은 알려지지 않은 상황이었다.

호기심을 가진 사람들이 3층으로 몰렸다.

"끄으으으응...."

그리고 그로부터 며칠 뒤.

"아오, 무거워서 죽겠네! 좀 비켜!"

"캬아아앙! 너, 너무하구나, 인간!"

누가 전쟁을 끝냈는가.

많은 사람이 궁금해하는 대상이자, 화제의 중심이 된 진현우가 잠에서 깨어났다.

139화

생명의 전당

진현우가 깨어난 것은 전쟁이 끝나고 정확하게 일주일이 지난 시점이었다.

여우 형태의 미호가 얼굴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불쾌한 형태의 기상이었다.

"너무하구나, 정말로 너무하구나, 인간. 추울까 봐 붙어서 몸을 데워 준 것이거늘...."

"데워 준다는 놈이 얼굴에 붙어서 자냐?"

어느새 소녀의 형상으로 바뀐 미호가 얼굴을 가리면서 엉엉 울었다.

당연하지만 가짜 울음이었다.

"됐고, 내가 자는 동안 뭔 일 있었어?"

"별일 없었느니라. 그대를 왕궁으로 옮기고, 마족들을 처리하고. 아! 그리고 그대와 비슷한 인간들이 이곳으로 많이 몰렸더구나."

"비슷한 인간? 플레이어들?"

"그렇게도 부르지."

미호가 준 정보들을 머릿속으로 조합한 진현우는 코웃음을 쳤다.

콩고물이 떨어질까 봐 몰려든 모양이다.

그는 주변을 돌아봤다.

"방 한번 더럽게 넓군."

"왕궁의 방이니라. 그 여왕이 널 배려해서 제일 좋은 방으로 내줬다고 들었다."

"음, 이 정도면 뭐... 제일 좋긴 하네."

진현우가 있는 곳은 넓은 방이었다.

그가 깨어나자 바깥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엘프들이 들어왔다. 그중에 하나, 진현우에게 반가운 얼굴의 엘프가 섞여 있었다.

"여행자, 정신이 좀 들어?"

"이리샤."

이리샤였다.

그녀가 해맑은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일주일 동안 잠만 자길래 걱정했어. 뭐, 치유사들 말로는 별문제가 없다고는 했지만."

"어, 몸 상태는 괜찮아."

"다행이야."

이리샤가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잡고 일어난 진현우는 창문으로 향했다. 창문 너머로 바깥의 풍경이 보였다.

"여긴...."

"헤이시스야. 아직 좀 황폐하지?"

"음."

피난처 베카샤의 왕궁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진현우가 있는 곳은 헤이시스였다.

한때는 아름다운 자연이 있었으나 마족이 점령하면서 그 아름다움을 잃어버린 수도.

근데.

"생각보다 회복이 빠른데?"

헤이시스의 상태가 꽤 괜찮았다.

마기로 완전히 파괴되었던 자연도 어느 정도 회복되었고, 파괴된 건물도 마찬가지였다.

이리샤가 헤이시스의 중심부를 가리켰다.

거기에는 작은 묘목이 있었다.

"세계수의 묘목이야. 베카샤에서 헤이시스로 이전하고 있는 거지. 지금은 작지만, 일주일 이내로 베카샤의 것처럼 성장할 거야."

"성장 속도 한번 더럽게 빠르네."

"세계수니까."

간단하게 말해서.

세계수가 여기에 들어서면서 파괴되었던 자연이 빠르게 회복되고 있다는 말이었다.

'세계수라....'

진현우는 헬만과의 전투를 떠올렸다.

마지막에 엘프 여왕에게 중추석을 받아서 화살을 쐈을 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었다.

- 아니, 이것이 네 미래다.

따사로우면서도 차갑던 목소리.

어쩌면 세계수의 목소리였을지도 모른다.

"음...."

묘목을 바라보던 진현우는 메시지들이 시야 한구석을 가리고 있는 것을 인지했다.

달성한 업적에 대한 메시지들이었다.

-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하이아칸 대륙을 침공한 자, 대악마 헬만을 죽일 것.

- 보상으로 전설 등급 칭호 [대악마를 죽인 자 (효과: 모든 능력치 +25, 마족과 마인에게 주는 대미지 +20%)]를 획득했습니다.

전설 등급 칭호였다.

보상도 화끈하기 그지없었다. 마족과 마인에게 주는 대미지를 20%나 올려 줄 줄이야.

앞으로 두고두고 써먹을 수 있는 옵션이다.

그리고 또 하나.

"맞다, 인간. 이것들을 보거라. 네가 챙겨 놓고 기절했길래 따로 보관해 둔 것들이니라."

"아, 이거."

미호가 두 아이템을 건넸다.

하나는 창, 또 하나는 불길한 핵이었다.

[마창 (전설)]

· 설명: 대악마, 헬만이 자신의 권능으로 만들어 낸 마창이 유품의 형태로 남은 것. 강력한 마기가 흐르고 있다. 평범한 사람은 착용하는 것만으로도 마기에 잠식될 것이다.

· 착용 제한: 마족과 마인 혹은 강력한 마기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자.

· 옵션: 잠식, 부식, 압도.

· 스킬: 분열하는 악의.

* 잠식: 착용자의 팔을 잠식한다. 착용하면 대미지가 최대 70%까지 점차 강화되며, 모든 능력치가 최대 30%까지 향상된다. 하지만 오래 착용할 경우 신체에 악영향을 미친다.

* 부식: 지독한 마기가 적중한 적의 상처를 쉽게 회복하지 못하게끔 만들며, 부식 디버프가 누적될 경우 속도를 크게 저하시킨다.

* 압도: 마창에 깃든 대악마의 잔재가 주변의 적들을 압도하여 신체 능력을 저하시킨다.

* 분열하는 악의: 분열하는 마창을 투척한다. 사용한 마력의 양에 따라 숫자가 달라진다.

[거악의 마핵 (전설)]

· 설명: 대악마, 헬만의 정수가 담겨 있는 마핵이다. 지독한 마기와 독기로 물들어 있지만, 사용한다면 큰 힘과 스킬을 얻을 수 있다.

하나 마기와 독기에 대한 저항력이 없는 사람이 복용할 경우, 사망할 가능성이 있다.

· 효과: 알 수 없음.

헬만이 드롭한 아이템들이었다.

진현우는 마창을 붙잡았다. 그러자 마창에서 검은 촉수 같은 것들이 튀어나오더니 팔에 달라붙었다.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

"더럽게 기분 나쁘네."

"대악마가 쓰던 물건이지? 그냥 처분하는 게 어때? 사람이 쓸 물건은 아닌 것 같은데."

"아니, 놔두면 어딘가 쓸데가 있겠지."

진현우는 마창을 아공간에 넣었다.

흑뢰의 회동으로 마기에 대해 강한 저항력을 가지고 있는데도 이 정도일 줄이야.

하지만 메리트는 확실하다.

'거악의 마핵... 이건 그냥 써야겠다.'

잠깐 생각하던 진현우는 마핵을 사용했다.

타르처럼 까맣고 질척거리던 마핵이 녹아내리면서 그의 몸에 흡수되었다. 이리샤와 미호가 기겁했지만, 순식간이라 말릴 새도 없었다.

- 거악의 마핵을 흡수합니다. 지독한 독기와 마기가 당신의 몸을 침범합니다....

- 만독불침 (S)이 독기에 저항했습니다!

- 흑뢰의 회동 (전설)이 마기에 일부 저항했습니다. 남은 마기가 당신을 덮칩니다.

거악의 마핵에 담긴 마기는 흑뢰의 회동으로 다 저항할 수 없을 정도로 지독했다.

하지만 못 버틸 정도는 아니었다.

진현우의 온몸에 핏줄이 떠올랐다. 마기 때문에 새까맣게 물든 핏줄이 기괴해 보였다.

"이, 일어나자마자 뭐 하는 거야! 여행자!"

"인간, 넌 정말로 대단한 놈이로구나. 죽다가 살아났으면서 바로 이런 짓을 할 줄이야."

"걱정 마, 안전하니까."

이리샤가 기겁했고 미호가 감탄했다.

하지만 진현우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별 부담이 안 될 거라고 판단해서 사용한 거니까.

그리고 그 판단이 옳았다.

- 당신의 몸에 흐르던 마기가 사그라듭니다.... 거악의 마핵을 완전히 흡수했습니다!

- 새로운 능력치, 마기가 생성되었습니다.

- 특성: 마핵 (S)을 새로이 익혔습니다.

진현우의 눈이 동그래졌다.

새로운 능력치가 생성되었다는 메시지. 이건 그도 예상치 못한 결과물이었다.

그는 상태창을 열었다.

[진현우]

· 레벨: 70

· 클래스: 웨펀 마스터

· 칭호: 대악마를 죽인 자

· 근력: 243 (+20) · 민첩: 218 (+20)

· 체력: 220 (+25) · 마력: 161 (+12)

· 마기: 70

마기 능력치가 생긴 것이 보였다.

진현우는 능력치의 설명을 읽으면서, 새로 생긴 특성 마핵이 가진 효과를 확인했다.

· 마기: 악마의 힘을 다룰 수 있는 능력. 높을수록 마기 보유량이 늘어나며, 마기와 관련된 공격과 스킬에 이로운 효과가 추가된다. 마기는 능력치를 투자할 수 없고, '모든 능력치가 상승하는' 옵션의 효과를 받지 않는다.

· 마핵 (S): 당신의 몸에 마핵이 자리 잡았다. 이 마핵의 힘으로 당신이 죽인 마인이나 마족에게서 마기를 흡수할 수 있다. 또한 마기에 대한 저항력이 크게 증가한다.

진현우는 입가를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간단하다.

'마족이나 마인을 죽여야지만 마기 능력치를 올릴 수 있다는 거군.'

다른 방법으로는 올릴 수가 없다.

아쉽기는 하지만, 크게 나쁘지는 않다.

'어차피 마인은 자주 만나게 될 테니까.'

앞으로 더더욱 그렇다.

진현우는 상태창을 껐다. 처음에는 뭔가 싶었지만, 이 정도면 만족할 만한 보상이다.

"여, 여행자. 괜찮아? 다 끝났어?"

"어. 말했잖아, 안전하다고."

"그럼 다행인데... 무모한 짓 좀 하지 마."

이리샤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휴우, 아무튼. 여왕님이 네가 깨어나거든 데리고 가라고 하신 곳이 있어. 지금 바로 갈까 하는데, 움직이는 데 별 지장은 없지?"

"어. 바로 가자."

"좋아."

어느새 여우의 형태로 바뀐 미호가 진현우의 어깨 위로 올라탔다.

그는 이리샤와 함께 방을 나섰다.

* * *

진현우와 함께 왕궁을 떠난 이리샤가 향한 곳은 세계수의 묘목이 있는 곳이었다.

정확히는 그 근처에 있는 광장.

묘목은 엘프 수색대, 그중에서도 가장 정예인 이들이 지키고 있기에 접근할 수가 없었다.

- 인간, 인간. 사람이 굉장히 많구나.

"응, 오늘이 그날이거든."

- 그날이라고?

미호의 말에 대답한 건 이리샤였다.

녀석의 말대로 광장에는 굉장히 많은 플레이어가 모여 있었다. 베카샤도 비슷한 상황일 것이다. 그 이유를 진현우는 알고 있었다.

"후후, 저것 봐. 보여? 저기 있는 게시판."

광장 한복판에 커다란 게시판이 있었다.

나무를 엮어서 만든 게시판. 광장에 모인 플레이어들은 모두 그 게시판을 보는 중이었다.

"생명의 전당이야. 전쟁이 끝나면, 지금까지 큰 공헌을 한 사람들을 기록해서 기리는 곳이지. 당연하지만 그에 맞는 보상도 있고."

생명의 전당.

거창한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그 기능은 간단하다. 하이아칸 대륙에서 높은 공헌도를 달성한 이들을 기록하기 위한 전당이었다.

진현우는 게시판에 다가갔다.

"어? 야, 저기. 저 사람!"

"진현우 아냐? 맞지? 맞는 거 같은데?"

"그러니까 저 사람이 이번 전쟁을...."

그를 인지한 플레이어들이 웅성거렸다.

진현우는 그에 개의치 않고 걸어갔다. 게시판, 생명의 전당에 기록된 내용이 보였다.

거기 적힌 것은 플레이어들의 순위.

하이아칸 대륙에서 높은 공헌도를 거둔 플레이어들의 이름이 전당에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중 가장 높은 곳에.

[생명의 전당]

1. 진현우 (공헌도: 71,500)

2. 유신 (공헌도: 34,200)

3. 윤서희 (공헌도: 27,600)

4. 아벨루스 (공헌도: 23,000)

5. ....

진현우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그는 바로 아래에 있는 이름을 확인했다.

'유신.'

5대 길드.

그중에서도 가장 선두에 있으며, 최고의 길드라고 꼽히는 제우스 길드.

그 길드장의 이름이 유신이다. 그런 길드장보다 더 높은 곳에 이름을 새긴 것이다.

"진짜로 1등이라고?"

"공헌도가 유신의 두 배잖아? 저게 가능해?"

"가능하지. 수도 헤이시스 탈환은 저 사람하고 엘프 여왕이 협력해서 한 거라던데."

플레이어들이 웅성거렸다.

그럴 만도 했다. 기존의 1위였던 유신의 두 배를 넘는 공헌도로 1위를 달성했으니까.

진현우가 이곳에서 한 것들을 생각하면 지극히 당연한 공헌도라고도 볼 수 있었다.

- 위업을 달성했습니다: 하이아칸 대륙의 전쟁을 끝내고 엘프 진영을 승리시킬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가장 큰 공헌을 할 것.

그리고 그 보상이 주어졌다.

- 보상으로 특성: 세계수의 축복 (S)을 새로이 얻었습니다. A등급 스킬 하나를 승급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집니다.

· 세계수의 축복 (S): 세계수의 축복을 받았다. 숲에 있을 때 모든 능력치가 30% 상승한다. 정령에 대한 감응도가 크게 상승한다.

보상을 확인한 진현우는 혀를 내둘렀다.

'하루 만에 S등급 특성이 두 개라.'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는 보상이었다.

140화

할타릿산

71,500.

여태껏 3층에 나타난 적이 없는 공헌도다.

사람들은 그런 공헌도를 달성한 진현우를 놀란 눈으로 보면서, 동시에 기대감을 품었다.

'저 정도 공헌도면 무슨 보상을 줄까?'

'유신이 34,200 공헌도를 달성하고 엄청 좋은 아이템을 얻었다던데. 저건 그 두 배잖아.'

'와, 71,500이 말이 되나....'

진현우도 사람들의 기대감을 느꼈다.

그는 눈앞에 나타난 메시지를 봤다.

- 충분한 공헌도를 달성했습니다. 상위 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권한을 획득했습니다.

지극히 당연한 메시지다.

이 정도 공헌도를 달성하고도 못 올라가면 그게 문제니까. 중요한 건 이게 아니다.

"축하드립니다, 진현우 님."

"여왕님."

어떤 보상을 얻느냐지.

저 너머에서 수백에 달하는 엘프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순식간에 광장에 질서를 가져왔고, 귀인을 안전하게 안내했다.

엘프 여왕이었다.

"깨어나기를 기다렸습니다. 오랫동안 주무시더군요. 물론, 그럴 만한 일을 해내셨지요."

"핀잔을 주시는 건 아니겠죠?"

"설마 그러겠습니까."

엘프 여왕이 따사로운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마음은 은인을 향한 감사로 가득했다.

"공헌도는 확인하셨습니까?"

"겸손을 떨자면, 생각보다 잘 나왔더군요."

"그럼, 겸손 없이 말한다면요?"

"제 생각대로 나왔습니다. 그 정도 공헌도를 받을 정도의 일들을 했다고 생각해서요."

엘프 여왕이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맞습니다. 진현우, 그대가 한 일은... 이 대륙에, 엘프의 역사에 남을 위업입니다. 지나친 겸손은 자기를 낮추는 것처럼 보일 뿐이죠."

그녀가 뒤를 향해 손을 내저었다.

곁에 있던 라시드가 큰 상자를 내려놨다.

"영웅의 노고를 보상할 방법이 무엇이 있겠냐마는, 그대의 장비가 파괴된 것이 마음에 걸리더군요. 상자를 열어 보시겠습니까?"

"예."

진현우는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 든 것은 가죽으로 된 갑옷이었다. 척 봐도 비범한 가죽을 쓴 걸로 보이는 갑옷.

[수호자의 갑옷 (전설)]

· 설명: 먼 과거, 수호자라고 불리었던 엘프가 쓰던 갑옷이다. 신수가 선물한 가죽으로 만들어졌다. 갑옷 표면에 마력이 감돌고 있다.

· 착용 제한: 엘프의 허가를 받은 자.

· 옵션: 방어막, 적응, 신수의 힘.

· 스킬: 엘프의 수호자.

* 방어막: 갑옷 표면에 얇지만 튼튼한 방어막이 흐르고 있다. 일시적으로 마력을 불어넣어 원하는 부위의 방어막을 강화할 수 있다.

* 적응: 모든 종류의 상태 이상에 강한 저항력을 가지며, 어느 환경에서든 적응한다.

* 신수의 힘: 모든 능력치가 +20 강화된다.

* 엘프의 수호자: 특수한 방어막을 전개하여 착용자에게 닥치는 공격을 요격한다. 많은 마력을 소비하여, 재사용 대기 시간이 있다.

갑옷을 확인한 진현우는 속으로 감탄했다.

폭정의 상징 못지않게 좋은 갑옷이다.

"수도 헤이시스의 보관고에 있던, 수호자라 불렸던 선조께서 쓰셨던 갑옷입니다. 이게 파괴된 갑옷을 대신할 수 있었으면 좋겠군요."

"감사히 쓰겠습니다."

"예, 그리고...."

여왕이 위를 올려다봤다.

진현우도 뭔가에 홀린 듯 하늘을 봤다. 아무도 없는데, 누군가 지켜보는 듯한 기분이다.

그건 기분 탓이 아니었다.

"세계수가 맡긴 물건이 있습니다."

여왕이 오래된 팔찌를 건넸다.

어딘가 강한 힘이 느껴지는 팔찌였다.

[맹약의 증거 (전설)]

- 설명: 엘프의 선조가 어떤 정령왕과 맺었던 맹약의 증거다. 이 증거를 소지한 자는 맹약에 따라 어떤 정령이든 계약할 수 있다.

· 옵션: 맹약에 따라, 귀속.

* 맹약에 따라: 정령의 범주에 속하는 자는 맹약에 따라 소유자와 계약에 임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기존의 계약은 무시된다.

* 귀속: 획득 시 귀속된다.

정령과 계약하는 데 쓰는 아이템이었다.

"이게 도움이 될 거라더군요."

"그래요?"

진현우는 팔찌를 빤히 봤다.

어떤 의미로는 정령과 '강제로' 계약을 맺을 수 있게끔 해 주는 아이템. 세계수는 이게 그에게 도움이 될 거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건 사실이었다.

'4층을 날로 먹을 수 있겠는데?'

4층의 기믹을 생각하면 가능한 일이다. 진현우는 엘프 여왕이 건넨 팔찌를 받았다.

"감사히 쓰겠습니다."

"그리해 주시면 저희야 고맙지요."

엘프 여왕이 손을 내저었다.

주변을 뒤덮었던 장막이 사라졌다. 모여 있던 사람들이 진현우를 호기심을 가득 담아 바라봤다.

그들의 눈이 갑옷으로 향했다.

'부럽다.'

척 보기에도 귀해 보이는 아이템.

플레이어들의 눈이 부러움으로 물들었다.

"그럼, 진현우. 이제부터 어떻게 할 건가요? 한동안 여기 머무르는 건 어떻습니까?"

"아뇨, 내일 바로 떠날 생각입니다."

"왜? 조금만 더 있다가 가지."

이리샤가 눈에 띄게 아쉬워했다.

"그러고 싶기는 한데, 시간이 없어서. 일주일 정도 쉬었으니 빠르게 움직여야죠."

"그렇군요. 그럼 어쩔 수 없죠."

여왕이 엘프들에게 손짓했다.

"오늘 밤에 연회를 열죠. 떠나는 은인이 만족하실 수 있게 최선을 다해서 준비하세요."

"알겠습니다, 여왕님."

"연회 정도는 괜찮겠죠?"

엘프들의 눈이 진현우에게 몰렸다.

갈 때 가더라도 송별회는 하고 가라는 눈빛. 진현우는 한숨을 삼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거절할 이유가 없군요."

"잘 생각했어, 여행자."

이리샤가 해맑게 웃었다.

그리고 그날 밤, 성대한 연회가 열렸다.

전쟁에 참가했던 이들이 대부분 참석한 연회라서 요란스럽고 떠들썩한 연회였다.

'죽겠다, 진짜.'

수많은 이가 즐긴 연회였다.

감사 인사를 하려고 끝없이 몰려드는 엘프들과 길드 가입 권유를 하는 플레이어들을 상대해야만 했던 진현우를 제외한다면.

* * *

다음 날.

진현우는 탑 바깥으로 나가는 포탈 앞에 섰다. 그의 주변에는 이대건 파티와 하이드 그리고 여왕을 비롯한 엘프들이 함께 있었다.

"이대건 씨는 나중에 올라갈 거라고 했죠?"

"예. 레벨을 좀 더 올리고 갈 생각입니다. 그리고, 흐흐. 진현우 님을 따라가면 뭔가 큰 사건이 터질 것 같아서 말입니다. 좀 쉬려고요."

"큰 사건이 터진다니...."

누가 사건을 몰고 다니는 것처럼.

사실 4층에서 사고를 칠 생각이긴 했지만.

"진현우 님, 잠시."

"예?"

이대건이 진현우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4층으로 올라가실 거면 조심하십시오. 아그니스 길드가 거기 있다고 합니다. 길드장 화련도요.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화련이 4층에 있다고요?"

"예. 길드장님이 전해 달라고 하시더군요."

윤서희의 정보였다.

진현우는 인상을 찡그렸다. 화련이면 7층, 최전선에서 활동할 레벨의 플레이어다.

그런 플레이어가 왜 4층에 있단 말인가.

보정 시스템 때문에 능력치나 스킬이 약해지는 위험성을 부담하며 내려올 이유가....

'가 보면 알게 되겠지.'

지금 생각해 봤자 답을 알 수 없는 문제다.

진현우는 하이드와 눈을 마주쳤다.

"하이드, 너는...."

"쉬면서 엘프의 재건을 도울 생각이다. 언젠가 인연이 닿으면 또 만날 수 있겠지."

"쿨해서 좋네."

진현우는 하이드와 손을 맞잡았다.

대부분 이번 전쟁에서 지친 상황이라 평화로워진 하이아칸 대륙에서 쉴 생각이었다.

단 한 명, 샬럿을 제외하고.

"아흐으, 나... 술을 너무 많이 마셨어...."

"야, 술 냄새 난다. 고개 좀 저쪽으로 돌려."

"너, 너어. 여자한테 못 하는 말이... 우욱!"

샬럿이 입을 틀어막았다.

어제 고래처럼 술을 마신다 싶더라니. 2층에서는 성녀라는 이미지 때문에 자기가 원하는 대로 술을 마시기가 힘들었다는 모양이다.

그녀는 신성력으로 숙취를 제거했다.

"휴, 좀 살겠네. 현우야, 바로 4층에 갈 거라고 했지. 나도 좀 데려가 주라. 따라가게."

"너도 온다고? 상관은 없는데, 레벨은?"

"네가 자는 사이에 70레벨은 찍었어. 남아 있는 마족들 사냥하는 거, 내가 도왔거든."

70레벨이면 상위 층으로 갈 수 있는 최소한의 레벨은 달성한 셈이다.

진현우와 같은 레벨이기도 했고.

"4층은 사제 혼자서는 공략하기 힘들다더라구. 이왕이면 믿을 수 있는 사람하고 같이하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흠."

진현우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4층은 플레이어에게 여러 제약이 붙는 곳이지만, 그럼에도 샬럿은 큰 도움이 될 테니까.

그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야 좋지."

"좋아, 버스 좀 타 볼까."

"무임승차는 하지 마라."

샬럿이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진현우는 마지막으로 엘프들과 마주 봤다. 엘프 여왕, 라시드, 아드네아 그리고 이리샤.

그를 배웅하기 위해 온 이들이었다.

"너한테 특별한 휘장을 준 건 내가 최근에 한 일 중에 가장 잘한 일일 거다, 진현우."

"제값은 했죠?"

"물론이지."

라시드가 진현우의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아드네아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은인이시여, 이번 일을 기념하여 은인의 동상을 만들 계획입니다. 나중에 오시거든."

"아니, 동상은 만들지 마세요."

"하지만 은혜를 기리려면."

"다른 형태로 기려 주세요."

아드네아의 말에 진현우가 질겁했다.

동상이라니. 무슨 수치 플레이도 아니고. 시무룩해진 아드네아가 뒤로 물러났다.

그와 교대하듯 이리샤와 여왕이 다가왔다.

"여행자, 언제든지 찾아와. 우리 엘프는 널 영웅으로, 그리고 친구로 반길 거야. 평생."

"그 말대로입니다, 진현우. 인간은... 저희와는 달리 짧은 삶을 살죠. 엘프는 오랫동안 당신을 기억하면서, 또 위업을 기릴 겁니다."

"굉장히 부담스러운 말인데요."

진현우는 이리샤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중에 또 올게. 쉬고 싶을 때."

"응, 마음 편하게 와."

이리샤가 활짝 웃으며, 그 손을 맞잡았다.

"그럼."

진현우는 샬럿과 함께 포탈에 섰다.

"다음에 또 봅시다."

마중하는 이들의 얼굴을 눈에 담으며.

진현우는 탑을 나섰다.

* * *

"스읍, 후우우."

탑을 나선 진현우는 공기를 들이켰다.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지구의 공기를 마시는 게 굉장히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인가안, 나는 쉬고 싶느니라. 꼭 바로 탑으로 가야 하는 것이냐? 좀 더 쉬었다가....

"지금까지 쉰 놈이 뭐라는 거야?"

- 요즘 너무 많은 정기를 먹어서 소화가 안 되느니라. 꼬리를 늘릴 시간이 필요하느니라.

"다음 층에서 해라."

미호가 입을 비쭉 내밀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샬럿이 나왔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녀는 진현우의 존재를 알아채고는 손을 크게 흔들었다.

"샬럿, 뭐 따로 챙길 건 없지?"

"없어. 바로 올라갈 거야?"

"어. 올라가자."

진현우는 샬럿과 파티를 맺은 후 탑의 문 앞에 섰다. 그러자 메시지가 나타났다.

- 세계의 탑에 방문한 것을 환영합니다.

- 현재 탑은 7층까지 개방되었습니다. 당신이 입장할 수 있는 층은 4층까지입니다.

- 4층으로 입장하시겠습니까?

진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 4층: 할타릿산으로 향합니다.

- 입장 가능 레벨: Lv.70~Lv.90.

문이 열린다.

진현우와 샬럿은 문 너머로 몸을 내던졌다. 새하얗게 물든 시야가 원래대로 돌아왔을 때.

- '울부짖는 구릉지'로 진입합니다.

일행은 낯선 초원에 서 있었다.

초원에 있는 것은 진현우와 샬럿만이 아니었다. 70명 남짓한 플레이어도 있었다.

그리고 플레이어 주변을 투명한 장벽이 에워싸고 있었다. 마치 지켜 주려는 것처럼.

- 할타릿산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잠시 후, 목소리가 들렸다.

이 대륙의 배경을 설명해 주는 목소리였다.

- 이곳은 한때는 평화로웠지만, 지금은 모든 것이 분노와 광기로 물들게 된 곳입니다. 날씨는 변덕스러울 것이며, 몬스터는 흉폭할 것이고, '정령'들이 적의를 보일 것입니다.

- 여러분의 목적은 간단합니다. 주기적으로 닥치는 '몬스터 웨이브'를 피해서....

모인 플레이어들이 장벽 너머를 바라봤다.

그들의 눈빛에는 경계심이 가득 어려 있었다. 그리고 그건 무의미한 경계심이 아니었다.

- 생존하여 탈출하십시오.

장벽 저 너머, 검은 빛무리가 가득 생겼다.

그 빛무리들이 서서히 형체를 갖추었다. 다양한 종류의 몬스터 그리고 '정령'의 형체로.

- 키하아아아아!

- 인간, 밉다. 모두, 복수...!

몬스터 웨이브.

적들이 플레이어들의 존재를 인지했다.

그리고.

- 무운을 빕니다.

- 파아아앗!

장벽이 사라졌다.

"X발, 무기 들어!"

"몰려온다!"

치열한 전투의 소리가 고원을 가득 채웠다.

141화

몬스터 웨이브

적이 몰려든다.

선두에는 몬스터가, 그리고 후방에는 정령들이 몬스터들을 지원하는 형태로.

플레이어들의 마법이 놈들을 덮쳤다.

- 크하아아아!

- 마법! 잔재주다! 물러서지 마라!

"저 무식한 새끼들이!"

화염과 전격 그리고 냉기까지.

각종 마법이 몬스터들을 공격했다. 적지 않은 몬스터가 죽었지만, 숫자가 너무 많다.

플레이어들이 무기를 빼 들었다.

"X발!"

- 먹이다! 찢어 죽이고, 먹어라!

그리고 격돌.

플레이어와 몬스터들이 충돌했다. 서로의 무기가 맞부딪쳤고, 피가 사방에서 튀었다.

몬스터들이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쫄지 마! 많이 싸워 봤잖아!"

"다 죽여!"

뭐가 됐든 4층까지 올라온 플레이어들이다.

전투 경험은 충분한 상황. 게다가 이런 식으로 시작할 거라는 얘기를 이미 듣기도 했다.

플레이어들은 뭉쳐서 웨이브에 맞섰다.

- 인간, 인간, 인간....

- 배신자들!

"저 새끼들은 또 뭐라는 거야!"

딱 하나, 문제가 있다면.

"X발! 정령 마법!"

"온다! 우아아아악!"

정령들이 몬스터들을 돕는다는 것이었다.

후방에 있던 각 속성의 정령들이 정령 마법을 사용했다. 하늘에서 얼음 기둥이, 하늘에서 화염 구가, 허공에서 바람의 칼날이 닥쳤다.

플레이어들이 쏟아지는 마법에 기겁했다.

"얘, 얘기는 들었는데...!"

"처음부터 이 정도로 많으면 어쩌자는 거야! 저 숫자 상대로 어떻게 이기라고!"

"정령이 몬스터들을 돕는 게 말이 돼?!"

정령들은 호전적인 존재가 아니다.

그들이 싸움에 나설 때는 누군가가 자신들을 공격했을 때. 지금 정령들의 상태를 보면 누군가가 건드려서 화나게 한 건 분명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몬스터와 협력해서 인간을 공격하는 건 이상하다.

"몬스터들만 처리하면 됩니다! 정령들은 몬스터들이 다 죽으면 알아서 도망쳐요!"

"크윽!"

뭐가 됐든 지금은 싸워야 한다.

바로 그때, 쿠웅! 땅이 크게 울렸다. 몬스터 웨이브의 저 너머에서 거인이 걸어왔다.

- 구어어어어어!

"설인이다!"

설인.

온몸이 새하얀 털로 뒤덮인 거인이 얼어붙은 몽둥이를 쥔 채 돌진해 왔다.

가장 선두에서 몬스터들을 막던 전사들이 설인의 덩치를 보고는 창백해졌다.

'저걸 막으라고?'

그렇다고 도망칠 수도 없다.

전사들은 이를 악물며 스킬을 발동했다. 공격을 막으면서 반격할 기회를 노려야 한다.

설인의 몽둥이가 들이닥친다.

- 콰아아앙!

그때, 섬광이 번쩍였다.

인지할 수 없는 빛이 전사들 사이를 스쳤고, 설인의 거대한 몸을 이리저리 내달렸다.

날카로운 절삭음이 연이어 들렸다.

- 크, 어어?

몽둥이를 내리치려던 거인이 멈췄다.

놈은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자신의 몸을 의아하다는 듯이 봤다. 그리고 잠시 후.

- 카하아아악!

설인의 몸 곳곳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몽둥이를 쥔 팔이 땅에 떨어졌다. 깊게 베인 무릎이 무게를 지탱하지 못하고 구부러졌다.

의아해하던 설인의 앞에 누군가 섰다.

- 푸우욱!

- ...!

진현우의 검이 설인의 목을 베었다.

요란스럽게 뿜어져 나오는 피.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플레이어들이 멍하니 그를 봤다.

진현우가 크게 외쳤다.

"샬럿!"

"여기, 충실한 신자에게 축복을!"

두 손을 모은 샬럿이 경건하게 기도했다.

쏟아지는 빛이 진현우를 휘감았다. 성녀가 가진 강력한 버프가 그의 신체를 강화했다.

그는 땅을 박찼다.

'자잘한 몬스터와 싸우는 건 시간 낭비다. 그건 다른 플레이어들한테 맡기고.'

진현우는 몬스터 웨이브를 봤다.

엄청난 숫자의 몬스터. 그 사이에 강력한 힘을 가진 엘리트 몬스터들이 있었다.

'굵직한 놈들부터 처리해야겠군.'

저놈들이 다른 몬스터들을 지휘할 터. 먼저 처리하면 전투가 한층 쉬워질 것이다.

부서진 검이 사복검의 형태로 변했다.

- 촤르르륵!

- 키이익?!

길게 늘어진 검이 몬스터들을 베어 냈다.

동시에 투척된 도끼가 몬스터들 한복판을 헤집었다. 진현우는 다시금 되돌아오는 도끼를 받을 준비를 하면서, 광휘를 터트렸다.

- 파아아앗!

- 캬아악! 눈, 내 눈이!

"마법 쏴요! 빨리!"

"네? 아, 아아!"

몬스터들의 시선이 진현우에게 쏠린 타이밍이었다. 광휘가 놈들의 시야를 순간 빼앗았다.

그가 외치는 걸 들은 플레이어들이 마법을 쏟아 냈고, 몬스터들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 쿠어어어어!

"스으읍...!"

진현우는 그리즐리 베어를 소환했다.

포효하는 곰이 몬스터들을 내리찍었고, 진현우는 적들 사이를 누비면서 검을 휘둘렀다.

몬스터들이 비명을 토해 냈다.

"소, 소문은 들었는데, 저 정도였나?"

"혼자서 저렇게 싸우는 게 말이 돼...?"

그가 싸우는 걸 본 플레이어들이 경악했다.

얘기를 들어도 실제로 보는 것은 느낌이 다르다. 저 정도 숫자의 몬스터들 한복판으로 돌진하는 것부터가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 가증, 가증스러운 인간!

- 저 나쁜 인간부터 죽여야 해!

정령들이 진현우의 존재를 인지했다.

수많은 정령 마법이 허공을 수놓았다. 그게 노리는 지점은 단 한 곳, 진현우가 있는 곳.

"진현우 씨! 위험합니다!"

누군가 다급히 외쳤다.

하지만 진현우는 피하지 않았다. 대신 수호자의 갑옷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마력을 가득 흡수한 수호자의 갑옷이 빛을 내뿜었다.

- 콰아아앙!

"무, 무슨!"

그러자 갑옷이 방어막을 전개했다.

아주 작은 조각으로 된 수많은 방어막을. 그것들이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이더니, 진현우를 노리는 마법들을 닥치는 대로 요격했다.

허공에서 마법들이 요란스레 폭발했다.

"저, 저것도 스킬인가?"

"갑옷 옵션이겠지. 아니, 지금 그럴 때가 아니라! 지금이 기회입니다! 공격합시다!"

놀란 정령들이 진현우를 멍하니 봤다.

그걸 기회라고 판단한 플레이어들이 몬스터들을 밀쳐 내고, 역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전황이 뒤집혔다.

"공격!"

"이 새끼들 다 죽여!"

- ...!

몬스터들이 하나둘씩 쓰러졌다.

굵직한 몬스터는 진현우가 처리하고, 자잘한 몬스터는 플레이어들이 처리하는 식으로.

거기에 샬럿의 버프가 그들을 지원했다.

- 나쁜, 인간들.

- 다음에는, 꼭....

전황이 불리하다고 판단한 정령들이 물러났다. 전투가 끝났음을 알리는 순간이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몬스터가 얼마 못 가 쓰러졌다. 진현우는 검에 묻은 피를 털어 냈다.

"사, 살았어."

"이 정도 생존자면... 역대급인데?"

플레이어들의 피해는 크지 않았다.

죽은 사람은 아예 없을 정도. 4층 도입부에서 적지 않은 플레이어가 죽는 걸 생각하면 역대급이었다. 당연하지만 그걸 가능케 한 건.

'저 둘 덕분이겠지.'

진현우와 샬럿이었다.

플레이어들의 시선이 둘에게 쏠렸다. 그때, 누군가 시선을 돌리려는 것처럼 크게 외쳤다.

"모두 모여 주십시오! 흩어지면 그냥 개죽음입니다! 뭉쳐서 위기를 헤쳐 나가야 합니다!"

훤칠한 백인 남자가 사람들을 모았다.

조금 전의 전투에서 큰 목소리와 존댓말로 사람들에게 명령을 내리던 남자였다.

"저는 블루 아이즈 길드의 헤롤드입니다. 여러 공략대를 이끈 경험이 있습니다! 절 믿고 따라 주시면 여길 탈출할 수 있을 겁니다!"

"블루 아이즈?"

"미국에서 유명한 길드잖아."

한국에 5대 길드가 있듯이, 서양에도 큰 유명세를 떨치는 길드들이 있다.

미국의 블루 아이즈가 그러했다.

"그 정도면 뭐...."

"일단 얘기 정도는 들어 볼까?"

플레이어들이 헤롤드 곁으로 모였다.

"조금 전에 저희가 겪은 것이 몬스터 웨이브입니다. 4층의 대표적인 기믹으로, 주기적으로 몬스터들이 저희를 공격해 올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할타릿산 곳곳에 먼저 온 플레이어들이 만든 요새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일단 거길 찾아서 방비부터 갖춰야 합니다. 탁 트인 곳에서 웨이브를 상대하는 건 자살행위입니다."

헤롤드가 설득력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

금발의 미남에, 호소력 짙은 목소리까지. 얘기를 듣던 플레이어들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흩어지면 죽을 뿐입니다. 함께 뭉쳐서 이 위기를 헤쳐 나가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당신이 우리를 이끌겠다는 거요?"

"허락해 주신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럼...."

진현우와 샬럿은 헤롤드가 열변을 토하는 것을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샬럿이 손을 호호 불었다.

"오, 리더십이 있는 사람이구만."

"아흐, 추워. 이럴 때 입에 술을 넣어야 하는데. 그래서, 어쩔 거야? 우리도 같이 가?"

- 캬악! 인간 여자, 난 난로가 아니니라!

샬럿이 미호의 털 속에 손을 집어넣으면서 플레이어들 쪽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저 사람들하고 같이 움직일 것이냐.

"아니. 오히려 그게 더 위험해."

"위험하다구? 왜?"

"아까 메시지에 나왔던 거 기억나냐? 몬스터 웨이브가 주기적으로 온다고 했던 거."

"응, 기억하지. 그게 어때서?"

조금 전에 봤던 몬스터와 정령들.

그런 종류의 몬스터 웨이브가 주기적으로 공격해 온다. 여기에 문제가 하나 있다.

"같이 있는 사람들의 숫자가 많을수록 몬스터 웨이브의 규모가 커져. 빈도도 잦아지고."

"아, 그래서 위험하다는 거구나?"

"그리고 우리가 저 무리에 합류하면...."

진현우는 헤롤드를 흘깃 봤다. 꼬리로 샬럿을 찰싹찰싹 치던 미호가 작게 웃었다.

"우리를 귀찮게 만들 것 같아서."

- 으흠, 무슨 생각인지 알 것 같구나. 너희를 이용할 생각으로 가득한 것 같지 않느냐?

"나도 알아."

한창 열변을 토하던 헤롤드가 진현우와 샬럿을 봤다. 얼핏 보기에는 잠잠해 보이는 그 눈빛의 이면에는 탐욕이 가득했다.

'진현우 그리고 성녀. 유용한 전력이다.'

둘 다 랭커라고 봐도 무방한 실력.

진현우는 뛰어난 전투력을 가졌고, 샬럿은 극한의 상황에서 특히 도움이 될 것이다.

저 둘은 반드시 데리고 가야 한다.

'아무리 실력이 뛰어난 자들이라고 하더라도 4층에서 둘이 움직이는 건 불안하겠지.'

같이 움직이자는 제안을 거절할 리가 없다.

'일단 같이 움직이자고 설득하고, 저 둘을 최대한 이용해서... 여기서 살아남아야 해.'

헤롤드의 머릿속에는 진현우와 샬럿을 이용해서 살아남을 생각밖에 없었다.

계산을 마친 그는 진현우에게 향했다.

"진현우 씨, 잠깐 대화 괜찮으십니까?"

"뭐, 같이 가자고요?"

"어, 예. 맞습니다."

헤롤드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진현우의 화법에 잠깐 당황했지만, 금방 침착해졌다.

"4층은 위험한 곳입니다. 여러분이 함께해 주신다면, 서로 협력하면서 안전하게...."

"아뇨, 저희는 따로 움직이겠습니다."

"네, 같이... 예?! 따로 움직이신다고요?"

헤롤드의 두 눈이 커졌다.

"개인적인 목적이 좀 있어서요. 그쪽하고 같이 움직이는 건 힘들 것 같네요."

"아니, 그게 무슨... 둘이서 움직이면 몬스터 웨이브는 어떻게 상대하실 겁니까?"

"그건 저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진현우의 태도는 칼같았다.

그 말을 들은 헤롤드가 입술을 깨물었다.

"여, 여러분이 따로 움직이면 저희도 그만큼 위험해지는 겁니다. 그걸 생각하면...!"

"지금 절 협박하는 겁니까?"

"...!"

진현우가 인상을 찌푸렸다.

순간, 엄청난 압박감이 헤롤드를 덮쳤다. 경험이 많은 그조차도 몸이 움츠러들 정도였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공략대를 이끈 경험이 많다면서요? 요새를 찾아내서 방비를 구축하면, 뭐 괜찮겠죠."

"진현우 씨!"

진현우와 샬럿은 등을 돌렸다.

"저희는 따로 움직이겠습니다."

"...."

둘은 돌아보는 일 없이 떠났다. 그 뒷모습을 멍하니 보던 헤럴드는 땅을 걷어찼다.

거센 눈보라가 초원을 덮쳤다.

"아흐으, 추워어. 근데 현우야, 그 목적이라는 게 뭐야? 나는 못 들은 거 같은데?"

"목적?"

진현우는 새하얀 숨을 내뱉었다.

땅에 눈이 쌓이는 것이 걸음마다 느껴졌다.

"4층이 이렇게 된 원인을 제거해야지."

"원인? 그게 뭐야?"

4층 할타릿산의 정령들이 인간을 적대시하며, 몬스터 웨이브가 계속 일어나게 된 이유.

진현우가 따로 움직여야만 했던 계기.

"쇠락한 대정령."

그놈을 찾아야 한다.

142화

거절할 수 없는 제안

할타릿산은 특징이 하나 있다.

날씨가 굉장히 변덕스럽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변덕스러움의 정도가, 꽤 심하다.

"이, 인간! 인가안! 내가 쪄 죽느니라!"

"현우야아아... 나 앞이 안 보여...."

뜨거운 바람이 진현우를 덮쳤다.

하늘에서는 강렬한 햇볕이 내리쬐고 있었다. 거기에다가 바닥의 눈이 녹으면서 습기가 엄청 올라갔는데, 사우나에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러다가 진짜 익느니라!"

"흐아아아...."

얼마 전까지만 해도 눈보라에 칼바람이 치고 있었는데, 갑자기 사막 같은 날씨가 됐다.

할타릿산의 특징이다.

지독할 정도로 변덕스러운 날씨.

- 할타릿산은 외부의 식량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소유한 식량과 편의 물품이 사라집니다.

진현우는 주머니를 뒤졌다.

쓸 일이 거의 없기는 하지만, 비상시를 대비해서 주머니에 건조식을 조금 넣어 뒀었다.

그런데 그 건조식이 하나도 없었다.

침낭도 마찬가지였다.

"환상적이군."

'생존'이 주목적인 만큼, 생존에 도움이 될 만한 식량 같은 것들도 제거하겠다는 것.

진현우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런 곳에서 오래 머무를 필요가 있나.'

없다.

진현우가 조금 전의 플레이어들과 함께 행동하는 것을 거절한 큰 이유가 그것이다.

'거점을 찾아서 버틴다. 정석적인 방법으로 4층을 탈출하려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이 대륙의 탈출구는 플레이어들이 일정 시간 생존해야지만 열리기 때문이다.

그것보다 더 빠른 방법이 있다.

'4층이 이렇게 된 이유, 대정령을 처리한다.'

어떤 식으로든 놈을 처리하면 이변이 끝나고, 거기에 바로 5층으로 가는 문이 열린다.

그게 여길 탈출할 가장 빠른 방법이다.

요새에서 버티는 건 비효율적이다.

'좀 고생은 하겠지만.'

진현우는 미호와 샬럿을 봤다.

더위에 지친 둘이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시원한, 차가운 맥주가 한 잔...."

"인간, 저 여자 헛것을 보는 것 같구나. 응?"

미호는 진현우의 갑옷 속에 억지로 파고들더니, 뭔가 이상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는 갑자기 발톱을 세웠다.

"키야아악! 비겁한 인간! 이상하게 조용하다 싶더라니, 너 혼자만 시원한 것이었구나!"

"그, 그게 무슨 소리야아?"

"이 갑옷을 보거라, 계집!"

진현우가 입은 수호자의 갑옷.

거기에는 적응이라는 옵션이 있었다. 어느 환경에서든 적응할 수 있다는 내용의 옵션.

그의 갑옷에서 냉기가 흘러나왔다.

"혀, 현우야!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인가안, 이래 놓고 좀 참으라고!"

"아, 아니. 진정해. 다 왔어!"

진현우가 저 너머의 동굴을 가리켰다.

으르렁거리는 미호와 샬럿을 데리고 동굴로 들어가자, 차가운 바람이 그들을 반겼다.

"아아, 시원해...."

"이제야 좀 살 것 같구나...."

할타릿산 곳곳에는 여러 피난처가 있다.

요새나, 작은 집이나, 아님 동굴 같은 것들. 이런 피난처들은 각각 특징을 갖고 있다.

[바람이 부는 동굴]

· 설명: 어디선가 시원한 바람이 들어오는 동굴이다. 날이 더울 때 머물기 좋을 것 같다. 하지만 적을 상대하기에는 부적합하다.

· 특징: 냉방, 무방비.

냉방, 말 그대로 냉방이 된다는 거고.

무방비하다는 것은 동굴에 별다른 방어 시설이 없기에 적을 상대하기 안 좋다는 것이다.

'뭐, 어차피 여기 오래 머물 것도 아니니까.'

그 정도 단점은 크게 상관없다.

미호와 샬럿은 동굴에서 바람이 부는 곳을 찾더니, 찰싹 붙어서 열기를 식혔다.

진현우는 매를 소환했다.

"주변을 정찰해라."

- 끼루룩.

매가 하늘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바닥에 앉은 진현우는 조금 전 몬스터 웨이브로부터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가 계산했다.

'두 시간 정도 뒤면 또 공격해 오겠군.'

그때까지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진현우는 미호와 샬럿에게 쉬라고 말해 둔 다음, 영혼 늑대들로 입구를 지키게 했다.

그리고 아이템을 꺼냈다.

[망집의 자취 (전설)]

· 설명: 폭군의 힘이 담긴 결정체다. 강력한 저주가 깃들어 있었지만 완벽하게 정화됐다.

사용할 경우 A등급의 특성 하나를 승급하며, A등급의 특성 하나를 생성한다.

이 아이템은 진현우에게 귀속되었다.

예전에 폭군을 처리하고 얻은 아이템.

지금까지는 딱히 쓸 일이 없어서 놔 뒀었는데, 이제는 쓸 때가 됐다. 진현우는 바로 아이템을 사용하고, 승급할 특성을 골랐다.

- 빙정 (A)을 승급시킵니다.

- 빙정의 주인 (S)이 새로이 생성됩니다.

· 빙정의 주인 (S): 얼음의 정령왕의 기운을 흡수했다. 냉기 저항력이 90% 증가하며 냉기 계통 스킬의 대미지가 50% 증가한다.

마력을 자유롭게 냉기로 변환할 수 있으며, 얼음 정령과의 친밀도가 크게 상승한다.

날씨가 추울수록 특성의 효과가 강화된다.

진현우는 손바닥을 펼쳤다.

마력을 일으키고 약간의 과정을 거치자, 마력이 지독한 냉기로 바뀌어 흘러나왔다.

그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도 좋지만, 더 중요한 건....'

새로이 생성될 A등급 특성이다.

이런 종류의 아이템이 가진 특징이 있다. 사용자가 '필요로 하는' 특성을 준다는 것이다.

지금 진현우에게 필요한 특성이 무엇인가.

그의 눈앞에 여러 선택지가 나타났다.

- 다음 특성 중 하나를 선택하십시오.

- 1. 강철 같은 피부 (A)

- 2. 영창 가속 (A)

- 3. 정령 친화 (A)

- 4. 은밀 (A)

선택할 수 있는 건 네 가지 특성.

그중에서 진현우에게 필요한 특성은 하나.

· 정령 친화 (A): 강한 정령을 제어할 수 있으며, 정령의 소환 시간이 길어진다. 또한 근처에 있는 정령을 감지할 수 있다.

바로 이 특성이었다.

특성의 다른 효과는 상관없다. 그가 필요로 했던 것은 정령을 감지하는 효과였다.

이게 있어야 대정령을 찾을 수 있다.

'3층에서 위업 보상으로 얻었던 A등급 스킬을 승급시키는 권한은....'

당장 쓸데가 없다.

오히려 A등급 스킬보다는 B등급 스킬을 승급시키고 싶었다. 특히 파쇄권 스킬.

진현우가 애용하는 스킬이었으니까.

'언젠가 B등급 스킬을 승급시키는 권한이 생기겠지. 그때 같이 쓰는 게 낫겠어.'

진현우는 그렇게 결론 지었다.

할 일을 마친 그는 바깥을 바라보면서, 두 번째 몬스터 웨이브가 시작되길 기다렸다.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 피유우우우!

하늘에서 새의 울음이 들렸다.

진현우가 소환한 매가 내는 소리였다. 그는 휴식을 취하던 미호와 샬럿에게 손짓했다.

"준비해. 몬스터 웨이브다."

"뭔가 2층으로 돌아간 기분이야...."

샬럿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동굴 저 너머에서 몬스터와 정령들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그 숫자는 대강 수십.

처음과 비교하면 확연히 줄어들었다.

"빠르게 끝내자."

진현우는 검을 쥐었다.

* * *

전투가 벌어졌다.

진현우는 그리즐리 베어에게 샬럿을 지키라고 명하고, 적들 한복판에 돌진했다.

그런 그를 샬럿과 미호가 지원했다.

- 인간...!

전투는 생각보다 금방 끝났다.

남은 것은 정령들뿐. 진현우가 공격하려는 순간, 놈들의 몸이 반투명해지면서 멀어졌다.

도망치려는 것이다.

- 우리는, 원한을 꼭 갚을 거야.

- 너희한테....

"현우야, 우리 뭐 잘못한 거 있니?"

"짚이는 게 너무 많아서 모르겠는데."

으르렁거리면서 물러나는 정령들의 말에 샬럿이 황당하다는 듯이 말했다.

오자마자 원수라면서 달려들고 있으니.

진현우는 허공에 손짓했다.

"저 정령들을 은밀하게 추적해."

- 끼루룩.

영혼 매들이 날아올랐다.

아마 도중에 정령을 놓칠 것이다. 그걸로 충분하다. 그 뒤부터는 직접 찾으면 되니까.

진현우는 검에 묻은 피를 털어 냈다.

-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너하고 같이 다니면 오래 못 살 거 같아."

샬럿과 진현우에게 레벨이 올랐다는 메시지가 동시에 나타났다.

그녀는 혀를 내두르며 메시지를 껐다.

"그러니까, 휴우, 저 웨이브가 가면 갈수록 더 커진다 이거지? 몬스터도 많아지고?"

"그래."

"최대한 빨리 끝내야겠네."

진현우도 그 말에 동의했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면서 먹을 수 있는 몬스터를 찾았고, 재빠르게 손질했다.

그리고 불을 피워서 대강 구웠다.

"정말 끔찍한 맛이구나, 인간."

"나도 알아."

조미료도 안 친 고기가 맛있을 리가.

그것도 몬스터의 고기인데. 하지만 진현우나 샬럿은 별 불만 없이 고기를 섭취했다.

이 정도는 이미 익숙해졌다.

"좋아, 그럼 매가 올 때까지...."

쉬자고 말하려던 진현우가 검을 들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꽤 많은 무리가 다가오는 발소리 따위.

샬럿도 소리를 인지했다.

- 쿠르르, 쾅!

우연의 일치인지 날씨도 바뀌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햇볕이 쨍쨍했는데, 어느새 먹구름이 가득 끼고 번개가 내리쳤다.

진현우는 도끼를 움켜쥐었다.

- 바스락.

"크아아악!"

그리고 소리가 들린 곳으로 도끼를 던졌다.

순식간에 쏘아진 도끼가 분열하면서 목표를 꿰뚫었다. 우렁찬 비명이 주변을 가득 울렸다.

나무 너머에서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끄, 끄으윽! 저, 적...!"

"이 X발! 어떤 새끼야! 당장 튀어나와!"

플레이어들이었다.

본 적이 없는 얼굴이다. 진현우와 함께 들어온 플레이어들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다음으로, 척 봐도 고급스러운 장비들이 보였다. 거기에는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저 사람들, 아그니스야."

"어쩐지 익숙하다 싶더라니."

아그니스의 문양이었다.

진현우는 여기로 오기 전, 네메시스의 이대건이 자신에게 해 준 말을 떠올렸다.

- 4층으로 올라가실 거면 조심하십시오. 아그니스 길드가 거기 있다고 합니다. 길드장 화련도요.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아그니스가 4층에 있다. 그리고 화련도.

저 길드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은.

"어머, 이게 누구야?"

그 길드장인 화련도 있다는 것.

타오를 듯한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장신의 여성이 길드원들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의 입가에는 비웃음이 어려 있었다.

"우리 길드를 엿 먹인 진현우...!"

- 쉬이이익!

화련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도끼가 날아들었다. 그녀는 황당해하며 손가락을 튕겼다.

즉각적으로 발현된 화염이 도끼를 쳐 냈다.

"너, 미친 거니?"

"어차피 사이좋게 대화나 하려고 온 건 아니잖아. 날 처리할 생각으로 온 거 아닌가?"

"눈치는 빠르네. 맞아!"

화르르륵!

화련이 붉은 마력을 일으켰다.

그녀의 곁으로 거대한 화염 정령 둘이 소환되었고, 허공에 수많은 화염구가 일렁거렸다.

'랭킹 39위, 화련.'

길드를 운영하는 수완에는 의문이 있지만, 플레이어로서의 실력은 확실하다.

혼자서 전장을 불태울 정도의 실력자.

"너 때문에 내 길드가 큰 손해를 입었거든. 그 손해는 갚아 줘야 하지 않겠니? 그리고."

화련이 사납게 웃었다.

"윤서희, 그년이 널 마음에 들어 하잖아. 남의 장난감을 부수는 건... 꽤 재밌거든."

"취미가 안 좋으시군."

"아하하하! 나도 잘 알아!"

길드원들이 무기를 들었다.

그리고 그보다 먼저, 더는 못 참겠다는 듯이 화련의 마법이 진현우를 향해 쏘아졌다.

시야를 가득 메우는 수많은 화염구.

적중하는 순간 광대한 폭발을 일으킬 것이다. 하나하나가 그 정도의 마력을 가졌다.

'하지만.'

진현우의 검이 움직였다.

흐르는 강물처럼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여기가 4층이라는 걸 기억하셔야지."

유수가 들이닥친 화염구들을 흘려 냈다.

그리고 뭐라 말하기 힘든 신묘한 손놀림으로, 자신을 노린 화염구들을 다시 되돌려 줬다.

아그니스의 길드원들에게로.

"화, 화련 님!"

"시답잖은 잔재주를...!"

화련이 이를 갈면서 화염벽을 일으켰다. 콰앙! 화염벽과 충돌한 구체들이 폭발했다.

원래라면 유수라도 저 마법을 흘리지 못했을 것이다. 랭킹 39위의 괴물이 쓰는 마법은 지금의 진현우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니까.

하지만 여기는 4층.

'저 괴물도 보정으로 약해졌다.'

화련 본인도 그걸 잘 알고 있기에 수많은 길드원을 곁에 대동하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 활로가 있다.

- 서걱!

진현우는 다시금 들이닥치는 마법을 베어 내면서, 부서진 검을 손에서 놓았다.

순식간에 분열한 환검이 허공을 뒤덮었다.

그 검들이 아그니스 길드원들을 겨눴다.

"어이가 없네. 뭐, 날 협박이라도 하겠다는 거니? 내가 아무리 보정으로 약해졌다고 해도 너 하나 못 죽일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화련의 마력이 들끓었다.

불길처럼 뜨거운 마력이 솟구치면서, 격렬한 불꽃이 되어 그녀의 몸을 감쌌다.

"주제를 모르는구나. 건방지게."

맞는 말이다.

보정으로 약해졌다고는 해도, 저 화련을 상대로 싸워서 이기려면 목숨을 걸어야 한다.

그건 진현우가 원하는 게 아니었다.

"화련, 네가 여기 왜 왔는지 안다."

"그래? 독심술이라도 익혔니? 뭘 아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널 불태우고 그 뒤에...!"

"직업 퀘스트 때문에 온 거잖아. 틀렸나?"

마법을 일으키려던 화련이 멈췄다. 불꽃처럼 이글거리는 눈동자가 진현우를 직시했다.

"그 퀘스트 목적을 달성할 방법을 못 찾아서 오랫동안 여기서 헤매고 있는 거고."

"...."

화련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의 곁에 있던 길드원들도 겉은 담담해 보였지만, 속으로는 당황한 상태였다.

"그래서, 그게 뭐 어쨌다는...."

"당신이 헤매는 직업 퀘스트를 해결할 방법을 내가 알아. 그리고 내 목적하고도 겹치지. 이 정도면 손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아하, 그거 참 흥미로운 제안이네."

화련이 고개를 까딱거렸다.

"내가 그 말을 어떻게 믿지? 네가 뭔데?"

"유저."

그 말을 들은 화련의 안색이 달라졌다.

유저. 세계의 탑의 전신이었던 게임, 브로큰 월드를 플레이했던 극소수의 플레이어들.

그녀는 유저가 아니었다. 윤서희와 시종일관 충돌했던 것도 그녀와 성격이 안 맞는 것도 있지만, 윤서희가 유저인 것도 큰 이유였다.

"네가 유저라고? 그걸...."

"잘 생각해 봐. 설득력은 있을걸."

유저들은 플레이어들은 모르는 지식을 가지고 있고, 그걸 바탕으로 빠르게 성장한다.

진현우는 최근 플레이어 중에서 가장 유명한 이였으며 누구보다 빠르게 성장했다.

'유저라면 그 모든 게 납득이 된다.'

화련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가 4층에서 머물고 있는 이유가 직업 퀘스트를 해결하지 못해서인 건 사실이었다.

빨리 퀘스트를 끝내고 싶은 마음이 큰 것도.

"길드장님."

"스읍, 후우우...."

화련은 길게 숨을 내뱉었다.

그녀를 휘감던 불꽃이 잠잠해졌다. 하나 여전히 이글거리는 눈빛이 진현우를 노려봤다.

"말해 봐. 얘기는 들어 주지."

"융통성이 있으신 분이라서 좋네."

화련은 속으로 혀를 찼다. 퀘스트 때문에 저런 얼간이의 제안을 듣게 될 줄이야.

'흥, 상관없어. 이번 일만 끝나면....'

어떻게든 진현우를 죽이고 말 것이다.

화련은 그리 생각했고, 그녀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누구보다 진현우가 잘 알았다.

하지만 상관없다.

'대정령이 있는 곳까지만 가면 돼.'

그러면 화련을 처리할 방법이 생긴다.

진현우는 씨익 웃었다.

143화

불편한 동행

화련.

아그니스의 길드장. 여러 층의 지역이나 던전을 통제하면서 이익을 창출하고 있는 집단.

1층에서 특히나 악명을 떨쳤었지만, 부길드장의 비리가 밝혀지면서 지배권을 잃었다.

'날 좋아할 리가 없는 놈들이지.'

진현우는 화련과 마주 보고 있었다.

그녀나, 그 뒤에 있는 아그니스 길드원들이나 진현우를 보는 시선이 몹시 매서웠다.

흡사 원수라도 보는 듯한 눈빛.

- 널 당장 찢어 죽이고 싶어 하는 눈빛이구나. 나쁜 짓을 얼마나 하고 다닌 것이냐?

"이번에는 나도 좀 억울한데."

정말로 억울했다.

나름 착한 일을 하다가 원한을 산 거니까.

"현우야, 나도 억울해서 미칠 것 같아.... 버스를 타러 온 거였는데, 버스가 아니라 핸들이 고장 난 트럭이었어.... 나한테 왜 이래?"

"다 생각이 있어서 이러는 거야."

"응, 우리 안전도 좀 생각해 주라."

샬럿이 한숨을 푹 내쉬면서 진현우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찔렀다. 그것도 꽤 세게.

그 모습을 지켜보던 화련이 코웃음을 쳤다.

"친해 보여서 보기 좋네. 우리 제안은 칼같이 거절하던 성녀께서 어쩐 일이신가 몰라."

"너한테도 가입하라고 권유했었어?"

"하긴 했었지. 근데, 조옴...."

샬럿이 눈을 돌렸다.

히든 클래스라서 선택지가 풍부한 그녀에게 아그니스는 내키는 선택이 아니었을 것이다.

워낙 악명이 자자했으니까.

화련은 코웃음을 치면서 고개를 돌렸다.

'화염의 지배자.'

화련이 얻은 히든 클래스의 이름이다.

강력한 화염 마법을 다룰 수 있으면서, 화염 계통의 고위 정령까지 다룰 수 있는 클래스.

그녀는 이런 클래스를 어떻게 얻었는가?

'불의 정령왕과 거래를 했으니까.'

화련이 처음부터 히든 클래스였던 건 아니다. 처음에는 평범한 마법사였던 걸로 안다.

탑을 탐험하다가 특별한 퀘스트를 발견했고, 그 보상으로 불의 정령왕과 만나게 됐다.

거기서 거래로 히든 클래스를 얻은 것이다.

'화련이 여기 있는 이유도 그것 때문이지.'

불의 정령왕의 부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부탁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뻔하다. 진현우는 자신을 노려보는 화련과 마주 봤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럼, 말해 봐. 그 잘난 유저면 내가 받은 직업 퀘스트가 뭔지도 알고 있겠지?"

"할타릿산에 일어난 이변을 해결하는 것."

화련이 계속 말하라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여기 일어난 이변은 정령과 관련된 일이고, 당신과 거래한 불의 정령왕이 두고 볼 수 없는 일이니까. 그걸 해결하라고 불의 정령왕이 보낸 것 아닌가? 억지로 말이야."

"정확해."

말없이 얘기를 들던 화련이 혀를 찼다.

"유저라는 게 거짓말은 아니었네. 내 직업 퀘스트가 뭔지도 잘 알고 있어. 흥미롭네. 이 퀘스트를 깰 방법도 알고 있을 거라 믿어."

"여기서 얼마나 헤맸지?"

"뭐? 그걸 네가 알아서 뭐 하게?"

"말해."

화련의 고운 미간이 찌푸려졌다.

"직업 퀘스트는 몇 달 전에 받았어. 그때는 길드끼리 탑 공략 경쟁이 심하던 때라서 미뤘었고. 본격적으로 움직인 건 2주 전부터야."

"2주 동안 할타릿산 곳곳을 돌아다녔겠군. 그러면 짚이는 곳이 하나 있을 텐데."

"네 화법, 굉장히 마음에 안 들어. 사람의 마음을 훤히 안다는 것 같은 역겨운 말투."

화련이 적의를 드러냈다.

그때, 저 멀리서 진현우의 매가 돌아왔다.

도망치던 정령을 추적하던 매다. 그의 어깨에 앉은 매가 알아 온 것들을 전달했다.

"시끄러운 새네. 뭐라는 거니?"

"도망치는 정령을 추적하라고 보냈던 매야. 계속 추적했었는데 중간에 갑자기 사라졌다는군. 그리고 그 사라진 지점이...."

진현우가 갑자기 화련을 빤히 쳐다봤다. 뭔가를 바라는 시선에 그녀가 인상을 구겼다.

"왜, 뭔데?"

"지도. 오랫동안 여기 있었을 거 아냐."

화련은 여전히 못마땅한 얼굴로 부하에게 손짓했다. 부하가 지도 한 장을 건넸다.

할타릿산의 지리가 그려진 지도였다.

"상세하군. 직접 그린 건가?"

"어떻게 얻었는지까지 말해 줘야 하나?"

"그럴 필요는 없지. 여기 있네. 정령들이 사라진 곳. 너도 여기가 수상했던 것 같은데."

"...."

지도의 중심부에 커다란 원이 있었다.

그리고 위험하다는 걸 강조하려는 것처럼, 원 옆에 느낌표가 수없이 그려진 게 보였다.

"맞아. 거기가 몬스터 웨이브가 시작되는 곳이니까. 제일 수상하다 생각한 곳이었지."

4층, 할타릿산의 특징은 몬스터 웨이브가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명백하게 시작하는 지점이 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

"이상한 안개가 낀 곳이야. 안에서 몬스터 웨이브가 나오는 건 알겠는데, 안으로 들어갈 방법이 없어. 내부가 엄청 위험한 곳이거든."

화련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마 마법이나 결계 종류겠지. 문제는 바깥에서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는 거야. 그러니까, 네가 뭘 생각하는지 모르겠는...."

"나머지는 가서 이야기하지."

"...."

화련이 뭔가를 더 설명하려고 했지만, 진현우는 그 말을 끊고 먼저 가 버렸다.

그걸 본 화련의 눈에 분노가 어렸다.

'일만 끝나면 죽여 버린다.'

원수나 다름없는 인간의 도움을 받는 것도 화나는데, 이런 모욕까지 받아야 한다니.

화련은 일이 끝나거든 진현우도, 저 잘난 성녀도 죽여 버리겠다고 생각하며 움직였다.

* * *

일행은 할타릿산의 중심에 도달했다.

가장 먼저 그들을 반긴 것은 한 치 앞을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자욱하게 낀 안개였다.

원래는 드넓은 초원이었던 것 같은데, 안개가 낀 바람에 지형을 알아보기도 힘들었다.

"일정 시기가 되면 저기서 몬스터가 한가득 튀어나와. 4층의 기믹인 몬스터 웨이브지."

"그, 길드장님. 저번에 본 것도...."

"뭐, 네가 본 헛것 말이야?"

"뭔데?"

화련이 부하의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우리 길드원들 말로는 저 안개 너머에서 사람의 형체가 보였다고 하네. 로브를 입은 사람이나, 갑옷을 입은 기사 여럿이 말이야."

"거, 거짓이 아닙니다. 정말로 봤습니다."

"나는 본 적이 없어서 몰라."

화련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럴 만도 했다. 몬스터 웨이브가 나타나는 안개 지역에 사람의 형상이 비친다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뭔지는 몰라도 강력한 결계야. 내 마법으로도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어. 내부로 들어가서 길을 찾는 방법 말고는 없지."

"내부가 미로처럼 되어 있어서 길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헤매면 정신이, 점점 무언가에 잡아먹혀서...."

"굉장히 위험한 곳이라는 거군요."

화련의 말을 들은 샬럿의 얼굴이 굳었다.

외부에서는 어떻게 할 방법이 없는데, 내부로 들어가면 미로에, 정신 공격까지 하는 안개.

굉장히 까다로운 곳이었다.

"정신이 이상해지는 건 대처할 방법이 있는데, 미로가 문제야. 보이지 않는 벽으로 된 미로거든. 내 마법으로도 파괴되지 않는 마법. 그 안에서 실수로 길을 잃게 되면...."

화련이 자신의 목을 그었다.

"평생 안개에서 헤매다가 못 나오는 거지. 그래서 아직은 탐색할 엄두도 못 내고 있고."

그녀는 진현우를 바라봤다.

자신의 말에 뭔가 반응이라도 보일 줄 알았는데, 그의 얼굴은 무표정하기 그지없었다.

게다가 시선은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야, 너. 내 말을 듣긴 한 거니? 어딜...."

"조용히 해 봐."

"뭐?"

진현우가 손가락으로 입을 가렸다.

그리고 일행을 데리고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서 모습을 감췄다. 너무도 갑작스러워서 화련은 뭔 짓이냐고 따질 수도 없었다.

하지만 잠시 후.

"몬스터 웨이브가 온다."

화련은 진현우가 왜 그랬는지 알게 됐다.

사방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녀가 수없이 들었던 적의 어린 괴성이 들려왔다.

- 크하아아아!

"몬스터...."

몬스터들의 괴성이었다.

사방에서 어마어마한 숫자의 몬스터들이 걸어오는 게 보였다. 근데, 이상한 점이 있었다.

"현우야. 저 몬스터들, 눈이 이상해."

몬스터들의 눈에 초점이 없었다.

뭔가에 홀린 것 같은 눈빛. 중독자처럼 흐릿한 눈동자를 한 몬스터들이 안개로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 쿠웅! 쿵! 휘이이이...!

진현우는 피부가 따가워지는 걸 느꼈다.

아래를 내려다보자, 땅에서부터 푸른 기운이 미친 듯이 뿜어져 나오는 것이 보였다.

- 어마어마한 마력이구나. 몬스터들이 왜 홀린 것처럼 여기 왔는가 했더니.

마력이다. 엄청난 규모의 마력이 땅 아래에서, 깊은 지하에서 솟구치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 키하아아아! 차아!

- 으으, 으우오오오오!

다시금 몬스터들이 나타났다.

눈이 시뻘겋게 물든 채로, 완전히 광기에 물든 몬스터들이 안개 너머로 뛰쳐나왔다.

그 뒤를 정령들이 뒤쫓았다.

- 인간, 나쁜 인간들. 으흑!

- 그 인간들은 약속을 지키지 않을 거야.

- 그래도 우린 해야 돼. 괴물들아, 더 많은 마력을 가지고 싶다면 우리 말을 들어.

엄청난 규모의 몬스터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 층의 기믹인 몬스터 웨이브였다.

일행은 침묵한 채 그 모습을 지켜봤다.

"저게 몬스터 웨이브란다. 나도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이네. 자, 그럼...."

"그럼 들어갑시다."

"뭐라고?"

진현우가 앞으로 나서면서 대뜸 말했다.

"들어가자고. 시간 없으니까."

"너, 우리가 한 말을 듣긴 한 거니?"

"알아. 저 안은 미로고, 오래 있으면 정신이 맛이 간다며? 방법이 있으니 갑시다."

"아니!"

진현우가 가리킨 곳은 안개였다.

조금 전, 화련과 아그니스의 길드원들이 입을 모아서 위험하다고 했던 미로.

그는 소풍이라도 가는 것처럼 말했다.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네. 네가 자살하는 거에 우리도 동참해 달라는 거니?"

"싫으면 빠져. 우리끼리 할 테니까."

"으, 으응? 현우야, 나도 포함된 거야?"

가만히 듣던 샬럿이 크게 당황했다. 진현우와 화련은 그녀를 무시한 채 서로를 응시했다.

"지금 날 협박하는 거야?"

"권유하는 거지. 쫄았으면 빠지라고. 방법이 없어서 내 제안을 받아들인 것 아닌가? 내가 아는 방법은 하나야. 안개를 돌파하는 것."

"그러니까 대체 무슨, 하!"

화련에게는 의아한 말이었다.

"귀가 먹었니? 미로라고. 들어갔다가 잘못하면 평생 못 나올 수도 있다고. 길 찾기 전문가인 도적들도 길을 못 찾는 곳을...."

"글쎄. 그건 보면 알겠지."

"...."

화련이 화를 억누르며 숨을 내뱉었다.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솟았지만, 그것도 잠시. 자신이 가진 아이템 하나가 떠올랐다.

그녀는 귀걸이를 만지작거렸다.

'설령 일이 잘못된다고 하더라도, 이 귀걸이만 있으면 나는 어떻게든 도망칠 수 있어.'

화련은 고개를 돌렸다.

아그니스의 길드원들이 근심 어린 표정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진현우의 제안을 거절하길 바라는 눈치였다. 하지만.

"좋아. 네가 선두에서 앞장서서 움직이는 조건이라면 네 제안대로 하겠어."

"그 정도야 어렵지도 않지."

"기, 길드장님!"

화련은 제안을 수락했다.

길드원들이 기겁하면서 그녀를 불렀지만, 그녀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럼 갑시다. 다음 몬스터 웨이브가 도착하기 전에 안개 속으로 들어가야 하니까."

"아으, 으아아... 난 몰라아...."

- 난 주인을 잘못 만난 것 같구나....

진현우는 가장 먼저 안개로 들어갔다.

그 뒤를 샬럿과 미호가 울상으로 뒤따랐다. 화련이 속으로 욕을 내뱉으며 그를 쫓았다.

"길드장님, 진짜 괜찮겠습니까?"

"괜찮겠니? 방법이 없으니까 가는 거지."

그리고 일행은 안개 속으로 들어섰다.

순식간에 주변의 풍경이 달라졌다. 자욱한 안개가 드리우면서 시야를 가로막았다.

한 치 앞도 볼 수 없을 정도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 캬악! 인간! 여기 벽이 있느니라!

"그러게 왜 혼자 멋대로 가고 그래?"

안개 속에 보이지 않는 벽이 있었다.

진현우는 파쇄권으로 벽을 강타했다. 하지만 벽은 부서지기는커녕, 흠집도 나지 않았다.

거인의 괴력을 썼는데도 그러했다.

"바보니? 말했잖아. 안 부서지는 벽이라고. 내 마법으로도 파괴하지 못한 벽이야."

"흠."

물리적으로도, 마법으로도 파괴할 수 없는 벽. 여길 벗어나려면 길을 찾는 수밖에 없다.

일반적인 플레이어라면 그럴 것이다.

진현우는 검을 빼 들었다.

"그러니까, 의미 없...."

부서진 검이 검기를 내뿜었다.

진현우는 막대기라도 휘두르는 것처럼 무성의하게 벽을 향해서 검을 휘둘렀다.

무의미한 짓이다. 화련은 그리 생각했다.

- 쉬이이익! 콰드득!

"...!"

그런데, 아니었다.

마력을 흡수하는 탐식의 검이 투명한 벽을 베어 냈다. 그리고 벽을 구성하고 있는 마력을 그 이름처럼 탐욕스럽게 흡수했다.

콰르르! 앞을 막던 벽이 무너져 내렸다.

"어?"

경악한 화련이 입을 벙긋거렸다.

그녀의 뒤에 있던 아그니스의 길드원들도 마찬가지였다. 덤덤한 건 진현우뿐이었다.

그는 무너진 벽을 넘어갔다.

"안 따라오고 뭐 해? 빨리 갑시다."

"아니, 잠깐. 대체 무슨...."

화련의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무슨 짓을 해도 부서지지 않던 벽이, 너무도 쉽게 부서졌으니까.

뭔가 잘못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 콰드득! 서걱! 스으으으...!

진현우는 오로지 직진만 하면서 앞을 가로막는 벽들을 무자비하게 베어 냈다.

누구도 돌파하지 못했던 미로에서, 더없이 무식한 방법으로 길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뭐, 뭐 이런 새끼가 다 있어?'

'저 검에 뭐가 있는 건가? 대체 뭐길래?'

의아해하는 사람들의 반응을 뒤로한 채, 직진만 하던 진현우는 목적지에 도달했다.

안개 저 너머로 흐릿한 형체들이 보였다.

사람의 형체였다.

"저건...."

"기다려. 조용히 처리해야 하니까."

진현우의 신형이 반투명해졌다.

그는 순식간에 앞으로 뛰쳐나갔고, 잠시 후. 저 너머에 있던 사람의 형체들이 쓰러졌다.

그가 손짓으로 일행을 불렀다.

"네 길드원들이 헛것을 본 건 아니네."

"...진짜로 사람이 있었다고?"

진현우 아래에 사람들이 쓰러져 있었다.

검은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었다. 그 갑옷을 유심히 바라보던 화련이 인상을 찌푸렸다.

"이 문양은...."

기사들이 입은 검은 갑옷에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화련은 그 문양이 뭔지 잘 알았다.

어느 나라의 문양.

"델하이움 제국의 문양이잖아."

"이놈들, 제국의 기사인 거 같은데요?"

델하이움 제국.

- 우우우웅!

그 이름을 들은 도끼, 용맹한 자가 격하게 진동했다. 마치 원수의 이름을 들은 것처럼.

144화

나다

제국, 델하이움.

브로큰 월드에 있는 국가들 중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로 강한 국력을 가진 나라.

그리고 먼 과거, 용맹한 자에 깃든 사념인 카리악의 고향을 습격한 나라였다.

- 우우우우웅!

그에 화답하듯 도끼가 격하게 진동했다.

도끼 안에 남은 사념, 카리악이 느끼고 있는 격렬한 증오가 진현우에게도 전해질 정도.

놈들이 여기 있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여기 이변이 일어난 이유는 일차적으로 대정령 때문이지만, 궁극적으로는....'

델하이움 제국 때문이다.

죽은 기사의 갑옷을 심각한 얼굴로 바라보던 화련이 그제야 알겠다는 듯 혀를 찼다.

"몬스터들이 왜 여기로 모였는지, 정령들이 왜 인간을 적대하는지 이제야 알 것 같네. 불의 정령왕이 날 여기로 보낸 이유도."

화련은 고개를 들었다.

쓰러진 기사들 너머에는 거대한 동굴의 입구가 있었다. 놈들이 지키던 곳이다.

최상위 랭커에 속할 정도로 뛰어난 마법사인 화련은 저 동굴이 이상하다는 걸 알았다.

"느껴져? 마력이 저 동굴로 모이고 있어."

"길드장님, 그게 뭘 뜻하는 겁니까?"

"따라와. 동굴 안으로 들어가면 알 거야."

화련은 부하들과 함께 동굴로 들어갔다.

그러자 모두의 눈앞에 메시지가 나타났다.

- 히든 던전을 발견했습니다.

- 처음으로 발견한 보상으로 몬스터의 경험치와 드롭률이 상승합니다. 보스 몬스터가 무조건 희귀 아이템을 드롭합니다.

- 던전: 비밀스러운 추출장에 진입합니다.

- 권장 레벨: Lv.80.

동굴에는 눈으로 볼 수 있을 정도로 짙은 마력이 흐르고 있었다. 거기에 물속으로 빠진 것 같은 압박감이 일행을 짓누르고 있었다.

고산지대에 온 것처럼 숨을 쉬기가 힘들다.

"여기, 영맥이야."

영맥.

간단하게 말해서 마력이 모이는 곳이다.

할타릿산이라는 지역의 마력이 집중하는 곳으로, 그만큼 어마어마한 마력이 고여 있다.

화련이 고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데 누가 헤집은 것 같네. 영맥의 흐름이 이상해. 폭주하고 있다고 해야 할까."

그 범인이 누군지는 말할 것도 없었다.

진현우는 검으로 마력을 흡수했다. 여기까지 오면서 소비된 마력이 금세 회복되었다.

"제국이 한 짓이겠지."

"내 생각도 그래. 그리고...."

화련은 자그마한 정령들을 소환했다.

뱀처럼 생긴 정령들이 땅속으로 파고들더니 사방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돌아오더니, 그녀에게 정보를 알려 줬다.

"이 동굴의 중심부에 제국군이 모여 있어. 아마 거기서 뭔가 수작을 벌이는 모양이야."

"재주가 많아서 좋네."

"빈정거리는 거니?"

진현우는 화련의 말을 무시했다.

간단한 이야기다. 제국군이 이곳에서 수작을 부리고 있고, 그 탓에 이변이 일어났다.

몬스터 웨이브나, 흉폭해진 정령 같은 것들.

이변을 해결하려면 델하이움 제국을, 그와 연계된 대정령까지 어떻게든 해야 한다.

'습격한 이유가 희귀한 자원 때문이었던가?'

- 우우우웅!

진현우의 기억으로는 그랬다.

도끼가 긍정하듯이 진동했다. 카리악의 고향 역시 자원 때문에 약탈당했던 곳이니까.

그의 눈앞에 퀘스트창이 나타났다.

[피의 복수.]

· 난이도: A.

· 설명: 델하이움 제국에게 모든 것을 잃었던 카리악은 피의 복수를 원하고 있다.

· 보상: 카리악과 관련된 새로운 스킬.

마음에 드는 퀘스트였다.

진현우는 퀘스트창을 지운 후, 기절한 기사들을 모으고 미호를 불렀다.

"이 동굴과 관련된 정보 좀 캐 봐."

- 쿠후훗, 그건 내 전문이지.

마안이 기사들의 정신을 파고들었다.

그걸 이용해서 적들의 구성이나 인원을 파악한 진현우는 아그니스 길드를 바라봤다.

"실력은 믿어도 되겠지?"

"우리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니? 탑 7층에서 활동하는 플레이어들이야. 보정으로 약해졌어도 4층 따위는 우습게 클리어할 수 있어."

"2주 동안 헤매 놓고 입은."

"현우야...."

샬럿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진현우와 화련 사이에서 팽팽하게 당겨진 실 같은 것이 느껴졌다. 아주 약간의 기회만 주어지면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 같은 실.

"싸우더라도 나가서 싸우면 안 될까?"

"...일단."

진현우는 도끼를 쥐었다.

"이 던전부터 끝냅시다."

동굴의 안쪽에서 제국이 기다린다.

일행은 걸음을 옮겼다.

* * *

안개에 숨겨져 있던 지하 동굴.

지금은 '비밀스러운 추출장'이라는 이름의 던전이 된 곳이지만, 옛날에는 대정령을 비롯한 수많은 정령이 터전으로 삼았던 곳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1번 추출 장치 점검 끝났습니다!"

눈으로 인지할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마력이 흐르는 곳에, 수많은 인간이 모여 있었다.

그들 너머에는 기계장치가 가득했다.

- 취이이익! 쿠우웅!

동굴에는 마도 공학으로 만들어진, 동굴과는 어울리지 않는 기계장치가 다수 있었다.

거대한 주사기를 여럿 연결해 놓은 것처럼 생긴, 흉물스럽기까지 한 추출 장치였다.

"3번 추출 장치, 추출 시작합니다!"

그것들이 지하에서 뭔가를 끌어 올렸다. 그리고 일련의 과정을 거친 후, 돌을 생성했다.

엄청난 마력이 깃든 최상급의 마력석을.

"최상급입니다. 역시, 질이 좋군요."

그 마력석을 어떤 여성이 살폈다.

화려한 로브를 입은 중년의 여성이었다. 그녀는 곁에 있던 기사에게 마력석을 건넸다.

"창고로 가져가세요. 나머지도 전부."

"예, 헬룬 님! 마력석을 창고로 옮겨라! 전이 마법진의 충전이 끝나면 제국으로 옮긴다!"

여성의 이름은 헬룬.

델하이움 제국의 정령사단. 그곳의 단장 자리를 임명받은, 고명한 정령사였다.

제국에게 할타릿산을 개척하고, 잠재된 자원을 가져오라는 명을 받은 자였다.

"몬스터 웨이브가 언제 출발했죠?"

"이제 한 시간 정도 지났습니다, 헬룬 님."

"후후, 멍청한 몬스터들. 영맥의 마력에 꼬이는 것이 불나방을 보는 것 같아 우습군요."

헬룬은 영맥의 엄청난 마력을 이용해서 할타릿산에 있는 몬스터들을 유인했다.

그리고 정령들을 이용해서 마력에 심취한 몬스터들로 플레이어들을 공격하게 했다.

"이번에는 많이 죽었으면 좋겠네요."

몬스터들이 죽든, 플레이어들이 죽든.

그건 헬룬의 알 바가 아니었다. 그녀가 몬스터 웨이브를 일으키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래야지 더 많은 마력을 추출할 수 있을 텐데요. 이번에 할당량이 꽤 많았죠?"

"예. 저번보다 더 많아졌습니다."

"워낙 전쟁이 많아졌으니 어쩔 수 없겠죠."

더 많은 마력을 추출하기 위함이었다.

몬스터나 플레이어가 죽으면 그들이 가지고 있던 생명력과 마력이 영맥으로 흡수된다.

그것들이 영맥을 더욱 강하게 만든다.

몬스터 웨이브의 목적이었다.

"후, 후훗. 이번 일만 잘 끝마치면...."

헬룬은 광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걸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이번 일을 끝마치고 어떤 보상을 받을지에 대한 기대로 가득했다.

수많은 보상이 떠올랐지만, 정령사인 헬룬이 가장 원하는 보상은 바로 이곳에 있었다.

- 크르르르르르....

"어머, 펜리스. 오늘은 제정신인가 보네요?"

공동의 가운데.

여러 추출 장치의 중심에 거대한 늑대가 누워 있었다. 집채만 한 크기의 늑대였는데, 특이하게도 그 털이 모두 얼음으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

"얼마 전만 해도 이 지역에서 숭상받던 대정령이, 이런 비참한 꼴을 하고 있다니."

검은 사슬이 늑대의 전신을 묶고 있었다.

그 목에도 불길한 목줄이 채워진 게 보였다. 헬룬이 팔을 뻗자 목줄이 손아귀로 돌아왔다.

으르렁거리던 늑대가 조용해졌다.

"우후훗. 늑대의 대정령... 아아, 좋네요. 정말 좋아요. 이런 강력한 정령을, 이번 일만 끝나면 내 노예로 삼을 수가 있다니...."

헬룬은 황홀한 표정으로 대정령을 봤다.

그녀가 가장 원하는 보상이 이것이었다. 늑대의 대정령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

제국에게서 받은 '아티팩트'의 힘이 있다면 이룰 수 있다. 가능성이 있는 소망이었다.

"후후, 펜리스. 얼마 안 있으면 내가 당신의 주인이 될 거니까 잘 보여야 해요. 알겠나요?"

- 크르르르....

헬룬이 쓰다듬자 대정령이 고개를 숙였다.

애완견이 주인의 귀여움을 받는 듯한 모습. 그 광경을 본 정령들이 분노에 몸을 떨었다.

- 펜리스, 펜리스가....

- 나쁜 인간, 나쁜 인간들. 모두 미워.

- 저 인간은 약속을 지키지 않을 거야. 나쁜 아티팩트, 저 아티팩트를 뺏어야 하는데.

정령들이 중얼거리는 걸 들은 헬룬이 고개를 돌렸다. 그 입가에 잔혹한 미소가 어렸다.

"말이 많네요. 펜리스, 저 정령들한테 명령하세요. 몬스터들과 함께 인간을 덮치라고. 바깥에 있는 인간들은 너희들의 적이라고."

- 가르르르르....

- 아, 안 돼. 펜리스, 그만....

대정령은 정령들에게 명령할 수 있다.

강제되는 명령을 들은 정령들이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주어진 명령에 따랐다.

- 아흐윽! 머리가, 머리가 너무 아파....

- 그만, 나는 그만하고 싶어!

정령들이 비명을 지르며 떠났다.

몬스터들과 합류해서 바깥에 있는 플레이어들을 공격할 것이다. 헬룬이 히죽 웃었다.

"모든 건 제국을 위해서."

헬룬은 손아귀의 아티팩트를 꽉 움켜쥐면서, 자신에게 기회를 준 국가를 찬양했다.

그녀는 천천히 등을 돌렸다.

- 콰아아앙!

"뭐야?! 이게 무슨 소리야!"

바로 그때.

강렬한 폭발음이 들리면서 동굴이 뒤흔들렸다. 헬룬이 황급히 소리가 들린 곳을 봤다.

공동의 저 너머, 입구가 있는 곳.

- 으아아아악!

- 어, 어디서 이런 괴물... 캬학!

- 내 몸, 내 몸이이이! 흐아아아아!

굳게 닫힌 철문 너머로 비명이 들렸다.

제국군의 비명이었다. 날카로운 절삭음도, 이글거리는 불길의 소리도 함께 들렸다.

헬룬은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비명? 누가 침입한 건가?'

대체 어떻게?

영맥과 대정령의 힘을 이용해서 안개를, 그리고 강력한 미로를 구축해 놨다.

누구도 들어올 수 없는 마경이 이곳이다.

근데 침입자가 들어왔다고?

- 쿠웅! 화르르륵!

점점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다.

혼란스러운 상황. 헬룬은 입술을 깨물면서 정령을 일으켰다. 그녀의 주변에 어둠으로 빚어진 정령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헬룬 님! 침입자입니다!"

"나도 알아요! 저쪽으로 들어오는 것 같으니까 진형 갖추고 경계하세요. 그리고 적이 들어오면 한 번에 공격을 퍼부을 겁니다!"

"예!"

어둠의 정령들이 힘을 일으켰다.

다른 병사들 역시 마법이나 스킬이 담긴 화살을 준비하고 저 너머의 문을 주시했다.

쿠웅, 쿵! 소리가 코앞까지 다가왔다.

그리고.

- 꽈아아앙!

"지금!"

거대한 철문이 단번에 날아갔다.

헬룬과 병사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철문 너머로 준비해 뒀던 공격들을 쏟아부었다.

강력한 힘이 담긴 화살이, 수많은 마법이, 정령들의 힘이 침입자들을 향해 쏘아졌다.

'이걸로 죽일 수 있으면 최선. 못 죽여도 상관없다. 분명히 큰 피해를 입을 테니까.'

헬룬은 곁에 있는 대정령을 봤다.

큰 피해를 입은 침입자들을 늑대의 대정령을 이용해서 처리하면 된다. 쉬운 일이다.

그녀는 그렇게 판단했다.

"뭣!"

"저, 저게 무슨!"

자욱하게 일어난 먼지가 가라앉고, 문 너머의 광경이 보이기 전까지는 그랬다.

헬룬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내가, 뭘 보고 있는 거야?"

멈춰 있다.

쏟아지던 화살이, 들이닥치던 마법이. 누군가 시간을 멈춘 것처럼 허공에 멈춰 있었다.

그리고 그것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으, 으아아악!"

"우리한테 온다! 방패...."

그 공격을 쏘아 낸 제국군을 향해서.

방어할 새도 없었다. 순식간에 되돌아온 공격을 막지 못한 제국군이 비명을 내질렀다.

마법이, 화살이 그들을 덮쳤다.

"크으윽! 대체 이게 뭐야!"

헬룬은 입술을 깨물며 목줄을 끌었다.

그러자 대정령이 그녀에게로 쏟아지던 마법을 막아 냈다. 덕분에 그녀는 무사했지만, 공격을 피하지 못한 제국군의 상태는 처참했다.

"어떤 놈이냐! 대체 누가...!"

헬룬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시선이 부서진 문으로 향했다. 강력한 힘에 의해 반으로 쪼개지다시피 한 철문.

그 너머에 남성이 서 있었다.

"나다, 이 새끼야."

진현우는 검에 묻은 피를 털어 냈다.

그의 무심한 눈동자가 헬룬을 직시했다.

145화

맹약의 증거

"끄으, 으어어...."

"부상자들을 뒤로 보내! 얼른!"

"저, 적들이!"

헬룬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조금 전만 해도 평소와 같았던 공동은 널브러진 제국군들이 신음하는 곳으로 바뀌었다.

이 광경을 만들어 낸 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저놈을 막아!"

"진형을 유지하면서 돌진한다! 가자!"

그래도 모든 제국군이 당한 건 아니었다.

유수의 영향에서 벗어난 제국군들은 빠르게 진형을 갖추고, 진현우를 노리고 돌진했다.

그는 도끼를 높이 들었다.

"크윽, 무슨 힘이!"

분열하는 도끼가 제국군들을 덮쳤다.

엄청난 위력에 병사들은 걸음을 멈추고 도끼를 막아야 했다. 그들을 노리고 진현우의 검이 움직였다. 보이지 않는 검기가 쏘아졌다.

- 서걱!

"커, 헉...!"

"뭐, 뭐야! 어디서 공격한 거냐!"

사각지대에서 날아든 검기가 병사들을 베었다. 제국군이 기겁하면서 주변을 경계했다.

그리고 진현우가 돌진했다.

"크하악!"

"괴, 괴물...!"

연이은 공격에 제국군들이 휩쓸렸다.

일방적으로, 그 누구도 진현우의 앞을 막지 못했다. 헬룬이 분노하며 정령들을 부렸다.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제국의 병사가 저것도 못 막는다니! 전원 정령을 일으켜라! 저놈들을 공격해!"

"예, 헬룬 님!"

그녀를 따르는 정령사들이 명령에 따랐다.

정령사단 전원을 데리고 오지는 못했지만, 그중에서도 정예들은 데리고 올 수 있었다.

정령들이 순식간에 나타났다.

- 화아아아악!

정령들이 다시금 마법을 일으켰다.

어둠을 빚어낸 조각상처럼 생긴 어둠의 정령들이 그림자로 된 창들을 수없이 쏘아 냈다.

다른 정령들의 마법이 그 뒤를 따랐다.

조금 전에 진현우가 마법과 화살을 되돌리는 믿을 수 없는 곡예를 보이기는 했지만.

'그걸 계속해서 할 수는 없을 거다.'

그런 계산에서였다.

헬룬의 그런 생각은 어느 의미에서는 맞았고, 어떤 의미에서는 또 틀린 생각이었다.

진현우는 마법들을 신경도 쓰지 않았다.

대신.

"우리를 지켜 주시옵소서!"

"...!"

샬럿이 정령들의 마법을 막아 냈다.

그림자로 된 창들이 갑자기 솟구친 빛의 장막과 충돌했다. 강렬한 빛은 어둠을 몰아내기에 충분했고, 창들이 허망하게 사라졌다.

"사제다! 사제부터...!"

- 쿠어어어엉!

사제부터 죽여야 한다.

그렇게 판단한 제국군들의 바로 앞에 거대한 곰이 나타났다. 샬럿이 곧바로 곰에게 버프를 부여했고, 그 앞발이 적들을 찢었다.

그리고 샬럿의 뒤에서 미호가 튀어나왔다.

- 쿠후훗, 너희는 서로 죽여라. 그리고 나머지는 이 계집을 목숨을 걸고 지키도록!

"큭, 으윽, 머, 머리가!"

미호의 마안이 일대의 제국군을 덮쳤다.

환각에 당한 제국군이 같은 동료들을 죽였고, 매혹당한 제국군이 샬럿을 엄호했다.

샬럿은 십자가를 높이 들었다.

"용맹한 자들에게 축복을!"

"좋아, 우리도 돌입한다! 가서 다 죽여!"

"들어가!"

샬럿이 십자가를 높이 들자 빛이 사방으로 퍼졌다. 그녀의 뒤에서 나타난 아그니스의 길드원들이 그 빛을 받으며 뛰쳐나갔다.

버프가 그들의 힘을 강화했다.

"허, 성녀가 확실히 다르긴 다르네!"

"이것들 다 죽여!"

"크으윽! 감히, 우리 제국군에게!"

아그니스 길드원들의 숫자는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20명 남짓. 하지만 모두가 이 층의 수준을 벗어난 플레이어였고, 지금은 버프로 강화된 상황. 제국군이 맥없이 밀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 쿠르르르....

천장에 뜨거운 열기가 모였다.

그 열기는 타오르는 구름으로 바뀌었고, 천장에 맺힌 구름은 빗물을 쏟아 냈다.

불길로 이루어진 빗물을.

- 화르르르륵!

"키하아아아악!"

"뜨, 뜨거워! 히이익! 내 몸이이!"

땅에서부터 불길로 이루어진 커다란 뱀이 솟구쳤다. 그 뱀들이 병사들을 집어삼키고, 정령들에게 화염구를 토해 냈다.

천장에서는 불길로 된 빗물이, 지상에서는 거대한 뱀이 쏘아 내는 화염구가.

"아하하하! 좋네, 내가 아주 좋아하는 환경이야! 다 태워 죽여 줄게, 제국의 개들아!"

사방이 불타고 있었다.

마법을 쏟아 낸 화련이 광소했다.

엄청난 수준의 광역 마법을 아무렇지도 않게 전개하는 모습에 샬럿이 감탄했다.

'역시, 최전선에서 활동하는 플레이어....'

최상위의 랭커이면서, 아그니스라는 대형 길드를 이끄는 플레이어다운 마법이었다.

그리고 그 못지않은 것이 진현우였다.

"뭣들 하고 있는 것이냐!"

"다, 단장님!"

제국군이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던 순간.

헬룬 너머에 있는 후방의 문이 열리더니, 거기서 수많은 제국군이 뛰쳐나왔다. 소란을 듣고 동굴 전체에서 달려온 병력들이었다.

그중에 제국군의 기사단장이 있었다.

"이런 추태를 보이다니! 우리에게 이곳을 맡긴 황제 폐하께 부끄럽지도 않느냐!"

기사단장, 그레이슨.

사자를 형상화한 듯한 검은 갑옷을 입은 중년의 남성이었다. 그가 할버드를 들었다.

"사자의...!"

사자의 진을 갖추어라.

그렇게 말하려는 순간, 그보다 먼저 진현우가 아공간에서 창을 꺼냈다.

지독히도 불길하게 생긴 창을.

- 쉬이이익!

마창에서 튀어나온 가시가 진현우의 팔을 찔렀고, 피를 흡수하며 잠식하기 시작했다.

그에게서 검은 마기가 흘러나왔다.

진현우는 숨을 삼켰다. 그리고 앞으로 발을 내디디면서, 창을 쥔 팔을 힘껏 내질렀다.

- 콰아아아앙!

그 손끝에서 몇 겹의 충격파가 일어났다.

동시에 쏘아지는 마창. 허공을 가로지르던 검은 창이 천장 높은 곳까지 도달했고, 순식간에 수십여 개의 마창으로 분열했다.

그것들이 노리는 것은 하나.

"마, 막아라! 방패를...!"

"우아아아악!"

그레이슨을 비롯한 기사들이었다.

그들은 경악하면서 방패를 들었다. 하지만 무의미한 짓이었다. 마창, 분열하는 악의는 방패를 꿰뚫으면서 그들의 살점을 관통했다.

"흐, 어억!"

"크아아악...!"

쏟아지는 마창이 기사들을 휩쓸었다.

지독한 마기가 상처로 스며들었다. 끔찍한 통증을 느끼던 그들에게 진현우가 돌진했다.

엄청난 압박감이 그들을 짓눌렀다.

- 마창이 주변의 적들을 압도합니다. 인근 적들의 신체 능력이 저하됩니다.

마창이 적들을 무자비하게 베어 냈다.

그중에는 그레이슨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검기를 일으키면서 진현우를 막으려 했다.

하지만 불가능한 일이었다.

"대체, 이게...!"

두 자루의 검이 맞부딪쳤다.

부서진 검과 그레이슨의 검. 두 검이 충돌하는 순간, 그레이슨이 일으킨 검기가 사라졌다.

부서진 검이 흡수한 것이었다.

예상치 못한 광경에 순간 당황한 그레이슨의 심장을 향해서 마창이 쇄도했다.

"커, 헉!"

그걸로 끝이었다.

그레이슨은 심장을 꿰뚫은 마창을 떨리는 눈으로 봤다. 제대로 된 전투조차 못 하고 이렇게 허망하게 죽을 거라 누가 생각했겠는가.

"네놈, 끄르륵...."

떨리는 손으로 붙잡으려고 하는 그레이슨을 밀쳐 내면서, 진현우는 앞을 향해 걸어갔다.

저 너머에 헬룬이 보였다.

그녀는 대정령을 쓰다듬고 있었다.

"당신은... 대체 누구죠?"

"진현우. 근데 내 이름을 말한다고 아나?"

"몰라요. 그래도 알아 둘 필요는 있죠."

상황은 헬룬에게 있어 최악에 가까웠다.

기사단장 그레이슨은 죽었다. 병사들도 일방적으로 학살당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곧 죽을 놈인데 이름은 알아 둬야지."

하지만 헬룬은 여유로웠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녀에게 자신감을 불어넣는 최종 병기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웃으며 손을 뻗었다.

"이리 와."

- 우, 우우우....

거대한 늑대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온몸이 구속되어 쓰러져 있던 늑대. 놈을 둘러싼 쇠사슬들이 하나둘씩 풀리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목줄만은 남겨 둔 채, 늑대를 구속하고 있던 속박구가 모두 해제되었다.

- 크르르르르르....

거대한 늑대가 눈을 떴다.

한때는 총명함을 자랑했을 것 같은 푸른 눈동자에는 어떠한 지성도 느껴지지 않았다.

늑대가 헬룬의 옆에 섰다.

"펜리스! 저 인간을 죽여!"

- 크하아아아아!

늑대가 형언할 수 없는 포효를 내질렀다.

그 포효에 반응하듯 사방에서 정령이 나타났다. 대정령과 똑같이 초점을 잃은 눈동자를 한 정령들이 순식간에 진현우를 포위했다.

대정령이 걸음을 옮겼다.

"여긴 영맥이에요. 마력이 넘쳐흐르는 곳이지. 여기서 정령은 불사신이나 다름없어."

아티팩트로 굴복시키고 강제로 계약한 대정령이다. 원래 가진 힘보다는 약해졌지만, 여전히 강력한 데다가 불사에 가깝기까지 하다.

인간이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헬룬은 확신했고, 실제로도 그러했다.

"실력이 대단하지만, 거기까지야."

헬룬이 진현우를 비웃었다.

그녀의 앞을 수많은 정령이 가로막았다. 자신만 죽지 않는다면 변수는 없다.

그렇게 판단한 것이었다.

"펜리스."

하지만 단 하나.

헬룬이 착각한 것이 있다면.

"정령왕과 숲의 일족이 맺었던 맹약을 지켜라. 여기, 내 손에 맹약의 증거가 있다!"

- 크, 크르르르...?

"뭐?"

진현우가 아이템을 내밀었다.

3층에서 보상으로 얻었던 아이템, 맹약의 증거. 정령의 범주에 속하는 자라면 누구든 맹약에 따라 계약에 임하게끔 만드는 아이템.

"잠깐, 무슨 헛소리를... 하는...!"

그리고.

- 맹약의 증거가 목표를 인지했습니다.

- 대상: 늑대의 대정령, 펜리스. 맹약에 따라 펜리스를 강제로 계약에 임하게끔 합니다.

- 정령이 기존에 맺은 계약이 무시됩니다.

기존의 계약을 무시할 수 있는 아이템.

헬룬이 맺은 계약도 마찬가지였다. 아이템에서 흘러나온 힘이 늑대의 대정령을 감쌌다.

늑대에게서 검은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뭐야? 뭘 하는... 계, 계약이, 뭐냐고!"

헬룬이 경악했다.

제국에게서 받은 아티팩트의 힘으로 저 대정령을 강제로 굴복시키게끔 만들었다.

지금, 그 목줄이 풀리려고 하고 있었다.

- 카아아앙!

- 크르, 크... 크하아아아악!

청명한 소리가 공동을 울렸다.

오랫동안 늑대의 대정령을 구속해 왔던 목줄이 스스로 벗겨지면서 나는 소리였다.

펜리스가 비명을 내지르며 고개를 젖혔다.

"서, 설마!"

젖혀진 고개가 원래대로 돌아왔을 때, 펜리스의 눈에는 여태껏 없던 지성이 담겨 있었다.

그 눈동자에 분노가 일렁거렸다.

"말도 안 돼. 아, 아티팩트를... 계약을!"

- 크르르르... 가증스러운 인간....

헬룬의 눈이 크게 떨렸다.

그녀는 정신을 놓은 사람처럼 말을 더듬으면서 뒤로 물러났다. 펜리스는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면서 천천히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

"있을 수 없어! 부, 불가능한 일이라고!"

- 얼마나 오랫동안 참았던가.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거늘.

쿠웅, 쿵!

헬룬은 필사적으로 도망쳤지만, 둘 사이의 거리는 계속해서 좁혀지고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나타난 정령들이 그녀의 사방을 포위하고 있었다.

"아, 아아...."

- 분수에 맞지 않는 아티팩트의 힘으로 날 지배하려고 했던 대가를....

펜리스가 헬룬의 앞에 섰다.

그녀는 황급히 어둠의 정령들을 소환했지만 무의미한 짓이었다. 펜리스가 내지른 거대한 고함에 어둠의 정령들이 그대로 흩어졌다.

거대한 늑대가 크게 입을 벌렸다.

"안 돼, 이럴 리가, 이건...!"

- 이제, 치러야 할 것이다.

헬룬은 시야가 어두워짐을 느꼈다.

그리고, 콰드득! 살과 뼈가 짓이겨지는 끔찍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걸로 끝이었다.

제국의 정령사단을 이끌던 헬룬은, 그 명성에 걸맞지 않은 허무한 죽음을 맞이했다.

"헤, 헬룬 님."

"말도 안 돼...."

그걸 지켜본 제국군은 전의를 상실했다.

헬룬도, 그레이스도 죽은 상황. 이곳의 제국군을 이끌 지휘관들이 모두 죽은 셈이었다.

그들은 항복해야 한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하나 펜리스를 그걸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

- 정령들이여! 영맥을 더럽힌 침입자들을 용서하지 마라. 치욕을 갚을 시간이다!

- 나쁜 인간들!

정령들이 기다렸다는 듯 제국군을 덮쳤다.

펜리스도 그를 뒤따랐다.

- 제국의 이름을 내세운 자는 그 누구도 여기서 살아 나가지 못할 것이다!

"우, 우아아아악!"

처절한 비명이 공동을 가득 울렸다.

진현우는 마창을 아공간에 집어넣으면서, 그 모습을 흐뭇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와, 이거 완전 날로 먹었네."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146화

복속의 말뚝

이 던전의 원래 보스는 펜리스다.

늑대의 대정령과 놈을 강제로 사역하고 있는 헬룬을 동시에 상대해야 하는 던전이다.

거기에 제국군과 그레이슨, 정령들까지.

'난이도가 말도 안 되게 높은 던전이지.'

정석적인 방법으로 깬다면 그렇다.

실제로 전생에서는 어떤 공략대가 정성적인 방법을 써서 이 던전을 공략했었다.

엄청난 피해가 뒤따른 건 당연한 얘기였다.

"완전히 날로 먹었군."

"기분이 참 좋아 보이는구나, 인간."

"그럼 안 좋겠냐?"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미호는 널브러진 인간들의 정기를 흡수하면서, 신난 진현우를 묘한 눈빛으로 응시했다.

그걸 화련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봤다.

'이게... 말이 돼?'

도무지 믿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화련이 보기에 진현우는 전사였다. 다양한 계통의 무기를 다루는, 아마도 히든 클래스.

정령에 대한 특성은 없을 것이다. 운 좋게 보상으로 얻었다고 한들 좋은 특성은 없을 터.

'그런 주제에 대정령과 계약했다고?'

펜리스는 성난 짐승처럼 날뛰고 있었다.

놈이 바닥을 짓밟으면 땅이 얼어붙으면서 수많은 얼음 가시가 적들을 꿰뚫었다. 숨을 내뱉으면 지독한 냉기가 제국군들을 얼렸다.

대정령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힘이었다.

'아냐, 말이 안 돼. 저 정도 급의 정령과 계약하려면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해. 고작 몇 초의 순간으로 계약을 맺는 건 불가능해.'

그렇다면.

'아마도 펜리스와 맺은 건 가계약.'

특수한 아이템의 효과로 가계약을 맺어서 펜리스를 잠깐 부리는 것일 수도 있다.

진현우를 보는 화련의 눈빛이 묘해졌다.

'그럼... 기회가 있을지도 몰라.'

화련은 지금의 진현우를 보면서 큰 위기감을 느꼈다. 이대로 둬서는 안 된다는 위기감.

그 위기감은 펜리스를 보며 더욱 강해졌다.

- 나쁜 인간들! 복수할 거야!

- 제국의 이름을 내세운 자는 모두 죽여라!

"크아아악!"

정령들은 펜리스와 함께 적들을 휩쓸었다.

지휘관들을 잃고 전의까지 상실한 제국군들은 정령들을 막지 못했다. 정령이라는 해일에 휩쓸린 그들은 얼마 못 가 모두 쓰러졌다.

- 펜리스!

- 크르르... 미안하다. 나 때문에....

"쿠후, 저것들. 이제 신파극도 찍는구나."

"넌 공감 능력이 아예 없구나?"

전투가 끝나자 정령들이 펜리스에게 달라붙으면서 엉엉 울어 대기 시작했다.

펜리스의 눈동자가 진현우를 바라봤다.

- 고맙다, 은인... 아니, 계약자여.

펜리스가 고개를 깊이 숙였다.

- 네가 아니었다면 난 아티팩트의 힘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죽을 때까지 아티팩트에 놀아났을지도 모르지.

"저 목줄 말이지?"

- 음. 아직도 안 사라졌군. 목줄은 그 여자의 취향이었으니, 원래 형태로 돌아올 것이다.

헬룬이 썼던 아티팩트.

펜리스의 목을 구속하고 있던 검은 목줄은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그런데 그 형체가 다소 바뀌었다.

'말뚝?'

목줄에서 말뚝으로.

진현우는 허공에 뜬 말뚝을 확인했다.

[복속의 말뚝 (전설)]

- 설명: 먼 과거, 신의 짐승에게 멸망당할 위기에 처했던 왕국에게 신이 내린 선물. 대상을 강제로 복속시켜 명령에 따르게끔 한다.

· 옵션: 복속.

* 복속: 특정한 조건들이 갖추어졌을 때, 상대방을 강제로 복속시킬 수 있다. 이 아이템의 효과는 어떤 의미에서 저주에 가깝다. 상대방이 죽기 전까지 이 효과는 사라지지 않는다.

복속의 말뚝.

불길한 이름인데 효과까지 불길했다.

"특정한 조건이라...."

- 나도 자세한 조건은 모른다. 하지만 정령사가 말하기를, 굉장히 까다로운 조건들이었다고 하더군. 힘들게 충족시켰다고 했다.

"헬룬이 말이지."

진현우는 말뚝을 만지려고 했다.

그걸 펜리스가 다급히 막았다.

- 만져서는 안 된다, 계약자. 그 아티팩트는 계약의 대상을 잃었을 뿐, 아직도 작동하고 있다. 대상만 찾는다면 다시 작동할 것이다.

"다시 작동한다고?"

- 그래. 저건 저주에 가깝다. 한번 발동하면 대상이 죽기 전까지는 사라지지 않아.

그런데 지금은 맹약의 증거 때문에 저주의 대상이었던 펜리스를 놓친 상황.

복속의 말뚝은 새로운 대상을 찾고, 그 대상이 죽기 전까지는 유지될 것이다.

'응? 잠깐만.'

진현우는 화련을 흘깃 봤다.

그녀와 아그니스 길드는 그를 경계하는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협력자였지만, 이제부터는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이걸로 화련을 강제로 복속시키면...?'

다른 길드도 아닌, 추문으로 영향력을 꽤 상실했으나 여전히 대형 길드인 아그니스.

길드장인 화련을 복속시킴으로써, 그 길드를 자신의 입맛대로 다루는 게 가능해진다.

'든든한 동맹이 생기는 거나 마찬가지다.'

탑을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세력의 중요성은 커진다. 진현우는 층을 혼자서 공략하는 걸 선호하지만, 그게 불가능한 층도 존재한다.

그럴 때 아그니스가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탑 최전선의 랭커인 걸 생각하면 위기 상황에 자기 몸을 내뺄 수단은 갖고 있을 거다.'

그걸 생각하면 화련이 자신에게 스스로 접근하게끔 유도하는 것이 맞다.

그리고 기습으로 처리하는 게 낫겠지.

"좋아."

진현우는 조심스레 말뚝을 잡았다. 말뚝이 그의 손아귀로, 아공간 속으로 사라졌다.

- 계약자. 내 말을 허투로 들었나? 그 말뚝은 봉인해야 한다. 내게 맡기면, 지금 당장.

"아니, 봉인하지 말고 가지고 있어 봐."

- 왜지? 따로 이유가 있나?

펜리스가 격하게 반대했다.

그럴 수밖에 없다. 녀석에게 이 말뚝은 원하지 않는 일을 하게끔 만든 물건이었으니까.

"쓸 일이 생겼어. 잠깐 내 말대로 해 줘."

- 뭘 하려는 것이지?

진현우는 펜리스에게 뭘 하려는 건지 말했고, 그걸 들은 늑대의 표정이 묘해졌다.

- 그리 내키지 않는 계획이다만.

"나한테는 필요한 일이야. 네 목숨도 내가 구해 줬잖아? 그냥 따라 줬으면 좋겠는데."

- 일단은 그렇게 하겠다.

펜리스가 못마땅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그 이마에 진현우가 손을 갖다 댔다.

그러자 늑대에게서 강한 냉기가 일어나더니, 바닥에 새하얀 마법진이 생겼다.

- 나, 펜리스는 그대와 정식으로 계약하겠다. 내 이빨은 그대의 적을 물어뜯을 것이며, 설원의 차가운 바람이 그대를 지킬 것이다.

파아앗!

마법진이 강렬한 빛을 내뿜었다. 지켜보던 이들의 시야가 순간 멀어 버릴 정도였다.

펜리스의 몸이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 여기, 계약은 이루어졌다.

이윽고 펜리스가 완전히 사라졌다.

남은 것은 진현우뿐. 그에게로 새하얀 기운들이 미친 듯이 흘러 들어갔다. 그 기운들을 받아들이던 진현우가 불현듯 허리를 숙였다.

"커헉!"

그 입에서 피가 왈칵 쏟아졌다.

엄청난 양의 피였다. 몸을 추스를 수가 없는지, 진현우가 위태롭게 휘청거렸다.

그걸 본 화련의 눈이 번쩍였다.

"길드장님. 저놈, 왜 저러는 거죠?"

"무리한 거야."

정령사는 자신의 수준을 넘어서는 정령과 계약을 맺을 때 큰 부하를 받게 된다.

조금 전, 진현우는 특수한 아이템으로 펜리스와 가계약을 맺고 싸우게끔 했다.

'거기서 엄청난 힘을 소비했을 텐데.'

그 상황에서 진현우의 수준을 아득히 넘어서는 대정령, 펜리스와 정식으로 계약했다.

엄청난 부하가 그 몸에 가해졌을 것이다.

'한동안 몸을 못 움직일 정도일 거야.'

화련의 예상대로였다.

위태롭게 휘청거리던 진현우가 결국 무릎을 꿇었다. 그 입에서 다시금 피가 쏟아졌다.

샬럿이 당황해서 그에게 달려갔다.

"현우야!"

"욱, 우웨에에엑!"

화련은 진현우의 몸을 봤다.

전신에 푸른 핏줄이 솟구친 게 보였다. 저게 무엇을 뜻하는지 화련은 잘 알고 있었다.

'마력 역류.'

화련도 겪은 적이 있다. 신체의 마력이 엉망으로 헤집어지면서 몸을 가눌 수가 없는 것.

그리고 그건, 그녀에게 있어 큰 기회였다.

"지금 처리해야겠어."

"예? 저놈을 말입니까?"

"그래. 대정령과 계약한 놈이잖니. 게다가 우리와 적대 관계이기까지 하지. 여기서 살려 두면, 앞으로 두고두고 귀찮아질 거야."

화련은 진현우의 가치를 인정했다.

저놈은 더 성장할 놈이다. 유저이니 앞으로의 층에 어떤 비밀이 있는지도 잘 알 것이다.

그런 놈과 적대적인 관계라는 건, 그 관계가 호전될 가능성이 없다는 건 큰 부담이었다.

"마력 역류면 한동안은 못 움직일 거야. 지금, 이 자리에서 죽인다. 가자."

"예."

굴욕을 갚아 줄 필요도 있다.

화련과 아그니스 길드원들은 재빠르게 움직였다. 그들이 순식간에 진현우를 포위했다.

상황을 뒤늦게 눈치챈 샬럿이 당황했다.

"뭘 하려는 거죠? 다가오지 마세요."

"알잖아. 우리가 뭘 하려는 건지."

"오지... 꺄아아악!"

화련의 마법이 샬럿을 덮쳤다.

거대한 화염구가 그녀를 강타했고, 샬럿이 요란스럽게 벽까지 날아가 처박혔다.

그녀는 코웃음을 치며 걸음을 옮겼다.

"언데드가 아니면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하는 사제 따위가. 너희는 저 여자를 잡아 둬라."

"네, 길드장님."

"잠깐, 아으윽...!"

화련은 진현우 앞에 섰다.

한참 피를 쏟아 내던 그는 거친 숨을 내뱉고 있었다. 그 눈동자가 화련을 바라봤다.

그녀가 피식 웃으며 마력을 일으켰다.

- 화르르륵!

"크하아악!"

지상에서 솟구친 불기둥이 진현우를 덮쳤다. 살이 타들어 가는 냄새가 사방으로 퍼졌다.

고통스럽지만, 죽지는 않을 정도의 위력.

화련은 진현우의 무기를 멀리 쳐 냈다.

"너 이 새끼...."

"여전히 입버릇이 나쁘네. 내가 말했었지. 네 화법, 굉장히 마음에 안 든다고."

"날, 처리할 생각이냐?"

진현우가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화련이 그를 걷어찼다. 균형을 잃은 몸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너한테는 고마운 것도 있어. 박현진, 그놈이 어떤 놈인지 나한테 알려 줬잖아. 알고 보니까 새 길드를 만드려고 별짓을 다 했더라고."

"그럼, 이 상황이, 말이 안 되는데?

"뭐,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잖니?"

화련이 손가락을 튕겼다.

바닥에서 거대한 뱀들이 나타났다. 놈들의 불타는 꼬리가 진현우를 단단히 묶었다.

허공에 나타난 지옥의 불길이 그를 겨눴다.

"네가 살아 있으면 나하고 계속 부딪힐 것 같거든. 나는 감이 좋아. 그러니까...."

화련의 입가에 비웃음이 어렸다.

"넌 여기서 죽어 줘야겠어."

마법이 진현우를 향해 쏘아졌다.

그를 포위한 아그니스의 길드원 역시 그를 공격했다. 수많은 스킬이 진현우를 노렸다.

그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신체가 한계에 달해 움직이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도와줘서 고마웠어, 진현우."

화련의 입가에 조소가 어렸다.

그리고 그녀가 바라보는 진현우의 입가에도, 그와 똑같은 비웃음이 짙게 어렸다.

거기에 그녀가 의아함을 느끼려는 순간.

- 크허어어엉!

"뭐, 윽, 아아아아악!"

화련의 등 뒤에서 거대한 형체가 나타났다.

거대한 늑대, 펜리스였다. 날카로운 얼음으로 뒤덮힌 앞발이 화련을 강하게 짓눌렀다.

그녀가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페, 펜리스? 이게 무슨...!"

화련은 불길함을 느꼈다.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직감. 그녀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귀걸이를 사용하려고 했다.

하지만 조금 늦었다.

"쿠후훗! 이 귀걸이구나?"

"...!"

영체 상태에서 나타난 미호가 화련의 귀를 발톱으로 할퀴었다. 그 귀에 매달려 있던 귀걸이가 살점과 함께 뜯겨졌다.

그리고 진현우가 움직였다.

- 콰아아앙!

수호자의 갑옷이 그에게 닥치던 공격들을 모조리 요격했다. 재빠르게 몸을 일으킨 진현우는 섬광을 사용해 화련에게 돌진했다.

진현우는 오른손을 활짝 펼쳤다.

"뭐, 뭘 하려는 거야?"

그 오른손에서 복속의 말뚝이 나타났다.

불길하게 생긴 말뚝. 그걸 본 화련은 강렬한 위기감을 느꼈고, 거세게 발악하기 시작했다.

"너 뭐 하는 거냐고! 크으윽!"

하지만 늦었다.

진현우는 말뚝을 쥔 손을 높이 들었다.

"뭐긴 뭐야, 너 엿 먹이는 거지."

"너 이... 아아아악!"

푸우욱!

말뚝이 화련의 심장을 찔렀다.

불길한 힘으로 이루어진 말뚝이 심장을 꿰뚫고, 그 심장에 복잡한 문자를 새겼다.

그리고 메시지가 나타났다.

- 말뚝이 복속의 대상을 변경합니다.

- 대상: 화련.

검은 기운이 화련을 휘감았다.

- 화련이 당신에게 복속합니다.

"마, 말도 안 돼애애!"

절망 어린 비명이 공동을 울렸다.

147화

넌 내 부하다

"너, 너어... 너어어어...!"

증오 가득한 눈동자가 진현우를 향했다.

화련의 것이었다. 하지만 그 증오도, 복속의 말뚝이 심장을 장악하자 이내 사라져 버렸다.

그녀의 눈에 혼란스러운 빛이 어렸다.

"기분이 어때?"

"나,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헬룬이 펜리스를 복종시킬 때 썼던 아티팩트를 너한테 썼지. 이제 넌 내 부하다."

"부하? 하! 무슨 말도 안 되는...."

화련은 코웃음 쳤다.

하나 그것도 잠깐이었다. 진현우를 비웃던 그녀는 뭔가가 바뀌고 있음을 느꼈다.

자신의 내면이 바뀌고 있다.

"너, 너, 으윽! 아아아악!"

"다시 말해 줄게. 넌 내 부하다. 틀렸나?"

"...."

화련이 입을 벙긋거렸다.

부정하고 싶다. 난 네깟 놈의 부하가 아니다. 하지만 부정할 수 없었다. 이미 늦었다.

복속의 말뚝이 그녀의 내면을 변화시켰다.

"...맞아, 나는, 네 부하야."

화련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까닭 모를 충성심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치솟는 것이 느껴졌다. 오랫동안 눈앞의 남자를, 진현우를 진심으로 따른 것 같은 느낌.

"어떤 명령이든, 네 말이면... 따를게."

진현우는 등골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자가 저러는 걸 보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이거, 진짜 무서운 아이템이잖아?"

- 말했잖나, 저주에 가까운 물건이라고.

화련의 변화를 본 진현우가 혀를 내둘렀다.

펜리스가 맛이 갔던 것도 이해가 갔다.

- 그만큼 발동시키기도 힘든 아티팩트다. 이번에야 그 조건을 무시할 수 있었지만.

"흠, 이래저래 운이 좋았네."

날로 먹은 게 한두 개가 아니다.

진현우는 넘칠 정도의 충성심이 담긴 눈으로 자신을 보는 화련의 눈빛을 잠깐 피했다.

저 여자가 이러는 걸 보니 부담스러웠다.

"그 헬룬이라는 여자는 네 자아를 없앴었잖아. 말뚝을 쓰면 다 그렇게 되는 건가?"

- 네 선택이다. 그 정령사는 내 자아가 남아 있는 것을 원하지 않았지. 단순한 애완견처럼 나를 부리는 게 그자의 바람이었으니까.

"그래서 자아를 없앴다?"

- 그렇다. 그건 어디까지나 네 선택이다.

진현우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화련, 이 괴물을 어떻게 할 것인가.

"사람이 너무 바뀌는 건 곤란해."

- 다른 이가 의심하는 게 걱정스러운 건가?

"어. 복속의 말뚝을 제거하는 건 힘들기는 하지만,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니까."

진현우가 맹약의 증거를 이용해서 무효화했던 것처럼, 어떤 방법이 나타날 수도 있다.

그걸 생각한다면 화련의 성향이나 행동을 아예 바꿔 버리는 것은 리스크가 크다.

평소처럼 행동하게 놔둬야 한다.

"대신, 내가 필요할 때 써먹어야지."

- 흠. 내가 보기에는 암사자 같은 자다만.

"그래도 이젠 내 암사자야."

펜리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진현우는 화련의 턱을 손가락으로 끌었다.

"내가 너한테 말뚝을 꽂았다는 사실은 잊어라. 너하고 나는 협력해서 이 던전을 공략했고, 잠깐 다툼이 있었지만 화해한 거야."

"화해...."

"그리고 너희가 통제하는 곳들의 통제 강도를 길드원들이 의심하지 않는 선에서 낮춰."

"네 말대로 할게."

평소의 화련이었다면 미쳤냐면서 달려들 명령이었지만, 지금은 그러지 않았다.

"그것 말고는 최대한 평소처럼 지내. 대신, 내가 부르면 언제든 달려와라. 탑 바깥으로 나가면 나한테 연락할 수단을 보내고. 알겠어?"

"알았어."

화련이 고개를 끄덕였다.

천천히 일어나는 그녀를 뒤로하고, 진현우는 주변을 둘러봤다. 아그니스의 길드원들이 멍한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게 보였다.

"미호, 다 됐어."

- 안 그래도 아슬아슬한 참이었느니라.

아그니스 길드원들은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오직 그들의 눈에만 보이는 '장막'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화련 님은... 괜찮으시겠지?"

"아까 그놈 상태를 보면 괜찮으실 거다."

"음...."

아그니스 길드원들의 눈에 보이는 것은 장막이었다. 갑자기 나타난 거대한 장막이 진현우와 화련이 있는 곳을 에워싸고 있었다.

당연하지만, 진짜 장막은 아니었다.

- 쿠후후! 내 환각도 점점 강해지는구나.

미호의 환각이었다.

아그니스 길드원들이 개입할 것을 막기 위해서 잠깐 환각을 걸어 둔 것이었다.

물론, 지속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하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 화아아악!

"화련님!"

장막이 걷히고 화련이 걸어 나왔다.

아그니스 길드원들이 보기에 그녀의 상태는 멀쩡해 보였다. 진현우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에게 다가간 길드원들이 의아해했다.

"화련 님, 저놈을 죽이는 거 아니었습니까?"

"...생각이 바뀌었어."

"예? 그게 무슨...."

화련이 인상을 구겼다.

"내 말 못 들었어? 생각이 바뀌었다고. 직업 퀘스트도 마쳤으니 이제 떠난다. 따라와."

"아, 예. 알겠습니다."

"뭐야? 갑자기 왜?"

자기가 나서서 진현우를 죽이겠다고 한 양반이 갑자기 생각이 바뀌었다니. 아그니스 길드원들은 의아해하면서 화련을 뒤따랐다.

그리고 진현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우야, 괜찮아?"

"어. 너는? 아까 요란스럽게 날아가더라."

"후후, 괜찮지. 내 연기 실력 어땠어?"

"나쁘지 않던데."

샬럿은 화련의 마법에 날아갔었다.

미호가 설명해 준 진현우의 계획을 듣고 일부러 당해 준 것이었다. 그녀는 몸에 묻은 흙을 털어 내면서 진현우의 상태를 확인했다.

"마력 흐름이 조금 뒤틀렸네. 조심해."

"알아. 일부러 그렇게 만든 거니까."

"넌 정말... 몸 아까운 줄을 모르는구나?"

진현우의 복부에 심한 타박상이 보였다.

피를 토하기 위해서 스스로 주먹으로 친 탓이었다. 거기에 마력의 흐름을 일부러 뒤틀리게끔 만들어서 마력 역류를 위장하기까지.

"몸 좀 아끼고 살아."

샬럿은 한숨을 내쉬며 진현우를 치료했다. 그녀의 시선이 화련이 나간 방향을 향했다.

"근데, 화련 씨는 어떻게 된 거야?"

"펜리스를 강제로 복종하게 만들었던 아이템을 이용해서 내 부하로 만들었지."

"진짜로? 그 화련 씨가?"

"어. 나중에 설명해 줄게."

샬럿이 입을 헤벌렸다.

다른 길드도 아니고 아그니스의 길드장이 일개 플레이어의 부하가 되다니.

믿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어디 보자, 희귀 아이템이 있을 텐데."

진현우는 바닥의 아이템들을 뒤적거렸다.

여긴 히든 던전이다. 보스 몬스터를 죽이면 희귀한 아이템을 무조건 얻을 수 있는 곳이다.

원래 보스 몬스터였던 펜리스가 아군이 됐으니, 남은 보스 몬스터는 헬룬일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여기 있군."

헬룬이 희귀한 아이템을 드롭했다.

[어둠 정령의 반지 (영웅)]

· 설명: 제국의 정령사단을 이끌던 정령사의 반지다. 어둠 정령의 힘을 빌려서 만들었다. 까닭은 모르나, 짙은 사념이 느껴진다....

· 착용 제한: Lv.80, 정령술 특성 보유자.

· 옵션: 어둠 정령의 선물, 사념.

* 어둠 정령의 선물: 어둠 정령의 최대 소환 수가 한 마리 증가한다. 또한 어둠 정령과 계약할 때 반지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 사념: 누군가의 짙은 원한이 담겨 있다. 착용할 경우 불길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다른 플레이어가 이 아이템을 봤으면 저주받은 아이템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희귀 아이템이라고 항상 좋은 것만 주는 건 아니니까 꽝이 걸렸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진현우에게는 다르게 보였다.

'이런 진귀한 물건을.'

오랜만에 보는 사념 아이템이었다.

진현우는 곧바로 기억 감정을 사용했다. 안에 담긴 기억은 정령사, 헬룬의 기억이었다.

그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보였다. 그리고 그 사념이 자신에게 저주를 퍼붓는 것도.

'네 얘기를 들어 줄 시간은 없어.'

헬룬의 사념이 절규하는 게 들렸다.

진현우는 폭군의 사념에게 그랬듯이, 헬룬의 사념을 힘으로 강제로 짓눌러 버렸다.

그러자 눈앞에 메시지가 나타났다.

- 기억 감정에 성공했습니다.

- 오만한 정령사, '헬룬'의 사념이 가지고 있던 힘을 전승합니다. 어둠 정령의 반지가 가진 옵션, 사념이 '정령사단'으로 바뀝니다.

- 특성 '정령술 (A)'을 익혔습니다.

기억 감정에 성공했다는 메시지였다.

· 정령술 (A): 정령과 계약할 수 있으며, 정령을 소환하고 유지할 때 드는 마력이 감소한다. 소환한 정령이 정령술의 힘으로 강화된다.

* 정령사단: 소환한 정령이 많을수록 정령들이 강해지며, 정령 마법의 위력이 강해진다.

간단하면서도 좋은 특성이었다.

정령사가 아니면서도 정령과 계약할 수 있다는 게 주는 이점은 어마어마했으니까.

그리고 또 하나의 아이템이 더 있었다.

[어둠의 매개체 (영웅)]

· 설명: 어둠의 정령을 소환할 수 있는 매개체다. 어떤 정령이 나올지는 알 수 없다.

곁에 있던 펜리스가 아이템을 들여다봤다.

- 계약자, 그건 여기서 쓰지 마라. 어둠의 정령에 최적화된 환경에서 쓰는 게 나을 거다. 그러면 더 강력한 정령이 나올 테니까.

"그래? 그럼 그렇게 해야지."

어둠의 정령에 최적화된 환경.

어떻게 할지 방법이 떠올랐다. 진현우는 어둠의 매개체를 아공간에 집어넣었다.

"일단...."

진현우는 공동을 돌아봤다.

제국군들이 설치한 장비들이 보였다. 어느새 다가온 펜리스와 정령들이 그를 바라봤다.

"이 공동부터 치우자."

- 으음, 좋은 생각이다, 계약자.

일행은 청소 작업을 시작했다.

* * *

동굴에는 제국의 흔적이 가득했다.

그 흔적들을 다 치우는 데에는 꼬박 하루의 시간이 필요했다. 하루 동안 온갖 노동을 한 진현우는 지칠 대로 지친 채 바닥에 앉았다.

"날로 먹어서 좋다 했더니."

이런 식으로 일하게 될 줄이야.

진현우는 추출 장치를 비롯한 제국군의 장비를 파괴하는 정령들을 멍하니 봤다.

그의 눈앞에 메시지들이 나타났다.

- 4층, 할타릿산을 공략했습니다. 상위 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권한을 얻었습니다.

- 할타릿산의 비밀이 파훼됐습니다. 4층은 새로운 형태로 출입자들을 맞이할 것입니다.

새로운 형태로 출입자들을 맞이한다.

기믹이 바뀐다는 뜻이다. 몬스터 웨이브의 원인이었던 늑대의 대정령이 정상으로 돌아왔으니, 다른 식으로 플레이어들을 시험하겠지.

-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제국군의 마수에 빠진 늑대의 대정령을 구해 낼 것.

- 보상으로 영웅 등급 칭호 [정령의 친구 (효과: 정령이 큰 호감을 드러냄. 정령을 유지하는 데 드는 마력 -20%)]를 획득했습니다.

그다음으로 업적 보상이.

또 하나.

- 카리악이 크게 만족했습니다.

- 그는 더 많은 제국의 피를 원합니다....

진현우의 도끼가 부르르 떨렸다.

이 던전에 있는 제국군을 모두 죽이기를 원했던 카리악의 소원이 지금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 보상이 주어졌다.

- 스킬: 격노 (A)를 새로이 익혔습니다.

· 격노 (A, Lv.1): 상대방을 향해 크게 도약하면서 도끼를 내리찍는다. 착지했을 때 주변을 뒤흔드는 강한 충격파를 일으킨다.

카리악이 생전에 쓰던 스킬일 것이다.

격노. A등급답게 괜찮은 스킬이었다. 진현우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도끼를 집어넣었다.

- 계약자, 동굴의 정리는 끝났다. 나머지는 우리가 맡아서 처리하면 끝날 것이다.

"음, 이제 우리도 가도 되겠네."

- 쉬었다가 가도 좋다. 물론 여기는 인간들이 쉬기에 적합한 곳이 아니긴 하다만.

진현우는 고개를 내저었다.

여긴 영맥이다. 마력이 넘쳐흐르는 곳에서 잤다가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샬럿과 미호가 그에게 다가왔다.

- 너는 내 계약자다. 내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불러라. 달려가서 도울 테니.

- 늑대의 대정령, 펜리스와 계약했습니다. 스킬: 펜리스 소환 (S)을 익혔습니다.

· 펜리스 소환 (S, Lv.1): 할타릿산의 주인, 늑대의 대정령 펜리스를 소환할 수 있다.

진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 다만 네게는 정령사로서의 자질이 부족하다. 여기는 영맥이 있으니 괜찮다만, 다른 곳에서 날 소환하면 큰 부담이 가해질 것이다.

"그럼 여기서는 소환해도 된다는 거지?"

- 음? 그렇다.

펜리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진현우의 입가에 음침한 미소가 어렸다.

"잘됐네. 그럼 일 하나 하자."

- 일이라고? 무슨 일을 말하는 것이지?

"무슨 일이긴."

진현우는 상태창을 확인했다.

몬스터 웨이브와 이번 던전을 공략하면서 78레벨이 되었다. 하지만 아직 부족하다.

위층으로 가려면 레벨을 더 올려야 한다.

"사냥."

진현우는 할타릿산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눈에 보이는 몬스터들을 사냥하기 시작했다.

그것도 엄청난 고강도로.

148화

각인

할타릿산에는 여러 요새가 있다.

먼저 이곳에 온 플레이어들이 살아남기 위해서 만든 요새다. 후발 주자들은 그런 요새들을 이용해서 몬스터 웨이브를 버티고는 했다.

"드, 들여보내 주세요! 제발요!"

"하라는 대로 하겠습니다! 살려 주세요!"

"어떻게 할까요?"

요새 바깥에서 비명이 들렸다.

헤롤드는 성벽 위에서 그 모습을 싸늘하게 바라봤다. 저들은 그의 명령을 따르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밖으로 내쫓긴 이들이었다.

그는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저대로 놔두세요. 다음 몬스터 웨이브가 닥칠 때가 되면 안으로 들여보내 줍시다."

"버릇을 단단히 고치시려는 거군요."

"여기서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 없습니다."

헤롤드는 이 요새의 폭군이었다.

같이 온 길드원들 덕분에 가진 무력이 뛰어났고 정치력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내 영향력을 넓혀야 한다. 내 말에 거역하지 못하게 만들어야지.'

그러려면 몬스터 웨이브가 와야 한다.

사람은 위기가 있어야지 뭉친다. 자신이 그 구심점이 되어야 하는데, 문제가 생겼다.

'뭐지? 웨이브가 올 시간은 지났는데?'

그것이었다.

시간을 계산하면 다음 몬스터 웨이브가 언제 올지는 대충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근데 몬스터 웨이브가 오지를 않는다.

'너무 늦으면 말이 많아진다. 얼른....'

헤롤드가 그리 생각하던 때였다.

- 플레이어 '진현우'에 의해 할타릿산의 비밀이 파훼됐습니다. 4층은 앞으로 새로운 형태로 바뀌어 플레이어들을 맞이할 것입니다.

"어?"

모두에게 예상치 못한 메시지가 보였다.

"지, 진현우라고?"

"저게 무슨 말이야? 할타릿산의 비밀이 파훼됐다니. 새로운 형태로 바뀐다는 건...."

"자, 잠깐만. 설마!"

헤롤드가 경악하면서 외쳤다.

저 메시지,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자신의 생각이 맞는다면 이다음에 이어질 것은.

- 30분 후, 자격을 갖추지 못한 플레이어는 추방됩니다. 새로운 형태로 바뀐 4층을 다시 찾아와 자신의 자격을 증명하십시오.

"아, 안 돼!"

헤롤드가 비명을 내질렀다.

탑에 이런 기능이 있다는 얘기는 들은 적이 있었는데 설마 이 타이밍에 일어날 줄이야.

그것도 다른 사람도 아닌 진현우에 의해.

"헤롤드, 저게 무슨 소리야?"

"이해 못 하겠어? 이 층의 기믹이 더는 유지될 수가 없으니까 다른 기믹으로 바뀐다고. 진현우, 그놈이 이 층의 비밀을 깼으니까!"

"기믹은... 몬스터 웨이브?"

헤롤드의 동료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둘이서 떠나지 않았었나? 그게 가능해?"

"가능하니까 지금 이런 일이 일어난 거지. 아니, 하여튼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야."

헤롤드는 입술을 깨물었다.

주변의 분위기가 이상하다. 요새 밖으로 내쫓긴 플레이어들이 그들을 사납게 노려봤다.

요새 안의 플레이어들도 마찬가지였다.

"뭐야, 저놈들 왜 우리를 저런 눈으로 봐?"

헤롤드는 여기서 폭군처럼 굴었다. 지금까지는 몬스터 웨이브라는 공통의 위협이 있었기 때문에 그가 폭군처럼 구는 걸 용납했었다.

하지만 이제 상황이 달라졌다.

"진현우, 그 빌어먹을 놈 때문에...!"

여기서 무사히 못 나갈 수도 있다.

헤롤드는 진현우와 샬럿을 원망하면서, 노려보는 플레이어들을 향해 무기를 들었다.

* * *

며칠 후.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는 언덕에서, 진현우는 자신의 상태창을 확인하고 있었다.

[진현우]

· 레벨: 82

· 클래스: 웨펀 마스터

· 칭호: 대악마를 죽인 자

· 근력: 252 (+40) · 민첩: 227 (+40)

· 체력: 229 (+45) · 마력: 170 (+32)

· 마기: 70

며칠에 걸친 사냥의 결과물이었다.

82레벨. 상위 층으로 올라가고도 남을 정도의 레벨이다. 진현우는 뿌듯함을 느꼈다.

"나, 나느은... 더는 못 해에...."

"배가 터져서 죽을 것 같느니라...."

"나약한 놈들."

물론 다른 이들은 그렇지 않았다.

샬럿은 십자가에 기댄 채 녹아내리고 있었고, 미호는 배가 빵빵하게 부푼 채 신음했다.

휴식 없는 사냥에 지친 탓이었다.

- 계약자, 너는 참... 대단하구나.

펜리스가 혀를 내둘렀다.

진현우는 펜리스와 정령들을 이용해서 할타릿산에 있던 몬스터들을 대거 사냥했다.

- 영맥 때문에 미쳐 버린 몬스터들이었으니 처리하기는 했어야 했다만, 이런 식으로....

"좋은 게 좋은 거지, 안 그래?"

- 할 말이 없군.

펜리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진현우는 기진맥진한 샬럿과 미호를 억지로 일으켰다.

"그, 그만. 난 쉬고 싶어...."

"집에 가서 쉬어, 집에 가서. 돌아가자."

"이, 이제 돌아갈 수 있는 거야?"

샬럿의 눈이 반짝거렸다.

진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할타릿산에서 할 일은 끝났다. 이제 돌아갈 때다.

"펜리스, 다음에 보자."

- 알겠다, 계약자. 네가 날 부를 날을 기다리고 있겠다. 언제든지 불러도 좋다.

- 잘 가, 인간. 고마웠어.

진현우는 포털에 올라섰다.

펜리스와 정령들이 그를 배웅했다. 금방 시야가 뒤바뀌고, 그는 탑 바깥으로 나왔다.

곁에 있던 샬럿이 휘청거렸다.

"술, 알코올, 나한텐 알코올이 필요해.... 현우야, 한동안은 날 찾지 말아 줘...."

"그, 그래."

샬럿이 흐느적거리면서 사라졌다.

며칠 동안 쉬지도 못하고 굴렀으니 술로 스트레스를 풀 생각인 것처럼 보였다.

진현우는 미호와 함께 섬을 떠났다.

"일단 집으로 갈까. 먹을 게 있던가."

"우우웅...."

집으로 돌아가는 길.

차를 운전하는 진현우의 옆 좌석에서, 미호는 배가 빵빵한 상태로 신음하고 있었다.

"너 뭐 많이 먹었냐? 배가 왜 그래?"

"저, 정기. 정기를 너무 많이 먹었느니라."

"그러게 작작 좀 먹지 그랬어?"

"그 말을 네가 한단 말이냐...?"

미호가 질린 얼굴로 진현우를 바라봤다.

차는 금방 집에 도착했다. 그는 움직이지 못하는 미호를 어깨에 올린 채 차에서 내렸다.

어깨 위에서 미호가 바둥거렸다.

"제발, 제에발! 나한테 정기를 소화할 시간을 좀 다오, 이 빌어먹을 인간아!"

"뭐? 빌어먹을? 죽을래?"

"쿠후우웅...."

기세 좋게 대들었던 미호가 꼬리로 얼굴을 가리면서 몸을 덜덜 떨었다.

하지만 녀석의 입은 멈추지 않았다.

"그, 그치만! 정말로 시간이 필요하단 말이다! 소화할 틈도 없이 정기를 먹어 대니까 꼬리를 늘리고 싶어도 늘릴 틈이 없느니라!"

"그래서, 시간을 달라?"

"그, 그렇느니라."

뭐 대단한 일이라고.

한동안 사냥이고 뭐고 그냥 쉬면서 정기를 소화할 시간을 달라는 얘기였다.

진현우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진작에 그리 말할 것이지. 좋아."

"그러니까 시간이... 응? 괜찮은 것이냐?"

"날 뭘로 보는 거야? 빨리 소화나 시켜."

미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집에 되게 오랜만에 오는 기분인데."

진현우는 집의 정원을 돌아봤다.

그가 마지막으로 떠나기 전과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수풀이 무성히 자란 정도.

하지만 그의 눈에만 보이는 것이 있었다.

"...."

"인간, 왜 그러는 것이냐?"

"아니, 아무것도 아냐. 들어가자."

진현우는 집으로 들어갔다.

그는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 내가 요즘 좀 설치고 다니긴 했지.'

누군가 집에 왔다 간 흔적이 있다.

보통의 플레이어라면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확실하게 흔적을 지우고 갔으니까.

하지만 진현우가 가진 노련한 사냥꾼의 감각이 누군가 왔다 갔음을 그에게 알려 줬다.

'이렇게 비밀스럽게 나한테 찾아올 만한 놈이 누가 있을까. 길드? 아니면 카오틱?'

어쩌면 마인일 수도 있다.

카오틱과 마인의 활동이 가장 왕성한 곳은 탑이지만, 바깥이라고 조용한 것은 아니다.

테러 활동을 벌이거나, 탑에서 자신들의 방해가 되는 이들을 암살하고는 한다.

'일단 모르는 척 지내야겠군.'

아마 자기들이 먼저 행동에 나설 것이다.

* * *

해가 진 저녁.

진현우는 자신의 방에 앉아 있었다. 그의 옆에서는 미호가 방석에 누운 채 자는 중이었다.

그는 노트북의 화면을 바라봤다.

'화련이 명령은 잘 지켰군.'

화련과 연락할 수단이 메일로 들어왔다.

그리고 아그니스 길드가 탑 내부의 통제를 조금이지만 약화했다는 소식도 볼 수 있었다.

명령이 제대로 먹힌 것이다.

'말뚝이 해제되지만 않는다면... 화련은 꽤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겠어.'

진현우는 입가를 매만졌다.

가능하면 화련처럼 강하면서,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존재가 더 있으면 좋겠는데.

'이건 방법을 좀 생각해 보기로 하고.'

진현우는 노트북을 덮었다.

"자기 전에 이것부터 처리하고 자야겠지."

그리고 품속에서 아이템을 꺼냈다.

어둠의 정령을 소환할 수 있는 아이템, 어둠의 매개체. 정령과 계약할 때 쓸 수 있다.

문제가 있다면 무작위라서, 어떤 어둠의 정령이 나올지는 전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강한 정령을 소환하려면 어둠의 정령에 최적화된 환경에서 쓰는 게 좋다고 했었지.'

펜리스가 했던 말이다.

어둠의 정령이 좋아하는 환경이 뭘까? 당연하지만 사방이 짙은 어둠에 잠긴 곳이다.

진현우는 지하로 내려갔다. 사방이 어두운 곳이었지만 이 정도로는 아직 부족하다.

"어쩔 수 없나."

진현우는 한숨을 내쉬며 정신을 집중했다.

그의 내면에 잠들어 있는 마기가 반응했다. 스으으! 그에게서 짙은 마기가 흘러나왔다.

마기가 방을 새까맣게 물들였다.

"나와라."

- 어둠의 매개체를 사용합니다. 주변의 환경에 반응하여 적합한 정령이 소환됩니다.

- 어둠 정령의 반지가 빛나고 있습니다. 어둠 정령과의 계약이 한층 더 쉬워집니다.

매개체가 사이한 빛을 내뿜었다.

바닥에 커다란 마법진이 그려졌고, 그 너머에서 이계의 존재가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 존재가 형체를 갖추었다.

- 시이이이이....

그건 그림자였다.

인간과 비슷한 형체의 그림자. 다만 팔이 기이할 정도로 길고 날카로웠다. 새까만 형체에서 붉은 눈동자가 요사스레 빛나고 있었다.

그림자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 나는... 셰이드....

그 이름을 들은 진현우의 눈이 반짝였다.

'상위 정령이잖아?'

셰이드, 상위 어둠의 정령.

대정령인 펜리스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상위급이면 강력한 축에 속하는 정령이다.

셰이드가 진현우를 응시했다.

- 그 몸에... 짙은 어둠을 품은 자여.... 나는 네가... 마음에 들었다....

'말하는 거 더럽게 답답하네.'

진현우는 속내를 삼켰다.

- 네가... 원한다면... 계약하겠다....

"거부할 이유가 없지."

셰이드가 손을 내밀었다.

진현우는 그 손을 맞잡았다. 바닥의 마법진이 요사스레 빛나면서 그에게 각인을 새겼다.

계약의 각인이었다.

- 상위 어둠의 정령, 셰이드가 당신과의 계약에 응했습니다. 당신이 품은 마기의 영향으로 셰이드가 한층 강화됩니다.

- 셰이드는 그림자를 이용한 기습에 능한 정령입니다. 이 그림자는 단순히 공격이 아닌 다양한 방법으로도 활용할 수 있습니다.

- 스킬: 셰이드 소환 (A)을 익혔습니다.

뜻밖의 문구가 있었다.

마기의 영향으로 셰이드가 강화되었다.

'마기, 어둠. 비슷한 종류긴 하지.'

마인 중에도 정령을 쓰는 놈들이 있다. 특이하게도 대부분 어둠의 정령을 썼었는데.

이제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 이제... 난... 돌아가겠다....

"아니, 잠깐만. 기다려 봐."

진현우는 돌아가려는 셰이드를 막았다.

녀석에게 쓸 아이템이 있다. 그는 아공간에서 예전에 얻었던 아이템을 하나 꺼냈다.

대정령사의 반지였다.

[대정령사의 반지 (영웅)]

· 설명: 오래전 역사에 이름이 남을 정도의 활약을 했던 대정령사가 쓰던 반지다.

· 착용 제한: 레벨 60.

· 옵션: 정령 친화, 대정령사, 각인.

* 각인: 소환할 수 있는 정령 하나에게 특수한 각인을 새겨서 해당 정령을 크게 강화한다. 이 옵션은 한 번 사용하면 제거된다.

이 반지에 각인이라는 옵션이 있었다.

펜리스에게 쓸까 했지만, 펜리스는 어차피 강하다. 게다가 마력 소모 때문에 자주 소환하기 버겁다는 단점이 있었다.

'셰이드는 소환하기 버거울 정도는 아니야. 게다가 이 녀석, 나하고 상성이 잘 맞아.'

그림자, 거기에 기습에 능하다.

솔직히 말해서 진현우가 선호하는 정령이었다. 잠깐 고민하던 그는 결심을 굳혔다.

- 대정령사의 반지가 빛을 발합니다.

- 반지가 상위 어둠의 정령, 셰이드에게 각인을 새겼습니다. 각인이 완전히 자리를 잡은 후, 셰이드가 크게 강화될 것입니다.

- 이, 건....

셰이드의 붉은 눈이 커졌다. 놈이 스산하게 웃으며 진현우의 그림자 속으로 녹아들었다.

- 좋다, 네 각인... 받아들이겠다....

다시금 방 안이 조용해졌다.

진현우는 마기를 거두면서 지상으로 올라갔다. 방석에 누워 있던 미호가 낑낑거렸다.

"끄응, 끄으응... 인간, 인가안...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느니라... 내 분신이...."

"슬슬 올 때가 됐나."

진현우는 미호에게 주변에 분신을 흩뿌려서 누가 다가오는지 지켜보라고 했다.

그 분신이 적들을 감지했다.

"야, 미호. 일 좀 해라."

"쿠, 쿠후훗.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느니라. 이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 같으니라고."

미호가 눈물을 삼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둘은 어두운 방에서 침입자에 대비해 뭔가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멀리 떨어진 곳에서 진현우의 집을 지켜보는 이들이 있었다.

"목표가 도착했는데요. 어떡할까요?"

한 무리의 카오틱과 마인.

은신용 장비를 갖춰 입은 이들이었다. 그들이 귀에 찬 장비로부터 목소리가 들렸다.

- 죽여라. 목표물은 회수하도록.

"명령대로."

마인이 씨익 웃었다.

149화

보복은 철저하게

마인, 한서진은 먼 곳에 있는 집을 봤다.

집과의 거리는 멀었지만 마인의 발달된 시야는 가까이에 있는 것처럼 볼 수 있었다.

진현우가 잠드는 모습이 보였다.

"한가로운 놈이군. 집은 생각보다 허름한데? 최근에 가장 유명한 놈이라고 안 했나?"

"맞습니다, 한서진 님. 유망주 중에서는 가장 유명한 놈입니다. 저놈을 유망주라고 불러도 되는지는 개인적으로 의아하긴 합니다만."

"흠, 그 정도란 말이지."

놀라운 평가다.

하지만 그게 이상하지는 않았다.

"무월을 죽였으면, 그래. 그럴 수도 있지."

무월은 3층에서 활동했었지만 더 높은 층에서 활동해도 될 정도의 실력을 가졌었다.

그런 그녀가 패배할 정도의 실력자라니.

"우리가 다녀간 걸 눈치챈 것 같나?"

"아니요,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습니다. 하루 종일 감시했지만 특별한 움직임은...."

"태평스럽다고 해야 하나."

한서진은 코웃음을 쳤다.

그래도 결국은 유망주. 길드가 없어서 그런지 아직도 자신의 가치를 잘 모른다.

길드에 가입했더라면, 유망주가 아니었더라면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을 알았을 텐데.

"배치가 끝났습니다. 움직일까요?"

"그래, 장치를 가동해라. 최대한 은밀하게, 목표만 처리한 후에 이곳에서 벗어난다."

"예."

한서진은 무기를 꺼냈다.

달빛을 받은 거대한 낫이 서늘하게 빛났다.

"진입한다."

마법이 전개되었다.

투명한 막이 집을 감쌌다. 바깥에서 이상을 감지할 수 없게끔 하는 종류의 마법이었다.

한서진과 카오틱들이 반투명해졌다.

- 스으으윽!

그들은 재빠르게 실내로 잠입했다.

집 안에는 새하얀 연기가 흐르고 있었다. 연기를 맡은 사람을 잠들게 하는 아이템이었다.

이전에 침입했을 때 설치해 둔 것들이었다.

'지속 시간은?'

'2시간 정도입니다. 충분합니다.'

'좋아, 절반은 바깥을 지켜라. 너희는 복도를 지키고, 나머지는 날 따라오도록.'

한서진과 카오틱들은 방으로 향했다.

문이 조용히 열렸다. 한서진은 안을 확인했다. 침대 위에 진현우가 자고 있는 게 보였다.

코를 고는 소리가 방을 울렸다.

'잘 자고 있군. 빠르게 처리하지.'

진현우는 침입자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한서진은 그의 바로 앞에 도달했다.

'잡았다.'

마인이 입가에 광소를 띤 채 낫을 높이 들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목표를 내리쳤다.

침대에서 잠든 진현우의 목을 향해서.

- 서걱!

낫이 목을 베어 냈다.

확실한 촉감이 손을 타고 전해졌다. 눈으로도 목표의 머리가 분리되는 것이 보였다.

침대에서 머리가 굴러떨어졌다. 눈을 감은 머리가 허망하게 바닥을 나뒹굴었다.

"자기가 언제 죽었는지도 모를 거다."

"생각보다 쉬웠군요."

"그래, 바로 이탈...."

여기서 벗어난다.

한서진은 그렇게 말하려고 했다. 바닥을 나뒹구는 머리가 눈을 뜨기 전까지는.

"뭣...!"

진현우의 머리가 눈을 떴다.

사방을 돌아보던 눈동자가 한서진을 직시했다. 그의 눈매가 초승달처럼 휘었다.

그 입가도.

"쿠후후후훗."

진현우의 머리가 한서진을 비웃었다.

그 순간, 마인은 강렬한 위화감을 느꼈다. 이건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감각이었다.

굳이 말하자면.

"쿠후후. 환각은 잘 봤느냐?"

"설마! 크, 허어억!"

그래, 꿈속에 있는 것 같은 부유감.

한서진이 위화감의 정체를 눈치챈 순간, 서늘한 검기가 그의 심장을 꿰뚫고 튀어나왔다.

등 뒤에서 조소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꿈은 잘 꾸셨나? 좋은 꿈이었지?"

"무슨, 말, 도... 안 돼...."

한서진이 필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눈에 비친 것은 진현우의 모습이었다. 목이 베이기는커녕, 너무도 멀쩡한 진현우.

그가 마인을 비웃고 있었다.

"화, 환각? 언제부터, 나를... 끄르륵...."

"글쎄, 너희가 그 연기를 마셨을 때부터?"

"연기? 그건, 우리가 설치한...!"

한서진은 일부러 진현우와 대화를 나누면서 어떻게든 몸을 추스르려고 했다.

심장이 꿰뚫리기는 했지만, 이 정도면 움직일 수 있다. 마인은 그런 존재다.

하지만 그보다 진현우의 행동이 빨랐다.

"으아아아악!"

어둠 속에서 검광이 번뜩였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검격이 한서진의 사지를 순식간에 베어 냈다. 지지대를 잃은 몸이 쓰러졌고, 그의 얼굴에 경악이 어렸다.

'마인의 몸을, 이렇게 쉽게 벤다고?'

믿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한서진의 떨리는 눈동자가 진현우를 봤다.

"일단 하나."

서걱! 검이 마인의 목을 베어 냈다.

탑에서는 꽤 이름을 떨치는 마인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허망한 죽음이었다.

진현우는 검에 묻은 피를 털어 냈다.

"여섯. 생각보다 많이 왔군. 밖에 더 있나?"

"미, 미친. 마인을 단칼에 죽인다고?"

카오틱이 경악했다.

아무리 기습이라고는 하더라도 마인을 일격에 죽인다니, 그게 가능하기나 한 일인가.

그리고 진현우는 검을 놓았다.

- 쉬이이익!

"허, 허억!"

순식간에 수십여 개로 분열한 환검이 사방으로 쏘아졌다. 검들은 창문 너머로 사라졌고, 잠시 후 밖에서 끔찍한 비명이 들렸다.

집을 포위하던 카오틱들의 비명이었다.

'뭔가 잘못됐다.'

'여, 여기서 도망쳐야 돼. 어떻게든 은신처와 통신해서 지원을 요청해야...!'

카오틱들은 일이 잘못됐음을 느꼈다.

그들 중 일부가 곧바로 창문을 통해 달아나려고 했다. 하나 진현우의 행동이 더 빨랐다.

"도망치려고? 근데 늦었어."

진현우의 그림자가 들썩였다.

파도처럼 일어난 그림자가 사방을 뒤덮었다. 벽도, 바닥도, 창문도, 그 모든 것을.

실내가 칠흑 같은 어둠에 감싸였다.

"셰이드."

- 시이이... 키히히히히!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림자 속에서 기괴할 정도로 마른 팔이 수없이 튀어나오더니 카오틱들의 발을 잡았다.

"이, 이익! 이게 왜... 놓으란 말이다!"

"빌어먹을! 침착해! 저, 적은 하나다! 이렇게 된 이상, 힘을 합쳐서 저놈을 죽...!"

푸욱!

그리 말하던 카오틱의 목이 꿰뚫렸다. 그걸 멍하니 보던 카오틱들은 그제야 깨달았다.

수많은 가시가 자신들을 에워싸고 있음을.

그림자에서 솟구친 가시들이었다.

"여섯 명 정도만 살려 두면 되겠지."

진현우가 손을 펼쳤다.

그 손아귀에 불길한 마창이 나타났다. 마창이 팔을 잠식하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상관없다.

"바쁘다. 빨리 끝내자."

"우, 우아아악!"

전투는 금방 끝날 테니까.

* * *

"끄으, 으아아아...."

"많이도 왔네."

마지막 카오틱이 쓰러졌다.

진현우의 집을 포위하고 있던 카오틱 무리였다. 진현우는 도끼를 닦으며 혀를 찼다.

'가족이 없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공격을 막는 건 어렵지 않았다.

적들이 공격해 올 거라는 걸 이미 알았으니까. 전생에서도 몇 번 겪었던 일이다.

만약 가족이 있었다면 그들까지도 지켜야 했을 테니 훨씬 까다로워졌을 것이다.

"어디, 마인 시체가...."

진현우는 엉망이 된 집 안을 걸었다.

방에 있던 마인의 시체로 다가가자, 자신의 안에 있는 무언가가 반응하는 느낌이 들었다.

- 마인, 한서진을 죽였습니다. 마핵의 효과로 마인에게서 마기를 흡수합니다.

- 마기가 15만큼 상승했습니다.

"이야, 많이 오르는데?"

올라가는 수치가 호탕하기 그지없다.

아니면 한서진이라는 마인이 생각보다 강한 놈이었든가. 만약 기습으로 처리하지 않았더라면 전투가 꽤 귀찮아졌을지도 모른다.

"이래서 만독불침이 좋다니까."

적들은 진현우의 집에 많은 걸 설치해 뒀다.

이전에 침입했을 때 설치했을 것이다. 방심한 진현우를 잠든 사이에 몰래 처리하려고.

그걸 역으로 이용했다.

"분신을 많이 터트렸더니 지치는구나. 으음! 뭔가 소화가 되는 것 같은 기분이니라!"

미호의 분신에는 소멸할 때 주변 적의 정신 계열 공격 저항력을 감소시키는 효과가 있다.

그 이펙트가 연기와 비슷하다.

"산 놈들은 이게 다인가?"

"으으, 끄으윽...."

진현우는 카오틱들을 한데 모았다.

다 죽일 수도 있지만 심문을 위해서 여섯 명만 살려 뒀다. 미호가 그들의 앞에 섰다.

"뭘 알아내면 되겠느냐?"

"이놈들이 어디서 왔는지 알아내."

"쉬운 일이로구나."

미호가 카오틱들과 눈을 마주쳤다.

그 눈동자가 요사스럽게 빛나기 시작했다.

"자, 내 눈을 보거라. 네 마음 깊은 곳에 무엇이 있느냐? 내게 모두 털어 보거라...."

"으, 으으... 흐으으으!"

요호의 마안이 번뜩였다.

처음에는 카오틱들도 마안에 저항하려 했다. 그 순간, 검이 그들의 사지를 꿰뚫었다.

"끄아아아악!"

부상을 입은 탓에 취약해진 카오틱으로서는 미호의 매혹에 저항할 방법이 없었다.

그들의 눈빛이 점점 멍해졌다.

"됐냐?"

"됐느니라. 날 뭘로 보는 것이냐?"

"매혹 셔틀...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셔... 으응? 무슨 말인지는 몰라도 몹시 불쾌하구나. 날 얕잡아 보는 말이 분명하렷다!"

"됐고, 왜 여기로 왔는지 물어봐."

눈치 한번 빠르군.

진현우는 그런 생각을 하며 손을 내저었다. 미호는 그를 흘기면서 시키는 대로 했다.

"말해 보거라. 왜 여기로 온 것이냐?"

"골드를... 받았다. 일을 잘 처리하면, 우리에게도 은총을 받을 기회를 주겠다고...."

"은총? 이건 무슨 말이냐?"

"마인이 될 기회를 주겠다는 거야."

"아하. 응? 근데 그게 왜 은총인 것이냐?"

진현우는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거렸다.

자신이라고 어찌 알겠는가. 괴물 같은 꼴로 바뀌는 걸 좋다고 은총이라고 부르는 것을.

"본거지를 물어보면 되겠느냐?"

"아니, 그건 됐어. 거점이 어딘지 물어봐."

"알겠느니라."

본거지는 어차피 탑 내부에 있다.

지금은 갈 수 없는 곳. 그건 알 필요가 없다. 알아야 할 것은 이놈들이 어디서 왔는가.

마인과 카오틱이 숨을 수 있고, 은밀하게 움직이는 걸 도와준 거점이 분명히 있을 터.

"말해 보거라, 너희의 거점은 어디냐? 이 나라에서 쓰고 있는 거점 말이다."

"거점...."

카오틱이 고민에 잠겼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금방 대답이 나왔다.

"로열 그레이스 빌딩... 그곳에, 우리를 도와주는 자들이 있다. 위장한 자들이...."

"위장한 자? 그게 무엇이냐?"

"카오틱으로 변절했지만, 필요하니까... 플레이어로 활동하고 있는, 자들이다."

진현우는 혀를 찼다.

이 시기는 이래서 문제다. 플레이어 진영에 배신자가 많아도 너무 많은 시기다.

믿을 수 있는 놈이 많지가 않으니.

"아는 명단이나 말하라고 해."

"알겠느니라."

미호는 다른 카오틱들도 똑같이 심문해서 배신자들의 명단을 만들어 냈다.

진현우는 명단을 확인했다.

"로열 그레이스 빌딩. 흠, 여기가...."

휴대폰으로 빌딩의 이름을 쳐 봤다.

그러자 나오는 길드가 하나 있었다.

"적해. 이놈들의 길드 하우스인가."

중견 길드다. 규모는 그리 크지 않지만, 소수의 인원으로 견실한 운영을 해 온 길드.

소속원은 모두 변절자들이었다.

"다 죽이면 되겠군."

"정말 가차 없는 인간이구나, 넌."

미호가 진현우를 질린 눈으로 봤다. 그는 그 눈빛이 가소롭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이런 일에 대응하는 방법이 뭔지 아냐?"

진현우는 널브러진 카오틱들을 포획했다.

이놈들은 증인으로 써먹어야 한다. 일단 지하에 처박아 뒀다가 나중에 꺼내는 게 낫겠지.

"철저하게 보복하는 거야. 확실하지 않으면 날 건드리지 못하게끔, 아주 철저하게."

진현우는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 냈다.

그 모습이, 이런 일에 굉장히 익숙한 사람처럼 보여서, 미호는 묘한 괴리감을 느꼈다.

그는 휴대폰을 꺼냈다.

"사람을 불러야겠어."

그 휴대폰에 나타난 이름은 화련이었다.

150화

건드릴 사람을 건드려야지

로열 그레이스 빌딩은 작은 빌딩이었다.

소수의 인원으로 견실한 운영을 해 왔다는 평을 받는 적해에 어울리는 길드 하우스였다.

빌딩은 1층을 제외하곤 불이 꺼져 있었다.

"흠, 흐흠...."

1층의 안내 데스크에 서 있던 경비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이 빌딩은 사람들이 자주 찾아오지 않는 곳이라서 한가한 편이었다.

그의 머릿속에 있는 생각은 언제 퇴근할 수 있을까. 오로지 그 생각뿐이었다.

- 드르륵.

"응?"

그때, 문이 열렸다.

훤칠하게 생긴 남자가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경비를 무시하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놀란 경비가 그를 막았다.

"누구십니까? 실례지만 여긴... 헉!"

"넌 아무것도 보지 못했느니라. 알겠느냐? 모든 걸 잊고, 네 할 일에 집중하거라."

남자의 어깨에 있던 여우의 눈이 요사스럽게 빛났다. 그걸 본 경비의 표정이 멍해졌다.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경비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안내 데스크로 돌아갔고, 다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진현우는 마법 아이템을 꺼내서 사용했다.

CCTV의 영상을 위장하는 아이템이다.

"CCTV는 이거면 됐고."

- 띠링!

진현우는 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탔다.

"잘했어, 매혹 셔틀."

"날 그런 호칭으로 부르지 말거라! 무슨 뜻인지는 몰라도 기분이 불쾌해진단 말이다!"

어깨 위의 미호가 거세게 반발했다.

아래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지하 1층부터 지상 5층까지 가는 버튼들이 눈에 보였다.

진현우는 버튼을 특수한 패턴으로 눌렀다. 그러자 엘리베이터가 지하로 내려갔다.

- 지하 3층으로 이동합니다.

버튼에 없는 지하 3층으로.

진현우는 캐낸 정보들을 상기했다.

'지상은 위장. 길드의 시설은 지하에 집중되어 있다. 지하 3층부터는 오직 길드원들만 있고, 일반인은 없다. 길드원은 모두 배신자.'

적을 구분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진현우는 부서진 검과 도끼를 쥐었다.

"몇 명은 살려 둘 테니까 매혹해."

"알겠느니라."

띠링,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넓은 복도가 보였다. 다소 허름한 느낌이 드는 지상과는 다르게 몹시 화려한 복도였다.

복도를 걷는 적해의 길드원들이 보였다.

실내였기에 장비를 갖추지 않은 상태.

"뭐야? 당신 누구...!"

"히익!"

그게 실책이었다.

진현우를 본 길드원의 목에 도끼가 꽂혔다. 숨넘어가는 소리가 복도에 퍼졌다.

곁에 있던 동료들이 비명을 내지르려는 순간, 한 줄기 섬광이 복도를 내달렸다.

"빠, 빠르... 컥!"

"끄으으윽!"

대응할 새도 없었다.

비명을 내지르려던 동료는 순식간에 심장이 찔린 채 쓰러졌다. 그 옆에 있던 이는 무기를 빼 들려는 손이 날아간 탓에 절규를 토했다.

"뭐야?! 이게 무슨!"

"셰이드."

- 시이이이...!

주변에 있던 길드원들이 소란을 듣고 달려왔다. 그 순간, 바닥의 그림자가 솟구쳤다.

검은 그림자가 복도를 가득 메웠다. 사방을 비추던 전등도 그림자에 완전히 삼켜졌다.

끔찍한 어둠이 복도에 내려앉았다.

"크륵...!"

"커허억!"

그리고 진현우가 움직였다.

온몸을 그림자로 휘감은 그가 움직일 때마다 누군가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적들은 저항도 하지 못하고 쓰러졌다.

"펜리스를 부르기에는 공간이 좁나. 일단 그 여자한테 받았던 아이템을 뿌려 두고...."

진현우는 바닥에 아이템을 흩뿌렸다.

여기로 오기 전에 받아 온 전이 아이템. 바닥에 마법진이 그려지면서 마력이 모였다.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발동될 것이다.

"셰이드, 엘리베이터 문 막아."

- 시이이이....

진현우의 발밑에서 솟구친 그림자가 엘리베이터의 문을 단단히 틀어막았다.

이걸로 그 누구도 나가지 못한다.

"좋아, 그럼."

진현우는 되돌아오는 도끼를 받았다.

목표를 마무리한 늑대들이 그의 곁에 섰다.

"쓰레기들을 한번 치워 볼까."

* * *

로열 그레이스 빌딩의 지하.

그곳에 있는 길드장의 방에 여러 인원이 모여 있었다. 적해의 길드장, 간부들. 그리고 이곳을 거점으로 쓰는 카오틱들이었다.

그중에는 마인도 한 명 포함되어 있었다.

"...."

중년의 남성. 적해의 길드장인 임윤환은 근심 어린 표정으로 방을 돌아다녔다.

마인이 그를 못마땅하게 봤다.

"좀 가만히 있을 수 없나?"

"지금 이게 가만히 있을 수 있는 상황인가? 마인은? 한서진한테서 온 연락은 없나?"

"아직 연락은 오지 않았다."

"출발한 지 몇 시간이 지났는데 아직도 연락이 없다고? 후우, 이거 느낌이 안 좋은데."

임윤환은 초조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한서진을 비롯한 카오틱들은 여러 플레이어를 암살해 온 전문가들이다. 평소 같았다면 벌써 일을 마쳤다는 연락이 오고도 남았을 터.

'설마, 실패했나?'

불길한 예감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희박한 가능성이다. 그 정도의 숫자가 진현우 개인에게 당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누군가 도와주는 게 아니고서야.

"실패할 리가 없으니 걱정하지 마라. 마지막으로 온 보고에서 그랬잖나. 타깃이 자기들의 존재를 아예 눈치채지 못한 것 같다고."

"그건, 그렇지만...."

"여태껏 우리가 암살한 타깃이 몇 명인지 잊었나? 이번 일도 똑같이 흘러갈 거다."

"으, 으음."

임윤환은 입을 닫았다.

그 말대로다. 이미 수없이 해 왔던 일이다. 실패할 확률보다 성공할 확률이 높다.

그러니까 걱정할 필요는 없다.

"...30분만 더 기다리지. 거기까지가 정보를 차단할 수 있는 한계 시간이다. 그 이상을 넘어가면 협회에서 이상함을 눈치챌 거야."

"마음대로."

서울에는 협회 소속의 순찰대가 있다.

카오틱이나 마인들을 경계하기 위한 순찰대다. 나름 견실한 길드를 운영하고 있는 임윤환은 그들의 경로를 이용해서 정보를 차단했다.

그 틈을 타서 마인과 카오틱들이 움직였고.

'빌어먹을, 내가 왜 이런 꼴을....'

임윤환은 손톱을 깨물었다.

탑 2층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카오틱과 거래했었다. 그게 계속되더니, 이제는 이런 꼴이 되어 버렸다. 발을 빼고 싶어도 못 빼는 상황.

'내릴 수 없는 배에 탄 셈인가.'

길드원들도 비슷한 처지에 있는 이들이다.

애초에 그런 이들만 들어오게끔 카오틱들이 소개를 했고, 자신은 받아들이기만 했으니까.

이 길드는 카오틱의 괴뢰나 다름없다.

'아예 카오틱으로 전향하는 것도 생각해 봐야겠군. 이대로 가다가는 내가 위험해진다.'

임윤환은 그리 생각했다.

그리고 그때, 방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

"기, 길드장님!"

"헉, 허억! 회, 회의 중에 죄송합니다!"

길드원들이 다급히 뛰어 들어왔다.

그들의 상태를 본 임윤환의 눈이 커졌다. 온몸이 상처투성이에 죄다 치명상이어서였다.

도대체 어디서 저런 부상을 입었단 말인가.

"무슨 일이냐? 꼴이 왜 그래!"

"저, 적이... 침입자가, 있습니다...!"

"침입자라고? 여길?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아니 대체 누구냐? 몇 명이길래?!"

"하, 한 명. 한 명입니다."

그 말에 임윤환의 어안이 벙벙해졌다.

한 명이라니. 설마 단 한 명에게 이 빌딩이, 적해의 길드 하우스가 돌파당했단 말인가.

'랭커인가?'

당연히 떠올릴 수밖에 없는 생각이었다.

적해 길드가 랭커에게 원한을 살 짓을 했던가? 아무리 생각해도 떠올릴 수가 없었다.

그 대답은 금방 알 수 있었다.

"일단 적을...!"

"그림자가! 정령 마법이다!"

"불을 밝혀라! 아무나!"

문 너머에서 그림자가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누군가가 황급히 빛을 일으켰고, 밀려들던 그림자가 빛에 가로막혀 주춤했다.

모두의 시선이 문 너머로 향했다.

'누구냐? 대체 어떤 놈이....'

'누군지는 몰라도 들어오면 죽인다.'

그들의 눈에는 살의가 가득했다.

부상을 입은 길드원들은 상처를 부여잡으면서 뒤로 물러났다. 긴급한 상황이었기에 그들에게 신경을 쓰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의 눈이 요사스럽게 빛났다.

"컥...?!"

"아으윽! 너, 너희들, 무슨 짓을!"

푸욱! 무기가 간부들의 급소를 찔렀다.

뒤로 물러났던 길드원들이 갑자기 간부들을 기습한 것이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급소를 찔린 간부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우, 우아아악!"

"크윽! 창?!"

저 너머에서 마창이 날아들었다.

순식간에 분열한 마창이 간부들을, 그리고 카오틱들을 꿰뚫었다. 지독한 마기가 그들의 신체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새겼다.

유일하게 마인만이 마창을 붙잡았다.

"이 무기는... 모습을 드러내라!"

마인이 붙잡은 마창을 투척했다.

문 너머의 그림자 해일 속에서 진현우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걸 본 마인이 혀를 찼다.

'진현우. 정말로 실패했단 말인가.'

다른 누구도 아닌, 한서진이.

얕볼 생각은 아니었다. 투입한 마인이나 카오틱의 숫자를 보면 랭커도 암살할 정도다.

그런데 그걸 혼자서 막아 냈다니.

'여기서 죽여야 한다.'

마인의 형상이 괴물처럼 변했다.

방에 있는 이들이 모두 그에게로 모였다.

"대, 대장님."

"너희는 상처를 치료해라. 적은 혼자다. 쉬지 않고 여기까지 왔으니 힘을 꽤 소모했을 거다. 내가 시간을 벌 테니, 한 번에...."

"혼자라니, 내가 혼자 왔다고 했던가?"

진현우가 불쑥 그리 말했다.

그는 뒤를 흘깃 보더니 몸을 크게 틀었다. 그의 등 뒤에서 강렬한 마력 반응이 느껴졌다.

그리고 반응할 새도 없이.

- 화르르르륵!

"크하아아악!"

"모, 몸! 내 몸이...!"

거센 불길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공격에 마인조차 반응하지 못했다. 그도, 그의 주변에 모여 있던 이들도 불길에 휩쓸려 고통에 찬 비명을 토했다.

"이, 이 마법은!"

땅에서 커다란 뱀들이 나타났다.

불길로 이루어진 뱀들이 카오틱을, 적해의 간부들을 무자비하게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그에 연계하듯 강력한 화염 마법들이 계속해서 마인과 그 무리를 덮쳤다.

"말도 안 돼. 이건... 화련?"

이런 마법을 쓸 수 있는 자는 드물다.

마인은 아연실색한 얼굴로 진현우의 등 뒤를 바라봤다. 또각, 또각. 여성이 걸어왔다.

타오르는 적발이 인상적인 여성, 화련이.

"네, 네가, 여기는 왜?"

"왜긴 왜야. 이분이 불렀으니까 왔지."

"뭐? 이, 이분이라고?"

화련이 턱짓으로 진현우를 가리켰다.

그 몸짓에 마인은 전율했다. 그 개차반 같은 성격의 화련이 누구를 이분이라고 부른다고?

그것도 자기보다 한참 아래인 진현우를?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냐?"

"그건 네가 알 필요 없고."

부서진 검이 검기를 일으켰다.

진현우의 옆에서 그림자가 솟구치더니 사람의 형상을 갖추었다. 그리고 여러 늑대까지.

화련이 마력을 집중했다.

"빨리 끝내자. 시간 아깝다."

"...!"

수많은 화염이, 검기가 마인을 덮쳤다.

그가 마지막으로 인지한 것은 그게 다였다.

* * *

지하의 전투는 일방적으로 끝났다.

마인에게 특히나 강한 진현우, 최상위권의 랭커인 화련이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끄, 어어어어...."

- 마인, 루벨을 죽였습니다. 마핵의 효과로 마인에게서 마기를 흡수합니다.

- 마기가 20만큼 상승했습니다.

마인은 제대로 저항도 못 하고 죽었다.

다른 동료는 부상 때문에 도움이 못 되는 상황. 혼자서 저 둘을 상대하는 건 버거웠다.

그 죽음은 허망하기 그지없었다.

"잘 태웠네. 너무 잘 태운 거 아냐? 쓰읍, 그래도 심문할 인원은 살려 두고 싶은데."

"몇 명은 회복하면 살릴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저기, 제일 중요한 놈이 남았네."

화련이 방구석에 있던 이를 가리켰다.

임윤환이었다. 그는 애벌레처럼 몸을 둥글게 만 채, 자신의 반지를 만지고 있었다.

'도망쳐야 한다.'

특이할 것 없는 아이템이다. 딱 하나, 지정한 위치로 전이하는 기능이 있는 것 말고는.

그의 반지가 마력을 머금었다.

"혀, 형... 나도...."

"빨리, 빨리, 빨리... 됐다!"

다른 간부들이 임윤환을 불렀지만,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반지의 빛이 그를 감쌌다.

화아악! 그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니, 정확하게는 사라질 뻔했다.

"내 앞에서 무슨 짓을 하는 거야?"

"...!"

화련이 손을 내젓기 전까지는.

그녀가 일으킨 마력이 반지의 마력에 간섭하더니, 발현하려던 마법을 무효화했다.

전이 마법이 실패하게끔 만든 것이다.

"이, 이걸, 막았어?"

"후진 길드나 운영하는 놈이라서 그런가? 자기 주제를 모르네. 싸구려 아이템으로."

경악한 임윤환의 앞에 진현우가 섰다.

그의 검이 바닥에 드리웠다.

"적해의 길드장, 임윤환. 맞나?"

임윤환은 절망 어린 눈빛으로 진현우를 올려다봤다. 그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지독히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볼 뿐.

"건드릴 사람을 건드려야지."

"끄아아아악!"

서걱! 검이 임윤환의 두 팔을 베어 냈다.

처절한 비명이 방을 가득 울렸다.

151화

보스 레이드 (1)

전투는 끝났다.

진현우는 화련에게 협회에 연락하라고 말했고, 협회는 금방 출동하겠다고 알렸다.

그들도 깜짝 놀랄 일일 것이다. 협회에서 멀지 않은 서대문구에서 마인이 나타났으니.

"크흑, 으아아아악!"

두 팔을 잃은 임윤환이 고통스러워했다.

놈이 핏발 선 눈으로 화련을 노려봤다.

"미, 미쳤나? 아그니스의 길드장인 네가 우리를 공격한다고? 이건 길드 분쟁이다!"

"길드 분쟁? 얘 뭐라는 거니?"

"몰라. 이 상황에서 발뺌하려는 건가?"

진현우와 화련은 동시에 실소를 터트렸다.

마인, 카오틱과 함께 있는 모습을 들킨 상황인데 저런 소리를 하는 것 자체가 우스웠다.

"그러게 이분을 왜 건드리고 그래?"

"이, 이분... 이라고?"

"뭐? 이분?"

임윤환은 '이분'이라는 단어에 전율했다. 곁에서 듣고 있던 진현우도 함께 전율했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화련이, 그 개차반 같은 성격으로 유명한 아그니스의 길드장이.

누구를 높여서 부른다니.

"그래, 이분. 나는 이분 덕분에 다시 태어났거든. 이런 상쾌한 기분은, 처음이야."

"화, 화련. 미친 거냐?"

"미쳤냐고? 후후, 아하하하!"

화련이 갑자기 광소를 터트렸다. 방에 있던 이들이 떨리는 눈으로 화련을 봤다.

진현우도 그랬다. 저 여자가 보이는 행동이나 언동 하나하나가 소름이 돋게끔 했다.

'복속의 말뚝, 정말 무서운 아이템이야.'

늑대의 대정령을 개로 만들 만도 하다.

광소를 터트리던 화련의 웃음이 멎었다.

"좋은 의미로 미쳤다고 할 수도 있겠지. 자, 그럼, 네가 아는 걸 이분한테 말해 주겠니?"

"내가 미치지 않고서야...!"

"아니, 뭐. 굳이 말 안 해도 돼."

"우욱, 난... 토할 것 같느니라...."

진현우는 손가락을 튕겼다.

근처에서 헛구역질을 하며 정기를 흡수하던 미호가 임윤환에게 바로 매혹을 걸었다.

큰 상처를 입은 상태였기에 쉽게 걸렸다.

"좋아. 그래서, 누가 날 노렸다고?"

"...흑림. 마인이 수장으로 있으며, 많은 카오틱이 속해 있는 길드. 그들이 널, 노린다."

"흑림? 흠."

진현우는 혀를 찼다.

마인들도 플레이어처럼 길드를 만들어서 움직인다. 놈들의 대표적인 길드가 흑림이다.

강력한 마인이 수장으로 있고, 그 밑으로 여러 마인과 카오틱들이 수하로 있는 길드.

'귀찮은 놈들인데.'

흑림은 진현우가 회귀하기 전에도 있었다.

그때까지 생존했다는 뜻이다. 더 귀찮은 점은 지금은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흑림이 있는 층까지 가려면 아직 멀었어.'

마인은 탑으로부터 일종의 혜택을 받는다.

탑에서 자신들만을 위한 별개의 층을 얻을 수 있는 혜택이다. 일정 층수까지 공략해야지 놈들이 있는 별개의 층으로 향할 수가 있다.

아직은 조금 먼 얘기였다.

'빠르게 탑을 공략하는 수밖에 없겠군.'

진현우는 그 밖에도 몇 가지 정보들을 캐낸 후, 협회가 오면 전달할 수 있게끔 적어 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협회가 도착했다.

"프, 플레이어 협회 소속의 순찰대입니다! 여기 마인하고 협력한 놈들이...."

"여기 있으니 데려가세요."

"아, 아아. 예, 감사합니다."

수십 명 남짓의 순찰대였다.

그들은 실내의 상태를 보고는 흠칫거리더니, 진현우의 곁에 있는 화련을 보고 놀랐다.

"화, 화련 님? 여기는 왜...."

"이 남자가 도와 달라고 해서 도와줬어."

"도와주셨다고요? 화련 님이 말입니까?"

"내가 누굴 돕는 게 이상하니?"

화련의 붉은 눈동자가 서늘하게 빛났다.

순찰대가 숨을 삼켰다. 그들도 플레이어 중에서는 뛰어난 솜씨를 가진 이들이었다.

하지만 화련에 비할 바는 못 되었다.

"아, 아닙니다. 실례했군요."

"알면 됐어."

순찰대는 구속된 이들을 끌고 나갔다.

"설마 적해 길드가 변절자일 줄은...."

그들은 적잖게 충격을 받은 눈치였다.

적해는 평판이 꽤 괜찮은 길드였다. 그런 길드가 마인과 손을 잡아서 플레이어들을 암살하는 일을 도왔으니, 충격을 받을 수밖에.

"아, 그리고 댁에 있던 카오틱들도 구속했습니다. 정보를 캔 뒤에 알려 드리겠습니다."

"예."

진현우와 화련은 순찰대를 따라 지상으로 나갔다. 지하에서 더 볼일은 없었다.

바깥은 경찰 그리고 기자들로 가득했다.

- 찰칵, 찰칵!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두 분이 같이 계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화련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순찰대만 쫓아다니는 기자들이야. 따라다니면 기삿거리가 나오거든. 귀찮네."

"찍게 놔둬, 필요하니까."

"필요하다고? 이게?"

진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과 화련이 함께 있는 이 그림이 필요하다. 그가 굳이 화련을 여기로 부른 이유였다.

'아그니스와 진현우의 사이가 가까우며, 아그니스라는 대형 길드가 진현우를 보호한다.'

이 인식이 필요하다. 손에 꼽히는 대형 길드인 아그니스는 카오틱이든, 설령 마인이라고 할지라도 우습게 볼 수 없는 상대다.

함부로 진현우를 건드리지 못할 것이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진현우는 길게 기지개를 켰다.

'할 수 있는 대비는 해 둬야겠군.'

자다가 목이 날아가는 건 최악이다.

진현우는 언젠가 또 있을지 모르는 습격에 대비해서 자신의 집을 강화해 두기로 했다.

그리고 그건.

"잘 부탁한다."

"응? 뭐니?"

화련이 해 줄 것이다.

진현우는 그녀의 어깨를 두들겼다.

* * *

- 초신성 '진현우', 아그니스의 길드장 '화련'과 협력하여 마인의 본거지 토벌!

- 적해 길드가 오랫동안 마인 및 카오틱과 협력해 온 것으로 알려져 큰 충격을....

- 로열 그레이스 빌딩, 그곳을 중심으로 벌어진 각종 암살과 테러 행위를 알아보자.

- 협회는 대체 뭘 했는가?

인터넷에 온갖 뉴스가 올라오고 있었다.

이번에 진현우가 겪은 일과 관련된 뉴스였다. 그걸 본 윤서희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이게 뭐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말이 안 되는 조합이었으니까.

"...화련? 얘가 이 사람이랑 왜 같이 있지?"

"그게, 저도 잘 이해가 안 갑니다."

"그렇죠? 저도 이해가 잘 안 가네요."

윤서희가 신음하며 기사를 읽었다.

진현우와 화련에 대한 칭찬, 적해 길드의 진상 그리고 협회의 대처에 대한 비난까지.

- 진현우와 아그니스는 무슨 관계인가?

- 아그니스, 진현우 영입 초읽기?

"진현우, 그 사람이 아그니스와 우호적인 관계가 되는 게... 가능한 일인가요?"

윤서희는 자신의 눈을 여러 번 비볐다.

아그니스의 비리를 고발한 게 진현우인데 원수가 됐으면 됐지, 친구가 될 수 있나?

도무지 믿을 수가 없는 뉴스였다.

- 침식률 58% 돌파.

- 7층의 플레이어들은 무엇을 하는가?

- 플레이어 협회는 게이트의 출현 빈도가 높아졌으며, 최전선의 길드들과 협의하여 최대한 빠르게 7층을 공략하겠다고 밝혔다.

"하아...."

스크롤을 내리던 윤서희의 눈에 보고 싶지 않은 뉴스가 보였다. 침식률에 대한 뉴스.

그녀는 한숨을 토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내가...."

윤서희는 이마를 감쌌다.

플레이어의 탑 공략은 7층에서 멈췄다. 이곳이 어렵기 때문인가? 그것도 있다.

하지만 그건 진짜 문제가 아니다.

"이 정도로 단합이 안 될 줄이야."

"예. 당연히 예상은 했습니다만, 단합하지 않고 이익 때문에 싸울 줄은 몰랐습니다."

"머리가 아프네요."

협력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었다.

7층의 기믹을 깨기 위해서는 플레이어 간의 협력이 필요한데, 그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중심에는 제우스 길드가 있었다.

그놈들이 사고만 치지 않았더라면.

"제우스, 유신, 이 망할...."

윤서희는 지친 듯 길게 숨을 토해 냈다.

그의 시선이 화면을 향했다. 이상할 정도로 화련과 친해 보이는 진현우의 얼굴이 보였다.

'저 사람이 오면 뭔가 달라질지도.'

매 층마다 이변을 일으키며 올라온 초신성.

진현우가 7층에 도달한다면 상황이 달라지지 않을까. 그런 기대가 조금이지만 들었다.

윤서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심하지만.'

그때까지 버텨 보는 수밖에.